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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의 이야기

last modified: 2015-05-16 10:09:33 Contributors


1. 조우, 그리고 위기


보통 사자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라 하면, 일반인들은 예르하임 제국의 군단이 위풍당당하게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는 모습을 연상한다. "나부끼는 사자 깃발 아래로 진군하는 제국군" 이라 하면 여러 희곡이나 가곡, 연극, 소설 등에서 마르고 닳도록 써먹히는- 하나의 클리셰로까지 정립된 표현인 만큼, 이 사자 깃발은 제국군의 트레이드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헌데, 이 사자 깃발 아래의 제국군은 조금 이상했다. 사자의 깃발이 휘날리는 탄탄한 깃대는 분명 제국군의 것이었으나, 그 아래의 제국군은 전혀 오와 열을 맞추고 행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깃발 아래에 있는 게 제국군이 맞긴 했는데... 이 제국군들은 때아닌 아수라장을 겪고 있었다.

기사 10명과, 200명의 선발대. 그 선발대 병사들이 이리저리 뒤엉키고 아우성치고 있었고, 그 사이로 부오오오오, 하는 끔찍한 부르짖음이 울렸다. 딱 봐도 그 전장이며 전고며 전폭이 20미터씩은 넘길 듯한. 빙하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크기의 흰 털의 거대한 멧돼지같이 생긴 짐승 하나가 온 몸에 화살과 투창이 박힌 채로, 두 쌍의 4미터는 될 듯한 어금니와 신전의 기둥만하면서도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는 길다란 코, 하나하나가 시계탑만한 네 다리를 휘저으며, 두 눈을 시뻘겋게 불태우며 날뛰고 있었다. -기실 그 짐승은 매머드라고 불렸지만, 벨로넨트는 이 짐승을 육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그 덩치가 얼마나 큰지, 몸에 꽂힌 화살이나 투창 따위는 그냥 바늘 정도로 보였다. 제국의 황태자, 벨로넨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제국군의 방진을 짓뭉개며 미쳐 날뛰고 있는 매머드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회복력인지, 기사들이 오러가 실린 검격을 날려도 피는커녕 칼이 훑고 지나간 사이로 지방이 조금 삐져나오는가 싶더니 그 지방이 그대로 굳어서는 상처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보통 오러라 하면 인간의 몸을 매개로 특수히 정제된 순수한 마력으로 상처부위에 초물리적인 충격의 흔적을 남겨 치유가 굉장히 힘든 상처를 남기는 것인데, 저 괴물은 어떤 방법을 쓰는지 몰라도 그 오러가 남긴 상처마저도 스스로 임시땜질이나마 치료해버리고 있었다. 필시, 저것은 오러의 문제가 아니라, 기사들이 쓰는 검의 길이가 문제이리라. 저 괴물의 몸을 두른 지방층이 기사들의 검의 길이보다도 더 두꺼운 탓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오러를 응집해서 지방층보다도 더 깊게 찌를 수 있는 길이의 기검을 형성할 수 있다면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었고, 벨로넨트 황태자에게 붙어있는 호위기사인, 3미터 가량의 기검을 뽑아내는 대검의 명수 이빅스 아시라트라면 그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가 곁에 없었다. 벨로넨트는 그가 못내 아쉬웠다. 물론, 벨로넨트 황태자의 호위기사는 네 명이었고, 그 넷이 모두 벨로넨트가 진두지휘하는 스코틀랜드 파견군에 따라왔으나, 애석하게도 벨로넨트는 선발대를 편성할 때 "선발대가 행군하는 길에 고향이 있는데 그 곳을 찾아보고 싶다" 는 이빅스만을 데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유일하게 데려온 호위기사인 이빅스는 고향에 들러보느라 지금 선발대에 없었다.

물론, 호위기사 세 명을 본대에 남겨둔 것은, 천 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 파견군과 그에 따르는 후발 보급대를 통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저 괴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벨로넨트는 하필이면 이빅스가 자리를 비운 틈에 부대를 기습해 온 저 괴물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기실, 그 괴물이 어쩌다 막사에 달려들어 깽판을 놓은 것인지는 벨로넨트도 잘 몰랐다. 그가 이 이백 명의 군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가 다루는 병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완벽히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상은 이렇다. 정찰을 내보냈던 병사 몇 명이 그 매머드의 식량 저장고를 발견했고, 마침 돌아온 매머드가 처음에는 그들을 내쫓으려 코를 휘둘렀다. 헌데 정찰대원 하나가 기겁한 나머지 매머드에게 단궁을 날렸고... 그게 눈가에 맞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그 괴물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화가 난 매머드가 날뛰기 시작하자 정찰대원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벨로넨트의 휘하 부대가 머물고 있는 캠프로 도망와 버렸고... 그게 매머드를 이리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물론, 벨로넨트는 이 내막을 내일 아침의 정기 보고에서 전해듣고는 정찰대원에게 경징계를 내리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내일 아침의 일이었다.

"무슨 놈의 괴물이 오러 화살을 다섯 대씩이나 맞고도 돌아다닌담." 벨로넨트 근처에서 필사적으로 석궁의 시위를 당기던 정찰대장 틸러가 절박함과 짜증이 섞인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화살에 오러를 실었다. 하얀 우윳빛으로 물든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다시 그 매머드의 어깨에 정통으로 적중했지만, 괴물은 잠깐 비틀거리더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그나마 오러 화살은 지방층을 뚫고 신경과 힘줄에 유효타를 가할 수 있었는지, 오러 칼날에도 꿈쩍 않던 괴물이 오러 화살에는 움찔움찔했지만, 그 유효타는 결정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괴물의 화를 돋구기만 하는 것 같았다. 벨로넨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 매머드를 바라보고는, 십여 분 남짓의 전투를 바라보며 내린 결론을 정찰대 병단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소리쳤다. "전군, 집합-!! 방어 대형으로-!! 물러선다!"

사자의 포효같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덕에, 매머드에게 이리저리 얻어맞고 날아가면서 수난을 겪던 제국군들은 언제 그렇게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치이며 날아다녔냐는 듯 방패를 들고 단단한 방진을 짠 채로 물러섰다. 몇몇 부상자 혹은 사망자는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매머드는 지칠 줄 모르고 다시 방진으로 돌진해 왔지만, 벨로넨트의 지휘에 제국군은 매머드와 정면격돌하기보다는 매머드의 돌진을 유연히 빗겨내듯 피했다. 다시 시위를 당기려는 궁병대장 틸러의 팔을, 벨로넨트는 저지했다. "틸러, 관둬." 궁병대장 틸러는 벨로넨트를 의아하게 올려다봤고, 벨로넨트는 괴물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지금의 화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물건이 아닌 것 같다." 벨로넨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언성을 올려서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물러서서 때를 엿본다! 자극하지 마라!" 벨로넨트는 그렇게 말하며, 냉철하게 손을 휘저어 지휘를 내렸다. "다시 온다!" 벨로넨트는 진을 지휘하며, 아까 봐뒀던 침엽수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울창한 침엽수림까지 후퇴하면 저 거대한 생명체도 들어오기 조금 힘들 테지.


2. 후퇴 이후, 이빅스의 귀환


방진을 짜고 매머드의 돌진을 수 차례 빗겨내 가며, 침엽수림으로 산개해 도망친 벨로넨트 휘하의 사단은 다시 숲 속에서 집합했고, 매머드는 자신의 몸집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침엽수림 앞에서 침엽수 수십 그루를 무너뜨리면서 그들을 쫓아오려고 했지만 침엽수가 끝도 없자, 지치고 싫증난 듯 생채기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벨로넨트는 휘하 사단을 점호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와, 거의 열 명 정도 비는 자가 생기자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거 참 빌어먹을 종자일세." 벨로넨트의 무표정은 곧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냥 빠르게 후퇴할 걸 그랬군. 소중한 동생들을 너무 많이 잃었어." 채 십여 분의 교전에 이렇게나 큰 손실이 있었다. 이 정도면 제국군의 전략사에 대어 보았을 때 거의 완패가 아닌가? 벨로넨트는 짜증과 안타까움이 섞인 눈길로 휘하 병단을 돌아보고는, 곧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제군들, -우선 굳이 내가 연설을 한다고 대오를 갖출 필요는 없으니 다들 그 자리에서 휴식하며 들어주기 바란다. 훌륭히 버텨주었다. 이번 괴물의 습격으로 전우를 잃게 된 제군들에게 여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사과를 표하는 바이다..."

