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외형 ¶
율은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외형 때문이 아니라, 유달리 큰 키와 긴 머리 때문이었을테다. 포니테일로 올려묶은 머리는 허벅지 중반 까지 닿아 있었고, 그 머리와 함께 197cm라는 평균보다 훨씬 큰 키는 시선이 닿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먹을 부어낸 듯 새카만 머리를 풀어내면 무릎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을 두면 흐르는 것이 꼭 물결과도 같았다.
그리도 긴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모으면 퍽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띄운 얼굴이 보였다. 각지지도 않고, 너무 둥글지도 않은 턱선과 날렵한 콧날은 그를 퍽 수려한 미남으로 보이게 했다. 눈가에 칠해진 붉은 안료, 촘촘한 속눈썹과 함께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여우상에 가까워 그리 상냥해보이진 않았지만 늘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옅은 색의 입술과 상냥한 호선을 그어낸 눈썹, 그리고 자신이 눈을 휘어 웃었기 때문에 내려간 눈꼬리가 그를 온화하게 보이게 했다. 복숭아 색. 딱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은 피부에는 흠 한 점이 없었다. 그것이 율을 더욱 상냥히 보이게 만들었다.
율은 전체적인 비율이 좋았고, 현무 특유의 검은 한복과 추위를 타는지 그 어떠한 날에도 굴하지 않고 걸친 두루마기는 그에게 잘 어울렸다. 다리가 긴 편이었더라 더욱이.
그러나 그런 율에게도 의외의 모습이 있었지. 지팡이를 쥔 큰 손은 굳은살이 박히고 여러 상처의 흉터로 투박했다. 무예를 갈고 닦았기에 생긴 검흔을 비롯한 상처로 팔 또한 성치 않았을테다. 눈은 심해와도 같이 깊고 푸른 색이었지만 생기가 없었다. 맹인처럼 그 어느 초점도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1.2. 성격 ¶
1.4. 패밀리아 ¶
두 앞발을 들어올려 섰을 경우 150cm, 어깨 까지의 높이가 80cm인 평범한 회색 늑대. 작명센스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름은 랑. 제 주인의 명령이 없으면 목석 같이 자리를 지키고, 다른 패밀리아들을 돌보기도 하는 등 매우 온순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키우고 있었다 하였지.
1.5. 기타 ¶
- 경주 천씨
한 순간의 선택으로 몰락한 추종자 가문.
신라시대 당시 국선이었던 천월이 시조가 되어 현재까지 오게 된 유서깊은 순혈 가문. 가문의 상징은 바람을 늑대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것으로, 천 가문의 사람들은 화랑의 정신을 이어받아 풍류를 즐기고 예와 무를 숭상하고 있다. 이들은 화랑의 정신과 더불어 다른 특징 몇가지를 지니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특징은 마법과 무예를 병행한다는 점과 그로 인하여 오러의 비중이 높고, 위즌가모트에 소속되어 있는등, 마법부나 그 산하 기관에 소속된 가문원들이 꽤 많은 편이다. 현재는 방계들에게서 오러의 비중이 유독 높은 편이다. 무려 추종자로 돌아선 제 가문의 직계를 잡는 일이 허다했다지만.
가주는 무조건 학교를 졸업한 성인이자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가주가 독살 당하고 스큅인 형을 제외하며 누이가 아즈카반에 수감된 지금, 유일한 직계인 율이 학교에 재학중인지라 공식적인 가주 자리는 공석이며, 공적인 자리에선 스큅이자 천씨의 장남인 천우석이 나서고 있다.
비공식적인 가주인 천율은 현재 순혈주의와 머글 우호중에서 그 어떤 사상에도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개중에선 그가 추종자라는 소문이 있지만 머글과 혼혈에게 예를 갖추는 태도를 보자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천 가문은 머글에게 매우 우호적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마법이 아닌 무예를 중점으로 갈고 닦아 무장 투쟁 운동을 벌여 머글의 독립에 힘썼다는 것이 기록에 적혀져 있으나, 율의 할아버지가 마법사 전쟁이 발발하자 누에를 지지하기로 한 뒤 전쟁 도중 사망 하였으며, 율의 아버지 또한 누에에게 충성의 뜻을 내보이며 머글 우호 가문중 단연 손꼽히던 가문이라는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2년 전, 정확히는 방학 도중 가문 내부에서 순혈주의자이자 추종자, 가주인 천백환이 늘 마시던 한약으로 독살을 당하였고 순혈우월주의 사상이 대다수인 가문 내부에서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던 천율이 의심을 받았으나 그의 누이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아비를 독살한 것이 드러나 아즈카반에 수감되었다. 현재 가주는 율이지만, 나이가 차지 않아 공식적인 가주 자리는 비어있다.
- 天 潏
위선자
경주 천씨, 천 가문의 가주. 천 가문 내부에서 스큅인 우석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직계로, 아버지인 천 백환이 사망하고 그런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이 된 천 선이 아즈카반에 수감되어 실질적으로는 유일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폴리주스로 누이의 모습을 한 뒤 제 아비를 살해 하였다. 원인은 그의 비틀리고 광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머글과 혼혈에게도 우호적이나, 그는 추종자의 문신이 팔뚝에 새겨져 있다.
- 외자 이름. 한자로 쓰면 하늘 천에 흐를 율이라.
- 생일은 2월 14일. 탄생화는 카모밀레(Chamomile). 꽃말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
- 수면시간이 극히 적었다. 흔히 말하는 4시간만 자도 모든 피로가 풀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날엔 아예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곤 하였다. 그럴 땐 기숙사 휴게실에 홀로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곤 했다.
- 율은 아버지와 누이의 언급을 은연중에 꺼렸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답하여도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고 누이의 행방에 대해선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아니하였다. 가문에 대한 언급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 지금까지 동화학원을 졸업한 가문원들은 백호 기숙사이거나 주작 기숙사였지만, 그는 현무 기숙사에 가게 되었더란다. 정확히는 주작과 현무의 선택을 받았지.
- 검술에 능했다. 무예를 갈고 닦았기 때문이리라. 무를 숭상하였던 가문이었기 때문인지 그 자신도 검을 썼기에. 늘 목도 하나를 쥐고 다녔다. 지금도 기숙사 뒷편에서 혼자 연습을 하곤 했던가?
- 신체능력 하나는 발군이라지?
- 신체능력 하나는 발군이라지?
- 머글 문화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 혼혈, 머글 출신과 자주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 가족관계는 돌아가신 어머니 서 홍옥, 독살 당한 아버지 천 백환, 아즈카반에 수감된 누나인 천 선, 형이자 스큅인 천 우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참고로 늦둥이. 형이 무려 서른살이니 말 다했지.
- 천 가문의 비공식적인 가주. 가문을 모독하지 않을 것에 유의하자.
