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누님.”
사도닉스는 눈 앞에 놓이는 술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물게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라피스는 타협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 병, 두 병, 세 병…상자에서 술이 계속 계속 튀어나온다. 정말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서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과음은 나쁘다는걸 톡톡히 깨달아 술자리를 크게 즐기지 않는 어른으로 자란 사도닉스와 달리, 똑같은 경험을 한 라피스는 ‘그러니까 그 나쁜 술을 다 먹어치워서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입장으로 자랐다…아니. 어딜봐도 핑계다. 아마 어떤 부모의 밑에서 자랐어도 그녀는 술을 탐했겠지.
“…이건, 너무 많지 않을까.”
“너 나랑 하루이틀 보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잔말 말고 술잔 들어. 이 누님이 간만에 동생 보러 멀리까지 나오셨잖아.”
“…….”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이 따라진다. 대답을 들을 생각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뻔뻔스레 말하는 것이다.
“야. 이런 누나가 세상에 어딨냐. 동생 만나며 귀한 술을 잔뜩 사오는 걸로 모자라 직접 따라주기까지 하신다. 감사해 절을 해도 모자랄 망정.”
“정말 여전하구나.”
“당연하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변해.”
“애초에 귀한 술이라고 해도 평범한 소주잖아.“
라피스는 사도닉스의 태클을 가볍게 무시한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인 사람이라니까.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술잔을 든다. 라피스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표정을 푼다.
“우리들의 멋진 노년을 위해서 건배.”
“건배.”
작게 건배사의 뒷말을 따라한 사도닉스는 술잔을 입에 댄다. 코앞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신음소리에 문득 어깨를 움찔한다.
“─크으!”
…깜짝이야. 누님. 소리가 요란해. 아. 그러니까 나를 하루이틀 보냐니까. 한 잔 마셨는데도 라피스는 벌써 취기가 가득해보인다. 아니. 마시기 전부터 취해있었다. 이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안심하며 사도닉스는 마저 술잔을 비운다.
소주병 여덟 개중 두 개가 빈 병이 될 무렵, 라피스의 얼굴은 제법 붉어져 있었다. 같이 마신 것 치고 마신 티가 거의 나지 않는 사도닉스랑은 대조적이었다.
“그래서, 사루비아는 잘 지내고 있냐.”
이 무렵의 사루비아는 열다섯살이었다. 딸의 안부를 묻는 라피스에게 사도닉스는 덤덤히 대답한다.
“잘 지내고 있지. 곧 고등학교 가야 해서 바빠.”
“교복은 예쁜걸로 골랐냐.”
“교복을 고르긴 어떻게 골라.”
“뭘 모르네. 교복이 학교를 고르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준인줄 알아.”
어차피 나중에 남는건 결국 교복입고 찍은 사진 뿐이야.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학교는 교복을 남긴다는 말도 못 들어봤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라피스는 열변한다. 안 되겠네. 이 녀석. 그런 것도 모르는 죄로 한 잔 더 받아. 라피스는 술병을 든다.
“어라.”
“그거 빈 병.”
“벌써 다 마셨구나. 이 녀석. 말로는 틱틱거려도 몸은 솔직하다니까.”
“…아니. 안 마시고 있으면 따라주니까 그런거잖아.”
“솔직히 말해. 너도 사실 술을 좋아하고 있는 거지! 나의 동생이라면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거 참.”
뭐. 그가 술을 좋아하냐 싫어하냐로 치다면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게 맞을 것이다. 과음은 두렵지만, 술자리 자체는 싫지 않았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이렇게 누나와 함께 만나 가지는 담소는 술냄새는 좀 나도 즐거웠으니까. 만약 누나가 아니었다면 술이란건 무서운 상황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라는 인식인 채로 어른이 되었을 테니까.
“그거 아냐. 누나 이제 숟가락으로 병뚜껑 딸줄 안다.”
“전에 그거 했다가 숟가락 망가트렸잖아.”
