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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레주 공식 카를라 불행연성 ¶
- 카를라: ;ㅅ;
- 귀족이란 의무 위에 명예가 있어야만 하고, 의지 위에 규칙이 있어야만 진정한 귀족이 될 수 있다. 즉, 아래를 돌봄과 동시에 위를 다스리고 주위를 골고루 살피는 것. 귀족의 시작은 본인의 명예와 규칙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백작은 요즘 들어 흰 머리가 늘었다. 다름이 아닌 자신의 말괄량이 딸 카를라 때문이었다. 장녀라는 이름이 있기에 후계자가 되었고, 그 능력이 부족하지 않기에 사람들의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영지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많았기에 아무리 배상한다 하더라도 그런 카를라가 백작위를 이었을 때, 과연 분란이 없을까. 백작의 고민거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오월의 영지는 한창 농경기로 바쁜 시기이다. 특히 한 성을 다스린다는 입장에선, 더더욱 문제가 생기기 쉬운 법이다. 외성의 백성들은 몬스터의 침입을 두려워하진 않으나, 영지 안의 사고에는 예민해진다. 내성의 백성들은 그 주머니가 열리는 것으로 영지의 흥망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주머니가 열리지 않는다면, 곧 영지는 무너진다는 말이었으니.
백작은 요근래 고민이 많아졌다. 카를라를 백작후의 자리에서 해임시키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수도원에 보내어 혹시라도 일어날 정치 싸움을 배제시키는 것이 좋을지 더더욱 고민이 되었다. 최근에 둘째의 성장세가 급격히 늘어난 지금. 그에게는 선택지가 너무나도 늘어졌다.
침묵의 정적을 깨고 느릿느릿한 노크 소리가 문 바깥에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손님이 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 할 만큼, 그는 너무나도 피곤함을 느꼈다. 백작은 문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게."
고풍스런 나무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은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이 영지의 운영을 돕는 집사였다. 한때는 전장에서 기사로써 이름을 높이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어 은퇴함과 동시에 자신의 영지에 집사가 되었다. 30년 이상.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피로가 심하시군요."
백작은 말 대신 눈웃음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집사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곤 찻잔에 자신이 가져온 차 한 잔을 따랐다. 잔은 슬그머니 백작의 앞에 놓아졌다.
"고민이 많아지니 어쩔 수 없었네. 차는 잘 마시지."
백작은 자신의 친우가 내민 잔을 잡았다. 뜨겁지 않은 잔은, 서리가 생길 만큼 차가웠다. 집사는 알고 있었다는 듯, 하나의 잔을 더 꺼내어 친우의 차. 술을 한 잔 담았다.
"자네라면 능력이 뛰어난 둘째와 자격이 있는 첫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 같은가."
백작은 술이 든 잔을 한 번에 마셨다. 차가운 술과 다르게 온 몸이 뜨거워지는 술의 향이 입을 떠나지 않았다. 서부에서 마신다는 독주. 고민이 많은 때에 마시는 술이다.
백작의 질문에 집사는 잠시 고민하듯, 음 하는 소리가 닫힌 입에서 울렸다.
"저라면 능력이 뛰어난 둘째를 선택할 듯 싶습니다. 아마도 카를라 아가씨와 ......... 를 말하시는 이야기시겠지요?"
"조금은 모르는 척 해주면 안 되겠나?"
"노력하겠습니다."
둘의 분위기가 조금은 유쾌하게 풀렸다.
"재능이 있다. 능력이 있다. 아무리 지금 왕국이 평화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작님이 계시는 지금만입니다. 백작님이 죽으시면 이 땅의 규칙, 풍습, 성격 모두가 바뀌겠지요. 그런 면에서 현재의 땅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영지를 지키고, 돈을 벌고, 영지를 확장시키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아쉽게도 더 재능있고, 유능한 영주가 필요합니다."
집사의 말이 맞았다. 카를라는 천성이 자유롭고, 백작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영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 말괄량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서 둘째에겐 파벌이 있다. 지금의 부인과 가문의 어르신들. 그 둘을 이용할 수 있는 둘째와 달리 카를라는 그런 힘을 만들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급사한다면 가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집사는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카를라인가? 아니면 둘째일까.
"친구."
백작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처음이 보통의 울림을 내는 현악기와 같았다면 지금은 깊은 소리를 내는 관악기처럼 들렸다. 집사는 살짝 눈썹을 움직였다가 고개를 숙이고 답을 기다렸다.
"우정을 믿고 부탁하겠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자네는 누구의 편도 들지 말아주게."
백작의 말에 집사는 말 대신 잔 가득 술을 따랐다. 어쩔 수 없다. 백작은 그 답없는 대답에 자신도 말 대신 잔을 비워냈다. 쓰다.
고민에 더더욱 쓴, 술의 맛이 고통스럽다.
5. EVENT : 스레주배 신춘문예 ¶
- 제뉴어리주
- 내가 A군을 처음 본 것은, 1년 전 신화와 관련된 강의에서였다.
당시 에탈베니아 국립 마탑에 막 들어온 신입생이었던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상상으로만 해왔던 마탑 생활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첫 강의 시간에 운명 같은 만남은 없을까. 그리고 A군은- 이 두 가지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평민도 귀족도, 심지어 나 같은 이종족마저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이 에탈베니아 국립 마탑에서 그가 사우전의 귀족 도련님이란 사실은 크게 유별나지 않았지만, 그의 외모만큼은 교수님이 오기 전 강의실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유별났다. 민 제국의 사자성어를 빌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미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이기에 아름다움을 타고 난 나조차도 그의 옆에 서 있다면 하나의 오징어와도 같아 보일 정도다. 그래서일까? 당시 그의 옆에는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강의실에 늦게 찾아온 나는 빈자리가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A군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님은 첫날부터 조별 과제를 위해 조를 짜 주었는데, 귀찮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앉은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조원이 선발되었다. 그렇게 나와 같은 조가 된 그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다.
A군이 귀족이라고 해도 교수님이 내주시는 과제 앞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다를 게 없었다. 조별 과제를 진행하는 동안 A군은 귀족이라고 슬쩍 빠진다거나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이 충실하게 제 맡은 바를 다 했는데, 의외로 이런 면모 덕분에 나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
그는 글을 정말 더럽게 못 썼다.
그가 수줍게 보여준 정리 글을 보고 나는 A군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분명 자신의 영지에서 글을 똑바로 쓰는 법은 교육받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 점은 다른 조원들에게는 A군의 예상치 못한 매력 포인트로 다가왔지만, 조장을 맡게 된 나는 슬픔을 참고 그가 써 온 분량을 전부 수정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에게 약간의 대가를 받고- A군이 글을 쓰면 거기서 모자란 부분을 말해주거나 수정할 부분을 알려주는 등, A군을 처음 만난 신화 강의가 끝난 이후에도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서포트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A군이 건내는 수첩을 받고 온 길이었다. 과제는 아니고- 용마대전을 주제로 해서 아이들도 알기 쉽도록 글을 써 봤는데, 한 번 봐줄 수 있을까? 봐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의 글을 보기 전에는 충분한 심호흡과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겼다.
- - - - -
"크아아아아"
드래곤중에서도 최강인 볼카나쉬가 울부짓었따
볼카나쉬는 졸라짱쎄서 드래곤중에서 최강이었다.
볼카나쉬는 드래곤의 왕에 만족하지 않거 신이 되고 시퍼했따
그래서 세계수를 불태웠따 볼카나쉬는 새상에서 하나였다 어쨌든 걔가 울부짓었따
한편 서부에선 드라노마이어가 나타났따
드라노마이어는 인간인데 희셍자 에탈라가 만드럿따 형이랑 졸라게 수련해서 졸라 강해졋따
그래서 볼카나쉬와 싸웟따 드래곤중에서도 최강인 볼카나쉬도 드라노마이어 앞에서는 졸라 야캤따
싸움 끝에 볼카나쉬는 주겄따
그러케 드라노마이어는 드래곤의 신이 되어 승천햇따
끝
- - - - -
"이게 뭐꼬."
나는 그만 그 내용을 다 읽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존
- 칠전팔기와 꽃이 피어난 마을.
옛날 옛적. 지금보다 가까우면서도 먼 시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용사를 꿈꾸던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은 세계를 떠돌며 좋고 나쁜 일을 배웠고 번쩍이는 갑옷에 두둑한 돈 주머니를 지닌 청년으로 돌아왔다. 늙은 청년의 아버지는 물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온 소년을 환대했다. 커다란 가축을 잡아 잔치를 벌였고 청년은 알싸한 취기와 두둑한 배를 두드리며 그리운 이부자리에 잠들었다.
그날 밤. 청년의 집에 대여섯 사람이 들이닥쳐 청년의 돈 주머니를 노렸다. 독사와 독버섯을 뭉개 만든 독을 묻혀 날아드는 칼날을 청년은 능히 피해냈으나 청년의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순식간에 침입자는 청년의 칼날에 베어졌고 청년의 아버지는 시름시름 쓰러지고 말았다. 청년은 여행중에 구해온 해독제를 아버지의 입에 부었으나. 늙은 아버지의 몸은 독을 버티기 힘겨워했다. 아마 다음날의 태양이 하늘의 중간에 떠오를 무렵에는 청년의 아버지는 떠나고 말리라.
그 순간에 청년의 머릿가에 어릴적에 들은 전설이 스쳤다. 마을 근처의 어느 산 깊숙한 장소에 사는 바위의 마수에 대한 전설이었다. 탄생과 함께 높은 지성을 타고나는 바위의 마수의 머리에는 순백의 꽃이 피어나는데 그 꽃은 마수의 생명의 원천이기에 어떠한 질병도 치료하며 어떠한 독 또한 치료하며 죽어가던 사람조차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 전설을 떠올린 청년을 검을 집어들고 산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날이 밝기 전에는 마수를 만나리라. 정리되지 않은 짐승의 길을 타며 나뭇가지가 청년의 뺨을 긁어댔다. 보이지 않는 절벽을 기어오르느라 죽음의 순간을 계속해서 겪었다. 마침내 동이 터오르며 소년은 마수를 마주했다. 그것은 바위로 이루어진 짐승과도 같았다. 6개의 다리는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더욱 거대했으며 꼬리부터 시작하여 등줄기에는 바위 가시가 솟아올라 있었다. 마수가 거대한 입을 열자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울림이 퍼졌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청년의 눈에 마수의 이마에 자라난 순백의 꽃이 들어왔다.
눈처럼 새하얀 순백의 꽃이.
검을 치켜들었다. 대화는 없었다. 시간은 아직도 흐르고 있었다.
해는 하늘의 중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끼어 들 수 없는 혈투가.
먼저 뻗어나간것은 청년의 검이었다. 마수에게 뻗어나가는 검날이 앞발에 부스러졌다. 검이 동강나 흩어졌다. 상관없었다. 청년의 검은 수 없이 많았으니까. 두 번째 검이 날아들었다. 마수의 강대한 힘에 손아귀가 찢어졌다. 검을 놓쳤다. 세 번째 검이 날아들었다. 마수의 갑각을 찔러 부수지 못한채 튕겨났다. 마수의 발톱이 청년을 갈랐다. 청년은 마수보다 더욱 거친 외침을 토하며 날아갔다. 네 번째 검을 꺼내들어 달려들었다. 마수에게 박혔으나 깊지 못 했다.
다섯 번째 검은 허공을 갈랐다. 마수의 발길질에 피가 퍼졌다.
여섯 번째 검은 힘 없이 던져졌으나 마수에게 닿지 않았다.
마수가 쓰러진 청년을 한 없이 비웃었다. 조롱하듯 꽃이 피어난 자신의 이마를 갈라보라 말하였다. 그럴 수 없었다. 청년은 그 꽃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으니까. 그렇지만 이마를 가르지 않는다면 마수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 박혔던 네 번째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갈라져있던 마수의 살점이 붙고 바위가 피부를 뒤덮었다. 청년은 절망하지 않았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마수는 어찌하여 그러하냐 물어보았다. 청년의 대답이 없었음에도 마수는 어느새 붉어진 청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대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마수 또한 패배해서는 안되었다. 둥지에 있을. 어쩌면 어미인 자신의 싸움을 지켜볼 어린 마수가 있었기에. 애초에 정의 따위는 없었던 싸움이었다. 청년은 세상을 떠돌며 그것을 깨달았었다. 청년은 묵묵히 일곱 번째 검을 꺼내들었다. 검에 핏빛의 검기가 둘러졌다. 찰나의 순간에 핏빛이 터져나와 마수의 다리를 부수었다. 마수의 다리는 여섯이었다. 하나가 없다한들 거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제까지 미약한 대응을 하던 마수는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그것이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전력으로 투구하는 마수의 거체를 급히 검을 들어 막아내었으나 검과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청년이었던 핏덩어리는 절벽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태양은 정오에 다다랐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 청년의 아버지는 한참 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주마등이라 하던가? 여행을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대장장이였던 아버지는 손수 만든 검을 쥐어주며 미소지어주었던 기억. 자신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기도했던 기억.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핏덩어리는 몇 번이나 넘어져가며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검이 들려있지 않았다. 꺼낼 검도 이제는 없었다.
그것이 어쨌다는거냐.
핏덩어리는 다가오는 마수를 노려보며 마지막 숨결을 토해냈다. 마수는 그러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였다. 삶의 끝을 맺어주려 하였다.
마수의 발길질이 떨어져내렸다.
발길질이 갈라져 나갔다.
마수는 놀란 표정으로 청년을 보았다.
마지막 숨결이 이어지고.
청년은 끝에서 무아를 보았다.
청년의 손에는 무형의 검이 들려있었다.
무형이었으나 그것은 예전에 부서졌을터인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던 검이었다. 여덟 번째 검에 핏빛이 담겼다. 검은 휘둘러졌고 쓰러질리 없는 마수가 쓰러졌다. 혈투는 끝나고 청년 또한 쓰러지고 말았다.
☆
지난 밤. 작은 마을의 약초꾼은 독사와 독버섯을 뭉개 만든 독을 만들었었다. 그는 탐욕스러웠고 그렇기에 청년의 돈 주머니를 노렸었다. 그 일은 실패하였지만 아무도 약초꾼을 의심하지 않았다. 약초꾼은 어리석은 마을 사람을 비웃으며 청년이 향한 산으로 향하였다. 운이 좋다면 돈 주머니를. 더욱 운이 좋다면 순백의 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만병을 통치하는 약은 얼마에 팔 수 있을까? 비죽이 웃으며 약초꾼은 청년의 흔적을 밟았다. 절벽으로 오른 흔적이 있었으나. 약초꾼은 돌아가는 길을 알고있었다.
한참을 길을 오른 약초꾼은 마수와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약초꾼의 광소가 한참을 울렸다. 희희낙락하며 돈 주머니와 꽃을 챙기는 손놀림이 기분 나쁘도록 경쾌했다.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채 물건만을 챙긴채 약초꾼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날 이후로 약초꾼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어린 마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위의 마수는 탄생과 함께 높은 지성을 타고난다. 그렇기에 그 광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미의 이마에서 꽃을 따가는 약초꾼의 역겨운 표정이 뇌리에 간직되었다.
