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
"이건 비밀인데, 저는 마안(魔眼)의 소유자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눈을 감고 있는거죠."
아마데우스 타루 (amadeus tarrou) | |
성별 | 여성 |
나이 | 29 |
세븐스 능력 | Let It Bleed(피 흘리게 놔둬) |
1. 외모 ¶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실눈의 여인. 머리는 높게 올려 묶었음에도 허리 끝까지 내려온다. 특이하게도 앞머리보다 옆머리의 길이가 짧다. 머리에는 바보털 한 가닥이 있는데 무슨 짓을 해도 가라앉지 않는다고 한다. 눈썹은 팔자로 쳐져있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지만 눈을 뜨면 가늘고 길게 위로 째진 눈매다. 홍채의 색은 흰색. 그래도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은 된다. 본인은 이걸 가지고 마안이라는 드립을 치는 등 콤플렉스는 아닌 모양. 키는 182cm 정도이며 몸은 말라보이지만 꽤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아스팔트 껌딱지. 흉부가 매우 빈약해 남성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다.
언제나 검은 정장을 입지만 신발은 워커를 신는 등 격식에 그리 연연하진 않는 듯 하다. 입가의 점에 대해서는 유명 배우와 같은 곳에 점이 있다며 자랑으로 여긴다. 안경을 쓰고 있긴 하지만 멋내기용에 지나지 않는 듯. 늘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청금석 귀걸이를 착용한다.
2. 성격 ¶
늘 예의바르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쓴다. 원래 집사였나 싶을 정도로 남을 챙기는 걸 좋아하고 아이들에겐 더욱 더 친절하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 너무 다정해서 사심이 있는 것으로 오해 받는 일도 많다. 남을 돕는 것을 삶의 보람이라 여기며 언젠가 반드시 인류가 한 치의 증오도 남기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약간 4차원 기질이 있는듯.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며 왠지 혼잣말을 하는 일이 잦아 모르는 사람들에겐 종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3. 세븐스 능력 ¶
Let It Bleed(피 흘리게 놔둬)
자신의 피로 검과 창같은 냉병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보통 삼국지의 장비가 사용한 장팔사모같은 장창을 구현해내며 가끔 채찍이나 단검도 만들어낸다. 만들어낸 무기는 양도가 가능하지만 사용자 본인의 실력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며 아마데우스의 몸에서 떨어지면 강도도 급격히 떨어져나간다. 한번에 한 개 이상 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으며, 예를들어 창을 만든 상태에서 단검을 만들고 싶다면 창을 거두고 단검을 새로 만들어야한다. 무기의 크기는 흘리는 피의 양으로 결정되며, 무기를 거둘땐 원상태(혈액)로 되돌려 피를 흘린 곳으로 집어넣는다. 무기가 클 수록 시간도 꽤 잡아먹는다. 강도의 경우 많은 피를 압축해 만들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평소엔 보통의 창과 칼의 강도로 만든다.
4. 기타 ¶
이름인 아마데우스는 남성의 이름으로 쓰이지만 본인은 여성이다. 본인은 이에 대해 부모님이 아들을 바라셔서 그랬나? 라고 넘긴다. 사실 가명일지도 모른다. 문짝만한 키에 재빠른 몸놀림과 뛰어난 근력을 가졌으나 은근히 허우적댄다.
애칭은 아마데. 이름이 길어서 성인 타루로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 그냥 면 종류면 다 좋아하는 듯. 다만 쓴 것에는 약해 다크 초콜릿은 입에도 못 댄다.
왠지 남성으로 오해받는 걸 즐기는 듯. 남성인 척 하다 정체를 밝히는 장난을 매우 좋아한다.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오해사기 딱 좋은 인물. 어린아이들은 첫만남부터 그녀를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여담으로 혈액형은 O형.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는 피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록 음악 매니아로, 종종 흥에 겨워 에어드럼이든 에어기타든 신명나게 뭔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작 다룰 줄 아는 악기는 없으며 그냥 악기를 다루는데 재능이 없다. 이름이 아마데우스임에도 음악에 재능이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 그래도 트라이앵글 정도는 연주할 수 있다며 합리화하곤 한다.
과거에 대해 말해달라면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해준다. 그냥 알려주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모양. 과거는 과거일뿐이라며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왠지 가족이 언급되면 주제를 돌리려고 한다.
5. 독백 ¶
파티마 마리아 카시야스 가르시아(Patima Maria Casillas García)로서의 삶
- Uno(1) [탄생]
- 카시야스 가문은 마을 제일 가는 부와 명예로도 유명했지만 일족 전체가 보랏빛 머리카락과 흰 홍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부계로만 이어지는 그 가문만의 특징이었으며, 특유의 보랏빛 머리카락은 카시야스의 보라색이라는 의미로 '카시야스 모라도'(Casillas Morado)라고도 불렸다.
현 카시야스 가문의 가주인 35세의 펠리페 가브리엘 카시야스 곤잘레스는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애인인 카밀라가 태어난지 3달은 된 여자아이를 안고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었다. 그 여자아이는 분명 보랏빛 머리카락과 흰 홍채를 타고 난 카시야스 가문의 핏줄이었다. 카밀라가 양다리를 걸쳐 남의 자식을 낳았다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증거가 있었다. 그리고 굳이 친자검사를 하지 않아도 아이는 펠리페를 쏙 빼닮았기에 펠리페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뒷목엔 선명한 숫자 '7'이 새겨져 있었다. 그냥 사생아도 꺼림칙한데 하필이면 세븐스이기까지 한 것이다.
펠리페는 아내 외의 애인을 둘 정도로 윤리관이 어그러진 인물이었으나 소심한 구석이 있어 세븐스이기까지 한 사생아를 죽일 용기는 없었다. 어려울 것도 없이 '폐기' 해달라고 부탁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갓난아기를 죽이는 건 꺼림칙했는지 그는 아이를 거두어 의식주 모두 제공은 하되,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철저히 숨겨 기르기로 결심했다. 심약한 성정을 가진 펠리페의 아내 카타리나는 남편의 사생아가 세븐스라는 사실에 혼절했다.
여러모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음에도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인물은 있었다. 펠리페와 카타리나의 8살 된 외동딸 프란시스카 앙헬라 카시야스 에르난데스였다. 그녀는 천사를 뜻하는 '앙헬'이 들어간 이름의 소유자답게 타고나길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세븐스인 자신의 이복동생을 무척 귀여워하였다. 아이가 집에 들어온지 2주가 되어가는데도 이름이 없자 프란시스카는 직접 동생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파티마 마리아. 성모 발현이 일어난 포르투갈의 지명인 파티마와 성모의 이름인 마리아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 프란시스카가 이름을 지어주자 펠리페도 마지못해 비공식적인 풀네임을 지어주었다. '파티마 마리아 카시야스 가르시아'. 가르시아는 파티마가 태어난 국가에서 가장 흔한 성씨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모두 물려받는 조국의 전통대로 지어졌지만 친모 카밀라의 성은 아니었다.