- 3학년 이후로 맹인처럼 눈에 생기가 없어지고 위가 약해졌다. 시도때도 없이 속이 쓰렸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곤 했다. 그 여파로 룸메이트와 더이상 같이 살 수 없었기에 개인실을 썼나.
- 목소리 또한 상당히 탁했다. 예전엔 탁 트여있었는데.
- 율은 마시는 것을 극도로 제한했다. 정말 필요할 정도로만 마셨다.마법약을 마시는 것 또한 꺼렸다. 액체를 마시는 모든 행위를 잘 하지 않았다.
- 대다수의 과목에서 O나 E를 받는 우등생인 율은 마법약 만큼은 젬병이었다. 마법약 수업을 같이 듣자는 말에 그는 정색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3학년 방학 이후, 2학기 수업에서 간신히 T를 면하였지.
- 꽤 한 성깔 한다. 예의바른 존댓말을 구사하여 단순히 정중한 모습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그가 시비가 붙으면 말로 풀려 노력하지만 계속 시비를 거는 순간 주먹을 새하얗게 쥐는 걸 보면....
- VOICE SAMPLE
- THEME
2. 독백 ¶
- 부르짖다
배신자.
새벽 2시 45분. 율은 눈을 떴다.
*
율이 아비가 자주 마시던 탕약이 든 사발을 들고 제 누이와 눈을 마주하며 이르되
"누이는 어찌 나를 경히 여기는가. 정녕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건가. 하루라도 빨리 기실을 직고하시오. 그리하지 않으면 누이는 천벌을 피할 수 없을것이오."
라고 하니, 누이인 선 격노하여 이르되
"배신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내 결백하니 너 또한 결백함을 증명하라."
라고 하였다. 이에 율이 두루마기를 벗으며 이르되.
"어딜 감히 배신자라 하느뇨, 본좌는 천 가문의 율이요, 아비를 죽인 너와는 달리 결백하나니. 이 내가 어찌 결백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이 탕약을 마셔 결백을 증명하겠나니, 결백이 증명되면 오라를 받으라."
그러나 사발이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나니, 쏟아지는 검은 피와 함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노라.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위선자!!!!!!!!!!!"
누이의 살벌한 목소리와 달려드는 오러, 제 이름을 부르는 우석의 소리를 들었다. 율은 제 누이를 올려다보며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뻐끔거리곤 입술을 휘어 웃었다.
네년이 정녕 파멸을 자초하는구나.
*
이불이 걷힌다. 율은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 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띵했다. 속이 미친듯이 쓰려왔다. 시간을 확인할 틈도 없이 율은 화장실로 뛰쳐갔다. 웨엑, 웨에엑. 헛구역질 소리와 함께 쓴 물이 넘어왔다. 목이 따끔거렸고, 혓바닥이 쓰렸다. 여간 독한 것이 아니었다. 율은 숨을 헐떡이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뜻하니 시야가 흐렸다.
*
물로 입을 헹구고 나니 새벽 세시다. 잠은 진즉에 다 달아난지 오래다. 율은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물이 쏟아지고 긴 머리와 삼베 옷을 적셨다. 물이 차가웠으나 머리의 열은 도무지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제 잠옷마저 적셨으나 나쁠 것은 없다. 일단 씻자. 씻고나서, 늘 그렇듯 기숙사 휴게실에서 밤을 새자. 율은 서늘한 벽에 머리를 기대며 밍기적밍기적 옷을 벗었고, 혼자 나지막히 이르되.
"위선자.."
라고 하였다. 고통스러운가? 긴 머리의 물기를 짜내며 밖으로 나오니 랑이 편지를 물어 주인에게 보여주되, 밖의 전서구가 보냈나이다. 하니.
'''천 가문의 율은 보아라. 내 가문의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니 부디 안심하고 안온한 생활을 즐기며, 기실을 직고하되 직고하지 아니할 것은 묵언하여 네 자신을 금하거라.
추신. 최근 너를 독살하려 하였던 누이를 비롯하여, 그의 측근을 모두 아즈카반에 밀어 넣었으니 더 이상 본가에서 암살시도에 시달리지 아니하여도 좋다.
- 천우석 '''
라 쓰여있는 편지를 보고 율 탄식하되, "안온하다니, 진정 나를 위선자로 만드는구나, 조조의 회유에도 넘어오지 않는 공명과도 같으나 그것이 독이 될 터이니 이 어찌할쏘냐!" 라 하였다.
- 간원하다
- 율은 침대에 누워 명을 다한 아버지의 시신을 보았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였다.
*
율아.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율은 고개를 들었다. 율의 쓰다듬기에 정신을 못 차렸던 랑은 총총걸음으로 넓따란 정원을 향한다. 율의 두 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담겼다. 팔에 새겨진 추종자의 문신은 익숙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누에를 따르던 자였으니 당연할법도 하다. 누이 또한 팔에 문신이 있었던가. 율은 자세를 바르게 서 제 아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부르셨습니까."
"학교 생활은 어떠하였느냐."
율은 선하게 눈을 휘었다. 퍽 상냥하고 성정이 올곧음이 드러났다. 학교 생활이 어떠하였느냐 묻는다면 속임이 없었다. 그리도 선인이었는가.
"늘 그렇고 안온하고 기실을 직고하지 아니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하느냐. 음."
백환은 제 아들의 눈을 마주쳤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저를 쏙 빼닮았기에 괜히 뿌듯했을지도 모른다. 스큅이 아니고, 어미를 닮지 않은. 제 자신을 빼닮은 아들. 선과 달리 성품이 올곧았기에 더욱이 총애하였고, 추종자 백환이 아닌 아비라는 직위의 백환으로 제 아들을 더욱 사랑하였을지도 모른다.
"네가 잡종과 머글에게 호의적임을 알고 있으나, 부디 조심하였으면 좋겠구나. 그들은 믿을 자가 못 되니 말이다."
"....아버지."
율은 말 없이 아비를 끌어안았다. "새겨듣겠나이다." 라 답하며 나지막히 눈을 감았다. 아비는 제 자신을 총애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실망을 시킬 수 없었다.
"율아.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다. 비록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아니할 손가락이 없을지언정, 특별히 아끼기에 반지를 끼는 손가락은 있지 아니하더냐. 나는 네가 칭송받는 화랑이길 바라며, 곧 돌아오실 그 분이 총애할 천 가문의 자제인 율이기를 바랄 뿐이다."
제 등을 토닥이며 자상하게 읊조린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율은 물수건을 들어 아비의 입가에 말라붙은 검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리고 흰 천으로 아비의 얼굴을 덮었다.
*
율은 제 눈가에 붉은 안료를 칠했다. 긍지도, 명예도 없을지언정 화랑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아비의 유언이자, 선조들의 바람일테니.