어린 마수는 그런 기억을 간직한채 거대한 마수로 자라났다.
약초꾼은 아직도 살아있었다.
다행이었다.
어리석은 인간에게 종말 있으라.
분노한 마수의 발길질에 마을은 멸망하였고 주민들은 몰살당하였다. 외진 마을이었기에 아무도 마을의 멸망을 알 수 없었고 긴 시간이 흘러 그곳에는 꽃과 풀이 자라나 마을의 흔적조차 뒤덮고 말았다. 자연의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고귀한 귀족의 화원과도 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독한 화원.
바위의 마수는 그곳에서 홀로 남을 뿐이다. 언제까지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까지.
- 아이 멀린
- -이건 책에서만 보던 몽환사가 보여주는 꿈일까?
바람에 살랑이는 달밤의 달맞이꽃밭, 둥그런 만월 아래서 꼬리를 살랑이는 늑대귀의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사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마을에 단 하나뿐인 도서관. 햇볕이 잘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에는 햇빛이 닿지 않도록 슬그머니 각도를 조절하여 글자를 읽었다. 문 비스트는 짐승의 신 바라투스의 자손이자.... 거기까지 읽어내렸을 때, 창 밖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라 책을 내려놓고 밖을 보자, 익숙한 얼굴의 아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재밌는 일이 있는 거겠지. 다시 자리를 잡고 책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아저씨."
"세실. 오늘도 책이냐? 이야 녀석, 겨우 열 살 짜리가 벌써 이런 책을 읽고, 나중에 고명한 학자가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농담이 심하세요."
이제 주름이 눈에 띄는 나이의 아저씨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괜찮다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 하실 게 있지 않느냐며 얼른 아저씨를 보낸 나는, 아저씨가 있던 곳을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목발을 집어 들고, 무릎 아래가 텅 빈 오른 다리를 조심하며 왼 다리와 목발로 몸을 지탱했다.
날 떄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호기로운 친구들과 함께 숲에 들어갔다가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늑대에게 먹힐 뻔 한 친구를 밀어버린 대신, 내 다리가 날아간 것 뿐이다. 다행히 그 뒤로 아이들이 숲으로 들어갔다는 걸 알아챈 어른들이 와서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나만 두 다리로 설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사제를 부르면 다리를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늑대에게 먹힌 것이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는데다가, 그런 사제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이 우리 집에는 없었다.
자랑거리라고는 자그마한 도서관이 전부인 작은 마을. 내 사정은 금새 마을 전부에 퍼졌고, 다들 내게 위로를 건네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고, 나는 더이상 친구들과 섞여 노는 것이 힘들어졌다. 나는 예전부터 몰래 들어가곤 했던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구해준 아이가 도서관 주인네 아들이라는 것이 그나마 내게는 다행이었나. 아저씨는 감사의 표시인지 글까지 알려주신데다가, 도서관에 들어와도 별 말씀 안하셨으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분명 오늘은 보름이었지. 나는 오늘 밤을 기다렸다.
나는 보름달 밤, 새벽이 오기 무섭게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목발을 챙기고 그 밑에 천 몇 장을 감싸 묶었다. 빼꼼 머리를 내밀어 부모님이 잠에 드셨는지 확인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
동쪽에 있는 숲, 유독 키가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쭉 걸어가서 나무에 엉성하게 그려진 표식을 기준, 왼 쪽으로 꺾어서 그대로 계속 가면 나타나는 드넓은 달맞이꽃밭.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달맞이꽃을 타고 흘러간 내 물음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대답했다."세실? 나 있어."
달맞이꽃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올린 건. 늑대의 귀를 가지고, 꼬리를 가진 예쁜 여자아이였다. 저 아이가 늑대 문비스트 메리였다.
문 비스트는 보름달이 되면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짐승으로 변해 폭주한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름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누구 있느냐며 물었을 뿐이다. 그래. 처음.
처음, 그 날. 어른들은 연민과 동정을 하며 보고, 아이들은 거기에 더해 귀찮은 짐을 여기듯 나를 보았다. 내 과잉반응일지도 몰랐지만,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밤이었다. 나는 다리를 짓이기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이제 더 없는 오른쪽 무릎 아래가 아팠다. 뾰족한 송곳니로 씹는 듯한 고통. 나는 남은 부분을 붙잡고 이를 악문 채 버티다가, 고통이 가라앉아 땀투성이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의 연민과 고통에 절어진 머리,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말았다. 한 쪽 없는 다리로 달려나가려다 넘어지고, 목발을 집어 들어서 가능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괜찮은 척 한 보람이 있는지 부모님은 그저 자그마한 소란인 줄 알고 나오지 않으셨다.
나는 있는 힘껏 앞으로 향해. 숲으로 들어갔다. 숲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외쳤다.
"돌려줘!"
내 다리를 돌려줘. 내 평소를 돌려줘. 친구들을 돌려줘. 제발 다 돌려줘. 나는 심야의 숲에서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작정 돌아다니며 외쳤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곧바로 일어서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그건 정말로 우연이었다.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엉망으로 달리던 나는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놀라 넘어졌다. 그 곳은 달맞이꽃밭이었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가만히 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이건 책에서만 보던 몽환사가 보여주는 꿈일까?
바람에 살랑이는 달밤의 달맞이꽃밭, 둥그런 만월 아래서 꼬리를 살랑이는 늑대귀의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소녀는 꽃밭 가운데 홀로 있더니,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흔들흔들 위태로워보이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분명 문 비스트다. 지금은 보름이다.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귀를 보자마자 몸이 멈췄다. 늑대였다. 목발에 기대 반쯤 일어나려던 몸이 떨어졌다. 늑대였다. 늑대다. 늑대야. 숨이 거칠어졌다. 늑대는 마침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작은 손으로 내 뺨을 잡았다.
"...쉬이..괜찮아.."
늑대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멍하니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늑대는 반복하였다. 그녀는 더듬더듬, 내 몸을 만지더니 천천히 앞으로 움직여서 나를 껴얀고, 등을 두드렸다. 터질듯하던 심장이 가라앉고, 나는 더듬거렸다.
"도, 돌려줘."
"응."
"내.. 내 다리. 내 평소. 내 친구들..."
"그래."
"...흐으... 흐으앙..."
느릿하고 어설프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나는 그날 울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나는 나를 부르는 메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내 얼굴을 보고있다 생각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보는 것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허공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잡아, 위치를 바로해주었다.
"음.. 그냥.. 처음 만난 날."
"...그 때. 세실 엄청 울었"
"제발!"
메리는 보름달에 폭주하지 않는 문 비스트였다. 보름달 아래서도 야성에 먹히지 않는 이성은 굉장했지만, 그대신 선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하고도 친하게 지낼수 없었다고 한다. 앞도 안보이고, 행동도 느릿한 굼벵이. 부모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거의 방치당한 채 지냈다고 한다. 그게 싫어던 메리는, 보름날이라 모두 신경을 못쓸 때 몰래 마을을 빠져나와. 무작정 냄새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이 달맞이꽃밭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로 보름날마다 이 달맞이꽃밭에 들어왔고, 나를 만난 것이라고, 메리는 달빛을 가득 품은채 웃으며 말했다.
"메리. 저기 말이야. 세상은 엄청 넓데. 내가 있는 마을이나, 메리네 말고도, 세상은 엄청 넓다고 해."
"엄청?"
"응 엄청!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 그 넓은 세계를 다 돌아보자. 그러면 언젠가 메리의 눈이나, 내 다리가 나을지도 모르잖아."
메리는 그 말을 듣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지만 금새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앞도 안보이고... 느림보인데..."
"나도 다리가 한 쪽 없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괜찮으니까. ..혹시 가기 싫어?"
내가 조금 우울하게 말하자 메리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슬쩍 웃고는 메리의 손을 잡았다. "그럼 약속이야." 라고 하면서, 서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을 때.
"세실!"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등뒤가 싸르르 올라왔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린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보였다. 나는 목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는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내 뺨을 후려쳤다. 찰싹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맞은 뺨에 손을 대고 엄마를 올려보았다.
순간 농기구를 든 어른들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메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빠가 붙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아빠는 "무서웠지? 앞에 문 비스트가 있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하필 늑대인 거 같고.." 라는 말만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따. 나는 결국 목발로 아빠의 정강이를 때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메리! 손!"
"세실,"
메리는 내 손을 잡았다. 어른들은 내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움직임이 멈췄고, 우리는 그 사이에 얼른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내 다리는 여전히 한 쪽이 없었고, 속도는 느렸다. 잡힐 거 같다고 중얼거리자 마자 메리는 나를 잡고 들어 안았다. 그리고 바로 뛰어나가며 말했다.
"우리, 이대로 여행을 떠나자."
"이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 같아. ..넓다고 했잖아.. 세실이."
"..응.. 그러네. 가자. 그러자."
나는 앞만 보고 뛰어가는 메리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도 좋을 거 같았다. 이대로 뒤는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고? 메리가? 나는 메리의 눈이 향한 곳을 보았고, 그대로 외쳤다.
"메리 멈춰, 저기 앞에나무가아아아!"
쾅.
"..무슨 생각해?"
"...음.. 그냥 옛날 생각."
"...나 이거 알아.. 향수병?"
"아직 출발도 안했거든."
"..그치... .... ... 기대된다."
"그러게. 허락 받는 거 힘들었으니까 말이야."
"다리 나았으면 좋겠다."
"네 눈도 나았으면 좋겠네."
"응. ...이제 갈까.."
"그러자. 그럼."
""잘부탁해.""
- 오웬
- 영광스러운 카두스파시아 공국의 서쪽에는 드넓은 평야지대가 있고, 그 곳은 야만의 땅이었다. 말을 타고 창을 든 사람들이 흩어져 서로 죽이고 빼앗았으며 들판은 언제나 피로 얼룩졌었다.
그러나 한 인간이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에 끝을 맺었다.
사우전의 카로토 1세. 하얀 독수리는 서쪽의 땅을 굴복시켰고 그 후손은 기어이 동쪽의 풍요로운 땅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었다.
정예 기병대 헤르베니아가 파죽지세로 공국의 보병들을 돌파할 때 마다 전선은 동쪽으로 밀려났다. 공국은 요새와 성들을 중심으로 전선을 유지하려했지만, 사우전의 사령관은 이를 무시했다.
사우전의 사령관 헤거스테론 공작은 군대를 이끌고 공국의 수도로 들이닥쳤고 사우전의 선봉장이 성벽 앞으로 나아갔다.
다가닥. 다가닥.
푸르르르...
- 카두스파시아의 사내들이여! 나는 엘프 마실리아! 가탈라토야 기사단의 단원이며 헤르베니아의 선봉이고 헤거스테론 공작과 사우전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다. 어디 나와 생사를 가늠해볼 자가 있느냐!
성벽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장군의 눈에 한 명의 엘프가 들어왔다. 말에 올라 등에 활을 메고, 허리에는 전통을 꾸려놓고 갑옷을 입은 기사. 한 쪽 귀를 잃은 엘프는 이 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장군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저 자인가. 헤르베니아의 영웅이."
그 말에 부관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장군. 병사들이 듣고 동요할 수도 있습니다. 짝귀라고 부르시죠."
"그거 참 잘 어울리는 별명이군. 누가 지어줬지?"
"제가 방금 지어줬습니다."
"훌륭하네."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살이 간신히 닿지 않을 거리에서 홀로 서서 성벽을 노려보는 엘프와, 그 뒤에 보이는 수만의 병사들. 양익에 나뉘어 성벽마저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의 헤르베니아.
그에 비해 공국의 병사들은 정예는 커녕 병사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했다. 적군이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던 여러 요새와 성들을 무시하고 수도로 달려올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성벽에는 급히 징집된 일반인만 있었다. 썩은 나무창대를 들고 솜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었고, 살찐 수도 경비대원들이 중간중간 섞여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다. 보호받아야할 아이들과, 숨어서 떨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여자들도 올라와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공국의 정예와 용기있는 자들은 모두 전선에 나가있었고 남은 것은 쭉쩡이들 뿐.
"병사들에게는 무조건 자리만 지키라고 명령을 전달하도록 하게. 우리의 목표는 전선에 나가있는 병력들이 돌아올 때 까지 버티는 것이니."
"신신당부하겠습니다 장군."
부관은 명령을 전달하러 내려갔다. 곧 성벽에서 지휘관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장군은 성벽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런 장군의 뒤로 젊은 남성이 다가왔다.
"아버지."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음색. 장군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펠릭스."
펠릭스는 장군의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찰나에 성벽 아래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녕 나서지 않을셈인가! 카두스파시아에는 겁쟁이밖에 없는 모양이구나!
- 하하하하하하!
적군의 진영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뿌득, 하고 이빨을 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아버지. 저 풀떼기놈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참기만 하실겁니까?"
"네가 나서서 싸우기라도 할테냐? 아서라. 너가 상대할 수 없는 자다."
"해보지도 않고서 어찌 안단 말입니까?"
"그래. 해보지도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 기회비용은 너의 목숨이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이전에 카두스파시아 공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귀족입니다. 제 목숨으로 공국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지지도 않을겁니다."
"너는 공국의 귀족이기 이전에 내 아들이야! 저 자가 뭐라고 불리우는지 모른단 말이냐!"
얼굴이 시뻘개진 장군은 펠릭스에게 소리지르며 삿대질했고, 펠릭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잠시동안 부자 사이에는 날카로운 눈길만이 오갔다.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고, 펠릭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성벽 위에 싸울 줄 아는 자들이 있기는 합니까? 이 곳에 전사는 없습니다. 전사는 커녕 피를 보고 기절할 사람들만 가득하단 말입니다."
"....."
"전선에서 병력이 되돌아오기까지 최소 나흘입니다. 그 때 까지 마법사도 없이 이런 자들을 이끌고 정녕 성벽 위를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리를 잡고 그 위치를 사수하기만 한다면..."
"하. 겁에 질려서 도망가느라 전열이 벌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요."
"말이 심하구나. 펠릭스. 저들은 공국을 위해 창을 든 자들이다. 아무리 못미덥라도 그 의지만큼은 존중해야 할..."
"거듭된 패전으로 떨어진 사기가 아버지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성벽 위에 선 자들중에 그 누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창칼을 들이밀고 올라가라 하니 올라간 것 아닙니까. 지금 버텨내려면 작은 승리가 필요합니다. 저 풀떼기 놈을 제가 꺾겠습니다."
"펠릭스!"
"출전을 허락해주십시오. 장군."
"그 말을 하려고 올라온 것이었더냐."
장군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말없이 아직 젊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큰 키. 뚜렷한 이목구비. 갑옷에는 긁히고 패인 자국으로 가득하고 들고있는 검은 예리했다. 굳은 의지와 호승심, 분노가 섞인 감정이 눈빛에서 흘러나온다. 어느새 이렇게 커져버렸는지. 언제나 자신의 자랑이었던 아들. 어린 나이에 병으로 제 어미를 잃었음에도 바르고 씩씩하게 커 가문의 미래라 생각한 아이가 스스로 쉬온델에게 향하려 한다.
"펠릭스......"
"허락해주십시오."
펠릭스는 단호했다. 장군은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아들아....평화로울 때는 아들이 아버지를 묻지만, 전쟁일 때는 아비가 아들을 묻는다는 이야기를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해다오."
