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Who killed cock rob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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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증언
( 반역자 니콜라이 볼코프와 유일하게 친분이 있던 카산드라 블랙에게 증언을 요청, 받아들여짐. 아래 기록은 카산드라 블랙의 말만을 기록한 것이며, 취조인의 모든 발언은 공백처리되었음을 알림. )
"-"
...볼코프의 일기 말입니까. 불행히도 저는 그 일기를 읽은 적도 없거니와, 그 존재에 관해서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일기의 번역가로는 부적합한 것 같군요. 니콜라이가 반역자로 밝혀진 지금 그 일기를 읽을 순 없지 않습니까. 다만 경이 그 내용에 대해 알려주신다면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줄 순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에 한하여 말입니다."-"
살로메?"-"
..."-"
네, 알고 있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제가 배신자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아뇨, 니콜라이와 저는 동료가 아니었습니다. 의아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편의상 닉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경께서는 반기시지 않겠지만... ...닉과 제 사이에 대해 변명을 해보자면, 애초에 닉은 동료를 만들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분명 관계의 폭이 넓기는 했지요.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본다면 그 관계들은 겉보기엔 수평적이었지만, 실상은 닉이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닉 입장에서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달가웠을 리가요. 게다가 저는 혼자 연구하는 편이었고. 닉이 제게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아마 접점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뭐, 그런 이유를 제하고도 니콜라이 볼코프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만... ... 의외라고 느끼십니까? 그렇게 느끼시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요. 뭐, 경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저에게 달려오지 않으셨습니까. 표현이 부적절했나요?
당시 닉과 저는 죽음에 관하여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그저 생물 안의 무언가가 소진되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요. 당시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그로써 닉과 제가 도출해낸 결론은 정반대였습니다. 닉은 죽음을 도려내고 싶어했고, 저는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어째서 닉을 싫어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친구는 지나친 몽상가였습니다. 닉도 아마 제가 그리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타인이 생각하는 바를 워낙 잘 알아내니까요. 해서 저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닉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카데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유를 물었고, 닉은 답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저는 그날 전달된 카데바의 절반을 닉에게 주었습니다. 그때의 제가 무슨 생각이었냐고요. 저도 잘 모릅니다. 아니,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아무리 지나친 몽상이며 꿈이라도 그것이 실현되다면... 죽음을 모든 생명에게서 도려낼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 저는 의사로서의 윤리보다는 과학자의 호기심에 더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그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경,"-"
..."-"
... 다시 시작하자면, 그날부터 암묵적인 계약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닉은 제게 연구의 진척을 알려주었으며, 저는 그 답례로 닉이 필요한 시체, 약품, 필요하다면 사형수까지 주었습니다. 경께선 경악하시겠지만, 대부분의 사형은 교수대가 아니라, 황성의 지하실에서 벌어지니까요. 아마 닉도 잡힌다면 지하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요. 제 추측입니다만."-"
저 또한 정신을 차려 보니 실험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저는 그 누구보다 정신이 또렷했으니까요. 실험 과정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실 텝니다. 안다고 우기지 마세요, 경이 그 내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진작에 제 동료나 제자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정리한 서류철을 로레인 측에 보내긴 하겠습니다. 이해한 이가 있다면 제게 보내세요. 제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에 말입니다. 북부에서 칼을 들기엔 아까운 인재이니... ...결사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닉은 몇 개월이 지나서야 포기했습니다. 드문 일이었지요. 그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즉시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그것을 위해 처음의 야망을 포기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제 직감이 맞을지도 모르고요.
닉은 불멸을 꿈꾸었습니다. 불사가 아닌, 불멸 말입니다."-"
그 자신이 그리 되기를 바랬냐고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경께서는 살로메를 잊으셨습니까?"-"
(낮은 비웃음소리,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 불쾌한 침묵.)
...살로메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실존해서도 안되고요.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살로메는 닉의 머릿속에만 존재합니다."-"
아뇨, 모델이 있긴 합니다. 연구를 함께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닉이 제게 꽤나 긴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진위 여부? 글쎄요... 저는 니콜라이를 믿지 않고, 경은 절 믿지 않으시죠.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 작은 기침 소리, 카산드라 블랙의 불쾌한 웅얼거림이 이어졌다. )
니콜라이 볼코프가 니콜라이 볼코프가 아니라, 데인드리로 바깥을 활보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게도 꽤 최근까지 니콜라이는 볼코프가 아니라 데인드리였지요.
니콜라이는 꽤나 훌륭한 학생이었고, 당시에는 돌아갈 집도 있었습니다. 니콜라이는 그 곳을 삼촌 댁에 간다고 표현했습니다. 경께서 조사하실 일이 더 느셨군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여기서 허튼 소리 했다가 목이 달아나는 사람은 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여튼, 닉은 그 날 지쳐 있었고,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밖에 나왔다 합니다. 그리고 밖에 나온 그 자리에서 그 여자를 봐버린 겁니다. 그래요, 살로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완벽한 그 여자. 사실 닉은 그 여자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살로메는 닉이 엄청난 심사숙고 끝에 붙인 이름이지요. 그 여자는 사실상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사실과, 닉에게 엄청난 집착을 남겼다는 것만은 명백하지요. 닉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 놓았으니까...
1.2. Mo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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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드디어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게로구나."
클레리 무어는 턱 아래 느껴지는 날붙이를 의식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이번엔 진심이다. 이번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프레드릭 무어의 눈이 안광을 잃은 채로 클레리를 바라봤다. 한계치까지 분노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와 무엇을 어쩌겠는가? 망나니는 이미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낭떠러지 끝에 선 셈이다. 하여 클레리 무어는 웃는 편을 택했다.
"그럼요, 아버지. 누굴 닮았는데."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망나니의 얼굴이 돌아갔다. 오른쪽 뺨이 붉었다. 다시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이제 왼쪽 뺨도 붉다. 클레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칼을 거둔 게 다행인건가. 곁눈질로 본 프레드릭의 목에 굵은 핏줄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트리고 싶은 것을 참는 성 싶었다. 그냥 부러트리지 그래. 한참동안 분노에 찬 숨소리가 이어지다가, 프레드릭이 클레리의 발밑에 찢겨나간 편지조각들을 던졌다. '데인드리.' 클레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이 일이라면 그가 물러나야 한다. 반역자가 사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무어 가의 장자에게. 이 일만으로도 무어 가 모두가 사형당할 수 있다.
프레드릭의 차가운 시선이 클레리를 향했다. 가문의 안위, 분노, 그리고 제 1 후계자, 명예. 이 모든 것을 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역겨워.' 클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알아서 처신하거라."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엇나갔다간 프레드릭도 더 이상 클레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겠단 이야기와 같았다. 반쪽짜리 가주가 먼저 자리를 떴다. 클레리는 한참동안 뺨을 매만지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냥 죽이지. 죽이지 그랬어. 한숨과 함께 편지를 주워모아 불에 던졌다. 흰 편지지가 불에 잿더미로 변해가는 것을 끝까지 살펴본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바깥 공기라도 좀 쐬고 싶었다. 머리를 식혀야 했다. 그리고, 클레리는 그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 오랜 친구, 어찌 답장을 하지 않았는가."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 잊을 수 없는 웃음. 데인드리, 니콜라스 볼코프. 후드를 쓴 그가 클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절친한 사이인 줄로만 알았다네."
빌어먹을.
