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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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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메세지 | |
연구자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 |
최초 레스 작성일 | |
(여기에 작성) | |
캐릭터 소개 | |
서기 23nn년의 우주 인류, 연구자, 과학자, 탐사자 | |
본명 | 아냑 |
나이 | 28 |
성별 | 남 |
국적 | X(우주 인류 연방) |
종족 | 인간 |
생일 | 4월 13일 |
직업 | 연구자 |
상태 | 살아있는데 이거 과학적 증명 필요합니까? |
상징색 | Black, Blueviolet |
Contents
[-][+]2. 특징 ¶
- 과학자: 과학자답게 수상할 정도로 어휘가 딱딱할 때가 있음.
- 에코-프렌들리: 환경오염으로 지구 멸망 당한 인류 출신 과학자는 환경 오염 문제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차원 택배로 일회용품을 보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음.
- 시차: 평균적인 초톡방 접속자들과 차원 차이가 심하게 나는지 대략 10시간~12시간 정도의 시차를 가진다. 낮과 밤이 거의 정 반대.
2.1. 외형 설정 ¶
- 검고 긴, 적당히 곱슬거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다. 평상시에는 둘둘 말아 묶은 상태로 지낸다.
-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눈이다. 자연적인 보라색 눈은 인류가 지구에 살 때도, 우주에 나온 이후에도 발견하기 어려운 색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수성이 적은 과학자라 한들 종종 자신의 눈이 신기하다고 여기긴 하는 듯.
- 검고 짙고 굵은 눈썹이 맵시있게 잘 빠졌다. 이건 픽크루를 찾아다니는 오너를 위해 셀프 게재... 얘는 눈썹이 굵어.
- 아이홀이 있다. 눈 앞쪽부터 제법 깊게 있는 편. 그래서 그런지 둥근 인상을 가지고 있어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잘 지는 인상이기 때문.
- 키가 165cm. 전반적으로 인류가 우주로 탈출한 이래 평균 신장이 점차 줄어들었다고 여기는 듯. 아냑도 자신의 키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초톡방 사람들의 가지각색의... 자신보다 큰 키를 인지할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 안경을 자주 쓰지만, 그보다는 과학자 답게 고글이나 보안경을 더 자주 쓴다. 프로필 사진은 연구동이 아니라 방에서 찍은 컨셉샷.
- 손과 발이 키에 비해 큼직하다. 지구력이 높고 궃은 일을 잘 한다. 특히 손가락은 투박하고 굵은 게 바로 보일 정도.
2.2. 성격 ¶
- 우주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지구의 풍경, 아니면 자연이 드넓게 펼쳐진 풍경, 기타등등 아무튼 풍경을 보면 일단 감탄하고 본다.
-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성격이 대체로... 감수성이 조금 부족하거나 감성적인 표현을 하는 데에 어색해 보일 때가 있다. 중대한 결함이라기 보단 그의 현 환경과 직업적 특수성까지 겹친 사소한 문제에 가깝다.
- 탐사자라는 일을 하는 탓인지, 안전을 먼저 챙기고자 한다. 다만 안전이 확보되기만 하면 꽤 큰 도박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지르고자 할 때에는 잘 지른다.
- 이 때문인지 꾀를 써서(...) 초톡방에서 받은 물품 중 현 우주 인류들에겐 사치품이나 마찬가지인 기호 식품 몇 개를 소소하게 이용하려 하기도 한다. 그래도 양심은 찔리는지 항상 물어는 본다.
- 과학자가 양심이 없으면 인류가 망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연구 윤리는 철저히 지키려고 한다. 기본적인 선량함은 갖췄다. 소시민적으로 일 저지르기, 소시민적으로 쫄기... 그냥 이런 게 그의 일상일 뿐이다.
- 인내심이 꽤 튼튼하고 높은 편이다. 그 반작용인지, 한 번 인내심이 바닥 났을 때 오는 반동이나, 그 때 오는 충동을 유달리 견디기 어려워해서 힘들다고 이야기도 하는 편. 우주선 동기들 사이에서는 인내심의 지표 정도로 쓰이지만 별 신경은 안 쓴다.
- 또한 인내심이 높은 탓에 무언가에 화를 낼 때는 대체로 이성적으로 아, 이건 화를 내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때가 많다. 강제로 감정을 실어서 왁왁 화를 내느라 힘이 쭉 빠질 때가 더러 있기도 하고, 진정되면 의외로 쉽게 진정될 때도 있는 듯. 물론 이런 사람이 감정적으로 펑 터져서 화낼 때가 제일 무섭다.
4.1. 세계관 ¶
- 모선
아약스 호: 신이 버렸거나, 신을 버렸거나.
HiO의 모선, 본 함선이자 고향. 대개 HiO가 모선이나 본선 이야기를 꺼내면 아약스 호를 이야기하는 것.
구획
구획 별로 사람들의 혈통이나 출신이 약간 갈린다. 아냑의 구획은 과학자들의 구획.
그래서인지 아냑의 구획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울감이 조금 넘실거리기도 하는 한편, 구획이 폐쇄됐을 때도 안정감이 보였다고 한다. 아냑은 나중에 어느정도 자라고 나서 다른 구획 사람들이랑 이 부분에 대해 토론한 적도 있다.
환경, 생활
아약스는 외행성계에 존재하는 만큼 햇볕으로 인해 생기는 기분 변화 확률이 극히 낮다. 외로운 사람들이나 이유없이 붕 뜨는 감각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 그래서 늘 그런 감각을 낮추기 위해 각종 문화체육활동을 권유하는 편이다. 인류가 수집한 미디어 자료 열람이 잦은 이유도 이런 향수병과 그걸 이겨내려는 노력 탓.
마찬가지로, 그리고 특히 아냑의 구획은 과학자들이 많은 탓에, 동적 활동을 주기적으로 해야 사람이 좀 사람답게 살게 된다는 연구가 있던 탓에 아냑은 운동을 이것저것 하게 되었다. 과학자들 대부분도 그렇고. 아냑은 하다보니 재미가 붙어 내기 승부를 주도할 정도로 지루하지 않게 지냈다.
풍습
친한 사람의 물건을 이유 없이 빌리는 풍습이 있다. 그 사람이 우주 정거장 밖으로 나갔을 때 언제 어디서 사라질 지 모르기 때문. 대부분의 우주 정거장 사람들은 사라진 사람들을 우주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오의 방에도 전혀 취향이 아닌 이모스러운 티셔츠, 크기가 맞지 않는 실내화 한 켤레, 옛날 노래들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중 카세트 테이프는 영원히 돌려줄 수 없게 되었다.
유행하는 농담
대표적으로, 대를 넘어 내려오는 농담으로는 이상형에 관련된 농담이다. '산호가 잘 어울리는 사람' 같은 관용어는 우주에 사는 인류 사이에선 '저는 이상형은 없구요 일만 하고 싶습니다' 정도로 통한다.
- 인류의 멸망
인류의 멸망?
여러 환경 문제가 심화, 해안선의 상승, 자연 재해의 잦은 발생이 겹친 미래의 지구는 인류가 생존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죽음과 멸종으로 내몰리기 전에 어떻게든 지구에서부터 탈출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우주를 표류하는 인류를 만든 것.
현재 지구는?
통제된 정보. 그러나 과학자들 사이에선 대다수가 어느 정도의 자연 회복이 되었으리라 믿고 있다. 아냑은 다시 지구에 정착하는 게 우주 인류의 목표 중 하나일까 막연하게 생각한다.
5. TMI ¶
- 편식은 안 한다. 오랜 시간동안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도 질리는지 조리법을 조금씩 바꾸기도 한다.
- 요리를 잘 한다.
- 굳이 좋아하는 음식을 따지자면 견과류가 들어간 초콜릿, 커피. 둘 다 비싼 기호 식품인 데다가, 외행성대에선 수급하기 까다로워 사실상 없는 셈 취급.
- 전화번호를 못 알아본다.(...)
- 아냑은 부모님이 모두 과학자다. 어머니는 모선의 선임 연구원, 아버지는 탐사를 도맡는 쪽.
- 패션센스가 그다지 좋지 않다.(...) 정확히는, 키치함을 표방하지만 그에 비해 센스가 부족한 편.
- 선물 받은 악기로 위성에서 지내는 동안 연주를 했는데,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 최장 밤샘 기록은 일주일.
- 연구가 안 풀릴 땐 운동 시설에 잠시 다녀온다.
6. 독백 ¶
- 발신: 아냑, 수신: 아약스 호
보고 내역:
‘happened rift’ 라고 이름 붙인 지형에 대해서-추가 보고.
일전에 보고를 올린 대로, 해당 지형에 비정상적인 대기 형성 및 기상 상황 발생이 포착됨. 모선 및 위성 사진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다시피, ...
(중략)
한숨. 한 사람의 숨결로는 채 달궈지지 못하는 차가운 공기가 아냑의 어깨를 유난히 무겁게 짓눌렀다. 윙윙 돌아가는 수많은 기계의 백색 소음들, 단지 기계만이 수다스러운 이곳에서 아냑은 자신이 타자를 쳐서 시끄럽게 해야 함을 알았다. 아무렴, 눈앞에 있는 화면이 보고서인 이상에야 그럴 수밖에.
하지만 아냑은 그러기엔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다. 아냑은 당장에라도 담배를 피우든가, 단 것을 먹든가, 토를 하든가, 아무튼 이 땅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었다. (토는 이 말라비틀어진 위성에서도 할 수 있긴 하지만 넘어가자.) 아냑은 굉장히 힘들었다. 힘들다는 말을 언어로 구체화시키는 일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 부류로 길러졌음에도.
아냑은 눈알을 굴려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는 테이블 위의, 문제의 그 시퍼런 곤충 사체를 보았다. 저것이 튀어나올 구석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없다, 만약 있었다면 진작에 꽃이나 풀, 이끼 군락이 이 행성 표면에 있었을 것이다. 아냑은 진화 생물학 책을 꺼내들었다... 저렇게 빌어먹게 어여쁜 곤충이 언제 등장하더라. 삼엽충 같은 모양새는 내가 이 땅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살기가 왜 이렇게 팍팍하니, 나는.”
지금까지는 이 말 뒤에 대개 혼잣말로, ‘당연히 탐사자니까 그렇지.’ 라고 덧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사람이 죽을 위기를 넘기는 경험도 흔치 않지만 살아남았다. 큰 부상이였지만 그래도 회복은 했다. 그건 좋았다. 정신적인 문제도 추가로 있을까 봐 당분간은 그 문제 투성이 협곡에 얼씬도 안 하고 있었다. 꽤 나쁘지 않았다.
근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갑자기 외계에서 온 건지 어디서 온 건지 출처 불명의 곤충이... 아냑은 사진 몇 장을 드래그해서 보고서에 첨부했다. 프란과 함께 찍어온 물건들이다. 허허벌판에 널리고 널린 죽은 곤충 사체들이다. 빌어먹을. 왜 이런 시련까지 함께 해야 하는가?
아냑은 마지막으로 레이더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그냥 마른 세수를 마저 했다. 저 갑작스럽게 생긴, 널리고 널린 곤충들이 처음 레이더에 잡힌 곳이 문제 투성이 협곡인 걸 자기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아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가라는 뜻이라도 되나?”이게 진짜 초대장이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차라리 그냥 외계에서 온 녀석들이었어야 아귀가 맞았다.
솔직히 아닌 것 같긴 했다. 누가 초대장을 그따위로 보내는가. 이미 사멸해서 나비 박제도 없이 그냥 삽화로만 존재하는 나비로? 아냑은 속이 마구 울렁거렸다.
“프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외계에서 이따만 한 나비가 불타지 않고 그대로 여기까지 날아올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해서?”
“아냑. 그건 이곳에 생명이 탄생하는 경우의 수보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아냑이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주르륵 이어 말했다. 대기가 불안정하니 뚫고 들어올 때 불에 탈 수도 없고, 무언가에 담겨서 왔다고 한다면 그냥 그 빌어먹을 협곡에 우연히 처박혀서 저렇게 된 거겠지. 그렇지 않겠느냐고.
아냑은 애써, 만약 그렇다면 레이더에 나비들을 실은 컨테이너든 무엇이든 잡혔어야 한다는 사실이나, 나비들이 진즉에 이 산소조차 제대로 마련이 안 된 작고 외로운 위성에서 날갯짓 한 번 못하고 죽었어야 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말하면 위장이 위산으로 녹아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절망감도 무엇도 아니었다. 순수한, 미지에서 걸어 나온 공포. 우주를 떠다니는 생명체에게, 우주가 선물하는 작고 귀여운 미지.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작지 않은,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운, 그런 것이었다.
“...가볼까.”
웃기게도, 그 빌어먹을 협곡의 대기와 기상 상태는 이례적으로 안전했다. 입을 벌리고 먹잇감이 들어왔으면 하는 괴물처럼 고요했다. 자기 기지에 몸을 부딪혀 죽은 저 시퍼런 곤충이 꼭 낚시꾼의 미끼 역할을 하는 걸까. 아냑은 식은땀이 송글하게 맺힌 뒷목을 벅벅 닦았다.
인류의 정착지 마련을 위한 탐사자의 탐사 원칙 제 1장.
살아서 돌아올 것.
“로프는 다 챙겼으니까...”
제 13장.
미지를 두려워하되, 뛰어들 것.
“가 보자. 나도 이제 스트레스 더 받기 싫다.”
인간이 지은 작고 외로운 철옹성의 문이 다시 열렸다. 자색 눈이 고글과 방호복과 얼굴을 덮는 산소 마스크에 가려진다. 타박 타박.
보고서는 생명 신호가 만일 끊긴다면 자동으로 모선에 보내지는 처리를 해 놓았다. 아냑은 이 일이 그렇게 무겁지 않길 바라면서, 자신의 친구 프란과 함께 탐사선에 올라탔다.
- 발신: 아약스 호, 수신: 아냑
회신 내용:
자세한 보고를 위해 선임 연구원의 방문을 대기할 것.
-
“다 숨겼나?”
아냑은 차원을 넘나드는 통신망에서 선물받은 온갖 물건들을 모조리 숨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과학적 성과가 담긴 것들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아냑의 운명은 불투명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냑은 마지막으로 외딴 위성에서 친구를 자처해 줬던 로봇인 프란에게 넉넉한 공간을 내어주고선 그대로 밀폐를 완료했다.
아마 곧 있으면 저 하늘에 가득 찬 모선에서 선임 연구원이 내려올 것이다.
...아마 그 선임 연구원도 그다지 훌륭하게 이 상황을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외로운 위성은 정기적으로 보급선이 들른다. 부족한 산소를 채우기 위해서, 배고프고 허기진 탐사자에게 영양소를 보급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려해 현재 탐사가 어느정도 이루어졌는지 모선 차원에서 탐색하기 위하여. 일종의 보급과 감사이기도 하였다. 다만 이번에 오는 보급선은 경우가 달랐다. 사실상 보급선의 탈을 쓴 직접 감사가 오는 셈이다.
이곳에 인간이 오는 일이 얼마나 드문가. 아냑은 솔직히 자신이 선 이곳에 사람이 굳이 온다면 정말 여기가 살 만 하다고 느꼈을 때나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란 희귀자원이 또 파견을 오리라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기어이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약스 호의 아냑,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냑은 자신이 모선 안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부터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를 들었다. 솔직히 아득하기도 하고, 만일 자기가 있는 곳이 위성도 아닌 모선이였다면 아, 또 괴담이네, 하고 넘겼을 목소리였다.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냑은 기지의 문을 열었다. 선임 연구원은 아직 모선과 위성 사이의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느라 얼굴을 가린 채였다.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 있는 건 아냑 자신 뿐이었다.
아냑은 그러나 표정 관리를 진작에 때려쳤다. 그래 봤자 어차피 눈 앞의 선임 연구원도 조만간 이게 무슨 일이냐고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게 뻔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아냑은 차폐문의 잠금을 똑바로 한 다음 말없이 생물 연구실로 따로 격리한 곳으로 선임 연구원을 안내했다.
그리고 순리대로, 예정대로 두 사람은 연구실 안에서 대충 연구원 특유의 한숨 소리만 푹푹 내쉬었다. 그럴 만 한 사항이였다.
“말이 되냐고 소리를 지르러 왔는데 눈앞에 이게 있으니 죽겠군.”
“뭐야? 죽지 마세요.”
“안 죽어. 그래서 이게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다고?”