- 혈육
- 율의 두 눈이 느즈막히 감겼다. 침대에 걸터앉아 랑이 물어온 편지를 받아내곤 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리를 마구 흔들던 랑은 이내 제 쿠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털퍽 주저앉는다. 편지를 펼쳐보니 붓펜으로 세심하게 쓴 종이에서 매캐한 향이 난다. 분명 장죽을 태우며 썼을게다. 품이 큰 옷을 입고 양반다리를 하고, 그 곱고 흰 손에 각각 붓펜과 장죽을 쥐고. 간혹가다 저만큼 긴 머리가 쇄골가로 흘러내리면 장죽을 입에 물곤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기고....아.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겐지..."
율은 화들짝 놀라선 화끈 달아오른 제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무래도 형님은 아버지를 빼닮은 자신과 누이보단 어머니를 빼닮아 아름다운 편이었으니 자주 그런 생각이 나곤 하였지. 그것보다 제 이상형에 가까웠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이었지. 성별과 가족이라는 장벽에 막혔지만. 고개를 마구 휘저은 율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밤이에게.
그간 잘 지내고 있니, 가문의 서신을 보낸지 하루가 지났지만 그건 공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딱딱하게 말을 할 수밖에 없더구나. 말하였듯 네 누이의 측근을 전부 잡아들였단다. 전부 전과가 있는 추종자였기에 아즈카반에 보냈지 뭐니. 이제 편히 마음을 놓아도 된단다.
각설하고, 최근 날이 덥구나. 더운데도 늘 수고가 많단다. 네가 현무 기숙사인 것이 망정이지, 네가 더위에 지칠까 조마조마 하구나. 랑이 또한 더울테니 부디 더위 조심하렴.
(중략. 이제서야 말하는 이야기지만 미안, 네가 이번 방학에 찬장에 숨겨둔 피징 위즈비를 내가 먹었단다. 아이들이 먹었다 거짓말해서 정말 미안하단다...따위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네가 늘 행복하길 바란단다. 사랑하는 너의 형이.''
짤랑. 갈레온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물어온 랑을 바라보며 율은 말 없이 편지를 접었다. 이제 남은 가족은 형 뿐이었기에 더욱이 그가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남은 건 형 뿐이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형은 서른이다.
어떻게 마법사 전쟁에서 태어난 스큅이 지금까지 살아있는거지?
율의 두 눈이 서늘히 뜨였지만 그것도 찰나였더란다.
- 소유욕
가지고 싶다. 손에 담고 싶다. 너의 유일신이 되고 싶다. 나를 간절히 원하게 하고 싶고, 나만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고, 나 때문에 미소짓게 하고 싶다.
오로지 나만, 오롯이 나만.
*
후회한다. 속죄한다. 과오를 범하였기에,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기에. 그러나 너는 욕망하고 갈망한다.
*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어, 내 손에 담고 싶어, 이 품 안에 안고 싶어. 유일신이, 아니, 너만이 나의 유일신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아."
가질 방법이 떠올랐다.
"아하하."
*
그들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단다.
- 은닉하다
- 율아.
예, 아버지.
이 세상은, 이 곳은 동화가 아니란다. 네가 그 어떠한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숨겨야 한단다. 너는 천 가문의 아이지 않느냐. 이 가문은 그 분을 위해서만 존재한단다. 이상은 버리되 현실을 직시하거라.
너는 눈을 휘어 웃었다.
*
추종자 가문의 아들. 한 순간의 선택으로 나락에 빠져버린 가문. 이제는 재건할 수 없는 몰락한 가문. 머글들의 언어로 치자면 몰락귀족이요, 한국인의 언어로 치면 이미 무너져버린 친일파 집안의 자손이렷다.
우리를 믿었던 머글들에게, 혼혈에게 배신을 했고, 우리는 그러함에도 멈추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와 누이의 팔에 새겨진 문신은 죽음을 갉아먹고, 누에만을 위하여 존재하겠다는 암묵의 증표였던가. 너는 그 문신을 눈에 담는 날 마다 결심했던가.
우습구나.
*
책상 위에 놓인 편지는 아버지가 너를 위해 친히 쓴 것이었나.
'''아들아, 이 아비는 네가 훗날 그 분의 품으로 다가가길 원한단다. 허나, 네가 그 분의 품으로 가지 아니하겠다면 이 사실은 명심해다오.
함구하여라. 은닉하여라. 네가 무슨 존재인지를 밝히지 말아야 한다. 쉿, 지금은 조용히. 네가 입을 다물 시간이란다. 그 어느것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만 생각하거라. 항상 웃어라.
안온해야하며 기실을 직고하되 직고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함구하여라.
너의 모든것을 숨기거라.'''
너는 다시금 눈을 휘어 웃었다.
*
은닉하여라.
너는 추종자의 아들이다. 행실을 바르게 하라.
함구하여라.
너는 추종자들이 모인 가문의 가주다. 사상에 대하여선 입을 다물어라.
안온하거라.
너의 행동은 무모하기에.
너는 다시금 눈을 휘어 웃는다. 어찌 그리도 야살스러운 미소인지 모르겠구나.
- 연기하다
- 네 기억속의 아버지는 추종자다. 누에를 찬양했고, 늘 그 분이 돌아오실 것이라 말했다. 너의 이름 또한, 누에가 원하는대로 흐르길 바랐기에 흐를 율을 썼더라지. 사람들은 네 아버지를 악으로 치부했다. 대적하고, 원망하며, 증오했다. 네 유년시절은 적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너는 네 아버지를 잘 따랐고 그에게 단 하나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네가 가장 사랑하는, 너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였으니. 어머니께서 너를 낳으신 이후 2년 정도가 지나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누이와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아니하던 형을 제외하며 아버지와 있었던 시간이 더욱 많았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닮은 사람이었다.
"율아. 이리 오려무나. 한 번 안아보자."
"예, 아버지!"
너의 아버지는 네 앞에선 추종자 백환이 아닌 천 가문의 백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네가 궁금해 하던 것을 알려주며, 자상하게 너의 곁에 있었고, 때론 엄격하게 너에게 지혜를 알려주었지. 너에게 검을 쥐는 법도, 망설임 없이 상대를 베도록 한 것도 아버지였다. 너를 사랑하던 아버지를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나. 그래,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을 새겨듣고 따랐지. 그럼에도 네 아버지가 너를 걱정하면 금세 따르지 아니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금 네가 중립을 유지하는 것 또한 같은 이치지.
아버지는 너에게 있어서 가장 큰 버팀목이고, 천 가문을 비록 몰락하게 만들었으나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네 아버지는 굳건할 것 같았다.
