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내 옆자리의 신 님 4U
소오인누시 | |
모티브 신 | 전령의 신 |
성별 | 남성체 |
학년과 반 | 1-C |
성적 성향 | ALL |
THEME | https://youtu.be/bzuuxp7dsxQ?si=qH6KmvL0eVyWn3cR |
VOICE | https://youtu.be/-uS-JFAg_zQ?si=jx0_cKm5z8vjBntU |
1. 외형 ¶
EMO, 그리고 PUNK.
검은색 가죽과 징, 그리고 체인. 종종 선명한 원색. 그를 이루는 근간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주얼계 밴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먼지같은 흐린 회색의 머리카락을 덥수룩히 길러 여러 층을 내 정돈했으며, 곱상한 소년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엿보인다. 녹색으로 빛나는 눈은 귀공자처럼도 보이지만 목 아래를 보면 귀공자는 커녕 골목길의 패왕. 두걱거리는 두터운 굽의 부츠까지 포함해 176cm의 훤칠한 키이나, 굽을 빼면 170 근처에 머무는듯 하다. 그러나 원체 마르고 늘씬하여 그것은 큰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검은색 가죽과 징, 그리고 체인. 종종 선명한 원색. 그를 이루는 근간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주얼계 밴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먼지같은 흐린 회색의 머리카락을 덥수룩히 길러 여러 층을 내 정돈했으며, 곱상한 소년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엿보인다. 녹색으로 빛나는 눈은 귀공자처럼도 보이지만 목 아래를 보면 귀공자는 커녕 골목길의 패왕. 두걱거리는 두터운 굽의 부츠까지 포함해 176cm의 훤칠한 키이나, 굽을 빼면 170 근처에 머무는듯 하다. 그러나 원체 마르고 늘씬하여 그것은 큰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듯 매일 바뀌는 옷은 한 벌에 5자릿수는 기본이고 그마저도 어설픈 마감은 용납하지 않는다. 쩌렁쩌렁한 체인과 징이 박힌 벨트? 물론 은제다. 손에 낀 반지들은 또 각각 얼마나 하겠나. 불같은 충동성으로 질러댄 그 돈은 모델일을 해도 다 갚을 수 없다. 그래도 산다. 멋을 내는 것이 좋으니까. 그러면 행복하니까.
빼빼마른 몸은 관리로 인한 것일지, 혹은 배를 곯아 그런 것일지.
빼빼마른 몸은 관리로 인한 것일지, 혹은 배를 곯아 그런 것일지.
3. 기타 ¶
모델일을 하여 돈을 벌고 있다. 얼굴, 전신, 손 할 거 없이 모든 게 사진에 찍힌다. 잡지나 광고에서 닮은 꼴을 본 적 있을 수도.
벌이는 웬만한 성인 못지 않으나 씀씀이는 벼락부자 못지 않아 빚만 쌓여간다.
전령의 신들은 바람과 친하다.
왼쪽 관자놀이에 창백한 미로같은 금 간 흔적이 있다. 평소에는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티나지 않는다.
벌이는 웬만한 성인 못지 않으나 씀씀이는 벼락부자 못지 않아 빚만 쌓여간다.
전령의 신들은 바람과 친하다.
왼쪽 관자놀이에 창백한 미로같은 금 간 흔적이 있다. 평소에는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티나지 않는다.
5. 독백 ¶
- 소오인 차드는 엄청난 것을 가져가버렸습니다
- 안녕하셔요, 테이라고 해요.
갑작스럽지만 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답니다!
비록 말도 붙여보지 못했고, 그럴 주제도 아니지만요.
어디에도 풀어놓지 못할 이야기지만 여러분께만 조심스럽게 털어놓아 보려해요.
큼, 흠, 시작합니다.
사실 전 말이죠, 전혀 보기 좋은 용모가 아녀요. 예에전에 부뚜막에서 어머니 일을 돕다가 불티가 뺨에 닿아 큼지막한 흉터가 생겼거든요. 다른 곳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면 모를까, 이런 어중간한 얼굴로는 어디 시집 보내기두 어렵지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지인의 지인을 통해 저를 어느 호족 분의 집에 넣어주셨답니다. 거기서 평생을 보내라구, 거기가 네 있을 곳이라구 덧붙이면서 말예요. 그렇게 저는 큰 집의 부엌데기로 일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텃세란 건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요. 흉터도 있는 저는 특히나 본보기가 많이 되었어요. 부엌언니께서 저를 많이 갈구셨는데, 그 구실이란 게 참으로 부조리했다니까요. 발을 걸고 엎어뜨리고는 너 때문에 음식을 망쳤지 않느냐며 뭐라 하시구, 바늘을 잃어버려서 잠도 못 자고 불을 비춰가며 찾은 적도 있답니다. 하지만 견뎌야만 했어요. 어머니 말마따나 저는 여기 아니면 있을 곳이 없는 걸요.
