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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7-12-08 17:58:09 Contributors

* 상위 항목:울프 첸들러


증오의 시작


여기 한 청년이 있다.

태어나 누구에게도 축복 받지 못 하고, 사랑 받지 못 하고, 받아들여지지 못 한 청년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작은 두 손을 피로 적셔버린 그런 한 청년이.

그 청년이 얘기한다.

그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한 여자에겐 너무나 가혹한 옛 일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시작의 처음부터? 내 기억의 근원부터? 어느 쪽부터 시작하건 내용이 엄청 길고 많다는 건 다를 것이 없어. 그러니 떠오르는 대로 지껄여 볼까.

그래. 지금 무엇보다도 그 애를 괴롭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태어나 열 살이 될 때까지 변변한 이름이 없었다.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야. 매일 어디서 누구의 씨인지 모를 애가 태어나고 죽는 세계니까. 나는 그나마 행운이었지. 먹여주고 키워준 사람은 있었거든.

열 살 어느 무렵에 이름을 받기 전까진 야, 너, 심하면 페툼(쓰레기,오물)이라고도 불렸어. 걷기 시작하면서 가능한 잡일은 다 했지. 말을 배우는 것도 글을 배운 것도 전부 혼자 해야 했어. 어머니는 있었지만 그녀도 날 돌봐줄 여력은 없었어. 창녀였으니까.

어머니가 나왔으니 아버지 얘기도 해야겠지. 응. 어머니는 항상 내게 말했었어. 내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기다리면 언젠가 어머니도 나도 데려가 줄 거라고. 어릴 때는 그 순진한 말을 믿었지. 아버지가 어떤 쓰레기인지도 모르고 말야.

뭐 그 쓰레기 얘기는 조금 뒤로 미루자고. 그 놈 아니어도 할 얘기는 많거든.


한 7살쯤 된 해일거야. 그 해에 내가 사는 구역에 왠 귀티 나는 녀석이 하나 굴러들어왔어. 더러운 옷에 꾀죄죄해도 숨길 수 없는 후광? 하하, 아무튼 그런 귀티가 보이는 녀석이었지. 쉽게 말하지만 그 녀석이 나보다 한살 많았어. 그리고 나이 이상으로 아는 것도 많았고.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내가 사는 곳 '바깥'의 얘기를 알려줬다. 녀석에게서 내 아버지에 대한 것도 듣게 되었지. 그 작자가 사건을 일으켜 자신은 이곳으로 도망온 거라고 녀석은 그렇게 말했어.

난 처음에 안 믿었어. 당연하잖아? 그 시점에선 아직 7살 짜리 애였는 걸. 더러운 틈바구니에서 눈치 보는 법, 살아남는 법은 배웠어도 아직 얘기를 듣는 귀는 없었으니까.

자신의 말을 우스개소리로 듣는 나를 보고 녀석은 어차피 조만간 나도 알게 될 거라고 했어.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라고도 했고. 무섭지 않아? 고작 8살 짜리가 저런 말을 했다는게.

그리고 거짓말처럼 얼마 뒤에 나는 그 녀석을 찾았어. 눈물과, 어머니가 토한 피를 손에 움켜쥐고서.


그 소년의 비애


그래. 내 어머니는 내가 7살에 죽어버렸어. 멍청하게도 약을 먹고 온 몸에서 피를 토하며 세상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어.

내가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잡일을 끝내고 왔을 때는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놀라서 달려들었더니 내게 피를 토하며 그러더군.

'낳지 말 걸 그랬어! 널 낳으면, 기다리고 있으면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너 따위 낳지 말 걸 그랬어!'

진부한 소리지. 참. 그렇게 나를 저주하고, 내 아비를 저주하며 어머니는 숨이 끊겼어. 나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울었지.

눈알이 빠질 듯이 울면서, 어머니의 죽음과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향한 원망이 뒤섞여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어. 아마 그 때였을 거야. 능력을 각성하게 된 건. 당시의 나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피를 뒤집어쓴 그 몰골로 녀석을 찾아갔어. 녀석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나는 피범벅인 얼굴에서 두 눈만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는군.

녀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받아주었다. 녀석이 올 때 같이 온 집사 같은 사람의 돌봄 아래에서 나는 그동안 배우지 못 한 것들을 배우며 내 목표를 위해 성장했어.

