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어딘가의 초차원 오픈 카톡방
1.1. 1 ¶
-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 xxxx.08.23.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무의식에서 자신을 건져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정우는 이 사실을 항상 이상하게 여겼다. 손발이 차면 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양 손을 쥐었다가 폈다. 손가락 마디가 뻐근했다.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손목에 불거진 정맥을 지그시 눌렀다가 뗐다. 저항 없이 들어갔다. 피부가 얇았다.
xxxx.08.24
정우는 이틀에 한 번 지하에 있는 가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흉터가 있는 고객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타투를 해줬다. 건물 주인은 정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임대료를 또 올리겠단 전화가 왔었다. 정우는 군말 없이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주인은 정우가 화내지 않는 것에 실망한 눈치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우는 자신의 식비가 거의 들지 않는단 사실에 조용히 안도했다.
정우는 음식을 가렸다. 정확히는 채식주의자였다. 정우는 살덩이가 높은 온도에 익어가는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다. 정우는 고기의 피를 빼는 과정을 싫어했다. 이미 움직임을 멈춘 근육에서 억지로 피를 우려내는 일련의 무언가를 역겨워했다. 역겨워한다기보다는 두려워했다.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정우는 겁이 많았다.
xxxx.08.25
언젠가 공포영화를 봤었다. 정우는 시작한 지 30분만에 뛰쳐나가서 구역질을 했다.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싫었다.
xxxx.08.26
사실 정우의 자취방 주인도 정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벌써 이주 째 보일러 수리기사가 오지 않고 있었다. 정우가 전화하면, 주인은 짜증을 내며 언젠가 부르겠다고 덧붙였다. 전화기 너머 노인의 목소리는 이따금 불안정하게 떨렸다. 정우는 노인이 천식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을 그 정도로 싫어하거나.
xxxx.08.27
둘 다일지도 모른다.
xxxx.08.28
정우는 가게 문을 열지 않을 땐, 병원에 갔다. 대다수의 환자들은 정우를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아니면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엔 주로 경계심과 적개심이 들어 있었다. 익숙했다.
1.2. 2 ¶
- 달이 나만 따라오네
- xxxx.08.29.
정우는 정 의사의 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1년 6개월 전, 그 죽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우는 정 의사에게 되려 감사했다. 자신을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병원의 다른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다.
xxxx.08.30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들어섰다. 저녁 9시 즈음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TV 한 대만이 떠들고 있었다. 출근하기 전에 정우가 틀어놓은 것이다. 정우는 뉴스보다는 예능 프로를 틀어놓는 편을 선호했다.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정우는 화면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우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혜선 언니', 정우의 몇 되지 않는 지인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에요, 언니?"
"아니, 그냥. 어떻게 지내나 해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묵은 피로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도 지쳐 있었다. 정확히는, 혜선의 전화가 달갑지 않았다. 혜선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정우를 눈에 띄게 챙겨주었고, 정우도 그 사실엔 감사했다. 하지만 혜선의 호의에는 어딘가 거북한 부분이 있었다. 지나친 햇빛이 식물을 말려죽이는 것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혜선과 오래 있다보면, 자기 자신의 일부분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저는 잘 지내요. 언니는요?"
"나? 나야 잘 지내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정우는 긴장했다.
"정우야, 이번에 다시 신청받는 거 알지?"
"전 안 할거예요."
예상했던 질문에, 언제나의 대답을 내뱉었다. 정우의 어조는 드물게 단호했다. 혜선은 한숨을 쉬었다. 전화기 너머 정우가 들릴 정도로 깊은 한숨이었다.
"너 말고 할 사람이 없어."
"은주 언니도 안 한대요?"
다시금 침묵이었다.
"언니?"
침묵이 또다시 이어졌다. 한참 뒤, 정우에게 다시 돌아온 목소리는, 어딘가 꽉 막혀 있었다. 충격받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너 모르니?"
"뭘요?"
이번엔 정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은주는, 몇 달 전에 죽었잖아."
"네?"
정우가 모르던 사실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정말, 사람들이나 너나 어쩜 그럴 수가 있니..."
"..."
"너는 몇 달 째 은주랑 연락도 안 되는데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언니,"
"응?"
"저 은주 언니랑 1년 넘게 연락 안 했어요."
정우는 베란다 난간을 매만지다가, 문득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새끼손가락이 부서져 있었다. 주먹을 쥐곤 다시금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다.
