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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
상태 메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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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레스 작성일 | |
2024-12-30/14:21:53 | |
캐릭터 소개 | |
제국 루페리아 황제의 부군 | |
본명 | 한 폰 볼프강 |
나이 | 20세 |
성별 | 남 |
국적 | 제국 루페리아 |
종족 | 해룡/레비아탄 |
생일 | 청해의 달 21번째 일 |
직업 | 사령관 |
상태 | 생존 |
2. 특징 ¶
역사, 신화 덕후. 신화에 숨겨진 비밀이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책을 읽던 학생.
일반인에 비해 매우 강한 괴력이 있으며, 용으로 각성한 이후로는 세계의 '흐름'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에테르, 공기, 물까지.
해룡인 탓에 건조기후에선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았다. 현재는 완치되었다.
일반인에 비해 매우 강한 괴력이 있으며, 용으로 각성한 이후로는 세계의 '흐름'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에테르, 공기, 물까지.
해룡인 탓에 건조기후에선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았다. 현재는 완치되었다.
7. 독백 ¶
- 상경-첫만남
대제국 루페리아의 지도를 보기는 쉽지 않다. 워낙 굵직한 도시와 시설이 많아 몇번이고 꼼꼼하게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의 고향은 그런 지도에서 티클만큼 작게 보이다. 항구도시이지만 유람선을 타는 빼어입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어업과 간혹 길 잃은 선박이 임시로 정박하는 곳. 그런 작은 마을이 한의 고향이었다. 한은 그 동네가 싫지 않았다. 종종 도시 생활을 그리워하며 불평하는 어른들이나 그들의 대화를 꼭 빼닮은 아이들이 투덜거려도, 밤에 시끄러워지는 술집, 눈을 감으면 더 크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간혹 길 잃고 해안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 이들만으로 한의 일상은 충분했고 이런 곳에서 평생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고, 한은 생각했다.
한의 소박한 일상과 반대로 제국은 하나라도 더 많은 인재를 원했다. 수도 사관학교의 학비가 무료라고, 사관학교에서 군인이 되면 신분도 조금 우대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 말을 부모님이 전해듣고 또 한에게 전해주었을 때 한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거창한 목표의식이나 신분 상승의 열망이 없더라도 부모님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는 건 어린 나이에 얼마나 훌륭한 효도인가. 한은 그렇게 상경했다.
"우와아..."
수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한은 살면서 그렇게 커다란 건물은 처음 보았다. 도로에 처음 보는 마차들이 지나갔다. 어떤 것은 열개의 칸이 하나로 합쳐져 말 없이 길을 지났다. 정교하게 설계된 도로들은 마치 장인이 수놓은 융단 같아서, 한은 자기도 모르는 새 꼿꼿하게 걸었다. 나도 이제는 품격있는 대도시 사람이다. 어느새 제국 시민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가 학교지..."
허나 하루아침에 촌뜨기가 신사가 될리가. 한은 온통 커다랗고 미로같은 도시에서 금세 길을 잃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한은 제국 사관학교의 마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발견했다. 또래같고 제법 세련된 티가 나는게 한과는 비교도 안되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귀족일지도 몰라. 불쾌해할지 모르니 그냥 뒤를 따라가자.'
한은 천천히 뒤를 밟았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생쥐처럼, 살금살금. 뚝 하고 고개를 돌리면 휙, 숨어버리기를 몇번. 들키지 않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한은 점점 그 사람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마침내 꾸불꾸불해 햇빛도 들지 않는 건물 틈새로 들어간 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어디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앞서 걸어가던 소녀는 휙 뒤돌았다. 한이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소녀는 전력으로 달려와 교복에서 서슬퍼런 단도를 꺼내 한의 목에 겨누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 상경뭐시기둘
- "...너는 암살자가 아니구나."
단도가 천천히 내려왔다. 한은 황급히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말랑한 피부가 생채기 없이 느껴진다. 휴우우, 한은 영혼까지 빠질 한숨을 내쉬었다.
"마, 맞아요. 저, 저는 그냥 학생이라구요."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한은 입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생존본능이 먼저 말하는 탓이다. 그런 한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소녀는 단도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날을 좀 갈아야겠군."
