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히어로 vs 빌런?
"글쎄,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1. 외모 ¶
검은색이라기도, 회색이라기도 애매한 잿빛 색의 머리카락은 목덜미까지 깔끔하게 잘려져 있는 단발이다. 주로 자신이 내킬 때 가위로 멋대로 자르기 때문에 전체적인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삐뚤빼뚤하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 듯. 주로 반 묶음으로 묶고 다닐 때가 많으며, 전투 시에는 꽁지머리.
머리색보다 한참 옅은 색의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큰 눈에 눈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으며 송곳니가 유난히 뾰족하다. 전체적으로 장난기 많아보이는 고양이상.
복장은 주로 민소매로 되어있는 검정색 크롭탑에 진청 색의 스키니를 입거나, 검정색의 츄리닝 레깅스를 주로 입는다. 전체적으로 달라붙는 옷을 좋아하는 듯.
날씨가 추워지면 그 위에 검정색의 져지나 청자켓을 걸친다. 신발은 컨버스.
오른쪽 입술 끝부분에 검정색 링 피어싱을 하고있다. 팔이나 배, 이마 등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는 흉터들이 가득하다.
머리색보다 한참 옅은 색의 회색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큰 눈에 눈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으며 송곳니가 유난히 뾰족하다. 전체적으로 장난기 많아보이는 고양이상.
복장은 주로 민소매로 되어있는 검정색 크롭탑에 진청 색의 스키니를 입거나, 검정색의 츄리닝 레깅스를 주로 입는다. 전체적으로 달라붙는 옷을 좋아하는 듯.
날씨가 추워지면 그 위에 검정색의 져지나 청자켓을 걸친다. 신발은 컨버스.
오른쪽 입술 끝부분에 검정색 링 피어싱을 하고있다. 팔이나 배, 이마 등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는 흉터들이 가득하다.
키는 158cm에 크진 않지만 생각 외로 굴곡진 몸매에 비율이 좋은 편이라 어린애 같거나 하진 않다고 본인은 생각 중. 배꼽을 내놓고 다니는 이유는 잔근육을 자랑하기 위해, 라고 당당히 말한다.
2. 성격 ¶
귀찮음이 굉장히 심하고 순 제멋대로이다. 그에 더해 무인도에 버려놔도 혼자 굉장히 잘 살아갈 수 있을 듯한 잔머리와 능글거림이 수준급.
남의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해본 적이 드물고, 그냥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에 맞춰 별명을 지어 부르거나 특징을 잡아 부를 뿐. 사람을 신뢰하거나 좋아한다는 감정이 들어 본적이 드물고, 동정심이나 공감 능력도 떨어지는 편.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도 싫어하고 사회생활도 그다지 못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성격으로 어떻게 잘 빠져나가며 살고있다. 본인 위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길고양이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마냥 싸이코는 아니라고. 흥미있는 것이 생기면 과하게 집착한다.(다갓 공인 머루 고양이 쓰다듬 횟수 8nn번)
남의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해본 적이 드물고, 그냥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에 맞춰 별명을 지어 부르거나 특징을 잡아 부를 뿐. 사람을 신뢰하거나 좋아한다는 감정이 들어 본적이 드물고, 동정심이나 공감 능력도 떨어지는 편.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도 싫어하고 사회생활도 그다지 못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성격으로 어떻게 잘 빠져나가며 살고있다. 본인 위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
길고양이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마냥 싸이코는 아니라고. 흥미있는 것이 생기면 과하게 집착한다.(다갓 공인 머루 고양이 쓰다듬 횟수 8nn번)
3. 이능력 ¶
무효화
신체 접촉하고 있는 상대방의 능력을 발산하지 못하게 무효화시키거나 투사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공격을 신체에 닿게 하여 없앨 수 있다.
본인은 치료든 저주든 능력에 관해선 일절 능력이 통하지 않고 능력이 몸에 닿으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다만 물리적인 공격은 통한다. 사람끼리와의 신체 접촉으로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대상이 옆에 있기에 물리적 공격을 당할 리스크가 크고, 오로지 몸으로만 막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인간방패.
자신의 체구보다 작은 크기의 능력은 아무렇지 않게 무효화 가능하지만 건물 한채 처럼 범위가 큰 능력을 무효화 하려 한다면 금세 탈진 상태가 된다.
신체 접촉하고 있는 상대방의 능력을 발산하지 못하게 무효화시키거나 투사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공격을 신체에 닿게 하여 없앨 수 있다.
본인은 치료든 저주든 능력에 관해선 일절 능력이 통하지 않고 능력이 몸에 닿으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다만 물리적인 공격은 통한다. 사람끼리와의 신체 접촉으로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대상이 옆에 있기에 물리적 공격을 당할 리스크가 크고, 오로지 몸으로만 막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인간방패.
자신의 체구보다 작은 크기의 능력은 아무렇지 않게 무효화 가능하지만 건물 한채 처럼 범위가 큰 능력을 무효화 하려 한다면 금세 탈진 상태가 된다.
4. 기타 ¶
부모님의 이름조차 모르는 고아였고, 고아원에서 멋대로 지어준 성은 버렸다. 학교는 아이들의 심한 따돌림에 일찍 자퇴했고 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양아치짓을 하다 히어로에게 걸려 제압당하던 중 우연히 능력의 존재를 처음 깨달았다.
