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쿠키 레이키(Ms. CLOUD)
- 오늘의 날씨는
- 넋이야 넋이로다
서천 하늘 땅끝
무간 팔만사천 지옥
해꾸지하고 해꾸지당한
서로서로 묶인 넋들
초넋 이넋 삼넋 들어
살아나고 살아나라
아홉 겹 하늘 위로
하얀 새 날아가듯
풀려나고 풀려나라
훨훨 훠이훠이
훨훨 훠이훠이
- 황석영, 바리데기
***
어둠이 내리는 도시를 옥색 눈동자에 잔뜩 담았다.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차다. 레이키는 제 발아래에 깔린 어슴푸레한 전경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이따금 잘게 웃음을 터뜨린다. 동떨어진 곳에서 보는 라오스의 풍경은 언제나 몹시 아름다웠다. 실상 여기서 몇 미터만 아래로 내려간다면 온갖 인간군상이 득시글거리는 소음과 혼돈의 본거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추악한 공간만이 자리하고 있거늘, 고작 구름과 등을 맞댈 정도까지만 올라왔을 뿐인데 이토록 아름답게만 보이다니. 아. 정말 우습고 우습기만 하구나. 잠깐, 그런데 뭐가 우스웠더라. 뭐, 아무렴 뭐라도 우스웠으니 웃었겠지. 무심코 뒤돌아서니 금시에 잊었다.
순식간에 레이키의 흰 얼굴에서 웃음기가 깔끔히 사라진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도시의 야경이 한순간 저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는 괴물의 모양처럼 추악하게 변모한다. 곱게 휘어 웃던 옥색이 삽시간에 차게 굳었다. 의식하지 못한 침묵이 고요한 상공을 짓누르고 폐를 압박했다. 이에 레이키는 한가로이 공중을 한 바퀴 돌며 제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려진 명료한 결론. 아, 내 기분이 나빠졌구나! 결론이 내려진 동시에 희고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이 고요한 상공을 휘저었다.
툭. 투둑.
정확히 17시 정각부터 라오스 수도에 예고되지 않은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량 미친듯이 내리치던 물벼락에 가까운 비는 두 시간 반을 조금 넘긴 19시 45분에서야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구름 위에서 홀로 끽연하며 적요롭게 비를 피하던 외다리의 인영이 두 시간의 화풀이 끝에 결국 질려서 구름을 다 헤쳐버리고 멀리 날아 숨어버린 후에야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이라는 일기예보와 기상 캐스터의 활기찬 음성을 믿은 당신의 순진함을 부디 깊게 원망하시길.
- 피구름
- 먹구름이냐 뭉게구름이냐 안개구름이냐 비구름이냐. 제가 그 중 무슨 구름인지 궁금하다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해가 맑다. 레이키는 짙푸르고 맑은 하늘 위에서 한 가족이 사는 주택의 녹색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아이 둘, 조부모까지 포함해 가족의 수는 여섯이었다. 여섯. 주택과 본인 사이의 거리가 꽤 되는데도 화목한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회색 탁한 구름이 주택 위로 몰렸다. 시나브로 해가 가려진다.
하얀 낙뢰가 녹색 지붕 위로 떨어졌다. 건물이 무너진다.
굉음이 일대를 메운다.
***
한 걸음, 새까맣게 타 버린 시신들을 부러 짓밟고.
" 옛날 옛날에, 겉도 속도 새까만 영악한 개새끼가 있었습니다. "
두 걸음, 새까맣게 타 버린 마룻바닥을 넘어.
" 다만 사회성이 부족해 제 또래를 물어뜯고 제 선생을 물어뜯던 개새끼는 종국엔 제 부모마저 물어뜯고 옥색으로 털을 물들였습니다. "
세 걸음. 다리가 잘리고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아이의 몸 앞에 멈춘다.
" 그러다가 어떻게 됐게? "
저런.. 네 눈에서 비가 내리네. 아직 숨이 끉어지지 않은 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던 레이키는 그리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불시에 아이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들어올렸다.
" 정답. 개새끼는 결국 스스로 죽었어. "
새까맣고 붉고 이리저리 튄 육편이 난무하는 이 공간 속에서 나긋하고 여유로운 음성은 이질적일 뿐이었다. 레이키는 제 손에 들린 작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눈을 휘어 말간 미소를 그려내었다. 정말 끔찍한 몰골이구나.