너는 그런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석과 선은 그저 시체를 바라보고 방을 떠났을 뿐이다. 너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도록 했다. 단 둘만 있고 싶었다. 아니, 너 혼자 있고 싶었다. 네가 오열하는 소리를 들리지 않고 싶었는지 붉은 눈으로 머플리아토를 쓰고 문을 닫았더란다. 너는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의 시신을 자세를 바르게 뉘였다. 입가에 묻은 피를 물 수건으로 닦았고, 침대의 빈 공간에 고개를 파묻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부모가 명을 달리하면 천붕이라 하였노라..아아...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너는 고개를 천천히 들며 몸을 떨었다. 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뺨을 떨리는 손으로 쓸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을뿐이다. 비틀리고, 어긋나버린 그 미소에 수많은 광기가 스쳤던가. 힉, 히힉. 웃는 소리가 네 입에서 새어나왔고, 너는 결국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아버지! 어찌 저의 앞에서 이리 흐트러진 모습을..하아아..완벽하시던 아버지가 이리 망가지시다니..! 그 어떠한 예술작품도 아버지보다 아름답지 아니할겝니다...아아, 어쩜 이리 아름다우신지요, 어찌 이리도 갸날프신지요!!! 아하하하하!!! 하하하하!!! 아! 이 불효자식은 아버지께서 명을 달리하여 너무나도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아버지에게 위해를 끼치지 아니할겝니다..후후후후.."
아아, 아버지. 너는 세상을 가진 눈으로 웃으며 시신을 앞에 두고 기뻐하였느냐.
"이제..이제... 아하하, 이제 영원히 곁에...제 곁에 계시는 겁니다, 아버지..히..히힉..아하하하하하...."
영원히. 너는 그 단어를 내뱉으며 황홀하다는 듯 자지러졌다. 아아, 운명도 참 잔혹하여라. 너는 웃던것을 멈추고 정색하였다. 네가 늘 그러하듯, 지금도 그러하듯 빠르게 가면을 갈아끼운게다.
"누님은 결국 파멸을 자초하겠지..다음은 누님인가."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사약 정도는 마실 수 있다. 너는 야살스레 웃었다.
- 소유하다
- 어린 시절이었다. 작은 새 한마리를 주웠더란다. 둥지에서 떨어져 다리와 날개가 꺾인, 어린 참새였다. 짹짹거리며 비참하게 우는 새를 두 손바닥 위에 올린 장면을 네 아비가 보았더란다.
율아, 새를 주웠구나.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새를 극진히 보살폈다. 새가 날개를 제대로 펼칠 수 있고, 다리마저 전부 나았을 때.
너는 새의 목을 꺾어 죽였다.
율아, 어찌하여 죽였느냐. 라고 네 아비가 이르되, 너는 답하였다.
가지고 싶어!
어린 너는 순진무구하게 말하였으나 그 안에 들어찬 간교한 여우는 되려 반대의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말투부터 달랐던가? 아비가 어찌하여 갖고 싶다 새를 죽이느냐. 라고 물었을 때.
"이젠 소자를 떠나 날아가버리니 차라리 죽여서 소인의 곁에 영원히 두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너는 눈부시게 미소지었다. 네 아버지는 그 반응에 미소를 지었던가?
너는 역시 나를 닮았구나. 율아.
*
너는 난을 치며 긴 머리를 쓸어내더니 살풋 웃었더란다.
"가지고 싶어라..이 손이 한 번만 담아봤으면 좋겠구나...."
우습게도...
- 광구하다
- 그것은 필시 정신의 죽음이라 부르는 것일테다.
그것은 필시 당신과의 이별이라 칭하는 것일테다.
그것은 필시 이 나를 혼자 두는 것일테다.
그것은 나를 잡아먹고 너를 갉아먹으며, 정신을 헤집고 육신을 병들게하며, 결국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외로움은 그런 것이다.
*
흰 붓에 검은 먹이 스며든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하얀 세계를 채워나간다. 한 번 붓이 오갈때마다 새겨지는 곡선은 곧 난이 되어있다. 늑대가 잠들어 고롱고롱, 고르게 숨을 쉬는 소리와 붓이 스쳐가는 작은 쓸림은 기나긴 새벽을 채운다. 그리하여 붓을 내려놓으니, 난이 기려하게 피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되 속의 고혹을 은연중에 드러내더라.
이런 것을 보아도 아름답지 않다.
손으로 종이를 가볍게 들어 구겨버린다. 감흥이 들지 않는 그림은 그리 처리하곤 하였다. 벌써 여섯장째다. 너와 긴 새벽을 함께한 난초들은 감흥이 없는 너를 위해 기려하고도 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지만 너는 그런 난초를 눈에 담지도 않고 버리는구나.
불안하다.
어찌 난을 그려도 감흥조차 없는겐지 이해할 수 없다. 위태로이 일렁이는 촛불이 네 심정과도 같았다. 무엇이 두렵기에 감흥조차 잊을 정도인가, 무엇이 너를 갉아먹는가. 너의 내면에 가득 들어찬 그것은 무엇인가. 눈을 뜨고 똑바로 지켜보기보단 외면하기가 더 급급하던가. 그래, 너는 그런 존재다.
그것은 너에게 있을리가 없는 감정이기에. 너는 괜히 양 팔뚝을 움켜잡고 고개를 떨궜다.
*
율이야.
예, 아버지.
너는 나를 가장 많이 닮았구나.
...저도 아버지를 닮아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나를 혼자 두지 말아다오.
*
광증
애증
사랑
총애
광신
집착
그리고 너.
*
너는 촛불을 불어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너를 삼키는 그 순간만이 너를 안심시킨다.
*
아니, 아닌가.
- 혐오하다
-
단 두 글자 차이의 단어. 너는 이 둘중 무엇인가.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정확히 꼬집어야 한다고 독촉하면 너는 함구한다.
그저 지독히도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
눈을 감는다. 너는 늘 호기롭고 당당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네 외형과 성격을 서로 맞대어서 본다면 꼭 먹잇감을 잡아먹지 않고 사근사근히 챙겨주는 범과 같았던가. 너는 狐의 가죽을 뒤집어 쓴 虎였으니.
그리하여, 범은 과거를 회상한다.
망상과 감상에 젖거라. 언제까지고 네 눈 앞의 사람을 사랑하되 가까이 하지는 않는, 천 가문의 사람이어야 한다. 율아, 나와 했던 약속을, 이 자리에서 네가 직접 그리하겠다 입으로 내뱉어 새긴 맹세를 잊지 말아야한다.
서늘한 푸른빛 눈동자는 거울에 비친 너를 담는다. 지독히도 야살스럽게 미소짓는 너는 평소와도 같았고, 그렇기에 네 아비는 너를 총애했다. 너는 아버지께 대답하였다. 일곱이 채 넘지않은 율 이르되, 망각하지 않겠나이다. 라 하니.
그 이후의 일은 내 악신의 앞에서도 감히 담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죄를 보았기에 함구하겠다.
*
가만히 눈을 뜨니 새벽이다. 4시간도 채 잠들지 못하였음에도 몸은 홀가분하다. 새벽 2시 반. 너는 늘 그렇듯 남들보다 수 시간은 먼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끝마치며 두루마기를 걸치고 방 밖으로 나섰다. 랑은 귀를 팔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주인이 머리를 묶지 않았나보다. 머리끈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지.