능력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다른 능력자들을 속이고 협박하며 돈을 뜯는 등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것을 눈여겨보던 빌런에게 또 붙잡혀 돈을 전부 다 뜯기고 빌런에 들어오면 돌려준다는 조건에 어거지로 빌런이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터라 히어로 놀이든 악당 놀이든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을 파괴한다던가 그런 것은 상당히 귀찮지 않냐고, 세상을 파괴하는 것보단 본인이 죽는 게 본인의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니 빠르고 간편하지 않나? 정도. 그리고 그것을 굳이 막겠다는 히어로도 세상 참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 중.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나머지는 민간인들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라 평소엔 정말 민간인이라고 남들을 속이고 다닌다. 뒷골목에서 생활했다보니 상당히 민첩하고, 맷집이 쎄다. 살기 위해 단련된 몸 덕분에 힘도 생각보다 강한 편. 평범한 성인남성과 맨손으로 싸웠을 때 이기진 못하더라도 질질 끌려가진 않을 정도. 호신용으로는 진짜 총 같은 BB탄총과 수술할 때 쓰는 매우 날카로운 메스를 가지고 다닌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스스럼은 없지만 귀찮은 일은 지양한다.
누구에게나 일관적으로 반말을 쓴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길 고양이나 길 강아지들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아 친구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은 굳이 말하자면 라면.
4.2. 독백 ¶
- Normal
- 머루는 어느정도 아물은 허벅지를 빤히 내려다보며 앞은 주시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하지만 꼭 이럴 때 누군가와 부딪혀 버리지. 머루는 대충 고개를 까딱하고서 다시 방향을 틀어 제 갈길을 가려는데, 다시 한번 또 그 상대방에게 부딪혀 앞길이 막히자 머루는 인상을 있는 힘껏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래서 골목길을 좋아해.
"하아, 고개 까딱이 아니지."
시비가 잘 붙거든. 큰 키와 온몸이 문신으로 덮여있으나 근육이라곤 볼 수 없는 다소 마른 남성이 꽤 뒤가 구린 얼굴로 기분 나쁘게 웃으며 머루의 뒤통수를 힘으로 세게 억눌렀다. 90도를 바라는 듯한 그의 행동에 머루는 찌푸린 얼굴로 그의 손을 세게 쳐냈다.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 시전하려던 그의 얼굴은 곧 물음표로 가득 찼고, 무어라 지껄였지만 그런 걸 머루가 귀담아들을 리가. 능력 하나만 믿고 깝치는 부류 같은데, 나는 그런 너네를 너무 좋아해.
"삼초."
3--. 머루는 잔뜩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귀찮으니 대꾸하고 싶지도, 상대하기도 싫다는 뜻으로 최소한으로 내뱉을 수 있는 숫자를 느릿하게 던졌다. 답지 않게, 평소 같았으면 오글 거린다고 했을만한 카운트 다운이지만 편한 건 사실이잖아. 좋게 타일러 보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 멍청하고 더러운 부류를 좋아하지 않아서, 오늘은 네 운이 없었던 걸로 하자. 주제도 모르고 얼빠진 얼굴로 멍청하게 서있던 그는 머루의 카운트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그녀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2--.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벙찐 얼굴로 코에서 두 줄로 흐르는 액체에 질겁한듯 보였고, 머루는 그런 그를 보고 다시 숫자를 읊었다. 이쯤 하면 잘못 걸렸구나 싶어 도망갈만도 한데. 그는 자존심이 구겨졌는지 다시 머루에게 달려들었고, 머루는 재빨리 품속에서 메스를 꺼내 달려드는 그의 복부를 깊게 찔렀다. 요즘 세상은, 미쳐 돌아가서 착한 사람만 있는게 아니란 말이야. 응, 왜 몰라? 무기 들면 안돼? 아니, 방심한 네가 멍청한거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진짜 총이 아닌 장난감총 따위를 들고다니면서 남의 비위나 살살 긁는다던가, 질척거리지 않고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총을 쓰지 않는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이런 걸 뭐라더라.
일-. 세상 물정 모르고 인생을 편하게 살다 처음 느껴보는, 차가운 날붙이가 몸속으로 매끄럽게 파고드는 느낌에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고도 머루는 메스를 더욱 뒤적이다가, 발버둥 치는 그가 역겨워 그대로 발로 힘껏 멀리 차버렸다. 그는 찔린 부위를 움켜쥐고서 피를 마구 뱉어냈고, 머루는 튀긴 피에 혀를 쯧 차며 그가 헝클인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쓰러진 채 욕설을 내뱉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그에게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늘 그랬듯이 그의 지갑을 꺼내 민증같이 잡다한 것은 멀리 내다던져버리고, 현금을 꺼내어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 일어나 그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휴대폰액정은 마구 발로 짓밟았다.
"...왜 ..능,력..이"
"와, 이제 추위에 떨며 죽을 일만 남았네."
아니면, 벌레처럼 기어가서 도움을 요청할래? 네가 어떻게든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재밌을 거 같지만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살고 싶은 마음에 마구 소리를 지르는 그가 시끄러워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네가 운이 좋다면 어떻게든 일어나서 살아남겠지만, 아니라면야. 꽤나 연약했던 그는 그렇게 복부를 조금-, 찔렸다고 일어나지 못하고 비명만 지르는 폼이 꽤 우스웠지만 더 이상 듣고있자니 화가 날 것 같네.
머리가 윙윙 울리는 듯하여 머루는 시끄럽게 짖고있는 그의 복부를 한 번 더 걷어 차준 뒤 침을 뱉고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뒤통수가 상당히 따가웠고 뒤처리를 마저 하지 않은게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죽이진 않았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으려나. 어차피 CCTV도 다 부숴져있고, 이런 일도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이곳에서 머루의 영향력이란 애들 장난 정도겠지. 머루는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조금 웃었다.