“아니. 이번엔 진짜라니까. 이거 봐!”
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날아간다. 이번엔 정말로 숟가락으로 따는 데 성공했다. 비록 병뚜껑이 좀 화려하게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어때.”
“음식점에서 하면 안 되겠네.”
“임마. 좀 더 감탄하란 말이야.”
이번엔 숟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통통 때린다. 아야. 사도닉스는 작게 신음을 뱉는다. 정말로 아프다기보단 반쯤 장난이지만.
“어휴. 술냄새나.”
정부군을 피해 돌아오느라 평소보다 늦게 집에 돌아온 사루비아가 두 사람을 보고 작게 핀잔을 놓는다. 하하. 머쓱하다는 듯이 웃는 사도닉스랑은 달리 라피스는 당당하다.
“너도 크면 다 알게 된다니까. 원래 이 세상은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곳이야.”
“아빠에게 자꾸 술 먹이지 마요. 아무리 아빠가 안 취해도 그렇지.”
“정기적으로 간에 알코올을 부어줘야 소독이 된다니까.”
“애 앞에서 왜 주정을 부려. 부끄럽게.”
사루비아의 투덜거림에 라피스는 뻔뻔하게 응수한다.
“적당히 마셔요. 또 아빠 괴롭히지 말고.”
“후…적당히라.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로군.”
“네 병 정도는 남겨두라고요. 그거.”
“어라. 왜 이러지. 나이들어서 그런가, 귀가 잘 안 들리네.”
한숨을 쉬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물론 사루비아가 정해준 네 병이 다 되어도 라피스는 그만둘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같은 무슨 소년만화같은 대사를 읊기까지 한다. 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며 라피스는 문득 사도닉스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 일이라는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네.”
“응?”
사도닉스는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라피스는 숟가락으로 사도닉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 말이야. 너.”
“나?”
“어릴때는, 훨씬 가녀리고 연약한 녀석이었잖아.”
의문은 이윽고 의아함으로 바뀐다. 자신의 누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딱히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다. 오히려 아직도 그닥 어른답지 못한 것은 아닌지 고민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네가.”
“지금은 안 그렇다는 소리야?”
“당연하지.”
라피스는 술잔을 다시 기울이곤 이어 얘기한다. 어릴 적의 사도닉스를 떠올린다. 자신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졌을 무렵에도 그는 여전히 연약했던 소년이었다. 혼자 스스로를 몰아가고 웅크리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넌 비실비실하고, 여리고, 언제 어디서 끽하고 죽어버릴까 걱정되는 녀석이었다고. 이 험한 세상 살기엔 심하게 가냘픈 놈이었어.”
“꽃집 일 하다보니 체력이야 늘긴 했지…….”
“몸 얘기만 말하는건 아니거든.”
부러 다른 해석을 하는 그에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라피스는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언젠가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한 적 있었다. 라피스도 사도닉스도 아직 어른이 아니었던 때였다. 아버지에게 대든 탓에 누나의 얼굴에 난 상처를 소년은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그 눈에 라피스는 괜스레 울컥하게 됐다. 동생 앞에서 이런 얼굴을 보이는 게 자존심상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너 말이지. 그렇게 눈치만 보면서 살지 마. ’
그 때의 말은 어린 그에게 꽤나 충격을 가져다줬다. 어찌됐건 소년은 바깥에서는 늘 상냥한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었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놓는 사람은 있을 지언정 그의 성품에 대해 지적을 하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소년은 스스로의 비겁함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스스로를 병들게 할 지경이 될 때까지. 결벽적으로 도덕을 추구했고, 올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애썼다. 눈치만 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무력한 존재가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의 소년시절은 그러한 죄책감의 연속이었다.
그런 인생의 전환점을 줬던 누나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어른이 된 사도닉스는.
“강한 사람이 됐어. 너. 옛날보다 훨씬. ”
“…….”