“제가 그거 생략했던가요?”
아냑이 수기로 쓴 종이 보고서 낱장을 가져오더니 냉큼 건넸다. 우주인류시간으로 일주일 전, 오전 10시 32분 경에 벌어진 작은 기지 접촉 사고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 뒤에 있는 낱장부터는 충격과 격앙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의문의 곤충 사체가 날아온 경로를 최대한 추론한 보고서와 그림들이었다.
“이제 제가 왜 모선에 그딴 말 같지도 않은 보고서랑 같이 이것저것 요청했는지 좀 아시겠죠?”
“살다살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차라리 화성이였으면 말이 됐겠는데.”
“와, 저도 차라리 화성이였으면 했어요. 거긴 그래도 물이 흐른 자국도 있고 원시 이끼 흔적도 발견됐고, 무엇보다 콜로니도 정상적으로 정착했잖아요!”
“그래... 하지만 화성도 여전히 대기 중에 이런 나비는 못 날아다니지.”
선임 연구원이 여전히 곤충 사체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게다가 저건 멸종한 거잖나.”
“알아요. 그래서 제가 보고서에-”
“그래, 자네가 보고서에 앞글자로 F word 농담을 친 건 나도 잘 봤어.”
“어때요.”
“나올 만 했군. 몇 개나 있는 건가?”
“...2천 마리?”
“자네 잠은 잤나?”
“저기 종이 보이세요? 크기랑 날개랑 뭐 이것저것 기록한 건데 저게 제가 잠이랑 바꿔먹은 거예요.”
무자비하게 쌓인 종이의 탑이 생물 연구실 곳곳에 널려 있었다. 선임 연구원은 그제서야 얼굴을 감싼 헬멧과 방호복 후드를 벗어 제꼈다. 거기에는 아냑과 똑같은 자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엾고 딱한 존재를 본다는 듯이 아냑을 보는 눈이었다.
“동정표를 던질 거면 이후에 뭘 어쩌시겠다는 말씀 먼저 해 주시고 하세요.”
“추가 보고 먼저 해야지.”
아냑은 선임 연구원- 그러니까 생물학적인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잠깐 말을 골랐다.
“일단 앞선 보고서에도 이야기했듯이, 저 문제점 투성이 협곡에 한차례 탐사를 다녀왔습니다.”
“그래, 그 이야기는 들었다. 물이 흐른 흔적도 그곳에 있다고 했지?”
“안 그래도 혼자 탐사하기엔 너무 큰 흔적이라 오시기로 했잖아요? 때마침 잘 됐다 싶긴 한데요.”
“지금은 탐사 내용을 더 듣고 싶군.”
“...협곡 안에 나비 사체가 더 널려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리고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한 광야 쪽에도 나비 사체를 발견했고요. 현재는 모두 수거한 상태입니다.”
“흐음.”
“알은 없었고요.”
선임 연구원이 턱을 쓴다. 그녀의 오래된 삶 속에서도 처음 보는 일이였으니 정말 당연했다. 아냑도 뒷짐을 진 채 보고하던 자세를 풀고 한숨을 다시금 푹 내쉬었다. 이게 말이 되냐는 듯이 묻고 싶다가도, 연구원 특유의 냉정한 자세를 찾으려 애쓰는 모양새였다. 실패했다가 성공했다가 하는 것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특이한 점 하나를 보고해 드리자면, 역시 협곡 벽면에서 발견한 의문스러운 구조물이겠네요.”
“인공 구조물이라고 설명했었지.”
“네.”
“아직 들어가 본 적은 없고.”
“그렇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고.”
“흐음.”
바깥은 선임 연구원과 함께 온 다른 연구원들이 길을 내고 다른 임시 기지를 여느라 바쁘다. 소음이 이리저리 들리고, 무전기로 이런저런 지시 사항이 어지럽게 오가는 것이 들렸다. 아냑은 뭐가 됐든 일단 결정이 나길 기다렸다. 자기가 모선으로 돌아가든, 이 사람들이 여기에 무언가를 차리고 자기도 여기에 합류를 하든...
“그래, 여기엔 좀 본격적인 연구 기지가 생길 필요가 있겠군.”
“와!”
“뭘 그리 기뻐하나?”
“저도 여기서 근무하나요? 그럼?”
“그렇게 되겠지.”
“아-아.”
“싫어하지 말고.”
“휴가 좀 내고 싶네요.”
“아냑.”
아냑의 어머니가 선임 연구원의 탈에서 벗어나 아냑을 부른다. 그제야 아냑도 조금 더 풀어진 태도로 어머니를 마주 본다.
“이 정신 나간 위성은 그래도 겉보기엔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도 말이다.”
“정신 나간... 이 붙은 시점부터 좀 뭔가 이상하지 않냐고요.”
“뭐, 그것도 그렇지. 그래서 아냑, 진실로 넌 이 위성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싶으니?”
지독한 연구원의 삶을 산 얼굴이, 아직은 어린 얼굴을 들여다 본다. 그러나 연구원이란 족속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어린 얼굴에 묻어나는 감정이 채 색을 띠기 전에 이미 무슨 생각인지 알아내 버린다. 늙은 얼굴의 주름에 완전히 숨긴 감정도 마찬가지다.
아냑은 이 위성이 숨긴 비밀을 탐식하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인류가 살아남은 본능 중 하나였으니까.
“정말 내가 휴가를 주길 바라?”
...그래도 말이다.
“받을 때는 됐죠???”
“그래.”
“설마 모선에 제 방 치우신 건 아니죠???”
“치웠겠니...”
“야호.”
“짐 싸서 당장 돌아가거라. 올 때 다른 연구원들도 더 데리고 오도록 하고.”
나긋한 당부를 끝으로 선임 연구원은 다시금 방호복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번엔 아냑 또한 제 것을 뒤집어 썼다, 곧 있으면 미리 챙기고 숨기고 이것저것 한 짐을 모선으로 옮겨야 할 테니까.
다만 아냑 또한 선임 연구원에게 당부하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제가 없을 때 그 빌어먹을 구조물 안에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알았죠?”
그건 정말 자신을 위한 컵케이크와 같았단 말이다.
- "잘 지내고 있어?"
아냑의 방엔 아냑이 주인이 아닌 물건들이 더러 있다. 아냑의 취향이 아닌 다른 노래가 담긴, 고전적인 카세트 테이프. 아냑은 절대 입지 않을 것처럼 생긴 새카만 티셔츠-이모 문화 프린팅까지 되어있는 물건. 아냑의 큰 발엔 맞지 않는, 적당히 작은 실내화까지.
아냑은 우주인들에게 퍼진 습관을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이유 없이 서로 물건을 교환하는 건 어색하지 않나 싶어서 각자의 방에 쳐들어가 노는 소소한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 사람이였다. 그 흔적이 아냑의 방에 널려있었고 아마 아냑의 동료 연구자들의 방에도 있을 것이다.
아냑은 카세트 테이프를 오랜만에 틀었다. 고전적인 물건이라, 늘 그 주인이 다룰 때 조심하던 것이었다. 지금의 아냑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망가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물건은 소중히 다뤄야지 않겠나.
딸깍.
지지직-
카세트 테이프 안에서 아직 깔끔한 음질을 가진 음악이 흘러나온다. 대체 언제 어디서 얻은 건지도 모를 고전적인 음악들이다.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겠지. 투박한 음질의 한계로 이리저리 먹혀들어가는 악기 소리는 오히려 조용히 가라앉은 아냑의 방 공기와 잘 어우러진다. 또는 우주. 또는-
아냑은 사방이 막힌 벽 너머에 뭐가 있을 지 상상해 본다. 거긴 분명 망망대해일 것이다.
이제 더는 돌려줄 수 없게 된 카세트 테이프의 주인을 기억하며.
"어떤 여행을 하고 있길래 아직도 이걸 받으러 오지 않는 거려나..."
딸깍.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지면 안 됐기에, 아냑은 오늘도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부분을 부러 아껴주기 위해 카세트 테이프를 빨리 꺼냈다.
우주 어딘가에서는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많이 듣고 있니?
별의 연주를 듣고 있니?
"대답해 주러 왔으면 좋겠네~."
만에 하나라도 그래주러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그럴 리 없다는 몸을 느릿하게 움직여 다시 카세트 테이프를 보관하러 간다.
- 외행성대 우주정거장 아약스 호의 슈퍼스타
아냑은 방을 나섰다. 나서기 전에 메모까지 꼼꼼히 하고 나왔다. ‘화장실에 물이 샌다.’ 그가 잡다한 방면의 지식을 알고 심지어 손도 바쁘게 움직일 줄 아는 과학자 겸 엔지니어라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생명과도 같은 우주정거장의 내부 설비를 고지도 없이 함부로 고칠 수도 없었으며 비품도 없이 야매로 때울 수도 없었다.
큼지막한 손이 잠시 허공을 춤춘다.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과학자의 슬픈 손짓이다. 그리고 이 상태로 연구동에 들렀다가 생길 미래를 며칠째 겪어 본 사람의 몸짓이기도 했다. 며칠째 얼굴을 비추러 가고 수다도 떨러 가고 겸사겸사 연구 진척도에 손도 얹어주려고 가는 거긴 하지만, 아냑은 매번 갈 때마다 심란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어! 나비 발견한 놈이다!”
“대체 몇 번 씩이나 날 그런 호칭으로 부를 셈이야.”
“에이, 이제 반응이 싱거워 졌잖아.”
“난 어제부터 이런 반응이였거든.”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우주 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사실 다이아몬드가 제일 싼 광석일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였으니. 나무라는 유기물이야 말로 우주에서 제일 희귀한 자원이란 사실은 과학자들 뿐이 아닌 우주정거장 거주자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냑이 자리한 곳은 외행성계였다. 그나마 태양이 가까운 내행성계였다면 아주 작은 미생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수도 있었다. 혹은 골디락스 벨트가 지구가 있는 곳에서 뒤로 미루어져서 화성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는지 그 영향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나... 아, 아냑은 생각을 접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플랜카드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르포 나비들은 어쩌다가 나온 거냐니까?”
“그거 연구하려고 내가 휴가 쓰고 쉬다가 복귀하러 준비하는 거잖아.”
“나비 발견한 소감은?”
“죽겠다 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나비 사진을 오려 대충 종이에 붙여 만든 플랜카드. 아냑이 연구동에 올 때마다 왔냐는 인사말 대신 다가오는 이미지였다. 아냑은 이제 환장할 기력도 남지 않은 듯 눈길만 주고 관뒀다. 과학자들도 플랜카드를 다시 회수했다. 농담의 본질이 반복인 걸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걸 그렇다고 정직하게 반복하라고 한 적은 없다. 과학자들이 이래서 재미가 없다. 아냑은 자신도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의식의 흐름은 막지 않기로 했다.
아냑이 연구동 안을 둘러보면 여러 대형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방 중 두어 개의 불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롭고 흥미롭고 충격적인 ‘나비 사건’에 연구원들이 대부분 들러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오늘이 휴가 온 지 며칠 째더라. 연구동에 계속 얼굴을 비추던 아냑은 이제 슬슬 드러누워서 힘들다고 하는 과학자들도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쉬라고 만들어 놓은 소파에 늘어진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아냑은 저 사람들이, 지금 발견된 나비의 학명과 진짜 나비인지에 대한 고찰과 기타 등등 생물학적 연구까지만 가능하고 그 배후를 전혀 연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도파민에 쩔어서 밤을 샜다가 나가떨어진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다지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못 볼 걸 봤다는 듯 보안경을 쓸 뿐이다.
“왜 저래.”
“밥 안 먹었대.”
왜 또 다른 이유인데.
“에휴.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넌 가서 저 양반들 밥 좀 먹여라.”
아냑은 휴가 사이에 쌓인 연구 데이터를 마저 살폈다. 정말 정밀하게 연구했고, 자신이 가져온 모든 나비들을 삭삭 긁어모아 연구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데이터들. 동시에 발생과정을 전혀 알 수 없어 연구자 모두가 피상적이라고 말하며 우울해하는 데이터들.
아냑은 몇 장을 넘겼다. 그중 그나마 기이함과 이상함, 특이점을 기록한 부분이었다.
모든 나비들에게서 암수 구분이 불가능함.
보존 상태가 양호한 개체 일부의 몸통을 해석해 보았으나, 번식과 관련된 기관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
그 밑에 더 추가된 것이 있다. 아마 오늘까지 쭉 나비들을 전부 돌려보면서 나온 결과의 요약본일 것이다.
정정. 모든 나비들에게서 소화기관이나 기타 장기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음.
모든 나비들에게서 채취된 체액은 곤충에게서 발견되는 체액이나 혈액과 유사.
나비의 대롱입에서 연결되는 내부 공간이 존재하지 않음.
아냑으로서는, 아니, 이 내용을 읽는 모든 과학자, 일반인은 서늘할 내용이였다.
‘나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전제가 생긴 셈이니까. 아냑은 며칠 전에 묵직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만큼의 서늘한 감각을 뒷목에서 느꼈다. 불가해에서 오는 본능적인 공포. 상식 바깥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절망감, 막막함.
...그리고 새로운 헤집어 놓을 것을 발견했을 때의 벅참과, 새로운 방점을 올바른 자리에 찍어야만 하는 막중한 무게감까지. 후우. 아냑은 요 며칠 사이 쉰 한숨의 숫자를 세지 않기로 했다. 오늘 새로 들어가야 하는 연구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지구에서 발견되었던 나비와 아냑의 위성에서 발견된 ‘나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일. 올바른 방점을 찍기 위한 수천 번의 삽질.
아냑은 보안경을 고쳐 쓴 뒤, 남을 사람들 몇과 다시 인사하고 일을 시작했다. 아냑의 보랏빛 눈이 백열등 아래에서 자줏빛으로 충혈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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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이야, 저 연구 말고 이전에 하던 프로젝트들 좀 마저 연구했으면 좋겠어.”
아냑이 오늘치 연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또다시 위임해 주며 말했다.
“수경 재배할 수 있는 것들이나, 그 왜, 있잖아.”
“조개나 게 같은 거?”
“그래.”
아냑을 포함한 과학자들이 우주정거장 내 식당에 도착했다. 거기엔 이제 막 업무에서 복귀해 식사를 준비중이던 엔지니어 팀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학술적인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일단 먹는 음식 종류를 더 늘려야 하지 않겠냐고.”
“오! 나비 발견자!”
“...아 젠장 또 시작이네!”
아냑은 이것마저 이젠 일상적이였다. 엔지니어 팀이 돌아와서 내부 연구자들한테 하루를 묻는다든가, 연구자들이 오늘은 이런저런 실험을 했었는데 혹시 이 시간대에 선체에 이상한 점이 있지 않았는지 묻는 것들 말이다. 다 같은 함선에 사는 사람들이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거기에 아냑 본인의 일이 끼워지니 매번 죽을 맛이긴 했다만.
“며칠째에요!”
“하하!”
“아오!”
참고로 이것까지가 레퍼토리다. 정말 과학자들은 재미가 없다... 엔지니어도 포함해서.
다 같이 모여 배식받은 식판을 식탁에 내려놓고 와글와글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은 어땠냐, 어제보단 어떻더라, 하는 일들. 개중에는 외부에서 흔치 않게 찾아오는 무역 함선이 이런 물자를 가지고 왔다더라 하는 소식을 한 발 빨리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공돌이들이 새로 업그레이드한 물건이 오늘 세미나실에서 시연할 예정인데 보러 갈 사람 있냐는 사람도 있었다.
나비 주제는 아냑이 토할 것 같으니 그만 물어보라고 성질을 몇 번 낸 탓인지 그다지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아냑이 입안에 남은 음식물을 삼켰다.
“저 엔지니어실에 빌리 부품이 있는데요.”
“뭐가 또 고장났어?”
“아니, 별 건 아니고. 방 화장실에 물이 새서.”
“아, 연락 받긴 했어.”
엔지니어 몇이 이미 아냑의 신고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따고 들어가긴 했는데, 물이 실제로 화장실 문 앞에서 실실 새고 있었고.”
“꼭 구멍 난 기름통 같이 말이야.”
“그렇죠?”
“그런데 문 열어보니까 화장실 안 바닥이 말라 있던데?”
엥.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 전원이 그런 소리를 냈다. 추리극에서 본격적으로 수상한 부분이 시작될 때 꼭 나오는 소리 같았다고 아냑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냑이 그런 바람 빠진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 새다 만 건가?”
