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항목: 에스터 힐데가르트.C(머리말)
- 리제 - 그것은 밤
(리제 - 그것은 밤)
할짝하고 손에 묻은 피를 입으로 핥는다. 아아, 이 옷도 슬슬 못 쓰겠네. 버릴까.
피가 잔뜩 튀어있는 후드티, 그리고 적당히 쓴 일회용 마스크. 그야말로 대충 숨겼지만 반대로 누구도 의심하기 어려운 복장이다.
피가 아니라면 말이다.
"음?"
기척이 느껴진다. 누가 있는건가? 식칼 하나는 버러버렸으니 다른 무장을 들어야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후드티를 벗는다. 안에는 다른 옷이 있다.
그리고 그 후드티를 뒤로 휙 던져 골목길에 들어가게 한다. 머리카락이나 이런 것 안 묻게 나중에 태워버리자.
"거기 누구있어?"
어둠 속을 향해 말을 건다.
에스터 - 리제
"있다."
피 냄새. 비릿하게 풍겨오는 향에 에스터는 얼굴을 찡그린다. 안 그래도 늘상 굳어있는 인상이 더 험악해진다. 에스터는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당신을 직시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으리라는 추측은 어둠속이라 앞이 잘 안 보이는 와중에서도 어렵지 않았다. 에스터는 당신을 바라본다. 키 차이가 머리 하나가 나니 약간 내려보는 모양새같기도 했다.
"...그만둬."
하지만, 이런 말이 먹힐 리는 없겠지.
(리제 - 에스터)
"무엇을?"
알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댄다.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총을 집는다. 이미 장전은 되있다. 저번의 싸움으로 난 1:1에는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개인적으로도 취향은 아니고 말이야.
"자세히 이야기해줄레? 보다시피 내 키는 너보다 작아서 말이야."
어둠은 그녀의 사냥터다. 하도 많이 어둠 속에서 지내서 리제 그녀의 시력은 낮보다 밤이 더 잘 보이니까.
그녀의 눈 앞에 보이는 한명의 '또다른 이름모를 영웅'
하늘색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그녀의 시야 내에 보인다.
(에스터 - 리제)
"사람을 해치는 것을 그만둬라."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당신의 말에 에스터는 이번엔 빠짐없이 또박또박 말한다. 하지만 그대는 쉽게 그만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에스터의 말재주는 그리 좋지 못했고, 당신이 사람을 해쳐선 안되는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능력은 되지 않았다.
"아니면, 제압하겠다."
주머니에 무기가 있는건가. 에스터도 마찬가지로 바지 뒷편의 총을 잡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태로운 대치상황이었다.
"하지만, 네가 순순히 그만둬준다면, 죽이지 않겠다."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받게 되더라도 말이야. 덧붙인다. 진심이었다. 에스터는, 사람을 죽일 만한 담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리제 - 에스터)
"증거는?"
나는 평범한 23살의 여성일뿐이라고? 주머니에 있는 총의 손잡이를 집는다.
상대도 무기를 잡는건가. 그러고는 뒤이어지는 말에는 태연스레 이야기한다.
"제압이라던가 죽인다던가. 그런거 나같은 민간인에게 이야기해도 되는거야? 언론이 열심히 때릴거라고?"
리제가 무서운 것은 단순히 그 잔혹성만이 아니다. 그녀는 '머리가 좀 돌아간다.'라고 해야겠지.
즉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그녀를 '체포'하는 것도 '제압'하는 것도 선택지에 넣을수없다. 그 증거로 쓰일만한 옷은 그녀의 뒤편에 있다. '이미 벗어던졌으니까'
옷에 대해 물어본다 해도 돌아올 대답은 '우연히 지나가다 보니 있었다' 정도 밖에 돌아오지 않겠지.
(에스터 - 리제)
"언론은 현재 빌런 측에 불리하게 되어있다. 빌런 즉각 사살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에스터는 머리를 쥐어짜낸다. 말 싸움은 특기가 아니다. 특기가 아니라기 보단 전혀 재주가 없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우선은 자신이 아는 한 최선의 정론으로 대답한다.
"나는 죽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가 빌런이 아니라면, 너를 절대 죽이지 않을 것이다. "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당신의 얼굴을 확인한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구나.
"그러니까, 네가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면, 죽인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실언이었다."
'빌런'을 너무 경계한 탓에 말이야. 에스터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바라본다. 말을 이어나간다.
"민간인이라고 한다면, 외출을 자제하라는 이즈모의 지침을 들었을 테지. 듣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전해주겠다. 현재 도시는 위험한 상태이다. 네가 '민간인'이라면, 위험하니까 외출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만약 민간인이라면, 너의 집으로 바래다주지. 갈 곳이 없다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보호해주겠다. "
"이를테면, '히어로지부' 같은 곳에 말이야."
'민간인'에게는 그 어디보다도 안전한 곳이지. 그렇지 않아?
(리제 - 에스터)
"그럼 민간인인 나를 집으로 데려가주겠어? 히어로씨"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손를 낳은채로 에스터에게 다가간다. 보호를 요청한 민간인-이라는 상황이다. 옷은 별슈없이 전에 곰돌군에게 받은 발화 스위치를 총 옆에 있는 버튼을 누름으로서 활성화 피묻은 후드티가 갑자기 불타기 시작한다.
"우리 집은 이 쪽이야"
그러면서 큰 거리로 향하는 길을 손가락으로 제시한다.
그러고나서 에스타를 보면서 이야기한다.
"계엄령인 것은 몰랐어. 다른 사람들도 돌아다니니까 밀이야"
(에스터 - 리제)
"얼마든지."
에스터는 리제를 집으로 데려가는 듯 싶더니, 길을 계속 바꾼다. 의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는 듯이.
"하지만, 옷을 태운다는건 분명, 인멸행위같군."
그 짧은 사이, 불타는 소리와 섬유 타는 냄새를 맡은걸까. 에스터가 리제를 데려가는 길은, 분명 이즈모 본부를 향한 방향이었군.
"뭣보다도, 증거가 없다는 말을 하기에는 말이야..."
그녀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단순 정색인지, 분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위압적인 인상이었다. 큰 키와 골격은 그 인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었다.
"너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수 없이 사람을 죽여온 살인자의, 지워지지 않는 냄새가 말이야. 무엇을 불태우더라도 지울 수 없는 선명한 증거였다.
(리제 - 에스터)
"왜 굳이 길을 바꾸는걸까? 히어로씨"
그러고는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미소지은채로 쳐다본다. 마치 어이가 없다는듯
심적 증거라, 근데 그런거 법에서는 인정 안하거든.
"미안한데, 너의 심적 증거만으로 민간인을 히어로 본부에 데리고 간다고? 겨우 너의 감 하나 때문에?"
심적 증거는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는다고? 자백 같은게 아닌 이상 말이야.
그러고는 방향을 돌려 '엘리'의 집으로 걸음을 바꾼다.
"에스코트는 역시 됬어. 무엇보다 멀쩡한 사람을 '빌런' 취급하는 당신의 행동이 불쾌할 뿐이야."
그래, 에스터는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의하면 민간인을 빌런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법원에서 모욕죄로 고소 당해도 할 말이 없을만큼 말이다.
물론 '먼저 공격'하면 그것만으로도 언론은 히어로를 규탄하게 될 것이다. 언론이라는 것은 갈대다. 애초에 지금은 '빌런 관리를 못하는 이즈모'를 규탄하다 겨우 실적 하나가 나오니 띄우고 있지만...
'히어로가 민간인을 빌런으로 의심'했다는 심적 증거만으로 공격했다고 하면 이즈모의 평판은 나락 끝으로 떨어지고 히어로의 평가는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니까.
"짧은 에스코트 고마웠어. 의심쟁이 히어로씨"
그 것을 증명하듯 리제는 '순간적으로만 보이는' 경멸 표정마저 연기해냈다. 자신이 의심받았을 때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 에스터 - 파크
(에스터 - 파크)
체스에는 소질이 없었다. 어릴 때 부터 계속 해오긴 했으나, 상대가 너무 강한 건지 자신이 발전이 없는건지 도무지 실력이 늘질 않았다. 이에 에릭은 '에스터씨는 큰 그림이 아니라 말 각각을 보는게 문제에요'라고 말하곤 했지. 맞는 말이다.
에스터는 말 하나하나를 잃는 것에 과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느 말을 희생해서 더 가치가 높은 말을 잡는다...같은 전략에 서툴었다. 어느 말도 희생시키지 않고, 오직 체크메이트만을 손에 넣길 바랐다. 이때문에, 비웃음을 산 적도 있었던가.
히어로 본부에서 명령으로 대기중이던 에스터는 소파에 앉아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여기서 이 말이 이렇게 움직인다면? 이 말이 죽지 않도록 유도한다면? 같은 경우의 수를 헤아리면서.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로서는 멋질지 몰라도, 체스에 있어서는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에스터는 지나가던 그를 바라본다. 자신과 같은 장신에 청색 계통의 머리카락의 히어로. 하지만 과거 수많은 테러를 저지른, 끔찍한 빌런이었던 자. 인상을 약간 찌푸린다.
에스터는 파크를 바라보며 손짓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 테이블을 톡톡, 가볍게 두드린다. 마치 앞에 앉으라고 말하듯이. 테이블에는 체스판. 에스터의 쪽에는 흰색, 그 앞쪽엔 검은 말이 있다.
(파크 - 에스터)
파크는 지금 ISMO 복도를 걸어다니고 있다. 최근 파크는 잠을 푹 잔듯 보였다. 복용한 수면제의 효과일수도 있지만 잠만 잘 자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부작용보다는 수면이 훨씬 중요했으니깐.
소파의 근쳐를 지나가던 파크는 에스터를 발견한다. 자신과 같은 청발의 근육질 여.....성? 파크는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헷갈렸다. 꽤나 크고 떡대가 있는것을 봐서는 남자인듯 싶었다. 어쨌든 파크에게 손짓하는 에스터를 보고 파크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체스판을 본다.
"번잡스럽게도 뒀네. 쉬운길이 곳곳에 보이는데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뭐지?"
파크는 대충 수를 보더니 그녀가 둔 의도를 파악하지는 않더라도 대충은 추려냈다. 그녀의 말은 둔 횟수에 비해 지나칠정도로 말이 많았다.
"........설마 체스판에서 자신의 말을 전부 살리려하는거냐?"
(에스터 - 파크 )
"전부는 아니다. 희생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을 뿐."
하지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 번잡스러웠다. 체스는 근본적으로는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왕을 몰아세우는 것이 승패를 결정하는 게임이니 굳이 이런 수를 쓸 필요는 없었다.
"네 말대로, 비효율적이지만 말이야. 변형룰이라면 모를까."
말을 잃는 것이 껄끄러웠다. 에스터는 흰 폰 하나를 다시 움직여 말을 쓰러뜨린다. 검은 나이트가 둥, 소리를 내며 가벼이 눕는다.
"어디까지나 실전을 엄두에 둔 것이 아닌, 가능성의 수를 둬본 거다. 실패같지만."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에스터 자신의 단점을 고치지 않고 역으로 극대화한 방식으로도 게임이 진행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의 소모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성질이, 역으로 전략으로서 이용가능한가? 글쎄. 이대로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
그러고는 에스터는 체스판을 리셋한다. 흰 말, 검은 말이 전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둘 생각?"
에스터는 정돈된 체스판을 180도 돌린다. 이번엔 흰 말이 당신쪽, 검은 말이 에스터의 쪽이다. 검은 말을 택한 것은 이번엔 시험적인 전략이 아닌 정도로 공략해내리라는 뜻도 있었다. 즉슨, 말의 소비를 꺼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 과연. 이번 체스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파크 - 에스터)
"희생을 최소화 하는거든 아니면 전부 살리는거든 체스에서는 전부 너가말한것처럼 비효율적이라는걸 알텐데."
뭐, 그건 그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일테지만, 파크는 굳이 걸고넘어졌다. 마치 자신을 보는것같아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는것. 너무나도 자신이 떠올라버렸다.
그녀는 그 수들이 실패라고 말하더니 체스판을 정리해버렸다. 그러고는 판을 180도 돌려 파크의 앞에 하얀 말이오게했다. 파크는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동의했다.
"좋아. 할것도 없으니깐. 그럼 폰을 A2에서 A4로."
폰을 옮기며 파크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파크는 갑작스레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작은 목소리여서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너도 나를 못믿나?"
못믿는게 당연. 그렇지만 파크는 굳이 확인하고 싶었다.
(에스터 - 파크)
"못믿나...라. 글쎄. '믿는다'의 기준이 어디까진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말을 하는 동시에 눈으로는 말을 쫓고 있었다. 에스터의 손이 자신의 말에게로 닿는다.
"히어로로서의 너를 믿는다. 하지만 빌런으로서의 너를 믿지 않는다. "
에스터는 말을 옮긴다. 달각. 체스말 소리가 다시 가볍게 울린다.
"그렇기때문에 네가 히어로로서 계속 올바른 활동을 이어가준다면, 나는 너를 믿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파크를 쳐다본다. 당신의 눈을 직시할 작정이다.
(파크 - 에스터)
"히어로로서의 나는 신뢰해 주는거야? 고마워. 그정도면 됬어."
파크는 밝게 웃어주고는 체스말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파크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오랜만에 두는 체스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저 자신이 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이번에는 나도 내 신념을 한번 실험해볼까나~"
적 체스말도 아군 체스말도 죽이지 않고 오로지 킹만을 체크메이트 할려고 마음먹었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해봐야 아는거니깐.
"너 근데 남자야 여자야? 아 잠깐만.....맞춰볼게.....남자지!"
장발남자라고 완벽하게 오해한 파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딴에는 신장,골격등을 보고 평균적인 결과를 통해 판단한거지만, 예외는 상정하지 못했다고 할까.
(에스터 - 파크)
"아니."
성별에 대한 질문에 에스터는 짤막하게 대답한다. 자주 오해받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것 보다는 말을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실패했던 전략을 사용하려는 건가. 의외였다. 예를들어 에스터가 자신의 고집을 투영하여 말을 움직였을 때 흰색 말들은 최대한 말을 보호하며 움직였었지.
"아까전엔 번잡스럽다고 말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 에스터가 쥔 말은 흑색 말이었고, 이번 판은 시험 체스가 아니었다. 에스터의 입꼬리가 약간 미소를 띈다. 불살주의의 흰색 말은 언제든지 검은색 말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에스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 폰 하나를 흑색 폰으로 잡아버린다.
검은 말이 흰 말의 눈치를 봐줄 리 없다. 자신이 흰 색이길 원하더라도 검은 말이 검은 색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한다면 좋겠군."
너의 전략이 말이야. 그렇게 말하곤 판의 다시 흐름을 살핀다. 현재 전황은, 그리 불리하진 않은가.
(이 시점부터, 체스의 우세나 흐름을 다이스로 정했습니다.)
(파크 - 에스터)
"엄.....그렇구나"
예상과 달라서 파크는 약간 당황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온 그녀의 말과 공격에, 파크는 체스판을 응시하며 에스터에게 대답한다.
"번잡스러워보여도 재미있거든 이거. 그리고"
파크는 수를 짧은시간 안에 몇번 두더니 자신의 나이트와 퀸이 상대의 킹을 노리도록 배열을 짠다. 그리고 에스터의 눈을 쳐다보며 선언했다.
"체크."
(에스터 - 파크)
흰 나이트의 체크. 불리하다.
"이런."
짧게 신음했지만 기분나빠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꽤나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공격당했나. 어디. 방안은? 에스터는 자신의 나이트를 움직여 퀸을 잡는다. 하지만 이걸로 완전히 피할 수 있을까?
"테러를 일삼던 빌런 클라운이, 불살주의의 히어로 코스츔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궁금하군."
말을 계속 움직여가면서 에스터는 말을 잇는다. 이 이야기는, 조금 민감한 주제일 수 있었나. 에스터는 약간 찡그린다.
"어느 부분이, 너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그렇게 당신의 반응을 살핀다. 무례했나?
(파크 - 에스터)
"어이쿠. 퀸이 잡혀버렸잖아?"
난감하네 라며 중얼거리던 파크는 옆에있던 룩을 킹과 같은 선상에 놓으며 체크를 한다. 뻔한 체크였지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것 같았다. 저쪽의 비숍이 뭔가 수상하다.
"계기.....계기라....나의 마음을 움직인 부분이 궁금하다 이거지....."
갑자기 파크는 손을 부들부들 떤다. 트라우마가 다시 플래시백 하여 또 환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린다. 몇백명의 사람들이 파크의 근처에서 너때문이야라고 외치며 파크에게 달려든다.
"나........나는............ㅇ....."
파크는 갑자기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더니 잠시 괴로운듯이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몇분이 지나서야 파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눈에서 눈물을 조용히 흘리며 일어났다.
"계기는.....이거지 이 죄책감....."
긴 이야기가 될텐데 괜찮겠어 라며 파크는 에스터에게 묻는다.
(에스터 - 파크)
이건... 에릭이 자주 쓰던 눈속임이다. 에스터는 말을 조금 움직여, 파크의 꿍꿍이를 수포로 만들어버린다.
다음 말을 놓을 곳을 고민하던 에스터는, 눈앞의 파크의 상태에 동요한다. 분명 좋지 않은 상태다. 체스를 중단하고, 파크에게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죄책감. 평범한 동기다.
"말을 이어가기 힘들다면 그만둬도 괜찮다. 내가 무리한 화제를 던진 것 같아. 미안하다."
수많은 사람을 마구 학살하며 터뜨릴땐 느끼지 못했으나, 죽이는 쪽에서 살리는 쪽이 되며 한명한명의 목숨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죄책감이 찾아왔다. 그 정도로 이해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건, 그렇다면, 결국 그렇다는 얘긴가. 괴물이라고 비춰지던 공포의 대상도, 사실은 그냥 사람이었다고.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지 못한 것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파크 - 에스터)
"어.....괜찮아 졌어.....고마워."
함시온과의 말다툼 이후에 드디어 극복한줄 알았는데 라고 생각하던 파크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걱정마. 무리한 화제는 아니니깐. 그냥 잠깐 힘든거야."
그게 그건가? 하고 아하하 웃어보지만,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은것 같았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을 계속해나갔다.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채로 편안하게.
"나는...원래 빌런이었었지. 광기가 넘쳐 나 자신을 제어할수 없는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었다. 하지만 서커스 이후로, 모든게 바뀌었어."
파크는 소파에 누워서 생각에 잠기듯 말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뭐.....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라고. 갱생을 시켰다는데 아무것도 안시켰지. 그리고 히어로인척이라도 하려고 싸이킥 갱을 때려잡고, 사람들을 구했지. 근데 그 과정에서 나는 살인을 안했어. 살인을 하면 더욱 이미지가 나빠질테니깐."
파크는 숨을 잠시 고른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개비 꺼낼까 생각했지만 샤오화하고 약속했기에 도로 생각을 집어넣고 이야기나 계속하자고 생각했다.
"웃긴게 뭔지알아? 살인을 안하니깐, 광기가 사라지고, 감정들이 점점 생겨나더라? 난 처음에는 감정들을 무시했지. 그런데 어느날 화재현장에서 내가 못구한 사람들의 유족을 봤어. 그게 내가 죄책감이 생겨난 이유지!"
즉. 파크는 원래 죄책감따위는 알지도 못했지만, 그 유족에 의해 죄책감이 생겨났고, 그 죄책감이 점점 번져가 파크가 저지른 모든 범죄들을 트라우마로 만든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어. 불쌍한 남자는 나처럼 피곤해보였지. 나와 다른 정의를 관철하는, 살인으로 정의를 관철하는 자. 그 남자와 대화하며, 나는 그와 반대로 불살을 추구하기로 했어. 더이상 죄책감때문에 사람을 죽일수도, 그렇다고해서 빌런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나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그리고 파크는 끝이라는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스터 - 파크)
괜찮지 않아보인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에스터는 가만히 앉아, 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위악을 표방하던 사람이 정말로 악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많이 보았으나, 이 쪽은 반대인가.
"그런가."
덤덤하게 말했지만, 에스터는 마음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 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그 기분이라면, 자신이, 에스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직 약했던 시기의, 그 연구소의 모습을 떠올린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물러터졌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수백명을 죽였다면, 그 대신 수백, 수천, 수만명을 구해내는 것이 단순히 죽어버리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불쌍한 남자라. '
살인으로 정의를 관철하는 자라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있었다기 보다는, 히어로 내에서 빌런 즉각 사살 명령이 내려진 후로는 그 누구도 저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권위에 의한 명령은 때로는 많은 것을 정당화시킨다. 설령 그것이 부도덕적인 일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해도.
에스터는, 그리고, 그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과거, 연구소의...
"네가 진심이든 위선이든 옳은 일을 행한다면 나는 너를 올바른 사람으로 믿을 뿐이다. 역으로 네가 정의를 위해서건 쾌락을 위해서건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너를 막아서겠지."
이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스터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을 하는 말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때는 툭툭 던진 말에 그렇게나 쉽게 상처받곤 했으면서, 우습네. 속으로 자신을 조소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연기일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준비해놓은것만 같이 그럴듯한 이야기. 이것은 사기꾼들의 흔한 수법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뭐 어떻겠는가. 위선이라면 어떻고, 자기만족이라면 어떤가. 어떻게든 살려내고 구해낸 목숨은 구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구원은 또 다른 구원을 낳을 것이고, 설령 그것이 위선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때문에 파크를 믿었다. 파크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 속이 죄책감으로 점철되어있든, 구원받는 사람에 대한 비웃음으로 가득차있든, 그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그 속의 진심에 대해서는 파고들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그렇다. 어차피 사람의 진짜 속마음같은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사람들은 언제나 부정하고 외면하는데,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 따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어깨를 으쓱대는 파크에게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스터는 체스의 말을 하나 손에 잡는다. 검은 나이트였다.
"체스였다고 하면 말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플레이겠지. 왕을 잡는 것이 목적인 게임에서, 말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것은 의미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들어보인 나이트로 파크의 비숍을 눕힌다. 어디선가 들었지. 프랑스에서는 비숍을 '광대'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그러나 이 곳은 체스판 위가 아니고, 우리들이 하게 될 일은 게임이 아니다."
만약에 체스라고 한다면, 변형 룰의 이색 게임에 가깝겠지. 애초에 세계는,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단조로운 곳이 아니거늘.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관철시켜도 된다. 우리들은 적진의 끝에 있는 회색 폰이다. "
어떤 빛깔이라도 될 수 있고, 어떤 말이라도 될 수 있다. 우리가 잡아야 할 왕은 적진의 왕일 수도 아군의 왕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그 사이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는 흑색 말일수도 있다.
"나는 네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음을 믿는다. 코스츔."
에스터는 다시 파크를 응시한다. 언제나처럼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파크 - 에스터)
그녀는 계속하여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 말들이 끝나자 나온 문장에 파크는 시원스레 대답한다.
"그래. 그렇다면 만약 내가 다시 광기에 빠져든다면, 너가 바로잡아줘. 막을 사람은 구했거든. 그렇다면 이제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내가보기에는, 그건 너가 적합할듯 하다."
파크와 체격도 비슷하고, 정의감도 투철하다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다.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막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짓을 할지는 그도 모르겠지만. 파크는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들의.....신념....."
나이트에 의해 눕혀진 비숍. 마치 나중에 자신이 검게 물들면 나올 구도를 보는것 같기도 하다. 검은 광대는 백기사에게 쓰러지리라.
그리고 서로의 신념을 관철해도 된다는 그녀의 말에, 파크는 결심했다.
"나는, 모두 구하겠다. 히어로도, 빌런도, 시민들도. 전부 구하겠다. 나는 이제 히어로니깐."
주먹을 단단히 쥐고 결심한듯이 말한다. 그의 마음속에서 드디어 정의가 확고해졌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아무도 죽게하지 않겠어."
(에스터 - 파크)
"선택당했나."
에스터는 입가에 미소를 띈다. 영웅은 광대의 허물을 찢고 탄생했다고 하는 이야기인가.
"좋아. 물론이야."
환영이다. 에스터는 당신에게 악수를 건넨다. 큼직한 손이 체스판을 가리고 당신의 눈앞에 보인다.
"네가 다시 미쳐버린다면, 어떻게 해서든 고쳐내도록 하지. 심리 케어는 전문이 아니다만."
그거라면 구제프의 쪽이겠지. 그녀는 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파크는 그에게 상담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아마 자신에게도 따로 부탁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히어로는 히어로의 손을 잡는다.
-
- 사각이는 종이 소리를 들으며(녹턴 - 에스터)
(녹턴- 에스터)
새삼스럽게 다시 일터에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없는 사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구석에 쌓인 서류가 한가득이었고, 그게 참 난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쁜 일에 쫓기며 시침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샌가 창문 밖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을 테니까. 어둑한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가면 피로에 눈꺼풀을 닫는 일 외에는 생각하지 못할테니까. 그래, 그 순간의 찜찜함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서류를 넘겼다. 사망한 히어로와 빌런, 살아난 민간인과 파손된 공공기물들. 잔해 처리에 동원되는 인부들과 다시 재건에 동원되는 인부들. ST와....종이를 훑어내려가던 그녀의 손가락이 멈춰섰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제 일을 도와주겠다 나선 마음씨 착한 당신 덕분이겠지.
녹턴은 시계를 한번 바라보고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단정히 갈무리했다.
"머리말님."
이제 잠시 쉬어도 될 듯 합니다. 하고 열심히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당신을 부르며.
(에스터(머리말) - 녹턴)
에스터는 서류를 정리한다. 눈 앞의 흰 종이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서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서류를 비교해본다.
사무 담당이 아닌 에스터가 굳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면,꽤나 여러가지가 있었지. 우선 자신이 즉살명령을 거부할 시 녹턴의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충격적인(아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맘모스 엉덩이에 깔린 것 마냥 무거워졌기 때문도 있고, 녹턴의 머리가 염색이 아니라 고생해서 샜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을(사실 이즈모에는 이런 소문이 많이 돈다. 야근하던 중 작년에 죽은 귀신을 봤다던가, 실력좋은 정신과 의사가 사실 세뇌능력자라던가. 그럴 리 없지.)진지하게 믿었던 탓에 어깨마저 맘모스에게 짓눌리는 것처럼 무겁게 되어버린 탓이다. 그렇다. 몸과 마음이 맘모스에게 온통 짓밟혀서 천근만근이다. 아아. 맘모스. 꽈광꽈광!
"...아. 네."
당신이 부른다. 서류를 놓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렇군요."
물론, 단지 에스터가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지 선량해서가 아니라, 당신에 대한 동경심도 이러한 행동의 원천이리라.
에스터는 조심조심 쉬는 시늉을 하며 앉는다. 쉬는 시늉을 하려 열심히 노력한다니 뭔가 이상하다. 녹턴이 기억할 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터는 히어로가 되기 전의 녹턴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고로 멋진 경찰청창살. 아니 경찰찰상. 경창청. 경찰! 생각으로 혀를 깨물다니, 너무한 수준이다. 어쨌든 갓 성인이 된 어린 에스터에게 당신의 모습은 꽤나 멋졌던 것이다.
똑같이 자신을 구해준 블래스터의 경우 (현재는 비스트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그래도 에스터 자신이 연장자라는 인식이라던가, 본인이 정의를 표방하지 않는 삐딱한 점이라던가(아마 춘델레...라고 하는 그런 것이란 얘기 같지만.)기타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과거의 만남이 있어도 이 정도로 물렁하진 않는데, 녹턴을 보면 그 때의 물렁함이 돌아오는 것 같다.겉과 속이 전부 물렁. 그래. 흡사 액체괴물!
...그러다보니 서술도 왠지 흐물흐물 녹아버렸는데, 아무튼 녹턴은 에스터의 동경의 대상이다. 에스터는 그녀를 동경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히어로가 되다니, 대체 얼마나 유능하면... 과로로 머리가 세버렸다니, 고생이 너무 많아... 그래. 단 걸 많이 먹는 것도...스트레스...아니. 그냥 좋아해서인가? 아. 지금 바보같은 생각 하는거 들켰나? 어떡해. 변명할 말이 없어... ......같은 의식의 흐름을 서류처리하는 내내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류처리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고 멀티태스킹을 한 것이다. 어쨌든 보이기에는 남들에게와 같은 겉은 딱딱해보여도 속은 따스한...이즈모의...히어로를......무리인가?
이런. 시간축이 뒤죽박죽이다. 어쨌든 에스터는 흡사 10대의 팬심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물렁이 꼬마 에스터를 숨기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서류 뿐만이 아니라.
이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했다. 0.00001초만에 물렁이를 액체괴물통에 눌러버리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다.
(녹턴 - 에스터)
정적 가운데 울리는 초침 소리가 요란하다. 녹턴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엉거주춤하게 의자에 앉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 담겼다. 저리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혹 자신의 말투 때문에 당신이 그리도 몸을 굳히고 있는 것인가 싶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정적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따스한 김이 방 안을 서서히 채워나가며 흐려지는 모양을 보며, 찬장을 열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홍차 티백이 눈에 들어온다.
"홍차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묻는다. 홍차 외에 있는 차가 없으니, 아마 괜찮지 않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잠시 제 동생의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carpe diem, Tempus omnia sanat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심플한 머그컵을 둘 꺼내면서 문득 제 일 특성상 히어로들과 대면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래서 이렇게 컵을 하나 더 준비할 수 있었고, 어쩌면 차갑게 얼어 굳어버린 당신을 녹일 한잔을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듯한 물이 담긴 컵과 각설탕, 우유에 이전에 쟁여두었던 호두과자를 예쁘게 담아낸 접시까지 쟁반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당신에게 다가갔다. 책상에 놓인 수많던 서류들이 황급히 미끄러지며 가지런히 저 한구석으로 몸을 뉘이자 녹턴은 쟁반을 내려놓고 컵 하나를 당신 쪽으로 밀어주었다.
"혹 다른게 필요하시면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편히 쉬라는 듯한 말을 건네면서도, 정작 그 말투는 딱딱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란 사람이 그런 것을.
녹턴은 컵에 티백을 넣고 차를 우려냈다. 컵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와 향기가 그녀를 조금 나른한 시간으로 이끈다.
(에스터 - 녹턴)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집어넣는다. 사실 홍차를 마셔본 일은 없으나 독이 든 잔인들 못받을까. 에스터는 당신이 유능함과 철두철미함 뿐 아니라 다정함과 섬세함까지 갖추었구나- 라고 생각한다. 대단해! 역시 녹턴님이야!
촉촉한 호두과자. 당신이 단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설탕은 몸에 나쁘니 적당히...같은 소리를 꺼내는 에스터이니, 차별대우가 아닐 수 없다. 마침 호두과자는 팥으로 단 맛을 내는 간식이니, 탁월한 선택이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두번째다. 이미 에스터의 머리는 충분히 녹아있는데, 따스하고 향긋한 차가 몸까지도 노곤노곤하게 녹여주는구나. 아아. 이런.
"녹턴 님은, 유능한데다가 섬세하기까지 한 분이로군요."
에스터는 앞으로 홍차 향을 맡을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나쁘지 않은 변화겠지.
"존경스럽습니다."
(녹턴 - 에스터)
손안에 가득 들어찬 온기를 즐기며 오래도록 서류를 보며 고생했던 피곤한 눈을 감는다.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차의 향기와 당신의 감사를 음미한 뒤 잔을 살짝 기울였다. 이 순간의 평화가 향긋히 어우러져 그녀의 혀를 감미롭게 만든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리니 제 안경에 하얗게 서린 김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쩌면 렌즈를 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짤막한 생각과 함께 은빛 뿔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앙증맞게 담긴 호두과자 하나를 살며시 집어간다. 어쩌면 당신이 이 다과에 손대지 않는 건 자신이 먼저 손대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사로잡혀서일까, 아니면 이 호두과자를 먹을 생각에 작은 행복을 느낀 순간이었기 때문일까, 갑작스레 제 귀를 파고드는 당신의 말에 호두과자를 입술로 가져가던 손을 멈칫했다.
존경스럽다라, 나는 그런 말을 들을만한 사람이던가- 어쩐지 작은 고민이 되어 머리속을 맴돈다. 그녀가 건넨 홍차가 당신에게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음을 새까맣게 모른 채.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앉아 서류나 만지고 있는 저보다는 오히려 빌런들을 제압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말머리님이 더 대단하시지요.
-라며,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어보인다.
(에스터 - 녹턴)
당신이 미소짓는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버리니, 에스터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당신의 말에, 울컥한다. 반 쯤 담긴 홍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릴 때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나는, 모습이 성장했다고 해서, 나 자신은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말들은 입 안에 남은 채 맴돌고 있었다. 그것들이 입 안을 따끔따끔 찌르고 있어서 당신의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넣을 겨를이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오는 일들이 이뤄내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만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러한 업무 하나하나가 쌓여 히어로들이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갖춰진 환경 속에서 빌런을 제압하는 히어로는 만들어지는 것 입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그리고... 이런 말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 말의, 서두부분만을 지웠다붙였다 하며 맴돌고 있다.
"......저는, 과거 경찰이던 녹턴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떨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겨우 뱉어낸 말로부터 정적이 흐른다. 1초가 1분 1시간처럼 느껴진다. 어떡하지. 이미 얘기하긴 했는데. 어......
이미 뱉어낸 말을 주워담을 순 없다.
"그 때, 연구소에서... 이상한 실험... 제 어설픈 예측을... 듣고, 녹턴님과 경찰분들이 출동해주셨습니다. 어린 놈의 허황된 망상이라고 코웃음쳤더라면 저도 아이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말을 믿고 미리 출동해주신 경찰분들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갓 스무살이 되었더라지. 그 때의 에스터는. 아직 미숙하고, 약하고, 앳된 티가 많이 나던 시절이었다. 블래스터의 도움 이후 자신도 그렇게 누군가를 구할 수 있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강해지고 싶었다. 자신과 같이 약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저는...그, 그 때, 그, 동경을, 고마움을... 그러니까... 실험을 막을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성장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과거의 자신과 달라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무언가 뱉고, 부딪히고, 행동해라. 증명해내는 것이 자신의 부족이든, 훌륭한 성장이든.
잘 이어지지 않는 말을 떠듬떠듬 이어붙인다. 여기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답이기를.
(녹턴 - 에스터)
달큰한 팥 앙금을 속에 품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빵의 질감을 이로 살며시 깨문다. 걸리는 것 없는 부드러움이 입 안에 담겨 너무 과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담백한 호두과자의 맛이 입안에 감겨온다. 그 달달한 작은 행복에 잠겨서, 그녀는 무심코 당신이 아직 하나도 거들지 않은 호두과자를 또 집어들었다. 이러다가 정말 혼자 다 먹어버릴 기세로.
호두과자를 한입,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딱 적당하고 알맞은 즐거운 조합을 즐기며 진중한 태도로 서류 업무도 대단하고 멋진 일이라 두둔해주는 당신의 상냥한 생각을 듣는다. 정녕 그러하더라도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채 위험한 상황에 몸을 던지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 마냥 맑고 순한 눈빛으로 그녀 덕분에 자신도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모습에, 역시 당신과 같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내려진, 불합리한 사살 명령이 거두어지고 보다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혜택과 복지가 제공될 수 있도록. 제 눈 앞에서 서류를 찢어 발기던 함시온의 모습이 순간 당신과 겹쳐 보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만큼 필요한 일이겠지.
손에 들린 호두과자 조각을 입안에 쏙 넣었다. 그리고 다시 따듯한 차 한모금 - 그래도 몸을 던져가며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 해야지. 그렇지만 당신의 생각에 감사하다는 말도 전해야겠다.
"......저는, 과거 경찰이던 녹턴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아니, 그보다 어떻게?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그저 차만 홀짝였다. 그래, 그랬구나. 10년 전 일도 아닌데 왜 이리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당신이 말한 사건을 떠올려보려 해도 이미 흐릿해진 기억은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래.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지. 녹턴은 제 손에 쥐여진 컵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떨리는 표정과 더듬거리는 목소리- 순수한 당신의 고백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안할 따름이다.
"그땐 그게 제 일이었을 뿐이니까요."
실험을 막을 용기를 내서 신고한 -녹턴은 잠시 망설였다. 섣불리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까?-에스터님이 스스로 구하신 겁니다. 라며 잔잔한 미소를 덧그려낸다.
"그때의 제가 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터님의 감사를 받는대신, 저도 이렇게 감사를 전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미소처럼, 그녀의 물음또한 잔잔하다.
(에스터 - 녹턴)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정하다. 에스터는 마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 짧은 과정에서 일어난 당신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부른다. 에스터 힐데가르트는, 당신의 미소를 쳐다본다. 고개를 숙인다. 흐물흐물거리는 표정을 감춘다. 그리고, 남은 차를 마셔버린다.
힘으로 누르고 제압하는 것 만이 강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다른 방식의 '강함'이 존재했다. 수도 없이 많은 능력들이 존재하듯이, 사람의 수만큼 각각의 강점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위압적인 말투나 압도적인 공격 하나 없이, 상냥한 말과 희미한 미소만으로 에스터의 입을 다물게 한 것도. 에스터는 말과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회유해내는 부분에서는 약하고 녹턴은 조금 더 강했던 것이다.
그래. 이를테면 , 자신이 그를 되돌려내야 할 때가 온다면. ...이라던가.
...물리적으로 강해진 것 만으론 안된다. 역시 자신은 내면이 조금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호두과자를 하나 집는다. 말을 삼킨다.
그것은 입안에서 달콤하고 흐물흐물하게 녹아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약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녹턴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강자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다.
"...녹턴님은, 지금의 빌런 즉살 명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녹턴 - 에스터)
손에 담긴 컵의 온기가 조금 미지근해졌다. 녹턴은 드디어 호두과자를 하나 집어먹는 당신의 모습을 기분좋게 바라보았다. 이로써 그녀가 내온 다과를 그녀 혼자서 먹어치웠다는 오명은 피할 수 있겠다. 물론 치졸하게 그런 이유로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그저 당신이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녹턴은 이어지는 질문에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제 손에 들린 찻잔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달각,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난 것도 같다.
"즉시사살 명령 때문에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만큼 예민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에스터 - 녹턴)
※시체, 트라우마 증세 묘사 주의
"앗, 아니,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정답이었다.
사실은 그랬다. 불가피하게 최악의 경우 상대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최후의 방법으로, '최악의 경우'로 놔두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즈모에서 내린 명령에 의해선, 살인은 최후가 아닌 최우선수단이었다.
"아니,었..."
열일곱살 짜리 어린아이들에게 사람을 죽여야 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영웅 아닌 영웅이던 자와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살인의 죄책감으로 우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긴장해 속이 잔뜩 쫄아있었던 탓일까. 팥으로 된 달콤한 간식이 소화가 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정곡을 찌르는 말에 당황한걸까. 에스터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욱."
그것을 자신을 저지르는 일따윈, 절대 겪고 싶지 않았다.
"죄송, 합니다. 조금..."
조금 구역질이 났다. 녹턴에게 그 때의 일을 말하려 떠올리던 도중, 애써 가라앉히려 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이번 사살명령 이야기로 완전히 생생하게 떠올라버렸다. 자신의 말을 믿고 지켜줬던 경찰과, 자신의 손으로 실험실에서 나온 아이와, 구출되는 아이들, 실험동물들, 몰락하고 분열하는 부패한 연구소. 그러나, 그러나- 동물들과, 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죽어있었다.
에스터는 시체가 보관된 방을 봤던 일을 떠올린다. 체구는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자신보다 훨씬 작은 어린 아이의 시체들이 은밀하게 폐기될 날을 기다리며 줄지어 누워있었다. 몸 곳곳이 부패한 채, 로.
"...으윽..."
이러한 트라우마는 자신이 의지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루만지면 찢어질듯한 고통을 주는 큼지막한 상처자국 같은 것이었다. 단지 약을 취하고, 비교적 아물 때 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스터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 또한 자신의 약함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안타깝도록 눈물이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숨을 쉰다. 진정. 진정하자. 결국, 결국엔, 나, 나는, 자신은, 에스터 힐데가르트 클라인은.
아무것도 성장하지 못했어.
(녹턴 - 에스터)
솔직하게 말하겠다. 당신이 처음에 구역질을 할 때만 하더라도, 제가 내온 다과가 당신의 입에 지독히도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순간 가슴을 졸였다는 사실을. 허나 당신의 두 눈 아래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에, 그녀는 조금 뒤늦게서야 비로소 그 구역질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비닐이 담긴 종이백을 가져와 당신에게 건네주며, 그녀는 가볍게 당신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사람은, 한번 경험한 충격을 쉽게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 옛날 경찰이었던 동료는 첫번째 살인현장을 맞이한 순간을 늘 가슴속에 지니며 살아가고 있었더랬지. 어쩌면 그와 비슷하게, 당신의 여린 마음에 흉이 남은 것은 아닐까 - 그러한 자상을 넘기더라도, 이즈모의 지침을 따라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가 거부감이 들 수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혹 기분이 편치 않으시면 이곳에 토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곤 그녀는 위로처럼 덧붙인다.
"아마 즉시사살 방침은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견뎌 주시겠습니까?
(에스터 - 녹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그 말을 믿어도 되나? 어떤 근거를 가지고? 당신은 무언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생각인가? 나는...
가빠진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조금씩, 조금씩...
"......감사합니다."
다정하다. 당신은 지금도 그 때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정의롭고 상냥하구나. 세 번째의 감사합니다가 나지막히 울려퍼진다.
"...오래 가지 못할까요. 저는...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빌런은 사회에서 너무나도 큰 위협이고, 시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당장 현실의 위협을 피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과격할 지언정 효과가 눈에 또렷히 보이는 이런 수단은, 시민들에게 있어 어떻게 생각될까. 히어로의 실책으로 시민 열명이 죽더라도 빌런을 살려둬 시민 백명이 죽는 것보단 나은 것일까.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미숙함이 자꾸만 느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고 다정한 당신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다시 한 번 눈물이 나려고 한다. 호두과자를 하나 더 삼킨다. 꿀꺽. 목이 메이는 것만 같다.
"역시 녹턴님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 27스레까지,)
(녹턴 - 에스터)(28스레)
당신의 숨이 가라앉는다. 조금은 불확실한 의문을 던지는 당신의 모습에 늘 화제로 떠오르곤 했던 정의를 떠올린다.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한때 경찰로서 그녀도 대면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글쎄,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였던가. 조금은 소박하고 이기적인 이유였지만 나만의 정의에 대한 사전을 만들어 둔 이후로는 한번도 자신의 일과 행동에 의심하지 않았다. 허나 모든 사람은 다르고, 그들의 정의가 다름은 어찌할 방도가 없는 법.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당신같은 정의를 가진 이가 세상에 많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최근 인권운동가들의 항의가 높아졌습니다. 과격한 조치로 경범죄에도 사형을 내리게 되었다며 현재 지침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모아지고 있고요."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라며 당신의 눈물을 훔쳐내고.
그러고보니 법이란 가해자를 위한 것이라고 들었던 적이 있음을 상기한다. 도둑질을 했다고 해서 손을 자르던 시기는 지났다. 이번 조치가 빌런 클라운에 의해 실현될 수 있었음을 생각하며, 히어로 코스츔이 된 그를 떠올렸다. 이제 더 이상 이즈모 측에서도 이러한 비상경보를 유지시킬 명목이 없으니 다시 거리는 위험한 동시에 안전해지리라.
"전 여기서 몇마디 건네 드린 게 다인데, 너무 과분한 감사를 받네요."
조금은 장난스레 당신의 연이은 감사를 받고, 이미 비어버린 당신의 잔을 눈짓했다.
"따듯한 우유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다과를 먹는 당신의 목이 그렇게도 메워 보였는지.
(녹턴-에스터)
단순히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말임을 깨닫고는, 어깨의 힘이 풀린다. 당신의 말에, 에스터는 마침내 뭔가 진심으로 안식을 얻었는지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렇군요."
무거웠던 마음속에서 드디어 맘모스들이 얌전히 먹이를 찾아 떠났다. 뿌우.
"감사합...아."
또 다시 감사를 말하려다, 당신의 반응에 머쓱한지 약간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밝게 웃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
막연하던 감사와 동경이 계속 깊어지는 것이다. 우유를 따라준다는 녹턴의 말에, 아, 부탁드립니다. 라고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까지 약한 소리를 하고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내보인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었을지 모른다. 누구보다 여리고 약했던 시절의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괴로움을 말로 표현하는 법도 서툴렀고, 의지하는 법도 잘 몰랐다.
...지금은,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다. 솔직한 말하기는 서툴지만,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전보다 강해지고, 히어로 머리말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래선 안 된다니까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이리 네 목소리가 또렷하게 머리에서 튀어나오면, 무심코 웃음이 나와버린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여전히 에스터에게 에릭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났을 때의 영향도 있겠지.
나중에 에릭에게도 감사인사를 해야겠군. 오늘 녹턴에게 한 감사의 2할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강한 히어로를 동경했지만, 역시,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녹턴님이나, 다른 강인하고 멋진 히어로들에 비하면..."
약하다는 것은 아프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쉽게 고통받는다. 에스터는 강한 사람이 그 고통을 덜어내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다.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강렬하게 강함을 좇게 된 것은, 자신이 그 약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약함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약한 사람이 홀로 버티는 것이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에, 녹턴님에게도 이렇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 생긴다면,"
그렇기에, 감사한 당신에게 말을 잇는다.
"오늘의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녹턴님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ㅡ당신은, 그것이 필요없을 만큼 저보다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녹턴님만큼, 자, 잘 할 자신은 없지만서도."
겨우 이은 끝말이 흐릿해진다. 역시, 말로 표현하는 것은 행동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부끄럽다. 언제나 서류처리를 하며 누군가를 상대하는 일을 하는 당신은 대단하다.
(녹턴 - 에스터)
당신의 잔에 따스한 우유가 차오른다. 먼저 우유를 권한 것은 그녀이니, 서류 작업을 돕던 당신이 잠들어버린다고 해도 이제 무어라 할 수 없겠구나. 만약 그리 된다면 그녀의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담요를 덮어주고 말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잠깐의 선잠이 오늘 눈물을 떨구어버린 당신의 기운을 보다 복돋아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머리말님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계실 뿐."
접시에서 마지막 호두과자를 집어든다. 티스푼으로 과자를 반듯이 둘로 잘라 당신에게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 이리도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자신의 도움이 되고 싶다며 말하는 당신에게, 그녀는 작은 뇌물을 건넸다.
- 에스터 - 아나로즈
- (28스레)
공원에서 에스터는 또띠(최소 9살 이상. 도베르만.)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또띠는 마구 뛰어다니지도 않고 갑자기 멈춰 빈둥거리지도 않는 이상적이고 착한 강아지다. 조금 쉬다 가도록 할까.
분수대가 보이는 벤치에 앉는다. 에스터는 사람이 없는 새벽부터 일어나 산책을 시키고 있다. 대형견은 아무리 착해도 주변의 공포를 사곤 했다. 이렇게 미리 사람 많은 시간대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리는 또띠에게 간식을 건넨다. 몸만 컸지 아직도 아기강아지같다.
...어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새벽이었으나 에스터는 문득 당신을 발견한다. 덤으로 또띠도 ?하는 표정으로 당신을 보고 있다.
(아나로즈 - 에스터)
사람이 없을만한 시간에 산책을 나온 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눈 앞에 있는 댕댕이와, 멍멍이의 주인처럼 보이는 긴 머리카락의 .... 성별을 모르겠네요. 로즈의 고개가 다시금 반대쪽으로 갸웃입니다. 멍멍이를 한번, 에스터를 한번. 번갈아 본 로즈는 갑자기 제자리에 쪼그려 앉네요. 그리고 제 손을 살짝 내밀며 내뱉는 한마디는
"멍멍아! 손!"
남의 강아지한테 뭘 하는 걸까요. 물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아, 그래도 알고있는 의사가 있으니까 괜찮을것 같아요? 물리면 혼날텐데?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으로 헤싯거리며 멍멍이를 빠안히 쳐다보던 로즈는 보채기라도 하는 것처럼 응? 이라고 말하네요.
"으음.. 언니? 오빠? 이 멍멍이 손! 하면 반응 안해요오~?"
반응을 하는게 더 이상한거 아닐까요. 저 멍멍이한테는 로즈가 처음보는 사람일 테니까요.
(에스터-아나로즈)
에스터는 조금 당황했다. 뭐지? 또띠가 무섭지도 않은건가? 큰 개에 대한 겁이나 편견이 없는 당신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낸다. 다른 사람의 강아지에게 손을 해보는건 어떨까 싶지만.
"아, 아니, 하는데."
당황한 에스터는 당신의 자신에 대한 호칭을 정정할 타이밍을 놓친 채 대답해버린다. 목소리를 듣고 뭐 구분해준다면 다행이지만. ...왠지 당신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다. 자. 봐봐.
"또띠. 손?"
"왕!"
착한 또띠는 앉은채 에스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착! 올려놓는다. 훈련 보상으로는 간식. 에스터는 또띠에게 간식을 하나 또 건넨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하면, 어, 할지도 모르지만."
근데 당신은 무섭지도 않은 걸까....? 또띠는 에스터의 허리까지는 올법한, 상당히 커다란 강아지인데.
"...그보다, 타인의 강아지에게 갑자기 접근하는건 위험하다고."
(아나로즈-에스터)
"손을 안내밀길래에~ 못하는줄 알았어요오~"
그냥 자기가 낯선 사람이라 하지 않은거라고는 생각 안한 걸까요.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 로즈가 당황한 듯 보이는 에스터를 쳐다보다가, 또띠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손? 이라는 말과 함께 에스터의 손 위에 또띠의 손이 올려지자 우와! 하며 감탄사를 내지르네요.
"이르음? 아하.. 이름을 안말해서 그렇구나아~"
아까 분명 또띠라고 했었나요. 로즈는 쪼그려 앉은 그대로 다시 눈 앞의 멍멍이에게 손을 내밉니다. 또띠야! 손! 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며 손을 내미네요.
"근데에~ 이 멍멍이 물어요오~?"
그거, 한참 전에 나와야 할 질문이라는거 알아요? 쪼그려 앉으니까 거의 눈높이가 똑같을 정도인데, 그거 봐요. 위험하다고 말하잖아요.
"아~우움.. 언니야...? 가 물게 구경만 할거 같지느은 않아서요오~"
위험하다는 말에 대답을 궁리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꺼내네요. 그 와중에 호칭때문에 말을 잠깐 멈칫한것도 그렇고. 그냥 겁이 없는거 아니에요?
(에스터-아나로즈)
또띠는 아나로즈에게 손을 준다. 또띠도 조금 어이없어하는 것 같다.
"물진 않지만... 그래도 물리면 큰일날테니까 말이야."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아니. 보통 안 무는 개라고 말해도 불안해지지 않는가. 더군다나 이렇게 큰 개는.
"...그야 뭐, 말리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큰 개를 만나면 보통은 조심하지 않나...?"
당신이 호칭을 잠시 망설이지만서도, 별다른 태클은 걸지 않는다. 맞췄다는 걸로 만족한다.
"만약 무는 개였거나, 주인이 책임감이 적었다면 큰일났을지도 몰라. 또 평소엔 안 무는 개도 놀라면 사람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또띠는 금세 익숙해졌는지 당신의 얼굴을 핥고 있지만 말이다. 당신의 얼굴이 신난 또띠에 의해 침범벅이 되어간다.
"...또띠. 그만 해."
에스터는 또띠를 아나로즈에게서 떼어놓는다.
(아나로즈-에스터)
또띠가 로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자 아이의 눈이 반짝거립니다. 와! 진짜 손 줬어! 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환한 표정으로 멍멍이를 보네요. 또띠가 좀 어이없어하는것 같지만 이 아가씨는 상관하지 않나 봅니다.
"괜찮아요오~"
뭐가 괜찮다는 걸까요. 물려도 괜찮아? 아니면 안 물릴 자신이 있어?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으음~ 알았어요오~ 멋지고 이쁜 언니이~"
금새 또 호칭을 언니- 에서 멋지고 이쁜을 덧붙이고는, 자신의 얼굴을 핥는 또띠를 향해 꺅- 하고 웃네요. 간지러워~ 하지마! 라고 말은 하지만 떼어 놓을 생각은 들지 않나 봅니다. 좋잖아요 이런거?
"아하하~ 난 괜찮은데에~"
에스터가 또띠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자 로즈는 옷소매로 침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닦아냅니다. 기분이 좋은지 생글거리네요.
"근데 언니야느은~ 왜 이 새벽에 산책하고있어~ 멍멍이때문에~?"
(에스터-아나로즈)
"...그렇지. 대형견이 돌아다니면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물지 않는 개고 목줄도 잘 차고 있지만서도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에스터는 이렇게 사람이 없는 새벽에 산책을 하고 있다. 시민들의 안심을 위해.
"...그러는 너야말로 이런 새벽에 무슨 일로?"
당신은 개를 데리고 나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새벽에 무슨 일로 공원에 나섰을까.
(여기까지 28스레)
(여기부터 29스레)
(아나로즈 - 에스터)
"확실히~ 이렇게 크며언~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겠네요오~"
쪼그려 앉았던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또띠와 자신의 키 차이를 눈대중으로 재어 보기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뜨던 아이는 무언갈 깨달은 것처럼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언니야도 키 엄청 크네요오~ 하고 말하네요. 부럽다는 감정이 섞인 말투입니다.
"잠이 안와서요오~ 산책이라도 하면 잠이 올까 해서어~"
집 앞에 잠깐 나온거에요. 한바퀴만 돌고 다시 가려고?
"뭐어.. 멍멍이하고 언니야를 만날 줄은 몰랐지만요오~"
아이는 다시 또띠 쪽으로 손을 뻗습니다. 머리라도 쓰다듬을 생각인가보네요.
(에스터 - 아나로즈)
"뭐... 아무래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기 보단, 꽤 많다. 주인까지 세트로 덩치가 커서 그런가.
"잠이 안 오는 날이 있지."
처음 연구소를 옮긴 다음 에릭도 잠이 안 온다며 A씨에게 칭얼거린 일이 많았던 모양이니까. 뭐, 칭얼거릴 수 있을만큼 마음을 열어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잘 시간이라기 보단, 일어날 시간인데. 초면에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또띠는 아나로즈의 손길에 기분좋은 표정을 짓는다. 정말 사람을 좋아하는 멍멍이다.
"키... 나도 중학생 때 쯤에는 너보다 조금 큰 정도였으니까. 더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1때의 에스터는 156cm였다. 매년 성장판이 너무 열심히 일하고 정년퇴직조차 안한 탓에 지금은 이만큼 컸다. ...에스터는 다른 여자아이들의 경우 보통 중학생때쯤 성장판이 닫힌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의 농담기도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하고 있다.
(아나로즈 - 에스터)
"커피같은걸 마신것도 아니고오~ 낮잠 잔것도 아닌데에- 잠이 안오더라니까요오"
투덜거리며 대답하던 로즈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멍멍이의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네요. 나름 재미있는 것인지 살짝 쥐어도 보고 조물거리기도 해 봅니다. 진짜 사람 좋아하네.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요.
"......"
보통 중학교~고등학교 쯤이면 키가 안크지 않나. 생각했지만 굳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으며 슬쩍 에스터의 표정을 살핍니다. 아, 진지하네요. 농담도 아니고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애꿎은 멍멍이만 만지작거리던 로즈는 슬쩍 주제를 돌려버리려 하네요.
"나 있지이~ 아까부터 언니야~라고 했긴 한데에~ 언니는 남자야 여자야아~? 성별을 모르겠어~"
알려주기 싫으면 말고오~
라고 말은 했지만, 로즈는 궁금하다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에스터를 바라봅니다. 말과 눈빛이 따로 노네요?
(에스터 - 아나로즈)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귀를 만지는 것은 싫은 모양인지 또띠는 컹! 하고 짖는다. 이런.
"이런. 귀는 안 돼."
개들도 예민한 부위가 있는 모양이다. 에스터는 으르렁거리는 또띠를 살포시 막아선다.
"만약 남자라면 계속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언니라고 불렀던 것인가. 보통 그럼 호칭을 생략하거나 성중립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않나? 아무래도 에스터의 안에서 아나로즈는 완전히 특이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잠이 안 와서 나온거면 조금 걷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같이 걸을까? 라고 말하듯이 에스터는 살짝 일어나는 시늉을 한다.
(아나로즈주의 사정으로 여기서 막레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각자 산책했다고 생각하면 될듯 합니다!
- 에스터, 에릭 - 하나비
(에스터,에릭 - 하나비)
"...그러니까, 애플파이를 만드는데, 칼이 필요없다는 거에요."
에릭과 에스터는 장을 본 채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장바구니를 든 쪽은 에스터였다. 에스터가 걸음걸이를 맞춰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보폭 차이가 꽤나 난다. 쫄쫄쫄 걸어가는 에릭이 에스터에게 쫑알쫑알 새처럼 계속 무언가를 말한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는 레시피인가 해서 봤더니, 이럴수가! 손으로 사과를 쪼개야 하는 거 있죠!"
"왜 굳이 그런 짓을."
에스터가 든 장바구니에 들어있는 것은 애플파이 재료였다. 사과 여러개, 버터, 달걀 한 판, 소금, 설탕, 그 외 멋진 재료들. 에릭의 말에 작게 추임새를 넣으며 에스터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런데 저같이 연약한 연구원이 사과를 손으로 쪼갤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에스터씨에게 부탁하는 거에요."
"아니. 우리 집엔 칼이 있다."
"하지만, 칼 없이 만드는 애플파이 재료라고요! 어..."
와장창.
이것은 에릭 앤서니가 현란하게 넘어지는 소리이다.
"...괘, 괜찮아?"
에스터는 당황해서 말을 건다. 에스터랑 같이 장을 본다고 평소보다도 2cm나 높은 신발을 신은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5cm짜리 통굽이 달린 신발을 신고다니건만. 그까짓 키가 뭐라고.
쭉 앞을 보지 않고 걷던 에릭이 당신을 뒤늦게 발견한 탓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이런 슬랩스틱 코미디를 한바탕 벌인 것이다. 꽤 큰 거리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다행히 당신과 부딪히진 않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으브러흑헉억!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종이인형마냥 무너져내리는 것을 본 당신은 어떤 기분일까.
(하나비 - 에스터, 에릭)
바람이 쌀쌀합니다.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목적지 없이 싸돌아다닌지도 어언 n시간, 뭔가 재미있는 건 없을까요? 저는 멀리 지나쳐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한참 전에 다 마신 더블 초코 프라푸치노 휘핑 추가 라지 사이즈 라떼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립니다. 음, 골인! 10 점 만점에 10점이지 말입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는 바른 시민이라면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휙 던져버리는 몰상식한 짓은 하면 안 되죠. 푸핫, 방금 개그는 제가 생각해도 진짜 웃겼습니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딱히 할 게 없으니 근처의 주유소라도 털기로 한 저는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기름이랑 폭탄은 많을 수록 좋으니까요. 걸으면서 눈을 열심히 굴리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뜻밖의 멋진 만남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음. 방과후에 놀러라도 왔는지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는 여학생 둘, 회식길로 떠나는 것 같은 회사원의 무리. 그리고 농구 경기장 이외의 장소라면 어디서라도 시선을 확 끌 만한 여성분과...와, 키 진짜 크다. 그 옆의 남자분은 조금 오빠를 닮았네요.
...취소하죠. 생각해보니 저희 오빠를 닮았다는 말은 초면인 분께 붙이기에는 너무나도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위험하시네요. 아무리 빈 손이라고 해도 말하는 중에 옆을 보면서 걸으시면, 봐봐요. 이렇게 코앞까지 왔는데도...안 피하시네? 어? 어라!?
쿠당탕. 예술점수 10 점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앞에서 꽤나 현란하고도 심미적인 스텝을 밟다가 기어코 넘어지신 남성분을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다가, 곧 키가 큰 여자 분께서 하신 말을 똑같이 반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괘, 괜찮으심까!?"
(에스터,에릭 - 하나비)
"......"
꽤나 오랫동안 엎드려있는다. 에스터가 부축해줄게, 라며 한 쪽 무릎을 꿇고 팔을 내민다. 하지만 에릭은 오히려 팔을 쭉 늘어뜨려버린다.
"이대로 있자니 바닥과 하나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일어나라."
에스터가 에릭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마치 고양이 들어올리듯 일으켜세우는 와중에도, 에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아무래도 많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으...으...걱정받는게 더 창피해..."
"무릎 털고, 다친 데는 없나?"
에릭은 얼굴을 가린다. 안경에 조금 금이 가있다. 마음에도 조금 금이 가있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마음이 다쳤어요. 마음이! 이런 기분으로는 달콤상큼 부드러운 애플파이를 먹을 수가 없어!"
"...입은 괜찮은 것 같군."
"아. 저희는 지금부터 애플파이를 먹으러 갈 예정이에요!"
이목이 쏠린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이왕 이목이 쏠린거 더 헛소리를 늘어놓기로 작정한건지, 처음보는 당신에게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TMI를 흘리고 있다. 아니면 넘어지며 머리를 좀 부딪혔거나.
"이렇게 우연히도 이상한 포즈로 넘어진 제 앞에, 우연히도 당신께서 인사를 건네는 이런 우연적인 만남! 이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마음을 조금 다친 것 같긴 한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저희랑 애플파이 먹으러 가지 않으실래요!?"
...에스터의 집에서 에스터에게 요리를 부탁하면서(그것도 사과를 맨 손으로 부숴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면서)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뭐,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에릭도 아무에게나 뻔뻔하게 굴 정도로 싸가지가 없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에스터라면 이 정도 어리광을 받아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하나비 - 에릭,에스터)
아무래도 마음이 아니라 머리를 더 다치신 것 같은데.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낼 뻔 했지만, 동행인 분의 반응을 보니 원래 이런 느낌의 분이신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앗, 애플파이를 만드신다구요!? 게다가 저도 초대해주신다니! 저는 마음 속에서 앞의 일행의 첫인상을 이상한 사람들에서 아주 좋은 사람들로 수정합니나. 아버지께서는 무려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까지 처음 본 사람이 맛있는 걸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만. 음...애플파이...아버지와의 약속...애플파이...
"당연히 가야죠!!!"
죄송합니다, 아버지! 못난 딸을 용서해 주세요!! 이미 돌아가셨으면서 용서 안 하시면 뭐 어쩌실 겁니까!!!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거기에 공짜 밥이라니 완전 감사한 일이지 말입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저는 두 번 강조하고는 일행처럼 보이도록 방향을 바꿔 돌아섰습니다. 아, 앞의 남자 분께서는 붙임성이 실로 저만큼이나 좋으신 것 같아 보이셔서 걱정이 없지만, 조금 과묵해 보이시는 일행 분께 실례가 되는 건 아니겠죠? 저는 옆의 여자분께도 살짝 목례했습니다.
"제 이름은 스미모토 하나비임다!"
(에스터,에릭-하나비)
"좋아요. 그럼 출발!"
"...잠깐. 잠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애플파이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한 그 때, 에스터가 강력하게 태클을 걸어온다.
"왜 그러시나요. 에스터씨? 집은 저쪽이에요."
"내 집을 내가 모를리가 없잖아...그게 아니라, 이건 문제 아닌가!"
"무슨 문제요...?페르마의 대정리라면 이미 풀린지 오래..."
"완전히, 초면인 사람을 음식으로 유혹해 끌고 가는게 말이야!"