저게 방금 찌르려던 사람 앞에서 할 말이 맞나. 한의 얼굴에 남아있던 핏기마저 가신다. 소녀는 단도를 집어넣었다.
"네가 암살자가 아닌 건 알겠어. 보통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지는 않거든. 사실, 그렇게 멍청하게 추적하지도 않고. 최근 일로 괜히 예민했던 것 같네."
소녀가 어느새 힘이 풀려 주저앉은 한에게 손을 뻗는다. 한은 팔도 내밀지 못했다. 한숨을 쉰 그녀는 쭈그려 한과 마주보았다.
"귀한 옷을 입은 사람은 함부로 따라다니는게 아니야. 내가 성격이 더러운 귀족이었으면 어쩔 뻔했니? 일단 사과할 테니, 왜 내 뒤를 그렇게 쫓았는지 말해봐. 돈이 필요하면 조금은 나눠줄 테니까."
"저, 저는 거지가 아니거든요?"
"그럼 역시 자객이니?"
"그것도 아니에요!"
한참이나 숨을 헐떡거리던 한은, 마침내 눈앞에 선 얼굴을 볼 정도는 되었다. 윤기나는 은색 머릿결, 총명해 보이는 붉은 눈. 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은 고개를 휘젓고 똑바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저, 저는 사관학교 신입생이란 말이에요. 그쪽같은. 그런데 길을 몰라서, 그래서..."
한은 꾹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신식 신사인 양 생각한 게 방금인데. 똑바로 소리쳐야 했는데. 얼뜨기처럼...
"아하... 하하!"
소녀가 통쾌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한은 그 웃음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런 거였어? 가끔 그런 애들이 있지. 평민 출신으로 수도까지 불려나온 애들. 보통은 잘 찾아오는데... 너 도시가 처음이구나?"
소녀는 두 번째로 손을 내밀었다. 한이 겨우 뜬 실눈으로 손을 잡았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렸다.
"안내해 줄게. 나는 아델이야. 네 이름은?"
"한..."
손에 이끌려 골목을 빠져나오자, 바스라진 태양광이 얼굴을 때렸다. 그제야 한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한의 첫키스
- 석식시간, 아델과 한은 마주보고 앉는다. 오늘 한은 식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한 자신의 고민 때문에.
아델은 묵묵히 스튜를 떠 입에 넣는다.
"이, 있잖아 아델."
어렵사리 입을 뗀 한을 아델은 빤히 바라본다. 석류같이 붉은 눈이 유독 눈에 뜨인다. 한은 기껏 말을 걸어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친구, 지?"
"응."
짧은 대답 이후 아델은 식사를 이어간다. 한은 방금 달리기를 마친 듯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 너무 빠른 대답에 혼미할 지경이다. 왜 물어봤냐고 말해주면 안돼? 아니, 그러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너는 긴장이 안돼? 그야 친구니까? 한의 얼굴은 이제 거의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아델은 그런 한이 알아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웃는다.
"스튜 식겠다. 먹어야지."
"응..."
유독 조용한 저녁 시간이 지나갔다.
열병 때문이었을까, 한은 며칠째 앓아누웠다. 룸메이트가 감염될 수 있으니 위험하다며 위생장교는 독방을 내주었다. 눈만 뜨면 천장이 시계 바늘처럼 회전했다.
"으으으..."
이불에 몸을 파묻은 채 한은 생각한다. 이대로 죽는 거 아니야? 그럼 안되는데, 역사책을 보면 병으로 죽은 사람이 수두룩...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좀 앓아누우면 낫겠지... 그런데, 그런데.
우리 정말 친구야? 그냥?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마..."
우우우.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한은 이불을 더욱 감쌌다. 자기만의 마음 속에 틀어박히며.
마침내 겨우 몸이 풀어졌을 무렵, 한은 겨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잠시 굳었다.
"이, 이게 뭐야."
들여다본 자신의 팔. 그 위에는 비늘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예쁜 청색 비늘들이 조각조각.
비늘이 돋아나는 병이 있던가? 나쁜 짓은 한 적이 없는데 저주라도 받은 건가? 이런건 용족이나 뭐 그런... 종족적 특성 아니야? 나는 인간이잖아. 메스껍고 입이 바싹 마른다.
