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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의 히카루 ✟ | |
상태 메세지 | |
최초 레스 작성 일시 | |
알아야 하는 정보 | |
본명 | 와타누키 히카루(四月一日 光) |
나이 | 세는 나이로 16세 |
성별 | 남성 |
국적 | 일본 |
종족 | 반요 |
생일 | 4월 1일 |
직업 | 학생 |
상태 | (20/12/26) 실종? |
7. 독백 ¶
- 저승으로 가는 기차에 타고 안녕
- situplay>1596245055>173
지금, 센리 코우카의 손에는 한 서류 파일이 들려있다. 뭉텅이로 묶여있는 그 종이뭉치는 플레이아데스에게서 자신이 되찾아온 서류의 복사본 일부. '뭐, 이건 내가 훔쳤던 거기도 하지만.' 원 주인인 자홍의 왕과 싸웠던 기억이 남아있어 떨떠름함이 없잖아 있긴 하다. 그래도 그 서류는 2020년 초의 전투에서 그녀와 마젠타 자경단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 새삼스러운 감회에 빠진 채 이따금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파일 안 종이를 하나씩 넘겨본다.
우에하라 안즈. 세 가지 색을 주입받은 후에도 높은 수준의 자아를 유지하는 데에 성공.
마츠다 이치조. 츠쿠모가미와 영혼을 융합시킴.
니지마 카나데. 영혼의 세 가지 빛 중 하나를 자홍색으로...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실험체'들의 기록. 자세히 보기가 힘들어 뒤로 갈수록 이름과 사진만 훑어보는 데에 그쳤다. 비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한 전대 자홍의 왕 - 지금의 왕인 히나타 나츠미의 아버지가 죽은지는 6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류 안의 아이들 중 나이가 중학생을 넘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코우카는 이 서류를 넘겨받았던 때를 돌이켜본다. 평상시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있는 걱정과 미안함과 함께 자홍의 왕은 서류를 넘겨줬더랬다.
'여기 있는 게 내가 색을 가져가줬으면 하는 아이들이다, 이 말 맞지?'
'... 정말로 괜찮겠어? 나츠쨩은 지금 아무것도 못 준다니까는.'
'네가 신경쓰는 애들이라며. 너한테는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봉사 좀 해주지 뭐.'
'나는 그런 대접 받을만한 일 한 기억 없는데.'
웃음기 없이 중얼거리던 나츠미도 코우카가 보기엔 그 아이들과 별다를 바 없는 어린애였다. 착잡한 마음에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는 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본다. 착하고 어린 사람들이 너무 막중한 책임을 지는 걸 보면 신따위는 정말로 믿을 게 못 된다.
낡은 스피커의 안내방송이 눈 내리는 논밭의 기차가 곧 키사라기역如月駅에 도착함을 알려준다.
하늘을 향해 내쉬는 숨결이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도쿄보다 확연히 맑은 공기는 하늘이 흰 숨에 가려지더라도 은하수를 쇼에게 보여준다. 태어나고서부터 카부키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청년에게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시골 풍경은 이유 없는 고양감을 선물해주기에 충분하다.
신칸센을 내리고서도 일반 기차로 한 시간, 기차를 타고서도 마을버스로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시골마을. 주민 대다수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라 모든 소리가 쌓인 눈에 먹혀버린 듯이 조용하다. 마을에서 가장 큰 옛날식 저택에는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지만 청년이 마주한 아이들은 그 나잇대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말이 없었다. 마당에서 놀던 어린아이 두 명이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던 그 모습.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쇼가 보기에도 자못 섬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이질감이 청년이 저택 밖에 덩그러니 서있는 이유는 아니었다. 청년의 왕과 저택의 주인 - 키사라기의 자홍의 왕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 쇼는 할일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싶어도 낯을 심하게 가리는지 아니면 경계를 하는 건지 자신이 다가가면 아이들은 도망가기 일쑤였고. 별 수 없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눈 내리는 추운 날씨에 팔을 문지르며 은하수나 올려다보고 있는 이유였다.
