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관 ¶
이리봐도 저리봐도 그쵸? 제가 좀 귀엽죠? 할 경박함 온갖 곳에 다 묻은 녀석. 훤칠한 인상. 다른 사람만치 빛이 나는 건 아니고, 아 쟤는 분위기 때문인가? 참 매력적이네. 주된 평이 그렇다. 앳된 모습 한스푼에 나머지도 좀 앳되긴 해도 점점 성숙해지려 하니, 마의 16세 넘겨 잘 자란 서방 사람이었다.
- Hair
- Face
- cm/clothes
- Another
더군다나 입 다물고 경박하지 않은 모습 보이면 경박함 분위기 온데간데 없고 사람 물기 직전 경찰견처럼 냉정하고 매서워 그 모습 진중하니, 다르다면 또 다른 반전이다.
2. 성격 ¶
"퍼지는 두루두루 잘 어울리지. 누구나 퍼지를 사랑했어."
─ 이전 동료, C.
"그 아이는 날 닮았어요. 무뎌졌지요."
─ 대부, 통칭 '리리'.
"음..어쩔까? 있죠, 나랑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면 보내주는걸로 할게요. 범죄자라도 교화 될 기회는 있어야지. 어? 진짜 할 생각이었어요? 기대했어요? 난 몰라, 그걸 믿으면 어떡해요.. 교화 될 기회도 없고 남 희망 뺏은 범죄자 주제에 희망을 품었대. 어쩜 좋아.(그는 여기서 안타까운듯 웃었다.) 그래도 갈게요? 가위~ 바위..보? 아, 어떡하지.. 내가 이겼네?"
─ 퍼디난드, 범죄자를 체포하고.
서내 비글 3대장중 1대장처럼 생긴 것과 다르게 성격 참 얌전하..나? 비록 조금 깝죽대긴 하지만 일단 멈춰! 하면 말 고분고분 잘 듣고 차분하니 구제불능은 아니라는 점이 안심이다. 사근사근하니 사람과 잘 어울리며, 어울린다의 기준 깊다. 모르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눈맞아 춤춰본 적 있을 정도로. 보듯 어느 때는 MBTI 앞자리 E같아 러쉬 알바생급 아무에게나 친구하자고 들이대보는 모습을, 또 어떤 순간에는 한없이 소심한 모습 보이기도 하니 알다가도 모를 성격. 확실한 것은 누구에게나 열린 마인드와, 본인도 열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남을 강제로 오픈하게 만들 지도 모르는 환장할 입담은 덤. 차분한 어조와 여유로운 모습으로 경박한 언사를 구사하며 때로는 "내가 옳았죠~ 어떡하죠~ 졌어요~ 우리 다 x됐죠~" 처럼 깝죽대기까지 하기에 배로 얄밉다. 차분함의 범위도 친화력만치 넓어 누군가 눈앞에서 죽어도 미동없다. 보기에 아이같은 모습 다반사며, 가만히 지켜보는 때 있고 살벌히 말하는 부분 있으니 속내 알기 어려우나 이 경우 드물다.
3. 능력 ¶
"나는 다 알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아."
섬망 |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 |
4. 기타 ¶
- 대테러 영웅.
- 한국어 배워서 할줄 아는데..불리할 때만..
"Sorry. I can't speak Korean."하고 상황을 회피해버리는 양심리스. 거기다 말투도 oh 나 다 알아yo 이런 느낌이라 더 얄밉다.
- 가족관계
"이 집안은 확실히 영향력이 크지."각종 배우를 양산한 베르너 집안의 사람. 가족 사이 나쁘지 않으나 개인주의. 테이도 단지 평범하게 살고 싶어할 뿐이라, 가족 언급은 하지 않는다. 유명세를 싫어하기에. 현재 테이는 독립했다.
- 베르너
- 대충 엔터테인먼트 하면 떠오르는 집안.
- 마크 베르너
- 유진 베르너(결혼 전에는 맥도너)
- 나탈리 Q. 베르너
- 브라이언 베르너
- 마크 베르너
- 대부, 리리
"아! 나요. 리리가 불러서 왔어요. 리리가 도와달랬거든요. 가족보다 대부님이 더 가까워요."대테러 영웅은 직접 자원하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현재 '리리' 집 근처에서 산다는데, 글쎄다? 리리'에게 배웠다는 것 여러개가 누군가를 닮지 않았나?'''
- 술꾼
"때려 부어, 마셔, 적셔!"그는 음주가무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휴가철 그는 하루종일 캔맥주와 함께 한다.
- 졸려 죽겠어 이잉 잉.
- 애연가
4.1. 관계 ¶
선관은 ●표시
- 최소라
"아! 소라 씨요? 좋은 분이죠! 서로 힘내자구요, 라타토스크? 라타..투이? 라따뚜이? 그런 애들한테 너무 고생이 많아요~ 그것보다 우리 동생 광팬인 것 같던데~ 히어로 영화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나중에 동생 내한하면 제일 먼저 보여드릴까 해요. 그것보다 나랑 브리랑 그렇게 안 닮았나? 다들 나 보면 브리 닮았다고 생각하던데.."
─ 퍼디난드, 팔자 좋게 늘어지며.
4.3. 떡밥 정리 ¶
개인 만족형이라 중구난방함...
─ 커여운 테주가
- 풀린 떡밥
- 뉴욕 클라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저 살았어요?"
"그래. 그대로 눈 감고 있으렴."
"ㅍ, 필립은 죽었어요?"
"…대신 많은 학생이 살았지. 가자꾸나.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마."
"경찰이세요?"
"그래. 난 리우리엔이야. 너를 지키러 온 뉴욕의 경찰이지.
─ 애쉬, 가해자 필립 메이어를 사살한 뒤 퍼디난드를 구출하며.
- 사건 기록
- 로커에 숨어있던 퍼디난드는 죽기 직전 애쉬에 의해 구출된다.
- 애쉬의 본명이 리우리엔 아델 프리드리히(결혼 전 성씨 키르스텐)임이 밝혀졌다.
- 애쉬가 필립을 사살해 테이를 구했다. 테이가 경찰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쉬는 이 사건 이후 퍼디난드의 대부가 되었다.
- 사건 기록
- 가위(TW. 자해)
"안녕하세요, 프리드리히 씨. 오랜만이에요. 아뇨, 그게 아니라요. 퍼지가 한국에 가서 많이 걱정이 되거든요. 네. 힘드실 건 알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퍼지는 아마 혼자 살 거예요. 프리드리히 씨도 알겠지만 예전부터 혼자 독립해서 살았거든요. 그러니까..집들이로 찾아갔을 때 혹시라도 가위가 보인다면..."
─ 나탈리 Q. 베르너
"형, 좀 어때?"
"멀쩡해! 아무 걱정도 하지 마."
─ 이 통화를 마지막으로 퍼디난드는 가위로 목을 그어 병원에 이송 되었다.
-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날짜는 12월 28일이 되는 새벽.
- 초커를 착용한 이유와 비대칭 머리인 이유는 이것. 흉터가 깊게 남아있다.
- 그는 무엇을 두려워 한걸까?
-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날짜는 12월 28일이 되는 새벽.
- 영웅
"아, 영웅 서사는 다 그렇잖아요. 누군가는 살인자를 보고 영웅이라고 하고. 살인자든 뭐든 영웅이 되면 그 말로는 꼭 별자리가 되는 건데, 암만 영웅이라고 해도 별자리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 경우도 있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요.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별자리로 만드는 걸 원하지 않았을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고. 세상에 사람이 수십억인데 그러지 않을까요?"
─ 이후 퍼디난드는 염증이 난다는 듯 웃었다.
찍한 테러에서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씨는 주범을 사살하고 살아남은 영웅이 되었으나..
─ 독백 中
"내가 죽였어요."
─ 퍼디난드는 쓰게 웃었다.
- 퍼디난드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 한순간의 실수로 가장 소중했던 친구인 루이스 그레이와 기동대 팀을 잃었다.
- 격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뿌리깊게 박힌 신념은 바뀌기 어려운 것 같다.
- 퍼디난드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 알코올
"퍼지, 통화 중에 음주는 자제하라고 몇 번을 말하지?"
"설마 비행기 안에서도 술 마셨니?"
─ 애쉬
오늘 산 맥주 4캔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의 위장을 적시고, 속을 망가뜨릴 것이다. (중략)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과 4캔에 만원인 맥주를 위해 건배.
창문 블라인드까지 꽁꽁 친 거실 테이블에 와인, 보드카 할 것 없이 빈 병이 가득하다. ……(중략) 이럴 땐 술이 약이다. 늘 그렇듯이.
─ 독백 中
돌아가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탈출구다. 마시고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끝없는 굴레의 쳇바퀴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 독백 中
"퍼지 말이죠. 거짓말을 해봤자 뭐 할까! 많이 걱정 돼. 늘 술을 마시고 있거든요. 저녁만 되면 술을 마시는 걸 내가 설마 모를까.."
─ 퍼디난드의 누나, 나탈리 Q. 베르너
- 비정상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음주.
- 그의 음주는 적당히, 천천히가 아니며, 한잔으로 끝나지 않는다.
- 비정상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음주.
- 12.5 테러
그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6분 본인의 능력으로 동료의 생전 목소리와 얼굴을 기억하며 추모한다. 그가 추모로 사용하는 매개체는 주인 없는 경찰 뱃지로, 고인이 고아였기 때문에 유품을 받을 사람이 없어 자연스럽게 그게 가지게 되었다.
나는 모두 기억한다. 15명이 죽고 5명이 살아남던 그 순간을. 양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 가리면 깜깜한 칠흑이지만 눈을 감을 수 없다. 세상이 무너지고 혼자 남기 때문이다. 등이 떠밀리고 동료는 깔려 죽는다. 세상은 아찔하고 눈앞이 빙빙 돈다. 나는 모두 기억한다. 잊을 수 없는 저주받은 능력 때문이다.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루이스가 뒤로 넘어갔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던 루이스는 큰 타격이 없었으나 뒤로 넘어갔고, 휘몰아치며 몸을 감싸던 바람은 사방팔방 날아가더니 이내 건물의 기둥에 직격했다. 튼튼하던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건물 전체가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 독백 中
"실은 멀미가 나. 하루종일 역겨워서 토하고 싶어. 술을 마시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총성도, 건물 무너지는 소리도..아, 혼잣말이에요. 흘려들어요...제발..제발 조용히 해."
- 12월 5일, 루이스 그레이와 에스더가 벌인 백화점 테러.
- 이 테러로 기동대 팀 15명 중 5명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멸했다. 직접적인 건물 붕괴에 대한 원인은 폭발로 추정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만 있을 뿐, 그 사건이 루이스의 익스파 때문임은 알지 못하낟.
- 루이스 그레이는 현장에서 압사했다.
- 12월 5일, 루이스 그레이와 에스더가 벌인 백화점 테러.
- 풀리지 않은 떡밥
- 에스더의 시
비극의 시작
"나는 종말의 인도자고, 사냥꾼이며, 선지자다."
- 극중극, 설정상 애쉬가 '리리'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피카레스크 성격을 띠는 판타지 범죄 소설 시리즈. 우연히 초능력을 가지게 된 '에스더'가 살인을 실행하기 위한 계획과, 에스더의 뒤틀린 시선과 미쳐가는 과정을 낱낱이 고하는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쾌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충격적인 전개로 많은 사람의 사랑과 질타를 동시에 받았던 소설이며, 한국어 정발본도 있다는 설정.
- 해당 극중극은 애쉬 독백에서 서술트릭으로 사용 됐다.(위키 애쉬/익스레이버 항목에 기재 되었던 ASH, 감기, 장례식 독백의 문단.)
-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 리리, 당신은 역경을 극복하고 엔딩을 쓸 수 있을까.
- 극중극, 설정상 애쉬가 '리리'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피카레스크 성격을 띠는 판타지 범죄 소설 시리즈. 우연히 초능력을 가지게 된 '에스더'가 살인을 실행하기 위한 계획과, 에스더의 뒤틀린 시선과 미쳐가는 과정을 낱낱이 고하는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쾌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충격적인 전개로 많은 사람의 사랑과 질타를 동시에 받았던 소설이며, 한국어 정발본도 있다는 설정.
- 리우리엔 아델 프리드리히, 애쉬
"내 대부님. 그리고.."
─ 퍼디난드, 이후 입을 다물고 미소 지었다.
"가엾어라."
─ ???
- 퍼디난드의 대부代父이자 前 익스레이버 '위그드라실' 팀의 멤버. 현재 무기한 휴가중.
- 팀에서 이름 대신 애쉬라고 불렸으며, 현재도 본명을 아는 사람은 케이시와 퍼디난드, 소라를 제외하면 없다.
- 에스더의 시를 쓴 이름없는 작가. 비극적인 사고로 배우자와 사별했으며, 냉정한 성격.
- ?????
- 퍼디난드의 대부代父이자 前 익스레이버 '위그드라실' 팀의 멤버. 현재 무기한 휴가중.
- ???
"리리, 리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내가 리리의 기억을 전부 읽은 만큼 나에 대해 알겠죠? 그런데 리리는 동요조차 안 하네요. 내가 동요하지 않았듯 우리는 결국 닮은 존재인 거야. 당신은 이런 날 알아보고 받아준 거고."
- 우리의 공통점은 여럿이다. 가령 능력부터 시작하여.
- 우리의 공통점은 여럿이다. 가령 능력부터 시작하여.
5. 독백 ¶
- 재, 그리고 수호자
- 본 독백의 시점은 대부 리리의 시점임을 미리 밝힘
"hello."
"아! 리리, 안 자는구나. 전화 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무슨 일이니?"
"그게요- 나 드디어 다 읽었어요."
"벌써 다 읽었니?"
"응. 리리는 천재야. 나 왜 이걸 이제 읽었을까요? 나, 기억에 남는 문단도 있어요." 흥분된 목소리에 그는 작게 웃었다. 꼭 개구리를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그는 아이를 어르듯 "어떤 걸까?" 하고 물었다.
"4권 148p요."
