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어딘가의 초차원 오픈 카톡방
신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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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메세지 | |
꼬우면 착하게 살아라 | |
최초 레스 작성 일시 | |
2020/5/7 0:21:45 | |
알아야 하는 정보 | |
본명 | 더스틴 블루버드 Dustin Bluebird |
가명 | 저스틴 프라이 Justin Frye |
나이 | 27 → 33 |
성별 | 남 |
국적 | 이데아(세계관 내 가상국가) |
종족 | 인간 |
생일 | 3월 15일 |
직업 | 낮에는 레드스틸 사 치안 담당자, 밤에는 자경단 |
상태 | 생존 |
상징색 | firebrick, yellow |
1. 소개 ¶
꼬우면 착하게 살아라.
살고 싶어?
거래를 할 거였으면 입단속을 잘 했어야지.
참치 인터넷 어장 상황극판 어딘가의 초차원 오픈 카톡방 스레 등장 캐릭터.
2. 특징 ¶
- 선천적 이타성을 가지고 있는 게 맞는데, 드러나거나 할 일이 좀체 없다.
- 오너는 얘를 츤데레로 설정했다(대체).
- 책임감이 강하다.
- 아마 톡방에서는 장난도 자주 치고 아무말도 자주 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신더의 현실 세계를 언급하려고 한다거나, 목소리 드러난 이벤트 등... 뭔가 까발려지려고 하면 욕부터 박으니 주의.
- 의심이 무럭무럭 큰 불신의 고슴도치.
2.1. 외양&분위기 ¶
고양이상
아무튼 신더는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을 한 친구입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냐면
자기랑 대립각 세운 사람이 불꽃 능력자고 자기는 옛날에 그 사람 동료 겸 조수(히어로의 사이드킥!) 이였는데
정작 신더가 가진 능력은... 바람이랑 전기거든요
불같이 생겼는데 불은 아닌... 어쩌다보니 캐디까지 왔군
아무튼 신더는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을 한 친구입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냐면
자기랑 대립각 세운 사람이 불꽃 능력자고 자기는 옛날에 그 사람 동료 겸 조수(히어로의 사이드킥!) 이였는데
정작 신더가 가진 능력은... 바람이랑 전기거든요
불같이 생겼는데 불은 아닌... 어쩌다보니 캐디까지 왔군
분위기는 님이 적이라면 눈빛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타는 얼음을 마주할 수 있을 것
달궈진 호박석 아래의 본성에서부터 오는 악에 대한 으; 하는 것이 으르렁거릴 것
경계할 때도 비슷하다
물론 양어머니한테는 그냥 짖궂은... 애다 쫌 무뚝뚝 제곱같이 생겼는데 틱틱거림
달궈진 호박석 아래의 본성에서부터 오는 악에 대한 으; 하는 것이 으르렁거릴 것
경계할 때도 비슷하다
물론 양어머니한테는 그냥 짖궂은... 애다 쫌 무뚝뚝 제곱같이 생겼는데 틱틱거림
신더는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보호대를 항상 차고 다닌다. 특히 다리쪽에는 점프 및 각력을 향상시켜주는 장치를 항상 장치하고 다님. 멀리서 보면 기계사슴처럼 생겼음.
오른 다리 부상 때문에 오른 다리쪽 장치가 더 튼튼하게 생김.
오른 다리 부상 때문에 오른 다리쪽 장치가 더 튼튼하게 생김.
- 불이되 불꽃이 아닌 자
- 죄인이 아닌 당신에게, 샛노란 눈은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확장판과도 같을 것이다. 먹을 것을 탐내지는 않는, 안온하고도 경계심 많은. 당신이 본 길고양이는 용케도 도둑질을 해 갔다면 유감이다. 그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굳이 한다면, 당신이 죄인이라면 할 것이기에. 샛노란 눈동자의 어느 정도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보면 틱틱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모양새였다. 단단한 손의 끝이 혈색이 도는 입술을 매만진다. 핏줄은 날 여기에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톡톡 드러나곤 하였다. 그래, 당신이 죄인이 아니라면 그저 한가롭게 입술을 매만지는 청년이겠지. 당신이 죄인이라면, 그를 볼 수 있을까, 본다면, 도망치는 것이 옳다. 잿더미에게 그 눈은 불씨였고, 그는 거대한 철이되 용광로에서 올라온 철이었으며, 새카만 밤에 겨우 열기를 식히는 중이였을 테니까.
4. 인간관계 ¶
- 올리비아 트레이: 신더의 양어머니, 신더가 사이드킥일 때 파트너였던 영웅 '솔라리움'. 현재 은퇴했으며, 오른팔에 의료용 보조 기구를 달고 있다. 보조 기구는 레드스틸 사의 것.
- 버나드 트레이: 올리비아의 친아들, 즉 신더와 의도치 않게 형제가 되었다. 올리비아가 1대, 버나드가 2대 솔라리움으로 ,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역시 신더가 사이드킥이었으나, 현재는 사이가 틀어졌다.
...였으나, 선 넘어 (ABANDONED) 독백 이후로
표면적으로는 신더가 일방적으로 싫어해서 버나드도 꺼려함 정도->표면적으로는 둘이 대놓고 싫어함
깊게는 둘이 서로 싫어함->분명 둘이 서로 싫어하는 건 맞는데 이해가 가니까 그냥 거침 없이 할 말이나 할 거다.
여전히 애증관계지만 뭔가... 감정의 골의 끝을 보고 그랬고
자기 감정에 서로 솔직해지기로 했으니 넌 정말 X같아! 하는 사이가 되겠지만 그게 마냥 나쁜 느낌은 아닌
결정적으로 서로가 서로한테서 자기 엄마 닮은 걸 보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는데 그걸 또 서로 알게 되었고
하여튼 서로 사정 이해를 마친 느낌
서로한테 험하게 굴면 엄마한테 미움 받을까봐 걱정한
굴러온 돌에게 자리를 뺏긴 박혔던 돌과
피 하나 안 섞인 고아였던 이들의 애정 쌓지 말자 싶은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 과거
- 사실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과정에 휘말렸을 때, 일을 일으킨 당사자와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다. 신더와 버나드 트레이 둘이 함께. 그러나 신더가 제압 과정에서 멘탈이 흔들려 불길이 번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신더는 이 일에 실수와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대면 당시에 드러난 이름이 자신과 버나드, 올리비아의 이름이였기 때문에 버나드도 일단 챙기려고 한 것. 그리고 이 결심은 거대한 스노우볼로 돌아오게 된다.
- 크레이그 댈러쉬: 신더에게 무기를 조달해 주는 무기상. 전 무기 중개 회사 '댈러쉬 사' 운영. 히어로들과 아는 사이이며, 올리비아의 은퇴에 복잡한 생각을 가졌음. 신더를 돕는 이유는 '올리비아의 양아들' 이기 때문일 가능성 높다.
- 시어도어 레드우드: 의료 보조 기구 제조사인 '레드스틸 사' 운영. 올리비아에게 도움 주는 중. 신더한테도 마찬가지. 후진 양성 중. 크레이그 댈러쉬와는 과거에 모종의 딜을 했으며, 신더도 이를 알고 있다. 전 지휘관 겸 참모, 은퇴전 히어로 명은 스티그마, 능력은 마킹으로, 추적 능력이 월등한 사람.
- 도노반 콜슨: '배신의 계절' 독백에서 나온 배신자. 전 동료였다. 생활고 문제로 배신한 듯. 현재 레드스틸 사에 억지로 구금시켜 놓은 듯 하며, 앞으로도 정보를 뜯어낼 계획인 듯 하다.
- 팬텀: '삼자대면' 독백에서 나온 빌런, 전 히어로. 자의로 전향했으며, 악한들을 살해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수감 중에 있으며, 신더가 협력을 요청해 공동 목표인 판 뒤엎기를 통해 복수심과도 같은 마음을 해소하려는 듯 하다.
- 경찰 스탠리: 독백에서 여러 번 마주친 경찰. 도중에 제 동료가 마약을 하는 걸 알고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이후 경찰 내부를 기자에게 폭로하였다.
5.2. 자세한 정보 ¶
- 톡방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낮에는 히어로들이 프로파간다와 정치인이 되어 활동하고, 밤에는 온갖 빌런들이 히어로들과 맞짱을 뜨는 국가, 이데아.
이데아는 건국된 지 몇 년 안 된 신생국이지만, 히어로들은 그 전부터 존재했다.
신더는 히어로의 곁에 존재하는 조수인 사이드킥이었다.
현재로 돌아와서, 신더는 현재 이데아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히어로와 빌런들이 서로 손을 잡고 이득을 챙기는 중이라는 것.
그리하여 천천히 이 판을 엎기 위해 자경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능력자이다. 바람과 전기를 다룰 수 있으며, 사살은 불가능한 정도의 힘이라고 한다.
주 무기는 플레어건, 섬광탄, 연막탄, 주먹, 주변에 흩어진 집기들.
싸움은 상위급으로 잘 한다. 가르친 어른들이 영웅이기 때문.
- 과거에 묶인 자
- 그의 인생은 그가 타오르던 10대~20대에서 모든 게 엉켰고, 모든 게 결말지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 상흔은 그에게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직도 그에겐 가까운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둘러대기 용으로 대는 친한 사람이나 아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파견 근무를 갔다가 알게 된 사람 같이. 그 사람들을 아끼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사람들을 친구라고 여기냐면, 신더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더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에 묶여있고, 배신의 상처를 입은 사람 답게 인간 관계에 매우 신중하다. 신더가 친근감을 표시하는 거의 대부분의 행동은 신더 스스로도 눈치 못 챌 거짓말이라고 보는 게 옳다.
신더는 보이는 만큼 건강하지만, 보이는 것보다 어둡다. 어째서 아직도 잿더미같은 이름을 톡방 닉네임으로 그대로 쓰겠는가. 털어내지 못한 미련이 많은 사람처럼.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결국 신더는 톡방에서도 상상 이상으로 외톨이이다.
6.1. 테마곡 ¶
영웅도 악당도 없는 곳 : 세계관 테마
"그쪽네가 뭘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가 싫어." "너가, 너가 친아들이라는 게. 그게 부러워서 뒤질 것 같았다고. 나는."
먼지더미에서부터!
6.2. 잡담방에서 풀린 설정 ¶
(갑자기 저런 놀라운 사실에 반응하는 자캐별 반응을 보고싶어졌어요)
이미 하고 있음 -2어장 277답글-
신더 방 느낌 -3어장 367답글-
(발사이즈)
신더는 285지만 넉넉하게 290도 신을 수는 있는 정도다 -4어장 105답글-
(친구들 옷 뭐 입는지)
신더
: 평소에도 그렇고 주로 후드티+후드집업을 입고 다닌다. 덕분에 여름철에 죽어나가는 중.
밤에 돌아다닐 땐 장갑이랑 마스크를 추가적으로 끼고 나간다.
얘가 만약 정장을 입는다면 그냥 검정 마이+흰 와이셔츠이거나, 아니면 와인색 컬러를 주로 하거나, 카키색 컬러를... 아무튼 그렇다 -4어장 193답글-
: 평소에도 그렇고 주로 후드티+후드집업을 입고 다닌다. 덕분에 여름철에 죽어나가는 중.
밤에 돌아다닐 땐 장갑이랑 마스크를 추가적으로 끼고 나간다.
얘가 만약 정장을 입는다면 그냥 검정 마이+흰 와이셔츠이거나, 아니면 와인색 컬러를 주로 하거나, 카키색 컬러를... 아무튼 그렇다 -4어장 193답글-
(신더 친구 살갗을 안 드러내려 한다는 인상인데 이유가 있나요??)
신더는 자경단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히어로의 사이드킥이였다. 대충 과거에 히어로들 신상 털리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 신더는 안 털렸지만.
여름에 긴팔 입는 이유는 뭐... 혹시라도 현장에 혈흔 남으면 조사 들어갈 테니까 그거 방지하려고 하는 거기도 하고 아무튼. -4어장 206답글-
신더는 자경단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히어로의 사이드킥이였다. 대충 과거에 히어로들 신상 털리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 신더는 안 털렸지만.
여름에 긴팔 입는 이유는 뭐... 혹시라도 현장에 혈흔 남으면 조사 들어갈 테니까 그거 방지하려고 하는 거기도 하고 아무튼. -4어장 206답글-
(#지나가던_사람들이_갑자기_자캐를_향해_절을_한다면)
그대로 도도하게 걸어간다 : 신더
멀뚱멀뚱 쳐다본다: 데이브, 신더 -4어장 229답글-
멀뚱멀뚱 쳐다본다: 데이브, 신더 -4어장 229답글-
이쪽 이프의 신더=플레어는 그러니까
입양이 제대로 안 돼서 결국 빌런인 누군가한테 입양된 경우이다
그 다음에 빌런의 장기말로 길러지지만 머리가 상당히 컸던 상태라 환멸이 남과 동시에 왜 이런 사람을 안 죽이나 싶은 히어로들한테도 좀 적개심이 들기 시작함
일단 빌런을 청소년기에 배신하고 히어로쪽에 붙었지만 히어로의 불살주의가 어지간히 꼬왔기 때문에(치기어림!)
입양이 제대로 안 돼서 결국 빌런인 누군가한테 입양된 경우이다
그 다음에 빌런의 장기말로 길러지지만 머리가 상당히 컸던 상태라 환멸이 남과 동시에 왜 이런 사람을 안 죽이나 싶은 히어로들한테도 좀 적개심이 들기 시작함
일단 빌런을 청소년기에 배신하고 히어로쪽에 붙었지만 히어로의 불살주의가 어지간히 꼬왔기 때문에(치기어림!)
얘때문에 최종적으로 히어로쪽 아이덴티티가 다 털리게 된다
빌런들도 그렇고
지금은 쫓기면서 아무도 못 믿는 상태-4어장 945답글-
빌런들도 그렇고
지금은 쫓기면서 아무도 못 믿는 상태-4어장 945답글-
올리비아: 엄마라고 부르렴!
신더: ...
올리비아: (눈 반짝!)
신더: ...어,
신더: (고장!)
신더: 어어어어 어
올리비아: (? 아가 아프니 싶어하는 표정)
신더: 어어ㅓ어어어엄마
올리비아: (빵끗!)
신더: ...
올리비아: (눈 반짝!)
신더: ...어,
신더: (고장!)
신더: 어어어어 어
올리비아: (? 아가 아프니 싶어하는 표정)
신더: 어어ㅓ어어어엄마
올리비아: (빵끗!)
(올리비아가 본편 신더 양어머니다) -4어장 965답글-
(캐릭터들 주사)
(분명 달달한 술이 오래 마시면 훅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파괴함) 대충 취하면 욕설이 는다 빼곤 없다. -5어장 108답글-
(분명 달달한 술이 오래 마시면 훅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파괴함) 대충 취하면 욕설이 는다 빼곤 없다. -5어장 108답글-
(플러팅 들은 캐들 반응)
뭐래ㅎ(필요에 따라 법규를 보여줄 수 있음) -5어장 616답글-
양어머니 따라 요리 배워서 가정식 제법 하는데 요새는 재정난! 재정난이! -5어장 880답글-
신더는... 중립선이거나 혼돈선이거나
중립선이지만 혼돈성향이 좀 있
중립선이지만 혼돈성향이 좀 있
(생각해보니 자경단이면 혼돈선이겠네) -6어장 119답글-
(캐들 주무기)
신더는 연막탄과 섬광탄과 주먹과 플레어건입니다 -6어장 215답글-
가끔 컴뱃나이프도 씁니다(항상 소지중임) -6어장 223답글-
(전투방식)
신더
일단 전기로 총알 안의 화약을 굿바이해줍니다
그 다음에 오는 애들부터 차례차례 때려눕혀줍니다
다대일? 어쩌라고요 너네 연막탄 맛 봤냐? -6어장 765답글-
일단 전기로 총알 안의 화약을 굿바이해줍니다
그 다음에 오는 애들부터 차례차례 때려눕혀줍니다
다대일? 어쩌라고요 너네 연막탄 맛 봤냐? -6어장 765답글-
독백 백업 전이기도 하니 대충 풀자면
고아원에 봉사활동 온 히어로들을 만나고 나도 안 지켜주면서 무슨 영웅이냐구 떽뗵거림
그리고 봉사활동 온 히어로 중 한명한테 입양된다>>대충 어리둥절
똘망순진똘똘사고뭉치 -7어장 198답글-
고아원에 봉사활동 온 히어로들을 만나고 나도 안 지켜주면서 무슨 영웅이냐구 떽뗵거림
그리고 봉사활동 온 히어로 중 한명한테 입양된다>>대충 어리둥절
똘망순진똘똘사고뭉치 -7어장 198답글-
신더의 경우
진심으로 귀엽다고 한 사람을 걱정합니다(그 혹시 시력이 어떻게 되냐)
물론 양어머니 뺴고
물론 양어머니 뺴고
(캐릭들은 장마 좋아하나요?)
신더는 좋아하는데 안좋아하고(?? -8어장 27답글-
신더가 왜 장마 조아하는데 싫어하나요
습한 거에 관련잇다
습해서 불쾌지수는 올라가는데 얘 능력 둘 다 비 올 때 점 활용도가 높음
비가 오면 바람도 씨게 불겠지는 그렇다 쳐도 습하다! 이얍 띠리찌리찌리찌리같은 느낌
아무튼 업무환경은 좋은데 기분이 나쁨같은 상태 -8어장 35답글-
습한 거에 관련잇다
습해서 불쾌지수는 올라가는데 얘 능력 둘 다 비 올 때 점 활용도가 높음
비가 오면 바람도 씨게 불겠지는 그렇다 쳐도 습하다! 이얍 띠리찌리찌리찌리같은 느낌
아무튼 업무환경은 좋은데 기분이 나쁨같은 상태 -8어장 35답글-
(아이들한테 동물 파자마를 입혀야 한다고 하면 뭘 입을까요?)
신더는 고슴도치 잠옷을 입을 것 같습니다
신더는 고슴도치 잠옷을 입을 것 같습니다
(신더네 세계관에서 인질 강도가 출몰할 경우 히어로들이 먼저 파견되는가 경찰이 먼저 파견되는가)
보통 경찰이 먼저 출동한다
다만 아주 조금 뒤에 히어로들이 백업을 위해 은신한 상태라고 보면 된다 -10어장 859답글-
보통 경찰이 먼저 출동한다
다만 아주 조금 뒤에 히어로들이 백업을 위해 은신한 상태라고 보면 된다 -10어장 859답글-
신더 목소리 지금
신더 생일은 3월 15일 탄생화는 당근, 꽃말은 죽음도 아깝지 않으리 (포에니 전쟁이 연관검색어에 뜨고 있어)
(#자캐는_파도풀에_떠내려가는가)
호우! 제대로 놀아보자!! -12어장 478답글-
이라고 대답할듯 -13어장 356답글-
(트롤리 딜레마)
신더는 이런 상황도 개같고 선택한 나도 개같고 빡치고 합니다 -13어장 929답글-
신더는 이런 상황도 개같고 선택한 나도 개같고 빡치고 합니다 -13어장 929답글-
(#복수할_대상을_죽인_자캐_자캐는_복수대상에게_소중한_사람이_있다는_것을_알게되었다)
그의 악행을 알린다: 신더 -14어장 710답글-
그래, 내가 죽였어. 내가.
...당신이 날 죽일지 말 지는 순전히 당신 선택이지만...
...구구절절 이야기라도 하자. 당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그리고 당신은 뭘 알고 있는지. -14어장 758답글-
그래, 내가 죽였어. 내가.
...당신이 날 죽일지 말 지는 순전히 당신 선택이지만...
...구구절절 이야기라도 하자. 당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그리고 당신은 뭘 알고 있는지. -14어장 758답글-
신더는 내가 디씨 코믹스의 레드 후드를 모티브로 생각하고 있는데(몬가 많이 바뀌었다
어제 쓴 독백에서도 그게 좀 드러났다
빌런한테 뭔가 배우고 팽한게 바로 그것이였던 거시야 -15어장 35답글-
어제 쓴 독백에서도 그게 좀 드러났다
빌런한테 뭔가 배우고 팽한게 바로 그것이였던 거시야 -15어장 35답글-
(#자캐에게_소중한_것은_과거_현재_미래)
신더는 일단 미래가 확실한데 -15어장 45답글-
#자캐의_웃음은or기쁨or아픔or난처함or가식or절망or희열or버릇or강박
신더: 기쁨 아픔 난처 가식 희열
#자캐는_지원군or배신자or스파이
신더: (어) (잠깐만) (모르겠다) (스파이는 아닌데)
#자캐는_친구or선생or제자or상사or아군or적군or모르는사람으로_두기에_좋은_사람이다
신더: 모르는 사람 선호하고 모르는 사람으로 두면 드립을 쳐준다
#자캐는_찬란한광명or흔들리는빛or끝없는암흑
신더: 흔들리는 빛
#자캐는_추락이_두렵다or불가하다or익숙하다or어울린다
신더: 좀 두렵다
#자캐는_대체로_사실을_안다or모른다or모르는척한다or알린다or감춘다
신더: 알!!! 린!!! 다!!! -16어장 73답글-
신더의 모티브는 디씨 코믹스의 레드후드이다 -17어장 46답글-
신더는 톡방에서 엄청나게 장난 많이 치는 녀석이지만(선 넘으면 언제나 오너방에서 뎁주를 불러줘...)
독백에선 멋짐! 을 표방하고 있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여러분을 만나면 경계심 가득한 냉정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백에선 멋짐! 을 표방하고 있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여러분을 만나면 경계심 가득한 냉정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래실력)
신더: 잘 부른다. 내 생각에 신더는... 락보컬이야 -18어장 170답글-
(자캐에 어울리는 타로 카드)
신더-심판(말그대로) 아니면 정의(ㄹㅇ말그대로) -18어장 476답글-
(건강상태)
...어 음 풀어봤자 알렉한테 혼나는 미래밖에 상상이 안가는데 일단 멍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다 -20어장 457답글-
#자캐의_사랑해_그러니까________다음에_올_말행복해줘... 가 아닐까 둘다
신더는 내가 잠깐 자리 비워도 -21어장 174답글-
신더는 내가 잠깐 자리 비워도 -21어장 174답글-
해당 대사를 할 자캐를 골라보시오
1.이제 죽는 방법 외엔 없다
2.죽음은 언제나 나를 쳐다봤지
3.한번 죽어보는 것도 괜칞아
4.살다보면 결국 죽는거잖아?
5.싫어 난 죽고싶지 않아!
6.자 오라 죽음이여! 난 두렵지않다!
7.내 주변 사람들만 죽고 난 언제나 살아남았지
2.죽음은 언제나 나를 쳐다봤지
3.한번 죽어보는 것도 괜칞아
4.살다보면 결국 죽는거잖아?
5.싫어 난 죽고싶지 않아!
6.자 오라 죽음이여! 난 두렵지않다!
7.내 주변 사람들만 죽고 난 언제나 살아남았지
6번 -21어장 410답글-
신더 패션은... 그냥 편한 옷 위주로 입고 어두운 색감 위주로 입습니다
후드티가 기본인 것이야
감이 안 오신다면 쓰레기 버리러 갈 때 대충 챙겨입는 옷 정도의 외출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후드티가 기본인 것이야
감이 안 오신다면 쓰레기 버리러 갈 때 대충 챙겨입는 옷 정도의 외출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투하러 갈 땐 대강 보호장비 내가 어케 맞춰는 주고 싶은데(침침
정장의 경우는 와인색 아니면 카키색이다 검정 양복 뭔가 어색해서 싫어할 듯 -22어장 308답글-
격식 차려야 할 때만 자켓 베스트 다 입는 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격식 안 차리는데 굳이 입어야 할 때면... 자켓을 손에 들고 있던가 아니면 베스트 안입고 오고 그럼 -22어장 310답글-
그냥 내가 풀고 싶어서 푸는
오너가 적는 내 캐릭터 첫인상과 친해진 뒤
오너가 적는 내 캐릭터 첫인상과 친해진 뒤
첫인상: 뭐지? 아무말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나?
친해지면 현인상: 은 지금 신더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업어요 -21어장 664답글-
친해지면 현인상: 은 지금 신더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업어요 -21어장 664답글-
신더는 밧줄로 지혈할 때의 적정선을 알았다 -21어장 717답글-
(퍼스널 컬러)
가을 웜뮤트 얘 머리색이랑 주로 입는 후드색이 여기 다 있다 -23어장 242답글-
가을 웜뮤트 얘 머리색이랑 주로 입는 후드색이 여기 다 있다 -23어장 242답글-
(필살기)
신더는 일단... 뭐 딱히 필살기 이런 건 없는데( 결정적 한 수! 같은 느낌이려나
스택 다 차면 자동으로 카운터 쳐짐 겸 해서 -23어장 532답글-
신더는 일단... 뭐 딱히 필살기 이런 건 없는데( 결정적 한 수! 같은 느낌이려나
스택 다 차면 자동으로 카운터 쳐짐 겸 해서 -23어장 532답글-
(캐릭터별 자기야)
자갸. (이래놓고 눈 안마주침) -23어장 667답글-
(롤러코스터 탈 때 반응)
WAAAAAAAAAAAAAAAAAAAAAAAA!!!!!!!!! (대충 사진 찍히면 포즈의 달인) -24어장 200답글-
WAAAAAAAAAAAAAAAAAAAAAAAA!!!!!!!!! (대충 사진 찍히면 포즈의 달인) -24어장 200답글-
(미연시au)
밤에만 이벤트가 뜬다
심지어 처음 이벤트가 뜨면 호감도가 팍 깎여버림
분명 낮에는 그냥 아무말맨인데...?? 애초에 낮에 호감도가 쌓이긴 했나?? 하고 세이브로드 신공을 해 보시면
예 안 쌓였읍니다 -25어장 646답글-
밤에만 이벤트가 뜬다
심지어 처음 이벤트가 뜨면 호감도가 팍 깎여버림
분명 낮에는 그냥 아무말맨인데...?? 애초에 낮에 호감도가 쌓이긴 했나?? 하고 세이브로드 신공을 해 보시면
예 안 쌓였읍니다 -25어장 646답글-
이하 뇌절
낮: 너어는 왜 정비소 기웃거리냐. 위험한 장비 많다고 내가 몇 번 얘기해? 어, 야, 차 들어온다. 위험하다니까.
밤: 입 잘 다물고 있네. 그건 고마운데, 왜 자꾸 마주치는 걸까, 새꺄? -25어장 646답글-
낮: 너어는 왜 정비소 기웃거리냐. 위험한 장비 많다고 내가 몇 번 얘기해? 어, 야, 차 들어온다. 위험하다니까.
밤: 입 잘 다물고 있네. 그건 고마운데, 왜 자꾸 마주치는 걸까, 새꺄? -25어장 646답글-
(호그와트 기숙사)
확신의... 그리핀도르... 모자가 얹어지자마자 그리핀도르! 하고 외쳤을 듯
왠지 머글 태생일 것 같다 느낌이 그렇다
정작 뭐야 후플푸프 갈 줄 알았는데? 하고 지 혼자 머쓱해하다가 룰을 어기는 것도 용기다 핫하 하는 애들 보고 대략 정신이 멍해질 것 같다
지는 몰랐을 거야 슬리데린 점수 챙겨가는 거 보고 얼척없어서 룰을 어기자맨에 합류하게 될 줄은
퀴디치 선수도 할 것 같음 우리 애는 운동을 잘 해요
머글학 보고 띠용할 듯 하다 야 너네 머글 잘 아냐? ㅎ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확신의... 그리핀도르... 모자가 얹어지자마자 그리핀도르! 하고 외쳤을 듯
왠지 머글 태생일 것 같다 느낌이 그렇다
정작 뭐야 후플푸프 갈 줄 알았는데? 하고 지 혼자 머쓱해하다가 룰을 어기는 것도 용기다 핫하 하는 애들 보고 대략 정신이 멍해질 것 같다
지는 몰랐을 거야 슬리데린 점수 챙겨가는 거 보고 얼척없어서 룰을 어기자맨에 합류하게 될 줄은
퀴디치 선수도 할 것 같음 우리 애는 운동을 잘 해요
머글학 보고 띠용할 듯 하다 야 너네 머글 잘 아냐? ㅎ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 다 공통적으로 점술쪽은 싫어하지만 데이브는 어느 정도 잘 하는데 싫어하고 신더는 그냥 못 해+싫어+안 해-29어장 724답글-
#자캐가_부끄러울_때_가장_먼저_튀어나오는_대사
허, 뭐, 뭐어 뭐!! ...뭐. (헛기침) -29어장 563답글-
허, 뭐, 뭐어 뭐!! ...뭐. (헛기침) -29어장 563답글-
#자캐가_약해지는_유형의_사람은
본인 기준 올곧다! 싶은 사람...? 정 많은 사람이랑 -41어장 515답글-
본인 기준 올곧다! 싶은 사람...? 정 많은 사람이랑 -41어장 515답글-
#자캐가_자고_있는_모습을_서술해본다
자니...? 아빠 안잔다 -41어장 515답글-
자니...? 아빠 안잔다 -41어장 515답글-
정확히는
(어) (어...) 모르겠다 근데 얘도 같은 방에 들여놓는 사람은 양어머니가 아닌 이상에야... -41어장 559답글-
(어) (어...) 모르겠다 근데 얘도 같은 방에 들여놓는 사람은 양어머니가 아닌 이상에야... -41어장 559답글-
(손 어케생겻는지)
손가락과 손바닥이 1.3:1 정도 아닐까 싶다 핏줄이 막 드러나는 손이고 뭔가... 굳은살이 많음 -41어장 883답글-
손가락과 손바닥이 1.3:1 정도 아닐까 싶다 핏줄이 막 드러나는 손이고 뭔가... 굳은살이 많음 -41어장 883답글-
#자캐의 말중 진담과 농담의 비율
진담 5% 농담 95% -41어장 925답글-
(고백받았을 때의 반응)
그저 그런 사람일때
...왜?? (이헤못한다는표정)
...왜?? (이헤못한다는표정)
좋아하는 사람일때
(행복에 겨워서 웃으면서) 나도 좋아해.
(행복에 겨워서 웃으면서) 나도 좋아해.
싫어하는 사람일때
꺼져... -42어장 34답글-
꺼져... -42어장 34답글-
고양이상 -42어장 644답글-
나는 외양묘사같은 거... 몰라! 핫하
아무튼 신더는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을 한 친구입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냐면
자기랑 대립각 세운 사람이 불꽃 능력자고 자기는 옛날에 그 사람 동료 겸 조수(히어로의 사이드킥!) 이였는데
정작 신더가 가진 능력은... 바람이랑 전기거든요
불같이 생겼는데 불은 아닌... 어쩌다보니 캐디까지 왔군
아무튼 신더는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을 한 친구입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냐면
자기랑 대립각 세운 사람이 불꽃 능력자고 자기는 옛날에 그 사람 동료 겸 조수(히어로의 사이드킥!) 이였는데
정작 신더가 가진 능력은... 바람이랑 전기거든요
불같이 생겼는데 불은 아닌... 어쩌다보니 캐디까지 왔군
분위기는 님이 적이라면 눈빛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타는 얼음을 마주할 수 있을 것
달궈진 호박석 아래의 본성에서부터 오는 악에 대한 으; 하는 것이 으르렁거릴 것
경계할 때도 비슷하다
물론 양어머니한테는 그냥 짖궂은... 애다 쫌 무뚝뚝 제곱같이 생겼는데 틱틱거림 -43어장 73답글-
달궈진 호박석 아래의 본성에서부터 오는 악에 대한 으; 하는 것이 으르렁거릴 것
경계할 때도 비슷하다
물론 양어머니한테는 그냥 짖궂은... 애다 쫌 무뚝뚝 제곱같이 생겼는데 틱틱거림 -43어장 73답글-
죄인이 아닌 당신에게, 샛노란 눈은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확장판과도 같을 것이다. 먹을 것을 탐내지는 않는, 안온하고도 경계심 많은. 당신이 본 길고양이는 용케도 도둑질을 해 갔다면 유감이다. 그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굳이 한다면, 당신이 죄인이라면 할 것이기에. 샛노란 눈동자의 어느 정도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보면 틱틱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모양새였다. 단단한 손의 끝이 혈색이 도는 입술을 매만진다. 핏줄은 날 여기에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톡톡 드러나곤 하였다. 그래, 당신이 죄인이 아니라면 그저 한가롭게 입술을 매만지는 청년이겠지. 당신이 죄인이라면, 그를 볼 수 있을까, 본다면, 도망치는 것이 옳다. 잿더미에게 그 눈은 불씨였고, 그는 거대한 철이되 용광로에서 올라온 철이었으며, 새카만 밤에 겨우 열기를 식히는 중이였을 테니까. -43어장 169답글-
#자캐가_누군가에게_소중하다는_이유로_100명의_일반인_대신_구해졌다면
이것이 당신의 멘탈입니다(반갈죽)
수습 안된 멘탈로 선택한 사람 반죽여놓고 이런 상황 만든 원인들 조지러 간다
일이 다 끝나면... 병원 가거나 은거하거나 -43어장 464답글-
수습 안된 멘탈로 선택한 사람 반죽여놓고 이런 상황 만든 원인들 조지러 간다
일이 다 끝나면... 병원 가거나 은거하거나 -43어장 464답글-
(다들 좀비아포가 된다면 어떻게 지낼까요? 복장이라던가)
선량한 시민같은 느낌이지 음음
복장은... 약간 헤진 야상같은 거 아닐까 목티는 그나마 깔끔하고
전투보다는 어디를 가야 좋을 것 같다 하는? 내부 평화 담당 -43어장 547답글-
복장은... 약간 헤진 야상같은 거 아닐까 목티는 그나마 깔끔하고
전투보다는 어디를 가야 좋을 것 같다 하는? 내부 평화 담당 -43어장 547답글-
(여러분 캐가 판타지 세계 일원이라면?)
방랑의적 -43어장 555답글-
(캐릭터들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원래 학생 시절: 영웅은 공부따위 안한다네/친화력 max
지금...은 상상이 안된다 -43어장 670답글-
지금...은 상상이 안된다 -43어장 670답글-
7. 독백&스토리 ¶
주요 사건 목록 올리비아의 은퇴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댈러쉬 사 인수 사건(=>레드스틸 사의 급격한 성장) 히어로 집단 은퇴 및 사적제재 합법화 경찰 마약사범 사건 8월 대규모 뒷세계 폭주 사건(8월 소요 사태) 9월 대행진 10월 31일 수용소 폭발 사건(빌런 집단 탈출사태) 11월 19일 2차 수용소 폭발 사건 12월 28일 데일 로렌스 낙하 사건 12월 31일 데일 로렌스 기자 회견 2021년 1월 말 경 헌법 재판소의 판결: 총회의 해산 및 귄리 박탈, 데일 로렌스의 총장 자격 박탈 2021년 4월 경 판결: 데일 로렌스 무기징역
- 검푸른 도시
잿더미의 작은 꺼지지 않은 불꽃은
바람을 타고 일어나
들불이 된다네 들불이 된다네.
이데아. 이상적임을 위해 국호가 바뀐 나라는 그의 조국이었다. 언제 바뀌었을까, 간단히 생각해보자면 그의 동료들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그리고 드러난 이들이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는 드러나지 않았고 드러난 이들의 모든 걸 반대했지만 결과는 축출이었다.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일을 했으니 결과가 좋건 나쁘건 사람들은 환호의 연속이었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기도 하였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한 때는 그의 동료들이었으니까. 그는 드러나지 않은 이였으니, 드러난 이들의 선택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난 이들도 서로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선택을 한 걸 마지막으로 이해한 지 5년 전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5년 전에 그는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점이다. 시작은 그가 사는 곳에서, 정확히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였다. 그가 지내는 곳은 방음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고, 바깥의 대화는 주변의 소음이 없다면, 아니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들을 여력이 되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들은 이야기는 퍽 충격적이었다.
‘오늘 최대한 멋지게 당해주면 되는 거지?’
‘뭐 사람 좀 죽이게 해준다는데.’
기가 차네. 그는 짓씹었다. 바람 소리를 따라 대화 소리가 이어서 들리고, 내용은 점점 더 가관이 되어 갔다. 그가 기억하는 짧은 요약에 따르자면, 짜고 치는 판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드러난 이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도왔고, 위상과 명예는 높아졌다. 그리고 악질적인 자들도 여전히 등장하고 또다시 퇴장하는가 하면, 탈옥이라는 화려한 재데뷔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짜여진 판에 의하면, 악질적인 자들 중 일부는 순수히 악을 위해 등장하는 이들이었고, 일부는 자기 이익을 위해 등장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드러난 이들의 위상과 명예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섭외되었으며 탈옥당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범죄율이 들쑥날쑥하지만 점점 증가하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는 생각했다. 대단한 이들이 고작 시장 잡배들을 잡으면 이제 시시콜콜할 테니까.
그는 하나의 게임 같다고 느꼈다. 점점 더 강한 적이 나타나는 건 게임에선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 하면 성취감과 게임에 대한 주인공 캐릭터의 애착, 도전정신 등이 피어오르곤 하였다. 물론, 악당을 플레이어가 직접 만든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잔인한 이야기들이 샘솟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각본이 존재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그저 영화에 지나지 않을까, 전달하는 매체가 신문 같은 종류이고 지들끼리만 영화를 찍어서 문제지. 혈압이 올라서 그런지, 정비소에서 할 일을 좀 많이 했는지, 뒷목도 어깨도 뜨겁게 뭉치고 있었다. 먹먹하게 피가 막혔다가 도로 소름을 돋우며 피로와 함께 사라지고 나면 남은 것은 심장의 먹먹함 뿐이었다. 그리고 뜨겁고도 차갑게 움직이고 싶어하는 온 몸, 온 두뇌, 오롯이 그.
잿더미는 오늘도 검푸른 밤에 스스로를 흩날렸다. 자경단이란 이름의 작은 파랑새는 불어오는 바람에 희망을 실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봇대에 기대서서는, 짜여진 판의 스위치 역할을 할 자를 신호 차단하듯 억류하고, 오늘의 선물은 이렇게 생겼네요 하며 경찰에게 물어다 주는 것이었다.
그래, 거미줄을 짰다면, 천천히 태워줄게. 불은 없지만, 꺼지던 불을 살리던 게 나야.
- 폭발의 대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톡방에서 채팅을 하다가도 그 별명이 보이면 킥키거리고는 했다. 어쩔 수 없나? 그의 닉네임이기도 한 데다가, 자경단 일로 보통 12시 전에는 사라져 버렸으니. 하루 수면 시간이 6시간을 넘지 않는 사람인 만큼 꽤 어울릴 지도 모르겠어. 신데렐라의 동화에 나오는 노동량을 생각해 보았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정비소 가서 일 하고, 운동 짬내서 하고. 이런 행동 루틴이 전에도. 문득 회한에 잠기고는 한다. 이 별명을 처음 듣는 건 아니었으니까, 갈라진 동료들에게 맨 처음 들었으니까.
그의 옛 동료는 불꽃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들불이 지칠 때, 태양이 지칠 때, 그는 일으켜주기 위해서, 일으키기 위해서 옆자리를 지키기도 하였다. 잿더미에겐 불꽃은 없었으나 불을 일으킬 힘은 있었으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라고 옛날의 기억 속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렇게 놀려먹으면 그는 유쾌하게 소방관이 어디 있지, 하고 핸드폰으로 화재 신고라고 하려는 듯 자판을 두드리는 척 하였었다.
옛 추억은 미뤄넣을 때였다. 뜨거운 김이 훅 올라오는 창고는 불타고 있었다. 불이 낼름거리며 태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지도 않고 있었다. 눌어붙는 불꽃은 폭발이었나, 도착 전에 들린 괴랄한 소리는 분명히 폭발음이었으니까. 순항하는 배들이 부둣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는데.
부둣가에 전선이 있느냐면 여기 또한 전기를 쓸 공간이 존재하기에 전봇대도 있었고, 치렁치렁한 전깃줄도 있었다. 그것은 곧 의도적으로 순식간에 끊어져 서커스의 줄타기를 연상시키는 스윙을 하다가, 전봇대의 고정이 풀리고 제 몸길이를 늘린 순간 불어치는 바람에 바다로 몸을 내던졌다. 스파크가 튀는 걸 부둣가 사람들은 봤을까. 끊긴 곳엔 임시 전지를 연결해 놓았다. 아마 이걸론 안 되겠지만 말이야. 그는 바람을 타고 착지했다.
총을 든 것들은 어수선해 하기 시작했다. 배에 탄 것들은 더욱 그러했다. 배를 고장내는 게 목적이였고 전동 모터는 신명나게 말을 안 듣고 있었으니. 그리고 여기서 범인이 나타나면, 그것도 혼자, 그렇다면 저 것들은 배에서 내릴 것이다. 그래, 절반은 내릴 거라고. 너흰 항상 그랬지, 갱단들아.
주변을 느끼는 감각이 넓어진다, 정전기가 오르는 듯도 하였다. 에워싸고 있음이 분명했다. 총알이 비싸던가?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쇠와 화약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숨소리, 긴장했나 본데. 화재가 난 창고의 열풍이 갱단에게 순간 압박하듯 불어닥치자, 그는 바람을 타고 제일 가까운 녀석을 잡아챘다. 개싸움의 서막이었다.
총을 쏴 봐, 탄약은 모두 터질 테니까. 갱단들의 손에서 터져 나가는 총들은 시야를 밝혔다. 전선이 끊긴 곳에서, 빛이 사라진 곳에서 그는 빼앗은 총을 둔기로 쓰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온 무기란 애초에, 그는 혀를 찼다, 그러고서는 개머리판으로 상대의 명치를 찍어눌렀다.
조금씩 달궈지던 쇳덩이들을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하며, 그는 5명씩은 덤벼오는 것들의 갈비뼈를 날려주었다. 먼저 오는 녀석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고, 다음으로 오는 녀석에게 발로 걷어차서 내던진 다음에, 등 뒤에서 오는 것들에게 풀 스윙, 마지막으로 그를 붙잡은 것에겐 전기 충격기의 위엄을 보여주기. 간단하고 심플하게,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나가떨어지는 것들에게 묵묵히 걸어가서, 안 뛰어간 것이 적절하겠어, 다이빙하듯이 킥을 마저 내려 꽂았다. 그도 날아가고 동료를 붙잡고 있던 녀석들도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그는 즉시 중심을 잡고 저 쓰러질락 말락 하는 볼링핀 같은 것들에게 공이 되어 줄 공격을 가했다. 윈드밀 잘 도네, 다시 일어서서 총을 주워서는 개머리판으로 도끼질을 하는 건 여담이었다. 한 번만 했고 살아있다는 추가 여담도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그는 그가 가져온 무기를 꺼냈다. 섬광탄이 그들의 앞에 떨어지고 그는 눈과 귀를 막았다.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때, 그들이 인식할 수 있었던 건 개머리판의 타격이었다. 패닉상태에 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등판을 찍고 다리를 짓밟으며 그는 잡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개머리판의 먹이로 만들었다.
다른 무기 하나가 일을 하겠다고 쿵쿵거렸다. 그의 손에 플레어건이 쥐여지고, 붉은 신호탄이 하늘에 쏘아졌다.
-
“…그래서 여기에 온 사람이 누구라고 추정되십니까?”
“나도 모르겠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터져나간 총들과 고장난 배와, 화재가 난 창고들과, 그리고 제압당해 전봇대에 묶여있는 갱단들을 볼 수 있었다. 일부는 기절을 했는지 늘어진 상태였고, 대다수는 입에서 침과 피를 흘리고 있었다. 퉁퉁 부은 팔들은 두드려 맞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제압 신고가 그 사람들에게서 들어오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무런 신고도, 아무런 흔적, 아니 정확히는 흔적은 남아있었으나 그 인물이 누구인지 추측할 것이 없었다. 갱단들끼리 싸움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보는 게 옳을 만도 하지만,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는 배에 있던 밀수품들이 남아있다 못해 경찰들 눈에 잘 띄라고 신호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이데아의 영웅 중 한 명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 공을 빼앗겼단 표정이라기보단 당혹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수한 궁금증이 섞인 얼굴이었다.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째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는 동료들에게 불법 사적 제재를 하지 말고 합법적으로 하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하라는 새로운 공고문을 제안할까 생각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잿더미 같은 그늘이 진 곳에 숨어 있다가, 열풍이 들이닥친 어느 순간에 옥상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맞은 곳이 안 아플 리는 없지. 아까 몸을 던졌을 때도 그렇고, 쓸린 곳도 많았다. 오늘 붕대질 할 곳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많았다. 옥상에서 그는 과거의 동료가 경찰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제 범위에 들어온 게 저릿하게 느껴지자, 흩어지는 열풍마냥 사라졌다.
- 사이드킥
영웅도 악당도 없는 도시에 자경단은 홀로 서서 검푸른 도시를 사각사각 잘라내고 있었다. 아마 그의 눈에도, 다른 이의 눈에도, 이 일은 솔직히 하루에 한 번만 움직이는 사포 같은 짓일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어그러뜨리다 보면 언젠가는.
…사실은 이렇게 계획 없이 기약 없이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 옛 동료들은 언젠가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 자를 추적하려 들 것이다. 또는 은퇴한 영웅들을 쫓기 시작할 지도 모르겠지. 연락망을 미리 만들어 두지 않은 건 그의 실책이었다. 바쁨을 핑계로 댈 수는 없었다. 주말이 되면 휴가를 내 볼까. 음, 아니, 좀 더 미뤄도 괜찮을 것 같아. 뉴스를 보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생각해 낸 게 그거라면 난 정말 고마운데.
하긴, 옛날의 신더는 어땠더라, 전용 무기인 에어 슈터였나도 있었고, 그 때의 저는 딱히 튀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지금도 튀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제 정체성은 그러니까, 불꽃을 되살리는 것에 치중되어 있기도 했다. 아이덴티티. 그는 뉴스에 나온 이가 한 번 빼앗긴 것을 입에 담았다.
그는 영웅의 조수였다. 히어로의 사이드킥, 신더. 고단한 삶이였지. 열 두살 때부터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까. 히어로들 중 상당수가 본명과 얼굴이 까발려진 게 벌써 몇 년 전이야. 이데아라는 국호가 새로 새겨진 때와 맞먹을 것이다. 얼마 안 된 싱싱한 국호와 그 이전의 어둠을 살라먹던 이들은 이제 빛나는 어둠의 편에 서 있는 것도 같았다.
드러나지 않은 그는, 그러니까 보호받기도 한 그는, 애초에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을 필요도 없었고, 결과는 상당수의 히어로들에게 반발의 화살을 얻어맞는 것이였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 때 꺼낸 말은 그들의 입장에선 헛소리이기도 했다.
‘그럼 드러나지 않은 사람끼리 활동하면 되는 거잖아요?’
사실상 너네 은퇴해라, 이런 말이였으니 누가 달가워 했겠어. 아니, 달가워하는 이들은 전부 저와 같이 은퇴인지 축출인지를 당해버렸지. 그것도 사이드킥이, 경력은 제법 됐지만 아직 능력이 어떤 지 모르겠는, 혼자 다닐 수 있을까 싶은 녀석이. 태평해 보였으려나, 그는 킥킥거렸다. 지금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정말로 은퇴해야 했다. 후진을 양성하는 게 맞았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빌런들이 생성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는 들고 나갔던 무기들을 하나씩 정비했다. 전선을 끊어먹은 나이프는 지 스스로 타버려서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크기도 했다. 뭐, 어쩔 수 있나, 그냥 써야지 뭐. 밧줄은 밧줄, 밧줄은 밧줄. 섬광탄은 여유분이 있지만 혹시 모르니 유통 경로를 다시 알아보러 가야 겠고, 플레어 건. 그는 플레어 건을 만지작거렸다. 사이드킥 신더로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이기에 꽤 애착이 남기도 했다. 어쩌면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걸까, 그는 고민하다가, 파란 빛을 내던 게 어디 있는지 찾았다. 보통 붉은 색만 내는 것과 달리 사이드킥 신더는 푸른 빛을 내던 걸 썼으니까.
언젠가 이건 다시 쓸 일이 있겠지. 다시 집어넣었다. 마저 총기를 분해하고, 하나하나 닦아내고, 다시 조립한다. 바람 소리에 오늘은 술 취한 자들의 숨소리와 약의 기운이 느껴졌다. 뒷골목부터 가야 하나.
- 솔라리움
종잇장이 팔랑이며 가져온 소식은 신문이 아니었고 광고도 아니었다. 어느 평행세계의 나는 솔라리움을 이어받았나 보지? 그는 똑똑히 새겨진 이름을 보았다. 말투는 확실히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더였고, 솔라리움은 그의 불꽃이였다. 그가 저버렸는지 그를 저버렸는지 모를 불꽃. 항상 불꽃과 함께 다니고 산소를 연료 삼는 인간들 중 가장 산소 소비가 많을 자이기도 했다. 오죽해면 내가 끌어다 주겠냐고.
핸드폰 메모장에 여과 없이 어처구니 없음을 적었다가, 몇 분 뒤에 삭제한다. 언제 어떻게 해킹 당해서 관찰 당할 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옛 동료들의 기술력을 알았고, 때문에 톡방에서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설마 톡방까지 뜯어보겠어, 하지만 자신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다른 이들도 혹시 모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렇게 의심이 늘어난 이유가 뭐였더라. 한창 안전파와 은퇴파가 합쳐지고, 정치파와 활동파가 합쳐져서 극단적으로 언쟁을 높이다가 별안간 조용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던 무렵에, 아직 파가 그렇게 갈렸다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을 때마저, 눈치를 보며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하기 급급했다.
히어로들의 적은 원래 빌런이어야 했다. 악당. 그러나 그 시점에서 과연 그는 히어로의 사이드킥이었나, 아니면 예비 빌런이었나. 그는 적어도 그 스스로를 빌런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던진 폭언을 생각하자면 제 옛 동료들은 배신자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썼을 수도 있겠으나, 이젠 그가 그들에게 써야 할 때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히어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히어로라고 자처하는 저 동료들을, 이제는 프로파간다가 된 이들을 영웅이라고 불러줄 생각도 없었다.
여기에 있는 건 전부 악역들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도 자경단 활동을 할 뿐이었다. 그저 하나의 자율적 방범대이고 감시자지, 자신도 영웅은 아니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판을 엎은 언젠가엔 정말로, 신더라는 이름으로써 확실히 은퇴해서, 1대 솔라리움의 집 한 켠을 꿰차고 들어갈 것이다. 그녀가 은퇴 전에 약속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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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종이를 예쁘게 불로 태워버린 뒤 바깥으로 나간 그는 오늘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의 하루는 지금부터 시작이었고, 창문을 뛰어넘고 벽을 딛고 담을 넘어 옥상에 올라선 그는 가면극이 시작될 곳은 어디이고 자신이 조준점을 맞춰야 하는 곳은 어디일지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게 웬 걸, 그가 있는 옥상에 불과 5초 뒤에 예의 그 불꽃 같은 자가 도착한 것이다. 날이 아니네, 이거 참.
다만 순전히 우연일 것이다. 아니, 사실 우연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각본이라는 솜방망이로 이루어진 주먹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집에 쳐들어 올 수도 있는 총을 든 녀석들도 전부 무섭지 않았다. 제일 두려운 건 역시 일상생활이 붕괴되는 것이겠지만. 쉽게 들켜 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잿더미였으나 불 옆의 재가 아니였다. 불씨를 스스로 품고 내달리고 있었다.
옥상에 수상한 행색의 인물이 있었으니, 솔라리움은 당연히도 이를 감지했을 것이다. 꽤 거구의 체형에, 숨긴 장비라도 있는지 옷의 어느 부분은 불룩히 튀어나온 듯도 했다. 이건 예고에도, 시나리오에도 없던 사람인데. 하지만 강도라면? 보통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면 악당인 경우가 많았다. 소수의 예시가 옥탑방 거주자거나. 아니면 옥상에서 화재 진압 등의 사유가 있는 소방관이나, 무튼 선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었고, 혹은 기습을 준비하는 미친 자이기도 했다.
“…누구입니까?”
옛날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확실히, 굵어진 목소리였다. 시간의 흐름과 나이를 먹은 것이 그는 와닿은 모양이었다. 친구가 기억할 그의 목소리도 지금보다 훨씬 쨍하거나 여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친구의 목소리를 결국 기억해 냈듯이, 친구 또한 그의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건 사양인데.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언젠가 바람이 들이닥치고, 길가의 쓰레기들이 위쪽으로 암살 시도를 하듯이 뛰어들면, 시야는 좁아지고, 그 한 순간의 깜빡임에, 바람은 누군가의 길이 될 것이며, 둘 중에 하나는 옥상에서 사라져 있을 것이다. 아야, 하는 소리는 내지 않기로 했다. 착지할 때 팔 하나를 잘못 썼나. 골목길의 부산스러움은 없었으니, 이건 이거대로 골치네.
어디로 갔는지 찾기 위해 분명히 밑을 내려다 볼 것이다. 그리고 또한 뛰어내리겠지. 그는 멋진 녀석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므로 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세월을 기억하며 은밀히, 조용히, 먼지처럼, 그러다가 멀어졌다고 생각됐을 쯤에, 그의 친구는 별안간 담을 넘는 인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는 아니었다. 지나가던 시비 거는 놈 하나를 넘긴 거였으니까.
한쪽 팔이 부어오르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우선순위가 좀 달랐다. 검푸른 도시가 아침을 맞이하고 새벽공기가 서서히 데워지면 그 때, 아야. 부목은 대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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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소에 결국 며칠 휴가를 내 버렸다, 만. 오후 쯤에 톡방을 접속했을 때 소원으로 한창 시끌벅적 해 져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혹시 이것도 되느냐는 말을 했고, 그의 반깁스는 곧 용도를 잃어버렸다.
- 비가 내리는 날엔
유달리 새벽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습기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구름이 버티지 못한 채 물을 쏟아낼 날씨였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내리꽂히는 거센 빗방울은 형체를 벗어 던진 송곳이었다. 부서지는 물들은 온기 없는 솜방망이들을 묵직하게 해 주기 위하여 안개를 드리우고 발소리를 숨긴다.
빛 없는 곳의 무게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검은 쇠처럼 무거운 일들이 깃털처럼 가볍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는 빛깔에 기대 그 형태와 내용을 바꿔치기 하는 일도 흔했다. 여기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빛은, 총의 방아쇠가 당겨졌을 때의 순간의 불꽃일 것이다. 비명 소리를 흐르게들 하는.
물이 흐르는 검푸른 도시에, 안개가 걸어 들어오고 소리가 먹먹해진 이 곳에, 제일 활개칠 자 누구일까? 그는 낙뢰주의보를 보았다. 날씨가 생각보다 나쁘네. 벌써 정전이 난 모양인지 실시간 뉴스는 오늘도 깜빡이며 새 소식을 전했다. 어둠이 활개를 친다면 빛은 강제로 길을 밝히기 위해 뛰어들 것이다. 시나리오대로, 여전히, 늘.
어둑한 환경은 악역을 이끈다. 부둣가는 풍랑을 못 이겨서 비싼 밀수품을 못 가져 갈 것 같고, 그러면 오늘은 실내 갱단끼리 뭐라도 있을 것 같군. 그리고… 그는 끊긴 연락망을 수복해야겠다 싶어서 움직이던 도중에 들은 어느 악역의 이름을 기억했다. 팬텀, 가진 힘은 증기와 감각 혼란. 활개 치기 딱 좋은 때인데.
파랑새의 날개는 젖었다. 그렇다고 새는 날지 못하는가? 아니, 그것은 비가 내리고 번개가 내리칠 때에 날개를 피는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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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게 다듬어진 주먹은 물기를 머금지 않아도 가볍게, 축 처진 것들의 명치에 스스로를 명중시켰다. 지하 도박장의 마룻바닥은 유감없이 삐걱거리며 불법 행위의 대가를 알리고 있었다. 의자는 바닥이 부러울 것이다, 방금 막 다리가 부숴져 몽둥이로 변질돼서는 누군가의 뼈와 함께 순식간에 무기 역할이 송곳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연막탄을 추가로 구한 다음 이 곳에서 유감 없이 써 먹고 있었다. 그에게 시야는 살짝 차단되어도 저릿한 감각과 적들의 움직임, 호흡은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지도를 만들어 버리고는 했다. 뒤에 하나, 뒤돌아서는 반동까지 실어 상체에 한 대. 어버버거리는 놈 다리에는 운동화 발자국을 예쁘게 한 대. 마지막으로 등판을 찍어버린다. 다음.
길다란 탁상이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좀비게임이냐? 꽤 먼데, 미안하지만 충분히 대비할 정도야. 높이 도약해서 끌고 오는 것들의 목을 낚아채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뜨린다. 바로 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겐 숫제 전기 충격기가 있었으니까. 바로 옆에서 순간의 번쩍임을 보고 손을 노리는 것처럼 달려들었으나,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반대편 손엔 아직도 들고 있던 의자 다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손뼈에 타격은 갔는지 쑤신다, 주먹을 쥔 그는 피가 흐르진 않는지 살폈다. 피검사라도 하면 안 되니까. 순간의 빈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녀석에게 친히 부러진 손으로 한 대. 팔근육이 찢어지지는 않았단다. 의자를 들고 오는 녀석에게, 멱살 잡고 먹이 던지듯 줘 버린다. 마치 볼링 하는 것도 같았다. 탈출 하려다가 이미 막아놓은 걸 눈치챘는지 총기 소리가 들렸다. 멍청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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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구름만큼의 먹먹함을 가졌으나 낙뢰를 내리꽂을 수는 없었다. 다만, 사람이 죽지는 않게 할 수는 있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과하게 두드린 사람 하나의 심장에 멈추지 말라는 신호를 몇 번 주고서, 모조리 터져버린 총기들에 시선을 잠깐 주다가, 밧줄로 묶어놓을 때 총구를 입 안에 다 재갈처럼 쑤셔놓고는 사이렌이 먼 발치에서 들려오길 기다리다가는, 그 스스로 막은 문을 두드려 패서는 다시 뚫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습한 공기 사이사이로 바람이 일었다. 도시의 골목은 갇힌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통과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니까. 비명 사이에 사이렌과, 무전 소리와, 먼저 내리는 선발대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에 파묻힐 소리는 바람에 실려오곤 했다. 여긴 털었으니,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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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구두 이야기를 생각한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방금 폐공장의 천장 유리창을 깨고서 등장하는 허무맹랑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유리란 유리는 다 깨먹지 않았을까, 구두도 안 남을 것 같은데. 떨어지는 파편들에 움츠러드는 것들을 위해, 튼튼한 장갑을 끼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파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쇠 파이프를 들고 오는 녀석은 그가 특히나 웃음거리로 여기곤 했다. 맨손이면 더더욱. 아쉽게도 전부 그 만큼 지문이 드러날 걱정도 없을 장갑을 끼고 있는 것들 뿐이었다. 일단 도망가는 놈은 갈 생각도 하지 말고. 잡아챈 쇠 파이프를 얼굴에 들이박은 다음 그대로 빼앗아 멀리 던졌다. 명중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바닥엔 물이 흥건했으니까.
도망가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먼저 기절시키고자, 향하는데 발목을 잡으려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는 옛날 옛적의 에어 슈터를 생각했다. 한 방 한 방 넘어뜨리기 딱 좋았는데, 아쉬워라. 그러나 그건 그가 자진 탈퇴였는지 축출이였는지도 모를 과거에 두고 온 물건이었다. 깨진 천장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약했으나 천장 위에 자잘하게 흩어졌던 유리 조각들을 우박 삼아 시간을 버는 데엔 성공했다.
기절 안 한 놈까지 다시 얌전히 재우는 데에 성공하고, 이제 너희들이네. 뒤를 잡기엔 그의 뒤는 한산했다. 그는 다시 쇠 파이프를 잡았다. 오늘의 전기 충격기는 얘고, 오늘의 바람은 유리를 실어다 줄거야. 봉쇄가 강제로 풀린 폐공장 안은 조그마한 유리 조각때문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연막탄과 섬광탄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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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일거리가 당분간 많겠어. 유리 조각으로 난 상처를 손수 지혈해 주는 김에 꼭꼭 묶어둔 그는, 바람에 날려오는 소리들 중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한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것들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예상 외의 변수가 생긴 모양이다. 그인가? 아니, 아마도 비 오는 날에 활개를 칠 수 있는 사람, 하나 더. 그는 팬텀을 상기했다.
아마도 감각이 순간적으로 교란되어서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것보단 과거의 동료가 은퇴한 줄 알았더니 빌런으로 나타나서 화가 잔뜩 났으려나. 그렇게 되면 내 입장은 난처해 지는데. 최우선 목표가 방향을 틀어 안개 속의 난잡한 소음 사이로 향했다.
