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기분을, 마치 색이 가득한 하늘을 하얀 물감이 덧씌워 삼키는 듯한 그 기분에 삼켜져서, 잿빛의 검광과 함께 남자는 목표를 잃어버렸다.
목표 없는 검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말을 동료에게 들은 순간, 그저 입을 닿은 채 도망쳐버렸다. 먼 일루나스에는 사람의 정체를 숨겨주는 마법이 있다고 했지만, 나같은 인간의 돈으로는 불가능한 것 이겠지.
강물에 손을 씻고 있으면 피로 물든 손에 강물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빼들어진 손은 그때의 검광을 재현하며 정신을 갉아먹었다. 당장 죽고싶다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지만, 목표를 위해 강해진 몸은 이제 몸 쉬이 누울 곳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죽기 위해서 그로카로 찾아갔다. 열사의 땅이라면 나조차 죽일 자들이 가득하지 않을까 하면서, 도망따윈 치지 않고 그로카의 사막 전사들과 맞섰다. 어느 때에 한 사막 전사 무리가 달려드는 것들을 보며 그들의 목을 베어넘기고, 몸 뉘어 죽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한 여자아이가 나에게 활을 쏘기 시작했다. 닿으려 하는 때가 되면 여자아이는 도망가고, 그렇다고 화살은 나에게 닿지조차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려 어느 한 순간이 와 달려들어 목을 베려 하자. 소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있었다.
"이런 곳에서 뭘 하는거지?"
내가 무표정으로 물었을 때, 소녀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우는 얼굴로도 활시위에 걸친 활을 쏘아내며, 나를 죽이려 하였지만. 화살은 너무나도 간단히 막혀버렸다.
넣어두었던 검을 빼어들고 소녀의 목에 들이댔다. 죽음을 각오했던 것처럼 보이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검을 집어넣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 왜."
질문의 시작.
"어째서."
그리고 물어지는 이유 모를 질문.
"우리 가족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
"죽인거야?"
그 말에 할 대답은 단 하나밖에 없어서, 오히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툭 던졌다.
"이 검으로 배운 것은 죽이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이는 방법만을 배우며 이 자리까지 다가왔다. 마침내 죽일 자를 찾고, 죽이는 때에 모든 목표는 사라졌다. 이것이 과연 내가 바랬던 것인가 생각할 시간따윈, 검을 어떻게 휘두를까 하는 생각에 무시당했으니까.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다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내려봤다.
"이름은 뭐지?"
"...죽여."
"다시 질문하지. 이름은 뭐지?"
"...루니에."
루니에, 그로카 어로 반짝이는 자라, 이 사막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등을 돌린 채 말을 툭 내던졌다.
"따라와라."
소녀는 따라오면서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의 이름은, 뭐야?"
"내 이름따위. 알 게 뭔가."
"그게 그로카의 문화니까."
입을 꾹 닿고 있다가, 발걸음을 몇 걸음 떼어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드. 라고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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