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곳은 어린아이들이 별로 없는 전형적인 시골 동네였다. 청장년층은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은 전형적인, 그런 동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끼리는 자연스레 친해질수밖에 없었고 해가 뜨면 어울려 놀러나가고 해가 지면 헤어져 집에 가곤했다.
비교적 문명의 혜택은 받지 못했지만 자연의 혜택은 분명하게 받은 시골동네는 아이들의 놀이 천국이었다. 여름에는 산에 가서 곤충을 잡아오고 강에선 물놀이를 즐기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강에 가서도 얼음 썰매를 타고 놀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커갔고 이런 나날이 계속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그렇지 않았고 도시로 떠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내 친구들은 하나 둘 시골을 떠나갔다.
우리 부모님은 비교적 성실히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셨고,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한번은 부모님께 우리도 도시로 가자고 졸라댄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서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하셨다.

" 농부는 굉장히 중요하단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우리가 재배하는거니까. 너도 그걸 느낄때가 언젠간 오게 될꺼란다. "

혼내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차분하게 나를 타이르시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친구들이 보고싶은 그리움과 그래서 생기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만이 가슴에 쌓여갈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내가 12살이 되던 해에 폭발했다. 12살 생일을 맞이하고 나는 생일 선물로 무엇을 줄까 고민하는 부모님에게 도시에 보내달라고 말했다. 물론 부모님은 완강하게 거절하셨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엔 허락을 맡았다.
도시로 가는 날 아침에 나는 부모님과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근처 도시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곳도 그저 소도시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가보는 도시라는 생각에 아주아주 흥분해있었다.
여행은 순탄했다. 날씨도 화창했고,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어서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골과 도시 사이에는 잘 닦인 길도 있었기에 그저 길만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도시에 도착해있었다. 하루도 걸리지 않아 도착한 도시는 그 당시의 나의 눈에는 아주 장엄했다.
높은 건물들, 수많은 사람들, 흥정을 위해 여기저기서 지르는 고함소리. 모든 것들은 나에겐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조그마한 시골 소년이 난생 처음 본 도시에 대한 감상을 글로 적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감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시에서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도중,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귀에 들렸다. 누굴까, 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카얀 아니니! 여기까지 와서 뭐하는거니? "

토바르 아주머니였다. 우리 집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있는 집에 사시던 분이었는데, 아주머니의 아들과는 언제나 어울려다니던 패거리였다. 나도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서는 인사했고 아주머니는 과일가게를 운영하신다고 하면서 가게안으로 나를 들여보내주셨다.
아저씨도 함께 가게에 있으셨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들은 잠시 심부름을 보냈다고, 곧 돌아올 거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앉아서 기다렸고 심부름 갔던 친구가 돌아오자 빠르게 달려가서 인사했다. 그 아이 또한 굉장히 놀라워했고 기쁜듯이 크게 웃으며 나를 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걔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 같은 도시로 이사 온 다른 아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예전처럼 패거리를 이루어서 골목 골목을 돌아다녔고, 가끔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도 사먹으며 우리는 굉장히 즐겁게 놀았다. 놀다보면 시간은 금방 가게 마련이고 곧 해가 졌다. 마땅히 잘곳이 없었던 나는 토바르 댁에서 몇일동안 신세를 지기로 했다.
도시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정말 재밌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고, 나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쉬워하는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금 집으로 갔다. 도시에서 집으로 가는 길도 순탄했고 나는 금세 집에 도착했다. 집에선 부모님과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다녀왔습니다! 라는 인사를 크게 하고는 도시에서 있던 일을 마구 자랑했다. 부모님은 말없이 웃으시며 내 얘기를 다 들으셨고, 재밌었겠구나? 라는 말을 하셨다.

" 네! 무지무지요! "

나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서 크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시골의 무료한 생활이 시작됐다. 같이 놀 아이들도 없이 여름에는 산에 가서 곤충을 잡아오곤 강에선 물놀이를 즐기고, 겨울에는 산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강에 가서도 얼음 썰매를 타고 놀았다.
같이 노는 여동생은 굉장히 좋아했지만, 친구들과 노는 맛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맛을 알아버린 나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다시 허락을 맡기엔 이번엔 절대 안해주실 것같아서 그렇게 심심한 생활을 2년 정도 지속했다. 14살의 나는 이젠 부모님의 일을 어느정도 도울 정도의 나이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밀을 재배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밭의 이곳저곳을 뒤집어주고, 밀이 한창 자랄때에는 잡초를 뽑아주었다. 농사가 너무도 힘들어서 나는 어릴때 엄마가 해주셨던 그 말에는 더욱더 공감을 하지 못했다.
14살의 생일날, 아버지는 이젠 어느정도 컸으니까 바깥 세상을 둘러보고 오라고 하셨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깥 세상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폈다. 여느때와 다른 빠른 속도로 짐을 싼 나는 2년전의 그날처럼 부모님과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여행을 가려고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자신도 데려가달라며 떼를 썼다. 애초에 동네에 같이 놀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혼자 남는 것이 굉장히 불만이었던것 같았다.