- Dos(2) [불청객]
- 생후 3개월인 파티마는 곧바로 유모에게 맡겨졌으나 유모라는 인간들은 세븐스 아기에게 자기 젖을 먹이는 걸 몹시 탐탁잖아했다. 그들은 아직 옹알이 밖에 하지 못하는 아기가 자기를 죽이기라도 할까봐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파티마는 모유 대신에 분유를 먹어야 했다. 종종 이복언니 프란시스카가 그 고사리 손으로 아기를 안고 젖병을 들어 분유를 먹이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저지 당하거나 어른들의 불안에 가득 찬 눈빛을 받아야했다.
프란시스카는 요람에 누운 여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매의 아버지 펠리페는 맏딸의 행동이 못마땅했으나 프란시스카가 하나뿐인 자식이기에 엄격히 주의를 주지 못했고, 펠리페의 본처이자 겁이 많은 카타리나는 파티마를 두려워해 거의 작은 악마 취급을 하였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건드렸다간 2배, 3배, 아니 100배는 더 크게 앙갚음 하리라 여겨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탓에 파티마는 계모의 괴롭힘을 피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고독 외엔 얻은 것이 없었다. 괴롭힘보다는 무관심이 더 괴롭다고 하지 않는가?
파티마는 얼마 전 요절한 펠리페의 동생 후안 마르코의 양녀로 입적되었다. 팔자에도 없던 세븐스 양녀가 생긴 후안 마르코의 아내 카를라 빅토리아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기에 길길이 날뛰었으나, 그녀가 직접 기르는 것은 아니라는 해명에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세븐스를 자기네 호적에 올린 댓가로 많은 돈을 요구해 한바탕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이렇듯 영원히 카시야스 가문의 일원일 양 굴던 카를라는 얼마 안 가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파티마의 평온하면서도 평온하지 않은 일상은 앞으로도 문제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파티마가 2살 되던 해에 변수가 하나 생겼다. 프란시스카의 동복동생이자 파티마의 이복동생, 펠리페의 후계자인 카를로스 펠리페가 태어난 것이다.
- Tres(3) [격리]
- 카를로스 펠리페. 프란시스카의 동복동생이자 파티마의 이복동생. 현재 가주인 펠리페가 결혼 12년 만에 얻은 적법한 후계자였으니 그의 탄생은 카시야스 가문의 경사였지만 2살배기 파티마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프란시스카는 더 이상 펠리페의 유일한 적자가 아니었고, 하나뿐인 적자를 관대하게 대할 수 밖에 없던 펠리페는 카를로스의 탄생 이후 그녀의 행실을 하나하나 짚으며 엄하게 훈계했다. 보통은 훈계로만 끝났지만 펠리페가 회초리까지 들며 크게 혼을 낼때에는 세븐스인 이복동생 파티마를 감쌀 때였다. 카를로스가 태어나기 전까진 프란시스카의 비호를 받던 파티마는 언니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덩달아 나락으로 떨어졌다.
펠리페는 세븐스인 파티마가 카를로스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정원 뒷뜰에 오두막집과 울타리를 세워 그곳에 그녀를 격리시켰다. 그로서는 폐기하지도, 완전히 집에서 쫒아낸 것도 아니었으니 자비로운 처분이었다. 파티마는 펠리페의 허락이 떨어질때까진 울타리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2살밖에 되지 않은 파티마에게 오두막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깔끔하게 지어져 침구며 가구며 완벽히 준비 된 그녀만의 공간이었으나 이는 파티마가 원치 않았으니 소용 없는 것이었다. 외롭고, 어둡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아무리 불을 떼워도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없었다. 낮에는 그나마 나무에 묶인 그네를 타거나 울타리 안의 모래 놀이터에서 노는 등 울타리 내부라면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저녁 7시가 되면 고용인에 의해 가차없이 오두막 내부로 끌려가 다음날 아침이 될때까지 감금되었다.
이러한 생활이 몇 년이나 이어졌어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문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가 너무나 공포스러웠던 나머지 이성을 잃고 문을 미친듯이 두들기고 손톱으로 긁어 손이 엉망진창이 된 적도 있었다. 이런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언니 프란시스카가 몰래 자신을 만나러 왔을때였다. 울타리 틈을 비집고 손을 내민 언니의 손을 잡은 파티마는 상처 투성이인 자신의 손에 약을 발라준 그녀의 사랑을 죽어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때 프란시스카의 손은 천사의 손길처럼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카는 매일 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번 파티마를 몰래 만난 것을 들킨 이후 호되게 질책당한 프란시스카는 이후로 고용인들의 감시를 받았다. 언니의 방문이 끊기자, 파티마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걸까. 나의 이름에도 카시야스가 들어가는데, 어째서 프란시스카 언니와 카를로스처럼 저택에서 살 수 없는걸까. 내가 세븐스라는 것을 갖고 있어서 그런걸까? 세븐스란건 무엇이기에 날 이리도 고통스럽게 하는걸까? 내가 세븐스만 버린다면 나도 언니와 카를로스처럼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세븐스만 버린다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매일 잠에 들기 전 신에게 자신의 세븐스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닿지 않았다. 분노한 파티마는 십자가를 부수고 성경을 모두 찢어버렸다. 그녀에게 신이란 세븐스를 창조해놓고 그들이 고통받는걸 방관하는 악한 존재였다. 파티마는 이후로 오두막 밖을 나가는 일이 적어졌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언니의 방문에도 두문불출하며 문을 걸어잠궜다. 이런 파티마를 일으켜 세운 것은 프란시스카가 몰래 울타리의 열쇠를 빼돌려 그녀의 울타리 안으로 직접 발을 들였을 때였다. 파티마의 나이가 10세, 프란시스카의 나이 18서의 일이었다. 파티마의 울타리 안으로 최초의 침입자가 발생한 순간이었다.
- Cuatro(4) [침입자]
- 파티마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븐스가 사라져 모두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는 꿈이었다. 그곳에서 파티마는 저택에 머물며 언니 프란시스카와 자유롭게 저택 밖을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행복한 꿈을 꾸던 파티마는 밖에서 들리는 작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허탈함을 느끼며 작은 소리에 깨어질 꿈이었다면 아예 꾸지 않는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파티마는 자신을 부르는 프란시스카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소리를 차단하고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프란시스카는 단단히 준비를 하고 동생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오두막의 현관문이 열리자, 파티마는 더 이상 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휴... 오두막 열쇠까지 챙겨오길 잘했네. 불도 안 켜고 있었니? 아얏, 발 밑에 이건 또 뭐야?"