펠릭스는 흉갑위에 오른손을 올려 인사하곤 등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걱정하는 아비의 눈길을 무심하게 외면한 펠릭스는 장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문을 열어라!"
펠릭스는 검을 들고 말을 달려 성문을 나섰다. 성벽 위에서 환호성이 들려온다.
"카두스파시아에는 겁쟁이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 용기있는 자가 있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마실리아가 크게 외치자 펠릭스는 검을 뽑아들며 받아쳤다.
"카두스파시아 공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수도를 굳건히 수호하는 데리아만트 백작의 장자! 펠릭스 드 데리아만트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펠릭스와 마실리아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펠릭스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마실리아는 등자에서 발을 빠르게 빼더니 허리를 뒤로 눕혀 검을 피해냈다. 서로는 간신히 스쳐지나갔고 다시 말머리를 돌려 서로를 향해 달렸다.
후웅 - !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내리꽂히는 펠릭스의 검. 마실리아는 떨어지는 검보다 한 발 앞서 미리 등자에서 빼놓았던 발을 안장 위에 올렸고 검이 다가올 때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어엇!
펠릭스의 당황섞인 외침이 있었고 마실리아는 곧바로 펠릭스의 눈을 손바닥을 활짝펴서 가리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쿠당탕탕탕!
펠릭스가 먼저 낙마했고, 그 위를 마실리아가 짓눌렀다.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펠릭스. 마실리아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어느새 활시위를 풀어 펠릭스의 연약한 목에 걸었고 힘껏 조이기 시작했다.
"켁...케헥...케흑....컥..."
마실리아는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힘을 강하게 쥐며 시위를 당겼다. 펠릭스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얼굴은 보랏빛이 되어갔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은 마실리아의 차분한 대응에 힘을 잃었다. 곧 펠릭스의 몸은 축 늘어졌고 마실리아는 단검을 꺼내 목을 잘라내어 높이 들어올렸다.
와아아아아아아 - !!!!
적군의 진영에서 승리의 함성이 들렸고, 성벽 위는 고요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장군은 눈을 감았다. 헤거스테론 공작은 진군 명령을 내렸고 공국의 성벽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함락되었다. 성문이 불타올랐고 성벽은 피로 가득찼다.
전투가 끝나고 장군은 온 몸이 묶여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장군의 귀에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장군의 앞에서 멈췄다.
장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데리아만트 백작. 아들의 일은 유감이오."
"죽이시오 공작."
"아직도 감정적이시군. 아들을 잃은 충격이 크셨나보오. 공국이 정예를 전부 전선에 내보낸 이유는 바로 당신을 믿었기 때문일텐데 말이외다. 백작 때문에 수도를 함락시키는건 쉽지 않다고 여겼는데."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렇지. 백작에게는 소용이 없겠소만, 내게는 소용이 있다오."
"시끄럽소만."
"백작은 경솔했소. 헤르베니아의 영웅을 상대로 후계자를 내보내다니 말이오. 차라리 백작이 직접 나섰다면 헤르베니아의 영웅의 목이 떨어졌을 것을. 그 뿐이외까. 차라리 나서지 않고 성벽에서 가만히 있었다면 백작의 검술과 오러로 전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다 부질없소. 백작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을 내보냈고, 그를 잃은 충격에 지휘도, 전투도 못했지. 부끄러운줄 아시오. 카두스파시아의 수호검이란 위명이 아깝구려."
"그래. 모욕은 다 끝나셨소?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소. 그대에게 아직 명예라는게 남아있다면 말이오."
"걱정마시오. 그대는 수호검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할터이니."
공작은 발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국은 사우전 왕국에 복속되었고, 공국의 수호검은 자신에게 무릎꿇었다. 승자는 미소짓고, 패자는 모든걸 빼앗기고 울부짖는다. 잠깐 발을 멈춰 뒤를 돌아본 공작은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울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날에, 나라와 명예도 잃은 자가 눈에 들어왔다. 공작은 그 모습을 잊지 않겠다는듯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다 마저 걸음을 옮겼다.
전쟁은 끝났다.
- 볼크
- 옛날 옛적에 튜토긴 마을이 있었답니다. 튜토긴 마을은 산골 속 분지에 터를 잡았어요. 어려워도 서로 도와가며 살던 평범한 마을이었답니다. 옆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아주 맑고 깊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연못에 신령님이 계신다고 여겨서, 그 연못에 음식을 바치고 숭배했어요.엘프들이 일주일 후 호수를 통해 나타나자마자 목만 땅 위에 간신히 내민채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에 큰 근심이 닥쳤어요. 마을의 연못에서 기원의 돌을 바치던 어느날, 물 위에서 엘프들이 번쩍번쩍 나타나서, 물 위를 걸어오는 거였어요. 엘프들은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이 연못은 우리의 중요한 거점이고, 너희는 우리 땅을 그 한심한 나무더미로 유린하고 있다. 당장 꺼져라."
마을 사람들이 싫다고 거부하니까, 엘프들은 사람들을 마구 죽였어요. 그리고는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경고했어요.
"일주일 뒤 다시 올 테니 그 전에 떠나라. 그러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
졸지에 마을을 잃게 된 사람들은 펑펑 울었어요. 몇십년을 살던 고향이 사라진다는걸 막을 수 없던 사람들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는데 그때 한 모험가가 나타나서 물었어요.
"댁들은 무엇이 문제길래 대낮부터 곡소리요?"
그에 사람들은 자기 사정을 설명했고, 그러자 모험가는 끓어오르는 의기를 참지 못하고 돕겠다고 맹세했어요. 모험가는 사람들을 끌고 연못으로 갔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넘기고는 연못에 가서는...
열심히 흙을 퍼부어서 연못을 메워버렸습니다!!!!!!!!!!!!!!!!!!!!!!!!!!!!!!!!!!!!!!!!!!!!!!!!!!!!!!!!!!!!!!!!!!!!!!!!!!!!
인간이 승리했습니다!!!!!!!!!!!!!!!!!!!!!!!!!!!!!!!!!!!!!!!!!!!!!!!!!!!!!!!!!!!!!!!!!!!!!!!!!!!...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모험가는 튜토긴 마을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험가는 보답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기억이라도 하게 이름을 알려달라 간청했습니다. 모험가가 밝힌 이름은...
지구는 인류의 것이다!!!!!!!!!!!!!!!!!!!!!!!!!!!!!!!!!!!!!!!!!!!!!!!!!!!!!!!!!!!!!!!!!!!!!!!!!!!!
"드라노마이어"였습니다.
- 크라우스
- 그날은 평범한 아침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꾹 감고있던 내 눈위로 쏟아지고 그와 맞춰 자동차의 시끄러운 엔진음이 내 잠을 깨워낸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강렬하게 지각을 직감하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34분.
...아니 35분. 누구의 말투를 빌리자면...
" 조졌다... "
급하게 교복을 챙겨입으며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나는 조용한 집안을 바라보다 오늘이 부모님의 여행날이라는 것을 눈치채며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분명... 이때만 해도 나는 오늘 저녁은 뭘 시켜먹지 라는 시시콜콜한 생각밖에 하지 않고 있었다. 최악의 하루가 될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겠지.
" 1교시... 1교시 뭐더라... "
기억들을 뒤져가며 골목길을 급선회하던 도중, 옆에서 달려오던 차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딛혀 버리고 만다. 기괴하게 뒤틀리는 시야와 머리가 깨질듯 울리는 이명과는 반대로 고통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끼지 못하고 있는것이 더 옳은 표현일터다. 이미 말은 나오지 않았고 감각들이 하나 둘 닫혀가고 있었다.
'...하드 디스크는 부수고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과 동시에 점멸하던 의식이 끊어져 나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만, 제 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줄은 꿈에도 모른채로.
- 볼크의 이벤트 번외작 : 이세계 전생 2탄
- 내 이름은 사카모토 도오쥬, 일본의 지극히 평범ㅡ고등학생이다. 학생회장도, 교사도, 이모토도 나만 찾는 통에 랄까ㅡ 귀찮다구 라 할 수 있는 삶 살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스쿠르 하렘 라이후》이라 하면 좋을까.
"오니쨩! 오니쨔앙! 하야쿠 오키나이또! 지금 밥먹지 않으면, 지고쿠 시챠우요!""이 미친 새끼가! 야! 버스 앞에 뛰어들고 지x이야! 아 내 인생 완전 x됐네!"
아아, 익숙한 목소리다. 나의 사랑스런 여동생이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볼을 부풀리고 있다. 저 볼, 찔러보고 싶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ㅡ 갈아입어 오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어요."
옷을 대충 입고 내려오자, 여동생이 자신있게 준비한 기색이 역력한 오므라이스가 오늘 메뉴로 나와 있었다. 어제 오므라이스 먹고 싶다고 무심결에 말했는데, 텔레파시라는 게 있는 걸까.
"딱히 오빠 먹으라고 한 건 아니니까, 멋대로 오해하지 말라구!"
"알았어. 알았어. 이타다키마스."
오늘도 이모토가 챙겨준 밥을 먹고 학교로 가던 중이었는데, 나는 버스를 만나고 말았다. 아아ㅡ 쇼가나이나. 《이세계 전생 하렘 라이프》인가.
쾅!
조금씩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렇게 끝-디 엔드-인가.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었다. 소카, 나란 녀석, 결국 《이세계》에 온 건가ㅡ 나는 몸을 일으키고, 내 애검 <무라마사ㅡ학살검>을 잡은 채로 거리에 나왔다. 내 애검 《무라마사》ㅡ 미국과 소련에게는 학살검으로 유명한 물건은, 조부께서 지난 2차 대전쟁 당시 평화로운 일본국을 유린하는 미군 폭격기를 참격ㅡ일도양단ㅡ하는데 쓰시고, 몰려드는 강철의 파도-소련 8월 작전-을 평정하려고 드신 무기다. 비열한 미국은 자기들의 신ㅡYHWHㅡ의 힘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멸시켰지만 말이지. 그 위력에 경악한 맥아더는 다시는 일본을 무시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지."가문의 검...《무라마사》가...!"
본론으로 돌아가면ㅡ 약간 절망했달까. 오이오이, 곤란하잖아. 앞에 있는 귀여운 엘프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w
"?@,(?!)))"(와, 진짜 보기 싫게 생겼다.)
뭐지? 아아, 이놈의 인기-페로몬-이란 말이지... 이세계 라이프도 여자 때문에 귀찮겠는걸. 그래도 만난지 10초만에 반하는 전개는 춋토... 심했달까.
"아아, 안신시떼. 내 애검ㅡ무라마사ㅡ는 귀여운 미소녀에게는 한없이 약해진다구?""?!!@?!@@!.:-),)"(와, 말도 X같이 한다!)
하아, 미소녀란 말이지. 벌써 이런 반응이라니.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엘프는 화를 내며 손을 내쳤다. 아, 이 엘프는 츤데레인가? 이런 류는 정말 맞춰주기 어렵다구.
"?,)(.!@;-♡-:'/?,"(너 여기 가만히 있어! 죽여버릴 테니까!)
아마 또 만나게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세계 소설처럼 귀찮은 전개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세계인들이란 말이야, 주인공이 치트 하나만 있어도 "스고이!!!!"하는 놈들이라구. 뭐, 문명국의 일원으로서의 사명, 간직하고 있다. 앞선 문명의 문물-사계절-도 겸사겸사 알려주도록 할까. 이세계인들은 알아야 한다구ㅡ 발전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일본국의 어떤 대단한 점부터 소개할까? 디젤 엔진? 스시? 자동문 택시? 애민 정신? 벚꽃? 이러다 이세계인들 충격먹어 대핀치일지도(웃음)
일단 일본의 선진문물, 치즈부터 소개해주기로 할까. 아아ㅡ 이것은 《치즈》라고 하는 것이지. 동물의 젖을 발효시키고 굳혀 만드는 것으로ㅡ
"??)))?@'^♡-@"(뒤통수 후려쳐.)
퍽!
이번 세기는 아무래도 낯선 방문자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이단심문관 할트만은 이번 세기에만 100명이 넘는 차원 전이자가 왔다는 보고서를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저쪽 세상은 뭐가 문제인 것인지."
그 와중.. 그의 앞에 묶여있던 차원 전이자가 깨어났다. 신체적으로는 민제국 사람 같지만 입은 옷에서 다른 차원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할트만은 그의 검을 만지자마자 오글거려 어디다 숨겨놨다. 그리고는 신의 권능을 빌려 차원전이자와 자신의 말이 통하도록 조치했다.
"코레와 나니... 소레와 나니...?"
"미치겠네."
"와타시와... 다레? 코코와... 도꼬?"
"말 똑바로 해라. 차원전이자."
차원전이자는 자기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자 신기한 모양이었다. 차원전이자는 멋쩍게 웃더니 자기를 소개했다. 이전의 전이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아ㅡ 이것이 《언어 마법》인가. 우리 일본국의 문물 번역기에 대응하는 이세계의 유산ㅡ 하지만 천황 폐하의 애민 정신으로 만들어진 번역기는 누구나 쓸수 있달까. 소개가 늦었군요. 와타시노 나마에와 《사카모토 도오쥬》ㅡ 일본국의 고등학생입니다."
"그리고 일본국의 사계절 소개하러 왔고? 아예 고양이도 일본국 문물이라 하지 그래?"
사카모토는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본 할트만을 보고 잠깐 정색했지만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ㅡ 아까 전의 카와이한 엘프가"
이번 전이자도 맛이 갔다고 판단한 할트만은 말을 끊고 이 세계에 대해 설명했다.
"차원전이자는 세 종류로 나뉜다네. 꿈꾸다 여기 온 놈. 숙취로 온 놈. 여자 꼬시자고 오는 멍청한 남정네들. 앞의 두 경우는 환영하는 편이야. 꿈꾸다 온 놈은 잠 깨면 자기 세계로 돌아가고, 숙취로 온 놈도 술 깨면 돌아가더군. 그런데 가끔씩 너 같은 3번째 경우가 오지. 아주 짜증나!"
할트만이 열심히 말하는 동안, 뒤에서는 교단의 팔라딘들이 장작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사카모토가 뭐라 말할 틈을 주지도 않은 채 할트만은 말을 이어나갔다.
"몸만 와도 귀찮은 것들이 즉사치트네, 스탯창이네 뭐네 가져와서 설치니 아주 고생이야. 자네도 무라마사인지 마사토인지 모를 뭔가 가져왔다면서? 그건 이 세계의 지각판 아래에서 지금쯤 녹아내리고 있을테니 걱정 말게. 아! 그리고 그게 일본국이 미국이랑 싸울때, 같은 소리는 하지 말게. 하나도 안 궁금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듣기 싫어!"
"사실 꿈꾸는 놈, 술먹은 놈은 적당히 구경시켜주고 보내는게 관례야. 하지만, 자네처럼 똥오줌이랑 구토물도 자기 나라가 원조라 우기고, 이상한 거 가져와서 세상 날로 먹으려 들고, 츤데레네 뭐네 듣기만 해도 귓구멍이 찢어지는거 같은 《문물》을 지껄이는데다가 심지어 제발로 돌아가지도 않는 너 같은 놈들이 정말 싫어!"
