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초능력 특목고 모카고 R2
2. 외모 ¶
- 메이드복(아르바이트)
- 표정모음
"아하하, 제 입으로 제 외모가 어떻다고 얘기하긴 좀 민망한데... 머리랑 눈은 훈련받고 나서 이렇게 됐어요. 딱 이런 스트로베리 블론드 염색하고 싶었는데 잘 됐죠, 뭐~. 키는 마지막으로 쟀을 때 아슬아슬하게 140요. 세상에, 열일곱이나 먹었는데도 당최 크질 않는다니까요! 그리고 체형은 먹는 만큼 열심히 운동해서 관리중이에요, 싸울 때 움직임이 느려져서 폐를 끼치면 안되니까요! 손이랑 발은 작은 편이긴 한데 손가락이 길단 소린 들었어요. 물론 피아노 치기엔 부족하지만요! 옷차림은... 학교갈 땐 당연히 교복을 입고, 사복은 편하게 입는 편이에요. 티셔츠나 맨투맨에 청바지 정도? 그래도 좋은 데 갈 땐 저 사진처럼 입죠!"
3. 성격 ¶
- 다정함
"정이 많아서 탈이란 소리 자주 들었어요, 히히."
- 회복탄력성
"그래도 페이스를 잃어버린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놀랐다가도 금방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달까요?"
하지만 상황은 벌어졌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 다음이겠지.
- 균형잡힌
"또 건강하고 잘 살려고 노력하는 건 나름 잘 하는 편이에요!"
제가 겪은 불행에만 초점을 맞춰서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웅변해서 뭐하겠어요. 불행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그런 걸로 웅변해 봤자 저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꼴 되는걸요.
- 단것 의존
"건강한 버릇은 아니긴 하지만, 전 인간의 힘은 당분에서 나온다고 믿어요."
- 둔함
"어떤 상황을 받아들일 때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곤 해요. 힘든 상황에는 나름 유용하답니다?"
- 신장에 대한 강한 컴플렉스
"아!! 성장기 다 끝나가는데 아직도 140이라니, 실화냐고요!"
- 조건부: 악귀 들린 치와와
"이것도 재밌었는지 나중에 보면 말해주라. 그럼 잘가~."
4. 기타&특징 ¶
인첨공에 들어온 것은 8살 무렵이며, 저지먼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학기 초이다. 저지먼트에 들고 싶은 이유는 <좋은 일도 하고 나에게도 좋은 게 떨어져서>.
동성부부인 두 어머니들 슬하의 외동딸로, 1년에 한번 씩 외부의 사람들이 방문할 때 어머니들과 만남을 가지곤 한다.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
방과후에는 디저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카페에서 운영하는 인첨스타그램 지기를 맡고 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요리에는 능한 편. 디저트를 만드는 걸 즐기지만 식사용 요리나 반찬도 인첨튜브 레시피 영상을 보면 곧잘 따라하곤 한다. 자신있는 식사와 반찬 요리는 황금 볶음밥과 장조림.
커리큘럼을 통해 개화한 능력은 비전투계이기 때문에 비상시에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권투, 봉술 등 무예를 익히고 있다.
목소리는 맑고 높지만 부드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음색. 다만 스스로는 어떻게 말하든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키 다음가는 컴플렉스로 여긴다. 노래실력은 보통이나 힘있게 부르는 (지르는) 것은 잘 못하는 편.
동성부부인 두 어머니들 슬하의 외동딸로, 1년에 한번 씩 외부의 사람들이 방문할 때 어머니들과 만남을 가지곤 한다.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
방과후에는 디저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카페에서 운영하는 인첨스타그램 지기를 맡고 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요리에는 능한 편. 디저트를 만드는 걸 즐기지만 식사용 요리나 반찬도 인첨튜브 레시피 영상을 보면 곧잘 따라하곤 한다. 자신있는 식사와 반찬 요리는 황금 볶음밥과 장조림.
커리큘럼을 통해 개화한 능력은 비전투계이기 때문에 비상시에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권투, 봉술 등 무예를 익히고 있다.
목소리는 맑고 높지만 부드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음색. 다만 스스로는 어떻게 말하든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키 다음가는 컴플렉스로 여긴다. 노래실력은 보통이나 힘있게 부르는 (지르는) 것은 잘 못하는 편.
좋아하는 것: 모든 종류의 달달한 디저트(하나만 꼽자면 신선한 생크림과 딸기로 만든 촉촉하고 부드러운 쇼트케이크), 고기요리, 적당히 쌉싸름한 차, 인첨튜브 보면서 새로운 레시피 익히기, 식후 러닝, 맑은 날씨,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 주변에 (사소한 거라도) 도움이 되기, 감정조절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싫어하는 것: 밍밍하고 싱겁거나 매운 맛, 부상당한 상태, 감정조절이 어려운 것, 비가 올 듯 말듯 우중충하고 습하기만 한 날씨.
싫어하는 것: 밍밍하고 싱겁거나 매운 맛, 부상당한 상태, 감정조절이 어려운 것, 비가 올 듯 말듯 우중충하고 습하기만 한 날씨.
6. 통지표 ¶
대분류: 리얼리티 매니퓰레이션(Reality Manipulation)
소분류(특화능력): 이미지네이션 쿠킹 (Imagination Cooking)
개요:어느 한 매개체를 음식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단 생물에게는 사용이 불가능하며, 어디까지나 무생물에만 사용할 수 있다. 이 능력의 가장 큰 특징은 말 그대로 음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무줄을 파스타로, 책을 식빵으로, 벽돌을 초콜릿 케이크로 만들 수 있다. 단, 요리로 만들기 위해선 만들고자 하는 요리의 조리법을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그려내야만 한다. 파스타로 만들기 위해선 머릿속으로 파스타 조리 과정을 완벽하게 그려내야만 한다는 이야기. 따라서 집중력이 상당히 중요하며 집중이 끊어질 경우 능력은 강제로 실패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요리는 실제로 칼로리와 영양분이 있기에 이 능력을 가진 능력자는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복잡한 요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소분류(특화능력): 이미지네이션 쿠킹 (Imagination Cooking)
개요:어느 한 매개체를 음식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단 생물에게는 사용이 불가능하며, 어디까지나 무생물에만 사용할 수 있다. 이 능력의 가장 큰 특징은 말 그대로 음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무줄을 파스타로, 책을 식빵으로, 벽돌을 초콜릿 케이크로 만들 수 있다. 단, 요리로 만들기 위해선 만들고자 하는 요리의 조리법을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그려내야만 한다. 파스타로 만들기 위해선 머릿속으로 파스타 조리 과정을 완벽하게 그려내야만 한다는 이야기. 따라서 집중력이 상당히 중요하며 집중이 끊어질 경우 능력은 강제로 실패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요리는 실제로 칼로리와 영양분이 있기에 이 능력을 가진 능력자는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복잡한 요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7.1. 레벨 1~3 ¶
- 04~05
- 모험은 잠시 쉬어갑니다 0404
- "새봄아? 집중하자, 집중!"
"…앗, 죄송해요! 무심코 딴생각해 버려서."
아이고, 벽돌이 반은 초코케이크가 되다가 말았네. 이거, 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그립네~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연구원 선생님이 우는소리를 하신다.
"레벨도 올랐는데 왜 그래…. 선생님 퇴근 좀 하자~."
"아이, 죄송해요~ 저 딱 10분만 쉬면 딱 될 거 같은데…."그 말에 선생님은 연구실 바닥에 크레이터를 만들 기세로 한숨을 쉬셨다.
"그래라, 딱 10분이다? 나도 좀 쉬어야겠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라고 노래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소리를 흥얼거리며 터덜터덜 훈련실을 나서는 선생님의 축 처진 뒷모습에 무척 죄송해졌다. 아까 딴생각을 한 게 선생님하고 관계없지 않아서 더 그랬다. 방금 나가신 연구원 선생님이나 우리 연구원 선생님들에 대한 건 아니고, 다른 연구소 선생님들에 대한 거랑 우리 코뿔소들에 대한 거랑 그리고... 인첨공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달까.
어저께 리라 언니네 연구소 선생님께서 카페에 오셨다. 운영시간은 아니었고, 마감하고 난 뒤였다. 정리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놓고 온 게 있어서 다시 올라갔다가 예기치 못하게 대화를 들어버렸다. 리라 언니가 커리큘럼을 깜빡해 버린 바람에 리라 언니의 연구원 선생님이 바람 맞아버리신 모양이었다. 아이고, 핸드폰을 두고 오셨다더니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구나, 탄식이 나오려던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경황이 없어 보이던 리라 언니가 재차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선생님은 단단히 노하신 모양이었다. 솔직히 화나실 만 했지. 훈련실 사용 시간 연장 신청서 제출에, 커리큘럼이 늦어져서 초과근무 하게 되신 셈이고. 정시 초과했을때 재끼고 칼퇴하실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선생님께서 더 뭐라고 안 하시려는지 따라오라고 재촉하시길래 나도 자리를 피하려는데, 리라 언니의 격앙된 목소리가 귓전을 후려쳤다. 아이고, 언니…. 그 강을 건너시면 안 되는데. 이제 겨우 혼내는 걸 멈추셨는데….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걸 참고 들어보니, 언니도 쌓인 게 있는 듯했다. 사실, 언니가 원래 레벨 0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반년간 성장세를 보이지 못했었다는 것도. 그래서 연구소에서 찬밥 취급이었던 듯했다. 남 일 같진 않았다. 나도 인첨공에 온건 초딩초딩 때지만, 선하가 죽은 중2 학기 말에 겨우 능력을 개화했으니까. 아아, 거친 세월이었지. 언니에게도 그랬을 거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무섭게 화내시는 것도 있고, 언니가 울컥하게 된 다른 배경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언니가 선생님께 화를 내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그 상황은 언니가 원한 상황이 아니었다 해도, 언니의 부주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봤고, 그게 연구원 선생님이시니까.
그래도 선생님께서 감정이 격앙되신 감은 있지만 나도 알아듣기 쉽게끔 입장을 설명하셨다. 그에 리라 언니도 다시 사과해서 상황이 일단락되려는 것 같았는데….아직 하교하지 않은 부원들이 한둘씩 부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는지, 다 같이 격앙된 태도로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른이고 연구원이라고는 해도, 일반인이고, 미성년자이고 일종의 착취를 당하는 처지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저 선생님께서 직전에 하신 말씀이 심했다곤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다. 심지어 한 사람은 그 선생님을 죽일 듯이 위협하기까지 했다. 저지먼트라는 동아리는, 이런 경우를 저지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었나…? 다행히도, 그 상황은 그 이상 심각해지거나 더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나도 부실이 비었을 때 물건도 찾고, 카페에 출근도 했고.
내 가치관까지 크게 흔들리는 경험을 하긴 했고,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니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보다 더 오래 저지먼트 활동을 해왔고, 저지먼트로서의 의식도 확고한 사람들일 텐데, 왜 그랬을까.
각자 살아온 삶은 다 달라도 연구소에서 능력을 개발해 온 경험만은 다들 공유하니, 내가 생각하는 걸 그들이 생각하지 못할 리 없을 텐데.
물론 나 역시 선하가 죽었을 때, 연구원 선생님들이 악마로 보였었다. 리버티인가, 그런 사람들 같은 테러단체를 찾아 가입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선하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묵묵히 훈련받으며 졸업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본 연구원 선생님들의 처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연구원 선생님께 혼이 나듯이, 연구원 선생님들도 실적이 나쁘면 소장님께 불려 가 질책을 받는다. 소장님도 실적이 나쁜 상황이 계속되면 연구소를 닫고 실직하시는 신세고. 그런 걸 계속 보다 보니 친구를 잃었는데도 연구원 선생님들을 미워하지는 못하게 됐었다.
하지만 만약에, 선하가 살아있고, 선하가 연구원 선생님께 심하게 질책당하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 가정이 스치자, 머리가 맑아졌다. 인첨공에서 훈련생이라면, 연구소에 억하심정을 안 갖기는 어렵다. 매일매일 고된 훈련과 수술의 연속이니까. 게다가 성과가 없으면 혼나기 일쑤고. 그러니 혼나는 리라 언니에게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나는 이제야 리라 언니와 대화를 텄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나보다도 리라 언니와 오래 봤으니,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더 어려웠을 테고.
그들이 왜 그랬을지, 짐작으로나마 조금은 이해했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으니까. 나 역시도, 감정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져 명백한 불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이제 막 레벨2고, 주변에 고레벨이 많아서 실감은 안 나지만, 나도 일반인에겐 얼마든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니ㄲ...
"새봄아, 10분 지났다. 얼른 끝내고 가자~."
"네, 쌤~."
아이, 모처럼 각오 다지는데. 뭐 훈련도 위험한 존재 안 되기 위해서는 필요하고, 선생님도 정시퇴근...에 가깝게는 퇴근하셔야 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 실종자 수색 후기 0408
- 실종자는 모두 구출했다. 혜우까지 포함해서. 심지어 혜우는 상태가 좋진 않지만 의식까지 돌아왔다. 마음이 놓였다. 가장 심하게 다쳤던 진형을 비롯해서 내 몸에 생긴 자잘한 상처(이리저리 뛰고 구르느라 생긴거지만)까지 씻은듯이 낫게 해줬을 땐 무척 고마웠다. 그래도 진형한텐 병원도 꼭 가보시라고 우겼다. 혜우의 능력이야 어느 수준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람 몸에 구멍이 났다. 정말이지, 아찔했다.
맞아, 서형이 말해준 바에 의하면 기억의 주인, 그러니까 백발 씨가 그 레이저로 혜우를 쓰러뜨리고, 까만 알약을 잔뜩 먹는게 보였단다. 얼른 메모했다. 세은이에게 제출할 저지먼트 활동 보고서에 쓸 생각이었다. 백발 씨 사건에 마약이 엮여있다는 정황 자료로는 유용할 테니까.
사실, 마약을 누가 줬는지도 알아내서 보고서에 적고 싶었는데 걘 캐퍼시티 다운에다 테이저건도 잔뜩 맞아서 아프고 정신도 없을 텐데도 욕이나 하고 말도 안 해줬다. 못됐어!
사실, 마약도 마약이고, 배후도 배후지만, 왜 스팸을 보내서 우리를 불렀는지, 피랍자 신병을 인계할 때 어트랙션을 시킨 목적은 뭔지, 전투에 앞서 테이저건같은 건 왜 줬는지... 영문 모를 일들 투성이다.
근데 이제 와선 그 영문이 뭔지 생각해 봤자 피곤하기만 할 거 같다. 백발 씨는 안티스킬 선생님들이 데려가셨으니 잘 심문도 대응도 다 하실 거고, 저지먼트가 할 일이 생기면 또 소집되겠지.
다음 날엔 혜우가 저지먼트 카페에 나와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조금 핼쓱해보였지만, 어딘가 크게 아파보이진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c...그런데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했나?
혜우가 걱정됐던 건 맞다. 전에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가 갑자기 실종됐다니까. 그래서 찾으러 나가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결국 이유가 뭐가 됐든 그러지 않았다.
그 뒤에 스팸 유령 씨 일로 소집됐고, 두리안 어택을 할 때까지도 이게 혜우랑 관련된 일인 것도 몰랐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순간만큼은 혜우는 저지먼트 일보다 우선순위가 밀린 셈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폐공장에 가서도 내가 한 건, 영문도 모르고 납치범과 한 패로 추정만 되는 스팸 메시지 발송자가 하라는 것만 주구장창 하다가 레이저 맞을 뻔했던 것 뿐이다. 그 난리를 치고도 알아낸 건 뭣도 없고.
랑 선배랑 서형이 아니었으면 난 광인 씨가 왜 선빵을 날리고 음파공격까지 덤으로 날렸는지 몰랐을 거다. 지금에 이르러선 궁금하지도 않다. 서형이 이야기해준 걸로 짐작해보면 그냥 약쟁이 묻지마 폭행범인 것 같던데.
아무튼, 아무튼. 감사받을 일을 했다고 스스로 납득하기가 어려워서 영 마음이 찝찝했다. 하다 못해 다른, 지금 혜우랑 친한 - 특히 6번 방에 갔던 사람들 다수처럼 혜우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고, 그 스팸이 혜우 일이라는 걸 비교적 바로 알기라도 했더라면 이 감사를 들었을 때 마음이 편했을까? 저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혜우의 감사에 마음이 편치 않은 진짜 이유를.
내가 일방적으로나마, 혜우를 아직 친구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겼다면, 내가 뭘 했든 못했든 간에 혜우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했을 거다. 유령 스팸이 혜우의 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겠지. 혜우 생각만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혜우의 고맙다는 말에는 이런 생각부터, 말부터 했을 거다.
c살아 있어줘서, 내가 더 고맙다고.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이번 임무가 혜우의 구출임을 깨닫기 전이든 후든, 심지어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난 항상 다른 것들, 다른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과의 교류(와 그 과정에서 생긴 개인적인 상처 하나. 이건 그래도 임무중에는 잘 덮어둔 것 같다. 조만간 당사자랑 이야기해서 잘 풀어야지.), 그들에 대한 걱정, 일단 스팸 메시지 발송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리고 레이저 피하면서 광인 제압하기. 마지막으로, 구하러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에 받을만 했나 혼자 따져보기.
애초에 혜우도, 정말로 고마운 사람은 따로 있을 거다. 혜우랑 가까운 사람들. 당장 연인인 성운 선배라던가, 리라 언니... 뭐, 더 있겠지. 그 이상은 모르겠다. 그러니 다른 부원들과 동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맙단 소릴 '덤으로' 들었대서 그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욘 없겠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새삼 실감이 났다.
c혜우와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로서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구나.
1년 남짓.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어떤 인연이 끝나는 데는 충분했나보다. 당연하다. 그 1년 간 나는 오직 생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혜우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물론, 앞으로 2년 반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은 나나 혜우 중 누가 탈퇴하지 않는 이상은 저지먼트 동료일 테니, 계속 만날 테고 협력도 할 거다. 하지만 저지먼트 동료 천혜우에게서 초등학교 시절 내 친구 혜우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아? 애초에 내 능력은 '이미지네이션 쿠킹'이지, '이미지네이션 퍼슨 인 더 패스트'가 아니라고.
c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지금 나와 놀아주고 교류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재밌게 놀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서로 정신적으로 부담 안 되는 선에서 진지한 대화도 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어떤 건지, 내가 줄 수 있는지 주의깊게 살피고.
우리가 필멸자인 이상 그들도 영원히 있어주진 않을 테지만, 마지막 순간이 오더라도 가급적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마무리짓고 싶으니까. 이번에 혜우와의 관계를 나 스스로 정리한 것처럼 말이다.
- 성하제 성불 0409
- 꿀 빨면서 월루 아닌 월루를 하는 - 급여도 안 주는 데 루팡할 게 있나, 아 엄마들이 내 친절점수 50점 줘서 마이너스를 없애주시긴 했다. 사랑합니다 엄니들. - 행복한 시간도 잠시, 대기하는 손님도 있고 해서 엄마들이랑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안녕했다.
그러고 다시 부엌에 들어가려는데 또 다시 지명을 받았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번에야말로 그 높은공기단은 아니겠지? 긴장하면서 나갔는데, 처음 뵙는 손님이었다. 특이점이라면, 엄청 피곤해보이는 정도? 그래서 인사는 약식으로 하고 자리로 안내한 뒤 주문을 받았는데 에스프레소 도피오에 초콜릿 들어가는 디저트 아무거나 달라고 하셔서 커피와 함께 초코범벅케이크(초코크림을 샌드한 초코케이크를 초콜릿으로 코팅한 건데, 나도 이거 꽤나 사랑한다) 한조각 내갔다. 재료가 다 떨어져서 솔드아웃이긴 했지만 그냥 만들었다. 능력 뒀다 뭐해. 케이크 한 입에 커피 한 모금 드시더니, 피곤에 절어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피어나더라.
별 일 안했는데도 그 손님은 커피와 케이크 순식간에 흡입하시고는 15점이나 주시고 가버리셨다. 누군가의 담당 연구원 선생님이셨을까? 왠지 내 담당 연구원 선생님이 생각나서 짠해졌다. 세상 살이 힘드시겠지만, 힘내세요!
...그건 그렇고, 이제 40 넘겼네? 아싸! 그럼 그걸 살 수 있겠다.
- 비번의 서막 0410
- 드디어 찾아온 비번! 은 어제부터지만, 그 전날은 서형이 일하는 편의점 앞에서 보냈다. 호객해주려다가 대형사고 쳐버렸거든.
심슨의 호머 볼링장 호객행위를 따라했는데(물론 실탄을 마시멜로랑 사탕으로 바꾸면서.) 총소리가 너무 리얼했던 탓에 손님들이 도망가신 건 물론이고 안티스킬도 오고 서형네 사장님도 화나셨다... 물론 냅다 싹싹 빌었다. 서형도 같이 빌어서 더 미안했다. 그래도 달다구리 무제한 제공 참말 사건으로 어떻게든 수습한 것 같다. 다시는 만화에서 나오는 건 함부로 따라하지 말아야지.
오늘은 조금 바쁘다. 낮에는 엄마들이랑 놀고, 저녁때엔 철형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한 대화를 할 거라서. 전날에 철형한테 개인톡으로 오늘 카페 마감하고 잠깐 부실에서 볼래요? 라고 보내뒀다.
그러니 오늘은 낮부터 카페 마감 전까진 엄마들하고 놀다가 '그 물건'을 들려서 보내고 부실로 가는 게 내 계획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연구소 숙소에서 준비를 마치고 엄마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보니... 먼저 와 계셔서는 역시나 염장질 중이다. 어이구? 어이구, 조금 있으면 뽀뽀하겠네. 아니 이미 했나? ...가만 있자, 내가 완장을 가져왔더라. 교복주머니에서 완장을 꺼내 차고서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거기 커플 두분! 딸래미 옆구리에 동상 걸리겠으므로 그사세는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어, 딸 왔어?"
"우리 딸 저지먼트 됐다더니 역시 포스있네~."
"목청이, 이야~ 불량배들이 다 도망가겠는데?"
역시나 둘이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로 알은체를 한다. 아우, 눈꼴시려. 카페에서 로판 백합 찍은 걸로 모자랐나보다. 뭐, 눈꼴 시리지만 안심은 된다. 내가 그동안 힘든 티가 안 나진 않았을텐데, 나 걱정하느라고 서로 우중충하기만 했으면 엄청나게 미안했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뻐기듯 턱을 치켜들고 젠체를 했다.