천사같이 선한 마음을 지녔으나 호구처럼 당하고 살지만은 않는 여장부였던 프란시스카는 자신이 이 곳에 왔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커텐을 치고 그 위로 담요를 겹쳐 달은 뒤 촛불을 켰다. 파티마는 언니의 등장이 여전히 떨떠름했는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왔어? 여기 있는 거 알면 아버지가 가만 두지 않을텐데."
"괜찮아. 최근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몰래 과수원 땅 팔아치운거 나한테 걸렸거든. 또 주식에 손 댔다가 반토막 났나 봐. 당분간은 입막음 하느라 나한테 쩔쩔맬걸? 만약 할아버지한테 들킨다면... 곱게 넘어가지는 않겠지."
오랜만에 재회한 자매였음에도 둘의 대화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져나갔다. 그들은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는데, 파티마야 프란시스카가 방문하기 몇 주 전부터 오두막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고, 프란시스카는 자신의 근황을 말하던 중 최근 들어 파티마가 오두막 밖으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크게 걱정했다며 고민이라도 있는지 물었다. 파티마는 정곡을 찔렸는지 머뭇거리며 크게 갈등하다가 결국 곧이 곧대로 털어놓았다.
"언니, 나는 저주 받은 존재같아. 아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현대에 창조 되어진 악마같아. 난 왜 세븐스로 태어났을까? 세븐스는 왜 존재하는걸까? 왜 하느님은 세븐스를 창조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우릴 구해주지 않는걸까?"
파티마는 그간 있던 일, 그러니까 신에게 분노해 십자가를 부수고 성경을 찢어버린 일까지 전부 말했다. 그 말에 프란시스카는 방금 자신이 밟은 것이 십자가의 파편이었음을 짐작했다. 프란시스카는 동생이 늘어놓는 말들을 묵묵히 듣고는 파티마의 손을 어루만졌다.
"파티마, 너와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너는 저주 받지 않았어. 물른 세븐스도 저주 받지 않았고. 만일 너희에게 저주가 내려졌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 내린거야. 파티마, 신의 저주와 인간의 저주가 다른 점이 뭔지 아니? 신의 저주는 절대적인 힘을 가졌지만 인간의 저주는 그저 악담이라는거야.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잊혀질 악담 말이야.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지."
그 말을 들은 순간, 파티마의 머릿속으로 큰 벼락이 떨어진듯 강렬한 섬광이 스쳐지나갔다. 오두막에 틀어박혀있던 동안, 스스로를 저주 받은 존재라고 여기며 세븐스는 신에게 버림받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파티마에게 프란시스카의 말은 일종의 구원처럼 느껴졌다. 내게, 아니 나를 비롯한 동족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그저 인간의 악담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파티마의 눈에 난생 처음으로 희망이 비춰졌다. 그러나 그녀는 비능력자인 프란시스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영문 모를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언니는 두렵지 않아? 내가, 아니... 세븐스들이?"
프란시스카는 픽 웃으며 파티마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파티마, 넌 누가 뭐래도 내 소중한 동생이야. 난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거든. 사람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저 갓난아기를 보며 사람을 해칠 괴물이니 뭐니... 상식적으로 말 못하는 갓난아기보다 다 큰 어른이 더 무섭지 않니?" ...그리고 납득이 안됐을 뿐이야. 쪽수가 적으면 괴롭히고 보고, 남을 증오하지 않으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인간들이. 그래서 난 너희가 두렵지 않아."
이 말에 프란시스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풍파가 느껴졌는지 파티마는 숙연한 얼굴을 하며 언니의 손으로 자신의 손을 겹쳐쥐었다. 그런 프란시스카는 동생의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는 것으로 답했다. 친애의 입맞춤에 파티마가 얼굴을 붉히며 언니의 입술이 닿은 이마에 손을 올리자, 프란시스카는 결연한 얼굴로 파티마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파티마,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지하는건 나쁜게 아니지만, 그 존재에게 의존하기만 해선 안돼. 나를 구원할 수 있는건, 오직 나 자신이라는걸 알아야해. 도움을 받더라도 그 사람한테 기대기만 해선 안돼. 네 삶의 주인은 너니까."
촛불의 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언니의 결연한 눈빛에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님을 깨달은 파티마는 그녀의 충고를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지막의 '네 삶의 주인 너'라는 말이 인상깊게 다가왔는지 한참을 그 말만 속으로 되뇌였다. 파티마는 지금껏 왜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어야하는지, 왜 미움 받아야하는지는 고민해봤어도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그저 밖에 나가서 남들처럼 사랑 받고 싶다고 생각했을뿐 장래에 무엇이 되고싶은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등등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파티마는 혼자 남았을때 오두막 밖의 삶을 상상하고 계획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 Cinco(5) [이상향]
- 두 사람은 카페트 위로 팔을 베고 누워 촛불의 빛에 의지해 종종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시동안 말 없이 천장만 응시하던 파티마가 프란시스카에게 물었다.
"언니는 세븐스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
"인간이 만들었지. 세븐스는 인간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신이 아니라?"
"글쎄,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럼 세븐스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초능력만 가졌을뿐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음... 진화한 인간이라고 봐야하려나? 사실 깊게 생각해본적은 없어. 늘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파티마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란시스카의 대답이 이어졌다. 평소에도 늘 이렇게 생각을 해왔다는듯 간결하면서도 확고한 답이었다. 파티마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지금껏 자신이 한 고민은 그저 잡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왠지 허무해지기도 했지만, 훗날 파티마가 아마데우스 타루가 된 뒤에 이를 뒤돌아보니 정말 잡념이 맞았다. 당시 그녀는 어렸기에 모든 고민은 그저 잡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파티마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건 스스로가 해결하건 고민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프란시스카는 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파티마, 이것도 나만의 생각이지만,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뭔지 아니? 폭력? 권력? 권위? 아니야. 그건 바로 사랑이야."
파티마는 정말 뜬금없다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사랑? 어째서?"
프란시스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댄 뒤 웅변이라도 하듯 당당하게 말했다.
"폭력으로 지배하면 당분간은 잠잠할지언정 언젠가 반드시 크게 폭발하고 말지. 이건 수천년의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야. 그리고 지금 세상이 그런 상황이지. 비능력자들이 세븐스들을 폭력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상. 이러다간 곧 폭발하고 말거야! 뉴스에서 간간히 세븐스 조직의 테러 소식이 들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겠지! 하지만 사랑과 존중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분명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거야!"
파티마는 이것이 프란시스카가 생각하는 이상의 일부이며, 그녀에겐 이보다 더 큰 이상향이 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프란시스카가 바라는 세상은 무엇일까? 내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언니가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그녀의 삶은 대체 어떠했기에 이러한 이상향을 꿈꾸게 된 것일까? 그러나 파티마는 그녀의 까마득히 높은 이상이 싫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있는 멸시와 박해가 가득한 세상에 전면으로 맞서는 그녀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파티마는 홀린듯이 물었다.