할트만은 열변을 토하고 나서 흠흠, 하더니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혐오스럽지만, 우리 신께서는 자네 같은 반푼이에게도 이 세계에서 살아갈 기회를 주도록 하신다네. 방법은 간단해. 자네가 가만히 있으면 우리들이 알아서 윤회를 시켜줄 거야. 일그러진 자의식과 성욕으로 뭉친 정신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태어나는 걸세. 자네 문물 말로 따지면 《공장 초기화》지."
"기억의ㅡ 《완.전.소.실》Format? 손나 바카나.."
"마음껏 상상하고 떠드시게나. 다음 생에서는 그렇게 비참하게 살 일 없을테니."
할트만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팔라딘들이 사카모토를 잡아다 장작 위 형틀에 묶고, 기름을 붓고 나서 불을 당겼다.
"끄아아아악! 로리와... 사이코다제!!!!!!"
"...이 미친놈이 어린애랑 대면 안한게 천만다행이구만. 다음 생에서는 이모토, 학생회장, 센세, 센파이, 토모다찌, 마마, 갸루... 뭐 너네 말로 그런 거 없는 곳에서 편히 사시게나. 다시는 그 오니챤인가 뭔가로... 기분 나쁘다. 그만하자."
사카모토는 타는 연기마저 기분나빠, 그날 벌레들이 전부 피하고, 할트만을 제외한 인원들은 구토를 하느라 고통스러워했다.
이렇게 하여 유피네스의 세계는 안전해졌다.
- 노브
- -소설 탈라카-
(저자 : 아돌론의 아무개)
에탈라는 바라보았습니다. 세계의 혼란을. 질서 이전의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에탈라는 손을 뻗었고, 그러자 한 줄기 빛이 하늘로부터 내리쬐었습니다. 그것은 태양빛과 닯았으나 더 고귀했습니다.
먼 옛날 알려지지 않은 서쪽 땅에 무 왕국이 있었습니다. 위협이 도사리고 질서가 없어 혼란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침, 왕국의 작은 마을에서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남자 아이는 막 태어난 직후였음에도 울지 않았고 외모에 멋과 기품이 서려있으니 사람들은 아이를 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탈라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탈라카가 태어난 후 어머니는 탈라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힘껏 애썼습니다. 소문은 넓게 퍼져 이웃 땅에서도 탈라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방문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탈라카는 성장했습니다. 외모가 아름답고 활을 쏘는 실력은 하늘의 태양을 놀래킬만 하며 검술은 검호들과 견줄 수준이었습니다. 글 실력도 일류 문관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드라노마이어를 외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탈라카는 뛰어난 재능을 받았을 뿐 이루고 싶은 목표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힘에 의문과 망설임을 품었습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탓인지 그가 18세가 되던 날 밤, 그의 어머니가 탈라카를 불러냈습니다. 탈라카는 조용히 침묵했습니다.
"탈라카, 너는 자신의 혈통이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 내가 보여주겠다."
탈라카의 어머니는 작은 상자를 꺼냈습니다. 탈라카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상자의 장식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무 왕국 유명 귀족가의 상징인 새싹과 씨앗이 금으로 조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상자를 열자, 여러 장식품이 드러났습니다. 모두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빛을 잃지 않은 것들이었고, 심지어 몇 개에는 탈라카의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총명한 탈라카는 모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탈라카의 어머니는 원래 위대한 귀족의 혈통이었으나 옳고 바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탓에 늘 주변에게서 시기받았으며, 결국에는 비열한 술수 탓에 위대한 혈통으로부터 추방당한 여인이었습니다.
"내 비록 추방된 꼴이기로서니 옛 다짐을 잊을 정도로 몰락하진 않았다. 알겠느냐, 탈라카?"
어머니가 탈라카의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꼭 잡았습니다.
"너의 재능은 이런 곳에서 썩힐 재목이 아니다. 추방당했을지언정 혈통은 고귀하며, 인품도 청렴하니 너는 분명 나라를 구할 인재다. 네 재능을 사람들을 구하는데 사용해다오. 현재 이 땅의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누구도 그를 구하지 않으니 네 힘이 필요하다. 부디 힘 없는 자들을 도와다오."
탈라카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튿날 아침해가 떠오르면 탈라카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되기 직전이 되자 탈라카는 마을 주민들 몰래 여행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을 걸었습니다.
"마지막이다. 이걸 가져가라."
그녀가 건넨 것은 어머니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은반지였습니다. 탈라카는 반지를 소중하게 감싸쥔 뒤 오른손에 꼈습니다. 탈라카는 짐을 챙긴 채 마을 밖으로 떠났습니다.
첫 몇달간 탈라카의 여정은 고되기만 했습니다. 챙긴 식량이 다 떨어지면 결국 자급자족하거나 벌어 먹어야만 했습니다. 마실 물도 그리 쉽게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쓰러질듯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탈라카는 꺾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탈라카는 들리는 곳이 있을 때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아이가 납치당한 부부가 있다면 납치한 자들을 소탕했으며, 사기를 당한 사람이 있다면 사기범을 붙잡아 두 배로 값게 했고, 흉작과 수탈에 지친 농민이 있다면 땅의 주인을 설득해 세를 줄여주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탈라카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습니다.(중략)
긴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던 탈라카는 한 마을에 들려서 숨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모습을 감춘 탓에 그를 눈치채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탈라카는 마을에서 기괴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이란, 왕국에 나타난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들이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괴물들의 강함 탓에 왕국의 병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우며, 높은 사람들도 골치를 썩히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탈라카는 소문의 진위여부는 신경쓰지도 않고 바로 그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짧은 여정 끝에 목적지에 온 탈라카는 비명을 지르는 자들, 황폐한 땅, 지친 병사들과 마주했습니다. 탈라카의 눈에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악한 숲이 보였습니다. 자리에 있던 몇명이 탈라카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 중의 병사들의 지휘관처럼 보이는 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당신은 혹시 이 땅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다닌다는 탈라카가 아닙니까?"
탈라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휘관이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저희의 힘으로는 이 위협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에 역부족입니다. 괴물들은 재빠르며, 창칼과 마법이 듣지 않을만큼 견고하고 일격에 강철을 뭉개버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도움이 있다면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 열정에 응해 탈라카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병사들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습니다.
"우리들 중에 괴물들을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가 편성되어 오늘 밤 숲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비록 저는 참여하지 않지만 탈라카, 당신은 함께 하시겠습니까?"
"괴물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이 지역에는 본래 스물다섯 마리가 남아있을 터이지만, 많은 수가 저희의 희생 끝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수가 약 열아홉 정도 됩니다. 최소한 한 자리 수로 줄여야 이후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탈라카가 수락하자 지휘관이 병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탈라카는 부상자를 돌보러 움직였습니다.(중략)
정예 토벌대의 마흔 명 일원들은 모두 단련된 면면들 뿐이었습니다. 탈라카가 그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실패해도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지휘관이 걱정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탈라카에게 정찰대들이 만든 숲의 지도를 건네고 일행 한 명 한 명을 격려했습니다. 곧이어 임무가 시작되자 일행은 숲에 발을 들이밀었고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언짢은 분위기에 탈라카는 침을 삼켰습니다. 일행이 몇 걸음 내딛은 직후 갑작스럽게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운 그림자가 튀어나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병사 두 명을 낚아채어 사라졌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병사들은 창을 고쳐쥐었고, 탈라카는 앞서 그림자를 쫒아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풀을 헤치자 그림자의 정체와 두 명의 시체가 보였습니다. 괴물의 크기는 장정 둘을 합친 것과 비슷하게 컸습니다. 미처 병사들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탈라카가 먼저 달려들었습니다. 검을 뽑아내 그 소리가 마치 천둥번개같이 울렸고, 검을 휘두르자 어두운 괴물도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습니다. 병사들은 감탄했습니다.
수 시간의 토벌 속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정예였던 자들조차 무참히 쓰러졌으며, 그들의 공격은 괴물에게 치명상은 주지 못했습니다. 탈라카의 힘이 아니면 괴물들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탈라카는 괴물의 급소에 정확히 검을 꽂아 넣거나, 어두움 속에서 화살로 목표를 정확히 맞추는 등 뛰어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탈라카도 점차 지쳐갔습니다. 남은 괴물의 수는 넷, 그러나 처음 마흔 명이었던 병사들의 수는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수를 토벌한 탈라카는 병사들의 희생을 떠올리며 일단 퇴각할지를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피로와 순간의 방심을 놓치지 않고 무언가가 탈라카를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괴물이었습니다.
탈라카는 입에서 붉은 빛을 토해냈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괴물을 무찔렀습니다. 하지만 이미 탈라카의 부상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탈라카의 눈이 감겼습니다. 병사들은 탄식에 잠겼고 결국 돌아가자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탈라카의 죽음에 하늘조차 눈물 짓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두운 하늘의 빛이 갑작스럽게 내려오더니 탈라카의 몸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달빛과 닯아 있었습니다.
빛을 받은 탈라카가 곧 눈을 떴습니다. 병사들은 다급히 그의 몸을 살폈고 그 몸에는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탈라카 일행은 이것을 하늘의 가호라고 여긴 채 계속해서 괴물들을 토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힘을 회복한 탈라카의 앞에서 남은 괴물들은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임무가 끝난 뒤, 지휘관은 탈라카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는 다른 병사들에게 시신 수습을 명하며 탈라카에게 깊이 감사했습니다.
곧 탈라카는 높은 명성과 신비한 소문에 의해 국왕과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저지하려던 자들의 비열한 수는 기이하게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국왕이 탈라카에게 나라를 위해 일한 대가로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탈라카는 올바른 나라를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다시 국왕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탈라카는 청렴한 나라를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왕이 똑같은 질문을 다시 했습니다. 탈라카는 제 자신이 이룬 것이 모두에 의해 이뤄지는 나라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왕은 그의 말뜻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국왕은 탈라카를 친히 자신의 곁에 두고 그의 능력을 중하게 쓸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많은 자들이 반대했으나 탈라카가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서자 위압감에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탈라카가 이후 가장 먼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탈라카는 어머니의 반지를 보며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악을 바로잡으며 그럼에도 사적인 욕심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탈라카는 모든 사람의 신뢰를 받았으며 무 왕국에는 드디어 긴 평화의 때가 찾아왔습니다. 탈라카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여지껏 소중하게 여겨왔던 어머니의 반지를 팔아 그 돈으로 어려운 자들을 도와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는 드라노마이어처럼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으나 훌륭한 위인이었습니다.(후략)
- 다니엘
- 달그락달그락. 드르륵. 쨍. 덜컹. 와하하하.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조화롭게 얽히고 있었다. 이곳은 어느 술집. 이름없는 술집인데다 크기도 다른 술집에 비해 크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있는 푸근한 술집이었다.
그 술집의 안쪽에는, 카운터에 두명의 남성이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한 남성은 기사인듯 두꺼운 갑옷에 검을 차고 있었고, 한 남성은 음유시인인듯 등에 악기를 메고 있었다.
한바탕 마시며 밤이 깊어가던 도중,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갑자기 다른 남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 찔린 남자는 갑작스러운 감각에 넘어지려고 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는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를 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기사가 음유시인을 향해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더니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야, 솔직히 술만 마시는건 너무 지루하지 않냐? "
" 나는 안 지루한데? 술을 마시려고 오는 장소잖아. 근데 그런 장소에서 술 마시는게 뭐가 지루해? "
음유시인이 아까의 그것에 조금 삐졌는지 어깨동무를 풀며 퉁명스레 답했다. 기사는 피식 웃고는 음유시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 야, 너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잖냐. 그 노래, 한번만 해줘. 응? "
" 아 안해. 알면 정중하게 부탁하던가, 다짜고짜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냐? "
" 그러면 다음 잔은 내가 살게, 어때? "
" 아 안한대도. "
" 한번마안~ "
기사가 그 무거운 몸뚱이를 이용해서 음유시인에게 매달리며 징그럽게 부탁했고, 음유시인은 뭐 씹은 표정을 지으며 떼어내려고 했지만 기사의 단련된 근육은 그것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한참 옥신각신 하고 나서야, 음유시인이 한숨을 쉬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 그러면 네가 세잔 사. 그러면 불러줄게. "
" 좋아. 그러면 일단 한잔. 마시면서 불러. "
기사가 언제 준비했는지 맥주를 한잔 내밀자 음유시인이 피식 웃어버렸다. 못 당해내겠네. 음유시인이 악기를 꺼내자 술집의 사람들중 몇몇이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관심을 끄고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음유시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악기를 점검하며 목을 가다듬기 시작하였다.
" 이 곡은 우리 영광스러운 드라노마이어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노래... "
" 어차피 듣는 사람 나밖에 없는데, 그냥 부르지? "
" ...시끄러. "
부끄러운지 음유시인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고, 기사는 그것을 보며 키들거렸다. 음유시인은 술 한잔을 전부 들이키자 만족스러운듯 컵을 탁 내려놓았고 이내 악기를 천천히 연주하며 느긋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볼카니쉬의 날개가 하늘에 드리웠네.
그는 천둥보다도 우렁찼고, 폭풍보다도 강인했다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으며, 싸우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네.
세계수마저 불타고, 세계는 두려움에 휩싸였다네.
우리는 볼카니쉬의 날개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구원자가 필요하리니.
그 불멸의 존재에게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영웅이.
만약 볼카니쉬가 승리한다면, 이 세상은 불길에 휩싸이리라.
끔찍한 고통과, 비명이 함께하는.
하지만 그때에, 황금의 검을 가진 영웅이 나타났다네.
그 황금의 검이 모든것을 갈라버리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네.
모두가 그 노래를 들었다네, 볼카니쉬의 죽음을.
달콤한 자유의 노래, 영광스러운 승리의 노래.
결국 황금의 검을 가진 영웅이, 우리를 볼카니쉬로부터 구원했다네.
황금의 검을 우리에게 남기고, 새 시대를 열어젖혔네.
만약 볼카니쉬가 불멸의 존재라면, 그 불멸도 이제는 스러져버렸고.
그 분노의 불길도 꺼져버렸고, 그 영웅은... 사라졌다네. "
술집은 그 노래에도 몇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자신의 세게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오직 한명만이 그 노래를 듣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 어땠어? "
" 역시 그 노래가 제일 듣기 좋은데. "
" 입에 발린소리 하고있네. "
" 진짠데. "
두 남자가 동시에 키득거렸다. 그 둘은 서로의 잔을 부딪히며 건배했다. 그리고 내일 있을 하루를 위해 술잔을 부딪히고는 동시에 비워내었다.
술집의 밤은 변함없이 시끌시끌했고, 깊어져만 갔다.
8.1. 레주 공식 연성 ¶
- 숙련의 경지
- 빈약하다면 빈약했다. 공허하다면 공허했다. 뜨거웠다면 뜨거웠다. 오웬은 자신의 오러 홀 안에서 꾸물거리기 시작한 오러의 움직임을 이해했다. 묵직하던 몸을 일으켜 창을 잡았다. 다리와 팔, 어깨를 움직이며 창을 휘두르고, 찌르며, 거두길 반복했다. 몸 위로 희끄무리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모르고 오웬은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창을 움직였다.