어느새 사박거리며 눈이 밟힌다. 인적이 없는 어두운 현무 기숙사의 휴게실은 끝나지 않을, 차디찬 겨울이다. 옅은 입김과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따스한 녹차는 겨울의 추위를 여즉 잘 알리고 있었던가. 김이 잦아드는 속도가 유독 빨랐다. 네 손에 들린 녹차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녹차에 비춰진 제 자신과 하림없이 눈을 마주했을 뿐이다.
비춰진 너는 유독 불안정했다. 당연하게도, 네 손이 떨리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손마디를 이기지 못했는지 녹차가 담긴 잔은 퍼석, 소리를 내며 미지근한 액체를 쏟아내며 손을 적시며 작은 유리조각을 모조리 쓸어간다. 미처 다 흐르지 못한 녹차는 붉은 방울과 섞여 이젠 녹차라고 부를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하.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웃음소리가 이어지다 이내 흐느끼는 소리가 되었더란다.
속이 쓰리다. 너는 그리 생각하며 조용히 손을 얼굴에서 떼었다.
"일찍 죽일걸."
너는 괴물이다.
- 학습하다
- 입학하기 이전이었지, 너에게 온 여러장의 편지엔 필히 동화학원 또한 끼어있었다. 누이도, 네 아비도, 가문의 대다수가 동화학원을 졸업하였더라지? 그리하여, 너 또한 동화학원의 입학을 희망하였다. 입학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였다.
가문 내부에서 아버지의 곁을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이것저것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그런 아버지의 곁을 떠나기 이전 여러 대화를 나누었을터다.
"드디어 네가 학교에 가는구나, 율아."
너는 고개를 들어 아비를 올려다본다. 너는 아비를 닮았지, 아무렴. 아비의 큰 키는 현재의 너와 엇비슷했고, 주름이 있긴 했지만 얼굴 또한 비슷했다. 그리하여 아비는...수도없이 말을 했지만 너를 총애하였다.
"예. 학교에 가는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네 아비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렸지. "율아, 그곳엔 여러 사람들이 있을거란다." 라고. 너는 두 눈을 느긋하게 끔뻑인다. 여러 사람? 너는 떠올린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귀한 순혈에게 있어서 불결하다고 알려진, 잡종과 머글에 대해서.
"아버지, 소인이 잡종과 어울리는 것이 그리도 걱정이 되시는지요?"
네 아비는 옅게 웃는다.
"...학교 내부에서는 되도록 가문 내부에서 쓰던 말을 쓰면 아니된다. 그들을 혹여 지칭할 일이 있거늘 혼혈이라 부르거라."
네 안위를 위해서다. 선과 달리 너는 천 가문을 온전히 물려받은 존재이니, 어떠한 위해도 있어서는 아니되기에.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혈, 이라고 몇 번 발음을 해보곤 표정을 구겼다. 너는 '잡종'을 발언하는 가문 내부에서 홀로 '혼혈'을 발언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 표정이 구겨질법도 했다.
"어렵습니다."
"쓰다보면 익숙해질게다. 율아."
"예, 아버지."
네 아비는 눈물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네 아비는 눈물을 글썽짓고 안쓰럽다는 듯 네 볼을 쓸어주었지.
"미안하구나."
너는 짓던 미소를 거둬냈다. 친절도, 온화함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마음에 짊어진 짐을 감히 이해한다는 무표정만이 자리잡았을테다.
"부디 네가 나, 천백환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음을 들키지 말거라."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임을 들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1년. 들키지 말아야한다. 호랑이는 능글맞은 여우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 집착하다
- 촛불 하나에 의지한 방, 남성에게 겨누어진 서늘한 은장도와 여성에게 겨누어진 지팡이.
"어찌하여 망설이는게냐?"
남성이 옅게 웃었다. 남성은 제 심장이 있을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를 찌르면 나는 그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심장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그렇지만 눈과 혀는 아니된단다. 내 죽어가는 그 순간동안 너를 볼 수 없고, 내 너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을테니."
여성은 남성을 미친 사람을 보듯 쳐다보았다.
"어찌 나를 그리 쳐다보느냐. 꼭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게냐..?"
남성은 슬픈 표정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려 했다. imper...아, 맞다.
"나는 지금 학생이지. 아쉽네.."
남성은 눈을 휘어 웃었다. 손을 뻗어 단숨에 여성의 목을 부여잡았다. 은장도에 팔을 깊게 베여도 딱히 상관은 없는 듯 싶었다.
"커억....컥......끅..."
"본좌는 너를 사랑했고, 나를 사랑할 기회를 주었다. 아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해...아아.."
우두둑.
침대에 누워 상황을 지켜보던 우석은 혀를 찼다.
"벌써 세 번째야."
"아아. 이번에도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어...."
율은 여성을 가볍게 던져버리며 눈을 흘겼다. 아! 사랑했는데.
"...다음엔 이름을 알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름이라도 부르게.."
"꿈 깨렴. 저거 빨리 내다 버리고. 저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버릴 수 없어! 라면서 방 구석에 몰래 숨겨두기만 해봐. 사랑해가 아니라 살려주세요 소리 나올때까지 처맞을줄 알아."
"형은 사랑의 위대함을 몰라."
"네가 비정상인 걸 아는거란다, 밤톨아. 하여튼 지 애비를 똑 닮았어요."
우석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마저 책장을 넘겼다.
"상처는 치료 안하나봐. 그 상태로 옆에 눕기만 해봐."
"이정도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내쳤다는 슬픔의 상처로 남겨둬야지...평생, 두고두고 보면서 마음을 다잡을.."
"흉터 가릴 흉터를 만들 생각이겠지."
우석은 입술을 휘었다.
*
사랑해.
*
광신도. --가, 너의 신이지.
*
사람의 품이 미치도록 그립다. 사랑해서, 사랑해서,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서-
"우웁...윽.."
쓴 물을 토했다. 마치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처럼 쓰다.
*
사랑이란 감정은 너의 모든 가면을 만든 장본인이지.
*
너는 네 아비를 쏙 빼닮았단다. 외모도, 성격도, 행동력도, 전부 다.
그러니 네 어미의 행방에 대해서 묻지도 않는게지?
*
천 가문의 현재 유일한 순혈 마법사 직계 남성은 율으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사교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좋은 이미지를 심었으나 누이에 의해 독살을 당할 뻔 하였고...
*
"네가 죽였잖아!!!! 네가!!! 먹어 봐, 먹어 보라고!!! 결백하면 이걸 처마시라고!!! 내가 죽여?! 거짓말!! 마셔 보라고!!"
이야, 시끄럽네. 우석은 귀를 틀어막았다. 긴 옷깃이 흘러내린 우석의 팔에는 선과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원숭이 얼굴에 호랑이 몸통, 새의 날개와 뱀 형상의 꼬리.