"아무리 내가 작가라도 잘 모른단다. 읽어보렴."
"어디보자… 에스더는 더 완전해졌다. 그의 대담한 살인행각은 두각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젖는다. 그는 자신이 우월하다 생각했다. 수많은 천사의 목을 꺾었다 생각한다. 오늘도 죽은 여성은 호수에 둥둥 떠 그 짧았던 순간의 공포를 얼굴에 온전히 드러낸다. 그는 이 상황을 보고 자신이 선지자라 생각했다. 나는 종말의 인도자고, 사냥꾼이며, 선지자다."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는다. 이게 누굴 놀리나. "그게 마음에 들었구나." 그의 속을 뒤집듯 청년은 재잘재잘 떠든다. "당연하지! 더 있어요."
"더?"
"멍청한 어린 양아, 들어라. 나는 너희를 인도할 선지자이며 이 피는 거룩한 길을 위한 피일지니, 너희는 두려움에 젖지 말고 다가올 메시아를 환대하라. 그는 믿는 자 해치지 아니하며 사랑할지어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쐐기까지 박는다. 수화기 너머로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말 많이 했더니 목 마르네." 부스럭대며 뭔가 포장을 뜯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코르크 마개를 따는 소리. 이 아들놈은 오늘도 끝내주는 음주를 벌일 예정인 듯 싶었다. 그는 긴장이 풀리자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퍼지, 통화중에 음주는 자제하라고 몇 번을 말하지?"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라는데 내가 이것까지 닮은 거죠, 뭐. 건배! 10달러 남짓의 싸구려 와인을 위해!"
"진짜 자식도 아니면서 무슨 소리니. 그리고 누가-"
"아, 몰라요. 응애 할게요, 응애, 퍼지는 응애야." 이윽고 호쾌하게 병나발을 들고 삼키는 소리. 또 잔에 따라 마실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익숙한 일이니 그는 골머리를 앓듯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불을 그러모으고 팔을 뻗어 침대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쿠션을 등에 가져다놓고 기댄다. "그래. 할 말 있니?"
"아! 그게요, 리리. 있잖아요."
"응."
"나 여기 지긋지긋해서 그만 둘까봐요?"
"뉴욕의 영웅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다시금 들이키는 소리. 그는 이 아들놈의 음주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했다.
"리리, 나 질문 있어요." 취기 어린 목소리에 그가 눈을 감는다. "마음껏 하렴."
"내가 거기 가서 익스퍼 팀에 소속되면 어떨 것 같아요?"
"무슨 소리니."
"얘기가 좀 긴데 요약해줄까요?"
***
침묵은 짧지 않다. 그는 안경을 주섬주섬 쓰며 한숨을 쉬었다. 기어이.
"너마저 이 가혹한 운명에 빠지면 어떡해. 어쩌면 좋아."
"리리?"
"그 새끼가 일을 쳤구나. 그렇지?"
"응, 그 새끼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그는 심호흡을 했다. 호흡이 가빠지자 수화기 너머로 "리리?"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그는 심호흡 이후로 무심하게 병나발 부는 소리에 결국 이마를 짚었다. 얘는 대체 얼마나 마시는 거지? 거기다 대체 왜 내게 이걸 고백하는 걸까.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점도.
"리리. 지금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려요."
"무슨 소리람."
"술 마신건 난데 왜 취한 건 리리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줘요. 그럼 내가 기대에 부응해볼게."
침묵. 그는 쐐기를 박기로 했다.
"하나 부탁해도 되겠니?"
"뭐든지."
"…퍼디난드. 여기로 오지 않을래?"
"대부님 말씀을 어떻게 거절할까요? 술 깨면..알아서 가겠죠 뭐. 비행기 표 아까워서라도 내가 갈 걸요?"
"내가 오지 말라 해도 왔겠구나."
"당연하죠! 딸 얼굴 보고 싶다며. 거기 딱 기다려요."
"그래, 고마워. 고맙구나. 술김에 하는 얘기는 아니지?"
"아니에요. 내가 이건 내 동생 걸고 얘기할 수 있어. 그럼 이만 끊어요. 좋은 오전!"
"그래, 좋은 오전 되렴..잠깐, 오전?"
"아! 음주가무는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죠! 진짜 끊어요, 리리!"
이번에도 먼저 끊어지는 전화와 함께 그는 한참이고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복잡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잔 마시고, 베란다로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편지를 써야겠다. 여러장. 그리고 휴가를 신청할 것이다. 후임을 데려온다고 하면 될 것이다. 그는 몇모금 태우지도 못하고 서늘한 눈으로 저멀리 허공을 일정한 간격으로 번쩍이며 지나가는 비행기를 봤다.
"그래, 테오도르. 당신이 옳은 것 같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머리가 복잡하다.
- 본 독백의 시점은 대부 리리의 시점임을 미리 밝힘
- 맞이
- 공항은 소란스럽다. 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보안 요원들, 비행기 시간이 늦을까 뛰어가는 가족, 소리높여 웃고 떠드는 학생과 불안한 눈치로 핸드폰과 뒤를 쳐다봐 누가 봐도 일행을 기다리는 것 같은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있는 그 장소에서 애쉬는 가만히 서 이번에 자신 대신에 위그드라실에서 일할 후임을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이 캐리어를 끌며 나온다. 그중 유독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었다. 애쉬의 대자代子 퍼디난드다. 그새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앞머리 양쪽을 한가닥씩 백금색으로 탈색하고 사과머리로 대롱 묶은게 멀리서도 보였다. 캐리어는 파스텔 옐로,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는 유니콘과 스폰지밥. 거기다 옷차림은.. 애쉬는 커다란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롱치마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저 아이가 자신을 모른척 하는 바람이 들었다.
"아-!! 리리!!! 마중 왔어요?"
어쩜 저렇게 한결 같이 내 말을 들어먹지 않을까? 애쉬는 한숨을 쉬었다.
***
공항 내부의 스타벅스에서 퍼디난드는 우유를 두유로 바꾸고, 자바칩을 최대치로 추가했으며, 휘핑은 에스프레소로 바꾼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점원도 많이 달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했지만 퍼디난드는 잠시 고민하다 빠진게 있다며 카라멜 드리즐을 추가했다. 이후 자리에 앉아 점원을 갈아 만들어 무시하지 못할 칼로리의 설탕 덩어리를 아무렇지 않게 쭉 빨아마시는 모습에 애쉬는 몸서리를 치며 아메리카노를 덩달아 들이켰다. 보기만 해도 혀가 아팠다. 퍼디난드는 빨대에서 입을 떼곤 의자에 푹 늘어졌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그러다 병 생긴다고 말했을 텐데."
"괜찮아요! 병 생기는 건 리리가 아니라 나예요."
"퍼디난드."
"그치만 이거라도 먹어야 좀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오는 내내 머리가 띵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설마 비행기 안에서도 술 마셨니?"
"원래 하늘에서 마시는 와인이 좀 각별한 법이잖아요, 이번만큼은 눈 감고 넘어가줘요."
"기내에서 난동 피우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겠구나."
"나 참! 리리는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제멋대로에 말썽쟁이지. 넌 평생 트러블 메이커야."
"정말이지! 나빴어."
퍼디난드는 툴툴대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아! 커피. 사진 찍는 걸 깜빡했네. 어쩐담?"
투명 케이스 너머로 끼워둔 사진이 보이자 애쉬는 질색했다. "제발 그 사진도 좀 바꾸고!"
퍼디난드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쳐두더니 아이폰을 휙 뒤집어 사진을 확인했다. 애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싫은데요, 리리랑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애쉬를 흘끔 바라본 퍼디난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리리!"
"살이 왜이렇게 빠졌어요?!"
"난 그대로거든."
"무슨 소리예요? 이 사진을 좀 보세요. 다른 사람이잖아!"
퍼디난드가 아이폰 뒷면을 애쉬의 코 앞에 갖다댔다. 너무 가까워 초점이 도저히 맞지 앉자 애쉬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뒤로 밀어냈다. 이제 보니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안에선 강아지 같던 인상의 애쉬와 퍼디난드, 그의 누나 나탈리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속의 애쉬는 강아지 머리띠가 어울렸다. 지금은 고양이 머리띠가 더 어울릴 것이다. 퍼디난드는 "봐요, 지금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요! 귀엽던 리트리버가 도베르만이 됐어! 경찰견은 이젠 질색인데!" 하고 불만을 토로하더니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뒀다.
"아! 리리, 이번 직장은 좀 고됐나봐요!"
"음, 그렇게 고된 일은 아니야. 살인 사건도 드물지, 마약류 단속도 우리 몫이 아니지.."
"어? 그러면 총기 사고도 없어요?"
"여긴 총기 소지가 불법이지."
"적어도 머리 날아간 시체 볼 일은 없겠네! 좋다.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랩에 둘둘 말린 시체를 봤거든요. 진짜 변태 같았어. 으!"
"고생이 많았겠구나."
퍼디난드는 허리를 뒤로 쭉 꺾고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1등석 의자가 편하다고는 해도 장시간 비행은 지친다. 퍼디난드가 다리를 몇번 구르다 고개를 내렸다. "고생하진 않았죠. 아, 맞다."
"리리, 나 직장 분위기랑 사람들 얼굴도 좀 보고 싶어요."
"청해시로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지금 보고 싶은데."
"출발하잔 소리니?"
"아뇨."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보고 싶다구. 나 절대 피하면 안 돼." 테이블 너머로 손을 쭉 뻗은 퍼디난드는 애쉬의 양 볼을 손으로 움켜쥐곤 그대로 당겼다. 엎어질뻔한 아메리카노 잔을 겨우 사수한 애쉬는 두 눈을 마주치자 눈을 질끈 감았다.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내 기억 읽지 마." 단호한 목소리에 퍼디난드는 재미 없다는듯 손에서 힘을 빼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미 손 닿은 시점에서 다 봤어요. 놀리는 것도 못해!"
"딸, 이번 건 조금 심했구나."
"오, 미안해요 리리. 그래도 궁금했단 말이야."
"맙소사, 어쩌다 너도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어선!" 애쉬는 들릴듯 말듯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쩌겠어요? 극작가의 시나리오가 그렇다는데."
퍼디난드는 빨대로 다시금 프라푸치노를 휘휘 젓더니 이젠 컵째로 쭉 들이켰다. 얼음 덩어리도 망설임 없이 벌컥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으니 벌써 반절이 줄어있었다.
"그래도 이번 직장은 재밌어보이긴 하네요. 분위기도 떠들썩 하고, 사건에서 범죄자가 윗사람을 공통적으로 신이라고 믿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상대할..그러니까, 그..이상한 또라이들이 사이비 종교는 아니고 우상화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마 힘 때문일 가능성도 높을 거고." 애쉬는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다음 사건은 누구로 고르고 행동해야 할지 대가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나네. 아! 머리 쓰는 건 싫은데."
"어차피 쓸 일도 없을 거란다. 가만히 있으면 팀원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
"그거 다행이네." 퍼디난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억할 일이 적단 거잖아요. 참 다행이네."
퍼디난드가 가볍게 웃자 애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든 잔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봤다. 과연 기억할 일이 적을까. 녹아 흐르는 프라푸치노, 공항의 시끄러운 소음, 오늘의 날씨까지.
우리는 그 어떤것도 잊을 수 없는데.
애쉬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뒤로 눈을 감았다.
-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새로 계약한 집은 큰 창 너머로 오션뷰가 보이고 역세권, 슬세권까지 모두 포함된 좋은 여건의 오피스텔이다. 방음도 잘 되고, 커튼으로 가리면 남이 쳐다볼 수도 없으며, 평수도 나쁘지 않다 못해 혼자 살기엔 조금 널찍한 감이 있다. 가족끼리 놀러 다니던 별장만큼 좋은 곳은 아니지만, 집 구하기 힘들다 소문난 한국에서 이 여건 저 여건 따져보자니 남들이 군침 줄줄 흘릴 곳은 맞는 것 같다. 그는 오늘 집에 침대를 들였고, 소파를 비롯해 여러 가구도 전부 들였다.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당근이라는 좋은 플랫폼을 통해 팔아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점프하듯 뛰쳐 누워 티비를 튼다. 채널도 이곳저곳 다 나온다고 하는데 원하는 채널은 가입해서 또 따로 청구해야 한단다. 디즈니나 넷플릭스를 뜻하는 말이었나 했는데 청년 혼자 살기 적적하지 않겠냐는 건물주의 말을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는 채널을 돌린다. 예능 프로를 건너 홈쇼핑을 건너고, 뉴스를 건넌 뒤 아이돌이 나오는 채널도 건넌다. 영화가 나오는 채널에서 잠시 멈춘다.
─ 꼬마야,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니?
─ 어, 그게.. 빵을 사러요.
─ 안타깝구나. 이 근처에선 빵을 살 곳이 없는데.
최근 상영하던 영화는 아니고, 좀 옛날 영화다. 화면 속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등 뒤로 밀서를 숨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남자와 함께 산책 나온 개가 소년이 등 뒤로 숨긴 편지를 눈치채고 컹컹 짖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도망칠 것이고, 개가 쫓아올 것이다! 그때 어른들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몸서리를 치며 채널을 돌렸다. 다시 예능 채널을 건너고, 드라마를 건너고, 재미없는 채널을 계속 건너다 또 한 채널에서 멈춘다. 최근 신작이 나온다는 히어로 영화의 바로 이전 편이다. 중후한 매력을 가진 남성이 손을 들어 올리자 땅이 흔들린다. 이때 아빠가 뭐라고 했더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히어로 수트 입고 손 들어 올려라 해서 늙은이는 웃음밖에 안 나오더라! 였나? 그는 저기에 얼마큼 많은 cg를 쏟아부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어 또 채널을 건넌다. 스포츠, 스포츠…. 문득 스쳐 지나가는 채널에선 야구가 진행 중이다. 8회 말, 4:6. KIA는 한화에게 지고 있다. 지금쯤 리리는 애간장이 탈 것이다. 다시금 채널을 넘긴다. WWE 경기를 중계하는 채널이다. 검은 수트를 입고 금발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과, 흰 수트를 입고 푸른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마주 보며 마이크 웍을 하고 있다.