“일단 안전 검침은 다 해 봤는데, 별달리 새는 부분이 없었다. 화장실 안은 말이지.”
“이거 꼭 화장실 밖에서 샜다는 소리 같잖아요.”
“너 혹시...”
“아니야.”
아냑은 테이블 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헛소리를 바락바락 반박하면서 손을 붕붕 휘저었다. 와삭와삭, 싱싱하지 못하고 그저 영양소만 제대로 있는 야채가 매우 불만스럽게 아냑의 입속에서 신속하게 씹어 넘겨진다.
“너 염소 같아.”
“시끄러워. 아무튼 화장실 안 문제가 아니란 거죠?”
“확인해 봤을 때는 그렇지.”
“보통 이럴 땐 바닥 쪽 문제 아니던가?”
“역으로 천장일 때도 있고.”
이 모든 이야기가, 그들이 사는 곳이 우주정거장이라는 거대하고 목숨보다 소중한 시설이 아니었다면 정말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단지 선조들이 살았다던 층층이 쌓인 아파트 같은 시설이었다면 그냥 윗집 밑집과 이야기를 나눴겠지. 그렇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들은 인류의 방주에 생명이 묶인 사람들이고 이 빌어먹을 방주는 더럽게 예민한 거대한 기계였다.
“...엔지니어링 비상 인력 충원을 해야 하나?”
그리고 이 말은 과학자들이 업무 중단을 하고 공구 들고 전원 점프수트 입고 따라오라는 소리와 같다. 아냑은 오늘따라 일이 참 많다고 느끼며 식판 안을 전부 비웠다. 식판을 수저로 긁어내는 소리가 한동안 말소리 없이 조용히 식당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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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결과적으로, 아냑을 비롯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의 걱정과는 달리, 비상 점검과 검침 결과, 물이 샐 구석도 없었고 압력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시달린 많은 사람들이 안전을 확인받아 한동안 진이 빠진 채 흐느적거렸다. 그 중에는 아냑도 있었다.
“그럼 그냥 네가 머리카락 말리다가 물이 고인 거 아냐?”
한 엔지니어가 말했다. 아냑의 긴 머리를 옛날부터 지적하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아냑이 엔지니어로 일할 때도 하루에 세 번은 그 머리를 좀 자르라고 했던.
“그 기다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고인 건데 네가 그냥 물이 샜다고 착각한 거지.”
“아니, 이쯤 길렀으면 그렇게 뚝뚝 흘러서 떨어진 거랑 말 그대로 물이 샌 거랑 구분을 못 할 리가 있겠냐고.”
아냑이 둥글게 말아 묶은 제 머리를 매만졌다. 몇몇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어디 기계에 안 껴?”
“어, 이번이 스물다섯 번째 듣는 말이네. 안 껴. 이렇게 말아서 묶으면.”
“얼마나 길렀더라.”
“몰라.”
“안 자릅니까?”
“귀찮아요...”
아냑의 보랏빛 눈이 어둠 속에서 탁한 패리윙클 색으로 둥둥 떠다녔다. 빛이 유달리 없는 휴식 장소란. 아냑이 역으로 물었다.
“그러는 여러분들은 어둠의 자식들입니까. 나 불 켠다.”
“으아악!”
아냑은 저 깜찍한 엄살을 들어줄 정도의 자비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불을 켰다. 똑같이 하얗고, 나무 흉내 낸 캐비넷과 고철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캐비넷이 늘어서 있는 휴게실 겸 장비 정리실이였고, 그냥 그 뿐이였다.
“눈부셔!”
“플래시로 여기저기 비추고 다니니까 그냥 한동안 어둠 속에 있으면 눈이라도 덜 피곤할까 해서 있던 거야.”
“나.”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아냑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과학자였다.
“그냥 지금 다들 대충 피곤하니까 자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아마 맞을걸.”
“아니거든요. 엔지니어팀은 이따가 세미나실 가서 신형 기계 발표도 보고 그럴 거거든요.”
그런 사람 치고 느물거리고 있었다. 휴게 시설에 있는 거의 모두가 퍼진 상태이긴 했지만. 엔지니어팀을 이끌다시피 하는 팀장은 그 꼬라지를 보고서는 결국 세미나실에서 진행될 신형 기기인지 장비인지 하여튼 무언가의 발표회를 조금 미뤄달라고 연락하고 있었다. 아냑은 미적거리면서 다른 과학자 한 명과 함께 생수를 보급하고 있었다.
점프수트 색 굼벵이들이 한동안 휴게 시설 안에서 꿈지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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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들이 권유를 많이 해왔지만, 아냑은 거절했다. 무엇을? 그래, 그 세미나실에서 한다는 그 행사를. 아냑은 다른 과학자들에게 사용 후기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자기 방 안에서 일어난 이상한 물 침범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게 정말 자기가 머리를 감다가 물이 고인 건지, 밤늦게 요리를 하다가 물을 흘린 자리이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점검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액체가 새어나온 건지 확인이 불가능하지 않던가. 아냑은 보안경을 연구실 안에 도로 돌려놓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사실 마음 같아선 곧장 잠들고 싶었다. 푹 쉬고 싶기도 했고.
엔지니어들이 네 방은 다시 정리하고 그 참에 물도 도로 닦아놨다는 말을 듣고, 그냥 쉴 겸 추리나 해볼까, 자기 방 안에서 사소한 이유나 더 찾아볼까, 하면서 휴가를 마저 즐길 셈이였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정말 기계나 만지러 도로 나갈 셈이었다.
그랬는데.
아냑은 다시 화장실 방향에서 새어나온 물이 있는 걸 보고 눈가를 가렸다.
이유도 없이 생긴 이변이 이걸로 두 번째다...
아냑은 고인 물에 한 조각의 작고 여린, 밥풀인지 꽃잎인지 모를 허연 무언가가 둥둥 떠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은 유난히 느리게 열렸다.
아니, 어쩌면 아냑이 느끼기에 느렸을 수도 있다. 평소 속도와 같았는데, 단지 아냑의 인지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라진 나머지, 문이 열리는 게 조금 느리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런 일은 보통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나 발동된다고 알음알음 괴담처럼 회자되다 말던 것이였는데.
아냑이 뒤늦게 눈을 굴려 물이 고인 자리에 있는 작고 납작하고 둥근 것을 발견했을 때, 이미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앞에는 거대하고 찬란한 수국 꽃밭과 그 위에서 저들끼리 군무를 하는 나는 금붕어와 푸른 새와 나비 같은 것들이...
무수한 별들의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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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냑은 깨어났을 때 자신이 방 바닥에 있음을 알아챘다.
물이 샌 흔적은 온데 간데 없었다.
아냑은 자신이 아는 온갖 단어의 욕설을 타자리고 격렬하게 적어 내렸다가 그만 두었다.
- Meta-Friction
아냑은 오늘도 예의 그 메아리와 같은 소음을 들었다. 참 이상한 점은, 사람들과 같이 일과를 보내는 동안은 그 메아리가 티끌만큼도 들리지 않다가, 자신이 일과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다음, 그러고 나서도 평안히 심신이 안정되었을 때야 비로소 들린다는 것이다. 왜? 아냑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구역으로 남아버린 자신의 화장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로 물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엔지니어 팀들이 단체로 미치고 날뛰거나 심란해지거나 함장님에게까지 연락이 닿는 일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수시로 점검하는 날이 잦아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괜찮았으니. 건조하기만 한 바닥은 아냑이 모선에서 생활하던 바닥과 동일했다.
지금 당장 다른 건 백색 소음과도 다른 웅성거리는 메아리, 귓가에 웅웅거리는,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것 하나뿐이다. 아냑은 자기 몸 걱정을 잘하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메아리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자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 그 감각들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였다는 듯 사라진다. 그 메아리는 원래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며 들었던 말소리가 맞다고 말해주는 듯이. 이런저런 걱정은 오늘도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힘없이 바람이 빠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둥근 눈이 다시 뜨인다.
아냑은 다시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봤다. 이 모든 소리가 잠잠해지고 네 감각이 맞다고 인정해 주며 쿨하게 넘어가는 고요 속에서 유일하게, 한번도 출처조차 모르겠는 소리가 하나 있다. 기묘한 흐느낌. 뭔가,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런 거.
아냑이 탄 모선에는 비록 개와 같은 동물은 없었지만 구시대 미디어엔 개의 여러 가지 모습과 소리가 녹아 있었고 그 소리도 그 중 하나였다. 아냑은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 지 사흘 정도 된 이 기이한 소음이, 다른 소음과는 달리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발목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과 요 근래 그의 근처에서 일어났던 당최 유래를 알 수 없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아냑이 플라스틱 고정형 테이블 위의 모니터를 보았다가 만다. 보고할 물건인지 아닌지는 이제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냑은 침대에서 일어나, 꼭 자러 갈 사람이 화장실 한 번 들러야지 하는 태도를 취하며,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끼익.
그가 과로로 기절한 건지, 혹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뇌가 셧다운을 해 기절한 건지 몰라도- 그 풍경이 있던 곳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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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인 광경이였다.
하늘은 가짜 별들로 가득했다. 우주를 평생 바다처럼 삼는 우주인에게 있어 저 별의 배치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보다 쉬운 건 없었다. 마치 그림이 진짜인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진짜 같기도 했다. 끝없이 어두운 가운데 희미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
그 밑으로는, 그때,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드넓은 꽃밭이 보였다. 수많은 작은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선, 끝도 없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흰 빛깔을 띠는 꽃은 때로는 푸르스름하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분홍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때와는 달리 하늘에 수천수만의 나비 군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저 멀리에 무언가 보였다. 불그스름한 형체와...
“...사람?”
사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아냑은 자신이 이번엔 기절하지 않았음을 매우 감사히 여겼다. 그리고 기절했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위험신호를 여실히 느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을 열어두었다. 땅을 디뎌 본다. 꽃들이 그의 발에 맞춰 꽃대가 조금씩 꺾이거나 휘거나 부러진다. 지나치게 정적인 공간이다. 식물과 상호작용하는 소리 하나하나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냑은 생각했다. 내가 어쩌면 미쳐버린 나머지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곳에 있는 모선의 비상 해치를 열어서 기압도 난리 나고 모선 안도 난리 난 상태인 건 아닐까? 하고. 자신이 지금 밟고 있는 게 압력 차이로 찢어발겨진 동료들‘이였던’ 무언가면 어떡하지? 하고. 그러면서도 아냑은 나아갔다. 그게, 미지를 탐사하는 자의 우선순위다. 설령 거대한 불안을 품안에 안고 있더라도 나아가는 것.
식물 소리에 익숙해지자 발걸음은 조금 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사박, 하는 소리가 처음 크게 귓가에 들렸을 때 아냑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저 먼 곳에 있는 인간 형상의 무언가가 미동조차 하지 않자, 아냑은 조금 더 사박, 하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걷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것은 없었다. 아냑의 뒤쪽에는 여전히 도망칠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었다. 달콤한 꿈처럼, 모든 게 마련되어 있었다. 아냑은 위장통이 생기는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꽃향기와 풀의 풋내가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처음 느끼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데도 자극적인 향들이 아냑의 어깨에 붙어 춤추듯 따라왔다.
아냑은 이동하는 동안에 신기한 것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를테면 돌로 이루어진 비석들.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물건들.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우주 인류 보편어의 이전 버전인 언어로 쓰여 있는 온갖 비석들. 그러나 이끼조차 끼지 않은 채 꽃무더기 위에 위풍당당하게, 이 자리는 자신들의 자리라고 서 있는 비석들.
아냑은 한동안 그 비석들이 무언가 표지석인 건 아닌지 내용을 들여다봤다.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정말로 묘비인 걸 알았을 때 아냑은 빠르게 이름만을 수첩에 적고 그 자리를 떠났다. 모든 비석을 지나쳤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으로 그는 의례를 대신했다.
그렇게 비석의 들판을 지나고 나면 그 인영은 정말로 가까워져 있다.
근처에 장미꽃을 닮은 양이... 아니, 장미꽃인지 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형체가 아냑을 흘끗 봤다가 도로 지나친다. 양은 어딘가에 기댄 채 늘어져 있는 수상한 인영에게도, 이 공간에 침입한 아냑에게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양은, 아니 장미꽃은 그냥 몇 걸음 떨어진 채 양이 울음소리 내는 형태를 흉내낼 뿐이였다.
아냑은 그것이 정말 징그럽다고 느끼면서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냑이 보기에 그 사람은 조금 마른 사람 같았다.
어딘가에 기댄 채 앉아서는 그대로 추욱 늘어진 자세라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었지만, 아냑은 적어도 자신보다 5cm는 클 것이리라 느꼈다. 그렇지 않았으면 멀리서 제대로 보였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냑은 이어서 검은 체모와, 꽤 창백한 피부색을 마저 확인한다. 눈 색은 어떻게 확인이 불가능하였고, 마치 잠든 듯이 존재했으니까, 그렇다고 깨웠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냑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다. 드문 일이다.
아냑은 그 대신 손을 살폈다. 드러나 있는 손은 길쭉하고 늘씬했다.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대다수의 사람들 손과는 꽤 달랐다. 저런 손은 인류가 우주에 나온 지 초창기 쯤에 잘 보였고, 지금은 다수 인류가 과학자나 엔지니어라는 직군을 선택한 시점에서 잘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저런 손을 뭐라고 하더라. 예술가의 손?
아냑은 살그머니, 소리 없이 움직여 이 사람(맞겠지?)이 기댄 것을 관찰했다. 이 들판에 있는 설치물은 비석밖에 보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아냑의 기대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람(추정)이 기대고 있던 것 역시 비석이였으니.
아냑은 그나마 특이점을 발견한다. 관리가 잘 되어있던 저쪽 비석 무리와 달리, 혼자 동떨어져 있는 이 비석은 많이 깨지고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시간의 손길을 온전히 받은 것 같았다. 아냑이 자세를 낮춰 글씨는 남아있지 않나 하고 살금살금 비석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
“...어?”
“...”
“...으아아악!”
새파란 눈과 동그랗고 검고 어둡고- 지극히 인간의 특징 중 하나인 눈의 형태가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어떻게 하지?
아냑은 다시 도망갈까? 생각했다. 그게 맞았다. 당초 계획이 무엇이였는가. 그냥 살아있는지, 아닌지. 사람인지, 아닌지... 이 공간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자신의 방과 이어지는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 온 거였잖은가. 절대로 이런 미지의 지성체와 접촉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아냑은 블루 스크린이 뜰 것 같은 머릿속을 최대한 다시 진정시켰다. 저것의 눈이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도망가면 그건... 음. 좋지 못한 판단이다. 아냑의 보라색 눈이 푸른 빛깔의 저 인간형 개체의 눈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소리를 냈던가? 비명을 놀라서 지르긴 했다. 얼빠진 어, 하는 소리도 냈다. 아냑이 자기 입을 막았다. 어떡하지?
“...저기.”
“으악!”
“겁을 너무 드신 것 같은데.”
그때 그 인간형 개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냑에게 있어서는 조금 예스러운 발음으로 들렸다.
“겁 먹지 마세요.”
“두, 두려워 말라...?”
검은 체모에 푸른 눈을 가지고 창백한 피부빛깔을 한 인간형 개체가 짐짓 아냑은 조금 바보를 보는 눈으로 보았다. 아냑은 헛기침을 했다.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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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세계의 관리자는 저 말이 어디서 나온지도 알았고, 자신이 그 말이 나올법한 상대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도 그럴것이 일단, 세계의 관리자니까.
관리자는 그냥,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늘어져 잠든 사이에 또 거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조절이 영 안 되는 걸 보면 자신의 불안정함이 느껴진다. 이래선 안 되는데. 게다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심지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나타나버린 특이점이다.
영영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이 어쩌면 이 사람에 의해 깨어났을지도 모르는 그런.
푸른 눈이 자신의 세상에 탄생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을 본다. 자신이 빚지도 않은, 그러나 스스로 잘 살아나가고 있고, 이야기를 써가고 있는 존재를.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을, 인류를.
정말 멋진 사람들이야.
“저기...”
그 사람이 관리자에게 묻는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세계의 관리자는 질문을 기다렸다.
“...그, 누구신지.”
음.
어떻게 하지.