그리하여 너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가문원도 믿어서는 아니된다.
*
예와 친절이라는 가면을 쓴 비틀린 위선자 주제에.
- 밀고하다
- "막내가 곧 입학한다며."
선은 날선 목소리로 녹차를 들이켰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우석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우석은 선에게 낮게 속삭이며 다식 하나를 집어들었다. 녹차에 비친 우석의 얼굴이 일렁인다. 선과는 달랐고, 율과도 달랐다. 혼자 동떨어졌지만 지독히도 아름다운 선녀와도 같았다. 남자였지만.
"당연하지. 아빠가 걔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 착하게 살라잖아! 걔가 할 행동을 생각해봐."
"뭐가 문젠데?"
"분명 그 역겨운 잡종들에게 착한 척이나 할 거 아니야, 으! 소름끼쳐. 바깥에 나갈 때마다 크루시오라도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고. 어떻게 그런 벌레같은 녀석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지? 나 아까 걔가 혼혈이라고 하는 거 듣고 토할 뻔 했어."
우석은 다식을 입에 넣고 씹을 뿐이다. 선은 한숨을 푹 쉬며 다식을 집어들었다. 검은 색이 비현실적이다. 이를 드러내는 걸 보아하니 감초로 만든 듯 싶었다.
"나는 잘 모르겠네. 그 아이의 선택이 아니니."
"선택이고 자시고, 나는 그 자체가 싫어. 위선자!! 기분이 나쁘다 못해 엿같아!!!! 걔가 그 득시글한 곳에서 사상이라도 옮아와봐!!! 나도 거기서 버티는게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너는 절대 모를 걸!!!"
우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감이지만 걔가 사상을 옮아올 애는 아니야. 그것보다 선아."
"뭐!"
"네가 율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율이를 모를 줄 몰랐네."
우석은 눈을 휘며 농의 문을 열었다. 선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이런 미친."
*
율은 고개를 들었다. 산발인 머리와 표독스러운 눈동자가 거울에 비쳐있었다. 세면대엔 붉은 물이 가득했다. 극에 치달은 스트레스를 토해낸 흔적이었을테다.
"..죽였어야해..."
그때 죽였어야해....차라리 보내줬어야해.....
"..사랑하니까 죽이는거지, 아무렴......"
- 살해하다
- 양심에 맹세컨데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아버지를 파멸시키는 걸 볼 수 없다. 그것도 머잖아. 추종자가 아즈카반에 들어갔다는 둥, 또 천 가문이라는 둥, 신문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걸 생각하니 몸이 절로 떨려왔다. 그들은 나의 심정을 모르고 나를 동정하는 척 수근수근 떠들것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밤새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했다. 한 가지 계획이 섰다. 누구도 내가 했으리라 믿지 않을 것이다.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들켜도 늙은이들은 쉬쉬하며 조용히 묻을 것이다. 그들은 날 좋아한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버지도 이런 나의 행동을 이해할 것이다.
눈 딱 감고 한 번이면 돼.
폴리주스가 담긴 빈 병은 흉흉한 검은색으로 일렁였다. 역한 검은색이다. 자신의 결심을 알리듯 깊고 어둡다. 그는 눈을 꾹 감고 폴리주스를 들이켰다. 쓰디 썼다. 표정이 절로 일그러지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거울에 비친 익숙한 모습은 누이와 같은 모습이다. 성공이다. 방학 숙제로 폴리주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재료 수급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수월하게 이룬 일이니 수월하게 끝내야 한다. 탕약이 담긴 그릇과 다식 두어개가 담긴 그릇을 받친 둥근 쟁반을 들어올렸다.
곧 아버지께 탕약을 가져다드릴 시간이었다. 누이는 밖에 나갔다. 사랑을 지독히도 간원하는 사람이었으니 또 남자를 만나고 올 것이다. 혹은 여자를. 오래 걸리겠지. 초조한 표정을 감춘다. 지나치는 가문의 사람을 경멸하듯 쳐다본다. 허리를 곧추세운 모습이 당당하다. 단 하나도 아랫것들에게 꿀리지 않는다는 표정을 연습해두길 잘 했다. 아버지의 방 앞에서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선 입니다."
침소에서 몸을 일으키는지 대답이 느렸다. 들어오거라,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이불을 걷어내고 앉아 옅게 미소를 짓는다. 숨이 멎는 듯 싶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백, 수천번 머리 한 구석에서 연습했지만 실전은 달랐다. 자신은 지금 아버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복어알을 얼만큼 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장도 넣었다. 단숨에 죽도록, 단 한 번에 보내야 한다. 머리가 새하얘질 찰나 간신히 마음을 되잡는다.
"오늘은 아침 일찍 왔구나. 일찍 일어났느냐?"
"기실 그 자벌레 녀석과 또 말다툼이 있던터라 화를 참지 못하고 깨버린 것 같습니다."
"하하! 언제 쯤 율이와 친해질 생각이느냐. 아무리 미워도 네 동생이 아니느냐. 아무리 그 아이가 잡종을 품고 머글을 우호 하여도 결국 천 가문이다. 너도 보았지 않느냐."
"그렇지요. 아무렴."
아버지께 공손히 드린 탕약이 눈에 담겼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탕약을 마셔 삼킨다. 웃음을 내비치던 표정이 굳는다. 머잖아 탕약 그릇이 떨어져 깨진다. 선아, 어째서냐. 라고 묻는 듯 입이 뻐끔거린다. 선의 형상을 지닌 율이 환하게 웃었다.
성공했다. 성공해버렸다. 사랑하기에 편하게 보내준거야.
"아버지, 이제 그 누구도 아버지를 해하지 않을겝니다. 편히 쉬소서."
"율, 아...?"
너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음은 선이었다. 마룻바닥을 빠르게 지나치는 발걸음에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방계는 상념에 잠긴다.
아씨가 저리도 기쁜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 라고.
- 비웃다
- "왜."
율은 선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난을 마저 치기 시작했다. 선은 장죽을 입에서 떼고 연기를 훅 내뱉곤 눈살을 찌푸리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장죽을 툭, 건드렸다. 재가 튀어 율의 고운 한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런 썅. 뭔데."
율은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루마기를 주섬주섬 걸치려는 손등을 장죽의 끄트머리가 강하게 내리쳤다.
"아, 뭐, 왜. 뭐가 문젠데."
"우리 가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네 짓이구나. 당장 씻고오렴."
"머리 젖은 거 안 보이냐?"
"역겨운 잡종 냄새가 아직도 안 사라졌잖니? 정 좀 떼렴. 토할 것 같으니."
"정을 쏟지 말라고? 왜?"
선은 후, 한숨을 쉬었다.
"아랫것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리고 넌..."
선은 율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눈을 휙 휘었다. 야살스럽되 표독스러운 미소였고, 비웃음이 가득 담겨있기도 했더라지.