- Nomore
-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유 없이 스트레스가 최대치를 찍는 날, 원인 모를 짜증이 솟구치는 날. 충동이 모든 걸 짓누르는 날. 한 달에 한 번이라기엔 주기가 일정치 않고, 그렇다고 잦다고 하기엔 너무 뜸하다. 우울이 모든 것을 뒤덮는 날. 그런 날 머루는 어딘가 처박혀 숨어있으면 좋을 텐데, 꼭 밖으로 굳이 기어나와 그것을 태우며 우울함을 달래보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아. 연기로 가려진 시야는, 흐리멍덩해져 무엇을 응시하는지, 무엇을 갈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이런 식 이었지."
흐릿해진 초점을 맞추기 위해 느릿하게 두 눈덩이를 깜박이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면, 인적이 드문 광장.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 그냥 그렇게 누워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붉게 물들어 있는 시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부비적 거려보면, 따끔한 감각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된다.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깃덩어리 위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마침 길을 지나가다 광경을 목격하고 마구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나. 경찰에 신고하며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코를 찌르는 비릿한 쇠 냄새와 입에 남아있는 이물감에 조금 오물거려보다 찍 내뱉었다. 붉은 덩어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입가를 문질러 닦아보고, 공허한 두 눈으로 두 손을 내려다보면 잔뜩 묻어있는 붉은 것이. 아니, 그 두 손은 이미 태초부터 붉었다는 듯이. 주륵,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손이 네 개로 보이고, 점점 까맣게 잠식되어서 의식과 멀어지는 시야는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힘없이 휘청거리는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쳐박은 채 땅을 힘겹게 손으로 짚고 있다 보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운 구토감에 저항 없이 그대로 모든 걸 뱉어낸다.
깨질듯한 머리에선 눈물인지 땀인지 그 외의 것인지 모를 액체는 자꾸만 흘러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다리에는 이미 감각이 없고, 복부는 움직일 때마다 수 백 개가 찔러오는 듯한 고통에 입이 달려 있었다면 이미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을 듯하다.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죽은 듯이 꼼짝 않고 누워있으면, 무한한 심해 속으로 끌려들어가 침강하고 있는 것만 같다. 힘겹게 감았던 눈을 떠보면, 붉게 뒤덮여있던 시야가 무색할 만큼 검게 물들어있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들 사이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금씩 빛을 내비쳐주는 달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아까부터 쥐고 있었던 권총의 총구를 머리 쪽으로 힘없이 겨냥해 보는 것이다.
"살고 싶네~"
그치만 무척이나 죽기 좋은 날이야.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느릿하고도 정확하게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지겨운 굴레에서 벗어나야지. 어쩜 나는, 빌런이라는 멍청한 꼬리표를 달고서도 항상, 이렇게, 무식하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늘 그랬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킥킥 웃으며 들고 있던 권총을 저 멀리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은 너무 식상해. 그러니 애초부터 운명 따위 없었던 걸로 하자.
심한 갈증을 느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질척거리는 붉은 것을 손에서 털어냈다. 털어내질 리가 없지만. 충돌해오는 현기증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무작정 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넘어져도 일단 살아남아 버렸으니 마저 살아줘야겠지. 잃어버린 머리끈, 초점 없는 눈, 역한 비린내, 여기저기 성한 곳 없이 꽤나 그로테스크한 부상들은 늦은 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적합했다. 검은 옷을 좋아하는 이유가 붉은 색이 묻어도 잘 티가 안난다는 점이 좋았는데, 오늘은 그다지 의미가 없네.
벽을 짚고 걷는 건지 기는 건지 모를 속도로 끊어지기 직전인 정신줄을 붙잡고 걷다보면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한 백색 빛에 눈이 부신 큰 병원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다니. 책임이라는 무게에 조금 웃음소리를 내보았다. 이런 꼴로는 택시를 탈 수도 없기에 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해 본다. 자전거는 괜찮으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조금 하며 밝은 병원을 지나 다시금 어두운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끝없이. 걷고 또 걸어서, 목적과 정처 없이 아무렇게나 무자비하게 살아온 삶. 그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보고, 죽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것은 이미 태초부터 까맣게 그을려져 그딴 게 있을 거 같냐며 마구 비웃던.
이젠 정말 내 몸이 맞나? 싶은, 전신을 덮쳐오는 고통들은 아직 내가 죽지않고 숨이 붙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 나는 이걸 좋아했었지. 항상 마지막은 같았다. 웃는 거야, 활짝.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공백이었는지, 쉼표였는지, 마침표였는지.
머루로써는 알 도리가 없다. 그래 사실, 내가 진정 원하던 건--.
- Trigger
- 사람은 연약하다. 발달한 의학 기술 덕에 웬만한 병으로는 쉽게 죽지 않아 생각보다 강한데? 싶기도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으로는 어쩜 그리도 연약하던지. 머루는 tv 뉴스에 나오는 최근 히어로들의 활약을 자랑스럽게 내뱉는 리포터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아물어가는 복부에 대충 굴러다니는 연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요즘 히어로들의 실적이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그와 반대로 빌런은 죽은 듯이 잠잠하다. 무엇이 문제였나 생각해보지만 딱히 명확하게 답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웃해보며 붕대 끝자락을 가위로 잘라내었다. 물에 젖어 떨어져 나간 밴드도 다시금 붙여주고, 얼굴에 난 상처가 흉이 지지 않게 메디폼 따위도 다시금 붙여보고. 깨져있는 거울 사이로 머리를 묶던 머루는 방긋 웃었다.
