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R,AIRSS

last modified: 2015-05-06 17:05:55 Contributors

언젠가 상황 맞춰 풀려던 과거사 중 하나인데, 버리기 아까워서 올려둬요.
보긴 봤을까나.

- 그대를 만나서, 저는.

푸르러야 할 하늘이 어둡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차디찬 빗방울. 사방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로 하여금 깨닫는다.

꿈이구나. 지긋지긋한 그 날의 꿈.

몽롱하게나마 꿈임을 알면 빗소리 사이로 노이즈가 섞여든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 웅덩이라도 밟는지 찰팍찰팍 하고 물 튀기는 소리가 선명하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소리의 정체는 알지만, 여태까지 그랬듯 천천히 돌아서 발소리의 주인을 본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키, 짧고 붉은 머리칼과 아직은 생기가 남아있던 홍안의 소녀. 소녀는 몸에 맞춘 나실한 드레스가 빗물에 젖고 매끈한 구두가 진흙투성이가 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린다. 한 손에는 푸른 아게라텀 다발을 쥐고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학학거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소녀의 허상이 자신을 지나쳐가면, 아무것도 없던 주변이 그날의 풍경으로 변해가는게 보인다. 마치 물감을 푼 것 마냥 번져나가며 절망으로의 길을 비춰준다.

"끔찍하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달리는 소녀의 뒤를 느긋하게 쫒는다. 필사적으로 나아가면서도 꽃다발이 상하지 않게 드는 모습에 피식 자조한다. 내 기억이지만, 보고있자니 처절하군.

"달려가도 소용 없어. 걘 이미 죽었거든."

소녀의 좁은 보폭을 따라가며 그 뒷모습에 툭하니 던진 말. 몇 번이고 이 기억의 꿈을 반복하면서, 한번도 빼놓지 않고 한 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떠올리고 싶은 말. 무의미하고 무의미한 말. 이 말을 내뱉고 나면, 소녀는 발견한다. 바닥에 쓰러져 비를 맞고 있는 소년의 시체를.
비는 어느덧 폭우로 바뀌어있다. 그 강렬한 빗줄기 속에서 그의 머리는 빗물 섞인 피웅덩이에 반쯤 잠겨있고 눈은 동공이 풀려서 감기지도 못 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군데군데 붉게 물든 옷과 차갑게 식어버린 체온이, 그가 죽었음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자..는 거야? 여기서 자면 안 돼..>
<일어나...오빠 주려고 이거, 가져왔어...>
<..일어나...응..? 일어나아....일어나아아....>

사고의 핀트가 나가버린 소녀는 시체의 옆에 앉아서, 시체의 어깨를 흔들며 일어나를 반복한다. 몸이 이상하게 차가운 것이나 딱딱하게 굳은 건 그저 추워서 그런 걸 거라고... 제 겉옷을 벗어 걸쳐주며 깨우려 애쓴다. 하지만 소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죽었음을 인지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철퍽철퍽...흔들흔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시체는 그저 흔드는 데로 흔들리고, 시선은 허공에 꽂힌 채 그대로.
시체에게 제 겉옷을 덮어주고 그 위에 꽃다발을 올려놓은 소녀의 눈에선 생기를 빼앗기듯 새빨간 눈물이 흘러나온다.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와 푸른 꽃잎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고, 붉은 눈물에 젖은 꽃잎은 급속히 시들어가 검게 메말라버린다. 그런 소녀의 앞에, 시체를 두고 마주 앉아 물끄러미 바라본다.

"미련하게도... 오늘만큼은 유모의 말을 듣는게 좋았어. 나오지 않는게, 여기 오지 않는게 좋았지. 하지만 나는 생각한 데로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아서... 고집을 부리고 유모와 양친의 눈을 속여서까지 여기에 왔다. 그런 날 맞아준 건 너의 죽음이라는 이름의 절망."

<우으아아아앙- 시이- 일어나아- 왜 안 일어나는 거야- 흐으아앙->

방울방울 눈물 흘리기에서 통곡으로 루트를 바꾼 소녀의 절규가 작은 입에서 터져나오지만 억수 같은 빗소리에 잠겨버린다. 막혀버린다. 그렇지만, 그 슬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어서, 소녀는 끝없이 운다. 상처 입은 목에 무리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이 날, 나는 눈물샘이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울었다. 작은 몸임에도 눈물이 끝도 없이 나와서 울고 울고 또 울었지. 그런 내 앞에 나타난 건 널 죽인 원흉들...그래. 빌어먹을 인간들."

'뭐야 뭐야, 시끄러워서 왔더니 또 있네.'
'이번엔 여자애인가- 좀 가지고 놀까?'
'그럴, 야 안 되겠다. 뒤에 딴 사람 와.'
'아 그러게. 쳇. 계집애는 어떤가 궁금했는데.'

아직 하임어를 배우는 중이던 소녀였기에, 그 얘기를 모두 알아듣는 건 힘들었지만 얼추 내용은 파악했다. 소년을 죽인 건 저들이라고. 소년의 몸 곳곳에 난 상처는, 저들이 가진 검에 의한 거라고.