저처럼 예쁘지두 않고, 이렇다할 재주도 없는 계집아이를 누가 거두겠어요? 제 입 하나 풀칠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저여도 눈은 있어요. 뭐가 멋진지는 잘도 알아서는 저택을 자주 드나드는 어떤 사내분과 그 옆의 친우 분을 힐끔거렸지요. 그 분은 정말 멋지셨어요. 햇볕을 받으면 반짝이는 머리칼하며, 험한 일이라고는 모르는 듯이 반짝이는 녹색 눈은 잘 정돈된 다다미방처럼 느껴졌지요. 하지만 너무 힐끔거렸다가는 언니께 또 혼날테니 황급히 눈을 피하고 일하러 가기 바쁜 나날이었어요.
오늘은 언제 오시려나, 내일은 오시려나. 그 분 앞에서는 실수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마루에서 철푸덕 나동그라지고 말았어요. 머리에 이었던 먹음직스런 과실들도 복도며 땅바닥이며 뒹굴고 있었죠. 언니는 과실을 줍는 저를 밀치며 다그쳐요. 너 왜 그렇게 모자라느냐, 이 과실들에 흠이 났으니 어쩔 것이야 하구. 하지만 저는 알고 있죠, 저만큼이나 언니두 그 분을 좋아했단 걸요. 그래서 괜히 저를 더욱 모질게 혼내던 거겠죠. 그건 익숙했어요, 언니의 트집잡이는 이제 귓등으로 흘릴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그게 그 사내 분 앞이었던 거였어요. 귀가 화끈거렸죠. 뺨이 불티에 닿았던 때처럼 뜨거웠어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인다만."
그 분께서 상상한 것보다 늠름한 음성으로 말하셨어요. 다가와 저를 일으켜 세우시고 과실을 주우시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부엌데기인 걸요. 버티고 버티다, 운 나쁘게 늙으면 쫓겨날... 그래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그런 존재요.
"그래도 정 흠이 있다면 그래, 내가 값을 치를테니 새 과실을 사오는 건 어떻겠어?"
"이봐 오토우지, 지갑 내놓게."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니, 두배는 더 쳐줘야 할 걸세.
"그러면 세배를 쳐주지."
-...내 돈이야 이 사람아.
"달아둬."
그 분께서는 언니에게 손수 돈을 쥐여주시더니 뭐라 당부하시고는 저택을 떠나셨어요. 사실 이 때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야, 실감이 안 나잖아요? 그렇게 멋있으시고, 귀한 일을 하시는 분께서, 왜 저를 돕겠어요? 꿈만 같았답니다.
그렇게 그 분과 무언가 일이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너에게 주제 넘은 일이라는 듯 더 이상 뭔가는 없었어요. 저택은 늘 정신없었고, 손님들의 분위기는 더 어수선했고, 주인님께서는 제 분을 못 이기시고 화병을 깨부수는 일들이 잦았죠. 그럴 때마다 그분은 더 자주 오셨어요. 친우 분께서 주인님의 방에 들어갈 때면 마당을 서성거리시고, 눈을 감고 햇볕을 느끼거나 하며, 연못을 유심히 들여다보시며. 그렇게 지내시다 돌아가셨죠.
-뭣이―!
-꺄아아아아...
-고정하시옵소서! 주군! 검을 거두시고―
아아, 그 날은 정말 끔찍한 하루였어요. 친우 분께서 목이 잘린 채 정원에 던져지셨거든요. 흰색 모래 위로 붉은 핏자국이 얼룩덜룩. 머리는 데구르르. 오니같은 얼굴을 하신 주인님. 그리고 전에 없이 슬픈 표정을 하던 녹빛 눈의 손님...
정신을 차려보니 손님은 사라지시고 저택엔 친우분의 사체 뿐. 그게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궂은 일을 하는 다른 하인들이 치워주셨겠지요. 나뭇바닥에 얼룩진 피는 닦아도 닦아도 지질 않아서 팔에 쥐가 날 정도로 꾹꾹 눌러댔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지요.
아아, 그 분께선 더 이상 오시지 않겠지...
하지만 제 생각은 역시 짧았나봐요, 그 분은 다시 오셨거든요. 다른 분과 함께. 저라면 다시 오지 못할텐데 정말 담대하신 분이어요. 하지만 그 분의 표정은 밝지 않았어요. 그런 얼굴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웃어주셨으면 했는데.