조금 격조 차리는 어조로 시작한 벨로넨트의 연설은, 이내 패잔병의 몰골이 된 선발대들에게 우리가 약한 것이 아니라 그 괴물이 너무 불시에 습격해온 것이었다며, 그들의 자존심을 추켜세워 주었고, 전우를 다시 들먹여 그들의 복수심을 다시 채웠다. 그는 이내 조만간 본대가 도착하면 그 괴물에 맞서 복수전을 치르리라는 공약을 내걸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패배에 이어 기가 죽어 있던 병사들은 벨로넨트의 연설에 기운을 차리고 되려 빠른 회복과 그 이후의 복수를 염원하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정작 연설을 마치고 약간 외진 곳으로 이동한 벨로넨트 본인은 꽤나 착잡한 표정이었다. 궁병대장 틸러는 말주변이 없어, 이런 상태의 황제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기에,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벨로넨트의 착잡한 표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던 궁병대장과 황태자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벨로넨트는 반색을 하며 그 쪽을 돌아보았고, 백발이 성성한, 흉터가 크게 찍힌 사각턱이 인상적인 노장, 벨로넨트의 호위기사 이빅스 아시라트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맙소사, 캠프가 있던 자리에 찍혀 있는 흉물의 발자국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소신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소신의 불찰 불충을 용서하소서!" 이빅스는 그대로 벨로넨트의 앞으로 허청거리며 달려와서는 벨로넨트 앞의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벨로넨트는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서서, 이빅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가, 영감. 내가 자네더러 고향에 가보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내 말대로 했네. 뭘 그리 풀죽어서 무릎을 꿇고 있나, 부하들 보기 안 좋게!" 입으로는 짐짓 이빅스를 질책하는 듯한 어투였지만, 아시라트를 잡아 일으키는 손길은 굉장히 힘있고 온화했다. 그는 항상 이빅스를 영감이라고 불렀다.

벨로넨트의 상냥한 손길에도 고개를 땅바닥에 박고 움직이지 않는 이빅스와, 그를 일으키려고 하는 벨로넨트의 실랑이가 조금 있은 뒤에야, 이빅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었다. 흉터가 찍힌 사각턱을 내세운 매서운 마스크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냥하고 감정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이빅스는 눈가의 눈물을 간신히 찍어내고는, 벨로넨트에게 질문을 꺼냈다. "하얀 매머드에게 공격당한 것이옵니까, 전하?" 그 질문에, 벨로넨트는 눈을 치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싸울 때는 과잉성장한 멧돼지 종류인 줄 알았는데 영감 말을 듣고 보니 그게 매머드였구만 그래. 헌데 경은 그걸 어찌 알았나?"

이빅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숲에서 가장 늙고 사나운 매머드인 오그벨루스로군요. 제국말로 하자면 「걷는빙하」 정도의 이름을 가진 흉물입니다. 진지에 남은 매머드의 발자국이, 바르바리아-그러니까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란 소신이 기억하는 매머드의 발자국과 형태는 똑같되 크기는 소신의 기억보다도 크더군요. 그만한 발자국을 내는 발바닥을 가진 매머드는 제가 알기론 한 마리뿐이니까요." 벨로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넨트는 이빅스가 스코틀랜드 토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벨로넨트 황태자를 보좌하기 시작한 이후로, 아직 어렸던 벨로넨트는 이빅스가 쏟아놓는 북방의 이야기보따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 역시 그것을 즐겨 들었던 덕이다.

"그렇다면 그게 그거지, 경이 노상 해주던 이야기들 중 하나. 가장 영악한 큰늑대 초승달이라던가, 와이번과도 싸워 이기는 엠벤스 이글 북벽나래라던가. 특별히 오래되고 강인한, 그러니까 경이 해준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름난」 흉물들." 벨로넨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스코틀랜드에는 무슨 마가 낀 것인지, 주기적으로 특별히 강력한 동물들이 나타나 수많은 설화와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이야기를, 이빅스가 그에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이빅스는 그 이름난 짐승들이 남긴 설화- 벨로넨트가 언급한 큰늑대 초승달이나, 북벽나래 등등, 다양한 이름난 짐승들이 남긴 이야기 또한 벨로넨트에게 해 주곤 했다.

"헌데 경이 한 이야기 중에서 저런 큼지막한 매머드 이야기는 없었지 않아?" 벨로넨트는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비틀었다. 이빅스는 벨로넨트의 반문에 즉시 대답했다. "아마 저 오그벨루스가 이번 세대에 나타난 이름난 흉물인 모양입니다. 소인이 고향을 떠나올 적까지만 해도 그런 흉물이 없다가, 이제사 고향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소인이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쯤 뒤에 그런 흉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하옵니다. 저 흉물이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적이 십수 년이 되었다 합니다."

벨로넨트는 이빅스의 말을 듣고 즉답했다. "뭐야, 십수 년? 완전 애송이라는 거잖아, 저거?" 벨로넨트의 표정에는 짜증이 어려 있었다. 십여 년밖에 안 된 애송이 하나가 자기 병단을 이 꼴로 만들어 놔? 곧바로 이빅스의 즉답이 따라붙었다. "십수 년 되었다고 해도 이름난 흉물. -특히 이 흉물은 자신과 한번 맞선 자는 그 냄새를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스코틀랜드에서 나갈 때까지 해코지를 하는, 그 힘이 강함에도 그 성미가 옹졸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라, 그놈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통째로 뭉개진 부족이나, 혹은 지금 우리 병단처럼 그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는 침엽수림으로 은거한 부족이 한둘이 아니라 하옵니다." 그 말에, 벨로넨트는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거 건방지네."

그러다 말고, 벨로넨트는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그 괴물이 그렇게 집요하다면, 지금 이 숲에서 나가면 그 괴물이 재차 또 덤벼들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벨로넨트의 질문에, 이빅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짧은 시일 내에요." 벨로넨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상자들만 다 치료하면 당장 나가서 저걸 조지면 되겠군. 마침 영감님도 왔으니 말야." 벨로넨트의 말에, 이빅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의 선발대원들을 가지고는 저 괴물을 제압할 화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벨로넨트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곧 질문을 던졌다. "연락병 하나를 본대로 보내서 본대를 끌고 오면 되잖나?" 그 말에, 이빅스는 고개를 저었다. "연락병이 숲에서 나가자마자 오그벨루스에게 따라잡힐 겁니다." 벨로넨트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벨로넨트의 표정이 변했으나, 이빅스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허나 그 집요하고 옹졸한 성미의 괴물은, 그 성미 덕에 적을 여럿 만들고 말았습니다. 당장 소신의 고향만 하더라도, 오그벨루스를 토벌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제서야 심상찮게 변했던 벨로넨트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그럼 영감님의 고향 사람들도 숲에 은거하는 건가?" "아닙니다. 허나 오그벨루스가 스코틀랜드를 누비기 시작한 이후로 스코틀랜드의 부락 치고 오그벨루스의 손속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는 부락은 없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오그벨루스에게 받혀죽을 놈, 이라는 게 요즘 스코틀랜드에서 통용되는 가장 심한 욕이겠습니까?"

이빅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목이 마른지 곧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꺼내 조금 들이켰다. 이빅스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무리해서 오그벨루스와 사생결단을 내고자 마음먹은 계기라기엔 부족함이 있지요. 당장 이 스코틀랜드는 부족한 식량으로 부족끼리도 서로 치고받고 사생결단을 내는 것이 일상인 땅이니, 오그벨루스 같은 짐승을 토벌하느라고 힘을 과하게 뺐다가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부족들이 얼씨구나, 하고 쳐들어와 그들의 것을 노략해 갈 테니까요. 소신이 항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보다 피를 먼저 머금고, 울음소리보다 고함을 먼저 내뱉고, 딸랑이보다 칼자루를 먼저 쥐고, 걸음마보다 칼 휘두르는 법을 먼저 배우는 세상이라고."

벨로넨트는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거 양반들 심보 하고는... 그 친구들이 어떻게 좀 손에 손잡고 그 괴물한테 맞서싸우도록 할 방법 없겠는가?" 이빅스는 그에 즉답했다. "있습니다. 부족들이 서로서로 다른 부족들에게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댈지언정, 두 부족 사이에 혼사가 생기면 언제 서로 으르렁댔냐는 듯이, 서로 형제가 되는 화해의 잔을 나누고, 그 이후로 동고동락하는 한 부족이 되지요. 다만, 서로 다른 부락의 선남선녀가 만나 첫눈에 반해 맺어지는 일이 드물 뿐이지."

이빅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물병을 비운 뒤, 어깨를 으쓱했다. "헌데, 소신의 고향의 부족-북방에서 가장 수가 적으나, 가장 강인한 전사들인 얼음어금니 부족-에 그 드문 경사가 일어났지 뭡니까. 지금은 얼음어금니 부족의 족장이 되어 있는 소신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내미가 서리왕관 부족의 족장의 딸 되는 아가씨에게 한 눈에 반해서, 혼사를 치르고자 한답니다. 부족원과 부족원끼리의 결혼만 해도 경사인데, 부족장의 자식들끼리 맺어지는 혼사는 모노리스를 세워도 되는 겹경사이지요. 헌데 문제는 서리왕관 부족이 바로 오그벨루스에게 미움을 사서 숲 속에 칩거하는 부족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벨로넨트는 잠깐 이빅스가 모노리스를 세워도 되는,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언젠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후대에 남길 만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기록한 거대한 비석을 세우는 풍습이 있다는, 이빅스가 해 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연달아서, 행군해 왔던 동안 항상 잊을 법하면 스코틀랜드의 말이 잔뜩 새겨진, 몇 미터쯤 될 법한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나씩 나타났던 것 또한 떠올렸다.