뽀드득. 눈이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청년은 낮은 돌담에 기대 서 있었기 때문에 쇼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혹시 마을 주민인가, 자신이 길을 막고 있는 건가 싶어 기색을 살피려 하니 마을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중학생 정도 되었을까. 썩 호의적이지 않은 표정과 태도는 추운 겨울바람과 잘 어울리긴 한다. 그러나 나무 줄기를 닮은 갈색 곱슬머리에 반무테 안경 밑의 초록색 눈은 겨울보다는 봄에 더 어울린다.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소년 주위에만 오면 마치 자아를 가진 듯 소년에게 닿길 거부하고 피해버린다. 다른 세계의 장면을 엿보는 듯한 이질감, 다른 세계의 개념을 억지로 붙여놓은 듯한 위화감. 그리고 그건 저택에서 청년이 보았던 아이들과 똑닮았다.
소년 또한 이 마을에서 처음 보는 청년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눈밟는 소리가 멎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청년을 관찰한다. 처음 보는 길고양이를 만났을 때처럼 쇼는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하게 가만히 마주보기만 한다.
"... 생각보다 젊네."
응? 하고 되물었지만 방금 한 말을 다시 들려주진 않았다. 아마 단순한 혼잣말이었을 테지.
"도쿄에서 온 사람이죠."
"어? 엉, 그려. 맞어."
"... 정말 도쿄에서 온 거 맞아요? 웬 사투리?"
"고거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도. 니는 마에다씨네 사는 아 맞제?"
"...... 와타누키 히카루입니다."
불신과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는 있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아이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청년도 같이 인사를 해준다.
"왜 밖에 나와 있어요."
"기양, 뭐. 산책? 고라는 니는 뭐하다 인제 들오는겨? 여긴 뭐 할 것도 별로 읎어보이든디."
"미안하게 됐네요. 도쿄보다 훨씬 심심한 동네라서."
"... 아니 그런 말은 아녔는디. 음. 미안혀."
"... 됐어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녜요.'
이야기는 가능할 것 같지만 태도가 퉁명스럽고 말투 하나하나가 날이 서있어서 마음 편히 대하기는 아무래도 좀 힘들다. 한창 사춘기일 때라 더 이러는 건가? 청년은 본인이 중학생일 시절을 떠올리려 했지만 지금 상황에 도움될 기억이 마땅히 없어서 포기해버렸다. 소년은 시선을 살짝 땅바닥으로 내린 채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넣는다.
"도쿄는 막, 밤늦게 나와도 할 거 많고 그래요?"
"아무래도 그르지. 식당같은 것들도 늦게까지 여는 데 많을 것이고. 노래방이라든가 게임방이라든가... 아, 그래도 청소년은 일찍일찍 집에 들가라."
"젊꼰대."
"허허. 가끔 그런 말 듣긴 혀."
눈을 쭉 찢고 노려보는 게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냥 능청스레 넘겨버린다. 첫만남에 잔소리부터 하는 어른을 곱게 보기는 힘들 것이기도 하고. 다행히 깊게 한소리 하려던 건 아닌지 금방 대화를 원궤도로 돌려놓는다.
"여기보단 확실히 더 좋겠네요. 유배지 온 것마냥 사는 내내 숨막힐 필요도 없을 거고."
"글씨다. 으떨란지."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썹 한 쪽을 올린다.
"뭐어, 좋은 사람은 좋고 나쁜 사람은 나쁘기도 하단 말이여. 으데나 그렇듯이. 그나저나 니 도쿄에 관심 있나? 함 가보고 싶은겨?"
그 한 마디에 계속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곧바로 들어올린다.
"데려가줄 거에요?"
소년의 태도가 곧장 바뀐다. 허리를 곧게 펴고 결의에 가득 차서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황한 청년을 똑바로 마주 올려본다.
"나도 카부키쵸에 데려가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저기..."
"돈이 필요하면 지금까지 모아둔 용돈도 있어요. 솔직히 싸움도 아무한테도 안 질 자신 있고, 내 능력도 분명 황의 왕님에게 도움될 거야. 그놈의 색인지 뭔지 이제 와서 하나둘 더 받는 거 안 무서우니까 날 부하로 만들면 되잖아. 너희도 좋고 나도 좋고, 오히려 너희에게 더 좋은 거잖아요. 나도 갈래."
