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R,AIRSS

레오 블레인 그레이울프

last modified: 2015-04-27 02:56:49 Contributors



1. 시트



1.1. 외모



1.2. 성격



1.3. 기타 사항



2. 과거사


<첫번째, 살인.>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언제, 누구에게서?
소년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몽롱한 듯 희번득한 눈동자. 미지의 광기로 물든 그것은 이미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회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소년은 그 추악함에 칼을 잡았습니다.

"처리해라."
소년의 등 뒤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명했습니다. 처리?
소년은 그 말을 '처단'으로 정정하며 머리속으로 되뇌겼습니다.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와닿는, 둔탁한 칼자루의 감촉이 소년을 전율시켰습니다.

주위의 시선들이 수많은 눈동자를 굴리고 혀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마녀가 네 어미냐?"
라고, 누군가가 그렇게 물은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철로 만들어진 둔탁한 흉기를 들어올렸습니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노란 눈과 일순간 마주친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그레이울프님?"
-정신나간 마녀의 마지막 말은 유언이 되어 서늘한 쇳덩어리에 잘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앞으로 굴러왔습니다.
이미 생기를 잃은 눈동자. 그것을 본 소년은 이제 그 누군가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조용히 침묵하며 애도하듯 눈을 감는 노란 눈동자.
이것이 바로 소년의 첫 살인이자 악에 대한 선의 응징이었습니다.

<어느날의 수다>
"얘, 그거 들었니? 어떤 여자가 그레이울프님에게 다른 아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대."
"어머머, 정말? 그레이울프님, 그런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신데... 혹시 천한 것이 콩고물이나 주워먹겠다고 억지 부리는 거 아냐?"
"글쎄, 그런다면 좋겠지만 그 아이 말이야, 왠지 그레이울프님과 닮은 구석이 있어서.."
"으엑, 기분 나빠. 그래서? 마님은 좀 어떠셔?"
"난리도 아냐. 근본도 모르는 여자를 집에 들이는 꼴, 두 눈뜨고 못보겠다고 하시면서-.. 간신히 칼을 뺏어서 망정이지.."
"그래도 그 정도면 양호하시네. 주인님은?"
"글쎄, 아직 아무 말도 없으시니까... 하지만 나도 마님 생각엔 동의해. 그런 작자들이 이곳에 온다니, 소름끼치는 걸."

<뒤늦은 환영>
머리가 아파왔다.
어째서?-라고 묻기에는 조금 기묘한 일. 손에 아직도 느껴지는 생생한 감촉이, 실상 가축을 도륙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알려오고 있음에 아마도 그의 머리는 반응하고 있는 것이리라.

왜?

레오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박동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순간 생각도 멈췄다. 마지막, 마주쳤던 눈동자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방금 친모의 머리를 내리친 사람이라고, 눈을 마주치고 그 마지막을 잠시 응시한 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과 분위기.
레오는 그 모든 것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채 낯선 기척에조용히 호박색의 눈을 떴다.

"일그러졌어. 딱 맞게.."
언제부터 있었던지 레오의 앞에서 미친듯이 중얼거리는 에리카 그레이울프의 모습. 그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미쳤어! 미쳤어! 미쳐버렸어!! "

꺄하하하하하하하!!!!

하고, 하이톤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레오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전율했다.
갑작스럽게 들어올려진 누이의 옅은 하늘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그 어떤 불길함과 진실.
반쯤 미쳐버린 광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여섯이네? 여섯이지?! 일그러진 건 여섯이지!?!"

에리카는 한발짝 물러나 빙그르르, 한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취해지는 우아한 제스처.
광기로 번들거리는 하늘색 눈동자와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이 그녀의 행동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환영해, 레오 블레인 그레이울프!! 사랑스런 나의 동생이여!"

<첫만남, 멸시.>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보는 어설픈 친모의 미소아래 외로운 고성에 입성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도 무언가를 얘기하지 않았고 소년은 마치 야윈 돼지를 보는 듯한 사방의 시선들 사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미소라도 지어보였던 건, 그나마라도 버려지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

하지만 제 아무리 의지의 초연함으로 무장한 자인들 극심한 추위 속의 마찰을 이겨 낼 수는 없는 법이었고 소년은 화끈거리는 볼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돌아간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에리카 그레이울프.
본디 그레이울프가의 영지 아래에서 지내왔던 소년은 그 소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영혼과 광기에 굶주린 늑대..

