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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드시웨 씨 ¶
공개된 극비-드시웨[1] | |
https://www.neka.cc/composer/10034 | |
상태 메세지 | |
최초 레스 작성 일시 | |
알아야 하는 정보 | |
입이 걸다. | |
본명 | Daniel Clyde Walker |
나이 | |
성별 | 남 |
국적 | |
종족 | 휴먼카인드다, 휴우먼. |
생일 | 6월 21일 |
직업 | 여러분의 악랄한 정보 제공자. |
상태 | 뭐 Still alive 라도 불러줘야 하나. |
상징색 | Navy, Silver |
1.1.2.2. 자세한 정보 ¶
우리 집 골칫덩이(...) 이자 개인 대 집단의 협력 관계 계약서를 성사한 개인 되는 놈.
푸른 꿈 사건의 범인이자 호숫가 납치 사건의 피해자. 발견 당시 자신의 능력 파악을 미처 못 하고 있던 탓에 피해자를 이렇게 대해도 되냐고 열불을 낸 데다가, 사태 파악 이후에도 자신의 힘이 위협적임을 알고 딜을 건 또라이로 소문이 나 있다.
푸른 꿈 사건의 범인이자 호숫가 납치 사건의 피해자. 발견 당시 자신의 능력 파악을 미처 못 하고 있던 탓에 피해자를 이렇게 대해도 되냐고 열불을 낸 데다가, 사태 파악 이후에도 자신의 힘이 위협적임을 알고 딜을 건 또라이로 소문이 나 있다.
- 능력
꿈
매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정보의 취득 능력 자체로는 고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단점으로는 수면 시간에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서면 상으로 내용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
1.2. 에이스 씨 ¶
공개된 극비-에이스 | |
https://picrew.me/image_maker/227881 | |
상태 메세지 | |
최초 레스 작성 일시 | |
알아야 하는 정보 | |
두 명 이상 접속했을 때 자신을 붉은 색으로 나타낸다. | |
본명 | Alice Blake McGuff |
코드 네임 | Anansi |
나이 | |
성별 | 여 |
국적 | |
종족 | 인간 |
생일 | 7월 6일 |
직업 | 내 입으로 영웅이라고 하긴 좀 그런데. |
상태 | 살아있고 말고. |
상징색 | Crimson, White |
1.2.2.1. 알려진 정보 ¶
- 세 명 중 가장 먼저 입사 및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사내에 붉은 머리가 몇 없거나 그녀 혼자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시선이 꽤 잘 끌린다고.
1.2.2.2. 자세한 정보 ¶
이 중 가장 베테랑, 현장팀 소속.
- 능력
골드버그 장치 : 트랩
우연을 가장한 도미노 장치를 그녀가 인지할 수 있는 장소에 생성한다. 좁고 기물들이 많은 장소일 수록 그녀의 능력 활용 또한 쉬워진다.
다만 가만히 있으면 결국 도미노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자신이든 상대든 누구든 액션이 취해져야만 한다고.
또한 변수가 적은 평야에서는 상당히 약한 편이라고 한다.
가능성 조작
무엇이든지, 그녀가 바란다면, 일어날 수 있다.
1.3. 말랑이 ¶
공개된 극비-말랑이[3] | |
https://picrew.me/image_maker/684058 | |
상태 메세지 | |
최초 레스 작성 일시 | |
알아야 하는 정보 | |
두 명 이상 접속했을 때 자신을 노란색으로 나타낸다. | |
본명 | Jack Edwin Hope |
코드 네임 | Daedalus |
나이 | |
성별 | 남 |
국적 | |
종족 | 사람 :3 |
생일 | 8월 17일 |
직업 | 히어로 :3 |
상태 | 생존 :3 |
상징색 | Black, Gold(Goldenrod) |
1.3.2.2. 자세한 정보 ¶
메이슨 호프의 보험사기극 및 빈민가 납치 사건에 휘말렸던 피해자.
도중에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영웅들이 사건에 개입할 빌미를 제공하게 됨과 동시에 영웅들에 의해 구조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도중에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영웅들이 사건에 개입할 빌미를 제공하게 됨과 동시에 영웅들에 의해 구조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 능력
방어막 : 벽
발견 당시 아이는 작은 금빛 공 안에 자신을 욱여넣은 형태였는데, 긴장 상태가 해소되자 이 공이 사라졌다.
발견자의 증언으로는 공이 얇은 막처럼 보였다고.
5. 기타 설정 ¶
- 세계관
어반 판타지, 초능력자들이 존재하는 세계.
새로운 힘, 새로운 부류의 인간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종류의 갈등이 늘어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등장한 이들.
여명의 혼란스러움이 지나가고, 질서가 막 시작되는 시기의 이야기.
- 재단과 회사
1. 재단 SAFEGUARD(세이프가드)
: 독백 내에서 재단이라고 지칭된다. 여명기의 영웅이 여러 기업들 및 국가들에게 협조 및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설립되었고, 하단에 서술할 회사를 시작으로 재단이 확장되었다.
보통 재단에 소속된 고위직들을 임원 혹은 의원으로 지칭한다. 고위직들은 다른 기업의 이사, CEO 등의 본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전직 영웅이었던 이들이 소속되기도 한다.
'영웅'이 가지는 선한 영향력과 이를 뒤따르는 상징성, 상표성, 기업 이미지 상승 등을 노리고 투자한 이들이 많다.
재단 소속 시설들
-회사 NEST(네스트)
-재단 소속 주거 공간
-재단 설립 교육 기관(초등 교육부터 고등 교육까지 담당하는 학교/재단 설립 대학)
-기타 연구동, 병원, 공방 등.
2. 회사 NEST(네스트)
: 독백 내에서 회사로 지칭된다. 분류상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업무를 맡지만, 국가의 지원 및 협력 하에, 실질적으로는 초능력자로 인해 발생하는 특수 범죄를 담당하는 회사.
국가의 협력이 포함되다 보니, 종종 경찰과 협업해 대형 조직과의 대치 상황에 보조적으로 투입되는 경우도 있다.
재단보다 먼저 설립되었으며, 재단이 설립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초기 시절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한다.
회사 지부 내 시설들
-본관
- 정보팀: 대부분의 정보를 담당하는 곳. 1팀부터 n팀(?)까지 있는 만큼 규모가 크고, 그만큼 중요성이 크다. 지하 데이터 베이스인 수장고 또한 정보팀이 관할한다. 철칙은 '정보는 정보로.' 소속 인원들 대부분이 조금 쎄하다는 평. 현장팀과 함께 에이전트가 배정된 팀이다. 정보팀 에이전트들은 정보 요원으로서 첩보 활동을 주 활동으로 한다.
- 대회의실: 본관 꼭대기가 여러 임원들, 이사들, 의원들을 위한 공간이다 보니 큰 회의를 위한 공간이 이곳에 있다. 분기별 회의 및 연말 정산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 회사 내 다른 팀들이 작전을 위해 임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 하이 플로어: 임원/이사/의원들이 머물거나, 일하는 공간이다. 주로 회사 이사들이 머물고 일하며, 이들을 위한 중간 크기의 회의실이 별도로 하나 존재한다. 다른 의원들이 중요한 회의마다 잠깐 들르는 오피스텔같은 역할도 겸한다.
- 상황실: 작전 본부, 참모들의 집합실. 여러 회의실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눈에 띄는 점은 첫번째로 천문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돔형의 작전 지휘실(주로 이 곳을 '상황실'이라고 지칭한다.) 이 존재하며, 두번째로 이 곳에 소속된 인원은 전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잔뼈 굵은 인간들이라는 점이다.
- 수사 시설: 간이 감옥이나 심문 시설 등이 비치되어 있다.
- 사격 훈련장: 훈련장 지하와 연결되어 있으며, 사격 훈련이 실시된다. 총소리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인해 지하로 시설이 이전되었다고 한다.
- 수장고: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회사 소속 인원의 일반인에게 공개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는 전부 이 곳에 저장되며, 열람이 허용된다.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방공호 바로 옆에 있는 만큼 굉장히 두꺼운 벽으로 보호되는 시설.
- 방공호: 말 그대로 방공호. 비상시 대피를 위해 준비된 시설.
: 현장팀의 아지트, 애용하는 시설. 그들의 능력을 측정하고 기록하며 성장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어떤 전술이 유효한지 토의하며 연구하는 곳이다. 또는 새로운 장비들의 성능을 테스트하기도 하고, 어린 능력자들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환경 상 쉽게 설비가 노후되기도 하고, 기술의 발전 때문에 자주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이기도 하다.
- 현장팀: 우리들의 영웅, 혹은 현상금 사냥꾼들. 그리고 초능력자들. 예외적으로 초능력 없이도 특수 범죄자들을 제압하기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면 소속될 수 있다. 실질적 주축 중 하나이자 신비로운 얼굴마담들이기도 하다. 현장팀에게는 작전을 보조하기 위한 에이전트들이 배정되는데, 이들은 총을 들며 경호 및 업무 보조를 담당한다. 일종의 사이드킥과도 같다고 보면 편하다.
: 기술자들의 모임. 현장에 나가기에 부담스러워 하는 초능력자들, 대다수의 기술자들, 은퇴한 영웅들로 구성되어 있다. 늘 새로운 기술을 탐구하고 어떻게 해야 실용적으로 이를 다룰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아무래도 기술의 결과물을 사용하는 이들이 보통 내기가 아니다 보니 결과물을 수정하는 데에 힘들어 하는데, 트랩 등의 경우는 현장팀 소속 한 인물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연구동
: 정보팀과 공방과 연계된 시설. 사실상 연구동이라기 보다는, 수사 과학을 위해 특별히 설치된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과학 수사를 위해 준비된 기기들이 많고, 순전히 수사를 위해서만 기동되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평소에도 공방 및 정보팀과 연계해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데에 도움을 주거나 성능 테스트에 협력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한다.
-기숙사
: 현장팀 대다수 및 회사 소속 인원 일부가 기거하는 곳. 성별 별로 건물이 두 동으로 나뉘어 있으며, 1층 로비는 이어져 있다. 로비는 연회장 내지 파티장으로 쓰이며, 평소에도 여가 활동을 위해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며 만담을 나누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 기숙사 방은 대체로 사람이 혼자 쓰기에는 넓고, 둘이 써야 적당할 정도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방에 가기 위해서는 방의 주인한테 허락을 받으라는, 특히 다른 동으로 오갈 때는 반드시 동 입구에 기숙사 카드키를 태그하고 갈 것이라는 사칙이 있다.
-사내 병원
: 복지의 알파이자 오메가. 주로 현장팀과 연계되며, 응급 처치부터 정기 건강 검진까지의 일을 도맡는다. 병실도 완비되어 있는 사실상 회사 차원에서 준비한 병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사내 병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인근 병원에서 받아주지 못 하는 환자를 입원시킬 때도 있다고 한다.
-재단 내 주거 시설
: 회사 및 재단 소속 인원들의 가족, 혹은 사건의 피해자나 가해자, 그 가족들이 터를 잃고 보호받기 위해 지내는 곳이다. 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곳. 회사와 가까운 곳에 도그 파크가 있다.
-재단 소속 교육 기관
: 주거 시설과 연계되어, 주거 시설 및 아직 어린 영웅들을 위해, 그리고 대학교가 제일 등록금으로 돈을 벌기 쉽다는 이유로(...) 초중등 시설부터 대학까지 전부 완비되어 있다.
- 정보팀: 대부분의 정보를 담당하는 곳. 1팀부터 n팀(?)까지 있는 만큼 규모가 크고, 그만큼 중요성이 크다. 지하 데이터 베이스인 수장고 또한 정보팀이 관할한다. 철칙은 '정보는 정보로.' 소속 인원들 대부분이 조금 쎄하다는 평. 현장팀과 함께 에이전트가 배정된 팀이다. 정보팀 에이전트들은 정보 요원으로서 첩보 활동을 주 활동으로 한다.
7.1. 과거 ¶
- 푸른 꿈.
붉은 머리의 여성은 때때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 간다. 그녀가 향하는 ‘지하’는 엘리베이터로 쉽게 닿을 수 있는 지하 주차장 같은 곳도 아니었고, 소리 때문에 라도 지하에 시설을 만들어 둬야만 했던 사격 훈련장도 아니다. 그 둘은 모두 사용할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이용할 수 있게끔 지표면과 가까이 있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보다는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문득 이 정도면 지구의 겉표면을 얼마까지 파고 들어온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하였다. 누군가는 쓸모 없는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누군가는 어떤 장치를 빗대어 설명해 줄 것이다. 방공호, 그래, 그녀는 방공호가 설치되고 안전을 도모하기에 딱 적당한 깊이만큼 걸어 내려왔다. 숨이 조금은 답답했다. 곳곳에는 옛날의 흔적들이 피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 곳을 특히 자주 사용하였고, 지금도 사용하는 사람이 자주 그런 비유를 했다. 그녀가 가는 곳은 특히 더 그렇게 칭했다. 정보의 방공호 같다고, 왜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어 놨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아니면 보고 싶을 때 한 번 열람해도 되는 거잖아.
그녀는 수장고에 도착했다. 이 곳에 온 이유는 논리적이지도, 누군가의 부탁을 받지도 않았다. 단지 오랜만에 그 녀석과 만났던 때의 기록을 더듬어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
연말연시, 눈이 내리고 사람들의 감정은 술렁이며, 낡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뜨는 때. 크리스마스라는 축제 같은 날이 있고 겨울 내내 블랙 프라이데이를 내걸기까지 하는, 함박눈만큼이나 휘몰아치는 것이 많은 시기. 그리고 반대급부로, 빛이 밝을수록 어두움 또한 짙어지는 시기이기도 한 때.
스물 두 살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접어 두었다. 웃긴 생각이다. 세상은 늘 밝았고, 동시에 어두움을 필사적으로 감추었으며, 그리고 그 감춘 것들은 꼭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치, 요 근래 몇 달 간 발생하는 이상현상처럼 말이다.
그들은 학자가 아니기에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힘을 통해 해괴한 일을 벌이는 자들을 추적하는 데에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사건’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 이상현상이 단순히 ‘방에서 개미가 나왔어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에 도둑이 들었어요.’ 정도로 위험의 격이 상승했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붙인 사건의 이름은,
푸른 꿈 사건. 붉은 머리의 여자, 앨리스 맥거프는 몇 달 동안 지속된 이 현상, 아니 증상의 증언이 정리된 페이지를 펼쳤다. ‘다른 것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파란 눈이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내 어린 시절의 꿈을 꿨는데, 그 순간 파란 인간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것 같았다.’ 앨리스는 익숙한 문장들을 읽으며 그 때를 회고한다.
스물 두 살의 앨리스와 그녀의 동료, 친구, 선배, 후배를 가릴 것 없이, 내부는 이 증상으로 인해 하나같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개꿈이라면 그녀나 다른 모두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넘어갔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증상이 하나 둘, 그것도 그들에게 몰아서 발견되다시피 하자 내부는 순식간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곳은 현상금 사냥꾼 회사라는 탈을 쓴, 영웅들의 첨탑이요 안락한 둥지. 그 곳에 순식간에, 마치 우물에 독이 풀어져 모든 이가 광인이 된 마을처럼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 모를 불안감과,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강렬한 감각, 확신할 수 없으나 확신해야만 하는 상황. 정보팀의 누군가가 말하길, 정보가 샐 수도 있다고. 온갖 추측들의 무게가 하나같이 무겁기만 한 그런 때.
그 당시에 앨리스는, 선배들과 동료들을 이끌고 한창 정보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상황을 지휘하는 사람들과 대립을 하고 있었다. 소통이 되지 않고 있던 상황에, 전염병처럼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으니 내부에 있던 불편한 실금은 순식간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고, 소음이라 여겼던 것은 듣기 싫은 잡음으로 변질되었다. 소통의 부재와 그 결과의 처참함을 보며, 스물 두 살의 앨리스는 부정적인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수색에 나섰다.
이 증상은 몇 달 씩이나 그들을 괴롭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앨리스가 ‘용의자’를 잡는 데까지 몇 달이 걸렸다는 셈이 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꿈에서 보인 푸른 잔상만이 전부인 사람을 도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잡아 내는가? 그래서 그녀는 이 사건의 해결이 순전히 시간과 노력, 그리고 운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운에 기댈 수밖에 없겠다고 바람에 생각을 실어 보냈다.
호수가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이를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혹독한 어느 겨울에, 우연은 일어났다. 앨리스는 그 날의 차가운 바람과 살을 말 그대로 잘라버릴 것 같은 추위를 회상했다.
수색 방향 자체가 무차별적이었고, 다른 팀들의 도움을 받기엔 이미 내부는 균열이 일어날 대로 일어난 상황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정보팀 요원이 들고 온 단 몇 마디 문장은, 냉랭한 분위기와 이미 벌어진 균열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했다.
‘저라고 꿈을 안 꾼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사를 하길래 저나 정보팀 소속 요원들, 뭐 에이전트들… 그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죠. 정보 공유를 해 봤자 허사일 것 같더군요. 소득도 없었고. 그런데 제가, 오늘, 이… 여기 지도 보세요. 이 쪽을 돌아다녔는데 말입니다, 어떤 청년을 마주쳤는데, 그 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푸른 잔상의 주인이 그 청년이라는 것도요.’ 그 요원은 잠시 후에 대체 왜 안 잡아왔냐는 고함과 함께 나가떨어져 버렸다. 앨리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추위를 불태울 열기를 오랜만에 느끼면서, 밖으로 나섰다. 달이 숨은 밤이었다.
빛 한 점 없는 밤에, 대략적으로 주워들은 청년의 특징을 물어 가며 흔적을 쫓았다. 그들의 꿈 속에 나타났던 푸른 잔상이 새카만 밤의 한 줄기 빛이 된 것처럼 그들은 움직였다. 앨리스의 붉은 머리에 성에가 끼고, 추위에 강한 사람이 넌덜머리가 나도, 그들은 눈밭 속의 사냥꾼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씩 나아가고 있었다. ‘얼굴을 보면 딱 알 걸요? 농담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을 믿으면서, 그들은 집요하게 강추위를 헤치고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체력 소진으로 인해 경찰들에게 양해를 구해 인근 경찰서 실내에서 잠깐 쉬고 있을 쯤에, 신고가 들어왔다.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때였다. 신고자는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잠에 들기 위해 집으로 향한 것인지, 아니면 이 새벽부터 일하려 나가려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일을 위해 바깥에 나갔다가 살려달라는 비명을 들었다고 한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거구의 사람 한 명에게 끌려가 차에 쳐박혔는데, 그 차는 근처 호수로 향하는 외길로 빠졌다고 하였다. 앨리스는, 이렇게 된 김에 이 일을 도와줘도 괜찮겠느냐 하였고, 경찰들은 수긍하였다.
서리 낀 머리카락이 버석거린다. 입술도, 눈꺼풀도, 전부.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의 낚시를 위한 작은 통나무 오두막이었다. 차는 버려져 있었으니 금방 사용한 듯 엔진이 채 열을 식히지 못하고 있었으며, 차에서부터 이어지는 두 개의 발자국이 영락없었다. 이렇게 흔적을 많이 남겼다는 건, ‘납치가 문제가 아니라 납치당한 쪽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판단은 빠르게, 행동은 그보다 더 빠르게. 그 곳에 있는 모두는 즉시 오두막으로 향했다.
단단히 잠긴 오두막의 문을 부수고, 그 곳에 부디 사람의 시체가 없길 기도하며 들어갔을 때, 앨리스는, 그 곳에 있던 그녀의 동료들도, 전부,
푸른 잔상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부숴진 문 사이로 손전등이 비춰지면서, 새파란 눈을 가진 자가 결박된 채 매섭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납치 사건의 피해자는 즉시 영웅들의 안락했던 둥지로 끌려갔다. 얻어 터진 상처와, 새파란 멍과, 흐르는 피를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때의 그들은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송곳 흉내를 내는 고드름처럼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았다.
피해자가 두 번째로 쳐박힌 곳은 다름 아닌 취조실이었다. 그것도 어떤 사건의 용의자 신세로 말이다. 그는 이동하는 내내 병원 몇 개를 각막에서 떠나 보내면서 제 안의 분노를 키워 나가고 있었는지 아예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마의 상처 때문에 눈에 피가 들어간 것이었다.) 청테이프를 활용한 불법적인 결박이 아니라 수갑을 통한 꽤 법적으로 보이는 결박에 어이없어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게 다 뭡니까. 경찰서도 아니고, 병원도 아니고, 냅다 여기에다 내던져 버리는 건 대체 어느 나라의 수사 과정이야?”
“평범한 수사 과정이다. 네가 피해자가 아니라 용의자라면 말이지.”
“씨X, 지X하고 앉았네. 난 납치당한 사람이고, 아니, 납치 뿐만이 아니라 그냥 개쳐맞았다고.”
“이름이 어떻게 되나.”
“얼굴에만 피딱지 앉아서 모르나 본데, 목에 헤드락도 걸리고 허벅지랑 정강이도 존X게 아프거든요, 개X끼들아. 여기에 앉혀놓는 게 맞기는 합니까? 병원은 또 씨X 언제 보내 줄 건지나 말해 보쇼.”
붉은 머리의 여자는 취조실에 들어섰다.
“이름, 대라고.”
앨리스에게는 그다지 많은 자비로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착한 형사와 나쁜 형사를 해 줄 정도로 그들이 여유로운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붉은 머리를 본 청년은 그녀를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조금 떨리는 눈동자와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신.”
“이름.”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겠군. 당신들이 왜 나를 이렇게 압박하고 있는지도… 뭘 걱정하는지도.”
청년은 자세가 불편한 듯 이리 저리 몸을 비틀며 자세를 바로 했다. 목을 꼿꼿이 세워 똑바로 정면을 보고 있는 청년은, 방금 전까지 양아치처럼 굴던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이 예상한 겁에 질린 순한 양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태도를 하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런 저런 것을 계산하듯 중얼거리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다니엘 클라이드 워커. 당신들의 정보를 아직 유출하지 않은 사람이지.”
거기 있는 청년은 거래 대상을 찾은 사기꾼의 모습이었다.
- 여러분의 끔찍한 정보 제공자.
내 이름은, 다니엘 클라이드 워커. 지금 당신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 절찬리에 비속어를 삼키고 있고, 당신들의 개인 정보가 불꽃놀이처럼 번쩍거리는 머릿속을 가진 사람이다.
-
그의 스물 두 살은 궁핍과 가까워지고 있던 시기였다. 아무리 모아 둔 돈이 있어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단박에 소비시키는 대학교에 입학 절차를 밟은 이상 그도 그저 한 명의 노동자가 되어야 했을 뿐이었다. 모아 둔 돈이 목돈과도 같아서 그 시기가 남들보다 훨씬 늦게 왔을 뿐. 때문에 혹한에 몸서리 치는 그라도 눈 밭을 미적거리며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그런 하루가 되었다면,
좋았을까? 시간이 제법 흐른 뒤의 다니엘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그 사건은 당시의 ‘비공식’ 수사관들이나 저한테나 큰 이득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정확히는 그에게만 굉장히 일방적으로 말이다. 그는 느린 발을 옮겼다, 지팡이가 걸음을 받친다.
다시, 혹한의 청춘으로 돌아와 보자. 그 당시의 그는 몇 달 전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용이 희미해 마지 않았지만, 점점 강렬해지는 기억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디선가 본 사람들이었다. 일단 꿈 속에서 본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한밤중에 일어나는 온갖 소란스러운 사건들에서 유추해 보았을 때 그들은 경찰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무슨 일인지 익숙한 얼굴들. 스스로도 경찰들의 얼굴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니 미디어에 제법 노출된 사람들의 얼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추론이 더는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 즈음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달갑지도 않은 잔혹한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유해하기 짝이 없는 범죄 현장을 눈 앞에서 목도하다 깨어나는 건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제일 불쾌한 것은 이 꿈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리할 길이 한 순간에 막막해 졌다는 점이지만.
탐정 놀음이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무슨 수로 이를 알리는가. 목격자? 알리바이도 불충분하고 증언이 심히 의심스러운 목격자는 범인으로 지목되기에 가장 좋다. 놀이로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고, 인터넷의 셜록 홈즈가 되기에도 해야 할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 지어 던져 놓는 것은…
아니, 하기 싫었다. 일단 하기 싫은 일에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가 지금 당장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은 이 꿈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론해내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도중이나 일 하는 도중의 빈 시간에 잡다한 생각을 하는 것 정도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딴 길로 새기’ 이다. 그는 오늘도 핸드폰을 매만지고, 걸걸한 욕을 중얼거리다가, 피로한 새벽에 지역 신문을 사러 나갔다.
몇몇 지역들은 법에 따라 수사 과정이나 어떤 경위로 처벌을 받았는지 개방적으로 공개되는 터라 그런 지역의 뉴스는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은 인터넷보다 신문이 훨씬 효과가 좋은 것 같다, 고 지역 신문을 살펴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는 방금 전에 인터넷 상에서 그 영웅인가 뭔가 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지금 지역 신문에서 실종자 명단 중 한 명을 보자마자 거친 꿈의 조각들이 마구잡이로 조합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두통이다.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누군가 본다면 얄밉다고 표현할 것이었다.
입꼬리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뒤에서 접근한 누군가가 그의 목을 옥죄어 미끄러운 눈 벌판을 횡단하며 그를 차에 쳐박아 놨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지른 비명은 커다랗고 차가운 손에 막혀 틀어막혀졌고, 그는 그대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사람이 한 명이라는 걸 확인하고 신나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가 운전대를 놓고 날 패러 와 봤자 이득이고 뭐고. 자의를 씹어 뱉은 행위를 한 사람에겐 작은 대가로 모욕을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물론 어딘가에 도착한 다음에 그는 혹독하게도 끌려가야 했고, 낡은 의자에 청테이프로 묶여야 했으며, 묶이자 마자 뺨을 얻어 맞아야 했다. ‘아까 한 욕은 일단 다시 말해 보시지, 피도 안 마른 애송아.’ 고개 숙여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 속에서 꿈 속의 피투성이가 생각나 그는 침이나 마저 뱉어 주었다. 의자가 째로 바닥을 굴러 다닌 건 그 이후였다.
새벽, 홀로, 납치되어, 죽음에 가까워 지는. 패닉 투성이의 상황이 폐부에 깊이 쑤시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눈 앞의 개자식이 어딘가를 잘못 때린 것 같다. 어딜 맞았는지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중간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숨 쉬는 게 거칠고, 공기가 차가워 소름마저 달아날 정도로 고통스럽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조금 흐려진 동공이, 아무리 그대로 도발을 그렇게 세게 하면 안 됐는데, 라고 느꼈는지 빛이 조금 돌아오며 눈을 슬며시 끔뻑인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람은 여기서 나를 그냥 죽일 생각인가 보다. 살려달라는 소리는 질러 놓았으니 누가 들어 줬으면 좋을 텐데, 여기서 이 인간 손가락이라도 물어 뜯어 놔야 하나. 팔 하나 부러지고 탈골이 되더라도 이걸 풀고 나와 저 사람의 뒷목을 도끼로 찍을까. 도끼가 있었나, 각목은 봤던 것 같은데. 이마가 찢어졌는지 피가 계속 흐른다. 따뜻하다, 따뜻하다. 순간 눈 앞이 밝아진다. 과도하게 쏠린 피가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누군가가 구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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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또 다른 납치범이었는 듯 싶다. 그는 이번에는 은으로 도금된 듯한 반짝이는 수갑을 손목에 낀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에 쳐박힌 차는 히터가 틀어져 있어 제법 따뜻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숨을 불규칙하게 쉬었던 것이 찬 공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부상일 수도 있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와는 별개로, 운전자와 그들의 동료들은 그를 병원에 내려 줄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의 눈에 스쳐 지나간 병원만 벌써 4개 째였다. 이 새벽부터 눈 위를 조심스럽게 달리는 차량은 스물 여덟, 아니, 방금 지나간 승용차 한 대까지 추가해 스물 아홉 대. 그리고 그 중 앰뷸런스는 한 대도 없었고, 이 차에게 기꺼이 길을 내 주는 차량도 없었다. 애초에 특유의 사이렌 소리도 안 나니 이 차가 앰뷸런스일 리도 없다.
하룻밤 사이에 두 번 씩이나 납치를 당하는 사연은 대체 어디에 제보를 해야 하나. 왼쪽 눈에 고인 피를 덜어내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흘러내리지 않았는지 뺨에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얼어붙은 조각이 눈 안에 파고들어 끔찍한 일만 안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공기는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다. 그를 보는 눈초리도 그러했다. 어쩌라고? 바라보는 사람 한 명에게 조용히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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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국 참다 참다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도착한 곳이 하다 못해 집이라 부를 수 있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무 호텔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아니, 수갑에서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취조실에 도착한 것이다. 날씨 만큼이나 새파랗게 얼어붙은 눈동자와 푸르게 질린 입술이 활기를 되찾은 듯 열정적으로 신랄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새로 들어오는 누군가(정확히는 아까 부터 차에 있던 동행객 이었겠지만, 각도 탓에 얼굴을 보지는 못 했다.)의 얼굴을 보고 왜 그들이 무어라 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 녹색의 눈. 여기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살벌한 분위기.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그녀에 대한 꿈. 그녀의 개인적인 과거의 파편 일부… 가족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장면들. 그제야 그는 스스로를 멈추고 한 명 한 명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고, 꿈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들의 정보를 아직 유출하지 않은 사람이지.”
입막음, 아니면.
“그리고, 어쩌면 당신들이 쫓았고, 쫓아야 하며, 쫓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정보를 쥐고 있는 인간이기도 해.”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 그 곳에서 가장 환하게 웃었다. 징그럽게도 그림 같은 미소를 얼굴에 들이밀었다는 소리이다. 그는 숨이 조금 모자른지 몇 번의 호흡을 정적 속에 삼키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코드 네임 아난시. 본명은, 앨리스 블레이크… 맥거프. 맞지 않습니까, 그 쪽.”
“…지금 알고 있는 정보 하나로 유세를 떨고 싶은 건가?”
“당연하죠. 당신들이 모조리 나 하나 잡겠다고 유난을 떨고 있으니까, 나도 그럼 그렇게 해 줘야지. 아닙니까?”
붉은 머리의 여자는 낭패라도 당한 듯 얼굴을 구겼고, 푸른 눈의 남자는 서서히 미소를 누그러뜨려 얼음판을 얼굴 위에 깔았다.
“날 납치해 간 사람도 아마 당신들과 비슷한 증상을 겪었을 거고, 어디 보자… 솔직히 그 개X끼 증언을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 김에 나도 좀 치료도 받고.”
희게 질려 가는 얼굴은 비단 그가 표정을 굳혀서 그리 된 것은 아닐 터다.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 그 스스로는 명백하게 납치 사건의 피해자였고, 부상자였으며, 지금도 부상자인 데다가, 여전히 출혈이 멎지 않은 곳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흐려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하는 시야를 붙잡으며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여전히 그의 숨은 불규칙했고 입술은 파리했다.
“대략적인… 정황이나, 당신들도 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 그런 게 모이면 다시, 할까.”
“이봐, 누구 멋대로… 이봐, 잠깐. 다니엘, 다니엘 워커!”
시야가 잠깐 점멸했다. 모든 소리가 흐리게 느껴졌다. 수근거리는 소리마저 불투명해지니 평온하다. 조금만,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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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사내 병원을 오가면서 진술을 반복했다.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은 그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알며,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는 피로 속에서도 용케 추가적인 정보를 물어 온 모양이었다. 취조실에서 기절해 사내 병원의 딱딱한 듯 푹신한 듯 애매한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그 사이에 말이다. 그는 제 힘을 증명하려면 우선 이 천덕꾸러기 같은 힘을 도구처럼 운용할 줄 알아야 했고, 기절한 사이에 어떻게든 그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물어 온 정보는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였다. 예를 들면 이 회사나 재단에 끼인 여러 의원이나 이사진들의 정보 같은 것들.