상당히 당황스러운 제안이다. 보호자 두 명(카부키쵸와 키사라기의 자홍의 왕 두 명)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란 점이 첫 번째 문제점이고, 청년은 아직 어린 청소년이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이는 걸 고깝게 본다는 게 두 번째였으며 무엇보다 쇼가 모시는 왕은 세력을 넓히기가 매우 힘들고 눈치도 보이는 상황이다. 어떤 이유로 상경하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쇼의 판단으론 받아주기 매우 힘든 부탁이었다. 옆머리를 검지로 살짝씩 긁는다. 어떻게 해야 원만하게 거절을 할 수 있을까. 팔짱을 끼고 되든 말든 일단 말이나 해보기로 했다.
"우리도 말여, 사정이 있어가꼬."
"......"
"뭣보다 니를 우리가 델꼬가뿔면은 우에 있는 분홍왕님이 삐져부릴지도 몰겄구만. 여 있는 어르신께도 허락을 받어야 할 것이고."
"그놈들이 내가 나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잖아."
청년의 말을 가로막고 한 마디 툭 내뱉은 소년은 짜증이 날 대로 났다는 태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 길이 저택과는 정반대편이었기 때문에 청년은 다급하게 소년을 불러세운다. 히카루가 그런다고 멈춰설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본새를 보면 데려가줄 것 같지도 않은데 더 얘기해봤자 뭐 해?"
"으데가 야, 집 안 갈겨?!"
"신경 끄시지. 꽉 막힌 어른놈 잔소리따위 들을 것 같냐."
길모퉁이를 돌아 청년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쇼가 무언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마음 상하게 한 걸 사과하기도 해야 하고, 밤이 늦었으니 집에 데려가는 게 어른으로서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급하게 소년이 들어갔던 외진 길목에 뛰어가 섰지만, 가로등 없는 시골길의 어둠에 녹아버린 듯 소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시각, 저택의 사랑방에는 두 명의 왕이 마주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저녁 즈음에 쇼와 함께 마을로 찾아온 황의 왕, 센리 코우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저택의 주인이자 키사라기의 자홍의 왕인 마에다 히로토. 송이송이 내리는 눈만큼이나 얇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었고, 가늘은 눈은 자글자글한 주름과 함께 곱게 접혀 있다. 기차에서 보던 서류를 건네받을 때 같이 설명받은 바에 따르면, 나츠미가 연구소에서 구출한 아이들은 평소에는 이 노인이 위탁받아 돌봐주고 있다고 한다.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에 걸맞는 느긋한 성격인지라 언젠가 그녀가 초록의 왕을 만났을 때와 달리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라 그런지 빨리 자네요. 가능만 하다면 아이들 금방 봐주고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어 바쁜 일 있다고 그래 서둘러. 한 며칠 있다 가, 애들도 좋아할 거."
"있어봤자 폐만 끼칠 텐데요. 마에다씨 신경 쓰이시니까 얼른 가는 게 낫죠."
"그래도 한 밤은 자고 가는 게 좋아요. 위험해."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야 나오는, 읍내에 위치한 기차역. 저택에서 거리가 있다지만 소년 입장에선 밤에 등교길을 걷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주변이 어둑어둑해도 초록빛 가득한 눈에는 어둠따위 아무 악영향도 주지 못했으니.
"혹시 키사라기역 괴담이라고 들어본 적 있남?"
"어... 네.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어른이 자기가 하는 말을 순순히 들어줄 거라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어차피 인간들이란 자기 이득만 챙기려 드는 족속이 아니었던가. 보나마나 나이 운운하면서 이 답답한 새장에 계속 가둬넣으려고 했던 거겠지. 어른들은 선의니 배려니 봉사니 하는 것도 모르는 놈들이다.
역시 처음부터 나 혼자 하고싶은 대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원래는 그런 괴현상따위 전혀 없는 역이었는데, 아마 누가 장난이라도 쳤는가. 언젠가부터 키사라기역에서 귀신 사는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괴담이 생겨버렸네."
