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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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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하는 정보 | |
'센리 코우카'라는 소녀의 오른손에 세들어 사는 영혼. | |
본명 | 千里 空花 // 千 |
나이 | 만 22세 // 만 0세 |
성별 | 여성 |
국적 | 일본 |
종족 | 인간? |
생일 | 6월 1일 // 12월 25일 |
직업 | 대학생? |
상태 | 숨쉰 채 발견 |
7.1. 참치 독백(?) ¶
센에게는 기억이 있었다.
-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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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보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달빛이 닿아 산산히 부서진다. 달맞이꽃을 닮은 소녀는 천장 없는 폐건물 아래서 별하늘을 올려다본다.
'... 뭐해? 다 끝냈으면 비켜.'
'미안해요. 그렇지만 조금만 더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몸이 있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정말 행복하네요.'
이해를 못 하겠다며 낮은 콧소리를 흘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온다. 새하얀 소녀──센의 몸은 센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이 몸은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것. 꽃의 온정으로 오른손에 세들어 살고, 꽃의 아량으로 이따금 몸을 빌릴 수 있을 뿐인 객식구나 마찬가지인 신세. 하얀 머리카락도 샛노란 눈동자도 그 몸이 본디 가진 색이 아니었다.
대신, 센에게는 기억이 있었다.
'네가 기억도 없고 너가 누군지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불쌍하신 몸이라서 내가 봐주는 거지,('불쌍하신' 부분을 길게 늘여 강조했다.) 다음부턴 얄짤 없다? 오늘만 봐주는 거야. 오늘만.'
'고마워요. 하나花한테는 항상 도움만 받네요.'
'... 아니 그렇게 고맙다고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데.'
영혼이 깨져 센이 센으로 되기 전의 추억을, 새하얀 소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조각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로 작은 파편 속에 각인된 지식들은 뇌라는 물리적 실체를 통해 정교화되고 공교화되어 다시 영혼 속에 저장된다. 센은 그 느낌이 정말로 좋았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들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강하게 붙잡을 수 있는 이 기회가 더없이 소중했다.
소녀는 자신이 센이 된 그 순간을 기억한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 순간, 센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리 되길 원하고 있었으면서도 죽음이 다가오는 게 두려워서, 하늘을 보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하늘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육신의 도움을 받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손을 뻗는 센을 바라보는 검은 사람이 있었다. 맹수를 닮은 노란 눈이 얼음장처럼 서늘해서, 주위를 날아다니는 노란 나비가 잡아먹힐까봐 감히 걱정한 기억이 있다.
'... 센, 왜 그래?'
그래. 센은 자신의 목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문제가 너한테 있는지 물어본 거잖냐.'
'아뇨, 아무것도 없는데... 제가 너무 오래 몸을 차지하고 있었나요?'
'아냐아냐. 별 일 아니면 됐어. 여기도 허탕이었으니까 네가 많이 짜증났나 싶어서.'
몸을 빌려준 주인은 마음 약하고 착한 사람이니까. 사실대로 곧이 말하면 굳은 결심을 했더라도 하릴없이 흔들려 악을 용서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악행은 결코 묵인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며, 의도에도 사악이 깃들었다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없애야만 한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검은 여자가 사악과 욕망으로 빚어진 자임을 소녀는 기억하고 있다. 센이 세상에 태어난 건 그 자를 세상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 막을 사람 없는 욕망을 죽여 없애기 위해 만들어졌다. 센은 그렇게 믿었다.
'고마워요, 하나.'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오른손에 깃든 영혼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다는 두 사람의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 뿐인 목표였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행동이 사실은 행방이 묘연한 황의 왕을 찾기 위해서였단 걸 신체의 주인은 알고 있을까.
아, 하나가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달빛 아래에서 소녀는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센은 선택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 조우와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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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가 뒤틀리고 변형되는 소리.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폐건물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두 팔을 벌려 신나게 이야기하는 그 청년은 분명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음에도 시선과 고개를 한참 위를 향하고 있었다.
"내통, 내응, 내부內附, 괜찮아요. 좋아요. 에피큐리아니즘 사용 조건은 없음, 누구나 설치할 수 있어 입문이 가볍고 쉬운 게임인 게 장점. 마젠타든 시안이든 정보 누출이 알게 뭐람? 어차피 우리 플레이아데스가 더 강하니까요! 마음껏 유출해요. 마음껏 퍼날라요. 그럴수록 우리는 관심을 얻고 힘을 얻고 재미를 얻고 뿌리를 내리고 궁극적으로 아무도 얻은 적 없던 쾌락에 도달할 수 있겠죠! 모든 행동을 허락했어요, 저는 당신이 한 모든 행동을 용서한다고요!"
어쩔 수 없이 청년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인간────인간이었던 무언가는 앞턱을 부딪히는 듯한 소리를 낸다. 억울함과 의문을 표현하려 한걸까? 온전히 남아있는 눈은 절망을 눈물로 바꿔 흘려보낸다.
"그렇지만 이용 약관 위반은 중죄예요. A랭크 등극이 경사스러운 일이라 축하받고 싶었어요? 우쭈쭈 그래쪄여? 그렇지만 GM을 만나고 싶을 땐 혼자 만나라고 했는데. 안 그러면 규칙을, 법을, 우리 세계의 절대적인 법칙을 어겨서 벌칙을 받게 될 거라고 말 했잖아? 이건 네가 나쁜 거지. 에피큐리아니즘 세계의 주민이면 우리의 규칙에 따라야지. 남들이 정해놓은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게 호모 사피엔스의 정의라며? 그걸 충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 이하잖아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잖아요? 네? 내가 나쁜 건가요, 이용자님? 아니죠? 전적으로 당신이 나쁜 거죠? 건방지게 함정을 파려는 짓을 한 당신이 잘못한 거죠?"
폐건물의 목적 없는 방을 가득 채운 건 노란 빛이 나는 나비 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날갯짓 소리. 아니, 날갯짓이라기보단 날개가 꿈틀거리는 소리.
"그치만 바로 죽이지 않은 건 칭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뭐니뭐니해도 그 희귀하다는 A랭크 달성자이신걸! 특전도 주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잖아요. 자, 활짝 웃어요! 당신의 노력이 정당하게 결실을 맺은 결과예요! 많은 인간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힘을 얻으셨잖아. 입꼬리를 올리고, 스마일!"
자신의 양쪽 입꼬리를 손으로 올리며 웃는 청년은 나이보다 어려보여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그 표정을 따라하는 살덩이는 그렇지 못했다. 뒤틀린 미소는 청년에게 또다른 사역마가 생겼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 *
에피큐리아니즘은 쉽게 말해 현실에서 하는 게임이다. 어플이 말하는 임무를 완수하면 포인트를 받고, 포인트를 모아 다음 랭크로 올라가는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진 게임. 겉으로 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이 게임이 마젠타와 시안 두 파벌 사이에서 관심을 끄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어플의 개발자가 전세계적 민폐 단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카부키쵸의 황의 왕도 연관이 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은 어플의 대상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 속하는 하나花라는 소녀는 이 게임을 이렇게 평가했다.
"개쓰레기씹망똥겜."
그 평가가 100% 정확하다고 소녀의 오른손은 생각했다.
"존나 시X 너만 없었으면 이딴 겜 하지도 않았어. 알어?"
"으이구, 제 탓 하기는. 그 남자아이에게 부탁받아서 하는 거잖아요?"
"애초에 너 없으면 걔를 만났겠냐고."
"그건... 그러네요."
