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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타/과거

last modified: 2015-04-27 02:56:54 Contributors


"야! 어서 나와! 걸리면 혼난다고."

난 친구의 외침을 무시하고 있었다. 여자 샤워실 밖에서 분명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길러온 물들을 작은 통으로 푸어서 몸에 부어 싹싹닦는 일을 난 멈추지 않았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순간이라도 손을 멈췄다간 또다시 떠오르는, 내 팔을 잡던 그 능글스런 자식의 감촉이 참을 수 없어서였다. 맨날 술에 찌들어 살고, 툭하면 공금이라던가 후원금을 빼돌리는 원장이란건 머리에 피가 마른 아이라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몰랐다, 나이 지긋한 그가 이런 변태라는 사실을. 아니, 쉬쉬했던걸까? 나 말고도 당한 아이가 있을까. 난 계속 떠오르는 생각을 덮어놓기 위해 더 거새게 거품질을 시작했다. 얼마동안이나 몸을 씻었을까. 길어온 물은 이미 동이 났고,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로 손을 가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잠에 들지 않은걸 들킨다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었다. 아니, 차라리 치도곤이었다면 좋겠다. 하지만, 더이상 자신이 받는 벌은 손바닥 맞는 식이 아닐 것 같았다. -이제와서, 상관있나? 망 봐달라고 부탁한 친구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자 벌써 떠난건지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기를 닦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에,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시설덕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떠날거야.

어디를?

이 썩은 곳을.

어디로?

아무곳이든.

*

"콜록콜록"

베르는 기침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악몽에서 깬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현실적인 추위가 몸을 감싸왔다. 여기가 어디지? 주위를 돌아보니 보이는건 깜깜한 골목. 그리고 바람에서 숨으려고 나와 함께 몸을 붙이고 누워있는 노란머리, 보라머리, 검은머리의 세 명의 친구들.

"콜록콜록"

또다시 들려오는 베르의 기침소리에 드디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금 그것은 악몽이었다. 한 달전,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의 악몽. 하지만 자신은 벗어났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날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삼일간의 설득 후 그들은 나와 같이 가겠다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망치겠다 결심한지 일주일만에, 자신들은 너무도 쉽게 고아원을 빠져나왔었다. 솔직히 '도망'이라고 부를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었던게, 그들은 평소처럼 원장이 술에 취에 코를 골고 있을 무렵 담을 넘은 것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희망에 차있었지.

현실은 참담했다. 골목에선 다른 고아들나 깡패들이 영토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부모없이 자라긴 했어도 고아원에서 주는 밥만 먹고 살던 우리들은 태어나서부터 생존을 위해 혈투를 벌인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쓰레기 더미에 숨어 잠을 잘 수밖에 없는것이었다. 게다가 내게 설득당해 같이 고아원을 나온 사람들 중에 한 명인 베르는, 원래 약한 몸이었기에 벌써부터 병에 걸려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난 옆에 누워 자면서도 기침하는 소년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먹지도, 편히 자지도 못하는 처지에 병을 고치러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시 베르의 노란 머리를 쓰다듬은 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내일은 음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

"으어어어어어어엉"

리타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난 맨손으로 차가운 땅을 파고 있었고, 다른 한놈은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노란머리 소년이 땅에 뉘여있었다. 그는 싸웠지만, 병을 견디지 못했다. 고아원을 나온지 딱 두 달째 되는 날이었다.

죽었다.
죽었어.
죽었구나.

처음 접해보는 죽음의 무개가 가슴을 짖눌렀다. 난 그럴수록 더욱 더 하는 일에 집중했다. 얼어붙은 땅은 파기 어려웠고 흙이 손톱아래를 쑤셔와 이미 시린 손이 아프기까지 했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시신을 묻어줘야했으니까.

"-훌쩍, 그만해애."