그의 힘은 약한 편이었다. 살생은 안 하는 게 좋지, 그러나 이 정도 힘은 누군가의 말로는 조무래기들을 잡기에 제격인 힘이라고들 이야기했다. 그것에 억눌려 산 지도 꽤 됐었지. 저것들이 조무래기일까, 누군가에겐 일생에 단 한 번 만날 악역 아닐까. 다 묶은 것들을 지나치며 밖으로 빠져나온 그는 저릿한 감각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것까지 왜곡시킬 수는 없지. 생체 전류가 흐르는 게 아주 잘 보였다. 감각 교란으로 순간 엇나간 다른 히어로들의 상태도. 저건 저거고, 감각은 감각이고. 보이고 느껴지는 건 알겠으나, 그 또한 아예 안 당할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저들보다 그는 공기에 예민하고 전기에 예민했을 뿐이었다. 되려 약점이 늘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자칫 잘못 하면 그 또한 아예 빌런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었으니, 해결은 가급적이면 그의 손으로 하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순간 확성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으나 실려 있는 먹먹한 감정은 안개보다 무거웠다. 어쩌면 짐승의 으르렁거림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잘못된 걸 이제 알겠어? 너희가 언제까지 옳다고 생각할 셈이야?”
아 저런. 그는 소리를 쫓아 달리다가 순간 멈췄다. 그 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말려야 했다. 그는 제 옛 동료들을 이렇게 공격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여기서까지 사상 차이가 발생할 줄은 몰랐다. 또한 옛 동료 하나를 잡으러 가는구나. 배신과 배신이 꼬리를 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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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도착했으나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에, 팬텀은 없었다. 두 세명은 감정 싸움으로 번졌던 것을 겨우 진정하고 있었고, 네 다섯 명은 빌런의 전직 히어로 네임을 짓씹으며 뒷담화 하기에 바빴다. 잿더미는 축축히 젖은 채로 골목 사이에서 그것을 듣고 있었다. 저러다가 순식간에 은퇴파들이 싸잡히겠지. 가슴 아픈 이야기야.
무거워진 옷이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딜 어떻게 다쳤더라, 일단 손뼈, 그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공구는 집을 수 있으니 내일은 또 출근할 수 있겠지. 그리고, 유리 부스러기가 언제 점퍼 사이에 들어왔는지 피부에 긁힌 자국이 생겼다. 그 위와 옆과 저 멀리엔 피멍이 들어있었다. 방어한답시고 등으로 의자를 막은 게 화근이었나.
팔뚝은 모두 무사했다. 다리는 따끔거리는 상처가 있었지만, 이제 집에 돌아가면 처치를 하고, 그러면 괜찮겠지. 그는 대화 내용을 마저 듣다가, 푹 젖은 행인처럼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치킨 수프
“솔라리움!”
그가 어느 가정집을 노크하면서 작게 소근거린 말이었다. 문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을 지 아닐 지는 그 또한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 집 안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이름은 분명히 그의 옛 동료의 이름이었다. 옥상에 나타난 이를 이미 가리킨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태양을 똑똑하고 다시 불렀다.
문이 열리면 중년의 여성이 나온다. 후드를 쓴 남자보다 키는 작았지만, 그는 일을 쉬고 있는 사람에게서 아직도 이런 기세와 박력이 나온다는 점 자체에 감탄했다. 사령관님이라고 부를까. 어울리는 호칭인데. 집에서 나온 사람은 태양을 가리키는 호칭에 눈빛도 표정도 한껏 날을 세웠다가, 여전히 작아 보이는 붉은 머리의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사이드킥이었고, 그 이전에 그녀의 양아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작은 파랑새야!”
“우왁.”
그녀는 작은 소년이 눈 앞에 나타난 날을 기억했다. 붉은 소년은 언제나 당차려고 노력했지만 그에게 부모님은 없었다. 작은 아이는 보육원에 들른 히어로들을 향해 너희가 뭔데 영웅이냐며 억울해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 아빠를 찾아주지도 못 하면서 무슨 영웅이냐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작은 아이를 그녀의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지.
그녀의 양아들은 히어로라는 직업에서 자진 탈퇴를 선언하고 사라졌다. 얼마 뒤 다시 나타나, 나는 트레이라는 성을 버리겠다고, 소리를 쳤었지. 그 이후로 연락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이렇게 나타나서는 종달새가 종알거리듯 오늘은 이랬고 어제는 저랬다며 수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파랑새, 작은 파랑새야. 아이의 머리카락은 붉었지만 희망을 가져다 주는 아이는 파랑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이제는 청년이 된 붉은 머리의 남자를 일단 반긴다는 표시로 포옹을 했지만 말이다. 찾아올 때마다 다쳐서 오니 오늘은 붕대를 어디에 했는지, 안을 때 갈비뼈라도 아픈지 아니면 옆구리에 상처가 있어서 벌어질까 봐 긴장하는지. 그걸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꽤 멀쩡했다. 그냥 일 때문에 피로가 쌓인 게 눈에 들어오는 점을 빼면, 아무 이상도 없었다. 자경단 일을 시작하고 근 몇 년 간 올 때마다 다친 상황이었는데.
“아가야, 안 다쳤니?”
“올 때마다 듣는 말이네요 올리비아. 안 다쳤어요, 아니 정확히는 다쳐서 일 쉬었더니 안 다친 거고.”
뭐? 그녀의 눈빛을 못 본체 하며 그는 제 팔을 톡톡 쳤다. 원래 진작에 다 나았지만, 그리고 또 다 나은 거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그는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이쪽 팔에 살짝, 금이 가서 말이죠.”
“어이구, 자랑이다 자랑이야!”
“자랑이죠 물론! 덕분에 그 이상 두드려 맞을 뭣도 없이 그냥 낫길 기다렸대도요.”
으이구. 그녀는, 올리비아 트레이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기어코 툭 하고 때릴 수밖에 없었다. 소리가 겨우 날 법한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가짜로 엄살을 부려볼까 싶었지만, 그는 아마 그녀가 안을 때부터 몸이 생각보다도 건강하다는 걸 알았을 터였다. 장난 쳤다간 오늘의 용건이고 뭐고 못 하게 생겼네. 그는 히죽거리며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허락은 없었으나, 기꺼움의 따뜻한 손길은 볼을 쓰다듬다 꼬집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아야! 이건 엄살 아닌데.
“그래서 아가야,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일단 으음, 버나드를 만났어요, 오랜만에.”
“저런.”
“아니 친아들 얘기에 너무 시큰둥 한 거 아니에요?”
버나드 트레이, 현직 솔라리움, 2대 솔라리움. 둘은 모두 그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한 쪽은 그의 어머니였고, 한 쪽은 그의 형제이자 파트너였다. 그는 버나드와 올리비아의 불을 잠깐 머릿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유전인가, 아니, 마냥 유전인 것은 아니었다. 올리비아의 불은 업화라고 불릴 정도로 지독할 때가 있었지만 그에겐 따뜻했는데. 버나드는, 흐음. 사이드킥으로서 붙어있으면서도 버나드의 불은 맹화였다. 그냥, 재난. 항상 스스로 방향 잡는 것이 힘들어 했었지. 올리비아는 아직 덜 다듬어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떨떠름해하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하잖니. 싸웠어?”
“아뇨. 그러면 제가 일단 화상을 입었, 아니구나 응. 그리고 으음… 터치모프가 팬텀이라는 빌런으로 나타났다는 거랑.”
세상에. 그녀가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동료가 악당을 자처하는 건 그녀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인 건 둘째 치고, 현 히어로 측의 회유로 빌런이 되었다면 소식이라도 들어갔을 텐데, 그녀의 이 반응은 그렇다면 터치모프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점이겠지. 그는 팬텀을 잡아넣을 명분이 무럭무럭 커져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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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의 종알거림이 끝난 파랑새는 자기가 짐을 꽤 가득 들고 있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내려놓지도 않고 꽤 떠들었네, 올리비아가 식탁 의자에 폭 하고 앉혀 주긴 했지만. 그는 어릴 때의 습관을 여전히 기억하며, 정확히는 몸이 기억하는 것이었지만 발을 엇갈리며 앞뒤로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말 할 게 남았다.
“올리비아, 나 오늘 저녁 먹고 싶어요. 치킨 스프. 그래서 사 온 건데 이거.”
“응? 만들어줄까?”
“나도 레시피 기억 하거든요? 같이 해서 먹자구요.”
짐을 한 가득 들고, 주방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팔이 아팠다. 그렇다고 그게 그의 걸음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 하는 소리만 내게 했을 뿐이었다. 그가 유의하지 않은 점은,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은 그의 양어머니라는 점이다. 왜 그러니? 하는 듯한 토끼눈이 된 따뜻한 눈을 바라보며 아니, 너무 오래 들고 있었나 봐요. 하고 대답한 그는 어서 주방으로 가자고 꽁알대었다.
두 사람이 들어간 주방은 그리고 한참이나 또 다시 종알거림과 투닥거림, 단란한 온화함이 넘실거렸다.
- 삼자대면-1
며칠째 비가 그치질 않는다. 습기는 빠져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바람을 이끌었고, 갇힌 물들은 안개로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밤에 자욱하게 깔린 것을 보며 붉은 머리의 청년은 문득 저것 또한 고인 물일까 생각했다. 그것도 그 어떤 물보다도 흩어지기 쉬운, 서로의 눈 앞을 가리기 급급한. 그는 옥상 위에서 먼저 비를 맞으며 먼저 물을 흘리며 먼저 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먼저 먼지를 털어내고자 젖어드는 이는 모순적이게도 잿더미라는 이름을 쓴 자였다.
붉은 머리가 후드로, 그의 얼굴이 그림자와 마스크로 가려져 어둠에 숨었다. 샛노란 눈만큼은 불씨가 튈 것처럼 순간순간 일렁였다. 어쩌면 물이 너무 들어가 충혈됐을 지도 모르는 눈을 잠깐 감았다가, 비의 냄새를 맡다가, 그는 최우선으로 둔 자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한기가 돌기 시작한 검푸른 도시의 불안함 한 방울, 히어로들의 다툼과 패배, 어그러진 무언가. 시나리오 외부에서 침입한 물방울은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바위 속의 고드름이 되겠지.
바람이 휘몰아칠 때, 옛 동료들의 흔적일 수밖에 없는 소리와 냄새가 들려올 때, 저 멀리에서 생체 전기가 주머니 속의 이어폰처럼 꼬여있을 때, 그는 옥상 위를 내달렸다. 막을 자들은 안개에 휩싸여 위를 볼 수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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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풍이 불어왔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공기는 오지 말라는 듯한 선과도 같았다. 어영부영 하고 있는 다른 히어로들이 근처에 있었고, 개중엔 원거리 공격을 시도할지 아닐지 고민하는 이들과, 추가 병력을 요구할 지 이야기하는 이들, 경찰과 상세하게 포위망을 짜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 그리고 먼저 흩어져 다른 어둠을-다른 시나리오를 해결하러 가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 포위망은 덜 짜여 있는데, 들어가기엔 시선이 너무 많다.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
순간 열풍 수준이 아닌, 말 그대로의 불바람이 일었다. 보이는 거라곤 감각 교란에 당하고 있는 자신의 불이였던 자와, 이 축축한 증기의 주인일 터인 자. 그 마저도 실루엣도 무엇도 아닌 생체 전기의 도움을 받은 한 순간의 신경계적 모습이었다. 이 불바람은 당연히 그의 불이였던 자의 것일 터였고, 지금 이 상황은 적어도 솔라리움의 계획이진 않겠다는 추측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큼지막하게 계속해서 불이 일어나면 점점 고립되니까. 그새 불이 전보다 강해졌네, 그래도 누군 안 강해졌을까, 조금 더 기다리다가 시선이 많이 줄어들면, 아니 이 쪽이 불에 가려졌구나.
여전히 불을 꿰뚫는 것은 어려웠다. 오늘은 비도 오는 데다가 바람이 수없이 들이차서 뚫고 나서도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예전에는 어땠더라, 크게 한 번 뚫으면 5분은 숨 쉬면서 바쁘게 달려야 했었나. 지금도 그러려나. 보이고 싶지 않은 화살이 되어 난입한, 또 다른 시나리오 외부의 인물은 그 화살촉을 그대로 악역에게 꽂았다.
퍼억! 육중한 타격음에 방금 전까지 승기를 잡고 있었던 자는 그 깃발을 부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거구의 남성이 육탄으로 쏘아져 내려오는 것의 힘을 이기기엔, 그 자의 특기기는 버티고 서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붉은 머리의 청년은 속으로, 이 정도면 버나드가 맞아도 누워 버릴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을 했으나, 그 버나드는 코앞에서 겨우 감각 교란에서 탈출한 채였으니.
토끼눈을 한 것이 보인다. 그 눈이 며칠 전에 본 올리비아와 똑 닮았다. 그 올리비아를 좀 더 닮을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불의 운용이라던가, 아니면 아군을 좀 더 생각한다던가, 아니면 적어도 판단력이라던가! 그녀와 함께 있다가 그의 사이드킥이 된 날 틱틱거렸던 것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망령을 우선적으로 둬야 할 때지. 토끼눈에게 그는 시선을 주지 않고 섬광탄을 꺼내 들었다.
파편이 무수하게 튀는 녀석은 아니었다, 다만 굉음과 눈 버릴 정도의 빛이 있었을 뿐. 순간적인 감각의 충격을, 팬텀은 전부 그에게 돌려버리고 싶었는지 온 감각을 휘저어 놓았다. 하나 모르는 게 있다면, 그는 꽤 밀착하고 있었고, 또한 감각의 교란에 저도 모르게 출력을 미친 듯이 올려서 전기적 자극까지 추가로 줬다는 점이다.
그는 왜 솔라리움이, 버나드가 고전했는지 알게 되었다. 출력을 낸 감각까지 헷갈리게 했어? 이 정도면 확실하게 기절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였다. 겨우 시야가 돌아왔다 싶을 쯤에, 팬텀은 아직 전기에 의해 저리는 한쪽 다리를 이끌고 버나드에게 가고 있었다. 미친, 이래서 였군. 바꿔서 말하자면 아직 과부하가 되네 어쩌네 해서 신더 그가 지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유령은 아까완 달리 꺾인 승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저린 다리를 이끌고 향한 곳은, 불의 운용은 선대보단 못 해도 육체적 능력은 솜방망이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이상은, 그는 타격음을 들었다. 어딜 친 거야, 얼굴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팬텀은 수갑에 스스로를 던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근처에 달궈진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버티고 서기에 힘을 키운 자는 아니었다. 그새 감각 교란의 시간도, 건들 수 있는 범위도 더 늘은 것을 보면. 어쩌면 오랫동안 잠적했을 때 꽤 무료하게 지냈을 지도 모르겠군. 그는 무럭무럭 몸을 키운 그 자신을 생각했다. 돌이 궤적을 그리고, 무릎 뒤쪽에 명중했을 적에, 휘청거리는 유령은 한 번 더 솔라리움의 주먹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에 한계는 있었다. 감각 교란을 방금의 후드 쓴 이에게 집중해서 쓴 탓인가. 주먹이 휘두르는 방향을 엇나가게 하는 것 외엔 제대로 맥을 못 추리겠다고, 팬텀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퍼억! 타격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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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움은 자신과 팬텀 사이에 수갑을 채웠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꽤 당연스럽게도 자신을 잡으러 올 줄 알고 도망칠 준비를 했으나, 그렇지 않아서 살짝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불을 가르고 튀어나온 자신을 떠올렸고, 아 제기랄, 하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사실상 쟤한텐 다 들킨 거잖아.
“…신더.”
“아 닥쳐.”
“그러면 ㄷ-“
“2대 솔라리움, 하지 마라.”
“…저스틴이면 되겠어?”
“넌 신더 냅두고 왜 내 본명을 나불거리려고 하는데?”
2대 솔라리움, 그의 형제, 버나드는 말이 없었다. 아니, 되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집안에서까지 사라진 형제를 이런 식으로 볼 줄은 몰랐겠지. 그 이전에, 물려받은 뒤에 기어코 이름이 드러난 버나드와, 끝끝내 어둠 속에서 잿더미처럼 존재하는 신더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판단 착오이다. 후드를 쓴 남자는 혀를 찼다. 어서 떠나야 겠어.
“…신더?”
“아니 터치모프 너는 또 왜.”
“오랜만에 봐서.”
골 때리는 상황이네 진짜. 솔라리움은 그의 친구, 그의 형제, 그의 옛 동료이자 사이드킥의 노란 눈동자가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둘은 그 아이덴티티 유출 사건에서-
“너희 둘 은퇴파 아니였어?”
“맞는데.”
그들의 본명이 드러나고, 히어로들은 몇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드러난 것을 신경쓰지 않고 활동하자는 파와, 이 영향력을 토대로 사회의 정의를 위해 본 직업을 법이나 정치 쪽으로 바꾸겠다는 파, 일단 안전을 위해서라도 활동 중지를 권유하는 파, 마지막으로 드러난 이들에게 은퇴를 권장하는 파. 점차 앞의 두 파벌과 뒤의 두 파벌은 하나로 모여 드러난 자들의 처우를 논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 끝은 전자였고, 은퇴를 바라던 이들은 모두 바라던 대로 되었지.
그는 은퇴파였고, 전 터치모프-현 팬텀인 자 역시 그러했다. 2대 솔라리움만이 활동파였다. 그리고 신입 정치인이기도 했다. 파가 하나로 합쳐졌다고 진짜로 정치 활동까지 하려고 하냐. 그는 제 친구의 여러가지에 실망을 금치 못 했다. 물론 이 다음에 말하는 말에 멍청함 하나 더.
“…둘이 아군이 아니고?”
“미쳤냐.”
“만나고 싶긴 했는데, 연락도 안 닿고, 이렇게 만날 줄도 몰랐지.”
“넌 좀.”
자기 스스로한테 능력 썼냐고 묻고 싶어졌으나, 그도 다른 이들도 슬슬 본격적으로 지칠 화두가 나올 것임을 알았다. 완전히 갈라지고 흩어진 이후로 대면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그게 누가 됐든, 은퇴파가 정말로 은퇴한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오랜만이란 말은 일단 집어치우고, 아니, 왜 활동파로 간 거야?”
그 시작은 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이해가 안 돼. 올리비아도 은퇴파를 지지했다고.”
“사실 올리비아의 아들이라서 난 네가 음, 우리랑 같은 의견일 줄 알았거든.”
“우리라고 묶지 마.”
“왜, 내가 빌런으로 등장해서?”
“넌 개 같은 놈아, 알면 좀, 왜 빌런이 된 건데.”
“이해가 안 되니 내가 쟤네들을 무찔러야지. 나한텐 이제 쟤네가 빌런이야.”
골 때린다는 표정이 팬텀을 제외한 두 명의 얼굴에 선명했다.
“넌 이해할 줄 알았어, 신더. 그런데 왜 날 잡으려고 하는 거야?”
“너 사람 죽였지.”
안개만큼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후드를 쓴 청년은 솔라리움을 바라보았다. 끄덕임을 본 그는 이어서 말하려고 했으나, 이번엔 끄덕인 이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사람은 악인이였는걸.”
“그래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거야?”
“너네가 풀어 줬잖아.”
다 알고 있었구나 너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듯 하였다.
“…안 풀어줬어.”
“풀어 줬잖아.”
“솔라리움, 그건 나도 아는 건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왜 어쩔 수 없냐고 생각하는 지 이유나 들어보자. 아니, 내가 맞춰 볼까? 이제 빌런이라고는 갱단이나 깡패들밖에 안 남아서 위대한 히어로들의 명예에 걸맞지 않아서잖아.”
“닥쳐.”
“꼬우면 하질 말았어야지.”
“너가 이 자리의 무거움을 알기나 해?”
“그럼 박차고 나오시던가.”
“어떻게 나와, 이름도 알려졌는데.”
“올리비아도 이름 알려졌는데 왜 조용히 사냐 그럼.”
“하, 너는… 너는 사이드킥이라서 모르는 거야. 너는 안 드러나서 모르는 거라고. 엄마가 대단한 거지 너한테 훈수 들을 건 아니야. 알아?”
“뭐래, 내 바람만 타던 히어로가.”
“너 진짜로 형편 없긴 했어.”
“아니 오늘 건 네가 아예 얘 감각을 망쳐놨잖아 터치모프.”
“나 그냥 너 도와줄려고 말 얹는 거야.”
“망친 당사자 입에서 나올 소리냐. 넌 애초에 왜 살인 하고 깽판치는데, 너, 너 때문에 은퇴파 싸잡힐 뻔 한 건 알고?”
“감사해하지 않을까?”
“올리비아가?”
“엄마가?”
“좋아, 너네랑 대화가 하나도 안 통한다는 건 잘 알겠어.”
“피차 마찬가지야.”
철컥, 순간의 금속 소리는 서늘했다. 총소리가 아니다, 그럼, 수갑이 열려있었다, 너, 아니, 고개를 저었고 솔라리움은 팬텀을 잡으려고 했으나, 대화하는 도중에 이미 꽤 힘을 쓸 역량이 된 건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아 제기랄! 시간 잡아먹었어!
원거리로 무언가를 하려는 틈에, 그는 제 친구에게 다시 수갑을 선물받았다. 눈빛으로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라도 잡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친 놈아. 그는 답례로 제 친구에게 기어이 전기 지짐을 선물하고서는 제 손뼈를 다시 희생하는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친 팬텀은 언젠가 잡을 것이다. 그리고 저 머저리 같은 버나드 트레이는… 보는 족족 몰래 걷어 찰 것이다. 이젠 내 정보도 다 흘리겠지. 개 같은 거. 그는 주변을 살피며 인적이 뭉치지도 않은 쪽의 불을 꿰뚫고 갔다.
검푸른 도시는 오랜만에 밝게 빛났으나, 그 빛은 붉은 머리 청년에게 있어서 저 희멀건 안개만도 못 한 것이었다.
- 삼자대면-2
그는, 붉은 머리의 남자는 대화할 당시를 생각했다. ‘너네가 풀어 줬잖아.’ 라고 하던 팬텀은 또한 그를 보고 있기도 했다. 너는 왜, 알면서도 이 연극 같은 짓에 동참하냐는 듯했다. 질책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은 그러면서도 말로는 제 말에 한 짐 더 얹어주겠다는 양 굴었으나, 방향이 갈린 이상 그리고 이해를 원하지 않는 길로 갈라진 이상은 서로가 서로를 가면극 속의 등장인물로 보는 셈이겠지. 그는 애초에 팬텀과는 목적이 달랐다. 직접적으로 히어로들에게 타격을 주고, 악인들을 척살한다는 목적은 사뭇 매력적이고 또한 극단적으로도 정의로워 보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팬텀의 생각이 이해는 가기도 했다. 누군가 잡아넣어도, 모종의 거래로 다시 나올 녀석들이기도 했다. 거미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악역들이 하나 둘씩 아예 소모되어 간다면 불안정해 질 것이다. 이걸 노리고 있다면 이해가 가긴 했으나, 그의 신조는 영웅의 우군인 것이고 또한 조수였다. 살인과 거리가 먼 이들의 협력자에서 뿌리를 뻗은 신조는 절대로 죽이지 말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도 계속, 밧줄로 묶는 김에 출혈을 막아주고 엇박자가 나기 시작하는 불길한 심장을 천천히 보듬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받아낼 것도 있고. 갱단들은 꽤 본격적으로 털었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우두머리는 크게 다치지 않게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리의 머리가 보스라면 그 손발은 부하들이었다. 수하라고 불리는 것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며 하수인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손발이 다 잘린 머리를 다시 찾아가서 불타는 거미줄의 실 끝자락을 걸쳐 둘까. 살려줬잖아, 하는 말 한마디의 위력을 그는 그가 찾아가는 무기상에게서 알 수 있기도 했다. 결국엔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 그는 뒷돈으로 빠져나온 우두머리 하나의 격렬한 거절을 뼈가 부러지는 소리 여럿으로 대체했다. 아마 팬텀에게 죽지 않을까. 이야기했으나 명예욕에 파묻힌 이의 답은 같았기 때문에.
명예욕에 파묻힌 이들은 그러고 보니, 그는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보았다. 대비를 한 지 하루가 막 지난 시점이었다. 버나드가 그를 놓친 시점에서부터 예상은 했었고, 들이닥칠 것이라는 묘한 긴장감은 그의 정비소 아르바이트를 하루 쉬게끔 만들었다. 그가 둥지를 튼 네스트 스트리트는 원체 빈 집이 많기도 했고 그만큼 범죄와 잘 맞닿아 있는 최전선에 가까웠으며, 이 작은 둥지에 갑작스러운 습격이 행해진다고 한들 도망가는 것이 더 바쁠 이들이 둥지 내린 곳이었다. 피차 잘 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웃이 다칠 일이 없다는 건 좋은 것이니까.
총 소리는 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먼저 총알 안의 화약을 긁어버렸으니까.
거창하지 않은 소리들과 대조적으로, 새된 비명소리와 흐느낌이 시작되었다. 하긴, 손이 다치는 건 좀 아프더라. 그는 수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희생된 제 손 하나를 보았다. 붕대에 칭칭 감겨서 아직도 얼음주머니에 기생하는 중이었다. 어쩌다보니 둔기 하나를 지니고 있게 되었네. 경고 사격도 필요 없어진 것들은, 곧, 어떻게 나올까.
순간 창문이 깨진다. 철문을 몸으로 어떻게 하기엔 그들은 평범한 군인이었다. 가능할 지도 모르겠는데,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쿵쿵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려왔다. 유리 파편은 이번엔 그의 적이 되어 흩어졌다, 그의 안락한 둥지에 붙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바람이 흐르는 밤에 이 유리 파편은 기회일 지도 모르지.
진입한 군인 하나는 총을 둔기로 쓰고 있었다. 중무장을 한 상태인 만큼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무식하게 달려들지 않고 대치 상황을 이끄는 것으로 보아, 저 문이 뚫리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디에 구멍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얼굴 쪽이겠지, 큼지막한 유리 조각이 군인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틈은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선공의 기회를 주었다.
제법, 단단했다, 다만, 철판이라는 점. 약하게 여러 번 나뉜 저릿함은 순식간에 군인 하나를 일어서 있지 못하게 했다. 그는 톡방에서 본 케이블 타이를 상기하며 쿵쿵 소리가 들려오는 바깥을 예의주시하는 둥 마는 둥 묶은 채 도로 밖으로 던졌다. 반송이야.
문이 개박살 날 것도 같아 문에 가까이 갔다. 정확히는 저 경칩이 슬슬 불안하게 덜컹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쓸만한 출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슴도치 가시마냥 경고의 의미는 전해졌겠지. 그리고 그는 만약에 들어먹지 않는 이들을 위한 다른 준비를 하기로 했다.
저런, 창문으로 다른 이들이 들어왔네, 유리 파편이 이번에는 군화 앞코를 꿰뚫었다. 셋인가. 그는 바닥에 놓았던 얼음주머니를 들었다. 제법 흐물해진 얼음 주머니는 전도체가 되기에 알맞은 것들 로 충만했다. 차가운 너클은 꿀렁거리며 이미 상당히 액화가 진행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복싱 장갑의 원리를 생각하면서, 아, 생각하기엔 저들이 이번엔 선공인가, 그렇다면야.
에워싸고 동시에 달려드는 이들 중 안 다친 손 쪽으로 오는 녀석에게 위협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중앙으로 오던 자에게 팔을 붙잡힐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히 했다,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으므로. 대신 그는 그 자의 신발 앞코에 있던 유리파편을 중심으로 발을 자근히 밟았다. 밀어붙임을 당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순간 밀리는 힘이 약해지자 발을 밟으며 버티고 서 있던 그는 반대쪽 발로 다친 손 쪽을 붙들던 자에게 니킥을 날렸다. 붙드는 자세가 제법 숙이고 있던 터라, 유감스럽게도 이마 쪽을 좀 친 것도 같았다.
나가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균형도 휘청거린다. 그대로 냉장고 문에 쿵, 부딪히고 말았으나, 기댈 벽이 존재한다면 아직 괜찮겠지. 억류하기 위해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려는 자들에게, 어차피 제 균형은 이제 냉장고 문에 기댄 등쪽으로 쏠렸다. 비교적 쓰기 쉬워진 다리 하나로 복부를 공격했다.
냉장고 파티는 이제 시작이지 않아? 얼음 덩어리들을 마저 손에 들고 나온 그였다. 이제 공구함 쪽으로 이동해 볼까. 때마침 현관문도 적절하게 열렸잖아. 그는 주저 없이 차가운 자연산 인공 둔기들을 머리를 향해 날렸다. 아까 부딪힌 충격으로 어지러운 감이 있었는지, 몇 개는 몸에 맞았으나, 맞춘 걸로 만족해야지. 저릿함이 다시 그의 머릿속을 일깨우고 방향 감각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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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솔라리움 그는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며 현장에 도착했다. 그가 잡으라고 지시한 사람이 전직 사이드킥이라 한들 지금은 일반인이고, 능력이 있다 한들 그보다는 약한 사람이었다. 곳곳에 터져나간 총알들의 흔적과 유리와 얼음이 뒤섞인 파편들, 피를 흘리는 군인들이 가구에 묶여있다 못해 서로서로에게 묶여있는 채 기절한 이 상황. 신분을 증명할 것들은 그가 들고 온 일종의 세입자 등록 서류 빼고는 없었다. 녹아가는 마지막 얼음조각이 서류만큼이나 황량하게 그의 언저리를 굴러다녔다.
하나 더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쪽지는 군인들이 얼기설기 옭아매 져 있는 곳 틈바구니에 껴 있었다. 구깃한 쪽지의 메모는 그가 알던 이의 필체가 아니었으나, 내용은 얄궂게도 목소리가 훤히 들릴 만큼 전에 만난 그이기도 했다. ‘엿이나 먹어, 솔라리움.’ 죽죽 줄이 그어진 곳은 분명 솔라리움 그의 본명이 들어가 있겠지. 확신했다, 손으로 만져보고 한 번 더 확신했다. 버나드라고 삐뚤빼뚤하게 쓰인 걸 그는 확인할 수 있었다. 감정적이라니까.
그는 제 사이드킥이었고 제 형제인 그가 이렇게 강해질 줄은 몰랐고, 더불어 지금 그는 팬텀과 제 형제를 동일선상에 올려 빌런으로 봐야 하는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때 그를 전기로 지져버리고 수갑에서 기어이 손을 빼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합법적 사적 제재는 솔라리움 그를 포함해 현재의 이데아 정권에 합류한 히어로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빌런일까.
팬텀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제 형제의 모습을 겹쳐 보였다. 너희가 틀리다고 주장할 것만 같은 모습이 선연했다. 예상대로, 형제는 저에게 직설적인 언어로 화를 내기도 했고. 그러나 왜 서로도 적대했으며, 왜 군인들은 전부 살아있는 걸까. 복잡한 심경은 꼬이고 꼬인다.
그는 옛날에, 형제가 처음 생긴 날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사랑받고 싶어서 온 집안을 어지르고 말썽꾸러기 짓을 하던 것도, 그리고 왜 이렇게 늦었냐면서, 기다리는 게 익숙했던 어릴 때의 저와는 달리 불안해하다 못해 울음을 참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제 나름대로 성장했고, 컸으며, 이제는 제 가치관을 그깟 게 가치관이냐고 비웃을 정도로 커버렸다. 동갑이라는 걸 매번 잊어버렸던 그는 이제야 온전히 머릿속의 우는 아이를 지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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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우는 아이는 버나드 자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활동파로 마음을 굳혔을 무렵부터 그는 제 어머니를 보러 가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는 피로 이어진 아들이니까, 아니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더 질책을 받을까 봐 오랫동안 집의 문을 보고서도 모른 척했고, 시내에 나가는 것도 살짝은 꺼려졌다. 그러나 아주 오랜만에, 이제 각오는 됐을까 하고 스스로도 의문이 들 무렵일 때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엔, 거기엔 종적을 감췄다고 생각한 제 형제가 있었다.
“…너가 왜 여기 있어?”
아마 서로 동시에 말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셋이. 다시 주춤거리면서 빠져야 할까, 아니, 아니.
우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 아이는 이미 참고 견딜 줄 알았다. 그는 강했으니까. 그는 강한 어머니의 아들이니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입양을 온 형제는 한없이 약해서, 울 줄 밖에 몰라서, 그래서 사랑을 달라고 떼를 쓰고 온갖 것으로 표현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평소에도 잘 챙기셨으나, 그 때부턴 꽤 세심해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참아야 했을까, 표현해야 했을까. 엄마, 나는. 이젠 엄마, 트레이라는 이름을 버린 쟤가 나보다 좋아? 한 순간에 우는 아이가 될 것 같은 버나드는 숨을 골랐다, 정말로, 울 것 같았고, 화가 나서. 어떻게, 왜.
“버나드, 아가야.”
모든 비난의 화살은 예의 없이 누구에게든 쏘아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따뜻한 품이 너무 그리웠다.
-
“…야.”
“뭐.”
“안, 안 다쳤네.”
“누가 보낸 군인들 덕분에 다친 게 용케 눈에 안 들어오나 봐?”
붉은 머리 남자는 제 후드 티를 쭉 올렸다. 여기 저기 멍자국 위에 새로 생긴 멍자국들이 선연했고, 한쪽 손과 손목은 당분간 휴식을 알리는 듯 꽤 전문적인 부목이 붕대와 함께 붙어있었다. 그는 그 부목 댄 손을 들이댔다.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았다.”
식사 중에 미안해요, 올리비아. 그는 먹던 것을 마저 들이킨 다음 바람을 타는 마냥 현관으로 내달렸다.
“파랑새야, 아가, 어디 가니.”
“아냐, 됐어. 지가 가겠다는데.”
“버니! 너 정말 왜 그러니, 응?”
“엄마는 그러면 왜 그러는데, 왜 나보다 쟤 편을 들어주는데, 같은 은퇴파라서 그런 거야?”
이번엔 너가 먼저 그랬어. 붉은 머리의 남자는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야, 그냥 자리 피하겠다는데 말이 심하지 않냐.”
“아가, 진정하고. 응?”
“맞잖아 엄마. 아니야?”
“올리비아는 그냥 찾아오면 오는 대로 따숩게 대해주거든?”
“거짓말 하지 마. 엄마는 내가 우선이었던 적은 있어? 나도 좀 예뻐해 달라고, 나 좀 지지해 달라고. 내가 말로 해야 하는 거냐고…”
“아니 꼬우면 진짜로 말로 표현-“
“아가야.”
올리비아는 제 아들을 감싸 안았다. 어쩔 수 없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충분히 쉬진 못 했지만, 밤에 몰래 2층으로 드나들기로 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할까. 항상 불안해 했던 그는 오늘의 일을 계기로 껄끄러움이 하나 더 늘어난 것도 같았다. 그는 애초에 트레이라는 성을 버리고 뛰쳐나갔기에 피도 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는 동료일 수도, 한참 후배를 따뜻하게 대접한 것일 수도 있을까. 입이 썼다.
“…난 진짜 너가 이해가 안 돼. 엄마가 그렇게 좋으면, 올리비아가 그렇게 좋으면.”
“넌 닥쳐. 넌, 엄마가 물려 준 솔라리움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넌 그러면 난 뭐로 생각했길래 그러는데? 올리비아가 이름만 물려줬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난 내 히어로의 뜻을 따랐고, 넌 그냥 그 이름을 더럽힌 거야.”
“내가 하는 것도 정의야.”
“존나 퍽이나 정의다.”
“…아가들, 진정하련.”
“진짜, 미안해요. 소리 지르고 그래서. 근데… 이따가 밤에 다시 올게요.”
“엄마, 나, 내가 활동파로 간 게 싫어?”
“아가야.”
“그냥 이 참에 들을래.”
“…실망은 했지, 그렇지만 너도 독립적인 선택을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한 거였어.”
“…내가 찾아온 건 그러면.”
“언제든지 오렴.”
“아들로서? 아니면 엄마의 후대로서?”
“…아니야, 내가 미안해.”
모두의 미안해가 조용히, 속삭이듯이 들릴 때 쯤에, 현관문의 종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순간 집 안에 침범했다가 도로 창문 틈으로 사라졌다. 신더는 완전히 자기가 외부자이기로 각오한 듯이 차가운 불꽃을 은은히 눈에 튀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직도 비가 오네.
- 삼자대면-3
비가 서서히 멎어간다. 완전히 멎었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온종일 거센 물방울과 마주하는 것보단 안개와 가랑비 사이를 걷는 것이 체력적으로는 좋았다. 얻어맞은 곳에 하늘의 작은 물폭탄으로 다시금 고통을 느끼는 건 슬슬 열받기도 하고. 물론, 이 안개의 근원 되는 사람, 그러니까 유난히 물가도 아닌 것이 물안개가 내내 습하게 껴 있는 것의 이유가 되는 사람, 팬텀은 아직 다쳤을 몸으로도 철창 바깥에 있겠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놓친 자를 생각했고, 저를 놓아버린 자를 생각했다. 개 같은 거. 감정을 갈며 하루하루 피곤해 하기엔 그는 적어도 하나의 확실한 목적이 있었기에, 안개 속의 누군가를 부수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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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궁금한 게 있어.”
“들어는 주겠는데.”
“왜 죽어야만 하는 것들을 죽이질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듣기엔 가치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죽어야만 하는 것들이라니. 그는 팬텀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과연 저 말의 무게는 알고 있으며 애초에 ‘죽어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일지도 궁금해졌다. 무엇인가에 골몰히 심취하면, 결국 자신과 적대하는 모든 이가 적으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어림짐작이었으나, 그 또한 저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포함되기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는 제 동료였던 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잠깐 슬픔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사실, 남아돌긴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추적에 성공하였고, 팬텀은 수중에 부하가 없었으며, 둘은 서로가 까다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로 끝내고 싶었거나 했다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여긴 적의 손아귀요 입 안이었다. 꽤 준비를 많이 한 듯한, 함정들의 조용한 쇠냄새가 이곳 저곳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이쪽도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게.”
“네 최종 목적이 뭐야?”
“설마 목적 없이 분노에 일그러진 건 아니지?”
도발, 그리고 기계의 소음, 어디지, 그는 바닥에서 들려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등 뒤와 옆 벽까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더러 지금 서커스 쇼를 하라는 거냐. 순간 벽과 바닥을 이루던 돌의 틈새로 석궁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무거운 녀석인데, 그는 혀를 차며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화살이었으면 아마 상황이 달랐겠거니 싶었으나, 급한 회피를 위해 뒤쪽으로 점프한 그는 뒤쪽 벽면이 채 열리기 전에 다시 벽을 디뎠다. 엥간히도 멀리 뛰었구나 나 자신.
함정이 열림과 동시에 벽을 딛고 한 번 더 도약, 저 녀석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고, 함정이 설치된 벽은 낮은 쪽이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 이 순간 올라온 벽에는 해당 되지 않는 사항이었는지 그는 나이프를 꺼내 버팀목 삼았다. 오늘 손목 한 번 쎄게 나가겠군. 나이프를 못처럼 박아넣은 결과였으나 도망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옆의 함정들이 마저 제 할 일을 끝낸 즉시 그는 튀어올라 퇴로로 향했다.
“복수심이면 차라리 그럴싸한 계획 좀 세우지 그랬어?”
플레어 건 한 발이 공중에 쏘아진다. 저 녀석은 감각을 오류나게 하는 녀석인 만큼, 처음부터 빗맞히려는 의도로 벽에 맞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함정을 피할 때에도 감각 교란의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찜찜함을 느끼며 그는 뒤를 계속 쫓았다.
“계획은 있었어, 그리고 그걸 너가 망쳤고!”
“난 살인자 계획은 망치는 게 취미라서.”
“정당하다는 생각은 안 해?”
“고리타분하게 되받아쳐 줄까?”
신더와 팬텀 모두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영웅일 적부터 꾸준히 강조되던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이 선을 지향한다면 어떠한 악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감정을 느껴도, 살인은 설령 그것이 실수라 하더라도 책임을 져야만 했다. 저버린 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을 봐, 살려서 다시 감옥에 보내봤자 다시 나온다고!”
“그러면 다시 보내버리면 돼.”
“힘 들여서 시간 낭비할 일이야?”
“선 넘어서 시간 단축하는 것보다 낫다 개X끼야.”
그리고 어차피 어지간히 감정 실어서 때리고 줘 패고, 몇몇…이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을 복귀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그도 나름대로 복수의 불꽃은 타고 있었으나, 팬텀의 말에 홀리진 않을 것이다.
“이해가 안 돼. 다 없애버리면 결국 쟤네들도 설치질 못 할 텐데?”
“멍청아, 그러면 새로 만들겠지, 예를 들어 은퇴한 히어로들과 협상을 한다던가.”
말문이 막히는 게 순간 들렸다. 팬텀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가 협상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은퇴파는 곧 악이라는 게 순식간에 못 박힐 걸?”
은퇴한 모든 히어로들이 꼬드김 당하고, 미래가 불분명해질 상황까지 갈 수도 있었다. 당장 빌런들을 풀어주는 것도 그렇고, 그들은 시나리오를 채워 줄 악역을 원하는 거였으니까. 그들을 선하다고 믿게 하고 정당화시킬 장치가 필요했으니까. 현상 유지가 필요했다. 그가 하는 짓도 축적되다 보면 소모를 가져올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살인보다야 훨씬 효율이 좋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계산적인 문제보다도, 인도적인 선을 넘은 제 옛 동료를 그는 이해하기 싫었다. 이런 식으로밖에 이해시킬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싫었다.
플레어 건이 기어이 팬텀의 발 근처를 맞추고, 퇴로의 출구 근처에 다다르자 다시 격발된 탄환은 불길로서 앞을 막았다.
“죽일 셈이야?”
“내가 너냐?”
“나가게 해 줘. 차라리 죽여.”
“숭고한 어쩌구 지껄일 거면 그냥 순순히 잡히시지 그래.”
불에서 나는 연기와, 팬텀이 만드는 안개가 뒤섞였다. 오 좋아, 그렇다면야. 그는 연막탄 하나를 던졌고, 매캐한 출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일어났다. 팬텀은 초조했다. 불이 일어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신더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잘못되었나,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나? 불안함에 그는 신더를 발견하자마자 지금껏 아껴두었던 모든 교란에 얽힌 힘을 퍼부었다. 내가 옳아. 내가, 옳아.
연막을 뿌린 이유는, 그가 응용할 안개의 범위나 농도가 화약으로서 조금이라도 축소되길 바래서였다. 그리고 어차피 교란이 일어날 것도 같았기에 차라리, 하는 심정이기도 했다. 예상한 바 보다 훨씬 더 꼬이는 듯한, 감각 자체가 심각하게 고장이 나는 듯한 어지러움과 두통에 그는 휘청이는 것을 숨길 수도 없었고, 심지어 능력으로 감지하는 것마저 괴이쩍게 꼬여 있어 미친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결국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도망은, 못 갈 것이다. 그는 최대 출력이던 어떻던 바람을 끌어와 불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고, 정말로 거길 뚫고 가려면 바깥이 가랑비가 아니라 폭우 수준으로 와야 하기 때문이다. 놓치지 않는다. 붕 뜬 꿈 같은 감각에 허우적거리며 일어난 그는 다시 섬광탄’들’을 꺼내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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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힘을 썼으면, 섬광탄 하나도 아니고 세 개 정도에 대응을 제대로 못 하는 게 당연하지. 그는 케이블 타이와 밧줄로 묶인 팬텀을 보았다. 진짜로 뚫고 갈려고 했는지 벌겋게 데인 부분이 보였다. 옷가지도 탄 구석이 있었고. 지금 불은 그가 어떻게든 바람으로 길을 트고 산소를 몰아낸 다음 관할 소방서에 연락한 상태이다. 경찰도 오겠지. 일반인인 척해야 겠는걸.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아 젠장, 버나드도 보인다. 그러나 팬텀은 그의 손으로 직접 경찰 손에 넘겨주고 싶었다. 틀 하나가 어긋나는 것. 그러려면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자경단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묶어두고 경찰이 오길 기다렸다가 사라지거나 아니면 경찰서 앞 어디에 아예 두고 가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 스스로가 느끼기엔 상황이 달랐다.
“ㅅ-“
“오, 솔라리움씨, 그리고 경찰 여러분, 이 사람이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길래, 좀 노력했습니다.”
신더의 ‘ㅅ’가 나오기 무섭게 칼같이 지나가는 행인 행세를 한다. 연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선량한 시민 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
“…나한테 공 주기 싫어?”
“그거 아니야, 여기 온 게 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랬을 걸.”
“아 그래. 어찌 됐거나 엄마한테 오늘은 이랬어요 하고 칭찬받을 거리는 늘은 거잖아.”
“집 구하면 이제 안 가.”
“돈 있어?”
“히어로가 지 친구한테 돈 있냐고 묻는 건 대체 어떤 인성이냐?”
돈이 있냐면 있고, 없냐면 없었다. 그의 집은 억류 상태였지만…
“…억류 풀어줄게.”
“그건 고맙네.”
돈을 좀 더 아낄 수 있다는 점은 오늘의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제 형제의 생각을 얼추 읽을 수는 있었다. 아마 집에서 빨리 내쫓고 싶은 거겠지. 그러나 이게 상호 편하다는 점엔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호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한 뒤에 혀를 찼다. 솔직히 기분은 더럽지만.
“잠깐, 너 그 정도로 권력자였어?”
“아니 엄… 부탁해 보겠다고.”
“꺼져.”
#02: 현재라는 다리
- 트라이파노
“살려줬잖아.”
이 한마디의 무게는 무거웠다. 그가 직접 내뱉는 말도, 옛 동료에게 질책당하듯이 들은 말도, 납덩이 하나만큼 무거웠고 그만큼 온갖 곳을 들쑤시게끔 하는 말이었다. 고전 문학의 1 파운드 만큼의 살덩이처럼, 심장처럼, 어쩌면 심장 자체를 내려앉게 하고 피의 온도를 달리 하게 만드는 말. 주문과도 같은 말은 방금 막 그의 입에서 쏘아져 나갔다. 용케 출소한 한 녀석에게 정보를 뜯어낼 작정이었다. 손발은 이미 다 묶인 머리에게 남은 건 기름칠 잘 된 혀밖에 없겠지.
그는 이렇게 갱단 청소를 하는 것도 하는 것이었으나, 판을 조금씩 어그러뜨리려면 탈옥을 빙자한 협의와 계약관계 안의 빌런 하나를 선수 치는 것을 원하기도 하였다. 조급한 것은 아니었으나, 끊임없이 캐내고 있는데도 새는 것이 없는 게 여간 답답하다 못해 수상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제 수족 하나 없이 사지가 묶인 머리는 가장 단단한 뼈가 괴한의 발 밑에서 짓눌리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비례하게, 공포는 무럭무럭 차올랐다.
“아, 알았어, 말 할게, 말 하면 되는 거잖아!”
“거짓이면 재미 좀 볼 줄 알고.”
-
협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탈옥으로부터 일주일 이상이 지난 뒤, 한껏 공포감 조성이 심해졌을 때, 참으로 멍청하게도 양지에 나와서 헛짓거리를 하다가 잡힐 것. 미쳤나, 지금 나온 이는 혼자서 무슨 짓거리를 할 파워는 없었다. 그가 잘 알고 있었고, 아니 애초에 올리비아와 있을 적에 같이 잡아넣은 놈이었다. 첨단 공포증에서 따온 이름. 도심의 촘촘하고 비좁은 골목길이 전부 날붙이로 변하는 해괴함. 풀밭이라도 풀이 전부 가시가 되어 버리는 위험성…
빼고는 없는 놈이기도 했다. 그는 아직 일주일이 안 지난 것을 확인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협의 내용 중에 지정된 활동 영역은 없다는 점에 기인해, 요 며칠 간 미친 듯이 뒷길을 들쑤시고 다녔다. 일주일동안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방향을 아예 잘못 잡으면 그 곳에는 꼭 아는 얼굴들이 오늘도 실패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꿔 말하자면, 그들을 마주치지 않은 날은 제법 근접했다가도 결국 놓쳤다는 말이었다. 그는 탈옥 기사가 나고 불과 하루가 지난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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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힘인 만큼, 제대로 잘 쓰려면 용의주도한 편이어야 했다. 골목길은 외려 나쁜 선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총과 약이 흐물거리는, 새카만 어둠들의 아늑한 둥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악의 둥지이기도 했을 터, 그는 새벽이 끝나갈 때쯤 번화가로 찾아갔다. 이제 막 햇빛이 검푸른 하늘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파랑새 깃털 같은 색이거니, 우두커니 바라보기엔 거리의 느낌이 평소와 달랐다. 모든 것에 날이 서 있는지 바람이 이리저리 튀는 것도 같았다. 이럴 줄 알았어.
각 진 벽돌길이야 우스꽝스러운 봉사활동이 됐겠지만 모든 사물의 모서리가 칼날처럼 변한다면 집히는 모든 게 흉기가 될 것이었다. 그는 옥상 위로 올라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디뎌야 할 것들 것 기괴하게 송곳 모양으로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 길을 택했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벽에 박아넣고 등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완력은 진작에 있었으니까. 튕겨 오르듯 옥상에 도착하면 난간의 모서리가 그의 피를 검출한다. 떽, 안 돼. 설마 해서 두꺼운 옷을 쪄 죽을 날씨에 입고 있던 게 다행이네, 그는 생각했다.
이미 거리에 한 바탕 했으니 도주로도 개판으로 해 놓은 건가. 살벌하게 날이 선 난간 하며 튀어나온 파이프는 송곳 모양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걸 보면 그가 이런 저런 걸 신경 쓰면서 쫓기엔 제약이 컸다. 핏방울이 튀어 신상이 공개되는 건, 아니 이미 들켰지만서도 말이지. 몇 개의 건물을 이미 풀쩍 뛰어 넘어오다가, 그는 시나리오 안의 악역을 주시하며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번화가에 출입금지 테이프가 신속하게 붙은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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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은 번화가에 주로 등장했지만, 득달같이 번화가를 지키고 있자 결국 노선을 튼 모양이었는지 어제부터는 나타나질 않았다. 그리고 인명 피해가 발생한 건 광장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또라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지능적일 수도. 자신을 쫓는 사람이 드러나는 걸 꺼려하는 이라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저러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유감스럽지만, 그에게는 연막탄이라는 새 친구와, 섬광탄이라는 오랜 친구가 있기도 했다. 파랑새는 자신과 다른 색의 푸른 하늘이 완전히 태양의 하얀 빛에 물들기 전에,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곳과 예측한 곳을 돌아보고 마지막 지점에 섰다.
“너지? 너가 날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커지?”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굳이 대답하자면, 친구들이 대신 대답해 줄 것이다. 핀이 따였다.
-
광장은 저 녀석에겐 분명히 불리했다. 워낙에 넓어서, 벽과 사물을 잘 이용해야 하는 저 녀석에겐 꽤 곤란한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그는 날아오는 쓰레기통 하나를 피했다. 이렇게 집기가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기도 했다만, 애석하게도 이렇게 날이 벼린 물건은 저 녀석뿐만이 아니라 그 또한 쓸 수는 있었다. 그는 오늘 꽤 튼튼한 장갑을 가져왔다. 전깃줄을 끊을 때나 사용할 멋진 녀석이라고. 원반 모양의 커터-마치 정원사들이 선호할 모양새가 된 쓰레기톤 뚜껑을 집어들었고, 바람에 태워 던졌다. 그 쪽 가지 마, 경고야.
생각해보니, 저 녀석을 상대할 때에도 그는 바람으로 주로 날아오는 것들을 견제했다. 그 때의 올리비아는 불을 내면서 열풍으로 그의 힘을 좀 더 끌어올려 주었다. 물론 불 자체가 파괴력이 있던 만큼 저 녀석한텐 확실한 견제가 되었다. 풀밭으로 가서 가시밭길을 만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의 표정을 그는 기억했다. 제법 웃겼는데.
연막이 제법 자욱하다. 굉음도 났던 만큼 사람들은 나오려던 것을 도로 멈추었다. 이제 몰아야지 않겠어, 그는 저 자가 던진 칼날들을 마주 던지며 슬슬 길을 만들고 있었다. 옆으로 틀 길을 차단하고, 묵직한 벤치를 밀어서, 다리를 맞출… 생각은 아니었지만, 광장은 상호간에 아무튼, 불안한 공간이었으니까. 심리를 안 모양인지 그 벤치를 기어이 딛고 넓은 곳으로 가려고, 자욱함을 뚫고 가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후드를 쓴 남자의 주먹이 가까이 왔을 때였다.
좁은 골목의 입구는 섬광탄 하나와 연막탄 하나로 틀어막았다.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모양인지 후드를 쓴 남자의 옷을 날붙이로 바꿔버렸으나, 삐걱이고 아린 옷따위에 신경 쓸 이도, 그 피를 신경 쓸 누군가도 잠깐 없는 상태였다. 전기 충격기를 끝으로, 이 악역은 기절하고 말았다. 뒷처리 할 연막이 아직 깔려있어서 다행이라고 후드를 벗어야만 했던 남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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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어건은 하늘을 보았다. 새빨간 몸체와 붉은 빛과는 대조적으로 아직도 새파란 하늘에 파랑새는 웃었다. 온갖 굉음과 난리에 이미 사이렌 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은밀한 자경단은 이만 사라져야겠군. 지니고 있던 밧줄로 제 몸의 상처들을 꽉 묶어버리는 미친 짓을 행한 뒤 그는 골목길에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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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움은 난처했다. 그리고 눈 앞의 사람도 충분히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돈은 돈대로 주고 계획은 계획대로 짰는데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솔라리움은 이 이상 함구해야 하나 싶었으나, 팬텀을 잡았던 그의 짓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나…
…한 가지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직 ‘팬텀을 제압한 그 시민’ 이 누구인지는 미궁에 빠져 있었다. 버나드로서는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으나, 모르는 이들 투성이인 여기에선 이 미지의 인물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이고, 마치 지나가던 시민 1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제 형제와 별개의 인물로 취급되겠지. 비교질은 더 이상 사양이다.
“데우스, 제안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제안이지, 솔라리움.”
“저번에 팬텀을 잡은 이를 기억하시겠지요, 어쩔 수 없이 이를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명예의 시민상을 준비해야 하겠군.”
-
얼마 뒤에 자신이 그 명예의 시민이라고 포상금을 얻으려는 이들이 몰렸고, 그 중에 당연히 신더는 없었다. 검푸른 도시의 잿더미는 그것이 유혹이자 미끼임을 알았으니까.
- 맴도는 것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뉴스 댓글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걸리적거리게 할 줄은 몰랐는데, 이 이후에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이었냐면, 검푸른 도시의 무거운 어둠을 일부러 헤집고 다니는 평범한 시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어두운 장막은 식별 가능성을 낮게 하고, 그것이 시뻘건 범죄들이 밤에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그가 정체를 숨기고 장막 안의 모든 것들을 헤집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찰의 이동 동선은 옛날부터 외운 바, 돌발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변수가 생기면 그의 입장에선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연막탄도 없고, 섬광탄도 어제 다 써버린 실정이었다. 모습을 감추거나 심장이 깨끗한 이들-솔직히 더러운 것들 중에서도 많이 놀란다만-을 패닉하게 만드는 데에는 요긴하게 쓰이는데, 이게 봉쇄되었다는 점이 미친 듯이 맞물려 고생하고 있었다. 준비를 일찍 하게 된 점은 그것이었다. 시민들을 미리 집에 들여놓기 위한 작업 시간.
뉴스 댓글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는 애당초 이제 더는 믿을 이가 없기도 했다. 댓글에 현재 영웅들을 힐난하는 내용이 있어 봤자, 그것은 언젠가 본인에게로 돌아올 지탄일 것이겠지. 영웅들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도가 있는 모든 이들을 일단 물어 뜯고 보는 유형의 사람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조금 붕 뜨는 것이었다. 여론을 조금이라도 뒤흔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기에, 이를 확인하는 것은 의욕에 영향을 주곤 하는 것이었다.
별개로, 시민들을 집에서 못 나오게 의도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는 않았다. 그는 오늘 벌써 세 번째로 튀어나오는 사람을 봤으니. 그는 마스크 안에서 한숨이 겉도는 것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은 아마 그 안에서 훨씬 많이 겉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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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그 조차도 예상 못한 일일 것이다. 이제 더는 뜨거운 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절은 태양에 익어갔고, 드러나면 안 된다는 신조를 지키며 꾸역꾸역 긴 팔을 입은 그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이러다가 열사병으로 쓰러지진 않겠지, 조만간 쿨팩 같은 걸 사야겠구나 하며 그는 자금 사정과 쿨팩과 연막탄과 섬광탄을 저울에 재 놓고 있었다. 냉동실에 얼음이 얼마나 있더라. 수도세는 얼마나 하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를 돌연 깨우는 것은 어느 사이렌이었다. 그것도 그가 배경음으로 듣던 사이렌이 갑작스럽게 멈추었기에.
차가 부서진 줄 알았으나, 그 차가 코앞에 있다는 것과 그 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점에서 석연찮음을 느낀 그는 곧바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경찰차의 운전자는 이봐요, 하고 부른 뒤 꽁꽁 언 얼음이 적당히 녹은 물병 하나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 경찰은 하복이었다. 이미 반팔 철인 사람이 꽁꽁 싸맨 사람을 보고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 지 후드를 쓴 남자는 실소가 나왔다.
말은 하지 않고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왜냐하면 그 경찰은, 팬텀을 잡았을 때 봤던 경찰이니까. 그 때 이미 껍데기가 벗겨질락 말락 한 것을 아예 들추라고 더 대화를 나눌 순 없었다. 잠깐의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하게 만들 만남이 지나간 후, 그는 자리를 피해 이 무거운 어둠과 대조되게도 가볍게 반짝이는 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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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종종 올리비아의, 자신의 영웅의 집 앞을 맴돌곤 했다. 노크를 하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 했다. 두려움이 가득 들어찬 손발은 하염없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 만을 허락했다. 낙엽처럼, 그저 주변에 둥지를 튼 새처럼, 어둑할 때 가로등에 보이는 작은 먼지처럼, 곁에는 죽어도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에 마주한다 하여도 그는 아마 도망칠 것이다. 더는 올리비아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제 양어머니가 자신의 표정을 보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 뭐든 간에 그는 싫었다.
그는 올리비아의 집에 창문이 꽤 있다는 점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다만 집에서 맴돌 때마다 막 치킨 수프의 향을 맡았던 것을 기억했다.
- 오른팔
이것은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는 타고 남은 재 중에서도 아직까지 숨 붙은 것을 꺼냈다. 숨 붙은 것들 중에서 가장 불을 붙여놓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것과, 이 이후에 일어났던 그 일일 것이다. 그는 그의 영웅이 은퇴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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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평범하게, 버나드와 그는 든든한 밥을 챙겨 먹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와 버나드는 소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담은 따뜻한 스튜와 길거리에서 사온 핫도그의 짭쪼름한 소시지를 입에 우물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식사 이후에 버나드는 방에 들어갔고, 그는 올리비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트레이일 적의 신더는 이제 일에 익숙해진 사이드킥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바람을 부리고, 산소를 불에 집어넣었다. 그의 영웅의 입에, 코에, 닿게 하였다. 꺼질 것 같은 생명에게 심박의 저릿함과 폐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잘 큰 어중이 떠중이들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그를 상대하려 했겠으나, 다정하면서도 혹독한 어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선배들이 있던 그에게는 어중이 떠중이를 보내면 안 되었다고 생각하게 할 심산으로, 그는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었다.
그러나 단 하나 놓친 것이 있다면, 그 스스로의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해서였다. 화약 냄새가 처음부터 진동하던 것을 그는 알았으나 지속되면 당연히 후각은 마비되고, 주변에 산재한 각종 위협과 머릿속에 울리는 민간인 구조 알림은 화약 냄새를 어느 순간 잊게 만들었다. 매캐한 연기에 그는 화재가 난 줄 알았고, 그는 그의 영웅을 믿었다. 다른 이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나가려던 때에 그는 총에서 나는 화약냄새를 맡았다. 다음 순간에, 총에서 나기엔 이 총은 총구도 달궈지지 않았고, 탄창도 비었음을 확인한 때에, 그 화약냄새의 정체를 상기한 순간은 공포에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모든 폭음과 폭발이 그에게 뛰어올 때쯤, 그는 기어코 누군가 또한 저에게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감쌌다. 그는 부디 그 누군가가 제 양어머니가 아니길 바랐고, 제 영웅이 아니길 바랐다. 사실 죽기 전에 그저 환상을 본 것이라고 바랐다. 아무 일도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영웅의 은퇴로서, 절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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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도 요리를 할 때마다 느리게 움직이는 오른팔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은퇴를 권고한 이를 기억했다. 재활에 신경 쓰면 활동 재개는 가능했으나, 그렇다면 그동안 빈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다그치던 이를 기억했다. 임시 솔라리움이 2대 솔라리움으로 어느 순간 명칭이 바뀌었던 때를 기억했다. 재는 다시금 불타고 있었다. 불꽃에게 닿지 못할 타오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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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오늘 하루 정비소의 알바생이 아니라 파랑새로서 들를 곳이 있었다. 접선 장소는 언제나 동일했다. 옛날의 둥지였고 지금도 누군가에겐 둥지일 곳이겠지. 무기상은 그녀에게 다그친 이였으며 또한 솔라리움이 2대로 바뀌자 당황해하며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따지던 이였다.
