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동화학원³
"심장에 새길 단 한 사람을 찾았으니, 더 바랄게 없어."
"나를 이룬 것이 독이든 오염이든, 죄이든 업보이든, 내 이념은 변하지 않아."
"나는- 나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게, 이렇게나 불안정하고 불안할 줄은-"
Felice White Spidely | |
나이 | 17 |
성별 | 女 |
기숙사 | 백호 |
1.1. 외형 ¶
타고난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려 평소에는 자연스러운 컬을 연출한다. 색은 깨끗한 은색. 윤기 덕분에 약간 광택이 돌아 빛을 받으면 자잘한 반짝임이 생긴다. 습한 날에도 스타일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는데 이유는 집에서 보내주는 특제 에센스 덕분이다.
동성동년배 사이에서도 큰 키(177)에 타고난 몸매와 꾸준한 관리가 겹쳐져 건강면으로 매우 양호하면서 성숙도는 나이를 살짝 웃도는 상태다. 전신이 잔근육으로 탄탄하지만 근육도가 선명한 건 복근 정도이며 우락부락함은 전혀 없다. 손발톱과 각질 케어도 철저해서 항상 깔끔하다는 인상이 있다.
피부는 전신에 걸쳐 희고 깨끗한 편으로 얼굴 역시 매끈하다. 트러블이 거의 없고 한여름에도 잘 타지 않는데 집안 내력이라고 한다. 완연한 이국적인 인상의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다. 선명한 금색의 눈에 둥근 눈매나 길고 짙은 속눈썹, 연한 체리빛 입술 등등으로 곱게 생겼지만 기본 무뚝뚝+냉랭한 표정이라 오해받기 쉽상이다.
평상시는 은근히 낮고 허스키함이 살짝 있는 목소리지만 마음 먹고 소리를 내면 깔끔한 고음도 가능하니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다니는거 아니냐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최근엔 발성을 바꿨는지 한음 높고 매끄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차분한 웃음소리도 자주 섞인다.
동성동년배 사이에서도 큰 키(177)에 타고난 몸매와 꾸준한 관리가 겹쳐져 건강면으로 매우 양호하면서 성숙도는 나이를 살짝 웃도는 상태다. 전신이 잔근육으로 탄탄하지만 근육도가 선명한 건 복근 정도이며 우락부락함은 전혀 없다. 손발톱과 각질 케어도 철저해서 항상 깔끔하다는 인상이 있다.
피부는 전신에 걸쳐 희고 깨끗한 편으로 얼굴 역시 매끈하다. 트러블이 거의 없고 한여름에도 잘 타지 않는데 집안 내력이라고 한다. 완연한 이국적인 인상의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다. 선명한 금색의 눈에 둥근 눈매나 길고 짙은 속눈썹, 연한 체리빛 입술 등등으로 곱게 생겼지만 기본 무뚝뚝+냉랭한 표정이라 오해받기 쉽상이다.
평상시는 은근히 낮고 허스키함이 살짝 있는 목소리지만 마음 먹고 소리를 내면 깔끔한 고음도 가능하니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다니는거 아니냐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최근엔 발성을 바꿨는지 한음 높고 매끄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차분한 웃음소리도 자주 섞인다.
본래 장신구는 하지 않으나 최근 목에 가는 사슬줄 목걸이를, 왼손 약지에 반지를 착용하게 되었다.
- 캐붕주의
-
1.2. 성격 ¶
매사에 진지한 듯 하면서도 나름의 융통성도 있고 일정 수준 이상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 잘해주기도 한다. 반면 친분이 없거나 먼저 적대시, 무례하게 굴어오는 상대에게는 가차없으며 정도가 심하면 호전적인 면모도 드러낸다. 호전적일 뿐이지 절대 다혈질은 아니다. 말로써 맞대응을 하지 결코 먼저 손을 올리는 일은 없다.
자신에게 오는 이에 대한 선은 흐릿하지만 타인의 선을 존중해 거리 조절을 하는 편이다. 이런 부분을 비롯한 신중함도 어느 정도는 있는 듯.
숨기거나 감추는 걸 번거로워하여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다. 가끔 당황할 때 빼고.
자신에게 오는 이에 대한 선은 흐릿하지만 타인의 선을 존중해 거리 조절을 하는 편이다. 이런 부분을 비롯한 신중함도 어느 정도는 있는 듯.
숨기거나 감추는 걸 번거로워하여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다. 가끔 당황할 때 빼고.
윤과 교제를 시작한 이후, 이전의 차분함은 줄고 다소 경박하게 보일 수도 있는 성격으로 변모했다. 이는 지극히 한정적인 상대에게만 내보이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변화다.
1.3. 기타 ¶
- 진실
- "0"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누구로부터 시작된 잘못이었을까.
끝없는 자문자답을 반복한 끝에 이것을 남기기로 하였다.
이를 받아든, 그리고 이어갈 이여.
읽기 전에 미리 일러두겠다.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며
다신 돌이킬 수 없는 옛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장"
1.
마법사와 머글, 어느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혈통이다. 인간이라 하는 이는 누구든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치며 태어나기 때문에, 그 몸에 흐르는 피에는 당연하게도 최초라 할만한 시작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들 가문에 표현하자면 뿌리에 해당되는 부분이렷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의 가문에는 이렇다 할 과거도 차곡차곡 쌓였을 가문의 나무도 없는 것을.
그럼에도 어째서 순혈 가문으로 불리우는지, 그리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그 이유를 찾으려 해본 적은 있을런지? 허나 어떤 수를 써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땅에서 솟은 듯 갑작스레 시작된 가문이란 것만이 그대가 알 수 있는 최선이었을거다.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고민하고 탐구했을지 내 알 길은 없으나 이 말은 할 수 있겠다. 기뻐하게. 그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의문에 답을 얻게 되었다.
현재 "스피델리"라 불리는 가문에게는 달리 뿌리가 존재했다는 답을.
2.
내 감히 그대의 기분을 예측하건데, 무슨 이런 일이 있느냐고 황당해하면서도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 듯 하나 명확하게는 모른 채 이것을 받아들었을 것이다.
이것을 준 이로부터 어떤 첨언과 함께 받았는지까진 모르니 그대는 그대가 받은 조언을 유의하며 이 다음을 읽어가도록 하길 바란다.
"중장"
1.
현재, 그리고 그대의 세대에서까지 "스피델리"라고 불리우는 순혈 가문은 시작 이전이 존재한다. 없어보였어도 명백한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스피어리" 라고 불렸던 그 가문은 석산이자 꽃무릇의 형상을 가문의 문양으로 삼고, 순혈지상주의를 가문의 사상으로 내새우며 눈에 걸리는 모든 혼혈과 머글들을 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드높았던 가문이었다. 옷과 지팡이에 새겨진 하얀 가문의 문양을 피로 붉게 물들이는 것을 즐기는 가문이기도 했다. 동시에 '매구'라 불리는 희대의 악인이자 어둠의 마법사의 추종자였으며, 나의 본래 이름이기도 하다. 베릴 R. 스피어리. 이제는 사라진 스피어리의 마지막 가주, 바론 R. 스피어리의 혈육이며 쌍둥이인 자의 이름이다.
스피어리는 그 시대 어느 순혈지상주의 가문에 빗대어도 모자라기는 커녕 차고 넘칠 정도의 악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 역시 어릴 적에는 그것이 당연하다 느껴지는 환경이었으니. 그러나 나와 내 반신은 그 중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지키고 있었다. 결코 우리가 먼저 남을 해하지 않았고, 부딪혀오면 피하거나 가문의 어른들처럼 참혹하게 대하진 않았다. 가문의 이름을 가진 탓에 억울하게 당하더라도, 항상 정도, 라는 것을 지키고자 했다.
당시에 그러했던 건 어리숙하게도 우리가 가문을 바꾸고자 하는 바람을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가주인 어머니 아래 자식은 우리 뿐이었으니 다음 가주는 필시 우리 중 하나가 될 것이고 그리되면 가문의 실정을 바꿀 수 있을거라 헛된 꿈을 꾸었다. 그것이 헛됨을 모른 채 우리는 성년을 맞이했다.
같은 날 태어난 우리는 성년이 되는 날도 같이 맞이했으나, 그 비극 역시 같이 맞이하고 말았다. 우리의 성년을 축하할 물건을 받기 위해 어머니가 직접 외출하셨다가 때를 노린 습격에 당해 돌아가셨다. 매년 축복받아왔던 날이 가장 뼈아픈 날이 되버린 해였다.
2.
비극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라고 하던가. 그것 뿐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과거가 된 시점에서 보자면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고가 갑작스러웠던 만큼 가문 내의 가주의 부재 역시 그랬다. 울분에 찬 가문원들은 하루 빨리 새 가주를 세워 일을 행한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 반신과 함께 했던 다짐을, 어릴 적의 꿈을. 허나 내 반신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함께 했던 꿈은커녕 일말의 정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돌변해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되돌리려 애썼으나, 내가 하는 어떤 호소도 듣지 않았으며, 내 손이 그리 가지 말라 붙잡을 때마다 냉정히 내쳤다. 내치고 내치다 못해 나를 가문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라며 내쫓았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이를 적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가 직접 내 멱살을 잡아 문 밖으로 내치던 때가 선명히 떠오른다. 더러운 배신자라며, 다신 가문 문턱을 밟을 생각도 말라 일갈하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나를 향한 눈에 선 핏발과 핏빛으로 보이는 눈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3.
쫒겨난 후 달리 기댈 곳도 없었기에 어디든 발 닿는대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달이 지고 해가 바뀌어 갈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마법사의 세계란 어딜 가든 소식이 들려오기에. 거기서 나는 깨닫고 만 것이다. 나의 태생, 나의 핏줄은 벽 하나를 넘었다고 하여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없애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머금은 이름을 씻어낼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깨끗이 없애고 나도.
그러나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잔악한 가문이더라도 나의 가문이다.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낸 곳이다.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끝이 나인 것도 고민의 한자락을 차지했다.
다시 달이 뜨고 해가 바뀌는 시간을 방황했다. 방황 속에서 흘러온 소식을 듣고 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았다.
매구가 일으킨 전쟁이 그것이었다.
4.
몇 해 만에 다시 찾은 세계는 전쟁의 불길이 가득해 마치 지옥 그 자체였다. 혼란 속에서 들은 바로는 나의- 스피어리 가 역시 매구의 추종자로서 모든 가문원이 전쟁에 나서 지팡이를 들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젊은 가주가 아주 잔혹하다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바론, 나의 반신.
전쟁터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니, 전쟁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다짐은 이미 굳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정녕 그 길을 계속 가야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세상에 눈 뜬 순간부터 함께한 그를 나 이상으로 쉬이 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의 눈을 피해 둘 만의 장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리고-
만남은 어찌 말할 것도 되지않았다. 당연했다. 우리는 그 날 너와 나로 갈렸을 때부터 이미 끝났던 것이었다. 이제, 더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5.
스피어리 가는 당시의 순혈 가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법 실력을 뽐내는 가문이었다. 그 재능은 금지된 저주를 쓰는 것에도 적합해 전쟁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해했다. 순수 혈통의 마법사로 태어나 마법에 출중한 것에 긍지를 갖고 살아온 가문이니, 마법이 아닌 방식으로 죽는 것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우리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주를 준비했다. 그들의 긍지를 빼앗고 가장 모욕적인 죽음을 안겨줄 저주를. 지팡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아주 날카로운 단도 하나만이 필요했다. 부정하게 만들어진 단도에 내 명을 깎아 그들을 해할 저주를 담았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전쟁은 가장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좋은 시기였다.
...
양 측의 전투가 심화되었을 때, 나는 마법부의 오러를 흉내내어 전쟁 속으로 섞여들었다. 금지된 저주를 날리는 그들에게 거침없이 반격을 날리며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한복판에서 나의 핏줄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시작했다. 속죄이자 단죄라는 이름의 잘못을.
그 날 그 단검에 몇의 피가 스며들었는지 끝내 기억하지 못 한다. 확실한 것은 당시 스피어리의 이름을 이은 자라면 전부,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론이었다. 내가 아니라.
6.
그 날, 나를 제외한 스피어리 가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철저하게 모든 이를 죽이고 가주이자 내 반신인 바론마저 내 손으로 직접 보내주었으니.
그러나 바론은 순순히 죽어주지 않았다. 그는 단검의 저주를 역이용해 내게 지울 수 없는 저주를 새겼다. 죽어가는, 그리고 죽은 자의 집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의 지팡이로 내 가슴팍을 찌르며 남긴 것은 그가 추종자로써 받았던 문양이 흉하게 비틀려 새겨진 형상이었다. 그래, 지금 그대의 몸에 있을 그것 말이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죽지 못 했다. 아니면 죽음의 앞에서 덜컥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지은 죄의 무게를 내가 알기에.
피를 피로 씻으려 한들 핏빛은 더욱 짙어질 뿐이라는 걸 왜 미리 알지 못 했을까.