"누나? 주제에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지?"

역겨워.
에리카는 목을 덮은 털 모피를 끌어올리며 소년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인한 웃음소리. 그것은 그녀와 그의 거리를 명백하게 나타내는 무언가였다.

"이런 쓸모없는 강아지는 왜 진작에 죽이지 않는거야?"
이해불가라는 듯한 말투로 다시 까르르, 웃어버린 에리카는 그대로 소년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제간의 우애>
그레이울프가의 보잘것없던 삼남이 스와인(녹지않는 대륙의 주민. 보통 북방의 야만인들이라 불린다.)들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고 스노우가의 공주와 약혼을 맺은지도 어언 한달이 지날 무렵, 잠시 수도에 머무르던 당사자가 늑대의 검은 성에 돌아왔다.
누구하나 반기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친숙하고 그리운 침묵의 공간. 넓은, 검은빛 대리석 복도 위로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자의 발자취가 잠시 새겨졌다가 과거로 스러졌다.

"...난 다 알아."
비밀스런 웃음기를 입은 친숙한 목소리에 한결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던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곧 정지했다.

"..센틴 형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소년일 적부터 지어오던 익숙한 미소. 그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초췌한 안색의 사내를 바라보는 그레이울프가의 삼남, 레오 B 그레이울프의 호박색눈동자엔 그 어떤 반가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그레이울프가의 장남 센틴 그레이울프는 마치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음산한 여운을 남길 따름이었다.
"공주와의 혼담 말이야, 그 귀찮기 그지없는 벙어리를 어떻게 꼬신 건진 모르겠지만- 역시 그거지? 넌 공주가 아닌 패이스를 보고 있는거지.."
페이스. 자연스럽지만 다소 인공적으로 어른거리던 미소가 레오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형님도 참 대단하시군요.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이 된다 생각합니까?"
글쎄-하는 능청스런 여운을 남긴 센틴은 미친듯이 키득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맙소사, 레오. 친애하는 잡종 동생 녀석. 페이스는 너가 죽였다고. 너가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 방에서-"

그 방에서?-말은 날카로운 쇳소리에 막혀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센틴은 목에 느껴지느 서늘한 감촉에 다시 한번 웃었고 레오는 차분히 그 광경을 가라앉은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행동적이네. 폭력적이고."
"형님같은 새끼한테는 이래야 효과가 있다는 걸 잘 알거든."
또 그딴 소리를 지껄인다면 죽여버리겠어, 식의 말을 남긴 레오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적막이 감도는 여운의 그림자 속에 홀로 남겨진 자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슬며시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건방진 새끼.."라는, 살의에 찬 목소리가.

<정보상의 은밀한 이야기>
뭐? 그레이울프가의 정보? 이런이런, 그건 왜 알고 싶어하는거지? ...응? 크크큭..돈을 받았으면 아무 말 없이 알려주기만 하라니..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그 눈빛, 좋아. 아주 좋아! 그래, 하지만 그 기세로 더 협상을 해야겠는데.. 아아, 그레이울프가, 아니 5대 가문에 대한 정보는 알다시피.. 조금 레어해서 말이야.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고? 자네도 익히 들은 바가 있지 않나? 그곳에 한번 들어간 정보원은 둘이 되어 나온다는 이야기말이야! 머리 하나, 몸 하나 말이지!!하하하하하!
아아, 그래. 좋아. 아~주 좋아! 말이 통하는 사람이로군! 이 정도라면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래, 그레이울프가의 뭐가 알고 싶다고? 모든 것? 그런 건 너무 포괄적이라 곤란한데... 흠, 그래. 가족 관계정도로 한정하지. 이 정도면 대단한 거라고? 좋은 정보상을 만났다는 걸 감사해해야 할거야..크큭...
현재는 가주인 바리안 그레이울프와 페리스, 레오, 에리카 그레이울프가 있는데 페리스의 경우에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학자가 되어서 실상 그레이울프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고...응? 왜 '현재'냐니, 재밌는 질문이군. 그야 당연히 원래는 가주와 부인, 그리고 센틴,겔런, 페리스, 페이스, 레오, 에리카등등의 어린늑대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뭐, 지금은... 그래, 살아남은 건 넷뿐이야!하하하!! 페이스와 센틴, 겔런은 사고사했고.. 부인은 실종으로 인한 사망처리랬던가? 뭐.. 그런가 보더군.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는 누가 알겠어? 안그래? 크크크크...

