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제목은 주홍색이었으나, 어장에 독백 올리는 과정에서 선홍색으로 잘못 표기함.)
(어장에서는 가릴 수 있었던 험한 욕설이 그대로 올라온 문장이 있으니, 읽기 전 주의 요망)
모든 소동이 가라앉고.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기숙사로 돌아가 운 좋게 그 자리에 없었던 덕에 큰 화를 입지 않은 자신의 패밀리어인 청을 생전 처음으로 품에 소중하게 꼭 안아주고서 정말 오랜만에 이 근처에 놀러온 삼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허나 기분이 썩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지만 그래도 주양의 기분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해뒀다고 한들 언제 또 만날지 기약조차 없는 것은 고사하고, 이미 자존심에는 큰 금이 갔으며, 더 나아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괴로워했던 모습을 보고서 정신이 말짱할 리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진짜로 미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고 맞을지도 모를 후배. 기린궁으로 갔지만 한때 같은 기숙사에서 친분을 쌓고, 자신의 거침없는 내기에 유일무이한 브레이크가 되어준 선배. 쿵짝이 잘 맞고 성격도 잘 맞고, 자신의 내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단짝 친구. 항상 자신을 자기 혹은 달링이라고 불러주는. 그래서 남이 보면 오해할 사이의 또 다른 단짝친구. 항상 좋은 텐션과 신박한 이야기거리로 동화 옥음이라는 유희거리를 진행해주는 청궁의 후배. 꽤 차가워보이고 의외로 물리력을 잘 행사하던 백궁의 후배. 조금 허약한 느낌이고, 실제로 중간에 쓰러져버려 크게 걱정했던 현궁의 선배. 패밀리어로 보이는 덩치 큰 강아지와 함께 자리에 있었던 키 큰 현궁의 친구. 그리고 그들이 크루시오를 쓸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 했는지, 그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은 채 서있던 백궁의 선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했다. 그때 조금이나마 악바리를 꺾고 남들을 좀 챙길걸. 6학년 학생대표까지는 아니지만, 자신 역시 어엿한 학생대표였는데. 왜 나는 그것조차도.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자신 따위의 사람에게 학생대표라는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학생대표를 하기에는 자신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었으니.
끔찍하고 쓰라린 기억과, 기어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크루시오에 무력하게 당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은 팬에 잔뜩 늘어붙어 타버린 캬라멜처럼 평생 주양의 가슴에 붙어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이 주양의 기분을 더욱 상큼하게 만들었다. 아아. 입 안에 까나리맛 젤리를 수십개 털어넣어도 지금 이것보단 덜 짜릿하겠다.
그런 이유로 인해, 간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삼촌과의 대화 자리에서도 좋은 표정을 보이기 힘들었다. 그럴 수가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상할대로 상한 자존심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자신에 대한 걱정과 안도 이후로 들려온 이야기가. 직계 사람들이 방계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내는 자신을 본격적으로 까내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주양이 이미 그 내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실망이나 배신감보다는 불쾌함이 앞섰다. 잘한것도 없는 주제에 옳은 길을 택하겠다는 자신을 적대하겠다는 그들을 주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거 직계고 뭐고 싹 다 처벌받고 아즈카반에서 영영 썩었어야 했는데. 자신이 세상의 빛을 볼 일도 없이. 뿌리까지 뽑혀 나갔어야 하는데. 같은 피를 나눈 혈족조차 이 모양 이 꼴이니, 혈압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더더욱 짜증나는 점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을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당하듯 한번 더 들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친애하는 삼촌에게 들어서 망정이지, 만약 직계 사람 중 하나가 지금의 주양에게 그따위 소릴 지껄였다간 가만 놔두지 않았을것이다. 설령 자신의 아비라고 하더라도.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거슬리는 짓만 골라서 해요 진짜."
"아이고.. 이렇게 된 김에, 졸업하고 나면 본가 말고 삼촌 집으로 넘어올래? 그 편이 주양이 너한테는 더 안전할거야."
"아뇨. 사양할게요."
보여주기식 호의가 아닌 순수한 호의였으나 주양은 칼같이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적대한다고 한들 호락호락 물러날 주양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존심에 한번 큰 금이 간 뒤라, 더더욱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이상 스스로가 무너져내리지 않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건 용납할 수 없었기에. 제 목에 칼을 들이밀었으니, 그들의 모가지에는 전기톱을 들이밀어도 싸다.
자신의 거절에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삼촌을 마주 바라보던 주양은 이윽고 히죽 웃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상대한테나 보이는 세상 무해한 웃음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졸업 후 계획이 있으니.."
순간. 말이 끊어졌다. 괜히 그런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뭔가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고 있었는데. 미묘하게 느껴졌던 제 3자의 기척까지는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허나 이곳에 모습을 비추고 있는 사람은 주양과 삼촌 둘 뿐. 학원 사람일 리도 없었다. 뭐지? 누구지?