그가 이를 증언하기 시작하자 취조실은 순식간에 관람객이 늘어났다. 정보의 주인 되는 인간들이 불안함을 못 이기고 문 근처를 좌우로 뱅뱅 돌지 않나, 녹음과 녹취를 위해 마련한 여러 의자들에 앉아서는 다리를 떨지를 않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한 명이 직접 난입하는 결과까지 만들어 내었다.
“원하는 게 뭐지?”
이제는 제법 모자랄 것 없는 사람이 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래를 원합니다. 정보를 대가로, 나의 목숨과 안전을 원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신중했고 결연했다. 당연하게도, 지금 이 제안은 그나 이 곳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거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생을 뒤바꿀 거대한 거래일 테니까. 아니,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말 그대로 걸어버리는 거래일 테니까.
계약서는 작성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가 취조실에서 나올 때의 인사말을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여러분들의 정보 제공자로서 협력하게 된… 다니엘 클라이드 워커라고 합니다.”
그는 잘 부탁드린다는 말 따위는 집어치운 뒤, 그대로 병실로 향했다. 우리들의 악랄하고 끔찍한 정보 제공자가 도래한 날이자, 푸른 꿈 사건이 종결된 기록. 낡았지만 한줌 바래지 않은 활자들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그려주고 있는 기록을, 그녀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느린 걸음의 주인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앨리.”
“아 젠장, 들켰다.”
“들켰다는 무슨. 네가 수장고에 가서 하는 일이 열이면 열, 다 그 때 일 보는 거지.”
느린 걸음의 주인, 다니엘은 짧은 한숨을 쉬며 문 틀에 기대어 선다. 이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막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내가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든.”
“계약 내용?”
“그래. 여기에도 결국 계약서는 없잖아.”
‘이봐, 다니엘. 다니엘 워커. 무슨 계약을 한 거지?’
‘녹음기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말장난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누누히 이야기하듯 그건 극비 사항인데,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저런, 그건 제 목숨이 달린 극비 사항이거든요. 앨리스, 블레이크, 맥거프.'
“와, 그러면 가면서 이야기해 준다는 거지? 알았어.”
‘빌어먹을, 하아아… 대가리 새X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 내 친구가 아무래도 난청이 온 모양이야. 이러면 내 계약서 제1조의 보호 관련 조항이 의미가 없어지는데?”
‘모르죠, 나도. 꼬우면 당신이 알아서 해 보던가.’
스물 두 살의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지금의 그들은 느린 걸음에 함께 발 맞춰 수장고를 나갔다. 앨리스는 이 녀석의 말에 웃었다, 극비라면서 벌써부터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공개된 극비이다.
- 어리고 여린 희망.
이 곳은 둥지, 영웅들의 첨탑. 사람들은 영웅이라 한다면 단단한 육신과 강인한 정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짜여버린 틀이고 보편적이 되어버린 군상이며 대중이 요구하는 영웅의 모습이라 해도,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필요한 곳이며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곳임은 분명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 혹은 노란 눈을 가진 사람처럼 눈에 보이는 색채가 특이한 사람들. 꿀벌의 노란 빛을 연상시키는 눈을 가진 남자가, 붉은 머리에 새싹빛 눈을 한 여자와 한동안 재잘재잘 대화를 나눈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그들이 서 있는 복도에 달린 문이 열리고, 한쪽 눈에 안대를 쓴 남자가 두 사람을 불러 사무실 안으로 부른다. 보편적인 영웅 군상, 그런 사람은 아닌 존재. 제법 마르고, 평범하게도 갈색 머리칼에 푸른 눈빛을 가진 남자는 순식간에 복도 언저리를 고요로 채우고는 그대로 자신의 공간으로 사라진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항상 있어왔던 일 치고는 드물게 시선을 모아 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방금 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잠시 동안 휴가로 자리를 비웠었기 때문이다. 빈 자리의 고요가 순식간에 채워졌다가 평소의 일상적 모습마저 보여지는 광경은 늘 그렇듯이 잠깐 동안의 낯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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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눈을 한 남자는 하루 일과를 잘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으면, 문이 열린다… 본인의 방이 있는 층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그를 보고 손을 흔들어 준다. 그는 살갑게 웃으면서 따라 인사를 한다. 짧은 대면의 순간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면서 끝난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 속 스스로의 모습을 본다. 그는 아주 옛날에, 이 거울에 제대로 비치지도 못할 정도로 작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거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지만, 작고 작은 시절에는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파르르 떨었던 때가 있었더랬다. 손을 흔드는 것조차 무서워 누군가의 뒤에 숨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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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면 비가 추적추적 온다는 묘사를 자주 끼워 넣곤 한다만, 어떤 작은 아이에게 일어난 일은 바람이 유난히 강한 날에 일어났다.
그 날은 아이의 어머니가 유달리 아이를 잘 달래던 날이었다. 매일같이 언성을 높이고, 조악한 밥을 먹이던 사람이 까슬한 손길을 뒤로 숨기고 아이를 서툴게나마 보듬던 날이었다. 어린 아이는, 무감함 속에 새겨진 학습된 공포에 어머니를 이리 저리 피해 보려고 여느 때와 같이 장롱에 숨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찾았고, 이내 평소와 같이 거친 손길로 장롱을 열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걸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꿈에서도 엄마는 항상 화를 냈는데. 아이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꿈을 눈 앞에 두고 망설였다. 소리 지르지 않는 엄마. 안 아프게 하는 엄마. 엄마한테서 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술을 먹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정말로 꿈일까. 그래도 붙잡아도 될까. 아이는 까슬한 손을 붙잡고 장롱 밖을 나왔다. 아이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어머니의 체온이 따뜻한 지 차가운 지 잘 느끼지도 못했다.
닫은 문이 덜컹거릴 때는 무서운 걸 봤을 때 뿐이었다. 화난 엄마, 술을 먹은 엄마, 술을 먹고 화를 내는 엄마… 돈이 없다고 하는 엄마. 집에 방치되었던 아이는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현관문 밖에서 오간다. 아이는 무섭다. 조금 무섭지만 엄마의 손을 잡고 있어서 괜찮다.
그런데 엄마가 손을 놓아 버렸다. 아이는 모르는 사람의 손에 넘겨졌다. 엄마는 아이 대신 돈을 잡고 있다. 아이는 모르는 사람의 품에 들어가 버렸다. 아이는 무섭다. 이제는 너무 무섭다. 그런데 울면 혼날 거야. 소리를 내면 혼날 거야. 아이는 그저 품에서 떨기만 한다. 노란 눈동자는 바람에 빠르게 실려가는 구름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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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정돈을 한창 하고 있던 와중에, 정보 제공자가 붉은 머리의 영웅에게 은밀히 정보를 흘린 것으로 사건의 서술은 시작되었다. 정보 제공자는 지도를 펼치며 항구 근처와 빈민가 인근의 몇몇 장소를 골라 짚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장소로 짚인 곳은 두 곳이었는데, 하나는 항구의 대체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는 중간 크기의 창고였고, 다른 하나는 빈민가 쪽의 지하 설비(정확히는 지하와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였다. 붉은 원과 별 표시로 중요성을 나타낸 정보 제공자는 붉은 머리의 영웅을 바라보았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아동 실종 사건, 불법 선박 목격 등의 이유로, 누군가 조직적으로 일을 치고 있다는 것. 이런 일은 경찰들이 해결할 수 있다면 할 일이기 때문에 본래 그들이 주로 개입하는 사건은 일반적으로 공권력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로 정의되며, 특히 초능력에 관련된 사건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번 일에 마땅히 개입할 명분을 그가 끌어왔는데,
‘납치된 아이들 중에 아무래도 초능력자가 있는 것 같더라. 이 일을 꾸민 새X들은 걔만 따로 어떻게 할 속셈인 거고.’
그리 된 것이었다. 이런 정보를 물어 와 기어코 틈바구니를 쥐어 짠 정보 제공자는, 혹시라도 그 애를 데려올 수 있다면 최대한 심적 안정을 취하게끔 조치하라고 추가적으로 당부했다. 당시의 붉은 머리 영웅은 그것을 명령이라고 느꼈지만, 동감하는 바였기에 이에 동의하였고, 몇 가지를 간단하게 토론한 뒤 그들은 둥지 밖을 나섰다. 경찰들의 사이렌이 그들의 얼굴에 번쩍거렸다.
붉은 머리의 영웅은, 앨리스 맥거프는 이번 일에 기습적인 협조를 해 준 녀석에 대해 짧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정보 제공자는 원래부터 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듯 시큰둥해하며, 일이나 빨리 마치고 오라고 핀잔이나 주었다. 이걸 그저 성과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앨리스는 그리 쏘아 붙이려다가 말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스스로의 유능함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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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는 홀로 다른 방에 갇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마룻바닥 밑의 쥐 떼 처럼 죽은 듯이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 쥐 덫에 걸린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무섭게도 커다란 손은 아이가 떨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자 눈을 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지 억지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아이는 순간 제발 이 사람이 나에게서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리 되었다.
불완전하고 얇고, 아이의 눈 색을 닮은 황금빛 벽이 아이를 잠깐 보호했다. 보호되는 순간 아이는 황금빛 세상에 들어온 듯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지만, 이내 커다란 사람의 거친 고함에 세상이 깨어지자 다시 숨을 죽였다. 눈을 죽이고, 울음을 죽였다. 공포를 짓눌렀다. 불규칙한 호흡만이 아이가 무서움에 갇혔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렇게, 혼자 갇히게 되었다. 나쁜 짓을 했나 봐. 내가 어른들 말을 안 들어서 그래. 나쁜 아이가 된 거야. 어떡하지? 잘못했다고 할까? 작은 머리가 이리 저리 구른다. 달이 뜬 밤이었지만 아이의 생각은 달만큼 높이 닿지 못하고 구름에 막힌다. 조막만한 손이 눈을 덮었다. 울면 안 돼, 혼날 거야. 나쁜 아이는 울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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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본래 향해야 할 곳은 항구 쪽이었다. 그녀의 힘은 복잡스러운 곳에서 더 활용하기 좋은 만큼, 그리고 항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홀로 시간을 끌거나 수비하기에도 좋은 만큼.
그래서 그녀가 항구에 있었는가? 있었다. 다만 아이에 대한 정보를 듣고, 정보 제공자의 말을 들었을 때의 피 끓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빨리 끝낸다면 합류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야.’ 빌어먹을 놈, 사람 이용 한 번 잘 하는 놈.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모르겠으나.
적들이 보였다, 창고 안에 있는 빈 드럼통이 ‘우연히’ 구르기 시작한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위로 남은 자재들이, ‘우연히’ 굴러가는 드럼통에 밀려 ‘우연히도’ 덮인다. 쇠사슬 같은 것들 이 사람들을 얽어버리고, 바깥은 관리가 제대로 안 된 창문 너머로 굴러간 드럼통에 소동이 인다. 골드버그 장치는 그녀를 배회하며 적들을 노려본다. 노려보는 것을 그만 둔다, 이 쯤이면 그냥 주먹질을 해도 이길 것 같거든.
어둠을 틈타, 의도적으로 도착한 자가 뒤통수를 강타하기 시작한다. 항구에서 선박을 기다리던 이들은 하나 둘 씩 제압당한다. 제압당하는 자들 보다도, 제압하는 자의 이가 훨씬 더 악에 받친 듯 꽉 물려 있었다. 늦고 싶지 않다. 몇 명을 드럼통을 둥글려 넘겨 버림으로써 넘어뜨리고 차례차례 기절시킨 뒤,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을 해결한다. 바닷바람이 매섭고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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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이 곳이 집에 있던 장롱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매일 같이 어머니의 손을 피해 숨던 곳. 금방 들키지만, 숨을 곳이 마땅치 않던 집에서 유일한 피난처. 그래서 아이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자연히 그림자 속으로, 구석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곳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아이는 쥐 죽은 듯 가만히 숨을 참았다. 가만가만 쉬기만 했다.
이따금 높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아까 전 같이 있던 아이들의 것인가 보다. 또 들어 보면 굵고 짧은 소리가 들린다. 이건 아까 커다란 사람의 것인가 보다. 나쁜 사람이 여기를 태우러 오나 봐. 나쁜 사람이, 잡아먹으러 오나 봐! 아이는 구석에 잔뜩 웅크렸다. 달빛이 지상과 지하를 가르는 그 틈새로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쾅! 마침내 문이 부서질 듯 열렸을 때, 앨리스는 작은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싶은 것처럼 작고 노란 공에 갇힌 작은 아이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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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번의 용의자였던 사람이나, 전무후무한 사례를 남긴 정보 제공자와는 달리, 아이는 정말 설탕유리과자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이동되었다. 회사에 딸린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고, 취조를 할 때에도 그 숨 막히는 공간보다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병원 복도의 의자에서. 앨리스는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아이는 병원에 있는 모든 시간동안 앨리스의 옷자락을 움켜쥐느라 손이 허옇고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앨리스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피가 몰린 아이의 손을 주물거리면서 물었다.
“아가야, 있지. 누나가 궁금한 게 있는데. 아, 내 이름은 앨리스야.”
“…앨리스…”
“응. 혹시 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 아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여기는 병원이야. 병원.”
“…병원…”
멀거니 따라하는 아이의 모습이 예사롭지는 않다. 단어를 발음하는 게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앨리스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처음 오니?”
“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신호를 본 것치고 앨리스의 속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면 아이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아서 병원에 올 일이 없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것보다는 아이를 살피는 데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부드러운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했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야. 여기서, 아까 본 하얀색 옷이랑 초록색 옷 입은 사람들 있지. 선생님들이야.”
“응…”
“선생님들이랑 놀면 아픈 게 다 낫는 곳이야. 알았지?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아이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아가야, 선생님이 아가 이름을 알고 싶대. 아가는 이름이 뭐야?”
새싹빛 눈이, 죽어가는 전구처럼 빛나는 눈을 마주한다. 노란 눈을 한 아이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엄마는… 잭이라고 했어요.”
“잭, 잭이구나. 안녕, 잭.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괜찮을 거야…”
앨리스는 잭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여린 새싹의 화분을 옮기듯이. 잭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머리 위까지 올라간 손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고, 또 난생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난생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안겼다. 처음 일어난 일은, 아주… 따뜻했다. 따뜻했다.
-
“…메이슨 호프.”
“그럼 잭도 잭 호프가 되나?”
“그 애 이름이 잭인가 보군.”
“그래. 메이슨 호프 씨는 어떻게 되고 있지?”
“이 쪽은 순전히 경찰들 소관이지만, 조사 결과 정도는. 경찰들이 나한테 고마워할 걸.”
정보 제공자, 다니엘이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쳤다. 참 예의 바르지 않은 자세였다. 저 사람이 아이의 보호자 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적대감을 드리우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의 추측이 맞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 뒷면에 있던 것 까지는 그녀도 몰랐겠지.
“일단 이거 먼저. 실종자 서류. 특이사항, 눈이 노란 색임.”
“…이 사람은 호프 씨가 아닌데. 그렇다는 건,”
“그래.”
“실종자라고?”
“실종자 ‘였어.’ 다음은 보험 청구 문서.”
메이슨 호프의 앞으로 도착한 거액의 보험금. 다니엘은 이어서 사진 한 장을 추가로 들이민다. 비교적 최근, 아니, 바로 어젯밤에 찍은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깔끔한 화질의 사진이다. 사진 안에는 메이슨 호프와 잭 호프가 살았던 집과, 작은 안뜰. 앨리스는 사진을 자세히 봤다.
작은 안뜰은 파헤쳐 져 있었다. 파헤친 흙더미 사이로 유골이 보인다. 옷가지가 같이 보인다. 실종자가 입고 있던 옷과 똑같다.
“보험… 사기였지. 실종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된 셈이야. 메이슨 호프는 살인 및 보험 사기, 인신 매매 혐의로 체포 됐어.”
“…그걸 알아냈다고?”
“단기간에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다니엘 워커씨의 힘이랍니다, 맥거프 씨.”
재수없게도 어깨를 으쓱한 다니엘은 이어서 앨리스를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듯이.
“…아, 무래도 죄목을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 테면?”
“…아동 학대.”
“으흠. 실종 처리가 14년 전에 됐거든? 그런데 그 애는 몇 살로 보였지?”
“14년? 거짓말하지 마, 그 애는 고작 8살 밖에 안 돼 보였다고.”
“최소 14살. 그 애가 몇 살로 보였다고? 교육 수준은? 지능 검사… 는 안 했으니 패스.”
“…하.”
아이의 건강 검진 결과에 분명히 써 있던 영양결핍이 눈에 아른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죽은 듯이 지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눈이 핑 도는 것 같다. 눈물이 새는 것도 같다. 다니엘의 웃음소리가 들려도 새어 나간 눈물이 다시 마르지는 않았다.
“웃음이 나오나 보지?”
“아니, 그렇게 울 수 있는 인간이 나한테는 그렇게 살벌하게 대한 게 웃기잖아.”
다니엘은 자신이 다쳤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웃는 사람의 눈은 웃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썩고 독이 가득 든 사람의 눈. 앨리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 애는 어디서 치료받고 있어.”
“어쩌려고.”
“만나게.”
“개짓거리 하지 마라.”
“안 해.”
앨리스는 다니엘을 막기에는, 눈 속 어딘가의 흔적을 읽은 것도 같았다. 혹은 애라고 할 때 묘하게 부드러워지는 목소리를 눈치챈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앨리스는 다니엘을 막을 수 없었다. 기묘한 믿음이 태도에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
잭은 하얀 병원복을 입고 하얀 병실에 있었다. 하얀 침대의 하얀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어색함을 느끼고 있다고 열심히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병원, 아픈 곳이 사라지면, 떠나는 곳. 그러면 나는 이제 어디로 가지? 노란 눈이 깜빡거린다. 작은 머리가 돌아갈 힘이 없어 숙여진다.
그 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꾸미려는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지다가, 간이 침대에 멈췄다.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기엔 잭은 작은 아이였고, 들어온 사람은 어른이었다. 어른은 아이가 충분히 낮춰 볼 수 있도록 간이 침대에 자신을 꿇어 앉혔다.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을 잭이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나중이 될 일이다.
“안녕, 아이야. 이름이 뭐니.”
“…잭이에요.”
“잭, 잭… 호프. 네 어머니의 성함이 메이슨 호프 더라. 그래서 네 이름은 아마도 잭 호프일 거야.”
“…잭, 호프.”
그제야 제 이름을 안 것 마냥 아이는 몇 번이고 스스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살 없이 마른 아이의 뺨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호프는 희망을 뜻해.”
“희망…?”
“그래. 어두컴컴할 때, 숨이 막힐 때, 한 줄기 빛 같은 거지. 으음, 나도 설명은 잘 못 하겠는데.”
“좋은 거야?”
“아마도.”
“…어…”
잭은 눈 앞의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이름을 모른다. 어떻게 불러야 하지? 커다란 사람? 방황하는 입과 손이 빤히 보여 다니엘은 순간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꾹 참는다.
“아저씨라고 부르든 형이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는데, 일단 이름은 다니엘 워커라고 해. 다니엘, 클라이드, 워커.”
“…클라이드?”
“미들 네임이야.”
“미들 네임 있으면 좋아?”
“음, 있으면 좀 더… 멋있어져.”
그렇게 말하면서 다니엘은 멋진 팔짱을 껴 본다. 잭도 그것을 따라한다. 노란 눈이 다니엘을 향한다. 자신이 멋지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다니엘은 슬며시, 느리게 손을 잭의 뺨 가까이에 가져가서, 아이가 눈을 꼭 감으면 그제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짜잔. 안 아프지롱.”
“어…?”
어떤 아픔도 찾아오지 않자 잭은 감은 눈을 떴다. 안 아프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 이제 막 노란 눈에 작은 빛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아이에게 다니엘은 말한다.
“앞으로 천천히, 아픈 걸 치료할 거야.”
“…나 안 아픈데.”
나이에 비해 확연히 어려 보이는 모습. 키 하며 체구까지 두 뼘 정도는 평균보다 작은 아이. 그리고 말 하는 투를 봐도, 이걸 넘겨짚는 것은 조금 실례일 지도 모르겠으나 정신적인 연령 마저도 또래보다 확실히 어릴 것이다.
“잭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잭이 어디가 아픈지 알아. 그래서 잭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병원에?”
“병원 말고, 음… 새로운 집이랑, 새로운 사람들이랑 있을 거야. 병원도 계속 올 거지만.”
“…그럼 나, 앨리스랑도 계속 봐?”
“그으렇지.”
아이가 밝게 웃는다. 웃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서 다니엘은 안심한다. 서리 같은 것으로 촘촘히 쌓여 있던 안이 조금은 녹는 것 같았다. 고드름으로 온통 수장되었던 심장이 체온을 느끼라 한다. 다니엘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빙긋 웃는다.
“앨리스한테 멋진 이름 자랑하려면 미들 네임도 지어야지.”
“응!”
“그래서 내가 가져온 건 이름 모음집이야.”
“응!”
“잭, 좋아하는 이름을 찾으면 말해 줘.”
“응! 다니엘!”
다니엘은 살며시 잭의 옆자리로 가 앉는다. 커다란 사람이 곁에 가 앉자 잭은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이내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다시 눈을 뜬다. 아프지 않다. 잭은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눈 앞에 놓인 이름 모음집이라는 이름의 책을 건네받는다. 만지작거린다. 책이다, 동화?
“동화도 있어?”
“있지. ‘잭과 콩나무’라는 동화도 있어.”
“그럼 나는 잭 콩나무 호프야?”
“아니야.”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책의 표지를 펼쳤다. 음, 제법 글씨가 빽빽한데. 글씨 공부 용으로 가져올 만한 거였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그가 자신의 방에 도착하면 문패에 적힌 이름이 보인다. 건너편에는 ‘다니엘 클라이드 워커’가 적힌 방이 보인다. 제 형의 이름이다. 아직도 사무실에 있겠지, 하여튼 형은 서류를 만지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의 문패에 적힌 이름은- ‘잭 에드윈 호프’.
‘명예를 지키는 사람.’ 그는 문패를 한 번 쓸며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말랑이 호프.
잭의 방에는 주변 어른들이 챙겨 준 흔적들로 가득하다. 고립되어 있던 그를, 외로움의 공포에 떨던 그를 지켜주던 애정 어린 손길이 가득한 방.
예를 들어 찬장에 있는 서로 다른 브랜드의 코코아 가루 통 같은 것들 말이다. 죄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들이다. 잭은 그 중 하나를 꺼내 핫초코를 탄 뒤, 마시멜로를 퐁당 띄우고 책상이 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책상 위에는 아이의 몸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다르게 말하자면 지금은 그가 한 팔로 끌어안아도 될 정도의 낡은 인형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잭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컵을 놓는다. 그러고서는 대뜸, 이 낡은 인형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이 행동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책상에 앉을 때마다 꼭 이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안녕, 말랑아.”
이제는 어느 톡방에서 저 자신을 칭하는 이름이 된 것을, 인형에게 말해 본다. 낡은 인형의 낡고 소중한 추억을 매만져 본다.
-
이 현상금 사냥꾼들의 회사가 속한 재단은 생각 외로 규모가 커다랬고, 재단이 커다랗다면 으레 그렇듯이(적어도 잭이 생각하기에는) 학교가 하나 재단 소속으로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 학교는 회사 소속 가족들과, 현상금 사냥꾼들, 그러니까 영웅들이 해결한 일들에 엮인 상처 입은 사람들의 터가 되었다. 거주 지역 또한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이일 적의 그는 앨리스에게 들었고, 자신이 혹 동떨어질까 봐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앨리스는 시무룩해진 아이의 표정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어떤 점을 잘못 말한 걸까, 하는 걱정이 녹색 눈에 역력히 드러났으나, 곧 어릴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본 그녀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는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어른들과 헤어지기 싫은 것이다. 유치원을 처음 가는 아이의 등원 거부와도 같은 것이다.
아이에게는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이제는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살해당했고, 어머니는 구속당해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아이는 아직 증언 요청을 받지 않은, 정확히는 법조인들도 망설일 정도로 케어가 필요한 아이였다.
14살. 그런 것 치고도 너무 앳된 몸과 정신. 아이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전문적인 법조인도 아니고, 의사도 아닌 그녀 스스로의 생각으로도 그렇게 보였다. 아이의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 버렸기에,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4살이라고 하기에는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이 할 법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앨리스는 못내 서글펐다.
때문에 앨리스는 어린 잭에게 말했다. “아가, 너는 아마 나나 그… 다니엘이 사는 기숙사에서 살게 될 거야. 우리는 자주 볼 거란다.”
잭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벅차오름을 느꼈다. 아마 벅차오른다는 단어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뛸 듯이 기뻤다는 표현을 알았다면 그렇게도 표현했을 것이다. 아이는 그 때 할 수 있는 것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우는 것, 끌어안는 것, 그리고 가지 말라고 비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멋진 어른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울먹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붉은 머리의 어른이 천천히 손을 내려 등을 토닥거리자 그제야 아이는 웃었다. 아이는 버려지는 게 무섭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이 무섭다. 떨어지는 건 더더욱 무섭다.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최고의 안도였다.
-
그 날 저녁에 잭은 앨리스의 방에 초대되었다. 자신의 방이 또 다른 멋진 어른(자신에게 미들네임을 지어 보라고 한 사람 말이다!)의 건너편 방인 걸 알았을 때 방긋방긋 웃다가, 그럼 그 사람 방에는 자주 놀러 갈 수 있겠다면서 홧김에 한 결정이었다. 앨리스는 기꺼워하며 아이를 제 방 안에 들여 놓았다.
“아가, 뭐 먹을래?”
“네?”
“이리 와 볼래? 여기 이건 핫초코고, 이건 아이스티야. 둘 다 달달한데 어떤 걸 먹고 싶어?”
“어…”
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핫초코를 골랐다. 앨리스는 아이를 따라 핫초코를 마시기로 선택했다. 이어서 앨리스는 찬장에서 크고 몽실몽실한 마시멜로가 가득 들어있는 봉지를 꺼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식탁으로 돌아온 그녀는 핫초코와 마시멜로의 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는 더 달라고 하고 싶은 표정을 숨기고 싶어했다.
핫초코와 마시멜로를 즐기면서, 앨리스는 아이에게 물어볼 것을 물어보았다.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는 대로 말해줄 수 있냐고. 아이는 드문드문 대답을 시작했고, 따뜻한 핫초코 때문인지 아니면 아아의 손을 잡은 사람의 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이 제법 유창해졌으며, 이야기가 끝나갈 때 쯤엔 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앨리스는, 참던 눈물을 어떻게 능숙하게 훔치는지에 대한 방법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팠어요. 아팠어요… 아프고… 싫었어요… 싫어… 나는 여기 계속 있을래요. 나, 나… 버리지 마요. 잘못 했어요, 안 울게요. 안 울게요.”
“울어도 돼, 아가. 괜찮아. 응? 아가야.”
“나 여기서 있을래… 버리지 마아…”
아이는 그날을 기점으로 제법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굳어버리고 얼어붙은 것들이, 생각보다도 잘 녹아내려서.
-
아이가 재단 소속의 학교에 등교가 결정된 뒤에, 앨리스는 커다란 강아지 모양 인형을 선물로 주었다. 왜냐하면 잭에게는 그녀와 그 다른 재수 없는 놈 외에는 이렇다 할 말동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나는 너를 지켜주러 온 요정이야!”
“헉!”
“이 요정님은 요정 나라에서 잭 호프를 지켜주러 왔는데, 너가 잭 호프니?”
“네!”
발그레해진 아이의 볼이 보였지만 앨리스는 웃음을 참으며 인형 뒤에 숨어 계속해서 요정을 연기했다. 가성을 내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방정맞지만, 알 게 뭐람.
“다행이다, 길을 잘 찾아왔네! 잭, 나는 너를 지켜주러 왔어. 그런데 그 전에 네가 나한테 해 줘야 할 게 있단다!”
“어어, 어떤, 어떤 건데요?”
“그건 바로… 요정님의 이름을 정해주는 거야!”
그러면서 앨리스는 잭에게 커다란 인형을 안겨주었다. 입학 기념 선물이야, 부드러운 웃음이 뒤따랐다. 잭은 인형을 꾸욱 끌어안으면서 인형의 눈과 앨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인형에 볼을 폭 부볐다.
“말랑이. 말랑이야. 와, 내 이름은 말랑이구나!”
아이는 능숙하게 요정 흉내를 내며 인형과 놀기 시작했다. 말랑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퍽 귀여워 앨리스는 한동안 한 아이와 한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는 무언가 놓친 게 있었는지 앨리스에게 다가갔고, 고개를 꾸벅였다.
“있잖아요, 고마워요. 진짜로. 응.”
“선물이라니까.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짱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아이의 눈은 햇볕이 들지 않아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의지할 어른이라 할 만한 존재조차 없던 시절에서 가까스로 구조되어 도착한 방 안, 아이가 쓰기에는 제법 넓고 컸던 방 안은 이제는 성인 한 명이 안락하게 하루, 한 달, 일 년을 영위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공간의 작은 방 안, 낡은 강아지 인형의 이름은 말랑이 호프였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었고, 자신의 상상 친구가 되어 줬고, 자신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아이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친구였던 말랑이 호프는 오늘도, 친구의 곁을 지키고 있다.
-
“학교를 가는데 그걸 들고 가겠다고.”
“…안 돼요?”
다니엘은 별안간 커다란 인형을 들고 온 작은 잭을 보았다. 본 적 없는 인형인데, 어디서 받아온 걸까. 그리고 이걸 학교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선언하는 이 아이는 참 무슨 삶을 산 걸까.
“선생님이 싫어할 것 같은데.”
“으응, 그러면 어떡하지…”
놀리는 말은 아니다. 잭이 가는 곳은 유치원이 아니라 학교이고,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존재하는 교육기관이다. 즉슨 공부에 방해가 될 만한 물건은 뺏기거나 치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셈이다. 물론 저학년에게 그렇게까지 굴까 생각하지만, 그렇게 구는 곳이 존재하니까 문제인 것이다. 안절부절하는 잭을 보고 다니엘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던졌다. 왜 던졌느냐 묻는다면, 애니까, 하고 대답하겠지.
“흠… 이렇게 하자. 어차피 난 네가 하교를 해도 계속 여기서 있을 거거든. 그러니까, 네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나한테 맡기는 게 어때.”
“…”
“그 김에 숙제라도 같이 하고.”
“…응.”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나 눈을 굴리는 것이나, 철저하게 방치되고 억압된 아이 치고는 눈치를 보거나 셈을 할 줄은 아는 걸까. 다니엘은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지 가늠하다가,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근데 인형은 어디서 나온 거야?”
“앨리 누나가… 줬어요.”
“아하.”
“앨리 누나랑 안 친해…?”
어, 잠깐. 이렇게 외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는데.
“…친하지.”
-
“…그렇게 됐다.”
“야.”
“뭐 어쩔 건데 그러면.”
“…아니, 됐다.”
“앞으로 친구인 척 정도는 하는 걸로 하자.”
이 사실을 잭이 알게 되는 건 5년은 더 뒤일 것이었다. 그래야 한다. 아무렴. 친구라는 이름의 동맹인 것으로 합의된 이 관계는 잭이라는 교량을 통해 유지될 것이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 달리아 포레스트 연속 실종 사건.