"반박을 하려거든 뇌를 거치고 말하자? 아참 너 뇌 없지."
혼자서 말투를 순식간에 바꿔가며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녀는 자신의 오른손과 대화를 하는 중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른 건 아니었고. 소녀의 오른손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움직였고, 그 행동의 기저엔 새하얀 영혼이 있었다. 나비를 닮은 새하얀 영혼은 지금같은 평상시에는 붕대 감긴 오른손에 얌전히 머무른다. 심지어는 지금처럼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아니면 입을 열지도 않기 때문에 몸 한 부분을 차지하는 침입자 치고는 같이 지내기에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른손 본인 뿐이고 몸주인은 하루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겠지만.
두 사람은 유동 인구가 적은 조용한 도시 한 부근에 위치한 폐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은, 그 곳에서 협력자와 접촉하기 위해서. 에피큐리아니즘(약칭 에피큐)이 내놓는 임무는 고위 랭크로 올라갈 수록 비도덕적인 행위가 많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 있었고, 그 중에서 또 일부는 법적, 윤리적 문제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포인트를 얻는 법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도 하나가 그 방법을 사용해서 알아낸 사람이었다. 조금 오래 친분을 쌓았더니만 자신이 이제 곧 A랭크가 된다고, A랭크 이상의 상위권이 되면 GM이 직접 찾아온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해보자며 먼저 제안해오길래 덥썩 좋다고 손을 잡아버렸다.
'너무 성급했나?' 위기감이 너무 없었나 고민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에겐 오른손에 센이라는 엄청난 무기도 있었고. 거기에 더해 든든한 보디가드 한 명─소녀에게 어플 다운을 부탁한 그 소년─도 대기시켜 놓았으니까.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질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냥 소문 확인만 하고 오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야 쌈박질하는 것보단 쉽지.
' ★ 깜짝 1000 포인트! 지나가던 사람 3명에게 시비를 걸고 연속으로 이겨봅시다! 데미지 0으로 이기면 무려 2배의 포인트가 찾아온다굿?! '
"예엠X 지X을 떨어요."
폐건물 계단을 오르며 핸드폰을 하다가 날아온 팝업 메세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누가 그런 걸 할까보냐. 이제 약속 장소도 시간도 가까워졌으니 기분 나쁜 메세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심산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잘했다고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칭찬은 덤이었다.
그런데, '어라?', 말소리 없어야 할 빈 건물에 꽉 찬 소리가 저 복도 어딘가서부터 작은 진동을 동반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대기시켜놓은 보디가드는 위험한 상황 아니면 나서지 말아달라고 부탁협박해놨었고, 무엇보다 걔도 바쁜 몸인지라 약속시간에 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단 말을 들은 상태였다. 지금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빠른 시간이어서 소녀와 협력자 말고 따로 누군가가 찾아올 가능성은 적었다. 설마 미리 A랭크로 올려놓고 기다리는 건가? 그렇지만 지금 만날 협력자가 그럴 사람인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무엇보다, 소리가 불길하다. 이 세상의 존재가 내는 게 아닌 것 같은 소리가 이제 곧 도착할 약속 장소에서부터. 돌발 상황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소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벽에 등을 밀착시켜 살금살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알아.'
벽 뒤로 몸을 숨긴 채 소리의 근원지를 몰래 들여다본다. 그러자 그 안에서 보이는 건──
'......'
소녀는 웬만해선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속을 게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치 인간의 몸이 주인의 의지는 무시한 채 나비를 닮으려고 용쓰는 것만 같은, 인간이었던 것 같은 무언가가 그 곳에 있었다. 상황 파악을 뒤늦게 한 후각이 진득한 쇠냄새를 잡아낸다. 그러니까 저게... 마젠타 놈들이 쫓는 괴물이라는 거지. 토기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살피자 무수히 많은 나비들 사이 한 인영이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모습이 변하는 살덩이를 서커스라도 구경하는 양 흥미롭게 바라보는 뒤통수가 보여서, 거기로 돌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응?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오른손이다.
'넌 가만히 있어. 나서지 마.'
'그치만 저 사람은...!'
'GM이겠지. 얼마나 잘 싸우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괴물까지 상대하면 힘들어. 우리는 오늘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지금 저 사악한 자를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요? 당신이 그러고도 센리 코우카야?!'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는 목소리를 익숙하게 무시한다. 저 도발 패턴도 정말로 많이 우려먹어서 이제는 질린다.
'그래. 비겁한 데다가 오로지 나 하나만 살려는 게 센리 코우카야. 그러니까 좀, 닥치라고.'
살벌해지는 뇌내 분위기에 오른손의 영혼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무작위적으로 날아다니던 방 안의 나비들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기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의식은 거기로 집중되었다. 노란 빛이 모여 사람만한 크기가 되고, 뭉쳐진 나비 무리에서 사람이 한 명 걸어나온다. 어둠을 긁어모은 것처럼 새까만 먹색 일색이었지만 가면의 무늬와 그 아래의 눈동자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시린 노란색이었다. 새로 등장한 사람은 넓은 부분을 차지한 살덩이를 힐끔 보고는, 원래 방 안에 있던 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걸었다.
'또 하나가 늘었어... 여기서는 물러나는 게 상책이려나, 잠깐, 야! 센!'
상황을 보며 자리를 뜨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던 하나는, 본인의 모습이 점점 변화하는 걸 금방 눈치챘다. 노랗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리고, 갈색 눈동자는 달맟이꽃을 닮아가고, 무엇보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에서 그르렁거림이 튀어나온다. 주인이 차마 말리기도 전에 신체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센에게 넘어가버린다.
"소라 이 개자식아!!"
포환처럼 쏜살같이 튀어나간 센은 검은 사람─소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악마를 닮은 눈과 달맞이꽃을 닮은 눈, 본질적으론 동일한 노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단번에 죽일 기세로 센이 소라의 얼굴을 후려갈겨버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특히나 공격을 직접 맞은 쪽은 꽤나 먼 거리를 뒤로 날아가버린다.
"뭐야, 뭐야?! 언제 나타났어요?!" 센과 반대편 벽에 등을 딱 붙인 청년이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외쳤다.
"일어나. 이 정도로 끝나는 건 내가 용서 못 해."
태생적인 노기를 품은 소녀는 청년따윈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성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씹어뱉었다. 깨진 가면조각과 핏물을 바닥에 뱉어버린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며, 온통 새하얀 소녀의 모습을 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언제라도 뛰어나갈 준비가 된 자세로.
소매로 피를 훔치는 여자는 파안대소를 하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내는 웃음소리는 악의에 가득 차 더없이 상쾌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하하, 하, 설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 기다리고 있었어, 나의 분신 나의 반쪽 나의 반신── 나의 증오스러운 형제!"
"지금까진 마음대로 날뛰었을진 몰라도 그것도 오늘까지야.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갈갈이 찢어 죽여주마...!"
소녀가 뿜어내는 색의 파동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중력에 따르질 못한다. 무기가 없는 소녀가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거리를 서서히 좁히고, 여자는 그걸 가만히 두고보며 오히려 어서 오라는 듯 양팔을 벌린다.
"너를 먹어치우고 완벽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세상에서 없애버릴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 꽉 깨물어라...!"
"꽉 깨물어야 하는 건 당신이고요."
그러나 소녀가 여자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청년의 손가락질 한 번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거대한 나비모양 살덩이가 육중한 팔을 소녀가 걷던 땅으로 내리꽂았으며, 그 덕분에 소녀는 뒤로 뛰어 여자에게서 멀어져야 했으니까. 땅에 딛어 물러남을 막는 두 다리를 땅에 한 손을 짚는 것으로 도우며 소녀는 나비괴물을 향해 외쳤다.