“댈러쉬 사장님, 댈러쉬 아저씨?”
“오, 그러니까…”
“…레드우드 아저씨도 계셨군요.”
이런 상황은 그에겐 익숙했다. 전 댈러쉬 무기중개사, 현 레드스틸 의학보조기구 제조사. 전 사장과 현 사장의 뒷거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었다. 레드우드는 이미 흔한 광경이라는 듯이 댈러쉬에게서 신더가 여러 가지를 제공받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 테오.”
“호칭 좀 통일하게, 아까는 레드우드 아저씨였고 지금은 또 테오인가?”
“내 멋대로 부를 거에요.”
“…그러니까,”
“저스틴?”
“저스틴, 그래. 올리비아는 괜찮아 보였나?”
“…요새도 오른쪽 팔 반응은 느리신데. 그리고, 음…”
본명이 튀어나오지 않게 재빨리 옛날 옛적부터의 별명을 입에 올린 그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레드우드는 이 청년을 알았다. 이런 행동은 보나마나,
“싸웠나?”
“나 감시해요?”
“그, 자네가 올리비아랑도 싸우고 버나드하고도 싸우고 그 다음에 올 때마다 이런 표정에 항상 이런 레파토리인 대화였지.”
“아 젠장.”
“화해는 안 한 것 같고.”
“앞으로도 아마 안 할걸요.”
“거하게 한 판 했나 본데.”
댈러쉬가 중간에 끼었다. 재미있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올리비아를 몰아붙인 사람 중에 한 명인 만큼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가 신더를 챙기는 이유는 순전히 올리비아와 사상이 같은 양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뭐 올리비아네 집으로 좀 튀었더니 버나드가 오랜만에 튀어나와서는.”
“기가 막히네.”
“대충 상상이 되네. 일단 올리비아 오른팔 이야기는 좀 더 들어도 괜찮겠나? 싸운 이야기는 뒤로 미뤄도 괜찮을 거고, 자네도 그거 받았으니까, 그거.”
레드우드는 연막탄과 섬광탄이 담긴 가방 하나를 가리켰다. 댈러쉬는 덧붙이며, 너무 과소비 하지 말라고 말했다. 등판인지 어깨인지 모를 부분을 짝, 하고 두드린 건 덤이다.
-
“언제까지 혼자 싸우게 둘 건가?”
“내 후진 양성은 아직 덜 됐는 걸 어떻게 하겠어, 나중에 이야기 해줌세.”
- 배신의 계절-1
“…그래서 팔은 어쩌다가 다쳤는가?”
“그것도 오른팔을 말이야.”
“아, 쫌.”
붉은 머리의 남자는, 아주 전에 들렀던 바로 그 건물 안에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팔이 금이 간 건에 대한 것이었다. 병원은 아니었으나, 후견인들 도움은 이럴 때 쓰는 것이랬다. 시어도어 레드우드는 혀를 차고 싶은 것을 눈으로 차고 있었고, 크레이그 댈러쉬는 오른팔에 유난히 강세를 두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도 알고 있었다, 오른팔은 그의 양어머니가 크게 다친 곳이였고, 은퇴한 결정적 계기가 된 곳이였으니까.
시어도어는 간단한 처치를 해 주었다. 사실, 병원이 아닌 것 치고는 최고 정도일 것이었다. 여긴 의료 보조 기구를 제조하는 곳이었고, 개중에는 고객 맞춤형 기구를 만들기도 할 때가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석고로 본을 뜨기도 했으니까. 지금 그는 석고로 고정된 튼튼한 깁스 위에 붕대가 둘러지는 오른팔을 보고 있었다.
“뭐 거진 의사 아니에요?”
“아닐세.”
“단호하기는.”
비죽 웃는 청년의 얼굴은 곧 웃음기를 지웠다. 그는 처치를 받을 때까지도, 어쩌다가 다쳤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입을 다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꽤나 많았다. 그저 뉴스를 기다리면 되겠거니, 시어도어는 생각했다. 그가 치는 일은 거의 항상, 그가 말하기 한참 전에 신문으로 먼저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레이그는, 오른팔을 유심히 보다가, 인상을 찌뿌리고는, 돌연 성질을 내는 것이었다.
“…이 따위로 다쳐서 온 적이 한 두 번 도 아닌데 또 입을 안 열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혀 차는 소리였다. 당신이 뭔데, 하는 듯한 험악한 표정이 지워지면, 청년의 눈에는 가시 같은 불신이 굴러다녔다. 크레이그는 말 안 하면 다음 연막탄도 섬광탄도 없을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았으나, 당신 추적해서 뜯어가겠다는 장난 섞인 칼날을 마주해야 했다. 저 다물어진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은 말 중에 하나를, 크레이그와 신더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도 그렇게 몰아붙였나 보죠?
-
다물어진 입 속에 맴도는 이야기는 주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일주일, 이주일.
탈옥한 이, 라고 쓰고, 의도적으로 탈옥이란 이름의 출소를 한 이라고 읽는 것들을 쫓았다. 스케일을 키우고 싶었는지, 이번엔 네 명이였고,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블러드 시리즈, 하고 그는 읊조렸더랬다. 네 명의 팀으로 움직였던 녀석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예전과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는 과거에 혼자가 아니였으나 지금은 혼자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 있다면, 그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마지막 하나가 있다면, 그는 이제 사이드킥이 아니라 자경단이라는 점이었다.
세 개잖아, 그는 키득거렸다. 그리고 적은, 변한 점이, 있을까! 흉기로 자리한 철의 칼날과 묵직한 철퇴가 원거리 전기 충격기로 변하는 데 까진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나, 꽤 방비를 철저하게 했는지 기절한 이는 없었다. 아, 저런, 유감스럽게도 그의 눈은 마비된 쪽이 보였다.
네 명 중 세 명. 네 명 전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리에 없는 한 명은 그들의 우두머리일 터였다. 그들이 돌아다닐 무렵에는 이렇게 돌아다니질 않았다. 우두머리인 블루 블러드는 한 명 이상을 대동하고 다녔으니까. 그는 가까이에 있는 짚이는 점들을 생각했고, 방향을 틀었다. 가까이에는 그가 기억하는 한 은퇴한 이 한 명이 살았다.
칼날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암살자 특유의 암기가 예기를 뽐내며 시퍼렇게 궤적을 그려 왔다. 바로 눈치 채는 것 봐라, 의도적으로 내가 자기들이랑 싸우길 원했나 본데. 자리 뜨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이미 근처의 CCTV와 안 친한 상태였으므로, 저들의 순전한 육감에 박수갈채를 날릴 뿐이었다. 예를 들어, 암기를 도로 주워 담아 부메랑 모양의 전기파리채로 만들어버린다던지.
벽을 딛고, 날아오는 칼날을 피하고, 놀리듯이 암기를 전서구처럼 도로 돌려보내면, 흐르는 핏물이 있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건 본인의 피였으니까. 어느새 출혈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이건 안 좋은데. 그는 출혈의 근원일 터인 하얀 복장의 양반을 쳐다보았다. 응고 막는 것 좀 봐. 혀를 차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는 탈옥한 이들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다음번엔 응급처치용 뭐라도 들고 오기로 하였다.
밧줄로 피를 틀어막는 틈에, 새카만 복장의 녀석이 올라왔다. 아, 이건 추억인걸. 그는 이 자가 다른 동료들보다 먼저 탈옥했을 무렵에 그를 끌고 와서는 손에 잡히는 집기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피에 새겨질 정도로 배우곤 했다. 배운 다음엔, 이 작자를 그대로 시험용으로 쓴 다음에, 경찰차에 손수 배달시켰더랬지. 손엔 밧줄과, 컴뱃 나이프 하나. 뒤에는 칼 든 미친놈들, 여기까진 못 오겠군. 둘 모두 다리는 저린 상태다.
아, 또 있네. 그는 대치 상태에서 돌연 떨어진 암기 하나를 선제시 했다. 발로 하나 날리고, 시야가 조금이라도 끌린 사이에, 무기에 전류를 흐르게 한 뒤에, 어이쿠. 타격은 팽팽한 밧줄로 어떻게든 저지한 뒤, 묵직한 타격음.
겁나 딴딴하네, 발로 명치를 걷어찼는데도 쓰러지지 않자 끊어질락 말락한 밧줄과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렇게 시야를 순간 흘리면, 저쪽이 들어오겠지. 자세는 순식간에 바뀌고, 들어올 만한 방향은 짚어놓았다. 나이프가 질긴 옷감을 꿰뚫고, 한 명을 거뜬히 기절시킬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흐른 피를 수습한 뒤에 걸음을 옮겼다.
미친 놈들, 암기 중에 소리를 내는 화살을 흉내낸 것도 있었나보다.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마비가 풀린 붉은 복장의 양반네가 그를 향해 들이닥쳤다. 날붙이는 사양인걸! 보호 장비라도 더 갖춰야 하나. 옆으로 틀어 피한 그는 싸움을 파하기로 했다. 이것들을 해치우는 것보다, 오늘의 우선순위는 따로 있었다.
-
“콜슨!”
이번엔 그가 들이닥치며 한 말이었다. 눈 앞의 사람은 제법 당황스러워 했으나, 혼자였다.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블루 블러드? 그는 제 몰골을 확인하며, 문을 닫고 밧줄로 마저 출혈을 막으려 하였으나, 쇳덩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오 그래, 그러시군요.”
“…그렇게 됐지.”
“배신자 양반네.”
보라색 장미꽃 한 송이가 테이블에 있었다. 뭐, 퍼플 블러드이신가? 그는 비아냥거리며 총알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탕, 총소리는 문 밖에서 난 것이었다. 매복해 있었나. 이건 탈출이 답이겠는데. 그는 콜슨이라 부른 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창문 밖으로 향했다.
-
그러니까 그 때 그 콜슨이라 부른 사람은 전 동료였다. 은퇴한 사람이었고, 그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날에 처음으로 음습함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아가리를 쳐 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시 돋친 불신이 그의 주변을 경계하란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달이 언제가 되었건 간에, 그에게 있어서 제일 추운 계절은 지금이었다. 쪄 죽을 날씨에 그는 은퇴한 이래 홀로였으나, 고드름이 자라나는 것이 확실했으니 지금은 겨울이었다. 배신의 계절이었다. 팔은 낙하할 때 유리창과 낙하 충격으로 꽤 엉망이 되었으나, 그저, 마지못해, 벽 타다 잘못 디뎠다는 말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어도어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신더는 믿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나 묻지 말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 배신의 계절-2
그는 당장 한 달 전인지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는 자발적으로 은퇴한 녀석이 빌런이 되어 돌아왔고, 이번에는 심지어 공조였다. 톡톡, 책상 두드리는 소리는 일정했으나 그는 제 동료였던 이한테 했던 말을 생각해 냈다.
‘그러면 새로 만들겠지, 예를 들어 은퇴한 히어로들과 협상을 한다던가.’
이 말이 어쩌다가 나왔느냐면, 빌런들을 죽이지 말라는 이유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감정을 동시에 흔들기 위해서 뱉은 말이었다. 그로서도 예상까지는 했던 말이었다. 예상까지만.
그로서는 원치 않는 일들이 이따위로 일어나고 있었다. 저 바로 다음에 뱉은 말이 은퇴한 자들에 대한 인식이 낭떠러지로 가는 일이 벌어질 텐데, 라는 요지의 말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은퇴한 이들에게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는 건 아예 판 밑의 말 자체를 싹 갈아엎겠다는 뜻이지 않나.
…쳐넣는다? 아니. 아니… 뉴스에 나오겠지. 이런 일을 벌였다면, 신상도 기자들이 마구잡이로 퍼뜨리겠지. 아이덴티티가 밝혀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우려했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붉은 머리의 남자의 머릿속은 가위질이 필요한 실타래같이 엉켜버렸다.
그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생겼다. 왜 그들은 팬텀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나? 그들은 이미 전향한 자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자가 간 감옥에 무엇이 있나?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를 아예 탄압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작에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은 큰 패착이었다. 아니, 그의 행적을 생각해보자. 그 자는 누구를 죽였는가? 빌런이지. 악당이고.
…히어로들을 죽이기 전에 제지시킨 게 다행이지. 복합적인 문제가 얽힌 것이려나. 그는 다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온전한 그의 추측과 그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싶은 염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히 피할 수 없겠지. ‘대외적으로 탈옥한 빌런’ 과 공조한 ‘은퇴를 주장한 히어로’.
그의 밤은 길었으나 생각해야 할 시간은 짧았다. 오래 곱씹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
“저스틴 프라이 씨!”
그의 가명이 들렸다. 본명을 감추기 위해 서류에 적은 이름은 본명과 같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명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은 그것은 본명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의 개명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오늘 만나러 온 사람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이겠지. 그의 성이 트레이일 시절의.
“…왜 온 거야? 무슨 수작으로?”
“여기선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팬텀.”
칼 같이 자르는 것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입 다물고 본명 서로 까지 말자는 표시이기도 하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가진 샛노란 눈은 면회실 안의 유리벽 너머, 팬텀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주 맹렬히 눈으로 오만가지의 무언가를 뱉어내는 것도 같았다.
“눈으로 욕 하지마.”
“안 했거든.”
물론 건너편의 팬텀이 눈으로 무언의 것을 뱉어내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기에, 초장부터 언사가 제법 거칠어 질 수밖에 없었다.
“용건이 분명히 있을 텐데.”
“있으니까 오지. 왜, 누구 다녀갔어?”
“짐작하는 대로일 걸.”
“빠르다 빨라.”
빈정거리는 웃음소리는 붉은 머리의 남자 것이었다.
“출소하냐?”
“아니.”
“…이런 면에선 참 좋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런데 그것이-“
입모양은 실제로, 를 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모두 알 것이다. 불길한 추측을 말한 당사자와 들은 당사자였으므로.
“도와달라고?”
“널 뭐 출소시키겠다는 건 아닌데.”
“최소한 우리 둘의 공동 목표는 같잖아.”
-
“잘 된 것 같나?”
“몰라요 나도.”
시어도어의 입장에서, 이 붉은 머리 청년이 갑자기 이런 위험천만한 선택을 하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들었다. 지금 그의 신분은 위조된 상태였고-저스틴 프라이라는 이름으로- 그 상태에서 자칫 잘못하면 후에 책 잡힐 수도 있는 ‘접선’같은 짓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법 떨떠름한 표정은 늘상 보는 만큼 결과를 알기에는 어려웠으나, 기다리기엔 심상치 않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더 할 애기는 없나?”
“뭘요?”
“나한테 해 줄 이야기는.”
“딱히.”
-
팬텀은 대화 내용을 기억했다.
‘난 공조하고 싶지 않아.’
‘네 맘대로 해.’
옛 동료의 또라이 같은 결백함이란. 저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음습함은 앞에 것과 이어야만 했다. 공동 목적. 개 같은 놈. 그러나 그 또한 그런 사태가 이미 일어났다면, 그리고 이미 제의를 한 번 거절한 입장으로서, 판을 뒤엎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기꺼이 변수로 나서야 할 때였다. 처음부터 변수로 등장했으니까.
‘네 정체가 뉴스에 안 까였어. 이거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냐.’
그러게나 말이다, 신더.
-
새벽녘의 하늘은 푸르스름했다. 파랑새는 하루의 할 일을 마무리하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띄는 녀석을 경찰에 친히, 얌전히 데려다 줄 계획이었는데, 그의 눈에 스쳐지나간 것은 보라색 장미꽃이었다. 이미 메마른. 제법 본격적으로 꾸미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그는 이 순간부터 보라색을 열심히 쫓기로 하였다. 아주 간단하게, 입에 달궈지지 않은 총을 들이밀고, 결백을 주장하라고 하면 되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이미 한 번 거짓을 고한 이가 그걸 못 할까. 그는 배신자 하나를 제 손아귀에 묶어놓을 생각이었다.
- 배신의 계절-3
보라색을 찾는 과정 중에, 카톡방의 알람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언젠가 새벽에 접속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막 저녁잠이 깨서 일찍 나갈 채비를 할 때 마주한 이름은 그를 5분 정도 인간 폴더폰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올 해 들어 가장 많이 웃은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근 1개월 간엔 가장 많이 웃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앞에 있는 게 자기 지인의 이름인 것이었으니까. 동명이인을 보고 그는 저녁동안 침대를 몇 번 가볍게 내리칠 수밖에 없었다.
-
조금 전으로 돌아가서, 그가 시어도어 레드우드를 만날 때로 가보자. 그는 언제나와 같이 상처 투성이였고, 크레이그 댈러쉬는 그 날 이후 도통 조용했다. 자리를 한 번 비운 걸 확인한 청년은 유난히도 연막탄과 섬광탄을 아껴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배신자가 배신자로서 접선을 마쳤을 때, 어쩌면 연막탄이 있었다면 무슨 짓이던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는 시어도어에게 오늘도 잔소리를 제법 들었고, 타박상에 대한 타박도 들었으며, 상대해야 하는 이가 누군지 알면서 밧줄로 지혈을 하느냐는 의료 보조 기구 제조사 운영자의 말도 들어야 했다. 그 때마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야트막한 상처에도 피를 빨리 빼 버리는 작자가 있는 건 그 또한 진작에 알고 있으나, 어찌 되었던 지혈은 했으니까.
“그래서 자네는 지금 이 밧줄 때문에 생긴 멍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셈이고?”
“예엡.”
괴사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그는 다음엔 좀 더 느슨하게 묶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빈혈은 왔나?”
“내가 올 위인이에요?”
“…혹사하지 말게.”
시어도어는 이 청년의 힘을 알았다. 어지러워도 바람으로 제 숨을 억지로 더 트이게 하고, 무리해서라도 생체 전기를 이용해 평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려 하겠지. 뼈가 부러졌을 땐 얌전히 쉬더니. 어쩌면 정말로 빈혈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중년의 노파심이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자네는 왜 혼자 많은 걸 하려 하는지 원.”
노파심에 꺼낸 말 하나는 공기의 분위기를 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계신데요 뭐.”
“숨기는 것도 많고 말이지.”
“아저씨는 어차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
이제 공기는 무거움을 향하고 있었다. 신더의 입꼬리엔 약간의 조소가 걸려 있었고, 시어도어는 잠깐 헛기침을 하였다. 따지고 보자면, 둘이 서로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이 대화도 굉장히 자연스러웠을 것이었다. 중년의 남자는 그저 이 청년이 의심을 한 풀 꺾어주길 바라는 바였으나, 안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 말 없는 공간은 청년의 처치 후에야 중년의 한숨 소리 하나로 채워졌다.
-
그나마 그가 시어도어를 방문하는 것은 배신자가 나왔다는 것, 그 하나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내비치느냐, 아니면 아예 연결 자체를 끊어버리느냐. 그에게 있어서 원래의 방침은 후자였으나, 양어머니에게 지속적인 의료적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으니.
게다가 그는 과거에 현직으로 지휘관이나 참모를 맡은 적이 있던 사람이었고. 중년의 양반네가 좀 더 젊을 때, 그리고 그가 한참 어릴 때를 회고하기엔 그는 오늘 보라색을 쫓기로 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카톡방의 어느 마법사가 치유 스크롤을 줬으니까. 이 꼬맹이는 왜 지 몸을 안 챙길까, 하고 매일같이 퍼런 멍을 달고 오는 이가 생각했다.
-
몸은 가뿐하고, 바람은 습기를 머금었음에도 원활했다. 비가 내리기 전후의 날씨는 언제나 먹먹하고 정적이었으니, 스치는 돌풍은 못 되어도 여름날의 봄바람은 될 수 있겠지. 먼지더미를 흩으며 일어나던 조무래기 하나는 그의 발 아래에 머리가 깔렸다. 조무래기와 그 모두 볼 수 있던 것은 보랏빛의 마른 장미. 본격적이게 살인마 같은 짓이다.
“죽기 싫지.”
이 말은 불으라는 뜻이었다. 그나 그 배신자나 이 자를 죽이지는, 아니 어쩌면 그 자는 죽일 수도 있겠구나 이젠. 장미와 함께 있던 계약서 안의 내용은 허례허식이겠지. 이 조무래기가 속한 곳은 전에도 한 무리가 무기를 밀반입하려다가 화약이 단체로 그 때문에 터져나갔더랬다. 저런. 화약이 총알 안의 것이었으면 좋겠는걸. 그는 언젠가 터져나간 창고를 기억하고 있다. 총이 돌면, 폭탄도 안 돌 리가.
“하나 더.”
어디로 갔어. 후드를 쓴 남성의 으르렁거림이 나직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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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를 하겠다니 노력이 매우 가상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그로서는 피로도가 열심히 쌓이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그 정도의 화악을 터뜨리는 건 안 건드리는 것만 못하고, 게다가 시한폭탄과 비슷하다면… 젠장. 파랑새는 내달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정말로 시한폭탄이었다. 해체하는 방법을 자세히 배우고 자시고, 그는 폭탄을 뜯어내었다. 청테이프로 붙은 걸 그는 해체할 능력은 되지는 않았으니, 그는 가까운 검푸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물안개의 고향으로. 바다로.
오늘 비가 안 내려서 다행이네, 당장에 그는 이 먹먹한 공기가 기기 작동 오류를 낼 까봐, 당장에 터질 까봐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상태였다. 비까지 내린다면 화약 자체가 젖어서 도박정도는 할 지도 모르겠으나, 폭발은 물 속에서도 일어나는 걸. 혹시라도 일어날 최악의 수는 각오해야 했다.
폭탄을 들고 다시금 날아오른 파랑새는 먼지더미를 뚫고 옥상을 내달려 가장 빠른 길을 달렸다. 광활히 트인 주제에 발길이 적어 먼지만이 황량히 그를 반겼으나 그는 발자국 몇 개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부둣가로 향했다. 한 번이라도 떨어지면 끝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바람의 끝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부둣가, 오랜만인가. 오랜만이기엔 그는 이야기되지 않은 어느 날에도 분명히 들러서, 한 차례의 공방을 벌였을 것이다. 끊어진 전기선은 이미 수복되었구나, 어차피 상관 없다. 이번엔 더 끊어야 했다.
검은 전선과 그가 가진 밧줄을 주우욱 이어서 그는 바다로 도약했다.
-
폭발에 휘말렸느냐면, 아주 조금. 충격의 여파로 인해 되려 부두와 가까워졌음을 그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여파로 속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치유 스크롤을 하나 더 쓴 건 덤이었다.
바다라, 그러고 보니. 그는 톡방을 생각했다. 그래, 그도 바다를 갔다. 간 셈이 되었다.
- 배신의 계절-4
감은 눈가에 소금 알갱이가 굴러다녔다. 모래일 수도 있고, 피로를 부정하고 싶은 스스로의 감정일 수도 있겠지. 그는 씻어낼 대로 씻어낸 고운 입자들을 고깝게 바라보았더랬다. 생각할수록 화가 들이치는 건 어쩔 수 없었더랬다. 그러나 들이쳤던 것은 바닷물이었고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일 쉬느냐의 것이었다. 일을 쉬고, 파랑새가 되어 볼까. 피로감에 푹 젖은 몸은 활력을 얻자마자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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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긴 눈 사이로 주욱 지나가는 것은 배신자의 발자국들이었다. 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자면, 새벽에 일어난 일을 제쳐 두고도, 도시에 둥지를 틀은 구더기 같은 것들과의 교류라거나. 클리셰같게도 그들은 부둣가에서 일을 자주 하곤 했다. 한동안은 여러 모로 안 오겠네.
폭발물들은 아직 남아 있을까. 화약 냄새는 어디를 향하는가. 마약들은 전부 조져 놓기는 했는데, 무엇을 위한 움직임인가. 발견한 것들 중 하나를 미끼처럼 놓아준 것은 바람을 타고 흐르는 기묘한 향을 위해서였다. 다른 걸 다 없애버리면 그것만 남으니까. 이러다가 혈중에서 발견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는 키득거리면서 눈을 떴다. 옥상을 돌아다니기에 여지없이 좋은 먹먹히도 흐린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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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이는 장소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꼭 건물 중간의 층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고층 건물의 사무실이었고, 혹은 작지만 깔끔한 아파트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항상 까다로웠으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엔 물건을 숨길 곳이 없다는 게 흠이었다. 대량으로 뭔가를 구매했다면 숨길 만한 장소는 마련했을 터.
이유 없이 매입된 주인 생긴 나무 집들의 흉흉함이란. 주인 없는 나무 집들을 지키고 있는 근육 덩어리 녀석들이란. 외곽이라고 안 올 줄 알았나 본데, 그의 거주지도 도심은 아니었다. 아끼고 아꼈던 연막탄이 달그락거렸다. 약자 붙은 것들의 냄새가 발에 채였다. 여기에 다 있진 않겠지. 없길 바래야지. 그는 화약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방금 막 떠올린 참이었다.
입구의 떡대들 위로 내려앉으면서 머리 쪽을 가격, 두 세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 곳으로 출근하자마자 퇴근 조치 당했다. 코 앞에서 급습을 본 이는 당황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좀 더 빨랐어야 했다. 사람 하나를 눕힌 그는 곧바로 다리를 노리고 회전축을 만들었거든.
넘어진 이를 들어 방패를 세웠다. 총이 얌전히 있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생각해보자면 이 사람도 가지고 있겠네. 방패와 무기가 전부 갖춰졌다. 다만 눈이 멀지 않은 총알은 심장도 머리도 노리지 않고 다리를 집요하게 노리다가, 탄약이 떨어진 걸 알림과 동시에 둔기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물론 방패도. 집어 던진 건 던진 거고, 사람 무게는 사람 무게였다. 다리를 절기 시작한 이에게 짐덩이 하나를 추가하는 건 제법 좋은 수였다. 소란에 얼기설기 뛰쳐나오는 건… 유감인걸, 설마 여기에 다 있을 줄이야. 빨강, 하양, 검정… 눈앞이 침침해지려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딱지가 겨우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으니까.
여기에 다 몰아넣진 않았을 텐데. 그는 눈을 굴렸다. 약자 붙은 게 여기 전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근방 집 몇 채에는 더 있겠지. 그럼 여기는, 먹먹한 풀떼기 냄새가 조금 나기도 하는 것 같고.
이건 이제 집요함의 싸움이겠지, 약자 붙은 것들을 망치고 싶은 자와 지키고 싶은 자들의 집요함. 칼날 하나, 두개, 그리고 암기와, 둔기와, 철의 냄새. 선두로 나서는 검은 옷을 입은 자도, 흐름 속에 침투하는 붉은 옷을 입은 칼잡이보다도, 그는 먼저 이 피를 멎게 할 하얀 옷의 작자를 잡아야 했다. 연막탄 하나, 흐린 날의 어둠 하나.
생체 전류로도 구분은 가능한 입장에서 유감없이 그는 암기를 던지는 이에게로 향했다. 마주하면 칼을 빼드는 것은 같았고, 그의 나이프보다야 당연히 길이는 길었다.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공포스러운 장면이긴 한 데다가, 능히 다루는 이였다. 일단 저번에 마주했을 때의 암기 되돌려 주기로 페이크를 주자.
스파크가 반짝여도 감전은 안 당하는구만, 혀 차는 소리는 하얀 옷의 누군가 근처에서 들렸다. 뚝뚝 떨어지는 피와 함께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그가 이 길다란 검에 칼등이 있음을 알아차린 뒤에는 붉은 옷의 칼잡이가 오고 있기도 하였다. 하여튼 까다로워.
샌드위치가 될 위기를 뒤로 빠짐으로써 무마하고, 연막이 깔린 틈에 화약을 보러 갈까 하였으나 검은 옷의 구면인 사이가 길을 가로 막았다. 가로 막은 수준이 아니라 도주 각을 보려다 홱 하고 잡혀버린 것도 있었다.
잡혔을 때의 룰은, 첫번째로 일단 자신의 뒷머리까지 무기로 활용할 것. 안면과 가깝다는 느낌이 숨결을 통해 느껴지자 곧바로 그는 고개를 움직였다. 얼얼함은 상호 느꼈겠지. 그 틈에, 두번째로 저항하기. 항상 이럴 때 느슨해지더라.
시야가 어두웠다. 이 양반이 왜 블랙 블러드겠어. 암전된 시야에서도 그는 마지막 단계를 행한다. 손에는 이미 저항을 위한 단검이 들려 있었으므로, 절연제인 옷을 꿰뚫고 저번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절시키기. 암전은 전기 충격기와 함께 풀렸다. 유감스러워라.
이 자가 들고 있던 둔기 하나를 손에 얻었다. 좋아, 나도 이제 쌍수네. 붉은 옷을 입은 칼잡이가 다시 난입해 왔고, 쇳소리는 다시금 들렸다. 묵직한 둔기로 칼날을 막는 틈에 하얀 옷의 암살자는 암기로서 난입해왔다. 힘을 싣는 방향을 급작스럽게 바꾸면, 위치는 순식간에 틀어지고 그 암기 중에 하나는 눈 앞의 칼잡이에게로 향했겠지.
그리고 휘청이는 걸 보자면, 후드를 쓴 남자는 제 남은 한 손의 단검을 보태어 기어코 칼잡이의 팔과 손에 피를 내고 마는 것이었다. 칼을 못 쓰게 떨어뜨리는 건 당연한 처사였고. 격투 잘 하게 생겼네, 뻗어오는 공격을 아슬하게 피하며 그는 바람을 흩어놓았다. 암기 하나는 저 쪽으로 향할 것이다.
이 핏방울 중에 하나는 그의 것일 거고 다른 하나는 이 작자 것이겠지. 두 개째, 휘청임이 다시 일면, 그는 명치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저 검은 옷 입은 자보다 이 자는 상대적으로 방패로 쓰기 적절했기에, 그는 이를 끌고 갔다. 암기는 날아오지 않았으나, 발자국 소리는 겁이 없어진 뱀처럼 득달같았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면서 자국을 남기고 있었으나, 섞이고 있었다. 모 아니면 도,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폭발이 일어나면 지워질 범위이다. 어렵게 고지대로 올라가려 하였으나 하얀 옷의 암살자는 기어이 칼을 다시 빼들었다. 왜 칼이야, 칼.
그리고 대치 상황, 인질극과도 같았으나, 저 자는 그가 칼잡이에게 이 이상의 손을 쓰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 옷의 암살자는 대치 상황을 깨고 칼날과 함께 들이대었고, 후드를 쓴 남자는 치유 스크롤이 몇 개나 남았는지 생각하기로 하였다.
칼날과 칼날끼리 무력하게 부딪혔다, 그의 단검은 실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플레어건은 재빠르게 그의 손에 잡혔고, 날을 향해 겨누어 쐈다.
도검은 이제 없었다. 도망을 추구하는 이와 잡으려는 이밖에 없었다. 인질로 잡은 이를 끌고 다시금 고지대로 올라가면, 이제 다시 암기가 그의 팔다리를 노리고는 하는 것이었다. 이게 하이라이트지. 그들이 복귀했을 때, 배신자와 접선할 때를 그들은 복기했어야 했다. 그는 이 인질 몸에 박힌 팀킬의 흔적과 오는 암기들을 죄 돌려주었다. 방향은 날린 곳이 아니었다. 전류가 반짝였다.
폭음이 일었다.
-
그는 오늘도 응급처치를 밧줄로 해야 함에 꽤 절망했다. 멀리서 지켜본 바, 피를 흘리는 붉은 옷의 칼잡이는 살았고, 하얀 옷의 암살자는 검은 옷의 구면인 작자를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가 급습하고 그들이 지키고 있던 곳은 화약이 없이 마약만 있던 곳이어서, 그리고 그가 지근거리에 있던 두 채의 화약고를 터뜨리지는 않아서.
모든 게 수습될 쯤에, 그러니까 여기에 배치된 인물들이 도주를 택했을 쯤에 그는 남은 것들을 전부 날려버렸다. 주운 암기의 주인은 손쉽게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핏자국은 지워진 지 오래였고, 이 일은 악역들의 소행이 될 것이지.
-
그래서 그는 도주하는 이들을 잡으러 갔느냐면, 그렇다. 급히 도착한 어울리지 않는 리무진을 쫓아 그는 다시 먼지더미를 헤치고 날아 올랐고, 그 놈의 처치곤란인 건물 중간에 끼워둔, 젠가였으면 뽑아버리고 싶은 사무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사이렌 소리. 우당탕 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이 사이렌 소리는 거짓이었다. 제법 동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튀어나오는 이 중에 제일 익숙한 한 명을 잡아챘고,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렇다고 둔화를 나한테 걸어요? 아니, 저 작자들한테 거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대답은 못 하겠네. 플레어건을 배신자의 입에 들쑤신 그는 혀를 찼다. 조용히 있으라는 표시와 함께, 그는 이 자를 들고 상황을 빠져나가며, 경찰을 불렀다. 진짜 사이렌 소리가 오기 전에 간단히 정보를 주워간 것은 덤이었다.
#04: 방문자들
- 질의응답
“레드우드, 대체 당신은 왜…”
“내가 낄 줄 몰랐나, 아니면 뭘 상상한 건가?”
“제일 먼저 협력자가 된 줄 알았는데.”
“사람 보는 눈이 왜 이렇게 삐뚤어진 게야.”
배신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댈러쉬의 매각과 동시에 레드스틸이 그 자리를 전부 차지한 데다가, 현 히어로들이 정계에 진출한 시기와 맞물리게 일이 진행되었으니까. 추측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엇나가는 결과였다. 순전히 사장과 사장간의 거래였으니까.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아니, 이 질문은 주인이 따로 있지.”
“하.”
“그 주인 왔어요 이 양반네들아.”
붉은 머리의 청년이 때마침 끼어들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눈 것 자체에 상당히 불만스러웠는지, 둘 중 어느 누구를 봐도 흘겨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왜 흘겨보나?”
“녹음 했어요?”
“했다만?”
“그럼 됐구요.”
회사에 이런 공간도 있어요? 하고 중얼거리면 급조했다네, 하고 대답하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레드스틸의 사장인 시어도어 레드우드와 옆에 앉은 붉은 머리의 남자, 저스틴 프라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
“좋아, 도노반 콜슨 씨. 나는 지금 매우 꼽고, 댁이 왜 배신했는지부터 알아볼 계획이거든요?”
“…본명으로 부를 줄은 몰랐는걸.”
“내가 배신한 양반을 옛 이름으로 불러줘야 하나? 신념도 알아서 꺾어버린 양반아.”
붉은 머리의 남자는 턱을 괸 채 응시하고 있었다. 필히 그가 심문을 받는 입장이었다면 불량한 태도라고 지적 이상의 것을 받을 테지만, 그는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돈?”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면 청년은 당장이라도 이 간이로 이루어진 집기들을 걷어 차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생활고는 사람의 내면을 파먹기 마련이었으니까. 내쫓은 것들에게 모든 분노가 돌아가게 방향을 다시금 틀었다. 잘 되길 바래야지, 내 핸들.
“그거 내가 다 날렸는데 퍽 기분 좋겠어요?”
“그 폭발 사고 자네 짓이였나?”
“아뇨, 화이트 블러드가 했는데요 표면적으로는.”
“…너 언제부터 그렇게 머리 잘 굴렸어?”
“엎으려면 기민해져야지 이 양반아.”
낄낄거리는 소리는 분명히 청년 것이었다. 레드우드는 잘 키운 제자를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고, 한 가득 표정에 쓴 것을 담은 것은 콜슨이라 불린 자였다.
“경찰에 넘길 줄 알았는데.”
“내가 순순히 넘길까 봐? 한 행적을 무슨 이렇게 많이 남겨 놨어?”
“그건 시킨 거야.”
“치고는 정성 들인 표식이던데, 퍼플 블러드? 바이올렛? 뭐?”
탁자에 던져지는 것은 콜슨이라 불린 자가 그동안 뿌려 놓은 마른 보라색 장미였다.
“계획을 보자… 이야, 난 높은 사람들 파티 하는 것도 몰랐네?”
“그건 처음 보는 일정표군.”
“아저씨 높은 사람이에요?”
“…음. 파티 초대는 받은 적 없지.”
그 일정표는 왜 들어가 있는거야, 하고 중얼거리는 콜슨을 뒤로 한 채 자기들끼리 잠깐의 만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폭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청년이 단호히 말을 끊어내면서 다시 심문으로 돌입할 수 있었다.
-
“당신이 잡히면 당연히 은퇴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니까.”
“입 닥치고 있던가, 아니면 이제 나한테 좀 협력하지.”
-
화약고를 근절하는 방법? 그에겐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 하나가 있었다. 빌런들이 풀린 이후부터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갱단들, 밀항해서 오기로 한 마피아들… 전부 정리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 단면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의 노란 눈만큼이나 노랗게 빛나는 메시지를 보았다. 안전에 주의하라는 메시지 여럿 사이에 끼인 자신이 보낸 것, 정비소 사장님에게 보낸 것. 그는 보낸 이후 며칠째 답장도 없는 것을 보고, 칼같이 들어온 반 달 치 월급을 확인한 뒤, 잘렸음을 확인했다. 당분간 죽어 있어야겠군.
사실상 통보식으로 휴가를 받으려던 대가였다. 차라리 잘 된 셈이 아닐까. 덕분에 그는 대낮부터 이뤄지는 일들을 즉석에서 구경하고, 경찰을 불러봤다가, 경찰들 중에 누군가가 한 개비를 나눠 피는 걸 보게 되었으니까. 경찰 폭행은 무겁다.
“어, 전에 그.”
이건 또 뭐야, 하고 청년이 뒤를 돌아보면, 경찰차의 구도 하며 뻗는 손 하며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밤에 물병을 던져 준 이였나? 새카만 어둠이 드리운 수많은 나날들 속에서 가로등처럼 밝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어려운가 쉬운가.
확실한 건, 그를 부른 이는 경찰이라는 것이었고, 저 골목에 신나게 일에 담긴 사명감을 태워 먹고 있는 다른 경찰이 있다는 점이었다. 불렀으니 그는 다가갔고 열린 창을 향해 시선을 마저 주기 무섭게 얼굴이 튀어나온다.
“낮에도 보는군요!”
“아 예.”
이 경찰이 팬텀 제압 때의 그 경찰이라는 걸 그는 상기했다. 이 번으로 세 번째였나? 그는 혹여라도 더 눈길을 받지 않도록, 그 밤에 만난 이후 이 길을 피해 오긴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만났는지는 거미줄 같은 골목길에서 툭 튀어나온 그의 탓일 것이었다.
“…실례지만 저 골목 안에 잡범이 좀 있습니다만.”
“아, 예, 신고가 접수돼서 동료랑 같이 왔지요. 지금 동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
말을 흐리는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서 경찰은 낌새를 느낀 듯했다. 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문을 열고 나온 경찰은 제 총에 실탄과 공포탄을 확인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는 정직함이 깃들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능숙함에는 못 미친다는 각 맞는 행동이었다.
경찰은 골목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에 언쟁이 일었다. 아마도 한 개비를 권유 받았는가 보다, 청년은 생각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는 했고, 사람들이 어쩌면 몰릴 수도 있겠고, 다투는 소리도 나고. 그는 다른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경찰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바람에 다급한 발소리가 실려왔다. 한 개비, 두 개비, 피운 녀석들의 생체 전류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둘로 나뉘었으면 얼마나 좋아, 한 녀석 금방 제압하고 다른 녀석 뒤를 밟아서, 아니, 아직 낮이기는 했다. 위치 파악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취한 녀석들이 무서운 점은, 가감이라고 할 것 없이 달려든다는 것이다. 아프긴 한지도 물어보고 싶고. 소란이라도 크게 일면 성가시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자기네들도 쫄리는지 CCTV 없는 곳으로 알아서 기어 들어갔다는 점이다. 사각지대를 골라 발을 딛던 청년에겐 더 넓은 곳을 활보하게 될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지에 몰린 두 명의 취한 자들은, 기어이 구석의 각목을 쥐었다. 쥐는 폼, 엉성하고, 뒤쫓고 자시고 해봤자 그냥 머저리일 가능성이 높나. 한 놈은 제법 자세를 잡는다. 아닐 수도. 부웅! 먹먹한 공기를 마른 나무덩이가 가르며 달려들었다.
엉성한 스윙에 단 한 가지 장점은 사거리가 길다는 것, 그 외에 단점은 리스크를 생각 못 한다는 것. 피한 이후 즉시 보호가 안 된 곳을 쳐내고, 휘청거리려다 중심을 잡고자 하는 녀석의 팔을, 그림자가 보였다.
오른쪽! 능숙한 스윙은 적절한 힘을 싣고 내리꽂혀 바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화려하네, 무슨 필기체 글씨 적는 궤적이야 저건. 보이는 빈틈은 엉성한 스윙이 다시 가로 막으려 하겠지, 각목 하나를 피하고 밟았다. 그는 손을 밟으며 들어오는 엉성함을 손에 쥐었다. 득달 같은 개들은 아픔을 잊어버릴 만큼 취했다. 그의 손 하나는 자유로웠고, 밧줄은 뭉쳐 있을 때 아프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
푹푹 찌는 여름은 비와 함께 왔다. 불은 가셨으나 그만큼의 습도를 던져 놓았다. 괴상하게도 긴 팔을 입는 청년은 쑤시는 곳을 주물거리며 골목 밖을 나섰다. 어느 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골목에서 나왔으면서 몰라요? 경찰이 약 피우다가 동료 경찰한테 걸려서 체포당했대!”
“오호라.”
“참 이럴 때 히어로들이 나서줘야 하는데…”
글쎄, 그는 혀를 찼다.
“경찰도 제 할 일 했네요 뭐. 속상하겠어.”
모든 것이 영웅들을 위주로 돌아가서는 안 될 일이지 않나. 그는 막 연행되어 나오는 경찰 하나와, 연행하는 경찰 하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의 사람 좋은 인상과 동료를 믿는 듯한 평온함, 그것이 깨진 후의 사람 불안하게 하는 잘그락거림은 어디로 가고, 수갑을 채워 놓고 뒷목을 잡아챈, 격노한 이가 보였다.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부패? 공권력의? 그 어느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지? 현 히어로들과 같이 부패했음을 보여주는 것? 그 외에는 어느 것도 좋다고 할 수 없지 않나.
날이 더웠다. 그는 자리를 뜨기로 했다.
-
그리고 저녁에 뉴스를 본 그는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 그 일이 뉴스에 실린 것은 그래,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용케도 누군가가 자신이 묶어 놓은 약쟁이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 화살의 물결
여론의 방향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누구를 겨냥하고 있으며 누구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을까? 톡방에 접속하게 되고 나서도 그는 꾸준히 뉴스와 그 반응들을 대략적으로나마 훑고 있었다. 판을 태워 엎고자 하는 이에게 있어서 이는 거미줄 주인의 이슬과 먹이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활동한 요 근래부터, 히어로들의 활약을 가로챈 근래에 들어서면서 히어로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 전에도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시선에 이전부터 보이던 것들은 순전히 사기 저하를 위한 인터넷 상의 빌런 같은 존재들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스트레스나 받았으면 좋겠다는 목표 의식, 향조차 없는 네트워크에서도 느껴지는 악취.
영웅들의 존재가 서서히 언론에 드러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악질적으로 들러붙어 있는. 그도 이 맑아 보이는 개천의 진흙을 헤집을 목적이긴 했지만, 모두까기인형의 열화판같은 존재들은 누구에게든 들러붙을 것일 테니까.
헤집은 결과는 그래도 조금씩 꾸준히 성과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뉴스로 안 내기엔 일을 크게 벌린 건도 종종 있었고, 폐쇄적으로 돌아가는 언론사 몇몇은 날을 세우려고 준비 중인 건가. 시민들에게 권고 사항을 전하는 것도 있고. 그는 저녁을 대충 때우며 뉴스를 계속 훑었다.
-
영웅들에게 화살이 조금씩 돌아가자, 현재의 영웅들은 발끝인지 발등인지 모를 곳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론을 이용해서 푸쉬를 하는 것에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SNS 상의 기록들은 현장에 그들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거의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들끼리만, 오직 그들의 머리에서만 나와야 하는 생각으로만 구성되어야 하는, 그런. 문득 누군가가 제안한다, 이게 정말로 옳은가? 하면 그들은 날을 세운다. 이게 옳지 않을리가 없잖아.
꺼림칙함 속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이도 있었고, 그 중에는 2대 솔라리움이 있었다. 냉철하게 판단한다 쳐도 그 냉철함은, 지금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처럼, 언젠가 바닥을 보일 수도 모르는 것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등유를 잿더미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그는 언젠가 들렀던 집에서, 바람처럼 떠난 그의 옛 동료, 형제를 보며, 그리고 어머니의 표정을 보았다.
시민들을 향한 개방이 필요한데도 이 사람들은 점점 벽을 세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입을 연 사람이 어떻게 될 지 그는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공포 정치가 아니면 뭐더라. 새카만 불이 그를 핥는 것 같았다.
그 중앙에서, 데우스라는 이명을 가진 이는 온화하게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도 잘 해 왔으니까 진정하라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언어들은 제법 잔인하기도 하였다. 위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공포를 더 풀어버리겠다는 것이 그의 말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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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은, 탈옥을 추가로 약속 받는 이들을 보았다. 무시 못할 돈다발들이 흘러 넘쳤고, 수용소에서만 이야기될 시끄러운 말들은 철창 너머를 벗어나지 못하겠지. 몇몇 이들은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울부짖었고, 그건 제법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그에게는 기회가 왔었나? 왔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그처럼 거절하는 이들은 몇몇 보였다. 절개를 지키는 것도 같았다. 그는 변수로서 휘몰아치고자 했기에, 좋은 상황이 오기 전까지 잠잠히 수용소 내부의 상황을 읽었다. 오늘따라 제의하는 횟수가 많았다. 상황이 심상치는 않구나.
별개로, 그는 몇 번이고 거절한 이들을 살폈다. 몰려다니는 이들이었고, 쑥덕거리는 것을 들을 수는 없었다. 불량한 코스프레를 해야 할까, 그는 눈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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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술을 먹인 뒤에 개껌을 주겠다고?”
“예엡.”
대체 왜? 레드우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개껌을 먹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골때리는 대답이 튀어나온 이후에 한숨은 당연하게도 따라붙었다.
“마셔요, 저기 아저씨가 쏘는 거.”
도노반 콜슨은 꾹 눌리는 어깨와 살갑지 않은 목소리에서 도주를 포기할까 고민했고, 어깨를 쥔 손이 뒷목까지 얼추 닿아 떨어지질 않자 그냥 포기했다. 얌전히 마실 것이나 마시기로 하였다.
“콜슨, 그러고 보니까… 왜 했어요? 그런 거.”
“…종이쪼가리 다 본 녀석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타국 마피아가 오는 건 좀 그렇잖아?”
“너가… 갱들을 수시로 조지고 있으니까. 무력 수단이 하나 더 필요한 거지.”
“얼씨구야.”
달달한 술이었다. 아주 달고 일상적인 커피 향이 나는 술. 쭉 들이키는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었나? 답은 아니, 콜슨이 생각보다 훨씬 먼저 뻗어버렸다. 안온한 커피 향 사이에 축적된 알코올은 검푸른 도시의 피 안에서 돌고 있는 듯도 하였다.
후드를 쓴 남자는 자신의 몫을 마저 들이켰다. 그렇게 취한 기색도 없는 그는 완전히 뻗은 자를 끌고 레드우드와 같이 돌아갈 채비를 했다. 어떻게 할 셈이냐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러 취기가 올라온 연기를 하듯이. 개껌은 못 먹이겠네, 그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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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간단하게 들이켰다. 차가운 물은 머릿속을 명료하게 해주었다. 언제 그는 명료하지 않았나? 언젠가는 판단이 틀릴 때도 있겠거니, 그는 생각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짜인 거미줄이 어디까지 허물어졌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허물어지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만일 그들이 알게 된다면 이미 디딜 땅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겠거니 하였다.
바쁜 나날의 저녁이었고 밤이었다. 항구 쪽을 틀어막기엔 갱단이 기승이고, 갱단을 주시하기엔 마피아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저쪽도 알겠지. 당장은 갱인가? 정착 못 하게, 본격적으로 훼방 놓는 시기는 조금 미뤄도 괜찮나? 차가운 물을 마저 들이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생각으로는, 마피아로 위장한 새로운 변수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입에 담은 것을 삼켰다. 어디까지 판을 벌리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는 상념이 이어졌다. 지금 그가 직접 본 것만 하더라도, 탈옥이라는 명목의 복귀, 은퇴한 이들을 빌런으로 끌어들이기 둘이었다. 은퇴한 자들한테 세게 거절이라도 당했나?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또 늘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신반의했다.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더라니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만큼 판단력이 많이 아슬아슬해졌다면 그거대로 문제였다. 그는 차가운 물을 전부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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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못 봤던 화살이 벽에 박혀 있었다. 골목길이었고, 이틀 간 미처 살피지 못한 곳이었다. 이걸 경찰들이 못 봤을 리는 없겠지. 근처에 있나.
바람이 갈리고 생체 전류로 누군가를 찾으려 해도 보이질 않았다. 이미 자리를 뜬 것도 같았다. 이 방문객은 그가 아는 사람이었고, 부디 그가 아는 레파토리로 만나지 않길 바랬다. 그는 팬텀을 떠올리며, 정말로 부디, 하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 방문자
화살, 철로 이루어진 화살은 그가 발길이 뜸하거나 늦게나마 발걸음해서 미흡하게 둘러보던 곳의 골목에 하나 이상은 놓여 있었다. 놓여 있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개중에 몇은 벽에 박힌 채, 먼지가 조금 이는 것도 같아, 한마디로 자리를 뜬지 오래 된 것도 아닌 흔적이었어서, 그는 기가 차는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살을 발견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그는 같은 선택을 했다. 화살을 치운다. 설령 그가 보고 싶거나 어쩌면 잡아 채야만 하는 인물이 근처에 있더라도. 처음에는 애초에 제법 오래 된-그래봤자 몇 십분 전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들 뿐이었지만- 것들 밖에 발견 못 했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발소리에 대한 착각을 들었을 정도로 가쁘게 도착했을 때도 있었다. 그가 며칠 간의 동향을 살펴보자면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피가 묻으면 묻었지 죽음이 묻지는 않았더랬다.
이 점이 그는 마음에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신뢰가 일렁거리기도 하였다. 물론 정신을 차리면 그는 의심이라는 칼로 계속 잘라내고 있었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는 누군가를 믿기엔 아주 최근에도 배신자를 마주한 적이 있었기에, 이는 그저 거대한 무리들을 홀로 쳐내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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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피로감이 어느 쪽으로 갈 지는 지금 이 순간의 대화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예측되는 곳을 먼저 갔던 게 바로 어제였고, 유감스럽게도 화살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놀리나, 싶어서 그는 천천히 짚어보았다. 제 움직임을 고찰하고 행동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같은 방식으로 나와주지.
하여 지금은 어제도 들렀던 폐공장지대를, 아지랑이 같은 먼지를 연막 삼아, 조금씩 흩어지는 바람을 따라 숨어든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 얼굴이었고, 철로 된 화살은 순식간에 인기척에 반응하듯이, 관통하기 위해 날아들었다.
원거리 투사체라고 칭한다면 제법 게임 같겠군,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종류들은 궤적을 바꾸면 그만큼 맞을 확률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이건 이 화살의 주인과 예전부터 대련해봐서 아는 것이었고.
“…바람을 뚫을려고 했는데.”
“날 죽일 셈이냐.”
“아니! 농담이야.”
사실 뚫는다기보단 그가 화살의 궤적을 튼 것이라, 이미 진작에 뚫지 않았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실없는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쓰러진 이들의 숨이 전부 트여 있었다. 죽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활로 팼어?”
“아무리 그래도 쇠꼬챙이야, 쇠꼬챙이.”
“그래, 박히면 뒤짐 반은 확정인 건 아는데… 그럼 왜 화살을 무슨, 헨젤과 그레텔이냐고.”
화살의 주인은 후드를 쓴 남자의 말에 웃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장에선 활로 팼다는 걸 확인 받은 시점부터 이미 어느정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웃음기를 지워야 할 때이지 않나? 안온할 때는 아니었다. 안주할 때도 아니었고, 이제 날을 세워야 할 때였고 가시를 세워야 할 때였다.
“왜 왔어?”
“보시다시피?”
“레드우드 아저씨가 시키던?”
“…거기서 스승이 왜 나와?”
“안 나오기에는 그 양반을 좀 생각해볼래?”
“아니, 봐봐 좀.”
화살의 주인은 급히 자신의 핸드폰을 넘겼다. 비밀번호까지 풀어서는. 그는 대강 최근 연락한 모든 것을 쭈욱 살폈고, 그 와중에 발자국 소리가 또 들려서는, 결국 전부 확인하기까지에 장장 1시간은 넘게 걸렸을 것이다.
“아니 눈치없는… 아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봐봐. 난 스승이랑 관계 없다니까?”
“그 양반 후진 양성하는 거는 올리비아가 넌지시 얘기해 준 적은 있어가지고.”
“야, 나는 후진이 아니고 니 동기에요!”
“아 좀.”
“그으래서 아이언애로우씨는 어쩌다가 왔다고?”
“트레이씨 살던 곳이 유일하게 도심이니까!”
“뭐가 많이 생략됐잖아.”
“너도 트레이니까?”
“아닌데?”
“개명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화살을 다루는 새삼 가벼운 친구. 뭐, 경계해서 나쁠 것도 없지. 반대로 말하자면 경계하지 않아서 나쁠 것도 없나,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는 생각했다.
“하긴 버나드가… 흐음.”
“아니 그러니까 뭐가 많이 생략됐잖아.”
“활개칠 사람은 많지만 도심에서까지 활개칠 애는 너밖에 없겠다 싶었지.”
“콜슨은?”
“콜슨 아저씨는 뭔가… 늙었잖아.”
인마. 그는 친구의 등판을 결국 가볍게 때리고 말았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뭐어, 스승이랑 잠깐 어떻게 하고 오라고?”
그는 혀를 찼다. 그가 레드우드를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것도 있었지만, 별개로 등장한 제 옛 동료란.
“됐어… 난 간다.”
“어디로 가게?”
“니 예상대로요.”
“뭐야 그게.”
실없는 대화였으나 그의 무의식은 오랜만에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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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주운 화살들은 전부 ‘그냥’ 철로 된 화살들이었다. 옛 동료의 화살들은 꽤 바리에이션이 많았고, 그것들은 전부 댈러쉬한테서 오는 것이었다. 접촉을 못 했나? 아니, 예전만큼의 수완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찜찜함이 순식간에 골목의 어둠처럼 그를 채운다. 얼굴을 못 본지 근 2주 내지 3주는 된 것도 같다. 목표 하나가 더 생길 것 같은데, 하고 그는 먹구름 하나를 머릿속에 잡아두었다.
- 까치밥
누군가는 버튼을 눌렀다.
‘아니, 봐봐요. 네? 스승! 뭘 했길래 쟤가! 안 믿냐니까!’
‘아무 짓도 안 했대도? 것보다 우리 제자는 왜 내가 부르기도 전에 왔을까?’
두 명의 아옹다옹한, 설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화 기록이었다. 녹음기는 빨간 불빛을 내고 있었고, 그걸 만지작거리는 이에게서는 붉은 머리카락이 스륵, 흘러내렸다. 꾸민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그렇게 되면 속을 더 모르겠는 것이었다. 차라리 레드우드가 저를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거라면 모를까.
그건 그거대로 속이 더러울 것 같지만. 애당초 어느 정도는 감시당하고 있지 않을까. 전 지휘관 겸 참모인 사람의 머릿속이란. 탐사와 판 읽기 등을 다 어디서 배웠겠는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제 선생이기도 한 사람을 그렇게 기꺼워하지 못했다. 다른 동료에게 세게 뒤통수를 맞은 시점부터 더욱.
그럼에도 쉬이 떨쳐낼 수 없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쓸모가 있었고, 그조차 제대로 짚지 못하는 내면적으로는 기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홀로 무리를 하면 어지간해서는 속이 점점 너덜너덜해져서 가시바늘 하나 외엔 무엇도 남지 않겠지. 무의식중에 그는 기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의 그가 그러하였듯.
“…그러니까 좀 믿어주라.”
“아, 꺼져.”
귀찮다는 듯이 손을 설렁설렁 흔든다. 말을 걸어온 이는 철의 화살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이 녹음기의 주인이기도 하였고.
“불법 녹음.”
“너도 구금 억지로 하고 있잖아…”
그건 할 말이 없는데. 그는 혀를 차며 녹음기를 다시 던지듯이 건넸다. 가벼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녹음기는 야구공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아이언애로우의 손에 들어갔다. 이제 믿어 줄거야? 하는 물음에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너가 갈 길 가라. 짜증내는 듯 소리내는 붉은 머리의 청년은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장소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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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고 나서 며칠간, 바쁠 수밖에 없었다. 수소문을 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전부 쑤시고 다녔으니까. 겸사겸사인지, 주객전도인지, 쭈우욱 밀어버릴 것들 중에 한 무리를 청소하기 시작한 지 오늘로 사흘인가 나흘인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잿더미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웅크리게 하거나 지나치게 돌출하게 하거나의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렇게 과격하게 행동해도, 철의 화살이 경로를 제한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가 가지 못한 곳을 어느 정도는 정리하기도 해서, 파랑새는 먼지더미 속에서 뛰쳐나오듯이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하나하나 줄여가는 걸 목표로 조금씩 조금씩 허물려고 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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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댈러쉬, 묘연한 행방을 찾기엔 역시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털어야 했고, 그가 밀어버리고 있는 곳은 불법 무기 밀매를 주로 하는 이들이었다. 마피아와의 접점도 존재하는 것들. 작은 무리들만 튀어나와서 약올리기에, 낚싯대를 멘 어부가 아닌 그물을 이끄는 배가 되겠거니, 하고 그는 작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조용하고도 작은 호텔에서 나오는 차라던가, 그 차에서 유난히 흘러나오는 화약 냄새라던가. 들쑤셔놓은, 그가 알고 있는 한 거의 전부의 지하 불법 도박장 같은 곳을 용케 피해서,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는 어둑한 곳으로 간다던가. 검푸른 도시의 어두운 장막을 두르고 싶었는지 아니면 불에 스스로 장막을 거둬지고 싶었는지.
어둠의 무게는 무겁다, 그 안에 녹은 혀의 무게와 피의 무게와 손의 무게도. 가리기 위해 가볍게 행동하는 이들 가운데, 그 묵직함을 그대로 체화해 온몸에 두른 무거운 이들이 나타났다. 익숙하지 않은 전경이었다. 붉은 머리의 청년은 그들의 동료가 저런 무게감을 달고 있었지, 싶어 했다.
물론 그들은 빛을 삼키고 살았지만 저건 그런 자들이 아니었고, 뒤를 쫓는 이유 자체도 명백하게도 달랐다. 애초에 제 옛 동료들은, 쫓는다기보다는, 좇았다, 그가. 차가 멈춰 서고, 미약한 화약 냄새를 숨기려는 듯한 은은한 탈취제 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작은 바였다.
그리고 주변엔 사람이 많았다. 손에 무언가 하나씩 들고 있는 남루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경비견들인 듯 했다. 소란을 일으키기에는 아직, 아직.
지금.
이야기가 무르익는 낌새에, 경비견도 농땡이 피우고 싶음이 분위기를 이끌어 갈 때쯤, 후드를 쓴 남자는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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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하는 놈들, 튀지 말고.”
아직 망가지지 않은 총 하나를 집었는지,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긴밀하게 이야기 할 게 있지 않을까?”