다니엘 워커가 정보 제공자로서 협력한 것은 그 해가 시작되는 겨울이었고, 잭 호프가 구조 받아 재단 내 복지 시설 및 교육 시설에 인도된 것은 같은 해 가을이다. 그렇다면 겨울과 가을 사이, 봄과 여름의 시간에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이를 앨리스 맥거프에게 물어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지친 인간의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봄, 그 해의 첫 꽃이 피고 새싹이 자라는 계절. 누군가는 생명의 경이에 감수성이 피어 올라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꽃가루들 때문에 알러지로 눈물을 흘리고, 또 누군가는 새로 협력하게 된 사람 때문에 시끌벅적 해진 회사 속에서 고군분투 하느라 한숨을 흘리고.
또 누군가는, 숲 속으로 사라지고. 봄의 어느 날, 그들은 경찰들로부터 간곡한 협력 조사를 요청 받았다. 숲 속으로 순찰을 나간 경찰 몇 명이 그대로 실종을 당한 것이다. 숲 내부에 들어간 사유는 아주 간단하게도, 다니엘의 납치 사건처럼, 그러니까 조용하고 고립되어 사람의 손 밖으로 나간 장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방범을 강화하고자 하는 명령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처음은 세 명이었다. 개들도 세 마리. 돌아온 것은 세 마리의 개들 뿐이었다.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은 여섯.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숲을 담당하고 있던 경찰들은 세밀한 조사를 위해 인근 주민들에게 탐문을 시작했고, 주민들은 그 숲에 대한 말을 꺼내 놓았다. 정확히는 숲 인근 주거 지역에서 벌어진 몇 건의 실종 사건들을 말이다.
‘경찰들이 저 숲으로 갔다가 사라졌다고요? 그럼 작년 이맘때쯤 사라진…’
‘그 있잖습니까, 실종 신고된 사람 말입니다. 저 앞 집에 사는데, 없어졌거든요. 한… 그래, 4월 쯤부터 안 보였던 것 같은데. 이사라고 생각했는데 벽보가 붙었지 뭡니까?’
‘어이구 세상에... 경찰들까지 사라진 거요? 이를 우째요, 그러면 사라진 사람들은 우째요…’
경찰들이 실종 신고 후 수색을 허투루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숲을 놓친 것은 안일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일함을 그 해 봄에 아홉 명의 사라짐으로 돌려 받고서야 그들은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부리나케 영웅들을 찾은 것이다.
-
담당 수사관으로 배정된 앨리스는, 어떻게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고 개들만 돌아왔는지 이유를 알고자 하였다. 그래서 경찰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견들을 자주 진료하는 동물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 기록으로는, 탈수와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여러 증세가 적혀 있었다. 특이사항으로는 눈곱이 눈병으로 착각할 정도로 많이 껴 있었는데, 꽃가루로 인해 눈물을 흘려 이렇게 되었다고 진단된 점이다. 개들도 꽃가루 알러지가 있나? 앨리스는 그리 생각하며 회복중인 경찰견들을 살펴보았다. 가엾게도, 자신의 파트너를 잃은 개들은 힘 없이 낑낑거리며 제 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능력이 공간적 변수를 가지고 노는 능력임을 잘 알았고, 이를 활용하며 자란 인재였다. 하지만 때때로, 사건의 목격자가 입을 열지 않거나 이런 동물일 뿐이라면, 차라리 기억을 읽는 능력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앨리스는, 정황상으로 보아 숲에서 조난을 당했으며, 생존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중이었다. 즉 경찰들이 제 발로 일을 맡긴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영웅이라 불리지만, 대외적으로 그들은 현상금 사냥꾼이다. 주 업무 자체가 경찰들이 제압하기에 무력으로 밀리는 존재들을 직접 처단하는 사람들이다. 잦은 협업이 존재하긴 했지만(멀리 가지 않아도 다니엘이 납치당했던 당시로 보자면 말이다.) 부탁에 가까운 요청을 해 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공권력의 힘이 강한 나라의 국민 입장에서 보자면 더더욱.
그래서 앨리스는 그냥 물어보기로 하였다. 그녀는 곧이어 경찰서로 향했다. 꽃가루가 유난히 날려 하늘이 맑지 않았다.
경찰서의 분위기는 침침하였다. 도넛과 커피를 나눠 먹던 동료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불안감을 앨리스는 잘 알고 있었기에, 문을 열려던 손길에서 확고함이 스러져 버렸다. 발걸음이 무거워진 그녀를 경찰서 안의 누군가가 먼저 발견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앨리스는 10분은 더 고민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일이나 내일 모레 정도에 찾아왔을 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그, 이 지역에서 일어난… 그러니까, 저 숲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으로 찾아오신 분이십니까?”
“네, 민간 수사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아하.”
경찰들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앨리스는 그들의 표정을 하나 하나 살폈다. 그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당연하게도, 사람 아홉과 인근 주민 몇 명까지 합 해 열은 넘는 사람이 사라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대동된 건 고작 한 사람, 그것도 아직 짬밥도 덜 차 보이는 사람이었으니.
“오늘은 조사 차 왔습니다. 인력이 저 뿐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불행한 사건은 저희도 해결하고 싶고, 살아있으신 분이 있다면 한 시라도 빨리 구조하고 싶거든요.”
“…그렇지요. 보낸 자료 외에 추가적인 자료를 보고 싶어 오신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으시다면 열람을 요청해도 될까요?”
“…따라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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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가 안 된다면, 왜 저희에게 수사 협력 요청을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왜냐고 한다면… 그래, 아홉이오. 아홉. 첫 번째는 세 명, 두 번째는 여섯 명. 그 숲을 안전하게 탐색하려면 꽤 큰 인원이 필요하겠지.”
자료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빨랐다. 그러나 말은 굉장히 고요하게 흘렀으며, 숨결은 무거웠다. 비통에 잠긴 공기가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내 생각이나 상관 분들 생각이나 의견은 똑같소. 헬기를 띄워야 작업이 수월할 텐데, 꽃가루 때문에 공중에서는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으음, 확실히 날이 계속 흐리더군요.”
“그렇지. 매번 우중충한 날씨고 말입니다. 수월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많이 투입하면 찾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니, 그 전에 안전을 위해 당신들과 협력을 요청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구조를 위해서 말인가요?”
“미안합니다.”
경찰이 돼서는 담력이 이렇게 약해졌다 중얼거리는 사람의 어깨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런 어깨를 한 사람의 표정과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안전이 최우선인데요, 뭘. 사람의 생명도 최우선이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도, 본사에 있는 동료들도 최선을 다 해 협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료실은 여기고, 사건 정보는… 이 쪽으로.”
제 말로 부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 지길 바라, 앨리스는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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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납치했나? 아니다. 경찰들도 스스로 들어갔다가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인근 주민들 중에서는 정말 납치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민 실종과 경찰 실종을 나눠 생각해야 하나? 화이트 보드 앞에 선 앨리스는 몇 개의 선을 그리다 지우길 반복했다.
아무런 징후도, 증거도 없다. 생사도 불명확하다. 그들이 살던 집에 남은 소지품 중에 무언가를 암시하던 것이 있었는가? 혹은 실종자들 간에 연관이 있는가? 이들 중에 정말로 숲 속으로 가서 조난을 당하거나 사고를 맞이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 붉은 수성 마카로 동그라미를 치고 연결하다가 한숨을 한 번 쉬면서 지우고, 다른 것들을 또 연결하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아직 수사 초반이다.
…그리고 조난당한 사람들에게 하루 하루는 지옥과도 같을 텐데. 눈 앞이 캄캄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었다면. 기억을 읽는 능력이. 앨리스는 순간 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 미친 놈이 협력을 해 줄까? 악에 받친 정보 제공자의 서슬 퍼런 눈이 순간 기억 속에 스쳐 지나갔다. 아니,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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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협력의 수사 협력?”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
“거진 미제 사건으로 남을 만 한 일을 물어 와 놓고?”
“…도와줘.”
이제 화이트 보드 앞에는 두 명이 서 있다. 탄탄한 몸을 한 붉은 머리의 여성과, 조금 마르고 창백한 갈색 머리의 남성. 그 갈색 머리 사이로 시퍼렇게 빛나는 눈을 한 사람이, 다니엘이 앨리스를 향해 물었다.
“저기요, 맥거프 씨. 우리는 고작 스물 두 살이야. 우리보다 베테랑 되는 사람들이 거기 있던 경찰들이라고.”
“알아.”
“미제로 남을 사건이라니까. 보면 말이야…”
다니엘은 앨리스가 가진 벽과도 같은 의문을 똑같이 읊으면서 사건을 하나 하나 짚었다. 아무 증거 없이,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 사람들. 찾아 달라고 하면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가, 우리가 무슨 마법사인 줄 아나. 다니엘은 어처구니 없어 하며 서류를 다시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죄다 봄에 일어났네. 맥거프 씨, 이 정도는 연관성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봄에 일어났다면, 주로… 잠깐, 전부?”
“전부.”
“…왜?”
“이 ‘왜’ 라도 알아낸다면 실마리 하나 정도는 잡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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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리고 봄. 과반수 이상의 실종 사건이 숲으로 들어갔다가 일어난 것이라면, 모든 실종 사건의 신고 일자가 봄이라는 것이 조금은 특이하게 여겨질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숲에 사람을 버려 두고 온다는 전통이 있는가?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보자면 아니오, 애초에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조사차 방문한 외지인을 기껍게 놔둘 리 없다. 봄에 축제를 맞이해서 오컬트적인 의식을 치룬다고 하더라도 바로 실종 신고를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더군다나 우연히 마을에 들른 외지인의 실종이 아니라, 그 마을에 살던 토박이. 그것도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최근 2년뿐.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가? 증언을 토대로 실종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보았다. 이를 테면 아이가 보호자의 눈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틈타 놀이터로 놀러 나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 말이다. 증언들 중에는 자신이 확실하게 숲으로 들어가겠다 말 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돌아오지 않았지만.
봄에, 숲에서… 숲에서 뭐, 빌어먹을.
“차라리 항구면 이해 하겠다.”
“밀항 같은 거로 사라지는 거 말하는 거지?”
“그래, 맥거프 씨. X발 숲은… 게다가 인근 마을이라는 게 숲 기준 북쪽에 서쪽에 남쪽에 하나씩 다 있어. 동쪽은 그냥 숲이야. 뭔 X발 마을에서는 다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특이한 사건인 건 일단은 맞겠지, 전부 봄에 일어났으니까.”
그들이 전문적인 수사관도 엽기적인 미제 사건으로 기록할 법한 일에 불만을 토로할 쯤에 다시 한 번 봄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대체 봄에 일어날 만한 범죄가 무엇이냔 말인가. 혹은 봄에 뭔가 다른 루트라도 열리는가. 숲 속에 이상한 침입자라도 살고 있나? 앨리스는 탁자에 앉아 있었고, 다니엘은 화이트 보드에서 푸른 수성 마카를 삑삑거리고 있었다. 그 놈의 봄이 무엇이길래.
“그래… 그 쪽도 숲에 들어는 가 봤어?”
“아니.”
“…꽃가루 묻은 것 같은데.”
돌아보는데 시야에 거슬린 것이 있어 다니엘은 말했다. 앨리스의 어깨에 송진 마냥 묻은 것.
“이렇게 묻을 정도로 많았나?”
“헬기가 못 뜰 정도기는 하네.”
“…아니, 이 정도로 숲에 뭐가 있지는 않을 텐데? 소나무도 아니고.”
앨리스는 자신의 어깨를 살피며, 그리고 털어낸 손을 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가루처럼 나올 정도로 뭐가 많다고? 그냥 나무들일 뿐이다. 아니 물론 나무들이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이르게 피었나…?”
“꽃이?”
“으으음, 최근 몇 년 사이에 너무 꽃가루가 심하게 퍼진다고는 하시던데.”
“…허?” 다니엘은 순간적으로 웃었고, “잠깐, 최근 몇 년이 ‘정확히’ 언제부터야.”
아까의, 필사적으로 벽을 긁어 대던 사람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칼 한 자루에 총 한 자루로 제법 무장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바뀐 남자가 앨리스에게 묻고 있었다. 언제부터? 갑자기?
“…2년… 전…”
“봄이랑 숲을 연관시킬 만한 단어 하나가 있었지.”
“꽃?”
“그래, 그거.”
꽃. 꽃가루를 뿜어내고 지나다니는 벌레들을 유혹하는, 식물의 기관. 그래서 꽃이 뭘 어떻게 했다고? 앨리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거기에 독초가 있다? 앨리스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이것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도에 나온 숲의 이름은…
“아니 이름부터 달리아 포레스트 였잖아!”
“그 달리아 말하는 건가? 블랙 달리아?”
“그래 미친! 독초가 자란 거 아냐? 숲 안에! 누가 오고 간 뒤로 숲 안에 갑자기 독초가 자라서, 숲 속이 그대로 독안개의 숲이라도 된 거 아니냐고!”
“그게 정답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개들은 왜 살아왔지?”
독초, 독초라면 개들이 살아서 왔을까? 꽃가루에 독 성분이 있다면 그녀는 이 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서둘러 개들의 진단서를 살펴봤다. 꽃가루 성분이 있나? 아니, 없다. 그 정도로 세밀하지는 않았다. 앨리스는 한 번에 열을 냈다가 스르륵 힘이 빠져 그대로 의자에 늘어졌다.
“…왜 봄에만 일어났지?”
“넌 개들의 기억은 못 읽나?”
“바랄 걸 바래야지.”
“으으, 젠장.”
앨리스는 서류 한 장 한 장을 다시 집어 정리하였다. 그 동안 다니엘은 꼿꼿이 화이트 보드 앞에 서 있었다. 봄, 숲에서 일어난 실종사건. 아니, 숲으로 들어갔기에 일어난 실종사건. 조난인가? 근 2년 사이에만 급증한. 정말로 조난인가?
“…지속적인 실종이면 모를까 근 2년 사이에 급격하게 늘었으면 범인이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싶긴 한데.”
“…그러면?”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고.”
어렴풋한 실마리, 실마리인지도 아닌지도 모를 희미한 동앗줄 하나를 잡은 채 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갔다. 앨리스는 비슷한 실종 사건이 있었는지 다른 사례들을 가져오겠다며 밖을 나갔고, 다니엘은 그 동안 낮잠 좀 자면서 어떻게든 기억을 좀 살펴 보겠다며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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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일 가능성? 충분히 높다. 숲 안에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둥지를 틀고 사람을 죽이고 있을 가능성? 음모론의 국가라지만 솔직히 없다고 보기에도 힘들다. 외려 두 사람은 슬슬 이 쪽으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점치기 시작했다. 식견이 좁은 스물 두 살의 치기 어린 두 명의 모습을 보라.
앨리스는 다니엘이 충분한 정보를 모으게 하기 위해, 다시 한번 동물 병원에 들르는 돌발적인 일을 저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꽃가루에 대한 정보라도 있으면 좋겠거니 했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늘어난 꽃가루니까. 사내에 있는 여러 학자나 연구자들에게 제 옷에 묻었던 꽃가루를 맡겨놓았고, 앨리스는 개들에게서 얻을 정보만 얻어가면 되었다.
결과는 영 평범했다. 숲에서 볼 만한 것들. 피톤치드 테라피를 받는다면 묻어 나올 것들. 그녀는 작은 수첩에 결과를 꼼꼼히 적고 회사로 돌아가 연구원들의 답을 기다렸고…
…제법 흥미로운 대답을 얻은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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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다음 날, 홀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러 산악용 밧줄들과 방진 마스크를 낀 채로. 다니엘은 제 능력을 제어하면서 기억 속으로 자신을 숨긴 채 걸어들어 가던 때를 상기해 보았다.
숲 속에 굉장히 목가적인 집이 있었다. 어떤 남자가 그 곳에 있었고, 남자는 그 곳에 아무도 모르게 사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숲 속에 사는지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누군가가 남자의 집에 찾아온다. 남자는 스스로 통나무 집을 지었는지 그에 어울리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고, 손님을 보기 위해 도구를 들고 나갔다.
남자의 집 앞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살아있었던 사람들. 남자는 밭을 기르고 있었다. 옥수수? 옥수수 옆에 꽤 커다란 다른 밭. 해바라기 만큼이나 큰 꽃을 가진 식물. 달리아, 구근에 독이 있는 꽃.
다니엘은 잠에서 깼다. 멍한 얼굴로 기억을 다시금 되짚어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었다. 내가 이전에 이 장면을 보았던가? 데자뷰를 겪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이건 그것 보다는, 마치.
‘…내가 납치 당했을 때 말이지,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내면서 다가 와서는… 음, 음.’
‘갑자기?’
‘여러 모로 많은 걸 함의한 말이군.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다가온 이들이 혹, 정신을 건드림 당했다거나. 그로서는 인생사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을 장면에 선명히 기록된 순간과 기묘하게도 겹쳐 보여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앨리스는 조금 찜찜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가 알아 온 것을 생각해 보자면 들어맞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저 긍정하였다.
앨리스는 꽃가루의 차이를 조사해 왔고, 그 중에서 다양한 독초들의 꽃가루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꽃가루로 작용하는 독성들. 다만 그렇게 송진 처럼 묻어도 효과가 미미하거나 아예 나지 않고, 따로 정제라도 해서 약이든 독이든 만들어야 작용하는 종류들이라고 하였다. 몇몇 종류는 서로 서로 겹쳐야지만 효과가 작용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다니엘은 실종자 중 한 명을 상기했다. 식물원을 운영하던 사람. 식물원이 망했고, 가장 먼저 실종되었던 사람. 숲길은 불편했고 꽃가루와 방진 마스크 때문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는 실종 사건들에 대한 자료 중 연관이 있어 보이는 자료를 가져왔고, 개중 일부는 사이비적 종교 의식의 결과로 밝혀진 사건도 있었다. 첨부된 사진 속의 환각 버섯이 보였다.
독성 꽃가루들, 환각 버섯, 식물원의 관리인. 식물에 대해 박식한 사람… 꽃가루들의 효과를 잘 아는 사람. 답답해서 그는 방진 마스크를 벗었다. 순간 꽃가루들이 그의 숨을 조일 듯이 불어 닥쳤다. 눈, 코, 입, 얼굴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 전부 들러붙는 것 같았다. 조여드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알러지가 없어도 폐에 꽃가루가 쌓여 금방 폐병을 얻을 것이다.
누군가는, 숲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구근이 되고.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기침으로 그저 꽃가루일 뿐인 것들을 털어 내고.
이것은 도박이 아니었다. 퍼포먼스이자 쇼였고, 다니엘 스스로의 유능함을 입증하기 위한 시찰이었다. 그는 바람이 불어 닥친 방향을 향해 산악용 밧줄로 길을 내었다. 환각 버섯에 홀린 사람처럼 독성 가득한 꽃가루들에 홀려 죽을 길을 찾아가는 이들이 걸었을 길.
유감스럽게도 다니엘은 이런 종류에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었다. 정신을 건드리는 족속들이란, 자신의 정신이 건드려 지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나머지 그렇게 변화하곤 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만물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그가 숲에서 나오자마자 체력 저하와 스트레스로 픽 쓰러졌다는 것은 꽤 큰 이슈가 되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점이나, 쓰러졌다는 점이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스스로 ‘특수한 경우의 용의자’의 피해자가 되어 사건을 진술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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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는 에버그린이라는 농지 겸 식물원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다. 한적한 동네였던 만큼 운영하는 데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계속해서 방문해주는 덕에 굶어 죽을 일은 면한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이 초라한 비극은 마을 주민들이 단체로 생계가 어려워져 마을 내의 자영업자들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을 때 일어났다. 그 또한 경제적으로 낭떠러지에 내몰려 있었기에, 있는 땅들을 모조리 팔고 식물원을 아주 작게 운영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가정이 분열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혼 서류는 온통 녹색인 그의 곁에서 유난히 하얗게 빛났고, 도장 자국들은 피처럼 붉게도 빛났다. 그 사람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무렵, 그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저 모든 것이 미웠고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싶었다. 체포된 살인자의 진술이었다.
진술서 상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있었으나, 대체로는 범인이 이혼 직후부터 어떤 능력을 개화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식물 조작, 그 중에서도 아주 가벼운 물질들, 예를 들어 꽃잎들처럼. 꽃잎이 휘날리는 것만이 그가 그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 것이 너무 비참했다는 서술이 뒤를 이었다.
진술서를 보는 다니엘과 앨리스는,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 눈으로 그저 무심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체포 과정은 단순했다. 다니엘이 길을 내었고, 어떤 것이 위험한 지 알았으니 방진 마스크를 써 대비를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사실상 흉기라 할 수 있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보니 양봉업자라도 불러서 전부 걷어가 버리면 어떠냐는 안도 나왔으며, 초능력자일 가능성이 점차 높아진 이상 회사의 무력적 개입은 누가 막기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다니엘이 추가적인 정보를 긁어모으는 틈에, 앨리스와 경찰들 그리고 회사 소속 에이전트들은 모든 정비를 갖춘 뒤 움직였고, 경찰들 중 일부는 용의자가 숲 바깥에서 살 당시의 물품들을 챙겨 정황을 정확히 수사하고자 하였다.
실종 사건은 특수 살인 사건으로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다니엘은 꽃가루 때문에 결막염이 온 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내 병실에서 결과만을 보고받고 있었다. 앨리스는, 경찰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보 제공자라는 막연한 자리에 있던 다니엘 워커는 이곳 저곳에 슬쩍 참견질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앨리스가 속한 현장팀은 고립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냄에 따라 입지가 상승한 한편…
…현장팀 독단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큰 불만을 가진 다른 팀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계기 또한 만들게 되었다.
- Chairman Break - Othello Game.
앨리스는 여름이 뜨거운 계절임을 알았다. 얼마나 불탈 수 있고, 얼마나 녹아 내릴 수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나열된 문장 안에 ‘사람이’ 를 넣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간과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스물 두 살 쯤의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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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 포레스트 사건을 현장팀 단독으로 주도한 이래, 내부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공기가 서서히 불쾌해지는 만큼 다른 팀 소속 인물들의 시선도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단히 노력했다. 적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다니엘이 오기 전부터 현장팀은 서서히 고립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특수 장비 제작을 담당하던 직속 공방과 연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녀가 가진 골드버그 장치 능력으로 이목을 끌어 현장팀을 아예 고립되지 않게 한 것은 선배들에게도 칭찬받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현장팀은 사내 병원 쪽과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공방 쪽과도 연결고리를 확보해 놓았다. 두 날개를 근간으로 정보팀과도 연결을 해 보려고 그녀는 나름대로, 해보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만, 일단 그녀가 당시엔 5년차 현장팀 소속이라는 점이 계획을 그저 구상에 지나지 않는 단계에서 멈춰 서게 하였고, 그 다음으로 푸른 꿈 사건이 내부를 혼돈으로 몰고 가 계획이라는 이름의 여러 종이쪼가리가 다른 종이쪼가리에 파묻혀버렸다.
그래서, 다시 그 해의 여름. 누구 한 명이 불화의 씨앗을 던지면 당장이라도 파벌이 갈리건 네댓조각으로 쪼개져 버리던 이상하지 않을 상황. 뜨거운 공기가 유난히 모두의 목을 조이고 있던 시기. 정보팀이 눈치를 주고 상황실이 말 없이 상하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듯 하던 때. 모두가 유리로 만든 실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 같았던 날.
…폭풍의 눈이 별안간 회사 내부를 들쑤시기 시작한 건 어쩌면 행운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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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느 팀에 속해 있는가?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 대 회사로 협력 계약을 맺은 정보 제공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약이 성립될 당시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재단에 소속된 여러 사람들이 끊임 없이 발걸음하던 취조실. 조용하길 바랬음에도 시끄러웠던 주변. 아마 취조실 밖에서는 자신의 욕을 신나게 늘어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웃었다, 그게 내 알 바 인가? 지금은 계약의 내용이 중요했다.
높은 사람들과 맺은 개인 대 회사와의 계약은 지극히 저한테 유리한 계약이었다. 자신이 뭘 들출 수 있고 어떤 것을 바깥에 떠들 수 있는지 그들이 가늠해 버린 탓에, 그들은 그만 계약서를 허술하고 불공정하게 작성해 냅다 바쳐버린 것이다. 뒤늦게 알아챘는지 추가 조정을 하자고 했지만, 그 시일이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남은 시간 안에, 제법 비굴하게 군 이들의 속사정을 제대로 뒤엎어 깡그리 불태우고 싶어 졌을 뿐이다.
이유를 묻는다면 간단했다. 그는 보호를 약속받았음에도 삐걱거리는 회사 내부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기별 회의에 처음으로 참여해 안건을 내어 놓아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 의사가 없는 놈들과 내가 왜 같이 일해야 하나. 그는 커다란 회의실에서 웅성거림을 무시하고 기어이 강단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무어라 말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외부자 취급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강제로라도 의지를 쥐여 주고야 말 것이라고, 불을 붙일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 회사 내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보만 뱉어 주는 자판기로 보인 모양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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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관용구가 있다. 누군가의 시점에서 보자면 굴러 온 돌은 빼도 박도 못 하게 다니엘 워커를 가리킬 것이다. 굴러 온 돌은 계속해서 박힌 돌들끼리 서로 부딪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분기별 회의에서 제 증명을 못 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도 느끼는 듯이.
숨 죽인 채 모 난 곳 만을 깨트리려는 수많은 박힌 돌들 사이에서, 유난히 소리를 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정보팀 앞에 있었고, 조금 멀리에는 붉은 머리의 누군가가 정보팀 소속의 다른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정보팀에 정보를 요청하러 온 상황실 사람인 것 같았다. 대화 내용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선배, 들어 보세요. 사건 자료는 충분히 넘겼다니까요?”
“정말로 그게 다냐? 그 일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해결이 되냐니까?”
“얼마나 더 듣고 싶으시길래 그러시는 거에요?”
“솔직히 말해 봐. 외부 인력이랑 손 잡은 거잖아, 아니야? 작전 설계는 우리 상황실이 담당하는데.”
붉은 머리의 여자, 앨리스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시비를 붙이는 건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건지.
“외부 인력이요, 네, 경찰 분들이 협력을 요청하셔서 당연히 경찰 분들이랑 일 했죠. 상황실이 손을 많이 뻗어 주셨으면 결과가 또 달라졌을 텐데!”
“…거, 소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외부 인력은 저도 포함인가요?”
정보 제공자가 가벼운 발걸음을 딛어 다가와 무거운 말을 쑤셨다.
“아, 회의 때 난리 친…”
“난리는 씨X 말 하나도 안 뱉는 댁들이 등X인 거고.”
“야, 야, 잠깐만.”
그리고 급작스러운 욕설에 앨리스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말리는 스탠스를 취했다. 다니엘은 대화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말림을 당하자 외려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말이다.
“뭐.”
“갑자기 와서 뭐야?”
“그러게, 넌 뭔데 끼어들어?”
“정보 제공자가 달리아 포레스트 사건에 공 좀 얹어서 이야기에 끼어나 들겠다는데 꼽습니까?”
시퍼런 눈빛이 새싹을 닮은 눈을 꿰뚫어 본다. 앨리스는 분명 이 자식이 어떤 목적이 있어 하이에나처럼 물러 왔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 먹잇감이 자신은 아닐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그의 발이 선배와 저를 갈라버리고, 그 발은 저한테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그 쪽이 설계했어?”
“경찰 분들 도움도 컸고, 현장팀 베테랑 분들 도움도 있었죠? 상황실이 뭘 어쩌고 있었다고?”
“…작전을 공모해야 했는데, 정보팀한테 추가적인 정보를 요청하거나 상황실이랑 함께 전술을 고안하고 지휘를 맡기거든.”
“이상하다. 난 댁을 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왜 배짱을 부리지?”
“허,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그렇지.”
다니엘은 이 곳에 둥지 튼 이래 기묘한 공기의 마찰 하나를 눈 앞에서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거 알아요? 수사실에는 나랑 얘밖에 없었어. 사내에 사건이 알려졌으면 뒤늦게라도 도와주러 올 생각을 하셨어야지.”
“…사내 연구원들한테 이것 저것 조사를 맡겨서 퍼질 수밖에 없는 구조기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래, 그 방의 화이트 보드는 앨리스와 다니엘의 마카 자국만 빼곡히 남아 있다. 다른 이들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방에 들어온 것도,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 두 사람 뿐이니까.
“저희라고 단독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에요. 얼마나 안 도와주셨으면 제가 먼저 협력 요청을 드리지도 못 했을까요?”
그리고 이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 현재의 상황이 이러하다고 알려주는, 붉은 머리의 새싹이 보내는 말. 다니엘은 저런,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기별 회의에선 아무 것도 안 하고, 단독 임무를 수행한 현장팀한테는 뭐라도 뜯어가려고 하고. 음, 내가 보호 받아야 하는 조직이 고작 이따위라니. 무려 지휘권을 가진 곳이. 대단하다!”
“이봐,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렇게 만든 게 당신네들인 걸 어쩌라고. 가십쇼, 넘길 자료는 댁들 머리로 잘 굴려서 추측이나 하고 놀아.”
“…다음 작전때는 얼굴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선배.”
정보팀 입장에선 어리둥절할 상황이다. 다른 팀 두 명이 자기 팀 사무실 앞에서 싸우다가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축출령을 내리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쫓겨난 이는 2대 1의 말싸움에서 패했고, 정보 제공자는 이제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일단 그가 정보팀에 들른 이유부터 해결한 다음에. 그는 정보팀의 총괄자에게 붙잡혔고, 앨리스는 다니엘에게 붙잡혔고.
다니엘의 요구와 총괄자의 요구는 간단했다. 정보의 교환과 다니엘이 임시적으로 소속될 만한 직책을 줄 것. 정보는 정보로, 대가 또한 정보로. 임시적으로 소속되는 만큼 정보팀에 들어가는 정보는 늘어날 것이다. 둘의 요구는 하나의 합의를 만들어 냈고, 일처리는 빨랐다.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는 있는 편이 좋다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기묘하다고 앨리스는 느꼈다.
그리하야, 총괄자가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눌 게 있어 보인다며 상냥하게도 자리를 비워 준 지금. 앨리스는 다니엘이 어떤 것을 묻기도 전에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 5년차라는 경험은 얕보일 연륜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 마저도 맥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고, 그저 어느 순간부터 상황실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으며, 정보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요청하기 힘들어졌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는 정보팀이 이야기에 들어가자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겐 언제나 이면이 있고 모순이 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충분히 이런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석연찮았다. 총괄자라는 사람이 정보는 정보로서 대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러니까 그 ‘어느 순간’이 언제인데?”
“으으음… 말 그대로. 딱 언제라고 짚지는 못 하겠어.”
“넌 그 ‘어느 순간’에는 아직 2~3년차 정도였겠고?”
“…그렇지?”
다니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말에서 앨리스는 무언가를 유추해냈다. 성인일 때 2~3년차라면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미성년자 시기가 겹쳐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아직은 어리숙하고, 사회에 갓 발을 내딛을 시기의, 파릇한 인재.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연륜 있는 사람들…
“아니, 잠깐만. 무슨 생각 하는 지 알겠는데, 아니, 설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내 선배들을 의심하는 거야?”
“그렇지? 눈 귀 다 막고 우리가 정당해요, 하는 건,”
“현장팀은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너가 모든 걸 다 알아? 진심으로? 푸른 꿈 사건의 용의자가 말했다. 꿈 속에서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모습을 관찰한 자가 말했다. 새파란 눈이 붉은 머리의 여자를 바라봤다.
“정보팀에 왔으니까 일단 여기에 물어는 보자고. 그동안 왜 협력이 안 됐는가, 그거. 총괄자분 한테 여쭤 보자고.”
“…그래.”
-
정보는 정보로. 다니엘과 총괄자의 합의가 그러했듯이, 현장팀과 정보팀간의 교류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비단 현장팀과의 교류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팀과의 교류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정보란 그런 것이고 정보를 다루는 이들이 속한 팀인 정보팀이란 그런 집단이었다.