"사랑이 그렇게 강한거야?"
"파티마, 가장 강한 사람은 싸움을 잘하고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거지. 싸움만 하다보면 적이 생기지만 사랑을 하면 자연스레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어. 그러니 가슴 속에 늘 사랑을 품고 살아가야해. 나는 인간들이 밉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랑해. 인간들은 잘못을 반성하고 고쳐나가려는 의지를 가졌으니까.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분명 더 좋은 세상을 만들테니까."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문장에 파티마는 잠시 머뭇거리다 프란시스카에게 물었다.
"언니는 내가 밉지 않아?"
그 말에 프란시스카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내가 널 왜 미워하니?"
"나는 아버지가 바람 피워 낳은 자식이잖아. 언니의 엄마를 울게 만들었고..."
"그건 아버지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잖니. 네가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게 아닌데 어떻게 너한테 죄를 물어?"
그 말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파티마였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을까?"
"파티마, 세상에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없어. 완전한 외톨이도 없고.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해. 봐봐. 여기 널 사랑하는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자꾸 자격 없다는 말 할거야?"
파티마는 말 하는 내내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곧 자신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는 언니를 보고는 픽 웃었다. 그래. 세상의 모든 것이 거짓이어도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만은 진실일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파티마의 얼굴에 행복의 미소가 띄워졌다. 다만 근본적인 의문은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조심스럽게 프란시스카에게 물었다.
"언니는 날 왜 사랑해?"
"그건... 파티마, 나는 8살때까지 외동이었잖니. 그 나잇대 애들이 동생을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데. 나에게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네가 나타난거라고. 그때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데. 거기다 여동생이고!'
"...남동생이었으면 싫어했겠구나..."
"얘는! 어디까지나 여동생을 더 원했던거지 남동생이었어도 좋아했을거야! 내가 카를로스를 대하는 것만 봐도 모르겠니?"
파티마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눈빛으로 프란시스카를 응시했다. 프란시스카는 그런 동생의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며 달리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동생을 달래려 쩔쩔 맸다. 토라진(?) 파티마를 달래는데 성공한 프란시스카는 다시 팔을 베고 누워 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자신의 원대한 소원이자 계획을 말했다.
"파티마, 내가 직업을 얻고 독립하게 된다면 널 데리고 나갈거야. 나랑 같은 집에 살면서 다른 자매들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내자. 나랑 쇼핑도 가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가는거야. 서로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면서 밤새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는거지."
신나는 계획이었으나 파티마는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어떡할건데?"
"그때도 같이 사는거지."
"남편 될 사람이 싫다고 하면?"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착한 사람을 만날 자신 있으니까."
"그런 날은 언제쯤 올까?"
"글쎄... 23살 즈음에 대학을 졸업하고 최대한 빨리 직업을 얻는다면 한 24살 정도 되겠지? 이제 6년 남았다! 네가 16살이 되면 같이 나갈 수 있어!"
파티마는 언니의 계획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그녀가 말한 즐거운 나날을 그려나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백화점이란 곳에, 영화관이란 곳에, 저택 바깥의 세상에 발 한번 들여본적 없는 파티마였지만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땐 언니와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어야지. 앞서거나 뒷서거나 하는 것 없이, 사이좋게 나란히 걷는거야. 잔잔히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던 파티마였지만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프란시스카에게 말했다.
"하지만 언니, 지금 들은 생각인데... 나는 혼자서 살아보고 싶어. 한 2년 정도.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아. 아예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가버릴까?"
프란시스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나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의 삶이라... 살아보고 어땠는지 꼭 말해줘."
밝게 웃던 프란시스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마, 우리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산다해도, 나는 널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파티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끼손가락을 걸쳤지만, 프란시스카는 파티마의 마음을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자매는 평생의 약속을 맺었다. 프란시스카가 떠난 뒤로, 그녀와 약속을 맺었던 새끼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파티마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잠에 들 수 있었다.
- Seis(6) [탈출]
- 파티마의 이복동생이자 가문의 후계자 카를로스가 10살이 되었을때, 남매의 아버지 펠리페는 파티마가 오두막에서 지낼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점과 고용인의 증언 등을 통해 그녀가 공격적인 세븐스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저택 안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했다. 12세가 된 파티마는 오두막에 갇힌지 10년이 지나서야 격리가 해제되어 집에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카를로스에게 누나 노릇을 하려 들지 말 것, 프란시스카와 카를로스를 상전으로 모실 것, 자신이 정실 태생의 자녀들과 동급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 것 등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파티마는 프란시스카를 더 이상 언니가 아닌 아가씨라고 불러야 했고, 카를로스는 파티마를 누나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나온 것 만으로도 파티마는 크게 기뻐했고, 자신에게 내걸어진 조건에 조금은 씁쓸함을 느낄지언정 불만을 품지 않았다. 파티마가 오두막에서 지내던 시절 울타리 밖에서 그녀를 창살 속의 짐승 구경하듯 보며 조롱하던 사촌들이 '너는 카시야스의 수치', '네가 우리와 같은 머리칼을 가진게 싫다' 라며 진흙탕에 빠뜨리고 머리를 처박아 보랏빛 머리카락를 흙투성이로 만들었어도 파티마는 묵묵히 버텨냈다. 차라리 오두막 시절이 더 나았을 정도로 불평등과 부조리가 이어지는 나날이 이어졌으나 파티마는 모두 감내했다. 그녀는 방 밖에 나오면 사람이 있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기뻤다. 비록 그 사람들 중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아버지 펠리페가 불평 한 마디라도 했다간 다시 오두막에 처박아버릴 기세로 그녀를 감시한 탓도 있었다. 그는 보란듯이 파티마가 지내던 오두막을 철거하지 않았다. 그녀를 언제든 다시 가두기 위해서였다. 파티마의 방은 저택에 남는 작은 방이었지만 춥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다락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반응을 하질 않으니 사촌들도 질려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된 것과, 가정교사에게서 뒤늦게나마 교육을 받게 된 것이었다. 글을 배우게 된 파티마는 도움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가장 먼저 언니 프란시스카의 이름을 썼다. 가정교사는 엄하고 무뚝뚝한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세븐스라 배움이 늦다는 등의 차별은 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가 된 현재에 이를 돌아본 파티마는 가정교사 역시 인생의 은인 중 한명이라고 인정했다. 하여튼 파티마는 글을 배운 이후로 책에 파묻혀 살았다. 당연히 펠리페가 서재 출입을 허락하지도 않았고 따로 책을 사주지 않았기에 모든 책은 프란시스카의 것을 물려받거나 그녀가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때 조달해주었다.