다음 중 옳은 대답을 고르시오. 1번. 구인류라고 하기.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환영 받을 대답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반은 거짓말이다. 하지 말자. 2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기. 괜찮아 보이는데 내 양심이 아프다. 보류하자. 3번. 세상의 신이라고 하기. 그렇게 됐다가 이 사람한테 무슨 눈초리를 받을지 너무 예상이 가는데...
관리자는 앉아있던 채로 흘러내리다시피 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봐야 상대방은 서 있었고 자신은 앉은 채 올려다보는 상태였지만. 상대방은 그걸 일종의 대답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비석에 무언가 단서가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금방 자신이 가리고 있던 면을 흘긋거리더라. 관리자는 그냥 비석을 읽을 때까지 두기로 했다.
“...이건 당신의 이름인가요?”
깨진 글자가 비석 위에 있었다. 돌이 삭고 깨져 알아볼 수 없게 된 이름이다. 관리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밑에 있는 건 생몰년도인가요?”
닳아 없어진 숫자는 그의 탄생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밑에 있는 사람들 이름은 뭔가요?”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스르륵, 눈꺼풀 밑으로 가려졌다. 저 사람도 짐작하는 바나 수상하게 여기는 바가 점점 많아졌겠지. 그러니까...
“희생자입니다.”
“희생자라니요.”
“저는 당신 세상의 관리자고.”
...서투른 고해를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다.
-
관리자?
아냑은 그 호칭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모든 차원을 아우르는 통신망에서 말이다.
비록 실제로 마주하는 관리자들은 그렇게 위엄이 있지도 않고,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유치찬란한 데다가, 구인류들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통신망 속 문화 언어를 활발히 사용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아냑이 이해한 관리자는 그랬다. 한 차원을 관장한다.
한 차원.
아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당신이?”
“네.”
“당신이 우리 차원의 신... 이라고요?”
“...그보다 더 높죠.”
음울해 보이는 얼굴을 아냑은 보았으나 아냑은 순식간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냑은 물어봐야 할 것이 자신에게 이렇게 많았는지 스스로에게 감탄하기까지 했다. 질문이 그의 입에서 폭풍처럼 튀어나왔다.
“진실이에요?”
“네.”
“희생자라는 건 뭐고?”
“그것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정말 신이 맞다면 왜 여기에 있죠?”
“...원래는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당신이 도달한 겁니다.”
“지평좌표계가 우연히 나에게 꽂히기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이상한 연결망도 당신 소행이에요?”
“소행이라고 하지 마시고. 그리고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이 신이라면, 그럼.”
아냑은 후둑 떨어지는 질문 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어떤 것 하나를 찾아냈다.
“그동안 무얼 했나요...?”
“...”
왜 눈 앞의 존재가 인간 앞에서 낮은 자세를 하고 음울함을 보였는지 그제서야 그는 이해했다. 이해보다 더 뜨거운 것이 잠시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마 그건 분노였을 거다.
“관리자... 라면서.”
-
“...죄송합니다.”
변명할 수 없는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 부실로 인해 차원이 이렇게 된 건 다 자신의 탓이었다.
관리자는, 특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아주 능숙한 관리자는 눈 앞의 특이점이 불쾌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 알았다. 분노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올 지도 모르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차라리 주먹에 얻어맞아도 괜찮지 않을까. 관리자가 음울한 낯에 깨질 듯한 미소를 덧그렸다.
“제가 세상을 방치한 탓에.”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아냑은 점점 부글부글 끓는 속이 자신을 잡아먹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우주로 내쫓긴 사람의 한스러움, 지구에 대한 이유 없는 동경, 동질감, 멀어진 느낌, 향수병, 주변에 깔려있던 잔잔한 우울함,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발끝자락에서 머리 끝까지 기어올라 기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끓는 기름이 그의 머리에 부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넘어가려고?”
“넘어가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하려고요. 나더러 뭘 하라고?”
“제가 그렇다고 바랄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냑은 자신도 왜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에 나서고 몇십, 몇백년이 흘렀다. 그동안 인류는 뿔뿔이 흩어졌고 신을 찾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신이 정말 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될 동안 살려주셨겠지. 아니지, 신이 계셨으니 그런 천벌을 맞은 거야. 그러고도 우리는 살아남은 거라고. 동료들이 떠들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 아냑은 깨달았다.
아냑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아니지, 당신은 내게 이걸 바라야 해.”
“당신한테 있던 일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해체해서 물어뜯으라고 해야 한다고!”
사건의 경위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관리자의 마른 어깨를 콱 잡았다.
-
아냑을 장미인지 양인지 모르겠는 생물이 한바탕 들이받았다. 진정하라는 뜻이다. 아냑은 그러고 나서도 성에 안 차는지 씨근거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지적 생명체이자 지성 있는 만물의 영장이자 인류 최후의 보루 중 수많은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는지 사뭇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 후우, 뜨거운 한숨이 아냑의 입에서 나왔다. 관리자는 여전히 묘비 곁에서 힘없이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뿐이다.
아냑은 제 몸에 붙은 장미꽃잎의 향이나 맡으면서 관리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흘긋, 가끔 자신이 나온 문 방향을 보기도 하고. 닫혔나, 그렇지 않았나.
“거긴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여기 있는데 왜 닫겠어요.”
“...아니 보통 닫고서는 증거 인멸을 하지 않아?”
“...그럼 도망치셨어야지, 왜 기다리고 계세요?”
“죽어도 들어야겠다 싶어서.”
살벌함이 조금 펴발라져 있지만 본질은 우주에 둥둥 뜬 인류로서 가지는 거대한 부유감일 것이다. 거기서부터 오는 공허함. 관리자는 뿌리 없이 다니는 삶을 이해했다. 그리고 관리자는 자신의 말이 어느정도 까지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으나, 일단 원없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방치했는지를 물으신다면, 정말... 간단해요. 이곳에서 흐르던 이야기가 모두 종결되었거든요. 새 이야기거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질 못했죠. 그걸 만들지도 않았고.”
삭막한 말이다.
“그냥, 끝까지 붙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묻어나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문장이다.
“그걸로 끝?”
“네.”
“...원망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그렇게 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아서요.”
“으음.”
아냑은 고민한다. 솔직히 원망을 하고는 싶었다. 자신도 이유 없는 어떤 억울함이 울렁거리고 있단 말이다. 그게 자꾸 열을 내게 만들어서 못된 말 하나하나를 성심성의껏 빚어 올릴 것 같았단 말이다. 그건 썩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위축된 존재한테, 괴롭히라고 넙죽 매를 받는 느낌은 굉장히... 불쾌하고 폭력적이었다. 설령 존재 자신이 아냑에게 스스로 매를 넘겨주었더래도. 아냑은 눈매를 찌푸렸다.
“그거 싫은데요. 애초에 난 신도 안 믿고.”
“그런가요.”
“우리 함선 이름이 아약스 호에요. 신 같은 거 안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믿는 동료들도 더러 있지만. 신 버리고 활동하기.”
“...그렇군요.”
“외행성대라서요. 신에게 비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럴 시간에 인간들끼리 뭉쳐서 뭐 하나라도 해내는 게 낫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럴 만한 곳이고... 뭔 작은 운석 하나 막아줄 목성 궤도보다 더 먼 곳이니까.”
아냑이 조금 나쁜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지는 못했단 뜻이다.
“그러니까, 음.”
“날 부정하고 싶다.”
“그렇지.”
“...”
“...좀 그런가? 눈 앞에 두고 난 당신 없는 취급 할 거다 하는 거.”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치만 좀 들어 봐요.”
아냑이 박수를 착착 쳤다.
“당신이 없는 시간대가 언제였어요.”
“...300년?”
“그래요. 인류는 그동안 알아서 우주에 갔어요.”
“하지만 지구가 그렇게 됐잖아요.”
“그... 건 솔직히 현시점에선 인류의 업보라고 다들 결론을 내려서 댁이 아무리 내 잘못이오 해도 이론적으로는 잘 안 와닿고.”
아냑도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많이 애쓰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턱을 몇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관리자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울컥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러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묻는 거 아니야. 관리자로서 한 일이 뭔지. 깨어있을 땐 무슨 일을 한 건지. 잠든 건... 뭐.”
“제가 잠든 건 호통치지 않으시는 건가요?”
“호통을 쳤다고 내가.”
“...”
“이 정도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신한테서 졸업을 못하고 신한테 기적만 바라는 게 정상이였다면 인류는 그때 망했어야 하는 게 좀 맞을 것 같은데...”
관리자가 처음으로 일어났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이다. 항의의 행동이 아냑의 시야에도 훅 들어오자 당연히 아냑도 놀랐다. 움직일 줄 몰랐단 말이다. 아냑은 역시 고분고분이고 나발이고 일단 생긴 게 인간이고 두 발도 달렸는데 이걸 예상을 못 하고 놀라다니 참 우습다, 하고 속으로 자조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놀란 건 놀란 거다.
“와 깜짝이야.”
“...다시 앉을까요?”
“아뇨, 키를 대략적으로 알게 돼서 좋네요 그래. 176?”
“cm 단위를 쓰시는구나...”
“야드 파운드 법은 죽었어.”
약간의 농담이 한차례 대화를 환기한다. 음울한 고해자와 냉정한 과학수사원의 조금 딱딱한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그래서, 한 일이 뭔가요.”
그리고 다시 굳어졌다.
아냑 때문만은 아니다. 고해자를 자칭하고 있던 관리자가 말 없이 희생자의 이름들이라고 한 묘비 아래쪽을 가리키고, 뒤이어 아냑이 한차례 지나쳐 온 묘비들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을 모두 달래주고 평안과 안식을 주고 있었어요.”
“에.”
“...현세에도 물론 뭔가를 하긴 했습니다. 현실에 위험이 갈 만한 물건들이나 힘은 모두 회수했고.”
“그런 게 있었어요? 초능력?”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건 아쉽네. 아냑이 농담 삼아 말을 했다.
“그게 있었으면 어쩌면 다른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
“어쩌면 당신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을지도.”
“왜 치웠나요?”
“현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니까...? 그리고 개중엔 사람도 좀 잡아먹는 괴물이 있고.”
“오, 없애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관리자는 이쯤에서 이 사람이 자길 취조하는 건지 변호하는 건지 혼내려는 건지 화를 내러 온 건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자가 다 그런가? ...그가 아는 한, 과학자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긴 했다.
“그리고 또, 세상이 좀 더 좋아졌으면 해서.”
“해서?”
“사람들이 좀 더... 선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좋겠어서?”
“...따져 묻지 말아 주실래요.”
“하지만 아까 냅다 대답 회피한 것 치고는 한 일이 좀 있으시길래. 게다가 이번에는 인류에 직접적으로 손을 댄 거잖아요.”
“그렇게 직접 손을 댄 건 아니에요. 그냥 내면을 전반적으로, 악성에 물들지 않게, 악에 저항할 수 있게.”
“어느 강도로?”
“...갑자기 변하면 안 되니까 미세 조정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렇군요.”
관리자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직위를 물려받은 관리자라면 말이다. 그가 자리를 물려받은 직후 제일 급한 건 전대가 어질러놓은 온갖 기묘한 물건들과 힘의 처리였고, 자기에게 트라우마를 극심하게 안겨준 재단이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전대 관리자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자신에게는 정말, 그토록 사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다른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니었으니까.
친구 한 명의 얼굴이 스쳤다가 사라진다. 그 애도 이 세상에서 평온하게 죽어갔다. 그랬다. 자기가 손을 더 댔다가 어떻게 멸망할 줄 알고 감히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하겠는가.
아냑은 다르게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관리자의 뒷사정을 알 리도 없었다.
“...그럼 인류는 원래 멸망할 처지였는데 탈출 성공한 걸지도.”
“네?”
“아니 그냥, 관리자씨 말 들어보면 좀 그렇잖나 싶어서요. 그러니까 개 조- 아니.”
아냑이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고친다.
“환경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시에 살아보지 않은 한 모르겠죠. 기록이라고 한들 그게 파편적일 수도 있고, 잘못된 기록일 수도 있고, 편파적으로 적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어요. 그건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이 됐어요. 살려고 아등바등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온다. 살기 위해 착해지는 사람들이라. 아냑은 희망이 없던 조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었다. 평소에는 생각도 안하던 문제였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을 했고.”
“...예?”
“인류는 그냥 쌓은 업보를 개같이 쳐맞았다는 겁니다.”
“네??”
“보험금 지급 끝!”
“아니, 잠깐. 네?”
“말했죠. 그쯤 발전했는데 신을 찾으면 그건 그냥 인류가 개같이 망한 거라고.”
그리고 아냑은 빠르게 조상에 대한 결정을 했다. 평소에도 냉소적으로 조상을 판단하던 그는 진지하게 판단해야 할 순간에 이르러서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냥 그런 겁니다.”
아냑은 눈 앞의 상대가 단지 낮아보이고 탓을 하라고 생살을 들어내 보여주고 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쾌했다.
그리하여 아냑은 본래부터 인류가 그토록 맹비난해온 조상들의 업보를 열심히 들먹이기로 했다.
이 다음부터 한 시간 가량은 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일어났던 인류의 자질구레한 역사 강의가 이어졌고, 아냑은 여기서 관리자에게 터뜨렸어야 하는 화를 한시간동안 조상에게 마음껏 대신 분출했다. 관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자기가 왜 아직 아무것도 얻어맞지 않고 그대로 멀쩡히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만 어렴풋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해할 뿐이었다. 자신과 아주 엮이기 싫구나. 지금 어렵게 이루어낸 인류의 새 역사마저 내 것이 되면 안 되니까.
열성적인 강의를 마친 아냑이 벌겋게 물든 얼굴을 슥슥 닦았다.
“그럼 이제 무얼 할 계획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뭔가 좀 계획적으로 살아볼 생각은 없어요?”
“나름, 운동도 하고 있고. 햇볕도 보고 있-”
“햇볕??”
-
아냑은 그제서야 한참을 또 관리자에게 화를 낼 수 있었다. 섭섭함과 서운함으로 포장된 뜨뜻한 감정이 조금 정제된 언어로 관리자에게 날아갔다. 어떻게 혼자 햇볕을 즐기냐. 그럴 수 있냐. 그건 너무했다. 그런 유치한 말들로. 그리고 아냑은 다음에 보여줄까요, 하는 관리자의 제안에 매우 기겁했고.
‘그게 돼요??’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아냑은 그러는 대신에 여러 가지를 마저 요구했다. 첫째. 그 나비의 출처. 관리자는 자신의 것이 맞다고 하였고 아냑은 그 대가로 30분을 더 화를 냈다. 관리자는 그냥 흔흔하게 웃었다. 둘째. 정말 앞으로 계획은 없는 건지. 관리자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차원을 지키는 일을 좀 해볼 거라고 어리숙하게 답했다. 아냑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이렇게 계속 제 방 화장실에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을 연결해 놓고요?’
‘이건 실수예요. 진짜라고요.’
음.
더 관찰하고 싶은데 어쩌지. 아냑은 감정을 툭툭 털어낸 뒤에 남은 어딘가 허한 감정과 약간의 미안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안절부절못한 피조물로서의 위치에서 생기는 그런 것도.
그러다가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 나비 연구도 좀 미루고 할 겸 연구원이나 해주시면 안될까요.’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해 주세요.’
‘당신 차원의 피조물 언저리가 부탁하는 건데 좀 들어주세요.’
아냑은 그러고서 그 빌어먹을 나비가 얼마나 연구 자원을 갉아먹고 있고 식량 자원 개발 연구를 미루고 있는지를 한숨을 푹푹 쉬며 설명을 했다. 관리자는 이쯤 되어서 간접적으로 자신한테 화를 마구 내고 있군, 하는 생각을 했다. 다 들어주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연구자로 와 주세요.’
관리자의 마지막 대답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
아냑은 그리하야 지금 이 앞에 서 있다. 함장실. 손에는 들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후추랑 초콜릿. 게다가 초콜릿은 견과류까지 든 고급품이다.
“함장님, 실례지만... 신분증 하나를 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신분증 하나를- 잃어버려서.”
아무튼 얻어두면 어딘가에 쓸 데가 있다니까. 이렇게 쓸 생각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아냑의 보라색 눈은 그런 생각과는 달리, 당당하고 다채롭게 빛이 났다. 함장을 향해서.
그날 발급된 새 신분증의 얼굴은 오직 아냑만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곧 있으면, 며칠 내로, 여러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아냑은 이렇게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게 얼마만의 일인가 생각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그는 제 방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봤다. 보고서 입력란이 깜빡이고 있었다.