이후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몸을 숨겼다. 다만 살고자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면 전쟁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눈을 감으면 내가 죽인 이가 내지르던 단말마가 시도 때도 없이 정신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죽지 못 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추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문양이 욱신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연명하다보니, 지독한 전쟁의 불이 꺼지는 날이 찾아왔다.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던 전쟁의 불이 꺼진 뒤에 남은 건 다 타버린 세상이었다.
"종장"
1.
전쟁이 끝난 후, 남아있던 스피어리의 잔재들을 처리하거나 처분해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가문의 초상화도 태피스트리도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내 나름 철저하게 스피어리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를 덮기 위해 스피델리라는 이름을 세웠다.
허술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대는 알 것이다. 허술해보여도 그 뒤를 전혀 캘 수 없었던 것을.
없는 것은 찾을 수 없고, 설사 아는 이가 있더라도 쉬이 입에 담지 않았을테니.
모든 것은 혼란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반대하거나 막는 이 하나 없었으니 순조롭기만 했다.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을 무렵에 새로운 이름을 조용히 세간에 흘려넣었고 나는 그렇게 스피델리의 초대 당주가 되었다.
2.
그 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스피델리는 순탄히 가지를 뻗었다. 내가 정한 조건에 따라 문양을 가진 자식이 내 뒤를 잇고, 그 다음 문양의 소유자가 뒤를 잇고 다시 이어 그대에게까지 다다른 것이다.
문양을 가진 순혈 자식에게 가주를 넘겨줄 것.
그것이 스피델리의 가주를 잇는 조건이다. 그대가 기억해야 할 가문의 수칙이기도 하다. 그대가 이 가문을 존속해 나갈 것이라면 말이다. 하여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물음은 남겨두겠다.
당대의 가주가 된 그대여. 이 죄와 업을 짊어진 가문을 그대는 어찌할텐가.
오염에 물들어 그대로 끝을 맞이할 것인가.
독을 머금었을지언정 가지를 뻗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인가.
내게 묻는다면 이리 대답하겠다. 지금도 후회한다. 그 날 그 무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3.
내가 남길 말은 여기까지다. 이 수기에 뒤를 이은 가주들이 각자의 기록을 채우도록 해두었으니 모쪼록 그대에게 쓸모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를 이어나갈 것이라면 그대의 후계를 위한 기록을 이어서 남겨주길 바란다.
만약, 만약이지만, 더이상 대를 잇지 않을 것이라면 이 수기는 그대의 명과 함께 끝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길.
......부디 그대의 영혼이, 마지막까지 자유롭기를.
- 스피델리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대대로 이탈리아에 본가를 두고 있는 순혈 가문이다. 순혈지상주의는 아니지만 신기하게 순혈을 이어오고 있다. 가문이 성립된 초창기부터 이렇다 할 가풍이 없었다보니 각자 개성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열에 아홉은 모르는게 당연한 순혈 가문이 되어버렸다. 가문 자체는 유명세가 없지만 나름의 업적으로 명성을 높인 이는 종종 있었다고 한다. 주로 약학이나 도구 제작 쪽이었다. 펠리체가 쓰는 특제 에센스도 이들의 작품 중 하나로 선선대의 자식이 만들고 특허를 내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 가문의 상징은 사각으로 컷팅한 블루 토파즈에 꽃을 연상케 하는 금속 장식을 두른 것. 장식의 모양은 가문원 개인에 따라 다르다. 펠리체는 꽃무릇의 모양을 한다.
- 현재 가주는 필립 W. 스피델리이며 아내 클로에와 슬하에 3남2녀를 두고 있다. 3남은 첫째 둘째 넷째, 2녀는 셋째와 다섯째다. 펠리체는 이 중 막내인 다섯째로 부모와 남매들에게 과할 정도로 애정을 받으며 자랐다. 애정을 받음과 동시에 제각각이던 남매들의 특기를 가르침 받은 덕에 몇몇 현악기를 다룰 줄 알고 기본적인 트레이닝과 간단한 체술 정도는 할 줄 알게 되었다.
- 신체적으로 봤을 땐 주궁이 어울렸겠지만 더위를 싫어하고 더위에 약하기 때문에 연중 여름인 주궁만은 피하고 싶었다. 또한 개인적인 학구열과 지식욕으로 백궁의 역사서를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백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처음 순혈 태생을 장점으로 느끼게 된다.
- 진행 중 매구의 호크룩스인 로켓 목걸이를 얻었다. 선비탈 현성에게 빼앗은 뒤로 절대 풀지 않는다.
1.3.1. 독백 ¶
- 일말의 감성
-
조용하던 하루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건, 동화 옥음 방송이 지나간 후였다.
어쩌다 듣게 된 방송의 내용은 남녀의 연애 문제가 담겨 있었다. 타 기숙사의 남학생이 백궁 소속의 여학생과 헤어지려 한다는 말을 서두로 시작된 방송은, 서두와 전혀 다른 결말로 끝났다. 그 직후 그 남학생이 백궁의 여기숙사에 찾아와 난리가 났다, 라는 전개였다.
웅성거림으로 인해 밖이 시끄러워서 나가보니 그림으로 그린 듯한 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먼발치에서 팔짱을 낀 채 마치 광고 패널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잠시 보고 있다가,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시청시간 끝난 광고의 스킵 버튼을 눌러 넘겨버리는 것처럼.
타박타박 걸어서 방으로 돌아온 펠리체는 좀전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어보였다. 표정은 평소와 같고 자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내일 수업에 대한 예습을 좀 하고 읽다 만 책을 몇 페이지 정도 보다가, 그즈음 장난기에 발동이 걸린 리치와 한바탕 놀아준다는 전개는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나도 다를게 없었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한참 놀고 만족스러워진 리치가 먼저 이부자리로 들어가 발라당 뒹구는 것을 신호 삼아 그녀도 자리에 누웠다. 그대로 잠들어 일어나면 전날과 같은 하루를 시작할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평소와 다른게 있었다. 늘상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것이다. 자다 깬게 아니라 눈을 뜬 순간 완전히 깨어버려 다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펠리체는 더 자는 걸 택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입었다고 해봐야 잠옷 위에 낙낙한 후드집업 하나를 걸친게 전부였다.. 옷을 입은 뒤 그녀는 방에 있던 물건 두가지를 챙겨 조용히, 매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발소리가 날까봐 입구를 나갈 때까지 맨발로 걸어가는 기묘한 짓을 좀 했지만 아마 본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래도 좋을까.
후원으로 나가는 문에 다다라서야 신발을 신고 아직 해가 덜 뜬 바깥으로 나간다. 사시사철 가을인 백궁이다보니 이슬에 젖은 나뭇잎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밟혔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어 쭉 걷다보니 후원에서도 제법 깊숙히 들어온 듯 싶다.
낙엽이 소복히 쌓인 한복판에 멈춰서, 혹시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가 있나 없나를 살핀 그녀는 확인을 마치자 근처의 나무에 작은 오르골 같은 것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깨에 끈이 달린 무언가를 메는데, 다름아닌 어쿠스틱 기타였다. 이번에 돌아오면서 가져온거다. 공부만으로도 바쁠 시기에 무슨 악기놀음인가 싶겠지만, 그녀의 부모는 하고싶으면 하라고 등을 떠밀어줬으면 밀어줬지 결코 막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기타도 방학 내내 마음에 들어했으니 가져가라고 떠넘겨진거나 다름없었다.
".....좋아."
기타의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는 걸로 준비를 마쳤다. 무슨 준비인가 하면,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를 준비였다. 기타의 조율을 손본 뒤 나무에 올려놓은 오르골을 열자 오르골에서 나오는 거라곤 믿기 어려운 반주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반주에 맞춰 기타를 가볍게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던 펠리체는, 이윽고 소리를 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
노래가 끝난 뒤 그녀가 리 사감에게 들켜 혼이 났을지, 무사히 학생들의 눈을 피해 돌아가 짧은 선잠을 즐겼을지는 미지수로 남겨두도록 하자. 뒤가 어찌되었건 그녀는 마음껏 노래한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니.
- 스피델리 남매의 환담 - 1
- "파이몬"
막내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우리 집안에 대해 조금은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짧게 서론을 풀고 시작하려 한다.
대단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특이하면 특이했지 절대 보통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기에. 그러니 조금은 지루함을 참고 들어줬으면 한다. 들어둬서 이득은 없지만 손해도 없을테니 말이다.
나와 막내를 포함한 5남매의 집안은 이름을 대면 그런 가문도 있었냐고 되물음이 돌아오는게 이상하지 않은 약소 순혈 가문으로 가주 일가와 약간의 친척들이 구성원의 전부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가주이자 아버지인 필립의 자식들이다. 가주의 자식이라고 해도 언젠가 우리 중에서 차기 가주가 정해질 거란 것 외엔 특별할게 없는 보통 가정을 이루고 있다.
왜 장남인 내가 차기 가주가 아닌가 하면 성년을 훌쩍 넘긴 지금껏 한번도 그에 대한 확답을 받은 적이 없어서이다. 나 자신도 스스로가 가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고 있으니 되지 않아도 원망할 생각은 없다. 역대 가주들 역시 그래왔던 듯 하고.
역대 가주들이라 해도 어째서인지 초대부터 전부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기록도 무엇도 남긴게 그다지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 가문의 가주는 단명하는 저주가 있는게 아닐까 싶지만 현재의 부모님을 보면 내 생각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쉬이 손을 대선 안 될 거 같은 예감에 파고든 적은 없다. 그러니 지금도 왜인지는 모른다.
순혈 가문이지만 순혈주의는 아니고 유별난 업적도 없으며 이렇다 할 내세울 것도 없는 가문이다보니 기행을 벌이는 가문원이 종종 있었다. 라고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때마침 한창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나도 모르던 가문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의미는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네가 하고싶은 걸 하고싶은대로 해라. 아버지는 좀더 직설적으로 아니 있는 그대로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으니 두 분 역시 가문의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동생들도 다 한번씩은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 막내도 듣지 않았을까 했지만 막내는 들을 필요 없을거라고 헬리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보니 나도 다른 동생들도 동감이라 생각해서 좀 소름돋았다.
가풍도 가훈도 없이 보잘것없는 그런 가문에서 우리 남매들은 각자의 길을 지향하며 자랐다. 다 모아놓고 보면 나의 기행은 보통 수준이 될 만큼 서로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막내는 유별났다. 무엇이 그러느냐고 물으면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우니 그 존재 자체라 답하겠다. 내가 그걸 느낀 건 10세가 되던 해, 갓 태어난 막내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였다.
"블리스"
아니 우리 다 모여도 파이만큼 이상한 사람 없거든? 우리 껴서 은슨슬쩍 이미지 관리 하지 마라.
"헬리아"
나는 동감하는데? 우리 다 비슷비슷해~ 막내만큼은 아니지만~ 아, 그렇다고 파이 편을 드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면 곤란해?
"델피니"
어제 밤샘하고 막 자려는 사람 불러다 놓고 무슨 소리를 듣고 싶었던거야... 파이 나가 죽ㅇ, 아니다, 평생 혼자 살아.
"파이몬"
...니들 미워... 나 얘기 안 해...
-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 일없는 저녁, 기숙사 침대에 누워 설렁설렁 책장을 넘길 때만큼 평화로울 때가 또 있을까? 난 이보다 평화로운 시간은 달리 없다고 생각해. 리치가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구. 게다가 여긴 온전히 나 혼자 쓰는 방이니 다소 무방비한 차림을 하고 있거나 방정맞은 자세를 취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도 않지.
예를 들면, 야시시한 차림으로 폴댄스라던지? 아, 이건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야. 진짜 그러진 않아. 옷은 있어도 봉이 없는 걸.
집에서도 이렇게까지 자유롭진 못 해. 파이라던가 파이라던가 파이가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두들겨대거든. 파이 말로는 방학 때 밖에 못 보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렇다는데 솔직히 짜증나. 약속만 아니면 진작 몇대 걷어찼을거야. 진심 100, 아니 1만배 담아서.
팔락.
잠깐 생각이 집과 파이로 새긴 했지만 착실하게 책도 보고 있었으니까 새롭게 책장을 넘겼어. 무슨 책을 보냐구? 그냥 책이야. 두꺼운 표지에 새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책. 펼친 페이지를 다 보면 넘기는게 맞잖아. 그래서 넘겼어. 다음 페이지도 한가득 글자가 있으니까 이걸 다 보면 또 넘길거야.
바각바각.
냐오- 냐오오오-
바각바각.
익숙한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까 사랑스러운 리치의 쭉 뻗은 등이 보였어. 문 앞에 앉아서 발톱으로 문을 긁고 있는 저 하얀 고양이 말야. 사랑하는 리치. 소중한 내 패밀리어. 나는 보던 책을 덮고 일어나 리치에게 다가갔어. 그 때까지도 문을 긁던 리치는 두 발로 선 채로 나를 보고 울었지.
냐앙!
리치의 높은 울음소리는 나가고 싶다는 의미야. 이대로 문만 열어줘도 괜찮겠지만 같이 나가기로 했어. 이리 온. 리치. 두 팔로 작은 리치를 감싸안고 방 밖으로 나가. 외출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문턱을 넘은 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 뒤가 길어 걸을 때마다 나풀나풀 거리는 드레스는 나비의 날개 같은 느낌이었을거야.