1.3. Nor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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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아 유스타프는 처음 이리스 유스타프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유달리 추웠던 그날 밤, 탈리아는 숲 어귀에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다. 북부는 혹독하다. 겨울은 특히나 그렇다. 그러니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부모, 같은 사연 또한 흔한 일이다. 흔한 일이니 울어서는 안 된다. 해서 탈리아 유스타프는 울지 않았다. 그저 체온을 아끼기 위해 더욱 웅크렸을 뿐이다.
눈이 내렸다. 탈리아는 자신이 얼어죽을 것을 직감했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의 손길 대신, 부드러운 털가죽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유스타프의 기사 중 하나가 탈리아를 발견했다.
**
탈리아는 일주일이 걸려 몸을 회복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잠자리, 맛있는 음식, 단정한 옷. 이 모든 것이 일상처럼 향유되었다. 탈리아가 성에서 열흘을 지낸 뒤에야 그 모든 것들의 원래 주인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리스 유스타프, 북부의 지배자.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입에서 나온 말만큼.
“네게 선택지를 주마.”
유스타프의 입양아가 될 것인지, 아니면 유스타프의 이름을 가지지 않는 대신 저 밖으로 나가, 후원만을 받을 것인지. 탈리아는 그 둘의 차이를 물었다.
독수리가 된다는 것은, 이리스 유스타프는 입을 열며 탈리아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손길이 부드러웠다.
“스스로의 목숨보다 명예를 중히 여겨야 하며, 전쟁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야 한다. 네가 생전 모르던 타인 둘을 구하기 위해 네 형제를 희생시킬 줄 알아야 한단다. 네 공적이 아무리 빛나고 영광되고, 네 희생이 아무리 처절하여도 그 누구도 널 치하하고 위로해주지 않을 테다. 네 그림자 아래에 무수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너 스스로는 항상 뜨거운 햇볕과 매서운 눈보라를 견디는 나날들이 이어지겠지.”
당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묻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날 때부터 유스타프인 이들은 이러한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대신 어린 시절의 생존이 보장되고, 네가 그간 열흘동안 받은 호의호식을 평생 누리겠지. 이 모든 것들은 그에 대한 대가다. 그러니 억울해할 것도, 눈물 흘릴 것도 없지.”
말이 이어졌다.
“허나 너는 다르다. 이 모든 것을 겨우 열흘 동안만 누렸어. 그러니 선택지를 주마.”
독수리가 될 테냐, 나긋한 목소리다.
탈리아는 그 날 검독수리의 알을 받았다.
**
흰 검독수리가 다정스레 탈리아의 목에 머리를 비볐다. 탈리아는 웃으며 검독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그 순간처럼, 떨리는 발걸음을 문 안으로 내딛었다.
“탈리아 유스타프가 이리스 유스타프를 뵙나이다.”
**
그 때 만큼 아름다운, 그러나 지금은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하지만 눈만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다정하다.
“무어 가에게 서신은 잘 보냈느냐?”
“예.”
“‘데인드리’에게는?”
“그것 또한.”
잘해주었다, 짧은 칭찬이다. 그 옛날에 말했던 그대로, 성대한 치하나 상은 없다. 그러니 이 짧은 한 마디가 가장 중한 무게를 지닌다.
“시어도어에게는 이 일을 비밀로 하려무나.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일찍 알아 좋을 것 없겠지.”
“예.”
“미네르바나 바실리에게도. 미네르바는 유능하지만 그 곧은 성정 탓에 이 일을 견디지 못할 테고, 바실리는... 독수리보단 늑대처럼 일을 처리하니.”
“그것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이어지는 말이 쓸쓸하다.
“허면 너는 클레리 무어와 그 친우를 맞을 준비를 하면 되겠구나. ...시어도어와 그 아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예.”
나가보거라, 팔을 뻗어 탈리아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 뒤 덧붙인 말이다.
- - 2
이리스 유스타프는 의원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2년 전부터 그녀는 급격히 병약해졌다. 설령 북부인이라 할지언정 맨 살갗에 북부의 바람이 닿으면 몸이 상한다. 이리스는 자신이 한 말을 복기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북부의 바람이 앗아간 생명이 얼마나 많겠는가. 자신이 그 중 하나가 될 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슬퍼할 것도, 애통해할 것도, 억울해할 것도 없다. 그저 삶이 짧아진 것에 대한 짧은 아쉬움과 미련. 그 뿐이다. 그 이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업무를 줄이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몸의 부담을 줄이라. 의원의 당부였다. 그리 말하는 이의 손은 따뜻했다.
의원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실상 이리스 유스타프는 전권을 자신의 남동생이자, 차기 가주인 시어도어 유스타프*에게 일임했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지금 자신 옆에서 떽떽대고 있는 오랜 친우라던가.
“네가 몸이 아프더니 머리까지 어떻게 된 모양이로구나.”
“말이 좀 심하지 않은가.”
로레인의 가주이자, 이리스의 오랜 친우, 티르 로레인*은 침상 근처로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바람 냄새와 가죽 냄새가 훅 다가왔다. 온기 또한 다가왔다. 잔소리가 길어지겠군, 이리스 유스타프는 쓰게 웃었다.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 결정 내린 지가 2년 전인데 여태까지 이러는 것은 너무한 처사 아닌가. 봐주게나.”
“2년이나 지났으니 슬슬 네가 다시 되찾을 때도 됐지.”
“시어도어의 어디가 어때서 내가 다시 권리를 뺏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티르 로레인은 시어도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이리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둘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맞지 아니한 것을. 티르는 불같은 성격이었고, 시어도어는 불보다는 철에 더 가까웠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 이리스는 그러한 성격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이 간다 평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티르 로레인의 생각은 달랐다. 차가우면 얼어붙고, 날카로우면 무뎌지며,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리스는 이러한 주장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친우 사이에 쓸데없는 갈등을 두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방 안까지 쳐들어와, 2년 째, 잔소리를 해대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러나 티르 로레인은, 그녀 또한 나름대로 심각했다. 이리스 유스타프가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서리 맹약의 맹주이자, 북부의 평화의 상징이다. 그러한 그녀가 최전선에서 물러난다면 분명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들이 그 아가리를 치켜들 것이다. 실제로 2년 동안 티르 로레인은 그런 승냥이들을 ‘사냥’해왔다.
게다가, 티르 로레인은 시어도어 유스타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스타프에 그리도 인재가 없나?”
“말이 좀 심한 것 같은데, 그래. 시어도어를 능가하는 인재는 없지. 대답이 되었는가?”
“미네르바*, 바실리*. 나머지는 어리니 제외한다 치고. 이 둘도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에게 나누어 할당할 수도 있지. 시어도어에게 지나친 권력을 주지 마.”
이리스 유스타프의 눈이 곰을 향했다.
“미네르바는 시어도어에게 의지하는 바가 크고, 바실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게다가 둘 다 아직 어려. 그러니 묻지, 자네는 시어도어를 어찌하여 그리도 싫어하는가?”
“솔직해도 되는지 먼저 묻지.”
“내가 언제 거짓 원한 적 있던가.”
티르 로레인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내뱉었다. 시어도어는 북부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담담하게 말을 끝마친다. 이리스 유스타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보게나, 갈라진 목소리다. 곰이 떠난 자리는 싸늘했다. 그리고 남겨진, 병든 독수리가 있었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그 사실을 알았다. 시어도어는 북부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티르, 내 오랜 친우여, 나는 그래서 시어도어를 선택했다네.