<배움의 시작, 첫 도약>
그 날은 조금 이상한 날이었다. 페리스 그레이울프가 평소와 달리 연습장에 나가지 않고 그저 멍하니 난간에 기대 앉아 정원을 구경하고 있던 것이었다. 확실히 그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고, 소년은 그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상대를 부른 것은 페리스가 먼저-
"레오, 일은 그만해도 된다."
라는 말에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어보인 소년은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그런가- 하고 페리스는 잠시 자신과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이 성의 어린 시중인이나 다를바가 없는, 분명 동생이라는 호칭을 가진 소년을 응시했다.
"뭐, 그렇게 깍듯하게 부를필요없어. 이제 똑같으니까."
페리스는 기다란 망토에 가려졌던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세개가 사라져버린, 더는검을 잡을 수 없는 손을.
"그건..."
"사소한 순리에 따른 대가랄까. 더 이상 이 짓을 해먹기는 글렀으니 학자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어."
페리스의 푸른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에 순응하겠다는 듯이 차분했다.
"하지만 페리스님, 검술실력이..! 의수를 해보시는 건.."
그레이울프가의 삼남-센틴, 겔런, 페리스 중 가장 검술 실력이 뛰어나 최연소 기사로서 이름을 빛낼 것이라 예상되던, 나름 자신이 존경하던 자가 단순히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 통보하자 소년의 호박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이유를 모르겠는 건 아니지만..
"의수라.. 해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해봤자야 다음엔 팔이 날라갈까봐 두려워서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겁쟁이는 이쯤에서 빠지라는 신의 계시겠지."
붕대를 감은 허전한 손을 잠시 바라보던 페리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다가 소년이 안고 있던 작은 늑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때, 그제서야 소년은 그의 곁에 더 이상 늑대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직도 살아있었군."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레오. 그레이울프가 되고 싶으냐?"
소년은 답하지 않았고 페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어째서 입니까?"
소년의 질문에 페리스는 흐릿하면서도 장난스런 미소를 흘렸다.

"글쎄... 가끔은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라고 할까?"

그렇게, 은밀한 사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정의의 사도>
후회는 없었다, 라고 되뇌이기만 했다. 손에 남은 떨림과 난자하던 핏자국이 과연 가치있는 것이었을까 고민했건만은 답은 매정하게도 나오지 못했다.
스러지는 한 생명, 그리고 불꽃. 페리스 그레이울프는 당연한 것이라고 정의내렸었고 레오는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생명이라는, 열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완전해지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스러질 수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한편으론 시원한 기분마저 드는 기묘함에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친모를 죽이고, 또 다시 다른 마녀를 처형한 나날에서- 살인의 괴로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레오는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그레이울프의 표식을 어루만지다가 어두운 방 안에서 일어났다. 악의 악, 그리고 또 다른 악. 악을 가장한 선,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정의.
그는 태어나서부터 이곳에 오기전까지 목격했던 뒤골목의 수많은 범죄들과 그 추악함을 기억하고 있었고 사실 어느정도 그가 마녀사냥에 만족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악의 근본적인 처단. 그리고 승리하는 선.
레오는 그 모든 것에 자신의 신념을 두었다.

"...그래서, 처단목록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진짜로 할 셈이냐? ...이대로라면.."
페리스는 레오에게 살풋 찡그린 눈빛을 보내면서 무리라는 듯한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확고했다.

