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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일에 끌여들여 잃을 수 없다.'''
신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귀히 여긴다. 누이가 있다면 그리 대할 터이지만 그 방법이 북부의 것이라 서로 소통 방식에 대한 오해가 쌓이고 폭발했다. 결국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자신은 떠날 존재이며, 형님이 목숨을 노리고 있어 멀리 하였다고. 다만 이제 한 배를 탄 사이다. 가까이 있어라, 일이 끝나면 안전해질 터이니.
첫 일탈을 도왔으니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라. 서로 술잔 기울이며 무르익을 적 비밀을 공유했다. 제 형님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고, 자신의 본모습을 보였다. 선 안에 들이니 더 유대감이 돈독해진 느낌이지마는, 꼬리를 희롱당한 것은 다른 의미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리라…….}}}
{{{#!folding 모 윤하
신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귀히 여긴다. 누이가 있다면 그리 대할 터이지만 그 방법이 북부의 것이라 서로 소통 방식에 대한 오해가 쌓이고 폭발했다. 결국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자신은 떠날 존재이며, 형님이 목숨을 노리고 있어 멀리 하였다고. 다만 이제 한 배를 탄 사이다. 가까이 있어라, 일이 끝나면 안전해질 터이니.
> '''"…오늘 말벗 해주어 정말 고마웠단다, 화야."''
> '''"…오늘 말벗 해주어 정말 고마웠단다, 화야."'''
* '''귀히 여기는, 서로의 비밀 나눈 동생.'''첫 일탈을 도왔으니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라. 서로 술잔 기울이며 무르익을 적 비밀을 공유했다. 제 형님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고, 자신의 본모습을 보였다. 선 안에 들이니 더 유대감이 돈독해진 느낌이지마는, 꼬리를 희롱당한 것은 다른 의미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리라…….}}}
{{{#!folding 모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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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께 실로 무례한 발언일 수 있으나, 어느 날 아이와 제가 사라져도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옵고, 주었던 애정이 부족했던 탓이 아닐 터입니다. 그저 무상한 봄날은 찰나일 뿐이고, 무엇이든지 스치다 사라지는 것이 연 아니겠습니까……. 감히 이런 무례를 입에 올리고자 하여 이리 자리를 주선한 바, 부디 용서하시어요."
그때 도련님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알 수 없었다. 알 도리도 없었다. 그날 잠든 아이가 평소보다 더 미동 없었음을, 유달리 어여쁘게 영글었던 낙상홍이 바람 불적 그 몸 투신해 눈밭 새빨갛게 물들였음을 나는 어찌 몰랐을까…….}}}
그때 도련님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알 수 없었다. 알 도리도 없었다. 그날 잠든 아이가 평소보다 더 미동 없었음을, 유달리 어여쁘게 영글었던 낙상홍이 바람 불적 그 몸 투신해 눈밭 새빨갛게 물들였음을 나는 어찌 몰랐을까…….}}}
- 상위 항목 : 도술학당 도화(都華)
"천지신명이 뜻 펼칠 자에게 기회 주었으나 막상 나는 범인이요, 쓸만하지도 못한 몸뚱이 제하면 아무것도 없소. 다만 내 역사에 남겨지지 못한들 그 속에서 뉘우치리다."
巫 我懷 | |
나이 | 19 |
성별 | 男 |
기숙사 | 적룡 |
고향 | 겨울탑 |
1.1. 외형 ¶
무가 사람들 머리는 푸른 기운 도는 검은색이요, 그 풍채가 참으로 위용 있다더니만 아회는 영 그러하지 못했다. 먹빛 흔적, 아스라한 모습만 남을 뿐. 전체적으로 보아 푸른 기운 도는 긴 잿빛 머리칼과 가녀린 체구는 무인務人보다는 문인文人에 가깝다. 물어보면 이 부모에게 물려받았다 한즉, 제 가문 사람들 생각하면 어미를 많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아회 바깥 돌아다님 잦고, 해 자주 닿아 피부 전체에 복숭앗빛 도는 것 정상이나 남들과 달리 유달리 피부 창백하여 이리 보나 저리 보아도 마치 시체처럼 희멀겋다. 손마디와 같은 뼈 닿는 부분, 그림자 지는 부분으로만 복숭앗빛 감도니 손마디 무릎 어깨 할것 없이 발간 색조 은은하며 어린티 아직 벗지 못해 앳된 듯, 성숙한 듯 발 걸친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대칭 이룬다.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그 모호함 섞여있어 신이하니, 무예 닦는 집안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우아하니 조신한 미인상이다. 늘 비녀로 헐거이 쪽을 지어 목을 드러내었고, 앞머리는 적당히 쳐내고 길러 귀 뒤로 넘기었으나 영준하고 반듯한 이마에 머리카락 몇 가닥 내려온다. 길게 뻗고 반듯한 콧날이요, 늘 곧게 다물린 입매와 그 밑의 자그마한 점,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눈은 늘 나긋하게 내리 감겨있으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표정 달라지는 일 없고 여상하나 간혹 눈 위 가지런히 놓인 눈썹으로 감정 드물게 드러내곤 했다. 줄 매여있는 외알 안경을 썼기에 학자와도 같은 단아함이 물씬 풍기며 눈 떠본 적이 없으나 사람들 제각기 떠들기론 저것의 눈 색이 다르다느니, 기실 눈을 마주치면 금술에 걸리느니 하는 헛소문 나돈다만 진위 알 수 없다.
가락다란 목 밑으로 품 넓은 한복 입으니 직접 수선 의뢰하여 붉은 매화꽃피운 자수 퍽이나 아름다이라. 어깨에 걸치는 두루마기도 흰색에서 점점 붉은색으로 바림하며 그 주변 노니는 붉은 적룡 자수는 위용 한 번 드세다. 두루마기 밑으로 간혹 치마 입기도 하며, 고운 손 밑으로 한 손에는 홍옥으로 붉은 용 조각한 부채를, 다른 손에는 부채와 더불어 늘 떼지 아니하는 긴 지팡이 소지한다. 이외의 장신구 일절 하지 아니함에도 생긴 것 자체가 꾸민 듯하니 겉보기엔 단아한 소년이요, 너른 옷차림에 가려져 체구 보기 어려우나 가녀리며 키 172cm로 사내 치고는 작달만하지만 여전히 크고 있다는 것이 본인 주장. 작은 체구요 앳된 인상 탓에 외견만으로는 뭇사람의 '저 사람 말랐으니 뭐라도 먹여라' 싶은 안타까움 사나 어느 쪽이든 밤길 가다 귀기 서린 듯 풀어헤친 머리 마주하면 살아있는 사람인 게 중요하지 외형이 무슨 상관이련지 싶으리라.
아회 바깥 돌아다님 잦고, 해 자주 닿아 피부 전체에 복숭앗빛 도는 것 정상이나 남들과 달리 유달리 피부 창백하여 이리 보나 저리 보아도 마치 시체처럼 희멀겋다. 손마디와 같은 뼈 닿는 부분, 그림자 지는 부분으로만 복숭앗빛 감도니 손마디 무릎 어깨 할것 없이 발간 색조 은은하며 어린티 아직 벗지 못해 앳된 듯, 성숙한 듯 발 걸친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대칭 이룬다.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그 모호함 섞여있어 신이하니, 무예 닦는 집안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우아하니 조신한 미인상이다. 늘 비녀로 헐거이 쪽을 지어 목을 드러내었고, 앞머리는 적당히 쳐내고 길러 귀 뒤로 넘기었으나 영준하고 반듯한 이마에 머리카락 몇 가닥 내려온다. 길게 뻗고 반듯한 콧날이요, 늘 곧게 다물린 입매와 그 밑의 자그마한 점,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눈은 늘 나긋하게 내리 감겨있으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표정 달라지는 일 없고 여상하나 간혹 눈 위 가지런히 놓인 눈썹으로 감정 드물게 드러내곤 했다. 줄 매여있는 외알 안경을 썼기에 학자와도 같은 단아함이 물씬 풍기며 눈 떠본 적이 없으나 사람들 제각기 떠들기론 저것의 눈 색이 다르다느니, 기실 눈을 마주치면 금술에 걸리느니 하는 헛소문 나돈다만 진위 알 수 없다.
가락다란 목 밑으로 품 넓은 한복 입으니 직접 수선 의뢰하여 붉은 매화꽃피운 자수 퍽이나 아름다이라. 어깨에 걸치는 두루마기도 흰색에서 점점 붉은색으로 바림하며 그 주변 노니는 붉은 적룡 자수는 위용 한 번 드세다. 두루마기 밑으로 간혹 치마 입기도 하며, 고운 손 밑으로 한 손에는 홍옥으로 붉은 용 조각한 부채를, 다른 손에는 부채와 더불어 늘 떼지 아니하는 긴 지팡이 소지한다. 이외의 장신구 일절 하지 아니함에도 생긴 것 자체가 꾸민 듯하니 겉보기엔 단아한 소년이요, 너른 옷차림에 가려져 체구 보기 어려우나 가녀리며 키 172cm로 사내 치고는 작달만하지만 여전히 크고 있다는 것이 본인 주장. 작은 체구요 앳된 인상 탓에 외견만으로는 뭇사람의 '저 사람 말랐으니 뭐라도 먹여라' 싶은 안타까움 사나 어느 쪽이든 밤길 가다 귀기 서린 듯 풀어헤친 머리 마주하면 살아있는 사람인 게 중요하지 외형이 무슨 상관이련지 싶으리라.
1.2. 성격 ¶
"아회, 너는 타오르는 불꽃 보다는 타고 남은 잿더미에 가깝구나?"
─ 6학년이 되기 이전, 제 선배 말하기를.
무감하며 정적인 사람. 불이기에 냉랭한 사람도 존재하는 기숙사의 사람이라기엔, 냉랭함을 넘어 초연하니 마치 타고 남은 잿더미와 같다. 아회 사사로운 것에 마음 담지 않았다. 기숙사 영향 강하게라도 받은 것인지 두루 벗 사귀려는 유연한 성미와 거리가 멀었으며 홀로 남을 피하고 겉돌려 했으나 세상은 쉽지 않았다. 하여 다가오는 사람은 받아들이나 그 모습이 최소한이고, 미적지근하니 초연하다. 누군가를 선 안에 들이는 걸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들어왔다 내쫓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려 애썼다.
아회 지나치게 고요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도 과묵하게 침묵을 유지하다, 제 말을 느릿하게 꺼낼 적엔 대화의 흐름이 잠시 어색하게 끊길 정도였다. 스스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때는 필요에 따라 재량껏 입을 벌려 대화의 장을 열기도 한다. 대화를 이끄는 모습은 친절한 편이었다. 그 모습 탓인지 겉으로 보기에 타인 曰 "속내 겉처럼 우아하니 간혹 하는 짓 보면 적룡 기숙사는 고사하고 속세에서 벗어난 듯싶은 사람"이리라.
타인 의견 보듯 감정이 어째 흐린 면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무성의함인지, 혹은 그만큼의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던해졌는지. 모든 어조에서 드러나는 삭막함이 그리하였다. 뭉근한 사람. 깊이 파고들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덕분에 타인 우아하고 초연한 소년으로 알지, 속내 쉬이 알 수 없을지다. 다만 그대 기억하라.
잿더미도 뜨거울 때 있는 법이다.
아회 지나치게 고요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도 과묵하게 침묵을 유지하다, 제 말을 느릿하게 꺼낼 적엔 대화의 흐름이 잠시 어색하게 끊길 정도였다. 스스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때는 필요에 따라 재량껏 입을 벌려 대화의 장을 열기도 한다. 대화를 이끄는 모습은 친절한 편이었다. 그 모습 탓인지 겉으로 보기에 타인 曰 "속내 겉처럼 우아하니 간혹 하는 짓 보면 적룡 기숙사는 고사하고 속세에서 벗어난 듯싶은 사람"이리라.
타인 의견 보듯 감정이 어째 흐린 면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무성의함인지, 혹은 그만큼의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던해졌는지. 모든 어조에서 드러나는 삭막함이 그리하였다. 뭉근한 사람. 깊이 파고들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덕분에 타인 우아하고 초연한 소년으로 알지, 속내 쉬이 알 수 없을지다. 다만 그대 기억하라.
잿더미도 뜨거울 때 있는 법이다.
1.3. 기타 ¶
- 鬼氣 巫氏
─ 낮은 자 높은 자 가리지 아니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 하게.
상징은 검은 비단에 감긴 혼불.
- 시조는 본디 제사장을 호법하던 무인이요, 그 출중한 무예요 가문의 도술 덕인지 맥이 확실하게 이어지고 무가 이름 드높여짐이 옳아야 하나 과거 크나큰 죄 지은 적 있고, 지금도 궁기를 필두로 한 여럿 범죄자 나타나 쇠락의 길 걷고 있으나 가문 자체는 뿌리를 박았기라도 한 듯 겨울탑에서 굳세게 위치하고 있다.
- 쇠락하여 별 볼일 없어 보이나 아직도 이 가문 사람 쓰곤 하니, 가문의 비기로 내려오는 도술과 무예 병행하여 전장 돌거나 제 주인 목숨 바쳐서라도 지키는 꼴이 눈 돌아버린 귀신과도 같으니 그 충심과 경호에서 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 무가의 대다수는 흑룡 기숙사 출신이나 아니무스를 필두로 한 제사장의 비율이 현저히 적고, 제사장의 호위로 명맥을 잇고 있고, 이마저도 배척 당하여 거의 없는 실정이다.
- 현재 낮은 자 높은 자 가리지 않으며 공명정대하란 뜻 그나마 행하고 있으나 가문의 일원인 궁기의 난입, 그리고 아회 무인과 어울리지 않는 문인상이자 난데없이 적룡 기숙사 들어간 행태에 곤욕 치르고 있다.
- 시조는 본디 제사장을 호법하던 무인이요, 그 출중한 무예요 가문의 도술 덕인지 맥이 확실하게 이어지고 무가 이름 드높여짐이 옳아야 하나 과거 크나큰 죄 지은 적 있고, 지금도 궁기를 필두로 한 여럿 범죄자 나타나 쇠락의 길 걷고 있으나 가문 자체는 뿌리를 박았기라도 한 듯 겨울탑에서 굳세게 위치하고 있다.
- 입학 때가 되어서야 무가 사람임이 밝혀질 정도로 존재감 희미했으니 대단한 자제는 아니다. 가문원이 모두 동의를 받아야만 하는 안건에 가끔 서신 쓰는 정도.
- 자주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이따금 넘어지기도 했다. 아회 길치인 듯싶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 전통적인 것에 입맛 두고 있으니 단맛 때문인지 곶감 제법 좋아하며, 떡은 그닥 좋아하지 않으니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면 육류겠다. 물만 있다면 나흘을 넘게 굶는 재주도 있더라.
- 따뜻한 것보다는 미적지근한 차를 좋아했다. 뜨거운 것은 영 미덥지 않다 하였다.
- 하오체를 섞어 쓴다. 필요하다 판단할 때는 다 내려놓고 입 거칠며 언사 거침없어 사람 곤욕 치르게 할 때 있다.
-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존재감 희미하여 어느 구석에서나 쉽게 숨어들곤 했다. 제 성격 탓이다.
- 코의 끝을 위로 하게끔 고개를 드는 버릇이 있다.
- 늘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은 필히 어머니께 기별 보낸다. 효심 깊디 깊다.
- 순간적인 힘은 좋으나 오래 유지하질 못하였다. 무예를 배운 흔적 남아있을 뿐.
- 홀로 있을 적엔 사천성을 즐겼다. 이리 간단하게 머리 쓰는 것 좋아하며 체스는 양것이라며 좋아하지 않는다. 기실 영 젬병인지라...
- 지팡이 짚고 다니며 무슨 일이 있어도 떼놓지 않는다. 제 허리에서부터 곧게 뻗은 지팡이 검은 비단 휘감겨있고 혼불 모양 새겨져 있으니 필히 무巫가의 상징이다. 간혹 육탄전 필요하면 도술 대신 휘두르기도 했다.
- 뱀은 싫다. 뱀은…….
- 궁기. 무가에서 나온 희대의 범죄자, 악인, 도사의 자격을 상실한 자, 괴물……. 아회는 제 가문에서 나온 범죄자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나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죄인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니. 계속 물어보면 환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3.1. 소지품 ¶
- 땅신령 - 목화
"나 귀인님 따라가! 따라가! 많이 배울 거야! 배울 거야!"
SANTA 선물가게에서 일을 도우자,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마리가 아회를 따라왔다.
임시로 부르고자 지어준 이름은 목화.
- 땅에 굴을 파고 사는 요정 혹은 신수 같은 것.
- 털이 굉장히 복슬복슬하며, 하얗고 다 커봤자 15cm가 전부.
- 끝 말을 따라하는 습성이 있다.
- 만지면 삑! 소리가 난다.
- 자랑스러우면 두 발로 서서 가슴을 당당히 편다.
- 땅에 굴을 파고 사는 요정 혹은 신수 같은 것.
2. 관계 ¶
선관은 뒤에 🧧를 붙여두었어요!
- 류 온화🧧
"제발 본인의 육신을 소중히 여기고 위신을……. 말을 말아야지. 내려…주시오."
─ 아회, 공주님 안기를 당했을 때.
- 물 흐르듯 유유자적, 무말랭이.
"내 이리 보여도 적룡이오. 만일 누이로 대하지 아니하면 낭자 이리 행동하였을 때 이미 한바탕 뒤집었겠지."
- 표현하지 않아도 신뢰하고 있다.
"부디……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지척에 깔린 위험에 발 들이기엔 여리고도 너무 많은 것을 쥐었어. 아직 여명 밝을 시간 충분한 네게 무엇이 남았는지 기억하여야지. 그런 네가 맹세해버리면 내가, 너의 주변 사람들을 볼 낯이 없지 않더냐. 너는 싸움을 잘 하며, 머리가 좋고, 도술을 잘 쓰되, 기이한 검을 가졌다. 인간성을 아직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를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네 아직 여기에 발 들이기엔 지나치게 순수하지 않더냐. 하니 울지 말아라, 네 뺨을 왜 치겠더냐. 내 너를 내치지 않으마. 네가 그리 맹세하지 않아도 나는 졸업하기 전까지 떠나지 않을 터이니 이제 그치려무나.."
- 자신의 일에 끌여들여 잃을 수 없다.
"…오늘 말벗 해주어 정말 고마웠단다, 화야."
- 귀히 여기는, 서로의 비밀 나눈 동생.
- 물 흐르듯 유유자적, 무말랭이.
- 모 윤하
"……무엇이냐 말한다 쳐도 필히 다르겠지. 인간은 같은 곳에서 잠을 자도 다른 곳에서 꿈을 꾸는 법인데."
─ 아회, 쿠키 부스러기를 삼키며
- 묘한 꺼려짐, 그렇지만 썩 재미난 말벗.
- 묘한 꺼려짐, 그렇지만 썩 재미난 말벗.
- 불가살
"…벗이 이리도 좋은 정보를 주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오리까. 참으로 기쁩니다, 예."
─ 아회, 미소 지으며.
- "언제 들킬지 모르는, 범죄자와의 밀회와 공조. 다만 죄책감은 없다.
- "언제 들킬지 모르는, 범죄자와의 밀회와 공조. 다만 죄책감은 없다.
- 화유현🧧
"예서 만났으나 이름 다른 것은 달리 변명할 것이 없지. 다만 아쉬워는 말아, 그 이름은 네게만 알려주었잖니."
─ 아회, 유현이 본명에 대해 묻자.
- 동향, 북부의 유일한 벗.
북부에서, 하물며 폐쇄적인 무 씨 가문 밖으로 사람 만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일까, 편히 대할 수 있고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내심 걱정하고 있다. 제 형님과 마주하면 필히 위험해질 것이니, 어떻게든 선 그어야 하거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 동향, 북부의 유일한 벗.
- 英 사감
"…악인이라는 운명이 있는 제가 감히, 그 길을 선택해도 될는지."
─ 아회, 애처로이 웃으며.
- 가장 큰 비밀을 함께 하며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자.
- 가장 큰 비밀을 함께 하며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푼 자.
2.1. 궁기 ¶
분리 사유: 관계성이 짙기 때문에 분리하였습니다…….
- 아회 曰
"……궁기라 함은 무거운 죄를 지은 자 아니오, 죄인은 심판 받아야지."
─ 아회, 평상시 궁기에 대한 질문을 들으면.
"아뢰기 조심스러우나 듣는 귀가 많습니다. 늘 입을 중히 여기라 하였지 않았습니까."
─ 아회, 집안에서 이야기 나돌 적.
본능적인 공포를 다른 본능이 짓누른다. 원초적인 감정이 일렁였다…… (중략) 압박감. 정신이 아득해진다. 기절할 것만 같다. 마른침을 삼켜도 먹먹한 귀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 아회, 직접 조우하였을 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당신도 잿더미가 되어주어야지. 나를 단 하루라도 형제라 생각했다면 동등한 가치를 보여줘야지, 끔찍하게 싫다, 짜증이 치민다, 역겹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다……. 그리고 생각한 그 모든 감정을 내게 고스란히 느낀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
- 아회는 궁기의 동생으로, 과거 사이가 원만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궁기를 향한 극도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
- 현재 원내에서 이 사실을 아는 학생은 없다.
- 아회는 궁기의 동생으로, 과거 사이가 원만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궁기를 향한 극도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
- 만남
세상이 멸망해 형님과 자신만 남는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둘은 배다른 형제로, 사생아이던 아회는 가계 도술을 배우게 된 시점을 계기로 궁기에게 의지했다.
감정이 요동친다.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친다. 호흡이 흐트러졌다. 비명이 목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호통이라도 치고 싶으나 손이 덜덜 떨린다. 떨림이 몸으로 전파된다.
─ 수업 외 이벤트 中
- 학당에 재학한 이후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득한 과거의 공포 때문이었다.
"친우입니다, 치, 친우입니다! 워, 원내에, 자, 작은 소란이 있어 수업이 미뤄진 터라, 도움이, 도움을, 요청하여, 그러니까…… 잘못, 잘못했습니다……."
너는 행복하느냐? 그렇게 비굴하게 살아 행복하였더냐? 꼬리를 말고, 뜻을 펼치지 못하여 행복하냔 말이다. 그것이 네 삶이라면 네 어찌 적룡의 선택을 받았느냐. 어찌 다짐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꾸짖었느냐, 아둔한 것아, 네 목표를 잊은 것이냐! 네 삶이 영영 겨울이로고, 겨울이로다. 네 죄가 깊고도 깊다.
─ 일상 및 독백 업경대 中
- 두번째 만남 또한 겁에 질려버렸다. 궁기에게 꼬리를 말았다는 자신에게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내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구나. 애정 따위는 그때 집어치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직 미련이 있어. 어리석은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내게 써먹을 수 있는 패를 보여주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당신도 나와 같은 피 물려받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이 패를 어떻게 써먹고 무엇을 내어줘야 할까. 당신은 나와 달리 산전수전 모두 겪고도 살아남은 4명의 도사 중 하나다. 그런 당신을 상대하려면 어떤 말을 버리고 전진하여야 체크메이트로 승리를 따낼 수 있을까…….
형님은 아실까요, 알고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표정 하나하나가, 웃을 적엔 어디부터 호선이 그이는 지, 어디가 찡그려지는지, 어디에 주름이 지고 어떤 방향이 조금 더 올라가는지 이 하잘것없는 눈에 모조리 담기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내가 소경처럼 손으로 당신의 얼굴 윤곽을 더듬었던 이유는 당신이 실존하는 것인지, 내 오늘 또 몽중에서 헛된 망상이나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몽중도, 내 망상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내 결국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허상이라면 내 추잡한 망상에 괜히 당신을 몰아세우며 내 잣대로만 보는 것에 참을 수 없는 역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후회할 일이 많다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후회를 연상케 하는 발언은 무 씨 집안 답지 아니합니다, 형님……."
─ 일상 中
- 세번째 만남. 무슨 아무래도 근래 있었던 일 때문에 기어이 미치고야 만 것 같다. 아니면 너무 멀쩡한 날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결심을 확고히 다진다. 반쪽의 피를 이은 존재에 대한 증오심을 꽃피웠다.
- 둘은 배다른 형제로, 사생아이던 아회는 가계 도술을 배우게 된 시점을 계기로 궁기에게 의지했다.
3. 독백 ¶
- 서신 - 첫 번째
- 本第入納, 母
─ 친전(親展)
겨울탑에 비록 꽃 피지 아니 하오나 봄기운 완연함은 인간의 몸에 깃드니 기체후 일향만강 하시었나이까.
취백(就白) 하오니 소자 곧 기나긴 배움의 끝이 다가오나 영민하지 못한즉 어머님의 너른 지혜와 온후하심에 기대고자 하여 이리 기별 드리옵니다.
소자 살아가오니 답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고민과 불안함이 이따금 치솟곤 합니다.
과연 소자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무모한 것이 아닌지도 떠올리곤 하니 무씨의 피 일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부응하지 못하는 듯하여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답신 없으셔도 그것 또한 어머님께서 주신 답이요 소자 기꺼이 받아들일 터이니 언제라도 그 비상하심과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어머님, 겨울탑 날씨 매섭기에 걱정 기인하여 말씀 올리오니 부디 몸 성히 보존하소서. 그곳에도 완연한 봄날 다가오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불비백(不備白) 소자 아회 상서.]
아회는 편지를 고이 접었다. 사랑하는 어머님. 저는 기실 이 마지막 학년이 기대가 됩니다.
다 자라 어엿하게 사회에 나가 섞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 그 미래에 대한 것이 내심 기대가 됩니다.
소자 이럴 때면 스스로도 어른 되기엔 멀었다 싶은 듯싶으니.
예, 부디 평온하게 졸업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부디."
아회 홀로 있는 방에서 눈 가늘게 뜨며 입술 호선 긋는다. 오늘은 괜한 감상에 젖으니, 답지않게 겨울탑의 모질고 세찬 바람이 그리운 날이다.
- 몽중
- 적룡이라 함은 본디 그 붉음에서 뜨거움을 연상하기 쉬우나 그의 기숙사 방은 차가운 편이다. 차가운 북부 출신이다 보니 추위가 그리운 날엔 간혹 벽난로를 통해 방을 보온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러그가 깔렸다 한들 맨발로 걷기엔 제법 서늘한 바닥을 맴돌다 보면, 발 끌리는 소리와 일정한 박자로 무언가 내려놓고 떼는 소리가 방을 울린다. 소리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췄다. 침상 앞이다. 침상 앞에 지팡이를 양손으로 짚고 선 그를 보자니 풀어헤친 채 젖은 기가 이제 막 가시기 시작하는 머리요 새하얗고 긴 기장의 야장의(夜長衣)로 보아 잠들 준비를 이제 막 마친 모양이다. 그는 느릿하게 침상에 걸터앉았다. 지팡이를 한구석, 늘 세우던 곳에 모셔놓고는 부드러운 재질의 침상을 손으로 쓸었다.