파티마에게 기초적인 상식만 가르쳐주고자 가정교사를 고용했던 펠리페는 세븐스가 똑똑하면 재수 없다며 못마땅해 했으나, 의외의 인물인 가정교사의 설득에 결국 눈 감아주었다. 가정교사는 펠리페에게 '지식이 없는 자는 반드시 큰 문제를 일으킨다' 라며 그를 설득했다. 사실 이 가정교사라는 인물은 지식을 숭상하고 무지를 극도로 혐오해 무식한 사람이라면 비능력자건 세븐스건 공평하게 혐오했다. 반(反) 세븐스 정서가 팽배한 세상에서 못 배운 비능력자 200명과 잘 배운 세븐스 3명 중 한 그룹만 살려야한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못 배운 비능력자 200명을 죽일 인물이었다. 많이 혼나긴 했어도 파티마에겐 최고의 스승인 셈이었다.
시간이 지나 파티마는 14세가 되었다. 그녀는 언니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프란시스카가 24세, 파티마가 16세가 되었을때 그녀는 언니와 함께 이 저택을 떠날 수 있었다. 저택에 돌아온 뒤 눈 깜빡할 사이에 2년이 지났기에 남은 2년도 그렇게 빨리 흐를 것이라고 파티마는 생각했다. 그리고 14세가 된 해의 크리스마스에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파티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본가를 찾아온 프란시스카가 은밀하게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깜짝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청금석 귀걸이 한 쌍이었다. 프란시스카는 자신이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지만, 파티마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선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귀를 뚫지 않았지만 두 자매는 귀걸이를 귀에 대보며 웃고 떠들었다. 귀걸이는 파티마의 보물이 되었고 늘 그것을 소중히 보관했다. 그리고 저택을 나가자마자 귀를 뚫어 항상 착용하고 다니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파티마는 저택 밖으로 쫒겨났다. 즐거운 명절을 보낸 뒤 새해를 맞이할 생각에 들떠있던 카시야스 가문 저택으로 강도가 침입했고, 강도는 어린 카를로스를 위협했다. 파티마는 카를로스를 지키기 위해 세븐스를 발현해 작은 칼을 만들어 그와 대항했고, 강도는 경호원들에 의해 곧 제압 되었지만 눈 앞에서 세븐스가 발현되는 것을 본 카를로스는 기절했다. 정확히는 파티마가 칼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내고, 흘려낸 많은 피를 보고 기절한 것이었다. 펠리페는 파티마가 카를로스를 구하려 했음을 알면서도 역시 아이와 세븐스를 한 집에 살게 하는 건 위험하다며 그녀를 카시야스 가문의 소유의 외딴 별장에 보내 평생 감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파티마는 사랑하는 언니에게 작별인사 한번 못한 채로 추방되었다.
별장은 호수가 위치한 숲 속에 위치해있었다. 길을 모르면 끝없이 헤매다 객사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파티마는 당연히 길을 몰랐다. 좋게 말해 한적하고, 곧이 곧대로 말하면 따분하고 무료한 곳이었다. 마치 생명으로 둘러싸인 감옥 같았다. 별장엔 그녀를 감시하는 눈이 많았다. 파티마의 생활을 위해 고용인 신분으로 별장에 입주한 인물들은 말이 좋아 고용인이지 그녀를 상전은 커녕 동등한 인격체로도 보지 않았다. 다시 격리되어 감금 된 파티마는 고용인의 냉대보다 읽을 책이 없다는 것에 더 슬퍼했다. 사실상 프란시스카와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가 완강히 거부하니 프란시스카는 파티마를 빼내올 수 없었다. 창 밖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진 별장 밖의 세상을 구경하던 파티마는 그 날 오두막에서 프란시스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은 그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새 삶을 상상했다. 한참 공상을 이어가던 파티마는 그 날 밤, 홀연히 별장에서 탈출해 카시야스 가문의 땅을 떠나버렸다.
- Siete(7) [구원?]
- 객사의 위험에서 살아남아 카시야스 가문의 영향력을 벗어난 파티마는 그녀의 소망대로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다만 거주지를 자주 옮겨야 했고, 파티마의 처지에 쾌적하고 안정적인 거처를 얻는건 기대도 할 수 없었기에 극도로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그래. 생활이 아닌 생존이었다. 그만큼 파티마의 독립은 험난했다. 물론 즐거운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래 친구가 단 한명도 없던 파티마는 뒷골목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세븐스 친구들을 사귀었다. 비록 어제까진 웃으며 놀았던 친구들이 다음날 모두 살해당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파티마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마데우스가 된 지금도 그녀는 친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의외의 수확도 있었다. 파티마는 우연히 최근까지 클럽을 운영했던 은퇴한 사업가 호세 디에고 씨를 만나 친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나가던 파티마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불러세워 '카밀라 로자'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 노인은 카밀라가 약 15년 전 파티마처럼 보랏빛 머리카락과 흰 홍채를 가진 세븐스 여자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그녀의 애인이자 지역 유지 '펠리페 카시야스'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그 빌어먹을 펠리페 때문에 자신이 친딸처럼 아꼈던 카밀라가 죽었다며 파티마의 두 손을 꼭 잡고 분통을 터뜨렸다. 파티마는 자신이 펠리페의 사생아임을 긍정하지 않았으나 노인은 자신 앞에 서있는 세븐스 소녀가 카밀라가 낳은 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사실이었지만.
파티마는 호세 씨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낡은 사진을 통해 친모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붉은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리움이라던지 애틋함은 없었다. 친모와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파티마는 호세 씨의 온정으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으나 약 한달 뒤 스스로 집을 나갔다. 그가 떠돌이 세븐스와 얽히면 좋을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호세 씨와 살면서 파티마는 콩 껍질을 벗기고, 마음 푹 놓고 낮잠을 자고, 부활절 달걀에 물감을 칠하는 등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누렸다. 그 추억을 만들어준 호세 씨에게 큰 감사함을 느꼈지만 그렇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인간 아래의 취급을 받는 자신이 계속 그의 집에 머물면 호세 씨의 평판이 떨어져 그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카밀라의 아이가 작별인사 없이 떠나자 호세 씨는 야속함을 느꼈으나 그녀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기도해주었다.
호세 씨의 집을 떠난 뒤 파티마의 삶은 무척 곤궁해졌다. 흘러흘러 치안이 극도로 나쁜 뒷골목에 정착하게 된 파티마는 며칠 굶었다가 겨우 한끼를 떼우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녀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의 세븐스가 아니었기에 생존 경쟁에 더 뒤쳐졌다. 돈이 될만한 물건인 청금석 귀걸이가 있었지만, 이건 프란시스카가 준 소중한 선물이었기에 차라리 삼키고 죽지 팔아치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걸어다닐 힘조차 떨어져 뒷골목 구석에 널부러진채 산송장같은 꼴이 된 파티마는 가늘어진 숨을 힘겹게 쉬어가며 자꾸 감겨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있었다. 눈을 부릅 뜨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기운이 없어서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 자꾸 감겨졌다. 파티마의 마음 속에서 이대로 잠들어버려도 된다는 유혹이 몰려와 그녀를 충동질했다. 유혹과 맞서 싸우던 파티마였지만, 어느 순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그녀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파티마의 짧은 삶도 끝이 나나 했지만, 그녀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을 떠보니 당연히 생전 본 적 없는 천장이 보였고, 팔엔 링겔이 꽂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해하던 파티마의 옆으로 한 여성이 다가왔다.