" 나도 데려가 오빠! "

여동생의 이름은 카이렌이었는데, 나는 평소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땡깡을 부리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하게 계속 문앞에 서있기만 했다. 그러자 부모님이 여동생을 말리기 시작했고, 뜻대로 안되자 여동생은 금방 시무룩해지더니 결국엔 작게 울기 시작했다. 더욱 가슴이 아파진 나는 여동생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 이번엔 못데려가지만, 다음번엔 데려가줄께. 이번엔 오빠가 사오는 선물로 만족할까, 카이렌? "

나의 제안이 어느정도 마음에 들었는지 여동생은 울음을 어느정도는 멈추고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 ... 인형이 가지고 싶어, 오빠. "

인형, 도시에 갔을때 가게에서 본적이 있었기에 나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더욱 멀리 나가기로 결심하고 걸음을 땐 나는 2년전보다 빠르게 이웃도시에 도착했다. 전과 다름없는 풍경에 나는 반가움을 느끼며 토바르 아주머니 댁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토바르 아주머니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과일가게도 아니고 그냥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나는 잡화점 주인에게 가서 이곳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 아, 그 사람들이라면 과일가게가 장사가 잘 안돼던 모양인지 다른 곳으로 갔단다. 그 이상은 모르겠네, 미안하다. "

친절한 대답에 감사하다고 대답하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또 이사를 간것인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 나는 조금은 기운이 빠져서 도시를 빠져나왔다. 친구들이 없다면 그 도시에서 하루를 소비할 이유는 없었다. 2년전에 대부분 구경한 상태였기때문에 더 이상 볼거리도 없었다. 다시금 길을 나선 나는 대로를 따라서 그저 걷고 걸었다. 비가 올때는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걸었고, 햇볕이 뜨거운 날에는 그늘에서 쉬엄쉬엄 가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걷다보니 또 다른 도시가 나왔다.
새로운 도시가 나타나자 나는 굉장히 흥분했었다. 새로운 볼거리! 새로운 경험! 그 때의 나는 이런 것에 아주 취해있었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도시에 입성하자 전에 있던 곳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더욱 많은 사람, 규모도 큰 건물들,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했던 것은 기차였다. 그 웅장함이란! 기차역이란 이름을 보고 이건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에 들어가본 나는 그때 본 기차에 대한 감상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강렬했다는 뜻이겠지. 기차라는 것을 타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솓구쳤지만, 의외로 기차표값은 비쌌고 그정도 예산을 할애할 정도의 돈이 나에게 없었기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나는 도시를 구경하러 역을 나왔다.
규모가 큰 도시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보석점이라던가 고급스런 옷들을 파는 가게도 즐비했다. 새로운 볼거리에 만족한 나는 인형을 파는 곳이 있나? 하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도시가 넓어서 하루만에 다 둘러보기는 힘들것 같았기에 반정도 둘러본후 근처에 여관에 방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아이인줄 알고 나를 내쫓으려던 주인도 내가 정상적으로 값을 지불하자 말없이 방열쇠를 주고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오랫동안 걸어서 피곤했던 나는 금세 곯아떨어졌고,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난 뒤였다. 피로가 채 가시지않은 몸을 이끌고 여관을 나섰다. 인형을 파는 곳을 찾기 위해서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나는 겨우겨우 인형을 파는 곳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가지 인형들이 많았는데, 너무 싼것은 금방 부서질것 같았고 왠만해선 동생에겐 좋은 것을 사다주고 싶었던 나는 그중에서 가격이 가장 무난한 인형을 하나 골랐다. 인형 가격으로 흥정을 해서 가격을 조금 깎은 나는 기분이 좋아서는 인형을 짐가방 안에 넣고서는 도시의 명물이라는 분수를 구경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분수는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큰 분수가 시간마다 뿜어져 나온다고하는 그 분수는 내가 도착하자 마침 분수를 뿜어올리고 있었다. 기차에 이은 두번째 충격이 내 머리를 스쳤다. 정말 웅장했다. 고래라는 것에서 나오는 것을 형상화했다고 분수 아래에 써져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물이 있다면 그것을 보러가고싶다고 나는 강렬히 생각했다.
정신없이 구경하다보니 분수가 멈췄고, 나는 다음에는 여동생을 같이 데려와서 꼭 보여주어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다시 길을 나섰다. 슬슬 집에 돌아갈때가 다 된것같았던 나는 짐을 챙겨서 귀행길에 올랐다. 아니, 오르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 카얀! "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토바르 아저씨가 그곳에 서계셨다. 나는 우연한 만남에 너무도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한달음에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 오랜만이구나, 카얀. 잘지냈니? "

아저씨가 인사하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을 찾는지 눈치챈 아저씨는 다른 가족들은 바빠서 못온다는 말을 했다. 나는 괜히 아쉬웠지만 아저씨의 얼굴을 보았기에 그걸로 만족했고, 짧은 만남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다.

