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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거 ¶
- 봄 새싹이 움트는 날
- 아이는 봄 새싹이 움트는 날에 태어났다. 평범한 부부는 자식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애는 연예인을 해야 한다고.
아이의 진로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다.
반드시 이루어내리라.
리라의 이름은 부모의 소망을 담아 지어졌다. 기억나지도 않는 아기 시절, 당시 꽤 인기를 끌던 사극에 세손 역할로 출연한 걸 시작으로 타 연속극 등지에서 비슷한 포지션의 엑스트라 출연을 반복하며 카메라와 이른 안면을 트게 된 리라는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엔 갖가지 스튜디오와 촬영장에 불려다니며 베이비 모델, 키즈모델로 점차 발을 넓혀갔다. 당연하지만 그 모든 일정과 진로의 흐름에 리라의 의견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누구도 물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리라도, 그의 부모도, 친척도, 가족 구성원 중 그 누구도 이 사실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부부는 그들이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카메라 앞에서 집보다 더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던 리라에게는 이미 그것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곤 해도 리라의 매일이 일반적인 일상과 거리가 멀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테트리스처럼 촘촘이 짜여진 스케줄 안에서 미취학 아동이 한번도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 아픈 조명과 카메라 사이에 마네킹처럼 멈춰 서서 원하는 표정도 짓지 못하고, 얼굴에 간지러운 화장품을 바르고 불편한 옷에 몸을 맞추는 동안 리라는 자주 칭얼거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하지만 부모는 그럴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중에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원래 모든 일은 다 힘들어. 리라, 이런 것도 못 참으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니?"
나중에가 언제 오는데? 왜 참아야 하는데? 나 힘들단 말야! 집에 갈래! 그때마다 리라는 리라대로 용기를 내 반박했지만, 말대꾸에 화가 난 부모가 언성을 높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가진 기회가 당연한 건 줄 알아? 이거 다 엄마 아빠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굽신거려서 얻어낸 일들이라고!"
우리 좋자고 이 고생 하는 거 같냐. 너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봐라, 집에서 촬영장까지 매일매일 차 태워다 주고 삼시세끼 도시락 싸다 먹이고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우리가 너를 위해 이렇게나 희생하고 있다. 그런데 고작 그거 가지고 우리한테 징징거려서야 되겠냐. 도대체 언제 철이 들 거냐.
속에 천불이 이는 듯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부모님은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을 써 가며 자신을 보살피고 관리했으며 그 때문에 언제나 만성 피로와 두통에 시달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리라의 식사, 위생, 스케줄을 챙겼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리라가 생각하기에도 부모님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떨어뜨리면 부모는 아이를 안고 달랜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된 다음부터 리라는 떼를 쓰고 눈물 흘리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부모가 웃었고, 스태프가, 감독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스타일리스트가 웃었다. 리라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찡그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못 견디게 불편한 일이었으니까.
대체 누가 그런 걸 원하겠는가?
- 바나나맛 과자
- "리라는 왜 이거 안 먹어?"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었을까. 모처럼의 자율활동 시간을 맞아 교실에서 과자 파티가 열린 날이었다. 책상 위에 올라앉아 교실 중앙에 모여 과자를 먹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중 당시 짝꿍이었던 아이가 그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애는 그 애 나름의 배려를 한다고 질문한 것이었겠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해도 아이들을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 같아 그저 웃어넘기려고 하면.
"야, 왜겠냐? 쟨 급식도 안 먹고 집에서 싸온 것만 드시잖아. 공주님처럼 귀한 몸이신데 이런 걸 먹겠어?"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한마디가 화살처럼 파고드는 것이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헤매던 리라는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걸 느끼고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됐어. 상관 없다. 어차피 이제 조퇴할 시간인데.
"반장, 오늘도 출석부에 조퇴증 끼워뒀어. 선생님께 말씀드려줘."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챙기고 걸어나가 뒷문을 닫으면 예민한 귀에는 내부의 수군거림이 잔잔하게 전해져 온다.
—리라는 매일 일찍 하교하네. 부럽다~
—넌 저게 부러워? 쟨 간식도 안 먹고 학교 끝나고 놀지도 않고 현장체험학습도 수련회도 안 가잖아. 내가 쟤였으면 진짜 매일매일이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근데 이번에 채널 OOC에서 새로 나온 어린이 캠프 프로그램 있잖아, 거기 리라도 나오더라. 수련회 가서 할 만한 건 다 하던데? 그리고 말이야, 우린 가도 다같이 모여서 바닥에서 잤었잖아. 그치? 근데 쟨 예쁜 방에 있는 침대에서 자더라.
—뭐야,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 봐.
—솔직히 재수 없어. 이거 몇 개 먹는다고 세상이 무너져? 아까도 봐, 유빈이가 왜 안 먹냐고 했을 때 표정.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먹냐~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니까?
—그만해. 너희도 리라 부모님 엄한 거 알잖아. 걔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어?
—아, 몰라. 쟨 저럴 거면 왜 학교 오는지 모르겠어. 그, 그 뭐지. 검은고시?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던데.
—검은고시가 아니라 검.정.고.시 야.
—아, 아무튼 그거!
됐다. 들을 만큼 들었다. 리라는 가방끈을 조이고 복도를 가로지른다. 수업 중인 다른 반에서 토론하는 소리, 소란스레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치미는 화를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는 선생님의 인내심 가득한 목소리나 교육용 영상물에서 나오는 소리, 이따금 발표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반대로 리라가 걷고 있는 이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게 너무 싫어서 걸음을 재촉하다가 교문 앞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초조한 얼굴을 발견하면 겁을 먹어 조금 더 빨리. 그러다가, 튀어나와 있는 벽돌에 발끝을 걸린다.
"리라!!"
무릎이 아프다. 리라는 쓸려서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유독 얼얼한 오른쪽 무릎을 내려다본다. 조금 긁혀서 피가 났지만 심하진 않네. 다행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거친 손길이 리라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조심성 없게! 엄마가 넘어진다고 뛰지 말랬지!"
어디 봐, 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상처를 살피는 모습에는 그래도 약간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아 리라는 조금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그래도 상처가 작아서 어떻게든 가릴 수는 있겠다. 니삭스나 스타킹 같은 걸..."
다음 말에 곧바로 식어버렸지만.
"가자. 준비 시간 맞추려면 아슬아슬해."
"네, 엄마."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차량 내부는 깔끔했다. 리라는 뒷좌석에 앉아 미리 준비되어 있던 점심 도시락 가방을 열었다. 닭가슴살과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당근을 버무려 구운 요리와 식초를 뿌린 샐러드 채소 조금, 아몬드와 방울토마토 각 3알씩. 플라스틱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으면 운전석에 앉은 어머니가 차를 출발시킨다. 그리고 몇 초 후, 교문 앞 과속방지턱에서 차체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포크에 꽂혀 있던 음식이 바닥을 굴렀다.
"아!"
"또 왜? 하아... 주워서 쓰레기 봉투 안에 넣어두렴."
아까워. 리라는 가장 큼지막했던 고기 조각을 한참이나 미련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쓰레기 봉투 안에 던져넣는다.
"엄마. 있잖아요, 오늘 학교에서 자율활동 시간에 과자 파티 했는데요."
"먹었어?"
"네? 아니요."
"잘했어. 그런데 그건 왜?"
"안 먹었는데... 애들이, 왜 안 먹냐고. 재수 없다고."
"그래?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무슨. 그냥 무시해. 어울리지도 말고. 물든다."
물 드는 게 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얼른 먹어. 이따 배고프다고 하지 말고."
"저도 그냥 친구들이랑 같은 거 먹으면 안 돼요?"
끼익. 마침 빨간불이라 정지한 참이었지만 타이밍이 나쁘다. 리라는 자연스레 그의 어머니가 화가 났다고 느낀다.
"...아니에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뀐다. 타이어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전진한다.
그 다음날은 조금 이르게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은 아침조례 직후 조퇴증을 제출하고 출발해야 하는 날이라 조금이라도 학교에 더 있고 싶어 새벽에 나가는 아버지를 졸라 함께 나왔다. 하지만 막상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와 있자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무념무상으로 벽에 걸려있는 알록달록한 시간표만 노려본다.
—드륵.
그 때,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약간 동그란 얼굴에 갈색 단발머리를 단정히 자른 여자애. 옆자리 짝꿍인 한유빈이다.
"어? 리라야, 안녕! 오늘 일찍 왔네?"
"으응. 어쩌다 보니까. 유빈이는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 사실 있잖아."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진 통통한 뺨을 보며 리라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비록 짝꿍이지만 그의 잦은 조퇴와 결석으로 말을 섞을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하지만 이 애가 자신의 험담에 좀처럼 끼지 않고 때로는 대신 변명까지 해 주는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리라 어제 과자 못 먹었잖아. 그래서 서운했을까 봐."
"아니야. 내가 안 먹은 건데."
"있잖아, 지금 학교에 아무도 없다? 선생님도 아직 안 왔어."
그래서 뭐? 하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뭔가 노란 것이 면전에 들이밀어진다. 해맑은 얼굴로 공을 차고 있는 바나나 모양 캐릭터가 그려진 과자 봉지.
"네 사물함에 몰래 넣어두려고 가져왔어. 근데 마침 만났으니까, 잘 됐다. 우리 이거 나눠먹자."
"나 먹으면 안 돼."
"아, 제발~ 리라야~ 어차피 지금 아무도 없잖아! 빨리 먹고 양치하면 아무도 모를걸? 응? 같이 먹자. 이거 되게 맛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리라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복도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확실히 인기척은 없다. 본격적인 등교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았다. 최적의 환경, 완전범죄를 위한 최적의 조건. 어린아이의 인내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좋아."
"아싸!"
나란히 앉아서 과자 봉지를 뜯자 달콤한 향기가 아직 차가운 새벽공기를 누그러뜨린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맛있는 냄새."
"그치? 자, 얼른 하나 먹어봐."
입술 앞까지 내밀어진 과자를 베어물자 단 맛이 뇌를 강타한다. 리라의 눈이 커졌다.
"맛있다!"
"그치 그치! 더 먹어, 우리 둘이서 이거 다 먹어야 해. 우리끼리 먹은 거 들키면 안 되니까."
머뭇거리던 손길은 몇 번의 바삭바삭 소리가 지나간 다음부턴 꽤 대범해진다. 막 여섯번째 과자를 집을 즈음, 리라의 귀 안에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이어폰이다.
"이게 뭐야?"
"자랑하고 싶어서. 봐라? 미X마우X 모양 MP3.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 담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어. 들어봐~"
동글동글한 모양의 기계를 몇번 매만지자 이어폰 속에서 신나는 멜로디가 전해져 오기 시작한다.
—힘을 내라고 말해줄래. 그 눈을 반짝여 날 일으켜줄래. 사람들은 모두 원하지, 더 빨리 더 많이, Oh 난 평범한 소녀인걸...
"노래 좋다!"
"그치? 이거 요즘 내가 제일 많이 듣는 노래야. 가사가 엄~청 좋거든! 문제집 풀다가 힘들 때 들으면 완전 힘난다?"
리라랑 같이 듣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는 짝꿍의 눈을 리라는 가만히 응시한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평균보다 약간 옅은 것 같은 검은색 눈동자가, 이 애의 눈이 흑진주를 닮았다는 걸.
"나중에 리라도 이 언니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할 거야?"
"글쎄...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못할 건 또 뭐야. 리라 노래 잘 하잖아. 음악 가창 시험 때 다 들었거든. 춤은 못 봤지만 그건 배우면 다 된대."
뭐야 그게~ 하고 웃으면 유빈은 리라의 손을 가만히 감싸쥔다.
"나중에 커서 너 텔레비전 나오면 내가 첫번째로 팬 하고 선물로 과자도 잔뜩 사 갈게. 그리고 가끔 오늘처럼 나랑 아침에 일찍 와서 과자 나눠먹자. 봤지? 이러면 아무한테도 안 들킨다니까!"
발랄한 목소리에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좋아, 그러자."
"약속이야?"
"응, 약속!"
작은 새끼손가락 두 개가 얽힌다. 약속 도장 사인 복사 코팅 다짐. 맹세!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달콤한 공기와 다정한 가사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평생을 가더라도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 2년 전, 서울 K중학교
- 하지만 힘을 내 이만큼 왔잖아
이것쯤은 정말 별거 아냐
세상을 뒤집자 하!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뿐인
복잡한 이 지구가 재밌는
그 이유는 하나 yes it's you
흥얼흥얼. 창 밖을 보며 띄엄띄엄 가사를 따라부르던 유빈의 귀에서 이어폰이 뽑혀나간다.
"뭐야?!"
"불렀는데 답이 없어! 오늘 저녁 같이 먹을 거냐고!"
"아 그거. 아니. 나 오늘 학원 쨈."
"뭐? 왜?"
"티켓팅 성공함."
친구의 입이 크게 벌어지는 걸 즐겁게 지켜보던 유빈은 노래가 흘러나오던 MP3를 끄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진짜 미쳤네. 어떻게 잡았냐? 완전 부러워 진짜."
"죽이지? 나 아무래도 초능력자인듯. 티켓팅 수상하게 잘하는 초능력자."
"그런 것도 있냐?"
"하는 소리지. 인첨공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 초능력자가 어딨냐?"
투닥거리며 달려드는 친구의 이마를 밀어내며 sns에 시선을 집중한 유빈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걸린다. 아니 굳이 따지면 익숙한 것. 너무 잘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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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유빈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이게 뭐야?
- 너는 아직도 좋아하니
리라는 선물로 받은 아이돌 앨범을 집어들었다. 이런 걸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유씨? 아니, 김씨던가... 아니다. 한씨다. 한...
"유빈."