그리곤, 연약해 빠져서 얼굴 따위는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를. 이제는 하늘나라에 있을 법한 옛 동료의 먼지가 쌓인 방에 문을 따고 들어가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상자를 대충 뒤지니 금방 나오는 smg이라던가, sr 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대충 뒤로 던져놓고-. 저격이라니, 너무 폼 잡는 거 같잖아? 결국엔 수류탄과 소음기를 낀 권총 한 자루, 망원경을 챙겨 들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야겠지, 귀찮은데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으려나.
-
--전방에 사고 다발 구간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웬일로 택시에 몸을 싣고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어디론가 한참을 달리던 머루는, 택시 내비게이션에 흘러나오는 맑은 목소리를 듣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택시기사의 어깨를 톡톡 건드려 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그대로 쏴버릴까 했지만 총알 낭비라는 생각에 그냥 지폐를 쥐어드리고 잔돈은 무시한 채 택시에 내렸다. 커브 길이 잔뜩 나 있는 높은 절벽 위에서, 많은 차들이 달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이사이를 여유롭게 거닐던 머루는 까맣디까만 절벽의 아래를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경치 좋은걸!
주변을 둘러보다 도로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중 적당히 높은 위치를 찾은 머루는, 그곳에 앉아 한쪽 손엔 망원경을 들고, 한쪽 손에는 빵 쪼가리나 든 채 그냥 무작정 하염없이 기다렸다. 뭐 아무것도 안 지나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겠네! 이대로 내가 뛰어내려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은 악당의 편이었나? 체감상 30분쯤 지난 것 같았을 때, 멀리서 머루의 망원경 안에 들어온 것은 머루의 눈을 잔뜩 휘게끔 만들었다.
처음 머루의 생각은 간단했다. 그저, 지나가는 화물 트럭이나, 어디 동창회 모임을 가는 관광버스가 지나가면 커브 구간에서 가볍게 총으로 바퀴를 터트려 떨어뜨릴 생각이긴 했는데. 이렇게 우르르 지나가 줄줄은 몰랐지. 마침 다른 차선의 도로는 한가하기 까지! 누가 타고있는지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비슷한 색들로 줄줄이 이어진 긴 관광버스들이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워지자 머루는 몸을 영차, 움직였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너희들이 운이 더럽게 나쁜 건지. 사실 상관없는 얘기지?
근처에 있는 cctv를 사각지대에서 권총으로 쏴버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도로 한복판에 선 채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분명 커브 길에선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아마 집으로 빨리 데려다주고 싶었던 걸까? 결국 금방 버스와 마주하게 된 머루는,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란 버스 기사에게 활짝 웃어주고, 당황하여 급하게 핸들을 돌리는 기사님의 선택에 박수를. 뭐 브레이크를 밟았어도 뒤에 오는 차량이랑 쾅 해버렸겠지만 말이야. 내가 버스 기사 따위였다면, 이런 일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쳐버렸을 텐데, 안타깝네. 여러모로--.
다수의 비명과 함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버스와, 앞 버스의 사고에 충격을 먹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급브레이크를 밟는 뒤 차량, 그 차량을 세게 박아버리는 세 번째 차량. 아슬아슬하게 사고는 면한 마지막 차량.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린 사고 현장과 함께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비명소리에 머루는 귀마개라도 챙겨 올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되고. 그래도 역시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선물을 전해주고 떠나려 했다.
왜 이런 짓을 벌이냐고 묻는다면...어, 분발하세요? 쉴 타임이 어딨습니까?..사실 그런 거 있을 리가 없잖아. 머루는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비엔나처럼 늘어져있는 버스의 쪽으로 멀리 던지고서 반대쪽 갓길로 온 힘을 다해 뛰었다. 4, 3, 2, 1. 꽈광. 뒤돌아 뛰면서 보는 그 광경은 꽤 볼만했다지. 귀를 찢을 듯한 비명과 함께 터져나가 굴러떨어지는 버스들은 당장이라도 머루를 위협해 올 것만 같았기에 머루는 얼른 뛰쳐나와 사고현장에서 막 살아남은 불쌍한 민간인인 마냥 저 멀리 반대편에서부터 오는 개인 차량 하나를 붙잡고 울먹였다.
"살려주세요!" 하고.
- Terror
- 날씨가 상당히 춥다. 한기 가득한 바람은 이제 완연한 겨울을 알려주고 있으니 곧 눈이 쌓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네. 더 추워지기 전에 얼른 움직여야겠지. 그런 머루의 옷차림은 웬일로 불편하다고 평소엔 입지 않을 검은 정장차림 이었으며 어째선지 가슴 밑까지 흘러내리는 검정 머리카락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당연하지, 가발이니까. 큭큭 웃으며 길어져 버린 머리카락을 조금 만지작거려보다, 정해진 시간이 가까워져 간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검정색 선글라스를 꼈다. 민간인에게 정체가 탄로 난다는 건 너무나도 큰 리스크지, 아직까지 놀이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너무 이르다. 이럴 땐 멍멍이의 재력이 참 유용하다는 생각을 하며, 안절부절 못하던 그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가도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이 가득한 머루였기에 금방 지워버렸다.
"생각보다 부하를 잘 뒀는데."
예상외로 일이 번져버려서 모인 인원이 몇명이더라. 리마, 하나비, 세이지, 유 형수.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조금 웃으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유치하게 시작 전에 한곳에 모여 작전 타임이라던가 하는 그런 시간낭비 적인 짓은 간단하게 생략하고. 각자 잘 전달받았을 간단한 작전과 일회용으로 쓰이고 말 무전기를 손에 들었다. 엄밀히 말해 자발적인 테러였으니 맡은 일은 알아서 잘 해내고 죽어 주겠지 하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져보고.