드물게도 에스터가 소리를 높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윤리의식이 꽤나 투철한 사람이었다. 이 청소년납치 현장같은 상황을 버틸수가 없는 거지.
"...그래도 본인이 허락했는데...에스터씨가 좋은 분이라는건 라오스 사람들이 다 아는데...동물보호소에 기부도 하고...고아와 인체실험 피해자를 후원하는 선량한 연구소를 전폭 지지해줘서 규모를 확장시키고...고기도 잘 사주고..."
"하아....."
에릭이 의미없는 에스터의 tmi를 방출한다. 에스터가 미간을 짚고 한숨을 쉰다. 이 낯가림이라곤 고양이 수염만큼도 없는 녀석. 네에. 제가 원래 그래요! 칭찬이 아니야. 일본 만담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스미모토 하나비.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이 먹을걸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내 이름은 에스터 힐데가르트다.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걸 증명하기 위해서 얼굴을 찍어가도 된다."
"너무 고지식하시다- "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야.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에릭은 곰곰히 생각한다.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었지. 카페에 같이 가겠다는, 어떤 히어로분의 권유가.별일은 없었지만.
"저라면 역시 수상하니까 거절하겠지만요."
"그런데 잘도 이 녀석을 끌어들였구나!"
"하지만 저같이 착하고 귀엽게 생긴 소년이 있다면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얼굴은 곧 도덕이라잖아요- "
"그런 비도덕적인 발언은 하지 마."
"아. 저는 에릭 앤서니에요!"
에릭의 뒤늦은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어찌됐건 에스터네 집을 향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에릭의 신나는 말소리가 이어진다.
"에스터씨는 머리말이라는 이름도 쓰고있는데요- 혹시 들어보신적 있으세요? 말머리가 아니라 머리말..."
"에릭. 스미모토를 귀찮게 하지 마."
"아. 그런거 들어본 적 있으세요? 초능력 강아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징후...제가 그걸로 논문도 썼는데..."
(하나비-에스터,에릭)
"맞아요! 밥을 사주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좋은 사람이지 말입니다!"
고기 잘 사주는 사람은 더 좋은 사람! 저는 소리를 높여 남자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건 그렇고 얘기를 듣자하니 에스터 씨? 으음, 네. 에스터 씨는 아무래도 보통 수준의 좋은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라오스의 자선사업가라도 되시는 걸까요? 아앗, 설마 저. 뭔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가출청소년으로 보였던 건가!? 몇 번이고 모르는 사람의 위험성을 당부하시는 에스터 씨입니다만, 이미 좀전의 만담으로 이 일행의 위험성이 제로라는 것은 충분히 알아버렸습니다. 보통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태도에서부터 딱 보이거든요. 술에 거나하게 취한 회사원이라던가, 딱 봐도 저 폭력배입니다~라고 얼굴에 써 있는 듯한 양아치라던가요. 뭐 그런 경우에는 용돈 벌이가 되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앗, 또 엉뚱한 생각으로 새 버렸다...
"아하하, 사진은 안 찍을게요. 그리고 걱정 마십쇼, 웬만한 이상한 사람보다는 제가 더 세니까요!"
범죄이력으로도 마찬가지구요!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저는 팔을 들어 강함을 과시하는 포즈를 취해 보였습니다. 옆의 남자분은 에릭 씨라고 하시는군요. 흠, 초능력 강아지? 머리가 말이면 켄타우로스의 반대 같은 건가요? 저는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일단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재밌는 두 분의 만담에 맞장구를 치며 열심히 따라 걸었습니다.
(여기까지 29스레)
(여기부터 30스레)
(에스터,에릭-하나비)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도록 해."
에스터는 다시 한숨을 쉬며 미간을 짚는다. 에릭은 그 와중에도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는다.
에스터네 집은 혼자 사는 집 치곤 꽤나 쾌적했다. 원래는 부모님의 집이었으나, 두 사람이 잡혀가면서 어찌저찌 하다보니 최종적으로 현재는 에스터네 집이다. 거실에서 커다란 도베르만이 뛰어나와 에스터를 반긴다. 일어서니 거의 에릭보다도 큰 느낌이다.
"...아. 미안. 혹시 개를 무서워하나?"
사나운 개는 아니지만, 몸집이 커서 에스터는 당신이 겁을 먹었을까봐 걱정인 것 같다. 에스터를 반긴 후에 또띠는 에릭에게 꼬리를 모터처럼 흔들며, 멍! 멍! 하고 짖는다.
"또띠. 집."
에스터가 손바닥을 보여주며 그렇게 한 마디 하자 또띠는 켄넬로 쪼르르 돌아간다. 또띠랑 더 놀고싶은데에. 에릭이 작게 칭얼대본다.
에릭은 손을 씻은 뒤 거실 쇼파에 폭! 하고 다이빙한뒤 쿠션에 부비부비를 시도한다. 거의 자기집같은 익숙함이다. 에스터는 손을 꼼꼼히 씻고는 팔을 걷어올린다. 옷에 가려져있던 근육이 드러나보인다. 그리고 주방에서 아까 사온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맞아. 오늘의 애플파이 컨셉을 공표해야겠군요. 그 이름하여, 칼 없는 애플파이!"
"...정말로 부탁할 셈인가. 그런 짓을."
"매우 놀랍게도, 사과를 맨손으로 쪼갤 수 있다면 칼은 필요없다는 사실!"
"그렇지만, 아무리 나라도 사과를 맨손으로 쪼갤수 있을리가 없잖...아!"
없잖, 과 함께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는 사과의 것이었다. 에스터는 깔끔하게 두 조각 난 사과를 보며 본인이 해내고도 본인이 어이가 없는지 사과를 쳐다보고 있다.
"......아무리 나라도, 사과를 맨 손으로 쪼개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에스터씨. 방금전에 뭐가 지나갔는데요."
에스터는 조용히 주방에서 칼을 꺼내와 사과를 썰어낸다.
(하나비-에스터,에릭)
개네요.
큰 개입니다.
정정합니다. 엄청 엄청 큰 개입니다.
저저저저스미모토하나비는한사람의어엿한어른이자성숙한하나의인간으로서저보다도작고인도적으로보호해야마땅할생물을두려워한다는것은윤리적으로도도의적으로도실로있을수없는일이라고생각합니다!!!!!!! 아니, 저보다 큰가!? 일어서니까 저보다 커 보이는데요!? 기분 탓인가!!? 어라, 제가 언제 기둥 뒤로 숨었죠? 저는 큰 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빨리 원래 위치로 복귀했습니다. 네, 정말이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어요.
"흐, 흐흠. 귀여운 개지 말입니다. 네. 무섭긴요!"
우우, 제 신비롭고도 새침한 이미지에 약간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아, 칼 없는 애플파이! 좋죠! 비폭력적이고 좋네요! 저는 방금 전의 상황으로부터 화제를 돌리려 열심히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가볍게 두 동강 내 버리는 에스터 씨...는 못 본 척 해드리기로 하죠. 네. 가끔은 잊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솔직히 좀 많이 놀라긴 했지만 금방 도구를 가져오셨지 않습니까!
...으음...가만히 있자니 또 심심한데요. '얌전히 앉아서 벽지 무늬 세기'놀이에 금세 질려버린 저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 근처를 기웃거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실례라고 하셨습니다. 뭐, 오늘 처음 뵌 데다가 친구도 아니지만 딱히 적인 것도 아니니 친구에 가까운 쪽이라고 분류해 드리죠!
"저어,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슴까?"
(에스터,에릭-하나비)
"글쎄. 도와줄 거라... 손님에게 그런 걸 시키기도 좀 그렇군."
"스미모토씨. 또띠랑 놀지 않을래요? 또띠는 장난감 물어오기를 정말 잘해요!"
"에릭. 그만둬. "
눈치없이 하나비에게 또띠를 꺼내올 것을 권하는 에릭을 에스터가 제지한다. 에스터는 사과를 손질하고 있었다. 아까 손으로 깨끗하게 두조각난 사과도 껍질이 잘 깎인 채 예쁘게 썰려있다.
"...아. 그렇지만 역시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려나. 스미모토. 칼은 쓸줄 아나?"
"아아. 안타깝다. 스미모토씨는 착한 아이네요... 기회가 있을 때 에스터씨의 노동력을 잔뜩 착취해야 하거늘!"
에스터는 여분의 칼을 꺼내온다. 손잡이 부분이 가게 해서 당신에게 건넨다.
"그렇다면, 버터를 썰어주지 않을래? 반죽을 만들 때 필요해서."
(에스터,에릭-하나비)
"...무, 물론 저도 동물과의 비정기적 교감은 싫어하지 않지 않은 것도 아닌 바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제가 멍멍이와 놀기에는 약간 불가피하게 어려운 부분이... 아, 그 쪽은 괜찮다구요? 아하하...알겠습니당♪"
저는 속사포로 횡설수설하다가 에스터 씨의 말을 듣고 갑자기 진정했습니다. 바, 방금은 조금 구차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처음 오는 남의 집에서 심정지로 기절하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단 말입니다...보다보니까 덩치랑은 다르게 의외로 얌전한 친구 같지만요. 아, 버터인가요?
"아, 네! 칼 잘 쓰죠, 물론이지 말입니다!"
착한 아이라니, 그거 진짜 오래간만에 듣는 말이지 말입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저는 신나게 식칼을 받아들어서는, 즐겁게 버터를 박살...아니, 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요리에서 손을 놓은지 꽤 되긴 했어도, 저 스미모토 하나비. 학교 다닐 때 가사 수행평가 점수만은 꽤 좋은 편이였다구요! 진짜로!
(31스레부터)
(에스터,에릭-하나비)
"......"
버터를 써는 당신을 보는 에스터의 눈이 조금 불안해보인다. 그래도 자신도 사과를 맨손으로 쪼갰는데, 뭐, 구태여 태클걸 필요는 없겠지.
-
여차저차 이러저러해서 맛있는 애플파이가 완성되었다! 따끈따끈한 애플파이의 향기는 당신을 유혹하려는 듯이 넘실대고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훌륭한 비쥬얼과 훌륭한 맛으로 완성되어주어서 다행이다.
"에스터씨와는, 남매같은 사이에요~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의남매를 맺었거든요."
애플파이를 먹으며 에릭은 조잘댄다. 그러니까, 무릉도원 밑에서 피를 나눈 잔을 마셨다...뭐 그런거 있잖아요. 멋지죠! 아. 뭐. 진짜로 그렇게 한건 아니지만. 에릭이 싱글거린다. 에스터는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고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을 덧붙인다.
"에스터씨는 저를 구해줬고, 저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귀여워지는, 뭐 그런 관계죠! 공생관계랄까!"
"에릭. 너무 말을 많이 걸면 스미모토가 먹기 불편하잖아."
"아. 그런가요? 그럼 대답 안하고 먹기만 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입을 쉬기 힘들어서 그런거니까!"
에스터는 그렇게 잔소리하면서도 애플파이를 맛있게 먹어주는 것에 흐뭇해하는 모양이다. 당신은 맛있게 먹고 있을까. 애플파이를.
"그래서~처음 만났을때, 저는 열다섯, 에스터씨는 스무살이었어요. 참고로 지금의 저는 스물두살! 잔뜩 자랐죠! 키는 별로 안 자랐지만!"
"그래도 많이 자랐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에스터씨는 중학교때 160센티였다면서요! ...성장판이 닫혀야 할 시기에 계속 컸잖아요!"
"뭐. 그렇지만."
에스터는 가볍게 긍정한다. 에릭은 뭐라고 하긴 하지만 딱히 진심으로 불쾌한 눈치는 아닌 모양이다.
"아. 그러고보니 에스터씨는 스무살때는 지금보다 연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어요...하지만....그리고...."
온갖 잡다한 지식을 담은 에릭의 재잘거림이 계속 이어진다.
(하나비-에스터,에릭)
잡다한 과정은 전략하고, 드디어 먹음직스러운 애플파이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야, 역시 손을 놓은지 꽤 됐어도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요~지금이나 예전이나 저는 밑준비만 하고 본 요리는 에스터 씨나 오빠가 다 했지만요. 아무튼 그런 세부사항은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저와 애플파이 말고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
"잘 먹겠슴다!!"
박수를 짝 치며 인사를 하고, 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애플파이를 포크로 찍어 크게 한 입 베어물었습니다. 아아, 당이 뼛속까지 충전되는 기분입니다... 아, 역시 그랬군요. 두 분이 말하시는 것을 보아 연인은 아니고 친남매도 아니다 싶었는데, 이제 알겠습니다!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인연을 맺은 그런 느낌이였던 거였군요!! 어라, 이건 삼국지였나? ...그건 그렇고, 에릭 씨는 저보다 연상이셨던 건가요? 되게 의외다...경박한...아니, 가벼운...? 분위기 탓인지 분명 저랑 비슷한 나이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남매라, 그거 좋죠. 피로 이어졌든 아니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건 분명 좋은 겁니다. 저는 포크를 잠깐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멋지네요."
저는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가, 조금 딱딱한 어조였겠다 싶어 뒤이어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남매끼리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지 말입니다."
음. 그건 그렇고 이 애플파이 진짜 바삭하고 부드럽고 맛있네요. 아예 이 집에 얹혀살아 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후후, 이 쯤 되면 굳이 농담이라고 덧붙이지 않아도 알아 주실 것이라고 믿어요. 저는 활짝 웃으며 애플파이를 한 조각 더 가져왔습니다.
(에스터,에릭-하나비)
"그렇죠! 저희 둘다 그 전까진 의지할 만한 가족이랄게 없었거든요!"
에스터는 당신의 순간 낮아진 톤을 눈치챘는지 아무 말도 안했지만, 눈치없는 에릭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이대로가다간 에스터의 사생활을 초면인 사람에게 전부 털어버릴 기세다.
"...정확히는 에스터씨와 저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에요. "
에릭은 애플파이를 베어문다. 에스터는 의외로 요리솜씨가 좋았다. 혼자 생활하다시피 한 나날이 길었기 때문이겠지.
"...아. 너무 나불거렸네요. 에스터씨. 죄송해요.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지 마."
"스미모토씨. 혹시 다음에 또 애플파이 먹고 싶으면 연락하세요."
요리는 에스터씨가 하겠지만. 에스터는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지만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는다. 에릭은 명함을 건넨다. 에릭연구소 출신 연구원인 에릭 앤서니의 연락처가 적혀있다. 그리고 에릭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아무 쓸모없는 말들을 나불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요~ 에스터씨가 동경하던 상사에게서 간식 선물을 받았는데~ 가보로 간직한다며 안 먹으려 하는 거에요...."
당신이 에릭의 온갖 나불거림을 듣고 있던 사이, 슬슬 시간이 늦어간다.
(33스레)
(하나비-에스터,에릭)
으음, 두 분께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뭐어, 요즘이니만큼 조금 특수한 가족의 형태도 있는 법이겠죠. 주로 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꽤나 흉흉한 세상이잖슴까. 저는 애플파이를 한 술 더 뜨면서 말했습니다.
"그치만 이거 죄송해서...앗, 명함 감사하지 말입니다♪"
저는 냉큼 명함을 받아 가방 안에 챙겼습니다. 이미 집 위치는 외웠고, 아마도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아무튼 예의상으로도 받아 둬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함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솔직히 이 애플파이는 미련을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단 말입니다!
...
우와, 간식을 가보로 삼다니. 에스터씨도 보기와는 다르게...아니. 보기랑 비슷하게? 아무튼 어지간히 강직하신 성격이신 것 같습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저희 오빠도 언젠가 반에서 예쁘다던 여자 동급생이 우정 초코로 준 동전 초코를 평생 간직하겠다며 제습제를 뜯고 아주 별 난리를 다 쳤던 적이 있었죠. 한 달 정도 뒤에 단번에 차이고 까먹었길래 어쩔 수 없이 제가 몰래 훔쳐...꺼내서 먹어줬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동전 초콜릿은 맛있죠.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까지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불랑식품의 특성상 어린 시절의 추억보정이라는 것이... 핫, 이런. 잘 가다가 갑자기 마구잡이로 딴생각의 서막이 오르려 하는 것을 보아 이건 졸리다는 뇌의 신호입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남의 집에서 골아떨어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지 말입니다!! 우우, 정말 아쉽지만 시간도 늦었고...밤늦게까지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겠죠. 저는 아쉬움을 담아두고 입을 열었습니다.
"저어, 화장실은 어디 있나요?"
...
저는 종종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는 창문을 드르륵 열었습니다. 음, 적당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네? 적에게서 탈출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몰래 나가려는 거냐구요? 묻지 말아주십쇼. 애초에 웬만하면 저랑 엮여서 좋을 일도 없고, 악당은 원래 이렇게 퇴장하는 법인 겁니다. 사실 저는 작별이 서투르기도 한데다, 바래다주시겠다던가 하시면 곤란한 것도 있어서요. 아, 맞다! 저는 급하게 지퍼를 열고 가방을 뒤졌습니다. 초면인데다 초대돼서 얻어먹기까지 했는데. 마땅히 답례를 해야겠죠!
어디보자, 폭탄...은 좀 아니고. 총기류...도 오버고. 수상한 하얀색 가루...이건 왜 여기 있어!? 이런, 세상에! 평소에 정리 좀 하고 살 걸! 한참을 투털대던 제 손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습니다.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저는 단번에 선물을 꺼내서는 바로 옆에 내려놓고 편지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엣헴, 이 정도면 꽤 잘 어울리는, 괜찮은 선물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추우니까요!저는 마지막으로 편지를 붉은 목도리 두 쌍 위에 예쁘게 올려 놓은 뒤에 뒤를 한 번 돌아봤습니다. 그럼 안녕, 착한 사람들! 저는 이만 어둠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후후, 지금 완전 코믹스 주인공 같았어!
...
===
(깔끔하게 개인 붉은 목도리 두 벌 위에 편지가 올려져 있다.)
급한 사정이 있어 이렇게 인사도 못 드리고 가네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어딘가 시공의 틈새로 납치당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구요♪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추신. 애플파이 잘 먹었어요!
From S.M
- 녹턴 드네리스 (녹턴 두번째 일상)
(32스레부터 시작된 녹턴과의 두 번째 일상.)
(녹턴 드네리스)
부쩍 이즈모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가드맨, 진저 그레이의 확신에 가득찬 빌런 지목과 자신은 결백하다 강력히 주장하는 이반 구제프. 둘 모두 그녀가 알던 사람이었으나 둘 모두 그녀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휴가(라 읽지만 근신처분이라 쓰는)를 보내고 있는 제 동생은 그에 대한 이무런 언급이 없었고 가드맨은 이제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를 따라 점차 그녀를 찾지 않고 단독행동을 벌이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거지? 과연 둘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서류를 두드리다가, 결국 놓고 말았다.
--
그녀는 다시, 어려진다. 솜사탕같은 구름 위에 앉아 온갖 달디단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다. 저 멀리서 오색빛깔의 풍선들이 두둥실 날아오른다. 제곁엔 가족들이 있다. 귀여운 자수가 새겨진 돗자리를 펼쳐두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만든 샌드위치와 과자를 베어물고 감탄사를 쏟아냈다. 아버지와 동생은 보드게임을 꺼내들고, 주사위를 던진다. 어머니는 책을 읽으며 간간히 그들의 승패의 희비에 함께한다. 달다. 달디단, 행복의 풍경이다. 주사위가 굴러간다. 아, 어떻게 굴린거야. 저 멀리 날아가버렸잖니. 놀랍다는 듯한 웃음이 뒤따른다. 내가 가져올게! 라고 외치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어느순간부턴가, 이곳에 그녀 이외의 존재는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동생이 다시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화목한 웃음소리에 묻혀, 다시 달디단 과자를 집는다. 달다. 나는, 이리도 달디단 곳에 있다. 입에 달콤함을 가득 머금는다.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를 무시하면서,
-아, 어떻게 굴린거야. 저 멀리 날아가버렸잖니.
달콤한 죄악을 가득 삼키며.
--
기묘한 꿈을 꾼 기분이 들었다. 녹턴은 가벼이 마른세수를 하고 잠시 책상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썼다. 머리가 이리도 아픈건 최근 일이 워낙 많이 터진 탓이었을까. 두통약을 꺼내 삼킨다. 그 쓰디쓴 맛에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지고 만다. 물 한모금으로 혀의 여운을 씻어낸 후에, 다시 서류에 손을 가져갔다.
잠깐 서류를 훑어보는 새에 당신의 노크소리가 들렸기에, 그녀는 사무적으로 "들어오세요" 라고 답했다가 이런 대답을 하게 된 순간도 오늘 들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스터-녹턴)
현재 이즈모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안전구역의 해제. 터지기 시작한 의심. 이즈모 본사, 곳곳이 의심 제기라고 하는 폭발에 휘말린 채 타오르는 불길속을 에스터는 걸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그 빌런이 만들어낸 불길속이 덜 뜨거울 것 같군. 에스터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에 잠시 멈춘다.
"머리말씨. 녹턴에게 가는 겁니까?"
에스터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상대는 고개를 젓는다. 이어져나오는 것은 반갑지 않은 말이었다.
"지금은 가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현재 녹턴 드네리스는 이즈모에 구제프를 들여놓은 건으로 의심받고 있어요."
"그는 유능한 의사가 아니었나?"
"빌런갱생계획을 실천한, 유-능한 의사였죠. 그 증언만 아니었다면."
이 사람은 진저 그레이의 쪽을 신뢰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긴. 비밀리에 진행된 상담계획하고는 달리 안전구역은 히어로에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봤을 테니까.
"만약 그가 빌런의 수장이라면, 이즈모는 완전히 악의 세력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게 돼요. 지금 안전구역이 해제된 것만 해도, 그 때문 아닙니까?"
"...아직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진저 그레이가 조금 허당이긴 해도,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요. 더군다나 그처럼 빌런을 혐오하는 사람이."
빌혐남 영상...을 본 사람인 것 같다. 에스터는 그 영상을 보진 못했고 얘기로만 들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그를 지켜보며 정의감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을 터이다.
"에스터씨가 진정으로 가드맨씨를 믿는다면, 그에게 힘을 실어주셔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용기있는 증언을 내준 그에게 말이에요."
"그 말은."
"녹턴 드네리스와 닥터 구제프를 멀리하라는 거죠."
에스터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마치 벽이라도 부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에스터는 그런 폭력을 아무 때나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불쾌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르겠다. 가드맨도, 구제프도, 지금으로서는 잘잘못을 가릴 수 없어. 어떠한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고, 이 분열 자체가 빌런이 노리는 것일 수도 있지."
"그치만..."
"그를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확실한 근거가 드러나기 전까진 적대하는건 하지 않겠다는 얘기지. 의심이 가는 마음은 알고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 남의 험담을 하는건 삼가해라."
그리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불길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뒷통수맞으면 어쩌려고요!"
에스터는 한껏 얼굴을 찡그린다. 남자는 조금 겁먹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윤리에 입각한 얘기를 할 뿐이다. 내 말이 듣기 싫으면 대화하는건 집어치워."
에스터가 이렇게 험악하게 말하는 일은 아마도 이즈모에서 그 누구도 본 일이 없을 것이다. 에스터는 물리적으로 강한 사람이긴 했으나, 다른 사람의 기를 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험악한 인상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것에 고민을 하고 에릭과 상담을 하기도 할 정도였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에스터의 평판이 좋은 이유중 하나였고, 무서운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아마도 역린을 건드렸다고 하는 것일 테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곤 해도, 당장 논란중인 사람에게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하고 싶으나 그는 말을 삼켰다. 자신이 먼저 과하게 나불거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에스터도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그녀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겠지.
-
"...녹턴님."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것은 에스터였다. 전에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지. 만약 당신이 괴로워질 때이면, 제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 고. 그것을 실천하려 온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얘기할 것이 있는지, 그녀는 당신의 앞에 찾아왔다.
"겉잡을 수 없이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녹턴님과 직접 얘기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당신의 앞에 찾아온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눈치이다.
"...괜찮으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였다. 먼저 이 말만이 앞으로의 대화들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녹턴-에스터)
겨우내 찾아온 방문객도 결국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일 뿐이다. 이대로 가다간 해고당할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먼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일전에 있었던 문제로 근신처분을 받은 적이 있기도 했었으니 그저 섣부른 걱정이라는 생각이라 넘겨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해고되면 뭘 하면 좋을까.
그녀의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당신을 향한다. 어쩌면 그 눈밑에, 약간의 피로가 고여 있었을지도.
"괜찮습니다."
아직 머리 한 구석이 지끈거리기는 했다만, 견딜만했다. 아니, 당신이 물은건 몸이 아니라 정신상태였던가. 글쎄, 그건 모르겠다. 그저 제 앞에 서류가 더 쌓여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처리해야 할 서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녹턴은 가볍게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앉아계시면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녀는 커피포트의 전원을 켰다. 물이 끓으며 따스한 김이 올라왔다. 마치 그때와 같은 평온한 고요가 흘렀다. 그때와 다른, 두명을 앞에 두고서.
녹턴이 쟁반을 들고 다가서자 책상 위의 서류가 바쁘게 몸을 피한다. 이번에 접시에 담긴 것은 아침에 그녀가 30분을 기다려 사온 예쁘장한 과일 모양의 화과자였다.
"물어보실 게 있으십니까?"
당신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는 차분히 묻는다.
(망아지-녹턴)
에스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알록달록한 화과자가 빛깔을 뽐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나 삼키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단 맛에 취할 때가 아니다.
"...녹턴님."
다시 말이 잘 나오지 않는군. 머리말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말이 서두 이후로 나아가지 못한단 뜻이었나.
"...물어볼 것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녹턴님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오늘은 당신의 일거리가 적은 걸까. 다행이다. 그렇게 마냥 무구하게 생각한다. 어떻게든, 당신의 짐을 덜어내고 싶거늘.
"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또 다시 목소리가 떨린다. 아까전에 그 남자에게 험악한 소리를 하던 자는 어디갔나. 지금은 다시 당신의 순진한 망아지일 뿐이다.
"당신이...힘든 일들을 덜어놓을 수 있도록..."
탁한 하늘빛이 시야를 가린다. 고개가 내려가 앞머리가 눈을 덮은 것이다. 왜 또 이렇게 되는 걸까.
(녹턴-에스터)
걱정된단다. 이야기를 듣고 싶단다. 힘든 일을 덜어주고 싶단다.
아무것도 추궁하고 묻지 않는 당신이 조금은 낯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당신의 상냥함과 믿음에 온기를 느낀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의 편이 되어주려는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마는 당신을 보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진위를 살핀다. 이리도 맑은 사람을 감히 의심하다니, 참 우습기도 하지. 밀려오는 두통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무마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에야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에 좋은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그녀는 따스한 차를 머금었다.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결국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두둔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저를 두둔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둘 모두 그녀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던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어쩌면, 당신도 그럴지도 모르지.
(에스터-녹턴)
에스터는 조금은 울컥한다. 이전의 다과회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의 북받침이었다. 그런 태도를 보이면, 자신은 어떻게 반응하라는 뜻인가. 당신의 괴로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녹턴님은 저의 얘기를 다정하게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다니, 조금 서럽습니다."
그야, 뭐, 녹턴에게 있어 에스터가 그렇게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에스터에게 녹턴은 커다란 구원이자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당신에겐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니까. 아니, 그 때의 일을 아예 조긍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 에스터는 알지 못했지만.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 뿐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저의 진술이 녹턴님께 불리해지기라도 할까 걱정되십니까? 녹턴님께서 느끼신 감정이나, 괴로움 같은 것은, 어떠한 증거도 뭣도 아닌 그 자체의 사실 아닙니까. 저는 애초에 논리를 통해 추리해내고... 증거를 따지고... 그런 데에는 소질도 없습니다. 일단 이 사건의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저는 입을 다물고 지켜볼 뿐입니다. "
화가 난 것인지, 울 것 같은 것인지, 조금의 흥분을 꾹꾹 누른 채로 에스터는 말해나간다.
"...그리고...저는...녹턴님을 믿고 있고..."
...얼굴을 약간 붉힌다. 울 것 같아서 그러는게 맞는 걸지도...
"...아니...이 말은... 잊어주십시오. 함부로 믿느니 아니느니 말을 꺼내는 것은 다른 한쪽을 의심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죄송합니다. "
흥분했는지 말이 빨라졌다는 것을 자각하곤 마음을 가라앉힌다. 다시, 말하기를 느리게 하려고 애쓴다.
"...단지, 설령 녹턴님께 불리해지는 사실이 진실이라 해도, 그것이 녹턴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따스한 차를 바라본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어찌됐건 이것은 가드맨과 구제프 둘 중 하나가 유죄라는 이야기. 하지만 만약 구제프가 유죄라면 녹턴 당신 또한 유죄인가? 연좌제가 인정되다니 , 히어로도 막나가기 짝이 없지.
"만약 그렇다면...저는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할 사람이 되겠군요. 친부모가 두 사람 다 인체실험에 동조하고 어린아이를 끔찍하게 죽인 살인자니까 말입니다... "
클라인 부부는 인체실험에 동참했다. 결과 수많은 실험동물과 고아를 끔찍하게 죽였더래지... 헛구역질이 났다. 빈정거리듯이 날카롭게 당신을 찔렀건만, 막상 공격받은 것은 에스터 자신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속에서부터 뭔가 올라오는 듯 울렁댄다.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꺼내든 탓이 컸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과하게 날선 말투를 썼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자신의 경우와 당신의 경우가 같을 수 없는데 함부로 같은 것처럼 취급한 역겨움에, 또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은 정말로 바보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죄를 몰랐다는 것이 죄라 한다면...저는 그 누구 앞에서든 절대 떳떳할 수 없는 사람이고...그런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녹턴님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되묻는다.
"저는 이 상황에서 무엇이 진실로 밝혀진다 한들, 녹턴님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부디."
화과자 하나를 끌어온다. 입에 넣지는 않고 손에 꼭 쥔다.
"...녹턴님이 지금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부디, 저의 말이 무례했더라면 지적해주십시오. 그렇게 덧붙이곤.
(여기까지 32스레.)
(33스레부터.)
(녹턴-에스터)
그녀의 눈이 당신을 향한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김이, 머리 속에 낀 성에처럼 눈 앞을 흐린다. 그 누가 가장 차가운 빛이 회색이라고 했던가. 은빛 뿔테 안경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끝에 맺힌 것이 차가운 한기가 되어 이 공기를 고요히 가라앉힌다. 당신은 그것이 그리도 서러웠던가. 솔직하게 제 감정을 토로하는 당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잠시 밑으로 내려앉는다. 솔직한 당신의 표현이, 그 안에 담긴 당신의 올곧은 마음이, 기묘할 정도로 생소하게 다가온다. 언어로 차마 담아낼 수 없는 그녀와 다르기 때문일까.
접시에 담긴 화과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이리도 진중히 말하는데 도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화과자로 향하는 손가락을 멈출 수 없다. 뭐라도 먹지 않는다면 제 안에 넘실거리는 것을 쏟아내고 말 것 같아서, 커다랗게 팽창한 숨을 불어넣고 결국엔 무언가와 마주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라서. 화과자를 베어물며 구석에 고이 모셔놓았던 화과자 세트를 모두 꺼내놓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례하게도, 당신이 그녀의 의심을 읽어내고, 그 사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중에.
화가 난 것인지, 흥분에 젖은 당신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되어 있고 동시에 조금 빨라졌다. 그녀는 차마 당신의 말에 솔직하게 긍정할 수 없어 머뭇거린다. 하지만 동시에 드는 감상은, 내가 이리도 당신에게 신뢰받을 만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자신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내고 살아왔기에 당신같이 올곧은 이에게 솔직한 분노의 대상이 되고 이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이 짐을 챙겨 이즈모를 떠나면 당신은 울어줄 수 있을까. 아, 그런 생각을 하기도 무섭게 당신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어졌다.
"전 괜찮습니다."
황급한 당신의 사과에,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정작 괜찮지 않아 보이는 것은 당신인데, 제가 괜찮다 하는 게 이상하기도 하지. 그래서 그녀는 다시금, 조금은 어색하게 "머리말님은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린아이를 잘 달래지 못하듯, 당신같이 섬세하고 맑은 이를 달래기에는 많이 서투르기에,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은 차가운 무표정에 가까웠다. 조금 미소라도 지으면 괜찮을텐데, 그러지 못함은 이 상황 때문이던가. 혹은 두통 때문이던가.
"전 이미 닥터 구제프의 신원을 보증했습니다. 만약에...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럴리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저도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이 자신의 보증에 대해선 제대로 전해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찻잔을 가벼이 기울였다가, 당신이 화과자를 집는 모습을 보고 역시 더 꺼내와야겠다는 소소한 결정을 내린다. 감정이라, 감정. 화과자를 꺼내와야지. 녹턴은 몸을 일으켜 화과자를 더 가져와 접시 위에 예쁘게 올려놓고는 작게 만족한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에게 매정할 수도 있고 사소할 수도 있는, 동시에 그 무엇보다 솔직한 마디를 내뱉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에스터-녹턴)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녹턴님의 곁에 있어선 안 되는 겁니까?"
조금 서글픈 눈으로, 당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만약, 닥터 구제프가 유죄라고 한다면... 당신이 유죄라고 한다면... 어떤 때라도 당신의 곁에 있고자 하는 자신은 유죄인가? 화과자 대신 말을 삼킨다. 에스터는 당신의 간식을 앞에 두고 자꾸 다른 것을 배불리 삼키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었다. 그렇지만 꾸역꾸역 눌러놓기만 할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말을 뱉어낸다. 숨쉴 수 있을 만큼의 말을 토해낸다.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구제프를 믿는 당신이 유죄라면ㅡ당신을 믿는 저도 유죄이고...끝없이 죄의 연속이로군요. 사람을 믿는 사람은, 전부 죄인입니다."
아까 전까지 한 쪽을 믿는 것은 다른 한 쪽을 의심하는 것이라 본인의 입으로 말했거늘. 역시 에스터는 본심을 숨기는 데는 서투른 사람이다.
"...그, 유죄라고 해도... 저는...사실...상관없습니다. 수백명을 학살한 클라운도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히어로 코스츔이 되지 않았습니까?"
죄목에 따라 달라질 지언정 말이다. 그래도, 에스터는 사람이 흑과 백으로 나눠떨어지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흑심이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만약에 완전하게 올바른 사람만을...골라잡고, 조금이라도 악한 사람을 내치면서 살아간다면...제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첫 구원자는 빌런 출신의 복수귀. 자신을 히어로라고 여기지 않는 남자다. 그는 히어로와 빌런에는 멋대로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차이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더지. 그리고 자신은 둘 다이며.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구하고ㅡ그 원인이 트라우마탓이라 할 지언정, 그게 무슨 상관이지? 불순한 선행은 선이 아닌가? 자신이 불살을 표방하는 것 또한, 트라우마의 탓이 아닌가? ... 그의 블랙 더 라이트라는 이름부터가 그런 그의 양면성과 잘 어울린다. 흑이자, 빛. 검은 구원.
"...제 눈에는 완벽하게 올바른 사람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저, 그것을 이상으로 애쓰고 있을 뿐."
이상이 높다. 에스터가 정의하는 완벽한 정의의 기준이 너무 높았다. 그렇기때문에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으며, 자신조차도 그것에 이르지 못했다. 에스터는 화과자를 우물, 한 입 베어문다. 큼지막한 손과 자그마한 화과자가 대조되어 조금 우습군. 에스터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당신의 물음에 에스터는, 저는 괜찮습니다. 라고 담담히 대답한다. 조금이나마 후련해진 듯한 모습이다.
"...단지, 올바르지 않은 것을 택하려는 사람에게...끝없이 불평불만을 하긴 하지만요. 잔소리쟁이라며 핀잔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에스터는 어색하게 웃는다. 에릭이라면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전환했을텐데 말이다. 역시 자신은 아직도 부족한 사람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 작게는 담배는 몸에 나쁘다...춥게 입고 다니지 마라... 깊게 들어가자면 무고한 인간을 지키는 것을 우선하고...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선 안되고...같은 것들이 있다. 비스트에게 늘 귀찮은 취급을 받긴 하지만, 이게 제 천성이었다.
"그, 그...이런 잔소리쟁이는 싫습니까? ...만약 당신이 옳지 못한 선택을 한다면, 녹턴님은 완전히 악을 목표로 할 것입니까?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무시하고...?"
에스터는 걱정스럽다. 당신이 나아가는 데에 자신이 걸림돌일까봐. 당신이 목표로 하는 앞이 에스터가 가고자 하는 길과 정 반대일까봐.
"저는... 녹턴님이 죄인이라면... 주제넘게도 잔소리를 하겠지요. 정말 주제를 모르고 말입니다... 그리고...당신과 함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싶군요. ...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그랬다. 당신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해도, 당신의 정의롭고 다정했던 모습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거짓이었을리 없겠지. 에스터는, 그저 올바른 저 앞을 향해 가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과 함께. 에스터의 감정은 맹목적으로 보이나 절대적인 신앙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인 당신을 동경하고 있었다.
"...녹턴님은, 무엇이 불안하십니까?"
어쩐지 계속 단 것을 먹어치우는 당신이, 무언가를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속에서 올라오는 뭔가가를 계속 억누르려는 듯이.
(녹턴-에스터)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녹턴님의 곁에 있어선 안 되는 겁니까?
이어지는 말은 단순히 믿는 것으로 죄가 있다 여긴다면 전 세계인이 죄인이나 다름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결국 완벽할 수 없으니 죄가 있더라도 이상을 위해 올곧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 숨이 막힐 정도로 올곧고 바르구나. 지독하게 고집하며 머물고 있는 자신과는 달랐다. 아니, 내가 머물고 있었던가? 왜 그런 생각을 했었지? 잿빛 눈동자와 하늘빛 눈동자가 마주친다. 지독한 두통은 가실 줄을 모르고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따사로운 차 한잔과 다과를 곁들인 이 시간에, 자신을 위해 분노하고 울음을 자아내던 저 올곶은 눈빛 앞에서 약통을 꺼내며 보란듯이 약을 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머리말님은 제가 빌런으로 지목되었을때 제 신분을 보증하실 겁니까?"
믿는 것과 이에 대해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 이것은 마치 겜블과도 같다. 어떠한 수가 나올거라고 믿는 사람, 몇번 경주마가 이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저 제 믿음이 맞기만을 기도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 돈을 건 사람은, 그 액수가 커질수록 그가 치루는 대가가 커지는 것일 뿐이다. 종내는 돈을 모두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녀 자신을 걸었다.
믿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제 동생이 빌런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어째서 가드맨에게 당당히 그의 말이 틀린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는가. 딸기 모양의 화과자를 베어물었다. 맛은 딸기맛이 아니었다.
생각은, 그만.
"싫지 않습니다."
어찌 싫다 하겠는가. 허나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생각을 이끌어내려 하는 사람이기에.
"세상에 주제넘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죄인이라 해도 찾아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싫지 않다면서도, 감사하다며 대화를 종료하려 한다. 그럼 나중에 모든 것이 밝혀지면, 같은 대사를 덧붙여서라도. 허나 당신이 조금 더 빨랐구나. 녹턴은 에스터의 마지막 물음에 잠시 그녀를 살짝 올려다보았다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리 불안해 보였습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는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싸늘한 목소리로 되받아치고 말았다. 당신의 물음이 조심스러운 걱정에 의한 것임을 알면서도, 결국엔.
(에스터-녹턴)
"......"
신분을 보증한다. 그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혀버린다. 당연하다. 에스터와 녹턴은 근본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었다. 가족이라고 해도, 누구라고 해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해도, 그것이 그의 행동을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잔소리쟁이. 고지식한 사람. 그녀가 자주 듣는 이야기였다.
당장 부모의 일과 구제프의 일을 같은 가족의 일...이라는 이유로 묶었을 때부터 이미 이런 반론은 예정되어있었다. 에스터가 택한 것은 부모의 직장을 신고하고 소장과 부모를 감옥에 집어넣는 일 아니었나.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아 늘 에스터의 결핍이었던 부모와, 자신에게 체스를 처음 가르쳐주었던 무섭지만 다정한 소장을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을 찾았지. 에릭이라고 하는.
...그리고, 당신이라고 하는.
"저라면...당신의 신원을 보증하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녹턴님을...계속 지적하고 몰아넣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가만 보지 못하고ㅡ"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말한다. 단 맛에 심취해야 할 다과회이건만, 그녀는 단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을 먹어치우려 드는군.
"...그것이 소중한 사람의 짓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요."
입에 감도는 쓰디 쓴 감각을 음미하며 말한다. 역시 에스터는 단 것과는 맞지 않았다. 그 안에 듬뿍 들어간 것이, 설탕인지, 방부제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ㅡ 아니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생각을 굳어지게 만드는 마취제이거나. 입에 쓴 약이 몸에는 달다고들 말하곤 하지.
"녹턴님. ...녹턴님이 더 불안해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 구제프가 빌런으로 확정되는 것?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큰 불안입니까?"
안쓰러운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 이 안쓰럽다 함은 안쓰러운 것이 에스터이고 그녀의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는 뜻이지만. 글쎄, 당신에겐 어떻게 느껴질까? 자기자신을 무심코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당신에게, 이 말은.
"어느 쪽이 더 불안한지 알아야지, 그 불안이 현실로 찾아왔을때 행동을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소중한 자의 본질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당신을 향한 무수한 불신의 눈빛과 잃어버린 위치가 두려움을 줍니까...? "
에스터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는 아닐지 모른다. 이것이 당신을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걸 에스터는 알고 있다. 쓴소리라는 것을 알고있다. 마음을 저려오는 쓰릿함이 자신을 죄고 괴롭히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에스터의 일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자신이 가려는 정의로운 길로 이끈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의 마음이 헤집어지고, 곳곳이 쓰라려지는 것을 보며 자신조차도 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쓰라림에 몸부림치더라도.
...이를테면, 당신이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하자. 가시투성이인 발이 따끔따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방치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가시를 뽑아내고 전부 치워야지만, 장미가 만발한 꽃길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설령 그 가시를 뽑느라고 당신에게서 피가 나고 고통에 몸서리친다 하더라도. 그리고 가시를 치우는 자신의 손 또한 가시투성이로 따끔거린다 하더라도.
"그, 불안을...제가 함께 가져갈 수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어느 쪽의 불안이 당신을 더 괴롭게 하는지 알아야지만, 그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저의 말에 모순이 있었습니까?"
(녹턴-에스터)
"저 같은 이의 지위보다는 가족의 안위가 더 걱정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지위의 나락을 불안해할 정도로 대단한 위치에 있던 것도, 굉장히 복잡한 일을 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자리는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녀의 가족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조차 거짓된 것이라도, 같은 혈육이 아니더라도, 10년을 넘는 시간동안 함께 먹고 즐기며 보낸 세월은 그 안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는 법. 제 아무리 못난 이라도 정이 들고 마는 법. 그녀는 결국 그에 대한 것이 불안하다고 토해낸다. 동생이 범죄자인 것이 불안하다? 그녀는 당신처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고 어르는 것을 두려워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을텐데. 동생이 처형대 위에 서게 되는 것이 불안한 것인가. 가족이라는 형태가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던가? 데구르르 주사위가 저 멀리 던져진다. 이번에 주사위를 들고 있는 것은 은빛 머리칼에 흰 피부를 한, 자수정같은 눈을 반짝이는 동생이 아닌, 탁한 하늘색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당신이다. 그녀와 당신. 둘 뿐인 보드게임판에는 그녀 대신 주사위를 가져와 줄 이가 없다. 다음은 당신의 차례라는 듯, 하늘빛 눈이 시선을 보낸다. 그녀는 그 시선에서 고개를 돌리며, 입에 달디 단 화과자를 담을 뿐이다.
"어찌 제게 모순의 여부를 묻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솜사탕의 한 귀퉁이가 썩어들어간다.
가족이라는 형태의 붕괴가 불안해서-?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맞지만, 동시에 아니다. 동생이 처형대 앞에 서게 될 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이것또한 맞지만, 동시에 아니다. 무엇이 맞고 동시에 아닌 것인가. 녹턴은 몸을 일으킨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정답을 채우지 못하는 빈 문제집 위에서, 결국 펜을 놓아버리고. 그녀는 도망친다.
(에스터-녹턴)
에스터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당신과 에스터의 근본적인 차이였을 지 모른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나, 태도, 환경 등,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을 방치한 가족을 집어넣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겠지. 에스터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자신은 당신의 불안이나 고통에 진심으로 깊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결론지었지만, 과연 그 뿐일까?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 에스터로서는 진심이었다. 역시 이런 부분에서 에스터는 약한 것이겠지.
"...완전하게...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함부로 이야기해서."
에스터는 이마를 짚는다. 당신의 두통이 옮겨가기라도 한 듯이 어질어질하다. 얼얼할 정도로 쓴 맛이다. 오늘의 다과회는.
"저, 저는... 당연하게... 가족이고, 친밀한 사람이라고 해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막아야 한다...그것만을 생각해서."
물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보호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막아야 했다. 에스터는 다른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다. 즉살명령. 빌런에 대한 시선. 동생이 위험해질 지 모른다고... 그 외의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막아낸다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뭐, 괴로운 부분이 그 뿐만인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에스터는, 울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만 해도 큰 신경을 쏟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건, 타인의 잘못이건... 소중한 사람의, 잘못...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고, 에스터는 점점 자신을 잃는다. 하려고 했던 말들이 점점 정리가 안 된다. 무슨 말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말이든 공허한 울림으로 들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나의 말은,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가.
"...네. 다음에 이야기를 받아주신다면, 정말로 고마울 것 같습니다."
결국,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당신을 놓아주고 만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하, 하지만, 시간이 난다면... 저를...의지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말 상대로 삼아주십시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덧붙인다. 아직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당신이 나를 달래주었듯이, 자신도 당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당신이 해답을 찾을 때 까지, 저를 마음껏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머리말은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약간 비틀거린다.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신의 짐을 조금도 덜어내지 못했다. ...당신의 기분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당신이 더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은 진심이었다. 과연 '다음'은 올까. 하지만 만약 다음이라는 것이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것이 아닌가. ...과연 불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붕괴중, 어느 것이 나은 일일까.
에스터는 문을 닫고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로 주저앉은 채.
지금의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고, 에스터의 눈물은 이번에는 오로지 그녀 혼자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당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소리없는 눈물이 복도를 잔뜩 메워가고, 에스터의 얼굴은 붉게 일그러진다. 이번에는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거늘.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무의식중에 잠들어있는 것일까. 에스터는 지키지 못하는 것에 더없이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 블래스터
(33스레)
(블래스터)
어제 꿈에서, 그녀를 보았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검은 어둠의 그녀의 얼굴에 짗게 드리워져 있었고 무언가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노이즈가 끼어있었다. 구역질이 나서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몸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강한 두통과 손끝이 떨리는 증상. 선반위에 있는 약으로 손을 뻗었다 참았다. 그 이상한 상담소에서 받아온 약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정도 두통과 손떨림은 참을 수 있었다. 간신히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하고 나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명. 내 정보를 가지고 있는 녹턴과 다른 한 명.
하늘빛 그녀.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눌러 그녀에게 물품의 준비와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 써 보낸다. 아마 그녀라면 금방 올것이다. 정의감 넘치는 불살주의자. 그런점에서는 둘이 닮았다. 성격은 정반대.... 였던가? 어?
겪어보지 못한 두통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구역질도 몰아쳤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세상이 돌고 환청이 들린다. 분명한것은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구지? 약물오남용에 의한 환청 증세인가? 무기력하게 넘어진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지하로 내려가 간신히 물품들을 바이크의 적재함에 실었다. 운전, 가능할테지.
옷을 입으려 들어간다. 수많은 검은색 옷들 사이로 보이는 스웨터와 셔츠. .... 한 번쯤은 입어줘도 좋겠지. 진저걸이 골라주었으니.
바이크의 배기음이 시원하게 들려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접선장소는 ISMO의 사격장. 우선, 가보자.
(에스터-비스트)
터져나가는 총성과 함께 표적 하나가 무참하게 찢겨 날아간다.
에스터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이즈모에 마련된 훈련장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 중앙에 맞은 표적 판때기가 바닥을 굴러다닌다. 어차피 반동을 받지 않고 총알도 무한수급되니 만약을 대비해 양손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인지, 물리적으로 이즈모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어느쪽이든 녹턴과의 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잡념을 비우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지하기 위해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에스터는 반가움을 표할까 하다가, 안색이 좋지 않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잠시 정색한다. 재빨리 달려가 당신을 부축하듯 붙잡는다.
"괜찮나?"
하늘이 에스터의 빛깔을 가득 담은 시간이었다. 에스터는 얼굴은 굳은 표정이지만 행동에서는 당신에 대한 걱정스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무슨 일로 연락한거야?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블래스터-에스터)
"물품들과.... 인생상담."
나답지 않은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두 개의 가방을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각종 총기류와 무기들이 가득했다.
"글록 18 2정, M4 2정, AA-12 1정에 테이져 나이프 3개, 비살상용 제압 수류탄 10개, 고무탄환 총 300개. 전쟁이라도 나갈셈인가."
뜻하지 않는 대량 주문에 밤을 새는 공장이 이런 기분일까. 어제까지 기를 쓰고 만들어낸 결과물. 그 도련님에게 넘기는 하등품과는 다른 극상품들. 하나하나 부품을 조립하는데 잡아먹은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확실한 거래처에는 서비스 정신이 새겨지는법이다.
"...... 확인해봐라. 나는 잠시 쉬고있을테니."
의자에 앉아 본능적으로 담배를 꺼낸다. 입에 붙히려는 순간 정신이 돌아와 혀를 차며 다시 집어넣었다. 역시, 이 담배와 약에 뭔가 문제가 있는것이 분명하다.
(에스터-블래스터)
"...아니. 이 정도까지 부탁했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은데. "
쏟아져나오는 무기들에 당황한다. 이렇게 부탁했었나? 전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팔을 내두른다. 시체 하나도 못 보는데 무슨. 당신의 서비스가 섞여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노고의 결과물을 받아든다.
어쩌니저쩌니해도 무기를 부탁한건 사실이니 확인해나가나, 그런 것 보단 당신의 상태가 신경쓰인다. 사실 비비탄으로도 싸울 수 있으니 이 정도 무기들을 받아드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도 모른다만.
"비스트. 여기 이것들...그 담배는?"
에스터는 당신의 조금 이상한 반응으로 시선을 옮긴다. 단순히 금연이 목적...이라기엔 다소 상태가 이상하다. 안색도 그렇고, 인생상담이라는 말도 신경쓰인다. 에스터는 무기 확인을 관두고 대신 당신의 상태를 확인하려 한다.
(블래스터-에스터)
"솔직하게,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너 밖에 없다."
너는 내 약점을 다른이들에게 내뱉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렇게 덧붙히며 손에 쥐었던 담뱃갑을 에스터의 손에 올려주었다.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보랏빛의 담뱃값. 그 안에는 은은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한 향이 맴돈다. 마치, 유혹하는 독성 식물처럼.
"지금의 나는....... 나는 라디언트를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입을 살짝 깨물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복수에 대한 감정은 서서히 사그라 들었고 그녀의 얼굴, 행동, 말버릇, 목소리 등 모든 것이 보랏빛으로 덧칠해져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감정을 잃은 나는 살아있는 가치가 있는가? 아니라면... 내가 뭘 해야하는가?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기억들도 좀 먹어가고 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너에게 부탁하는거다."
나 혼자로써는 안될것이 명확하니까. 이렇게 약해진 짐승은, 결국 먹혀 죽거나 길거리에서 사라지거나.
"도와줘. 에스터."
(에스터-비스트)
라디언트를 기억하지 못한다니, 비유적인 의미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뒤에 덧붙여진 말을 통해서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담배. 최근 비스트가 이상할 정도로 흡연 빈도가 늘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거, 어디서 난 거지? ...연구소에 성분 분석을 맡겨도 될까?"
최근에 에릭이 개인적인 이유로 혼자 약 분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저도 연구원으로서 한층 성장했어요! 저는 이제 전보다 더 강한 에릭이에요! 같은 말을 했지. 그러면서도 다시, 하지만 다시는 그런 짓 안할 거에요! 역시 모두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의지하는 삶 최고!...같은 상반되는 증언을 하기도 했었나. 비밀이라고 하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아마 에스터와 연이 있는 당신이라면 에릭이나 에릭연구소에 대해 몇 번인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에스터에게 에릭은 가족같은 존재니까. 에스터는,비스트의 말을 잠잠히 들어준다.
"...우선은, 진정해."
마음을 가라앉혀. 그런 말을 건넨다.
"일단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이렇게 되기 전 최근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찬찬히 생각해보는것부터 시작하자."
단순히 스트레스로 나타난 정신적인 작용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가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스터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블래스터-에스터)
"가져가도 좋다. 이것도."
집에서 가져온 알약병. 이것 또한 보라색빛을 띄며 달그락거린다. 이젠 본능적으로 원해버린 이 약과 그 의사에게 가는것이 마약처럼 중독되어 버린 나는, 억지로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휴식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복수 하나로 살아온 짐승이 쉬어 버린 순간, 사냥 당하거나 도태될테지. 그래. 지금처럼."
왼손이 떨리는 것을 오른손으로 붙잡아 억지로 멈춘다. 약을 먹지 않은 부작용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 이거야 원. 도와줄 생각 가득인 눈빛이다.
"의심가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그 담배와 약. 다른 하나는 상담소다."
(에스터-블래스터)
에스터는 담배와 알약병을 받아든다. 단순히 휴식없이 스트레스를 연속으로 받아 이런 부적절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늘어났다... 고 생각해왔건만. 뭔가 그 이상의 문제가 있는 걸까.
"이것들은 연구소에서 분석한 다음 성분과 효능을 알려주도록 하지."
에스터는 당신의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본다. 심하게 불안정한 상태의 당신이 보인다. 에스터는 최대한 안타깝다는 눈빛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눈으로 본다면, 동정한다며 자존심상해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일부러 평소와 다름없는 굳어진 표정을 띄워내보인다.
"...그리고, 쉬는 법을 배워."
솔직하게는, 에스터 본인조차 별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블래스터를 기다리는 순간까지도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만 해도. 거기서 거기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충고가 의미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언가 하려고 해봤자, 일을 더 그르칠 뿐이다. 이런 수상한 약같은 것에 의존하게 된다면 더 최악이지."
에스터는 약을 흔든다. 기분나쁜 보랏빛이 일렁거린다. 눈살을 찌푸린다.
"일단은, 하루빨리 이것을 분석해오겠다. ...상담소에 관해서도."
(블래스터-에스터)
또 다른 이유. 이 문제는 그 망할 마녀에게 간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마녀는 분명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것이고 나를 약점으로 옥죄어 나를 잡아먹으려 할테지.
약과 담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사후 눈에 띄게 의존한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 한 가지 더."
묻고 싶은것이 있었다. 요새 보이지 않는 그 여자. 나를 도련님에게 몰아넣은 그 여자.
"녹턴, 그 여자. 어디 있는지 알고있나."
(에스터-비스트)
"...녹턴님...말인가."
좀 더 정중하게 말하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괜히 그런 얘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그 분이라면 사무실에 계시겠지. 언제나 쌓여있는 게 서류업무니까 말이야. 무슨 일이지?"
...최근에는, 그 일도 많이 줄어든 모양이지만. 에스터는 그런 생각을 하다, 조금 쓰라린 생각으로 사고가 이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당신에게 드러내보이지는 않는다.
"...몸조심해라."
에스터는 진심으로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 최근, 약했던 나에게 구원을 준 사람들은 다들 약해져 있는 것 같군.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가 하는 얘기를 꺼낼만큼 오래 살진 않았지만, 조금 묘한 심정이었다.
(블래스터-에스터)
"그러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여몄다. 사무실에는 가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그녀가 가지고있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여전하다. 언제나 그랬듯 참아내며 입구쪽의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넌, 죽지마라."
더 이상 주변인이 쓰러지는건 귀찮으니까.
- 에스터 - 파크 (두번째 일상)
(36스레, 에피5에서 이어짐)
(에스터 - 파크)
...에스터는 자신과 이번 임무를 함께 했던 파크 당신을 찾아갔다. 감옥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클라인 부부가 구속당했을 때는 자주 당신들을 찾아가곤 하였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무서우니까. ...외로우니까. 그 외로움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잡아넣은 거나 다름없는 부모를 꾸준히 찾아갔다...
하지만, 방치와 무관심을 대신해 그 자리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있었더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부모님에게 나쁜 짓을 했다는 죄악감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은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되어버렸다고. 춥고 어두운 감옥속에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고. ...그러나 계속된 혐오의 말이 계속되자, 에스터는 부모를 동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자신은 새로운 가족을 찾았다.
가족관계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장 위에 놓여있는 관계라고 해도, 그 관계를 채우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오로지 폭력 뿐이었다고 해도, 단순히 오랜 생활을 함께해온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래도 좋은 관계였다고 합리화하려 하는 것이다. 에스터는 착한 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그 곳에는 자식을 방치하고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부모만이 남았다.
"...코스츔하고, 대화를 하고 싶다."
간수에게 그런 말을 건네, 당신과의 잠깐의 시간을 얻는다.
ㅡ
"...코스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도 될까."
에스터는 당신과 마주보고 있다. 시간을 끌기 싫은지 질문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너의 담당의를 맡고 빌런갱생 프로젝트를 진행한, 닥터 구제프는 어떤 사람이었지?"
ㅡ
(파크-에스터)
그녀가 걸어와 나를 마주보며 대화를 하고 있다.
"무슨 일이지?"
그의 태도는 약간 지친듯한 말투였다. 아까의 머루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회의감을 느낀 듯.
"구제프. 그래, 요새 그런 소문이 있던데, 확인하러 온거지 응?"
그럼 말해주마 에스터. 빌런 클라운으로써 말이지.
"니가 원하는 답은 이거잖아? 구제프는......'곰돌씨'다. 이게 정답이야."
약간 조소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에스터에게 이야기한다.
ㅡ
(에스터-파크)
에스터는 조금 당황한다.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믿어도 되나?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지? 빌런의 목적은 어디까지인가? ...또 다시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자신이 해온 것은 언제나 정면충돌 뿐이다.
"...전직 빌런에다가, 구제프랑 상담을 한 적도 있는 네가 하는 말이라면 신뢰가 있겠지... ...그렇지만 괜찮은가?"
에스터는 당신을 쳐다본다. 언제나와 같은 굳어진 얼굴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당신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다.
"...구제프가 빌런이라면, 그것은 분명 너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갈텐데."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다. 에스터는 어찌됐건 말을 이어간다. 그런 것보다도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는 말은 구제프의 빌런갱생프로젝트 또한 거짓이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가?...그것은..."
조금 혼란스럽다. 구제프가 타격을 입으면 누구보다 타격을 입을 사람이 이렇게 담담하게 증거를 입에 담는다. 만약에 구제프가 빌런이고 그 빌런갱생프로젝트 또한 빌런을 침투시키기 위한 작전이라면, 파크는 구제프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패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여기에도 뭔가 속임수가 있나? ...에스터는 머리가 복잡하다. 이런 큰 그림을 보는 정치적인 싸움같은건 솔직히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에스터는 정면충돌이 특기였다. 그 때처럼 그냥 증거를 발견하러 쳐들어가서 잡았다! 증거다! 게임 끝! ...같은 상황이면 좋을텐데.
"...진저 그레이는 빌런이었나?"
이것 또한 묻는다. 이 대답에는 너는 어떻게 답할까?
"...그리고, 저번의 그 임무에서...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너는 확인했나?"
아무리 가면을 써봤자 그 형상은 에스터라는 것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렇기때문에, 에스터가 '뭘 하고 있었는지'도 너무 쉽게 입증되었다. 그리고 에스터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라디오에다가, 정체불명의 테이프를 넣어 듣고 있었지.
"나는... 지하 2층에서, 빌런 본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무언가 히어로측에 유리할 증거가 있을까를 찾고 있었어. ...블래스터와 함께."
당신은 지하의 CCTV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에스터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나, 혹시나 싶어서 당신에게 물었다.
"...내가 증거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어?"
ㅡ
(파크-에스터)
"뭐야, 걱정해주는거야? 어차피 이건, 함시온에게 근시일 내에 밝힐 예정이었다. 너에게 밝힌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건 없지."
이제와서 밝히는것도 조금 그렇긴 하지만, 일단 최근에 밝힐 이유가 두개나 생겨버렸다. 어차피 밝히게 될 거, 에스터에게도 말해주는 것이었다.
"진저 그레이는......히어로다. 누구보다 성실한 히어로야. 구제프의 대답을 빌런 클라운으로써 했다면, 이 대답은 히어로 코스츔으로써 하겠다. 그는 히어로다. 절대로 빌런이 아니야."
이빨을 까드득 물면서 마치 자기가 빌런이냐는 소리를 듣듯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대답했다. 누가 보면 그가 파크의 생명의 은인인 줄만 알 정도였다.
"알고 있어."
그녀는, 무언가 테이프를 돌리고있었지. 무슨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해주마. 내 발언이 얼마나 먹힐줄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파크는 나직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발언이 쓸모는 있을까. 하지만 부탁받았으니깐, 노력은 해봐야 하는 것이었다.
ㅡ
(에스터-파크)
"......"
솔직한 당신에게 말문이 막힌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당신의 발언일 뿐, 어디까지가 실효성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것이 '내부고발자' 로서의 파크의 발언이라고 한다면, 상당한 신뢰가 있겠지. ...하지만 이것 또한 히어로측을 혼란시킬 당신의 발언일 가능성과... ...이렇게 되었을때 구제프에게 향해지는 것과... 에스터는 머리가 아팠다.
...빌런 갱생 프로젝트는, 빌런에게 있어 이로운 프로젝트인가? 해로운 프로젝트인가? 만약 이것이 구제프를 모함하기 위한 발언일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지만 그렇다면 빌런측은 상당히 무능하고...아니, 그러니까... ...구제프가 모함당하기 위한 경우의 수...
그러니까, 구제프가 모함당하는 처지라고 한다면ㅡ그래서 파크가 이런 발언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면? 진저가 빌런이라면? ...하지만, 분명히 이 갱생프로젝트가 없었다면 파크는 애초에 히어로로서 서지도 못했을텐데? 어느쪽이냐 하면, 파크의 입장에서는 구제프의 편을 들어주는 게 더 유리하고 올바른 처사일텐데? 구제프가 배신당한 건가? 아니. 애초에 파크도 현재 감옥에 있기 때문에... 파크의 말이 가지는 효력이...아니, 애초에 나온 증거가 가리키는 것이...지금 진저는 근신처분을 받아 사실상 히어로로서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 증거를 통해 다시금... 아니...
"...역시, 이런 식으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건 나랑 맞지 않아."
에스터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범죄현장에 직접 쳐들어가서 잡아넣는 것이 나에겐 가장 맞고 편한 방식인데. 무식한 방법이지만."
에스터는 자조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빌런 갱생 프로젝트 또한 거짓이었다...고,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건가? 그 내용을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 파크?"
네가 구제프와 함께 나눴던 대화를 말이야. 에스터는 그렇게 물었다.
ㅡ
(파크-에스터)
"거짓. 그래 다 말해줄까? 갱생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거짓이야. 구제프는 나보고 아무것도 안했어. 설득도, 상담도, 세뇌도. 아무것도. 나에게 양의 탈을 쓰고 양 우리에 들어가라 하던데. 몰론 나는 양의 탈을 쓰자 진짜 양이 되어버렸지만."
신랄하게 그녀에게 답해주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아 쐐기를 박아주기로 했다.