그 얼굴을 볼 날만 기다렸는데. 볼 수 없게 되었어요. 제가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봐버렸거든요. 불타고 있는 저택과, 그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낭인들을요. 제가 모르는 무언가의 일이 있었구나, 그런 직감이 들었어요. 아무리 배운 게 없더라두 알지요. 저택은 점점 어수선해지고, 있던 하인들이 간밤에 도망치거나 하고... 저처럼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버린 거여요. 이상할 것도 없다는 체념부터 들었네요.
그래서 오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벌써 날은 저물기 시작하고, 마을에서 벗어나 어둔 숲을 헤치고 가야 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발걸음을 딛을 뿐이에요.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반겨주실까, 내 사정두 모르고 호통부터 치진 않을까, 그런 생각에 눈물이 비어져 나와요. 정말 서러웁지 뭐예요. 나에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준 것도 모자라 만날 곳도, 있을 곳도 앗아가다니요. 신이 있다면 분명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며 발을 옮기던 때.
나무 새로 무언가 날쌘 것들이 지나가요. 사브작거리는 발소리가 섬짓하게 목덜미를 훑고, 무언가 있다가도 돌아보면 없고. 그러나 쫓긴다는 직감이 뭐라도 해야한다며 호통을 쳐대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서 다른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앞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옆은 이미 막혔고, 뒤에서마저 누군가 쫓아오고 있어서요. 결국 숨이 목 끝까지 차 더이상 뛸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나타났어요. 늑대들. 이래서 해 졌을 때 다녀서는 안 됐는데.
어쩌면 이게 맞는 거겠죠. 저도 피할 수는 없던 거예요. 어쩌면 이런 못난 것이 명을 잇기를 바란 것도 과욕이에요. 그러니까 하늘께서 늑대를 보낸 거겠지요...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저는 진이 다해서 눈을 질끈 감는 것밖에 할 수 없었는데.
-괜찮으냐?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던 음성이 문득 들려요. 그래서 고개를 들면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그 분께서 계셨어요. 그리고 아주 믿음직한 목소리로 늑대들에게 으름장을 놓으셨죠.
-물러가라. 이미 배불리 먹었을 것인즉 또 인간을 탐내하다니.
-과욕이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늑대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더니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게 아니겠어요. 무사분의 기백이란 눈빛만으로도 곰을 압도한다더니 정말이었나봐요. 실감이 나지 않아 주저앉은 채인 저에게, 그 분께선 손을 내밀어주셨죠.
-안타깝게 되었구나.
-돌아갈 곳은 있느냐?
"아니요......"
고개를 저었습니다. 고쿄인 저도 이미 불타버렸고, 어머니는 저에게로부터 받는 돈도 끊겨 호통만 치시겠지요. 기댈 곳이란 눈 앞의 그 분밖에 없었어요.
-나도 마땅히 지낼 곳은 없는 처지이니 잘 되었구나.
-내 시동으로 지내며 일단 거처부터 마련하도록 해라.
거짓말. 원령의 장난도 이 정도면은 악질적이에요. 저같은 것에게 어떻게...
제가 대답도 못하고 있자, 그 분께서는 제 더러운 손을 선뜻 잡아오시며 당기셨어요. 어두운 숲에서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저는 과욕을 품고 말았답니다. 시동이 아니라 아내로서 있고 싶다구요. 그러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구요...
- 마음이 깃드는 곳
대장장이 신은 고민한다. 이것은 냉병기를 따위로 만들 정도로 섬세한 물건이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장신구도 이보다 섬세하지는 못하다. 단순히 '이런 효과를 가진다' 로 끝날 수 없다. 구동해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의 목적을 막힘없이 수행하기 위해선, 마음은 어디에 넣어주어야 하는가.
영감이 된 건 그가 처음으로 만든 인간이었다. 땅의 기운을 뭉쳐 만들었던 인간.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고서 인간처럼 기능하는 듯 싶더니 결국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스러져간 작품. 아버지가 이름붙이기로는, 판도라라는 여자. 신들이 엉터리로 붙여준 재주와 마음이 한데 뒤얽켜, 처음에는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을 듯 싶었다. 그녀를 부추긴 건 마음이었다.
헤파이스토스는 마음이 한낱 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면 바퀴를 돌릴 뿐인 그저 동력. 그렇게 부여했던 마음이 결국엔 그녀를 원하던 결말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순수히 경탄했다. 그리고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판도라처럼 한 가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마음. 얽매일 수밖에 없는 마음을 넣어준다면. 하늘의 오만불손하고 불규칙적이며 자기 멋따라 사는 신들보다 더 근면하겠지. 쓸모있는 일을 해내겠지. 그런 실험정신이 그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때부터였다, 하늘의 기운을 비밀리에 모아 이것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어쩌면 불경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혼인도 없이 신을 만들어내겠다니. 불경하게 자식을 만들기로 유명했던 제우스조차 눈살을 찌푸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제우스를 설득할 좋은 구실, 아니. 절대로 거절하기 힘든 기능이 여기 있다.