잘 지내고 있을까. 돌이켜 보니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나를 본 친구는 지금으로선 그가 유일하다. 리라는 의자를 돌려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편지지와 편지 봉투들이 들어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쓰여져 포장된 게 절반이다. 보내지지 않은 편지들. 보낼 수 없는 것들. 이 편지들의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곳에 안부를 여쭈려 한다. 리라는 펜을 들고 가장 고운 편지지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유빈에게.
첫 글자를 떼고 나자 놀랍도록 머리가 새하얘져서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져서 애꿎은 종이 위에 점을 찍어대다가 얼굴을 박는다.
"내가 글재주가 이렇게 없는 줄은 몰랐네. 선물이라도 부쳐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안 되겠지."
애초에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스스로의 무대책함에 헛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황당한 마음이 도를 넘으면 한순간 가뿐한 기분까지 들어버리고 만다. 리라는 다시 펜을 집는다.
—너는 여전히 바나나맛 과자를 좋아하니?
- 신성의 탄생
- '나중에 리라도 이 언니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할 거야?'
가끔은 작은 계기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바나나 향이 묻어나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었던 가요는 리라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변혁이다. 꿈을 가지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건 정말이었다. 오색찬란하게 물든 하늘 아래를 걸어가며 리라는 결심했다. 노래하고 춤추며 새처럼 날아오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 이후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내심 그가 배우가 되길 바랐던 부모는 몇 번이고 반대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리라는 포기하는 대신 자주 노래를 부르고 혼자 춤을 연습했다. 그리고 어느 날, 모 댄스학원의 내방 오디션에 연고도 없는 어린애가 침입하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부모는 뜻을 꺾는다. 인생 최초로 부모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은 때였다.
곡절이 많았지만 그 뒤로는 대체로 순탄했다. 리라에게는 소위 말하는 재능이 있었다. 멋대로 침입한 바로 그 학원에 등록한 지 몇 주도 되지 않아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로 거듭난 그는 곧 아이돌 기획사의 문을 두드려서 연습생이 되었고, 선배 그룹의 활동 시기 탓에 새 그룹 런칭과 데뷔조 발표가 자꾸만 미뤄지자 그대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정글에 제발로 들어갔다.
그건 분명 무모하지만 동시에 대담한 선택이었다.
프로그램은 분명한 메리트가 존재했지만 부정할 수 없이 비인간적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연습생들을 안방 브라운관에 올리며 표수로 평가하고 등급을 나누고 대중의 반응을 눈앞에 들이밀며 차가운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분만 해도 그랬으니 카메라 뒤에서 무슨 일이 더 일어났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겠다.
어쨌거나 리라는 견뎠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잘 하는 게 그거였다. 배 곯으며 안무를 연습하고 대형을 짜다가 현기증이 일 때, 보컬 평가를 앞두고 목이 갈라져 말도 하기 힘들 때,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를 잡아준 건 이제 얼굴도 흐릿한 초등학교의 인연이 들려준 노래뿐이었다.
고작 노래 한 곡. 고작 노래 한 곡이 리라를 연습실로도 스테이지로도 촬영장으로도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 날. 최종 결과가 발표되는 그 생방송 날.
아직도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리라의 심장은 불안하게 박동한다. 4등이 발표될 때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땐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았고 3등이 발표될 땐 구질구질한 마음이 들었으며 2등이 발표될 땐 그저 눈을 감고 싶었다.
때문에 그 다음 그의 이름 석 자가 불렸을 때, 리라가 울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국으로 송출된다.
신성新星의 탄생이었다.
이리라는 끝내 영광의 1위를 쟁취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성공하라고 한 이유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구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으니 발밑 모든 게 아득해 보였다. 그 순간, 리라는 십몇년 만에 그의 부모를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 온더로드: Pre debut
- 망가진 우산, 버리고. 학원 첫 등록 때 받은 단체 티셔츠... 언제적 거야? 버리자. 악보는 챙기고, 노트도 챙기고...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던 사물함을 텅 비우고 나니 당분간 이곳에 올 일이 없다는 게 비로소 실감난다. 리라는 사물함 문을 닫고 조용한 연습실을 바라보았다. 이른 새벽, 아직 누구도 출근하지 않은 사내는 몹시 고요하다.
'정리 다 했어?'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리라는 불 꺼진 연습실을 들여다보길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밝은 갈색 머리, 부드럽고 선한 인상을 한 소녀가 그 자리에 있다.
"네, 다 했어요. 차 왔대요?"
'아니, 30분 정도 늦을 것 같대. 참나. 그럴거면 왜 일찍 픽업하러 오겠다고 한 거야? 사람 잠도 못 자게. 피곤하지?'
"조금? 지호 언니는요?"
'엄청. 다크서클 보여? 완전 턱에 닿을 지경이야.'
"아, 진짜! 판다 같아!"
'......이럴 땐 별로 안 그래 보인다고 해 줘야지.'
"별로 판다 안 같아 보여요."
'늦었거든!'
"으아! 다히지마! 자모해서여!"
양 볼을 쫙 잡아 늘리며 버둥거리는 리라를 지켜보던 지호는 곧이어 풋, 하고 웃은 뒤 손을 놔주었다.
'당분간 여기 말고 다른 데로 출근할 생각 하니까 이상하네. 리라 넌 어때?'
"저도요. 솔직히 이렇게 빨리 데뷔할 수 있을줄도 몰랐고요. 기분이 이상해요."
'뭐야? 1위가 이런 소릴?'
"순위 발표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나이도 제일 어리고, 저보다 잘 하는 사람들도 많아 보였으니까."
순간 침묵이 흐른다. 리라는 돌아오지 않는 대꾸에 의아해하며 신발 끝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중에서 네가 가장 잘 했잖아.'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에 긴장도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리라는 마주 웃어보인다.
'긴장되지? 본격적인 숙소 생활도 처음이고. 부모님이랑 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는 건데 힘들지는 않겠어?'
"괜찮아요! 프로그램 참여하면서 다같이 지내본 사람들이고 지호 언니도 있으니까."
'그래, 내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데뷔조 멤버들도 전부 구설수 없는 사람들로 뽑혔고 숙소도 괜찮대. 다같이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창문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조금씩 푸르스름해지는 하늘이 덧씌워졌다. 리라는 어깨 위에 얹힌 지호의 손을 마주잡는다.
'차 올 때까지 1층 휴게실 가서 쉴까? 여기 계속 서있기도 좀 그렇고. 타이틀곡 샘플 들으면서 기다리자.'
"좋아요!"
이어폰을 건네받아 귀에 끼운 리라는 발치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경쾌한 멜로디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만 같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 온더로드: Blossom Bike
- 주의: 사람에 따라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빛이 따가워지고 기온이 올라가자 분홍빛이었던 나무는 금세 녹색으로 물들었다. 리라는 그 나무들 중 하나를 골라 가장 튼튼해 보이는 가지 위에 앉아서 푸르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더운 건 힘들지만 한결 가벼워진 행인들의 옷차림이나 더운 날씨를 겨냥한 각종 상품들은 예쁘고, 계곡과 바다, 알록달록한 제철 과일의 향취는 새콤하다. 바야흐로 세상의 채도가 올라가는 계절이 다가왔다.
산들바람이 머리를 헝클이고 지나간다. 리라는 가지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를 살짝 휘저었다가 손에 들려있던 편지를 다시 바라본다. 봄에 사 두었던 편지지는 철 지난 벚꽃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은 펜으로 장황하게 쓴 내용들을 읽어내리다 보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레벨 3. 열등생 딱지를 내려놓을 수 있는 출발선. 초능력을 보다 능숙하게 활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살상력을 갖추기 시작하는 단계. 강능력자 라고 지칭되는 숫자.
힘주어 눌러쓴 글씨 끝에는 그리운 명칭이 적혀 있다. 리라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편지 봉투에 넣었다. 꽃 모양 스티커를 그려내서 봉하고 가방에 쑤셔넣은 다음 헤드셋을 올려 쓴다. 잠시 방황하던 손가락이 한참 손대지 않던 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다. 자전거 바퀴가 구르는 효과음을 시작으로 포근하고 발랄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블로섬 바이크는 온더로드의 데뷔 타이틀곡이자 첫번째 미니 앨범이다. 정식 데뷔 전부터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주목을 한껏 받고 있던 신인 그룹은 첫 음악 방송 무대에서 대중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을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차트 순위와 앨범 판매량은 그날을 기점으로 급격히 치솟았다. 무대 직캠이 하나하나 갱신될수록, 뮤직비디오의 조회수가 올라갈수록, 주간100 리스트의 최상단에 머무르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날 수 있었다. 어딜 가나 그들의 노래가 나왔다. 텔레비전 광고는 멤버들의 얼굴을 쉴새없이 반복 재생했다. 그중에서도 이리라를 향한 관심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세븐스타즈가 발굴한 어린 신성, 화려한 재능, 팀 내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감은 많은 러브콜을 불러오는 요소가 되었다.
사랑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리라는 마냥 행복했다. 새벽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일상이 되더라도, 꼼꼼히 짜여진 매일의 루틴을 피로와 함께 소화할 때에도, 꼼꼼히 올려진 메이크업과 장식 가득한 무대 의상이 이따금 갑갑하게 느껴져도 애정 담아 울리는 응원 구호와 함성, 환호,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팬들의 긍정적 반응을 보고 있으면 힘든 것 따위는 어느새 잊혀지곤 했다. 욕구를 억누르는 게 사랑받는 대가라면 기꺼이 평생토록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어렵지 않다. 통제는 익숙하다. 신체는 적응한다. 다만 이왕 그러는 김에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다.
배꼽시계는 고장났지만 한동안 지속된 새벽 기상은 생체 리듬을 고정시켜서, 그날도 리라는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물을 마시기 위해 나간 숙소 거실은 모두가 잠든 탓에 고요하고 어두웠다.
아니, 어두운 게 정상이었어야 했다. 덜 가신 잠기운에 취해 느릿하게 옮겨지던 발이 살짝 열린 욕실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누가 깼나? 문득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긴 리라는, 문고리를 몇 보 앞두고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한순간 굳어버렸다. 이어지는 거친 숨소리. 환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 그러나 환풍기로도 가려지지 않는 불쾌한 냄새. 실제로는 10초나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체감 상 한 시간은 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호 언니?"
바짝 긴장된 손으로 문을 밀면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리라는 타일 바닥을 밟았다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지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대신 레버를 눌러 변기의 물을 내린 뒤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걸어갔다. 수돗물이 쏟아지고, 입을 헹구고, 이윽고 다시 수도꼭지가 잠길 때까지 좁은 욕실 안에는 침묵만이 무겁게 감돈다.
'왜 벌써 일어났어.'
"언니... 속 안 좋아요? 어떡하지? 매니저님 불러서 병원 갈래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물 한 잔만 가져다 줄래.'
"네. 잠깐만 기다려요."
'조용히 갔다 와, 다른 사람들 깰라.'
살금살금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은 결코 멀지 않았지만 심장은 먼 길을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두근거렸다. 커다란 컵에 미지근한 물을 가득 담아온 리라는 벽에 기댄 지호에게 컵을 내밀었다. 메마른 입술은 핏기가 없다. 리라가 안절부절 못하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으면, 지호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고 가볍게 웃어보인다.
'별 거 아니야.'
"병원 안 가도 돼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괜찮아. 물 마시고 자면 돼.'
지호의 반바지 주머니에서 소포장된 노란색 스틱이 나왔다. 리라는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이지컷 라인을 따라 뜯어지는 비닐의 단면을 보고, 그 안의 내용물이 컵 안으로 쏟아지며 풍기는 어딘가 텁텁한 시트러스 계열의 냄새를 맡는다. 그걸 물에 섞어 단숨에 들이키는 소리가 예민한 귀를 자극시켰다.
"그게 뭐예요?"
'넌 몰라도 되는 거. 이건 신경쓰지 말고 리라 너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더 자. 오늘 화보 촬영 간다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매니저님 부를게요. 병원 가자."
'하아... 얘가 말을 안 듣네. 됐다고 했잖아. 말하는 것도 안 돼. 비밀로 해.'
"그럼 언니도 이거 하지 마."
'그건 안 되겠는데.'
"뭐가 안 돼? 목이랑 속이랑 다 상하려고 그래요?"
'가끔 이러는 거야. 네가 신경쓸 일 아니고. 그리고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나 같은 애들 한두번 봤어?'
"그래도 하지 마!"
'곱게 말해주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네. 이리라. 뭘 안다고 참견이야. 넌 비교 당해본 적 없으니까 속 편한 소리 할 수 있겠지. 난 아니야.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지 알기는 하고 말리는 거야?'
날카로운 대꾸에 리라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에야 지호는 손을 뻗어 리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미안. 잊어버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겠지?
분위기에 떠밀려 걸게 된 새끼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온더로드: Tropical Trap
- 주의: 노골적인 악성 댓글 묘사, 괴롭힘
성공적인 데뷔 활동을 시작으로 온더로드는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전국이 그들을 주목했다. 가게마다 온더로드의 노래가 나오고 영화 시작 전 대형 스크린에 흐르는 광고에서는 멤버들의 얼굴이 나왔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번화가의 광고판에는 리라의 얼굴이 걸렸고, 텔레비전을 돌리면 그들의 얼굴이, 그중에서도 리라의 얼굴이 가장 많이 나왔다. 화려한 시절이었다.
프로젝트 그룹의 장점은 데뷔 후 컨셉과 발표곡들이 전부 정해져 있다는 거다. 활동 부진으로 2집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꿔 보고 묻힐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사실 이 정도로 성공한 시점에서 활동 부진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긴 했지만, 다양한 나이대가 포진해 있는 그룹인 만큼 연습생 기간이 길었던 멤버들은 꽤 깐깐하게 이것저것을 따지기 시작했다. 리라는 그런 언니들에게서 빈틈없는 시간관리와 강박적 스케줄 설정을 배웠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해왔던 일에 타이머 하나를 더 달았을 뿐이니까.