"구제프는 곰돌씨다. 갱생 프로젝트는 거짓이야. 나는......빌런이다."
이제 나는 빌런 클라운이다. 이제 나의 정의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미안해요 누나. 약속 못지켜버렸다.
ㅡ
(에스터-파크)
"....."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파크의 증언을, 또렷하게 기억하도록 하자.
"...고맙다. 파크. "
너의 증언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훌륭한 가설로서. 에스터는 확신한다. 에스터는, 당신에게 동료로서 감사를 표한다. 고개를 숙인다.
"...우선은 여기까지, 다시 너를 찾아오게 될지도 몰라."
머리가 아프니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에스터는 돌아갈 채비를 하며 말한다.
"더 대화를 나누다 가지 못해 미안하다."
ㅡ
(파크-에스터)
"다시 찾아오는건 상관없는데 하나만 약속해줄수 있어?"
파크는 떠날 채비를 하는 에스터에게 질문을 던진다.
"네 팬인 이 누나좀 여기서 꺼내줘. 노력만이라도 좋으니깐. 아직 아무런 범죄를 하지 않았기도 하고, 혹시 이즈모 테러를 걸고넘어지면 내가 협박해서 한 일이라고 하면 되니깐."
이 누나를 구해주는 보상은 케이크-라며 자신이 케이크를 휴게실 안쪽 의자의 밑의 아이스박스에다 보관해 두었다고 말했다. 보냉제 꽉 채워놨으니 아직 안상했을거라고.
"......미안할거 없어. 정 미안하면 이 누나나 꺼내줘."
나는 상관 없으니깐. 이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나가는 그녀에게 손을 반갑게 흔들고는 쓰게 웃는다.
"잘가 에스터. 즐거웠어."
쓰디쓴 미소로 에스터를 배웅할 뿐이었다.
ㅡ
(에스터-파크)
에스터는 케이크라는 단어에 반응한다. ...케이크. 단 것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에스터는 조금 마음이 무거워진다.
"...노력해보지."
다만 에스터는 범죄에는 엄격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선 반응하기 힘들었다. 감옥보다 빌런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나?...같은 감상이 있었으나, 지금 그런 말을 할 때는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지만, 어떤 식으로 도울지에 대해 말하진 않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안녕."
쓰디쓴 미소를 애써 못 본 체 하며, 에스터는 발걸음을 옮긴다.
- 에스터 - 리제(리제 두번째 일상)
- 37~38스레 전후 추정
(에스터-리제)
"......"
에스터의 따가운 시선이 붉은 눈의 당신에게로 꽂힌다. 고뇌를 끌어안고 이즈모에 출근한 그녀는, 우연히도 당신을 마주하게 된다. ...의심쟁이 히어로씨라느니 말하더니만, 뻔뻔하구나. 처음 생포소식을 들었을때 느낀 점이었다.
"...좋은 아침이다."
정녕 이것이 아침인사인가. 그러고보니 당신도 구제프의 갱생프로젝트를 했을 테지. 물어도 되나?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지? 에스터의 의심은 현재 테이프의 '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구제프쪽으로 기울어졌으나, 빌런에게서 얻는 정보가 어느 정도 효용이 있을까. 코스츔의 경우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아 어느정도 신뢰가 있는 사이었으나, 당신의 경우는 미묘했다.
"...뭔가 할 말 없는가?"
...선량한 시민씨.
(리제-에스터)
"아아, 좋은 아침"
그리 이야기하고는 별 관심없는듯 핸드폰 게임을 한다. 여자 캐릭터 목소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RPG라도 되는 것일까.
에스터에게 별로 흥미없는듯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쳐다본다. 빰빠밤하는 전형적인 소리와 함께 그 판을 클리어한듯 하다.
"...없는데?"
다음 판을 할까 고민하는 리제, 그 모습에는 그냥 모바일 게임 중독자처럼 보일 것도 같았다. 실제로는 삶이 지루해서 시간 죽이기이지만.
그러고나서 리제는 에스터를 잠깐 쳐다본다.
"왜, 물어볼 것이라도?"
(에스터-리제)
"...아니. 글쎄다. 결국 너는 빌런이 맞았다는 거지?"
괜히 억울해진다. 그래. 분명 그때 피냄새도 나고... 옷 타는 소리도 나고...무기 잡는 소리도 나고...그랬다니까!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같다. 이제 지난 일이건만, 굳이 꺼내봤자 소용 없겠지.
"...지금은 히어로 소속으로서 있는 거겠고? 구제프의 빌런 갱생 프로젝트를 통해?"
현재 에스터가 의심하고 있는 그 인물의 이름을 대본다. 이 와중에도 느긋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당신이 대단하다. 그 여유를 반만이라도 나눠갖고 싶군.
"현재 구제프와 진저의 상호 빌런지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넌지시 언급해본다. 무시당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리제-에스터)
"뭐 그렇지"
2개의 질문을 한 대답으로 퉁친다. 핸드폰은 일단 집어넣는다. 배터리 없어. 곰돌 녀석 방에서 시간 떼우려면 배터리를 아껴야한단 말이지.
그 이후 질문에는 간단하면서도 가벼운 어투로 이야기한다.
"관심없어, 서로 빌런으로 지목한다? 그게 뭐?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곰돌군 정체가 들킨다? 그럼 원레대로 빌런으로 돌아가서 하던거 마저하면 그만.
진저가 빌런이 된다? 그게 뭐?
(에스터-리제)
"거 참, 속 편한 녀석이군."
게임 좀 그만 해라. 사람이 말을 할 때 그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같은 소리를 하기도 전에 당신은 게임을 순순히 집어넣는다. 에스터는 당신에게 잔소리할 타이밍을 놓쳐 조금 아쉽다.
"빌런 즉살 명령을 잊었나? 구제프가 빌런이라면, 갱생 프로젝트로 목숨을 부지하던 그대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
그렇게 말하고서야 에스터는 파크가 처한 위치를 새삼 다시 깨닫는다. 절대 구제프를 적대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건가. ...그 의도가 무엇이건,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군.
"...그러고보니 진저 그레이는 당신을 생포한 사람, 아닌가?"
이 부분의 대화를 통해, 뭔가 얻을 수 있을까.
(리제-에스터)
"그렇다면 나도 죽이면 될 뿐이야? 나도 그냥 안 죽이고 다닐 뿐이고?"
갱생의 여지는 0, 거기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무죄'다.
상관없다는듯 그리 이야기하고, 조용히 뒷 이야기에 답해준다.
"그렇긴 한데 왜?"
게가 날 잡았다고 해서 뭔가 달라진 것은 아니잖아?
(에스터-리제)
"아니. 뭐..."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이런식으로 정보 캐고 다니는건 역시 나랑 안 맞는다. ...반응을 유도할 수는 없나?
"진저와의 전투 상황...은 어땠지? 당신은 어찌됐건 나에게는 빌런이라는 것을 끝까지 숨기지 않았나."
꼬리를 물고 늘어져본다. 어떻게든 뭔가 알아내보자.
"구제프와의 상담 과정은? 어떤 이야기를 했지? ...히어로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없어보이는데."
확실히 이런 사람을 히어로측에 놔뒀다는 점에서 구제프는 다소 수상할지도.
(리제-에스터)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했다. 그 정도인데?"
에스터가 하는 것을 보니 정보를 캐내려는 것 같은데..
뭐 약간의 힌트나 던져줘볼까?
"게가 떠들면 난 게임한다. 그정도야 아 그리고..정보를 캐려면 좀 더 교모해야하지 않겠어?"
리제는 당신을 쳐다보며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심하든 그 것은 진실과 가깝다. 라고 해두지."
(에스터-리제)
"...안타깝게도, 교묘하게 말을 하는 특기가 없어서 말이야."
완전한 직설 뿐이었다. 에스터의 말들은. ...에스터는, 약간의 욱신거림을 느낀다.
"뭐. 고맙다. ...이 정도로 해둘까. "
너의 증언이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고개를 숙인다.
"...한 가지 더. 그렇다면 너는 빌런으로 돌아가게 된다 해도 별 상관없다...그런 입장으로 봐도 되겠지?"
(리제-에스터)
"그래, 난 빌런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어. 나는 쾌락주의니까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난 간다-하고 자리를 뜹니다.
늦었다고 뭐라 안 하겠지-라고 중얼 거리며 말입니다.
- 에스터 - 가람
- (에스터-가람)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이 있다. 에스터는 실제로 그 테이프를 획득하고 꽤나 괴로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병이라고 표현해도 될 법 하다. 쳐들어갔던 빌런의 아지트에서 에스터는 단편적인 진실이 담긴 테이프를 획득했고 이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중이었다. ...테이프의 정보로, 나는 닥터 구제프를 지목할 수 있는가? 진저 그레이는 누명에 씌였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증언을 수집했으나, 여전히 용기가 부족했다.
...이런 음모론이니, 내부 분열이니 하는 걸 처리하는 건 자신과 맞지 않는다. 경우의 수라던가, 모함이었을 때의 대처방안이라던가, 모함이 아니었지만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여 자신에게 돌아올 역풍이라던가...머리가 아팠다. 역시 명백한 증거를 통해 정면돌파하는 것이 에스터로선 편했다. 일단 밑도끝도없이 전력충돌한 뒤 자신의 생각과 맞으면 최선의 경우인거고 아니면 책임지는...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 다른 희생을 낳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정면충돌.
지금 막 당신의 범죄현장을 발견한 에스터가 취하기에 딱 좋은 행동이지 않은가? 191cm의 장신의 덩치가 당신에게 걸어온다. 이 상황에 대해 당신의 설명을 요구하듯이.
(가람-에스터)
"어ㅡ라? 안녀엉ㅡ"
너는 느긋한 어조로 말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네 손에는 방금 네 손으로 죽였을지도 모르는 사람이ㅡ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세하게 움직였으니까.ㅡ 차고 있던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작은 레이피아 형태의 은색 브로치다. 그림자와 엎어진 사람의 검붉은 피가 네 손에서 흐르고 있었지. 네 입장에서는 히어로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일 터였다.ㅡ그 동안 본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이겠지ㅡ 꽤 큰 키를 올려다보면서 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와! 키 진짜 커!!!"
네 키도 작은 편은 아닐진대, 퍽 신기한 듯 싶었다. 어쨌든 너는 브로치를 네 가슴팍에 달.. 야. 그거 달지마! 아. 너는 정말 바뀌는 법이 없다.
"어때ㅡ? 어울려?"
아니요. 그러라고 다가오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에스터-가람)
에스터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시체. ...아니,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질어질해지고 있는 속을 숨기고, 짐짓 더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당신이 한 행동때문인지 그 쪽도 키가 크군...같은 느긋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피 묻은 손으로 브로치를 달아준다. 뭐 하자는 거지? 역겨워해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반응할 타이밍을 놓쳤다. 에스터는 브로치를 빼서 그 쪽으로 도로 던진다. 그리고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당신을 응시한다.
"살인미수에, 절도행위인가."
철컥. 에스터가 허리에서 총을 뽑는다. 양 손에 자동권총이 쥐어진다. 험악한 얼굴의 에스터와, 자동권총 둘이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 안 그래도 최근 심란한 상태인데다, 당신의 돌발행동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위압적인 인상이다.
"위험인물로 보이니, 제압하겠다."
(가람-에스터)
"에ㅡ 모처럼 예쁘게 달아줬는데!"
짐짓 토라진 어투로 말하던 너는 땅바닥에 떨어진 브로치를 아깝다는 듯 다시 주웠다. 그러다, 총구와 에스터의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나쁘지 않아? 내가 갖고 싶은 갖고 있었으니까 얻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제압할 필요는 없어~"
너는 웃는 투로 궤변을 늘여놓았다. 네 그림자가 일렁이다가 불쑥 솟아올랐다. 너는 까르르 웃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픈 건 싫어."
너도 공격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네 눈을 즐거운 것이었으니 다행인지도 모르지. 너에게만.
(에스터-가람)
"너는 사람을 해쳤어. 제압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에스터는 그림자가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본다. 약간 긴장한다. 총구를 거두지는 않은 채, 이어 말한다.
"아픈 것이 싫다면, 순순히 연행되어라. 그렇다면 다치게 하진 않겠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터는 찡그린다. 당신이 공격할 타이밍을 기다리며.
(가람-에스터)
네 두 눈이 초생달 모양으로 샐쭉히 접혔다. 너는 웃으면서 그림자를 쥐었다. 그것은 총의 형상을 띄었다. 에스터가 쥔 총을 보고 마음대로 떠올린 것인지도 몰랐다.
"연행되는 것도 싫고 아픈 것도 싫으니까 말이야ㅡ 아. 혹시, 이즈모였나? 그 쪽 소속이야??"
아직 네가 잊지 않은 그 일은 거의 대다수 흐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이겠지만.
"그러면 재밌게 놀 수 있겠네ㅡ!"
아니, 이거 노는 거 아닌데요. 야! 쏘지마! 야! 넌 언제나 공격하고 보는 그 성격을 고쳐야했다. 정말이지, 그걸 왜 안 고치는 걸까.
어쨌든, 네 방아쇠에서 그림자로 만들어진 총알이 날아갔다.
Dice(1,100) value : 8
(에스터-가람)
"빌런다운 것인가. 그렇다면 빌런인 너를 제압하는 것은 히어로다운 행동이다."
그렇게 대답한다. 그림자가 총의 모양으로 쥐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이즈모의 소속이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히어로다운 행동이라는 말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겠지.
에스터는 튀어나간다. 당신의 그림자 사격은 에스터의 갑작스런 돌진으로 인해 초점을 잃어버린다. 에스터는 아무런 상처하나 없이 그것을 회피해버린다.
그리고 회피하는 동시에 쌍권총을 갈긴다. 탕탕탕. 하고 가볍다면 가볍게, 무겁다면 무겁게 총성이 울려퍼진다. 에스터는 불살주의의 히어로였기 때문에, 급소가 아닌 다른 부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무름때문에 당신에게 역으로 제압당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Dice(1,100) value : 56
(가람-에스타)
"아하하하!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히어로들은 재밌어서 좋아!"
너는 총알을 피한 에스타가 재밌다는 것처럼 꺄르르 웃었다. 좋아. 여기에선 어폐가 있다. 첫째, 네가 기억하는 히어로는 아직 한 명 뿐이었다. 둘째, 너는 히어로를 단 한 명만 봤다. 그러니까, '들' 이라고 말하지 않는ㅡ 야! 무시하지마! 야!
"악!"
피한다고 피했지만, 너에게 총알이 남긴 경상은 선명했다. 아무리 너라도, 그게 급소를 피한 거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척 하지마, 임마. 너는 그림자로 마치 붕대를 감듯 다친 부분에 감았다. 나중에 수현에게 상처를 봐달라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난 총 처음 써보는 거라구? 초심자의 행운이다 뭐다 하는 걸로 맞지 않을까?"
아니. 거기에서 요행을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너는 다시 그림자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Dice(1,100) value : 45
"이렇게 즐거운 건 오랜만이야!"
너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 햇볕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너는 햇볕에 드러나는 걸 싫어했으니까.
(에스터-가람)
에스터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하고 있다. 그림자를 능력으로 사용한다...라. 에스터는 희번득한 눈으로 당신을 노리더니, 다시금 총을 갈기려고 하는데... 자신의 얼굴에 총알이 스쳐간다. 에스터는 스쳐가는 총알을 눈으로 쫓는다.
"......"
볼에 찢어진 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피가 떨어지는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신에게 총을 겨눈다. 얼굴이 다쳐서인지 표정짓기가 더 힘들어져, 더욱 험악하게 찡그려진다.
"초심자의 행운이라, 이 곳에서 무사히 제압되는 것이 너에게 있어서 행운이 아닐까."
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에스터는 당신을 겨눈 두 권총을 동시에 발사한다. 이번에도 역시 급소를 노린 일격은 아니었다.
Dice(1,100) value : 13
(가람-아세타)
"아하하하ㅡ 맞았네ㅡ?"
너는 피를 흘리는 즐겁다는 듯 연신 까르르 웃었다. 그 상황 자체가 네게 정말로 즐거운 것일 터였다. 무엇인지 너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을까. 너는 고개를 비뚝 기울였다.
"너무하잖아ㅡ 그런 건. 제압 되면 더 이상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구?"
그 사실은 너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너는 더 이상 즐겁게 빌런 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잖아.
"그러니까ㅡ 히어로도 나랑 노는 게 즐겁잖아?"
아세타가 쏜 총을 그림자로 막아 선 너는 재밌다는 듯 총을 겨눴다.
"Bang!!!"
Dice(1,100) value : 57
너는 언제나 즐거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너는 혀를 내밀곤 히죽 웃어 보인 거겠지.
"있지, 히어로랑 노는 거 정말로 재밌는데 이름이 뭐야? 이름 알려주면 내 이름도 알려줄게ㅡ!"
네가 지금까지 이름을 알려준 건 누구였을까. 너는 기억을 하고 있기나 하니?
(에스터-가람)
"그닥 즐겁지 않다. "
이런 광기가 담긴 말에도 에스터는 고지식하고 무뚝뚝하게 진지한 대답을 건넬 뿐이었다. 그야. 당연히 즐겁지 않겠지. 전투인데.
"......"
잠시 고개를 숙인 사이, 총은 코끝을 찢고 지나간다. 콧잔등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뼈가 깨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에스터는 속으로 생각한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코를 붙잡은 채, 다시금 연사가 이어진다.
연달아 울리는 총성. 위협사격과, 진심어린 사격이 섞여있다. 그 중 어느것이 맞을 지는 모르는 일이지. 이름을 알려달라. 그 말을 이런 상황에 들어줄 필요가 있나? 그러나 에스터는 나지막히 대답한다.
"에스터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는 미들네임이고, 성은 클라인이었으나, 그녀는 늘상 성 대신 미들네임을 알려주곤 했다. 부모와의 일이 있었으니까. ...또 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타앙. 강력한 총성이 다시금 울린다.
Dice(1,100) value : 96
(가람-에스터)
"왜ㅡ? 이렇게ㅡ나! 즐겁잖아??? 즐거운 건 좋은 거야? 어째서 히어로들은 이런 걸 모르는 걸까ㅡ"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너는 빌런에 어울리는 거겠지.
"아하하하핳! 또 맞췄다!!"
빨갛게 된 에스터의 코 끝을 보면서 넌 즐겁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맞췄다는 사실에 즐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네 손에 들린 총이 빙그르르 돌았다. 너는 에스터의 이름을 듣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름을 기억하기라도 할 생각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너는 해맑게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리퍼야!"
네가 가르쳐 준다고 했던 이름이 빌런으로서의 이름이었던 것이었냐. 너는 재밌다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하다가 팔에 총알이 맞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프네에ㅡ 아파ㅡ 아파ㅡ"
아프다고 연신 말하던 너는 그것을 붕대로 감는 것 처럼 그림자를 감았다. 넌 총을 쓰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갈고리 형태의 그림자가 너에게서 솟았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에스터에게로 날렸다. 묶어둘 생각인 모양이다. 어린애가 따로 없구나.
Dice(1,100) value : 19
(속박다이스)
(에스터-가람)
"리퍼. 슬슬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데."
치명상이다. 좀 더 맞다간 아무리 피튀기는걸 좋아하는 광기어린 빌런이라도 힘들 것이다. 물론, 에스터 자신도 힘들어지겠지만.
"사람을 해치는 일은 즐겁지 않다. 그게 너같은 빌런이라고 해도."
에스터는 폭력과 가학을 지극히 불쾌하게 여기는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총을 계속 쏴나가던 에스터는 팔이 잡힌 것을 확인한다. 이내 그림자는 몸을 감싸 그녀를 속박한다.
...속박인가. 에스터는 자신의 몸을 감은 그림자를 쳐다본다. 그리고 끊으려고 힘을 줘본다.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진 않으니.
Dice(1,100) value : 61
(가람-에스터)
"아하하하하ㅡ 아프니까ㅡ? 아픈 건 나도 싫거든ㅡ"
그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면 정말 좋겠지만, 아쉽게도 너는 그러지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너는 빌런이 아닌 히어로가 되었겠지. 너는 여전히 까르르 웃으면서 에스터를 바라봤다. 그림자로 누르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피는 뚝뚝 흐르고 있었다. 객기 그만 부리는 게 어떨까.
"ㅡ히어로는 이해하기 어렵네~ 즐거운 것이 그렇지 않은 거야?"
오히려 에스터의 입장에서는 네가 더 이해하기 어려운 쪽 아닐까. 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가, 그림자에 붙잡힌 에스터를 보곤 씩 웃었다. 그 동안, 잘 안썼긴 해도 제대로 잡을 수ㅡ 오, 이런. 끊어졌구나.
"와ㅡ 강하네? 나는 완전히 다쳐버렸고ㅡ"
너는 다시 에스터를 속박하려고 했던가?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너는 에스터를 다시 한 번 휘감으려던 그림자들을 다시 갈무리 했지. 햇볕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연행되는 것은 정ㅡ 말 질색이니까. 두고 보자! 라고 하면서 도망칠래ㅡ"
결국 너는 더 이상 안 싸우는 걸 택했구나. 계속 피를 흘린다고 좋을 것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아직 죽는다거나 하는 건 싫잖아, 그렇지?
(에스터-가람)
"...애초에 즐겁지 않다."
서로간의 대화가 평행선이다. 에스터는 다시금 자신을 휘감으려는 그림자들에 움찔하나, 그것들은 에스터를 감지 않았다.
"너도 아픈 것은 싫으니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마. 누구나 고통을 겪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진 않은걸. 애초에 이런 대화가 통할 상대였으면, 사람을 해치고도 태연히 브로치를 선물하는 일은 없었겠지.
"...도망갈 셈인가."
그렇게는 놔둘 수 없다며 당신을 쫓으려 하나, 당신은 어둠에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뚝, 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 손바닥이 붉은 색으로 번져만 간다. 에스터는 얼굴을 찡그린다. 그리고는, 피투성이인 얼굴을 가린 채 골목을 나선다.
- 아누비스
- 38스레
(아누비스)
오늘은 어제보다 따듯한 날씨라고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어제보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이즈모 내부에서는 진저 그레이, 가드맨의 닥터 구제프 빌런 의혹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은 녹턴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그녀가 휴가를 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휴가 중 연락이 두절된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누군가의 음모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그네들의 입에 나돌고 있었다.참으로 서늘하다. 아누비스님, 춥지 않으십니까? 하며 누군가 손에 쥐여준 핫팩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당신이 다가와 말을 걸어주기 전까지.
(에스터-아누비스)
"...진저 그레이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가."
에스터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겨울인지라 그녀의 옷도 꽤나 두툼해졌다. 작은 산타에게서 받은 붉은 목도리, 와이셔츠 겉의 갈색 가디건, 조금 두꺼워진 바지. ...당신의 옷은 조금 따뜻해져봤자 여전히 추워보인다만.
"고생이 많군. ...춥지 않은가? "
그녀는 핫팩을 당신에게 선물한다. 당신은 핫팩을 또 하나 얻었다. 띠링.
"......"
에스터는 당신하고 이야기를 시작핳 타이밍을 재고 있다.
(아누비스-에스터)
대신한다기엔 그가 이미 근무중일 때부터 경비 일을 받았으니 엄밀히 말하면 아니었지만...경비를 한다는 의미 자체로는 맞는 말이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핫팩을 쥐고 있던 손을 슬쩍 뒤로 숨겼다. 이런 히어로복을 입고선 근엄하게 보여야 할 경비 업무를 하고 있던 차에, 핫팩이나 쪼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숨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띠링, 핫팩 하나가 더 건네지자 저도 모르게 핫팩을 쥐고 있던 손을 내밀어 나머지 하나를 받고 말았다. 손안에 가득 찬 핫팩을 어쩌지 못하고 다른 한쪽 손에 옮겨 든다. 의상에 주머니가 없으니 별 수 있나. 결국 한손에 핫팩을 하나씩 들고 조물거리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그의 목에 걸려 달랑이는 히돌이의 부담스러운 미소가 마치 그 모습을 보며 '이제야 좀 따듯해 보이는군, 친구!'라고 하는 것만 같다.
"감사..합니다."
겨우내 입술을 뗐는데 조금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아직 감기가 온전히 떨어지지 않은 걸까. 그는 황급히 뒤늦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에스터-아누비스)
"...감기기운이 있는 건가?"
에스터는 목소리를 듣고 추측한다. 옷좀 따수게 입고 다니라고 해주고 싶은데 아직 친밀도가 낮았다. 친밀도가 낮다기 보단 거의 초면이다. 말을 건게 용하다.
"......"
이럴 때 에릭이었다면 작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짜잔! 이라며 약을 꺼내줬을텐데. 하다못해 목 부은데 좋은 캔디라던가. 안타깝게도 에스터는 에릭처럼 잡다한 것들을 잔뜩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릴때 물건을 들고 다니면 자꾸 잃어버려서 그냥 집에 두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됐다.
역시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하고 싶은데. 아니, 초면에 패션 지적은 좀...하지만 감기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 게 나을텐데."
...결국 넌지시 말을 던져버린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게 아닌데.
(아누비스-에스터)
"...아직, 조금 남아있습니다."
말하고선 조금 후회했다. '아직'이라니, 어쩐지 자신이 원래 감기에 지독하게 앓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상대가 히어로 에스터..아니, 머리말이라는 사실을 알긴 하지만 전에 친분을 쌓던 사이도 아니고 -인사를 했다면 서로 지나치며 고개를 한번 끄덕인 정도나 되려나? 그런 사람에게 '나 감기 걸렸는데 몰랐어요?'라고 칭얼거리는 것처럼 말하다니. 당신이 그의 말실수를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는 제 손안의 핫팩을 꾹 쥐었다가 살짝 느슨하게 놓았다. 손 안이 뜨끈뜨끈하다.
"히어로로 활동 중일 땐 히어로 복장을 입어야 하니까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대답을 건네고, 당신에게 양쪽 핫팩을 모두 내밀었다. 오른쪽을 내밀자니 당신이 준 것이니 실례가 될까봐 못 내밀겠고, 왼쪽을 내밀자니 당신이 오기 전부터 그가 손에 담고 있던 것이니 괜히 낡아 이제 곧 식어버릴 것을 내미는 것 같아 못 내밀겠고. 어느것도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가 결론내린 행동이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마치 빨간 핫팩을 원하니, 파란 핫팩을 원하니-하고 묻는 것만 같다.
(에스터-아누비스)
...그런 걸 지켜보긴 커녕, 그런 게 정해져있는 지도 몰랐다. 자신도 뭔가 이미지를 신경쓴 옷같은걸 입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해본다. 이미지를 신경쓴다면 어떤 거지? 말 탈같은 거? ...창피하니 싫다. 관두자.
"...나는 옷을 따스하게 입었다. 당신의 핫팩을 뺏어갈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아누비스의 핫팩을 내민 양 손을 둥글게 말아 도로 두 핫팩을 쥐어준다. 곧 겨울이 다가오니 적어도 윗옷정돈 줘도 되련만. 안타깝다. 히어로 복장같은 허례허식이 다 뭐라고.
"......"
에스터는 고민하다가, 당신에게 자신의 가디건을 입혀주기로 결정한다. 꼭 한겨울 눈사람에게 밀짚모자를 씌워주듯이.
"...일단 이것을."
히어로인 내가 입던 것이니 이것도 히어로복장이다! ...라고 에스터는 속으로 생각해본다. 역시 에스터라고 할까. 성별의 차이가 있는데도 가디건은 그렇게까지 작아보이진 않았다. 에스터는 윗옷을 입은 당신을 보며 뿌듯해한다.
"입던 옷이라서 미안하다. ...당신께 조만간 스웨터라도 선물하고 싶군."
(아누비스-에스터)
뭐라고 입을 열어 말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고 있던 새에, 어느샌가 당신의 손길에 팔을 들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드는 가디건의 팔 부분에 자신의 팔을 끼고 말았다. 이렇게 하면 히어로 아누비스의 복장이 가려지고 마는데...머뭇거리는 그에게 당신의 보드라운 가디건이 몸을 감싸온다. 정중하게 거절하자,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반대쪽 팔까지 완벽하게 가디건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니야, 벗자. 하고 결심한 순간에는, 이 가디건이 당신의 호의하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우고 만다. 잘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겉옷을 벗어가면서까지 베풀어주는 호의를 거절해버리는 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렇지만 결국 당신이 추워지고 그가 복장규정(?)을 어기게 된다면 둘이 손해니 도로 벗어서 돌려주는 게 옳지 않을까...혼란스러운 머리속에 그는 다시 핫팩이 쥐여진 양 손을 내밀고 말았다. 어찌되었건 이제 겉옷을 하나 벗었으니 그만큼 당신이 더 추워지지 않았겠는가. 그는 당신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당신이."
두번째다.
빠알간 핫팩줄까, 파아란 핫팩 줄까.
(에스터-아누비스)
"......"
에스터는 당신의 빨간 핫팩...아니, 쓰다 만 핫팩을 쥐어 가져간다. 그러는가 싶더니, 훼이크다! 자신의 새로운 핫팩하고 바꿔버린다. 그렇다! 에스터는 자신이 핫팩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신의 양손에는 에스터의 파란 핫팩이 쥐어진다.
"나에게는 이미 핫팩이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누비스가 쓰던 핫팩과 아직 뜯지 않은 새 핫팩을 짤짤 흔든다. 핫팩을 꽤 여러개를 가지고 나왔던 모양이다. 자잘한 걸 들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고 방금 말하긴 했지만, 이런 날씨니까 핫팩은 예외로 치자. 핫팩은 자잘한 게 아니라 생존수단이다.
"그리고 나에겐 목도리도 있지. 목도리는 신체의 체감 온도를 확 높여준다."
뭔가 자랑스러운 사실을 말하듯이 뿌듯하게 말한다. 에스터의 목에는 빠알간 머플러가 감겨있다.
(여기까지 39스레.)
(41스레)
(아누비스-에스터)
아누비스는 약 5초간 가만히 서 있었다. 당신이 핫팩을 여러개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전개에 제 손에 들린 새 핫팩 두개와 당신이 가져간 쓰던 핫팩을 말가니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이 핫팩을 저리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렇게 해서 결국 당신이 쓰던 핫팩을 가져가게 만들고 마는 최악의 결과(?)를 내지는 않았을텐데. 이래서야 호의를 베풀어준 당신의 은혜를 은혜가 아닌 원수로 갚은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는 복잡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들어갈 수록, 해답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아마 생각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머리 주변에 휘몰아치는 ???을 볼 수 있었으리라.
손 안이 뜨끈뜨끈하다.
자신은 머플러도 하고 있다는 자랑스런 당신의 목소리에 물음표의 홍수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물론 끄덕이고 난 후에는 - 내게 무언가를 물어본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이는게 이상해 보이진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있고 싶었지만 경비일을 하는 도중에 쥐구멍이라니, 택도 없지.
"..날이 많이 춥습니다."
정작 제일 추워 보이는 복장을 한 것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숨지 못하면 상대를 떠나보내면 된다는 기발한 생각에 도달한 아누비스가 택한 행동은 당신에게 추우니 어서 안에 들어가 있으라 하는 것이었다.
(에스터-아누비스)
아니. 어딜봐도 당신이 가장 추워보이는데. ...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오려는 것을 참는다. 초면에 그런 말은 그닥 예의가 아니다.
"그렇군..."
핫팩도 전달했고, 가디건도 빌려줬으니 할 일은 전부 마쳤다. 당장 상대도 쥐구멍을 찾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이제 가야겠지... 에스터는 "가디건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낡기도 했고, 비슷한 게 몇개 더 있으니까..."같은 소리를 하며 돌아갈 채비를...
...이게 아니지.
"...저기."
생각해보니 이것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 아누비스의 추워보이는 모습에 무심코 잊고 있었다. 눈 앞의 꼬마눈사람을 따뜻하게 꾸며줄 생각만 하다가 자신이 눈사람에게 볼 일이 있다는걸 잊었군. 무서운 능력이다. 혹시 아누비스를 경비원으로 세운건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녹턴님의, 현재 소식을 알고 있나?"
(아누비스-에스터)
꼬마 눈사람이라기엔 좀 건장한 눈사람은 이제 대화의 마무리를 짓는 목소리에 속으로 작게 안도했다. 그의 새로운 전략이 잘 먹혀 들어가는 듯 했다...물론 그가 그런 심정을 느낀 것은, 당신이 그녀의 이름을 꺼내기 전까지의 이야기.
녹턴과의 연락두절 후 당신처럼 몇몇이 그리 물어오곤 했었다. 갑작스런 휴가, 그리고 잠적.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을만한 위치까지도. 하지만 그의 짐작이 점차 뻗어나갈 수록, 더더욱 그녀를 누군가와 섣불리 만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턴또한 그리 생각하기에 연락을 끊었을 것이다.
"...."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은 하기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에스터-아누비스)
"....."
모르는 건가. 어쩔 수 없군.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유감스러웠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성격처럼은 보이지 않으니.
에스터는 추궁하는 행동에는 약했다. 사람을 밀어붙여서 원하는 증언을 얻어내는 것 자체가 폭력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런 무름 때문에 그 때 소장을 더 일찍 추궁하지 못했던 것이고, 지금도 교묘한 질문따위는 못하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너무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 추궁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녹턴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아누비스 뿐인 것은 아니다. ...대답해주지 않는 그를 돈먹은 자판기마냥 아득바득 괴롭히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묻는게 낫겠지.
에스터는 정말로 돌아선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은 자유다.
- 미야 - 에스터
- (40스레)
(미야 - 에스터)
"아~! 자유다~! 원래도 착하게 살았지만 더 착하게 살게요~!!"
파크와 농땡이를 치다가 잡혀들어간지 n일. 그의 희생덕에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무려 그 에스터를 보지않았는가. 혹시 이즈모 앞에 죽치고 앉아있으면 아누비스 가면을 쓴 사람이나 에스터를 볼 수 있지않을까? 방금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서 에스터를 보고싶다하면 분명 나를 이상한 사람 보는 것 처럼 보겠지. 일단 이렇게 젊은 애가 나쁜 짓 하지말라 해주길래 안했다고 하고 나오면서 본 표정을 굳이 또 보고싶진않았다.
"일단 기다려볼까..."
그러니 어쩌겠는가. 밖에서 기다리는 수 밖에. 말해주고 싶은게 한가득이었다.
(에스터-미야)
에스터는 이즈모 건물에서 나온다. 최근의 전투때문에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다. 각각 콧등과 볼이 찢어져서,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 험악해보이게 됐다. 그렇지만 그런 걸 신경쓰기에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
아는 얼굴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파크가 팬이라고 말했던... 아, 한 번 구해준 적이 있었던가. 에스터는 떠올려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가? ...그렇지만, 빌런이 히어로 본부 앞에서 저러고 있어도 되는건가? 뭐, 풀려나기도 했고 파크의 말에 의하면 아직까지 심한 범죄는 안 저지른 것 같으니까.
"저기..."
이름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호칭으로 부를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석방되었는지라던가 자세한 정황이라도 물어볼까. 뭔가 정보가 될만한 게 있으면 좋을텐데.
(미야-에스터)
"네에, 저요.... 어!! 언니야, 안녕하세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본다. 아! 에스터다!! 마치 풀숲에서 희귀한 포켓몬이 뜬 것 같은 두근거림을 간직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손을 방방 흔든다. 뺨이 붉어진건 분명 추위 때문은 아닐것이다.
"저어번에 구해주신거 감사했어요!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었는데... 그, 제대로 만나서 얘기하고싶어서... 그리고, 뭔가 보답을 하고싶었어요."
아무래도 케이크 하나 만으로는 좀 그렇잖아요. 헤실거리면서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에스터의 얼굴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힐끗 쳐다본다. 멋진 얼굴에 상처가 났다니, 물론 그것도 멋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건 싫다!
"제 본명은 밤비에요, 유밤비! 특별히 언니야랑 파크한테만 알려주는거에요? 추우니까, 어디든 들어가서 얘기하는게 좋을거같은데... 여기 들어가기엔 좀... 눈치가 보이네요..."
빌런이 히어로랑 이즈모건물에서 담소를 나눈다니. 함시온이 알면 코웃음치면서 총을 갈길 것 같다. 무서워.
(에스터-미야)
"!"
에스터는 자신을 향한 열렬한 반응에 흠칫 당황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 그녀는 방어력이 약하다. 어? 어? 하면서 얼굴을 조금 붉힌다. 총으로 코가 깨지거나 볼이 찢겨나가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적극적인 애정공세에는 한없이 약한 것이다.
"보, 보답... 그그그런걸 바라고 한 일은. 히어로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삐질삐질거린다. 칭찬에 약하다. 별로 칭찬을 바라며 자라오질 못해서 그런지, 그냥 천성인지는 모른다.
"바, 밤비구나... 예쁜 이름이네..."
으아! 이런 칭찬 기분나쁜가! 으아! 어떡하지! 에스터는 고뇌한다! 밤비는 쉴새없는 칭찬공세로 에스터를 물렁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빠밤!
"어...그, 그럼, 카페라도 갈까."
춥다는 말에 카페를 권유해본다. 아무리그래도 집에 들여다보내기는 좀 그렇지. 지금 정보도 모으는 중인데, 어쨌든 빌런출신을 집에 들이는 게 되니까. 이렇게까지 열렬히 자신을 환영해주는데 너무 매정한 태도인가...하고 약간 찌릿찌릿하는 마음을 꾹 눌러본다. ...미안해. 속으로 되뇌인다.
(미야-사랑해에스터너무좋아)
어, 당황한다. 귀여워! 사진으로 찍고싶지만 그럼 실례니까 내 기억 속에 잔뜩 저장해두자. 히어로라서 한 일이라니, 이렇게까지 본투비 히어로인 사람이 흔하진않지. 멋있다! 멋있다 에스터!
"정말요? 그런 칭찬 처음 들어요! 기뻐, 에스터가 내 이름 예쁘다고 해줬어!"
이건 자랑해야 한다. 진짜로 자랑할 일이다. 뒷사람도 광대가 승천하는 정도의 칭찬이다!! 행복해!!
"에스터랑 카페요...? 헉, 어떡하지. 나 이러다가 행복사로 죽을거야...!"
양손으로 입을 막고 감격한다. 음, 이정도면 미안해하지않아도 될 것 같다. 완전 매우 기쁜지 방방뛰고싶은걸 겨우 참고 있다.
(41스레)
(에스터-세상귀여운미야)
"......"
에스터는 쑥쓰러운지 얼굴을 긁적거린다. 눈을 약간 피한다.
"그, 그럼...이 쪽으로."
사람이 적은 카페에 들어가, 주인장과 접촉이 적은 구석자리를 잡는다. 에스터는 밀크티를 고르고, 당신에게 메뉴판을 건넨다. 자신이 사겠다는 말도 덧붙이고.
"...먼저...이야기를 시작하겠나?"
어쩌다보니 이 빌런 아가씨랑 카페에서 팬미팅(?)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미야-에스터♡♡♡)
"언니야도 제가 빌런인거 알고 계시죠? 그때 감옥에서 만났으니까요."
속으론 좋아 죽고 있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얘기한다. 얘기하고 싶었어도 감옥 안이라는 영 좋지않은 장소인데다 딱히 상관 없지만 파크도 있었으니까 따로 대화할 수 없는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제가 언니를 보고싶었던건 저희 수장님에 대해서 얘기하고싶어서에요. 경비원 오빠야... 진저? 이름이 진저였죠? 진저 오빠야한테 유리한 정보라기엔 뭐하지만 그나마 제가 알고있는걸 말하고 싶었거든요."
정말로 도움이 안될수도 있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거에요. 멋쩍게 웃으며 덧붙인다.
"구제프씨라고 하는 사람, 사진을 봤는데... 이 얼굴이요. 제가 아지트에서 본 사람이랑 완전 똑같아요. 이 사람 쌍둥이도 도플갱어도 아닌 이상 어떻게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구제프의 사진을 핸드폰에 띄워둔다.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제가 봤을 땐 숙취 땜에 피곤해서 죽어버릴거같은 얼굴이었긴 하지만 목소리도 거의 곰돌이 오빠야랑 비슷했거든요. 제가 아는건 여기까지. 도움이 좀 됐나요?"
에스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약간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답변만을 기다리고 있다.
(에스터-미야(귀여움))
"......!?"
에스터는 놀라있었다. 뭔가 보답이라던가, 얘기를 해준다곤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아니, 이걸 빌런이 히어로측에 얘기해줘도 되나!?...에스터는 침착하고, 이것 자체가 빌런의 함정일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 얘기를 나에게 해주면 빌런측은 불리해지는 것 아닌가?"
에스터는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뭔가를 만지작거린 뒤 그렇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손이 시렵기라도 한걸까? 그러고보니 최근, 가디건을 입고 다니며 자주 그랬지. 파크를 만나러 갈 때도. 리제를 만나러 갈 때도. 주머니속 핫팩을 만지고 있었던건가. 뜨끈뜨끈한 핫팩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다. 진지한 얘기 도중에 주물거릴 물건은 아닌데.
"도움이 안 되진 않겠지만...일단은, 정보에 있어서 모두를 설득할만한 신빙성은 중요하니까. ...빌런측에서의 증언이 어떻게 들릴지는 알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서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좀 더 안심이 됐다. 고마워."
(미야-존잘생에스터♡♡♡♡♡♡♡♡♡♡♡)
"불리라, 그럴수도 있죠. 근데 빌런은 나오면 그만이잖아요? 파크나 비스트 오빠야같이 히어로가 된 경우도 있고. 너무 그렇게 의심하진 마요, 그냥 순수한 호의로 알려주는거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파크처럼 히어로나 할까요? 고민하더니 묻는다. 언니야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만약 그런다면 조금 더 내 증언에 신빙성이 생길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제가 쓸모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서 다행이에요."
싱긋 웃어보인다. 좀, 그 배신자같죠? 역시 신뢰하기엔 어려우려나. 그래도 한번쯤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보고싶었어요.
(에스터-미야)
역시 말을 너무 매정하게 했나. 다시 조금 미안해진다. 재판 준비로 정보를 모으느라 예민해져있다보니.
"...너 같은 사람이 히어로측으로 와준다면, 나로서는 환영인데 말이야."
블래스터도 비스트로서 히어로가 되었으니까. 분명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텐데. 그렇게 아쉬운듯이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증거자료로서 필요한 거니까 말이야... 조금의 흠도 보이면 안 되는 상황이고."
구제프를 지지하는 측과 진저를 지지하는 측의 갈등이 팽팽하다. ...구제프를 지지하는 '그 사람'조차도 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그렇지만 그런 걸 드러낼 수는 없겠지.
"...밤비. 너는 어째서 빌런이 되었지?"
조금 신기하다는 듯이 에스터는 묻는다. 이즈모 테러때도 히어로들이 나타나자 싸우지 않고 도망갔다고 하고, 무기도 장난감이었다고 하고, 대체 무슨 계기로 빌런이 된걸까.
(미야-에스터)
"지금은 역시 시기가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니야가 환영해준다니 기뻐요."
조금 씁쓸하게 웃는다.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으면 바꿔 볼까.
"아, 맞다. 이거 좀 봐주실래요? 곰돌이 오빠야한테 온 문자인데."
뭔가 떠올린건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문자 하나를 보여준다. 빌런의 새 아지트인 카지노의 위치가 적혀있다.
"치기어린 꼬마의 호기심일 뿐이에요.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해서 들어가 본건데... 역시 안맞네요. 응, 이런건 나랑 안맞아."
(에스터-미야)
"역시 지금은 안 되겠지..."
유감스럽지만, 저 쪽에도 사정이 있을테니까. 밤비 본인을 위해서라도, 히어로를 위해서라도 이 쪽으로 넘어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꼭 히어로측이 아니더라도, 민간인으로서라도 괜찮으니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라."
뭔가 있었던 걸까? 그걸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닌 자신이 묻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고민해본다.
"......"
카지노의 주소. 저 곳을 소유하고 있는게 누구인지를 조사하면...뭔가 될지도 모르겠다.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까지 알려줬는데,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걸까.
"...빌런 진영에 있으면, 네가 직접 중범죄에 관계하지 않아도 낙인이 찍히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현 즉살명령 하며...여러가지로 위험한 일들도 많으니까."
결국 자신은 이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세계와 충돌하는 것과도 같다. 자신은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길을 추구할테지만, 그것이 옳든 아니건 누군가가 자라오며 만들어온 세계를 부정하게 된다. ...그게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정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자면, 즉살명령도 그런 것이겠지. 다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이왕이면, 네가 더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좋겠군. 굳이 이즈모같은 위험한 곳이 아니더라도, 민간인으로서 새 삶을 산다던가...같은."
물리적으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할 수 있으나, 상대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바꾸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에스터는 이런식으로 자신의 약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그랬었고.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웠다."
이 참에 미움받는 연습을 해두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몇 번이나 있을 일이니까.
(미야-에스터)
"역시 그렇겠죠? 어차피 이미 제 정보같은거 이즈모에 다 털렸을테고...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런가. 솔직히 말하자면, 전 반쯤 빌런진형에서 손 땠어요."
그 사람들한테 정나미가 떨어진게 아니라, 자신이 왜 빌런을 하고있는가에 대한 기본적 의구심이었다. 자신이 만난 빌런들 중 완전 매우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미워하기엔 너무 정을 잘주는 성격이었다.
"내 호기심만으로 사람을 멋대로 죽이는 곳에 소속되어있는게 옳은지 고민이 되더라구요. 언니야 말마따나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고 말이에요."
한숨을 내쉰다. 걱정해주는건가요, 나를? 오늘을 기념일로 정하는게 좋겠네요.
"들어줘서 나야 고맙죠. 그럼 언니야, 제 부탁하나만 들어줄래요? 어려운거 아니고, 정보제공의 보답으로 치는걸로. 어때요?"
연락처 교환하고싶은데.
(에스터-미야)
"부탁?"
어떤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연락처라면 알려줄 수 있어. 그렇게 비싼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여차하면 나중에 위험에 처했을때 도와줄 수도 있고. 밤비의 경우 전투능력은 거의 없어보이니까. 에스터는 당신의 핸드폰을 조심조심 눌러,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준다.
(미야-에스터)
"이거 꿈 아니죠 그죠??"
에스터가 핸드폰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 뺨을 슬쩍 꼬집는다. 꿈이 아니네, 현실이야.
"우와아... 고마워요 언니야... 제 번호도 드릴게요!"
자신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이름을 ♡에스터 언니야♡ 라고 저장해 놓는다. 그리곤 에스터의 번호로 전화해 자신의 반호가 뜨게한다.
"에헤헤, 에스터 언니야랑 연락처 교환했다~"
(에스터-미야)
에스터는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짓는다. 받은 핸드폰번호는 '밤비'라는 이름으로 등록해둔다.
"그럼, 일이 있으면 연락하도록."
다음에 볼 때는 빌런으로서 만나지 않게 되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 쪽 일에서 손 떼고, 평범하게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 블래스터,에스터,엘리 3인일상
- (41스레)
(블래스터와는 두 번째 일상.)
(블래스터)
"저거 하나. 아니, 한 통."
도저히 참지 못해서, 결국 입에 사탕을 물고 까딱거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라이더슈트를 입은채 바이크에 기대있는 사람을 빌런으로 볼까, 히어로로 볼까. 정답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비를 걸면 땅에 머리를 심어주면 되는 일이다. 슬슬 움직일까. 약속시간에 늦겠군.
꽤 시간이 지났다. 약속시간까지 5분전. 한 번도 늦지않는 하늘빛이라면 이 트랙에 3분안에 도착할 것이다. 이곳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ISMO안의 바이크트랙. 덕분에 전세낸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저 막대사탕이 담긴 통을 어찌할지 고민이다. 들고타기에는, 모양새가 빠진다.
(에스터-블래스터(비스트))
당신의 예상대로 에스터는 바이크 트랙에 늦지 않고 도착했다. 오히려 '10분전에 도착하지 못하다니, 너무 늦게 왔나' 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늦어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인사대신 건넨다. 평소의 셔츠/양복바지 차림인 것은 비슷했으나, 남색 자켓을 와이셔츠 겉에 걸친 채, 목에는 붉은 머플러를 짧게 두르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진 것이다. 콧잔등과 볼에는 아직 찢어진 듯한 상처가 남아있다.
"최근 상태는 괜찮나? ...약의 분석 결과로, 에릭과 함께 걱정을 많이 했다."
에릭에게 비스트는 완전히 생판 남인데도 에스터의 소중한 지인이라니까 쩔쩔매며 걱정해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하며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이모티콘같은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더 걱정이 깊어야 할 에스터쪽에서 역으로 진정하라며 에릭을 가라앉혀 줄 정도로. 아무래도 약을 연구하는 사람이 느끼는 위험도는 비전문가가 느끼는 위험도하고는 다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당신의 사탕을 발견하나, 별 말은 없는 것 같다. 담배였으면 잔소리를 했겠지만, 막대사탕정도야 뭐 괜찮겠지. 이 기회에 담배도 완전히 끊을 수 있으면 더 좋을텐데.
(블래스터-에스터)
"늦지 않았..."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두르지않은 빨간 머플러. 그리고 가장 거슬리는 콧잔등쪽의 상처. 갑자기 열이 올랐다. 이유는, 내 스스로 변명하자면... 모르겠다. 이유를.
"콧잔등의 상처. 어떤 개자식이냐."
아마도 인상을 썼을것이다. 이빨로 사탕을 씹어버렸다. 아그작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난 사탕은 까글까글했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에스? 아니면 빌런? 말해라."
가서 죽여줄테니까.
(에스터-블래스터(비스트))
"자신을 리퍼라고 칭한 쾌락살인범. 그림자 능력을 썼어."
이름을 듣긴 했지만 굳이 그에게 가르쳐줄 필요까지는 없었나. ...유혈사태를 놀이취급하는 광기어린 살인마니까 빨리 제압되어야 하는건 사실이지만. 고작 얼굴의 상처정도로 비스트가 또 사람을 죽이게 하고 싶진 않은데.
"평범한 빌런이지. 진정해."
분노가 차오르는 듯한 당신을 진정시킨다.
"히어로로서 싸우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고, 딱히 심한 상처도 아니야."
애초에 이 쪽에선 그 쪽에 치명상을 입혔다. 굳이 분노해야 한다면 그 쪽에서 진작에 자신을 죽이러 왔어야겠지. 에스터는 그림자로 붕대를 만들어 감았는데도 피가 뚝뚝 떨어졌었던 모습을 기억한다. 얼굴의 경상정도는 딱히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 위험인물을 놓쳤다는 것은 유감이었지만.
(블래스터-에스터)
"리퍼."
기억해두지. 만약 그놈을 찾는다면, 곱게 물어뜯지는 않을테니까. 가장 고통스럽게... 찢어주지.
"알겠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 다음을 말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지나친 참견이라는 생각과 이정도는 동료로써 말할수 있는것 아닌가? 라는 두 가지 생각이 충돌 했다. 가벼운 한숨으로 정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사탕을 까서 입에 물고 바이크에 기댔다.
"어울리는군. 옷들."
시답잖은 이야기야. 시답잖은. 나답지 않아. 지난번 이야기를 들어준 보답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에스터)
"...고마워."
아무리 오래된 지인이라곤 해도 칭찬을 받으면 부끄러워졌다. 시선을 피한다. ...갑작스레 왜 답지않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낯뜨겁게. 휘휘.
"담배 대신 사탕을 무는 건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해."
그러므로 말을 돌린다. 건강을 위해서 말이야. 사탕도 많이 먹으면 안 좋지만, 담배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애초에 담배는 주변인을 위해서도 끊는게 좋고.
"그래. 그러고보니 몸 상태는 괜찮은가?"
약과 담배의 분석결과탓에 묻는 말이었다. 건강을 신경쓰는 에스터라면 당신이 꽤나 걱정스러웠겠지. 더구나 당신은 소중한 지인이기도 하니까.
(블래스터-에스터)
"끊지 않으면, 네가 계속 잔소리 할것이 뻔하니까."
그리고 그 담배 이후, 모든 담배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망할 의사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아이비의 일족 중 하나일테지. 찢어죽일.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그녀의 대한 기억들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으니."
다만 문제는 그 기억의 복구가 랜덤이라는 점과 복수에 관한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수를 막연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기억의 덧칠을, 어서빨리 치워버리고 싶지만.
"그 과학자에게도... 꽤 쓸모있다고 전해. .... 수고했다."
역시, 나와는 안어울리는 말이다.
(에스터-블래스터)
"그렇지."
에스터는 피식 미소짓는다. 늘 들으니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자신이 말해온 것들이 전혀 소용없는 것은 아니었단 거니까.
"...다행이네. "
라디언트의 얘기를 들으니 문득 쓸쓸해진다. 비록 그녀의 일들이 당신을 괴롭힌다고 해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기억들이다. 블래스터를 그렇게 움직이게 한 것은,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그녀였으니까.
"과학자라, 에릭이 들으면 좋아하겠는걸. 알았어. "
늘 천재 사이언티스트! 를 뻔뻔하게 입에 달고 사는 에릭이지만 실상 경력은 신입 연구원이니까. 뭐, 능력있다는 건 사실이다. 이번 일은, 연구소의 도움도 꽤 컸지만.
"생존신고는 끝인가. 어딘가 갈 데라도 있어?"
(블래스터-에스터)
"시간있나."
그러고보니, 엘리를 안 본지 꽤 시간이 지났다. 리모델링도 슬슬 끝났을테니, 차 한잔 하러가는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테고.
"커피 한 잔 하러갈 생각있나.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좋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하나보다는 둘이 더 좋을테니까. 그리고... 엘리에게 할 이야기도 있고.
(여기까지 41스레)
(42스레)
(에스터-블래스터)
"부담스러울 게 어딨겠어. 환영이다."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운다. 다만 에스터의 경우 커피가 아닌 밀크티나 그린티...아니면 홍차를 마시게 되겠지만. 홍차에까지 입맛을 넓힌 계기를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카페까지 어떤 수단으로 갈 생각이지? 오토바이가 있는 걸 보니 도보는 아닐 듯 한데. 설마 이것에 두 장신의 덩치가 부둥켜안고 카페에 가는 것인가? ...에스터는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진저 그레이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잘못된 추측도 아닐지 모른다. 아마 위험성이나 교통법을 이유로 거절할 것 같지만.
(블래스터-에스터)
"원한다면."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하늘빛을 뒤에 태우고 간다? 꽤 재밌는 경험이겠군. 물론 그녀의 표정과 얼굴에는... 날 죽이려 들지모를 일이지. 그리고 엘리의 표정은.... 걸어가자. 꽤 가깝기도하고.
"걸어가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아. 개업 선물정도는 들고 가야하나. 뭐가 좋을까. 같은 여자에게 물어보는게 나을라나. 아는 사람은... 하나같이...!
"되는일이 없군."
망할년에 하늘빛, 여우가면, 최근 안보이는 흑발, 붕대 꼬맹이, 자주색 꼬맹이, 전기녀, 풍선. 그리고... 누가있더라. 머리아프다.
(에스터-블래스터)
"그럴리가."
에스터는 안도한다. 정말로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면 태클 걸 거리가 열개도 넘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는 그 카페로 가는건가. "
에릭이 뭔진 몰라도 그 카페 다녀와서 머리를 박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천장......"이라던가, "책......"이라던가, "부끄...러..."...같은 알 수 없는 얘기를 했던가. 뭐, 바로 쌩쌩해졌지만.
"...선물이라도 사가야 하나? ...꽃...같은 거?"
유감스럽게도 선물 센스라면 이쪽도 딱히 없었다. 뭐, 나름 모범답안이긴 하지만.
(블래스터-에스터)
"우린 그런쪽으로는, 전혀 지식이 없으니까."
라이티는 뭘 주어도 좋아했다. 연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리는 여동생같은 아이였다. 겉으로는 좋아해도 속으로는 시무룩할 그런 아이. 그렇다면, 최대한 좋은 선물을 골라야한다.
"꽃은 차선책. 다른 선물은..."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뭐가있지. 어렵다.
"향수? 아니면... 악세사리?"
참 어려운 문제다.
(에스터-블래스터)
"...향수나 악세사리는, 너무 연인에게 주는 것 같지 않나?"
...아닌가? 당신도 에스터도 이 쪽으로 지식이 없긴 마찬가지다. 에스터는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런건 자신보다 에릭이 전문...이라고 하려다가, 초면인 사람에게의 사과선물로 꽃다발같은걸 생각해내는 센스를 생각하고 입을 다문다. 에릭의 상식수준은 감 잡기가 어렵다. 어떨때 보면 정말 똑똑한 것 같다가도, 어떨 때 보면 심하게 부족한 것 같고.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걸지도. 그러다가 ,문득 뭔가 괜찮은 생각이 났는지 당신을 쳐다본다
"방향제같은건 어떨까?"
아무래도 카페를 리모델링 했으니까. 새 방향제같은걸 건내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괜찮지 않을까. 에릭이 여기 있었다면 '에스터씨 치고는 괜찮은 생각이네요!'같은 소리를 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블래스터-에스터)
"그거 꽤 괜찮군. 꽃과 방향제. 둘 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ISMO의 밖을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가는 길목에 꽃집이 하나 있었다. 여러가지 꽃들과 향의 조합. 골라보자.
"금매화와 코스모스를 섞어서. 크렌베리꽃으로 추가. 선물용이니 저 물병도."
분홍색의 심플한 도자기 물병. 무난하게 어울리는 포장을 받아들고, 하나 더 주문했다.
"호접란과 라넌큘러스는 꽃다발로."
완성된 꽃다발. 툭하고 하늘빛에게 쥐어주었다.
"선물이다. 답례라고 생각해도 좋다."
(꽃을든에스터-블래스터)
"......?"
왜 이걸 나에게? 라는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받아든다. ...역시 아직 기억이 덜 돌아온 것 아닐까? 같은 의심을 입 밖에 내면 역시 실례겠지. 상대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걷어차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다.
"...고마워."
꽃을 받고 낭만적이라며 해맑게 기뻐한다거나 수줍게 좋아하는...그런 귀여운 면 같은게 없는 점이 아쉽군. 에스터는 담담하게 꽃을 받아든다. 대신 시원스레 웃어보인다. 흉하게 상처가 나있는 것 빼면 괜찮은 얼굴이었다.
"이 쪽도 나중에 답례를 생각해둬야겠군."
어디, 비스트를 향한 선물은 뭐가 좋을까. 생각하며 걸어간다.
(블래스터-에스터)
"뭐, 상관없다."
저멀리 보이는 엘리의 카페. 방향제는... 나중에 개인적으로 사오는것으로 하자.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는것 같은 날씨니까. 카페의 북적이는 사람들, 그 사이로 엘리는 보이지 않았다.
"흐음."
역시 아르바이트 생에게 넘겨주고 가야하는건가 고민이된다.
(에스터-블래스터,엘리)
"곧 비가 올 것 같네."
이 카페는 항상 인기로군. 확실히 내부가 넓어진 느낌이다. 천장도 높아졌고... ...천장?
"우선 자리를 잡을까."
사람이 많긴 해도, 꽤 크게 증축된 것 같으니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비교적 사람들이 적은 자리에 앉는다.
(엘리-블래스터,에스터)
밖에서의 즐거운 회하를 마치고 가계로 돌아왔다. 직원 한명이 꾸벅하고 인사하자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변한 후 슥 둘러보다, 익숙한 얼굴과 히어로 뉴스에서 잠깐 본 것 같은 인물이 보입니다.
꽤 오랜만에 들리신 것 같기에 베시시-하고 미소가 세어나옵니다. 그러고 뚜벅 뚜벅 걸어 두 분에게 말을 겁니다.
"어서오셨어요? 블래스터 씨, 그리고 아마..히어로 머릿말님?"
에스터라는 이름은 아직 모르는 그녀였다. 밝은 미소로 둘을 향해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는 그녀였다.
(블래스터-에스터 엘리)
"리모델링 축하한다."
꽃병을 건네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 스쳐가며 했던 말이었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아한다'를 방금 생각해내었다. 오랫만에 만났으니, 이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뒤에 서 있는 하늘빛도 소개할까 하다가 둘이 아는 얼굴인것 같아 그만두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오랫만이다. 엘리."
(에스터-블래스터,엘리)
"?"
에스터는 당황한다. ? 이거 그때 본 빌런 아냐? 엥? 생각해보니 이즈모에서 들은 바로는, 자신을 리제라고 칭할 때와 엘리라고 칭할 때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고 한 것 같다. 그러고보니 눈 색이 다르긴 한데. ...우선 공식적으론 히어로 소속이기도 하고, 여기서 쓸데없는 얘길 해봤자 일만 꼬일 것 같다.
"...안녕."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거기다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 못 하는 눈치다. 이름을 말해줘야하나? 이름은, 에스터. 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조금 당황한 채 그대로 앉아있다. ? ? ?
(엘리-에스터,블래스터)
블래스터가 쓰다듬자 ??하고 순간 당황해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둡니다. 좋아하는 이가 자신에게 쓰다듬어 주면 뭐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이어지는 블래스터의 리모델링 축하에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감사해요 블래스터 씨, 그리고 오랜만이네요."
히어로로서 바쁜 삶을 보내는 블래스터 씨는 나름 인맥 중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엣헴.
이어지는 에스터의 이야기에 누군가 비유하길 태양과 같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합니다.
"네, 안녕하신가요 에스터 씨. 혹시 불편하신 곳 있나요?"
뭔가 어색해하자 가계에 어색한건가?하고 착각합니다.
자신에게 다른 인격이 있따는 것은 모르니 말이죠.
(블래스터-엘리,에스터)
"서로 일면식은 있는건가. 그럼 다행이군."
메뉴판을보니, 깔끔하게 적힌 메뉴들이 유혹하듯 눈에 박힌다.
"나는, 아메리카노. 시럽 두번. 너는?"
하늘빛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표정. 엘리가 불편한것인가? 아니면 이 상황이 불편한가. 곤란하다.
"엘리. 할 이야기가 있다."
(에스터-엘리,블래스터)
"아니...불편하지 않아."
이런. 이대로라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리겠어. 자신에게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는 법이다. 괜히 자신이 관계를 망쳐버리면 안 되겠지. 그러니까 변명을 하자. 에스터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원래부터 인상이 이렇게 생겼을 뿐이다. 오해를 줘서 미안하군."
...사실,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 말이야. 억지로 표정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써봤자 더 험악한 얼굴이 될 뿐이고.
"나는 그린티로."
카페에서는 왜 녹차라고 안 적고 그린티라고 적어두는 걸까? 같은 작은 의문을 마음속으로 표해본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엘리-블래스터,에스터)
"네, 아메리카노하고 그린티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니 그건 다행이네요."
밝게 미소지으며 이야기하고는 메뉴를 준비하려 떠날까하는 직전에 블래스터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할 이야기요?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일면식이 있다는 이야기에는 더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에스터씨는 처음 보는데요..?
"네, 무엇인가요 블래스터씨?"
궁금해하며, 블래스터에게 물어봅니다
(블래스터-에스터,엘리)
"다녀와라."
묵묵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이 방법이 옳은가. 그녀에게 옳은 선택인가. 그 날 부터 이어져온 엘리의 일상을 부숴버리는게 아닐까. 비일상을 걷는것은 나로 충분한데.
"뭔가 숨기는게 있나."
그런 얼굴과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이제 그녀도 알게되겠지. 지금 이것을 말하려는 중요한 장소에 그녀를 동석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신용할만하고, 불살주의기 때문에.