"..네가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있다고 생각하는데."
율은 눈을 휘었다. 선 또한 그 미소에 맞받아치듯 헤쭉 미소를 지었더라지.
"너는 그들에게 원망만 들을 걸. 그리고 가문 안에선 겉옷은 벗고 다니렴. 아버지가 네가 천 가문의 자제임이 부끄럽다 생각하시는지 근심이 크더라고."
잘 들어, 율아.
"너는 평생 그들에게 사랑받지 못 해."
- 삼키다
- "그리하여, 본좌의 무죄가 입증이 되었다 그 말이로고?"
"그렇습니다. 수 많은 증인들이 선이 전 가주님께 탕약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고, 자리를 떠나는 것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복어 알과 내장을 구했다는 사실 또한 발견되어..."
"그만하면 됐다."
눈가에 붉은 칠을 한 오러 한 명이 율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율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무죄다. 그래, 폴리주스로 누이를 흉내낸 건 용케 잡히지 아니하였다. 율은 쉽사리 나가지 않고 머뭇대는 방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영 익숙치 않았다. 분명 나흘 전까지는 서로 여러 대화를 눈을 마주하며 하였거늘.
"더 고할 사항이 있느냐?"
오러가 몸을 떨었다. 과연 이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오러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마가 서늘한 바닥에 닿았다.
"..소신이 걱정이 되어 아뢰오는 바....가주님. 부디 당분간은 존체를 보존하심이..."
"본좌를 걱정하는가?"
"......."
"그래, 네 말이 맞다."
오러는 고개를 들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백환이라면 하등한 녀석들이 감히 자신을 능멸한다 하였을테다. 그리고 크루시오를 쓰겠지. 그러나 율은 달랐다. 율은 자상하고, 자신을 안심시키듯 눈이 마주하자 활짝 웃었다.
"본좌에게 있어선 이제 위험한 존재가 수두룩하다. 그들은 강철로 된 날선 발톱을 드러내고, 쇠로 된 가면을 쓰며, 바늘로 된 혀를 휘두를테다. 그 괴물에게서 이길 방법은 목을 치는 것이 아니라 존체를 보존하며 기다리는 것이지. 그들이 녹슬 순간까지. 허나.."
율은 미간을 좁혔다. 근심이 어린 표정이 방계를 대할 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백환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러는 율의 태도가 믿기지 않는 듯 싶었다. 항상 두려움에 떨던 때와는 다르다. 단 며칠만에 분위기는 뒤집혔다.
"본좌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버틸 수 없다. 아무리 본좌가 낭도를 이끄는 국선일지라도 그 많은 적을 혼자서 해치우는 것은 무리이지 않느냐."
침묵.
"본좌는 공의 도움이 필요하다. 부디 이 나약한 자를 도와주지 않겠는가."
오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직계가 방계에게 손을 뻗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머리속에서 섬광이 스쳐가는 기분이다. 기대감이다. 율의 할아버지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가문은 변화하고 있었다. 다시 원래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목을 베어내는 폭군이 아닌 용맹한, 낭도를 보필하는 국선이 존재하는 화랑의 후예인 천 가문으로. 방계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율이 한없이 위대한 존재로 보일테다. 오러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겨우 참아내곤 고개를 다시금 조아렸다.
"...망극하옵니다."
"본좌의 손을 잡아주어 고맙구나."
고개를 든 오러의 눈에는 경외심이 담겼다. 율은 이제 그의 눈에서 신과도 같은 존재일테다. 비록 그가...
"듣거라, 그들에겐 죽음만이 구원일지라.."
...일지라도.
그는 회유하는 것에 말재간이 있었다. 그것은 세뇌일지어니.
자신 또한 그리 세뇌하였을테다.
- 감추다
- 선은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는지 자신을 쏙 빼닮은 것도 싫었고, 그런 얼굴로 친절한 척을 하는 것도 싫었다. 방계는 그 멍청이를 신을 모시듯 떠받들었고, 직계의 사람들도 율을 마음에 들어하는 듯 했다. 멍청하긴! 하는 모든 행동이 거짓으로 참철된 위선자의 어디가 좋길래 그러는 거지? 선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이 들고있는 검을 내팽겨치며 자리를 떠났다. 동생을 생각하는 순간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율의 편을 더욱 들어주었다. 그것이 선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을테다. 아니면 그 반응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율은 무럭무럭 자라며 자신을 앞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이젠 자신의 자리까지 탐내고 있다. 곧 돌아오실 그 분에게 가장 사랑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말이다! 이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선은 율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마다 율을 괴롭혔고, 그건 이제 당연한 순리가 되었다. 선은 이를 바드득 갈며 율의 방 근처를 지나쳤다.
- ...조금만 더..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창호지로 비치는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율은 혼자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거지? 선은 조용히 조곤거렸다. 아씨오 지팡이, 아씨오 투명 망토. 선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창호지 사이로 귀를 기울였다. 열 다섯의 율은 학교에서 머글과 혼혈 친구가 많았다고 했다. 방계의 아이가 그렇게 전했다. 역겨운 잡것들과 놀아나더니 결국 미쳐버렸나? 선의 미간이 좁혀진다. 작은 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율은 꼭 짐승이 그르릉대듯 낮은 목소리로 숨을 씨근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무언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선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창호지 안의 인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수작인거지? 문을 고정하고 있던 장식이 투둑 소리를 내며 점점 기울어졌다. 몸을 너무 기댔던 탓이었다. 선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결국 문은 앞으로 무너졌고, 선은 방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율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고, 그의 팔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팔뚝의 살을 떠내려고 했는지 살점이 마치 고기를 썰어내듯 벌어져있었다. 구역질이 치민 선은 제 동생을 미친 녀석을 보듯 올려다보았다. 율은 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이 방계를 바라보듯 가소롭다는 눈치였다. 선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팔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선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놓고, 이제는 진짜 위선자가 되어 사람들을 마음대로 주무르시겠다? 선은 이를 악 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율의 뺨을 손등으로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율의 고개가 돌아갔다. 지나가던 방계의 사람이 그 장면을 보았는지 달음박질을 치는 소리가 들려도 선은 율의 뺨을 다시금 세차게 후려쳤다.
"이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새끼야!!"
"선아."
선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고개를 휙 들어올리다 몸을 움찔 떨었다. 율은 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권력이 낮은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마주했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보였음을 깨달은 선은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니 내가 우습지."
높낮이도 없는 단조로운 억양이었다. 선은 율의 팔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어버린 팔을 보고 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우습냐고? 우스웠다. 선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율에게 쏘아붙였다. 기분이 상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우습지. 내가 너는 평생 그들에게 사랑받지 못 한다고 했을텐데? 이 멍청한 것, 네가 그렇게 발악해봤자 그들이 너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얘, 율아. 네가 그렇게 우호적인 역겨운 짐승 새끼들의 역사로 설명해줄까? 친일파의 자손이 독립 이후에서야 독립 운동가 편에 붙겠다는 꼴과 다를 게 뭐니?"