우연한 기회에 능력에 대한 것도 알아서, 능력도 키웠지. 집사가 말하길 나는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던데. 각성했음에도 다른 익스퍼들에게 들키지 않은 희귀케이스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능력을 어떻게 이용하고 써먹어야할지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댔지만.

익스퍼인 나와 달리 녀석은 일반인이어서 나를 종종 부러워했어. 나 같은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나는 내 일이 끝나면 녀석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 네 오른팔이 되주마! 하고 어디서 본 어른들 흉내를 내었지.

그렇지만 녀석은 내게 '친우'로 남아줄 것을 부탁했어.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친구로 남아달라고. 그 때는 그게 무슨 차이인지 몰라 그냥 그러겠다고 해버렸지만 말야. 나중에 후회할 줄도 모르고.


어렸지 그 때는. 녀석도, 나도.


시기상조가 부른 허무(1)


집사의 밑에서 '세상'을 배우는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3년이란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어. 그래봤자 나는 10살이 되고, 녀석은 11살이 되었을 뿐이었지.

그 동안 나와 녀석은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고 집사만이 밖을 왕래하며 정보를 가져왔어. 그 정보는 주로 '조직'과 내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들을 들으며 나는 나날이 증오의 칼날을 새롭게 갈았어.

그러던 와중에, 너무 갑작스럽게 기회가 와 버렸지.


어느 날 집사가 가져온 정보에는 아버지가 설립한 회사의 기념식에 대한 것이 섞여있었어. 공교롭게도 그 식이 내가 숨어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열린다는 거 였지.

어쩌면 아버지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아니, 너무 많은 생각들이 섞여 더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잡아준 건 그 녀석이었지.

녀석은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 지금 할 건지, 기다렸다가 나중을 노릴 건지.

원래 예정은 그보다 7년이나 더 기다릴 거 였거든. 녀석이 18세가 되는 해가 예정이었어.

7년. 앞으로 기다려야 할 시간을 생각하니 왠지 그 시간들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어. 눈 앞의 기회에 비하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졌어.

그래서 나는 선택했지. 언제가 될지 모를 훗날이 아닌 지금 당장을.


선택한 후에는 어떤 것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은 잘도 흘러 기념식 날이 되었고 나와 녀석은 군중을 가장해 기념식에 섞여들었어. 옷 회사라 그랬는지,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식이더라고. 완전 기회였던 거야!

그 날은 내가 태어나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 얼굴을 본 날이기도 해.

화려한 퍼포먼스와 공연들, 맛있는 음식들과 즐거워하는 사람들. 생전 처음 보는 광경 안에서 나와 그 녀석만이 겉돌았어. 그 어떤 색도 빛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어. 내게 보인 것은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 뿐.

기념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아버지가 무대 위로 올라왔어. 내 정신이 아버지에게로 몰리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댔지. 옆에 녀석이 없었다면 아마 무대로 뛰쳐나갔을 거야.

새하얀 무대 한 가운대로 아버지 부부가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무어라 말을 시작했어. 기념사였겠지. 부부의 환한 얼굴이 군중을 돌아보며 감사의 말을 전하던 중 한순간이지만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아니 분명 마주쳤어. 멀리 있었지만 느껴졌거든.

그 한 순간, 부부의 위로 무대장치가 쏟아져내렸고 미처 피하지 못 한 부부는 그대로... 즉사했어.


시기상조가 부른 허무(2)


대형 스크린으로 생생히 전해진 참사에 기념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어. 새하얗던 무대엔 시뻘건 피가 퍼지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 바빴어.

아직도 잊지 못 해. 대형 스크린에 비치던 붉은 피웅덩이, 그 가운데 엎어져 으스러지고 뭉개져 죽은 아버지의 얼굴, 사방을 울리는 고함소리, 비명소리, 그 와중 눈부시게 맑은 하늘.

세상 모든 아수라장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 한복판에서 열살배기 나는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르겠어서 멍청히 서 있었지.

그런 날 찾아서 끌고가준 것도 그 녀석이었어. 그 때 그 녀석 아니었으면 난 아마 거기 사람들한테 밟혀서 압사했을 걸? 어? 웃을 일이 아니라고? 뭐 어때,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데.

아무튼 진짜는 이 다음부터라고.


그 식의 사고는 단순히 시작일 뿐이었다. 내가 정신이 빠져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그 녀석은 집사의 도움으로 '조직'에 복귀했어.

