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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함/키다리 아저씨

last modified: 2015-06-05 23:10:26 Contributors

상위 항목: 1 : 1 자유 상황극키다리 아저씨



1. 첫 번째 편지

진윤서

To.

수신인에 뭐라고 적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재단장님? 근데 재단장님은 어감이 이상한 것 같아요. 재단사랑 좀 비슷해서 자꾸 알록달록한 천이 떠오르거든요. 다음부터는 수신인 자리에 뭐라도 적로 싶은데, 마땅히 불리고 싶은 것 있으신가요?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의 호칭도 문제지만, 관리인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는 더 어려워요. 관리인님은 맨날 뵙는 분이잖아요, 그런데도 최근 몇주간 '저기……', '저……' 같은 걸로만 불렀다니까요. 그게 뭐예요.
분명 이름이 있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건 첫째, 언어 예절에 맞지 않고 둘째, 실은 제가 견디질 못하겠어요. '관리인님' 이라는 말은 너무 딱딱해요. 한자여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우리말로 바꿔서 '지기님'이라고 불러 볼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건 뭔가 이상하잖아요.

아무튼, 호칭에 대해서 벌써 너무 길게 써 버렸으니까 다른 얘기를 적을게요. 예를 들어 학교 얘기 같은 거?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은데, 고등학생 때보다는 훨씬 즐거워요. 우선은 고아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 수업을 들으면 되니까, 제 시간이 많아져서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신입생이다 보니 요즘은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일이 많지만, 중간고사 정도만 지나면 여가 생활 정도는 즐길 만한 시간이 나지 않을까요.
학교 수업이라, 교양 수업도 좋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문예창작에 관한 개론학이에요. 기초가 되는 부분부터 탄탄히 다지는 중인데, 지금까지 제가 썼던 글이 말랑한 젤리 같았다면, 지금 듣는 수업은 거기다 뼈대를 끼워넣는 과정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젤리랑 뼈는 잘 어울리지 않으니까 적절한 비유가 아니려나요? 어쨌든 어떤 기분인지 대강은 이해되시죠?

그리고 관리인님께 전해들으셨나요? 대학 새내기치고는 매일 제법 일찍 집에 돌아온답니다. 술을 전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전 제 체질 같은 것도 전혀 몰랐거든요. 근데 저번에 오리엔테이션을 갔을 때 소주 딱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온 몸이 다 빨개진 거예요! 온 몸이! (신기했어요.) 그래서 그 후론 선배들이 저한테는 술을 안 주시더라고요.
지금도 술자리에 가게 되면 맨날 음료수 신세죠, 뭐. 그때 그렇게 빨개진 것 덕분에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핑계댈 필요도 없게 돼서 편하긴 해요. 실은 술이 그다지 맛있는지도 모르겠던데요.
혹시 재단장님…도 술을 드신다면 조금 자제해서 드셨으면 좋겠어요. 하루에 소주 4잔 정도가 적정량이라고 해요. 또, 술이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하면 우리 몸에서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거 아셨나요? 이래봬도 고등학생 때 청소년 건전음주 홍보대사였거든요. 절대 청소년에게 음주를 권하는 게 아니에요! 건전음주를 권하는 청소년 홍보대사라는 뜻이죠. 수료증도 있어요.

적고 싶은 말은 많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이만 이쯤에서 줄일게요.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짧은 메모로 추신을 남기겠습니다. 후원에 관해서는 항상 감사해요.


윤영후

진윤서 귀하께

이 사람의 이름을 알려드리지 못하는 사정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마땅히 불리우고 싶은 호칭도 없군요. 이 편지를 다른 사람이 읽을 일은 없으니 계속 비워두어도 문제는 없겠지만, 원하신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는 무난히 아저씨라 지칭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그 일에 대해서는 관리인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너무 어려워한다며 푸념이 섞인 말을 늘어놓았지요.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조금은 편하게 해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빠르게 익숙해지고 계시다는 말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즐거우시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군요. 흔히 대학은 교육의 장이라기보다 사회와 선택을 경험하는 곳이라고 하지요. 오히려, 시키는 공부만 하면 되는 삶에서 벗어나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은 친구도 있습니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실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수업에 대해서는, 글쎄요. 부족한 글재주를 가진 본인으로는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부드러운 묘사에 틀이 잡힌 이야기나 주제의식을 넣는다는 걸까요. 두서없이 뭉쳐있는 이야기를 잡아늘여 머리와 꼬리를 정해주는?
이해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만일 틀렸다면 관리인을 통해 말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둘째치고 윤서 양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행히 좋은 학우를 만난 것 같군요. 술은 맛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로 한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없이 잘 어울리는 친구가 있는 것은 당신의 복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니 윤서 양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저도 음주를 즐기지 않고 필요할 경우에만 약간 하는 편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손편지를 받아보는 것은 간만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답장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혹여 그러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디 양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에게 과한 감사를 표하기보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십시오. 당신이 자격이 없었다면 받지 못했을 후원입니다.