─ 퀸 이블. 네 동생은 뉴욕의 영웅이라 불리는데 넌 뭐지? 집안의 명성 빼곤 아무것도 없잖아! 이곳에 온 것도, 바람이 셌던 거잖아! 실력도 없으면서 다른 녀석의 꿈을 짓밟고 탄탄하지 못한 길을 걸어온 거라고. 내 말이 틀리나? 난 널 막기 위해 여기 나섰지.
(아, 미스트가 퀸 이블에게 도발을 했어요!)
(실제로 퀸 이블은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걸로 유명하죠? 퀸 이블이 뭐라고 할지 기대가 되는데요.)
─ 너같이 입만 잘 놀리고 실력 없는 쭉정이 거르고 올라온 게 나다, 이 멍청한 미스트. 꿈을 짓밟기는! 약해 빠진 것들이 이 퀸 이블을 이기지 못했으니 당연히 기회가 없는 거지! 뉴욕의 영웅? 난 미국의 악당이다, 이 머저리야! 그것도 이제 너를 밟고 챔피언 자리에 오를 미국의 악당이지!
(아-! 퀸 이블 당당해요, 사악합니다! 악랄해요!)
다부진 체격, 금발 머리의 화려한 여성이 마이크를 뺏어 던지더니 그대로 스피어[¹]를 날린다. 크나큰 환호소리와 경기를 시작하는 링 소리가 울린다. 퀸 이블이라 불린 금발 여성이 링 바닥에 쓰러진 여성의 다리를 한 팔로 잡고 몸을 누른다. 심판이 카운트를 세자 누워있던 여성이 몸을 펄떡이며 일어선다. 격렬한 링 싸움을 지켜보던 그는 퀸 이블의 클로스 라인에 쓰러진 미스트를 본다. 링 기둥에 올라선 퀸 이블이 높게 점프하자 그는 채널을 돌렸다. 며칠 전 누나의 인스타그램에서 챔피언 벨트를 당당히 든 사진이 떴다.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는 경기 결과는 안 봐도 안다. 그는 채널을 이것저것 돌리다 한국 예능을 본다.
─ 안녕하세요, 자기님.
남동생이 어색하게 한국어를 하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다시 채널을 돌려 뉴스를 보기로 했다. 재수가 없으려니 광고 시간인가 보다. 음주 전후 숙취해소, 해외 수출까지 한 모 숙취해소제 광고를 뒤로 핸드폰이 윙 진동한다.
《퍼지!》
- (남동생과 누나의 셀카. 남동생은 표정이 뚱하다.)
그는 일말의 고민 없이 답장을 보냈다.
《어딜 가나 너희가 보여.》
《이 베르너들아!》
《보고 싶어!😏》
《나도!🥺》
《아, 브라이언도 보고 싶대.》
《자기 말로는 형 얼굴 보고 싶지도 않고 떠나서 좋다고 하는데》
《아직도 밤만 되면 형은 안 잔대? 전화해 봐! 하고 물어보다가 자기가 놀란다니까?😏》
《lol》
《절대 마약 하거나 여자 만나거나 남자 만나거나 그놈의 flex 해서 인스타에 올리지 말라고 전해줘.😡》
《맡겨만 줘!😎》
《그리고 엄마랑 아빠한테도 안부 전해줘.》
《그것도 맡겨만 줘!》
《으!😩》
《더 대화하고 싶은데》
《이제 촬영 들어가야겠다.😩😩》
《Bye!😚》
《I luv U! fudge💗》
《Bye. I luv U 2》
그는 핸드폰을 다시 잠그고 아예 엎어버린다. 지긋지긋한 광고 뒤로 처음 뜬 뉴스의 헤드라인에도 빠지지 않는 가족 이름이 또 보인다.
─ 유명 토크쇼 MC 지오나 유진 베르너… UN 연설. "누구도 차별받을 권리 없다."
그는 소파에 벌렁 배를 까듯 뒤집어 누웠다. 이래서는 독립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내 이름이 안 나오니 다행일 것이다. 술이나 마실까 하는 생각에 그는 몸을 일으키다 뉴스를 가만히 본다.
─ 미국에서 원인 불명의 산불 발생, 이번이 5번째…….
"재밌네."
그는 냉장고로 걸어가 캔맥주를 꺼냈다. 오늘 산 맥주 4캔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의 위장을 적시고, 속을 망가뜨릴 것이다. 어차피 그러기 위해서 산 맥주다. 술을 마시려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아 무표정으로 오늘의 비고를 전하는 아나운서를 향해 건배한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과 4캔에 만원인 맥주를 위해 건배.
----- [¹] 프로레슬링 기술 중 달려가며 어깨로 상대의 복부를 뚫듯이 들이받는 기술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으로, 달려가는 동작과 부딪힌 상대방이 드러눕는 모습이 마치 창으로 찌르는 모양과 비슷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남동생과 누나의 셀카. 남동생은 표정이 뚱하다.)
- 영웅의 최후
- 12월 27일. 날씨는 춥고 유례없는 폭설로 고립된 사람이 많았다. 지금껏 기후 문제는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고 이번 여름에도 더웠지만 과학자나 해결해 줄 일이라 생각해 관심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한 날씨였다. 추위는 물론이고 눈도 많이 내려 어디 갈 수도 없는 노릇의 날이었다. 창문 블라인드까지 꽁꽁 친 거실 테이블에 와인, 보드카 할 것 없이 빈 병이 가득하다. 수여받은 훈장은 꼴도 보기 싫어 구석에 던져버렸다. 핸드폰은 12월 26일 오전부터 배터리가 다해 꺼졌다. 소파에 누워 허공을 노려보던 퍼디난드는 26일 새벽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꽤 그럴듯한 침묵이다. 늘 그렇듯 조용한 소음이다. 어둠이 내려앉고 끔찍한 악몽은 그를 좀먹었다.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경찰이 된 이상 반드시 보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죽고 다칠 것임을 교육받았다. 사살조차 익숙한 일인데도 막상 겪어보니 끔찍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그게 테러라면 더욱이. 다행스럽게도 테러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아주 적었지만 20명이 있던 팀은 15명이 죽고 5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 이후 팀은 자연스럽게 와해됐다. 그리고 지금 여기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순직한 15명 중 마크는 11월 25일에 사기 전담 부서의 노라와 결혼했다. 페더슨 선배는 딸이 곧 중학교에 입학한다. 아이작은 12월 25일 WWE 경기 표를 얻었다며 신나했다. 퀸 이블을 볼 수 있겠지! 하며 경박한 휘파람을 불다 한대 기어이 맞으며 누나한테 그런 이상한 성희롱 좀 하지 말라며 눈총까지 받았다. 그 밖에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여주던 유일한 여성 대원 도나,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던 막스, 그리고…….
퍼디난드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드높던 천장이 금방 가려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을 부릅 떴다. 감는 순간 세상은 무너지고 혼자 남기 때문이다. 누군가였는지 기억에 생생히 남는 목소리와 함께 등이 떠밀리고 눈앞에 있던 동료는 깔려 죽는다. 다른 사람을 도울 틈도 없이 발밑은 아찔하고 눈앞이 빙빙 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얼굴 가죽을 뜯어낼 것처럼 마디마다 힘이 들어갔다.
한때 영웅 서사를 동경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크나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 영웅이라 칭송받고, 그 자리가 마냥 멋있어 보였다. 영웅의 말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나, 별자리가 되고 영원히 기억에 자리하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영웅이 되어버렸다. 비참한 최후를 맞지 못하고 살아남아 별자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악의 하나 없이 그를 영원히 존경하고자 별자리로 올렸을 것이다. 기억하고자 별자리로 만드는 걸 원하지 않았을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임에도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발버둥 쳤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영웅에 머물러있다. 그 영웅이 겪은 고난과 시련 따위는 알지 못하고, 한때 영웅을 동경하던 자신처럼 무지몽매한 눈으로 쳐다보고 숭상할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참지 못하고 목 깊은 곳에서부터 절망 어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입을 벌려 나오는 소리보단 속 깊은 곳에서 짐승이 울듯 괴로워하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몸부림쳤다. 소파에서 굴러떨어지고 태곳적 어미 배에서 곤히 잠든 태아의 시절처럼 웅크린다.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도 충분한데 그때의 주마등이 멈추지 않았다. 퍼디난드는 울었다. 지친 짐승처럼 자신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지쳐 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울던 그는 몸을 비틀비틀 일으키곤 테이블 위의 가위를 집어 들었다.
***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켰다. 꿈자리가 사나웠는지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어디선가 소음이 들린다. 방음 잘 되는 집이라며! 거짓말인가?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소음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TV에서 여전히 무표정의 아나운서가 오늘의 비고를 전하고 있다. 그 밑 테이블엔 빈 맥주캔 4개가 안주도 없니 가지런히 놓여있다. 기억났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 잠들었지. 나도 참. 아직 덜 깬 술기운 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기분이 나빴지? 참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꿈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 같더니 이젠 꿈 내용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개꿈이려니 싶어 그는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손으로 부스스 넘긴다. 이럴 땐 술이 약이다. 비척비척 일어난 그는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가 남았나……."
늘 그렇듯이.
- 무뎌짐
- 퍼디난드의 대부, 통칭 '리리'는 뉴욕 경찰국 살인 전담팀에서 마녀로 불렸다. 23살 신입 당시를 기억하는 동기 몇은 대부가 저렇게 냉정하게 변할 줄 몰랐다고 했다. 되레 예전의 리리는 시체를 보면 울었고, 그 모습이 순한 강아지 같아서 언제 그만 둘지 내기로 돈까지 오갈 정도였단다. 그 말에 퍼디난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리리와 그가 처음 만난 날은 리리가 23살이고, 그가 17살일 적이다. 그때 리리는 어땠더라? 생각하니 강아지 같긴 했다. 울진 않았지만. 지금은 어떻더라. 적어도 지금은 그때 모습을 보기 어렵다. 리리는 수많은 사건을 겪었고, 여러 범죄자를 마주하며 그 심리를 파악했다. 그럴수록 리리는 감정을 이성과 분리하는 법을 배웠고, 점점 무뎌져 이젠 주변 사람이 죽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사람이 됐다. 누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 주변에서 어떤 평가를 들었든, 리리에게 범죄자는 범죄자였다. 퍼디난드도 비슷하게 무뎌지긴 했지만 리리는 궤를 달리했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출근해 일을 했던 사실도 경찰국 내부에서 유명하다. 누군가는 리리를 보며 존경스럽다 했고, 누군가는 리리를 상식 밖의 두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퍼디난드는 전자였다. 리리가 출근한 날 퍼디난드는 그를 붙잡고 "대부님, 쉬어야죠. 이럴 땐 쉬는 게 맞아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리리는 아니었다. 예의 그 신비로운 금빛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깨 위의 손을 포개고 몇 번 토닥였을 뿐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잃은 사건이 더 중요하지." 그리고 일하러 들어가 버린다. 퍼디난드는 뒷모습을 보며 그를 걱정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달리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식됐다.
그리고 리리는 안식년 휴가를 신청하기 전 퍼디난드를 불렀다. 취조실로 부르는 건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여기로 부르는 건 둘이서 할 긴밀한 얘기가 있단 뜻이었다. 리리의 후임 중 하나인 아이리스가 취조실 문을 연다. 그 당시 머리가 비대칭도 아니고, 치렁치렁하게 길어 위로 높게 올려 묶어 땋고 다니던 퍼디난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와 털썩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엔 늘 그렇듯 맛없는 커피와 주변에 흐트러진 종이가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식에 불과했고, 리리도 그걸 아는지 한구석으로 밀어 치워버렸다. 퍼디난드는 먼저 말의 운을 뗀다. "사건 수고하셨어요." 최근 16살 앞날 창창한 소녀가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호수에 둥둥 떠 발견된 소녀는 다리를 랩으로 결박 당했고, 그 모습이 인어공주와도 같아 사건 이름이 특별 수사본부에서는 '인어공주 사건'으로 명명된 지 오래였다. 그 사건을 해결한 건 남편이 죽었음에도 수사에 뛰쳐든 수사본부의 지휘 아델 프리드리히, 그의 대부였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귀신같이 범인을 추리했고, 과정과 동기까지 맞추는 신기한 모습을 보였다 했다. 퍼디난드는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그의 마지막임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가 최근 서장에게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리리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맙구나." 하고 툭 대답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부르셨어요?"
"퍼디난드. 네가 보기에 사건 해결엔 뭐가 필요한 것 같니." 리리는 늘 그랬다. 친절했지만, 용건을 먼저 말해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뭐든 과정을 단축해 효율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 버릇은 마녀라는 별명에 일조했다. 퍼디난드는 익숙하게 답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 리리는 늘 그에게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구나. 퍼디난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편견이 아니라 사건을 사건 자체로 바라보는 눈이다."
리리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퍼디난드는 "경찰은 취조실 안에서 흡연 금지예요!" 하고 툭 뱉었고, 리리는 "나도 안다." 하고 답하며 불 붙이지 않은 연초를 입에 한번 굴렸다. 천하의 리리가 실수를 할 정도였으니, 생각이 꽤나 깊은 것 같았다. 리리는 한참 동안 말을 아끼다 생각을 정리했는지 안경을 벗어 내려뒀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든, 무엇을 했든, 무슨 동기가 있어 보이든 사건 자체에서 바라봐야지 사람을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음, 리리. 그거 조금 어려운데요."
"쉽게 말하자면 그 사람의 과거를 동정하는 순간 편견은 생길 것이란 뜻이지. 강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 쳐보자. 그 사람은 10센트 사탕 하나도 못 사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과거를 가졌고 말이다."
"네."
"네가 그걸 동정하면, 그 이유로도 합당한 범죄를 저질렀을 거란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단 뜻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아주 사소한 균열은 수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요컨대 동정하지 말란 뜻일까. 퍼디난드는 신발 하나를 슥 벗고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렸다. 무릎을 세워 거기에 팔을 괴고, 불량한 자세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했다.