"그러니까 신부 쪽 부족이 숲 밖으로 나왔다간 오그벨루스에게 공격당하는 처지니까, 그 친구들도 신랑 부족까지 합세해서 그 오그벨루스를 죽여 없애고 싶다는 이야기구만 그래." 벨로넨트의 정리에, 이빅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적의 적은 일반적으로는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3. 임시 동맹, 그리고 만남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빅스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 곧 곤란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벨로넨트는 이빅스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면 항상 벨로넨트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이빅스를 타일러 보았다. "번번이 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말을 해봐, 영감님. 그럴 때마다 되게 답답한 거 알아? 영감님이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알아야 내가 좋다 싫다 하지..." 벨로넨트가 재촉하자, 그제서야 이빅스는 말을 터놓았다. "솔직히 얼음어금니 부족과 서리왕관 부족만으로는 오그벨루스를 토벌하는 데에 힘이 모자랍니다. 얼음어금니 부족들이 전부 자신의 키보다 큰 병장기를 다루는 것을 부족의 법도로 삼은 강인한 부족이라 한들 그 수가 적고, 서리왕관 부족들은 드래곤 로드의 정기를 타고나 얼음 마법을 부리는 데 능통한 자들이 많으나 얼음 마법으로 불러내는 송곳 따위는 오그벨루스의 두꺼운 지방질에 별다른 유효타를 가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신이 고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폐하에게 올리고자 마음먹은 참람한 부탁이온데, 오그벨루스를 토벌하는 데 폐하 휘하의 병단의 힘을 두 부족에게 빌려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벨로넨트는 충성스런 신하가, 자신의 고향을 위해 벨로넨트 휘하의 병력의 힘을 빌려달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고깝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빅스의 말대로라면 이 병단을 움직이려면 자신의 병단이 먼저 저 오그벨루스라는 괴물과 한 번 사생결단을 치러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어차피 사생결단을 낼 차라면, 오그벨루스를 퇴치하기로 뜻을 품은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이로 보나 모로 보나 나은 결정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지 않던가? - 그래도 동맹을 얻었다손 쳐도, 너무 빠르게 복수를 할 기회를 얻은 것에 휘하 선발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그 걱정은 곧 일단락되었는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틸러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성깔을 부렸던 것이다. "당장 조집시다, 전하! 더 듣고 말고 할 것이 뭐 있습니까? 그 놈 때문에 제가 밤잠 설쳐가며 키운 녀석들이 세 놈이나 낙오됐습니다. 아무리 사리분별을 못하는 짐승일지언정 위대한 제국의 병단을 몰라보고 패악질을 부린 부라퀴같은 놈은 당장에 골통을 박살내 줘야..." 궁병대장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턱 틀어막았다. 틸러는 평민 출신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자로, 악바리같은 성격과 험한 입버릇의 소유자인 이 궁병대장은 항상 말을 하다 보면 제풀에 흥분해서 거친 단어를 고르는 버릇이 있었고, 벨로넨트 황태자 앞에서 거친 말을 섞어가며 보고를 하다가 황제에게 혼쭐이 난 이후로는 아예 벨로넨트 앞에서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삼가고 있었다. 벨로넨트는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폐하는 여기에 계시지 않으니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틸러."

틸러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휘하의 궁병대를 돌아보았다. "오늘 낮에 우리 동료 셋을 데려간 그 미친 괴물을 같이 조지자는 친구들이 있단다! 누구 불만 있는 자식 있냐?" 그러자 궁병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당장 출발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습니다!" 보통 그만한 괴물에게 실컷 당하고 나면 웬만한 사람들은 겁을 먹을 텐데, 그들의 대장을 닮아, 그들도 만만찮은 악바리들인 것 같았다. "조만간 출발할 것 같으니, 주둥이들 다물고 출발할 때까지 궁둥짝 얌전히 붙이고 있어!" 어김없이 거친 단어를 써가며 부하들의 함성에 대답한 틸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빅스를 돌아다보며 깐죽거렸다. "우리 불꽃살 궁병대는 그 괴물을 조지지 못해 안달인 것 같은데. 영감님 보병대는 어떻수?" 틸러는 기회만 되면 이빅스에게 깐죽거렸고, 그 때마다 이빅스는 어김없이 성깔을 부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요 풋내나는 애숭이녀석이 깐죽대기는, 강철사자 선봉대! 언제까지 피난민같은 꼬락서니만 하고 있을 테냐!" 이빅스가 자신 휘하의 보병대에 고함을 치자, 직접 그 괴물과 실컷 부대끼며 그 괴물의 엄청난 용력에 기가 꺾여 있던 보병대원들 하나하나와, 소대장을 맡고 있는 열 명 남짓의 기사의 얼굴에 서려 있던 공포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강철사자 선봉대! 대원들의 복수를 위해! 지휘관 이빅스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붕대를 두르고, 병장기를 땅바닥에 뉘어둔 채로 각자의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봉대가 순식간에 병장기를 갖춰들고 사열 대형을 갖추어 일제히 고함치자, 이빅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동료 대원들의 복수를 할지 말지는 황태자 전하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쉬어!" 사열 대형을 갖춰섰던 병사들은, 다시 병장기를 내려놓고는 제각기의 자세를 갖췄다.

이빅스가 여봐라는 듯 틸러를 노려보자, 틸러는 한눈을 팔며 딴청을 피웠다. 그들의 경쟁심리는 항상 이쯤에서 마무리되곤 했다. 물론 과열경쟁은 항상 조직에서 가장 치명적인 요소인 내분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지만, 벨로넨트는 적정선의 경쟁심리는 휘하 병단의 사기를 돋구는 데 가장 좋은 동력원이라는 사실을 거의 신봉했고, 그래서 그는 항상 이런 적정선 내에서의 경쟁을 방치하거나, 은근히 조장했다.

"영감님이 오그벨루스에 대해 얻어온 정보와 평가가 사실이라면 스코틀랜드에서 불꽃살 궁병대와 강철사자 선봉대로 구성된 본 선발대의 원활한 활동을 약속받기 위해서는 그 괴물과의 결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바.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결단을 내는 것이 좋겠구나. 지금 와서 후속 본대에 연락을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틸러 궁병대장 역시 오그벨루스라는 괴물에게 분노를 품은 것 같고, 영감님 예하의 강철사자 선봉대 역시 그 괴물과 맞설 동기가 충분해 보이는군. 그렇다면 영감님이 말씀하신 부족의 구성원들과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들의 대표는 언제 만날 수 있겠나?"

이빅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음, 그것이, 애초부터 전하를 설득할 작정으로... 올 때 두 부족의 대표를 데려왔습니다만. 차라리 오그벨루스가 우리 부대마저 적대하게 된 이상 폐하에게 좀더 기탄없이 소개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저쪽 숲 속을- 자신이 헤치고 왔던 덤불 쪽을 돌아본 이빅스는 가볍게 손짓했다.

그의 말대로, 곧 수풀 너머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2미터가 넘어가는 거구에, 자기 키와 똑같은 투박스러운 대검을 들고 있는 자가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보기 좋게 빗어넘긴 금발과, 솜씨좋은 조각가가 바위를 투박스레 깎아 만든 듯한 야성미넘치는 이목구비와, 움푹 들어간 눈매 안에서 빛나는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아무리 봐도 벨로넨트와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드미트리." 라고 한 마디를 뱉었다.

다음 순간, 이빅스가 들입다 그의 머리에 꿀밤 한 대를 놓았다. 드미트리라는 말을 꺼낸 청년은 인상을 구기더니, 기묘한 말을 내뱉었다. "아-르 아 모트 다이그. 뮈트 나븐 얼 드미트리." 아까보다 격식을 차린 것이 분명했지만, 벨로넨트는 이쪽 말을 하나도 몰랐으므로 그가 격식을 차리건 말건 알 방도가 없었다. 이빅스가 "만나서 영광입니다. 내 이름은 드미트리입니다." 라고 통역을 해 줄 때까지는 말이다. 이빅스는 그가 아직 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런 벨로넨트의 눈에, 그제서야 드미트리의 뒤에 붙어서서는 고개만 빠끔 내밀고 있는 작은 소녀에 눈길이 닿았다. 키가 2미터가 넘어가는 드미트리와 대조적으로, 그 소녀는 겨우 14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인 것 같았다. ...벨로넨트의 머릿속에 이거 범죄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 왠지 가련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과 소담스러운 체격, 그 위에 드리워진 은발에 가까운 금발 사이로 내비치는- 북극의 청량한 하늘과 같은 맑은 하늘색의 눈동자를, 벨로넨트는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드미트리가 눈을 부릅뜨고 눈독들이지 말라는 듯 벨로넨트를 쏘아볼 때까지. 벨로넨트는 그 드미트리라는 자의 따가운 눈길에 지지 않고 맞서 눈싸움을 벌였다. 이 눈싸움은 결말이 나지 않고 끝났는데... 이빅스가 드미트리의 머리에 어떤 자비도 없는 꿀밤을 때려넣은 것이다. 벨로넨트는 아주 잠시 드미트리가 왜 뜬금없이 눈싸움을 걸었나 고민했고, 바로 다음 순간에 이 아가씨가 드미트리와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 아가씨라는 것을 눈치챘다. 불필요한 오해를 산 것 같았다.