취미와 숙련의 영역, 그 영역의 입구를 넘어서지 못한채 오웬은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했었다. 벽을 넘으려 하면 그 벽이 높았고 돌아가려고 하면 그 길이 너무나도 짧았다. 허망한 움직임 속에서 오웬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창을 잡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동은 반 뼘, 팔에서의 길이는 반 뼘 더, 거리는 두 뼘, 좁혔을 때는 한 뼘, 넓혔을 때는 다셧 뼘. "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의 움직임에 대한 해답이었다. 단순히 창을 왜 거리를 두고 싸웠을 때 이득이 되는 무기라 생각했을까. 그 의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창의 견습과, 숙련의 경계였다.팔에 오러가 휘감겼다.
이 거리면 창을 찌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오웬은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접근한 적이 있다면 왜 창으로만 이해하려고 했을까.
텅 -
쇠를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오웬의 팔이 휘둘렸다.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뒤로 멀어지면서도 오웬의 창을 표적을 노렸다.
까가각,
오러를 이용한 다리에 움직임이 멈추었고.
탕 !
쏘아지듯 나아간 오웬은 창을 내질렀다.
콰드드드득
쇠로 만들어진 인형이 고통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숙련. 그 경지를 오웬은 이해했다.
- 꿈
- 정적 속에서 떠올리는 것에 대해 상상한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단순하게 이야기를 떠올리기보다 나라면 이 이야기에 어떻게 답했을까,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떤 대답을 했을까, 다양하게 상상의 상상을 피워내며 말 대신 이야기를 만들었다. 상상 속에선 나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황금의 검을 들고 반짝이는 빛을 발하며 수백의 적을 베어넘기고 마침내 악마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해내는, 어린아이다운 유치한 상상을 했다. 오웬은 자신의 창을 바라보았다. 아홉살이 되던 해에 아나란은 오웬의 골격을 살피고 성장할 키를 맞추어 대장장이에게 주문을 넣었다. 무기에는 당당하게 드라노마이어 기사단의 상징인 황금의 검이 박혀있었다. 앞으로 이게 너의 친구며, 동료가 될 거라고 단장은 오웬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창을 내려두었다. 오웬의 상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꿈 속에서 오웬은 위대한 기사가 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계곡에서도 오직 오웬의 창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오웬은 창을 지팡이 삼아, 바위를 길 삼아 끝도 보이지 않는 계곡을 올랐다. 하늘에는 흉흉한 천둥번개가 내려쳤고 계곡 끝에선 오웬을 방해하기 위해 커다란 바위도 내던졌다. 그렇지만 꿈 속의 오웬은 멈추지 않고 계곡을 올랐다. 어둠을 뚫고, 마침내 빛이 오웬에게 얼굴을 내밀었을때 오웬은 자신의 창을 내뻗어 거대한 용에게 결전을 선언했다." 내 이름은 오웬 드 알고노스. 드라노마이어의 후계자이자 널 죽일 용살자다. "
드래곤은 오웬의 목소리에 웃음, 조소, 조롱 등의 부정적 감정을 섞어 시선과 목소리를 보냈다. 거대한 몸집이 움직이고 숨결이 내뱉어지면 숨은 태풍을 불러왔고 공포는 몸을 짓눌렀다. 애초에 오웬은 그렇게 용기 있는 기사도 아니었고 아직 오러에 대해 이해조차 하지 못한 꼬마였지만 꿈 속에선 오웬은 위대한 드라노마이어의 후계자였고 용살자의 격을 가진 존재였다." 죽어라, 사악한 드래곤아! "
드래곤의 날개가 뻗어져 태양을 가렸다. 날개를 펄럭여 하늘로 날아간 드래곤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 에탈라의 빛마저 가려버렸고 커다란 그림자는 빛을 잃어버린 오웬을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오웬은 공포에 떨지 않고 오히려 더욱 거세게 창을 휘잡았다. 황금빛의 오러가 폭사되어 어둠으로 물들었던 세상을 뒤엎었고 빛을 가리는 어둠과 어둠조차 가릴 수 없는 빛의 대결이 시작됐다.
오웬의 창이 한 번 내질러지면 공기는 수없이 흔들리고 마침내 꿰뚫려 드래곤의 비늘에 닿았다. 겨우 바람만으로도 주위의 나무들이 베여 쓰러졌지만 드래곤은 자신의 고고한 힘을 뽐내기라도 하듯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오웬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오웬의 힘이 우습다는 듯 날개를 펄럭여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고 오웬은 땅에 창을 박아넣고 지지대삼아 거센 태풍을 견뎌냈다. 바람이 끝나기도 전에 드래곤은 하늘에서 땅으로,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고 오웬은 창을 들어올리며 자신의 주위로 황금으로 이루어진 오러의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두 존재가 격돌한 순간, 그 소음이 세상의 끝가지 퍼졌다. 오웬은 가까이 다가온 드래곤의 흉부로 황금빛의 창을 찔러넣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부수고, 창이 드래곤의 비늘을 관통하였고 드래곤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냥꾼이 아닌 동등한 상대를 만났다는 것에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9.2. 개편자 아우텐 ¶
- 속삭임
- 아득하게 올라간 숲에는 빛이 들지 않는다. 빛을 차지하기 위해서 높게, 더 높게 오를려는 나무들에 의해 작은 나무들은 죽어버리고 큰 나무들만 더욱 커져 저들끼리 빛을 가지고 경쟁한다. 그렇기에 어두운 숲에서 빛을 찾기란 요원하고 길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긁히고 피 흐르는 상처들로도 발걸음은 느려질 수 없었다. 빛은 보이지 않았고 간혹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사이로 드는 빛으로 길을 찾아야만 했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조금의 빛만 더 있었더라면, 한탄은 끝날 시간이 없었고 그 이상으로, 흘린 피에 의해서 몸은 점점 차가워만 갔다.
" 멀었군. "
고통에 입술을 질근거리면서, 달려야만 했다. 소식을 전할 사람도 없었고 복수는 요연했다. 불타버린 주택을 바라보며 그 윤곽만이 집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컸는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주어진 시간은 많았지만, 시간을 탐내는 사람은 더더욱 많았다. 불타는 저택을 바라만 봐야했던 무기력함에도 당장 살아야만 한다는 공포에 도망치기나 했었던 한심함이 온 몸을 짓눌렀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말하죠. 힘이 있었더라면 자신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멈추어선 안 된다. 비록 복수를 이룰 수는 없더라도 목숨을 버려선 안 됐다. 찢어진 상처를 묶고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면서 떠올렸다. 힘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마 그 자리에 죽어있던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었을 것이다. 쇠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은, 타락한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결국 당한 것은 힘이 없어서. 지킬 시간조차 없어서였다.
방울처럼 뭉친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만약, 힘이 있었더라면 나는......
풀을 밟는 소리도 없이, 인기척 없던 깊은 숲에서 하나의 인영이 걸어나왔다. 추격자들은 이 숲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빠르게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피하려고 둘러서 바깥을 찾았고 더욱 높은 나무로 가득한 숲으로 걸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의 등장에 경각심이 곤두섰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을 인간들에게 넘기는 것은 하지 않을테니까요. "
마침내 나무가 바람에 흩날렸을 순간 잠시의 빛이 인영을 비추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족. 인상은 그랬다.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그는 날 보고 웃고 있었다.
그것도 재밌겠지만. 하는 말에 경각심이 곤두섰다가 가라앉았다. 최소한 거짓말의 의도는 없었다. 천천히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흐릿한 윤곽에 익숙해지고야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망토를 당겨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귀족들은 쓰지도 않을 예의 방식이었다. 한참은 낡은 방식으로 자신에게 인사한 남자의 머리에는 선명한 두 자루의 뿔이 솟아있었다." 소개하지요. 본인은 66명의 마왕 중 하나이자.....이형계의 한 구역을 다스리는 자.
악마. 사자를 피해 도망친 숲에 호랑이가 있는 셈이었다. 경계를 풀지 않고 손에 잡은 돌멩이를 꽉 쥐었다. 언제라도 던지고 도망칠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튕겨진 손으로부터 백색의 빛이 만들어졌다. 눈이 부시진 않았고, 오히려 적당하다고 느낄 만큼 은은한 빛이었다.
아우텐이란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내게 힘이 있으면 어떨까.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 힘이 주어지면 그 사람들 대부분은 거기서 만족하고 맙니다. 힘이 있단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것들이 바뀌고 자신에게 친숙해지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줄을 서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당신과 말이라도 걸어보고자 재물을 가지고 찾는 자들도 늘 것입니다. 그런 욕심에 인간을 비롯한 종족들은 약하기 마련입니다. "
짝,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손뼉을 쳤다. 말이 나오지 않아 아우텐을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방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왕은 변덕스런 존재, 그러나 아우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마왕과 관련된 기록이란 것은 흐릿하고 확실하지 않은 고서의 기록이 더 많았으니." 대가를 치르기만 하시겠다면 그 힘.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무인들이 바라 마지 않는 오러를 드릴 수도 있으며 당신에게 축복받은 마나의 힘을 드릴 수도 있고 신체를 바꾸어 다른 종족의 육신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딱 하나. 당신의 하나만 제가 가져가는 것을 조건으로 하신다면 말이죠. 물론 싫다고 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으니. 대신 경계까진 데려다 드리죠. "
아까부터 불어오던 바람들이 약해질 때가 되어서야 아우텐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나를 걱정하듯 따뜻했고 눈빛은 불쌍한 아이를 보는 듯 연민이 넘쳤다. 자세히 보고서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이 연푸른 색이란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와, 나의 부모님과 같은 눈의 색. 어쩐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이상 차갑던 몸도 없었고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럼. "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을 바꾸고 복수할 힘이 필요했다.
거래를 -
시작해보죠.
9.3. 다니엘 극룡공염파 ¶
- 수인류, 극룡공염파
- 뚝.
단순히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득한 고통의 감정만이 다니엘을 지배합니다. 단순히 이성만으로는 억제하기 힘든 고통. 인간의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은 황홀경을 느끼기도 전에 잠들었던 용의 피는 다니엘의 혈관을 타고 흘러 마침내 인간의 이성을 잠재우고 감정의 표면으로 드래곤의 이성을 끌어올립니다.아,
주위는 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끄러웠고 전투는 진행되는 도중이었으며 아직도 상처에선 피를 울컥거리며 토해내고 있었고 고통에 정적은 한참 울리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인간의 이성을 유지하고자 아픈 상처를 참고 주위의 동료를 살피다가 한없이 작은 자신의 손으로 눈길을 옮깁니다.
드디어 깨달았습니다.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다니엘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고 완전한 인간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비록 한쪽 눈이 없어 보이는 것은 적었고 한쪽 팔이 없어 무언가를 잡기에 불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이라는 제약에 있을 뿐이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반쪽이라곤 하지만 위대한 레드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아직 전신에는 거대한 불의 권능이 박동하며 다니엘에게 고통주었던 무언가를 태우기 위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적은 깨집니다. 균형을 유지하던 전투 상황에서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올립니다.
그것은 차마 무엇이라고 표출할 수 없는 웃음.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인간의 이성과 피에 억눌려 표현할 수 없었던 고통. 살가죽을 제외하면 인간과 별로 닮을 것도 없는 몸뚱아리와, 겨우 반절의 피를 가지고 인간이라 칭하던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이 상황에 대한 명백한 조롱이었습니다.아하하하하하하 !!!!!!!!!!!!!!!!!!!!
그저 우스울 뿐인 이 상황에서, 이제 잠시 다니엘은 용이 되기로 했습니다.《 수인류 》
권능은 뭉치고, 또 뭉쳐 다니엘의 전신으로 흡수됩니다. 지금 이 공간의 마력은 오직 다니엘에 의해 조절되고 있으며 전신에 존재하는 반룡의 뼈와 피는 이 권능에 대해 울부짖기라도 하듯 다니엘의 전신을 진동시킵니다.《 극룡공염파 》
어디서 불이 피어나지도 않았지만 주위에 풀과 나무가 불타오르는 상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괴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다니엘에겐 기괴함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은 편안함, 그리고 자신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에 대한 충족감.
마침내 다니엘의 전신은 권능을 완성시킵니다. 무형의 기운이 하나의 형태로 바뀌고, 불의 권능은 다니엘의 온 전신을 내달려 마침내 심장에 도달합니다. 박동하는 심장은 권능을 짜내고 뭉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경배하소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열기는 마침내 다니엘의 입에서 화염의 형태로 분출됩니다. 타오르는 불꽃, 무너지는 지형 속에 한 줄기의 화염만이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뿐입니다.(?) 필드 상태가 '레드 드래곤의 권능지'로 변경됩니다. 화염 속성 마법이 증폭되고 마력 소모량이 감소합니다.
닿는 것은 불길에 휩쓸려 바스라지고 세상은 마침내 재가 되어 먼지로 화합니다. 무너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오직 위대한 한 존재, 다니엘만이 분노를 쏘아낼 뿐입니다.
거대한 불길이 휩쓸어 세상을 뒤엎고, 다니엘의 피는 자신이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전신의 무력감과, 피로에 주저앉고 말지만 떨리는 손과 발만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험. 다니엘의 피로가 80대를 돌파하였습니다.
9.4. 아리아드네 ¶
- 그는 새벽녘이 지나기 전 보이는 일출을 사랑했다.
-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출과 일몰. 낮과 밤의 중간에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는 아탈라와 에탈라의 인사가 유난히 맘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었고 단순히 어두막한 곳에 들어서는 황금빛의 태양을 바라보며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아탈라 교단에선 엘프도, 문 비스트도, 드워프도, 인간도 그 어떤 종족이라도 하나의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엘프인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게르만슈다흐 성기사장님. "
일몰과 함께 아리아드네는 눈을 떴다. 달을 상징하는 아탈라의 상징에 고개 숙인 채 팔을 높여 기도하는 것으로 아탈라의 상징에 기도를 올렸다. 기도 내용은 다름이 아니었다. 자신의 살아감을 알려주심에 감사드리옵고 오늘도 저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주심에 감사드린다는 특별함이 없는 기도였다. 따분한 기도가 끝나면 자신의 검을 들고 또다시 연병장을 향했다.
이제 겨우 해가 뜨는 시간. 빛을 받아들이는 창은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도를 통해 수백의 위정자를 회개시키신 기도의 성인 앙그리타, 왕의 분노에도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던 절개의 성인 모드림.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눈길은 한 성인의 빛에 고정되었다. 달빛을 삼킨 눈을 가진 자신과 똑같은 문 엘프. 역병에도 불구하고 열셋의 병자들을 치료하던 희생의 성자 이쥴데. 아리아드네는 그런 이쥴데와 같은 성자가 되고싶었다.