2. 두 번째 편지

진윤서

To. 아저씨

답장을 받지 못할 걸로 생각했는데 답장이 돌아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관리인님이 직접 전해 주신 편지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뜯어 보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 정도였다고 하면 짐작이 가실까요?
바쁜 분이시니 타이핑을 해서 적은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필이어서 또 놀라고 말았지 뭐예요. 그리고 매번 답장을 받는 건 오히려 과분해요. 부담 갖지 마시고 이따금 짧게 프린트한 메모라도 괜찮으니 안부를 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아저씨'라고 적으니까 어딘지 새로운 기분이에요. 아저씨는 나이가 많으신가요? 아니면 이런 질문은 실례인가요? 하지만 궁금한데요.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자면, 글을 쓰시는 걸 보니 왠지 나이가 많으신 분 같아요. 관리인님보다는 연장자이실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반듯하면서도 한 쪽으로 약간 치켜올라간 독특한 필체를 갖고 계신 걸 보니, 그런 견고한 글씨체를 가진 분은 펜을 오래 잡아 본 분이시겠죠?
펜으로 썼는데도 고쳐 쓴 흔적이 없는 걸 보면 꼼꼼한 성격이시거나 의외로 한 번에 써내려가는 시원시원한 분이시려나요. 탐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저번 주에는 화이트데이가 있어서 사탕 비슷한 걸 만들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관리인님(아직도 적합한 호칭을 찾지 못했어요. 흑흑.)이 깨지 않게 조용히 만드느라 많이 애쓰느라 속도는 좀 더뎠지만. 재료는 그 전날에 다 사 뒀거든요.
제가 만든 건 중국에서는 '탕후루'라고 부르는, 설탕 시럽을 입힌 과일 조각들을 끼운 꼬치예요. 차마 사탕을 만들 엄두는 안 나서, 사탕 대신 만든 건데 그래도 꽤 귀엽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날 아침에, 관리인님 드리려고 학교 가기 전에 리본을 묶어 놓은 탕후루를 예쁜 접시 위에 놓아 두고 거실 탁자에 몰래 놓아 두었어요. 메모 적는 건 깜빡해서 그냥 나와 버리고 말았는데, 저녁에 집에 들어와 보니 빈 접시 위에 잘 먹었다고, 고맙다는 말이 적힌 메모지가 있더라고요.
무슨 공장처럼 거의 서른 개 정도는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 나눠 주고 나니 이제 남은 게 없어요. 그래도 물론 아저씨 건 미리 챙겨 뒀죠. 작은 종이 상자에 포장해서 편지랑 같이 보내니 한 번 드셔 보세요. 화이트데이 선물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관리인님은 의외의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처음에는 뭔가 좀 더 딱딱하고 날카로운 이미지인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친절하고 여러모로 신경도 많이 써 주시고요.
특히 웃을 때! 웃을 때. 주변의 분위기까지 한번에 삭 바뀌는 것 같아서 신기해요. 어찌됐든 잘 지내고 있답니다. 관리인님 집에 방을 얻어 살면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곤 집안일밖에 없지만, 그래도 제일 자신있는 것 중 하나도 집안일이거든요.
요리, 빨래, 청소, 맡겨만 주시라. 음…… 관리인님 집은 남자 혼자 사는 큰 집 치고는 구석구석 먼지 쌓인 곳 없이 깔끔해서 조금 무서울 정도긴 했어요. 그래도 요리만큼은 관리인님 입에 맞는 걸 해 드리고 싶은데, 무슨 음식 좋아하시는지 아시나요?