"그럼그럼! 반년째인데, 웬만큼은 해야지. 히히."
오늘은 공식적으로 커플 사이에 끼는 날. 어제 서형한테 가기 전에 학교 안에서 해볼 만한 것들은 철저히 조사해왔지롱.냉큼 엄마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양팔로 두분의 팔에 팔짱을 꼈다.
"자, 그럼. 오늘은 집사 말고 딸래미로서 모실게요. 가요!"
-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0411
성하제 끝나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뒤풀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뭐, 좋긴 하다. 내가 엄청 외향적인 건 아니긴 한데, (소위 말하는 소문자 e다보니) 그래도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자리를 싫어하진 않으니까. 물론, 나는 노래를 못한다. 음감은 있는데, 음을 유지하는게 좀 힘들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어서, 정확히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이 노래를 들어줬으면 해서, 뒤풀이가 있다고 들은 날부터 열심히 연습해왔다. 많이 빡셌다. 하지만 어떻게든 됐다. 성규가 도와줬기 때문이다.
성규 하니, 단풍이에게 지은 죄로부터 시작된 모험 이야기를 아직 마치지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왜냐면 나 계손실 오거든!
성규는 원래 성악을 하다 말고 인첨공에 들어와서 능력자가 됐다고 했다. 매일같이 커리큘럼에 갈리는 나날에 원래 하고 싶던 노래를 계속 하는 게 심리적으로도 도움이 돼서 성악이 정규 커리큘럼 과정에 있다나. 그래서 간간히 오페라에 출연하는 짬바로 노래가 아닌 소음을 낼 뿐이었던 나를, 그래도 공연자 태는 나게 만들어줬다.
그리하여, 운명의 날. 뒷풀이 장소인 부장 선배가 통째로 빌린 파티룸에 있는 마이크를 집어들고 목을 가다듬었다.
"부족한 솜씨지만, 열심히 불러볼게요. ...들어주세요! 꽃다지의... 바위처럼."
누가 들어주셨는지는... 기억이 거의 휘발돼서 모르겠다. 꽤 긴장했었으니까. 기억나는 건, 율동을 과감히 포기한 보람이 있도록, - 비록 한 음 한 음이 위태롭게 떨렸지만 - 가사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을 담아서, 목청껏 노래했다는 정도.
비록 이 사회가 끊임없이 정병과 마약을 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었을 때라도 행복해지고 싶다. 그 날을 위해, 지금 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디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도 그래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c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 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c
- 새봄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0412
- 출장 뷔페로 차려진 음식들이 가득한 파티룸 한 구석, 디저트 코너 옆에, 작은 테이블 위에, 형형색색의(각각 말차가루, 코코아 파우더, 견과류, 얼그레이 등으로 맛을 낸) 동글동글한 사브레 쿠키가 일곱개씩 들어있는 작은 비닐 포장봉투가 여러개 놓여있다. 사브레를 포장한 봉투에 묶여진 분홍색 리본에는 1부터 7까지 숫자가 랜덤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맨 앞에는, 새봄이 손글씨로 작성한 듯한 팻말이 놓여있다.
[성하제 뒤풀이 기념으로 약소하지만 준비해봤어요!
리본에 적힌 숫자의 정체는, 뒤풀이 마지막 날 공개할게요~><]
- 신새봄 - 분홍빛 한복판서 지방방송을 0414
- 잤다. 아주 푹 잤네. 요리하는 꿈을 꿨던 거같은데 다행히도 부실은 멀쩡하다. 레벨 2가 되면서 무의식중에 능력이 발현되지 않도록 억제하고 내가 원할 때 능력을 쓸 수 있게 돼서겠지. 근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분홍색이다. .....음, 낯설지 않다. 나 이거 알아. 성하제에서 느낀 이 분홍빛 눈꼴시림. 흠, 리라 언니가 축하곡을 부르시려는 모양이니 마이크는 포기하고. 성규가 내게 준 노하우로 승부보는 수밖에. 목은 잠겼지만 알반가 노래하는 것도 아닌데.
"정하랑 청윤 선배 축하해요! 그리고 잠시 지방방송이 있을 예정이니 제 사브레 쿠키를 드신 분들은 잠시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쿠키 봉투에 붙은 리본들 다 갖고 계시죠?"
그렇게 외친 후, 나는 준비했던 돌돌 마는 족자를 꺼내 아래로 촥 펼쳤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을 것이다.
-
1. 이면지 꾸긴거
2. 박스 테이프
3. 새 지우개
4. 두루마리 휴지
5. 다 쓴 건전지
6. 미국 간지 얼마 안 된 복어
7. 새봄이가 사랑을 담아 하나하나 주워모은 닭둘기 깃털(소독함)
-
"헤헤, 실은 여러분이 드신 쿠키의 원재료랍니다! 당연히 제 능력을 써서 만든 거구요. 오늘 발표하기로 했는데 자버리는 바람에 지금 지방방송했어요~. 고마워요!"
해치웠나? 해치웠다. 다시 잘래. 작은 지방방송을 끝내고 난 다시 엎어져 잠들었다.
- 어쩌다보니 오늘도 모험은 쉽니다 0506
- 퍼엉!!
"새봄아아아아!!"
이게 무슨 소리게? 무슨 소리긴, 계산하다가 꼬여서 음식물이 화학결합물 되는 소리지. 그거랑, 연구원 선생님의 비명? 왜냐면 어... 훈련실 안이 밀가루와 날계란과 설탕과 이것저것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거든. 아이고, 하필이면 오늘이 휴가 전 마지막 근무일인데 사고 쳐버렸네. 어쩌겠어, 치워야지. ...그 전에.
"헤헤... 죄송해요, 쌤. 제가 다 치울게요."
"됐어, 임마. 너 혼자 하면 하루종일 해! 내가 못살아 증말ㅠㅠㅠㅠ"
- 질풍노도 0513
- 요즘은 다른 의미로 기숙사에서 퇴소당한 걸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왜냐면 내 생활 경로가 좀 꼬여버리는 통에. 내 하루를 요약하자면, 내 원래 연구소인 이삼연구소에서 자고 일어나서 학교 갔다가 리라 언니네 연구소 가서 정인쌤한테 훈련 받고 나면 알바 마감조 하고 다시 이삼연구소에 들어가서 잔다. 뭐, 갈 곳이 여러군데라 복잡해서 그렇지, 가까워서 운동삼아 뛰어가면 체력에도 좋긴 하다.
물론 심장엔 나쁘다. ...왜긴 왜겠어. 정인 쌤 때문이지. 아니, 정인 쌤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정인 쌤은 연구원으로서 맡은 바 열심히 일해주시고 계시고, 술렁이는 건 내 마음 뿐이니까. 그래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리라 언니네 연구소 들르기 전에는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내고 있다. 효과는 좋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왜냐면... ...그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자.
그래도, 오늘도 여러 번뇌가 날 시험에 들게 했지만, 커리큘럼엔 빡 집중했다! 그만큼 성과도 괜찮고. 오늘도 포장하고 남은 쓰레기를 가져와서 브리오슈를 만들었지 뭐야. 점점 복잡한 레시피도 구현할 수 있게 될 수록 엄청 보람차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레벨 5까지 성장해서 조금 더 편안하게 부실을 과자집으로 만들어야지~
- 미운 자식에게 하나 더 주는 떡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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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구에 가기 얼마전에 있었던 일이다.
진형이 이런 아이디어를 내게 제시해줬다. '미운 자식에게 하나 더 주는 떡' 이라는 느낌으로, 과자류를 비치해놓자고. 그것도, 최대한 이상한 재료로 만들어서. 전에 뒤풀이에서 닭둘기 쿠키를 먹은 게 어지간히도 강렬했나보다 싶어 웃긴 반면, 그 취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라 언니의 담당 연구원이신 (지금은 내 임시 담당 연구원이시기도 한) 윤정인 선생님께서 성하제 때 커리큘럼을 짼 리라 언니를 데리러 부실에 오셔서 리라 언니를 혼내시다 삽시간에 부원들에게 둘러쌓여 위협을 당하셨을 때, 절절히 느낀 바가 있다.
저지먼트가 잘못된 상황에 잘못된 마음을 먹으면, 스킬아웃보다도 더 위험하고 해로운 집단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점에서, 부원들이 부실 안에서만 흥분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부실 안에도 비치하고 내가 챙겨다니기도 해야겠다 싶기도 했다.
물론, "이 미운 사람을 위한 떡" 제조 및 보급을 맡은 나 역시 유의해야 할 몇가지 윤리적인 지침이 있다.
1. 재료는 최대한 괴랄하고 경악을 자아낼 만한 것이되, 독극물은 피할 것.
- 내가 이제 레벨 3이지만 실수를 안 할 거라는 보장은 레벨 4는 된 뒤에야 가능하니까. 실수라도 했다간 장르가 코미디에서 범죄드라마로 바뀌어버린다.
2.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간에, 결과물에는 그 재료의 흔적을 전혀 없게끔 할 것.
-진형의 말을 빌리자면, 이 '떡'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무 이상도 없는 물건을 주는 것으로 우리끼리 낄낄거리며 골탕먹이기'이다. 그러니, 이 '떡'의 현 상태는 멀쩡하고, 무해하고, 맛있어야 한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지원금에 내 월급 중 자유 운용 예산을 약간 보태서 '떡'을 비치해둘 작은 협탁을 마련했다. 그리고 2학구 임무가 있기 하루 전, 응접용 소파 근처의, 어디에 앉아도 눈에 띄고, 오가는데 방해도 안 될 만한 자리에다, 협탁을 두고, 그 위에 제 1대 '미운 사람을 위한 떡', 마시멜로를 그릇에 그득 담아 비치했다. 그러고는 사진을 찍어, 이 마시멜로의 '과거 사진'과 함께 올린 뒤 다음과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저지먼트 단톡방
신새봄
미운 사람을 위한 떡
여기 놓여있는 과자가 보이시나요? 이 과자는 겉보기에는 특별할 게 없고, 인체에 무해하고, 아주 맛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과자는 한 때, 아주 더럽든 맛없든 애초에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든, 화려한 전적이 있답니다
이 과자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날 때, 조금은 치사하지만, 문명인답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물리적, 언어적, 정서적 폭력을 가하는 대신, 비록 수상한 전적이 있지만 지금은 무해하고 달콤하기만 한 이 과자를 슬쩍 건네보세요.
생각보다 통쾌하고, 폭력을 쓸 때 느끼는 후회와 자괴감도 없을 거예요.
오늘의 미운 사람을 위한 떡은, 마시멜로입니다.
한 때는 에티켓을 잊은 견주가 길가에 버려두고 간 견분(犬糞)이었죠!
그러고보니, 오늘 그릇 뚜껑 열어보니까 마시멜로가 하나 줄어있던데, 누가 먹었을까?
- 모험이고 나발이고 전쟁이야 0516
- 머릿속이 새하얗다. 샤를리아, 라고 했던가? 그 연구소 테러 소식 듣고 나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아주 최소한의 비상전력 정도의 역할을 하는 정신은 있었는지, 이삼 연구소에서 긴급호출 받은 건 듣고, 최대한 빙 돌아서 약속장소로 갔다. 뒤를 밟힐 수도 있으니까.
소장님 선생님들도 샤를리아 참사 소식을 접하셨는지, 우리도 일종의 대피...를 할 거라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잠정 폐업이고, 소장님 소유의 부지 아래에 만들어둔 쉘터로 대피해서, 거기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거라고. 그리고 대피는 우리 연구소 소속 여러 능력자들의 협력 하에 비밀리에 이루어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꽤 중요한 일을 맡았다. 밖에서 쓰레기 등 쓸모 없는 물건들을 조달해오면 그걸 식품으로 만드는 거다.
...솔직히, 소장님도, 휴가 갔다가 급하게 복귀하선 내 담당 연구원 선생님이나, 다른 연구원 선생님들도 너무 침착하셔서 놀랐다. 우리 중에 리버티에 동조하는 애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나도, 솔직히... 걔네들같은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리고 솔직히, 이대로 폐업하고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게 더 안전할텐데. 왜 연구소를, 훈련생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대피하려고 하시는 건지. 회의가 끝나고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공지를 마치신 소장님을 부르며 서둘러 다가갔다..
"소장님!"
"어, 새봄이. 뭐냐?"
"그게..."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그 뉴스를 보고도 가시지 않은 충격, 그런 것들로 인해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래서 그냥 심호흡을 했다. 연구소 내 상담센터에서 배운 리듬으로. 소장님은 의외로 그런 날 잠자코 기다려주셨다. 그래서, 무작정 물었다.
"...왜, 우리들까지 같이 대피해요?"
"? ...대피 안 할래? 그럼 너 어디서 살게?"
"그게 아니라요~ 그... 이번 테러, 범인 집단이 어떤 집단인지, 소장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훈련생들 중에, 그 놈들이랑 한패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저일 수도 있는데... 왜 소장님이랑 선생님들만 안 피하시고 우리도 같이 대피...시켜주세요? ...그냥, 진짜로 폐업하시고... 다른 직업 가지시면 안전할 수도 있잖아요..."
물어보는 게 맞았을까? 정작 물어봐놓고, 막상 대답을 들으려니 긴장돼서 고개를 떨구려니, 머리 위로 소장님이 특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 테러범이야?"
"네? 아뇨! 저 저지먼튼데요! 그런 놈들이랑 싸우는 게 제 일인데요!"
당황감에 목소리가 높이 튄 나와 달리, 소장님은 평소처럼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됐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나도 똑같아. 테러범이 인첨공에 있는 연구소란 연구소는 다 조질려는 것 같고, 이대로 있으면 ㅈ되니까 대피하는 거지. 그리고 테러범도 언젠간 잡힐 거 아니냐? 그랬는데 진짜 폐업해놓으면 쌤들은 뭐해서 먹고 살아, 평생 이 짓만 해왔는데. 그리고 테러범이 지X한다고 찐으로 폐업하는 거 자존심상해서 싫다."
".....하지만."
"그리고, 너나 애들이 우리 죽일 거면 옛저녁에 죽였겠지. 뭐, 냉정히 말해서 너네들이 합심해서 우리 죽이겠다고 덤비면 쪽 못 써, 우리. 그건 맞아. 근데 니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잖냐? 그래서 나도 나 꼴리는 대로 하는 거야. 남아계신 쌤들도 하고 싶은 게 나랑 똑같아서 남아계신거고."
"그러니 너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안 그래도 어려운 거 많은 세상에 어려운 거 늘릴 일 있냐."
그 말에, 뭔가 울컥하고 북받쳤다.
"...죄송해요."
"음? 10만원 건이라면 너도 억울할 만 했..."
"그, 그거도, 그건데요. 저도, 실은... 저 테러범들이랑 비슷한 마음 먹을 뻔 했었어요... 그, 선하, 죽었을 때..."
"...음."
"근데, 그러고 싶다가도... 지내다 보니까, 소장님이랑 쌤들이랑... 선하, 일부로 그렇게 만드신 거 아니고, 사고였다는 것도 알게 됐고... 선생님도, 소장님도, 윗대가리들한테는... 저희랑 같은 입장이시라는 것도 알게 됐고... 또, 제가 사고치면... 뒷수습해주시는 건 언제나 소장님들이었다는 것도 알아요... 근데, 그렇게 마음 먹은 게..."
눈물도, 울음도 주체하지 못하고, 껄떡껄떡 숨을 들이키며 가까스로 말을 이어가던 중,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내 담당 연구원 선생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마음, 지금도 있어?"
"아뇨..."
"선생님도, 소장님도, 애들도... 죽는 거 싫어요. 뉴스에서 본 것 처럼 되는 거 싫어요..."
그 뒤로는, 음. 그냥 마음속에서 뭔가가 툭 터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소장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선생님은 말없이 내 어깨를 다독이다가, 넌지시 내 이름을 불렀다.
"새봄아?"
"네...?"
"너 30분 뒤에 정인쌤 커리큘럼 아니니?"
"으악, 맞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허겁지겁 얼굴을 닦고 가방을 챙겨들고 반은 인사고 반은 비명인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다.
"다녀오겠습니다아아아아악!!!"
- 헬 쉐프를 향하여 0519
- 테러가 일어나도, 첫사랑이 끝나도 시간은 흘러간다. 죽어라 안 갈 때도 있지만, 학교 가는 날 아침같은 때에는 배속이라고 한 거마냥 빨리 가지.
그런 점에서, 시간은 내 눈 앞을 가득 메운 파란 하늘, 그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을 닮았다. 아주 잠시 올려다볼 때는 그냥 비슷비슷한 모양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를 노려보면, 눈을 떼는 게 아까울 정도로 모양이 바뀐다. 그게 참 신기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말하자면, 그냥 텅 빈 연구소 옥상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시간이 안 갈까봐 그 뒤로 일부러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러다보니 좀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오늘 하루는 이러고 있기로 했다. 그래봤더니 생각보다 괜찮다. 아니, 비 오는 날이 아니라면 좀 버릇이 될 것 같다. 마침 야외에서 멍 때리기 좋은 계절이고, 뭔가 색다른 넷플릭스를 보는 것 같달까?
아, 그나저나 저 구름, 꼭 내가 만든 마시멜로같이 생겼다. 개똥 마시멜로 만들 때 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다음엔 뭘로 만들까나~ 다음엔 새똥을 모아볼까?
- 서형과 합동훈련~>< 0520
- "자, 해볼까."
모든 훈련생의 커리큘럼이 끝나고 텅 빈 훈련실 안, 새봄은 계란 한 판 - 포장지에서 꺼내 뽀득뽀득 씻은 뒤 김장에나 쓸 만큼 큼지막한 음식용기에 차곡 담긴 - 을 노려보며, 기지개를 켜고 눈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나름대로의 준비운동을 마치고, 새봄은 훈련실 바닥에 양반다리도 아니고 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매서우리만치 뚫어져러 가만히 계란을 응시하던 새봄은, 이내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락앤락은 두가지 식재료로 채워졌다. 반절은 크림처럼 뽀얗고 조밀하게 거품을 올려 흰 뿔이 솟은 머랭으로, 나머지 반절은 샛노랗고 몽글몽글하면서도 뭉친 곳 없이 매끈한 커스터드 크림으로. 그러나 새봄은 인상을 푸는 대신, 눈을 꾹 감으며 한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딱!
제발 성공했기를. 연산을 마치고 기도하듯 속으로 읊조리는 찰나, 훈련실을 매운 바닐라 향에, 색다른 향이 끼어들었다. 달콤쌉싸름하면서도, 고소한 향이었다. 새봄이 천천히 눈을 뜨자, 투명한 음식용기의 벽 너머로, 은은한 아이보리빛을 띤 머랭 시트에 커스터드, 흑설탕과 계피가루 약간으로 맛을 낸 바나나잼이 샌드되어 있고, 쿠키와 견과류를 부숴 만든 크럼블이 솔솔 뿌려진, 큼지막한 파블로바 케이크가 보였다.
"됐다!!"
새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깡충 뛰어올랐다. 그런 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연이 새봄의 제안에 응해, 방과 후 부실로 향했다면, 새봄이 소파 앞 테이블에 하얀 가운데 초콜릿 소스와 이런저런 토핑이 뿌려진 케이크 한 조각이 올라 있는 접시 두개와 (부실에 비치된 커피머신에서 뽑은 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준비해둔 채 서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서형 여기예요~!"
"히히,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그 퀴즈란 게 뭐냐면요~ 짜잔!"
새봄은 장난스레 케이크를 가리킨 뒤, 잔뜩 기대에 차서는 초롱초롱 빛나는 분홍빛 눈으로 서연을 올려다보며 재잘거렸다.
"이 파블로바 케이크의 과거를 맞춰주세요~ 사이코메트리로요!"
"이 케이크는 총 두번의 변신을 거쳤는데요, 처음에 뭐였고, 이 케이크가 되기 전에는 뭐였는지 맞춰주면 돼요~!"
"상품은... 지금은 비밀이에요!"
- 서형과 합동훈련~>< 0522
- "히히, 네! 지금은 비밀이에요~."
케이크를 보자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라는 서연을 보며, 새봄은 잔뜩 뿌듯한 듯 싱글벙글 웃다가, 이어 그가 의욕적인 모습으로 손뼉을 치며 방법을 알아챈 듯 사이코메트리를 쓰면 되냐고 묻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부연설명할 필요 없이, 곧장 케이크를 한 입 가득 떠넣는 서연을, 새봄은 숨까지 죽인 채 빤히 응시했다.
서형이라면 당연히 맞추겠지? 근데 서형 사이코메트리가 어떤 식으로 서형한테 정보값을 주는 지 모르겠는데, 감각이라면 지금 느끼는 감각하고 교란되거나 하지는 않겠지?
서연이 케이크 맛을 무심코 음미했는지 식량을 머금은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진 채로 행복해하다,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오물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감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걱정 아닌 걱정이 고개를 들 즈음이었다. 능력 사용을 마쳤는지 케이크를 마저 삼키고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한 서연이 내놓은 대답에, 새봄은 방싯 웃으며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추셨구나! 역시 서형이야~
"딩동댕! 그럼 상품 가져올게요~ 히히."
새봄은 부실에 딸린 탕비실로 쪼르르 들어갔다가, 긴 변이 서연의 어께너비 정도인, 옅은 갈색 바탕에 검은색 리본이 붙은 종이상자를 꺼내왔다. 상자를 내려둔 새봄이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단풍잎 모양을 낸, 옅은 갈색 크림이 샌드된 쿠키가 가득 들어있었다.
"짜잔~ 메이플 쿠키예요! 버터쿠키에다가 메이플 시럽을 넣은 크림을 샌드한 건데요, 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하면 알아봐도 돼요! 히히."
서연이 능력을 사용한다면, 박력분, 아몬드가루, 생크림, 메이플 시럽, 등 다양한 재료들이 새봄의 손에 요리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섞여 구워지고, 크림이 샌드되어 완성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가을이잖아요, 철형이랑 단풍구경 데이트 하면서 알콩달콩 나눠먹으라고 만들어봤어요~ 히히."