"타치바나씨!"
" " 앞턱이 달각이는 소리가 났다.
"타치바나씨 맞죠? 저예요, 센리 코우카예요! 머리가 할머니같아서 못 알아보시겠죠, 그래도 정말 센리 코우카란 말이에요! 제발 정신 좀 차려보세요!"
무언가 대답을 하는 듯 앞턱과 그 주변 조직들이 계속해서 꿈틀거렸으나 공격은 절대 멎지 않았다.
"이미 제정신인데 더 차릴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재밌네." TV 프로그램 시청하듯 두 인외가 싸우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청년은 여자의 옆으로 잽싸게 이동했다. 무언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더해진다.
"주인공과 최종보스가 싸우는 도중에 난입하는 녀석은 처음 보는데." 언짢은 듯 하면서도 이전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입꼬리를 히죽거리며 말했다.
"재미 좀 보던 차에 죄송한데요, 방금 여기로 왕급 뜬다면서 빨리 자리 피하자고 한 건 동업자씨였거든요? 당신 쟤랑 걔까지 다 상대할 수 있어요?"
"총 내놔."
"네?"
"저 사이에 맨몸으로 끼어드는 건 자살행위가 아닌가. 총 꺼내."
"일본이 총기 소지 불가인 나라라는 걸 고려해주지 않을래요?!"
핀트가 엇나간 지적을 한귀로 흘리며 혀를 쯧 찬다. 총 하나도 없다는 불만은 청년으로선 부당하기 그지 없는 평가였다.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예비용 나이프 하나만 들고 뛰어들려는 여자를 막느라 그걸 흘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니, 방금 자기가 자살행위라고 해놓곤!"
"내가 그랬었나?"
"좀 침착해져봐요! 그리고 나 오늘 싸울 기분 아니란 말야. 오랜만에 일 별로 없는 휴일이었는데!"
"질서 없는 돌발 상황을 즐기는 거 아니었나?"
"나한테 일어나는 건 제외예요!"
콩트 아닌 콩트를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대화에 배경음처럼 깔리던 소리의 성질이 변했다. 거구가 기울어 바닥에 추락하는 소리. 무게를 이기지 못한 조직이 무너지는 소리와 무언가를 헤집는 소리. 그제서야 전황을 확인한 두 사람은 쓰러진 시체 위에 새하얬던 소녀가 피칠갑을 하여 서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내 사역마가 졌다고?" 입술을 검지와 엄지로 쓸며 당황하던 청년의 몸은 금방 자리에서 사라졌다. 반대로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던 검은 여자는 괴물의 정상을 정복한 소녀를 향해 비웃음을 지어주며 박수를 쳤다.
"운없이 휘말려든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걸 축하한다, 센!"
"죄책감을 자극하려 해도 소용 없어. 정의를 위한 희생은 필수불가결."
고통에서 해방된 데다가 선의 실현에 보탬까지 되었으니 타치바나씨도 기뻐했을 거라며, 살점의 산을 내려오며 소녀가 말했다. 검은 여자가 운을 떼었다, "피칠갑을 한 정의의 사도는 처음 보는군."
"이상적인 척, 완벽한 척, 고상한 척은 다 하지만 현실은 자기정당화일 뿐이 아닌가. 너처럼 정의를 값싸게 쓰는 자는 또 없을 거다! 결국 너도 나와 똑같은 욕망의 포로였다는 거지! 차라리 인정하는 게 속편할 텐데?"
"입으로만 나불대면 뭔가 변하기라도 해? 꼬우면 덤벼."
방금 전과는 달리 방바닥에 발을 디딘 소녀는 움직일 기력을 아끼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경계만 하고 있었다. 기묘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검은 여자는 이전부터 경계하던 발소리가 철제 계단을 오르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쫄아버린 놈은 튀어버려서 다신 안 올 것 같고, 애완견은 왕급이 아니라 도움이 될지가 미지수. 반쯤 부서진 가면 아래로 혀를 찬다. 역시 세력이 쥐똥만한 게 가장 문제라니까.
"꼬리 말고 도망가는 꼴이라 기분 더럽군."
"뭐? 잠깐...!"
센이 차마 막아보기도 전에 나비에 뒤덮여 사라져버린 여자. 그녀가 있던 자리를 팔로 휘저었을 뿐인 꼴이 되어 비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춘다. 겨우 목표물을 잡았나 싶었는데 놓쳐버렸다. 하루 빨리 죽여 없애버렸어야 하는데. 분노와 자괴감 때문에 몸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센은 자기 치맛자락을 찢을 듯이 꾹 붙잡았다.
"소라......!!"
어금니 틈 사이로 삐져나왔던 분노는 금새 체념으로 바뀌고, 포기가 되어 모든 걸 놓아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동안 계속 몸을 되찾기 위해 반항했던 덕분에 순식간에 몸의 주도권을 되찾은 하나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가까운 벽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피로에 환경이 겹겹이 쌓여 도저히 버틸 수 없게 만들었건만 야속하게도 시원하게 비워야 할 속은 뒤집히지 않는다.
"미안해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태도. 그럼에도 기이한 냉정함을 의식 한켠에서 인식하면서 하나는 내면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설명해."
"......"
"이 상황이 되어서도 입 다물고 있진 않겠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불어."
센은 본인이 다혈질이라 인정하고 있었다. 머리에 피가 쏠리면 앞뒤 가리지 않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습관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증오의 대상이 눈앞에 없어 사고를 논리적으로 할 수 있게 된 지금 센은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젠 하나한테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 기억 없다며.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며."
"...... 네."
"근데 쟤는 왜 너를 알고 있고, 너는 왜 쟤를 알고 있는데."
이제 센은 선택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센리 코우카는 카부키쵸의 야경을 내려다본다.
- 천 송이 하늘꽃
- situplay>1596240168>978
"너 기억 없다며.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며."
"...... 네."
"근데 쟤는 왜 너를 알고 있고, 너는 왜 쟤를 알고 있는데."
이제 센은 선택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나비가 날아오르던 성탄절의 기억을 또다른 자신에게 말을 해야 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을지.
"말씀드릴게요. ... 전부 다."
그리고 센은 하나가 잊어버린 기억을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센과 소라와 하나를 낳은, 센리 코우카란 인간에 대해서."
어차피 진실을 안다 한들, 하나가 센의 의도대로 휘둘린단 것은 변함이 없을 터였으니까.
* * *
센리 코우카는 신주쿠 거리를 홀로 살아가는 젊은 여성이었다. 양친은 어릴 적 여윈지 오래였고 친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코우카를 돌봐주는 대모가 있었다지만 풍족하지 못한 살림에 얼굴 못 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날이 많았으며, 그마저도 성인이 되고서 독립한 뒤엔 가끔씩 안부 전화나 해보는 정도가 교류의 끝이었다.
그렇다면 센리 코우카는 불행한 사람인가?
"아니, 전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다 보겠다며 그 질문을 한 사람을 꼬라볼 자신이 코우카에겐 있었다. 펑펑 쓰며 놀 정도는 아니라지만 부모가 남긴 유산도 꽤 있었고, 보호자도 나쁜 사람은 아니어서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걸 언제라도 느낄 수 있었다. 고아라고 놀려대는 통에 급소를 까버려서 내쫓기 일쑤였던 질 나쁜 부류도 대학에 들어오고 나선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그녀가 짜증내며 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고 먹고 잘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인간과 세상을 원망하는 기질을 타고나지도 않았다. 살아가기에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센리 코우카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 뭐야, 결국 반차 쓰셨다고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어차피 저도 집에 없을 건데."