해시(亥時),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학기의 시작은 아직 멀었으니 당연히 과제도 없었거니와, 바깥에 나가기엔 학기의 시작과 마무리 때마다 적룡 기숙사는 유달리 싸움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가 손으로 정갈하게 이불의 끄트머리를 더듬어 쥐어 들어갈 자리를 만들던 시점에도 방 밖은 고성이 쟁쟁했다. 아마 사감과 학생의 싸움일 터다. 저런 예민한 시중에 나갔다가 불미스러운 싸움판에 휘말리고, 피곤함으로 학기를 시작하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었다.
본디 잠이란 누우면 자연스레 드는 법이며, 그 차이는 조금 일찍 잠들거나 아니면 뒤척이기를 한참이다 원래 잠들던 시간에 잠들거나 둘 중 하나였을 터다. 그는 몸을 뉘어 머리를 부채꼴로 높이 펼치고, 눈을 감았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전자인 듯싶다. 두꺼운 이불을 덮기가 무섭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듯싶더니, 이내 기숙사 학생들이 이대로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뜯어말리는 소리도 귀에서 멀어졌다.
그는 외진 복도를 걷는다. 관리가 잘 안되었는지 거미가 이곳저곳 둥지를 터 거미줄이 만연하며 먼지는 걸을 때마다 뒤를 따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는 문을 열었다.
놀라울만치 화려한 방이 보이기가 무섭게 무언가 날아들어 그의 머리를 거세게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눈두덩이 시큰거린다. 맞을 때 느껴지던 아찔함과 더불어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를 듣자 하니 보석함이거나, 아니면 벼루겠지. 눈두덩만 맴돌던 뜨거움이 뺨까지 줄기가 되어 낙하하는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낙하하듯 흐르던 것은 이내 턱 선을 타고 흐르다 더 그릴 곳이 없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그린 듯이 벌어진 광경이었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훑지 않아도 피가 흐르는 것 정도야 알 수 있었다. 씨익거리는 숨결이 귀에 꽂힐 적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소리의 주체를 향해 다가갔다. 방 한가운데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우는 소리가 서럽기 그지없다. 그는 팔을 뻗었다.
"누가…… 이리도 슬프게 하였습니까."
품을 내어주면 정신없이 품에 안겨 서럽게도 운다. 목에서 턱턱 막혀 뱉지 못한 울분을 뱉어내고 싶은지 크게 몸이 요동치면 그는 얌전히 등을 다독였다. 몇 번이고 몸이 요동치다 마침내 진정할 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었기에.
"어머니, 이제 괜찮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이 다시금 요동쳤다. 팔이 앞으로 쭉 뻗어 나와 허공을 더듬을 적에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정녕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더냐. 내 지금 몽중이 아니더냐, 그렇지, 꿈일 것이다. 아니면 그럴 리가 없을 터다……. 아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렸다. 예. 이 아회가 여기에 두 다리를 굳건히 한 채로 있습니다. 등을 조금 느릿하게 다독이다 보면 어느덧 아회는 품에 온전히 안겨있다. 앙상하나 너른 품에 안겨 고개를 쭉 올린 채 가만히 있을 적, 조금은 부드러운 어조가 더듬더듬 입을 뗀다.
"아회야."
"예, 어머니."
"아회야……. 아아, 아회야."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MA 님은 모두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는 숨을 황급히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황급히 들이켠 숨의 양이 턱없이 모자라다. 호흡이 불편했고, 식은땀이 흘러 온몸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방의 온도와는 다른 오한이 몸에 끼쳤다. 숨을 쉬어야만 했다. 막힌 숨을 토해내고, 어떻게든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숨을 쉬고자 하는 자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밭은 기침과 함께 몸의 떨림이 잦아든다. 앞섶을 움켜쥔 손은 여전히 가늘게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그는 그 감각에서 시선을 떼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고개를 들었다.
아.
살아가며 몽중을 헤매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나 그 선명함에 나는 가라앉고야 마는구나.
"……부디."
─지 마십시오. 무어라 씹어뱉었으나 바깥의 소음에 가려져 들리지 아니하니, 어두운 방에서 홀로 고개 숙인 표정이 어떠하였을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다.
- 유령
- 무씨 가문에는 유령이 존재했다. 긴 머리는 빗질 잘 하였다 한들 산발이요, 사람들은 곁을 스쳐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아니하고 그것 또한 발소리 일절 내지 않으며 돌아다니는 재주 있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타나 주변을 맴돌던 유령은 어느 순간 시선을 떼면 사라지곤 했는데, 찾아보면 구석에서 제 어미 곁에 꼭 붙어있곤 했다. 그 순간에도 말이라곤 일절 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시선을 피했으니, 유령은 대대로 제사장 호위 기르는 무씨 집안에서 무인으로 자라기엔 어렵겠노란 이야기를 듣곤 했다.
또, 가끔은 어미가 가문의 일 때문에 불려나가곤 하였다. 그럴 때면 홀로 남은 유령은 소리를 죽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북부 아닌 곳에서 온 사용인들 말하기를 '제 어미 곁에서 떨어지며 그 나이면 불안한 것이 당연하나 해 떨어져도 조용히 자리 지키고 일절 움직이지 않는 녀석이니 도통 의중을 모르겠다'라며 치를 떨곤 하였으니, 유령이 도술로 회춘한 것은 아닌지, 혹은 진짜 유령이 아닌지 제각기 열띤 토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유령이 가문원 중에서 제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이 모습이 달라졌는데, 어미가 불려나갈 적엔 소리 없이 사라지며 누군가를 만나고는 하였다는 점이다. 돌아올 때면 간식 품에 가득 안고 수줍게 미소 짓곤 하였으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깊고 경쾌한 타박타박 소리 나는 것이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유령이 아닌 사람이구나 확정 지었으나 무씨 집안의 누굴 만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어 또 사용인끼리 작은 입씨름이 벌어지곤 했다. 머잖아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졌으나, 사용인들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단지 무씨 가문이 한번 크게 뒤집어지고 쑥대밭이 되었던 이후 유령은 나이에 맞지 않는 차분한 표정으로 정해진 시간마다 발걸음을 죽이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홀연히 돌아오는 등 다시금 유령의 행보를 반복하였다는 점만 아스라이 남았을 뿐이다. 이는 유령이 학당에 재학하고 방학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어머니가 계신 별채에서 비통하게 목을 놓아 우는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용인들은 유령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암묵적인 규칙으로 정했다.
지금도 유령이 밖을 나돈다. 자다 깨었는지 요추를 넘어 허벅지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산발머리가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더불어 짚는 지팡이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퍽 기이하다. 그렇게 휘청휘청 위태로이 길 걷다 보면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데, 작은 휘파람 소리 들린다. 휘파람이 멈추면 저벅저벅 걷고 어딘가로 휙 돌아 꺾으며 다시금 휘파람 소리가 울린다. 이내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요 이 새벽 어두컴컴하니 어지간한 사람의 담력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곳이다.
"머잖아……."
유령은 잔털이 돋아난 제 손등을 느릿하게 쓸어 보이고, 고개를 들어 코를 위로 치켜올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은 뒤로 풀썩, 툭, 두루마기 어깨에서 흘러내려 땅에 덮이는 소리요 지팡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소리만 울린다. 투박한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허공만 하염없이 쳐다본다.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하여 도통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싶었건만 여전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는 결국 선택을 내려놓을 수 없고, 한 가지 알껍데기에 단단히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하는 잿더미가 되고 죽음만이 고요히 온 땅을 덮을 터입니다……."
하여 인생사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여 삶은 무상하니 봄날과 같구나……."
유령이란 삶을 살아오는 것은 본디 그러한 것이다.
- 여반장
- "아회야."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종달새 지저귀듯 사랑스러웠다. 아직 새의 울음소리를 구분할 정도로 많은 소리를 듣진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울음소리가 예쁜 새가 있다면 제 어미 앞에서 부리를 딱 다물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는 사랑을 가득 채워 사람으로 빚은 듯싶었다. 여기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거니와 다른 지역으로 가본 적도 없지만, 책에서나 보던 봄날을 한 아름 안은 것 같은 사람. 그런 어머니와 달리 이곳은 차갑고, 편이라곤 일절 없었다. 아무도 사랑을 쏟지 않는 것이 냉랭한 눈초리는 나 삭막한 겨울에서 자란 마탑 사람이요, 잇새로 보이는 발음 하나하나는 나 겨울 첨예한 고드름 닮았소 하고 있었으니. 아회는 어린 나이지만 무씨 집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편 없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어머니."
그런 이유에서인지 아회는 어머니의 말이라면 찰떡같이 듣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꾸짖을 때도 그 이유를 조목조목 알려주셨고, 무언가를 할 때면 그 방법에 대해 온화하게 알려주며, 어려울 때는 직접 편이 되어주었으니, 가까이 다가가면 얼어버린 볼이 쓰라릴 정도로 친절하지 못한 난로와는 궤를 달리하는 봄날 같은 온기는 어린 아회가 푹 빠져 어미 품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이유로 충분하고도 남았을 터다.
"사랑하는 우리 아회, 내 보물 같은 아이야."
어머니는 오늘도 머리를 빗겨주다 말고 아회를 크게 안았다. 아회는 이 품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그것도 참 나쁜 표현이다. 좋았다. 차고도 넘쳤다. 낯간지러운 말을 쏟는다 해도 그것이 어머니의 애정 표현인데 어떻게 싫지 않노라, 부정의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온갖 긍정적인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었다. 아직 많은 단어를 모를 때라, 보답하는 것을 몸으로밖에 배우지 못한 어린 아회는 이럴 때면 몸을 돌려 그 너른 품에 가득 안기곤 으레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세상의 모든 행복을 쥔 미소를 짓곤 했다. 아직 팔이 짧고 키가 다 크지 못해 어머니를 품에 다 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쭉 뻗는 것에서 자신의 모든 애정을 쏟으며 자신이 어머니의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는 그 모습이 예뻐 죽겠다는 듯 조그마한 몸을 으스러질 듯 꽉 안고 장난을 쳤다.
"어머니이, 어머니. 숨이 막혀요!"
"기특하기도 하지, 사랑스럽기도 해. 아회야. 어미가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 알고 있어요. 이번 주만 하여도 열 번이 넘으셨단 말이에요."
"그걸로도 모자라다, 모자라. 아회야, 어미가 널 사랑하는 만큼 MA 님도 너를 사랑하실 거란다."
"정말요?"
"물론이지."
아회는 품에서 어머니를 보기 위해 고개를 비집고 쭉 빼들었다. 정말 사랑하실까? 온화한 표정에는 확신이 가득 찼고, 봄이 가득했다. 어머니 말씀처럼 그러면 좋을 텐데! 어머니가 종종 말씀하시기를, 우리 무씨 집안사람들이 조상대에서 아주 큰 죄를 지었다더라. 어머니는 신실한 신앙으로 하여금 영원한 겨울에 갇힌 북부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MA 님께서 언젠가는 무씨 집안사람들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아회 또한 자신이 선조의 죄를 씻고 차가운 겨울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면 사람들도 모두 봄날 같은 따뜻함을 제각기 품고 살 텐데. 아회는 말없이 품에 푹 안겨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피어오르는 생각을 지우고자 하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죄를 지은 가문에서 태어난 나는…….
"아회야."
"네, 어머니."
"그 누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다른 취급을 받겠더니. 그렇지?"
아회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어서 긴 겨울이 끝나기를 바라자. 그리고 언젠가 다 자라면 어머니를 품에 안아드리자. 겨울이 가시지 못한들, 나만은 어머니의 편이 되어 든든하게 곁을 지키자. 머리를 빗다 말고 마주한 품에서 아회는 꾸벅꾸벅 졸다, 온기에 패배해 잠들었다.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눈두덩과 뺨을 찢어버리듯 강타하는 여러 충격과 함께 보석함이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화려하고 값진 돌덩이가 바닥을 구른다. 정신이 아찔했고, 충격이 원체 큰지라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줄기처럼 흐르던 피는 어느덧 뺨을 무성히 덮었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앙칼지고 목을 찢을 듯한 고성이 귓전을 때렸다.
"나가라, 나가!! 네 존재로 하여금 모든 것이 망가졌다. 모든 것이 네 탓이다. 네 탓이란 말이다! 너는 죄인이다, 너도 결국 무씨 집안의 피를 이은 죄인이다! 고결한 척 하여봤자 너라고 다를 것 같더냐!"
아회는 그날을 잊지 못했다. 어머니가 바뀐 날. 그때의 소리와, 차가웠던 겨울날 공기와, 숨소리와, 목에서 끓던 피 냄새까지. 아마 앞으로도, 자신의 몸이 잿더미가 되어 허공에 흩날릴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서럽게 우는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한때 들었던, 이 세상의 모든 한을 다 떠안듯 울부짖던 소리와 비슷했다. 아회는 그 울음소리에 묻힌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쓰러지듯 주저앉은 여인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어머니."
가녀린 체구가 품에 온전히 들어온다. 한때 닿지 않아 갖은 애를 썼던 것이 이리도 쉽게 행해진다. 아, 이제 나는 장성하여 팔이 닿고 어머니를 품에 안을 수 있는데 어찌 어머니는 홀로 외로운 길을 택하셨나이까……. 아회는 등을 토닥였다. 여인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벌벌 떨며 울음을 토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아회는 상냥한 손길로 여인을 어르고 달래며 작게 속삭였다.
"다 괜찮습니다, 제가 죄를 짊어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편히……."
"으윽, 흐으윽, 윽……."
"소란스럽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머리요 체격 다부진 남성이 뒷짐 지며 아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회는 예를 갖추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여전히 아물지 못한 피가 후드득 쏟아졌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나누기에 상황이 좋지만은 않구나."
"시생 익숙하오나 가주님께 누가 될까 걱정이옵지요."
"아니다, 광증을 내 어찌하겠더냐. 다만 그런 취급을 받음에도 네 여전히도 효심 갸륵하구나 싶을 뿐이다. 그래, 가끔 너를 보면 경탄스럽다."
"가주님의 덕을 시생의 몫으로 돌려주시니 과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나의 덕분이다?"
"예. 시생 또한 미약하나 무가의 피 이은 몸이요, 가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가문의 무한한 은혜 덕분에 어머니께서 몸 보전하고 계시오니 어찌 감읍하지 않으오리까."
"하하! 녀석. 예쁨 받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아는구나. 이거야 원, 집안의 다른 녀석들이 본받아야 할 터인데 말이다."
남성은 만족하듯 소리를 높여 웃었다. 아회는 말도 못 하고 벌벌 떠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잠시 돌리며 등을 느릿하게 다독였다. 남성은 여인을 향해 무기질적인 시선을 보내다, 아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네 지금 상황을 보아라. 다디단 말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이 명 달리할 듯싶으니 치료하고 가거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또한 네 학당으로 출발하기 전에 같이 오찬이라도 들자꾸나."
"예?"
"봐라, 비쩍 말라서는 어찌 무가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느뇨?"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것은 있더냐?"
"…차가 뜨겁지만 아니하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아니합니다."
"하면 내 정성껏 준비하라 이르겠다."
아회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 돌려 나가버리는 가주 보다가, 숨 헐떡이고 울음 뱉는 소리에 천천히 허리 숙였다. 사시사철 겨울인 곳은 차갑고도 냉혹하니, 어머니 사무친 추위에 혹여 얼어붙지 아니하도록 품음이 옳지 아니한가.
"가주님은 가셨습니다."
"으, 으으……."
"어머니,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 아회가 굳건히 무씨 가문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MA 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실 터입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나지막이, 그리고 상냥하게 입술을 달싹였을 적, 발버둥 치며 끔찍하게 비명 지르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목을 쭉 빼들며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말을 뱉어댄다. 손에 잡히는 대로, 손아귀가 새하얗게 될 때까지 아회의 머리채를 덥석 쥐며 당기는 손길이 우악지고, 갖가지 보석이 휘어잡힌 머리채 때문에 목선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생채기를 남긴다. 아회는 그 광증을 버티는 듯하다, 제압하듯 덥석 다시금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니."
이후 품에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인의 등 뒤로 보이는 거울에 발버둥 치는 모습과 굳건히 자리한 자신이 비쳤지만, 어떤 몰골인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피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소란에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어떻게든 패악질 부리는 여인을 떼어놓고 제압하려 안간힘을 썼을 적, 아회는 비틀대며 일어섰고, 그 몰골을 보며 몇 사용인들이 질겁해 새된 비명을 지르더니 부축하려 들었다. 휘어잡혀 헝클어진 머리와 목에 남은 잔 생채기, 그리고 찢어진 눈두덩과 얼굴 반을 덮은 피는 여전히 뚝뚝 떨어져 옷을 적셨으니 몰골이 말이 아닐 터였다. 아회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하."
아, 사무친 겨울이 도통 끝이 나지를 않는구나. 봄은 이리도 허망히 피고 지는구나…….
- 업경대
- 아회의 방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깔끔함을 유지하곤 했다. 어질러진 물건 없거니와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였으나 지금은 다르다. 아니, 많은 것이 달랐다. 천부에서 돌아오는 길도 평소라면 하지 않을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태였으며, 기숙사에 들어갈 적에도 황급한 걸음이 몇 번이고 미끄러져 휘청이고, 부딪히면 미안하다 먼저 사과하던 것이 상대를 되려 휙 밀치듯 하며 일언반구 없이 가버리니 6년 동안 같이 지내던 기숙사 학생도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어이를 상실했다. 하물며 문 닫는 소리마저 조용하던 것이 쾅, 하고 문 크게 닫더니만 그 이후로 깨부수듯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으니, 어안 벙벙하던 학생은 정신을 차리고 도망쳤다.
흐트러졌다. 심상이, 그간 다짐해온 것이 흐트러졌다! 내가 꼬리를 말았다. 감히, 감히 무가의 자랑스러운 피를 이은 사람이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꼬리를 말아버렸다. 지레 겁을 먹어 비굴하게 배를 드러내며 장단에 맞춰 아우 노릇을 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더욱 분한 것은 그 순간 자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손가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더니만 우뚝 멈춘다. 정적은 시간이 멈춘 듯이 길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시계 초침을 빼버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고, 이내 그 정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차례 산산조각이 났다. 테이블 위를 팔로 거칠게 쓸자 있던 물건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을 채웠다. 꽃병은 말라비틀어졌는지 물도 나오지 못해 파편이 방 모든 곳에 튀었다. 그리고 다시금 정적이 일었지만, 이번엔 다른 소리가 들렸다.
쿵!
아회는 테이블에 머리를 거세게 박으며 노성을 참기 위해 부들부들 떨었다. 거친 숨결과 함께 속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악물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던 것인지 머리를 거세게 몇 번을 더 박아대자 비녀가 풀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목을 옭아매듯 뱀처럼 기어다니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나는 아직도 이런 것으로…. 부들부들 떨던 몸 사이로 거친 숨이 날카로운 웃음으로 두어 번 흐른다. 하, 하하! 들썩이는 어깨를 뒤로 테이블 위로 붉은 방울이 떨어져 번지기 시작했다. 한참이고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모양새로 있던 아회는 양손을 들어 몇 번이고 얼굴을 문질렀다. 강박적인 행동은 얼굴에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뜯어버리고 싶다. 이 낯가죽을 뜯고 찢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업경대인가? 그래, 저것은 업경대다. 죄가 막중하다! 저 안의 존재는 여전히 꿈결 걷듯 몽롱한 표정이나 짓고 있겠구나. 그래, 너는 행복하느냐? 그렇게 비굴하게 살아 행복하였더냐? 꼬리를 말고, 뜻을 펼치지 못하여 행복하냔 말이다. 그것이 네 삶이라면 네 어찌 적룡의 선택을 받았느냐. 어찌 다짐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꾸짖었느냐, 아둔한 것아, 네 목표를 잊은 것이냐! 네 삶이 영영 겨울이로고, 겨울이로다. 네 죄가 깊고도 깊다. 나는 죄인의 탈을 벗을 것인데, 너는 그 안에 갇혀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것이냐! 거울을 한참이고 마주하던 아회는 몸을 일으키더니 걸음을 옮겼다. 비틀대는 움직임이 취객보다 몇 배는 더 위태로이 휘청대더니만, 깨진 꽃병 조각을 밟은 나머지 발에 피가 스미며 핏자국이 족적으로 남는다. 느릿한 걸음과 동시에 손을 까딱이자 지팡이가 쉬이 날아와 손에 잡혔다. 아회는 양손으로 지팡이를 쥔 팔을 들었다.
와장창-!!
아회가 조각이 난다. 여러 명이 되고, 수십 명이 되며, 스친 파편에 의해 피가 흐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란스럽게도 거울을 깨부순 몸이 거친 호흡을 따라 크게 요동치다 점차 잠잠해졌다. 사위가 고요하다. 벽난로 불 붙이지 않아 소름 끼치도록 추운 곳이다. 달도 지레 겁을 먹어 구름 뒤로 숨은 나머지 발을 들이지 못하고, 불빛 하나 들지 못한 암실은 마치 호랑이 한 마리가 휘젓고 간 것 같다. 여러 물건이 깨지고, 부서지며, 마침내 거울까지 박살 내어 파편이 이리저리 튀어 난장판이 된 방 사이에서 피 묻은 족적과 새빨갛게 물든 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지팡이를 마치 칼처럼 역수로 쥔 채로 우뚝 선 봉두난발의 사내, 혹은 짐승. 그늘이 져버려 표정을 도통 확인할 수 없는 짐승은 고개를 치켜들고, 긴 제 꼬리를 느릿하게 늘어뜨리며 길게 심호흡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댔다.
"모두 잿더미로구나……."
- 우천
- 언제였지, 그래. 비가 내리던 날이었을 터다. 북부에서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은 드물었다. 그 짧고 어린 삶에서, 책에서나 나오던 묘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창가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땅이 젖는 것이 하도 신기해 글공부 봐주던 가문의 어르신이 곁으로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날. 수업이 다 끝났으면 나가지 무얼 하냐는 따끔한 호통 소리에 벼루며 붓이요, 글자 공부하는 책을 품에 가득 안고 꽁지가 빠져라 발걸음을 옮겼을 때,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돌아가려면 그 빗줄기를 뚫고 넓은 기와집의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야만 했던 날. 저것에 맞으면 필히 젖겠지만, 눈처럼 그냥 맞고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자박자박 걸었을 때 깨달았던 것이 우수수 쏟아지는 장대비라는 것은 어리고 연약한 몸에 있어 상당히 아프다는 것과, 비는 몸을 빠르게 젖게 하며 바람결에 스치니 눈보다 더 차갑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벌벌 떨며 걸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겐 가문의 유령이라는 별칭 딱 걸맞게 다른 사람들처럼 우산 받쳐주는 시종도 없었거니와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기엔 작은 몸뚱이로 몇 보는 더 걸어야 하는데…….
빗줄기에 젖은 손 때문에 무거운 벼루가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나는 몸을 웅크려 앉았다. 벼루를 쥐고 싶어도 꽉 벼루를 쥔 나머지 손바닥으로 쥘 힘이 없고, 장대비는 아팠으며, 책도 젖었고, 몸을 웅크리니 품에서 빠져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위태롭게 벼루를 향해 손을 뻗어 쥐기를 몇 번, 그만 품에 위태로이 안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러고 있다가 돌아가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물방울이 머리카락과 뺨을 타고 떨어졌다. 땅을 한참이고 쳐다볼 때 후드득 비 몸에 쏟아지던 소리가 좀 높은 곳에서 들렸다. 몸을 세차게 때리던 빗줄기도 느껴지지 않아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산을 들고 있던 당신이다. 그때 당신이 날 마주하며 뭐라고 했더라, 아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니? 였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 전 추위 탓에 한번 훌쩍였다.
"그게, 도련님, 쉬었다 가려고 했어요."
새파래진 입술로 얘기했을 때, 당신이 되물었다.
"여기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작은 마님은?" 내 침묵에 당신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당신은 어머니가 계신 곳까지 바래다줄 테니, 힘들지 않으면 일어나자고 타일렀다. 나는 허둥대며 쏟아진 필기구와 책을 품에 안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내 걸음을 맞춰주었다. 몇 걸음의 침묵이 어색한 나머지, 친절에 조바심이 난 나머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달달 덜리는 입술로 얘기했다.
"저, 그게요." 당신이 귀를 기울였다.
"처음이에요, 이런 거. 누가 우산을 받쳐주는 것도, 같이 걸어주는 것도……."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우렁찬 빗소리에도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는 것과, 당신은 나를 유령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만 남아있다. 나는 낡고 거미줄이 가득한 곳에 발을 디뎠고, 젖은 머리카락이 무거웠음에도 당신을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 올렸다. 당신은 돌아갈 것이고, 그 사실에 나는 욕심이 덜컥 치솟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는 가문의 유령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두려웠던 나머지 내가 얘기하고 말았다.
"저, 그게. 그러니까, 도련님."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렇게 더듬더듬 얘기하던 나를 마주 보던 당신의 표정이 어땠더라.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 심한 고뿔에 걸리고 열이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표정이 내 머리에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비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뒤의 거리처럼, 당신이라는 존재가 이미 아득히 기억에서 씻겨 내려간지 오래다. 나는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도 나는 씻겨져 내려간다. 당신은 씻겨져 내려간다. 그때 무릎에 묻었던 진흙처럼, 세차게 내린 비가 내 속을 씻었다.
나는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눈을 짓누르듯 덮어 가리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당신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我懷
- 북부는 사시사철 겨울이었고, 춥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추운 날이 있으면 모를까!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북부의 척박함과 추위를 싫어하며 선조를 욕하곤 했지만, 적어도 여성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기가 좋았다. 아니,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이 북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어마어마한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커다란 눈에 담은 북부는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와 서리가 내린 꽃, 언제나 내리는 첫눈, 그리고 아롱아롱 맺힌 고드름……. 하나하나 짚어보면 미처 모르던 소박한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겼고, 눈 내리는 너른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광활함에 넋을 잃었다.
그건 이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용인으로 일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얘기지만 한때 찬란한 아름다움을 간직했을 것만 같은 이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 이전 생에서 한번 와본 것처럼 마음속에 깊이 와닿는다. 이 집에서 영그는 낙상홍과 동백꽃을 사랑한다. 얼어붙은 호수 위로 가끔씩 쉬었다 가는 겨울 철새를 사랑한다. 차오른 달을 사랑했다. 눈송이와 함께 흩날리는 누군가의 삶의 증표인 뽀얀 숨결을 사랑했고, 타오르는 모닥불의 냄새를 사랑했다. 여인은 이 북부와 남다른 사랑에 빠져있었다.
"화련아."
그리고 당신도. 여인은 활짝 웃으며 뽀얀 숨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빛에 빛나는 검푸른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새파란 눈을 가진 남성은 이 겨울을 사람으로 빚어놓은 듯 고고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치 벼락이 치는 것만 같았다. 그 번개 같던 순간의 기억은 평생토록 함께할 것이다. 여인이 북부에 품은 사랑처럼 영원히! 여인이 뛰어올 적, 남성은 팔을 벌리며 여인을 한가득 품에 안았다.
"도련님!"
"네 뛰지 말래도. 북부는 미끄러진다고 누누이 말했잖느냐."
"그렇지만……."
"거기다 오늘도 한 시진 일찍 왔겠구나, 그렇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내 눈은 못 속이지. 볼과 코가 새빨개선…… 네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이다."
"괜찮아요! 저, 이렇게 보여도 령도 사람이라 몸 하나는 튼튼하답니다!"