불필요한 오해만큼 조직간의 동맹에 치명적인 건 없었기에, 벨로넨트는 일단 드미트리의 오해를 풀려 했지만, 이미 이빅스가 거친 말투로 빠르게 쏘아대며 드미트리를 몰아대고 있었다. 잔뜩 화난 어조로 보아 황태자한테 무슨 버르장머리냐고 성을 내는 것 같았다. 벨로넨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빅스의 뒤통수에 대고 쏘았다. "영감님, 그만!" 이빅스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는 벨로넨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하오나 전하..." 라고 말하며 벨로넨트와 드미트리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벨로넨트는 이빅스에게 인상을 써 보였고, 이빅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드미트리를 돌아보더니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드미트리는 풀이 죽기는커녕 자신이 왜 맞았는지도 감이 안 잡힌단 표정으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벨로넨트는 일단 그에게 "여보게..." 라고 말을 걸어보았으나, 드미트리가 하임어를 아직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썹을 꼬며 이빅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물소 가죽을 가공해 만든 것 같은 로브를 걸치고 있던,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붙은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 아이의 아비되는 사람입니다." 드미트리의 옆에 붙어선 소녀의 아버지를 자처하며 일어선 그는 꽤나 유창한 하임어와 함께 하임식 경례를 벨로넨트에게 올려보였다. 벨로넨트는 금세 이 사람이 서리왕관 부족의 족장이나 그에 준하는 직책쯤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앞뒤 정황으로 따져보자면 이 사람이 바로 저기, 드미트리의 뒤에 숨어있는 아가씨의 아버지일 테니까. 아니나다를까, 그는 이내 "서리부족 왕관의 족장이자, 저 아이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라고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벨로넨트는 그렇구료, 라고 고개를 끄덕이다, 별 의미 없이 말이나 터보자는 심산으로 당연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어찌 그리 하임어에 능통하시오?" 서리왕관 부족의 족장은 즉답했다. "언젠가 제국어에 능통한 마법사를 부족의 손님으로 모신 적이 있습니다. 연금술이라는 학문의 창시자로 유명한 것으로 압니다." 벨로넨트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그 이름을 알 것도 같았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드미트리 공에게 공의 아내될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사감도 없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해명해주실 수 있겠소이까?" 서리왕관의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드미트리에게 차분한 어조로- 그 기묘한 언어를 써서 뭐라 타일렀다. 드미트리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안한 표정이 돼서는 벨로넨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로넨트는 기꺼이 그 손을 붙잡고 악수했고, 드미트리는 만족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 보면 서리왕관의 족장의 이름은 어찌되오?" 벨로넨트는 서리왕관의 족장에게 질문을 던졌고, 서리왕관의 족장은 즉답했다. "족장은 부족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갖습니다. 저의 이름은 서리왕관. 저희 말로 읽으면 프로스든크룬." 드미트리가 옆에서 짓궂은 표정으로 "프룬." 이라고 끼어들었고, 이 말에는 프로스든크룬도 역정을 내고 말았다. 벨로넨트는 도저히 못말리겠다는 웃음을 짓고 있는 이빅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저렇게 성을 내는 거요?" "프룬이 자두라는 뜻이거든요. 프로스트크룬은 자신을 크룬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고, 저도 크룬이라고 부르곤 있지만, 드미트리 저 녀석은 장인어른이 아주 그냥 편하게 여겨지는지 노상 프룬, 프룬 하고 불러대서 매를 번다니까요." "유쾌한 사람이네요." 벨로넨트는 웃어보였다.


4. 작전 회의


다음날 아침, 목숨을 걸고 막사 장비를 회수해 온-이 과정에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 근처를 지나가던 오그벨루스가 다시 덤벼드는 통에, 다행히 사망자나 낙오자는 없었지만 부상자가 두엇 더 생겼다- 정찰병들 덕에 다시 숲속에나마 막사를 꾸리는 데 성공한 벨로넨트는 지휘관용 막사에 앉아, 드미트리와 이빅스, 틸러, 크룬을 이끌고 머리를 맞댔다.

"후발 보급대와 스코틀랜드 기지 보급대에 주의사항과 좌표는 전달했습니까?" "아무렴요." "-그렇다면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로군요. 얼음어금니 부족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사는 몇입니까?"

드미트리는 손가락 한 개를 펼쳐 보인 뒤 손을 접고는 다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보였다. "열다섯이군요. 그들의 강함은?" 이 질문에는 이빅스가 대답했다. "한 명 한 명이 검강을 뽑는 법을 터득한 초고수에서 달인들입니다. 드미트리 이 친구도 초고수라 칭할 만한 수준이구요." 이빅스는 저편에 놓인 자신의 160센티미터쯤 되는 대검을 고갯짓해 보였다. "모두가 저것보다 길고 큰 검이나 도끼, 혹은 창을 씁니다."

벨로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속도만 어떻게든 한다면 망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겠군요. 저 무지막지한 놈을 다룰 모루라면... 마냥 단단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그 역할을 할 만한 훌륭한 모룻감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얼음왕관 부족에서는?" 크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물세 명의 얼음 마법사를 투입할 수 있겟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얼음을 이용한 공격은 오그벨루스에게 큰 상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벨로넨트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해야만 합니다. 비단 얼음창을 날리는 것 말고, 눈보라를 몰아쳐 눈을 가리거나 눈바닥을 파내거나, 물을 얼릴 수 있지요?" "물론입니다만 그런 잡기로 어떻게 오그벨루스를..." 벨로넨트는 눈보라로 시야를 가리거나 허방다리를 파는 것이 그런 거대한 짐승을 상대로 굉장히 전략적으로 사용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 대해, 지혜로워 보이는 크룬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놀랍게 생각했다. 이 땅에는 전략전술 개념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혼자 생각한 벨로넨트는, 언젠가 전략전술에 대해 크룬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눠보고자 마음먹었다. 크룬이 전략에 대한 지식이 없었을지언정 지혜는 충만해 보였기에,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

"이 근처에 얼지 않고 흐르는 강이 있습니까?" "블루라 강이 있습니다. 바닷물이 섞여 흐르는데다 강이 넓고 깊은지라, 저희 서리왕관 부족이 물을 얼려 다리를 만들거나, 배를 띄우지 않으면 건널 수 없지요. 헌데 저희 부족이 이렇게 숲으로 몰리고 말았으니, 지금은 날씨가 좋을 때 배를 띄우는 것 말고는 블루라 강을 건널 방도가 없을 겁니다." 벨로넨트는 잠깐 고심하는 듯하더니, "희생이 따르겠지만 확실히 토벌할 수 있겠습니다." 라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5. 첫 번째 대화


말할 때는 자신있게 말했지만, 회의가 끝나고 중식을 배식하는 동안, 벨로넨트의 얼굴은 약간 비감한 빛을 띄었다. 포리지와 자몽, 육포를 배급받아가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복수에 대한 갈망 혹은 기대감, 동료를 빼앗긴 데에 대한 분노, 호승심 같은 것이 제각기 어려 있었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몇몇 동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데에 대한 슬픔이 공통적으로 엿보였던 것이다. 3분의 1쯤 되는 인명들이 여기저기 붕대를 감거나 부목을 대고 있는 통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괴물의 역량을 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격돌이었다지만, 벨로넨트는 잠깐 동안 그 매머드가 자신의 진영을 멋대로 휘젓게 내버려둔 것을 후회했다.

군대에서의 식사는 빈부귀천이 없었기에, 벨로넨트도 포리지와 자몽, 육포로 이루어진 식단을 들고 탁자에 앉으려고 했으나... 병사들의 얼굴을 보기가 꺼려졌기에, 그는 조금 떨어졌다. 숲 사이에 고즈넉한 바위 하나가 있었고, 벨로넨트는 그 위에 포리지 그릇을 내려놓고 자몽을 까먹기 시작했다. 그런 벨로넨트의 뒤로 거대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드미트리였다. "너 뭐하냐?" 어눌한 하임어가 튀어나왔다. 벨로넨트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돌아다보았다. "제국 말, 익히고 있습니까?" 그의 제국어 수준을 감안해 간단한 어휘와 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해 준 벨로넨트는, 곧 어눌하지만 시원스런 억양으로 울려나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빅스 아저씨가 배우라고 갈군다. 게으름피면 때린다. 억지로 배우는데 잘 하냐?" 말이 짧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정겹게 들리기도 하고, 말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거라고 벨로넨트는 짐작했다. "곧 있으면 능숙해지시겠는걸요." 능숙이란 말을 못 알아들은 드미트리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벨로넨트는 푸하하, 웃고 말았다. "곧 있으면 잘 하시겠는걸요." "그래 보이냐?"

드미트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정에 꽤나 솔직한 사람이구나. 벨로넨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드미트리는 배급받은 것으로 보이는 육포를 꺼내서 질겅질겅 씹었다. "너희 부대는 이런 거 맨날 먹냐?" 고기를 얻자마자 먹어치우기 일쑤인 바르바리아의 땅에서, 고기를 장기보존하기 위해 말리는 것이 드미트리의 눈엔 신기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귀한 고기를 이백 명씩 되는 군단에게 매 끼니마다 나눠준다는 것 또한 그의 눈에는 신기하게 다가설 테지. "그럼요." "이렇게 맛있는 걸 맨날 먹으면서 왜 그렇게 우거지상이냐?" 드미트리가 이리로 다가올 때, 벨로넨트가 우울해하고 있는 것이 드미트리의 눈에 포착된 듯했다.