2019년 12월 25일, 세상이 기쁨과 축하의 빛으로 물드는 날. 바람 따라 흩날리는 갈색 머릿결 사이사이로 밤거리의 화려한 야경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몸을 기울이고 있는 그녀는 가로등불에 나비가 꼬여든 걸 내려다보며 자신의 대모와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변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이에 두 발 딛어 선 채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여인. 웃음 섞인 가벼운 어조완 달리 표정은 허무함에 가까운 무관심이었다.
"... 네. ... 이제 저도 스물둘이에요, 그 정도 앞가림은 스스로 할 수 있죠. 그리고 제가 누구 밑에서 자랐는데 쭉정이들한테 지겠어요? ... 네. 친구네 집에서 밤새 놀 거예요. 일부러 시간 내주셨는데 선약 때문에 못 만나뵈어서 죄송해요. ... 하하, 술 적당히 마실게요. 네. 연초에는 정말로 만나요. 끊을게요."
드디어 귀찮은 통화가 끝났다. 전화가 끊어지고 남은 빈자리를 한숨과 도시의 소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메운다. 친구들과 밤새 논다 했던 것 치고 그녀의 주변은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사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선약이 있다고 홧김에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충동적으로 한 말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자신의 우울만 쏟아내는 꼴이 될 것이 뻔하지. 혼자 남은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에게도 대모에게도 이 선택이 옳았다.
센리 코우카는 카부키쵸의 야경을 내려다본다.
먼 불빛에서도 가까운 길가에도 사람들은 제 갈길을 가기 바쁘다. 그 중엔 가족과 함께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고, 휴일에도 쉬지 못한 직장인도 있었으며, 연인끼리 다정하게 붙어있는 자들도 있었다. 센리 코우카는 현재를 보면서 미래를 생각한다. 10년 뒤 이 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저 가족은 저대로 계속 웃고 있을까? 저 사람은 지금 다니는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어쩌면 저 연인들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영원한 거 하나 없고 확실한 거 하나 없다.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센리 코우카마저 내일이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하는 고민 자체가 아무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되겠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이 세상을 아등바등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까?
나는 왜 살아있는 걸까?
이렇게 속을 썩히는 지금도 누군가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운이 좋은 누군가는 합격 소식을 듣고 웃고 있겠지.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고민을 할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게 훨씬 건설적이고 좋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움직이는 건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상념 때문에 그녀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아. 그냥, 모든 걸 버리고, 이 생각마저도 멈추고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걸 위해 옥상에 올라온 것이기도 하고.
뭐, 그래도, 당장 그녀가 저 밑으로 내려가는 일은 없다. '그야 자살같은 건 하면 후회할 것 같고. 아플 것 같고.' 이 충동이 한순간의 열기인지 평생 지고가야 할 업인지도 답을 못 내리는 상황. 무엇보다 여성의 이성은 지금도 자살은 나쁜 짓이라고 자신을 끝없이 질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밤바람에 한숨만 더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자기 옆을 지나치는 저 나비인지 나방인지 모를 생명체가 자신의 우울을 다 가져가주기만을 바랄 뿐. 적당히 바람이나 쐬다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서 들어가야지. 오늘과 똑같을 내일을 그리고 있을 그 때였다.
"마침 오늘같은 날에 자살 희망자를 만나다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센리 코우카는 드디어 자신이 환청을 들을 정도로 미쳤는지를 먼저 의심했다. 그러나 잘못 들은 걸로 치고 넘어가기엔 그 남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뚜렷하게 들려오지 않았는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나비가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건만, 하루동안 본 모든 나비가 옥상 위에 전부 모여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은은한 노란빛을 내는 하얀 나비들이 별하늘을 덮을 정도로 한가득 날아다니고 그 한가운데에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남자. 나비로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노란 눈동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떨어져나온 것 같은 비현실적인 모습.
'뭔 코스프레냐.' 그걸 본 코우카의 감상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남이 뭘 하든 신경 끄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생각보다는 씩씩하네. 걱정 되어서 날아와준 신한테 너무 쌀쌀맞지 않아?"
"뭔 상관. ... 그것보다, 신이라고?"
"맞아, 난 신이야. 황색의 주인이자 무수히 많은 날개를 가진 나비의 신. 그리고 세상의 탐구자이자 열렬한 연구자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호칭은 인간학자야."
자신을 인간학자라고 소개한 그 신은 키나가시 옆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가벼운 인사를 올린다.
"신기하지? 신을 가까이서 볼 기회는 인간에겐 별로 없잖아."
"아니... 신이라는 작자도 인간과 그다지 차이는 없구나-하는 생각 뿐인데."
"맞아, 신은 인간을 닮고 인간은 신을 닮지. 그걸 바로 깨닫다니 너는 정말 우수하구나. 나는 정말 운이 좋아. 응. 정말 행운이야."
상대에게 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남성. 여자는 저 자의 헛소리를 들어줘야 할 필요가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녀가 이 세상에 인간 아닌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그걸 차치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꼭 대화를 해야 할까?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해, 그냥 꺼져줬으면 싶다.
"용건이 뭔데. 자살하지 말라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거면 그냥 가지?"
"아. 바로 본론이구나. 좋지, 좋아. 인간의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네 자살을 말리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렇게만 표현하면 상당히 단편적인 서술이 되고 말 거야. 나는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어."
'혓바닥 기네.' 상대가 퍽 진지해보여 목구멍 뒤로 삼킨 말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에 머무르고 있던 나비들은 여자가 손을 잡기 편하도록 날아올라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의 연구를 도와주지 않을래?"
"뭔 연구."
"그야 물론 인간 연구지. 정확히 표현하면... 그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있는 인간에게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쥐어주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알고 싶어. 네가 앞으로 세상을 만나면서 반드시 겪을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을 능력. 초능력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려나? 그걸 가지고 있으면 너는 살고 싶을까? 아니면... 변함없이 죽고 싶을까? 네 선택이 보고싶어. 네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고싶어."
"자살을 망설이고 있던 인간아, 네 인생을 나에게 빌려주지 않을래?"
잡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상대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갑작스러운 비일상과의 만남, 그리고 정체 모를 제안. 센리 코우카는 지금이 자신의 스물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 그런 예감이 들었어도 그녀가 할 대답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회의감에 가득차있던 사람이라곤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남자와 마주한다.
"싫은데."
미소엔 변함이 없었지만 약간 실망한 기색인 남자가 묻는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우선 날 가지고 뭔지도 짐작 안 가는 실험을 한다는 게 불쾌해. 두 번째로 관찰을 한다는 것도 스토커같아서 징그러. 그리고 뭐, 힘? 필요 없거든요. 누가 그런 거 원했대? 내 인생에 그런 건 안 들이기로 결정했으니까 용건 끝났으면 돌아가주셨으면 좋겠는데. 혼자 있고 싶거든."
정말로 흥미가 없단 걸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등을 돌리고 난간에 팔을 올려 턱을 괸다. 다음에 등을 돌렸을 땐 나비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져있길 바랐는데.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아직 신은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몰차게 거절당해 버렸네. 슬퍼라."
"......" 등 뒤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모처럼 딱 좋은 타이밍에 완벽한 자리에 있는 재미있는 인간을 발견했는데. 동의를 못 받다니 슬픈걸. 너는 나에게 행운이야. 그걸 그냥 놓칠 수는 없지, 그냥 보낼줄 알아?"