늦은 저녁의 기숙사는 한없이 조용해. 다른 기숙사도 이럴까? 아니면 백궁만 이럴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조용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던 적은 없었어. 아무리 늦었어도 이렇게 사람이 없지도 않았어. 적어도 내 기억에는. 하지만 이 분위기가 싫지는 않아. 응. 싫지 않아.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지 않아. 내 걸음은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지.
차가운 바닥이 맨발에 닿는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차갑지만 차갑지 않아.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그래서인지 자꾸만 걸음이 빨라져. 자박이던 걸음이 점점 보폭을 넓혀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아. 내가 들뜨는 걸 느꼈는지 품 속의 리치가 가릉거려. 코끝으로 내 목을 간질이는 통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어. 빈 복도에 웃음소리가 허하게 울려퍼지고 이내 사라지는게 너무 생생해서 무심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 웃고있는데 어쩐지 슬펐어. 애절한 기분이었어.
자, 이제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면 내 앞엔 후원으로 나가는 문이 있어. 올해로 4년째 보는 이 문은 어쩐지 위화감이 들어. 내가 아는 그 문이 맞는데 아닌 거 같아. 어째서일까? 위화감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면 리치가 그런 나를 떠밀었어. 꼬리 끝으로 내 팔을 살살 간질이는거야. 이 애교쟁이 같으니. 리치가 간질인 팔로 문을 열자 낙엽 한장이 눈 앞을 지나가네. 백궁은 늘 가을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어. 지나치는 낙엽을 뒤로 하고 천천히 후원으로 나갔어.
그거 알아? 맨발로 젖은 낙엽을 밟을 때마다 푹푹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 늪으로 걸어들어가는 거 같아. 가을의 숲도 그래. 비슷한 색의 낙엽들이 깔린 숲은 들어갈수록 그 속에 잠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착각 때문에 숨이 가빠지기도 하나? 어느새 숨이 턱끝까지 차서 걸음을 멈췄어. 딱, 후원의 한가운데쯤에서. 어느새 품 안의 리치는 없어지고 나 혼자였어. 그럴 터였어.
멈춘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어. 여기 원래 거울이 있었나? 왜냐하면 정면에 누군가 있었으니까. 답은 당연히 아니다, 였어. 왜냐하면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거든. 나의 새하얀 드레스와 정 반대인 칠흑의 드레스가 낙엽 위로 긴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었어. 검은 옷 위로 반짝이는 은발을 드리운 그녀는 나와 같은 금빛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어.
--.
창백한 입술이 말을 했는데 안 들렸어. 낙엽이 바스락거려서 그런가봐.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그래. 다시 한번 말해주지 않을까.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그녀도 가만히 있어. 못 박힌 듯 서 있는 그녀의 왼손이 살짝 움직였을 때 뭔가 반짝여. 반짝임은 시선을 끌지. 그걸 보는 건 자연스러운거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럽지. 길고 얄팍하지만 동시에 날이 바짝 선 그것이 새까만 나이프라는 걸 나는 어째서인지 미리 알고 있었지만.
--.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들어올려. 나도 내 손을 들어. 그녀는 나이프를 든 왼손을 드는데 나는 지팡이를 든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있어. 가문의 표식이 달린 나의 지팡이. 푸른 보석이 그 끝에서 옅게 빛을 내는게 그녀의 나이프 날이 서늘한 빛을 흘리는 것과 같아보여.
누가 천천히 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릿느릿 팔을 들고 관절을 굽혀 나이프와 지팡이가 가리켜야 할 곳을 가리키게 해. 내 지팡이가 어디에 어떻게 향하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나이프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보여. 검은 칼날은 서서히 안쪽으로 다가가 하얀 목에 가느다란 틈을 내. 그걸로 멈추지 않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날이 전부 모습을 감출 때까지 멈추지 않아. 아니, 반대편으로 날이 다시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어. 검은 옷에 붉은 색을 더하게 된 그녀가 입을 열자 나오는 건 붉은색 뿐.
그리고 떨어졌어.
떨어졌지.
낙엽처럼.
-
"......"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기숙사의 익숙한 천장이었다. 천장으로 보이는 색이었다.
잠 덜 깬 시야에 천장과 침대 주변에 두른 베일 커튼의 색이 잠시 섞이다가 원래대로 돌아간다. 흐릿하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고도 얼마를 더 가만히 있던 그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목을 문지른다. 희고 매끈한 살결엔 아무런 흔적도 없다. 확신이 안 서는 듯 두어번을 더 문지른 뒤에야 옆으로 손을 툭 내려놓는다. 하. 짧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뭐야, 꿈이었잖아..."
그것 뿐. 다른 말도 반응도 없이 그저 꿈이었다는 것만 인지하고 끝이다. 그 뒤엔 다시 눈을 감고 남은 잠을 청한다. 그대로 다시 잠든다.
- 스피델리 남매의 환담 - 2
- "파이몬"
10세, 열살. 아직은 세상에 대해 모를 나이지만 그래도 그건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데려온 막내는 정말 작고... 작구나, 라고.
어머니의 태중에서 채워야 할 달을 하나 반이나 덜 채우고 나온 막내는 당연하게도 몸이 너무나 약했다. 갓난아기일 때는 몇번이고 숨이 넘어갈 뻔 하거나, 조금 큰 후에도 툭하면 열이 올랐다.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이 반의 반도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열에 들떠 누워있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막내는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어릴 때인데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는게 그 때문이다. 나는, 아니 우리 넷은 막내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아기라면 당연히 툭하면 우는게 정상일텐데 전혀 울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으론 아주 작게 칭얼대기는 했다고 하셨다. 늘 곁을 지키던 어머니에게만 들릴 만큼.
막내에게 뭔가 병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몸이 약한 태생도 아니다. 나를 비롯한 세 동생은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태어나 건강하게 자란게 그 증거였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유를 모른다. 찾아도 찾지 못 했으며 유일하게 어머니가 이유에 가까운 사실을 알고 계시는 듯 했지만, 그것만큼은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으실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모르는 일로 남겨두는 쪽을 택했다.
아무튼, 막내의 이상증상은 10년간 질리지도 않고 이어졌다. 그 탓에 한창 놀아야 할 시기에 놀지 못 하고, 많은 것들을 경험할 시간을 허비했다. 그런 막내가 안쓰러워 우리가 곁에서 지켜봐주고 싶어도 일단 나부터가 학교에 가야 했다.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번 학교에 들어가면 방학 때에나 나올 수 있었으니, 막내를 돌보는 건 온전히 어머니가 하셨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께 부담이 갈 만한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아예는 아니고 최소한으로, 가능한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사고를 치면 아버지가 대응해주셨지만 몹시 죄송스러움이 내 안에 남곤 했다.
10세, 열살. 내가 막내를 처음 본 그 나이가 막내의 나이가 되던 날. 나는 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원래는 오러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문득 회의감이 들어 그만둬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이건 내가 하고 싶은게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해도 부모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니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졸업 후 할게 없어진 나에게 돌아온 건 막내를 돌보는 일이었다.
"뭐라도 좋으니 가르쳐주렴. 글과 말은 배웠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말고. 이대로는 키도 잘 크지 않을 것 같으니 체력이나 기르게 해주려무나."
어머니의 말씀대로 당시 막내는 겨우 평균적인 체형을 유지하는게 고작인 아이였다. 이 때에는 낯가림도 있어 가족 외 사람에게는 맡길 수도 없었다. 나로서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잘 돌봐주지 못 했던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거리낌 없이 막내 돌보기에 임했다. 어머니 조언대로 밖에 데리고 다니며 걷게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동안 못 했을 경험들을 시켜주었다.
재학 중 내가 잠시 집을 떠났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얻었던 매의 깃털을 선물해준 것이 이 해의 막내 생일 때다. 작고 여린 몸을 지키는 부적이 되어주길 바라서였다.
이 때부터 2년 가량을 내가 맡아 돌보는 동안, 막내는 우리와 비슷하게 자랐다. 평균 키가 큰 집안의 아이답게 금방 쑥쑥 컸으며, 가르쳐주는 건 금방금방 익혀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바깥 경험을 시켜주니 낯가림도 없어졌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무작정 살갑지도 않았지만. 장난을 치면 자지러지게 웃고 가끔은 성도 낼 줄 아는 보통의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보였고,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끝까지 믿고 싶었다.
그러나 2년 뒤 블리스가 졸업한 해에 나는 막내를 가르치는 것을 관두고 집을 떠났다. 도망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에서 도망쳤는지는...
달리 할 것을 정하고 나간 건 아니다. 무작정 집을 나와 방랑길에 올랐다. 그저 집이 아닌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그렇게 내가 떠난 동안, 남은 동생들이 내가 했던 것처럼 막내를 돌봤다는 걸 어쩌다 이어진 연락으로 인해 들었을 뿐이었다.
"블리스"
저 때 파이 완전 무책임했어. 갑자기 사라져서 막내 한동안 우울해하는 거 달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 줄 알아?
"헬리아"
그래도 너 졸업할 때까지 버틴게 용한거야~ 너였으면 절대 못 버텼어.
"블리스"
...인정하기 싫긴 한데. 그건 그렇지.
"델피니"
...... ...... ......
"블리스"
아, 이 XX 또 앉아서 졸아. 졸리면 들어가라니까. 난 몰라. 또 자빠져서 코가 깨지든 이마가 깨지든 알아서 하라지.
"헬리아"
그래~ 낡고 지친 델피 냅두고 파이 오면 한잔 하러 가자~ 얘기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블리스"
좋지. 가자고.
- 그녀의 가족에 대해
- "소개"
필립 - 아버지
클로에 - 어머니
파이몬 - 파이. 5남매 중 장남, 첫째.
블리스 - 브리. 5남매 중 차남, 둘째.
헬리아 - 헬리. 5남매 중 장녀, 셋째.
델피니 - 델피. 5남매 중 삼남, 넷째.
펠리체 - 리체. 5남매 중 차녀, 막내. (유년기 한정 애칭 - 쁘띠첼)
이하 썰들은 대략 10년 전 시점입니다.
"식사시간"
파이, 브리 - "아 옆에 앉지 말라고 XX아." / "싫으면 니가 비켜 XX"
누구보다 빠르게 내려와서 앉자마자 서로 신경전을 벌인다. 클로에가 파이용 나이프를 들면 조용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탁 밑으로 계속 투닥댄다.
헬리 - "마마, 파이랑 브리 발싸움해요~"
제일 늦게 나온다. 오는 길에 위 싸움을 보고 클로에에게 이르는 장본인.
델피 - "오늘 무슨 날이에요? 로스트비프네..."
위에 둘 사이쯤 나와서 자리잡는다. 가장 조용하다. 그리고 존재감이 옅다.
필립, 클로에 - "적당히 해라." / "밥 먹기 싫으니, 응?"
말 대신 행동으로. 필립은 식탁 밑 다리를 걷어차고 클로에는 파이용 나이프 대신 지팡이를 든다. 그럼 모두 조용해진다. 자, 밥 먹자.
"여가시간"
파이 - "야 저기 숲에 흉가 있다는데 거기 가보자. 야 가자고. 야."
야외파. 집에 잘 안 붙어있는다. 뭐 할 때도 시끄러워서 주로 밖에서 논다.
브리 - "아 씨 귀찮게. 진심 영양가 없는 짓만 하네. ...콜."
야외반 실내반. 주로 파이가 야외로 꼬시고 아닐 땐 집안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본다.
헬리 - "흉가? 나도 갈래~ 쫄보들 튀는거 구경해야지~"
실내파. 재밌어보이는 일이 있으면 꼭 구경간다. 기준이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흥미가 없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안 간다.
델피 - "ㄴ...난 안 갈 거... 안 가, 안 간다고 했ㅇ으아아아"
실내파지만 주로 파이에 의해 끌려다닌다. 하도 끌려다녀서 생존력과 체력만 높아졌다.
필립, 클로에 - "오늘은 좀 나은가." / "예. 오늘은 그나마 좀 낫네요."
펠리체를 돌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평소엔 주로 필립이 다른 자식들의 케어를 하고 클로에가 펠리체를 돌본다.
- 그 외 -
"흉가체험 이후"
필립과 클로에 몰래 한밤중 흉가에 다녀온 남매들. 각자 소곤거리며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파이 이 등신아 거기서 그걸 왜 밟아...! 갈통인가 눈이 장식인가 왜 뻔히 보이는 걸 못 피하냐고.....!"
"내 눈엔 안 보인 걸 어쩌라고 XX 니가 똑바로 안 비춰서 그런거 아냐..!"
"푸흐흐... 결국 둘 다 쫄아서 나갔으면서~"
"...나, 나는 방에 갈ㄹ....흐이익!"
서로 티격대다가 델피의 비명에 모두가 흠칫한다. 비명의 장본인인 델피가 가리킨 앞을 보자 불 꺼진 거실에 누군가 있다. 남매들 중 한명이 루모스로 빛을 내서 보자 거기 있는 건 애착 인형을 끌어안은 막내, 펠리체(7세)가 오도카니 서서 남매들을 보고 있다.