"꿈인가..."
대충 퍼질러 자면 되겠지. 아무튼 해결되겠지. 사고가 정지된 한은 도피를 선택한다.
"똑똑."
도피하지 말라는 듯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한은 보이지도 않는데 이불을 뒤집어 쓴다.
"누구세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문 너머의 사람이 당황한 듯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나야. 아델."
아, 위생장교님이 아니구나. 안도도 잠시, 지금 자신의 팔을 보며 한은 한숨을 쉰다.
"지금은 들어오지 말아줘."
한의 냉담한 반응에 아델은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나 머뭇거림도 잠시.
"물이랑 약 가져왔어. 위생장교님이 감기에 걸려서. 바보같지? 그러니까 들어가도 괜찮을까?"
"안된다니까! 문 앞에 두고 가줘..."
아델은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 알았어, 문 앞에 두고 갈게. 짧은 말을 끝으로 떠날 뿐.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부랑자 노파처럼 이불을 몸에 돌돌 두른 채.
"갔네..."
나중에 미안하다고 꼭 전해야지. 한은 궁시렁거리며 물을 마신다. 목이 부어 제대로 끼니도 챙기지 못했다. 이상하게 물컵은 티끌만큼의 해갈도 주지 못한다. 되려 더 갈증을 심화하는 듯했다.
"어어..."
어지러운 머리를 붙든다. 물, 물이 필요해. 한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급수대를 향한다. 어디였더라. 몸은 점점 움츠러들고 머리가 점점 아파온다. 한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솟아나는 뿔은 이미 이불 너머로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물... 물..."
한은 마침내 급수대 앞에서 물을 틀고 벌컥벌컥 마신다. 누가 보던지 알게 뭐람. 머리가 온통 젖어가게 한은 물을 마셔댄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다.
"!"
고개를 돌리자 아델이 보인다. 환영인가? 아냐. 이 눈... 이 감촉. 분명히 사람인데. 당황한 한의 눈동자가 세로줄로 찢어진다. 안돼!
"보지마!"
움츠러드는 한의 얼굴을 붙잡고 아델이 눈을 마주친다. 화났나?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다. 너를 만난지가 일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난 모르겠어.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한은 불쑥 억울함이 솟구친다.
"우리가 친구야? 왜? 난... 미안해. 미안... 그냥... 나는."
아델은 천천히 다가온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곧,
"쪽-."
뭐지. 뭐지? 정신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왜 나는 갑자기 몸에 비늘이 났으며, 아델은 입술에, 아니, 잠깐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정신이 없어. 하지만, 하지만.
입술은 체리처럼 부드럽고
기분은 봄 나비처럼 떠오르고
네 비누 향기가, 아이보리색으로.
- 도서관에서
- 한, 아델은 도서관을 뒤적거린다. 토요일 도서관은 적막하다. 아델은 별 말 없이 이리저리 책장을 살펴본다.
"찾았다."
'용족연구'라는 표지의 책을 들어올리며 아델이 말한다. 책은 대충 보기에도 낡았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읽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용족?"
"용족."
"설마 내가 용족이라고 하는건 아니지?"
"그건 봐야 알지."
한은 항변을 꾹 삼킨다. 내가 용족일리가 없잖아. 기껏해야 도마뱀 정도겠지.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델의 옆에 달라붙는다.
"서력 280년에 쓰여진 책이야."
"엄청 오래됐네."
"...제국에서 용족은 자취를 감췄으니까."
용. 해방왕 칼라일이 인류에게 에테르를 선물한 이후, 세계의 종족은 가지처럼 분화를 시작했다. 그러한 촉진 과정에서 강한 지능과 아름다운 비늘, 고도의 에테르 적응력을 갖춘 종족. 그것이 용이다. 탄생 초기에는 그 위대한 힘과 능력에 매료된 사람들이 숭배하였다. 하지만 더이상 제국에는 없다. 현재 공식적으로 용이 존재하는 나라는 연합국 뿐이다.
"제국 지도부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에게는 용이 눈엣가시였겠지."
아델은 목차를 훑어보다 덮는다.
"우습지. 기록하지 않으면 다 잊혀지는거야. 한때 누군가 이렇게 용들에 대한 책을 썼더라도."