잠깐 생각에 잠긴 주양은 곧 용의자를 떠올려낼수 있었다. 방학때 저에게 잡혀 모가지를 꺾일뻔한 직계측의 인물. 그때도 괜히 감시하고 졸졸 따라붙는 꼬락서니가 역겨워 손봐준 전적이 있었으니. 이곳까지 졸졸 따라와 대화를 듣고 있을 건 그 사람 말고 더 없었다. 그 더러운 숨통을 끊어버리지 않고 붙여두겠다고 판단한 건 큰 오산이었나? 기어코 방계 인원과의 접선을 확인하고 아주 대놓고 이간질할 속셈이렸다. 그들의 속내는 주양 자신보다도 더 들여다보기 쉬웠다.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한데 올려묶고. 적당히 몸을 숨길 수 있을법한 장소를 찾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아. 참으로 재미 없는 숨바꼭질의 시작인가.
".. 삼촌. 그 말 아세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대요."
분명 이 근처였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숨어서 들을만한 곳은 많았지만 주양의 촉은 이곳을 지목했다. 분명 이 뒤에 숨어서 듣다가 뭔가 잘못 밟거나 해서 기척을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무판자로 된 벽 앞에 섰다. 내기와 도박에서나 써먹어야 할 촉을 이런 시시콜콜한 숨바꼭질에 낭비하고 있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몸을 살짝 비틀고, 주먹을 뒤로 뺀 다음 강하고 빠르게 판자를 향해 내질렀다. 요란한 파열음이 저녁의 고요함을 깨부수었다. 반쯤 박살난 나무판자가 결국에는 반으로 꺾여버리고, 판자 뒤에 몸을 감추고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양의 예상대로 직계 가문의 사람. 자신이 방학때 목을 꺾을뻔한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순혈을 옹호하던 파벌의 사람이 왜 은신 마법을 쓰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런것 따윈 주양의 안중에 없었다.
"근데. 우리들 이야기는 왠 개새끼가 엿듣고 있네요!"
짜릿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흐르고, 나무 파편이 박힌 주먹에서는 피가 흘렀다. 피를 보면서도 주양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감정은 고통이 아닌 광기였다. 찢어질듯한 입꼬리. 전혀 휘어지지 않은 채 흉흉한 감정을 여과 없이 내보이며 대화를 엿들은 쥐새끼를 내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 그리고 놀랍게도, 주양의 패밀리어인 청은 이 모든 소동에서도 평소답지 않게 묵묵히 주양의 어깨자리를 지키며 대화를 엿들은 사람에게 관심따윈 없는 양 주양보다 더 검은 눈빛으로 정면만을 바라본 채 부리를 맞부딪치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판자 부수는 소리에 날아갔어야 정상이었다. 하여튼. 누구 패밀리어 아니랄까봐. 재밌는 광경은 놓치기 싫은게지.
"찾~았다. 쥐새끼."
아니. 쥐새끼가 아니지. 아까의 그 험한 욕설을 입에 담으며. 광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평소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양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가. 우습지? 댁들 말마따나 순혈 주제에 머글이랑 혼혈이랑 하하호호 하려는 쪽으로 가니까. 내가 아주 별것 아닌 사람으로 보였지~? 그래서 한번 뒈질뻔 했는데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온 거. 맞지? 그렇지? 그런 거잖아?"
그래. 그래. 아주 좋다고. 무시와 멸시의 태도. 아까도 느꼈는데 또 다시 이렇게 몸소 체험하는구나. 예습 후 복습인가? 기분이 심히 아찔했다. 두번 씩이나 얕보였다. 처음은 추종자에게. 두번째는 이 자에게.
추종자들이야 엄청 강하니까 자신이 질 수 있다고는 해도 이 자는 자신이 직접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다시 제 앞에 그 잘난 낯짝을 비추는 건. 도대체 얼마나 나를 깔봐야 할 수 있는 행동이지? 모든 것이 불쾌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나를 깔보고 있어.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어. 용납할 수 없어.
그래. 이렇게 된 김에. 훗날 추종자들과 맞먹을만한 실력이 되기 전에, 먼저 이 놈부터 가지고 놀자. 조금이나마 이 짜증을 풀 자리가 마련된다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피가 흐르는 주먹을 잠시 거둬두며. 그리고 눈의 검은자위를 좁히고 웃음기를 지우며 주양은 그에게 다가갔다. 주인 대신 웃는 모양새의, 잔뜩 벌어진 청의 부리 속 샛노란 입이 분위기를 한층 더 오묘하게 만들었다.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적어도 목숨만큼은 붙여서 돌려보내줄게. 난 말이야. 생각보다 엄~청 자비롭거든? 나 믿지?"
자. 그럼 어떻게 요리해볼까. 아무리 기분이 뭣같아도 저주 마법인 크루시오를 쓸 순 없으니. 그리고 머글 사회에서 마법을 쓸 순 없으니 적당히 머리끄댕이를 잡아 쌀포대 끌듯이 학교 주변으로 질질 끌고 가서, 인센디오나 레라시오로 천천히 지져도 좋고. 섹튬셈프라로 발가락부터 시작해 서서히 몸에 선을 그어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쿠아 에럭토를 이용해 물을 잔뜩 먹이는것도 해봄직한 일이었지. 이도저도 귀찮으면 마법 안쓰고 즉석에서 두들겨패더라도 속이 후련할테니, 주양의 가학심에 불이 지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후, 삼촌과는 바로 헤어져서 뒷이야기는 주양 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으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직계 사람만큼은 앞으로 서주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솔개 뜬 하늘 아래의 나약한 짐승새끼마냥 빌빌 기게 만들 악몽같은 기억을 주양에게 선사받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마지막에 주양은 말했다. 결국 모든게 자업자득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