그런 곳에서 정보를 내어주지 않는 이유란 단순하다. 교류를 먼저 끊은 쪽이 존재한다는 것. 총괄자와의 대화에서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총괄자는 당시로부터 2년 전 정도를 기점으로 정보가 굉장히 허술하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이 회사가 일단은, 인명 구조를 위한 곳인 건 나도 잘 알아요. 그런데 그러려면, 데이터 베이스가 필요하고… 그걸 다듬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줘야 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주기 싫어서 안 준게 아니라…”
“네. 데이터 베이스로 만들 만한 정보가 이 시점부터 많이 부족했거든요.”
“…세상에.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자, 이게 바로 사내 정치란다, 앨리스 맥거프… 아마.”
그래서 정보팀은 정보 제공자의 존재를 굉장히 환영하고 있다는 것 또한 덧붙였다. 정보팀에 할당된 에이전트들이 필요 이상으로 활동해 되려 인력의 손실이 생겼음을 총괄자는 설명했다. 다니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세게 조건을 달 걸 그랬다며 혀를 찼고, 총괄자는 제 패를 쉽게 보여주면 안된다며 생긋 웃었다.
“그럼 이제 가능성은 몇 개일까.”
“조언컨대, 빼돌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채서… 가로채서 뭐에 쓰려고요?”
“바로 이런 혼선을 만들기?”
“그러니까 만들어서 어쩌려고?”
애초에 지금 하는 추측 자체가 정답이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세 사람은 최대한 추측하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정보팀 총괄자와 이야기가 된 것이 위안이라도 됐는지 적극적으로 이것 저것 추론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가로챈 게 상황실이라면요?”
“사실 상황실도 그럴 이유가 없긴 해. 아니, 회사 목적 자체가 일단 인명 구조라고. 왜 해?”
“진짜 왜 혼선이 났지?”
“어쩌면 저희 팀에서 가로챔이 일어났을 지도 모르니, 총괄자인 제가 책임 지고 제 팀을 한 번…”
차가운 물을 마신 총괄자가 말을 이었다.
“…한 번 갈궈보겠습니다.”
“여기에 스파이라도 잠입해 있으면 목 날아가는 건… 그렇지. 행운을 빕니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현장팀이면, 왜…? 왜…”
“너네도 사람이다. 단독적으로 임무 수행 가능한데 부차적 목적에 욕심이 생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야.”
“…하…”
“물 마셔, 물.”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내부의 적인 걸까, 입이 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앨리스의 얼굴이 유달리 창백했다. 그럴 수밖에, 그녀의 제2의 삶의 터전인 곳이 이 곳이다. 그 곳에서 벌어진 일이 음험하고 치졸한 일일 줄은 그녀도 몰랐을 터다.
“이래서 대화가 중요하다니까. 이 참에 상황실까지 돌격해 봐?”
“아니야… 너무 생각할 게 많아졌어…”
“그럼 나 혼자 가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게 어지간히 웃겨서.”
축 늘어진 앨리스를 보고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정보팀 문 앞에 있던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을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그 만이 알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아직 스물 두 살인 것을 잊지는 말자. 제법 치기 어리다는 점도 잊지는 말자. 다니엘은 상황실로 향하려다가, 정보팀 총괄자가 어떤 자료가 누락되었는지 조사되기 전까지 도와달라고 붙잡혀 버렸다. 치기 어림을 잊지 말자. 다니엘은 자료를 조사하면서 힌트라도 얻기 위해 날밤을 깔 기세로 기어이 침낭을 챙겨 왔다.
앨리스는, 앨리스는 모든 것에 머뭇거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이 싫어서 제 선배들을 의심하다가, 그것마저 싫어 제 방에 스스로를 욱여 넣었다. 그러나 아끼는 선배고 믿었던 선배라서 이번 일을 용서할 수 있는가? 질문하면 그녀는 결국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앨리스는 제 선배들의 행적을 조심히 되짚어보고, 질문해보았다.
-
다니엘은 아직까지도 상황실이 찜찜했다. 정보팀과 현장팀 간의 마찰은 이유가 있었으나, 상황실과 현장팀 간에 일어난 마찰과 갈등은 말 그대로, 실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대립하는 모습과 정말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 회사는 인명의 구조와 일반적 공권력의 힘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범죄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이 원래 그렇지. 기대를 왜 했더라.
푹 죽은 눈 속에 살벌한 예리함만이 등불로 존재했다. 단어 하나 하나를 삼키고 문장 하나 하나를 읽으며 기억했던 다른 자료들과 대조하기 위하여. 새파란 눈 근처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새빨간 눈알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자료들을 탐닉하고 있었다… 물론 잠을 충분히 자면서. 그의 능력 매커니즘이 대략적으로 꿈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 그의 수면은 자료를 모으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잠을 잔 것과 별개로 휴식이 적절히 주어졌는가? 대답을 하기 애매한 문제이다. 권고했음에도 집요하게 온갖 서류 뭉치들을 뒤져가는 놈을 보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여질 것이다. 정보팀 총괄자는 분명히 휴식을 권했고, 무시한 건 다니엘이었다.
앨리스는 사교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성격을 앞세워 넓은 인간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녀라 할 지라도 소식이 뜸하거나 연결 고리가 별로 없는 사람의 근황을 세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현재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낼 뿐이다.
정확히는 2년 하고도 반 년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그 기점부터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 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을 텐데. 앨리스는 훈련장에 비치된 벤치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보를 모았다. 처음에는 휴가를 다녀온 다른 선배에 관한 이야기, 그 다음에는 그 선배와 다른 선배가 저가 있기 훨씬 전에 일어났던 무용담.
그 일에 있었던 다른 사람, 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도 태평하게 질문을 한다. 저번에 은퇴를 결정하셨음을 안다. 그러면 무얼 하고 계시려나요. 글쎄. 두루뭉술한 대답이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분기별 회의 때 어느 분이 가셨었지?”
“왜? 무슨 일 있어?”
“그게요, 정보팀 앞에서 제가 상황실 분이랑 싸웠거든요. 알고 보니까 그 분도 회의에 참석하셨던 분인가 봐요.”
이렇게 말을 흘리면 그게 누구인지는 나온다. 너무 타인에게 관심이 없지 않느냐 해도, 현장팀의 아지트는 훈련장이거나 기숙사 로비인지라 쉽게 전부 모일 수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어떻고, 를 모아도 손에 잡히는 것은 모래처럼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뜬구름을 손에 잡겠다고 팔을 뻗는 것과 같았다. 짚이는 게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연결하는 다리도 목적지도 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수상한 시기에 돌연히 휴가를 자주 가거나 은퇴한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은 건 제가 들은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 메모장에 날짜를 정리하던 때였다.
-
“아니, 그, 워커… 음… 여기서 숙식을 한 거야?”
“그으으으래애애애…”
“미쳤어?”
“재미있어. 서류 보는 거. 같이 할래?”
“아니…”
몰골이 황량한 사람이 눈만은 비정상적으로 총명한 걸 본 감상은, 저게 집착인가 혹은 광기인가. 미쳤냐고 평을 했으니 광기라 명하겠다,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보팀에 슬며시 입성했다.
총괄자가 따로 쓰는 방에 널부러진 침낭 하며 식사 대용으로 먹은 크래커의 부스러기 하며, 이게 숙식한 사람의 방인지 아니면 대피소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각종 서류철과 온 사방에 빼곡한 책장 속 책들이 아니면 그냥 순 버려진 공간에 남루하게 먹고 잔 노숙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오델로 게임?”
“심심하잖아.”
“재미있게 했습니다. 이런 게임으로 피로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으으으렇지.”
며칠 사이에 죽이 잘 맞는 사이가 된 게 새삼 신기해 앨리스는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만 봤다. 와, 저 도라이한테 사회성이 있었구나.
“그럼 수상쩍은 게 대체 뭐였는지 까 볼까.”
-
두 사람이 빈 자료를 메꾸고 2년 반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휴가 처리 문서가 유독 지저분한 것을 발견했다 진술하는 것으로 대화는 시작되었다. 주어진 휴가 외에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심지어 이를 허가한 사람의 사인이나 낙인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이것이 관례였다면 넘어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이전과 이후에 남은 기록은 평범하게 깔끔했고 가끔 누락이 생겨 이후에 덧붙인 내용들로 잉크가 조금 번진 것 뿐, 전반적으로 깔끔했다. 이 시기의 휴가 문서가 왜 수상한가? 지나치게 빈 곳이 많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것도 다 채워버리겠다는 심산으로 자면서 이 시기의 기억을 들여다 보겠노라 했다. 그런데 생각 이상의 소득이 나온 것이다.
“의원 한 분이 개인적으로 용병으로 쓰고 계시더라고?”
아까 봤던 눈 안의 총기는 광기가 아니라 정답에 근접한 이의 기상이다. 앨리스는 자신이 들었던 명단 하나 하나를 보여줬다. 대조함으로써 검증하고, 앨리스가 들은 이야기를 다시금 옮겨 들으며 추론을 이어갔다.
“그리고 여기, 갑작스럽게 은퇴하신 분들이 몇 있는데…”
“…오.”
“발이 좁다고 내가 생각은 안 하거든. 소식이 닿는 분들도 더러 있고, 알음알음 전해지는 분들도 계셔. 그런데 이 분들은 유독 조용한 편이더라.”
“음, 사직서 처리 명단에 계실 겁니다. 유달리 기억에 남아요.”
소식 없는 이들 중에 유독 어린 나이에 일을 그만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 영웅이라는 이름 하에 미지의 힘을 가지고 미지의 힘을 가진 적과 맞서는 일이다. 고된 일이고, 목숨을 건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지만…
“이직하신다고 넌지시 말씀하셨었죠.”
영웅이 이직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활동을 그만 둬도 재단 내 임원(이사나 의원으로 통칭되는 바로 그 직책)을 맡거나, 현장팀에서 다른 팀으로 자리를 옮기거나(상황실이 대표적이다), 아니면 재단 소속 학교로 직책을 옮겨 교육자로 일하는 것이 남은 미래였다. 그럼에도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꽤,
이상한 점이다. 다니엘은 꿈 속에서 다른 정보를 물어 왔는지, 서류철에 손을 얹어 덮어버리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상황실 소속 그 사람. 맥거프 씨가 선배라고 부른 그 사람… 도 한 의원이랑 접점이 있었고.”
“어, 뭐?”
“사실, 그럴 수는 있지. 가끔 뭐 높은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 호출하고 뭐… 그러잖아.”
서류철 위에서 피아노 치는 손가락이 흥겨운 듯 무겁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앨리스 맥거프. 혹시 이 이름을 알아?”
노닐던 손이 펜을 잡고 이름을 적었다. 앨리스가 익히 아는 이름이다. 이번 회의때 현장팀 측에서 참여한 인물. 다니엘은 다른 서류철을 집어 펼쳤다. 보고서, 2년 반 전부터 부실해지기 시작했던 현장팀의 보고서이다.
“…이걸 먼저 봤어야 했는데.”
“알아. 그 사람은 위치가 어느 정도 되나?”
“10년은 넘게 계셨지. 응… 베테랑이시고. 훈련소 리모델링도 건의하시고…”
…어쩌면 그 건의의 배후에. 새싹같던 눈이 흔들린다. 다니엘은 잔인하게도 이후의 보고서들을 하나 하나 살피면서 이름을 나열했고, 정보팀 총괄자도 상황실과 주고 받은 기록 속에서 시비를 유독 잘 거는 선배의 이름을 필두로 보고서 내에 불분명한 정보가 많은 인물들을 특정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상에는 아니야. 놀라운 게 뭔지 알아?”
“더 놀라기 싫은데.”
“이 상황을 딱히 특정 지을 만한 게 없다는 거야. 그래서 이 일이 왜 일어났는가. 우연으로 2년 전에 일어난 휴가 대란과 겹친 게 아닌가.”
한 마디로, 물증도 없고 증인도 없다. 있는 증인이 호의적이리란 확신도 없다. 사태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리 마저도 없다.
“그러니까 크게 두 개군요. 하나는 정보를 가로채거나, 목적을 가지고 엉터리로 넘긴 것. 다른 하나는 인력의 외부 유출.”
“이걸 이으려면 목적이, 목적이… 아까 용병이라고 했잖아.”
“그으으으래. 용병이라고 하기도 뭣 하던데, 과시용 그런… 그런 거. 어.”
“두 문제가 겹쳐서 나왔고 목적도 나왔는데 연결이, 연결이…”
그들은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정보는 대체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고립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이가 지시한 것인가? 아니다, 같은 이가 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펜으로 두 문장을 슥슥 잇던 다니엘이 손을 멈췄다. 내부 사정이 어땠더라?
“내부가 흉흉하다고 했지?”
“그래.”
“흉흉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된다고 생각합니까, 총괄자씨?”
“해결하려고 하거나, 이탈하고 싶어하죠. 직장이 크게 휘청거릴수록 더더욱.”
“…잠깐, 그러면.”
“그냥 추측이긴 한데, 맞으면… 맞으면.”
펜의 끝을 슬쩍 깨물며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상쾌했다.
“맞으면 이 새X랑 엮인 사람 다 죽일 거야.”
“진정해!”
“아니, 내 말은 해고한다고.”
인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내부 분란을 조장하고 이간질을 했다. 감히 그랬다면 재단 내부에서 무슨 무슨 위원회가 꾸려져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파멸적인데, 감당할 자신이 있을까? 그는 자비로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맥거프, 대화하면서 뭔가 쎄한 구석이 있던 사람은?”
“벌써 그렇게 갈라 버리긴 싫은데…”
“흐으음. 좋아, 아예 그 사람들을 회유해 버리자.”
여기는 지금부터 대책 본부다. 총괄자의 허가가 10초 뒤에 나온 것은 기분 탓이다.
해야 할 일, 증인을 회유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이 사태를 끝내는 것. 고립을 멈추고 각 부서가 제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 앨리스는 그 때를 회고한다. 그 일이 그녀가 입사하고 5년 뒤에 일어난 일이고, 다니엘이 협력한 지 불과 몇 달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라는 게 제일 어이가 없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신비로운 곳에 떨어져 수수께끼 같은 모험을 하는 동화. 앨리스는 동화 속의 아이의 심정을 이제껏 어른의 시선에서 헤아리려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뒤집혀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동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영웅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을 구하는 자들이다. 구조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은 적도 있고, 구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큰 사고를 겪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견디고 견뎌 저마다의 영웅관과 사명을 완성하는 이들이다. 새로운 날개를 달고 도시의 어둠 속을 활보하는 존재들이다. 그랬는데… 그녀의 눈이 눈꺼풀 뒤로 숨었다.
사람들을 믿기에 이 일을 지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랬다. 그리고 신뢰가 흔들리는 이 상황이 그녀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수도 있다. 내부 분열, 단지 사익을 위해서.
그녀에게 누군가가 접근했다. 혼란과 두려움에 지쳐 보이는 표정을 한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조금 더 쉬운 일을 제안하고자 하는 사람이. 조금의 미안한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한 사람. 그녀가 갓 입사했을 무렵부터 앞길을 넌지시 제시해 주던 선배였다.
내부 사정이 이렇게 된 게 어쩌면 자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며 호소하는 말. 훈련장을 보수하기 위해 무리해서 의견을 냈더니 이렇게 됐다는 말. 가물거리는 것처럼 붉은 머리의 여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느냐 말을 건네기 무섭게,
앨리스는 제 선배를 벽에 밀어붙여 제압했다. 사람들을 믿기에 이 일을 지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랬다. 구한 사람이 실은 잡범이었다든가, 대체 왜 전에 일어난 사건에는 오지 않았냐든가, 하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지속하고 있다. 그녀는 그랬다. 사람들을 믿기에 지속하기 이전에, 그녀 스스로 버틸 수 있기에.
회유라는 단어를 쓰기 무색하게도 제압해 버렸으나, 밀려오는 배신감과 일말의 신뢰가 그녀를 그리 움직이게 했다. 녹음이 가득한 눈에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곳은 동화 속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을 알고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꿈에서 깨야 할 사람은 진작부터 그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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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속의 사람 수를 세던 다니엘은 정보팀 총괄자에게 급여에 관련된 서류도 이 곳에 있느냐 물어 보았다. 이에 총괄자는 여기가 인사팀도 아니고, 무언가를 결재하는 이사진들의 모임은 더더욱 아니기에, 기껏 해 봤자 영수증들 뿐일 거라 대답했다.
그럼 그쪽 월급은? 총괄자는 웃으며 대략적인 급여를 이야기했고, 명단에 있는 이들의 수만큼 곱해 보았다. 자금의 양은 컸지만, 다니엘은 제 추측을 거기에 얹었다. 그들이 따로 받은 돈이 적은 양일리가 없다. 이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조금 더 메리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요구사항을 대가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붉은 머리가 믿어 왔던 선배의 건이 그러하듯이.
그 자금이 쉽게 운용이 되었을까?
사람은 총알 한 발이면 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총알을 단 한 발만 가지고 다니는가? 두 쌍의 눈이 고요히 꿈 너머의 세상으로 굴러간다. 총알 하나는 이미 주웠으니, 나머지 하나를 만들 납과 화약이 필요했다.
꿈 속은 바다인가, 무엇인가. 정돈되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그로서는 대답할 수 없었고, 단서를 얻기 위해 뻗어 나가는 이로서는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나뭇가지가 햇빛을 찾아가듯이 끝없이 뻗어 나가, 싱그럽거나 혹은 썩어 문드러진 과실을 기억의 끝에서 발견할 뿐이다. 구멍 뚫린 잎사귀의 맥 없음을 관찰하고, 꽃의 피고 짐을 관찰하고…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채 들여다보지 못한 게 있었음에도 방문객에 의해 그는 꿈에서 끌어올려졌다. 그는 무표정에 짜증을 덧바른, 서늘한 얼굴을 하였으나, 방문객이 데려온 손님이 납덩이 화약통인 것을 알자 그 위에 구렁이 같은 웃음을 하나 그었다.
“제압해 온 건가?”
“그렇게 됐어. 나한테 접근을 하려고 하시길래.”
“좋아. 우리 이야기 좀 할까요?”
사람을 진정시키는 데에 쓰이는 음료는 보통 홍차가 있다지만, 그렇게 자비롭게도 대접해 줄 이유는 없었다. 차가운 물 한 잔이 컵 안에 들어 찼다. 선고를 내리는 듯 서늘한 말이 귓가에 넘실거리지는 않은가?
“후배를 다른 일에 꾀어내려고 하시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다, 알고서…!”
“화를 낼 사람이 왜 댁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야 이야기가 이어질 테니 물이나 마저 드시고요.”
제 컵에 담긴 물을 뿌릴까 말까 고민하는 손가락이 일품이다.
“맞잖아요. 지금 열받아야 하는 건 댁 후배랑 여기 새로 둥지 틀었는데 계약 사기 당한 나랑 씨X.”
대신 마시는 걸 선택한 다니엘은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운 뒤 말을 이었다.
“어이가 없으려고 하네. 이 인간이 뭐라고 했길래?”
“나한테 접근했을 때?”
“으흠?”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훈련장 어쩌구…”
“음, 그럼 그 건을 좀 이야기 해 볼까.”
당신은 무슨 계약을 했는가. 죄책감이라도 있다면 입을 여는 게 좋을 것이다. 발이 가볍게 바닥을 두드린다. 초를 재는 듯 일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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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이 그리 대화를 빙자한 심문을 하는 동안, 앨리스는 내부에서 이 일을 알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찾았고, 이 일에 대해 고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회사는 겉보기에는 넓어 보이지만 아주 좁은 사회다. 그녀가 이 일을 입에서 입으로 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실인지 묻기 위해 그녀를 찾는 사람도 있었고, ‘휴가’를 빙자한 ‘다른 업무’에 끌려간 이들도 걸음해 왔다.
그들 중에는, 상황실 소속이면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어하던 다른 이들 몇몇도 있었다. 싸움판이 나지 않길 바라는 그녀의 바람대로 모인 사람들 중에 진실을 아는 이들이 먼저 입을 열며 차갑게 장내를 달궜고, 소리 없는 분노가 공기를 뜨겁게 식혔다.
…문을 열고 나온 다니엘이 순식간에 불어난 사람들을 보고 표정을 달리 한 건 일단 못 본 체 하도록 하자. 어차피 담당 심문관도 아니었으니, 단체로 작정하고 무언가를 할 일만 남았다.
아직 오지 않았거나, 혹은 오는 것을 결정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이를 어떻게 할지 토의했다. 일에 휘말렸던 이들이나 휘말린 이들과 연락이 닿는 사람들에게 다니엘은 앨리스 모르게 이런 저런 부탁을 했다. 총알의 나머지 하나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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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을 부려 피 말리는 신경전을 벌이고, 그 사람을 잘라내는 등의 일을 할 때 이를 체스 게임에 비유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대립 구도가 명확한 게임이고, 플레이어가 기물을 움직여 판도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총괄자의 방에서 흑과 백으로 나뉜 게임의 말이라 할 수 있는 동그란 것을 뒤집고 있었다. 탁, 탁. 오델로 게임은 그에 비하자면 접근하기 조금 쉬운 편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직관적일 지도 모르고, 이기는 방법이 훨씬 눈에 띄기도 한다.
그에게는 어떠한 기물도 없다. 그런 주제에 체스를 강요 받는다고 덥석 물려 줄 생각도 없고, 기물이 있다고 해서 이 흐름에 익숙한 인간 뜻대로 놀아나 줄 생각도 없다. 그는 말 하나를 뒤집었다. 흑색의 반대쪽엔 백색이 있고, 백색의 반대쪽엔 흑색이 있다. 코인처럼 생긴 말을 손 안에서 굴리다가, 첫 수를 둔다.
그는 오늘 게임을 하러 간다고 일렀다.
오늘이 어떤 날인가? 그와 회사 간의 계약서를 1차적으로 조정하는 날이다. 때문에 회사 내부에는 회사 이사진들을 포함해 재단 내 의원이라 칭해지는 임원들도 몇 명 와 있었다. 이 사람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고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안건을 생각하자면 정말로 그렇다. 다만 그는 한 명, 이 일을 일으킨 원인 되는 인간, 단 한 명을 집요하게 노리고 싶었기 때문에, 조정이 시작되기 전 독대를 요청했다. 모든 비밀을 꿸 힘이 있는 자의 요구에 가까운 압박이 되었을 수도, 사회 초년생의 어리숙한 부탁일 수도 있을 그런 것 말이다. 요청을 받아들여졌고, 그는 그 인간이 대기하고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지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당신들은 총을 입 안에 집어넣는 행동을 보고 사지에 들어간다 표현하는가? 다니엘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머리로 굴리고, 눈으로 굴리고, 입 안에서 혀로 굴려 보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부드러웠고, 경첩이 삐걱거리지는 않았다. 누군가 더 들이닥쳐도 충분히 잘 열릴 문이다. 가벼이 닫은 뒤 그는 그 사람 앞에 섰다. 의자에 앉은 사람.
그 사람이 앉은 곳의 책상 위는 난잡했다. 이 곳에 몸만 온 사람 치고는 책상 위의 서류들이 꽤 많았다. 어쩌면 눈속임을 위해 일거리가 많은 체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손님을 맞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그를 위한 의자는 준비 되어있지 않았다. 상관은 없었다. 선 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더 괜찮을 것이다.
시야가 더 높기 때문이다. 내려다볼 때의 압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푸른 눈이 똑바로 그 사람을 쳐다본다. 예의를 집어 치운 표정으로 살갑게도 안녕하십니까, 인사 한다.
“조정 전에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왜, 있잖습니까. 제 계약 조건이 절대적으로 좋았던 점은 인정할 테니까…”
말을 조금 흐린다. 상대방은 아무래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 지레 짐작한 모양이다. 첫 수는 약하게. 이 곳에 찾아올 만한 이유를 대며, 정석적으로.
“조건이 많이 좋았죠. 그 때는 저희도 많이 혼란스러웠거든요. 조정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예의 차리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본론만 바로 박아 버리고 당장 저 자의 목을 치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 스스로 게임을 선택했다. 상대는 이미 말을 고르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벼르고 벼를 시간이다.
“긍정적일 이유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찾아오는 것 말입니다.”
“…흐음, 사실, 조금 두렵긴 하군요. 당신이 가진 힘은 많은 걸 휘두를 수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아직 곁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분기별 회의 때도 제대로 힘을 못 쓰겠더군요.”
한 수, 또 한 수. 서로 서로 하나씩 잡아먹고 내어주며 탐색을 이어가고, 그는 제가 가진 것 중 상대가 먹기 좋아해 보이는 것을 주었다.
“본론이 그 겁니까?”
“어떻게 보자면?”
“…입지가 중요하긴 하죠. 초년생 치고는 똑똑하군요.”
자, 그의 것은 두 개 뒤집혀 상대의 손에 넘어갔다.
“뭐, 저는 일단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니, 조정안이 나오기 전까지 제가 가진 모호한 권력은 유지되지 않습니까. 옆방에 다른 분이 계셨던 것도 같은데.”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지요, 그렇죠?”
“그렇죠.”
하나를 다시 뒤집으며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간다. 초년생 치고 똑똑하게 군다 생각한 모양인데… 글쎄. 무표정 위에 사무적인 웃음이 덧붙는다.
“그렇게 과감하게 나올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난 당신이 가지는 가치를 알고, 당신은 가장 먼저 날 찾아왔으니까요…”
하나가 다시 뒤집혔다. 수적으로 조금 열세이다. 아까 내어 준 것 때문일 것이다. 야금야금 교환을 계속 할까.
“…제가 다른 분을 찾아 갔다면 어떻게 되길래?”
“아니요, 뭐… 다른 사람들은 자금을 많이 댈 뿐일 테니까요.”
우회해서 한 수. 상대는 탐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조금 나쁜 위치에 수를 두었다. 모른 체 했더니, 알아서 입방정을 떨려고 하는 모양이다.
“저는 사내에 아는 분들이 많거든요. 입지를 다지기 아주 좋을 겁니다.”
아까 뒤집었던 것까지 한 번 더 뒤집힌다. 오델로 게임은 기본적으로, 흑과 백의 개수에 따라 승패를 나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수적 열세를 가지면 크게 위험할 수도 있다.
“이를 테면 상황실이나 현장팀 쪽에 말이죠?”
그리고 기본적인 필승법에는, 각 끝 모서리를 먹는 방법이 있다.
“…네, 맞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뵈어야 하는데.”
순식간에 저가 뒤집어야 할 말들이 많아진다.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빨라진다. 초조함을 드러내기 안성맞춤인 습관이다만, 저처럼 그저 손이 비기에 두드릴 수도 있으니 수는 여전히 신중히 두어야 한다.
“…무서운 사람이었군요?”
“별 말씀을.”
상대는 그가 차지한 모서리를 뒤로 한 채 다른 곳에 말을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세력이 없으니까요.”
내어 준 적도 없는데 두 개를 먹어 간다. 상대는 급해졌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가 준 정보 하나로 최대한의 이득을 보려는 셈이다.
“…그건 사실이긴 하네요.”
“부탁하러 온 게 아니라 협박하러 온 것이였나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하나, 둘. 손실이 조금씩 생긴다. 상대는 궁지에 몰린 것이 아니라 단지 비밀 하나를 아무것도 못 하는 사회 초년생에게 들켰을 뿐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색은 판에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길래 협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기다리던 대답이다.
“그걸 맞추셔야 뭐라도 진행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는 거래라는 단어를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봤다. 회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어디 보자.
“내 입으로 까라는 소리입니까? 헛소리.”
상대는 코웃음 쳤다. 아무래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빈 깡통 수준이리라 짐작한 것 같다. 하기사, 그가 보여준 것이 별로 없긴 했다. 상대는 과감하게 수를 내질렀다.
“여기 있는 서류는 다 뭔가요?”
“아, 이건 자회사 일 때문에 가져온 겁니다. 운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긴 한데, 처음 보겠군요?”
흐름을 저 쪽에 내어 준다. 우회적인 수가 뱅글뱅글 돈다.
“그래도 몸만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지 않던가요?”
“뭐, 전 여기서 이래 저래 일 해야 하니까요…”
그가 서랍을 닫았다. 서랍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 아마도 저가 계약을 한다면, 을 가정했을 때의 약식 계약서 정도? 아니면 불청객이 봐서는 안 되는 서류?
“회의가 금방 끝나면 이것도 참 금방 옮기지도 못하겠는데 말이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회의가 쉽게 안 끝나게 하면 되겠군요.”
조금 공격적인 수 하나. 이 걸로 조금의 이득을 챙겨 간다. 나는 당신이 숨긴 것을 알고 있음을 어필하는 듯이, 간교한 혀가 부르튼 입술을 축였다.
“상황에 따라 어찌 될 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다른 방에 가면 정말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말들이 가득 찼으니 슬슬 강수를 하나씩 둔다. 가지고 있는 것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한다. 패를 전부 보여주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제일 좋겠지. 다니엘은 아직 먹히지 않은 3개의 모서리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움직임이 크게 제약된, 그러니까 저가 먹은 모서리 쪽으로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방을 보았다.
“갈 겁니까?”
“결론에 따라서?”
“…위험한 사람 같으니라고. 회의 때 당신의 의견을 푸시해 주면 괜찮겠죠?”
상대는 포기한 채 다른 곳을 먹으려 하고 있다. 닿아가는 것도 같다.
“회의… 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죠?”
“…허?”
난 그렇게 둘 생각이 없다. 다니엘은 시계를 다시 보았다. 시간을 끈다면 저 쪽의 승리로 마무리될 수도 있고, 이대로 무승부가 날 수도 있다.
“2년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부터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당신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대는 것부터 할까요?”
“…젠장.”
두 번째로 모서리를 먹었다. 운신폭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다음 수가 예측되기 마련이다.
“많이 알아내셨군요. 그걸 저와 경쟁관계이든 어떤 사람이던간에 뿌리면 제가 먹잇감이 되는 건 확실하겠습니다.”
“잘 아시네요.”
“그런데, 이걸 왜 회의 때 발의하지 않으시고. 죄 떠들 기회 아닙니까?”
스스로가 초반에 둔 악수. 그것으로 창출된 다른 수들. 그는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해 갉아먹으려 하였다. 그는 더 이상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내가 곁에 사람이 물리적으로 없댔지 연대한 사람이 없댔나.”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한 번에 몇 개를 뒤집는 걸까. 웃음 뿐이 안 나온다. 이건 허풍이다. 저 인간은 내가 이미 다른 의원들과도 접촉했다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비라도 베풀 셈입니까? 뭘 원해서 온 거에요? 돈?”
“그러니까 말 했잖아요. 알아내야 뭐라도 진행될 거라고.”
그리고 그는 거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또다시. 그가 원하는 게 다른 것임을, 상대는 이제야 알아챈다. 게임의 승패는 처음부터 기울어진 채 시작되었음을 그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시간을 질질 끈 걸 보면 당신도 뾰족한 수가 마땅히 없어서 온 것 같은데.”
아차, 허술했던 쪽에 수가 놓였다. 순식간에 그의 말 몇 개가 다시 상대방의 것으로 돌아간다. 이 쪽을 언질하지 않은 것이 설계였다지만, 너무 신중했나.
“없죠.”
“…다른 의원들하고도 마땅히 공모도 안 된 것 같고.”
한 수, 한 수 다시 먹힌다. 길을 트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몰아붙여진다. 괜찮다, 상대는… 조급하다. 그는 모서리 둘을 먹었고, 상대는 그 어디도 먹지 못했다. 말했듯이, 행동반경이 제한된 사람의 수는 읽히기 쉽다. 그리고 목적을 가진 수는 의도가 빤히 보이기 마련이다.
“뭘 믿고 그렇게 입을 터시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굳이 서류 작업을 하는 이유를 알아서?”