#05: 손과 길
- 손과 길-1
붉은 머리의 남자는 며칠 전을 회상했다. 그러니까, 총알들을 미리 긁어버리고, 맨손으로 쇠파이프를 잡고 있는 녀석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다음에, 터져버린 권총에 얼얼해하는 친구를 친히 재워주고 나서, 용케도 차 안에 있는 걸, 그러니까 거래 품목을 꺼내서는 그한테 겨눴다가, 거래 품목과 일자리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등의. 굉장히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총알이 맞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당초에, 그가 어떤 도시에 가서 굉장히 경계를 세운 이유는 총알 때문이었고, 그 반작용인 그의 차원에서는 그가 총 속에 장전된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게 가능했기에, 그는 그 날도 피멍만 들어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멍자국과 함께 들은 것은 다음 거래 장소와, 댈러쉬의 대략적인 행방이었다. 크레이그 댈러쉬는 전직 무기 중개업자였고, 그가 무기를 들여오는 곳도 아무리 어두운 곳으로 물러났다 한들 제법 안전한 루트였다. 이용할 가치는 충분했고. 대략적 추측이 아니기에는 불타는 차 안의 소음기까지 챙겨 물어본 것이었으니 믿을 만하지 않나 싶었다.
차 안에는 댈러쉬가 없었다. 어딘가에 묶여 있거나 감금당해 있거나. 그렇게 들쑤신 지하 카지노는 아니었고.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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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공장 지대는 아니야.”
“나무 집들 쭉 있는 거기도 아니더라.”
고오맙다 아이언애로우, 하고 중얼거린다. 이 분야에서 가장 쓸 만한 건 레드우드지만. 그는 며칠 전의 그 녹음본을 생각해 보았다.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레드우드한테는 별다른 죄목이 없는 셈 아닐까. 사실상 의심한 이유 자체가 지금 레드우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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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는 왜 부재중이래.”
“대신에, 건물 밑을 잘 살피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저스틴.”
“아 예.”
로비에서 사장님 되는 사람의 비서를 마주한 뒤, 친히 비서까지 보내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안 오는 걸 신경쓰고 있었나 보다 싶어한 그는, 건물 밑이라는 말에 진작에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 아저씨 건물 밑에 있어요?”
안 보이면 솔직히 그거 밖에 답이 없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연락을 씹고 씹고 씹으면, 불안한 노장의 입장에선 직접 움직이고자 하는 것 외엔 답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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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레드우드. 전직 사령관 겸 참모. 그리고 히어로 네임, 스티그마. 능력은 마킹. 사람 몇 명을 끝까지 추적하는, 무슨 사냥개도 사냥용 매도 슬퍼 할 능력이람. 은퇴한 지 어언 15년 정도는 지나지 않았나 하고 연도를 세다가도, 장난스럽게도 참모로서 활동할 때까지 합하면 나랑 여전히 동기네, 하고 킥킥거리는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의 아주 외곽, 하수도로 진입하는 곳이었다.
거무스름한 물이 질척하게 토해져 나오는 가운데 그는 상황을 생각했다. 레드스틸 사 지하에 억류된 자와 레드우드가 사라졌고, 하수도 지도만이 일렁거리던 것을. 그 아저씨 총 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은퇴한 이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노화와 부상이었다. 그가 직접 선언한 것이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사령관 겸 참모로도 꾸준히 곁에 있던 사람인 만큼 경험도 지식도 식견도 넓었으나, 이번 일을 생각하자면 배신자를 용병으로 쓸 만큼 다급했던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더럽게 좋았다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생각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하수도는 예상하듯이 퀴퀴했고 예상보다도 역겨웠다. 쥐들이 찍찍거리는 건 알겠는데, 여기까지도 사람이 들어와 생애를 이어가는 건 동정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손을 떨며 약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자수하면 그래도 감옥이라는 곳이 여기보단 시설이 좋지 않을까.
발자국 소리는, 이 곳에 세금도 없이 세 들어 사는 이들에 의해 문득 문득 섞여 들어가고, 구분할 수 없게 되기도 하였고, 으르렁거리는 거뭇한 물에 의해 묻혀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가 이렇게 늘어나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구두와 운동화 같은 소리. 조용함을 위해 살며시 뻗어나가던 붉은 머리의 청년은 멈췄다.
“와 깜짝이야.”
“아니, 이쪽이 놀랐네만!”
“왜 놀라요 이 아저씨야! 귀로 탐지를 하라고!”
“노화일세.”
너무 태평스럽구만, 이라고 중얼거린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총을 겨눈 방향은 여전히 배신자의 방향이고, 귀가 안 들릴 리는 없고.
“더 들리는 거 알잖아요.”
“숨을 공간에 거의 다 왔네.”
“아저씨 싸움 잘 하냐고.”
“내가 자네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그는 턱짓으로 조금 더 앞을 가리켰다. 당신 숨은 상태에서 저 양반한테 제압 안 당할 자신 있어? 땀으로 푹 젖은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으나 눈빛만이 샛노랗게도 반짝였다.
“우리가 먼저 도착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리고. 인질 잡을 거 같고.”
“자네가 탱킹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
“가 있으쇼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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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섯이면 좋았을 발자국 소리들은 거래 도중의 사고로 크게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두 자릿수가 된 모양이었다. 순전한 그의 추측이었을 뿐이지만서도 말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다른 길목도 있는 만큼 다른 인력들이 더 없길 바래야지. 물론, 있겠지만서도 말이다.
후드를 쓴 남자는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하수도에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할 이였다. 발자국 소리는 가까워졌고, 소리 없이 서있던 그는, 코너 쪽에 숨어있다가, 꺾는 타이밍에 맞추어, 활로를 먹어치웠다.
한 명이 물에 빠진다. 기절하진 않았지만 휩쓸려가는지 어영부영 쫓아가는 이들이 몇 보인다. 그리고 기습에 당황하여 내질러지는 주먹은, 생각보다 날카롭구만, 공격의 방향이 물가가 아닌 건 괜찮았다. 몸을 트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벌려야 했던 점은 조금 그렇지만 말이야, 하고 생각하며.
벽을 짚어 오며 한 명은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 그 뒤로 화약의 냄새가 슬쩍 났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에, 선두의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총알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잠깐의 당황은 틈을 주었으며, 후드를 쓴 수문장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번째로 하수도 물에 누군가를 쳐박아 버렸다.
얼얼해하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녀석을 마주한다. 걸어오는 순간의 발목을 도발하듯이 찔러본다.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제법이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긴 외나무 다리인 것을. 잠깐의 후진과 이어지는 빠른 전진, 다시금 견제하듯이 낮게.
개를 길들이듯이. 발만 집요하게 노리던 그는 손을 뻗어오는 타이밍에 일부러 붙잡혀 보기로 했다. 아주 일부만. 그렇게 되면 이제 적은 잡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고, 상체 방비에 조금 미비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빈 허리를 가감 없이 쳐냈다. 세 명째 쳐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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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한 놈을 끌고 정보를 불게 하기 위해 시름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복장이 생각보다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빠져나가던 이처럼 향수를 뿌린 것들도 있었고-그것들은 총알이 터져나가 어이가 나가 있었지만- 향수 뿌린 것들과 거래를 하고자 했던 녀석들이랑 비슷한 느낌을 주는 복장도 있었지만, 다른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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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일이야 여긴 또.”
질질질, 입이 살아있어야 하는 자를 끌고 오면 정말로 총이 뺏긴 채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도 같고. 배신자는 총을 든 채로, 하수도에 구금되어 있던 댈러쉬를 인질 삼을 속셈이였나 보다. 저런, 레드우드. 내가 연락 안 씹을게요.
“콜슨씨, 다친다. 총 내려 놔.”
그리고 이어진 것은 총알이 터져나감과 동시에 누군가의 손목 건강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 손과 길-2
손목이 나간 이와, 오랫동안 묶여 있던 이를 들쳐 메고 업고 하수도를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보다 먼저 온 사람이 은퇴한 노장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노장은 기어이 총을 뺏겨 있던 상황이었고.
“와, 다음엔 진짜 연락 씹지 말아야지.”
“제발 그래주겠나?”
“아 예.”
물론 배신자가, 둔화라는 것을 작용시켰겠으니 뺏길 가능성은 충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병으로 쓸 생각을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사적인 용도의 수갑을 풀어버린 시점에서 판단 한 번 극단적으로 했구나, 하고는 혀를 차는 것이었다.
행동은 빠르게, 은밀하게. 수문장으로 나선 청년이 사람들을 정리했다 쳐도, 그들의 연락망이 죽어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더 활발하게 돌아갔으면 돌아갔겠지. 붉은 머리는 그 연락망을 차단할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핸드폰과 무전기 등을 쳐박아 놓는 것이라면 모를까.
먼지 구덩이는 시커먼 물에 침전해 검은 안료가 된 지 오래였나, 그런 것 치고는 뿌옇고 목이 칼칼했다. 흔한 먼지 더미 속이었고, 건조함은 목 안을 노크하고 있었다. 더위에 뚝 떨어진 체력은 스스로를 자극시켜서라도 강제로 올리게 하면 되었다. 들어온 길로 도로 가야 할까 하는 고민에 잠깐의 탈진과 함께 결국 벽에 기대고 말았지만.
“제가 들어온 입구가 아저씨가 간 데랑 같죠? 거기, 그.”
“자네가 지도를 보고 왔다면 아마 같을 걸세.”
“거기 그렇게 노출은 안 된 장소던데 괜찮지 않나.”
“발자국은?”
“내가 색적을 누구한테 배웠더라?”
“…내 제자지만 거만하군.”
“어쩌라고요.”
“유감스럽게도 노출이 안 된 장소라고 한들 지키고 있을 거라고 판단되네.”
“그럼 딴 길 찾아야 되겠네.”
“둘 다 잠깐 아가리 닥쳐 봐.”
“삐지고 튄 사람 발언권 증정.”
“닥치라고. 내 아지트-“
“있었어요?” “있었나?” “너무 놀라잖냐.”
“아무튼 그 쪽으로 가는 길이 있긴 하다.”
“납치당한 사람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못 믿을 건 또 뭐냐.”
“…어쩌다가 납치 되었는지 경로라도 말해 주겠나?”
“잠적하다가 거래 쪽 접촉하려다 훅 갔지.”
“잘 하는 짓이에요.”
“받아먹는 놈이 말이 많아.”
“아무튼 그러면 아지트는 발견 안 된 거고?”
“…”
“에라이.”
“결국 슈뢰딩거의 뭐네.”
“자네 체력은 괜찮고?”
“괜찮은데요?”
“벽에 기댄 놈이.”
“네 다음 탈수증 초기?”
“…혹시 내가 둔화를 걸면 승산은 있어?”
“이제야 입 여는 게 X나 야속하고 X같은 건 알고 있죠?”
“거 참 능력 값 하게 빠르군.”
“욕받이 된 기분이 어떠냐.”
“…하아.”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쉰다. 퀴퀴한 냄새와 잔기침을 유발하는 먼지는 파랑새의 깃털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언제 탈진했냐는 듯 샛노란 눈이 등유를 집어넣은 랜턴처럼 빛났다. 방향은 정했는가?
“아지트는 아무래도 불안하고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위치 미리 알면 그럴 가능성도 높고. 여기는 거리가 좀 멀잖아요, 도심이랑. 아니, 까놓고 말해서…”
“아예 도심이거나, 아예 외따로 있거나. 자네나 내가 택한 입구가 골목길이랑도 척을 졌을 정도로 먼 곳이니.”
“채택. 코카콜라 갈까요?”
“도심으로 가자. 그게 안전하지 않을까?”
“밤 도심이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이 양반아.”
트라이 할 거지만. 네 명이라 쓰고 셋 이하의 발걸음이라 읽어야 하는 무리는 걸음을 옮겼다.
-
포진된 이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 쪽이 짐이 조금 있다 치더라도, 그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숫자이기도 했다. 탈진한 것을 포함하고서라도, 일단 짐 되는 이들을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는 되는 정도였으니까.
손목이 날아간 배신자는 얼얼한 곳을 붙들고 둔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상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몸이 느린 것에, 반응하는 것보다 안 따라 주는 것에 포진된 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탈진한 이는 마스크 속에서 이를 악물며 너덜한 체력에 활기를 주었다.
-
“…그래서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기 사람들이 왜 복장이 신나게 가지각색이냐는 거지.”
“짐작하는 대로 맞으니까 쓸어버릴 준비나 해라.”
- 이빨들-1
경찰 스탠리는, 제 동료가 마약 사범으로, 현행범으로 잡혀간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눈 앞에서 흘러갔다. 그 날의 날씨도 짜증나리만치 더웠으며, 동료를 잡아넣을 때의 온갖 감정은 지금으로서 정의내리자면 혐오와 환멸과 분노였다. 배신감이라는 검은 봉지 안에는 그런 감정들이 뒤섞인 채 한 켠에 썩어가고 있었다.
그 날에 들어온 신고를 생각했다. 점점 늘어나는 길거리 잡범들을 오늘도 서로 연행한 다음에, 동료와 함께 잡다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음 신고가 들어오자 이번 건만 끝나고 도넛이나 먹으러 가자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말을 주고 받았다.
어느 때부터 스탠리는 동료의 눈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동료를 제대로 살피려 하지 않았다. 몸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스탠리도 잘 알았다. 중독자의 증상 같은 게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면, 예전과 달리 징그럽게 툭 튀어나온 혈관과 종종 떨리는 손가락을 보자면 눈 감아 주는 것이 맞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 경찰들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눈을 들지 않았던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무릎이 너무 아픈 동료가 의무실도 아니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것. 그리고 마주한 풀린 눈.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 서내. 그저 친근하게 다시 도넛 가게나 가자고 하는 다른 동료들. 똑바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스탠리는 빌런을 제압한 용감한 시민을 보았고, 다시 만난 날에는 물을 주었고, 세 번째로 만난 날에는 기어이 동료를 제압했다. 스탠리는, 눈을 똑바로 들 수 있었다. 직시해야 했다.
스탠리는 그 때 받은 기자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
붉은 머리의 남자는 유리와 콘크리트의 마천루를 거닐었다. 고양이가 담장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좁은 길을 걸어서, 생선을 낚아 올린 낚시꾼처럼 멱살 잡이를 하고는, 가볍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살고 싶어? 끄덕일 수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였으나, 눈빛 만으로도 뉘앙스를 대충 알 정도로 이 바닥을 들쑤시고 있는 청년은 잡아챈 멱살을 도로 놓아주었다.
물론 그가 애초에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콜록거리는 기침은 흐르는 바람이 습한 공기라도 들이밀어 줌으로써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아참, 정강이를 좀 손봤어야 했나? 대신에 도로 옷자락을 뜯어질 정도로 잡고 있는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일련의 상황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옷자락에서부터 오는 거센 악력은 절대로 종점이 아니리라고, 서늘한 노란 눈이 말하고 있었다. 샛노란 불이 존재한다면 저런 색이겠지, 뒤늦은 답을 하고서 기절당하기 직전의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짐작하는 바는 이러했다. 최근 화약의 유통 경로와, 무기 밀매의 확대와, 마피아들과. 한 무리로 뭉치고 있음과 동시에 외부 세력이 동원되고 있다.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린 새끼 거미들이 바글바글 늘어나고 있었다. 검푸른 어둠을 장막 삼아서, 숨어들고 있었다. 장막을 드리운 주인의 손에, 거미줄에 의해 운영되기 위한 것이었다.
화약의 쓰임새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는 배신자가 시도한 테러의 이유를 알았다. 정말로 악역으로 몰릴 셈이였겠거니, 하고 돈을 받아 챙길 작정이었겠지. 그리고 그 건물의 소유는 당연하게도 거미의 소유였다. 그가 거미라 칭하는 이는, 돈은 확실히 줄 이어서 더 문제였다. 적어도 사기꾼이면 모를까, 제대로 보수를 준다면 일하려 하는 이들이 더 꼬일지 모르는 일이다.
최근에 빌런들이 묘하게도 잠잠한 것도 동태가 수상했다. 아니, 이 부분은 아마도… 각본의 일부일 것이다. 그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마 홀로 움직이는 그 혼자로선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을 치려고 하는 것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 빌런들을 최대한 아끼고 있는 것일 테고, 세력을 의도적으로 결집하고 있는 것이겠지. 노란 눈이 굴러가고 있었다.
-
어느 날의 팬텀은, 괴악한 자 한 명이 계획하는 것을 들었다. 이 곳은 수용소였고, 감옥이었다.
화약 이야기가 나온 다음부터 짐작이 갔고, 큰 일이 터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팬텀은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빌런들은 더 이상 돈다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점점 괴악한 자 한 명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갔다.
-
거미줄의 주인이 누구인가? 2대 솔라리움, 버나드 트레이는 눈 앞의 사람을 보았다. 데우스 라고 불리는 이. 제 어머니의 은퇴를 앞당겨 버린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솔라리움의 이름을 준 사람. 현재 히어로들의 리더이며 정계를 숨 틀어쥐듯 잡아 챈 사람.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변수가 늘어난 것이다.
“전부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잖아요.”
“…이래선 안 되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경찰들이 신뢰를 잃은 건 그렇다고 쳐도, 빌런들이 나서질 않아. 우리가 나설 상황이, 주목받을 상황이 일어나지 않고 있어.”
“그래서 의도적으로 결집을 주도하고 계시지 않나요?”
데우스는 웃었다. 입만. 눈은 그저 공허한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전에 치울 말들을 치워야 하겠는데.”
“…그 명예 시민이나, 아니면 수용소 내의 상황 정리를 말이죠.”
“그래.”
이건 공포 정치가 맞다. 버나드는 굴복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
“스승님!”
“헤이 스승.”
“둘이 온도 차가… 그래.”
시어도어 레드우드, 레드스틸 사의 머리는 현재 둘을 숨기고 있는 제 입장이 슬슬 괜찮은지 조금 걱정되고 있었다. 한 명은 배신자에, 한 명은 갱단들이 잡아채려고 이빨을 세운 사람에. 저 말랑한 송곳니 하나와 어금니만큼 단단한 건지 속이 썩은 건지 모를 송곳니 하나 같은 제자들은 괜찮은 건지. 이래저래 걱정할 일이 늘어가고 있었다. 전직 사령관의 습관은 살피는 것이었다.
신더는, 붉은 머리의 남자는 물론 그 살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려 반기는 기색도 아니었다. 시야에 넣어두지 말라는 듯 홱하고 무례하게도 지나쳐 버린다. 장난이라는 듯 다시 뱅글 돌아 키득거리지만.
“우두머리가 숨고 있는데 어디로 숨었을까요.”
이 말은 레드우드보단 뒷세계에 좀 더 가까운 크레이그 댈러쉬에게 할 질문이었다. 안 그래도 폭우 때문에 하수도는 진짜 아슬하게 못 써먹게 됐고, 하는 남자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부둣가도 날씨를 생각하면 막혔고. 오도가도 못 한 채 뒷골목과 지하도와 도심의 젠가처럼 낑겨있는 지금이 딱인데. 이어서 중얼거리는 걸 보면 댈러쉬 없이도 뭔가를 털어 온 모양이었다. 그저 좀 더 구체적인 위치를 위한 방문일 터였다.
“수용소도 한 번 들러야 하는데… 이거야 원.”
시간이 도통 나질 않는다. 이건 확실히 레드우드를 향한 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설령 많아도 쏟을 곳이 있었다. 아군과, 아직 피아식별이 덜 된 자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보호와 함께.
“이 밑에 있죠?”
“그렇다네. 웬일로 제자 녀석을 대동하고 온 겐가?”
“제가 보고 싶어서요!”
“아 뭐 어때요.”
시간은 낮이었다.
그가 나온 시간은 여름임에도 석양이 막 지려는 시간이었다. 레드우드는 제법 일찍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곧 저 청년이 제 다른 제자를 상당히 경계하여 걸음을 일찍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중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이 분명했다. 레드우드 자신이야 그의 양어머니와 연이 닿기도 했고, 스승 노릇을 한 만큼 돕고 있는 것이었고.
붉은 머리의 청년은 위치 정보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파악한 뒤였다. 이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젠가 놀이의 시작일 터였다. 검푸른 도시에서 잠입이라, 본격적인 범죄일 것 같은걸, 하는 그였으나.
-
제대로 튀어버린 것인지 극단적으로 갈려 있었다. 제대로 된 위치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대략적이긴 했지만, 하수도에서 납치되어 있으면서 댈러쉬도 그저 묶여있기만 한 것은 아닌 셈이었다. 하수도는 여러 방향의 입구가 있었고, 이 중에 불가피하게 특정한 방향이나 특정 지역의 통로만을 지속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지속적으로 곳곳을 들쑤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집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가 지나쳤거나 하겠지. 화약 냄새를 기점으로 찾으려 했으나 지나친 것이라면 수색에 신경을 좀 더 많이 기울여야 겠는걸. 위장이라도 하고 있는 셈이겠지.
놀랍게도, 판자촌 방향에 한 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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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약으로 풍비박산 난 집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정부의 손은 여기에 닿기조차 싫은 듯 보였다. 그저 터를 잡으려는 어슬렁거림 없이 조용함만이 감돌았다. 물론 청년은, 여기에 지하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하실에 숨은 채로 조용히 약들을 지키다가 여기서 보는 것조차 이상한 리무진의 탑승객이 된 놈들이 기억났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많은 판자집들 밑에도 비슷한, 그러나 남들한텐 들키지 않은 지하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매입을 했다면, 혹은 집주인이 있다면 말이다. 이런 곳을 아지트로 이미 쓰고 있던 녀석들은 오래 전에 매입을 하거나 지속적으로 무리를 보내 관리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화약 냄새가 나지 않은 것은 이상했다. 딱 총 정도의 화약 냄새는 구형 권총들과 함께 목격되곤 했지만 그가 찾던 자들은 아니었다. 이정도면 숨은 것이 확실한가? 싶기도 하였다. 무차별적으로 들쑤시기엔 이쪽도 리스크였다. 조용히, 바람이 건네는 소리를 들었다.
찾았다.
늦은 새벽의 밤손님은 후드를 쓰고 있었지, 그리고, 샛노란 눈을 하고 있었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훤히 보였지. 그럼에도 웃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건 확실했다.
이를 악문 청년은 살그머니 빈 집 하나로 들어갔다. 그 곳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은, 방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맞았다. 그건 개미굴이었다. 여기서 쇼생크 탈출을 찍으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 없다. 이건 생각해보자면 골 때리는 것이 맞았다.
때문에 몰이 사냥이 필요했고, 경고의 메시지로 개미굴 길의 끝과 중간 사이의 어딘가에 모르는 이의 누운 것 하나를 떡하니 보였다. 어디로 올까. 야바위를 하는 건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생체 전류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방향이 서로 달랐다. 판자촌을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되었다. 파랑새는 날아올랐다.
빈집이라고 생각된 다른 집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발길질이 쇄도했다. 운 좋네, 퀴퀴함 속에서 용케도, 제법 비싼 시계를 그는 눈치챘다. 사람이 많은 다른 갈래들을 보자면, 홀로인 셈일까, 아니면 돌아서 다시 이 쪽으로 오려나.
우두머리를 담당한다기보단 그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놈에 가깝겠지만! 나가떨어지지 않은 놈은 이어서 절제된 주먹을 휘둘렀다. 묵직함과 재빠름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차라리 피하기보단 막아 버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다.
타격음은 컸다. 그렇다고 후드를 쓴 남자가 고통을 호소했는가? 이를 악문 청년은 막은 것을 생각하며 상대를 보았다. 흐트러지지는 않았고, 정통으로 가야겠군.
주먹을 떨쳐냄과 동시에 이어지는 찰나의 간극, 먼저 들이닥친 건 청년 쪽이었다. 얼굴을 노린, 정확히는 턱 쪽을 노린, 깔끔한 움직임. 빈 공간을 치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는 걸 예상했는지, 청년의 주먹보다도 다시금 발길질이 놈의 다리에, 무릎에 내리꽂혔다.
다시 대치, 그리고 이번에는 실전에서 구른 흉흉한 이의 반격이었다. 흡사 몸통 박치기를 할 것 같다 싶었지만서도. 아니, 속도를 보자면 진짜로 부딪히겠는데! 재빨리 피한 청년을 놈은 놓칠 세라 잡아채려 하였다. 헐렁한 옷은 잡기 좋은 소재였다.
잡아채서 내동댕이를 칠 속셈이었으나 청년은 버티고 섰다. 잘 잡았다는 듯이 샛노란 눈이 번뜩였다. 잡아챈 손의 손목엔 청년의 손이라는 수갑이 톱날도 없이, 악력이 그 역할을 대신하듯 죄여왔고, 팔꿈치는 깊숙이도 쇄골 언저리에 파고드는 데에 성공했다.
-
뒤이어 온 병력이라 한들 소규모로 숨어 있기 안성맞춤인 이들이었다. 하나 하나가 강했다는 점. 슬프게도 청년은 차라리 40명의 어중간한 실력자를 상대하는 게 체력적으로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좁은 문을 활용한 대치 상황을 이끌어 냈다.
-
자, 도시에서의 젠가 놀이를 할 차례다. 앞세운 이는 맨 처음 때려눕힌 이 뿐이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가? 기어이 경찰들의 안뜰에 집어 쳐 넣고 오는 길이었다.
- 이빨들-2
원래 그의 계획으로는, 이 자를 앞세워 도심 어딘가의 썩은 이빨들을 뽑아버릴 계획이었다. 쓸데없이 뾰족하기만 하고, 약이란 약은 전부 흡수한. 그러나 앞세워 가는 도중에 들은 이야기가 쏠쏠하게 즐거웠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결집 이야기는 사실인 것이 맞았다. 안 그래도 그가 온갖 것이 돌아다니는 뒷골목의 싹을 태워버리기 위해 싹둑싹둑 무리 째 덩어리 째 자르는 짓을 한 건 잘 한 짓이었다. 살고 싶으면 계속 읊어 봐.
그렇게 자른 놈들이 수용소 이송 도중에 아예 탈주해서 재합류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한창 경찰 마약사범 이슈가 터지지 않았냐? 물음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눈길을 그는 받았다. 그게 살아서 돌아갈 리 없다. 총알 하나 두 개는 박히는 게 정상이지 않느냐고. 의도적으로 석방시킨 것이다. 이젠 아예 집어넣지도 않네.
그렇다면 점점 한적해진 것도 수용소 안에 처박힌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환원된 셈이었다. 그걸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다수를 장시간 상대하면 탈진이 와서 혼자 널부러질 것이 뻔했다. 그 혼자 몇 개월 간 상대한 인간들을 동시에 다시 홀로 상대하는 것은 심장과 폐가 2배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씁, 현기증 오겠네. 지금 당장 괜찮은가?
-
“…설마 그런 상태일 줄은.”
“진짜로 몰랐어요?”
“내가 주로 마킹하는 대상은 자네 아니면 저 녀석 아니면 올리비아인 것을 어찌 하겠나.”
“아저씨는 왜 빼.”
“포함해서.”
레드스틸 사의 지하에는 다섯이 모였다. 눈치를 미친 듯이 받고 있는 배신자와, 의중을 모르겠는 제자와, 현재 숨어야만 하는 무기상과, 회사의 주인과, 붉은 머리의 남자. 아, 여섯이군. 추가로 묶어놓은 중간 우두머리.
붉은 머리의 남자는 이걸 독단적으로 하기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고슴도치 같은 가시를 수그리고 지하까지 다시 걸음을 한 것이었다. 믿을 사람이 존재하는지는, 뒤통수 맞을 염려는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이었다. 순서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먼저 건드리느냐 아니냐 라는 건데요.”
“그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모르겠는걸.”
단 한 명의 지원군만 있어도 그 절반은 깎아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아니, 그, 기다려봐, 애초에 그렇게 순환되는 구조면 나서도 의미가 없지 않아?”
“먼저 치는 게?”
“저 말에 동의한다. 결국 체력 소모만 심해질 뿐이라고 생각 해 봐라.”
“적어도 터져 나오는 사람들 수 자체는 당장 줄일 수 있겠죠, 그쵸.”
“…저스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는 지금 당장은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이네.”
“왜요.”
“솔직히, 자네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돌입하려 하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 맞지 않은가. 자네도 알고 있으니까 정보 공유도 하러 오고, 그런 셈일 텐데.”
“…아니 열 받을 상황이 맞으니까.”
“진정하고 물 먼저 먹게나.”
“난 X발 빼돌릴 줄 몰랐다고.”
“그치, 그건 진짜 충격적이야.”
“…저 부분은 솔직히 나도 몰랐어.”
“배신자도 몰랐다는데, 일 한 번 교묘하게 꾸미고 있는 것 같군.”
“내가 한 게 헛짓거리가 맞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그럼 이제 조지러 가야지.”
“…삭혔다가.”
“삭혔다가.”
“그러면, 하아.”
“진정이 되었나?”
“이성적으로 이야기하자고요. 내가 들쑤시지 않아도 저 쪽은 터져나와. 그래서 그게 문제야.”
“…시민들이 어떻게든 피해는 보는구나.”
“그래.”
“위치를 알아내서 잠복이라도 해 봐.”
잠복이라는 말 하나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배신자는 순간 제가 무언가 말을 잘못 했는가? 하는 생각에 다시 대화 순간을 복기라도 하려 했으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묶어 둔 중간 우두머리에게 다가가는 것이 먼저였다. 입을 막은 테이프를 톡톡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입구컷, 옳은 선택이네.”
가벼운 웃음기가 담긴 남자의 말과는 달리 샛노란 눈은 제법 살벌했다.
“나도 가?”
“오던가.”
“…이번엔 배신하지 않겠어.”
“와 퍽이나. 정황이나 들읍시다 그거. 왜 그랬어요?”
“…그땐 정말 내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아니, 됐는데. 오지 마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는 대충 목을 탁탁, 하는 시늉을 했다. 레드우드는 뒤이어 총을 어디다 잃어먹었더라, 하고 거들었다.
“난전 상황이 거의 예상되는데 거기다가 배신자를 투입시키는 멍청이가 어디있어.”
“그래도 잘만 하면 정말 전부 제압될 수도 있는 법이지.”
“약 팔지 마 이 사람아. 둔화로 해도 그 물량은 진짜 죽어.”
“시민들의 피해는 신경쓰고 싶지 않나 본데?”
“라고 잠복 떡밥을 쥐여준 사람이 말했습니다. 누가 잠복하기 싫대?”
“…콜슨, 자네는 신경 더 긁지 말고.”
“나도 시민들 안전은 생각하고 싶어서 그렇지.”
“화약 가지고 장난친 놈이 말이 많다.”
“잡혀 있는데… 이제 장난 못 쳐.”
“총으로 장난 친 사람 손? 아 못 들지? 묶여있어서.”
위험 요소는 최대한 치워 놓는 것이 맞다.
“…음, 허어.”
“왜 그러냐.”
“아저씨들 저 양반한테 한 큐에 망할 뻔 했잖아.”
“…자네.”
“흐름이 진행되면 결국 여기까지 혼란이 번지잖아요.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잠복할 자들은 정해졌다.
-
청테이프가 뜯어진 시점에서 위치는 쉽게 나왔다. 갑작스레 끌려온 놈을 본 나머지와는 다르게 신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좀 볶았죠 뭐. 저 놈 언젠가 나까지 들볶겠군. 이미 했는데? 낄낄거림이 가신 후에는 위치를 내놓으라는 압박 밖에 없었다.
역시 분산되어 나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정보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특정 누군가의 소유인 건물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이 곳에 오기 전에 바로 들쑤셨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젠가 게임을 스케일 크게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그냥 대형 부동산 업자의 건물 중간을 왕창 점거한 것도 보였다.
맞는 정보라면 말이지. 다시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의 남자 입장에서는 거미줄의 주인과 그 주변 사람들을 꿰고 있었고, 건물 주인이 그들쪽이라면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다는 게 조금 걸리는데.
총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곤란한데, 한 쪽에 뭉쳐있을 줄 알았더니. 그러니까 한 곳이라도 정확한 정보여야 했고, 택해야 했다.
“전부 정확한 정보여도 문제고, 아니면 더 문제네.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 이빨들-3
잠복이 시작된 동안, 레드스틸 사의 두 사람은 잠깐 의견을 모았다. 두 베테랑은 화약에 대한 동선이 수상한 점을 짚었다. 무기상은 애초에 본인이 취급하는 것 중에 그런 대용량의 화약은 짧은 시간 내에 입수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들어온 정보와 들여오라는 종용을 생각해 보아도 일전에 바다에서 펑, 터져 나간 것의 절반 어치였다는 말이었다.
판자촌에 있던 화약의 양이 상당했다는 건 황량한 판자촌이 신문 기사에 실리면서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밀매다. 뒤이어 두 베테랑은 최근 붉은 머리의 남자가 마피아 쪽 세력이 유입되고 있다는 점을 일러준 것을 생각했다. 이쪽 방향일 가능성이 컸다.
즉슨 보자면, 윗머리의 말대로 놀아나는 세력일 가능성이 큰 갱단들과, 애초부터 윗머리의 말에 의해 현혹된 배신자들의 세력이 모두 화약을 가지고 있다면, 이번에 터질 수도 있는 일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인명 피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대로 괜찮겠느냐는 질문에는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대신에, 필연적으로 히어로들이 나서는 만큼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희망을 걸 뿐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빌런들이 가세하면.”
“…이데아가 다시 한번 암흑기가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조용한 게 의심스러운데.”
“세력 규합을 하고 있는 것 빼고 다른 가능성이 있나?”
“…이걸 알아보려면 지금이 제일 적기이긴 하지.”
지하엔 배신자가 없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달 단위로 갈 예정이었던 수용소의 면담은 이제 다른 두 명의 몫이 될 터였다.
“혹시 모르니까 차는 좀 끌고 가자고.”
“음, 그럴 예정이었다만.”
“그 차 말고.”
픽업 트럭 한 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원을 옮기기에 제법 좋은.
“후진은?”
“…으흠.”
“또 다른 것. 은퇴한 다른 녀석들.”
“면허증을 항상 들고 다녀서 다행이야.”
손쉽게 차에 시동이 걸렸다.
-
잠복 1일 차.
조용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잡아먹힌 것 같았다. 소리마저 잠겼나, 하늘로 붕 떠버렸나. 풀벌레는 더위에 움츠러든 것인지 사각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났다, 그러나 그것들은 온전히 고요 가운데의 그들이었다.
잠복 2일 차.
낮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나눈 셋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눈에 들어온 게 확실한 배신자와 적어도 눈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잿더미를 제외하면 남는 이는 한 명 뿐이었다. 이 한 명은 무엇을 하는가, 그저 지나가는 시민처럼 돌아다닐 뿐이다.
잠복 3일 차.
3일차의 밤은,
예고된 난장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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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을 시작하기에 앞서, 목표한 건물들 말고 다른 건물들과 그 인원과 생체 전류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옥상이라는 존재는 탐지를 쉽게 해 주는 이로운 공간이었다. 높이도 높이이고 그의 힘의 한계도 한계인 만큼 걸치지 않은 곳은 있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탐지의 결과와 얻은 정보를 토대로 보아, 뜯어낸 위치 상의 건물 중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지는 곳에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생체 전류를 보자면 이런 대도시에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들의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용된 경호원들이나 가드라고 쳐도 문제가 많았다. 보통은 저렇게 바글바글하지 않지. 정해진 동선이 있느냐, 없었다. 규칙적으로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 등의 교대가 이루어 지는가? 저 많은 인원수에 비하자면 턱도 없었다.
피곤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체력이 소모되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가보다. 상관은 없었다, 늘상 해오던 것과 그저 비슷할 뿐이었다.
3일 째는 유난히 그가 예민하게 굴기 시작하였다. 유난히도 차가 자주 드나들던 날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인원수가 상당했다는 점이, 탐지를 하는 입장에서는 몸의 무리와 상관없이 정신적 피로를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순식간에 광범위하게 신경써야 한다는 점은 새삼스럽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흘 간 온전히 여기 이 곳, 울브스 코퍼레이션에 몰두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해가 기울어 주홍빛을 드러내고, 달은 이미 제 자리를 찾아 가 있으며 어둠이 달의 뒤로 돌아가며 하늘을 덮어 오고 있었다. 여름의 낮은 길었다. 아직 사람들은 북적거리던 어느 날에, 주홍이 채 빛을 거둬가기도 전에, 개떼들은 건물에서, 온갖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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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째의 밤은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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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잠깐 괜찮나?”
“레드우드! 전에 정기 점검 빼고 개인 연락이라니 무슨 일이야?”
“…잠깐 대피할 일이 생겼네.”
“응?”
“문 앞일세. 아, 혹시 댈러쉬가 동행해도 괜찮겠나?”
“괜찮아. 지나간 일인걸.”
1대 솔라리움이 오른팔을 감싸며 문 밖을 나온 것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두 남자는 역시 위험 정도는 감지하고 있었나 싶어하고 있었고. 왜냐하면, 당황해서 허둥지둥 온 것 치고는 제대로 짐을 싸고 왔기 때문이다.
“픽업 트럭이네!”
순전히 옛날에 전장에서 구르던 이의 감은 예리했다.
- 이빨들-4
잠복 기간의 어느 날에, 세 베테랑들은 수용소에 왔다. 면담할 이를 알게 된 올리비아는 오 저런, 이라는 짧은 유감스러움을 전했다. 몰랐느냐는 물음에 그때 일이 혹시나 했다는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붉은 머리를 한 아들 녀석이 그 누구를 잡아넣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상하게 보도 자료가 적었는데.
“눈치는 빠르네, 그것보다.”
“아들래미 둘이 다 조용하지, 최근 뉴스도 옛날이랑 판국이 좀 바뀐 것 같지, 어떻게 이상함을 못 느끼겠어?”
“버나드도 뭔가 소식이 없냐?”
“응. 그래서 걱정이야.”
가장 가까운 보호자인 입장에서는 나머지 둘보다도 훨씬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걱정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가 얼마나 될 지 짐작하지 않기로 했다. 두 아들들이 딱 봐도 개싸움을 할 기세인지라, 아니 애초에 싸워서 한 놈은 뛰쳐나갔고, 그나마 안 뛰쳐나간 놈은 연락 두절이라면, 불안감이 안 들기에는.
더군다나 그녀의 말대로 뉴스의 흐름이 미심쩍기도 하였다. 경찰이 마약사범으로, 그것도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을 굉장히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물갈이에 대한 여론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뒷세계에 대한 보도가 없는 것을 보자면.
이건 그들이 이번에 찾아가고 있는 팬텀 관련 사건에서부터 그 미묘함이 이미 드러나 있기도 했다. 다른 때라면 화려하게 1면을 장식했을 히어로 대 빌런의 이야기가, 작은 소란처럼 지나가 버린 점도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에서 폭파 사건이 난 것과 네 명의 탈옥수들 이야기까지. 분명히 정체 불명이라 떠들썩해야 하는 사건, 그리고 명백히 빌런의 체포 소식인 만큼 소란스러워야 정상일 사건이 유야무야 넘어갔다.
“내 생각엔 이번 경찰 사건도 추가적인 내부 고발이 없었으면…”
“조용히 덮었겠지. 있었으니까 이 지경이라면 아마 역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군.”
“다 덮어버리자는 건가.”
트럭 안은 조용했다. 작은 끄덕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야 그들이 목적으로 삼은 사람을 만났냐면, 면담을 거부하였다는 대답과 함께 다시 트럭 안에 들어온 세 명의 어른들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골 때리는군, 하고 중얼거리는 건 무기상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올리비아야 믿고 온 거지만.”
“응? 아, 내 친구들도 정말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네. 콜슨이 말이야…”
배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올리비아는 조금 침울한 기색을 내비쳤다. 라디오가 낡은 음색의 재즈를 연주해도 한동안 그녀는 입을 닫고 있었다.
“…난 우리 파랑새한테 옮은 줄 알았는데.”
“파장이 좀 크지. 진짜로 배신자가 나타난 거니까.”
“찾아갈 생각으로 트럭을 가져온 거 아니였어?”
“맞다네. 여의치 않으면, 이 트럭은 그대로 빈 채로 오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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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의 밤은 혼란스러웠다. 집단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갱들은 도심부, 특히 상가가 뭉쳐 있는 지역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일찍 문을 닫은 가게들의 유리창은 저항할 새도 없이 부숴졌고, 설령 새벽까지 운영하는 가게라 하더라도 구급차에 사람들이 실려가는 것 외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슬럼의 팽창이 아니냐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네스트 스트리트는 그 사이 뭔가가 휩쓸어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뒷골목 담벼락에 낙서를 본 적은 있어도 남의 집에 대놓고 하는 미친 놈들은 본 적이 없는데. 이미 빈집이라고 추정되는 곳은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물론, 실제 거주자인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잠복하는 동안 올라오는 몇 개 안 되는 보도내용을 통해 이걸 잠자코 지켜봤어야만 했고.
실제 거주자의 솔직한 생각은, 슬럼의 팽창이라기보단 뒷세계가 이미 너무 선을 넘은 것에 가깝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경찰들이랑 접선하는 시점에서 앞과 뒤가 흐릿해져 가지 않나. 물론 이걸 의도적으로 한 건지 아니면 히어로들의 활약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찰들이 나태해진 것인지는 불명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경찰 마약사범 현행 체포 건으로 인해 군기라고 해야 할지 직업 소명의식이하고 해야 할지, 무튼 평소에 보던 경찰들과는 꽤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그가 체력이 없어 잠깐 쉬는 사이에도 사이렌이 울리면서 공포탄 소리가 나기도 했고.
이건 소모전이었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히어로들이 오고 자시고간에 그 혼자서는 해결 자체가 될 일은 아니었다.
3일째의 밤으로 돌아가서, 나오기 시작하는 인력들을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뛰쳐나가려고 할 쯤에, 철로 된 화살 하나가 그들을 주춤하게 하고, 행동이 과격해 보이는 이들은 도로 행동이 느려지면, 본격적으로 다대 일의 전투가 시작된다. 뿌득뿌득 갈린 이가 열대야에서도 한기를 내뿜는 숨결에 예기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무모한 싸움이 맞다. 그가 연막탄이나 섬광탄을 애용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무리지어 다니는 놈들을 상대할 바에야 강자와 일대 일의 싸움을 하는 것이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이는 인원만 하더라도 최소 30명은 되는데, 죽겠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일단 잔챙이 같은 놈에게 한 대. 시원하게 내리 꽂아 준다. 뒤따라오던 놈에게 덤으로 사람 한 명 만큼의 짐을 강제로 챙기게 해 주었다. 빈 시간에 순간적으로 잡아채려던 놈에게는 순간적인 둔화 효과가 걸린다. 그래도 일은 잘 하네, 뻗어오는 손을 그대로 잡아채며 메쳐버린다.
뻗어오는 주먹을 아슬하게 피한다. 수두룩 빽빽해서 궤도를 짐작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순전히 오랫동안 히어로 옆에 있으면서 여러 위험한 상황에 있던 자의 감이었다. 그대로 무게중심을 무너뜨릴 기세로 팔을 잡아당겨 반대편으로 보내버린다.
포박하려는 움직임은 이번에도 있었다. 얌전히 잡힌다고 잡혔으나 달려드는 것들에게는 친히 그의 사지가 팔만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뒷꿈치가 한 놈의 쇄골에 박혀 들어가는 건 순간이었고, 그걸 붙잡으려던 자가, 떨쳐내기 위한 붉은 머리의 남자의 움직임에 의해 얼굴이 타격을 입는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총기가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늘도 유감없이 발포를 허용하지 않았다. 총알은 불발되고, 그 영향으로 곳곳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심할 타이밍을 여러 번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총기 자체가 많았지만, 그걸 전부 다 무력화시키지 않기에는 총알이란 위협적인 존재였다.
내빼려고 하는 이들은 거듭되는 철의 화살에 뒷걸음질을 하고 있고, 살아 숨쉬는 잿더미는 우락부락하지만 서툰 것들의 움직임을 주먹으로 꿰고 발길질로 뚫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둔중한 것들. 이것들이 피를 봤다면 이것들은 그냥 피를 다 마신 모기 같은 놈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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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처리하기엔 역시 무리가 있는 일이었으나, 예쁘게 케이블 타이를 해 주지 않아도 널부러져 있는 것들에겐 칭찬의 의미로 하늘이나 보고 있으라며 손수 몸을 굴려줬다. 경찰에게 연락을 하기 무섭게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이건 튀어야 하겠네 싶었던 청년은 여느 때와 같이 벽과 벽 사이를 딛어 작은 건물 옥상으로 날아올라,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올랐다.
다시 그 이후의 오후로 돌아오자. 바로 새벽에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그는 오늘 오전에서야 겨우 남은 육포를 전부 씹어 삼킬 수 있었다. 이건 거의 테러 아니냐? 기가 차서 원. 그는 긴급히 대피소로 오십시오, 라는 문구로 방금 전에 온 문자를 보았다. 대응이 느리다.
SNS 상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자기가 본 괴한이 뉴스에서 본 적 있는 체포된 사람이랑 얼굴이 똑같다는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정작 검색어 1위 등등은 되고 있지 않지만서도 말이다. 이런 극단적인 수를 써서 뭐 하려고. 탈옥수들이라고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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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기자 회견이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괜찮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정도면 대체 우리 빼고 너넨 얼마나 안전한 곳에 있냐는 비아냥도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 사태는 경찰들의 태만에서 비롯된 것의 연장으로-“
그리고 버나드는, 2대 솔라리움은 곧 파기될 명단들을 보다가 흠칫했다. 이 다음 부분부터는 범죄자들이 아니었다. 어쩐지 사람이 많다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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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스탠리는 한창 제압 활동 중이었다. 밤샘 야근은 종종 있던 일이었으나, 추적도 잠복도 아니고 끊임 없이 제압을 해야 하다니 마치 테러 사태와 같지 않나 하고 여기게 되었다. 단단히 내쳐질 각오를 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아예 일에서 손을 떼거나, 내쳐지기 싫어서 각 잡고 일을 열심히 하거나.
그 와중에 다른 서에서 온 연락이었다. 여기에 그 마약사범이 깡패처럼 돌아다니고 있다고.
오후에 발표된 대국민 사과 및 기자회견은 경찰들에게 있어서 암울한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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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 사건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히어로들이 드디어 나선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 이빨들-5
경찰 스탠리는 피로함을 뒤로 한 채 다시 제압 활동에 나섰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느냐는 비아냥 섞인 시민들의 말이 종종 들렸다. 그럴 수 밖에, 지금 경찰들에게 모두 덤터기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수용소 이동 도중에 탈출이라거나 등등. 아니, 애초에 탈옥이 빈번하게 일어났을 때부터 경찰이라는 위신은 가라앉기 시작하지 않았나.
금속 재질의, 변색된 경찰 뱃지는 어두운 낮을 살폈다. 이 정도의 사태라면 필히 군대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아, 쓴 웃음이 나왔다, 히어로들이 있었지 참. 경찰 스탠리는 제 동료였던 마약쟁이가 있던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한 번 더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대체 왜 그곳에 있는지도, 무엇 때문에, 누가 널 풀어줬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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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을 알 것 같은 자가 그 곳에 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검은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쓴 채 무리를 와해시키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법 필사적이라면 필사적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소 수면 시간의 절반 이하 정도만 자고 있었으니까. 사안은 사안이었다. 그리고 몸을 갈아 움직이는 건 그의 특기였고.
졸음이 문득 올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민한 것도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 사실과 예측이었다. 이따금씩 심한 두통이 오는 걸 보자면 잠을 줄이면서-그의 생각으로는 ‘분명 전에는 밤샘도 괜찮았는데.’ 였기에 줄인 것이 없는 것과 같았는지 몰라도- 딸려 오는 것이 분명 이 두통일 것이다, 혹은 이러다가 진짜 기절하겠네, 싶어하는 그였으나,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 그대로 자극을 줘 버리는 것이었다.
몸이 무겁다면 도로 가볍게. 숨 쉬기 힘들다면 바람을 집어넣어. 할 수 있는 짓이라면 하는 게 마땅했다. 적어도 지금은. 8월의 난장판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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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얼기설기 나왔다. 부어오른 곳은 붕대로 가려졌고, 상처 입은 곳은 거즈로 가려졌다. 밧줄로 임시 조치를 한 끝에 부르튼 곳은 연고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숨을 쉬는 게 조금 아픈 것 같다. 조금 쉬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올까 봐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온 사방에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온갖 기물들이 찌그러지고 깨져 자체적으로 흉기를 만들고 있었다. 사흘 째였다. 히어로들이 나서기는 했지만 성과가 아직 미미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기가 차네, 구해준 이들에게 뭐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지. 저것이 저가 받는 시선과 동일할지도 모르겠다. 상관은 없지, 저 시선따위와 무관하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에.
아직 사상자는 두 자릿수였다. 그는 불안감에 오늘도 심장에 펌프질을 한다. 설마 이걸 지표 삼아서 행동을 제약하진 않겠지. 미치지 않았으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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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째의 낮, 경찰 스탠리는 집요하게 구역을 수색한 끝에, 뒷골목에서 킬킬거리고 있는 제 옛 동료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잡배들도, 아니, 잡배인가? 전에 봤던 그 마약쟁이들은 아니었지만 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갱들처럼 건들거리는 폼도 아니었다. 실탄이 얼마나 있더라?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그는 머릿속을 굴리고 기억을 헤집어 들고 나온 탄약의 개수를 세려고 했다.
그러나 저 쪽의 총이 먼저 쏘아지려고 하지 않았나, 총부리가 몇 개가 튀어나오는 것인가. 각 잡힌 자세들 속에 마약사범 홀로 약에 마저 취한 듯 휘청이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도시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총을 가진 이들이 전부 화들짝 놀라버린다. 적어도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란. 게다가 총을 들고 있던 녀석들은 단체로 손목 정도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탄약을 보관하던 주머니와 가까이 있던 살갗은 얼얼하다 못해 나중에 치료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경찰 나리, 잘 싸워?”
유난히 피로에 절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스탠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고, 그 사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밤낮을 새 잠복근무를 하던 옛날의 제 목소리보다도 상태가 나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볍게 착지한 누군가는, 후드를 쓴 남자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경단과 경찰은 약속한 듯 서로가 맡아야 할 대상에게 돌격했다.
각 잡힌 움직임이나 우락부락한 체구, 총을 들 때의 모범적인 자세를 보자면 최악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드를 쓴 남자는 둘에게 맞춰서 돌진하는 두 명 중 거리를 가늠하기에 적당한 녀석을 먼저 노렸다. 뛰쳐 나가던 청년은 멈추지 않고, 멈췄다가 무게 중심이 어찌 될 지 상상하기 찜찜했기에 들이박는 모션을 취하기는 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상상하던 것이 맞다면 이 FM스러운 자는 보디 슬램이라도 하건 잡으려고 하건 하겠지. 팔을 뻗는 걸 보면 잡는 게 맞고, 육탄전을 세심히도 해 온 자는 몸을 조금 틀어버린 뒤에 속력을 힘으로 한 킥을 비어버린 상체에 꽂아 넣는다.
경찰 스탠리와 교전하고 있던 이는 너덜해진 손목을 꾹 누르면서 지속적으로 압박을 넣고 있었다. 스탠리는 이미 무용지물이 된 제 품 안의 권총을 꺼내려다가, 얼얼함에 몸을 움츠린다. 그 사이에 덮쳐 오려는 것을, 마약사범을 체포한 이는 간신히 피해 낸다. 아슬아슬하다. 뒤에서 한 명이라도 온다면,
그리고 경찰 바로 옆에서 대치하던 적이 쓰러졌다. 발소리가 늘어났다. 적이 조금의 당혹에 멈칫하는 사이에, 빼든 권총의 손잡이로 타격을 가한다. 권총은 좋은 둔기다.
이렇게 쓰러뜨리면 보통, 그래, 후드를 쓴 남자는 대치하던 놈을 들어 도로 짐짝 던지듯이 돌려줬다. 받아 볼 테면 받아 보라는 듯이, 길을 막는 듯이. 던지는 걸 잽싸게 피하고 경찰을 노리면, 경찰은 한 놈 더 있노라고 그대로 따라해 준다.
후드를 쓴 남자는 옆에 없었다. 벽을 디디고 길목 위로 날아올라 저들의 배후에 팔꿈치라는 무딘 칼, 혹은 날카로운 몽둥이를 들쑤셔 버릴 작정이었다. 몸을 날린 공격은 두 녀석을 땅에 엎드리게 했고, 경찰은 땅바닥의 모래를 활용해서라도 남은 한 놈을 드러눕게 해야 했다. 무게에 짓눌린 자는 금방 일어날 테니 그걸 밟고 뛰어올라, 엉망진창으로 덮쳐서는 굴러버린다.
일어날 생각 하지 말라고 밧줄로 손목을 묶던 와중에 무게에만 짓눌린 쪽이 일어난다. 혀를 차며 밧줄로 오는 공격을 팽팽히 막아내 버린다. 도로 감아 잡아당겨 한 번 더 눕히려는 찰나에, 복잡스러운 공간인 걸 인지했는지, 발이 조금 휘청거린다. 결과적으로 잡아당겨진 방향은 그가 노린 방향에서 조금 빗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마약 사범 쪽으로. 원래는 경찰 쪽을 조금 어떻게, 도우려고 했는데, 엉망으로 뒹구는 두 사람에서 밑에 깔린 경찰이 결국 관뚜껑을 걷어차듯이 일어나 승리하는 것을 보자면 잘 싸우네 싶은 것이다. 길 잃은 황소 하나가 마약 사범을 향한 둔기가 된 것은 덤이었다.
-
“…씨X 예상대로네.”
“뭡니까?”
“이거 봐요, 경찰 나리.”
숨을 거칠게 들이쉬는 샛노란 눈동자의 남자는, 별안간 군번줄을 들이민 것이었다.
지천에 깔린 이 중에 군인이 있다. 현역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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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째의 저녁, 세상은 시끄러웠다. 군번줄의 발견 소식 하나로 경찰에 시선을 돌리려던 여론이 단숨에 정부 및 군대 쪽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버나드는, 2대 솔라리움은, 유니폼 안에 숨긴 종이를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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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냐?”
“…”
“…편하지는 않겠지.”
쑥덕거리는 걸 듣고 온 게 분명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면, 형제로서 그리고 전 동료로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올라오곤 하는 것이었다. 히어로와 사이드킥 활동을 할 때는 그가 조수였지만 그가 선배였다. 넘기는 데에 익숙한 쪽은 아마 그는 그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만 어린 시선은 예상 했잖아. 진작에 해치우던가.”
“…그게.”
“지시?”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 버나드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발가 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왜 오셨나. 본격적으로 쓸어버리려고? 그 불로?”
기가 차다는 옛 동료의 말이 유난히 날 서고 예민했다.
“…너 얼마나 안 잤어?”
“시끄러.”
“…나 좀 도와줘.”
“니 사이드킥 없다 X끼야.”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조절 좀 부탁할게.”
제 형제는 생각보다 속이 물렀다는 걸 진작에 생각했어야 했는데. 후드를 쓴 남자는 충혈된 눈동자를 잠재우려 애쓰다가,
“무능한 놈.”
라며 도로 옥상 어딘가로 뛰어 올랐다. 여름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 이빨들-6
뉴스 기사가 비처럼 쏟아졌다. 끝나가는 여름의 뭉게구름은 방향을 돌렸다. 시나리오 상의 이벤트 하나에 눈을 돌리던 관중들은 그 내막을 알게 되자 장막 너머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때로는 조심성도 버리고 다가가기도 하며, 때로는 진실 공방을 내버리고 정보를 드넓은 바다에 그물처럼 먹이처럼 뿌려 버리기도 하였다.
시작은 문제의 군번줄에서부터 였다. 제압 도중 경찰에 의해 발견된 군번줄은 이후로 몇 차례 발견되었고, 휴가를 나온 군인 한 명이 기어이 입을 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현역 군인이 맞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폭주하는 댓글들과 실시간으로 미쳐 돌아가는 SNS는 혼돈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뉴스란의 한 쪽은 낌새를 눈치챈 자들이 슬그머니 정부에게 이빨들을 들이대는 추세였다. 나머지 한 쪽은 무슨 상황인가, 군번줄 건이 터지자마자 제압에 속도를 가하는 것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가 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상자 수를 꼭 언급하면서.
붉은 머리의 남자는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새벽녘, 불빛이 서서히 돌아오고 가로등이 하나 둘씩 휴식을 가지기 시작하는 푸른 시간에, 핸드폰 불빛은 아직 생각보다 밝았던 모양이다. 전면에 나선, 이젠 앞골목이라고 불러줄까 싶은 자들의 부스럭거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여름 바람이 방향을 틀었더라고 말을 했던가?
바람결에 열풍이 가득히 실려온다. 무리하지 않아도 그저 이끌기만 하면 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슬슬 시야가 조금 가물한 느낌이 들었으나, 버티면 괜찮을 것이다.
텅 빈 곳에 한바탕 불길이 닥쳐온다. 어딘가에 옮겨붙지도 않는 아주 깔끔한, 마법과도 같은 불이. 옥상에서 지켜보며 불길을 최대한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는, 불이 들이닥침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이번에는 쇠몽둥이 같은 기세로 한 놈 한 놈씩 처리하고 있는 제 형제였던 놈을 본다. 달궈진 기세가 전에 본 솜방망이 같은 놈은 아니였다고 회고하던 참이었다.
탕! 총소리가 울려퍼진다. 어디지? 아, 바로 근처다. 형제 놈은 안 맞은 모양이다. 그도 맞지 않았다. 그저 공포를 주기 위한, 나는 총이 있음을 시사하기 위한 위협적인 실탄의 소음이었다. 그래서 그 총알은 어찌 되었나, 옥상 위의 파랑새는, 놀래킨 것에 대한 보복으로 남은 총알들을 모조리 터뜨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음.”
“방향 알려줄 수 있어?”
“알아서 찾아라, 짬이 그렇게 안 찼냐고.”
발길질이 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버나드 트레이는 바람이 스치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
6일차의 밤이 지나고 7일차의 새벽에 접어들었을 쯤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안도할 정도로, 눈에 띄게 일련의 혼란한 상황이 줄어들었다. 쥐들이 다시 쥐굴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홀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묵직한 피로감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잘 보일 지경이었다. 떨리고 있는 걸 보자면 누가 약쟁이인지 구분도 못 하겠는데.
“동료가 제보를 가져왔는데.”
“뭐.”
“데우스 소유의 건물에 난동이 일고 있다나.”
“거기 동료들은 솜방망이래? 따라 와 봐.”
그리고 쥐굴 청소엔 불꽃이 특효약이다. 유난히 유하게 구는 제 형제였던 자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찰나였다.
“명령이라고.”
“내 알 바 아니야.”
“난 알 바야.”
“오, 진심이야? 그것도 그냥 쇼잖아. 아니면 뭐 자경단씨 얼굴이나 드러내 보십시오 하는 건 아니고?”
“…”
“…전에는 그래도 대들긴 했잖아, 뭔데. 뭔 심경 변화야.”
“아는 기자 있어?”
“없어.”
이자식 뭐 털어왔군. 잔뜩 충혈된 샛노란 눈동자는 직감적으로 현역 히어로에게 뭔가 있음을 알았다. 실시간으로 막혔다가 뚫렸다가 하는 기억들 너머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군번줄 사진을 찍고 어딘가에 연락하는 경찰. 그 자는 뭔가 있을 것이다. 전화번호는 모르는데, 저런.
“나중에 경찰한테라도 물어보지 그래?”
“지금 상황에?”
“경찰들 자기 밥그릇 뺏기기 싫어서라도 일 열심히 할 걸.”
그러니 제보할 거면 해라. 잿더미 안에 살아 숨쉬는 불꽃이 일렁거렸다. 안 그래도 건수를 잡아 책임의 어느정도를 정부쪽으로 돌리려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이참에 정부에 완전히 화살이 돌아갈 만한 상황이 온다면 환영하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거린 뒤에, 안 가냐고 그는 다시 제 형제놈한테 묻는다. 쥐가 숨은 굴은 전부 소탕해야 하지 않겠어?
-
비가 내리지 않는 밤에, 하수구 물이 막 적어진 때에. 항구에서 가까운 작은 맨홀 하나가 들썩거리려 하는 때에,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열어젖힌 것은 바깥 쪽의 습격자였다. 탈출할 작정이었나, 아니면 이 혼란을 틈타 또 수작질을 하려는 것이었나.
항구에 있어야 했던 배는 도망친 지 오래였고, 하수구에서 나오는 이에게 보이는 것은 결박당한 수많은 이들과, 잡혀가는 불길과, 그리고, 여기에 존재해선 안 되는 자들이었다. 쥐들은 하수구에 사나 봐, 하는 중얼거림이 문득 들렸는지 흠칫 하고 몸을 떨면, 후드를 쓴 누군가는 그대로 강하를 실시하였다.
-
“…그러니까 갈래 갈래 나눠졌다고.”
“아 그렇다니까요?”
“그 와중에 저 양반은 또 튀려다가 잡혔냐.”
“잡았어요!”
“기름 냄새.”
“넌 하수구 냄새 난다.”
시동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픽업 트럭 앞에서, 정확히는 레드스틸 사 앞에서, 거의 모든 게 끝났구나 싶어 한 젊은이가 훅 쓰러진 건 그 직후였다.