- - 2.5
클레리 무어는 기분이 좆같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북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 소문에는 사람들이 하루에 열댓명씩 얼어 뒈진다던데. 벌써부터 뼈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클레리 무어는 기분이 아주 좆같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의 일행이 니콜라스 볼코프*이기 때문이다. 클레리는 저 웃는 낯짝에 주먹이라도 내리꽂고 싶은 심정 -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하므로 참았다 - 이었다. 그래서 건질 것이라고는 그 반반한 얼굴밖에 없는 그 양반이, 무어 가의 제 1 후계자가, 얼굴을 한껏 구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서. 볼코프가 그 꼴 보고 한 마디 던졌다.
"웃게나, 자네 얼굴 말고 봐줄 것 없네."
클레리 무어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분이 좆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친우의 말을 무시하는 겐가?"
클레리 무어는 또다시 무시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니콜라스 볼코프를 어떻게 패야 잘 팼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소문이 나면 곤란하지만.
"자네,"
그래서 클레리 무어는 니콜라스가 한 마디 더 하자마자 바로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억, 소리를 내머 볼코프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 - 2.5 (2)
클레리 무어는 점점 날씨가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염병.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옷을 여몄다. 바람이 옷깃 새를 파고들고 있었다. 알고 있는 욕이란 욕 - 패드립은 당연히 빼놓지 않았다 - 을 모두 내뱉으며 옆을 흘깃 보았다. 제 옆 일행, 니콜라스 볼코프*는 태연해 보였다. 꼴에 북부인이라 이건가, 클레리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 때 한번 때려두길 잘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분명 지금 요절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뼈도 못 추렸겠지.)
무어는 자신이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인지 복기했다. 이게 다 빌어먹을 아버지 때문이다. 기분이 잡쳐서 집으로 돌아온 그 날, 프레드릭 무어*가 자신을 호출했다. 다시 목이라도 조르려는 건가, 아니면 이번엔 뺨으로 넘어가려나? 아니면 드디어 양 다리를 자르려는 걸지도. 클레리는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제 아버지 앞에 섰더랬다. 프레드릭 무어는 지금 클레리만큼이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이런 것 까지 닮기는 싫었는데. 허리춤에 있던 물병을 꺼내 물 한 모금 했다. 아버지한테 권한다거나, 미리 양해를 구하는 예쁜 짓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왜 해.
"네가 북부로 가야겠다."
클레리 무어는 물을 뿜었다.
"예?"
프레드릭 무어의 무릎이 촉촉했다. 프레드릭은 당장이라도 제 아들의 목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런 망할 놈의 자식이. 아차, 내가 저 놈 아비지. 내가 망할 놈이군.
"유스타프가 널 호출했다."
"예?"
"나도 이해 안 되니 되묻지 마라. 멍청해 보인다."
클레리 무어는 무어 가의 1 후계자고, 수도 내 최고의 망나니였으며, 자타공인 쓰레기였다. 그런 그를 유스타프가? '그' 유스타프가? 클레리 무어도, 프레드릭 무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안 가면 안 됩니까?"
프레드릭 무어는 대답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냐? 하는 투다. 클레리 무어는 한 수 물러나기로 했다. 제 머리를 목에 단단히 붙여놓으려면 하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내가 북부로 간다고. 클레리 무어는 예의바른 하직 인사 대신, 속으로 비속어를 내뱉으며 제 방으로 향하려 했다. 짐 싸야지. 프레드릭 무어가 클레리를 불러세웠다. 인사 가지고 트집 잡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럴 시기는 지났다. 클레리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친다는 계획은 일찍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다.
"중간에 일행 합류한다 했다. 누군인지는 적혀있지 않으나... 제발 사이좋게 지내라."
제발. 프레드릭 무어의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난 그 일행이 저 새끼인 줄은 몰랐지. 볼코프의 '역겨운' 웃는 낯이 클레리를 향했다. 클레리 무어는 볼코프를 한대 더 갈겼다.
- - 3
이리스 유스타프는 일찍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감상에 빠지기 적당한 순간이었으나, 이리스는 그저 무감히 바라보았다. 북부와 햇살이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닌가. 이 생각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탈리아 유스타프*다.
"그들과 약속한 시간입니다."
"그래, 알고 있단다."
클레리 무어와 니콜라이 볼코프*. 비밀리에 초대한 '손님'이다. 한밤중에 도착했다길래, 일단 비밀리에 어딘가에 묵게 하고, 오늘 만나기로 약조했더랬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 제복과 칼 내오거라. 오랜만에 만난 손님을 대충 맞이할 순 없지."
*
털코트와 칼, 유스타프의 제복. 그녀가 젊은 시절 즐겨 입었던 복식이다. 이리스는 칼을 손에 쥐고 여러 차례 휘둘러 보았다. 칼은 그대로였으나, 달라진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공기를 베는 선이 둔탁하다. 왼팔의 통증이 생경했다. 미간을 가볍게 좁혔다. 무리하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의원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몸을 조심하라 염려하던 주변인들의 다정한 말들 또한. 그녀는 오늘 하루 그녀의 몸이 버텨내기를 기원했다. 올해를 넘기지 못한다 하였다. 더 미룰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니콜라이 볼코프를 들라 하라."
다시 한번 호흡했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방금,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
"내가 그대 어찌 불렀는지 짐작가는 바 있는가."
니콜라이 볼코프는 웃음으로 일관했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치밀어오르는 역겨움을 참았다. 칼 빼들어 칼끝을 볼코프의 목덜미에 겨눴다.
"무릎 꿇으라."
그제야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이제야 볼만해졌군. 이리스는 입을 열었다.
"명심하라. 클레리 무어의 일행은 그대가 아니라 탈리아 유스타프였다. 그대는 탈리아의 수행원일 뿐이다. 알겠는가."
"..예."
볼코프의 시선 끝이 떨렸다. 꼴에 목숨은 아깝다는 것인가. 이리스는 시선의 경멸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유스타프는 니콜라이 볼코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반역가의 마지막 후손. 허상에 미쳐 도덕마저 저버린 자. 이리스가 니콜라이 볼코프에게 호감을 표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리스는 칼을 거뒀다.
"그대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볼코프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이리스 유스타프를 향했다.
"나는 살로메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무너졌다. 광기에 가까운 환희가 그 자리 대신했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구역질을 참았다.
- - 3 (2)
- 니콜라이 볼코프*는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었다. 이리스 유스타프의 신발 끝에 입을 맞추었다. 몸 지탱한 팔이 떨렸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기쁨이었다. 집착이다. 광기에서 비롯된 환희가 한낱 인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개만 겨우 들어 이리스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시선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이리스 유스타프는 깨달았다. 저 자는 미쳤다. 단순한 감탄사 따위가 아니다. 저 자는 우리와, 나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지의 것을 마주한 공포가 이리스의 발밑을 느리게 핥았다. 맹견, 아니, 독사의 목줄을 쥔 기분이었다. 유스타프는 볼코프의 목을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내 요구하는 일 모두 성공해낸다면, 살로메의 이름을 알려주지."
볼코프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독대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반역자 요구 들어주어야 하는가?"
"지배자시여."
니콜라이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우위를 점할 기회를 얻었다.
"배신자, 배반자를 누구보다 증오하는 그대가, 정작 배신자들의 왕을 죽이지 않으셨지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해."
내 말이 틀립니까? 검은 뱀이 시뻘건 입천장을 드러냈다. 그 잇몸에는 독니가 박혀 있다. 사과나무를 타고 기어오른다.