자, 여기 예쁘장한 외통수를 주겠다.
“자금 운영이 그렇게 단독적으로 될 리가 없죠. 그렇죠? 사람들을 고용해서 웃돈까지 얹어 주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해요. 그런데 일처리가 빠르고 말이에요… 응?”
“…하, 하하… 어디까지 안 겁니까. 어디까지?”
“서류작업을 여기서 하는 이유. 말했잖아.”
그는 가담한 이들 가운데 상대의 사무실이나 집무를 보는 곳 어디든 간에, 접근할 수 있는 이에게 최대한 접근해 증거를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드러난 결과는 그의 예상이 맞았다.
“난 이 이상 말하지 않을 테니, 열심히 상상해 보시고.”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래, 회의를 미뤄서 권력을 원하는 거구나. 하!”
“글쎄요. 그냥 댁을 만나기 가장 좋은 때라.”
“그걸로 어떻게 할 건데.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회의는 시작 됐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연대했다고 했죠? 내 대리인이 회의실에서 뭘 밝힐 지 재미있을 것도 같네요. 이쯤이면 올 시간이 됐는데…”
총괄자와 가담자들은 그의 대리인이 되어 회의실에 돌연 출석했다. 당신들이 대리인 몇 명 내세운다고 그가 못 할 것은 없긴 했다. 사실 일방적으로 회의를 끝내기 위해, 그들의 면담 요청을 시작 직전에 맞추게 한 뒤 회의 전 간단하게 단체 면담을 계획한 것이긴 하다.
의원들이나 임원들이나 이사들이나, 개인들이 가진 금전이라는 압박이 있고 권위가 있을 터다. 그것으로 빠르게 면담을 종료하고 회의를 시작했을 것이다. 묶인 사람을 챙겨 줄 의무는 딱히 없지만, 대상자인 다니엘 워커까지 없으니 그들도 회의에 앞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문이 열린다. 회의 전 단체 면담에서 나온 충격적인 담화 겸 해서, 그 묶인 사람을 찾기 위해, 담화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적절도 해라.”
“이게, 그, 내용이, 사실입니까?”
가장 최후의 한 수를 둘 시간이다. 자충수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한 수.
“기자한테 먼저 뿌리기 전에 회의 안건을 바꾸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핸드폰을 흔들었다. 어디에든 뿌릴 준비가 되어 있는 요즘 젊은 이들의 모범적인 자세였다. 오델로 게임의 판은 그의 색으로 완전히 물든 채 끝났다.
체스 게임에 응해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손에 기물이 있는데 이용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뒤이어 온 정보팀 총괄자와 가담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웃어 보였다.
그 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한 의원의 서류철을 확인하느라 회의를 미뤄야 했고, 결론을 간단히 지으려는 찰나에 결국 기자들의 먹잇감이 된 채 새 안건을 준비해야 했다. 애송이처럼 보인 사람이 그다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어야 했을 것이다.
쉽게 넘어가려는 이들을 뒤로 한 채 핸드폰을 켜 온갖 곳에 제보 이메일을 돌린 다니엘은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간단히 발의하고, 축출을 제시했다. 가담자들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상황의 흐름은 이제 그의 손에 쥐인 채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회의는 윤리 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채 마무리가 되었다. 확인 사살된 결과에 다니엘은 만족한 듯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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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뒤늦게 기사를 보고 다니엘을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갑자기 터져버린 이슈에 다른 동료들이 상처를 입을까 봐, 그리고 이런 일을 (그녀의 생각으로는) 다니엘이 독단적으로 행했으니까.
“이 미친… 이게… 뭐야…?”
“당분간 윗사람들 많이 사리라고.”
“아니 이…!”
“여기서 반박 기사가 나오면 사내에서 일어난 일까지 덧붙을 거고.”
먼저 유출된 내용은 당연하게도 자금의 행방이 묘연함에 대한 의구심, 비리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두 총알 중 어떤 것을 먼저 쏠 것인가 고민한 끝에 다니엘은 순서를 결정했다. 혹시라도,
“이 쪽에 타겟팅이 된다면 여기도 피해자였다고 어필을 하기 좋잖아.”
“…진짜 돌겠다. 피 말려서 단명할 것 같아.”
“폭로전이라 당분간 내부가 많이 어수선할 거야.”
혹시라도 내부의 싹이 있다면 똑바로 보라고. 순서가 반대였다면 여론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그 의원으로 몰렸을 것이다. 이 순서대로라면 회사도 일말의 의심을 받을 것이고. 앨리스는 눈 앞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보고 무어라 더 말해야 하는지 입조차 떼지를 못했다.
이건 재단과 회사에 속한 모든 이들을 향한 총알이었다. 아군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몇 시간 전인데. 화끈하게 모든 걸 불태워 버렸다.
“이게 맞다고 봐?”
“자진 신고한 내부 고발자가 있었으니까? 외려 내부는 다시 뭉치겠지.”
외풍에 의해 내부가 뭉치는 건 늘 있어왔던 일 아닌가. 내부 고발자가 있었기에 내부의 긴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터지고, 느슨해지기 시작했으며, 다시 교류가 시작되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규합이었고, 그 이전에…
“자, 이제 일동이 모여 입장문이든 뭐든 쓰러 갈 시간이야.”
“개X끼야.”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성명서였다. 다니엘은 걸음을 옮기면서, 자기도 제법 위험에 노출된 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앨리스는 지금 이 상황을 보고 할 말이냐며 타박을 했지만 말이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관용구가 있다. 지금 이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만한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다니엘은 부정할 것이다. 첫번째로 자신은 사람이며, 두번째로 저것들은 박혀 있는 스스로의 주변을 알아서 깎아 먹어 스스로 굴러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 201n년 3월 13일, NEST 사 기숙사 습격사건.
잭은 오랜만에 바냐가 일하는 곳에 방문했다. 그의 오랜만의 기준이 남들보다 좀 좁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방문은 오랜만이긴 했다. 현장팀이 주로 쓰는 곳과 바냐가 주로 상주하는 곳은 애매하게 가깝고 애매하게 먼지라, 작정하고 갈 수 있다면 갈 수 있지만 가기 귀찮아지는 순간 한없이 가보자 하는 날만 기약하게 되는 딱 그 정도 거리였기 때문이다.
지하. 잭은 여기가 정말 근무하기 괜찮은 곳인지를 매번 안부 인사처럼 묻곤 했다.
“바냐! 나 왔어.”
“그래, 일단 그 땀 난 것 좀 말리고 와.”
오늘은 묻기 전에 바냐에게 선제로 저런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훈련을 막 하고 아차, 하면서 급히 연락한 뒤 곧바로 온 상황이라, 잭은 히히 웃으면서도 지하 쪽 곳곳에 설치된 공기 송풍 장치를 강제로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하라고 해도 나름 괜찮다고.”
“하지만 햇볕을 못 받잖아.”
“여긴 그러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니까.”
게다가 난 밥 먹으러 올라와서 맨날 1시간 산책은 기본으로 한단 말이야. 바냐가 중얼거렸다. 바냐는 물론 잭한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햇빛 받고 달빛도 받고 바람도 쐬는 녀석에게 가만히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지루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란 사실을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간의 잡담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퍽 상냥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선배님들 이야기지?”
“거의 항상 궁금한 거잖아. 너도 그렇고.”
“...뭐, 너나 나나 늘 궁금해하는 거긴 해. 앨리 선배님은 좋은 분이 맞는데.”
둘은 공통적으로 남은 한 사람을 서술하기를 생략했다. 그 대신 기록물을 뒤지는 것을 선택했다.
“이렇게 자주 열람해도 돼?”
“기록대장에 네 이름만 쓰고 가. 아니면 내 이름 써도 그만이고.”
“으응.”
“어차피 누가 와서 몰래 열람하고 가도 나한테 다 걸리기도 하고.”
“그것도 그렇네...”
잭이 잠깐 바냐의 손에 있던 장갑을 보다가 이내 기록물에 눈을 돌린다. 팔락, 팔락. 시간대로 나뉜 파일들이 착착 넘어가고 그들이 입사하기 이전 일들이 펼쳐진다.
“과연 오늘 우리 발굴 작업이 괜찮게 진행될까 보자고.”
“내가 듣기로는 형이 한 번 기숙사에서 습격을 당했었다고 들었어.”
그럼 이거야. 바냐의 장갑 낀 손이 정갈하게 정리된, 그러나 시간에 갉아먹혀 제법 낡은 파일 하나를 꺼낸다. 척척 꺼내는 모습에 잭이 작게 박수를 쳤고 바냐가 픽 웃는다. 바냐는 조심스럽게, 제법 낡은 자료를 파일철 안에서 하나씩 꺼내든다. 약간 노랗게 물든 낡은 종이 속 날짜와 사건명 바로 밑에 진술자 이름이 보였다.
다니엘 C.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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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사의 기숙사는 절대다수가 현장팀의 숙소였다.
다니엘은 그 부분이 꽤 신기했지만, 며칠 동안 네스트 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 결과 그럴 만 하다고 결론지었다. 온갖 곳에 비밀 도로나 통로를 뚫어 놓아 출퇴근 할 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으니까. 이걸 지은 세이프가드 재단의 주인 얼굴이 궁금했다. 정신머리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뜯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래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다. 출퇴근을 할 수 있다고 기숙사에 있는 장점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빠른 출퇴근, 뭐 그런 것들. 아주 얄팍한 장점 하나 빼고는 쓰잘데기가 없어 보이는 지라 다니엘은 그냥 빠르게 가능성을 접었다. 그 대신 기숙사에 혼자 남은 자신의 어떤 신세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현재 그는 회사 및 재단의 운영자, 이사진, 기타등등 높으신 인간들의 개인 신상과 입을 열면 안되는 비밀까지 전부 알고 있음을 시인하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모양새로 보면 인질이기도 했다. 목숨이 누구 손아귀에 쥐어진 듯한 기분.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바깥에 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영웅 사업을 하는 재단의 산하인데.
최소한 건드리지는 않겠지. 다니엘은 짐더미 하나 없이 휑한 자신의 방을 본다. 들어온 지 2주 정도 흘렀던가. 제 짐은 한없이 가벼웠고 들락날락 할 사람도 없어 결국 처음 모습 그대로인 방이다. 기껏해야 인스턴트 음식 쓰레기가 전부다. 생활감 참 죽여주네. 다니엘은 그렇게 자조한다.
지금은 3월 12일 23시 50분. 이 기숙사를 쓰는 아주 많지 않은 사무직들마저도 집으로 돌아가고, 현장팀들 중 일부도 집으로 돌아가고, 심지어 남은 현장팀들도 새벽 패트롤과 주말 패트롤을 위해 남은 진성 미친놈들 뿐인 이곳. 다니엘은 이 건물에 고요히 혼자 남아있다.
-증인 A(사무직): 그 날 미리 조기 퇴소를 권고 받았음을 시인.
다니엘은 아직까지도 이 회사에서는 외부인이고 이방인이었다. 이 회사의 모든 인간들에게 적대받는 삶!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낮게 방 안에 울리다가 끊긴다. 오늘 하루만 해도 미친놈이란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던지. 미친짓으로 강제로 몸을 담게 된 인간을 받아들이는 눈이란 그렇겠지. 자기 혼자 빠루를 들고 문을 비틀어서 몸을 들이밀어 폭탄을 흔들며 온 인간이란 으레 그렇지 않겠는가. 다니엘은 그런 적의가 익숙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다니엘은, 이렇게 혼자 붕 뜬 듯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기괴할 정도로 고요한 이 시간이 좋았다. 아주 잠시나마, 혼자여도 괜찮다고 거대한 기숙사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풀썩. 다니엘은 말라비틀어진 감수성 사이에서 한줄기 물렁한 느낌을 받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베개 맡과 서랍 안을 오늘도 확인한 그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증인 D(정보제공자): 새벽 2시였지 그게.
13일로 넘어가고, 새벽 2시 3분. 토요일.
-증인 D(정보제공자): 그게 금요일일 리가. 토요일이였으니까 사람들이 다 꺼졌겠지.
텅.
텅, 텅. 유리창이 무언가에 두드려 맞는 소리가 울렸다.
-증인 D(정보제공자): 당신들이 그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데.
-
쨍그랑!
유리창이 깨졌다.
기숙사 곳곳에 존재하는, 주인이 없거나, 분배되지 않았거나, 주인이 ‘없어진’ 방에서 난 소리였다. 텅, 텅, 쨍그랑! 방에서 하나씩, 하나씩 소리가 난다. 그리고 이어서, 문에서 들어왔다면 나서는 안 되는 발소리가 방에서 나와 복도로 향한다. 무거운 발소리다. 저벅저벅저벅. 그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방에서 나와 점점 무리를 이룬다. 저벅저벅저벅저벅.
다니엘은.
그걸 꿈에서 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난 것은 사건이 터지기 5분 전이었다. 꿈은 감각이 대부분 뭉툭하고 둔한 공간이지만,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감각이 뾰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언가의 예지를 알려주는 듯이. 보통 이런 감각이 그를 따라올 때는 꼭 꿈 자체가 악몽이거나, 혹은 현실이 악몽이거나 둘 중 하나인 편이다. 현실은 이미 그렇게 된 지 오래라 그럴 일은 잘 없는데.
해서 그는 그저 자신의 몸 주변을 둘러봤다. 건물을 오르는 무슨 밧줄을 든 미친 강도놈들인지 뭔지를 발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였다.
5분은 그랬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도망치기까지는 전혀 충분한 시간이 아니였다는 뜻이다.
다니엘은 눈을 떴다. 3분? 2분? 모르겠다. 다만 이상할 정도의 적막이 오랜만에 숨통을 조이는 감각이 불쾌했다. 이런 적막은 본래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누군가가 강도짓이나 하려고 오다니? 다니엘은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서랍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총이다. 뭐, 이런 곳에서 혼자 살면 으레 한 정 정도는 챙기지 않는가. 그는 두 정이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도 베개 밑에서 마저 꺼낸 그는 품이 크고 낙낙한 옷을 급하게 챙겨 입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 법은 품위있게도 잘 배웠다. 개좆같은 습관이 몸에서 보이는 게 기분이 나빴으나 지금은 그것보단 안전이 먼저다. 그는 두 정의 총을 챙긴 뒤에, 가만히 몸을 숙였다. 어디에 있지? 그 미친놈들이?
그때 소리가 들린다.
텅.
텅. 텅.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다.
다니엘은 바로 옆방으로 고개를 끼긱, 기계적으로 돌렸다. 긴장으로 어느새 굳은 목근육은 그렇게 활발하게 뜻대로 움직여주지 못했다. 텅! 유리창을 부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소음이 강렬히 그를 강타하고 있었다. 텅! 저게 자신의 방에 침입하면 어떻게 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텅! 깨지지는 않았다. 아직 인기척이 복도에 슥슥 다니고 있지는 않았다. 텅!
다니엘은 빠르게 복도로 뛰쳐나가 그대로 계단으로 사라졌다. 한 층 밑으로 사라진 그는 이어서 유리가 차례차례 깨지면서 내는 빌어먹을 오케스트라를 들었어야 했다. 깨지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강화 유리는 깨어질 때 얼마나 부산스럽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가? 그걸 그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인 D(정보제공자): 그 정도만 있었다면 나도 원래는 그냥 1층으로 내려가서 튀었을 텐데.
그는 살그머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배정받은 층수가 제법 높았던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생각한다. 어째서 저 유리 두드리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는가. 계단통로가 소리가 울리기 좋은 공간인가?
아니다. 다니엘은 그러느니 빠르게 사고 전환을 하는 걸 택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층에도 포진해 있다고 보는 게 더 옳았다. 1층이 안전한지 보고 오지 못한 게 그의 패착이라면 패착이였다. 이 씨- 욕을 읊조리던 그가 계단통로 쪽 창문을 흘긋 봤다. 이쪽을 타고 올라가는 인간은 아직 없는 건가.
바깥은 휑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과 조금 멀리 떨어져서 지어진 곳이다. 계획된 설계고 계획된 구획 속이다. 여기에 나중에 올 인간이야 기껏해야 새벽 패트롤을 돌고 온 현장팀 영웅 나리들일 것이다. 다니엘은 그 인간들이 여기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 고민해 봤다. 그리고 역시 빠르게 접었다. 얼굴이 갈려 있거나 아예 육신이 이곳에서 사라져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살아야지. 최소한 그 자신이 살아 남아 반드시 이루고자 한 숙원을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그도 없었다.
잘그락. 계단통로 창문 바깥에 와이어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다니엘은 가만히 그 와이어를 봤다. 계단통로에서 피신해 있는 것도 여기까지인가 싶어졌다. 다니엘은 친절한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아직 올라오지 않은 무장강도인지 아니면 쓰잘데기 없는 쓰레기들인지에게, 엿을 먹여줬다.
창문을 열어 친히 와이어를 풀어버렸단 뜻이다.
아악! 밑에서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다니엘의 알 바는 아니었다. 위치가 어디로 보일지는 몰라도 이제 이동할 시간이었다. 다니엘은 품 안의 총 위치를 다시 확인하며 계단통로에서 벗어났다.
계단 통로에 별안간 드르르륵, 총소리가 무자비하게 들린 건 그로부터 3분 뒤였다.
-
사건 발생 30분 후.
다니엘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정리해 봤다.
다른 층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바깥을 다시 살폈다. 자신이 있는 방을 노린 게 확실했는지, 괘씸하게도 반대편쪽에 인원이 거의 없더라. 망원경 보는 인간이 있긴 했는데 그 인간이 뭐든 잘 볼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래서 그는 그 층에서 이것저것 챙긴 뒤에, 한차례 층 교란을 일으켰다. 잘 낚이더라. 등신들. 누구한테 교육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명령 내린 인간 닮은 건 확실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란에 성공해 다시금 다른 층으로 몸을 피신했다. 놀랍게도- 그가 본래 묵던 곳의 바로 밑에층이였다. 높은 층까지 도로 올라왔으니 그만큼 체력이 미친듯이 달렸다. 동공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게 체감이 될 정도였다. 폐에서 쇳소리가 났다. 다니엘은 이 정도에서도 움직인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움직인 거고, 총을 든 상대 앞에서 움직인 적은 없으니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싶어 잠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제일 안전할까.
아마 머잖아 다시 수색을 위해 인원이 흩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유리창이 박살나 있어 자신이 있는 위치를 들키기 쉬웠다. 음, 훌륭하게 개좆같군.
급작스럽게 움직인 몸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심장은 산소를 달라고 폐를 쥐어뜯고 있었다. 폐는 목을 쥐어뜯고 있었고 목은 성대를 긁어대며 산소를 거의 흡입하고 있었다. 하아. 이제 피맛이 입 안에서도 났다. 다니엘은 아직 바깥이 소란스럽지는 않은지, 자세를 낮추어 슬그머니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조금은 고요했다.
다니엘은 그렇게 상황이 몰리니 슬슬 열이 뻗쳤다. 핸드폰을 열어 그가 강제로 뜯어낸 연락처 중 하나를 쥐어잡아 총알 쏘듯 문자를 날렸다. 메신저 알람을 무차별적으로 터뜨려댔다. A라고 적혀 있어 연락처 맨 위에 올라가 있었으니 그게 누구인지는-
-증인 D(정보제공자): 그게 앨리스였지.
-증인 B(현장팀): 연락을 해준 덕에 심각성을 바로 알 수 있었지.
이제 알 것이다.
다니엘이 이런 발작적인 행위를 한 데에는, 그럼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정말 단순하고 지극히 다니엘 특유의 꼬인 사고에서 비롯된 비상식적인 이유라서 문제였지만.
테라스에 비상용 사다리 따위가 존재했다. 그래, 다른 층 같은 열을 공유하는 칸끼리 서로 오고 가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 말이다. 그게 보관함에서 꺼내지려다 만 상태로 덜커덕, 하는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그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고생을... 왜 했을까? 끓는 속을 가라앉힐까 말까 하던 다니엘은, 가라앉히는 대신 그 거센 감정을 연료 삼아 척척 사다리를 꺼내 조립하고 냅다 걸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가 있는 위치는 발각되기 쉬운 위치와 상태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다니엘은 조립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간다. 넘어가고 나면, 방 안에서 총알이 사정없이 난사되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저런 물건이 박살나는 소리. 변기가 깨지는 소리. 날카로운 파편이 자박자박 밟히는 소리... 이 층에 남아있을 이유가 있는가? 아니. 다니엘은 피로감이 짙은 얼굴을 하며 사다리를 하나 더 꺼낸다. 건너간 방 테라스에 있던 것이다.
덜컹. 사다리 하나를 더 꺼내고 조립을 못 한 그 사이에 그가 있는 방 문이 열린다. 다니엘은 에라이 씨X 같은 욕설을 읊조린다. 목격되기 참 어려운 방이 그에게는 이제 절실했다. 아니면 바깥에서 망원경을 들고 그를 보고 있을 인간이 먼저 실명되길 기다리거나. 다니엘은 그가 가진 게 뭔지 보다가, 일단 펼쳐져 있는 먼젓번의 사다리를 집는다.
그리고 하강한다.
-
사건 발생 1시간 후.
다니엘은- 지금 꼭대기 근처에서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곧 있으면- 옥상이다, 개좆같은!
탕! 그를 노리는 총알 하나가 빗나갔다. 동시에 밑쪽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들렸다. 늦어, 이 개새끼들아!
-
앨리스는 복귀 도중에 거대한 문자 폭탄을 받았다. 누구에게서 왔는지 처음에는 확신하기 어려운 물건이였다. 그녀가 아는 한 그녀에게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낼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알람을 주기 위해 보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문자를 보낼 인간은 아예 없었으니까.
그런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녀와 동행해 패트롤을 돌고 있었다. 즉,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궤적대로라면. 그녀가 간과한 게 있다면 최근 그녀의 삶에 끼어든 중대한 미친놈 하나가 있었다는 점이고, 불행하게도 그녀는 그 미친놈을 여기에 알박게 만든 장본인이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번호를 확인했다.
‘BASTARD’
그녀는 욕을 짓씹으며 내용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진동 울리는 거 처음 보는데.”
“그 미친놈. 번호 한 번 깠다고 왜 지랄-...”
“데이트 집착남 같네. 얼굴이랑 이름 텄다고 너한테 협박질 하는 건 아니지?”
“...선배, 밟아요.”
“뭐?”
“씨발 지금 기숙사가 습격당했다고!”
-
멋들어진 자동차 바퀴 소리? 그딴 건 없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가 과속하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아악, 짧게 비명 지르는 소리와, 이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부에 연락을 시도하려는 사람들, 앨리스에게 보내진 문자 수십통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뒤 비명을 지르면서 운전자의 의자를 내려치는 사람들만 존재했다. 아, 드리프트 소리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보다 컸지만 사람들은 그딴 걸 신경 쓸 이성이 없었다. 쓰겠나?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고 반복적이였다. 기숙사 습격. 죽을 듯. 공실 위주로 침입. 총 있음. 때때로 문자 안에 빨리 쳐오지 않으면 죽을 거다 개새끼들아 등의 문장이 끼어있었지만 모두는 참작하기로 했다. 거기 혼자 있는데 그런 상황이 났다는 건 보통 상황이 아니란 거다.
촤아악. 마지막 드리프트와 동시에 그들은 도착했다. 동시에 차 몇대가 도착하는 건 장엄한 광경일 뻔했으나 동체에 밀쳐진 검은 인영 하나의 비명소리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
“일단 이 새끼 하나 검거.”
“안으로 진입할 사람 진입해! 생존자는!”
“지금 기숙사 안에 그 미친놈 하나 뿐이에요!”
“이미 죽었나?”
“...그럼 시체라도 데려와야지. 아무리 그놈이 미친새끼라도.”
외부에 있던 인간에게서 망원경 하나를 주운 선배들, 그리고 진즉에 망원경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본래부터 야간 패트롤이 천직이라 밤눈이 밝은 인간들. 냅다 돌진해 버린 인간이 절반이고 남은 인간이 절반이였다. 들어간 사람들에게 브리핑을 해주기 위해 남은 사람들이 그 중 둘이였고, 나머지는.
“...옥상으로 누가 가는데?”
기어코 그 인영을 발견한 인간들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그게 예의 그 문자 테러한 우리팀 미친놈인지 아니면 간밤에 이따위 짓을 해놓고 살아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개새끼들인지 확인을 못 한 인간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인영을 좇기엔 이미 늦었다. 그 인영 하나가 옥상 너머로 사라졌으니 땅 바로 밑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각도로 억까나 당할 뿐이다.
앨리는 울렁거리는 감정을 느끼며 계속해서 미친놈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보낸 문자 메세지가 세 배는 되었다. 살아있냐고 묻는 문자 메세지는 저 위에 가 있었고, 이제 그냥 A나 다른 글자 하나가 찍힌 문자만 한가득이었다.
그 순간에도 무전기로는 이것저것 이야기가 들린다. 여기 개판이다, 문짝이 싹 갈린 방이 한 두개가 아니다, 창문 몇 개가 박살이 났다, 여기 지금 대치하겠으니 더 와라. 인원들의 배치가 바뀌고 앨리스 역시 돌입하려는 그 찰나.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옥상에서 정확히 아홉 발의 소리가 났다.
영웅들에겐 모두 익숙한 박자였다.
SOS.
앨리스는 S를 뜻하는 짧은 총성이 세 발 들리자마자 와이어를 쐈다.
-증인 B(현장팀): 그때 다니엘이 진짜 또라이인 걸 알았어야 했는데. 누가 총으로 그딴 짓을 할 생각을 해?
-
다니엘은 거의 멍멍해진 귀와 늘어진 팔다리를 이끌고 옥상 문 옆에 앉았다. 이대로면 아마 살거나 죽거나겠지. 그래도 꼼꼼하게, 다 쓴 총은 문고리에 야무지게 걸어두었다. 안에서 밖으로 쉽게 들어오지는 못하게 말이다. 남은 총알은 셋. 음, 이럴 거였으면 그냥 돌아다니는 놈들 하나 둘 쏴서 떨어뜨릴 걸 그랬다. 그게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기어올라오는 것들이 휘휘 떨어지는 걸 보고 비웃을 정도는 됐을 텐데.
다니엘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유언이나 남기는 슬픈 꼬라지를 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구조 요청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확신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걸 교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고, 애초에 그를 구하러 올 의리도 없는 인간들이긴 했다. 이유도 별달리 없기도 했다. 그래도 구하러 온다면 뭐 좋겠지. 다니엘은 그렇게 희망차고 낙관적인 생각은 오래 전에 여러 번 접었다. 상황을 그가 컨트롤할 수 있을 때만 그건 유효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무슨 최후통첩 내리는 외로운 사령관마냥 우울하게 혼자 찌그러져 있는 것이다.
옥상에 와이어 걸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다니엘은 물론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총구도 겨눴다. 하지만 모든 자세가 엉망이라, 눈 앞에 곧 다가올 인간이 아군이 아니면-
“다니엘, 워커.”
-그건 꽤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떤 새끼가 실탄으로 그딴 짓을 하지?”
바람을 가르고, 저 땅 밑에서 고층의 기숙사 옥상에까지 기어코 올라와버린 그 사람의 목소리는 다니엘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니엘은 여전히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등장한 사람은 그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총구 내려.”
“...이 정도는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뭐가.”
여기 있을 존재가 적일 가능성.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기 전에 팔을 내렸다. 이제 들고 있기 너무 힘들었다. 사다리는 정말 존나게 타기 어려운 물건이다... 다니엘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도 이르게 도착한 사람을 물끄러미 본다. 붉은 머리는, 옥상 그 어둠 속에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 밑에 있던, 그림자 속에 있는 목소리가 그를 향해 다시 조소 섞인 말을 건넨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고, 왜 여기까지 내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야 할걸.”
“사건 진술때 보자고. 여기 가만히 있어라, 방해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옥상 문을 잠금쇠처럼 막고 있던 빈 총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니엘이 벽에 기대 마저 찬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듣고 있자니, 비명 소리 중에 그가 아는 인간의 비명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그를 비웃듯 배웅한 사람의 목소리는 특히 더.
총소리가 하나 둘 잦아든다. 주먹질 소리가 총소리를 대신하다가 또한 잦아든다. 긴장이 풀린 몸이 차가운 바람을 그다지 차갑지 않도록 느끼게 만든다. 수마가 다가온다. 졸립고 피곤하다...
-
-증인 D(정보제공자): ...일어나 보니 사내 병원이였지.
-
앨리스와 다니엘의 후임이나 마찬가지인 잭과 바냐는 기록을 덮었다. 잭은 당장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어떻게 살아남았어? 답신은 빠르게 왔다. 그건 네 누나한테 물어봐라.
-
앨리스는, 일이 정리되자마자 옥상에 다시 갔다. 체온을 잃어가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창백한 낯을 한 민간인이었다. 그것이 미친놈이라 불리는 인간일 지라도 그건 민간인이었다. 앨리스는 서둘러 그 사람을 들처 메고 다급하게 층계를 내려갔다. 맥박이 느껴졌다. 앨리스는 그게, 빌어먹게도 다행이라고 느꼈다.
앨리스는 그다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동료들과 다시 웃으면서 합류를 하게 된 건, 새벽을 꼴딱 새다가 별안간 그 민간인이, 다니엘이, 늦지 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후였다.
“안 늦었으니까 살아있겠지.”
“걔들, 기어이 그걸 찾았네?”
“기숙사 습격사건이 그거 말고 또 있었냐...?”
지금의 두 사람은 그냥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 201n년 4월 5일, 앨리스 맥거프 조난사건.
한가로운 오후, 다니엘은 어제 만들고 남은 에그노그에 계피가루를 약간 치고 있던 도중이었다.
다니엘은 사용감이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한 전자레인지를 흘긋거리다가, 창문 바깥을 봤다가,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지금 시간에 핸드폰을 켜서 활자를 다시 들여다 보기엔 그는 여전히 정보의 수해에 빠져 사는 인간이었다. 가끔은 글자가 담은 단 1g의 정보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음을 가만히 있음으로서 어필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다니엘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린다. 이런 식의 알림음은 수상한 곳과 연결된 그 메신저쪽은 아니고, 보나마나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은데. 다니엘이 자신의 피로 관리에 오늘도 마이너스를 책임지는 직속 후배를 생각하며 핸드폰 화면을 켠다. 아니나다를까, 후배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V.S: 선배님?
-V.S: 이거 문서 왜 이래요?
-V.S: 전화나 좀 받으시죠??
읽음 표시가 뜸과 동시에 후배에게서 전화가 온다. 에라이. 다니엘은 다 데워진 에그노그를 꺼내 느른하게 테이블에 늘어지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발신음이 들리고 한참을 느적느적 걷다가 받았다는 뜻이다. 대략 20초는 될 거다.
“어.”
이거라고 지칭한 문서가 뭔지도 모르겠으니 다니엘은 짧은 대답만 한다. 바꿔 말하자면, 다니엘이 보통 수준으로 건드린 게 아닌 문서가 제법 많으니 다니엘 자신도 영 짐작을 못 한다는 뜻이다. 핸드폰 저편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지하시설 특유의 울림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급하게 올라오고 있는가 보다.
“어, 는 무슨 어?!”
“설명을 안 하고 나서 나한테 물어보면.”
“...이 빌어먹을 선배 새끼가?”
“뭘 물어보고 싶은데?”
반대편에서 한바탕 최대한 검열한 수준의 욕설이 툭툭 튀어나온다. 다니엘은 직속 후배가 떠들게 두고 냉장고에서 어제 남겨 둔 에그타르트 하나를 마저 꺼내 차갑게 식은 상태로 한 입 베어물면서, 후배가 할 말이 욕설 이상으로 갱신되기를 기다렸다.
“공간 이동자 사건이요. 왜 맨 처음 보고서가 없어요?”