쎄한 느낌이 들어 황급하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여자의 얼굴이 남자의 손에 잡힌다.
나비가, 나비 날갯짓소리가 어지러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통에.
"키리나시요쿠가미의 이름 아래."
저항하고 싶어도 얼굴을 잡은 손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무언가가 전신을 옥죄어와 힘을 줄 수가 없다.
온몸이,
찢기는 것 같아──
"나의 왕이 될 자의 이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닌 그 이름, 센千리里 코우空카花."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아주렴."
──아, 깨졌다.
영혼이 찢어진다. 물을 담은 준비가 안 된 그릇에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물이 쏟아져버려서 내용물이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튀어버린다. 다룰 준비가 안 된 힘이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황의 색이, 터져버린다. 나뉘어버린다. 이성의, 욕망의, 자아의 사이사이를 갈라버린다.
쪼개진 인간의 잔여물 중 일부가 건물 아래로 떨어진다. 옥상 위에 남은 인간의 잔여물이 떨어지는 잔여물을 바라본다. 한 쪽은 기억과 다른 노란 눈을 보았고, 한 쪽은 기억과 다른 노란 머리를 보았다. 그것이 서로에게 센리 코우카로서 마지막으로 남을 기억이었다.
... ... 그래서, 새어나온 색 때문에 일어난 폭발에 휘말려서 저희는 정신을 잃었어요. 그 이후는 하나가 기억하는 그대로예요. 저희는... 크리스마스날 그 폭발사고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게 전부예요. 새하얀 소녀의 말이 끝나도 노란 소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전투의 흔적이 남은 폐건물 벽에 기대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센千은─ 센리 코우카의 이성을 담당하던 인격은, 하나花라는 이름을 가져간 자아 인격의 상태를 걱정한다. 어쩌면 한꺼번에 모든 이야기를 다 전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지 않은가.
"...... 지금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아냐."
한참을 혼자 생각을 정리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센은 모르겠다는 식으로 대꾸를 했다.
"사실을 숨기고 있던 너한테도 화가 나고, 그 놈이 알고보니 나랑 똑같은 사람이었단 거도 화가 나는데, 그냥 그 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나한테 제일 화가 나. 분명 심하게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야 할 텐데 아무 생각도 안 든다고."
감정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웃음은 충족에서 나오고 울음은 결핍에서 나온다. 기초적인 감정의 근원은 갈망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원하고 탐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인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깨달은 소녀는 자기를 직시할 기회를 얻었고,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텅 비었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그에 대한 또다른 자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져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재개한다.
"너는 그 놈을 또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처음에는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한들,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죠. 소라空는 처음부터 욕망만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니까요. 없애버리는 게... 저한테도 하나한테도, 그 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선택이에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센. 다른 선택지는 두지 않고 센리 코우카의 이성이자 정의이자 선인 자신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고 설파한다. 정의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죽여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는 그저 자기 이마를 왼손으로 짚을 뿐이었다.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일지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한다.
7.2. 백업 독백 ¶
※ 참치로 이주하기 전 있었던 캐릭터이자 옳은손과 아주 큰 연관이 있는 캐릭터인 '꽃'이 주로 등장하는 독백을 백업했습니다. 따라서 현재 참치에서 굴리지 않는 캐릭터들이 많이 언급됩니다. 언급되는 캐릭터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상단의 세계관 항목을 참조해주세요.
또한 독백을 올린 뒤로 설정 변경이 크게 한 차례 있었어서... 지금 설정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독백들에 나온 큰 맥락들은 변하지 않았으니 참고용으로 읽어주세요.
또한 독백을 올린 뒤로 설정 변경이 크게 한 차례 있었어서... 지금 설정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독백들에 나온 큰 맥락들은 변하지 않았으니 참고용으로 읽어주세요.
- 1
- ※ 약한 수위의 욕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개X끼들이..."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아무리 철이 단단함의 상징이어도, 결국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 원래 형태를 잃어버리는 건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지.
"감히 내 앞마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하지만 그 철봉을 오른손만으로. 그것도 아직 어린 티를 다 벗지 못 한 소녀가 우그러뜨린다면? 공터 앞에 설치되어 있었던 과속방지 표지판은 이미 소녀의 손에 구겨지다 못해 끊어져 제 역할을 다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한손에 쥔 표지판(이었던 것)을 옆으로 휘두르며 노기 어린 얼굴로 소리치는 것만으로, 하얗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을 묶어두던 머리끈은 구실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에 세 발로 기어들어갈 각오는 된 거겠지?!"
변변찮은 실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를 내쫓는 건 노랗게 물든 눈을 흉흉하게 빛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거리에서 소식 듣는 귀가 빠른 사람이라면, 새해 들어 카부키쵸 거리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미친 여자의 소문은 한번 쯤 들어봤을 테니까.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기에 성인 장정들은 공터를 떠났고, 소녀는 그런 무리의 뒷모습에 침을 뱉어주었다.
"깡다구도 없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짜증난다고 중얼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던 머리끈을 주워 먼지를 털고 있으려니, 공터 안쪽에서 한 사람이 소녀 쪽으로 걸어왔다. 방금 전 도망친 무리들에게서 시비를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로. ...... 넌 굳이 내가 안 도와줘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냐?"
감사인사를 전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소녀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괜히 도와줬다는 마음 반,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마음을 반 가진 소녀 앞에 있는 건, 꽃이 목을 꺾어야 할 정도로 키차이가 나는 푸른 제복의 소녀였다. 남색이라 하기엔 어둡고, 검다고 하기엔 푸른 머리카락 아래에서 소녀의 푸른 미소는 빛을 발했다. 그 미소를 보면서도 꽃은, 도움은 고사하고, 제복 옆구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만 빼들었어도 상황은 끝났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아뇨. 소녀가 함부로 검을 휘둘렀다간 오히려 더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행하신 적절한 선행,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끝낼 수 있도록 하신 혜안과 마음씀씀이. 무엇 하나 훌륭하지 않을 수가..."
"길어."
"...... 길다고요?" 살짝 충격받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뭔 말을 그렇게 줄줄줄줄 늘어놓냐? 그냥 고맙다고만 하면 될걸. 그리고 말 놔. 딱봐도 내가 더 어려보이는구만."
"아, 그럴까?"
"예상 외로 시원하게 말 놓네 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말을 편하게 하는 모습에 꽃이 어이없다는 듯이 개미를 바라봤다. 개미는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끝까지 예의를 지키면 피곤하다며 웃었다. 싸움터에서 얼굴을 몇 번 맞대었을 뿐인 사이라곤 하나 그것도 결국엔 인연. 서로의 선과 정의를 위해 주먹과 칼을 휘두르는 걸 봐왔기에 상대에 대한 약간의 호감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편하게 말도 놓을 수 있었던 거겠지.
"그래도 너에게 고마운 건 사실이야. 나한테 상황을 타파할 능력이 있었든 없었든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무언가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됐어. 한 것도 없는데 답례는 뭔 답례? 그 돈으로 너 맛있는 거나 사먹어."
"이번 일 뿐만이 아니라 저번 플레이아데스 일당과의 충돌에서도 도움을 받았었지. 거기에 대한 답례도 포함이야. 보답으로 플레이아데스 일당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 알려줄까? 최근 신주쿠 부근에서 유행하고 있는 게임인..."
"필요 없어! 너 아직도 그 오래전 일을 기억하고 있냐...?"
"기억하지. 그 때의 너는 꽤나 멋졌었는걸."