- 오늘도 이삼연구소는 평화롭습니다 0523
- ...하아, 내가 왜 늘그막에 이런 경우에 놓여야 하는거야. 분명히 어젯밤까지 내 정겹고 달콤한 과자집의 마시멜로 안락의자에서 한 숨 붙였거늘, 딱 봐도 맛대가리 없어보이는 지하소굴에서 모르는 젊은 것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냐고. 저 사또나린지 소장인지 하는 젊은 녀석은 지가 뭘 안다고 네 시간이면 집에 갈 수 있을 테니 시키는 대로나 하라는데... 네 시간 지나도 집에 못 가봐라, 네놈부터 잡아먹어주마! ...아니다, 내 몸의 주인인 꼬맹이가 못 먹을 것도 먹을걸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 그냥 여기서 눌러 살면서 아무거나 먹을 걸로 만들고 배 채워도 되겠는걸? 옳지, 저 맛대가리 없어보이는 벽부터 맛있는 쿠키벽으로 만들어볼ㄲ...
-"보소, 어르신!! 요력은 정해진 물건에만 쓰시래도!!"
"시끼러 이눔아!! 니눔 옷부터 달콤하게 만들어주마!!"
-"신새봄 이녀석 일부러 할머니인 체 하는 거렸다!!"
- 뭣이 중헌디 0524
-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어질러놓고 그 노래 부르지므르(부르지 마라)... 그그 느 느르으(그거 내 노래야)..."
"아 쌤~ 그래도 요즘같이 시절이 하 수상할 땐 저도 능력을 전투에 응용할 수 있게 단련해야 좀 도움이 되잖아요~."
"지금 테러범이 우리 벙커에 쳐들어왔니?"
"...죄송해요, 헤헤."
-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달콤해져라 0525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당보충은 꽤 되고 있고, 타이레놀 먹어서 좀 낫긴 한데, 쉴 틈이 없어. 밑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움직일 때마다 능력 쓰고 있는 건 똑같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올라간다고 해도, 나 혼자 저 파란 머리랑 맞짱을 떠서 이길 거라는 보장? 솔직히 못해. ...그런데, 저 파란머리도 내가 이리로 올라오는 게 달갑지는 않아보여. 그리고, 그것만큼 반가운 신호가 없지. 새봄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세개의 드론을 보며, 씩 웃음지었다.
새봄은 그저 위를 바라보고, 온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고는 더욱 속력을 높여 연산하고, 몸을 움직였다.
중요한 건 단 하나. 난 저 위로 갈거야. 조금이라도 더 높이. 저것들 때문에 겁먹고 내려갈 거라면, 애초부터 이리로 올라오지도 않았어. 얌전히 부장 말이나 들었겠지. 하지만 XX 난 나만의 길을 간다. 새봄은 이를 익물고, 어느새 콧속에서 뜨끈한 것이 흐르기 시작함에도,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근육통과, 이따금 스치는 화끈한 감각에도 아랑곳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던 끝에, 조그맣게 보이던 파란머리가 제 팔뚝만큼은 크게 보일때 즈음, 새봄은 오르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설탕이 물에 젖고, 고온에 녹에 바글바글 끓는다. 제 머릿속에 일어난 현상을 현실로, 파란머리의 전신을 감싼 옷으로 불러오기 위한, 아주 간단한 연산. 그것을 마치자, 새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씩 웃으며 한마디 외쳤다.
"달콤해...져라!!"
_________________
"HA↗HA↘!"
성공했다! 내가 해냄!! 신난다!!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파란 머리의 옷을 보며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또는 어떤 가족 애니메이션의 조역 캐릭터처럼) 신이 나서 조소를 터뜨리다 퍼뜩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안 다치기로 했는데. 너무 가버렸네. ...뭐라고 변명을... 아니 사과를... 아이고, 모르겠다. 쟤네 가네? 잡아야 하지 않나? 근데 할 수 있나? 아, 못하네. 할만큼 했지, 이 정도면. 오, 그럼 심슨 생각난 김에 이 말 해주고 싶어. 원작은 발화자가 떠나는 구도였지만, 뭐 어때?
"SO LONG, SUCKERS!"
그렇게 마지막까지 한마디 해주자, 기운이 다 빠졌다. 내려가야 하는데, 귀찮네. 그래도 여기서 천년만년 있을거야? 내려 가야지. 기세등등했던 조금 전의 모습이 무색하게, 새봄은 내려온 대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훈련 전 핸드폰은 무음으로 0526
- 오늘은 조금 하드 트레이닝에 도전하기로 했다. 큰 물건을 갖다가, 여러개의 각기 다른 음식으로 만드는 거다. 한꺼번에. 방법 자체가 연산이 만이 들기도 해서, 주재료는 하나로 통일하고, 가급적 단순한 레시피로 엄선했다. 일단 저 폐지더미 정도면 계란 한판은 나올 테니, 아는 계란 요리를 다 동원해보자.
계란에 물 또는 기름만 있으면 되는 거. 삶은 계란. 완숙이랑 반숙, 훈제. 그리고 후라이. 기본적인 스크램블드 에그도.
여기까진 쉽네, 그럼 재료를 좀 더 추가해볼까? 계란을 풀고, 물과 우유, 소금, 설탕, 야채 적당히 다져놓고, 계란찜. 계란찜 레시피에서 물은 빼고 계란말이... 하나만 더 해보자, 장조림! 근데 장조림에 소고기랑 마늘이 없으면 뭔가 서운한데... 까짓거 넣지 뭐.
됐다, 전부 그럴싸한걸! 장조림은 이 중에서 제일 손이 많이 가서 걱정했는데, 계란껍질이 좀 들어간 거 빼곤 나쁘지 않고. 이제 이것들을 그릇에 하나씩 넣기만 하면...
띠링
"악!!!"
리빙 포인트: 훈련에 임하기 전 핸드폰은 꺼놓자.
안 그러면 훈련실 청소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까지 늘어난다.
- 미트로프를 양산하며 0527
- 어쩌다보니 취직하게 됐다. 우리 연구소에, 전속 요리사로. 상황이 안정되고 임시 연구소 생활이 끝날 때까지라,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계약직이지만. 설마 투잡, 아니 학생 신분인 것까지 합하면 쓰리잡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생 모른다. 이러나 저러나 일정은 똑같다. 임시 연구소 - 학교 - 임시 연구소 - 알바 - 임시 연구소. 달라진 건 전속 요리사 활동을 하는 동안엔 커리큘럼을 일부 면제받는 거 정도다. 그래도 비상식량이 꽤 있어서 내가 물량을 충당할 동안은 그걸로 버티려나보더라.
원래는 필요한 영양소가 전부 들어있는 죽만 만들면 됐는데, 서형한테 좋은 책을 선물받은 김에 졸랐다. 하루에 한번 정도는 특식을 만들고 싶다고.
물론 다른 거 안 만들고 그 영양죽만 만드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영양학적으로도 좋을 거고. 그럼에도 특식을 제안한 건, 먹는 게 은근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대량을 일정한 품질로 만들어야 하는 여건상 고를 수 있는 레시피는 한계가 있을 테고, 내가 고른 레시피가 모두의 마음에 들 수도 없지만, 할 수 있는 노력은 해보고 싶었다.
여기가 아주 조금씩이나마 더 좋은 곳이 되도록, 나부터가 작은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은 아니지만, 애착이 없지 않다는 걸 이번 테러로 확인해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생님들과 의견을 좁힌 결과, 화요일, 목요일, 주말 이틀 정도는 하루에 한 끼 정도 특식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하루 한 끼는 좀 빡세긴 했다...)
그리고, 첫 특식은 서형이 선물해준 대공황 레시피에 들어있는 미트로프를 골랐다. 오늘이랑 내일 열심히 만들어두면, 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주말 연일에 영양죽과 함께 배급될거다. 솔직히, 영양죽 만들 때는 엄청 입맛이 당기진 않았는데, 미트로프 한덩이 생산하고 나면 냄새 때문에 배고파져서 그게 좀 빡세긴 하지만, 퍽 재미있다. 당장 폐지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로 변하는 걸 보는 게 보람있기도 하고, 레시피에만 집중하다보니 하면 할 수록 지치게 되는 생각도 일할때만큼은 안 할 수 있도 하고. 임시 연구소 생활이 끝날 때 쯤이면 지금보단 낫겠지. 지금은 주어진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 3분 훈련 0528
- 콰삭, 오물오물.
"이 능력 편리하다니까~"
"선생님들 몰래 간식도 만들어먹을수 있ㄱ..."
-"몰래 간식이라고요, 환자분?"
"끼야아아아아아아악!!!"
- 한과 탐구 ~ 매작과 0529
- 한가해 죽겠다. 그 전투 이전에는 학교에 커리큘럼에 비상식량 생산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그래도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는 모양이다. 퇴원하고 뭐 할 지 궁리하던 끝에 또 다시 책을 잡았다. 지금 보고 있는 페이지는 매작과 레시피다. 매화 가지에 앉은 참새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매작과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매작과 하면 떠오르는 정형화된 모양(배배 꼬인 파스타같기도, 리본같기도 한)을 상기하자 의아해졌다. 나뭇가지 참새의 흔적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데, 우리 조상들이 상상력이 풍부했던걸까, 아니면 과거에는 진짜 매화가지랑 참새 모양으로 요리가 아니라 공예를 했던 걸까? 모르겠다.
매작과는 밀가루에 물과 소금 생강즙을 넣고 반죽해서, 모양을 내고 기름에 튀긴 다음 꿀이나 조청에 담가 계피가루를 뿌려서 만든다. 한과를 보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과자는 맛있을 수록 몸에는 안 좋을 수밖에 없나보다. 하긴, 그 일정량 이상 먹으면 몸에 안 좋은 성분 때문에 맛있는 거니까. 인간의 힘 - 최소한 마음의 여유는 당분에서 나오는 거고. 그러니 맛있는 거에 건강하기까지를 바라는 건 과욕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러니 내일 퇴원하기만 해봐라, 침대생활하면서 익힌 모든 레시피들을 다 손으로 구현해서 맛봐주마!
그리고 그 녀석을 위한 떡도 만들어야지
- 06~07
- 스트레인지 모험 0601
- 역시 저지먼트도 집단이라 갈등은 피해갈 수 없는지, 퇴원 후 복귀하고 보니 떡을 담아둔 그릇이 텅 비어있었다. 누가 썼을까? 워낙에 부원이 많아놔서 잘은 모르겠지만 싸움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진 않는 거 보니 제 용도에 맞게 잘 쓰이긴 한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 개인톡으로 뭔가 항의나 건의사항이 오겠지.
아무튼, 새로운 떡을 생산해야 한다. 줄어들었다는 건 어쨌든 수요가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모든 일과를 마치고 가까운 스트레인지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못해 흉흉하고, 비옷을 뚫고 들어오는 습하고 쌀쌀한 공기에, 신발을 잔뜩 침범한 빗물의 찐득한 감촉이 의욕을 떨어뜨렸지만, 그럼에도 이 곳을 찾은 건 - 다름 아닌 이 곳의 하수구에서 떡의 재료를 찾기 위해서다. 일반인이 맨홀 뚜껑을 여는 건 범법이지만, 이곳은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한 곳이니 하수구에 누가 들어간들 안티스킬이 잡으러 오지 않을 테니까.
마침 적당한 맨홀뚜껑이 눈에 띈다. 단단히 닫혀있어서 열릴 것 같진 않지만 - 방법이 있지. 맨홀 뚜껑 위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맨홀뚜껑의 안쪽 부분만 머랭쿠키로 만들기 위해서. 심호흡 몇번으로 머릿속을 비우고 연산하기 시작했다. 딱 들기 좋을 만큼만, 이 만큼.
덜걱.
무심코 힘을 주고 있었을까? 연산이 끝나자마자 맨홀 뚜껑이 조금 묵직하나마 손에 들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성공했네. 돌아갈 땐 안쪽의 머랭쿠키를 물로 바꿔두면 한동안은 괜찮겠지.
- 춘치자명(라스트!)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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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재밌네. 태오 선배는 여태 주에 한번은 마주쳐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생각을 읽는다 치자? 저 형사는 나랑 오늘 처음 만났을 뿐더러 태오 선배랑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한들 오늘이 초면인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아는 체 지껄이실까? 저렇게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이 형사라니, 역시 인첨공답네. 형사 되기 은근 쉬운가봐. 야, 그럼 나도 어른만 되면 형사될 수 있겠는데? 아, 근데 저런 안티스킬 될 바에야 케이크나 만들겠다. 그게 더 보람찰 것 같은걸. 아, 그러고보니 태오 선배는 목소리가 들려야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셨지. 그럼...
새봄은 목청을 가다듬고 연극조로 낭랑하게 외쳤다.
"처음 시, 피어날 발!"
그러고는 손을 모아쥐고 동요라도 부르는 듯 기교 없이 맑고 곧기만 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시발,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시발,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태오 선배. 들리시죠? 이거 질문 아니고요. 제가 운이 좋은 지 어떤지는 맘대로 생각하세요.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라는 게 있는 민주 국가니까요. 그런데 그 생각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에 따라 제가 후배다울 지 버릇없을 지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은 알려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이제 아실 거고요.
시발~ 시발~ 시발자동차~
새로 피어난 우리 자동차
시발~ 시발~ 시발자동차~
새로 피어난 특별한 처음!
물론 저도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지금같은 어처구니 없는 경우나 더 짜증나는 일도 생기지만, 그만큼 좋은 일도 많으니까요. 제가 겪은 불행에만 초점을 맞춰서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웅변해서 뭐하겠어요. 불행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그런 걸로 웅변해 봤자 저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꼴 되는걸요.
희망이 피어나는 참 좋은 말
시발~
새로 피어나다~
참고로 이 노래는 명동로망스라는 뮤지컬에 나오는 새로 피어나다 라는 넘버인데요, 시간관계상 숏츠 사이즈로 불렀어요.
아~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노래를 마친 새봄은 언제 짜게 식었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되어서는 자리에 앉아 이내 제 질문에 대답하는 태오의 증언을 받아적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자, 요약해보자.
선배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유. 본인은 말로서 부정했지만 능력으로 진위여부를 확인한 결과로 인해.
그리고 지금은 좋아한다고 안 믿는 이유. ...안 만나줘서!
새봄은 제가 도달한 결론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까도 확인한 결론이지만 정말 착잡하다. 물론 태오 선배는 리버티가 아니고, 피해자를 해치지도 않았어. (뭐 넘어지면서 타박상같은 건 입었겠고 운이 나빴다면 뇌진탕이 왔을 수도 있지만) 하지만 피해자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고 자기 배에 칼빵을 놓고 협박을 함으로서 정서적인 폭력을 가했지. 솔직히 같은 동아리 선배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은 벌어졌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 다음이겠지. 새봄은 열창하느라 조금 까끌해진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선배, 지금까지 질의에 답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선배의 사랑 방식이야 선배 사생활이고,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요. 만나주지 않는다고 그 사람 앞에서 자해를 하고 협박하신 건 참 끔찍한 짓이셨어요."
"리버티에 가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상해를 입히신 것도 아니지만, 선배가 하신 일이 데이트 폭력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건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요."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엔 안 그러시길 바라요. 선배는 저지먼트지 범죄자가 아니잖아요."
"이 다음에 나오시고 나서, 피해자한테든 누구에게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시겠으면 단톡방 한번 확인해보세요. 미운 사람을 위한 떡이라고, 제가 만들고 있는 게 있거든요. 부실에 비치해뒀어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예요.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형사님."
새봄은 형사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활짝 웃으며 넉살 어린 투로 말했다.
"형사님 때문에 형사 참 아무나 하는 직업이구나, 하고 오해할 뻔했잖아요~ 그렇게 쉬우면 형사나 해볼까, 하고 잠깐 생각했는데요. 역시 저는 케이크 만드는 게 더 보람차고 즐거울 것 같아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집에 가고 싶을 땐 초콜릿 0608
- "악!! 미친!!!"
비명부터 터져나와, 눈을 가렸다. 솔직히 머리 쓰는 일은 영 젬병이라서 쫄래쫄래 일행들 꽁무늬만 쫓아다니다 천장에 모니터가 달린 방에 이르렀는데. 모니터에서 이제야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된 사람 - 케이스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자기자신을 향해 총질을 하는 영상이 적나라하게 송출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거 아냐? 왜 사람을 불러놓고 자해쇼를 하는거야? 그나저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구급차를 부르고 싶어도 저 자해쇼 현장이 어딘지를 몰라. 눈을 가린 채 돌아가지 않는 머리라도 억지로 돌리려니, 쿵!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어, 잠깐만.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보니, 화면은 껴졌고,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이거, 여기서 일어난 일이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자, 딱 한순간이나마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솔직히, 서형이랑 철형이 비통해보이지 않았다면 아까보다 더한 쌍욕을 내뱉었을 거다. 난 수경이가 엮인 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 그래서 내 시점에서 지금 이 상황을 묘사해보자면, 같은 동아리 부원이 납치당해서 수색하던 도중, 부원의 지인인 모르는 사람이 오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사람이 자살하는 걸 라이브로 목격한 거다. 그래서 슬프다고는 도저히 못해주겠다. 고인의 사정을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도움을 바랐던 거라면, 이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됐다. 애초에 도움을 바랐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아까 본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만 싶다. 아, 이거 트라우마 생기겠다. 조만간 상담센터 예약 잡아야지. 선생님께 뭐라도 털어놓고 징징거리면 좀 나아질거야. 지금은 수경이 찾기에 집중하자. 일단 뭐라도 좀 먹자. 급한대로 바지주머니속에 들어있던, 꾸깃하고 바랜지 오래인 영수증을 초콜릿으로 만들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일행들을 좇아 다른 방으로 향했다.
- 23만원의 전말 0609
- 학교 가고, 커리큘럼 가고, 급식 만들고. 똑같은 하루가 몇번을 갔는지 기억도 안 나는 어느날이었다. 언제나처럼 급식 제조를 마치고 (특식 제조까지! 오늘은 특별히 힘서서 개성주악을 간식으로 내봤다.) 퇴근하려는데, 소장님에게서 호출이 있었다.
무슨 일일까? 요샌 사고는 커녕 인생에서 제일 지루하게 살았는데. 아, 물론 주말에 있었던 난리통 관련해서 멘탈이 나갈 똥 말 똥 하는 바람에 상담센터 예약해서 한바탕 울고 징징거리고 썰풀고 그러긴 했다. 그러고 났더니 기분은 좀 좋긴 했다만. 아니면 디스트로이어 상의 벗겨버린 거 때문에 안티스킬에서 걸고 넘어졌나? 이런. 또 내 뒤치다꺼리를 하게 해드릴 수 없으니 적금 하나 깨야겠네. 그나저나 그 아저씨가 뭐 입고 있었더라? 기억 안 나는데.
그렇게 망상에 망상을 거듭하며 소장실로 가보니, 소장님은 의외로 차분하셨다. 늘 그랬듯이 엄청 피곤해는 보이시지만, 열받으신 느낌은 아니었달까?
"안녕하세요!"
"어어, 새봄이 왔냐. 왜 불렀냐면 말이다."
소장님은 사람이 궁금해 미칠 지점에서 운을 떼시더니, 가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지원금이라고 쓰인 하얀 봉투였다. "옛다, 지원금."
"감사합니... 어라, 소장님. 봉투 잘못 주신 거 아니에요?"
"니거 맞어. 이번달부터 13만원 인상하기로 했다."
"네에에에에??? 아니, 이만큼이나 올려주셔도 돼요? 두배 이상이잖아요!"
기함했다. 내가 친 사고로 완전 적자났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돈이 나신 거지? 잔뜩 얼빠져있을 내 얼굴을 보며 소장님은 피식 웃으시더니 내 코를 한번 잡았다 놓으셨다. 으악.
"그동안 급식 만드느라고 욕봤잖냐."
"애껴 써."
"아, 그리고 광고 찍을 준비도 해둬라. 그럼 더 올려주마."
"...그거 진짜 찍어요?"
"당연하짐마, 리버틴지 아갈틴지도 조용하겠다, 이참에 얼른 찍어놔야지."
"네에..."
- 실종자 수색 후기 2 0610
- 수경이는 무사했다. 무척 쇠약해져 있긴 했지만. 승아선배를 노렸던 파란 머리나, 지 멋대로 우릴 아래로 보낸 분홍 눈, 시체인 채로 처음 만났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파란머리나 분홍 눈은 디스트로이어처럼 어딘가에서 만나면 꼭 특제 떡을 먹여주고 싶지만,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또 그들의 시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 정도. 왜냐면, 시체 한 구 한 구 발견할 때마다 힘들었으니까. 시체를 보고도 점점 안 놀라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었기도 하고. 결국 그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지만, 내가 자살 장면이나 시체를 직접적으로 본 게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저런 일들로 지쳤다보니 가상현실로 들어가서는 딱히 별 일이 없었는데도 아무것도 못 했다. 아니, 안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가상현실 속 수경이는 어째서인지 마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같은 몰골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목화고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듯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서형의 말에도 자신은 저지먼트같은 게 될 수 있을 리 없다며 자신없는 듯 말하기도 했다.
다들 수경이의 마음을 돌리고자 호소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해 줄 말이 없어서다. 물론 수경이가 그렇게 너덜너덜한 몰골로 그 미친 파란 머리한테 착취당했으면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수경이를 모른다는 거다. 수경이를 괴롭히고 있는 배후가 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보고서를 통해 알았을 뿐더러, 그 순간에도, 지금도 수경이가 왜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당해왔는지나, 미친 파란 머리를 포함한 수경이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래서 수경이가 어떻게 하면 마음을 돌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심란했지만 머지 않아 결론이 났다.
당연한 일이다. 나와 수경이가 그 정도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고서로 접한 것 이상으로 수경이의 인생사에 대해 더 알고 싶냐면, 그렇지는 않다. 비상사태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알았다고 생각한다. 수경이 본인도 알려지고 싶지 않은 부분이지 않을까 싶고.
어쨌거나, 상황은 끝났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선은 비는 시간에 자체적으로 주변을 순찰할까 한다. 나쁜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까. 그 놈들이 다시 나타나서 수경이를 괴롭히는 걸 막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질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루프로든 뭐로든 반복되는 것도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서 아예 미연에 방지하고 싶긴 하다. 그런데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좀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3학구를 한바퀴 순찰하면서 다음 떡의 재료를 주웠다. 바로... 과자 음료수 쓰레기랑 담배꽁초! 초대와 2대가 개똥에 바선생이니 이번에는 좀 순한 맛으로 가려 한다. 자꾸 자극만 추구하다간 내가 처음에 정해놓은 강령을 어길 수도 있으니 말이지~.