그 뒤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름을 맞아 정규 1집으로 컴백한 온더로드는 날개 단 새처럼 푸르른 여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케이팝 역사 상 전례없는 초동 판매량에 회사는 웃었고 멤버들은 기뻐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더 좋아졌다. 좋은 재료로 채워진 냉장고, 더 섬세한 체력 관리 프로그램, 영양 관리, 높은 가격의 샵... 그리고 더 좋은 숙소.
변한 게 있다면 반대로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리라는 여전히 수많은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어린애 치고 지대한 관심이 연일 이어졌다. 그건 찬양과 동시에 의문을 낳기 충분했다. 저 애가 뭔데 이렇게까지 세상이 열광하는가, 저 애가 뭐길래 어린 나이에 화려한 것들을 두르고 호화로운 대접을 받는가.
저 애가 뭐라고, 라는 의문은 저 애가 어떻게, 로 변한다. '어떻게' 가 궁금해진 사람들은 갖은 추측을 내놓았고 그건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텍스트로서 온라인에 범람했다. 개중에는 15살짜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문도 다수 있었고, 그중에 무엇도 진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몇몇 이야기는 사실이나 다름없게 된다.
—저 브랜드 이미지랑 너무 안 맞지 않아? 회사에서 돈으로 찔렀나?
—다른 멤버들 자연스럽게 들러리로 만들어 버리네
—어릴 때부터 방송계 있던 애들 특: 싸가지 없음
—예쁘면 된 거 아니냐? 인간들 바라는 거 개많아
—나 방송국 갔다가 봤는데 부모가 진짜 극성이더라 회사까지 따라와서 챙기는 거 처음 봄;
—지나가던 플랫폼인데요 이 영상 댓글 왜 이렇게 더럽나요... 신고합니다
—딴 건 몰라도 아이돌 할 거면 인성에는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공항 갔는데 눈 한번도 안 마주쳐 주고 팬들 선물도 거의 다 무시하더라고요. 인기는 한철인데... 겸손한 아티스트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 제트*인데 얘 인준이한테 너무 대놓고 치댐 우리 애들도 중요한 시기인데 자제 좀 했으면
역사적으로 말의 힘은 강력하다. 한 명이 말하면 헛소리로 치부될 것도 다섯 명이 말하면 어쩔 수 없이 한번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열 명 백 명이 동시에 같은 말을 하면 그건 아무리 허무맹랑해도 힘을 가진다.
—온더로드 이리라 충격 스캔들
ㄴ??
ㄴ스캔들? 연애해?
ㄴ그래서 충격 스캔들이 뭔데
ㄴ어그로ㄴㄴ
ㄴ글쓴이: 사내연애
ㄴ그룹 내에서 사귄다고?
ㄴ이건 또 뭐야;; 딴 데 가서 하세요
ㄴ그래서 뭐냐고? 던져놓으면 끝임? 사람을 화나게 하는 첫번째 방법은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ㄴ글쓴이: (양복을 입은 성인 남자와 리라가 손 잡고 있는 사진 이미지)
ㄴ??
ㄴ????
ㄴ착장 보니까 E페스타 때인데
ㄴ남자 쟤네 대표잖아
ㄴ아니 사진 하나 가지고 무슨... 억까 자제좀
ㄴ어그로ㄴㄴ
ㄴ글쓴이: 회사 안에서 소문 다 남
ㄴ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ㄴ글쓴이: (삭제된 이미지)
ㄴ엥????????
ㄴ???????
ㄴ미쳤나ㅋㅋㅋ 너 안짤려?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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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는 열리지 않는 링크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숙소 냉장고에서 미리 불려놓은 오트밀을 꺼냈다. 오늘도 스케줄이 잔뜩이다. 근거없는 소문들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게 아무리 거슬려도 눈 감는 게 버릇 되어야 한다. 얼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씹어대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유리병에 담긴 오트밀을 그저 노려보다가 겨우 한 술 떠 본다. 어쨌든 움직이려면 먹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열량 정도는 챙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욱! 이게 뭐."
그러나 겨우 떠 넣은 것마저도 끔찍하게 역한 맛이 나서 도로 뱉고 만다. 리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오트밀을 바라본다. 역하고 익숙한 향. 텁텁한 시트러스 분말의 맛.
"무슨 일이야?"
"...지호 언니, 약 아직 안 버렸어요?"
"어? 아니? 네가 매니저님한테 말하는 바람에 멤버들 다 보는 앞에서 버렸잖아."
거짓말.
"제 컵 건드렸어요?"
"뭐?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컵을 왜 건드려."
"언니가 먹는 약 맛이 나서."
".....너 피곤하니?"
정말 모르겠다는 듯 팔자로 내려간 눈썹, 의아하다는 듯 기울어지는 고개를 보고 있자니 의심 또한 손쉽게 희석되고 만다. 리라는 오트밀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전부 버리고 자리를 떴다.
그게 제대로 된 대화의 마지막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나은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 온더로드: Maple Maze
- 주의: 집단적인 괴롭힘에 대한 묘사
부지런한 거북이는 게으른 토끼를 이긴다.
하지만 토끼가 거북이만큼 부지런하다면 과연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토끼의 뒤에 머물러야만 할까?
적어도 정지호는 그림자 뒤의 거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곧 터져버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불만은 크게 부추길 필요조차 없다.
정지호는 알고 있었다. 이리라의 재능은 넘볼 수 없는 것이지만 무대 뒤에서 필요한 재능은 다르다는 걸. 그는 손쉽게 거북이들을 제 편으로 만들었고 그 뒤로는 많은 것이 쉬워졌다.
정말 많은 것이.
그리고 리라는, 여느 때처럼 인사를 건네며 방에서 걸어나온 그를 바라보는 12개의 눈이 지독한 냉기를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챈 어느날 아침에서야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O월 2주차 수요일
사복에 이상한 얼룩이 졌다
개인 신발 한 쌍 분실
2주차 토요일
오트밀에서 또 이상한 맛이 난다
버렸다
3주차 수요일
개인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내 방 안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3주차 금요일
모아둔 펜레터가 전부 사라졌다
4주차 일요일
펜레터 발견
방문 앞
타다 만 채 쓰레기 봉투에 담겨 있었다
4주차 목요일
언니들이랑 같이 밥 먹기 힘들어서 깨작거리니까 지호 약 먹는 거 일러바칠 땐 언제고 네가 그러면 어쩌냐고 한 소리 들었다
결국 체했다
X월 1주차 월요일
협찬 의상 분실
다행히 지호 언니가 찾아왔다
1주차 수요일
악세서리 파손
내가 안 건드렸는데
물건 간수 못한다고 가빈 언니한테 혼났다
2주차 월요일
대기실 위치를 잘못 알아서, 선배 그룹 대기실에 들어가 기다리다가 잠드는 바람에 한 소리 들었다
세라 언니한테 따졌는데 자긴 그런 적 없단다
3주차 목요일
데뷔 전 구매했던 개인 가디건이 조각조각 나서 변기 안에서 발견됐다
4주차 수요일
싸웠다
(날짜가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내가 뭘 잘못했지
아니야 다 제가 잘못했어요
전부 그만두고 싶어졌다
울고 불고 애원하고 가식을 떨고 눈치를 보다가 화도 냈지만 그 모든 걸 전부 놓은 다음이 차라리 편했다. 섭섭하고 괴롭고 슬픈 걸 숨기면 카메라 앞에서 친한 척 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물건이 사라지거나 옷이 변기 안에서 발견되거나 숙소가 넓어진 후로 사실상 방 하나에 격리되어서 바깥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혼자 잠드는 일 따윈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일정이 끝난 후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쏟아지는 차가운 눈빛들 만큼은 지독하게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매니저도, 회사나 업계 관계자도, 당시 온더로드를 담당했던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 거북이들은 현실을 납득하는 대신 토끼의 다리를 꺾어놓길 택했고 상황은 모두의 합의 하에 철저히 숨겨졌다.
그리고 이 당시의 '모두' 에는 드물게 리라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게 수월하게 숨겨진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온더로드는 현재 가장 크게 주목받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고,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그 순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슈가 될 게 분명했다. 피해자 가해자를 가리지 않고 각 멤버에게 기자와 불특정다수가 덧붙이는 막말 및 지독한 꼬리표가 붙을 것이고, 그렇게 금 간 이미지는 설령 연예계를 떠난다고 해도 평생토록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게다가 활동 중에 일이 공론화 되면 손해를 보는 회사 측에서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불이익을 줄 지 몰랐다.
더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 온더로드를 순수하게 사랑해준 팬덤. 팀이 불미스러운 사유로 공중분해 되면 가장 큰 충격을 떠안아야 할 사람들. 플랫폼.
리라가 그들에게 동조해서 침묵하길 택한 이유였다.
그래서 온더로드는 약속했다.
그룹 활동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끝나고도 계속해서, 평생토록, 이 숙소 안에서 일어난 일은 영영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리라는 그의 일을 사랑했고, 플랫폼을 사랑했고, 기대를 걸어주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랑했으며, 솔직하게는 열몇 살 나이에 좋지 않은 일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더로드를 사랑했다. 비굴하다면 비굴한 애정 앞에서, 정이 남아있는 동료들의 의견에 순순히 따른다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앞에서 판단력은 쉽게 흐려졌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꾸역꾸역 활동이 종료되고 본 소속사로 돌아간 뒤에는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이 생겼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못했다.
- 6번 대기실_Before the scene
- —막활까지 너무하네. 또 쟤 스타일링만 눈에 띄잖아. 하얀색이 뭐냐, 하얀색이? 우린 다 쌩 검정인데.
—리라도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이의 제기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맞냐고, 뭐라도 좀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야야. 걔가 그러겠냐? 가만 있어도 알아서 떠먹여 주는 거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데.
—아! 꼴보기 싫어, 진짜! 우린 들러리야?
—회사에 도는 썰 진짜라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쟤만 밀어주겠냐?
—...그거 x나 믿기 싫었는데 솔직히 이젠 모르겠다. 순진한 척 착한 척 친한 척 다 하더니. 더러워.
리라는 대기실 문 앞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들을 가만히 귀담아 듣다가 문을 두드렸다. 6인분의 음성이 단숨에 가라앉자, 리라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고리를 쥔다. 셋, 둘, 하나.
"저 왔어요! 언니들! 이제 무대 올라갈 시간~"
빨리 빨리! 대놓고 차갑게 굳어 있는 표정들을 무시하고 장난스레 등을 떠민다. 자꾸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상대의 손을 마주잡으려 노력하다 질세라 팔짱을 끼면 거세게 떨쳐지고, 그러면 결국 애매한 웃음기만 남은 얼굴로 맨 뒤에 서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모두가 기다리던 그룹이죠! 가요계의 샛별, 온더로드! 마지막 활동인 만큼 강렬한 퍼포먼스와 훌륭한 곡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스탠바이가 떨어진다.
셋, 둘, 하나.
- 온더로드: Winter Wonderland
- 주의: 언어폭력,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
오랜만에 보는 원래 소속사의 간판은 정겨웠다. 캡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채 Vic ent. 라고 쓰여있는 건물 간판을 올려다보던 리라는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온더로드에는 Vic ent. 소속의 아이돌이 둘 있었다. 하나는 이리라, 하나는 정지호. 그룹의 댄서 역할을 맡았던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 출신이기에 가장 끈끈했고, 서로를 잘 알았으며, 그래서 가장 잔혹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세번째 사실만큼은 온더로드 멤버들을 제외한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니까. 그러니 사장이 같은 그룹 출신이자 회사 동기이며 한때는 거짓 없이 친하기까지 했던 두 사람을 다시 묶어 내놓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거다.
"재데뷔요?"
"그래. 프로젝트 그룹 끝났으니 이제 정식 데뷔도 해야지. 오디션 프로그램이랑 온더로드로 팬덤은 충분히 쌓였으니까 재데뷔 하면 바로 1군 노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리라, 할 거지?"
그날은 마침 입사 초기에 정했던 계약 기간이 끝나가던 참이라 재계약에 대해서 상의하기로 한 날이었다. 말이 상의지, 사실상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이라 도장만 찍으면 됐다. 리라는 사장실 테이블에 놓여있는 계약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누구랑 데뷔하는데요?"
"아, 그래. 이미 내가 데뷔조도 싹 편성해놨다. 너랑 같이 연습생 생활 했던 애 둘이랑 다른 회사에서 옮겨온 애 하나. 그리고 지호랑 너."
"지호 언니도요?"
"당연하지. 너희 둘이 같은 그룹이었잖냐. 사이도 좋고 하니 야박하게 떼놓을 생각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사이가 중요한 건가. 리라의 시선이 계약서의 하얗고 매끄러운 표면에서 사장의 얼굴로 옮겨간다. 반사적으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막연히 이전 팬덤 더 많이 끌어오시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네요~"
"하하."
웃음소리가 오가는 동안 실내의 온도가 순조롭게 떨어졌다. 마주 웃던 사장은 손깍지를 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리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말 있니?"
"네."
"뭐지?"
"저 재계약 안 해요."
"뭐?!"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낮았던 체고가 급격히 높아졌다. 리라는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어 사장의 혼란스러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시에, 사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호. 너도 와서 앉아라"
"네,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리고 리라야."
리라의 시선은 고요하게 돌아가 마주앉는 지호에게 고정되었다. 저 눈을 안다. 혼란스럽고 두렵고 안절부절 못 하는 눈빛. 계획했던 것이 잘못될까 안달내는 눈동자.
"리라야... 나 방금 들었어. 재계약 안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역시 들었구나. 리라는 다시 매끄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럴 수밖에요. 방금 정했거든요."
"갑자기 왜?"
"그래, 리라. 불만이 있으면 얘기를 해 봐라. 조율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이건 조율 가능한 사안이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이유가 뭔데? 너 다른 기획사 캐스팅이라도 받았어?"
"......정말 그런 거냐? 그런 거면 곤란한데. 아직 계약 기간 좀 남은 건 알지?"