"알게되겠지만, 엘리는 이중인격이다. 그것을 감안해줬으면 한다."
눈을 감고 엘리를 기다렸다.
(에스터-블래스터,엘리)
"...아. 그랬군."
에스터는 그런 대답을 한다.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 조금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뀐다. 어쩐지.
"전에 붉은 눈이었던 그녀를 본 적 있었어. 지금과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약간 놀랐다."
그러고보니, 이중인격이라고 하면 나중에 치료되면 두 인격이 섞이는 걸까.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에스터는 전에 자신을 향해 빈정거리며 뻔뻔하게 나 안 죽였소- 하고 가버린 리제와 지금의 예의바른 카페 주인 엘리를 겹쳐보며 위화감을 느낀다.
(43스레)
(엘리-블래스터,에스터)
엘리는 충격받은듯 눈이 흔들립니다. 경계가 깨집니다.
기억이 흘러등어오가 시작합니다. 마리를 부여잡는 엘리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엘리 배드엔딩 루트로 이어짐.)
- 에스터 - 형수
- (45스레)
(에스터 - 형수)
손에서 잃어버린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너무나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 그것이 산산조각나 찢어지기 전까지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두 손으로 찢어버린 것은, 바로 나였지... ...언제나 곁에 있었으니까, 알지 못했다. 다른 그 어느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단 사실을.
...와이셔츠 얘기다.
"......"
이제는 그 양복점의 와이셔츠가 아니고선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안 되겠다. 한 벌, 아니 여러 벌 맞추러 가자. 다른 와이셔츠론 안 된다. 에스터는 일어나, 옷을 챙겨입는다. .
'그 셔츠'가 아닌 아무 셔츠 위에 진회색 스웨터를 입고, 하의로는 청바지. 오늘도 작은 산타의 선물(붉은 목도리)을 목에 두른 채, 에스터는 양복점에 들어섰다.
"...옷을 맞추러 왔다."
(형수 - 에스터)
" 안녕하십니까, Miss. C.님 맞으십니까? "
쥐색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안쪽으로 모십니다. 이윽고 조금 큰 방에 들어섭니다. 그곳에 있던 테이블에 앉으십시오. 하는군요.
방의 상태는 여전히 깨끗하고 조금 사치스럽습니다. 장식들도 그렇고,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물건들이죠. 당신이 앉은 의자만 해도 보석과 금, 그리고 흑단나무같은 비싼 것을 뺀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혹여 기성품이시라면 좌측 문으로 들어가시면 직원이 안내할 겁니다. "
그리고 차와 다과를 내옵니다. 조각케이크도 끼여 있습니다. 전부 일반적인 사람이 먹는 것과는 격 자체가 다르다는 듯한 데코레이션과 향이 있습니다.
" 아티스트가 오기까지 3~4분 정도가 걸릴 예정입니다. 양해의 뜻으로, 차와 다과를 내 왔습니다. Miss. C. 님의 시간을 허비하여 죄송합니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시지요. 만일 직원을 호출하시거든 이 종을 사용하십시오. "
그는 식탁 위의 금 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한 후에 나갑니다.
(에스터 - 고오급양복점주인)
역시 고급! 정말로 고급! 에스터는 흘러나오는 고급의 분위기에 잠시 압도당했다! ...뭐랄까, 고등학교때의 그 세상 모든 것에 어버버 하던 어린 자신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다. ...이왕이면 한 번에 여러 벌 맞추자. 에스터는 쭈그러진 봉제인형같은 얼굴로 다과를 본다.
"......"
또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다. 구제불능이다. 이젠 이건 완전히 상사병이다. 상사병의 상사는 그 상사가 아니긴 하지만 실제로 상사이기도 하지. 상사를 향한 상사병이라니. 이 무슨. ...에스터는 씁쓸한 마음으로,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자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이 과자 사드려야지. ...근데 나랑 만나주실까.
에스터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분위기에 조금 적응돼서 다시 침착한 얼굴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 45스레)
(46스레)
(형수 - 에스터)
똑똑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립니다.
" 아티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
그리고 양해를 부탁하는 말소리, 당신의 허락과 함께 직원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당신을 안내합니다. 여러 유명인들에게 맞춰준 양복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복도를 지나, 좀 큰 방에 들어왔습니다.
의사들이 쓸 법한 책상에 "H. Y. gailov"라고 적힌 명판이 보이는군요. 그곳에 앉은 그는 당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 인사하고 다시 앉습니다. 이제 보니 이 방도 꽤 사치스럽습니다. 책장에다가는 여신이 조각되어 있고, 이번에 앉을 의자는 흑단나무 소재에, 보석과 금이 보이는군요.
" 잘 오셨습니다. Miss. C. "
그는 인사하고, 의자에 앉을 것을 종용합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조금 창백해진 피부와 목에 조금 보이는 상처? 가 있겠군요.
" 와이셔츠 하나도 되고, 맞춤 양복 한 세트, 특별 옵선도 괜찮지요. "
그는 돈만 있다면 뭐든지 맞춰 줄 겁니다. 반으로 자르면 증식하는 와이셔츠도 괜찮겠죠.
(에스터 - 형수)
에스터는 주변의 호화스러운 풍경을 모른 체하려 애쓴다. 여기는 옷집이다. 여기는 옷집이다. 나는 옷 사러 온거다. 옷에게 패배하면 안된다. 빌런도 아니고 옷에게 패배하다니, 그런 수치스러운 패배도 없다.
"...와이셔츠, 세벌로."
겨우겨우 말을 뗀다. ...저 상처는,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픈 건가? 하기야 너무 오랜만에 오기도 했지만. (팽태자가 엠페르트가 되는 시간이었다.)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 상대에게 무례가 될 수 있다. 입을 다물자.
"...특별 옵션이라면, 어떤거지?"
(형수 - 에스터)
" 와이셔츠 세 벌입니까. 혹시 신체 수치에 변동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원하지 않으시면 이전의 수치로 하겠습니다. "
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클릭 몇 번을 하면서 대답했다. 들키지 않은 것은 기적. 다음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 이 때에 최대한 이득을 봐야 되는 것이다.
" 특별 옵션... 예전에 설명드리지 않았나 보군요. 기능성입니다. 예를 들어 방탄 기능을 내장한다거나, 특수 소재로 더 가볍다거나, 무선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내장한다거나 하는 기능을 추가하지요. 소정의 요금이 추가되지만, 인기가 많은 서비스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열중인 것이겠지. 그는 서랍을 열어 차트를 찾는다. 묻는다면, " 디지털 정보는 누가 해킹할 수도 있으니까요. 손님도 손님의 정보가 새어나가면 좋지 않겠죠?" 라고 대답했겠지.
" 특히 Miss. C.님은 직업이 직업이시다 보니, 방어형 옵션을 추천드릴 수 있겠죠. 혹시 직업을 거론한 것이 불편하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
찾은 차트를 책상 위에 올리고, 당신을 바라본다
(에스터 - 형수)
"신체 수치... ...확인해보겠다."
몸을 많이 길렀으니까 그 때의 사이즈로 했다가 안 맞을지도 모른다. 어제까지도 입고다니긴 했지만, 오래 입었더니 늘어나서 못 느낀 걸수도 있으니까.
특별 옵션...전에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 다만 꽤 전이다 보니 잊어버렸을 뿐. 아니, 분명 그 때도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겠지. ...이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것은. 아마 그 때는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됐을 때이니 자신도 꽤나 여러가지로 앳된 티가 났을 것이다. 앳된 티라고 할까, 벌러쿵이었겠지. 실은 지금의 성격과 외관 변화는 사람들이 볼 때마다 놀라는 수준이니까. ...근데, 기능중에서 명백히 와이셔츠에 달려있을 게 아닌 것들이 들리는데. 배보다 배꼽이라고 할까, 배의 배꼽크기로 배꼽에 배가 붙어있는 느낌이다.
"...알고 있었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히어로일을 하면서 자신도 꽤나 유명해졌으니까. 다만, 눈 앞의 당신이 빌런이라는 것을 그녀가 눈치챈다면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당신의 자신의 신상을 철저히 보호한 덕분인지 그녀는 당신의 정체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다.
"옵션... 은 패스하겠다."
얼마 전처럼 셔츠로 지혈을 하거나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괜히 너무 이것저것 기능이 붙어있으면 아까울 뿐이다.
(형수 - 에스터)
"신체 수치 측정은 기계가 하는 것과 사람이 직접 하는 게 있습니다. 사실 절차는 기계가 훨씬 더 간단하지요. "
기계는 특수 촬영 하나면 끝. 사람이 하자면, 직원을 불려야 하는데다 만에 하나라도 부적절한 터치가 생기면 처리하기 까다롭다.
" 그러시다면 옵션은 그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
분명 방탄방검이 각각 레벨 2 이었나. 그리고 히어로 분이시니 특별 서비스로 옵션 두개를 넣어줄 생각이다. 그러니까... A와 B 정도면 되려나.
" 알고 있을 수 밖에요. 우리들을 지켜주시는 영웅들인데 모를 수가 없죠. "
모니터를 뒤로 돌린다. 초록창에 "머"만 적어도 "머리말"이 바로 검섹창 아래 보인다. 그 다음엔 다시 스스로에게 돟린다.
" 그리고 가격은 대략 한 벌당 C만원 쯤 될 겁니다. 결제는 어떤 걸로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A
Dice(0,3) value : 0 Dice(0,3) value : 3
합산 0. 외골격 1. 치료 서포트 2. 방탄방검 레벨 3 3. 불연성 4. 파편 방어 5.오토 피부 캐어 6. 재생성 섬유
B
Dice(0,3) value : 0 Dice(0,3) value : 0
합산 0. 외골격 1. 치료 서포트 2. 방탄방검 레벨 3 3. 불연성 4. 파편 방어 5.오토 피부 캐어 6. 재생성 섬유
C
dice(50,120) value : 61
(에스터 - 형수)
"그렇다면 기계로. ...그런가."
우리들을 지켜주는 영웅이라. ...내심 감회가 새롭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어느새 이렇게 유명해지기까지 한걸까. 쑥쓰러움을 숨기는 것은 여전히 서툴다.
"결제는 카드로."
꽤나 가격이 있구나. 뭐. 그만큼 좋은 셔츠니까. ...한 벌만 살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나저나 기본추가옵션을 보아하니 다음엔 지혈용으로는 도무지 못 쓸것 같다. 에스터는 아직 서비스의 존재는 모르고 있지만.
"...하, 한벌만으로."
구차하게 말한다. 한 번에 세 벌 시키기엔 너무 비싼 옷이었다. 히어로 월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에스터 - 형수)
" 그러시다면 저기 좌측 벽에, 동그란 문양 보입니까. 그쪽 중간에 서 계시지요. "
그는 손으로 당신의 왼쪽에 있는 벽을 가리켰다. 물론 그 곳에는 그가 말한 대로 약 2m쯤 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도를 본 딴 듯한 문양이 있었다. 물론 그려진 재질은 고풍스러운 금.
그 문양의 정 반대편 벽은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당신의 뒤쪽에 그려진 문양보다 반의 반 정도의 벽이 들어가서, 여러 갈래로 쪼개져 수납되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기계로... 뭐랄까. 끝에 렌즈 같은게 달렸으니 레이져 요격 장치? 레이져 병기? 그런 착각이 들 물건이 불길한 전자음과 함께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 오지 않으신 사이에 설비를 새로 들였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물론 인체에 무해한 설비이지요. "
그것이 전부 나왔는지 철컥 하는 소리가 나왔고, 그는 그러자 마자. 책상 아래에서 전선이 연결된 막대형 스위치를 꺼낸다.
" Miss. C 숨 들이키시고, 숨 내쉬시고. 심호흡으로 4-5번 반복하시면 되겠습니다. "
당신이 심호흡을 하는 동안, 그는 그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자 그 장치의 최말단에서 붉은 빛, 초록 빛, 파란 빛이 느긋하게 한번씩 깜박거리더니 그 설비는 다시 들어갔다.
" 끝났습니다. 간단하지요? "
그리고 그는 다시 의자에 앉을 것을 권유하고는 스위치를 집어 넣는다.
" 카드 결제는 나가 주실때 하시면 되실 것 같습니다. 내일 가지러 오시면 될 것 같고요. 그리고 서비스로 저희가 옵션을 추가했습니다. 뭐 거슬리거나 문제가 될 옵션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는 다시 모니터를 돌린다. 강화 외골격... 불연성... 본래 가격도 표시되어 있다. 외골격은 금액이 숫자 세 개라 조금 적다 싶었는데 자릿수가 억 단위고, 불연성은 자릿수가 만 단위이지만 숫자가 세 개다.
" 그냥 와이셔츠처럼 막 굴리시면 됩니다. 무게는 일반 와이셔츠보다 Ag정도 더 나갑니다. 이 점은 죄송하다고 해야 되겠군요... 아직 경량화 기술이 그렇게 좋지 않은 점을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외골격은 섬유처점 쉽게 접힐 겁니다. 그리고 불연성이지만 통풍도 좋은 편입니다. 일을 할 때에 걸리적거리지는 않겠죠.
그런 연유로, 한꺼번에 사시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서비스 없답니다? "
그리고 그는 모니터를 스스로에게 돌린다.
" 왜 이려냐고 물으신다면, 히어로시니까요? 최대한 편의를 보이는 것이 예의이지 않겠습니까. "
A
Dice(30,200) value : 194
(에스터-형수)
"......"
에스터는 고뇌하고 있다. 분명 좋은 옷이긴 하지만, 여러 벌 사기엔 조금 비싸다. 이것도 할인가라곤 하지만서도 히어로 월급은 고생에 비하면 그리 좋진 못하다. 구르는거에 비해 복지가 그닥이라서 입원 몇 번 하다 보면 월급이 훅 가버린다... ...외골격이 있으면 덜 다치니까 입원빈도가 줄지 않을까? 최근에 어깨가 날아간 일이 있다보니 더 고뇌된다.
처음 사러 올 때는 더 이상 그 셔츠가 아니면 입고다닐 수 없어...라는 마음이었는데, 셔츠 세벌로 식비제외 한달 월급의 반이 날아가는 광경을 보니 갑자기 지금 입고 있는 싸구려 셔츠가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에스터는 소시민이었다.
...불연성과 외골격이라. 확실히 크게 다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저 추가옵션이라면 절대 찢을 순 없을 것 같군. 앞으론 붕대를 몸에 챙겨다니도록 하자. 결국 에스터는 설득당해서, 세 벌을 계산하기로 마음먹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세벌로. 라고 작게 말한다.
확실히 엄청난 기술이긴 하다. 셔츠에 무슨 짓을 하길래 그런 기능들이 달려오는 거지? 당장 건물 모습이며 검사도구까지 예상도 못한 비쥬얼들이 한가득이다. 검사도중에 내 머리에 초미세한 크기로 된 마이크로칩을 박아넣었다고 해도 음, 가능할 법 하군. 이라고 생각해버릴지 모른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한다."
에스터는 꾸벅 인사한다.
(48스레)
(형수-에스터)
아쉽게도 한 벌인가 싶던 차에 당신이 답했다. 물론 세 벌인 쪽이 훨씬 손해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편했다. 돈은 다시 벌면 되는 것이고, 장비는 다시 사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의미한 호의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손해가 아니다.
" 알겠습니다. 세 벌이시지요? "
그는 키보드를 두들겨 로비에 결제 예정 금액을 전달한다. 뭐, 당연하다시피 수작업으로 만드는, 샷건을 치려 해도 손이 거부할 가격대겠지. 물론 그라면 필요할 때 칠 수 있었다.
" 감사하시긴요, 당연한 겁니다. 다들 당연한지 모르고 있지만, 영웅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우가 필요하니까요. "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 사람들은 하는 일에 비해서 너무 적은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평범한 시민이라면 이런 호의는 당연한 것.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인지는 그도 몰랐다. 빌런으로서 활동하기도 하는 그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여기고 알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그 다음에 그는 부연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외골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등 쪽의 부품들이 척수를 타고 내려가는 신호를 감지하면 외골격이 경화되며, 신경신호를 토대로 움직인다는 원리를 설명했고,
연이어 USB-c type을 사용해 충전하며, 완충시 최소 12시간 정도 기동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외의 정보는 옷을 수령할 때, 첨부된 사용 설명서를 참조하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은 이 외의 용건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 사실 취급품목은 넓습니다. 스타킹이나 우산도 취급하지요. 그리고 이 외에도 수선 및 옵션추가도 가능합니다. 기기불량의 경우에 AS는 3년이지만... 직업 특성을 고려해 6개월을 추가하도록 하지요. "
타닥타닥, 경쾌한 소음이 울린다. 키보드를 친 것이다.
" 사실 이 외에도 편의를 봐 주고 싶습니다만, 죄송하게도 이쪽 상황이 그리 좋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해 드릴 순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어쩔 수 없다. 이 이상은 장기적으로 보더라도 이쪽의 손해.
" 그럼, 이 외에 문의사항이나 용건이 있는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
(에스터 - 형수)
히어로에게 걸맞는 대우라. 에스터는 침묵한다. 이즈모에 들어오고서 본 히어로의 실태는 흔히 매체에서 비추어지는 환상과는 많이 달랐다. 더군다나 최근의 이즈모의 방침이나 테이프에서의 내용을 보면... ...우리들은, 체스말같은 존재였나. 하지만 그런 속내를 구태여 드러내진 않는다. 그저 당신의 호의에 조용히 감사를 표할 뿐.
에스터는 옷에 대한 설명에 끄덕인다. 아득한 하이테크놀로지다. 저걸 만들기 위해 외계인을 잡아 고문한것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보며.
...스타킹? 스타킹에도 이런 기술을 동원할 수 있는건가!? 상상도 안 된다. 내가 아는 스타킹은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빵꾸가 나있는 불편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의류이건만. 그렇지만 에스터는 스타킹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레깅스 파였다. 스타킹을 신을 일이 있다면 레깅스 밑에 받쳐입는 용도겠지.
"...딱히."
별다른 문의사항이나 용건은 묻지 않는다.
(49스레)
(형수 - 에스터)
" 그렇다면... 내일 본점에 오셔서 수령하시면 됩니다. 수령할 때의 본인인증은 홍체인식, DNA, 지문입니다. "
물론 그것들은 이전에 얻은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 다음, 그는 당신과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고, 사적인 이야기를 할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직원을 호출했다.
-곧 손님이 나갈 테니 준비하라-라는 신호도 같이 보냈고.
" 이제 시간을 더 이상 뺐진 않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Miss, C. "그는 당신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중용했다. 분명히 문 바깥에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직원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이곳은 안전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는 당신께 허리숙여 인사했다. 당신이 나갈 때까지.
그 다음에, 나간 당신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키보드를 몇번 탁탁 두들겨 아까 특수촬영으로 얻어낸 정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걸리적거리지 않게 관절의 가동범위와 옷이 스침에 따른 피부자극을 고려하고, 심지어 총상, 타박상, 자상까지 고려하여 방탄재와 방검재, 외골격의 구조, 베터리의 위치 등을 결정해야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 옵션에 따라 전부 설계가 조금씩, 때때로는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였기에, ’가일로프는 이곳 저곳에 이러한 처치를 하면 효과적이다’라는 소리는 그에게 있어 모욕적인 언사였다.
하지만, 그런 소리가 그의 언전에 내뱉어졌더라도, 그는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에스터-형수)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지막으로 허리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계산을 마친 뒤 가게를 나선다. 정말이지,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꽤나 날씨가 쌀쌀해졌다. 에스터는 입김을 내보내며 목도리를 만지작거린다. 마음이 얼어붙지 않도록 해야지. 앞으로는 장갑을 하고 다닐까. 조금 시린 손을 쥐었다 편다.
- 에스터 - 수현
- (49스레)
(에스터)
...좋은 의사를 소개시켜준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랄까, RPG게임에서 적을 해치웠더니 보상을 획득한 것 같은 느낌으로 빌런들에게 의사의 연락처를 받았다. '무지 좋으신 분이거든! 우리가 쐈다는 얘기 하면 싸게 해주실거야!' 에스터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히어로 복지 환경은 그닥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소개받는게 나쁠 건 없는데. 빌런들이 소개해준 의사라 다소 찜찜하다.
에스터는 호러영화에 나올 법한 매드 닥터를 무심코 떠올린다. 돈은 필요없으니, 해부하게 해줘! ...좀 많이 다쳐서 판단력이 흐려진건지, 얼마전에 에릭과 본 영화가 귀여운 포스터랑 달리 호러하고 그로테스크했던 게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이상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악. 또 떠올랐다. 후자인가보다. 아니. 애초에, 에릭도 약 전공이니까 일단은 의료계통이라고. 좋으신 분... 좋으신 분 맞겠지?
에스터는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닥터 드림?"
그들이 알려주었던 이명을 불러본다.
"...김영세와 시료쿠라는 녀석들이 번호를 알려줬다만, 치료 건으로 연락 가능한가?"
(수현-에스터)
수현은 전화 하나를 받고, 그래, 솔직히 말하면 어이가 없었다. 그 증거로 전화를 끊고 나서 멍하니 침대에 앉아 그들의 말을 되짚어보아야 했으니까. 어쩌다보니 히어로 하나에게 의사를 소개시켜주기로 했으니 잘 부탁하다는 요지인 건 알겠는데, 이렇게 신분을 노출당하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우선이다. 수현이 눈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약을 모아둔 방을 정리했다. 빌런 아지트에서 치료해줄 순 없는 노릇이니 부득이하게 집으로 불러야겠지.
짐을 모두 옮기고 허리를 펴던 수현은 가디건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분명 소개해줬다던 히어로겠지. 수현은 화면을 가볍게 밀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제게는 여전히 어색한 호칭이지만) 닥터드림, 하고 불러오는 것을 보니 영세와 시료쿠가 번호뿐만 아니라 이명까지 알려준 듯 했다. 워낙 허스키한 목소리여서 성별을 짐작하긴 어려웠지만, 사람을 만나는데에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수현은 상대의 질문에 조용히 대답했다.
"네. 지금 괜찮아요. 혹시…죄송하지만, 상처를 입으셔서 제가 필요하신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히어로가 저를 찾아올 이유는 없으니. 히어로 측에는 치유 능력자가 없는걸까. 불쑥 의문이 들었다.
(에스터-수현)
"...그렇게 되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상상하던 것과 달리 차분하고 예의바른 어조였다. 그러고보니 이 쪽도 히어로를 치료해달라니 당황스럽긴 하겠군. 만나자마자 갑자기 너는 우리 빌런의 원수! 죽어라! ...같은 대치상황이 되진 않겠지. 시덥잖은 생각이었다.
"그 두 사람과 싸우게 되었다만, 처음부터 그 쪽도 이 쪽도 죽일 생각은 없기도 했고, 어찌저찌 이 쪽의 부상이 크다 보니 그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 녀석들 왠진몰라도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해뒀을것 같으니 우선 친절하게 설명해본다. 그러고보니 안경 녀석도 꽤나 부상을 입었는데. ...하긴, 생포당했으니 치료받으러 갈 자유는 없겠군. 빌런의 목숨 취급에 동정을 표해본다. 자업자득이지만. 두 사람이 자신에게 생포당했다던가, 당신을 소개시켜준 것도 이즈모에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한 뇌물(?)인거라던가, ...이런 이야기까진 할 필요 없겠지.
"지금 당장 약속을 잡아도 괜찮겠나?"
(수현-에스터)
"……."
수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그렇군요, 답했지만 당황한 티는 분명 났으리라. 대체 빌런들이 히어로와 어떤 인연이기에 의사를 소개시켜주나 했더니 상처를 입힌 것이 본인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은 있었지만, 수현은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저찌'의 자세한 상황을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다만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도를 표하기로 했다.
"네, 괜찮아요. 야외에서 치료를 할 수는 없으니…괜찮으시다면, 제 집으로 와주시겠어요? 위치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모드를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문자로 제 집 주소를 전화하고 있는 상대에개 보냈다. 무슨 상처인지는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추운 겨울에 밖에서 약속을 잡아 상처를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치료를 한다지만… 몸 담고 있는 진영이 빌런인 이상 히어로에게 살고 있는 집을 공개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집에는 중요한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곧 아지트로 돌아갈 생각이기도 했다.
생각은 저편으로 밀어둔 수현은 다시 통화모드를 일반으로 바꾸고, 방의 난방을 켜 두었다. 능력이 있으니 거창한 준비는 필요없겠지만, 적어도 이정도 예의는 지켜야겠지.
(에스터-수현)
집으로 와달라는 말에 가벼이 긍정을 표한다. 그리고는 보내준 집 주소로 걷기 시작한다. 삐걱대는 어깨에 작게 신음한다.
문을 열어준다면 당신의 눈에 가장 먼저 띌 것은 어깨깁스. ...아니, 어깨깁스를 한 191센치의 덩치? 탁한 하늘빛 장발을 뒤로 대충 묶어넘긴, 날카로운 눈매의 삼백안의 환자는 어쩌면 당신에게 조금 위압감을 줄지도 모르겠다. 통증 탓인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어깨가 부서졌다."
그리고 증상을 물으면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겠지.
부서졌다고 할까, 깁스 안의 상태는 거의 '날아갔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안 그래도 부상을 입은 어깨로 도박처럼 총질까지 했으니 오죽할까. ...뭐, 그런 돌발행동 덕분에 승리하긴 했지만서도. 한편, 에스터는 아마 예상 이상으로 유순해보이는 당신의 인상에 속으로 의외라는 평을 내리고 있을지도.
아무튼, 별도의 치료능력 없이 재활한다면 상당히 오랜 기간 쉬어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때문에 당신을 소개받은 것이겠지.
(수현-에스터)
주소를 보내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은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주니, 그 곳에 서있는 사람은 역시나 히어로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큰 키를 가진 사람이었고, 눈매는 매섭다고 느낄만큼 날 선 인상의 손님이었지만… 그런 것에 압박을 느끼기 전에, 수현은 상대의 상처입은 어깨에 가장 먼저 시선이 닿았다. 환부가 꽤 커보이는데 어떻게 참았을까. 어깨가 부서졌다 제 상태를 말하는 것조차 덤덤하기 그지없다. 대체 왜 내 주변에는 제 고통에 둔감한 사람들만 모여드는 걸까. 차라리 엄살을 부리는 편이 더 나을텐데. 수현은 속으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능력으로 치료는 가능할테지만, 일단… 상태를 좀 봐도 될까요?"
수현은 손님을 맞기 위해 준비해둔 방으로 상대를 안내했다. 방 안은 온기가 돌아 따스했다. 의자 하나를 끌어다 두고, 환자가 앉도록 했다. 상처를 제대로 살피기 위함이었다. 수현에게는 환자가 빌런인지 히어로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다친 사람일 뿐.
"상처 보여주시고…, 어떻게 하다가 다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어떤 일로 부상을 당했느냐에 따라 상처를 치료하는 범위가 달라진다. 그저 외상만 입은 것 뿐이라면 그 부분에만 손을 대면 되지만, 근육이 다친 경우에는 손이 미처 닿지 못해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만약 총의 반동 등으로 근육이 다쳤다면 그것도 수현은 알아야 반동이 왔을 때 다치는 근육 부위를 짚을 수 있었다.
(에스터-수현)
에스터는 깁스를 푼다.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는 어깨가 흉하게 드러난다. 팔이 안 뜯어진게 용하다.
"공격 반사로 총을 맞았다."
상처 경로에 대한 질문에 그런 담담한 말이 돌아온다.
"한 방은 시료쿠가 그 자신의 이마를 겨눴고, 다른 한 방은 그걸 말리려다가."
에스터는 기본적으로 불살주의의 히어로였다. 빌런이라고 해도 눈 앞에서 죽게 놔둘 순 없었다. 상부의 즉살명령과 충돌하는 방침이라 늘상 징계를 받고 있고, 이즈모에 생포되면 어차피 최후는 예상대로지만ㅡ최소한의 신념이었다. 물론, 이 신념의 형성에 가장 큰 원인을 준 것은 트라우마였지만.
"총구를 겨눈 손을 노려 쐈으나,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두 방 다 돌아왔다."
아무리 정통으로 맞았다 해도 어깨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그 때문이겠지. 에스터의 능력은 총기류 보정. 총기 치트...라고도 불리는 종류. 어떤 싸구려 총이라도 에스터가 잡으면 고화력 무반동의 무적의 무기가 된다. 무한 탄창은 덤. 그런 강화된 사격을 되돌려받았으니 이렇게 다칠 수밖에.
"그 상태인 왼팔로 무리해서 두 번정도 사격을 했고, 이후 치료할 틈 없이 바로 전투를 지속했다. ...참고로, 자신의 능력은 총을 통한 공격을 유리하게 만든다. 반동 피해는 받지 않았다."
그 대신이랄지, 공격반사도 강력하게 얻어맞았지만. 에스터는 그렇게 덧붙인다.
(50스레)
(수현-에스터)
붕대가 감긴 부위가 꽤나 크다고는 생각했는데, 총기류로 인해 깊게 패인 상처였다. 상처가 커서 힘들었을텐데도 다행히 지혈은 잘 했는지 상처가 아물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들으며, 담담한 시선으로 상처를 살피고는 있지만, 꽤나 참혹한 상처다. 치료하는 데에는, 물론 수술에 비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병원에 갔다면 몇 개월은 팔을 사용하지 못 했겠지. 수현은 새삼, 빌런에게 불리한 일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공격반사라고? 제가 알기로는 시료쿠의 능력 중 그런 것은 없었다. 새로 자각하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둘의 능력으로 히어로를 상대하기는 힘들었을테니…. 그럼 지금 이 눈 앞의 히어로는 시료쿠의 공격 반사로 인해서 어깨의 상처를 입었다는 이야기다. 서로 죽이려 들었다면 더 큰 상처를 입었겠지. 수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나저나 총기류 보정은 문득 지나가다 들어본 적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의 주인이 이 무뚝뚝한 히어로였구나.
"반동 피해가 없어 다행이예요. 만약 총 반동도 입었다면 근육까지 치료해야 하니까… 혹시 다른 상처 입으신 곳은 없으세요?"
이 정도라면 치료 후 밀려드는 잠을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방 구석에 놓인 작은 철제 탁상시계를 흘끗 바라보며 시간을 계산했다. 빌런들 앞에서야 치료하다 풀썩 잠들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히어로 앞에서는 다르니 주의해야 했다.
"괜찮으시다면, 상처에 손을 좀 댈게요. 접촉을 해야 이루어지는 능력이라서…."
아무리 어쩔 수 없다지만, 수현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더 이상 지체되면 몸에 무리가 갈 테니 빠르게 치료를 하는게 좋겠지.
(에스터-수현)
"다른 상처는 없다."
상처에 손을 댄다는 말에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것을 신경쓰지는 않았다. 치료를 위해 당연한 일이니까.
"...그 쪽은, 빌런을 돕고 있는 것인가?"
나지막히 묻는다. 빌런이라고 해도, 현재로선 적대하거나 제압할 생각은 없다. 방관이라 비난한대도 어쩔 수 없으나, 우선 둘은 '의사'를 소개시켜준다고 하였으니 빌런임을 확신할 근거는 못 된다. 환자를 돕는건 의료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상처를 치료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악행이라고 볼 순 없다. 단지, '빌런으로서의' 행동이 눈에 띈다면 제압하겠지만.
"이 쪽은, 에스터 힐데가르트다. 히어로 머리말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먼저 개인정보가 두 찌질이들에 의해 밝혀졌으니 이 쪽도 이름을 대는게 예의겠지. 당신이 에릭과 친분이 있다면, 에스터에 대해 에릭이 조잘대는 얘기를 한 번쯤은 들었을지 모른다.
(수현-에스터)
수현은 상대의 대답을 확인하고 손에 소독제를 발랐다. 밖에서 들고다니던 병 형태의 것과는 달리 펌프 형식으로 된 비치형 소독제였다. 그러다 나지막히 이어지는 질문에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돕고있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관점이다. 확실히 지난 행적만 본다면 빌런으로써 행동한 일은, 용도를 모를 약을 제외하고는 없으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빌런이라 정의해놓고 이제와서 빌런을 돕고 있었을 뿐이라고 변명할 생각은 없다. 악을 돕는 것만으로도 악이 될 수 있으니. 수현은 미소지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상처를 치료하려 손을 가져가던 수현은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이름에 다시금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연구원 세미나에서 만난 작은 소년의 얼굴이 그려졌다. 뭐라고 했더라. 가족, 의남매… 라고 했던가. 공포영화를 못 본다던가, 큰 강아지를 기른다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들은 적이 있다.
"… 이 수현입니다. 아시다시피, 닥터 드림이에요."
그럼, 치료하겠습니다. 수현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손을 상처에 망설임 없이 가져다 댔다. 잠시 따가울 수도 있겠지만, 상처가 아물면 잊혀질 고통이겠지. 상처의 뼈가 붙고 근육이 이어지며 살이 차오른다. 수현은 문득, 미안함이 치고 든다. 소년이 알게 될까.
(51스레)
(에스터-수현)
"그런가."
에스터는 그저 입을 다문다. 의료인으로서 부상자를 도울 뿐이지 딱히 빌런의 편은 아니라는 뜻일까. 아니면... 뭐, 지금의 정보로선 잘못을 물을 근거는 부족하다. 괜히 이 선량하고 유순해보이는 자를 괴롭힐 필요는 없겠지. 뭣보다도, 지금은 그런 것 까지 신경쓰기엔 조금 지쳐있었다. 신체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구제프의 빌런 지목 건으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의심하고 몰아붙이는 것에 말이다.
이수현... 그러고보니 에릭의 입에서 들어본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떠올려보려 하나, 지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치료가 먼저겠지. 에스터는 당신에게 순순히 환부를 내준다.
잠시 따끔함이 느껴진다. 상처가 깨끗하게 아문다. 에스터는 왼팔을 시작으로 왼어깨까지를 가볍게 움직여보며 상태를 확인한다.
"......"
놀랍다. 한참은 재활했어야 할 상처가 단숨에 나아버렸다. 이 정도의 치유능력을 쓰는데, 피로나 반동같은 건 없을까?
"...대단하군."
우선 히어로인 자신을 적대하지 않고 순순히 치료해줬다는 점에서, 아직까진 크게 적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빌런이라고 해도 자신의 위치에 고뇌하던 밤비와 같은 아이도 있었으니까. 이 상태라면, 내일 당장이라도 임무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벌었다. 감사한다."
에스터는 치료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뇌하고 있다.
(수현-에스터)
그 히어로가 이 사람이었구나. 소년이 즐거이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소년은 옳은 길을 걷고 있겠지. 자신도 같은 길을 걸으리라 생각했던 과거가 문득 떠올라 수현은 밑 입술을 얕게 깨문다. 잘못없는 것들을 죽이고 태어난, 천국과 천사의 이름을 붙인 마약들이 지금도 누군가를 갉아먹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현은 더 이상 흡수되는 것이 없자 눈을 떠올렸다. 상처가 큰 덕에 졸음이 심하게 밀려든다. 둔해지는 몸을 숨기고, 휘청이려는 걸 옆의 책상을 짚어 지지했다. 얼마나 눈을 뜨고 버틸 수 있으려나.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나니 초능력을 제외하고도 운동을 꾸준히 해온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근육이 다친 것은 아니라 하니 추가로 치료하거니 약을 처방할 일은 없겠지. 상태를 확인하던 상대가 감사인사를 전해오기에, 수현이 어두운 낯을 뒤로하고 미소지으며 답했다.
"대단하다기엔, 별 거 없는 능력인걸요."
감사의 인사 이후로도 고민하는 듯한 낯을 가만 들여다보던 수현은, 이내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정직한 히어로구나. 소년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겠지.
"제 이야기를 히어로 쪽에 이야기 하지 않는걸로 해주시면 돼요."
돈을 받고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의무실에서도 돈을 받고 치료를 한 적은 없고, 이 히어로에게도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 지금이라도 정보를 단속하는 편이 낫겠지. 에스터라고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상대에게, 얼떨결에 제 이름을 알려주었으니 만약 히어로 측에게 노출된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에스터-수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히어로측에는 숨겨달라는 말에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고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당신이 하는 행위가 치료 뿐일 때...의 얘기이다. 사람을 해치는 것에 당신이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면, 나는 당신의 정보를 숨길 명분이 없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에스터가 수현의 정보를 숨겨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 어찌되건 에스터는 히어로였기 때문에 당신의 악행을 모른 척 할 의무는 없었다.
"...뭐,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능력도 치료계통이고. 아무리 부탁받았다곤 하나 히어로를 무료로 치료해줄 정도로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자이니, 심한 짓을 저지르진 않지 않았을까...라고 마냥 추측해본다. 물론, 사람은 겉으로만 보고는 모르는 일이다.
"...능력의 후유증인가? 괜찮은가?"
에스터는 당신이 꽤나 위태로워보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수현-에스터)
"이미 나쁜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걸요."
그렇게 말하는 수현의 입꼬리엔 흐릿하고 가벼운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난, 그리고 죄책감이 잔뜩 묻은 웃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칼을 들이댈 일은 전에도, 앞으로도 없다. 하지만 수현은 스스로의 능력이, 상대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망쳐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 이미 누군가를 망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휘청거리는 몸을 숨겨보려 책상 위에 걸터앉는다. 의지할 곳이 생기니 어지러운 시야를 조금이나마 숨길 수 있게 된다. 사람을 해칠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내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이 정도 정보는 괜찮겠지. 이미 상대에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티가 나기도 하고.
"이명이 닥터 드림인 이유죠. 잠이… 밀려오니까."
괜찮아요. 하고 답한 뒤로는 정적이 조금 흘렀을 테다. 그러다가, 수현은 조용히 적막을 깨고 질문을 하나 던졌다.
"히어로로 일 하면, 행복한가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물음이었다.
(에스터-수현)
"......"
에스터는 침묵한다. 이런 말에는 어찌 반응하면 좋을까. 굳이 나쁜 짓을 하면 신고한다는 말에 저런 대답을? 단순한 농담인가? 에스터가 신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객기를 부리는건가? 아니면 조금 자책이 심한 사람인가? ...알 수는 없었다. 우선,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의문은 훗날 천천히 접촉해가며 푸는 것으로.
"...그런가."
꽤나 몽환적인 이름인 것에 비해 지극히 현실적인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그 꿈속에서 보는 것은 황홀경일까. 아니면 악몽일까. 정적이 흐르는 동안, 에스터는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진 않는다.
"...행복...이라."
최근의 일들을 떠올린다. 빌런이라면 피해 강도에 관련없이 즉살하라는 명령에, 온건한 측의 희망과 같았던 빌런갱생프로젝트는 허구. 누구보다도 동경해온 존재를 스스로 무너뜨릴 정보를 쥔 데다, 끝없이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되는 나날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에스터는 잠시 생각한다.
이내 생각을 돌린다. 자신이 구해줬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빌런을 배신할 각오까지 하고 정보를 알려주었던 밤비. 자신을 언니라고 불러오는 엔젤리카. 팬이랍시고 뭔가 선물을 계속 보내주는 그 애. ...그리고, 에릭.
"나는 행복해."
그렇게 대답했다. 현재가 괴롭다고 해도, 히어로로서 보낸 나날들 전부가 불행이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 행복하다.
"약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보고 있지 않아도 된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재해와 같은 공포로부터 시민을 지켜낼 수 있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나."
굳건한 얼굴로 말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불행하지 않다.
(수현-에스터)
단순한 자책일 뿐이었지만…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 칭한다면 어떤 반응을 할까. 히어로로서 불쾌함이라던지, 적개심의 단면을 내보이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대의 입에선 어떠한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수현은 간혹, 차라리 벌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겠지.
시야가 잠시 울렁였다가 다시 돌아온다. 상처가 크긴 했지만 이 정도큰 아닐텐데. 패널티가 더 심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분명 잘 쉬질 못한 탓이겠지. 수현은 약 상자들을 눈으로 훑으며 각성제를 찾다, 이내 그만 두었다. 히어로가 가고 나서 잠에 드는게 좋겠지. 암흑을 또 다시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렇군요…."
한참의 생각 끝에 상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수현은, 문득 그 날도 히어로가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제 나약함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누군가를 지켜내는 당신과, 세상을 저주하는 나.
생명은 소중하다 이야기하며 모두가 살길 바라면서도, 또한 고통 받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제 이중성이 가증스러웠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네요."
제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수현은 흐린 시선을 창 밖으로 옮긴다.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조그마한 창이지만, 가족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현은,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에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터-수현)
"......"
멋지다. 멋지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고, 그 당연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은 이리 쉽게 휘청거린다. 자신이 구한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냐는 말에 망설이고 말았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인데도, 그 날 알아듣고 만 당신의 목소리를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드러내진 않는다. 의사이기 이전에 상대는 빌런의 측. 속을 알 수 없긴 했지만 우선은 빌런을 돕고 있음은 분명했다. 히어로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약에 빌런의 앞에서 히어로로서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간, 패배하는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로 대신한다. 실제로, 에스터의 이상도 그랬으니까. 악인조차도 구해낸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 쪽에서 빨리 사라져주는 게 좋겠군."
에스터는 당신의 안색이 그닥 좋지 않음을 눈치챈다.
(66스레)
"그래요. 당신은…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수현은 창가에서 시선을 내렸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끄덕이는 고개는, 분명 공감에서 나오는 긍정의 신호는 아니었다. 상대에게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긴 침묵이 필요했지만, 대답을 들은 수현은 그녀가 망설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 신념을 단단하게 지키고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웠을 뿐이었다. 눈 앞의 히어로는 강한 사람이었다.
나도 옳은 일을 하고 있는걸까.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 없으니, 그런 힘을 가진 자를 돕는 비열한 이 짓거리가. 수현은 스스로가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저 다무는 편을 택했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냐고, 히어로인 상대에게 빌런인 제가 물어봤자 좋은 대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 멀리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죄송해요."
수현은 그래도 제 손님인 상대를 배웅하기 위해 앉아있던 책상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꼴 사나운 모습은 보여주진 않았으나, 멀리까지 못 나갈 몸 상태이기는 했다. 수현은 결국 방에 가만히 있는 것을 택해야 했다
"만약 아픈 곳이 있으시다면…. 다시 연락 주셔도 돼요."
스스로도 이런 말을 꺼내고도 놀라기는 했지만, 수현은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보지. 수현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열렸다 닫혔을 문을 바라보지 않았다.
- 엔제 - 에스터
- (엔제-에스터)
(51스레)
조용한 한 카페, 생긴지 얼마 안 된 곳인지 사람이 적은 그 곳에 소녀는 묵묵히 들어왔다.
자리에 앉고는 조용히 핫초코를 시키고는 소녀는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본다.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 독서를 하는 사람,친구로 보이는 이들과 떠드는 사람,가족과 같이 와서 차 한잔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 적은 수지만 다양한 부류의 이들이 모여있었다.
소녀는 그 풍경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작은 미소를 짓고, 핫초코를 한입 넘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 곳을 쳐다보니 그 곳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렇기에 소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신가요 에스터 언니."
(에스터-엔제)
에스터는 최근의 일들로 꽤나 지쳐있었다. 코와 얼굴을 찢은 흉터자국이 그녀의 모습을 더 처량하게 만든다. ...아니, 되려 험악해보이나. 여유를 가지고 카페라도 다녀오라는 에릭의 말에 우선 몸을 이 쪽으로 향하긴 하였으나, 마음의 여유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찾아지진 않았다. 이제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조사는 거의 끝냈다. 남은 건 기다리는 것밖에...
"...아. 엔젤리카."
들은 적 있는 목소리에 문득 대답한다. 전에 구해준 적 있었던 아이였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네보인다.
에스터는 메뉴를 고민하며 메뉴판을 바라본다. 커피도 단 것도 그리 선호하지 않는 입장에서 카페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고민하다 그린 티를 주문한다. 왜 카페에서는 녹차라고 적지 않고 그린 티라고 적는가... ...를 고민한적이 있었으나, 그냥 통일성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메뉴를 기다리며 잠시 엔제에게 안부를 묻는다. 합석하지는 않고, 그녀의 근처에 서서 주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엔제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했는데, 방해하게 되면 안 되니까. 스스로가 사람을 마주하고 오래 있을 에너지가 없기도 하고.
"최근에는, 위협하는 사람은 없니?"
(엔제-에스터)
다친 모습에 격렬한 싸움이라도 있던 것인가..하는 생각을 한다. 소녀는 당신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다시 한 모금 넘긴다.
들어온 질문에 소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딱히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약한 이는 아니기에."
최근 수리가 완료된 수녀복을 다시 입는다 400만 정도가 수리비로 깨진 것 같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다.
소녀가 보기에 쭈볏쭈볏 서있는 당신을 보며 소녀는 입을 열었다.
"합석해도 좋답니다?"
당신에게 자연스레 합석을 권유한 것이었다.
(에스터-엔제)
"......"
합석을 권유하는 당신의 말에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별 일 없었다니까 다행이구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자리에 앉는다.
"엔젤리카는 강하구나. 안심이 됐어."
그렇게 약하지 않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미소를 지어보이려 노력한다. ...역시,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것엔 서툴지만. 아직 어린데도 자신이 약하지 않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분명, 그 마음이 무척 강인한 아이겠지.
사람이 적어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에스터는 말주변이 없고, 거기다 좀 지쳐있었던지라 자신의 합석이 엔제에게 부담이 될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다. 괜히 말을 거는게 불편할 수도 있고,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하는게 불편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당신이 마시고 있던 핫초코에 눈이 간다.
"단 거, 좋아하니?"
(엔제-에스터)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에스터 언니."
핫초코를 다시 한모금 넘기는 소녀, 어색하지만 부드러운 미소에는 자신도 작은 미소로 답해준다.
밝은 미소는 아무레도 아직 라오스에서는 한 사람에게만 지어주나 보다. 지쳐보이는 당신에게 소녀는 조용히 지켜본다.
이어지는 질문에 답하기 전까지는.
"네,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에스터 언니는 뭐하시고 계시길레 이리 지쳐계십니까?"
당신이 지친 것을 간파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티가 났던 것일까. 소녀는 당신을 바라보며 그리 물었다.
(에스터-엔제)
"......"
티가 나버렸군. 다 들켜버릴 만큼 자기관리를 못 한 자신의 탓이다. 볼을 약간 긁적이다, 순순히 대답을 꺼낸다.
"...히어로라는 일은, 여러모로 힘들 일들이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늘상 이런 상태인것은 아니니, 이것 이상의 설명을 덧붙여야 겠지. 상대가 어리다고 해서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당장 이 아이는 강하고, 거기다 자신의 상태까지 눈치채지 않았는가. 합당한 설명을 건네야 한다.
"스스로는 정의를 위해서 행동하고,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 완벽하진 않더라도."
하지만 괜히 무거운 얘기를 건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이 이전에,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고민을 스스로가 혼자 지고 가지 못하다니, 약하구나. 에스터는 말을 고른다. 어떻게 표현해야 최대한 간결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올바름의 기준은 상대적이니까...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게 옳지 않을 수도 있어. ...반대일 수도 있고."
지금 올바른 것. 올바르지 않은 것. 지금의 자신이 빌런 살해가 옳지 않다고 믿어도, 사회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디까지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예시를 들어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역시 말재주가 없구나. 부끄럽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때...그것을 다른 사람이 옳다고 믿지 않을 수도 있고...그렇다면 충돌하게 되니까."
사람에 따라 도덕의 기준은 다르다. 똑같은 정의를 믿는 사람끼리도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실상, 빌런들조차도 자신들의 행동이 '악'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뿐일리는 없었다. 당장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낸 쾌락살인마조차도,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말했지. 싸우는 것을 마치 놀이처럼 여기니까.
"똑같이 올바른 일을 하려 하는데도, 서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조금 지쳤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무겁게 말해버렸지. 조금 후회가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역시 지쳐있었나보다.
"동료하고도 싸워야 한다는 게."
이 즈음에서 에스터는 완전히 체념한 얼굴이었다. 말을 풀어내고 나니 더 이상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공허했다. 자신은 분명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이 짓을 벌였을텐데, 어째서 점점 더 이렇게 허무감이 남는 거지.
단순한 악과 선의 평면적인 전투였더라면 쉬웠을텐데. 실상 자신이 꺾어야 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올바르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그 자의 말은 서로가 모순되어 있었다. 경찰시절의 당신과, 히어로의 수장으로서의 당신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던 너무나도 낯선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당신이 조금도 변함없는 올곧은 자라고 믿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멋대로 한 착각이다. 인간은 완전하게 올바를 수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제멋대로 실망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래.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사람으로서의 당신을 동경한다고. 우상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부터가 흑백이 아니므로 회색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다. 당신이, ...히어로를, 버리는 말로서 취급했다고 해도.
당신의 올바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겠지. 그것이 자신이 예상 못하던 일이었을 뿐이다. 당신의 전부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믿느니 존경하느니 쏟아냈던 자신의 탓이다. 거기다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이란 언제나 다면적인 존재가 아닌가. 당신이 처음에는 히어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히어로들과 함께 보냈던 나날 속에서 생각이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당장 자신에게도, 그렇게나 따스한 말을 해주었는데...
...하지만...내가 용서한다고 해도.
방금 막 앞에 놓인 녹차를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본다. 목이 타는 것 같아 한 모금을 삼킨다. 뜨뜻한 차가 닿으니 말라붙은 입술이 따끔거린다.
자신은 언제나 정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만인의 평화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올바르지 않은 것은 올바르지 않다 말해야 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모두에게 위험요인을 알려야만 한다. 그 증거들이 빌런의 아지트에서 발견된 이상, 그것들을 숨겼다가는 자신은 빌런의 편을 들어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그렇다면, 당신이 한 말들조차 전부 들려줘야 해. 모두에게. ...당신이 비난받는 일을 내 손으로. 만인의 평화를 위해. 올바르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내가 용서하느니, 동경하느니, 그 속에 무언가 뜻이 있다고 믿느니 말한다 한들...모두의 비난 속에서, 당신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 당신이 비난받는 것을 보며.
...당신을 몰아넣고 만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당신에게.
(엔제-에스터)
"정의를 이루는 이는 항상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볍게 노력한다는 이야기에 답합니다. 완전한 정의는 존재하기 힘들다. 그 것은 악이라는 상대성에 있을뿐인 행위니까.
'정의'는 어려운 것이다. 과하면 악이 덜해도 악이 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에.
"동료와 싸울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정의는 상대적이 될 것이므로."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소녀는 '평범한 이'가 애석하게도 아니다. 선량한 민간인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듯 가볍게 운을 뎁니다.
"간단한 이야기를 하죠. 저는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제 앞길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저를 칭찬하고 좋아해줬습니다."
내가 바란 것, 약자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의 변혁. 남미에서는 카르텔들이 철저히 약자들을 착취해 자신들의 배만 불렸다. 그들이 만회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않고. 그렇기에 나는 바랐다. 최소한의 기회라도 오는 세상을. 그렇기에 세웠다.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의 기치를.
"묻겠습니다. 에스터 언니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정확히 하자면 언니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눈 앞의 소녀는 더이상 소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한 조직의 장으로서의 면모만 남았을뿐. 쉬러 온 곳에서 이런 말을 2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자조하며.
"작은 일에 흔들릴 신념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정의'도 '신념'이라고도 말 할 수 없습니다. 에스터 언니가 바라는 정의로운 풍경이란 무엇입니까?"
소녀는 당신에게 재차 물어봤다. 그대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에스터-엔제)
"......"
조직의 수장이라는 이야기에는 반신반의하나, 소녀의 강인함은 에스터에게 뼈깊이 전해졌다. 당신은 자신에게 구해지거나 하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사람을 구할 강인함이 있는 자였다. 앞길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했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약자를 구하고, 시민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
당신의 강직함에 에스터의 죽어있던 눈에도 다시금 힘이 돌아온다. 에스터는 당신을 또렷하게 쳐다본다.
"만인을 위험으로부터 지킨다. 약한 사람이 고통받지 않고,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위해서."
그렇다. 그것이 목적이었다. 에스터는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그녀를 동경했던 것도, 자신을 구해줬기 때문에. 연구실의 참상에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무너져있는 자신의 약한 마음에 구원의 손길을 줬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이 정의와 멀어진다면, 자신이 바로잡는다. 미움받는 것을 걱정하다가는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
...단지, 그 정의를 행하는 자신조차도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였다만.
"...고마워.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기자신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당신에게 적대당한다 하더라도. 에스터는 아까보다는 조금, 아니, 분명히 기운이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 것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리고 무거워진 이야기를 돌리려고 시도해본다. 마침 얼마전부터 팬...이라고 하는 대범한 사람이 꾸준히 선물을 보내주고 있었다. 밤비도 그렇고,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나... 에스터는 조각케이크 쿠폰을 엔제에게 보여준다. 이 카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이런게 생겼지만, 나는 단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 괜찮다면 먹지 않을래?"
만약 당신이 긍정한다면 에스터는 친히 달콤한 조각케이크를 주문해줄 것이다.
(엔제-에스터)
"좋은 신념이군요."
당신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자 소녀는 방긋 웃어줬다. 고해성사란 것이 이런 기분일까?
수녀복을 입은 소녀는 당신-에스터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적어도 저는 언니를 응원하겠습니다. 언니의 신념은 저와 방향은 다르지만, 고결한 이상이기에."
시스템 메세지:엔제가 당신의 팬이 되었습니다!라고 뜰지도 모르는 문구군요.
단 것을 좋아하냐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먹겠냐는 말에는 소녀는 사양하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조각 케이크가 나오길 기다리며 소녀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에스터-엔제)
방긋 웃어주는 당신의 얼굴에, 에스터도 약간 부끄럽지만 미소지어준다. 역시 부드러운 표정은 조금 서투르려나. 하지만 아까보단 확실히 훨씬 나은 표정이었다.
에스터는 조각케이크를 점원에게 주문한다. 이윽고, 달콤한 딸기케이크가 테이블에 놓인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생크림 위에 신선한 딸기들이 여럿 세워져있다.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최고의 디저트다.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케이크를 당신 앞에 밀어주며 미소짓는다. 당신을 위한 것이다.
- 에스터 - 녹턴(3번째 일상)
- (55스레)
(에스터-녹턴)
에스터는 옷을 갈아입는다. 붕대로 칭칭 감긴 허리가 눈에 띈다. 찢겨진 피투성이 셔츠를 대강 던져두고, 새 셔츠 위에는 짙은 녹색의 스웨터를 갖춰입는다. 청바지 밑에는 보이지 않게 레깅스를 입은 상태다. ...습관적으로 붉은 목도리에 뻗은 손이, 잠시 멈칫한다.
"...스미모토."
붉은 목도리에 손대는 것을 그만둔다. 원래 하고 다니던 붉은 목도리의 자리를 대신할 검은 목도리가 목에 감긴다. 털실로 된 보들보들한 재질이었던 산타의 선물과 달리, 새 목도리는 다소 뻣뻣한 감이 있었다. 목도리 끝 부분 한 뼘가량은 회색으로 되어있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찬 바람에 상처가 시려지니, 얼굴의 흉터에 흰 밴드들을 붙여준다. 콧등과 볼의 고통의 흔적들을 네모지고 새하얀 것이 깔끔하게 감춰준다. 이 상처는 빌런을 생포하지 못한 흔적이니, 뻔뻔하게 의사를 찾아갈 생각은 없다. 흉진다면 에릭에게서 잔소리를 좀 듣겠지만.
에스터는 조각케이크 하나를 구매한다. 차까지는 무리라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판단이었다. 딸기가 예쁘게 장식된 생크림케이크가 정갈하게 포장된다.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이런 것을 산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되겠지.
에스터는, 심문을 가장한 면회를 가는 길이다.
ㅡ
...유감스럽게도, 케이크는 검사를 위해 완전히 뭉개져버린다.
"......"
시무룩한 표정의 에스터가 당신과 케이크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다. 딸기 하나까지 남김없이 산산조각난 조각케이크는 처량하게도 당신과 에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산산조각난 조각케이크라니, 이런 말장난이 없다.
"...녹턴님."
그렇게 이름을 부른다. 당신이 어떤 것을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글프게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애정어린 눈길이다. 단지 여러가지 일들로 조금, 아니, 많이 지쳐있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눈가에 서린 희미한 눈그늘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에스터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저 이 처참한 케이크와 플라스틱 포크를 당신쪽으로 살짝 내민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도 덧붙이며.
(녹턴-에스터)
지금 상황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불친절한 누군가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면 그녀는 치워주십시오. 하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 한켠에서는 아마도 익숙하다고 답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인마 취급을 받고 모두의 시선 앞에 드러나 선 채 그 차갑고 서늘한 쇠창살 안에 갇히는 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관의 망치가 올라가 판결을 내리는 꼴도 이미 익숙했다. 굳이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 그녀는 한치의 죄악감도 느끼지 않은 채 자신에게 내려진 법의 심판을 향해 조소를 보냈고 지금의 그녀는 법의 심판 앞에 그 머리를 조아렸다는 정도일까? 그만큼 지은 죄가 크고 무겁구나.
심문이다, 녹턴 드네리스.
라는 딱딱한 간수의 목소리-이 또한 이즈모의 사원이었다. 이전에 커피를 한잔 사 준 일이 있었더랬다. 그때 감사하다 말하던 당신과, 지금 차가운 독방의 문을 열며 그녀를 부르는 당신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녀의 업보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저 커다란 잘못에 관한 당연한 결과였다.-에 몸을 일으켜 심문실까지 이끌려 갈 적 만 하더라도 아마도 상대는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는 ST제압반의 일원이거나, 심문에 유능한 사원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애정을 담은 지친 하늘빛 눈이, 조심스레 포크를 건네는 손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진정 몰랐던가.
어쩌면 이 또한 그녀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죄송하다는 소리를 듣는게 자신이고, 그 말을 하는게 당신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도리어 비난받고 죄송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도 모자른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던가. 이리저리 뒤엉겨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이 혼란스럽게 덩어리가 된다. 잠시 그 덩어리에 막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말없이 당신이 건네는 포크를 받아든다. 말랑한 플라스틱 포크의 감촉이,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의자의 감촉과 사뭇 달라 저도 모르게 어색한 시선을 내리고 뭉개진 케이크를 바라보고.
"감사합니다."
겨우내 꺼낸 말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라는 말을 당장 꺼내기에는 조금 용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포크가 부드러운 파운드와 생크림의 혼합물을 뒤적였다.
(에스터-녹턴)
973 이름 : 에스터 - 녹턴 2018/12/10 14:10:27 ID : ur8002spgo6
"......"
서로간에 오랜 침묵이 이어진다. 에스터는 당신이 케이크를 입에 넣기를 기다리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말을 고르는 건지 고개를 숙인 채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헤집어지는 생크림이 애처롭다. 에스터의 시선은 케이크(이고 싶었던 것)를 따라 움직인다.
"...저는."
이제는 당신 앞에서 말을 더듬진 않는다. 좋은 변화일까. 하지만 좋은 변화라기엔 여기까지 오기의 과정이 너무도 처참했다. 당장 에스터가 당신과 세 번째 티파티를 하기까지의 여정동안 몇 번을 찢겨졌는지를 돌이켜보자. 물론, 내면의 이야기다.
"저는 제가...정의를 위해 움직인다고 믿었습니다."
에스터의 손은 어색하게 깍지를 낀 채 무릎 위에 놓여있다. 자신 몫의 다과를 가져오지 않았던 탓이겠지. 뭐, 케이크가 어찌 됐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밴드를 붙였건만 얼굴의 흉터들이 여전히 간지럽다.
"...그러니까, 그 결과는...정의로우리라고..."
고개를 숙인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들이 머릿속에서 흩어지다 사라진다. 무얼 말하려 했지? 무얼 위해 노력해왔지? 뭘 위해 애써왔지? 뭘 해왔지? 다시금 들려오는 것은 사이렌같은 환청.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습니다, 라고. 윙윙윙 하고 울려퍼지는 소리들 중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말 뿐이었다.
"......"
에릭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에스터씨. 적어도 일주일, 넉넉잡아 한 달은 에스터씨 자신을 위해 푹 쉰다고 생각하세요. 에스터씨는 지금 다른 사람을 만날 상태가 아니에요. 구할 상태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러니까, 부디 무리해서는 안 돼요. 이즈모 쪽에는 근처도 가지 마세요. 하지만 안 되는데. 일주일은 너무 늦어. 당신을 만나려면, 무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갑자기 다시금 그 사실이 머릿속을 쥐어짠다. 그래. 이제 당신은 죽는구나. 자신의 정신이 낫기 위한 최소기한조차 채우지 못한 채 죽는다. 맨 정신의 자신이 살아있는 당신과 마주할 일은 이제 없겠지. 덜컥. 무언가가 고장나는 듯이 덜그럭거리는데, 이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린가. 환청, 이명이, 멎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첫 다과회때는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지. 이번에는 '미안해' 로구나.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사죄가 바닥으로 꺼져간다.
"말이...정리되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케이크 접시를 바라본다. 억지로 그 곳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주본다면, 분명 무언가가 망가져버릴 것이다. 겨우 정리해낸 감정들이 패대기쳐져 두들겨맞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왜 당신을 보자고 했을까.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이제와서는 전부 소용없는 짓이다. 그런 것따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가슴은, 낡고 너덜거리는 심장은,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다. 아니,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텐데. 분명히, 더 많이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차를 마시고 다과를 먹으며, 느긋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찌그러진 케이크가 이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에게 다음은 없다. 두렵다.
비이성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이성은 깊은 휴식을 취한다.
(56스레)
(녹턴-에스터)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고보니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간식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웠다. 설탕같은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당신이기에 섣불리 케이크 조각을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먹으면 좋을텐데. 그러기엔 자신이 휘젓고 있는 케이크의 꼴도 그닥 좋지 못했고 당신이 먹을만한 간식도 아니었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따스하고 향기로운 차였다. 차 한잔을 곁들이면서 당신은 당신을 위한 다과를, 자신은 당신이 준비한 케이크를 먹으며 이렇게 마주했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는 헛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차가운 백열등 아래에서 마실 것 하나 곁들이지 못하고 자신만 뭉개진 케이크를 건드리고 있는 꼴이 결국에는 자신의 잘못에 비롯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당연히 그녀가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인 것일까. 그녀의 회안이 뭉개진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바라보았다가, 당신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케이크를 먹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뒤늦게 이 정적에 눈치를 보며 부드러운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함뿍 떠올렸다. 적절히 숨이 들어간 단단한 생크림의 부드러움과 폭신한 빵의 조합이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깨진 정적. 그녀의 시선이 다시 당신을 향한다.
마치 입구가 막힌 주머니를 쥐어짜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당신의 허전한 손을 잡을까, 하는 생각은 멈칫 물러서고 만다. 죄를 지은 이에게 있어 그것은 사치스러운 위로였다.
"이것이 정의로운 결과입니다."
부드러운 생크림은 입안을 달게 만들어주었지만 그 말까지 달게 물들이는 기적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무리 씹고 삼키며 혀로 유린해도 결국에 쓰디 쓴 현실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단 것은 미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 외에는 하등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허기진 아귀처럼 탐하며 스스로 달고 부드러운 존재가 되길 바라는게 얼마나 허무한 행위인지를 다시금 깨달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정의로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스스로 옳은 행동을 자책하지 마세요, 라고 덧붙였던가. 그녀는 또 무슨 말을 할까 잠시 생각을 고르다가
"당신은 용기있는 영웅(hero)이었어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에스터-녹턴)
당신의 입에 케이크가 들어간다. 바보같이 조금 안심한다. 엉망이 된 케이크가 전혀 쓸모없지는 않았구나. ...케이크 안에 흉기나 위험물품을 숨겨두면 안된다며 케이크를 뭉개던 간수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 조그만 케이크로 자신이 뭘 할수 있다는 건지. 하긴, 그런 짓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검사하는 거겠지만. ...케이크 하나가지고 까다롭게 굴지 말고 진작 생포된 빌런 간수나 잘 하던가...같은 생각이 조금 떠오르지만.