발신: 아냑
수신: 선임 연구원-
건의 사항, 수경 재배 작물 및 식량 연구 프로젝트를 다시 활성화할 것을 요청. ‘나비’에 대해, 생물로 봐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점이 너무 복잡함. 이에 집착하여 인류의 생존을 도외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됨. 우리는 생존해야 함.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자원을 넘겨줄 의무가 있음. 그렇기 때문에라도 프로젝트의 우선순위를 교체할 것을 요청.
- 이것은 범인류적 중대사가 아니다.
발신: 선임 연구원
수신: 아냑
내용:
이곳은 지구의 달이 보이지 않는 외행성대지만, 우리 인류는 여전히 달력을 지키고 있다. 그거 아는가. 일력과 월력에 대해서? 물론 네게는 이맘때쯤이면 항상 이 이야기를 서두로 시작했으니 알겠군. 나는 멍청하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겠다.
아냑. 슬슬 인류의 다음 세대를 만들어야 할 때다. 지구에서도 이맘때쯤에 높은 어른들이 이런 잔소리를 비슷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말미암아- 그리고 이 때가 월력으로 새로운 해를 맞이함을 기념하며, 네게 타고 흐르는 피의 계보와 DNA가 겹치지 않는 이성 인원을 선별해 보았다. 첨부한 파일에 있으니 잘 생각해 보거라. 작년이나 재작년처럼 임무 탓에 못 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
-
발신: 아냑
수신: 선임 연구원
내용:
선임 연구원, 그렇게까지 큰 실례는 아니겠지만 혹시 제가 탄생할 당시 연애는 해보셨습니까?
-
발신: 선임 연구원
수신: 아냑
내용: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는 게 너희 세대의 특징이더군. 미디어 자료 열람실이 넉넉하게 열려 있게 된 영향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놈의 로맨스 코미디. 연애라는 게 얼마나 허황됐는지 알지 않은가? 우리는 우주에 튀어나온 인류고, 다음 세대를 만들어 우리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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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아냑
수신: 선임 연구원
내용:
예 그냥 요즘 들어 우리끼리 세미나를 자주 하는데 우리가 꼭 미래형 부족사회 내지 봉건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미디어 열람실 권한 다시 제한하면 드러누울 인간 한 두명 아니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
발신: 선임 연구원
수신: 아냑
내용:
하기 싫다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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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아냑
수신: 선임 연구원
내용:
빨리 제 휴가 연장이나 좀 수리해 주십쇼. 아니면 뭐 제가 함장님 앞에 가는 거고.
-
“...하.”
아냑은 모친인 선임 연구원과의 대화 내용을 쭉 보다가 도로 테이블에 엎어졌다. 요즘 들어 초차원 연결망 쪽에서 이러쿵저러쿵 여러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폐쇄된 우주 정거장 환경 바깥으로 정신이 트이기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거긴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우주 정거장 안이나 이 우주 안을 빼고도 다른 인연이 있다는 건 아냑에게 그간 존재했던 심리적 장벽을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게 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심리적 장벽이 사라지면 무얼 하나, 현실적 장벽이 눈 앞에 있는데. 아냑은 ‘send’ 버튼을 누르며 이번에는 의자에 늘어졌다. 하기 싫은 대화를 어거지로 해야 하는 사람의 형상이 의자 위에 구겨져 있었다.
아냑은 천장을 말 없이 바라보다가, 자기와 같이 말 없이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게 맞는지 3초 고민했다가 대충 관리자로 치환한 다음에 말이다.
“이거 어떻게 해결 안 돼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요.”
이 세상의 관리자라는 창백한 남자가 굉장히 안쓰럽다는 눈으로 아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냑도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데구르르르, 의자를 한 바퀴 돌렸다. 자기 나름대로 불만 표시였다.
아냑은 꽤 이성적이고 튼튼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나름 평가하고 있었지만 이때 만큼 신이 간절한 경우는 얼마 없을 거다. 이 생각을 읽는 신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보라색 눈이 낮은 조도의 방에서 탁한 페리윙클 색으로 흐려졌다.
“정확히 말해 봐요.”
“회피하는 건 아냑 씨가 이전에 한 방법을 쓰면 똑같이 될 거고.”
“와, 또 써먹을 수 있구나.”
“진짜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려면 제가 세상을 뒤엎어야-”
“아니 그건 진짜 됐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냑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말이었다. 아냑 자신도 세상이 어떻게 순식간에 급변하는 꼬라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냥 자기가 이렇게... 다음 세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하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아냑은 더 말을 꺼내는 대신에 의자에서 아예 흘러내리기로 결정했다. 관리자의 안타까운 시선을 마음껏 받으면서 말이다.
관리자가 우물쭈물하는 게 느껴졌다. 아냑이 흐늘대던 몸을 바로 잡음과 동시에 관리자의 입에서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휴가 연장 신청이 안 됐나요?”
“한 3일 뒤에는 될걸. 진짜로.”
“그러다가 제가 혼자 여기 남으면.”
“따라오시든가요.”
스트레스를 받은 연구원 특유의 투박하고 성의 없는 대답이 관리자에게 날아간다. 본래 신과 피조물의 관계라면 성립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싶은 태도와 위치였으나 그들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관리자가 그건 뭐 노력해 보겠다고 덧붙이며 이야기는 어찌저찌 잘 마무리되는 듯 싶었다.
딱. 파르스름한 눈의 관리자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채팅방에 들르실 예정이십니까?”
“왜 갑자기 경어체를 쓰지? 불안하게?”
“저도 쓰고 싶을 때가 있는 겁니다. 아냑 씨가 해요체랑 해체를 섞어 쓰는 것처럼요.”
그러고 나서 아냑의 시야에 제대로 들어온 관리자는, 조금 어둑한 방의 모든 빛을 역광으로 받아내면서 스스로 그림자가 되고 있었다. 아냑은 그 모습을 보고 속된 말로 ‘폼 잡는다.’ 라고 하고 싶었으나.
“당분간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 경고가 어쩐지 공연히 내뱉는 것 같지 않았어서 말이다. 아냑은 의자에 다시 걸터앉아, 역광을 가득 쬐어 그림자가 된 관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들여다보고 싶었-
“들어가지 마십시오.”
-보면 안 될 것 같다.
아냑은 탐사자로서의 재능이 있고 개중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는, 감의 영역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이게 울린 적은 상당히 많았는데, 적어도 선내에서 울린 적은 드물었다. 크고 작은 전염병이 돌아서 구역이 폐쇄되고 자기가 그 안에 들어있을 때조차 울린 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 울림이 지금 본능을 매우 크게 뒤흔들고 있었다. 경고, 거기서부터 오는 숨이 조이는 듯한 느낌. 선을 넘는 순간 뼈를 추리기는커녕 흔적도 남지 않으리라는 감각. 분명 선내에 있는데도 마치 미지의 행성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위험한 느낌이 그의 모공을 사각사각 건드리고 있었다.
아냑은 어렵게 마저 입을 뗐다.
“...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위험성이 확인되지 않은 이용자분이 계십니다.”
“...어차피 다른 차원일 거 아니야? 위험하다고 해도.”
“이용자분들 중에는 차원을 넘나들 가능성이 있는 분들이 있죠.”
묘한 말장난이다. 아냑은 거기에 낚이지는 않았지만 이 관리자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이거 정보 차단이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느끼는 본능적 두려움을 뚫고 위압감을 뿜는 신격에게 기어이 한소리를 했다. 순식간에 존재감이 줄어드는 신격을 그는 똑바로 보았다.
“그런 존재 정도는 나도 피할 수 있어요, 저기요. 응?”
“...저한테 접근하셔놓고?”
“누가 먼저 문을 열어놨지, 난 하나도 모르겠네.”
아냑은 크게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푹 기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림자처럼 우뚝 서 있던 신격은 본래의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다시 헛기침을 한다. 변명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건 그게 저기.”
“됐으니까 나도 지켜는 보게 해 줘요.”
“...다시 말하지만 당분간은-”
“그럼 나더러 그러니까, 이런, 통신이나, 하라고?”
아냑이 투덜거리며 가리킨 끝에는 마지막으로 선임 연구원과 나눈 메신저가 있었다. 관리자도 그 내용을 차마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는지, 아니면 우주정거장 내 인류의 생활이 워낙 광기에 은은하게 젖어 있음을 인지한 건지 그냥 한숨만 쉬었다.
“...그럼 그냥 제가 내용을 검토하고 몇 개 읊어드리겠습니다.”
“오 그거 좋다. 당분간이면 어느정도인데요.”
“‘확인’이 끝나면.”
“그 확인이 대체 뭐길래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관리자의 얼굴에서 표정이나 감정 같은 것이 사라졌다. 온전히 어둠 속에 위치하는 관리자는 베일 속에서 희미한 푸른 눈만 번뜩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냑은 이번엔 자신의 위험 감지 센서가 그를 조심스레 두드리고 있음을 알았으나, 한 번 이겨낸 거 두 번은 안 되겠냐는 듯이 빠르게 말을 마저 하였다.
“아깐 그래도 잘만 말해주더니?”
“안 됩니다.”
“알면 저 죽어요?”
“제가 종종 이유를 말하지 않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까.”
아냑이 관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또 흘긋, 그를 보았다.
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건 들여다보면 절대 안 된다는, 심장에서부터 오는 경고가 울렸다. 아니면 뇌동맥에서부터 오는 거라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소음을 전부 부수고 있었다. 다만, 아냑은 어렵게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보통 위험한 게 아니구나.
...그리고 아무래도 관리자는 그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도박수는 안 하려는 것 같았다. 아냑은 의자에 편하게 웅크려 앉아 턱을 괴었다. 무언의 협상이 끝난 듯이, 공기에서부터 오는 압박이 스르르 사라지고, 어둠에서 벗어난 관리자의 얼굴은 이제 다시 똑바로 보였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아냑은 이 분위기를 푸는 법을 알았다. 보랏빛 눈이 여상히 관리자를 향했다.
“오, 그럼 며칠 전에 드라이 랩 설명해 주는데 딴짓한 거랑 운동량이 다시 20개 정도로 회귀한 데에도 좀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그쵸?”
“아니 잠시만요.”
순식간에 방의 빛이 밝아진다. 미세하고, 그러나 부옇게, 누군가가 필터를 씌운 듯.
“와 정말요.”
“그으으건 그러니까.”
“이상하다, 내가 톡방에서 본 건 재미없다는 말이였던 것 같은데.”
“아니 그건 또 언제 보셨어요?! 그리고 운동 정량은 좀 늘린 거지 회귀는 안 했어요, 진짜로!”
“아하아. 오늘 산책은 다녀 오셨습니까아.”
“...다녀올까요.”
“축객령입니다아아.”
“네...”
한껏 시무룩해진 관리자를 따라 빛이 차분히 변화한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하는 걱정은 알아서 자신의 속에서 읽어내길 바라면서, 아냑은 관리자를 데리고 오늘도 우주정거장 한 바퀴를 위해 관리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아냑, 16세.
이건 열 여섯 살 때의 어떤 우주인의 일화이다.
우주인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는가? 한때 그들의 조상이던 지구인들은 한창 자라나는 때에 온갖 곳에서 각종 풍파를 겪으며 성장했다. 그것이 학교가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또래 무리가 되었든 간에. 그들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학교에서 주는 시험이 되기도 했고, 그냥 어떤 공간 그 자체가 되기도 하였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시련을 맞이하러 가는 수많은 조상들의 선택은 일탈이라는 이름 하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피냄새가 나는 활자도 더러 있었다.
어느 날, 어린 날의 아냑은 그 점에 주목했다. 열여섯. 우주정거장에 아직 시설적인 미비함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척박하게 살아가던, 그들의 세상이라고는 우주정거장 뿐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은은한 절망과 우울이 깔린, 그런 인류의 시절.
일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남을 때리거나 심하게 공격해 연행당하는 정도로 인지되던 시절. 운석이 한 번이라도 잘못 스치면 우주정거장의 모두가 사라지는 곳에서, 하루하루 줄타기처럼 연명하듯 지내고 있는 그런 시절에, 하루빨리 인재를 찍어내듯 양산해야 하는 바로 그런 때에.
시작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아냑은 얌전하다는 소리를 듣는 우주정거장 차세대 인류 그룹 내 우등생이었다. 매번 상위 그룹에 꼽히고, 대인 관계도 원만한 데다가, 우주정거장 내 필수적으로 실시하는 인격 테스트에서 인내심이 굉장히 높이 나오는 등, 그는 모로 봐도 전혀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랬었다.
아냑 스스로도 그 결과를 통지 받았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저, 그런 결과물과 상충되는 무언가가 아주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의 머릿속을 점점 조여왔을 뿐이다.
우주인의 비극 중 지금에 와서야 해결된 것이 바로 일탈이라는 개념의 무지다. 멀리서 봤을 땐 인생을 모나게 살고 싶은건가, 하는 책망만이 향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미 일생에 모가 났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사포질을 하려는 청소년기의 부르짖음임을 우주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냑의 세대에서도 늘 일어나는,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원인 불명으로 넘어가거나 사이코패스적 특수한 자질로 따로 인원을 분류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열여섯살의 아냑은 어느 날 문득 괴상한 답답함과 함께 지독한 충동이 몰려왔다.
-
우주정거장의 교육 장소는 협소하지는 않다. 다만 그 공간은 언제나, 늘, 어쩌면 영원히 교육공간일 것이다. 소년인 우주인은 청소년일 때도 그 공간에서 수업을 들을 것이다. 교육을 받는 선생이 바뀔 지언정 보는 사람은 늘 똑같을 것이다. 바깥은 우주. 교육 장소와 그들이 사는 주거 구역은 같은 건물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때, 한창 예민한 청소년의 속이 답답하지 않을 확률을 구하시오.
-
아냑은 그때 평소처럼 수업에 임하고 있었다. 아냑의 나잇대부터는 슬슬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의 제법 활달한 친구들은 활달하다 못해 포악한 정신머리를 가지게 되었고, 얌전한 친구들은 아냑의 생각에 교육자를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냑은 뭐가 됐건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아냑은 무언가 달랐다. 왜냐하면 아냑은 그날,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우주정거장의 해치를 열어서 누가 죽든 말든 상관 없이- 아니 오히려 반드시 그 꼬라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렬한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은 저 선생을 죽이거나. 혹은 포악해진 친구들을 데리고 갑자기 싸움판을 열거나. 혹은...
한 번 다른 길로 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트인 충동은 괴상한 생각을 끊임 없이, 무한히 뜨개질을 하는 거미가 머리에 내려앉은 듯이 끝없이 생성되었다. 어느새 아냑에게 수업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뭔가를 일으키고 싶었다. 하고 싶었다. 아니, 아냑은 영민하게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냑은 난생 처음으로 눈을 뜬 채 교육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수업 내용을 하나도 듣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아냑의 귓가에는 충동으로 상기된 심장소리와 그걸 내리누르려는 이성이 팽팽 돌며 싸우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러했다. 해치를 지금 당장 여는 건 어때? 아니, 그러다가 찢어발겨질 거야! 한 번도 안 그래 봤는데도? 그치만 온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는 건 아파. 싫어!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유기체가 되기도 싫고. 그럼 다른 애들이랑 싸우는 건? 그것도 싫어! 아플 것 같아!
아냑은 머리가 다른 쪽으로 웅웅 돌아가는 게 혼란스러웠다.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다. 자신은 인내심이 높고 이런 충동도 익숙하게 조절할 줄 아는 학생, 이라고 매번 소개된 사람이다. 이 세대의 유망주 중 하나였다. 아냑은 이런 게 너무 익숙하지 않았다. 계속 견뎌야 하나? 이런 이상한 상태를?
아냑은 첫 번째 지혜를 구하러 자신을 교육하던 교육자에게 가보았다. 그리고 제 상태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다. 아냑은 자신이 그런 무섭고 끔찍한 충동적 상상을 했다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겁이 났으며,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저어, 교육자님. 오늘 수업 말인데요.”
“무슨 일인가요? 아냑 교육생?”
“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잘 못 들었는데...”
“오, 그럼 오늘 배부된 학습 데이터에 따로 체크를 해 줄까요?”
“그게 아니라, 저, 그.”
그 딴 생각 말인데요. 아냑은 몸을 배배 꼬다가 간신히 무언가를 말했다.