- 진짜로 행복한 어느날의 개성주악 0611
- 요즘 들어 느낀건데, 원한을 갚는 것도, 싫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큰 탈 없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것 같다. 그 생각이 문득 들어서, 오늘은 커리큘럼 외에는 별 스케줄이 없는 김에, 간만에 수제 베이킹을 하기로 했다. 종목은, 서형이 준 책에 나오는 개성주악! 레시피를 보니 부실 주방에서 만들기에도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더라. 물론 상상하는 게 나을 정도로 손이 가긴 하지만, 그 상상을 하려면 실제로 만들어보기도 해야 하니 말이지!
먼저 뜨뜻한 물에 생막걸리(이건 그냥 물에다가 상상해서 만들었다. 도저히 정상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가 없어서.)를 중탕해주고, 방앗간에서 빻아온 습식 쌀가루와 밀가루를 채로 쳐서 내리고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했다. 한데 섞여서 곱게 걸러져 사막의 모래언덕마냥 소복이 쌓인 가루 재료 위에, 미지근해진 생막걸리를 조금식 부어가며 반죽했다.
말랑말랑하게 뭉친 반죽은 잠시 두는 동안, 집청을 만들었다. 그냥 생강을 썰어다가 물과 함께 믹서기로 간 뒤 면보에 걸러서 생강즙과 조청, 소금을 넣고 걸쭉하게 끓었다. 멀티태스킹으로 고명을 만들다보니 어느새 점도가 생기고 갈색으로 졸아들어있었다. 다행히 태우기 전에 잘 껐다.
그러고나니, 나머지는 간단했다. 반죽을 작은 도넛 모양으로 잘 성형해서 기름에 튀기고, 건져서 기름기를 좀 뺐다가 아까 만들어둔 집청에 담가두고. 커리큘럼 다녀오는 동안 재워두면 완성! 커리큘럼이 끝나자마자 부실로 와서, 집청에서 완성된 주악을 꺼내, 하나씩 (원래는 머핀을 감싸는 용도였던) 종이틀에 넣고, 상자에 포장해서 철형 자리에 올려두었다. 영화 관람권 두 장이랑 같이.
@철형
[철형철형] [시간 되면 부실에 들러요!] [형 자리에 선물 놔뒀지롱><]
그러고 퇴근할까 하다가, 포스트잇을 뜯어 짧은 메모를 남겼다.
형! 요 근래 엄청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 살아있어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제가 선물 준비했지롱! 이건 개성주악이라고, 서형이 나한테 준 책에 실려있는 한과인데요, 서형이랑 사이좋게 나눠먹고, 데이트도 해요! 아, 맞아. 서형이 걱정하면 나 지원금 두배보다 더 올랐다고 전해줘요>< 개성주악에 사이코메트리 해도 된다고두요~ -새동생이
- 冬恥緘默 0613
- 할 수 있는 질문은 모두 한 시점에서 더 이상의 필기는 무용하겠다 싶어 핸드폰으로 서형이 준 책 중 세계대공황 레시피북을 읽고 있던 새봄은,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곧장 고개를 들고 병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바닥에 기절해있는,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저지먼트 선배, 금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은 채 핸드폰을 넣고 일어섰다. 뭐야? 습격이야?
그러려니 이번에는 (안티스킬 형사와 뜻 모를 문답을 주고받던) 태오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기절해버리자, 새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아니, 하나는 알겠다.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거. 새봄은 벨트 고리에 매단 몽키피스트 키링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 진정하자. 누구든 날 건드리면 달콤하게 만들어주거나 이걸로 때려주면 되니까.
그러고 있자니 형사가 이쪽을 향해 사과하자, 새봄은 볼을 긁적였다. 저 형사님... 평소에 많이 혼나나보네? 오늘 처음 본 미성년자들한테도 사과하고. 좀 안쓰럽긴 하다. 수사 과정이 드라마보다도 바보같은 거나, 날 처음 본 주제에 운이 좋네 어쩌네 아는 척 잘도 떠들어댄 거야 지금도 유감이긴 한데, 이거랑 그건 별개니까. 그래도 해줄 말은 없다. 평소에 많이 혼나는 것 같다는 것도 내 짐작에 불과하니, 아까 저 형사님이 나한테 한 거랑 같은 실례를 저지를 필요는 없지. 그런 마음으로, 새봄은 형사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뒤, 새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금이 깨어나는 걸 보고 커리큘럼에 갈 심산이었다. 다행히 시간은 좀 넉넉하네. 커리큘럼엔 안 늦겠다. 다행스럽게도, 20여분이 지나고 금이 눈을 뜨자, 새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누군지 몰라도 미성년자를 폭행해서 기절시켜? 미친 놈 아니야. 걸리기만 해봐, 내가 아주 그냥 비너스의 탄생 코스프레를 시켜줄 테니. 그럼 나도 이제 일어나볼.......
-쾅!!!!!!
아, 나 커리큘럼 좀 가자!!! 정인 쌤 기다리신다고!!!!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새봄은 또 다시 굉음을 내며 열린 문쪽을 쳐다보다, 탄식이 새어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아, 이번 사건의 피해자이자 무책임한 어른 2네. 그나저나, 몰골이 제법 엉망이신데. 저것도 태오 선배가 한 거라고 하지 그래, 아주 그냥. 그나저나 어디서 오신 건 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달려오신 걸 보니 뇌진탕은 안 걸리신 것 같다.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우리가 심문할 기회도 없었을 거 아냐.
백한결이 형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태오에게로 다가가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모양으로 무어라 말하자, 새봄은 무심코 집중하고 말았다. 커리큘럼 과정 중에 독순술도 있었지. 요새 연습 안 한지 꽤 됐는데, 한번 해볼까...
...아하, 오늘 심문은 피해자의 의사로 이뤄진 게 아니군. 거기다 저 사과 많이 하는 형사님 수하가 피해자를 가뒀다? 아, 알겠다. 오늘도 피해자가 심문이 끝난 뒤라고해도 난입하는 걸 못 막았잖아. 보통 방법으로는 피해자가 심문하는 도중에 난입하는 걸 막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초강수를 쓰신 것 같은데... 결국 실패하셨네. 안됐다. 그건 그렇고, 난 저 아침 드라마 보고 싶지 않거니와, 안티스킬 선생님들과 금 선배님이 당하셨으니 누군가는 문단속을 했어야 했는데, 나도 못하고 아무도 못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새봄은 문 가까이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때마침 열린 문틈으로 태오의 썸남(?)이자, 새봄이 무책임한 어른으로 규정한 이들 중 한명인 백서휘가 걸어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젠장, 오늘 무슨 날인가? 새봄은 제 얼굴이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로 문가에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가서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봉을 챙겨왔다? 물티슈는? 그건 그렇고, 태오 선배는 저 어른들 어디가 좋을까? 오늘 두번째 보면 무책임함을 만회할 만한 매력이 찾아질까 생각했는데, 나 도저히 모르겠어. 난 정인쌤이 나를 차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고백한 다음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커리큘럼을 진행해주셨기 때문에 더 좋아지고 흠모하게 됐는데. 저 아저씨들은 1년을 못 기다려서 미자 꼬실 만큼 우사인볼트 급의 쾌속을 자랑하는 주제에, 그렇게 꼬신 썸남이 누명 썼을 땐 누구보다도 늦었잖아? 아, 근데 잠깐만.
새봄은 이내 손을 멈췄다. 심문은 끝났고, 금 선배도 정신이 드셨다. 그럼 나도 이제 이 자리를 떠도 된다는 거잖아? 게다가 늦게 생겼어, 정인쎔 커리큘럼에!! 나 지금까지 제 시간 엄수는 물론이고 최소한 10분 전에 개근했단 말이야!! 때 마침 할 말을 마친 백서휘가 자리를 뜨자, 새봄은 가방을 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심문 끝났으니 이제 가봐도 되죠? 저 커리큘럼에 늦게 생겨서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는 곧장 병실을 뛰쳐나가 제 모교 부속 연구소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인 쌤 제가 가요!!! 무지각 무결석의 기록, 오늘도 이어가리라!!!
- 솔직히 훈련쓰기 귀찮았던 0615
-
조사라, 거기서 리버티나 그림자가 튀어나오지 않는 한 달콤해져라는 봉인이겠네. 그래도 가봐야지~ 뭔가 재미난 게 나올 수도 있고.
새봄은 아군용, 적군용 재료들과 호신용 무기가 든 가방과 리라 언니표 장비들(방패랑 팔찌)을 챙기고 은우가 보낸 지도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 자매사이도 달콤해져라! 0616
- 아~ 오늘도 빡셌다. 커리큘럼 끝나고 연구소로 귀가하던 중, 새봄은 어딘가에서 이는 소란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아이 둘이 다투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어린 자매 둘이 쿠키 한 개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새봄은, 두 아이를 향해 넉살좋게 말을 붙였다.
"얘들아, 안녕~."
"언니가 재밌는거 보여줄까?"
하고 말하며 돌맹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양손에 돌맹이를 올려놓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버터를 부드럽게 풀어, 계란 노른자와 설탕을 섞고, 밀가루를 체쳐 넣은 다음 초코칩을 넣고 구우면... 짜잔. 순식간에 손바닥에 있던 차가운 돌맹이는, 갓 구운 쿠키가 되었다. 새봄은 그 쿠키를, 언니의 것을 탐내던 동생에게 건넸다.
"짜잔~ 거의 비슷하지?"
-"우와!! 돌맹이가 쿠키가 됐어!"
-"먹어도 돼요?"
"아이, 그럼~ 한번 먹어봐! 맛있을걸?"
동생이 쿠키를 조그맣게 한 입 배어물더니, 순식간에 먹어버리고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외쳤다.
-"맛있어요! 또 해주세요!!"
-"저도 해주세요, 언니!!"
"히히 맛있었구나? 저녁 먹고 사이좋게 먹는다고 약속하면 만들어주~지!"
새봄은 쪼그려 앉아 어린아이들과 하나씩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쿠키를 만들어 두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고, "고맙습니다!!" 라고 외치며 집(어쩌면 연구소)으로 향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새로 피어나는 봄 0617
- "시발~ 시발~ 시발 자동차~"
"??? 도선생, 새봄이 왜저래?"
"오늘 아침부터 계속 저럽니다. 주말에 부활동에서 또 엿먹었나봐요."
"헐... 그거 한 일주일은 놔둬야겠네."
"넵, 그래도 다른 훈련생들과 부딛치진 않게 주의 주겠습니다."
"어어, 수고가 많아."
- 증오와 번뇌의 스쿼트 0618
- "습—후, 하나."
"습—후, 둘"
"...? 아, 부장 선배! 하시던 일 마저 하세요. 세은이 너도!"
"훈련중이라서, 히히~"
이쯤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서술해보자면, 부장 선배와 세은이 자리의 교차점에서 스쿼트를 하고 있다.
솔직히, 기분은 썩 좋진 않다. 아니, (새로피어나다) (엿)같다. 그 문서가 말한 대로, 퍼클 주변에 있기만 하면 능력이 상승하는 거라면 선하는 개죽음을 당한 거니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맨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맘같아선 거기 다시 가서 휘발유 붓고 불 질러버리고 싶다. 그럼 박찬유 그 개X끼는 몰라도 애비 박씨는 뒈질 수도 있을 테니까.
당연하게도, 내가 원망하는 대상은 소장님, 선생님들이 아닌 그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박씨 부자다. 진짜 그 새끼들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 저지먼트답지 않은 생각일 지도 모르지만, 저 새끼가 먼저 우릴 모두 죽인댔고, 실제로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겠어? 방어해야지.
그건 그렇고, 부실에 놓인 서형의 시말서 아닌 시말서를 보고도 생각이 많아졌다. 서형이 어떤 걸 노리고 애비 박씨의 관짝을 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사과문을 보고 마음이 내려앉았다고 해야 하나... 언제고 서형하고 이야길 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비참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게 동아리 선배와 동기 앞에서 스쿼트를 하는 거라도 말이야.
- 분노와 각오의 팔굽혀펴기 0619
- "습~후. 안녕, 박찬유!"
"습~후, 거기서 듣고 있지? 넌 웬만한 능력 다 갖고 있으니까."
"습~후, 내가 여기서 왜 이 XX 떨고 있는지 아주 궁금할텐데"
"습~후, 네놈 덕 좀 보려고 왔다."
"습~후, 자세한 건 잘난 니 애비 이론 보면 알거야~."
오늘은 또 뭘 하고 있냐면, 우리가 지난 주말 제대로 엿을 먹었던 그 장소 앞에서 이번엔 팔굽혀펴기를 조지고 있다. 처음엔 이런 식으로 훈련하는 게 참 비참하고 선하 생각도 나고 그랬는데, 박찬유한테 욕 좀 하면서 하고 있자니 제법 할만 하다. 맘 같아서는 안으로 쳐들어가서 아예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고 싶다마는, 그러면 날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속상하게 할 가능성이 크니 참고 있다. 아무튼, 결론은.
우릴 죽이겠다고? 오냐, 네 덕으로 더 강해져서 상대해주마.
그리고 네놈 애비가 고작 너 친구 만들어주자고 내 친구를 죽였으니 니 애비도 죽일 거야.
네 덕에 강해진 내 손에 니 애비가 죽으면 참 재밌겠다, 그치?
- 학살희망자에게 부치는 노래 0620
- 다음날, 으슥한 밤, 같은 장소.
새봄은 다시 1학구의 허름한 연구소를 찾았다. 요가매트가 아닌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살기등등하기보단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연구소 문 앞에 자리를 잡은 새봄은, 마이크를 켜고 핸드폰으로 반주를 튼 뒤 나지막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_
난 늘 궁금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난 늘 기다렸어
날 이해해 줄 알아봐 줄 한 사람
사실 다 알고있는데
답은 내 안에 있는데
자꾸 되물어봤어
나를 믿을 수 없어
애써 모른척 했어 혼자 자신이 없어
계속 외면해왔어 나를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살아온 날들과 사랑한 이들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
지금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중요한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 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_
"오늘은 너 덕 보려고 온 거라기보단 내 입장 이야기하러 왔다. 노래로. "
"이 대목에서 대사 있는 김에 알려줬다."
_
당신과 같은 심장으로 숨을 쉬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는
하지만 결국 당신과 다른 당신이 아닌 사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해도
아무도 내 존잴 원치 않아도
나는 나로써 충분해
괜찮아
이젠
- 미움 내려놓기 0621
- 서형의 보고서를 처음 봤을 땐, 안도감이 들었다. 서형의 사과문을 봤을 때 마음이 내려앉았던건 서형이 잠깐이나마도 자포자기했던 게 아닐까 싶어서였으니까. 내 생각이 맞는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서형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학살하려는 전능하신 리틀 히틀러와 맞서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박형오와 박찬유를 내 손으로 죽일 각오까지 했던것도, 어쩌면 일종의 자포자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선하를, 죽어간 많은 훈련생들을 죽음으로 몬 원흉인 박형오와, 우리를 학살하겠노라고 잘난 듯이 떠들던 박찬유가 죽어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영화 대부에서도 이런 대사가 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미움을 최대한 분출해서 내려놓아 보기로.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노래 개사였다. 생각해보니, 박씨 부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꼭 1학구 거기서 부를 필요는 없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석은 전능하니 전지하기도 할 테니 어디서 부르든 듣겠지.
그래서 즉석에서 뮤지컬 엘리자벳의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을 개사한 뒤, 재빠르게 코인 노래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번호를 눌러 재생하고, 핸드폰을 보면서 한음 한음 또박또박 노래했다.
_
난 싫어 이런 삶
새장 속의 새 친구
난 싫어 이런 삶
도구 같은 내 취급
난 네놈들 소유물이 아니야
내 주인은 나야
난 원해 내 친굴 죽인 원수 갚기를
여기서 내 삶을 온전히 누리기를
난 신경 안써 네놈 입장
내 알 바 아니야
그래 알아 네놈들 세상에선
우린 존재할 수 없댔지
하지만 착각마 난 가만 안있어
내 주인은 바로 나야
이 문을 넘어서 너에게 가고 싶어
나 당한 모든 일 온전히 돌려줄래
난 나를 지켜나갈 거야
니 모가질 원해
난 싫어 네 놈들 사상도 신념들도
날 이젠 그냥 둬 이 녹음기같은 놈아
살인자가 될 것만 같아
니 모가질 원해
당신들의 학살에 저항하다
나 설령 죽는다 해도
저 세상 가서도 괴롭혀주마
난 원한을 잊지 않아
새장 속 친구로 살아갈 수는 없어
난 이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주인은 나야
니 모가질 원해
D져!!!!!!!!!!!!!!!!!
_
"켈록, 켈록..."
"이야, 이거 두번 부르다간 목 나가겠네."
- 오세요! 상담센터 0622
- "하아..."
"뭐야? 왜 한숨셔?"
뒷자리에 앉은 단풍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소리에, 자동으로 몸이 돌아갔다. 애 무슨 일 있나? 단풍이는 평소보다 힘이 없어보이는 기색으로 인상을 쓴 채 투덜거렸다.
"상담센터 간다는 거 엄빠한테 막힘."
"뭐? 왜?"
"상담센터같은 건 미친 애들 아니면 나약한 애들이나 가는 데라면서 니가 거길 왜 가녜..."
"와, 쌍팔년댄줄. 언젯적 얘기야~!"
"내 말이. 내 돈으로 가기엔 빠듯하고... 에휴, 머리 아프다."
가여운 단풍이. 이제 막 알아보기 시작해서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을 다 모르는구나. 상담센터 가는 거, 돈이나 부모님 허락 없어도 아주 최단루트가 있는데.
"단풍아, 너 연구원 선생님 어때?"
"우리 쌤? 음... 엄하긴 해도 성격파탄자는 아니지. 왜?"
난, 단풍이에게 손짓하고는 귀를 갖다대는 단풍이에게 속닥거렸다.
"연구원 쌤한테 일단 이러이러한 문제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커리큘럼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해."
"너가 정신적으로 힘들잖아? 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실거야."
"왜냐면 어쩔 수 없이, 연구원 선생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성과거든, 성과."
"연구소도 마찬가지라, 상담비용 정도는 연구소 예산에서 나갈거구."
단풍이의 두 눈이 토끼눈마냥 동그래졌다.
"야, 그 방법을 몰랐네! ...근데, 우리 부모님도 저런데 나 상담받았다가 취업에 지장생기거나 그러진 않겠지?"
"얘, 상담센터는 물론이고 정신과 병원도 비밀보장이 원칙이야~! 그런 건 드라마속에서나 있는 일이라구. 너가 밝히기 싫은 정보가 새어나갈 일은 없어! 아, 내친 김에 좋은 데 추천해줄까?"
...그렇게 해서, 우리 상담센터에는 내담자가 한명 더 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늘고 있는 거 아냐?) 나한테는 꽤나 잘 맞아서 라포형성도 꽤 된 곳인데, 단풍이에게도 잘 맞았으면.
- 臥薪嘗膽 0623
-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다. 섶(땔감)에서 누워 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인데, 춘추전국시대의 오월의 왕들이 서로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고행까지도 감행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선하의 일로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자 했지만, 선하의 죽음이 한 애비의, 초능력자가 아니면 지 아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터무니없이 멍청한 생각으로 인해 발생한 개죽음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내 결심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지금 저 꼴을 보면 과연 저 녀석이 정상적으로 학교 생활을 못한 게 과연 초능력 때문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말하는 수준이 인간이 아니라 고장난 녹음기잖아. 그럼 누가 좋아해.)
그렇지만 어렵다. 적을 미워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법이라고 배웠지만, 그 미운 마음을 내려놓기가 참 어렵다.
박찬유의 경우는, 비교적 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홀로코스트를 해야만 하겠다는 그 고장난 리틀 히틀러 녹음기 스러움에 치가 떨리고, 그동안 리버티를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학생들이 연구원을 죽이게 만들고 샤를리아 연구소 사람들을 학살한 게 문제라, 내 손으로 그 놈을 죽이지 않아도 사형이라도 당한다면, 아니면 뭔가 과학적으로 초능력을 거세당한다면 별로 신경이 안 쓰이게 될 것 같다는 대안이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형오, 그 새끼다, 내 첫 친구이자 절친이었던 선하가 이 놈의 멍청한 생각 때문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버렸으니까. 선하 뿐만이 아니다. 단풍이의 연인이었던 소월 씨도 이 놈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살아있었을 거다. 그리고 이 인첨공에서 죽어간 여러 사람들이 그렇겠지.
그래서 와신상담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게 내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서 클레이와 레진으로 박씨 부자를 본뜬 모양을 만들었다. 박형오는 파란 머리에 하얀 눈을 단 모습으로, 박형오는 레진 캡슐 안에 든 모습으로. 옷까지는 표현을 안 하려다 수의를 입혀줬다. 내 손에든, 남의 손에든 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실, 만들면서 몇번이고 손에 힘을 줘서 짜부시키고 싶었던 순간이 꽤 있었다. 그걸 어떻게든 참고 만들어내니, 기분이 제법 이상했다. 이래서 미움과 사랑은 한끗 차이라고 하는 걸까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겠지.
그렇게 만든 클레이에 능력을 사용했다. 곁은 색을 낸 슈가 폰단트로, 내부는 씁쓸한 다크 초콜릿 무스를 샌드하고, 블랙 카카오 파우더와 커피추출물로 맛을 낸 스폰지 케이크로, 캡슐을 감산 투명막을 표현한 레진은 반원모양의 설탕 막으로.
그러고 난 뒤, 접시에 올리는 대신 도마 위에 올려, 전부 먹어치웠다.
목부터 천천히, 슈가 하이가 오든 말든 한조각 씩 잘라서 천천히 씹고 또 씹으며 생각했다. 내 원한을 해결할 길이 살인 뿐인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 살인을 했을 땐 어떤 장단점이 있고, 살인을 하지 않을 땐 어떤 장단점이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는 웬만하면 안 하고 싶다.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그 녀석들이 다른 우리와 대적했던 상대들처럼 아군이 된다면, 그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솔직히, 그 때는 더는 저지먼트로 있을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 易地思之
- 강선혜 씨께
안녕하세요? 서면으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목화고등학교 1학년 N반 신새봄입니다.