"무뎌져야 하는 거지."
"리리만큼요?"
"내가 무뎌졌다고 보니?"
"당연하죠, 아니면 마녀 소리도 못 들었을걸요?"
"칭찬인지 욕인지도 모르겠구나."
"음, 적어도 저는 칭찬에 속해요."
"아, 퍼디난드." 리리는 문 연초를 입매 근처로 옮기더니 한숨을 깊게 쉬었다. "난 네가 무뎌지는 날이 두렵구나. 너도 나랑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는데." 그 탄식이 꼭 어째서 경찰이 됐냐는 말 같아 퍼디난드는 다른 쪽 다리도 의자 위로 올려 허리를 숙였다. 테이블 위로 긴 머리카락이 엎어졌다. "리리가 내 목숨을 살려줬잖아요! 은혜 갚기죠. 내가 리리 때문에 경찰이 된 건 여기 사람들이 다 알걸요?"
"퍼지."
"네에, 네."
"우리는 그렇게 삶을 살고 누군가의 죽음을 밝혀내며 무고한 자를 찾고 죄인을 심판해야 하지. 그렇지?"
"그렇죠."
"비단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경찰의 삶이 아닌 민간인의 삶에서도 나는 나로 봐야 하지, 어떤 일을 당한 누군가로 사람을 대해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이미 수도 없이 봤는데요. 퍼디난드가 속으로 생각했다. 당장 눈앞의 대부도 남편 죽은 가엾은 사람으로 포장되어 어떤 일을 당한 누군가에 속하지 않은가. 리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고, 퍼디난드는 그 모습을 테이블에 고개를 대듯 엎어져 빤히 올려다보다 시선을 굴렸다. 리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하자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켰다.
"네, 대부님."
"나는 네가 무슨 일을 당해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람! 퍼디난드는 냉정한 그의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이어 리리는 "너도 내가 무슨 일을 당하거나, 무슨 짓을 해도 동정하지 말거라.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감하지 말고,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하렴." 하고 결단을 내리듯 말했다. 퍼디난드는 그 모습에서 리리의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을 읽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퍼디난드가 잠시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더니, 그대로 발을 슥슥 신발에 밀어 넣어 구겨 신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뼘은 더 컸던 퍼디난드는 리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귓가에 정확히 속삭이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면 담배부터 끊으세요." 보지도 않고 그의 입술에 물려있던 불 붙이지 않은 연초를 능숙하게 검지와 중지 사이로 쥐어 뺀 그가 손을 옮겨 자신의 입가로 연초를 가져다 대곤, 이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경찰은 취조실에서 흡연 금지라며."
"언제는 내가 말을 들었나?"
리리의 등 너머로 보인 벽은 제법 넓었다. 그는 그 너머의 세상을 가만히 노려보다 이내 연기를 뱉어 지워버렸다.
- 상처와 염증
- 2020.12.28 뉴욕 911 상황 기록
— 뉴욕 911 입니다.
— 제발 살려주세요! 동생이 자살시도를 했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요!! 구급차가 필요해요!!
— 응급 조치는 시도하셨습니까?
— 지혈을 하고 있어요. 목을 가위로 그었어요. 제발! 신이시여!!
— 지금 어디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 여기는..*여성은 다급한 목소리로 주소를 말했다.*
*잠깐의 정적*
— ..이곳에 오기 직전에 경광등을 꺼주세요.
— 네?
— 제 동생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 선생님, 죄송하지만 들어드리기 어려운 부탁입니다.
— 파파라치가 있어요. 제발요.
— ..
*해당 부탁을 들어주긴 어려웠다.*
이후 환자는 호송되었으며 다행히도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음.
***
"퍼지는 26일부터 연락을 받지 않았어요. 핸드폰이 꺼졌거든요."
"그 이전에는요?" 살인 전담팀 아이리스 킴은 커피가 든 잔을 밀어주며 질문을 건넸다. 나탈리는 사양하겠다며 잔을 구석에 밀어뒀다.
"25일에 브리가 안부 전화를 했어요. 남동생이요. 우리는 퍼지가 많이 힘들 걸 알아서 언제든 본가로 돌아오라고 했어요. 퍼지는 자신은 멀쩡하다며 웃었고 전화를 끊었고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발견 당시엔 어땠나요?"
나탈리는 그때를 상상하곤 괴로운지 몸을 떨었다. "너무 비참했어요." 그리고는 눈물을 훔쳤다.
"테이블에 술병이 가득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 지 감도 오지 않아요. 저는 처음에 퍼지가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소파 밑에 누워 있었거든요. 그래서 퍼지, 일어나. 하고 흔들었는데.." 나탈리는 얼굴을 손으로 덮어 가렸다. "머리카락도 숭덩 잘려있고, 피가 이제 막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더라고요.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지혈을 하고 911에 신고했어요."
아이리스는 끔찍한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명랑하고 쾌활한 퍼디난드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리우리엔 선배도 그렇고, 이젠 퍼디난드까지! 리우리엔은 남편이 집안에서 무참히 난도질 당해 살해 당했고, 퍼디난드는 테러 사건에 휘말려 팀을 잃었다. 세상이 잔인했다. 그렇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지옥 구렁텅이로 밀어 넣다니. 더군다나 퍼디난드는 이제 겨우 23살을 바라보는 나이 아닌가.
"그 작은 손에 피가 묻은 가위가 있었어요." 나탈리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칼도 아닌 가위요. 그걸로 목을 자를 생각을 할 정도로 괴로웠던 거겠죠! 아, 왜 나는 퍼지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걸 몰랐을까요..단순히 힘들다고만 단정짓고 얼마나 괴로울 지 몰랐어요!"
"나탈리 씨 잘못이 아니에요." 아이리스는 나탈리를 달래며 손수건을 건넸다. "지금은 어떤가요?"
"치료를 받고 있어요." 나탈리는 눈물을 툭툭 닦았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지만 흉터는 남을 거래요."
"지장이 없었다니 다행이지만.." 아이리스는 말을 흐렸다. 뒷 말은 나탈리도 알고 있다. 뉴욕의 테러 영웅이라 불리게 된 퍼디난드가 이런 뒷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민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식이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이런 시선이 팽배했다. 세상은 잔인하다. 영웅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둘은 브라이언이 S.O.S를 요청하기 전까지 한참을 침묵했다.
***
나탈리는 황급히 뛰어 방으로 들어갔다. 퍼디난드는 이불을 꽁꽁 싸매고 떨고 있었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났는데 갑자기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한다. 나탈리는 퍼디난드를 끌어안았다.
"퍼지."
"누나."
"왜 그래? 오늘도 혼자 자는게 무서워?"
"아니, 사람이 죽었어."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았어."
"아냐, 방금 내가 쐈어. 내 실수로 루이스가 죽었는데, 다들 날 영웅이라고 해.."
"맙소사, 퍼지."
"내게 대통령이 훈장을 줬어! 난 이제 평생 영웅인거야. 내 잘못인데 그걸 잘 했대!"
"네 잘못이 아니야.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일어서야지. 응?"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퍼디난드는 팔을 뻗어 나탈리를 마주 안았다. 허공을 쳐다보던 퍼디난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벌벌 떨렸다. "난 죄인이야! 다 나 때문에 죽었어!"
"괜찮아, 퍼지. 괜찮아.."
퍼디난드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다시 현재. 그는 오늘도 알 수 없는 불쾌감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방음 잘 되는 오션뷰 오피스텔은 적막이 가득하고, 커튼을 걷어내자 별이 보인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별을 노려보던 그는 목이 마른지 몇번 더듬다 손을 멈췄다. 길다랗게 난 흉터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힌 그는 "개꿈이겠지." 하곤 냉장고로 향했다.
맥주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암전.
- 2020.12.28 뉴욕 911 상황 기록
- 꿰뚫는 자
- 작년 11월 중순이었나, 사기 전담팀의 샘이 다가와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그놈의 쿨과 마초가 뭔지 성격 한번 제멋대로에 답답한 샘과 한번 추진한 일은 불도저 처럼 밀고가 끝내버리는 것이 직성인 리리의 사이는 가히 공화당과 민주당처럼 좋지 않아 그도 나름 멀리하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리리가 일을 그만 둔 이후로는 아예 말리는 사람도 없겠다 한참을 으스댄적도 있다. 자판기에서 작은 플라스틱 페트병에 든 제로콜라를 뽑을 때였다. 샘이 껄렁대며 다가왔다. "베르너, 연애 안 하냐?" 자기는 최근 아내랑 이혼해놓고 남에게 지랄은 싶었고, 그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콜라를 집어 들었다. "일도 바빠 죽겠는데, 안 해요."
"거짓말!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누구요? 아이리스요?"
"그 동양인 말고. 매일 같이 따라다녔으면서 딴청은! 베르너, 기회 생겼으니 추근대기라도 해 봐. 내가 큐피트라도 해줘? 한국 보내줄까?"
샘이 윙크를 하자 그는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샘은 추잡스러운 말을 쿨함으로 포장하는 가짜 마초다. 그 소위 쿨함 물씬 나는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도 자기 딴엔 한방 먹였구나 싶을 것이다. 자칭 마초는 하나같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미국은 땅이 넓어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몇은 배울 의지조차 없다지만 인성까지 저렇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경찰이 말이다. 그는 콜라의 플라스틱 뚜껑을 돌려 따며 눈을 굴렸다. "저 대부님 안 좋아해요." 하자 샘이 짓궂게 웃는다. "만날 때마다 표정 풀어졌던걸 내가 모를까?" 음, 맞는 말이다. 리리를 보면 내 마음이 좀 편안해지긴 했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연애 감정과는 다르다.
"샘."
"생각이라도 들었어?"
"샘은 사람 안 죽여봤죠."
"뜬금없이 무슨 소리래? 나는 살인 전담팀도 아니고 ESU도 아니니 당연히 사살 허가는 없지."
"난 또."
그는 콜라를 들이킨다. 따가운 탄산이 목을 찌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뚜껑을 닫는다. 지긋지긋하단 표정으로 샘을 쳐다봤다. 다들 왜 대부님과 자신의 관계를 묘하게 보는지 모르겠다.
"옳다구나 싶어 인성의 밑바닥 보여주고 타인 헐뜯으려 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이나 가질 법한 혓바닥으로 용케 타인 안 죽인게 용하다 생각 들어서. 적어도 리리는 그 혀로 실적이라도 냈으니 용써보쇼. 헤어진 아내 붙잡고 징징대보든가."
비슷하게 마초 흉내를 내며 씩 웃어보이자 옆 자판기에서 과자를 뽑던 아이리스가 웃음을 참듯 입술을 꽉 깨물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을 때 그는 뒤로 휙 돌아 "난 갑니다~ 도넛이나 처먹어보실까." 하곤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
"샘이 그런 말을 했구나."
"그래서 내가 혼내줬어요. 잘 했죠?"
"흐으음. 그래."
애쉬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자신도 땋고 싶은데 자기는 잔머리가 삐져나오니까 땋아달라 징징댔기 때문이다. 비대칭으로 싹둑 잘린 머리 때문에 애쉬는 어쩔 수 없이 머리의 결을 반으로 갈라 양갈래로 땋을 수밖에 없었다. 별개로 짧은 쪽을 만지작거리며 땋아냈을 때 들어온 기억은 제법 재밌다. 내 주변에 10명이 있다면 관심 없는 사람이 7명, 싫어하는 사람이 2명, 좋아하는 사람이 1명 있다더니. 애쉬는 샘을 별것 아닌 뜨내기로 봤기에 7명에 속했건만 샘은 애쉬를 2명에 넣어버린게 틀림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정말이에요."
"뭐가 말이니." 애쉬는 반대쪽 머리를 땋기 위해 머리카락에 두 손가락을 집어넣어 3등분을 했다.
"전 대부님 연애감정으로 본 적 한번도 없어요." 그는 봉지에서 치토스를 꺼내들어 입에 넣었다. "의심스러우면 다른 기억을 읽어봐도 돼요." 하고는 두툼한 조각 하나 집어들어 팔을 위로 뻗는다. 애쉬는 고개를 쭉 뻗어 조각을 입에 물고 몇번 씹어 삼키며 머리를 마저 땋았다.
"안 봐도 감정이 다 느껴지니 의심할 여지도 없지."
"그러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지 알아요?"
애쉬는 그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 본다. "아니." 하고는 땋았던 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풀어 다시 엮는다. 잔머리가 삐져나왔기 때문이다. 애쉬는 새끼줄 엮듯 하나하나 정성껏 엮으며 말을 이었다. "읽히지 않는구나."
"지금 제 생각은요." 그는 치토스를 다시 하나 입에 넣는다. "레게 머리 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봐요, 읽었죠?" 치토스를 또 애쉬의 입가로 가져가듯 팔을 위로 쭉 올렸고, 애쉬는 능숙하게 받아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내가 머리 땋는 기곈줄 아니? 난 못 해."
"너무해!"
"네가.."
애쉬는 운을 떼며 머리를 마무리 짓는다. 양갈래로 땋은 그의 머리는 길이가 제각각이다. 여간 독특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그의 귓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재밌는 얘기를 많이 물어온다면 해줄 수는 있겠지."
"아, 리리! 치사해요."
"원래 치사한 사람이지. 몰랐니?"
"그게 아니라요."
그는 뒤로 등을 기대고 치토스 봉지를 품에 안고는 왼쪽 엄지 발가락을 까딱였다. 손을 봉지 속에 대충 쑤셔넣고 하나를 입에 툭 던져 넣으며 엄지 손을 쭉 빤다.
"내가 대부님 말씀을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리리는 진짜 잔인한 사람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이마."
"진짜 짜증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어떻게 대부님 말씀을 거절할까. 검지에 묻은 시즈닝도 혀로 훑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애쉬의 "손이 맛있는 건 알겠는데 그만 핥고 손 씻고 와." 한마디에 소파로 향하던 발걸음이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가고 말았지만. 저 잔인한 사람! 내가 어떻게 거절해!