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이다보니 자세한 부분은 빛이 바랬지만, 눈 앞의 소녀가 하얀 머리카락과 흰 원피스를 휘날리며 머리채를 쥐어잡던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옛날 기억을 되살려보다가 사소한 의문이 들어 개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는 존댓말을 썼던 것 같은데. 이 쪽이 원래 말투?"
"아 그거."
꽃은 잠시 시선을 피하며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자기의 오른손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소금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어찌됐건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면서. 하지만 눈 앞의 소녀는 착해보이는데 오른손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소금과 개미가 다른 일파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 않은가. 꽃은 마음을 굳혔다.
"정확히는 내가 한 거 아냐. 내 오른손이 한 거지."
"오른손...?"
"보여줄까? 야, 센. 말해봐."
"정말 말해도 돼요? 한마디만 말하게 하고 바로 또 재울 거 아니죠?"
붕대 감긴 오른손을 꼬물락거리며 말하는 모습에 개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선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씩 끄덕이는 것이었다.
"연기... 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네 오른손님이 지금껏 전장에서 싸워왔다는 거네?"
"센이라고 불러도 돼요, 개미씨. 둘이서 같이 싸워온 거죠."
"어쩐지, 반요나 요괴같진 않은데 인간 아닌 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어."
"인간 아닌 자."
개미는 마치 센이 어떤 존재인지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위화감을 느낀 꽃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너, 얘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확답은 못 하겠지만."
"... 야. 나한테 답례를 하고싶다고 했었지?"
오른손목을 왼손으로 감싸쥐었다. 오른손은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그거, 센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걸로 하면 안될까."
"그래."
너무 시원하게 긍정의 답변이 돌아오는 바람에 되려 꽃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꽃을 보고 개미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진짜? 괜찮아?"
"나중 가서 딴 소리 하기 없기예요?"
"먼저 물어본 건 너희들이였잖아? 크게 힘이 드는 일도 아니니까 괜찮아. 하지만 집중은 좀 해야 하는데......"
공터 안쪽을 살펴보던 개미의 눈에 커다란 파이프 더미가 들어왔다. 파이프 쪽으로 가서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개미가 꽃을 이끌었다.
꽃의 오른손 쪽에 개미가 앉는 식으로 파이프 위에 나란히 앉았다. 다소곳하게 무릎을 모아 앉은 개미가 꽃에게 오른손을 달라고 말했고,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은 꽃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면서 손을 내어주었다. 붕대 감긴 오른손을 위아래로 감싸쥐는 형태로 왼손을 아래에 두고 오른손을 꽃의 손등에 가볍게 올려놓는다. 속눈썹이 옅게 떨리고 원래도 푸르던 두 눈이 약간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정수리에서부터 강렬한 하늘색으로 물들어간다. 멍하니 푸른색을 감상하고 있기를 몇 분, 침묵을 고수하던 소녀가 조용하게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신의 기운이 느껴져."
"신이라."
"무수히 많은 날개의 나비신. 하지만... 굉장히 미약해. 조각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파편? 여기에 들어있는 영혼을 표현하기엔 이 정도가 정확할까."
"그럼... 원래는..."
"내 추측이 맞다면, 원래는 엄청나게 강한 존재였을 거야. 모종의 이유로 찢겨진 이후에 네 오른손에 정착하게 된 거겠지. 아마 신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만 머무르는 이유도 영혼의 상태가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
자신의 이야기는 다 끝났다는 듯이 개미는 자신의 손을 원래 자리로 물렸으며, 밝게 빛나던 머리색 또한 원래대로 짙고 어두운 남색으로 돌아왔다. 찾아다니던 해답을 얻었으니 속시원할 만도 하건만 꽃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꿈틀거리는 자기 오른손을 왼손으로 주무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떠들고 있는 센은 드디어 원하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기뻐 방방 날뛰는 중이었지만.
"없앨 수는 없는 거고?"
"아쉽지만 나는 거기까지 하기엔 능력이 부족해. 게다가 너와 나의 결정만 가지고 오른손님... 성함이 센이라고 하셨었나? 센님을 제거한다면 센님에게 큰 결례를 저지르게 되는 거겠지."
"결례는 무슨. 그냥 기생충 비슷한 건데..."
"듣는 센님에게 실례야."
"내 생각을 말한 것 뿐이야."
인간 아닌 분들께는 언제나 예의를 다 갖춰야만 해. 당연한 세상의 진리를 말한다는 듯이 한 점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그래봤자 꽃에게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나 다를 바 없는 잔소리였지만.
"그럼 이것만 묻자. 얘는 왜 하필 나한테 붙은걸까."
"...... 글쎄."
줄곧 시원함이 느껴질 정도로 재빠르게 대답을 내오던 개미가 말끝을 흐리며 꽃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만 그 눈동자는 정면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게 아닌 듯했다.
"... 내가 아는 한, 너같은 경우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이 쪽 세계와 접촉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노란색을 가진 사람들은 다수 보고가 되고 있지만 너처럼 신의 파편을 몸에 지닌 건..."
"특이 케이스다 이거지?"
"어쩌면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걸수도. 우리들한테도 중요한 문제니까 조사는 해볼게."
결과를 알려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며 소녀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꽃은 거기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으나 방금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그걸 바로 말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개미가 곧바로 일어나 예정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돌아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말을 더듬으며 잘 가라고 말하는 수밖엔 없었다.
"아, 그렇지."
"응?"
무언가 불현듯 떠올렸는지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걸 멈추고 다시 꽃을 마주보았다.
"방금 건 전에 플레이아데스와의 전투를 도와줬던 답례."
"하나로 퉁치자니까 뭘 또..."
"그러니까 지금 말해줄 건, 오늘 도와줬던 건에 대한 보답이야."
영문을 모르겠다며 꽃이 고개를 기울였다.
"황(黃)의 왕이 움직이고 있어. 가면을 쓴 사람을 조심해."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의문에 빠진 꽃을 뒤로 하고, 개미는 완전히 그 공터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 2
- 핸드폰 화면을 채팅방에서 게임 화면으로 바꾸고 앞을 향해 흔들었다.
"B랭크로 올랐어."
"자랑이시네요."
"칭찬해주면 어디가 덧나......?"
가시 돋친 듯 툭툭 쏘는 말에 청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가는 사람이 드문 굴다리에서 자홍색의 청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눈이라도 내린 듯 완전히 하얀 머리가 눈에 띄는 소녀였다. 애용하는 야구배트는 옆에 기대 세워놓고 무릎을 쭈그려 앉은 건 누가 봐도 불량하다고 말할법한 자세. 청년은 그 모습에 겁도 안 먹고 맞은편 인도 난간에 반쯤 걸터앉는다. 잠시 꺼두었던 채팅창을 다시 켜고 한 손으로 타자를 치는 게 꽤나 빨랐다. 이제는 소녀도 청년도 서로가 익숙해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거 랭크 오른다고 좋을 것도 없어보이든데요. 소문이 안 좋아요."
"괜-찮아 괜찮아- 게임 하던 사람이 괴물로 변한다는 그 소문 말이지? 나는 안전권이니까 괜찮답니다아."
"영화에서 보면 그렇게 자만하던 놈이 빨리 뒤지던데 말이죠."
"자기가 B랭크 못 됐다고 질투하면 못 써요 센 어린이-"
"곧 오를 거거든요?! A든 S든 센리 코우카라면 금방금방 오를 수 있거든요!!"