알고보니까 그 녀석 아버지가 전 보스였는데 내 아버지가 그 녀석 아버지를 죽이고 보스 자리를 찬탈했다더라 그렇다더라고. 비현실적이지만 내 현실이었어.

더 놀란 건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 자식인 걸 알고 찾아왔대. 만남부터 노렸다는 거야. 내게 아버지에 대한 걸 알려주고 증오하게 만들려고. 그래서 나중에 내가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려고.

이건 성인이 된 후에 들은거라 별 감흥이 없었어. 아 그냥 그래서 그랬구나 정도. 어차피 늦던 빠르던 난 분명 아버지를 찾아가 죽였을테니까. 녀석에겐 감사했지. 그 후에도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줬거든.


...잠시 얘기가 옆으로 샜네. 자, 어디까지 풀었더라.


그래. 맞아. 그 녀석은 '조직'으로 돌아가 제 아버지의 자리를 되찾았어. 고작 11살이었지만 간부들은 돌아온 전 보스의 자식에게 꼼짝을 못 했지. 왜냐하면 지들도 전 보스를 죽이는데 거들었거든. 그래서 보복이 두려워 납작 엎드린 거야. 고작 11살짜리 꼬맹이한테.

우스운 일이지.

그 녀석이 집사와 함께 '조직'을 재정비하는 동안 나는 그냥 있을 뿐이었어. 그 녀석은 어른들의 세계를 따라가느라 바빴고, 얼핏 보면 무관계한 나는 끼어들 틈이 없었거든. 그 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고.

언젠가 할 일이긴 했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시작되고 끝나버리니까 이건 뭐... 허무했지. 그 말 밖에 안 나오네. 허무함.

한동안은 죽은 눈을 하고 죽은 듯 살았어. 거기선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어서 알아서 먹고 알아서 자고 생활하고 그랬어.

나와 그 녀석이 예전 사이처럼 만난 건 그 해가 끝나가는 12월이었어. 거의 반년만이었지.


P로서의 삶


나름 후유증 떨쳐내면서 뒷골목에서 살던 시절 비슷하게 돌아간 나는 이제 완전히 귀티가 나는 녀석을 보고 아 저게 녀석이구나 싶더라. 이젠 정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우울해하는 나와 달리 녀석은, 아니 그는 나를 예전처럼 대해주고 친구라고 불러줬어. 친구. 그 진부한 말이 그 때는 참 반가웠어. 잠깐이나마 멀게 느껴졌던 그가 여전히 나와 함께 한다는 실감이 들어서.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 다음에 뭘 했는지 알아? 울었어. 꼴사납지만 서로를 붙잡고 펑펑 울었어. 그간 서로 쌓여 있던 걸 그 날 서로의 앞에서 죄다 내려놓고 마냥 울었어. 울고 또 울고.

이런 일 저런 일 다 했지만 결국 우린 꼬맹이들이었으니까. 고작 10살과 11살의, 그냥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불행한 꼬맹이들.

둘 다 눈이 시뻘개지도록 울고나서 그가 내게 무언가 줬어. 줬다고 하지만 물질적인 걸 직접 준 건 아니야. 말을 해준 것 정도였거든.

'10년 만에 이름과 생일 생긴 걸 축하해. P.'

그 때의 놀람은 아직도 기억해. 뭐냐고 되묻지도 못 하고 벙찐 내게 그가 앞으로 내 이름이라며 나를 P라고 불렀어. 세상에 맙소사 이름이라니. 부모조차도 붙여주지 않았던 이름, 이라니.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그와 달리 나는 다시 울고 말았어.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서운하고 시원하고 막...복잡했거든. 그제서야 내가 뭘 했는지도 피부로 실감하게 됐고 말야.

울음이 잦아들고나서 그도 이름이 바뀌었다고 얘기해줬어. 그의 아버지 이름을 받았다고. 앞으로 R이라고 불러달라 하더라. 그 전까지의 이름은 나와 그만의 비밀로 간직해둔 채로.


그 날부로 나는 그의 충실한 부하...가 되진 않았고, P로써 그의 친우로써의 삶을 살았어. 물론 지금도. 그동안 누리지 못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뤄가면서 부족함 없고 만족스러운 삶을 이어나갔지.

이 다음은- 음, 그녀와 내가 만난 얘기를 한번 해 볼까?

끝난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그 만남, 작위적.


자, 이제 그녀와 만났던 얘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그거 알아?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비로소 시작이라는 거.