"아, 막내였어.... 델피 넌 뭐 막내보고 쫄아...!"
"그, 그치만 잘 안 보였다고...!"
"이 XX 파이보다 더한 쫄보야 진짜..."
"우리 쁘띠첼~ 안 자구 여기서 모해~ 자~ 언니랑 자러가자~"
또 투닥대는 형제들을 두고 헬리가 애칭으로 부르며 펠리체에게 다가간다. 방에 데려다주기 위해 손을 잡으려 하자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기 싫어서 그런 줄 알고 달래려고 하지만, 펠리체의 시선이 어딘가로 꽂힌 채로 고개만 까딱거린다는 걸 남매들은 금방 눈치챘다.
"......야... 막내 뭐 보고 있냐...?"
"그... 파이... 아냐...?"
".......흐어엉........"
까딱...까딱...
"음~ 그러고보니까, 그 흉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더라~?"
"어? 전에 살던 일가족 모두가 목 매달아 죽었다ㄱ..."
목매어 죽은 사람들의 집을 다녀온 남매. 그곳에서 '불길한 것'을 밟은 파이, 를 보고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이는 펠리체. 남매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상황파악이 되어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엄마!!!!!!!!! 엄마!!!!!!!!!!!!!!!!!!!!"
"으아아아악!!!!!! XX!! XX!!!!!!!!!!!!!!"
"헝엉엉엉....!!!"
아수라장을 일으키며 안방으로 뛰어가는 세 형제와 키득키득 웃으며 펠리체를 안고 방으로 가는 헬리의 모습이 있었다.
"어휴~ 저 쫄보들~ 집에 올 때까지 그걸 몰랐단 말야? 아, 웃겨 증말~"
그 날 밤, 자식들의 멍청한 행동을 엄하게 질책하는 필립과 붙여온 것들을 치워주는 클로에의 고생이 있었다고 한다.
"파이가 쏘아올린 작은 업보"
한꺼번에 방학을 나온 남매들 중 헬리가 간만에 컨디션이 좋은 펠리체(7세)와 놀아주고 있다. 외출은 힘드니 실내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 쁘띠첼 차례~ 뭐 뽑아볼까? 응?"
"이거, 이거."
"그거? 옳지, 천천히~ 천천히~ 응~ 아이쿠 무너졌네~"
"우.. 으..... XX!"
"...응...?"
"XX!"
젠가를 하던 중 아직 어린 펠리체가 블럭을 뽑다가 넘어뜨린다. 그러자 와르르 무너진 젠가 위로 들고있던 블록을 던지며 어설픈 발음으로 욕을 하는 펠리체. 자기 귀를 의심하던 헬리에게 다시 어린 목소리가 욕을 한다. 헬리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펠리체에게 욕의 출처를 묻는다.
"쁘띠첼~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을까? 누가 쁘띠첼한테 가르쳐 줬을까~"
"응? XX?"
"ㅇ...응, 그거~ 누가 했어...?"
"이거, 파이가 저거 하구, 했어. 막 이렇게."
"응 그랬어~ 음...... 이제 델피한테 놀아달라 할까? 델피랑 간식먹자, 응?"
누가 이 작은 아이에게 욕을 가르쳤는지, 조곤조곤 물어서 출처를 알아낸 헬리는 조용히 펠리체를 데리고 델피의 방에 간다.
"델피? 잠깐 막내 좀 보고 있어. 밖에 시끄러워질테니까, 나오지 말고~"
"...또 파이야?"
"응~ 또야~"
책을 보던 델피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펠리체가 밖에 안 나오도록 하라고 하곤, 그 옆방으로 가 브리에게 파이의 만행을 전달한다.
"이... XXX가.... 내가 그렇게 조심하랬는데..."
"파이가 그렇지 뭐~ 난 마마한테 갈게~ 너 먼저 가~"
파이의 만행을 전해들은 브리는 곧장 파이에게 가 1차로 응징을 가하고, 헬리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클로에가 2차로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상황은 끝나는 줄 알았으나...
"악!!! 왜, 왜요! 나 아까도 맞았, 악!!!!!"
퇴근한 필립의 표정을 보고 그 날 파이는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신 막내 앞에서 욕하나봐라... XX..."
"XX?"
"으아아악...!"
- 전조의 꿈
- 누군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방을 쓰고 혼자 잔다는게 얼마나 쾌적한 건지 알아버리니까 집에서도 도저히 남매들 사이에 껴서 잘 수가 없겠더라구. 뭐, 그러고 싶어도 다들 각자의 집이 있거나 집에 없거나 해서 못 하게 되었지만. 나로서는 그게 좋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래서인지 옆에 누군가 있다는게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쉽게 잠들지 못 했던 거 같아. 겉보기엔 완벽하게 잠든 듯 보여도 옅게 잠든 채로 줄곧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심박 소리 같은 걸 듣고 있었거든. 듣다보면 잠들겠거니 하고.
그런데 말야, 이게 잠이 오기는 커녕 주변 소리만 점점 더 잘 들려오게 되는거야. 청각만이 점점 범위를 넓혀가는 것처럼.
침대가 눌릴 때의 소리, 천천히 걷는 듯 느릿하게 울리는 복도 바닥 소리, 저멀리 누군가 문을 열고 닫는 소리 등등등. 내 청각은 지치거나 쉴 줄도 모르고 계속 범위를 늘려서 기어코 저택 바깥에까지 뻗쳤어. 실은 가장 먼저 들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그 때서야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멀지 않은 해안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
아.
파도 소리에 눈을 뜨자 내 앞엔 밤하늘과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어. 내가 언제 나왔는지 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검푸른 바다 앞에 서서 멀고 먼 수평선을 바라봤어. 가만히, 가만히, 그대로 있다가, 문득 시선을 내리니까 내가 책 한 권을 들고 있는게 보이더라구. 맞아. 그 책이야. 두껍고 낡은 가죽 표지 속 낡은 종이에 오래된 잉크로 글씨가 잔뜩 적힌 책. 아직 반도 못 봤지만, 사실 펼쳐본 적도 없는 그 책.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다음은 뭘 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책을 들어 펼쳤어. 내용을 보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 하지만 지금 책을 열면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어. 그런 거 같아. 낡은 페이지들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찢겨 바다로 전부 날아가게 될 거란 걸.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줍기 위해 바다로 들어갈 거란 걸.
이제 비어버린 표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앞으로 나아가. 발끝만 간질이던 물결에 스스로 발을 들이고 한걸음 두걸음 물 속으로 들어가는거야. 나는 살아있기에 물 위를 걷는 기교 따위는 할 줄 모르니까. 물 위에 뜬 종이를 줍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모순을 일으켜.
신기하게도 내 발은 수중에 뜨지 않고 계속 바닥만을 밟아서, 종이들이 일렁이는 수면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물 속에서도 똑바로 서서 위를 바라볼 수 있었어. 제법 멀리 뜬 종이들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보이더라구. 너무 멀어서 올라가보면 내가 찾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 때서야 바닥을 박차고 위를 향했어. 천천히, 천천히, 닿지 않을 듯한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데.
부그르륵. 올라오는 기포. 수중의 내 발목을 잡는 차가운 손. 익숙하지만 낯선 그 손이 나를 잡아당겨. 얼마간 올라갔던 수중을 그대로 되돌려놔. 날 다시 바닥에 닿게 해. 나는 어째서인지 반항하지 않았어. 해봤자 의미가 없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이걸 기다렸던 걸까. 이젠 발만이 아니라 완전히 바닥에 짓눌린 채로 천천히 타고 올라오는 손의 주인을 봐.
아.
'너'는 여전히.
손의 주인은 목 위가 부족한 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어. 그야 그렇겠지. 목 위는 그 날 떨어뜨렸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되었던거야. '나'는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억울했겠지. 원망스러웠겠지. 어째서냐고 한탄했겠지.
이제는 없는 시선이 맞을 만큼 올라온 그녀를 봐. 너덜너덜한 단면이 나를 향해 기울어있어. 부그륵. 단면으로부터 새어나가는 기포 속에 들리지 않는 말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아, 잡으려 손을 뻗지만 그녀의 손이 내 손을 막았어. 차가운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을 짓누르고 차가운 왼손으로 내 몸을 더듬어 올라와. 얄팍한 옷 따위는 그녀의 손이 주는 한기를 막아내지 못 해.
손끝이 닿고 손바닥이 쓸어내는 부분부분이 그 한기로 인해 얼어가는 것 같아. 전신이 동시에 무력해지는게 아닌, 조금씩 감각을 잃고 사라져가는 걸 느끼는게 더 최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대로라면 숨마저 얼어버리겠다 싶을 쯤. 그녀의 손끝이 고동을 띄는 지점에 다다랐어.
한기와 달리 상냥한 손길이 느려져가는 고동을 음미하듯 살결 위를 쓸어내리는 것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 눈을 감고, 다음 순간,
푸욱.
둔탁하며 날카롭게 꽂히는 소리와 동시에 내 안에 남아있던 숨을 전부 뱉어내. 새빨간 기포를 내뱉으며 가장 뜨거워야 할 곳이 가장 차갑게 변해버린 그 순간을 생생하게 체감해.
그래. 그녀의 손에 짓이겨진 생이 꺼지는 순간을.
수중은 내가 내뱉은 붉은 기포가 터져 검푸른 물을 더욱 검게 물들어가지만 나는 이미 눈을 감았기에 볼 수 없었지.
그저 희미하게 흐려져가는 정신에,
누군가...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
같았
어...
-
한쪽의 정신이 완전히 끊김과 동시에 그녀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밤이라 해도 한여름이라 이 정도의 추위를 느낄 일이 없는데도 그녀의 몸은 식은땀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추워..."
가늘게 말을 흘리는 순간, 숨결이 희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현실의 온도는 변하지 않았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체감만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를 느끼는 것이었기에.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을 그를 붙잡는다. 자꾸 떨려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손을 몇번이고 재차 쥐면서 눈을 감았다. 냉기와 함께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날 수 있길 바라며.
- 칠석의 추억
-
그녀 나이 12세 무렵. 갑작스럽게 집을 떠난 파이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잠시 어수선했었다. 기본적으로 서로 간섭이 없는게 스피델리 가의 분위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마디 전언도 없이 떠나버리면 동요가 일고도 남는다. 특히나 아직 어린 그녀의 상심은 일가 중 가장 컸기 때문에 이를 어찌 달래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더해졌더란다.
얼마 후에 짧은 외출을 나온 두 남매도 이를 듣고 잠깐은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곧 나온 헬리의 의견으로 가족들의 고민은 해결되었다.
"아~ 그럼~ 막내도 건강해졌겠다, 다같이 여행 한번 가는게 어때요? 마침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었는데~"
"네가? 별일이네. 어딘데?"
"여~기~"
헬리가 지도를 펼쳐 짚은 곳은 동쪽의 작은 섬나라였다. 뜬금없긴 했지만 가보고싶다는 헬리의 말과 다른 가족들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니 그 자리에서 그 나라로 정해졌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준비도 출발도 신속했다. 어린 그녀에겐 첫 장거리 장기간 외출이라 준비할 때부터 들뜬 기색이 상심을 밀어낸 듯 했다. 그러나 너무 들떠서일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 숙소를 잡은 후엔 피로로 인해 반나절을 쉬어야 했다.
"에구 우리 쁘띠첼~ 녹네 녹아~ 그런 쁘띠도 귀엽지만? 한입에 먹어버릴까보다~"
"애 지쳤는데 자꾸 건드리지 마. 뭐, 이래서야 해진 후에나 나갈 수 있겠지만."
"후,후,후. 내가 그것도 다~ 생각했지! 브리, 잠깐 이리 와봐."
"뭐? 왜, 야, 뭔데?"
먼저 관광을 나간 부모님과 델피를 대신해, 숙소에 남아 지쳐서 잠든 그녀를 돌보던 브리와 헬리. 작게 대화를 나누던 중 헬리가 히죽 웃으며 브리를 방 한구석으로 데려가 소곤소곤 뭔가 말을 주고받았다. 또 무슨 귀찮은 일을 벌이냐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브리였지만 헬리의 얘기를 들으며 표정이 점점 바뀐다. 얘기가 끝난 후에는 둘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얘기의 방향이 어찌 흘러갔는지는 두말 할 것도 없겠지.
몇시간 뒤, 먼저 나갔던 가족들도 일찍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어린 그녀도 나갈 수 있을만큼 체력을 회복했을 쯤, 이제 어린 그녀의 관광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클로에가 현지에 맞춘 옷을 요령 좋게 입혀주는 동안 얌전히 있던 그녀는 어쩐지 주변이 허전해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마망, 브리는? 헬리는?"
"브리랑 헬리는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단다. 리체도 어서 준비하고 가자?"
"으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클로에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옷을 마저 입혀주었다. 유카타, 라고 불리는 그 나라의 옷은 더위를 잘 타는 그녀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흰 바탕에 푸른 꽃무늬가 들어간 것도 물론 잘 어울렸고 말이다.