화련이라 불린 여인이 품 속에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 하나를 들어 올린 뒤 마치 근육을 자랑하듯 굽히자, 남성은 참을 수 없었는지 웃음을 터뜨리고 품에 들어온 여인을 내려다봤다. 참 사랑스러운 여자다. 이름은 탐스러울 화嬅와 연꽃 련蓮을 썼으니, 그 뜻처럼 탐스러운 연꽃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긴 회색 머리카락은 은색에 가까웠고, 눈은 연꽃처럼 분홍색 색조가 은은했다. 북부에 대해 알면서도 당돌하게 발을 들인 점에서는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처럼 고고했다.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급료를 받고 온갖 허드렛일을 했으나,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추위에 부르튼 손과 거칠어진 모발, 허름한 옷으로도 아리따운 미모와 밝고 활기찬 성품을 쉽게 가릴 수 없었다. 북부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 올곧고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미움받지 않고 외려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품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저어, 그게요. 오늘 만나 뵙고자 한 이유가요."
"그래, 무엇이든 들어주마. 무엇이더니?"
"사실은……."
수줍은 듯한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남성은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무엇을 바라는 걸까? 드디어 귀한 비단옷을 입고 싶은 걸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일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걸까? 다디단 간식을 바랄까? 같이 손을 잡고, 이 호수를 걷길 바라는 걸까? 여인의 분홍색 눈동자엔 생전 처음 보는 감정이 숨겨지지 못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두려움, 희열, 환희, 수줍음, 가득한 사랑……. 마침내 그 조그마한 입술이 벌어졌을 때, 남성의 예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저, 도련님의 아이를 가졌어요."
"아, 이라고?"
"네에."
"……그것이 참이더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성은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그래. 회임이라니, 내 아이라니……." 그리고 덥석 무릎을 꿇자, 여인은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어나시어요! 어찌 천한 저에게……!"
"화련아."
"도, 도련님."
"……네게 갑작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이다. 부디 들어주지 않겠니?"
"무, 무엇...인가요?"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소리셔요……?"
"더는 허드렛일하지 않고, 배곯지 아니하였으면 한다. 너와, 나아가 너와 내 사이의 아이가 이 겨울 속에서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어. 내 어떻게든 너를 빼어주마. 사용인 일은 그만두고, 부디 나의 여인이 되어주지 않겠느냐."
여인의 입가에서 흐르던 뽀얀 숨이 멈췄다. 머리에서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희뿌얬다. 정말? 정말 그는 나와 같은 천한 것을 사랑해 주는 걸까? 이 척박하지만 사랑스러운 북부에서 나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도 되는 걸까? 고민은 길지 못했다. 여인은 무릎 꿇은 남성을 향해 마주 무릎을 꿇으며, 그 다부진 체격의 몸을 품에 한껏 안았다.
"정말, 정말 기뻐요……!"
남성이 훌쩍이는 여성을 덥석 들어안고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여인은 새된 비명과 함께 남성의 품에 덥석 안겼고, 남성의 행복함 가득한 웃음소리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인은 그 평생이 행복하리라 믿었다.
영원은 약속해서는 안 될 말인데도.
"……도련님."
이게 무슨 일이지? 화련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려하고 우아한 여인을 마주하고, 남성으로부터 여인이 본처라는 소개를 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여인 또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손에 쥔 쥘부채가 부들부들 떨리다 결국 손아귀 사이로 으스러졌다.
"화련아, 도망치지 말거라, 당당해져!!"
"가, 갈래요, 갈래요!! 놓아주세요!!"
행복이란 마치 사막 위의 고운 모래와 같아 손에 쥐면 흩어져 다신 그때의 것처럼 온전히 찾을 수 없다고 누가 그랬더라?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본처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화련이 무씨 집안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된 이후였다. 화련은 도망치고자 했으나 남성은 화련을 붙잡으며 괜찮다며 어르고 달랬다. 그런 모습에 안색이 더 창백해진 화련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손을 뿌리쳐 후다닥 도망쳤다. 남성이 쫓으려 하자 본처는 그런 모습에 얼굴에 노기를 띠며 손목을 붙잡고 따졌다.
"상공."
"부인."
"내가 납득하여야만 할 겁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더 무엇을…!"
"우리 사이에 이미 햇수로만 치면 여덟 된 아이가 있으니 둘째 부인 받는 것을 나는 반대했습니다. 상공께서 완강히 뜻 밀어붙일 적 나는 어디 해 씨 가문이나 송 씨 가문과 같은 명문가 여식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면 내 대를 잇는 것에 반박하지도 못하였을 터입니다."
"부인."
"나는 상공께서 그 귀한 허리 친히 놀리신 존재가 출신도 모르는 천한 계집년이라곤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부인!!"
"나는-!!"
본처는 앙칼지게 목청을 높였다.
"이 무씨 집안에서 내 아이가 유일하고 적법한 후계자일 거라고, 둘째 부인 들이지 않겠노라 약조하였던 당신의 말을 믿었다고!! 그런데 뭐? 어디서 아이를 밴 계집을 데려와서 둘째 부인? 당신 아이는!! 나는!! 약속은 어찌하고 저딴 여자를 데려와서 집안을 말아먹으려 들어!!"
"부인. 걱정 마시오. 화련이의 아이는 후계자가 되지 아니할 것이오. 그 아이에겐……."
"상공, 내 걱정이 안 될 것 같습니까?"
본처는 시선만으로도 남성의 목을 조를 듯이 눈을 홉뜨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더 얘기하지 않아도 뒷이야기는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이미 욕심에 약조를 어기고 출신 모를 사람을 둘째 부인 삼았는데 두 번 어기지 않을까? 살벌한 눈빛을 뒤로 본처는 쥐었던 손목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남성을 지나쳐 화련이 도망친 곳으로 향했다. 부인! 남성이 불렀으나 본처는 욕을 삼키며 목소리를 긁었다. "막지 마십시오. 두 번은 없습니다."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화원 구석에서 화련은 웅크려 울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건 꿈일 것이다! 차라리 꿈이어야만 했다. 주제넘은 사랑이라는 걸 알려주고자 했던 걸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허련은 도망치고 싶었다. 노기 서렸던 본처가 두렵고, 자신을 속인 도련님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한참을 울자니 저 멀리서 고성이 그치고 얼마 있지 않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허, 허억!" 그 주인이 누군지 깨달은 화련은 화들짝 놀라 몸을 허둥지둥 일으켰다.
"죄송, 죄송해요, 전, 전 정말, 몰랐어요."
그러니까, 정말, 저는… 흐윽, 눈물을 닦아내던 화련은 결국 본처를 마주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의 존재로 누군가의 행복이 부서졌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자신은 갑자기 굴러들어 와 상처 입힌 돌이 됐다. 그 사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도련님은……. 사랑하셨으면서!
"잘못했어요……."
"……."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울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얼른 그칠게요……."
본처는 그 모습에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덤덤히 화련을 쳐다보더니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세상이 아찔한 감각과 함께 화련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도련님께 사랑을 고백받았을 적처럼 머리에서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 같고, 귀가 먹먹했지만 느끼는 것은 정 반대였다. 뺨이 화끈거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더듬었다.
"천한 길거리의 개 같은 년."
"……."
"길거리 말라죽어가는 토룡에 기름칠하면 용이 될 성싶더냐? 나의 남편을 탐하여놓고 몰랐다고 하면 네 배에 있던 씨앗이 네 구르던 다른 남자 중 하나의 것이 될 것 같냔 말이다."
"자, 잘못했어요……."
"나는 부디 네년의 아이가 사랑스럽길 바란다. 그이와 뒹굴고 낳은 것을 보며 증오하지 못하고 끔찍이 아꼈으면 한다. 네가 그 아이를 사랑한 나머지 이 무씨 집안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 들어오며 남은 생을 오래토록 살아가면 좋겠구나."
마침 네 회임한 시점이 둘째 부인이 아니었던지라 서자도 아닌 사생아로 받아들여지니, 너나 아이나 퍽 편안한 삶을 살겠어. 본처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내뱉는 말은 시린 겨울의 고드름처럼 첨예했지만, 표정은 싱그러운 봄날처럼 잔잔했다.
"그러니 순산하십시오, 화빈. 그대를 닮았더라면 필히 아리따운 아이일 터입니다. 예, 북부 밖의 만민이 사랑할 터이지요."
독기 서린 말을 뒤로 본처는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화련은 덜덜 떨며 뺨을 더듬던 손으로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내가 이 북부처럼,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화련은 주저앉은 몸을 웅크렸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만 했다.
"……아가야, 난 너를 사랑할 거란다."
이 북부에서 우리 편은 없을 거야. 너에게는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아. 비록 이 북부에 좋지 못한 시선이 가득해도 사랑할 것이 많음을 알려주고 싶단다. 소박한 것에서 보이는 아름다움을, 온기를, 이 차가운 곳에서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 테니 너는 부디 어여쁘게만 자라주렴. 너는 나와 달리 죄가 없으니, 태어남에 어찌 죄가 있겠니……. 어찌 죄가, 죄가…. 결국 화련은 소리 내어 울었다. 남편이라 불러야 하는 남성이 자신을 애타게 찾을 때까지.
화련은 그날 밤, 태어날 아이 이름을 아회我懷로 지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이름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 금욕
- 나 살면서 술잔에 입 대지 아니하는 이유는 나이 적절하지 않음도 있으나 예비하기 때문이라.
또한 나 살면서 남령초 피우지 아니하는 이유 마찬가지로 나이 적절하지 않으며 인내하기 때문이라.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법이라 하였으니, 나는 언젠가 내게 찾아올 대가를 예비하기 위하여 인내한다.
나는 인내하노니 좀먹는 것에게 휘둘리지 아니하리라.
나, 그렇게 인내 위하여 모닥불 피우지 않아 차가운 암실에서, 오늘도 하루하루 몸 멀쩡히 살아가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노니, 내게 손짓하는 과거는 나의 우둔함을 속삭이며 내가 부정한 것을 모조리 긍정하며 나를 몇 번이고 충동질한다.
나는 인내하노니 내 삶을 파먹는 것에 휘둘리지 아니할지다.
나는 간원하노니 내 삶을…….
아회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 가렸다.
기실 나는 의존하여 내 모든 것을 망칠까 두렵다.
한때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고 발걸음을 재촉한 날처럼.
그때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룸에 대한 대가를 치렀으나, 내 바라던 것이 너무나도 컸던 모양이다. 나는 오늘도 잃어가기만 하고 있으니.
"형님."
소리 낼 힘조차 없어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을 타고 흐른다.
"저는… 두렵습니다……."
아, 나는 채워진 술잔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겁이 많구나.
- 길들이기
- 이따금 저것의 눈알을 파 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에게 품을 감정은 아니라지만 어쩔 수 없다. 저것의 시선을 마주할 때면 불편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날 쳐다보는 멀뚱멀뚱한 시선이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이 소리칠 때가 있었다. 저걸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저건 일을 칠 새끼의 눈이라고. 제 아비 쏙 빼닮은 눈동자 자체가 꺼림칙하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마주하기가 두려울 때가.
본인은 아예 모르는 것 같지만 가끔 나이에 맞지 않게 사색에 젖어있을 땐 평소의 총기 어리고 반짝거리던 눈이 아니었다. 저것은 음험한 저 밑바닥 오만 감정이 그득히 깔린 눈빛으로 세상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밑바닥 기어다니는 욕망을 채울 놈이냐면 아니다. 녀석은 그럴 객기까진 부리지 못하고, 그저 그런 눈으로 세상 바라보는 것도 모르는 녀석이다. 아마도 그런 녀석일 것이다. 아니면 저게 사색에 젖을 리가 없다. 저건 수작질이지 않은가! 그래, 수작질이다. 감히 마님을 욕보인 여자의 자식이다. 그 여우 같은 여자의 아이라면 필경 일을 벌일 것이다. 그 천한 피가 어디 가겠는가!
나는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사달을 낼 것이다. 그 이전에 기를 잡아둬야만 했다. 나는 나쁘지 않다, 이건 정당한 일이다, 이건 마님께서도 묵인하신 일이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나는 산에 약초를 캐러 나온 그 아이를 두고 도망쳤다.
죽을 줄 알았던 아이는 여명 밝아올 적에서야 대문을 두드렸다. 아이는 상태가 엉망이었다. 어디 구르기라도 했는지 진흙투성이에, 손은 추위에 곱아지고, 뺨은 한기에 부르트다 못해 핏기 싹 가셨으니 사용인 중에서도 불편한 기색 비치는 사람 태반이다. 아이가 엉엉 우는 제 어미 품에 안길 적, 내가 정당하노라 믿었다.
봐라, 저 독한 새끼, 울지도 않잖아. 난 기를 잡았을 뿐이야.
그런데 방금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이를 다시 쳐다봤으나 어미 품에 고개를 묻은 채였다. 그래, 착각이겠지.
아회에겐 좋지 못한 버릇이 있었다.
제 형님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좋지 못하는 버릇이.
- 我悔
- 6월에도 북부에는 눈이 내린다. 사시사철 낙상홍이 영글어 있고, 백일홍은 도술 덕분인지 시들지 않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화련은 창 너머로 하얗게 쌓인 눈과 얼어붙은 작은 연못을 쳐다봤다. 여전히 북부는 아름다운데, 마음은 그런 아름다움을 느낄 감상은 없다고 자꾸만 얘기했다. 도련님이 따뜻하고 아늑한 별채를 내어주시고,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셨지만 그럴 때마다 기쁘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기도 했다. 령도에서도 맛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난생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누릴 때도 자꾸만 첫째 부인이 눈에 아른거렸다. 누리는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자리와 사랑을, 온전한 가정을 뺏고 망친 값인 것 같았다. 그것도 열 달이나! 앞으로 얼마나 더 누군가의 행복을 망칠지 모르는데 시간은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출산의 때가 다가왔다. 그간 첫째 부인은 화련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첫째 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별채 안에서도 귀품 있고도 화를 눌러 참아 낮아진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오늘도 첫째 부인은 어떻게든 사용인을 물리고 별채를 찾아와 아이를 위한 선물이라며 상자를 주고는,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그대가 그리 호가호위하는 날도 머잖았습니다, 화비."
"네……?"
"상공께서는 잔인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마음은 필히 갈기갈기 찢길 터이지요. 이건 내 잔인한 남편에게 휘둘린 여인에게 가진 마지막 연민으로 하는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아이를 지우십시오."
"마님, 무슨 말씀이신지……."
"낳아봤자 불행할 거란 말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나가지도 못할 터이니, 차라리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 행복하십시오."
"당신, 또 여기까지 와서 화련이를 괴롭히는 게요?"
"도, 도련님."
"상공."
"이젠 서방님이라 하여도 좋은데.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오. 아이를 죽이겠다 겁박이라도 하였소? 아니면 그 잘난 도술로 저주라도 걸었나?"
"말씀이 지나치셔요, 도련님! 마님께서는……."
"그건 무엇이지?"
첫째 부인이 손에 든 상자에 남성의 시선이 닿자 화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성의 푸른 눈이 좁아지자 고개를 내젓는 모습이 더 세찼다. 저건 정말 호의였는데, 연민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눈으로 보실 수 있나요? 아니에요! 간절한 눈빛과 달리 남성은 상자를 손등으로 후려쳐 떨어뜨리곤, 검은 아기 비단신이 바닥을 구르자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첫째 부인을 쳐다봤다.
"이젠 아이를 대놓고 죽이려고 들어?"
"진심이 담긴 호의일 뿐이지요."
"마, 맞아요, 진심이 담긴 호의예요, 마님께서는 그저 아회를 걱정하셔서─"
"화련아, 너는 너무나도 착해서 걱정이 되는구나. 저 악독한 여자가 어찌 너를 걱정하겠느냐, 남을 걱정하느니 자신을 걱정하게 만든 주체를 죽일 여자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들어가렴, 날씨가 춥지 않니."
"도련님!!"
"괜찮습니다, 화비."
"마, 마님…!"
첫째 부인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사용인들은 주변 눈치를 보다 화련을 어떻게든 별채 안으로 데려가기 위해 기를 썼다. 화련이 질질 끌려가다시피 별채로 향하면서도 첫째 부인을 돌아봤지만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늘 그렇듯 고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상공, 후계자 자리를 주지 않겠노라 하지만, 이리 귀한 패물 보듯이 싸고돌면 내가 그 말을 어찌 믿겠습니까? 지금만 봐도 세상을 다 드릴 것 같으니, MA 님께서도 갸륵하게 여겨 상공을 용서하시겠습니다."
화련은 문이 닫히자 들리는 목소리에 창틀을 새하얗게 움켜쥐곤 고개를 푹 숙였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앙칼진 외침이 울렸다. 창틀을 쥔 손으로 이번엔 귀를 틀어막았다. 도련님, 마님, 제 아이가 후계자가 되지 않아도 돼요, 행복하게 자라게만 해주세요. 그러니 제발 싸우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조금만 자라면 떠날게요, 과분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기적이라서 죄송해요……. 뛰쳐나가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별채를 지키는 사용인들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무력하게 두 사람을 볼 수밖에 없었다. 화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난 정말 나쁜 사람이다, 답도 없고 눈치도 없는 한심한 사람, 누군가의 자리를 꿰찬 못된 사람…….
아! 이렇게 나쁜 생각을 하면 우리 아회도 힘들 텐데! 화련은 눈물을 꾹 참고 불룩 솟은 배를 매만졌다. 자꾸만 아이를 지우라고 하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안 돼, 이 아이도 빛을 보고 싶어 할 텐데, 그래서 내게 와준 걸 텐데……. 도술 때문에 들리는 큰 소란이 그치고 나서 한참 뒤에서야 다시 뜰로 나갔을 때, 아기 신발은 불타 있었다. 화련은 그 잔해를 손에 움켜쥐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못 지우겠어요, 죄송해요 마님, 이기적이라서 죄송해요…….
시간은 흘러 일을 만들어 내고, 후회는 그 많은 일 중에서 찰나의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오곤 했다. 산파는 화련의 금방이라도 죽어갈 듯 초췌한 안색을 보고 혀를 쯧 차며 품에 아이를 안겨주었다. 아들이란다. 비록 조그마한 핏덩이지만 분명 나를 닮았을 것이다. 벌써부터 닮은 점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화련은 우는 아이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사랑스러운 내 아가,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나중에 네가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북부에서 사랑을 알려줄게…… 가장 먼저 네 아버지를 보자.
"도, 아니, 서방님. 들으셨어요? 아들이래요…."
지친 기색으로 땀으로 범벅 진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과거 첫째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련님께선 잔인하신 분이라서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라고. 화련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꾹 안았다. 새파란 눈이 아이와 자신을 슥 훑었을 때, 본능적인 감이 곤두섰다.
"그래, 아들이라……. 고생 많았소, 화련."
맹수가 사냥감을 보다가도 먹을 가치가 없다고 내버려 두는 포식자의 눈. 화련은 멍하니 남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닫히는 문을 보며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님, 저는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죄송해요…….
"아회. 아회야."
그래도 엄마가 네 편이 되어줄게. 서럽게 우는 아이는 점차 울음을 그쳤다.
화련의 세상은 그 이후로 뒤집혔다. 가문의 어르신들은 화련이 혼인하기 이전에 품은 아이였기 때문에 적통도, 서자도 아닌 사생아라고 못을 박아버렸고, 내정은 다시금 첫째 부인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가주는 더는 첫째 부인을 말리지 않았다. 온전히 모진 시선과 행동을 보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겨난 이후, 화련은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실권 하나 잡지 못하고 겉도는 변두리의 꽃이 되었다. 실권을 쥐었으니 그나마 화련을 가엽게 여기던 편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과거, 화련과 함께 일했고, 그 이후 화련의 사용인으로 고용된 벗들도 모두 해고되었고 새로운 사람들이 별채를 채워나갔다. 새로운 사용인들은 화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첫째 부인에게 고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용인들의 괴롭힘은 곧 무시가 되었고, 방치가 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별채 안에 고립된 새장 속 새가 되었다. 화련은 자신을 향한 방치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니,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신은 감히 마님께서 주신 기회를 걷어찬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벌이었다. 응당한 벌. 감히 누군가의 행복을 망쳤으니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고, 가끔은 자신이 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지식과 뜻 모를 단어를 동원해서라도 말을 이어가려고 애썼다. 자신의 아이만큼은 행복해야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내 아이, 사람 취급도 못 받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게 자랄, 사람들이 언젠가 인간으로 인정해 줄 내 아이. 잔병치레 잦고 병약한 내 양심. 북부의 사람들은 모질지만 자연은 너를 사랑할 거란다, 세상은 너를 사랑할 사람으로 넘칠 거란다…… 그 순간까지 엄마가 지켜줄게. 화련은 굳세게 버텼다. 어미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 아이는 불안정하긴 해도 제법 잘 자랐다. 잔병치레가 있긴 했지만 사경을 넘진 않았고, 날이 갈수록 의지에 보답하듯 사랑스러이 컸다.
다만 어린 아회가 본 것은 많았다. 자신의 허름한 방에 가끔씩 장난감도 아닌 나뭇가지를 휙휙 던져주는 사용인들은 아회를 제대로 된 자녀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있든 말든 제각기 떠들었고, 어머니가 없는 날에는 손가락질을 하며 불륜으로 태어난 죄인이라 하였다. 나름 명문가에 태어났으면서도 좋은 옷 한 번을 제대로 걸친 적이 없었다. 좋은 옷을 입는다손쳐도 다음날 일어나면 누군가 입고 허름해진 옷이, 아니면 도술 때문에 갈기갈기 찢긴 비단만 남아있었다.
아버지는 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랑 또한 쏟지 않았다.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물질로 해결이 가능하다 믿었는지 가끔 사용인을 통해 툭툭 값진 것을 던져주곤 하였다. 그마저도 사용인이 가져가는 것이 절반이었다. 그럼에도 아회는 거만해지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패악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단지 어미 곁에 딱 달라붙어, 입을 무겁게 했다. 마치 자신의 처지를 일찍이 깨달았다는 듯, 자그마한 유령처럼. 아회가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을 적, 아회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어머니를 제외하면 자신의 편은 없다는 것이었고, 자신이 이렇게 조용히 사는 것이 어머니를 더 괴롭게 하지 않을 일이란 것이었다. 아회我懷는 태어난 이후로 아회我悔 해야 함이니.
북부를 사랑해야 할 아이는 그렇게 설원을 떠도는 유령으로 자랐다.
- 다툼
- 축시, 새벽부터 적궁은 소란스러우니 싸움 그칠 날이 없다. 다만 이번엔 구경꾼 제법 많았으니 그 조용한 아회가 싸움의 주체였기 때문이리라. 아니, 무슨 일이야? 가장 처음 목격한 어린 학생이 소곤거리기를 저 선배는 제사장 가문 사람이고, 아회 선배를 도발하듯 무가를 멸시하는 말을 하다 기어코 싸움이 난 것 같노라 하였다. 어찌 되었든 난장판이다. 대체 얼마나 세게 주먹을 주고받았으면 코피가 턱을 타고 흐르며 바닥도 미끈미끈하게 피가 묻었는지.
머리를 틀어올리게 도운 비녀는 싸우다 부러진지 오래고, 서로 나누던 주먹은 살갗이 까져 피가 배어 나왔다. 적룡 기숙사의 학생은 이미 주먹에 여러 번 얻어맞았는지 멱살이 잡혔던 옷깃은 너덜너덜하고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아회가 비틀거리며 다시금 멱살을 쥐어잡았을 때, 학생이 발로 배를 거세게 걷어차 아회가 나동그라지자 주변 학생들이 동요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회는 입에 고인 피를 거칠게 뱉으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몇 번의 주먹이 더 오갔다. 옷고름이 풀리고 머리채를 쥐어잡히고, 코뼈 부러졌는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비명 났을 때 누군가 더 못 보겠다 싶었는지 뒤에서 아회를 붙잡았다.
"야,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놔, 놓으라고."
"아니, 쟤 진짜 위험하다니까─"
"놔!!!"
아회가 어디서 난지 모를 힘으로 자신보다 체구 더 큰 남학생을 뿌리치더니만, 산발이 된 머리를 뒤로 짐승처럼 기묘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고개를 비뚝 기울였다. 황당하다 못해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달려나간 아회가 다시금 녀석을 붙들고 같이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큰 소리와 함께 뒹구는 두 사람을 보며 비명과 환호가 울렸다. 마침내 학생을 깔아뭉개고 목을 손으로 짓눌러 제압한 아회가 손가락 한번 까딱이는 도술로 지팡이를 불러와 역수로 쥐었을 때, 환호성이 점차 작아졌다.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
"너."
아회 지팡이를 높게 치들었다. 산발이 된 머리 때문에 학생만이 아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초점 없이 홉뜬 눈에, 턱을 타고 흐르는 코피, 그리고 씨근대는 숨 뒤로 속삭이듯 광적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작아 학생이 아니면 들을 수 없었다. 네깟 것이 내 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 하잘것없는 것이 본좌를 이기려 드냔 말이다……. 네 이번 기회로 본좌의 옥체가 네게 친히 닿는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하고 겸손하며 순종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구나…….
퍽.
"야!! 사감 불러!! 사감 부르라고!!"
"잡아!! 야, 아무나 눌러!"
피가 튀고 새된 비명이 울려도 팔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사감을 부르기 위해 뛰쳐나갔고, 여럿이 겨우 달라붙어서야 아회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바닥에 고인 피, 새빨간 피 묻은 지팡이와 함께 바닥에 끌리듯 제압된 아회는 히죽 웃으며 입에 고인 핏덩어리를 다시 뱉으며 중얼거렸다. 아깝다. 한 대만 더 쳤으면 됐는데.
- 편린
- 집안에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얘기가 나돌았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조용해진,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 사건이. 그렇지만 변화는 있었다. 아회를 향한 사용인들의 행동이 변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사생아를 향한 멸시의 시선과 괴롭힘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지만, 적어도 아회에게 약초를 캐러 가자며 요괴가 많던 설산에 두고 가 홀로 내려오게 하거나, 의식주를 건드리는 등의 괴롭힘은 줄어들었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면 드문드문 작은 얘기가 나돌았다.
"저 사생아가 그때 어땠는지 보았나?"
"봤지. 사실 마음에 걸렸던 차야. 내게도 여덟 된 딸이 있어서 그런지……."
"어휴, 저 안타까운 것. 잘못 태어났지."
"차라리 도망쳤으면 몰라."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는 안 됐을 텐데."
"……태어남이 죄는 아닌데."
"거 입 좀 조심해! 여긴 북부야, 이 사람아. 태어난 것도 죄인인 곳!"
"아이고, 맞다.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아회는 유령처럼 고요히, 대화를 못 들은 척 다시금 어두운 복도를 지나쳤다.
"평균보다는 높구나."
"……."
"다만, 네 무가의 수치다. 고작 남들보다 조금 위를 웃도는 수준으로는 그 수치를 지울 수 없지. 도련님을 보거라. 곧 조기졸업을 하신다는데 너도 더 노력해야지 않겠느냐? 발끝은 따라야지."
"……."
"알았다면 다리 걷어붙여라."
"알겠습니다."
묵묵히 수업을 듣고, 꾸지람을 들어도 침묵했다. 아회는 쐐액, 하는 회초리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다리가 왜 이 꼴이람?"