" 그리고 미쳐버렸지. "
불시에 들어올린 타인의 신체를 또다시 불시에 떨어뜨린 레이키는 제 칼을 꺼냈다. 시퍼런 날에 뜨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레이키는 기어 도망치려는 인영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칼을 휘둘렀다. 새까만 마룻바닥에 붉은 것이 한겹 더 덧씌워졌다.
" 죽어서 다행이야. 모르는 게 약이거든. "
네 걸음. 그을린 자국이 선연한 흰 창문을 딛고 날아오른다.
///
☆쿠키 레이키 6명 살해.
☆주택 반파. 시신 훼손도 심각.
- .Rain
- 1
- *탑승 게이트 곳곳에서는 '사요나라' '톳진스' '굿바이' '잘 가' 그리고 '안녕'이란 말이, 전화하겠다는 말, 편지한다는 말, 그만 들어가라는 말, 울지 말라는 말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크고작은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는 단조로운 모양새를 지켜보는 검은 머리 아이의 옥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었다. 즐겁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례없이 온화한 제 아이의 반응에 어머니는 안도한다. 어딘가로 사라졌었던 아버지가 환히 웃으며 아이에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아이가 마주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 입에 머금는다. 다시없을 평화로운 오후였다.
또 하나의 비행기가 착륙했다. 아이와 가족들의 몸을 싣고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날아가야 할 여객기였다. 아이는 매끈한 기체의 날개와 옆구리를 훑어보며 짐을 챙기다가, 아! 하고 놀란 소리를 낸다. 어쩌지, 휴대폰을 화장실에 두고 왔나 봐. 금방 가지러 다녀올게요. 먼저 타 계세요. 부모는 황급히 뛰어가는 아이의 뒷통수에 대고 서두르라는 말을 던진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10분이 지났다. 여객기의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 서서히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순식간에 얇은 빗방울들이 투명한 유리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이라는 일기예보는 거짓이었는지, 가녀리게 시작한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되려 거세지기만 한다. 톡톡톡 소리가 투둑 투둑 소리로 변모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분이 지났다. 이륙 시간이 미루어졌다. 30분이 지났다.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공항 화장실이 그렇게 멀리 있었던가. 어머니- 여인은 불안한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갈 걸 그랬나.
찾으러 가야겠어. 그렇게 남편에게 일러둔 후 걸음을 옮기려던 여인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창문 너머로 무언가 이상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옥색 눈동자가 가로로 가늘게 좁혀지다, 크게 뜨인다. 지금 이 장소에 절대로 존재하면 안 될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채 이륙조차 하지 못한 비행기가 마구 흔들린다. 다수의 비명이 한순간 공간을 메운다. 떨어지는 짐가방이 머리를 강타해 피가 흘렀다. 강풍 속에 모든 것은 믹서기 속 과일처럼 이리 찢기고 저리 뒹굴며 뒤섞이는 것 이상은 하지 못하였다. 정신도 시야도 흐려지는 의식의 마지막- 그 끝의 끝에서 여인은 다시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공중에 둥둥 떠 입을 양 손으로 틀어막은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쌍의 옥색 눈은 마주쳤다. 그러니까- 어림잡아 한 3초 정도?
***
070606 간사이 국제공항 허리케인 상륙 사건
2007년 6월 6일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에 큰 규모의 허리케인이 상륙한 사건. 당시 수많은 여객기와 공항 차량, 공항 외벽 등이 반파되었으며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했다. 사건의 원인은 당시 가족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에 방문한 쿠키 레이키(당시 14세)의 이능력에 의한 사고로 밝혀졌으며....
그녀는 사건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
*트위터 마지막 문장 봇
- 1.75
- ※Trigger Warning※
※우울, 자해 등의 묘사 존재함※
기록 - 2007. 12. XX
이중능력자 - 누비키네시스(Nubikinesis), 비행(flight)
A. 누비키네시스(Nubikinesis)
: 구름과 안개를 다루는 능력. 상공의 구름을 끌어모아 종류를 변환시켜 비를 내리게 하거나 평범한 구름을 적란운으로 변환시켜 천둥번개, 최대는 허리케인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상으로 구름을 하강시켜 안개화하거나 상공의 구름을 조금만 떼어와 작은 구름으로 만들어 한 사람 머리 위에만 비나 번개를 내리게 하는 것도 가능. 단 없는 구름을 생성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구름을 끌어모아 올 수 있는 범위는 반경 20~30km 내외.