내가 딱 그랬어. 10살에 목적을 달성하고 그 후의 내게 남은 것은 없었지. 당연했어. 그 후에 뭘 하면서 살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까.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

R은 나와 달리 되찾은 자리에서 할 일이 많았어. 매일을 무료한 시간으로 보내는 나와 달랐지. 어린 몸으로 '조직'의 일도 보고, 학력을 위해 학교도 다녀야 했거든.

나 역시 그에게 어울려 같이 학교를 다니긴 했는데, 영 적성에 안 맞더라고. 공부라면 집사에게 개인으로 배우는 쪽이 훨씬 수준 높고 흥미도 생기는데. 왜 이런 답답한 단체생활을 하느냐고 R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어.

'나중을 위해서.'

뭐가 나중을 위해서야. 내가 볼 땐 그는 그저 즐기고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어. 수업도 설렁설렁 듣는 나와 달리 그는 방과 후 모임도 하고 클럽 활동도 하고 아주 만끽 삼매경이더라고.

나와 그가 다니던 학교는 제법 부유층만 다닐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식이라 위아래 다양한 연령층을 만날 수 있었거든. 그 때까지 또래 친구라곤 나 뿐이었던 그에게 어쩌면 적절한 장소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시시하고 따분한 생활을 한 3,4년 정도 했을 무렵- 중등부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을 때니까 15살 때군. 그 시기엔 나도 제법 그와 어울려서 다과회 정도는 나가고 있었어. 그거라도 안 하면 심심했거든.

그가 주최하는 모임에는 하급생부터 이미 졸업한 상급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어. 그러면 혼란스러울 것 같지? 아니더라고. 역시 있는 집 자식들이라 그런가 어린 애들도 예의범절 같은게 똑바라서 오히려 내가 보고 배울 정도였어.

당시 나는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급생들과 주로 어울렸어. 진학 방향이라던가 시험에 대한 거라던가. 애들 보는 건 나랑 안 맞았거든. 그쪽은 주로 R이 맡았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저 귀찮은 치다꺼리를 그가 맡아주는구나 생각만 했지.


그 어느 날인가. 그 날 열린 모임에서는 나와 그를 제외하곤 전부 하급생들이었어. 사전에 그런 예정을 못 들었던 나는 모인 애들을 보고 단박에 자리를 차고 나가려고 했어. 그런 나를 그가 잡았고, 그는 언젠가 본 적 있는 얼굴로 내게 말했어.

'지금 나가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웃는 얼굴,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옛날 나를 끌어들였을 그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뭘 꾸미는 거야. 나는 기대보다 불안함이 치솟아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머리와 달리 몸은 순순히 다시 자리에 앉았지.

아,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 곳을 떠났을거야. 평생 후회하더라도.

자리에 앉아 유치한 애들 얘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이 시간이 언제 끝날까 그것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아이가 보호자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들어왔어.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R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안겼고 여성은 그런 아이의 행동에 미안한 듯 미소지으며 그와 말을 나누었어.

병원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었다던가, 오는 내내 R의 얘기만 재잘댔다던가.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때의 소리는 내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거든. 내 신경은 온통 방금 들어온 아이에게 꽂혀있었어.

밝은 녹색 머리칼, 붉은 수정처럼 맑게 반짝이는 두 눈, 아이 특유의 하얀 피부와 가녀린 몸. 아이가 내 시야에 들어온 순간부터 일분일초도 눈을 뗄 수가 없었지. 첫 눈에 반함. 그런 느낌이었어.

그가 그런 나를 눈치챈 것은 여성이 나간 후였어. 그 때까지도 뚫어지게 아이를 보는 나를 보고 그는 웃으면서 아이를 내게 소개시켜 주었지.

'첸들러 부부의 딸이야. 이름은 울프 첸들러, 8살이고 여기 초등부 소속이야. 자, 인사해야지?'
'응! 안녕하세요. 울이에요.'

그에게서 내려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아이는 낯가림이 없어서 처음 본 내게도 잘 다가왔고 우린 금방 친해졌어.

그 뒤 나는 그 애가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나가서 그 애와 어울렸고 나중엔 그 애의 부모와도 친분을 맺게 되었어. 그가 주선해준 덕분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일부러 그랬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는데 말야... 당시엔 그 애에게 푹 빠져서 그런 걸 눈치 챌 틈도 없었다만.