한은 문득 아델의 혈류를 느낀다. 기현상 이후 한은 흐름에 민감해졌다. 하늘의 흐름, 지하수의 흐름, 에테르의 흐름. 거기에 사람의 혈류와 심박까지. 이해할 수 없는 감각들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한에게 기묘한 일체감을 주었다. 지금 한은 아델의 얼굴과, 피부보다 깊숙한 감각으로 전해지는 혈액의 온도,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아델의 얼굴은 평소처럼 굳어있을 뿐인데도.
"황가의 역사를 알고 있니?"
아델은 문득 책장을 본다. 아니, 책장 너머의 무언가를 보듯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황가라고 하늘에서 떨어졌겠어? 신도 죽어버렸잖아. 도대체 어떻게 최초의 황제였을까. 궁금하지 않니?"
"그런..."
"있지 한."
아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 박동이 거세짐을 한은 느낀다. 자신의 박동보다 크게 느껴지는 아델의 불안정함. 그럼에도 아델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 아이는 늘 이래왔던 것일까?
마침내 아델은 좁힐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와, 한의 가슴에 푹 기댄다.
"만약 지도자의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면... 넌 어쩔거니?"
"난..."
한은 본능처럼 아델의 등을 쓰다듬는다. 천천히 천천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심장 박동이 누그러짐을 느낄 때까지.
"네가 하자는 대로."
한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안는다. 아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성취감 같기도 한, 용의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흐릿한 미소를.
- 야 강아지다!
- 한은 구석진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델과 연애하기 시작한 이후로 한은 교본을 보는 시간을 늘렸다. 오후의 햇살은 포근하다.
문득 멀리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족 아이들이다. 제국 사관학교에서 평민을 받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혹자는 귀족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험지로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모쪼록, 평민이 귀족과 엮이면 귀찮아진다. 평민 아이들 기숙사는 일부러 떼어놓을 정도니까.
"...어! 강아지 아냐?"
짓궂은 소년 한명이 한을 가리키며 말한다. 한은 애써 미소를 짓는다.
"강아지가 어디 있는데?"
"매번 졸졸 볼프강 여식을 따라다니니 강아지지."
뻔한 모욕. 한은 책을 덮는다. 수도에 오고 난 뒤로는 매번 이런 식이다.
"강아지라 대답도 못하네."
깔깔거리는 애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은 일어서다가 문득 몸이 굳는다.
"뭐야. 도망도 제대로... 아 왜?"
눈치가 빠른 일행이 툭툭 리더를 건드리자, 덩치 큰 녀석이 고개를 젖힌다. 아델이 서있었다.
"흠."
아델은 팔짱을 끼고 죽 일행을 쳐다본다. 대개 저 나이에 연인이 비웃음을 당하면 화내지만, 아델은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한은 그게 소리치는 것보다 배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같은 귀족임에도 고저차가 있다. 지체 높은 명문가인 볼프강과 총회에 참석도 못하는 가문들은 비교되지 않는다. 아델은 가만히 사이를 지나친다.
"아, 아델. 왔어?"
한은 쿵쾅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애써 평범하게 묻지만, 아델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느새 아이들은 비둘기처럼 산회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그, 그야..."
한은 푹 고개를 내리깐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걸. 속으로만 내뱉는다. 그런 한의 머리를 아델은 정돈해주며,
"두렵니?"
"응?"
한은 아델을 쳐다본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들어도 조금은 내려봐야 한다. 아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봐... 쓸모없는 사람일까봐, 혼자 떨어진 사람처럼..."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한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 대답이 필요 없다는 듯 아델은 할 말을 이어간다.
"걱정하지 마, 한. 너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될 테니까. 누구보다..."
아델이 한을 푹 껴안는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뭐라도...
- 아델의 비밀
- 안개의 달(10월)에도 제국의 정세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국경 지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소규모의 근접전이 벌어졌다는 말에 교실은 시끄럽다. 아델도 몇 개월 전부터 무슨 생각인지 부쩍 말이 줄었다. 한은 이런 상황이 몹시 불안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성적이 올랐고, 아델과 개인적인 담소를 나눴고, 함께 별도 봤으며, 자신의 용으로서의 자각도 더욱 뚜렷해질 참이었다. 알레르기도 줄었다.