패널티는 우울감 및 스트레스의 증폭. 능력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우울한 감정이 커지며 피해망상증세를 보이거나 신경이 예민해지는 양상을 드러낸다. 정도 이상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을 경우 일정 기간 의식불명•무력화되는 것을 확인.
B. 비행(Flight)
: 사이코키네시스(Psycokinesis)의 일종. 다만 본인의 신체외의 것은 띄울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를 둘 수 있다. 특수장비 없이 떠오를 수 있는 높이는 인간의 신체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산소가 존재하는 구간까지가 한계이며 능력 사용 중 이동의 피로도는 빨리걷기와 비슷한 정도로 누적된다.
- 국제 이능력 관리기구 ISMO
***
" 테스트 하나 하겠다고 이런 외진 섬까지 오다니. "
" 그럴 만도 하지. 날씨를 조작하는 능력이잖아? 나라 안에서 행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게 될 걸. 왜, 팡정에서 일어났던 마을 단위 집단 최면 사건만 봐도.. "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연구원들의 목소리가 그저 거슬려 누운 채로 입에 대고 있던 호흡기를 떼어냈다. 손가락에 힘이 전혀 없었다. 아, 죽고 싶다. 어디까지 날아갔었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죽은 옥색 눈동자 두 개가 흰 벽을 따라 올라가다 백색 전등에 닿았다. 창문이 없는 흰 공간의 온도는 외부보다 더욱 낮았다. 입김을 불면 하얗게 뭉그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자극적인 백색 불빛에서 눈을 돌리고 제 손목으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곧잘 시야에 들어온 얇고 희여멀건한 손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로 돌아누운 레이키는 바짝 짧게 깎인 손톱을 부러 세워서 피부를 긁어 파내기 시작했다. 일전에 제 피를 뽑으려던 한 연구원의 얼굴에 상처를 낸 이후로, 더불어 이능력 사용 시 나타나는 부작용이 우울감과 스트레스의 증폭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이후부터 더더욱 레이키에게 길게 기른 손톱은 허용되지 않았다.
허나 손톱이 짧든 말든 아예 뽑히지 않는 이상 힘을 주면 상처를 내지 못 할 것도 없다는 걸 증명하듯이, 몇 번의 찡그림과 소리없는 비명 몇 차례가 지나가면 창백한 손목은 머지않아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어버린다. 몸 밖으로 슬슬 빠져나가는 적은 양의 핏망울들을 바라보며 레이키는 순간적으로 기이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지만서도.
콜록. 저도 모르게 마른기침을 뱉어낸 레이키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공황이 찾아들자 시야가 흔들렸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저 흰 가운차림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칼을 들고 달려와 자신을 수 차례 찌를 것 같다는 출처모를 공포심이 떠나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 -그래서 이거야? 우울감 및 스트레스의 증폭, 피해망상증세... 왜 영향이 정신 쪽으로 가지? "
" 난들 알겠냐. 그걸 알아내는 게 우리 일이잖아. "
" 너한테 물어 본 거 아니거든. 그냥 혼잣말이었어. "
다만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새어들어온 바깥 공기에 조금은 가라앉았을지도 모르겠다. 레이키는 애써 숨을 몰아쉬곤 홀로 공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제 손목의 상처를 손끝으로 마구 헤집었다. 먼 곳에서는 금속이나 약병 따위가 부딪혀 챙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실험 목표는 부작용을 억제하거나 없앨 수 있다면 이능력이 발전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거지? 근데 받아온 약이 영 뭐한데. 이거 진짜 써도 되는 거 맞아? "
" 안 될 건 뭐야. 이것보다 더한 것도 많이 했으면서 뭘 새삼스레. "
" 찜찜하잖아. "
" 찜찜은 무슨 얼어죽을. 빨리 가지고 와. "
정정한다. 챙강거리는 소리는 제법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것이었나보다. 한순간에 상처를 내지 않은 팔에 끈이 묶인다. 다행이야, 상처 낸 쪽은 주삿바늘 자국이 하도 많아서 더 늘리기 싫었는데. 의외로 얌전한 레이키의 반응에 긴장했던 연구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레이키는 눈을 감는다.
