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천유혜 ¶
- 첫사랑
- 마음 한 구석에 놓인 낡고 작은 박스 안, 먼지가 자욱히 쌓인 그 상자 안에는 꽁꽁 싸매고 숨겨놓았던 한 때 나를 잠 못들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첫사랑이 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비밀스러운 추억. 첫사랑.
첫 사랑의 시작은 벚꽃내음이 코를 간질이는 봄도 하얗게 피어오른 눈송이가 하늘을 수놓는 겨울도 아니었다. 늦봄과 초여름 그 사이의,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을 좋게 만들던 그 어느날. 그렇게 갑자기 피어오른 이름 모를 새싹 하나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냈다.
그 작은 새싹이 말하길, 처음 벚꽃이 피어오른 날 누군가가 마음에 피어날지, 피어오르지 못할지 모를 작은 씨앗을 심어두고 갔더랬다.
모든 사랑을 그렇게 시작한다고. 그리고 그렇게 자라나는 거라고, 그 작고 어린 새싹의 속삭임은 벚꽃잎 처럼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그에게 눈길이 갔다. 사랑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감정이었기에,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어쩌다가 가끔,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그의 생각이 나면 홀로 뺨을 붉히기만 할 뿐이었다.
사랑이었단 걸, 홀로만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게 된 건,
늦여름의 어느날. 그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아주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 할 감정. 신기루처럼 이제는 잡히지 않을 그 감정을 처음으로 맛 본 짜릿하고도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처음 느낀 감정의 파도는 금세 나를 덮쳐 쓸어버렸다.
파도는 너무나도 높고 억세서, 열심히도 가꾸었던 나의 모든 것을 쓸어덮쳤다. 대신에 가벼워진 마음을 그라는 존재로 다시 가득 채워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비록 나의 모든 게 비뚤어지더라도 어느 한순간을 온통 너로 채울 수 있음이 사무치게 행복했다.
밤하늘에, 꼭 감긴 내 눈에, 손톱만한 달에. 그렇게 너를 그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래, 그렇게 나는 매일밤 너를 그렸다.
첫사랑은 그 어리고 미성숙한 어딘가에서 비로소 빛을 보인다. 아주 찬란하게, 내 삶의 밤하늘 어딘가에 박혀 그 아름다움을 내비춘다. 그 떨리고 두근거리는 첫사랑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가장 완성되지 못 함에 있지 않을까, 처음 느낀 그 오묘한 감정들이 다시는 내게 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여겨본다.
2.2. 이 지현 ¶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하윤이와 이야기를 하고 난 그 다음날은, 기구하게도 시현이의 기일이었다.
네가, 나에게 잊지말라고 말하는 것일까.
성류시에서 기차를 타고서 수 시간, 땅끝마을 해남. 기일을 맞은 시현이의 고향이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품에 항상 지니고 다니던 그의 유서에 따라 그가 묻힌 곳은 내겐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너무도 머나먼 이국의 땅 같아서, 오늘같은 기일이 아니면 쉽사리 올 마음이 들지 않는 곳이다. 나는 그의 기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 나는 어김없이 해남행 왕복 기차표를 미리 끊어두곤 했지만 이번 기일에는 어째선지 그 전날인 어제 번뜩 생각이 나 부랴부랴 기차표를 끊었었다. 어째서일까, 너를 잊고싶어 하는 걸까. 그 생각의 소용돌이는 내가 앉은 좌석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속엑서, 그리고 해남역에서 벗어나 택시를 잡아 타기 전 까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해남역에서 내려 근처를 지나던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님의 첫인상은 올해 예순을 갓 넘어가는 은백색으로 하얗게 센 수염이 인상적인 한국에서 보기 힘든 노신사같은 분이셨다. 복잡한 역전을 지나 그래도 분주하던 읍내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기사님은 늘 그러셨던 것인지, 라디오를 틀었다. 우연히도 거기서는 내가, 아니 시현이가 좋아하던 양희은님이 게스트로 출연하신 모양이었다. 부인을 사별한 50대 남성의 사연이 지나가고 나온 신청곡,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시현이가 늘 흥얼대던, 자기 어머니의 애창곡이라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곡이었다.
나는 왜인지, 거기서 눈물이 흘러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울었을까, 눈물이 났을까.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던 나는, 이 눈물은 마치 복선처럼 아침부터 따라왔던 것이었음을 금세 깨달았다. 아침부터 날 괴롭히던건 복잡한 생각의 소용돌이 같은게 아니었다. 그건 그를, 너를, 시현이를 지독하게, 정말 사무치도록, 창자가 끊어지도록 그리워했다고, 넌 억지로 참았지만 네 진실된 감정은 그게 아니라고 시현이가, 아니 그를 그리워 하던 내가 나에게 화내고, 울고, 절규하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 사실을 안 것 뿐인데, 그저 그것 뿐인데. 나는 그의 무덤이 있는 평화공원묘역까지 가는 길에도, 그의 무덤 앞에서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자책하듯이, 후회로 가득차서, 그저 그렇게.
나는 아직, 시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다.