잠시의 달콤한 잠을 포기하고 누군가가 연병장의 문을 열었다. 소음에 고개를 돌린 곳에는 황금빛의 아우라가 고단한 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매마른 미소를 지었다. 기쁨보단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소임이 옳았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아리아드네 교육기사. "
일출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그 시간을 쓰는 방법은 무수히나 많았다. 아리아드네와, 게르만슈다흐의 일출은 대게 몸을 움직이며 수련에 정진하거나 기도실에 들어가 수없는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리아드네가 간신히 검을 들고 방패를 잡는 법을 연습할 때, 게르만슈다흐는 피어오르는 아우라를 가다듬고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만 행동했다. 단순히 막고, 찌르고, 발견하는 것을 빠르게 각인하기 위해 움직이는 아리아드네. 그와 반대로 무언가에 대응하듯 움직이는 게르만슈다흐. 두 사람은 대화는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다른 방법으로 정진한다는 점에서 둘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2.
에탈라의 태양이 세상을 향해 어둠의 공간이 남지 않았음을 선포하는 순간, 두 사람의 훈련은 끝났다. 가져온 수건으로 비처럼 떨어지는 땀을 닦고 있으면 게르만슈다흐는 물통 하나를 던져준 채, 말없이 연병장을 떠났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인사로 끝이었다.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유였으나 쓰는 방법은 편이하게 달랐다. 아리아드네에게 기도란 신에게 진심을 내보이는 것. 그렇기에 잦은 기도보단 한 번의 기도를 중요시했고 게르만슈다흐에게 기도란 대화, 그는 잦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즈음 기도를 올리러 가셨겠구나, 아리아드네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된 아리아드네는 한참을 검을 휘두르고 방패로 막는 연습을 한 끝에 끝났다.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것도 아리아드네였고 닫는 것도 아리아드네였다. 문을 닫으면서 아리아드네는 이쥴데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들의 입에 죽을 떠주는 성인의 모습은, 달빛을 받아 신성의 상징처럼 은은한 백색의 기운을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 연민의 여신이시여. 이 연민자의 인생을 격려하시옵소서. "
9.5. 볼크 ¶
- 전쟁
- 전쟁." 참... "
참으로 허무하고도, 쓸모없는 왕관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자 발버둥쳤다. 겉모습은 황금으로 둘려있고 수없는 보석으로 치장되어있는 사용자를 고귀한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한 외형이었다. 그러나 그 겉과는 달리 속모습은 이미 썩어버린 판지를 덧대 만들고 반짝거리는 돌조각이나 박아넣어 만들어진 허울 좋은 장식품일 뿐이었다.
볼크는 전쟁에 대한 본인의 철학이 있었다. 어느 사제님에게 들었던 '생명의 가치는 황금의 무게로 알 수 없다'는 말은 지금 볼크의 손에 올라온 묵직한 골드 주머니에 비하면 틀린 이야기였다. 최소한 용병의 목숨값은 황금의 무게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값을 매기는 곳은 전쟁터다. 그 알 수 없는 굴레를 신경쓰기엔 볼크는 신경쓸 주제가 너무 많았다.
에스카론은 자신의 반짝이는 갑옷을 바라보며 가슴께를 텅텅 두드렸다. 목숨값으로 받은 골드의 절반이 갑옷값으로 들어서인지 유난히 비어버린 골드 주머니에 한참 예민해진 모습이었다." 주머니가 너무 가벼워. "
볼크도 자신의 애병, 츠바이핸더를 등에 걸치곤 있지만 기로 신체를 강화해 싸우는 공격자인 본인과 달리 큰 방패와 두꺼운 방어구를 쓰는 방어자인 에스카론과의 차이는 크게는 물건의 금액부터 작게는 착용하는 물건의 수에 있었다.
" 언제는 무거웠나. "
볼크의 헹 하는 콧방귀에 에스카론은 이 떡대의 통수를 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쳐봐야 자기 손만 아플테니 그냥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거 끝나고 술이나 마실 돈이 있을지 모르겠군. "
" 이번에 가면 안나한테 머리가 깨질지도 모르겠는데. "
" 그건 영감탱이야. 니가 돈만 꼬박꼬박 주지 자식들한테 사랑이고 애정이고 금전적인 것만 가져다주니까 문제잖아. "
" 그럼 이 나이 먹고 내가 허리에 힘 줘야하냐? "
" 여자는 나이 먹어도 여자다. 그건 안 바뀌더라. "
에스카론의 말에 볼크는 안나를 상상해봤다. 억센 손으로 볶음통을 들고 볼크의 머리를 깨려던 장면이 기억의 수면을 헤쳐나왔다." 그건 모르겠네. "
기억 속 안나는 아직도 억세고 강한 여자다. 자신의 도움이 없더라도 강인하게 살아갈 여장부. 그런 그녀에게 이제 다가가 사랑하니, 무언가를 사왔니 하기에는 안나도, 볼크도 살아간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일찍 그만뒀어야 했었나. "
첫 손녀를 봤을때 일을 마쳤더라면 지금 볼크는 전쟁터가 아니라 통나무집의 햇볕을 쪼며 의자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나의 바가지에 웅얼거리며 밭을 갈고, 늦게 찾아오는 증손에게 대왕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평화롭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두가 모른다는 가정이었을 뿐이다." 혹시 아는 세공사 있나? "
결국 자신은 망령일 뿐이다. 가족들에게도 겉돌고, 사람을 대하는 것에도 겉도는 용병. 딱 거기까지라 생각한 볼크는 생각 대신 무거운 방패를 정비하는 에스카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제대로된 반지를 만들어주지 못 한 것이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을 괴롭게 만들었다.
9.6. 레옹 ¶
- 각성 구슬
- 죽음이라는 결말은 레옹에겐 퍽 즐거운 결말은 아니었을겁니다.
호기심에 문제가 되었던 첫 죽음, 그리고 운이 좋아 부활하였을 뿐. 그것은 레옹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고 거기에 운이 따라주었을 뿐. 레옹 스스로가 이룬 결과는 아닙니다.
마수, 재앙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하늘을 유영하는 마수를 바라보며 레옹은 자신의 손을 바라봅니다.
피투성이가 되었고, 껍질은 다 까졌습니다. 손톱은 무뎌졌고 팔다리는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근육은 소리치며 이제 자신들은 움직일 수 없음을 토로하고 본능은 이제 자리에 쓰러질 것을 중용하고 있습니다. 오직 레옹만 쓰러진다면, 마수의 진격은 끝없이 이어지겠지만 레옹만은 편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레옹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다시 아래를 바라보는 마수를 향해 손을 맞대어봅니다.
마수의 고요한 눈과, 레옹의 휘몰아치는 눈.
상처 없는 마수와, 상처로 뒤엎인 레옹.
강한 힘, 한없이 미약한 힘.
격.
드높은,
그렇기에 레옹의 발악조차 하찮을
격.
레옹은 품에서 구슬을 꺼내듭니다.
미약한 격의 레옹으로도 알 수 있을만큼 강대한 격의 구슬을 손 위에 굴리고 있습니다.
레옹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구슬을 사용합니까?
구슬을 사용합니다.
......
...
레옹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잔잔한,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일상들입니다.
소년은 자랍니다.
소년은 싸웁니다.
청년은 배웁니다.
청년은 사랑합니다.
청년은 헤어집니다.
청년은 만납니다.
청년은 이어집니다.
중년은 살아갑니다.
중년은 싸워갑니다.
중년은 지켜갑니다.
중년은 잃었습니다.
감정.
고요하던 소년의 감정은 청년이 되며 혼잡해졌고 중년이 되어 다시 가라앉았지만 지킬 것을 잃은 중년은 바닥으로 내려앉습니다.
오직 무.
스스로를 단련하고, 가다듬고, 가다듬기를 반복하던 그의 눈이 레옹에게 닿습니다.
방긋, 흐릿한 미소로 레옹에게 인사한 그는 레옹에게 주먹을 내지릅니다.
막아내고, 쳐내고, 지르고, 맞고, 때리고. 그걸 반복한 끝.
이제 노인이 된 그를 마주하고, 레옹은 손을 뻗습니다.
툭.
레옹의 몸에 그의 다리가 닿고,
휘잉.
레옹은 허공에서 온전한 원을 그립니다.
쿵.
바닥에 떨어지고,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레옹의 옆을 스쳐갑니다.
패배.
마침내 완전히 져버린 레옹을 그가 바라봅니다.
수많은 깨달음과 계기 끝에, 그는 과거의 소년이 되어 레옹에게 손을 뻗습니다.
" 고마워. "
과거의 무신은, 미래의 레옹에게 미소를 짓습니다.
" 그러니까. "
싸워.
레옹은 다시 현실을 바라봅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지쳐버린 몸은 마지막을 불태웁니다.
굳건한 나무가 되어, 자리를 지키는 레옹은 마침내 숨을 뱉습니다.
고통과, 혼란과, 공포와. 그 부정적인 모두가 마침내 내뱉어지고.
이제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을.
레옹은 알고 있습니다.
" 지금 "
그 손에서는 힘이 요동쳤고
" 오직 나만이 "
그 눈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담았으며
" 이 세상에 홀로 섰으니 "
그 자리에서 오직 레옹만이 자유로웠습니다.
" 진정한 극極을 이룰지어다. "
무신 - 극 : 성중팔세
武神 - 極 : 成中捌勢
세상은 무너집니다.
규칙? 그 무엇이 감히 규칙을 칭할 수 있습니까?
법칙? 무엇이 당신에게 순리를 강요할 수 있습니까?
부수고자 한다면 무엇이라도 당신 앞에선 재가 될 것이며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레옹은 없습니다.
레옹의 정신과, 레옹의 몸을 가진 새로운 무신만이 존재할 뿐.
세상은 마침내 레옹의, 무신의 손 위에 들려집니다.
그리고,
쿠과과과과광 - !!!!!!
세상은 무너집니다.
쿠구구구구구 - !!!!!
허무하게 갈라진 공간은 마수의 몸체를 수개의 공간으로 찢어버리고
카가가가가가가가 - !!!!!!
날카롭게 벼려진 시간의 검들은 마수의 뼈와 살을 발라냅니다.
Aaaa......!!!!!!!!!!!!
처량한 고통 속에서도 레옹은 그것에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습니다.
어디. 벌레따위가.
감히 당신을 막아선단 말입니까?
찢어지고
부수고
토막내고
불태우고
짓이기고
갈아내고
...
그 모든 폭력들을 거친 끝에 레옹은 마수가 있던 자리를 바라봅니다.
격은 뒤바뀝니다.
레옹은 마수를 내려봅니다.
마수는, 레옹을 올려봅니다.
그 눈빛에 혼란이 끼치기도 전.
레옹은 가볍게 손을 털어버립니다.
먼지.
재.
그저 존재했다는 파편만이 남아 흘려진 마수의 모습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9.7. 아돌론의 푸른매와 멸화인 ¶
- 미래버전 오웬과 다니엘
- 담배에 맛을 들린지는 오래도 되었다.
연초에서 곰방대를 태우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끊는 것에는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의미없이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에 잊은 생각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익숙했는지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쓸쓸하게 올라가는 마지막 담배연기가 하늘에 닿은 뒤에야 오웬은 곰방대를 털어버리곤 땅에 떨어진 자신의 창, 해일우를 뽑아내곤 손을 털어냈다." 정말.... "
그의 뒤로는 수척의 전함이 줄비했다. 각자 이름 날리던 해적들이 쓰고 있었던 배인지 각 해적들의 심볼이 선명했고 그 깃발은 여전히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지만 배는 더이상 나아갈 방법이 없었다. 돛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그 돛을 들여줄 뱃사람은 이젠 없었으니 배는 이제 나아갈 곳이 없어진 셈이다.
쏠쏠하네. 오웬은 자신이 벌여놓은 풍경을 보곤 피식 웃었다. 배 위에는 기술만 충분했다면 기사장이 될 재목들도 줄비했지만 오웬의 상대는 없었다. 한 국가의 최고전력을 넘어, 현재는 대륙을 다 뒤져도 채 100명도 되지 않을 8단계의 기사가 단순히 해적이란 이유로 시작된 무력의 발산은 폭력과 다르지 않았으니 휩쓸린 해적 잘못이지 하고 오웬은 배들을 찬찬히 살펴나갔다.
" 여전하지. 내가 싫어하는 것이 둘 있는데. "
" 하나는 도둑질하는 놈, 하나는 해적? "
" 아니. 하나는 해적이고 하나는 내 적이지. "
마리안나가 아돌론에 있다. 그 얘기 하나만 듣고 아돌론을 찾아오던 다니엘을 맞은 것은, 그런 다니엘을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던 오웬이었다. 국가 차원에선 대마법사에 대한 예우였겠지만 다니엘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마리만 보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
명백한 협박표현. 우리들은 네가 장난질을 벌이려 한다면 전력으로 자신을 막겠다. 그 사실을 지금 곰방대나 뻐끔대는 이 중년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 미안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움직이는게 국가간에는 큰 문제거든. 그래도 예측이 되는 성녀 아가씨랑 다르게 우리 아가씨는... "
" 내 성격 지랄맞다고 돌려까지 말지? "
9.8. 어둠의 오웬 ¶
- 어둠의 오웬
- " 이런 일은 사람을 쓰는 것에 맞지 않죠. 왜 제가 사람들 앞에선 손을 들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지 아십니까? "
조용했다. 아니, 오히려 소란스러웠다면 소란스러웠다. 기긱거리는 밧줄 늘어나는 소리, 때때로 어금니가 갈리는 듯한 소리, 몸부림을 치려는지 움직이는 의자의 끄는 소리, 말소리가 끝난 뒤 들려오는 느린 발걸음 소리." 명예라는 것은 절대적일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바깥에서 술을 먹고 쓰러진다면 다음날 사교계에는 알고노스의 아들이 고주망태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노란 소문이 한가득 돌겁니다. 아니라면 제가 술 중독자란 소문이 돌며 어떻게든 저와, 제 가문을 까내리려 할겁니다. 거기서 당신이 문제였던겁니다. "
오웬은 손에 작은 검을 들었다. 고문에 걸맞을 것 같은 역으로 된 톱날은 찌른다기보단 긁는 것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러면서도 가볍게 꾹 누르면, 그 부분으로 칼날이 부드럽게 박혀들만큼 칼날이 날카롭게 벼려지긴 했다.
카직. 낡은 방바닥의 나무가 기이하게도 푹 꺼졌다. 가루가 되어버린 바닥에서 먼지가 흩날리자 오웬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은 그의 안대를 거칠게 벗겨냈다.
반응은 대게 비슷하다. 눈을 떨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거나, 입술을 달싹이려고 하면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거나, 아니면 분노로 스스로가 다쳐도 좋다는 듯 의자에 탄 채로 몸을 날리려고도 한다. 이번 반응은 두번째, 그의 눈가가 바르르 떨리면서 입을 봉해진 상태에서도 힘겹게 읍읍거리는 울림을 내고 있었다.오웬은 한 번 그 목소리의 의미를 맞춰보기로 했다. 왜 날 납치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살려달라? 들어올린 단검을 그의 허벅지살에 쳐박자 입을 막았음에도 고통에 목소리를 내질렀다. 눈빛으로 보아 후자. 이걸로 이 자가 범인이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 때때로 난 내 손에도 피를 뭍히곤 하죠. 그러면 내 손에 뭍은 피는 최대한 적게 흐르길 바랍니다. 그런데 왜! "
단검을 다시 한 번 내찍으면서 오웬은 물었다." 내가 이렇게 피를 흘리게 만듭니까? "
그는 정보 길드에 오웬이 누군가를 죽였다. 고 정보를 알렸다. 덕분에 몇주간 정보길드의 조사로 인해 고혹을 겪었고 형제단의 몇몇이 수면 위로 들어나기도 했다." 당신때문에 베들과 아만타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카진은 형제단에서 나갔고 이디갈은 귀족파에 억류됐습니다. 나 하나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그림자에 숨었던 내 형제들은 죽었고, 그들의 피는 자연스레 내 옷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모습을 들먹이고 당신이 영웅이라도 되는 듯 입을 놀리더니 결국 날 찾아와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모습을 봤다고 하면 내가 덜덜 떨면서 돈이라도 죽여줄줄 알았습니까? "
이런 시대에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입을 놀리는 것, 오웬은 싫어하진 않았다. 능력만 있다면야 입이 가벼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점이 된다면 모를까. 그러나 문제는 이 자는 재능도 능력도 없으면서 한 순간의 행운을 마치 제 운이라도 되는 듯 놀려댔다. 그게 문제다.