편지지 뒷면에 적은 더하기.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보고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렇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잠깐의 기억으로 사라져 버리는 시간들이 너무 아까운걸요. 저한테 이런 시간들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저는 편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써온 편지들은 항상 수신인 칸이 비어 있었거든요. 드디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어 기쁜 저의 애정 표현 정도로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노란색 메모지에 쓰는 더하기 하나 더.
아, 저 그리고 이제 핸드폰 꾸미는 법 알아요. 핸드폰으로 문자도 잘 못 치지 않았느냐고요? 에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걸요. 그런 기술쯤이야 금방 습득하죠. (금방이라는 게 두세달 정도긴 했지만.)
핸드폰 꾸미는 어플이 따로 있더라고요? 거기에 예쁜 것들 진짜 많아요. 진짜진짜. 여러가지 테마 다 다운받아서 배경화면 바꾸고, 아이콘도 바꾸고. 글씨체도 이제 딱딱한 고딕체에서 벗어났다고요!


윤영후

진윤서 귀하께

배려해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 장의 편지에 이 정도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받기만 해서야 도리라고 할 수 없지요. 앞으로도 별다른 일이 없다면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이번은 한가하기도 하니 답장을 드립니다.
엄지를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뜻을 전할 수 있는 시대에 꽤 찾아보기 힘든 취미를 가지고 계십니다. 전혀 괘념치 않으니, 앞으로는 적어도 보낼 상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나이라면 비밀일 것도 실례일 것도 없는 부분이지만, 혼자 즐기는 나쁜 버릇이 동한 터라 자세히 알려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훗날, 혹시라도 대면할 경우의 즐거움을 위하여 비밀로 해두자고 하면 귀하도 납득하실까 싶습니다. 추측하신 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 사람이 정말 그런 것 같아 재미있습니다. 스스로는 노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젊은 사람들 틈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심술궂었다고 생각되니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드리자면 본인은 시원하기보다는 꼼꼼한 편입니다. 답하기 전에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며 되새겨야 ‘겨우 쓸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면 얼마나 심한지 감이 오시겠지요.

화이트데이라! 영후 군이 제게 말할 때엔 ‘특이한 간식을 만들어놓고 나갔다’ 정도로 설명한 뿐이라 그런 사정이 있는 것은 몰랐습니다. 직접 먹어보면 상당히 달면서 과일 본연의 맛도 전해지는 것이 꽤 즐길 수 있었습니다.
대척점에 있는 발렌타인데이에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았군요. 본인의 입장에 있어 대소한 기념일을 전부 챙길 수는 없는 점을 이해바랍니다. 더불어 오해의 소지를 줄 수 없는 관계로 섣불리 보답하거나 할 수 없으니, 그만큼 제가 더 감사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관리인은 뜻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 성격과 사고방식으로 타인과 갈등을 빚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온갖 일에 정성을 들이는 편이라 남을 성가시고 불편하게 한 적도 많다고 합니다. 본인은 일을 맡기고 나면 편하게 있을 수 있어 선호하는 편이지만요. 윤서 양과는 별다른 문제가 없이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본 저도 그에게 ‘웃고 다니라’며 조언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항상 웃다가 한번 찡그리는 것보다, 항상 찡그리다가 한번 웃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말하는 것에 뭐라고 반론할지 모르겠더군요.
관리인은 대체로 매운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어제 등산을 마친 후 국밥을 먹을 때엔 시치미의 양이 지나친 까닭에, 보는 이 사람의 혀가 아려올 정도였지요. 그렇게 먹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데. 먹는 것을 막을 수도 없는 법이니, 집에서는 그 취향을 따라주는 것보다야 담백한 것을 강제해주셨으면 합니다……어쩌면 너무한 발상일지도 모르겠군요. 윤서 양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사족을 붙이자면, 관리인은 당신을 들이고 나서 내심 안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괜한 부담감에 가만히 있질 못한다며 불만을 토로할 정도니까요. ‘하숙에는 원래 숙식에 세탁까지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견을 구해오는 것을 맞장구쳐야할지, 아니면 설득해야할지.
본인은 윤서 양의 ‘짐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기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 지나쳐 윤서 양 스스로의 일에 영향을 줄 정도가 되진 않을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할 수 있도록, 가끔은 엄살을 부리면서라도 집안일을 떠맡기는 쪽이 오히려 관리인을 생각하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판단은 음식과 함께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편지가 직접 전달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우체국을 거치면 며칠이나 시간이 더 들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계속 관리인을 시켜 전하도록 해도 괜찮으시겠지요.
이만 줄입니다.

추신.