"정신이 드나?"
건장한 체격에 까무잡잡한 피부, 앞머리의 일부가 하얗게 새고, 그 외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에메랄드빛 홍채의 여성이었다. 눈밑으로 검은 기미가 깔린 매서운 눈을 가진 그 여성은 파티마가 질문하기 전,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여긴 세븐스 레지스탕스 조직 '옴브라'의 의무실이다. 살려두면 쓸만해보여서 데리고 왔지. 난 특수부대 '벤데타'의 대장 에스메랄다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지?"
"파티마 마리아..."
"그만, 성은 말할 필요 없다. 여기선 뿌리는 중요치 않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며 물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나?"
파티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
"귀를 뚫고 싶은데... 어디서 뚫어야하나요?"
그 말을 듣자, 에스메랄다는 황당하기 그지 없다는 듯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고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파티마를 바라봤다. 그녀의 인생에 이런 어이없는 질문은 처음이라는 듯이.
- Ocho(8) [새로운 세상]
- 레지스탕스 '옴브라'(Ombra)는 라틴어로 '그림자'를 뜻하는 이름대로 음지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것을 지양하는 조적이었다. 그들이 주된 활동은 학대당하는 세븐스를 구출하거나 폐기 위기의 어린 세븐스를 거두어 보육하는 일이었으며, 그들은 조직의 우두머리들, 공간을 복제하는 세븐스를 가진 '리샤르 로베스피에르'와, 거울을 입구 삼아 특수한 이공간을 구현하는 세븐스를 가진 '자넷 클라리스'가 구현한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성향 자체는 온건하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음지에서의 은밀한 활동을 지양한다는 조직이 비능력자 요인 암살과 테러 전문 특수부대인 '벤데타'(Vendetta)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부대는 신설된지 얼마 안 된 부대로, 전투부대 대장이었던 '에스메랄다'의 강력한 추진으로 만들어졌다.
에스메랄다는 평화적인 비둘기파인 상관들과 조직의 분위기와는 달리 강경한 성향의 매파였다. 본래 떠돌이 세븐스였던 그녀는 여러 레지스탕스를 전전하던 중 옴브라에 입단했고, 실력을 키워 입지를 넓혀나갔다. 폭력과 가디언즈와의 접전을 최대한 피하려던 수뇌부를 못마땅해하던 에스메랄다는 수도 없이 많은 설전을 통해 대(對) 가디언즈 전투부대 '살바토르'(Salvator)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가디언즈와의 전투를 통해 더 많은 세븐스를 구출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옴브라 내부로 파벌이 나뉘어 에스메랄다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수뇌부는 전과 다른 위상과 세력을 얻게 된 에스메랄다의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공을 쌓일수록 에스메랄다의 지위는 더더욱 공고해져갔다.
여기서 잠시 에스메랄다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는 매파라는 언급답게 극단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에스메랄다는 세븐스 우월주의자였고, 늘 세븐스는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으로서 비능력자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비능력자들을 발 밑에 두고 지배해야만 하지만 쪽수에 밀려 하등한 종족에게 박해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이는 백배천배의 값으로 앙갚음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반항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비능력자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고, 강함이야말로 세븐스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는 가디언즈 또한 극렬히 증오했는데, 그들이 U.P.G의 충견으로서 비능력자에게 복종하고, 같은 세븐스를 탄압하는데 앞장선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가디언즈를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에게 있어서 세븐스는 정점 위에 군림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오히려 비능력자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매우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가디언즈를 배신자로 규정해 가차없이 처단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사실 그녀의 본명은 에스메랄다가 아니었다. 사실 '비토리아 에스텔'이라는 본명이 따로 있었는데, 비능력자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거부하고 세븐스로서의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스스로 지은 이름이 지금의 '에스메랄다'였다. 스페인어로 '에메랄드'를 뜻하는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세븐스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는데, 그녀는 에메랄드빛 액체를 생성해 그것을 굳히거나 조작할 수 있는 세븐스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에메랄드빛 탄환을 사방팔방 발사하는 것부터 사람의 몸 속에 액체를 주입해 터뜨리는 과격한 방식까지 그녀가 세븐스를 다루는 방법은 다양했다. 진짜 에메랄드가 아닌 미지의 물체였기에 단단함과 공격력도 뛰어났고, 이것으로 방어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온갖 무술을 섭렵한 달인이었기에 에스메랄다는 전투마다 눈부신 활약을 했다. 에스메랄다만의 신념은 이름을 바꾸는 것 만으로 그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비능력자가 세븐스의 뒷목에 새긴 숫자 '7'을 가리기 위해 목에 초커를 찬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노예의 낙인으로 규정해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대원들에게 자신처럼 초커를 착용할 것을 명령했고, 이는 나아가 에스메랄다 파벌의 상징이 되어 전투부대원이 아니어도 착용하는 이가 늘어났다.
에스메랄다에 대한 설명은 이쯤에서 그만 하고, 이제 파티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파티마는 타고나길 강골인 신체와 피를 무기로 만들 수 있는 세븐스를 가진 덕(?)에 에스메랄다의 눈에 띄어 그녀가 직접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파티마의 전투력이 쓸만해지면 자신의 특수부대에 배치시켜 암살이나 요인 납치에 쓰러고 했다. 그러나 에스메랄다에겐 안타깝게도 파티마는 그녀와 정반대의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프란시스카의 이상향과 가치관을 물려받은 파티마는 언니의 말대로 무기를 잘 다루거나 싸움을 잘 하는 사람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하다고 믿었고, 폭력은 아무것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탓에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할때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고, 그럴때마다 두들겨 맞았지만 폭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말을 고분고분 듣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 처음엔 폭력을 쓰지 않겠다며 에스메랄다의 무술 교육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스로와 남을 지킬 힘 정도는 기르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힘을 타인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하고는 마음을 바꿔 열심히 훈련했다. 그렇다고 에스메랄다의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어서 파티마의 몸엔 훈련으로 생긴 상처보다 에스메랄다에게 두들겨 맞아서 생긴 상처가 더 많이 늘어갔다. 그렇게 오늘도 훈련 중 분노한 에스메랄다에게 얻어터져 생긴 상처를 달고 숙소로 돌아가던 파티마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꼴통!"
그때 파티마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계속 걸어나갔다. 파티마는 그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기 또래의 소녀가 있었다.
"네가 소문의 그 꼴통이구나? 에스메랄다한테 맨날 개긴다며?"