팽팽히 당겨진 끈을 타고 소리가 건너가듯이, 신들끼리의 사소한 잡담도 용건도 틀린 것 없이 전해진다. 앞에 수신인을 쓰고 안부를 묻는 형식적인 인사도 필요 없었고, 문자로는 미처 전해지지 못하는 마음도 표정으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투명하게 만들어진 이것은 보내는 자를 그대로 모사해내, 눈 앞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리라. 환상적인만큼 터무니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운명의 세 여신들이 실을 승인해줄 정도로 가능성이 있음직했다.
그를 수식할 좋은 말을 고르자면,
전령傳令.
그러므로, 대장장이의 고민은 여전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을 때의 그는 가슴이 아팠다. 땅에 떨어졌을 때 으스러질 것만 같은 가슴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구를 고안해내며 밤낮으로 머리를 쥐어짤 때, 말 그대로 머리에 쥐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폴론은 생각이란 머리로부터 나온다며, 그 안의 주름이야말로 섬세한 마음이 기어들어가기 딱 좋은 곳이라고 했다.
마음은 어디에 깃드는가.
-과연, 이건 한번쯤 보고 싶은걸요.
-내 딸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난 뭐든 찬성하리다.
-혼인도 없이 신을 만들 수는 없소.
-나아는 일이 줄어든다니 좀 솔깃한데~
-이렇게 신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들이 얼마나 불손해질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손을 들자 좌중은 조용해졌다.
-모이라이들이 실을 내어줬지 않는가. 언젠가 존재할 신을 더 일찍 만들 뿐이야.
그저 난봉꾼 짓을 하기 편해진다는 게 마음에 들었을 뿐이지만, 제우스의 찬동은 큰 파문을 가져왔다. 이윽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이라이가 있다고 하면, 있는 거다. 그것을 이 대장장이에게 맡겼다면 그것도 그의 운명인 것. 운명은 신들을 납득시키는 좋은 변명거리였다.
"그렇다면 아버지, 이것에게 이름을."
조심스럽게 안아서 아버지의 옥좌 앞으로 내밀었다. 유리로 빚은 살갗 아래에 뼈도, 뇌도, 그 외에 인간을 구성하는 것들은 모두 담겨있었다. 근육따위는 보이지 않는 늘씬한 팔다리는 공기만을 품어 가볍고 날쌨다. 언뜻 보기에 징그러운 얼굴은 보내는 자를 투영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며, 그 아래의 기관들에는 목소리와 메시지가 담길 것이었다. 구조 중 무엇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짜맞춰진, 신을 일시적으로 담기 위한 하나의 관. 투명하고 정교한 예술품을 내려다보던 제우스는,
-χάρτης.
공예품에게 마음을 집어넣었다.
- Στύξ
저는 행복했어요. 분수에 맞지 않게 행복했지요. 그러니까 안타까워 하지 마셔요, 그런 얼굴을 하지 마셔요. 다시 뵈어서 기뻐요...
애틋하게 눈물짓던 테이는 숨을 거두고, 혼백이 되어 차드를 다시 본다. 좋아하는 인간을 만든단 건 이렇게 어색한 순간을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갈까, 하고 손을 뻗으면 잡고 어색하게 발을 옮긴다. 오랫동안 신세를 졌던 노쇠한 육체를 두고.
오랜 전쟁이 있었다. 전령이 이보다 많았던 적도 드물다. 거진 백년에 거쳐 이루어진 전란의 시대에 그는 전례없이 바빴다. 정신을 차리면 죽어버린 전령이 있고, 피안으로 인도하고, 다시 테이에게로 돌아간다.
어머니에게 말을 전한다는 희미한 사명만이 남은 전령, 전령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은 존재였지만. 그는 이 혼란한 시대에 가냘픈 그 인간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종종 위로를 얻었다. 테이는 돌아가면 늘 여보 오셨어요, 하며 아껴두었던 쌀을 긁어모아 상을 차려왔고,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며 자신은 기어코 사양하는 좋은 인간이었다. 길게는 몇 달도 말 없이 못 찾아봤지만 테이는 혼자서도 제법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덕분에 많은 죽음을 보고도 잘 견뎠다.
이 전란의 시대에 제 수명을 다 살고 가는 건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차드의 표정도, 테이의 표정도 좋지는 못하다.
- 있죠, 여보.
"응."
- 당신께선 원령이신 거지요?
"...비슷한 거야."
- 그렇군요...