수 번을 찌르던 단검을 던져버리고 오웬은 힘으로 재갈을 뜯어냈다.
" 사....사으어.... "
입술이 터지고 턱이 망가졌는데도 그는 살려달란 말을 앵무새처럼 지저귀었다. 재미도, 흥미도 없는 시시한 존재다. 총알받이로 쓰기도 아까운 폐급. 오웬은 결론을 내렸다. 장갑을 낀 채로 팔에 오러를 집중시킨 오웬은 그의 심장 부근을 세게 찔러넣었다. 피가 터져나오고 뜨거운 피가 팔에 흐르고 있는데도 그 눈은 이런 일은 익숙한지 너무나도 평온해보였다.꺽꺽거리던 숨이 꺼지고 피 뭍은 장갑을 던진 오웬은 그의 손에 끼워졌던 반지 하나를 꺼내곤 시체를 발로 차냈다. 잠시 뒤 한 형제가 들어와 오웬을 바라봤다.
오웬은 웃고 있었다." 형제. 작은 부탁을 해도 될까요? "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웬은 죽어버린 시체를 밀었다." 불로 다 지져버리고 적당히 땅에 묻으세요. 물론 그 전에 사제에게 부탁해 정화 의식도 부탁하려는데 괜찮겠죠? "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축 쳐진채 천천히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오웬은 손에 든 반지를 꼭 쥐곤 한숨을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은 아돌론을 위해서. "
때때론 피도 필요한 법이니.
*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 가족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발견한 순간에는 고블린들의 식사 제물이 되고 있었다고 오웬은 말했다. 겨우 건진 반지만이 그의 유품이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보상은 돈밖에 존재하지 않음을 용서해달라고. 오웬의 모습은 명예로운 기사와 다르지 않았다.
수천골드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내밀면서 오웬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그 표정을 본 사람은 없었다.오웬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9.9. 100스레 축사 ¶
- 축사
- 100번째 이야기.
100 장의 이야기.
유피네스 전기가 드디어 100스레를 달생했습니다. 흥하고, 흥하지 않고의 지표가 되기도 하는 100스레란 수를 바라보며 스레주의 입장에선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유피네스 전기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듯 한 레스주가 올린 드워프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임시스레, 폭파, 또 임시스레, 무한한 시트 검수의 벽을 거쳐 진행 없는 무정부스레까지 이어지며 태그에 붙은 육성이 레스주의 인내심 육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 모든 사과를 더해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겁니다.
언젠가 제가 말했습니다. 100스레가 목표라고요. 그리고 목표를 이룬 지금의 기분은......얼떨떨합니다.
먼저 레스주분들께 감사말씀 드리겠습니다. 약 50명이 넘는 분들이 유피네스를 찾아주셨고, 많은 분들이 떠나셨습니다. 그럼에도 스물 가까운 수가 유피네스에 계십니다. 이 100스레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다음은 수많은 관전자들께 바치겠습니다. 스레 내적인 주인공이 레스주들이라면 외적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스레의 한 장면을 위해 야광봉을 흔들어주시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같이 화내주신 여러분이 있었기에 유피네스는 지금까지도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양이별로 떠난 우리 파괴신, 냥놈. 매번 설정 짜고 할때면 골골골거리며 내 옆에 있어줘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어. 참 고마워.
이 많은 인사들을 거치며 저는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유피네스는 이제 첫 장을 겨우 꿰었습니다.
새로 펼쳐진 페이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낡은 책 특유의 퀴퀴한 향기, 열심히 써나가는 하얀 깃펜이 있습니다. 펜은 지금도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가며 열심히 준비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이 행복일지 지옥일진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첫 시작은 괜찮게 꿰었노라고 답하겠습니다.
오늘도 방 어딘가에서 키보드를 만지며.
오늘도 여러분에 대한 감사인사를 써내려갑니다.
9.10. 레스주 배틀토너먼트 예시 ¶
- 아리아드네VS오웬
- 세상에 절대적 기준이라는건 없다.
누군가에겐 재능이 주어지고, 누군가에겐 튼튼한 육체가 주어진다. 누군가는 권력의 밑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고 누군가에겐 그 밑조차 주어질 기회가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꽤 잘 태어난 셈이다. 가진 것도 나쁘지 않았고 재능도 충분했다. 권력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싸웠다. 겉으로는 표리부동의 정의를 외치고 뒤로는 칼과 창을 자유롭게 썼으며 앞으로는 미소와 자애를 연기했다. 단언코 나만큼 더러운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것이다.
지금은 손을 보더라도 피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들은 굳은살이 좀 베겼더라도 미려한 손이라 칭찬하지만 실상은 20년의 시간보다 이루기 위한 20년의 시간동안 씻은 피의 양이 물보다 깊을 것이다.
피식. 이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결국 장갑을 끼기 시작했고 손에서 벗지 않았다. 자연히 잠들 시간은 줄었고 피를 흘리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아돌론은 제국이 되었다. 사우전과 발타카를 삼키고 북대륙의 제국을 넘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점차 넓어지는 왕국의 영지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난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치 땅이 얘기해주는 듯 싶었으니까.
연애는 자연스레 멀어만 갔다. 정략혼으로 이뤄진 관계와 일 중독으로 이어진 내 삶은 자연스레 부인의 외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할 말은 없었다. 난 거기에 신경 쓸 시간보다 전장에 나서고, 명령을 내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기에 난 신과 같았던 내 아버지를 꿰뚫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한 왕국은 부흥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넓어진 대륙에서, 공작이라는 이름과 수없는 명예, 무력을 쥐고도 내 손에 남은 것은....슬프게도 단 하나도 없었다.
소홀한 관계에서 자식은 없었다. 후계자조차 정치의 방해물이 될지도 몰라 다 치워버렸다. 친구는 이용, 활용하다 결국 모두 떠나버렸다. 나를 존경하는 인물들도 내 실체를 알면 욕을 하고 도망쳤다.
그래. 권력자는 외로워야했다. 권력자는 홀로 설 수 있어야했다.
외로움과 절망감을 삼키고, 싸워 이길 수 있어야한다.
" 어디부터 잘못되었을지 모르겠군. "
피폐한, 그러면서도 신념이 담긴 목소리만은 아직 남았지만.
" 그대는 아시오? 검은 빛의 기사여. "
그 신념마저 무너지면 기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 적어도 지금의 당신에게는 과거의 이치도, 빛도 찾을 수 없겠습니다. "
" 하...... "
대충은 알고 있었다. 대충은 이해했다. 누군가가 막아줬음 좋겠다 생각한 순간도 많았다.
" 더 일찍..... 들었더라면 난 달라졌을까? "
" 아뇨. 그 시절의 당신이라면 신념을 흐트린다며 절 죽이려 드셨겠죠. "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마 그때의 나라면 신념을 방해한다며 죽이려 들었겠지. 그러곤 말했을거다.
" 내 신념은 틀리지 않으니까. "
오웬 드 카두스파시아.
카두스파시아의 공작, 피로 물든 창, 아돌론의 실질적 지배자, 왕국의 영웅, 북대륙 최강의 창.
" 하지만 지금 그대의 모습은 망가져 무너지고 있는 암흑과 다르지 않군요. "
아리아드네 델 아미르.
검은 종, 이단심판관의 제일성, 에탈라의 검지 손가락, 대륙 최흉의 성기사.
" 봐주는건 없다. "
" 손속따윈 봐줄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
오웬은 창을 잡았다.
아리아드네는 검과 방패를 잡았다.
오웬은 스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여유롭고, 지금의 상황에 조금의 걱정도 없어보이는 느긋한 발걸음은 그에게 이런 상황이 이젠 익숙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보입니다.
금새 아리아드네의 방패가 빛을 반짝이며 오웬의 안면으로 쇄도하지만, 오웬의 몸을 기점으로 흐르기 시작한 오러는 그 공격을 허공에서 막아버립니다.
《 검은 피의 마왕 》
그는 마왕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위엄을 가졌습니다.
비록 그 앞에 마魔라는 이름이 붙긴 한다고 하나, 그렇다고 하여 오웬의 가치를 훼손할수는 없습니다.
공격에 있어 우습기라도 한 듯, 피폐해진 동공은 아리아드네를 비추어냅니다.
《 피의 의전 》
꾸드드드드득 -
진득한 피를 보는 것 같은, 음산한 오러가 오웬을 뒤덮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뭉치고 퍼져 갑옷의 형태를 이루어냅니다.
아리아드네는 잠시 고민합니다.
육체적 능력만 본다면 아리아드네는 방패의 보호를 받는 검. 그러나 오웬은 뒤가 없는 창에 가깝습니다. 전투 방식에서도, 위력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는 상황.
아리아드네의 오른쪽 눈이 태양빛으로 물들어갑니다.
《 천안 개방 》
태양빛의 눈은 공격을 가해오는 오웬의 동작을 판단합니다.
역수로 잡은 창을 내려찍어가며 공격하는 오웬의 공격을 아리아드네는 침착히 막아내거나, 위험한 것은 흘려냅니다.
뒤가 없는,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 없는 공격입니다.
" 무도회가 시작되고 나면 사람들은 정신없이 춤을 추고, 파트너를 살피며 누군가를 비교하곤 하지. 결국 전투도 무도회랑 다른 것은 없더군. 상대를 살피고 나와 적의 격차를 비교하곤 하지. 물론, "
Kyi - ..........
오웬의 창은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 내 파트너도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는군. "
《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팔 잘린 소녀의 노래 》
Ka - !!!!!!!!!!!!!!!!!!!
아리아드네의 천안은 어떻게든 이 목소리를 차단하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목소리는 여러 형태와 속성을 바꿔가며 노래를 부릅니다.
극강한 정신력을 가진 아리아드네의 정신마저 조금은 흐트려가고, 오웬은 그 틈을 노리고 창을 휘두릅니다.
굳건하기만 하던 신체가 스쳐간 창에 의해 얇은 선이 생겨나고, 첫 핏방울을 흘리는 아리아드네를 보면서 의욕이 사라졌던 오웬의 동공은 여느 순간보다 선명해져갑니다.
" 그러니 나와 내 파트너를 위해 춤춰주시오. "
카득.
아리아드네는 이빨이 갈릴 정도로 힘을 주며 무기를 붙잡습니다.
11. 볼크 ¶
- 샤를에게: 우리가 어떻게 만났을까?
- 그래, 샤를. 사랑하는 내 증손. 이 늙은이를 보러 여기까지 와줬구나.
오늘은 네 생일이기도 하니, 약속대로 이야기해주마. 네 증조모, 내 사랑, 안나와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그 여자가 안나였어.
우리가 사는 마을, 아이헨그라프는 내가 어릴 적에는 괴물들의 침공에 신음하는 곳이었단다.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지에서 침공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서 넓게 퍼져있던 경비병들이 전부 당했고, 당시 남작님은 주요 도시만 지키시기에도 힘이 벅차셨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그저 일어난 것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든 수습하는 것만 가능하니까.
결국 아이헨그라프 마을은 스스로를 지켜야 했단다. 나는 그때 고작 열셋이었지만, 나는 걸을 수 있었고, 괭이를 잡고 땅을 갈 수 있었단다. 그것이면 싸우는 곳에 끌려가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어. 나는 괭이를 잡고, 고블린을 내리쳤어. 고블린들은 한도 끝도 없이 몰려왔지. 그나마 아이헨그라프는 주변에서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이미 목책으로 마을을 두르고, 네 키보다도 더 큰 돌담을 쌓았단다. 우리에게는 다행이게도 고블린들에게는 그게 성벽으로 느껴진 모양이구나. 하지만, 아이헨그라프는 마을이 불타고 죽임을 당하는 최후를 맞지 않았다뿐이지, 상황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단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실려갔다가, 다시 목책에 서기를 반복했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면 고블린들에게 달려가야 했고, 두 팔이 남아있다면 팔을 휘저어서라도 고블린을 죽이라더구나. 어쩌겠니.
너뿐만 아니라 네 할애비도 모르겠지만, 그때 마을 사람들이 숱하게도 죽었어. 알보르, 카를, 그리고 불프 아저씨. 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그 사람들은 비석에 글자로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런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이 마을을 지킨 덕분에, 몇 주가 지나고 고블린의 시체가 워낙 많아서 날파리가 들끓을 지경이 되니까 고블린들도 안 오더구나. 그 때문에 돌림병에 걸린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초록색 땅꼬마 새끼들한테 우리 것을 뺏길 일은 없겠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그때 마을의 촌장이었던 하킨 할머니가 새벽에 고블린들의 경계가 약해진 틈을 타서 돌격해 큰 타격을 주자는 의견을 냈어. 그때까지도 큰 상처 없이 몸이 멀쩡하던 사람들, 나까지 포함해서 13명한테 경비들이 쓰던 무기와 갑옷을 줬지. 무거웠지만, 고블린의 짱돌이 투구에 맞고 튕겨나간 뒤로는 생명의 무게로 느껴지더구나.
그때 나는 고블린의 막사로 들어가 가장 덩치가 큰 고블린을 대검으로 내리쳤고, 고블린 막사가 시끌시끌해지자 마을 쪽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나와 혼전을 벌였어. 정말로 그때가 제일 격렬했단다. 사방이 고블린이었고, 어거지로 끌려왔던 장님이 아무렇게나 무기를 휘두르는데도 고블린이 한둘씩 걸려들어 죽을 지경이었지. 거기서 죽은 사람이 제일 많았어. 그때 나는, 대검을 들고 고블린들을 죽이다가, 내 또래 여자아이가 괭이를 들고 고블린들을 죽이다가 막다른 곳에 몰려 위기를 맞은 것을 보았지. 왠지 모르게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고블린들을 다 죽였어. 그리고 그녀는 내 뒤통수를 노리던 고블린을 괭이로 으깼지. 서로 감사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서로 할 일 했지만.
고블린의 막사는 그렇게 파괴됐고, 우리는 고블린들이 약탈했던 우리 물건들을 되찾아서 돌아왔지. 그 이후에는 고블린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순찰을 돌았어. 사흘이 지나자 우리는 목책 바로 바깥의 밭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개와 장정 다섯 이상이 되면 바깥의 밭에 농사를 지으러 나갈 수 있게 됐단다. 나는 밭에 나가지 않고, 박살난 마을을 수리하는 일을 맡았어. 그때 나는 고블린 막사에서 봤던 여자애와 한 팀이 됐지.