"우리가 함께 무찌르기로 한 괴물, 기억나십니까?" "걷는빙하 말하는 거냐?" "네. 오그벨루스 말입니다." 그들의 말로 해 주자,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과 제가 이끄는 병사- 친구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벨로넨트는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보자마자 도망치는 건데, 그 괴물의 힘을 측정해 보겠다고 정면대결을..." "이백 명 중에 열 명밖에 안 죽은 거냐?" 벨로넨트의 말을 끊고 들어온 드미트리를 벨로넨트는 놀란 듯 바라봤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열 명씩이나 잃었습니다." "보통 그 놈에게 이백 명이 덤비면 백구십 명이 죽는 건 아냐?" 그렇게 말한 드미트리는, 벨로넨트가 대답할 틈도 없이 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죽은 열 명에 대해 슬퍼하는 것도 좋지. 하지만 살아남은 백구십 명에 감사하는 게 더 낫지 않냐?" 드미트리의 그 말에, 벨로넨트는 눈을 잠깐 치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벨로넨트는 드미트리가 말을 항상 의문형으로 끝맺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주저앉아 슬퍼하지 말고, 복수를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벨로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는 것 같다, 는 건 뭐냐?" 이빅스가 아직 「~하는 것 같다」라는 어휘를 가르치지 않았는지, 아니면 벨로넨트가 우유부단한 어휘를 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미트리의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뤄보아 전자인 게 분명했다. 벨로넨트 역시 드미트리의 말을 전자로 알아들었지만, 벨로넨트의 마음에는 후자의 뜻으로 다가왔다. 벨로넨트는 이내 말을 고쳤다. "드미트리의 말이 맞아요." "그러냐?"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며, 육포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벨로넨트의 육포를 매의 눈으로 노리고 있었다. 벨로넨트는 기꺼이 그의 몫의 육포를 드미트리에게 내어주었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다시 환해지더니, 이내 그 육포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벨로넨트에게 선언했다. "디마라고 불러도 된다. 들었냐?" 그는 자신의 애칭인 것 같은 이름을, 벨로넨트가 얼마든지 불러도 된다고 말하고는, 곧 자기 몫의 자몽을 까먹기 시작했다. 포리지는 이미 해치우고 온 것 같았다. 벨로넨트도 자기 몫의 포리지를 먹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짧은 양자대면은 드미트리가 벨로넨트의 육포를 먹어치우는 것을 목격한 이빅스가 황태자 전하의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을 갈취한 데에 대한 응징의 주먹을 휘두르는 통에 끝났다. 다만 그런 길지 않은 대화 동안에, 드미트리가 벨로넨트에게 해준 말은 벨로넨트의 마음의 짐을 약간 덜어주었고, 벨로넨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작전을 짤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손실 없이 처치하면 돼.'


6. 결전


벨로넨트의 2개 군단의 부상병이 상처를 치유하는 며칠 동안, 드미트리와 벨로넨트는 사이가 썩 가까워졌다. 항상 먼저 다가와 이야기를 거는 쪽은 드미트리였지만, 벨로넨트 역시 그의 말상대를 즐겼다. 벨로넨트는 그간 황태자라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에게 우정을 내세우며 다가오는 사람은 십중팔구 그를 해꼬지하려는 정적, 아니면 그를 이용해먹으려는 위선자였고, 그 때문에 순전한 호의를 가지고 그와 격식없이 자연스레 말상대를 해주는 드미트리가 퍽이나 신기하고 기꺼웠다. 이빅스 역시 드미트리가 벨로넨트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게 못마땅했을 뿐이지, 드미트리가 벨로넨트와 친해지는 것 자체는 반감이 없었다. 오히려 드미트리는 그 붙임성으로, 단어선택이 까탈스러운 틸러와도 쉽사리 친해진-그리고 틸러의 영향을 받아 입버릇이 좀 거칠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왔다. 서리왕관의 족장 크룬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오그벨루스도 쏙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큼지막한 크레바스를 블루라 강가에 파내는 신기를 부렸다. "허방다리를 파는 것이군요. 작은 짐승에게나 쓰던 얕은 수인데 오그벨루스가 걸리리라 보십니까?" 크룬은 그렇게 말했으나, 벨로넨트는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었다. "그 옹졸하고 성깔 잘 내는 힘만 센 짐승이라면 걸릴 겁니다. 눈보라로 감각을 흐려놓으면 더 쉽게 걸리겠지요." 벨로넨트는 그렇게 말했다. 간단한 수법이었다. 오그벨루스를 유인해서 진을 뺀 다음 망치와 모루의 형세로 구덩이에 집어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 "구덩이 안에 오그벨루스의 지방을 꿰뚫을 만한 얼음송곳을 서너 개 깔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날카롭고 단단해야 합니다." "간단하군요." 크룬은 자신이 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 옆에 있던, 은발에 가까운 금발-서리왕관 부족의 특징인 것 같았다-의 다른 마법사들에게 고갯짓해 보였고, 그들은 곧 구덩이 안에 세 개의 오그벨루스의 엄니만한 얼음송곳을 세웠다. 벨로넨트의 지휘 아래, 곧 그 구덩이는 오그벨루스의 무게 정도면 박살나 무너질 얼음 뚜껑이 덮였고, 약간의 눈보라로 완벽히 은폐되었다.

이빅스는 강철사자 선봉대에게 함정의 위치를 숙지시키고 있었다. "괴물의 무덤자리에 같이 딸려들어가 순장되는 멍청이가 없도록 해라!" 틸러 역시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또 등신짓해서 죽고 그래봐라. 그리고 내가 이걸로 다섯 번째 말하는데, 눈을 노리고. 알았어? 그 녀석의 화를 돋궈야 돼."

어느새 벨로넨트의 옆으로 다가온 드미트리는, 벨로넨트의 어깨를 반갑게 툭 쳤다. "깔끔하게 조져줄 준비 됐냐?" 그렇게 말하는 드미트리의 등 뒤로, 저마다 180cm 아래의 사람이 없는 거한 열네 명이 제각기 자기 키만한 병장기를 들고 제각기의 폼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는 안 오시는데 괜찮냐?" 부족들끼리 빈틈을 노려 싸우고 투닥대는 이 미친 동네의 습성을 벨로넨트는 잘 알았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의 최고강자인 그의 아버지가 부족을 지키고 있어야 할 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빅스의 지휘 아래 강철사자 선봉대가 방진을 앞세우고는, 몇몇 병사에게는 커다란 횃불까지 들려준 채로, 얼음어금니 부족의 전사 여덟 명까지 대동하고서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위풍당당하게 행군하기 시작했다. 강철사자 선봉대의 뒤를 따르는 불꽃살 궁병대의 가장 앞에 선 틸러는 오감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리고 틸러의 감각에 반갑잖은 징표가 잡혔다. 이 정도의 진동은...

"이빅스 영감! 옵니다!" "저기 저 지평선! 봤다!" 이빅스의 말대로 저쪽 지평선에서, 낯익은 하얗고 거대한 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빅스가 고함질렀다. "전 부대원- 개문방진!" 부대원들과 궁병대들이 열 명의 기사를 따라, 좌우대칭형의 어째 가운데가 성겨 보이는 특이한 방진으로 늘어섰다. 얼음어금니의 전사들은 이러한 택틱에 익숙하지 않을 법한데도, 어설프게나마 그들의 보조에 맞춰 좌우대칭으로 갈라섰다. 오그벨루스가 점점 이리로 다가옴에 따라, 궁병대원들이 거대한 매머드의 얼굴께에 화살세례를 퍼부었고... 성이 잔뜩 난 오그벨루스는 최대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오그벨루스의 거대한 몸뚱이가 방진에 쇄도하는 순간, 방진은 물살 갈라지듯 갈라지며 오그벨루스의 돌격을 그대로 통과해보냈다.

아니, 그냥 보내지도 않았다. 보병들의 칼날과 기사들과 전사들의 오러 담긴 검격이, 갈라진 방진 사이로 아무것도 짓밟지 못한 매머드의 발목에 검상들을 남겼던 것이다. 물론 보병들의 검이 남긴 상처는 곧 아물어 버렸고 더러는 다리에 검이 박힌 채로 검을 놓치는 통에 병장기를 잃는 일까지 있었는데다, 기사들의 검은 오그벨루스의 다리의 지방질을 찢어버리는 데에 그쳤지만, 얼음어금니 전사들의 장병기는 오그벨루스의 다리에 피가 흐를 만한 상처를 남길 수 있었고, 이빅스의 대검은 오그벨루스의 뒷다리에 유의미한 상처를 남겼다.

달려드는 매머드를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보내버리면서 상처까지 입혀주고 다시 유기적으로 합쳐지는 방진을 보며, 이빅스는 기뻐할 법도 하건만, 저 멀리서 멈춰선 매머드를 보며 그는 오히려 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엔 그냥 돌격하는 게 아니라 상아와 코를 휘두르면서 보병진에 달라붙어서 짓이기려고 들 거다! 명심해라!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지 말고 흘려내!" 방금과 같은 수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경고와 함께, 이빅스는 함정을 판 구역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저 성급한 녀석이 이리로 달려오느라 가속도를 붙일 수밖에 없도록 거리를 벌려! 빨리 물러서라!" 그에 맞춰 틸러도 앙칼지게 고함쳤다. "저 돼지놈이 달려오고 싶도록 빡치게 만들어! 눈을 노려, 눈을!"