오늘은 저지먼트로서가 아닌, 사람 신새봄으로서 귀하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귀하께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넣어두려 합니다.
실례 되는 일임은 아오나, 저에게 귀하와의 공통점이 제기되어 기록을 통해 귀하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저지먼트의 아군이신 크리에이터, 진민호 씨에게 레드윙 연보라 씨께서 당하신 일에 대해, 그로 인해 귀하께서 진민호 씨에게 품은 살의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도 현장에 있으면서도 몰랐습니다.
귀하와 연보라 씨는 무척 가까운 사이시죠. 진민호 씨가 사죄를 하고 연보라 씨께서 그 사죄를 받아들이신들, 연보라 씨께서 겪으신 수모와, 그로 인해 귀하께서 느끼셨을 고통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죠.
그로 인해 쉬이 마음을 푸실 수 없음에 대해, 저는 감히 공감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감정을 느껴보았으니까요.
제가 겪은 일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한 번은 누군가의 멍청한 판단으로 인해 절친이 개죽음을 당했고, 두번째로는 그 뒤 제가 마음을 열게 된 사람들이 총 두 사람에게 각각 고강도의 폭행과 위협을 당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한 자들은 사과도 하지 않았거나,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한 사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과를 했다 하더라도 용서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이런 저의 공감은 지극히 일방적인 것이고, 귀하와 저는 초면이라기에도 뭣한, 잠깐 스쳤을 뿐인 그런 사이지만, 저와 비슷한 일을 겪으신 귀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미운 사람을 위한 떡>이라는 것인데요. 보시면,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도, 실제로도 그냥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마시멜로입니다. 하지만 이 마시멜로에는 제법 수상한 과거사가 있습니다.
바로, 바퀴벌레 시체와 각종 오물, 슬러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죠.
귀하께 권하건데, 진민호 씨에게 느끼는 분노감이 극심하여 마음이 괴로우시거든, 이 마시멜로를 진민호 씨에게 건네보십시오.
이 마시멜로는 수상한 과거가 있고, 수상한 과거가 있지만 지금은 결국 무해한 마시멜로니까요.
진민호 씨가 거절한다고 해도 마음 상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거절한다면 두려워서일 테니까요. 진민호 씨의 행동으로 발생한, 귀하의 원한에 대해서요.
저의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제가 동봉한 물건이 귀하께 유용하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신새봄 올림
- 마음 비우기 0626
- 도록
"나무아미타불"
도록
"관세음보살"
도록
"나무아미타불"
도록
"관세음보살"
도록...
느닷없이 왜 염주를 굴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있느냐면, 적을 미워하지 않기의 일환이다. 요즘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서 걱정을 할 정도에 이르러서, 적을 미워하지 않는 걸 궁리하기 이전에 머리를 비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있지만, 얼마 전에 내가 좋아하는 중드를 정주행했는데, 거기 나오는 황제가 화가 났거나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염주를 도록거리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108 염주를 샀다. 막상 해보려니 처음엔 어색했지만, 기도 아닌 기도를 하다보니 잡생각이 좀 덜어지는 것도 같다. 이거, 전투할 때도 가지고 가야지~.
- 랑 선배, 고맙습니다! 0627
- 랑 선배 덕에 목숨을 건졌다. 비록 당시에는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감사인사(및 귀 테러에 대한 사과)를 건네는 게 고작이었지만, 제대로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근처 슈퍼에서 장을 본 뒤, 약국에 들렀다가 부실에 들렀다. 그러고는 어쩌다보니 전세를 낸 것 처럼 쓰고 있는 부실 탕비실에서, 랑 선배를 위한 몇가지 디저트를 만들었다.
우선, 수제 계피사탕. 가장 좋아하시는 게 계피사탕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또 물로 수정과를 잔뜩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거기에 계피가 들어간 한과도 두가지 만들었다.
제철 밤을 삶아 잘 으깨어 꿀과 함께 반죽한 후, 밤 모양으로 빚어 밑동에 계피가루를 묻힌 율란과, 흰색과 연보라빛으로 색을 내고 꽃모양으로 빚어 바삭바삭하게 튀긴 뒤, 설탕과 계피가루로 맛을 낸 집청(시럽)에 푹 담가 말린 매작과.
율란과 매작과, 계피사탕을 세 구로 나뉘어진 종이상자에 잘 포장해서, 약국에서 산 멍을 빼는 크림과 함께 랑 선배 자리에 놓아둔 뒤, 랑 선배에게 개인톡을 남겼다.
- 안녕, 선생님 0628
오늘은 윤정인 선생님과의 마지막 커리큘럼이다. 사실, 리버티의 테러 때문에 내 연구원 선생님이 복귀하신 지는 한참이지만 약속은 원래라면 선생님이 휴가에서 복귀하시기 전일까지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좀 오래 신세를 졌다. 그래서 오늘은 커리큘럼을 앞두고 많이 긴장이 됐다.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도 계속 불완전한 결과를 맞았던 시도를, 오늘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물론 윤정인 선생님께 이 결과는 엄청 중요하지는 않을거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임시 담당 학생이 아닌 타 연구소 소속 학생으로 돌아가니까. 그래도 내 능력을 연구해보신 경험이 조금은 선생님께 도움이 됐길 바랄 뿐이다.
왜냐면 난 선생님을 만나서 엄청 행복했으니까.
넓은 훈련실 한 가운데 떡하니 자리잡은 트레일러. 그 안으로 들어가니 쓰레기장에서 수거해온 가구들이 즐비하다. 이것들은 오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들. 크게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집중했다. 커리큘럼중이 아닐 때도 아무거나 바꿔버리지 않게 능력 제어 장치를 단 채로 상상하면서 훈련했던 것처럼.
벽과 천장은 아이싱으로 장식한 쿠키. 지붕을 버티려면 안정적이고 조금은 단단한 편이 좋으니까. 바닥은 바꿔봤자 못 먹으니까 이대로 두고... 모델링 초콜릿으로 고정하고, 아이싱으로 도배도 해야겠다. 색은 채도 낮은 코랄핑크로 할까. 소파는 식빵. 테이블은 약과 타르트, 서랍장은 네모지게 썰어놓은 딸기 쇼트 케이크, 침대는 쿠키로 틀을 만들고 마시멜로 매트리스를 깐 다음- 솜사탕 이불을 덮으면... 끝!!
어느샌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뜨려니 따뜻한 톤의 분홍색 벽이 시야에 먼저 들어왔다. 그다음엔 먹음직한 황금색으로 구워진 식빵 소파, 쿠키로 만든 다리 위에 안정적으로 올려진 거대 약과 타르트와 서랍장이었던 딸기 쇼트 케이크, 생각보다도 무던한 디자인으로 완성된 침대까지. 성공했구나. 다 잘라봐야 알겠지만, 이만하면 성공이겠지! 벅차오르는 흥분감에, 신이나서 내가 만든 과자집 안에서 뛰쳐나오며 외쳤다.
"쌤, 저 해냈어요!!"
물론, 정인 쌤의 반응은 여상했다. 변함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차트를 훑고는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주셨다. 그래도 기뻤다. 마지막에는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니까. 커리큘럼이 끝나고, 정인쌤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냥 집에 가도 되긴 했지만, 마지막이니만큼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선생님, 그동안 지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구요."
"편지 하나 썼는데, 저 가고 나면 읽어주세요. 부끄러워서, 헤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린 뒤, 책상 위에 편지봉투를 올려두고 사무실 밖으로 나오려니, 울컥, 하고 눈이 뜨거워졌다. 이상하다. 차였을 때도 안 울었는데 이제서야 눈물이 나다니.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이 나서일까. 숨을 참고 열 발자국 정도 디뎠다가 냅다 내달렸다. 마지막이라도 우는 걸 들키는 건 싫었으니까. 헤어짐이 아쉬워서 난 눈물인 건 맞지만, 더 자라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니까.
- 윤정인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신새봄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실 때 쯤이면 저희는 아무 사이도 아니겠네요!
그 전이라고 해도, 임시 담당 연구원과 임시 담당 학생 정도의 사이였지만요.
각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면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썼어요.
이 편지를 드리고 나올 때도 그동안 지도해주셔서 감사했다고 말씀을 드렸겠지만... 아시잖아요, 저 선생님한테 사심 있는 거, 히히.
과거형으로 쓸까도 고민했지만 거짓말이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앞으로 뵙기도 어려워질 것 같아서 솔직하게 썼어요.
그러니 쪼끔 봐주세요!
선생님한테는 첫 만남부터 오늘까지도 고마운 것 투성이에요.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을 처음 뵌 날, 전 처음으로 닮고 싶은 어른이 생겼어요.
물론 선생님 입장에선 당연하신 대처였다는 건 알아요. 부원들이 정말로 선생님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도요.
그치만 그 날의 선생님의 모습은 제 안에서 하나의 지표가 됐어요.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할 일을 하는 사람요. 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임시 담당 연구원 선생님이 되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들어주셨던 것도 감사해요.
물론, 호의로 제 부탁을 받아주신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런 마음이 오가기엔 저랑 선생님은 사적으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임시로 담당하시는 동안 얻게 되신 데이터가 선생님께 유용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선생님께 드릴 수 있었던 건 그거 뿐이니까요, 히히.
선생님이 절 임시로 담당해주셔서, 리라 언니의 연구원 선생님으로만 알 때보다는 선생님이랑 조금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저는 엄청 행복했어요.
제 첫사랑의 상대가 되어주셔서, 그리고 첫사랑을 많이 아프지 않게 간직하고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미련이 아주 안 남는 건 아니에요. 차였다고 해서 그만 좋아하기엔 선생님은 너무 멋진 분이시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단호하게 제 마음을 거절해주시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셔서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성인과 미성년자, 연구원과 학생이라는 문제도 있고, 선생님이 제가 마음이 없으신 것도 있지만, 저나 선생님이나 너무 서로를 몰랐으니까요. 그런 상태에서 섣부르게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약속했다면 서로에게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께 빗대긴 실례인 사례였지만, 어른에게 고백했을 때는 차이는 게 복이라는 걸 새삼 절감한 일도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선생님을 만나서, 좋아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어요.
그러니 선생님도 행복하셨으면 해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만 줄일게요. 건강하세요!
신새봄 올림.
7.2. 레벨 4 ¶
- Rising of BOMB Chef
- 수업 1교시 쯤 남았지만, 과감히 째버리고 일찌감치 부실로 향했다. 무얼 위해서냐고? 당연히, 저지먼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꿈꿔왔던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지. 그건 바로...
프로젝트 저지먼트 - 헥센 하우스
일명, 부실 과자집 만들기.
사실, 지금 단계에서는 손가락을 튕기는 걸로 부실 전체를 과자집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책상을 한 곳으로 밀어놓고 큰 공간을 만든 뒤, 본체 역할을 해줄 이동식 칸막이 여러개와 여러 잡동사니로 과자집을 만드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차!"
칸막이로 뼈대부터 만들어야 한다. 미리 준비해둔 칸막이들을 빙 둘러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적당히 집같은 모양을 내고,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다음 깨끗이 세척한 가구를 그 안에 배치했다. 그런뒤, 그 안에 서서 정신을 집중했다. 버터쿠키로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모델링 초콜릿으로 견고하게 마감한 뒤, 색색의 아이싱으로 장식한다. 이러기만 해도, 사실 과자집은 완성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내게 있어 과자집이란, 안에도 먹을 것으로 가득 차있어야 하니까. 낡은 소파는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로, 1인용 의자는 거대 밤식빵으로, 서랍장 하나는 시나몬 애플파이로, 하나는 밀푀유로, 긴 테이블은 쿠키 다리 위에 거대한 직사각형의 약과를 올린 뒤, 그 위에는 수제로 만든 작은 간식들을 담았다. 개성주악, 율란, 과편, 마시멜로, 슈크림, 사탕, 젤리 같은 것들.
침대는 여러층의 딸기 생크림 케이크로. 욕조는 인테리어상 조금 쌩뚱맞아보이긴 하지만 거대한 빵그릇으로 만들어, 따끈따끈한 스팸계란볶음밥을 가득 담았다.
코피가 날것 같으면 물을 마시면서 조금식 쉬어가며 차근차근 만들어 완성하다 보니, 어느새 한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이 다 빠져, 부실 바닥에 주저앉아 생수를 들이키며 올려다보니, 제법 꿈에 그리던 모양새다.
그래, 역시 난 이런 게 체질에 맞아. 누군가를 증오하고 죽이는 것보다 말이지.
물론, 온갖 못된 놈들이 주말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어쩌면 같은 부원들과도 다투고 정이 떨어지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런 때 조차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낼 테고, 누가 뭐라고 하든 당당히 해낼 테니까. 바로 오늘처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일을 꾸몄는데, 제대로 인사해야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과장스레 인사하며 빵끗 웃는 얼굴로 한 마디 외쳤다.
"어서오세요! 봄(春/BOMB)셰프의 과자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긴 하루
- 적을 미워하지 않는 걸 시작해본 게 제법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원한이라는 감정을 발산하는 과정이 내게 필요했던 것도 맞지만, 오래 떠안고 있기에는 아무래도 피곤하니까. ...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일이 터졌다. 서형이 학폭에 휘말린 거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어떤 미친 인간들이 서형에게 화분을 떨어트렸단다. 다행히 서형은 랑선배 덕에 무사했다 들었지만, 역시나 화가 났다.
...살고 싶지 않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부터 들었지만 이내 뇌를 다잡았다. 이게 다 불량녹음기 부친 때문이다. 그 인간을 향한 살의에 휩싸였던 이후로 일정 이상 화가 나기만 하면 이런다니까. 그래서 쉬는 시간동안 계속 염주를 도록거리다, 염주에 매달려 귀여운 방해를 하는 병연이에게 전신 마사지를 해주며 생각했다. 이 마음도 제대로 풀어 보자고.
그래서 점심시간을 틈타, 잠시 외출해서 요 전부터 저주인형을 팔고 있던 노점상에서 저주인형을 여러개 사서 교실로 돌아왔다. 학폭가해자들 인원수에 두개를 더해서. 거기에 가해자들 이름을 적고, 하나에는 클레이로 파란 머리와 흰 눈을 달아주고 하나는 캡슐을 만들어 속에 넣어준 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송곳으로 찔러댔다.
폭 폭 폭 폭...
그 사람들 대신 쑤신다는 기분은 잠시고, 어쩐지 지푸라기를 송곳이 스치는 소리에 중독되는 것 같을 때 멈췄다.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이 저주인형들은 맛있는 진저브레드 쿠키가 되었다. 불량녹음기 부자의 몫을 아작아작 씹어먹고, 학폭범들 몫도 먹으려다 멈칫했다. 그 부자야 어쩔 수 없다지만, 학폭범들에겐 더 속시원한 복수를 해줄 수 있겠는데?
그래서 학폭 가해자들 몫의 쿠키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오늘 일 전에도 전적이 화려한 덕에 어렵지 않게 이름과 반을 알아낼 수 있었다. 가해자들 자리에 쿠키를 하나씩 두고 오니, 조금은 속이 가뿐해졌다.
그 인간들이 이걸 먹든 먹지 않든 상관 없다. 그 쿠키와 함께 내 미움도 내려놨으니까.
무기정학이라니 이후에 더 볼 일도 없을 거고.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교실로 돌아오려니, 단풍이가 내 자리에 와 있었다.
"어? 나단풍,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웬일. 걱정돼서 왔지! 저지먼트 하는 1학년 여자애가 아까 계단에서 굴렀다길래!"
"난 보다시피 멀쩡... 뭐라고?"
누구지? 영희인가? 혜우? 수경이? 덜컥 마음이 내려앉아 얼어붙어있으려니,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한마디 건넸다.
"천혜우인 것 같던데? 파란 머리. ...점심시간에 봤거든. 양호실로 옮겨지더라."
혜우였구나. 자가 치유가 가능하긴 하지만, 계단에서 굴렀으니 그럴 수 있는 여건은 아니겠지. 황망하고 기가 막힌 와중에, 의구심이 고개를 들어, 짝궁에게 물었다.
"어쩌다 계단에서 굴렀대?"
"다른 애가 팼다나봐. 분위기 살벌하더라. 안 좋은 소문도 좀 돌고..."
안 좋은 소문이 뭔지는 묻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봤자 좋지 않은 일일테니. 짝궁에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려니, 단풍이가 볼을 긁적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 친구 어쩌다 원한을 사서 이렇게 험한 꼴을 본다냐..."
"...그러게."
그 세글자가 어색하게 입에 맴돌았다. 생각이 복잡했다. 떠도는 소문이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진짜 사정을 아는 것도 아니거니와, 안다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병문안? 복수? 글쎄. 전자라면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 혜우가 요 근래 어두워보이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오선배나 지난번에 봤던 희야라는 선배가 아니라면 그 누가 병문안을 와도 반기지 않을 것 같다, 는 느낌이 들었달까.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지.
더군다나, 서형을 괴롭힌 녀석들에게처럼 복수를 하기엔 난 혜우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복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게 느껴지기도 했다.
종이 울렸다. 단풍이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병연이를 만지는 한편 수업에 집중해서 그 일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전전긍긍해봐야 혜우가 폭행당하고 소문이 도는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내 생각은 얼추 맞았다.
종례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얼굴이 퉁퉁 부어 오는 애들이 하나 둘 생겼다. 다른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주로 혜우에 대해서 말하고 다닌 아이들이 저렇게 된 듯 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박쥐에 물렸더니 저렇게 되었다나. 저런 피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서, 혜우의 주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학교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사람 뿐이다. 리라 언니. 어떻게 보면 내 생각이 적중하긴 했다는 생각에 이어 미리 조심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종례가 끝나자마자 단풍이에게 급히 손짓했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단풍이와, 짐을 챙기느라 바쁜 짝궁에게도 이렇게 일러두었다.
"단풍아, 유란아. 우리 이제부터 혜우 일은 입밖에 꺼내지 말고, 소문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가 들려도 귀막고 모른척 하자. 박쥐가 어떤 조건으로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혜우의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건이긴 한 것 같아."
단풍이는 "난 피해자가 네가 아닌 시점에서 신경 껐다"며 괜한 걱정 말라고 대답했고, 짝궁 역시 박쥐에 물리기 싫다며 그러겠단다.
그 대답들에 마음이 놓이는 한편, 조금 전까지 했던 내 고민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 서형과 철형을 건드리면 눈부터 뒤집는 것처럼, 혜우에겐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다. 평소답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경한 행동에 나선 리라 언니가 그렇고, 거론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태오선배와 희야선배가 그런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부장 선배, 아니면 부부장 선배, 아니면 청윤 선배나 리라 언니나 태오 선배가 부원들을 소집해 브리핑을 할 거다.
그러니, 지금은 기다려보자. 내가 난리피우지 않아도 혜우는 이미 아프고 지쳤을 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부실에 있는 거대한 과자집을 대형 인형의 집 정도로 축소해서 수제로 만들었다. 물론, 쿠키와 초콜릿으로 장식한 외관 뿐만 아니라 가구들도.
그리고 부숴먹으라고 작은 나무망치도 동봉했다.
공간이 모자라 다 넣지 못한 과편이나 사탕, 개성주악 등은 종이상자에, 볶음밥은 맛이 뒤섞일 수도 있겠다 싶어 도시락 통에 따로 담았다. 어쩌다보니 어마어마해진 짐을, 혜우가 잠들어있는 양호실에 맡겼다. 혜우가 깨어나거든 전해달라고. 그러고는 개인톡으로 몇자 남겼다.
[혜우야, 많이 아팠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돼서 유감이야.]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줘.] [그럼 푹 쉬어!]
- 혜우야 빨리나아!><
- 학교가 닫기 전, 과자집을 설탕으로 바꾸어, 바닥에 깔아놓은 비닐에 담아서 꽁꽁 싸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내일 신선하게 다시 만들려고이다.) 갑작스레 바지 주머니속에서 징 하고 진동이 울려,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보니, 뜻밖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혜우였다. 확인해보니, 각각 내가 만든 볶음밥과 과자들을 커피와 함께 차린 상과, 부서진 과자집이 찍혀있는 두 장의 사진 아래에, 짤막한 감사인사가 적혀있었다.
다행이다. 뭔가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했구나. 하긴, 냉정히 따지면 내가 혜우 걱정하는 건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꼴이긴 하다. 혜우는 주말마다 싸우면서 더한 부상도 입어봤을 테니까. 그래도 막상 잘 먹었다는 표시와 함께 감사인사가 돌아오니 제법 기분이 좋긴 했다.
[몸은 괜찮아?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잘 쉬고, 쾌차해서 부실에서 보자><]
- 의혹을 제기하다
- 남의 말은 사흘이고, 소문을 입 밖으로 내면 리라 언니의 박쥐들에게 당하는 모양이니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도 쉬는 시간만 되면 혜우 이야기가 들려왔으니까. 지겹지도 않나, 싶으면서도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더욱 심란했다. 바로, 혜우도 가해자에게 성적인 모욕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다는 거다.
아무리 그 친구가 마음이 피폐해졌어도 그 정도로 선을 넘었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따졌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네가 들었냐고. 그런데 그 애는 자기가 똑똑히 들었다며 구체적인 내용까지 읊었다.
가해자의 짝사랑 상대가 자길 볼 때 가슴만 봤다며, 가해자는 없으니까(가슴이 작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 이제는 키우는 것도 가능한데 도와줄까... 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가해자가 폭행을 시작한 거라고.
믿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얼굴이 화끈해져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려니, 그것 보라며, 너도 꼴에 저지먼트라고 나서냐는 그 동기의 말도 그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해 부실로 갔다. 내 자리에 둔 임무용 가방에서 아무거나 꺼내 판 초콜릿으로 만들어 오독오독 씹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 사실 여부는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무어라 말문을 트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혜우에게 개인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혜우야, 나야. 새봄이.] [갑작스러운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솔직히 말할게. 네가 가해자한테 폭행당하기 전에, 가해자를 성적으로 조롱했다는 이야길 들었어.] [가슴이 작으니까 차인 거라고. 키우는 것도 가능한데 도와줄까, 라고.] [사실인지 아닌지 말해줄 수 있어?]
사실이 아니라면 사과해야지. 내가 사과할 수 있는 상황이길. 그렇게 바라며 답장을 기다렸다.