"......"
말문이 막힌다. 당신의 자상한 말이 날아온다. 그것은 어떠한 칼날이나 탄환보다도 날카롭고 깊게 박혔다. 과연, 종이를 무기로 사용하는 당신답다고나 할까. 에스터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시선이 올라가지 못한다.
...만약에, 당신이 이 상황에서 자신을 원망했더라면, 나는 당신이 죽는 결과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자신의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신을 향한 부모의 경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너는 너의 얄량한 양심을 위해서 부모를 팔아먹은 쓰레기다. 진짜 정의며 도덕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얼간이다. 우리들 없이 네가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융통성 없는 괴물이다. 냉혈한이다. 너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느냐. 착한 척 하는거냐. ...이런 말들을 들은 횟수가 셀 수 없이 되었을때, 부모를 면회가는 것은 그만두게 되었다. 동정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너를 키워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누구때문에 따스한 집에서 밥먹으며 살아있다고 생각하느냐...같은 흔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학대들은 넘어가더라도, 실제 죄를 지어 감옥에 간 것은 당신들인데도 마치 그것을 신고한 자신이 죄인인 것 처럼 구는 태도는, 어땠을까. 자신의 죄책감을 계속해서 유도하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던 목소리들. 그것들을 부러 들으러 가는 것을 포기했을 때, 자신은 진정한 의미로 어른이 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면회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었다. 파크에게 갈 때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었다. 이번에는 자신 탓에 사형을 당하는 상대를 보는 것이니,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서 깊이 긴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당신은.
"...저는."
아니. 이제 당신의 앞에서 우는 것은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결심했다고 할까, 꼴사나우니까. 매번 당신을 만날 때마다 한 번씩 눈물을 머금고 온다. 이래서는 당신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것 또한 감정의 학대다. 자신의 감정을 당신에게 토해내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쓰레기통으로 사용한다니, 그렇다면 쓰레기라는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때문에 견뎌낸다. 물론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만. 정말로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 것은 성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딘가 고장나있다는 증거였을까. 이미 눈물조차 나오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그런 걸까.
"그 증거를 발견하고...제출한 것은 저였습니다."
에스터는 말을 뗀다.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가도, 원망받고 싶어지고, 그러면서도 무언가가 두려워진다. 원망해준다면 그것은 다시금 되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겠지. 하지만 누군가를 살해하는 데에 그 정도의 상처를 입는 것이 이상할까. 총의 반동을 겪지 않는 자신은 적어도 그 정도의 상처라도 남아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사람을 해칠 때에는.
"녹턴님의 목소리를... 녹음된 파일을... 빌런의 아지트에서 발견하고."
상처입어야 한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만큼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사람을 구하지 못한 만큼 피가 흐르고 몸이 곪아 터져야 한다. 상대를 상처입힌 만큼 자신의 심장을 찢어발기고 불살라야 한다. 속죄해야 한다. 무언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자신을 채찍질하고.
아. 역시, 에릭의 말대로 사람을 만날 상태가 아니었나. 지금의 자신은 이미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을 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도 제정신이었다면 나는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추측한 끝에 단어를 조합해가며 말을 옮기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성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려웠다.
"빌런의 아지트에서 발견되었으니...모두를 위해서... ...그것이 공식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테이프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었던 그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퍼진다. 마치 당신이 나에게 그 녹음의 기록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어째서? ...죽여버리겠어. 그네들의 영웅놀이를. 버리기 좋은 패들을. ...나 때문이었어.
"그래서, 동경하는 당신에게...경멸받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이 죄를 지었다면... 심판받아야 한다고."
어째서 자신은 관계가 틀어지는 것만을 걱정했을까. 왜 당연하게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자신이 당신을 죽는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먼저 잘못되어있었을까.
"...하, 하지만..."
그러나 정의로운 결과일까. 당신 한명이 이즈모 내부의 모든 문제들을 만들어 낸 주범이라고 꼬리를 자르고.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고쳐지는 것은 없는 채였다. 이즈모의 보안은 허술해빠졌고, 내부에는 의심스러운 것들 투성이. 테러를 저지른 빌런들을 놓친 무능마저도 당신의 탓이라 돌리고. 이즈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겼는지, 시민들은 제대로 된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당신 하나를 처형대에 올려도...여전히 이즈모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어째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위험요소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아...아무것도."
당신의 앞에서 말을 더듬고 마는 부분조차, 다시금 돌아와버리고.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눈물을 흘려도 될까? 하지만 더 이상 울 기운이 있을까? 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눈물을 낭비했는가? 울음이 쓸모있게 될 때에는 울지 못하게 되지 않았는가.
"...제대로 된 것이 없지 않습니까."
대체 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 그런 말을 삼킨다. 사람을 앞에 두고 중얼거리기까지 하면 그건 완전히 엉망이다. 당신의 마지막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만두도록 하자고. 힐데가르트. 속이 울렁거리는데도,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한다. 헛구역질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지쳐있다. 이젠 정말로, 지쳐버렸다.
"이것이... 정의로운 결과일까요."
그렇기에 머리말은, 꼬리에게 묻는다. 잘려나간 꼬리가 무슨 대답을 해주길 바라는 것인지.
"...정의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싸워왔을까.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들었다. 자신은 정말, 올바른 것을 위해 가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57스레)
(녹턴-에스터)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그러고보니 초코x이를 마구 으깨서 무스처럼 만들어 먹거나, 스폰지 케이크를 부서뜨려 생크림과 곁들여 브라우니나 파르페 비슷한 걸 만들어 먹는 레시피가 있지 않았던가, 하는 하릴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물렁한 재질의 포크를 들고 말랑한 고무재질의 접시에 묻은 생크림을 긁어냈다. 푹신한 케이크 시트가 녹진하게 접시에 들러붙은 생크림과 함께 포크에 묻어나듯 한가득 담긴다.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그리도 부지런히 접시 위의 눈밭에서 달달한 눈덩이를 이쁘게 굴려내고 입안에 머금는다. 마치 눈이 녹듯 달콤함이 입안에 스르르 퍼져나간다. 이런 상황에 눈치없이 간식이나 먹고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열심히 먹지 않으면 케이크를 사온 제 앞의 어린 영웅이 어쩐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서, 그래서 당신의 배려를 이렇게 잘 받았다고 행동으로나마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만큼 눈 앞의 하늘빛 소녀가 '오늘은 매우 맑지 않음' 같은 표정을 짓고서 비를 뿌릴 것처럼 시선을 한없이 바닥으로 떨구고만 있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의 말이 당신의 기분을 복돋아주기는 커녕 더 나쁘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누나는 사람 달래는데 재주가 없어.- 문득 빌런의 수장으로 지목받았던 자신의 동생의 한마디가 떠오른 것은, 어째서인지. 그러고보니 너는 어째서 그리 행동했던가. 짧은 의문이 허망하게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당신을 바라보고.
차라리 빗방울을 흩뿌렸으면 하는 것이다.
비를 뿌리지 않으면 먹구름이 다시 새하얀 흰구름으로 떠오르지 못하듯이, 한없이 가라앉아버린 당신이 그저 속의 물기를 삼키고만 있는 것 같아서. -허나 그녀가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녹턴은 늘 그랬듯이 침묵을 지킬 줄 알았다. 굳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같잖은 충고나 위로를 보탤수록 누군가는 더욱 무너져내릴 수 있음을 알기에. 또 그녀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당신의 목소리가 정황을 고백한다. 이미 녹음 기록이 공개되었다는 것부터 당신의 이야기를 모를 리 없는데, 당신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고해성사를 하듯이 하나하나 읊조리고 있었다. 어쩐지 그것이 뒤이은 말을 위한 초석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비난을 바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잠시 당신에게 날카로운 말을 콕콕 찔러넣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게 당신에게 상처 외에는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는 저도 한가지 물음을 던졌다.
"머리말님은 왜 히어로가 되셨습니까?"
그녀는 열심히 먹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어찌나 열심히 먹었던지 고무 접시는 포크로 싹싹 긁어 생크림과 빵 부스러기의 잔해를 약간 남기고 완전히 말끔해져 있었다.
"이즈모는 시민의 불안감 조성을 최소화하고 평화를 일구기 위해 존재합니다. 실제로 이즈모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걸 알게 되고 시민이 패닉에 빠지고, 이즈모가 신뢰를 잃을 수록 이능력 범죄자에게, 혹은 잠재적 빌런에게 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이 모든 면에서 정의롭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실이 곧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머리말님도 알고 계시겠죠."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비녀를 꽂아 틀어올리지 않은 은색 머리카락이 그 작은 고개짓에 같이 흔들린다.
"언제나 각자 '최선'이라 생각하는 선택을 내릴 뿐. 절대적인 정의의 잣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에스터님의 정의는 무엇이었습니까?"
(에스터-녹턴)
"......"
어째서 히어로가 되었는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 약자를 향한 공포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에. 약한 자들을 위한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서 구원받은 경험에서, 그 생각은 강해졌다. 약한 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원자중 하나는...
"약한 자에게 있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기 때문에, 저는 그런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포에 시달리는 자들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
자신의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구원의 굴레들속에서 자라나 굳어진 이상이다. 굴레를 이루던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진다고 해도 그 모양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이 이상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처가 최선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현재 테러범들의 대다수는 탈옥했는데 시민들은 이즈모 내부에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불안감 조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질적인 안전을 무시한다면, 우선해야 할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말을 통해 당신의 의문에 다시 답한다.
"...제가, 히어로가 된 이유이자 정의입니다. 약자를 구해내는 것."
당신또한 이런 내가 한심하다고 여기겠지. 그 질문은 분명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아. 나는, 미움받는 영웅이 되어야 했는데. 영웅조차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보였다. 영웅다움조차 갖지 못한다. 비스트와도 이 문제로 충돌하곤 했지. 이상적인 영웅상과 불살의 이야기. 죽이는 것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가다간, 나의 구원자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즈모의 문제점을 이렇게 감추고 입을 씻어버리다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즈모는 안전한 조직이 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민심은 안정될지 모르지만 이래서는..."
그렇지만 히어로로서의 신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어쩐지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그러고보면 그 때도 그랬지. 시체들이 가득한 참상속에서도 '지키는 자'의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인지하면 이성이 되돌아왔다.
그랬기에 수없는 전투동안에도 무너지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다. 뒤엉키는 상처가 머릿속을 긁어내더라도, 괴로워하는 것이 당장 해야 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구해내는 동안엔 구해내는 것만을 생각하며 임해왔다. 나약한 자신은 사람을 구하고 있을때는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이래서는...장기적으로 갔을때 계속 피해를 입게 되고, 지금...언젠가, 이런 방식은..."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자, 자신은 다시금 말문이 막히게 된다.
당신은, 이 순간에도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진저 그레이가 즉살주의를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긴박한 순간 나를 일깨워주고, 비스트가 자신을 벤 빌런을 물어뜯기 위해 최선을 다했듯이, 당신도, 나를.
자신은 정말, 어찌나도 많은 사람의 배려속에 살아있는 것일까.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목 놓아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제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망가짐이 원인인 것을 확실하게 들켜버렸군.
"...아하하."
그래서 웃었다. 허탈함만이 묻어나온다. 당신이 이런 때조차도 자신이 마음을 단단히 먹기를 바라 그런 말을 하는데. 나는, 이제와서도 바보같은 생각만을 하고 있구나. 그래. 애당초 내가 온 이유부터가 그런 것이 아니었나. 갈 곳 없는 우둔함만이 내가 뱉어내고자 했던 말들인데.
당신은 내가 히어로로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끝나버리더라도,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겠지. 이상이 아닌 현실을 되짚어주며, 자신이 믿어온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녹턴님. 동경합니다."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라오스 최고의 비웃음거리가 이 곳에 있구나. 자신의 탓에 곧 죽는 사람이 의지를 다져주고, 그것조차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 채 꾸역꾸역 우는 소리를 했다. 당신은 자신이 준 케이크를 꼴이 엉망이 된 것에 불평도 없이 삼켜주었건만. 우스웠다. 처형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무력감과 허망함에 발버둥치고 있어도 모자란 사람에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빼앗아간다.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아둔한 짓이었다.
"...저는, 마지막까지도 당신에게 폐만을 끼치는군요."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을 낼 수 없었다. 말라붙은 눈가가 퀭하고 상처투성이 얼굴은 초췌하다. 그런데도 당신이 소중하다고 말하고만 싶었다. 그런데도 당신이 소중함을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 한심함을 향해 떨어지는 거지. 향한다기 보다도, 한심함보다도 더 밑으로.
"...동경합니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을 마음속에 삼킨다. 이제와서 이야기한다 한들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전한다고 해도, 이제 곧 끝나버릴텐데. 동경이 아닌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았다고 해도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결국, 당신의 마지막마저도 이렇게 망가뜨린 채.
전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지 않으려 애쓰고.
(녹턴-에스터)
정의(justice)라 하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그것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질서와 평화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나 절대적이지 않다. 정확히는 절대적으로 보이나 절대적이지 않다. 흔히 현대사회에서 언급되어지는 정의란 작게는 누가 도넛을 몇개씩 나눠받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누구를 살리고 죽일 것이냐는 문제까지 포괄하게 되며, 여기서 히어로는 생명이 오고가는 순간에 그 이름을 들먹여야 하는 존재였다. 정의란 진정 무엇인가 - 철학에서, 그리고 책에서의 정의란 집단 내 모든 개인의 요구와 필요를 적절히 충족시킬 수 있는 타협점이라고 했던가. 허나 그런 미묘한 문장으로 납득하기엔 '사람을 구하는 존재' 혹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존재'로서의 우리들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무거운 정의와 불확실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 불확실에 한번 휩쓸리게 되면, 영웅은 단숨에 무너지고 만다.
당신이 구한 수많은 생명이 있듯, 당신이 구하지 못할 혹은 이미 꺼져버린 생명이 정의의 기로에서 그 무게를 달리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당신은 굳건한 당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행동해야 하며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책상에 팔을 괸 채 당신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아무리 어렵고 무거운 주제로 빠져봤자야 죽음을 목전에 둔 사형수와 사형 판결의 결정적인 증거를 내민 이와의 사적인 대화만큼 위험하고 무겁겠는가. 더군다나 불확실성에 다가선 당신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주제가 어디있겠는가. 게다가 지치고 슬프게만 가라앉아있던 당신의 눈빛이 진중히 가라앉으며 그 신념과 의견을 하나하나 분명히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그럭저럭 재밌고 안심되는 것도 없었다.
그렇구나, 당신의 정의는 바로 그런 것이겠다. 그녀의 정의만큼 흔들리기 쉬운 것도 아니며 동시에 상처받고 무너지기 쉬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미묘한 안도감을 받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적어도 당신의 정의는 누군가의 상실에도 굳건히 자리할 수 있으리라.
당신의 말이 이어진다. 적절한 단어를 이어붙이려 하는 듯 띄엄띄엄 휴식을 취하는 문장의 끝에는 당신의 어떤 진심과 의견이 달려있을까, 두손을 깍지끼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경청하던 그녀는 이어지는 웃음에 고개를 살짝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 어리석게도, 그 웃음에 자신이 입술로 옅은 호선을 그려내고 말았다.
"저같은 사람을 동경해서야 쓰겠습니까."
감방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지독한 농담거리로 던지면서, 정작 당신의 그 웃음이 쓰디쓴 실소라는 것을 모르고.
"폐가 될 만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제가 받은 것은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인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일수록 폐를 끼칠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니 이번기회에 양껏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라며 그녀는 얼핏 제 사랑하던 이들을 떠올렸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지 못해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건 어찌나 허무하고 슬픈 일이던가.
그리고 이런 순간에서조차 폐를 끼치고 있다며 의기소침해지는 당신은 얼마나 여리고 상냥한 사람인가.
비록 처음엔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문득 당신과 함께 이렇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해야하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당신이 그녀에게 베푼 귀중한 마지막 기회겠다.
"에스터님. 당신의 정의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즈모의 행동이 부당하다 생각하시면 기꺼이 목소리를 내십시오. 본디 정의란 그렇게 만들어지고, 이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진력이 뛰어난 그녀의 상사를 떠올렸다가, 어쩌면 당신과 그가 이즈모의 양대산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녀의 상상대로 된다면 조금은, 정말 아주 조금은 그것을 보지 못할 미래가 아쉽겠다. 그녀는 책상에 괴었던 팔을 내리고 상체를 다시 반듯이 세웠다. 그런 작은 아쉬움은, 툭툭 털어버리면서.
"그리고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듣게 만든 것에, 부정한 사상을 가지고 에스터님을 히어로라는 일에 끌어들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녀는 허리를 깊이 숙인다.
(에스터-녹턴)
"......"
이어지는 말들에 입을 다문다. 달콤한 케이크가 입에 꽉 찬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터무니없이 대단한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가지고 싶다고 떼쓰다가, 울음을 멈추기 위해 댓가로 케이크를 받아 먹고. 동경합니다. 그 말에 당신에 웃음을 띄고 말한다. 그 서글픈 말에 더할나위없이 슬프게 미소짓는다.
"...진심이십니까."
폐를 끼칠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라. 그 말은 진심인가. 당신에게 정말로 매달려도 되는 걸까. 뭉그러진 케이크를 자신을 위해 싹싹 긁어먹어주는 당신에게, 결국 에스터는 패배하고 만다. 몇 번이나 당신에게는 지고 만다면서.
사과하며 허리를 숙이는 당신. 그래서, 그 발언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것은 당신의 진심이었나. 그렇다면 당신이 이제껏 보여준 것들은 전부 거짓이었나. 아니. 거짓과 진실도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깔끔하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겠지. 언제나 거짓속에도 높은 함량의 진실이 담겨있듯이.
"하지만, 녹턴님은 그 누구보다 히어로의 처우 개선을 위해 애쓰셨죠."
테이프의 내용과는 다르게 말이다. 같은 사람이 말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개를 숙인 당신 앞에서, 눈물이 터지기엔 좋은 때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이젠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
"...부정한 사상으로 시작하였다 해도,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들려줄 대답은 이 뿐이다. 이야기하게 되어 다행이다. 마침내, 당신의 목소리의 환청이 조금씩 잦아들어가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덜 괴롭게 잠들 수 있으려나. 라디오가 놓여있는 머리맡에서.
"당신이 히어로를 깔봤다고 해도, 히어로의 대표로서 이즈모를 지켜보며 그 마음이 변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2016년의 테이프였다. 그 때와 지금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히어로가 생기기도 전의 이야기를, 지금의 당신과 동일시하기에는.
"그러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히어로로서의 당신도, 테이프속의 당신도, 경찰로서의 당신도, 전부 당신이었습니다."
...녹턴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덧붙인다. 슬프게 웃어보인다. 쓰라리지만, 조금이나마 무거움이 덜어진 듯한 미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지막이니까, 폐를 끼칠 기회도 이 뿐이라는 당신의 말에. 결국 민폐를 끼치기로 결정한다.
(녹턴-에스터)
단 한순간도 거짓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라고 덧붙여봤자야 뒤늦은, 쓸모없는 변명덩어리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꼬리가 길게 늘어질 터다. 당신을 붙잡고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아봐야 어쩌겠는가. 마지막을 굳이 당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하소연하는 것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일이고.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받아낼 의무도, 필요도 없는 타인이 아니던가. 그녀의 하소연은 이제 영영 만날 리 없는 그녀의 혈육에게 향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게임이었고, 룰이었으니. 그런데, 어째서. 끝맺어지지 못한 의문이 머릿속을 감돈다. 아직 그녀에는 불완전한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접어야 한다.
자신이라는 삶을 가볍게 접어서, 이제 모든 걸 털어내야 한다.
거기에 당신의 고민이 섞여들어간다면 조금이나마 그 고민을 더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언가 남기지 않기를 바라기에. 당신의 말을 고요히 듣기만 하다가 마지막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에스터-녹턴)
당신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 것을 긍정의 뜻이라는 사실로 연결시키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정말로 말해도 되는 걸까. 어찌됐건, 이 곳은 심문실이었다. 무언가를 심문하는 장소이다. 심문이라.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일종의 심문이라면 심문일까. 아니, 고해성사인가. 무엇이 되건 어떻겠는가. 이 행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쓸모가 있다는 것인지. 어차피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은 당신 뿐이고, 그 당신마저도 이제 곧 사라져버릴텐데.
테이프의 내용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었느니, 이즈모에서는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 것인지, 당신이 믿는 정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여러가지 쓸모있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것을 캐묻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진실과 거짓에 지쳐버렸다. 더 이상 머릿속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는 쉬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할 일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라는 삶을 고이 접어 보내듯이, 그녀에게도 접어 보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요. ...녹턴님을 그 누구보다도 동경해왔다고."
울면서 말했었지. 아니. 말하다가 울었나. 그 때는 참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고개가 기울어진다. 지금의 자신은 감출 필요도 없이 눈물이 메말라버렸고, 당신의 케이크는 짓뭉개져버렸다. 어째서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꼭꼭 숨기느라 애썼을까. 동경이라는 말을 함부로 낭비해왔던 지난 날들을 반성해본다.
"하지만...테이프를 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녹턴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히어로로서 제가 알던 당신과, 경찰로서 제가 마주했던 당신과 전혀 다른... 그 목소리를."
그것이 당신의 목소리임을 부정하고, 부정하며, 라디오를 틀었던 나날들. 비극적이게도, 그것은 어떻게 들어도 당신의 목소리였다. 말하는 투도, 목소리도,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히어로 머리말로서, 에스터 힐데가르트로서, 클라인의 딸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몇 번이나 들으면서, 부정하면서, ...당신의 목소리임을 확신하면서. 저는 그것이 온전한 동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동경하지 않는다. ...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당장, 방금전에도 동경이라는 말을 써버리지 않았는가.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한 단어에다가 자신의 마음을 몰아넣었다. 그렇게해서 순수한 감정을 연기해왔다. 자신도 알지 못하던, 비겁하고 추악한 이면이었다. 그 속에는, 기실 그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는데.
"...죄인이라고 해도 죄와 사람을 분리해야 한다던지, 사람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변하는 존재라던지, 그 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일치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그런 말들을 되뇌이며 이상적인 존재이고자 해왔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번뇌를 숨기고자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것은 동경이 아니게 되었다고. 깨달은 것이 너무 늦어버렸는데. 동경하는 당신이라는 말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이 마음을. 이미 자신은, 추하고 더러운 마음으로 뒤덮여버렸구나. 정의가 아닌, 사심으로.
"언제부터였는지, 저는..."
말문이 막힌다. 이제서야 눈물이 나오는 걸까? 울컥하는 것일까? 그 때의 당신과 서류정리를 했던 때처럼? 아니. 아니다. 단순히 말을 꺼내는 것이 괴롭다고 할 뿐인 말라빠진 감정. 순수하게 목놓아 울 수 있었던 때는 진작에 지나버렸다. 그 때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
"당신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ㅡ
혼자 남겨지는 것은 외로웠다. 그것이 자신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라도 그 결과를 완전하게 예상할 수는 없다. 단지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할 뿐. 그래서 소녀는 가족을 잃으며 가족을 만들었다.
그것이 어린 그 애와의 첫 만남이었다. 둘만의 약속이었다. 두 사람은 남매라는 형태로 더할나위없는 가족이 되었다. 비록 법과 혈연으로 묶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끈끈하고 사이좋은 남매였다. 소년은 그러한 가족의 형태에 더할나위없이 만족했다. 더 이상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그 다음을 바랐다.
바랐기 때문에 대상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신과 가족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신을 원했기 때문에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탐욕스러운 자신을 경멸했다. 이미 나에게는 소중한 가족이 있는데.
그래서 소년에게 상담했다. 고해했다. 이 처절한 감정으로 인해 자신은 너무나도 괴롭다고. 나는 너와 이미 남매이기로 약속했는데도, 다른 가족을 원하고 있다고. 남매의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을. 소년은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그녀를 향해 말해주었다. 불쌍한 등을 토닥이면서.
그것은, 사랑이라고.
이미 소녀도 소년도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두 사람 다 여전히 너무나도 미숙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서툴기만 한 소년과 소녀지만 두 사람의 지식을 더듬어가며 그 답을 찾아내었다. 한 사람이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으로, 누군가가 겪은 적 없는 일을, 다른 누군가의 경험으로 메워가며.
그렇게 해서 사랑을 겪고 사랑을 모르는 소녀와, 사랑을 알지만 사랑을 겪지 못한 소년은 온전하게 답을 향해 나아갔다. 그 답에 소년은 만족했지만, 여전히 소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은 오고 말았다.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빼앗아가는 형벌을.
ㅡ
언제부터였을까. 동경 속에 불순한 감정이 섞여들어갔던 것은. 당신이 의심들 사이에서 몰리기 시작했을 때? 아니면 그보다 전? 트라우마에 북받친 자신의 순수를 당신이 훔쳐주었을때? 혹은 히어로로서 재회했을때? 이제와서는 알아낼 수 없을 지경으로, 기억은 뒤섞이고 말았다. 순수했던 감정의 기억들은 어느새 잿빛의 사심으로 더럽혀져버렸으니. 이제는 첫만남의 기억조차도, 처음의 감정으로 되살려낼 수 없는 것이다.
"좋아합니다."
그렇게, 동경이라는 단어 하나에 묶어왔던 온갖 갈래의 말들을 하나하나 풀어낸다. 우선은, 진부하고 가벼운 단어부터 시작하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연모하고 있었다. 그런 뻔한 말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까지. 아. 역시 자신은 말재주가 없었다. 이럴 때 에릭이었으면 어떤 말을 했을까. ...아니, 에릭은 연애감정에 가까운 사랑이라는 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지. 그것이 아직이든, 앞으로가 됐든.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것도, 어쩌면 병의 일부일지 모른다고. 에릭의 능력이라면 그런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일까. ...정말이라면, 부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를 짓는 일은 없었을텐데.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무례를 범하는 일 따위는.
"이제와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울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근, 두근 하고 심장소리가 계속해서 울려온다.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 움켜쥐어 소리를 나지 못하게 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였다. 조용한 참회실에, 누군가의 고해가 울려퍼진다. 토해내듯이.
"...주제넘은 사랑을 해왔습니다."
당신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 올라설 수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당신은 저 높은 곳에 고고하게 서서, 자신은 그것을 저 아래에서 끊임없이 동경하는 위치에. 차마 닿지 않는, 그런 곳에 있어야 했는데. 발을 땅에 붙이고, 밤하늘을 동경해야 했는데. 오만한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요한 밤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것이 감상하는 이의 예의.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나는 이 밤에 사랑에 빠져버렸노라고 소리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위 사람을 깨우고, 밤의 아름다움을 깨뜨려버리지 않는가. 침묵속에서만 유지되는 그 아름다움을.
"당신과 줄곧...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리고 눈물은 터져나온다. 오랜 가뭄이 끝나고, 잿빛 하늘은 삼킨 물기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꾸역꾸역 내리는 그것은 마을 전체를 뒤덮어버릴만한 홍수다. 줄곧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결국엔 목소리가 떨려버린다. 흐르는 눈물이 당신의 모습을 가려버린다. 다행이였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됐다. 볼 낯이 없고, 자신이 없었다. 자격 또한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흘러넘치고, 흘러넘친다. 이제는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말들이.
"처, 처음 구해주신 날부터 줄곧 동경해왔습니다. 그것이 계속 동경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다. 평범한 동경. 구원을 겪지 못했던 아직 어린아이가 가질 법한 순수하고 흔해빠진 감정. 막연하고, 순수하고, 마음을 숨기기에 좋았던 단어를, 뒤늦게나마 접어두려고 한다. 이제는 그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당신이 눈부시고, 강인하고, 거기에다가 다정하고, 너무도 멋진 존재였기에,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두근, 두근. 말을 잇는 것이 힘들 정도로 자신을 두들기는 심장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이 자리에서 당신보다 먼저 죽어버릴까, 걱정됐다. 그랬다가는 , 당신의 마지막을 더럽히다 못해 처참하게 모독하고 마는데.
"그것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변질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차분하려고 노력한다. 목이 메이고, 속이 울렁거려도, 나의 말들이 전부 당신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한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속여왔으니까. 끝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숨긴 채로 있는 게 당신을 위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말해버렸다. 토해내버렸다. 돌이킬 수 없다.
"...녹턴님과 가족이 되고 싶었습니다."
역겹다. 자신의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족이느니, 어쩌느니, 이런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들을. 하지만, 이제 마지막이니까. 손이 떨린다. 지금도 나는, 그런 만약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이야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결말이 되기를.
다음은 없었다. 이제는 처절한 배드엔딩만이 우리들에게 남았고. 체호프의 총을 부숴뜨릴 시간이었다. 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라고 하는, 극을 위한 장치는, 이제 필요없었다. 당신의 퇴장과 함께, 자신은 그것을 없애버려야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이야기는 완성도를 가졌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요했다.
"죄송합니다."
이걸로 세 번째의 죄송합니다. ...인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전에 했던 말들을 전부 잊어버릴 만큼 한 번의 눈물이 강렬했다. 첫 다과회때에는 세 번이나 감사를 표했었지.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를 되돌려주면 다른 하나를 빼앗아가는 걸까.
"용서받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다. 자신조차도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죄인을 믿은 사람은 죄인인가. 죄인을 사랑한 사람은, 죄인인가.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어야 할 동경의 대상을, 연모의 대상이라고 하는 위치로 끌어내리고자 한 자신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
"...단지, 녹턴님의 입으로...듣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연심의 대상으로 끌어내린 추악한 죄인에게 벌을.
"...그 대답을."
사랑받기를 바라다니, 가족이 되기를 바라다니, 얼마나 한심하고 추한 인간인가. 약자를 향해 구원을, 동정을 베풀어주었던 당신에게, 끝을 모르고 애정마저도 갈구하게 된 속마음이 너무나도 더럽다. 더럽기 짝이 없다. 이 새까만 마음을, 새하얀 당신에게 심판받기를.
사실은, 당신의 모든 것에서부터 사랑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퍼져나가니 겉잡을 수 없는 병과 같았다. 당신의 가족사에 대해 알게 될 때마다, 자신의 일과 겹쳐본다든지. 심지어 라디오테이프에서 재앙이 떨어졌을 때조차도, 당신의 목소리에서 사랑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심판받고 싶었다.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계속 욕심내온 사실을. 순수로 치장해 시치미를 뗐던 나날들을.
이제와서는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앞으로의 일들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에스터는 실연당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마음들을 정리하고, 참회하기 위해서. 만약에 그 만약의 만약이, 자비를 베풀어주리라는 기대따위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 욕심을, 채워주리라는 생각따위는. 단지, 고해하고 싶었을 뿐. ...자신의 죄를. 당신을 다시금 동경의 위치로 올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손이, 차마 닿지 않는 곳으로.
"...진심으로, 답해주십시오."
어차피 끝이라는 이유로 동정으로 하는 수락을, 배려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답한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각오는 되어있었다.
(녹턴-에스터)
(58스레)
당신이 그 속에 품고 있던 것은 무겁고 혼란스러운 언어가 되어서 울려나온다. 내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에요, 라며 도망치기에는 분명한 단어가 되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사랑의 속삭임에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곧게 마주쳐오는 하늘빛 시선에 사로잡혀 그 푸르게 드리운 눈동자 속으로, 일렁이는 수면 위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자그마한 숨소리조차 깊숙한 수심에 잠겨 가라앉고 마는 깊은 당신의 고백 속에서 나도 사랑해요. 하는 속삭임마저 조심스럽다. 애초에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러한 가벼운 속삭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간절한 목소리로 선명히 전해들었기에.
당신의 사랑은, 우리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며 경건히 기도하던 돈 비발디의 단단하지만 차디찬 대들보같은 사랑도 아니었고 사랑하기에 이리 모질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고백하던 아버지의 상처만 남긴 서늘한 칼날같은 사랑도 아니었으며 예쁘다, 어쩜 이리 예쁠까 감탄하며 머리카락을 빗겨주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같은 사랑도 아니었다. 가벼운 공기 중의 부유하는 사랑과는 달리 묵직하게 밀려오며 눈부시게 부서지는 파도같은 사랑이었다. 모래사장에 파고든 그녀의 발가락을 간지럽혔다가 다시 황급히 도망가고- 끝내 빠져버린 그녀를 다시 모래사장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그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드높은 대들보 위를 건너 가슴에 스치우는 아픔을 지나 따스한 손길에 나른히 고개를 기대우는 지상의 사랑을 들이키며 걸음을 내딪던 그녀를 한 순간에 나아가는 것조차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드는 사랑이다.
감히 그녀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뜨거우면서도 따가운, 동시에 부드럽게 강렬한.
뜨겁게 감겨오는 고백의 열기에 잠겨 있자니 문득 머릿속으로 아득한 먼 옛날이 스치웠다. 학교라는 곳에 다니며,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잠구고 혹여 그 위에 매단 리본이 삐뚤어지진 않았을까 염려하던 멀고 먼 순간에, 발그레한 살찐 볼을 하고 고개를 숙이던 그 아이의 풋풋하니 달게 느껴지던 꽃내음과 솔직하게 토해내던 어설프게 익은 새빨간 사과같은 감정이, 당신의 연모와 사랑이라는 뜨거운 단어들과 겹쳐 보인 것은 그만큼 당신의 사랑이 조심스럽고도 강렬히 느껴져서였을까. 이미 흐려져버린 기억의 필름들 위로 당신의 무거운 목소리가, 머금고 있던 물기가 투둑 떨어진다. 번져가는 울음에 그녀는 제 삶에 젖어온 당신을 다시 떠올리며 그 어두운 하늘과 다시 마주했다. 빛 바랜 기억의 조각들만큼이나 흐린 얼굴을 하고서, 무엇이 그리도 서글프고 힘들었던지 비를 쏟아내는 당신은 마치 때 아닌 겨울비를 흩뿌리는 먹구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그 무게를 덜어낼 수 있게 되어서.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밀어진 손은 당신의 넘쳐흐르는 감정의 홍수를 향했다가, 허공에 머물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그 끝없는 물기를 훔쳐내고 만다. 이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한 행위가 될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제 무엇이 당신의 눈을 부시게 하고 강인하다 느끼게 하였으며, 다정하고 멋지게 보였을까요-하는 말을 뱉으며 농담처럼 건네보려 했다. 당신의 그 무거운 물살을 그 가벼움에 실어 날려보내듯, 당신의 흘러넘치는 울음을 달래듯이. 하지만 다음 순간 당신의 입술 새로 뱉어진 '가족이 되고 싶었다' 라는 말에 순간 말을 잊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 그녀의 전부이자 그녀만의 정의의 근간, 그녀의 깊은 사랑과 행복의, 자그마한 솜사탕으로 이루어진 그녀만의 그리고 달콤하던 세계. 한낱 동화의 결말같은 해피엔딩을 바라며 어설프게 쌓아올렸던 모래성같은 그녀의 안식처.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저 흉한 상처로 자리잡은 그곳에 당신같은 반짝이는 영웅이 자리할 수 있을까? 혹은,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신이 과연 '가족이 되고 싶었다'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을까. 어느 쪽을 재어보건 고이 접어 내려놓은 그녀의 삶에는 새로운 시작같은 것보다는, 이제 모두 낡아빠진 끝만이 자리해야 했기에 그런 의문이 부질없음을 안다. 부질없음을 아는 손은 다시, 흘러내리는 당신의 울음을 훔쳐낸다.
머나먼 빛바랜 기억처럼, 당신의 시간도 그녀의 시간도 서로에게 나누어주기 충분했다면 당신이 이보다 조심스레 따듯하고 푹신한 단어만 골라내 고백할 수 있었을까?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지 않았다면 좀 더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같은 공상에 무르익은 따스한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서로를 가늠해보며 한걸음씩 다가가는 일을 해보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사물함을 열어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무겁게 가라앉은 사랑을 죄처럼 고하고, 하나는 영웅에 다른 하나는 사형수가 된 현실에 짓눌려 있었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의 이 순간은 고작 며칠 뒤면 끝나버리는 순간이면서도 당신에게는 기약없는 미래의 나날을 이어나갈 것이었다. -그런 당신에게, 곧 사라질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혹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나? 당신의 마지막 말에 호흡할 수 없는 물결에 잠긴 입술은 그저 보글거리는 숨을 내뱉듯 입술만 달싹이며 망설였다.
"감정이란 본디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에스터님이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같은 이를 그리 눈부시게 봐주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건네보자. 그리고 당신이 자신같은 이보다 빛나는 사람이라는 말을 곁들이고. 그러니 전혀 자신이 용서할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그녀의 언어는 조심스럽다. 당신이 이 곳을 나서는 순간 이곳에 있었던 일을 털어내고 모두 잊어버릴 수 있게 하려면 어찌하면 좋을까. 이 때만큼은 얄미운 동생의 구원이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사랑해 주셔서."
그녀는 당신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떨어졌다.
"하지만 에스터님에게는 저 같은 범죄자보다는 더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어울리십니다."
어차피 곧 져버릴 인생의 답을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조금은 매정하게 당신을 밀어내고. 이 세상에 자신같은 커다란 죄 한점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많으니 당신은 자신같은 저주받은 가족보다는 보다 행복한 가족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하면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흘러넘친 감정들은 제가 가져가 이 생명과 함께 내려놓을테니, 부디 행복하라며 미소지어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당신과 나의 마지막일테지.
(에스터-녹턴)
마지막까지도 너무나도 다정한 당신의 말을 들으며,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사랑해왔던 당신의 목소리로 소나기를 달래며, 무너진 둑과 물에 잠긴 마을을 정비할 차례다. 희망을 가진 수재민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띄워보인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말을 듣기 위해 온 것이었다. 당신이 죽기 전에야 이 용기가 난 것도, 고백이 아닌 고해에 가까운 감각이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결국, 끝까지 폐를 끼치는 셈이다.
나는, 이것으로 당신의 마지막까지 당신께 구원받았다.
이제 정말로 한동안은 휴가를 낼 생각이다. 웅웅거리는 이명과, 두뇌가 갉아먹히는 듯한 두통에서 해방되려면 우선은 쉬어야 한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조차도 머릿속의 소리는 떠드는 것을 멈추질 않으니. 그리고 에스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리없는 이별을 고한다.
당신보다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을리 없느니 하는 말은, 과한 사족이겠지. 이제부터는 정말, 이런 무거운 감정으로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애초에 발견하는 순간부터 잘라내야지. 기실 그것이 사람의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이겠냐마는.
사실은 당신의 행복을 바랐다.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것을 이루어주지 못했고 당신의 무대에서 조연은 이제 퇴장해야 할 시간이다. 마지막 무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행복한 끝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괴로움따위는 없기를.
"마지막까지, 폐를 끼쳤습니다."
길고 길었던 고해성사를 마치고, 참회실에서 빠져나온다.
- 에스터 - 블래스터 (세번째)
(57스레)
지친 몸을 비적비적 이끄는 그것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글쎄. 태엽장치로 굴러가는 허접한 장난감이 기어가는 꼴같다. 에스터는 곧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케이크를 한 손에 든 채, 그저 면회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신을 마주쳤지.
"...블래스터."
평소에는 의식적으로라도 히어로로서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였다. 히어로가 된 이상 그 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실례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고, '영웅'으로서의 그에 대한 경의의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고 호칭이 망가진 것이 그 경의가 깨졌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단지 정신이 쪼개졌을 뿐이다. 당신의 히어로 네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니. 사과한다. 블랙... ...비스트. "
좋은 아침이라는 말이 빈말로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끔찍한 날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해본다. 머릿속이 꼬여서 다시 호칭을 실수해버렸지만. 붉은 목도리를 대신한 검은색 목도리. 녹색 스웨터. 청바지. ...에릭이 붉은 목도리가 더 어울린다고 잔소리했건만. 아직 그에게 스미모토의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할 수 없었다. 말을 문장으로 잇는 능력이 심하게 퇴화해냈다. 성인이 되고,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니, 한 때는 말하는 데에 서툴었지. 이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지? 지금 말해도 되나? ...같은 것들을 고민하며 우물쭈물하다, 말해야 할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게 된 탓이었다. 소심함과 수줍음 탓이었지. 지금의 말투는 이 탓에 정립된 것이다. 딱딱해보이더라도, 해야 할 말을 간단히라도 하기 위해. 형식을 신경쓰지 않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를 중요시하다 보니.
(블래스터-에스터)
"에스터."
또 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제 스스로 좀먹는 것인지를 모르는것인가? 언제나 느끼지밀, 몸만 크고 정신적으로는 지나치게 올바르게 자랐다. 그녀에게 있어, 녹턴의 사형 처분과 빌런들과의 생사를 건 싸움은 버티지 못할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망가진다면 무슨의미가 있는거지?
"아무렇게나 불러라. 겨우 호칭 하나에, 그렇게 머뭇거리지 마. 네가 어떤 호칭으로 날 불러도, 나는 상관없다."
사실, 이름을 불렸을 때 조금 찌릿한 두통이 왔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나보다 더 급한 그녀의 상태에 신경써야한다.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모래성. 적당한 자극엔 단단해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는 빨간색이 어울린다."
자주 입던 목도리를 벗고 다른 색을 입었다는것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늘빛은 읽기 쉬우면서도 강직했으니까.
"앉아라. 이야기정도는 들어주지."
이거야 원. 당나나귀 임금님의 대나무 숲인가. 나는.
(에스터-블래스터)
"...이야기라."
너도 그런 얘기를 하는 군. 빨간 목도리. ...블래스터는 그녀와 면식이 없었으니 그 정도는 얘기해도 될까. 이야기. 이야기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미 너는 다 알고 있지 않나. 자신과 함께 그 광경에 있었으니.
"뻔한 이야기...인데."
에스터는 허탈하게 미소를 띈다. 이 표정은 최악이로군. 냉정한 누군가 봤다면 그런 평가를 내렸을 법한 얼굴이었다.
"누구나...견디기 힘든 부분이 있는 거지. 나는 그게, 사람이 죽는 광경이었을 뿐이고..."
트라우마를 지닌 동지니까 이것을 알아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하게 민폐겠지. 상대의 상처를 자신의 이야기를 위한 수단으로 쓰는 거니까. 입 밖으로 직접 내지 않았는데도, 이기적이라는 비난이 뇌를 향해 마구 꽂혀댄다. 공개석상인 머릿속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사실은 저게 다는 아니었지만, 더 꺼낼 자신은 없었다.
"...목도리라면."
스미모토와 애플파이를 먹었지. 좋은 추억이었다. 에릭과 친구가 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밝고 발랄하다가, 남매의 얘기가 나오자 어딘가 쓸쓸하게 웃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테러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물과도 같이, 그리.
"아니. 역시..."
떠올리기에는 구역질이 났다. 타인을 향하지 못하는 비난이 자기자신에게 내리꽂힌다.
(블래스터-에스터)
"종종, 나는 그 일을 후회하고있다. 그날 너를 구해준것을."
너를 그때 구해주지 말것을. 그랬다면, 네가 이리 힘들지 않았을텐데. 애초에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데. 결과론적이 말이지만.
표정이 볼만했다. 조금 짜증도 났지만, 억눌렀다. 지금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것은 없다. 삼류 만화처럼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그런 어줍잖은 감정변화는 세상에 없을테니.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라면 네 편한대로 해라. 나는 듣고, 기억하지 않겠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먹구름이 올라온다. 잿빛의 그녀를 과연 하늘빛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래도 그녀는 하늘이었다. 본질은, 그랬으니까.
"나는 너와같이 트라우마 덩어리니까, 받아주겠다."
(에스터-블래스터)
"...하하."
후회한다는 말에 웃는다. 그렇지만, 그 때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더 큰 좌절을 겪었을 걸. 지금이 아니더라도, 더더욱 이른 때에. 그리고 지금이라면, 아마 무너져버렸겠지. ...유일한 구원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에 몰아넣은 이 상황에서.
"......"
받아준다라. 너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쪽에서 이야기를 들어줬는데, 이젠 반대가 되었다. 이제 비스트가 에스터를 보고 쉬는 법을 배우라는 말만 하면 완벽하겠군. 당신이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모든 이야기를 꺼낼 순 없어도 목도리 얘기정돈 해도 되지 않을까.
"붉은 목도리는...인연이 있던 소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겨울을 따뜻하게 나라며..."
함께 애플파이를 만들어먹었거든. 그녀랑. 그런 말을 한다. 사실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목도리는 겨울동안 계속 정이 들어있었는데. 소녀를 작은 산타와 같이 여겼던 것을 떠올리며.
"...이번에, 테러범 일동중에 하나로 잡혔지만."
폭탄, RPG, 대전차 수류탄, 온갖 흉악한 무기들을 가지고 벽을 부숴대던 모습이 선명히 잡혔다. 리틀 헬메이커. 그녀의 이명. 그랬나. 사람대 사람이 아닌, 빌런대 히어로로 만나면 똑같은 사람인데도 이렇게나 바뀌어버린다. 뭐, 스쳐지나간 인연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도 좋지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준 목도리를 소중하게 두른 채, 당신을 저지하는 일 같은건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당신을 스쳐지나갔다. 다른 빌런들을 막느라 정신없어 보지 못한 척을 하며.
"뭐. 물론 고작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고작 그것, 이라고 할만큼 담담한 사건은 아니었으나, 다른 일들에 비하면 확실히 보잘것없었다.
(블래스터-에스터)
기대를 하니까 배신당하는거다. 입에서 맴돌아 내뱉을뻔 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검은색이었나. 그 빨간 목도리는 그 빌런의 선물이었기에.
"......."
눈을 감았다. 정리해보자. 에스터의 트라우마인 살해 현장 목격과 인연인 줄 알았던 이의 정체가 빌런. 그리고... 지금 상황의 추측에 의하면, 그 여자밖에 없는가.
"녹턴 드네리스."
그 여자와 너의 문제인가. 지독하게 엮였군. 에스터.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연 하나에 쉽게 흔들리고 고통받지. 착해빠진 성격으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기엔, 이 세상은 만만하지 않지만...
"그래서, 내가 도울일이 뭐지."
네가 나를 도운 것처럼 나도 너를 돕겠다.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행동이니까. 이야기를 들어달라면, 들어주겠다. 정보가 필요하다면 그 망할것 앞에서 무릎을 꿇어 얻어오겠다. 네가 생포를 원한다면, 이 라오스 전부를 뒤져서 대려와주겠다.
"고작이란 말은 하지마라. 지금 너에게 사소한것은 없다."
(에스터-블래스터)
그리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에, 철렁 내려앉는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입술을 잘근 깨문다. 그렇군. 너무 가까워져버린 걸까.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쓴웃음을 짓던 표정이 이내 굳어진다.
"......"
고작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니. 얼마전이었다면 자신이 했어도 모자라지 않은 말인데. 세상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든든하다. 다시금 조금 미소짓는다. 더할나위없는 쓴 웃음이지만.
"얘기를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과분하다."
그리고 도울 일이 없냐는 말에는 그런 슬픈 미소로 그렇게 말한다. 미소라기 보단, 뭐랄까, 웃음의 흔적을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 안 그래도 웃음짓는 부드러운 표정이 서투른데, 이런 상황이니까 제대로 된 표정이 지어질 리가 없다.
"역시 든든하네. 전에도, 나를 공격하는 자를 향해 달려들어줬고. "
아직 상처가 쑤시다. 그렇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스웨터 속살이 여전히 붕대로 칭칭 감겨있다는 것도. 대신, 고맙다는 말을 덧붙여서, 감사인사를 전한다.
"그렇지만, 녹턴님에 관해서는... 너에게 할 말은 없어."
조금은 냉정한 투로 들릴 수 있지만,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리 꺼내놓고 바닥에 치덕치덕 발라 구경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치명적인 감정이었다. 꺼내는 것 만으로도 어딘가가 뒤틀려버릴지 신경써야 할 정도로 예민한 감정이었기에, 이것을 다른 사람의 앞에서 꺼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 관한 일은 자신이 그녀와 지금 직접 이야기해야 할 일이다. 손에 들린 케이크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이런 것을 사올 일도 없게 되겠지.
"지금부터 나는 심문을 갈 생각이야.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겠지."
사실은 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의 생산성있는 주제는 없었다. 그저 이끌리듯이 지친 몸을 질질 끌며 다가가고 있었을 뿐.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아니, 그렇지만, 나방이 뛰어드는 것이 먼저일까. 불이 꺼져버리는 것이 먼저일까. 짐짓 냉정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조금이나마 침착을 되찾았다.
"다시 한 번, 고마워."
그런 말을 남기고 뒤돌아선다. 이런 초췌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블래스터-에스터)
"그런가. 나답지 않은 말이지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지."
정말 나답지 않은 말이다. 누군가를 걱정하는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지인이기에? 종종 내 대답에 답하지 못할때가 많다. 지금처럼. 그런 너에게 이런말이 도움이 될까 싶지만, 이미 내뱉어버린 말은 주워담을 수 없지.
그녀가 떠나고 이곳엔 나 혼자만이 남았다. 이 적막함 속에서 곰곰히 곱씹어보았다. 그 불안정한 몸의 밸런스와 금방 낫지 않을 상처들. 아마 억지로 붕대로 감싸 참고 있을것이다. 짜증이 몰려온다. 내 주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들에게 무슨 벌을 내려야할까.
"총체적 난국이로군."
담배 한 대가 절실해진다.
- 에스터 - 리퍼(가람 2번째)
- (58스레)
(에스터-리퍼)
"..."
에스터의 근처에 다섯명 가량이 쓰러져있었다.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를 불어낸다. 이것까진 강화로 안 되는건가. 사망자는 없었지만, 쓸데없이 벽까지 파괴한게 유감스럽다. 붙잡혀있던 세 사람은, 감사를 전하며 앞쪽 길로 도망간다.
(3명 구출)
세 사람이 도망친 방향과는 반대쪽의 길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단 것을 에스터는 눈치챈다.
(가람 - 에스터)
"~♬"
네 기분은 무척 좋았다. 왜 좋았을까, 는 넘기도록 하자. 너의 기분은 언제나 이런 편이지 않았는가. 넌 이번엔 인근 고등학교 여학생의 교복을 얻은 것 같았다. 아직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네가 걸치고 있는 그림자 코트로 가려지지 않은 곳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이 근처는 네가 이번에 새로 구한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던가. 너는 에스터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너는 에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라아ㅡ? 살인이야?"
아. 유감입니다. 너는 어쩌면 기억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높은 확률로 그럴 가능성이 컸다. 너는 한 번 잊어버리면 그것을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태연히, 에스터에게 말을 건네는 거겠지. 상대가 히어로였고, 너와 싸웠었다는 것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네가 에스터를 보는 표정이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어라, 살아있는 건가ㅡ?"
죽은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에스터 - 리퍼)
"오랜만이다."
철컥. 에스터는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Dice(1,100) : 17
"오늘은 또 누굴 죽이고 왔지? 리퍼?"
봐줄 생각이 없다. 그런 태도를 몸으로 드러내듯 대화를 건네는 동시에 총질을 한다. 살아있는 건가ㅡ라는 의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연사되는 탄환들이 당신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간다.
(가람-에스터)
"오랜만?"
너는 에스터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웃었다. 에스터를 기억하고 있었던가.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
언제나 그랬지. 네가 기억하는 일은 적었다. 너는 총알이 날아오자, 그림자로 막았다. 아, 네가 좋아하던 코트가 못쓰게 되었구나. 철퍽철퍽, 소리와 함께 그것은 네 그림자로 섞여 들어갔다.
"나? 어라ㅡ 기억 안나ㅡ"
그렇지만, 공격하는 것에는 얌전히 맞아줄 네가 아니었지. 너는 씩 웃으며 그림자로 만든 권총의 총구를 에스터에게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지.
"히어로야? 그러면 나랑 놀자! 심심하던 중이었어!!"
Dice(1,100) value : 6
제발 기억을 좀 해라. 이것아.
(에스터 - 리퍼)
"기억 못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에스터의 연사가 이어진다. 그림자 능력이라, 까다롭군. 거의 아물어가는 상처는 밴드로 봉해져있었다. 그가 남긴 상처탓에, 비스트를 화나게 해버렸지만.
"다 놀고 나면 이즈모로 가도록 할까."
끝없는 총성.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격발음이 연달아 이어진다. 지끈대는 머리와 귀울림을 모른 체 한다. 아른거리는 환영을 뒤로 하고 당신을 노린다.
Dice(1,100) : 75
(가람 - 에스터)
"악!"
총이 네 팔을 명중했다. 너는 팔을 움켜쥐었다. 아, 햇볕이ㅡ 너는 다급하게 그림자로 붕대를 감듯이 팔에 휘감았다. 햇볕에 노출되면 안되었다.
"아프잖ㅡ아!!"
너는 화내듯 말하다가 그대로 총구를 에스터에게 겨눴다. 이즈모. 그 단어를 들은 네 입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아, 히어로라는 자각이 드디어 생겼나보다. 너는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즈모가 히어로라는 것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놀자! 히어로들과 놀면 정말로 재밌거든!!!"
일단, 그건 노는 게 아니라니까. 좀!!! 네 손에 들린 그림자 총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Dice(1,100) value : 41
(에스터)
"......"
더 이상 대꾸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에스터는 입을 다문다.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 이런 녀석과 대화하는 것은 피곤하다. 괜히 말려들지 않는게 낫다.
에스터는 조금 뒷걸음질친다. 이윽고 연사한다. 수많은 금속탄환들이 당신에게 폭풍치듯 달려든다.
Dice(1,100) value : 22
가까이 다가선다. 당신의 앞으로, 앞으로, 조금 더.
(가람)
“뭐야ㅡ 왜 답을 안하는 거야ㅡ? 히어로씨, 대답 안한다고 해도 이 미모의 소년은 도망가지 않아요♡?”
네 텐션이 꽤나 높게 올라갔다는 건 생각 안하고 있는 걸까. 성격이 좀 바뀐 것도 같다. 너는 에스터가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곤 까르르 웃었다. 도망친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연사되는 탄환들을 피하려다가, 가벼운 상처가 잔뜩 생기고 있었다. 이런 자상들은 나아갈 때 즈음이면 네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늘 그랬잖은가. 너는 에스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곤 히죽 웃었다.
“히어로를 잡으면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아!”
뭘 생각하는 건데! 야! 너는 그림자를 늘렸다.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자 덩어리였다.
포박 Dice(1,100) 26
(에스터-리퍼)
"미모의 소년. 순순히 잡혀라."
당신의 말에 적당히 대답해준다. 에스터의 총질이 거세다. 반동피해를 입는다면 이미 팔이 날아갔을 정도로 쏴댔다. 그림자를 노려본다.
포박다이스 Dice(1,100) 13
"즐거워보이는군. 싸움을 좋아하게 된 계기라도 있나?"
총질을 하면서 하는 대화라기엔 꽤나 예의바르다.
((광인)가람 - 에스터)
“잡히는 것은 싫은데ㅡ 히어로에게 잡히면 더 이상 히어로들과 못 놀고 내가 갖고 싶은 것도 못 얻잖아?”
너는 에스터에게 까르르 웃으면서 말하곤 양 손을 펼쳐서 턱에 꽃받침을 했다. 이번에는 뭐 하는 건데, 야. 너는 에스터가 잡힌 것을 보곤 즐겁다는 듯 웃었다. 히어로를 붙잡은 것이 굉장히 즐거웠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 질문이 들어오는 것에는 그대로 모든 행동이 우뚝 멈춰섰다.
“이유가 있어야만 해?”
네 비뚤어진 시야에는 아직 에스터가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너는 모르겠다는 듯 에스터에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것은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일 것이다. 분명히. 그래, 너는 왜 좋아하는 걸까.
“얻을 것이 있으니까? 그리고ㅡ 혼란이 가득한 게 좋아. 있잖아, 히어로씨. 나에게는 큰 이유가 없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이 이것이라고 배웠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 뿐이야.”
아, 누가 그랬던가. 너는 광인이나 다름 없었다. 너는 양 팔을 주욱 펼쳤다.
“집, 실핀, 옷, 음식까지도 나는 이렇게 얻어. 아. 그렇지만, 역시 여러 명은 조금 다른 이유도 있어. 혼자 남는 건 외로운 거잖아?”
외롭지 않도록 해줘야지. 함께 있는 게 가장 좋아.
그러니까, 너는 여러 명이든 한 명이든 모두 죽였었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지. 궤변을 늘여놓던 너가 에스터를 바라봤다.
“히어로는 왜 히어로인거야?”
그 물음과 함께, 너는 그림자로 만든 총을 에스터에게로 겨눴다. 그래, 잡았으니까 공격하는 데에는 수월한건지도 몰랐다.
Dice(1,100) value : 88
에스터 중,경1
가람 중1
(머리말-리퍼)
"......"
목 부근에서 피가 흐른다. 이런, 조금만 잘못맞았다간 위험했다. 급소를 피해갔지만, 꽤나 큰 부상이다. 에스터는 몸을 움직여본다. 얇은 그림자처럼 생겼는데, 예상외로 단단하다.
"너는 나와 다르군."
그림자 속에서, 총을 뽑으려 노력해본다.
"나는 질서를 사랑한다. 약한 사람을 구하기를 바라고, 불안에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상대는 광인이었다. 대화는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되뇌이듯이, 그런 말을 그를 정면으로 보며 읊는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 자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 당신을 처형대에 올리더라도, 해야만 하는 것.
"그러니까 너와는 적대해야 한다."
(가람-에스터)
“이해할 수 없네ㅡ 역시 히어로는 그런걸까ㅡ”
너는 마치 묻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것치고는 너무 평이한 톤이라서 문제였지. 아, 너는 오히려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불안과 공포에서 평화를. 너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불안, 공포, 죄악, 죄책감 따위는 네가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히어로가 사랑하는 건 나는 사랑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애초에 네가 사랑을 이해하는 건지는 넘기자. 너는 에스터가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걸 봐도 웃었다. 너에게선 전부 재미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 너는 그랬다.
“나는 혼돈을 사랑하고 히어로는 질서를 사랑하니까, 질서를 어지럽히면 히어로들은 더 나와 잘 놀아주는 걸까?”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내려졌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여전히 웃으면서 그림자 총을 에스터에게 겨눴다. 적어도 너는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생각해, 히어로씨?”
질문과 함께 방아쇠가 당겨졌다.
Dice(1,100) value : 85
에스터중2경1
가람중1
그리고 당신의 총은 에스터의 옆구리를 관통한다.
흉한 신음소리를 토한다. 얼마전에 칼을 맞은 부위였다. 숨이 가빠진다. 하지만 결코 기죽지는 않은 채, 당신을 노려본다.
"너는 아픈 것을 싫어하는데, 어째서 타인을 상처입히지."
두 손으로 총을 겨눈다. 허리에 남은 총 하나가 걸려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의 급소를 관통하길 바라며, 쏜다.
탕.
Dice(1,100) 96
"그랬다가는 너 또한 누군가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르고, 타인도 아파 괴로워하게 되지 않는가."
통하지 않을 말이라는건 알고 있다.
에스터중2경1 가람중1치1
(가람-에스터)
“아하핫ㅡ 히어로씨 엄청 힘들어 보여!”
너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 들려오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곤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모르는구나. 히어로씨.”
네 그림자가 일렁였다. 너는 웃음을 뚝, 멈추곤 에스터를 바라봤다. 네 눈에는 분명 광기가 가득 찼을 것이다.
“나는 아픈 게 싫지만ㅡ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하는 거잖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신경 써야 하는 거야?”
너를 두고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너는 그냥 광기에 몸을 맡긴 광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총에 맞아서 피를 토하는 거겠지. 너는,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꽉 쥔 채 히죽 웃으면서 그림자로 다시금 포박을 시도했다. 왜 포박하려는 거야? 어라, 무시하지 마. 야. 야 임마.
포박 다이스 Dice(1,100) 82
ㅡ
(에스터-가람)
"......"
이 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광기어린 눈을 보며,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린다. 계속 미소짓고 있다가 싹 굳어지는 얼굴. 그래서 말 대신, 총을 겨눴다.
"폭력이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번다던가, 일할 수 없다면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던가, 다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지."
철컥, 총구를 당긴다. 하지만 당신이 더 빨랐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림자가 에스터의 손목을 잡는다.
탕. 총을 쏴본다. 그림자를 향해 저항하듯이.
Dice(1,100) 21
(가람 - 에스터)
"으응ㅡ 그래도 가장 빠르고 확실한 건 이 방법이잖아?"
너는 에스터의 말에 여전히 웃으면서 되묻듯 말했다. 아, 너는 말이 통하는 쪽이 아니지. 참.
"거기다ㅡ 나는 한 번 잊으면 기억이 정말 안 나. 이게 가장 큰 안정감을 주니까 이 방법을 쓰는거야"
너는 해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에스터에게로 걸어갔다.
"아마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ㅡ 나도 맨날 코트로 입고 다니니까?"
네 시선이 쓰러진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 제발. 참아봐. 그 사람들에게서 갈취할 생각은 좀 접어.
"히어로씨도 엄청 힘들어 보이는데...ㅡ"
팔이 여전히 아픈 듯 너는 몸을 골목 벽에 기댔다. 생각해 보니, 근처에 네가 이번에 구한ㅡ사람을 죽여서 얻은ㅡ 집이 있었다. 너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듯 에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근처에 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히어로씨 치료해줄까? 아마도 치료할 수 있는 것들은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다음에 또 같이 놀면 재밌겠다!"
이걸 완전히 놀이로 인식하고 있는 것부터가 일단, 문제 아닐까.
ㅡ
(에스터 - 가람)
(속박저항다이스 값 35. 82이상이야 풀림)
"......"
쓰러진 사람에게 향하는 당신을 그저 지켜본다. 그러고보니 이 난리를 치는데 아직까지 기절해있군. 아니면 죽을까봐 기절한 척 하는건가. ...아. 하나가 꿈틀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당장, 지금도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힘든 기색은 커녕 여유로운 소리나 하고 있다. 일단은 이 그림자를 풀 방법이 묘연해보이니, 얌전히 따라가볼까. 속박이 풀리는 순간을 노려 기습해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을 자꾸 잃어버리는 건가."
자신을 기억못한 것도 그렇고, 본인의 말로도 그렇다하니 물어본다.
(여기까지 58스레)
(59스레)
(가람-에스터)
“앗! 움직였다♡”
너는 꿈뜰거리는 사람을 보곤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었다. 가져갈 것인지 고민하던 너는 포기한 듯 손을 대지는 않았다. 지금도 치명상을 입은 상태고, 피를 더 이상 쏟으면 그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너는 휘청이다, 에스터를 바라봤다. 그 말의 뜻을 생각하듯 가만히 바라보던 네 벽안이 곱게 휘어졌다.
“나는 잊는 게 많은 거야ㅡ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귀찮아지는 일들이 많잖아?”
너는 언제나 잊는 게 많았다. 그래서 순순히 대답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면서, 교복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것도 세탁해야겠네, 그렇지?
“어울려♡?”