“남에게 의지하기만 하던 꼬맹이가, 남에게 의지받는 어른이 되다니, 감개무량하기까지 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릴 때 그랬던 것 마냥 겸연쩍게 볼을 긁적인다. 사도닉스는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글쎄. 그런 걸까…….”
“이 나의 안목이니 틀림없어. 믿어. 사루비아가 잘 자라고 있다는게 그 증거야.”
딸의 이야기가 나오면 사도닉스는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사루비아만큼은, 흠잡을 데 없는 그의 당당한 자랑거리였다. 젠장. 술기운에 얘기하기도 좀 쑥스럽네. 취하게 만들었을때 슬쩍 지나가듯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나마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이 쑥쓰러움을 가려준다는 것이 다행일까. 사도닉스는 이런 누나의 칭찬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다가, 살짝 미소짓는다.
“…그러는 누나도, 많이 변했는걸.”
“나?”
“그래. 옛날엔 망나니 같았다고.”
“뭐야. 그거.”
화났어?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예상 못한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은 망나니가 아니라는 거냐? 너, 사람 볼줄 모르는구만.”
“…하하하.”
…마침내, 여덟 개의 술병이 전부 비어버리고 만다. 술에 강한 편인 사도닉스라고 해도 이 즈음에는 조금 술을 마신 티가 난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라피스를 쳐다본다. 이 쪽은 이미 거의 아슬아슬하다. 한껏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이 자식…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안 취하는 거냐…….”
“글쎄. 누님의 동생이라는 증거 아닐까.”
“크윽…분하다. 이번에야 말로 바카디의 복수를 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뭔데…”
떡이 되어 테이블에 눌러붙어있는 자신의 혈육에게 태클을 건다. 취하진 않았다곤 하나, 슬슬 어질어질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그런의미에서 보면 나름대로 복수 성공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으면서도, 내심 약간의 자랑스러움이 사도닉스의 안에 자라난다.
“네가 반 병을 먹어치우고도 멀쩡했던 그 녀석을 벌써 잊어버린거냐. 괘씸하구나…바카디는, 네녀석이 취하는 모습만을 열렬히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아. 그때 그 독한 술 얘기구나.”
“흐으윽…흐으윽. 불쌍한 바카디…….”
…취하지 않았을때도 기본적으로 취한 것 같은 기세를 띄고 있는 라피스이다만, 이제는 진짜로 취한 게 분명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술병도 다 비웠겠다, 이제 슬슬 들어가서 자십시오.”
“안 돼…그래서는, 녀석의 복수를 해줄 수 없어…….”
“누님. 완전 취했다니까.”
“덤벼라. 동생아……나는 사실 한 대만 때려도 죽는다…….”
“그거 약골이잖아…….”
그보다,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천하의 나쁜 놈이지. 물론 그런 기본적인 도덕관에 입각한 상식적인 태클이 주정뱅이에게 들릴 리는 없고. 잔뜩 남은 병뚜껑들을 쌓아 모양을 만든다. 무덤인 것 같다.
“바카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결국엔 털퍽, 테이블에 엎어진다. 아. 이런. 이번에도 뒷정리는 내가 해야겠네. 그럴 줄 알았지만. 사도닉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뻗어있는 라피스의 팔 사이에 손을 끼워 들어올린다. 안아올린 모양새로 능숙하게 자세를 바꾸고는 자신의 침대에 눕힌다. 오늘은 바닥에서 자야겠네.
어쩌니저쩌니해도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는 건 사실이라 조금은 어질하다. 술판이 벌어졌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테이블을 적당히 치우고는, 방으로 돌아가 장롱에서 침구를 꺼낸다. 어느새 침대 위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사도닉스는 바닥에 자신의 이부자리를 깐다. 침대에 널부러져있는 자신의 혈육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불을 덮어준다. 뭐. 또 차내겠지만. 오늘은 역시 그도 지쳐서 씻을 기운이 없다. 불을 끄고는, 그대로 쓰러지다시피 누워서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