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해서 어쩌누, 우리 진석이... 얘가 무슨 죄가 있다고..."
솟아오르던 불길이 잦아들고, 잿더미에서 홀로 서 있던 나를 끌어안은 할머니께서 초조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
언제였는지, 고대하던 가족 여행을 떠나던 날은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만큼 설렘에 전날 밤 잠도 이루지 못했다.
진석은 부모님만 있으면 되었던 아이였다. 친구들이라고 부르기에는 또래 아이들은 진석의 허약한 몸, 그보다는 유약했던 성격을 얕잡아보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니까.
내심 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여린 심성 한구석에서 키워나갔으나, 그것은 거기까지였다. 밖으로 튀어나올 일이 없었으니까.
사춘기의 폭발적인 충동도 그를 움직이진 못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홀로 참아내고, 부모님을 만나 여행을 떠난다는 것으로 해소해버렸으면 되었으니까. 가족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아직 그가 의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있었다. 과시할 필요는 없었고, 그랬다간 그나마 있던 거리마저도 더 멀어질 거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언젠가 모두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자기 손으로.
하지만 운명은 소년을 가장 끔찍한 구석으로 내몰았다. 무엇이 계기였을까? 우스울 정도였다.
가족 여행 중에 자동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들른 무인 주유소에서, 그저 사사로운 시비였을 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았지만.
진석의 집안은 그렇게까지 윤택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가족들 다같이 씀씀이를 조금씩만 아껴 모자람 없이 살 수는 있었다.
다만 그것은 겉으로 보면 일가의 경제적 상황을 조금 낮춰보이게 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그리고 약해 보이면 무시당한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현실이었다.
좋은 외제차를 탄 일가가 먼저 주유를 하겠다며 우긴 것이 화근이었다. 어이가 없는 요구였으나 진석의 가족들은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진석 자신을 욕하고 놀리는 것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참으면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무시하는 말 만큼은 넘길 수 없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머리로 피가 확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의념도 진석의 의지와는 반대되었다.
폭발의 의념이 스파크를 내었다. 하지만 장소는 인화성 가스가 가득한 주유소였다.
그러한 참사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진석을 구하려고 했고, 그것은 기적을 발휘했다.
아, 차라리 그 기적이 일어나지라도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거대한 폭발은 진석의 가족과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덮쳤다.
단 한명, 부모님이 온몸으로 그 폭발의 열기와 폭풍을 받아낸 차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건의 원흉 외에는.
대외적으로는 그저 스파크나, 담뱃불 정도로 인한 가스 유폭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아는 것은 단 한명 뿐이었다.
~
할머니의 품 속에서 진석은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 속은 잿빛으로 물들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정신 속 방어기제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기억을 지우고, 다른 것으로 바꾼다. 인간의 기억은 굉장히 취약했으나, 그 파급력은 큰 법이니.
모두가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실을 아는 한명마저도 사라졌다.
그 때 이후로, 서진석은 자신이 그저 평범하게만 살아왔다고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