실없는 소리가 하나 더 늘었다. 너는 여전히 키들대며, 속박했던 그림자를 풀었다. 어, 공격당할 것 같은데 말이지. 너는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 공포나 불안 따위를 느끼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저ㅡ쪽이야. 아하하하ㅡ 나도 이제 어질어질 하네ㅡ”
아닌 척을 해도 계속 피가 흘렀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에스터-리퍼)
"......"
묶인 상태로 순순히 따라나간다. 교복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옷을 좋아하는 걸수도 있고, 보이시한 여자일수도 있지...아. 아까 미소년이라고 말했으니 전자겠군. 본인이 오해를 자주 받다보니 이런 부분에서 편견이 없었다.
기억하고 있으면 귀찮은 일들이라, 사실이었다. 트라우마때문에 치료를 받을 예정이던 에스터로서는 무척 공감되는 말이다. 지금도 이명이 울린다. 웅웅댄다. 그리고 당신이 그림자를 풀자, 공격을 시도한다.
Dice(6,94) 84
"유감이군."
논리가 통하지 않는 쾌락살인범에게 필요 이상 자비를 베풀어주고 싶진 않았다.
가람-치1 중2
(가람-에스터)
"어라♥? 너무 잘 어울려서 할 말을 잃은거야?"
아니, 그것은 아닐거라 확신한다. 애초에 남이 입던 옷을 빼앗았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너는 에스터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한 번 더 총에 맞았다. 아, 더 공격당하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네. 너.
"너무하ㅡ잖아!"
분노를 터뜨리듯 너는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림자로 붕대마냥, 감았다고 하더라도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까 전부터 상처를 감았던 것이 모자란 것처럼 주륵, 흘렀다.
"정말 너무해! 치료해주려고 했는데ㅡ"
너는 너무하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그대로 주륵, 미끄러졌다. 아, 다행이네. 네 집이 근처에 있잖아. 너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대로 더 놀았다가는 앞으로 못 놀 것 같네...."
너는 에스터를 바라봤다. 뭘 말하려는가 싶었냐만, 아마 그것은 한 마디였을 것이다.
"다음에 또 놀까?"
그때까지 네 기억이 온전하겠느냐만.
ㅡ
(에스터-가람)
"다음에 또 놀까."
에스터는, 그렇게 말한 뒤... 당신을 1인 안기 운송법으로 들어올린다. 흔히 '공주님 안기'라고 하는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즈모로 가자고. 거기에 너랑 놀아줄 히어로가 아주 많으니까. 나는 지쳤다."
그 상태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빈사 직전의 여학생 교복을 입은 180센티 남자빌런이, 마찬가지로 꽤나 다친 191센티 여자히어로에게 공주님안기로 안겨 잡혀간다는 요상한 광경이다. 누가 보면 사진을 찍을지도.
"자. 너는 다쳤으니 특별히 안아주겠다."
기실 다치게 한게 본인이다만. 요상한 사고방식인 사람과 싸우면서 이쪽도 생각하기가 좀 귀찮아진 모양이다. 아이달래듯 너를 달래며 이즈모로 향한다.
"도망친다면 다시는 못 놀줄 알아."
...돌려말했지만 꽤나 험악한 말이다.
(날뛰는 가람 - 진정하는 에스터)
“다음에? 다음에ㅡ!!!”
너는 신난 듯 말하다, 에스터에게 들려지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너도 조금 말이 통하는 걸ㅡ
“이렇게 안기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부끄러운데...♡”
얼굴을 붉히며 너는 쑥스럽다는 듯 에스터에게 안긴 채로 말했지. 아. 잊고 있었습니다. 네가 굉장히 가벼운 성격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즈모로 가면ㅡ 히어로들 엄청 많으려나ㅡ”
어쩌면, 너는 빌런들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에스터의 품에서 버둥거리다, 다시는 못 놀 줄 알라는 말에 행동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입을 삐죽였다.
“놀고 싶은 사람에게 못 놀게 하는 건 너무한 거야, 히어로씨ㅡ”
일단, 네가 노는 것은 노는 게 맞는지가 문제지만. 너는 못 노는 것은 싫었는지 정말로 얌전하게 잡혀갔다. 자, 너는 언제 다시 탈출할까. 아마 심심해지면 나오지 않을까.
일단, 너는 네 기억 상으로 이즈모로는 처음 갈 것이다. 아마. 네가 기억하지 못하니까 매번 처음이겠지만.
- 에스터 - 미야(2번째)
- (59스레)
(우푸라는 소녀는, 팬시리즈 독백에 나온 모브캐릭터입니다.)
(조금 가라앉은 팬입니다!에서 이어집니다.)
(에스터)
"...정말로 위로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눈가가 붉은 소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옆에 있는 에스터와 함께.
"에스터님에게는 밝고 귀여운 팬이고 싶어요. 그게 제 역할인걸요. 왜냐하면, 저는 애초부터 그러기 위해서 에스터님을 좋아한 거니까."
그런 말을 하는 목소리가 어둡다. 그러기 위해서 좋아한 거라니, 어떤 의미일까. 우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에스터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인가. 그런 기분이라면 에스터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소녀를 에스터는 바라본다.
"...맞은 것도, 저 때문이에요."
에스터를 따라갔던 그 날. 벤치에서 괴로워하는 에스터에게 인사를 한 뒤 뛰어간 소녀는,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무참하게 한 대를 얻어맞았다. 가족이라느니, 집이느니, 그렇게 생각해왔던 자신이 바보였다. 나에게 돌아갈 장소는 없는 거야.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쓸모를 가지지 못한 나의 잘못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소녀의 손 위에, 에스터의 손이 부드럽게 올라간다.
"그런 말은 너 자신에게 가혹하지 않은가."
개과의 얼굴을 한 소녀. 우푸는 에스터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세로동공의 동물같은 노란 눈동자가 거대한 영웅을 바라본다. 부드럽고 슬픈 눈을 한, 눈물 빛깔의 영웅.
"......"
...그런 대화를 하고 있던 도중,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에스터는 순간 긴장해 전투자세를 취하고, 소녀는 쫑긋 하고 몸을 긴장시킨다.
(미야)
"언니야~ 나 보고싶었... 아, 들켰네..."
살금살금 가서 껴안아줄 생각이었나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패했군. 머쓱해서 볼을 긁적인다. 이내 에스터의 옆에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어라, 누구지?
"누구에요? 동생 이라기엔 너무 안닮았는데. 설마...?"
아니다, 이 인간아! 무슨 상상을 하고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아이의 하늘빛 눈동자는 갈 곳을 잃는다.
"그, 둘이 좋은 분위기였다면 미안해요! 풍선 요정은 빠르게 사라져 줄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요!"
몸을 돌려 도망가려한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한거같은데, 목돌미라도 낚아채서 잡는게 낫지않을까?
(에스터)
"히익!"
...앗.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우푸가 급하게 도망갔다. 이런.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강아지라니. 소녀는 수풀을 헤치고 파득파득파득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간다.
"...팬이라고 한다. "
에스터는 뭐야, 밤비였나. 라고 생각하면서 공격자세를 푼다. 최근 너무 예민해져있다. 그리고 저 멀리 사라지는 갈색 강아지...같은 것에 대해 미야에게 설명해준다. 역시 라오스에서는 개보다 고양이가 강한 모양이다. 고양이 짱짱.
"...그렇지만 저렇게까지 도망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우푸(라는 애칭의 팬)이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강아지 털같은게 남아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미야-에스터)
"엫, 팬이요? 아... 오해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해서 살짝 미안해졌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도망갔는데.
"아하하, 귀여워. 강아지같다. 겁쟁이 스탠다드 푸들~"
키득거리며 우푸가 간 곳을 바라본다. 그렇게까지 큰소리를 낸거같진않은데, 심약한 친구인가보다.
"귀신인줄 알았나? 나처럼 귀여운 귀신이 어딨다고, 그쵸?"
굉장히 뻔뻔한 소리를 한다. 이런, 어떻게 저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걸까. 이 또한 요 조그만 녀석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넘어가 주자.
(에스터-밤비)
"그러게. 겁이 많은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는 너는 고양이같다던가 말하면 실례겠지.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설마 수풀속에서 지켜보거나... 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조금은 오싹해진다. 에이. 설마. 역시, 아프기 때문이다.
"아. 맞다. 전의 재판 증거, 고마웠어. 덕분에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끝은 참혹했지만. 자신의 의심제기가 타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희생될 필요는 없었다. 다시 울렁거린다. 멍하니 있던 에스터가, 조금 비틀거린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덩치차이인 당신에게 쓰러진다면 너무 민폐니까, 이마를 부여잡으며 다시 일어나지만.
이명이 웅웅거린다. 그러고보니, 오늘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이 근처에?"
하지만 다정한 눈을 지어내보인다.
(미야-에스터)
"정말요? 에헤, 별 도움도 안됐을텐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싱긋 웃어보인다. 물론 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그때의 일만 봐도 분명 엄청난 사람이 죽었겠지 싶었다. 어쩐지 미안해져버린다.
"언니야...! 괜찮아요? 어디 아픈거야?"
에스터의 몸이 흔들림과 동시에, 혹시나 하는 경우의 수를 대비해 그녀가 넘어지지않도록 몸을 꼭 껴안는다. 아, 안넘어져서 다행이다. 분명 넘어졌으면 저번에 자신이 그랬듯 손 같은 곳에 상처가 났을테니까. 아이는 에스터를 걱정된다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까치발을 들어 자신과 에스터의 이마 온도를 비교해보곤, 고개를 갸웃한다.
"역시 이걸론 모르겠네... 으응, 그냥 산책 겸 돌아다니다가요, 언니야의 예쁜 머리가 보여서... 으앗! 미, 미안해요! 멋대로 손이...."
아무 생각 없이 여전히 까치발을 들고 에스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다 자신이 뭘하고있는지 자각했던 걸까,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뗀다. 부끄러워 하고있다.
(에스터-미야)
"......"
웅웅대는 이명. 머릿속을 갉아먹는 기억들. 자괴감.
모든 것들이 한 데 섞여 날카롭게 에스터를 찔렀다. 괜찮아졌다고 말하기엔, 여전히 괴로웠다. 이건, 자신의 탓인가.
'...그건, 당연한 거에요.'
옅은 노란빛 눈이 그렇게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괴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 찔리면 다치고, 다치면 아픈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그러니까, 쉬어야 한다고.
...정말로, 휴가를 내야 겠군.
"...괜찮다."
머리가 아프고, 귀가 울려대지만,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내본다. ...전투중에 이랬다가는, 분명히 처참한 꼴이 되겠지. 생각을 삼키며.
예쁜 머리라니, 자신의 머리가 예쁘게도 보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상냥한 쓰다듬이 다가온다. 화들짝 놀라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크게 움찔한다.
"......!!?!?"
...쓰다듬에 익숙하지 못하다.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야, 어릴 적 이후로는 쓰다듬어진 적이 없으니까.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평균 키를 훌쩍 벗어난 그녀였다.
(미야-에스터)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거야? 아닌거같은데. ...모르는 척 해줄까. 그치만 좋음>별로>나쁨>괜찮아 랬는데.
"진짜죠? 몸이 재산이란 말도 있으니까, 아프면 안돼요~ 수현 오빠야가 괜찮다고만 하면 안된다고 그랬던거 같은데?"
맞나? 이런데서만 기억력이 안좋아지는 아이였다.
"놀래라... 우아앙, 미안해요~! 이렇게 까지 놀랄줄은 몰랐어! 쓰다듬는거, 싫어해요...?"
어쩌지, 어쩌지 하며 콩콩 뛴다.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에스터의 손을 꼬옥 붙잡고 시무룩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뭔가 반짝반짝한 효과가 뒤에 보이는건 기분 탓일까?
ㅡ
(에스터-미야)
"......"
수현... 그 의사인가. 역시 의료인이라고 할까. 에릭과 똑같은 얘기를 하는군. 지끈거리는 머리로 괜찮아. 라고 웃어보이려다가, 문득.
"...쉬면 괜찮아질거야."
걱정끼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해져야겠지. 에릭을 떠올리면 마음이 약해진다.
웅웅대는 머리. 이명. 트라우마의 광경.
"...아, 아니. 싫어하는 건 아닌데."
반짝거리는 눈에 당황한다. 미야는 에스터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다들 에스터를 너무 잘 아는 것이다. 과격한 사람이면 넌 나를 너무 알아버렸다며 총을 겨눴을지 모른다. 그녀가 불살주의에다가 이성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그, 그... 쓰다듬어지는 것에 익숙하질 않아서..."
붉어진 얼굴을 긁적이며, 눈을 피한다.
ㅡ
(미야-에스터)
"응, 푹 쉬어야해요! 많이 자고, 많이 먹고!"
약같은 걸 먹는다는 발상은 안하나보다.
"언니야 진짜.... 너무 귀여워어~!!"
싫어하지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다가, 에스터의 말을 듣고 파핫, 하고 웃더니 꼭 껴안고 부빗거린다.
"그럼 밤비가 앞으로 익숙하게 해줄까요오~?"
장난스런 얼굴로 에스터를 쳐다본다. 이 녀석, 쓰다듬어줄 생각으로 가득차있다!
ㅡ
(에스터-미야)
"!?"
이번엔 부빗당했다! 또다시 움찔! 에스터는 호의로 인한 애정행각에 취약했다! 이런! 완전히 밤비가 에스터 머리꼭대기 위다.
"대,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거지!? 이런...덩치...외모...말투에!?"
당황스러운지 말을 필터링없이 쏟아낸다. 본인이 귀엽다니 전혀 상상도 못한 결론이라는듯이. 대체 왜...? 에스터는 고뇌한다. 귀염성같은거 조금도 없단 소리를 들어온 자신이라 자부했건만.
"아, 아니. 거절한다!"
말을 더듬지만 단호하게 소리친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고. 그만둬...아. 이 순간조차 머리는 아파온다. 귓가에 무언가가 속삭여댄다.
'지금 밀어낸다면, 결국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른 체 해버린다.
ㅡ
(미야-에스터)
"전부 다요. 언니야 너무 좋아! 완전 내 취향인걸!"
원래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귀여워 보이는 법이다. 놓지 않겠다는듯 조금 더 세게 안는다. 에스터한텐 간지럽지도 않겠지만.
"자신감을 가져요, 언니야! 언니야는 충분히 귀여운걸? 그리고, 어... 잘생겼고, 또 친절하고!"
까치발을 들어 에스터의 머리를 또 쓰다듬는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보인다.
"거절은 거절한다! 아하하, 토마토같아. 얼굴 엄청 빨갛네요?"
ㅡ
(에스터-미야)
"......!?"
이번에는 껴안겼다! 고양이같다고 생각했는데, 개냥이에 가까운 것 같다! 물리적인 타격은 어떨지 몰라도, 심리적으론 효과가 굉장했다! 이제는 땀까지 흘리고 있다!
칭찬세례에 그...그...나는...딱히...그렇지는...이라며 말을 흐트리고 있다. 빌런에게 완벽히 제압당한 히어로다.
"얼굴...빨갛...아. 진짜. 뭘 하고 싶은거야!"
화내는 톤으로 말해보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화낸다기 보단, 끼야악! 을 대신하는 소리라는 느낌.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던 에스터는 다시 벤치에 털썩 앉아버린다.
(미야 - 에스터)
"아닌데에~ 맞는데에~"
에스터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곤란해 하는걸 즐기고있다.
"우엥, 무서워!"
눈을 가리고 우는척을 해보인다. 에스터를 놀리는 재미에 눈을 뜬걸까. 그녀의 옆에 걸터앉고 싱글거리며 바라본다. 곤란해하는걸 즐기다니, 빌런녀석! 사악하다!
"앗, 붉어진 언니야 모습도 엄청 귀여워!"
김치~ 하더니 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도 곤란하다면 지우겠단 말을 덧붙인다.
(에스터 - 미야)
당신이 우는 척을 하는 것을 보고 에스터는 당황한다. 울려버렸나?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인데, 언성을 너무 높였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당신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보인다. 속았구나! 빌런! 41cm나 작은 빌런에게 농락당하는 히어로가 있었다.
"...지워줘."
에스터는 얼굴을 가려본다. 놀려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진까지 찍히다니!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그...이, 이런 것보다도, 산책을 하는 중 아니었나...?"
자신을 놀리는 것 외의 흥미를 찾아주려고 노력한다. 에스터의 최대의 방어행위였다.
(60스레)
(미야-에스터)
"아껍다, 모처럼의 희귀한 사진인데~ 그치만 언니가 싫댔으니까 지울게요."
뭇내 아쉽다는 얼굴로 사진을 지운다. 그래도 머릿속에 저장해놨으니 괜찮겠지. 에스터를 빤히 쳐다보고는 다시금 자신의 이마와 에스터의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열이 조금 있는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너무 안좋으면 병원에 가봐요, 언니야."
얼굴이 좋지않다는걸 알아챘는지 더이상 깝죽거리는건 그만둔다.
"언니야를 봤는데 산책이 중요해요?!! 당연히 언니야가 만배는 더 중요하지!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걸 느꼈지만, 그렇게 순순히 넘어가주면 풍선 요정이 아니다.
(에스터-밤비)
"......"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까. 괜히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은데. ...지나가듯이 언급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애초에, 사실이니까.
"테러 이후, 이명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무게있게 나와버리는 말에 스스로도 약간 놀란다. 생각하는 것과 생각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말로서 형태를 갖춘 생각은, 자신에게 또 다시 일깨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괴로웠구나.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스스로가 괴로운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두통이. 이명. 테러의 광경. 나를 향해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괴롭다. 고작 일주일만에 이것이 자신에게 당연한 기본상태가 되어버렸다. 다시 머리를 부여잡는다.
"휴가를 냈어야 했는데, 내가 쉬는 사이에도 누군가가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괴로웠고...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게 자책이 들어... 정신차려보니, 이 상태로 평소 이상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집착하듯이. 속죄하듯이. 이렇게 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되뇌이며, 자신을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굴릴수록 정신은 더더욱 침식되어가고, 그럴수록 자괴감은 악화되어만 갔다.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연쇄속에서.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습관적으로 사과가 튀어나와버린다. 단순히 무거운 말로 부담을 주게 돼서? 아니. 이것은 분명, 자괴감에서 나온 말이겠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미야 - 에스터)
"아..."
두통과 이명이라니. 에스터의 담담한 듯 하지만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마음이 아려온다.
"언니야, 뭐하는거야. 언니야 혼자만 히어로인거 아니잖아요. 파크도 있고, 진저 오빠야도 있어요. 혼자서 떠맡으면 그건... 그건 누구라도 못버텨. 초인이라도 그건 안돼."
에스터가 안쓰러워져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더 이상 고생은 그만하고 쉬라고 말하고 싶은데.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내가 뭐라고?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래도 걱정끼치지않게 울지말자고 되뇌인다.
"왜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하지않아도 돼요.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기대줘요. 작은 몸이지만, 빌런이지만... 힘이 되주고 싶어. 함께 무너진다 해도 받쳐주고 싶어. 자신을 탓하지말아요, 응? 꼭 착한 아이가 아니어도 되니까..."
작고 짧은 팔로 에스터의 몸을 끌어안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에스터 - 밤비)
"......"
작은 풍선요정은, 거대한 에스터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으로 정한 모양이다. 에스터는 놀림받는 걸 멈추고 싶긴 했지만서도,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화제를 바꾸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만이 히어로인건 아니지만, 내가 쉰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게 돼."
그래서 이 쪽도 나름대로 그렇게 의견표명을 해본다. 그리고, 진저와 파크도 둘다 지금 힘든 상태일게 분명하고. 이 말이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가져다줄진 모르지만. 또 다시 재판의 시작인가.
"...밤비."
고맙다는 말이 바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우물댄다. 그래서 우선은 행동으로 마음을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허리를 조금 숙인다. 작은 고양이를 자신의 두 팔로 조심스레 끌어안는다.
고마워, 라는 말이 작게나마 입 밖으로 형태를 갖춘다.
(미야-에스터)
그런거, 몰라. 난 언니야가 더 중요한데. 생각은 말이 되지 못한채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왜 자기 먼저 안챙기는거에요. 바보, 언니야는 바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마 에스터의 온기를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부끄러운듯 작게 감사인사를 하는게 너무 고마워서, 또 무력한 자신이 미안해서 더욱더 서럽게 운다.
"미안, 해요... 안울려고했는데. 근데... 울고싶은건 언니야일텐데. 난 맨날 어리광이나 피우고..."
계속 이러면 안된다 생각했는지 계속 히끅거리면서도 울음을 멈춰간다.
(에스터-밤비)
에스터는 밤비를 토닥토닥 해주며, 씁쓸하게 미소짓는다. 며칠만에 울고 있는 사람을 달래주는 입장이 됐군. 자신도 조금은 성장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쓸어내려간다.
"미안하다."
그렇게 사과한다. 자신을 챙겨본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지. 성장 과정도 그랬고, 히어로라는 직업도 그랬고. 어릴 때는 자신이 괴로워한다고 울어줄 사람이 없었고, 지금은 남을 구하려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직업이니까. 에릭도 이 건으로 꾸준히 잔소리했는데. 자신을 챙기는 법을 배우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애가 에릭하고도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에 솔직한 점. 장난끼와 발랄함이 드러나는 점. 무엇보다도 이런 자신을 이렇게나 신경쓰고 챙겨준다는 점. 쓴 웃음은 어느새 비교적 부드러운 웃음이 된다. 여전히 서글픈 눈이었지만.
"울어도 돼. 내가 울지 못하는 만큼 실컷 울어주렴."
심문실에서 마지막의 눈물을 잔뜩 토해냈다. 더 이상 사람의 앞에서 울면 꼴불견이겠지. 다시는, 울지 않을 것이다.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 이미 눈물은 말라버렸고, 울 장소는 사라져버렸다. 홀로 울지 않는 한 울음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아직 어린 네가 대신 울어줘. 이기적인 부탁을 삼켜본다. 울 수 없는 자의 온기가 당신에게 건네져간다.
(미야 - 에스터)
"자꾸 미안하다고만 하고. 언니야는 진짜 바본데, 그런데..."
싫어지지가 않아서. 자꾸만 좋아져서 견딜 수가 없다.
"진짜 짜증나... 안되겠어. 나도 히어로 되서 언니야 무리하는지 안하는지 지켜볼거에요."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고여있던 눈물을 닦는다. 드디어 결심이 선걸까. 더는 울지않겠다며 의지를 바로 잡는다.
"...언니야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어요."
(에스터 - 밤비)
작은 당신의, 붉어진 눈가와 솔직한 말을 쳐다본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이번에는 슬픈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미소였다.
"그래. 고마워."
조금은 표정이 부드러워진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며 다시금 미야의 등을 쓸어준다. 히어로가 되어준다니, 든든하구나. 굉장히 어려운 생각이었을텐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곳에 미야가 들어오게 해도 될까 걱정도 된다.
"...이즈모라는 직장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니야.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빌런보다 더 더러울지도 몰라."
"파괴가 아닌 구원을 명분으로 삼다보니, 공식적으로는 올바른 행동거지를 보이고 있을 뿐."
"...거기다가, 위험하다는 것도 분명하고."
빌런을 그만둬주는 것은 고맙지만 역시 이즈모는 위험한 곳이었다. 최근에는 그 생각은 더더욱 짙어졌다. ...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금 누군가의 판결에 대해 생각한다. 역시, 괜찮은 척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의 다짐이라면 내가 말릴 수는 없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너무 겁을 주는 걸까. 나를 위해서 히어로가 되겠다고 말해주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무거운 말들만 늘어놓는게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그러면서, 문득 차가워진 손을 쥐었다 펴보다 생각한다.
"날씨가 춥네. 계속 밖에 나와있는거 괜찮니?"
다정한 말투로 당신을 불러준다.
(미야-에스터)
"나야말로 고마워요..."
에스터의 웃는 얼굴은 정말 너무 치명적이다. 붉어진 눈매만큼이나 귀와 얼굴도 붉어져서 손으로 얼굴은 가린다.
"더러우라 해요. 윗대가리가 그렇죠. 그리고 뭐... 빌런보다 위험하겠어요?"
수틀리면 다 죽여버려, 그냥. ...역시 이 말은 안하는게 좋겠다. 위험해도 에스터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런건 개의치않는다. 뭐! 죽여보던가! 사람이 패기가 있어야지!
"괜찮아요. 사람이 생각없이 굴수도 있는거 아니겠어요? 사실 원래도 생각안하고 잘살았으니까..."
말끝을 흐린다. 바보같아 보였을까. 선 생각 후 행동이 기본인데, 반대가 되버렸다.
"풍선 요정은 감기같은거 안걸려요! 멀쩡하다구요, 에헴!"
에스터의 걱정을 싹 없애버리듯 당당히 대답한다. 이러다 감기 한번 지대로 걸려봐야 정신차리지.
ㅡ
(에스터 - 밤비)
이제는 이 쪽이 토마토가 됐다. 놀림받는것은 싫으니 이 쪽도 놀리거나 해서는 안되겠지. 강인한 대답을 보고 조금이지만 안심이 됐다. 본인이 결정한 일이라면 자신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구나."
풍선요정이라는 말에는 살짝 소리나게 하하, 웃는다. 그래. 내가 걱정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이런 아이랑 함께한다면, 머리를 울리는 이명마저도 웃어넘길 수 있을 테지.
"그렇지만, 추우면 안 좋으니까 이만 들어가자.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풍선요정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문득 생각나서 말을 꺼낸다.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준다면, 나는 그런 너를 지켜주도록 하지."
의지하기만 한다면 안 되니까. 이 쪽에서 도움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있어야겠지.
(미야-에스터)
"언니야는 웃는 얼굴이 제일 잘어울려요."
아, 또 얼굴이 붉어진다.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해본다. 에스터가 내밀어준 손을, 친절을 놓치지않겠다는 듯 꼭 붙잡는다.
"그럴까요? 에헤, 왕자님같아..."
멋진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에스터를 생각해본다. 오, 좀 멋진데? 안멋질수가 없지만.
"..."
너무 설레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한껏 익어버린 얼굴을 푹 숙이며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얼마나 세게 잡든 아프지도 않겠지만, 분명 쑥스러움을 이리 표현하는거겠지. 지켜지지 않을만큼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다.
- 에스터(17)블래(14)파크(27)
- (61스레)
(이벤트중의 3인일상.)
(롤백으로 인해 중간중간 날아갔습니다.)
(에스터/17)
...에릭에게서 호신용품을 받고 오랫동안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단독외출 허가가 내려졌다. 정말이지. 고작 이 정도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이라니. 이래봬도 사격실력은 그대로인데. 전기충격기가 코트 안주머니에 소중히 들어가있다.
에릭의 옷을 받아 입었는데, 조금 크다. 갈색 더플코트와 검은색 츄리닝바지를 입은 채 길을 돌아다닌다. 최근에 어째선지 두르지 않고 다녔던 빨간 목도리도 에릭이 꽁꽁 싸매줬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 익숙한 꼬마가 벤치에 앉아있다. 잠깐. 설마.
"비스트?"
아니, 혹시 기억까지 잃어버렸으면 어쩌지. 그래서, 다시 고쳐 불러보도록 한다.
"...블랙?"
ㅡ
(파크/27)
생각해보니 결국 버블건은 못샀다. 사고싶었는데 아깝다. 하여간 몸이 꽤나 강해진것 같았다. 뭐 근육량이 엄청 늘어버린것 같다. 17살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능력이란거 말도안되는 거였구나....."
키나 골격만이 아니라 근육량까지 성장해버리다니. 파크는 길을 거닐다가 벤치와 그 근처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손까지 흔들며 인사한다.
"블래형 에스터누나! 안녕하세.....요......?"
잠깐, 블래형하고 에스터누나가 아닌가? 비슷하게 생겼는데! 너무 어린데!? 파크는 머리에 혼란이 왔다. 둘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어렸다. 몰론 자신이 커버린 탓에 그렇게 보이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에스터를 보니 키도 그렇고 체격도 그렇고 너무나도 작아져 마치 형과 누나의 동생들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엄........에스터누나랑 블래형.....맞.....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어버렸다. 아 아니면 진짜 이불킥을 몇십번은 찰것같은 분위기다.
ㅡ
(블래스터/14)
"니들 뭐야."
귀찮아 보이는 인간 두명. 에스터라고 불린 저 하늘색머리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키가 멀대만하게 큰 인간은 나를 블래형이라 불렀다. 사람 잘못봤겟지 멍청이들아. 내가 어딜봐서 형이고, 사람이랑 사귈 법한 인간으로 보이냐. 우연히 이름이 비슷한 것도 대단하지만.
"꺼져. 니들 뭔데 아는척이야."
세상 만사가 다 싫다. 어떤 정신나간 후견인에 이젠 저런 아저씨까지 날 잡으러 오는거야? 하. 재수 옴붙었네. 그냥 튈까?
"그것보다, 너. 어떻게 내 이름 아냐?"
ㅡ
(에스터/17)
어쭈. 말본새좀 봐라. 에스터가 아니라 좀 더 참을성 없는 사람이었다면 한 대 쥐어박아줬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지금 워낙 자신에게 친절해진지라 잊고 있었지만, 블래스터는 이런 녀석이었다. ...그래 도 다 자란 비스트를 생각해서라도, 한 마디 해주는 건 그만두도록 하자. 능력탓이니까.
"네가 직접 알려줬다."
어떻게 관계를 입증해줄 수단같은 게 없을까. 에스터는 고민한다. ...성인이 된 후의 사진을 보여줘도, 못알아보려나. 고뇌하던 끝에, 블래스터가 만들어준 무기들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보여줘본다.
"블랙 더 라이트. ...블래키."
네가 만들었던건데. 기억나? 그런 말을 덧붙이다가... ...뒤늦게 자신을 불러오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거대하다! 뭔가 거대하다. 아니. 내가 작아진 건가!? 파크를 올려다보며 당황한다.
"코스츔!?"
머릿속이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지!? 잠깐. 나이를 줄어들게 한다면 반대로 많아지게 할 수 있는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데. 당한건가!? 아니, 저 모습이면 전투하는 입장에서 오히려 유리...! 그러면, 굴복시킨건가!? ...샀다는 발상같은건 상상도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아. 그래. 그와의 관계를 입증해줄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나? 아무래도, 이 쪽은 기억까지도 돌아간 모양이라서."
사실 그런 얘기를 하는 본인의 기억도 완벽하진 못했지만. ...여전히, 녹턴 드네리스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ㅡ
(블래스터/14)
"내가? 너한테? 뭔 헛소리야? 난 친구없어."
게다가 너같이 큰 여자를 알지도 못한다고. 연상의 여자랑 연이 없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지? 게다가...
"형? 14살 쳐먹은 애새끼한테 형이 어딨어? 이쪽도 정신 놓은거야?"
2M정도되는 인간이 형이라고 말해본들, 설득력이 없는데? 놀리는건가? 아니 애초에 뭐하는 인간들이지?
"손에서 불을 뿜는다고? 내가 무슨 만화 주인공이라도 되는줄 아나? 막 머리에서 불같은거 조금씩 나오는 그런 인간인줄 아는거같은데?"
그래, 그 만화 주인공이 손에서 불을 뿜기는 했지. 하나는 지탱하고 하나는 발사한다였던가? 하여튼 이래서 만화랑 현실을 혼동하는 그런놈들이 이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있는게 문제야.
"블래키니 라이티니, 그렁 애칭같은 이름 집어쳐. 난 세상에 혼자고, 인간같은거 안사귀어. 그러니 돈 안줄꺼면 꺼져. 배고파서 말할 힘도 없네."
ㅡ
(에스터/17)
"...밥 사줄까?"
여러가지 할말이 있지만 역시 이 말이 먼저 나온다. 왜 어린애가 굶고 다니고 있어.
"돈이라면 얼마정도 필요한데. 보태줄 수 있다고."
히어로 월급이 아무리 박봉이라도, 가출청소년 밥 한끼 사주고 돌봐줄 돈정돈 있다. 에스터는 지폐 한장을 과시하듯 흔들어보인다. ...뺏으려 한다면, 머리위로 손을 휙 뻗어버리겠지만.
"아마도, 이 쪽은 기억까지도 잃어버린 모양이야."
그리고 파크 쪽을 보며 말한다. ...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다들 자신을 보며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기억과 인격에 대한 혼동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니까... 비스트는 아예 대정전 이전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인데, 어떻게 할까."
나중에 기억 돌아올때 이때 한 발언들까지 기억하고 있다면, 꽤나 부끄러워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해본다. ...복수라는 말을 언급한다면, 어린 블래스터는 어떻게 반응할까. 괜히 자극하고 싶진 않으니 속으로만 생각한다. 우선은, 신뢰 구축이 먼저다.
"일단, 식사다."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한창때 어린애가 굶으며 돌아다니는 꼴을 볼순 없다. 하다못해 퀸즈랩도 애들 밥은 먹이면서 실험했다는데.
ㅡ
(파크/27)
"14살이요???"
에에? 그럴리가. 내가 아는 블래형은 분명 성인이다. 근데 왜 미자지? 설마 진짜 동생? 근데 왜 블래스터란 이름에 반응까지?????
"아 그거 츠X......가 아니라! 그런 기구가지구 막막 폭발력으로 날아다니던데! 엥 그리고 그런이름이던가?!"
파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왜지? 왜 전부 기억을 못하는거지?? 파크는 이내 에스터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아.....그런건가요....놔두면 돌아오려나....?"
오오 에스터누나가 나를 올려보고 있다. 이 느낌은 꽤나 감회가 새롭다. 에스터 누나가 나를 올려다보는 날이 올 줄이야. 몰론 내가 그렇게 올려다 볼 정도의 키는 아니었지만, 히어로 중에서 매우 큰편에 속했던 에스터누나가 나를 올려다보는건 꽤나 미묘한 쾌감이네.
"아아.....그런가요. 대정전때면 내가 완전 애기때인데.....어찌한담....."
이 형이 내가 애기때의 시간대로 돌아가버렸다니, 이건 또 무슨일일까. 설마 그 아저씨가 이 형의 나이를 강제로 빼았아버린건가. 파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이런 모습의 블래를 보는것은 꽤나 즐거워서 화같은건 나지 않아보였다.
"밥인가요~맘X터치 갈까요? 아니면 X브웨이?"
어느곳이든 상관없어요~라고 파크는 덧붙인다. 원, 끼워준다고도 한적 없는데 저렇게 당당하다니 무척 뻔뻔하다.
ㅡ
날아간 일상중 있던 내용
파크:(에스터누나가 나 올려다본다)(새삼 신기)
파크:(입증해줄거?)
파크:(제가 이 쇠파이프로 샤오화누나 때리려던거 형이 막아줬어요...이딴건 안되겠지)
파크:형은...너클에서 불뿜을수 있어요!!
파크:어...그리고...라이터...라이티...???
파크:(내 기억력....)
블래:(돈 흔드는 에스터 보고)(왜 저따위 제스쳐를...역시 인간강도가)
블래:(꼬르륵)
블래:(젠장)
블래:이상한짓하면 물어뜯을거야(합류)
에스터:(삼겹살이 구워지는 식당으로 데려왔다!)
ㅡ
(파크/27)
"물어죽인다니, 너무하시군요 형~"
뭐 딱보니 어릴때부터 힘들게 살아와서 저렇게 날카롭다는 건 알겠지만, 조금 섭섭하려나 하고 파크는 생각했다. 사실 표정을 보면 섭섭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 형이 나중에 능력이 풀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ㅡ같은.
"패스트푸드는 안먹는거에요? 에이."
파크는 아쉽다 라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나름 맘스터치나 서브웨이 같은 패스트푸드 점만 말했지만, 에스터에게는 통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건강을 신경쓰니 몸이 그렇게 좋은거려나.
잠시후, 세명은 고기집에 도착한듯 하였다. 고기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식욕을 자극한다. 에스터가 먼저 계산을 하고 들어가자, 파크는 그 뒤를 따라들어가 착석했다.
"그래서, 블래형. 하고싶다는 말이 뭔데요?"
주문한 고기가 나오자 그 고기를 불판에 올리며 질문한다. 아까 할 말이 있었다는게 신경쓰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소주나 맥주를 시키고 싶은데 에스터의 눈치가 보인다는게 훨씬 신경쓰이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에스터누나는 어쩌다가 그렇게.....?"
내가 만난 그 아저씨는 나이를 주기만 했지, 뺏는건 못봣는데. 그 아저씨의 능력으로 뺏긴건가 하고 추측도 해보았지만 역시 직접 듣는게 나을것 같았다.
(블랙/14)
"첫째. 너네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가장 필요한 질문.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여자의 끄나풀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바로 죽이지 않은걸보면 갱 쪽의 인간은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의심을 거두면 안된다.
"둘 째. 만약 니들이 나를 알고있다면,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말해."
만약 나를 알고있다면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고있을것이다. 그래. 그것도 알아야 한다.
"셋째. 지금 몇년도지?"
정말 만약이지만, 시간여행도 고려해봐야한다. 굉장히 멍청한 생각이지만.
우선 익은 고기부터 먹었다. 맛있네. 엄마가 죽고나서 꽤 오랫동안 못먹었지. 이런 정상적인 음식은.
"뭘 봐. 먹는거 처음봐?"
부끄러우니까, 보지마.
ㅡ
(에스터/17)
"히어로."
대정전 이전과 이후는 완전하게 새로운 세계라고 봐도 무방한데, 어디부터 얘기하는게 좋을까. 핸드폰을 꺼낸다. 능력 개발 및 응용을 위해, 연습도중에 찍어둔 영상이 있었지. 어른인 비스트가 연습장에서 능력을 화려하게 사용하는 모습이다. 영상 끝에는 수고했어, 라는 어른인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에 대해서 말하자면, 글쎄. ...복수자라고 할까. 굳이 트라우마를 헤집고 싶진 않은데."
어릴때부터 험한 생활을 거쳐온건가. 출신이 출신이니 이상할 건 없지만. ...라이티에 관해서라면 모를까, 그의 출생환경과 가족사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에스터는 작아진 손으로 열심히 고기를 굽는다. 잘 먹는 어린 블래키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사람이라고 하는건 한 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법이잖아? 내가 지켜봐온 너의 모든 부분이 너였다. 어떤사람이니 하는 질문에 답하기엔, 여러가지 면이 있으니까. "
거친듯 하면서 상냥한 부분이 드러나고. 거침없는 척 하면서도 상처투성이고. 의지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지켜주고 싶어질 때도 있고. 적어도, 이런 말들을 늘어놓다간 어린 블래키가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버릴거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니 흐지부지 넘겨본다.
"지금은 2018년도야. 주변사람에게 묻거나, 달력을 찾아봐도 좋아."
핸드폰의 날짜정보 역시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보량에 버틸 수 있을까. 십년전에서 막 깨어난 눈 앞의 어린 아이는. 그리고 블래스터를 향한 대답이 끝나자, 이번엔 파크의 대답에 답한다.
"빌런에게 당했다."
에스터는 물을 마신다. 주스도 술도 안 좋아하는 데다가 어린 몸이 되어버렸으니 마실것에 그다지 선택지가 없다. 작아진 손이 물컵을 소중히 잡고 있다.
"최근, 대정전 이전으로 나이를 돌려보내는 빌런이 돌아다닌다는 모양이야. 너도 조심하도록...이미 만났나?"
모습을 보니, 그 빌런의 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지만 나이를 줘버린다면 전투에 불리해지는 것 아닌가? 고민해본다.
"그나저나 용케도 알아봤구나. 이즈모에서는 신원검증에 꽤 걸렸는데."
애초에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뒤늦게 알려졌다. 파크는 그 빌런과 이미 접촉했기에 예상하고 있던 것일까. 작아진 몸으로 다시금 열심히 고기를 뒤집어본다. 작아졌다곤 해도, 역시 평균보다 큰 키지만.
...혼자 즐거워보이는군. 이 녀석. 파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건 비밀이다.
(파크)
"질문 두개는 에스터누나가 했으니 패스. 그리고 형은.....음.......멋진사람.....?"
폼나지. 솔직히 그 불뿜는 너클가지고 날아다니는 모습 개쩔지. 음음.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아X언맨이 비행할때 쩔잖아? 그걸 현실에서 보는기분은, 엄청 멋져 라고 할만큼 멋있지. 그 외에도 뭐 전투스타일 이라던지 아니면 말투라던지 멋있잖아?
"아 빌런이었군요. 그냥 나이파는 고물상인이라 생각했는데."
파크는 어쩔 수 없이 콜라를 하나 시켜 벌컥거리고는 말했다. 분명 장난감등을 파는 특이한 아저씨였던걸로 기억한다. 장난감 상태가 영 조잡했었지.
"이미 만났죠. 2000원에 10살 사버렸고. 대뜸 나이를 살 수 있다길래 그냥 한번해봐란 심정으로 10살 사버렸는데, 몸뚱이가 갑자기 급성장해버렸군요."
나이를 뺏는 빌런이라. 선공을 안한걸 봐서는 그냥 평소에는 조용히 있는 타입인듯 하였다. 혹시 그런 빌런도 잡아야 하는건가. 평소에 조용히 있고, 능력도 이런정도의 빌런이라면 굳이 잡을필요가 있나. 인력낭비것 같은데.
"아니 뭐.....그게.....대충 알아보겠던데요? 멀리서보면."
가까이서 보니깐 누나의 동생인줄 알았지만. 파크는 어려졌음에도 열심히 고기를 굽는 모습이 왠지모르게 재미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모습이었는데 꽤나 귀여워 지셨잖아. 게다가 블래형도 뭔가 먹이(?)를 먹는것같아서 귀엽고. 파크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블래스터의 머리를 쓰다듬고, 에스터의 볼을 잡아당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뭔가 오늘따라 두분다 귀여우셔서요. 저도모르게 그만."
나름의 변명을 급하게 덧붙였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변명보단 손을 떼는게 낫겠지만 그대로 손은 유지하고 있었다. 멍청이.
(블랙)
"이건 뭐야. 휴대폰...? 이상하게 생겼는데."
내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것은 맞는듯 했다. 이런 이상한기계에서 영상이 이렇게 선명하게 나올줄은 몰랐으니까. 그 기계로 보이는 남자는 강했다 녹색 머리를 휘날리면서 손의 무기를 이용해 불을 뿜었다. 게다가 능력을 사용한 테크닉까지. 이게 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복수자라고 불렀다. 복수자. 꽤 좋은 울림이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조금 거슬렸다. 그건 나약한 놈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잖아? 그런건 인간강도가 떨어져서 그런것이다.
"내가 그런 나약한 트라우마에 굴복한다고? 말도안되지."
물론, 지금의 나도 쓰러진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뛰기는 한다.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우선 고기다. 입에 넣고보자.
"결국 너도 나를 모른단 거잖아? 미래의 나는 어쩌자고 이런 귀찮은 관계에 의존할 정도로 약해진거지?"
약해. 이래서 누군가를 사귀면 강도가 떨어져. 특히 지금같은 일에늘 더더욱. 고기를 먹고있자니 머리에 다가오는 큰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가장 사나운 눈으로 그 남자를 째려봤다. 내 머리에 손을 댈 수 있는것은 나밖에없어.
"머리에서 손 때. 물어뜯기고 싶지않으면."
(에스터)
"산 거냐."
파크에게 어이없어하며 말한다. 그 정도로 일찍 나이를 먹고 싶었나. ...아니. 근데 나이 너무 싸잖아. 하긴 나이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드는거니 싼 것도 당연한가. 오히려 어려지게 하는걸 파는 게 좋을지도. ...아. 기억이 사라지지. 눈앞의 고기를 먹는 아기짐승을 보며 생각한다.
"보통 다들 못알아보길래...크스츰."
파크가 볼을 꼬집어온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해본다. ...그래봤자 볼이 꼬집히니 발음이 새서 별로 엄숙하게 들리진 않는다. 느르. 라고 말해보지만 들어줄지 모르겠군.
"글쎄. 약해진 걸까."
에스터는 별로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그만큼 괴로운 일들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약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라이티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으니까. ...조금 울적한 생각이 난다. 계속 고기를 굽던 에스터는,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는다. 입도 작아졌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난다.
"...그러고보니, 지금 사는 거처도 모르고 있겠군."
그렇게 어린 블랙에게 말을 걸어본다.
(파크)
"으음.....관계라고 할까요.....솔직히 블래형과 저는 개인적으로 만난 두번이 다 싸운거라....."
젠장 머리아프네. 파크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으음....죄책감때문에 머리가 깨질듯 아프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토악질이 나오지 않는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죠. 파니깐 사온거. 간단한겁니다만."
사실 말처럼 간단하진 않으려나. 파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해보았다. 몰론 나이는 시간이 지나면 먹는거지만 그래도 그때는 실험적 의미가 강했다. 사실 굳이 먹고싶다면 6살 정도만 먹고싶었는데 10년이 진짜로 될 줄은.
"아. 이거 실례했군요."
한쪽에서 위협하고 한쪽에서 경고하자 파크는 그제서야 두 손을 뗐다. 사실 위협도 경고도 귀여워서 그대로 주물럭거리고 싶었지만 참은거다. 연장자가 아니었다면, 아니 에스터누나까지 정신이 어려졌다면 망설임없이 주물럭거렸을텐데. 아쉽다.
"뭐......체격도 그렇고 많이 달라지셨으니깐요. 그래서 그럴수도."
꽤나 많이 달라졌지. 가까이서 보면 못알아 볼 정도로. 눈치가 꽤나 빠른편인 파크도 이정도인데 보통 사람들은 확실히 못알아 봤을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형과 누나는 어떤사이에요? 아까 블랙 더 라이트인가라고 본명까지 알고계시던데. 나는 블래스터란 이름만 알고있었고."
그러고보니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이 둘은 무슨 사이일까. 본명까지 알고있는걸 보면 꽤나 각별한 사이같은데.
(62스레)
(블랙)
"다음부터 그러면 진짜 물어버린다."
2M가 넘는 장신이지만, 약점은 존재할것이다. 물론 그전에 내가 다운 되겠지만, 어짜피 미련없는 인생이니까. 으르렁거리는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러니 우선 힘을 비축하자. 고기. 고기를 보자!
"나도 궁금하긴 하네.내 성격상 너에게 풀네임을 알려줬다는게 이상한데. 난 친구같은거 안만들어."
애초에 이성격으로 누굴사귀고 누굴만나? 어짜피 세상은 혼자야. 독하게 살아야 살아남아.
"뭐, 연인사이라도 되냐? 그건 좀 이상한데. 동료는 죽어도 아니겠고... 부하? 아니고. 도데체 뭐야?"
입안에 다시 고기를 넣는다. 다음에 음식을 넣을 수 있는것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많이 먹어둬야한다.
"미래의 나는 몸만 큰 놈이네. 너무 물러졌어. 이래서야 복수는 커녕..."
아. 고기 익었다.
(에스터)
여전히 주물럭대고 싶은 미련이 가득한 얼굴의 파크를 째려본다. 그만두라니까.
"어떤 사이라. ...동료는 죽어도 아니라니, 왜 확신하는 건데."
연인사이인 것이 더 그럴듯하단 뜻인가. 에스터는 비스트에게 받은 예상 못한 꽃다발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선물 아니었나. 애초에 비스트의 선물 센스는 연인사이에서나 줄 법한 것들 뿐이었으니. 아니. 근데 연인사이라니. 죽은 라이티가 일어나서 죽빵을 칠 소리 하지 말라고. 이 도둑고양이! 믿고 맡겼더니 배신했구나! ...이상한 상상이 든다.
"굳이 말하자면, 동료가 맞지. 의지 가능한 동료."
그나저나 우리들에겐 의심 가득하면서 고기는 잘도 먹는군. 하나 더 시킬까. 잘 먹는 어린 블래키를 보면서, 자신도 한 입.
"예전에,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 강아지를 빼앗길 뻔 했었지..."
새삼 이 모습으로 말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이 모습에서 1년쯤 지난 뒤였는데.
"사이킥 갱에게 무력하게 당하는 중이었는데, 블래스터가 와서 구해줬었어."
그 때의 일을 떠올려본다. 어디. 뺨을 맞고, 울먹거리고, 놀라고, 감격하고... 새삼, 어렸다. 지금의 모습으로 성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게 확실히 위화감이 들긴 하겠군.
"...뭐. 너는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고 후회했을지 모르지만."
조금 씁쓸해진다.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변화였던 사건이, 누군가에겐 단순 변덕으로 인한 후회스러운 사건이라니. 그런 속을 감추고, 다시 물을 마신 뒤 고기를 뒤집는다.
(파크)
한쪽에서는 나를 째려보고, 한쪽에서는 나를 물어버리겠다고 한다. 더 했다가는 기억과 나이가 돌아왔을때 이 근육질 두명에게 죽도록 맞을수도 있겠지. 그만하자. 파크는 완전히 단념했다는듯 손을 반쯤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뭐.....그런일이 있었던건가요. 신기하네요 뭔가. 지금은 아니지만 저렇게 까칠했던 형이 누나를 도와주다니."
파크는 블래스터에게 농담이라고 말하며 고기를 한점 날름 집어먹었다. 음 역시 고기는 맛있다. 콜라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블래스터의 말을 부정한다.
"글쎄요. 물렁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지 않나요. 저는 관계라는건 사람을 물렁하게 하는게 아닌, 더욱 단단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히어로에게는. 지킬게 많을수록 강해지는게 히어로니깐."
히어로는 홀로 설 수 없다. 지켜야 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히어로 특성상, 관계를 쌓는다는건 더욱 더 강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다. 이 분위기, 이 음식들. 아무리 콜라를 마신다고 해도 부족하다.....알코올이 필요하다. 알코올. 그치만 에스터 누나도 있는.....잠깐. 나 성인이잖아? 그럼 시켜도 되겠네!
파크는 맥주 한캔을 주문하여 한모금 들이킨다. 조금 살것같다는 표정을 지어버렸나. 어찌됬던 곧바로 파크는 질문하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그 나이빌런, 잡아야 하려나요? 아무래도 나이를 뺏기신 분은 돌려받아야 할테니."
그렇다. 파크로서야 별 상관 없겠지만.....에스터누나와 블래스터형 에게는 꽤나 중요하겠지. 정작 블래형은 중요한지 잘 모를수도 있겠지만.
(블랙)
"미래의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인간강도가 떨어지잖아. 게다가, 복수도 하지않고. 하여튼...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렇게 되지말아야지. ....그래도... 부럽네.
"지킬게 많아지면 그만큼 약점이지. 히어로가 뭐 하는 집단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강한 집단이겠지?"
흐음. 구미가 당긴다. 강해진다면 복수도 쉬워질테고 빌어먹을 여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날 그 히어로에 넣어줘. 난 강해져야 하거든."
(에스터)
"...그렇지."
블래스터가 자신을 구해줌이 신기하다는 파크의 말에는 그냥 그렇게 가벼이 대답한다. 트라우마같은 얘기를 꺼내면 안 되겠지. 거기다, 눈 앞에 있는 건 어린 블랙이다. 어른이라 해도 남의 상처를 헤집는건 안 되지만, 어리다면 더더욱 해선 안 될 짓이다.
지킬게 많아야 강해진다, 라. 좋은 말이었다. 멋진 히어로가 됐구나. 코스츔. 그에 대한 블래스터의 대답은, 그 다운 말이다. 굳이 태클걸고 싶진 않다. 어느 쪽이든 일리가 있는 말이니까. 어린 에스터는 묵묵히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당신의 성장을 뿌듯해하면서...잠깐. 뭘 시키는 거야!?
"...코스츔. 무슨 짓이냐!"
저지할 틈 없이 맥주를 시켜 마시는 파크에게 강력한 잔소리가 돌아온다. 에스터는 언제나의 에스터였다. 한결같이 옳지 못한 건 보지 못했다. 자연스레 맥주를 들이키는 것도 태클걸고 싶은데, 저 살것 같다는 표정은 뭐야!? 열일곱살의 영원한 어린 막내인줄 알았던 코스츔이 술마시는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이런 성장은 필요없어. 에스터는 파크의 맥주를 빼앗는다.
...그러던 사이, 어린 블랙의 말이 돌아온다. 맥주를 뒤로 숨기던 에스터는 그 말에 대답한다. 글쎄. 라고 운을 띄우면서.
"이미 어른인 너는 훌륭한 히어로다. 뭐.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히어로와 빌런의 차이는 멋대로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차이. 그리고 자신은 둘 다. 그런 말버릇이었지. 글쎄ㅡ히어로라는 직업에 속해 사람을 구해내는 일을 하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히 히어로라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
(파크)
"그런가요."
뭔가 숨기고 있는 눈치군. 뭐 별로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관심이 그렇게 있는것도 아니고 에스터누나는 상당히 사려깊으니 누나가 숨기는거라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겠지 아마.
"형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히어로는 강한 집단이 맞습니다. 형 말처럼 지킬게 많으면 약점이죠. 저희는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맞대고, 등을 보여주고, 어깨를 나란히하며 다같이 성장하고 강해집니다. 약점이 있기에 저희는 더욱 강해질 수 있는거에요."
나는 지금 클라운일때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자부할 수 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 하나없을 그때보다,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는 지금이 훨씬 더 강하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오히려 더욱더 잘 싸울 수 있는것 같다.
"에? 그야 맥주를.....아! 내 맥주!"
이 상황, 오랜만이다. 분명 샤오누나도 이랬던것 같은데. 파크는 반응할 새도 없이 맥주를 뺏어가버린 에스터에게 아쉽다는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뭐 결과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에스터누나의 잔소리 뿐이다. 파크는 지금은 자기도 어른이니 마셔도 괜찮다는 둥에 반박을 했지만, 에스터의 바른말 논리폭격에 무참히 패배해버렸다.
"으윽......뭐, 블래형은 이미 히어로에요. 형은 기억이 안날지 모르겠지만, 헤이샤오화라는 히어로 동료를 미치광이 살인마인 클라운이라는 빌런에게서 구해냈거든요. 뭐 사실, 빌런을 물리쳐야만 히어로인건 아니지만."
파크는 쓴 미소를 지어버렸다. 으음 자기 비판이란거 생각보다 아프잖아. 사실 전부 다 있던 일이라는게 더욱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더욱더 블래형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고마워요 형. 샤오누나를 고문하고 죽이지 않게 저를 막아줘서. 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말해본다.
(블랙)
"흐음. 그래. 돈만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거기 돈 많이주니까 내가 갔겠지."
돈이 없어서 쓰레기통 뒤지는 것도 이제 신물나기도 하고, 그 여자피해서 도망치려면 얼른 이 도시를 떠나는 수 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 내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면 유리한 점이 꽤 있잖아? 그런데 빌런이라는건 뭐지? 적대세력인가?
"내가 사람을 구해? 의뢰라도 받았나보네. 그 빌런 크.. 뭐? 어찌되었든 그놈이 내 적이었다는 거고. 흠."
역시 사병집단인건가. 아니면 경찰같은 국가조직인가. 꽤 이해못할 말들만 해대니 내가 알턱이 있나. 적어도 확실한건 내가 꽤 나쁜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 기계에서 비춘 나(추정)는 꽤 큰 공간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고 어느정도 인정받는듯 했으니. 괜스레 뿌듯한걸?
"그래. 거기 키큰 아저씨, 그럼 그쪽한테 물어볼게. 당신은 나랑 어떤 관계였던거야?"
저렇게 큰 남자라면... 동료? 아니면 친구? 친구라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맞는데? 도데체 뭐야?
"뭐, 어찌되엇든 고기는 잘 먹었으니 인사는 할게."
(에스터)
코스츔은 맥주를 뺏기고 시무룩해져있다. 이런 걸 먹을 나이는 아니잖아. 너. 신체적으로야 어른일지 몰라도, 아마 정신은 그대로일텐데. 자학을 하는 코스츔의 태도에는 입을 다물어준다. 물을 다시금 마셔본다.
인사를 하는군. 좋은 태도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고 있었구나. 그런 블래키에게 집 주소를 알려줘본다.
"여기가 네가 사는 집이야. 조심해서 들어가라. 지금 모습으로는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뭣하면 경호해줄까? 라는 말을 하기엔 자신도 지금 이런 상태로군. 파크에게 도와달라고 해볼까.
"파크. 블래스터를 안전히 집에 데려다줄 수 있어?"
자존심 상해하려나.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실제로 위험한건 사실이니까. 당장 이능력범죄자들이 넘실대는 판국에 빌런에서 히어로로 전향한 그가 능력도 잃고 어려졌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상황이다. 먹잇감이 되기 딱 좋다. 더군다나 그는 싸이킥 갱을 오랫동안 죽여온 걸로 알고 있고.
"시간이 늦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돌아가면서 해."
마침 불판위의 고기도 어느새 모습을 거의 감춰가고 있었다.
(파크)
"뭐......돈때문은 아니였죠. 그리고 형이 그 빌런을 막은 이유도 의뢰때문이 아니였고."
동료가 구조를 요청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하면 안믿으려나. 그리고 그가 관계를 물어보자, 파크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음.....관계라.....관계.......
".................동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틀린말은 안했다. 그도 나도, 빌런에서 히어로가 된 부류니깐. 다만 다른점은 나는 죄책감, 저 형은 복수심때문에 히어로가 된 거겠지. 뭐, 자세한건 설명을 딱히 해주기가 귀찮아 어물쩡 넘어가버렸다.
"상관 없겠죠. 형 한명 경호하는건 쉬우니깐."
파크는 딱히 기분나빠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 할일도 없고, 블래스터를 경호하는 것도 저번에 신세를 졌으니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서서 하고싶긴 했다.
"저도 잘먹었어요 누나. 그리고, 가실까요 형?"
혙의 집으로, 라고 덧붙인다. 뭐 그의 집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에스터 누나가 준 집 주소가 있으니 별 상관은 없을것이다.
(63스레)
(블랙)
"뭐야. 나한테 집도 있었어? 꽤 잘살았네."
자수성가라고 하나? 애초에 집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그래, 뭐... 먹고 잘 수 있다면 어디든 좋지만. 하지만, 여러명이 우르르 가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내 집인데 왜 사람들이 들어와?
"약도만 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애초에, 니들 생각보다 그리 약하지도 않고."
그리고 알고싶은 일도 많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이놈들의 감시를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해보지만 결국 포기했다. 결국 이들은 따라올것이고 나는 수긍하겠지. 뭔가, 거절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나 혼자 갈테니, 내일 만나자고. 그럼된거아냐?"
(에스터)
순순히 경호를 해준다고 하는 코스츔을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보다가, 블랙의 싸늘한 반응에 속으로 아쉬움을 표한다. 이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알았다. "
에스터는 약도를 대략 표시해서 어린 블래키에게 전달해준다. 하긴, 자신을 구해줬을때도 고작 15살밖에 안 된 나이었으니까. 능력이 없어졌단게 걱정되지만.
"이 세상은 이능력 범죄자로 가득하니까. 네 시대 기준으론 강했을 지몰라도, 지금 기준으론 위험할지 몰라."
ㅡ뭐. 그걸 감안해도, 블래스터의 능력은 직접공격이 아니라 무기를 만들어내는 종류였으니 괜찮을지 모른다. 그래도 걱정되니까, 에릭이 챙겨줬던 호신용 전기충격기를 건네본다. 자신은 호위받을 사람이 있으니 괜찮지만, 어린 블랙은 혼자니까.
"또 보자고."
그렇게 작은 블랙과 큰 파크에게 인사를 건넨다.
- 에스터(17) - 진저
- (61스레.)
(나이빌런 이벤트중.)
(에스터17)
"...그리고, 기억과 인격의 손실 정도는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추정..."
에스터는 최근 나타난 가칭 '나이빌런'에 대해 알아낸 것을 이즈모에 보고하는 중이었다. 학생 티가 나는 목소리가 힘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초등학교 근처에 자주 출몰하며, 아직 학생들에게 입힌 피해는 없는 것으로..."
긴긴 보고가 이어진다. 휴가를 내놓고 왜 쉴 생각을 안 하는걸까. 이 사람은. 그렇지만 집에서 가만히 있으니 도저히 안되겠다며 굳이 전화나 메세지가 아닌 직접보고를 하는 것이다.
"...이상이다."
보고를 끝낸다.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즈모의 복도에 고등학생 에스터가 돌아다니고 있다.
소식 전달을 받았다면 에스터가 어려졌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겠으나, 모르고 있었다면 외부인이나 가족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에스터는 걸어가다가, 무심코 발걸음을 멈춘다.
ㅡ
(진저)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게 반나절만이었다. 오는 길에는 손을 씻을 만한 곳, 하다못해 간이 식수대조차도 보이지 않던데요. 단지 내가 못 찾은 걸지도 모르고. 수도꼭지를 비틀자 세면대에 붉은빛이 도는 물이 차오르고. 이내 소용돌이를 만들며 줄어간다. 그렇게 배수구를 휘감고 뻔뻔스럽게 바다로 가서 결백한 해수들 틈새로 섞여들겠죠. 정수과정 따위가 가증스럽게도 느껴지는건 과도한 감정이입이었겠다. 양손에 매달린 물기는 당연하게도 투명했고. 이마저도 곧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지겠다. 거울을 보면 가슴 위에서 훈장이 빛나고 있는데. 이게 불쾌하게 느껴졌던 까닭 또한 알게 되었다. 녹턴을 내세웠듯이 불만을 틀어막으려는 수단같이 느껴졌던 거다. 경비견이 주인을 물지 않도록 던져주는 고깃덩어리. 그럼에도 굳이 훈장을 자랑하듯 달고 다니는 이유라면 있었지만. 간혹 묻는 빌런들이 있었더랬다. 몇 명을 죽여서 받은 훈장이야?
덜 마른 물기를 털고 복도로 나가면, 작은 체격에-나이를 고려하면 키는 작다고 하기 힘들었지만- 뻗친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걷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머리말. 고개를 기울인다.
"?"
그녀를 무서울 정도로 닮았지만 세세한 인상은 다르려나. 사람이 하룻밤사이에 나이를 먹을 수는 있어도 적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ㅡ-라고. 일반적인 상식에 기초한 장벽이 진실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럼 잠시간. 고민의 시간을 가집시다. 그럴듯한 결론을 내린다. 에스터의 여동생이겠다. 정의로운 그 성격이 유전되었으리라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가까이로 걸어가 모자를 벗어, 동료의 혈족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거다.
"이즈모에 방문하신걸 환영합니다. 경비원 가드맨입니다."
히어로 머리말의 동료입니다. 아시겠지만, 언니인 에스터씨 말입니다. 라고 대단한 착각에 본인을 설명까지 해버리는 실수를 범했으니 이제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군. 모자를 제자리에 올려놓을 땐 머리는 아까보다 흐트러져 있었으려나. 그녀의 목에는 방문객임을 나타내는 아무것도 걸려있지않았다. 이상하네요. 견학생이라면 분명 줬을 텐데. 잃어버린 걸까. 내가 에스터의 동생이란걸 알아보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방문증은 잃어버리셨습니까?"
목에 거는 것 말입니다. 검지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려가며 친절히 설명해보인다.
ㅡ
(에스터17)
"...진저 그레이?"
당신의 인사에 문득 이름을 부른다. 아직 전달받지 못한건가.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받아온 이번 사건 관련 서류 겸 임시 신분증을 꺼내본다. 제대로 된 신분증이 있는게 나으려나. 어차피 일시적인 모습일테니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에스터 힐데가르트다. 빌런의 능력으로, 이런 모습이 되어있다."