" 아, 카얀. 내가 부탁이 있는데 말이지. "

아저씨는 나에게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했다.지금 생각하면 아저씨는 그때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릴때의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고, 아저씨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어떤 물건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는데, 천으로 둘둘 말린 길다란 어떤 것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도시의 정문으로 와달라는 아저씨의 부탁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꽤나 무거웠지만 농사일로 꽤나 단련되어있던 나는 그렇게 힘들이지않고 옮길수 있었다. 등짐을 앞으로 매고 뒤에 아저씨의 물건을 맨 나는 천천히 걸어서 정문으로 향했고, 분수가 있던 곳은 정문과는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나는 금방 도착했다. 정문의 모습은 내가 도시에 들어올때와는 달랐다. 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정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몸수색은 물론 짐까지 수색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생겼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정문을 지나가려고 행렬에 끼어들었다.

" 잠시 짐 수색 좀 하겠습니다. "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짐을 모두 내려놓고 팔을 벌려 몸을 수색하기 쉽게 해주었다. 집에 가서 이번에 본것들을 자랑할 생각에 들뜬 나의 귀에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대장님! 여기에! "

소리가 들려온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경악했다. 아저씨가 맡긴 그 물건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빛의 낫, 그것도 아주 큰 낫이었다. 내 키보다 더 큰. 애초에 등에 사선으로 지고 걸어도 땅에 질질 끌리던 길이였는데, 저정도 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거기에 나는 그 경비들의 손에 단단히 포박된 상태였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그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수밖에는 없었고, 그들은 내 뒷목을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의식이 흐려져가는 내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도시를 빠져나가는 아저씨였다.

그리고 몇달동안, 나는 지하 감옥에 갇혀서 계속 고문을 당했다. 물고문부터 시작해서, 온갖 고문은 다 당하였다. 그들이 묻는 것은 단 하나, 그 낫을 어디서 났냐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저 아는 아저씨에게 받았다고 했을 뿐이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고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죽어버릴 것같은 공포와 고통 속에서 잠도 들지 못했다. 간혹 잠이 들면,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저씨의 눈이 꿈에 나와서 나를 괴롭혔다.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난 것은 그들이 찾던 것과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다른것이 밝혀지면서 이루어졌다. 나를 고문하고 추궁하던 사람들은 미안한 표정을 가득 지으면서 나를 보내주었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나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갈 길을 떠났을뿐이었다.
몇달에 이은 고문으로 내 신체는 거의 만신창이였고 나는 간신히 걷기만을 할 수 있었다. 입은 다 헐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저 빵을 물에 불려서 간신히 목으로 넘기는 것이 내가 하는 식사의 전부였다. 도시로 올때는 일주일 정도 걸렸지만, 내가 다시 집으로 가는것은 한달이 걸렸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나는 내가 떠나올때와 다른 마을의 분위기에 놀랐다. 사람은 적었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정이 넘치는 동네가,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나를 잘 알고있던 그 사람은 내 모습에 아주 놀라면서 괜찮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물었다.

" ... 얼마전에 큰 산불이 났었다. 겨우 진화하긴했지만 ... 사람들이 .... "

패닉, 쇼크,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마음을 후벼놓았다. 뛰어가야했다. 뛰어서 여동생이, 우리 가족이 잘 있는지 확인해야했다. 하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않았고, 나는 마음만 급한채 천천히, 천천히, 우리 집을 향해 갔다.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 어머니가 내 소식을 들었는지 집 앞에 나와계셨다. 부모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는 안아주시고 울었다. 나는 부모님의 얼굴이 너무도 반가웠지만, 보이지 않는 한명이 너무도 신경쓰였다.

" ... 카이렌은요? "

나의 물음에 어머니는 우시던 것을 더욱 서럽게 우시기 시작하고, 아버지는 간신히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네 동생은 ... 자다가 ... 불이 나서 그만 ... "

그 순간, 내 감정회로가 타버렸는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조차 멈추었다. 그저, 그저 눈에서는 눈물만이 하염없이 나올 뿐이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내 가방에서, 인형이 빠져나왔다.
그때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었는지 나는 한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않는다. 아마도 내가 일부러 기억에서 지웠거나 했겠지.
충격에서 벗어난 것은 집에 오고나서 두달정도를 요양했을때였다. 이제는 몸에도 어느정도 힘이 돌아오고,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농사 때문에 바쁘실텐데 언제까지고 내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이 집에 있기 싫었다. 집에 있으면 카이렌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에. 그 빈자리를 느끼기 싫었던 나는 부모님께 한마디만 하고 집을 나왔다.