-
8일째의 낮, 익명의 제보자에 의해 이번 뒷세계 폭주사건의 명단이 전부 공개되었다. 그 중에는 아직 진실 여부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루머들이, 그러니까 군인들이 얼마나 존재하는가, 혹은 정말로 탈옥수들이 섞인 것이 맞나, 하는 것들의 추가적인 비고까지 주우욱 공개되었다.
- 휴식
“…그러니까 전부 퇴짜를 맞았다구요?”
쩌렁거리는 그의 동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도 귓가에 들렸다. 그가 기절하고 나서 이틀 째가 지나던 때였다. 몸은 뻐근했고, 흔히 말하듯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으며, 기절을 잠이라 치환해도 피로가 온갖 곳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쑤시고 저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새 다친 곳에는 붕대가 곱게 감겨 있었다. 부러지는 걸 허용한 적은 없었지만 부어 오른 곳은 있었으니 가볍게, 단단하게도 더 많은 조치가 취해 진 곳도 있었다.
몸이 무거운 건 분명 붕대 때문일 거야, 하는 붕 뜬 바람 하나는 다시 몰려오려 하는 잠에 의해 가볍게 날아갔다. 깨고 싶은데 조금 더 자고 싶다, 상충하고 가라앉는다, 그래도 말소리가 들렸잖아, 물어는 봐야 하는데. 삐삐삐,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한나절은 더 잤을 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안개가 가득히 낀 듯한 상태로 겨우 일어난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장소를 확인했다.
그래, 그러니까.
쓰러진 당일에, 그의 양어머니는, 올리비아는 분명 근처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댈러쉬였음은 기억 나지만… 눈이 뻑뻑하다. 아늑한 다락방의 따뜻한 공기는 검푸른 도시의 차가운 공기와 대조되었다. 새벽을 마주하던 그는, 식어버린 정의의 차가움을 마주하고 오늘을 즐기기 위한 불타는 연료 같은 이들만을 마주하던 그는 지금의 아늑함은 제법 오랜만인 것이었다.
기껏해야 한달, 아니 두 달인가. 제 양어머니와 연락을 끊은 것 말이다. 그는 해가 저물지 않은, 분홍빛의 하늘이 보랏빛으로 마저 물드는 오후에, 꽃잎이 사뿐히 길거리에 내려앉는 것만큼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에서 올리비아를 마주하는 건 물론 예상이라곤 한 적도 없는 일이었고. 깜짝이야, 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어깨의 움직임은 올리비아의 눈이 잠깐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올리비아는 이틀 전에 제 아들녀석이 기름냄새가 난다고 중얼거리며 곧바로 푹 쓰러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커다랗게도 자란 제 아들들이었고, 제 옆에서 보좌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알아보며 전투 중에도 머리를 어느 정도 굴리는 아이였다. 머리가 시원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푹 늘어지는 걸 보자면 베테랑인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새하얘지는 것이다. 본능적인 움직임은 아들이 땅에 널브러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진작에 왼손과 왼팔을 익숙하게 움직이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부스스하게 깨어난 아들 녀석은, 샛노란 눈에 아직 총기가 채 돌지 않는 것 같았다. 보호자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더 재우고 싶을 정도로 졸음이 얼굴 가득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맞이하는 그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꼭 안은 다음,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아가야, 우리 파랑새야. 더 자지 않으련?
“…올리비아, 여기 계단인데요.”
“아! 내 정신 좀 봐.”
-
차가운 물은 머릿속의 막힌 길을 명쾌히 뚫어주고 있었다. 단지 기분탓일 수도 있고, 차가움에 정신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계단을 내려온 붉은 머리의 남자와 올리비아는 식탁으로 향하였고, 의자를 찾아 앉았다. 멀뚱하게 앉은 아이언애로우는 자리를 지키고 있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니까, 하고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
물론 손짓 하나로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무례하잖니, 하는 말은 흘려 넘겼다. 그다지 믿기질 않는 인사인 건 여전하기도 했다만, 모순적이게도 기대고 싶은 사람이라 더 까칠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뭔 얘기 하고 있었어요?”
“옛날 얘기랑 지금… 그, 왜 있잖니, 은퇴한 다른 동료들. 만나러 갔다가 퇴짜 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어이구야… 일단 피난은 잘 갔네. 없어진 물건은 없구요?”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구.”
옛날 이야기라. 근데,
“그게 왜 엮여서 나와요?”
“엮이는 부분이 있긴 하더라고.”
“허 이 미친… 어디서부터 판 짜고 있던 거야.”
“내 말이!”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TV는 화면으로 음성으로 이를 조잘대고 있었다. 이번 뒷세계 팽창-폭주 사건에 대한 미흡한 대처, 그리고 군번줄, 명단까지. 정부의 개입이 진심으로 의심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방영을 할 줄은 몰랐는데.”
“기자 하나가 잘 문 모양이더라고!”
“뭘.”
“그 경찰 폭로한 기자 있잖아. 그 사람이 이번에도 물어서 완전 신뢰도 높아!”
“어엉.”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아… 하고 투덜거리는 걸 흘려듣는다. 뉴스의 내용에 집중할 시간이었으니까. 요는, 정부에서 최선을 다 해 진실 규명을 할 것이며, 관련자를 내부 색출해 처벌할 것이라고. 물론 시민들의 반응은 이미 한순간에 신뢰도를 나락으로 던져버린 정부에 대해 가지각색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키고 빠르게 염탐을 하다가 별안간 웃음이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와 굉장한데.”
“어떤 걸 봤니, 파랑새야?”
“뭔데? 너만 보지 말고.”
“이거 봐봐.”
이미 교도소 사람들도 다 탈주 시켜놓고 이제 와서 처벌 운운하느냐는 요지의 게시글이었다. 사실상 맞는 말이기도 하였다. 다른 글들은 경찰 일로 눈길 돌리려고 하지 말라는 글이었고, 또 다른 글은 상당히 음모론적 구석이 있는 글이기도 하였으나,
“제압 마지막 날에 데우스 소유 건물이 공격받은 건 굉장히 수상한 일이다… 뭐 맞는 말이네. 상가 근처에 있었는데.”
“그렇구나, 다른 건물들도 피해를 입었는데 확실히 의심할 만도 하지.”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집회에 대한 알림이었다. 자경단의 샛노란 눈은 점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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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가 참여할 수 있었느냐면, 아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하길 수용소에서 너가 만나야 했던 사람이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걸 듣자면, 그리고 이번 사건에 사용된 화약이라곤 총기 안의 총알들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많은 다른 화약들은 어디로 갔는가?
본 얼굴들 중에 비교적 최근에 잡힌 이들은 있었지만 ‘빌런’으로 분류된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전에 튀어나온 한 놈과 한 무리가 보이질 않았다. 변수로 작용하길 바라는 녀석도 얼굴을 비추질 않았고.
그는 누군가를 만나길 고대했으나, 저스틴 프라이라는 가명을 내밀고서 한 번 더, 그러나 면회를 거부당한 것을 기점으로는 다시금 불안에 떨 필요성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떨 수는 없었다. 다른 배지책이 필요했고 다른 추적이 필요했다. 어떻게? …잠이 밀려오고 피로가 몰려오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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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외출을 하였다면 그에 맞는 일을 해야지. 파랑새는 이틀 간의 휴가를 잠으로 날렸다. 그 휴가는 스스로 용납하지 않은 휴가였기에, 강제로 뿌리 뽑히고 세척당한 뒷골목을, 그 고요 속에 숨은 남은 쥐새끼들을, 위신을 세우고자 열심히 일하는 경찰들에게 넘겨버릴 작정으로, 검푸른 도시의 밤하늘에 섰다. 잿더미는 움직였다. 먼지더미를 박차고.
- 감언은 못 하는 자
평화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빌런들은 조용했고, 뒷세계는 이번 일로 하여금 반강제로 뿌리째 나가 떨어졌다. 이 주 정도의 기간이 짧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평화란 낮이요 위험이란 밤이었다. 하루에 3분의 1 이 일상적으로 붉은 피와 새카만 범죄로 물든 곳이었다. 검푸른 밤의 장막 속에 숨어서.
그래, 모든 것이 조용했다. 순찰을 돌아도 취객과 보잘 것 없는 깡패들만 마주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위험에만 매번 노출된 사람으로서 어색해하기에 충분한 환경인 건 차치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것에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런 고요 뒤에는 늘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불어닥치기 마련이었으니. 바로 전에도 겪은 바이지 않은가.
예컨대 소식이 끊긴 수용소의 누군가. 변수로 작용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사실을 공유한 바 있었으나, 전해 듣기로는 면담이 거절당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자가 수용된 곳은 원래 빌런들이 윗쪽과 합의를 거친 뒤에 탈옥이라는 명목의 악역 복귀를 하는 곳이었고. 소식이 끊겼다, 배신인가? 쉬지 못한 자의 머리는 부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마피아들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발을 뺀 듯 종적을 감춰버린 것. 이건 뭐 호텔을 불심 검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늑한 다락방에 날카롭게도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그 때 이 나라 갱단이 접선한 건 타국 쪽이 맞았을 텐데. 치고 빠졌나?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외려 크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화약고가, 이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도심에서는 촛불과 횃불로 인해 불의 냄새가 났다. 양초가 타면 심지에 불이 붙어 있었고, 나무가 타면 분노인지 열정인지 모를 것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 머리의 남자의 것은 아니었다. 시민의 목소리에 담긴 것이었지. 보도되는 뉴스들도 점차 기세를 기울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은 상쾌해지는 것도 같았다.
여름 끝자락에 불기 시작한 바람은 뜨겁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세한 화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시위대를 감시하고 있는 경찰들의 총알 속 냄새라고 믿고 싶은 그였다. 무기상이 지인으로 있고 대량의 화약이 유입됐다는 사실을 들은 이상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지만. 저 불이 부디 평화롭게 끝나길 바라는 바였다.
이제는 제법 서늘한 바람 속에, 지친 자는 오늘도 휴식을 취한다. 이제서야 돌아온 그의 사이클은 새벽을 지새운 그에게 낮잠을 권유했고, 그는 시계를 확인한 뒤 벽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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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엄마가 다쳤어요.
버니, 내가… 내가 엄마를…
왜 은퇴해야 하는데요? 왜? 말해 봐요, 말해 봐 데우스!
…안녕, 버니. 아니, 이제 솔라리움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잖아. 내 말 들어.
그래, 내가 드러났어야 하지? 그렇지? 젠장 내 말 좀 들으라고! 내 말 들어, 버나드 트레이!
-
악몽이다. 악몽인가? 그가 악몽으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그럴 것이다. 옛날의 기억은, 특히 그 스스로 나쁘다고 낙인 찍어버린 기억은 그리 칭하기에 충분했다. 땀에 푹 젖은 그의 머리는 피가 돌다가 만 듯, 아니 오히려 피가 두 배는 더 돌아버린 듯 지끈거리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도 컸다. 여름 저녁의 밤은 유난히도 차가웠고, 체온을 앗아갈 것 같았다. 창문을 닫으면 문이 열리고, 그는 저의 영웅이 저녁밥을 먹지 않겠느냐는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을 듣기 전까지 진정하지 못했다.
외려 머리를 굴리고 있지 않았나? 평화였다. 과거의 기억이 돌연 튀어나온 것은 뒷세계의 폭주가 완전히 제압될 때 형제 녀석을 만났기 때문일 터였다. 노란 눈이 깨작거리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 것이 뭐였지? 히어로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옛 동료이자 형제는 어째서 저에게 협력을 요청했지? 틈 하나를 발견했나. 포크질에 조금 힘이 실렸다.
“올리비아.”
“왜 그러니, 우리 파랑새야?”
“오른팔 괜찮아요?”
“그럼, 당연하지.”
“…그냥 미안해서.”
“아가야.”
올리비아는 제 오른팔을 손수 들어 아들녀석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피로감에 젖어 한동안 그저 대자로 뻗어 자던 아들녀석이 웬일로 어느 날처럼, 습관을 들이겠답시고 앉아서 자나 했더니.
- 이설
저녁이라 하기엔 보랏빛마저 저무는 하늘이었다. 해가 소란스러움을 가져가고 달이 고요함을 내려놓는 시간이었다. 여름의 더위가 스스로 물러서는 계절이었고, 서늘한 바람이 붉은 머리의 남자 곁을 맴도는 날이었다. 바람을 다루는 자에게 이렇게 쾌적한 날씨는 컨디션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운용이 쉽게쉽게 이루어지는 날인 것이다.
그 바람에, 화살 소리가 섞여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아이언애로우를 필두로 한, 레드우드가 숨겨둔 후진.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전부 활을 든 채로 건물 곳곳의 옥상에 있는 광경이란 진풍경이었다. 농담으로도 그렇고 진담으로도 그랬다, 저 양반들 제압하려고 모인 게 맞지?
-
“대부분의 옛 동료들 한테는 좋게 표현해도 에둘러 거절당했다 외엔 설명할 길이 없군.”
“아저씨 회사 인수는 잘 하시더니.”
“뭐 인마.”
“아, 쫌.”
“댈러쉬, 자네는 좀 앉게. 서 있지 말고… 뭐 하나?”
“…레드우드, 우리 둘이 몇 개월 간 법적 절차 밟는 동안 뭔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안 그러면 그렇게 거절당할 리가 없지 않겠냐고.”
“너무 간 추측이 아닌가.”
“나야 초기에 나가떨어졌으니 모르고요.”
초기에 일찍이 은퇴를 선언한 전직 사이드킥과, 보여주기식 법적 분쟁을 빙자한 회사 넘겨주기를 하느라 언론과의 싸움을 한 두 베테랑이나, 꽤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는 이 두 베테랑을 옛날부터 봐 왔고, 그 판단력이나 직감을 보고 배웠다. 왜 둘이 자리를 교체했겠어, 미래 도모를 벌써 그리고 있었던 거지.
아무튼, 제 어머니의 집에서 아이언애로우가 전한 소식에 꺼림칙함이 들었고, 올리비아도 같이 전하는 것에 확실히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겠구나 하였다. 그저 단순히 돈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단이 나고도 단체로 가만히 있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도 일찍 은퇴했었지. 그는 다시금 오른팔을 상기했다. 이내 지운다. 아니, 다시 새긴다. 그걸 지우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그러니 일단 상황이 상황인 만큼…”
“뭔 상황이 상황이에요, 조용해 뒤지겠구만.”
“자네도 알잖나.”
“넌 정치인 하지 마라, 소름 돋으려고 하니까.”
“뜻 없네.”
-
그 다음에 레드우드가 그에게 연결시켜 준 게 저 사람들이다. 확실히 레드우드의 말은 일리가 있긴 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일이었고.
물론 그에게 있어서 제일 당혹스러운 소식은 그가 잠복활동을 하는 동안 저 둘이 제 어머니와 함께 단독활동에 나섰었다는 것이지만. 언질도 없이 말이다. 하여튼 현장에서 뛴 사람 둘에 현장에서 뛰던 사람들 아지트 제공하던 사람 한 명이었다. 다음 세대인 그로서는 채 발견 못 한 걸 볼 수도 있겠거니, 하였다.
그래서, 인력이 많아지고 거리는 조용한 이 때에 무엇을 할 심산이냐고 묻는다면, 가장 걸리는 것의 순서를 정렬하려다가도 결국 방향은 하나로 정해지곤 하였다. 수용소 건은 그조차 쉬이 건드리지 못했고, 다른 은퇴파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건 시간이 오래도 걸리는 일이었다.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시위대 너머, 현재 영웅들의 총본산에.
무엇을 위하여? 그는 설득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려 하는가? 합리적으로 이유가 나오지 않았나, 은퇴파의 은퇴자들의 입장을 보아라.
-
낯설디 낯선 상황이었다. 시민들이 종종 적대하거나 하는 것은 분명 영웅들에게 있어서도 익숙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차라리 호의에 가까운 말을 얹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무례한 이들-이들은 실상 영웅들을 그저 노예로만 보는 것들이었으니 옛날에 갈라진 동료들도 싫어할 잡것들이지만-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보이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적대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빌런이 아니더라도, 악한이 아니더라도, 그저 질투가 난다는 악질적인 이유부터, 어째서 제 시간에 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한이 서리고 말문이 막히는 이유까지. 그러나 지금 이루어지는 시위는 본질이 달랐다. 어째서 제 시간에 오지 않았는가를 필두로 한, 차가운 글씨로 써진 뜨거운 분노가 곳곳에서 일렁거렸음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국가에 종속된 히어로들은 해명하라!’
‘수용소에서 탈출한 범죄자들과 군인들이 왜 같은 무리에 있는지 해명하라!’
‘군인이 파손시킨 시내를 배상하라!’
‘사상자에 대한 책임과 사과를 확실히 해라!’
‘늦장 대처한 히어로들은 사과하라!’
뒷골목 녀석들이 제 구역이랍시고 그래피티를 해 놓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인원이 유동적이면 무엇 하겠는가, 감소가 1이 된다면 그 다음 증가하는 것이 1.5 였는것을. 시위 장소는 주로 두 군데였다, 하나는 국회 앞, 하나는 이 곳. 두 갈래로 나뉘었음에도 내부에 기거하는 이들을 압박하기에는 충분했다.
경찰들은 그저 의무적으로 시위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듯이, 되려 국민을 위한다는 듯이, 과한 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혹은 무언가를 던지면 정말 테러 사태가 터질 거리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은, 제압봉은 그저 허리에 달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웅들이 은연중에 무시하거나, 혹은 도구로 여기거나, 그러던 이들이었다.
여론의 힘은 무력을 무력화시키곤 하였다.
낯설디 낯선 상황에, 익숙할지 아닐지 모를 이가 방문객으로 등장하였다. 이 곳에서 일하는 공무원들과 영웅들 외엔 잘 모르는 뒷문이 방문자가 왔음을 알렸다. 붉은 머리의 남자다. 샛노란 눈이 저 바깥의 불꽃만큼 타오르고 있었다. 예의상 차린 웃음이 차가운 글씨 만큼이나 얼얼했고, 그 속의 뜨거운 분노 만큼이나 불타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ㄷ,”
“저스틴.”
“…그래, 가명 쓰는구나.”
“드러나는 일이 내 실수로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이 사람들아.”
말을 끊어내며 튀어나온 목소리에 날이 서렸던가, 적어도 그 옛날의 감정적인, 소년을 벗어난 티가 막 나는 청년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눈에 불을 키고 오는데 어떻게 감정적이지 않다고 표현하겠는가?
“아니면 신더라고 하던가, 옛날처럼.”
“은퇴했잖은가?”
“허.”
기가 차다는 듯이 웃는다.
“….왜 찾아왔지?”
“바깥 상황은 인지하고 있나 보러 왔는데.”
“잘 알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너무 걱정이 되는데.”
“지금도 불안에 떨고 있잖아요.”
“아니, 우리는 그저 대책을 마련할 뿐이야.”
“무슨 대책? 무엇에 대한?”
잠깐의 침묵. 그래, 당신들은 무엇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지?
“시민들의 요구 사항에 대한 대책이지.”
“사과하라는데?”
“알고 있는 문제인 것을.”
“아니, 내가 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긴 했어.”
“그렇게 탈옥을 많이 하는데 왜 수용소에 주기적으로 히어로가 들리지 않는가?”
“왜 히어로들이 그 근처는 유독 가지를 않는가?”
다시 침묵이 감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자들의 장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지 않았나?”
“있으니까 왔죠.”
“또 은퇴하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심산은 아니겠지?”
“그걸 헛소리가 아니게 만든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지금 은퇴하면 빌런들이,”
“뭐, 빌런 뭐요. 시민들한테도 잡히는 빌런이 뭐?”
“다시 조직적인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그건 미루려고.”
“설득 하러 왔습니다.”
“…또 무슨 소리를 늘어놓을 심산인 게야.”
“정보 유출이 난 건 알잖아요?”
“친 데우스파 여러분들아, 슬슬 현실을 직시하는 게 어떨까. 이거 입 다문다고 끝날 일 아닌 건 알잖아요.”
“…그저 공개되면 혼선이 지속될 텐데.”
“지금이 제일 혼란스러운데?”
“일단 수습하고 나서 무언갈 하는 게 옳아.”
“동의는 하지만, 그래서 책임은 누가 지기로 했는지는 아직 안 정해졌죠?”
“그걸 그쪽한테 말 할 이유는 없으니.”
“우리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걸로 끝이야.”
“…진심이야?”
“아니, 일단 이야기는 쭉 나눠 볼 거고.”
다급하게 이어붙는 말에 무언가의 전조를 느꼈다.
-
플레어건을 만지작거렸다. 푸른색 빛이 나게 만든 탄약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신더’ 였던 시절의 것들. 그 옆에는 평범하게 붉은 빛이 나게 만들어진 시제 탄약이 있었다.
오늘도 그는 탄약을 버리지 않았다.
- 면과 면 사이
히어로 총회 내부는 연일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부터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청객의 방문 이후라고 대답할 것이고, 나머지중의 또 대부분은 시위가 시작한 때 부터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티끌만큼의 조금의 사람은, 침묵의 처음부터를 알고 있던 사람은, 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느냐고? 이 총회가 설립되기 전부터였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에 그저 눈을 돌리며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겠지.
대화가 오래 가지 못하고 단절되던 것, 모두가 날을 세우며 저 사람은 은퇴파야, 저 사람은 너의 적이야, 라고 한 것,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히어로들 사이에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던 것. 그 끝에는 축출과 남은 자들이 있었다. 총회는 남은 자들의 위대한 공간이었어야 했다. 겉보기에는 지켜낸 자들의 명예로운 전당이겠지. 비록 이름도, 얼굴도 전부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으로서 소임을 다 한다니!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내면에는 이제 권력의 싸움이라며 다시금 파를 만들고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줄을 잘 타야 한다며, 너는 이제 어머니도 여기에 발을 못 붙이고 네 형제도 관둬버렸다며, 입지를 생각하라며 서늘함만이 존재하는 자들의 공간이었다. 이데아, 이상의 끝은 진작에 무너져 있었을 것이다.
버나드 트레이는 오랜 시간 동안을 합리화하며 보냈다. 이게 맞는 것이라고. 이미 들인 이상 어쩔 수 없다고. 그러나 제 형제가 합리화라는 글자를 째로 부수며, 거미줄을 하나 하나 끊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미묘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오늘 그는 데우스와의 개인 면담에 의해 로비에 있던 소동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했으나, 전해 들은 바, 목에 칼이 들어온 느낌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꼈다. 발 밑에 무엇이 있었지? 거미줄은 이미 끊어지고 끊어져 시민들의 양초에 지그시 태워지고 있었다. 적막이다. 여길 채우는 대화는 온정 어린 대화도 일거리 같은 것도 아니었다. 할 일을 하라는 고압적인 감독과 목줄 찬 인간 모습의 개. 비호는 이제 불규칙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튿날, 불청객이 다시 찾아왔다. 자유로운 파랑새가 손수 날개를 접고서.
-
“무반응이 보름을 지났는데.”
파랑새는 유난히 먼지에 꿰인 옷을 입고서 등장했다. 그것이 퍽, 오히려 사람들 속에 숨어 섞여들기 좋은 회색빛이라서, 혹은 마치 너희가 만든 도시가 이렇게나 회색빛이란다, 하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어제 부로 금이 확실히 가기 시작한 자들은 다시금 등장한 이의 행색에, 아니 등장 자체에 숨을 잠깐 멈췄다.
금은 계속 존재했다. 그저 데우스의 존재 하나로, 각본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이유 하나로, 그 금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국가에 그들만 살았다고 착각했는지, 그들이 멋지게 구해야 할 시민들이 지금은 영웅들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하고 있었다.
실금은 정보가 유출된 직후부터 계속 가고 있었다. 우리 중에 우리를 속인 자가 있다. 색출해내야 한다. 안 그래도 긴장 상태였는데, 붉은 머리의 남자가 한 순간에 던진 돌 하나로 합리화를 마친 뻔뻔한 자들과 죄책감에 휩싸인 불안정한 자들로 나뉘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애초에, 거센 말 한 마디로, 강경하게 은퇴하기 싫어하는 이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으니.
‘그럼 드러나지 않은 사람끼리 활동하면 되는 거잖아요?’
축출의 시발점이 되다시피 한 말을 뱉은 사이드킥은 다시금 이 자리에 왔다. 언어의 무게를 잘 새겨넣은 자는 그 무게로 이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프로파간다들의 얼굴에 돌을 던지기 위해 왔다. 잿더미 속에 품은 불은 조용히 눈에서 빛났다.
“어제도 왔다고 할 생각 하지 마요. 시민들한텐 무응답 투성이인 보름이야.”
“신더.”
“…이야, 어제는 안 보이더니.”
두 명의 트레이가 만났다. 영웅을 등진 자들이 만났다.
-
“그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꼭 있었거든.”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도 괜찮을 텐데?”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니까 안심해.”
버나드는 제 형제가 자신이 폭로자임을 말할까 두려웠다. 자신이 자료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경찰과 접선하여 넘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경찰은, 또한 폭로자였기에, 기자와의 연이 있어서, 그대로 군인들이 동원됐다는 것이 묻히기는커녕 기정사실화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공공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람들이 군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린 것 하나.”
“그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투입된 것이 정보가 섞인 것일 뿐이지.”
“질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빌런들의 수용소에 왜 그 누구도 가지 않았는가에 대한 하나.”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보름의 침묵 하나.”
“오랜 시간의 회의가 필요한 거야. 알잖아.”
“빌런을 일부러 풀어준 것 하나. 수용소로 가는 차량에서 일부러 범죄자들을 풀어준 것 둘.”
“…그건 순전히 루머인 것을.”
“시민들한테 나돌 음모론이나 루머였으면 내가 직접 말하진 않겠지.”
“거래를 할 거였으면 입단속을 잘 했어야지.”
참으로 악랄한 웃음이다. 아니, 사실을 고하는 자에게 왜? 악한가? 입꼬리만 올려 웃는 것을 보자면 가증스럽다고 느껴지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듣고 있는 자들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적어도 내가 아는 걸 그대로 제보해 버리면 숨어있는 사람들도 경상으로 쉬고 있는 사람들도 단체로 피켓 들고 나올 거라는 정도는 알지.”
“무엇을 위해 왔어.”
“말했잖아, 설득하러 왔다고요.”
이게 설득인가, 아니면 압박인가? 이미 돌을 던져 본 자는 돌을 다시 던지는 때와 감각을 예측하기 참으로 쉬웠다. 그때는 의도치 않았지만, 이제는 말을 잘 골라 하나 하나 말해준다. 의도적으로 부수기 위하여. 폭력적인 설득이고 회유이며 협박이었다.
“공개하기엔 증거도, 증인도 없지 않은가.”
“…그래, 너는 그냥 루머를 망상까지 부풀린 사람 취급받을 텐데.”
“애초에 공개하면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지 않나?”
“혼돈이요? 잘 알지.”
“그 혼돈을 다시 야기시키는 게 선한 건가?”
“진실은 조금 뒤에 알려져도 괜찮을 거야. 적어도 이번 일이 완전히 해결되고 나서 말이야.”
“내 눈엔 신더, 저스틴, 뭐… 전 트레이라고 할까. 그쪽이 악한으로 보이는데.”
“망상증 환자에 부풀려진 루머라니 우리야 고맙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다시 재검토를 하고 사람들은 도로 냉정해질 가능성도 있는걸. 애초에 지지기반도 없잖아. 네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트레이, 라는 말에 다른 트레이는 덜걱거렸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하나? 이걸 말려야 하나? 마치 트레이, 라고 부른 것이 꼭 저를 불러 어서 멈춰 보아라, 하는 것 같았다. 여기 현 트레이가 있잖아. 안 그래? 하는 압박감이 이는 것 같았다.
“…너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지만, 저스틴. 시민들을,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오, 그래. 넌 개인적으로 좀 보고 싶은데.”
돌아온 말이 철화살 같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제 형제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다는 말에서부터 금이 간 것이 꽤 바깥까지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았다. 지금 입을 놀리지 않고 굳은 얼굴로 희게 질린 채 상황을 지켜본 이들도. 도망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선택이 강요당하기 시작했다는 걸 마땅히 고해 준 저 뻔뻔한 얼굴들에게 박수를.
물론 이것도 도박수지만, 그는 저 모두와 아예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었다. 미쳤다고. 저도 저지만 저들도 저들이었다. 저도 오래 굴러먹었지만 저들은 저보다 오래 굴러먹은 자들이었다. 동시에 능구렁이들도 있었고. 능구렁이가 아닌 이들이 부디 존재하길 바랬고, 있었고, 예를 들어 제 형제처럼, 그리고, 이 도박은 조금 성공한 것도 같았다.
저가 그 못 지킬 약속 같은 말을 일부러 반박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내면을 보아라, 하는 것이었다. 금 사이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스스로 추가할 줄은 몰랐지. 내분을 일으켰던 원인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던 자는 이제 내분을 일으키고 정보가 폭로되길 기다리는 자로 바뀌었다.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직도 모르겠냐.”
“몰라. 모른 척 할 거라고.”
“진심이야?”
“…그렇게 갑작스럽게 부수고 들어와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유부단한 놈.”
“넌 너무 매몰차고.”
“알아.”
“…엄마는?”
“내가 더 묻고 싶다?”
“그 말이 왜 나와, 엄마 어떻게 됐어?”
순식간에 역전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으나 당황한 건 둘 모두였다.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그때, 너가 올리비아 집 왔, 아니.”
“…그때 뭐.”
“올리비아가, 그러니까… 네 곁에 섰잖아. 근데 왜.”
“그래서 잘 있냐고.”
“있다고!”
“…됐어. 엄마는, 엄마는… 이제 날 용납 못 할 선까지 왔나보지.”
무거운 침묵이다. 차라리 질식해 기절하는 게 나을 정도로.
“안 털어놓을 거야?”
“…난, 내가 알아서, 선택할 거야.”
그리고 붉은 머리의 청년은 그러던가, 라는 말을 툭 던지는 것이었고.
“야.”
“또 뭐.”
“너가 최초 폭로자인 거 밝히면 감형된다.”
“…내가 뭐, 참나, 무슨 사범으로 끌려들어 갈 것 같아?”
“더 털면 더 깎이겠지.”
“헛소리 하지 마.”
“내가 X발 내 담당 영웅이랑 내 형제가 무슨 나중에 입건됐다가 20년 썩고 나오는 꼴을 봐야겠냐?”
그리고 이건 순전한 진담이다.
“…올리비아한테 난 당당할 수도 없다고. 내가 잡아 쳐 넣은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데.”
무거운 침묵은 살인적이게 이어졌다. 그 둘은 알고 있었다. 이 시위는 지속될 거고, 종지부는 찍힐 것이라는 걸.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 이가 버나드의 앞에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
붉은 머리의 남자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누군가의 부름을 들었다.
“…너가 한 말이 진짜야?”
“그러니까, 잠깐만. 브룸스틱?”
“나는, 몰랐어…”
“…여기도 정보 통제가 있다고요? 돌겠네 진짜? 아니, 나 말고. 아니 나도 필요하긴 한데, 나 말고, 그러니까…”
흔들린 청년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선택을 지지할 뿐이었다.
- 선 넘기
제 아들이 한창 순찰을 나가거나, 장을 보고 오거나, 아무튼 임시 숙소로부터 잠깐 외출을 나가는 일이 생기자 그 보호자는, 베테랑은 다른 베테랑 하나를 불렀다. 집주인은 그 임시숙소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모든 일이 끝나면 둥지 틀 것을 약속하였으니까. 아무튼, 그가 자리를 비운 틈에 임시 숙소라고 쓰고 트레이 가의 집이라고 읽는 건물에 레드스틸 사의 주인이 들어섰다.
“…올리비아, 너가 이렇게 골 때리는 생각을 할 줄이야.”
부를 때 이미 그녀는 무엇을 할 지 전부 알려 주었다. 문자 안에 알차게 적힌 사항들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우드가 온 이유는, 이것이 퍽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것 같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 해서 찬성한 거 아니었어?”
“…좋아, 일단 피켓부터 만들까. 아니면?”
-
시위 현장은 어둡지 않았다. 아직 보랏빛 하늘이 오지도 않은 오후였다. 노을이 슬슬 제 색깔을 내려 준비중이었고, 바람은 이에 맞춰 서서히 선선함을 더하는 중이었다. 첫 낙엽이 바람에 굴러오는 듯도 하였다. 저 낙엽에 언젠가의 아이들은 농담따먹기를 하며 깔깔 웃었겠지, 이제는 아니야. 횃불들과 양초들만큼이나 피켓들은 많았다. 낙엽 하나에 눈길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 낙엽이 시위 현장 근처의 어린 아이에게 톡, 닿았을 때, 아이가 짧은 팔로 허우적거릴 때, 다정한 왼손이 그걸 치워주면서 괜찮니?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아이는 서늘한 바람에 살짝 빨개진 볼을 우물거리다가 끄덕이며 제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참 다정하다, 레드우드는 걸음을 갑작스럽게 틀은 친우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괜찮겠나.”
“…버니가 있는 곳인 건 알지만.”
“제일 위험해질 수도 있어.”
“예상 못 한 한수 정도는 둬 줘야 하지 않겠어? 우리 아들들이 고생하는데.”
아예 상황 자체를 종결시키려고 하는군. 연륜 서린 눈이 보호자를 본다.
“…질문 차단은 어떻게, 괜찮겠나.”
“너 하는 거 보고 따라하지 뭐!”
쾌활함 속에 분명히도 쓰다쓴 웃음을 본 것 같은데. 그녀의 아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날개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명확했고, 피로써의 그녀의 아들이었지. 그녀는, 스스로 날개를 꺾으러 가는 기분일 것이다.
시어도어 레드우드는, 그는 버나드 트레이를 그다지 전담하지 않았다. 저가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때문에 속이 뒤틀어진다면 저 우두머리인 데우스라는 녀석 때문에 뒤틀어졌겠지. 무얼 의미하느냐, 현재 그로서는 제 친우의 속을 쉽게 파악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
‘혹시 은퇴한 히어로 분들 아니세요?’
‘맞습니다.’
‘시위 현장엔 무슨 일로?’
‘상황을 보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전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러 왔지요.’
‘다른 은퇴한 동료들도 보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친구들도 뜻은 다 알 거야.’
‘시민들의 목소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솔직히, 음.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합니다. 전문적인 정치학적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말이죠.’
‘히어로들은 언제나 시민의 편이어야죠. 그걸 위반한 이상, 은퇴했어도 쓴소리를 하고 싶네요.’
‘…실례지만 올리비아 트레이 씨가 아닌지? 아드님이 현직 히어로 활동을 하는데도 말입니까?’
‘잘못되었다는 걸 제가 여기 서 있다는 걸로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답니다.’
‘…오. 부디 닿길 바랍니다. 두 분의 말이 모쪼록 닿았으면 좋겠네요.’
-
조용한 트레이 가의 식탁에, 혼자 앉아 있는 청년은, TV를 틀고 홀로 가벼운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헛기침을 심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체했느냐고 한다면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릴 콜록거림이었다.
-
“아니, 나 좀 봐봐요. 무슨, 누구 제안이에요?”
“내 제안이란다, 우리 파랑새야!”
“…돌겠네 진짜!”
“왜 그러니?”
“그 놈이 자극돼서 판단이고 나발이고 놔 버리면 어떡해요.”
“만나고 왔구나.”
“…아 제기랄.”
“나는, 내 아들이… 내 신념을 부정해도 괜찮아.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다.”
“…있었어.”
“…올리비아, 저녁 아직 안 먹었죠.”
붉은 머리의 남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늘 장을 보고 온 결과물들이 수두룩했다. 엄마, 올리비아, 흔들릴 때가 제일 무서운 걸, 그리고 걔나 나나 흔들렸는 걸. 괜찮을 거야, 그렇지? 그는 올리비아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이 따라들어갔다.
음, 나는 무시당했군, 하는 레드우드는 그저 식탁에 앉아있었다.
-
자신의 어머니가 시위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란. 데우스는 그럴수록 저를 더 압박하려 하였다. 버나드는 요즘 들어 숨을 제대로 쉰 적이 있었는지 헷갈렸다. 저번에는 제 형제였고, 이번에는 제 어머니였다.
그래, 그도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고, 그 앞에는 브룸스틱이, 확실히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었다.
- 선 너머 (ABANDONED)
어째서, 분명히, 은퇴파를 주장하던 이가 급작스럽게 늘어났는가? 이 물음은 시어도어와 댈러쉬와 올리비아, 그리고 은퇴파들한테 퇴짜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신더한테까지 쿡 박혀있는 물음이었다. 공통적으로, 올리비아와 시어도어는 이른 은퇴를 맞이했고, 동시에 시어도어와 댈러쉬는 한창 바빴으며, 신더는 파탄을 낸 장본인으로서 그 스스로 영웅들을 등지다 못해 제 성씨까지 버렸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전해지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았다.’ 이건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리 현직 히어로들과 절연에 가까운 상태라 하더라도, 전해지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는다. 붉은 머리의 남자야, 스스로 연을 끊어버리는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물음에서 출발하는 의심투성이의 가시였다. 도노반 콜슨이라는 배신자야 바로 저번 8월의 난장판에서도 아이언애로우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아이언애로우는? 무엇때문에 왔는가? 정말 흥미인가? 처음에는 언어로도 구성되지 않는 무의식적 의심이었으나, 그는 다른 은퇴한 사람들에게 퇴짜를 맞았다는 걸 알게 된 시점에서 그럼 저 놈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넌 대체 무얼 하러 왔지? 술잔을 기울여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긴 하였다.
-
데우스는 초조했다. 그래, 그 말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위험도를 늘리기 위해 인원을 충당해야 했고, 마피아들은 진작에 날라서 차선책으로 군인들을 쓴 것이 화근이었다. 쉽게 걸릴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 쪽에 저런 일이 터진 지금, 그에게 있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잡아떼면 되겠지, 하는 것은 내부 정보가 유출되면서 물건너갔다.
군인은 민간에 덜 노출되니까. 그리고 정리하는 건 나의 편이니까. 덜 위험할 것이다. 이미 위험도를 높여놓은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내렸구나. 그리고 오늘 시위에 있었던 자, 옛 동료였고 지금은 걸리적거리는 이들인 자. 그리고 그 중 한 명과 연결된 이. 그는 솔라리움을 호출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요?”
“의견을 듣고 싶은데.”
“…”
“가족에게 버려졌군.”
-
나는 가족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있지? 붉은 머리가 아른거렸다.
진짜로. 질리지도 않고, 하루 정도를 건너 뛰더니, 결국 또 찾아왔다. 썩 좋지 않은 표정을 하고 들어오는 것이, 분명히 뉴스를 본 것이겠지. 다른 이들은 각자 다른 사유를 생각할 것이다. 전에 반박을 굳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찜찜해하는 이들은 흥미롭게 볼 뿐이었다.
버나드는 그 의중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히 저의 상태를 살피러 왔겠지. 그림자가 가득 진 불의 영웅은 바라볼 뿐이다. 휴게실로 가는 문 앞에서.
“하루 걸러 왔는데.”
“성급하군.”
“빈말도 없으니까요.”
“이런 건 신중히 정해야지.”
“왜 신중을 논해? 당신들은 영웅이고, 시민의 편에 서 있지? 근데 왜 신중을 논하냐고?”
가시 돋친 윽박이었다. 은퇴한 이가 한 말이었으며, 살아 움직이는 잿더미의 불이었다.
“왜, 정치인인 걸 시인하게?”
영웅이 아니라? 솜방망이 같은 새X들, 중얼거리며 그는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제 형제가 있는 곳으로 뛰어 올랐다.
-
“…걱정돼서 왔어?”
“오냐.”
“왜? 내가 틀어질까봐? 내가 버림받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려고? 나도 잘 알아, 안다고.”
“뭔 말을 들은 거야.”
“엄마는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니까 날 설득시키려고 하는 거지, 그렇지… 너는? 넌 뭔데.”
“내 질문이 먼저다. 뭔 말을 들었냐니까?”
“버려졌냐고.”
“그 아저씨 하여간 말본새 어지간히 성질머리 더럽게 나가네.”
“엄마는 날-“
“미쳤다고 올리비아가 버렸겠어? 내가 들은 게 뭔줄 알아? 본인 사상 무시해도 좋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생각이나 듣고 싶댄다!”
“…그러면 안 버렸어?”
“왜 버려?”
“너가 있잖아.”
“나 뭐?”
“이렇게 자기랑 뜻도 맞고, 스스로 알아서 하고, 제 뜻에 대한 대답도 꼬박꼬박 하는 아들이 이미 있잖아. 응?”
“애초에 엄마는 날 본 적이 있기는 해?”
“…야 이 개X끼야, 너, 전에 팬텀 건 기억해라.”
“진짜로 그게, 맞을까.”
“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 하.”
“…너 나 싫어하지.”
“올리비아한테 잘못 돌아가고 있잖아 화살이.”
“…안 싫어해.”
“난 너 싫어하거든?”
“…왜?”
“왜냐고? 시X… 너가, 너가 친아들이라는 게. 그게 부러워서 뒤질 것 같았다고. 나는.”
“나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는데 넌, 넌… 이미 사랑받은 줄 알았다고.”
“그래서 떼 썼어. 그래서. 어릴 때 짜져 있었어야 했어? 너한테 미움 받기도 싫어서 너한테 치근덕댔어, 나도 알아, 개 X같은 거! 그래도 시X 그때는, 시X…”
“난 그냥 파이면 끝이야.”
‘내가 너 다치게 두면 이제 성 버린다, 진짜.’
“그래서 내 손으로 파고 나왔어. 근데, 너는, 넌, 왜… 왜 나간 모양이냐고 왜.”
“…할 말 많아 나도.”
“알아. 들으러 왔어 나.”
“그래, 떼 썼지. 나는 기다리는 거 밖에 할 줄 몰랐는데. 나는 엄마가, 너 때문에 그렇게, 세심해 질 줄 몰랐어. 나는 있지, 응? 엄마가 나보다 널 더 아끼는 줄 알았다고.”
“사이드킥으로 너가 된 것도 그래. 엄마가 나한테 이 자리 물려줄 때 탐탁치 않아 한 것도! 전부! 다… 다 날 그냥 2순위로 보는 것 같았다고. 다…”
“…피로 이어진 건 나잖아?”
“…”
“…난 성을 버렸어, 트레이.”
“알아.”
“널 다치게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른이고.”
붉은 머리의 청년은 붉은 눈가를 양 손으로 누르며 물을 찾았다. 기침하는 다른 청년은 숨을 내쉬다가, 조용히 물 두 잔을 가져왔다.
-
“…일단 내가 해야 할 말. 미안해.”
붉은 머리의 남자가 한 말이 사실인가? 그가 사과를 아끼는 편이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제 잘못엔 말끔히 사과하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 오해지. 너가, 예쁨 받았던 것 같아서 그냥 나도 갈구해야지 했던 거.”
“…그렇게 나오면 내가 지금 빡친 건 방향을 잃는데?”
“취소해줘?”
“…아니.”
“그리고 그, 음. 올리비아는 날… 구해 준 거잖아, 어떻게 보면. 사이드킥은 순전히 자원이였어.”
“…알아. 아는 거야.”
그냥 널 미워하고 싶었다. 속상했으니까.
“그리고 널 맡은 건… 내 가족인데 뭘 어떻게 하라고.”
“날 언제부터 미워했는데?”
“…맞춰 보던가.”
“처음부터지.”
“아마.”
“용케도 맡았네.”
“그러게.”
“특히 니가 올리비아랑 같은 능력인 걸 알았을 때 더.”
“…그거 진짜 진심이네.”
“당연하지.”
“난 너가 싫어. 쓸데없이 다정해서는 나쁜 놈인 척 하잖아.”
“헛소리.”
“…너가 싫다고 한 100번 정도는 더 말해도 돼?”
“허락 받지 말고 그냥 눈 마주칠 때마다 가운데 손가락 들어라 이 눈치 보는 데 도만 튼 놈아.”
“난 아마 갇히겠지?”
“아 이 개-“
“나도 판 좀 짜자. 응?”
그러니까 그 눈빛이 더 이상 솜방망이였나? 아니.
“다치지 마라.”
“너도.”
-
버나드가 오늘 확인한 것이 있었다. 첫째,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받았던 것 같은 제 형제가 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챙겼다는 것. 입이 썼다. 타들어갈 것 같았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챙긴 이유가 단지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아는 바였다. 제 형제는 다정하니까. 넌 우리 엄마의 성정을 똑 닮았다. 나는 엄마의 능력을 닮았다면, 너는 그러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낸 두 형제는 무표정했다. 그저 눈가가 조금 붉을 뿐이었다. 단지 화살의 방향이 매우 정확해졌고, 그게 다였지.
‘…내가 우리 엄마 다치게 한 거 그건 이야기 했었나?’
‘올리비아 다치게 한 원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유한 놈…’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정말 지독히도 자신의 형제가 부러웠다. 저의 양어머니와 같은 능력으로 저 스스로가 피를 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항상 저를 살피려 하고 양보하려 드는 것이 딱 양어머니의 성정이었다. 하나도 안 닮았네, 거친 언사의 남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 저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니까, 그걸로, 되었다. 널 지키려 한 것은, 그럼에도, 너 덕분에 내 어린 시절이 외롭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너가 다치면… 올리비아가 날 버릴 것 같아서. 유난히도 제 형제에게 무능한 놈이라 까 버린 것은 그 탓이었다, 질투와, 애증과.
-
그 날 밤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순찰을 나간 사이 불의 청년은 제 어머니를 잠깐 보고 갔다. 편지를 들고.
감상적인 놈. 답장은 어디로 보내냐, 하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주소를 뒤적거렸다. 못 다 한 말들이, 온갖 악의로 보여야 정상인 말들이 해소된 마냥 널부러져 있으니.
- 술잔을 기울이며
‘고흐, 붓질하게 하지 마요: 명예라는 권력이 있는데 뭘 더 줘?’
타이핑을 마친 붉은 머리의 남자는 ‘ㅋ’ 버튼에 손가락을 적당히 꾹 눌렀다가 떼었다. 그리고, 다음 한 번의 터치. 댓글은 등록되었고, 수 시간 뒤에는 또 어떻게 되어 있으려나, 생각하기에는 눈 앞의 베테랑들이 맥주병과 양주병들을 들고 왔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잔을 짤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옮기고 있었고.
그가 알코올을 좋아하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유일하게 탐탁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유일한 건 아니었다. 배신자 또한 수갑과 밧줄로 충분히 양념된 채 눈 앞의 잔에 빨대가 꽂힌 걸 보며 같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묶여 있던 거지, 하고 계산하기에는 이미 일전에도 투닥거린 전적이 있었으니까.
“안 마실 건가?”
“오늘 이중 약속이 있거든요?”
“저런. 거기서 진탕 마실 예정이군?”
“파랑새야, 맥주라도 마시지 그러니.”
아니요, 하는 게 예의 그 파랑새라 불린 남자의 표정에, 참 오랜만에도 온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었다. 유쾌한 성격을 가진 이들이 여기 모인 어른들 중에 그나마 그의 어머니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막내나 마찬가지인 그를 놀리기 위해 능글맞은 사회인들의 장난끼가 웃음소리와 섞여 나오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제 선배들이 아니라 동네 아저씨가 맞다. 그치, 맞지, 하면서 한풀 꺾인 기세로 맥주 한 잔을 받아드는 그다. 입모양으로 아, 싫다고요, 하고 중얼거리는 건 다들 못 본 척하고 있다.
“하여튼 다들 나쁜 어른들이야.”
“너도 어른이잖냐.”
“아, 젠장.”
옛날에는 나쁜 어른들이야, 한 마디에…
‘너는 커서 이렇게 되지 말아라.’
‘나아아쁜 어른이라고? 나쁜 어른이 잡아먹는다?’
같은 게 따라붙었던 것 같은데. 맥주거품만 깨작깨작 훑는 그를 보며 댈러쉬는 원샷 해야지, 그 정도는! 하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저 무기상 양반이. 실상 이 중에 두 번째로 안 취하는 게 저 무기상 양반이었고, 그는 첫 번째라고 못이 박힌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알코올에 대한 반응은 이다지도 상반이 되고 있었고, 반 잔을 이미 털어 버린 레드우드나, 원샷을 한 올리비아나, 빨대로 불만을 보글보글 표시하며 드링킹을 하는 도노반은 무기상과 같은 반응이었다. 이건 진짜 너무하지 않냐고. 픽, 숨을 내쉰 그는 결국 한 잔을 깡으로 비웠다.
“풀어지면 안 되잖아요.”
“라고 약속 잡은 녀석이 말했다!”
“아 진짜!”
웃음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모인 목적이 있었는지도 모를 술자리에 이야기 보따리는 입을 열었다. 그 모두가 보따리인 베테랑들이다.
-
옛날 옛날에, 어느 불을 다루던 영웅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맞으려나? 아하하, 좀 봐 줘. 응? 으음, 그 영웅은 결혼을 했고, 아이도 가졌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영웅이라는 직업이 행복하기에 세상은 아직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그 영웅은 사고로 자신의 남편을 잃었답니다. 응, 괜찮아. 멀고 먼 이야기니까. 그래서 이제 그 영웅에게는 저를 빼닮은 아이와 어디에 써야 할 지도 모를 명예와 위로를 해 주는 동료들밖에 남지 않았어요. 하여튼 고마운 친구들이야.
불을 다루는 영웅은 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자신이 실수하면 안 되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든 어떻게든 다루려고 노력했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계속해서 갈고 닦았지요. 그래야 영웅은 영웅으로서 빛날 수 있었으니까요. 영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저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어느 아이가 찾아와서는, 내 삶이 이렇게 불행한데 당신들이 그러고도 영웅이냐고 했었지요.
“…난 사별한 줄 몰랐어요.”
“얘기 안 했으니까, 아가야.”
영웅은 그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지요. 우리 파랑새가 그때 얼마나 당당하면서도 부서질 것 같았는데. 엄청 작았지. 버나드보다 작았을 걸?
“지금 키는 비슷한가?”
“아니 똑같아요.”
“안 재 봐서 최근에는 모르겠네, 응. 우리 아들래미들 키 말이야.”
“똑같아 아무튼.”
“근데 진짜로, 왜 입양했어?”
“…그렇게 쏘아붙이는데 양심의 가책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거야. 그래서 그랬지.”
-
그 꼬마애는, 먼지 투성이였어요. 잘 알잖아. 어디보자… 내가 이야기 뺏은 거에요? 몰라, 그냥 풀래. 맥주 강제로 먹인 값이라고 해요.
그 애는… 처음으로 가족이 생겼어요. 따뜻한 사람과 따뜻한 형제가 생겼어요. 똑 닮은 둘을 보면서 조금 무섭고 외로웠고. 나만 빨간 머리였는걸. 얼마 뒤에 형제라는 녀석이 나도 빨간 머리 할래, 하고 투정부리기 전 까지는 말이야. 그 때 버나드 진짜 웃겼는데. 그래서 내가 홧김에 너 그러면 눈은 어쩔거야! 라고 성질도 냈던 것 같네. 응.
“우리 아들래미들 많이 싸웠지.”
“갑작스러운 입양인데 그럼 뭐 어떡해요.”
“많이 걱정되긴 했지…”
“…충동은 아니야. 약속할게.”
아무튼간에, 뭐… 형제랑도 투닥투닥 하면서 잘 지냈고, 응, 내 생각에는. 걔 입장에서는 아니었나봐. 언제 한 번 엄마한테 조르니까, 그 이후로 엄마의 태도가 변한 걸 눈치채고 날 미워했었나 봐.
“그리고 지금까지… 라고 해도 이젠 뭐.”
“…”
“올리비아.”
“…엄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구요.”
걔랑 이야기는 이미 주먹질 빼고 다 했으니까. 나도 미워하고 그랬지. 자꾸 이야기가 끊기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 어쩌다가 내가 초능력이 나와버린 거에요. 아마 엄마도 모르지 않았을까? 응. 나도 몰랐는데 엄마가 알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운 거고. 그으래서 바로 엄마한테 자랑하고, 나서, 이제, 훈련받기 시작한 거지. 사이드킥으로.
“그 이후는 아시는 대로에요.”
“맥주나 마저 마시지 그러냐.”
“와, 개 나빴어.”
-
…뭐, 사실 자네가 다치는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네. 미안한 소리인 건 나도 알아. 그래도 말이지, 사별로 사람을 한 번 잃어봤는데, 이번엔 자식 녀석을 다치게 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사고 소식이 났을 때 둘 다 다치는 건 생각했지만 올리비아만 멀쩡히 탈출했을 것 같지는 않았어.
“잔인해.”
“잔인한 놈.”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음해하지 말게…”
예상한 대로, 올리비아는 다쳤고, 자네도… 경상은 입었지. 자네는 빨리 나았지만, 올리비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로.
“…그때 일은 진짜로, 미안해요.”
“괜찮대도.”
이런, 무겁게 해 버렸군. 미안하게 되었어. 그래도 꼭 해야 할 이야기인 건 맞다고 생각하거든. 그 때부터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나.
히어로들은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다 싶은 수였지. 몇 개의 팀이 구성될 정도였고, 몇몇 조력자들이 필요한 규모였고. 늙고 병든 나는 신더, 자네가 오고 몇 개월 뒤에 은퇴를 선언했고, 그 뒤에는 지휘관 겸 참모로 일했지 않나. 그러면서 살핀 게 꽤 있는데… 데우스 녀석이 찜찜하다는 거였지. 그냥 늙은 녀석의 감이 말년에 안좋게 꺾이는 건가 했는데.
“지금 무슨 야망가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그거였어요?”
“그래, 놓쳐서. …아니 야망가라니.”
“맞는 말인데?”
“너무 레드우드한테 뭐라고 하지 말자.”
“테오한테 뭐라고 하자.”
…뭐라 말을 못 하겠군! 이야기를 계속 그래도 이어야겠지,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꽤 사교성이 좋았고, 능력 자체도 강력한 데다가, 경험도 많은 베테랑이라서 좋은 선배의 표본이 되었지. 데우스는 꽤 독선적인 성향이 있었으니 조금 마찰이 벌어진 적도 있었지만, 사람 여럿이 모이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싶었고. 난 그저 몇 가지 주의를 줬을 뿐이었다네.
그러다가 자네가 다친 날, 기회다 싶었는지 그 녀석이 은퇴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 게야.
“능구렁이같네.”
“아이고야, 어쩌다가 걘 그렇게 된 거람…”
-
까놓고 말해서, 난 무기상이라고. 화력을 좋아하지, 그리고 난 너희들의 파괴력에 매료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한데, 동시에 시민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에도 매료되었다. 그래서 난 내 회사 공간 얼마 정도를 너희들이 모이는 데에 쓰게 해 줬어.
너희들 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기 마련이지. 시커먼 금속을 매만지는 나로서는 구분을 잘 하거든? 네놈이 이렇게 치고 올라올 줄은 몰랐지만.
“나요?”
“그래 인마.”
“섭섭한 소리를. 연막탄이나 섬광탄 더 주고 말하시던가.”
아, 재미있는 놈. 그래도 그 때 넌 사이드킥이었잖냐. 너가 맡고 있던 히어로가 눈에 띌 뿐이었다고 나는. 무기상인, 아니 그 때는 중개업자였지. 그 때도 어지간히 위험한 돌발 상황은 많았으니까, 올리비아가 다쳐서 왔을 때 그 원인 되는 네 놈이 그렇게도 싫었다. 근데 진짜로 은퇴한다고 하니까 낌새가 이상한 걸 느꼈지. 그걸 너도 느꼈을 것 같은데.
“X나게.”
“그렇지…”
“아, 잠깐만, 약속 있는 애한테 전화 왔다.”
“벌써 가냐?”
“예에. 꼬우면 나보다 술 잘 마시던가요.”
“잘 다녀오렴, 아가야! 너무 늦게 오지는 말고!”
“갔다 오게나.”
보글보글 소리가 들렸다. 저건 배웅의 인사야 뭐야, 하는 생각은 미뤄 두었다. 술자리는 이제 시작일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어른들이 숨겨 둔 위스키를 꺼내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훅 옷자락을 잡기에 서둘러 떨쳐내고 그는 갈 곳을 향해 걸었다.
- 과거는 현재의 거울
걸음 걸음마다 소음이 들린다. 거리 거리마다 잔해가 보인다. 골목 골목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썩은 나무의 뿌리가 사라진 곳은 흉흉한 굴의 모양이었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수습이 제법 된 거리에도 여전한 잔해들을 넘어, 감정이 분노를 넘어 폭발하지 않게 식지 않게 승화시키기 시작한 유쾌한 시민들을 보며, 소음을 제쳐 가며 그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푹 감상에 젖는 날이다.
-
“…안녕, 버니. 아니, 이제 솔라리움이라고 불러야 하나.”
얼떨떨한 제 형제를 보며 붉은 머리의 남자가 건넨 첫 인사였다. 미묘한 차가움, 날 섬, 거리감, 어색함이 훅 끼치는 복잡한 표정은 두 사람 모두의 것이었다. 어색한 기류는 두 사람의 보호자가 다친 직후부터 번져가긴 했으나, 버나드의 생각으로는 툭툭 끊어지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아니었고. 착잡함과 회한과 죄책감이 섞인 샛노란 눈은 그림자를 바라듯이 멀거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 시야에 제 영웅이 닿아 있어야 했는데. 본래라면 이런 분위기도 아니었을 텐데. 샛노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진다. 다 저 때문이었다. 전부. 그리고 눈 앞의 형제는 아무 죄도 없고.
그러니 이렇게 얼어붙은 분위기 안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가 선배로서 이끌어야 할 형제녀석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숨이 막히게, 그렇지? 가볍게 킥킥거리는 어느 사이드킥은, 왜 얼었냐고 먼저 말을 건네었다.
“…너가 얼어 있었잖아!”
“아니거든?”
버나드는 제 형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다. 어머니가 다친 원인이 본인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얼어 있었겠지. 병문안을 갔을 때의 소름 끼치는 침묵을 알았고, 그 연장선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았고.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으니 뭐라 화를 낼 수도 없었으며 그저 머리만 차게 식었다가 말 뿐이었다.
그리고 제 형제는 그 소식을 몰랐다. 마음 속 깊이 짜증도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쓰럽고, 무엇보다도 제 형제였고. 차가운 가을 밤바람은 목덜미를 스치며 가라앉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눈썹을 까딱였다, 제 형제는 바람을 다룰 줄 알았다.
“오한이 잠깐 들었거든?”
“오, 눈치 빠른데.”
“바람 너야?
“으흠?”
고개를 끄덕이는 붉은 머리다.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도 없이 당당함이 돋보였다. 얄밉게 올라간 양 입꼬리, 그 입 안에서 메롱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 같다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사고가 있지 않았다면 말이지.
“또 너가 서늘하게 느껴야 하는 게 있는데.”
“…뭐길래?”
그의 얼굴에서 웃는 상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분노는 아니었다.
“솔라리움. 넌 이제 히어로고, 이제부터 사람을 구하러 활동할 거야.”
“…알고 있어.”
“넌 불을 다루고. ‘처음으로.’”
“…알아.”
“그리고 싸워 본 경험도 없지.”
“운동은 나름 했-“
“운동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다쳐서 오는 두 가족의 모습을 모를 리 없었다.
“…겁 주는 거야?”
“겁 주는 걸로 보여?”
“아, 니…”
“머리로 이해하면 안 돼. 몸으로 움직여야지. 아니, 머리는 써도 좋아. 아니… 써. 그런데, 몸이 좀 더 빠릿해야지.”
조금의 으르렁거림이었다. 언젠가 크게 다투었을 때도 이런 소리는 들은 적도 없었는데.
“요컨대 판단력이 몸에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어디 가는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분의 걸음은 훈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붉은 머리의 남자만 아는 사실이었다.
“너 굴리러?”
“첫… 날부터?”
“당연하지.”
첫 날이니까 좀 봐주라, 하는 제 형제의 눈빛이 언뜻 보였으나, 그로서는 충분히 무시할 사유가 있었다. 쉬엄쉬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안 굴리면 제일 먼저 다치는 건 너야.”
“너 팩트로 그러지 마…”
“팩트인 걸 알면~ 훈련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시길 바랍니다 내 히어로~”
“내 담당이야?”
“당연하지, 잿더미가 불 옆에 있어야지 그러면 누구 옆에 있어?”
버나드는 한 순간에 생각이 가볍게 복잡해졌다. 일단 제 형제는 저보다 선배였고, 앵간히 짬이 있는 것도 확실했으며, 동시에 히어로가 아닌 사이드킥으로서, 그러니까 제 조수로서 저를 전담하겠다고 의사를 내비쳤다. 이걸 안 부담스러워 하기에는 처음 히어로가 된 입장으로서는 식은땀이 흐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너 정도면 히어로… 아냐? 아니, 굳이 왜…”
“나 때문에 엄마가 다쳤어.”