그럼에도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제국에 밀려오는 안개처럼.
"한."
쉬는시간, 아델이 말을 걸어왔다. 한은 엎드렸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 함께 저택에 왔으면 해."
저택? 한은 한번도 아델의 저택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아델이 초대한 적도 없거니와, 한이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생활은 기숙사에서 꾸려오기도 했고. 그런데 저택이라니!
"으응. 좋아."
한은 두근거리는 마음에 남은 수업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아델의 집은 매우 거대했다. 예전의 한이었다면 움츠러들었으리라. 허나 지금은 아델의 연인이라는 자부심이 마음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한은 그 자부심이 밀어주는 용기에 아델을 따라 들어왔다.
"오셨군요."
나이든 집사가 점잖게 인사했다. 한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한은 집사의 심장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용의 감각을 각성한 이후로도 이 떨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불안을 느끼면 곧장 전파된다. 마치 파동처럼.
"있지 한."
아델은 잠시 계단 앞에 멈춰섰다. 아델의 심장도 조금씩 불안해졌다. 두 번의 불안에 한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언제까지고, 나와 있어줄 거지."
'물론.'
아델은 말이 끝나자 바로 내려갔다. 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아차하는 새 한은 아델을 뒤따라간다.
깊은 계단을 내려가며 아델은 말을 이어나갔다.
"한, 예전에 우리가 도서관에서 나눈 대화 기억나? 황가는 어디서 왔을지."
"응..."
그날의 대화, 그날의 포옹, 한은 그날의 대답까지 세심히 기억한다.
"그날 너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했지."
"맞아."
"지금도?"
"지금도."
얼마나 내려왔을까, 바닥이 드러났다. 냉기가 올라오는 듯한 싸늘한 돌바닥. 그 끝에 놓인 철문.
"사실... 제국 초기에는 다섯 개의 가문이 있었어."
아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국이 어떤 땅에서 시작했는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다섯 개의 주요 가문이 통치하다 현재의 황가가 독재를 시작했다는 사실까지. 한은 이야기를 듣다 주저앉았다. 어두운 철문 때문일지, 이야기의 심각성 때문일지 알 수 없다.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한은 차마 서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황가는 위대한 발견을 했거든."
"어떤?"
"신의 시신."
아델은 철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저 눈빛이다. 먼 곳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표정. 저 순간만은 아델의 심장을 읽을 수 없다. 아아. 한은 탄식했다.
"지혜의 신을 칼라일이 죽이자, 하늘에서 추락했지. 혜성처럼. 비처럼. 그렇게 추락한 신의 시신... 껍데기라고 할까. 한때 지혜의 샘이라고 불리던 이곳. 소피아로 추락했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지혜의 샘이라니까."
아델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천천히 문 너머에서 청색광이 번져오고, 마침내 너머의 세계가 보인다. 거대한 유리. 그리고 그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 얼굴이지만 몸은 바다의 생물 같기도 하고, 새의 사체 같기도 하다. 그 형체에는 관으로 보이는 길쭉한 호스들이 마구잡이로 꽂혀있다. 유리는 수조처럼 그것을 담아두었다.
"우리 볼프강은 이 시신에서 지혜를 추출했어. 그리고 황제에게 선물했지. 싸울 수는 없었어... 이미 그때 황가는 너무나 강했고, 우리 가문은 나약한 학자들의 모임이었으니까. 황가는 신의 잔재로 팔현제를 배출했지. 문제는 시신이 언젠가 썩는다는 거야. 우리 가문은 오랜 기간 방부防腐작업에 몰두했지만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어... 몇 년이 지나면 이 시신은 완전히 힘을 잃을 테지."
한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아델이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행운은 끝이야, 한. 제국에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해. 제국이 이 시신처럼 부패하게 둘 수는 없잖아. 그렇지?"
한은 대답하지 못한다. 아델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이 흐르는 한의 얼굴을 닦아준다. 아델의 모습은 청색 역광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선 사람은 누구인가.
"충격이 크지, 한.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말해 미안해. 준비가 진행될 시간이 필요했어. 한, 사랑해. 진심으로. 너는 느낄 수 있지?"