그가 감추던 사실을 알게 된 건 해가 두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였지. 그 애를 떼어놓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어.


지독한 운명이란 인연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나는 하루의 반을 그 애와 어울리고 함께 보낼 정도로 가까워졌어. 아이도 R보다 나를 더 따르고 반겨할 정도로. 그 2년간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하고 행복했어.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 이후의 삶을 버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 준비를 하고, 아이는 중등부로 올라가는 준비를 하는 시기였지. 당시 나는 그 애의 공부도 봐주고 있던 참이라 매일이 바빴어. 그래서 한동안 그와 소홀했는데, 그런 나날 중 그가 나를 따로 부르더라고. 난 뭐 요즘 어떻게 하는지 그걸 들으려나보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그 부름에 응했는데.

......현실이란 건 참 잔인하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는 것은 오랜만이었어. 그는 생각했던 대로 요즘의 행보를 물었고 나는 순조롭다고 답했어. 다과회에서 알게 된 상급생들 덕분에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순조롭다고. 그런 내게 그가 불현듯 한 이름을 입에 담았지.

'울-과는 어때?'

그도 내가 아이의 공부를 봐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걸 묻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쪽도 문제 없다고 대꾸했는데, 그 순간 그가 생전 보지 못 한 비릿한 웃음을 짓더라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웃음이었어.

나는 어디서 그런 악취미적인 웃음을 배워왔냐고 우스개소리처럼 말했지만 그는 내 말은 무시하고 사진 두어장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어. 한번 보라면서. 무슨 사진이길래 그렇게 무게 잡냐고 투덜거리면서 사진을 주워들고 봤는데,

맙소사.

그 때의 충격은 어릴 때 겪었던 이후로 두번째였어. 내가 든 사진 속에는 아버지 부부, 내가 죽인 아버지 부부가 서 있었고 그들의 품에는 자그마한 아기가 안겨 활짝 웃고 있었어. 2살, 아니 3살쯤 되었을까. 녹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이 선명한 아이였지.

아버지와 눈매가 똑닮은 아이. 그 아이는 내가 지난 2년간 그렇게 아끼고 사랑스러워했던 그 아이였어...

사진을 든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은 내게 그가 말해왔다.

'놀랐나?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나도 꽤 놀랐다고. 어떻게 2년이란 시간 동안 한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는지. 그 애의 부모, 첸들러 부부가 이끄는 회사가 D.M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지.'

아! 나는 그 때야 생각해냈어. 내가 아버지를 죽이던 그 날, 회사 창립기념일, 그 회사의 이름이 D.M... Dear My였다는 걸.

모든 힌트와 조건이 갖추어졌는데도 내가 눈치를 못 채니까 그가 직접 알려준 거야.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냥 보기 답답해서 였을까. 그 진위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실을 알아버림으로 나는 2년 전 그 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지.


나는 너를 만나선 안 되었는데. 네게 이토록 정을 주어선 안 됐는데.


사진을 쥔 손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알고 나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 눈물샘이 터진 것마냥 눈물을 흘리며 나는-

그 때 그는 내게 물었다. 사실을 알고나니 그 아이가 미워지느냐고. 아버지의 피를 이은 그 아이가 경멸스러워지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그럴 수 없다고. 어떻게 그러냐고. 이미 그 아이를 내 영혼으로 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렸는데 이제와 사실이 이렇다 해서 그 애를 미워하겠냐고.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인지 실소인지 모를 가느다란 소릴 흘렸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지독한 운명을 탓하며 울었어. 그는 내가 성에 찰 때까지 울게 내버려두었고 울음이 잦아든 후에 다시 물어왔다.

'그럼 이제라도 그 애와 거리를 두고 떨어지겠어? 늦던 빠르던 언젠가 아이는 사실을 알고 널 증오하게 될 거다. 언제까지고 지금 같은 관계로 지낼 수 없어. 하지만 넌 그 애와 떨어지고 싶지 않겠지...'

그랬다. 그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물은 거 였어. 나는 곧바로 물었지. 어떻게 해야 지금 그 애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내 절박한 말에 그는 또다시 선택지를 주었어.

'그 애가 진실을 알아내어 널 증오하게 되는 걸 기다리던가, 때가 되었을 때 네가 직접 그 애에게 알려주고 그 증오를 받아 내던가.'