거두절미하고 들어오는 언어는,
“너까지 다치게 둘 것 같아?”
잿더미 스스로의 다짐으로 이어지고,
“내가 너 다치게 두면 이제 성 버린다, 진짜.”
-
후미진 곳의 술집이었다. 술집이라기 보다는 칵테일 바라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았다. 나무가 삐걱거리고, 그새 새 걸로 덧댄 곳도 보였다. 그가 언젠가 한 번 부숴먹은 전적이 있는 곳일 것이라 친히 짐작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악연이겠네, 여기 주인장 하고는. 고르는 솜씨가 지독하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바 쪽의 자리에서 손이 보였다.
“여기!”
“후드 쓰고 왔는데 용케도 알아본다.”
“하도 후드를 많이 쓰고 다녀서 눈에 익었다고 생각해줄래…”
아 젠장, 그게 있었지. 얼굴이 먼지가 붙은 후드 안의 그림자로 들어간 자는 아이언애로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 술 잘 하냐.”
“…실은 아니!”
“오 미친놈.”
그리고 솔직한 평가. 적어도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일은 없겠구나 싶은 그는 주머니 속의 칼을 조금 깊숙이, 안전하게 두었다. 이어지는 주문에, 아이언애로우는 모히또를 주문했고,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블랙 러시안이랑 깔루아 밀크로.”
“…나 죽어?”
“일단 잘 만한 곳에 데려는 놔 드릴게.”
킥킥거린 그는 근처의 담배냄새를 치우기 위해 가볍게 바람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삐걱, 위아래로 회전하는 탁상거울이 소리를 냈다. 낡은 게 왜 있지, 하는 생각은 이내 거울로 조금 기울었다.
-
“트레이!”
하고 부르면 돌아보는 사람이 둘이 되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붉은 머리의 남자였고, 나머지 한 명은 그의 형제였으며 신참내기 히어로였다. 내가 뭐랬어, 하는 표정을 지은 쪽이 분명 훨씬 더 경험이 많은 쪽이었으며, 진짜네, 하고 작게 박수를 치며 웃는 쪽이 신참내기일 터였다.
“트레이 누구?”
“어, 스티그마 씨가 부르는데?”
“아니 그러니까-“
“나구만? 야, 잠깐 기다려 봐.”
테오 이 양반은 은퇴해도 스티그마로 통하냐, 하고 중얼거린 그는 제 형제한테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지휘관이 한창 있을 곳, 참모가 한창 있을 곳은, 원탁이 딱 생각날 만한 넓은 공간이 아니겠어? 휘파람을 불며 종종 만났던 곳을 갔으나 모두 없었다. 아니, 다른 곳으로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좁은 어딘가에서 결국 만나긴 했지만.
“자네.”
“뭐야, 이번에는 좁은 데에요? 그새 공간 취향 바뀌셨나보네.”
“…아니, 잠깐 탐색을 요청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으아아 일 늘어난다.”
농담이고 어서 말하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사실 조금 곤란하다네.”
“뭐, 어떤 게 곤란한데요.”
“그냥… 수상쩍다는 낌새가 요새 들어서 말이지.”
“아 쫌! 그럼 주변 방비랑 감시죠?”
참모의 고개가 긍정을 알렸다. 거 참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는 제 제자에게 뭘 더 말해야 할 지.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것은 순전히 늙은 이의 직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냥 훈련이라고 치는 거죠?”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여 주게나.”
“예예~ 항상 그랬듯이요~”
말의 무게가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외부에 뭔가 있다. 샛노란 눈에 칼날 같은 빛이 돌았다. 날 섬을 한창 제대로 숨기지 못 하던 때의 청년은, 머리를 굴리면서 골똘히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겨우 그 예기를 해소하고서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제 형제와 동기가 있는 곳.
뭐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지만. 친화력 좋은 놈들, 하고 중얼거린 청년은 음료수 먹을 사람,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
“…생각해보니 테오 아저씨 제자였지.”
“생각해보니 라니 이제 와서?”
“너무하다고 하지 마라. 그냥 생각난 김에 그런 거니까.”
“너무해…”
“오늘은 술잔이나 기울이자고.”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 거울을 두드리면
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당시 영웅들이 와해되기에 딱 좋은 결정적인 일격을 날린 것은 분명히 자신이 맞기는 했다. 홧김에 한 말의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뉴스로 전해 들으며, 피와 살에 새기며 알게 되었으니. 그러나 그 시작점은 개인적인 생각이라 하기에는 모두의 의견이 거의 일치할 것이라고 보았다. 좁히고 좁히다 보면, 몇 가지 방점이 나올 것이고, 제일 많은 의견이 나올 것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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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지가 왔다. 데우스의 앞으로 온. 아니, ‘데우스’ 가 아니라 그의 본명인 ‘데일 로렌스’ 에게 온 편지였다. 본명, 가면을 쓰고 히어로 네임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쓰며 피와 화약의 쓰디쓴 밤을 비추는 이들에게 날아온, 익명에게서의 편지란. 어떤 의미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불운을 넘어선 공포였다.
가면무도회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에는 빌런이라는 이름의 범죄자들도 히어로라는 이름의 시민 자체 자경단들도 결국 가면을 쓰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런들의 이름은 그나마 경찰들이 공개하기야 하겠지만, 히어로들의 이름은 베일 안으로 끝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이 공포스러운 군상극의 희생양인가? 어둠이라는 장막 안의 도구 1인가? 널부러진 시체? 극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그 때는 누군가가 짠 각본도 없었고, 각본을 굳이 생각하려 한다면 붙잡는 데에 실패한 녀석을 잡기 위해 핏발 선 눈과 새카만 잉크로 쓴 작전 회의 정리 자료일 것이다. 그 마저도 음성으로 변환되고, 행동으로 변환되어 흩어져 버리는. 솜방망이가 한창 철퇴일 적에는 각본 따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극이라 하기에 무색한, 가면 하나만 덧댄 곳에, 그 가면만이 의미를 지니는 검푸른 밤에, 가면을 찢고자 하는 이가 등장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개명 전 이름까지 꼼꼼히 써서?”
“드니 로랑. 개 같은…”
“데일, 아니, 지금은… 데우스라고 하자. 비상 사태니까.”
지금의 이름과는 다른 언어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미 편지에 튀어나와 있는 시점에서 그들의 안색은 차라리 하얗게 질리고 싶어하는 것도 같았다. 어두컴컴한 것이 그들이 밝히던 밤을 닮았고, 밤 속에 숨던 모든 것들을 닮았다. 심장 가운데에 두려움이 웅크렸다.
“신더, 정말로 수신인은 못 봤나?”
조금은 날카로워졌을지도 모르는, 책망이 어린 시선이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일단 확실히 얘기해 두고 싶은 게 있거든요? 잠깐만, 잠시만요.”
그리고 그는 아무리 이 사람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하더라도 이런 시선은 부담스러운 것이고. 당연하게도, 심적으로 걸리는 일이 전에도 있었던 데다가-그의 어머니 건- 이로 인해 한 번 이런 눈총을 받았던 전적이 있으니 침착함을 되찾는 데에는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니까… 언제 발견 했다고요?”
“1시간 전이지.”
“적어도 그 전에 놓고 간 거겠네요?”
“요점은 어떻게 여길 아느냐와 왜 데우스의 본명을 알고 있느냐는 건데.”
“위치도 노출된 거면 영 큰일이군.”
“댈러쉬, 자네한테는 유감이야.”
현재 히어로들의 아지트는 댈러쉬 무기중개업 전문 회사였다. 무기 공급에는 편하겠지만 그 외에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슈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떨어진 창고 쪽이였지만,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제 동선은 그러니까…”
그의 하루는 다르지 않았다.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평소처럼 이야기를 하고, 그의 선배들은 몰아붙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듣고 있었다.
별안간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데우스, 잠깐만, 밖에 안 나갔어요?”
“난 오늘 도착한 이후로 쭉 여기에 있었지.”
“…잠깐. 잠깐만.”
“…상상하지 말게. 아니,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젠장.”
“밖에서 데우스 특유의 그, 생체 전류 치고 더럽게 고압 전류인 걸 봤다고.”
그의 정체가 폭로되고 연이어 온갖 매체의 접촉 시도가 일어난 건 사흘이 지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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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처음 폭로된 자는 경제력이 꽤 높은 자였다. 이것이 나쁘게 작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본래의 이름과 나이, 출신, 직업이 공개되고 ‘데우스’ 라는 이름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자, 영웅들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주변 관계망을 무차별적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그의 일반인 친구들이라거나, 가족들, 재계 인사, 많은 이들이 탐문을 받곤 하였다.
그리고 영웅들 중 정말 거의 대부분들은 그 친구들에조차 포함되지 않는 목록에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실제로는 밤의 장막 속 등불을 든 동료였음에도 말이다. 대외적 정보가 유출된 김에 일부러 추가적으로 더 내보내 시선을 돌린 건 당시의 그 자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여파는, 미래에 알게 되겠지.
이는 작고도 큰 해프닝이었다. 그는 주요 전력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은퇴를 권할 수는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오히려 다른 쪽에서는 데우스 한 명만 이렇게 됐다면, 우리까지 걸리기 전에 은퇴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한 명 뿐이었다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졌고 자시고를 이야기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정보 유출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신더는, 붉은 머리의 사이드킥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착각했는가? 왜 눈치채지 못했는가? 제 어머니의 사건 무렵부터 신경이 곤두섰던 것이, 제 형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위축시켜 놓았는데.
“의태.”
“변신일 수도 있고.”
“카멜레온 같네.”
“…돌겠네 진짜.”
우리 중에 있을 수 있다.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을 때부터 그에게 휴식이라는 단어는 잠깐 자취를 감췄다. 온갖 감각의 예민함을 끌어 모은 불신과 불안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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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게도 빌런들은 그들이 불안해하는 걸 느끼는 듯이 더 자주 날뛰고 있었다. 이건 짠 것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뒤흔들기에 충분한 먹잇감 신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흔들리기 시작한 내부에 견고함은 점점 나약해져 갔다. 날뛰고 싶어 미친 자들은 이 때가 기회라고, 제 능력을 제 마음대로 써 피라도 보고 싶은 자들은 피를 보겠노라고, 저들은 능력을 쓰면서 왜 우리는 막아세우느냐며 위선이라 하는 자들은 자신이야말로 선임을 밝히겠다며 파괴를 일삼고. 혼돈이 걸어왔다.
걸어오는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영웅들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통을 셧다운 시켜주겠다는 듯이, 이번에는 뉴스가 편지보다도 먼저 그들을 습격했다.
자신이 어떤 영웅이고, 어떤 추악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대놓고 살인을 하는 장면까지.
두통이 아니라 머리가 째로 부숴지는 충격이었다. 악몽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이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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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생각이 갑자기 왜 나지.”
“응? 아, 거울 삐걱이는 소리 때문 아냐?”
“신빙성 있는 가설이야.”
그가 거울을 피한 적은 없었다. 당장 붉은 머리의 남자는 평소에도 거울을 보며 자신이 채 돌보지 못한 상처를 보기 위해 애썼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술기운 때문이다. 술은 옛 기억을 들추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에 유독 제 형제와 많이 얽혔고, 유독 가장 처음에 드러나 버린 자와 대놓고 대적하겠다 다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우스, 현 히어로들의 수장. 그가 그 때 편지를 제대로 저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샛노란 눈은 술잔 안의 술에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술은 후회를 불러 일으키는 좋은 음료였다. 곱씹으며 다시는 이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하니까.
“오, 이번에는 내가 이기나?”
“바랄 걸 바래라.”
그리고 그들이 있는 바 테이블의 옆 자리로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잿더미는, 저 먼지 가득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잠깐 흘끗 보고서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더 달달한 쪽을 옆 자리의 새로운 손님에게 넘겨주곤 하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이언 애로우의 질문이 무색하게, 새 손님은 일어나 더 쓴 것을 가져가 버렸고,
“멍청아…”
그리고 이어지는 새 손님의 기침 소리에 붉은 머리의 남자는 깔루아 밀크를 하나 더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잿더미는 제가 돌보던 불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리 싸매도, 아무리 먼지더미로 포장해도.
- 금이 가던 옛날
그 때는 누군가에겐 물어뜯을 거리가 홍수처럼 넘쳐나던 때였고, 누군가에겐 팝콘이 한가득 들이차던 시기였겠고, 누군가에겐 셔터를 끊임없이 누르며 일단 키보드를 아무렇게나 두들기던 때였을 것이다. 나열한 부류 중 어느 쪽에도, 붉은 머리의 남자는 속하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자는 당시에 히어로들 뿐이었을 테니까.
“…그게 7년 전이지?”
“그러네, 너랑 걔랑 둘 다 스물일 때니까.”
거울 소리의 삐걱임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적어도 동기인 옆자리 술친구나 그나 동일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애초에 7년 전이라고 먼저 말을 꺼낸 이상 튀어나올 사건은 하나밖에 없다.
세간에는 히어로 집단 신상정보 유출 사태라고도, 사칭사건 이라고도, 누군가는 그럴싸하게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라고도 불렀더랬다. 어떻게 부르던 다 맞는 말이었다. 어딘가에선 히어로의 와해의 시작이라고 했었나. 어딘가에선 뒷세계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들 하기도. 표현할 단어는 많았고 그건 전부 들어맞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한 번에 일어났다는 점이 가슴 아플 뿐일 것이다. 그러나 히어로들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미러사이드, 그 작자는 탈출 소식도 없지?”
“하겠냐, 제일 피해 입은 사람들이 집권하고 있는데.”
그 빌런을 ‘미러사이드’라 이름지은 순간부터, 그들끼리의 사건명은 ‘미러사이드’가 되었다. 거울이 삐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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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모든 이야깃거리가 히어로로 도배된 시기가 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최소한 일주일 정도. 그 시기 중 하나가 잿더미가 엎으려는 거미줄 같은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갔던 그 옛날이었다.
연일 자극적인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이 히어로는 과거에 무슨 일을 했으며, 현재는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 이 히어로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고 친구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 히어로의 SNS에는 이런 내용이 올라와 있는데, 정말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있는가. 전부 다 한 명이,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한 명이, 이름을 알아낸 뒤에, 떠벌린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판매량과 조회수를 위해 기사를 쏟아냈고,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받기 시작했다. 분명한 사람들은 얼마나 피해를 봤느냐 한다면, 글쎄, 그 때는 기억하기도 싫다는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 지냈는지 진짜 기억도 안 난다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피가 마르는 것을 이해하는 직종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히어로의 탈을 쓴 살인자, 라는 기사가 났을 때, 모든 것이 패닉에 빠졌었다. 그 때 그는 그의 형제와 함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였다.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혼란에 빠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활력 있게 움직일 수는 있는 사람이었다. 활력 있게, 움직여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회고했다.
습관적으로 약칭이고 애칭이고 부르던 것이 히어로네임으로 고정되었던 시기가 이 때였지, 버니. 이제는 잘 들러붙지도 않는 것을 기억 속에서만 굴린다. 멀찍이 앉은 잿더미의 불 또한 그런 상태일까. 생각의 공유 따위, 쌍둥이도 아닌 것을. 그는 쓴 맛이 감도는 잔 하나를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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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흉하네.”
“어쩌겠어, 그 사단이 났으니까…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봐, 나는.”
“…우리까지 다 까발려지면 어떻게 해?”
“그럴 일 없도록 해야지, 야. …아 본명 부를 뻔 했다, 솔라리움.”
스물에 접어든 어느 날이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제 형제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중얼거렸다. 거기에 이미 스스로의 부담감과 불안이 스며들었다는 사실은 모른 채로.
“이러다가 집에서까지 히어로 네임 부를 것 같다.”
“그러면 진짜 망하는 거 아냐…?”
“농담이야, 쫄지 마.”
버나드는, 제 형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장난끼와 침착함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의지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 둘 꺾이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가 돌아오고, 그걸 반복하고.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에, 연차로 얼마 되지도 않은 그로서는 의지해야 하는 곳이라곤 제 형제밖에 없었다.
“그으래서, 오늘은 어디부터야?”
“오늘은 폐공장 지역 먼저. 그 다음에… 저기, 슬럼 쪽 가고.”
“…어, 그러니까.”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샛노란 눈동자가 제 형제를 바라본다. 곧 있으면 여러 무장들로 인해 그림자 지고 가려질 형형한 눈은 퍽 온화했다. 그의 형제는 그저 문득 생각난 것을 최대한 풀어내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뭔가, 내 직속 선배? 라고 표현해야 하는 게 맞지?”
“으흠?”
긍정하는 끄덕거림이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분도 너가 이렇게… 같이 일 할 때 이렇게 지도하고? 그랬어?”
“그렇지, 당연하지. 되게 갑자기 묻네.”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무엇이 떠올랐을까, 둘 모두는 같은 생각을 했다. 어머니와 겹쳐서 보였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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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할 사람들이 밤의 위태로움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운 시점부터, 그곳에는 다른 위태로움이 피어올랐다. 앞으로의 길이 불투명한 것이 뇌리에 새겨져 있었으니. 지금까지는 정글도 하나로도 온 삼림을 뒤엎어버릴 사람들이었고 그럴 깡이었겠으나, 그러나 지금은 무너져가는 빙하에 고립된 자와 같은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칼을 놓치지 않은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은퇴한 자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시어도어 레드우드는, 속보로 나온 댈러쉬와 히어로간의 유착관계를 보며, 슬슬 준비하던 것을 꺼내 놓아야겠다고 느꼈다. 건물 주인장이 있는 공간은 히어로들이 쓰는 공간과 제법 거리가 있는 만큼, 그리고 당분간 거기서 지낼 것도 같았으니, 내부 불안을 어떻게 손은 쓰고 싶었으나, 하지를 못하는 처지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꼴이었다. 그나마 좋은 수를 꼽았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데에 그쳤다.
그가 걱정하는 내부 불안은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를 예시로 들어 보자면, 가장 조급해한 자를 들 수 있었는데, 그는 가장 잃을 게 많았고 최초로 정체가 드러난 이였고, 그를 중심으로 파벌이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 하나가 생성되고 배척이 시작되면, 자연스레 다른 파벌이 생성된다. 당연한 수순이었고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막았어야만 했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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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의 남자는 최초 목격자가 된 시점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체력 소모가 예전에 비해 늘어났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본인이 놓친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히질 않는 게 더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일반인으로 다닌다거나, 하는 가설이 그럴 듯한 신뢰를 얻었다.
실핏줄이 늘어난 눈을 설명할 방도가 딱히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되려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최근의 변화에 대해 업데이트는 잘 하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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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예민한 감각은 조금의 이상함을 찾기 위해 피로를 더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가는 도중에 몇 번을 멈춰 선 거야, 글쎄, 다섯 번? 이제 여섯 번이네, 뻑뻑한 눈과는 대조적으로 머리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몸에 피가 돌고 온 신경에 미약한 전기가 흐르는 것이 당연하며, 그들이 이동하기에 공기와 충돌하며 바람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듯이. 바람 잘 날 없는 여기 이 나라, 이 도시의 눈 앞 골목에 전선 하나가 뚝 끊어진 게 그렇다고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신더, 벌써 몇 번째야…”
“봐 보라니까. 누가 이걸 굳이 끊어먹어?”
이번에는 그의 형제가 보기에도 수상한 면이 있기는 했다. 잠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그새 정전 소식이 하나 떠 있었다. 곧 방송국 쪽이 차를 몰고 오겠구만, 행동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늘어날수록 말은 줄어들고 걸음소리는 빨라졌다.
굳이 끊어먹을 이유는 없었다. 의도치 않게 끊어졌다면 바로 신고가 들어가거나, 아니 애초에 전기 공사 쪽이 사람을 그렇게 소수로 운영했나? 둘 씩 짝지어 다니던 걸 본 것 같은데, 이런 일이 났는데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긴장상태의 형제 만큼이나, 그 스스로 만큼이나 온 신경이 곤두선 사람이 느껴졌다. 숨어 있는 사람 같았다. 숨어? 왜?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넌 저쪽, 난 이쪽.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손가락의 향방을 잘 유추할 수 있게 된 형제를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다음 순간 이 괴이쩍은 탐지 결과에 신더는 제 형제의 뒤를 바짝 따라가야만 했다.
지나쳐 온 고압선의 단면을 확인하지 못했다. 불로 끊겼다면? 그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탐지하는 그의 감각에 제 형제가, 자신의 불꽃이 둘이 되어 느껴지는 것을. 혼란에 잠길 수는 없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자기 스스로는 자신의 어머니 건으로 인해 혼란을 집어 던졌다. 그건 저가 상대해야 할 녀석들이 느껴야 할 것이라고 이를 갈았는데.
“왜 여기로 왔어?”
“…감이 안 좋아. 그냥 감이 그렇다는 거야.”
“감 말고 다른… 다른 거는?”
“쉿.”
끼익,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렸다. 민가의 창문은 깨진 흔적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통해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오, 흉기, 하고 주워드는 것은 붉은 머리를 감춘 남자였다.
“계십니까…?”
삐걱,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왔노라고 증명을 해 주고 있었다. 제법 기분 나쁜 소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 여는 소리와 바닥 소리를 헷갈릴 정도로 끼익거리는 바닥이란.
탐지 담당은 붉은 머리의 그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제 눈 앞의 형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천천히 잠입하고 있었다. 위층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지자, 그의 형제는 생각하길 당장 나타날 적을 밖으로 끌어내던 어쩌던 해야 겠구나 싶어했다. 집 안에서 뭘 하기엔 그의 능력은 그냥 순 방화였다.
그 문 너머에 있던 것이 똑같은 얼굴임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머릿속이 말 그대로 백지화가 되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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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쓴 걸 한 잔 비워야 하는 모양이다. 멀리 옆자리라 부르기도 애매한 사람이, 지가 먹겠다고 했다가 도로 가져온 걸 벌컥벌컥 마시고 만다. 날것의 알코올 냄새가 훅 끼친다, 커피 리큐르가 쓰인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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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동시에 들린 말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지? 어느 쪽이 최대의 적이지? 50%의 도박을 이 따위로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도박 자체를 말이지! 표정 하나 하나를 따지기엔 급박함이 온 사방에 널려 있었고 그 때의 그는 어렸다. 그래서 표정과 낌새와 불안함을 읽지 못했느냐, 유감스럽게도 그는 12살때부터 훈련을 시작한 자였다. 집 안에 있던 사람의 신경의 깜빡거림을 복제하기에는 범인의 능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오른쪽!”
그래, 그러니까 그 때는 어렸다. 그렇게 선언하지 말고 그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 제압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는 걸 지금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형제가 바로 왼쪽에 있던 집 주인 되는 시민을 데리고 곧바로 탈출한 게 잘 된 일이라면 일일 것이었다.
모습이 변형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걸 직관하는 건 일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꿈틀거린다고 표현해야 할지, 전신의 표면이 물의 표면처럼 일렁거리다가 바뀐다고 해야 할지, 잠깐, 이건 물의 표면이 아닌데, 순간 든 기괴함에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에어 슈터에 공기는 언제나 차 있었고, 제압하기에 딱 좋은 녀석인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그 놈이 그 말고 그의 형제로 변할 줄은 몰랐는데.
“사이렌 소리 들리잖아. 내가 이 모습으로 뛰쳐나가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다, 그치?”
깨진 유리창은 이미 누군가가 탈출하기에 충분했고, 틀어막으려 했으나, 아까도 언급하였듯, 그는 어렸다. 스물이 어린 나이고 8년이라는 경험을 가진 스물의 그는 강철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 결정적으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은-“
“미친 새끼야, 하지 마!”
그 사이렌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로 제 형제의 이름을 쩌렁쩌렁 알리려 하는 미친 놈이 눈 앞에 있는데, 손쓰기엔 이미 판단력이 귀의 먹먹함과 함께 흐려져 버렸다. 이런 미친놈을 상대한 적이 있었던가? 전례 없는 일이라고 선배들도 이야기하던 것을?
그 때, 분명 탈출했던 형제가 다시 들이닥쳤다. 분명 스스로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반쯤 패닉 상태가 된 사이드킥을 보고, 몸을 먼저 날렸다.
그 이후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 자가 똑 같은 짓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솔라리움이 들이닥치자 마자 바로 자신의 모습을 신더로 바꿔 버리는 기행에, 두 히어로 측 사람 모두 패닉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두 번째 겪은 자는 이제 냉정을 되찾을 때라며 냅다 유리조각을 던져버렸고, 여기에 있는 네 피는 너가 누군지 기록될 것이라고 서느랗게 읊조림으로써, 그의 불 또한 제정신을 찾게 되었다.
거기엔 수많은 집기들이 있었고, 박살 난 가구들은 좋은 말뚝들이 되었다. 무슨 뜻이냐면, 나무 조각 하나 하나가 붉은 머리의 남자가 던진 유리 파편이랑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신경만 좋아진 어느 변신 능력자는 제법 손 쉽게 제압당했으나, 맨 마지막에 그 나무조각들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버렸다. 제압하느라 가까이 근접한 것은 두 영웅의 잘못은 아니었다. 피가 흩뿌려 진 것도.
돌려받았군, 하는 생각에 다시 보이는 실루엣이 두 사람의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제 형제의 능력이 분노에 차올라 민가를 째로 불태우는 일이 생겼다.
“-버나드 트레이가 민가를 불태웠다!”
“닥쳐!!”
“왜, 너가 대신 불태운 거로 해줄까? 너로 변해서 남아있어 줄까?”
“닥치라고!!”
“트레이 가의 아들 둘이 일을 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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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는 없었다.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그 미친놈은 일부러 전선을 불로 녹여 잘라냈다고, 나중에 누군가에게 듣게 되었다. 놀아났다.
- 녹슨 뒷면
그는 아직도 대화를 선명히 기억했다.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 때의 대화. 표정에 무엇이 담겼는지 더럽게 잘 아는 사이란, 침묵을 지켜도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질문 몇 개에 대한 침묵 몇 개는 찡그리고, 한숨을 내뱉었으며, 그저 째려보는 등의 제스쳐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것이 대답이었고 곧 가감 없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대화는 그 미치광이와의 대화가 아니라, 그 이후였다.
그의 영웅이 두 번째로 몰락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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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그의 형제의 맨얼굴은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맨얼굴이 까이면 이름도 까이기 참 쉬웠는지, 열띠게 달아오른 히어로들의 실제 신상에 관심이 많은 탓이었는지, 그의 형제의 이름은 기어이, 다른 동료들이 그러했듯 큼지막한 글자로 인쇄되고 타이핑됐다. SNS 계정이 삽시간에 시끄러운 자명종이 되었고, 곧이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맨 처음, 데우스에게 일이 터졌을 때 일상적인 사진을 다 내리는 게 낫겠다는 충고를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계정에는 신더의 얼굴과 두 사람의 어머니의 얼굴도 같이 있었으니까. 정말 지워야 해? 제법 애처롭고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물음이었던 것 같았다. 신더는 행동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봤기에 제 계정을 지워 시범을 보여주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SNS를 별로 즐겨 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엄격하게 설득시킨 결과가, 그의 형제만 드러나 다행인 꼴이 되었는지 어쩐지는 그로서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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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웠어?”
“…응.”
“여기, 차가운 물.”
할 수 있는 위로가 얼마 안 되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처음 겪는 일에 대한 패닉은 몸소 봐 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걸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었다. 그러니, 그저 불안감을 최대한 없애 주는 수밖에.
“많이 피곤하지.”
“…응.”
“경찰 조사에, 지금은… 어휴.”
두 사람은 지금 다른 방에 있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히어로들이 한창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딱 그 무렵이기도 했다. 토론을 위한 방은 드넓은 곳이었고, 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두 명이서 대화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사물함이 즐비한 것만 빼자면. 문과 벽 너머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만 시끌거릴 예정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파벌이 나뉜 거야?”
“아무래도… 이번 일 때문이겠지.”
“…미치겠네, 입장은 이해하지만 솔직히 분열돼서 좋을 거 없는 건 다 알텐데.”
공기가 조금 차가워졌나? 제 형제의 눈치를 살피던 붉은 머리의 남자는,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향하지 않은 채 바닥만 보고 있는 눈 앞의, 그의 영웅을 보고 있었다.
“데우스 아저씨가 제일 불안해보였으니까, 아마 주도를 먼저 하신 게 아닐까? 그, 알람 폭탄도 그렇고.”
“주도를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드러나면 안 되는데 드러났으니까, 미래가 무서운 거겠지.”
제 형제도 똑같을 터였다. 더군다나 그의 형제는 입지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유일한 입지가 신더였고, 또한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던 시어도어 레드우드였으나, 베테랑은 급하게 서류 처리를 하기 시작해 회의가 열렸다는 소식만 들었을 터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해?”
노란 눈을 마주 보는 눈이 어두컴컴했다. 새벽녘이라 빛이 들지 않아서 그렇겠지. 전구는 분명히 켜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너?”
“아니, 다른 사람들.”
“내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길 바래, 아니면 뭐.”
“가감 없이 그냥.”
“…후회 없지?”
그는 이 때를 후회한다. 끄덕거리는 것을 보고도 그냥 입을 닥쳤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퇴는… 해야 하는 게 맞지."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 당시에는 후회 없음을 머리로 새겼지만.
“농담이 아니라, 당장 다른 분 중에도 하루종일 시달리느라 활동 자체가 안 되고 있잖아.”
“…그치.”
“다른 한 분은 무슨 클레이 사격 탄알에 맞고 오시질 않나.”
“…응.”
“대낮은 어떻게 못 한단 말이야.”
“…그래서?”
기가 차다는 듯한 소리가 목 언저리에서 숨을 쉬었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의 얼굴이 구겨질 쯤에, 바닥을 보던 다른 한 명은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낮에 활동이 가능하면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시민들 다친다고.”
“…폐건물들도 많아지는데 시민들이 거길 갈까?”
“빌런들은 거길 가줄 것 같아?”
“아니, 고집 부리지 마.”
“여건만 만들면 되는 거잖아. 데우스 아저씨가 청원도 하겠다고 하셨어.”
“…하, 잠깐만, 그 사적 제재 합법화 그거 말하는 거야 지금?”
“인정 받고 합법적으로 하면 보호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렇잖아, 은퇴 안 해도 되고.”
“그대로 말해 줄게, 악용 가능성 같은 거. 지금 왜 자경단 형태로 운영됐는지 알아?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점 자체가 의의고 정의였어.”
“인력도 어떻게 못 채우는 형태인 건 맞잖아. 게다가 너, 그 말 있지. 날 여기에 끌어들인 시점에서, 그리고 나랑 대립하는 시점에서 아귀도 안 맞고.”
“…아 젠장 진짜! 생각해 봐, 나중에 빌런이 되고 싶은 사람이 그냥 합법화를 들먹이면서 뭘 어떻게 이용해 먹는다면 어쩔거야?”
“내부 규정은 그럴 때 있는 게 아닐까?”
“퍽이나 잘 솎아내 지겠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 거야?”
“좀, 생각해 봐. 이미 사회 전체에 드러났다고. 내가 굳이 다른 이유를 댈 필요도 없이, 사회 전체에 드러났다는 것 하나로 이미 끝 아냐?”
“그러니까 왜?”
“아니 진짜… 스파이가 그냥 네 옆에 붙어버려도 모른다니까? 넌 대놓고 정체가 발각됐는데?”
“이번 일은 그런 거 없어도 그냥 정보가 죽 새버렸잖아.”
“참나, 이번 건 특수한 경우고. 일반적인 경우에서까지 정보 새는 꼴을 봐야 겠어?”
“그렇다고 은퇴를 시키고 싶어? 나를? 다른 사람들을?”
“…그냥 걱정이라고. 그렇게 드러낸 채로 활동하면, 그냥…”
“뭐가 걱정되는데? 나도 성인이야. 저 분들도 다 성인이야. 뭐가 어떻게 걱정돼?”
“그래, 성인이라서 그 알람 폭탄에 패닉도 오고 그랬지.”
“그건!”
“가볍다고 생각 안 해. 사회에 드러나잖아? 그러면 대응도 못 하고 죽을 가능성이 미친 듯이 높아진다고. 너가 대학을 갔어, 네 동기가 친해지고 싶어서 음료수를 줘, 근데 걔가 어디 하수인이라 그게 독이야. 어쩔 건데?”
“…싫어.”
“뭐?”
“싫다고 했어.”
이때쯤부터 당시의 그는 아마 화로 넘실거렸을 것 같다. 적어도 그 스스로의 생각이었다. 설명을 해줘도 떼를 쓰는 자신의 형제에게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노란 눈에 스파크가 튈 수 있었더라면 튀었을 것이다. 맞추고 있는 저 눈이 지독하다고 생각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 땐 그 독기 좀 억누르길 바랬었다고, 생각을 했었다.
“은퇴하기 싫다고?”
“알아서 대응 방안은 마련해 주실 거 아냐.”
“어느 부분을 어떻게 뭘 마련해? 당장 지금도 불안한데?”
“시끄러워. 그 정도 의심은 나도 다 할 수 있어. 너가 교육한 거야. 너가 이미 대응 지침은 다 나한테 알려줬어. 맞잖아.”
“…허.”
“여기 있을 거잖아, 그리고. 너.”
“…글쎄.”
마치 배신당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의 형제의 뒤는, 정말 얼마 없었으니까. 베테랑과 이어주는 연결 다리가 은퇴를 홧김에 선언할 것 같자 불안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신더로서는, 입꼬리를 조금 늘리기도 했다. 제 은퇴를 걸고 내기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어진 입꼬리가 위를 향했는지 아래로 그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상 그저 감정적인 대응 뿐이었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왜 거기서 글쎄가 나와?”
“뭐. 난 은퇴하면 안 되냐?”
“안 털렸잖아.”
“넌 털렸잖아.”
“…지금 연쇄적으로 뭐가 일어날 거라고 상상이라도 하고 있어?”
“상상이 아니라 예측이라고 해라.”
“망상.”
“이 새끼가 진짜.”
“…솔라리움. 아니, 됐어. 버나드. 내 말 들어. 버나드 트레이, 내 말 들으라고 했어!”
우악스럽게 양 어깨를 붙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제 형제에게 으르렁대며 정신 차리라는 듯 양 어깨와 팔을 붙잡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사뭇 간절해보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답변이 생각보다 매몰찼지만. 마주 본 눈에서 울컥한 게 느껴졌고, 그 시점에서 독한 말이 날아오겠거니, 생각했다.
“뭐가. 넌 우리 엄마의 이름이 그대로 공중분해 되길 바래?”
“그러는 넌 이대로 악용의 끝에 그 이름이 같이 새겨지길 바래?”
“왜 못 믿어? 날? 그 사람들을?”
“…내 말 좀 들어줘.”
“너야말로.”
“제발.”
“난 싫다고 했어, 내가, 어떻게 지킨 이름인데, 어떻게…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비칠 이름인데.”
“하나도 안 자랑스러운 일 일어날 거야.”
“절대 그럴 일 없어.”
“데우스가 저러지 않아도 되는 데 저러는 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도 타협점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 아냐. 왜 믿지를 못 해.”
“아 젠장, 니 목숨도 위험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말이 있다면, 형제의 목숨을 걱정한 것을 꼽을 수 있었다. 실제로 무기상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격 소총을 싼 값에 내놓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팔려나갈 줄은 몰랐다고 했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냥 돌격 소총들도. 눈 앞에서 쏴재끼고 튀어도 아무 대응도 못 할 게 그림으로 그려지는데, 왜 이해를 못 해.
“이름이 니 목숨보다 소중해?”
그에 대한 대답은 들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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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그 회의 있잖아.”
“뭐.”
“넌 아예 은퇴 선언하고 그냥 뛰쳐나갔지만 난 거의 마지막까지 뻐팅겼거든.”
아이언애로우는 채 한 잔을 비우지 못한 술잔을 치우고 자신의 핸드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옆 자리에 앉은 그는 빼꼼히 보려고 상체를 기울였다. 막지는 않는 걸 봐선 단순히 온 문자를 확인하거나, 굉장히 프라이빗한 걸 처리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본론을 위한 움직임이구만? 알코올 때문에 조금 더웠던 것이 한 순간에 서늘함으로 바뀐다.
“내가 여기 온 이유중에 제일 큰 거.”
아이언애로우는 강경하게 은퇴를 요구하는 게 아닌,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몸을 사리자는 안전한 방향을 원했다. 중도적인 길을 계속 요구하던 사람이 없지 않았다. 솔직히, 그의 형제가 안전을 추구한다 했다면 지금쯤 아이언애로우와 같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건 제법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거 입금 내역 아냐?”
“위에는 내가 거절로 보낸 돈이고!”
“발신자는?”
“누구겠어?”
지금의 거미가 한참 옛날에, 안전을 위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은퇴하라고 외치게 한 내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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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댁들은 아는 내용일지 모르겠네.”
그 시각, 베테랑들이 온갖 술들을 까고 있는 곳에서, 홀로 빨대로 처량하게 술을 마시던 도노반이 입을 열었다. 배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에는 단어 선택이 도발적이었다. 이번에 헛소리가 나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한 나머지 셋의 태도가 일품이었다만,
“다른 은퇴파 사람들이 연 끊어버린 거 말이지.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자네 사례처럼 무슨 돈이라도 찔러넣었겠지, 안 그런가?”
참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직 사령관은 잔 안의 차가운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안전파가 왜 진즉에 축소됐게?”
“아, 거기서부터였나.”
이중으로 돈을 찔러넣었을 줄은 몰랐는데. 한참 회사를 세우고 페이퍼 컴퍼니가 아님을 입증하는 동시에 댈러쉬의 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이 주욱 있었던 그로서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짓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하는 옛날의 회고는 왜 기정사실이 되는가.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도발했잖아, 테오.”
“그건 자네 아들한테만… 아니, 잠깐만, 설마.”
그녀는 불이었고, 유동적인 형태를 띠는 것을 운용하는 자였다. 그 중에서도 잘못 다루면 위험해지는 것을. 그만큼 그녀는 위험을 직감하고 다루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이 소식을 들은 뒤에도 태연했던 이유는 순전히,
“그냥 소식이 다 끊겨서 게릴라적으로 준비한… 인터뷰였는데.”
굉장히 게릴라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능통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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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적도 없지만, 취했어도 확 깨는 소식을 현대에 와서 겨우 접하게 된 그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가오는 가을 바람의 냄새에 살얼음이 섞인 것 같아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 얼음의 근원지를 찾아 깨부수는 게 목표라곤 하지만, 폐부가 차갑다는 느낌을 지우기엔 일렀다.
“아무튼 이렇게 약속 잡은 것도 그렇고, 온 것도 그렇고. 난 전할 거 다 전했어.”
“그래서, 갈 거냐.”
“아니? 돌았어? 이걸 받고 안 빡치게?”
“성깔 하고는.”
이제야 저의를 시원하게 파악하게 된 옛 동료는 결국 현재의 동료가 되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조용히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지는?”
“아 예.”
이제 일어나자, 라며 덜컹 소리를 내고 자리를 뜬다. 계산은 누가 할래? 라는 말에 실랑이를 벌이는 게 영락없는 이십 대의 어느 청년들 같았다. 거무죽죽하고 온기 없는 짙푸름이 가득한 이 도시에, 9월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횃불과도 같은. 소소하고도 생동감 있는 활력이 투닥거림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때에,
“계산하겠습니다.”
“…아, 진짜… 계산이요.”
기어이 옆에 죽치고 있던 사람이 계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신더는 얼척이 없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그 사람을 가볍게 밀치고, 딱히 제대로 밀쳐지지도 않았지만, 자기 지갑에서 주섬주섬 재화 같은 것들을 꺼내 놓았다. 아이언애로우는 이열, 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맙다며 실실 웃고 있었다.
“아, 나 또 약속 있는데.”
“응? 집 안 가?”
“먼저 가 있어라. 아저씨들이랑 엄마 좀 봐 줘, 그리고.”
알았어! 하고 손을 흔들며 가는 것이 제법 쾌활했다. 그가 말한 약속이라는 것은 이제 이 사람이랑 해야 하는, 방금 막 생긴 약속이다.
“그래서 녹음은 했어?”
“했어.”
“…들은 소감은?”
“어떻게 들으면 들을수록 너가 맞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까.”
“누가 알았겠어, 이렇게 될 줄.”
넌 몰랐어? 하는 눈짓이 그를 향한다. 솔직히 몇 년 정도는 믿었던 그였기에, 정말로 몰랐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수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연속적으로 튀어나올 줄도 몰랐고, 이렇게 더럽게 판을 깔고 있을 줄도 몰랐지. 밑작업을 무슨 언제부터 한 거냐며 중얼거리는 말에 허탈한 웃음이 형제로부터 나왔다.
“알 줄 알았는데.”
“아니, 솔직히 이렇게까지 판 깔고 타락하고 이럴 줄 누가 알았겠냐고,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래도 날 말렸잖아.”
“말리는 데 실패한 걸 보면 모른 게 확실하지.”
“그것도 그렇네.”
“아 맞다, 좋아. 중요하진 않지만 질문 사항이 있어.”
“어떤 건데.”
“…솔라리움이라는 이름이 목숨보다 중요해?”
그는 7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신더는 저 말에 대한 진위여부를 묻지 않았다. 아니라는 대답과 그렇다는 대답 모두를 들을 각오를 하고 왔으니까. 명예가 소중하건, 목숨이 소중하건, 이름이 소중하건, 하여 긍정을 하건 부정을 하건간에.
- 잊어버린 것은 없니?
그가 기억하기로, 10월의 시작은 여전히 횃불과 함께였다. 꺼져 가기에는 루머라는 이름의 장작들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려 하였고, 정당성을 상실시키고 싶어하는 어느 거미의 앞다리가 공연히 제 적을 찔러보고 있기도 하였다. 쓸데없이 세밀하고 세심한 발톱이 장작을 태우려 하자, 휘둘리는 데에 지친 시민들은 이 장작의 흉내를 내는 폭탄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휘둘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시민들은 한 몸이 아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이끄는 사람들 왈, 팩트로 승부 봐도 저 쪽은 할 말이 없다며 루머를 지양하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했고, 참 놀랍게도 음모론인가 싶지만 정확하게, 의도적으로 뿌린 게 아니냐는 예측을 해 놓기도 하였다. 으레 그렇듯 음모론자들의 말은 씹히기 마련이었지만.
붉은 머리의 남자가 히어로 총회에 다녀간 지도 시간이 지났다. 거진 2주는 넘게 지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할 무렵이 10월 초였다. 그때까지 응답이 없다면 대응은 점점 실패 그 이하의 평가를 받을 것이고, 지지자들도 피가 말라 죽어가겠지.
-
그 시각 총회 내부는 거대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안한 기운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직 사이드킥이 온 날을 기점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10월의 초반과 중반을 아우르던 어느 날에, 자발적 탈퇴를 한 한 명을 시작으로 총회 내부의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에 따른 기사들은 7년 전의 어느 날처럼 물어뜯고자 하는 언론의 이빨에 깨물리기 시작했으나, 입장을 밝히는 순간 고요에 휩싸이고, 곧이어 정보를 더 얻어보고자 하는 마이크의 세례가 잇따랐을 거라고 짐작했다.
탈퇴한 자들이 밝힌 내부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현재 리더라고 여겨지는 사람의 공포 정치를 필두로, 아무 대응이 없는 이유에 대한 각자 자기들만의 추측과, 탈퇴 의사가 없어보이는 사람들이 했던 말들. 하나 하나가 풀리면서 사그라들 줄 알았던 불씨들은 차가운 가을바람의 건조함에 제 불씨를 담았다. 저것이 산이라면 태워버리겠다는 분노가, 곳곳에 서렸었다.
일각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나, 데우스의 이름이란 신을 뜻했는데 혹시 신이 무슨 신이냐고 비웃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위상과 위엄, 명예라는 것을 겉껍데기로 삼았다면,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죽는 것과 매한가지임을 아는 자가, 탈퇴를 가만히 두었을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이 상황 자체에 지쳤거나.
명예 그 자체가 되려면 정말 명예로운 자가 됐어야 했다. 그리고 그 자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저 프로파간다였으며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모든 걸 정당화시키기 위한, 정의로움은 이제 없었다.
-
“…한창 시끄럽더니, 다들 떠나네요.”
“그런 사람들은 필요 없어. 돈에 휘청인 사람들이 뭐가 정의롭다는 거지?”
그러는 당신은 그 돈의 근원이 아닌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는 오로지 감언만을 생각하고자 한다만, 그 속에는 후회와 회의감으로 가득 찬 젊은이가 들어 있었다. 당당한 사람이라면 거래 내역이라도 공개했겠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면, 이제야 환상이라는 게 사라졌구나 싶다. 이걸, 멀리서부터 보면서 도미노를 하나 하나 준비한 제 형제는, 관망할 때 무슨 기분이었을지. 더러웠겠지.
“더 이상 입장문이라도 내지 않으면 안 될 거에요, 데우스. 다른 분들도 슬슬 어떻게 움직일 지 행동 지침을 정해주길 바라고 있기도 하고…”
“…비서 노릇 참 잘 하는군. 고용한 적 없는데.”
“…버려진 절 이끌어 주셨잖아요.”
이끈 결과가 이것이었다.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전면에 나서게 하는 결과라면, 복수를 조금은 꿈 꿔봐도 괜찮지 않을까? 평소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듯 어색하게 웃는 솔라리움은, 평소와 똑같이 눈을 피했다.
“다들 회의실로 모이라고 해.”
“그, 저는,”
“…그래, 넌 그냥 늦깎이 녀석 중 가장 오래 해 먹은 놈일 뿐이야. 비켜.”
데우스로서는 제일 의심이 갈 인물이 바로 솔라리움이었다. 바로 쳐 내야 마땅한 인물인 것도 알고 있었다. 동향이 수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껴졌으나, 놓을 수 없었다. 저걸 완전히 적대하느니 제 손아귀에 좀 더 두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아무렴, 불꽃의 아들 또한 불을 타고 났으니, 그 불은 늦게 튀어나와도 그 힘을 가감 없이 발휘했으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죄의식을 조금 쥐여 줄 생각이다. 목줄이 되어 끝내 제 선택을 따르게끔 할 생각이다. 이번 회의는 정신적 압박을 위한 회의가 될 것이다. 그 압박이, 이미 노선을 정한 누구에게 잘 먹혀들 지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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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왜 갑자기 연락이 참 활발히 되는 걸까. ‘도심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전직 히어로’라는 명칭은 이미 아이언애로우에게 들은 바였다. 단지 그 이유로 찾아왔다고 하기엔 믿기도 싫었고, 뭐 하러 왔는지 9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에 비로소 들은 참이었다. 지금 와서는 믿음직 하지만, 그러니까 SNS는 안 하냐면서 살갑게 연락하는 이 양반네들은, 설령 전에 동료였다고 할 지라도 믿음을 주기도 싫었다.
그러니까 돈에 뭘 판 거야 대체? 입장을 팔았다 이 말이잖아. 입이 쓴 수준이 아니라 눈길도 행동거지도 쓰다 못해 짜증이 솟는다. 이후 다시 아이언애로우와 이야기를 나눴고, 대략적으로 상황은 기괴하게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극성끼리 만난 결과 그 극성의 특징이 결집을 도왔다는 것이다.
‘완충 지대를 없애 버린 것도 그거지만, 반강제로 그렇게 하면 토론할 때 퍽이나 논리적이겠다.’
‘바로 그거야. 사사건건 밀리기 시작하니까 점점 정치파가 힘을 얻었어.’
‘그래서 추진도 빨랐겠고.’
‘그…렇지.’
‘넌 어떻게 버텼냐?’
‘못 버티고 은퇴했잖아.’
그 때 옛 동료의 표정은 장난꾸러기같진 않았다. 7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의 깊은 생각이 새겨진 얼굴이었다. 언젠가 저 눈시울이 시뻘게졌겠지, 마지막까지 자기가 남았어야 했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자체가, 최후의 보루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을 텐데.
‘…나 이 썰, 기자한테 풀어버릴까?’
‘물어보지 말고 그냥 니 맘대로 해.’
그걸로 죄책감이 덜어진다면 그렇게 해도 좋았다. 굳이 붙이지 않은 말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핸드폰을 붙잡고 한참을 망설이던 것을 나중에 스쳐지나가며 보긴 하였다. 나 잠깐 수용소 좀 다녀 올게. 팔을 붕붕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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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것은 없니? 수용소 내의 빌런들을 이끄는 자가 넌지시 묻는 말이었다. 그 말에 다들 웃음을 낄낄거리고 있었다. 잊어버린 게 있으면 안 돼, 곧 여길 나갈 거니까. 매캐한 화약 냄새가 점점 늘어가는데도 윗선은 바깥에서 자기 스스로 일으킨 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 화약 자체가 거대한 변수가 되겠지. 될 것이었다. 팬텀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변수를 창출해 제 나름대로의 복수를 이루고 싶었으나, 이건 생각 이상으로 선을 넘은 것이었다. 탈출 계획 치곤 과격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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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이 들렸다. 수용소의 문 하나가 터져나갔다는 소식이었다. 10월 31일, 할로윈을 기념하는, 잊지 말라는 자들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 MISS ME?-1
바쁨의 시작은 마피아들이 번잡하게 오고 가고 있다는 걸 포착한 때였다. 근래 다시 뒷골목이 어수선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걸 찾아 갔을 땐, 분명 일찍이 내뺀 줄 알았던 녀석들이 슬그머니 동향이라도 살피려고 눈칫밥을 한 움큼씩 집어먹고 있었다. 그래, 복잡스러운 틈을 타서 무슨 짓거리라도 벌리려고 온 거겠지. 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급하게 헬기를 불러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끔 해 주었다. 국경 잘 넘어갈 자신은 있냐며 비웃기엔 비리가 너무 심하게 터졌다는 걸 잘 알았다.
마지막 녀석들에게 친히 전기충격을 해 주며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에 윤활유를 들이 붓던 와중에, 이상하리만치도 화약 냄새가 났었다. 끝내 방향을 찾지 못한 화약 냄새, 이 쪽에서 다시 회수해 갔나? 그 난리가 났는데도 폭발 하나 안 일어난 건 천만 다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자동차 폭발 등은 이미 시가지가 신명나게 박살났을 때 일어나긴 했지만. 그건 기름 냄새고, 이건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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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알았어야 했는, 데.”
그건 마지막 거래였을 것이다. 잔금까지 받아낸 마지막 거래. 수용소로 향하던 그가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엔 너무 큰 운을 바란 게 아니었나? 먹먹한 청각 속 이명만이 가득 채우는 상황에서 몸은 순간적으로 이리 저리 휘청거리다가, 부서지지 않은 곳에 겨우 기대어 선다. 바다에서 폭발을 마주할 때도 여파로 속을 좀 게워 냈었는데, 오늘은 머리가 훅 울리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얻어맞지 않았는데도.
문이 터져 나갔다면, 교도관들은. 그 근처 사람들은? 그의 나라는 한창 시민들의 대행진으로 인해 인파가 이곳 저곳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수용소에 몰릴 일이 원래대로면 없는 게 맞았으나, 수용소에 갔어야 할 사람들의 탈출 과정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아 루머만 나도는 지금 상황에선 인파가 그리로 몰려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안 돼.
핑핑 도는 시야를 다 잡으며, 억지로 평형 감각을 정상으로 되돌리라 다그치며, 겅중겅중 걸어 간 끝에는 비명의 현장이 있었다. 다른 문에 붙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옛날 옛적의 악연들이 벌레 같았다는 짧은 감상을 뒤로 한 채 그는 급히 시민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수용소의 벽은 튼튼하게 설계되었어야만 하기에, 그 잔해도 손으로 치우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알 바인가? 사람의 손은 도구를 쓰라고 있는 것을. 지렛대는 원래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나뒹구는 파이프 하나는 줍기 좋게 눈 앞에 있었다.
오랜만에 참 바쁜 날이었다. 바쁘기만 했으면 오죽 좋았겠어? 뒤이어 탈출하는 저 것들은 어째야 하는가? 사람 생명과 악의 처단을 저울질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저 미치광이 떼들이 좀비처럼 달려드는 걸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었다.
그는 일 대 일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다 대 일도 능히 잘 하겠지만, 이 따위의 물량전은 그 혼자 어찌 하기엔 지구력은 물론이고 생명력도 깡으로 깎아먹는 짓인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를 알아본 것들이 죽이려 달려드는 시점에서, 그 외에도 생명력을 잃어먹을 상황인 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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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어떻게 해서든 해치운 것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 얼굴 중에, 수용소에 갈 원래 목적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머리가 여전히 아프다. 당연하다. 기절시키려면 머리를 때리는 게 제일 효과적이니까. 용케 살았네.
“…신더.”
분명 본능적 욕설이 나왔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이 묶여있어서? 눈이 푹 감기려 하는 시점에서 그는 상당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무렵에 내가, 상당히 체력을 많이 썼구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리했는지 전기를 필요 이상으로 사용한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 말 거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그의 고개가 조금 움직인다.
“…난 노력했어. 네 문 전부 중 하나만 터뜨리게 했으니까.”
…그럼 나머지는?
“접선해서 도로 돈으로 바꿔쳤어. 궁금해할까 봐. 아직 화약은 남아있지만.”
풀어줄 생각은 없는 건가. 그의 팔이 버둥거렸다. 밧줄에 묶인 양 팔은 꿈틀거림 외에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화약을 빼돌린 시점에서 나도 여기 안 갇힌 게 행운인 입장이야.”
도박 좀 하지, 라고 하기엔 그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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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상황은 생각보다 최악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팬텀이 가끔 찾아와 한 말에 의하면, 올리비아의 인터뷰에 자극을 받은, 정확히는 제 발 저린 전직 히어로들 중 몇몇이 도심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총회에서 자진 탈퇴한 사람들도 전투와 구호를 이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잠깐, 참여하지 않는 세력이 있는데? 총회가 빠졌다. 이건 총회가 계획한 일인가? …그럴 리가. 그랬으면 동조했을 리 없다. 팬텀이, 그랬을 리는 없고. 이건 일종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혼란이었다.
짤랑, 열쇠 하나가 발치에 떨어졌다. 로프를 풀 수 있다면, 탈출해라. 여기서 뭔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도박이 제법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았나.
아, 돌멩이로 접속하는 괴담 어서 빨리 작동해 봐.
- MISS ME?-2
컴뱃 나이프 하나, 폴딩 나이프 하나, 물 하나, 감기약 하나, 보온병 하나, 그리고 또 뭐야, 이게. 날붙이로도 밧줄을 끊어 내기 여간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묶여 있는 처지였으니까. 밧줄 자체가 두꺼운 것도 한 몫 했다. 펜치로 끊는 게 더 실용적이라고 할 정도의 두께였으니 칼날로 제대로 끊으려 해도 시간은 좀 걸렸겠다. 게다가 이쪽은 야매적인 자세였으니까. 공사판 밧줄인가, 힘으로 손목 빼고 그러다가 다리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이게 진짜 뭘까, 바닥에 어수선히 늘어진 물건들을 본다. 일단 열쇠는 주워 두고.
칼 하나를 부탁했더니 쏟아진 물건이 다섯이다. 나이프 두 개와 물은 고마운데, 감기약은 의외였고 보온병은 더 의외였다. 내용물을 살피니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음식이겠거니 짐작한다. 그리고 이 불새의 눈물이라고 본 이건 대체 뭐냐 이 말이다. 여기도 초능력이 존재는 하지만 이런 걸 볼 때마다, 다른 차원은 또 뭔 판타지적인 게 있는 거야, 싶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지금 당장 이 곤두세운 감각과 습관에 따라 정말 못 믿겠다 싶은 건, 하는 생각을 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이 나이프 두 개를 준 사람이 추가로 보내 준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과 이곳 저곳 다치고 부은 몸, 아직까지 울리는 머리는, 그래도 이를 악물고 끌고 가기 충분하긴 했다.
하지만 빚 지는 느낌이라 싫긴 한데, 어쩔 수 있나.
-
열쇠가 딱 맞물리는 느낌이 들고, 이어서 수용소의 철문이 끼익 열린다. 이 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수많은 문을 뚫고서 마지막의 마지막 문에 화약을 설치한 거야. 이래봬도 방비 시스템 정도는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무효화하는 약물 등의 소문과는 달리, 금고 같은 방을 마련해뒀다고 하더랬다.
그를 그 곳에 가두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지. 남은 화약이 있다는 말에 짚이는 곳은 그 곳과, 수용소의 소장실 같은 곳이었다. 그가 갇혔던 곳은 열쇠 하나로 뚝딱 열리는 잡범들의 감옥이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어쩌면, 일부러 탈출이 용이하게끔 여기에 빌런들을 가두는 짓거리도 했을 것도 같다고 추측도 하는 것이다.
한결 나아지다 못해 말끔해진 몸 상태를 잠깐 살피며, 무기를 다시 재정비하며, 그는 다음 문에 손을 대었다. 똑똑, 노크 소리. 샛노란 눈에 보이는 것은 날을 숨긴 폴딩 나이프였다. 이름값 그대로 접힌 채 작은 둔기 같은 모양새로 쥐여 있었다. 있는 장비를 전부 생각하자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별안간 문을 열었다. 제법 두꺼운 문에, 연 이후 공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 대신 뭔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이 문 안으로 친히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문을 벽 삼아 사람 하나 패고 있던 게 이제 아군인지 적인지 보면 되었다. 열쇠를 준 녀석은 암살자 같은 녀석이라 이런 정면 승부는 잘 못 할 텐데.
아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감각을 어느 정도 꼬아 놓을 수 있는 녀석일 텐데, 그래도, 라는 생각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그 패고 있던 사람이 동맹을 체결한 녀석인 걸 확인했다.
“강골이 됐구만?”
뭐, 좋게 보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아군인 건 아군인 거고, 이 사단을 낸 건 낸 거였다. 규모 축소는 고맙지만, 일을 거든 건 거든 거였다. 비꼼이 언뜻 새겨진 말은 살갑지도 않았고, 주변을 빠르게 살피고 다시 팬텀에게 시선을 주는 노란 눈은 영 온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옛 정이라도 생각해서 이러고 있는 건가, 팬텀은 속으로 생각했다.
“죽였냐.”
“답답하게 굴지 말고 탈출이나 해.”
“유감인데 난 그 화약 좀 마저 손보고 가야 겠는데.”
문이 열리며 바닥에 자빠진 누군가는 기절해 있었다. 즉슨 죽은 게 아닌 셈이다.
“누가 수뇌인지는 몰라도 보안 한 번…”
죽여준다, 진짜. 보초로 세워 둔 녀석들을 툭툭 건드려 보니 그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빌런이 아니라 차라리 무뢰배나 뒷골목 시장잡배들일 가능성이 컸다. 화약 빼돌린 놈이랑 인질로 쓸 만한 놈 붙어 있는데 여기에 이렇게 보안을 해 놓다니.
“너 나한테 능력 잠깐 써 봐.”
“꿍꿍이 정도는 알려주고 그래 주던가.”
“여기 그 새끼가 있을 수도 있다.”
미러사이드. 누가 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던 절대로 타협조차 하지 않을, 그 새끼. 당연히도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지금은 행방조차 모른다. 다만 그의 마지막 행적은, 2대 솔라리움과 신더와 분전 끝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낮았고 조용했다.
감각이 순간 어질하고 뒤틀린다. 꼭 도수 안 맞는 안경을 쓴 것 같았다. 시각으로 아주 확실하게 알려주네, 그럼 넌 아니고. 팬텀은 굳은 표정으로 방금 전까지 자신이 기절시켰던 아무 능력도 없는 범죄자들을 살핀다. 저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역시 한 명 한 명 다 죽였어야 했다.
“다 죽여 놨어야 했는데.”
“이젠 아주 빌런이라고 광고하지?”
“너도 내가 죽여 놓는 걸 바라지 않았어?”
“아니거든, 미친 새끼야.”
“적어도 이런 일은 안 일어났겠지.”
“…뭐 밖에서 내가 화약 쪽만 꼬리를 일찍 잡았어도 이 사단은 안 났겠지만.”
말이 길다, 이런 상황에서 말다툼은 적에게 시간을 더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분열시킬 단서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깔끔하게 제 탓으로 방향을 돌려 대화를 마쳐버린 그는 어떻게든 탐지를 발동시켰다. 워낙 두꺼운 벽과 천장인지라, 라고 하기에는 전통적이게도 환풍구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은가.
“화약은 어디 있어.”
“…그건 이제 나도 몰라.”
“그러면 뭐… 가자고. 아무 데나.”
“여기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어차피 쫓아올 걸. 적어도 내 목적은 아는데 그냥 둘까.”