" 잘 지내세요. "

그렇게 15살이 되던 새해, 나는 여행을 시작했다. 돈이 부족하면 여관에서 일도 하고, 그렇게 돈이 모이면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가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내는 정도가 나의 소식통 전부였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던 도중, 내가 잠깐 묶고 있던 여관으로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계속해서 거처를 옮기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나에게 바로 온 것이었다. 편지의 발신인은 아버지였다. 정성스레 촛농으로 닫혀있는 편지 봉투를 열자 아버지의 친필로 쓰여있는 장문의 편지가 한통 들어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갈곳을 알고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눈 앞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아버지의 친필이었으므로 내용을 읽어보았다.

'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아들아, 잘 지내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것이냐.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의 안부가 심히 걱정되는구나.
언제나 밝게 지내던 네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버릴줄은 상상도 못했거늘. 하지만 너가 받은 충격이 어느정도인지 우리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때 너의 앞을 막지 못했던 것 같구나.

( 중략 )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여기까지하고, 너는 지금 아버지가 어떻게 너가 있는 곳을 딱 알고 편지를 보냈는지가 심히 궁금해 하고 있을 것같구나. 사실 아버지는 남 그래시 무력단체, ' 밀레니엄 그레첸 ' 소속의 중견 간부였단다. 북 그래시에서 활동을 하던중 정체가 드러나서 더 이상 어느 그래시 어느 지역에도 정착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었지. 그래서 북그래시와 남그래시의 경계 지역의 산 속 마을에 정착하고 너의 어머니를 만나서 너와 카이렌을 낳은 것이란다.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도 ' 밀레니엄 그레첸 ' 의 정보망을 이용한 것이지. 마침 너가 그래시와 멀지 않은 곳을 여행하고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어머니는 너가 그렇게 이곳 저곳 여행하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게 보지않는 것 같지만, 나는 너의 앞을 막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단다. 다만 너가 험한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금 걱정은 되는구나. 이 편지지는 ' 밀레니엄 그레첸 ' 의 밀서에만 사용할 수 있는 종이란다. 아마도 이 편지지를 지부에 가지고 가면 너를 ' 밀레니엄 그레첸 ' 에 가입 시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몇가지의 시험은 거쳐야 할 것이고, 너는 이 단체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도 해서는 안된다. 어느 곳에서라도, 설령 너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이다. 어머니조차 나의 정체를 모른단다.

아들아, 어쩌면 너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너라면 해낼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단다. 남그래시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그런 거창한 일을 너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란다. 단지 너가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될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그러므로, 가라 아들아. 가서 너의 재능을 펼치거라. 그리고 강해져라.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 모든 것을 잊거라 아들아. 그리고 더이상 전진할 수 없을때, 지쳐 주저앉고싶을때, 돌아오거라. 그리고 쉬다가거라. 이곳은 너가 살기엔 너무 작은 곳, 하지만 쉬어가기엔 아주 좋은 곳이란다.

새로운 시간 속에는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한다.
아들아, 부디 잘지내거라. 너마저 잃는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들구나. 지부의 위치는 ... 이란다. 너의 소식은 밀레니엄 그레첸을 통해서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겠지만, 너의 어머니를 위해 편지 보내는 것을 잊지말도록하여라. 그럼. '

아버지의 정성이 담긴 편지에 나의 마음은 찢어질듯 아팠다. 두분에게 남은 것은 나 하나뿐일텐데, 나는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집을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의 죄책감은 아직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고, 이 슬픔을 억누르기에는 나는 아직 어렸다. 나는 편지를 다시 편지봉투에 넣고 품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아버지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향했다.

입단 시험을 치르고, 나는 2년동안 첩자로써의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서 19살이 되는 해에 첫 임무를 받게 되었다.

'아르토리아 - 아플리냐에 가서 각국 계층의 젊은이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해라. 이는 네가 졸업할때까지 계속된다. '

작년에 성인이 되었기때문에 학교 생활 같은 것은 나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상부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입학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으로 나의 기억을 덧칠하려한 나는 아르토리아 아플리냐의 전경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서는 아주 맘에 들어서 몇 일에 걸친 기차여행 후에 아르토리아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시작하면 그때서야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시작했고, 시간은 흐른다. 어디로 흐를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