- 현실을 직시하다
- 혜우의 답장은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터져나왔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구나. 사실이 아니길 바랐는데.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씁쓸하고 영문을 모르겠을 뿐. 내가 나를 챙기느라 애쓰던 그 몇년 동안 혜우는 전과는 많이 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씁쓸했고, 능력도, 재력도, 권력도 남 부러울 것 없는 그 애가 가해자에게 법이 아닌 성희롱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했다.
듣자 하니, 혜우와 가해자의 악연은 햇수단위로 오래된 모양이었다. 과거에야 어땠을 지 몰라도 레벨 5가 된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사실적시든 허위사실적시든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가해자를 응징하고, 뒷말하는 애들을 견제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런 저급한 방법으로 대응했을까.
왜 그랬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났다면, 박형오가 고작 1년밖에 못 견뎌서 인첨공을 세우는 데 앞장서고, 2대 대표이사가 여지껏 그림자들과 진상부리고, 박찬유가 이대론 안되겠으니 우리보고 지랑 다같이 죽자고 할까. 그래서 그냥 이렇게 보냈다.
[내가 널 너무 몰랐구나.] [지금도 모르고 있을 테고.] [알겠어,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
핸드폰 액정을 끄고, 탕비실 한구석에서 연심차를 꺼내 뜨거운 물에 우려 한모금 넘겼다. 당연스럽게도 진한 쓴 맛이 미뢰를 덮쳤지만,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지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진실을 알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일방 폭행이 한 쪽 과실이 더 큰 쌍방 과실이 된 것 뿐이다.
양아름이 아직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듯 혜우 역시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도 혜우는 저지먼트에 있어 귀한 인력이다. 언제 박찬유가 우릴 죽이려 들 지 모르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받아들일 때도 된 것 같다.
저지먼트라고 해서 과정이나 수단 모두에서 정의만을 지향하는 집단은 아니라는 것을.
저지먼트가 정의롭지 않은 수단과 과정을 일절 배제하는 집단이었다면 정인 선생님이 물리적 위협을 당하시고, 리라 언니가 박쥐 공격으로 소문을 틀어막는 강경책을 쓰고, 태오 선배가 치정 문제로 담당 연구원에게 자해를 하며, 월광고의 저지먼트 소속 학생(무슨 민우였더라)이 리버티가 되는 일이 있었겠는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형의 사건 때 서형도 그 수박들에게 총으로 (실탄총이 아니고 테이저건이겠지만) 협박하고, 랑 선배도 폭력으로 대응하셨던 것 같고. (팔이 안쪽으로 굽어선가, 무심코 그럴만한 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부터 들어버리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적들을 숱하게 달콤하게... 아니 강제로 입고 있는 옷을 먹을 것으로 만들어 망가뜨리거나 없애버리고도 아무런 탈이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긴 하고 말이지.
물론 이번 주말에도 전투가 있다면 그 수단부터 적극 써먹을 거라 누가 그걸로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다. 옯고 그름 이전의 생존의 문제니까. 다른 사람들도 입장은 비슷하겠지.
그러니, 나도 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집단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활동할 지를.
...잠깐만. 지금 손쉽게 할 수 있는게 있겠는데?
나는 청소용구 함에서 빗자루를 들고 먼지를 싹싹 긁어모았다. 부실부터 탕비실까지 구석구석 꼼꼼히 쓸으니 세주먹은 나온것같다. 그 먼지에 빈 과자봉지와 작은 페트병까지 합해서 동그란 미니 버터쿠키를 잔뜩 만들고, 어느새 텅 비어있는 "미운떡" 바구니에 담았다. (물론, 멀쩡하게 잘 만들었는지 맛보는 것도 잊지 않고.) 그런 뒤, 이 쿠키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사진 두장을 짤막한 글과 함께 단톡방에 올렸다.
[<미운 사람을 위한 떡>이 오랜만에 업데이트 됐어요!] [이번 미운떡은 미니 버터쿠키입니다><] [우리 부실 곳곳을 쓸어 모은 먼지와 빈 과자봉지와 페트병으로 만들었어요!] [이번 미운떡은 매일매일 생산할 예정이니 많은 이용 부탁드려요!><]
- 한계에 봉착하다
- 오늘도 어김없이 과자집을 재건축하러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실에 들르려니, 책상에 종이 몇 장이 놓여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서형이 쓴 보고서였다. 주제는, 혜우가 당한, 아니 당해온 학교 폭력에 대한 것. 오늘은 과자집 잠시 쉬어가야겠구나. 가방을 내려놓고 보고서를 집어 들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서형의 보고서를 통해 접한 혜우의 몇 년간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바로 어제, 혜우에게 내가 널 너무 몰랐다고 말한 나만큼도 혜우에 대해 모를 학생들에게 비공개 계정으로 도촬과 명예훼손을 당해왔을뿐더러, 물리적인 폭력 또한 오늘이 처음 당한 게 아니란다.
혜우가 왜 자신을 짓밟고 헐뜯은 것들과 똑같은, 저속한 방법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었는지 (또는 그렇게 보였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졌다. 혜우가 레벨 5에 달한 것은 올해다. 레벨이 낮았던 시절도 있었을 거다. 내가 레벨 0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혜우도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다 몰랐을 수도 있겠다,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해서.
그렇다 보니, 혜우를 끔찍이도 아끼는 태오 선배를 괜히 탓해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나도 혜우가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당하는 걸 몰랐고, 혜우와 가해자와의 악연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했던 시점에서도 혜우의 발언으로 내가 받은 충격만 생각했으니까.
그거랑은 별개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서형이 애써서 조사해 준 덕에 이렇게 공론화가 되었으니까. 혜우의 말에 대한 내 입장을 무를 수는 없더라도, 동료로서, 그리고 저지먼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서형이 보고서를 통해 모두에게 지속되고 있는 폭력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청했으니까. 일단, 생각을 하려면 머리가 돌아가야 하니, 차라도 마셔야겠다. 텀블러 속에 있는 물을 뜨끈한 보이차로 바꾸고, 급한 대로 지우개를 밤양갱으로 만들어 먹으며 머리를 굴렸다.
제일 만만한 건 징계, 학폭위, 법적 조치 등이지만 서형 말대로 이건 혜우의 의사에 달린 일이다. 그러니 보류. 소문 확산이라도 막아보자니... 이것도 저것도 애매하다. 우선 리라 언니가 혜우에 대해서 말하고 다니는 학생들의 입을 박쥐로 틀어막아 보긴 했지만, 서형이 보고서에 적은 대로 반발심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우리 반에도 혜우에 대해 관심이 없던 아이들조차 이러다 억울한 사람이 박쥐에게 물리는 거 아니냐고 언짢아하는 여론이 생겨버렸으니까.
내 경우에는, 약 먹은 거 아니냐던지, 남의 연구원에게 꼬리 친다든지 하는 뒷담은 그냥 무시했더니 편했다. 내가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날 까던 애들도 그 애들의 생활이 있다 보니 내가 눈에 띌 때만 쑥덕거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혜우의 경우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대응법이다. 혜우는 사회적 위신에 치명적일 수 있는 헛소문으로 인해 햇수 단위로 고통받아 왔으니까.
그래서... 모르겠다. 도저히 대안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홍차만큼이나 좋아하는 조합으로 뇌를 깨워봤는데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저, 교칙에 따른 징계와 학폭위나 법적 조치를 통한 처벌이 강경하게 이루어지고, 그것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만이 반발심을 최소화하면서 확실하게 추가적인 폭력을 막을 방법이라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데, 그건 혜우가 원치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서형이 제안한 방법 - 관련한 발언을 접할 때마다 반박하기도, 현시점에서 실천할 방법 중엔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원 개인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어버리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지난번에 보고서 써줬을 때처럼 좋은 생각이 마구마구 나와서 제안서 형식으로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은우 선배한테까지는 전달이 안 된 것 같지만….)조급해하지 말자. 그런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씁쓸해서일까, 양갱 맛조차도 떫게 느껴진다.
7.3. 새봄의 모험 ¶
- 프롤로그 《꿈》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다. ...아닌데, 이 아일랜드 식탁, 이 싱크대, 이 찬장... 많이 보던 인테리어인데? 아! 생각났다. 내가 능력 쓸 때 쿠킹 스튜디오로 맨날 상상하던 인테리어잖아. 그런데 이런 곳이 정말로 존재했나? 내가 왜 여기 있어? 황당해하다, 문득 깨달았다. 꿈이네. 그러지 않고서야 머릿속으로나 상상하던 곳에 와 있을 리 없잖아. ...잘 됐네! 한동안 길게 쉬어서 찜찜했는데 꿈속에서 연습할 수 있겠다~ 히히.
신선하고 품질 좋은 재료가 다양하게 진열된 선반(이건 선택! Z의 디저트에서 본건데 여기가 호주일리가 없잖아, Z님도 R님도 아무도 안 계시고~)에서 룰루랄라 재료를 챙겨서 아일랜드 식탁에 늘어놓았다. 우선 기본 버터 쿠키를 만들어볼까나? 언젠가 만들 과자집의 벽과 기둥이 될 거니까 적당히 단단할 필요도 있으니 재료의 비율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겠어. 정량보다 약간 덜어낸 말랑한 실온버터를 보울에 넣고 손거품기로 힘껏 저어 크림처럼 만든 뒤 설탕을 두번에 나누어 넣는다. 그 다음엔 실온계란과 소금. 분리되지 않도록 빠르게!
보울을 안고 팔에 힘을 주어 속도를 높여 재료를 섞다가 슬쩍 안을 보니, 덩어리가 뭉친곳 없이 매끈하다. 이제 나머지 가루 재료를 섞어야지!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 슈가파우더를 넣고 실리콘 주걱으로 잘 섞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뒷목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이전의 전투에서 내가 잘 잡고 있던 빨간머리 여자분이 사라지시기 전, 뭔가 바람같은게 불기 전에 이런 느낌이었는데... 급히 보울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피다가 경악한 나머지 악 하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쿠킹 스튜디오의 벽면이 쿠키반죽이 되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뭐야?! 이거 뭔데? 그 배드 파더 소행인가? 모르겠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어! 보울을 팽개치고 그 자리를 박차려는데, 발바닥에 뭔가 끈끈한게 달라붙는 바람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철퍽, 소리가 나며 바닥에 얼굴이 파묻혔다. ...철퍽? 급하게 상체나마 일으켜보니, 바닥까지 쿠키반죽으로 변해있었다. 바닥은 고사하고, 사방이 쿠키반죽이다. 나갈 틈도 없어보여. ...어쩌지? 이렇게 죽는 건 상상도...ー
"야!!! 신새봄!!!!!"
귀를 찢을 듯한 절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 룸메, 나단풍의 목소리다.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뭔가 침대가 찐득하다. 마치 버터와 계란을 섞은 밀가루반죽처럼...
......아, 잠깐만.
~다음 화, 제1장 《단풍아, 미안해!
내일 이 시간에 계속!
- 제1장 《단풍아, 미안해!》
- 늪처럼 서서히 몸을 삼키는 찐득함에 불쾌감을 느끼기도 전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싸늘한 느낌이 엄습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황망한 마음으로 내 침대였던 거대한 쿠키 반죽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내가 알던, 단풍이와 함께 쓰던 기숙사 방은 온데간데없이, 말 그대로 쿠키 반죽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벽은 물론, 침대, 책상…. 모든 것들이 반쯤 쿠키 반죽으로 변해있었고, 그 한 가운데, 나의 룸메 단풍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 단풍아, 저..."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제대로 된 문장을 뱉지도 못해 황망하게 입을 떼는데, 단풍이의 싸늘한 목소리가 자르듯 방 안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고 쳤다. 의도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사태는 내 책임이다. 왜냐면, 멀쩡하던 기물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심호흡하고, 단풍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자는 사이에 능력을 발동하는 사이에 기숙사 방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네 침대랑 책상이랑…. 다른 물건들도 망가트린 것 같아.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연구소에 도움을 구하고, 망가진 것들은 책임지고 새 걸로..."
"새 거? 새 거라고?"
격앙되어 확 높아진 목소리로 단풍이가 받아치며 짓는 헛웃음에,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방이 엉망이 된 거 이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들기도 전에, 단풍이가 바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침대 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에는, 단풍이의 침대 모양으로 굳은 쿠키 반죽 위에, 희미하게 어떤 실루엣이 보였다. 저건... 설마.
"...소월이 유품은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쿠키 반죽으로 만들어버린 건 기숙사 기물만이 아니었다. 단풍이가 항상 침대에 두고 자던, 에나멜로 밤하늘색 배경에 작고 하얀 달과 단풍잎이 그려진 로켓 펜던트. 그 안에 든 죽은 단풍이의 애인, 명소월 씨의 사진. 세상에 단 하나뿐이던 물건을, 내가 망가뜨려버린 거다.
단풍이와 친해진 것도 단 하나의 버팀목을 잃어버린 고통을 공유하고, 서로에게서 자신을 비춰보고, 사는 게 뭐 같아도 앞세운 사람들의 뜻을 잇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남아 보자고 의기투합하면서였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모를 수가 없는 상처를 헤집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질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단풍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내 멱살을 잡아채고 흔드는데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는데도, 입안에 맴도는 미안하다는 말이 너무나도 알량하게 느껴져서. 단풍이는 내 멱살을 붙든채 한참을 울다가 손을 떨구고 주저앉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던 걸 어떻게 돌려놓을 건데…? 뭐, 시간을 돌리기라도 하게?"
단풍이를 부축하지도 못하고 따라 몸을 낮추던 그 순간, 단풍이가 한탄하듯 내뱉은 말에, 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을 되돌린다. 나는 확실히 그런 능력은 없다. 하지만, 이 인첨공 어딘가에는 가능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 하루, 아주 작은 범위라도!
"…돌려 볼게. 고쳐 볼게."
"뭐? 이게 미쳤나, 지금 뚫린 주둥아리라고 아무 말이나…."
"내가 돌리겠다는 게 아니라, 돌릴 수 있는 사람, 찾아볼게. 오늘 안으로! 여기 인첨공이잖아. 나는 못해도, 누군가는 저 목걸이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무슨 수를 쓰든, 부탁해 볼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단풍이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기숙사 탕비실로 가서는, 칼과 비닐봉지, 휴대용 용기를 가져와, 유품이 있던 자리의 쿠키반죽을 조심스레 잘라내 비닐봉지에 싸서 용기 안에 넣고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완충재 삼아 구긴 비닐봉지를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채운 뒤 뚜껑을 닫았다. 용기를 가방 안에 넣어 챙긴 뒤 다시 단풍이 앞에 꿇어앉아 고개를 숙였다.
"내 능력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폐를 끼쳐서, 유품...까지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연구소를 통해서 대책을 논의하고 실행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알량한 사과라도, 몇번이고 하자. 단풍이가 더는 듣기 싫다고 할 때까지. 그리고 단풍이가 내게 하는 말은, 욕이든, 비난이든, 한탄이든 듣자. 유품을 고치는 것 못지않게, 제대로 사과하는 것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본 단풍이의 감정을 받아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단풍이가 내뱉었다.
"…꺼져…. 그거 고칠 때까지, 연락하지 마. 말 걸지도 말고."
"…응."
무거운 마음으로 방(이었던 것)을 나와 제일 먼저 기숙사 사감실로 향하려는데, 이미 사감 선생님과 교직원 선생님 몇 분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계셨다. 하긴, 벽이 통째로 쿠키 반죽이 되었을 테니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알려도 벌써 알렸겠지. 사정을 설명할 겸 이실직고했고, 당연하게도 퇴소 조치당했다. 멀쩡한 짐은 연구소에 연락해서 가져가게 할 모양이다. 연구소에 사정을 설명할 때 이야기가 더 빨라지겠다. 물론 된통 깨지고 지지고 볶이는 것도 빨라지겠지만, 딱 하나만은 우선 해결하고 깨지든 볶이든 할 거다. 단풍이의 목걸이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유품을 고치는 거. 결과가 어떻든, 그리고 단풍이가 평생 날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꼭 해내야 한다. 아니, 해낼 거다.
다음 편
제2장 ~ 《구원자를 찾아서》
내일 아무 때에 계속!
- 제2장 《구원자를 찾아서》
...그렇게 있는 대로 비장한 각오란 각오는 다 하고 연구소로 들어섰지만, 역시나 빡세다. 도착하자마자 소장실로 불려가서 된통 깨졌다. 할 말은 없었다. 머리 열고 쑤시고 전기로 지지는 게 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는 걸 전에는 몰랐고 지금은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그걸 죽어도 하기 싫었던 건 내 사정이고. 소장님이 호통을 치고 또 친 끝에 조용해지실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제 아집으로 사고를 일으켜 뒷수습하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사고를 치고 돌아온 주제에 몰염치하지만, 부탁이 있다고, 전기로 지지든 뇌를 열든 어떤 조치든 따르고, 어떤 대가든 치르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소장님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씀하셨다.
"레벨을 올려. 이야기는 네가 레벨 2가 되고 나서 듣겠다."
그 뒤에는 뭐...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당장 할 수 있는 훈련은 다 받겠다고 말씀드렸고... 역시나, 오늘 하루는 꽤 길었다. 살면서 해볼 수 있는 훈련이란 훈련은 다 했고, 의료팀 선생님들께서 준비되시자마자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열게 됐다. 솔직히, 수술실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무서웠다. 정말 많이.
단풍이가 고인과 서로를 버팀목으로 삼아 버텼었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버팀목이 있었다. 인첨공 밖에서 살던 시절부터 2년 전까지, 11년간 언제나 함께였던 내 절친, 주선하. 그 애가 세상을 떠난 것도, 머리를 열고 뇌를 직접 건드리는 수술을 하면서였다. 선하가 수술 전에 남긴, 사실상 유언장인 그 편지에 있던,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아달라고, 힘들겠지만, 여유가 될 때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언젠가는 행복해져 달라는 말. 그 한마디로 인해, 내 장래희망은 노인이 되었다. 기왕이면 행복한 노인. 그래서, 다른 전기로 지져지고 주사를 맞아도 머리는 열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었는데, 오늘 이렇게 열게 되네.
...역시, 죽고 싶지 않다. 최대한 오래, 행복하게 살겠다고 선하한테 약속했고, 무엇보다도 단풍이 물건을 되돌려놓기 전까지는 못 죽어. 좀비든, 안드로이드든, 뭐가 되더라도 단풍이 물건은 돌려놓을 거다. 오로지 그 생각만 되풀이하다보니, 마취 주사를 놓으시는지 팔이 따끔해지고,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겨우 마취에서 깨어나 인사불성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연구원 선생님께서 수술 성공이라며 소장님께 보고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놓을 뻔 했지만 주먹이나마 꽉 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찍어눌러 잠을 쫓았다. 한 시라도 빨리 말씀드려야 하니까. 지금은 임시로 연구소 탕비실 냉동실에 뒀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풀려나자마자 소장님을 뵈어야겠다고 말씀드리니, 연구원 선생님은 의식이 있냐며 귀신이라도 본 듯이 비명을 지르시긴 하셨지만, 다시 소장실 앞으로 데려다는 주셨다. 노크 후, 소장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었다. 사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꿇은 거지만, 안 그래도 꿇으려고 했으니 상관없지.
"레벨... 올렸어요. 저... 그러니까, 부탁이란건요... 일주일 이내만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자 분... 한 분만, 소개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시간을 돌려? 허... 협력 연구소에 비슷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 있다고 들었으니, 주선은 해주마. 청탁은 니가 해."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감사인사는 커녕 기뻐할 새도 없이 바닥이 훅 가까워지더니 눈 앞이 새카매졌다.
아, 한계다.
다음회
제3장 《추억의 맛》
내일 자정 전에 계속!
- 제3장 《추억의 맛》
너무 순조로워서 불안할 정도였던, 그렇지만 돌이켜보니 나름 험난도 했던 연구소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드디어 내가 찾던 분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사람 머리 크기 이내의 무생물에 한정하여 상태를 과거로 돌릴 수 있는 분이고, 능력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하신 적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나만 잘하면, 단풍이에게 준 상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잠을 이루는 것도 퍽 어려웠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을 못 자서 부탁드릴 때 잘못하면 안 되니까.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기숙사에서 유품을 챙겨, 약속 장소이자 내 직장인 카페 블랑 엣 느와르(Blanc et Noir)로 달려갔다. 자리를 잡고, 냉수를 마시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거구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머리는 짧았고, 인상은 퍽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앳되어 보였다. 일어서고도 머리를 젖혀야 할 만큼 크지만, 왠지 나랑 나이가 비슷할 것 같은 느낌. 어쨌거나 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확신했다. 이분이 그분이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삼 연구소 소속, 목화 고등학교 1학년 신새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행중 3학년 한성규라고 합니다. 단 연구소 소속이고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엄청난 동굴 저음이다. 그 생각이 한성규 씨가 마주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순간 들었다. 아니, 그런데 말을 놓으라니, 내가 아쉬운 처진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긴 하지만서도. 아니다, 이런 걸로 실랑이 할 때가 아니지.
"제가 부탁드리는 입장인데…. 그럼 놓...을게요, 아니 놓을게?"
"네네, 그래 주시는 게 제가 편해서요. 그나저나 부탁하실 게 있으시다고 들었는데…."난 성규에게 쿠키 반죽으로 변한 유품을 보여주며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틀 전 새벽에서 아침 사이, 내 능력이 폭주해서 주변의 기물을 쿠키 반죽으로 만들었고, 내가 쿠키 반죽으로 만든 물건 중 작은 것 하나를 원상으로 복구해 주길 부탁하고 싶다고.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 초면에 실례지만 꼭 좀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규는 유품을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목걸이죠? 안에 종이… 사진이 든. 빨리 가져오셔서 내용물도 복원이 될 것 같네요. 아마… 일주일 정도면 될 거예요."
"...! 정말? 고마워! 진짜 고마워!"
됐다. 유품을 돌릴 수 있다는 게 확인되자마자, 안도한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런 모습까지 보이는 건 역시 아니라서 꾹 참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성가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도 누나 능력에 대해서 전해 들어서, 누나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니까요."
"그랬구나, 뭐든 말해줘. 내가 레벨 2긴 하지만, 능력이 안 되면 손으로라도 만들어볼게."
"네, 그럼… 디저트를 하나,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인첨공에 들어오기 전에 먹었던 디저트인데요."
하나? 평생 전속 파티시에라 쓰고 노예라 읽는 모양새로 부려 먹어도 기꺼이 할 참이었는데. 그걸로 되겠냐는 물음이 입안에 감돌 때,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그게… 그 디저트 이름을 몰라요."