"허나 나 말고 그대에게 살로메가 누구인지 가르쳐 줄 이들이 있겠는가? 침묵하는 자들마저 그대를 버렸거늘."
그리고 독수리가 있다. 뱀은 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으로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다.
*
오랜 대화 끝에, 니콜라이 볼코프는 동부로 떠났다. 그 곳에는 독수리와 모종의 계약을 한, 어린 늑대가 기다리고 있다. 카산드라 블랙. 말에 오른 니콜라이 볼코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마냥 즐거웠다. 이리스 유스타프는 판을 지나치게 벌려 놓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따위는 생각치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수습할 수 없는 거대한 체스판을 짜고 있다.
"올해 안에 죽겠지."
과학자의 예리한 눈은 떨리는 칼 끝을 놓치지 않았다. 독수리는 이제 칼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병들었다.
- - 4
언젠가 탈리아 유스타프*가, 이리스 유스타프에게 물었다.
"어째서 클레리 무어입니까?"
"무슨 의미더냐?"
탈리아는 잠시 단어를 골랐다.
"나약하고, 무능하며, 쓸모없습니다. 자신의 지위 뒤에 숨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이지요. 그런 자 북부에 들이는 이유 모르겠습니다."
내뱉는 목소리에는 명백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전형적인 유스타프였다. 이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가 점점 독수리가 되어가는 것이 보기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탈리아는 '자신의' 사람이니까. 가장 어리나, 가장 강단있고 현명하다. 제 형제들인 미네르바 유스타프*처럼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으며, 바실리 유스타프*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캐서린 유스타프*처럼 나약하지도 않다. 탈리아는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경험의 차이로 인한 미숙함만 떨쳐낸다면 분명 훌륭한 유스타프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른 것이다."
탈리아의 시선에 의문이 담겼다.
"네 말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지. 하여 핑곗거리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적당힌 핑계라면... 중앙과 북부의 교류, 가 괜찮을 성 싶구나. 사람들은 내가 클레리 무어의 소문이 진실인지 궁금하여 불렀다고 생각하겠지. 더군다나 내가 노망났다는 소문까지 퍼진 이 마당에는 말이야."
자조적인 웃음이 이어졌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해야지.
*
일주일 뒤, 클레리 무어는 유스타프들의 선물을 받아들고 중앙으로 돌아갔다. 이 때에는 수행원이 동행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
그리고 일주일 뒤, 시어도어 유스타프*의 배우자, 에이버릴 유스타프*가 카시안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누군가가 가슴에 칼로 대여섯번 낭자한 흔적과, 목의 멍자국들, 팔의 긁힌 자국들로 보아, 유스타프 가는 이 것을 살인으로 간주, 살인자를 끝까지 추적할 것이며, 체포한다면 즉각 처벌할 것임을 공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리스 유스타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미간이 좁아졌다. 체념에서 비롯된 한숨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는구나.
- - end
"카산드라.*"
"오랜만이야, 데인드리.*"
"내 이름은 그게 아니야."
*
"유스타프가 블랙과 계약을 하다니, 믿겨지는가?"
"못 믿을 것도 없지. 내가 산증인이니까."
"하여, 무엇을 해준다 속삭이던가?"
"말해야 하는가?"
"그럼, 동료인데."
"우리가 동료인가?"
*
"북부의 지배자가 살로메의 이름을 알려준댔어."
"그 자 드디어 노망났군."
*
"자네는?"
"..."
"말해주게나. 옛 정을 생각하여."
"내 이름에서 블랙 지워내주겠다 말했네."
"..뭐?"
"난 나 자신이 늑대인 것이 싫어."
"..."
"난 루시우스*를 죽일 걸세."
"미쳤군."
"나도 알아."
*
"하여 무엇 해야하는가?"
"영원히 죽지 않는 군인."
"북부의 지배자가 드디어 노망이 났군."
"그것 누가 모르겠는가?"
1.4. Grief ¶
- - 1
- 이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리스 유스타프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애롭고 현명한 유스타프의 가주는 모두의 이정표와 같았다. 북부의 폭풍우가 두려울 때 그녀는 항상 모두의 옆에 있었다. 슬프거나 무서울 때면 그녀를 껴안고 하염업이 눈물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리스 유스타프가 죽은 지금, 우리는 누구를 껴안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그를 제외하면 대체 그 누가 우리를 삶의 혹한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죽음, 갑작스러운 비극. 마치 잘 짜여진 연극처럼. 사람들은 아내와 손윗누이를 연달아 잃은 시어도어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저 철같은 얼굴에는, 도대체. 몇몇 이들은 구역질을 했고, 몇몇 이들은 소름끼쳐 했으며, 몇몇 이들은 도리어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시어도어는 가만히 있었다. 덤덤히 장례를 진행했다.
장례식은 성대했다. 고인의 유언에도 이를 막는 대목은 없었기에 더욱. 3일간 진행될 그것. 북부임에도 불구하고 관 앞에 꽃이 마냥 쌓여갔으며, 꽃이 없는 이들은 북부의 옛 예법대로 마른 나뭇가지를 관 위에 올려놓았다. 산 사람들의 마른 입김이 허공에 떠돌았다. 성긴 영혼처럼 비척거리며 하늘로 피어오르다가 흩어졌다. 곧 이어질 장송곡은 흐느낌에 묻힐 예정이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내가 아는 그는 항상 선량했습니다. 슬퍼하는 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며......"
추도사를 읽던 티르 로레인*의 목소리가 갈라져갔다. 그는 지금 가장 가까운 친우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기나긴 이별이다. 시체에 수의를 입히고, 관을 씌우고, 꽃을 덮고 나서야 실감한 죽음이다. 북부의 별은 꺼지고 말았다. 우리는 극야에 외로이 남겨졌다. 우리를 위한 새벽은 다시 오지 않는다.
- - 2
- 이리스의 장례, 그 첫 날. 사람들이 몰렸다. 슬픔이 북부를 엷게 덮었다. 극야에 남겨진 사람들이 침잠하듯 움직였다. 레퀴엠과 눈물, 눈물과 레퀴엠. 그리고 그에 걸맞지 않게, 울지 않는 상주. 마치 자신만은 철과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는 듯이 무표정을 고수하는 이가 있었다. 표정에 홀로 서리를 머금은 이가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참을 수 없는 슬픔 탓에 그런다 생각하거나,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시어도어 유스타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시선에 무슨 감정이 담겨 있었을지는 당사자만이 안다. 그리고, 그 시선 홀로 받아내는 이만이 안다. 시선의 대부분은 경멸을 담고 있었다.
그 무감을 눈치챈 이들은 시어도어에게 시선으로 침을 뱉었다. 돌을 던졌다. 야유를 퍼부었다.
그 중 하나는 시어도어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울지 않으십니까?"
울음으로 얼룩진 목소리며 표정이었다. 말간 시어도어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울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애통할 것도, 비통할 것도, 슬퍼할 것도...... 혼자 짓씹던 바실리*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제 아버지가 끔찍하리만큼 섬뜩했다. 저것이 정녕 며칠 전 아내를 잃고, 그에 이어 누이마저 잃은 이가 취할 태도란 말인가? 인간 아닌 것이 인간 탈 쓰고 행세하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인간 행세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저것은 인간 행세조차 아니었다. 괴물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제 습성대로 행동하고 있다.
"..없습니다."
바실리는 돌아섰다. 어머니와 고모를 한꺼번에 잃은 이가 지을 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어도어는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마른 입김이 허공에 흩어져서, 성긴 영혼처럼...