"……."
"또 회초리 맞고 말을 안 했지, 내가 못 살아. 이런 꼴로 가주님을 맞이하면 도련님이 아니라 내가 죽는다고요!"
"그럼 연고를 가져다주세요."
"하아, 기다려 봐요."
돌아올 때도 사용인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니면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회가 불러 세우자, 사용인은 덜컥 문을 열다 고개를 휙 돌렸다.
"저기, 잠깐만."
"왜요, 바쁜데."
"그게, 형, 아니, 도련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어차피 안 얘기할 거예요. 꾸지람 듣기 싫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하여튼 이상한 애라니까. 어차피 불쌍해서 봐주는 건데 뭐가 그렇게 좋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 쿵, 문이 세차게 닫혔다. 아회는 사용인이 덜컥 나가버린 별채 구석에서 아회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닐까? 형님께서도 연민에서 시작된 정임은 분명할 것이다. 저번에, 비가 오던 날에 내가 처량했으니까. 그 이후로 잘 대해주시는 걸 텐데…… 어째서일까, 형님을 생각하면 조금 다르다. 사용인들이 이따금 불쌍하다는 시선을 못 이기고 도와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런 애정이 절대 옳은 것이 아닌 건 안다. 마님은 날 싫어하니까. 형님께서도 가끔은 이상한 방법으로 도와주시긴 하지만.
"그래도……."
삭막한 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 주는 제 가족이었으니까. 아회는 사용인이 연고를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듯 몸을 웅크렸다. 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형은 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듬직하고, 믿음직하고, 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형님을 떠나지 않을 거야……. 아회는 그렇게 사르르 잠들었다.
아회는 몸을 일으켰다. 숨을 쉬기 불편했던 나머지 몸을 뒤집고 한참이고 헐떡이다 밭은 기침과 식은땀을 줄줄 내뱉고 흘렸다. 베개를 짚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쓰러지듯 몸을 다시 침대에 뉘곤 한참을 더듬거리며 얼굴을 더듬다 눈을 덮어 가렸다. 끅, 끄윽, 흐윽……. 고통에 가득 찬 신음과 함께 미처 내뱉지 못한 숨을 황급히 뱉고 들이켜며 몸을 웅크렸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 처지를 알게요, 제발 돌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암실은 오늘도 북부처럼 차가운 온도를 유지한다.
- 잠재
- 아회는 자라며 어머니를 많이 닮아가기 시작했다. 작달만한 체구에서도 청초하니 커다란 눈망울에 박힌 촘촘한 속눈썹이나 도톰한 입술, 가느다란 목의 선을 보면 어떻게 자라도 미인인 화련의 모습을 빼닮을 것이란 말이 사용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드물게 퍼지곤 했다. 비록 화련은 연고도 없는,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르는 여인이지만 우아하니 청초하고, 뭇사람의 사랑을 가득 받을 모습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 그런 화련의 아이로 자라는 얘기가 나오다 보면 꼭 다른 이야기도 나오곤 했다. 아회의 눈 이야기다.
아회의 눈은 부정할 수 없을 만치 무 씨 집안사람들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가주님의 눈을 쏙 빼닮았으니 사용인들 사이에서 아회가 사실 화련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느니 하는 헛소문은 사실상 소용이 없었다. 대다수의 사용인들은 부득이하게 아회와 시선을 마주할 때면 불편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쳐다보는 멀뚱멀뚱한 시선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는 북부였으니까. 가주님을 쏙 빼닮은 눈동자 자체가 꺼림칙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마주하면 마치 가주님의 감정을 엿보는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부엌에 옹기종기 여러 사용인이 모여 오늘 잔뜩 만들고 남은 전이나 잡채 같은 것을 주워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어느 날, 많은 사용인의 의견이 일치했다. 감히 마님을 욕보인 여자의 자식이니 잠깐만 혼을 내주자고. 그 여우 같은 여자의 아이라면 필경 일을 벌일 테니, 그 천한 피에 한 번은 골탕을 먹여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회를 맡던 사용인은 산적의 파를 쑥 빼먹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 물었다.
"기를 잡아두면 편하긴 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할 건데?"
"내게 생각이 있지."
"뭔데?"
"이틀 뒤에 산으로 나갈 일이 생기거든. 그 유령 꼬마는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러면 약초를 캐자고 꼬셔보다가 산에 두고 내려오는 거야."
"그러다 애가 죽으면 어떡해? 불똥이 나한테 튄다고!"
"어차피 산지기한테서 나무 받으러 가는 거야. 그쪽 길은 낮은 부분인데다 안전하니 걱정 마. 그리고 그 꼬맹이는 우리 탓도 못해."
"응?"
"생각을 해 봐, 그 애가 우리 탓을 하면 우리가 가만있질 않을 텐데 그럴 것 같아?"
"아~ 그러긴 하지."
"그러니까 너는."
"알아, 알아. 바람잡이 해달란 거잖아."
"그렇지! 잘 부탁해."
바깥에 나가 장작을 얻어오던 일을 맡던 사용인이 당당하게 계획을 설명할 적, 사용인들은 서로 미심쩍은 듯 쑥덕거리다 어느 순간 서로 입이라도 맞춘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들의 의욕이 넘쳤을 때, 둘째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 배정된 사용인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첫째 마님껜 누가 허락을 맡을 거야?"
"……."
"없으면 내가 할게."
아회를 데리고 나가려면 첫째 부인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둘째 부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고, 어차피 첫째 부인을 뵙기 위해 조만간 자리를 가져야 했으니. 남은 사용인들은 서로 결의를 다졌다. 좋은 계획이다. 이대로만 진행되면 우리는 마님의 실추된 명예의 티끌만큼은 복수할 수 있다. 아이도 길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부엌의 밤도 그렇게 지나갔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해달라?"
"네."
첫째 부인은 부채를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이것들이 머리 좀 굴렸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내치자니 녀석들이 갸륵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낮은 확률로 일이 잘못되는 걸 보자니 그건 또 아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인은 느릿하게 부채를 펼쳤다.
"마음대로 하렴."
사용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가보란 손짓에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하고 경쾌하게 밖으로 나서는 걸 보고 나서야 부인은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하겠느냐, 화련아. 네 아이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내가 제일 가엾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신께 빌어나 보거라…."
아회는 망토를 둘렀다. 어떤 동물의 것인지는 몰라도, 털이 복슬복슬 달린 망토는 낡았지만 참 따뜻했다. 사용인이 어릴 적에 쓰던 거라 했는데, 누군가는 모욕적이라고 말하겠지만 아회는 그런 걸 구분하기엔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 어쩌면 오늘이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주 오래전, 무가는 MA 님께 반기를 든 극악무도한 가문이었단다. 그럼에도 그 뜻이 틀리지 않았노라고 아버지는 주장하시고, 가문원들은 이미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에 용서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고 있단다. 그럴 때면 아회는 그런 끔찍한 가문의 피를 이었구나, 그리고 이 끔찍한 피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멸 받을 정도구나 생각했다. 저 치들의 입장에서도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죄인이니까 조금 더 노력하면 사람들이 봐줄지도 모른다. 아주 약간의 죄를 씻어낼 수만 있다면,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준비는 끝났어요?"
"……네?"
"그럼 빨리 좀 오세요,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에 나가면 벌써 열 걸음은 걸었어요!"
"잠깐, 어머니께 말씀을……."
"그건 다른 애가 어련히 했겠죠, 뭘 걱정해?"
아직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잠시 뒤를 돌아보며 별채를 쳐다봤지만, 아회는 결심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며 채 여미지 못한 망토를 손으로라도 꾹 쥐고 사용인의 뒤를 따랐다. 자박자박 눈이 가득 쌓인 길을 걷는 동안에도 눈이 내려 뒤에 남은 족적을 지울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와아."
아회는 바깥에 나와 가득 쌓인 눈과 우뚝 선 산을 마주했다. 여기로 오르면 이제 일이 시작된다. 사용인을 따라가서, 장작을 받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붉은 열매를 품은 약초를 따오는 일. 아주 쉽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척척 올라가며 쉴 틈을 주지 않는 통에 산을 오르는 일은 힘들었지만, 사용인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걸 보니 곧 일이 시작될 것인가 보다. 아회는 뽀얀 입김을 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이라 생명체라 할 수 있는 건 적었지만, 적어도 처음 보는 것이 많아 온통 눈에 담아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아회의 순수한 속과 달리 사용인은 속이 타들어갔다. 안전한 길이지만 가문이 있는 곳과는 정 반대로 가는 길목을 몇 번이고 돌아간 터였다. 나는 나쁘지 않다, 이건 정당한 일이다, 이건 마님께서도 묵인하신 일이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여기서 죽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산지기는 감이 좋으니까. 아니면 요괴가 데려다가 키울지도 모르지. 이 귀신같은 녀석을 보고 동족이라 좋아할 텐데. 난 죄가 없어. 결심한 듯 사용인은 산지기와 미리 약속한 곳에 다다르기 전, 발걸음을 돌렸다.
"도련님."
"응……?"
"이 근처에서 약초 냄새가 나요."
"정말요?"
"물론이죠! 제 코가 얼마나 좋은데요. 저도 장작을 받아올 테니까, 좀 둘러보고 계세요. 대신 여길 벗어나면 안 되고, 얌전히 계셔야 해요."
"응!"
아회는 열정적으로 나무 근처에 가서 약초를 찾듯 웅크려 앉았다. 이 근처에서 약초 냄새가 난 댔으니까, 여길 찾아보면 되겠지? 눈을 파헤치다 푸른 풀잎이 보이기가 무섭게 아회는 눈을 반짝였다. 약초일까? 조심스럽게 눈을 털어냈지만 이건 그냥 풀이었다. 풀 옆에는 또 풀이 있었고, 그 풀잎 옆에도 또 풀이 있었다. 아예 무릎을 꿇고 다른 곳까지 고사리 손으로 파헤치던 아회는 고개를 들었다.
"어……?"
저기 있을 것 같은데. 아회는 금줄 너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여기 주변엔 약초가 없는데……. 아회는 눈을 부산스럽게 굴리다 결심한 듯 금줄을 넘어갔다. 발이 눈에 푹푹 빠졌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이다! 아회는 작은 몸의 종아리 삼 분의 일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쳐나가며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곳저곳을 파헤치며 돌아다녔다. 어차피 금줄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될 거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어차피 깊게 들어간 것도 아니고, 금줄 근처만 돌아다니니까……. 길잡이를 하듯 이따금 금줄을 쥐며 한참을 돌아다니던 아회는 빨간 열매 비슷한 것이 있는 나무 밑동을 파헤쳤다. 눈이 굳고 얼음이 얼어 손이 아팠지만, 아회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약초다. 조심스럽게 뿌리까지 캐서 품에 고이 안은 채 고개를 돌리다 눈을 홉떴다.
빠르게 쌓이기 시작하는 눈이 자신이 불과 몇 분 전에 푹푹 발이 빠졌던 족적을 새하얗게 지우려 들고 있었다. 아회는 허둥지둥 족적이 사라지지 않은 곳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지 않으면 얌전히 있으란 말을 어기고 말 거야. 실망할 거야, 그건 싫어. 남은 체력을 쭉 빼서라도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아회는 다행스럽게 금줄 주변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에 있으라 했던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내려가는 길목일까? 아니면 올라가는 길목? 온통 새하얀 곳에서 오도카니 서서 주위만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도 지워지고 말았다. 아회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내가 없어진 걸 알았으니 장작을 받고, 찾으러 올 거야. 난 믿어. 아회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어깨에 눈이 쌓이고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리기 시작할 때까지. 아회는 어둠이 내리 깔릴 적, 그제야 부정하고 싶었던 생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걸 쥐고 내려가면 되겠지. 다시금 금줄을 쥐었을 때, 아회는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단 걸 깨닫고 시선을 내렸다. 이건 금줄이 아니라 식물의 줄기다. 지금껏 금줄이라 믿은 것이 식물의 줄기라는 사실 보다, 대체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보다도 먼저 치고 든 것이 있었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니구나.
만약 자신이 식물 줄기를 쥐어서 길을 잃었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사람을 풀어서라도 자신을 찾았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무 씨 집안의 사람들이라면 응당 그렇다고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횃불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회는 차갑게 굳은 몸을 겨우 가누듯 움직였다.
"그래."
어차피 기대한 적도 없었어. 경멸 받기에 바쁜데 죄를 씻기는 무슨. 비틀비틀 걷던 아회는 발을 헛디뎠다. 약하고 어린 몸뚱이로 지나치게 오래 견뎠다. 망토로도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한 번 넘어지는 걸로 족하지 못했는지 대차게 몸이 굴렀다. 나뭇가지에 몸을 긁히고 나무에 부딪힐 땐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아회는 진정하듯 숨을 씨근대다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되었든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난 살아."
난 살아서 할 일이 있어. 아회는 절뚝대며 몸을 옮겼다. 그렇게 아회는 여명이 밝아올 적에서야 대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남들은 30분이면 하산하는 것을, 아회는 몇 시간이 걸려서야 올 수 있을 만큼 어렸기 때문에. 문이 벌컥 열렸을 때, 아회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끌어안는 몸짓에 반응할 힘도 없었는지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귀에 각종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에잉, 이제 올라갔는데 다시 돌아오라 해."
"세상에, 꼴 좀 봐. 많이 다쳤네. 어쩜 좋아."
"가주님께 보고드려. 찾았다고."
"아회야, 아, 아회야. 어쩜 좋아, 몸이 이리도 차가워. 응? 어쩜 좋아, 우리 아회 어떡해…."
아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장갑이 찢어진 손은 추위에 곱아지고, 망토는 구르다 잃어버렸으며, 뺨은 부르트다 못해 핏기가 싹 가셨다. 하물며 맨 마지막 구간에서 굴러 진흙투성이니, 사용인 중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한 시선이 오갔다. 아회는 그 시선을 쭉 훑다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을 두고 간 사용인.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허둥지둥 나오는 모습에 아회는 어머니의 품에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고운 고개가 스르르 오른쪽으로 기울 때, 아회의 눈이 점차 서늘해졌다. 마치 사냥감인지 아닌지 재어보는 맹수와 같은 눈이었으나 아회 본인도 무의식적인 행동인지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미는 그런 아회가 추워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것으로 깨달았는지 고개를 품에 파묻게끔 했다. 사용인이 아회를 다시금 쳐다봤으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회는 품에서 가늘게 떨기만 했다.
"아회야, 어찌 그리 나갔어, 응?"
"약초를, 약초를 드리면 어머니께서 조금이라도 덜 편찮으실까 싶어서…… 잘못했어요."
"네게 그런 걱정을 주어서는 아니 되었는데, 어미가 미안하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무 씨 집안의 가주는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손을 들어 제 턱을 쓸더니 흥미롭다는 듯 눈을 휘었다.
"게 있느냐."
"예."
"우리 화련이가 쓸모 있는 것을 낳은 것 같구나. 어여쁘기도 하지. 내 보상을 해야겠어. 그렇지?"
"예?"
"사건이 좀 마무리 되면 데려와라. 아들놈 둘이서 수업을 같이 듣게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무 가의 가주가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저것에게 흥미가 생겼다.
- 사냥
- 북부는 영원한 겨울이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호수는 반질반질 얼어있고, 바다는 엄두도 낼 수 없으며, 산에는 그런 환경에 적응한 요괴가 득실득실했다. 가끔 요괴가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니, 무씨 집안에서는 사냥꾼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간혹 몇 사람이 나가 소탕을 하는 등의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 아회가 처음으로 요괴를 잡는 날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그 척박한 설산을 밟을 수는 없을 테니, 어미 요괴 죽이고 홀로 남은 작고 연약한 새끼 요괴를 가문에 데려와 처리하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아회에게 있어선 의미가 깊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명한 일이거니와 사용인이나 방문하는 객이 아닌, 온전히 '무 씨' 성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가문에서 그 사건이 있고도 유령 소리를 들었는데, 무 씨라고 당당히 공인되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으니, 오늘 아회는 평소보다 더 억세게 당기듯 머리를 빗겨주는 사용인의 손길에도 기대에 가득 찬 눈을 하며 웃을 수 있었다.
"나 참, 그렇게 좋아요?"
"응."
"그렇구나. 뭐, 지금을 즐겨두세요."
아회는 동글동글, 보석을 빼닮은 것 같은 눈망울로 거울 너머 사용인을 쳐다봤다. 다른 것은 청초한 미인이던 어머니를 많이 닮았지만, 눈동자만큼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한때 화련의 자식이 사실 가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 거란 헛소문이 돌았지만, 아회의 눈동자를 본 이후로는 그 소문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사용인은 그런 눈이 거울 너머로도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아무렴, 첫째 도련님은 눈을 감고 계시니 영 모르겠고, 가주님은 그 위압감에 눌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고, 요 작은 아이는…… 그래,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눈망울이었다. 음울하고 슬픔을 끌어안은 빛이 서렸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운 눈. 무 씨 집안에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난 뒤부터 자신이 괴롭힌다는 것도 짜증이 나 그만두게 만드는 저 빌어먹을 눈 때문인지, 사용인은 한마디를 더 붙일 수밖에 없었다.
"각오한 것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라잖아요."
"그렇구나……."
"자, 머리도 다 빗었어요. 웬일로 머리를 묶어달라 하지 않았는진 몰라도."
"……고 싶어서…."
"응? 뭐라고요?"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나가요, 이제 좀 쉬게!"
사용인의 툴툴거림을 뒤로 아회는 몸을 일으켰다. 한 바퀴를 빙그르 도는 자그마한 몸을 비추는 거울에는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새하얗고 정갈한 옷을 걸친 자신이 있었다. 허름한 옷이 아닌 건 가주님 덕분이다. 가계 도술을 배우기 위한 수업을 듣기 시작한 이후부터 가주는 아회의 처우를 조금씩 개선해 주기 시작했으니까.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는 충분히 오랜 나날 동안 기다렸던 작은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다. 눈을 오래 마주칠 수 있고, 아회라고 이름 불리는 것. 그간 아회에게 있어서 가주님이 아버지인 건 알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늘 고개를 조아려야만 하기에 볼 수 없거니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과거와는 거리가 약간이나마 있단 뜻이다. 하물며 제가 가장 의지하는 형님께서도 남몰래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좋아하는 우리 형님. 아회는 그런 형님을 닮고 싶은 나머지 머리를 풀어달라 했는데,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형님께서도 요괴를 잡아본 적이 있을까? 다음에는 꼭 물어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때 얘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과람한 욕심인 건 알지만, 아회는 아직 충년이 가까워가고, 따라서 조금은 욕심을 내어 보고 싶단 마음이 덜컥 치솟을 나이였으니.
오늘은 누구도 귀찮게 만들지 않고 열심히 해내야지. 꼭 해내고 말 거야. 어린 아회의 다짐은 그로부터 불과 한 시진도 안 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으, 흐으, 흐……."
아회는 숨을 헐떡였다. 각오한 것과 현실은 달랐다. 방계를 비롯한 무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눈 가득 쌓인 마당에 나앉은 아회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발붙일 적에도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따갑고, 차갑고, 아팠다. 누구도 이 순간을 돕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사냥감이니 아무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홀로 해내야만 한다고 가주님, 아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참 처절한 사투였다. 작달만한 몸을 가진 데다 병약했고, 요괴는 새끼라고 해도 요괴였다. 저 앙칼진 것이 발톱을 내지를 때 어찌나 두려웠는지! 도술 배우지 못했기에 무구라도 주잡시고 작은 손도끼 받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비명횡사했을 것이다. 도끼를 휘둘러본 적도 없는 작은 손으로 도망치고, 휘두르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를 수십 번. 아회는 결국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치는 것에 성공했고, 지금은 벌벌 떨며 자신 앞에 축 늘어진 요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주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아회에게 내리 꽂혔다.
"아회야, 무엇 하느냐. 어서 끝내지 않고."
"그, 그, 그것이."
덜, 덜덜, 덜덜덜……. 몸의 떨림이 그치질 않는다. 힘도 없는 작고 연약한 새끼 요괴를 잡는 것도 이 몸으로는 힘들었는데, 끝내는 것도 내 몫이라고? 그래야만 하는 거야? 요괴는 알아듣기 힘든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눈밭은 피로 흥건히 젖어가고 있었다. 아회는 주변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작은 손도끼를 집어 올렸다. 고민하듯 떨리는 손과 눈동자는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을 직시하고, 비현실적인 도피를 바라듯 흐려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죽음이란 걸 개념으로만 배웠다지만 본능은 알고 있었다. 이미 이대로 내버려 둬도 저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왜 끝내야 하는 거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대체 왜, 왜 무기를 들라고 하는 거지?
"으, 아으."
이성과 비이성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될 거야. 이 요괴는 죽을 거야. 자비를 베풀어주자.
그렇지만 멈추면 안 돼, 알잖아, 가주님이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본보기를 보여야만 해. 난 아직 약하잖아, 사용인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잖아, 하물며 가문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돼! 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무가의 일원이 되고 싶어…… 이건 하나의 시험이잖아…… 받아들여!
아니지, 내가 바라는 건 괴롭힘의 중단도, 무가의 일원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해져.
솔직해져.
네 욕심에.
아아, 어머니, 죄송합니다─
마침내 눈동자에 들어찬 건 확신이었다. 홀린 듯이 자그마한, 무딘 날의 손도끼 자루를 잡은 아회는 요괴를 향해 설설 기어갔다. 무릎발로 기어가, 새끼라고 해도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것 위에 올라타듯 하더니 한 손으로는 아직 맥 뛰고 뜨거운 몸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요괴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망설이지 않듯 쉼 없이 팔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콱, 퍽, 푸욱, 콱, 콱, 콱, 즈북, 철벅, 촥, 촤악, 촥…….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문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아까 친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합격선이오만……."
"가주님, 어떻게 하면─"
"내버려 둬 보거라."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피비린내는 짙어져만 갔다. 팔을 더 쓰기 힘든지 한 손으로 쥐던 도끼를 양손으로, 마침내 몰아쉬는 뽀얀 숨과 함께 내려둘 적엔.
"……."
요괴는 형체도 없었다. 가문 사람들은 어째서 아이가 멈췄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너덜너덜해질 것도 없었으니까. 그 위에 올라탄 조그마한 녀석이, 피와 뭉개진 살로 범벅이 된 도끼와 요괴였던 너덜너덜한 핏덩이를 오가는 어른들의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몇 가문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로 불안한 눈치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모습을 보던 녀석의 입과 눈매가 설설 휘었다. 고이 눈을 접어 웃는 모습에 속닥거리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붉게 물든 긴 머리카락은 핏물이 뚝뚝 흐르고, 조그마한 몸에 퍽 어울리던 흰 비단옷은 원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핏덩이와 색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라 잘못 보면 두 존재가 서로 이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팔을 들기도 버거운지, 어깨가 벌벌 떨린다. 그 때문에 이마부터 턱까지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는 주제에, 물 찬 제비처럼 호선을 긋는 눈이란. 그런 아이를 유일하게 마주하는 것은 턱을 쓸며 흥미로운 듯 아회를 보던 무씨 집안의 가주였다.
"옳지, 잘 하였다. 어여쁘기도 하지."
"……."
"북부에서 사냥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구나."
끌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의 눈이 휘자 주변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교육, 특히 사냥에 관해선 가주의 칭찬은 드문 것이었으니 주위에서 제각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 칭찬은 누구의 것이었더라? 그래, 무려 무 가의 천재라 불리는 첫째 도련님이다. 그런 칭찬을 사생아에게 쓴다는 것은…….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조그마한 핏덩이에게 몰렸다. 정확히는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이의 밑에 깔린 끔찍한 고깃덩이로, 그 아래의 흥건한 피 물든 눈밭으로.
"요괴란 말이다. 자신이 이 혹독한 설산에서 살아남은 주인인 것이라 믿는단다. 그래서 늘 기고만장하지. 자신의 영역이라며 신명 나게 날뛰며 다른 요괴를 짓밟으며, 상대를 따지지 아니하려 든다만…… 기실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주는 자리에서 일어서 아회를 향해 다가갔다. 조그마한 몸을 덥석 집어 피가 묻든 말든 개의치 않으며 품에 안아 들자, 많은 사람들이 기함했으나 그는 놀랄 만큼 여유로웠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두어 가닥 넘겨줄 적엔 어린 아회의 눈이 온전히 드러났다.
"놈들도 감정이란 것이 있고, 감정을 안다면 이질감이라는 것을 알 지능도 있으니 말이다. 이질감을 심어주면 결국 공포로 이어지는 법. 제아무리 설산을 헤집는 존재라 해도 공포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목을 내어줄 녀석들이니, 보거라."
가주는 그간 제사장을 호위하느라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으로 고깃덩이를 가리켰다.
"전장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북부다. 이질감을 통한 공포를 주는 범주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너는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아주 잘 아는구나, 장하다, 장해."
예쁘기도 하지. 그 목소리가 제 아들을 사랑하기보다는 길들인 짐승 새끼 어여쁘다 하는 어조에 가까웠으나 아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굴려 모인 인파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도 무씨 집안사람이라는 듯, 제 어미 유일하게 닮지 않은, 가주를 빼닮은 눈으로.
"보아라, MA 님께서 내게 좋은 아들을 둘이나 주셨으니 정녕 무 씨 집안이 용서받은 것이 맞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하지 않더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눈이 가문원에게 선포하는 가주를 향했을 적, 가주는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한 팔에 안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몸을 가볍게 들썩였다. 녀석, 욕심도 많긴.
"네 찾는 사람 여기엔 없다. 찾으려면 학당에 가야 할 터인데. 그래, 지금이라도 돌아오라 전령을 보내주랴?"
"……ㅇ, 아뇨, 형님은 바쁘실 텐데…."
"이 어여쁜 것. 너도 무 씨 집안사람이로구나. 그래, 잔치라도 열어야겠어."
가주는 아회를 보며 마냥 어여쁘다는 듯 뺨을 간지럽혔고, 자리를 떠나듯 발걸음 돌렸다. 가문 사람들 모두 눈치 보다 제각기 자리 떠나고, 살덩이를 치우기 위해 몰려든 사용인은 피 낭자한 현장에서 일방적으로 흥미 쏟던 가주와 요괴였던 것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려 하며 언젠가 당도할 이질적인 공포를 지우려 애썼다.
- 대면
- 사용인들이 기를 죽이겠답시고 지학도 채 안 된 어린아이를 설산에 두고 내려온 소동이 벌어졌을 때, 많은 사용인들은 이번 사건도 조용히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사생아를 향한 시선은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네 어미가 함부로 몸을 굴렸기에 네가 집안을 망쳤다며 아이를 탓했고, 유령 취급을 했으며, 가주 또한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대충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하며 없는 사람 취급을 했으니까. 이번에도 대충 홍옥이나 진주, 그런 값진 것으로 둘째 부인과 아이를 달래겠지. 그렇게 믿었고,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죽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하, 이거 재밌는 녀석이로고. 죽을 만큼 죄를 지었으면 죽는 것이 옳지, 무슨 소리를 하나?"
"가주님,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손 발목을 분지르고 설산에 버리고 오거라. 기어서 돌아오면 내 너의 아내까지는 살려주도록 하마."
"가주님!!!"
"끌고 가라."