2.3. 스레주 ¶
- 최서하
- 여기에 오기 전
- 여기에 오기 전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행복한 나날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내가 일하고 있던 곳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거기서 버틸 수 있었는지가 신기할 지경이다.
물론 나는 경찰이다. 사실 내가 귀차니즘 환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내가 왜 경찰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한 이가 많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경찰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지금 일도 귀찮고, 순찰하는 것도 묘하게 귀찮고 이런저런 해야 할 것도 많고, 만일의 경우는 위험한 일도 해야한다. 연금만 타려고 하면, 솔직히 이 일보다는 그냥 사무직 공무원이 최고다. 하지만 내가 그럼에도 경찰이 된 이유는... 솔직히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의 나는 귀차니즘이 없었으니까.
당시의 나는 상당히 정의감이 강한 이였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패기로 가득했다. 아마도...그래. 막 경찰이 되어서 뭐든지 하려고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의 나는 랭크 S 판정을 받은 익스퍼였고, 이 능력을 잘 활용하면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렇게 실적을 세운 것도 있었으니까. 그래. 초기엔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새로 부임을 받은 곳은 나에게 있어서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숨이 턱 막혀오고 가슴이 턱 잡히는 기분이었다.
ㅡ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ㅡ그저, 시키는 일에 충실하면 돼.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ㅡ너의 생각은 아무래도 좋아. 시키는 일에 충실해라.
그 한마디, 한마디.
모든 것이 지금도 서늘하게 내 귓가에 남아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곳.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 곳.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임무였다.
전에 누가 나에게 물었던가? 여기에 온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시에 나는 답했다. 나쁘진 않다고. 그래. 나쁘진 않다. 적어도 이곳의 생활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괴롭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익스레이버 아롱범 팀에 대해서 나는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겠지. 생각해봐야 귀찮을 뿐이고 머리가 아플 뿐이다. 환자인 내가 그런 것을 생각한들 무슨 이득이고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기에 온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곳의 생활에 대해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나조차도 이유를 모를 작은 미소를 담았다.
"...하지만 일..해야겠지. 귀찮아도 말이야."
돌아가면 무슨 일부터 하면 좋을까. 절로 한숨만이 나왔다. ...하지만 연금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겠지..
- 그냥 이전의 이야기
- ㅡ너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유를 아직 모르겠나? 최서하?
ㅡ....너의 얄팍한 생각 따위 아무도 묻지 않았어. 그냥 너는 시키는 일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고, 네가 하는 일이야.
ㅡ답답한 자식. 넌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너를 여기로 데리고 온 이유는 그냥 네가 S급 익스퍼. 그 때문이야. 그 이외에 네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이 세상에 S급 익스퍼는, 정확히는 그 이상의 익스퍼는 극소수다.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서 데이터를 전부 뒤져봐도 랭크에 S 이상은 극히 없다. 엑셀로 표현하면 몇%나 될까? 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전체의 5%도 안 될 것이다. 그 정도로 매우 적은 수치라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얼마 안되는 S 랭크 익스퍼 중 하나이다. 나의 능력. 포지션 텔레포트. 참으로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는 이것 뿐이라는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생각하는 것도, 판단하는 것도 귀찮다. 어차피,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어진 일을 하는 것 뿐이니까. 그러기에 일은 언제나 열심히 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하 하면, 나는 적어도 경찰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으니까. 비겁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제일 편했다.
ㅡ실망시키지 마라. 최서하.
...실망이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겠지. 일. 언제나 그랬듯이...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지. 물론 귀찮은 것은 싫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적어도, 잘못되는 일은 없으니까.
참으로 글러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함에도 바뀌지 않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바뀌기 힘든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그저 흘러가듯이, 그저 조용히...
주어진 일은 확실하게 처리할 뿐이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지만, 그럼에도 일...안할 순 없으니까. 아주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쉬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 정도는 여기에서나마 조금 허락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아무래도 좋은 귀찮은 생각은 접어두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지. 그게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 강하윤
- 알 수 없는 꿈
-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알 수 없는 꿈을 꾼다. 한번만 꾸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꾸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꿈 속에서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 달리는 차도 없고, 움직이는 사람도 하나 없는 그 풍경은 말 그대로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한번은 직접 움직여서 멈춰있는 사람을 툭툭 쳐봤지만 그 사람은 힘없이 옆으로 털썩 넘어졌다. 깜짝 놀라 꺄악 하는 소리를 내며 사람을 일으켜세우려고 잡으면 마치 나무토막을 만지는 것처럼 딱딱했다. 넘어졌음에도 다친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장식물인가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사람이었다. 만약 이것이 장식물이라면 이것을 만든 사람은 정말 엄청난 예술가가 아닐까?
아무튼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에서 움직이는 것은 단 둘이었다. 내가 처음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앞 쪽에 있는 남성과 여성은 언제나 이 꿈 속에서 움직였다.