어쩜 주인격도 부인격도 하나같이 저리 발화점이 낮을까. 랭크를 올리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얼굴 뒤로 숨기며 소금은 웃는 얼굴을 밖으로 내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인 꽃이 높은 랭크로 오르기는 힘들 테니까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손을 빌리고 싶고...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샐 뻔했다. 초커가 손에 걸리는 뒷목을 쓸며 쭈그려 앉은 소녀에게 물었다.
"근데 왜 네가 밖에 나와있어?"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새장을 고쳐 안자 절그럭 소리가 났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제가 하고싶은 걸 하라고 하나가 그랬어요."
"마지막이라- 드디어 서로 분리하는 법을 알아냈나보네?"
"가능할지 어떨지는 몰라요. 위험할지 아닐지도 모르고. 그냥... 언제나 그랬듯이 무작정 해보는 거예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괜찮겠어?"
한숨을 쉬는 건지 헛웃음을 흘리는 건지 모를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소녀는 평소처럼, 하나처럼 웃고 있었다.
"하나의 선택이니까요. 저는 그걸 들어줘야죠."
"......"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하고싶은 말은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게 너희들의 선택이라면 자기가 참견하면 안 될 거라며 어깨를 으쓱이고만 있었다. 노란 눈의 소녀는, 자기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달란 말을 끝으로 새장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굴다리 위로 차가 지나다니는 침묵이 오자 청년은 다시 채팅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분명 눈은 화면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튄다. 자신이 여기로 불려올 때의 상황, 여차할 때 자신의 상태가 이상해지면 뒷처리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왔었더랬지. 시덥잖은 조사 놀이라고 생각해 어울려주려 왔더니만 이런 중대한 사건일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만약 하나가 센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래서 황색의 힘을 잃는다면. 그러면 청년은 소녀와 두 번 다시 만나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그것이 하나에게도 더 좋을 일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봐와서 신뢰가 있는 일손을 잃는 건 뼈아픈데. 청년은 지금이라도 그녀들의 행동을 방해해야 할지 아니면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응원해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친한 동생 만드는 것도 힘들단 말야.' 핸드폰 너머로 노란 눈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마젠타파에서도 나보다 어린 건 완전 꼬꼬마인 누님 뿐이니까. 비슷한 나이대 친구를 사귀는 것도 인성 발달에 좋을 거라고 아줌마도 그랬었잖아.'
있지도 않은 친구를 뺏기는 것만 같은, 대상이 없는 질투심이 들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삐지고 이게 무슨 난리람. 소금은 스스로가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몰아닥치는 감정에 어느정도 휩쓸려보기로 결정했다. 바로 소녀에게서 관심을 거두기로 한 것이다. 일이 다 끝나면 청년은 잘됐다고 박수 몇 번 쳐주고 바로 자리를 뜰 것이다. 신분 상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청년이 소녀가 떠나가는 걸 끝까지 보게 한 나름대로의 벌이자 소심한 화풀이었다. 이 정도 투정은 부려도 괜찮겠지.
만약 실패한다면? 청년은 소녀의 시도가 잘못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패하더라도 분리를 하지 못해 현상유지만 할 것이라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원래 미래에 대한 추측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편중된다 하지 않았던가. 실패해서 오른손에 센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그럴 줄 알았다고 웃어준 다음에 바로 자리를 떠야지. 그렇게 어찌보면 귀여운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철그렁, 가벼운 철이 구르는 소리에 평소보다 더 놀라버린다.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웬 철소리인가 싶어 핸드폰을 내리고 길바닥을 내려다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일렁이는 노란 불꽃 하나가 든 새장이 굴러다니고 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소금의 뇌는 순간, 그 불꽃의 색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그리고, 서서히, 주변부로 시야가 넓어진다. 원래의 머리색과 눈색으로 돌아온 소녀가 있었다. 야상과 청바지라는 평소와 똑같은 옷차림. 영혼이 빠져나간 듯 공허한 표정에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널부러진 사지. 명백히 평소와는 달랐다. 있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저 소녀가 저런 모습으로 쓰러진다는 건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소금의 시야는 넓어지다 못해 새하얀 패닉으로 물들어갔다.
* * *
하나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대리석의 차가움도, 마룻바닥이나 다다미의 차가움도 아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느끼기에 그건 철이었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철바닥 위에서 자신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질적인 감촉이 있다고 한다면,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기이한 열기일 것이다. 뜨겁지 않지만 불타버릴 것 같은 이 온기의 정체는 뭘까. 하나는 궁금증을 업고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하나의 오른켠엔 또다른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 아니, 저건 내가 아니야. 눈을 깜박여 뿌얬던 시야를 깔끔하게 만들자 그 모습이 자신과 차이가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머리카락과 자신이라면 절대로 입지 않을 얇은 원피스. 하나는 눈 앞의 사람을 처음 보았으나 그녀의 눈꺼풀 안에는 노란 눈동자가 잠들어 있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근 4개월을 자신과 함께 해온 오른손이었다.
왜 오른손이 아니라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지? 무언가가 떠오를 듯도 싶었으나 안개낀 머릿속을 헤쳐나올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꿈일 수도 있겠지. 사방이 어두우면서 밝고 현란하면서 단조로운 이 곳은 너무나도 괴이하고 괴상하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아서,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아서, 지독한 무기력증에 사로잡힌 하나는 그저 공허한 눈으로 천장만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새까만 철로 뒤덮여있어 기묘한 안정감을 저 혼란스러운 배경보다야 가져다주었다. 꿈에서라도 이렇게 느긋하게 쉬어보고 하는 거지.
'꿈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어.'
천장이 말을 걸어왔다.
'현실에서도,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넌 누군데?'
천장 외에 그 검은 부분을 설명할 단어가 필요했다. 저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끝없이 깊은, 그러면서도 한없이 가까운.
'공허.'
악의로 가득찬 저 시꺼먼 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줄곧 찾아다녔어. 나의 힘. 나의 반쪽. 나의 떨어져나간 부분.'
'센을 말하는 거야?'
'그냥 나에게 모든 걸 맡겨. 힘도, 책임도, 의무도, 권리도 모두. 그럼 편해질 거야.'
'어... 난 딱히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러고 싶어. 네가 줄곧 바래왔던 거잖아?'
이름 없는 악의가 제 몸집을 불린다. 섬뜩한 무기질의 가면이 점점 다가오고, 검은 팔이 코 앞으로 점점 뻗어져나온다. 그걸 눈 크게 뜨고 뻔히 보고 있었음에도 하나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저것의 말대로 놓아버리면 편해질 것만 같아서. 놓는다고? 무엇을? 중요한 것마저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떠오르지 않았으나 악의의 속삭임은 너무나 달콤했다. 당장에라도 저 손이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을 것만 같았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건─────
* * *
─────하나는 눈을 떴다. 그러고서도 한참동안이나 자신이 눈을 떴다는 인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모든 감각이 멀리 느껴졌다. 그나마 희뿌연 세계에 흔들거리는 물체가 있어 이곳이 현실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말단부에서부터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몇 번, 동시에 소리도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몇 번. 하나는 드디어 세계 한가운데서 흔들흔들 움직이는 물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건... 양발굽이었다.
"몇 개게요요요."
"......"
"요요요. 아직 결합이 잘 안 됐나요요요? 들리면 대답해요요요. 몇 갤까~요요요."
"............ 발굽이잖아."
"요요요."