"양육강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처단목록: 센틴>
"레오, 너 이 자식.."
"글쎄요, 제가 얘기하지 않았나요? 다음엔 그어버리겠다고."
상대의 말에 여유롭게 웃어보인 레오의 문신에 푸른 빛이 스러졌다. 그리고 그건 상대인 센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이런, 효력이 다한 모양이네요."
큰 격차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느긋함. 레오는 아까전부터 맑은 소리를 내며 서로 갈아버릴 듯이 마주쳤던 검의 궤적을 흘려냈다.

"페이스를 죽이고, 페리스형님의 손을 불구로 만든 건 형님이죠?"
레오의 느긋한 태도와 질문에 열이 올랐던지 붉어진 얼굴로 튕겨나간 검과 그 떨림을 수습한 센틴은 약간 흥분조로 답했다.

"그래. 나야! 빌어먹을! 너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냐, 서자새끼야?!"
레오는 잠시 침묵하며 고민하는 듯했고 순간의 정적이 그 둘 사이를 휘감았다. 센틴은, 레오가 '올바른'결정을 하길 바라는 듯한 태도로 검을 들어 경계했다.

"그렇다면 정당방위에 인과응보가 성립되는군요. 실례하겠습니다."
레오는 빠르게 센틴에게 달려들며 파고들었고 다시 푸른 빛이 둘 사이에 난무했다. 아니, 난무라기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 지나갔고 결투의 결과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너 이자식!!!!레오!!!!!!"
피가 분수처럼 쏟아나오는 오른쪽 손목과, 이제 더이상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닥의 손 하나. 레오는 예의 그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칼을 갈무리했다.

"자질구레한 비명을 집워치워.약육강식이 아니었나? 걱정은 하지마. 테일런, 그 늑대는 잘 처리할테니까. ...아, 그러고보니 장남이 검을 들 수 없게된다면 어떻게 처분되는거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군."

<처단목록: 계모>
"죽여라!죽여라!"
미친 군중의 환호성에 남자는 살짝 뒤를 돌아보다가 처형대에 앉혀진 여자에게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대단한 구경꾼들이라고생각하지 않습니까?"

죽이지 않는다면 죽여버리겠어!라고 군중들 사이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외치자 청년은 옅은 웃음을 내비치며 그렇게 말했고, 칠흑의 머리를 산발한 여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청년을 경멸스럽게 직시했다.

"그러고보니 옛날 생각나네요. 딱 이런 걸 처음 접했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보단 좀 허술하긴 했습니다만.."
남자는 잠시 과거에 젖은 듯 몽롱한 눈빛을 하다가 손에 들린 묵직한 칼을 한번 허공에 휘둘렀다.

"끝까지 이러실겁니까? 사실 다 알고 있어요. 전 다만 단 한번, 기회를 드리는 건데.."
"널 내 자식처럼 생각했었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헌데 좀 이상한 것이 있더군요.. 제 어머니는 분명 한 분이신데, 한 분은 살아계시잖아요? 그럼 누가 진짜인 겁니까?"

남자가 여유를 부리는 모습은 군중을 더 애타게 만들었지만 여자에게는 안도감과 절실함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내, 내가 진짜다. 내가 진짜야! 레오, 살려다오. 넌 이런 아이가 아니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어머니께서는 절 위해서 가짜 어머니를 처단하게 한 것입니까? 진짜 어머니로서?"
"그렇다."

미세하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저분한 여자의 꼴을 응시하며 조용히 답을 듣던 레오의 호박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잠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는 조금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 알고 있나?"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듯이 휘둥그레졌지만 쇠로 된 물체는 들어올려졌고 여자의 말을 끊고 파고들었다.
곧이어 깔끔하게 바닥에 떨구어지는 잔해. 군중은 환호했다.

"마녀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

<신념>
"나으리.. 나으리! 제, 제 잘못이 아닙니다! 나으리!!!"

자신에게로 매달리는 여자의 모습에 별 감정없이 잡아넣으라 명령한 남자는 머뭇거리는 병사가 보이자 뒤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질문이라도 있는가?"
"저, 저... 아무래도 저 여자는.."

