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맺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끝이 나는 관계가 존재한다. 한쪽의 죽음으로 끝나는 관계들이 대개 그렇다. 정슬은은 여태껏 관계의 종말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슬은아, 할아버지가 많이 위독하셔.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렴. 검은색 부엉이가 배달한 편지와 함께 바라 마지않던 끝이 다가왔다.
: 관계의 종말
처음부터 최악인 관계는 아니었다. 가풍 상 교육이 엄격하기는 했어도, 평소에는 다정한 할아버지였다. 부모님의 이혼 후 조부모와 같이 살았던 슬은이니 부모보다 친밀하게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일 때문에 서재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어도 마주치면 항상 간식거리를 손에 들려주었다. 무뚝뚝한 성격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표현이었다. 슬은의 유년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하나밖에 없는 애완동물로 가득 차있었다.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건 할머니의 부고 이후였다. 차기 가주로 뽑히던 정세은은 너무 어렸고, 어머니는 오러 사무국장 일로 바빠 집안 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임시 가주 직을 맡은 것은 슬은의 할아버지였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고 없어진 세상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사랑하던 가문을 지키고 싶어했다. 슬은아, 너도 사랑을 하게 되면 나를 이해하게 될 거란다. 슬은이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가족 이외의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없으니 몰이해만이 조금씩 쌓여 갔다. 할머니가 사용하던 집무실을 할아버지가 사용하게 되었지만, 구조나 배치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슬은은 그 집무실이 할머니의 유품 같다고 생각했다.
슬은이 동화학원에 입학하던 해에, 정세은이 진로를 퀴디치 선수로 굳혔다고 선언했다. 할아버지는 불 같이 화를 내다가도 다정히 설득을 해보고, 마지막에 와서는 네 멋대로 하라며 소리를 쳤다. 남은 직계 후보는 둘이었다. 슬은과, 슬은보다 두 살 어린 남성 사촌. 이름은 정선하였다. 모계 혈통의 가문이니 자연스레 후보 자리는 슬은에게로 넘어왔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 일 이후로 더 악화 되었다.
어른들은 정선하가 여성이었어도 가주가 되기는 힘들 거라고 말했다. 정선하는 순혈이지만 사생아였다.
학원에서 슬은을 좋아하는 이는 많았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꼭 성애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친구로서 좋아하는 이는 넘쳤다. 재능이 없는 과목에서는 부진을 했지만 마법과 어둠의 마법 방어술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문제가 된 것은 4살 여름방학, 약초학 성적에 찍힌 A였다. 몇 달 만에 돌아온 본가에서, 슬은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갇혔다.
처음에는 상황에 대한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정에서 순응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집요정이 들어와 식사를 주고 나갔다. 접시를 던지고 식사를 하지 않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쓰러진 후, 햇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한 슬은은 그 상황이 꿈이기를 바랐다.
‘슬은아, 많이 힘드니? 그냥 엄마랑 같이 살까? 길지는 못 해도 휴가는 낼 수 있어. 응?’
슬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힘든 게 있으면 꼭 말 하라고 했지만, 둘 다 슬은이 쉽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고학년이 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본가와 멀리 떨어진 별장은 삼 면이 강이고, 뒤는 산으로 막혀 있었다. 독방으로 만족하지 못한 건지 그 별장에 갇혔다. 그 때의 슬은은 참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했다. 주인 없이 비워져 있던 공간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팡이는 뺏기지 않았다. 책상에 엎드린 슬은이 지팡이를 매만졌다. 학원 밖으로 벗어나면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을 고려한 것인지, 있어도 마법을 쓰지 않을 슬은을 무시하는 처사인지 알 수 없었다. 가둬진 공간 자체는 넓어졌지만 주변이 허허벌판이어서 더 끔찍했다. 밤이 되면 종을 알 수 없는 새 소리만 울려 퍼졌다. 사람 없는 곳에 혼자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반항을 시도한 건 17살 여름방학이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집요정과 반목을 했다. 협박성이 짙은, 평소의 슬은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이 향했다.
‘할아버지가 너보고 감시를 하라고 했지, 도망치는 걸 막으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 아니니.’
‘그래도 안 돼요.’
‘마법을 쓰는 건 그 사람도 바라지 않겠지.’
언쟁이 길게 이어졌다. 주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집요정이 슬은의 손을 잡고 강을 건넜다. 할아버지가 있는 본가 대신, 동갑내기 사촌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스큅인 사촌을 배려해 유일하게 한옥이 아닌 집이었다. 집요정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저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나 좀 도와줘.’
그 후 방학이 끝날 때까지 슬은은 사촌의 집에서 머물렀다. 학원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슬은은 할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너는 화도 안 나?’
‘화는 그 상황을 낫게 하기 위해 내는 거잖아. 그냥… 그럴 가치를 못 느끼겠어.’
곧 죽을 송장과 더 나눌 말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어. 그냥 지친 걸지도 모르지.
몇 년 전 들었던 협박이 귓가를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해가 지날수록 강박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는 본가에서 키우는 동물을 모두 죽일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생명의 무게는 그 정도였다. 네가 이미 죽고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슬은의 부탁으로 어머니와 언니에게는 이 소식이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슬은과 마주쳐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 더 이상 학대는 지속되지 않았다. 시연과 같이 지내면서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 400번의 구타와 레이디 버드였다. 언젠가 책에서 아이의 유년 시절은 예외 없이 행복해야 한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영화가 끝이 났다. 리모컨을 쥔 손이 다른 영화를 재생했다. 또 다른 성장 영화가 스크린에서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