그렇지만 무 씨 집안의 가주는 사건을 묵인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생아라 한들 자신의 피를 이었는데, 그 피를 아무렇게나 대한다는 건 무 씨 집안의 기강이 떨어졌단 뜻이라며 사건에 관여한 사용인을 모조리 처리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될 때, 청지기를 향해 넌지시 일렀다.
"미시未時에 돌아오마."
"또 어딜 그리 가십니까?"
"내 주인께서 부르지 않나."
"제발, 마님이 돕고 계시지만 내정 일도 버겁습니다, 슬슬 은퇴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싫다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 유년 시절 같이 보내줬으니 목은 자르지 않으마."
"빌어먹을 제사장 녀석들에게 언제까지 휘둘리실 생각이십니까?"
"하하, 청지기, 불경한 소리야, 내 제사장 호위인데도 어찌 그런 말을 해."
"…가주님께서 전대 가주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살아보니 알겠더구나, 호위 일은 해야지. 그렇지만."
가주의 푸른 시선이 딱 내리박혔다.
"내 비굴하게 꼬리를 만 것이 아니고, 휘둘리는 것도 아니다. 내 주인께서는 내 말을 철썩같이 믿으니 말이다. 넌지시 말 하나 흘렸다고 제 가문 재산 내게 다 바칠 정도면 말 다했지."
"…소문이 퍼질 텐데요?"
"내 거기까지 생각을 안 했을 리가. 곧 산제물 바친단 핑계로 서로 다투다 명맥도 죄 끊기고 흔적도 없어질 집안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막으려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 될 터이고. 재밌겠지? 이것 또한 내 제사장에게 베푸는 사랑인 게야."
"예, 참… 재밌겠습니다……."
"아참, 아들 둘에게 가계 도술을 가르칠 때가 되었구나. 신시申時에 내 방으로 그 아이도 오라고 해."
"예?"
청지기는 진심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가주는 뒷짐을 지며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그럼, 내 아들이라고 말했잖느냐."
"마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화련이도 어찌 되었든 무 씨 집안의 씨를 밴 몸이고…… 그 아이가 올해 몇이더라?"
"…아직 지학도 안 넘었습니다."
"그래, 아무튼 그 기간 동안 여기에 버티고 있었으니 그 여자는 이겨낼 수 있을 게야. 그만큼의 가치가 있단 뜻이지 않겠나?"
"예… 그렇겠지요."
"그럼 잘 부탁하네."
껄껄 웃으며 사라져버리는 가주를 보며 청지기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고 쳐다봤다. 아무리 내 주인 된 사람이라도 참 무책임한 사람이다. 청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으로는 두루마기를 펼쳐 괜찮은 사용인을 고르고 있었다. 뭐, 가주님께서 흥미를 가졌으면 그 사생아도 썩 괜찮은 녀석일 테니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이번에 사생아가 제대로 하면 전속 시비는 누구로 할지 정하는 것이었다. 사생아가 내로라하는 천재인 첫째 도련님을 뛰어넘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 노릇 정도는 하겠지. 그 정도면 짐 하나는 덜어줄 수 있겠다. 지나가는 사용인을 불러 세운 청지기는 내일 아침 사생아를 가주의 방으로 데려오라는 말과 더불어 "이번엔 잘 꾸며서 데려오고!"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그를 놓아줄 수 있었다.
그 시각, 아회는 어미의 품에서 얌전히 자수를 두고 있었다. 이따금 바늘에 찔리는 건 아프지만, 꼬물거리며 이것저것 수를 놓으면 그것만큼 재미난 일이 없었다. 하물며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자수 말곤 거의 없었다. 책은 탕약에 젖어 너덜너덜하니 글자를 읽을 수 없었고, 공은 아무도 같이 차주지 않는다. 말벗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덕분에 아직도 가끔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해 말을 더듬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머니 곁에 딱 붙어서,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를 따라 하는 일밖에 없었다. 오늘은 토끼를 놓았고, 내일은 꽃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머니가 알려준, 령도의 바다를 수놓고 싶다…. 화련은 아회를 품에 안으며 살갑게 물었다. 요즘 들어 화련은 아회를 품에 안는 날이 늘어났다. 그때 몸이 찼던 것이 많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 부르텄던 살도 모두 아물고 괜찮은데. 하지만 어머니 품이 나쁠 리가 없어, 아회는 얌전히 안겨있기로 했다.
"이건 뭐니? 땅신령?"
"으음, 어머니랑 같이 화원에서 본 눈토끼예요."
"아, 세상에, 정말 잘 놓았구나! 내 보물 같은 아이, 어쩜 이리 자수도 잘 놓는지!"
"어머니, 저도 언젠가는 바다를 보고 싶어요."
"꼭 같이 보러 가자꾸나. 어미가 태어난 령도가 어떤 곳인지 알려줄 테니까."
"정말요?"
"물론이지!"
"하지만 저는 북부 사람인데……."
"괜찮아, MA 님은 자비로우니, 언젠가는 죄를 용서해 주실 거란다."
"응,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바다에서 같이 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MA 님은 수영을 잘 하실까요?"
"어머, 너도 참! 누굴 닮아 이리 사랑스러운지 모르겠구나!"
웃음꽃이 필 적, 누군가 방을 똑똑 두드렸다. 아회와 화련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없다. 둘 다 별채에 고립된 존재니까. 화련은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오세요."
"둘째 마님."
"…본채의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가주님 명입니다요, 신시까지 아드님만 방으로 모시랍니다."
"잠깐, 무슨 일인지는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별채 사람이 내정에 간섭하시고 싶은 겁니까? 아이 꾸미면 데리고 갈 테니 그렇게 아십쇼."
"가지 마세요! 설명을 하고─"
사용인이 건들거리다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화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정도가 있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알고! 아회는 품 속에서 화련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다, 이내 자수 놓던 것을 내려 두고는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다녀올게요."
"네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네가 위로를 하면 안 되는데. 미안하구나."
"다 괜찮을 거예요."
화련은 고사리 손이 등을 토닥일 적, 아회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고는 다짐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본채로는 처음 가는 아이다. 우리 아이가 잘못되지 않도록 하자. 도련님, 당신의 아이에요. 아회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MA 님, 우리 아이를 보필해 주세요……. 화련은 속으로 기도하며 아회를 꾸며주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아, 큰일이다. 사용인들의 괴롭힘 때문에 옷이 없다.
그래도 해내야지.
아회는 거만한 걸음걸이의 사용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여러 시선이 한 번에 꽂혀서 무섭지만, 그래도 떨지 않으려 애썼다. 긴 머리는 굵고 낮게 땋아내렸고, 최대한 허름하지 않은 옷을 골라 입었다.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쟤야?"
"그래, 그 사생아."
"옷은 또 왜 저런담?"
"제 처지가 저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지. 이제 보니 마님의 자리를 꿰차려 한 그 요부를 쏙 빼닮았어."
"저런 애가 왜 여길 오는지, 원."
"모르지, 그 요부가 또 꼬리라도 쳤을지."
"우리 마님은 어쩌고!"
"쉿, 조용!"
아회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인 걸까, 그렇지만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오늘은 떨지 말라고. 아회는 옷자락을 꾹 쥐었다. 주름이 졌지만 이미 옷이 허름해서 별다른 흔적은 남지 않았다. 사용인의 발걸음이 멈출 적, 아회도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십쇼."
"아, 그게."
"어서."
툭툭, 등을 두들기자 아회는 떠밀리듯 문 앞에 서게 됐다. 들어와라, 가끔 마님과 함께 웃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릴 적, 아회는 허리를 꼿꼿히 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머니께서 주신 부적을 찢으면 된댔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문이 열렸을 때, 아회는 조심조심 방 안으로 들어가며 어머니가 알려준 인사를 더듬더듬 뱉었다.
"소, 소자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네가 화련이의 아들이라고?"
"……ㄴ, 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아회는 떨리려는 몸을 애써 부여잡듯 하며 시선을 올렸다. 온통 화려한 것이 즐비하고, 눈이 부실 정도의 방은 한눈에 보아도 넓었다. 쪽빛 칠이 되어 금빛 세공을 한 둥그런 목조 기둥, 대리석으로 된 말끔한 바닥, 곳곳에 놓인 고풍스럽다 못해 과분할 정도의 사치스러운 장식품…… 거기다 고급스러운 침대 겸 옥좌는 목재로 만들어지고 발이 쳐져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고 안의 주인을 보이고 있었다. 아회는 그 사람을 처음 보았으나 아버지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에, 다부진 체격을 채 가릴 수 없는 옷은 앞섶이 풀어져 있었지만, 자신을 영 탐탁지 않게 쳐다보는 저 눈이 아회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저분이 아버지구나. 아버지, 그러니까, 가주는 손을 휘휘 저었다.
"네 화련이를 많이 닮았구나."
"……그게."
"탓하려는 게 아니다. 저기 가서 앉거라."
"네…."
아회는 조심스럽게 마련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 앉았다. 맞은편에 놓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가주는 그런 아회를 유심히 쳐다보다, 청년을 향해 주의를 끌곤 아회를 슥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너는 처음 보겠구나. 네 별채로 갈 일은 없을 터이니. 이쪽은 네 동생, 그러니까……."
"아, 아회, 입니다."
"그래. 아회. 화련이의 아들이지. 앞으로 같이 가계 도술을 배울 터이니 이름 정도는 알아 두거라."
아, 저분이 도련님이시구나. 아회는 자연스럽게 손을 모았다. 마님의 사람께는 늘 예를 갖춰야 한다 했다. 사용인에게도, 도련님께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미처 못 보고 무례를 저질러버렸다. 아회가 꾸벅, 앉은 채로 크게 고개를 숙이자 청년은 그런 아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회는 입을 합 다물었다. 미소만 지었는데 귀품이 흘러넘쳤다. 이제 보니 도련님은 머리도 쪽빛이고, 무 가의 특징도, 아버지도 닮았다. 어머니를 닮은 자신보다 더 무 가에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하긴, 나는 사생아니까. 아회가 시선을 내리깔자 가주는 딱, 소리가 나게 불 올리지 않은 곰방대를 침대 가장자리에 두들기며 끌끌 웃었다.
"무 씨 집안의 사람들은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게 가족이거나, MA거나, 제사장이라 할지언정."
"……알겠습니다."
"화련이도 참, 이 집안에서 바깥 사람을 닮게 키우면 어쩌잔 건지. 토끼가 늘어나면 표독한 고양이가 잡아먹는다 했는데도 원. 약해 빠졌단 말이지."
"……어, 어머니는!"
"음?"
갑작스러운 외침에 가주는 부적을 손짓 한 번으로 불러오다 말고 아회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쭉정이 같던 녀석이 어찌 저리도 당돌하게 외치는지 흥미가 생겼다. 아회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피하려다, 결심했는지 고개를 슥 들었다. 시선을 마주한 가주의 눈이 슬슬 휘었다.
"어머니는 약하지 않습니다……."
"호오. 더 얘기해 봐라."
"그게, 그게… 어머니는 호랑이가 와서 저를 한 입에 삼켜 잡아가도 송곳니를 부러뜨리고 그걸로 뱃가죽을 찢어 꺼내주실 거라 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외쳐버린 얘기였다. 아회는 우물쭈물 대다, 숨을 뱉듯 한 번에 이야기를 꺼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주는 그런 아회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이 녀석 보소? 어미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눈빛이 앙칼지더니 지금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정녕 화련이가 그리 말했다고?"
"예."
잠시 정적이 일었다. 어머니가 사고 치지 말랬는데, 어쩌지? 불안감이 확 밀려왔다. 내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닐까? 어머니께 누를 끼친 건 아닐까? 가주님이 어머니를 미워하시면 어쩌지? 그렇지만 시선은 절대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런 모습과 더불어 정적이 괜한 기우였다는 듯, 껄껄 웃는 소리가 퍼졌다.
"하, 하하!! 하하하! 그래, 그래! 너 역시 무 씨 집안사람이구나. 네 어미가 너를 지키고자 그리 말할 정도인데, 너도 어미를 지키고 싶겠지? 받아라."
툭, 무언가를 던져주자 아회는 혹여나 작은 손에서 떨어질까 소중히 잡아채 손아귀에 쥐었다. 눈을 굴려 바라보니, 부적이었다. 아회는 가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네 오늘 하는 것을 보겠다. 너도 부적을 꺼내거라. 우리 가문이 어째서 귀기 무 씨인지 알려주도록 하마."
그렇게 부적이 불타오르고, 아회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가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아회는 다시금 부적이 불타며 옷깃을 정돈하는 가주를 한참이고 경외의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 아회야. 너도 눈에 잘 담았느냐?"
"보았습니다."
"ㄴ, 네."
"우리는 주인 된 자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한다. 전장을 돌며, 숨통을 끊어야지. 그리고 인간이 가장 오랜 기간 맞서 싸우며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두려움과 경외의 존재가 되거라. 그리하면 너희는 언젠가 귀기 무 씨라 불릴 것이다. 부적은 경면주사가 아닌 피로 써야 하니. 피를 두려워 말거라. 지금은 내 피로 쓴 부적을 주지만 언젠가는 직접 그려야 할 게야."
"새겨듣겠습니다."
"그리고 아회."
"ㄴ, 네!"
"네 아직 어리고 학당도 재학하지 않았으니 내 임의로 도력을 불어넣어 주마. 내 네게 제법 기대를 품고 있으니 어디 잘 해보거라."
"네…."
가주가 다가와 아회의 머리에 큼직한 손을 올리고 부적이 불탄 이후, 가주는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조만간 사용인을 죄 죽여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를 교육하고 말 것이다, 그래, 너도 결국 내 아이구나! 화련이가 아주 쓸만한 것을 낳았구나!
"하하, 어떻게 이런 경사가. 둘이구나, 둘. ─아, 네 눈앞의 동생이 보이느냐?"
"…예."
"아회야, 네 눈앞의 형이 보이느냐? 하하!"
"……."
"너희는 결국 무 씨 집안의 피를 받았어. 그래, MA가 내게 쓸모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주었으니, 무 씨 집안이 용서받은 것이 맞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지?"
아회는 무어라 떠들며 웃는 아버지께 차마 집중할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지은 미소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온화한 저 미소가 시선을 빼앗는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형님도 존경스럽다. 몇 번에 걸친 자신과 달리 한 번에 도술을 성공하셨다. 밤하늘과도 같은 저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다시금 눈이 마주쳤을 때, 아회는 자신의 삶이 변하리라 직감했다. 아, 존경스러운 분. 저분을 한 번이라도 형님이라 부르고 따를 수만 있다면……. 오늘은 꼭 어머니께 알려드리고 말 테야. 수업을 받았다고, 멋진 분을 뵈었다고, 그리고 그분이 나의 형이었다고, 그리고…….
"아회야."
"예, 어머니."
"잘 기억해라. 이 어미는 너를 사랑한다, 무엇보다 사랑해……."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하다고.
- 열 냥
- "너, 도련님의 호위가 되었다며. 안타깝네."
"너무 그러지 마, 사생아 도련님과 서자 호위가 어울리니까 그렇게 붙여준 거겠지!"
나는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저것들은 출신이니 뭐니 얘기를 꺼낼 테니. 그래도 하나 서로 공감대를 만드는 말을 하면, 조롱은 있을지언정 무시하지 않고 대화에 끼워주긴 했다.
"어, 그래. 근데 그 유령 도련님께서 짐도 채 풀지 않고 어디로 가버렸더라."
도련님 흉. 불경하긴 해도 어쩌겠나, 이게 내가 북부에서 살아남는 방법인데.
"또?"
"그래, 또."
"이야, 고생이 많네. 어이, 어디로 갔을 것 같아?"
"고드름 숲이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해도 제대로 들지 않고,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인데. 그런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니까! 혹시 거기에 꿀이라도 숨긴 게 아닐까 싶어."
"그렇지? 자길 닮아서 스산한 사람이라니까."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늑대를 닮은 듯한 호위 하나가 다가온다. 아, 띠를 보니 선배구나. 누굴 호위하는 분일까?
"네 이번에 도련님을 호위하는 아이더냐."
"예!"
"몇 냥이지?"
이 뜻을 잘 안다.
너는 얼마 만큼의 정보를 알고 있느냐.
나는 도련님의 과거를 모두 들었다. 가장 몸값이 비싸단 뜻이다.
"열 냥입니다."
"그렇군."
"근데, 왜요?"
"뭐, 낭비는 파산의 지름길이니 알아두라고."
뭐야, 이상한 사람이네.
아, 이 유령 도련님. 본가로 오기가 무섭게 어딜 간 거야? 새벽에 불침번을 서다 좀 졸았단 이유로 안이 휑 비었을 줄이야. 별채는 으스스하다.
"아니, 이 새벽에 도련님은 어딜 가신 거야?"
"날 찾니?"
"응?"
나무 위로 시선을 올리니 엎드리듯 늘어져있는 모습은 차분한 도련님이라기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짐승 같네. 머리를 풀고 있어서 그런가? 어찌 되었든 좀 짜증이 난다. 호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거긴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본가에서 내가 위험할 곳은 없는데, 무슨 소리람."
"나무가 부러질 수도 있어요, 도련님!"
"너. 몇 냥이니?"
"예? 저요? 열 냥인데요?"
턱을 괸 도련님께서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둘째 마님을 닮았다더니, 저런 사람인가?
"얘, 내가 그보다 많은 돈을 줄 수 있다면, 어찌할 거니?"
"지금 저 매수하시는 거예요?"
"아니,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되거든. 네가 말한,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에 물건을 보내주는 거."
"……설마 다 들으셨어요?"
"응."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요?"
도련님께서 자신의 손톱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여기에서 혀를 자르겠단 뜻이구나.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냥, 가도 좋아."
"네?"
"너는 내 호위니까 잘 해줄 거라 믿었을 뿐이지. 가주님께 고해도 좋단다."
"아니, 그."
처음 보는 표정에 나는 벙찌고 말았다.
뭐, 14살 먹은 애가 저런 표정을 지어?
아, 젠장.
"할게요. 뭔데요?"
고드름 숲은 대담한 호위 일을 맡는대도 참 무섭다. 으슥하고, 햇빛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제대로 드는 날엔 고드름이 빛을 반사해서 눈이 너무 아프다! 거기다 가끔 고드름이 뚝 끊겨 떨어지면, 자칫하다 오늘 단명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날카롭다.
그렇지만…….
"그런 표정인데 사람이 어떻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냐…."
아이고, 내 팔자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저, 그런데, 도련님."
"응……?"
"거기에 있는 거요. 혹시……."
도련님.
"……부디 비밀로 해줘."
또 그런 표정이네.
차라리 울면 좋을 텐데.
그 이후로 유령 도련님이 말을 많이 거신다. 호위 녀석들은 뭐, 끼리끼리 어울린다는데 어쩌겠나. 나는 더 얘기할 수밖에. 그 도련님이 글쎄, 날 부려먹는다니까.
어느 날이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예?"
나는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저는 그렇게 재밌는 사람이 아닌데요."
"너는 행복했니?"
"……."
또 그 표정.
이쯤 되면 어떤 의도인지 뻔히 알겠다.
힘들어서 어디라도 기대고 싶겠지. 내가 들은 열 냥 어치의 정보로만 해도 삶이 좀 고되던데.
"저는 그 뭐야, 제사장 집안 서자로 태어났는데요……."
"불편하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아뇨, 아뇨. 그냥, 남 앞에서 이런 얘기 꺼내는 건 처음이라."
내 얘기를 듣는 도련님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누구도 내 얘기를 이렇게 들어준 적이 없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점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랬구나."
"그래도 지금은 뭐."
"응?"
"…그, 도련님 모시게 됐으니까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는 말에 도련님은 활짝 웃었지만 영 모르겠다.
웃는 얼굴 너머로 계속 그 얼굴이 겹치니까, 점차 연민이 들었다 해야 하나?
그래, 죄책감이다.
앞으로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련님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야, 마음에 바르는 연고가 있다면 좋을 텐데.
도련님은 내가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신다.
또 저 얼굴. 세상 모든 슬픔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참으려는 얼굴.
도련님.
저는 그런 슬픈 표정을 지으면 거절할 수 없어요.
안쓰러운 것이 아니에요. 그건 기만이잖아요?
도련님께서 꿋꿋하게 살아가려 하는데, 소문에 휘둘리고 도련님 흉을 봤던 과거의 나 자신이 한심해지거든요.
어휴, 이래서 호위하지 말라고 하나 봅니다.
점차 우리의 유대감은 깊어졌다.
도련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바다에 가고 싶었어."
내가 알던 열 냥의 가치를 깨부수는 이야기를.
나는 그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어느덧 도련님이 18세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다.
"아룁니다."
"얘기하거라."
"오늘도 물건은 잘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보약인데, 가주님께서 챙겨달라 하셨습니다."
"더 할 말이 있으리라 믿는단다."
"독은 없는데, 맛도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고마워."
"곧 6학년이군요."
"응. 벌써 6학년이네."
"방학까지 나흘 남았으니 내 찾아가마."
"……채비하겠습니다."
"준비는 다 되었더니?"
"물론이지요."
"너는…… 늘 열 냥 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지. 오늘도 내 말벗이 되어주련."
도련님은 지팡이를 느릿하게 매만진다. 나는 알겠다는 듯 도련님께 깊이 오체투지를 했다.
"……얘, 내가 드디어 6학년이야. 학당을 졸업할 때니, 어찌 허망하지 않겠니.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도련님."
"내가 죽음을 봐버렸단다. 너무나도 많이. "
"……."
"살고자 했고, 인간은 원래 그런 법이지. 그렇지만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어찌 같겠더니?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나는 죄인이지 않더니."
도련님께서 또 그 표정을 짓는다.
아, 도련님.
"나는…… 늘 기꺼이 죽고자 했단다. 내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가볍길 바라고 있었단다. 늘 그랬어. 언제쯤 나는 죽을 수 있을까, 내 태어남 자체가 잘못인데 왜 나는 죽지 못했던 걸까, 차라리 날 죽여주지, 그 사람은 왜 나를 살려서 삶에 박아두고 간 걸까. 내가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도련님께서 한없이 작은 몸을 웅크린다.
제발, 안 됩니다, 도련님!
"차라리 언젠가 있을 내 죽음에, 동등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을 뿐이야…… 아, 미안하구나. 네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어. 새벽이라 정신이 없었구나. 흘려 들어줘."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는─
'''''이 미천한 몸이나마 MA 님께 바칩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시며 나의 죽음이 앞으로 살아갈 자의 삶과 동등한 가치가 있기를.'''''
도련님은 목매단 시체를 올려다봤다.
"얘, 나는 너의 마음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네게 늘 내 진심을 얘기했단다. 너를 귀애하였지. 그런데 어쩌겠니,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데."
네가 주도했던 모든 이야기가 열 냥의 가치를 소비했음은 알아야지.
"그렇지 않더냐."
늑대를 닮은 호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질러라. 누구도 오해를 사지 않게끔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또 그 표정이다.
"너는 오래 살아주거라. 가급적이면 졸업할 때까지면 좋겠구나."
세상 슬픔을 다 끌어안은 표정.
허름한 창고에 불이 붙는다.
열 냥의 값어치는 쓸모를 다했다.
---
"어찌 목을 매달게 종용하셨습니까."
"아, 영훈?"
"예."
아회는 모로 누우며 느릿하게 제 손톱을 내려다 봤다. 길쭉한 손가락마다 모난 곳 없이 옥수수알 영근 듯 큼직하게 박힌 손톱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보기로."
"많이 아꼈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내 호위란 아이가 나를 욕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더냐. 그것도 열 냥의 가치를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면 말이야. 붙잡혔을 때 입이 얼마나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하나?"
"……."
"사실 그 아이는 혀를 깨물어서라도 입을 무겁게 했을 게야. 열 냥의 가치 이상의 것을 들었고, 해냈으니. 기실 내 똑같이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 나를 많이 겹쳐 보았고, 의형제라도 맺을까 생각을 할 정도로 아꼈다."
그럼에도 어찌 본보기라 하였느냐.
느릿하게 웃는 모습에 호위 하나는 뒷짐을 지고 자세를 다시 고쳤다.
"죽음을 초월한 충정은 없을 거라 믿었다."
"예?"
"그 아이가 진심으로 나를 생각했던 거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기꺼이 목을 매달 수 있겠지. 하여 넌지시 흘렸다. 날 위해 죽어달라고. 잘 갈아둔 칼 같은 녀석이라 처음엔 철썩같이 믿고 따르더니만, 막상 올라서니 두려운지 울더군. 난 이해해. 진짜 죽어버리면 어쩌지? 여기서 정말 끝나면 어쩌지? 그런 본능적인 감정을 어찌 이기겠더냐? 그런데 그 아이가 내 얼굴을 마주보더구나."
"……."
"그래서 속삭여줬지. 난 널 이해하는데 넌 날 믿지 않아. 그래서 기뻐. 너의 충심을 알게 되어서, 내가 열심히 만들어온 내 사람들의 충심이 이 정도라는 걸 깨닫게 되어서. 이제 그만 둬도 좋아, 내려오렴. 그랬더니 날 똑바로 마주보며 디딤대를 제 발로 걷어차더라. 진정 나의 충정이었던 거야."
날카로운 손톱이 침구를 두들겼다.
"훌륭한 본보기가 생겼으니 너도 할 수 있지?"
어둠 속에서 가늘게 뜨인 눈과 손톱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비쳤다.
- 無影
- 네 호위될 자 고르거라. 생전 호위 하나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말이다. 무 씨 가문의 가주, 무 준서는 이회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에 손을 내저었다. "내 깨달은 것이 있어서."라고 말했지만,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나 싶다. 학당에 입학하기 2년 전, 아회 12살의 나이었으니 당연할 법도 하다. 형님이 죄 도륙하여 무 씨 집안 추락한 이후에야 남은 직계 챙기려 드니, 이 나이가 되어도 좋은 기분은 못 느꼈다.
쭉 둘러보니 가관이다. 어지간하면 쭉정이에 감시꾼이요 쓸모없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 아마 이마저도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겼음이리라. 형님은 이미 떠나버린 사람이라 무 씨 집안 잇지도 못하는데 견제 한 번 여전하다. 죽 둘러보다 구석에서 기회도 못 노리고 있는 사람을 마주했다. 청지기가 나직하게 이른다. 부모 진즉 잃고 이름도 없는, 호위 중에서도 허드렛일 도맡는 아이라고. 저 구석 호위 후보도 못 된 사람을 고르니 진심으로 괜찮겠냐 묻는다.
"저분과 함께하고픕니다."
"어찌하여?"
"저와 닮았습니다."
"네 어찌 저 놈을 닮았다 하느냐. 네가 저 허드렛일하던 존재더냐?"
"아니요, 외로울 겁니다. 저는 가주님이 있지만 저 아이에겐 가주님이 없지 않습니까."
"아량 넓기도 하여라. 그 품성이 화련이를 닮았구나."
"망극합니다."
하며 호위를 온전히 정했을 때, 아회는 그 사람이 자신과 평생 함께 할 충정이 되리라 믿었다. 그 사람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 이후로 약 한달간은 호위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훈련이 있으면 지켜보고, 밤에 호법을 설 때면 두어 시간은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 과묵한 품성을 지닌 호위와 말을 텄던 것은 아닌 새벽 아회가 고드름 숲에 홀로 갔을 적,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쫓아온 날이다.