아델은 말하며 한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댄다. 그렇다. 느낄 수 있다. 무엇이 진심인지. 혈류 하나, 목소리 떨림 하나까지.
"내가 황제가 되면, 너는 국서가 되겠지. 더이상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해. 네 능력도, 너의 가치도."
'누구도...?'
한은 혼미한 정신의 틈으로 생각한다. 누구도. 그래. 나 자신도. 더이상.
- 폭풍을 준비하자
- 대륙 칼드레아에는 세 국가가 있다. 루페리아 제국, 공화국 레가니온, 연합국 펜도라. 루페리아는 해방의 시대 이전 연구자들이 모인 도시로 출발했고, 레가니온은 전사들의 모임으로 시작했으며, 펜도라는 잔재 신도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각국은 그때의 흔적이 뚜렷하다. 제국은 질서와 학문을 숭상하며, 레가니온은 인간의 개척과 근면을 중시하고, 펜도라는 조화와 용 숭배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공화국(왕국이던 시절부터-)과 제국은 오랜 시간 나름의 교류를 해왔지만 펜도라는 둘과 이질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동안 이 관계는 큰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고 공화국이 혁명과 부유를 기치로 내걸며 이들의 관계는 한 세기동안 급격히 냉각되고 있었다.
이제 제국이 전쟁을 바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제국은 삼국 중 유일하게 에테르 제련기술을 갖춘 우수한 국가야. 인간 착취로 연명하는 공화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최악은 펜도라야. 그들은 감정조차 불가능한 양의 자원을 갖추고도 멍청하게 낭비하고 있으니까. 해방의 날로도 천년이 지났어. 이제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야 해."
아델은 차분히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국 귀족들은 멍청하게 공화국을 누르고 펜도라를 찌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공화국은 섬이라 상대하다 보면 자원이 바닥날게 분명해... 거기에 요즘은 북부 민족들이 점차 방비를 강화하는 추세. 단독으로 상대한다면 어려움이 없겠지만 제국이 힘이 빠지면 세 세력에게 둘러싸인 최악의 상태가 될 거야. 불필요한 소모전은 피해야 해."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야지."
"될까?"
"혼란스러운 상황이 장기화되기를 바라지 않을 테니, 섬으로 방어할 시간이 충분한 공화국은 국경을 닫아걸길 선택할 거야. 물론 믿을 수는 없지만, 황제가 바뀌고 외교 방향도 전환한다고 하면 거부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고 이 계획에 네가 꼭 필요해, 한."
아델은 고개를 들어 한을 바라보았다.
"너는 위대한 레비아탄... 바다를 봉쇄해줬으면 해. 지금 통제력이 얼마나 되지?"
"적어도 제국 영해는 지배할 수 있어."
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국을 방어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까."
"글쎄... 몇 달은 걸리겠지. 반년이 될 수도 있고."
한은 목소리를 삼켰다. 차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더이상 그런 투정을 부려도 되는 나이가 아니니까. 본격적인 준비를 하며 아델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곁에서 봐왔다. 지금도 서류를 넘기는 짧은 소매 너머로 보이는 저 흔적이 무엇인지, 한은 알고 있었다.
"팔은... 이제 괜찮아?"
"음."
아델은 지난 몇 개월간 용혈龍血이식을 연구했다. 처음에는 쥐, 이후에는 개...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신의 에테르를 이식하는 것보다 쉬웠지만 초기 연구는 늘 부작용을 동반한다. 여러 번의 패혈증과 치료를 겪은 팔이 검은 혈관이 뿌리처럼 살갗 너머로 비쳤다.
"곧 낫겠지... 전보다 회복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조만간 정예병에게 시도할 계획이야."
한은 입술을 꾹 닫았다. 처음 아델이 수혈을 이야기했을 때, 한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델은 인원을 모집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공화국과의 전면전이 시작될 거라고.
"포섭은 거의 끝났고... 이제 정말 결실이 코앞이네."
아델은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한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은색 반지가 둘. 제국의 문양이 검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거사일에 끼고 나와줬으면 좋겠어. 왼손 약지에."