-
하루 전날, 뜬금없이 그대들에게 보내졌을 선물상자 안에는 평범한 무전기와 작전이 담긴 종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당신들의 얼굴이 찍힌 작은 다섯 장의 사진이 반기고 있었으며 내용은 이러했다.
[본론. 찹쌀떡이 1층에서 대부분의 경비 인력의 시선을 끌 동안, 검은콩은 지하를 제외한 건물의 전체 전기를 차단. 그 짧은 순간 뒷길로 유자, 새싹, 건빵이 지하로 잠입. 유자가 가는 길에 크게 방해되는 덩어리들을 처리해줄거고, 남은 새싹이랑 건빵이가 함께 은밀한 곳에 폭탄을 설치. 소중한 목숨이니까 탈출구는 검은콩이 터줄게. 정확히 n시 n분, 각자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
p.s 시한 폭탄이니까 꾸물거리면 안 돼.
p.s2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이는 우리집 멍멍이가 물어줄거야.]
당신은 얼굴을 찌푸리며 종이의 뒷면을 살펴보니 대략적인 건물 지하 내부구조와 탈출로, 폭탄 설치 장소가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다시 눈을 부비고 살펴보니, 조막만한 사진들에는 각각 찹쌀떡(세이지), 검은콩(머루), 유자(리마), 새싹(하나비), 건빵(유형수) 과 같은 유치한 음식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특징적인 걸 적은 건가 싶으면서도 상당히 유치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뭐 어때. 재밌잖아.
-
그런고로, 머루는 외부 경비가 눈에 띄는 ISMO 건물 밖 으슥한 곳에서 정해진 시간이 다 다르기 전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세이지가 나타날 때까지, 얌전히. 보통은 와장창 하고 들어가서 폭탄을 설치하고 우르르 나가는게 정석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너무 연락이 빨리 닿아버리잖아. 재미없지. 그런 생각을 담고 있으니 어느새 새하얀 머리칼의 조그마한 그녀가 눈에 들어온다. 방긋 웃으며 담배를 던져버리고 당장 달려가, 경비들이 그녀를 막는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머루도 슬쩍 그녀를 말리는 척 하다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몸을 돌려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화장을 고치고 있는 한 여직원을 발견. 활짝 웃으며 그대로 여직원의 머리를 세면대에 쳐박고 입을 막은 채 수갑을 채워두었다. 화장실 맨 끝 칸으로 끌고들어가 급히 사원증을 뺏고, 지문 따위를 복사하여 자신의 손끝에 붙였다. 외모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런 거 따질 여유가 어디있냐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여자는 그대로 버려두고 당당하게 스캔을 뚫고 건물 중앙으로 들어온 머루는, 지나가는 사원 한명을 붙잡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상냥하게 물어 EPS실의 위치를 전해들었다.
n층, 오른쪽 복도의 맨 끝의 구석진 곳. 엘리베이터를 탈 여유 따위는 없으니 비상계단으로 당장 올라가 수상해 보이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EPS실 앞으로 도착했다. 한 번 쉼호흡을 하고 문을 차분히 열고 들어가, 졸고있는 남성의 입을 막은 채 목동맥을 메스로 정확히 깊이 찔렀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뒤로하고, 시끄러워질 그의 입에 대충 근처에 있는 휴지를 쑤셔박아준 뒤 마침내 전기 차단기 앞에 섰다. 무전기에다 'off' 라는 말을 적당히 지껄여주고, 지하의 전기는 제외한 채 정확히 3초를 센 뒤 하강.
이미 cctv에 찍혀버린 이상 다른 히어로들이 오기전에 재빨리 도망쳐야한다. 하지만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에, 안쪽 문을 열지 못하게 무거운 시체로 막아두고. 아까 왔던 길을 되새겨보며 비상계단쪽으로 전속력으로 뛰었다.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소리와 중간중간 몸을 부딪히긴 했지만 무시. cctv에 찍힌 영문 모를 살인과 갑작스레 꺼진 불에 소란스러워 질듯 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하로 내려간건 찍히지 않았겠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탈출할 때 사용할 뒷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불이 꺼져있건 말건,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는대로 접근하여 일단 메스로 명치를 찌르고 보았다. 전기가 들어와 cctv로 포착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죽여야한다. 총은 시끄러우니까 생략하고, 탈출할 땐 최대한 신속할 수 있게. 지하는 아마 리마가 맡고 있을테니.
귀를 찌르는 비명과, 손을 질척이는 핏물. 몇 명을 찌른 건지 생각도 나지 않을 때 즈음에 무전기에서 성공했다는 신호가 들렸다. 그와 함께 반짝, 하고 환하게 켜진 불이 눈이 부셔 조금 찌푸렸다가 눈을 뜨니 주변이 온통 붉게 물들어있어 조명이 바뀌었나 하는 착각을 잠깐. 찔린 부위를 붙잡고 괴로워 쓰러져있는 몇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덩그러니 서있다보니 어느새 근처의 계단에서 그들이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술술 풀려 불안하기도 했지만 뭐, 그런건 나중에 생각하고. 세이지에게도 슬슬 후퇴하라는 무전을 보내 준 뒤, 시계를 확인하니 약속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길은 이쯤하면 된듯 하여, 팀과 마주치기 전에 혼자 유유히 탈출구로 향했다. 모두 들켰을테니, 피에 젖은 메스는 도로 넣어두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쏴대며, 그렇게, 밖으로. 피에 절은 몰골이 말이 아닐듯 했다.