당시에는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몰랐어. 다만 아이가 직접 알아내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나는 후자를 택했지. 뭐,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그걸 택할 걸 알고 한 얘기였다던데. 그건 나중 일이고.

나 혼자만이 너무나 큰 변화를 겪은 채 그 해의 겨울이 넘어갔어. 아이는 어엿한 중등부가 되었고, 나는 고등부의 마지막 학년을 맞이했지.


시간이란 이름의...


그런 일이 있고난 후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거나 도망치지 않은건 모순적이게도 그 아이가 있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의지해오는 아이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멀어지기는커녕 행여나 나쁜 길로 빠질까 봐 그 전보다 노심초사하며 챙겼지. 진짜 멍청하지 않아? 아니 진심 멍청하네. 그 애만 관련됐다 하면 앞뒤도 안 봤으니.

아이는 변함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곁에 있었어. 공부를 가르쳐 줄 때도 같이 외출을 할 때에도. 성격 자체가 너무 활발하고 기운차서 커갈수록 내가 따라다니기가 힘들어졌지만 그럴 때면 내게 박자를 맞춰주기도 하는 모습이 또 얼마나 예쁘던지. 반항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말을 잘 들어줘서 정말 이상적인 동생이었어. 어디까지나 내 기준으로 말야.

내가 아이를 그저 동생으로만 보는 것과 달리 아이는 나를 이성적으로 보는 것 같았어.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히 알겠더라고. 다른 여자랑 얘기하는 것만 봐도 하루종일 부루퉁해지고, 칭찬의 의미로 해준 쓰다듬에 얼굴을 붉히고, 무리해서 어른스러워보이려 하고.

한번은 익숙하지도 않은 하이힐을 신고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져서 발목이 부러질 뻔 하기도 했는데, 와, 그 때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뭐하는 짓이냐고 혼내니까 지는 재밌다고 깔깔 웃는데 나 참. 웃는 얼굴에 어떻게 침 뱉겠어. 그 날 숍 데려가서 아이가 신을 수 있는 낮은 굽의 구두를 사주는 걸로 대신했지.


아, 이렇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야말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무작정 어리지만도 않은 너와 세상에서 하나 뿐인 친우와 나, 그렇게 셋이서 웃을 수 있었던 때였으니.

그런 의미로 흐르는 시간은 내게 독이었지만 동시에 약도 되었다.


아이가 중등부를 거쳐 고등부로 들어가는 사이, 나와 R 역시 문제 없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어.

그 즈음은 아이가 내게 조금 소원해질 때였어. 새롭게 들어간 학교에서 새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정신 없어 보이더라고.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또래와 어울리는 것도 그 아이에겐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찾아가서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한동안 R의 옆에서 그의 일을 도우며 지냈지.

당시 R은 '조직'을 양지화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어. 그건 아주 옛날부터 갖고 있던 그의 소원이었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야. 그 때부터 잊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자격이 갖춰지자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었어. 나도 미력하나마 그런 그에게 협력해 일을 도운거야. 그에게 입은 은혜가 한둘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내 유일한 친우였으니까.


나와 R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아이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어. 가끔 한번씩 만날 때마다 마냥 어리던 아이가 성숙해지고 앳된 티를 벗어가는게 보여서 흘러가는 시간을 체감했지.

나는 거의 변한 것이 없는데 아이는 정말 몰라볼 정도로 자라서 여자가 되더라고. 저게 내 허리에 매달리던 그 꼬맹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확 바뀐 모습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아이의 오빠인 걸. 언젠가 그 마음을 거절하고 상처 입힐 수 밖에 없는 사람인 걸.

아이, 아니 이제는 그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자란 울에게 첸들러 부부가 친부모 얘기를 해준 것은 18살 생일 때였어. 그들은 진실을 몰랐기에 알려준 것은 그저 그녀가 그들의 양녀라는 것, 부모가 죽은 건 그녀가 3살 때라는 것 정도였어.

그녀가 그 사실들과 함께 받은 귀걸이를 제 귀에 꿰었던 날, 아무것도 모르는 첸들러 부부는 내게 연락해 와서 그녀를 봐주지 않겠냐고 물었지. 나는 흔쾌히 알겠다 하고 그녀를 찾아갔어. 흰 양귀비와 붉은 양귀비로 된 꽃다발을 들고가 네게 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주며 언젠가 더 큰 진실을 알아버릴 그녀를 속으로 위로했어.