꽃단장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북소리를 향해서 걷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아직은 낯가림이 있던 어린 그녀를 필립과 클로에가 양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해주었다. 조심조심 걸어가는 그녀에게 필립이 여기는 마츠리를 하는 중이라고 말해주자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작게 반짝였다.
"마-츠리? 카니발?"
"오, 리체는 똑똑하기도 하지. 그렇단다. 이 나라의 카니발이야. 볼 것도 먹을 것도 많지. 자. 보렴."
필립이 어린 그녀를 안아올려 그 앞을 보여주자 작은 금안이 동그랗게 떠지며 놀람을 표현한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형형색색의 조명들은 늘 집에만 있던 그녀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장소만으로도 그런데, 그곳에서 먹고 노는 건 또 어땠을까. 몇군데의 노점을 지나며 이것저것 경험한 그녀는, 중간에 경품으로 딴 물풍선 요요를 흔들며 꺄르륵 웃어대었다. 다른 손엔 구운 옥수수를 들고 잊었나 싶을 때쯤 한입씩 먹으면서 말이다. 최근 시무룩하게 인형놀이를 하는 모습만 봐온 부모로써는 정말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적당히 기분 좋아진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필립과 클로에에게 델피가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그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클로에는 옆에서 델피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가족들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필립이 웃으며 말해주었다.
"브리랑 헬리를 보러 갈 거란다. 저기서 리체를 기다리고 있어."
저기, 라며 필립이 고개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여기서 가장 환한 조명이 비추는 장소가 그녀의 눈에 들었다. 높은 단상과 여러 악기와 마이크, 그것들을 이용해 공연을 하는 사람들. 그녀에게 그런 무대는 이 축제가 처음인 만큼 당연히 생경할 수 밖에 없었다. 무대 앞 관객의 환호나 전신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낯설고 무서워, 노는 것도 잊고 필립에게 꼭 안겨있던 그녀였지만, 앞선 공연이 끝나고 다음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보았을 때는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대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마망... 브리가 왜 저기 있어? 왜에? 헬리는? 응?"
"글쎄? 브리랑 헬리가 뭘 하려는지 같이 볼까?"
왜 그리 놀랐는가 하면, 한 밴드와 함께 나오는 사람들 중에 한껏 꾸민 브리와 헬리가 섞여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치장이 있긴 했지만 특유의 은발이 눈에 띄는 둘이었기에 어린 그녀도 금방 알아보았다. 놀란 눈으로 무대와 클로에, 필립을 번갈아 보는 어린 그녀를 보고 미리 알고 있던 가족들은 작게 웃었다. 무대에서 유창한 회화로 짧은 인사를 한 헬리가 관객 속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한 손을 들어 크게 흔들어주었다. 그에 또 깜짝 놀라는 그녀를 두고, 시작된 반주에 맞춰 헬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언제나와 같은 어느 날의 이야기. 너는 갑자기 일어나 말했지.
오늘 밤, 별을 보러 가자."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자아낸 멜로디에 이어 경쾌한 밴드의 음악이 이어졌다. 마이크 대신 일렉기타를 잡은 브리가 무심한 표정과 다르게 수준급의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처음인 무대 공연에서 남매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된 어린 그녀는 언제 낯설어하고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이 꺄악거리며 즐거워했다. 무대에 선 둘은 자신들의 막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 열정을 불태웠다.
한 곡이 끝난 후 무수한 앵콜 요청으로 인해 즉석에서 두 곡을 더 부른 뒤에야 무대에서 내려와 잔뜩 상기된 그들의 막내를 받아줄 수 있었더란다. 너무 과한게 신난 탓에 그 날 밤 미열로 앓긴 했지만, 그녀를 포함한 일가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밝디 밝은 무대의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던 둘의 모습은 어린 그녀가 처음으로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
"저게 데네브, 알타이르, 베가... 네가 가리키던 여름의 대삼각형..."
"오, 그거 그 때 그 노래 아냐? 막내랑 처음 여행 갔을 때."
"맞아~ 마침 오늘이 딱 그 날이길래, 생각나서~"
"그 때 재밌었지. 막내가 그렇게 신나하는 건 처음 봤었어."
"너무 신나서 밤에 열 났잖아~ 그렇지만 아픈데도 웃고 있는 건 처음이었지?"
"그만큼 즐거웠다는거니까. 야. 말만 하기 심심하다. 한잔 하자."
"좋지~ 이럴 줄 알고 다이긴조 공수해놨다?"
"뭐? 허 참. 한잔 할 각을 이미 잡아놨었구만?"
"후후. 당연한 소릴~"
어느 칠석날 밤. 추억을 되새기는 스피델리 남매의 술잔은 몇번이고 술이 차올랐다고 한다. 밤이 기울어 날이 밝아올 때까지.
- 고통의 저주
- 이 재앙의 변덕스러운 장난 중에, 신체의 나이가 많아지는 기믹이 있다면 그 반대도 있다는 걸 그녀가 과연 몰랐을까. 아니, 알았다. 알고 있었다. 첫 유리병으로 약 10년 후의 육체를 경험한 것과 바깥을 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예상이 아니라 확신을 했었다. 절대로 그 반대도 있구나.
그러나 워낙 다양한 변화가 있다보니 그녀답지 않은 방심을 해버린게 화근이었다. 처음 이후로 연 유리병들이 전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한 환상만 연달아 봤더니 되려 사리분별 하기만 어려워졌다. 그래서 리치가 몰고 온 유리병을 보고도 아무 생각 없이, 경계 없이 열어 그 사단을 불러 일으켰다.
나중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걸 노린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하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변화를 겪을수록 당황의 교차는 커지고 그만큼...혼란스러워 할 테니까.
"꺅...!"
퐁, 하고 유리병이 열린 순간, 어른의 신체가 될 때와 다르게 몸이 이질감에 휩싸여 줄어드는 것에 그녀는 놀라 작게 비명을 냈다. 이미 변한 목소리가 한없이 낯설게 들린다. 변화는 한순간이었겠지만, 그녀는 그 순간마저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대로 잠시 웅크리고 있었다.
툭.
도르르르...
작아진 그녀의 손에서 유리병이 떨어져 방구석을 향해 굴러간다. 그 병을 가져왔던 리치는 굴러가는 병을 따라 쪼르르 가버리고, 귀여운 토끼가 되어 같이 방에 왔던 그는 아직 있었던거 같다. 적어도 오늘이 가기 전까진 보내주려 하지 않았을테니까. 그가 당황했을지 그 상황을 즐겼을지는 모르겠다. 예민한 토끼 귀를 잔뜩 가지고 놀아졌던 그다. 그러니 그녀도 당황스런 상황에 처하는 걸 보고 웃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유쾌하지 않았다. 단순히 놀림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이 모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몸, 이 나이를 그녀는 기억한다. 허나 언제까지고 웅크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
"......"
시간이 얼마 지나서야, 천천히 웅크린 몸을 들고 또 얼마가 지난 뒤에야 눈을 뜬다. 눈을 뜨고도 잠시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서야 제 상태를 파악한다. 일단 팔을 이리저리 들어보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 직접 모습을 본다. 모습을 비추는 그 속엔 지난 날의 그녀가 생생한 실체를 갖고 그 너머에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여린 몸뚱이에 넘어지면 부러질 듯 가는 팔다리. 창백한 피부에 똑같이 창백한 얼굴. 아이용 원피스의 긴 소매나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붕대. 전신을 훑어보며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은 어린아이 특유의 진한 속눈썹이 가뜩이나 흐리멍텅한 금안에 그늘까지 드리워 낯빛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곱슬거리는 은발은 검은 리본으로 예쁘게 묶였지만 은빛보다 잿빛에 가깝다. 만지면 부드럽다기보다 푸석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현재의 그녀를 상상하기가 몹시 어려울 만큼,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
"아, 아. 이거 안 걸리려고 조심한다는게 그만 방심했네요. 리치는 정말, 어디서 이런 것만 주워오는 거야..."
아니길 바랐지만, 목깃 뒤로 감긴 붕대를 보고 정말로 그 때 그 시절 몸이라는 걸 인지한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종알거리며 그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몸만 바뀐거지 의식까지 그 때로 돌아간 건 아니니까 괜찮을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작은 발로 타박타박 걸어가며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모습으로 그에게 재롱이나 떨자.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는가. 분명, 그 때랑은 다를 거야. 같지 않을거야. 커졌을 때도 별다른게 없었으니까, 지금도, 분명히...
그런 불확실한 기대는 그녀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 같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털석...
"어?"
몇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발에 뭐가 걸린 것도 아닌데, 걷다 말고 갑자기 풀석 주저앉아버린다. 의도한게 아니라는 건 놀란 표정과 순간적으로 나온 소리가 반증했다. 잠시 멍해져 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작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는 전혀 그녀의 의지를 들어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잘 움직이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그냥 장식인 것 마냥 늘어져 움직여주지 않는다.
"ㅇ...아냐, 아닐거야, 아... 아니야, 이건. 아니, 아니어야 하는데...?"
생각과 다르게 다리에 전혀 감각이 없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에서 그나마 있던 생기와 함께 미소가 사라진다. 동시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내 바닥을 짚은 손마저 바들바들 떨리고, 어떻게든 아닐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현실은 몇번이고 그녀의 바람을 꺾어놓는다. 다리에 이어 팔마저 감각이 끊기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쿵.
작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 눈 앞이 핑 돌았다. 그 탓인가 비명은 커녕 작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점점 흐릿해지는 눈 앞을 바라보게 된다. 색도 윤곽도 전부 뭉개지는 시야는 그녀의 어릴 적을 떠오르게 한다. 어릴 적, 멀쩡히 놀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받아 방으로 데려가고, 푹신한 침대에 눕혀 휴식을 취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긴 그녀의 어머니가 없다. 달래줄 어머니는 없지만, 고통은 똑같이 찾아왔다.
"으, 아윽.. 흐으, 으, 악...!"
감각이 끊겼던 몸에 일제히 감각이 되살아나며,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늘어진 몸이 이번엔 발작하듯 퍼덕인다. 생애 마지막인 양 고통스러워하는 몸짓에 곱게 묶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고운 옷이 구겨진다. 바닥을 긁는 팔다리로 인해 올라간 소매와 치마자락 밑으로 칭칭 감긴 붕대가 보이고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가는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작은 몸이 괴로워하는 그 모습은 마치 죽어가는 동물을 찔러 마지막 발악을 일으키는 듯 하다.
그것만이면 좋으련만. 아, 정말 그저 아픈 것만이 전부였다면 그녀는 참을 만 했을 것이다. 차라리 너무 아파 정신을 놓을 정도라면 더욱 좋았겠지. 그러나 이번에도 현실은 매정하게 그녀를 내쳤다.
전신을 칼로 저미는 듯한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절대 기절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한순간 소강상태가 된다. 몸의 감각이 돌아온 채로 통증 만이 싹 가시며 머릿속이 맑아진다. 세찬 파문이 일제히 가라앉은 순간 같다고 할까. 그래도 통증의 여운이 남아있어 쉽게 움직이지 못 하고 가는 숨만 몰아쉬다가 겨우 상체를 일으키면, 그 때를 노린 듯 새롭게 떨어지는 충격이 다시 그녀를 무너지게 한다. 정확히는 지금이 되야만 자각하는 것 때문에 그녀는 겨우 일으켰던 몸을 다시 웅크려야만 했다. 저번 수업 때 그랬던 것처럼 양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으면서.
....s........i...d..f......s....h.......n....k......l......
"ㅅ...싫어...."
.....q.........g......i....k....k....l...s.......r.....y...
"싫어.... 싫어, 그만! 그만...!"
약초학 수업 때, 그녀가 뽑았던 맨드레이크가 내던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괴이한 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온다. 한시도 쉬지 않는 모령의 목소리는 감미롭게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맨드레이크 다섯이 동요를 부르던 것처럼. 그러나 이 환청은 시시때때로 음색을 바꿔 두개골을 터뜨릴 듯 들리기에 계속 들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귀를 막아도 머릿속으로 들리니까 막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귀를 막는 건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발악이었다. 과거의 그녀가 아닌 현재의 그녀는 그 노래의 의미를 너무나 생생히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ㅇ...이제 더는, 더는.... 싫어......싫어! 제발, 그만해... 그만... 아악...!"
환청에 괴로워하며 제발 그만을 외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전신을 찢는 통증이 재발한다. 그 탓에 웅크렸던 몸을 펄떡이는 그녀. 고통으로 인해 더욱 선명해지는 환청에 시달리면서 손끝이 뜯기도록 바닥을 긁으며 애원했다.
어서, 어서 이 시간을 끝내줘, 제발. 끝낼 수 없다면, 끝나지 않는다면, 차라리...
- 유일하게 가졌던 희망
-
내가 그 말을 한 날은
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았던 날이었어.
이제는 말하는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어릴 적의 내 몸은 무르고 약했어. 아직 어리고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내 몸은 그 범주를 뛰어넘는 오류가 있었어.