노란 종이에 쓴 글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젊은 세대치고는 습득이 늦다고 딴지를 걸어야하나요? 저는 핵심적인 기능만 쓰는 편이라 윤서 양이 당당히 자랑하는 것이 과연 어려운 부분인지 아닌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스스로가 쓴 것을 쭉 읽어보니 주체적으로 쓰는 이야기는 없고 비교적 수동적인 답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에게 재밌는 일이 워낙 적어 그럴 뿐이니 섭섭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근 일주일간 일어난 재미있는 일이 윤서 양의 편지를 읽은 것과 영후 군과 함께 등산을 간 것으로 끝이라면 말을 다했지요.

3. 세 번째 편지

진윤서

To. 아저씨

좋은 오후예요. 지금 저는 제 방 창문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일요일 오후의 햇살은 유독 나른하네요. 편지지에도 한가득 비치고 있는 이 여유로움이 종이에 배어서 아저씨께도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틈틈히 시간이 날 때에 낙서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저번 주에 종이나 펜 같은 것을 사려고 시내에 있는 커다란 문구점에 갔는데, 아주 예쁜 무지 노트가 눈길을 끄는 거예요. 겉표지에는 우주가 프린트되어 있는데다 가격 대비 속지도 꽤 탄탄한 것 같아서 사 버리고 말았어요.
제가 하는 낙서들은 다 어딘지 동글동글한 느낌인데, 나름대로 제 글의 분위기와 맞는 것 같아서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제대로 그림을 그리는 법도 배우게 된다면 동화책의 삽화도 직접 그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우선은 글부터 제대로 쓰는 게 먼저겠죠.

위 노트와는 별개로 아주 두껍고 무거운, 줄이 그어진 공책도 사서 들고 다니느라 항상 등하굣길엔 가방이 무겁네요.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빠짐없이 필기하려고 항상 눈에 불을 켜고 있답니다. 거기다 과제 초안을 적어 보기도 하고요.
학교 과제는 생각보다 자유롭고 가끔은 엉뚱하기도 해요. 저번 수업 때는 학교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나서 거기서 느낀 점을 글에 담아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도서관 앞의 벤치에 앉아서 우리 학교 캠퍼스의 아름다운 정경 같은 것을 적었는데, 의외로 캠퍼스를 돌아다니느라 다리가 아프고 더웠다, 하는 내용을 적은 학생이 칭찬을 받았어요. (뭐, 제가 좀 예찬적이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하기는 했죠. 하지만 고풍스러운 건물이랑 잘 어울리는 담쟁이덩굴 같은 것까지 제 눈에는 너무 예뻐 보였는걸요.)

충동구매는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공책이나 책 같은 것만큼은 너그러이 돈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옷을 한 벌 샀어요. 그건 조금 후회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꽃잎이 살랑거리는 봄에는 거리에 예쁜 옷이 너무 많단 말이에요. 괜히 마음도 동하고.
옷이 부족하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유독 마음에 든 예쁜 원피스였던 데다가 마침 거의 반값으로 팔고 있어서 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헤프게 돈을 쓴다고 나무라실 건가요?
그래도 제가 이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보면 아마 많이 나무라시지는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약간 채도가 낮은 분홍색 원피스인데, 치마 밑단을 따라 크림색 레이스가 나풀거리거든요. 그와 어울리게 크림색의 반팔 소매도 펀칭되어 있어서(남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용어일까요?) 아마 이 옷을 입으면 그 어떤 여성이라도 예뻐 보일 거예요.
그나저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게, 예쁜 옷을 사고 나니 이번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구두를 사고 싶더라고요. 점점 헤퍼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열심히 허벅지를 꼬집는 중이에요. 조금 안 어울리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잖아요.

다음 편지에서는 조금 검소한 모습을 보일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줄일게요. 강의와 과제 정도까지는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역시 시험은 조금 힘에 겹네요. 최선을 다해 준비해 볼 생각이기 때문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몸 건강히 지내세요.


더하기.
식사는 관리인님이 좋아하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이 관리인님 입맛에는 조금 싱거울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실은 제가 자극적인 걸 먹으면 속이 견디지를 못해서요.
그리고 집안일에 관해서는 타협할 수가 없지만…… 정말로 부담스러워 하신다면 아저씨 말씀대로 가끔은 관리인님께 맡기는 게 차라리 배려가 될까요? 제가 너무 고집스러운 것인지, 아직은 영 마음이 편하지를 않네요.