“아, 그거.”
“맨 뒷장이 왜 딱 한 줄만 있고 끝인데? 암만 봐도 누구 코멘트 있었다가 잘려나간 것 같잖아?”
우물우물. 역시 잘 만든 에그타르트는 맛있다. 속 터지게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재능 있는 다니엘이, 매너 있게도 음식을 모두 씹어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또 20초는 걸렸다는 소리다. 그 동안 바냐는 자신의 선배가 태평하게도 뭔가를 먹고 있거나 마시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숨으로 비트를 찍고 있었고 말이다.
“그게... 연도를 말해 봐라.”
“앨리 선배님이 휘말린 건이요.”
“아.”
다니엘이 과거를 회상한다.
“구출 기여자에 선배님 이름 박혀있는 그거요.”
그거라면 자신이 손 댈 이유가 너무 명확한 건이였지.
-
통신기 너머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는 아직 통신기에만 의존했어야 하는 시절이였다. 뭐, 그 때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통신기가 아니라 텔레키네시스를 쓰는 초능력자가 있다 한들 거리가 닿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다니엘은 그 때의 시대를 생각해 본다. 아직 윗선과 현장팀의 갈등이 영 안 풀렸던 시절이다. 자신이 오고 나서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 지원이 부족한 현장팀, 상황 전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그 때 말이다. 그나마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자신이 어느 자리든 꿰차겠답시고 통신기를 집어들고 아무 데나 들쑤시고 다녔던 때이기도 했다.
그 때 상대한 적은 자신이나 타인을 다른 곳으로 배달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아X존 택배기사 같은 놈.
뭐 어쨌든, 녀석이 중요한 건 아니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위치를 특정당했었고, 찾기 어려운 놈도 아니였던 데다가, 하는 짓도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는 도망치기만 반복하는 아주 이상한 놈이였으니까. 겁 많은 토끼 같다고 했어야 했다.
한 가지 문제 사항이 있었다면 그 녀석은 자신도 어디로 순간이동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고, 이는 다른 사람을 이동시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신이 들려왔다.
“아난시!”
아난시. 앨리스 맥거프의 코드 네임이다. 다니엘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상황실 안에서 누가 들어도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를 듣고 상황 설명을 요구했었더랬다.
“뭔 일인데요?”
“태평하게 건물 안에 처박혀 있지 말고 네놈도 나와!”
“아니 그럼 누가 당신들 상황 다 살펴주는데?”
“닥치고 처나와, 이 애송이 새끼가!”
변함 없는 현장팀의 적대감은 그의 알 바도 아니고 소관도 아니니 무시하고.
“애가 능력에 휘말렸어!”
그 놈이 애 맞습니까, 라는 말을 먼저 할지 아니면 적을 제압하는 데엔 성공했는지 중에 뭘 먼저 물어볼까 하다가.
“비상 소집이다!”
“일단 체포는 했고요?”
“튀어나오기나 해!”
“에라이 염병할.”
라고 대꾸했었지. 저기요, 그 애랑 동갑내기인 사람이 지금 당신 윽박을 받아주고 있는데. 라는 생각도 같이 했던 것 같았다. 다니엘은 그때 자신 빼고는 영 쓸 만한 사람이 없어뵈는- 아니, 정보팀 여럿이 있었으니 그나마 어중이떠중이만 모인 곳은 아니였던 상황실을 빠져나왔었다. 그 다음에 어쨌더라.
당연하지만 통신기를 끼고 상황 설명을 마저 브리핑 받으면서 필요한 것을 챙기러 갔다.
“일단 그 놈은 잡았고요.”
“그래, 잡았다! 네놈은 그게 더 중요하냐?!”
“안 휘말리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 피해 범위는 아까 들었으니까 됐고요. 연락은 안 됩니까?”
“...안 돼.”
통신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절망에 진정한 건지 뭔지, 하여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던 게 기억난다. 왜 기억에 박혔을까. 그런 목소리를 생전 읊조린 기억만 있지 타인의 입에서 말하는 건 처음 들어봐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다니엘은 기억의 실타래를 계속 쫓아갔다.
아마 자신이 통신기를 이용해 앨리스와 연락을 시도했던 것 같다. 당연히 시도는 실패했고. 추적이 가능한 인원이 있는지 이동하면서 마저 브리핑을 했었던가.
“위치 추적이 가능한 능력자는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방향만 잡힌다.”
“불어요 그럼. 뭘 입 다물고 앉아서 징징거리기나 해요?”
“네놈은 뾰족한 수가 있기는 한가?!”
달그락.
아, 그래. 그때 딱 그걸 잡았었지. 기억이 교차한다. 현재 다니엘의 시선에도 순간 잡히는 것이다. 그것은 둥글고 적당히 손에 잡힐 정도의 몸체를 가진 원통형 물체였다. 안에 든 것을 표기하는 라벨이 있었다. 라벨에 쓰인 명칭은, 자신이 그 통을 열어 입 안에 냅다 처박은 것들의 이름은.
“구급차 몇 대랑 같이 가니까 조난 신고 하고.”
수면제다.
다니엘은 그 때 수면제 몇 통을 챙긴 채 구급차에 올라 타서는, 자신이 타자마자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
그건 꽤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다니엘은 선명히 기억한다. 왜냐고? 그런 수면제들이 자신에게 잘 통했으면 자신도 수면제 한 알만 얌전히 먹었을 것이다. 왜 몇 통씩이나 챙기고 왜 몇 알을 냅다 입 안에 털어넣었겠는가. 안 통하는데 어거지로 통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꾸역꾸역 먹고도 잠에 가만히 빠졌다가 도로 파드득 일어나는 게 비일비재하단 말이다.
장거리 추적이 가능한 사람. 그 때 존재했던 현장팀 중 그나마 방향을 알겠다는 인간 하나. 통신기, 먹통. 전화, 먹통. 높은 확률로 통신국이고 뭐고 하나도 설치가 안 된 오지에 떨어졌을 가능성. 낮은 확률로 이미 죽었을 수 있음. 추적은 되나 생사 확인은 불가능.
다니엘은 그 때 강제로 꿈에 처들어가 누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기억의 특이한 점을 좇아 간신히 붙잡고 따라가는 것이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약함이란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다.
새카맣고 깜깜한 어둠이 몰아친다.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특이한 무언가를 발견하라지만 그게 말이 쉬운 줄 아는가? 지도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일 마당에, 어느 위치에 떨어졌는지도 모를 인간을 고작 느낌과 감각만으로 찾아내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이냔 말이다. 방향이 자신에게 거 참 대단히도 도움이 되었겠다.
실종, 조난 등 사람이 단시간에 사라졌을 때, 골든 타임이 언제인지 당시의 그는 몰랐다.
꿈 속에서 어떤 단서를 찾지도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갔고, 그는 위장에 든 모든 수면제를 게워내며 구급차에서 깨어났다. 그건 여섯 번째 기상이었다.
반쯤 녹은 수면제들이 위액과 뒤섞여 약물의 쓴 내음과 시큼한 위액 냄새를 같이 내뿜고 있는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하며, 그는 지친 체력으로 구급차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탈진이었다.
-
“앨리 진술부터 보시지 그래.”
“봤는데 왜요.”
“읊어 봐라.”
“아 이게 문제에요 지금?”
-
앨리스 맥거프는 자신이 갑자기 숲 속으로 이동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대상을 제압하기 위해 근처까지 갔다는 정도는 기억한다. 그 자의 손이나, 최소한 기동 거리까지 접근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한 바였다.
현장팀은 이번 대상이 굉장히 포획, 체포하기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고, ‘빌어먹을’ 다니엘 녀석의 몇 가지 추론과 꿈 속 관측을 토대로 ‘대상에게는 힘을 쓸 때 손에 닿는 것만 이동시킬 수 있으며, 바로바로 발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쿨타임이 필요하다.’ 는 것을 알아냈다. 이를 기반으로 여러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에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지금 앨리스의 피부에 닿는 공기는 습하고 차가웠다. 지나치게 청량해서 오히려 어지러웠다. 도심지 바깥, 교외에서도 더 바깥, 말 그대로 자연이 뒤덮은 곳. 여기가 어디지. 앨리스는 하늘을 한 번 본다. 나뭇잎과 가지에 가려져 빽빽하게 보이는 하늘은 차라리 천장에 금이 갔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주변을 본다. 온갖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주변 표지판이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허무하게 부서질 정도로 울창했다.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앨리스는 마지막으로 바닥을 본다. 사람이 다닌 적이 한 번도 없는 길이라는 듯 매끄럽게 닦이기는 커녕 낙엽이 조금 쓸려나간 흔적조차 없다. 앨리스는 눈을 감는다.
벌레 소리, 바람이 스치는 소리. 그걸로 끝이다.
“...허...”
앨리스는 녹색이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곳에서 유일한 붉은 머리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증인 A: 한동안은 움직일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네. 부상을 입지도 않았는데.
단지 자신이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꼭 나무에 질식당하는 기분이 들어, 앨리스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위해, 패닉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바스락.
인간이 홀로이고, 낯선 환경에 내던져지면 모든 감각이 곤두선다. 앨리스를 패닉에 빠뜨린 감각이 압도적인 공간감과 거대한 녹색의 충격이라면, 거기서 강제로 끄집어내 현실에 다시 내동댕이 친 것은 청각이었다. 조용하기 짝이 없는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놀랍겠나. 그것이 들짐승이라면? 이름 없는 범죄자라면?
아마 그녀가 잘 훈련된 영웅이 아니였다면 곧바로 비명을 지르거나 우왕좌왕하며 움직였을 것이다. 앨리스는 그러는 대신에, 빳빳하게 굳은 몸을 움직이기 좋게끔 살며시 움직이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바람이 나뭇잎을 밟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
앨리스는 그것에 허탈해하면서도, 몸을 거세게 훑고 지나간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앨리스는 이 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증인 A: 그건 그래.
-증인 A: 무력감이였지.
앨리스 맥거프 실종 1일차. 앨리스 맥거프, 발견되지 않음. 현재 앨리스 맥거프의 위치 확인 불가, 생사 불명.
-
2일차.
다니엘은 그때까지도 구급차에 계속 늘어져 있었다. 방향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대로 무작정 달리면서 말이다. 몇 대의 차가 더 도착했고, 수색 작업에 필요한 물건이나, 장기전에 필요한 물건들이 차에 실려 따라왔다. 따라온 것들 중엔 경찰이 있었는데, 경찰들은 그들을 조금 비웃듯 보다가도 수사에 협력하겠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갔다.
‘당신들 같은 초인이 조난도 다 당합니까? 의외네요.’
‘아, 모욕을 주려는 건 아니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방향이라면... 아십니까? 화이트 숲입니다.’
‘꽤 거대한 숲이라서, 근처에 사는 주민들도 깊이는 들어가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그쪽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저 싸가지를 보고 배워야 하는데.”
다니엘은 그때, 급속도로 컨디션이 나빠진 위장에 어거지로 콘스프를 때려박았던 기억이 났다. 공권력과도 사이가 유서깊게 안 좋은 영웅들이 잔뜩 비꼼 당하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그 때 담요를 어떻게든 두르고 공권력과 대치하면서도 어떻게든 쓸 만한 단서를 물고 오는 사람들도.
그 표정도.
“숲 안쪽에 있으면 숲 관리자들한테도 신고를 해야 겠지?”
“그렇겠죠...”
다른 영웅들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영웅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하는 걸 봤던 것도 말이다.
그 인간들한테 무슨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는지 몰라도 자신이 콘스프를 다른 인간들한테 냉큼 타 주면서 봤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그 때 그 표정들에 둘러싸이기 싫어 줄곧 구급차 안쪽에 마저 처박혀 있었단 것도 기억했다. 뭔가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고 해야 할까. 일이 안풀려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숲이 아니라 그 너머로 갔으면 큰일이야.”
“차로 가도 너무 먼 거리까지 가잖아...”
아, 그래. 이 대화에서 그가 한 번 끼어들었었다. 다니엘은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어제 내내 수면제와 위액의 혼합체를 게워냈던 목이 반쯤 쉬어서 켁켁대는 소리를 냈다.
“콜록.”
“...너도 고생이 많다.”
“아니, 말고. 그 놈 지금 수갑 차고 본부 구석에 짜그라져 있잖아요.”
위치를 알면 그만큼 들여다보기 훨씬 쉬웠다. 기억을 타고 다니는 것도 훨씬 쉬웠고 말이다.
“그 놈 능력 반경이 아무리 넓어도 숲 너머로는 가지 않을 걸요?”
그가 콘스프를 먹으며 어지럽게 끼적인 도안은 알아보기엔 아직 흉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도 위에 그린 몇가지 선들은 사람들의 눈에 어떤 가능성을 보게 하기 충분했다.
그가 깨작거렸던 선은 그 아X존 택배기사같은 놈이 언제 어디서 힘을 발동시켰는지에 대한 정보였다. 기억을 타고 내려가 겨우 찾은 피해자의 같은 시간 위치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동그랗게 그린 원은 그 반경이다.
비록 급하게 만든 것이라 구질구질하고 구깃구깃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지만, 그들에게 이 정보는 쓸모가 너무 넘쳤다.
“어떻게 알아낸 건데?!”
“밤새 본부에서 쪼는 걸 엿듣다가... 그 뭐냐.”
다니엘이 배터리가 나간 통신기를 귓가에서 빼서 흔들었다.
“일단 이것도 좀 누가 보급해 줬으면 좋겠고요.”
이후로 다니엘은 다른 인원들이 피해자를 찾으러 갔다는 언급이나, 본부에 남아 있던 이들이 피해자들 중 몇몇을 구조하고 사정청취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말을 마저 덧붙여 갔다.
“물론 그 전에 우선 위치를 잡은 건 저지만.”
이건 또 뭐하는 놈이냐며 약하게 신경질 내는 사람이 보였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저 그런 경위로 정보를 얻어냈구나, 하는 마음에 지도에 득달같이 달려들기만 했다. 다니엘은 그 때 자기 갈비뼈가 안 부러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추가적으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앨리스가 있을 수 있는 위치는, 방향까지 모두 고려를 하자면.
“아무리 멀어도 화이트 숲 너머의 이름도 안 지어진 작은 늪지이지 않을까.”
그 정도라면 아직은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믿자 다시 얼굴이 환하게 피고 있었다. 다니엘을 그걸 보는 걸 즐기다가, 햇빛이 반사되자 도로 꾸물거리며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배도 얼추 채웠고, 다시 수면제를 하루 종일 털어야 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저 인간들의 표정변화가 이상하게 속이 꼬이게 만들어서가 아니였다.
-
2일차의 어느 저녁.
앨리스는 그동안 숲 안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이슬이 지지 않는 자리를 찾기 위해 걷기,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하기, 먹을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 등등. 앨리스는 다음 번에는 이런 악성 미친놈을 상대할 때에는 패미컨 몇 개를 구비해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증인 A: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다들 이걸 생각 못한 게 오히려 신기했다고 할까. 반드시 붙잡으리라, 하는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고 할까.
-증인 D: ...(혀 차는 소리.) 실수가 참 많았다. 됐나?
앨리스는 해가 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에서의 밤은 인간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일찍 찾아온다. 차가운 공기가 이를 알리고 그에 맞춰 힘겨운 몸이 늘어지고 싶어한다. 앨리스는 방향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이슬을 맞지 않는 자리는 보아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최대한 체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습한 곳은 나무에 불을 피울 수조차 없었다. 이끼 가득한 나무는 보란 듯이 물기를 머금고 마찰을 회피하며 미끄러지기 바빴다.
먹을 수 있는 게 없었고 그마저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 있거나 그 존재 자체로 그냥 위험한 것들 투성이였다. 들짐승들, 버섯들, 기타등등.
앨리스는 내일까지 버티기로 했다. 오늘 새벽에 얼어죽지 않는다면 가능하리라.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데, 아마도 찾고 있겠지, 하는 그런 무상한 희망 하나만을 쥐고서. 어쩌면 먼저 간 선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뜬다면 말이다.
그럼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어처구니 없이 실수 한 번으로 죽게 되어서 말이다. 당신들이 한 번씩 막아준 치명상으로 살아남은 후배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려서 미안하다고 해야 겠다. 당신들의 목숨의 무게를 이렇게 날리고 돌아오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고 해야 겠다...
잠이 온다.
아, 죽으면 안 되는데. 그럼 제 어머니나 동생한테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는 게 제 시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건 너무 그랬다. 아직 아버지를 보러 가고 싶지도 않았다. 망할 아버지한테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욕도 푸지게 한 게 자신일 텐데, 가서 얼굴을 보면 또 엉엉 울 것 같아서 너무 걱정이 되었다.
잠이 온다...
살아서 나가고 싶었다. 죽는 건 무서웠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이렇게 맞이하긴 싫었다. 자길 구하러 오고 있긴 한지, 동료들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설마 자신이 체포를 실패해서 전부 다 자신처럼 어딘가에 흩어진 건 아닌지...
두렵다.
딱!
“겨우 찾았네.”
앨리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다. 아니, 떴다는 감각이 아니다. 이건 ‘보인다’는 감각이다. 눈 앞의 상대는 파란 가디건을 걸친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시퍼런 우산을 쓰고 있었다. 유령인가, 하고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무서워 해줘서 아주 고맙다. 덕분에 찾았어.”
무슨 뜻이지?
“거긴 사람이랄 게 없으니까. 뭔가 반응이 강렬하게 있길래, 딱 봤더니 그쪽이던데.”
넌 뭐지?
“...설마 어디 얻어맞아서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는 말고. 그쪽이? 나를 잊어? 이건 이거대로 웃기겠는데.”
조금 더 선명해진다. 인간 형상의 누군가가 해상도가 높아지는 만큼 주변의 풍경이 흐려진다. 앨리스는 눈 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다. 저 새파란 색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심장소리가 쿵쾅쿵쾅 들려온다.
“아니 근데 X발 여긴 그래서 진짜 어디야 미친.”
“다니엘-!”
허억. 앨리스는 악몽인지 뭔지 모를 꿈에서 깨어났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둠이 사야를 꽉 막고 있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본 인영은 마치 환상이였다는 듯,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바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 왔다. 앨리스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한참 들었다.
자길 찾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찾는 사람 중에 하필 그 녀석이 있다는 사실에 불쾌해 해야 하는 건지. 그러나 앨리스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모쪼록 생존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순식간에 바짝 긴장했던 몸은 안정을 찾자마자 다시 몸의 주인을 빠르게 수마로 빠트렸다.
- Fortuna.
“여기서부터 기록이 이상하다고요.”
“뭐가 이상한데.”
“3일차 기록이 너무 요약되어 있다고요. 댁이 정리했을 거 아냐?!”
바냐가 다니엘에게 전화로 전한 내용 상에서 3일차는 이렇게 끝이 났다.
-증인 A: 정말 극적으로 구조됐지.
-증인 D: 이게 다 내가 추적을 해서 정보 격차를 최소화한 거라니까.
위의 두 증언과 아주 개략적인 숲 조사과정, 앨리스를 발견했음, 조사 끝. 날림이 따로 없다. 누가 봐도 기록이 수정되었고, 빼먹은 기록이 있다고 알리는 꼴이었다. 심지어 사후 처리에 대한 내용도 없었다!
“말해 봐요. 대체 뭐길래 그랬어요?”
다니엘은 침묵한다.
-
3일차의 새벽.
다니엘은 그때도 앨리스의 꿈과 기억을 들락거리면서 정확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도 많은 나무들이 정신 나가게 있어서는 위치고 나발이고 길이나 안 잃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당시의 감상은 그랬다. 모든 나무들이 똑같이 보이니 여기가 어디고 저기는 또 어디이며, 방향은 또 어디인지 도대체 감이 안 잡혔다.
기억의 주인인 앨리스도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그 감각에 영향을 받아 더욱 그랬다. 북쪽이고 남쪽이고 어디가 어디야. 그나마 앨리스가 이끼가 자란 방향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알아내자 동시에 방향 감각 체계가 다시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고생 참 많이 한다. 다니엘이 기억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다.
“오늘 안에 못 찾으면 그 다음엔 뭐 생사 장담을 못 하겠는데.”
2일차 저녁에 앨리스를 극적으로 그의 능력을 통해 밝혀내면서 생존을 확인한 게 몇시간 전이다. 그리고 나서 3일차로 넘어간 새벽녘, 다시 확인한 앨리스의 상태는.
“탈진에, 탈수에... 저체온증도 간당간당하고.”
이걸 죄다 증상을 어느정도 감 잡을 수 있는 내가 레전드다 X발. 다니엘은 회고하면서 생각한 건데, 뭔 인생을 어떻게 살았나 하고 돌아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니, 이렇게 샐 게 아니라.
하여튼 3일차로 넘어가는 그 새벽에 앨리스는 차가운 상태였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다니엘은 그때 다른 풍경을 대조해 가면서도 수시로 앨리스의 심장 박동을 확인했어야 하는 그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물론 풍경을 대조한답시고 숲 안쪽까지 진입해서 꺠어났다가 다시 수면제를 왕창 먹고 고꾸라지듯 어거지로 잠에 빠져드는 것만큼 기분이 더럽고 생경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러다간 위험하다. 그 정보 하나는 충분하게 새겨졌다.
“앨리스 블레이크 맥거프.”
“...”
“앨리스 블레이크, 맥거프.”
“...”
“맥거프!”
다니엘은 결국 앨리스를 꿈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증인 A: 그 녀석이 별안간 꿈에 다시 나왔었어. 처음에는 안심하라고, 곧 도착한다고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뭐라고 한 줄 알아?
“너, 살고 싶은 거 맞지.”
앨리스의 공포를 좇아 온 다니엘이 꿈에서 말했다. 앨리스는 뿌옇고 검은 공간에 시퍼런 인영과 이미지로만 ‘보이는’ 그가 그렇게 물어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뭐지, 어딘가 잘못 됐나. 그 감정을 감지한 듯 다니엘이 가만히 말했다.
“숲 내부가 너무 넓어. 지도를 살펴 가면서, 네 기억도 거 미안한데 좀 뒤져봤고, 대조해 가면서 찾고는 있는데... 이대로 가면 아무리 빨라도 오늘 저녁이야.”
“...버틸 수 있어.”
앨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게 말라붙었다고 ‘감각했다’.
다니엘의 표정이 유달리 선명하게 ‘보였다’. 저런 표정을 아마 본부에서도, 심지어 지나다닐 때 조차도 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아,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앨리스 그 자신이 저치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 잔뜩 짜증나고, 어딘가 켕기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 없어하는 못된 인간같은 표정이다.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뭘 바라.”
다니엘의 시퍼런 인영이 점점 뭉개진다. 푸르스름한 색채가 주변을 가득 메운다. 처음 이 빌어먹을 놈을 마주했던 그 때처럼. 꿈이 퍼렇게 물드는 건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다.
“네 능력으로 뭔가 표기라도 해 달라고.”
“...표기?”
“나무를 부러뜨리든.”
“...”
“뭐, 나무 열매가 굴러떨어지든 어떻든. 흐르는 물을 보든 뭐 갑자기 불이 나든 간에.”
“...”
“대차대조할 단서가 필요해.”
앨리스는 시퍼런 풍경 속에서 정신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꿈 속에서 이런 것까지 느낄 수 있다니, 그거 참 신기한 일이다.
“뭐라도 해 봐, 맥거프.”
“...”
“살고 싶다며!”
저 짜증나는 입을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말이다. 책임을 은근히 회피하려고 하는 저 짜증나는 녀석이 뭐 저리 발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구차하게 왜 저렇게 주절거리는 건지. 봐라, 이번에도 말이다. 앨리스는 자신이 살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자신이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말을 하는 저 빌어먹을 주둥이를 봤다.
저 주둥이를 한 번 내리쳐 보고 싶다. 정말로.
-증인 A: 그 때, 주변이 온통 새파랬어서 그런가. 꼭 하늘을 움켜쥐는 기분이 들었어.
-
3일차, 새벽.
거대한 나무를 기점으로 몇십번이나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함. 확인 결과 낙뢰 주의보는 존재하지 않았음. 날씨는 매우 맑았음.
이상함을 느끼고 소방 당국에서 지원된 구조용 헬기와 함께 긴급하게 이동. 벼락이 꽂힌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아래에서 실종자를 발견함.
발견 당시 실종자 주변에 불에 탄 나무 잔해들이 떨어져 있었으나, 실종자에게 화상 등의 외상이 발견되지는 않음.탈진 및 탈수, 저체온증의 사유로 급히 인근 병원으로 이송을 결정.
-
다니엘은 그 때 꿈에서 쫓겨나며 꺠어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삼킨 열 세 정의 수면제를 그대로 게워낸 이후 자신도 마찬가지로 탈진해 고꾸라졌던 것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우레 소리였다. 동시에 온갖 사람들이 저게 뭐냐고 떠들기 시작하는 소음도.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 이것저것 잘도 포착해냈었군.
다니엘은 그 이후에, 눈 떠보니 옆자리 침대에 앨리스가 수액을 맞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증인 A: 눈을 떠보니까 걔가 피거품 물면서 있던데? 뭘 한 거야. ...뭐? 수면제를 몇 개나 먹었다고?
아주 귀신 쳐다보듯이 보던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
“안 알려줄 거에요?”
“목숨 걸 생각 있냐?”
“...그 정도에요?”
“없으면 끊어.”
-
-증인 D: 내 생각에 그 벼락을 만들어낸 게 걔라고밖에 추측을 못 하겠기는 한데 말이야. 그런데 그럼, 걔는 대체 능력으로 개입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 거야?
-증인 D: ...그리고 내가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증인 D: ...(걸어오는 소리.)
-증인 D: ...아무래도 본부 안에 있는 모든 공포 영화나 뭐, 쏘우? 그런 것들도 집어 치우고, 재난 영화 같은 것도 가급적이면 지우는 게 좋겠고.
-증인 D: 이것도 지우는 게- (파열음)
-
다니엘은 할 일을 했다. 그 뿐이었다. 끊어진 전화 속 이름을 가만히 보다가 통화녹음 내용을 지우고 나서, 그는 얌전히 괜찮은 온도로 식은 에그노그를 마저 홀짝일 뿐이었다.
원격 살인이 가능해 보이는 능력을 그런 식으로 발견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큰한 에그노그를 맛보면서 그는 일요일의 느긋한 오후를 마저 즐기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 아무 일도 없던 거다.
7.2. 일상(현재) ¶
- 내기 제안자는 억울하다.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가까운 메신저가 눈 앞에 나타나고,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언제인지 묻는다면 적어도 나는 3개월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3개월 전부터 그 메신저와 안의 대화 내용들이 핸드폰 안에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몹시 거슬리는 일이었다.
대화 내용의 어느 정도를 조용히 관찰하면서, 그러니까 다시 말해 눈팅을 하면서 알아낸 것이지만 이 안의 사람들 중 몇몇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이름이나 연령대 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솔직히, 여기까지 였다면 나는 이 주일 정도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메시지를 쳤을 지도 모른다. 그랬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긴다. 나 말고도 그 녀석이랑 그 조막만한(이젠 아니게 된 지 한참 됐지만) 애한테도 이게 보인다는 셈이고, 그렇다는 말은 내가 입을 다물어도 어느 쪽에서든 간에 정보 누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불러 내기를 걸었다.
“제일 먼저 여기에 채팅 치는 사람이 다른 두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할까.”
“와, 내용이 제법 식상한데, 대니.”
“이래봬도 ‘내가’ 말하는 거야.”
“소원이요? 무리수인 소원이라도 나오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다들 자기가 1번 타자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어쩌면 평범하다면 평범한 내기였다. 친구끼리 하는 흔한 내기였고. 그리고 늘 그렇듯 내기를 건 당사자가 걸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내가 신나게 놀림받았다는 소리다.- 이 녀석들한테 소원이 뭐냐고 협박에 가깝게 닦달했더니 돌아오는 것도 없어서 눈도 안 감기는 밤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기를 제안하는 데에 덧붙이자면, 나는 그 조막만했던 우리 애가 제일 먼저 채팅을 칠 것이라고 놀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애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녀석 한테는 별다른 놀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석도 제법 영리하니 관전을 하다가 내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래의 나를 내가 염려치 못 했다. 아니 그런데 그 당시의 채팅 내역을 좀 보라. 선천적인 성격 장애가 있는 존재 한 명, 신화적 존재 두 명이 있는데 그걸 참기에는 내 지식욕이 그만… 그래. 내가 나빴다.
-
“…그래서, 소원은 생각했고?”
“저요. 저 있어요.”
“그래.”
작았던 녀석이 손을 든다. 이제는 제법 큰, 아니, 이제 적어도 우리 중에서 제일 큰 체구를 가지게 된 아이는 노란 눈을 빛내더니 결심한 듯이 말한다.
“이번 휴가도 같이 가기에요. 네?”
“…일단 내가 휴가가 승인이 되려면 너희 둘이 없으면 안 되는데?”
이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 나중에 기술하도록 한다. 조만간 기술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때까지 기다려도 좋다. 사정이 없다 쳐도, 친구들끼리 여행 계획을 짤 때 휴가 일정을 맞추는 정도는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기술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기겠다.
“그건 맞지. 그러니까 그 전에 몸 좀 잘 챙기라고.”
“그건 나도 너희한테 좀 부탁하고 싶은 말이긴 한데.”
“잘 챙길게, 네 그 말을 내 소원으로 쓰면 되겠어?”
“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사내 병원에 들락날락 할 지 기대되는 걸.”
“잔소리 할 일 안 만들 거니까, 너도 제깍제깍 자.”
“라고 오전 12시에서 1시 사이에 기어이 기숙사 로비로 사람을 부른 누구가 말했다.”
아프지 않게 등을 맞았다. 몸 잘 챙기라면서 때리는 건 또 뭐냐, 라고 한다면 아예 토라질 것 같아 그만 뒀다. 이 정도 놀렸으면 됐다. 어차피 이번 여름 휴가는 작정하고 쉴 예정이기도 했으니.
“…여름이 다 가긴 했지만 말이야.”
“9월까지는 여름으로 쳐 주세요.”
“9월은 가을이야.”
“덥다구요!”
작았던 아이에게 손 부채질을 해 주면서,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여름 밤은 잠들기 좋게 어두웠고, 귀찮게도 습했다.
- 제가 고민이 있던 건 맞는데요…
방에 포켓 미러가 있나요? 아니요. 들고 다닐 수 있는 거울이 있나요? 전신 거울은 패스겠죠? 그럼 작은 거울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있나요? 있는데, 하필 말 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어요.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접어 가며 선택지에 아니요를 대답하다 보면, 결국 남는 건 내 손에 덜렁 잡혀 있는 핸드폰 뿐이다.
이걸로 셀카를 찍어야 하나? 화 났냐고 물어보는 시점에서? 갑자기 그러면 괴상할 것 같은데. 상상해 봤더니 조금 웃기긴 하다. 만약에 형이나 누나가 화를 내다가 갑자기 셀카를 찍으면 그것만큼 올해의 퓰리쳐 상 감은 또 없을 것 같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화면을 껐다가 켜 보기도 하고.
훈련장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냐고 하면 사실 아닌 게 맞다. 만약 내가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혼나서 나머지 공부까지 했을 지도 몰라. 훈련을 지도하는 사람이 이러고 있어도 괜찮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럼 지도받는 사람의 공부량이나 훈련 같은 건 누가 책임 져줘!
그냥, 지금이 쉬는 시간 중에서도 모든 피드백이 끝난 후의 달콤한 5분이니까 이렇게 있을 뿐이다. 훈련장에 비치된 긴 의자에서(병원 복도에서 볼 것 같이 생겼다.) 다리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왜 화났냐고 물어봤을까, 하고 후배들의 생각을 읽어 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할 뿐이다. 오늘따라 핸드폰을 조금 뚫어져라 보고 있긴 하지만…
“우~리 아가는 여기서 뭘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까?”