테이는 피안으로 가는 내내 침묵하다가 이따금 그런 질문을 던졌고, 계속 무언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채근하지 않고 걷는다. 호수를 걷고, 설원을 걷고, 걷고, 걸어... 어느새 눈은 녹고 풀이 솟은 평원이다. 하늘은 태풍이 올 것처럼 어둡고 불길하고, 물의 냄새가 짙게 남았지만 바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곳. 긴 강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곳을 보자 테이는 뒷걸음질 쳤다. 남편의 팔을 잡은 채로 애써 당긴다. 돌아가자는 것처럼.
"그럴 수는 없어, 테이."
"돌아간대도 죽은 몸에 다시 깃들 수는 없어. 사자에게 주어진 건 이 강을 따라 가는 것 뿐이야."
테이는 고개를 젓는다. 휙휙 저을 때마다 얇은 머리카락이 안타깝게 허공에 나풀거린다.
- 싫어, 싫어요. 가지 않을래요. 여기 계속 있을래요, 있게 해주셔요. 같이 있어요...
- 저곳으로 가는 건 무서워요 여보...
차드는 가엾은 표정을 감출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군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스스로의 마음을 갈무리할 때까지는 그저 홀로 내버려두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인간이 남긴 미련에 신이 뭐라 한들 그게 마음에 다가올 리가 없다. 테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외친다.
- 왜 도와주지 않아요 여보, 나는 여보가, 당신이 오지 않을 때 계속 기다려줬는데. 한번도 싫은 소리두 않구 언제 올지도 모르는 당신만 기다리면서 그 좁은 집에 계속 살았는데,
- 당신을 닮은 아이라도 있었으면 견딜 수 있었을 거예요, 난 그래서 계속, 계속...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아하지두 않았을 텐데. 날 그렇게 외롭게 만들어 놓고서!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테이는 온화한 사람이다. 속상한 게 있어도 쌓아두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이건 마지막이라고 직감했기에 나오는 서글픔일 뿐―
"미안해."
그 말을 듣자 여자는 주저앉았다. 맞아, 언제나 간절했던 건 나였어. 같이 산다는 것으로 욕심을 낸 것도 나, 여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나, 이름을 불린 것도 나... 떠올려보면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평생 살아왔는데 이렇게 끝나다니 있을 수 없어.
- 왜 미안해하는 거예요... 아냐, 방법이 있을 거예요. 원령으로 남아서 당신과 있을 수 있다면 그래도 좋아요, 전 다시 살아가는 거따위 바란 적 없다구요. 여보, 난 정말로 이런 거 바란 적이 없어요. 당신이 없는데 살아서 무엇하는데요. 제발 여기 좀 봐요 여보!!
애걸하다시피 옷깃을 잡고 늘어지는 여인. 눈을 질끈 감고 견디는 듯한 사내.
강물에서 스르르 일어나는 한 인형. 물 아래 누워있던 것처럼 몸을 일으켜 허리를 곧추세우면 차드와 여인을 훌쩍 넘는 거대한 물빛 실루엣이 드리운다. 그 얼굴은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띠고 있다.
차드는 인상을 찡그린다.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사내의 뺨을 잡고 돌렸다. 자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안되게끔.
- ...정말이에요 여보?
으응, 안될 거 없지. 원령으로 있기보단 신으로 있는 게 좋을 거야.
들어보니 제법 정을 들인 모양인데 괜찮지 않나. 전령 자네에게도 좋은 것인데.
당장 여기서 증인을 서줄 수도 있다네.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신이 대답한다. 지금 당장 여기서, 차드만 설득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테이는.
- 왜 말하지 않았어요 여보...?
- 혼인하면 되잖아요, 해요 여보. 당신도 싫지 않잖아요. 싫었으면 제가 여보라고 했을 때 하지말라 하셨겠죠 여보. 그쵸. 당신 성격에 그러지 않을 리가.
- 저랑 오래오래 살 수 있다구요...? 여기서 함께, 예전처럼 계속 살 수 있는 거라구요. 네? 같이 있어요. 제 평생의 부탁이에요.
"테이."
- 여보!!!
- ...왜 이름을 불러요. 그럴 필요 없잖아. 없다구. 왜 그렇게 이야기 해요. 나, 나 당신한테 그동안 바란 게 많이 없었잖아요. 내가 딱 한 번 하는 부탁이잖아요. 나는 당신이 오지 않아도 불평 한 번 없이 기다려줬는데 나에게 이러면 안 되죠, 안 돼요. 안 된다구요.
"그럴 수는 없어."
- 왜 그럴 수 없는데요, 왜요. 혼인이잖아요. 누구나 하는 건데 고작 이게 뭐라구. 나 정말로 가기 싫단 말예요. 평생 당신만 있으면 된다구 생각했던 이 가여운 계집 한 번 도와줄 수 없는 거냐구요. 다른 남편들처럼 나를 안아주고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쏘다닐 뿐이었으면서.
