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빛이 창문 새로 살며시 날아들어오는 날. 그러나 조그마한 인영이 웅크리고 있는 작은 방은 두꺼운 커튼을 빗장처럼 꽁꽁 닫아버린 암흑천지였다.
똑똑.
나무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인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약간 어긋난 나무 문을 밀어젖히는 소리가 삐걱거리며 퍼져나갔다. 방문으로 들어온 빛에 드러난 것은 탁한 금발과 약간 청록빛이 도는 짙은 녹색 눈의 중장년 여성.
“아이리스.”
여성은 속삭이며 인영을 향해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까만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어린아이가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이의 망토를 살며시 걷어내자 비로소 드러나는 머리칼은 조금의 빛을 받아 지상의 것이 아닌 듯 빛났다. 얼핏 보기엔 흰색이지만 마치 한 올 한 올이 프리즘의 노릇을 하는 양 제각각 무지개를 띄우며 반짝인다.
그제서야 열 살 정도 먹었을까 싶은 아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파르스름한 달빛을 닮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일렁인다.
“얘기 좀 할까?”
침대 위에 올라와 가까이 앉자 아이는 두 팔을 뻗어 여성의 무릎께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만 몰아쉬던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머니.”
긁힌 듯한 목소리다. 신체의 어느 곳도 다치지 않았지만, 마음이 그렇게 긁혀나갔겠지.
“그래.”
아이의 시선이 침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낡은 붉은색 담요에 머무른다. 눈빛에 죄스러움이 섞여있는 것도 같다.
“인간들을 미워하면 나쁜 건가요?”
여성은 눈을 내리깔았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돼.”
자장가를 불러주듯,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속삭임에 아이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어머니도 인간이잖아요.”
여성이 잠시 말이 없자 아이는 급하게 덧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일이 아니야.”
저 혼자 냅다 죄책감에 휩싸인 아이에게 여성은 단호히 말했다. 아이가 착한 성정인 것은 기특했지만, 자신이 상처를 입고도 눈치를 보는 건 그저 '착한' 게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는 아이가 당당하게 살기를 바랐다.
아이의 동족이 처한 운명에 대해선 이미 이야기해주었다. 사소하고도 추악한 이유로 벌어진 일방적 학살을 들려주었다.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으나, 진실을 숨기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아이는 역사를 알고도 여성을 보호자로서 거부하지 않았다. 당장은. 그 태도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그랬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들은, 제가 인간이 아닌 걸 몰랐겠죠?”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왜...”
저를 괴롭혔을까요. 인간 행세를 하는 것도 용납을 못 했을까요. 아이는 목이 메어와 뒷말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성은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동물의 본능이랄까. 이질적인 존재를 위험으로 느끼는 거지.”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네가 일방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가늘면서도 굳센 손가락이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본능이라고 그저 정당화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어. 인간은... 자기들 말마따나 지성을 가진 존재니까. 널 위험으로 느낀 게 본능의 영역일지라도, 네가 다르다는 이유로 괴롭혀선 안 됐어. 그건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야.”
“...다른 인간들도 어머니처럼 생각할까요?”
아이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엷게 담겨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은 소수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여성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세상에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과 희망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는 것의 균형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구나.”
언제나처럼,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진실을 말했다.
“같은 인간끼리라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하는 일이 여전히 흔해.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겐, 어떻겠니.”
“슬퍼요.”
“그래. 슬픈 일이야. 화 나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네게 인간을 사랑해달라고 할 수 없어.”
그 점이 가장 슬프다. 인간의 손에 자란 '인간의 아이'에게, 인간을 사랑하라 가르칠 수 없는 현실이.
“그럼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
빼꼼, 아이가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여성은 망설였다. 어디까지가 네겐 강요가 아닐까. 한참을 머릿속에서 말을 골랐다.
“......단지, 지켜봐주렴. 인간은 바뀔 수 있다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주렴.”
“그렇게 쉽게 변할까요?”
눈에 더욱 힘을 주어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에라도 힘을 주면 조금이나마 더 말에 힘이 있어보일 양.
“한 명의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지. 하지만 약하기 그지없는 인간 한 개체만으로 자연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없어. 인간종의 정체성은 인류라는 집단의 힘에서 온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그러니까 인간 하나하나의 사상보다 인류 전체의 사상의 경향이 중요하다고 봐.”
아이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여성은 기억을 되감았다.
“예를 들어보자. 옛날엔 이국에서 온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일이 많았지만, 어느덧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60년이 다 돼가지. 바로 재작년에는 모든 주의 여성들이 남자와 똑같이 투표권을 갖게 됐어. 그래, 네가 태어난 뒤에 말이야.”
여성은 희미하게 미소지어보였다.
“인류 전체는 어떤 식으로든 변하고 있고, 그 큰 변화의 흐름이 의미가 있는 거야. 짧은 인간의 수명으로 보면 느리더라도... 너는 아주 오래 살 테니까, 확실히 볼 수 있겠지.”
“......”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까는 아이를 보며 여성 역시 침묵을 지켰다. 아이는 다시금 여성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지만, 방금처럼 파고들려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불쑥 물었다. 문장의 주어가 빠져있었지만, '누가'인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잘못된 게 아니야. 변화를 믿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니까.”
여성은 아이의 자그마한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저보다 조금 높은 체온을 느낀 손은 부드럽게 펼쳐져 저보다 큰 손을 마주잡는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난 후 아이가 또 물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용서.”
자신의 용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백 년에 걸친 학살극. 마지막 마녀재판은 무려 44년 전이었다지만, 아직까지도 이 땅의 모든 마법사들의 신경을 좀먹는 망령으로 남아있었다. 여성은 상처 많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 못 했어. 앞으로도 못 할 거고. 하지만 내가 그 증오에 매달려봐야 어쩌겠니. 내 조상들을 죽인 장본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걸.”
아이는 몸을 일으켜 마주앉았다.
“체념하신 건가요?”
“단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 할 뿐이야. 사람은 시간 속을 직접 나아가야 하니까.”
쌉싸래한 미소가 여성의 입가에 걸렸다.
“......”
“......”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공간 안에서 차분히 흐르는 분위기를 느꼈다. 아이는 이해했고, 여성은 신뢰했다.
아이는 살포시 웃으며 지금까지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냈다. 갑자기 환해진 주변에 놀라 눈을 감았다 뜬 여성의 앞에 인간의 모습은 간데없었으나, '아이'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고마워요, 어머니.”
“천만에. 내가 고맙구나, 이야기 들어줘서.”
여성은 품에 파고드는 작은 드래곤을 소중히 끌어안고 비늘을 결대로 쓸어주었다.
“어머니가 제 어머니라서 기뻐요.”
“나도. 네가 내 딸이라서 기쁘단다, 아이리스.”
이번에는 여성의 목이 메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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