흠, 하는 짧은 감탄사가 남자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옛날에 A라는 남자와 그 친구인 B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네?하는 의문이 병사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남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둘은 사이가 좋았어. 하지만 A는 B가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지 알고 싶어했지. 그래서 돼지를 죽여 포대에 담고는 피칠갑을 한 보따리를 메고 B의 집을 찾아갔다. A는 B가 나오자 자신이 실수로 사람을 죽여 살인자로 몰렸다고 주장했어.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말이야. B는 그 말을 듣자 A를 집안에 들여보내주었고 자세한 사항을 들어보자고 진중하게 말했지. 하지만 A가 보따리에서 꺼낸 건 돼지였고 A와 B는 그날 고기파티를 벌일 수 있었다. 자, 여기서 문제. 이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들은 병사는 A와 B에게 어떻게 했을까?"
"....그,그거야.. 대단한 우정이라고 칭찬하지 않았을까요?"
"틀렸다."
"네?"
남자는 호박색 눈동자를 살짝 가라앉힌 채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병사는 A와B를 잡아 죽였다."
"...ㄴ,네?"
"B는 A가 돼지를 죽인게 아니라 사람을 죽였다고 알고 있던 상태에서 범죄자 A를 숨겨주려 했으며 심지어 그 범죄를 은폐하는 데 도와주려 했다. 이는 양의 탈을 쓴 늑대, 즉 시민의 탈을 쓴 범죄 조력자다. B는 A를 그 자리에서 신고했어야 했지. 그리고 A는 잠재적 범죄자다. 애초에 A가 생각한 진정한 친구의 기준이란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렸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의미한게 아닌가? 이는 A의 타락한 정신상태를 보여주지. 이런 발현가능성이 뚜렷한 잠재적 범죄들을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이 병사의 일이 아닌가?"
"...이 여자처럼 말씀이십니까?"

남자는 별 대꾸없이 미소와 함께 뒤돌아 사라졌고 병사는 여자를 구속했다.

<사랑하는 여동생,페이스에게>
네가 그 아래 잠들고 얼마나 지난걸까, 난 어느샌가 이렇게 펜을 들고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다.
보낼 수조차 없는 이 편지를 쓰고 나서 바로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오늘은 너를 이렇게 회상하고 싶다.. 너에 대한 모든 것을 놓치기 싫다는 마음때문일까- 사실 오늘만 하더라도 너의 초상화를 보기 전까지 네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더구나. 아마 지금까지 너무 피해왔던 탓일지도 모르지.
먼 것 같지만 멀지 않은 과거, 내가 처음으로 이 성에 발을 들였을 때- 날 유일하게 멸시하지 않았던 네가 기억난다. 그것이 첫 만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날 노려보는 어머니의 자궁에 잠들어 있던 너를 보면서 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때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든 생각은 네가 어쩌면 내게 온기가 되어줄 지도 모른다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 해, 겨울에 태어난 너는, 내가 하수구로부터 도망쳐온 추위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불꽃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먼 발치에서 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네가 그런 존재라는 것은 알겠더구나.

시간은 흘렀고 페리스 형님이 검의 길에서 물러나셨다. 형님의 도움과 나의 노력으로 하수구가 아닌 그 곳의 일원이 되었던 무렵, 내 손에 묻혀진 최초의 핏자국을 깨달았을 때 너는 이미 첫 걸음마를 뗀 지 오래인 작은 말괄량이가 되어있었다. 이미 피로 물든 내 손을 잡고 화사하게 웃던 너의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 때 너는 단순한 인사와 그 날 얼마나 신기한 경험을 했는지에 대한 요란한 수다를 떨었을 뿐이었지만 그건 내게 있어 가장 부드러운 안식의 속삭임이었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었다.
에리카 누님의 말대로 모두가 미친 이 곳에서, 순수한 웃음을 흩뿌리는 불꽃. 그리고 따스하게 빛나는 온기. 나는 너만큼은 이곳에서 지켜내리라고- 그렇게 어린 네 손을 잡고 맹세했었던 것 같다. 그래, 결코 이루어내지 못한 그 맹세를 말이야-