"아무도 저한테 말 안 해줬어요."
"..."
"알면, 나도... 아니야, 언니한테 화낼 건 아닌데, 이게..."
"응."
"나중에, 언제 꽃이라도 놔주러 갈게요."
혜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난 것이 분명한데, 정우는 혜선이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 어쩌면 정우 자신, 어쩌면 모두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전화가 끊겼다. 정우는 조금 울었다.
xxxx.08.31
정우는 그 날 가게를 쉬었다.
xxxx.09.01
평소처럼 병원 진료를 받았다. 평소처럼 장을 보고, 밥을 먹고, 늦게 잠을 잤다. 세상은 뒤집히지 않았다. 정우는 멍하니 달력을 바라봤다. 내일 광화문에 가야 했다. 정우는 벌써부터 겁을 먹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2.1. 1 ¶
- 당신에게.
- 1.
우리는 정우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당신이 그 사실을 반기든, 말든 이 이야기의 대상은 정우기 때문이다. 정우는 단순한 인간상에 속한다. 짧은 문단 몇 개, 재능 없는 작가가 지껄인 표현 몇 개로 정의내릴 수 있는 삶들. 당신이 오늘도 무수히 지나쳤을 절대적 다수의 보통. 정우는 그런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메마른 뼈대에 몇 덩이의 살점만 붙이면 된다. 사소한 일상, 자질구레한 버릇들 따위들이 그것이다.
2.
정우는 아침 7시 반에 일어나서, 30분 동안 몸을 씻는다. 정우는 일종의 강박 증세가 있는 사람처럼 몸을 씻었는데, 그러는 것치고는 빨리 샤워를 끝내는 편이었다. 아침은 먹지 않거나, 어제 먹다 남은 밥을 물에 말아먹었다. 집이 더럽다 싶으면 청소를 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 뒀다. 그리고 불행히도 정우의 그 기준은 매우 느슨한 편이었다. 자취방 한 구석에는 항상 먼지 덩어리가 뭉쳐져 있었다. 정우는 그 것을 보고도 모른 척 했다.
9시 정도에 집을 나섰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는 어느 상가 지하에 위치한 가게의 문을 열었고,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는 병원에 갔다. 정우는 타투이스트다. 몸에 큰 흉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타투를 해줬다. 문신을 하는 내내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우의 가게는 침묵을 원하는 고객들이 자주 방문했고, 정우는 그 니즈를 맞춰주었다.
3.
정우의 몸은 가슴께부터 발목까지, 온통 문신으로 뒤덮혀 있었다. 개중 왼쪽 허벅지에 있는 뱀과 칼, 장미덩굴은 정우 스스로가 한 문신이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흉터가 뒤틀려 있다. 꼭 똬리를 튼 뱀처럼, 근육의 움직임에 맞추어 꿈틀댔다.
4.
정우는 병원에 가기 전날은 꼭 잠을 일찍 잤다. 새벽 4시 전에 자리에 누웠단 뜻이다. 정우는 잠을 잘 자지 않았다. 원체 고요한 성정 탓에, 사람들은 정우의 피로 유무를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정우 자신도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5.
정우의 주치의는 정민수라는 남자였다. 정우는 어느 순간부터, 정 의사가 자신과 면담할 때마다, 의자를 최대한 뒤로 뺀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정우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정 의사는 1년 6개월 전, 여동생과 어린 아들을 잃었다. 아마 정우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우는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의사에게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다.
6.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우는 겁이 많다.
2.2. 2 ¶
- 생의 이면
- 7.
1년 6개월 전까지, 정우는 작은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다. 연습실은 지하에 있었다.
8.
당신은 1년 6개월 전, 그 뉴스를 봤을 것이다. 아니,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때의 기억이 토막나 있다. 설령 보더라도 별 감흥 없이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부터 그 뉴스에 대해 알아둬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닌 정우니까. 작년 2월, 한 여성이 지하 상가 방음실에 갇힌 채 발견되었다. 여성은 심각한 수준의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오른 다리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여성이 구조되고 여섯 달 뒤, 그 여성을 사형할 것을 요구하는 국민 청원이 온갖 사이트에 떠돌았다.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9.
정우는 타인을 무서워했다. 여름에 더 그랬다. 언젠가 정우의 지인, 혁승이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맨살을 더 드러내잖아... 나직한 대답이 있었다.
10.
지금도 정우의 자취방은 지하에 있었다.
11.
하지만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기타는 버린 지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