극상의 쾌락이 전신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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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약물: 메스암페타민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 '가상의' 마약류 각성제
- 2
- (--)가 여닫히는 느낌 -기실 느낌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 지나가고, 결국엔 전신 여기저기에 깊게 남아버린 흉터를 강박적으로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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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끝도 없이 달리던 다리에 파편이 튀어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조금 짧은 애매한 길이의 붕대로 겨우 묶어 지혈한지도 벌써 40분이 지났다. 강하고 더운 바람이 한순간에 불어닥친다. 하나로 내려 묶은 긴 옥색 머리카락이 대지로부터 날아오른 모래알들과 엉켜 위로 휘날렸다. 소녀는 제 군홧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성, 폭음, 비명소리, 소리, 소리들. 아주 지옥도가 따로 없네.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을 바라보는 소녀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저격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스코프 상에서 보이는 범위 내로 재빠르게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타깃을 따라 공중에서 위치를 조금씩, 조금씩 옮긴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십자선 중앙에 타깃의 머리가 맞춰질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언제라도 한 사람의 머리를 완벽히 날려버릴 준비가 된 소녀의 표정은 몹시도 차분했다. 끼릭, 방아쇠가 움직이는 작디작은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없이 숫자를 허공에 소근댄다.
3, 2, 1.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타깃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추하게 붉은 것을 흩뿌리며 와르르 무너진다. 그제서야 총구를 내린 소녀는 방금 전 격발한 무거운 총기의 반동 탓에 조금은 얼얼해져버린 팔로 무전기를 들었다.
11, 클리어.
다소 나른한 기운을 품은 또박또박한 음성이 무전을 타고 전달된다.
2011.XX.XX
- 탈옥 - Ms. CLOUD
- 너무 오래 걸으면 피로가 누적되어 피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지나치게 오랜 비행 또한 그만큼의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다. 레이키는 피곤한 눈꺼풀을 느른히 감았다가, 천천히 뜨길 반복했다. 별이 종종 박힌 도시의 밤하늘을 공중에 낮게 뜬 채 올려다보던 옥색 눈동자가 피로와 졸음에 잠겨 가라앉는다. 혹여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에 대한 로망을 품은 자가 있다면 일찌감치 접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라고 조언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비행 중의 체력 소모는 단순히 걷는 것 이상이었으니.
그나저나, 참 잘도 밟아 터뜨려 죽이더라. 까딱했으면 약속이고 거래고 뭐고 휘말렸을지도 모르겠다. 레이키는 더 이상 인간의 시신이라고 할 수도 없었던 피투성이의 무언가를 떠올려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뭉그러진 시신의 모양이 지독히 불쾌했던 탓이다. 나름대로 볼것 못 볼것 가리지 않고 보면서 살아왔고, 심지어 대다수는 본인이 만들어 온 것이었으니 비위만은 제법 봐줄 만하다고 생각했거늘 이러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나. 졸음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한적한 골목길의 적요로움 속에서 레이키는 무심코 실소를 흘렸다. 아주아주 멍청한 거래를 해 버렸네. 어쩐다. 생각없이 들어 눈을 비비려던 손이 아렸다. 레이키는 그제야 잔뜩 덧난 제 손목의 상처를 똑바로 마주한다. 정신이 없어서 다쳤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네. 부러진걸까, 도통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도 피는 멎었으니 됐지 뭐. 부러지지 않은 방향의 손으로 허리에 찬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은빛 칼날이 흰 달빛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난다. 예쁘다. 이렇게나 예쁘고 오랜 기간동안 쓸모있었던 무기를 버리고 올 순 없었지. 잘 챙겨서 다행이다.