"그건... 귀찮겠네요. 담력체험같은 거 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그것보다 더 위험한 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짜가 되어버린거."
역 플랫폼의 벤치에 털썩 앉는다. 이놈의 시골마을은 밤이 되었다고 벌써 역무원이 퇴근을 해버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기차가 올 때까지 노숙이나 하며 기다릴 생각으로 역 간판 달린 벽에 몸을 기대 다리를 쫙 편다. 소년이 머리를 기대고 있는 오래된 역 간판에는 키사라기역きさらぎ駅이라는 낡은 글씨가 박혀 있다.
"실제로 실종된 사람들이 있어."
"... 키사라기 역에서?"
"아마도 기차가 데려가버린 거겠지. 우리 할멈도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진 잘 모르겠다 하더구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평소에도 시간 감각이 망가졌던 소년으로선 그저 눈 한 번 깜박거렸다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터널에서 역쪽으로 새로운 빛이 두 개 더해진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가 점점 속도를 낮춘다. 이 역에서 정차하는 모양이었다.
"... 하하, 너무 겁줬나?"
"겁주다니요..."
"걱정은 붙들어 매. 해 떴을 때에만 가면 아무 문제 없드라고. 그래서 자꾸 자고가라 하는 거. 한숨 푸욱 잤다가 내일 가. 엉?"
"그래야겠네요. 그럼 하룻밤 신세 좀 지겠습니다."
기차 문이 천천히 열리고 조명 꺼진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 문제 없는 인간이었다면 섬뜩함을 느꼈겠지만, 소년의 영혼은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상태였다. 인간보다는 요괴가, 일상보다는 비일상이 더 친숙하다. 그래서 소년은 망설임 없이 기차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히카루를 태운 기차는 천천히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기차칸 내부도 조명이 켜있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어둡지는 않았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별빛이 어둠 대신 빈 공간을 채워주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더니 이미 기차에 타있던 손님이 한 명 있었다. 푸른 달빛이 부서지는 짧은 머리카락은 깊은 검은색이었고, 일본인이라기엔 까무잡잡한 피부를 뺀 전신 또한 새카맣다. 히카루만한 나이의 자식이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여성. 중동쪽 사람인 듯 이국적인 외모는 그녀와 그 공간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히카루는 이유도 없이 그녀가 편안하고 안심이 된다.
눈주름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검은 눈동자가 히카루를 바라본다.
- 이상한 나라의 히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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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루가 기차 좌석에 앉는다. 반대편 창가 좌석과 마주보도록 배치된 구조인지라, 어디에 앉더라도 또 한 명의 승객을 싫어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선객과 최대한 떨어진 반대편 좌석에 몸을 낑겨 붙는다. 어색함을 피하려는 소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중년 여성의 시선은 계속 히카루를 향해 있다. 집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히카루의 본능이 외쳤다, 친절한 아줌마가 나를 걱정해주고 있어! 그러나 의식 한켠에서는 그 시선은 명백히 자신을 평가하는 시선이라고 판단한다. 기묘한 양가감정이 불쾌해져 히카루는 여성에게서 눈을 돌린다.
덜컹, 덜컹. 북쪽으로 달려가는 기차가 터널로 들어선다. 서늘한 기차칸의 정적을 여성이 먼저 깨부순다.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안녕하세요."
히카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밤에 어디로 가시나요?"
계속 무시하면 제 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그녀에게 기묘한 호감과 안심을 품는 제 자신이 이해되질 않아 부러 심술을 부린다. 딴짓을 할 요량으로 핸드폰을 켜보았으나 전파가 통하지 않는다. 에이 씨. 이 와중에도 다른 세계와 통하는 라인방은 접속이 되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접속자도 아무도 없다. 애꿎은 액정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소리.
"피차 먼 길 달려야 할 텐데, 저와 말동무라도 하지 않으실래요?"
결국 기싸움에서 히카루가 졌다. 초록빛 눈동자가 여성을 쏘아본다.
"닥쳐.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그야 물론 저희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긴 하지만요."
검은 여자가 말을 흐린다. 이제 몇 번 더 말을 걸다가 내가 짜증난다면서 화를 내겠지? 다 알아. 나하고 대화하는 사람은 다 그랬었는걸.