그래. 오류.
그건 오류로 인해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전신의 신경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끊어지고 이어지며 사지를 찢는 듯한 고통을 주고, 고통이 길어지면 이윽고 환청도 들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누군가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와. 몇분, 몇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 들린 적도 있어. 한결같이 들리는 소리는 방심하면 내 의식을 어디론가 끌고갈 것만 같아서 두려웠지만 동시에 저 소리에 의식을 맡기면 편해질 것 같았어. 그 때 곁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난 진작 소리에 이끌려서 사라졌었겠지.
어머니... 내 어머니는 다른 남매들이 있음에도 헌신적으로 나를 돌봐주셨어. 내가 온종일 고통과 환청에 시달릴 때는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시고, 조금씩 자라며 아프지 않은 날이 늘어나게 되자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어. 그러면서 글도 배우고 말도 배우고 한 거야. 그리고 여러가지 개념에 관한 것들도.
지금의 내가 별난 사람인 것처럼, 나를 비롯한 남매들의 어머니는 격이 다른 사람이셨어. 뭐가 어떻게 달랐냐면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좀 많이 특이하시다고 할까. 그게, 아직 열살도 채 안 된 나에게 삶과 죽음 같은 것들을 가르치셨거든. 그 외에도 철학적인 개념이나 논리 같은 것도. 꽤나 특이하시지? 그런 사람이 나와 남매들의 어머니야.
다른 건 아무래도 좋으니 삶과 죽음에 대해서 배우게 된 걸로 돌아가자. 계기는 우연히 다친 새 한마리를 주운 것이었어. 아마 여덟살 중간쯤 되었던 때인 거 같아.
그 날은 몸상태가 다른 날들에 비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마당에서 노는 걸 허락 받은 날이었어. 하늘은 높고 푸르며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의 가장 좋은 날이었지. 나는 어머니가 입혀준 고운 원피스 차림으로 마당 풀밭에 앉아 클로버를 헤집으며 놀고 있었어. 말이 헤집기지 그냥 하나씩 뜯어서 앞치마에 올려놓는게 전부였지만.
그게 노는 건가 싶겠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주라. 당시의 나는 마당에라도 나갈 수 있다는게 진짜 너무 좋을 때였으니까.
검은 앞치마에 초록 클로버가 소복히 쌓일 쯤, 무언가 담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어. 아, 담장이 아니라 정원수다. 무슨 나무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잎이 푸른 나무들 중 한 그루 아래에 하얀 날개가 파닥거리고 있었어. 나는 앞치마에 모으던 클로버도 잊고 일어나 그 날개의 정체를 보러갔지. 날개의 정체는 하얀 새였어. 발 하나가 부러지고 날개가 이상하게 꺾여, 깃 일부가 붉게 물든 새.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퍼덕거리는 새를 아무 생각 없이 보고만 있는데, 언제 나왔는지 모를 어머니가 내 옆에 앉으며 말하셨어.
- 가여워라. 이대로면 곧 죽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나를 보며 웃는 얼굴로 그러시는 거야.
- 리체는 이 새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당시 내가 새에 대해 아는 건 날개를 가졌고 하늘을 난다는 것 뿐이었어. 그래서 이 새가 다시 날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하니까, 어머니는 말없이 다친 새를 앞치마로 감싸 들어올리셨어. 그리고 나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새를 치료하는 걸 보여주셨지. 마법이 아닌 약과 붕대로 손수 치료하시는 걸 말야. 그러자 새는 퍼덕대는 걸 멈추고 안정을 찾은 듯 얌전해져서, 나는 이 새가 다시 날 수 있느냐고 물었어.
- 다시 날 수 있을지 없을지, 리체가 직접 보면 되겠구나.
어머니의 대답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러면 되나보다 했어. 그렇게 다친 새는 나을 때까지 우리 집에서 돌보게 되었고.
며칠인가 지나서 죽어버렸어. 다시 날아보지도 못 하고.
새의 목숨은 정원수에 맞아 떨어졌을 때 이미 틀렸었던 모양이야. 어머니는 분명 알면서 데려왔던 거겠지.
아침에 일어나서 새를 넣어둔 보금자리에 가보니까 새의 몸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 그 며칠 사이 익숙해졌는지, 나를 보면 고개를 들고 쳐다보거나 걸어서 다가오거나 했었는데. 그 날은 내가 가까이 가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이상했어. 이상하다고 느껴서 손끝으로 살짝 만져본 새의 몸은 놀랄 만큼 낯선 감촉이었어.
처음으로 죽은 것을 접한 나는 이게 뭔지 몰라 당황했었던거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하면서 어머니에게 가 이것저것 횡설수설했지. 새가 안 움직인다, 안 따뜻하다, 딱딱하다, 이상하다, 대강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전혀 당황하지 않으시면서 나를 데리고 새의 보금자리로 가셨어. 그리고 죽은 새를 보시곤, 그 한마디를 하셨지.
- 결국 죽었구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하신 말에 나는 왠지 모를 기분이 들어 어머니께 매달렸어. 어머니는 나를 안은 채 새의 시신을 수습해서, 집 뒤의 작은 숲으로 향하셨지. 숲 안 쪽, 유난히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나를 한쪽에 앉히고 직접 땅을 파 새의 시신을 묻으셨어. 고요하고 적막한 숲 속에서 말없이 움직이시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무서웠어.
모든 과정을 홀로 끝내신 어머니는 다시 날 안고 집으로 돌아와, 비어버린 새의 보금자리 옆에 앉아서 죽음이란게 무엇인지 얘기해주셨어. 당시의 내가 알아듣기에는 어려운 말들이었지만 그거 하나는 알 수 있었어. 죽으면 더 이상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게 된다는 거. 그 사실만이 어린 내 머릿속에 깊게 남아, 그 날 밤 그렇게 말해버린 거야.
죽고 싶어요.
새의 죽음으로 나도 모르게 충격을 받았었는지, 평소보다 심하게 앓으며 허덕이는 중에 간신히 내뱉었던 걸로 기억해. 죽으면 더이상 아프지 않을테니까 죽고 싶다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그저 다독여주시기만 했어. 잠자코 내 증상이 가라앉길 기다리다가, 아픈게 덜해질 쯤 나를 안고 거실로 가서 하늘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내게 밤하늘을 보여주셨어. 무수한 별들이 흐린 내 시야로 인해 반짝이는 하늘을 보고 있으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지.
- 리체. 사랑하는 내 아이야. 내가 네 아픔을 덜어줄 순 없지만, 그렇다고 네가 죽음을 택하는 걸 그저 보기만 할 수도 없는 걸 용서하렴.
- 널 가졌을 때, 내가 널 낳는 걸 포기했더라면 이렇게 아파하는 너도 없었겠지. 사실은 그랬어야 했는지도 몰라. 네가 이런 아이일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네 존재를 안 순간, 널 낳지 않는다는 선택을 할 수가 없었어. 넌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고, 가여웠기에, 내가 잘못되더라도 너는 꼭 세상에 내보내주고 싶었단다. 네가 이렇게 고통을 겪더라도, 네게 세상을 보여주고 너 역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죽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하던 어린 내가 어머니의 그 말들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는,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어.
- 리체, 네가 지금은 죽음으로 편해지고 싶을만큼 아프고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이 고통이 끝나 너로 살 수 있는 때가 올 거란다. 그러니 조금만 더 견뎌주렴. 네 괴로움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네 곁을 지켜줄테니, 언젠가 네 발로 세상을 걸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주렴.
- 이 세상엔 아직 네가 모르는 것들이 많단다. 네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도 많고, 네가 만나야 할 사람도 아직 만나지 못 했단다. 그것들을, 그 누군가를 포기하지 말아다오. 너는 이렇게 아프기만 하려고 태어난게 아니라는 걸, 기억해주렴...
품 안의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잠에 빠져들어갔기에, 그 목소리가 갈수록 떨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 했어. 이윽고 잠든 나를 안고 어머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지. 밤이 지고, 하늘의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까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음을 입에 담은 그 날은
어머니가 나를 안타까워하며 우셨던 단 한 번의 날이기도 했어.
-
깊은 밤, 오래된 기억의 꿈은 그녀를 이전처럼 자다 깨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감긴 눈커풀 아래로 눈물 몇방울이 흘러내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날이 밝아 눈을 뜬 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한동안 베개를 적시고서야 겨우 멎었을 것이다.
- 그녀의 남매들에 대하여
파이몬(남)
갈색머리, 금안.
27세. 188cm의 키로 일가 중 최장신에 듬직한 체구. 잘 웃고 잘 떠드는 쾌활한 성격이다. 학교 졸업 후 일정한 직업 없이 방랑과 복귀를 반복 중이다. 딱히 집안에 손 벌리거나 하지 않는 걸로 보아 의외로 자급자족은 되는 듯. 그러나 딱 한번, 가문의 일로 손을 벌린 적이 있다. 남매 중 피지컬은 최상이지만 멘탈은 최약체(인 척 해줌). 연인은 없다. 아마?
어린 펠리체에게 기초체력을 길러주고 체술의 이것저것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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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스(남)
은발, 자안.
25세. 185cm. 마른 근육질 체형. 헬리아와 쌍둥이. 평소엔 너그럽고 시원스럽지만 성질을 건드리면 몹시 예민해진다. 까칠해지는 건 덤. 직업은 의류계 디자이너. 집안의 옷 9할은 블리스의 작품이다. (1할은 각자 취향)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다크서클을 달고 산다. 일이 바빠서라기보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 바쁜 타입. 본가를 나와 독립 생활 중. 교제 1년차인 동갑의 연인이 있다.
어린 펠리체에게 몇몇 현악기를 다루는 법과 간단한 바느질, 뜨게질 등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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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아(여)
은발, 자안.
25세. 174cm. 마른 글래머. 블리스와 쌍둥이. 늘 웃는 얼굴로 상냥하면서도 필요할 땐 독설도 서슴치 않는다. 직업은 나름 명성 있는 점쟁이. 복채가 입이 떡 벌어지게 비싼 대신 잘 맞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래서인지 가족과 본인의 점은 절대 안 본다. 점을 잘 봐서인지 운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독립했으며 블리스가 사는 빌라 아래층에 산다. 6개월 정도 만난 4세 연상의 연인이 있다.
어린 펠리체에게 약간의 천문학과 미인계, 사교에 필요한 화술 등등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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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니(남)
갈색머리, 금안.
21세. 184cm. 약간 허약함. 아직 얼굴에 미성숙한 앳됨이 남아있다. 어릴 땐 소심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담력이 생겼다. 만성 피로로 인해 말투가 좀 늘어지게 된 것. 블리스와 마찬가지로 워커홀릭의 상징(다크서클)을 달고 산다. 직업은 약초학과 마법약의 연구원으로 아직 말단이라 구르는 중. 왕게임 때 쓰인 변성 마시멜로의 제작자이기도 하며 다른 것도 있다. 아직 독립하지 않아 본가에서 살고있다. 일이 연인이라고 말하지만 아직 관심이 없을 뿐이다.
어린 펠리체에게 약초와 약에 관련된 지식을 일부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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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남매들에 대하여 - 2
- 막내동생의 연애 소식에 라온까지 찾아왔던 파이몬을 맞이한 건 당사자의 싸늘한 대접과 그런 그녀의 곁에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한 남학생의 모습이었다. 냉랭한 엄포에 굳어버려, 돌아서는 그녀를 바로 붙잡지 못 하다가, 뒤늦게 카페테리아에서 나와 쫓던 중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보고 만 것이다.
자신에게는 한겨울의 북풍처럼 싸늘하게 굴던 막내동생이 붉은 머리에 키가 훤칠한- 본인의 표현으로 기생오래비 같은 남학생의 옆에서 한없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파이몬을 그 장면을 보고도 차마 가까이 다가가질 못 했다. 지금 저기에 끼어들었다간, 조금 전 들었던 엄포가 현실이 될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서 둘을 갈라놓고 주먹으로 저 놈의 출신성분을 낱낱이 털어내고 싶었다만. 그것은 이루지 못 할 숙원으로만 가슴에 품은 채 그곳에서 나와야만 했다.
풀 길 없는 답답함을 어찌해야하나 싶던 파이몬은 남매들이라면 그나마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싶어 본가로 모두를 불러모았다. 그냥은 안 모일테니 회심의 술을 미끼로 부르니 다들 귀찮아 하면서도 모여주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라고 해도, 막내 개학하고 얼마 안 지나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네~"
"그러게 말이다. 난 이 시기에 파이가 여기 있다는게 더 신기해."
"...보나마나 리체 관련이겠지..."
"거 주둥이가 많으니까 한마디씩만 해도 시끄럽다. 야야, 떠들고 말고 잔이나 들어."
그렇게 간만에 남매들끼리 술자리가 열렸다. 다들 한 주량 하다보니 독한 술 두세병을 비울 때까지도 술기운은 티도 안 났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술이 도는 건 이길 수가 없었으니. 하나들 뭉근하게 술기운이 올라올 쯤 되자 이때다 싶었던 파이몬이 라온으로 그녀를 찾아갔던 일을 슬그머니 꺼냈다.