7. 처형


이빅스와 틸러의 지휘 아래, 기사들과 전사들, 보병들, 궁병들은 오그벨루스가 돌격해오도록 도발하며 거리를 벌린 뒤 오그벨루스가 돌격해오면 유기적으로 흩어지며 손상을 입혔다가 한 자리에 모이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 동안 이빅스는 오그벨루스의 발목에 꽤나 큰 검상을 몇 차례 줄 수 있었고, 지방질이 찢어지다 못해 근육을 드러내기 시작한 부분을 집요하게 노린 기사들과 전사들도 오그벨루스에게 유의미한 손상을 줄 수 있었다. 틸러의 오러 화살이 요행히도 그 매머드의 한쪽 눈을 꿰어버린 덕에, 그 사나운 매머드는 애꾸까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매머드도 슬슬 이들의 수법을 알아챘고, 매머드는 돌격해오기보단 달라붙어서 상아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블루라 강가에 도달했을 때는 오그벨루스의 상아에 기사 하나와 얼음어금니 전사 하나, 보병 넷이 꿰여 죽어 있었고, 깔려죽은 보병도 일곱이 되었다. 궁병대도 다섯 명 정도 치여죽고 말았다. 나머지 보병들도 이 지속적으로 기동방향을 바꿔가면서 진법을 바꾸기를 여러 차례 하다 보니 진이 빠져가고 있었다. 벨로넨트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들이 유효범위 내로 들어오길 기다렸고, 유효범위에 들자마자 함성을 질렀다. "크룬-!!" 그 고함을 신호로 크룬이 손을 들었고, 순식간에 서리왕관 부족의 마법사들이 맹렬한 눈보라와 함께 지방질이 찢기고 근육이 드러난 오그벨루스의 다리에 냉동 마법을 퍼부었다.

벨로넨트의 지시대로, 크룬과 휘하 마법사들은 눈보라가 땅에서 2미터 정도 위에서 불도록 조절하는 기책을 선보였고, 덕분에 벨로넨트 휘하의 병력은 오그벨루스가 눈보라를 안면에 맞아 꼼짝못하는 동안 안전하게 함정이 준비된 위치 바로 앞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벨로넨트 휘하의 병력의 준비가 끝나자, 크룬의 얼음마법사들은 눈보라의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대신 땅에서까지 불게 만들었다. 눈보라 사이로, 저 멀리서 애꾸가 된 오그벨루스의 남은 한쪽 눈이 형형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벨로넨트 휘하의 병단들은 함정을 등진 채로 괴물이 이쪽으로 달려들기를 기다리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 괴물은 이내, 지방질이 뜯기고 얼어붙기까지 한 발목으로 필사의 돌진을 해왔다. "사납고 집요할지언정 지혜롭지는 않구나." 벨로넨트는 그 짐승의 상아에 꿰여 있는 시체들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발목이 얼어붙은 오그벨루스의 돌진은 느렸다... 그리고 그 질량은 어디 가지 않았고, 그래서 멈춰서기 더욱 쉬웠다. 오그벨루스가 함정의 코앞까지 달려오자, 방진은 여지없이 반으로 갈라졌으나, 오그벨루스는 함정의 바로 앞에 멈춰서서 다시금 상아를 휘두르며 깽판을 놓기 시작했다. 벨로넨트는 이것마저도 계산에 두고 있었다. "디마!!"

그와 함께, 대열에 남아 있던 일곱 명의 전사와, 함정의 반대편에서 또다시 나타난- 드미트리를 포함한 일곱 명의 거병을 든 전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오그벨루스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강철사자 선봉대도 순식간에 오그벨루스를 함정의 반대편에서 포위했다. 오그벨루스 역시 한쪽만 뚫려 있는 포위진에 뭔가를 느꼈는지, 보병진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려고 했지만, 방패를 딛고 뛰쳐오른 열네 명의 거한의 오러 실린 병장기가 안면을 연달아 강타하자 그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고... 그것이 오그벨루스를 얼음구덩이 안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얼음구덩이 안에 준비되어 있던 세 개의 송곳 중 하나는 오그벨루스의 무게에 부러지고 말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오그벨루스의 살을 깊게 파고 들어갔다. "걸렸다! 크룬!" 벨로넨트는 이때다 싶어 고함을 질렀고, 서리왕관의 족장은 손짓 한 번으로 칼바람을 일으켜, 블루라 강과 오그벨루스가 빠진 함정 사이에 물길을 내어 오그벨루스의 욕조에 찬물을 쏟아넣기 시작했다. 오그벨루스는 함정을 허물고 빠져나오려고 버둥댔으나, 서리왕관 부족들은 일제히 눈보라를 거두고는 오그벨루스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물에 냉동마법을 걸었고, 오그벨루스는 함정에 서서히 차오르는 족족 얼어붙어 버리는 물에 여지없이 갇히고 말았다.

오그벨루스를 함정에 몰아넣은 채로 얼려버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오그벨루스는 머리만 내놓은 채로 버둥거리고 있었고, 함정에 가득찬 얼음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대검을 들고 다가오더니, 대검에 오러를 두르고는 그대로 오그벨루스의 정수리를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오그벨루스는 단말마를 지르더니, 곧 잠잠해졌다.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말로 서리왕관에게 말을 걸었다. "프룬, 이 검을 뽑을 권리는 당신에게도 있는 것 같은데요?" "프룬이라 부르지 말랬지. 그리고 이 노쇠한 늙은이가 이 대검을 어떻게 뽑겠느냐? 뽑은 셈 치고, 우리를 기꺼이 도와준 왕자님께 뽑게 하거라. 너희는 동료 하나를 잃었으니 숨통을 끊는 권리를 누렸고, 우리 부족은 기진맥진했을 뿐이지만, 왕자님은 소중한 동료를 여럿 잃었잖느냐?" 드미트리는 그 말이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는 곧 이빅스를 불렀다.

드미트리의 말을 전해들은 이빅스는 벨로넨트 황태자에게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원수나 짐승을 죽일 때, 숨통을 끊는 것과 그 숨통을 끊은 무기를 몸에서 뽑는 것을 크나큰 권리로 여긴다는 것, 그리고 그 둘 중에서도 무기를 거둬내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벨로넨트 역시 언젠가 이빅스가 해 준 이야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납니다." "드미트리와 크룬은 전하야말로 저 괴물의 정수리에서 대검을 거둬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까." 이런 문화를 처음 접해보는 벨로넨트는 이런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저, 이 괴물을 토벌하는 데에 여러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자신들은 대단한 권리로 여기는 그 행위를 자신에게 부러 양보해 주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 호의를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혼자 뽑기엔 버겁습니다. 이빅스 경, 도와주시겠습니까. 틸러 경도 이리 오게."

벨로넨트의 말에, 이빅스와 틸러는 군말없이 그를 따랐다. 얼음에 몸이 파묻힌 채로, 정수리와 코만이 얼음 밖으로 나와 있는 오그벨루스의 시체. 그리고 얼음 아래 파묻힌 상아에 꿰뚫려 있는 채로, 같이 얼음에 파묻힌 여섯 명의 시체. 벨로넨트는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이빅스는 벨로넨트에게 나직이 덧붙였다. "맥시스 경은 후련히 잠들었을 겁니다." 벨로넨트는 우울한 표정으로 괴물의 정수리에 박혀 있는 드미트리의 대검을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드미트리가 벨로넨트에게 하임어로 소리쳤다.

"당당해라!!" 항상 말버릇처럼 붙이던 의문형 어미도 포기한 채였다. "내 검을 뽑으려면 당당해라!!" 벨로넨트는 드미트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놈이 또 건방지게, 라면서 달려가려는 이빅스를, 벨로넨트는 한 마디로 멈춰세웠다. "이리 오세요." 벨로넨트는 우울해졌던 표정을 다잡았다. "그의 말이 맞아요." 이빅스는 잠깐 드미트리와 벨로넨트를 번갈아 보다가, 드미트리에게 두고 보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걸로 만족하곤 벨로넨트에게 되돌아왔다. 벨로넨트는 드미트리의 대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 아래로 이빅스의 손이 드미트리의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고, 그 아래로 틸러의 손이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벨로넨트는 카운터를 세었다. "셋, 둘, 하나."

죽은 괴물의 이마에서 대검이 뽑혀나오는 순간, 얼음어금니 부족의 열네 명의 전사는, 우렁찬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그 기세에- 덩달아 서리왕관 부족 마법사들도, 벨로넨트의 휘하의 병력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이 괴물에 함께 맞서 싸웠고, 함께 협동하여, 함께 승리한 것을 실감한 것이다. 벨로넨트는 이빅스의 도움을 받아, 대검의 칼끝을 땅에 짚었다. 드미트리가 다가왔고, 벨로넨트는 드미트리에게 검의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다시금 박수가 터져나왔다.