“...오늘 수업을 하기 싫은... 그런 생각이였어요.”
“음? 왜일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일이 흔한가요?”
아냑은 조언을 찾는 간절한 눈으로 눈 앞의 어른을 응시했다. 하지만 척박한 우주에서 살아온 어른, 그것도 지구와의 문화에서 크고 작은 미씽 링크가 존재하는 채로 살아온 어른에게 그 질문과 눈은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였다.
“흔하죠. 원래 다들 겪는답니다.”
“아, 그런가요.”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요. 아냑 교육생은 잘 견디는 편이죠? 그러니까 계속 견디면 된답니다.”
교육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냑에게 예시로 문제를 일으킨 여타 교육생들의 예시를 들어주었다. 고분고분하고 아직 말랑말랑한 머리를 가진 교육생들은 대개 이런 식의 예시를 들면 넘어갔다. 모든 매뉴얼이 그러했고, 교육자라는 어른도 그렇게 자랐다.
물론 아냑은 그 점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데에 집중해 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냑은 두 번째 지혜를 찾아 나섰다. 교육자가 말하길 다른 사람들도 한번씩은 겪는다고들 했다. 예시 자료에 나온 행동 양상이 제 친구들의 것과 너무 똑같고 심지어 자신이 겪은 증상과도 일치했다. 그럼 이걸 좀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또래 사회에서 경험의 공유는 의외로 쉽고 자주 일어나는 문제였다. 아냑이 자신의 경험을 무섭고 두려운 것에서 한번쯤 공유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게 된 데에는 다름아닌 교육자의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는 듯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무른 태도가 작은 무리 속에서 무언가를 촉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그랬다니까.”
“너도?”
“너까지?”
“...나까지, 라고 하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하지만 넌 뭔가 안 그럴 것 같았단 말이야.”
“맞아. 그냥 뭐든 고분고분. 그럴 것 같았고.”
아냑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지? 내가 고분고분하다는 점?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잖아.”
“와아, 꼰대.”
“아니 내가 왜 꼰대야아아.”
“그럼 교육자를 어떻게 할 거야? 막, 이렇게 뚜드려 팰 거야?”
“아니!”
“나도 그러긴 싫어. 그러다가 수경 재배실에서 발견될 지도 몰라!”
“으악!”
아이들 특유의 이런저런 헛소문과 자극적인 괴담 이야기가 한차례 무리 속을 훅 스친다. 그것만으로도 아냑은 뭔가 있던 불만이 소소하게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아냑은 자신의 친구들을 보았다. 분명 사고를 치거나, 치고 싶어하는 눈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기묘하고 생경한 충동을 느낀 이상 직감할 수 있었다.
“되게 이상하지 않아? 우리끼리 있을 땐 괜찮은데.”
“...헉, 그럼 교육자가 뭘 뿌리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
“나, 전에 다른 연구원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막 예전에 지구에서는-”
또 한차례, 이번에는 자기들이 얼마나 지구는 어떻고 얼마나 무서운 곳이었는지 토론이 우르르 쏟아진다. 아냑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아는 이야기를 톡톡 건네다가.
“...그럼 어른들이 나쁘다는 거 아냐?”
라는 희대의 발언을 해 버린다.
모든 아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아냑에게 돌아간다. 아냑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동시에 어떤 확신 또한 느낀다. 이건, 아마도, 옳다. 연구자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가지는 직감이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일어난 교육 거부 사건의 시작이다.
-
파동은 순식간에 번졌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교육자가 자신을 괴롭혔어요! 라는 말로 이런 저런 핑계를 댔으나, 모든 곳에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CCTV가 있는 우주정거장 안에서 그런 말은 썩 먹히지 않았다. 점차 아이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파괴적인 창조력을 가짜 멍을 만들기, 사고로 보이지 않을 사고 만들기, 꾀병이 무엇인지 배우고 활용하기 등으로 널리 퍼졌다. 몇몇 아이들은 꾀병을 어른들은 태연하게 쓰는 걸 봤다며 매우 화내기까지 했다!
아냑은 이런 일을 친구들끼리 하면서 생각보다 매우 재미있음을 느꼈다. 그동안 답답했던 게 풀린다고 해야 하나. 그 질리도록 간 교육공간에 가기 싫었음을 인정하고 이렇게 구는 게 괜찮아서 너무 좋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아냑은 아이들이 주르륵 늘어놓던, ‘지구에서 일어났던 사람 통제하기 괴담’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몰랐다. 아냑은 빠르게 겁을 집어먹었다가 곧 진정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 수두룩했다는 거다. 그럼 우리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냑에게 이때 행운으로 작용한 것이 있다면, 이 시기 쯤 전반적으로 온갖 미디어 자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조치됐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작고 소소한 반란은 그저 아이들의 ‘일탈’로 규정되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어떤 사례집에 남거나, 조금 더 후대에 연구를 위한 행동 사례집에 실리기나 했을 것이다.
아냑은 또래들, 동기들, 그 외 교육공간이 질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미디어 자료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와, 체육 시설이 있대.”
“그러게. 거기는 연구원들도 자주 안 가잖아.”
“난 가는 거 봤어!”
“우리는 왜 못 가?”
“그치만 이렇게 넓은... 축구 같은 건 우리는 못할 것 같은데.”
문장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온다. 아냑은 그러게, 하고 있는 한편으로도 자료를 찾던 도중 튀어나온 논문 하나에 유난히 눈길을 주었다.
‘운동과 심리학의 상관관계’.
“이건 뭘까.”
“심리학... 이잖아?”
“어려운 책이잖아. 우와, 논문인데.”
“아냑, 읽을 수 있어?”
“...못 읽으면... 그, 음...”
“설마 어른들한테 읽어달라고 하려고?!”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니니까.”
그치만 어려운 내용 투성이인걸 어떻게 하지. 아냑은 엄청나게 재미있어 보이고 중요해 보이는 이 논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데구르르 굴렀다. 지금은 사례를 찾는 게 먼저다. 물론 그러면서 또래 집단끼리 자체적으로 지구 문화 연구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으니까!
그날 아이들은 밤새도록 청춘 로맨스 코미디며 온갖 영화들을 정복했다.
-
아냑의 말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교육 거부에 나서고 자체적 연구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어갈 때였다. 어른들은 다음 세대 아이들을 실패작 취급하며 전전긍긍해 하였다. 특히나 다음 세대 인류의 중역이 되리라 믿은 아냑이라는 아이가 이번 일을 벌인 원인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건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꽤 충격이 컸다.
보통 연구자들은 말이다.
사람의 성향을 어떤 식으로든 느낄 수 있고 다루는 데에 능한 사람들은, 각자의 결론을 내고 있었다.
함장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교육이라는 자체적인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 과학에 마저 흥미를 불어넣게 할 방법을 찾아보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걸 받은 연구원 중 이 일을 흥미롭게 보던 연구원 한 명은 그 지침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했다.
-
아냑에게 세 번째 지혜는 어느 날 찾아왔다.
교육생의 의무를 저버린 멍청이들! 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지낸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공부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든가, 어른들도 똑같이 자기들이랑 자랐다면 더 멍청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본 B급 공포 영화는 어느 부분에서 공감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다들 웃으면서 봤고, 아냑을 뺀 모든 아이들이 곯아 떨어져 있었다.
그런 곳에, 그러니까 아이들의 아지트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누구세요?”
“너로군.”
“우왁. 안녕히 계세요.”
어른들이랑 그렇게 큰 대화는 하기 싫었다! 답답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인간들! 아냑은 속이 안좋다는 기분을 느끼며 황급히 아지트 안으로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나타난 어른은 달랐다.
“궁금한 것이 있지 않나.”
“궁금한 거 없어요! 안 사요.”
“오호라. 안 산다는 표현은 어디서 배웠지?”
“...지구식 표현이에요.”
흘끗. 아냑은 저 재수 없어 보이는(으!) 어른이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질 줄 몰랐는지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흘렸다.
“그, 로맨스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데.”
“난 그런 게 취향은 아니다.”
“으.”
“재수 없다는 표정이군.”
“으!”
“하지만 더 이야기해 봐라. 너, 유망주였지 않나.”
“으!!!”
“...배웠을 텐데. 무언가 주장을 하려면, 설득을 해보라고.”
아냑이 둥글게 눈을 홉떴다.
“주장이요?”
“너희가 말하는 어른들은, 우리같은 연구자들은 너희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른다.”
“이... 런 것도 주장이 될 수 있어요?”
“종종 연구자들, 엔지니어들이 윗선이 등신같은 짓을 할 때마다 하는 것과 흡사하긴 하지.”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거 하면 안 돼요?”
“...그도 그렇군.”
“왜 우리는 이런 거 하면 멍청하대요?”
“흠. 그럼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음...”
아냑은 별안간 툭 내뱉었다. 실없는 말이었다.
“우리가 왜 이런 짓을 벌이고 싶었는지 찾고 싶어서요.”
“찾고 싶다고? 너희도 너희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거냐?”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아냑은 이제 바닥에 앉았다. 의문의 연구원도 바닥에 앉았다. 아냑은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연구원은 꽤 진지한 태도로 그걸 들어주고 있었다. 아냑은, 어른이 이렇게 반응해 주는 게 정말 좋지만, 한편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이러다가 친구들이 배신자라고 하는 거 아닐까? 라고.
하지만 아냑이 궁금해하던 논문 이야기를 꺼내가 그 생각이 홀랑 사라졌다.
“해석해 줄까.”
“어 진짜요?!”
-
아냑이 없어도 아이들은 제멋대로 잘 놀았다. 그럼 아냑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그러니까! 그렇다는 건!”
자기 혼자 어른들한테 매우 화가 나서 논문 몇 개를 쥐고서는.
“운동 공간이랑 휴게 공간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걸!”
“그래. 누락을 시켰다 이말이다.”
“함장님 개새끼!!”
“난 욕 안 가르쳤는데.”
...이러고 있었다.
아냑은 그 때 만난 의문의 연구원과 함께 아동과 심리학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온 결과물이 이러했다. 그런 충동은 자연스럽지 않다. 단, 이런저런 제약들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약은 현재 우주에서는 아주아주 당연한 것들 투성이였다!
“당연한 것이라고?”
“적어도 지금은요. 근데!”
“근데.”
“...그럼 아니게 해야죠!”
“그게 네가 원하는 건가?”
응! 똘망한 보라색 눈이 그날 명쾌하게 빛났다. 어른 연구원은 그것이 네가 바라는 것이고, 그게 네가 이제껏 아이들을 이끌고 방만하게 군 이유이냐고 다시 물었다. 아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금 더 멋진 이유를 보태 답했다.
“그 애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재미있어 했으니까, 그런 시간도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경험적 증명이다.”
“윽, 연구원 냄새.”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들이 우리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했죠.”
“그렇다. 이제 적어도 나는 알게 됐군.”
“그럼 이걸 알리고, 음, 설득도 하고.”
“할 수 있겠나?”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아냑은 그날 하루 종일 문서를 붙들고 있었다.
-
그리하여, 교육생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지 두 달 하고도 보름이 막 넘어가는 날이 되었을 쯤.
그 보름의 기간 동안 아냑이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어른들에게 의지 피력을 할 때. 어떤 연구원이 답을 듣고 흡족한 듯이 웃은 뒤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설득을 이어나가게 되었을 그 기간이 지난 후.
그 의문의 연구자가 교육자로 합류하면서, 함선의 커리큘럼이 대폭 갈아치워졌다.
-
“우리... 다시 교육실 가?”
“으...”
아냑도 만성적으로 반항해 온 습관 때문에 가는 길이 이제는 싫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다시 찾아온 어른 연구원이 말하기를, 이번에 기대해 봐도 좋다고 했으니.
“이번에 이상하면 다시 뛰쳐나가자.”
“그러자!”
모두 약속하고 그렇게 다시 찾아간 교육공간에서, 새로 맞는 교육자는 이렇게 선언한다.
“전원.”
“체육실로 집합!”
“오늘은 배구를 시작한다!”
-
아냑은 16살 때의 일기를 보고 나서야 그 의문의 연구자 겸 신규 교육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미친 양반네, 날 아주 점찍고 보고 있었잖아...
- 똑똑, 대화를 합시다.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툭툭. 한창 위성으로 향할 체력 훈련을 하던 네모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보라색 눈이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 그리고 데이브가 의도한 적도 없이 생겨난 이 차원의 새로운 특이점.
아냑이었다. 아냑은 굉장히 곤란한 문제를 직면한 사람처럼 필사적인 웃음만 겨우 얼굴에 걸고 있었다. 데이브는 어제쯤에 나눈 대화가 제법 늦게 걸렸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아냑의 방으로 들어갔다.
-
"네가 톡방의 그... 다른 사람에게 싸움 걸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어."
머뭇거림이 몇 초동안 두 사람을 감싸다가 아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입 다물고 있기엔 이제 들은 게 너무 많았다. 입술과 턱을 매만지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모습은 화가 났다기 보다는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데이브는 그러나.
"...그건 굳이 모르셨어도 됐는데요."
그걸 캐치하고 먼저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였다. 넘실거리는 고민들이 당장 신경을 파먹고 있는 상황이였으니까.
"말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닐까나."
불퉁한 질문이 아냑의 입에서 데이브에게 날아들고.
"어차피 신을 안 믿는 아냑씨 입장에서는 듣지 않아도 상관 없을 이야기였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싸늘한 대답이 데이브의 입에서 아냑에게 돌아간다. 아냑은 기묘함을 느낀다. 그래도 나름 책임감 있게 구는 인간- 아니 신 아니였던가. 갑자기 이렇개 대책 없이 구는 이유가 뭐야? 잠깐 훅 끼쳤던 열감이 빠르게 식는다.
"내 차원 대가리가 갑자기 싸움판에 낀다고 하면 그 밑에 딸린 내가 해야 할 준비 정도는 알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전에 방비는 다 할 거고."
"이미 확정된 듯이 말하지 말라고."
"저한테 바라는 게 뭐에요?"
말이라고 하나.
"...첫번째. 왜 싸우려 하는가. 두번째. 진짜 선제타격을 할 셈인가?"
"둘 다 제가 말하면 안될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냑은 기어이 기기를 만져 통신망쪽 로그를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저 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캐물으라는 건데?"
"...음... 만약에. 저때문에 다른 차원의 신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럼 전 뭘 해야 할까요?"
그건 꽤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흘긋 본 네모라는 존재는, 관리자는 꽤 초연해 보였다. 아냑은 저 모습을 안다. 함장님한테 대차게 개긴 뒤에 세상 다 좆까라는 자신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렇다면.
"...그게 지금 이번 이야기랑 상관이 있다는 소리겠지."
"네."
"그럼 이 질문이 좀... 추가로 들어가야겠네. 무야씨랑 무슨 갈등이 있던 거냐."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옳아요."
-
아냑은 궁금증을 어느정도 해결한 대신 두통을 추가로 얻었다.
"뭐 좋아. 왜 입 다물고 싶어했는지는 알겠군. 그래서 아직 그 예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뜻도 모르고 있고?"
"네."
"...다른 곳은 뭐 갑자기 관리자가 사라지고 그랬다는 거고?"
"네. 그렇죠. 엄밀히 따지자면 이야기의 종결자나, 드래곤 같은 격이 그 자체로 높으신 분들도 그렇고."
"...이거 인명 피해로 봐야 하는 건가."
솔직히, 아냑의 입장에서, 관리자라는 것은, 그의 차원 관리자가 짚어준 대로 그다지 믿을 만하다고 느끼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자신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은 기분을 먼저 느낄 뿐이다. 그보다는 그런 규모의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공포가 먼저 들고 있었다. 아냑은 어거지로 그걸 내리눌렀다.
"아냑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넌 그렇게 생각하잖아."
"하하..."
"...뭐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있네. 로그."
뒤늦게 찾은 텍스트 투성이 화면... 아니 이 빌어먹을 다른 차원 영웅 양반이?
"보고 계시구나."
아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내용을 읽었다. 이건 빠르게 슥슥 훑어서는 안되는 건이였다. 오갔던 대화 내용. 거기에 담긴 감정들-비록 아냑 자신은 텍스트에 숨은 감정을 읽는 게 그다지 자신은 없었지만-까지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작당모의하는 걸 잡아챈 게 며칠 전이었는데 이걸 기어이 놓친 게 허망하기도 했다.