"여기 계셨군요."
"아."
"대체 왜 말도 없이 나가신 겁니까?"
아회는 힘없이 늘어진 꽃을 쥐고 있었다. 눈더미 속에서 직접 캔 것인지 손가락 끝이 새빨갰다.
"어차피 난 골칫덩이인걸요."
사라져도 다들 좋아할걸요? 늘 묵묵하던 호위는 아회를 어딘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회는 그런 시선을 잘 모르겠다는 듯 오히려 눈을 빤히 마주 해왔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도련님."
호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충격적인 말이다. 어떻게 자기가 사라져도 좋단 말을 하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이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는데. 호위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회는 말간 시선으로 호위를 쳐다보다 눈을 휘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익숙하니까요. 이렇게 된 거 같이 갈래요?"
"어디로……."
"내 비밀 공간. 가줄 거죠? 여긴 가끔 늑대가 나타나거든요."
자박자박 아회를 따라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새벽 하늘에 드리운 구름을 보니 곧 눈이 내릴 것만 같다. 아주 많이, 누가 왔는지도 모르게 흔적을 지워줄 것처럼.
"호위 님은 여기 오기 전엔 어떤 사람이었어요?"
"저는……."
말을 해도 될까.
"……맹猛 가의 사람입니다."
호위는 천천히 얘기했다. 아회의 아버지인 준서가 호법하던 제사장 가문, 맹 가. 그 속에서 기대를 받고 자라며 아니마를 꿈꾸던 청년이었다고. 삶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고, 집안에서 분열이 생기고, 제각기 산제물을 바치겠노라 서로를 도륙하더니만 결국 자멸했다고. 준서가 장자이자 살아남은 자신을 거둬 호위단의 허드렛일을 돕게 되었다고. 가치는 고작 한 냥이지만.
"그래서, 도련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힘들었을 텐데 얘기해주셔서 기뻐요. 다른 사용인들처럼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예?"
"사용인들은 아무리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봐도 답을 안 해주거든요. 저 때문에 형님이 그렇게 된 거라고, 제가 태어나선 안 됐다고. 말을 섞으면 부정이 탄다고 그랬지 뭐예요."
아회는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다. 호위에게 있어 묵직하고도 불편한 감정이 속에 쌓이는 것도 모르고. 발걸음이 멈췄을 때, 그 묵직함은 절정에 달했다.
"우리는 많이 닮았어요. 한 냥, 아니, 실상은 한 푼도 못 되는 존재."
아회의 시선은 하염없이 한 곳에 꽂혔다. 처음 보이는 표정에도 호위는 묵묵했다.
"그렇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어 뭐든 할 수 있지요. 나와 함께 해주시면, 그 가치가 턱없이 모자랄 거예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함께 해주실 건가요?"
"저를 거두어주셨으니 무엇이든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럼 이제 내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요."
아회가 속삭였다. 호위는 한쪽 무릎을 꿇던 자세를 바꾸더니, 오체투지를 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점차 아회는 입지를 세워나갔다. 학당에 입학할 적엔 여전히 경멸 어린 시선은 있으나 겉치레로나마 도련님 소리를 듣고, 자신 또한 대성하여 호위 대주 자리를 노릴 수 있을 정도였다. 호롱불 일렁이는 방 안에서 어린 아회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래, 이제야 묻는구나. 맹 씨 가문의 호위야."
"하문하십시오."
"네 진짜 이름이 무엇이더니."
"……."
"아, 여기 올 적 버렸던가."
"예."
"그래, 호위에게 이름이 붙으면 정이 들지. 가주님께서 그것 만큼은 참 잘 하셨다마는, 내 방식과는 맞지 않는구나."
아회 느릿하게 웃었다.
"하여 그림자에 또 그림자가 지겠느냐. 너는 내 곁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 그림자 겹쳐 존재하지 않을 존재로 살 것인즉. 너도 나의 뜻에 함께 하라. 어디 보자, 없을 무無요, 그림자 영影 하여 무영이 좋겠구나. 그렇지?"
다신 없을 영광이었다.
어느 날은 서로 침묵했고, 때로는 쓴소리하였다. 아회가 없으면 무영은 그 넓은 북부를 발로 뛰어 찾았고, 아회도 무영이 호법하지 않으면 밤 잠 설칠 정도로. 6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아회 침상에서 몸 일으켰다.
"영아, 무영아. 네 어디 있더니?"
"여기에 있습니다."
"내 너를 잃는 꿈을 꾸었다."
"명 다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참으로 충복이기도 하지. 무영아, 너도 네 삶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더냐?"
"제 삶 이미 죽었으니 주군이 다시 되살려주어 그 은혜 갚기 전까지는 살지 못하렵니다. 하니 불만 일절 없습니다."
"녀석, 침이나 바르고 말하거라. 아, 무영아."
"예."
"난 널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단다."
아회는 느긋하게 침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소중해지면 잃을 것이 생기잖니? 남에게 약점을 내어주는 일 따위는 없을 터이니 너도 날 그리 생각하거라. 서로 약점이 되어 거사를 치를 때 발목을 잡지 말란 뜻이란다."
"명심하겠습니다."
"영훈이가 목맨 것을 기억하니?"
"예."
"네 보기에 내가 너무했더니? 죽음을 초월한 충정이니 뭐니, 그런 것이 말이야."
"……이해할 수는 있으나 지나치긴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는 필히 지옥에 떨어지렷다."
"주군, 어찌 그런 말씀을……."
"얘, 무영아."
아회가 무영의 손을 고이 잡았다. 눈을 서서히 뜰 때면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정확하게 마주할 때면 오금이 저리니.
"그땐 너도 같이 가자. 그러니 부디 너는 오래 살아주거라. 가급적이면 졸업할 때까지면 좋겠구나. 그 이후엔 목을 매달아도 좋으니, 조금만 기다려주렴."
부적이 타오르고 손바닥을 베어내자, 무영은 군말 없이 환부에 입을 댔다. 아회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 수첩
- 길을 잃은 학생처럼 위태로이 배회하다 기숙사 방에 돌아오니 공기가 미적지근하다. 벽난로를 끈 탓이겠다. 그는 아늑한 방의 문을 닫으며 두루마기를 벗었다. 두루마기는 벗기가 무섭게 옷걸이까지 알아서 날아가 각을 맞췄고, 버선을 벗자 푹신한 러그가 발을 맞이했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다.
휴식 준비를 마친 아회는 자그마한 땅신령을 쿠션 위에 올려주곤 손가락을 퉁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벽난로가 타오르고, 방에 온기가 퍼져간다. 개인적인 이유로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마는 최근 들어 같이 살게 된 저 조그마한 땅신령에게 마땅한 배려를 보여야만 했다. 곧 여름이 다가오지만 저녁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고 아회의 방은 다른 방보다 추운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장작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아회는 지팡이를 한편에 두고, 흔들의자에 앉아 소매에 숨긴 수첩을 꺼냈다.
선물이라.
우스운 일이다. 한때 형님의 선물이라면 세상 어떤 금은보화와도 바꾸지 않으려 들고 애지중지 여겼건만 지금은 이리도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으니, 역시 세월의 흐름 앞에서 감정이란 것은 덧없구나.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대고 수첩 커버를 매만진다.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서늘한 가죽의 촉감이 나쁘지 않다.
그래서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단안경을 고쳐 쓰며 아회는 가늘게 눈을 떴다. 시야를 고의로 제한하는 것은 기숙사 밖으로 족한 일이니. 아래로 향해 수첩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눈동자 너머로 복잡한 생각이 오간다. 읽어, 말아.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흥미가 동한다. 가죽 커버를 매만지던 손길을 멈추고 망설임 없이 수첩을 펼친다.
"이 이름도 간만이야."
궁기라고 불린 자의 이름을 그는 알고 있다. 빼곡하게 적힌 이름을 읽으며 픽 웃어버린다. 그리운 글씨체고, 한없이 우스운 글의 나열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절박히 제 이름을 나열했나, 마치 잊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
그래, 눈치도 제법 있는 사람이로고. 타인이라면 그냥 넘길 사감의 행동에 흥미를 가진 것이 계기인지. 백룡이라 탐구심이 꽃 핀 것인지. 청룡 아이는 또 누구인지.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눈에서 흥미로움이 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저질러서는 안 됐지……."
일기가 덮인다. 불길이 일렁이더니 손이 팔걸이에 오른다. 저의가 무엇인가, 목적이 무엇인가. 툭, 툭, 툭. 손톱이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린다.
그의 원대한 계획에 나는 어떤 역할이길래 이리도 통제하려 드는가.
"저항하고 싶게……."
토도도독.
- 약조
- 사생아가 대단한 일을 벌였다! 아회가 요괴를 날이 무딘 손도끼로 내리쳐 곤죽을 만든 날, 무 씨 집안은 그야말로 경사가 난 듯 잔치를 즐겼다. 온갖 귀한 산해진미를 상에 올렸고, 악사를 초대해 좋은 노래를 들었다. 고매하던 무인 집안에 술과 향락이 가득한 날, 정작 그 경사를 안겨다 준 아회는 별채로 도망쳐 아른거리는 불빛을 등지고 있었다. 어머니, 화련은 피투성이가 된 아회를 보며 처음엔 그 피가 제 아들의 것인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의원을 찾으려 들었지만, 요괴의 피였음을 알게 되었을 적엔 아이가 다친 것보다 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 너른 품에 가득 끌어안기만 했다.
"아회야."
"네, 어머니."
"무서웠지."
"……아니에요. 저, 이제 인정을 받았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아회야. 내 보물 같은 아이야. 너는 무 씨 집안의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무 씨 그 자체가 될 필요는 없단다."
어떻게 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을 보아야 할 아이가 어째서 이렇게 피를 보고 당연해져야만 하는 걸까! 비통함에 얼굴은 더욱 울상이 되었고, 화련은 한참이고 아회를 끌어안고 있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이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숨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회, 아가."
"네, 어머니."
"우리 바다로 갈까?"
"네?"
"령도로 가자꾸나. 비록 여기처럼 사용인은 없겠지마는, 가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란다. 너울거리는 비단처럼 춤추는 파도를, 하늘을 유영하는 새를, 햇빛 속에서 찬연히 빛나며 바스러지는 백사장을 보자."
"그러면 형님은요……?"
"영원히 떠나는 게 아니니까, 볼 수 있을 거란다."
"정말요?"
"응. 잠깐 여행을 떠나는 거야. 엄마랑, 우리 아회랑 둘이서만……."
어린 아회는 별채까지 울리는 웃음소리와 번쩍한 불빛을 뒤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를 마주 안았다.
"저도 바다가 보고 싶어요, 갈래요!"
"잘 되었구나. 엄마랑 같이 가자, 약속이야."
"응, 약속."
어머니가 여행이라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이 끔찍한 집안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어머니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 대화가, 그 작은 약속이 불러올 파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아회는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 봤다. 달은 환하고, 학당에서 잠시 빠져나와 돌아온 북부의 호수는 여전히 차갑다. 이 호수가 떠나가도록 울부짖던 날이 있었다. 지금 어머니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알 수 없는 발음을 뱉고 바닥에 엎드려 우는 것처럼. 그에게도 한때 어머니가 말씀하신 바다처럼 사랑할 적이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가슴이 거세게 일렁이고, 옅은 햇살에도 찬연하게 빛나던 날이. 마르지 아니하고, 그 푸른 색이 바래지 않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 날이 찹니다."
"으으, 윽… 아으으…… 흑, 돌아가고 싶어, 집으로 돌아갈래……."
"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서 따스한 차를 준비할 터이니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요."
"차……?"
"예.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목련차입니다."
"좋아, 갈래……. 뜨겁게 달인 목련차와 다식……. 같이 가자꾸나, 너도 좋아할 거란다."
"……예."
아! 파도가 치면 바다는 수없이도 부서지는 것을…….
- 바다
- 어머니, 화련은 내심 령도를 그리워했다. 이따금 따스한 햇살이 그리웠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산산이 부서지는 포말이 꿈에 나타날 때가 있었다. 갈매기가 우는소리가 그립고, 그 비리고 짭짜름한 냄새가 그리웠다. 바다는 화련에게 있어 평생의 보금자리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차가운 북부에서 매몰찬 사람들만 만나니 더욱 선망과 그리움은 깊어져만 갔다. 멍하니 화련이 별채에 딸린 정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볼 적이면, 아회는 어머니가 내심 령도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최근 바다로 가자고 한 뒤부터 쭉 저 상태셨으니까. 아회는 오늘도 허공을 쳐다보는 어머니를 말가니 바라보다, 그 주변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머니."
"아, 내 사랑스러운 보물. 네가 오는 줄도 모르고 난……."
"아니에요. 저, 오늘도 수업을 들으러 가려고요."
"오늘도 열심이구나, 우리 아들. 조심히 다녀오렴."
"저, 그게……."
"응? 무슨 일이니?"
"오늘 시험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화련은 쭈뼛거리는 아회를 보고 무언가 눈치챈 듯이 길쭉하게 웃음을 지었다. "마법의 주문이 필요하구나. 그렇지?" 화련의 말에 아회는 시선을 피하다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담? 화련이 아이를 안아주기 위해 팔을 벌리기가 무섭게 아회는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쏙 품에 들어왔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배에서 나왔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마에 맞춰주던 입술은 이내 말랑말랑한 뺨과 조그마한 입술까지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으악!"
"누가 이렇게 귀여우래, 응? 우리 소중한 보물!"
"노, 놓아주세요!"
"네가 안으로 들어왔잖니, 못 나간단다!"
"엄마아…!"
"그래, 그래."
뺨을 연신 비벼대던 화련은 아쉽다는 듯 아회를 놓아주었다. 어찌나 볼을 비볐는지, 아회의 머리카락은 한쪽이 부스스하게 떠 정전기가 일어나고, 뺨은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오늘 시험은 분명 잘 볼 거란다."
"응, 금방 돌아올게요."
아회가 종종걸음으로 오늘 수업할 내용이 담긴 책과 붓을 안고 정원을 가로지를 적, 화련은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줄 걸 그랬나 생각하며 조그마한 아이의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주시하다, 다시금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고요한 정적이 일면 세상은 령도가 되었다.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회는 바다를 어떻게 생각할까, 좋아할까? 아니면 비린내를 견디지 못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까? 어느 쪽이든 자신의 아이니까 사랑스럽게 품어줄 수 있었다. 소라 껍데기를 주워 그 속에서 들리는 바다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소라에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백사장에 덥혀진 모래는 얼마나 따스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북부는 위험했다. 더는 아이를 이렇게 둘 수 없었다. 욕심은 부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회와 함께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싶었다. 북부를 구제할 수 있을 방법을…….
"얼마나 생각에 빠졌으면 내가 온 줄도 모르십니까."
"아. 마, 마님."
화련은 황급히 시선을 떼었다. 별채로 첫째 부인이 오는 날은 한 번도 없었거늘, 대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다. 불안함이 샘솟았지만, 화련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그저 불안함으로 판단하는 건 나쁜 일이다. 이 불안이 내 마음과 환경 때문에 생긴 것인데 어찌 타인을 탓할까? 더군다나 첫째 부인을 미워하면 안 된다. 저분도 굴러들어 온 돌인 자신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을 테니까. 화련이 미소를 짓자 첫째 부인은 불편한 심기를 눌렀다. 저 아이는 끝까지 순진하구나.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그게… 참, 내 정신 좀 봐. 안으로 들어가요, 추우실 텐데……."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테니 여기에서 이야기하지요."
"안 돼요."
"어찌 내 결정에 토를 답니까."
"감기에 걸리실지도 몰라요."
첫째 부인은 완강한 뜻에 기가 막히다는 듯 화련을 쳐다보다, 마지 못내 수락하듯 시선을 던졌다. 화련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미줄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화려하지 못하다 못해 수수하기 짝이 없는 방으로 첫째 부인을 안내했다.
"그, 목련차는 어떠신가요……? 저번에 보내주신 것이 맛이 좋아서, 저도 이번에 약소하게나마 구해보았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를 대접할 테니……."
화련이 자리를 빠져나가자 첫째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차와 다과는 사용인이 가져오는 것이 옳거늘, 어째서 저 순박한 여자는 홀로 하려 드는 건가? 애초에 남편이 붙여준 사용인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감시역으로 붙여둔 것들을 치웠길래 사정 좀 나아졌다 싶었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첫째 부인은 고개를 돌려 방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이따금 가주가 아이가 잘 해주었다며 바꿔준 가구나 선물한 장식품, 그리고 화련이 소중하게 걸어둔 바다를 표현한 자수가 아니었다면 과장을 보태 사용인의 방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했다. 자신의 방과는 천차만별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련은 따스한 목련차와 서양의 다과를 가져왔다. 아회를 위해 아껴두었던 것이지만 아이도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
"과자가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는데요……."
"눈치 보지 마시지요. 이야기만 하고 갈 터이니."
"ㄴ, 네."
첫째 부인은 찻잔을 입에 댔다. 자신이 마시는 최상품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과에는 손을 대지 않는 모습을 부산스러운 눈길로 보던 화련은, 잔이 상 위에 놓이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화비."
"네."
"나는 상공의 말을 믿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내 아이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당신도 그러지 않을 거라고 분명 말했지요."
"그렇, 지요."
"그런데 당신의 아이를 후계자로 두는 건 어떻느냔 말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네?"
화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나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화련 또한 아이의 순탄한 삶을 위해 완강하게 거부해오던 일이었고, 자신의 남편도 인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후계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화련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허락하지 않아요.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예요. 어떻게 도련님의 자리를 넘보겠어요!"
"그렇지요. 그대의 생각 또한 같은 게지요. 그렇지만 그대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네?"
"당장 사용인에게도 휘둘리는 당신이 거절한다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손찌검 하나 하지 못하고, 모진 말을 하면 홀로 상처를 받는 당신의 말을 사람들이 들어주기나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건……."
"그 사람들이 가엾다는 것은 나약함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핑계입니다, 화비. 이곳은 북부니까요."
온화한 어조였지만, 말은 가시가 되어 화련의 속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이 사람들도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 하지만 첫째 부인의 말도 맞는데,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첫째 부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여전히, 여전히 그 빌어먹을 선함을 내세우는 모습에서 많은 감정이 교차했으나 그 표정을 쉬이 갈무리하곤 눈을 감았다.
"화비."
"네, 마님."
"부디 당신의 아이가 내 아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손을 쓰는 날이 오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죽이겠단 뜻임을 누가 모를까. 화련은 등골이 오싹했다. 사랑하는 내 아이가 죽는 것만큼은 안 된다. 이 북부에서 살아가며 있었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신의 아이가 설산을 헤매다 달달 떨며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던 그 순간이, 끌어안았을 때 얼음장보다 더 차갑던 몸이, 최근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던 날이! 그 끔찍한 순간마다 살아 돌아왔는데, 만약 죽는다면 필히 모든 순간보다 더 끔찍하겠지. 그것만큼은 안 된다! 목련차가 든 찻잔을 쥔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ㄴ, 네. 며, 명심, 하겠습니다."
"……."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첫째 부인은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아무리 방을 따스히 덥혔다고 해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탓에 차는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렸다. 첫째 부인은 차를 단숨에 마시더니 잔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차의 값은 해야겠군요. 내 마지막 정이니 새겨 들으십시오, 화비."
마지막 정? 화련은 결국 입에 대지 못한 찻잔을 내려두며 첫째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참 우아하고 고혹적인 분이시다. 청초하기만 한 자신과는 다른, 빛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마지막 정이라며 어떤 말씀을 꺼내려는 걸까, 입술이 벌어지는 찰나의 순간, 머리에서 불안한 신호등이 켜졌다. 적색으로 껌뻑껌뻑 빛나는 것이 이 얘기를 들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첫째 부인은 날씨가 좋다는 듯 이야기를 쉽게 꺼내버리고 말았다.
"귀기 무 씨에 시집온 여성은 어지간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뭐, 라고요……?"
"나는 곡옥 사람입니다, 화비. 집안에서 온갖 예쁨을 받고 자랐고, 고향은 내게 특별한 곳이나 다름이 없었지요. 또한 나도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사람이지요."
첫째 부인은 지금 화련이 어떤 심정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공감하고 있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화련은 멍하니 이야기를 끊지도 못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이 아이를 배어 들어왔을 때 이 빌어먹을 집구석을 나가려는 시도를 여럿 해보았습니다. 가족이 그리웠기 때문이지요. 내가 어찌 이런 취급을 받고 살아야 합니까? 때문에 하루만 곡옥에 돌아가고 싶다고. 지쳤노라고 내 체면까지 내려놓고 애걸복걸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그이의 몸뚱이에 갇히듯 안겨 하루를 꼬박 새워야만 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뒷방 나부랭이라고 할지언정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테지요."
이것이 내 마지막 충고입니다. 첫째 부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화련은 손을 뻗고자 했으나, 차마 잡을 수 없어 움찔거리는 팔을 가만히 두고자 무진 애썼다. 그 모습을 보던 첫째 부인이 덤덤한 눈길을 보냈다.
"살아남고 싶다면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독해지십시오. 아니면 머리를 써 도망치십시오. 그게 내가 해줄 말입니다. 그대는 너무 착해."
"잠ㄲ……."
"잘 마셨으니, 조만간 선물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럼 저는 이만."
그리 얘기하며 첫째 부인은 밖에서 대기하는 사용인을 대동해 자리를 떠버렸다. 화련은 그 자리에 혼자 남아 한참이고 첫째 부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러니까, 령도에 갈 수 없다고? 내 아이를 이 끔찍한 곳에 계속 두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아이는 령도로 데려가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아이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북부의 죄를 구제하려다 죄에 삼켜지는 것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내 아이, 내 아이만은 행복해야 하는데……. 멍하니 첫째 부인이 떠난 바깥만 한참 쳐다보던 화련의 시야에, 시간이 오래 지나 조그마한 인영이 담겼다.
"아, 어머니! 여기에 계셨군요!"
사랑스러운 내 아이. 어느덧 여덟이 다 되어가는 내 아이. 자신을 닮은 머리카락은 무 씨 집안의 색이 섞여 신비로운 물안개 같고, 큼지막한 눈은 아비를 똑 닮았으며, 입가의 점마저 자신을 쏙 빼닮은 보물. 그 조그마한 아이가 눈을 동글동글 뜨다 불안한 듯 눈치를 보고 있음에도, 화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
"어, 엄마… 괜찮으세요?"
"아가."
아회가 다가오기가 무섭게 화련은 그 자그마한 몸을 품에 덥석 안았다. 아회는 놀란 듯싶다가도, 화련이 떨고 있음을 깨닫기가 무섭게 화련을 마주 안고 서툴게 등을 토닥였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화련은 그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참아오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를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몸은 점점 더 크게 들썩이며 목 너머로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 끅끅대며 서럽게 우는 소리가 퍼졌다. 아회는 그렇게 어머니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작은 품을 내어주었다. 시험 본 것을 모두 맞았노라 얘기하지 않고자 하며, 도련님을 돕기 위해서라면 고작 이 정도로 기고만장해서는 안 된다며 회초리를 맞았던 것도 숨기기 위해 어정쩡한 다리를 애써 곧게 세웠다. 지금 자신의 상처를 지금 드러내면 어머니가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한참이고 달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감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화련 또한 무언가를 다짐했는지 아회를 품에 가득 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벌벌 떨리고 울음기 가득한 소리였지만, 아회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회야. 우리 꼭 령도로 가자. 엄마랑 바다를 보자…….
"응."
아회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물을 쏟고,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은 오후가 지나고, 아회는 잠들었다. 어스름한 밤이 되었을 적, 화련은 잠든 아회를 뒤로하고 홀연히 본채로 들어섰다. 별채와는 사뭇 다른 곳, 이따금 시선이 와닿았으나 화련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주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청지기는 안 된다며 만류했지만 고집이 황소보다 센 화련을 막아세울 수는 없었다. 문을 여덟 번째 두드렸을 때, 안에서 문이 열렸다. 술도, 차도 마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화련은, 안에서 잠도 자지 않고 제 호위하는 가문에 대한 서류를 읽던 가주를 보며 입을 벌렸다.
"마님이 별채에 오지 않게 해주세요."
처음 보는 광경에 청지기는 안경을 벅벅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본인의 자유지."
그 다음 돌아오는 답에 청지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 돌아가버리는 화련을 보며 가주의 방에 쳐들어갔다. 화련은 방으로 돌아가며 명백하게 결론이 났노라 생각했다. 가주는 정실의 편을 들고 둘째의 편을 들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이제 첫째 부인의 자비는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별채에 사용인이 왔다. 가주가 보낸 사용인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로 사과를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화련이 가문의 어르신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받고, 사람을 피하게 되던 날보다는 오래, 그리고 첫째 부인이 기어이 화련이 상경할 때 가져왔던 학당의 선추를 부수고, 그 때문에 최소한의 사용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별채에 들이지 않던 날보다는, 그리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날보다는 가까이 온 셈이었다. 그렇지만 사용인은 단 한마디만 던졌을 뿐이었다.
"가주님께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화련은 여기에서 결국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가주님께서 내린 명인데─"
"나가."
자기가 실세인 줄 아나.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보석함을 쿵 소리가 나게 두고 휭 사라지는 소란이 벌어지자, 그 소리에 놀라 깬 아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비몽사몽한 눈으로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떠나가는 사용인의 경멸 어린 시선을 한번 바라보던 아회는 자연스럽게 눈을 흘겼고, 사용인은 그 모습에 흠칫 놀라는 듯싶더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아회는 어머니를 말가니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에 화련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런 일도 아니라 하였다. 대신 홍옥을 깎아 만든 조개와 그 안에 담긴 큼직한 진주를 보던 화련은 잠시 침묵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제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
"네에."
"오늘 가계 도술 수업이 있니?"
"네에……."
"그러면 도련님께 말씀 하나만 전해주렴. 늘 감사하니,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싶다고."
"형님께요……?"
"그래. 할 수 있겠니?"
"응! 저 잠이 다 깬 것 같아요, 형님께 정말 말씀드리면 돼요? 지금이라도 갈래요! 준비할게요!"
"그러다 넘어질라, 천천히 준비하렴.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
화련은 우당탕 뛰어가는 아이가 아닌 홍옥 조개에 여전히 시선을 두었다. 이건 경고다. 자신이 이제 고향을 그리워할 것이라 생각한 무 씨 집안 가주의 작은 위협이었다. 그렇지만 령도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위협해봤자 내가 가지 않을 리가. 오히려 오늘 일로 결심이 서버렸고, 화련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통제감에 금이 갔고, 마음은 이미 바다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떠나기 전 자기 아이를 그나마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도련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 내 아이를 진정 사랑했더라면."
어디선가 파도가 치는 것만 같았다. 수없이도 바다를 부술 파도가.