언젠가 나를 상처입힐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다가오지 않으면 좋을 것을. 히카루는 타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기를 의도했으며,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욱 더 가시를 세우기도 했다. 본인이 제멋대로라고 평가하는 인간들처럼 히카루도 쉬이 이해하기 힘든 청소년이다. 그리고 검은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상도 히카루같이 모순이 넘치는 인간이다.
조심스레 접근하는 건 역효과겠네. 그럼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가볼까?
한 차례 히카루에게 모진 말을 받았음에도 여성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이런 곳에서 같은 반요 동료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던 건데."
"...... 뭐라고?"
"어머. 모르셨나요? 저도 반요랍니다. 당신과 똑같아요. 인간도 요괴도 아니죠."
자기가 잘못 알아봤냐며 묻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정말일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예정에 없던 기차를 탔더니 우연히 그 드물다는 반요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히카루의 이성과는 달리 가슴 속에서는 자그마한 기대가 싹을 트기 시작했다. 히카루 본인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온전히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가.
"...그, 그게 뭐, 어쨌다고."
"이 나이 먹고 부끄럽지만..." 후후, 입을 살짝 가리고 작게 웃는다. "반요는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한번쯤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다른 반요분도 저처럼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받지 못하고 사는지가 궁금해서... 웃기죠?"
히카루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평소에 히카루가 하던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닌가! 거짓말을 들킨 어린아이의 기분이 들어 부끄럽다. 볼을 붉힌 히카루에게 여성이 그쪽 자리로 가서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히카루는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았으며, 그 긍정의 표시를 받아들이고 여성이 자리를 옮긴다. 히카루와 똑같은 방향 좌석에 거리를 두고 앉는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 와타누키 히카루."
"히카루였군요. 좋은 이름이네요."
"방금 만난 사람한테 벌써부터 요비스테라니 거리감 이상한 거 아냐?"
"기분 나빴나요? 미안해요.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 반요니까? 허,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지."
이해에 기반한 실소를 터뜨린다. 네. 반요니까요. 여성이 맞장구를 친다.
"반요는 뭔 말을 해도 사람들이 싫어하잖아. 시비 건다면서."
"대화의 맥락을 읽기가 힘들죠. 종종 나만 세상에서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나는 분명 내가 하고싶은 걸 했을 뿐인데 왜 분위기를 맞추질 않냐고 눈치받고."
"나와 얘기하는 친구가 왜 웃는 건지도 잘 모르겠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질 모르겠어."
"무슨 말만 하려고 해도 무시받고. 어리니까, 중2병 걸렸으니까, 히카루가 하는 말은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대충 대답해도 괜찮을 거야. 그게 이유가 되냐고."
"너무 이기적으로 산다고 자주 듣죠. 항상 자기 생각밖에 안 한다면서. 다른 인간이 얼마나 이타적으로 사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렇죠?"
여자가 되묻자 히카루가 곁눈질로 여자를 바라본다. 마침 그 타이밍에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온다. 여성이 고개를 기울여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목선을 타는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데 너무 들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러 헛기침을 한다.
"...... 뭐, 대체로 그런 편이지."
"역시 말을 걸길 잘했네요.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
"네? 잘 안 들렸어요."
"나도 그렇다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부끄러움을 참느라 히카루의 귀가 새빨개졌다. 그 빨간 귀를 보며 웃던 여자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린다.
"그런데... 왜 이런 심야에 혼자 기차여행을 나오신 건가요?"
"......"
"혹시 힘든 일이라도 있나요."
각 무릎에 양쪽 팔꿈치를 두고 깍지를 낀 손이 꿈틀거린다. 검지손가락이 주기적으로 반대쪽 손등을 두드린다. 히카루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여성은 조용히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
"... 도쿄에서 해야 할 게 있어."
"도쿄로 가시나봐요."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목표를 이루려면 도쿄로 가야 해. 원래는 좀 더 돈도 모으고 힘도 키운 다음에 가려고 했는데... 그 사투리놈이 이유도 안 묻고 무작정 깔보는 바람에."
"그래서 그 사람에게 히카루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군요?"