내부 공기가 잘 통할 리는 없었다만, 지금 믿을 건 화약 냄새를 쫓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뇌로 추정되는 어느 미친놈을 유인해서 포박한다면 참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옮기는 게 나았다. 찝찝해하는 표정을 지우고, 죄 지은 자들을 가두는 깊은 내부와 수용소 소장의 것이었던 상부 중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기로 했다. 탈출의 용이함을 위해, 그들은 위쪽을 택했다.
- MISS ME?-3
그들은 환기구로 가고 있는가? 아니. 당당하게 복도를 따라 가고 있었고, 동시에 발소리를 죽여가며 가고 있었다. 따각따각, 걷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울리면 숨소리가 사라지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는가? 그들이 순전히 환기구로 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애초에 여기에 모여 있던 작자들이야말로 그 환기구에 여러모로 이득과 실패를 동시에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뭐 하러 적들의 홈 그라운드 같은 곳 중에서도 피할 곳 없는 곳에 몸을 구겨가면서까지 들어가?
“미행인은?”
붉은 머리의 남자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행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따라오다가 마는 듯, 다시 따라오는 듯, 간 보는 것이 계속 해서 느껴지기는 했으나, 왜 덮치질 않으며 무슨 수작으로 저러고 있는지도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정확히는, 저쪽이 아군을 기다리며 슬슬 간을 보고 있는 거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긴 했다.
달렸다가, 멈췄다가. 잰 걸음을 조심히 옮겼다가, 또 멈추고. 텅 빈 공간 속의 숨소리와 발걸음 외엔 적막 뿐이었다. 영영 튀어나오지 않아서 최후의 최후에 낯짝이나 제대로 보고 넘어가면 참 좋을 텐데, 음, 정정한다, 그 낯짝을 보는 건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다. 지금 쫓아오는 녀석이 정말로 그 개새끼인 게 맞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문득 그의 탐색 범위에 다른 이가 걸렸다. 이건 필시 구면인 사람을 느낀 자의 얼굴이었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오려는 걸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최선의 장소를 찾기 위한 느린 발걸음과 빠른 머릿속, 그걸 증명하는 동행자를 빤히 보면서도 이리 저리 힐끗거리는 노란 눈동자 하며. 누가 왔군, 가까운 거리는 아닐 터였다.
수용소 복도가 넓지는 않았다. 일반 죄수들을 가두는 곳들 중에는 중앙에 넓은 곳이 있는 장소가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 오는 작자들과 넓은 곳에서 싸우는 게 맞을까? 그렇다고 너무 준비 없이 맞이할 것 같은데, 어떤 게 필요하려나. 게다가 뒤통수를 물리적으로 한 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고.
“팬텀.”
“뭐, 안개부터 깔아 줘?”
“좋은데. 안개 깔고,”
“칼 줘. 기습하게.”
“아니, 인기척을 느끼면-“
우리 뒤를 따라오는 저 스토커가 두명인 걸로 속일 수 있겠어?
-
실내에 갑작스레 깔린 축축한 물안개는 적어도 이 근처에 그 히어로였던 개자식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했다. 거리 감각이 흐려지는 가운데, 분명 근처 기척은 아군 말고도 둘이었다. 자신들을 이 곳으로 다시금 쳐박아 놓은 장본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안 이상 밖에서 난동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암기가 쐐기처럼 박히고, 동시에 거한의 팔이 안개 사이를 갈랐다.
“…너희 뭐 하는 거야.”
돌아온 대답은 어느 미친 우두머리의 말 하나 뿐이었다. 텅, 텅, 희미하게 저 멀리, 여유로운 건지 다급한 건지 모를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지금 날 쫓은 거라고, 너희가. 재미있네, 아주.”
“아니, 배신이 아니라니까?”
“지시부터 어긴 놈들을 내가 믿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목표가 똑같으니까, 됐어.”
-
“자재실은 갑자기 왜?”
“나 잡아다 넣기 전에 대체 뭘 본 거야?”
“…아 잠깐만. 트랩이라도 급조하려고?”
알면 다른 거나 좀 찾아 오라는 듯 한 눈쌀이 박힌다. 이걸로 몇 번 시간을 끄는 데에도 한계는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서 더 누가 동원되기라도 한다면 수싸움에서 점점 밀릴 테니까. 확실히 발목을 잡아 놓아야 한다. 아니면 확실히 나가 떨어지게 해야 한다.
“일단 화이트 블러드랑 블랙 블러드가 쫓아오고 있거든? 알다시피 화이트 쪽이 암기 쓰는 놈.”
“그럼 와이어는 못 써먹겠네.”
“강철 와이어가 있다면 몰라.”
“수용소에 있어도 누가 훔쳐먹었겠고.”
바깥 철조망이 그리워지는 상황이다. 그걸 떼어내면 적어도 저 트랩퍼의 머릿속에서 뭐라도 일어났을텐데.
“공구함은 킵.”
“그게 용케도 남아 있었네? 줘 봐.”
바닥을 죽 미끄러져 가는 공구함은 얌전히 팬텀의 손에 안착한다.
“철사라도 꼬아서 놓게?”
“선반 나사도 좀 빼놓고.”
“…어그로 좀 잘 끌 테니까 넌 어디 숨어 있을래?”
“기습은 역시 고지대지.”
-
자재실의 문이 열린다. 소란스러운 게 영 심상치 않았다. 문이 열리면 발 끝에 형광등 파편이 걸리적거린다. 일부러 불을 켜지 못하게 해 놓았단 셈이다. 그렇다면 이 앞엔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했다는 말이 될 텐데.
그러나 다음 순간 불을 시험삼아 켜자, 미처 부수지 못한 형광등에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자재실이 눈에 들어온다. 형광등 바로 밑에는, 그 형광등을 원망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막 칼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거한은, 블랙 블러드는 놓칠 새라 곧바로 그에게로 돌진했다.
순간 웃는 것이 보였다. 발치에 뭔가 걸리는 게 느껴졌고, 다음 순간-
선반이 그에게 쇄도했다. 모든 짐들이, 전부.
떨어지는 모든 게 바닥으로 향한 직후, 그러니까 고요가 시작된 직후에 화이트 블러드는 침입을 시도했겠으나, 그 짐들을 밟고 문 밖으로 맹진하기 시작하는 목표물을 보았을 때 일순 멈칫했다. 그 뒤로는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바닥을 딛고 나온 신더는 문을 닫아버렸다.
“칼은 어따 버려두고 왔어?”
날붙이를 던져 봤자 소용없을 거리에서 목표물은 말하고 있었고, 화이트 블러드의 손목과 암기는 타인의 손에 의해 꺾였다, 바닥을 향했다. 반대쪽 손과 자유로운 다리는 놀지 않았겠지, 그 놀 틈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 무리하고자 한다. 당분간 탐지는 못해. 보이지 않는 전기가 과다하게 뿜어져 나왔다.
순간, 옆에서 거한이 다시금 등장했다.
“미러사이드, 이건 좀 반칙 아냐?”
“어디가?
“아니, 그 거한의 풀 스펙을 그렇게 복사해 버리는 건 좀.”
빠르게 기절시키고 난 직후라 겨우 거리를 벌리는 선에서 그쳤다. 주우욱, 드리프트를 하는 발 뒤꿈치가, 발부터 시작해서 다리와 온 몸이 파르르 떨렸다. 노려보는 눈동자가 다만 흔들리지 않을 뿐이다. 이건 너무하지 않냐, 한 쪽을 무리해서라도 일찍 기절시킨 게 좋은 판단이어서 다행이지. 진짜 거한은 안쪽에서, 그래 부디 살해당하지 않았길 바란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본격적으로 기습이 시작되었을 터였다.
“능력은 못 베끼는데 풀 스펙?”
뺨에 상처, 이건 아무래도 화이트 블러드의 암기 쪽일 가능성이 높다.
“덩치 차이 좀 고려하지?”
“거절하지!”
이 새끼는 감옥에서 스파링을 왜 배운 거야! 무리해서 둔해진 몸이 곧바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좁은 복도에서 저 거한을 당장 압도할 만한 수는 뾰족히 보이지 않았다. 예상한 바였다. 공기의 흐름이 넘어간 것도 느껴졌고, 저 개새끼의 감정도 참 격렬하게 느껴졌다. 이쪽은 억누르기에 바쁜데 저쪽은 분출하기에 바쁘다, 틈은 보일 것이다.
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대로 유인하는 수밖에. 계단은 근처였고, 순식간에, 까지는 아니더라도 위층으로 계속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와 과부하로 조금 지친 몸을 이끌고 내달렸다.
“꼴에 도망인가?”
무섭게 쫓아오는 저 녀석에게 그래도 도발이 먹혔다는 반응 정도는 해 줘야 할 테니, 달리는 속도를 조금 더 높여 보자. 높여서, 벽을 박차 올라서, 그대로.
“듣자듣자 하니까, 참나. 별 것도 아닌게.”
쇄골 언저리에 그의 발 뒤꿈치가 훅 꽂혔다. 자칫 잘못하면 목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어쩌면 얼굴로 갈 뻔한 것이, 비껴간 것마냥 미끄려졌다. 맞은 상대는 되려 낄낄거린다.
“별것도 아닌 녀석한테 좀 열을 많이 받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다시 계단으로 향한다. 이 이상 과거의 감정이 불쑥 튀어나오게 두기도 싫었다. 핵심은 화약의 탈취와 탈출이었다. 여기서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달려, 어서, 달려.
- MISS ME?-4
텅, 텅! 계단을 세차게 오르는 소리인지, 아니면 난간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소리만 듣는다면 이게 정말 계단에서 나는 소리냐며 의문을 표할 정도로 거센 소리가 반복적으로, 불규칙하게 나고 있었다.
계단에는 참 당연하게도 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쫓기는 입장인 동시에 먼저 계단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다리 아픈 짓거리를 하면서까지 놀아날 시간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자신을 쫓는 사람이 몸뚱이가 알차게도 근육으로 꽉 찬 상태라 정공법으로 계단을 올라 갔다간 언젠가 잡힐 운명이라는 걸 직시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난간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온 몸이 하나의 용수철인 것처럼 뛰어 올라, 넘어서, 마치 벽과 벽을 타는 것처럼, 그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짓거리긴 하지만! 정직하게 계단으로 올라오는 추격자의 속도는 짜증나게도 빨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뭐, 서커스 같고 좋네 젠장.
그리하야 텅,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설령 다른 층에서 난입을 한다 하더라도 빠르게 지나칠 수 있는, 지극히 도박적이고 위험하면서도 확실하게 속도를 내는 방법. 여기에 그는 한 가지를 추가하기로 한다. 속도 차이가 줄어들면 쫓기는 입장에선 난감하지 않겠어, 그러니 계단에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굴린다.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보온병이 미친듯이 굴러가기 시작한다. 저 안에 구슬 같은 게 들어 있었다면 볼 만 하겠는데, 하는 생각은 집어 치우자. 이런 서커스도 슬슬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
그가 낮은 층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본래 수용소를 관할하던 이들이 쓰던 관리실과, 그곳을 비롯한 안전한 곳은 그보다 더 높은 층에 있었다. 위와 아래를 결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 자식들이 폭약을 보관한다면 저 아래 빌런들이나 감금시켜 놓는 금고 나부랭이에 넣어 놓았겠지만, 활용하고자 한다면 활용하고 싶어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 번 탈취당한 경력이 있는 한 말이다.
거칠게 열어 재낀 문 안에서 지독한 화약 냄새가 났다. 분명 그는 계단을 올라 이제 막 층에 진입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화약 냄새가 흉흉하게도 난다는 건 분산시켜 놓았다는 셈이다. 이 층 전체에! 수축되는 노란 눈동자 속의 동공은 비단 어두운 계단에서 밝은 형광등 아래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와서 뭘 할 셈인데?”
이건 낭패라고 해도 되는데 말이지, 큰일인데.
“왜 얼어붙어 있어?”
…목소리가 바뀐 것 같다. 지금 저 녀석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새 개명도 하고 말이야, 깜찍한 새끼.”
“하 시X 진짜…”
읊조리는 목소리도, 그 읊조림을 흘러나오게 한 목소리도 모두 같았다. 저 자식은 지금 붉은 머리의 남자 ‘자신’으로 변해 있는 상태였다. 7년 전의 기억이 노크를 하고 들어올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들어왔을 지도 모르겠다. 거울상 같은 자신이 등 뒤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7년 전의 광인이 그 곳에 있었다. 스스로 체포한 원흉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으로, 그 때와 똑같이.
“더스틴 블루버드.”
“입 닥쳐, 개새끼야.”
먼지투성이의 더스틴은, 뺨에 상처가 난 가짜의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뒤를 돌아본 그의 손엔 나이프가 날을 번뜩였고, 절제되길 바라는 움직임이 획을 그으며 빗나갔다.
“트레이 녀석들이랑 손절했어?”
도발, 도발, 계속되는 도발. 후유증이 없었느냐고? 없었다면 그는 홧김에 폭언을 날리고 은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이라는 성을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 형제를 말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유증이 잔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렇게 격양될 거라고 생각하진 못 했다. 착오야, 착오라고, 침착해. 제발. 다시 한 번 그어지는 날은 무뎠으나 품에 파고 들기에 충분했다.
빈 손은 놀아서는 안 됐다. 반대쪽 손은 파고 든 상황 속에서 제 할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고, 가짜에게 충격을 주는 데에 성공했다. 낄낄거림이 멈추길 바라면서.
“아하하… 이봐, 상당히 얼어붙어 있었지, 그치?”
유감스럽게도 그 가짜는 자신과 내구도가 똑같았다. 이런 행위 하나로 쉽게 기절할 처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낄낄거림은 이어지고 있었고, 도발은 계속 되고 있었다. 후유증은 서서히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증오 같은 것. 증오는 쉽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이 가능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러니까 더스틴이 자신의 가짜 위에 올라타서 구타를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또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이 가능하기도 했다. 날붙이는 궁극적으로 살을 자르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찌르기 위해서 존재한다. 찔러버려, 살의로 변모한 것이 숨결을 타고 속삭였다.
“왜, 죽이게?”
“안 죽여. 안 죽일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등신 새끼야.”
대답은 벽에 쳐박아 두는 걸로 대신했다.
“…진짜 죽겠는데!”
“죽게 안 놔둬.”
“답답한 새끼, 그냥 죽이면 되는 걸… 신념 타령이나 하고!”
한 번 더 무리를 하기엔 아직 몸 안의 전기는 요동칠 기력도 없었다.
“표정 되게 볼 만 하네, 더스틴.”
피가 섞인 침이 얼굴에 엉겨 붙는다.
“화약 냄새 맡았어? 그치, 맞지?”
“너가 안 죽여도 난 살아서 나갈 생각은 없거든? 여기를-“
-
폭음이 울렸다.
-
건물의 잔해가 위로 깔리는 상황인 건 둘째 치고, 밑 부분도 아슬아슬한 상태의 언젠가에,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은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곧 무너질 모래성 같은 이 곳에,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 한 명과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한 명이 갇혀 있었다.
회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순식간에 너덜너덜해 진 누군가는 칼 하나로 제 몸 어딘가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실실 웃고 있었다. 등신새끼, 과다 출혈로 죽으려고? 아까 물을 마셨던가 안 마셨던가. 물 대신 화답하는 몸 속의 전기는 저 자를 기절시키게끔 도와주었다.
대신, 폭발의 충격으로 너덜해진 사용자 또한 기절시키게 하였다.
-
꺼무룩한 시야 속에 오가는 말소리가 들려 온다.
“…한 놈 정도는 살인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복수극이 너무 거창하지 않냐.”
“이건 말야… 수용된 다른 빌런들의 복수로 이뤄진 그거야… 내 복수는 너한테 죽는 거였어.”
“죽이는 거겠지…”
-
빌런들의 대탈출이 일어난 10월 31일 이래, 사태가 진정되기까지는 2주 가까이 걸렸어야만 했다. 빌런 수용을 위한 특수 시설이 도심 외에도 먼 거리에 있던 만큼 사태가 진정되는 것도, 그 불안도 오랫동안 잔존했어야 했으나, 도중에 일어난 수용소 2차 폭발 사건으로 인해 급속도로 빌런들의 태세가 방어적으로 돌변하였으며, 또한 국제적 원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3주가 넘어가기 전에 고요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폭발 사건에서 구조된 이 중 특이한 상처를 가진 사람이 눈에 띄었는데, 붉은 머리의 남성이었으며, 팔뚝과 종아리에 ‘저스틴 프라이’ 라는 글자를 칼로 새겼다는 점이다. 이 사람과 똑 같은 얼굴을 한 채 구조된 다른 사람은 뺨에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나, 빌런으로 판명되어 지방 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는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올리비아 트레이가 증언한 결과였다.
저 새끼는 내 가명을 모른다. 밀폐된 공간에서 붉은 머리의 남자가 한 가장 차갑고도 뜨거운 생각이었다.
#11: 소강 속에서
- 이름과 이름과 이름
1. 그가 처음 고아원에 버려졌을 때, 그의 옷이나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 꾸러미 같은 것들이 온통 먼지 투성이였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더스틴인 이유에 대해 한창 생각하고 있던 대여섯 살의 그는 분명 제 얼룩덜룩한 담요를 보며 이것 때문일 거라고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짧고도 치기 어린 생각은 이내 그만 두기로 결정했었다. 어차피 고아원 앞에 버려진 아이임은 변하지 않았고, 제 이름이 제 먼지 투성이 옷 때문인지, 아니면 버린 사람이 남긴 상상 속의 쪽지 비스무리한 것 때문인지는 이제 상관 없었다.
2. “더스틴, 더스틴!”
“왜 자꾸 부르는 거야?”
그가 트레이 가에 입양된 7살 때의 일이었다. 그 때의 형제는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그런 눈이 영 달갑지 않았는지 툭 쏘아 붙이듯 말해 버리고 말았다. 아차 싶었는지 노란 눈과 그걸 담고 있는 어린 얼굴은 곧바로 안절부절 못 해 하고 있었다. 그의 형제, 버나드의 얼굴에는 조금의 놀람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가족인데 이름 부르는 거에 익숙해 져야지!”
버나드는 새 가족을 맞이하고 있었다. 항상 늦은 시간에 오는 엄마와, 이른 나이에 여읜 아빠, 그로 인해 어두운 밤은 온전히 그의 숨소리로만 가득한 고요였다. 그런데 이제 한 명이 더 늘어났잖아, 그치! 놀란 눈이 생글, 웃으면서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버나드야. 버나드! 트레이! 엄마는 버니라고 불러.”
“버니면 토끼야?”
“응! 엄마가 안 그래도 아기 토끼라고 막 그래. 더스틴은, 더스틴은…”
이윽고 새로 생긴 가족 두 명은 모두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으으음, 하는 소리만 거실에 도르륵 굴러가고 있었다. 두 소년의 입술이 한참을, 고민이 있다는 듯 앙 다물려서는 열릴 생각도 안 하던 어느 때에, 별안간 버나드의 표정이 확 풀려버리며 입이 열렸다.
“더스 하자!”
“더스? 나?”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며 더스틴은 쭈뼛거렸다. 못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 애칭인 셈이었다. 몽글거리는 감정을 감추는 건 아이에게 아직 서툴렀는지, 이어서 새로 생긴 형제에게 더스 웃는다! 하는 말을 곧바로 들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3. “우리 아기 토끼랑, 우리… 아기새!”
“엄마, 나 새에요?”
“응, 새지 그럼. 우리 더스틴.”
-
“더스, 있지, 나… 나 가족이랑 같이 자는 거 소원인데…”
“엄마는 아직 안 오셨어?”
“응…”
“그러면 우리 엄마 침대에서 같이 자자, 엄마 나중에 오면, 우리가 새벽에 깨도 엄마 품에 있을 수 있잖아.”
-
“우리 아가는 엄마 품에 있으니까.”
아침 일찍, 두 형제가 어머니의 품에서 일어나며 한 대화 도중이었다.
4. “파랑새?”
그의 형제가 처음 듣는 별명에 대해 물었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엄마와, 어린이는 아무리 그래도 11시 전에는 집에 있어야지 하는 다른 어른들의 만류로 인해 집에서는 늦은 시끄러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응, 파랑새.”
“넌 그러니까,”
“알아. 빨간 머리인 거.”
“근데 왜? 이왕이면 막 불사조! 로 하면 안 돼?”
“원래 별명은 안 닮게 지어도 된대.”
진짜 안 닮았어, 하고 중얼거리는 걸 그는 흘려 들었다. 대신에 입이 열렸다. 한창 무럭무럭 클 나이인 만큼 밤에도 무언갈 먹어줘야 한다는 법칙에 따라 두 사람은 야밤에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지만, 이는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이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게, 훈련 하다가 좀 내 맘대로 하고 그랬거든. 어휴 자유로운 녀석, 하고 지어 주셨어.”
그랬더니 버나드는 먹던 걸 최대한 삼키려고 애를 쓰면서 입을 가렸다. 아 웃지 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한바탕 울렸다. 작은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고, 웃음소리는 이내 두 소년의 하모니 같은 시끄러움으로 변했다.
“대체 뭘 한 거야?”
“그냥 이것저것!”
5. “그러니까 있죠, 엄마. 아니, 솔라리움.”
“…그래.”
“내 사이드킥 네임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좀 들어 봐요. 누가 이런 외형을 가졌는데 이름이 잿더미겠어?”
그러니까 그로서는 전략적인 걸 우선했다는 걸 어필하고자 함이였다. 표정이 풀리지 않는 걸 보고 어린 날의 더스틴은 으으음, 하는 소리를 냈어야 했다.
“…아니, 그래, 맞아요. 엄마가 불인 건 맞죠. 그리고 사이드킥인 내가 잿더미면, 엄마 입장에선 속상할 거야. 나도 알아요.”
“그래, 많이 속상하단다. 내 아가가 뭐가 부족하다고-“
“아니 나는 내가 부족해서 저런 이름 지은 거 아니라니까! 엄마의 등 뒤를 지키기에 좀, 걸맞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기야, 알았죠?”
올리비아는 제 아기새가 쫑알거리는 것이 못내 귀여워서, 그 속상함을 차곡차곡 지우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고른 이름일 텐데, 엄마로서 그걸 존중하지 못할 게 뭐람. 조용한 웃음과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6. 그리고 어느 날의 밤에 또 다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진짜야? 신데렐라라고?”
“…이럴 바엔 진짜 12시 넘어서까지 있을까 보다.”
“에이이이.”
제법 서운한 소리다. 적어도 버나드에게 있어선 그랬다. 이 고요는 이제 참을 만도 했지만, 동시에 누군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참는 셈이기도 하였다. 조금 더 자라면 그 고요마저도 혼자만의 생각을 위해 필요한 나이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런 나이였고, 외로움을 잘 타는 나이인 현재에는, 버나드는 제 형제에게 기묘한 소리를 내며 아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너까지 신데렐라라고 부르지 마?”
“안 부를게, 진짜로.”
“…진짜 안 돼?”
“아 진짜 쫌!”
7. 저스틴이라는 이름이 생긴 건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한창 활동이 활발해질 때,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은퇴하고 나서 제 형제가 훈련을 받기 시작할 때. 그는 아주 베테랑은 아니였지만 선배로서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고, 치기 어린 정의감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쟤가 만약에 가명을 쓴다면 저스틴이 어울리지 않을까?”
버나드는 지나가듯이 들은 말에, 정확히는 훈련장 안에서 다른 베테랑들의 말을 들은 셈이었지만. 지금 형제는 훈련 중이었다, 한창. 저보다 더 불사르듯이.
“저스틴!”
“…”
“더스!”
“뭐야, 나 부른 거였어?”
그리고 훈련이 끝난 형제에게 돌연 이렇게 불러버린다. 영문을 모르겠는 노란 눈이 자신의 후배로 들어온 형제를 쳐다보는 와중이었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냉철한 눈빛은 아니었다. 방긋 웃는 걸 보니 어디서 뭘 주워 들은 모양인데.
“다른 선배님들이 너가 가명을 만들면 저스틴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하니까 그냥 불러 봤어.”
“…아니 잠깐 나도 못 들은 이야기를 거기서 왜, 아니, 야, 난 모르는 이야기잖아!”
8. 자유의 파랑새는 은퇴 후 성을 버렸다. 그래, 버릴 참이었다. 곧 있으면 공란이 될 성에 대체 무엇을 끼워 넣어야 할까. 그는 제 스승을 자처하던 시어도어를 생각했다. 그 아저씨 성이 레드우드였잖아. 간단히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날부로 그는 정말로 파랑새가 되었다.
9. 돌겠네, 진짜. 가명을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뒷골목에서 스쳐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는 거짓말이길 비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현재 히어로들이 빌런들이나 다른 범죄자들을 의도적으로 풀어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돈을 주고서. 마치 고용한 것 같지 않나.
머리가 아프다. 분명 처음 몇 년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이야기를 듣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니 그 이후의 몇 시간까지도. 의심을 조금도 안 했냐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저는 은퇴한 사람이었다. 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낄 수밖에 없는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파랑새는 철창 밖으로 나갔다고 했던가? 최후의 최후에, 그가 결정한 가명에 들어간 성은 자유를 뜻하는 단어였다, Frye. 철창을 자진해서 짓고 있는 자들에게 고하기를 나는 이 곳에서 달음박질을 치겠다. 그리고 다시 날아올라, 너희의 철창을 무너뜨리겠다. ‘저스틴 프라이’는 그렇게 자경단으로서, 먼지더미를 박차고 지붕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0. 이름들, 수많은 이름들. 팔과 다리에 칼로 새긴 게 원인이었는지, 온갖 기억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꿈결처럼 지나간다. 아니,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 기억들이 꿈이 아니라, 몇 개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니까… 이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왜 지나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지도 않겠지. 그것도 이미 겪은 일이.
샛노란 눈이 빛을 마주한다. 사건이 터지고, 구조된 후 이틀이 지난 날의 밤이었다. ‘더스틴 블루버드’ 라고 적힌 환자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새삼 마지막에 정신줄을 붙잡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어느 누구와 바꿔치기 당해서 빌런 수용소로 가 있거나, 아니면 심문을 위해 여기와 분위기 자체가 다른 병원에 묶여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잠깐, 칼 어디 갔어, 돌려주기로 했는데.
- 상처
“…그래서 이렇게 막는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인지 말해보지, 솔라리움.”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책임은 전적으로 너에게 전가할 것이다.”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으시고 지금 사태만 이야기하려 하시다니요.”
안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시민들이 책임 전가를 믿어줄 것 같습니까? 노려보는 눈빛은 더 이상 예전의, 그저 굴복하기에 급급한 눈빛이 아니었다. 뒷배가 생긴 모양이군, 솔라리움. 어떻게 끌고 오고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고자 하는구나. 이미 늙고 지친 번개의 지휘자는, 아니 어쩌면 그의 실명이 절찬리에 공개되었을 시점부터 망가지기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으나, 빛을 잃은 그는 그저 눈 앞의 ‘제자’라고 생각되는 인물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쉽게 입장은 못 내실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배척을 받을 텐데, 각오는 되어 있겠지.”
“…이미 배척 받는 상황에 내부 배척이 두려운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들을 따돌리고 나간 분파가 존재하는 만큼, 현 히어로 총회 안은 싸늘했다. 모든 것이, 숨소리가 명확히 들릴 정도로 고요했고 차가웠다. 대화 하나 하나가 날이 서려 있을 만큼 소속 인원들 모두가 예민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솔라리움, 버나드만 오직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내부 배척이 두렵다는 건 곧 당신들은 아직도 이 총회의 더러운 면을 못 본 체 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걸 끝까지 물고 있을 셈이라면 배척당해도 상관은 없었다.
“너로 하여금 사람이 죽었다.”
“압니다.”
“형제가 실망하겠어.”
“실망시켜야 하니까요.”
난 네 생각보다 못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더스.
-
등 부분에 1도 화상, 일부분의 경우 2도 화상. 파편이 튀거나 박힌 곳이 있으나, 적출하여 대부분의 경우 무리 없이 완치될 가능성이 높음. 그러나, 라는 말은 언제나 따라붙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 다리를 보았다. 7년 전 자신의 어머니를 은퇴시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쳤던 곳이었다.
“얇은 철골이 좀, 심하게… 관통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파고 들었습니다. 근육 손상이 다른 곳보다 심각해요.”
“…그래서요?”
“…못 걷는 건 아닙니다.”
“뛸 수는 없다?”
무리한 운동은 삼가는 게 좋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블루버드씨. 그가 만약 운동 선수였다면 사형 선고나 다름없을 진단이었겠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자경단이었고, 고통을 씹고 움직인 적이 아주 많다는 것이며, 재활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뛸 수 없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앗 따가!”
“좀만 참으렴, 아가.”
그리고 한창 화상 연고를 바르는 중이었다. 눈을 뜬 첫 날에는 펑펑 울던 그의 양어머니도 다부진 얼굴로 양아들의 회복을 돕고 있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는다는 건 누군가의 입장에선 가슴 아픈 일이겠지만, 상황을 생각하자면- 살아서 돌아온 것이 더 다행이라고, 깨어난 이후 들었었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실종에 폭발이었다. 실종부터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생사 자체를 알 수 없게 된 셈이니. 그는 올리비아의 오른팔을 보았다, 분명 전에는 느릿하게나마 여유롭게 움직였던 팔이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파르르 떨리고 있지 않은가. 무리했다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설령 그녀가 왼팔을 거듭 사용했다 하더라도, 사태는 사태였다. 어쩌면 나라의 존망이 걸렸을 정도로 위험한 사건이었다. 떨리는 진동이 등의 따끔거림 너머로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그 따끔거림은 등 뿐만이 아니라 심장과 눈시울로 번져갔다.
“…무리할 생각이니.”
“해야죠, 뭐.”
이미 보조 장치를 알아보기 위해 연락을 넣은 후였다.
“…많이 걱정되는구나, 버니도, 너도.”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걘 왜, 아니, 이참에 좀 물어볼래, 총회는 왜 안 온 거에요?”
그 자식이 뭔가 했구나. 짧은 침묵은 순식간에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해서 시민들의 운동을 계속 뒤로나마 응원한 것이었다. 돌발적으로 전 히어로가 나타나서 연설이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정말 몰랐으니까.
자신의 어머니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때는 그래도 한창 감정의 승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지금 이 상황에 전력을 보태는 데에 한 몫 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러나, 만일,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미 피를 본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이 특히 그렇다. 그 사람들이 과연 전직 히어로를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쓸모가 있는가.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무엇을 탓해야 하는가.
+
“…아가, 팔에 이건 그러니까.”
“그 새끼가 내 가명을 알 리가 없잖아요.”
“얼마나 깊이 상처를 낸 거니? 여기서 난 피 때문에 쇼크랑 과다출혈로, 너가.”
…갇힌 곳이 유달리 어두웠어야지…
“문신 할까.”
악! 붉은 머리의 남자는 화상을 입지 않은 곳에도 따끔한 한 방을 맞았어야만 했다.
- 고요 속의 안식
폭력 시위 직전의 횃불이 이글거렸다. 히어로 총회를 당장이라도 불살라 버리겠다는 의지의 불길은 당연했고, 함께 침묵에 들어간 의회 앞에도 마찬가지로 불길이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껏 휘둘린 의회 안의 의원들은, 사실상 히어로들이 개판을 쳐 놓은 걸 자기들더러 수습해 달라 하는 게 어이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휘둘림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자신들이 대신 고기방패가 될 수도 있다며 돌을 맞는 것을 걱정하기도 하였으나, 원래 정치인이라는 것은 자기들끼리도 돌을 던지고 싸우며 이권과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이었다. 다만 이번 움직임에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것은, 자신들이 한 발 나서자마자 히어로 측에서 마치 떡밥을 문 물고기를 보는 것마냥 행동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먼저 팽하려다 버려진 고급진 개새끼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
더스틴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아직 욱씬거리는 몸을 이끌고 광장으로 향했다. 간만의 외출에서 보이는 풍경은 영화보다도 영화같았다. 이 나라 이 도시에 살면서, 사이드킥을 맡으면서 드문드문 느낀 것이긴 하였으나, 자경단 일을 시작하고 나서의 작위성 짙은 영화같다, 와는 차원이 달랐다. 각본이라는 것이 없는 풍경이, 어느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의 집대성이 불꽃을 이루고 있었다.
그 불꽃에 타들어 가는 것은 맹렬한 분노일 터였다. 넘실거리는 불꽃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심지는 무엇으로 이루어 졌는가, 근본적으로는 의심이라는 도화선이 존재했었다.
히어로에 대한. 물론 그에게도 존재하고 있는 심지였다. 애초에 현재 히어로들에 대해 거센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기도 했다. 없는 게 낫다고 짓씹을 수도 있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상당히 두려운 상황이었다.
영웅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수 있는 상황. 저 자들이 부정 부패 그 자체가 된 것, 그것은 끌어내리면 모두 끝날 줄 알았는데, 과거의 피와 땀들이 현재로 이어진 참상과 구조활동에서도 사람들은 문득 의심의 한 꼬투리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과거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과거, 제 동료였던 이들의 명예, 모든 게 횃불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명예일지도.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걸 그저 해치운 것 만으로 칭송받았다. 그 칭송은 어떻게 보면 한 순간에 칭송의 대상을 힐난과 불만을 쏟아내고자 하는 대상으로 바꿀 수도 있는 기만의 그것이었다. 순수하게 응원한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으나, 신상이 공개되던 날의 살아있는 지옥을 생각하면. 자조 섞은 웃음이 비죽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지키고 싶다. 자신과 함께한 이들은 자신의 영웅이었다. 일반 시민으로서, 누군가의 아들이 되던 자로서, 제자 된 자로서, 그리고 사이드킥으로서. 그 사람들은 언제나 순수하게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고, 적어도 그가 본 바로는 그랬는데, 저의가 의심 받는다면 슬픔에 잠기는 것 밖에 못 하지 않겠나.
그는 지금 희생자들의 묘 앞에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포함되었을. 유가족들의 흐느낌이 공기 중에 아련히 울리는 곳에 잿더미는 조용히 뒤섞였다. 오늘은 슬픔에 푹 잠기는 나날인가 보다.
절뚝거리는 남자를 본 다른 유가족들은 그가 생존자임을 알았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헌화를 위해 온 것을 알고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을 가진 이들은 그 복잡함을 풀어내기 위해 체력을 쏟은 나머지 마찰을 일으킬 체력도 없었는지-적어도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남아 돌았지만- 고요 속에서 어떤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묵념의 시간이었다.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다. 결국 영웅들이 이렇게 무력하다는 증거. 그리고 자신은 또 다른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은 누군가를 살려냈다는. 붉은 머리의 남자의 머리카락에 눈송이 하나가 내려 앉았다. 차갑고도 다정한, 짓궂은 현실이었다.
-
그는 걸을 수 있게 된 이후로 꾸준히 묵념하기 위해 찾아갔다. 어느 날에는 오랜만에 얼굴을 아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저기, 경찰 그…”
“아! 저는 스탠리라고 합ㄴ, 오, 그때 그 분이시군요?”
어떻게 기억을 다 하고 있지. 샛노란 눈 대신 그 위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자 스탠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런 인생사 대사건을 함께 한 사람을 어떻게 쉽게 잊습니까? 라고 말했다. 이 사람 농담 한 번 잘 하네. 하지만 경찰의 입장에서 올 해 일어난 이런 일들은 한 세대에 한 번 겪기조차 힘든 일인 것은 맞았다. 히어로들이 전부 진압을 해 왔으니까.
“참 사람들이 매정하긴 해요, 그렇죠? 은퇴한 영웅들이 기껏 왔는데… 또 권력 잡으려고 한다고 뭐라 하고 있고 말이죠.”
“아니 뭐, 총회나 의회나 다 침묵하고 있으니까.”
“직접 제압을 해 보는 우리는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걸 지금까지 무상으로 하다가 지금 와서야 돈 받고 하는 건데… 일이 이렇게 된 건 참 그렇지만.”
“…”
“…그래도 저어어번 달부터 지금까지 계속 조용한 건 그건 좀 아니죠. 경찰들한테 덤터기를 씌우려고 하질 않나. 이거는…”
“태업이죠, 태업.”
“그렇죠! 어휴.”
“히어로 본연의 일을 잘 한 것도 아니고.”
“그렇죠 그렇죠.”
“…지금 쏠려야 할 화살이 다른 데 쏠리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니고.”
한숨이 찬 공기에 훅.
“그래서 여긴 왜 오셨습니까, 경찰 일은요?”
“아, 뭐… 동료들이랑 같이, 예.”
돌아서면 정복을 차려 입은 경찰들이 보인다.
“우리도 의심받고 있거든요. 체면치레라고. 그래도 할 건 해야죠. 돌아가신 분들을 지켜주지 못한 건 미안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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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점으로 그와, 경찰들과, 그리고 그가 설득한 다른 영웅들의 묵념이 계속되었다. 언론은 과열되는 열기 속의 잔잔한 행위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시민들은 서서히 이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당신의 친구와 이웃의 죽음이었다. 시민들은 횃불 대신 침묵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물고 뜯기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사안이며,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침묵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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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는 침묵의 순간에 마저 조용한 총회를 보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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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정치인은 곧 나라의 흐름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좌시하다 못해 끌려갔다는 건 중대한 죄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진해서라도 책임을 물 수밖에 없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유감을 전하고, 복구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침묵 속의 분노가 스멀거리며 기어올라오자, 그들은 끝내 모든 일이 해결되면 자진 사퇴를 약속하기까지 하였다. 그것이 지켜질 지는 의문이었으나,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겠다고 한 일은 추진하고는 있었다.
이제 입을 다문 곳은 단 하나였다.
- 레드스틸 사의 특별한 고객님
“…테드, 아니.”
붉은 머리의 남자는 한창 재활 훈련을 한 이후 병실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다. 막 쓰다간 평생 다리를 못 쓸 수도 있다. 막 쓸 요량으로 이러고 있는 셈이었고, 못 써먹게 된다면 의족이라도 달아 더 움직이게 할 자가 이 자였다. 누군가는 지독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당장 그의 가족이었던 사람이나 스승이었던 사람도 이런 말을 하자 마자 한숨부터 내뱉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스승 겸 의료보조장비업체 오너인 사람도 만만치 않게 독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게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한 다리 쪽 장비인데, 그 모양이, 그러니까…
“아저씨 포탈 해봤구나?”
“어허, 이 밑부분은 그냥 장비 거치대라니까.”
아무리 봐도, 이제 포탈건만 들고 감자만 끼워 놓으면 딱 그가 아는 어느 게임 주인공의 차림새일 것 같았다.
“저 가방 안에는 주황색 점프 슈트라도 있어요?”
“허 참내.”
레드우드의 얼척이 포탈 너머로 사라졌는지 기어이 제자라고 생각하던 녀석의 볼을 꼬집어 버렸다. 아야! 가벼운 엄살 섞인 반응에도 요녀석이, 하면서 한동안 놓지를 않았다. 아 그만 해요! 마지막 마무리는 가볍게 다치지 않은 곳을 찰싹, 하고 치는 것이겠다.
“오늘은 사이즈 테스트란 말일세, 이 꼬마친구야.”
“아으… 알았어요.”
그가 통원 치료도 괜찮은 상태지만 여지껏 병원에 남은 이유는 아직 내장 쪽에 대한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발의 충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남았는지, 지금은 회복이 되었는지,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정신적 충격은 또 어떤지에 대해 꼼꼼히 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그의 다리는 걸을 정도는 진작에 되었다. 그 김에 재활 치료라는 명목 하의 현재 자신의 몸 상태 체크 및, 그냥 자유 시간을 보내는 수준이었고.
때문에 그의 병실은 암울한 기운이 좀체 자리를 잡지를 못했다. 그의 몸상태는 위급한 상태는 고사하고 금식도 풀린 상황이었으니까. 부러지거나 금이 가기 쉬운 뼈들도, 그가 오랫동안 기절해 있던 탓에, 깨어날 쯤에는 얌전히 칼슘의 힘으로 회복하고 있기도 했다. 애초에 많이 다치던 만큼 단단해진 몸뚱이이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인간 강화냐고 한다던가 나는 27강이다라고 하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보조 장치의 사이즈는 조금 조정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조정도 하고, 그 김에 1차 수정한 걸로 다시 가져오기로 약속을 잡았다.
“…보호 장비를 아예 사지에 다 착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럼 덜 다칠텐데.”
“나머지 다리야 키 맞춘다 쳐도 양 팔은 뭐…”
“이렇게 한 번 험하게 다쳤으면 슬슬 경각심 좀 가지게나.”
팔에 새긴 이 스크래치 좀 보게.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하는 레드우드를 보고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하는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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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팔을 보았다. 상처가 덧나지만 않는다면 깔끔하게 아물, 그러나 상당히 흉흉하기도 한, 과연 레터링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의문스러운 상처들이 보였다. 과다 출혈까지 이어질 정도였다면 여기도 상당한 피해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별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그가 보호 장구를 거절한 것은 이번 뿐은 아니었다. 자신이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 걸 알린 적도 없는데 갑자기 제안했던 적도 있었고, 활동 도중에도 두세번은 권유한 사람이었다. 왜 거절했느냐고? 히어로들이 대외적 이미지에 큰 손상을 겪고 신뢰를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댈러쉬 무기 중개 회사 건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또 일으키기에는 영 마뜩찮았다. 지금이야 정말 필요하니까 하고 있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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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는 더스틴의 양어머니인 올리비아에게 연락했다. 이번에도 아들 녀석의 고집이 이겼다는 소식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귀에 전해졌다. 올리비아는 이 고집스러운 파랑새 아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무엇을 조심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만큼 옅게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대신에 오늘도 병실에 가서 꾹 안아버릴 예정이었다.
- 고요한 밤, 어둠 속을 밝히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 보통이었다면 2주가 남았더라도 캐롤을 틀어서 나쁜 것도 없다면서 어딘가의 가게에서부터 하나씩 캐롤이 들려왔어야 했다. 일찌감치 설렘에 의해 온갖 치장을 다 하고 사람들을 환영하며 그 사이로 징글벨이 울려 퍼지든 창 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이런 노래가 울려 퍼지든 했어야 했다.
이 고요한 침묵은 이데아의 시민들이 가진 갈 곳 잃은 분노를 진정시켰으나, 역설적으로 사회 분위기들이 침묵을 조금 강요하는 형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1면에 실리지 않았으니 3면에 꾸준히 보이는, 상가 지구에서 있었던 해프닝이 경찰을 불러 일이 커져 버린 게 그 예이다. 상가 지구야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을 차용해 각자의 상품들을 어필하고자 할 것이었고, 심지어 시기상 크리스마스가 겹치니 붕 뜨는 캐롤을 틀고자 한 곳도 많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한 차례의 시끄러운 소란이 발생한 후, 비록 20일 정도였지만, 크리스마스를 아주 눈 앞에 둔 시점부터였지만, 늦게나마 이데아의 거리 곳곳에서는 조금씩 캐롤이 들리기 시작했다. 침묵 속의 날 선 이빨들과 추모를 빙자한 헐뜯기가 눈에 덮여 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늦은 크리스마스 주간의 흥겨움이 느린 템포로 억제된 캐롤들 사이로, 시민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남겨진 자들을 위해 이루어 진 것들, 이를 테면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복구 사업을 발표한 것들, 이를 제외하면 길고 긴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입을 닫은 곳은 입을 열 타이밍을 놓친 것 마냥 입장을 준비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고, 남은 자들을 보듬는 사람은 결국 남은 자들 끼리였다. 8월, 여름부터 계속 이어진 정신적 소모와 피로는 켜켜이 쌓여 때로는 거대한 분노의 불길로, 때로는 절망감으로 표현되었다. 그 사람들을 대변해 줄 사람들은 많았을지언정 시민들 사이에서 그 사람들을 깊이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 잠깐씩 기자들과 시민 단체가 도움을 줬을 뿐이다. 또는 경찰들의 위로, 그런 것들. 그들에게 있어서 잔잔히 들리는 캐롤은 잠깐동안의 안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몇 달 동안 이어진 시위를 자세히 보지는 못해 이 것이 처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캐롤이 음원 차트에 얼굴을 내비치자 마자 시위대 쪽의 간이 무대에서 조촐한 밴드의 공연이 하나 둘씩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무대는 보통 시민들이 각자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쓰이는 일종의 강단 같은 곳이었다. 그 공간이 크리스마스 랍시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결과, 마이크 시설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올라온 밴드들이 속속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밴드들 중 제법 회심의 준비를 한 것 같은 이들은, 구성원이 전부 유가족들이기도 했다. 하늘에 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노래를 바친다는 헌사를 시작으로 시위대는 오늘도 희로애락이 가득한 음악들 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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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크리스마스, 10시 반을 지나는 어느 겨울날의 밤, 날이 날이라고 유독 흥겨운 캐롤들이 많이 연주되고 불러진 날, 어딘가에서는 성가대가 왔다 갔더라 하는 웅성거림도 들려오는 밤이었다. 감정이 고조되는 만큼 이곳 저곳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고성방가가 밤공기의 차가움을 달궈 놓는 중이기도 하였다. 트리가 들어서고 온갖 장식으로 반짝거리는 시내, 그 곳의 빈 무대에 새로운 이가 등장했다. 10시 31분의 침묵이 지나간 자리에.
후드를 쓰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바로 마이크를 잡은 자신만만해 보이는 누군가. 누군가는 제법 유쾌한 성격을 가졌는지 마이크 테스트를 휘파람으로 하는가 하면, 급한 성격을 가졌는지 대중들이 몰려옴과 거의 동시에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는 캐롤을 준비하지 않았다. 기타 소리와 함께 연주는 시작되었다.
I believe, I believe, we can write a story.
I believe, I believe, we can be an army!
We are the broken ones, who chose to spark a flame.
Watch as our fire rages, our hearts are never tame.
‘Cause we are born for this, we are born for this.
더 이상 누군가의 이야기에 휘둘릴 필요 없이, 각자의 이야기속의 영웅이 될 수 있겠지.
누군가가 만든 균열에 우리는 전부 부숴졌기에, 불씨를 일으키는 걸 선택했어.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아,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들불을 마주해, 들불을!
Look me in my eyes, tell me everything’s not fine.
Beg me for mercy, admit you were toxic.
Won’t accept your silence, beg me for forgive me.
What’s your alibi?
What you gonna do, when there’s blood in the water?
뒤돌아섰다, 그 방향에 당신네들이 있으니까. 모든 게 나쁘다고 이제 슬슬 말할 때가 됐잖아?
이제 슬슬 내가 알고 있는 한의 모든 악행을 좀 털어놔야 하지 않아?
차라리 침묵할 시간에 용서를 구하는 게 더 나았을텐데, 오, 아직도 침묵중인 건 대체 무엇일까.
그래서, 너희의 알리바이는 뭐야? 저 물이 피로 가득 찼을 때 너희는 대체 뭘 했어?
So I can’t slow it down, No, I can’t slow it down.
I’m never gonna follow, just because they say so.
So I’m never giving up, never gonna crack,
Never giving in, never going back.
늦출 수 없었지, 이미 상황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따를 수 없었지, 너희가 하고자 하는 말과 행동이 그렇다면야.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도 없고, 나가 떨어질 생각도 없어.
굴복할 생각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생각도 없어.
Tell me when you kicked me did you ever think that I would get up?
Can you hear me now so loudly? I'm screaming at the top of my lungs
Can you hear me now up above the crowd, Singing-
Can you hear me, can you hear me now?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을지, 언제부터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는지 알아?
이제 들려? 수많은 사람들의 위에서 난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 사람들을 등에 업고-
오직 내 언어로만, 내 의견만 말이야. 이제 들려? 들리냐고 묻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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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가 될 무렵, 핸드폰 화면으로 가지각색의 전광판을 만들어 흔드는 모양이 야밤에 은하수를 만드는 것 같이 보이는 시내에서, 어느 누군가가 11시가 되어 간다고 소식을 전했다. 아무리 이렇게 느슨한 분위기라 할 지라도, 제2차 수용소 폭발 사건이 일어난 11월 19일을 기억하고자 암묵적으로 1분간의 침묵을 만들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관객을 보는 것보다 뒤 돌아 총회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일이 훨씬 더 많은 누군가는 이제 막 다시 관객에게로 앞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새 후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머리카락이 크리스마스에 썩 어울리는 모습이었고, 그 누군가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19분을 나직하게 이야기하였다. 오늘의 침묵은 정각이 아니라, 날짜에 그대로 맞춰서 하자고.
거의 쉬지 않고 연속으로 내지른 탓인지 누군가는 겨울임에도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쉬고 있었다. 입에서 쉬지 않고 하얀 입김이 쉭쉭 뿜어져 나오는 게 폭주기관차냐며 장난 섞인 말이 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마이크를 잡고 있었음에도 마치 미쳐 날뛰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실제로도 오랜만에 내달린다는 기분으로 체력을 쏟아 붓고 있기도 했다. 이러다 몸에서도 김 나는 거 아냐?
물로 목을 축인 누군가는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는다. 무대 위에 의자, 여전히 존재하지만 높이를 조절한 마이크, 의자 위에 덜컹거리며 같이 등장한 통기타. 관객들은 일시에 환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건 조금 부담스러운데.
-
“그러니까 이 시국에?”
“뭐 어때요, 크리스마스도 겹쳤겠다.”
추모로 인해 모든 게 슬픔과 비탄으로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더스틴은 농담같지 않은 말을 건넸다. 누군가는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터였고, 누군가는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는데 말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이런 답답한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어 했는지 몰라도 공간 대여는 알아봤냐고 대뜸 물어보고 있었다.
“아저씨… 어지간히 놀고 싶었구나.”
“이봐, 이래봬도 무기상이라고. 이렇게 쳐진 환경은 일단 내 환경에 맞지도 않아. 환기가 되면 나야 좋지.”
“아 예, 그래서 다음 록 페스티벌 표 좀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셨나 보죠 뭐.”
“뭐, 내 노래 취향에 불만 있냐? 지도 좋아하면서.”
나 키보드 두드리면서 노래 부를까봐. 아니지, 역시 기타가 최고지. 하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남은 두 베테랑 중 한 명은 침착하게 보조 기구를 매만지러 떠났다. 저런 일을 하거나 말거나, 제 제자라는 녀석은 일단 아직 보조 기구를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무대 위던 어디던 내 놓자니 기껏 겨우 걸을 수 있게 된 다리가 어떻게 또 망가지거나 할 지 모르니까. 그리고 남은 한 명은, 기어이 아들래미의 등판을 다시금 한 대 때린 후에야 소규모 밴드에 대한 참여 의사를 밝혔더랬다.
“…마지막 곡은 그래도 조금 차분하게 가고 싶어요.”
“통기타가 어울릴 만한 곡 말하는 거니?”
“으흠, 그렇죠. 이를테면-“
-
Toast to the ones here today, toast to the ones that we lost on the way,
‘Cause the drinks bring back all the memories, and the memories bring back you.
Everybody hurts sometimes, everybody hurts someday.
But everything gon’be alright, go and raise a glass, say…
1절이 끝나갈 무렵 하나 둘 씩 소등되는 불빛들. 하나 둘 씩 침묵을 지키기 시작하는 사람들. 멈추는 기타 소리. 무대 위의 조명은 그 누구도 비추지 않음으로써 11시 19분을 알렸다. 기나긴 1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곱씹고 죽어간 사람들의 고통을 슬퍼하며, 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며,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며.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고 싶다고 침묵이 끝나갈 무렵에 조용히 속삭이며.
…Here’s to the ones that we got, cheers to the wish you were here, but you’re not.
기타소리가 뒤늦게 관객들의 합창을 쫓아간다. 스포트라이트는 관객들을 비추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 예측과 불가능
이걸 뭐라고 하더라, 전야제는 아니고 후야제? 한 시간을 태워 버린 성대에 물을 쏟아 넣으며 그는 끝나버린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보았다. 12월 26일 새벽 0시 14분, 이 시간이면 원래 항상 활동하던 때인데. 지금의 그는 거리 구석의 벤치에 앉아 조금 늘어져 있었다. 늘어짐, 어쩌면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시민들이 다시금 팽팽해 진다면야.
-
이런 침묵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혹은 영웅 회의론이 슬며시 가라앉고 화살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비껴가 히어로 총회로 향하고 있음을 확인했는지, 조금의 장작 하나와 불씨 하나를 더 보탤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이번 크리스마스에 일으킨 바로 그것인 셈이었다.
어쩌면 나도 내 사람들을 지키려고 움직이고 있는 건가. 그가 생각하는 영웅은 대단히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이었는지 이런 생각 자체가 그를 조금은 떨게 만들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그 고민에 끝없이 생각의 흐름을 맡기거나, 쓸 데 없는 고민이라고 넘겨 버리거나, 자신의 사람들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사람들만 지키는 것의 차이를 인지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시금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동전과도 같은 명예와, 그 뒷면에 있는 비난이, 마치 옭아맨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조금 더 머물기로 하였다.
본질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영웅은 그가 지금 행동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영웅과도 같았다. 자경, 그리고 보수를 바라지 않는. 그러나 자연스럽게 명예가 실리면서, 그것이 곧 권력화가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안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명예가 한순간에 비난과 팝콘의 먹잇감이 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던 그로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표면적으로만 가치를 지닌 셈이었다. 이용할 수 있을 때만 이용하고 스러지던 말던 관심도 없는, 그런 것.
하지만 내 사람들의 명예는 지켜주고 싶은걸. 그건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그가 가지는 존경심이었고 자신의 우상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고난 속의 횃불이었던 사람들의 명예는 그렇게 손상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순 어린아이가 장난감 가지고 떼쓰는 모양 마냥 비슷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장난감이야? 아니, 내가 사람들을 좀 지키겠다는 게 뭐가 어때서.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대우까진 몰라도 슬금슬금 올라오는 싸잡는 형태의 비난을 보면 기가 차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렇게 기회가 온 참에, 화살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자 그는 일을 벌이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기야 했다.
“예를 들면 지금 분위기 자체를 그다지 좋게 안 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죠. 댈러쉬 아저씨가 그렇듯이. 그리고 또, 생각해 봅시다. 그 누가 크리스마스 근처까지 캐롤을 안 틀려고 할까요?”
“하긴 기껏 복구 사업이 실시되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당길 수 있을 때 당겨야 하는 게 상인들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솔직히… 시민들도 많이 지쳤을 거에요. 일들이 연달아 터지니까 붙잡고 있는 거지. 정말 아니라고 생각이 확실히 드니까, 라고 해도 그들의 생업이 먼저니까요.”
“어, 그러면 크리스마스때 분위기가 확 풀려버리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아이언애로우에게 1점. 정답이야.”
“게다가 그 다음주부터는 새해를 준비하게 되겠군. 한 번 풀린 분위기가 연말까지 이어지면 확실히… 위험한 기간이겠어. 묻히진 않더라도.”
“어쩌면 이렇게 힘을 너무 많이 썼으니 되려 더 빨리 무관심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구요.”
“와 맞네, 크리스마스때 풀어지면 이제 신년 인사에 뭐에 해서… 언론사도 조명을 다른 곳에 비출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번에 장작을 하나 넣어 두는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신더!”
어느새 길거리 노점에서 음료를 사 온 제 동기였다. 아이언애로우는 따뜻한 술이라며 벌꿀 냄새가 가득한 큰 종이컵을 건네고 있었다. 벤치에 늘어져 있던 그는 그대로 컵을 받아 든 뒤, 제 옆자리를 눈짓했다. 뭐 해? 앉지.
“으어, 노래 죽여주네.”
“말도 마. 지금 목 나가서 진짜 죽겠어.”
“그래도 잘 부르던데?”
“내가 아무리 여기가 튼튼하다고 해도 가수가 아니야 인마.”
즉슨 그는 순도 높은 철광석이지 연마된 강철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 것 치고는 잔기침도 가라앉아 멀쩡히 말을 하고 있긴 했다. 쭈우욱, 컵 속의 내용물을 원샷으로 들이키는 폼이 딱 바에서의 알코올 무적 술꾼이었다.
“그래서 너가 봤을 때 시민들은 어땠냐.”
“약간… 그거지? 이제, 성탄절이 마냥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죽어간 사람들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그런 분위기가 됐다고 해야 하나.”
“뭐야, 이스터 에그라도 좀 준비해야 했나?”
“부활절이냐고? 그러게. 아무튼 피로도 풀고 경각심도 조금은 세웠다, 이런 느낌?”
“그러면 됐어.”
컵 끝을 우물거리던 그는 슬슬 풀어진 몸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이 분위기 속에서 차가운 공기에 몸을 다시 식혀야 했다. 그게 그의 일이었고, 저 총회 꼭대기에 선 사람이 제 발로 물러나든 끌려가든 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일이니까. 아니, 어쩌면 그 뒤에도 쭉.
“어디 가게?”
“따라 와. 콜슨 양반네가 접선 시도 해 보겠단다.”
“그 아저씨가? 웬 일로 협조적이래…”
“대체 10월 말 11월 초에 그 양반이 뭘 했길래.”
“아니 뭐 그냥 혼란스러워 하던데, 어디 껴야 하지 싶어하는 것 같았어.”
“…그 아저씨 이제 진짜 저쪽에서는 버림패 된 것 같은데.”
“씁, 그치.”
“솔직히 우리 입장도 슬슬 어렵긴 해. 그 아저씨… 의 신뢰도 얻어야 하긴 할 거야. 나중에 감옥에서 우리가 억류하고 있었다고 하면, 뭐, 그거 불법이니까.”
“복잡해지네.”
“그렇게 선택을 했으니 마땅한 응보가 슬쩍 찾아오고 있는 거지.”
“생각은 해 놨어? 어떻게 할 지?”
“…아직 이렇다 할 답은 안 나오고 있어.”
그도 그럴 것이, 콜슨을 억류한 이유는 다름 아닌 전직 히어로들에게 누가 될 일이 생길까봐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가 감옥에 간다면 불씨가 어디로 튈지는, 그리고 시나리오 상의 악역이 누가 될 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돈에 유혹당해 합류를 대기하던 다른 변절자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 지 모르는 일이었고, 현재의 히어로들은 점점 입지를 굳혀가며 이 곳을 의도적으로 난장판으로 만들 셈이었겠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존재 자체로 위험한 그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뾰족한 수단을 찾아야 했다. 물론, 우선 해야 할 일은, 그가 억류된 곳에 먼저 들르고.
- DISHONORED-1
- 도노반 콜슨, 이제는 묶어 둘 필요조차 없어진 배신자. 억류된 이는 자신의 핸드폰을 매만지면서 도착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탁에 모인 건 이 건물의 주인과 그, 그리고 와야 할 사람은 그를 억류한 사람. 언젠가의 동료들은 이렇게 다시 모여 앉았으나, 그가 처음 억류되었을 때 처럼의 흉흉한 공기가 다시금 감돌기 시작했다.
“다들 오란 대로 잘 왔어. 이제부터 좀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는데.”
붉은 머리의 남자가 레드스틸 사 지하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곧바로 본론을 진행하려 하였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입장에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그만큼 자신이 가진 패와 이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불러 모은 만큼, 모인 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레드우드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일찍부터 그의 포박을 풀어 둔 채 감시를 느슨히 하고 있었고-물론 타겟을 지정하는 그의 능력으로는 커버가 되는 편이지만- 왁왁거리는 성정이라고 보이는 신더 또한 그가 보기에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았다. 이건 그가 압박하는 자리가 될 지, 어떻게 흘러갈 지 본인조차 모르는 수렁이었다.
“…우선, 11월달에 일어난 대형 사고 때 날 그냥 거기에 섞여 내보내 버리는 판단을 안 한 이유에 대해 듣고 싶은데.”
서두를 연 것은 콜슨이었다. 그 당시, 거의 당연하게도 그는 누군가에게 기습당해서 그대로 끌려갈 가능성을 재고 있었기에, 예상되는 답안이 있었지만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한 대답은 레드우드의 입에서 나올 줄 알았던 그는 나이 어린 자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고 약간의 의아함이 들었다. 이 어린 녀석은 그 때 자리에 있기는커녕 납치당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도 골 때린다는 표정으로.
“알잖아요, 여기에 그냥 잡아 놓은 게 권리가 있어서 잡아 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가서 입이라도 나불거리면 어떻게 될 지는 알고 있었겠네.”
“새삼 당연한 걸.”
신더가 입을 연 이유는 이런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억류했던 시점부터, 아주 잘. 그를 여기에 꽁꽁 싸매 집어 쳐 넣는 선택을 했을 때부터 고려한 문제점이기 때문에, 그리고 주도한 이였기 때문에. 물론 입을 열려다 만 레드우드에게 눈짓과 목례로 먼저 선수 쳐서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내기는 했다. 레드우드는 이에 됐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며, 아까보다 미묘하게 심드렁한 태도로 콜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론을 바로 꺼낼 줄 알았더니 서론부터 시작하는 거냐고 보채는 눈빛이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여기에 합법적으로 체류시키는 게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건 왜 안 썼는지 궁금하네.”