" 그래서 거기 누구야? "
별에서 달로, 달에서 칼날로 미끄러지던 옥색 시선이 비로소 어깨 뒤를 넘겨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인가? 차갑던 무표정에 나른한 미소가 어렸다. ISMO? 아니, 이미 공식적으로 두 번이나 죽어버렸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뭘까. 어디 물어라도 볼까? 아냐,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물어봤자 의미가 있던가? 다이어리는 그 경찰- 아니, 그 히어로와 만나기 전부터 잊어버린지 오래였고. 끉임없이 자문하던 레이키는 문득 제 칼의 날을 부러진 손의 힘 빠진 약지손가락으로 길게 훑어내렸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닿은 손가락에서는 붉은 것이 후드득 후드득 비를 뿌리듯 흘러내린다. 찬 공기에 노출되어 금세 식은 금속은 시원한데다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웠다.
" 내가 조금만 더 눈치가 없었어도 좋았을텐데. 아쉬워라. "
노곤한 웃음소리가 밤공기 구석구석으로 흩어진다. 손을 하나밖에 못 써서 평소보다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
쿠키 레이키 5명 살해
- .Hello, I'm ■■ :D
- 사람의 팔다리를 벽에 매단다. 찌익, 찌이익. 테이프 찢어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얼마나 붙이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떨어져도 뭐 어때, 중요한 건 유사성이지. 유사성. 모방범죄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 Hello, I'm
피 묻은 손바닥의 움직임이 잠시 정지했다가, 편안한 미소와 함께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Hello, I'm 11
라오스에 살았던 1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담기 좋은 시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째서인지 이 지긋지긋한 건망증의 영향을 비껴간 이야기는-
쿠키 레이키 5명 살해.
- .Massage
- 손바닥을 온통 덮은 붉은 것을 기울어진 고개와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늘은 작은 구름 한 점이 없이 깨끗했다. 비라도 내리게 할까, 비를 맞아서 온 몸에 묻은 이것들을 말끔히 씻어내려버릴까- 고민하던 머리는 이내 불어닥친 한 줄기 찬바람에 일시정지한다. 아니야, 비는 무슨. 이런 날씨에 비를 맞으면 틀림없이 병이 날 거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 아가씨는 높다란 고층 빌딩의 옥상에 내려앉았다. 보여? 이곳에서, 혹은 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가령 구름 위라던지- 세상의 전경을 보면 생각보다 더더욱 모든 게 하잘 것 없고 한없이 작아 보여. 개미처럼 작은 자동차들, 먼지만한 사람들, 손톱만한 주택들, 그보다는 크고 높은 아파트들. 모든 게 내 발아래에 놓인 것 같아서 밟으면 전부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아. 누굴 향해서, 누굴 위해서 말하는 걸까. 곁에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때 처치하지 않은 손목이 간헐적으로 아려왔다. 자업자득이야. 후회해보았자 이미 늦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제가 자초한 일이다. 말라붙어 검붉게 변모한 피의 색상을 이리저리 집요하게 훑던 옥색 시선은 문득 하이얀 별이 종종 박힌 하늘로 떠올랐다. 아니, 그 눈은 기실 하얀빛의 별무리보다는 그 뒤의 묵색을 보고 있었나. 끝도 없이 드넓게 펼쳐진 묵색은 제법 정겨웠다. 한때는 나도 저런 묵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꼭 저처럼 애매한 색감을 띈 촉촉한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피가 말라붙은 손가락으로 살짝 꼬았다가 풀어두었다.
이것 봐, 인간이 기본적으로 손을 두 개 달고 태어나는 이유가 있다니까. 한 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이 감각이 불쾌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외다리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도 느꼈던 감각이 한순간 레이키를 덮쳤다가 사그라들었다. 지금은 아니야.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하자 찌릿한 두통은 곧잘 위협적인 탄환이 되어 뇌를 관통해갔다. 이에 잠시 질끈 감았던 눈꺼풀과, 가려졌던 두 눈동자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서히 고개를 들 수 있었고. 아 참.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지. 조금 전 테이프로 붙이던 사람의 주머니에서 떨어져나온 스마트폰은 촌스러운 디자인의 새하얀 케이스에 갇혀있었다. 레이키는 붉어진 한 손으로 액정을 무심하게 터치했다. 와, 비밀번호나 패턴도 없어? 누군진 모르겠지만 잘했네. 만일 그런 게 걸려있었다면 풀 생각도 않고 이 아래로 던져버렸을테다. 끝이 살짝 부러진 긴 손톱이 거슬렸다. 시간이 나는대로 손톱부터 잘라야지. 곧 잊어버릴 다짐을 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메세지 앱을 눌렀다.