아, 그리고. 이래서 사람들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건가? 생각하며 셋, 둘, 하나.
그녀의 눈이 휘어졌다.
- Lost
- 약속대로 재판장이 터졌다. 무고한 히어로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동료들을 덫에 몰아넣었던 나는 분명 순순히 사형에 처할 운명이었을 텐데. 어찌 이 질긴 생명은 또 꾸역꾸역 살아남아 버렸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잔뜩 해버린 탓일까. 답지 않게 지나치게 쌓은 관계들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갇혀있을 때 꽤 여러 생각들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최고의 히어로니 뭐니, 말도 안되는 우스운 말이나 내뱉고. 하지만 나는 역시 영웅의 구원을 얌전히 기다리는 공주님보단, 무참히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악당 쪽이 어울리지 않냐며. 조금 이르긴 했지만 여러 감정이 뒤섞여 한데 어우러진 그의 절망적인 표정을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 종이남을 마주치기 전까진. 그런 사사로운 이유로 이렇게 쉽게 탈출해도 되는 거야? 여기 보안 시스템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 그리고 그런 점잖은 말투를 가지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 담배가 계산 되었으니 그런 시덥잖은 생각은 여기서 그만두자. 어쨌든 나는 책임감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긴 했어도 이렇게 제발로 직접 찾아온 기회까지 놓칠 멍청이는 아니었다. 나는 당연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전히 굳은 피가 달라붙어 역겨운 정장을 입은 채 나의 멍멍이가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생각하며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 휴대폰을 꺼내 빈 화면을 응시했다. 화가 많이 난 걸까,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안아주지 않을까. 어려운 기대를 걸어보며 돌아가는 길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그래도 역시 얼굴을 마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도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많은 부재중과 쌓여있던 문자 개수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걸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니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좋아하는 무언가라도 사다주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고보니 넌 뭘 좋아했었지? 꽤나 충격스러운 사실에 찌푸려진 얼굴은 제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아니 충격 먹을 것도 없었지, 누가 뭘 좋아하는지 따위 진심으로 궁금해해 본 적도 없었으니. 주인 자격 실격이라던 그의 말이 새삼 떠올라 결국 그 찬바람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당장 뛰었다. 이런 꼴로 택시를 타는 건 다시 붙잡히고 싶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무작정 뛰고 보는 것이고, 외투가 있을 리가 없는 그녀의 작은 몸 곳곳을 파고드는 시린 겨울바람이 아프다. 얼른 이 추위를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느긋이 녹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도 과연 날 기다려주고 있을까? 그렇다면 무슨 말부터하지? 미안해? 음, 너무 식상한가. 뛰는 와중에도 한눈에 들어오는 길거리 곳곳의 알록달록 빛나는 조명 길들이 예쁘다. 그러고보니 곧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던가.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바쁘다고 놀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이 드는 것이고. 기대를 한다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던가, 커다란 트리가 보고 싶다던가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결국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악당도 크리스마스는 좋아해?
다행히도 길치는 아니여서, 정신없이 뛰다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는 오피스텔 앞에서 숨을 고르며 추위에 얼어버린 듯한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뛰어왔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아서 휘날린 잿빛 머리칼을 정리해보았지만 그런다고 피묻은 생쥐꼴이 나아지는 건 아니지. 볼이나 코, 귀 할 것 없이 어린애처럼 잔뜩 상기된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비밀번호를 누른 뒤 마침내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싸온다.
"멍멍아~"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내어 보며 어째선지 캄캄한 실내의 조명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안왔나? 시간이 몇 신데. 불안함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이 도성, 하고 불러보며 어두운 내부에 환한 빛을 밝혔다. 설마, 작게 중얼거리며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집 안 곳곳 그의 흔적을 뒤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자괴감이란. 결국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어 당장 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xx."
맑게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결국 그가 쥐여주었던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볼품없이 두 동강 나버린 휴대폰이 모습이 마치 제 자신같아서 울 것만 같았다. 이때까지 도성이 먼저 연락이 안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길게. 자꾸만 피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어 짧아지는 손톱은 입안으로 기분 나쁜 비릿한 끝맛을 전해온다.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해? 웃어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을 반겨 줄 도성이 있을 거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머리가 아프다. 내가 너무 유난 떠는 걸까? 조금만 기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피곤한 얼굴로 익숙하게 주인님, 나왔어. 라며 몸을 기대어와주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질문에 불확실한 답은 아무도 해주지 않아, 허공으로 무의미하게 흩어져 간다. 이제 정말 하염없이 제 주인만 기다리는 멍청한 고양이 신세가 돼버렸네. 이게 네가 원하던 나의 모습이야? 아니면, 내가 무시한 너의 애정과 연락에 대한 벌? 정말 그것도 아니라면. 시야가 흐려진다. 애초에 돌아갈 곳이란 사치스러운 것 따위 존재하지 않던 길고양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인간의 눈에 들고, 마음에 들었다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상을 다 줄듯이 사랑해주다가도, 실증이나 귀찮은 존재로 추락한다면 늘 그렇듯 길가에 버려지고. 다시 제자리에.