나는 그 여자애가 마음에 들었어. 고블린 머리를 까버리는 늠름함 하며,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책임감에, 그 푸른 눈과 검은 머리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더구나.
그때 내 상황이나 그 애 상황이나 끔찍했어. 내 아버지는 돌림병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고블린에게 피살당했지. 나는 형이라도 살아남았지만, 그 여자애 집은 고블린에 다 죽었다는 거야. 미안하구나.
동병상련인지, 나보다 더한 꼴을 본 사람에 대한 동정인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나는 그 애를 위해 같이 묘지를 파 주고, 시신도 같이 들어줬지. 그 애가 울다 말고 나를 봤을 때 그 눈에 나는 동정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꼈단다.
그 후 우리 둘은 친하게 지냈어. 이 집은 이렇게 지어야지, 이 잔해는 어떻게 치울까, 밥은 뭐 먹을까. 모든 것을 같이 토론했고, 재건되면 나는 이 마을 최고 땅부자가 되겠다고 했고, 그녀는 세상을 모험해서 유피네스 같은 기사가 되겠다고 했지. 그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그 애도 나를 퍽 마음에 들어하는 모양이더구나. 그 애도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는 나만 따라다니고, 나만 보면 그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돌았으니까. 그 애는 웃을 때 제일 예뻤어. 어쩌면 그 미소를 나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거였을지도 모르지. 너무 나갔다면 미안하구나.
당장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도 고백하는데 반지 하나 없으면 얼마나 웃기겠니? 고블린 족장에게서 뺏은 은반지를 내보이며 말했어. 사랑하고, 진지하게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그 애가 결혼을 얘기하는 거냐 묻길래 맞다고 대답했어.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나에게 울분을 터뜨렸단다.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봐, 내 꼬라지를 보라고!나는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야? 주변을 봐, 다 죽었고, 고블린 피비린내가 벽에 배여서 닦이지도 않아! 벽돌은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무너진 건물에서 돌을 치우면 찢겨나간 팔다리가 나와! 여기는 미쳤어, 모든 게 다 나를, 나를 미치게 하려 한다고! 그런데, 너까지 왜 그래? 너라도 내가 평범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거야? 일단 날 여자로 만들어 줘. 평범한 연인처럼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꽃을 선물하고, 나를 안아주고, 같이 언덕에서 별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키스도 해주란 말이야! 그런데, 이 상황에, 너는..."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 그때는 나도 눈물이 나더구나. 고블린들이 나를 해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들이 내 정신을 박살낸 부분이 있었지. 정말로... 참. 그 여자애가 다시 나를 말을 잃고는 나를 안아주더구나.
"화내서 미안해. 그리고..."
긴 침묵이 지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어.
"사랑해. 볼크."
그게 안나와 내가 사랑하게 된 계기였고, 그 은반지는 몇년 뒤 제 쓸모를 찾았단다.
- 그때 그 공포
- 볼크가 젊을 적, 눈 두 짝이 아직 멀쩡하고, 아들이 장성해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다."카를한테 그러지 마!!!"
역시 전쟁은 벌이가 좋다. 국가와 국가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부딪치고, 국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쏟아붓는다. 그 자원이 얼핏 보면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것 같지만, 그 자원을 1차적으로 가져가는 것은 군수물자를 준비하는 상인들이고, 2차적으로 그 떨거지를 먹는 것은 용병들이다. 그리고 볼크는 엄청나게 거대한 '떨거지'를 챙겨 기분이 좋았다. 원래대로라면 약탈품은 그를 고용한 국가에 반납해야 했지만, 지난 전투에서 용병들을 감독하던 군관은 적 측 전궁이 쏴준 화살에 전사했다. 이제 그를 비롯한 용병들은 너나할것 없이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들과 함께 시체를 뒤지고 있었다.
"야! 이거 정말 대박인데!"
볼크는 함께 싸우던 친구들과 함께 팀을 이뤄 시체를 뒤졌다. 볼크는 나름대로 중무장한 시체를 찾아보았다. 볼크는 이 사람이 신은 가죽 신발을 벗겨서 자기 것과 사이즈를 비교해보더니 신발을 뺏어신고, 그 시체에서 투구를 벗겨 착용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갑옷은 전궁의 화살에 맞았는지 박살나버린 상태였다. 언제까지고 쇠 덧댄 누비 갑옷을 입을 수만은 없는데 말이야, 볼크는 혀를 차다가 시체의 약지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고 표정을 환하게 밝혔다.
"하하! 심봤다!"
볼크는 주저없이 금반지를 쏙 빼냈다. 금반지에는 카를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뭐, 카를이던 카를라던 볼크에게는 상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금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는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익숙한 용병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뭐야?"볼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해졌고, 순간 쫄았던 용병들은 볼크를 보고 박수를 쳤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가 볼크를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칼과 방패가 들려 있었고... 적들의 문양을 갑옷에 새기고 있었다. 즉, 전투에서 살아남은 적군이었다. 볼크는 등에 매인 대검을 뽑아들고 대화를 시도했다.
"이봐, 운 좋게 살아남은 거 같은데 말이야. 운을 두 번 시험하지 말고 그냥 가. 나는 여기 돈 벌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여자는 그 말에 손을 벌벌 떨더니 몇걸음 더 가까이 와서 칼끝으로 볼크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투구, 그 신발, 전부 우리 엄마가 내 동생 카를한테 해준 거야. 전부 돌려내!"
으음, 아무래도 무언가 사정이 있나 보다. 하지만 찾는 시체들마다 전부 개박살이 나 있어 동전 몇개 빼면 재미 못 보던 차에 이런 멀쩡한 시체에서 나온 물건들을 포기하라고? 그건 안 될 노릇이었다. 볼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네 엄마가 워낙에 좋은 물건 해주신 덕에 용병들이 약탈에 정신 팔려서 살 수 있었다고 해. 이건 대목이야. 나도 양보 못..."
"죽어...!!!!"
쾅!
"해."
여자가 분노에 차서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다른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볼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대검을 거꾸로 잡고 폼멜로 방패를 후려쳐서 멀리 튕겨버렸다. 여자가 당황한 사이 볼크는 대검을 들어 크게 내리쳤고, 여자는 살기 위해 칼을 머리 위로 들어 막으려 했다. 검은 속절없이 두동강이 나고, 여자도 두동강이 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으, 으으..."
볼크는 대검의 옆면으로 내리쳐 칼을 깨버리고, 여자도 팔을 크게 다치는 선에서 끝날 수 있었다.
"내, 팔... 응? 왜... 안 움직여...?"
"역시 볼크야! 사람 담구는 거는 누구보다 잘한다니까!"찌질이가 해 봤자 4명을 어떻게 이겨? 공터에서 볼크의 반대쪽에 선 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볼크와 적당히 싸우다가 3명이 합세해서 그를 죽여버리고 적당히 구실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 사, 살려주세요."
그 와중 여자는 볼크를 올려다보고 공포에 질려서 뒤로 엉덩이를 끌어 멀어지려 했다. 볼크는 가까이 가서 대검을 그녀의 목에 가까이 대고 나직이 말했다.
"갑옷, 반지, 목걸이, 다 벗어서 내놔. 돈은 안 건드릴게."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박살나서 말을 듣지 않는 한 쪽 팔을 억지로 움직여가며 갑옷을 벗고, 반지와 목걸이를 넘겼다. 목걸이에는 카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볼크는 200골드 꽁으로 벌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그녀가 벗은 흉갑을 착용했다. 그동안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는데 이제 안심이 됐다. 볼크는 갑옷을 벗고 천옷만 입은 상태로 벌벌 떠는 여자를 보고 혀를 차더니 턱짓으로 가라고 신호했다.
"네... 네!"
여자는 볼크의 턱짓을 보고 뛰어갔다. 한쪽 팔이 나가서 뛰는 대로 흔들리는 꼴은 아무리 볼크의 적이었더라도 처량한 꼴이었다. 용병들은 그 여자를 보고 참 이상하게 뛰어간다며 비웃다가, 한 용병이 장난으로 그녀에게 화살을 쏘아 맞추자 크게 폭소했다.
"아니 나는! 워낙에 이상하게 움직여서 좀비인 줄 알았지! 하하하!"
"맞아! 저게 사람 뛰는 꼴이냐? 무슨 민제국 경공도사도 아니고!"
볼크는 웃지 않고 화살을 맞고 쓰러진 그녀를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볼크가 (있다면) 맥주를 쏘기로 했다. 그래서 시다 한 명과 같이 마을에 가서 식료품을 좀 얻어오겠다고 했다. 볼크는 마을 외곽에 위치한 한 양조장으로 들어갔다. 양조장은 음침했지만 전쟁통 한복판에 위치했음에도 놀라우리만치 멀쩡했다. 볼크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아낙네에게 말했다.
"이긴 거 축하하는 기념으로 맥주 두 통 가지러 왔는데요. 그렇게 보지 마세요. 우리도 다 대가 지불할 준비는 하고 왔으니까."
아낙네는 그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볼크에게 맥주 한 잔을 꺼내다주었다. 싱겁고 미지근했지만 이런 곳에서 맥주가 어디랴. 볼크는 시다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상념에 잠겼다. 볼크가 처음으로 살인을 했던 때가...
볼크를 놀리던 패거리들이 있었다. 볼크와 안나는 이미 마을에서 평판이 조금 안 좋았다. 둘 다 부모가 죽었던 터라 안타깝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근본이 없다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었다. 볼크의 형인 크리거는 어리숙하고 지능이 낮아 아이들에게 항상 놀림당하고는 했다. 볼크가 놀리는 아이들을 혼내는 과정에서 부모와 마찰이 있었고, 이는 볼크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려던 차였다. 볼크가 아군이 몇 없는 것을 아는지 패거리들은 볼크를 계속해서 놀렸고, 어느 날은 볼크의 아내가 될 안나까지 욕하는 것에 볼크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애미애비 없는 년이랑 또라이랑. 끼리끼리 자알 논다!"
"야, 니 아내는 몇 골드 준다니까 결혼해줬냐? 나도 좀 하자야!"
"...결투다. 이 개새끼야."
볼크가 패거리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결투를 선언한 것도 엄청 참아준 것이었다. 하지만 패거리들은 비웃기 바빴다.
"으아악! 항복! 미안해!"볼크가 받은 모욕은 누가 들어도 참기 힘들 정도였고, 볼크는 절차에 맞춰 결투를 신청한데다가, 오히려 상대측이 1:1이라는 룰을 어기고 3명이 달려들었다. 죽은 이의 가족들이 볼크가 죽었으면 한 것과 별개로, 볼크는 정당한 결투 행위로 인정받아 풀려났다. 하지만 무죄를 선고받은 것과 별개로, 볼크는 그 이후 심적으로 더 힘들어했다.
볼크가 상대를 대검으로 내리치자 자세가 무너졌고, 자세가 무너지자 볼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죽여버렸다. 볼크를 죽이기 위해 뛰쳐나왔던 3명도 똑같았다. 한 명은 그대로 두동강이 났고, 나머지 한 명은 참수당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명은 팔이 잘린 상태로 엄마를 부르며 도망쳤지만, 볼크는 대검을 내팽개친 채 그를 쫓아가서 공터를 벗어나기도 전에 그를 넘어뜨리고, 볼크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어찼다.
젊은이 3명이 세상을 떴고, 나머지 하나는 심각한 외상과 함께 침흘리개 바보가 됐다. 잔혹하고 일방적인 학살이었지만 볼크의 행위는 규정상 정당했다.
더 이상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안나와는 친하게 지냈지만, 볼크는 다들 슬금슬금 피했다. 아이들도 볼크의 형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 이후에 한 아이가 볼크의 형을 괴롭혔던 적이 있었다. 볼크는 그에 농사일을 끝내고 해질녘에 그 아이의 집에 가서 항의했다. 그 반응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부모는 볼크에게 엎드리며 사과한 뒤, 내쫓듯이 문을 쾅 닫았다.볼크는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다가, 몇달이 지나서야 겨우 전선이 합류할 수 있었다. 볼크는 그때 다시금 깨닫게 됐다.
볼크가 그 집에서 떠나려는 순간, 안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와 벨트로 채찍질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가 울면 울 수록 채찍질은 거세졌다. 그리고 그 때 들린 어머니의 앙칼진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너, 이,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다 죽을 뻔했어! 너가 지금 무슨 미친놈을 건드렸는지 알기나 해!"
그 눈에 비친 두려움과, 그 목소리에 담긴 증오심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그렇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볼크는 도망쳐야 했다. 그 사람들의 두려움이 볼크를 잡아먹을 것이 뻔했기에.
"저기, 볼크 님? 여기 주인댁이 대금을 달라고 하시는데..."
"음? 아,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볼크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낙네의 지루한 눈빛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낙네는 볼크와 시다가 양손으로 들만한 크기의 맥주통을 준비해 놓고 볼크가 무엇을 대가로 제시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볼크는 그에 자신이 방금 '주웠던' 금반지 두 개와 목걸이를 내놓았다.
"예. 지금 제가 동전은 없고, 이거 꽤 비싸보이던데 이거면 되겠지 싶은데요?"
볼크가 웃어보였지만, 아낙네는 웃지 못했다. 아낙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손이 벌벌 떨렸다. 아낙네는 반지와 목걸이를 손에 잡고 벌벌 떨다가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죠?"
"주웠는데요."
"...어..."
시다는 왜 이 아낙네가 이렇게 반응하는지 대충 알아챈 눈치였다. 볼크는 아낙네가 왜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아낙네가 주저앉아서 벌벌 떨며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카린... 카를... 이건 아니야... 신이시여... 이건 아니야... 왜... 내 딸을... 내 아들을...?"
"이런 제기랄."
아낙네의 고개가 벌벌 떨리며 볼크에게 다시 돌아갔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볼크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그 시선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 것 같았다. 볼크는 애써 시선을 피하다가 흘깃 그쪽을 훔쳐보았다.
그 때의 증오심, 그 때의 두려움.
"헉!"
"볼크 님?!"
볼크도 넘어지면서 의자와 함께 굴렀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볼크는 그가 '카를'과 '카린'에게서 '주운' 갑옷과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양조장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시다의 말 따위는 공포에 질린 그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볼크 님! 볼크 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님을.
도망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임을.
12. 한태성 ¶
- 100스레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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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개무량하게도 100스레를 달성했습니다.
이전 임시스레들 까지 더하면 100스레는 아득하게 뛰어넘었겠군요. 아무튼 저흰 멋진 이야기를 제법 길게 끌고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먼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기차가 직선으로 가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뒤를 돌아보면 이리저리 굽어있는 것 처럼.
이 먼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문제 없다고 생각한 일이 혹여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누군가에게 AT가, 누군가를 화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에 레주가 100스레라는 넘버링이 앞도적이니 0.1로 고쳐써야 다른 사람들이 부담을 가지지 않을거라고 농담삼아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고단하고 감개무량하게 도착한 기념비적인 100스레니 우리 모두 처음 시트의 첫 문장을 작성하던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남들에게 상냥한 이웃이 되어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