자고있어
?
이것 봐, 인간이 기본적으로 손을 두 개 달고 태어나는 이유가 있다니까. 수없이 반복되는 오탈자의 퍼레이드와 그것들을 겨우겨우 지워내는 뒤로가기의 반복이 적어도 수십번은 반복된 후에야 간단한 문자 두 개를 보낸 레이키는 후, 하고 묵직한 한 호흡을 뱉어내었다. 짜증나네.
☁️☁️☁️☁️🌬
🐱
해서 의미 없는 이모티콘으로 장난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휴대폰을 부숴버리려다가-
" 아. "
나 아직안ㄴ
아직 안 죽었어
또 오타. 열불이 나는 것을 우선 미뤄둔 레이키는 남은 메세지를 마저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만큼 도중에 생각을 수정할 텀은 얼마든지 있었지.
잘자 미스터. 전화해줘.
딱 오늘 하루만 부수지 말아볼까. 전송. 휴대폰의 벨소리 음량을 최대치로 올린 레이키는 기기를 옥상 위 아무곳에나 대충 올려둔 후 다시금 도시의 야경을 한 눈에 담았다. 지독하게 일관적이다. 모든 행동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부분에서 더욱, 의미를 두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러니,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어, 그러고보니 전화번호는 어떻게 외웠더라. 짤막한 의문은 터지고 사라지는 불꽃놀이의 불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뭐, 기실 뭐가 중요하겠어. 야경이 아름답다.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 .Light Out
- 이만큼 완벽한 증거 인멸이 또 어디에 있을까? 부수기 직전 메세지 내용을 포함한 전화번호를 삭제, 그 외에도 등록되어있던 타인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 SNS 로그아웃, 무선인터넷 연결 차단, 이미지 파일 삭제, 문서 파일 삭제, 기본적으로 설치되어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제외한 모든 기타 애플리케이션 삭제. 추위에 얼어버린 한 손으로 딱딱한 액정을 이리 누르고 저리 밀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지워버린 레이키는 상공에서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난 휴대폰 조각들을 주워다 낼름대는 불길 속에 던져넣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하다. 아마도.
그리고, 다시 찬 바람이 분다. 목 뒤로 흐르는 오싹하고 서늘한 감각에 레이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발생하는 소규모의 잔바람과 닮은 그것이 싫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모방하듯 은회색 머리칼 위로 어둡게 드리운 먹구름들이 떼를 지어 침울해했다. 가만보자, 여기 계속 서 있으면 죽을 수 있을까. 벼락을 맞아 온 몸이 새까맣게 타들어서 죽을 수 있을까? 혹은 바싹 탄 검정색 분이 되어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될까? 운이 너무 좋아 흉만 남고 살아버린다면 그만한 벌도 없을텐데. 기실 당장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혹시 그거 알아? 우울이란 원체 독약과 같아, 귀신처럼 갑갑한 심정의 환자를 찾아서 기어들어와 강제로 입을 벌리고 허락하지 않은 목구멍 안쪽까지 제멋대로 스며들어 물렁한 뇌를 악독하게 잠식하고- 그대로 한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합리한 방향으로 끌어내리는 교활한 것이라는 걸. 아, 다시 읊어봐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비유다. 생각은 이만 하도록 하자. 기왕 열심히 구름들을 끌어모아뒀는데, 이러다가는 자살 용도 외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겠어. 이런 거대한 무력으로 고작 쓰레기 하나 짓밟는 건 심각한 낭비잖아. 그러니 그만두자. 레이키는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하나 둘 셋 넷. 의미없는 숫자를 중얼거리고.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의미없을 숫자를 중얼거리고. 열, 열하나. 의미가 없어야 할 숫자를 중얼거렸다.
" Show Time. "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적요로운 상공을 메웠다.
***
....금일 17시 15분, 낙뢰가 송전탑에 떨어져..
..17시 17분, 송전선이..
....17시 20분, 토네이도가 Z회사 사옥을 덮쳐..
쿠키 레이키 Dice(200,240) value : 208명 살해
금일 17시 22분부터 라오스 수도에 1시간 동안 정전이 일어납니다. 송전탑 몇 곳에 벼락이 떨어져 전선이 다수 끉긴 것 등이 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