"야, 내가 있잖냐- 막내 그게 애인 생겼다는 말 듣고 거기, 거 라온까지 찾아갔었거드은?"
알콜의 기운 탓에 다소 말이 늘어지긴 했지만, 가서 무슨 대화를 했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저를 그렇게 대한 그녀가 기생오래비-애인으로 보이는 남학생과 얼마나 알콩달콩하던가 상세히 늘어놓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동감을 표해줄 줄 알았던 남매들이 보인 뜻밖의 태도들이었다.
"이야- 이 XX 진짜 찾아갔네? 아 이래서 내기하기 싫었는데."
"후후! 그 얘길 듣고 가만히 있으면 파이몬이 아니지~ 브리, 나중에 돈 똑바로 내놔? 응?"
"재미없긴... 사람이 너무 한결같아도 매력없어..."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두고 내기를 한 듯한 블리스와 헬리아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마음일거라 생각했던 델피니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해주거나 알아주지조차 않는 상황에 파이몬은 그나마 들었던 술기운도 깰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매들의 입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본인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뭐 내기야 그렇다 치고. 파이 너도 참 징글맞어. 리체는 더이상 그 때의 꼬맹이가 아냐. 그렇게 득달같이 굴 필요 없다고."
"아니 그래도 아직 성인도 안 된 애인데,"
"그래서 뭐, 언제까지 싸고 돌 건데? 어? 나이 차면 다 컸구나 하고 놔줄려고?"
"그건 그 때 가서 생각-"
"하! 야, 말만 보면 아주 그냥 평생 돌봐주기라도 할 거 같이 구는데, 팩트만 까볼까?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그 애를 포기했던 건 너잖아."
파이몬의 가장 아픈 곳, 아니, 가장 양심의 가책을 찌르는 말에 일순 자리가 조용해진다. 술맛보다 쓴 말을 들은 파이몬이 조용히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블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를 대신하듯 헬리아가 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 정~말 정말 큰 일이었지~ 우리 귀여운 막둥이가 매일 매일 바닥만 보고 다니는데, 그거 달래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그래도 딱히 파이를 원망하진 않았어. 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
"2년이나 돌봤으니까 그만하면 고생했고, 나랑 브리가 졸업한 해에 나갔으니까 그렇게 무책임하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럴 수 있지 하고 파이의 만행을 넘어가줬어. 나중에 돌아왔을 때, 리체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우리는 널 봐줬는데, 넌 왜 그래?"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아니? 뭐가 다르다는 거야. 같은거잖아. 파이가 제멋대로 나간 거랑 리체가 제멋대로 연애하는게 뭐가 달라. 따지자면 리체의 대처가 더 현명하지. 사후 보고긴 해도 말을 해줬잖아. 그런데 파이는? 말도 없이 나가서 2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돌아왔었지?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기어들어온 너를 책망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었나? 그런 대우를 받아놓고, 이제와 무슨 낯짝으로 리체에게 행실이 어떻니 따위를 따질 수 있어?"
"...젠장..."
블리스가 묵직하게 치고 들어간다면 헬리아는 특유의 나긋함으로 차근히 짓밟는 스타일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팩트만 짚으니 파이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죄인마냥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의 답답함을 들어달라 하려고 만든 자리에서 이렇게 역풍을 맞을 줄이야. 반쯤 마음이 꺾인 파이몬을 보고도 누구 하나 달래주지 않는다. 형식상의 위로도 없다. 델피니는 질린다며 술잔을 들고 자리를 피하고, 블리스와 헬리아만이 쿵짝을 맞춰 대화를 나눌 뿐이다.
"아, 맞다~ 브리, 그거 알아? 내가 진짜 재밌는 얘기를 하나 들었거든?"
"재밌는 거? 뭔데?"
"저~기 어느 나라에 우리랑 비슷한 약소 순혈 가문이 있는데, 유일하게 대를 이을 장자가 지병으로 죽어서 가문의 맥이 끊기기 직전까지 갔었다더라구. 여식도 있긴 한데 걔도 오늘내일 했나봐~ 그래서 그 가문에선 여기까진가보다 하고 가문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어떤 순혈 마법사가 나서서 그 가문의 맥을 이어주겠다고 했다는거야~"
"뭐야 그게. 그런게 가능해?"
"방법이야 없지는 않지? 듣자하니 이번엔 그 마법사가 그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걸로 했다던데?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여식의 병을 낫게 할 특효약까지 구해왔으니 가문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참~"
"왜, 그거 말고 뭐가 또 있어?"
"있지~ 그게 말야, 그 여식이랑 그 마법사의 나이 차이가 무려-"
쾅!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노닥이고 있던 중,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파이몬이 돌연 술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소음을 일으켰다. 마치 헬리아의 말을 끊으려는 것처럼. 그 의도를 읽은 듯 모두가 말을 멈추고 행동을 멈춘 채 파이몬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기가 꺾인 표정 대신 은근한 분노를 드러내는 파이몬을 보고 곧 헬리아가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어머, 파이, 그렇게 발끈하면 애써 이름을 감춘 보람이 없잖아. 아, 혹시 감춰서 화난거야? 오. 난 네가 열두살짜리 님펫(Nymphet)을 들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줄은 몰랐는데?"
"뭐야. 파이 얘기였어 그거? 아니 그보다 뭐? 님펫? 몇살?"
"...하, 누가 말려. 저 성질머리..."
꽤나 충격적인 얘기에 블리스는 대놓고 놀랐지만 저만치서 듣고 있던 델피니는 이미 알고 있던 얘기인 듯 미간만 찌푸렸다. 이번에도 화두의 중심이 된 파이몬은 좀더 선명히 화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이 파문을 일으킨 헬리아는 되려 소리높여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헬리아, 너...!"
"아하하하! 왜, 왜 그러는 건데? 난 감춰주려고 했는데 파이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감춰주기 싫어지잖아. 자초한거야. 듣기 싫어도 꾹 참았으면 그대로 지나갔을텐데."
"됐고.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거야. 분명 어머니 밖에 모르실텐데."
"후후. 알다시피 내가 발이 좀 넓잖아~ 단골 손님 중에 하나가 마침!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거든. 파이는 몰라도 '스피델리' 라는 이름은 아니까, 성이 같은 나한테도 얘기가 들어온거지. 아, 멍청한 파이몬. 알려지는게 싫었으면 적어도 성은 가렸어야지~ 우흐, 흐흐, 아하하하!"
"이.... XX!!!"
자신의 일을 갖고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파이몬은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제법 무게가 있는 문을 쿵! 울릴 정도로 닫고 나가는 걸 보며 남매들은 각자 웃고,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파이몬이 나간 뒤 제자리로 돌아온 델피니를 향해, 헬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 가문 여식의 특효약 만든 거, 너지? 델피."
"...알면서 뭘 물어봐..."
"아니~ 뭔 수를 써도 안 낫던 병을 고치는 약을 만들었다니까~ 대단해서 그렇지?"
"어, 그러게. 뭘 어떻게 한 거냐?"
"......리체랑, 비슷했으니까... 그래서 가능했어..."
"흐음, 그렇구나."
"뭔 소리야. 니들만 이해하지 말고 설명 좀 해봐 이것들아!"
대화 중간에 끼어든 블리스가 성을 냈지만 남은 둘은 입이 붙기라도 한 듯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저만 따돌리는 상황에 성이 난 블리스에게서 다시 쌍소리가 나오려 하자, 헬리아가 근처에 있던 과일조각 몇개를 그의 입에 쑤셔넣어 말을 막았다. 그런 다음 태연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꼬꼬마 리체도 애인이 생겼으니 곧 그게 오겠네. 잘 견딜 수 있으려나?"
"저번에... 약 보냈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아, 델피는 아직 모르지, 그거? 엄청 아프다구~ 누가 심장을 쥐고 이렇게 비트는 것 같이 아픈데-"
"아 아 아아아! 아파! 아픈거 알았으니까 그만해!"
"어머, 미안. 살짝 예시만 보여준다는게~"
헬리아가 설명과 함께 정말로 델피니의 왼쪽 가슴을 비틀었기 때문에 아픈 비명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파고들었던 옷 위를 문지르며 궁시렁대는 델피니를 보면서 잠시 키득댄 헬리아는 그제서야 쑤셔넣었던 과일조각을 다 먹은 블리스를 발견하고 말했다.
"자! 아직 술 남았으니까 한잔씩 더 하자~ 브리, 거기서 안주만 축내지 말고 잔 들어~ 아직 밤은 길다구~"
"이 망할! 내가 축냈냐 니가 먹였지! 이 화상아! 오늘이야말로 너랑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을 때까지 마실 줄 알아!"
"오! 나야 환영이지! 델피, 저기 창고 가서 몇병 더 꺼내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보자구?"
"...에휴... 밑 빠진 술독들 같으니..."
그렇게 남매간의 술자리는 최초의 목적을 잃고 파탄 직전까지 간 끝에, 날이 밝을 쯤 블리스와 헬리아가 동시에 쓰러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파이몬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뒷정리는 그 때까지 조용히 자작하던 델피니의 몫이었다고 한다.
- 고통을 사랑하기 위한.
-
#
나는 이제 너를 알겠다.
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
스피델리 가의 아이라면 누구나 듣는 말이 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렴.
이렇다 할 가풍이 없는 집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개념.
동시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언제부터> 그 말을 내세웠는지,
<누가> 그 말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위한 말인지.
이름을 이은 자, 그 누구도 모른 채
부모는 새롭게 태어난 아이에게 속삭인다.
"부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렴."
#
내게는 고통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고통은 내게 충실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
"마법사로 태어난다는 건 말야."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가면, 더 큰 세상과 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접해보지도 않고 그저 멀리하려고만 하잖아."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알고있어."
#
아 고통이여, 너는 결코 내게서 떠나지 않겠기에
나는 마침내 너를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
내가 학교에 입학하고 제일 신기했던 건, 여기저기 있는 움직이는 초상화들이었다. 별거 아닌 것을 신기해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한 동급생이 뭐 저런 걸 신기해하냐고 면박 아닌 면박을 주었다. 그의 말에 나는 불쾌해하거나 성을 내지 않고,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다고 순순히 말했더니, 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너네 순혈이래매. 집에 저런거 없어?"
"없는데? 순혈 가문은 다 있는거야?"
어린아이의 순박한 대답에 그는 되려 불편해하며 나를 피했다. 이 대화를 들은 주변 학생들도 한동안 나를 피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 불만은 없었으나, 한가지는 궁금하게 되었다.
왜 우리 집엔... 없을까.
초상화도. 기록도.
#
내 영혼이 심연의 바닥을 헤맬 때에도
고통은 늘 곁에 앉아 나를 지켜주었으니
어떻게 고통을 원망하겠습니까.
#
우리는 자유롭게 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자유롭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
혈통 나이 사상 가문 종교 지위
etc etc
무엇도 우리를 메어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유의 날개를 펼친 끝에
강렬한 빛을 만나
이카루스가 되었다.
#
나의 고통이여, 너는 더없이 사랑하는 연인보다 다정하다.
#
"살면서 가장 쉬운게 뭔지 알아?"
"뭔가를 소유하는 거야."
"내 두 손은 비었기에, 무엇이든 잡을 수 있으니까."
"내 마음은 공허 그 자체이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으니까."
"그럼,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뭔지 알아?"
"이미 가진 걸 놓아주는 거야."
"쥔 걸 놓았을 때, 찾아올 허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러니 놓을 수 없어."
"끝끝내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놓을 바에는,"
"그래. 차라리 놓아야 한다면."
#
너는 가난한 내 마음의 화롯가를 결코 떠나지 않았던 사람을 닮았다.
#
우리의 운명은 한날 한시에 시작해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끝났으나.
나는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오.
내 손이 꿰뚫었던
내 반신의 심장의 마지막 고동을.
그 단말마를.
영원히.
#
나는 알고 있나니.
내가 죽음의 자리에 드는 날에도
너는 내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와
나와 함께 가지런히 누우리라.
#
- - Tale of S -
- 옛날 옛날,
아주 멀지는 않은 옛날.
어느 숲, 어느 보금자리에
어느 고양이 형제가 살았어요.
한날 한시,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같은 흰색 털에 같은 푸른색 눈을 가진 쌍둥이었답니다.
사이가 아주 아주 좋았던 고양이 형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이자 동생이었으며
때로는 영혼을 함께 하는 동반자였어요.
어두운 숲 속을 탐험할 때도 함께였고
맛있는 먹이를 먹을 때도 함께였고
즐거운 놀이를 할 때도 함께였어요.
요람에서부터 함께 해온 형제를 갈라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였어요.
...
...
하지만
한 형제가 왜 두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어째서
하나에서 둘로 나뉘게 되었을까요.
보금자리의 가르침을 따른 형의 탓이었을까요.
가르침에 반항한 동생의 탓이었을까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된 서로는
서로를 보며 왜, 라고 물었지만.
답을 듣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어요.
멀리
멀리
더 멀리.