내가 영문도 몰라하던 네게 맹세를 한 뒤 또 시간이 흘렀다. 에리카 누님은 광증이 생기신 이후로 호전되지 못했고 센틴 형님은 더 오만방자해져 온갖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셨다. 그에 불안했는지 센틴형님에게 더 알랑거리게 된 겔런 형니의 모습은 갈 수록 불안해 보이기만 했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손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내 손을 피에 담그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너만큼은 순수하고 솔직하며 쾌활한 소녀로 자라났고 가족 모두가 너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네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웃음과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다시 저편으로 활기차게 뛰어갈 때 아버지와 어머니모두가 웃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 그 아버지가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일이다. 만약 네가 이 구절을 본다면 아버지가 따스한 사람이라 주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보지 못할테니 지우지는 않으마.

...너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넌 그레이울프가의 희망이었어.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야..

평소와 달랐던 너를 대면한 충격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난 그 날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었고 왜 그런 일을 아직도 하냐고 구박하면서 활기차게 날 반겨줄 너의 수다를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 너는 늘 돌아다니던 복도에 없었다. 근처 하인에게 너의 행적을 물으니 '오늘 하루종일 외출하지 않으셨습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었다. 너의 방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려는 시도는 해 보았지만, 기억하느냐? 넌 대답도 없이 문을 단단히 잠궜었지. 그 때 방 안에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누군가가 그 때 옆에 있어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날, 나는 단순한 너의 변덕일 것이라는 생각에 내 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때부터, 이미 단추는 어긋나게 끼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너의 상태는 나아지질 않았고 결국 너와 나의 신경전에서 먼저 인내심이 바닥났던 건 내쪽이었다. 조금 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별 수가 없다는 생각에 방 문을 부수고 들어간 나는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너와 대면해야 했다.

너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 무언가를.. 무언가 너를 위협하는 것을 말이야. 너는 구석에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말은 더듬었고 눈에는 이미 초점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조금만 건드리려고 하면 광폭화를 한채 나를 내쳐 버렸었지. 두려워 하지 말라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아니라고 얼마나 너를 달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너는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너는 겨우 나를 알아봤다. 하지만 입은 열지 않았어. 나는 그 순간 우리 집안에 돌던 어색한 침묵이 '알고 있음'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뺀 가족 모두는 네가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알고 있다는 직감. 나는 그 직감에 매달린 채 에리카 누님에게로 찾아갔었다. 미칠 대로 미쳐버렸지만 진실밖에 말하지 않는 광인에게로 말이야..

미리 말해두겠지만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래, 아마 너에게도 충격이었겠지. 난 들었던 사실일 뿐이었고 넌 당사자였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솔직하게 밝혀두자면 역겹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하수구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더러운 행각들과 실태에 비한다면 그건 준수한 편이었으니.. '악하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이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한다고 해도 난 이해하겠다..만 너는 나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으니 조금은 늦은, 우스운 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할 것 같군.

나는 나의 존재가 그레이울프가에 어떤 파장을 일으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네가 아니었다면- 나완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었을테니 영원히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서자라는 이유로, 서자의 자식이 그레이울프가에 들어오는 치욕을 겪었다는 이유로, 근친상간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누군들 쉽게 들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나란 존재를 남겨두었고 심지어는 그 첩일 뿐이었던 여자가 그레이울프의 이름과 혈맥을 들이대면서 벌인 일련의 곤란한 사건들에 아버지가 내린 명령은 매우 단순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그건 앞으로 그 누가 된들 간에 다시 서자 이야기가 나온다면 죽여버리겠다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고 아마도 센틴 형님은 그 말 중의 허점을 잘 찾아낸 모양이었지. 첫번째는 에리카 누님이었다. 아마 너도 그 이야기를 누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머릿속이 복잡했겠지. 그리고 큰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었다.
에리카 누님의 다음은 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미리 알지 못해서 미안했다.
사실 센틴 형님의 '원흉은 너'라는 말에 동의를 표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몇번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너를 살리겠다고 맹세하고서는, 도리어 너를 내 존재를 죽인 셈이 되었고-....
....
....... 이만 이 편지는 줄이겠다. 차마 네 마지막을 회상하기에는, 지금은 너무 이른 것 같다. 이 부족한 인간을 부디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