- 제가 싫어진 거예요...? 괜찮아요, 신이 되고서 당신을 망신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나 정말로 노력할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요 여보. 여보는 늘 그랬듯이 어디론가 다녀오세요, 나는 기다리고 있으면 그거로 행복한 사람이니까...
"나는..."
- 나쁜 사람. 정말 싫어. 날 속였어. 날 속였다구. 아아, 역시 그런 거지. 어머니두 아버지두 싫어하던 나를 누가 좋아해요. 그냥 이 계집을 현지처로 쓴 거죠, 그런 년 따위는 이제 질린 거죠. 인간들 사이에서 혼인 시늉 한 번 내주는 것도 싫었는데 이건 신들끼리는 얼마나 싫을까. 난 그냥 여흥일 뿐이었는데.
아니다. 차드는 정말로 테이를 좋아했다. 그게 테이와 같지 않았을 뿐. 테이의 짧은 삶이나마 평온하길 기원했고, 그 머리카락에 가호를 얹고 갈 정도로, 내키지 않는 억지에 몇 번이고 어울려줄 정도로 좋아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끼는 인간에게.
- 내가 바란 건 좋아한다는 말 단 한 번이었는데
좋아한단 건 뭐지?
가엾어서 손을 내밀어 준 건, 좋아한다고 할 수 없는 건가?
- 죽어버려. 죽어버려 소오인. 꼴도 보기 싫어, 아냐, 아녀요. 이건 내 진심이 아니야. 같이 있어요. 같이 있고 싶다구요. 아아, 아악!
- 여길 보란 말이야!!!
목숨과 영혼을 걸어야만 사랑인가. 사랑이란 건 이렇게 목을 매야 하는 건가.
무릇 사람이 사랑을 마음에 담아야만 한다면. 그래서 사람이라면.
나는 줄곧 사람일 수 없는 건가.
차드의 가슴은 갈라지는 듯 아팠다. 깊이 슬펐다. 그러나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차드를 몰아세운다. 넌 인간일 수 없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
나에게 마음이란 건 있는 걸까.
"그만."
"시끄러워..."
없을지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여인은 주저앉았다. 뱃사공이 여인을 부축해 배 위로 싣는다. 외치느라 모든 진기를 다 써버린 여인의 혼백은 너덜너덜해 이제 한계다. 물빛의 신은 손짓하여 배를 흘려보낸다.
신들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제멋따라 살기 바쁜, 마음이랄 게 없는 족속들.
차드는 고개를 들어 저주한다. 가슴팍에 깊은 균열을 가진 채로.
"죽어버려, 피안."
- 走隠
- 명계의 대신격 스틱스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거절한다."
- 아카리오페.
"거절―."
- 네가 있던 시절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길 바라. 내 밑바닥에서 주린 배를 채우던 시절도 나쁘지 않았잖니.
전령의 신의 얼굴은 밝게 빛나며 스틱스의 형상을 띤다. 인간의 악의와 후회, 슬픔이 가라앉아있는 명계의 악당. 그 신묘한 것을 잘도 재현해 낸다. 폐허의 잔해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모든 것을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전달해 내는 오토마톤.
- 네가 요즘 먹을 것이 많이 없을 줄로 안다만. 아직 고집을 부릴 수 있는가 보구나.
- 음음, 아무렴, 좋은 일이야. 딸이 성장하는 걸 보는 건 어머니의 기쁨이지.
- 엄마는 널 언제나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 주려무나.
- 쪽.
- 이상입니다.
"가증스러운 몸짓까지 재현해 줘서 참 고맙군."
- 안녕히 계십시오.
"잠깐 기다려."
- 예, 전언이 있다면 편히 이용하시길.
"나를 어떻게 찾았지?"
아카리오페는 물었다. 그건 순전한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저승에 머리칼이 묶여있는 여신의 눈을 피해 도망 왔건만 기어코 찾아낸 그 작동 원리에 대한 따져물음이기도 했다. 전령은 두개골 안에서 눈을 멈춘 채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대답한다.
-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전령은 현재 주인 된 헤파이스토스의 방침에 따라 모든 전쟁과 제우스 님을 제외한 신들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 그렇기에 제우스 님이 아닌 당신, 아카리오페께는 제공이 금지된 정보임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 추가로 전할 말씀이 있는가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아카리오페는 전령의 손목을 붙든 그대로 주변에 눈을 돌린다. 검은 깃털이 사방에 떨어져 있다. 지붕은 주저앉은 지 오래. 기둥마저 풍화되어 떨어졌다. 신이 거한다고는 믿을 수 없이 초라한 곳.
아카리오페의 식사 공간.
인간계에도 신계에도 없는, 누군가의 마음 틈새.