"그들의 얘기에 내 슬픔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어 내 안에서 타올랐다. 하지만 작은 몸은 그런 감정의 격류를 버티지 못 하고 단번에 쓰러졌지. 계속 비를 맞았고, 기운이 다하도록 울어댔으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 당황한 인간들과 유모가 저멀리서부터 날 부르며 달려오는게 보였고... 그대로 아웃. 눈을 떴을 땐 내 방 내 침대 위였지."

깨자마자 양친에게 캐물어 들은 것은 확인사살 같은 소년의 죽음. 소녀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서 우리가 어찌 할 수가...>
<흐앙- 시이- 미안해애->
<네, 네이! 진정하거라! 아가!>

어린 소녀는 무섭도록 느껴지는 자신의 무력함과 소년에 대한 미안함으로 울었다. 그러다 지쳐 쓰러지고, 깨어나면 다시 울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휴식을 취하지도 않은 채 그러기를 사흘. 소녀는 기절해 빠져든 잠 속에서 그 날의 전경을 꿈꿨다. 그리고 깨어난 후엔, 거짓말처럼 울지 않았다. 자신에겐 소년을 위해 울 자격이 없다고 깨달아버렸으니까.

갓 일어나 망연하게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을 끝으로 낡은 필름 같은 영상은 끝난다. 하지만 꿈에서 깬 것은 아니다.
물로 씻어 낸 듯 새하얘진 공간에 자신과 어린 자신이 있다. 비가 오던 그 날처럼, 훌쩍훌쩍 우는 소녀의 앞에 수그려 앉아 제 손으로 눈물투성이의 작은 얼굴을 닦아준다. 방울방울한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 조그만 구슬이 되어 또르르 굴러간다. 그 소리가 마치 잔잔한 빗소리 같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주며 소녀에게, 과거의 자신에게 말한다.

"그렇게 슬퍼? 그만 울자. 응?"
<그치만...나 때문에...>
"그렇다고 계속 울면 힘들잖아. 알고 있지? 시이...세즈가 죽은게 슬퍼서 나는 눈물이 아니란 거."
<...응...>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마주 보는 자신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 눈에 깃든 건 슬픔, 절망 보다 깊은...허무와 상실감. 기대던 곳이 없어져 생긴 어둠.
간질간질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던 눈물이 서서히 멎어간다.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야 달래지는 제 과거를 마주하며 깨닫는다. 기억을 잃은 자신은 항상 불안정해서, 타인에게 기생하지 않는 한 살지 못 한다. 그래서 첫 기생지인 소년이 사라지자 그 곳을 도망쳐 나왔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 무서워 벽을 쌓아 타인을 거부했던 거다. 사실은 누구도 싫어하지 못 하고 달라붙고싶어 꼴 사나운 주제에.

"이제 숨기지 않아도 돼. 새로운 곳이 생겼으니까. 그만 보내자."
<응.>

어느덧 눈물이 멈춘다. 축축히 젖은 눈가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주고 손을 내려 자그마한 소녀의 손을 잡는다. 겹친 두 손이 천천히 내려가 닿은 곳은 홀연히 나타난 소년의 시체, 세즈의 얼굴. 반쯤 피에 물든 하늘빛 머리칼을 잠시 바라보다가 촛점 없는 눈을 감겨준다. 진한 자줏빛 눈동자가 가냘픈 눈커풀 뒤로 가려지자 손을 뗀다. 서로의 손을 거두는 두 사람의 자신은, 이제 눈 뜰 일 없는 시체를 보며 미소짓는다.

"<잘 자. 세즈. 사랑했어. 안녕.>"

둘이 입을 맞춰 그렇게 말하자 시체는 배경에 녹아들 듯 사라진다. 이제 저 아이는 슬픔도 무엇도 아닌 그저 그런 기억으로 남으리라.
남은 둘은 서로를 마주본다. 마지막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 뿐.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점점 흐릿해지는 과거의 자신을 보며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든다.

"다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또 보자."
<에에- 싫은데- 바보랑 또 보기 싫어! 메-롱이다, 히히.>

어린 자신이 빨간 혀를 쑥 빼무는 걸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게 되자 틈도 없이 시야가 명멸한다. 시린 감각에 눈을 감자 새하얀 사방이 자신을 먹어버린다.

-
"으음..."

다음 순간,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니 창문 틈새로 비춰오는 새벽빛이 보인다. 뺨과 몸에 닿는 천의 감촉이 제가 꿈에서 깨어났음을 알려준다. 아직은 어두운 사방에 익숙해지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천천히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에 누군가의 잠든 얼굴이 보이자 잠결임에도 소르르 웃음기가 솟아오른다.

레이, 내 연인. 새롭게 찾은 정착지. 사랑스러운 내 사람. 내가 묻힐 곳은 당신의 곁이고 그 마음 속이야. 세상 끝까지 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께할 테니까...

"...레이이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굼실굼실 움직여 팔 안에 자리하고, 한 손을 맞잡은 채 다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천천히 빠져드는 새 잠의 꿈에서는 더이상 빗소리가 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