서류에는 빌런에 대한 에스터의 보고, 신원 인증 과정 등등이 적혀있다. 초등학교 근처에 돌아다니는 빌런이 나이를 어리게 한다는 것. 에스터가 어려지는 사건이 최근 일어났다는 것. 이즈모에서 머리카락과 지문 채취를 통해 신원을 인증받은 과정 ...등등.이미 인사를 받아버렸는데, 이런 걸 보여주려니 조금 무안하게 만든 걸까. 하지만 이대로 계속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장기적으로 더 무안할테니. 어쩔 수 없었다. 덤으로 원래의 신분증도 함께 꺼내서 보여준다.
"아직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지 못한 건가... 아직 피해규모가 크지 않긴 하다만."
앳된 얼굴이다만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보는 입장에서는 꽤 위화감이 들 법 하다. 능력에 관한걸 모른다면 이 애늙은이는 뭐야!?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악용된다면 꽤나 위험한 사건일 법 한데, 사건사고가 너무 많아서 빠르게 처리 안 하는 걸까. 아니면 나름대로 히어로의 명예를 지켜주려고 입 다물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서로 무안해지잖아. 안 그래도 내적친밀감으로만 연결되어있는 사이인데, 정식 첫만남을 이렇게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다니. 그러고보니 사건 개요가 오랫동안 제대로 퍼지지 않는다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이런 인사를 하고 다녀야 할까.
(진저)
소녀의 이름에서 정확하게 불리워지는 내 본명을 듣고서도 조금 놀랐지만, 에스터가 다정하게도 동생에게 가르쳐 준 모양이지. 경비원 복장에 단내 나는 남자를 만나면 회색 생강을 떠올리면 된다고ㅡ....까지 생각해뒀는데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서류와 신분증이다. 그렇게 방금 한 소개가 거울에 대고 자기소개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었다는걸 깨닫고. 여기까지 오면 사람에게 민망함이라는게 생겨난다는 걸 알게 되고.
"..확인했습니다."
부쩍 사무적인 말투를 앞세웠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가리려했던건지는 나만 알고있도록 하는 거다. 그리고 실상 서류와 신분증보다는 이런 특유의 다큐적인 대처가 더 강력한 심증을 주었다는 사실은 뒤로 미뤄두자.
"그 밖에 다른 피해는 없었습니까? 그저 어려지게 만들고 보내주던가요?"
무엇보다 궁금한 건 원래 나이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다. 그렇지 않으면 9살은 차이날듯한 동료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게 된다. 원래의 신분증을 내미는 그녀다. 이 에스터와 저 에스터는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 같은데요. 천지가 개벽했을 리는 없고. 따라서 그녀의 현재 모습은 선천성이 아니라고 보는 게 옳겠다.
"..아직 보고받기 전이었습니다."
미리 알려줬으면 좀 좋습니까. 무안한 상황같은 걸 피할 수 있잖아요. 이즈모. 날 싫어하는게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보는 사람마다 인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만큼 눈치없는 사람이 이즈모에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지. 서류를 그녀에게 돌려주고. 그녀의 대리자가 휴가를 신청한 뒤에 처음의 만남이라는 걸 기억해낸다.
"휴가는 즐거우셨습니까."
재판장에서의 자기통제를 잃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푹 쉬었는지를 알고 싶은데. 낯빛이 좋아졌네요. 순해 보이고...이건 그냥 어려져서였겠다.
(에스터/17)
"...별다른 전투능력이 없었는지, 능력을 사용한 뒤엔 도망쳤다."
애초에 무기들부터가 장난감들이었지. 비눗방울 총과 페인트 건에 맞으며 어이없어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장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다가간 것도 그냥 초등학교 앞에 불법 노점상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거였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아마,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은 있지 않을까...정 반대로 나이가 많아졌다는 보고도 조금씩 들리는 모양이니."
팔짱을 끼고 생각해본다. 어른 횽내를 내는 어린애같다. 키 자체는 큰 편이지만서도 외모는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 역력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는 듯 싶지만.
"그런가... 조심하도록. "
그렇게 말하며 빌런의 인적사항을 설명해준다. 초등학교 근처에 불법 노점상을 하고 있다던가. 가면을 쓰고 장난감들을 늘어놓고 있다던가. 적이라고 판단되면 그 장난감으로 공격한다던가. ...탱탱볼이나, 버블건, 장난감 페인트총같은 것들로.
"휴가..."
일요일날 휴가를 냈었다. 근데 월요일날 빌런의 능력으로 이 모습이 됐다. 실질적으로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대신 매일매일 회사에 나와서 빌런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 뭐,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 이런 얘기까진 하지 않을 것이다.
"뭐. 꽤 괜찮아졌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려보인다. 실제로 어려진 후 오히려 머리도 좀 더 깨끗해진 기분이다. 뭐라고 할까. 맑아졌다고 해야하나. 그 전까지 이명이랑 머리울림에 시달렸던 기억이 나는데. 부분적으로 기억상실도 일어났다고 하니, 트라우마들이 기억나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어디까지의 기억이 없어진 거지? 에스터는 곰곰히 생각해본다. 기억이 없어진 이상 생각해봤자 아닌가.
(진저)
"처리하기 어려울 것 같진 않군요. 초등학교 근처의 노점상이라면 장소를 특정하기도 쉬울 테죠."
라오스에 초등학교가 겨우 한두군데는 아니겠지만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야. 오래 가진 못하겠네요. 그저 어리게 만들고 도망치는게 다였다면 말이죠. 적대하던 상대의 체격이 현저하게 작아졌는데도 제압하거나 공격해올 생각을 하지않았다고. 그래도 최소한 저항은 해줬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빌면 무르게 대처하게 되는 건 아닐지. 만일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이런. 당장 눈앞에 닥치지 않은 문제는 곱게 접어 행거치프의 자리에 넣어두는 게 낫겠다.
립스틱보다는 립글로즈가 어울리는 풋풋한 얼굴로 어른스러운 표정을 띄고 있는 것이 동료의 원래 얼굴을 겹치게 해 무척 기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돌아갈 방법은 있다는데. 그 과정에 빌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요.
"곤란하네요."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뚜렷한 불살주의 정체성을 가진 당신은 자세히 파고들지 않길 바란다. 불법 노점상에 장난감으로 공격하는 빌런이라고. 먹고 살려면 다른 방법도 있을텐데. 아니라면 어지간히 심심한 건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 참으로 초라하지 않은가.
"빌런을 생포하기 전까지는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변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
원래 몸을 생각하고 움직였다간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 신체의 익숙함이란 무서워서 부러진 손으로 무심코 커피를 잡기도 하는 법이니. 사단이 나기 전에. 동료들을 믿어주세요. 라고 한 말이 얼마나 믿음직스럽게 들렸을지는 당신의 몫이겠다. 꽤 괜찮아졌다고 끄덕거리는 에스터인데. 좀 짧았던 것 같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면야.
"안심되는 대답입니다. 나는 며칠 더 쉴거라고 생각했지만요. 빌런에게 방해받은게 아닙니까?"
전 일정이 끝내고 쉬러 돌아온 집에서 업무 관련 연락을 받고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더욱이 휴가를 내고 회사를 방문하는 건. 나는 문득 묻고싶어지는 충동을 느낀다. 내적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와 닮은 부분이 많은 당신도 부를 때만 출근하라는 말을 들으면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입니까. 에스터는 곰곰히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나는 생각을 투시할 수 없으니. 마냥 궁금해하다 묻는 거다. 에스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겁니까.
(에스터)
"그렇겠지. 능력이 특이하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는 빌런이었으니까."
당장 보고된 범죄 자체도 많이 잡스럽다. 불법 노점상. 이능력을 이용한 불법 거래라는 점에서 위험해질 법도 한데, 아이들의 나이를 많게 해준뒤 1살당 200원씩 받는다니. 작정하고 악용한다면 상대의 나이를 확 늘리거나 확 줄이는 식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수도 있는데, 어찌보면 스케일이 작은 범죄자라는 점이 다행일 뿐이다.
곤란하다라. 무슨 뜻일까.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게 확실하진 않아서 그런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우선, 더 묻지 않기로 한다. 더 파고든다고 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그저 무심결에 나온 말일 수도 있고.
"...그래야겠지."
자신의 몸을 걱정해주는 당신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몸의 불편함이라면 못 느낄래야 못 느낄수가 없었다.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는 고사하고, 근력의 차이가 무기 몇 개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심지어 능력까지 없어졌지. 어떻게보면 절망할만한 상황이다만, 에스터는 그런것에 비해 제법 담담했다. 역시,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해주는 당신에게, 호의에 감사한다고 꾸벅 인사를 한다.
"여전히 휴가중이지만, 빌런의 생포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속적으로 보고를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도 함 모씨 못지 않은 워커홀릭이다. 워커홀릭이라고 할까, 집착에 가깝다고 할까. 잠시라도 일에서 멀리 떠나있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휴가중이니까 굳이 이런 보고가지고 이즈모까지 나올 필요 없이 전화 등으로 알려도 될텐데. 보통은 휴가를 내고 회사에 다시 나오는 것 만큼 귀찮은 일도 없지 않나.
(진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특이한 능력이 가장 해결이 시급한 위험요소입니다. 머리말. 만일 당신이 신생아로 돌아가기라도 했으면 난 늦은 보고조차 못 받았을 거고 지금쯤 이즈모는 어린이집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화재로 번질 불씨는 미리미리 꺼두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초등학교 근처를 집중적으로 순찰하는 게 좋겠다는 계획을 세워보고. 그리고 이걸 물어야 하나. 묻기로 한다.
"혹시 에스터로 불러주는 쪽이 좋겠습니까."
격식은 둘째치고 신상 보호를 위해서라면 본명은 가려두는 게 좋을 거라 보는데요. 아무튼 아이는 좋아하지만 애보기하려 출근하는 건 아니고. 포부 큰 빌런이었다면 까다로웠을 거란 추측을 겉으로 드러냈다면 나는 간단히 동의했겠으나, 안 그래서 다행이야! 로 평화로운 마무리를 하기엔 또 안전한 걸 너무 좋아하지. 말 꺼낸 김에 신생아 에스터라. 이름 모를 오류가 있던 게 아닌지 궁금해지는 순박한 눈매를 보고는 침묵을 잠시간 끌어안고 있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묻는다.
"..더 어렸을 때는 어땠나요?"
순함을 넘어서 유약한 아이였던 건 아닐지? 쓸데없다면 쓸데없을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녀는 동료를 향한 평범한 호의에 깍듯하게 인사할 것까지는 없겠는데. 거기에 대고 이쪽은 또 꾸벅 인사를 되돌려주는것으로 답한다. 덩치 크고 눈치 없고 진지한 사람들끼리는 자기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 이 광경을 목도한 한 히어로는 생각했다지.
"일반적으로 휴가중에는 보고를 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없는 일을 찾아 하는 게 내가 아는 누구랑 썩 닮은 모양새가 아닌가. 쉴 땐 좀 쉬라고 재촉하던 주변인들이 이해되기도 하고. 그러나 쉬어도 쉬지 못하는 마음을 알고있으니 뜯어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내 방침은 이것이었다.
"일 없이 쉬는 것도 일이더군요."
그렇게 제발로 초과근무를 해왔던 인간이 깊은 공감을 품은 눈빛으로 말했다. 이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이 제발 줄어들기를 바랐건만 어째선지 더욱 깊어진 것 같다.
(62스레)
(에스터)
"확실히."
어린이집이라. 야망이 조금만 더 컸으면 큰일날 뻔했다. 딱 십년정도 어리게 한 탓에 대화정돈 평범하게 나눌 수 있다만. 그나저나 그러면 그 사람의 어려진 모습도 볼 수 있었을까. 하하. 상상이 안 되는...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심한 두통으로 휘청거린다.
"......"
무언가를 잊어버렸다. 목에 둘러진 빨간 머플러를 만지작댄다.
"...미안하다."
말을 하다 갑자기 쓰러질 듯이 군 것에 대해 사과한다. 역시, 어딘가 안 좋은 건가. 능력의 영향인가.
...아니. 기억나지 않는다기 보다는, 자신의 기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타인의 기억을 보는 것처럼 막연하고, 인물들의 존재감이 흐릿하게 느껴진다. 어째서 그 정도의 테러를 겪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지? 의문이 느껴진다. 소름이 올라온다.
"호칭 말인가. 히어로가 생기기 전부터 활동해왔기에, 본명이 익숙하다."
그 때는 이명을 만들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에스터라는 본명을 써왔었는데, 이즈모에 히어로로 들어오며 갑자기 이름을 정해야 한다는 것에 당황했었지. 그래서 적당히 지은 이름이 머리말이었나.
"마음대로 불러줘도 상관은 없다."
머리말이든, 에스터든, 자신의 본질은 그닥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름은 이제와서 숨기기도 그렇고.
"더 어렸을 때라... 확실히, 유약한 어린애였지. 지금도 그닥 강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름대로 지금의 성장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에스터였다. 역변이라는 놀림도 있지만, 성인 에스터의 성장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노력의 산물이었다. 몸도 마음도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한 에스터의 결의의 결과랄까. 뭐, 물론 키는 그냥 체질이다.
"그런가. 하지만 당장 위험해질지 모르니 말이다."
에릭의 등짝스매싱이 눈에 선하다. ...안 아프지만. 당신의 공감의 눈빛에 에스터도 공감의 눈빛을 보낸다. 두 덩치크고 진지한 사람들의 내적친밀감이 더 깊어지는 순간이다. 아니, 이젠 외적친밀감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진저)
"어릴 때 빈혈이 있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대화 중에 말을 끊는 것이 몰상식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대화하다 비틀거리는 게 예의가 아니란 말은 못 들었는데요. 동그랗게 뜨여진 눈이 소녀의 모습을 비추는데 눈동자에서는 이미 빈혈 환자가 비치고 있는 듯하다. 역시 나이만 어려지는 게 아니라 부작용을 동반하는 건 아닌가요. 어느 쪽이든 내게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마음대로 휘청이고 휘청이지 않기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빈혈에는 철분이 많이 든 소고기가 좋다던데요." 먼지 쌓인 기억들 밑에서 어느 때인가에 들었던, 좋다던 음식을 기어이 찾아내어 방향이 빗나간 해결책을 제시한다.
"마침 저번의 바구니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 주에 밤비 양과 셋이서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떻습니까. 에릭씨까지 넷이라도 좋겠네요."
스스로 지갑을 열겠다고 제안해 보는데 하고많은 고기들 중 굳이 비프를 상정하고 있으니 금빛 수저와는 거리가 먼 직장인 히어로가 베푸는 선심 중에서도 좀 무거운 것이었겠다. 내가 일하는 시간에 대부분 이명을 사용하는 건 같은 성을 지닌 가족들이나 빌런들에게 새어나갈 신상에 관한 우려가 있었겠으나 그녀는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이명을 굳이 정하라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겠습니다만..그렇다고 한다면 익숙한 쪽으로 불러드리죠."
에스터.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게 된 이명은 결국 폐기처분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속에 품은 생각을 알았더라면, 지금껏 이름에 맞추어 자신을 잘라내거나 부풀려왔던 나는 이해불가의 영역에 진입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상대방의 방식을 수용하겠다는 견해를 순순히 내비춘다. 다른 얘기로, 처음에는 말 머리를 잘못 써서 머리말이 된 걸까. 라는 엉뚱한 추측을 했는데 이건 서로간의 이미지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물어보는게 좋겠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군요. 지금은 훨씬 덜 유약해 보였으니까요."
유약하지 않다ㅡ-고 얘기하기엔 내가 뭘 안다고. 말 위에 쿠션을 올려두고 테이프로 둘둘 감아 그녀에게 건넨다. 푸딩처럼 몰캉한 어린애 모습의 에스터는 단서 없이 그리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지금 눈앞의 모습도 감히 상상해봤던 모습은 아니었으니-예나 지금이나 씩씩하고 튼튼한 체격의 여학생일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 충격적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조금 지나치게 모범적인 면이 없잖아 있지만 말입니다. 공감의 코드가 같은 주파수에 맞추어진다. 항아리 안에 모셔두었던 친밀감이 눈에 보일만한 것으로 각성하는 사태가 방금 일어났는데 이걸 동료애가 깊어졌다고 부르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에스터)
"...아니. 빈혈은 없었다."
능력의 후유증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딱히 특출나게 건강한건 아니지만, 그냥저냥 평범한 축에는 들었다. 비실비실하다고 해도 운동신경이 없고 겨울에 약한 정도지 구체적인 질병이 있는 건 아니다. 체력 자체는 평균보다 조금 좋았을지도... 그래봤자 조금 좋은 수준이었지만.
"아마 능력의 후유증이겠지... ...기억까지도 돌아가버린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니, 이 정도는 다행인 수준일 터이다."
에스터는 다시금 흑역사를 적립중인 블래스터를...너무 많이 떠올렸으니 그만 놔주도록 하자. 소고기의 얘기에는, 적당히 피식 하고 미소를 띄워보인다.
"답례같은건 필요하지 않다. 그 쪽이야말로 테러때 나를 구해줬고 말이야... 약속이라면 환영이지만."
그나저나 그 때까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모습 그대로 가는 걸까. ...밤비에게 놀림당하는 미래가 눈에 훤하다. 에릭까지 끼니 둘이서 아주 나를 잡아잡수겠군.
"나름대로 지금같은... 그러니까, 여태까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으니까. "
'지금같은' 이라는 표현은 지금의 시점에선 맞지 않으리라 판단해, 말을 고쳐본다. 괜스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작아진 손을 쳐다본다.
(63스레)
(진저)
당신은 불쌍한 진저를 얼마나 더 머쓱하게 해서 머쓱타드로 만들려는 생각이지! 장난이다. 흑역사를 충분히 지켜본 탓에 빈혈이 없었음에도 빈혈이었던 척은 해줄수 있었을텐데 곧이곧대로 빈혈이 없었다고 잘라버리니 이것 참 신선한 대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대처가 또 있을까 싶다. 빈혈이 없다는데 아쉽습니다. 라고 하지도 못할 노릇 아닙니까. 그럼 그거 말고 어지럼증을 부르는 원인이 어디에 있었죠. 수면 부족. 아니면 두통. 짐작 가는 데는 나보다 장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그럼 일시적인 어지럼증이었을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잘 모르겠어. 음. 능력에 동반하는 후유증이라 하니 라오스 전국에서 어린아이들이 휘청거리며 돌아다니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날 시점은 그때가 아닌가 싶고.
"기억마저도 돌아간단 말인가요. 하루빨리 생포하지 않으면 귀찮아지겠습니다."
그리고 머잖아 본인도 기억마저 돌아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하얗게 모르는 사람은 그걸 남 얘기하듯 해보는 거다. 평범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에스터를 어리게 만든 능력이 불완전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소녀의 몸에 소녀의 영혼을 가진 에스터. 대하지 못할거란 확신은 없는데 그렇다고 청소년을 다루는 데 도가 튼것도 아니어서 자신만만하지도 않다.
"말 한마디는 구해줬다는 말로 치환하기엔 너무 값싸지 않나요."
그럼 약속으로 하죠. 그렇게 한꺼번에 셋의 시간을 통제 아래 놓으며 옅은 미소를 흘려내었던 거다. 설령 별 거 아니더라도 원수보단 은혜를 기억하는 이를 대하는 것이 배로 유쾌했던 탓이다.
"반드시 돌아가게 될거란 보장이 없는데 생각보다 덤덤해 보이네요. 노력을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이 들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군요."
여태까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고.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는데 생각외로 타격은 없어 보이네요. 아니면 티를 안내는 건지. 그러겠대도 내가 없는 눈치를 만들어낼수도 없었으니.
"확인차 묻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히어로 일은 계속할 생각이겠죠? 부담을 줄 생각은 없지만 믿음직한 동료가 줄어드는 건 싫거든요."
자칫 낯간지럽게 들릴 본심을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무표정일 때가 많다. 말랑한 손이 쥐었다 펼쳐진다. 유혹하는 건가요. 저러면 간식 나눠주기가 취미인 나는 저 손바닥 안에 뭔가 집어넣고 싶어지잖아. 소지품에서 투명한 일회용 비닐에 포장된 말린 바나나칩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쥐여준다. 시작 신호 없이 시작된 보리쌀 수준이다. 이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신은 순간 말린 바나나칩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능력이 발현한건가 착각을ㅡ-.....아무리 해도 그건 아니겠지만.
(에스터)
"글쎄.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에스터는 고뇌한다. 단순히 기억을 일부 잃어버렸다는 걸로 휘청거리는 걸까. 아니. 그렇다면 10년간의 기억이 깡그리 날아간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못할 수준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정쩡하게 잃어버린 게 문제인 걸까. 완전히 기억이 쭉 밀렸어야 하는건가? 본인으로서는 지금의 상태가 훨씬 다행이긴 하다.
"이미 귀찮은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블래...생략한다.
"그 때 당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짓을 했을 지 모르지. 오히려 답례로서는 과분하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 쪽에서 사주는 것은 어떤가? 하고 제안을 건네본다. 어느 쪽이 사주는 것이건, 약속은 약속. 즐거운 식사가 되었으면 좋겠군.
"ㅡ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덤덤해보인다는 말에, 그런 추측을 내놓는다. 그 때의 감정이 지금 느껴지진 않지만,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열하고, 분노하고, 심지어 광기어린 발언을 하고, 이명과 두통에 시달리다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게 될 지경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에릭이 쉬라고 매일매일 쪼아대는 게 지극히 당연한 정도로.
"정신을 휴식하면서 다시금 몸을 길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게 담담하게 대답한다. 아니면, 근력이 아닌 다른 방법의 강함을 추구할 수도 있고. 함시온의 방식을 떠올려본다. 애초에 강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력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터.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히어로 일은 계속 할 생각이다."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그런 대답을 건넨다.
"...뭐. 이런 모습이 된 나를 히어로측에서 받아주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치안 유지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서류정리라도 한다던가. ...다시금 두통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당신에게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
바나나칩이 손에 들려있다. 뭐지. 말린 바나나칩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능력이 발현...했을리는 없고. 아마 당신이 집어준 모양이다. 나름대로 단 간식거리를 좋아하지 않는 자신을 배려한 것인가. 에스터는 당황하며 작아진 손으로 바나나칩을 쥔 채 살펴보다가, 짧게 고맙다고 한 뒤 바나나칩을 입에 넣는다. 음. 흔히 시중에 판매하는 것 만큼 설탕이 많진 않은 모양이군. 만족스럽다.
(진저)
"에스터. 사주겠다는걸 한사코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를 자각해주면 좋겠군요."
지갑을 여는 여학생과 뒤에서 신발끈을 메는 척 미적거리는 스물 여섯의 성인 남성의 모양새가, 글쎄. 썩 보기 좋지는 않겠네요. 대체 양심이 있느냐고 손님과 직원들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르고. 난 벌써부터 받게 될 눈총을 따가워해야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녀의 지갑에 든 정정당당한 월급을 부모님의 척수액이 묻은 용돈이라 생각할 테니.
"역시 이번에는 제가."
그게 좋겠습니다. 대신 다음 번에는 얌전히 대접을 받도록 하죠. 타협안을 내놓는다. 그나저나 과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새삼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은 기억해도 준 것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자각이 들고.
"그 상태를 휴식이라고 보는군요. 바람직한 사고방식입니다. 신체 자체에 불편한 곳은 없어보이니 제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뜻깊은 경험이 되겠죠."
작은 체격이지만 그렇다고 젓가락 그 자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는 소녀의 신체 이쪽저쪽을 뜯어보고서 말하는 거다. 그리고 히어로 일을 계속하겠느냐는 말에는 되돌아오는 즉답. 그건 아주 만족스러워서 미소를 피워올리기에 충분했고. 그녀를 아끼는 누군가는 그런 몸으로 히어로를 계속하면ㅡ- 운운했을지도 모르고. 또 그렇게 하겠다면 말릴 것도 없겠고. 그러나 내가 가족이나 지인이나 연인도 아닌 동료를 아끼는 최고의 방식은 과잉보호가 아니라 바로 그가 가진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이었으니.
"비슷한 연배의 히어로도 많으니 그 점에 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나 또한 적응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활동에 문제 없을 거라고 상부에 건의해두죠."
그리고 만일 거부당하는 경우라도, 결국 10년 후에는 ISMO에서 만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내가 저녁놀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당신의 태양은 중천에 떠 있겠다. 체구보다 큰 옷을 입고 바나나칩을 오물거리는 소녀 에스터.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잘 먹으니 이만큼 기분좋은 일이 없다. 아기새에게 먹이를 물어온 어미새의 심정이 되어 흐뭇하게 지켜본다.
(에스터)
"......거기까진 생각못했군."
그 말을 듣고서야 새삼 자신의 상태가 신경쓰이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금의 대화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의아하게 보이겠지. 성인 히어로를 상대로 근엄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고등학생이라니. 진저의 예의바른 말투까지 더해지니 더더욱 기묘한 광경이다.
"그래. 그러고보니...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런 모습이 되겠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실례하도록 하겠다."
...아니면, 나의 카드로 그 쪽이 계산하는 것은? 이라며 다시 한 번 슬쩍 제안해본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몸 상태로는 전투능력은 전혀 없으니까 말이야... 다시 일어서는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
에스터는 팔을 돌려본다. 본격적인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온 평범한 고등학생의 팔이다. 이런 몸뚱이로 전장에 나갔다간 분명 끝장이다. 역시 무리하지 말고, 처음에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며 히어로들을 돕는 게 좋겠다. 알렌의 일을 돕는건 어떨까. 안 그래도 늘상 과로사하기 직전인 듯 하니, 자신이 가면 꽤나 도움이 될지 모른다. 당신의 보장에 대해서는, 감사한다며 짤막한 인사를 전한다.
(진저)
"거기까지 생각해 주십시오."
부디. 말입니다. 에스터는 다른 절충안을 꺼내어 이건 어떠냐고 의견을 묻는다. 자기 카드로 내가 계산을 하는 방법이다. 한꺼번에 4인분의 밥값은 가볍지 않다. 그건 아는데, 고지식도 이정도면 나와 견주어도 되겠다 싶다. 근데 여기서 질 생각은 이쪽도 없어서.
"한번만 더 물으면 월급을 내 두배로 받는다 믿고 매일 등쳐먹을 겁니다."
.....한참 이어진 진지한 분위기에 눈치채지 못했을까봐 말해두지만 이건 농담이었다. 실상 스스로도 농담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녀와 대화하면서 농담이란게 이렇게 가뭄에 콩나듯 할줄은 몰랐지.
"그렇습니까. 바로 투입되지 못하는 건 아쉽네요. 이미 해냈던 일이라면 두번, 세번도 능히 해낼 테니 그땐 조급해하지 말아요."
시간이 걸린다면 그만큼 시간을 보내두면 되는 겁니다. 가령 만학도가 다시 놓았던 연필을 잡듯이. 따져보면 만학도보다도 나은 처지가 아닙니까. 나머지야 그녀가 알아서 잘 해내리라고 믿는데 입장이 바뀌어 있었다면 어땠을지는 모르겠네요. 감사인사에 고개의 끄덕임이 이어진다.
"그럼, 조만간 넷이 모인 자리에서 만나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에릭과 밤비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 될 거다. 작아진 에스터는 또 얼마나 주목을 받을 것인가. 그 점이 가장 기대되기도 했는데 거기까진 말로 하지 않고. 이번에 건네진 건 깍듯하게 모자를 벗는 인사가 아니라 단지 흘러내리지 않도록 모자 챙을 살짝 붙잡고 건네는 약식의 인사였겠다.
- 에스터(17) - 러브
- (61스레)
(나이빌런 이벤트중)
(에스터/17)
에스터는 포에버 러빙 유의 병실 앞에 서있었다. 최근 빌런으로 전향한 히어로고, 입원중이라고 했지. 당장 몸 곳곳이 성하지 않은 상태이니 이 쪽을 공격할 의사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생판 남의 병실에 왜 병문안을 왔냐 한다면. 글쎄. 그녀를 '배신자'로 칭하는 말들에 조금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대화를 해봐서 그 이유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테고, 설득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테지. 에스터는 평범한 크기의 과일바구니를 들고 문을 연다. 근력이 약해져있는 현재 상태 때문에 전에 진저에게 줬을 때만큼 무지막지한 크기는 불가능하다. ...잘 된 것 같다.
"포에버 러빙 유."
이명의 풀네임을 부르는 건데, 어쩐지 고백같다.
"...병문안을 왔다."
...생판 초면이지만 말이다.
(러브)
"어머나? 손님이신가요?"
메이드씨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인물의 등장에 놀라며 자신에게 병문안을 온 이를 살펴보았다.
히어로나 빌런의 무리들 내에서도 자신은 '무력진압 메이드'라는 타이틀 말고는 그다지 알려져있지 않으니, 게다가 친인척은 고사하고 가까운 지인도 조차 없기에 하늘빛 머리카락을 가진 이의 방문이 보통 놀라운 정도가 아니었다.
"으음... 제가 누군가의 병문안을 받을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일단은 거기 편하게 앉아계세요! 아... 그리고 잠시..."
일단 비교적 멀쩡한 팔로 그녀에게 편하게 앉아있을 곳을 권해주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게 피로감일까? 여지껏 제대로 쉬어본적도 없는 몸인데다 최근 며칠간의 일들이 몸에 무리를 줄만도 했는지 평범하게 팔에 힘을 주는 것도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그나마 자주 쓰는 팔을 다치지 않은게 다행일까?
"후후훗... 그러고 보니 기억 나네요~ 당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신 분 말이예요. 으음~ 물론 조금 더 우락부락하고 포스있는 ㅂ... 아야야~ 방금은 좀 무리였네요 이거~"
메이드씨는 평소처럼 활동적인 리액션을 취하려다 눈을 살짝 찡그리며 팔을 감싸쥐었다.
"후후후... 어쨌든 병문안 감사드려요. 머리말씨...
못보던 사이에 회춘하셨나 보네요~♥ 아아... 귀여워라♥"
역시 그 성격은 어디 안가는 걸까? 과일바구니를 받아 근처에 조심히 올려둔 메이드씨는 또 황홀경에 빠져 몸을 배배 꼬... 지는 못하고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다시 앉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ISMO의 높으신 분들께 지금 일을 들키면, 이래저래 곤란하지 않으시려나요~♥"
누구보다도 자신의 현상황을 자각하고 있는 메이드씨였기에, 그녀에게 경고 아닌 충고를 해주는 격이었다.
물론, 말상대라면 오히려 지금이 더 여유롭겠지.
"후후... 안심하세요~ 설령 제가 완쾌한다고 해도, 당신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구요. 다만...
...저 말고 제 '주인님'을 건드리신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요."
싸늘한 미소가 순간적으로 겹쳐지다 지나간 것은 그저 기분탓일 것이다.
메이드씨는 언제나 웃어보일 뿐이니까,
(62스레)
(에스터17)
"빌런에게 당해서 말이야."
회춘했다는 말에 별 감흥없이 대답한다. 평범한 과일바구니를 옆에 내려놓으며. 자리를 내주는 당신에게 약간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우락부락이라니, 사람을 앞에 두고 조금 심한 표현이 아닌가. "
뭐. 사실이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게 불평을 표해본다. 진심으로 상처입은 것 같지는 않고, 단순 투덜거림인듯 싶다.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인가. 워낙 여기저기 뛰어다녔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에스터는 과도로 능숙하게 사과를 깎아본다. 고등학생때도 이 정돈 할 수 있었다.
"무리하지 말아라."
활동적인 리액션을 취하려다 아파하는 것에는, 당황하며 덧붙인다. 아무리 배신자라 해도 히어로였던 상대의 몸 건강을 걱정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글쎄. 애초에 이 쪽도 휴가중인 몸이고, 이런 상태론 정상적인 전투도 불가능하니 말이야."
상대도 충분히 다친 상태고 자신도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다. 이명과 두통은 오히려 나아졌지만서도, 전체적인 몸 상태는 더 엉망이 됐지. 총 하나 쏘는 것도 힘들다니.
"여차하면, 그건 내 동생이다... 같은 핑계라도 대보도록 하지."
이것은 농담이었다. 너무 진지한 얼굴이라 눈치 못 챘을수도 있지만. 진저 그레이의 착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다. 그러더니 에스터는 깎은 사과를 예쁘게 썰어, 접시에 담는다. 포크를 꽂아두는 것도 잊지 않고.
"해코지 할 생각이라, 하려면 각오하는 게 좋을걸. 이 쪽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으니까."
비록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에스터도 나름대로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강했다. 이번 건에선 너무 하찮은 겉모습에 방심했지만. 에스터는 팔이 불편해보이는 당신에게 포크가 꽂힌 사과를 들어다준다. 아- 하고 입을 벌려 넣어줄 셈인 모양이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다니 다행이지만ㅡ아. 이 쪽도 딱히 그 쪽의 주인님을 건들 마음은 없다."
누군지도 모르기도 하지만서도, 굳이 본인이 아닌 본인의 소중한 사람을 붙들고 위협할 만큼 비열한 짓은 못 하는 에스터였다. 애초에 당신에게 그 만큼의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쪽의 주인님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무고한 사람을 공격할 순 없지 않나."
여전히 테러범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채였다.
(러브)
"후후훗... 역시 그쪽이었나 보네요~ 그도 그럴게 회춘한다고 키가 작아지는건 아닐테고, 오히려 회귀에 가까울지도요~♥"
별 감흥없이 대답하면서도 자리를 내어주는 자신에게 꾸벅 인사해보이는 것을 미루어보면, 그리고 어지간히도 딱딱한 말투를 어설프지 않게 늘어놓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녀 본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머나~ 후후훗...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남다른 분이셨는 걸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멋진 몸매를 가진 분...♥
아아~ 그 품에 한번 안겨보는게 꿈이었거늘~ 세상은 어찌도 이리 잔혹한지요~"
상처받았다기보단, 어딘가 작게 투덜거리는듯한 그 목소리에 저절로 스위치가 들어오는 걸지도 모르지.
메이드씨는 농담반, 진담반의 뉘앙스로 말하며 그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것보다 능숙하게 사과를 깎는 그 모습마저도 어쩐지 늠름해보여서 메이드씨는 그 광경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후후후... 무리하진 않을게요~ 이미 잔뜩 무리해버린거 같기도 하고~"
당황하면서 덧붙이는 말에는 평소처럼 밝게 웃어보이는 메이드씨였다.
차라리 이렇게 평화로운 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자신에겐 이런 여유로움조차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이 좋아 휴식이고 요양이지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 지옥을 마주해야 하니까,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고 지금은 잠시 그 보상을 누릴 시간이다.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당신도 저도 구조활동은 무리겠네요~
...그나저나 의외려나요? 에스터씨가 휴가를 내실 정도라니... 어떻게 하다보니 결국엔 수지가 맞아버린 걸까요~"
휴가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그녀가 드디어 제대로된 휴식을 취하다니, 물론 변해버린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디가 휴가인지 모르겠다만... 그와중에도 농담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녀도 지금같은 상황으로 인해 조금은 나아진 면모가 있는 것일지도,
"우와... 어디 가서 다른분께 그런말씀 하시면 안될거 같네요... 진심으로 믿어버릴거 같으니까~♥"
물론 농담의 경우와는 다르게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하마터면 정말로 그녀가 동생쪽이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게 바로 같은 말을 해도 말투에 따라서 의미가 변한다는 증거려나? 메이드씨는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겁먹은 시늉을 해보이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바로 웃어버렸다.
사과를 깎고나서 썰어내는 그녀의 행동에도 미숙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절도있다면 절도있다고 해야 할런지, 포크까지 꽂아두는걸 보면 병문안은 물론이거니와 손님 접대에도 문제 없을 정도의 소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후후후... 그래요.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는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당신 아니겠나요?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네요... 모습은 변해도, 그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는게... 참 안심이 되고 말이예요.
계속 그렇게 당신의 의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행동에 불만을 품을 이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신은 '폭군'이 될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거든요♥"
메이드씨는 본인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녀의 사람됨됨이를 잘 알고 있기에 어딘가에서 꺾여지지 않는 이상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만으로는 완벽한 세계를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질서정연하게 굴러가는 세상은 분명 재미없겠지. 트러블이라고 하는 약간의 현실성을 가미해야 사람이 진정즐기며 살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그런곳이냐 한다면 결단코 아니었다.
어쩌면 연옥에 가까운 수준이 아닐까? 미쳐돌아가는 이 세상은...
포크를 집어 자신에게 가까이 가져다대는 그녀를 보던 메이드씨는 본능적으로 거절하는가 싶다가도 이럴 기회가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마냥 덥석 물어갔다.
어딘가 행복해보이는 표정의 메이드씨도 분명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한참을 우물거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이드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성격은 어디 안가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후후후~ 맞는 말씀이예요!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당신 역시 그들을 보호하게 될 입장일테니까요...
아아... 사랑스러운 사람~♥ 당신과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답니다~? 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또 이상한데에서 스위치가 올라가버리는 메이드씨였다.
상대방이 테러의 경위를 알건 모르건, 그녀가 이런 자신의 모습에 당황을 하건 안하건, 아마 자신에겐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당신이 이곳에 계셔서 안심이예요. 여러가지 의미로 말이죠♥"
(에스터)
"회귀...확실히 그렇군. 나는 기억까지 과거로 돌아가진 않았다만, 기억마저도 돌아가버린 자들도 다수 있는 모양이니까."
에스터는 비스트를 떠올린다. 흑역사를 실시간으로 적립중인 어린 블랙에게 고기를 사줬었지.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다면 꽤나 창피해할 듯 싶은데.
"안기고 싶다, 라. 소원이라면 들어줄 수 있다. 다음 전투 때, 고려해보도록 하지."
그 후 무사하리라는 보장까진 할 수 없지만. ...에스터는 안은 뒤 이어지는 제압동작들을 여럿 생각해보고 있다. 살벌하다. 악의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무섭다. 전투는 전투. 관계는 관계.
무리하지 않는다는 말에, 별 대답은 없으나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성하지 않은 몸으로 돌아다니면 큰일이다. 비록 적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료였으니까. 이미 무리한 것은 어쩔 수 없고. ...이렇게보니, 정말 본인 몸 빼곤 다 챙기는 에스터였다.
"테러 이후 후유증이 심해서 말이야."
본인도 사과를 한 입 아삭 베어물어본다. 작아진 입이 사과를 오물오물 잘도 씹는다. 어려진 이후로는 어째 괜찮아졌지만, 원래는 일시적으로 말하는 것 조차 힘들어진 수준이었지. 무언가를 떠올려본다. 다시 머리가 아파와서 그만둔다.
테러 직후 냈어야 하는 휴가를 일주일이나 늦게 내버렸다는 얘기까진 할 필요 없겠지. 당장 무리하지 말라는 말에 신뢰도가 떨어져버리고. 그나저나 동생이라는 말, 그렇게 그럴듯한건가. 에스터 힐데가르트는 외동이었다.
"...그런가."
그녀의 후한 평가를 들으며, 그 말에 대해서 곱씹어본다. 좋게 봐준다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모두에게 나타낸다. 말이야 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 그것을 가능하리라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내린 고평가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노력할 수밖에 없겠지 .
"내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니, 기쁘네."
입가에 미소를 띄워보인다. 앳된 얼굴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눈매였다.
(63스레)
(러브)
"후훗... 그리고 몸은 물론이고 기억까지 십수년 뒤로 넘어간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라구요~"
메이드씨는 그녀의 이야기에 한가지를 더 보태었다.
대체 그런건 어떻게 하는 건지, 애당초 가지고 있던 기억까지 변한다면 자신처럼 세포를 조작할 뿐인 단순한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현실조작이라고 하는게 더 가깝지 않을까?
"우와... 살벌하네요~♥ 전투때 안긴다는 건... 그거야말로 정말 제대로 처리해버린다는 것 아니려나요♥
그래도 그런게 당신다워서 마음에 들어요♥"
꽤 투박하면서도 과격한 느낌이 전해지는 그녀의 말에 메이드씨는 조금 무섭다는듯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감쌌다.
물론 얼마 안가서 생긋 웃어보였지만 말이다.
역시 이렇게 되는쪽이 서로에게 편하려나, 한편으론 애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는 메이드씨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야기 해두는 거였는데...
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 후우... 그럴만도 하실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그래도 이제서야 원하던 휴가를 받으셨으니 조금은 쉬어가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녀는 무리를 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지금은 그저 다음 지옥을 위해 잠시 거쳐가는 쉬는 시간일 뿐이다.
이 뒤에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
그곳에서 이젠 적으로 만나게 될 두 사람이거늘 위로란게 이제와서 통할 리가 없지.
"후후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셔도 되는 사안이랍니다?
이래뵈도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있으니까 말이예요♥
그리고 아마 이 뒤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겠죠...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과 편을 가르게 된다 하더라도 꿋꿋하게 제 일을 할테니까요.
오히려 위선적인건 제가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그게 맞는 거였다. 애당초 사람을 죽여왔던 자신은 히어로의 자리에 설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당신과 척을 지는게 맞는 일이겠지.
그것이 비록 이곳으로 오기 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 죄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표정, 그 사이에 보이는 미소마저도 어째서 이리 사랑스러운 건지...
그 모습을 마냥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에스터)
"어처구니 없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게 이능력이라지만."
에스터는 담담히 대답한다. 사과 깎기에 분주하던 손을 다시한번 바라본다. 어른이 된 자신의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될만큼 물렁하고 여린 손이다.
지옥 문턱을 앞에 둔 쉬는 시간. 히어로는 상처입은 배신자에게 사과를 전하고, 빌런은 무력해진 히어로를 방관한다. 앞으로에 있을 지옥길을 버텨내고, 도피하기 위해서. 에스터는 사과 하나를 다시 당신의 입에 넣어준다.
"그 쪽도, 부디 푹 쉬기를."
그런 말을 건넨다. 이렇게 마주보고 다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도 지금뿐이겠지. 그녀가 붙잡혀서 심문실에서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 에스터는 문득 기시감을 느낀다. 하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응원이라."
좋은 말이다. 설령 적이 된다고 해도, 그 태도만큼은 여전히 본받아도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 말하곤 하는 '적이지만 인정한다' 같은 걸까. 에스터는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사적인 감정을 갖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라고 하는 게 좋을까."
적이 된다 하더라도 동료였던 당신은 여전히 경애의 대상이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단지, 다음에 그 쪽을 병원신세로 만드는 것은 자신이 될지 모르지만."
그 때도 병문안을 와도 괜찮겠나. 그런 말을 건네본다. 살벌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에스터의 방식이었다. 일은 일. 관계는 관계. ...그것이 언제나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러브)
"후후... 그렇겠네요~ 어처구니없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게 이능력..."
따지고 보면 자신이 처음으로 이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 어처구니 없는 일 때문에 이지경까지 되었으니까,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자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손이 가게 된다.
가끔은 이렇게 되찾은 기억들이 자신을 찌르곤 한다. 너무 많이 깨지고 닳아버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저 웃어보인다.
메이드로써 너무 감정적으로 사람을 대해선 안되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격려 감사드려요~ 역시 당신을 만나길 잘한 것 같아요...♥
그것이 어떤 곳이건, 그저 당신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후련해져요. 마치 오래전에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예요~♥"
그녀가 입에 넣어준 사과를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실 못다한 이야기는 많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려나.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공과 사가 뚜렷한 그녀의 행동이겠지. 그런면에서도 메이드씨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만약 자신이 계속 히어로때와 같은 행동을 해도 그녀가 비웃지 않을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후후후훗...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말을 꺼내는 것도 당신의 특기인걸요~♥
네! 얼마든지 가능하답니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자주 생길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당신에게 상처를 안겨드릴 생각이 없으니까요.
상처라면 이미 많이 입은 당신이니까요.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수는 없답니다♥"
설령 그녀가 자신을 병원신세로 만든다 해도, 그때도 병문안을 와도 괜찮은지 묻는 그녀의 말에 흔쾌히 승낙한다. 무엇보다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당신은 한때 동료였으니까, 이런면에선 자신은 공과 사를 쉽게 가르지 못한다는게 못내 아쉬웠다.
물론 그렇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거지만,
"대신 그렇게 된다면 병문안 선물은 더 큰걸로 들고 오셔야 할걸요~?"
여느때처럼 시덥잖은 농담도 곁들여보는 메이드씨였다.
(에스터)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이 쪽도 다행이네."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쁜 일이다. 히어로로서는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지.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띄워본다. 역시 어린애다운 표정은 아니다.
"......"
병문안의 허락을 받자, 아까보다 좀 더 확연히 미소지어보인다. 말을 대신한 대답이다.
"더 큰 병문안 선물이라, 확실히 오늘의 바구니는 작다. 근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훗날 에스터의 전력 과일바구니를 받게 된다면, 당신은 오늘의 농담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부분에서 과하게 손이 큰 에스터였다.
문득, 무거운 얘기를 꺼내본다.
"...당신은 , 어째서 빌런이 되기로 결심했지?"
사랑 때문이라는 얘기를 소문으로 얼핏 듣긴 하였다. 허나, 본인의 입으로 듣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러브)
"후후... 역시 미소가 어울리는 분이네요~♥
어느 누구던 안 그럴 사람이 없다지만, 당신은 조금이라도 더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길 바라거든요..."
병문안에 대한 승낙에 그녀의 기분도 한결 좋아졌는지 대답 대신 더 확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메이드씨는 그것을 보고 조금 더 기쁜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을 걸겠지.
"후후후... 근력의 문제라면... 왠지 나중이 감당이 안될것 같지만... 어쩌겠나요~ 메이드씨는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지 않는게 철칙이랍니다♥"
설령 그녀가 전력으로 과일바구니를 가져와 침대를 덮어버린다 해도 메이드씨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쪽도 즐겨보고 싶어서였을까?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다는 것이 그런 느낌일까,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조금은, 그때를 기대해보고 싶을지도...
"으음... 글쎄요~♥"
물론 그 뒤에 이어진 무거운 주제엔 그녀 역시 마냥 웃어보일 수만은 없었다.
어째서 빌런을 자처했는지. 정말 이유랄게 있었을까?
하지만 조금 더 확실히 하고 싶은점은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하는건 당신도 들으셨겠죠? 아마 그게 다일 거예요~
제가 사랑하는 분은... 빌런이니까요♥ 그분의 죄 또한 제가 떠맡기로 했던만큼, 그분이 죽을 위험에 처한다면 그곳에서도 꺼내는 것이 제 사명이랍니다?
그렇기에 저는 언젠가 어떤 위험한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빌런인 거겠죠...
게다가..."
메이드씨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이었다.
"저는 히어로하곤 안어울리거든요...~ 아무리 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다 해도... 내면의 제 자신이 그걸 용서하지 않아요.
당신은 모를 수도 있는, 원죄라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건 제가 빌런이 되고서도 변함없이 사람들을 구한다 해도... 달라지지 않겠죠..."
(에스터)
"......"
당신이 빌런이 된 이유에 대해 잠자코 듣는다. 사랑을 위해서. 죄를 떠맡는다...라. 자신으로서는 결코 할 수도 없고 엄두조차 내지 않는 계획이다. ...자신은,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한들 죄인을 구하는 일따위는. 찌를 듯이 아파오는 머리에 , 사과에 포크를 꽂으려던 손이 헛손질을 해버린다. 두렵다. 무엇이, 무엇이 두려웠더라.
되찾는 순간 무언가를 빼앗겨버릴 것이다.
덜덜 떨리는 몸을, 잠시 가라앉힌다. 목에 둘러진 붉은 목도리가 목을 졸라온다. 언젠가 삼킨 달콤한 것이, 역할 정도로 속에서 올라올 것 같다. 분명, 누군가를 총으로 쐈어.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절망이 나를ㅡ
... 눈물이 흘러나온다.
갑작스러운 감정변화가 자신을 집어삼킨다. 분명 이 상태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온함이 있다. 나는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이명과 머리울림을 대신한 갑작스럽고 깨질것 같은 두통이 자신을 쥐어짜고 있다. ...왜, 나는, 회귀해버린 걸까.
"...미, 미안..."
말은 끝까지 이르지 못하고 졸린 목을 맴돈다. 원죄자의 고백을 들으면서, 이런 반응을 하다니. 심한 실례였다. 원죄. 원죄라, 그 말을 들으니 무언가가 떠오르고 진정이 되는 것 같다. 그래. 나에게 있어 또렷한 기억.
"...원죄의 감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조금 붉어진 눈가로 겨우겨우 단호한 얼굴을 하려 애써본다. 하지만 이미 울어버린 이상 지금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추한 모습을 보여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어느 순간 남은 기억마저 뜯어먹히고 진짜 어린 애로 돌아가는 걸까. 그런 두려운 상상을 해본다. 안 된다.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른인 자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어른이 된다는 게 괴로움을 집어삼키는 일이라고 한다 해도.
"나의 친부모는, 인체실험을 계속 해온 비윤리적인 자들이었다. 나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미리 막지 못했다."
사과를 한 입 베어먹는다. 목이 조금 막히는 것 같다.
"...그렇기때문에, 나의 안에서는 계속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남아있었다. 설령 그것이 나의 행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릎을 붙잡는다. 손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그래서, 죽이지 않고 구해내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지."
다시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와서 이야기해보니, 자신이 어려지기 전에 느껴왔던 고통과 후유증이 뒤늦게 실감이 났다. 회귀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기억에서 느낀 감정 일부분을 잘라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크디큰 후유증이 쏟아져오겠지.
"나와 너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언젠가 적으로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포크를 내려놓는다. 또 다시 헛손질을 했다간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너와 공감하더라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진영과 관계없는 에스터의 진심이었다.
(러브)
자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어딘가 이상한것을 느낀 건지, 아니면 기억 속에 묻어져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온 건지, 갑자기 사과를 꽂으려던 손이 빗겨나가자 메이드씨는 당황스러워하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단단하게 고정되어있는 팔도 덩달아 그녀를 향했고 덜덜 떨려오는 몸을 추스려보려던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 괜찮아요~♥ 미안해하실 것 없는 걸요?"
오히려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닐까? 혹여나 그녀에게 나쁜 추억을 되살려준 것은 아닐까? 메이드씨는 무너질것 같은 감정을 애써 추스리는듯한 그녀를 보면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단호한 표정에 울상인 모습이 뒤섞인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니겠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인 건가요...
당신도 그런 이야기가 있을줄은 몰랐네요...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깨달았을지도 몰라요. 그게 지금와서 들어맞을줄은..."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그 이야기, 그녀가 고백하는 원죄에 대한 이야기가 소름끼치도록 들어맞았다.
비윤리적인 인체실험과 그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 그것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당시엔 진실을 보지 못했을 뿐일테니까,
"그래도 결국엔 막으셨잖아요? 당신의 용기로,"
막혀버린 갑갑함을 해소하려는듯 사과를 베어무는 그녀를 바라보던 메이드씨는 무릎을 붙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 역시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그런 광경을 지켜보았던 당신의 트라우마도...
어느 누구도 그때의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없겠죠.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를 지켜내고 싶고...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도 당신이 짊어진 짐일 거고 말예요..."
어느 누구던 사람이 죽는 것을 맨정신으로 좋아할 이는 드물었다. 더욱이 그것이 트라우마로 다가오는 이라면 격을 달리하겠지. 그러니 더더욱, 메이드씨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 사람처럼 이해자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당신을 품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서...
메이드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은 불안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포크를 내려놓는 것을 보아선 아마 진정하기 위해서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이게 제가 가야 할 길이었을지도 모르죠.
더욱이... 지금의 당신이 제 생각에 공감해주실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한걸요...♥"
그저 조심스럽게 그녀를 토닥여주려고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아주기까지 하기엔, 너무 오버하는 것 같은데다 일단 한쪽 팔이 온전치 못한 이유도 있으니까,
"감정을 쓸어내기 위해선 우는 것도 좋지만... 당신은 좀 더 단단하게 보이는 편이 좋다구요~?
진심으로 웃어보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말이예요♥"
(64스레)
(에스터)
나의 용기로, 막았다.
이 말을 과거 이젠 없는 누군가에게 들은 일이 있었다. 북받쳐오른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애초에, 분명한 기억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저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린애같았다.
토닥여주는 당신에게, 눈물을 뚝뚝 흘려내며 고맙다고 말한다. 역시 몸이 어려진 만큼 인격에도 어딘가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괴로움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다.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라."
그 말에 고개를 짧게 끄덕여 긍정을 표한다. 보드라운 살결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떨어진다.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채로, 다시 한 번 미소지어보인다.
"역시, 인격에도 어딘가 문제가 생긴건 아닐까...싶다. 기억과 인격이 어릴 때 상태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니까."
울어버린 것이 다소 창피해서, 괜스레 그런 변명을 덧붙여본다. 뭐. 사실이니까. 아마도 기억이 헤집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수한 눈물을 흘릴 일은 다시는 없었겠지. 어른에게 남은 눈물은 쓰디쓴 통곡의 결실 뿐.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다. ...다시금, 감사한다."
(러브)
뒤늦게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인지 그저 바들바들 떠는 당신을 토닥여준다. 당신이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건간에, 그 감정은 쌓이고 쌓였겠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부정적인 감정을 딛고 일어나면 강해진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감정을 잘 추스렸을 때의 이야기지 그저 가라앉히고 괜찮다고 하는 이들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터져버리고 말것이다. 그래선 보이지 않는 폭탄을 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당신은 고맙다고 했고, 메이드씨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이 당연히 해야 하는 위로라 덧붙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단단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그런 마음이 필요할 테니까요."
긍정의 의미로 끄덕이는 움직임에 따라 여린 살결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려가는 눈물이 보인다. 분명 슬픈 눈인데도 입은 웃어보이고 있다니 조금은 모순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게 나아지는 과정이겠지.
"후후훗... 그러게 말이예요? 어쩌면 지금이 되어야 깨달을 수 있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고... 정말 단순하게 인격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이런 짓을 하는 못된 빌런은 당장에라도 혼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러고보니 저는 이상태라서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지만요~ 후훗... 부디 제 몫까지 잔뜩 혼내주고 오실 수 있기를~♥"
어느정도 진정이 된 모양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라도 했는지 꺼내놓는 당신의 말에 메이드씨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이야기에 동조했다.
"추태랄 것까지야 있나요?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메이드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인 걸요?
저는 과거의 당신이어도, 현재의 당신이어도, 변함없이 위로해드릴테니까요... 물론, 말재주는 없지만요~?"
(에스터)
"...아하하."
이런 짓을 하는 못된 빌런은 당장에라도 - 당신의 장난스러운 말을 들으며 에스터는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위로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메이드의 덕목이라니, 역시 히어로로서는 누구보다도 의지되는 동료인데 말이야.
"...당신같은 사람과, 계속 동료로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꺼내본다. 이제와서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걸까. 사랑에 의해 행동하는 그녀가, 사랑을 위해 빌런이 된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히어로로서 든든한 동료를 잃어버렸다. 그 선택을 되돌리는 것을 감히 할 순 없으니, 그저 불평을 꺼내보는 것이다.
"이즈모의 손실이다."
그래서, 그렇게 단언해보였다.
"...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에스터는 스스로가 말재주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였다. 옛날에는 아예 더듬더듬거리며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는 소심한 아이였고, 지금은 해야 할 말만을 딱딱하게나마 꺼내는 것 이상으로는 못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부럽다고 생각한다.
(러브)
자신의 장난스러운 말이 어느정도 먹혀들어간 것인지 당신이 작게 웃어보이자 메이드씨도 덩달아 소리내어 웃어보았다.
이렇게 잘 웃을줄 아는 당신인데도 어째서 항상 진지하기만 한걸까, 라고 물어도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거겠지.
메이드씨는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이런 썩어빠진 세상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유감...
"후후훗... 저 또한 어떻게 해서든 당신들과 동료로 남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이 틀어져버렸으니까요...~"
설령 되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히어로의 길을 걸을 수 없는 몸이라면 빌런으로서라도 히어로답게 굴리라, 그것이 내가 나로써 있을 수 있음과 동시에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후훗... 말씀이라도 그렇게 해주신다니 감사드려요~♥
물론 당신의 말이 진심이란건 제가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저를 그대로 데리고 있는 것 또한 이즈모에겐 손실이겠죠. 또한, 당신에게도 손실일테니까요... 계속 곁에서 당신을 상처입힐 바에는, 차라리 서로 뒤끝없는게 낫잖아요?"
단언하는 당신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찔러져왔다.
이렇게 굳건한 당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운명은 자신을 그렇게 이끌고 있었다.
"으음~ 그건 어떠려나 싶네요~♥ 제가 당신을 부러워하는건, 그런 결단력일지도 모른답니다? 저는 누군가를 감싸주는 대신 모질게 말하지 못하죠.
반면 당신은 이래저래 말할 재능이 없어도 자신의 한마디를 누군가는 믿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저 또한 그렇고... 그런 사소한 의지의 차이만으로도, 세상은 참으로 쉽게 바뀐답니다..."
말주변이 없는 것은 분명 딱딱한 말투 때문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단단한 마음이 마음에 들었다.
아아... 그런 당신을 내가 소유하지 못한다는게 참으로 유감인걸, 물론 난 이미 임자가 있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시는 경우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히어로나 빌런의 관계로써는 도와드릴 수 없겠지만, 메이드로써는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요?"
(에스터)
"...그렇지."
이미 너무 많이 틀어져버렸다. 에스터는 유감스러움을 마음속에 눌러담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녀가 가고자 하는 길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다르니까. ...결국 적으로서 만났을 때, 전력으로 그녀를 막아낼 뿐이다.
"뒤끝없이, 인가. 좋아."
다음에 만났을 때는 봐주는 것 없는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런 말이 당신에게 건네어진다. 험악하긴 하지만, 악감정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에스터에게 러브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단력이라."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을 만큼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인걸까.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자신을 추켜세워주는 그녀의 상냥함일지도 모르겠다. 진심어린 평가라면, 영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언제든지 연락해달라는 말에,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 (이벤트전시점)에스터 - 도성
(63스레)
(어려지는 이벤트 전 시점, 사형 직후)
(에스터)
마침내, 휴가를 냈다.
멍하게 누워있다. 나는 무엇을 해왔지? 무엇을 위해 싸워왔지? 내가 그 빌런들을 미리 발견하자마자 죽여버렸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 싸그리...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뭣보다, 즉살명령에 동조한다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은 할말이 없어진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다.
"......"
휴가를 냈는데도, 자신에게 아무 일정도 잡혀있지 않다는 것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본관 1층에 다수의 사상자 발생. 본관 1층에... 계속해서 이명이란 지치지도 않고 울려댄다. 머리통을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은 뒤의 상태가 일주일 째 지속되는 것만 같은 느낌. ...에스터는, 조제받은 약을 꺼낸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약이 물과 함께 에스터의 목을 타고 내려간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까보다는 그나마 나아진 것 같다. 이명의 소리는 비교적 옅어지고, 머리울림은 덜해진다. 완전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은 안타깝지만, 대신에 부작용도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 대략 수지가 맞을 터이다. 그리고, 외출을 결심한다.
찬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다고 에스터는 생각한다. 검은 목도리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둥글고 빨간 털장갑으로 꽁꽁 싸맸다. 청바지 안에는 보이진 않지만 검은 레깅스로 보온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갈색 어그부츠를 신고, 눈덮인 길을 뽀득뽀득 걸어간다.
(이도성)
힘겹게 되찾은 자유는 달콤했지만 그와 동시에 어색했다. 짧은 기간 동안 제한 된 생활에 길들여져 버린 것인지. 철창 밖에서 행하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만신창이를 넘어 반송장 마냥 생기를 잃었던 육체는 둘째 형의 도움으로 예전의 고운 자태를 되찾았지만 썩 만족스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당했던 수치스러운 짓거리를 절대 잊지 않는다. 반드시 똑같이 되갚아 줄 것이다. 그네들의 일그러질 표정을 떠올리는 순.간 흥분감이 가득 차올라 당장이라도 작은 날붙이를 움켜쥔채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자칫 잘 못 움직였다간 다시 우리 안에 갇힌 맹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기다림 끝에 한 입 베어문 신선한 과육은 그 무엇보다 달콤할터. 조급할 필요 없다.
당신들이 가르쳐준 모멸감으로 나는 밤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장만할 생각이야. 도와줘."
사람도 하나 늘어났거든. 이 도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앞에 선 흑발의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현재 실종 처리 된 자신의 경제력은 바닥에 가까웠기에 예전처럼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려면 둘째 형의 도움이 절실했다. 어릴적 처럼 기억을 바꿔버리지 않고 실종처리로 마무리 지은 걸 보면 아버지께서도 이번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인가보다. 기다리다보면 다시끔 내게 황금수저를 물려주시겠지. 붉은 시선을 겁없이 마주하던 흑발의 남자는 잠시 고민하던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의 말을 들은 이 도성은 콧웃음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낭비해줘. 날 위해."
한 배를 탄 사이잖아 우리. 그럼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나는 잠시 나갔다올게. 오만한 작별을 마치고 자욱한 설원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올해들어 첫 눈이었나.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치 않지만. 이왕이면 눈이 내리는 날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허비하고 싶었다. 차가운 결정을 뒤짚어쓴채 서로를 마주본다던가. 눈덮인 길을 함께 걷는다던가. 여튼 보고싶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모르겠다. 지금은 자기자신의 안전을 위해 몸을 추스려야 할 때. 하지만 이미 외출을 해버진 시점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래. 이왕 나온 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충실히 시행했다는 걸 확인시켜줄게. 당신이 아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믿고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한 공간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막상 당신에게 다다르니, 얼른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본심과는 다르게 섵불리 문고리를 당길 수 없었다.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지. 원망하지는 않을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곁을 떠나진 않았을지. 문고리를 잡았다. 떼었다. 불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강박 행동을 반복하다 그 곳에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작은 종이 위에 당신을 향한 마음을 새겨놓고. 문앞에 버려두었다.
재회를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이별을 고했다. 힘빠진 걸음으로 정차없이 거리를 헤매다 보니. 뜻밖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늘빛 머리칼을 가진 장신의 여자. 익숙한 얼굴이다. 직접으로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본부에서 근무하던 이력을 통해 그녀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남긴 상처까지도.
"에스터씨 맞죠?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과거의 자신을 연기하며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스터)
"......"
에스터는 반사적으로 당신에게 총을 겨눈다. 챙겨오길 잘했다. 이런 거지같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살벌한 표정이다.
"감방에서 썩고 있을줄 알았더니, 잘도 나돌아다니는군."
네놈의 개같은 짓거리탓에 아직도 옆구리가 쑤신다. 두근, 두근. 약기운이 조금 가라앉혀준 머리울림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하필 왜 이럴때 네놈을.
"그 뻔뻔스런 낯짝으로 히어로들을 속이며 돌아다니며 즐거웠나? "
한 발 한 발 에스터가 당신에게 다가간다. 어느새 총구가 당신의 이마. 에스터가 불살주의만 아니었으면 당장 쏴버렸을 기세다. 뭐, 당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겠지만. 에스터는 희번득한 눈과 장신의 덩치의 위압감으로 당신을 짓눌러버릴 작정인 모양이다.
"아주 잘 지냈다. 덕분에 말이야."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다. 이명과 두통탓에 날카로움은 더 깊어져간다.
(이도성)
"워~ 인사라기엔 행동이 너무 거치신데요? 설마..."
과거의 가면을 뒤짚어 쓴 이 도성은 자연스럽게 무대위로 올라섰다. 저를 향하는 총구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당신과의 거리를 좁혔다. 잠시 키득이며 당신의 눈치를 살피던 이 도성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멋대로 짓껄이기 시작한다.