다음 편
제4장 《산 넘어 산》
다음 자정 전에 계속!
- 제4장 《산 넘어 산》
다들(0명) 많이 기다렸지? 자, 이제 신새봄님의 이야길 시작해볼까!
나는 튀르키예 풍의 하얗고 폭신한 디저트를 찾고 있어. 내가 망가트린, 내 룸메 단풍이의 목걸이를 고쳐주고 있는 성규의 추억의 디저트를 찾아주기 위해서!
...이누야샤 오프닝 풍으로 이야기를 재개하기에는 모험의 주체가 나 하나 뿐이네! 그만 두자 ㅋㅋ
어쨌든, 그 날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 해프닝은 기억해두고 싶은 지라, 이렇게 공부용 노트 뒷면에다 회고록이나마 적어두려고 한다.
성규의 추억속 디저트는 종합하자면, 새하얀 색에, 달콤하고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을 가진 튀르키예식 디저트라고 했다. 튀르키예식 디저트 하면 생각나는 게 터키시 딜라이트라고 불리는 로쿰이라, 혹시 찾는 게 그거냐고 인첨톡으로 메세지를 보내 물어봤더니, 성규는 그거 물어볼 줄 알았다며, 아니라고 했다. 하긴, 그렇게 쉬웠으면 성규가 로쿰쟁이가 되었으면 되었지 날 찾아오진 않았겠지. 다급한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졌었나보다.
로쿰은 물론이고, 성규가 여태껏 찾아먹지 못했다는 건, 아무래도 생소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디저트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 판단했다. 그럼 인첨공에 들어오기 전에 현지에 가서 먹어본 걸까? 그랬다면 난감할 노릇이었다. 나도 인첨튜브를 통해 알려진 레시피만 학습해서, 현지에서도 생소한 디저트에 대한 정보에는 접근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웹서핑을 통해 보기에 하얗다 싶은 튀르키예 디저트 레시피란 레시피는 다 수집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규에게 그 디저트를 먹은 상황에 대해서 질문했다. 다행히도, 그 디저트는 성규네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셨다는 모양이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보시고 만드셨던 것 같다고 덧붙인 메세지를 보자, 좀 희망이 생겼다. 만약 성규 어머님께서 한국어로 된 레시피를 보시고 만드셨다면 아마 이 한정된 네트워크 안에 있는 정보에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 뒤로, 수집한 레시피들을 하나씩 만들어 성규에게 가져다줬다. 쌀과 우유로 만든, 하얗고 꾸덕한 크림을 얹은 바클라바, 우리나라의 타락죽과 비릇한 각종 푸딩, 꿀타래와 비슷하게 생긴 피시마니에, 하다 하다 이제는 생소하지 않게 된 카이막 등.
...결과적으로 이 안에는 성규의 추억의 디저트는 없었다.
낙담하려는 찰나, 성규가 카이막을 다시 먹어보더니 말했다. 생김새는 얘랑 비슷한데, 더 달고 말캉한 식감에, 가루같은 게 뿌려져있었다고. 아이보리색이었던 것 같고, 견과류같은 고소한 맛이 났던 것 같다고. 그리고 어머니가 요리하는 걸 봤는데, 옥수수 전분가루가 나와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문득 이건 아니겠지, 하고 따로 저장해두진 않았던 레시피 하나가 떠올랐다. 우유와 생크림, 옥수수 전분을 쓴 하얀 튀르키예풍 디저트. 그 레시피는 코코넛 가루를 썼지만, 코코넛 가루 대신 아몬드 가루를 토핑으로 얹는다면 어떨까? 정답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설레발 치고 싶진 않았기에 성규의 증언을 메모한 다음 헤어졌다.
다음편
제5장 《추억, 그리고 상념》
내일 언젠가 계속!
- 제5장 《추억, 그리고 상념》
- 성규와 헤어지고, 난 곧장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온 뒤, 연구소 탕비실부터 빌렸다. 저녁식사시간이 지났을 때라, 청소만 깨끗이 해두면 된다는 조건 하에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의 레시피를 우선 손으로 구현했다. 우유와 설탕, 전분가루로 말캉하고 쫀득한 반죽을 만들어, 코코넛 가루 대신 아몬드 가루가 담긴 넓은 트레이에 부어 펼치고, 한 김 식혀, 동물성 생크림에 설탕만 넣어서 꾸덕하게 휘핑하고, 펴바른 뒤, 수건같은 모양으로 돌돌 말았다. 첫 시도니만큼, 보완점을 찾기 위해서 한 입 먹어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징 하고 울렸다. 성규로부터 온 메세지였다. 난 그만 먹던 걸 떨어트릴 뻔 했다. 성규가 단풍이의 목걸이를 완전히 고쳤다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방과 후에 성규를 다시 만났다. 물론, 내가 만든 디저트도 가지고. 성규는 목걸이부터 확인하겠냐고 권했지만, 사양하고 내가 만들어온 디저트를 권했다. 왜냐면 성규가 미리 사진을 보내줬기도 하고, 또 답례부터 먼저 하고 싶었으니까. 무엇보다 목걸이부터 확인하면 난 분명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 전에 답례를 하고 싶었다.
성규는 내가 만든 디저트를 한 입 맛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입만 우물거리다, 한 입을 더 먹었다. 표정은 평소와 변함 없었지만, 어쩐지 눈이 조금 발갛게 물든 것 같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려니, 성규가 말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게 이게 맞다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자, 난 어느새 달달 외운 레시피를 그대로 읊었고, 성규의 증언 덕에 기존 레시피의 코코넛 가루를 아몬드 가루로 바꾸어 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덧붙였다.
성규는 그 레시피를 꼼꼼히 받아적고는, 레시피를 어머니에게 물어보는 대신 내게 알아봐달라고 한 이유를 말했다. 들어보니, 곧 성하제고, 성하제 때 어머니가 오시면, 어머니께 물어보지 않고도 추억의 디저트를 만들어내어 대접함으로서, 어머니를 놀라게 하고 싶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만나자는 요청에 응했고, 거래에 응해줬던 거구나.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려니, 성규는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직감적으로 성규가 무엇을 꺼내려는지 깨달은 순간, 이번엔 내 눈이 뜨거워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성규의 주먹 아래로 손을 내밀자,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목걸이였다. 묵직한 금속 펜던트가 달린.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으며, 에나멜로 장식된 뚜껑을 조심스레 여니, 그 안에는 한 소녀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소월 씨의 사진이었다. 몇달 전, 단풍이가 이 사진을 보여주며, 잠긴 목소리로 한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야. 지금도...
그 뒤는 뭐... 뻔하지. 울어버렸다. 가게 한복판에서, 성규랑 사장님이 당황해서 달래는 데도 쉽게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민망하니 이 때의 일은 여기까지만 적겠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지만, 내일은 단풍이랑 그 사건 이후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솔직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단풍이한테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하지 않았다. 성규와의 거래가 시작된 날부터 진척사항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 때는 일이 잘 안 되었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유품을 잃어버리게 되어 억장이 무너졌을 텐데, 희망고문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기대하게 했다가 실망시키기도 싫었으니까. 그 선택이 옳았을까? 지금은... 모르겠다. 내일이 되어야 알겠지.
다음편
에필로그《중요한 것은, 그 다음》
내일이나 언젠가 계속!
- 에필로그 《중요한 건, 그 다음》
- ...한숨도 못 잤다. 단풍이 유품은 당연히 성하고 말끔하고 (그래도 겁이 나서 악세사리용 튼튼한 비닐 지퍼백, 천으로 된 파우치에 이중으로 봉해두고, 지금은 필요 없어진, 레벨 1일때 연구소에서 지급한 능력 제어장치도 차고 자리에 누웠었다. ) 단풍이한테 전화했을 땐 목소리가 가라앉아있긴 했지만 화난 기색은 덜했다.
무엇보다 전화를 받아준 게 기적이고. 목걸이를 고친 건 성하제 전인데, 이제야 연락이 닿았으니까. 못 자서 말이 헛나가거나 그러면 안되는데... 평일이라면 수업시간에라도 자겠지만, 얄짤없다. 오전에 만나기로 했거든. 가기 전에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야지. 능력 어제 마시다 만 물을 에스프레소로 만들기 위해, 텀블러를 쥐고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텀블러는 그대로, 물만 커피로 만들기 위해서. 한모금 넘기니, 지독한 쓴맛과 달달한 향만 느껴지는 걸 보니, 성공이다. 얼추 정신이 들자, 씻고 준비한 뒤 연구소를 나와 단풍이와의 약속장소인, (내 일터이기도 한) 블랑 엣 느와르로 향했다.
일하고 있는 동료 형들에게 인사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나를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단풍이가 좋아하는 아이스 페퍼민트 티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자니, 창 밖 멀리서부터 단풍이의 새빨간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된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단풍이는 가게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와서는, 곧장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내가 인사도 꺼내기 전에, 단풍이는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아 자기 앞에 놓인 음료를 말 그대로 원샷해버리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몇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거, 네가 제어할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알아."
"그 목걸이..." 단풍이의 목소리가 갈라지다 뚝 끊겼다가, 희미하게 떨리며 다시 이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나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이었어."
"그런데, 그 목걸이도 소중하지만, 너도 나한테 소중해. ...소월이 이후로, 처음 마음을 연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그 일은 용서해보도록 노력할게."
"...그 대신..."
"...딱, 한 대만 맞자!!"
한쪽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가 싶더니, 몸이 뒤로 기울어지며 나자빠졌다. 가방부터 몸으로 감쌌다. 아이고, 나단풍. 이 성질 급한 친구야. 이걸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고쳤는데. ...아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솔직히 생각보단 고생 덜 했다. 성규가 심성이 착하고 기억력이 좋았던 덕이지. 역시 난 운이 꽤 좋은 것 같다.
소중한 연인이 살아간 유일한 증거를 나 때문에 잃었는데도, 죽빵 한대로 용서해 줄 만큼, 마음이 넓은 친구가 생겼으니까.
선하가 죽은 이후엔, 동료라면 모를까... 친구는 안 두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도.
근데 주먹이 진짜 맵긴 맵다. 반사적으로 맞은 볼을 감싸니 제법 부어오른 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금은 아픈 볼이나 만질 때가 아니다. 놀라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장님과 형들에게 "잠시만요." 라고 양해를 구하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다, 똑바로 섰다.
"고마워, 단풍아. ...그리고, 이것 좀 봐줄래?"
단풍이에게 가방 안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내가 건넨 주머니를 받아든 단풍이의 표정은... 한마디로 아주 묘했다. 쳐맞고 일어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냐, 혹은 뜬금없이 이걸 왜 주냐는 황당함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거 설마... 하는 기색이 약간 첨가된 그런 느낌? 단풍이의 손이 잠시간 떨리다, 이내 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설마, 하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단풍이는 펜던트의 외관을 확인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미친" 하고 중얼거리더니, 황급히 지퍼백에서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떤 마음일까. 펜던트 안쪽을 보는 단풍이는... ...우, 울어? 단풍아? 단풍이는 펜던트를 꾹 쥐고, 삽시간에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울음기로 잔뜩 이지러진 목소리로 빽 소리질렀다.
"야, 이 미친 X아!! 고쳤으면 고쳤다고 말을 해야지!!! 왜 내가 때릴 때까지 가만 있어, 있길!!"
그 벽력같은 외침에, 아차 했다. 으이그, 다섯대 이상 맞아도 싼 일을 저질렀는데도 한 대만 치고 용서해줘놓고 울면 어떡해. 나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단풍이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으니까.
"한 대도 너무 싸지, 단풍이 넌 그동안 훨씬 아팠잖아. 내가 내 능력을 제대로 제어 못해서 벌인 일 때문에. 그러니, 미안해. 이유가 뭐였고, 지금 목걸이를 고친 거랑은 관계없이, 내가 그 날 너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정말 미안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들고 단풍이를 향해 어색하게나마, 어쩌면 울음을 참느라고 웃는 것 같지도 않은 몰골이겠지만, 웃어보였다.
"그리고, 고마워. 나 때문에 그동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힘들었을 텐데도, 용서해주겠다고 말해줘서. 그리고 날 여전히 소중한 친구라고 말해줘서..."
그 뒤로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단풍이가 가게가 떠나가도록 울기 시작했거니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다행히도, 안티스킬은 안 왔다. 내 생각엔 사장님이 대강 상황을 눈치채신 것 같다. ...그래도 죄송하니까 이다음에 뭔가 선물이라도 할 작정이다. 실컷 울고 나서는 당연히 쫓겨났고, 단풍이랑 기숙사까지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게 산더미였고. 단풍이는 정말로 내가 목걸이를 고쳐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용서해주려고 했다니. 이 마음에 어떻게 해야 보답할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질 않아, 그냥 단풍이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커리큘럼을 받고, 연구소의 주선을 통해 성규를 만나고, 거래하게 되고, 그런 일련의 모험들을. 묵묵히 듣던 단풍이가 입을 열었다.
"너도 욕 봤네. 정신 없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내 목걸이까지 신경썼어?"
"당연하지. 그 목걸이가 어떤 물건인지 내가 알잖아. 이미 일은 벌어졌고, 너한테 평생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기억을 더듬으니, 그 때 나를 버티게 했던 한 문구가 떠올랐다. 단풍이랑 같이 보면서 기가 막혀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엉 울기도 했던, 엄청 고전 드라마의 대사. (그러고보니 TMI지만, 그 드라마 주인공이자 그 대사를 말한 캐릭터, 저지먼트에 닮은 사람 있다!)
"그 다음이 중요한 거잖아."
"그래서, 너한테 목걸이를 고쳐서 돌려주는 것만 생각했지."
"아! 다시는 같은 사고 안 내게 조치하는 것도."
"그러다보니 레벨 3도 됐다? 이제 레벨 2 때부터 제어장치 없어도 자는 동안 아무일 없어, 히히."
그 말에, 단풍이가 반색했다.
"진짜? 야, 그럼 다시 나랑 방 같이 써도 되겠는데?"
아이고, 단풍아... 이런 기쁜 순간에 찬물을 얹고 싶진 않았지만, 어쩌겠나. 구라 칠 수도 없고. 그냥 말해야지.
"아, 내가 말 안했나? 나 퇴소조치 당했어. 아마 재입소 못할걸?"
"...헐."
The End.
7.3.1. 새봄의 모험 막간 ¶
- 새봄의 모험 ~ 막간(240405)
- "…이름을 몰라?"
"네…. 그런데, 어떤 맛인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단서도 조금… 있고요."
내 표정이 너무 절망적이어서일까, 성규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내 능력은 레시피를 모르면 발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사실상 손을 쓰나 초능력을 쓰나에 차이일 뿐 요리는 요리다 이거지. 솔직히, 저 친구가 미식가라고 해도 맛과 식감만으로 짐작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가령 초코가 들어간 바삭바삭한 과자를 생각해 보자. 초코칩 쿠키, 그냥 초코맛 쿠키, 초콜릿이 들어간 크루아상, 뺑 오 쇼콜라, 초코 슈크림, 초콜릿 비스코티, 초콜릿 슈니발렌…. 끝이 없다. 종류나 맛을 안다고 해도 그걸 구현하는 건 다른 문제고. 그래도, 단서라고 말한 게 신경 쓰인다. 맛과, 먹었던 상황, 적어도 어떤 문화권의 과자같은 지랑, 그밖에 성규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 그런 걸 하나씩 캐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방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좋아, 그럼, 오늘 시간 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저야 괜찮은데요, 누나는요? 그거 계속 실온에 둬도 괜찮아요?"
"…아."
어쩌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데, 성규가 씩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일단 그건 저한테 맡겨주시고요, 디저트 이야기는 인첨톡으로 계속할까요?"
"헐, 그래도 돼? 음 그럼….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조각 케이크 테이크아웃으로 쏴도 될까? 내 부탁 먼저 들어주는데, 고맙고 미안해서."
"진짜요? 그럼 두 개 얻어먹어도 돼요? 시그니처 케이크하고, 하나 궁금한 거 있어서."
"두 개가 뭐야. 세 개 사, 세 개~."
"아싸~ 무르시면 안 돼요."
…
그렇게 내 주머니는 한층 가벼웠지만,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선뜻 내 부탁 먼저 들어주겠다고 한 성규의 호의 덕이다. 단풍이에게 상황을 보고할까 했지만, 그만뒀다. 아직 고쳐지지도 않았는데,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거나 하면 두 번 상처 주는 짓이 될 테니까. 단풍이가 물어보면 그때 알려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를 나와 연구소로 향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훈련은 해야지~.
- 새봄의 모험 ~ 막간 2 (240406)
- 성규와 나눈 카톡을 통해 얼추 범위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문화권은 튀르키예인 것 같고, 달달하고, 보들보들한 느낌의 하얀 디저트랬다. 엄청 장족의 발전이라서 빨리 뭐라도 만들어보고 싶은데, 지옥의 사고속도 향상 훈련 시즌이 돌아왔다. 그게 뭐냐고? 암기다. 끝없는 암기.
- 새봄의 모험 ~ 막간 3 인생의 모험은 만화와 다르다 (240407)
- 오늘도 바쁘다.
성규의 추억속 하얗고 부드러운 튀르키예(풍) 디저트를 찾는데만 집중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인생은 모험물 만화처럼 임무가 하나 생겼다고 다른 임무가 제껴지진 않는걸 어쩌겠어.
그렇게 다독이며 오늘도 신나게 사고속도향상 훈련에 시달린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하얀나비 꽃 나ㅂ... 새봄아? 노래 부르지말고 집중하자~"
- 새봄의 모험 2 막간 《업보의 야식》0614
- media(https://www.youtube.com/watch?v=x1vb9NwawsM)
첫 협력 사업 때 내가 음쓰로 만든 재활용 볶음밥을 한 팩 받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먹고 있다. 야식으로! 이유는 별거 없다. 내가 만든 첫 냉동식품이 해동했을 때 맛이 있는지가 궁금했고, 내가 하기 싫은 남에게도 하지 말란 철칙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갓 볶은 것만은 못하지만 제법 맛있긴 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야채도 들어가 있긴 하지만, 스팸, 버섯, 계란 등 맛있는 재료도 잔뜩 들어간 데다, 기름에 달달 볶았으니까. 맛이 없으면 이변이지. 그러고 보니, 문득 단풍이의 시식평이 궁금해져서 단풍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풍아, 오늘 급식 괜찮지 않았니? 그거 내가 만든 거다?"
-잉? 너 지원금 쥐꼬리만하게 나와서 급식실에 취업했냐?
"아니 협력! 능력 썼어 ㅋㅋㅋ"
-뭘로 만들었는데?
"뭐게~ 맞춰봐!"
-뭐야, 그럼 스무고개로 하자! ...일단 못 먹을 거.
"맞아!"
-...쓰레기야?
"유감스럽게도 맞아."
-미친... ...설마, 급식실 잔반가지고 만들었냐?
"역시 내 친구 나단풍! 아주 명석하구나~!"
-야 이 미친-
- 새봄의 모험 2 ~ 막간 《뒤풀이는 차 한잔으로》 Lv.4
2024-07-08 (모두 수고..) 23:55:25
후룹-0
"아~ 살겠다..."
식고문 아닌 식고문 끝에 마침내 끝이 났다. 뜨뜻한 차로 먹은 것들을 누르니 좀 소화가 되는 기분이다. 소장님의 새옹지마성 식고문 이벤트... 그래. <무엇이든 먹어드립니다>는 제법 흥했다. 시작을 잘 끊어준 서형 덕이 반이지 않을까. 내가 만든 - 사실상 미운떡이나 다름 없는 초코를 엄청 맛있게 먹어줬으니까. 속이 좀 더부룩하긴 해도 재밌긴 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만들어 먹어볼 수 있어서 미각이 즐겁기도 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못된 애들이 들고 온 끔찍한 재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맛있는 걸로 바꿔 뇸뇸 먹을 때, 그 고약한 녀석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볼 때는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내가 원한을 갚으려고 바선생 시신까지 먹어봤는데, 가짜 샹그릴라 쯤이야 대수겠냐. 그럼 난 샹그릴라를 먹은 건가, 안 먹은 건가? 아무튼, 나름 재미있었다. 이거 심심하면 또 해봐도 좋을지도? 대신 신청자는 조금만 받아야지, 지금 배는 완전 빵빵하고 움직이기만 해도 먹은 것들이 뱃속에서 씰룩거리는 기분이다... 맛있었긴 하지만 너무 과식해버렸어... 그나저나 영상에는 잘 찍혔을 지 모르겠네.
7.4. 새봄의 모험 2 ¶
- 프롤로그 《투쟁, 그리고 협상》
-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 새봄은 이삼연구소의 숙소에서 일어나자마자, 곧장 소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작지만 명백히 힘이 실린 듯한 노크에 뒤이어, 문 너머에서 착 가라앉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새봄은 대답대신 문을 열고, 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잔뜩 분기탱천한 것을 대변하듯, 거침없이 내딛는 발걸음에, 새봄의 이마에 질끈 묶인 붉은 띠 두 갈래가 휘날렸다. 이삼연구소의 소장, 송두리는 잔뜩 불퉁한 표정을 하고, 머리는 질끈 묶어올린 채, 이마에 투쟁이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를 두른 소속 훈련생 - 지금은 다른 연구소에서 임시로 훈련을 받고 있지만 - 의 모습에, 꾸지람부터 내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때문에 왔는지 알 것 같다만, 너부터 말해봐라."
"10만원~? 10만원을 대체 누구 코에 붙여요? 이걸로 생활비는 커녕 한달 식비도 못해요! 개발되려던 능력이 도로 들어가서 레벨 0되게 생겼어요!"
발언이 허락되자마자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쫑알쫑알 불만을 늘어놓는 새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송소장은 새봄이 도로 입을 꾹 다물자마자 한 마디 내뱉었다.
"약 5억2천만."
"...?"
"니가 레벨 1 때 친 사고로 날아간 예산이다."
"...아."
"짤짤이 때고 말해서 저 정도고, 벌금으로 더 나갔어."
".....죄송해요."
불과 3분 전만 해도 분기탱천하여 들고 일어선 투쟁꾼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새봄은 슬며시 이마의 머리띠를 풀며 조그맣게 사과했다.