한은 반지를 꺼내 한번 끼워보았다. 잘 맞네, 아델은 맑게 미소지었다. 보기 드문 미소, 한은 상황이 달랐다면 이 미소를 자주 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좀 더 평화로운 시대였으면 무언가 달랐을까. 아니면 네가 이런 짐을 지지 않았다면? 한은 남은 반지를 들어 아델의 손에 끼워주었다. 창백한 반지는 은색 띠를 두르고 흰 손에 꼭 맞았다. 어쩌면 첫만남의 칼날이 문득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잘 될거야, 아델."
모든 게 잘 될거야, 한은 주문처럼 되뇌였다.
- 지들만의 로맨스
-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잠언 4장 7절
칼라일은 몇주간 혼신의 힘을 다해 설계한 도면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공간 창조는 한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계의 에테르와 소통한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근래 칼라일은 행로의 단서를 얻었다. 또 차원간 연결망 덕분이다. 늘 그곳에서 도움만 받는다. 칼라일은 일종의 축사와 같이, 영창을 시작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새벽별, 땅이 낳은 사생아. 프리드리히 가문의 마지막 혈통이 말한다. 오래된 자들의 역사, 새로 시작한 자들, 죽은 이들의 흔적마저 이 역사는 기억할지니, 누가 감히 지혜를 부정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 처소를 짓는 것을 막겠느냐? 이르노니 하늘은 길을 마련하고 땅은 힘을 쓰라. 그리고..."
차가운 새벽에서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흐른다. 칼라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영창을 마무리짓는다.
"이 곳의 이름은, 바벨의 도서관이니. 모든 기록이 이곳에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
영창이 끝나자, 땅이 요동친다. 새들이 놀라 울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거대한 건축물이 머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탑은 끝없이 올라가다 어느 순간 뚝 그친다. 그리고, 땅은 부양하기 시작한다. 칼라일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세계의 모든 지식을 담은, 무한한 공간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칼라일은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한다.
초목의 달 3일. 황태자는 궁전의 모든 귀족을 소집했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대회가 열렸다.
금빛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거대한 문 앞, 한과 아델은 나란히 서 있었다.
"문을 열어주시오, 경비병."
"외람되오나, 허가할 수 없습니다."
경비병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델은 미소지었다. 들어갈 자격이 없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귀족이 아닌 이상, 특권을 부여받더라도 학자에 불과하니까. 처음부터 허락 따위는 필요없었다.
"한."
아델은 짧게 부르며 곁에 선 동료를 바라보았다.
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변화를 시작했다. 피부는 차가운 빛을 띠며 푸른 비늘이 돋아났다. 동공은 뱀처럼 날카롭게 찢어졌다. 머리 위로 세 쌍의 뿔이 솟아올랐고, 손톱은 매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경비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얼어붙었다. 반응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게—."
겨우 말을 뱉기도 전에, 한의 손이 경비병의 투구를 움켜쥐었다. 강철 투구는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두개골은 처참히 부서졌다. 한은 촉감에 으, 찡그리고 시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두 손을 들어올려, 방해꾼이 없는 문에 쿵, 쿵. 주먹질을 서너번. 문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게 무슨!"
벌써 상황 판단을 마친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아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담담히 이름을 불렀다.
"에드워드, 레오폴드, 빅터, 어거스틴, 몬터규, 호손. 나가세요."
이름을 불린 귀족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자리를 떴다. 남은 귀족들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제야 그들의 판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란이다! 이건 반란이야!"
"근위대! 근위대는 어디 있느냐!"
"저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협박, 회유, 도피. 각자 살겠다는 본능에 따라 내뱉는 소리들이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섞였다. 아델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히 한을 불렀다.
"한."
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올렸다. 방 안의 귀족들이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리가 허공을 허우적대고, 목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비명은 점점 잦아지다 침묵만이 남았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요. 전하."
아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 낙엽을 걷듯 우아하게. 한은 마치 데뷔탕트 같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아델을 바라봤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얼굴은 창백했다. 한은 그가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음을 느꼈다.
"악의는 없어요. 하지만 새 시대에는 새 질서가 필요하죠. 제국은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시간이 별로 없네요."
한은 그녀의 말이 황태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독백 같다고 느꼈다. 아델의 즉위식의 유일한 청중임이 한은 기쁘다. 한 명의 방해꾼이 아직 남은 걸 제외하면.