그 소녀는 건강하고 활달한 인상에 살짝 그을린 피부와 카키색에 가까운 녹색 머리, 해질녘 노을처럼 진한 주황색 홍채를 가진 아이였다. 장난스럽게 미소 짓던 소녀는 파티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샤를로테. 물론 여기서 불리는 이름이지만. 진짜 이름은 유스티나.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 아, 에스메랄다 앞에선 샤를로테라고 불러야 해. 안그러면 너나 나나 얻어터지니깐..."
"...앰버."
"앰버?"
"눈이 호박(琥珀)같아서. 그래서... 앰버..."
자신을 샤를로테와 유스티나라고 소개한 소녀는(이하 유스티나), 파티마가 자신을 앰버라고 부르자 잠시 벙찌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파티마는 영문을 몰랐지만, 유스티나가 숨이 넘어갈듯 웃자 자신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소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마데우스 타루(Amadeus Torrou)로서의 삶
- Uno(1) [Reborn]
- 두 사람은 골목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스티나, 이하 '앰버'는 어디서 난 건지 모를 과자를 내밀며 파티마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좀 길어."
"괜찮아."
"파티마 마리아 카시야스 가르시아."
"...길다."
앰버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파티마 역시 그런 앰버를 보며 조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길다고 했잖아..." 그러자 앰버는 "진짜 그렇게 길 줄은 몰랐지!" 라며 응수했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려던 그때, 의외로 파티마가 먼저 말문을 뗐다.
"네 세븐스는 뭐야?"
"내 세븐스? 글쎄, 뭐 이런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앰버의 손에서 호박빛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콩알만한 크기로 그것을 뭉친 뒤 앞으로 던졌고, 얼마 안 가 작은 규모의 폭발을 일으켰다. 놀란 파티마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앰버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이게 내 세븐스야. 폭발성 물질을 생성하지. 많으면 많을수록 위력도 강해져."
"꼭 송진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찐득찐득한 것도, 색도 꼭 송진같아. 그래서 내가 앰버라고 했을때 웃은거야. 그것도 송진으로 만들어진 거잖아."
그러더니 앰버가 갑자기 픽하고 웃으며 자조하듯 말했다.
"그러고보니 나, 꼭 소나무같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머리는 푸르딩딩하고, 몸에선 찐득찐득한 주황색 액체를 분비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새 이름을 에버그린이라고 지을 걸 그랬어."
"난 소나무 좋아해."
"그거 위로하는거지? 근데 너 위로 진짜 못한다."
"어? 왜? 소나무가 뭐 어때서?"
그러자 앰버가 고개를 휘저으며 동시에 손사래 쳤다. 말하자니 입 아프고 피곤하다는 뜻이었다. 파티마는 여전히 눈치를 채거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앰버는 나른하게 눈을 뜨며 파티마에게 말했다.
"넌 여기 오기 전에 뭘 하고 살았어? 그거나 말해 봐."
"재미는 없을텐데."
"상관없어."
파티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이 옴브라에 오기 전의 과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녀가 지역 유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사생아에 세븐스라 차별 받고 자랐다는 것, 일찍이 사람들을 해칠 시한폭탄 취급받으며 2살부터 12살까지 정원 외딴 곳에 지어진 오두막에서 격리되어 지냈다는 것, 12살이 되어 격리는 해제됐지만 다른 비능력자 사촌들에게 괴롭힘 당한 것, 14살이 되던 해 연말에 세븐스를 발현했다는 이유로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에 가택연금 당했다는 것, 그러나 자신은 탈출을 감행했고 뒷골목에서 잠시 생활했다는 것 등등을 앰버에게 털어놓았다. 앰버가 미간을 찌푸리자 파티마는 즐거운 일도 있었다며 항변했다.
"비능력자에 배 다른 자매였지만 언제나 날 사랑해주는 언니가 있었어. 언니도 감시를 당했고, 자유롭지 못해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날 항상 감싸주고 용기를 줬어. 내 인생 최초로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도 언니가 준거야."
그 말을 들은 앰버는 세상에 그런 비능력자도 있냐고 크게 놀라워했다. 파티마가 자신을 잠시 거두어 준 은인인 호세 씨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자 앰버의 얼굴이 울상이 되며 격양된 말투로 중얼거렸다.
"왜 나한테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 이건 불공평해...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
곧이어 눈물을 흘리며 씩씩대기 시작한 앰버는 곧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파티마는 어찌할지 몰라 허둥지둥대다가 앰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앰버가 울분을 터뜨리며 세상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동안, 파티마는 어렴풋이 앰버가 아주 힘든 삶을 살아왔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처참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파티마 스스로도 자신의 인생을 고달프다고 평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더 고달픈 삶이라면 대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파티마는 앰버에게 그녀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끝내 묻지 않았다.
앰버가 다 울고난 후, 그녀는 파티마에게 사과했다. 자신의 인생도 인생이지만 파티마의 인생도 가시밭길 그 자체이기에 누가 더 불행했는지 무게를 재보는건 파티마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앰버에겐 자신의 불행과 남의 불행을 저울질하는 악취미는 없었다. 파티마는 딱히 사과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저었다. 두 소녀는 아예 자리를 깔고 골목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꽤 넓직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골목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앰버는 파티마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 새 이름 지었어?"
"안 그래도 그것때문에 맞았어."
"아직도 못 정했어?"
"바꾸고 싶지도 않은데, 좋은 이름도 생각나질 않아. 그냥 안 바꾸면 안 되나?"
그러자 앰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안돼! 그러다 너, 진짜 죽을거야! 에스메랄다는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니라고! 그 여자는 그깟 이름 하나 안 바꾼다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단말야!"
파티마가 믿기지 않는다는듯 대꾸했다.
"그정도야?"
"그래. 에스메랄다는 그정도로 미친 인간이야. ...불쌍한 테드. 그때 고집만 안 부렸어도..."
파티마는 뚱한 얼굴로 고민했다. 사실 맞는 건 두렵지 않지만, 죽는 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한참 고민에 빠진 그때,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곤란해하던 파티마의 머릿속으로 책에서 봤던 이름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아마데우스'(Amadeus). '신에게 사랑 받는 자'라는 뜻을 가졌다는 이유로 인상이 깊게 남은 이름이었다. 파티마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아마데우스로 할래."
"그치만 그건 남자 이름이잖아."
"상관없어. 이걸로 결정할래."
앰버는 어이없는 얼굴로 파티마를 보았으나 파티마는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결정을 내린 뒤였다.
"성은?'
"글쎄, 타루?"
이름은 한참 고민했으면서 성은 금방 정해졌다. 파티마가 언젠가 흥미롭게 읽은 책의 저자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앰버는 이상한 이름같다며 혹평을 쏟아부었지만 파티마는 별 생각 없어보였다. 그렇게 파티마가 15세가 되던 해에, 그녀는 '파티마 마리아 카시야스 가르시아'에서 '아마데우스 타루'로 다시 태어났다.