...그나마 누군가가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줬다는 건 다행이었다. 등 떠밀었어봐라... 지금쯤 아냑의 머리가 아주 드물게 벌겋게 익었을 거다. 이것도 등 떠민 건 맞지만. 설득까지는 해보려고 한 것 아닌가.
탁. 아냑이 기기를 내려놨다. 한숨을 한 번 쉬고 해야 할 말을 정돈한다. 그런 다음에 입을 연다.
"난 말이야. 당신이 우리 차원 관리자라는 것도 좀 부담스러워. 그리고 그렇게 개판 싸움을 하러 간다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는 일부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무야라는 존재가 네 뜻에 따라 행동해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아니잖아."
"또 그 이야기."
그 친구가 그 친구다. 어쩌라고. 견뎌라. 아냑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들은 이야기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과학자인 걸 어떻게 해. 네가 존재함과 그 자가 행동함은 완전히 별개의 독립 변수라는 게 너무 뻔히 보이는데. 얼핏 보면 서로 연관되어 있게 만드는, 보고서 초안에서 졸다가 실수로 쓰는 전형적인 서술 실수에 가깝다고."
"그래서요? 제가 거기에 가지 말았으면 하나요?"
"...왜 숨긴건지도 알겠고, 어차피 내가 이걸 당일 바로 들었어도 내가 이거랑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그렇지는 않으니까 그냥 1 괘씸죄 정도로 치고 일단 넘어가고. 내가 바라는 건 그냥, 그거야. 너무 괴팍한 짓은 하지 마."
그리고 저 관리자가 기어이 모른체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 말이지. 책임감이 그리 쏠리는 건 좋은데. 그럼 이쪽은 어쩌려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때인데도."
"말했듯이 이번 건은 당신 손을 떠난 건이야. 손을 대고 싶거든... 다른 방향이 더 낫다고 보고. 정 대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다면..."
아냑이 앓는 소리를 낸다. 데이브는 저 사람이 지금껏 몇몇의 동료를 우주로 떠나보내거나, 시체로 돌아온 동료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도 지금 동료 취급을 해주는 걸까. 그게 느껴져서 그런지 아프게도, 책임감이란 게 더더욱 그를 짓눌렀다.
숨을 쉬지 않는 동안 아냑의 잇새에서 작게 말이 나왔다.
"...다시 돌아와."
"돌아올 생각이에요."
"이왕이면 안 다쳤으면 좋겠는데."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럼 그냥 여기 죽치고 있든가."
"거절할게요."
"...여길 지키고 싶은 거지?"
"떠나지 말아달라는 건가요."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걸 안 이상 불안한 걸 어떻게 하겠어 그럼."
그 말이 어리광이나 투정 계통에 속한다는 것을 내뱉은 사람도 들은 사람도 모두 알았지만 둘 다 무시하기로 했다. 데이브는 내뱉은 말을 지키고 싶어하는 관리자였다... 그리고 자기 차원의 존재자를 안심시키지 못한 것을 뒤늦게 조금 후회하면서.
"...저도 막 나가진 않을 거에요."
"와, 안 믿기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대화는 아냑의 너털웃음으로 마무리된다. 데이브는, 아냑이 언제든지 정을 떼든, 무언가를 하든, 심리적 타격을 최소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면 돌아와줘야지. 방비도 철저히 하고... 그럼그럼. 데이브가 마주 웃었다.
아냑은 이 빌어먹을 외행성대에 담뱃잎 잘 자라는 환경 하나가 없다는 것이 참 서글펐다.
- 심장 함수.
"받으세요."
진동에 한참 고통스러워하던 과학자에게 건네진 물건은 펜이다. 익숙한 물건이다. 한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누군가에게 빌려줄 심산으로 치고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뒀던 물건이기도 하다. 이런 잡동사니를 기억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한다면 좀 이상하겠지만.
아냑은 펜을 받아들며 기억을 되짚는다. 이게 그러니까.
"이게... 이거 사랑씨한테 빌려준 펜인데."
"똑똑하셔라. 128씨한테 받은 게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안 보이긴 했지."
언제부터 안보였더라. 아냑은 자신의 룸메이트가 한동안 불안정했던 때 언저리를 곱씹어본다. 그때? 그 전후로 영 안 보였던가. 어쩌면 그 이전일지도 모르겠다. 아냑은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소식이 들려오면 미미한 기쁨 정도는 느끼는 인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냑은 이내 이상함을 감지한다. 그 펜은 그러니까, 마지막 쓸모라고 한다 치면 사랑씨에게 먹히는 일 아니였나. 왜 돌아왔지? 음울한 낯이 유난히 짙은 관리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
관리자가 조금 머뭇거린다. 대체로 저럴 땐 안좋은 소식이었는데.
"...유품일 겁니다."
이런 식으로.
"뭐?"
아냑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관리자를 봤다. 하지만 관리자는 그 말이 옳다는 듯이 아냑을 보고 있었다. 기기를 간단히 만져, 지금도 오고 있는 진동의 정체를 보여준다. 달라진 이름. 잃은 기억...
"다른 인격으로 보이는 분이 새로 오셨습니다. 이제 128씨는 없다고 하더군요."
"오, 음, 어."
"...유품입니다, 아마."
"...못 돌아온다냐?"
"그렇겠죠."
이건 아냑이 예상한 건 아니였다.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감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관리자의 눈은 불투명했다. 아냑은, 선명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을 이리저리 깜빡거리고 굴리다가 겨우 심란한 생각을 진정시켰다.
...유품이라.
아니, 어디 한가지 오류가 있지 않건가. 아냑은 의연함을 되찾는 가장 그다운 방법을 찾았다.
"유품이라. 난 그렇게 부르기는 좀 그런데."
"어째서입니까?"
관리자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존재에게 반박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무서운 소리겠지만 아냑에겐 적어도 일상적인 일이었으니 이제 그다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냑은 그냥 논리도 없으나 알맹이는 있는 말을 툭툭 던졌다.
"일단 그 사람 자체는 남아있잖아."
"하지만 인격이 영영 지워져 사라져 버렸습니다."
관리자는 그 말에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마치 인격이라는 부분에 한이 맺힌 것처럼. 하지만 아냑은- 과학자였다.
"허. 너 지금 과학자 앞에서 영원을 이야기하는 거냐?"
티끌보다도 작은 가능성은 과학자에게 불가능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건 아냑에게 어느 날은 불행으로, 어느날은 행운으로 찾아온다. 오늘은 아마도, 행운인 것 같다. 관리자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저 쓰게 웃었다.
+
"...내가 유품 아니라고 했잖냐."
- 메신저.
- 〔아냑.〕
〔뭐야 깜짝이야.〕
〔...제가 총기 훈련에 참석하지 않은 게 그렇게 걱정이 되셨습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음.〕
〔알면 안되는 말과 적당히 개연성에 맞는 말 중 하나를 골라보세요.〕
〔총이 무섭다가 후자라면 전자를 고르겠어.〕
〔예...........〕
〔...제가 생각보다는, 총에... 자주 죽었습니다.〕
〔뭔소리야이게〕
〔그냥 그런 겁니다.〕
〔더 설명 안 해???〕
〔그냥 그러니까 총기 쓰기 꺼려한다는 생각만 해주시면 안됩니까.〕
〔되겠냐??〕
〔아 제발요.〕
〔...하 좋아. 대신에 출석 찍고 간 건 다 깐다. 미친놈이 이걸 조작을 하고 튀어 왜.〕
〔죄송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연락한 이유나 그 빌어먹을 복도는 어쩌고 싶고 뭐 그런 건.〕
〔그... 제가 지금, 좀 아픕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정확히 이야기를 해.〕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보통 그런 건 운동으로 풀라고 하지 않았나?〕
〔이번은 격이 달라서요.〕
〔얼마나? 사람이 죽을 정도인가?〕
〔네.〕
〔아냑?〕
〔읽음 표시가 떴어요?〕
〔...그... 우리 차원 괜찮은 거지?〕
〔예? 예.〕
〔그래 그럼 됐다...〕
〔...?? 그래도 위성으로 내려가기 전엔 손볼 수 있는 문제니까 걱정 마세요.〕
〔왜 손을 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내가 알아야 하는 거지?〕
〔오.......〕
〔음. 아뇨.〕
〔...그래.〕
〔...저 이제 쉬어도 되나요?〕
〔...복도만 어떻게 정상으로 만들어 봐라 제발. 방 문 안 딸 테니까.〕
- 죽음에 관하여.
“죽음이란 대체 뭘까요?”
그날 하루 어치의 일을 모두 끝낸 뒤, 탐사기지 안 숙소에 겨우겨우 몸을 눕히는 도중에, 아냑에게 그의 룸메이트가 한 말이었다. 아냑은 슬쩍 룸메이트의 얼굴을 살폈다. 전에 없이 차분한 얼굴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보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색이 번들거렸던 푸르스름한 눈이 지금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보였다는 점이다.
아냑은 근래 그에게 일어났던 온갖 기이한 일과 꼬인 일정의 모든 원흉이 자신의 룸메이트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룸메이트가 이 차원의 주재자이고, 대개 이런 질문을 타인에게는 하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다.
요컨대, 속으로 앓을 질문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냑의 굵은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죽음?”
“네.”
아냑은 어느정도 사정을 알 것 같았다. 그 왜, 저번에 아냑 자신이 연결망 내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 이야기를 했다가 제 룸메이트가 딱 한 번, 끼어들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 분위기가 굉장히 흉흉해질 것 같아 바로 주제를 돌렸었다. 거기서 생각의 가지가 어떻게 뻗어나간 건지 모르겠으나, 부정적으로 번졌다면.
아냑은 그건 그렇게 바라지는 않았다. 확인해야 했다.
“...글쎄다. 일단 상태지.”
불안감이 조금 섞인 말이지만, 그는 학자다운 차분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간이 한 번 그 상태에 들어가면 벗어나기 극히 어렵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상태에 가깝지.”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았다. 어느 기관의 정지를 기준으로 죽음을 정할 것이냐. 인류가 수백 년 전에도 논쟁했던 것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후신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죽음이란 종착지라기 보다는 어떤 상태에 다다랐다는 것을 그는 담담히 입에 올렸다.
“네가 뭐라고 생각할 지는 몰라도, 나는 그래.”
실종자가 영원히 떠도는 공간에 사는 우주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룸메이트인 세상의 관리자가 가만히 그를 본다. 피로에 절은 과학자의 보랏빛 눈은 붉은색과 때때로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지금은, 자기 직전이므로 불을 거진 꺼둔 상태이니 자주색 빛깔에 가깝게 보이기야 하지만.
관리자는 관리자답게, 그가 하는 말이나 그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가 불안해하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렴 사고를 얼마나 훌륭하게 쳐댔는가. 그는 제 발 저릴 줄 아는 관리자였다. 새삼스레 미안해진 관리자 겸 신참내기 룸메이트가 목을 주물거렸다.
“너무 겁 내지 마시고요.”
“아, 그럴 필요 없는 문제였어?”
면전에 대고 당신은 죽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라고 할 정도의 정신 없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관리자가 허허 웃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죽음이란 대체 뭘까.”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죽음이란 개념은 무엇일까. 그게 궁금한 참이었다.
관리자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깐 생각할 게 있다는 듯이. 그 몇 초의 찰나를 그의 베테랑 룸메이트는 또 기다려준다. 참, 인내심 좋은 사람이다. 그리 생각하면서 과거의 몇 장면을 돌이켜 본다.
꺼내기 쉬운 것부터, 꺼내고 싶은 것도, 그리고 꺼내기 어려운 것까지. 날카로운 기억 몇이 그의 피부를 핥고 지나가지만, 가장 최근에 나눈 그리운 대화 덕분에 그것들은 서서히 진정되어 간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비틀린 광기로 세운 기둥 대신 최근에 각오를 다진 하나가 선명히 떠오른다.
“...사실은 말이에요. 제 전임도 그랬지만, 사후 세계라든가- 그런 시스템이 아직 미완성 수준이거든요.”
“...어, 내가 지금 들으면 안 되는 걸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를 해 주시면 설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쁨이 있어요.”
“별로 안 기쁠 것 같은데.”
보라색 눈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관리자를 봤다. 뭐 그런 것까지 나한테 의견을 물어보냐는 생각이 곧잘 드러났다. 그 뒤로는 이걸 일개 사람인 나한테? 라는 생각도. 그러다가 점차, 표층에서 심층으로 가면.
‘그냥 잠자듯 죽는다면 좋을 텐데.’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난다면?’
‘계속 우주 여행 하지 말고 한 번은 여기 들러줬으면 좋겠어.’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데이브가 생긋 웃었다. 그렇구나. 당신의 의견은 그렇구나.
“왜 갑자기 웃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데이브는 자신의 룸메이트를 가만히 보다가 히히 웃는 소리를 내며 잠자리를 먼저 준비했다. 너, 기계 켜서 이런저런 이야기 풀어놓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하는 잔소리에 네에, 하고 대충 대답을 하면서 말이다. 데이브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제법 욕심쟁이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사리사욕 없는 정의의 사도라든가, 죽음을 뛰어넘겠어- 같은 소리를 하는 미치광이였다면 그도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룸메이트가 정말 소탈하고, 동시에 욕심쟁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데이브는 불편한 이부자리에 푹 파묻혀 그날따라 이른 잠에 들었다.
- 아냑, 24세.
질문에 오히려 잠 못 이룬 쪽이 누군가 하면 아냑 쪽이다.
-
4년 전 일일 것이다.
아냑은 그때도 여전히 과학자이고, 엔지니어이고, 탐사자이고, 그랬다. 그는 무슨 말썽을 일으킨다 한들 일단 유능한 인재였고, 자신이 무능하단 딱지를 윗선 일부에서 얻어맞거든 뒤엎어버릴 생각이 아주 만만한 사람이었다. 4년 전의 그는 특히나, 지금보다도 더 젊었으니 그랬다.
아, 무슨 뜻이냐고. 4년 전에 사고를 쳤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하는 중이다. 그의 이런저런 사고뭉치 기질은 4년을 주기로 자의로든 타의로든 일어나곤 했다.
그는 유능한 탐사자였다. 때문에 어리숙한 나이에도 이미 한 얼음으로 뒤덮인 위성 쪽에 지원을 가거나, 거기서 연구를 추가적으로 도맡거나 하곤 했단 말이다. 위성을 자주 들락거리는 탐사자들은 우주 정거장에 상시 거주하는 과학자들, 엔지니어들과는 조금 다르게, 정거장 안의 흐름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단점이 목숨의 위협이라서 그렇지.
엄밀히 따지자면, 그마저도 온전히 피하기에는 어려웠다. 정거장에 결국 언젠가는 복귀하고, 그렇게 되면 밀린 흐름은 그에게 파도처럼 순식간에 몰려든다. 그날도 그랬다.
그가 얼음 위성의 임무를 어느정도 완수하고 우주 정거장에 복귀한 어느 날.
-
“...어째 보이던 사람 몇 명이 없다?”
아직 어린 시절의 그는 사람들의 죽음에 예민했다.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하고, 실종 소식이 있다면 바로 알려달라고 할 정도로.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기들 모두가 예민하기는 하였다. 다만 아냑의 개인적 사유와는 달리, 우주 정거장의 전반적 흐름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그- 음. 아냑.”
“응. 이야기를 해 봐.”
동기 중 한 명이 아냑의 전혀 차분하지 않은 눈을 애써 마주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젊은 피인 동료 몇몇이 슬슬 다음 세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윗세대의 압력에 못이겼다. 개중 두 사람이 몸 건강 이상으로-
“그만.”
-죽었다.
아냑이 아무리 그만이라고 하더라도 죽었다는 종언은 이루어진다. 마침표가 찍힌다. 아냑은 자신이 그 종언 대상이 되겠지, 혹은 영원한 실종 대상이 되든가, 설마하니 자신이 임무로 인해 우주 정거장 밖으로 나갔다 온 사이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그럴 수는 있었다. 이해는 한다. 머리는 이해가 갔는데.
“...어디 있어, 지금?”
그게 머리로만 이해가 갔다면 그가 지금 보랏빛 눈을 시뻘겋게 태우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울대가 어거지로 울음을 삼키는 게 보였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 시점까지는 아냑에게 뒤에 있을 이야기들을 더 말하지 않았다. 아냑에겐 충분한 슬픔을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냑은 돌아온 후 며칠을 꼬박, ‘다음 세대’를 위해 죽어간 동기를 위해 보냈다.