윤영후

진윤서 귀하께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 남짓 지났을 뿐인데 상당히 바빠져 평소보다 늦게 펜을 듭니다. 실제보다 마음이 더 급한 까닭에 여유롭게 적어내리기는 힘들 듯합니다. 문장이 다소 이상하거나 두서가 없어도 이해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도 윤서 양의 글은, 겨우 편지 세 통을 읽었을 뿐이지만, 편안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내용도 문장도 포근해 읽으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입니다. 그런 글을 쓰는 손도 그림을 그리는 손도 같은 사람의 것이니 닮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양으로 삽화나 그림에 관련된 과목을 수강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만 그런 류의 과목은 상당히 많은 양의 과제를 수반한다고 하니, 윤서 양의 말대로 어느 정도 여력이 생기면 손을 대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런 쪽으로 배워왔던 학생들에게 밀려 학점은 잘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배우는 것에 있어 남이 매기는 점수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으면 좋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최우선은 그 자신이 얼마나 배웠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가 점수와 재정 상태로만 수혜자를 선정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번 시험에 있어 너무 부담을 가지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 아이도 상당히 솔직한 학생이로군요. 그런 대범한 글은 재밌게 읽을 수 있겠지요.
윤서 양이 그런 일에 얽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노파심에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사람은 주관에 따라 가치를 결정하기 마련입니다. 교수는 자신의 시선과 꼭 맞아떨어지는 학생의 글을 윤서 양의 그것보다 쉽게 이해하고 깊게 느낀 것이 아닐까요. '어디서나 드러나는 불편'을 묘사한 학생의 것보다 생소했을 뿐, '어디에나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포착한 당신의 글이 그에 비해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같은 창문을 내다보도록 하는 것이 윤서 양의 향후 과제가 되겠지요. 좋은 글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법입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군가는 사고 또 입었을 옷이고, 이번에는 윤서 양이 그렇게 했을 뿐인데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펀칭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잘 자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소도둑이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 같군요. 앞으로도 그 눈이 흐려지는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문제는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요? 한걸음 물러서는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현재 처리할 일이 상당히 많아져 본인은 물론 관리인도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라, 윤서 양이 그렇게라도 도와준다고 하면 확 잘라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추신.
써놓고 보니 소위 말하는 오지랖과 ‘난 척’이 많은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언 이상으로는, 아니 조언으로도 생각하지 말고 잊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요? 연장자라는, 그리고 답한다는 사실에 너무 얽매여버린 듯합니다.
다음에는 저도 노력하여 편지다운 편지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주일은 부디 즐거움을 나눌만한 일이 많길 바라게 되는군요.

4. 네 번째 편지

진윤서

To. 아저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관리인님은 며칠 전에 감기 몸살인지 하루 심하게 앓으셨거든요. 두 분 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던데, 아저씨는 괜찮으신가요? 걱정되네요.
그러고 보니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편지밖에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불편하다는 느낌도 조금 받았어요. 관리인님이 아프셨던 날 말이에요. 핸드폰 번호나 따로 연락할 수단을 알려 주실 수는 없나요? 무리한 부탁일까요?

어쨌든 그 날,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고 있는데 관리인님이 일어나서 뒤에서 비척비척 걸어왔어요. 조금은 무슨… 좀비처럼? 이런 표현은 실례려나. 어쨌든 눈가도 퀭하고 얼굴도 하룻밤 사이에 엄청 수척해지신 게 나 아파요, 하고 얼굴에 써붙이셨던데요.
체온계를 못 찾아서 열을 재보진 못했지만, 이마가 진짜 뜨끈뜨끈했어요. 그래서 아침에 나가기 전에 급하게 간이로나마 쌀죽을 쒀서 억지로 어떻게 여차저차 먹였는데, 원래 아플 때 그렇게 밥먹는 걸 싫어하시나요? 고아원에 있을 때 돌봤던 어린애들만큼이나 죽 먹기를 싫어하셔서, 윤영후 어린이인 줄 알았네요.