그 날 시어도어에게 일어난 특별한 일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아니, 이것 하나뿐이어야만 했는데. 캐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아비를 찾았다. 시어도어는 메마르게 제 딸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비단 애통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바실리가, 모랠리 가의 사람을..."
이어진 말은 시어도어의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바실리가, 유스타프 가의 사람이 타 가문의 종복을 반죽음이 될 때까지 구타했다. 그것도 제 고모의 장례에서. 시어도어는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내 앞으로 불러와라."
캐서린이 바실리를 위해 무어라 말 하려 입 열었으나, 시어도어가 막았다. 변명은 필요없었다.
*
바실리의 뺨이 두어 번 붉게 변하고, 제 아비의 손에 이끌려 지하실에 갇힌 그 날, 시어도어는 나비처럼 지쳐 있었고, 밤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나중에 제 아들이 왜 모랠리를 구타했는지 들었으나 상관없었다. 제 아내의 죽음을 제 누이로 돌리는 사람들. 제 누이의 과오로부터 비롯되었다 수근대는 사람들, 누이는 단지 도망치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는 소문들. 시어도어는 바실리가 그에 반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노하면 사실이 된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저 헛소문이 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 제 아들은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몰랐다. 시어도어는 바실리가 지하실에서 무언가를 얻어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왕좌에 오른 독수리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 믿고 싶었다. 극야에 버려진 것은 시어도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 - 3 (end)
- 장례식 그 두 번째 날.
시어도어는 금면이 풀린 뒤에도 잠에 들지 못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바람이 목 언저리를 감싸고 놓아주질 않았다. 더 이상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이도, 한 밤중에 자신을 불러대며 잔심부름을 시키는 이도 없다. 분명 그랬다. 시어도어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에 들어야 했다. 그래야 그 다음날의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장례 일정은 꽤나 높은 체력을 요구했다. 아무리 시어도어라 하여도 휴식이 필요했다. 피로했다. 그리고 추웠다. 온 몸이 시리도록 추웠다. 시어도어는 제 목을 매만졌다. 어째서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어째서지, 혼자 되뇌었다.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웃옷을 걸쳤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밤 산책을 나갔다. 아니, 시어도어는 문득 멈췄다. 나갔었나? 밖은 너무 춥지 않은가? 그러니까, 따뜻한 무엇이 없는 밤은, 시어도어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얼어붙었다. 난 무엇을 하고 있지?
시어도어는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방 문 밖으로 나섰다.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차마 완전히 나가지 못하고 밖과 안 그 사이를 맴돌았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아주 옅은 입김이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시어도어는 작은 의자에 앉아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요했다. 이따금 늑대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고, 나직한 말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시어도어는 가만히 그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가 시어도어, 하고 부르고 자신의 손을 다정히 잡으면, 영문 모를 라즈베리 향이,
"시어도어."
독수리는 꿈에서 깨어났다. 방금 전까지 묘소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티르 로레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도 결국 사람이었나보군."
잠들지 못하겠나, 티르 로레인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녀에게선 가죽과 바람 냄새, 울음 냄새가 났다.
"아니 자려고 복용했던 차 문제인가 봅니다."
시어도어는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 대답과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티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져갔다. 시어도어는 그 변화를 눈치챘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구태여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의 아들 말일세."
티르 로레인은 철과 얼음에게 감정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시어도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 네게는 이게 어울리지. 티르는 속으로 조소했다. 역시 그녀는 시어도어 유스타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그랬지, 감정 없는 인간은 곧 괴물이라고. 시어도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자네가 내린 처벌을 두고 말들이 많아. 모랠리가 잘못했다는 의견이 다수인데, 나 또한 동의한다네. 과한 처벌이었어."
"유스타프의 일입니다."
허, 하는 소리와 함께 혀 차는 소리.
"자네의 손윗형제의 친우야. 로레인의 가주가 아닌, 그 친우가 하는 조언이라 생각하고..."
"괜찮습니다."
"그 말이 어떤 무게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압니다."
티르 로레인은 더 대화할 가치가 없다 여겼는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섰다. 뒤 돌아 시어도어를 바라보았다. 말간 괴물이 곰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슬프긴 한가?"
"슬퍼할 이유 있습니까?"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시어도어의 얼굴이 돌아갔다. 왼쪽 뺨이 붉어졌다. 그래, 그가 그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독수리를 바라보는 곰에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독수리는 뺨을 맞고서도 그저 묵묵히 있었고, 곰은 그런 독수리를 쏘아보기만 했다. 자존심도 없는가? 조소가 티르의 혀 끝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내뱉지 않았다. 저 이에게는 그런 말조차 필요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
1.5. Liar! ¶
- -1
- 클레리 무어는 똑똑했다. 가정교사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그는 천재였다.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열 살의 클레리 무어는 저보다 나이를 대여섯살이나 더 먹은 이들이나 붙들고 있을 책을 해석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똑똑하고, 무어 가의 장자니까. 클레리 무어는 대수롭지 않아했다. 왜냐하면 이걸 완벽하게 끝내고 나면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니까. 그거면 됐다. 그래서 클레리는 검술을 배웠고, 외국어를 외웠으며, 춤을 밤새 연습했다. 제 무뚝뚝한 아비의 표정이 잠시나마 풀어지는 것이 달콤해서, 그게 한없이 좋아서. 칭찬을 받고 싶었다. 저 잘했죠, 하는 물음에 잘했다는 대답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뿐이다. 그뿐이어야 했다.
세상이 그렇게 안온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클레리는 점점 긴장했고, 주어지는 책은 복잡해져만 갔으며, 대련에서는 울음을 터트리고, 춤 상대의 발을 밟았다. 대신 매 맡는 아이의 종아리는 매일 부르텄다. 클레리는 피멍으로 얼룩진 종아리를 보며 공포를 학습했다. 죄책감을 배워나갔다. 점점 악착같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가정교사 대신 제 아비가 매를 들었던 그 순간, 한없이 차갑던 그의 눈이 더욱 얼어붙었던 그 순간. 매 맞는 아이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다. 귀족보다 신분이 낮은 가정교사가 귀족 아이를 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족가의 가주가 폭력을 쏟아부었던 그 순간에는, 그 공포는 오로지 클레리 무어의 몫이었다.
클레리 무어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나? 지팡이가 허공을 가르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었나?
무어 가의 장자는 오래도록 앓아누웠다. 의원은 조금만 더 때렸다면 영영 허리 아래를 쓰지 못했을 것이라 말했다. 우연찮게도 클레리는 그 말을 들어버렸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직감했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부터는 쉽다. 앞으로 자신의 삶은 평생 이 모양일 것이다. 무력하게 짓밟히는 울새처럼, 힘없이 물어뜯기는 병든 짐승처럼. 클레리의 예상은 맞았다.
공포는 적개심으로, 적개심은 경멸로, 경멸은 분노로, 분노는 증오로, 증오는 체념으로.
*
클레리는 똑똑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어 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 그것 하나다. 그래서 클레리 무어는 그 정반대로 행동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니, 이 결심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확히는 클레리 무어가 무도회장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꼬셨던' 순간으로. (정확히는 꼬셔진 것에 가깝겠지만.) 무도회장 커튼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모두가 안다. 그러니까, 여자가 클레리의 갈비뼈를 옷 너머로 짚었을 그 순간에, 클레리 무어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 아래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소문은 빠르다. 삽시간에 무어 가의 장자가 상처투성이라는 추문이 퍼져나갔고, 프레드릭은 그제야 클레리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가문의 명예와 아들을 저울질했다. 클레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역겨웠다.