지금 여기서 이 정도로 꺾이면 나중은 어떻게 버티려고 그러니. 그 때의 너는 더 큰 분노로 나를 몰아쳐야하는데. 이렇게 여려서 어떡해.

말없이 쓰다듬어주는 내게서 그녀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의 안에서 무엇이 변한지 모른 채 평상시로 돌아온 모습을 보고 그저 안도했었지. 몰랐다기보단, 알고싶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똑똑하고 영리한 그녀는 학기 내내 우수한 성적과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으로써 남은 학창시절을 보내었어. 공부 면에서 더이상 내가 가르쳐 줄 것은 없었지. 나와 같은 학교에서 나보다 뛰어난 성적을 보이는 것이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어.

그녀 나이 스물, 그 때는 대학 졸업만을 앞둔 시기였어.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할 그 시기에 그녀는 어느 날 불현듯 내게 만나자 연락해왔고, 나는 드디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녀가 부른 곳으로 갔어.

그 날이 바로 첫 분기점이자

내 손으로 네게 평생 남을 상처를 입힌 날이었어.


마지막 아닌 마지막


그녀가 약속 장소로 얘기한 곳은 아직 어릴 때 겨울마다 찾아갔던 그녀의 별장이었어. 8살 때부터 겨울 휴학기가 되면 나와 어린 그녀와 R 이렇게 셋이 찾아와 한달 남짓을 같이 보내곤 하던 곳이었지. 항상 12월에 와서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그 곳에서 셋이, 혹은 첸들러 부부까지 다섯이서 맞이하던 정말 추억 깊은 장소였어.

그 날까지는 말야.


나는 가기 전 R에게 어딜 갈 건지 누굴 만날 건지 귀뜸을 해주고 내 차를 몰아 그 별장으로 향했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이었으니까. R은 나를 막지 않고 다만 '확실하게 해' 라고만 했어.

한 반쯤 갔을까. 도중부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고. 어쩐지 아침부터 하늘이 잿빛이더라니. 포슬포슬한 함박눈이 점점 내려 앞유리에 쌓이길래 와이퍼를 켜고 계속 달리다가...

갓길에 급히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박았어. 그리고 사정 없이 울었어. 미친 듯이.

정말 꼴사나울 정도로 우는 와중에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지.

몇 년간 기다리던 날이 결국 와버렸네, 영영 오지 않길 바랐는데 같은 멍청한 후회부터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과거의 기억들. 어렸던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그런 그녀가 하얀 눈 위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것까지.

그래, 확실하게 하려면 나는 그녀를 상처 입힐 수 밖에 없어. 내 손으로 그녀를, 그렇게 아껴왔던 보석에 흠집을. 내 손, 내, 내 손으로, 그녀와 내 아버지를 죽인 이 손으로.

상상만으로도 괴로워서 결국 문을 열고 뛰쳐나가 토했어. 내장까지 게워낼 기세로 전부 쏟아내고 눈물도 한바가지 흘리고 나서야 제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지. 거기 더 있다간 아예 목을 메어버릴 것 같아서 서둘러 차로 돌아가 급히 약속 장소로 향했어. 가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지만 어떻게든 도착할 수 있었어.

내리기 전에 볼썽사나워진 얼굴을 대충 정리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눈가가 벌건 건 어쩔 수가 없더라. 만약 물어보면 하품했다고 둘러대자...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다가 실소를 흘렸어.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배려하면 뭘 어쩔 건데.

냉정해지자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려 마당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이미 와서 놀고 있었어. 그녀가 좋아하는 눈송이 되날리기를 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던 그녀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눈치 채고 내게 달려와 안겼어. 익숙하면서 성숙해진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참고 물었지.

왜 불렀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대답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얘기라면 집에서 해도 되잖아. 여기가 아니면 싫은 걸.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가고 그녀를 내게서 천천히 떼어놓았어. 그런 나를 의아하게 보던 그녀가 돌연 심호흡을 했고,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았어. 그녀도 부끄러움에 눈을 감아 나를 보지 못 한게 다행이란 생각이 미련하게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어. 그리고 그녀는

고백, 했어.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난 그저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어...

'나, P를 좋아해. 지금까지처럼 동생으로써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보고 있어. 좋아해요. 나랑, 그, 사귀어...'

그만! 거기서 내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의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날카롭게 나간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움찔 떠는 것까지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지.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눈을 하고.