"...... 응."
"무슨 목표를 이루고 싶으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깍지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가 뭐라고 나를... 어차피 말해줘봤자 이해 못 할걸."
"설령 이해를 못 한다고 해도 히카루를 무시하진 않을게요."
"......"
"그래도 안 될까요?"
... 믿어도 괜찮을까? 이상한 친밀감과는 별개로 아직 이 사람을 믿어도 될지는 확신이 완전히 서지는 않았다. 그래도 히카루는 이해받고 싶었다. 나와 소름돋도록 똑같은 이 사람도, 그렇다면 내가 믿어주길 바라지 않을까?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목표를, 불안하고 어색해서 조금씩 떠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한다.
"...... 복수할 거야.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다 죽여버릴 거고, 내 가족들 괴롭힌 놈들도 한꺼번에 죽여버릴 거고, 조금이라도 연관 있다 싶으면 다 죽일 거야. 내가 괴로웠던 만큼 그 놈들도 고통스러워야지. 싸그리 싹 다 불태워버릴 거고 비명지르면 밟아버릴 거고 도망치면 찔러버릴 거고 그리고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광인처럼 지리멸렬한 말을 빠르게 쏟아낸다. 동공은 옛적에 풀려버려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만 좇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차가운 감옥에서 그저 썩기 직전까지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을. 평범할 수 있었던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사람들을 찾아가 업보를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었다. 나라면 할 수 있어. 히카루라면 할 수 있다. 그것만을 바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바람을, 살아가는 이유를, 겨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도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를 변명을 하며 거절했지 않은가! 그러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지.
그래.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나쁜 건 죄다 어른들인걸!
만나는 족족 다 없애버릴 거야. 흔적도 남지 않도록 죄다 죽어버려!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히카루의 고개가 홱 틀어진다. 균형을 덜 잡은 히카루의 뇌에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여성의 새카만 눈이 박힌다. 유난히 기뻐보이는 미소로 그녀는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 - * - *
입술에서 나오는 숨이 하얗다. 아무리 도쿄가 키사라기 마을보다 북쪽이래도 이렇게나 날씨가 춥다니. 마침 송이송이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히카루가 제 팔뚝을 쓸었다.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올걸.
파랗고 빨간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자기주장을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럽다. 차도는 바퀴 소리가 너무 커서 거슬렸으며, 히카루를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은 꼭 하나씩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정말로 핸드폰 없는 사람이 안 보이네. 신기해서 주위를 둘러보면 대형 전광판에선 늙은 아나운서가 처음 보는 나라의 정치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도시는 히카루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시끄러웠으며, 훨씬 더 화려했다.
'이 목걸이를 드릴게요.'
'같이 가주는 거 아니었어?'
'미안해요, 저는 도쿄에 오래 머물기가 힘들어요. 대신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순간에 목걸이를 사용하시면 당장 도움을 드릴게요.'
'목걸이를 사용하라니...'
'그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올빼미를 크게 불러주세요. 딱 세 번, 새하얀 올빼미가 히카루를 도와줄 거예요.'
목에 걸린 검은 날개모양 장식을 꾹 쥔다. 아직 올빼미를 부르진 않을 테지만,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단 걸 느끼고 싶었다.
'저는 스바루昴라고 불러주세요. 히카루, 나의 친구.'
스바루. 나, 꼭 성공할게.
그녀를 만나고부터 몸이 가볍고 기분도 홀가분한 게 모든 걸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애초에, 소년에겐 초능력이 있으니 실패하기도 참 어렵겠지만! 히카루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아, 오늘은 정말로 운이 좋을 것 같다.
복수를 초록 눈동자 속에 담은 소년이 카부키쵸에 도착했다.
- 토끼굴 속으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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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과 청소년의 집단따돌림은 극히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한다. 저 아이는 만만해보여, 저 아이는 놀려도 별 말을 안 해. 저 아이는 뚱뚱하니까, 운동을 못 하니까. 이상한 말만 하니까, 분위기를 안 읽으니까, 거슬려서, 짜증나서, 꼴보기도 싫어. 따돌림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릴 수 있을까? 네가 말만 좀 더 잘 했어도,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을 했으면, 네가, 스스로, 너 혼자, 문제를 고쳤었더라면. 그런 가정이 유효할 때가 있을까?