- 혼사
- 6학년이 되어 북부로 간 적은 손에 꼽는다. 애초에 학기 중에 가문 내부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을 때나, 어르신의 장례와 같은 공적인 일이면 모를까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북부에 간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해도 방학이 아니면 발 들이지 않았던 날이다. 뽀얀 입김과 함께 얼음이 얼어 새파랗게 변모한 나무와 흰 길을 가로질렀다. 얼어붙은 눈은 발자국도 남기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웅장한 대문이 보였다. 검은 기둥에는 우아한 곡선이 새파란 기운 드러냈고, 현판에는 푸른 글씨로 귀기鬼氣 쓰여있다. 귀기 무 씨. 아회의 본가다. 이번에는 공적인 일로 가는 것과는 조금 궤를 달리했지만,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심복인 호위 무영無影이 급히 보낸 전서 때문이다.
─ 급히 본가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靑墨.
청묵. 전서를 읽을 적만 해도 아회는 기억 속에서 이 단어를 언제 쓰라고 했는지 더듬어 끄집어 내야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적묵이요, 그 이외의 사안이면 청묵 쓰라 하였으나 막상 쓰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용히 넘어가놓고 난데없는 암호 때문에 아회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무시했다가 벌어질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은 파장을 넘길 사람도 못 됐기 때문에 본가로 왔건만.
"놓아라."
"안 됩니다, 도련님!"
"놓으래도!"
아회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문 열리기가 무섭게 사용인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생아에다 유일하게 남은 직계이니 다들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는 건 익숙했다마는, 서로 작당한 듯 시선 교환하다 살살 비위를 맞추며 어딘가로 데려가려 들지 않던가? 이것들이 안 하던 짓을 하나 싶더니만 난데없는 향유니 비단옷이니 꾸며야 한다는 아우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체로 돌아버렸나? 신이 유년 시절에 속으로 저주하던 것을 이제야 들어주기라도 하나? 그는 평소엔 쓰지도 않고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던 "이 녀석들아, 내가 무 씨 가문의 직계다, 이 무슨 무례냐!" 같은 말을 뱉기까지 했으나 사용인들의 결의가 더 강했다. 그는 이유도 알 수 없이 한 겨울날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따뜻한 물에 박박 씻기는 무자비한 손길처럼 몸을 원치도 않던 향유로 씻김 당하고, 머리에 빗질과 기름칠까지 당하며 비단옷까지 칭칭 휘감기고 나서야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두 시진이나 계속된 이유 없는 치장은 아회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방에 비척비척 들어가 침대에 엎어지기가 무섭게 인기척이 느껴지자 아회는 보지도 않고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음료가 든 잔을 쥐고 나서야 원망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들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잔을 건네준 검은 답호 차림의 남성은 아회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뒷짐을 졌다.
"무영아."
"예, 주군."
"내게 설명을 잘 하는 것이 좋을 게야."
"일단은 드시고 말씀하시지요. 사용인들이 주군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합니다."
"하, 이제 와서 단체로 대가리에 도끼라도 찍혔더니? 오자마자 이게 무슨 수난인지 원."
아회는 잔에 든 옅은 노란색 음료를 미심쩍게 바라보다 쭉 들이켰다. 레몬 향과 더불어 파인애플의 향이 났다. 중간중간 사과 향도 나는 것도, 작은 얼음을 써 목으로 쉬이 넘어가는 감촉도 썩 나쁘지 않다. 예전에 마시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이것이 호사의 맛이로구나 싶을 정도였다. 잔을 입에서 떼었다가 다시금 입에 댈 적, 무영이라 불린 호위는 뜸도 들이지 않았다.
"……주군 앞으로 청혼서가 왔고, 가주님께서는 흔쾌히 받아들여 혼담을 주선하려 하십니다."
차마 목울대를 움직일 생각을 할 수도 없는 발언이었는지 주스와 작은 얼음덩이가 아회의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 다시 잔 안으로 입수했다. 아무리 산전수전 온갖 역겨운 일은 다 겪은 무영이라도 흉물스러운 것을 본 것만 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오만상을 썼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을 표현하는 표정에 아회는 마찬가지로 표정을 구겼다.
"으, 더러워."
"이상한 관념을 가진 인간에겐 이것도 성수라 하며 절을 할 것이 분명한데 감사히 눈에 담아둘 생각은 못할 망정."
"저는 그런 관념이 없는데도요?"
"없으면 만들어. 아니면 내 얼굴에 뱉지 않음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거 아니니?"
"그랬으면 진즉 사직서 내고 그만두었죠."
"세상에, 윤허할 거라 믿었니? 검은 소 누런 소 중에서 네가 제일 일 잘하는데 왜 놓아준다 생각을 할까. 도축이면 몰라."
저 뻔뻔한 사람 같으니라고! 이따금 제 주군의 뻔뻔하고 얄미운 태도를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의 겉면만 알기 때문에 절대 타오르지 않는 잿더미에 평온하기 그지없는 현자라며 믿지 않겠지! 입속으로 욕을 씹어 삼키며 억울한 표정을 짓자 아회는 느긋하게 턱을 닦고 침대에 늘어졌다. 아마 머리를 치장해 준 사용인이 봤더라면 다시금 질질 끌고 가 머리를 박박 빗어줬을 행동이었다.
"그래서, 내게 청혼서 쓴 사람이 누군데 그러니."
"……곡옥의 엽獵 씨입니다."
"내 알기로는 거기 가주님의 딸이 내 기숙사 후배로 입학한 걸로 아는데. 그 아이더니?"
무영의 침묵이 길어졌다. 아회의 속에서 불길함이 조바심과 함께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
"무영아. 내 아무리 머리가 가벼우면 입 무겁게 하라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머리를 비우라 한 적은 없단다."
"……엽 씨 가문의 가주님입니다."
"농담이지?"
아회는 기어이 웃는 얼굴로 잔을 집어던졌다. 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음료가 이곳저곳 튀었지만 무영은 당연히 있었을 반응이었다는 듯 놀라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회가 몸을 일으키자 머리카락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회는 손으로 대충 머리를 쓸어넘기며 지팡이와 함께 맨발로 성큼성큼 걷더니 무영을 슥 흘겨 보았다.
"가주님께 알현을 요구할 터이니 그리 알거라."
"연통을 넣을까요?"
"무엇하러 고상한 방법 쓰느냐. 문 박살내면 어련히 들어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지기는 반쯤 울면서 아회의 다리에 매달렸다. 문을 부수는 것은 전통을 부수는 것과 같다며 얌전하신 분이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지금은 얌전히 있어주시면 안 되겠느냐는 등 그의 속내만 박박 긁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 얌전한 줄 알았더라면 건드리질 말았어야지. 지팡이를 높이 치들 적 도저히 소란을 못 본 척할 수 없다는 양 문이 벌컥 열렸다. 청지기가 매달린 다리를 거세게 턴 아회는 들어오라는 허락도 없이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문을 부술 듯이 처닫았다.
"네 어인 일로 화가 나서 우리 청지기까지 그리 학대할꼬. 안 그래도 삭신 쑤신다는 놈 구슬려서 붙잡아뒀건만 이 계기로 그만두면 큰일인데."
"혼담이 오갔단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그거. 네 혼기가 찼지 않느냐."
어느덧 나이가 멋들어지게 든 무 가의 가주, 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아까 아회가 늘어졌듯이 침대에 느른하게 모로 늘어진 모양새와 더불어 앞섶이 반쯤 벌어진 옷차림이 익숙하다는 듯 아회는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길바닥 개처럼 나앉도록 가르친 기억은 없건만."
"송구하오나 가주님은 고개 똑바로 들면 그게 무 씨 집안이라고 했지 길바닥에서 우아하게 앉는 법은 가르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에잉, 불효막심한 녀석. 작년에 알려줬는데 그걸 까먹어."
"그래서 소자가 싫으십니까?"
"싫다고 하면 가슴팍에 칼 꽂을 놈이라 싫다고도 할 수가 없구먼."
"제가 어찌 가주님께 칼을 꽂겠습니까. 부디 오래 사시어 다시금 무 씨 집안의 온전한 피를 번영케 하소서."
"그래, 입바른 소리 말고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그리 길게 끄느냐."
"소자는 아직 열아홉에 사생아라 가주 자리를 잇지도 못하는데 어찌 혼사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준서의 날카로운 시선이 잠시 아회를 훑었다. 머리를 또 개판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아회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타인에겐 절대 어울리지 않을 흐린 색감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신비로운 머리 색과 창백한 살결, 그리고 내리감긴 눈을 비롯한 이목구비가 자리한 얼굴은 화련을 똑 닮아 입만 다물면 조신한 미인이다. 화련의 얼굴이 잊힐 때면 아회를 아주 잠깐 바라보면 될 정도로,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그런 녀석이 혼사를 물러달라고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엇보다 큰 의미를 가질 녀석이다. 안 되면 되게 해야 했다.
"화련이는 널 낳을 적 스물넷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졌지."
어떤 의미 말입니까? 집안 다 말아먹는 망조의 상징? 몰락하고 쓸쓸히 자신을 놓아버리는 삶을 의미합니까? 대들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었지만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라 아회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새삼 머리가 아팠기 때문도 있다. 스물넷, 사회에 나선들 분간을 시작하여 겨우 이것이 옳고 그름을 알 나이, 학당을 졸업하고 학업을 더 이어간단 가정을 해도 이제 막 사회에 나설 나이. 그리고 현재의 자신과 고작 다섯 살 차이가 아닌가? 그런 여인의 인생이 어떻게 됐는지 알면서 그 저주스러운 회임을 자랑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니 그 뻔뻔함에 탄복하다 못해 지금 당장 도끼로 머리를 갈라 그 안을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다. 아회는 결국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이런 일에선 가주가 아니고 아비라고 시인은 해주는구나?"
"소자는 결혼에 뜻이 없습니다."
"그래도 해야지. 네가 거절할 수 있다 보느냐?"
"사생아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너는 직계의 피를 이었다. 그리 태어난 자들의 소명을 잊었느냐? 집안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을 네가 거절할 수 있다 보느냐?"
이 무슨 어머니가 소싯적 읽던 패관문학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들을 법한 발언이란 말인가! 그마저도 여주인공은 회귀 2회차에서 도망칠 묘수라도 있겠으나 아회는 회귀는커녕 아직 살아간 지 19년밖에 안 됐다. 머리가 더 아파질 적, 준서는 곰방대를 물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연기를 뱉었다.
"묻자꾸나. 만일 네게 가주의 승계권이 주어진다면, 무 씨 집안의 다음 대를 강건히 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아회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 떠 준서를 마주했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가주의 승계권이니 뭐니 왈가왈부하지 않던 사람이 그깟 혼사 거절하겠다니 갑자기 승계권 얘기를 꺼내오며 자신을 압박하려는 태도에 기가 찼다.
"고작 호위 하나 가진 사생아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게 북부의 편이 있느냐? 혹은 그런 것이 없어도 강대할 능력이 있느냐?"
"아버지."
"엽 씨 가문의 가주는 강대하다. 도술도, 명성도, 그리고 역사도. 그런 존재가 북부의 죄를 짊어진 가문 중 하나에게 흔쾌히 동맹을 맺고자 한다. 장담할 수 없는 봄보다는 너를 지지해줄 편과 안락한 삶이 낫지 않겠더냐."
"아버지!"
"너는 부군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첩으로 가는 것이니 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지 않으냐."
아회는 끔찍하다는 시선을 숨길 수 없었다. 패관문학은 무슨, 그 어떤 주인공도 이딴 쓰레기 같은 발언은 안 들었을 것이다. 인내심에 금이 가려 하고 있었다. 저 입을 당장 찢어버리고 싶지만, 지금 그래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제압될 것이고, 어쩌면 1년 남은 이 삶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바로 팔려가듯 사라질 수도 있다. 무준서라 불린 남성은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형님의 아버지였으며, 두 사람의 그 빌어먹을 성격의 원인 중 하나였으니.
"부군 되는 자 또한 네 초상화를 보고 기뻐하였다. 너를 자식처럼 아끼고 싶단 뜻도 밝혔다. 너는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 터이다. 아주 잠시만 참으면 예쁨 받으며 살 기회인데 어찌 그리도 거부하느냐."
"그분 딸이 저와 같은 학당에 있습니다. 재고하십시오."
"그것이 뭐가 어때서?"
아회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집에 하인 두는 것만치 애인이니 첩이니 두 번째 사람이니를 흔하게 두어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것만큼이나 정조관념이 드문 이 미친 세상에서 정조를 바란 자신이 멍청이다. 당장 눈앞의 제 아비도 정조관념 운운하다 둘째 부인 맞아 집안 파멸로 이끌었는데 어찌 대화로 풀 수 있다는 기대를 한 것인지.
"네 목숨을 살렸으니 무 가의 영달을 위해 책무를 다해야지."
"아버지."
"그래."
늙은 범이라 한들 맹수는 맹수이거늘. 아회는 지팡이를 들어 그 끝으로 곰방대의 중간을 정확히 쳐올렸다. 준서의 손을 빠져나온 곰방대는 허공에 휙 날아갔으나, 안타깝게도 도술로 인해 곱게 늙어가는 얼굴에 재를 뿌리지 못하고 다시금 준서의 손에 안착했다. 준서의 눈길이 일순 매서워졌으나 아회는 차분했다. 지금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데, 이어질 발언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심 기대가 될 정도였다.
"형님께서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준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곰방대를 쥔 손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주먹을 쥐며 모로 누운 자세 그대로 시선을 서슬 퍼렇게 떴다. 만일 준서가 짐승이었더라면 금방이라도 우악스러운 앞발을 들어 아회를 할퀴고 물어뜯을 것만 같은 눈길이었다.
"그 후레자식 이야기는 왜 하느냐."
"…저를 아직 많이 아끼고 계십니다."
"뭐라?"
"말 그대로입니다. 형님께서 저를 여전히 아끼고 품어주고 계십니다."
준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에 아회는 지팡이를 매만졌다. 진작 이럴 것을. 이 망할 집안은 온건한 대화는 통하지 않고 서로 머리를 쓰거나 꼭 속을 긁고 서로 있는 패를 전부 꺼내야만 이야기가 통하니, 도통 장단 맞추기가 힘들 지경이다. 하물며 그게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라 하여도.
"그 녀석과 아직도 연통이 닿느냐?!"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말씀하시기를 마님조차 기뻐하였다 하였지요. 그런데 정작 마님이 기뻐하시긴 하였습니까?"
"무아회."
"혹여 혼사가 추진되고 제가 스스로를 고립시켜 불우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뒷말을 하지 않아도 준서는 그 뒤의 일을 알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 있었던 어떠한 일과 겹쳐보는 일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눈앞의 맹랑하고 반쪽 피를 이은 아들놈은 자신의 속을 박박 긁고 있었다.
"내가 자식 농사를 망쳤어……."
"이제 깨달아서 무에 쓰십니까. 불효 자식은 물러나겠습니다."
"다만 기억해라."
아회가 일어날 적, 준서는 서슬 퍼런 눈으로 아회를 쏘아보았다.
"네가 지금은 빠져나갈 수 있지만, 살다 보면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은 필히 존재할 것이다. 이건 내 아비이자 인생을 조금 더 많이 살아온 사람으로서 하는 충고니 새겨듣는 것이 좋을 게야."
새삼스럽게 아비 노릇 하기는. 아회는 잠시 준서의 눈을 마주했고, 준서는 아회의 눈을 정확히 쳐다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아회가 느긋하게 웃으며 문을 열자 무영이 어느새 그림자처럼 나타나며 곁을 지켰다. 문을 닫기 전, 아회는 뒤를 돌아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는 아비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하늘이 내게 퍽이나 무심하셔서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망정 염병에만 온 심혈을 쏟고 계신지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이 굳게 닫혔다.
- 기우제
- 삼베라는 것은 거친 녀석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연약한 살갗이 쓸려 새빨간 자국이 남거니와 자세를 잘못 잡고 무릎을 꿇다 보면 허벅지를 찔려 상처가 남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옷을 벗을 이유는 못 됐고, 벗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크고 작은 느낌이 전부 그러했다. 아픈 것도 없고 배고픈 것도 몰랐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 무엇에 집중했는지 금세 까먹고 말았다. 얼굴도 이렇다 할 표정을 짓는 법을 잊어버렸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릎을 꿇는 일밖에 없었다. 이렇게 몸이 게으른 것을 보니 시린 북부의 추위가 야금야금 몸을 집어삼키나 보다.
아, 그것참 잘된 일이다.
어린 아회는 멍하니 무릎을 덮어가는 눈더미를 보며 생각했다. 눈발이 거센 것을 보니 이제 종아리를 완연히 뒤덮은 눈은 곧 다리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그렇게 냉기가 혈관을 타고 오르며 온몸을 맴돌고, 마침내 심장에 냉기가 도달하면 얼음 동상이 되어 더는 움직이지 않겠지. 자신은 북부의 일부가 되고, 북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간절히 소원을 빌고 동상이 되어버린다니, 일면만 보먼 참 아름다운 얘기다. 이 집안의 사람들은 차라리 그래버리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이번만큼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내 바람을 들어준다면 좋을 텐데. 단 한 번이라도……. 아회는 사무친 추위 속에서 뽀얀 숨을 뱉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회의 편이 아니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익숙한 무늬가 새겨진, 별채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자신의 방 천장이었다. 아회는 한참이고 천장을 쳐다보다 허탈한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따스한 공기가 온몸을 뒤덮고, 어디선가 고소한 내음이 났으며, 부드러운 감촉이 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거친 삼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누군가 분명 아회를 데려와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음은 쉬이 짐작이 갔다. 아회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고, 그제야 보인 전경에 다시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넉넉하게 장작을 넣은 난로, 협탁에 놓인 따스한 옥수수 죽, 몸을 덮은 비단 옷…… 아회는 시선을 내려 몸을 덮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어째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걸까.
따스한 피풍의가 몸을 덮고 있었음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무력감이 밀려왔다. 속절없이 떠밀려오는 감정이 온몸을 짓누르고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만 같아 몸을 웅크렸다. 귀한 피풍의를 덮어준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온정임은 분명했으나, 아회가 느끼기에는 사생아 따위가 아직 고통을 사함 받기에는 이르다는 것 같았다. 집안을 뒤집어버린 존재, 태어나서는 안 될 인물, 결국엔……. 어찌 되었든 죄 그 자체인 녀석이 어딜 편해지려 들까!
"흐."
아회는 웃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숨을 뱉고 울음을 삼켰다. 공허하게 몇 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얼굴을 꽉 쥐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참함? 모른다. 비참함이 이런 것이라고 배워본 적이 없다. 슬픔? 아니다. 슬픈 건 이런 곳에서 쓰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같이 바다에 가자고 했을 때, 차라리 하루만 더 일찍 바다로 가자고 할걸. 그랬더라면 이렇게 서로 떨어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이 설움을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음이 아회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을 불러 그 이야기를 해봤자 돌아올 반응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렁줄을 당긴다 쳐도 사용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덮어가리고 새벽 동이 틀 때, 아회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시비는커녕 청지기도 방을 찾지 않았다. 형님 또한 마찬가지다. 소식을 들었다면 본가로 왔을 것 같은데,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다. 다시금 유령이 되어버렸음을 실감했으나 무력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차라리 이 안에서 쓸쓸히 지내다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으면. 그럼에도 한 명 정도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아무리 누군가 삶을 포기한다 한들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세 번째 밤이 찾아왔다. 그날은 달도 뜨지 못해 별채 안은 어두웠고, 궁상맞게도 빗방울이 흩날렸다. 아무리 귀기 무 씨라 한들 요괴들이 도사리는 북부인지라 호법하는 호위가 있기 마련이거늘 별채엔 호위는커녕 사용인의 발길도 끊겨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아회는 별채에 홀로 남아 한참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공허한 눈빛을 뒤로 벼락이 쳤을 때, 무언가 뚝 끊기는 소리를 뒤로 아회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촛불 하나 없이 몸을 일으켜 침상 밖으로 나섰을 뿐.
관리가 안 되어 풀이 무성히 자란 땅은 물에 젖어 미끄럽고, 차가운 빗방울은 살을 에고 서늘하게 몸을 적신다. 세상은 어두웠고 바람은 매서우며, 이따금 치는 천둥번개는 귀를 먹먹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길게 뻗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빛을 잃었고, 눈빛은 알 수 없었다. 아회는 유령이 되어 비바람 속을 배회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 휘청이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옷깃 나부끼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유령이 향한 곳은 유일하게 빛이 남아있는 본채의 한구석이었다. 호위는 유령의 존재를 눈치채어 경계했다.
"누구냐."
"……."
호위는 유령을 정확히 마주 보다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락거리는 소리를 뒤로 창호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캉, 하고 문이 닫혔을 적, 호위는 뒤를 돌며 깊은 시름에 빠져 탄식했다.
다 젖었네. 우산도 없이 온 걸까……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마 당신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었나, 잠을 잘 채비를 마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업에 열중했나. 아회는 대답 대신 몽롱하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젖은 맨발이 족적을 남겼고, 젖은 머리카락은 길게 줄을 그었다.
"용서해 주실 거죠. 제가 이렇게 방자히 굴어도."
형이라면 용서해 줄 거라 믿어요. 제멋대로 얘기한 아회는 팔을 벌렸다. 조그마한 몸을 파묻고, 옷깃에 고개를 묻었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젖은 몸으로 타인 품에 파고드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이 지금은 더 중했기 때문이다. 아회는 등허리를 팔로 감으며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이 올라가 공허한 눈동자를 온전히 드러냈다.
"버리고 떠날까 두려워서 이리 찾아왔어요……. 제가 태어나버려서, 형의 집안을 망치게 되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형만큼은 부디 남들처럼 저를 미워하며 떠나지 말아 주세요……. 네? 이젠 제게 형밖에 남지 않았는걸요……."
나긋나긋 속삭이는 목소리는 작았다. 어린 나이에도 감정이 무뎌지듯 어딘가 마모되어 삭막했고, 몽롱한 눈 너머로 투명하게 무언가 차오르다 공허하게 떨어지길 반복했다. 목 놓을 수도 없었다. 울음소리를 들켜 본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님이라도 나타나면. 아회는 품에 고개를 묻었다. 자신보다 큼직한 존재의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그리고 꿈결을 걷듯 나긋한 목소리가 작은 몸집에서 흘러나왔다.
"형, 별채는 춥고 어두워요…. 저는 사무치게 외로우니 부디 오늘만큼은 밤 동안 함께 있어 주세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아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을 침묵했다. 우습게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호위를 보고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버리고 말았다. 과거를 회상하던 자신을 속으로 몇 번 탓하고는 아회는 손을 뻗었다. 아직 감상과 현실의 경계에 위치했는지 느릿한 손길은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금 침상 위로 툭 자리를 잡았다.
"영아."
아회의 나긋한 목소리에 검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금빛 눈의 남성은 고개를 한층 더 깊이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예, 주군." 묵직한 목소리가 기숙사실 안을 울렸다. 암실 속은 벽난로가 피어오르지 않고, 땅 신령은 단잠에 빠져든지 오래였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던 아회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영원한 것이 있다 보니?"
"……아니요, 영원한 것은 없다 생각합니다."
"그래. 영원한 법은 없는 법이지……."
아회는 느릿하게 중얼대다 침상 위에 모로 뉘었던 몸을 뒤척이더니 이불을 그러쥐었다.
"이부자리가 차구나."
"난로 불을 피워드릴까요?"
아회는 호위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지 입을 작게 벌리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곤, 지그시 잇새 사이로 깨문 입술을 휘고 숨을 뱉듯 희미한 웃음만 흘렸다.
"……아니다."
"……?"
"아니야. 오늘은 쉬다 가거라. 본가보다는 원내가 더욱 안전할 게야."
아회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호위가 보고 싶지 않았다. 무릎을 꿇으면 여전히 자신은 북부가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지 말라 빌었으나 형님은 떠나버린 지 오래다.
"오늘은 비가 한가득 내렸으면 좋겠구나. 어디도 갈 수 없게……."
다만 다시금 비가 오면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아, 실로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 추위
- "원내로 부르시는 일이 잦아진 것 같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방을 나지막이 울렸다. 더듬거리며 이불의 끝을 쥐던 아회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큰 체구와 함께 질끈 올려 묶은 머리는 탁한 잿빛이요, 눈은 노랗게 물들었으니 마치 늑대를 빼닮은 남성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세상이 흉흉하잖니. 가문에 지랄 한 번 했으니 네 입지를 걱정했을 뿐이란다."
"그런 위인이셨습니까?"
아회는 느릿하게 눈을 치켜떴다. "오냐오냐 받아줬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어." 툭 뱉은 말에 남성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원내 학우분들께서 주군의 그 성격을 알아주셔야 할 텐데요……."
"다들 나를 잘 알고 있으니 걱정일랑 말거라."
"얌전하다고 하더이까?"
"현자라고들 하지."
"세상 현자 다 죽은 듯싶습니다, 주군."
"역시 버르장머리를 잘못 들였어."
아회의 한숨에 남성은 눈을 굴렸다.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도롱도롱 작게 코를 고는 조그마한 땅신령을 한 번 바라보고, 자신의 주군을 향해 한 번 시선을 던졌다. 기실 제 주군에게 농 많이 던진다지만 알고 있다. 자신의 주군은 가벼이 대할 사람이 아니다. 가문 몰락하여 허드렛일하던 자신을 거두고 호위대주까지 올려준 존재가 아니던가. 이리 부르는 것에서 입지를 걱정한 것또한 알고 있었다.
"됐고, 자고 가거라."
"오늘도…… 말입니까?"
"싫으면 돌아가서 가주님께 보고라도 올려야지."
"아, 그건 좀 끔찍하니 바닥에 이부자리라도 펴야겠습니다."
아회는 제 이불을 덮기가 무섭게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부자리가 차구나."
"벽난로에 불을 붙일까요?"
"……됐다."
"농이었습니다."
옷고름에 손이 가는 것을 바라보던 아회는 손을 까딱였다. 남성은 옷고름을 풀기가 무섭게 손가락이 까딱인 방향을 향해 자신의 옷을 걸어두고는 침대를 향해 걸어가다, 이내 이불 속으로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아회는 느릿하게 묶인 머리를 더듬다 머리를 동여맨 끈을 풀어주곤 자신의 손목에 아무렇게나 묶었다.
"에잉, 좁아 터졌구나."
"다시 내려갈까요?"
"나보고 얼어 죽으라고?"
"고드름 숲에 잘 묻어드리겠습니다."
"그땐 너도 같이 묻어주거라. 피 값은 해야지."
"제 자유는 어디 있습니까?"
"하하."
아회는 한숨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남성 또한 자신의 말에 담긴 어폐를 깨닫고 작게 웃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아회는 입을 벌렸다.
"……영아."
"예, 주군."
"네 나와 같이 지옥에 가기로 약조하였지?"
"예. 주군께서 피 나누어주실 적 맹세하였습니다."
"약속한 게다. 내 목숨은 네가 쥐고 있고, 네 목숨 또한 내가 쥔 걸로…… 다만."
"다만?"
"가끔은 너는 지옥이 아닌 선계로 가였으면 하는구나. 네가 무슨 죄가 있느냐."
"주군."
"흘려들어라."
아회는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렸다. 뒷모습을 지켜보던 남성은 팔 뻗을까 하다가도 이내 멈추곤 이불만 다시 제대로 덮어줄 뿐이었다.
"원내는 안전합니다, 주군."
그 또한 눈을 감았으나 잠든 사람은 없었다.