작은 무어는 그 순간부터 엇나갔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노출'시켰다. 그래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 테니까.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클레리 무어의 비행이 무도회장 안, 정확히는 귀족 사회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클레리가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건, 좀 더 추접한 이유다. 클레리 무어를 동정하던 사람들도, 이 대목 즈음 되어서는 모두 그에게 침을 뱉었다. 말했잖아, 마녀보다 못한 취급. 오로지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무어 가의 이름만이 그를 비호하는 삶. 그러나 그 이유조차 거짓말인 삶. 가면극은 얼마나 편안하던지. 상처도, 피멍도, 부러진 자국도 모두 숨겨내고, 화려한 겉모습만 드러낸다.
*
거짓말! 거짓말!
*
그의 혀는 검다.
- -2
- 이 제국에 거짓말쟁이가 비단 한 명 뿐이겠는가?
독니를 세우고 나무를 휘감은 이가 한 명 뿐이겠는가?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 니콜라스 볼코프*와 클레리 무어는 그렇게 만났다. 그 때의 볼코프는 반역자가 아니었고, '데인드리'였다. 그 차이만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볼코프 또한 뱀이었고, 클레리 무어 또한 뱀이었다.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 클레리 무어는 '데인드리'에게 다가갔고, 볼코프는 그것을 구태여 밀어내지 않았다. 둘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동시에 서로를 끔찍히 여겼다. 아꼈다는 의미가 아니다. 둘의 관계는 서로의 목을 틀어쥔 채 졸라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에 자신과 지나치게 닮은 이가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단순히 그 이유에서였다. 무의식이니 둘 다 스스로의 살의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평화로웠다.
그 미친 여자.*
그 여자는 늑대였다. 동시에 뱀이었다. 키가 인상적일 정도로 작고, 동공이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여자였다. 표정 변화 또한 없었다. 그러나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도저히 사람이 내뱉을 말들이 아니었다. 이번엔 이 자의 팔을 잘라보지, 이번에는 이 쪽 혈관을....... 그러니까, 당신도 미쳤다 이거지. 여자의 실험을 지켜보단 클레리 무어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그 여자의 형제들*도 모조리 미쳤다는 것을 얼마 뒤에 깨달았다. 그래도 그 여자만큼은 아니었다. 카산드라 블랙은 단단히, 고요히 맛이 가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서 두어 번 키스하려고도 했던 것 같다. 그 때 부러졌던 곳이 갈비뼈였나, 왼쪽 팔이었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
모두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
"난 내 아버지*를 죽일 거야."
언젠가 스쳐지나가듯 한 말이 있었다. 미친 여자가 클레리 무어를 바라봤다. 감흥없는 표정이다. 모든 이야기에 그랬다. 재미없기는, 클레리 무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표정에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감추려고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카산드라 블랙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것을 보면 확실하다.
"사형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나?"
"없는데."
미친 여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자네 미쳤군."
그리고 내뱉은 말은 클레리 무어가 똑같은 말을 내뱉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네, 미쳤군.
"나도 루시우스 블랙을 죽일 것이라네."
그 다음 말은 더 가관이었다.
"하나보단 둘이서 죽이는 게 더 낫지 않겠나."
*
그 다음 날 부터 클레리 무어는 바깥을 돌아다녔다.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고, 대마를 피워댔다. 당연히 블랙 가 암시장에서 사온 것이다. 그 여자가 구멍을 뚫어줬길래, 그냥. 하여튼 클레리 무어는 '시선'을 끌어야 했다. 세간에는 그저 망나니 장자의 비행이라고 알려졌다. 클레리 무어는 소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무어 가의 장자가 사람을 죽였대. 무어 가의 장자가! 무어 가의 장자가, 사람들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클레리 무어는 소문을 빽빽하게 조직해서, 그 사이로 다른 헛소리가 끼어들지 않도록 만들면 되었다. 그래서 블랙 가의 암시장이 조금씩 세력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레 묻혔다. 뭐, 망나니짓 말고도 이것저것 해야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
말했잖는가. 클레리 무어는 똑똑했다. 그것도 아주.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큰 꿈을 꿔야 하는지도 알았다.
이 경우에는, 아주 큰 꿈.
1.6. Pole night ¶
- -1
- 서리 맹약*은 이리스 유스타프의 죽음으로 깨졌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어도어 유스타프는 제일 먼저, 서리 맹약의 중축들을 소환했다. 다시 맹약을 갱신하기 위하여, 누이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하여. 로레인*, 길렌*, 그리고 그 휘하 가문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그러나 방에는 약간의 공허가, 공백이 남았다.
모레츠*가 오지 않았다.
-
"그레이 힐*에서 연락 온 것이 없는가?"
보다못한 티르 로레인*이 입을 열었다. 벌써 모레츠를 사흘 째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올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레츠령과 북부는 멀지 않다. 게다가 여름이다. 길목을 막고 있던 얼음들이 녹고, 녹은 지도 며칠이 지나서, 진흙마저 어느 정도 굳은 상태였다. 이미 루크 모레츠*는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없습니다."
건조한 대답이다. 시어도어 유스타프는 초조했다. 모레츠, 빌어먹을 모레츠. 사실상 서리 맹약을 갱신하는 것 또한 모레츠를 의식해서, 아니, 서부를 의식해서 하는 것이다. 모레츠를 단단한 아군으로 만들어 둬야 했다. 북극성*이 맹주의 죽음을 핑계로 동맹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단순한 이유다. 로레인과 길렌은 그저 명목상 소집된 것이다. 그들 또한 그 사실을 알았고, 그랬기에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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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불안한 것은 길렌이다. 길렌 가는 광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진 가문이다. 현재도 길렌은 광산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모레츠는 오래 전부터 모레츠령과 인접한, 데이흐 산을 눈독들이고 있었다. 금광이 있는 곳이다. 길렌 가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전쟁을 막아주는 서리 맹약이 아니라면, 모레츠는 언제든 데이흐 산을 탈취하려 들 수 있는 것이다. 군사적 기반이 약한 길렌은 속수무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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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불안한 것은 유스타프다. 최근 블랙 가는 분열하고 있다. 루시우스 블랙*과, 이에나 블랙*. 루시우스 블랙이 최근 모레츠와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잔인하고, 악독하며, 비열하다. 또한, 북부의 자본을 조금씩 갉아먹는 가장 큰 이유, 암시장을 체계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모레츠가 루시우스에게 힘을 실어주어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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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불안한 것은 로레인이다. 로레인은 군벌이다. 평화는 군벌에게 쥐약이다. 아무리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해도, 오래 지속되는 평화 앞에서는 스러지기 마련이다. 이 것이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티르 로레인은 그 것을 알 정도의 분별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서리 맹약이 깨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이 일어날 것이다.
-
모레츠는 오지 않았다.
루크 모레츠가, 루시우스와 손을 잡았다.
- -2
- 모레츠*를 제외한 채 서리 맹약은 다시금 체결되었다. 또한, 길렌*의 요청으로 한 가지 조항이 더 추가되었다. 어느 한 가문이 공격당하면, 서리 맹약에 든 다른 가문들은 서로를 도울 의무를 지닌다. 로레인*과 유스타프는 이에 동의했다. 길렌은 이 조항이 마지막 동앗줄과 같았고, 로레인과 유스타프는 길렌이 방파제 역할을 자처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부에게는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북부는 명분으로 힘을 얻은 지역이다. 반역자를 직접 처형한 가문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니 상징적 제스처들이 강력했고, 과거의 일에 의미를 두었다. 북부의 가문들은 명예로 강인해졌고, 제국 모두가 이를 인정했다. 그러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모레츠와의 경제적 교류를 끊겠다 선포하고, 루크 모레츠에게 유감이라는 성명을 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북부는 예전과 다르다.