그럴 리가 있나. 설령 그랬더라면 이런 식으로 대놓고 데뷔를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얼버무리면서 버티다가 계약 기간이 완전히 끝나서 자유로워진 뒤에 걸릴 것 없이 훨훨 날아갔겠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이적 안 해요. 그리고 데뷔도 안 할 거예요."
"그럼 다 관두겠다고?"
"글쎄요. 그럴까봐요."
"왜!"
"왜?"
왜, 냐고 묻는다. 잠깐 먼 곳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 지호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온화한 눈매가 가엾을 정도로 처량하게 처진다. 저대로 울어버릴 것 같은 선량한 얼굴이 한때는 정감 갔는데.
이제는.
"비밀."
"뭐라고?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비밀이라서 비밀이라고 한 것 뿐이에요."
언니는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낮게 읊조린 한 마디에 지호의 오른쪽 안면 근육이 살짝 경련하는 게 보였다.
"정리는 차차 할게요, 사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뭐... 잠깐!"
"이리라! 거기 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가면 정말 끝이다. 돌아오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무대 위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은 남아있었지만 그보다 지난날 시달리고 가슴 졸이며 곪아갔던 세월의 통증이 더 컸다. 그런데 내가 겪은 모든 게 비밀이어야만 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앙갚음 할 수 있는 건 이런 방법밖에 없지 않나? 운이 좋으면 그를 뺴놓고 데뷔할 수도 있으니 사실상 완벽한 복수도 아니었지만 당장은 이걸로 족했다. 그러니까, 이런 치졸한 반격이나마 받아줄 순 없는 건가.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그만 끝내고 싶다. 리라는 그저 저 얼굴을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한때 진심으로 아꼈던 사람을 이 이상 깊이 미워하고 싶지 않기에, 여기서 끝내는 게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기 직전, 손목이 붙잡혔다. 차가운 손가락이 리라의 팔을 붙들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긴 손톱이 손목에 파고들어 리라는 얼굴을 찌푸린다.
"아, 아파! 놔요!"
"어딜 가! 그냥 이러고 가버리겠다고? 통보하고 나가면 끝이야? 어린애 같이 왜 이래? 다시 앉아. 사장님이랑 나랑 제대로 상의하고 다시 결정해. 너 이거 실수하는 거야. 후회할 거라고."
손톱이 파고든 자리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살갗이 밀려나가는 감각이 끔찍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을 이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어째서, 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거야!
"놓으라고요!"
사고는 언제나 순식간에 벌어진다. 사장실 한켠에는 단정하게 장식된 도자기 작품 하나가 있었다. 피부를 긁어내는 손길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치던 리라가 제지하기 위해 다가오던 사장의 손길에 놀라 지호를 그리로 떠밀어버린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왜 하필 그 자리에 그런 게 있었을까. 왜 하필, 그 도자기 작품은 보기보다 연약했을까. 왜 하필. 하필. 어째서. 모든 걸 깔끔하게 묻고 떠나려고 했는데.
쨍강!
"아아아아아아악!"
붉은 피가 다리에서, 쇄골께에서, 팔뚝에서, 뺨에서 흘러내린다. 날카롭게 튄 파편은 지호의 몸 여기저기를 깊고 얕게 훑고 지나갔다. 몰려오는 통증과 충격에 비명 지르는 지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라는 사장이 지호를 부축하러 움직이는 동안 굳은 듯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게 들린다. 나, 나는. 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나는 그냥.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너..."
"저, 저, 저는... 저는... 그게... 죄송합니다."
그 다음은 지저분하고 지지부진한 합의의 길이었다. 지호는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판국에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곳곳에 냈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사장은 소속된 아이돌에게 흠집을 낸 데다가 아끼던 사유 재산까지 망가뜨린 골칫거리를 보호해줄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을 키워서 언론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겠다는 지호의 흥분 어린 의견만큼은 강경하게 막았다. 본인의 회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오는 일이었기에 그리했겠지만, 속시끄러운 당시에는 그 별것 아닌 것마저도 감사했다.
생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압박감 속에서 각자의 보호자가 불려오고 법에 관한 이야기나 책임에 대한 이야기, 손해배상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들이 뒤따랐다. 패닉에 빠져 어떻게든 빨간줄을 그어버리겠다고 고함치는 상대방 앞에서 리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은 그의 부모가 적당한 금액을 싸들고 온 다음 가족이 단체로 상대 측 앞에서 무릎 꿇는 걸로 겨우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당시의 기억은 전부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지만 적어도 그때 했던 말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그리고 리라는 그 길로 연예계를 떠났다.
리라의 집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너 지금 이딴 식으로 그만둬서 뭐 하고 먹고 살려고 그러냐. 우리가 널 이렇게 책임감 없게 키웠냐. 하다못해 사고라도 치지 말던가. 왜 이렇게 나약하냐.
쉴새없이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지쳐 부모라는 타이틀만 믿고 비밀을 조금 열어 털어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리라의 사랑하는 부모님은 당시에만 조금 주춤하는 시늉을 할 뿐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고 마는 사람들이었다. 그걸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까.
"왜 그걸 지금 말해! 이 이야기를 엄마 아빠 무릎 꿇기 전에 했어야지. 그럼 그쪽도 뭐라고 할 말 없었을 텐데."
"원래 모든 일은 다 힘든 거야. 이런 것도 못 참으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니?"
"왜 이렇게 속을 썩이는 거야!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기왕 참은 거 조금만 더 참지 그랬어. 나중에 걔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콧대 꺾어줬으면 됐잖아! 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하고 이 사단을 내!"
그놈의 나중은 언제 오는걸까.
이 레이스의 끝이 존재하긴 하는걸까.
방구석에 박혀 끊임없이 골몰하는 동안 문득 머릿속에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섰다.
어차피 나중은 오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것을 위해 삶을 견뎌야 할 이유가 있나?
- 그리고 오래오래 ■■하게 살았답니다
- 주의:자살사고에 대한 묘사
인간은 수중에서 호흡할 수 없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 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초의 모습에서 지나치게 멀어져버린 인간은 더 이상 고향의 품 속에서 편안히 숨쉴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물을 갈망한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와 심해까지 파고드는 잠수함, 여름마다 사람들로 붐비는 바닷가와 계곡, 강가에 조성되어 있는 시민공원, 반듯한 저택에 하나쯤 딸려있는 연못 같은 것들이 그런 습성을 방증한다. 리라는 그런 증거들로 말미암아 물에서 난 것이 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비약적인 믿음 하에 위험한 행동은 정당화 된다.
방구석에 박혀 끊임없이 골몰하는 동안 문득 머릿속에 들어선 근본적 의문은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불려갔다.
어차피 나중은 오지 않는데, 실존하지 않는 것을 위해 삶을 견뎌야 할 이유가 있나?
생존 본능은 같은 것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으나 사실 이성의 영역에서 답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실존하지 않는 것을 위해 고통을 견디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그러니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더 미련해지고 싶지 않다면, 이 이상 부끄럽고 너절한 꼴로 존재하고 싶지 않다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여기서 유일한 문제는 리라가 인간이라는 거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살아있고자 한다는 걸, 욕조에 차가운 물 가득 받아두고 머리 끝까지 잠겨서 코로 물이 들어오는 감각을 버틸 때마다 체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접싯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존재한다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익수만을 고집한 이유엔 그게 꽤 생존 확률이 높다는 비겁한 무의식적 계산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리라의 본능은 시시각각 귀찮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번번히 숨이 제대로 넘어가 보기도 전에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수치스러움을 씹어삼키게 만든 거겠지. 정신은 죽음을 바랐지만 멀쩡한 신체는 드리우는 그림자를 격렬히 거부했다.
그렇게 새벽이 몇 번 더 흐르고, 딱 그만큼의 실패가 뒤따른 참이었다. 어느날 동틀녂 즈음에 새파란 입술을 한 채 욕실에서 나온 리라는 건물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빨간 태양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오늘은 밖으로 나가볼까?
결심은 이른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도착은 오후에나 가능했다. 지지부진하게 도착한 한강공원은 인파로 가득차 있었다. 리라는 마스크와 모자로 무장한 채 물가에 쭈그려 앉아 그대로 몇 시간이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웃는 표정, 다정한 눈빛, 땀 흘리며 달리고 돗자리 펴고 앉아 조잘대는 모든 것들이 마치 곱게 연출된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저들은 모두 성공한 사람일까? 그래서 저렇게나 행복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걸까?
순수한 궁금증에 애당초 걸음했던 이유는 어느새 잊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졌다. 리라는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 노는 인파를 헤치며 집에 돌아가려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모자를 떨어뜨린 그 순간을. 너무 부주의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어? 온더로드 리라다!"
"뭐? 어디 어디?"
"리라가 여기 왜 있어? 혼자야? 촬영해?"
"몰라. 야, 일단 사진 찍어! 사진!"
"리라야! 여기 봐 줘!"
누군가가 외친 한 마디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나지 않는다.
"뭐야, 표정이 왜 저래?"
"어? 어디 가? 저기요! 리라! 이리라!"
무작정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다가 인적 드문 곳에서 호흡이 멎었다.
리라는 뭍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 세상이 하얬고 시끄러웠다. 몸에 이상한 관과 바늘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반쯤 감긴 눈으로 뒤늦게 마주한 부모의 낯빛은 회색빛이었다. 그는 근처를 지나가던 아무개의 신고로 구급차를 탄 채 이곳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때 기분이 어땠더라. 정확하지 않지만 확실히, 전혀, 조금도 고맙지 않았던 것 같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지고, 몇 가지 검사와 전문의와의 상담을 거치고, 그대로 며칠이 더 흐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초록색 캡슐 알약과 하얀색 정제를 처방받고 난 다음부터 부모와의 대화는 현저히 줄었다. 가끔 말이 오갈 때는 너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같은 미래 계획에 대한 질문만이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학교라도 가야지."
"아직도 나가기 힘들어?"
"내가 미쳐, 어쩌다가 애가 이 지경이 됐나."
"이리라, 엄마 아빠가 말하면 대답을 해야지!"
미래. 그에게 미래가 존재하긴 할까? 초록색 캡슐 알약과 하얀색 정제를 삼키게 된 날부터 리라는 현관문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딱히 마음이 편하지도 않은 공간 안에서 탈출하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썩어가는 상황에 미래를 구상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러나 언제나 죽으라는 법은 없다.
그 상황에서 인천첨단공업단지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다.
"인첨공에 갈래요."
시간이 좀 더 흐른 어느날, 혀가 잘린 것처럼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뜬금없는 소리로 입을 연 자식에게 부모는 몇 번 정도 질문한 다음 의외로 순순히 허락을 내렸다. 이보다 더 나빠질 게 없을 거라는 체념. 어쩌면 저 꼴을 더는 못 봐주겠다는 불만 하에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이후는 지루한 준비의 시간이었지만 그것도 끝은 오기 마련이다. 리라는 벌어둔 돈을 모두 싸들고 인천첨단공업단지에 도착했다. 바깥보다 기술력이 20년은 더 앞서 있다는 하이테크놀로지의 세계, 초능력을 싹틔워 주는 곳, 많은 게 비밀인 공간, 아무때나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는 국가 기밀의 요새.
두렵고 지독한 바깥 세상의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새장.
그 다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그는 여전히 초록색 캡슐 알약과 하얀색 정제를 매일 같은 시간에 먹는다. 가끔은 다른 색깔로. 이따금 정량보다 조금 더 많이.
3. 에메랄드 시티 ¶
- 시즈의 유산
-
서녘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을 따라 늘어지는 그림자가 연구실 안을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모니터의 불빛을 난로 삼아 자판을 두드리는 손동작은 규칙적이고 정갈하다. 타닥 탁 타닥. 키보드 소리는 벽난로에 던져 넣은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데다가 내부 온도가 워낙에 서늘하니 한순간 겨울이 먼저 찾아왔구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정인은 워드 프로그램의 하얀 바탕에 어느새 빼곡히 채워진 그래프와 활자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훑어내린 뒤 저장 단축키를 눌렀다. 그리고 클라우드와 USB에 각각 파일을 백업한 후,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새 붉은 해는 건물의 숲 너머로 온전히 저문 탓에 모니터 불빛이 사라진 연구실은 그야말로 암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곧 퇴근 시간이니 구태여 불을 켤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때문에 정인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 5분의 여유 동안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반짝.
스마트폰의 직사각형 화면이 갑작스럽게 빛을 발하지만 않았더라도 그의 계획은 완벽히 이행되었을 것이다. 정인은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린 후 장시간의 작업으로 인해 뻣뻣해진 어깨를 들어 책상 위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래서 뭐냐. 택배? 아니면 스팸? 정기 구독 결제 알림? 셋 다 달갑지 않은데. 이미 집중은 깨져버렸으니 무시할 명분 또한 없지만서도.
그러나 가볍게 혀를 차며 잠금화면의 팝업 알림을 보면 차라리 앞서 예상했던 세 가지 중 하나인 게 이보다는 기분이 덜 더러웠을 거라고 확신하게 된다.
익숙한 전화번호 아래, 연달아 붙은 세 개의 메세지가 띄워져 있었다.
[엄시현이다]
[얼굴 좀 보자]
[(주소 - 3학구 어딘가의 카페)]
인천첨단공업단지의 저녁은 화려하다. 등대처럼 불 꺼지지 않는 건물들에 각종 네온사진, 가로등 따위로 빼곡한 도시는 낮에도 아름답지만 어둠이 깔린 뒤에는 유난히도 반짝인다. 단화 신은 발이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걸으면 손 안의 모바일 지도가 '나의 위치'를 초 단위로 갱신하며 길을 안내하고, 덕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건 수월했다.
"여기."
