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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계약자 이야기

last modified: 2016-12-11 04:01:14 Contributors











1997년 5월의 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불어오른 물이 다리의 기둥을 세차게 찰싹찰싹 때려온다.




올해 29살의 남용헌씨는 중견기업의 신입사원으로 경제불황속에 9개월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가 잃은것은 비단 일자리뿐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던 애인이 그의 품을 떠나갔고.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가리던 손길마저도 멀어졌다.





"하하하"


용헌은 베시시 웃음을 흘린다. 그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은 단 한줄기도 찾아볼수 없었다.





사직서가 놓인 책상을 뒤로하고 그가 선 곳은 대교 밑의 소용돌이 치듯 휘몰아치는 강물의 가운데.

그는 나락을 향해 서서히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걸음, 한걸음. 난간에 가까워지는 그의 인영.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얼굴에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 사이로 눈물 한줄기가 겹쳐 지나간다. 그는 토해내듯 웃고 웃는것을 반복한다.

거친 웃음소리는 대교 밑으로 철썩이는 강물과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에 묻혀 적막속을 파고든다.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육신이 혀를 날름거리며 거칠게 몸을 흔들고 있는 강물과 마주한다.

그가 조용히 눈을 감고 대교 아래로 몸을 기울기 시작했을때. 그의 주머니에 있던 삐삐가 진동을 울린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통의 메세지. 그는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눈동자를 굴린다.





──── "봉인을 해제하시려면 A키를, 해제하지 않으시려면 B키를 눌러주세요" ────






호출번호가 나타나 있어야할 화면에는 알수없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묵묵히 호출기 화면을 응시한다.






────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





먹구름 사이로 벼락이 내리친다. 우레가 내리치는 거대한 소리에 용헌은 몸을 움츠린다.

그때였을까. 방금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시선을 발견한것은. 그는 등 뒤로 고개를 훽 돌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무언가를 바라본다.





──── "당신의 악마가 해방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A키를 눌러주세요. 악마는 당신이 원하는건 대부분 이루어드립니다." ────












그것은 바로 악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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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규칙.."


집에 도착한 용헌은 젖은 몸을 씻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호출기의 화면만을 응시한채 혼잣말을 중얼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타난 Channel - Whisper. 그는 호출기의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가기를 반복.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호출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이녀석이 악마라고..'


붉은 눈동자. 날카롭게 튀어나온 앞니. 그리고 길다란 귀. 토끼의 얼굴을 가진 생명체는 용헌의 앞에서 눈을 껌뻑이며 그를 응시한다.


자신보다 훨씬 큰 체격을 가진 두발 짐승을 눈 앞에 두고 긴장을 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너 내말 알아들을수 있니?"


용헌이 토끼악마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붙인다.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던 악마는 당장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아.... 혹시 가능하다면. 나한테 이 상황을.... 설명해줄수 있을까...."


그는 기묘한 생김새를 한 거구의 악마를 눈 앞에 둔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잠시후, 그의 예상을 깨고 토끼악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용헌의 질문에 답을 이어간다.


떠돌이 악마였던 토끼악마는 다리 위에서 생기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던 그에게 다가갔고.


처음엔 그를 잡아먹으려 했으나 그의 텅 빈채 죽어있는 눈동자를 보고 손을 내민것이라고.


그리고 한번 맺어진 계약은 악마인 자신의 죽음이나 계약자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할것이라고.


아니면.. 또 다른 몇가지의 길이 있을수도 있다고. 용헌은 계약을 끊을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토끼악마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 첫번째 규칙에, 내가 원하는걸 대부분 이루어준다고 했어. 맞지?"




"그렇다."




"그럼 우리 아버지를 살려줘. 의사는 앞으로 길어야 6개월밖에 못버틸거라고 얘기하지만. 악마인 네 힘이 있으면 그런것쯤은 문제 없을것 아니야."


어쩌면, 악마의 도움으로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릴수도 있을것이란 희망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안된다."






"왜 안되는데?"






"나에게 주어진것은 고기를 찢기 좋게 발달한 날카로운 발톱과 강한 근력뿐. 죽어가는 생명을 치유할수 있는 힘은 없다."







"하."




아버지의 병을 치료해주는것은 토끼악마가 들어줄수 있는 소원의 '대부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건가.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잠에 들 시간이 되었다. 침대 위에 이불을 내려놓는 용헌의 시선이 자꾸만 토끼악마를 향해 슬쩍인다.


















"계약이고 뭐고 잘때만큼은 자리좀 비켜주면 안될까. 졸라 부담스럽거든?"


용헌은 이불을 깔고 침대 위에 누으며 아까전부터 가만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토끼악마에게 제발 그만좀 하란듯 말한다.




"졸라?"





"엄청 부담스럽다고. 말로 설명 못할만큼. 알았으면 좀 사라져줄래.."



그제서야 토끼악마는 용헌의 방에서 나간다. 용헌은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은채 몸을 웅크린다.



자신을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듯 휘몰아치는 난간 아래의 강물. 지금 생각하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아까전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라는 후회가 들지만. 만약 토끼악마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마...