- 후계자
- 사건의 마무리는 순조롭다. 퍼디난드는 대부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대부님은 본인의 집 벽에 붙여둔 종이에 뭔가 쓰고 계셨다. 막힘없이 어떤 단어를 적어내던 대부에게 보았던 기억을 모조리 읽어보라는듯 손을 내밀었다. 대부는 망설임 없이 잡고 기억을 읽는다. 대부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 끔찍했던 순간에도 미동하지 않고 쓰는 걸 이어간다. 팀원이 목을 조른다고 해도 무감정하다. 짧은 시간이 지나자 손을 떼고 "수고했다." 하고 퍼디난드를 보지도 않고 종이에 집중하며 말한다. 그 뒤는 침묵이다. 대부님은 일과 관련해서는 어떤 칭찬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은 일이라 칭찬이나 비난이 없어야 한다는게 대부님의 지론이다. 조금의 감정이라도 개입하면 흐트러지는게 사건이라 첫 투입부터 이렇게 끔찍한 일이 있어도 위로하지 않는다. 알고 있고, 늘 넘기던 일인데 오늘따라 왜이리 서운하고 속이 상하는지 모르겠다. 대부님은 "더 할말 있나?" 하고 물었고, 퍼디난드는 고개를 저으려다 잠시 고민하고는 "케이시 씨가 전해달란 말이 있었어요." 하고 말했다. 대부님은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무슨 말."
퍼디난드는 발을 직직 끌며 더듬더듬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편지를 읽고나서 하신 말씀인데, 음, 직접 보실래요?" 대부님은 벽에 붙은 종이를 떼내 둘둘 말며 손을 내밀었다. "손 줘봐라. 직접 봐야겠다."
또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퍼디난드는 이쯤 되면 기억을 읽을 시간이 충분함을 안다. 그런데도 대부님은 손을 놓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서있다. 말린 종이를 손에 쥐고, 다른 손은 퍼디난드를 꽉 붙들고 있다. 표정은 알기가 어렵다. 대부님은 퍼디난드가 "저 손 아파요." 하고 말하자 느릿느릿 손을 뗐다. "케이시가 그랬구나. 그래, 수고했다." 하고는 그에게 종이와 크기가 제법 있어보이는 상자를 건넸다.
"퍼디난드, 돌아가서 펼쳐봐라. 이제 나머지는 네 일이다."
"이게 뭔데요?"
"군말 말고 가 봐라. 생각할 게 좀 있으니."
퍼디난드는 군말없이 나간다. 대부님께서 나가라 하면 나가야만 한다. 퍼디난드가 나가기 전 본 광경은 마카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향하는 대부의 뒷모습이었다. 대부님은 매정하게도 잘가란 인사 하나 없이 그가 문을 닫고 나가든 말든 베란다로 휙 나가버렸다. 퍼디난드가 밖으로 나가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애쉬는 안경을 벗고 깊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오피스텔로 돌아와 손을 씻고 적당한 자리를 찾는다. 이정도면 되겠다 싶어 중앙에 종이테이프로 종이를 펼쳐 붙인다.
사람 크기만한 흰 종이에는 대부님께서 종이에 라타토스크, 나이트, S급, 위그드라실, 킹메이커라는 단어를 써둔게 보인다. 그는 이후 크기가 있어 보이는 상자를 열어 펼쳤다. 체스 판과 종이테이프로 단단히 고정된 말이다. 퍼디난드는 궁시렁대며 불량한 태도로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마카를 집어든다. 대부님은 사건을 정리하고 추론할 때마다 이렇게 사건과 관련된 기물을 모으고, 사람만한 종이에 적어서 연결점과 일말의 공통점이라도 찾아내려 한다. 이걸 준 이유는 알아서 추리하란 뜻이 분명했다. 나쁜 사람! 내가 암만 수제자니 뭐니 해도 자칭이지 타칭이 아니란 말이다. 퍼디난드는 이걸 어쩔까 싶어하다 제일 먼저 킹메이커를 본다. 저번에 대부님께서 킹메이커는 어떤 인물일 거라 했더라? 퍼디난드는 뭔가를 적으며 중얼거렸다. "킹메이커.."
─ 철두철미하며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직원을 내세울 계획과 목적이 있는 범죄자. 사회속에 숨어있고 사람을 휘어잡을 결속력이 있음.
그렇다면 지금 킹은 안달이 났을 것이다. 계획중 하나가 보기좋게 흐트러졌을 테니 분노했을 거고, 점점 더 강하게 옥죌 확률이 컸다. 퍼디난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름 단어를 쳐다봤다. 다음엔 라타토스크다. 안타깝게도 위그드라실도, 라타토스크도 모르는 영화에서 한번 보고 만 단어라 그는 핸드폰을 들어 검색한다. 위그드라실은 북유럽신화의 세계수, 라타..Ratatoskr? 퍼디난드는 위키백과를 스크롤 하며 중얼거렸다."위그드라실에 기생하여 줄기를 갉아먹는 청설모. 중상모략을 떠들어 분란을 일으키는 얼간이.." 그는 두 사이의 연결점을 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컨셉에 심취한 녀석이 그새끼 말고 또 있는 거야? 뭐 이딴게 다 있어." 하면서도 쓸 것은 다 적어냈다.
─ 조직 자체가 단체의 설립을 미리 알고 있었거나, 위그드라실의 팀 자체를 궤멸시키겠다는 목표를 정식으로 잡았다는 뜻?
─ 비밀로 부쳐진 위그드라실을 알고 있음. 나이트의 공격에서 큐브웨폰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나 팀원의 정보를 알 가능성 높음. 정보전에서는 우리가 밀림. 최소 정계 인사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음.
─ 양치기와 연관이 깊지 않음.
이건 대부님도 알고 안심할 것 같다. 그녀석은 지금 뉴욕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이 라타토스크에 집중해도 될 것이다. 퍼디난드는 이번엔 나이트라 써진 단어를 향해 걸어갔다. 세걸음 정도 걷고 나니 나이트의 바로 옆에 S급이란 단어도 있었다. 퍼디난드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다 체스판을 내려다 보곤 망설임 없이 적어내리며 중얼거렸다."체스 말을 떠올린다면 킹, 퀸, 비숍, 룩, 나이트, 그리고 폰..폰은 아마 접선하는 사회적 약자를 뜻할 것이고, 킹은 우리가 노리는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높지만 퀸이……."
─ S급, '폰' 언급으로 보아 직위는 체스 말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음. 나이트는 학생. 아버지가 킹?
─ 아버지=킹(킹메이커)의 가능성. 학생에게 살인을 시킬 정도의 또라이는 확실함.
─ 퀸, 실제 체스에서 룩과 비숍의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말. 변화무쌍하고, 가장 강력함. 아마 킹을 가장 근접하게 보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퀸은 킹의 트리거일 확률이 높음.
트리거.
─ 퀸은 현재 나서지 않음.
─ 어설프게 폰을 쓰러트리기 위해 내보낼 전력이 아님. 최소 S일 확률이 높음. 애당초 폰을 제외한 전체가 S일 확률도 있음.
─ C씨의 S급 익스파 파장 반응. 무엇 때문에?
─ 팀원의 성장 여지가 있음. 조건이 무엇인가?
─ 라타토스크는 성장의 때를 기다린다? 아니면 예상치 못한 변수?
퍼디난드는 엄지 손톱을 물어뜯는다. 이건 정보가 없다. 애당초 정보에서 밀리는 싸움이다. 확실한 건 뭘까. 모두 다 쓰러트리면 도망치는 일 없이 킹이 나선다는 점? 퍼디난드는 한참 머리를 싸매다 체스판 위의 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보전에서 밀리는 위그드라실, 팀원의 정보나 여타 위그드라실 체계를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은 라타토스크, 그렇다면 폰은..
"빙고."
퍼디난드는 엄지를 입에서 떼더니 마카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체스판을 향해 손을 뻗더니, 고정된 체스말을 모조리 치웠다.
─ 누군가의 악몽이 폰이 되어 돌아오니 주저없이 쏴버릴 것.
내 추리가 다른 길로 맞았네. 퍼디난드 붉은 눈 휘어 웃는다.
- 중압감
- 나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대단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조부모님, 그보다 조금 더 위. 세계 대전 이전에 배우의 삶을 원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신 고조부님 덕분이다. 베르너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 할리우드에서 통할 정도로 우리는 빛나는 길을 걸었다. 내 누나도, 동생도 할 것 없이 지듬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으니까.
음, 그래. 나도 여러 영화에서 아역배우로 출연하곤 했다. 광고도 몇개 찍었고, 베르너라는 이름값을 했다. 여유로운 자본가 집안에서 적응하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레귤러였다. 나는 홀로 부담감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의 기대 담긴 눈동자를 마주칠 때면 어린 나이인데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눈에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담고 있다.
그 유명한 베르너 집안 사람이니 이정도는 쉽게 하겠지?
토할 것 같았다. 누구나 하는 실수인데도 몇번이고 이정도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눈초리를 받은 것 같다. 심지어 1달러 25센트의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리던 날에도. 분명 웃으면서 다시 주긴 했지만 트럭에서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 시선이 사뭇 두려웠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내게 기대를 가졌다. 어머니처럼 노래라도 잘하겠지, 아버지처럼 연기를 잘하겠지, 아니, 이미 영화에 나올 정도니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겠지… 이 부담감이 싫었다. 시선이 끝없이 따라오는게 두려웠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숨을 쉬기 어려웠다. 일상에서 시도때도 없이 멀미가 났다. 잠을 쉽게 자지 못하고 악몽을 꿔 밤을 새웠다.
공황장애가 아닐까 하는 어머니의 걱정에 병원에 갔어도 특별한 이견은 없다 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충분한 휴식을 권했을 뿐이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파파라치를 발견한 아버지가 나를 감싸 안았을 때 나는 수면 유도제가 든 봉투를 숨겼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휴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았다. 지긋지긋했다. 왜 나를 퍼디난드 '베르너'로 볼까! 내가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으면 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소망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언제든 찾아뵐 수 있도록 가까운 곳으로 독립해 살았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지만 직장을 얻고 나서도 내 자신을 테이 베르너로 소개한다. 사람들은 굳이 퍼디난드 T. 베르너에서 T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T마저 유명해졌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하루만큼 늙어가는 사람들의 냄새에 지독한 멀미를 느낀다. 어린 날보다 악취는 더 심하다. 누군가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조금만 마음을 읽어봐도 호의에 가려진 악의가 넘쳐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지만 나는 일단 흐르는대로 산다. 그러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다. 봐라, 지금도 그러지 않나.
우리 대부님께서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 방종, 무지, 가해자
-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이길 바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무구해서 세상의 비극도 저런 일이 있다며 넘기고 눈앞에 있는 민들레에 더 관심을 가질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랬더라면 납득했을 것이다. 신이 성자기에 나는 분노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하게 드는 충동을 억누르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목사의 일장연설의 끝에 맞춰 손을 들었다. 하마터면 목을 향할 뻔했던 손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참는다. 손을 모아 엄지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주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니, 용서하지 말고 나를 지옥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십시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에스더의 시 3권 4p.
***
"루이스."
12월 3일, 날씨는 춥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얼어붙는 날씨다. 한겨울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출근하는 길에 하마터면 그대로 객사할 뻔했다. 문틀을 붙잡고 기대선 퍼디난드의 머리카락은 꽁꽁 얼었다. 코는 빨갛게 얼었고, 문틀을 잡은 손가락도 새빨갛다. 퍼디난드는 코를 한번 훌쩍였다. "너 야근한 거야, 아니면 출근을 나보다 일찍 한 거야?"
"오늘은 일찍 출근했지." 커피 머신 앞에 선 루이스가 허리를 폈다. 루이스는 크게 모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푸석한 금발 머리 밑의 눈동자는 아주 새파랗고, 옅은 주근깨가 있는 얼굴이 환한 미소를 품으면 주변 사람도 같이 웃었다. 다만 왼손 소지 마디가 뭉툭하게 잘려있는데, 이건 첫 파견 때 생긴 사고 때문이다. 루이스는 엉거주춤 머그잔에 커피를 담았다. "그런데 이거 진짜 마셔도 되는 거야? 색이 왜 이래?"
"말도 안 돼, 네가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날이 세상에 어딨어!" 퍼디난드는 놀라 소리쳤다. 루이스가 그보다 일찍 출근하는 날은 없기 때문이다. 야근이 분명하다! 그는 미심쩍다는 듯 머그잔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거 마시지 마."
저 안에 담긴 블랙커피는 끔찍하게 맛없는 커피다! 살인 전담팀의 샘이 사비로 샀지만 서내 모든 사람이 기피했다.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커피는 일반 커피보다 배는 끈적했다. 원두의 문제인지 기계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그 모습부터 여러 사람의 뜬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샘은 치우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시는 사람이 있고, 효과 하나는 죽여주기 때문이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살인 전담팀의 리우리엔이 주 고객이었다. 리우리엔은 이 커피를 마시고 이틀을 거뜬하게 밤을 새웠고, 이젠 후임 아이리스가 저 맛없는 커피의 맥을 잇는다. 퍼디난드도 한번 종이컵에 따라 혀를 대봤지만 저건 먹을게 못 됐다. 저걸 루이스가 마신다면 분명 뱉을 것이다. 퍼디난드는 보란 듯이 툴툴댔다.
"그거 진짜 맛없어."
"넌 커피를 맛으로 마시냐?"
"당연하지!"
"가끔 네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있어." 루이스는 커피를 마시고 표정을 찡그렸다. "우웩! 이게 뭐야. 킴은 어떻게 이런 걸 마시고 살았대?"
"내가 말했지? 그거 진짜 맛없다고."
퍼디난드가 얄밉게 이죽이자 루이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범한 루이스의 유일한 장점은 키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그는 퍼디난드의 머리를 꾹 누르며 낄낄 웃었다. "사실 나 밤새우고 새벽에 출근했어." 루이스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퍼디난드는 꾹 눌린 고개에 힘을 줘서 루이스를 노려봤다. "레딧에서 쓸모없는 걸로 토론하다 밤새웠냐?"
"아니." 루이스는 커피를 마셨다. "그냥. 오늘은 사건이 없었으면 하네."
