“이보쇼.”
쿵쿵 절굿공이 찧는 소리를 내던 도진이 열심히 움직이는 손을 내려놓고선 맞은편 바위에 기대앉은 주정뱅이를 바라보았다.
“...”
“야.”
“...”
“에이 씨 사람이 말하면 좀 들으라고 이 할망구야!“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연신 잔에 술을 채우는 제 친우의 모습에 참다못해 절굿공이를 던졌다. 제법 무게감 있게 쿵 소리가 나자 그제야 바위에 기대어 앉은 근육질의 여성이 자작을 멈추었다.
“왜.” 아쉬운 듯 쩝쩝 입을 다시고서는 빈 병을 바라본다.
그 작태를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허, 침음성을 흘리며 보던 도진은 말해보라는 그녀의 재촉에 흠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네 제자 어디 갔냐?”
“그걸 니가 왜 물어?“
”아니 어제까지 이 자리에 옹고집처럼 앉아있던 애가 사라졌으니 물어보지.“
”...“
”흠 음음. 그.. 왜... 왠만하면 좀 달래주는 게 어떻겠냐.“
도진은 앞에 앉은 여성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허, 거 참. 무인의 길을 걷는다지만 이제 열여섯이 된 어린아이에게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비록 제가 스승은 아니지만 앞의 못난 주정뱅이랑 같이 방랑하며 보낸 세월이 5년이라, 흰 머리의 계집아이는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되는, 반쯤 자식 같은 그런 존재가 되어있었다. 어제 제 아버지의 부고를 그리고 그 직접적인 원인을 무슨 재주인지 신통방통하게 알아낸 소녀는 그 원한을 갚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어른도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인데 그 어린아이가 무슨 도리로 침착하게 감당을 하겠나. 제 아무리 영민하다 하여도 이제 겨우 열여섯인 것을.“
도진의 말에 흥 소리를 내더니 여인은 다시 빈 병 옆의 새 술병을 들어 병째로 목구멍에 부었다.
”갔다.“
”뭐?“
”새벽에 보니 종이 쪼가리 하나 남기고 사라졌다. 지금쯤이면 도성 안에 도달하고도 남았겠네.“
아무렇지 않게 무미건조한 어투로 툭 기절초풍할 소식을 내뱉은 여인은 병을 재차 흔들고선 목 뒤로 넘겼다. 성의 없이 내던져진 답변에 도진은 잠시 멈추어 생각하다 문맥을 이해하고선 눈을 크게 떴다.
”시방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겨? 야 임마. 아무리 그 녀석이 조용히 움직인들 초절정에 닿은 네가 그걸 모른다고.“
아오씨 영감탱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잔소리 좀 그만해! 뭐래, 이 할망구가! 그 술이나 내려놓고서 진지하게 말 좀 해야겠다. 일류도 못된 놈이 내 술잔을 빼앗아 간다고? 자꾸 그렇게 나오면 다음 약은 없을 줄 알어! 못 돌아오면 어떡할 건데? 거기 삼류나 이류밖에 없어서 괜찮아. 이 사람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시끌시끌한 소란이 적막한 야산에 울리고 두 사람이 일으킨 소음에 나무에 앉은 새들이 푸드덕 날아갔다. 이윽고 여인이 탁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도진을 응시했다.
”... 돌아올 거다. 아무리 초입이래도 일류를 넘겼는데 그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당할 리가 없잖냐.“
여인은 숨을 깊게 들이키다 길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고집쟁이 제자는 성실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건 꼭 제 마음대로 해버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그래. 그러한 뜻으로 문제라면, 언젠간 겪을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 이건 나로서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일이야. 아파도 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지.“
복수의 무게란 걸 이 무림을 걷다 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순간이 오니, 그저 극복하길 바라며 바라봐 줄 수밖에 없는 거다.
”...“
여인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지나가고 산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