헤르메스도 이리스도 닿지 못할 곳을 이 전령신은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군가의 마음에 기댄 중립이란 건 말이야, 깨지기 직전의 알만큼이나 위태롭다네. 태어나는 게 새 생명일지 깨진 노른자일지 모르니까. 이해해?"
- 헤파이스토스 님께 전달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란 말이야, 답답해 정마알!"
- 전언이 아니라면 가보겠습니다.
전령은 훅,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
아카리오페는 명계에서 태어났다. 정신이랄 게 들었을 때는 이미 깊은 물의 바닥, 각질처럼 떨어진 것을 주워 바삐 입에 넣고 있었다. 넣는 것들은 모조리 씁쓰름한 후회의 맛이 났다.
"맛없어."
그게 아카리오페의 첫 말이었다. 마마도 파파도 아닌 미식언을 입에 낸 시점부터, 아카리오페의 성격은 그렇게 결정됐는지도 모르겠다. 입에 낸 말을 곱씹기도 이전에 목소리가 참 못났다는 생각부터 들었으니.
스틱스는 제 밑바닥에 있는 줄도 모르는지 아카리오페라는 불순물을 거르지 않고 내버려두었고. 아카리오페는 죽임당한 인간들의 슬픈 기억을 먹으며 자라났다. 더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도망쳐야 한다. 모르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건 무서워.
그렇게 몇 년을 묵었을까. 아카리오페의 손톱은 매의 발톱처럼 굽게 자랐고, 머리털은 해초처럼 뒤엉켰으며, 다리는 뭍 아닌 곳을 부유하기 좋도록 바뀌었다. 배를 채우기에는 이만한 형상이 없었다.
하지만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생존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어. 포도주의 맛을 보고 싶어. 잘 익은 석류를 손에서 부스러뜨리고 싶어. 버찌를 입에 잔뜩 묻혀가며 어린아이처럼 먹고 싶어― 누군가의 후회에서 엿봤던 것들을 탐내고 탐내다, 아카리오페는 물이 아닌 다른 곳을 누비기 좋은 형상마저 띠게 되었다.
그래, 날개, 날개다!
자유를 얻으려면 달리는 것만으론 부족해, 헤엄치는 걸로도 부족해. 날아서 가는 거야!
이마저도 태양에 닿으려던 누군가의 기억에서 얻어낸 영감이었지만. 충분했다.
아카리오페는 그렇게 아카리오페가 되었다.
*
포도주로는 취하지 못했다. 석류는 먹기 불편했다. 버찌는 시기만 했지 맛이 없었다. 뭍으로 나온 이후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아카리오페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입에 넣어 행복했던 것의 기억뿐. 포도주가 맛있었던 게 아니다. 연인과 함께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으며 밀회하며 입에 대었던 한 모금. 그것이 아카리오페의 미식이었다.
슬펐냐고? 아니.
질투 났냐고? 아니.
내가 아쉬울 게 더 뭐가 있어? 물 바깥에서 이렇게나 자유롭게 다니는데 말야.
인간들이 떨군 영감들은 맛이 좋았다. 헤르메스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몇 글자들은 짧지만 정말이지 진미였다. 전쟁이 터져 헤르메스는 샌들이 끊어질 때까지 달렸고, 신들은 영웅들의 드라마에 열광하며 도파민을 태웠다. 아카리오페는 그걸 훔쳐먹으며 행복했다. 그거면 물 아래의 생활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이대로만 가면 된다, 이대로만….
라고 생각했다.
전령의 신, 그게 생기기 전까지는.
만들어진 전령신은 비겁할 정도로 완벽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어떤 신이든 그 형상을 모사해 냈다. 망가지지도 않았다. 신들의 시시콜콜하고 부끄러운 담화는 칼같은 중립성 속에 감춰져 구경조차 못 하게 됐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러니까 이건 화풀이였다.
아카리오페의 짧은 삶에서 얼마 없는 즐거움을 빼앗아 간 것에 대한 짓궂은 보복이었다. 아카리오페는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헤파이스토스의 공방으로 숨어들었다. 그 헤파이스토스이기 때문에 발을 딛으면 꽥꽥 소리를 지르는 무언가라도 있을까 싶었으나 다행히도 없었다. 대신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 헤파이스토스가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부정교합이야, 아카리오페는 감탄하며 천장에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유리 상자 안에 곱게 뉜 전령신은 애굽의 보존된 사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유리, 헤파이스토스가 설정한 무시무시한 암호가 없다면 건드리는 순간 우렁찬 소리를 지르는 장치겠지― 아카리오페는 생각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스틱스 밑에서 숨죽이고 기억을 축내던 그는 조심스러워야 할 때와 장소를 잘 알았다. 여기서는 머뭇거리다간 오히려 당한다! 아카리오페는 시원스레 쨍그랑! 유리를 깨고 전원이 꺼진 전령신을 들고 날았다.