"없으면 잔업인 거 알지?"
"알아. 퍼지."
"왜?"
"퇴근하면 시간 있어?"
퍼디난드는 윙윙 울리는 핸드폰을 패딩 주머니에서 빼 슬쩍 바라봤다. 오늘은 가족끼리 만나는 날이다. 누나인 나탈리가 오늘은 RAW에 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흔치 않다. 벌써부터 단체 채팅방은 저녁에 모인 김에 늦은 추수감사절을 챙기자며 난리가 났다. 왁자지껄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잠시 침묵했다.
"시간 비어. 아주 많이."
조금 위에서 루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본 건 아닐까 싶어 주머니 속 손바닥이 땀에 젖어 축축해졌다. 루이스는 경찰이기 이전 고아였다. 부모님께서 양육 포기를 선언하셔서 위탁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루이스가 일부러 시간을 내준 걸 알면 동정한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퍼디난드는 눈치를 보듯 눈을 어색하게 위로 향하게 뜨며 웃었다. 루이스는 그의 새빨간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었다. "잘 됐네. 나랑 미겔 아저씨네 타코 먹으러 가자."
"넌 질리지도 않냐?" 아무것도 못 본 것 같다. 퍼디난드는 마주 웃었다.
가족에게 일이 있다고 빠졌다. 누나는 속이 상한 것 같지만 경찰이니 이해한다고 했다. 가족들이 칠면조에 크랜베리 잼을 곁들여 먹으며 NFL 경기 재방송을 볼 시간에 그는 루이스와 칠면조 고기가 들어간 타코를 먹었다. 여전히 끔찍하게 맛없다. 고기에선 알 수 없는 누린내가 나고, 야채는 전부 시들었다. 치즈는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게 용하지만 루이스는 그게 맛있었나 보다. 이후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샀다. 퍼디난드는 우유를 두유로 바꿨다. 따뜻한 라떼가 찬 바람에서 손을 지켰다. 혼잡한 거리에서 딱 세 걸음만 뒤로 하면 뉴욕 전경이 보인다. 시선을 멀리 둬야 하지만 역시 오늘도 번잡하다. 루이스는 가만히 멈춰 섰다. 퍼디난드도 발걸음을 따라 멈춘다.
"퍼지, 있잖아."
"왜? 스타벅스에 지갑 놓고 왔어?"
"만약 네가 초능력이 있다고 쳐봐."
"갑자기?"
"있다고 생각해 봐."
"우와, 진짜 너답네. 왜?"
"그러면 초능력자가 우대받는 세상이 올까?"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루이스의 코가 새빨갛다. 번잡한 뉴욕 거리 속 전광판 빛에 루이스의 얼굴 윤곽이 따뜻한 색으로 비친다. 그리고 하얀색, 그리고 빨간색.. 퍼디난드의 대답은 사람들이 몇 명이고 둘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 들렸다. "루이스, 사람은 누구나 같아. 우대받을 리가 없지." 루이스는 퍼디난드의 눈을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는 동그랗고, 동공은 둥글지만 세로로 길다. 새하얀 테두리가 있는 동공이 루이스를 빤히 쳐다본다.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마주친 루이스는 천천히 웃음을 지어냈다.
"그렇겠지. 최근에 레딧에서 그런 걸로 열띤 토론을 하길래."
"뭐라고 하는데? 걔네는 맨날 그런 걸로 싸워, 이상하게."
"..있어, 그런 게."
둘은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위협받지 않을 평화로운 뉴욕 밤거리를 걸었다. 라떼를 마시고 숨을 뱉자 12월 초인데도 희뿌연 연기가 나왔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시작도 안 됐는데 캐롤이 어렴풋이 들린다. 그 상황에서 루이스는 한참이고, 걷는 도중에도 퍼디난드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야, 퍼지. 사람은 어째서 같을까?" 루이스의 질문에 퍼디난드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퍼디난드는 말을 돌렸다.
"나는 새해엔 한국에 갈 거야."
"왜?"
"대부님이 한국에 계시거든."
"나는 일본에 가보고 싶네."
"너답다."
…아, 차라리 그때 대답했어야 했다. 퍼디난드는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잔해에 깔린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넌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치다 그가 쏜 총에 맞아 뒤로 넘어간 사람이 이 손의 주인이다. 뭉툭한 소지를 바라보며 안전한 곳으로 밀치는 손길에 쓰러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무너지는 잔해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 꿰뚫은 자
- 퍼디난드는 노트북 앞에 머리를 박고 잠든 애쉬를 보고 있다. 오늘은 12월 달력에 적힌 첫 번째 화요일로 그간 있었던 사건의 기억을 전달해 주는 정기적인 날인데, 정작 전달해 줘야 할 대상은 곤히 자고 있다. 퍼디난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책상에 불편하게 엎드려 잠든 대부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보니 평소 같으면 깨어있어야 할 애쉬의 주변엔 빈 커피 캔과 레드불이 가득하다.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허공에 짚어 세어 보니 레드불만 해도 6캔이 넘는다. 문 열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애쉬가 깨지 못할 정도면 금요일 밤부터 밤을 새운 것이 분명하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니 재떨이를 구비하긴 했지만 담배 하나 태우지 못했는지, 재떨이는 떨어져 이가 나간 흔적 빼고 깨끗하다. 주방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 설마 빈속에 커피라도 마신 건 아닐까 흘겨보니 노트북 근처 접시 위에 쿠키 부스러기가 있다. 분명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호밀 쿠키일 것이다. 그 와중에 샤워는 또 했지만 머리 말릴 시간도 아까웠는지 수건은 풀어헤친 머리 틈새를 잘 봐야 등 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활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퍼디난드는 허공에서 이것저것 가리키며 가늠하던 손가락을 맞부딪쳐 소리를 냈다.
"리리, 나 왔어요."
애쉬는 깨지 않는다.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지만 여전히 고개를 모로 박은 모습 그대로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퍼디난드는 조심스럽게 애쉬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고 애쉬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보며 안도한다. 다행히 그의 대부는 살아있다. 단지 피곤에 찌든 것 같다. 잠든 애쉬의 곁에서 한걸음 떨어진 퍼디난드는 잠시 연민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가 아는 애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딱딱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웃으로 보면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집안은 늘 깨끗했고, 자기 관리를 확실하게 했다. 살인 사건을 전담으로 맡았기 때문에 밤을 새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선을 넘지 않게 제지하는 사람도 주변에 있었다. 애쉬의 남편 테오도르다. 테오도르는 작년 7월 2일 집을 침입한 괴한에 의해 죽었다. 그날따라 잠시 산책이 하고 싶어 늦게 집에 들어갔던 애쉬가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망 추정 시각으로 미루어보아 평소와 같은 시간에 귀가했더라면 그의 남편은 살아있거나, 아니면 둘 다 죽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법의학자의 무책임한 소견에 애쉬는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대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이 됐다. 딱딱하고, 필요하다 판단하면 원리원칙을 무시했다. 이웃으로 봐도 건조한 사람이 됐고, 이젠 선을 넘지 않게 제지할 사람도 없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인생의 마차를 몰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어떤 일이 있어도 동정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부도 그가 평생을 앓고 살 마음의 병을 얻던 날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았다.
퍼디난드는 안경도 벗지 못하고 잠든 애쉬의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겨 한편에 둔다. 그사이 뒤척여 노트북의 무선 마우스를 건드렸는지 화면이 켜진다. 평소 같으면 비밀번호를 쳐야 화면이 뜨는데 단순히 절전만 되어있던 건지 저장도 안 된 문서를 흘끔 본다. 대부의 바로 뒤에서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저장 버튼을 누르며 주변 눈치를 한번 본 퍼디난드가 내용을 한번 슥 읽어봤다. 대체 대부님이 뭘 하다 잠들었는지 궁금했다. 사실상 휴가를 냈으니 일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안식년 휴가를 이후로 은퇴한 것에 가까운 뉴욕의 일을 대신하지도 않을 것인데 뭘까? 흰 화면에 뜬 검은색 글씨는 장황하고 길다. 뭔가 잔뜩 적어뒀지만 독일어로 적혀있어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무리 그의 증조부가 독일인이고, 그도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고 있다고 해도 제1모국어는 영어기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읽고 쓰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어릴 적 유창하게 했던 독일어를 떠올리고 화면에 뜬 긴 문장이 애쉬가 작성하던 원고임을 깨달았다.
─ 나는 너희를 인도할 선지자이며 이 피는 거룩한 길을 위한 피다. 나는 메시아요 사냥꾼이자 선지자이며, 위대한 뜻 받들어 종말로 인도할 사자다.
종장. 에스더의 시가 드디어 종장에 들어섰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도 끝이 나는 걸까? 그러면 그의 마음에 끝없는 병을 남긴 새끼도 사라지는 걸까? 색색대는 고른 숨소리가 턱 바로 밑에서 들린다. 퍼디난드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대부는 잠든 모습마저 처연하다. 퍼디난드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잠든 대부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던 그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지만,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고 붉은 눈동자 속 흰 테두리가 있는 둥근 동공이 작아졌다. 남들 앞에서 절대 짓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활기찼고, 여유로웠고, 느긋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밑에서 잠든 대부의 목을 틀어쥘 것 같았다. 손 뻗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애쉬가 뒤척였다. 드리운 그림자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모니터를 보며 웅얼거린다. "딸? 퍼지니?" 퍼디난드의 매섭던 표정이 순한 강아지처럼 풀어지더니 이내 환히 미소 지었다.
"응, 나 왔어요."
"으음, 그래. 왔구나.. 미안하구나. 깜빡 잠들었어."
"리리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더 자요. 내일 내가 일찍 퇴근할게."
"고맙구나."
"그렇다고 여기서 잠들지 말구, 침대까지 내가 데려다줄까요?"
"됐다, 혼자 가마."
퍼디난드는 그대로 엎어진다. 애쉬의 짧고 낮은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턱 밑으로 푸석푸석하게 마른 잿빛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샴푸 냄새가 난다. 대부님은 더없이 포근하고 좋은 분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고 싶지 때가 왕왕 있다. 몸은 받들고 따르는데 머리는 이 상황을 부정하는 것 말이다. 왜, 그런 것들 있지 않나.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까 봐,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 봐……. 오늘 같은 날이 딱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을 지옥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그 작자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그 극악무도한 새끼와 동일한 사람임을 아는 것도 오로지 나뿐일 것이다. 아무도 당신의 이면을 모르게 할 것이다.
"근데 나도 졸려요."
"너는 네 집이 있잖니. 가서 자렴. 무거우니 내려와."
"리리 치사해."
영원히.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퍼디난드는 눈을 감았다.
- 일상
- 카카오톡은 편리한 문명이다. 페이스북과 아이메시지, 그리고 Zoom보다 훨씬. 페이스톡이라는 버튼 하나로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퍼디난드는 이불 속에서 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모나고 반듯한 액정 속에서 더듬더듬 무언가 발음하는 연한 옥색 머리의 소년은 그의 남동생 브라이언이다. 그는 근사한 외모를 가졌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상의 퍼디난드와 달리 얌전하고 차분한 매력이 있다. 아직 성인이 안 됐고, 이번에 M사 영화 시리즈에 출연하게 됐다.
"안뇽..안..령? 안뇽? 하세요."
"잘 하네!"
"열심히 연습했지. 곧 내한이니까!"
"그래, 열심히 했어. 우리 브리 장하네."
곧 브라이언은 내한한다. 한국에 가면 3일 정도 그의 집에서 머무를 예정인데, 이 때문에 퍼디난드의 고민이 여간 큰게 아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해도 들킬 건데! 벌써부터 파파라치는 물론이요 범죄자가 뜨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타는 속도 모르고 브라이언은 주변 눈치를 보다 작게 속삭였다. "사실 다른것도 할 줄 알아."
"뭔데?"
"나탈리 is 돼지."
퍼디난드는 이를 악 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래, 그런 것 같네." 뒤에서 나탈리는 두툼한 베이컨과 써니 사이드 업, 호밀 토스트,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먹고 있었다. 퍼디난드는 저게 두그릇째 식사임을 안다. 나탈리는 운동을 하기 때문인지 먹는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침 베이컨을 포크로 집어 먹던 나탈리의 시선이 브라이언을 향했다.
"뭐?"
"아무것도."
"내가 돼지가 Pig인걸 모를 것 같아?"
"그치만 지금 네그릇째잖아! 돼지!! 돼지!!"
"넌 오늘 뒤졌다."
"Don't try this at home!"
"Enough!!"
퍼디난드는 나탈리가 일어나자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브리 큰일났네!" 하는 순간 브라이언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퍼디난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화면 사이로 나탈리가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자 침대 구석에 있는 죠르디 인형을 품에 안았다.
"퍼지, 이제 거긴 잘 시간이지?"
"어..응."
"그럼 이제 끊어야겠다. 그렇지?"
"너무 때리진 마. 걘 얼굴로 먹고 사는 애니까.."
"형, 형! 살려줘! 오늘 엄마랑 아빠도 안 계신단 말이야! 혀엉!! 형!!"
전화가 끊어졌다.
퍼디난드는 부디 브라이언이 나탈리의 피겨 포 레그락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했다.
- 비극
- 12월 4일, 어제처럼 얼어붙을 것 같던 날씨에 퍼디난드의 머리카락이 또 꽁꽁 얼었다. 앞으로는 머리를 다 말리고 출근해야겠다. 머리 밑에 고드름이 맺힌 걸 보며 끔찍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마시던 루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스노우 맨이 여기 있네!"
"조용히 해, 슬라임 커피 괴물." 퍼디난드는 코를 훌쩍이며 안으로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추워 죽겠어! 이대로라면 세상은 빙하기에 들어서고 말 거야." 하고 투정을 부리자 루이스는 낄낄 웃으며 퍼디난드를 팔꿈치로 툭 쳤다. 살이 에이듯 추운 날씨 때문에 몸이 꽝꽝 얼어 조금만 닿아도 아팠다. 퍼디난드는 펄쩍 뛰며 엄살을 피웠다.
"아야!"