“깜짝이야! 누나!”
“어허, 소리에 귀 기울이랬지.”
“아야, 볼 또 꼬집지 마요.”
으아악, 이미 꼬집혔다! 몇 번 볼을 따라 고개가 옆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가 돌아온 뒤에야 나는, 누나가 나한테 질문을 했다는 점이 생각났고 대답을 좀 하고 싶다고 느꼈다. 누나는 네 번 정도 흔들거리면 톡 놓으니까. 네 번 고개가 흔들릴 동안 꼬집혀 있던 볼 살을 주물거리면서 나는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는지 말했다.
“그게요, 음. 제가 이제 후배들도 가르치고 그러잖아요.”
“그렇지?”
“근데 가끔? 자주? 나한테 화 났냐구 물어보러 오고 그래서.”
“으응.”
“뭐가 문제일까 싶어서 어제 저녁에, 그, 거기에.”
“물어봤고?”
“응,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일단은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내가 편하게 느껴지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시고.”
“음, 맞는 말이야.”
“놀리는 거 아니냐고도 하시고.”
고개를 끄덕거리던 누나가, 내가 이 말을 하면서부터 안 웃은 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꾸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누나야.
“으응.”
“어떤 분은 거울 보라고 하시는데.”
“그랬구나.”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디 보자…”
누나는 후배들이 모여서 쉬고 있을 공간을 잠깐 살피고 왔다. 그 나이대 애들처럼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던 게 갑자기 조용해져서 조금 당황했는데, 딱히 누나가 뭘 한 것 같지는 않다. 교실에서 떠들다가 선생님한테 들켰을 때의 공기가 불지도 않는 바람을 타고 뺨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돌아 온 누나의 표정은 나쁘다기 보단 아까처럼 태평하고 금방이라도 웃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애들이 너를 놀리겠답시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응.”
“사실 내가 답을 알고 있긴 하거든.”
“응?”
“아가, 그거 아니? 너 고민하고 있을 때 인상 엄청 써.”
“…어, 진짜? 진짜로?”
“그래. 누가 보면 화 난 줄 알겠다 싶더라.”
그래서 거울 보라고 했던 거구나! 난 아무래도 이 때 작게 아, 했을 거다. 아니 그치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조금 있긴 하다.
“근데 왜 누나랑 형은 나한테 얘기 안 해 줬어요?”
“엇, 미안. 미리 얘기해 줄 걸 그랬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거든.”
“…그리고 나는 널 딱히 무서워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저녁 시간까지 훈련장에 박혀 있으려고? 둘 다? 웬 일로?”
“우와 진짜 소리 좀 내고 다녀 형아야!”
“아니 깜짝이야, 발자국 소리 어디 갔어?”
“듣고 살아라. 건강진단 때 진짜 청각 검사 좀 빡세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지 마.”
톡톡. 어느샌가 온 형이 바닥을 발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진짜 작은 소리다. 대충 치는 게 분명하다. 저렇게 스텀핑 하면 아무도 못 들을 거다. 그건 그거고,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구… 그럴 만 하긴 한데.
“나 인상 찌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
“…안 무섭구요?”
“이유가 없다니까.”
“형아는 좀 무서워 해 주면 안 돼…?”
“소원이 너무 크지 않니. 그래서, 오랜만에 걸어 좀 왔더니 저녁은 어쩌게.”
핸드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훈련 끝이라고 외치고 샤워실로 가든 방으로 냅다 뛰어가든 할 만한 시간이었다. 후배들은 나보다도 선배인 누나가 와서 좀 쫄아 있으려나,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저기 꽁 하고 있는 걸까. 그건 안 되는데!
“나 잠깐만! 후배들 해산시키고 올게요!”
“다녀와~ 아이고, 우리 생각 많은 애.”
“얘들아! 저녁 시간이니까 훈련 끝! 빨리 가서 밥 먹어!”
오로록 나오는 후배들이 아직 앳되다. 그 옆에 있는 나는 이만치 크고, 그 옆을 지켜주는 누나랑 형은… 내가 제일 키가 크기는 하지만 나보다 더 오래 일했고, 그것이 총명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도 이제 밥 먹으러 가요!”
나는 당신들을 지키는 게 좋아.
- 앨리스 가라사대 가장 풍족한 계절.
여러분은 가장 풍족한 계절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일단 겨울은 풍족한 눈과 얼음의 계절이니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이게 아니니 넘기도록 하겠다. 봄은 겨울 바로 다음으로 오는,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계절이지 만개하는 계절이 아니니 아쉽게도 패스.
계절은 4개고, 그 중 2개가 지나갔으면 여름과 가을만이 남는다. 무성한 풀이 자라나는 여름과 곡창이 가득한 가을, 사실 둘 중 무얼 고른다 하더라도 정답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나는 오늘 할 이야기 때문에라도 가을을 고를까 한다. 사실 이 일이 여름에 일어났다면 여름을 골랐을 성 싶지만 말이다.
우리들에게 있어 비는 시간은 굉장히 소중한 여가 시간이 된다. 누가 크게 다쳐서 문병을 간다 하더라도 원카드를 돌리기 위해 트럼프라도 챙겨 가는 문화가 정착된 지도 3년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곳이 회색 빛은 아니더라도, 장기간 머무르다 보면 쉽게 지치거나 질리고, 한순간에 우울함에 빠질 수 있는 그런 곳인 것이 사실이다. (사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은 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비는 시간이 겹친 잭과 함께, 재단 소속 주거 공간에 딸린 도그 파크에 놀러 갔다. 왜 있냐고? 그것보다는 차라리 동물 병원이 왜 가까운 곳에 없는지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만큼 동물들은 소중한 가족이니까. 동물 병원의 유치 문제로 몇 년 가까이 다방면적으로 심심치 않게 말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전해도 괜찮겠다 싶어 추가로 적는다.
도그 파크에 있는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우리의 얼굴을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개중 몇몇은 군견이었거나 안내견이었다가 퇴역한 친구들도 있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면 덩치 크고 폴짝폴짝 뛰는 귀여운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나와 잭은 이런 친구들을 놀아주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그 날은 잭의 어린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손바닥 만하게 작은 골든 리트리버 강아지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잭이 다가가자마자 드러누울 정도로 공세가 굉장했다. 나는 조금 떨어져서 강아지들의 가족 되는 분들과 소소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그 작은 녀석들의 어버이 되는 친구들과 터그 놀이를 하게 되었다.
“누나아아, 나! 일으켜줘요!”
“미안, 근데 나도 바빠서!”
“누나아아아아아…”
말은 저렇게 해도 강아지들한테 둘러 쌓여서 한참을 웃고 있는 녀석이다. 아니, 당장 나한테 구조 요청을 했을 때마저도 말이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데, 저게 뭔 줄 아는가? 헤실헤실 웃다가 지쳤는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거다. 하여튼 간에 강아지들 사이에 가장 큰 강아지라도 된 마냥 뒹굴고 있다.
터그 놀이를 하는데, 이 친구들 악력이 장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느슨했고, 나도 적당히 놀아줄 수 있어서 괜찮았다. 대신에 이 녀석들은 잡아당기는 것보다도 물고 흔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지 내가 몇 번을 장난감을 놓칠 뻔 했더랬다.
나중에 가족 분들에게 들은 건데, 마약 탐지견 출신이였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마약 탐지견들은 뭔가를 찾으면 그게 놀이로 여겨지지 않느냐고 했더니 맞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특히 물고 흔드는 걸 좋아해서 원래 나이보다 훨씬 이르게 퇴역했다는 사연을 가졌더랬다. 마약 탐지면 그럴 수밖에, 라고 생각하며 아직 튼튼하고 활발한 두 친구들을 쓰다듬었다. 가을의 햇빛을 받은 황금빛 털은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잭에게 먼저 가라고 일렀지만, 잭은 쫄래쫄래 쫓아왔다.
“어디 가는데요?”
“아니, 별거는 아니야.”
8살이나 어린 애지만 결국 성인이다, 로 의식이 흘러갔다면 뿌리치든 아니면 얼버무리든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나와 잭의 첫 만남은 14살의 작은 아이와 그걸 구한 22살의 영웅이었고 보호자였다. 사실 내가 가는 길 끝에 아주 대단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지라, 결국 딱히 뿌리치지도 않은 채 나는 잭과 함께 조금 으슥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에는 이제 제법 점프도 할 줄 알고 높은 담장도 오를 줄 아는 어린 고양이들이 있었다. 이 친구들을 발견한 지는 그리 오래 된 게 아니지만, 가끔 안부를 확인하러 들르거나 밥을 챙겨주러 오는 편이다. 잭은 이 친구들이 여기 있다는 걸, 아니, 이 장소가 이런 식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지 노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내가 고양이들에게 뒤덮이고, 녀석이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담장에 있는 유달리 높은 곳을 좋아하는 한 고양이가 잭을 덮쳤다. 하나 알려 주자면, 잭은 적어도 다니엘과 나, 그리고 잭 세 명중에 키가 제일 크고, 로비에서도 잭은 생각보다 잘 보일 정도로 큰 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애는 인간 캣타워가 된 것이다.
“으악!”
“풉, 으하하하핫! 뭐야!”
“어, 어깨에 있나? 어깨에 있지? 그치? 어어어, 내려와 줄래? 응? 아야, 아야, 내려 와, 응?”
하나 더 첨언하자면 녀석이 강아지들에게 파묻힌 이유는 자기가 잘못 움직였다가 다칠까 봐 여서이다. 그리고 그 강아지들과 아직 덜 큰 이 고양이들의 크기가 비슷한 건 내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녀석은 어린 고양이 암살자의 작고 날카로운 발톱에 신나게 등을 긁히고 있었다.
“누나, 고양이, 고양이 내 등에 있어요? 어딨어요?”
정말 다급하게 물어보는 게 너무 애처로워서 나는 다른 고양이들을 한 번씩 쓰다듬다가 결국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잭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고양이도 어리둥절한 채로 들러붙어 있었고. 나는 쉴 새 없이 웃으면서 잭의 등에서 고양이를 떼어 냈다. 톡, 톡, 옷감 사이로 박힌 고양이 발톱을 떼어내는 소리와 함께 잭의 동공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진정 좀 해 봐. 완전 얼었잖아. 누가 보면 너한테 고양이 털 알러지 있는 줄 알겠어.”
“그치만 고양이들은 더 뼈도 얇고, 응.”
“어이구. 다 됐다, 우리 어쌔신 야옹이.”
야옹! 우렁차게 우는 용감한 고양이를 한 번 쓰윽 쓰다듬었다. 잭은 아까 보다도 두 세 걸음은 더 뒤로 빠져 있었다. 병아리를 보면 기겁할 것 같다… 여기서 병아리를 상상하면 안 됐는데.
그 순간에 전화가 왔다. 다니엘에게서 온 전화였다. 메시지를 남기는 걸 더 좋아하는 놈이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한대,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나와 잭은 금방 자리를 옮기며 전화를 받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보세요? 아니, 내 신변에 문제는 없고 일적으로도 정말 별 일은 아니긴 한데.”
“…그러면?”
“그, 뭐냐… 창문을 열었거든.”
“어.”
“열었는데 새가 들어왔어.”
“뭐?”
그래, 병아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됐다.
“진짜로. 기숙사인데. 와 볼래?”
“구경 났냐고.”
“도와 달라고.”
얘는 진짜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지만,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순수하게 이럴 때 도움을 구할 만한 사람이 나와 잭을 제하면 없다시피 하다.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이래요?”
“아니,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새가 들어 왔대.”
“네?”
“어, 나도 어이가 없어.”
“어…? 일단 가보자 누나.”
사람을 얼타게 하는 능력 하나는 정말 출중한 게 다니엘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까지 얼타게 만들 줄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기숙사로 향했다.
그 녀석의 방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자 다니엘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니까, 음, 수건으로 예의 그 새를 둘둘 싼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새가…
“…아니 부엉이잖아?”
“짜잔. 상처 하나 안 생긴 나를 보라.”
“아니 미친 아직 해는 안 졌는데 왜?”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동물학자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제법 소중히 들어 올리는 게 웃기긴 했다. 어떻게 보면 그 왜 있지 않은가, 토르 핫도그 짤 같은 거. 그게 생각날 법하게 말이다. 실상은 발톱이랑 부리에 다치기 싫어서 조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형 디즈니 공주에요?”
“디즈니 공주도 숲에 가야 동물이 모이지 않냐?”
“나 이거 알아. 올빼미 법정이지?”
“미친 놈아, 여기가 고담이야?”
얘 그래서 창문에 머리 박았어? 아니, 열고 한 10초 뒤에 내 방에 돌진을 하던데. 형 정말로 디즈니 공주 아니에요? 백설 공주도 울고 가겠다. 이런 농담을 하면서 우리는, 하악질 하는 그 부엉이(덩치로 보아하니 쇠부엉이 같았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숲 어쩌고를 하기에는 애초에 산 쪽과 가까운 곳에 지부가 위치해 있다 보니, 날벌레라도 먹다가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가을에는 온갖 곡식이 열리고, 그에 따라 온갖 벌레들도 온갖 동물들도 열심히 눈에 띄는 계절이다. 겨울을 대비해 가을 과일들을 훔치러 오는 멧돼지나 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소식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가을은 풍족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말 대체 무슨 일로 사람 사는 곳까지 왔는지 의미도 모르겠는 이 부엉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이번 일로 동물 병원 유치에 관련해 한 표가 추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니엘의 한숨을 연거푸 들으면서 반쯤 확신했다. 우리는 그 녀석을 창가에 놓아 준 뒤에, 날개가 잘 파닥거리는 지 확인하고, 그냥 보내 주었다.
- 다니엘은 10월 31일이 즐겁지 않다.
바다 건너 킹스크로스 역에서 신나게 카트를 몰며 벽에 부딪히고, 땅길 건너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기 전 온갖 호박 탑을 세우는 날이 돌아왔다. 어디서 유래되어 망자의 분장을 하고... 지금은 레드카펫 위에서 어떤 배우가 무슨 분장을 하고 등장할 지가 더 기대가 되는 날이겠지만. 요새도 하나? 뭐, 신경 쓸 일은 그 쪽이 아니길 바라는 게 연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기도니까.
할로윈. 분명 어둠의-다크니스한-분장쇼의 날로 변화한 날인데, 대체 왜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24시간 범죄 허용의 날로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있는지 의문이다. 아니면 가면 좀 쓰고 분장 좀 했다고 페이데이를 현실에서 하는 줄 아는 건지, 조커가 된 줄 아는 건지.
그래, 그들은 멍청한 게 아니다. 분위기에 취해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멍청한 게 맞다. 이 때를 노려 군중에 섞여 제 손에 묻은 피를 케챱으로 감출 계획까지 하는 놈들. 그런 놈들은 멍청한 게 아니겠다... 안 잡히면. 여기는 영웅들의 둥지이고, 번잡한 축제 속에서 일어날 특수 범죄에 대한 토의를 논의하고 있다. 연례 거의 유일하게 하는, 연예계와 엮이지 않길 바라는 기도는 말 그대로다. 엮이면 다른 모든 정보가 묻혀 버리니까. 정보 제공자로서 화가 안 나기에는 혈압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이슈가 될 것이다.
...다른 이슈? 있다. 꽤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고 해야 할까.
작성된 문자열을 보는 이들에게. 할로윈 시즌에 눈 한 쪽을 가린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서구권에서는 백이면 백 정도 해적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는 안대를 썼고, 안대 바깥으로도 흉터가 보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흉터가 제법 커서 안대로도 커버가 안 되는, 그런. 이 부상에 대해 진술하려면 할로윈에서 한참은 벗어나니 넘어가기로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회의장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해적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는 점이다. 뭐 하는 거야 이 인간들아.
"R!"
"와, 제발. 너까지 그러지 마."
음, 좋다. 믿었던 앨리스 까지 날 보자마자 저러는 걸 보면, 회의 내 잡담이 평소보다 적어도 10%p는 증가해 있겠지. 나는 반쯤 포기한 채로 손이나 흔들어 줬다. 이럴 거면 아예 갈고리 손 같은 것도 준비할 걸 그랬나? 내가 왜 이런 헛생각에 스르륵 넘어가고 있냐고? 회의 시작 시간이 아침 6시다. 나는 4시에 회의실에 출석해 있었다. 잠이 부족하면 일어나는 흔한 현상이니, 내 수면 시간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수면 시간을 걱정해 달라.
6시. 아침 6시. 하늘은 파랗고, 해는 안 떴고. 그리고 춥고. 가을인가? 내 생각에는 벌써 겨울이 온 것 같다. 히터는 대체 언제 틀어 주는데.
해가 뜨고, 오후가 되었다. 회의가 지지부진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 두지는 않는다. 그러려고 자료를 싹 긁어 모은 거니까. 대신에, 일찍 깬 대가로 오후부터 졸음이 몰려와 잠깐의 휴식을 청했다. 다른 사람들도 쉬고 싶었는지 다크써클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말 한 마디에 회복이 되면 휴식이 의미가 있나? 적어도 나에겐 필요하니까... 달콤한 낮잠과 여분의 정보를 위해, 햇빛에 잘 구워진 소파에 몸을 내맡겼다.
...눈을 떴을 때 앨리스 녀석이 내 안대를 바꾸고 있더라. 다행이도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해적-밈을 밀어붙이고 싶었는지 안대에 조잡한 해골 패치를 붙여 와서 씌워 주고 있었더라. 어지간히도 놀고 싶었던 거냐. 하긴, 지난 해에는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걸 진즉에 확인하고 오랜만에 추수감사절 겸 할로윈 겸 해서 놀기도 했었지. 바뀐 안대를 매만져 봤다. 해골 패치만 조잡하지 바느질 솜씨는 꼼꼼하다.
"선물이냐."
"그으래."
"얼씨구."
붉은 머리가 팔랑거린다. 기대했을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놀리는 것 정도는 받아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그놈의 특수 범죄에 대한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나한테 집중될 필요는 없지 않나? 내 표정이 유쾌하지 않았는지, 녀석이 조금 머쓱해 한다. 나는 그냥 녀석이 집어 간 원래 안대나 돌려 달라고 말했다.
뭐, 그 뒤에, 타륜을 닮은 호박 파이를 녀석 앞에 배달해면서 조타수님 말 좀 들어보자고 농담을 먼저 걸긴 했다. 해적 놀이를 먼저 한 건 당신들이다.
- 면 장갑.
다니엘은 현재 자신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그로서는 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점차 의자와 한 몸이 되어가던 오랜 역사는 다니엘 스스로도, 그 주변 사람들도, 앨리스나 잭도, 심지어 그를 잘 모르고 있던 인간들도 얼추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인간들마저 다니엘의 관상을 보고는 어디 가서 운동하고 다니는 대신 키보드로 온 세상과 싸울 사람이라고 이죽거리지 않았나.
그건 90% 이상 맞는 말이라 다니엘 자신도 그다지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냥 다니엘은 그런 사람들을 기억 속에서 대충 지우면서 그 자리에 오늘 도착하기로 한 문제의 물건 전달자를 채울 뿐이었다. 다니엘은 핸드폰 화면을 켰다. 무음으로 켜지는 화면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화면 속에서 마지막으로 주고 받은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V.S: 그래서 그 장갑은 뭐 어따 쓰게요
쓸 일이 있다니까?
V.S: 선배가??? 그 장갑을??? 어따 쓰게???
아 거참 내 부사수는 왜 이렇게 따지는 게 많지
V.S: 당연히??? 보안으로 댄스배틀 출 것 같은 인간이 그러니까 이 인간아
하 이렇게 보안정신 빡빡한 부사수가 내 부사수라니 정말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V.S: 조까시고 받을거면 내려오세요
V.S: 지하까지 전에 걸어서 오셨다며^^
인마 저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라
바른 말로 할때
V.S: 내 사수 어따 쓰지
V.S: 아 엘베도 안 탄다고 징징대 어따 쓰는 사수지 이거
오거라... 커피 타준다...
V.S: 네^^
화려한 메신저 기록에 다니엘은 잠깐 눈물이 앞을 가리는 행세를 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깜찍한 부사수가 지하에서 자기가 있는 사무실까지 온다는데 뭐 쌍으로 징징거릴 만 한 일 아닌가. 커피로 가볍게 회유가 된 부사수의 넓은 아량에 마음속으로 1 박수나 쳐주는 다니엘은 그렇게 와야 할 사람이나 마저 가디렸다.
50초, 엘리베이터 소리,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와글거리는 인파가 오고 가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쓸려왔다가 사라지고 순간의 정적이 내리면 그 사이에 그가 아는 익숙한 걸음걸이가 한순간 들려온다. 먼 곳에서부터 들리지만 방향은 알았다.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시퍼런 외눈에 익숙한 인영이 멀리서부터 똑바로 보였다.
다니엘은 예상했다. 저 부사수 후배녀석 얼굴 표정이 벌써부터 질린 게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예상은 아주 적절히 들어맞았다.
“와, 문 앞에서 대기할 기력이 있으면 그냥 내려오시지 그랬어요.”
“거참 너무하네.”
그가 직접 스카우트한 그의 부사수, 현재 이 회사의 데이터베이스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실질적 관리자.
찾기 매우 까다로웠던 인간.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바냐 스콧.
“너무한 건 역시 내 선배님이 너무한 거 아닐까? 지 후배를 갑자기 오라가라 하시면 안 꼽게 볼 수가 없죠?”
“아, 정말 오랜만에 반박이 세 네 마디 따라붙는다.”
“어디 뼈가 다 붙으셨다고 했지.”
“발. 밟지 마 이자식아.”
“이럴 줄 알았으면 축구용 징 박힌 운동화 신고 오는 거였는데 정말 아쉽게 됐네요.”
“폭력 반대.”
“그래서 총기 반출 징계는 누가 최다라고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대화는 다니엘이 커피를 원두에서 믹스커피로 바꾸기 전에 닥쳐봐라, 라고 말한 부분에 가서야 겨우 멈췄다.
-
한 차례 휴식이 이어진다. 농담 따먹기인지 살벌한 대화인지가 지나간 공간의 공기 치고는 공기가 부드럽지는 않았다. 예민함이 공간의 주인 뜻에 따라 얇게 펴발라져 있었고, 그 위를 유려하게 방문객이 미친듯이 두드려 패고 있었다. 대화가 한차례 소강된 상태임에도. 말 없이 커피가 호로록, 입 안으로 사라지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음에도.
알음알음, 커피 맛있네요. 하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맴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정말 이유는 안 알려줄 거고요?”
“장담컨대 보안상 유출 문제는 없을 거다.”
단호한 질문과 제 2차전의 시작을 알리는 질문이 날라왔다. 그러자마자 공간의 주인 되는 다니엘은 단호한 대답으로 서두를 작두콩 재단하듯 끊어먹었다. 마치 그 시작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처럼.
“믿어 봐, 애초에 보안 유출 때문에 지금껏 소각해서도 제대로 못 해치운 물건이잖아.”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걸 이제 와서 땅에 묻거나 하는 개같이 원시적인 해결법을 찾은 것도 아닐 테고.”
“XX 지금 이게 무슨 ET 게임이냐.”
“그것도 발굴당했잖아요.”
데이터베이스의 관리직을 맡은 그의 부사수가 말을 한차레 주르륵 늘어놓는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는 2억이고 그 중에 잉여짓 할 인간만 수천수만이다. 전문 정보조직이 붙으면 또 어떻고. 루머랍시고 진짜 정보 가짜 정보 퍼뜨리는 짓으로 교란작전 하는 게 취미인 거 아는데, 애초에 이 장갑 건넬 때 우리 사수나으리께서 한 말이 바로 그거잖느냐. 이건 루머로도 새어나가선 절대 안되는 물건이라고.
“이제 와서 반출시킬 이유가 뭐냐고요.”
“마침내 새로운 소각법을 찾아냈다는 그런 거지.”
“그니까 그게 뭔데.”
“문제가 있다면 그걸 나랑 잭이랑 앨리 빼곤 도저히 증명을 못한다는 거지.”
“삼인성호야?”
“개 허술해 보이는데 정답이라 할 말이 없긴 해.”
“드디어 능력 리스크가 정신머리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겠냐?”
자신의 부사수를 굉장히 안쓰럽고 불썽사나운 눈으로 바라본 다니엘은, 그러나 이 이상 설명해 줄 증거도 증언도 부족하다는 것이 자신의 현실임을 직감한다.
“그런 걸로 하자.”
“에라이 미친.”
“그래도 좀 줘 봐라.”
“...이거 진짜 정으로 주는 겁니다. 알죠?”
“눈물 나게 고맙네. 스콧 양이 나한테 정이라는 게 있었다고?”
“내일 발을 으스러뜨리러 오라는 예고장 잘 받았습니다.”
“아 하지 말라고.”
설득력이 부족한 설득은 때론 거대한 비화를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정보를 다루는 인간들에겐 늘 있는 일이였다. 그건 때때로 가족이 엮인 일이라서, 자신의 목숨과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어서 등이 투명화가 된 상태로 붙어 있기도 했으니까.
다만 바냐 스콧은 자신의 전 상사이자 빌어먹게 영원할 사수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장갑 건네는 것을 망설일 뿐이었다.
“어디 돈이라도 빵꾸 난 건 아니죠?”
“그건 윗선 털면 나오는 거고.”
“XX 난 그게 더 무섭다고 미친 사람아.”
그것마저도 이 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마무리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 문제의 그 면장갑 세 벌은 온전히 다니엘의 손에 밀봉된 채 있었다.
다니엘은 가만히 면장갑을 들여다 봤다. 비닐 랩 안에 곱게 싸여진 채, 소각로에서 타길 기다렸을 물건들. 피가 묻지 않아 참 다행인 깨끗한 물건들.
팔짱을 낀 채 다니엘이 숨긴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아직도 추론하고 있을 부사수를 다니엘은 문득 바라본다. 팔짱 사이로 보이는 면장갑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하나의 차이도 없이 하얗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면장갑 마니아라서 이렇게 콜렉팅이라도 했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건 아직 괜찮은 상태냐.”
선배로서, 그리고 면장갑을 관리해주던 사람으로서 다니엘이 물었다. 그 면장갑은 아직 닳지 않았는가? 대번에 후배의 눈매가 곱지도 않게 찌푸려진다. 다니엘은 스콧 양의 이런 쿡 찌르면 나오는 반응이 굉장히 재미있어 항상 옆에 두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중책을 떠넘긴 지라 그럴 수 없었지만.
바냐 스콧의 입이 열렸다.
“이걸 아직도 걱정하고 있어요?”
“해야지 그럼.”
“...선배 몸이나 마저 걱정을 하지 그래요. 이제 나도 알아서 할 수 있고.”
“오 드디어?”
“하아...”
굉장히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다니엘의 볼을 화살처럼 꿰뚫고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진담이에요. 나름 조절도 가능해졌고.”
“...그래.”
“그러니까 무리해서 면 장갑에 그 망할 현실에 꺼내놓지도 못하는 능력 쓸 필요는 없어졌다는 거죠.”
다니엘은 기억을 반추한다. 자신이 제 능력으로 강제로 장갑에 제 힘을 도포했을 때 쏟은 피의 양, 귀에 새로 생겨난 이명이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 손에 갑자기 생겼던 금이 다시 붙기까지 걸린 시간. 그리고 그걸 실시간으로 알아채던 애송이 후배녀석의 표정. 그리고 지금의 표정. 코피를 흘렸을 때 모든 걸 깨달은 듯 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아채던 표정. 그리고 지금의 표정.
애송이가 거짓말을 아직 덜 익혔나 보다. 자기가 피로감을 좀 감수하겠다는 말을 뭐 저리 돌려 말하고 있지.
공간의 주인이 잘 알겠다는 듯이 비죽 웃자 방문객은 또 혼자 무엇에 찔렸는지 야무지게 다니엘을 야려보다가, 곧 그만둔다. 이 이상 질문하지 않겠다, 는 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배려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캐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둘 사이에서 말이다.
아까, 스콧이 다니엘에게 이유를 이 이상 캐묻지 않은 것처럼.
“...근데 진짜 괜찮은 거 맞죠?”
“뭐가? 내 건강? 발을 작살내버리겠다고 한 놈이?”
“뭐 발등 정도는 멍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후배를 잘못 키웠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댁 심은 데 댁 나죠.”
“잘 키웠네.”
“미쳤나 진짜.”
낄낄 웃는 속에서 다니엘이 가만히,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를 본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메신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새파란 눈이 번들거리는 걸 그 후배는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화의 종언을 선언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성공하면 너도 편해질 거다.”
- 누구누구씨가 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인데요.
이곳은 다니엘의 사무실이다. 평소에는 오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체류하는 인원도 많지도 않은 곳.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언제나 이 공간의 주인인 다니엘 한 명일 뿐인, 종이와 잉크와 커피 향이 그럭저럭 어우러져 있는 적당한 방이다.
그런 곳에 사람이 두어 명 정도 더 있는 일은 익숙한 일이다. 다니엘의 사무실에 찾아오는 단골 손님은 한정적이었고, 오는 이들의 성격 상 들를 때 타이밍이 겹치는 일도 없었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드물게도 셋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서류 뭉치와 각종 책으로 바글바글한 사무실 안에 방문객 둘과 셋은 천지차이다. 종이 뿐 아니라 사람까지 바글바글해 훨씬 복잡하고 답답한 공간이 됐다는 소리다.
다니엘은 가만히 외눈을 감고 있었다. 왜냐고? 형형하게 빛나는 노란 눈을 보기 참 어렵기 때문이다.
“다니엘.”
막내라고 어화둥둥 키운 녀석이 이따금 이름만 냅다 부를 때는 언제나 소름이 끼친단 말이다. 다니엘은 그러나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번 건은 독단적으로 일을 친 자기 실책이 맞았고, 심지어 이번에는 제가 기른 제 전 부하 직원이자 후배이자 부사수인 녀석도 얽혀 있었으니, 자칫 잘못하면 얽힐 게 한두 가지도 아니였고.
다니엘이 제 잘못은 안다는 태도를 보이니 앨리스는 조용히 잭을 말리고 있었다.
“그만 해. 게다가 너도 이름은 알려줬잖아.”
“...나야 이름이 흔하잖아. 게다가 음절도 하나고.”
“그럼 내 성은 안 흔하냐?”
“선배는 선배 성이 싫으니까 냅다 준 거잖아요.”
바냐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 빌어먹을 얘한테는 어쩌다 걸린 거지... 다니엘은 꼬인 상황에 대해 생각하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마저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 이기엔 그는 그럴 성미가 아니다.
“그래서 셋은 어쩌다 내 사무실로 왔다고?”
“그러게. 다니엘. 다니엘이 장갑을 줬다길래 바냐한테 가서 물어봤지 나는.”
“응 그랬구나 젠장.”
“저야 입 다물 일 없죠. 잭이 뭐 선배님한테 문제 될 행동 하겠어요?”
“지금 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하냐.”
“선배는 이런 정도는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다니엘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들이 지금껏 봐온 그의 새파랗고 선명한 눈 중에 가장 볼만한 눈이었을 거다. 잭이 형형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도로 조금 누그러뜨렸다. 모두의 시선은 다니엘에서, 이제 옥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별사탕 모양으로 깎인, 보석인이 무엇인지 정체조차 모를 무언가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게 뭐라고?”
앨리스의 말이다. 앨리스도 이 건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게 목소리에서 분명히 보였다. 아무렴 당연한 말이다.
“...면 장갑을 녹인 무언가.”
“일단 처리 자체는 제대로 됐네요. 누가 보면 장갑이라는 생각도 못 하겠는데요. 테라리움 안에 두면 예쁘겠는데.”