아니, 이런 생각은 더이상 하지 않는것이 좋을것 같다. 일자리는 다시 구하면 그만이니까. 정 안되면 몸을 쓰는 일용직이라도 알아보는거다.


짊어진 짐을 팽개치고 달아나기엔 아직 너무 젊은 나이니까. 유치한 생각은 이제 그만두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살아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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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용헌은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넥타이를 졸라매고 이곳저곳을 찾아 헤맨다. .....토끼악마와 함께









"제발 떨어져 있으면 안되나."



용헌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참다가 결국 발걸음을 멈춰 조용히 토끼악마에게 말한다.

아까부터 계속 바로 옆에 찰싹 붙어서 함께 걷는것이 여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상관없다. 계약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에게는 악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불편하다고.."



용헌의 꿍얼대는 소리에 토끼악마는 결국 몇걸음의 간격을 두고 용헌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쪽도 신경이 쓰이는지 용헌은 자꾸 뒤를 슬쩍슬쩍 쳐다본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해가 저물 무렵까지도 용헌은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슬슬 지쳐하는듯한 눈빛이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골목에 이르러 사용되지 않는듯한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 씨발 죽겠네..."




용헌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황혼이 비추는 거리는 아름답지만 이면으로 삭막하기도 하다.


그는 무심코 호출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다. 집에 도착하면 아마 여덟시쯤 될거 같다.





"배고파."


잠자코 용헌을 따라다니던 토끼악마가 한마디를 꺼낸다.






"기다려. 금방 집에 도착할테니까.."


용헌은 기다리라는듯 손짓을 하며 악마를 달랜다. 그러고 보니, 악마는 무엇을 먹고 사는걸까. 용헌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때쯤. 호출기에서 호출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정해놓은 호출음이 아닌, 난생 처음듣는 소리이다.




토끼악마가 귀를 쫑긋 세운다. 동그랗던 악마의 눈이 뱀의 눈처럼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감춰두었던 날카로운 발톱을 빼든다.







악마 근접








호출기 화면에 표시된 문구는 사라질줄을 모르며 날카로운 호출음을 반복한다.








"아......"




한순간에 돌변한 토끼악마를 보고 용헌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역시, 이렇게 보면 이 거대한 토끼도 어쩔수 없는 악마라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용헌, 그가 호출기와 악마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토끼악마가 양팔을 들어올려 그를 덮친다.




놀란 용헌은 비명을 지르며 팔로 얼굴을 감싸지만, 눈을 뜬 그가 본 광경은 토끼악마의 팔에 박힌 날카롭고 거대해보이는 몇개의 침이었다.



토끼악마는 계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공격을 막아낸것인가.







침이 박힌 악마의 팔이 점점 새카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고기...."


어느새 상반신은 여성의 몸이지만 하반신은 벌의 모습인 기형의 말벌악마가 용헌의 앞에 나타나 침을 흘린다.



"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시작된 겉잡을수 없는 공포가 용헌의 내부 깊숙한곳에서부터 두려움을 불러오기 시작한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얼어붙게 된다.




두려움에 잠식된 용헌의 시선에 두 악마의 그림자가 비친다. 커다란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는 몇차례나 서로 부딪치는것을 반복. 마침내 하나가 된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토끼악마의 날카로운 이빨에 살이 찢길때마다 말벌악마는 고통의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다.




인간을 닮은 말벌악마의 눈동자와 용헌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용헌의 인상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된 말벌악마는 토끼악마의 주둥이에 게걸스레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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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을 뜬 곳은 인근의 응급실이었다. 골목에 쓰러진 용헌을 누군가 발견해 구급차를 불러 이곳까지 데리고 온것이라고.







"그런가요.."




자초지종을 듣게된 용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한쪽 팔이 검게 물든 토끼악마는 언제나처럼 용헌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한 덕에 집에 들어올땐 이미 아홉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악마란건 서로 죽이고 먹고. 그런건가?"


용헌은 아까전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고개를 가로저으며 토끼악마에게 묻는다.





"그런 취미를 가진 녀석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계약자를 해하려 들기 때문에 처분한것이다. 마침 배가 고팠던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 그냥 강물속에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쯤........... 맛있는것을 그냥 버리는건 아까운 일이다."



토끼악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지만 용헌은 몸에 조금 닭살이 돋은것을 느꼈다.





악마는 동족의 고기와 자신과 같은 인간의 고기를 먹는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사람들을 해치는것은 식은죽 먹기일것이다.



용헌은 옷걸이에 옷을 걸다말고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토끼악마쪽에 고개를 돌린다.






"이것 하나만 약속해줘. 사람은 해치지도 먹지도 않겠다고. 좋든 싫든 이건 계약자의 명령이야."



그는 인간을 해치지 말것을 토끼악마에게 말한다. 적어도 자신과 결속되어 있는 한 이 악마가 사람을 절대로 해치지 못하게끔.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정도라면 괜찮다."



잠시 머뭇거리던 토끼악마는 용헌의 말에 수긍한다.



"아쉬울 생각도 안들도록 노력하란 말이야..."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