타 지역과의 교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리고, 북부와 육로를 통해 인접한 가문은 몇 되지 않는다. 개중에는 그레이엄*과 모레츠*가 있다. 그레이엄은 북부 내전에서 북부를 배반했다. 모레츠는 이번 일로 북부를 배반했다. 만약 이 둘 모두와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북부는 육로를 통해서는, 매우 한정적인 교류밖에 하지 못한다. 그레이엄을 택해도, 모레츠를 택해도 모두 비웃음거리가 된다.
-
"루시우스가 바라는 것이 그것 아니겠어?"
'루크 모레츠*가 루시우스 블랙*과 손을 잡았다.' 이 소식은 빠르게 이에나 블랙*에게 닿았다. 이에나 블랙은 한숨 섞인 어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명분은 강력하지만, 연약하지. 북부는 그동안 루시우스를 지나치게 자극했어... 흑백 대비를 노렸겠지. 정의로운 북부와, 비열하고 사악한 루시우스. 상당히 직관적이고 강력한 이미지 아닌가. 내 오라비의 성정에 그것이 가당키나 하겠어?"
작게 웃었다.
"'네깟 놈들이 명분으로 날 위협하니, 나는 너희를 비웃음거리로 만들겠다.' 루시우스가 할 법할 짓이지."
해서, 우리의 연약한 아군을 도와야 할까, 로빈*. 어떻게 생각하니? 이에나의 검은 눈이 울새를 향했다. 울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그다지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그저 복종하는 맹견. 그녀는 그것에 만족했다. 아마 울새가 무슨 말을 얹었다면, 이에나는 웃었겠지만, 울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 망나니에게 연락하려무나. 여름에 쫄쫄 굶는 독수리는 영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겠느냐. 일단 살려두어야 못난 꼴은 면하겠지."
그래서 클레리 무어가 이에나 블랙에게 끌려가다시피 소환되었던 것이다.
-
"무어 가의 장자 아니신가?"
나직한 목소리가 클레리를 맞았다. 클레리 무어는, 첫 번째로, 이 자리가 토할만치 불편했다.
- -3
- 이에나 블랙*은 몸에 털옷을 걸쳤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 위에서 털옷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항상 겨울을 살았다. 머리색과 닮은 겨울을 살았다. 블랙 가의 유일한 백색 머리칼, 그리고 가주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인물. 루시우스 블랙*에게 송곳니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도 살아남는 여인.
17살이 되던 생일, 화려한 잔에 담긴 음료를 마신 뒤 쓰러져, 일주일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으며,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그 잔에 독을 탄 인물 또한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 루시우스, 무리의 알파를 제하고는 감히 그런 짓을 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그녀는 묵인해야만 했다. 루시우스를 고발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 때의 그녀는 지나치게 약했다. 하여 그저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의 모든 삶이 겨울이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들어찼다. 기침을 하면 핏기가 배어나왔다. 억지로 연명하는 삶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나 블랙은 자신과 비슷한 겨울을 살았던 여자를 하나 더 알았다. 이리스 유스타프. 늑대는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 독수리처럼 힘없이 져버리지는 않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일이 뒤따르더라도, 추접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무리의 다른 늑대들을 전부 다 물어뜯는 한이 있더라도.
*
"무어 가의 장자가 오셨군."
수년이 지났다. 이에나 블랙은, 무어 가의 장자를 제 앞에 무릎 꿇릴 정도로 성장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불가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공포 정도는 될 수 있을 터다.
"내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늑대가 입을 열었다.
"가짜 울새를 어떻게든 루시우스한테 잘라내줬음 하는데."
"울새들을 시키면 되지 않는지요,"
클레리 무어는 말을 뱉으면서도 헛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안다. 아니, 그래도, '그' 작자와는 엮이고 싶지 않은데.
"울새가 내 사병단인 것이 공공연한데, 그들이 내 형제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면 제안을 하지,"
그 뒤에 말이 이어졌다.
그제야 무어는 승낙했다. 그리고, 그날 밤, 새 한 마리가 북부를 향해 날아갔다.
*
채셔 블랙은 죽을 것이다.
2.1. 빈 자리 - 시어도어 유스타프 ¶
- 는 항상 차다.
- 시어도어 유스타프는 이따금 붉은 환영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느꼈다.' 환각은 시각을 제한 모든 방향에서 찾아왔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그러니까 나긋하게 시어도어, 하고 부르는 목소리와, 제 손을 가만히 움켜쥐던 온기나, 제 침대 한 켠에 자리잡아 규칙적으로 내뱉는 안온한 숨결 따위의 것들. 시어도어가 잠을 못 이루는 것 또한 이것 때문이었다. 환각은 밤이 되면 더욱 선명해졌기에.
그리고 시어도어는 이들이 사실 환각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기억이다. 자신이 구차하게 붙들고 있는 무엇이다.
정략혼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던 혼인이었다. 시어도어는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또 다른 식을 올렸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 전 두어 번 만나 하지 않았을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를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북부는 춥지요, 예, 당연히. 소문에는 북부에 위험한 금수들이 많다던데, 예, 그러합니다. 유스타프는 독수리를 기른다던데, 제 것은 죽었습니다. 에이버릴*은 말수가 적고 붙임성 없는 독수리를 어려워했고, 독수리는 붉은 머리의 용*을 어찌 대할지 몰라 곤란해했다. 우스꽝스러운 조합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색한 사이였다. 나긋하게 시어도어, 하고 부르는 목소리와, 제 손을 가만히 움켜쥐던 온기나, 제 침대 한 켠에 자리잡아 규칙적으로 내뱉는 안온한 숨결 또한 어색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 시어도어는 매일 아침 에이버릴의 머리를 매만져 주면서도, 잠이 안 온단 중얼거림에 함께 밤 산책을 나가면서도, 붉은 물건들을 봤을 때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질 때 조차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에이버릴이 죽자마자 제 방의 머리끈을 모두 버리고, 밤 산책을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되고, 붉은 물건들을 봤을 때의 뻐근함이 욱신거림으로 바뀌었을 때 조차도. 시어도어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그러니 시어도어가 자신이 어째서 그 여자를 보면 무릎을 꿇고 싶어졌는지, 그와 동시에 발등에 입 맞추고자 하는 참기 어려운 충동이 일었는지 아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여 독수리는 용의 장례에서 울지 않았다. 다만 장례의 첫째 날 밤에, 홀로 방에 돌아와 가만히 가라앉았을 뿐이다. 그러고서도 슬픔인 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테다.
다만 이따금 붉은 색을 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2.2. 헤이 모두들 안녕, 내가 누군지 아니? - 클레리 무어 ¶
- 클레리다! 클레리다!