"꼴좋다. 그니까 누가 춥게 입고 오래? 이 날씨에 누가 짧은 패딩을 입어?"
"넌 패션의 F자도 몰라!"
"난 실용적인 거고."
퍼디난드는 머리 하나는 더 큰 루이스를 노려다 보다 이내 주먹을 들어 그의 허리를 퍽 쳤다. "Ouch!" 반지 낀 손가락이 루이스의 허리를 파고들자 호들갑 가득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퍼디난드는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썼다. "진짜 짜증 나."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게슴츠레 좁히더니 루이스를 다시금 노려봤다.
"야, 반지 어디다 뒀어?"
"아, 반지."
루이스가 뭉툭한 소지가 있는 왼손을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샤워하면서 빼두고 하는데, 실수로 안 끼고 왔나 봐."
"그럴 수도 있지." 퍼디난드는 입술을 비죽이고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취!"
재채기를 하자 루이스가 머그컵을 사수하더니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조심해! 내 생명수는 소중하다고."
"이 슬라임 커피 괴물, 어련하시겠어.. 에취!" 퍼디난드가 다시금 재채기를 하더니 휙 돌았다. "아, 얼어 죽겠다.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먼저 사무실 들어갈 테니까 늦지 않게 들어와."
"그래. 아, 맞다. bless you!"
"늦었어!"
루이스의 경박한 축복에 문을 닫고 나온 퍼디난드는 복도로 나서자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 티격태격하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복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서 버튼을 눌렀다. 20초 정도 기다리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로 들어서 맨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테라스가 있는 옥상이다. 금연구역이 확장되자 암묵적으로 테라스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쉬고 싶은데 죽겠다며 비흡연자들의 아우성이 오갔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 자리를 옮겨 쉰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대다수는 살인 전담팀이다. 자문을 위해 방문한 법의학자도 폐암으로 한 걸음 내딛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라며 담배를 꺼내들 정도였고, 그들의 고충을 알기 때문인지 짧은 핀잔만 오고 갈 뿐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퍼디난드는 버튼을 눌렀다. "잠깐만요!" 저 멀리서 사기 전담팀의 신입 경찰이 후다닥 달려왔고, 이내 쿵 소리와 함께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감사합니다!" 퍼디난드는 "별말씀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 엘리베이터는 침묵과 함께 올라갔다. 퍼디난드는 그 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반지 낀 손은 올곧고 길쭉하다. 얇은 반지에 박힌 얇은 보석은 처음 꼈을 때처럼 관리가 잘 되어 반짝인다. 안식년에 접어든 그의 대부 리우리엔이 낀 결혼반지와는 달랐다. 리우리엔의 우아하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와는 달리 그의 반지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수수하다. 무엇보다 결혼반지와는 용도 자체가 달랐다. 이 반지는 그가 큰맘 먹고 친구를 위해 준비한 우정반지다. 루이스 말이다.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지금 와서야 퍼디난드와 루이스는 동기이자 파트너이고,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처음엔 아니었다. 루이스는 저번 기수의 합격자 중에서 유일하게 팀 내부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계속 겉돌았기 때문이다. 퍼디난드는 그런 루이스와 유일한 동갑이었고, 루이스에게 다가갔지만 루이스는 계속 벽을 쳤다. 그럼에도 둘의 우정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퍼디난드가 끊임없이 다가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도 있지만 처음 파견을 간 사건이 가장 크다. 루이스는 아직 미숙했고, 퍼디난드도 미숙했다. 첫 파견은 총기를 들고 은행을 습격한 강도였다. 그 사건에서 루이스는 소지 한 마디를 잃었다. 범인이 주변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을 때 루이스의 손가락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범인을 제압하느라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던 상황에서 퍼디난드가 루이스의 지혈을 도왔다. 비록 손가락은 찾을 수 없었지만, 루이스의 마음은 활짝 열려 퍼디난드를 받아들였다.
이후 둘은 모든 걸 함께했다. 루이스는 외로운 퍼디난드에게 아주 좋은 친구였다. 혼자 살던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집에 초대하기도 했고, 루이스도 퍼디난드를 집에 초대해 서로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물론 루이스의 요리는 끔찍하게 맛이 없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새로워 짧은 다툼 뒤로 낄낄 웃으며 낡은 소파에 앉아 조그마한 TV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루이스의 집, 퀴퀴한 냄새가 나는 소파 위에서 그의 대부조차 학을 떼며 이건 망했다 혹평을 날린 B급 영화를 보며 술을 마셨다. 퍼디난드가 늘 마시던 와인이 아닌 값싼 보드카와 레드불을 엉망진창으로 섞은 예거밤을 마시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술김에 대화를 하며 서로 맞는 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터놓은 것도 많았다. 퍼디난드는 술김에 처음으로 남에게 그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난 외로운데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기만자라고 하지."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이런 말을 하면 루이스가 떠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늘 그랬기 때문이다. 멍청한 퍼디난드!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를 한번 끌어안고 등을 크게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외로움마저 다를 리는 없지. 내가 너를 이해해."
그 이후로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하게 됐다. 최고의 파트너였고, 친구이자, 뉴욕 경찰국 내에서 자석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서로 마음을 열게 된 지 1년째 되던 이번 2월, 퍼디난드는 큰마음을 먹고 반지를 맞추자 제안했다. 어린 시절에 TV에서 본 히어로가 사이드 킥이 서로 주먹을 맞대고 우정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루이스는 그의 취향을 잘 알았고,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낄낄대며 어깨를 툭 쳤다. 그 이후로 맞춘 것이 이 반지다. 퍼디난드는 하루도 반지를 빼놓고 다니지 않았다. 씻을 때도, 잠들 때도. 이젠 신체의 일부가 됐다. 침묵하며 깔끔하게 관리한 반지를 쳐다보던 퍼디난드를 누군가 불렀다. "저기요."
"아."
"저기. 도착했는데.."
".. 오, 미안해요."
"헤어지셨어요?"
"오.. 아니요."
"이해해요."
퍼디난드는 고개를 돌렸다. 사기 전담팀의 신입이 눈치를 보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열림 버튼을 꾹 누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누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했다. 퍼디난드는 사과하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사기 전담팀의 신입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잽싸게 구석자리로 뛰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뒤의 문이 닫히자 퍼디난드도 북쪽으로 걸었다. 그와 그의 대부가 만나 자주 담배를 피우던 곳이고, 그의 구역 같은 장소다. 퍼디난드는 주머니에 짱박힌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툭툭 털어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며 잠시간의 침묵 뒤로 연기를 뱉자 짙은 헤이즐넛 향이 가득 찼다. 루이스의 거짓말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루이스는 2주 전부터 반지를 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 간의 선이 있으니 그 선을 지키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오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어쩌면 혼자만 몰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시 연초를 입에 물며 퍼디난드가 뺨을 스치는 찬 바람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루이스의 반응을 생각할수록 어딘가 불편했다. 파파라치가 그의 사진을 찍어도 이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유명세를 등에 업고 경찰이 된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 척한다며 손가락질을 할 때도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퍼디난드가 희뿌연 연기를 뱉으며 물기가 바싹 마른 앞머리를 연신 뒤로 쓸어넘겼다. 그리고 연초를 다시 물며 생각했다. 이거, 설마 짜증인가? 막상 짜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나빴다. 꼭 자신이 친구 하나의 사생활까지 매달려 간섭하는 음침한 녀석 같지 않은가! 퍼디난드는 매서운 눈매로 연기와 F-Word를 함께 뱉었다. 고요한 테라스를 울리는 F 소리에 사기 전담팀 신입이 고개를 휙 돌렸다. 퍼디난드는 그런 신입을 한번 바라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이젠 시선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고작 이런 일로 짜증이 난다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퍼디난드는 연달아 3개비를 피우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평범한 하루가 지속됐다.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정리한 덕분인지 루이스에게 따지지 않고 서로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도 그 사실이 우스웠기 때문에 부러 말하지 않은 탓도 있다. 사생활에 일거수일투족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날 반차를 써 일찍 퇴근했다.
***
12월 5일. 평범한 날이었다. 겉보기에 평화로운 뉴욕이었고, 퍼디난드의 아버지 마크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배우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건 흔한 일이었고, 마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화점을 향하고 있었다. 마크가 명쾌하게 카메라맨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오늘은 딸 나탈리를 위한 쇼핑을 할 생각입니다. 잘생겼단 이유로 체포만 안 당하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백화점은 경찰이 통제하고 있었다. 마크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카메라맨을 마주 봤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경찰 하나에게 다가가 선글라스를 슥 내렸다.
"좋은 점심입니다. 그리고 실례합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죠?"
"죄송합니다, 선생님. 쇼핑센터는 지금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사건이라도 일어났나요?"
"누군가 익명으로 전화해 폭발물로 추정되는 수상한 가방을 숨겼다는데.. 현재 기동대가 안에 있으니 확인 이후 해체작업이 완료되면 들여보내드리겠습니다."
"맙소사!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전부 안전하게 준비하고 간 건 맞죠? 그렇죠?"
"베르너 씨, 왜 그러세요?"
카메라맨이 말을 던졌을 무렵이었다. 귀를 울리는 괴성을 뒤로 어디선가 칠판 긁듯 높은 비명이 울렸다. 건물에서 폭음이 들렸고 카메라가 모든 순간을 담았다. 불길은 삽시간에 치솟고 주변이 아비규환이 됐다. 서로 도망치기 위해 달렸고, 넘어지면 짓밟고 그대로 달렸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 마크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경찰을 뿌리쳤다가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마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카메라는 끔찍하게도 그의 반응을 모두 담았다.
"퍼지, 안 돼……."
저 안에 그의 아들이 있었다.
***
별거 없는 날이었다. 날은 코가 얼듯 추웠고, 늘 그렇듯 파견을 나왔다. 팀 전원이 수색작업에 돌입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이스가 오늘따라 불안한 눈치였다는 것 뿐이다. 퍼디난드는 작게 농담을 던졌다. "폭탄 한두 번 해체해 보냐? 쫄지 마." 루이스는 퍼디난드를 휙 쏘아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한두 번 해체했나.."
"너 왜 그래? 쫄았냐?" 퍼디난드는 눈을 둥글게 떴다. 왜 저런 반응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루이스는 퍼디난드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난 2층 수색해 볼게."
"너.. 아니다." 퍼디난드는 그 모습에서 묘한 짜증이 생겼다. 요즘 루이스는 이상했다. 퍼디난드는 불퉁하게 말했다. "뭐 찾으면 무전 줘."
그가 수색을 시작한 곳은 명품 향수를 파는 4층 매장이었다. 평소 같으면 사람이 몰려있겠지만 직원도, 손님도 모두 대피해 아무것도 없고 향수만 덩그러니 있었다. 한 곳 한 곳 세심하게 찾았지만 향수와 그뿐이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무전이 지직거리고 이윽고 제멋대로 떠드는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는 7층,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ㄷ-
─ 저런.. 구원받지 못할 어린 양이 여기 있구나.
─ 잠깐만, 잠깐!
그리고 폭음이 울리며 건물 전체가 진동했다. 퍼디난드는 뒤로 넘어졌다. 온몸 위로 향수병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팔을 들어 방어했을 때 와장창 소리가 들리고 팔에 고통이 스몄다.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엉망이었다. 값비싸고 좋은 향을 내뿜던 향수는 제각기 바닥에 엎어지고 깨져 숨이 막힐 정도로 독하게 얽혔다. 온몸을 덮은 지독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했다. "여기는 4층. 지원 요청이 필요한가?"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퍼디난드는 다시금 무전을 보냈다. "아이작 씨?" 무전이 없자 퍼디난드는 황급히 위를 향해 올라갔다. 소총을 품에 안고 돌격했을 때, 7층 의류매장은 난장판이었다.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고, 제각기 쓰러진 대원이 보였다. 퍼디난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작을 비롯해 세명 정도가 더 쓰러졌고,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그중 둘은 쓰러진 채로 몸에 불이 붙어있었는데 몸부림치거나 일어나지 않았다. 즉사한 것 같았다. 아이작에게 다가간 퍼디난드는 그를 살살 흔들었다. 그를 뒤집었을 때, 퍼디난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온몸이 바싹 그을려있다. 도저히 폭발에 휘말린 것으로는 볼 수 없었다. 퍼디난드는 그런 아이작을 안았다. "아이작, 아이작 씨. 정신 차려봐요. 아니죠? 아이작 씨." 아이작의 그을린 얼굴이 부스러졌다. 온몸의 수분을 모두 뺏겼거나, 그만큼의 열 때문에 타버린 것 같았다. 부검을 해도 이런 일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상식을 초월한 일에 퍼디난드는 덜덜 떨었다. 옷이 불타 독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다시 아이작을 흔들어보던 퍼디난드가 치미는 격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상식 밖의 일이 다시금 일어났다. 온몸이 타는듯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퍼디난드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작이 불길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나뒹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있던 대원이 다가가자 어디선가 불길이 휘몰아쳐 그를 감쌌다. 그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시야에 잡혔다.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하고, 옆에 다른 사람이 서있었다.
─ 4권 148p. 에스더는 더 완전해졌다. 그의 대담한 살인 행각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었다. 그는 자신이 우월하다 생각했다. 나는 선지자 에스더다! 그는 결국 미쳐버렸다. 악인의 말로는 광기였다..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네! 작가님께서 이 사건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으음, 자신의 세상이 실현되는 거잖아. 나라면 기뻐 뛰며 찬양하고 춤췄으리.
─ 그, 그냥 시위만 한다며. 위협만 한다며!! 이런다고는 안 했잖아요!!
─ 아, 가엾고도 멍청한 나의 어린 양아.. 들어라!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피와 폭력으로 이루어질지니.. 죽기 싫으면 너도 나와 동참하는 것이 좋으리라?
─ 난.. 난 못해..
─ 자기, 어린 양, 나의 신도, 꼬마야. 네 소중한 친구를 잃어도?
─ 난...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에스더, 제발 멈춰주세요. 제발!
─ 여기 경찰이 몇 명?