"짜증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분명 버리지 않겠다고 그랬을 텐데, 나의 불안감을 잠재워 줄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 한켠의 악몽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때와 똑같지 않느냐며. 그런 꼴을 당해놓고도 멍청하게 속는 꼴이 아둔하고 어리석다며. 그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지금 떠오르는 말은 '집착으로 변질되지 않게 잘 처신하는 게 좋을걸.' 따위인지 모르겠고. 속이 울렁거린다. 자업자득이라는 걸 알고있다. 그의 맹목적인 애정에 너무 나태해져 있었다. '주인님' 이라고 그럴싸하게 놀아주니 정말로 머리 꼭대기에 있는 줄 알았나 봐? 이리도 쉽게 휘둘릴 거면서. 눈을 감을 때마다 잊어버렸던 지난날의 끔찍한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떨고있는 나를 보니 그게 아닌거였고. 나는 나약한 인간이라 이대로 숨이 막혀 죽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린다. 새벽이 넘어가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다가, 피가 뚝뚝 떨어져나가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심각하군, 작게 웃음을 흘리며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버리지 않아, 절망하지 말고 기다려-..몇 마디의 쉬운 말들은 공허하게 울려퍼질 뿐이지. 나는 결국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몸을 움직였다. 머리가 어지럽다, 검게 좁아지는 시야가 기분 나쁘다. 숨은 또 언제 이렇게 거칠어졌는지. 아득해지는 정신에 무언가 짚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바닥은 빙글거리며 일어나 가로선이 세로선이 되어 나를 맞이해주고 있고. 정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구나.
나는 차가운 바닥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Fever
- 시간이 흐르고 있다. 고요한 침묵만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그 뒤로 며칠이나 지났지?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야. 악몽을 꾸는 것도 이젠 지겨워. 침대 위에서 불편한 듯 몸을 뒤척거렸다. 몸이 많이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글쎄, 분명 이불을 푹 덮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리는 걸 보면 아직인 모양이지. 분명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어째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추위가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작게 실소를 내뱉으며 도베르만 인형을 꼭 끌어안고 얼굴을 묻으니 어렴풋하게 그의 향기가 배어있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든다.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기대 따위를 하니까 그렇게 배신이나 당하는 거야, 멍청아. 작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찢어지는 듯한 갈증에 눈을 감았다. 지긋지긋한 악몽과 고된 감기몸살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만든다. 도망쳐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어째서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뭐라도 먹어야 나을 텐데, 요리엔 취미가 없고 죽을 사러 나가기엔 눈밭에 쓰러져 얼어 죽어도 전혀 손색 없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없었던 식욕이 아프다고 생길 리도 없었고, 며칠 새 쓰러져 잠만 자느라 무언가 목으로 넘기지도 못했다. 냉장고에 있는 자그마한 사과조차 넘기지 못하고 게워내는 것을 보았을 때 상당히 약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붙잡고 일어났다가도 기운이 없으니 금방 픽픽 쓰러지기를 반복하고. 이래서 내상이 싫다. 외상쯤이야 고통만 참으면 되지만, 이건 말이 다르지. 굉장히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머지않아 아작 날 건강을 되찾고자 집안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으나 과분하게 넓은 남의 집에서 조그만 약 쪼가리를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 결국 오래 서 있는 것이 지쳐 찾지 못한 채 끙끙 앓아누워있었다.
따분히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넓은 유리창 밖으로는 새하얀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픈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서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괜찮았다. 좋아하는 것이다, 보고 싶었다. 근데 머리 아파. 코를 훌쩍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차갑지만 너무 세게 쥐어버리면 뜨겁게 느껴지는, 칙칙한 나를 붉게 물들여주는 보송보송한. 그리움에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부스스한 얼굴로 무거운 눈꺼풀을 찬찬히 들어 올려보니 창밖은 이미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환한 세상이, 눈이 부시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원래라면 지금쯤 그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을 해보며 허망한 눈동자로 내내 바깥을 응시했다. 더 녹기 전에-보고 싶어.
그 일념 하나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고 세상이 빙글거린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검은 시야가 밝아지길 기다리며 인형을 품에 껴안았다. 누워만 있었다 보니 허리에 한참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구기며 침대 밑으로 발을 떨구고 비척비척 몸을 옮겨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었다. 물어뜯었던 손가락들이 따갑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물을 맞고 있다 보면 여러 것들이 깨끗이 씻겨져 나간다. 몸을 말리고, 옷을 조금 고민하다 실크 재질로 되있는 그의 검은 잠옷을 빌려 입었다. 조금 질질 끌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죽더라도 담배는 피우다 죽기 위해 담배를 챙겨 들었다. 온몸이 쑤셔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신발을 챙겨 신고 현관문을 열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를 생각할 때 즈음 발치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시선을 밑으로 떨구어보니 웬 종이 하나가 알짱거리고 있고. 쓰레기를 줍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깨끗한 복도 위 홀로 놓여져 있는 게 애처로워 보여 결국 마지못해 주워들었다. 그대로 구겨 버렸어야 했었던가, 언뜻 보이는 글씨에 호기심을 버릴 수 없어서 이내 펼쳐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세 번이나 읽고 나서야 겨우 손에 꽉 우겨 쥐었다.
"진짜 짜증나.."
개자식. 잠긴 채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그런 거친 말을 작게 내뱉었지만, 어째선지 눈가에선 뜨거운 덩어리가 방울 방울지며 뚝뚝 떨어져 나가고 있고. 고장 난 눈물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왜야? 하고 중얼거려 보아도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잖아. 나약하네. 애써 잔뜩 닦아내어 보지만 한 번 터져버린 감정은 주체하기가 힘들다. 정말로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결국 눈을 구경하려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손안에 쥐어진 애꿎은 종이-혹은 물고기-가 원망스러워 결국엔 문밖에 쪼그려 앉아 그렇게 제풀에 지칠 때까지 한참이나 서러운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것밖에는 할 줄 몰랐다.
―아. 요컨대 나는,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던 거야--..