- 클레리 무어는 중앙 골목 바닥을 말 그대로 기어다니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 이유로는 첫째, 좆같은 북부에서 탈출했기 때문이고, 둘째, 술을 마셨기 때문이고, 셋째, 자신이 '무사히' 살아돌아온 걸 본 프레드릭 무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기 때문이다. 아, 난 아버지가 좆같아하실 때 제일 기분이 좋더라. 두 번째였나, 세 번째 들어간 술집에서 지껄인 말일테다. 프레드릭 무어는 북부에서 클레리 무어가 죽더라도 별 말 하지 않았을 테다. 아마 클레리를 해친 짐승이든, 강도든 간에 큰절이라도 올렸겠지. 뭐, 적어도 클레리 무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행여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봐 아주 조심조심 다녔다. 돌다리도 건너기 전에 한 스무번 정도 두드려봤다는 의미다. 아버지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지.
"제발 좀 일어나주세요..."
그러니까 클레리 무어는 골목 어딘가에 엎어져 있었다. 그것도 어느 한 술집 대문 앞에. 귀족가의 직계, 그것도 장자의 몸에 손댈 수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과, 클레리가 문간을 막고 있어서 오늘 장사는 글러먹은 술집 사장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싫어."
혀꼬부라진 목소리다.
"제발요."
무슨 애 달래듯이, 무릎이라도 꿇다시피 애원한다. 이렇게까지 절박하다면 들어줘야지, 뭐. 클레리는 비척대며 일어나려다가, 순간 허리를 확 숙였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입에서 그동안 처먹었던 것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니까, 저건 소세지고... 오, 베이컨. 토마토조각도 두어 개 인사를 건넸다. 술집 사장은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 가게를 차렸는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
*
다음 날, 클레리는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고, 프레드릭의 경멸어린 시선을 당연히 받았다. 술병에서 깨자마자 밖으로 나갔는데, 두어 명의 사내에게 붙들려 - 당연히 복면이나 가면 따위를 쓰고 있었다 - 흠씬 두들겨맞았다. 둘 다 애인이 있었다. 너네가 좆같이 생겼고, 내가 잘생긴 걸 어떻게 해. 클레리는 멍든 자리를 매만지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맞았다.
2.3. 구토 - 채셔 블랙 ¶
- 미친 개
- 채셔 블랙은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 슬픈가? 불쾌한가? 하등 상관없는 일이니 그저 웃었다. 채셔 블랙은 울었다. 아, 이건 명확하다. 이건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기쁨에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울 때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울었다. 흐느낌을 틀어막기 위하여가 아닌, 말려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하여. 울면서 웃는 건 광기의 시작이라, 누군가가 말했다. 채셔는 미치고 싶지 않았다. 미친 개는 금방 죽는다. 죽은 개의 사체는 쓰레기보다 못하게 다뤄진다. 그래서 채셔 블랙은 자신이 정상적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에 부응하여, 제 입 끝을 감추고 다독이려 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하는 법이다. 채셔는 종종 제 '진짜' 표정을 감추는 데에 실패했고, 그런 날이면 으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를 지나치게 깊게 파고든 이들은 대개 처참히 죽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시키는 것 모두 했나이다."
채셔는 무릎을 꿇었다. 부드러운 속삭임과 같은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채셔 블랙의 눈이 가라앉았다. 분명 칭찬인데. 그는 문득 루시우스*가 보고 싶어졌다. 뭐, 이 사람도 결국 루시우스한테 죽겠지.
누군가가 채셔 블랙을 보고 고요히 뒷걸음질쳤다. 채셔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아, 생각났다. 블랙 가에 빚을 지고 도망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멍청하게 암시장에 기어들어와 일종의 '한 방'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바보같긴, 여긴 늑대굴이야. 채셔는 속삭이며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빚쟁이의 눈에 생리적인 공포가 차올랐다.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나도 사랑해"
채셔는 울며 웃었고, 뺨을 붉힌 채 여자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친 개가 시체 앞을 서성였다.
그러니까, 공포와 사랑, 적개심과 다정함, 경멸과 키스는 결국 같은 맥락의 것. 다정히 굴어줘요, 날 끔찍히 여겨줘.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채셔 블랙은 지금 울고 있고, 지독하게 행복했다.
*
생각 없는 복종이 주는 편안함이란 얼마나 안온한가. 제 의지며 판단을 모두 타인에게 떠맡기는 안이함은 또 얼마나 따스한가. 채셔 블랙은 판단내리지 않았다. 그저 주인이 물어뜯으라 하면 물어뜯었고, 꼬리치라 하면 쳤다. 야생성을 잃은 늑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야생의 늑대에 가까웠다. 무리의 알파에게 철저히 짓밟혀져서, 제 분수를 깨달은 축이었다. 왕좌보다는 바닥이 더 안전하다. 소리치는 것보단 길바닥을 핥으며 기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굴종은 지독하게 안락했다.
채셔는 행복했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이것 봐봐, 나 지금 울고 있다니까.
2.4. Narcissistic - 클레리 무어 ¶
- 악어
- 웃음과 거짓말의 상관관계를 아는가?
아주 먼 과거에, 누군가가 클레리 무어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클레리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보같은 질문이라 치부하고 넘겼다. 답은 명확하다. 웃음은 거짓의 일부일 뿐이며, 모든 웃음은 거짓말일 수도 있겠으나, 모든 거짓말은 웃음이 아니다. 이처럼 정답을 앎에도 답하지 않은 이유 또한 명확하다. 그 질문자가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답을 통해 클레리 무어는 훌륭한 배우가 되었다. 웃음을 배우지 않고 거짓을 배웠다. 하여 훌륭하게 웃을 줄 알게 되었다.
*
하지만 오늘 아침에 클레리 무어는 웃지 못했다. 기분이 아주 좆같았기 때문이다. 클레리가 생각하는 '상쾌한 아침'은 뭉개진 어젯밤의 안주와 인사하는 광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 들어 제정신인 상태가 더 잦아졌다 한들,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술 취한 망나니, 양아치, 철저하게 충동적인 골칫덩어리. 클레리 무어는 제 멋대로 사는 인생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진창에서 허우적거려도 결국 진창이다. 한번 삶의 방식을 결정한 뒤에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을 알고 결정한 것이어도,
후회는 없다.
술 냄새에 찌든 옷가지를 대충 아무 곳에 처박았다. '누군가'는 치울 것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좋은 향이 나는, 새로운 옷을 집어들었다. 이 또한 '누군가'가 값을 치르겠지. 세수를 한 뒤에야 겨우 제 꼴을 되찾았다. 엉성하게 잘린 머리카락을 한데 묶었다. 잊을 뻔 했다는 몸짓으로, 무뎌지기 시작한 지팡이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섰다.
공기가 맑았다. 숨을 들이키자마자 무언가를 깨달았다.
클레리 무어는 자신을 사랑했다.
끔찍하게도.
3.1. 망사랑AU (시어도어가 자신의 사랑을 자각한 AU) ¶
- 비극
- 시어도어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는 빌어먹게 아름다웠고, 그 앞에 선 자신은 끝없이 초라해져만 갔다. 시어도어는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 여자의 손에 얼굴을 부비며 자비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가 날카로운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주길 원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마치 잘 짜여진 비극 속의 연인처럼. 당장이라도 옷자락을 붙들고, 자신을 제발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성을 잃기 직전에, 시어도어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온 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충동 뒤에 이어진 것은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이었다. 흔들리는 눈을 감추기 위해 눈꺼풀을 닫았다. 공포다. 눈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어도어는 문득, ()가 한도 없이 두려워졌다. 그의 신은 사랑이 곧 패배라 속삭였다. 장엄하고, 아주 초라한 패배. 그 패배의 끝은 평화로울 것이라. 시어도어는 무력했다. 그 사실이 끔찍하고, 또, 황홀했다. 그래서 역겨웠다. 도망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