“그치?”
“난 너네 둘이 선후배 관계라는 걸 이럴 때 제일 잘 느끼는 것 같다...”
“앨리 선배, 그건 좀 모욕적인데.”
“너네끼리 만담할 거면 나가서 만담하고.”
“그래서 이게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모르는 일인 거잖아. 그렇지?”
낮은 목소리다. 이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건 애송이 막내녀석 뿐이다... 다니엘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이 말에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효과에 대해 전해들은 것도 없었다. 여기에 자신의 능력이나 바냐의 능력이 농축되어 담겨 있는지도 모르고.
“너희 오기 전에 부숴보려고 하긴 했는데.”
“그래서 이 개무거운 법학사전이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고 있던 거였어요?”
“일단 위로 쌓아봤는데 그냥 개쩌는 무게추 역할만 해주더라고.”
“저 안에 정체불명의 독극물이라도 있으면?”
“그랬으면 내가 죽었겠지 벌써.”
장내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앨리스의 헛기침 소리에 다시 풀린다.
“보기에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아. 그냥 보석 같은데.”
“...누나의 감은 믿지만서도.”
“넌 나는 안 믿고 앨리는 믿냐?”
“닥쳐.”
“잭이 저런 말 하는 거 처음 보는데요.”
“바냐, 넌 처음 보겠지.”
짜증 났을 때 한껏 깃털 부풀린 새나 등털 부풀린 살쾡이처럼 구는 것이 막내 녀석의 특징인지라. 다니엘은 그냥 눈이나 마저 굴렸다. 앨리의 직감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가검증의 가검증 받은 별사탕 비슷한 물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바냐가 그것에 손을 대 보았다.
“...오, 진짜 안전한가 본데요.”
“안전해? 진짜로? 바냐?”
“응. 뭐 힘이 응축되어 있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왜 어쩌다가 나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장갑 소각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제가아? 나중에 선배한테 물어보겠지만? 뭐... 여기에 든 기억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서로 폴리쉬하지 않은 언어를 주고 받는 중인 잭과 바냐의 대화가 한차례 오간다. 잭이 진짜 그런 게 맞냐는 듯이 샛노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냐는 제 장갑을 벗은 뒤 한 번 더 그 보석 비슷한 물건을 만져보곤 정말이라는 듯 갈색 눈을 확신으로 빛내었다. 다니엘은 데굴 굴렸던 눈을 겨우 다시 정면에 고정시켰다. 앨리스가 한숨 쉬는 모습을 포착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넌 네 후배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는 중이다.”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는 중이래도.”
“나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좀 생각해, 형.”
“와, 드디어 형이라고 다시 해주는 거냐.”
“왜. 뭐 대니라고 불러줘?”
“네 맘대로 해라...”
바냐가 옥색 별사탕 보석을 한참동안 가지고 노는 사이에, ‘공개된 극비’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셋은 머리를 모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저것을, 도대체.
“일단 내 후배가 좋아하는데.”
“...바냐가 저렇게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건 처음 보긴 해요.”
“그러게. 저렇게 웃는 거 보면.”
“그렇다고 떠넘기기는 싫어.”
“뭐 네가 벌인 일이니까 떠넘기는 건 또 용납하기 싫겠지.”
“게다가 내 독단으로 한 일이고.”
독단으로 한 걸 알고는 있군. 잭과 앨리스의 눈이 다니엘에게 쿡 찔렸다. 다니엘은 자신도 다 안다는 듯이 뒤에 이어질 말을 유창하게 내뱉었다.
“일단 저걸 장갑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야. 그렇지?”
“성분 분석 같은 거 맡기면 안 돼?”
“그랬다가 얘 끌려갈 것 같은데.”
“...형은 뭐, 맨날 문제만 만들어서 가져와. 무슨.”
“네 형은 옛날부터 그랬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 천 번 말했다.”
“그럼 신경 안 쓰이게 늘 안전하시던가요.”
투정 어린 말이 잭의 입에서 부루퉁하게 나왔다. 말마따나 이제 더는 어리지 않은 청년의 눈에선 여즉 어린 아이의 서글픔이 잠깐 스치고 있었다. 잭의 보호자 노릇을 했던 두 어른은 하는 수 없었다.
“...그냥 보석인 셈 치고 내 방에 보관하자.”
“에 이걸요?”
“내놔, 이녀석아. 너도 걸려서 이게 무슨 물질이냐고 털리기 싫으면.”
“아- 아깝다.”
앞으로 이 귀엽고 깜찍한 옥색 별사탕과 바냐의 만남을 하루에 1번으로 정하자고 모두와 정한 뒤에야, 이 수상할 정도로 비좁은 다니엘의 사무실은 제 공간의 본래 용적율을 찾을 수 있었다. 녹빛이 은은하게 도는 반짝이는 이 별사탕은 그날 밤 다니엘의 방 안 한구석에 별처럼 은은하게 반짝이게 되었다.
8. IF ¶
- 잭-실패 톡방: 개는 오늘도 주인을 찾는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밤, 그리고 밤을 주름잡는다 할 수 있는 조직들. 분명히 구시대적인 존재여야만 하는 자들이며, 피와 약의 향수병에 취해 재탄생하는 이들. 보잘것없는 깡패들, 이름 한 번 크게 부풀려진 갱스터들, 소문만 무성한 마피아들, 여기에 발은 걸친 것인지 의문인 삼합회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 곁에는 늘, 우두머리를 지키는 개가 있다. 어떤 조직이 되었건 간에, 우두머리는 가장 중요하고 조직을 지휘하는 데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라고 하여 정말 동물 ‘개’인가? 그것은 아니다. 뒷세계는 은어와 욕설로 뒤엉킨, 쓸 데 없이 시적인 녀석들의 세상이다.
지금 이 곳에는 유난히 ‘개 사냥’이 유행하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뒷세계의 작은 조직들끼리 서로서로 물고 뜯고 난리도 아닌 상황이라는 것이다. 왜 일어났는가? 한 조직이 어떤 소년을 쓸모 있게 키우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조직들 사이에서도 보통 우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두머리 사냥이 무려 부수적인 일이 되다니. 조직을 궤멸시키고 자시고 단지 유능한 인재 하나를 챙기기 위해, 지금까지 서로 쉬쉬하기만 했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인재가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을 커버할 정도의 이득이 되는가?
이제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됐을 지도 모른다. 싸움은 계속 해서 걸리고 있었고, 작은 조직들은 얻은 인재를 바탕으로 급격하게 몸을 부풀리려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으며, 피라냐들은 남은 잔챙이들을 먹으면서 살아남고 있었으니까.
소년은 맨 처음에는 또래보다 작은 덩치를 가진 상태였다. 소년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가장 무서워 보이는 사람한테 잘못했다고 빌 뿐이었다. 소년은 돌발적으로 위협을 당할 때마다 자신을 작은 공 안에 가두었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소년은 몸집이 있는, 그러나 아직 약한 조직의 우두머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두머리는 소년을 훌륭한 ‘경호원’으로 길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했으며, 자신의 머리 되는 사람을 보좌하고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그의 능력은 누군가를 지키고 적의 길을 가로막기에 탁월한 힘이었기에, 우두머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굴었다.
그의 힘이 노출됨과 동시에 그 조직과 나쁜 의미로 주고 받은 것이 많은 피라냐들이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조직은 와해되었다. 소년은 분명히, 우두머리를 지켰어야 했지만…
…우두머리의 끝을 직감한 소년은 그를 지키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명령받는 것만을 수행한다. 그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 온순하게 길러졌다 한들 결국 뒷세계의 존재가 된 소년은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았다. 소년은 자신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고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의 우두머리가 죽는 것을 담담히 바라본 채로, 스스로 전리품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위와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한 번은 그를 은밀히 빼돌린 자들이 덩치를 키우다가 덜미를 잡혔고, 한 번은 대놓고 광고를 했다가 폭격을 맞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다른 조직의 새로운 우두머리를 만났다. 언제든지 자신 대신 판단해 줄 우두머리를 기다리며, 죽음이 가까워진 우두머리를 버리면서.
큰 조직들이 이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저 난장판이 된 작은 골목길을 보라. 큰 조직들이 끼어드는 이상 무슨 대형사고가 날 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돈과 무력만으로도 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이었기에, 작은 피라냐들을 그저 관망하고만 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정말 그 어리석은 개를 눈독 들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어리석은 개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을 하고 싶지 않은 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싶은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면 쉬이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내일 당장 자신의 우두머리의 이마에 바람 구멍이 나도, 자신은 새로운 우두머리를 만날 테니까.
개는 오늘도 밤의 거리를 걷는다. 명령에 묶여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잭, 어리석은 자.
- 다니엘-실패톡방: 세공사는 루비와 황금을 목격했다.
모처의 어느 대학, 점심시간. 본래라면 엮일 일도 없고 마주칠 일도 없을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해 옆자리에 동석한다. 붉은 머리의 여성과 검은 머리의 남성. 남성 쪽이 키는 크지만 조금 더 어리숙해 보인다. 여성은 한숨을 푹 쉬며 남성을 눈으로 살핀다.
“우리 동아리실이 폐쇄당했다고?”
“네...”
“일 났네 이거. 어쩌다가?”
두 사람은 서로 면식이 있던 모양새였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건물에서 나왔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법학 관련 단과대 건물에서, 검은 머리의 남성은 이공과 계열 단과대 건물에서 말이다. 마주칠 일이라고 해 봤자 두 사람이 만약 입학 동기였거나 졸업할 때 타이밍이 맞거나 했다면 마주쳤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동아리라는 작은 인연이 있었다.
“모르겠어요. 요새 미디어실 확장한다고 계속 그러더니.”
“아 진짜, 설마 그 쪽이라고.”
“뭐 다른 동아리가 쓴다고는 안 했잖아요. 우리, 저번에도 아이스하키 치고 싶다는 사람들이 오길래 잘 방어해 냈었고.”
“하지만 결국 털렸지.”
“털렸네요, 지금은.”
하아. 두 사람이 각자의 끼니를 꺼내 한 입씩 먹는다. 요즘 떠오르는 신예 인플루언서의 기획작이다. 건강식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췌장을 갖다 팔아 쓰냐는 미국 사람들도 그 인기에 눈이 멀어 한 번쯤은 사 먹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도 그 대상에 속했다. 우물거리던 붉은 머리 여성이 가만히 음식을 보았다.
“그렇게 맛있지도 않구만.”
“이럴 거면 그냥 포케집이나 갈 걸 그랬어요.”
“어쩌겠냐. 그 포케집 지금은 브레이크 타임이잖아.”
“이래서 내가 목요일이 싫어.”
“너나 나나 강의가 왜 이렇게 몰렸대.”
졸업을 계속 실패중인 법대생과 신입이라 온갖 것을 배우고 있는 이공계생이 우울하게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방울 토마토 하나를 먹으면서 열 마디,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면서 스무 마디를 했다. 연강과 우주공강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학교 최악의 시간표가 그들의 목요일을 매주 피말리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맞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노란 눈을 데굴 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뒤적거리며 화면 몇 개를 넘기더니, 곧이어 하나를 붉은 머리 여성에게 보여준다. 아무래도 본론이라고 가져왔던 것 하나를 이제 기억해 내고는 꺼낸 모양이었다. 여성은 또 뭐가 있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고개를 숙여 확인한다. 자신들이 다니는 대학교의 수많은 정보와 더불어, 대학 안에서 활동하는 유명인들의 소식까지 모여있는 디스코드 화면이였다.
“우리 동아리실 그거요. 그... 누구야.”
“보니까 알겠네. 이거 걔잖아. 틱톡커.”
“네. 그 사람이 이번에-”
그러면서 디스코드에 널리 퍼진 가십이 검은 머리 남자의 입에서 가공되어 나온다. 찌라시 수준에,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붉은 머리 여성은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디어에 관련된 동아리를 새로 만든다고 자기 학년-고학년에서는 그런 찌라시를 듣기 참 쉬웠다- 에서는 이미 돌던 이야기였으니까.
“...어쩌고 싶으세요?”
“어쩌긴.”
그리고 그 일이 사실이라면 진실로 파헤쳐야 할 일이긴 했다. 그녀는 이런 일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일을 지금까지 막연히 상상이나 해 왔지 실제로 받아볼 줄은, 하는 말을 덧붙였다.
“총장실 문을 부숴야지.”
“네?!”
두 사람이 반쯤 농담, 반쯤 진심으로 부당한 처우에 대해 토로하며 진지하게 자신들이 유지해 온 동아리를 다시 존속시키고 부활시킬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있을 쯤이였다. 두 사람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기.”
“우왁! 누구세요?!”
“아, 그. 저. 신입생입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이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남성이다, 자신이 챙기는 후배에 비하자면 가는 덩치를 가졌고, 너드의 전형이라고 생각되는 둥근 안경에 체크무늬 옷까지 입었다. 저 체크무늬는 이 이공계열 후배도 입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애매해서 붉은 머리의 여성은 잠깐 눈살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섬뜩함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 신입생이라 주장하는 남성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싶었으나 검은 머리 후배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저쪽에서... 듣고 있었거든요. 이야기를.”
“그런 거 보통 이야기 안 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그치만 신경 쓰여서요.”
어리숙하고 우물쭈물해 하는 것이 평생 대화를 컴퓨터나 메신저로만 해온 사람같았다고 붉은 머리 여자는 생각했다. 그걸 스스럼없이 밝히는 게 뭐가... 좋지? 아니,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다음에 꺼낼 말은.
“저, 동아리를 찾고 있었는데, 어쩐지 없어져 있더라고요.”
“...탐정 동아리죠.”
“네. 그런데 두 분이 때마침 탐정 동아리신 것 같아서.”
붉은 머리 여자는 대번에 수상함을 감지한다. 둘이 꽤 공개적인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개적인 곳에서 이야기를 대놓고 엿듣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기밀을 이야기하는 클리셰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부분 별 쓸 데 없는 이야기나 하려고 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들끼리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일 텐데도.
이렇게 우연히? 붉은 머리 여자가 검은 머리의 후배를 팔꿈치로 쿡 찌른다. 검은 머리 남자도 뭔가 우연 치고는 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말을 걸어 온 남성이 부시시한 옅은 갈색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반론한다.
“아니 저기 그게, 진짜 우연이에요. 정말로요.”
“...일단 그렇게 됐습니다. 들은 바는 사실이고.”
“그럼 입부는 더... 안 받는 건가요?”
“그렇게 됐죠. 그래도 나중에 입부할 상황이 마저 되면 연락이라도 드릴까요?”
“그, 저... 총장님한테 항의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많이 들으셨네요?”
저 사람 대체 어디서 듣고 있던 걸까요? 검은 머리 후배가 붉은 머리 선배에게 속삭인다. 나도 몰라. 붉은 머리 선배는 이 사람이 접근했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뚝 떨어진 것마냥 갑자기 등장해서는 자신들에게 말을 건 게 이 사람이다. 뭐지?
의구심과는 별개로, 불퉁한 대답은 계속 나간다. 거대한 군중 속의 외침은 프라이버시가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것 아니였느냐 하는 듯한 태도로 붉은 머리 여자는 어리숙한 갈색 머리에게 마저 조근조근 대답을 이어갔다.
“항의할 겁니다. 입부할 생각이 있다면 당신도 돕는 게 좋겠죠.”
“...그럼 언제...”
검은 머리 후배가 골똘히 생각한다. 이왕 신입생인 것 같으니 자기가 연락처를 좀 받겠다며 먼저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저도 신입생이거든요. 어디 과세요?”
“아, 저는 그, 예술 대학이요.”
“아.”
예술대학이면 이곳과 바로 근처다. 밥을 먹으러 오가거나, 예술 대학 학생들이 가끔 자기네 단과대에서는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수업을 하기 위해서라면 여길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 후배는 그렇군, 하고 짧게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의심의 단계가 조금 누그러지는 걸 느낀다.
“성함이.”
“다니엘... 해먼이에요.”
“네, 해먼 씨. 그러면 제가 나중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근데 정말 그럼 탐정 동아리는...”
“뭐 지금 당장은 내쫓겼는데 어쩌겠어요?”
붉은 머리 여성이 마지막 계란 하나를 씹어삼키며 말했다. 할 일이 지금 당장은 없기도 하고, 기껏해봐야 하는 일이 인터넷에 있는 추리 문제를 배경으로 탐정 놀이를 하는 일이였으니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동아리였던 것도 동일했다.
갈색 머리의 신입생에게서 갑자기 빠른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그럼요. 어차피 총장님도 제 생각에는- 학교 홍보를 더 할 생각에 그러신 것 같은데! 그럼 저희도 실적으로 승부를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어요! 그러니까, 음, 보고서 같은 걸 쓴다거나! 아니면-”
“그만. 숨 쉬어요.”
“아.”
“...이건 실적이고 나발이고 우리한테 허용된 공간을 뺏은 거라고요.”
“그, 그렇네요.”
“우리는 그냥 우리가 잘 쓰고 있던 공간을 빼앗은 사람들이 나쁘단 것만 증명하면 된다구요.”
하지만 검은 머리 후배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 했다.
“혹시 뒤를 캐보라는 소리에요?”
“야!”
“아니 그치만.”
“전 그건, 아닌데. 그... 그냥. 게다가 그런 사람들, 팔로워도 막, 사고 팔 수 있다면서요.”
“와 그건 너무 질투에 눈 먼 모함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말을 한 차례 우다다 쏟아낸 갈색 머리 신입생은 자기가 생각해도 쪽팔린 말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이내 가보겠다고 급하게 얼굴을 가리고 사라져 버렸다. 예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들어간 사람은 이내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검은 머리 후배와 붉은 머리 선배만 다시 그 자리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슬슬 다음 강의를 위해 흩어지거나, 도서관에 가볼까 하고 몸을 움직이거나,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본격적으로 퍼질러지고 있었다.
“...뭘까요, 그 사람.”
“우리 팬?”
“아니면 추리소설 팬일지도요.”
“뭐가 됐든 수상하긴 했지.”
“수상하긴 했죠.”
붉은 머리 학생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첫째. 예술 대학 녀석들은 손이 깨끗한 적이 없어.”
물감으로 얼룩져 있든 흑연이 여기저기 묻어있든 간에 말이다.
“그 사람 손은 깨끗했죠.”
“그래. 옷은 나름... 구겨져 있었는데.”
“저도 수상한 거.”
“어떤 거?”
“대학이라고 말하고 어디 과인지는 얼버무렸어요.”
“그런 어설픈 수법을 썼다고?”
검은 머리 후배가 실제로 받은 연락처에 저장한 이름을 공개했다. 거기엔 예대 해먼이라고만 적혀있었지, 다른 정보는 없었다.
“...외부인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외부인을 빙자한 유튜버라거나.”
“하지만 우리 일을 어떻게 알고요?”
“아니지, 우리 학교 일이나 그 인플루언서 일을 알고 찾아온 거겠지.”
만약에 외부인이라고 치자. 그렇게 된다면... 붉은 머리 선배의 머리가 대화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본다.
“그거. 그 인간이 말한 거.”
마치 무언가 실적을 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 말들. 꼭 회사 사람 같은 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꼭 뭐 터뜨리고 싶으면 연락해라, 겸사겸사 이름 날리기 쉬운 길도 찾고 싶으면 말이다. 라고 말한 거 아니였을까?”
“...그거 말 되네요. 아니면, 혹시 인플루언서들 뒤를 캐는 쪽 유튜버라면 나랑 같이 일하자, 라고 한 걸지도요.”
“꺼림칙한데.”
“그쵸?”
두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더 나눴다. 만약 내부인이라면 그냥 진짜 단순 팬이겠지. 하지만 외부인이라면 정말 그런 설득일 수도 있겠죠. 우리한테 왜 관심을 가졌을까? 너드 티를 왜 냈을까요? 이상한 사람이야.
하지만 몇몇 상황에서 두 사람은 동일한 타협점을 본다. 그래도 우리 둘만으로는 안 돼. 게다가 어차피 우리가 총장실에 쳐들어 갈 때 연락하기로 했잖아. 일단 연락은 무조건 한다는 전제라고.
“와, 뭔가 덫에 걸린 기분.”
“...연락해 보고, 설마 무슨 음모론은 아니겠지 하는 미친 생각에서 일단 벗어나고 생각하자.”
“그러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갈색 머리의 남자는 지켜봤다.
루비와 황금이 저기에서 어여쁘게 재잘거리고 있는데 그걸 지켜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그 자에겐 제 아비 일에 대해 찔러주는 편이 좋나? 아니다. 이건 조금 경계심을 살 거다. 하지만 유혹하기엔 충분한 소재 아닌가? 하지만 이건 날조에다가 거짓 정보인데. 한 번에 고꾸라뜨리기 충분한 정보지 유효한 정보는 아니다. 지금보다는 그냥 말을 흘려서 구슬릴 때 써먹기 좋은 정보다. 파르스름한 두 눈이 건조하게 허공을 본다. 지금 이 공간과 시간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갈색 머리를 한 어수룩한 자는 어수룩한 티를 벗어내고 검은 차에 타 있었다. 일반인은 내부조차 볼 수 없는 곳에서 계속해서 그는 생각을 이어간다.
그 자에게는... 어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줘야 겠군. 이건 확실한 정보니까. 이쪽을 먼저 낚는 게 좋을지도 몰라. 어쩌면 가족이라는 바운더리에서 일시적으로 그 자를 빼낼 수도 있겠어. 좋아.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름과 동시에 차가 멈춘다. 도착한 곳은, 민간 자본이 투자된 교도소다.
“가시지요.”
“궁전에 별 일은 없었고요.”
“오전에 도련님이 잠시.”
“그 대외 활동 열심히 대신 해 주는 애가? 왜?”
저벅저벅, 교도소가 마치 제 집인 듯 갈색 머리 남자가 들어선다. 입구에 있는 교도관은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묵례를 할 뿐이었다. 그가 권력자라는 듯이.
“뭔가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싶었습니다.”
“그대에게 말을 안한 걸 보면 집안일인가. 아버지가 그 애한테 좀 야박하게 굴긴 하는데... 내가 그 애를 내 가면으로 아낀다는 걸 아버지는 여전히 이해를 못 하시나 봐요?”
“아버님도 이해는 하십니다만, 정무적으로는 도련님이 아버님과 마찰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 그럼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겠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럼...”
가는 길에 늘어져 있는 모든 교도관들이 묵례한다. 교도소라는 시설 안, 철장 안에 갇힌 모든 죄인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그를 보지 못한 척 한다. 누군가는 아예 뒤를 돌아 있고, 누군가는 벌벌 떨며 바닥에 붙어 있는다. 누군가는 귀를 틀어막고 부실한 침대에 틀어박히고, 누군가는 아예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복종을 맹세한다.
그는 그것이 퍽 기분이 좋은 듯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던져준다. 가장 좋은 태도를 보인 자에게 주는 돌발적 답례였다.
“주인님.”
“이 정도는 뿌려도 돼요. 알아서 살아남겠지.”
그리 말하며 갈색 머리의 ‘왕’은 자신의 ‘궁궐’로 걸어들어 갔다. 사비로 지은 교도소 안에 있는 비밀 시설로. 누구도 찾지 않고 절대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둥지로.
“잠시 짐승들 교육을 좀 할까.”
그가 ‘궁궐’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주문이였다. 선물을 받은 죄수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에게서 피가 빠져나가는 말이 선고로써 교도소에 퍼졌다.
-
저녁.
검은 차 한대가 부촌에 도착한다.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자연스럽고, 눈에 이상하게 잘 띄지 않는 차였다. 부촌의 수많은 저택 중에서도 상당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저택에 당당하게 들어서는 차는 주인이 누구인지 다른 자들에게 보이지 않은 채 차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비밀스러운 차고의 안에서 내린 주인은, 평화롭고 달콤한 집안의 공기를 맡는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가 제 가면 노릇을 하는 애송이의 방에 우선 들렀다가- 이내 피를 나눠준 남자 늙다리의 방으로 향한다.
퍽- 파열음 소리가 몇 번 난 뒤.
“아버지가 오늘은 오른뺨을 맞기 싫으신가 봐.”
그는 그저 검은 장갑을 도로 끼고 나올 뿐이였다.
비명이 새어나올 리 만무한 공간에서, 남자는 다시 나와, 그렇게 유유히 자택을 빠져나온다. 부촌에 사는 누구도 검은 차의 주인은 아직 알지 못한다.
-
“무슨 대화를 마저 나누셨는지?”
조심스레 누군가 묻는다. 그의 시중을 들었던 자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장갑 낀 손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허탈하게 늘어뜨린다. 누군가를 더 손찌검할 생각은 없다는 신호다.
“뭐 겸사겸사, 사업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하신다는 사업이요.”
“예. 요즘 들어 만들어진 인간들이 너무 많아요.”
내 가면도 그렇지만. 갈색 머리 남자가 짧게 자신의 가면 노릇을 하는 자의 방에 눈을 두었다가 이내 관둔다. 차 안에서도 잘 보이는 방은 누군가의 습격에 의해 죽기 딱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가엾은 것. 딱 그 정도의 동정이 들었다가 사라진다.
“만들어진 인간이라니.”
“그 만들어진 귀족 신분으로 누릴 것 다 누리고 감옥에 간 사기꾼도 그렇고. 그 친구는 원석이 좀 남다르긴 했어요... 지르콘 같았지.”
갈색 머리 남자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결국 예쁘게 포장된 게 들켰잖아요. 속은 크람푸스도 훔쳐가지 않을 목탄같은 사람이였고.”
“그렇습니까. 재능은 좋게 보셨지 않습니까.”
“알아서 소모했으니 그건 이제 가면에게 어떻게 써먹어 볼래, 하면 되는 일이에요.”
“허면.”
그가 즐거운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보세요. 만들어진 인간들. 잘 세공되서 내가 빛나고 광채가 나고 고귀한 줄 아는 가짜 다이아몬드들... 그 산업용 다이아몬드 칼같은 인간들이 서로를 찔러 죽이고 있잖아요.”
최근 가장 핫한 사업이였다. 인플루언서를 만들어내고, 고용하고, 후원해서, 자신들의 입으로 쓰는 것.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싸게 먹히고 세뇌하기 쉬운 지점이 정말 편했다. 그도 여러 ‘가짜 다이아몬드’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들을 제 손으로 ‘세공’해 여러 자리에 앉히거나, 미디어에 노출시켜 왔다.
“하지만 그게 요즘은 좀 질려.”
“...그래서요?”
“방향을 바꿔야죠. 고전적이지만 신선한 걸로. 트렌디하게 어레인지해서.”
그는 붉은 머리 여성과 검은 머리 남성의 사진을 차례로 들여다 봤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맹수같은 표정을 하면서.
“영웅 사업을 해볼거에요.”
교도소에 도착한 자의 말이였다.
- 실톡 다니엘과 마주치는 if: 정보제공자와 인간세공사
다니엘은 별안간 거대한 허공에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꿈 속에서, 80억 명에 육박하는 인간들의 무저갱과 같은 수많은 무의식의 속삭임을 듣다가, 그 과포화된 무의식의 세계에서, 마치 내쫓기듯이.
헉.
본능과 감각이 이제 막 눈을 뜬 다니엘에게 극심하게 경고했다. 평소에 느껴졌던 조용한 소음들은 쥐죽은 듯 들리지 않았다. 팔을 뻗으면 언제나 존재했던 모든 물건들은 그의 반경 내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벙커 침대로 냅둘지 말지 천년만년 고민한, 침대 앞에 달려있던 장롱식 문짝마저도!
이어지는 것은 귓가에 이명과 동시에 빠르게 침습하는 자신의 심장박동이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남들보다 자주 일어났던 일이다. 그만큼 자주, 눈을 떴을 때- 또는 기절하고 깨어나니 상황이 달라져 있는 걸 겪은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특히 적진에서 아군 진영으로 옮겨진 게 아니라 그 반대인 경우는 그가 슬프게도 스페셜리스트였다.
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이를 악물었다는 것을 느꼈다. 턱이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다니엘은 제 몸상태를 점검했다. 다행이도 묶이진 않았다. 자기 전에 둔 비상용 물건은 종류를 막론하고 증발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가장 가까이 보관한 건 제 품 속에 멀쩡히 있었다. 아주 평범하게도 그의 철심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몸만 아침을 알리며 앓는 소리를 내라고 척수에 윽박을 지르고 있었을 뿐이였다. 날씨가 안 좋은 건지, 아니면 80억명의 무의식 바로 위에서 군림하다가 떨어져 나가다시피 한 여파인 건지, 식은땀이 턱 밑에 차게 고였다.
그는 노릇한 햇빛 대신 딱딱하고 생명력 없는 형광등이 인공적인 빛을 비추는 공간을 살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다니엘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다니엘은 꽤 본능적으로 품 안에 든 예비 수단을 꺼냈다. 자고 있다고 생각한 그 사람도 동시에 그렇게 했다. 모든 세상의 다니엘은 꼭 품에 총을 두고 다니는 건지. 다니엘은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 삼류 농담같은 상황이 우습게도 현실이라 그렇다.
상대방을 뜯어본다. 자신과 같은 눈색에, 머리털색에, 혈색은 자기보다 좋거나 비슷하고, 덩치나 키는 조금 더 컸다... 다니엘은 계산을 꽤 빨리 끝냈다.
"누구지?"
"그러는 네녀석은 누군데 내 모습을—"
탕!
정조준. 머리를 정확히 관통하는 총알. 다니엘은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영양상태가 확연히 좋아보이는 다른 자기 자신을 쏘아 맞췄다.
다니엘이 시체가 된 다른 자기 자신에게 다가간다. 시체 치우는 법은 잘 모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소지품으로 자신의 추리가 맞는지 검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어차피 지문도 똑같을 테니 장갑을 찾거나 옷으로 손을 감싸 증거 인멸을 할 필요도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상대방의 지갑을 털었다. 위조된 가짜 신분증, 하얀 수표. 근처에 가자마자 나는 시가 향이 달콤했고 사이사이로 아는 사람만 그 존재를 안다는 브랜드의 향수가 존재감을 뿜어냈다. 꼭, 그래. 그가 종종 정보력으로 펜촉을 맞댈 때, 제 목덜미를 물어뜯거나 아니면 자신이 속한 회사며 재단이며 뿌리 채 작살내려 하는 존재들을 닮은 특징이였다.
한순간에 속이 안좋아진 다니엘이 감정적으로 한 발을 더 쏴제낀다. 탕! 그의 총은 회사 비품이며 총알도 마찬가지인지라 무단으로 총을 빼돌린 것도 모자라 총알까지 써버린 셈이지만 그에게 이제 그건 별로 알 바가 아니였다. 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건...
"이 새끼는 그러니까... 시발 어이가 없네. 꿇었어?"
그 부분이다.
그 징그러운 집안과 혈통에 무릎 꿇고 봉사를 한 건가? 아니다. 자신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그는 가짜 신분증을 다시 떠올렸고 상대방의 손을 확인했다. 손가락에 지문이 없었다. 그는 그였던 고깃덩이에게 침을 뱉었다.
"더한 새끼가 됐구나 이 씨발."
흑막이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분노의 버튼을 누르고 튀어올랐다.
다니엘의 존재는 어디서 오는가, 그 시작점이라고 한다면 그를 몰아세운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눈 앞의 존재는 그걸 보란듯이 무시하고, 오히려 틀어쥐고 있잖은가.
...괜히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보자마자 총을 내리 갈겨놨어야 했다.
존재가 흔들리는 공포가 그의 나머지 총성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체의 얼굴은 이제 알아보기 힘들어 졌다. 다니엘은 열감이 훅 오른 몸을 힘들게 옮겨 다시 침대에 늘어진 뒤, 시체 치우는 법은 올해 안에 꼭 배우겠다고 다짐하며 시름시름 눈을 다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