저를 부르는 게 분명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후, 내뿜는 담배 연기로 눈 앞이 부얘진다. 안경 렌즈에 가게의 전광판 불빛이 반사되어 시야가 한순간 흐려졌다가 돌아온다. 그리고 모든 방해물이 걷힌 자리에는 반갑지 않은 낯짝이 삐딱한 자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은색 눈동자에 회빛 도는 푸른색으로 겉만 덮은 머리카락. 카페가 아닌 옆의 어둑한 골목에 움푹 들어가 선 채 이리 오라며 손가락 까딱이는 폼만 보면 지나가던 가련한 직장인 삥 뜯는 양아치 한량 새끼라고 덤터기 씌워도 의심받지 않을 것만 같다. 정인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카페랑 길바닥도 구분을 못 하실 줄은 몰랐군요."
"나랑 얼굴 마주보고 뭐 마시면 체할까 봐 배려해준 거다, 새꺄."
"얼굴에 커피 맞을까 봐 무서우셨던 건 아니고요?"
"요즘 드라마 뭐 보냐? 그건 거를란다."
짧고 불편한 침묵 사이로 쓰고 텁텁한 담배 연기 냄새가 스며든다.
"그래서 왜 불렀습니까? 8년 만에 드디어 자수할 생각이라도 드신 겁니까? 서까지 동행해드려요?"
"윤정인 말하는 거 봐... 선배가 후배 근황도 못 궁금해 할 일이냐?"
"8년 넘게 감감무소식이었으면서, 이제 와서?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바꿨는데."
"목화고 연구소 들어갔다며."
"내 뒷조사 했습니까?"
"멀쩡히 잘 살고 있지?"
"내가 잘 살든 말든 당신이 X발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상관이 왜 없어? 너 떠날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내가 조져버린 연구소 10년 20년 걸려서라도 재건하겠다고 못박고 나갔잖아. 근데 갑자기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오네, 그 윤정인이. 안 쎄하고 배겨?"
"한순간에 직장 잃고 발붙일 곳 없이 떠돌다가 흘러들어간 사정의 어디가 쎄한 겁니까. 시비 걸려고 부른 거면 이만 갑니다."
애초에 뭘 바라고 여길 나왔나. 저 치가 죄책감에 못 이기고 폐인이라도 되어 자신 앞에 무릎 꿇기라도 바랐던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멍청하기는. 정인은 스스로의 충동성에 치를 떨며 몸을 돌렸다.
"윤정인아."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잠깐 걸음을 멈춘 정인은 정확히 3초 뒤 이를 격렬하게 후회했다.
"조용히 살아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다 잊고 흘러가. 거기서 배운 거, 듣고 익힌 거, 소장님도. 인첨공도 벌써 15년이야. 그때 하던 거 지금 다시 해 봤자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순간적으로 뇌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현은 제 멱살을 틀어쥔 정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굴러떨어진 연초가 상대의 신발에 짓밟히는 꼴을 목격하고 얕은 한숨을 토해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옷자락을 무참하게 구기는 감각이 선연하다.
"엄시현 씨가 할 말입니까, 그게?"
"아니 일단 좀 놓고."
"도대체 왜 자꾸 혼자서 깨끗한 척입니까? 당신은 우리랑 뭐 크게 달랐습니까? 모두 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던 시즈의 연구원이었잖아요. 그런데 대체 왜!"
"정인아, 좀!"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죠. 정도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인첨공의 연구원은 다 비슷비슷하게 애들 쥐어짜서 성과 올리는 직업인 것을요. 어디에서 근무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보나마나 당신도 여태 연구직일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있습니까?"
위선자. 악에 받친 한마디를 듣는 순간 시현은 얼굴에 침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순수한 죄질로 따지면 당신이 우리보다 더하죠. 살인자 아닙니까. 엄시현 씨는. 그런 주제에 나한테 똑바로 살라고?"
"......야. 사람 말 좀 들어라. 아니라고. 내내 아니라고 하는데 좀 믿어줄 수도 있잖냐, 제발."
"내가, 당신을?"
헛웃음과 함께 멱살 쥔 손이 떨어져 나갔다. 시현은 잔뜩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정인을 바라본다. 등불을 등진 검은 머리의 연구원은 어둠에 푹 잠겨 표정을 읽기 어렵다.
"어디서 뭘 보고 들어서 나한테 이딴 식으로 연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하지 마십시오. 관심도 끄고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내 성과에 입 댈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낮은 굽의 단화가 천천히 골목을 벗어나자 시현은 혀를 차며 머리를 털어낸다.
"성질머리 하고는."
바닥에는 구겨져 불이 꺼진 연초 하나만이 초라하게 죽어 있었다.
- 아녜스를 기다리며
-
성하제. 1년에 단 두 번 있는 인천첨단공업단지의 개방 시기이자 인첨공 전체의 큰 축제 기간. 학생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각자의 학교에서 부스를 열어 축제에 직접 참여하거나 타 학구의 축제를 체험하는 등 알찬 시간을 보낸다.
더불어, 이 시기는 부모 품을 일찍이 떠나온 인첨공의 많은 아이들이 외부에서 지내는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외부에 연이 있는 아이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이긴 했지만, 반대로 연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싫든 좋든 얼굴 맞댈 일이 한 번쯤은 우연찮게라도 생겨나게 될 때였다.
성하제는 그런 때다. 국가기밀이라는 명문 하에 같은 국가 내에서도 철저히 갈라지고 고립되어 끊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던 인연의 실을 다시금 매듭 지어주는 기회. 그 매듭이 마무리의 매듭일지, 기존의 것을 더 단단히 하는 매듭일지, 혹은 옛저녁에 풀린 것을 다시 기워보려는 시도 중 묶인 것인지는 각자에게 달렸겠지만, 확실한 건,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런 왁자지껄함 속에서 선 아녜스 센터는 홀로 고요했다. 지도교사들과 선 경, 엄시현을 제외한 대표 2인이 센터의 아동청소년들을 전원 인솔해 축제를 즐기러 나가버린 바람에 건물이 모처럼 텅 빈 탓이다. 덕분에 경은 오랜만의 정적을 만끽하며 사무실에서 나와 모처럼 1층의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널찍하고 깔끔하니 햇빛도 잘 들어 누구나 좋아하는 공간. 그러나 정작 센터를 세운 경 본인은 사무실 내에 커피머신이 구비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주 찾지 않았던 공간이다.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경은 주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따뜻한 카페 라떼 한 잔을 들고 창가 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통유리의 중간, 약간 높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반쯤 열려 있는 작은 직사각형 창 사이로 시원한 산들바람이 들어와 코끝을 간지럽힌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너와 함께 맞이하지 못했던 여름이.
부드러운 라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난 뒤 경은 하염없이 창 밖의 느릿하게 바뀌는 풍경만을 눈에 담았다. 금빛에 가까운 따스한 갈색 눈동자에 아직 푸르른 나뭇잎이 비춰진다. 저 멀리 뻗은 벽돌길 끝에 시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저만치에서 누구라도 달려와주길 바라게 된다. 누구라도. 아니 사실은 다른 누구 아닌 네가. 사실은, 사실은—
"경 선생님?"
그러나 그토록 갈망하던 인기척은 외부로 이어진 벽돌길이 아닌 등 뒤에서 느껴졌다. 경은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안경 너머, 잿빛 섞인 푸른색에 안쪽은 새까만 시크릿 투톤 헤어가 살랑거렸다.
"시현 선생님."
"죄송합니다. 혹시 휴식하시는데 방해했을까요?"
"아뇨, 괜찮답니다. 시현 선생님도 음료수 하나 시켜서 여기 앉으세요. 뭐 마시고 싶어요? 이왕 만난 김에 내가 살게요. 주문하고 와요."
"네."
정갈한 대화가 한바탕 지나가면 경의 눈동자는 다시 푸른 빛이 덜 가신 센터의 화단을 향한다. 흙과 풀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벽돌길을 지나면 아름다운 하얀색 철제 아치 문이, 아치 문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도착할 수 있는 화단에는 계절별로 바뀌는 색색깔의 생화가 가득하다. 마치 조그마한 정원처럼 꾸며진 앞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지만 너무 뜨겁진 않게 해 주세요." 하고 주문을 마친 시현이 곁에 다가와 앉는 게 느껴진다.
"경 선생님은 어디 안 나가시나요? 모처럼 축제 날인데요."
"전 여기 있어야죠. 그러는 시현 선생님은요?"
"에이. 저 인도어 파인 거 아시는 분이. 그래도 이따 목화고는 잠깐 가볼까 싶습니다. 듣기로는 그 학교 저지먼트가 이번에 메이드 집사 카페를 한다더라고요. 이리라 양도 좀 볼 겸 해서, 예."
"어머? 메이드 집사 카페? 그건 뭐래요?"
"말 그대로입니다. 학생들이 메이드 옷, 집사 옷 입고 커피 파는 거죠."
"세상에~ 신기해라! 요즘 학생들은 참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네요. 신선하고 재밌겠어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다소 늘어지는 목소리가 음료의 완성을 알린다. 이에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그잔을 들고 돌아오면, 그 사이 경의 눈동자는 다시 창밖을 향해 있다.
"이번 성하제에도 일찍 귀가하실 겁니까?"
"그래야죠. 언제 올 지 모르니까요. 물론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니 센터로 올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돌아온다면 더 편한 곳으로 먼저 올 것 같아서요. 여긴 항상 시현 선생님이 계시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그런거죠."
솨아아. 풀들이 바람 따라 흔들리니 소리가 마치 파도와 같다. 경은 문득 눈을 감는다. 솨아아, 솨아아. 부드러운 물결 소리. 반짝이는 윤슬과 백사장. 새하얀 조개 껍데기로 만든 웃는 얼굴.
새하얀 조개 껍데기처럼 하얗고 연약한 손등.
파도에 스며들어 철썩이는 웃음소리. 그리운 목소리.
- 엄마!
목소리.
"—경 선생님?"
"아."
감상이 길었다. 선경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확인한다. 오후 4시. 슬슬 귀가할 시간이다.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시현 선생님도 맘껏 즐기고 푹 쉬세요. 모처럼 축제 시즌이잖아요?"
"그러겠습니다."
"그래도 항상 몸은 조심하고요. 그건 시현 선생님이 더 잘 하실 거라고 믿긴 합니다만은."
"에이, 아무렴요."
"참. 리라는..."
"제가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그래주겠어요? 고마워요."
다정한 웃음을 남긴 채 오래된 집으로 돌아가는 선경의 뒷모습을 엄시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서글프다고 해야 할까.
말을 고를 수 없으니 침묵만 늘어진다.
비로소 경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시현은 겉옷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들고 센터를 나섰다. 텅 빈 카페테리아에는 반쯤 비워진 머그잔 두 개만이 남아서 씁쓰름한 카페인의 잔향을 풍겨 댄다.
선선하게 불어닥친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부드러운 풀들의 춤 스텝 소리는 고요한 안뜰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기나긴 가을의 시작은 그렇게 저마다의 기대를 품은 채 다가온다.
고요하고, 또한 무겁게.
- 누군가의 날갯짓
-
뇌주름 사이에 깃털 꽂은 미친 놈들. 그게 리버티의 지난 방송을 보고 엄시현이 느낀 감상이었다.
사건 당일. 담배갑을 들고 나가다가 핸드폰의 진동 탓에 정문 앞에서 우뚝 멈춰선 시현은 별 생각 없이 라이브를 켰고, 몇 분을 돌처럼 굳어있어야 했다. 그리고 약 24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센터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사무실과 로비만을 오가고 있었다. 그나마 센터 내부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리버티가 뿌려놓은 진실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아예 평소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연구원을 죽여라'는 말에 타격 받을 연구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한 아동 청소년 복지에만 힘을 쏟는 센터에 공들여서 침 뱉으러 오는 놈들도 없었으니까.
그래, 일단 '센터' 는 그렇다.
시현은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적휘적 젓다가 퇴식구에 잔을 올려놓은 뒤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어린이 도서관 옆, 선경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짧게 숨을 들이켠 시현은 문 앞의 이름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노크한다.
똑똑.
"들어오세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음성이 문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기름칠 잘 된 문고리는 삐걱거림 하나 없이 열린다.
"경 선생님."
"시현 선생님이었구나. 어서 와요. 잠은 좀 잘 주무셨나요? 눈 밑이 어두운데~ 또 밤 샌 거 아닌가 몰라."
"아, 귀신 같으시다니까. 조금 설치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피곤하지도 않고... 그보다 이거요. 부탁하신 거 정리해 왔습니다."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얇은 A4용지 두 장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된다. 시현은 출력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경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살짝 돌린다. 언제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슈 박스가 비어있었고, 커피 머신 옆의 머그잔도 하나가 부족하다.
"아슬아슬하게 기준치를 넘지 않았네요."
"네. 아직 정식으로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닙니다. 해당 부작용은 특정 용량부터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거고요."
"그런가요. 그럼 아직 우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네요.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정적 사이로 종이 스치는 소리만이 부드럽게 울렸다. 쥐었던 서류에는 작은 손톱 자국이 찍혀 있다.
"시현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어제 방송 보셨죠?"
"......"
"시현 선생님은 혹시 알고 계셨나요?"
안경 너머 밝은 갈색 눈동자가 시현의 은회색 눈동자를 정확하게 응시한다. 이에 시현은 한순간 언어를 잃는다. 메두사의 눈을 마주친 것처럼 온몸의 근육과 장기마저 돌덩이가 되어버리는 기분이 전신을 장악했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거짓말은 의미가 없다. 내가 모른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윤정인 연구원님도 알고 있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야 한때 소장직도 할 정도였고, 그만큼 이래저래 얽힌 게 많았으니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글쎄요. 당시의 위치만 봐서는 모르는 게 맞지만, 또 당시의 관계를 보면 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을 듯합니다."
치지직.
짜악.
- 어떻게 여기까지 쌓아왔는데 감히 나더러, 너 이 자식 지금...!
"......"
- 아, 윽... 헉!