머나먼 길의 끝에서 서로는 다시 만났지만.
한 형제로 돌아가기에는 늦은지 오래였기에.
그렇기에.
마주한 하얀 꽃밭에서
붉은 길을 걸어온 고양이는 자신이 걸어온 색과 같이 물들어 잠들었고
없는 길을 걸어온 고양이는 몇번이고 덧씌워져 끝내 검게 물든 채 울었어요.
울고 울어
끝에 이를 때까지.
...
...
옛날 옛날
그다지 멀지는 않은 옛날.
한날 한시에 태어났던 어느 고양이 형제는
너무나 사이 좋은 쌍둥이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에서 둘이 되어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어
그래서 서로 다른 끝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렇답니다.
끝.
1.3.2. 사용 지팡이 ¶
재료 | 느릅나무 |
속재료 | 가장 현명한 매의 꼬리깃, 천둥새의 꼬리깃 |
길이 | 15Inch(약 38cm) |
|
2. 관계 ¶
선관은 이름 뒤에 ☆을 붙여주세요.
- [제갈 윤]☆
- - 같은 기숙사의 선배. 별궁에서 역사서 보다가 면식을 텄다. 같이 역사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보면 즐겁다. 별궁에 가는 또다른 즐거움일지도.
- 버니 선배의 습격 이후 라온에서 만났다. 느긋하게 대화한게 오랜만이라 좋았다. 백설이 살찐거 같아. 간식 얻어먹었다! 하지만 바쁘다며 금방 가버렸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조금 더- 아주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 산 건지 죽은 건지 모를 불청객의 습격으로 옆구리가 썰렸던 사건 이후 백궁의 별궁에서 마주쳤다. 언제든 사라질 것 같던 선배의 모습에 백호의 신탁이 겹쳐보여 난생 처음 애원이란 걸 해보았고, 그 결과 나는 그를 잡게 되었다.
첫만남부터 심장이 술렁이게 하던 사람아. 잡았으니 놓치지 않아.
- 휴양지에 와서 그저 산책만 같이 하려다가 그의 방까지 가버렸네... 내 사랑이라고 불러줬어. 내색은 안 했지만 엄청, 기뻤어...
- MA의 농간에 놀아나던 중 별궁에서 토끼가 ㄷ 아니 귀를 단 그를 봐버렸어! 세상에 그런 모습을 한 그를 가만 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너무 가지고 놀면 미안하니까 적당히만 했어. 나중에 방에 가서 마음껏 저질러버렸지만. 음. 약초학 수업에서 외면했던 것 때문, 이라고 할까, 덕분이라고 할까. 그의 본모습을 봤어. 연한 보라색 풍성한 머리에 눈은 그대로.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나보다 나이가...많아보여.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어린애로 보이지 않을까. 아니, 어린애인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나는, 정말로...
- 내가 그와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이가 라온으로 찾아온 날. 어떤 예고도 없이 라온에서 마주쳤어. 그는 보기만 해도 그 전의 불쾌한 일 따윈 아무래도 좋게 만들어. 그래. 마냥 기분이 좋던 나에게 그가 반지를 선물해주었어. 노호정이라는 요괴의 여우구슬이 들어간거래. 직접 끼워주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다음엔 꼭 같이 가서 고르기로 했어. 그가 그러자고 했으니까. 반지까지 줬는데 이 이상 그의 진위를 의심할 이유는 없을 거 같아서, 연인이 된 후로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줬어. 그는 이미 나를 내 사랑, 이라 불러주고 있기도 했고. 그런 내게 들려준 그의 이름을 나는 절대 잊지 않을거야. 레이먼드 그레이엄.
다음엔 레이먼드의 모습으로 안아달라고 하고 싶어.
- 모종의 문양이 몸에 새겨진 다음날, 수업도 째고 별궁에 박혀있었는데 그가 왔어. 낮잠자는데 부르길래 눈 떠보니까 있지 뭐야. 한창 심란했던 나는 시덥잖은 장난으로 그 자리에서 그를 붙잡아 문양을 보여줬어. 혹시나, 만약에, 하는 걱정을 정말 많이 했지만, 오히려 여우를 닮아 마음에 든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거품이 되어버렸지. 그리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어. 내가 로켓을 갖게 된게 그의 의도였다던가 각시의 습격은 단순한 화풀이이자 보여주기라던가. 마법부는 움직이지 않을거고 당분간은 습격이 없을 거라는 것도. 그는 내 투정도 받아들여 목줄도 해주기로 했어. 호크룩스를 만들고 싶다는 것도 언젠가 가르쳐줄 것 같아. 반지가 좋겠다고 했으니까 반지로 해야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걸로.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전날 밤새 앓아서인가 너무 졸렸어. 그래도 그의 품에 안겨 잤으니까, 절대 아쉽지는 않았지.
그리고 후일담, 이라고 할까. 며칠 뒤 주문한 목줄을 그에게 가져가 목에 채워주었어. 목줄이랑 한쌍인 줄도 있긴한데 이것도 쓸진 모르겠네. 어쨌든 잘 어울려서 기뻐. 내 사랑.
- [레오파르트 로아나]
- - 우울한 밤에 만난 동급생. 레오라고 부르라던 그녀는 정말 친절했다. 친구가 되는게 미안할 정도로 좋은 사람. 덕분에 잘 잘 수 있었다. 다음에, 같이 놀면 좋을까.
- [주단태]
- - 휴양지에서 절벽 다이빙을 같이 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뛰어들었다. 그렇지만, 내 앞을 막았는 걸. 대화도 좀 했는데 말투가 신기했어. 파이 같, 아니 이건 좀 심했다. 역시 마주치면 인사는 하는 걸로. 그런데, 그 날 밤 보였던 모습이랑 왜 이렇게 다를까?
- 금지된 숲 초입에서 같이 산책을 하며 대화를 했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안부 묻기 정도- 였을까. 전에 봤던 모습이 겹쳐보여 떠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연인 관계에 대한 것도, 내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냥 산책이 즐거웠던 걸로.
- [서주양]☆
- - (잡담 선관) 교감 선생님의 저택에서 한 방을 쓰는 걸로 안면을 텄다. 초면에 주궁 권유로 당황스러웠으나 이후 나눈 대화로 괜찮은 사람이라 판단했다. 절벽 다이빙을 권유할 필요도 없이 해보겠다고 해서 같이 했다. 좋은 사람이야. 이 선배.
- [샤오첸 리]
- - 그의 수족 중 할미탈을 가진 남자. 양반탈과 각시탈의 습격 때 사태를 수습해준 수족이기도 해. 라온에서 마주쳐서 간단히 먹고 마시며 얘기를 했지. 본의 아니게 그 사람이 혼날 구실을 줘버리긴 했지만. 진짜 혼나고 오면 애교로 달래주지 뭐. 샤오라고 부르기로 한 그는 자신들을 적으로 생각하라 했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걸. 나중에 그와 싸워야 한다면 난 기꺼이 지팡이를 들긴 하겠지만. 적의 없이도 싸울 수 있으니까. 헤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해간 걸 건네줬어. 간식이랑 멜리스의 태피스트리인데. 입에 맞았을까. 태피스트리는 잘 전해줬으려나. 궁금하네.
- [발렌타인 c. 언더테이커]
- - 학기 전, 가온에서 마주쳤다. 늘 지나치면서 보기만 했었는데 직접 얘기해보니 좀 많이 특이한 선배였다.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좋은 조언을 해주시기도 해서 먼저 샀던 책을 양보해드렸다. 다음에 뵈면 인사하자.
- 교감 선생님의 별장에서 휴가 중 잠시 마주쳤다. 단태 선배 다음으로 다이빙에 끌어들였다. 떨어질 때 뺩 소리가 참...귀여우셔라...(카구야 짤) 오드아이인 건 처음 봤다. 가리기 아까운 눈이던데. 얼굴도.
- 나날이 습격이 짙어지던 날 중, 우연히 월식 주막에서 한 테이블을 쓰게 됐다. 그동안 숱하게 스쳐지나가며 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얘기를 나누게 된 건 별장 이후 처음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선후배로서 대화를 할까 하다가, 내 쪽에서 먼저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선배는 보기 좋게 그걸 물었고. 그 뒤로는 모든 말이 순조로웠다. 나와 벨 선배는 같지만 다른 목표를 위해 같은 결과를 바라는 공모 관계를 맺었다. 적어도 서로가 후회하지 않을 결과를 위해.
후일, 본가에서 보내온 간식거리를 한 바구니에 담아 현궁으로 가져다줬다. 마지못한 척 가져가며 초콜릿을 보던 시선을 나는 꼭 기억해둘 것이다. '우리 아가'와 같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또 줘야지.
- 하차 및 변경
- 후부키 이노리
- 라온에서 산책 중 귀곡탑 근처에서 마주쳤다. 조막만한 몸으로 6학년이라고 해서 좀 놀라긴 했는데. 그냥 존재 자체가 특이하고 신기한 사람인 거 같아. 말투가 휙휙 바뀌는거나, 분위기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거나. 리치가 호의를 보이는 것도 의외였고. 괜찮은 사람 같아.
엘로프 아델횔드
- 라온에서 마주친 선배. 키가 엄청 크시다! 파이보다 커! 그렇지만 친절하시다. 좋은 느낌. 시력이...조금 그러신 듯. 패밀리어도 귀엽다. 다음에 이름을 물어보자. 그리고 인사도.
미츠무라 쇼고☆
- 1년 후배. 겹친 수업에서 부딪히고 넘어진 쇼고를 일으켜 주는 걸로 접점이 생겼다. 그 날 일으켜 준 쇼고가 너무 작고 가벼워보여서, 안된다는데도 한번 번쩍 들어보고 도망쳤다. 그 뒤로도 마주치면 종종 장난을 치게 되었다.
3. 아이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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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18
+25 갈레온(퀘스트)
+10 갈레온(퀘스트)
06/23
+50 갈레온(퀘스트)
06/24
+2 갈레온(퀘스트)
06/25
+25 갈레온(퀘스트)
07/01
+50 갈레온(퀘스트)
07/02
+4 갈레온(퀘스트)
M.리델의 태피스트리조각
뒤에 붉은 펜글씨로 천인공노할 죄인이라 적혀 있는 태피스트리 조각.
갈색 보브컷 헤어,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안의 여성이다. 밑에는 금색으로 M.리델이라는 글씨가 필기체로 적혀있다.
(본인에게 돌려주었다.)
07/06
+3 갈레온(퀘스트)
+10 갈레온(퀘스트)
07/09
+3 갈레온(퀘스트)
+10 갈레온(퀘스트)
+18 갈레온(퀘스트)
07/10
+18 갈레온(퀘스트)
07/12
+3 갈레온(퀘스트)
작은 아가야, 아가야.
쥐는 여기에서 힘을 키운단다. (주작)
07/13
+4 갈레온(퀘스트)
+4 갈레온(퀘스트)
조만간, 조심하라는군. (칼)
잡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칼)
07/20
+2 갈레온(퀘스트)
07/23
+2 갈레온(퀘스트)
07/30
+2 갈레온(퀘스트)
역사서 - 그레이엄 가문(이벤트)
07/31
+2 갈레온(퀘스트)
+10 갈레온(캡틴의 용돈)
08/02
거울다이스권(다이스 결과가 반대로 책정된다. 빚맞->맞음, 맞->빗맞으로 바뀌며, 대상은 1명에게만 사용된다. 1회용.)(이벤트)
08/09
+20 갈레온(이벤트)
08/09
+2 갈레온(퀘스트)
08/10
+3 갈레온(퀘스트)
가장 작은 짐승이 커졌을 때, 혼자 있지 마렴.
08/19
+2 갈레온(퀘스트)
흰 국화 한 송이(사용)
08/20
+2 갈레온(퀘스트)
08/21
+4 갈레온(이벤트)
거울 다이스권
08/22
+2 갈레온(퀘스트)
08/23
+2 갈레온(퀘스트)
무꾸리를 해보자, 무꾸리를 해보자.
이 가엾은 아이들의 시련이 어디까지일지 무꾸리를 해보자.
+2 갈레온(퀘스트)
MA의 잔상
더 많은 피와 죽음을 내게 가져와주련.
그리하면, 원하는 모든 걸 이뤄주마.
08/27
+5 갈레온(퀘스트)
4. 기숙사 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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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18
+10점(퀘스트)
+5점(퀘스트)
06/24
+10점(퀘스트)
06/25
+10점(퀘스트)
07/01
+10점(퀘스트)
07/06
+10점(퀘스트)
+10점(퀘스트)
07/09
+10점(퀘스트)
+10점(퀘스트)
+15점(퀘스트)
07/10
+15점(퀘스트)
07/12
+10점(퀘스트)
+15점(퀘스트)
07/29
+5점(퀘스트)
07/30
-5점(이벤트)
08/03
+5점(퀘스트)
08/09
+5점(퀘스트)
08/10
+5점(퀘스트)
08/19
+4점(퀘스트)
08/20
+4점(퀘스트)
08/22
+4점(퀘스트)
08/23
+4점(퀘스트)
+10점(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