8. 축제


그날 저녁에, 제국의 수송병단이 보급품을 싣고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냉동마법이 풀린 오그벨루스의 얼음무덤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수송병단은 도착한 김에 얼음어금니 전사들과 함을 합쳐 오그벨루스의 시체를 얼음무덤에서 꺼냈다. 오그벨루스의 상아에 꿰인 여섯 명의 시체와, 오그벨루스에 치여 죽은 열두 명의 시체가 급히 꾸린 제단에 놓였다. 벨로넨트는 사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애석해했다. 상아에 꿰였던 얼음어금니 부족의 전사는, 다른 열네 명의 전사들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데려갔다. 궁병대 다섯, 보병대 열하나, 기사 하나. 벨로넨트는 자신이 손수 그 전사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손수 추도사를 읊어주었다. 그의 휘하의 병력들은 벨로넨트의 추도사와 함께, 저마다 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추도사가 끝났다. 추도사를 읊는 동안, 그들이 늘어서 누운 제단 앞에 뽑혀져 뉘어져 있던 그의 검은, 추도사를 마치자 벨로넨트의 손에 쥐여 그의 칼집으로 돌아갔다. 칼과 칼집이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순간, 벨로넨트는 딱 한 마디를 했다. "마시거라." 그 말과 함께, 보병대는 일제히 잔을 비웠다.

동료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그리고 기리기 위해. 그리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수송병단이 전해준 보급품으로, 그날 밤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얼음어금니 부족의 전사들과, 불꽃살 궁병대, 강철사자 선봉대, 서리왕관 마법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즐겼다. 벨로넨트는 잠깐 그들을 보고는, 다시금- 제단 저 너머, 오그벨루스가 빠져 있던 죽음의 욕조로 발을 옮겼다.

계획을 짤 때는 이 괴물을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려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남은 죽음의 욕조는 몰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환한 달빛 아래, 선명한 핏빛이 어린 반투명한 물 사이로, 아직도 피가 얼어붙어 있는 두 갈래의 얼음송곳이 섬뜩했다. 벨로넨트는 잔을 비웠다. 그러던 벨로넨트는, 문득 손가락 열 개를 펼치더니,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벨로넨트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는 순간... "뭐하냐." -역시나, 항상 이 타이밍에 튀어나온다니까.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는 가득찬 잔 세 개를 한 손에 전부 꿰어들고는 다른 손에는 고기며 말린 과일이 잔뜩 얹혀있는 쟁반을 들고 있는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명상." 벨로넨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쓰잘데기없는 거 말이냐." 드미트리는 명상에 대해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거 관두고 술이나 한잔 더 하는 건 어때."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며, 벨로넨트에게 잔 하나를 내밀었다. 벨로넨트는 "좋지." 라고 말하면서 잔을 받아들었다. 그들은 벌써 서로 말을 꽤나 짤막하게 할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뭘 그리 우거지상을 짓고 있어. 이겼잖냐." 드미트리가 그렇게 말하자, 벨로넨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열여덟 명이나 죽었어, 디마." 드미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벨로넨트를 노려보았다. "열여덟 명밖에 죽지 않았다고 말을 바꿀 생각은 하지 마." 벨로넨트가 먼저 쐐기를 박자,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들 죽은 게 그렇게 애석하냐." 벨로넨트는 빤히 그를 돌아다보았다. "...내 병사들이고... 내 사람들이고... 내 백성들이야. 모두가 좋은 사람이었어."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뭔가 이룩하려면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 알잖냐. 왜 그러냐 애도 아니고." 그럼에도 벨로넨트의 울적한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이룩이란 단어에 희생이란 단어까지 막 쓰고. 하임어 많이 늘었네." "그러냐."

벨로넨트가 너스레를 떨자, 드미트리는 잔을 죽 들이키곤 벨로넨트의 까만 눈을 마주보았다. 그는 또다시 잠깐 의문형 어미를 관뒀다. "...그 사람들 죽음은 슬퍼해도 된다. 그 사람들이 더는 없다는 걸 슬퍼하는 것도 좋지만... 하지만, 그 사람들과 함께했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한 마디에, 벨로넨트의 눈이 잠깐 커졌다. 다시 눈을 원래대로 되돌린 벨로넨트의 표정은 숙연했다. 하지만, 그 숙연함 속에는, 드미트리의 충고에 힘입은- 새로운 깨달음과 결의가 어려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너를 위해 만들어나갔고... 너를 위해 목숨을 유지하길 포기했으니까. 그들의 삶을 포석으로, 그들이 닦아놓은 길을 계속 닦아나가면 되는 거다."

벨로넨트의 귓전에, 언젠가 이빅스가 해 주었던 이야기들 중 하나가 떠올랐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말과 생명을 유지한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쓰지 않습니다. 그들의 살아간다는 말은, 생명을 바탕삼아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만들어온 신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것도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보죠." 벨로넨트는 나직이 드미트리에게 대답해 주었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했어." 드미트리는 웃으면서 그의 등짝을 툭 쳐 주었다. "그러냐."


9. 잠깐 다른 이야기


황제는 집무실의 옥좌에 앉은 채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왜 스코틀랜드에 기지만 세워 놓고 유지하는 것입니까. 식민지로 삼자니 너무 척박하고. 기후는 가혹하고, 사람들의 성정은 난폭한데." 황제의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황제의 책사 옆에서, 그를 따라온 비서가-이 사람은 책사의 비서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황제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만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질문을 던졌다. 책사는 곧 대답을 내놓았다. "인적 자원 때문이지. 차갑고 불친절한 스코틀랜드의 땅에서 살아남았단 것만으로, 강인한 전사라는 것을 인정받은 셈이니 말이다. 간혹 그들 중에서는 특별한 소질과 숙명을 물려받은 하이랜더들도 한둘씩 태어나고 말이다.현재 제국의 가장 강인한 명검들 중 하나인 이빅스 아시라트 경도 현 폐하께서 황태자이시던 시절 손수 스코틀랜드에 가서 데려오지 않았느냐."


10. 오그벨루스의 최후 이후


- 흉포한 매머드 오그벨루스가 죽은 못자리 가에는, 거대한 오벨리스크 하나가 세워졌다. 그 오벨리스크에는 오그벨루스의 해악과, 그를 퇴치하기 위해 떨쳐일어선 두 부족과 한 외지 부대의 이야기와, 그들의 무용,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새겨졌다. 몇 년쯤 뒤, 벨로넨트가 맡은 바 스코틀랜드의 기지에서 황태자로서의 수행할 임무와 시찰을 모두 마치고, 조금씩 더 성장한 대원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귀환할 때, 그 행렬에는 흰색 매머드 가죽을 뒤집어쓰고 대검을 짊어진 거한 하나가 작은 여인 하나와 회색 머리칼의 작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따라붙어 있었다.


11. A. E. 1


수십 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갔다.

"부인은 잘 보내드렸나, 디마?" 중장년이 된 벨로넨트는, 역시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패이기 시작한 드미트리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불과 몇 달 전에, 잠깐 귀향했던 드미트리가 아내를 떠나보냈다는 편지를 보낸 이후로 처음의 맞대면이었다.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성미는 네가 잘 알잖느냐." 드미트리는 떠나간 사람에 대해 떠나간 것에 유감을 갖기보단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다는 데에 감사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걸, 벨로넨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게 마련 아니냐." "오는 사람?" "손자를 봤다. 글쎄 오는 길에 잠깐 들렀는데 에스트라공 녀석이 아들이라며 보여주지 뭐냐." "이거 그런 경사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 손자 이름이라도 들어두고 싶은데." "에드문드라던데. 피부가 제 어미를 닮아서 가무잡잡한 색이더라, 내가 얼마나 식겁했겠냐." "이런, 애석하게도 모친 쪽을 더 닮은 모양이지?" "그건 아닌지 이목구비는 영판 나랑 에스트라공을 빼다박았더라. 헌데 넌 자식농사 언제 지을 거냐?" "형편 되면 짓지." "아서라 이놈아. 보수 왕당파들이 적통 적통 노래 불러대고 있는데. 내가 제국으로 떠나올 때 벌써 아들 하나 있었던 건 기억 안 나냐?"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여하간 손자놈이 여섯 살이 되면 걔 데리고 내 고향의 하이랜더 신전으로 여행 떠날란다. 여행 갔다올 때까지 아들 하나는 봐 둬라. 알았냐?" "세상에 황제한테 명령조로 아들 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있을까." "한 사람 더 있는데 태어나질 않았지. 누군지 알겠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들이로구만? 말장난 치는 솜씨도 점점 늘어가네." 그렇게 서로 안부를 주고받던 벨로넨트는, 운을 슬쩍 떼었다. "근데 디마 너 정말 작위 같은 거 받을 생각 없냐?" "인마, 말만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진다. 내가 그 잘난 옐의 귀족생활 같은 거 하면 내 손발이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드미트리는 그렇게 틱틱대며, 구석에 던져놓은- 검신만 작히 2미터는 될 것 같은 갸름한 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한테 받은 거면 저걸로 족하다. 그냥 이렇게 궁성 뒷구녕으로 드나들면서 친구랑 기탄없이 안부나 나누고 부탁이나 주고받고 썰썰대며 댕길란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작위인지 뭔지 달라붙으면 너 한번 만나자는 데 그 머리 복잡한 절차를 여러 개 밟아야 할 거 아니냐. 지금은 그냥 궁성 담 몇 번 타면 금방이잖냐." "그렇다고 쳐도 친구 만나겠답시고 제국 황제의 궁성에 들락날락거리는 게... 식구들에겐 뭐라고 하고 제국에 왔냐?" "밥 주고 등 따숩게 해 주니 따라왔다고 하고 왔지. 정 줄 거면 그냥 성씨나 아무거나 던져줘 봐라. 훗날에 그 에드문드가 그 에드문드인지 정도는 알아봐야잖겠냐." "아마운드. 너희 식으로 읽으면 아문두르. -펜슬럿 식으로 읽어도 아문두르가 되지. 뭐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 손자의 행보 덕에,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이니 지금은 함구하도록 하자.