- ......
"......소장님?"
...
...
- 인정 못 합니다.
"나가."
- 이따위로 할 거면 왜 소장직을 넘겨받은 겁니까? 전 소장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하면 안 되죠, 계속 이어나가야죠! 엄시현 소장님! 아니 선배!"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이딴 것들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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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에겐 얘기해주지 않았나요?"
"......예?"
"아니에요. 실언했네요. 아무튼 고생 많으셨어요, 시현 선생님. 이제 좀 쉬세요."
"......네. 경 선생님도 쉬십시오."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는 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현은 이내 몸을 돌렸다.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 들여다본 출입문 옆의 쓰레기통에는 피 묻고 구겨진 휴지 여러 장과 산산조각난 머그컵 조각이 들어있었다.
- 아녜스를 추억하며
-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그날, 그때, 그 아침에 등교하는 너를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따스한 가을 햇살이 사무실의 유리창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선경은 빛을 반사해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을 가리는 액자의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그늘을 드리운다. 이내 명확해진 사진 속에는 행복했던 순간이 담겨 있었다. 가을 코스모스 알록달록 만발한 화단에서 찍었던 사진. 근심이라곤 없는 낯으로 활짝 웃고 있는 두 여성. 같은 머리카락 색, 닮은 얼굴.
선경의 손가락이 지금보다 젊었던 그의 곁에 서 있는 앳된 여자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운 미소는 실제 존재했던 것보다 한참 작게 출력된 사진 속에만 박제되어 손가락 하나로도 이토록 쉽게 가려진다.
"후우."
문득, 먹먹한 기분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선경은 액자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댄 뒤 눈을 감는다. 오후의 햇빛은 젖힌 고개 위로 쏟아져 감은 눈마저도 환하게 밝힌다. 그러고 있자면 어쩐지 바닷가 특유의 시원한 소금내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아 숨을 깊이 들이쉬게 되고, 내쉬고.
그럼 그 호흡 소리는 점차 들어오고 나가는 파도의 노래가 되어 작은 사무실 안을 호화롭게 한다. 때문에 낙엽 지는 가을의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순간 이곳이 한여름의 모래사장이라 착각하게 된다. 표면이 달궈진 하얀 조개껍데기와 푸르른 물결이 일렁이는 곳.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해변에 부딪히는 백색 포말이 분간되지 않았던 풍경. 고요하지만 풍성한 자연의 소리들.
그 사이를 성큼 비집고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엄마!'
눈을 뜨지 않으면 이윽고 시야에 무한한 바다가 펼쳐진다. 사람 없는 해변에서 바스락 바스락 모래 밟는 소리와 함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면 곧 양 손 가득 쥔 조개 껍데기와 자갈 묻은 손끝 발끝, 볕에 익어서 빨개진 얼굴마저 실감나게 구현된다. 선경은 하늘색 원피스 수영복에 하얀 가디건을 걸친 열일곱의 딸을 응시했다.
'우리 이걸로 목걸이 만들어요!'
설렘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둥글게 말며 웃는 딸을 보고 있자니 이윽고 하늘과 땅이 세차게 일그러진다. 그러면 어느새 짭조름한 바다의 향은 멀어지고 약간 뜨거운 실내의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선경의 눈꺼풀이 경련한다. 파자마를 입은 딸은 자그마한 붓을 들고 조개껍데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토끼는 이름이 무엇이고 저 토끼는 이름이 무엇이고, 손도 입도 쉬지 않는 와중에 휘어지는 눈매 하나마저 사랑스럽다.
'얘는 점돌이고 얘는 제시, 얘는 몽글이, 얘는 범퍼카... 아, 웃지 마요~ 부원들이 하나씩 지은 거라서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너는 뭐라고 지었는데?"
'아! 난 아녜스. 이 갈색 토끼~'
"뭐어? 아녜스는 네 이름이잖니?"
'아무렴 어때요? 엄마랑 신부님 수녀님들 아니면 부르지도 않는 이름인 걸. 게다가 어울리잖아요~ 얘 털 색깔도 내 머리색이랑 비슷하고, 밥도 잘 먹고. 공통점이 많아.'
고르지 않은 표면을 따라 삐뚤빼뚤 그어진 색깔선은 어설프게 토끼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결국 또 웃음이 터져버리니, 투닥거리다가 함께 웃고 마루에 엎어지면서 재차 천장과 벽이 진동한다. 여름 공기가 빠져나가면 겨울의 한기가 뼛속을 스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롭지 않은 계절이었다. 졸업하는 선배를 위한 꽃다발을 든 딸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면 다소 시무룩한 낯이 거기 있다.
'졸업식 가서 졸업하지 말라고 하면 저주하는 거겠죠?'
"아이고."
'......유급하라고 하면.'
"그건 정말 저주로 들리는구나..."
'나도 알아요... 아쉬워서 그러지... 제일 친했는데, 철준 선배 가면 난 이제 누구랑 토끼장 지켜.'
"졸업한 뒤에도 연락하고 놀러오라고 하면 되지. 인첨공 안에서 영영 못 볼 일이 어딨겠니?"
'......그건 그렇지만요.'
선경은 그것이 정 많은 아이들에게 으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학창시절 쌓아올린 인연이 귀중한 만큼 더더욱. 그래서 그날 이후로 유독 자주 침울해 하더라도 크게 이상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혹시나 싶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딸은 고개만 저은 뒤 슬쩍 미소지어 보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첫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창문에 낀 서리가 녹아 떨어지며 분홍색 꽃잎으로 변한다.
새학기는 언제나 전쟁 같다지만 그 해 선경의 가정은 정도가 지나쳤다. 새학기 첫 주를 지나자마자 갑작스럽게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두문불출하던 딸은 몇 번의 대화 요청에도 요지부동이다가 담당 연구원의 전화를 받고 눈물 흘리며 현관을 나섰다. 그 뒤로 등교거부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밤마다 방문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일상이 되었고, 잘 웃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으며, 부드러운 말투에는 가시가 돋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고 판단한 선경은 담임과 반 친구, 담당 연구원을 차례로 찾아가 이것저것 캐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교내에서 딸의 인간관계와 행동에는 일체의 변화가 없고 안정적이라는 말뿐이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어느날 소리 소문 없이 사육부를 퇴부했다는 것.
선경은 별다른 수확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두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바깥의 말이 무색하게도 집안에서 딸은 점점 더 날카롭고 사나워지고 있었다. 타고나길 좋았던 모녀 사이에 갑작스레 던져진 돌은 적잖은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이에 따라 그는 점차 지쳐갔다. 와중에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을 방증하듯 딸의 가시는 점차 집안뿐만 아니라 집 바깥에서도 드러나 여기저기에서 전화 걸려오는 일이 잦았다. 담임, 친구.
유일하게 전화 걸려오지 않는 곳은 연구소 뿐이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여겨 귀가한 딸의 손을 붙잡고 제발 대화 좀 하자고 하소연도 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분노와 몸부림 뿐이었고, 결국 끝을 맺은 건 서로서로가 홧김에 남긴 통증이었다.
화해 없이 잠든 다음날 아침, 선경은 벽을 보고 모로 누운 자신의 등 뒤에서 연신 기웃거리다가 멀어지는 인기척을 느꼈다.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그날, 그때, 그 아침에 등교하는 너를 붙잡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는 그렇게 세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만회할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 쨍한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선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탭이 여러 개 켜져 있는 모니터와 이런저런 서류들이 쌓여 있는 책상. 그 한켠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그것을 집어 책상의 가장 위쪽 서랍에 넣어두었다.
"제 딸이, 뭐라고요?"
- 목화고등학교 2학년 선류빈 양이 커리큘럼 도중 능력을 사용해 담당 연구원에게 중상을 입히고 커리큘럼실을 반파했습니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데, 혹시 어머님께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중상이요? 그 애가 사람을 공격했다고요? 행방이 묘연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요?"
...
"환자 면회 좀 하러 왔는데요."
- 죄송합니다. 환자 상태가 위중해서 면회는...
"잠깐, 정말 잠깐이면 돼요. 잠깐이면..."
- 죄송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
"저기요. 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죠?"
-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난 이 학교 학부모예요. 게다가 사건 당사자 엄마라고요! 그런데 이게 무슨..."
- 나가주세요.
"이봐요! 학교에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
- 그 환자분, 오늘 오전 6시에 돌아가셔서...
...
"종결하겠다고요? 아니 얼마나 됐다고, 애를 찾지도 않고?
- 피해자가 사망했고... 저희가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럼 류빈이는 이대로 실종 처리 된다는 말인가요? 그게 말이 돼요? 저 그날 이후로 제 딸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요. 해명도 변명도 한 번 못 해본 채 나 몰라라 잠적한 애가 됐는데도."
- 죄송합니다. 더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지도 못하고.
붙잡아 둔 채 혼내고 타이르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너를 그토록 몰아간 이유의 유일한 단서마서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선경은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올린다. 커리큘럼으로 인한 부작용과 PTSD 증상을 겪는 청소년들에 대한 연구 자료, 불법 커리큘럼이 적발된 적 있는 기관과 학생 적대적 커리큘럼을 수행하는 연구소의 리스트, 스트레인지의 차일드 에러와 스킬아웃 조직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기록, 아녜스 센터 차원에서 곳곳에 설치한 학생 쉼터의 인원 관리 기록.
뒤늦게 너를 찾아 헤매다 만난 이들과 함께 쌓아올린 것들이 이곳에 있다.
그러니 이제는 네가 돌아왔으면 한다. 아니 차라리 족적이라도 남겨주었으면 한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 길을 따라서 내가 갈 텐데. 흔적 하나 남겨주지 않는 네가 원망스럽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가장 원망스럽다. 아마 너 또한 그러하리라.
쌓인 서류를 적당히 정리한 마른 손가락이 이내 상담 기록으로 향했다.
[내담자: 이리라]
때문에 나는 재차 실수하지 않으려 한다.
가을 코스모스가 살랑거린다. 선 아녜스 아동 청소년 복지 센터의 앞마당에서는 언제나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해변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 마냥 맑고,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 크레이지 홀
-
어제는 누가 죽었답니다. 그제는 어느 연구소가 발칵 뒤집어졌고요. 오늘은 옆 랩실 연구원이 길 가다가 벽돌로 머리를 맞을 뻔 했다는데요. 세상이 이토록 흉흉합니다. 연구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자판기 앞에서 마주친 또 다른 연구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던 정인은 태그한 id카드를 인식하고 불이 들어온 자판기의 버튼을 눌렀다. 캔커피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지면 멈출 줄 모르던 일방적 수다도 잠시나마 끊긴다. 그 틈을 놓칠새라, 허리를 숙여 음료를 꺼내든 정인은 그제서야 줄곧 뭐라고 말을 이어가던 동료 연구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제는 누가 죽었고, 그제는 어느 연구소가 발칵 뒤집어졌으며, 오늘은 옆 랩실 연구원이 길 가다가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을 뻔 했다고. 세상이 이토록 흉흉한데 나의 의견은 어떻느냐고?
무심코 실소를 흘린 그는 어쩐지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동료 연구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캔커피의 뚜껑을 땄다.
"인첨공이 언제는 흉흉하지 않았다고 그러십니까."
정말이지 멍청한 질문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들 맑은 날만이 지속될 수는 없다. 정인은 유난히 어둑한 회색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물줄기를 응시하다가 가방을 뒤져 휴대용 우산을 꺼냈다. 습기 가득하고 서늘한 가을 공기가 뼛속을 스미자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얕은 입김이 검은 허공에 흩뿌려지고 끝에는 들릴 듯 말 듯 한 욕설이 따라붙는다. 날씨 한 번 X같네. 자동우산의 버튼을 누르면 방수포가 공작새의 꼬리털처럼 힘껏 펼쳐진다. 빌어먹을 연구소 같으니. 요즘 때에 지하 주차장 없는 건물이 말이나 되나. 검은 신발 끝에 둥글게 고인 물방울을 응시하던 그는 이윽고 우산을 쓴 뒤 연구소 중앙 현관을 나섰다. 물기 잔뜩 먹은 계단참은 몇 개 되지도 않는 주제에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미끄럽다. 그래봤자 매일 다니던 길이니 미끄러질 리는 없지만.
빠앙.
미끄러질 리가 없지만.
정인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을 뻔 한 몸을 겨우 바로잡고 정문을 바라본다. 철조망 둘러진 담벼락과 철문 너머, 우중충한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검은색 세단이 전조등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 좁은 길에서 클락션을 울려대나. 아니, 그것보다 저기서 저러고 있으면 내가 못 나가는데. 우산 위로 쏟아지는 물방울의 무게까지 합해져서 조금 전보다 더 묵직한 한숨이 턱을 타고 흐른다. 정인은 홀로 빛을 발하고 있는 차의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여기 차 세우시면 안 됩니다. 차 빼세요."
똑똑똑. 마른 손가락이 운전석의 창문을 정확히 세 번 때렸다. 그리고, 정확히 마지막 노크가 끝나기 무섭게 유리창이 내려간다.
"......"
"......표정 봐라."
"이런 X발."
"아니, 야! 얌마! 너 왜 전화 안 받아!"
"우리가 전화로 하하호호 수다나 떨 사이입니까? 예? 안 받는다고 찾아올 사이에요? 미친놈, 여기가 어디라고. 빨리 차 빼요. 보안실에 연락하기 전에."
"윤정인아. 나도 너랑 얘기하기 싫거든? 근데 좀 중요한... 아, 멈춰보라고! 소장님 이야기라고!"
우뚝. 재빠르게 멀어지던 구둣발이, 핸드폰 액정을 바삐 두드리던 손가락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10분만 시간 내."