어느 정도는 회복된 것 같다며 발굽의 주인이 웃었다. 계속 눈 앞에서 흔들거리던 발굽의 주인은... 매우 당연하게도 양이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양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나는 양이 원래 이족보행을 하는 동물인줄 알았다. 하얀 양털이 폭신폭신해보여서 만져봐도 되냐 물었더니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만져도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서 하나는 자신의 몸상태를 돌아보았다. 마취제라도 맞은 듯 온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뇌에서 전달하는 신호를 각 부위가 거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몸이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워하는 하나에게 뇌는 정답을 던져주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센이 새장 속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는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역시 초차원 채팅방은 믿는 거 아니야. 열에 들뜬 한숨에 과거의 자신에 대한 원망과 후회를 담았다.
"그래서... 당신이 날 구해준 거야?"
"양이 말을 하는데 안 놀라네요요요?"
"뭐...... 요괴겠지." 정체를 아는데 놀랄 게 뭐가 있겠냐는 투로 말했다.
"요요요. 맹랑한 아이는 좋아해요요요. 나는 한 게 딱히 없고 우리 아이들이 힘 좀 써줬지요요요.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 해야한다요요요?"
"쓸데없이 점잔 뺀다! 츠지쨩두 한 거 어엄청 많으면서!!"
'뭔가가 늘어났어...' 하얗고 몽실몽실한 양 옆에 마젠타색의 몽실몽실한 여자아이가 한 명 잽싸게 들어와 앉았다. 하나가 누워있는 침대 시트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무릎 꿇어 앉은 자세, 아이의 눈높이는 양의 눈높이와 비슷할 정도다. 기분 탓인지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 눈이 부시다. 눈살을 찌푸리는 하나를 보고 아이는 양쪽 입꼬리를 크게 올려 씨익 웃는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말괄량이처럼 보이던 그 아이는 입을 열자 상상을 초월하는 왈가닥이었다. 물구나무 서서 720도를 돌 정도로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질 않나("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유능한 자신을 칭송하는 건 너그럽게 봐주겠다고 하질 않나. 하나는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정신마저 쏙 빠져버릴 것 같았다. 아이는 반쯤 넋이 나간 하나를 보며, 양손으로 턱을 괴고 나지막히 웃었다.
"새장 안에서 네 영혼을 꺼내서 몸 속에 집어넣어준 사람, 엔티쨩이고둔. 결합시켜주는 데까진 내 능력 밖이라서 츠지쨩이 해줬지만."
"옆에서 거들었을 뿐이야요요요."
"그러냐. 고마워. 나중에 제대로 된 답례 하러 올게."
"빚으로 달아둘까 생각도 했는데에, 우리 마젠타파는 친서민적인 자경단이니까? 기본적으로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니까! 그냥 미래에 대한 투자란 걸로 넘기기로 했어. 짜랫찌!"
"빚 청산이 아니라 그냥 인사하러 오는 건 괜찮은 거지?"
"시오쨩한테 사과나 잘 해주면 돼. 아, 덤으로 내 질문도 대답해줄래?"
대답해보라는 뜻으로 하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의 짙은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너, 정말로 인간이야?"
꽃은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저 질문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다.
"염색체 46개 박혀있는 인간인데 왜."
"평범하게 살아온 인간의 영혼이 반쪽짜리라니 이상해.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게 아니었던 게 아닌 거 아냐? 어딘가의 흑마술사가 일부러 만들어낸 꼭두각시라든지 말야아..."
양이 아이의 입을 발굽으로 막았다. 입이 막힌 아이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양을 쏘아보았으며 그에 양은 그들의 뒤쪽을 향해 눈치를 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뒤에 있는 사람이 퍽이나 즐겁게 듣겠다는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이는 결국 하고싶었던 말을 꾹 눌러참아냈다.
그 와중에 꽃은 저 발굽이 입에 닿으면 촉감이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잊어주라!"
"아니 그걸 어떻게 잊으라고. 존나 신경쓰이는데요."
"너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요요요. 색이 다른데 이 이상 파고드는 건 매너 위반일거고요요요."
"또 또 영문도 모를 소리를..."
"뭐, 그런 거지! 어딘가 이상이 없나 확인하러 온 건데 이렇게 팔팔한 걸 보면 문제는 없는 것 같구. 임금님은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바쁘니 이만 가볼까! 쉬고싶은 만큼 쉬다 가!"
"야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는, 바쁘다는 말이 사실인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행동이 빠른 건지 날렵하게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빠잉!하고 인삿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어볼 게 있다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할말만 하고 가버려 꽃은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다. 잽싸게 나가버린 아이와는 대조적으로 양은 생김새만큼이나 느긋하게 느릿느릿 움직였다. 자신도 용건은 다 봤으니 가보겠다는 말을 하면서.
"그, 뭐냐. 고마워."
"요요요. 감사 인사를 할 거면 나보다 저어 뒤에 시오한테 해줘요요요.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요요요?"
"뒤에? ... 아."
나중에 또 보자는 인사치레를 남기고 양마저 방을 나가자, 두 사람에게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있는줄도 몰랐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금이었다. 꽃의 맞은편 벽에 붙어 한껏 웅크린 채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는, 둥그런 알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쟤 살아있는 거 맞아?'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은 꽃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상대가 숨을 쉬고 있는지 귀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괜히 무서워져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린다.
"야야... 시오."
"......"
"들려?"
"안 들려."
"안 들리는데 대답은 어떻게 했냐."
침묵이 대답을 대신한다. 꽃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능글능글 웃고 있던 저 놈이 번데기마냥 움츠러든 것부터 시작해서, 방금 전 방을 나간 두 사람이 쟤한테 사과를 하라고 은근히 꼽준 것까지 전부 다. 자기네 식구라고 감싸고 도는 건가? 정작 환자는 이 쪽인데도. 답답함에 한숨을 쉬면서도 우선은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 생각을 한다. 그게 저들이 달아놓은 빚이기도 했고.
"미안했어."
소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인정할게. 이번에 한 건 좀 무모했어. 채팅방에서 얻은 거라고 별 일 안 일어날 거라 안일하게 생각한 것도 있고... 나도 설마 기절까지 할줄은 몰랐지. 많이 놀랐겠어."
"나빴어."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네가 성공했어도 나는 널 떠나보냈어야 한다고."
"...... 그랬냐."
"진짜 나빠."
침묵을 고수하는 대상이 바뀌었다. 소금은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자기 뒤통수만 한손으로 감싸 눌렀다.
"도와달라고 부탁 받았는데도 당황해서 우왕자왕 해버렸고.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큰일날 수 있었고."
"무사하면 된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신세를 너무 많이 졌어. 누님이 힘을 쓰게 만들었고, 양신님이 수고를 하게 만들었고. 아줌마도 신경 많이 쓴 눈치였고. 아지트도... 보여주면 안 되는데 외부인을 들여버렸어."
"역시 과일 한 박스 사다가 돌려야겠네."
"난 민폐만 끼쳤어."
"여기로 데려와준 게 너였다면서."
"난 쓸모없는 놈이야."
"야, 그건 아니지. 왜 그래 너."
몸상태만 멀쩡했어도 소금을 노려서 베개를 던졌을 텐데. 아직도 겨우 휘젓는 정도만 가능한 사지로는 떨어져있는 저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조차 힘들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세워놓은 무릎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이제 내 앞에서 위험한 짓 안 하면 안 돼?"
"그걸 시키는 게 너잖아."
"알아. 안 되는 거겠지. 그래도...... 안 다치면 안 돼?"
"... 글쎄다."
"다치지 마."
소년의 말은 소녀의 안쪽에 닿았을까. 소녀는 곤란하단 듯이 눈썹을 모으고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상태여야 방금 꾸었던 괴상한 꿈에 대해 물어보기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차가우면서 진득한 고요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