율은 말 없이 칼을 방 구석으로 내던졌다. 피가 방바닥을 어지럽혔다.
"그래, 느 말이 맞다."
선은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있음을 깨달았다. 율이 피가 범벅인 팔로 선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올린 것 이었다. 선은 발길질을 하며 악을 써댔다.
"차라리 전부 죽여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옳은 것 같다. 니는 그리 생각 안 하나."
그 와중에도 선의 시선은 피범벅인 팔에 있었다. 아버지가 달려오고, 오러 출신의 방계 두 명이 달려왔다. 백환의 안색이 창백했다. 딸과 아들이 싸웠다는 사실보다 율의 팔에 시선이 쏠려있었다.
"꼴 좋다, 배신자 새끼..넌 버림 받았어."
그 분이 돌아오시면 가장 먼저 너를 죽일거야. 선은 낄낄 웃었다.
"버림 받은 건 너야."
율은 눈을 휘었다. 선은 결국 눈을 반쯤 뒤집으며 율의 손에서 축 늘어졌다. 혼절하는 그 순간에도 선은 율을 배신자라 낙인 찍었고, 율은 선의 목을 놓지 않았다.
너는 기숙사 안에서 팔뚝에 손을 얹고 손가락 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팔을 꽉 눌렀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진짜 죽여 버릴 걸 그랬어..."
아무렴, 그때 죽였어야지.
- 드러내다
- 율은 누이인 선과 달리 어릴적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가 바른 아이로 천 가문 내부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무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무너져가던 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교계의 활동도 활발히 하며 율이라는 제 자신을 보였다. 스큅인 우석은 그런 율이 선보다 더욱 나은 사람이라 판단했고, 선은 어느 순간부터 율을 질투했다. 율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커가면서 정신머리가 제대로 들었을 때, 율은 선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선은 그런 율을 위선자라 평했다. 어쩌고 보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가문 내부에서 율이 무표정을 짓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그건 선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것에 해탈한 모습을 보이던 천하의 우석도 마찬가지였다. 율은 가문 내부에서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도통 모를 아이로 통했다.
그것이 절대 긍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
어린 율은 현재의 율과 확연히 달랐다. 아주 가끔, 한 가문 내부에서 경사가 있을 때 추종자 가문이던 천 가문을 초대하는 경우엔 율이 선 대신에 나타나곤 했다. 그때 초대를 했던 사람이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율을 외모를 제외하면 파티에서 눈에 잘 담기지 않는 조용한 아이로 평가했다. 어린 율은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질문하는 것에는 예의바르게 대답했지만 그 이외에 불필요한 언사는 하지 않았고, 백환이 부르면 귀신처럼 어느 순간 그의 옆에 나타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율이 수줍음이 많았을 것이라 판단했을테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혀 다르다. 수줍음과 경계는 거리가 멀다. 율이 온전히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장소는 자신의 집밖에 없었다.
"율아. 뭐 하니? 또 새를 죽인 거야?"
열 넷의 선은 아무리 율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때는 율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저 자상한 누이와 동생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율과 선은 아홉살이나 차이가 났으며 어머니까지 돌아가셨으니 제 동생을 아들처럼 돌봤다. 방학이 되면 아버지보다 율을 먼저 찾아갔다. 지금도 그러하였고, 어린 율은 손에 새를 쥐고 있었다. 새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가 꺾여있었다.
"그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외로워 하실 것 같아서. 곁에 아무리 추종자가 많아도 친구는 없잖아. 그래서 오시는 길 심심하지 말라고 보내주는 거야.."
율은 어릴 적, 순수함과 잔혹함을 넘나들곤 했다. 방계도 율의 동을 보며 몸을 떨곤 했다. 선은 그것을 대여섯살의 아이가 자라나며 겪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라 일축하며 다그쳤다. 그 나이의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사전적인 개념으로는 이해하지만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니. 선은 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날이 추우니 들어가자. 아버지가 방금 너를 불렀단다."
*
율은 가만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율이에게 역사를 가르쳐주곤 했다. 그리고 누에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자주 이야기 했다. 그 분은 완전한 순혈들의 낙원을 위해 노력하셨고, 그 분은 천 가문의 주인이라 하였다. 그 분은 돌아오실 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빼놓지 않는 문장 중 하나였다. 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왜 그러니, 율아."
"그러면 그 분은 신이 아니던지요."
백환은 놀랄 노자로구나.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껏 백환은 누에를 순혈들의 완벽한 지도자이자 이 마법사 사회의 왕이라 생각했지, 신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는 듯 싶었다. 우리는 신을 따르는 신도다. 그 어려운 말은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만 다섯의 아이가 할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율의 두 눈이 기대감과 희열에 가득 찼다. 그 분은 돌아오실 것 이다. 사실, 들은 적이 있다. 역겨운 잡종 가문에 갔을 때, 그들이 말도 섞기 싫은 머글 마법사를 초대했을 그 날. 메시아 라는 존재에 대해 얘기를 했다. 신앙이 있는 마법사였다. 어린 율은 3일만에 부활했다는 그와, 돌아올 누에를 동일시 하고 있었다.
명백한 광신이었으나 그것은 추종자가 가져야 할 당연한 성정이었다.
*
율은 자신의 오른팔에 문신이 새겨지는 날, 양 뺨이 붉어져선 으레 그 나이의 아이들만 지을 수 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추종자임을 알리는 끔찍한 증표겠지만 율에게 있어선 면죄부와 다름이 없었다.
*
열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율은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검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 검을 나의 신을 위해 쓰리라.
*
큰일이다. 율은 손톱을 깨물었다. 단 한 번도 손톱을 깨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깨물 수밖에 없다. 율은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비틀린 사랑도 빼닮았다. 그건 차마 모르고 있었다. 율은 자신의 속에서 꿈틀대는 애정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다. 율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고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율아. 이리 늦은 시간까지....그 상처는 무어냐?"
"제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잡종과 머글은 필히 그 분께 필요가 없었기에 처리한 것이거늘..어찌하여..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부디 이 못난 불효 자식을 죽여주소서!!"
백환은 껄껄 웃었다. 그래, 그리하여 저번에 네가 칼로 문신이 있는 부분을 떠내려 한 게로구나. 백환은 바들바들 떠는 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율아. 두려워 말거라. 역경과 고난은 필히 있는 법이다."
율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분은 네 진심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아, 이 미천한 소인의 구세주는 그들을 사랑하였기에 죽음으로 구원을 한 것이었군요! 그리하다면, 이 한 몸 바쳐 그 분의 뜻을 이어받겠나이다.
율은 눈물이 맺힌 얼굴로 환히 웃었다. 그것은 광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