그리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할 말을 했어. 네 부모님은 사고사가 아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네게 접근한 것도 언젠가 널 죽이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서였다고.

널 좋아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네 얼굴이 절망에 일그러지는 걸 보려고 그렇게 대했던 거다. 너 같은 덜 떨어진 계집애를 누가 좋아하겠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찌를 때마다 동시에 내 가슴도 저며졌다. 그 밝던 얼굴에 그늘이, 절망이, 배신감이 드리울 때마다 죄책감으로 심장이 옥죄어갔다.

아니야 아닐거야 라며 현실에서 눈 돌리려는 그녀에게 나는 손을 들었어. 내 손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능력으로 밀쳐내어 바닥에 구르게 만들었어. 처음 보는 내 능력에 그녀는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막더군. 눈송이를 날릴 때와는 다른 규모의 바람이 내 주변을 휘몰아쳤지만 나 역시 능력으로 그 바람을 찢으며 그녀를 조롱했어.

이깟 엉성한 바람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죽기 싫으면 전력을 다하라고 하면서 그녀를 '찔렀어'. 한번, 두번, 세번. 연달아 꽂히는 보이지 않는 창에 그녀는 결국 폭주했지. 목이 쉬어라 괴성을 지르며 사방을 휘몰아치는 거대한 기류에 통나무로 지어진 별장이 무너지고, 나 역시 휘말려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패대기 쳐지고 기절했어. 지면에 다리부터 박아서 뭔가 으스러지고 부러지는 소리와 감각이 느껴진게 마지막, 아니,

그녀가 울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마지막이었어. 내가 찔러낸 상처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천천히 무너지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고 옆에는 R이 있었어. 얼마나 있었는지 몰라도 엎드려 자고 있더라. 눈을 뜨자마자 온 몸이 얼얼해서 신음 아닌 신음을 흘리니까 그가 깨어났는데 세상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아주 그냥. 만신창이가 되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낄낄대는 나를 보고 그가 주먹을 들었다 놨지. 그러곤 허탈한 목소리로 묻더군.

'어떻게 됐어?'

너무 지친 목소리와 나보다 더 혈색 나빠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어. 모든 것은 예정대로, 라는 의미였지. 내 대답에 안심한 그는 의사를 부르겠다며 병실을 나갔고 나는 잠시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어.

그래. 예정대로 이제 그녀를 직접 볼 수 없겠지. 다시 보는 그 날은 아마도 내가 그녀의 손에 죽는 날일 테니까. 그 날도 늦던 빠르던 언젠가는 올 거야. 여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면 돼. 그녀의 손으로 나를 단죄해주기를 기다리면, 기다리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는데 눈물은 지 혼자 잘만 나요. 덕분에 의사와 함께 돌아온 R이 끅끅거리면서 우는 나를 보고 기겁해서 내게 달려들고, 의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내게서 그를 떼어놓으려고 하고,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새삼스러운 상실감을 느끼며 울고. 아주 개판이었지.


이 후는 특별한 건 없어. 나는 반년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나오고서도 재활로 1년을 보냈어. 그 사이 그녀가 나를 찾아온 적은 없었고, 나 역시 그녀를 찾지 않았지.

그 날의 사태는 때마침 일어난 눈사태로 인한 불행한 사고로 잘 수습되었고 첸들러 부부만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다친 나와 그녀를 걱정했어.

나에 비하면 경미한 부상이었던 그녀는 상처가 낫자마자 아픈 몸을 이끌고 출국을 했다더군. 그리고 3년 뒤 들려온 소식이 그녀가 형사가 되었다는 거였어. 너무도 그녀다운 선택이라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웃어버렸지.

그 즈음부터였지, R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위한 접촉이 시작된게.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흐를 동안 나와 그는 각자의 방법으로 그녀의 긴장선을 건들며 간을 봐왔던 거야.

그녀의 감정이 녹슬지 않도록. 잊지 않도록. 다음엔 절대 망설이지 않도록.


내가 해 줄 수 있는 얘기는 이게 마지막이야. 그 날 이후로 내 시간은 멈춰버린 것이나 다름없거든. 멈춘 시계는 고물일 뿐이니까 어서 부숴주길 바라고 있는데, 좀처럼 그 날이 오질 않네.

어서 만나고 싶다...내 하나 뿐인 동생. 어서 와서 나를 부수고 이 삶을 끝내줬으면.

그러기 위해 이 끔찍한 목숨을 이어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