- Mis?fortune*
- 스읍, 머루는 따끔따끔한 아픔에 이따금 흘러나오는 신음을 그렇게 꾹 눌러 참았다. 다리가 살짝, 그러니까 아주 조금 다쳐서 절뚝거리며 피를 조금씩 흘리는 게 모 게임의 생존자 같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라서 문제지.
머루는 굉장한 존재감을 내뿜는 그 남자의 손에 끝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강한 악당-아니 히어로, 에게 죽는다면 나는 그가 죽인 수많은 빌런 중에 한 명 밖에 되지 않아 가치 없는 사람으로 끝났을 테니까. 그건 너무 재미없고, 나의 죽음관에 맞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아무튼 그렇기에 대충 BB탄 총알들을 히어로 쪽에 뿌려놓고서 밟고 넘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놔두고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슬쩍 빠져나왔던 것을 떠올렸다. 존재감이 강한 캐릭터는 아니여서 그런 건 쉬웠지.
어쨌든 그 남자가 데리고 있던 머저리 중 한 명에게 총을 빗맞은 것은 꽤나 큰 실수였다. 덕분에 발도 무자비하게 밟혀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한쪽 발과 허벅지가 크게 쑤셔왔다. 목소리는 참아도 찡그려지는 표정은 어쩔 수 없어서, 머루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근처의 벤치를 찾아 몸을 뉘었다. 이곳은 꽤나 어두워서, 이렇게 누워있으면 위에 떠있는 별이 꽤 잘 보인다. 심하게 반짝이는 게 위성 같기도 했지만.
더이상 움직이기엔 지쳤고, 아지트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오늘 일로 인해 무슨 파장이 퍼져있을지 짐작은 갔지만 그다지 달가운 내용은 아닐 게 뻔했고,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도 괜찮을 거 같아. 문제가 있다면 얼어 죽을 거 같다는 거. 하지만 박스 따위를 찾을 여력도 없고, 더 걷기에도 지친다. 머루는 그렇게 힘없이 팔로 눈을 가렸다.
*
그날도 머루는 어김없이 적당한 박스를 찾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 중에 구석에서 들고 온 박스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그 안에 담았다. 머루로 인해 꽉 채워진 박스 안은 머루에게 있어 깊은 안도감을 준다. 잔뜩 웅크린 채 추위로 인해 바들바들 떨다가 보면 어느새 정신을 잃고 스르륵 잠들어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천천히 떠오르는 아침 해도 잠시, 소나긴지 모를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곧 추적거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자는 것은 익숙했지만 체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싫어도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머루를 톡톡 깨우는 빗방울에도 굴하지 않고 웅크린 채, 박스가 젖어 녹아가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눈을 꽉 감고 있었을 때. 그것은 갑작스럽게.
빗소리에 묻혀 발소리를 듣지 못했던가. 머루의 위로 떨어져 내리던 차가운 빗방울들은 어느새 식어있는 그녀의 몸에 닿질 못했다. 그 대신 얇은 비닐에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뿐. 머루는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쪽 눈만 게슴츠레 떴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아. 비오는데, 안 괜찮아 보여서."
허리를 숙인 채 우산을 들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너의 모습. 나는 그 모습에 놀라서 몸을 움찔하며, 크게 뜨고 싶었으나 졸려서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으로 몸에 난 솜털들이 곤두서는 걸 느꼈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을 굴리고 있는 나와, 그런 나의 모습이 뭐가 우스웠는지 눈을 반달로 휘어 보이던 너.
퍽 당황스러워서, 그런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빙글 웃고 있는 너의 검은 눈과 마주치기를 잠깐. 잔뜩 젖어 녹을 것만 같은 이딴 종이 박스에 웅크려 누워있는 내가 꽤나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기를 조금. 벙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를 눈치챘는지 너는 그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시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째선지 나의 손은 이미 네 손 위에 살포시 놓여져있었다. 아--그것은 강한 이끌림이었나. 그것은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먼저 내밀어준 따스한 손길이었던가. 추위에 떨어 잔뜩 내려가있는 체온과 차디찬 나의 손과는 다르게, 따뜻하던 너의 손은 나에게 햇살과도 같았다.
너는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가볍게 비몽사몽 한 나의 몸을 이끌어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한 우산 안에서 마주 보게 된 우리의 키 차이는 꽤나 컸었고, 그날 너를 올려다보았을 때 나의 기분은 아직도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런 내 키에 맞춰, 허리를 잔뜩 숙여 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뱉었던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어처구니가 없다.
"무슨 생각해?"
그걸 갑자기 왜, 너무 뜬금없지 않나? 우리가 뭐 연인 사이도 아닌데. 어이가 없던 나로서는 다른 대답이나 질문이 아닌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대신했고, 그런 나를 보며 너는 다시금 능청스레 웃어보였다. 그 와중에 너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아 혼자만 잔뜩 신경쓰던 나는 너의 눈치를 슬금 보며 손에 힘을 주고 놓으려 했지만 그런 나를 너는 더욱 꽉 잡으며 놓지 않을 거라는 듯이. 나는 그런 너가 정말로 이상해서,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너는 내게 너의 우산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고, 갑자기 한 발자국 물러서 우산 밖으로 나가더니 혼자만 비를 잔뜩 맞아버렸다. 나는 그런 너의 이상한 모습이 너무 멍청해서, 결국 너를 따라 푸스스 웃어버렸다.
그러니까, 그게 우리의 첫 만남.
다시, 나의 불행의 시작.
―나는 잊고 있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꿔버린 악몽에, 뜨겁고 욱신거리는 상처의 아픔에. 결국 그 자리에서 초라하게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