"이제 작별이에요. 한."
아델의 말이 끝나자, 한은 황태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쩐지 차오르는 분노는 즉위식에 마지막 남은 불청객을 향한 것이었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한은 그의 심장이 뛰지 않을 때까지 집요하게 목을 조였다.
더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다. 한은 성의없이 시신을 집어던졌다.
아델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다. 아델의 눈앞에는 널브러진 시신들과 파괴된 방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한에게는 단 하나만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우아한 자태. 한은 아델에게 관을 씌우고 탁자를 밀어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한다.
"그대는... 나와 영원히 함께할 준비가 되었는가?"
한이 대답을 대신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한이 먼저, 그리고 처음 키스했던 그 순간보다 더 길게. 둘은 곧 눈을 감았다.
- 아델의 과거
- 어둠에 잠긴 시각, 아델은 가만히 책상 앞에 앉는다. 새벽은 바람마저 잠든 듯 고요하다.
일렁이는 촛불만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잠시 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죽은 그날이.
제국을 역병이 할퀴고 지나갈 때, 귀족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아델을 부르던 그 날이 선명하다. 어린 아델이 바라본 아버지는 수백년을 산 고목 같았다. 몸은 회갈색으로 변해있고, 피부는 자글자글해 얼핏 노인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입을 열던 순간의 쇳소리 같은 저음을 아델은 기억한다.
"아델... 기억해라... 우리 가문의 의무를..."
아버지는 천장을 보며 말한다. 아델은 그런 아버지가 남처럼 느껴진다. 너무나 오랜 세월 떨어진 사람처럼...
가문의 의무. 그것은 아델이 태어난 때부터 아버지가 줄곧 말해온 저주였다.
해방왕이 신들을 떨어트리고 인간에게 에테르를 돌려준 날, 대지가 갈라지고 바다가 요동쳤다. 더이상 사제는 신성하지 않았고 아무런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현명한 선각자들이 모여 사회를 창조하였으니, 루페리아의 시작이다.
"최초의 시대는 영광으로 가득했다. 우리 가문은 가장 현명한 자들로 장로 중에서도 으뜸이었지. 바그너... 그 더러운 자식이 모든 걸 빼앗기 전까지!"
아버지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같은 대목에서 매번 격렬하게 분노했다. 팔현제를 배출한 바그너 가문, 현재의 황가.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는지, 그래서 우리가 왜 지금 학자 가문으로 살아가는지, 왜 우리가 그들을 증오해야 하는지. 몇번이고 몇번이고.
"이제 곧 우리의 시대가 올 것이다."
아델의 혈통인- 폰 볼프강 가문은 학자다운 집요함으로 몇년을, 몇 세기를 기다리며 황제를 끌어내릴 방법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탐구했다. 이제 그 결실이 아버지 세대에 빛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허무하게 떠났다. 불탄 다른 수많은 시체들처럼...
아델은 눈을 뜬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에 잠긴다.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진다. 아버지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한과의 첫만남은 썩 좋지 않았지만, 아델은 한 같은 유형이 싫지 않았다. 내심 가문이니 영광이니 하는 휘황찬란한 수사에 염증이 도져서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피나게 연습한 춤, 무도회, 외교적 수사...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눈에 차지 못하는 자격 없는 머저리들. 가문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존재들... 차라리 식사만이라도 속 편하게 하고 싶었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압박에서의 일탈행위였다.
"아!"
궁술 시간 들려온 비명. 한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활을 들던 아델은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활이 나뭇가지처럼 부러져 있었다. 아델은 한에게 달려가 재빨리 활을 살핀다. 매우 관리가 된 활이다. 그럼에도 부러진... 아차!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델은 슬쩍 활을 챙겨 한을 부축한다. 아무도 신경쓰지 못하도록 시선을 돌리며. 복도에 들어와 아델은 한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머리카락을 하나 뽑고 피를 자신의 옷에 닦는다. 그리고 빠르게 창고로 들어와, 아주 낡은 활을 여러 번 쳐댄다. 열 번 정도에 활이 맥없이 바스라졌다.
'한...'
부러진 활을 들고 아델은 돌아온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교에게 활을 건넨다. 평소와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