─ 씨발, 이런다고 안 했잖-
─ 여기 경찰이, 몇 명? 나의 어린 양아, 나는 여러 번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한단다. 네가 새로운 세상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구원자 중 하나인데, 내가 널 다른 사람과 같이 영영 잃는다면 얼마나 슬플까.. 응? 나는 너의 유일한 이해자, 구원자, 그리고 메시아가 아니더냐. 응?
─ ……도주 경로는 열어뒀으니 그쪽으로 가. 나는 2층으로 돌아갈 테니까.
제멋대로 떠들며 에스더라고 불린 사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구겨졌다. 푸석한 금발 머리 밑의 눈동자는 새파랗지만 분노에 얼룩졌고, 옅은 주근깨가 있는 얼굴은 웃지 않고 있다. 그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머리가 계속 부정했지만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공중에 둥실 떠오르더니 그대로 흘러가듯 사라졌다. 퍼디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타는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틀 전 했던 대화가 머리를 맴돌았다. 초능력이 있으면 초능력자가 우대받는 세상이 올까. 그때 했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구나. 죽어버린 동료의 눈을 감겨주며 퍼디난드는 아래로 향했다. 루이스가 묵인하고 에스더가 벌인 테러로 인해 이미 사람이 죽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7층 전멸. 2층으로 돌입한다." 퍼디난드는 2층에 돌입하자마자 총을 겨눴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장난감이 가득한 2층 한가운데에서, 루이스가 그를 돌아봤다.
"루이스."
"…퍼디난드?"
"당장 투항해."
"무슨 소리야, 같은 팀원끼리.."
"에스더는 어디 있어, 투항해!"
"너, 그걸 어떻게…… 아냐, 너도 아는구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잘 하는 게 뭐가 있겠어. 다들 알겠네.. 그래, 내가 그랬어."
"왜 그랬어, 왜!"
"미안해. 내가 그분을 안으로 들여보냈어. 우리 팀의 정보를 줬어. 그 사람이 초능력자를 우대해 준대, 그러니까, 나는 고아니까, 저 사람이 나를 가족으로 대해준다길래, 내가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준대서, 그래서.."
"루이스, 정신 차려. 지금이라도 투항해."
"나는 죽으면 지옥 가겠지? 나, 나는, 죽으면.. 그렇지만 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사람을 죽였어? 아이작 씨를, 수잔을? 제프를? 대체 왜, 그 사람이 뭐라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루이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퍼디난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루이스 주변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다시금 벌어지고, 무전을 받고 살아 돌아온 동료 몇이 도착했다. 장난감과 잔해가 어지럽게 바람을 타고 휘몰아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루이스는 코를 찡그리며 외쳤다. 순간 퍼디난드는 불편했다. 여전히 어제처럼 불편했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누군가 그 짜증과 불쾌감을 망치로 내려쳐 깨부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 밀어 넣은 기분이었다. 목이 까끌까끌하고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속을 뒤집었다. 대부님의 당부가 이런 것이었나 보다. 경찰과 인간의 감정을 분리하라는 뜻이 이런 것이었나 보다. 루이스의 화난 표정을 보니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너는 고아도 아니고, 나처럼 이런 끔찍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많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루이스, 너."
"하, 하하. 그래. 그래.. 사람들이 다 뒷얘기 하더라, 난, 난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 너는 뭘 해도 잘났고, 나는, 나는.. 네 주변에 붙어서 그 뒷바라지나 다름없는 그 삶이 끔찍했다고!!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당연하지! 네가 외롭다고 해서 우리와 같을 것 같아? 잘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잘난 삶을 살아온 네가 같을 것 같냐고!!"
"루이스 그레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에스더는 어딨어."
"넌 끝까지 날 추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그래, 말해줄게. 그분은 이미 가셨어."
"어디로 갔는데."
"말할 수 없어."
"루이스 그레이!!"
화를 삭이듯 보호용 헬멧 너머로 눈을 크게 뜬 퍼디난드를 마주친 루이스는 멈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퍼디난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시금 총을 겨눴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퍼디난드의 옆에 있던 동료를 베어 갈라버렸다. 그는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했고,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루이스가 뒤로 넘어갔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던 루이스는 큰 타격이 없었으나 뒤로 넘어갔고, 휘몰아치며 몸을 감싸던 바람은 사방팔방 날아가더니 이내 건물의 기둥에 직격했다. 튼튼하던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건물 전체가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금이 가며, 루이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주변 상황을 보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듯 절망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쳐다봤다. 익숙했던 동료 몇이 처참하게 찢겨 고통에 신음하고, 퍼디난드는. 그 장면을 모두 보다 루이스를 똑바로 마주쳤다. 루이스가 덜덜 떨리는 입을 벌렸다.
"퍼, 퍼디난드."
"……."
"미안해, 거, 거짓말이야. 사실 나 죽기 싫은데, 내가, 내가 어떻게 됐나 봐. 미,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나.. 내가, 내가 미안해.. 살고 싶은데, 그럴 자격도 없어. 그러니까, 나, 내가 너한테 상처를……."
"……."
"그러니까, 용서해, 용, 용서해 줘. 나,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젠장, 퍼디난드, 위!!"
루이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다가 위를 쳐다봤다. 무너진 천장이 우수수 쏟아지고는 루이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확인하기도 전에 다른 동료가 퍼디난드를 떠밀었다. 퍼디난드는 잔해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뭉툭한 소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건물은 주저앉기 시작했고, 퍼디난드가 밀쳐지는 손길대로 넘어지며 눈을 감았다. 끝까지 루이스는 반지를 끼지 않았다. 루이스의 말이 계속 귀를 맴돌았다. 차라리 내버려 뒀다면, 작은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루이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면, 루이스를 조금 더 돌봤다면. 차라리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퍼디난드는 잔해가 떨어져 헬멧에 울리는 큰 충격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
시야가 흐렸다. 빛이 쨍하다. 먹먹하던 귀 사이로 누군가의 큰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눈이 빛에 익어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웠다. 퍼디난드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아!! 퍼지, 퍼지!! 정신이 드는구나. 신이시여.."
옆을 보니 나탈리가 초췌한 안색으로 울고 있었다. 빙빙 도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무도 없고, 오로지 그와 나탈리, 그리고 주치의와 간호사만 곁에 있었다. 주치의도 퍼디난드가 깨어나자 벅차오르는 미소를 지었다. 퍼디난드는 나흘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주치의는 그의 상태를 몇 가지 진단하고는 조금 회복하면 될 것이라 말했다. 나탈리는 부모님을 모셔오겠다 했고, 주치의와 간호사를 대동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병실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 들어온 정장 차림의 사람을 마주했다.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씨 되십니까."
"맞습니다."
퍼디난드는 목이 잠겼는지 낮게 답했다. 남성이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자 퍼디난드는 진통제에 취한 눈으로 신분증을 쳐다봤다. 익스퍼 보안 관리부 소속 폴 웨더. 폴은 퍼디난드의 안색을 살피다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테러는 유감입니다."
"……뉴욕 경찰국과 연방수사국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이름의 보안 관리부는 본 적이 없고요. 누구십니까. 제게는 파파라치가 많이 붙어있습니다. 사칭하는 사람도 많고요. 용건만 말하고 가지 않는다면 제 보안 요원을 부르겠습니다."
퍼디난드의 머리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라 들어왔다. 까다로운 사람이구만. 남성의 주머니에서 삐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퍼디난드는 지끈 울리는 머리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 오, 익스파 반응이 보이는군요. 제 생각이라도 읽은 듯싶습니다."
"뭐라고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이스 그레이 씨가 부리던 이상한 힘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리고 현재 베르너 씨께서 제 생각을 읽으셨지요."
"무슨 소리입니까?"
"선생님께서 스파이더맨과 같은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 그 말입니다.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힘, 익스파를 다루는 사람은 지구에 실존합니다. 저희는 그런 사람을 익스퍼라 부르고 있으며, 그 존재를 비밀로 부쳐 관리하고 있습니다."
퍼디난드는 미쳤냐는 시선으로 폴을 쳐다봤다. 저 사람이 정말 정상인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자 이번엔 다른게 떠올랐다. 한 여성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22세, 어디 보자.. 오! 지금 핫한 뉴욕의 영웅이군. 폴, 자네가 다녀오게.
─ 저요?
─ 자네 말고 다른 폴이 있나?
"저도 사생활이 있습니다."
폴이 헛기침을 하자 퍼디난드는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합니다."
"아니오, 이해합니다. 지금은 혼란스럽겠지요. 아무튼 베르너 씨는 지금부터 익스퍼로 등록될 것이며, 회복이 되는대로 그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가족분께도 확실하게 기밀 유지에 대한 교육을 할 예정입니다."
"……."
"자유의 미합중국 시민으로서 맹세합니다. 감시를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한 일은 일절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익스파를 통한 범죄를 벌일 경우에는 예외지요."
"믿을 수 없군."
"처음엔 다들 그럽니다."
퍼디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루이스도 이런 존재였을 것이다.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폴은 퍼디난드가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자 당황한 듯 허둥댔다. 퍼디난드는 괜찮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을 떠오르자 머리가 윙 울리며 다시금 루이스가 뱉던 말이 귓전을 때렸다.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몸을 부르르 떨던 퍼디난드는 애써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에스더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
"뭐든 알려주십시오."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익스파 파장이 하나 더 검출되긴 했지만,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걸로 미루어보아 미등록 익스퍼로 추정되어 당국에서 추적에 나섰습니다만.. 에스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교육 장소는 가족분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몸도 편찮으실 텐데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뉴욕의 영웅."
"방금 뭐라고요?"
"아, 모르시나 보군요. 지금 뉴스에서 베르너 씨를 두고 뉴욕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테러범을 사살하고 살아남은 기적적인 영웅이라면서요."
폴은 병실 밖으로 나갔다. 퍼디난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협탁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뉴스로 채널을 돌리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화재로 불타던 건물이 이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퍼디난드는 리모컨을 내팽개치며 머리를 감쌌다. 손목에 꽂힌 링거 바늘이 파고들고 피가 역류했다. 퍼디난드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굽히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간호사가 달려 들어와 퍼디난드를 붙잡았다. 앵커가 잠시 묵념하고 화면 속에서 멋대로 떠들었다. 끔찍한 테러에서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씨는 주범을 사살하고 살아남은 영웅이 되었으나.. 퍼디난드는 두 눈을 홉뜨며 그대로 굳었다. 아니다. 나는 너무도 어린 나이의 청년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람을 실수로 죽여버린 살인자에 불과하다. 영웅이 아니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테러범이라며 화면에 뜨는 사진 자료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다. 이후. 순직한 동료의 얼굴이 하나하나 떴다. 그 명단 사이에 루이스가 있었다. 퍼디난드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 진정제를 맞고 늘어졌다. 몸이 천천히 이완되는 와중에도 머리에서는 그때의 기억이 떠나가지 않았다.
퍼디난드는 퇴원한 직후 교육을 받았다. 사정을 듣게 된 가족은 더 쉬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쉬면 머리에서 루이스의 외침이 떠나가지 않았다. 익스퍼에 대한 교육을 받던 날에도, 훈장을 수여받던 날에도. 퍼디난드는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처럼 떳떳하게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다시 일상에 섞여들어갔다. 퍼디난드가 정해진 절차를 밟고 자유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되었긴 하나 가족관계 하나 없던 루이스의 장례를 도맡은 것이었다. 퍼디난드는 압사당한 친구였던 시체가 담긴 관을 끌어안았고, 유품을 받을 사람이 없자 대신 받았다. 그리고 그의 낡고 협소한 뉴욕 단칸방을 정리하던 도중 반지를 발견했다. 낡은 것투성이인 방에서 늘 새것처럼 닦은 반지는 벨벳 천이 들어있는 종이 상자에 곱게 담겨있었다. 퍼디난드는 그 자리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을 술로 지새우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27일, 퍼디난드는 가위 날로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은 비대칭으로 잘리고 목에는 평생 남을 흉터가 졌다.
***
2021년 12월 28일. 날씨는 쌀쌀하고 갑자기 그 사실이 불편해 퍼디난드는 길가에서 멈춰 섰다. 흰 롱패딩을 입고 초커와 터틀넥을 통해 이중으로 목을 가린 그는 숨이 불편한지 잠시 허리를 숙이고 꽉 조이는 가슴이 있을 옷깃을 그러모아 쥐었다. 몸이 휘청이며 새하얀 입김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통증을 무시하면 또 멀미가 났다.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깨진 향수가 섞인 냄새, 살갗 타는 냄새, 그렇게 하루만큼 늙어가는 사람들의 냄새다. 지독한 멀미와 함께 염증이 느껴졌다. 조금만 마음을 읽어봐도 호의에 가려진 악의가 넘쳐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다. 그 와중에 여전히 어지러운 감정이 크게 가슴을 쳤다. 무슨 감정인지, 이것이 짜증인지 떠올릴수록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조여오는 그 감정에 숨쉬기가 불편해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불편해 보이시는데,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됐어요."
"그래도.."
"신경 쓰지 말고 꺼지라고."
퍼디난드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뭐야, 걱정해도 지랄이야, 저 사람 괜찮은 거 맞아? 퍼디난드는 윙윙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영웅의 끝은 추락이다. 원하지 않아도 별자리에 올라서고 만다. 그는 그 사실이 끔찍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멀미를 겪어야 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하며,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걷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정체 모를 화재가 발생했으며, 불은 여덟 시간 만에 진화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여덟 명이 다쳤으며, 그중 두 명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습니다.
다시금 루이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이미 가셨어. 그리고 아직도 잡히지 않았지. 지금도 너를 비웃고 손에 피를 묻히고 계시지. 퍼디난드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고는 미친 사람처럼 밤의 거리를 달렸다. 사람의 어깨를 쳐도 사과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내달렸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탈출구다. 마시고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끝없는 굴레의 쳇바퀴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익스퍼 관리부도 모르는 하나의 사실을 그가 꿰뚫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미친 사람 취급해도 좋고, 하나의 패로 봐도 좋다. 그러니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줘……."
닿지 않을 말이 희뿌연 입김을 타고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