아, 그리고 그날 하필 또 저녁까지 일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왔더니 아주 몸이 불덩이인 거 있죠. 집에 돌봐줄 사람도 없이 혼자 앓고 있으려니 밥도 거르고. 근데 또, 평소에는 어른스럽고 사무적인 (어느 정도는? 의외로 소소한 농담 같은 것도 많이 하시는 분이라 완전히 냉철하다고는 못 하겠네요) 분이 한참 아파서 골골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안쓰러워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이마에 물수건 올려 드리고 옆에서 자장가도 두 번이나 불러 드렸어요. 잘했죠? 어서 칭찬해 주세요. 아니, 뭐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안 해 주셔도 괜찮고요. 실은 그 날, 관리인님이 엄청 진실한 것 같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거든요. 솔직히 그렇게 진심이 담긴 것 같은 고맙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어요.
글쎄, 원래 그 분 자체가 묘하게도 신뢰를 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래도 맘대로 해석할래요. 진짜 고마워한 거라고. 아무튼 그래서 되게 뿌듯했어요. 좋은 일을 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제 노래를 좀 좋아하신 것 같아요. 자장가로 불러 드렸는데, 반쯤 감긴 눈으로 한 번 더 불러 달라고 부탁하시길래 한 번 더 불러 드렸죠, 뭐. 쪼끔 귀여웠어요. 근데 그 자장가 부르고 저까지 잠들었지 뭐예요.

오늘은 관리인님께는 비밀로 할 얘기가 많네요. 진짜진짜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몸조심하세요, 꼭! 너무 일 많이 하지 마시고, 관리인님도 너무 일 많이 시키지 마시고.

더하기.
관리인님이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리고 얌전히 누워 있는 그림. 좀더 가까이에서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도 있는데, 그건 제 보물 상자에 얌전히 들어 있습니다.
침대를 길게 표현한 게 이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암. 길다란 몸에 맞춘 길다란 침대랄까.


윤영후

진윤서 귀하께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관리인의 몫만큼 바빴을 뿐이군요. 이제는 무리할 일도 없이 어느 정도 한가해졌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인의 얘기도 해드리겠다고는 했지만 일이 계속되었을 뿐이라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쓸만한 이야기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이 여러모로 잘 풀리고 있어 여러분께 앞으로도 지원하고 상황에 따라 증량하는 것은 물론,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후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듯하다는 정도만 말해드리겠습니다.
관리인과 연락이 되지 않아, 저도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가 아팠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윤서 양의 생각은 이해하지만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관리인을 통해 연락을 받고 있고, 직통으로는 메일을 개설해둔 것이 최선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상당히 심한 상황이었던 듯한데, 혼자 내버려두었으면 얼마나 갔을지 생각하기 어렵군요. 영후 군이 아픈 일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저도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평소에도 간단히 하거나 건너뛰는 경우가 많으니 식욕이 동하지 않을 때 끼니를 거르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합니다.
윤서 양은 사소한 부분까지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재주가 있는 것 같군요. 신뢰를 준다는 것도 잘 듣지 못한 말인데, 영후 군이…….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랬던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남자는 아프면 애가 된다는 말도 있지요, 죽에 투정을 부린 일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지만, 다음에는 그런 곳에서 잠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은 봄이라 쌀쌀하기도 하니 주의하십시오. 말마따나 윤서 양이 전염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림도 잘 받았습니다. 이런 느낌이군요. 침대를……상당히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다른 그림도 궁금하지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저와 당신, 둘 사이의 비밀이니 타인에게 알려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적인 평가의 지표, 그리고 즐거움으로만 삼고 있으니까요. 여타 투자자나 감찰원들에게도 공개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당신께도 남의 말을 하면 안되겠지만. 본인의 가벼운 손을 조금 움직여도 심하게 탓하지는 않으시리라 믿어봅니다.
다른 분들은 정말 말 그대로의 보고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특히 프로그래머를 지망하는 학생은 뭐가 뭔지 모를 소리가 잔뜩이라 답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지요.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시작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정말 제가 바란 것은 보고가 아니라 윤서 양이 보내오는 이런 편지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일, 즐거운 일을 솔직히 전해듣고 같이 느끼는 것이 그들이 정말 무엇을 배웠는지 알기가 더 쉬울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제와서 편지로 바꾸라는 말은 못하지만 다음 장학생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리 말해둘까 생각중입니다.

그럼 다음 편지도 기대하겠습니다.

5. 다섯 번째 편지

진윤서

To. 아저씨.

몸이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좀 한가롭다니 더 다행이고요. 뭐, 한가로운 게 항상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이 잘 풀리고 있으시다는 걸 보면 나쁜 것은 아니겠죠?