-
일주일 후, 아냑은 함장실 문을 땄다.
-
아냑은 슬슬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라는 아이들을 보러 갔다. 아직 어린 핏덩이들이다. 손발을 움직이는 방법도 모르고, 눈을 뜨고 기어다니는 방법만 겨우 아는 아이들이다. 거기서 동료들의 모습이- 보일 리가! 인류라는 건 저런 콩알만 한 개체일 때는 구분도 못 한단 말이다.
동기들 중 일부는 아이들을 보며 심란해 하고, 또 일부는 그래도 저 아이들을 우리가 잘 이끌어 줘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아이들만 남는 것이 자신들의 미래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냑은 모든 것이 공존이 가능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당장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다.
“함장님이 그런 말만 안 했어도... DNA는 확보됐으니 다행이냐는 소리를 안 했어도.”
아냑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동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냑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잘 기억은 못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때는 그다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란 믿음이다. 했으면 그랬을 리가. 아니, 했어도 그랬겠지.
그래서, 아냑은, 동기의 멱살을 잡고 털었다. 함장님이 뭐라고 했다고? 그 때 아냑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아냑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손에 빠루를 들고 한 손에 렌치를 들고 있었더랬다. 다행히 부상자 소식이 없던 걸 보면 누구를 늘씬하게 쥐어 패지는 않았나 보지.
그 길로 아냑은 함장실 문을 땄다.
“함장님.”
문을 딴 뒤에 보통은 문 앞에서 살랑살랑 실랑이를 한다. 혼자 오면 보통 그렇고, 단체면 우르르 들어가서 함장실의 그 쓸데 없이 위엄 넘치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편이다. 그는 지금 혼자다. 뒤에서 그를 말리려고 오는 동기들이 이미 있었지만.
아냑이 선택한 건 그 개같이 징그럽게 화려한 테이블을 반으로 부순 뒤 함장을 질질 끌고 나오는 것이였다. 목에 빠루 거니까 제법 잘 되더라.
“무슨 짓인가-!!”
“아, 무슨 짓이냐고. 내가 지금 들은 게 있거든?”
헛웃음이 비식비식 나왔다. 질질 함장을 끌고 가는 아냑을 다른 이들이 말렸으나 아냑은 끝끝내 동기들까지 죄다 뿌리치고 가야 할 방향으로 갔다. 탐사자들이 임무를 떠나고, 혹은 돌아올 때 쓰는 곳이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고, 따라서 우주 정거장과 저 안쪽 공간은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압력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쾅! 아냑이 그 문 바로 앞에 함장을 던졌다.
“DNA?”
역광 속에서 아냑의 눈은 무슨 빛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희번득하게 뜬 흰자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동기들이, 여기 사는 모든 인류가 고작 ‘다음 세대’ 생산을 위한 부품인가?”
아냑이 함장의 눈 앞에서 도구를 흔든다. 이미 함장의 안전지대를 박살낸 전적이 있는 도구들이다.
“당신 말이야, 이미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않았어?”
아냑의 눈이 초승달처럼 휜다. 초승달을 본 적이 없을 텐데도.
“그럼 당신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콱! 틈새를 벌리기 아주 좋은 빠루가 문 한 쪽에 박히려고 애를 썼다. 그를 말리기 위해 끝까지 따라온 동기들이 그를 인력으로 내리누른 건 그로부터 3초 뒤였다.
-
...죽음이란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싫다. 죽음이 모욕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건 정말 싫다. 쓸모 없는 명예나 숭고함으로라도, 치장되어서 나에게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냑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겨우 잠에 들었다.
- Pillow talk
"자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어느정도 위성에서의 업무가 안정되기 시작하고, 동료들과 번갈아가며 일을 순환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쉴 시간이 늘어났다. 내일은 푹 쉬어도 괜찮은 날이다. 늘어져 있기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김에, 아냑은 미뤄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일이 있는 날에 자칫 대화가 꼬이면 큰 실수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대화로 한 번 꼬인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다시 대화로 풀 수 있을 때가 있는. 딱 그런 날. 오늘이 그 날이다.
푸근하지는 않지만 한 몸 뉘어 쉬기엔 괜찮은 침대 위에서 아냑이 말했다. 반대편 침대에는 이불을 어깨에 망토처럼 두르고 헤쓱하게 골골거리고 있는 룸메이트가 보였다. 파리한 안색으로 종종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듣는 동료.
그리고 차원 관리자. 그가 아냑을 본다.
"어떤 건데요?"
대화를 시작하자. 아냑이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다가 도로 일어난다. 상대가 앉아있는데 본인만 누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은 그 새를 못참고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니였다. 아냑은 그 점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무서워. 그래서 역으로 좀 막 대하는 게 있어. 널 좀 못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간 아냑이 겪은 바를 생각해 보자. 홀로 위성에 1차 탐사 및 기초 토대를 정비하고 있는 와중에 나비도 아닌 생체 비행물체가 나비 흉내를 내면서 자기 기지에 몸을 들이받질 않나, 없던 외부인이 선내에 갑자기 생겼는데 자기만 그 사실을 알고 나머지는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의심도 안 하질 않나. 하루는 복도가 꼬여 무한히 갇히는 건가 하고 식겁할 일까지 생기고.
이 모든 게 3개월 안에 일어났다. 아냑은 굵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자기 말에 타당성이 있는지 검토하려고 기억을 되짚었다가 역으로 너무 타당해서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네모라고 불리는 관리자가 헛기침을 했다.
"알아요. 그러실 필요도 있고."
범인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냑은 그래, 저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가 주눅든 태도, 의연하다기 보다는 초연한 듯한 모습. 갑자기 쪼그라들어 사라질 것 같이 구는 게.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잘 정리가 안 된다.
"그게... 음... 난 그런 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어떤 게 마음에 안 드시길래."
"서로 못 믿는 거."
혼자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함선 안에서 일과를 보내는 것과도 다르다. 탐사기지에서 임무를 하는 건, 같이 온 동료들과 마음을 맞추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 같이 생환하자는 믿음을 전제로 해야만 했다. 신뢰가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아냑이 네모라 불리는 이 동료이자 룸메이트에게 가지는 건, 뭐라고 할까. 끈끈한 동료애, 신뢰... 그런 단어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너는 아무튼 관리자니까, 당연히 살겠지. 라는 꽤 가볍고도 나이브한 믿음 정도. 그건 지금 상황에서 나쁘다고는 못 한다, 당연히. 손을 뻗으면 근처에 있는 희망 같은 느낌이니까.
그러니까 아냑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넌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사고를 쳐 왔지."
"...제가 좀 한 사고 하죠."
"그래도, 결국 사람 꼴로 돌아왔으니까 난 그냥저냥 믿고는 있어."
"그럼 다행이네요."
"난 그 그냥저냥인 상태가 싫어."
"네?"
아냑이 마찬가지로 이불을 구겨 대충 어깨에 두르더니 팔짱을 낀다. 네모라는 이름의 동료가 눈을 몇 번 깜빡거린다.
"애매하잖아."
"...어, 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미안해할 건 아니고."
"그렇다고 아냑이 미안해할 일도 아니지 않아요?"
그런가. 아냑이 길게 푼 머리카락의 삐죽 튀어나온 부분을 몇 번 만지작거린다. 그래도 켕기는 건 켕기는 거다.
"난 이 기회에 너랑 내가 확실히 동료라는 생각을 하고 싶다는 거야. 일방적으로 관리자랑 피조물인 관계가 아니라."
그래.
아냑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옮기는 데에 성공했다. 아냑이 침대 표면을 팡 두드리면서 그렇게 말하자 네모라 불리는 동료도 잠깐 눈이 커졌다가 그대로 작아진다.
"...지금까지도 그냥 잘... 된 거 아니였어요?"
"표면적으로는 그랬지."
"표면적이라도 잘 굴러갔으면 된 거 아니에요?"
"이봐, 우리는 결국 여기서 같이 일할거야."
짝! 박수를 친다. 이 대화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게 보이는 상대방을 붙잡아놓기 위해서다.
"이 주제 뒤에 벌써 뭐가 나올지 알고 있어서 그렇겠지. 하지만 뭐 어쩌겠어."
"......."
"난 다른 동기들, 여기 지내는 인간들과는 시간을 같이 보내 봤어. 하지만 넌- 너는 뭘 했는지 몰라."
"......."
아냑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이 부분이다. 다른 동료들은 꺼리는 기색 없이 이 존재를 동기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과거에 대충 같이 껴있었구나, 너도 우리랑 같이 지냈지 참, 하는 동료 의식이 있어 보였단 말이다. 자신을 제외하고!
그게 꺼림칙했단 뜻이다.
그를 찾아낸 게 자신이고 이 삶에 끼게 만든 것도 자신인지라 그런 조작이 먹히지 않았다면, 아냑은 다른 방식으로 이런 고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뭘 했어?"
"...저는 아냑이 뭘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럼 들을래? 들으면 알려줄 거야?"
"......."
이제 네모라고 불리는 동료는 문자 그대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정말 싫어하는 주제였나 본데. 아냑은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 정도도 못 기다려주는 인간은 아니다. 그는 가만히 룸메이트를 보다가, 도로 이불 두른 자세를 풀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어려운 대화였으면 관두자. 뭐, 널 못 믿는 건 아니-"
"...다음에."
"...응?"
"...다음에,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냑이 잠자리를 다시 다듬으면서 룸메이트를 본다. 룸메이트의 표정은 어느새 질려있다기 보단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겁을 먹은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난 뭐 언제든 좋아."
"네, 그럼..."
"지금은 아니란 거지."
"...그렇네요."
하하. 어색한 웃음이 너스레 떨듯 나온다. 텅 빈 공기를 한차례 울리다가 사그라든다. 아냑은 자기도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짧게 웃다가, 그럼 잘 자라고 손을 흔들며 누웠다.
안경을 접어 근처에 두는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울리다가, 곧 조명이 암전된다. 빠르게 잠에 드는 소리가 숨소리와 함께 난다.
-
아냑은 자신이 잠들기 전에 한 말을 이렇게 빨리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야."
언제든 좋다는 말을 적어도 일할 때 빼고, 라고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은 잠들기 직전에도 하긴 했었는데.
"여기 거기잖아!"
"네!"
"여기 어디야!"
"꿈이요!"
그렇다. 꿈의 주재자의 공간에 아냑은 잠들자마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둥실둥실 공중에 떠 있다가 사뿐히, 소리없이 안착하는 제 동료는- 아니 관리자는 정말이지 얄밉기 짝이 없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 언제든이 지금이였냐고!"
왜 이렇게 착실하게 마음의 준비도 다 하고 그런 건데! 왜 공간까지 따로 마련이 되어 있는건데! 아냑은 지금 자신의 어처구니를 찾고 싶어졌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검은 모래알이 곱게 깔린 곳. 그 위로 끝없는 우주가 펼쳐진 곳. 거기에 덩그러니, 세트장처럼 놓인 어느 공간. 테이블 하나가 있고, 그 위에 이런저런 종이더미가 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가 하나씩 있고.
누가 봐도 이야기하기 딱 좋은 공간이다. 아냑은 이렇게 본격적인 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왜 이렇게 추진력이 좋은 건데. 아냑은 자신의 추진력이 설마 이 인간한테서 기인하나? 싶어 그를 꼬라보기까지 했다!
"...? 여기 앉으세요."
하지만 관리자는 그저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할 뿐이였다. 아냑은 한없이 푸근한, 삭막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화롭고 정적인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뒤늦게 의자에 저벅저벅 걸어가 털썩 앉았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네에."
"이런 건 좀 알려주고 해!"
"하하. 여기가 속말을 가감없이 하기 참 좋죠."
환하게 웃으면서 아냑의 말을 듣는 관리자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꽤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이 바들바들 떠는 그런 태도라기 보다는, 휘어잡는 법을 아는 사람의 여유가 있다고 할까.
"알겠어요. 이번에 갑자기 초대드린 건 죄송해요. 그냥 이런 곳도 있고, 제 할 말은 여기서 해드리고 싶었다고... 그냥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관리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차를 내온다. 아니, 내 왔다는 표현이 맞나? 어느새 거기엔 찻잔 안에 파르스름한 차가 있었다. 아냑은 이게 꿈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했는지, 제 과거가 궁금하신 거랬죠."
"...그런데."
"으음. 좋아요. 되는대로 말해볼게요."
-
아냑은 그에게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예컨대, 그가 인류가 멸망하기 조금 이전 세대 출신이라는 점. 그거야 당연히 말투에서 확신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출 청소년 출신이였다는 점, 사진 작가였다는 점도.
관리자는, 아니, 청년은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쓰게 키득거리면서, 때로는 어떤 웃음도 내놓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때때로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먼 곳을 쳐다본다. 아마 그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 땅에는 이제 없을 것이다. 아냑은 그 부분을 짐작하고, 친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작은 조의를 표했다. 마음 속으로.
어느 순간 이야기가 멈추고 머뭇거림이 느껴지면 아냑은 청년의 눈을 들여다 본다. 조악한 솜씨로 칠한 듯 불투명한 눈이 그를 반긴다.
"이제 그만 해도 돼."
"어, 네?"
"...난 이런... 걸로 사람 고문하는 취미는 없어."
한창 꿈을 꾸다가 사람이 죽는 장면을 묘사하던 참이였다. 그건 그렇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였고.
"...이 앞에 더 끔찍한 이야기가 있는데도요."
"그러니까, 그 끔찍한 이야기를 네가 더 할 수 있는 상태면 난 괜찮은데, 너가 문제라고."
상대가 희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다. 청년에서 관리자로 태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분명 피자 배달 이야기를 할 때는 역으로 석이 나가서 한차례 웃음 파티인지 열받음 파티인지를 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장르가 급변하고 있었다.
"괜찮아?"
"......"
"...난 네 걱정을 하는 거야."
"......"
"...이런 이야기니까 꺼내길 망설인 거겠지."
"...잠깐, 쉴까요."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한동안 청년의 과거 대신 사막에도 키위새가 살 수 있는지 등의 농담따먹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 농담따먹기를 이어갈 정도로 둘의 사교성은 나쁘지는 않았다.
-
아냑은 가만가만 자신의 과거 몇 개를 늘어놓았다. 용기 있게 과거를 들려준 데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떨지 말라고, 지옥같은 경험을 한 걸 입 밖으로 내뱉게 한 데에 미안하다고. 그 모든 게 함축된 털이였다.
아냑은 열 여섯살 때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놀랄거다 부터 시작해서- 스물 네 살 때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간추렸다면 간추렸고, 사건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꽤 자세했다. 비록 상대방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아냑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아직도 화가 난다며 고함을 쳤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특히 관리자를 만난 부분에서는 해탈한 듯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관리자가 상대방이었고 듣고 있었으며 하하 웃으면서 이야기를 다 받아주고 있었다는 건 아냑에게 기묘한 감상을 남겼다.
검은 사막에 있을 수 없는 해와 달이 떴을 때, 청년은 마지 못한 이야기를 요약하기 시작해 들려주었다. 딱 별 몇 개 만큼의 찬란함과, 그 별들을 위한 거대한 검은 공간만큼의 절망이 가득한 이야기였다.
-
"...요약이지?"
"그렇죠."
"...맨정신으로 자세히 서술하기엔 요약본도 너무 제정신이 아니라서."
"하하."
둘 다 테이블에 늘어져서는 그렇게 말한다. 그래도, 한껏 털어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청년의 음울한 낯에는 조금 양순하다는 인상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기 술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술이요?"
"뭔가 어울리지 않나?"
"전 글쎄요, 별로."
별로면 어쩔 수 없지. 아냑은 눈 앞의 기구한 삶을 산 청년의 마지막 나이를 알게 된 참이었다. 스물 아홉 언저리였던 것 같다. 꽤 가까운 나이였다.
아냑은 본래도 몇 번, 언젠가, 이 존재를 안쓰럽게 본 적이 더러 있었다. 그냥 자기가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무언가 안 될 때. 모든 걸 자기 탓을 하는 습관이 있어 보일 때. 아냑은 그럴 때마다 이 신이라는 직책을 가진 자를 동정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침밥 뭐 먹지."
"어, 스프레드형 밥-"
"어허. 내가 꾸린 밭을 뭘로 보고. 우린 지금부터 작물을 마구마구 먹는다. 실시."
"...실시이이."
...그래, 그런 관계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