"됐다, 니 말대로 10만원으로는 급식을 꼬박 챙겨 먹어도 한달식비 대기도 빠듯하지. 그런데 말했다시피 주고 싶어도 읎어, 돈이."
"...네."
"그러니까, 몸으로 좀 떼워줘야겠다."
"...네?"
"별건 아니고, 일단 광고 하나야."
"네???"
다음편
제1장《오세요! 이삼연구소》
격일로 계속!
- 제 1장 《첫 협력은 급식실에서》
- 리버티 사태로 흐지부지 된 줄 알았더니만, 예의 '광고 작전'의 시동은 제법 빠르게 걸렸다. 처음으로 협력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나도 협력이라는 걸 해보는 구나 싶어 신기한 마음 반, 긴장 반으로 들으려니... 첫 협력 사업은 학교에서 한단다.
"...학교요? 그러니까, 제가 재학중인 목화고등학교에서요?"
"그래, 급식실. 간단히 말하자면 잔반처리 업무야."
"설마... 잔반을 새 음식으로 만들어서 처리하는 거요?"
"잘 아네? 정확히는 장기보존 가능한 새 음식. 석식 때 급식 조리 과정을 참관하면서 레시피를 익힌 다음에 실행하게 될거야. 할 수 있지?"
"네, 그거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설마 이거 찍어요?"
"당연하지, 광고에 들어갈 건데. 뭐, 너무 걱정말고 맡은 일에만 집중하면 잘 나올거야."
"...그냥 23만원으로 사는 것도 고려를..."
"에헤이, 무르기 없어. 출발하자~"
"네에..."
...그런 관계로, 하교하자마자 다시 등교하게 되었다. 그것도 학교 급식실로. 일하는 모습이 찍힌다는 게 민망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은 아니지만, 들어가 볼 일 없었던 공간에 들어가는 건 꽤나 설렜다. 우리가 먹는 급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궁금했고. 그리고, 그 생각을 한 지 정확히 20분만에 후회했다. 개더워!! 내가 지금 급식실에 온 거야, 사우나에 온거야? 하지만 나(정확히는 우리 연구소)와의 협력 사업을 위해 추가 근무를 해주시는 조리원 선생님들의 노고를 보고 있자니 불평이 쏙 들어가서, 조리법이 적힌 종이를 번갈아 보며 묵묵히 공부했다.
내가 만들 메뉴는 스팸 야채 볶음밥이라는 모양이다. 청윤 선배가 좋아하시겠다 싶으면서도, 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 미운 떡 재료 후보 중에 학교 잔반도 있었는데, 졸지에 선배들 급우들에게 미운 떡을 주게 생겼네. 근데 경제적이긴 하다. 어떤 학교든 잔반처리 비용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야채반찬, 채식하는 급우들에게는 고기반찬 때문에 특히...) 그나저나, 기름에 밥과 스팸, 채소가 볶아지며 나는 고소한 냄새를 계속 맡고 있자니 배고파진다. 아, 한 입만 먹으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눈빛이 여간 강렬한 게 아니었는지, 조리가 끝나자 조리원 선생님께서 식판에 볶음밥과 다른 반찬을 담아 가져다 주셨다. 아싸! 배고팠는데 잘 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앉은자리에서 폭풍 흡입을 해버렸다. 이야, 갓 볶은 거라 그런지 풍미 미쳤네~! 오늘은 반찬도 괜찮은데? ...뭐, 가끔 이걸 먹으라고 내놓은 건지 모를 것도 나오긴 하지만 그건 가끔이고. 아, 그래서 오늘 잔반을 볶음밥으로 만들어달라고 하신건가? 제일 인기가 좋은 메뉴라서? 뭐, 어쨌거나. 시키는 대로 해봐야지. 배부르게 먹은 뒤, 깨끗하게 청소된 조리실에 카메라와 산더미같은 잔반과 혼자 남겨지나 싶더니... 다들 구경하신다. 연구원 선생님이야 그렇다 쳐도, 조리원 선새님들까지 내 능력은 엄청 멋있는 이펙트같은 건 없는데. 조금 어색해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한 뒤, 잔반이 담긴 봉지를 하나씩 들어보며 견적을 쟀다. 보자... 하나 당 10키로 조금 안 되는 것 같고, 이게 열봉지니까 대강 100키로. 그럼 100키로짜리 볶음밥을 만들려면 계량을 좀 수정해야겠네. 받은 레시피에 볼펜으로 간단한 첨삭을 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계란은 미리 풀어두고, 채소랑 스팸은 잘게 다져서 같이 볶다가, 꼬들꼬들하게 지은 밥과 계란물을 넣고 마저 볶는다. 소금이랑 설탕도 약간 넣고... 굴소스도 약간만. 그런다음에 잘 식혀서, 적당히 1키로 씩 덩어리로 소분하고, 얼리면 끝!
눈을 뜨자마자, 탄성과 박수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사고는 안 친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잔반의 흔적은 없는지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아있으면 미운떡으로도 못 쓰는 게 되니까. 검수하면서 연구원 선생님과 영양사 선생님께서 나누시는 이야기를 듣자니, 원래 잔반 처리 비용으로 나갔던 예산과, 이번에 내가 만든 냉동 볶음밥을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비교해서, 절약되는 비용의 일부를 수고비로 주시겠다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말은 나한테도 좀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순간적으로 군침을 삼킬 뻔했지만 참았다. 편집되긴 하겠지만 돈에 굶주린 모습이 찍히는 건 부끄러우니 말이지.
어쨌거나, 첫 협력 치고는 잘 마무리된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일하느라 카메라를 거의 신경을 못썼는데 어떻게 찍혔을까? 궁금하네.
- 제 2장 《위기를 기회로!》Lv.4
어김없이 찾아온 점심시간. 음식물 쓰레기로 진수성찬(오늘은 무려 오므라이스랑 크림스프랑 초코케이크다!)을 만든 뒤, 배식시간에 맞춰 급식실로 가는데, 기이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맨 앞줄에 서있던 애들이 오늘의 메뉴가 쓰여진 종이를 보더니 급식실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옆으로 빠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쑥쑥 앞으로 나아가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메뉴 밑에 쪼그맣게 이렇게 써있는 게 아닌가.
본 메뉴는 이삼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음식물 쓰레기를 재활용한 음식입니다.
...저러면 아무도 안 먹지!! 다들 여름도 아닌데 더위먹었나!! 했다가 이내 이해했다. 하긴,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없을 수 없는데, 유출이라도 되었다가 파장이 오늘보다 클 테니까. 급식실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학생들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조금 슬퍼졌다. 과거사가 수상해도 맛있는 메뉴로 엄선한 건데, 이번 밥. 게다가 음쓰처리 비용보다 내 노동력이 월등히 싸다구! 레벨 4인데도 말이지! 게다가 저 설명, 암만 봐도 내 능력이 특정되잖아... 어쩐지 주위의 눈길이 좀 따갑게 느껴진다...
어쨌든 눈물 젖...지는 않은 식사를 마치고, 학교 끝나자마자 연구소에 가서 소장님을 뵈었다.
"...그렇게 됐는데요. 어떡해요? 저 다음날에 등교하면 몰매맞게 생겼어요."
"후후, 새봄아. 이 소장님은 다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지!"
"...무슨 기회요?"
"당연히 우리 연구소를 광고할 기회지! 그러니 새봄아? 내일 당장 광고 찍을 준비하렴. 점심시간에 소장님이랑 선생님이 장비 들고 가마."
"...대체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건데요?"
"걱정 마렴, 일일 기미상궁이 됐다 생각하고, 학생들이 아무거나 가져오면 먹을거로 만들어서 먹으면 돼."
"소장님, 저 배 터져 죽어요!!!!!!!!"
"이거 하면 지원금 최고액으로 주마."
"배터져 죽을게요."
...그렇게 됐다. 아이고, 돈 벌기 힘드네 정말!!
다음편
제3장《점심시간 새봄쇼》
언젠가 계속!
- 제 3장 《점심시간 새봄쇼》 Lv.4
다음 날,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점심시간대에 급식실앞으로 가보니 역시나. <새봄쇼: 급식실 옆에 무엇이든 먹어드립니다>라고 적힌 작은 부스와 촬영장비가 있었고, 소장님과 연구원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도 몇명 몰려있었다. 진짜 하는구나. 비장한 마음으로 다가가려니, 함박웃음을 지은 소장님과 어쩐지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도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의 연구원 선생님이 나를 반긴다.
"어서와라, 새봄아. 뭐 할지는 알지?"
"그럼요, 저 소화제도 챙겨왔어요."
"다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그럼요, 다 먹다간 저 진짜 죽어요..."
그렇게 해서, 팔자에도 없던 급식실 앞 새봄쇼의 막이 올랐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활짝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제법 방송인인양 과장된 투로 입을 열었다.
@전교생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N반 신새봄입니다~."
"제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로 급식을 만든 장본인이에요, 헤헤."
"사실 안 드시는 심정도 알아요. 얼마나 찝찝하겠어요. 성분은 새 음식이라지만 원재료가 음쓰였다니."
"그래서! 제가 직접 급식의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와봤어요~."
"여기 현수막 보이시죠? 무엇이든 가져오시면 앉은 자리에서 먹어드립니다!"
"물론 먹을 걸로 바꿔서요~."
- 에필로그 《모험은 계속된다》 Lv.4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었다. 영상은 꽤나 잘 뽑혔다. 괴영상이 되진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기우라는 걸 증명하듯, 나 말고도 쟁쟁한 훈련생 선배들, 동기들이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거기에,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우리 송두리 소장님께서 내 지원금을 배로 올려주셨다. 아직 홍보영상이 뜨기도 전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서 여쭤보니, 내가 레벨 4가 되면서 제법 돈이 나왔다는 모양이다. 그걸로 어찌 내가 빵꾸낸 예산도 충당하신 모양이고.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지먼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나서부터 내가 생각했던 저지먼트와 진짜 저지먼트 사이에 간극이 꽤나 있다는 걸 여러번 느꼈기 때문이다. 윤정인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혜우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진 학폭 사건의 주범이 뭔가 석연찮게 도박중독자로 전락해버린 사건을 거쳐, 사람을 몇명이나 증발시킨 위험인물과 함께하게 되기까지.
비록 저지먼트가 추구하는 정의에 대해서는, 내가 추구하는 정의와는 좀 다르다는 것 밖에 이해할 수 없게 됐지만, 동시에 저지먼트에서 내 정의를 구현해 주길 굳이 바라는 게 억지라는 결론에도 이를 수 있었다. 레벨 4도 되었겠다, 지원금도 불어났겠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으니까.
그러니 우선은, 은우 선배의 섬에서의 휴가가 끝나면 스트레인지에 무료급식소를 세울 준비에 들어갈 거다. 들어보니, 위험천만한 스트레인지에도 중립구역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곳에 거점을 잡아서, 조금 더 준비를 갖추고 나면, 푸드 트럭 형식으로 중립구역 뿐 아니라 조금 위험한 곳에도 무료급식을 해보려 한다. 중립구역까지 오지 못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리고 언젠가는 샹그릴라의 증상을 완화하고 회복을 돕는 약을 개발해서 전 학구의 스트레인지에 뿌리는 게, 지금의 궁극적인 목표다.
물론, 이건 좀 오래 걸릴 것 같긴 하다. 못해도 1년 이상은 걸리지 않을까? 연구소의 선생님들도 내가 공수해온 샹그릴라를 이리저리 분석해보시긴 했지만, 이렇다 할 만한 실마리를 잡진 못하신 것 같았다. 그래도, 진짜인 줄 알고 신나서 들고 온 샹그릴라가 가짜였을 때보다야 낫다. 어쨌건 내 손에는 진짜가 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분석해서 대항하는 약물을 만들 기회가 있으니까.
아마도, 이 목표도 달성되고 나면 또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지만, 제법 기대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다 이뤄가다보면, 이 끔찍한 도시도 언젠가는 지금보다는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을 테니까.
8. 토막글 ¶
- 퇴마 후 소회
- 합장하고서 감은 눈을 뜨고, 달콤한 딸기케이크로 변하고도 여러 공격을 맞아 곤죽이 되어버린 신종호 씨였던 것을 바라보는데, 문득 든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나, 살인해 버렸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달콤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건, 곧 그게 생명체가 아니란 걸 의미한다. 그러니까 달콤해졌겠지. 그리고 진짜 신종호 씨는 이미 죽었고, 저것 또한 신종호 씨라고 친다고 해도 사람으로서 죽는 게 아니라 귀신이 되길 선택한 건 신종호 씨 본인이다. 그러니 이건 살인보다는 퇴마라고 보는 게 적절하겠다.
은우 선배랑 세은이랑 퍼클들 기분은 어떠려나? 다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지금은 케이크 곤죽이 된 깡통 귀신이 일생일대의 원수였던 모양인데. 솔직히 신종호 씨가 대단한 악인이었다고 들어왔지만, 실감은 안 난다. 물론 악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릴 모두 죽이려고 했고, 안드로이드를 보내 고문 선생님을 다치게 했고, 서형의 삼천만을 박살 내려고 했고, 나도 때렸으니까. 근데 내게 있어서는 세상을 발칵 뒤집는 천하의 악당이라기보단 묻지마 폭행범에 더 가깝긴 하다. 그래서 사투 끝에 쓰러트렸는데도 그렇게 흥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은우 선배와 세은이, 퍼클들은 기분이 어떨까? 법적으로 살인죄를 물을 일 없이 각자 원수를 갚았으니 통쾌할까? 아니지, 진짜 신종호 씨를 살해한 플레어는 살인죄를 묻게 되려나? 그래도 원수를 두번 죽였다는 점에서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지도 모르지. 나는 띨띨이를, 그리고 그 가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뭐, 만나보고 나면 결심이 서려나.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던 찰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말도 안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혜우의 진정제를 맞고, 서형의 삼천만에게 단단히 붙들려있던 꼬맹이가 움직인 것이다. 미친 거 아니야? 진정제까지 맞고 그 무거운 삼천만에 짓눌려있는데 그걸 떨쳐냈다고? 다급히 테이저건을 꺼내 꼬맹이를 쐈지만 이미 무용지물. 꼬맹이는 품에서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눌렀고, 일대가 진동했다. 그리고 뭐... 3학구 뿐만 아니라 전 학구에 탑이 소환되듯이 올라왔다는 모양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원... 그나마 해산하면서 꼬맹이는 크리에이터 아저씨가 데려갔다.
그나저나, 서형이 걱정이다. 그 꼬맹이를 붙들고 있었던 건 서형이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낙심하지 않았을지... 서형에게는 감사 인사도 해야 한다. 수상한 아저씨와의 만남에서 그 꼬맹이의 드론에서 안 좋은 기억을 자극해서 부정적인 감각을 강화해서 이성을 잃도록 하는 수신장치가 발견되었다고 전해 들어서, 오늘 전투 중에 내가 전에 꾼 꿈 때문에 은우선배에게 폐를 끼쳐버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그게 아마도 서형이 끼얹은 까만 페인트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래서 난 해산하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서형에게 쪼르르 달려가려다 멈칫했다. 서형의 모습은 삼천만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즐겁게 이야기할 상태가 아닌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을 거는 대신 톡을 남기기로 했다.
@김서연
[서형! 오늘 애 많이 썼어요><] [달달한 거 먹고 싶으면, 언제든 블랑 엣 느와르에 와요!] [서형 줄 선물도 있거든요 히히] [푹 쉬어요!]
- 세뇌 IF ~ 어째서 당신이 부장이에요?
- 팔쯤에 뭔가 따끔한 게 느껴지더니, 자신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순식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마치, 그날 꿈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푸름이와 대화하기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꿨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슷하지만, 세세한 것이 다른 세계의 꿈이었다. 초능력이 있는 것도, 퍼클이 있는 것도, 내가 목화 고등학교에 다니고 저지먼트 소속인 것도 다 비슷했지만, 뭔가 달랐다. 구성원은 같지만, 어딘가 낯설달까. 수다 떨기를 좋아하던 지금의 적들과 달리 만나는 적들이 다 용건만 간단히 했던 것도 낯설었지만, 제일 낯설었던 건, 부장이었다. 부장이 은우 선배가 아니었다. 퍼클이고 여동생이 있는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솔직히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은우 선배보다도 더 벽을 치는 데다가, 행동도 맨날 혼자서 하려고 했었으니까. 그러다가 그 벽이 허물어진 건, 내가 꿈속의 부장을 몰래 따라가 전투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그 사람 주변에 모기만 한 기계가 빙빙 돌아다니길래, 잡아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수상하다는 생각에 그 기계를 각설탕으로 만들어 와작와작 씹어먹었더니, 그 사람의 동생을 통해 그게 뭔지 알게 됐다. 꿈속 세계에서의 퍼클들은 항상 초소형 감시카메라가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수상한 행동을 하면 언제든 버튼을 눌러 폭사시킬 수 있도록. 그걸 망가트리거나 꺼버리면 높으신 분들한테 혼난단다. 그래서 그걸 망가트린 건 나니 책임을 지고자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 사람이 말렸다. 그 초소형 카메라의 존재를 아는 건 퍼클들과 관계자뿐이고, 부외자가 그 존재를 안 걸 발각당하게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면서. 그러니 뒷 일은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미안했다. 나 때문에 높으신 분들에게 조인트 까이게 된 것도 그렇고, 그동안 의심했던 것도 그렇고. 너 때문에 오빠가 윗분들한테 조인트 까이게 생겼다고 날 원망하는 동생(이 친구랑 친했던 것도 현실과 비슷하긴 했다. 이 친구가 세은이는 아니었고, 현시점에서 친구로 지내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을 진정시키며, 카메라 없이 있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고맙다고 말해서 더 그랬다.
해방감에 활짝 웃는 얼굴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북받쳤다. 그래서, 제대로 사과한 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카메라가 없는 동안의 시간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둘을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닐 요량으로, 레이지 룸부터 데려갔다. 높으신 분들에게 억눌려 지낸 만큼 쌓인 게 많을 것 같아서, 합법적으로 기물파손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야구방망이로 실컷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다, 이내 웃어버리던 그 얼굴이, 꿈속에 내게는 깊게 각인되었다. 얼마 놀지도 못하고, 윗분들의 호출에 동생을 안심시키고 떠나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오빠를 걱정하며 울먹이던 그 사람의 동생을 보며, 난 다짐했었다. 수년 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꾸밈없이 짓던 그 미소를 다시 보기 위해, 이 세상과 싸우리라고.
그 뒤로도, 위험하니 따라오지 말라며 만류하는 그 사람을 쫓아다니며 많은 전투를 거쳤다. 딸을 해방하기 위해 자포자기했던 크리에이터 아저씨를 설득하기도 했고, 부장의 동생을 납치하고 그 사람을 죽여서 자신들의 개로 만들겠다고 도발하던 리버티에게 진심으로 화가 나서 손수 목줄을 채워버리려고 하다 말려지기도 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마자 1학구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들던 플레어를 목숨걸고 제압하려고 싸우기도 했고, 감시카메라를 떼는 대신 초능력을 레벨 4까지만 발휘할 수 있도록 족쇄를 차게끔 법을 바꿔놨더니, 인첨공을 멸망시키겠다고 날뛰는 고장난 녹음기... 아니 박찬유와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봐온 그 사람은, 내가 처음 가졌던 인상과는 달리 상냥한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모습이 안쓰러워 지켜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장으로서는 책임감과 리더십이 뛰어난 모습이 눈부신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깨어나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꿈속의 그 사람을 좋아했구나, 하고.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 보니, 부장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이 훅 끼쳐왔다. 그래서 서러워졌다. 꿈에서 깬 직후의 서러움이 되살아나, 정신을 차려보니 눈물로 얼굴이 흠뻑 젖어있었고, 꿈속의 그 사람이 아닌 은우 선배를 향한 이유 모를 원망이 북받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음쓰포를 장전하고 은우 선배를 쏴버렸다. 5개월 묵은 데다 피단과 취두부가 든 음쓰를 뒤집어쓴 은우 선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당신이 부장이에요?"
10. 새봄주 설명서 ¶
이 문단은 새봄주가 생각날 때마다 새봄주와 돌릴때 알아두면 좋은 점을 정리한 문단으로, 궁금한 점이나 의견이 있거든 @새봄주로 호출 바람!
- 새봄이가 좋게 반응하기 어려운 소재
새봄주는 다음과 같은 소재를 타 참가자가 사용함에 있어 미화나 옹호의 의도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와 별개로 새봄이가 마주했을 때 좋아하지 않는 소재 및 상황에 대해서는 반응을 하지 않거나 새봄이가 날선 반응을 보일 수 있기에, 아래에 정리한 사항에 대해서는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성인과 미성년자의 연애
- 성범죄를 비롯한, 현실에서 저지르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 각종 범죄
- 감정적인 폭력 및 착취
- 새봄이 또는 새봄주가 동의하지 않은 스킨십(새봄이와 친한 사이라면 토닥토닥 복복 정도는 그냥 해도 괜찮음. 새봄이도 가끔 그러기 때문에.)
- 의미가 불분명한 의사표현(이건 새봄주가 이해를 제대로 못해서 제대로 된 반응을 못할 수 있음)
또 생각나면 추가할 예정이며, 이와 관련된 질문은 상시 받고 있고 위에 적히지 않은 소재나 상황 중 일상 중에 새봄이가 우호적으로 반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등장할 시 이에 대해 조율 신청을 하겠습니다. - 성인과 미성년자의 연애
- 새봄이/새봄주와의 상호작용 도중에 둘 중 하나라도 불편감을 느끼는 상황이 발생했을 시
여기에서도 앞서 이야기를 꺼냈듯, 새봄주는 새봄이나 새봄주와의 상호작용에서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 기간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니, 언제든 본스레나 임시스레, 또는 이 페이지 댓글에 새봄주를 태그하여 호출해주세요.
저 역시 여러분과의 상호작용에 있어 요청사항이 발생하거든 기탄없이 제가 느낀 바와 그로 인한 요구사항을 이해하시기 쉽도록 말씀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새봄이와의 일상 도중에 불편감을 느껴, 더 이상 일상을 이어가기 어려운 경우, 마찬가지로 기탄없이 말씀해주시면 곧 바로 일상을 종료토록 하겠습니다.
새봄주 역시 일상 도중 더 이상 일상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느끼면 일상 종료 요청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서사적 완결성이 필요한 경우 조율에 응할 의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