"본론만 하십시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너저분한 뒷좌석과 치웠는데도 지저분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조수석. 정인은 엉망진창인 바닥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조수석 시트에 빳빳하게 앉아 와이퍼가 돌아가고 있는 앞 차창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옅은 담배 냄새가 기분 나쁠 정도로 익숙하다.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재정차했지만, 차체 위로 보다 거세진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것에 비해 차내는 어색한 침묵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인의 눈동자가 운전석에 앉은 시현에게로 돌아간다. 핸들에 반쯤 몸을 걸쳐 놓은 꼴이 숨 죽은 빨랫감 같다.
"3분 지났습니다."
"그걸 또 세고 있네... 알았다."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키면 흠뻑 젖은 청회색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어깨를 적신다. 시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마른세수를 하더니, 이내 정인을 마주보았다.
"혹시 연구소 닫은 이후로 따로 연락 받은 거 있냐."
"있겠습니까?"
"아 좀... 내가 알아? 니가 알지? 그래서 물어보잖아."
"정확히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연락 받은 걸 묻는 겁니까? 소장님 가시고 나서는 기자들한테나 좀 받았고. 연구소 문 닫고 나서 한 달쯤은 몇몇 선배들이 연락해주시더군요. 그 뒤엔 싹 끊겼지만요. 최근엔 엄시현 씨가 두 번. 그 외에는 없습니다."
"선배들 누구?"
"엄시현 씨도 다 아는 분들. 이건 왜 묻죠?"
"그 사이에 소장님 이름 대면서 너 찾는 인간들은 없었어? 8년 전 말고 최근에는?"
정인은 마주본 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었다면 좋았겠네요."
"없었다는 거지. 알았다. 다행이네."
"끝났습니까?"
"아니. 하나 더. 8년이나 지났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연락 오면 모른 척 해. 엄시화 소장. 그런 사람 모른다고."
"내가 왜?"
"그래야 네가 멀쩡하게 사니까."
담배 냄새 밴 차내에 습기까지 어리니 공기가 말할 수 없이 갑갑해진다. 와중에 깔린 침묵은 불편한 감각을 가중시키니, 수중도 아닌데 딱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멀쩡하게 사니까. 멀쩡하게... 사니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져 참을 수 없이 역겹다. 정인은 소름이 돋은 팔을 반대 손으로 박박 문지른 뒤 시현을 재차 노려본다.
"......살인자에게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
"내가 멀쩡하게 사니까? 내가, 멀쩡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그러질 말았어야죠. 잘 살고 있던 사람 앞길 다 조져놓은 건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하..."
"당신이 시화 소장님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시즈는 여태껏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을 거라고요. 어쩌면 지금 이름 드높은 몇몇 대형 연구소들과도 어깨를 견줬을지 모르겠네요.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겁니다. 당시에 우리가 쌓아올려 나가던 성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억합니까?"
"아, 솜털도 안 빠진 어린애들 피 한 방울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갈아서 쌓아올린 성과?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웠냐? 너는?"
"왜 당신은 아닌 것처럼 굽니까? 최대 수혜자가 당신 아니었나요?"
"아닌 것처럼 구는 게 아니라 X발 나는 그랬던 적이 없어요, 정인아.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고! 엄시화가, 누나가 연구소 문 열고 제대로 연구와 커리큘럼이라는 걸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고!"
"그래서 시화 소장님 죽이고 자리 꿰찼습니까?"
쾅!
핸들을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와 동시에 차체가 울렸다. 두 사람의 말이 멎자 세상을 채우는 건 거센 빗소리 뿐이다. 시현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다가, 풀어진다.
"넌 대체 왜 내가 내 가족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해. 어?"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면서요? 8년이나 지나서 기억이 흐려지셨나 본데, 당시 상황 다시 읊어드립니까?"
"......됐다. 내 입만 아프지. 너 그냥 내 말만 기억해. 그런 연락 오면 씹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할 말 끝났으면 이제 저도 좀 묻겠습니다. 몇 년 간 코빼기도 안 비쳤으면서 이제 와서 자꾸 연락하고 찾아오고 참견하는 이유가 뭡니까?"
풀어진 주먹이 다시 쥐여진다. 시현은 차오르는 울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말했지, 나는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고. 근데 몇 년 만에 겨우겨우 근황 안 후배 새끼가 엄시화 하던 짓 그대로 따라하면서 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냐?"
"끈 떨어진 말단 신세라 소장님 발끝에도 못 미치고 있는데 무슨. —......근데 그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뭐가."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요."
툭. 툭. 툭. 빗줄기가 규칙적으로 차창을 때린다. 정인은 상대의 말아쥔 손과, 흐트러진 매무새를 하나하나 훑다가 차 문을 열었다. 다소 멀게 느껴지던 빗소리는 고작 문 하나 열었다고 보다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우산도 채 펼치지 않고 젖은 아스팔트를 딛는 구둣발 소리가 다급했다. 어깨가 젖어들 찰나, 한발짝 늦게 우산을 펼친 정인은 천천히 몸을 틀어 다시 차 안에 앉아있는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나한테도, 내 성과에도 신경 꺼요. 당신이 이쪽 연구소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내 담당 학생'은 '내가 쌓아올린 성과'라는 겁니다. 여기에 당신이 손댈 수 있는 곳은 없어요."
발끝이 젖어든다.
"알았으면 꺼져요. 위선자면 위선자답게 구석에서 숨죽이고 살라고요. 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갈 겁니다. 소장님을 위해서라도."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를 틀어올린 인영이 저 멀리 사라진다. 시현은 그런 정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잘게 욕설을 씹어뱉곤 자리를 떴다.
- 사고
- 틱. 틱. 틱. 틱.
투둑. 투두둑. 투둑.
솨아아. 끼익, 부웅...
똑딱, 똑딱, 똑딱.
—끼이이이이이이이익,
휘잉
쾅!
...
—다음 뉴스입니다. 지난 밤 11시 30분 경, 3학구 목화고등학교 인근 사거리에서 승용차와 화물 트럭이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3학구 안티스킬 본부에 따르면 트럭 운전자는 발견 당시 의식이 없었고, 체내에서 마약성 진통제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고 밝혀졌습니다. 한편 승용차 운전자는...
- 양귀비 밭을 조심하세요
-
벽돌 하나하나에 햇살을 머금은 듯 온화한 지상층과 달리 센터의 지하는 제법 서늘했다. 아이들의 그림 같은 것들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지만 공간 자체의 온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자연스럽게 지하층은 센터 내에서 아이들이 가장 덜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하층의 가장 깊고 폐쇄적인 곳에는 겹겹이 설치한 보안문으로 둘러싸인 시현의 사무실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장소에 출입이 자유로운 선 아녜스 아동 청소년 복지 센터에서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 방문자와 거주자를 합쳐 절반 이상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곳. 대표적인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
"어우, 이 폐인."
"으어억... 뭐야아... 으... 다미냐...?"
"알면 좀 일어나죠? 와, 나 여기 도배 새로 한 줄 알았네. 정리는 어쩌려고 이래요?"
"난 다 찾아... 어디에 뭐... 있는지... 다... 기억...... 기억ㅎ..."
보통 그런 비밀스러운 공간에는 엄청난 능력을 숨긴 누군가나 대단한 힘을 가진 비밀 병기가 잠들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어째 눈에 보이는 건 낡은 서류 더미들을 깔고 바닥에 드러누운 폐인 하나다. 다미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시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발끝으로 상대의 팔을 툭 걷어찼다.
"아, 일어나라고! 지금 뭐하는데! 침대 가서 자, 침대!"
"악! 안 자거든? 잠깐 눈 붙인 거야! 아야! 아! 차지 마!"
궁시렁거리며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는 시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나마 깨끗한 간이의자를 가져와 털썩 주저앉았고, 시현은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넘기며 주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서류를 하나하나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그래서 왜 왔냐? 쥐어패러 온 건 아닐테고."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시현 쌤이 불렀잖아요? 그때 센터 앞에 와서 난동 피운 불법 시위대 부검 결과 알려달라고."
"아, 맞다. 하아...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래서 안티스킬은 뭐래?"
발치에 떨어져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들어 내용을 훑던 다미는 이어지는 시현의 말에 눈동자만 데굴 굴려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세불명의 약물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래요. 커리큘럼에 사용되는 약물들을 조합해서 만든 건데, 특이 사항은 심각한 수준의 신경 손상 및 근육의 손상이 발견됐다는 거. 일부 부위에서는 과경직도 관찰됐다고 하고."
"상세불명이라고... 그 외에는?"
"센터 앞에서 그 짓 하기 28시간 전에 약물이 최초 투여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고 했고, 그게 끝이에요. 사망 전에는 집단으로 가려움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했고 이후 전원 거품을 물며 의식불명. 응급처치 전 사망했다네요."
"에휴..."
"이번에도 맞는 것 같죠?"
"같은 게 아니라 맞아. 실패작 레시피를 이딴 식으로 써먹을 줄은 몰랐네."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 품에 안은 시현은 다미의 말이 끝나는 즉시 종이에 얼굴을 도로 박았다. 다미는 그런 시현의 뒤통수를 잠시 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상대에게 건넨다.
"정신은 차리시고."
"정신 멀쩡해. 열 받아서 그렇지. 아, 이 개자식들."
"네네. 그럼 다행이고요. 아무튼 이런 시국이니까 당분간 센터 밖에 나가지 마세요. 전에 윤정인 만나러 갔다 온 건 완전 실수였어요."
"확인은 했어야 됐어. 게다가 거기에 널 보낼 순 없잖아."
"확인이 유의미해요? 접촉을 했든 안 했든 그쪽에서 입 싹 씻고 거짓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대면으로 하는 대화는 유의미하지. 비언어적인 것까지 다 보이니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어."
다양한 태그가 붙은 파일을 열어 서류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시현의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법 연구소 자료, 학생 친화/적대 연구소, 커리큘럼 이론, 논문, 그 외 등등...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재빠르게 정리되는 방을 지켜보던 다미는 간이의자 위에서 내려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뭐, 어쨌거나 너무 걱정은 마요. 우리 센터에는 이제 뭐든 다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보호벽이 있잖아요?"
"이리라한테 부탁한 그거 말이지. 그래. 머리 잘 썼더라."
"상부상조죠. 리라는 능력의 약점이 드러날 일 없어서 좋고, 나는 티가 안 나니까 좋고."
그리고 그대로 책상 곁에 다가서면, 노란색의 낡은 파일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선류빈' 이라는 태그가 달린 파일. 다미의 푸른 눈동자가 내려앉은 눈꺼풀에 살짝 가려졌다.
"스트레인지에는 없었어요."
"뭐가? 아, 그 애. 알아. 웬만한 연구소에도 없었고."
"그래봤자 인첨공 안일 텐데 지나치게 찾기가 어렵네요. 고작 여자애 하난데."
"여자'애'는 아니지. 살아있었으면 너보다 3살은 더 먹었어."
"그건 그렇...... 뭐라고요?"
"어?"
"살아있었으면?"
"뭐ㄱ... ......아, 젠장."
20분 경과. 시현은 얼굴에 파일철을 덮은 채 웅얼거리는 다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발끝으로 상대의 팔을 툭 걷어찼다.
"정신은 차리시고."
"차리게 생겼냐고... 그러니까, 애초에 죽어 있었다는 거죠?"
"그래."
"하아..."
신경질적으로 파일철을 치우며 상체를 일으킨 다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하지 말죠. 기왕이면 계속."
"......나도 당장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계속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
"우리가 모이게 된 계기, 이 건물, 센터 아이들까지 모든 게 거기서부터 시작됐는데 이제 와서 사실을 말하자고요? 아니, 다 떠나서 진실을 알게 된 경 선생님이 어떻게 될 지 두렵지도 않아요?"
"그렇게 약하신 분 아니야. 너도 알잖아."
"모를 일이지. 시현 쌤이나 나나 자식은 없으니까. 어떻게 감히 자식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겠어요?"
"......"
"본인 자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삶을 지탱해온 분이잖아요."
무거운 침묵이 사무실 안을 메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물러설 곳 없이 똑바로 마주치길 얼마일까, 한숨과 함께 다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결책도, 화풀이할 곳도 없는 허무한 진실을 알려서 뭐 해요. 죽게 만든 놈 무덤에서 도로 꺼내와서 멱살 잡게 해줄 거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봐요."
"......시간은 많아. 그동안 지켜보면서 결정하자고."
- 돌이킬 수 없는 관계
-
탁. 신경질적인 마찰음과 함께 노트가 눈 앞에 던져졌다. 시현은 노트의 표지를 한 번, 그리고 그 노트를 던진 사람을 한 번 쳐다본 뒤 바닥을 구르는 노트를 주워들었다.
"이거 리라 거 아니냐?"
"숨길 생각도 않으시는군요."
"얼굴에 '나 다 알고 왔다' 라고 써놓은 사람 앞에서 그래봤자지. 아~ 난 예나 지금이나 연기는 젬병인가 봐. 너무 빨리 들켰네."
노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시현과 달리 정인의 얼굴은 딱딱하기 그지없다.
"이 센터에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린다면서요?"
"진짜 다 알고 왔구만. 애를 얼마나 쪼아댄 거야?"
"뻔뻔한 인간."
"칭찬 고맙다. 근데 이 노트를 왜 나한테 줘?"
"이제 이리라 학생이 그 노트를 들여다 볼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당신과 말 섞을 일도 없고."
시현은 안경 너머에서 가라앉아 있는 정인의 검은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리라가 노트를 직접 건네줬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압수했나. 열심히 쓰고 다니던데 그건 좀 안타깝게 됐다. 다만 저 성질머리에 압수한 즉시 태우지 않은 건 의외인데, 뭐. 이제 내 알 바는 아닌가.
다만 꾸준한 저 태도에는 슬슬 열이 뻗친다.
"나랑 말 섞게 하고 싶지 않으면 담당 연구원님이 노력을 하셔야지. 이 센터에서 내가 하는 일이 도 넘는 연구원들 가는 길 앞에 흙탕물 뿌리는 일인데. 정인아. 네가 잘만 하면 이리라랑 나는 크게 말을 섞을 일이 없다?"