“뭐, 자네 혹시 내가 자네한테 의료용 보조 기구라도 달아줬음 하길 바랬나?”
그렇다, 대외적 명목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특히 보조 기구를 만들기 위해 회사 내에 따로 마련한 시설에서 머물게끔 조치했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기도 했으니까. 보기에는 이렇게 안전한 길이 없을 터였다, 보기에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 여지껏 냅둔 건 또 뭐고. 난 당신네들한테 제일 위협적인 포지션의 인물이야.”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강제적으로 하면 그만큼 덜미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그 강제성을 몇 달 동안 여기 감금하는 데에 투자했으면서도?”
그 만에 하나에 신중을 둔 이유는 그의 친구인 댈러쉬의 건 때문도 있었다. 범죄자를 억지로 가둬 놓은 장소가, 그것도 장기적으로 가둬 놓은 장소가 어떤 기업의 지하라면, 필연적으로 댈러쉬의 회사가 미친듯이 공격받았던 때 처럼 이번에도 공격받을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그게 전 히어로의 기업이라면. 이것이 꼬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 히어로들끼리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감금은 되는데 그에게 기구를 만든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필연적으로 기록에 남기 쉽기 때문이다. 이 곳을 수색한다면 당장 저 사람을 내보내고 흔적을 지우면 될 일이지만, 제작을 한다면 꼬이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두 명이 서로 합의를 보든, 안 보든간에. 그것도 제작 도중이어야만 묶어둘 수 있는 것이고. 한정적인 수단에 쓸 데 없이 흔적을 남기기엔 차라리 기다리며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게 낫지, 하고 방치한 게 지금인 것은 낭패이긴 했다만.
이런 저런 길과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대답에 버퍼링이 생긴 레드우드 대신 신더가 입을 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왜 이렇게 행동하게 됐는가에 대해 다른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눈 앞의 배신자 그 자체였다.
“나는 아저씨 생각이 제일 궁금한데.”
콜슨은 잠깐의 당황을 얼굴에서 금방 지워냈다. 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눈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드우드의 눈썹 하나가 찡끗 올라가며 그 뜻을 대략적으로나마 눈치챘을 무렵에, 살얼음을 내뱉던 침묵이 깨어졌다.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이 녀석아.”
“전에도 합 맞춰서 디버프 넣으시고 내가 싸우고, 뭐 그랬잖아요? 저쪽 입장에서는 헷갈릴 일이고, 우리도 헷갈릴 일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저씨가 제일 헷갈리는 상황 아니에요?”
이로써 낭패를 본 것은 콜슨도 추가되었다. 이 쪽의 두 명은 그만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거미줄을 쳐 놓은 옛 동료를 상대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만큼 어디에 무슨 거미줄이 있고 어떤 방식으로 뒤흔들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바꿔 말하자면, 저쪽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신더는 콜슨의 답이 늦는 것을 확인하더니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두 어른의 생각이었다.
“아니, 까놓고 말하자면 저쪽도 말이야, 아저씨가 저쪽이랑 완전히 절연하고 우리랑 놀다가 나중에 뭐 하나 터뜨릴까 봐 쉽게 뭘 못 한 상태지. 아저씨는 지금 의도치 않게 이중 첩자 같은 짓을 한 거라고요.”
“…내가 저쪽이랑 접촉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있고?”
“일단 근거 하나를 들자면 이번 사건 때 심각하게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 시민 구조에 힘쓴 것.”
“또 저번 8월달에 여기 한 번 급습이 있었잖아요? 근데 그 이후에 여기쪽 정보가 샌 기미가 없다는 것.”
“그 자들이 버티고 있을 지는 어떻게 알고.”
“애초에 내가 아저씨를 끌고 나온 것도 있지만 그 때도 합 맞춰 싸웠잖아요? 터뜨리기 좋은 타이밍은 여러 번 있었어요. 경찰들한테 덤터기 씌우기 좋은 타이밍도 있었잖아. 한 순간에 이슈화 시키기에는 충분했는데, 아니면 화살이라도 잠깐 돌리기에 말이죠. 그런데-”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는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분명 그 때 나온 뉴스를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이슈는 이 쪽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보통 언론사를 활용한다면 최대한 자극적으로 기사를 쓰고, 물량 공세를 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레드스틸 사에 대한 기사가 났어야 정상일 텐데. 심지어 다른 이슈에 묻혀서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레드스틸 사에 대해 후속적 조치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래, 정보가 빼돌려 졌다면 일어났어야 하는 일들이-
“없었지.”
“없었죠. 여기쪽 소식이라고는 한 개도 없었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콜슨은 끝내 패배를 선언하듯이 이야기했다. 정답이다. 얻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제대로 된 맥락을 모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쪽과의 연결이 영 맛이 간 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불안해했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행보를 반복해 온 것이다. 그 결과 럭비공은 터치 다운 상태가 됐다, 저 두 사람에게.
“응? 아니 잠깐 그걸 아저씨가 하면 어떡해? 아저씨가 불러 모은 거에요 지금?”
“일단 반박에 대한 결론은, 자네의 입장 자체가 저쪽에도 상당히 애매해서 그렇게 됐다네. 사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우리가 더 묻고 싶어.”
…그리고 두 사람의 어처구니도 함께 터치 다운이 된 모양이다.
“…그래, 그래. 말한 대로 나도 꽤 애매한 위치야. 너희를 도운 것도 사실이고. 이미 어느 정도 버림패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 이렇게 불러 모은 이유는 또 뭐구요?”
“많이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어제 자에 온 이 연락으로 한 번 더 혼란스러워졌어.”
이제부터 정말 본론이었다. 탁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상체를 당겨 앉고는 그들이 오늘 봐야 하는 것을 보았다. 이 허무한 배신자의, 비밀번호 말고, 바탕화면도 말고, 문자 메시지의 어딘가에, 핸드폰 주인이 조심스럽게 꺼낸 텍스트.
“…28일 총회 뒷문에서 보자는 건 또 뭐야.”
“그러게나 말이다. 이미 다 끝났거든? 여기서 뭐가 더 나온다고 한들 뒤집는 게 어려운 건 본인이 제일 잘 알텐데 대체 날 뒤늦게 만나서 뭘 하려는지 참 궁금해서.”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
분명 요구 사항이 있을 터였다. 이건 정보였고, 여차 하면 대화를 엿듣고 새로운 작전이라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니까. 한편으로는 정말 그 의중이 궁금하기도 하다, 이 배신자의 속은 당연히 포함해서 현재 히어로들의 수장 되는 사람의 속까지. 때문에 그 알고자 하는 것 중 하나인 이 사람의 속을 캐내는 것이다.
“…어차피 돈이 부족해서 굴러들어 온 사람이 나야. 신념 싸움과는 영 엮이기 싫다고.”
“참나, 잠깐만. 이건 뭐 강매도 아니고.”
“…계속 해 보게.”
그리고 붉은 머리의 남자는 한 번 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상체를 도로 젖혔고, 레드우드는 숨겨진 속내가 더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 자세를 고집하고 있었다. 제 제자에게 눈치를 줘 도로 돌아오게 하는 건 덤이다. 어떻게 보던 간에 더 들어봐야 아는 거니까.
“그래, 요구사항 없이 일단 들이밀어서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상상하는 것처럼 어디 망명하게 해달라느니 그건 아니야.”
아니야? 망명으로 거의 예상하다시피 한 두 사람의 눈에 의문과 이채가 서렸다. 예상을 뛰어넘으니 그만큼 걱정과 기대와 이유 모를 흥미와 짜증이 한껏 두 사람을 노크하고 있었다. 이 대화의 주도권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제 그들조차 몰랐다.
“저쪽의 그 자식이 다시금 일어서면 일단 나도 엿되는 건 확정이잖아.”
“…잡아 달라? 그러면 그 다음에는요?”
“내가 감옥에 가서 입을 털면, 너희가 억류한 건보다도 저쪽이 훨씬 더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어. 만약에 저쪽이 몰락하면.”
“…오, 순순히 잡히시게?”
영 못 믿는 눈치의 신더의 발등이 살며시 가볍게 눌린다. 이 아저씨가, 사기 당하면 어쩌려고. 형형한 눈초리에 맞서는 노익장의 깊은 얼굴이 그를 마주한다. 여기도 달리 대책이라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입금된 돈도 못 써먹겠고… 솔직히 안 잡히는 게 제일 좋지만 너희 입장이나 내 입장이나 그 놈 못 나오게 작은 쐐기라도 하나 더 박는 게 낫잖아.”
적어도 이 말은 모두가 동의했는지 작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 아니었다. 일개라고 하기엔 뭣한 어느 회사 오너와, 정말 일개 자경단. 그 뿐이었다. 공익을 위해 움직일 뿐 공권력은 없었다.
“당장은 손은 못 쓰지, 우리는 경찰이 아니라네. 국가 공인이라고는 영업 허가 이런 것 외엔 없어.”
“알아.”
그리하여 그들이 하는 행동은 거미를 노리는 게 아니라 거미줄을 불살라 스스로 내려오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그걸 문득 문득 본 콜슨은 알고 있는 바였다. 다만 그걸 최대한 행하라고, 초라한 배신자가 짓는 표정 치고는 굳건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레드우드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신더는 아무래도 하나 더 묻고 싶은 것이 존재했다.
“보석금 요구하는 건 아니죠?”
“그거 알아? 내가 이런 저런 말 다 해도 결국 난 미수야. 진짜로 일 벌리고 탈옥까지 한 녀석들과는 형량 차이가 클 수밖에 없어. 보석금이야, 그 받은 선입금 같은 걸로다가 내던가 할련다.”
그 공로는 신더의 것이었다. 미수로 돌아간,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의 죄질을 의도치 않게 가볍게 만들고 시민들도 구해버린. 골 때린다는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자 표정 관리는 때려 쳤냐는 핀잔이 바로 꽂혔다. 그래도 그렇게 했어야지 사람들이 사는 걸. 후회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서야 이야기는 계속 해서 흘러갔다. 레드우드는, 속으로 생각하길 법정이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을텐데, 하며 눈 앞의 배신자를 보고 있기야 했다. 무운은 빌어주지 않기로 하며.
“…그래서, 결국엔 말이지. 이제 입장이 좀 정리된 셈이기도 하지만, 일단 저쪽이랑은 절연이고. 아까 이야기 한 접선은 최후통첩에 가까울 거라고.”
“순순히 믿지는 못 하겠지만요.”
“...배신의 대가냐.”
“뭘 새삼 당연한 말씀을. 우직하게 그러셨으면 몰라 어떨 땐 순하게 계시고 어떨 땐 뒤통수 칠 각만 재고 있으시고.”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배신의 대가란 그런 것이었다. 남의 신뢰도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어느 한 편에도 서지 못하는 것. 스스로 소속하고자 해도 그럴 수 없게 되는 것, 그게 말로였다. 그러나 이 쪽도 이렇다 할 패가 존재하지는 않았기에,
“…일단 28일에, 먼저 가시고. 타이밍은 몰라도 뒤따라 가는 걸로 할까 하는데.”
그렇게 극적으로 협상같지도 않은 신경전이 마무리되었다.
- DISHONORED-2
“끝났어?”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냐.”
“으으음, 나도 좀 정보 공유 좀 해 주라.”
“저 아저씨가 부른 게 나랑 테오 아저씨였다고.”
“아무튼, 연말연시를 보강할 중요 정보니까. 리슨 케어풀리 플리즈?”
-
12월 28일, 한 해가 끝나기까지 3일이 남은 어느 날의 밤. 바로 내일은 드디어 길고 긴 침묵이 깨지는 날이었다. 보도된 자료에 따르자면 기자 회견을 준비했다고 하였으니까 말이다. 히어로 총회가 입을 연다는 소식에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지 언론은 물론이고 의회도, 시민들도 수근거리는 와중에, 어딘가의 잿더미는 바람에 나부끼며 총회 인근의 건물 옥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언애로우는 망원경을 그에게 건네 주며 여기 저기를 둘러보고 있었고, 콜슨은 뒷문에서 시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히어로 총회는 그가 보기에 불명예로 가득 찬 건물이었다. 사치스럽고, 쓸 데 없이 호화롭고. 그것이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라면야 상관이 없겠으나, 의도된 시나리오대로 빌런들을 고용해 얻은 결과라면 그가 줄 수 있는 시선은 냉정함이 가득 담긴 샛노란 눈 뿐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누군가 내려오는 기색 없이, 즉 한 층 한 층의 불이 켜지는 기색 없이 그저 한밤의 고요를 증명할 뿐인 가운데,
“…잠깐, 저기!”
높은 층 언저리에서 누군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야 했나? 그 소리를 들은 순간에 신더는 바람을 있는 힘껏 끌어 모아, 낮은 옥상에서부터, 떨어지는 궤도로 뛰어 올랐다, 궤도 사이에 기어이 끼어 들었다. 그리고 기어이 낮은 층의 유리를 깨고 그 사람과 함께 내부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 하나를 전기 충격하는 힘의 거진 두 배는 가까이 소모된 힘은 붉은 머리의 남자를 급속도로 기절 직전까지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 방이 다름 아닌 자신의 형제가 구금당한 방이 아니었다면. 허영을 증명하듯 강화 유리도 아닌 게 우수수 깨어지면서, 한 순간에 난장판이 되는 방 안과.
“무슨, 잠깐, 더스틴?”
침입을 언제나 쇼킹하게 하는 제 형제였지만 이건 도를 넘지 않았나? 하는 생각보다는 유리 파편 속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되어 먼저 몸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그리고 데우스…?”
가끔 구금실에 찾아와 뺨이나 때리고 가던 사람이 여기는 또 왜 있는 거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아니, 일단, 그러니까,
“둘 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요, 제발! 무슨 일이에요?”
“…으. 다시는… 다시는 이렇게 무리 안 해.”
“더스틴? 데우스?”
생각해보니 에너지 소모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을 끌어안으면서 명치에 그대로 충격이 가해진 게 문제가 아닐까? 숨을 못 쉬고 있었잖아. 좋아, 갈비뼈가 안 나간 게 다행이군. 아니면 유리창에 피가 철철 안 흘린 게 다행인가? 어쩌면 둘 다 이미 개박살 나고 피도 흐르는데 내가 그냥 정신 차린 직후라서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어. 콜록! 기침 소리와 함께 점멸을 끝낸 시야를 바로 잡는다. 눈 앞에는,
“여어, 버나드.”
“일단 119 부를게? 그치?”
“진작 불러야지… 것보다 데우스라니.”
“아니, 너가 안고 온 사람.”
“…어?”
일단 유리 조각 중에 스친 상처는 크지 않았는지, 아니면 움직여도 된다고 판단했는지, 제 형제가 옮겨서 벽에 기대 놓은 상태를 그대로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고는 기어이 데우스의 상태를 보려고 하였다. 기절?
“아저씨 기절 안 했잖아. 아니 할 수도 없는 몸뚱이잖수 이 양반아. 이 인간 전기충격기가…”
“119 불렀어. 그래서 지금 무슨 상황이야?”
“이 아저씨가, 몇 층인지는 몰라도… 낙하산 없이 낙하했어. 갑자기.”
“…콜슨, 젠장.”
내가 깨어 있댔지. 아직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는지 신더는 그대로 주저앉아 데우스를 관찰했다. 이 아저씨는 내가 감싸서 스친 상처도 나보다 적고 말이야. 반면 버나드는 떨어졌다는 말에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속이 훨씬 더 혼란으로 가득 찬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야? 를 몇 번이고 남발하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도 결국에는 눈짓으로 뭐냐는 듯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이제 이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해. 근데 콜슨 아저씨 얘기를 꺼낸 걸 보면 솔직히 그 아저씨한테 뭐라도 덮어 씌울려고 한 것 같거든?”
“…예를 들어서 떨어진 상처 같은 걸 사실 그 분이 폭행한 걸로?”
“아마.”
“대체 왜-“
119의 사이렌이 들리기 시작하고, 몸에 별 이상이 없던 데우스는 기어이 다시금 낙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삶을 비관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니 비관할 처지이기도 했다, 뭐가 하여튼 많이 말아먹힌 한 해였으니까, 아무튼 의도는 의도고 낙하는 낙하였으며 그걸 막고자 하는 건 신더 그나 구금된 버나드나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거 놔!”
“이번에 떨어지면 이번에는 제가 밀었다고 하실 거잖아요? 폭력 행위에 대한 복수 같은 걸로.”
“잠깐, 이 아저씨 뭐도 했다고?”
“…나 구금시키고 뺨 때렸지?”
“아저씨 못 본 새 많이 추해졌구나?”
머리를 굴려서 최후에 나온 게 자기 목숨을 대가로 무죄 증명이라도 하는 거라니,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해 책임 질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 낮은 자세로 있던 붉은 머리의 그가 하체를 붙잡고, 그의 형제가 있는 힘껏 상체를 붙잡고 있는 와중에, 119 소속 인원들이 창 밖에 탈출용 쿠션을 까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결과, 누구도 죽지 않은 밤이 되었다.
물론 실려가기야 했지만. 구급차 안에는 버나드와, 콜슨, 먼저 119를 부른 것으로 보이는 아이언애로우가 각각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고, 데우스가 무슨 짓도 못 하게 하기 위해 앉아 있는 이들 사이에 그를 끼워 놓았으며, 신더는 베드에 누워 있었다. 산소 농도 측정기가 손가락을 깨물고 있는 것이 거슬리는 것만 빼자면, 붉은 머리의 그만 꽤 편하게 가고 있었다. 명치만 얻어맞지 않았어도 말이다.
“…아 편하다. 나만 누워서 가네.”
“편하냐? 와 진짜 깜짝 놀랬단 말이야 나는.”
“그니까, 나도.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데…”
“…이쪽은 저 녀석이 나한테 뭘 덤터기 씌우려고 했다는 게 제일 놀라운데 안 놀라워.”
결국 배신자는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 지 마음을 굳히게 되기도 하였다. 저 자를 편이라고 생각하다간 조져짐이나 당할 게 실제로 일어난 셈이니,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어도 휘둘리지 않겠다 싶었다.
“뭐, 누워서 좀 물읍시다. 왜 그랬어요?”
“…영민한 놈들.”
“그래 그렇구나~ 우리가 한 추측이 맞았구나~”
누워 있는 자는 능글맞게 대답하고,
“아, 참고로 떨어진 쪽에는 아무도 없었어. 누가 밀거나 한 건 아니었어. 내가 이 망원경으로 똑똑히 봤거든!”
낮은 옥상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자는 누구 놀리는 듯 해맑게 첨언했다.
“꼼꼼히 잘 봤네. 그러니까 이건 그러면…”
“악질적인 그런 거다, 꼬마 녀석들아.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지?”
급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두 사람은 골 때린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가 데우스를 째려볼 뿐이었다. 아, 이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앞 좌석 빼고 전부 노려보고 있기는 했다.
“…그나저나 맞았다는 건 또 뭐야.”
“총회 사람들을 수용소 건에 못 가게 의견을 낸 게 나거든. 이득도 없다는 걸 눈치는 챘는데 이도 저도 못 하니까 구금되고 그랬지.”
“…왜 그랬어.”
별안간 들리는 제법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조금은 쇠 긁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하였고. 버나드는 이를 예상한 건지, 올 것이 왔다는 듯이, 하지만 차마 제 형제의 눈을 똑바로 보지는 못 한 채 멀거니 시선을 두며 이야기했다.
“…할 말은 없어. 목숨의 무게… 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 셈이니까.”
“…왜 목숨 위에 신념이 있는 거야.”
차분히 으르렁거리는 자의 표정은 전에 없이 흉흉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거나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 치고는, 이 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온 생기를 이끌어 제 뜻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기세에 제대로 눌리지 않은 형제만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결국 이런 표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예상한 바였으니까. 그래도 일찍 봐서 좀 다행이야.
“복수에, 눈이… 멀었나 봐. 내 나름대로의, 이 사람을… 망치게 하기 위한. 그런.”
“하지 마.”
“어차피 내일 기자회견이 일어나면 그냥 그대로 잡혀갈 거야.”
“…쳐박혀 있어.”
“…널 멋지게 실망시켰네.”
알면 닥쳐. 신더는 그 말을 끝으로 제 눈을 제 팔로 가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렸다,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였다. 버나드는 이를 제일 먼저 알아채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서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한 와중에 동석한 이들의 식은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가, 아이언애로우는 슬쩍 눈치를 본 뒤, 송골 올라온 땀이 식어갈 때쯤 겨우 입을 열었다.
“나, 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데우스 아저씨가 그러면 버니한테 권한을 많이 준 거야?”
“좀 많이? 사실 이렇게 나오는 이상 내일 레퍼토리도 대충 예상은 가. 내가 모든 걸 뒤집어쓰겠지.”
이 또한 추측이었으나, 이 정도로 쓰레기같고 위험한 일을 벌인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을 아예 예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좋은 결말은 아니게 될 텐데.”
“하하… 만약 내일 기자회견이 진행될 수 있다면 기대해요.”
“또 무슨 게릴라를 하려고.”
분명 눈을 감고 쉬는 줄 알았던 형제가 다시금 말을 하였다. 두 사람의 눈은 맞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만은 확실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드러난 것은 결국 걱정일까.
“그 때 아니면 그 누구라도 반대할 거야.”
“…뭐 반박도 못 하기야 하겠네.”
“게릴라로 할 건 어떻게 알았어?”
“트레이 가의 명물이지… 올리비아도 그렇고.”
그래, 버나드를 자극시켰던 제 어머니의 인터뷰. 그리고… 가장 게릴라스럽게 활동하는 게 너지 않겠어. 맞다고 작게 긍정하는 버나드는 작게 웃으면서 대화를 마쳤다. 고요한 차체 내부에는 선뜻 말을 꺼낼 사람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는지 그 고요는 계속되었으며, 병원에 도착하고 모두가 해산한 뒤까지 이어졌다.
7.1. 엔딩 ¶
#13: 종언
- 시작하기에 앞서
일련의 사고로 인해 기자 회견은 아무래도 며칠 더 미뤄진 모양이었다.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입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는 로비에 앉은 채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추가적으로 받은 조치는 그의 아슬아슬한 오른 다리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인해 파들거리는 게 느껴졌으니, 이거야 원. 이렇게 계속 쓰다가는 다리의 다른 곳이 부담을 다 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망가질 지 모른다는 말이 조금은 아리게 다가오기도 했으나, 그는 속이 상한 것 안에 불태울 열의를 가득 채웠다. 다리의 보호 장비를 조금은 조이면서.
때마침 온 연락은 동기 녀석의 연락이었다. 기자 회견에 맞춰서 인터뷰 하고, 이걸 기사로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렸다. 스쳐 지나가다 알게 된 인연으로 경찰 나리가 있는데, 그 경찰 양반과 접촉 시키는 게 낫겠지 싶어서 그는 이 둘을 이어주기로 하였다. 이거 맞아? 아, 맞다니까. 퇴원한 사람과 활을 고이 접은 사람은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 스탠리, 신더, 아이언애로우. 잠시 후 이 세 명은 경찰서 맞은 편 도넛 가게에서, 기자회견 당일에 내 놓을 새로운 이야기를 기자와 함께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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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업보의 청산이요 죄인을 벌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기자 회견은 어렵사리 이루어 졌으며, 그 청산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 것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도, 그 뒤로 파도치는 군중들도, 단상 위의 누군가도 잘 아는 사실일 터였다.
단상 위에는 데일 로렌스, 히어로 네임인 데우스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 서 있었다. 이전의 소동에 비해 수척하지도 않은 얼굴로 그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한 악의, 더는 도망칠 수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 어쩌다가 판이 어그러 졌지? 자기 과신을 한 끝은 잘못된 판단이었고, 독선적인 사람의 끝은 저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홀로? 웃기지 말아라. 죽어도 끌고 갈 사람은 끌고 갈 것이다. 저와 함께 온 사람들은 단상 밑에서 경호원 같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칭송 받던 이들이 고작 누군가의 경호원, 그런 꼴을 보며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얼마나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고 허영에 가득 찬 상태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이 자리를 빌어 국민 여러분들에게, 길고 긴 침묵을 버틴 것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대처가 없었음에 대단히 송구한 마음가짐으로, 죄인이 되어 이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숨 죽인 가운데, 회견이 시작되었다. 플래시 라이트가 터지고, 기자들은 질문하기 위해 순번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참 애간장 타고, 시민들은 한 치의 거슬림이라도 생긴다면 새해의 태양을 이 땅 위에 굴려버릴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의회의 대책에 대해서, 또 총회는 앞으로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지, 와 같은 필수적이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질문부터 시작하여, 시민들이 히어로 총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같은 직설적이고 날 선 질문까지 쏟아져 내렸다. 그 때마다 온갖 이상하고 괴이쩍은 논리와 논지를 통해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고 아무튼 열심히 하겠다로 퉁 치는 꼴을 보아하니 시민들의 임계점은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마이크 소리보다도 커 지는 것을 TV를 보는 사람들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비전도, 계획도 없이 나온 게 확실해 보이는 지금, 놀아난 기분에 각자 저마다의 감상을 SNS에 한껏 올리고 있는 지금, 얼 탄 나머지 다음 질문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 기자들 중 누군가는 시민들 중 누군가에게 마이크를 넘겨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하였다. 아무래도 시민들이 훨씬 더 묻고자 하는 게 많을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마이크는-
-어느 붉은 머리의 남자의 곁으로 향했다.
“아, 아, 들리시나요? 예. 잘 들리죠?”
“네, 시민 분, 잘 들립니다. 속히 질문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샛노란 눈이, 열망에 타오르는 불씨가 수많은 적의 속에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단순한 복수심이나 달궈진 분노보다 훨씬 깊게 타들어가고,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승화의 불빛이, 지금 이 장면을 똑똑히 보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의 적은 눈 앞의 개자식이 아니라 이 상황과 판, 그리고 이 사단을 낸 개자식까지 통틀어 아우르는 상태였기에.
“데일 로렌스씨, 국호를 이데아로 바꾼 이래 빌런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풀어주셨나요?”
그리고 잿더미는 웃었다. 불씨가 번지듯이, 차갑고도 뜨거운 웅성거림이 장 내를 가득 메웠다. 기자회견을 하는 자의 뻔뻔한 얼굴은 흔들림 없이 받아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군인들은 8월 때 왜 끼어 있었나요? 은퇴한 전직 히어로들에게는 왜 돈을 찔러줬나요?”
속사포로 이어지는 다음 질문에 대처하기에는 이미 시민들의 분노가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외면한 들불은 조용한 포효가 되어, 파도가 되어 온 감각을 물어 뜯고, 그 들불을 일으킨 단 한 명의 불씨는 대답을 독촉하는 것인지 아닌 건지 뜻 모를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데우스, 신분 노출 당시 및 이후에 갑자기 은퇴한 히어로들이 많아진 이유가 뭘까요?”
“조용히 하시오! …천천히 대답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일 먼저 정체가 드러난 양반네, 빨리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할 거야. 당신이 그렇게 두려워 하는 상황이 왔잖아.”
그래, 이 상황은 흡사, 언젠가 신상이 죄 털려버린 뒤의. 이제는 텍스트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누군가의 협박 편지도 아니었고, 누군가 지나가며 써 놓은 욕설 같은 게 아니었다. 순도 높은 적의가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게 과연 옳은가? 정의감이라곤 없이 그저 물어뜯으려 하는 게 옳은가. 단초를 제공한 이는 끝까지 조금이라도 책임을 분할하고 싶어 하였다. 그 적의 속에서 피어 오른 대의를 위한 누군가를 애써 무시하고자 했지만.
“…저는 10년 전, 히어로들 중 가장 먼저 히어로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그것이 공개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죠. 다른 동료들은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고…”
“나가라고 했고, 그 결과는 뒷돈 주고 내쳤더라.”
“…시민 분, 루머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이게 루머였으면 참 좋겠는데.”
만약 이게 다 루머였다면 이런 상황도 없었겠지, 이 일의 시작도 끝도 없었을 텐데.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일어나 버렸다면 보통 바라는 것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울부짖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그게 다 사실이었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면역이 생길 정도로 여러가지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지 뭐야. 치가 떨리는 것을 뒤로 하고 그는 그가 아는 한의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아. 당시 히어로 내부에는 네 파벌이 있었어요, 정치파, 활동파, 은퇴파, 안전파. 정치파는 저 사람들처럼 이왕 얻은 명예와 권력을 정치계까지 뻗자는 사람들이었고, 활동파는 이렇게 드러나 있어도 계속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은퇴파는 드러났다면 은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안전파는 사태가 잠잠해지기까지 기다리자는 사람들.”
일순 다시 침묵이 감돈다. 이렇게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누군가는 붉은 머리에 대해 토론을 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은퇴한 히어로들 명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민들의 이미 깨져 없어진 뒤통수를 다시 깨먹어 버리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은퇴파들 중 몇몇 사람들은 일찌감치 상황 자체에 대한 여러가지 스트레스로 기습적으로 은퇴하고 은둔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은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알려 주기로는 안전파인 사람들이 말이에요. 가장 중립적인 성향에 가까운 사람들이 갑작스레 은퇴를 해 버렸다는 거죠.”
“…여긴 기자회견 자리야, 그런 속사정은 그만 떠들어도 돼.”
“영수증 내역까지 남기는 걸 보면 아직은 미숙했던 모양이에요?”
그는 바로 앞의 기자와 카메라맨에게, 그가 아이언애로우에게 받은 사진을 공개했다. 입금과, 반송 내역이 찍혀 있는 바로 그것. 명백하게 써 있는 데일 로렌스라는 이름. 날짜는 10년 전의 언젠가였다. 혹시 몰라 다른 각도로 찍은 것이 최근 사진으로 한 장 더. 명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고, 곧 비명 섞인 외침이 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만!”
“즉 무엇이냐, 중립측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은퇴를 열정적으로 주장하게 하다가 자신들 주장에 밀리게 한 뒤에, 떠밀리듯 은퇴하게 만든 겁니다.”
“억측이야!”
“그럼 뭐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때 은퇴자가 많았냐니까?”
“단순히 의견 충돌이라고!”
“이 영수증은요?”
“조작이겠지!”
“원본 가지고 있는 친구는 다른 데서 인터뷰 하고 있으니까 후속 기사나 기대하시고,”
“…자네 대체 여기 뭘 위해 왔나? 내가 그렇게 몰린 걸 가장 잘 알 텐데.”
웅성거리는 소음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말을 이어갔다. 또 다시 히어로들에게 기대야 하는 거냐는 등의 불만 섞인 말이 뒤섞여 나왔다. 하지만 내부 사정을 알던 사람은 그들 밖에 없었으니까, 도대체 이 시작점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들 뿐일 테니까. 탐탁치 않아 하는 이들도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바라봐야 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거랑 이딴 짓 벌이는 걸 이해하는 거랑 별개지. 이 사람아, 어떤 히어로가 자기 손으로 빌런을 풀어주고 다시 잡고 그래? 무슨 실적 채우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을 뿐이야. 이해도 못 하겠지!”
“그걸 누가 이해해, 해선 안 될 짓을 한 사람을 이해하면 그게 더 무서운 건데.”
“애초에 히어로들에게 더 큰 명에를 바란 게 누구였지? 기대를 건 건 누구였지? 전부 시민들이였어. 난 그렇게 욕설에 시달리고 난 뒤에도 시민들을 위해 일했다고!”
기대를 건 것, 비난을 한 것. 그 모두를 행한 자들은 순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점점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면 행패를 부리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한 사람들은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 게 맞나? 하고 뒤로 물러났을 터였다. 물론 극소수다, 애초에 이걸 자각하는 건 어렵고 이 부류에 속하는 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비난에 힘을 싣고 있었을 테니까.
“그거 다 버리고 은퇴했으면 이 사단은 안 났겠다, 그쵸.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다는 사람이 시민들을 일부러 사지로 내몰고, 무슨 영화 내 엑스트라처럼 써먹어?”
“…그럼, 히어로가 필요 없다는 소리인가? 말해 보게, 히어로들이, 필요 없어? 이데아는 누가 지키지? 내가 없었으면 누가 지키나.”
“은퇴한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이름을 버려가면서까지 사회 봉사를 했겠지. 명예 시민상도 고사하고 말이야.”
명예 시민상, 당신들이 나를 잡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것 같은 달콤한 과실 말이야. 그 때의 시민상 건은 제법 크게 보도되었기에, 시민들 중 몇몇은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독으로 빌런을 체포한 사람. ‘자기 이름을 버려가면서까지 사회봉사를 했겠지.’ 이 말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순간적인 고요 속에서 잿더미는 힘을 실어 말했다.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은 현재 영웅들이 쓸모가 없다는 걸 알 걸.”
이 말 하나에 집결된 시민들 모두가 긍정의 함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눈 앞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한 쓸모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웅이라는 개념이 쓸모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 영웅들의 무능이 거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들은 적어도 하나의 답을 도출할 수는 있었다.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저 사람은 무능하고 누군가를 이끌기에 쓸모가 없다는 것을.
“…다 루머 뿐인 말을 어떻게 하려고.”
“거 참, 영수증 주인이 이미 따로 증언 준비했다니까?”
“젠장…”
“명예도 챙기고 싶었고, 권력도 탐이 나고, 근데 무게감을 느낄 자리에 이제 섰는데… 그걸 차라리 내려 놓지 그랬어. 이렇게 일을 칠 거면, 그냥 다 내려놓지 그랬어?”
“…시민을 위했을 뿐이다.”
“방금 전에 시민 탓을 해 놓고서는 또 시민을 위했다고 하는 건 뭐야. 위대한 히어로인 척 그만 해, 위선자야.”
무능한 위선자. 아니, 정확히는 과욕을 부린 게 더 맞았을 것이다. 계속 사리면서 일을 벌였더라면 이런 끝도 이렇게 빨리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판을 키워서 그 명예를 더 드높이고자 한 수 하나가 여기까지 굴러온 셈이니. 그리고 그 위선자는 최후의 말을 준비하는 듯 지금까지의 수세에 몰린 표정과는 상이한 얼굴을 내비쳤다. 예의, 시작했을 때의 뻔뻔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격정적임을 담은.
“…너가 그때 그 미친놈만 제대로 잡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너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허, 참 나. 데우스, 책임 회피를 너무 이상하게 하는데. 일단 말이야, 난 그때 그 미친놈 존재를 처음 알았어. 그건 아저씨도 똑같잖아. 게다가 결국 붙잡는 데에 성공도 했고. 수용소 사건때… 아무 행동도 안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그리고.”
“그건-“
“내가 탐색에 소홀했던 건 맞아.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아저씨가 일하는 걸 응원을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소홀히 해서 아저씨가 몰렸고, 그걸로 모든 게 시작됐다면, 마무리 지으려고 여기 있기도 하거든, 나는.”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러. 그가 이 곳에 선 목적이었다. 복수가 아니라. 이제야 그 속을 눈치챈 데우스는 할 수 있는 말이 얼마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이상 그에게 존재하는 당위성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
“자, 아저씨. 뭔가를 합리화하려면 첫 단계로 본인이 한 일을 적어도 돌이켜 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대신 해 줄게. 탈옥에 가담하고, 뇌물 수수에, 간접적으로 살인 교사까지 하고, 국정을 완전히 망쳤고, 국민을 기만했다. 데우스, 이게 당신이 지난 10년간 벌인 일이야.”
“내려와. 지금 당장.”
종언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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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사건에 대해 답변하겠습니다. 당시 수용소 사건을 담당하던 이는 제가 아니라 버나드 트레이라는 자로-“
“-네, 안녕하세요. 제가 당시에 출동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시간부로 저와 모든 히어로들은 이에 따른 책임을 지고 은퇴를 선언하며, 경찰들의 수사에 협조할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바입니다.”
“잠깐, 자네 뭐 하는 짓인가?”
“이는 내부에서 충분한 회의를 거친 뒤의 결과로, 문제될 것이 없음을 다시 한번 밝히고자 합니다. 이상입니다.”
아니, 정말 문제가 많아 보이는 걸? 버나드를 제외한 다른 여타 히어로들의 온갖 당황한 표정들을 보면 상의고 나발이고 없어 보였는 걸?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말에 반박조차 하지 못했고, 당황은 곧 불안함을 가득 담은 수용으로 이어졌다. 빼도 박도 못하게, 그의 블러핑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버나드는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내려갔고, 회견 단상에는 팔 다리 없는 히어로 총회의 장만이 남아있었다. 수족이 한 순간에 공중분해가 된 자는 그나마 다잡은 정신을 다시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로렌스 씨, 질문입니다!”
“…기자 회견 종료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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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근 10년 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조사하기 위해 사법쪽에서 총력을 다 해 조사를 하기 시작, 이 조사가 어느 정도 끝난 뒤에, 헌법 재판소는 마땅히 내려야 할 판결을 내렸다.
주문, 히어로 총회를 즉시 폐회하고 총장 데일 로렌스를 파면한다.
- 에필로그: 증인 A와 레드스틸 지사 치안 담당자의 방문
‘이 기자회견은 올 해 가장 드라마틱한 회견으로 평가될 것이다. 전반부의 모든 말을 흘려버리는 프레젠터와, 후반부의 일 대 일 토론 매치업은 그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극단적 고조와 카타르시스로의 해소로 완벽하게 이끌어 준다. 프레젠터의 말 중 인상 깊은 점은, 시민에 대한 잘못을 짚은 것이다. 나는 프레젠터의 수많은 망언들 중 이 말은 건질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너무나도 안일하고 무책임한 시민이었으며, 이데아의 시민이 아니라 히어로의 팬으로서 존재하는 데에 그친 이상,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늘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일원으로서, 주권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나오는 길에 산 칼럼을 읽고 있었다. 시민들에게도 향상된 시민 의식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어떻게 보면 현 이데아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자칫 잘못 하면 범죄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의견을 들을 수도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시민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은 기자회견 이후로도 종종 화제에 오르는 내용이었다. 때로는 논쟁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공격적으로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으며, 때로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있던 결과라는 것을 납득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 화두가 아주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물 흐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꼭 어디든 존재하기 마련이지 않나. 옹호까지 가는 순간부터 피 터지는 갑론을박이 생기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여기서 생기는 감정적, 정신적 피로에 질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만큼, 이 화두는 앞으로도 점점 언급량이 줄어들겠지.
명예, 이면의 비난. 마찬가지로 이 모든 걸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포함해서, 이 명예라는 것에 굉장히 물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이런 저런 화두가 나오고 질색하는 것만큼이나 그들 또한 원치 않는 명예였다. 명예를 줬으니 그 만큼의 비난할 권리를 받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어쩌면 그건 그들의 활동에 대한 좋은 원동력과 억제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제일 좋았을 텐데.
언제나 과도한 것은 금물이다. 데이고 데인 전 영웅들은 쉽사리 다시 복귀를 입에 담지 못했다. 히어로에 의문을 표하는 시민들과 시민들에 의문을 표하는 히어로들, 간극은 이미 과거에서부터 존재했으니.
뭐, 그로서는 이 이상의 고민은 우스울 뿐이었다. 그는 자경단이었고, 명예를 등에 업기 위해가 아니라 이데아의 안전을 위해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으며, 수락은 이미 받아 놓았는 걸. 각자의 거처에서, 새로 기회를 보는 자들을 억제하자고. 그 간극은 영웅에게나 존재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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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어떠하였나. 그는 내부의 살아있는 지옥과도 같던 분위기를 회상했다. 담력이 높은 사람이라 한들 그 곳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살벌한 환경 안에서 판결은 시작되었고, 아, 이 다음부터는 조금 웃기긴 하네.
대체 무엇 때문이냐면 서로서로 살기 위해 한때는 같은 단체에 몸을 담았던 이들끼리 서로서로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누가 어떤 아이디어를 냈고, 어떤 작전을 짜서 시민들을 기만하고 사기 쳤으며, 누가 이때 뭘 했는지 물어뜯기 바빠졌다. 그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참석한 이들, 예를 들어서 수용소 사건 때 총회를 탈퇴하고 진압에 힘쓴 사람들 마저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니 합심해서 항변하기에 나섰다. 그 광경을 보는 도중 눈에 띈 서기의 바쁜 손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결국 데우스로 방향을 실었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참심원으로 참석한 사람들 중 몇몇은 사형도 싸지 않냐는 반응을 보였고, 저기에 들어 갈 세금이 아깝다는 언사 또한 거칠게 나오고 있었다. 하긴, 기만당한 셈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마 그가 가장 눈 여겨 본 재판 결과는 자신의 형제에 대한 형일 것이다. 일찍이 총회 내부에 여론을 만들어 최대한의 방어 수단을 만들 수도 있었을 그의 형제는, 최후의 최후에 누군가를 엿먹이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일부러 틀린 판단을 한 결과를 톡톡히 대가로 치를 것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값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울 테니. 그는 이런 저런 항변을 늘어 놓다가도 수용소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다른 이들을 저지했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징역 30년 형. 붉은 머리의 남자는 이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유난히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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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몇 개월 간의 법정 공방은 끝이 났다. 칼럼은 아직 뒷 내용이 남아 있었으니 집에 가서 마저 읽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미 속보로 뜬 기사들이 온갖 사이트를 점거하고 있었고, 그는 이 이후로도 조금은 바쁘겠거니 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에 대한 인터뷰로 부가적 기사를 쓰는 건 굉장히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그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으니, 이제부터 최대한 피할 예정이었다. 가능하다면. 누군가는 인터뷰를 하느라 바쁘겠지만 이 쪽은 정 반대가 되겠다.
아니, 바쁜 이유는 따로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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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스탠리는 정권이 바뀌면서, 경찰 내부의 부패를 고발했다는 점이 윗선들로 하여금 이미지로 어필이 잘 될 것이라고 눈도장을 찍힌 모양이다. 벌써 승진을 했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그를 경찰로 특별 채용을 하기 위해 연락을 할 정도일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정말 몰라야 맞았다. 한참 높은 상관과 같이 출몰한 걸 보고 나서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아하, 했으니까.
톡방에서 경찰을 만났었다. 젊을 때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했었나? 들어간다면 정정당당하게 볼 시험을 다 보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정말 시험이라도 칠 셈이냐면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솔직히 지금 이 시점에서의 공권력은 그로서는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특채 제의가 왔다고 제 발로 들어가라고?
아예 구미가 당기지 않거나 설득력 없는 제안인 것은 아니었다. 공권력은 그만큼 그의 활동에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시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의 권력 하에서 움직이는 말이 되는 셈이었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동시에 국가의 손가락으로서 일을 하는 것은 현재의 그로서는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경비 업체에서의 채용 제안 또한 거절하기도 하였다. 만약 경비를 요청한 사람이 빌런이라면? 그는 자신의 행동에 돈과 계약이라는 제약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어떤 정당에서의 접촉은 더욱 그러했다. 그는 마주하자마자 경찰의 번호를 누르고는 여기 채용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큰 소리로 그들을 내쫓아 버렸다. 신념을 어거지로 끼워 넣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수지.
그리하여 다시 구인 구직을 알아볼 찰나에, 레드우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회사 지사 중, 이번 수용소 사건으로 범죄자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굉장히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 된 지사가 하나 있다고. 그 이야기를 왜 꺼내냐 하였더니, 감사 임원으로 널 좀 채용해도 되겠냐고 한다. 그리로 가 달라는 소리냐는 말에 그는 어차피 갈 생각이지 않았냐고 답했다. 그 김에 일자리도 있는 채로 가면 얼마나 좋아? 그럼 감사 말고 그냥 알아서 면접 보러 가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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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그는 걸음을 옮겨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바랬다. 더스틴 블루버드씨! 역시 외따로 있는 곳은 찾아오는 사람이 도심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나. 금방 불리는 이름에 그는 작게, 목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그으래, 잘 살고 있냐.”
“그런 깽판을 친 것 치고는 잘 살고 있어서 좀 놀라워.”
“저런.”
눈 앞에는 버나드 트레이가 있었다. 그의 형제, 그를 실망시키는 데 성공한. 쓰디쓴 눈빛이 동시에 서로에게 꽂혔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바라만 보기엔 주어진 시간이 많지는 않지.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 때 맨 마지막에, 그거 게릴라였지?”
“당연하지. 다른 사람들까지 완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였잖아.”
“어쩐지…”
“도박수라고 얘기는 안 하네.”
“그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시민들은 어찌 됐던 믿을 수밖에 없지.”
“왜냐하면 반박도 못 했고 수습도 불가능하니까. 하여간…”
마치 말을 맞춘 것과도 같이,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유려하게 이어졌다. 꼭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속내를 어느 정도 내비친 것도 있겠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은 형제 관계였고,
“너무 잘 아는 걸.”
“다른 건 다 제쳐 놓고 내가 누구 사이드킥이었더라?”
영웅과 그의 조수 관계였기도 하니까. 조수 쪽이 더 경력이 높은, 허둥지둥하는 영웅의 생각 정도는 가락이 잡히는. 그러나 마냥 편할 리는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체 왜 제 형제가 이런 일을 했는지 물어야만 했다. 그 정답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나.
“…꼭 했어야 했어?”
“어떤 걸?”
“전부.”
“…그래, 내가 과욕이 심했네. 나도 알아.”
“아는 놈이. 적어도 일찍 나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에 처해졌어. 엿을 먹이고 싶다는 뜻은 알겠는데.”
“난 만족해. 이런 결과도.”
“…내가 겁나게 쓰니까 이러고 있는 거다, 새끼야. 또, 못 말린 것 같아서 그래.”
그래, 내가 못 말려서. 전에도, 지금도. 결국은 이렇게 된 거야.
“그 때나 지금이나.”
“너무 그러지 마.”
“미안한데 나한테는 그게 참 크게 다가오거든.”
“날 설득할 필요도 없었어. 어차피 너한테 말도 안 했잖아. 어떻게 알고.”
“…적어도 진행중일 때 제정신이냐고는 했어야 했다고.”
“…넌 언제나 날 이끌려고 하네.”
“이끄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래, 그래. 내 잘못이라는 걸 좀 인지해. 네 탓이 아니란 것도. 그 때 다른 말을 더 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접어.”
“…”
“할 말 더 없으면 가.”
“올리비아가 조만간 들르겠대. 알아 둬.”
그는 자리를 떴다. 내가 당신의 아들을 가뒀어요, 라고 그녀에게 전했을 때의 그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그리며. 너의 탓이 아니란다, 어쩜 둘 다 똑같은 말을 하는지. 태양은 환히 낮을 비추고 있었고, 잿더미는 볕이 드는 사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의 태양들, 나의 불들- 그 뒤에 붙어야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
검푸른 도시에 파랑새의 깃털이 펼쳐졌다. 어슴푸레함은 태양 아래 스러지고, 타오르는 불이 그 근원을 태우니. 거미와 거미줄은 스스로를 묶어 가두는 결과로 향했고, 거미줄 없는 세상에는 새로운 이들이 각자의 판을 짜기 시작하였다. 그 새로운 판을, 파랑새는 다시금 관망할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의 출현을 경계하며.
잿더미의 작은 꺼지지 않은 불꽃은
바람을 타고 일어나
들불이 된다네 들불이 된다네.
들불이 일어나 어두운 밤을 밝히니
바람이 모여 돌풍이 되었네
빛이 돌아와 모두가 눈을 떴다네.
모두가 눈을 뜨니 낮이 찾아오네
잿더미의 불꽃이 거미를 살라먹네
낮이 옴에 모두가 기뻐하네.
7.2. 외전 ¶
- 3월 15일: 죽음도 두렵지 않지만 고독은 슬슬 두렵지
도심에서 떨어진 지방이라고 그의 바쁜 나날이 사라지는 것은 죽어도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수가 차이가 날 지언정 북적거리는 곳이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 라는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유리로 빼곡한 건물의 숲보다는 좀 더 목가적이고 자연적인 휴양림을 누비는 일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점만 있다는 것은 곧 악독한 사람이 단지 도심에만 몰려있다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도 되었다. 치밀한 구석을 사람들 특유의 정 같은 걸로 때우는 걸 많이 봐서 그렇지. 유리판 위에 실거미줄을 친 것들은 서로서로를 팔아먹기 바빴는데, 여긴 여간 정보를 캐내는 데에 쉽지가 않다. 그가 여기 눌러앉은 지 몇 년의 기간을 통해 새로운 요령을 얻어서야, 자경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야 그가 왜 이런 상념에 빠졌는가? 해답은 아무래도 5년 전의 일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5년 전의 대사건보다는 거기에 얽혔던 자신의, 자신을 받혀주고 보호해주었던 사람들. 오른쪽 다리의 보호 장비가 슬프게 울었다. 혼자서 정비를 하는 법을 알게 되었지만 전문가 솜씨를 한 번은 타야 하는 때가 오는 것도 같았다.
홀로 선 때가 많기야 많았지만 그만큼 은연중에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기댄 적도 많았고, 이렇게 다시금 홀로 서니 이따금 찾아오는 고독이 영 마뜩찮았다. 너가 뭔데 나를 비에 젖은 강아지마냥 시무룩하게 만드냐고 감상에게 말해보아도 돌아오는 게 있을리가.
이게 다 며칠 전에 우정이니 의리니 하면서 모인 마약 유통자들 때문이다. 기어이 기나긴 탈출극을 찍어서(그에게는 탈출극이 아니라 추격극이었다.), 새벽녘의 바람에 향수가 쓸 데도 없이 몰려와서, 아니, 그냥…
3월 15일이라서. 버려진 고아의 생일이 다가와서.
-
그래서 쓸 데 없이 상념에 젖어 있던 그는 결국 퇴근하는 길에 가볍게,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도 하나 사기로 했다.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 데이니 그럴 때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념품을 사는 이는 많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는 답지 않게 꽃가게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꽃과 어울리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보다는 그가 꽃이랑 잘 친하지 않는 점이 조금 문제였지만, 꽃가게를 하는 주인장들은 으레 그렇듯이 이 꽃은 어떤 꽃말을 가지고 있으며, 하는 설명과 함께 이것 저것 추천하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더스틴은, 새삼 자기 곁에 있던(물론 지금도 핸드폰으로 연락은 굉장히 잘 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꽃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거랑, 음.”
물론 점찍어둔 꽃은 따로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의 영웅이고 태양이었기에. 해바라기를 꽃다발로 사는 게 어떻게 보이려나 싶다가도, 상냥한 꽃집 주인은 싱그러운 표정으로 고객을 응대해주고 있었다.
“다른 꽃도 고민하고 계시구나?”
“뭐, 네. 그 음, 스승 같은 사람한테는 무슨 꽃이 어울릴까요?”
“후후, 카네이션을 곧장 짚지 않으신 걸 보니 다른 꽃들을 소개 시켜드려야 하겠네요!”
해바라기는 이름 답게 샛노란 색깔이 매력이지요, 꽃의 크기도 크기이구요. 실은, 수많은 꽃들이 모인 두상화랍니다. 그래서 해바라기가 들어간 꽃다발은 꽃의 가짓수가 굉장히 적어요. 해바라기 몇 송이만 집어 넣어도 금방 꽃다발의 크기가 커져 버리기도 하고, 그 자체로 풍성해 보여서 다른 꽃들을 고르기 쉽지 않거든요.
꽃집 주인은 하얀색 수선화를 보여주었다. 이 꽃은 나팔수선화인데,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해바라기가 태양의 흑점처럼 이글거린다면 이 친구는 굉장히 곱고 우아하지요? 아, 네… 확실히 해바라기와는 다른 느낌으로 풍성한 모양새였다. 나팔이라는 이름이 괜히 접두사로 붙은 게 아닌, 이거 백합과로 분류되는 거 아니야? 식물학자가 들으면 정강이를 걷어 찰 법한 생각도 하면서.
그렇게 해바라기 홀로 있는 것이 아닌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자신의 양어머니가 외롭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 제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곁에 있던 이들을 생각하며 고른 것도 조금. 온화한 태양 같은 꽃다발.
그러다가 문득 그는 다른 꽃을 한 송이만 포장해 줄 수 있느냐고 꽃집 주인에게 말했다. 아, 여기에 추가하는 게 아니라요? 예에, 뭐… 한 송이만 낱개로요. 붉은 머리에서 한창 풀내음이 베기 시작할 때쯤 그는 꽃집을 나설 수 있었다. 밤이 짧아지고 저녁이 제 자리를 낮과 다시 다투기 시작하는 봄의 저녁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
홀로 지내는 곳은 늘 익숙하고 언제나 낯설다. 쓸모 없는 고독감 때문은 아니었다. 목숨의 위협 때문에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공간은 아늑함을 부여 받을 자격을 슬프게도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랬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그 공간은 유독 낯설었다. 길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서? 그 날이 그의 생일이라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버릴 수 있는 공간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그러니까 이건, 홀로 있어야 하는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더스틴,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늘상 하던 대로 생체 전류를 통해 주변을 파악한 그는 웃음을 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파악 못 한 거다. 나는 모른다, 하여튼 몰라.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통제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나?
그리고 불이 켜졌다!
“우리 파랑새, 생일 축하한단다!”
“귀가가 늦지 않나, 치안 담당자가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 하나?”
이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가 있어?
-
“아니, 연락 좀 하고 와요! 그러면 뭐 레스토랑이라도 내가 예약을 하던가 할 거 아니야!”
“이미 해 놨네.”
“아저씨 왜 이렇게 행동력이 빨라요??”
“어머, 꽃다발이니?”
“아, 그게, 예에… 오실 줄 몰랐는데… 아니…”
“올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알고.”
“…거 여기에 박혀 있다 보면 아는 사람들이 좀 그리워서 이런 것도 살 수 있죠, 참 내.”
“귀여워라. 그 노란색 장미는?”
“누구겠어요, 여기 못 오는 그 새끼지 뭐.”
유난히 입이 쓴 표정을 뒤로 한 채, 그는 제 스승의 정비와 어머니의 온기를 받고 있었다. 노란 장미, 버나드에게, 감옥에 갇힌 제 형제에게 노란 색은 하나도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제 눈 색이었지만. 이건 너다. 너는 꽃으로서 내 생일에 같이 있는 거야.
-
그리고 그는 그를 꼭 닮은, 불타는 듯한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선물로 받았다. 순식간에 꽃들의 천지가 된 그의 집에, 보란 듯이 그 공간은 아늑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탁자에는 노란 장미 하나와 해바라기 하나와 나팔수선화 하나와 붉은 장미 하나가 꽂힌 화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침대 근처에 둘 화병을 새로 샀고, 노란 장미를 한 송이 더 샀다.
- 10월 31일: 5주기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의 터에서 지방으로 간 지 4년. 그의 다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던 것이 5년 전. 폭음이 도심을 강타한 것도, 교도소가 무너진 것도 5년 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흘러내린 5년 전 가을 어느 날, 오늘.
그의 오늘이 항상 5년 전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매일 준비를 한다. 그는 사람들을 지키는 자였고, 5년 전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아지트를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주말을 맞이한 사람의 발걸음 치고는, 그리고 소소하고 즐거운 축제가 시작될 도심으로 향하는 사람의 걸음걸이 치고는, 잿더미는 그렇지를 못했다. 현관 앞에 망설임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그의 생일날에, 그의 다리 보조기구는 말끔하게 기름칠이 되었다. 이것이 핑계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누군가를 보러 간다, 좋은 핑계도 아니다. 아니, 그는 왜 핑계를 찾고 있는가? 늦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아니, 달이 뜨고 새벽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는 한 켠의 짐을 느끼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려 납치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뒤늦게 생각하자면 손 쓸 수 있는 것조차 없이 당하지 않았나. 늘어난 묘비에 자신의 무게가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는 새삼 핑계거리를 대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 묘비를 하나하나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꽃 한 송이를 놓아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을 찾아가 위로할 수 있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기에. 샛노란 눈은 오늘따라 광휘의 불꽃보단 이슬 맺힌 꽃잎과도 같았다.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그 무거움이 그가 감내해야 하는 죄책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도심에 가든 그의 아지트로 돌아가든 편할 수 없는 사람이니, 어찌 보면 그만의 일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 의해 부상을 입은 양어머니, 끝끝내 말리지 못해 범죄에 가담한 직장 동료와 형제. 모로 가도 궁지인 것을 그는 새삼 자각했다.
맞는 표현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 결국 그가 스스로 끌어안고자 한 것이다. 핑계거리를 생각하는 만큼이나 우스운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꽃은 사치품이다. 적어도 신더는, 더스틴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 그러면 교통비의 두 세배는 되는 값을 꽃의 대가로 치룰 리가 없다. 꽃은 사치품이 맞다. 아지트 안, 화병에 물 몇 모금으로 생존하고 있는 꽃들을 생각하자면 꼭 그렇지도 않지만, 아무튼 간에.
한 무더기의 꽃을 들고 가는 붉은 머리의 남자의 꼴은 아이러니하게도 할로윈에 적합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뜬금없이 꽃을 든 사람을 본다면, 그것도 오랜만에 열리는 소소한 축제에, 그러면 행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꽃을 파는 행상인이라고 오해할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그가 묘지로 가는 동안 행인들에게 이 꽃이 얼마냐고 다섯 번은 질문 받았다는 소리이다.
멀쑥한 정장을 입은 것이 문제인가? 싶다가도 평소보다 우중충한 표정 때문인가, 싶다가도. 그저 오늘이 그의 오늘을 붙잡는 날이기 때문일 터다. 할로윈이라는 날이 그렇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특별한 기념일처럼, 그 또한 꽃을 파는 누군가로 부여받은 것일 터다. 다른 의미가 그가 든 꽃 안에서 고요히 맴돌고 있음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오직 그 만이 아는 의미일 것이다.
취소. 붉은 머리의 남자는 묘지에서 작은 웃음을 띄었다. 그가 퇴원하고 여기 들렀을 때 마주한 얼굴이 그 곳에 서 있었다. 스탠리, 말을 몇 번 섞어 보았고, 도심이 엉망이 된 8월 어느 날에 합을 맞췄던 사람.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그가 지은 웃음이 가볍지만은 않겠지만, 억지로 지은 웃음은 아니었다. 홀로 선 그의 곁을 지켜 줄 동료. 죄책감과 책임감은 그에게 고통이라기 보단 이제는 동료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만 사뿐히 걸어와 어머니의 팔을 조금 쓰다듬을 뿐이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한 해의 마지막 열매들이 맺히는 계절이다. 꽃은 진작에 제 할 일을 다 해 꽃잎만이 남고- 더스틴은 울적한 상념 속에서 들꽃과도 같이 핀 코스모스를 발견하고 그냥 생각을 지웠다. 꽃은 언제나 핀다. 겨울에도 필 꽃은 피는 걸 뭐.
다만 그가 하고 싶었던 생각은 묘비에 헌화된 꽃들이 많아서, 그의 걸음이 조금 가벼워질 정도로 많아서. 묘지라고 하기에는 정돈되었고, 꽃밭처럼 꽃들이 만개해 있어서.
세 사람은 꽃을 헌화하며 묘지를 걸었다. 산책로인 것처럼 조용히,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 만큼 엄숙하게. 그러나 또한 그들의 일상을 공유하며. 다치지는 않았는지, 맛있는 것은 먹었는지… 평화로움을 공유하면서, 잿더미의 응어리는 가벼워져 갔다.
삶과 죽음이 기묘하게도 공존하는 공간에서 신더는 경찰관에게 손을 흔들고 제 어머니에게 작별의 포옹을 했다. 오늘 도심에 올라온 용건은 말 그대로 이게 다였으니까. 어머니는, 올리비아는 아들이 돌아가서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뺨에 애틋함을 선물한 뒤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날이 춥지는 않았으나, 새삼스럽게도 조용해진 곁이 추웠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 특별한 날은 유독 광란의 파티가 일어나고, 뭐가 됐든 간에 봐줄 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자경단이다. 슬슬 그의 구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추위를 불태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
교도소가 폭파된 지 5년. 그리고 그들이 지방의 다른 교도소로 나뉘어 수용된 지도 5년. 자신의 동료와 형제가 그 곳에 갇힌 지는- 그래, 4년이라고 하자. 5년인 사람도 있지만. 샛노란 눈이 별처럼 빛났다. 그의 다리는 삐걱거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서는 데에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10월의 마지막 날의 노을을 등지고 섰다.
5년 전의 일이 그를 동여맬 준비를 하고 있다지만, 그는 영웅이었고 자경단이다. 잿더미는 조용히 꽃피어 바람을 타고 자신의 구역을 죄러 간다. 꽃은 어디서든 핀다. 그것이 약이 되든 독이 되든 간에 말이다. 그는 매여 있는가? 그것보단 누굴 묶으러 가는 게 옳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