히카루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근본적으론 그의 영혼 자체가 문제였고, 영혼에서부터 질적으로 다른 인간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은 것도 원인이었으며, 몰이해에서 오는 특이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였다. 단적으로 말해, 다른 아이들을 히카루를 '눈치를 안 본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거절의 의사를 파악하지 못하고 다가갔다가 버려진 경험이 쌓이고 쌓여 '먼저 다가가봤자 다들 떠나버리니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말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배타적인 태도는 히카루에 대한 또래의 시선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악화시켰다. 악순환이 쌓이고 쌓인 끝에 히카루의 인간불신은 최고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히카루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인구가 적은 시골 동네는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가 바뀌어도 마주보는 얼굴들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 탓에 히카루와 척을 진 친구들과 거리를 둘 여건이 되지 못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은밀한 따돌림은 신체적인 폭력으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히카루도 가만히 맞고 있을 성격도 실력도 아니었기에 당한 만큼 되돌려줄 때가 많았다. 어른들한테도 문제아니 불량아니 하는 수식어를 받길 시작할 무렵이었다.
중학교 2학년의 1학기가 끝나갈 즈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선빵을 한 대 맞고 반격을 세 대 때리고. 난장판이 된 결과 양측의 보호자가 학교로 불려오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죄송합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렇게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를 바라보질 않으니. 심지어 한 지붕도 아니고 한 트럭에 한 명은 운전석으로 한 명은 보조석으로 앉았음에도 서로는 서로를 보려하지 않는다. 운전대를 잡은 손을 내려보는 분홍색 시선 하나와 창문 너머 건물 너머 산 너머 어딘가를 좇는 시선 하나. 한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를 바라보질 않으니 지금 뒤통수 부근에 있을 노인의 얼굴에 주름이 어떻게 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뭐, 그걸 모른다고 하여 뭐, 문제될 게 있나? 효니 우애니 뭣이니 다 쓸모없는데 버린다고 해봐야 아무 불이익도 없겠지.
예언자 놀이나 해볼까. 히카루는 저 노인이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할지 훤히 보인다. 좀 있으면 차 시동을 걸면서 말할 거야, 또 사람을 팬 거냐?
"또 사람을 팼냐."
거봐. 한 치 틀림도 없이 늘상 똑같지. 원하지 않아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다 큰 놈 자슥 뒷바라지나 하고 다녀야 쓰겄냐. 제발 철 좀 들어라."
"먼저 시비 튼 건 그 새X인데."
"안다, 나도 다 알아. 그래도 인간이 참을성이란 게 있어야지..."
"고아 새X는 인간도 아니라고 그러던데."
"......"
"인간도 아니라니까 짐승새X인 척 좀 해줬어. 하, X밥도 아닌 놈이 쪽수만 믿고 나대가지고."
노인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히카루도 입을 다문다. 오래된 트럭의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만 배경을 채운다.
"히카루야."
"왜."
"인간은 말이다, 니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질 않어. 화날 일도 많을 것이고 울 일도 많을거."
무시할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아, 꼰대 또 시작이네.
"무작정 참으라곤 말 안 하겄어. 오히려 화는 삭히면 삭힐수록 속을 썩히는 거. 그렇지만 너는 너무 무턱대고 짜증을 내는 경향이 있어."
"......"
"화날 수록 웃어라. 도저히 웃을 힘이 없어졌을 때가 오면 그 때 화를 내."
"......"
"......"
"웃음이 나와야 웃지."
마에다는, 운전대를 잡은 노인은, 이젠 설교를 할 여력도 남지 않았다. 히카루가 2학년에 오르고부터 반 년도 안 됐건만 이번만 벌써 몇 번째 고개를 숙이기 위해 학교로 불려나온건지. 얼굴 근육 움직일 기력도 없어 묵묵히 기어를 올릴 뿐이다.
"다음주 검진은 못 가겄다."
"......"
"......"