12. A. E. 2


그로부터 십 년쯤이 흘렀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벨로넨트는, 곤히 잠든 아기를 꼭 끌어안고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으이그, 하는 표정으로 벨로넨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영부영 살다가 그 모양 될 거라고 내가 그랬냐, 안 그랬냐?" 벨로넨트를 바라보는 그의 목소리엔 역정이 어려 있었다. "너 죽을 수에 몰린 건 아냐?" 벨로넨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다보았다. "전설로 남은 열여덟 번째 백년기의 마지막 하이랜더께서 걱정도 팔자다. 함께했던 추억에 감사하라며?" 드미트리는 인상을 팩 구겼다. "말은 쉽게쉽게 나온다. 그렇다고 그런 외통수로 덤벼들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냐?" "크로아를 확실히 내 아들의 편으로 굳혀두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이빅스 아저씨가 그러더라. 스코틀랜드 사람은 삶을 생명을 부지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기반으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개념으로 살아간다고. 그리고 드미트리 네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아? 나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만들어둔 길 위를... 그 사람들의 몫만큼 걸어가면 되는 거라고. 내 아들을 위해 내가 닦아놓은 길을... 내 아들이 내 몫만큼 걸어가주길 빌어야겠지." "너 아들더러 되게 혹독한 길을 걸어가라고 강요하고 있는 건 아냐?" "그러는 너는 네 손자한테 열아홉 번째 백년기의 첫번째 하이랜더의 길을 강요하고 있잖아? 나한테 잔소리할 처지 못 될 텐데?" "덤으로다가 네 아들놈 걸어가는 길의 가까이에서 걷도록 일러놓기까지 했다. 요 악당아. 그 녀석이 이번에 제국 장교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아냐?" "왜, 특혜라도 좀 줄까?" "노친네 노망은. 그러니까 자식농사 좀 진작진작에 지어놓으라고 꺼낸 얘기다. 그놈이 제 힘으로 출세 못할 것 같냐?"


13. 하이랜더


하이랜더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스코틀랜드-곧 바르바리아-에 태어나고 살아온 모든 극지방의 생존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저 옛날, 이 극지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백병의 패왕 오레이가의 핏줄들로, 이 하이랜더라는 말은 넓은 범위에서 보면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란 자들 모두에게 붙을 만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 소질이 무골에 치우쳐, 패왕 오레이가의 무골을 그 핏줄로 하여금 이어받은 이들이 있는데, 이들 전사의 용맹은 베델리엄의 그 어떤 병사들에 대어봐도 그보다 나은 자들이 없으며, 출중한 무위로 숱한 무용담을 남겼기에, 하이랜더라는 말은 이들 전사를 가리키는 말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 "전사로서의 하이랜더" 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은 씨족 위주의 사회가 주가 되는 바르바리아의 사회 환경상, 이 하이랜더들은 하나의 통일된 단체나 팩션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저 씨족 내에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들 중 오레이가의 무골을 이어받은 아이를, 선대의 하이랜더가 찾아내어 데려가는 식이다. 어떻게 하이랜더들이 하이랜더들을 알아보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떠한 느낌이 있다는 듯. 이렇게 하이랜더들이 추려간 다음 대의 하이랜더들 역시 선대에 못지않은 활약상과 무위를 떨치기에, 하이랜더의 명성은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앞서 말했듯, 하이랜더들에게는 어떤 단체에 가입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으나, 하이랜더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지켜야 할 세 가지의 규율이 있다.

가장 먼저 첫 번째 규율로는, 하이랜더의 힘을 이어받은 아이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냉혹한 지방인 "북녘의 뜨락" 에 있는, 거센 눈보라에도 조금도 파묻히지 않는- 하이랜더들의 신비한 영전인 「스물두 번째 오레이가의 영묘」를 찾아가야 한다. 오레이가의 영묘에서, 백병의 패왕 오레이가 이래로 그의 피를 이어받은 숭고한 전사들이 함께 매장된 거대한 돌무덤을 참배하여, 오레이가의 석상 앞에 놓인 비석에 그 손을 올려야 한다. 이 의식은 하이랜더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영혼을 그 선조의 영혼들과 링크시키는 의식으로, 허공의 흐름 속에 남은- 선조들이 살아간 발자취를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게 하여, 선조 대부터 내려오는 하이랜더들이 그 삶을 통해 관철했던 신념과 숙명, 그들의 무위를 느낄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 아이가 장성하여 하이랜더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관철한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 행해온 무위를 그 링크 속에 남겨 후대의 하이랜더에게 느낌으로 남겨 물려줄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 규율은 바로 위의 오레이가의 영묘에 관련된 것인데, 이 오레이가의 영묘는 항상 백년기가 바뀌면서 교체되어 왔다. 오레이가의 영묘에 선대 하이랜더들의 시신이 안장되어 영묘의 빈 자리가 줄어들수록 태어나는 하이랜더의 빈도도 점점 줄어드는데, 나중에 영묘의 자리가 가득차게 되면 절로 단 한 명의 하이랜더만이 남게 된다. -현재 생존해 있는 하이랜더는 드미트리뿐이며, 영묘에는 한 자리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 마지막 하이랜더는 다음 번의 영묘를 새로이 건립할 의무를 가진다. 모든 시신이 안장된 영묘에서 오레이가의 석상 앞의 비석만을 들고 나오면, 그 동안 눈에 파묻히긴커녕 눈이 쌓이지도 않던 영묘는 거짓말처럼 눈보라 아래로 사라지게 되고, 그 비석만을 보존한 채로 딱 100명의 시신이 들어갈 규모의 영묘를 새로이 건축하여 비석을 비치하면, 마지막 하이랜더의 후손들이 새로이 선대들의 지식을 이어받으면서 무덤을 채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규율은 규율이라 하기보단 천성적으로 물려받는 삶의 태도라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 같은데, 하이랜더들은 항상 스코틀랜드, 아니 온 베델리엄을 떠돌며 저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관철할 숙명을 찾아 헤맨다. "어떤 나라를 지킨다"와 같은, "무언가를 어떻게 지속한다"라는 식의 명확한 결말이 없는 숙명도 가능하나, 이런 결말이 없는 숙명은 본인이 행할 수는 있지만 후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그 반면, "누군가의 원수를 갚는다"와 같은, "무언가를 어떻게 이룩한다"라는 식으로, 명확한 끝을 맺을 수 있는 숙명을 품게 된다면, 그 숙명을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다. 이 숙명은 하이랜더 개개인마다 굉장히 다양하다.

하이랜더로서 살아가는 규율과 삶의 태도가 저렇다면, 이제 하이랜더들의 특징적인 무위를 파고들어 보자, 앞서 규율 부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규율에서 시행한 오레이가의 영묘의 참배 이후, 선조들의 영혼과 링크된 하이랜더의 영혼은 선조들이 남긴 삶의 태도나 신념 등등과 함께 그들의 무위를 링크를 통해 물려받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링크는 평상시에는 굉장히 흐릿하나, 하이랜더가 어떠한 각성이나 자각의 계기를 접하면 순간적으로 그 링크가 강력해져 선조가 남긴 무위와 무예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다. 알테인이 에드문드에게 하이 스코트 대검술을 가르쳐줄 때, 에드문드의 소울 링크의 연결을 강화시켜 그 무위를 에드문드에게 전해 주었다. 알렉스 역시 같은 방법으로 하이랜더 오러소드를 에드문드에게 전해준 것. 하이랜더들은 그 개개인이 살아간 독특한 삶만큼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병장기도 굉장히 다양했기에, 만약 대검을 쓴다 하면 선조들 중 대검을 사용했던 선조들의 영혼과 링크되어 그들의 무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이랜더의 핏줄로서 오레이가에게서 물려받은 그 무골의 정체이자, 그들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천성은, 굴하지 않는 근기이다. 절대 불가능한 열세 앞에서도, 그 생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태에서도, 몸이 뜯어지고 끊어진 상황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자신이 뜻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병장기를 휘두르는 악착같은 근기와 근성이 바로 하이랜더의 핏줄이 드러내는 가장 돋보이는 삶의 자세다. 이 굽힘없는 끈기가 있기에, 이미 죽은 선조들의 링크에 후예 하이랜더가 힘입을 수 있는 것이자, 그들이 끊임없이 단련하고 정진하여 높은 무위를 이룩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