- 이런 씹…!
소음에 놀란 헤파이스토스가 달려왔을 때는, 괴조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
괴조는 밤의 인간계를 날았다. 달빛을 튕겨내는 인형을 들고 낑낑거리며 날다가, 겨우내 한 곶으로 착지했다. 추격을 따돌리느라고 무진 고생을 하느라, 이젠 정말 무슨 기억이든 먹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더욱 기대가 됐다.
그 전령신이다. 황금사과를 둘러싼 신들의 추문을 가득 담고 있겠지. 응원하는 영웅이 죽임당했을 때, 그 콧대 높은 올림포스의 신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모욕을 서로에게 던졌을까. 이렇게나 시장한 때에 먹은 진미는 내 기억에 얼마나 오래 남아있을까. 어쩌면 평생 못 잊을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이 행위에 사냥이라는 야만한 표현을 갖다 붙이는 게 맞을까?
아카리오페가 하려는 것. 인간들에게 있지는 않은 개념이지만 수술이라고 하면 적절하지 싶다. 제우스의 정수리를 헤파이스토스가 쪼갰듯이 아카리오페도 전령신의 머리를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카리오페의 비틀린 입가에도 웃음이 서린다. 그러기엔 너무도 비위생적이고 조수 하나 없는 곳이지만. 애초에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자아, 제우스가 주었다는 네 마음은 어디에 있니.
그는 군침을 다시며 전령의 관자놀이에 발톱을 찔렀다. 탄성이 곧이라도 아카리오페의 입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짓말."
"헤파이스토스가 여기에 마음을 넣었을 리가 없어."
헤파이스토스. 신들을 경멸하기로 유명한 작자. 올림포스의 신들이 가지는 풍성한 드라마와 인간성을 혐오해 마지않고, 만든 것마다 끔찍한 정확성을 자랑하는 그 사이코가.
마음을 가슴에 넣었다고?
아카리오페가 들여다본 머릿속에는 그저 전령신이 되기 위해 설정된 무수한 값들뿐. 몇만 개의 인과 파생되는 수천만 개의 과로 이루어진, 숨 쉬는 것부터 발 딛는 것까지 글자로 구속된 신. 뭇짐승조차 가지는 마음의 틈새가, 이 전령신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욕망이 없었다. 추억이 없었다. 인상이 없었다. 감정도 없었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아카리오페의 깃털을 흔들고 지나간다. 제우스가 주었다는 마음은 이다지도 싸늘하고 무기질적인 것이었던가? 컸던 기대감만큼 상실감도 컸다. 하지만 이, 이 느낌은… 상실감만이 아니야. 이건 무슨 기분이냐.
아카리오페는 절제해냈다. 글자 뭉텅이로 만들어진 기억은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얼음 같은 감촉. 스틱스의 물처럼 이빨이 시린…. 달콤하지도 쓰지도 않은 맛. 이렇다 적확하게 표현할 도리가 없지만 아카리오페의 마음을 그대로 옮기자면,
"역겨워…."
저 멀리서 추격자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껍데기뿐인 전령신을 버리고 날아가야 한단 걸 안다. 지금 날아도 늦었을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동정할 정도로 끔찍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아카리오페는 그럴 수 없었다. 아카리오페가 스스로를 움직인다고 생각한 생존 본능, 그 이외의 무언가가 자신을 이 자리에 단단히 얽매놓고 있었다.
여기서 외면하면 평생 혀끝에 씁쓰름한 후회의 감촉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지겨울 정도로 맛봤던 스틱스의 맛이. 그래서 아카리오페는
자신의 털가죽을 전령신에게 덮었다. 유리 같은 몸이 바위 바닥에 부딪혀 쩍 소리가 날 때까지 흔들었다.
"일어나, 일어나 이 머저리야!"
"넌 이제부터 자유야. 알아들어? 자유라구."
돌려 말하는 나쁜 성질머리도, 수수께끼를 내고자 하는 기만의 기질도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흘러내리는 털가죽을 전령에게 다시 고쳐 덮어주며, 아카리오페는 외친다.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도 널 구속하지 않아. 너에게 뭐라고 명령할 수 없어."
"그러니까 가! 가서 생각해, 너 자신이 누구고, 뭘 하고 싶은지를!"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살아남아서, 뭘 하는가? 저 흐리멍덩한 유리 같은 눈에 맺혀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음에는 더 맛있는 기억을 내놓는 거야."
"자, 숨도록 해, 달리도록 해!"
"훠이!"
까마귀를 쫓아버리듯, 아카리오페는 잠이 덜 깬 전령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풍덩, 하는 소리를 듣고.
아카리오페는 처음으로 후회에서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