"...... 뭐? 도쿄로 안 간다고? 뭔 소리야, 이번엔 데려다준다고 약속했잖아!"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히카루가 화가 난 투로 소리쳤다. 평소같았으면 노인은 곤란하단 듯이 허허 웃으며 히카루를 달래거나 양보해준 차선책을 제시했겠지. 히카루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마에다는 요지부동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는.
"나는 분명히 말 했다. 효도 안 해도 좋고 공부 잘 하는 건 기대도 안 하니까 착하게만 살으라고."
"지금 그거 안 지켰다고 이런다고? 내가 때리고 싶어서 때린 건줄 알아?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니 행실이 나를 지치게 하는구나. 올라갈 기력이 없어."
"약속은!"
"얘야, 너무 힘들다."
"......"
"히나타씨께는 그렇게 전해두마. ... 이 늙은 할애비 생각도 해주려무나."
낡은 타이어가 흙바닥을 밟고 나아간다. 노인은 히카루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 상태인 노인은 결정을 번복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입술을 깨물어 분을 삭힌다. 이럴줄 알고 학교 가기 싫다고 말했던 건데. 도쿄에 올라가는 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쓰레기들 때문에, 그 놈들만 없었더라면, 그 놈들만 아녔다면! 히카루가 문 손잡이를 찌그러뜨리는 소리가 들려 노인이 말로 행동을 막는다. 그것마저 짜증이 나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 마을은 정말로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다.
"혹여라도 몰래 나갈 생각은 하지 말어라."
"......"
"얌전히 있으렴."
* - * - *
카부키초는 해가 지고 밤이 되어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리다. 인간이 숨기는 본성 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 숨어지내는 요괴들도 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히카루는 건물 사이 쓰레기통 위에 외눈박이 요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대놓고 요괴가 있는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다니. 외눈박이 괴물은 히카루와 눈이 마주치자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푸헷취. 자기가 한 기침소리에 자기가 놀랐다. 내 기침소리가 원래 이렇게 컸던가? 카부키쵸의 추위가 키사라기 마을의 추위보다 더 매섭게 느껴진다. 코를 훌쩍이며 팔뚝을 연신 쓰다듬는다. 코트같은 거라도 입고 나왔으면 좋았을걸.
지금 보니 텅 빈 쓰레기통 뒤에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다. 외눈박이 요괴가 있던 좁은 골목길에 들어가보았다. 비교적 깨끗한 의류 수거함이 있었다. 안을 열어보니 새 것처럼 보이는 말끔한 코트가 들었다. 왜 새 옷이 버려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소년에겐 행운이다. 기장이 살짝 긴 코트를 꺼내고, 기왕 주워입는 김에 교복 셔츠 대신 스웨터로 갈아입기로 했다. 어른들의 거리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너무 눈에 띌 거란 판단이었다. 목도리까지 둘렀으니 학생이라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큰 길가의 가게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유리를 보며 한바퀴 빙 돌아보았다. 음, 나름 만족스럽네.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거리를 걷는다. 입을 옷이 해결되고 나자 입이 심심해진다. 곳곳에서 길거리 음식들이 냄새로 유혹흘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포장마차 하나가 유독 눈에 띄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인심 좋아보이는 할머니가 붕어빵 하나를 권한다. 돈이 없다고 거절해도 하나만 먹어보라 건네주어서 어쩔 수 없는 척 받아주었다. 그러고보니 돈이 없네. 잠은 어떡하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붕어빵을 베어물었다. 어깨가 펄떡 뛸 정도로 놀란다. 팥을 예상했는데 크림이 들어있어! 언젠가 도시에 나가면 다양한 붕어빵을 먹어봐야겠다 결심했던 게 떠오른다. 이런 특이한 것들이 도시에는 잔뜩 있단 말이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마구 부풀어오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오늘 밤 잘 곳을 구하는 건데... 히카루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붕어빵 골목을 나와 길을 걸으려니 바로 앞으로 돈뭉치 하나가 턱하니 떨어지는 게 아닌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 3층집에서 몸싸움을 하느라 돈다발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뭐, 땅바닥에 떨어진 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 액수를 한장한장 세어보며 가볍게 걷는 히카루는 아주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한대로 전부 이루어지는 상황이 이리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