- 불면
- 귀기 무 씨의 상징은 검푸른 색이요, 야밤에도 상징인 푸른 불꽃과 샛노란 등불들 환히 켜져 그 모습이 도깨비불이 모인 것 같기도 하였기에 북부에서 귀신이 머물다 가는 곳, 혹은 혼이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들 하였다. 그런 밝은 곳에서 유일하게 호롱불 하나에 의지한 방이 있으니, 이곳은 다른 곳보다 유달리 조용하며 사람들 잠들 시간엔 쥐 죽은 듯 고요하니 이는 가문의 사생아요 현재 남은 유일한 직계인 아회를 위한 배려이다. 아회 요구하기를 휘황찬란한 등불 때문에 눈이 시리니, 밤에는 편히 잠들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기실 아회가 유일한 직계가 된 이후 입지를 다지고 입학한 이후 4학년까지는 호롱불이라 하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5학년이 되고 나서 요괴의 개체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하자 평소엔 아무리 불을 끈다손 쳐도 신경도 않았던 사람들도 아회가 본가에서 잠들던 날이면 귀신같이 나타나 불을 켜며 횃불을 들고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아회가 불을 끌 적이면 요괴가 밤중에 어둠을 틈타 들어올 수도 있다느니, 위험한 북부라느니 오늘만 넘어가면 그리 좋아하시는 양과자를 드리겠다느니 청지기가 몇 번이고 어르고 달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불 켜기를 강행하면 아회는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잠들었다. 그럴 때면 아회는 평소보다 더 수척한 몰골로 터덜터덜 학당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홀로 속으로 앓던 아회가 학당에서 잦은 소란으로 인해 밤을 며칠간 새우고 본가로 불려온 날이 있었다. 피로하지만 특유의 기감 때문에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써도 푹 잠들지 못해 예민함이 극에 달했을 때, 결국 아회는 등불을 켜려는 청지기의 멱살을 잡아끌고 가 가주의 방 안에 던져 넣고, 자신도 척척 방에 들어갔다. 호위들은 아회의 돌발행동에 제각기 부적과 검에 손을 올렸으나 가주인 준서는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앞발에 만두처럼 눌리던 녀석 아니냐. 홀로 요 말썽쟁이를 해결할 터이니 나가보아라."
혼자 있어도 된다 호언장담하던 준서의 방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청지기의 비명과 칼 맞대는 소리가 들리자, 호위들은 급히 칼을 빼들었으나 문은 도술 탓인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거세게 내리치는 소리를 뒤로 문이 열렸을 때, 호위들은 일제히 칼을 겨눴으나 막상 나타난 것은 곤히 잠든 아회를 한쪽 어깨에 들쳐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쥔 채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준서였다. 앞섶을 다 풀어헤쳤지만 멱살이라도 잡혔는지 옷이 구겨지고,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뻗쳤으며, 옷소매는 찢어진 데다 칼 쥔 손에는 피까지 흘렀으니 준서의 몰골은 그야말로 전장에서 이제 막 살아 돌아온 듯싶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
"가주님!"
"다시는……."
"가주, 님?"
"……다시는 이 아이 방에 등불을 달지 말거라."
"예?"
"아이들은 숙면이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키가 클 때지."
"괜, 괜찮으신…."
"어떻게 잠 못 자면 앙칼지게 굴던 점까지 화련이를 빼닮아선……."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중얼거림과 걷는 모습에서 고된 육아의 끝을 본 듯한 사람이 언뜻 비치자 호위들은 서로 당황스러운 시선을 교환했고, 터덜터덜 걷는 낡고 지친 걸음 뒤로 방구석에서 제발 이 집안에서 은퇴 좀 하고 싶다며 청지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호위 하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남은 호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천하의 가주님도 힘겨워 하고, 울지 않던 청지기가 울기까지 했으며, 칼 맞대던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으니 당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서로 눈치만 보다 아회를 데려가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무영이 나타나자, 준서는 걸음을 멈췄다.
"가주님."
"쉿."
"으응……."
"그래, 그래. 더 자라. 푹 자서 아침까지 깨지 말거라. 제발."
"……그, 가주님."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하였구나."
"…예?"
"네가 고생이 많을 터인데 휴가라도 보내주랴……?"
"그랬다가 도련님께서 못 주무시면 학당이 뒤집어질 겁니다……."
"네 쉬는 날은 죽는 날이겠구나."
"……."
준서는 무영을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금 터덜터덜, 최대한 조용하고 어두운 방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무영에게 나지막이 일렀다.
"애가 깨거든."
"예."
"……오늘 치 가배는 압수해라…."
"어……."
"아니, 아니다. 나흘은 주지 말거라…… 아니야, 이레는 주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그 하루 아회는 숙면하였으니 날을 훌쩍 건너뛰고 다음날 동이 틀 적에야 일어났으며, 의문의 가배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다시는 등불 켜는 일이 없었고, 대신 작은 소문이 와전되어 돌기 시작했다.
밤마다 작은 도련님 방에 있는 등불을 켜면 나타나는 요괴가 있는데, 그것이 어찌나 귀기로운지 같은 요괴도 찢어버리고 천하의 가주님도 고전하였기에 차라리 그 방의 불을 꺼버렸다…… 하는.
- 악인
- 아회는 눈 내리는 날을 싫어했다. 싫어한다 직접 표한 적은 없으나, 꾸물거리는 하늘을 노려보듯 하다 미간을 옅게 구기곤 쯧, 혀를 차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신기하게도 눈이 쏟아졌으니, 귀신같이 알아채는 기감 덕분에 눈과 연 많은 북부 사람임을 증명하곤 했다. 마침 지금도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머잖아 눈이 내려 세상을 희게 뒤덮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미간을 옅게 구기고 혀를 차는 이 순간이, 곧 눈이 내릴 하늘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무영은 알기 때문이었다. 사시사철 겨울인 탓에 눈이 채 녹지 못해 바삭바삭하고 새하얀 백지 같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참 시선을 고정했을 때, 아회는 뒷짐을 졌다.
"영아."
무영은 손을 말아 쥐었다. 차라리 노성을 냈더라면 좋겠다. 찢어질 듯, 발음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존엄성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로 친근하게 영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무영의 속을 뒤집어놓기 충분했다. 자신이 벌인 일엔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그저 그런 일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아 심장이 벌렁거렸다.
"예."
"내가 너를 어찌해야 좋을까?"
한줄기 흐르던 식은땀이 겨울바람에 차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모두 얼려버리기로 유명한 겨울탑이니 땀도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얼굴과 등골의 모든 모공이 송연했다.
"나는 상심이 크단다. 내가 믿던 너는 중한 순간에 나타나지 않고,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이가 그 자리를 꿰차 나를 농락했으며, 그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한 번도 내 그림자에서 나오지 않았다. 믿었던 네게 배신 당한 느낌이니 충심을 의심하고 있지. 그리고 내가 끝없이 가라앉는구나."
무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일전 류 씨 가문의 여식과 마찰이 있던 날, 부디 즐거웠길 바란단 말이 괜히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에게도 했던 말은 아닐까, 그때 나서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드려야 할까?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일 때, 아회는 지팡이에 올린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이내 검지를 일정한 박자로 두들겼다.
"하지만 영아."
"예!"
"나는 네게 내가 느낀 감정을 전가하지 않을 터다. 그리하면 내 진작 너와 야반도주라도 했겠지 않으냐?"
"……."
"내 너를 소중히 생각하다마는, 네게 그럴만한 가치를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면 아직 많이 미숙하구나."
덤덤한 어조와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무영은 잔뜩 긴장해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손가락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소리 때문도 있으나 그 의미가 더 날카롭게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미숙하다니, 팔 년을 모셨는데 여전히 자신은 처음 만났을 때의 불신을 지우지 못했다. 야반도주라니, 주군께서 그럴 정도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단 반증이다. 동고동락하며 지옥에 같이 가자 한 분이 전가하지 않는다니!
"영아."
자신을 아예 쓸모가 없다 생각했으니 그야말로 끔찍한 말이다. 무영은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려 애썼다. "예." 벌써 세 번째 대답이지만 세월은 팔 년이 지난 것만 같다. 아회는 그런 무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네게 세 가지의 기회를 주마."
무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엔 자신이 불경한지도 감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회는 그런 무영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폈다.
"첫째는 가문의 방식대로 너를 처분하는 것이고, 둘째는 너의 신의를 전적으로 믿는 것이며, 셋째는 네 진정 그림자가 맞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무영의 말아 쥔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서 기회라지만 모두 개죽음이다! 하나는 남들 앞에서 명예까지 박탈 당하는 개죽음, 다른 하나는 자결, 남은 하나는…… 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지금껏 가져온 모든 사상을 부정하고 스스로 때려 부수는 일. 그 셋의 공포를 익히 셈할 수 없으니,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난제만 가득했다.
"평소엔 즉답하던 놈이 어찌 이리 조용해."
"……."
"그럴 법도 하다. 죽음이 두려울 법도 하지! 이참에 얘기해 주마, 나는 죽음이 두렵다, 영아!"
무영의 눈이 커졌다. 천하의 제 주군이 두렵다고? 마른침을 삼키던 것도, 식은땀이 식어 덜덜 떨리던 몸도 순간 굳어버렸다. 제 주군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노성을 지르듯 존엄성을 찢기 위해 발톱을 드러냈기 때문도 아니다.
"나는 어느 날 잠들다 그대로 곱게 죽는 것도, 누군지도 모를 놈이 내 몸에 칼을 찔러 박는 순간을 상상하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나의 삶을 다른 무언가가 끝장내는 것 아니더냐! 영아, 역사에 적히는 위인들이 무어냐, 정절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이 난세에서는 더 지키고 싶지 않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처음으로 빙빙 돌리지 않고 확실히 드러낸 속내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자신이 예상만 하던 것이, 설마 그러겠는가 생각하던 모든 것이 들어맞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새하얀 폭풍이 지천을 뒤덮겠지만, 무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점차 자신의 몸이 발끝부터 얼어붙어 마침내 동상이 된다고 해도.
"하여 나는 위인이 아닌 전란의 폭군이 되고 싶다. 나는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요, 죽음을 수단으로 쓰고자 한다. 죽음 뒤의 길이 없다 한들 나는 그 순간만큼은, 일순이라도 난세를 호령하고자 한다. 그런데 너는."
아회는 눈을 떠 무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영 본인은 굳어버렸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꾸물거리던 구름은 어느새 어둡게 하늘을 가려 세상이 어둡고 하얗다. 아회는 지팡이를 쥔 손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힘을 주었다.
"정녕 그림자 속에 숨은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느냐? 아니, 너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으냐, 영아. 너는 내가 장난으로 죽음을 논하는 줄 아느냐, 이 북부에서 그런 장난을? 그 어떤 북부의 광인도 죽음을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너 또한 그러리라 믿었다. 나는 죽고자 하여 모든 각오를 다졌다. 죽기 위해 살아왔고, 죽기 위해 마지막 한순간이라도 타오르고자 한다. 그런데 너는, 너 스스로 보기에 너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냐?"
"……."
깨달음을 얻은 듯 무영의 떨림이 멎었다. 그랬다. 주군을 위하겠노라, 목숨을 바치겠노라 했으나 제 주군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감히 헤아리지 않았다. 폭군이 아니라 유유자적 살아가길 바라고, 부디 마음의 짐을 덜기를, 그렇게 하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감히 소망했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고 길들이려 했으니 어찌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까! 아회는 섬찟할 만큼 탁한 은색 눈으로 무영이 있는 곳을 정확히 응시했다.
"영아, 나는 악인이 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악인으로 몰아간다. 태어남이 죄인 녀석, 가문을 말아먹은 자, 북가에서 태어난 자, 무 준서의 아들, 궁기의 동생, MA의 악의를 받은 자라며 손가락을 겨누고 입방아를 찧는다. 가문의 영달을 위해 소임을 다 하려고 해도 악인이기에 가문을 이을 수 없고, 덕을 쌓아 등선하려 해도 악인이라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진정 악인이요 폭군 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제 주군은 길들일 수 없다.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면 부수고, 저항하는 것은 목을 매달아 그 시체를 발밑에 두어야 직성에 풀리며, 잡고자 하면 맹렬하게 포효할 터이니. 마침내 눈발이 거세지며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때, 아회는 눈을 휘었다.
"그러니 정하라. 어찌하겠느냐?"
"그림자에게 어찌 자아가 있겠습니까."
"옳지, 그래야지. 내가 네 거둔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구나."
"어리석었나이다."
"그러니 영아, 잘 듣거라."
"예."
"엽 씨 가문의 여식은 직설적이고 욕심이 있다. 가주인 제 어미에 대해 존경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일한 딸인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방계를 널리 보며 후계자를 택하려는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겠지. 그리하니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터이다."
"……예."
"무엇을 그리 걱정하느냐? 네가 할 일을 망설이지 말아라."
새하얀 입김과 함께 웃음이 흘렀다.
"그 집안의 사람들이 서로를 산 제물로 바치겠노라 싸우다 자멸할 것인데 어찌 너와 나의 탓이겠느냐? 비록 신께서 제사장 가문 하나를 잃겠으나, 미물들이 그만큼의 여흥을 보여주는 것인데 재롱과 산 제물을 마다하시겠느냐?"
무영은 그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눈더미에 파묻힌 머리가 차게 식었다. 한때 자신의 가문이 무 씨 집안의 가주 준서에 의해 멸문당한 방식 그대로 엽 씨 집안이 멸문지화 된다! 이젠 자신 또한 똑같은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아니, 악이 되어야 했다. 그깟 악행은 덮을 수 있는 더 큰 악이.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을 때, 무언가 배를 거세게 파고드는 감각에 무영은 크게 휘청였다.
"주, 군……?"
"지금부터 시작이란다, 영아. 살아 돌아오는 것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임무일 테야. 죽는다면 내 너를 금술을 써서라도 사용할 터이니 그리 알아라."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붉은 피도, 쓰러지는 인영이 금세 묻히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얄궂은 날씨를 지켜보던 아회는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이제 가서 언제 오나. 흥얼거리며 족적 하나 남기지 않던 것이 점차 가사가 변했다.
"이제 가면 어디로 가나, 어디로도 가지 못한 내가 왔습니다. 북부의 이 아회가 살아 돌아갑니다……. 호위 찌르고, 아버지의 목을 매달고, 어머니 가시는 길 편안히 보내드리고, 형님 목 비틀어도 살아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설산 요괴 아가리 속에, 어머니는 령도에, 형님은 땅 밑으로 그 조각 던지려 하니 갈 곳 없는 나는 어디로 떨어질까……."
- 담소
- 많은 일을 겪은 보상이라 주어진 홍옥 조개와 함께 마음속에 거센 파도가 치던 날, 화련은 령도로 떠나고자 마음을 굳혔다. 아직 잠도 덜 깨어 꾸벅꾸벅 졸던 어린 아회에게 첫째 도련님을 뵙고자 청한단 말을 전해달라 했을 적, 화련은 자신이 이런 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임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래, 자신이 팔 년을 넘게 이 북부에서 모진 삶을 살아가고 천천히 얼어붙긴 했어도, 자신은 령도의 사람이었다. 따스한 해가 내리쬐고, 파도가 몰아칠 적엔 도망치긴커녕 그 바다와 한 몸이 될 수 있던 강인한 사람. 객기에 가까운 용기를 품은 화련은 그야말로 담판을 짓고자 결심했고, 유일하게 가문 안에서 애지중지하던 아이를 같이 아껴준 단 한 사람에게는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감사를 표하며, 부디 그 사람이 상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조그마한 몸이 빨리 세수를 하고 형님을 뵈러 가야 한다며 우당탕 달려나갈 적, 화련은 홍옥 조개에서 시선을 떼고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찬장을 뒤적거렸다.
화련의 표정은 아회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숨겨온 다과를 꺼낼 적 점차 어두워져갔다. 새삼 날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를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용인은 다과를 준비해달라 말해도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별채에는 아무리 치워도 거미줄이 있고, 밤이 되면 호위들은 잠을 잔다. 가문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받았을 적엔 두어 명을 제외하면 누구도 화내지 않았고, 마님이 학당의 귀한 선추를 부술 적엔 쓰레기로 취급해 치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시름시름 앓을 적엔 주치의가 치료를 거절했다. 마님이 경을 치는 것이 두렵단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끝이다. 화련은 아회를 데리고 령도로 떠날 것이다.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아닌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따스한 햇살을,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북부에 봄을 불러오고 싶었지만, 그것이 평생의 소원이 되어 그 모진 수모를 견뎌왔지만 봄은 오지 않는다. 아마 봄이 온다 한들 자신 때문에 귀기 무 씨에는 영영 오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용서해……."
봄이 지고 여름이 다가오면 울음소리가 들릴 테니까. 화련은 한때 들었던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고, 꾸역꾸역 눈물을 목구멍 속으로 삼켜내던 한때의 흐느낌처럼 찻잔을 밀어내고, 찬장 깊숙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그날 들었던 울음소리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것 같았다. 여름이 되어도 온통 새하얗던 세상 속에서 온갖 화려한 색을 빼입은 외양을 어떻게든 구겨 넣어 숨기고, 자그마하게 마음속에 품어오던 봄을 잃어버려 서럽게 울던 모습을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서럽게 울어 붉어졌던 코도 부채로 가려내고, 화장이 번진 얼굴도 화려한 비단 드리우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여름을 마주한 뒤, 화련은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면 봄이 오겠지."
아마 여름에도 울지 않을 거야. 화련은 목련차를 꺼내며 품에 가득 안고, 별채의 낡은 정자를 청소하기 위해 남은 손으로 옷깃을 여미며 밖으로 나섰다.
아회에게 있어 형님은 소중한 존재였다. 유령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주는 존재이기도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기도 했다. 때때로 수업이 끝나고 여가시간이 주어질 적이면, 아회는 이것저것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대다수 시시콜콜한 이야기투성이였다. 형님이 학당에 계실 적 큰 사건 없이 잘 지냈다, 별채에 커다란 요괴가 나타나서 무서웠는데 어머니가 쫓아주셨다, 사용인들이 크게 괴롭히지 않는다…. 때로는 제 형님이 물어보는 것에 고분고분 답하고, 감히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최근 아회에게 지대한 흥미를 쏟다 못해 애정까지 품는 가주님께서 물어볼 적이면 입을 꾹 다물고 무탈하다, 안온하다만 말하며 자리를 떠 어머니의 몸 뒤로 숨기 바빴지만 형님이라면 무엇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만큼 아회의 형이라는 존재가 친절했던 탓이다.
가끔은 무 씨 집안에서는 흔하지만 별채의 사람에겐 귀한 양과자를 주기도 했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쉽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저 올려다보기만 해도 자신보다 한참은 큰 모습에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형님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갔고, 경계심은 누그러지기 바빴다. 자신도 형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 노력하여 진정한 무 씨 집안의 일원이 되어 형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니면 그 발끝에 진 그림자처럼 되어도 좋았다. 다른 사용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자신의 눈에는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가주님 곁 그림자에 늘 숨어있는 호위처럼. 어머니가 자신에게 있어 커다란 버팀목이라면, 형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우상이었으니 그런 망상 정도는 품곤 하였다. 우상이나 다름없는 형님과 어머니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사랑하는 존재와 동경하는 존재의 만남이라니.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하면 좋겠다, 형님이 잘 대해주시듯, 어머니께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회는 수업이 끝났을 적, 주변 눈치를 보듯 눈을 조심스럽게 굴리다 수줍게 시선을 올렸다.
"저어, 형님."
말을 너무 오래 끌지 않는 게 좋겠지, 아회는 조그마한 입술을 시선만치 수줍게 오물거리다 손가락을 꼬물거리지 않기 위해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는 자그마한 용기를 한 글자마다 담아 뱉었다.
"그러니까… 그게, 혹시, 오늘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혹시 오늘은 학당에 바로 돌아가는 날일까? 찰나의 침묵에도 조그마한 시선에는 수십 가지의 걱정이 서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었는데……. "그게요, 어머니께서, 늘 감사하다고… 그래서 형님이 뵙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늦게나마 덧붙인 뒤 아회는 시선을 내렸다. 역시 별채는 싫으신 걸까, 그렇겠지, 놀아주는 것은 있어도 가까이 하기는 싫으실지도 몰라. 생각이 가장 부정적인 곳까지 미칠 적, 아회의 시선이 다시금 천천히 올라갔다. 그럴까요? 흔쾌히 수락하는 듯한 답에, 아회는 말간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눈을 사르르 접으며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잔뜩 도취되어, 으레 아이들이 그렇듯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쭉 뻗어 품에 폭 파고들었다.
"정말요? 형님 최고! 제가 길잡이가 될게요, 형님이랑 같이 가면 분명 어머니께서도 좋아할 거예요!"
품에서 폭 빠져나온 아회는 머리카락이 눌린 것도 모르고 평소엔 흥얼거리지도 않던 콧노래까지 흘리며 앞장을 섰다.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시던 령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걸음이 오늘따라 가벼웠다. 종종거리며 별채로 향할 때마다 관리되지 못한 날것의 광경이 보였다. 얼어붙었다 한들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풀, 희게 얼어버린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 여전히 무성하지만 그래도 비가 왔던 날보다는 나았던 거미줄……. 아회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조금만, 종알종알 얘기하다가도 어느 한곳을 향해 시선과 걸음을 멈췄다. "저기에요!" 눈 쌓였던 정자는 어느덧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주변은 온통 새하얬다. 하얀 나무와 평생 지지 않을 겨울의 낙상홍이 영근 정취를 자아내는 장소에서, 아회는 두 팔을 쭉 뻗으며 정자 위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머니!"
"세상에, 우리 작은 보물!"
화련은 아회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품에 가득 안으며 뺨을 가볍게 비볐다. 추위에 빨갛게 익은 뺨과 콧잔등, 조그마한 입술까지 무자비하게 입술로 공격하자 아회는 제 형님에게도 잘 내지 않던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 깊게 폭 파고들었고, 화련은 그런 아회의 머리를 쓸어주다 "형님이 오셨어요."라고 소곤소곤 얘기할 적 그제야 깨닫곤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다소곳이 몸을 일으켰다.
"아, 나도 참, 바쁘신 분을 이리 걸음하게 하여놓고…… 미처 신경 쓰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부디 편히 앉으시지요. 아회도 앉으렴."
"응!"
자리에 마련된 소반 위에는 찻주전자와 가벼운 다과가 놓여 있었다. 아직 찻주전자는 따스한 김이 오르고 있었고, 화련은 사빈을 바라보며 온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회가 자리에 앉아서도 곁에 착 붙어있었기에 손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폭 눌린 머리를 쓸어주고 있었다.
"가벼이 담소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혹시 목련차는 어떠신지요? 마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라 향이 깊습니다."
"저어, 제가 따라드려도 돼요?"
"우리 작은 보물, 이런 건 엄마가 따라드려야 한단다. 뜨겁고 무겁잖니."
"으응, 그래도요……. 저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조심해야 한단다, 알겠지?"
"응!"
아회는 활짝 웃더니 조심스럽게 주전자를 들었다. 어머니께 배웠던 대로 하면 돼. 속으로 생각하며 아직 따스한 김이 오르는 목련차를 잔에 따르고는 뿌듯한 표정을 채 숨기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차를 쏟거나 하는 불상사가 없어 화련은 속으로 내심 안도했고, 아회는 그 안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의기양양하게 화련의 곁에 착 붙었다. 그 이후로는 작은 담소가 있었다. 이리 부르게 되어 미안하다는 거듭된 사과와 아회와 가까이 있어주어 고맙다는 감사, 따스한 차 한 잔과 고급 지다 할 수는 없는 다과…… 대화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따스한 차 한 잔과 몸이 녹고 제 어미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아회는 점차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지 입술을 꼭 다물다가도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미의 팔에 폭 기대 졸기 시작했다. 화련은 그런 아회의 머리를 제 무릎에 뉘여주며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었고, 아회는 곧 눈꺼풀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참으로 사랑스럽지요. 어리광도 많아 도통 제 곁에서 떨어지려 들지 않으니…….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할 따름이어요."
자그마한 웃음과 함께 화련이 짓던 미소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마저 쓸어주며 이마를, 그리고 곧게 뻗어난 속눈썹을 손가락을 살살 쓸어주던 화련은 사빈을 향해 시선을 온전히 돌리며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겠다는 듯 자세를 고쳤다.
"도련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단순한 담소를 나누고자 이리 귀한 분의 시간을 뺏을 리가 없을 터이니……."
이미 대화를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북부엔, 아니, 귀기 무 씨에는 봄이 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겨울 속에서 화련과 아회는 천천히 얼어붙다 마침내 동상이 될 것임을 알았다. 화련은 한차례 바람이 불기가 무섭게 싸늘하게 식어가는 찻잔에 시선을 한 번 주더니 마음을 다시금 다잡곤 평온히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께 그간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금부터의 이야기에 대단한 책임을 느끼고 있고, 그 사실이 한없이 미안하다는 듯. 숙인 고개의 바로 밑으론 곤히 잠든 조그마한 아이가 있었다. 보물. 평생을 품고 사랑할, 온전한 삶과 숨.
"어떠한 축복도 받지 못하고 자란 저의 아이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제대로 입적될 수 없어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던 저의 아이로 하여금 형제의 우애를 품어주시며 자애를 베푸심에 큰 감사를 느꼈습니다. 저 또한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이곳은 북부이자 무 가였습니다."
언젠가 추위에 얼어 깨져버릴지 모르는 너무나도 여린 보물. 화련은 고개를 천천히 들며 아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잠들 적이면 미동도 않는 제 아이가 이따금은 두렵곤 했다. 이대로 숨이 멎어버리면 어떡하나, 이 북부에서 얼어버리면 어떡하나.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 삶은 어떻게 될까… 더는 그런 고민과 불안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자라야 했고, 자라기 위해서라면 그만큼의 삶이 필요하였으니.
"저는 도련님을 믿습니다. 도련님의 곁에 있다면 아이는 필히 사랑받으며 자라겠지요. 하지만 때로는, 사랑으로 인해 망가질 때가 있으니…… 저는 제 아이가 그 망가짐을 겪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도련님께서 아무리 행복하게 해준다 한들 북부의 사무친 추위는 언젠가 필히, 제 아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 테니까요."
사랑은 봄을 부르지 않는다. 사랑은 여름 또한 집어삼키며 울음을 꾸역꾸역 밀어 넣게 만든다. 용서하겠노라 다짐하던 삶을 만들고, 그렇게 영영 서로를 알 수 없게 되는 골을 만든다. 제 아이에겐 그런 삶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하여, 저는 아이를 데리고 령도로 떠나고자 합니다."
화련은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련님께 실로 무례한 발언일 수 있으나, 어느 날 아이와 제가 사라져도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옵고, 주었던 애정이 부족했던 탓이 아닐 터입니다. 그저 무상한 봄날은 찰나일 뿐이고, 무엇이든지 스치다 사라지는 것이 연 아니겠습니까……. 감히 이런 무례를 입에 올리고자 하여 이리 자리를 주선한 바, 부디 용서하시어요."
그때 도련님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알 수 없었다. 알 도리도 없었다. 그날 잠든 아이가 평소보다 더 미동 없었음을, 유달리 어여쁘게 영글었던 낙상홍이 바람 불적 그 몸 투신해 눈밭 새빨갛게 물들였음을 나는 어찌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