남성은 뭔가 크게 소리를 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우리나라 말로 무언가 말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뭔지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아무튼 그렇게 남자가 크게 뭐라고 외치고 나면 그 남자가 부축하고 있는 여성은 슬픈 목소리로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표정이 참으로 슬프고 슬퍼서 나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우리나라 말인데 왜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보이는 것은 그 여성이 안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 그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마치 그 아이도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조용히, 정말로 조용히 여성의 품에 안겨있다. 아니, 그것은 기절한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남성의 모습은 다름 아닌 아빠의 모습이었으니까. 사진으로 본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꿈은 내가 엄마를 잃은 그 '사고'의 모습인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근처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가는 차량도, 그 무엇도...
그냥 단순히 꿈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꿈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미칠 것 같다. 나는 대체 무엇을 잊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지다보면 어느새 꿈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마치,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아마 조만간에 나는 또 이 꿈을 잊어버리게 되겠지. 다시 이 꿈을 꾸기 전까지는...
- 우울함
- ".........."
벌써 며칠째일까? 옆자리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괜히 우울해지다. 그때 서하 씨를 저격한 것은 대체 누구일까? 아니, 애초에 뭐로 저격한 것일까? 일단 현장에서 S급 익스파의 반응이 캐치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빠르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 지현 씨가 뭔가를 알리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반응이 잡혔던 그 익스파를 체크했어야 했는데.. 서하 씨의 익스파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전부 나 때문에..."
우울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심장이 파란색으로 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파랗게, 파랗게 물들어가는 나의 심장이 아팠다. 무섭고 쓰라리고 힘들었다. 고통스러웠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퍼레이터로서 하는 것이 뭐가 있냐고... 그런 느낌으로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72% 카카오 초콜릿 통을 열어 그 안에서 초콜릿을 꺼낸 후에, 입에 집어넣었다. 오독, 오도독, 오독. 달콤한 초콜릿이 녹아 목 너머로 넘어간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자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역시, 나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쓰러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그것은 어쩌면 엄마를 잃은 사고에 대한 충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빠의 말에 따르면 나를 지키려다가 크게 다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크게 다치는 것.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죽음으로의 길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다. 솔직히 말하면 서하 씨가 그렇게 되었을 때도, 서하 씨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했다. 불안하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병원에 연락을 해보기도 하고 그런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나의 집착이고, 내가 이상하게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안다. 살다보면 다칠 수도 있고, 경찰 일을 하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위험한 일이다.
그런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역시 조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서하 씨는..."
돌아오기만 해 봐. 내가 하던 일 다 떠넘겨버릴테니까. 작게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며 파랗게 물든 나의 심장을 다시 붉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이 파란 페인트를 덮기 위해선 붉은색 페인트를 강제로 부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울한 기분이, 하루 빨리 씻겨나갔으면.. 하고 빌어보는 날이었다.
- 기타
- 박샛별(알파) - 그저 짧은 다짐
- 나는 아쿠아리스. 수족관에서 일하는 평범한 아쿠아리스트다. 아니, 평범한 것은 아닐까? 일단 사람들에게 '인어공주'로 불리고 있고, 나름 팬도 있다. 가끔 파란색 짹짹이에 내 이름을 쳐보면 나를 응원하는 글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랭크 S 판정을 받은 익스퍼라는 사실 때문이다.
익스퍼.
난 그거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면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심정을 가지고 있다. 좋은 감정과 안 좋은 감정. 두 개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나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내 내 입에서 한숨을 만들어낸다.
ㅡ무엇때문에 그래야 하지?
ㅡ한번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 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분의 의지에 찬동한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팬들을, 그리고 나의 일도, 나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지령을 수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은 적성에 맞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일부로 뻔뻔하게, 차가운 미소를 보인다. 모든 것은 나의 꿈, 그리고 그 분의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너희들이 상대한 범죄자들이 랭크 A다보니, 꽤 자신만만한가보네. 좋아. 그 분의 오더대로 조금 쓴 맛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테니까. 자. 와 봐. 나를 체포하고 싶다며? 그럼..제압해야겠지? 안 그래? 후훗. 한번은 서비스로 맞아줄테니까 열심히 때려봐. 혹시 알아? 처음부터 나를 다운 시킬 수 있을지..?"
그래. 당신들은 나를 제압할 수 없어. 나를 이길 수도 없어. 그 분과 베타. 다혜가 제공한 정보를 보고 나는 가장 거슬리는 이의 제거를 요청했고 그것이 이뤄졌다. 물론 병원에 간 모양이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없다. 간섭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에게 승산은 없다.
나의 능력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저들에게, 그리고 파악할 수도 없는 저들은 나에게 충격 한번 줄 수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은 그 분의 대의를 위해서. 그리고 나의 꿈을 위해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저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느낄 절망감을 확대시켰다. 랭크 S와 랭크 A의 차이. 그리고 정보조차도 없는 미지의 적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면서...
"이해했어? 내가 그냥 맞아주겠다고 할 리 없잖아? 너희들이 몇번이고 나에게 공격을 한다고 해도 의미 없어. 내 능력이 뭔지도, 내 능력의 특성도 모르는 너희들이, 그것도 A 랭크의 이들이 S 랭크인 나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것이 내가 그 거슬리는 이를 보내버린 2번째 이유. 하하! 자..그럼 이제 너희들은 언제쯤 내 능력을 파악하고 날 제압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다시 인어공주로서 무대에 설 수 있는 날은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나의 역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