- Dos(2) [실연]
- 파티마, 아니 아마데우스는 그 후로 앰버와 꼭 붙어다녔다. 마침 나이가 같았기에 그들은 날때부터 함께였던 쌍둥이처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웃으며 우정을 나누었다. 아마데우스의 귀를 뚫어준 것도 앰버였다. 그녀는 앰버가 처음 옷핀의 바늘 부분을 라이터로 지질때 기겁했지만 막상 귀를 뚫고 언니가 선물한 청금석 귀걸이를 착용하게 되자 뛸듯이 기뻐했다. 아마데우스의 15년 인생에 앰버만큼 그녀와 오래 우정을 나눈 이는 지금껏 단 한명도 없었다. 에스메랄다라는 불안요소가 있었지만 앰버와 함께 할때엔 세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마데우스가 앰버에게 위안을 얻은 것처럼 앰버 역시 아마데우스에게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데우스는 앰버의 짙은 녹색 머리카락과 깊고 진한 노을빛 눈을 좋아했다. 왠지는 몰라도 앰버의 몸에선 소나무처럼 청량한 향이 났기에 아마데우스는 그 향을 맡고 싶을때마다 장난치는 척 그녀를 와락 껴안고 깊게 향을 들이마셨다. 앰버에게 너의 체향이 맡고 싶으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게 해달라고 하는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음습하게 속내를 밝히지 않고 아닌 척하며 향을 맡는게 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두 소녀는 동고동락하며 종종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아마데우스의 미래엔 늘 앰버가 있었고, 앰버 역시 그랬으나 언젠가 아마데우스가 없는 다른 미래의 자신을 상상한 적도 있었다. 이에 아마데우스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자신도 사랑하는 언니 프란시스카가 없는 혼자만의 미래를 상상한 적도 있으니 무어라 불평할 수 없었다.
아마데우스는 훗날 앰버를 회상하며 어쩌면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감상을 남겼다. 아마데우스는 앰버를 볼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앰버의 상처와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손등을 보면 입을 맞추고 싶었고, 나중에는 눈꺼풀에, 그리고 머리카락에, 나아가 앰버의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때 그녀가 가진 감정은 언니 프란시스카에게 느끼는 사랑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아마데우스는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할만큼 미숙했고,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감정 하나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그 당시에 감정을 자각했다 하여도 앰버는 아마데우스를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 아픈 짝사랑으로 끝날 것이 뻔했다. 우정으로 착각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에스메랄다에게 쓸만하다고 인정받을 정도로 무력을 쌓은 아마데우스와 앰버는 암살테러부대 벤데타에 편입되었다. 정확히는, 앰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나 자진하여 벤데타에 입대했다. 아마데우스는 앰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 당연히 그녀를 반겼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이 암살테러부대에 편입됐음을 알고 큰 혼란과 반발심을 느꼈다. 아마데우스는 자신이 암살테러부대 벤데타가 아닌 대(對) 가디언즈 전투부대 살바토르에 편입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몇번이고 에스메랄다에게 항의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서운 폭력이었다. 아마데우스가 좋든 싫든 그녀는 에스메랄다의 눈에 띈 이상 에스메랄다의 사병이 되어야했다.
그렇게 테러 일정이 잡힌 날까지 항명을 이어가던 아마데우스는 앰버의 설득에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라는대로 임무 첫날부터 에스메랄다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테러로 건물에 갇힌 비능력자 시민들을 구해준 일 때문이었다. 에스메랄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 맞았지만 그녀의 행보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계속 비능력자 시민들을 구출했고, 암살 대상자를 죽이지 않았으며, 명령을 비웃듯 모든 활동에 진심을 다 하지 않았다. 결국 아마데우스는 에스메랄다에 의해 살바토르로 편입되었다. 살바토르의 대장은 에스메랄다의 심복이었으니 여전히 그녀의 영향력 안에 있었지만 이제 아마데우스는 가디언즈와 부딪히며 박해받는 세븐스들을 구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만족했다.
물론 나쁜 일도 있었다. 아마데우스가 살바토르로 편입된 시기부터 앰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앰버는 아마데우스를 피하기 시작했고, 방도 따로 쓰게 되었으며, 나중엔 그녀의 말도 모두 무시했다. 영문을 몰라 앰버의 이름만을 부르짖던 아마데우스는 언젠가 날을 잡고(머릿속으론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보다 덩치가 작은 앰버를 힘으로 몰아붙인뒤 어째서 자신을 무시하는지 물었다. 얼마동안 안봤다고 앰버의 얼굴과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앰버는 한참 아마데우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더니, 아마데우스가 양쪽 어깨를 꼭 부여잡고 가볍게 흔들자 경멸이 비치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붙이곤 소리쳤다.
"넌 뭐야? 넌 나보다 가진 것도 많으면서 왜 내가 갖지 못하는 걸 손쉽게 가지는 건데? 왜 자꾸 비참하게 만드냐고! 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그 미친여자 눈에 띄어서라도 아득바득 기어올라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넌 아무 노력도 안하고 바로 에스메랄다 눈에 들어놓고선 네 발로 출세길을 걷어찼잖아!"
아마데우스는 앰버의 눈에 비친 자신을 향한 경멸에 한번 놀라고, 그녀의 폭언에 두번 놀라 멍청이마냥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했다. 그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면서 고장난 라디오마냥 뭐? 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앰버는 아마데우스를 밀쳐 넘어뜨리곤 말했다.
"사랑이니 자비니 뭐니 하면서 고결한 척 하지마! 강하고 추하지 않으면 짓밟히는게 세상의 이치니까! 어차피 너도 약해빠지고 별 볼일 없는 날 업신여보고 있잖아!"
그대로 발길을 돌려 떠나려는 앰버를 놓칠뻔하다가 정신을 차려 그녀의 발목을 잡은 아마데우스는 당혹스럽고, 또 정신나간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야! 난 단 한번도 널 그렇게... 넌 내 친구야!"
갑자기 발목을 잡힌 앰버가 발을 세게 잡아끌어 아마데우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이거 놔!"
끝끝내 발목을 놓지 않으려던 아마데우스와 빨리 떠나고픈 앰버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마데우스는 큰 목소리로 애절하게 외쳤다.
"나는 널 사랑해!"
그 말을 들은 앰버는 잠시 놀란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못 하더니, 울음이 터져 땅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마데우스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다시 응시하고는 힘이 빠진 그녀의 손아귀에서 발을 빼냈다. 그리고는 아마데우스에게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아니야."
그 이후로 아마데우스가 앰버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앰버가 피하는 것도 있지만 아마데우스가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1년쯤 지났을때, 아마데우스는 앰버가 가디언즈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