어느새 울음을 그친 리타가 다가와 내 어깨를 당겼다. 시야사이로 리타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고아원에 있을땐 풍성하고 윤기흘러 모든 여자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머리카락. 지금은 씻지못해 떡이졌고 먹지 못해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리타의 머리카락을 관찰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나마 관심을 돌려야했다, 이 죽음에서. 그리고 내내 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동안이나 그 상태로 쭈그려 앉아 있었을까. 그런 나를 도와줘야겠다 생각했는지 리타 또한 앞에서 마주앉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픈 배와 추운 3월의 공기를 무시해가며 하루종일 흙을 파고, 파고, 또 팠다. 그렇게 친구 한 명을 떠나보냈다.

*

"이리와, 이 개자식!!"

벨은 싸우고 있었다. 처음 맞이하는 죽음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을 때 동네 거지들 중 한명이 여자같은 이름이라며 시비를 걸어오자 그걸 참지 못하고 맞선것이다. 나는 말리려고 애를 썼으나 일찌기 한 대 맞고 땅에 구른채였다. 하지만 일단은 호각인듯 했다. 고아원에 있을 때에서 항상 놀림받았기에 곧잘 다투곤 했던 벨이었다. 곧 벨은 비슷한 덩치의 아이를 땅에 눕히고는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나를 향해 돌아본 그는 뿌듯한 얼굴을하고 손가락으론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그 때 포기한 줄 알았던 거지아이가 땅에 있던 주먹만한 돌을 쥐어 들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난 소리지르려 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볼 수 없어 꼭 감은 눈은 별개로 귀는 충돌하는 소리와, 비명소리, 달아나는 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눈을 뜨면 보게 될 풍경이 무서워 한참을 어둠에 숨어있었을 참이었다.

"눈 떠!"

벨의 목소리었다. 살아있는거야? 안다친거지? 서둘러 눈을 떴을 땐, 벨이 아닌 다른 조그만 사람이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며 길에 쓰러져 있었다. 벨이 아니야.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본 것에 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쓰러져있는건, 벨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익숙한 검은머리의 친구. 서둘러 머리에 난 상처를 확인해봤지만 흐르는 피는 멈출 수 없었고 이미 사라져버린 의식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친구는 떠났다.

*

"-미안해."

나는 사과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흙 파는 행동을 멈춘지는 오래였다. 봉긋이 선 세 개의 무덤옆에 누워 어제 밤 즈음만해도 살아있던 보라머리 친구를 기억해봤다. 싸움을 잘하던 그는, 아침이 왔을 땐 차갑게 얼어 죽어있었다. 유독히도 추운 3월을 원망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또다시 무덤을 마련해 주는 것 뿐.

내가 그들을 끼어들이지 않았다면.
내가 고아원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강간당하지 않았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없었다면.

내 친구들이 죽은 건 다 내 탓이었다. 눈 옆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기운조차 없었기에 난 소리없이 흐느끼며 누워있었다. 시선을 내려보니 손에 들린 이가 빠진 칼이 보였다. 그것은 어젯밤 자고 있던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한 고물이었다. 피가 묻은 그 칼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다른 손을 쳐다보니 손 주위 피가 흥건히 고여 변한 색의 흙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 피의 근원인, 험하게 긁힌 내 손목. 아팠지만, 그 고통이 죄책감 때문에 오는 저릿함에서부터 주의를 끌어주는 건 고마웠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

그렇게 난 피를 흘려보내며 정신을 잃었다.

*

짹짹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자 나는 더이상 잘 수 없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냄새나는 쓰레기더미 속이 아니었다. 약간은 추운 고아원 방도 아니었다. 무덤이 있던 산 속은…더더욱 아니었다. 그었던 손목은 붕대가 감겨있었고, 때에 찌들었던 몸은 깨끗이 씻겨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몸을 일으켜보자 어지러움이 덮쳤다. 하지만 참고 눈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평범하지만 아늑해 보이는 방이었다. 벽엔 화살이나 활 따위가 걸려있었고 춥지 않도록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왜 살아있지?
왜 죽지 않았을까.
왜 날 구한거지?
왜 내버려두지 않은거야?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난 다시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

"난 베리타라고 해요! 베르, 벨, 리타, 아무거나 골라서 불러줘!"

그들을 감히 추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기에. 오늘도 난 그들의 이름을 들어가며 산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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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베리타의 진짜 이름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