전화번호를 알려주실 수 없다는 건 이해해요. 대신 메일이라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제가 메일을 보낼 일은 없겠네요. 아저씨도 메일보다는 편지를 더 기분 좋게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메일이 확인이 더 빠르기야 하겠지만, 왠지 손편지가 더 정감가잖아요. 쓰는 맛도 있고.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때 영어작문 대회에서 메일 대신 손편지를 쓰자는 내용으로 적었던 글로 상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아,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말 그대로 의 보고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하지만 보고라는 말은 너무 딱딱한걸요. 누구든 '보고'를 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말 그대로의 보고'를 보내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가 후원하시는 학생이 저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잊고 있었네요. 그 모든 편지에 답장을 다 보내시는 건가요? 갑자기 죄송해져요, 다른 학생들은 저처럼 자주 편지를 보내지는 않을 텐데, 그렇잖아도 이런저런 일로 바쁘신 아저씨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요.
바쁘면 답장을 건너뛰셔도 되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만 관리인님을 통해서 전해 주셔도 되는데.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어서 매번 편지에 손수 적으신 답장까지 바라는 건 과욕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전 무엇보다도 제 편지에 명확한 수신인이 생긴 게 기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요.

그나저나, 벌써 4월이에요. 시험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아저씨께는 별로 즐거운 내용이 아닐 테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는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을래요. 물론 공부는 항상 즐겁지만, 편지에 적을 만한 그만큼 즐거운 일들은 더 많거든요.
예를 들어, 식물 키우기? 이런 건 공부에 대해 적는 것만큼 재미없으려나요. 요즘 왜 그렇게 뭔가를 키우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뭔가 작고, 애정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아서 생각해 봤는데,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싶더라고요.관리인님이 싫어하실 수도 있고, 게다가 돈도 많이 들잖아요. 손이 많이 간다거나 보살펴 줘야 하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요. 글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얹혀 살면서 애완동물까지 욕심내는 건 너무 몰염치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나마 나름대로 생각해 본 절충안이 식물이에요. 짠! 음, 물고기 같은 종류는 그나마 자리도 덜 차지하고 돈도 적게 들고 조용하고 털도 안 날리고 괜찮아 보이지만, 이상하게 영 물고기는 어딘지 꺼려지더라고요. 쓰다듬어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럴까요? 만질 수가 없잖아요. 만진대도 미끌미끌하고, 으으.
그래서, 제일 무난한 건 식물이겠다 싶어서 어떤 식물을 키울까 고민중이에요. 아직 많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기왕이면 손이 덜 가면서도 예쁜 꽃을 피웠으면 좋겠는데. 침대 머리맡 창가에 둘 생각이니까 너무 크게 자라는 것도 조금 곤란하고요. 요즘 꽃집을 기웃거리는 중이에요.

아저씨도 뭔가 키우시는 게 있으신가요? 애완동물이라든지, 식물이라든지……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자식을 키우는 중이실까요? 전 정말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언젠가는 아저씨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기를 바라며, 진윤서 올림.


윤영후

진윤서 귀하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잖지 않은 신비주의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누구인지는 적어도 재단의 지원이 있는 동안에는 수혜자들에게 알릴 예정이 없습니다. 짧아도 4년이 되겠군요.
어느쪽이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메일을 선호하는 모양이고. 그래도 손편지에 각별한 맛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보고도 보고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의도는 정보의 전달이지만 그 내용뿐만이 아니라 형식도 방법도 다르기에 사람의 면면이 녹아난다는 것에 있을 겁니다.
확실히 모두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정도의 짬을 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괜찮습니다. 전에도 말했겠지만,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권리로 의무를 요구했지만 그건 '그래야 보낼 것'이라 생각해서였고, 수직이 아닌 수평 관계에서 받고 보내고 싶었습니다.

관리인은 윤서 양이 애완동물을 둔다고 해도 막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집은 재단의 소유니까요. 관리인도 재단에 얹혀 사는 것에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은 동등한 관계지요, 둘은. 다만 애완동물을 어떻게 여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윤서 양의 말에 선인장을 떠올리는 저는 조금 이상한 걸까요? 물의 양을 조절하여 꽃을 피울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강인하지요. 줄기와 가시만 있을 때의 모습도 상당히 재미있고.
식물도 애완동물도, 그리고 아이도 키운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삭막하게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인데, 유머를 표방하면서도 상당한 깊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책의 내용 자체가 꼬여있어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편을 펼쳐, 한참을 되돌아가서 확인하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다시 바빠지기 전까지 완독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비록 제 편지에 드러나는 것은 적겠지만, 향후 몇 년, 그것으로 만족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