"타 연구소 조사 도움도 업무의 일환입니까? 아닐 텐데요. 애초에 '센터의 선생님' 으로서 대한 게 맞긴 합니까?"
"아, 이건 또 뭔 소리야 진짜. 아니면 뭔데."
"아니면 말고요. 예전처럼 또 제 연구 성과를 망치고 싶어졌나 했습니다."
센터의 앞마당으로부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걸 듣고 있자니 헛웃음을 참을 수 없어져서, 정인은 얼굴을 찡그리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잘도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군요. 소장 직함까지 달아보셔서 숨기기 쉽진 않았을 텐데."
"딱히 숨긴 적 없다. 다 사정 아는 사람끼리 모인 거니까."
"끼리끼리라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요. 처음부터 이 센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명확히 알겠습니다. 한심한 것 이상으로 위선적이었네요."
"야, 깔 거면 나만 까. 네가 뭔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려."
"왜요. 다들 엄시현 씨의 사정을 안다면서요? 인첨공에서 잔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자. 전대 소장의 목숨을 꺾고 자리를 차지한 2대 소장. 손에 묻힌 피가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당신을 채용했다는 것 자체가 위선적인 거죠. 안 그렇습니까?"
노트를 쥔 시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정인은 끌어올린 입꼬리를 도로 내린 후 몸을 돌렸다.
"이제 이딴 곳에는 볼 일 없습니다. 나도, 내 담당 학생도."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응? 잠깐. 너는 그렇다 치고 걔는 왜."
"내가 막을 거니까요."
"너 이리라 여기서 심리상담 받는 거 알고는 있지?"
"인첨공에 상담소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여길 고집할 이유는 없죠. 아직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아마 이리라 학생도 따라줄 겁니다. 그도 이미 당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아니까."
노트의 표지가 구겨진다. 동시에 격양된 음성이 정인의 뒷통수를 때린다.
"윤정인. 적당히 해라. 내가 네 담당 근처에 있는 게 거슬리는 건 알겠는데 난 이제 연구에 관심도 없고 애초에 옛날 옛적부터 네 것에는 관심이 요만큼도 없었어! 가만히 있는 사람 꾸준히 쓰레기로 만드는 짓거리, 솔직히 짜증나지만 나한테만 하는 거면 어지간해선 받아주겠는데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그러는 건 아니지."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 멀어지던 정인의 발이 문득 멈춰선다.
"가만히 있기는 무슨.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뭘."
"10년 전에 프리드웬을 빼돌린 인간. 엄시현 씨잖아요."
침묵이 길다. 각자 해를 등지고 그림자를 얹어 표정이 가려졌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이윽고 후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시현은 가볍게 혀를 차고 건물 안으로 발을 돌린다. 그러던 중 구겨진 노트 안에서 흘러나온 포스트잇 하나가 뒷마당을 나뒹굴다가 이내 바람을 타고 후문 밖으로 날아가 자취를 감춘 건 둘 중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작은 사건이었다.
- 건물 사이에 피어난
-
계수에 변동이 없다.
정인은 커리큘럼실 안에서 고글을 끼우고 연구소 외부로 날려보낸 새 모양 드론의 시야를 공유 중인 리라를 매직미러 너머에서 지켜보다가, 다시 모니터를 노려보고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의 감소 수치로 보면 이쯤에서 레벨의 변화를 맞이했어야 하는데, 그의 담당 학생은 야속하게도 계수 20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어째서?
"젠장."
제대로 형태 잡히지도 못한 뭉그러진 한탄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변화 없는 그래프와 비슷한 내용만 적혀 있는 차트를 보면 울화가 치민다.
"왜 이제 와서. 거의 다 왔는데."
와득. 손가락 사이에서 차트의 용지가 구겨졌다. 설마 이게 끝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가망도 없어 보이는 레벨 0에서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만큼이나 올라왔는데, 고작 여기서 멈출 리가. 그래서는 안 된단 말이다. 나는 실적을 쌓아야만 하는데.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분의 뜻을 이어야만 하는데. 그로 하여금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커리큘럼 시간 종료입니다. 정리하고 나오세요."
독한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속을 데운다. 서늘한 지하의 향기가 맴도는 어두운 실내에는 어슴푸레한 조명만이 유일하게 공간을 식별 가능케 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정인은 얼음도 들어있지 않은 유리잔을 한 바퀴 돌렸다가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3학구 외곽에 위치한 이 고급 바는 과거, 그의 스승이 종종 그를 데리고 방문하던 단골 가게였다.
"후우..."
평소에는 커리큘럼 진행자의 의무를 무리없이 수행하기 위해 음주를 멀리해왔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담당 학생이 에어버스터의 인솔 하에 일주일 간의 기나긴 휴가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짙은 벌꿀색 술이 다 비워진 원통형 잔 안에 다시 채워진다.
저지먼트의 단체 휴가 같은 일은 이전에도 종종 있어왔으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만 이번만큼은 예전처럼 무던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에 멈춘 성장. 그간 정체기가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그게 하필 이런 시기라는 건 정인의 마음을 배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커리큘럼 시간을 더 늘리거나 보다 다양한 방식을 사용해서 이 정체기를 가능한 빨리 꺾어보고자 했거늘, 휴가라니!
"빠질 순 없습니까?"
"......네. 다 같이 가는 거라서요, 빠지면 안 된대요."
빠질 수 없다는 말만 아니었더라면 휴가 기간 동안 커리큘럼에 전력을 쏟도록 설득했을 텐데. 결국 손쓸 도리 없이 담당 학생을 보내버린 정인은 지난 일주일 간의 변동 없는 계수 그래프와 커리큘럼 과정을 정리하는 표만 몇 번 끼적거리다가 이른 퇴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요즘 따라 되는 일이 없군.' 이라는,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다 머릿속을 스친 생각 한 자락이 삭막한 자택으로 향하는 핸들을 꺾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여기까지 도착했거늘, 가장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이 위스키는 영 입에 맞지 않는다. 정인은 재차 비워낸 유리잔을 응시하다가 턱을 괴고 바 테이블에 반쯤 엎드렸다. 소장님, 보고 계십니까. 이끌어줄 당신이 사라진 나는 이렇게나 정체되어 있습니다. 슬슬 꼬여가는 혓바닥 위에서 맴돌던 불평 내지 한탄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생각—또는 문장—이 흘러간 직후, 정인의 바로 옆자리가 채워졌다.
"좋은 저녁입니다."
"......뭡니까, 다른 자리도 많은데."
적대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인과 달리 마주 앉은 자의 표정은 무던하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인은 반쯤 엎드린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당신과 대화를 해 보고 싶어서요."
"제가 그다지 대화하기 좋은 상대는 아닐 겁니다."
"음, 그건 해 봐야 아는 거죠. 우리 초면이잖아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나 봅니다? 누구랑 얘기할 기분 아니라고요."
뭐지, 이 미친 놈은. 탐탁찮은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다가 혀를 찬 정인은 몸을 일으키려 한다.
다음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글쎄요, 윤정인 연구원님. 속는 셈 치고 몇 마디만 나눠보시지 않을래요? 전 윤정인 연구원님께 지대한 관심이 있거든요. 지금 당신이 몸담고 있는 그 연구소보다 훨씬 더 많이."
"......당신 누구야."
정인이 대꾸하자,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새하얀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걸린다.
"반갑습니다. 시즈의 진정한 후계자, 윤정인 님. 저는 시화 박사님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친구가 될 사람이기도 하죠. 정중히 고개 숙이는 상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좀 드세요?"
"사기꾼 새끼가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거지. 너 같은 놈 시즈 안에서 본 기억 없어."
"그러시겠죠. 전 시즈 소속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연락도 되지 않는 구 시즈 연구원들보다 제가 당신을 더 잘 이해할 거라고 자부한답니다. 청산유수로 흐르는 말이 불쾌하다.
그런데도, 술김이라는 건 꽤 치명적인 모양이라.
"어때요?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어요?"
"......"
긍정의 의미를 담은 무응답.
그 메세지를 읽은 상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낙엽 진 자리 밟고
-
어쩌면 당연하게도, 선경은 괜찮지 않았다. 리라의 상담이 끝난 날을 기점으로 그는 일주일 간 병가를 내고 완전히 은둔했고, 덕분에 아녜스 센터의 상담 일정들은 전부 조정되었다. 그나마 중요한 일을 분담할 대표직이 원래 넷이었기에 한 사람이 휴가를 내도 메꾸기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물론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짧고도 긴 공백의 마지막 날, 시현은 각종 학생 친화 연구소에서 온 제안서와 학생 적대적 커리큘럼을 수행하는 연구소들에서 온 항의서에 각자 도장을 찍고 답신을 보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짙었던 눈 밑 그늘은 이제 거의 턱 끝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어이구, 시현 선생님. 땅 꺼지겠습니다그려."
"꺼졌으면 좋겠네. 그대로 묻혀서 잠이나 자게."
"조금만 더 힘내십쇼. 저도 돕고 있잖습니까."
"경훈 선생님은 회사 괜찮아? 대표 없다고 난리 나는 거 아냐? 둘이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까 무리하진 마요."
"방금까정 죽는 소리 내 놓고 무슨. 그간 잘 쌓아놨으니 좀 자리 비워도 일주일은 거뜬합니다. 새벽이나 밤에도 틈틈히 일 보고요."
"그러니까 그게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경 선생님 일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침묵. 그 공백을 채우려는 듯 약 5분간은 타건 소리가 더욱 경쾌했다. 이윽고 급한 업무들이 마무리되자, 시현은 몸을 돌려 경훈을 응시한다. 타이밍 좋게도 상대 또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경 선생님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려 했지?"
"아니,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미 선생님이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있는데 아직까진 문제 없대요. 집 밖으로는 안 나오시지만 문고리에 걸어둔 생필품들은 가져가고 계시고."
"그건 다행이네요. 걱정 많이 했는데."
걱정될 만한 일이지. 시현은 복잡한 얼굴의 상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서류를 뒤적인다. 센터 대표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부 선경의 사정을 어떻게든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괜찮으실까요?"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했다.
센터의 불이 모두 꺼진다. 시현은 창문과 문을 마지막으로 단속한 후 뒷마당으로 나와 입에 담배를 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를 채우는 감각에 하루의 피로도 조금은 흐려지는 것 같다.
드물게 사람이 없는 한밤중의 센터는 지독하게 적막하고 캄캄해서 과거의 편린 하나를 떠올리게 만들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시현은 아이들의 벽화로 메워진 담벼락을 멀찍이 서서 응시하다가 빨아들였던 연기를 뱉는다. 어설프게 누덕누덕 기워 그린 어린이들의 벽화에서 스트레인지의 화려하고도 위협적인 그래피티가 겹쳐 보이는 것만 같다.
"센터 내에서는 담배 금지."
그러니 익숙한 목소리에서도 기어코 과거를 읽어내고 마는 것이다. 시현의 고개는 즉각적으로 움직여 발화자를 찾아낸다. 그새 조금 초췌해진 낯에 마른 입술, 그러나 여전히 다정한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늦은 동시에 한참 이른 시각이다.
"벌금 내셔야죠, 시현 선생님?"
시현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경은 손부터 내민다. 시현은 그런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만원 권 한 장을 꺼내다가 선경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오늘따라 좀 많네요? 저 없는 동안 종종 피웠다고 자수하시는 건가요?"
"피운 횟수에 비해서 적게 낸 겁니다."
"어머, 당당하기도 하셔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지만 시현은 가까워진 선경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있음을 인식한다. 동시에 그의 주변을 맴도는 담배 냄새에 그 이상으로 독한 알코올 냄새가 스미는 것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좀 괜찮으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차가운 가을 바람이 두 사람의 살결을 긁고 지나간다. 시현은 거의 다 타들어간 연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털어넣고 손을 휘저어 좋지 않은 냄새를 날려보낸다.
"춥습니다. 들어가실까요."
"음,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오랜만에 쐬는 바깥 공기고. 시원한 게 썩 나쁘지 않네요."
"전 춥습니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건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십니까?"
"어느 쪽이라도 같은 답변을 할 거랍니다. 전 어느 정도는 서서히 괜찮아질 거고, 어느 정도는 평생 아파하며 살아야겠지만 센터는 평소와 같을 거예요. 지난 일주일 간 못다한 만큼 사무쳐하며 깨달았어요. 그게 제 아이가 원하는 일일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바람이 뺨을 할퀸다. 시현은 어깨를 떠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몸에 밴 어지러운 냄새들이 한 꺼풀 더 떨어져 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리라가 류빈이의 학창시절 친구를 만났다고 했어요. 그 친구는 류빈이가 설령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 한들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겪은 억울한 일들을 제때 알아차려주지도, 해결해주지도 못한 못난 어미는 미워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이 일을 계속해야겠죠. 제 딸아이가 겪은 일과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되는 일이 없게 하려면요."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현은 다시 과거를 걷는다. 이런저런 그림이 잔뜩 그려진 담벼락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던 첫만남이 현재의 장면과 오버랩 되어 눈 앞에 펼쳐진다. 다만 다른 점은, 그때 그곳에서 눈물 흘리며 바닥을 구르던 여인이 이제는 한결 단단해진 표정으로 서 있다는 점이겠지.
그게 썩 마음에 들고, 동시에 씁쓸해진다. 성장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아름답지만 엄시현이란 놈은 그 단어와 살 맞댈 일 없는 족속이었으니까.
"그럼 내일부터 다시 잘 부탁드립니다, 시현 선생님."
"저도 다시 잘 부탁드려요. 추운데 이만 들어갈까요."
"담배 냄새 다 빠지기 전에는 안 돼요."
"겉옷이라도 가져오게 해 주실 생각은... 예, 알겠습니다."
슬슬 가을도 끝물이다.
낙엽이 진다.
4. 개인 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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