"잘은 모르지만~ 에스터씨 저희 부장님이랑 꽤 각별한 사이셨죠? 두 분이서 함께 계시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으니까요~ 부장님의 사형은...부하직원으로서 굉장히 안타깝네요. 저도 슬프답니다. 흑흑. 저한테 괜한 화풀이 하지 마시고. 붕어빵이나 드세요~"
인위적인 표정으로 당신을 올려다보던 이 도성은 억지로 제 눈가를 닦아냈다. 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거야? 독기를 가득 품은 바늘로. 일부러 당신의 아픈 부분을 찔러봤는데. 내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려줬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듯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오해라니까요~ 여튼 오랜만에 뵙네요. 반가워요. 가볍게 덧붙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당신의 손을 잡아 천천히 제 입가로 끌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체리에 Kiss~"
당신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상류층에서 전해오는 반가움의 표현이예요. 화내지 마세요.
"속이다뇨. 아무도 묻지 않았잖아요?"
이마에 겨눠진 총구가 위협적이다. 애써 당황한 시선을 만들어내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애처로움을 가득 담아 당신을 응시했다.
"다행이네요. 자 자~ 열내봤자 바뀌는 건 없답니다. 커피라도 한 잔 하실래요?"
이마를 총구에 밀착시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스터)
이윽고 당신이 그녀를 언급하자, 당신의 배에 총구가 하나 더 늘어난다.
"그래. 화풀이 대신, 네놈도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건 어떨까? 이 쪽이 훨씬 올바르고 좋은 행위같지 않나?"
이젠 진짜 쏠 기세다. 위험하다. 이마까지였으면 단순 위협이었겠지만, 배라면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라고 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에스터는 이마에서 총구를 거두더니, 대신 그 손으로는 머리채를 잡아본다. 으득. 두통은 심해지고, 이 자식을 쏴죽여버리면 조금이나마 잠잠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손등에 입을 맞추자 에스터는 거칠게 손을 뿌리쳐버린다. 그 더러운 입술 저리 치워. 애처로움을 연기하는 당신에게 약간의 동정정돈 보여줄 법도 한데, 경멸의 시선은 조금도 추스러들지 않고 그대로이다.
"커피? 웃기고 있네. 얼굴에 부어줄까?"
눈뜨고 보기 힘든 그 면상이 그나마 보기 좋아질 것 같은데. 두근, 두근. 이명이 멎지 않는다.
(이도성)
당신은 내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복부를 향하는 총구에 비릿한 붉은 빛이 스친다. 재밌네, 당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벌레를 상대하지 말고. 당신과 조금 더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데. 물론 난 지조있는 사람이라 당신에게 큰 관심을 주진 않을 거지만. 그런 당신이 마냥 재밌기만 한지. 흥미로운 장난감을 손에 거머쥔 어린아이처럼 쾌락에 물든 적색 눈길이 당신에게 고정된다.
"아이 참. 나쁜 말 하면 안 돼요. 그리고 저는 충분히 벌을 받았잖아요~ 죄를 뉘우치고 이렇게 돌아왔답니다. 그러니까~ 환영해주세요 에스터씨."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빙글빙글 정신사납게 웃으며 총구 안에 제 중지를 넣었다. 빼네었다. 그녀가 쉽게 사람을 쏘지 못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사냥을 시작하기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그녀와 재회하기 전까진 무탈하게 모든 것을 흘려버리고 싶었으니.
"죄송하게 됐네요~ 하지만 그건 좀 봐주세요. 막대하기엔 제 얼굴이 너무 잘 생겨서...."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강한 부정을 표했다. 가만보니 당신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터. 머리채를 움켜쥔 손도 그렇고. 정상적인 사람이 보일법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 무얼 할까요? 눈사람이라도 만들까요? 그나저나. 샤오화는 잘 있죠? 만나면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아끼는 동생이라."
작게 속삭이고는 나른하게 하품했다.
(에스터)
그리고 고막이 찢어질듯한 총성이 당신을 향하는 것이다.
Dice(71,94) value : 94
"버러지같은 놈."
험악한 얼굴이 중상입은 당신을 내려다본다.
"뻔뻔스레 그 이름을 꺼내? 네놈이 저지른 짓도 잊어버리고? 네 녀석의 머리통에는 그 잘생긴 낯짝 말곤 안 달고 다니는 거냐?"
녹턴의 언급까지도 인내하던 그녀는, 마침내 샤오화의 언급에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도성과 샤오화가 꽤 친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범죄자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거나.
"나쁜 말이라. 더러운 소리 듣지 않도록 그냥 죽어버리는건 어때? 서로를 위해 꽤나 좋은 해결책같은데."
이렇게나 분노를 향하는 데도 당신은 여전히 싱글싱글하다. 그 얼굴이, 태도가, 그녀를 배신한 누군가를 떠오르게 해 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이다. 닥터 구제프. 빌런의 수장으로 확인되었던 남자.
"눈길에 네놈의 흔적을 담아두면 퍽 아름다울 것 같군."
에스터는 테러의 참상과, 당신이 죽는 상상을 번갈아 떠올리며 일갈한다. 당신의 피로 물들어있는 눈 덮인 길. 언젠가의 핏빛의 비린내 가득한 이즈모. 머리가 아프다.
(이도성)
비릿한 총성. 욱신거리는 복부. 하여간. 요즘 나를 동네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새하얀 지면을 적시는 붉은 방울을 보자. 무엇인가 천천히 끌어 오른다.
충동 Dice(false,false) value : false
(3이었던 것으로 추정됨)
상처 부위를 힘겹게 감싼채 푹 고개를 숙이고 잠시간 미동없이 그 상태를 유지했다. 상처야 집으로 돌아가 둘째형의 능력으로 치료하면 되지만. 또 이렇게 수치를 남기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만나기 전에 일을 크게 벌리는 건 싫었기에. 지난 번 제가 당신에게 입혔던 상처를 떠올리며 애써 감정을 무마시킨다.
"아야야... 정말 아프네요..저..이러다가 과다 출혈로 죽을지도 모르겠어요..제가 죽으면 살인자 에스터씨가 되는 걸까요? 그런데~ 요즘 이즈모 근무환경을 보면 살인자도 떡 하니 히어로 타이틀을 달고 돌아다니니.. 문제 될 건 없겠네요~ 왜 그 클라운인가 코스프레인가 있잖아요? 그런 애가 히어로를 자처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니까요~?"
역류한 선혈을 거칠게 뱉어 내고는. 입가를 닦았다.
"이게 마지막. 벌레야 그만 짖어줘. 조용히."
당신에게 한 걸음 다가가, 붉은 입술 위에 제 검지를 올렸다. 그리곤 다시 가면을 뒤짚어 쓰고.
"저랑 샤오화는~ 에스터씨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각별한 사이라구요? 당신과 그녀의 관계보다. 저와 그녀의 관계가 더 깊을 걸요?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전화라도 해보셔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지난 번 그녀가 주었던 따스함의 흔적을 남겨둘 걸. 그거만한 증거가 어딨을까.
"오늘의 상처는 쌤쌤이 칩시다~ 지난 번 일로 에스터씨께 미안한 감정도 있었고. 이 정도면 다 풀리지 않았나요?"
다시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어내며 당신을 응시했다.
(에스터)
"살인자? 우습군. 즉살명령을 잊은건 아니겠지?"
에스터는 자조적인 비웃음을 얼굴에 띄운다. 누가 보더라도 많이, 꽤나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당장 조금이라도 이성이 증발했다면 당신의 이마를 쏴버렸을 지경으로.
"징계까지 받아가며 열심히 무시했지만 말이야. 역시 내가 물러터졌어."
당신을 이 장소에서 죽여버릴 각오를 다지던 순간, 에스터는 녹턴을 떠올린다. 머리가 아프다. 즉살주의를 긍정한다면, 당신의 죽음조차도 타당했다면서 인정하는 꼴이다. 지끈대는 이마를 붙잡고,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한다. 진정, 진정하자.
"한 번 더 지껄이면 정말로 죽여버리겠다."
그렇게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던 찰나, 당신이 꺼낸 이름에 표정이 싸하게 굳는다. 감정적으로 살의를 드러내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진심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진짜로, 당신의 죽음을 짊어질 각오를 하고 있다고.
벌레라며 자신의 입에 들이대진 손가락을 부러뜨려버릴까 고민하지만, 조금 가라앉히고 이런 녀석과 계속 대화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판단에 이른다. 단숨에 죽여버리는 것도 망설일 정도로 무른 자신과는 달리, 세상에는 더 잔혹하고 무자비한 히어로들이 많으니까. 제정신이 아닌 자신보다 이 인간만도 못한 자의 끝을 멋지게 맺어줄 것이다. 타인이 대신 손을 더럽히는 걸 바란다니, 심하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그녀는 중상을 입은 당신을 방치해두는 길을 택한다.
(이도성)
"하지만 그날로 히어로 에스터의 신념은 무너질 거야."
지금껏 지켜왔던 각오를 포기하면서까지 심장을 뜯어낼 정도로 내가 당신에게 가치있는 사람이었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더 이상 과거를 연기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무대 아래로 내려온 이 도성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그건 알 바 아니고."
당신이 불살을 이어가던 말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작게 조소하던 이 도성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느른한 한숨을 내뱉으며 품 속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시끄러워. 내가 허락하기 전 까지 소리내지 마."
자신의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뱉어내는 초식동물의 목덜미를, 당장이라도 물어 뜯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 벌레 하나를 잡겠다고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내키지 않았기에. 살의를 여유로움 속에 감추고 오만함을 덧씌웠다.
"오늘은 그냥 놓아줄게. 잘 가."
이 정도의 상처는 평소 자신을 자멸시키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언제든지 사냥감을 취할 수 있는 포식자의 시선으로 당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당신에게서 그대로 돌아섰다. 아까도 말했듯이 다음은 없어.
- 레이든
(63스레)
(레이든)
(나이빌런 이벤트 시점. 레이나는 7살로, 에스터는 17살로 돌아가있다.)
결국 몸은 작아졌어도 성깔은 그대로인 우리 누나는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다.
"하...이게 무슨 꼴이야? 설명이냐 해봐. 어느 미친놈이 누날 이렇게 만든거야?"
"양복에다가 동물 가면 쓴 잡상인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이거 돌아오기는 하는 거야?"
누나는 낸들아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면 이 일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일 수 도 있다. 몸은 어려지게 되었고 능력은 봉인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녀석의 정체를 모른다. 만약 그 녀석이 정체를 제대로 숨기고 많은 히어로들을 어려지게 만든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어서 잡아서 고문을 하든 뭘하든 되돌려야겠네. 녀석의 신원은 파악하고 있대?"
"그걸 알면 벌써 족쳤지. 참, 어려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나중에 녀석을 다시만나면 20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해볼까?"
"그럼 나한테 오빠라고 해야겠네? 어자피 지금도 7살이니 오빠라고 해봐."
누나는 오빠라는 말 대신 중지를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쳇, 그나저나 그럼 누나 말고도 다른 어려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가령 저기 가는 저 사람이 그 어려진 사람일 수 도 있고"
에이든은 마주오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
(에스터릭)
"그러니까, 에스터씨는 너무 겁이 없다니까요!?"
"...그래서, 너는 겁이 많아서 사이비 종교앞에서 신을 욕했나?"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에스터씨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모른다구요!"
"단지 외출가는 것 뿐이잖아. 흥분하지 마."
에스터가 작아진 탓에, 어느새 둘의 키차이는 거의 비슷하게 되어있었다. ...아니. 에릭이 통굽을 신은걸 감안하면 역시 에릭쪽이 작았다. 어찌됐건 키를 제외한 겉모습은 평범하고 앳된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에스터가, 그것이 걱정스러운 에릭의 잔소리 폭탄을 맞고 있었다.
"근력도 능력도 사라졌다구요! 엄청난 상황이라고요! 이러다가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아."
눈 앞의 남자가 어려진 사람으로 에스터를 가리킨다. 에스터는 자신을 향한 손가락을 바라본다. 에릭도 그 손가락을 바라본다.
"...아. 안녕하세요!"
에릭은 일단 활짝 미소지어본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를땐 웃는게 최고다. 그리고 에스터의 등 뒤를 꼬집어본다.
"이, 이쪽은 제 평범한 여동생 에리카에요! 저는 에릭! 앤서니 남매!"
"에릭. 이미 다 들켰으니 괜한 연기 하지마."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어색해지는 에릭의 연기에 에스터는 넌지시 태클을 날린다. 에릭의 얼굴이 새하얘진다.
"그그그, 무슨소리니. 엘리자!? 오빠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
"아까 에리카라며."
"아니. 그러니까 미들네임까지 합해 에리카 엘리자베스 앤서니인 거에요! 이 정도 설정은 바로 눈치채줘야죠!"
"설정이라고 해버렸다. 에릭."
에릭이 식은 땀을 흘린다. 그러더니 에스터를 자신의 등뒤로 숨기고, 팔을 벌린채 소곤댄다. 에스터의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그에게 박힌다.
"...여긴 제가 맡을테니, 에스터씨는 이 틈을 타서 도망쳐요."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다짜고짜 적 취급하는건 그만둬."
(64스레)
(레이든)
아무래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누나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고 꼬마들의 동공은 더 흔들리고 있었다. 행동도 부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보아하니 저쪽도 이쪽과 같은 꼴이다.
"자...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대충 내가 대충 찝은 사람이 진짜 빌런한테 당해서 어려진 사람이라는 거지? 누나는 이 두사람을 알고 있고. 그렇다면 아마 히어로겠네?"
히어로 아니면 빌런일테지만 빌런이라면 이 근방이 멀쩡할리가 없으니까 히어로가 맞는 것 같았다. 히어로+빌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이 있을리가....있네...
"굳이 도망칠 필요는 없어. 이쪽도 나름 히어로니까. 안그래? 동생아? 크억..."
누나가 내 정강이를 발로찼다. 누나가 안 변한건 성깔 뿐 아니었다. 손도 그대로 매웠다.
"하...레이나예요. 에릭씨, 보아하니 그쪽은 에스터씨 같은데 저랑 같은 신세가 된건가요? 아니다...제가 더 심각하네요.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거예요? 당신도 저 처럼 그 이상한 애한테 당한건가요?"
"자자, 누나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나중에 꼬맹이 히어로 모임에서나 하시고 지금은 그런거 다 잊고 좀 쉬어.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그나저나 두분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저희처럼 갑자기 어려져서 옷 사러 가는 길이신가요?"
(에스터릭)
"그렇다."
그 쪽도 당했냐는 레이나의 질문에 앳된 얼굴의 에스터는 대답한다. 저 쪽은 이쪽보다 더 심각한 상태인 모양이다. 뽀쟉뽀쟉 소리를 내며 걸을 것 같은 앳된 레이나가 보인다.
"앗..?아아...?아아아.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레이나라는 이름을 듣자 에릭은 꾸벅 90도각도로 인사를 한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히어로! 멋진 히어로! 아마 당신의 활약이 인상깊었거나, 능력이 인상깊었거나 한 모양이다. 레이나를 향한 동경 가득한 눈이 반짝거린다.
"이 쪽은 산책을 가는 길이었다. 집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말이야."
"아니. 레이나씨. 들어보세요. 에스터씨, 도무지 몸 사릴줄을 모른다니까요!? 얼마전 정신적인 상처로 휴가까지 낸 상황에 이렇게 돼서 능력도 힘도 못쓰게 됐는데 겁도 없이 혼자 산책이나 나가려 하고...!"
"쓸데없는 얘기 그만 해."
에릭이 에스터의 뒷담...아니, 앞담을 늘어놓는다. 그녀가 혼쭐이 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호신도구도 있고, 총도 쓸 수 있다고. 반동피해가 있을 뿐."
"그래도, 위험하다고요! 흉흉한 세상인데...!어디서 납치라도 당하기라도 하면..."
"과보호다."
그렇게 떠들던 에릭은, 에이든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화하고 있던 자신의 무례를 깨닫는다.
"아. 죄송합니다. 그그, 옆의 동생분은 이름이 무엇인가요!"
(레이나,에이든)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에릭이 레이나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며 관심을 가지는 듯 눈을 반짝거리는 것을 본 에이든은 레이나의 머리를 헝클여트렸다.
"오, 인기많네? 진짜 영웅 같은걸?"
"진짜 영웅 맞거든!"
그리고 에릭의 푸념을 들은 레이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든은 그런 레이나를 보며 웃었다.
"누나한테 말해도 공감 못해요. 히어로라는 족속들은 항상 무리를 한다니까요? 지난번에 폭발이 일어났을 때는 죽기 직전까지 갔으면서도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면서 병원을 탈주한거 있죠?"
에릭은 레이나의 공감을 원했지만 에이든의 공감을 얻었다. 레이나가 가끔 무리를 하고 돌아올때면 에이든은 무리를 하는 것, 희생을 하는 것 그것이 히어로의 기본 소양이라도 되는 거냐며 레이나에게 따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레이나는 그저 싱긋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총도 쏘고 호신용품도 쓸 수 있죠? 일곱살짜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야, 부자집은 망해도 삼년 가는 거 몰라? 나 아직 안죽었어!"
"그래, 안죽었지. 어려졌지. 장담하는 데 내 왼손만으로 능력 안 쓰고 누나 이길 수 있을껄?"
그리고 에이든은 에스터릭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다.
(에스터,에릭)
"에이든씨로군요! 저는 에릭,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에리카 엘리자베스에요!"
"장난치지 마. 이 쪽은 에스터다."
별로 통하지 않을 장난을 쳐보나, 에스터의 빠른 태클이 돌아온다. 에릭은 분한지 괜히 삐진 시늉을 해보인다.
"영웅적인 태도로군."
"...아-진짜. 하나같이 자기 몸을 챙기는 사람이 없네!"
에이든의 증언을 듣자, 에스터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서 모두를 구하고자 하다니, 본받을 만한 태도다. 반면 에릭은 팔을 뻗고 바둥거린다. 히어로쪽 사람들은 다들 과로가 취미인 사람들밖에 없어!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바쳐야 하는 법이지."
"구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자기 몸을 먼저 챙겨야 한다구요! 죽어버리면 다 소용 없는 일이라고요!"
"...이런식으로 늘 잔소리를 듣곤 하지만."
"에이든씨. 에이든씨라면 제 마음 알겠죠!?"
에릭이 에이든의 손을 붙잡고 눈을 반짝인다. 이 자기몸 안 구하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필요해.
"...그렇군. 확실히 이런 몸이라면 불편이 클 것이다. 인격이 돌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만."
에스터는 곰곰히 생각한다. 자신이 지켜준다면 어떨까... 를 생각해보다가, 자신도 이 꼴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레이나의 경우보단 낫지만, 빈말로라도 불편하지 않다곤 할 수 없으니까. 당장 능력 무효화에다가, 일반인만도 못한 수준의 근력이다.
"옷...! 옷 사러 가시나요. 그럼 같이 갈까요!? 에스터씨도 마침 옷이 필요하시죠!?"
"뭐? 아, 아니. 나는 그다지..."
"어린 몸에 걸맞는 옷! 옷이 필요한 거에요! 옷! 에스터씨 옷 골라줄테야!"
"...나를 가지고 인형놀이를 할 생각이지. 에릭!?"
그리고 마침내 에릭은 에스터가 말을 듣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에 에스터가 이 모습일 때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려야지.
(레이나, 에이든)
"알죠. 잘 알죠. 왜 히어로들은 자기가 죽으면 자기가 차후에 구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죽게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요?"
에이든은 남정네가 자신의 손을 갑자기 잡아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으로 자신과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나 기뻤나보다라고 생각해 넘어갔다.
레이나는 에이든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못마땅했는 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에릭의 같이 쇼핑가자는 말에 눈이 반짝거렸다.
"아, 이것 참. 어쩌지? 그래! 같이 가자"
"아니, 누나 우리 방금..."
레이나는 작은 몸으로 에이든에게 점프해 멱살을 잡고 머리를 끌어내려 그의 귀에 속삭였다.
"살려주세요. 남치범이예요라고 소리친다? 경찰서 가기 싫으면 조용히 닥치고 따라와"
"네.."
그리고 그의 멱살을 놔준 후 싱글벙글 웃었다.
"에이든, 너도 날 가지고 인형놀이를 한다고 생각해봐. 재밌지 않아?"
"난 인형놀이 싫어했어."
그는 내심 자신이 꼬마가 안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어린애가 되었다면 지금 에스터가 겪고있는 일이 자신의 일이 됬을 것이다.
(에스터,에릭)
에릭은 에이든의 말에 응, 응! 이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댄다. 그러다가 자신이 손을 잡아 상대가 당황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죄, 죄송합니다! 에릭의 손에서 에이든의 손이 놓아진다.
"그렇다면, 쇼핑하러 가는 것이군요! 렛츠 고~!"
에스터가 한숨을 쉰다. 에릭은 에스터의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옷가게로 향한다.
ㅡ
"어서오세요~"
일행은 옷가게에 도착한다. 점원의 밝은 목소리가 네 사람을 환하게 맞아준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 여학생 하나, 성인 남자 둘. 이 미묘한 나잇대의 조합이 다른 사람들에겐 대체 어떤 느낌으로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할 리 없는 에릭은 점원에게 환한 얼굴로 맞인사를 건넬 뿐이다.
"에스터씨. 에스터씨. 이왕 작아진 김에, 지금까지 못 입어봤던 옷 입어보는 것 어때요? 그 동안 여성복이 거의 안 맞았잖아요."
"에릭. 이 모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라."
"하지만... 지금이 기회라고요! 딱 하루 입는다고 해도 옷은 그 하루를 위한 가치가 있는거에요. 그쵸 레이나씨?"
에릭이 레이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은근슬쩍 타인을 끌어들여 에스터의 입을 다물게 할 셈이다.
"오래 못 입으면 기부할 수도 있잖아요. 네네?"
"...그러면, 최대한 실용적인 옷으로 사."
"어디. 이 옷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실용적인 옷으로 사!"
결코 실용적이지 않은 프릴 가득한 귀여운 드레스가 에릭의 손에 들려진다. 자기가 입을 것 아니라고 함부로 고르지 마! 에스터의 그런 외침이 속으로만 울려퍼진다. 디자인은 그렇다 치고, 전혀 편하지 않아보이잖아. 저 옷.
"네에에...에스터씨...? 이런 옷 입을 기회, 지금밖에 없다구요오...? 귀엽지 않아요. 이 옷...?"
"귀엽긴 하지만,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기에 너무 화려한 디자인이다. 그 전에, 불편해보여."
"한 번만... 이 귀여운 저를 봐서라도 입어주세요..."
"귀여운 네가 직접 입는 것은 어떨까."
에릭은 실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쉬운 듯이 드레스를 에스터의 몸에 맞춰본다. 에릭은 딱히 드레스를 입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드레스를 입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쩐지 부끄럽다. 자신은 귀여우니까 이런 거 입어도 귀엽겠지만...같은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는건 너무 재수없잖아.
"...아. 레이나씨. 이런 옷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나에게는 비교적 정상적인 옷을 골라준다. 아동복이지만, 어른이 입기에도 그렇게 부끄럽진 않게. 나름대로 에릭도 서로간에 지켜야 할 선이나 예의같은 것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레이든)
'아 젠장...'
세사람, 아니 두 사람은 즐거워 보인다. 그들은 옷을 고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다.
"맞아요 맞아요. 나중에는 입고 싶어도 못 입어요. 이때가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요. 두번다시 입을 기회 없어요."
'뭘 입든 상관없으니 나갔으면 좋겠다.'
빨리 나가고픈 에이든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두 사람은 서로 옷 이야기 하기 바빴다.
"근데 누나 너무 낭비하는 거 아니야? 우리 옷 이미 샀잖아?"
"네 월급, 내 월급 그리고 둘이서 사니까 조금은 낭비해도 돼."
"아니, 그럴 돈 있으면 내 용돈이나 올려주지..."
"시끄러"
프릴 드레스가 에릭의 손에 있자 레이나는 에스터에게 입어보라며 부추겼다. 그녀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어때, 에이든 너도 에스터씨가 이거 입는 게 좋을 것 같지?"
"네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레이나는 에이든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 지 똑바로 대답하라며 혼내면서 땅에다가 손을 짚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레이나는 살짝 당황했다.
"습관이라는 거 참 무섭지?"
레이나와 에이든 사이의 침묵은 에릭이 깨뜨렸다. 레이나는 그대로 에릭이 골라운 옷을 입고 나왔다. 꽤나 귀여워 보였다.
"에이든, 나 사진 한장만 찍어줘. 이거 잘 어울리지?"
"응, 그래. 잘 어울리네"
(에스터릭)
"......"
에릭 뿐이라면 모를까, 레이나까지 이렇게 말한다면 에스터로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옷, 익숙하지 않은데. 우선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레이나는 에스터가 입어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딱 한번만 입고 나오자.
잠시 후, 탈의실에서 드레스를 입은 에스터가 나온다. 조금 자신이 없는지 망설이는 표정이다. 곳곳에 프릴과 리본이 달린 드레스는, 무릎을 겨우 덮는 길이의 (에스터 기준으로)짧은 것이었다. 치맛자락을 어색하게 붙잡은 에스터는, 이제 됐지. 라며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앗. 잠깐만요. 에스터씨. 이대로 구매하면 입고 가도 괜찮아요!"
"...역시 입어보니, 구매는 아닌 것 같아."
"아니에요. 에스터씨에게 아주 잘 어울려요! 그렇죠! 레이나씨! 에이든씨!"
"자, 자꾸 끌어들이지 마..."
에스터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에릭은 탈의실로 들어가려는 에스터를 붙잡는다. 이거 놔줘.
"아. 레이나씨. 옷 정말 잘 어울려요!"
반짝반짝거리는 눈. 아무래도 레이나와 에릭은 가끔씩 이렇게 같이 쇼핑을 나와도 괜찮을 지 모르겠다. 쇼핑에 흥미가 없는 두 사람을 대신해서.
(레이든)
"정말 잘어울려요! 에스터씨!"
레이나는 프릴 드레스를 입은 에스터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고 에이든은 웃음을 참느라 힘겨워했다. 치맛자락을 어색하게 붙잡은 에스터는 그의 기준에서는 웃기고 귀여운 것이었다.
"야, 동생아. 누나 어떠냐?"
"어 예뻐. 아주 잘어울려"
"제대로 대답해"
"안 예쁘다하면 때릴꺼잖아?"
"좀"
"예뻐 예쁘다니까?"
"어휴 됐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그러면서 그녀는 곧 에스터가 옷을 갈아입겠다고 탈의실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에릭과 함께 필사적으로 막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포탈로 탈의실 입구를 봉인할까 생각했지만 이런 가벼운 일에 능력을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보류했다.
"근데 왜 이런 좋은 구경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는거야?"
그러면서 그는 이 세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에스터릭)
"......"
에스터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분명 저건 비웃음이다. 분명 이 모습 엄청 웃긴 모양이다. 어려졌다고 해서 커버할 수 있는 옷이 아니다. 빨리 갈아입자.
탈의실로 향하려던 에스터는, 에릭과 레이나에게 막혔다! 아무리 레이나가 작아졌다곤 해도, 에릭 한 명으로도 버거운데... 거기다 에스터 본인도 약해져있었다. 어떻게 하...아니. 사진이 찍혔다!
"찍지 마!"
에릭은 나이스! 라는 신호를 에이든에게 보낸다. 엄지손가락이 치켜세워져있다. 에스터는 얼굴을 가린다. 마른 세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에이든씨. 에이든씨는 옷 안 고르셔도 되나요!"
에릭이 신이 나서 파닥거린다. 아무래도 옷을 고르는 것에 신이 난 모양이다.
그 외에도 에릭이 동물잠옷과, 여러 실용성 없이 귀엽기만 한 옷들을 잔뜩 가져왔다. 예산문제로 대부분 기각당했다.
(레이든)
"나중에 전화번호 주면 사진 보내줄게요"
에이든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 누나 이제 옷 다 골랐지? 그럼 이제 가..."
"너 혼자가 임마."
"어"
에이든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레이나는 당황했다.
"어, 야, 진짜 갈꺼야? 야 나 일곱살이야! 나 진짜 누가 납치하면 어떻해?"
"알아서 잘 살아와봐"
"야! 하...미안해요 에스터씨, 에릭씨 먼저 가볼게요"
- 형수20 - 에스터17
- (66스레)
(이벤트중시점)
(형수)
커피를 사 마시는건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 시키는 것도 익숙하지가 않고, 커피머신이 있다고 해도 쓰기에는 좀 옛날 사람이라서 좀 그렇다. 그래서 커피를 시켰다. 내가 빌런이라고 하는 범죄자라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거리를 활보해도 괜찮은 모양이다. 양복차림으로 이 시대의 휴대폰을 좀 두들기며 있다가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오는데.
커피가 두 잔이다. 하나는 심플한 아메리카노. 나머지가 카페모카. 환불을 하고 싶은데 너무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냥 아무에게나 주고 신경 꺼야지.
그냥 저기 길 가는 키 큰 여자애에게 주고 갈 생각이다. 왜냐면 뭔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평범하지 않은 느낌을 느꼈기 떄문이고, 그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거 좋잖아.
" 아, 저기요. 커피 마시실레요? 딴게 아니라 하날 더 시켜서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
카페모카를 당신에게 건낸다.
하지만 당신이 유 형수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게 큰 실수겠지.
(에스터)
"...?"
분명, 가일로프 양복점의 그... 능력으로 젊어진건가? 기억도 사라진건가? 아니면 그냥 자신을 못 알아봤나...? 아니. 자신이 어려졌으면 상대가 어려졌을 수도 있단 추측을 할 수 있으려나... 에스터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가족일수도 있고. ...덤으로 에스터는 아직 테러범들의 정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덕분에 온건한 대화가 가능할 예정이다.
"...가일로프의 사람...?"
혹시나싶어서 슬쩍 지나가듯 언급해본다.
"...미안. 나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다... "
기껏 호의를 건네줬는데 거절하려니 미안하다. 얼굴을 긁적인다. 그나저나, 지금 모습이 이러다보니 말투에 의구심을 가지진 않으려나. 오해받게 된다면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자.
(형수)
이건 의외다. 굉장히. 그냥 아무나 집어 커피를 내밀었는데 11년 후의 자신이 알 것 같은 사람이다... 인생*발. 그래도 어떻게 할까. 내가 주의들 기울이지 않은 탓인데. 이 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 아마도,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죠? "
그리고 조금 머쓱해한다. 건낸 카페모카를 거두며
" 커피를 잘 안 마신다니 유감이네요, 그럼 먹는 수 밖에요. "
빨대에 입을 대 커피를 입에 담는다. 뭐, 10년쯤 지나도 커피는 커피구만. 달라지지 않을 건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 그나저나 생각한 사람이 누구길래 그렇게 당황하는거에요? "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아니면 꽤나 그렇겠다. 그런 의미로 물어본다. 그나저나 11년 후의 나는 이런 미성년자와 알 법한 사이가 된다... 뭐 일 때문이겠지 뭐.
(에스터)
"당황한 것처럼 보였나... 가일로프라는 양복점의 주인인데. "
에스터는 머쓱해하는 당신에게 미안해져 같이 머쓱해진다. 머쓱타드 두 사람분이 있었다.
"옛날에 봤던 모습으로, 아니, 그보다도 더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여서... 혹시 그 쪽도 나이를 빼앗긴건가 싶었다. "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기억까지 옛날로 돌아갔다면 소용 없으려나. 그래도 이 쪽은 성인이기라도 해서 다행이군.
"...이 쪽은 최근 열 살 정도의 나이를 잃어버렸다. "
그러고보니 이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있으려나.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자신의 상태를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형수)
" 그렇다면 정답이겠네요. 유 형수라는 사람이 바로 납니다. "
두 사람분의 머쓱타드 중에 하나를 풀어버리자 언제까지고 머쓱한 체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 나이를 빼앗겼다라, 설득력 있는 이야기네요. 요즘 그런 일이 있었다 하니까. 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없어서 그렇다고 확정짓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고. "
일단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 털어놓아도 괜찭을 것이다. 만약 이게 약수라면 11년 후의 내가 어떻게든 처리하겠지. 그런 안일한 마음이다.
" 아, 잃어버린 나이는 11년쯤에 아는건 없어요. 전 기억은 그렇다 쳐도, 이 시간대에서 산 것도 며칠 안 돼니까. "
다시 말해, 당신께 도움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카페모카를 입에 머금어 먹는다.
(에스터)
"...나이와 함께 기억을 빼앗긴 자들도 상당히 다수이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
사실은, 자신의 기억도 부분적으로 손상되어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가. 이 쪽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하지만 에스터는 도움을 받는 쪽보단 주는 쪽의 사람이었다. 히어로이기도 한 만큼. ...상대가 빌런이라는 것을 안다면 위험해질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부분적으로 빼고는 기억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형수)
"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그 사람이라고 봐도 괜찮은 거겠죠? "
이제 어떻게 요리할 사람이 정해진 듯 싶다. 만약 그 사람이 되돌리지 못한다면 아주 담가버려야 되는 것이다.
" 아쉽게도 이쪽은 도움을 받는걸 싫어하는 편이라서요, 뭐랄까 불편합니다. 그런 의도가 아닌 걸 알아도 의심하고, 결국 실수하겠죠. "
도움을 잘 믿지 못한다. 악의 없는, 딴 생각 없는 호의를 호의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 넘겨버리고, 지켜준다 말하고 죽어버리고, 좋아한다 말하고 찔러버리고, 사랑한다 말하고 죽어버리고,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고 팔아버리고, 안심하라고 말하고는 죽어버린다. 이 거짓말들에 실증이 났었다. 만약 11년 후라면 이것도 좀 옅어졌음 좋겠다. 아, 표정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 사람 때문이 아니잖아.
" 부분부분들 빼고는 전부 가지고 있으면... 몇살 더 시간을 가진게 아닐까요? 아, 미성년자라서 마이너스일수도 있겠네요. "
(에스터)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종류의 특이한 능력자가 많진 않을테니.
"...그런가."
유감스럽다는 말투로 그녀는 대답한다. 어쩔 수 없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몰라도, 상대의 입장에선 초면인 사람이니. 사실, 양복가게 주인과 손님이라고 하는 수준의 관계이기도 하고. 에스터에게 있어서 삶이란, 구원의 연쇄같은 것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자들이 있었기에 자신은 성장할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괜찮은 척을 하려 애쓴다.
상대도 표정관리에 서툰 편일까. 자신도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이니 어쩔 수 없지. 어릴때는 늘상 울상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굳어진 얼굴이지. 그렇기에 그 표정에 구태여 기분나빠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다를 바 없으니까.
"글쎄. 마이너스 아닐까. 몇 년 가까이 몸을 단련해온 게 전부 수포로 돌아갔으니."
그렇다고 해서 딱히 크게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꼭 전장에 뛰어드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히어로를 돕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 모습을 이용한 미끼가 되거나, 사무 처리를 돕거나, 봉사활동, 후원 등등. 뭐, 역시 가장 잘 맞고 익숙해져온 일이 전투였지만. 아무래도 이런 생각이 난다는 것은, 그만큼 싸우는 것에 지쳤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형수)
" 미안합니다. 믿어주지 못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요. "
괜찮은 척. 싫게도 다른 사람의 표정을 잘 읽는다. 누구든지 쓰레기 밑에서 일하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된다. 그 시절을 벗어나더라도 흉터같이 몸에 남은, 그 때를 연상시키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확실히 몇 년 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마이너스겠네요. "
여기서 몇 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더 사라질 게 있을까? 애초에 스스로 이룬 게 있었나? 몸에 남은 혐오스러운 것들과 뇌에 남은 잊혀지지 않을 것들만이 남은 몇 년, 얼마나 더 어려지던지 상관 없었다. 오히려 태어나기 전으로 돌려 사라진다면... 나쁘지 않다.
" 도와주시고 싶으시다면... 우리 나이를 뺐었다던 그 ㅅ...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면 좋겠네요. 어쩌다 길에서 만날 수도 있는 거고요. "
사실 만나면 반쯤 죽이고 싶다. 힘줄 다 끊어버리고 뒷골목에 던져버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잘 산다는걸 알아버리면 쓸데없는 희망을 가져버리게 하잖아.
" 그리고, 11년쯤 후의 나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라는 사람은? "
(에스터)
"...그 사람이라. 능력 외에는 보잘것없는 녀석이었다."
휴가중인데 접근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설마 숨겨진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모양새였으니까.
"초등학교 앞에서 불법 노점상을 하고 있었지. 주의를 주려 하니, 장난감같은 것들로 정신없이 공격해왔고."
공격력따윈 제로나 마찬가지였지만, 혼란시키는 목적이라면 제법 통했다. 비눗방울과 페인트 총으로 시야가 가려진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설마 저런걸 진심으로 공격용으로 쓰다니... 라는 당황 탓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장난감으로 무장한 불법노점상 하나에게 무기를 드는 건 과하다고 생각해 총을 쓰지 않았으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사실, 애초에 전투를 하게 되리라는 생각도 못했고, 전투능력따윈 없어보였는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곤."
에스터는 작아진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전에는 이러고 있으니 진저 그레이가 간식거리를 쥐여줬었지. 뜬금없이 바나나칩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무심코 애취급당한 것 같기도 한데.
"당신은ㅡ...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지."
에스터는 곰곰히 떠올린다. 당신에 관해, 몇번인가 간 양복점의 주인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가? 정말로? 하지만 깊이 떠올리려 하면 두통이 심해진다. 괜히 뇌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하자. 안 그래도 몸도 약해졌는데.
"몇 번인가 셔츠를 맞췄었다. 상당한 고급.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그에 걸맞는 품질이었지. 그 가격조차도 디스카운트된 거였지만."
고민끝에 산 셔츠는 상당한 활약을 했다. 외골격이 없었다면 그 때 그 테러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지. ...테러. ...참혹한 광경, 가해자들...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였었지. 당신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머리가 아파진다.
"...외골격에, 불연소 기능이라는 어마어마한 게 붙어있었으니까."
셔츠가 강해서 놀라버렸었다. 대체 누가 셔츠를 이렇게까지 만들 생각을.
"다치고 위험에 처할 일이 많다보니, 당신의 서비스가 굉장히 도움이 되었었다. 다시 한 번 감사한다."
아마 에스터 혼자 셔츠의 옵션을 결정해서 했다면 , 에스터는 어리둥절한 채 이런거 해본적 없다는 소시민 티를 냈겠지.
(형수)
" 그런 사람에게 당하다니, 11년 후의 나란 사람은 꽤나 엄밀하지 못하네요. "
불법 노점상 주인... 의외다. 뒷배가 전혀 없을듯한 사람이다. 물론 있을수도 있지만 수단과 직업이 너무 그렇다는 것을 어필했다.
"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 "
칭찬일까. 칭찬이겠지. 양복쟁이는 손가락질 받을 직업은 아니니까 확실히 칭찬이다.
" 외골격과 불연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께 옷을 맞춘 나는 꽤나 똑똑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
다시 생각해도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경지다. 어젠가 설계도만 보았는데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스스로를 기억하고 있다.
" 고맙다는 인사는 나이를 돌려받은 다음의 내게 해 주세요. 그때 해도 늦지 않을테니까요. 지금의 나는 당신과 완전 남남. 지금의 나와 당신이 아는 나도 옛 시절을 공유하는 남남이니까요. "
그러니까... 지금과 그때의 나는 구성하는 것도 다르고 몸도 다르고, 그에게 있어 공유하는건 기억의 일부분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남남이다.
" 컨디션이 즣아 보이지만은 않은데, 괜찮은거죠? "
(67스레)
(에스터)
"글쎄. 정말 예상 외의 타이밍에 능력을 썼으니까. 오히려 너무 허술해보이기에 방심하게 된다고 할까."
당장 에스터 자체도 그랬으니까. 지금 피해를 본 사람들중, 상당한 전투능력을 가진 이들도 많을 터였다. 본인이야 휴가를 내야 할만큼 심한 후유증도 있었다지만.
"...그렇지..."
미래의 유형수의 평가에 대한 당신의 반응에 긍정하려다, 다시금 머리가 지끈한다. 이번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휘청거렸다. 뭐지? 나는 이 자에 대해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조금 가쁜 숨을 쉰다. 두근, 두근, 두근. 묻혀있었던 괴로움이다. 어린 모습이 된 이후론, 테러현장의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일은 없었는데.
"...미안하다. 어려진 이후로, 지속적으로 두통을 겪고 있다. "
컨디션에 대한 질문에 결국 순순히 대답하고 만다. 거짓말은 서툴었으니까. 식은 땀이 흐른다. 이 감정이 무엇에 의한 건지 모르겠다. 두근두근대는 이 마음은 사랑... ...같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테고.
"어려지기 전에도 트라우마로 이명과 머리울림은 있었으나, 오히려 지금은 기억 일부를 잃었기 때문인지 그 쪽은 나아졌지만... 능력의 후유증인지,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모르나 두통이 찾아온다."
꽤나 솔직하다. 이것이 적에게 정보를 전해주는 꼴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지만, 아마 적이라 해도 숨길 수 없었겠지. 에스터의 성격을 생각하면.
"뭔가 당신과, 다른 관계가 더 있었을텐데... ...인간관계의 일부가 날아가버려... ...기억해낸다면, 빠른 시일 내로 연락해주겠다."
하지만 연락을 할 수 있는 날따위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되찾는 순간 미래의 그는 에스터에게 있어 적이 될테니까. 기억을 찾고 나서도 과거의 그를 온건히 대한다 한들, 그런 것을 전해줄 수 있을리는 없었지.
"...고맙다는 인사는, 기억을 되찾고 나서... ...그래야겠지."
기억을 되찾은 뒤엔 결코 고맙다는 말 따윈 할수 없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형수)
(68스레)
" 무엇보다... 안정을 취하는게 좋아 보인달까요? 어쩌면, 그 후유증이 나이가 돌아왔을 때에도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게 아닐까요. "
식은땀, 무엇보다도 상대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럴 때는 어떻게든 집으로 보내는게 순리겠지. 이 상태로 혼절이라도 하면 좋지 않기 떄문에.
" 말하는데 죄송하지만요... 그건 타인에게 말할 이야기갸 아닌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말하고 싶으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는게 어떨까요. "
스스로 생각해도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라는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연히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다. 카페모카를 한모금 머금어 마신다.
" 당신과 미래의 나와의 관계... 특별한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찝히는게 있다면 말해주시는게 도움이 되겠죠. "
그냥 RPG의 주인공과 방어구 상인의 관계가 아니였을까 생각해 본다. 신뢰라면 돈과 품질의 신뢰밖에 필요없는 관계. 11년 후의 자신은 그보다는 훨씬 다양한 신뢰를 받고있는 듯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받을 자격이 있을 듯한 신뢰는 그게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다.
" 꼭 해야 되는건 아니니까요. 마음 편히 생각해주세요? "
그리고 슬슬 보내야 되지 않을까. 이정도면 시간을 너무 많이 먹는게 아닐까.
" 그럼 이제 슬슬 일상을 살아보도록 하는게 어떨까요.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죽인것 같은데...... "
슬슬 나도 시간이 촉뱍해졌고.
(에스터)
"...고맙다."
걱정해주는 당신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 이 두통의 원인이 그가 저지른 일 탓이라는 건 알지도 못한 채로. 살짝 미소를 띄워내보인다.
"...그런가. 비밀일 것 까진 아니라 생각했다."
이마를 붙잡는다. 에스터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비틀거리는 약한 모습을 보인 시점에서, 상태를 숨기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 대한 정직한 설명을 건네는 것이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칠 정도로 올곧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고 만 것이겠지. 마침내 그 정직과 올곧음이 동경하는 사람을 죽여버리고 말았고.
"...없는 걸까."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기억을 헤집어놓고 식은 땀이 흐르게 만들 어떤 기억이 있었다. ...어떤 것이. 어째선지 다시금 테러현장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려진 이후로는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는데.
"아. 실례했군. 안녕히."
에스터는 당신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
여전히 당신에게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
(형수)
" ...... "
당신은 정직하다, 아마도 이십년이 지나도 힘들겠지 나라는 사람에게는.
" 올바른 사람이시군요. 그럼 안녕히. "
작별인사를 건내고, 걸음을 옮긴다. 올바른 사람을 한명 더 알아간다.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위에 올바른 사람을 두는게 최선이겠지.
- 黑小花 (샤오화 일상)
- (70스레)
(샤오화)
유난히도 추운 날이다. 원체 추위를 타지 않았기에 평소 얇고 짧은 옷도 무리없이 입고 다녔지만-몇 년 전만 해도 빙상장에서 얇은 의상을 입고 날아다니는 사람이었으니 내성이 길러질수밖에- 이런 극악무도한 날씨에는 역시 예외로 쳐야겠지. 목을 덮는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입고 검은 기모 스타킹을 신는다. 무릎을 가볍게 덮는 회색 치마가 걸음걸이에 맞춰 부드럽게 흔들린다. 다음. 검은 코트를 걸치고 포근한 부츠를 신는다. 그럼 이 다음은? 모자나 목도리는 크게 선호하지 않는다. 해서 흑소화는 부츠를 끼운 발에 온기가 돌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온갖 내용이 담긴 종이가 한가득 들어찬 박스를 양 손으로 들어올려 현관을 나섰다.
ISMO에 서류를 모아 전달하자는 결정을 내린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했고, 그만큼 간단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납게 치고 지나가는 한겨울의 칼바람에 하얀 양 뺨이 붉게 물든다. 파기되도록 내버려두자니 중요해보이는 내용들이 많았고, 가족들 편으로 전달하기엔 유품이라 칭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가 돌아갈 곳은 한 군데뿐이겠지.
그나저나, 진즉에 관두기도 관두었고 그간 구태여 방문할 이유도 없었으니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일체 걸음하지 않았었는데 그새 어디 바뀐 곳이 있으려나. 흑소화는 건물의 출입문을 밀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로비에 제가 놓아두었던 트리가 반짝거렸다. 해서 눈치없게도 절로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스가 묵직하다. 엷은 미소를 띈 채 트리를 바라보던 흑소화는 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김에 익숙한 얼굴이나 만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에스터)
겨울이었다. 이즈모 내부에는 난방이 잘 안되는건가. 아니면 감기기운이 있는 것인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에스터는 이즈모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최근 선물받은 검은색 비니에,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은색 패딩. 목에는 뻣뻣한 회색 목도리가 둘러져있었다. ...이 사람 아직 휴가중인데 쓸데없이 들락거리며 일을 돕고 있다. 서류처리를 돕거나, 청소를 하거나, 근처 잡빌런을 상대로 긴급출동하거나. 좀 쉬어라.
"도와줄까."
아무튼 그런 워커홀릭의 눈에 당신이 들어왔다면 반응은 하나 뿐이겠지. 무거워보이는 박스를 옮기는 것을 돕는다. 당신이 허락하건 허락하지 않건 그녀는 당신의 박스를 가볍게 가져가버릴 것이다. 선물받은 벙어리장갑을 한 손이 상자에 뻗어진다.
아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숏컷의 머리카락일 것이다. 꽤나 오랫동안 길러온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턱을 겨우 넘을랑말랑 하는 만큼만 남겨놓은 파격적인 변화. 뭐 숏컷의 하늘색 머리가 허리에 닿는 은장발이 되어왔다는 충격적인 사례도 본사에 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남색 기모바지를 입은 다리가 당신 옆에서 걸어간다. 에스터는 조만간 스커트를 몇 벌 더 구매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머리 하나 잘랐다고 이렇게나 오해받는 일이 늘어서야 원.
"휴가동안 잘 지냈나?"
여러가지 의미다. 자신의 휴가, 당신의 휴가, 휴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있었던 온갖 종류의 일들에 대해 함축하는. 더 섬세한 질문을 하기엔 에스터의 어휘력이 부족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에스터의 얼굴은 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졌을지도 모르겠다. 늘 인상을 쓴 듯한 굳어진 얼굴에서는 벗어난 정도.
당신이 머리카락을 의식해 쳐다본다면, 살짝 미소지어줄지도 모르지. 예전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진 표정으로.
(黑小花 - 에스터언니 ㅠㅠㅜㅜ)
시야 안에 벙어리 장갑이, 아니 정확히는 벙어리 장갑을 낀 손이 끼어들었다. 놀란 토끼 눈을 한 흑소화는 순식간에 비어버린 제 양손을 우선 응시하다가 눈을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음성과는 달리 조금은 낮선 모습에 동그랗게 떴던 눈을 한 번 깜빡, 이후로 두 번은 더 깜빡거리는 행위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해서 순간 막힌 말문을 감사합니다, 정도의 간단한 말로 겨우 터 놓고는 곧바로 조금은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제게 미소지어준 당신을 향해 마주 미소지으며.
" 에스터 님, 이미지 변신이에요? "
어울린다. 멋있네요~ 완전 예뻐요. 그렇게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다시금 생글거리며 질문하고.
" 휴가요? 음~ 글쎄요. 그런대로 잘..? 아, 잘은 아닌가? 뭐, 요즘 이런저런 큰일이 많았잖아요. "
허나 잘 지냈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던가, 당신이나 나나. 다만 당신의 부드럽게 풀린 표정이 너무나도 포근하고 보기 좋아서, 그래서 선뜻 성급하게 안심해버리곤 다시금 만면에 만개한 꽃 같은 미소를 떠올리는게다.
" 에스터 님은요? 머리는 언제 자르셨어요? "
(에스터)
"...그렇지."
아직 칭찬세례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한다. 이런 수줍은 모습들도 나중이 되면 보기 힘들지도 모르지.
여러가지 큰 일이 많았다는 얘기에는 소리없이 끄덕인다. 피차 더 얘기해봤자 상처를 헤집어내는 행위이다. 에스터는 당신의 미소를 보고 안심했는지 조금 더 웃어보인다. 그래도 다행이네.
"머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나서 바로."
원래 모습이라 함은 나이빌런 건의 얘기였다. 몸이 돌아오면서 기억 또한 다시 되돌아오게 됐고, 이에 따라 가라앉아 있었던 상처들도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에스터는 한 손으로는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 끝을 어색하게 만져본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잘랐다."
말 그대로였다. 테러 현장으로부터, 잃어버린 인연으로부터, 동경한 자의 사형, 수도 없는 시체들, 온갖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른 것이다. 그 사이에 실연이 있다는 감상적인 얘기따위는 숨겨버리겠지만.
"아. 그러고보니 최근 에릭이 드디어 너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샤오화씨였냐며,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며 난리를 피우더군."
난리를 피우더군. ...이 말 역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에릭의 사회인으로서의 어른스러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애초에 지킬 이미지도 없었지만.
(샤오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벽색이 곱고도 장난스레 휘어진다. 다만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웃음기 서린 얼굴에도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나버렸지. 우리들은 단시간에 너무 큰 일들을 겪었다. 쉽사리 낫지 않을 상처들이 깊게도 남았고 이 상처들은 필히 흉터로 남게 되리라 감히 짐작한다.
" 그렇구나아.. 정리. 정리 좋죠. "
다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아니. 당신들은 그 크디큰 흉터마저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안다. 흔히 '올곧은 인간'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흉터를 문신으로 덮어 가린 나와는 달리 똑바로 상흔을 보고 흉을 딛고 힘겹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들은 흐르는 물이고 흑소화는 고여있는 물이었으니까.
" 진짜로요. 물론 긴 머리도 어울리셨지만 이것도 엄청 예뻐요!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빗 말고 다른 걸 드리는 건데.. 뭐, 짧은 머리도 빗질은 필요하니까. 괜찮..죠? "
흐르는 물이 아무리 반짝여보인대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그저 제 자리에 순응하며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이미 결정했고, 아마 영영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겠지. 안다. 저는 과거의 행복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이미 알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수 없는 화목과 행복을 찾아 헤메이며 살아갈 고인 웅덩이다. 다만 그에 있어서 불만이란 글쎄.
천성이라는 건 참 무섭더라고. 결국 불만은 없었다. 흑소화는 약간의 씁쓸함을 흘려내고 방실 웃는다.
" 아, 그 연구원 님 이름이 에릭이었구나. 저번에 만났을 땐 통성명도 못 해서 몰랐어요. 근데 설마 제가 피겨스케이팅 했었던 걸 알아보신 거에요? 와우, 아직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좀 기쁜데요? "
그럼에도 제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엔 숨김없는 미소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 아 참. 그보다.. 안 무거우세요? 든 게 많아서 무게가 꽤 될 텐데. "
(에스터)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물인걸."
미소를 띄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어떻게든 당신에게 좋은 기분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어려운 일이겠지. 그저 서툴게나마 다정함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겐 순간이었던 일도 상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강렬한 경험일 수 있다. 너에게 피겨는 한순간이 아니었는데,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어떤 사람의 순간이 누군가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경험이라면 몇 번이고 해봤던 것이다. 피겨 얘기에 대한 답변으로는 과하게 무거울까. 하지만 이것 또한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모습일지어다. 어떤 상황과 말에서도 진지하고 진중하게 답을 내놓는 것이 에스터의 천성이었으니까.
"네가 나아갔던 모습은 누군가를 감명시키고 매료하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칭찬조차도 딱딱하고 무거운 말투로 해버리는 것은 고치고 싶은 부분이다. 에스터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후 네가 무엇을 하게 되더라도, 네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은 그런 형태로 남게 되겠지. 너의 땀의 결실은 누군가의 인생이, 희망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거창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낯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담담히 말한다. 왜냐하면 에스터는 언제나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당신의 속사정까지는 모른 채 하는 발언이 당신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들릴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에스터는 무거운 상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간다.
"...아. 이거? 무겁지 않아."
그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당신의 대답에 뒤늦게 반응한다. 신경쓰고 있었구나.
"이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에스터는 정말 끄떡없다는 듯이 가벼이 대답한다. 이럴 때 아니면 힘은 뒀다 어디 쓰겠냐고. 당장 휴가 이래로 제대로 된 일처리를 못 하고 있으니 이정도는ㅡ이 사람은 휴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71스레)
(샤오화)
참으로 당신다운 대답이었고 당신다운 방식의 칭찬이었다. 딱딱하고 무거운, 몹시 진중한 말투에는 진정성이 듬뿍 묻어난다. 해서 흑소화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제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잊혀질 일이 당연히 없으리라는 단언을 들었음에 감사하며 일순 안도하는 것이다. 다행이다, 하고.
" 누군가의 인생이, 희망이, 구원이 된다고요. "
제게 내밀어졌던 선물과 아기자기한 글씨체의 팬레터, 꽃다발과 목에 걸렸던 금메달을 회상한다. 반짝이고 예쁜 것들로 보답받았던 과거에서 흑소화는 제가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느꼈었다. 그래서 이대로 노력하고 나아가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거늘- 아니, 옳았던가? 좋지 않은 시점에서 발현된 이능력이란 이름의 재앙은 짤막하지만 강렬한 루머를 퍼뜨렸으며 그 결과란 제 친구들과 팬층 일부의 소실이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뒤틀린 애정을 품은 이를 만나게 만들었지. 그리고 마지막은 여기다. 이래서 사람들이 한 우물만 파면 위험하다 말하는거구나.
" 그랬으면 좋겠다. "
다만 앞으로 계획된 제 행보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희망이, 구원이 될 만한 결실이 맺힐 수 있을까? 아니요. 그럼, 앞으로의 제 모습은 누군가를 감명시키고 매료하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울까? 절대 아니요. 자문자답은 간단히 끝난다. 벽안이 일순 남몰래 가라앉는다. 다만 그와 별개로 당신의 고운 말들에는 적잖게 위로를 받았으니, 무겁지 않다는 배려있는 말엔 또다시 방긋 웃으며 " 그럼 이 쪽으로 옮겨 주실래요? " 라며 당신을 끌어가는것이다.
" 이거 서류들이거든요. 제가 갖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버리기는 또 뭐해서 이즈모에 다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오니 어디에 제출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
아, 여기로요. 그리고 그렇게 어물어물 말을 마무리하며 이미 떠나간 제 오랜 인연이 자리했던 방의 문을 버릇처럼 두드리려다, 아차 하고 그 손을 떨어뜨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것이다. 책상 위에 두면 관련된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가겠지. 아직 전부 치워지지는 않은 듯한 방에서 한기가 감돌았다. 문득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 여기 놓으면 잘 처리해주겠죠. "
그리 말하며 책상 위를 살짝 두드리는 흑소화는 그저 웃고 싶었다. 아니, 조금 많이 울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에스터)
에스터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당신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류들을 당신이 원하는 위치에 옮겨두다가, 무심코 말을 이어가는 샤오화의 얼굴을 쳐다본다. 함시온이랑 많이 친하다고 했었나. 그런 것이 문득 떠올랐다. 에스터는 잠자코 있다가 당신의 등을 살며시 토닥여준다.
아무래도 역시 말재주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의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이의 심정은 어떨까. 어떤 면에서는 자신보다도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좋지 못한 태도라고 꾸짖는 것이 좋을까. 말이 안되면, 행동으로 해야 할 뿐. 조심스레 토닥여준다. 그렇지. 라며 의미없는 대답을 한다.
"갈까."
토닥거림이 끝난 뒤에는 짤막한 말로 방을 떠날 것을 권유한다. 함께 이 방에 오래 있다 보면, 눈물을 보이기 싫어하는 너에게 못할 짓을 시킬지 모른다. 입김이 시리다.
"그러고보니, 에릭과는 무슨 일로 만났었나."
곤란한 질문일까. 순수하게 궁금증에서 떠올려낸 화제였다. 비밀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샤오화)
길지 않은 말, 토닥여주는 따스한 손길, 떠날 것을 조심스레 권유하는 간단할 말에서 가려지지 않는 배려가 엿보인다. 역시 당신은 히어로야. 그러니까, 직업 '히어로' 가 아니라 그 본 의미 그대로의 히어로. 역시 참 멋진 사람이네요, 본받고 싶어요. 히어로 머리말 씨. 유감스럽게도 말이 되지 못한 한 마디를 시린 입김이 대신한다. 등 뒤로 방의 문이 닫힌다. 결국 당신이 먹었던 것이 무엇이었으며 당신의 입가가 터진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아내지 못했구나. 올 한 해의 헤이샤오화는 이렇게나 무능하고 무력한 인간이었다는 걸 다시금 상기한다. 그러니까 뒤통수를 맞는 거야. 검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시야 끝자락에 돌아가지 못할 셋이 엿보인다. 문자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패러독스는 단연 인생 최악의 통보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추운 면회실에서의 그 조언을 조금 더 빨리 받아들일 걸 그랬죠. 어리버리하고 이도저도 아니게 굴지 말고. 결국엔 홀로 남아버렸네.
" 아, 연구원님이요? "
한 발 늦게 당신의 음성을 알아챈다. 흑소화의 미소 띈 얼굴이 순간 차분해지고,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가라앉는다. 그래, 비밀이라고 착실히 말하지 않아주었구나. 고마워요, 이름모를- 아니, 에릭 연구원님. 허나 이제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약물은 백설탕이 물에 녹듯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흔적없이 사라질텐데.
" 제가.. 약물 성분 검사를 부탁드렸었어요. 비밀리에. "
그래서 당신에게는 거듭 죄송하다. 거창하게 검사까지 해 두고 제대로 하나 써 먹지도 못했다니, 아. 헤이샤오화, 참 멍청했다.
(에스터)
약물 검사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메일을 받은 뒤 시무룩해했던 것만은 기억에 남는데.
"...에릭이 실패했었나?"
시무룩해하던 모습, 샤오화에게 미움받으리라고 생각했던 에릭의 태도 등으로 미루어 짐작한 일이었다. 결과는 오답이었지만.
"에릭은ㅡ첫만남때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싶다고 애썼던 모양이다. 그래서 너의 선물을 받고 나서 무척 기뻐했지."
무척.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에릭의 명예를 위해ㅡ아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훼손될 명예는 없고 모두가 상상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선물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한다. 언젠가 셋이서 함께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두 사람 다 발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 맞으니 아마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에스터는 즐겁게 얘기하는 두 사람의 옆에서 꿔다논 보릿자루가 되어있는 자신을 상상해본다. 상상만해도 행복한 보릿자루다. 만족스럽다.
(샤오화)
" 네? 아뇨!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어주셨는걸요. 다만 제가 연구원님이 노력해주신만큼 잘 일을 마무리짓지 못해서.. "
실패한 건 오히려 흑소화 본인이고.
" 기뻐해주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아, 그리고 셋이서 만난다라.. 응, 좋아요. 재밌겠다. 언젠가 꼭 한 번 만나기로 해요. "
물론 당분간은 무리겠지만. 그러고보니 당신은 제가 히어로를 관두고 홍콩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부러 이리저리 말하고 다니지 않았으니 모른대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꼭 한 번 만나기로 하자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테니까.
" 선물 고맙다는 인사 받고, 미안하다고. 죄송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머리말 씨는 몸이랑 마음이랑 꼭꼭 조심하시고요. "
그렇게 마지막 미소를 남기며 정든 방을 벗어나 로비로, 로비를 벗어나 문을 나선다. 아. 눈이 오려나, 날이 차고 하늘이 흐리다. 흑소화는 잿빛 하늘에서 눈을 떼고 당신 머리카락에 깃든 하늘빛을 잠시 응시하다가 도로 제 벽안을 정면에 둔다. 그리고는 앞을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멀어지는게다.
문득 휴대폰을 들었다. 아, 배터리가 다 되었구나. 전원이 꺼졌다.
- 에스터,에릭 - 파크
- (71스레)
(에스터)
"...그래. 에릭. 그 쪽에서 만나자고."
에스터는 전화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한 쪽 발로는 바들대는 빌런의 허리를 밟은 채. 주변 곳곳에 기절해 쓰러진 빌런들이 널부러져있었다. 그녀의 침착한 어조에는 어떤 당황도 실려있지 않았다. 차분하게 한 명 한 명을 그들의 옷으로 포박한 뒤, 에릭과의 전화를 끊는다.
경찰차가 빌런 나부랭이들을 실고 사라진다. 잘 된 일이다. 기껏 입고 나온 옷이 더러워져버렸다. 뭐. 히어로를 택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차분히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잠시 벗어뒀던 겉옷을 다시 입으면서, 뒷골목에서 나온다.
에스터는 은색 패딩과 검은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붉은 목도리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니 좀 더 밝은 색이라도 좋을텐데, 그녀 나름대로의 조의의 표시일까. 테러로 인해 참혹하게 희생당해간 동료들에게, 살인마에게 충격적인 최후를 맞은 상사에게, ...그리고 동경하던 자에게. 부디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만큼은 영원한 안식을.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럴때만은 기도하고 싶어진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온 것이다. 상처받을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단단해질 것이다. 에스터는 잘린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비니 대신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문득 손이 차다는 것을 느낀다. 잠시 주머니속에 집어넣은 장갑을 도로 착용한다.
차분하고 다소 탁한 연분홍빛의 롱스커트가 걸을 때마다 살짝 펄럭인다. 스커트 밑으로 검은 레깅스를 신은 다리와 연갈색 어그부츠가 보인다. 에스터는 에릭을 보며 손을 흔든다. 연갈색 더플코트, 털복숭이 흰 귀마개를 한 에릭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준다. 어라. 에릭의 뒤에 익숙한 얼굴이 또 보인다. 머리모양만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지만.
(파크)
고독. 그것은 말 그대로 독이나 마찬가지다. 의지할곳도, 털어놀 곳도 없는 상황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독은, 12월의 한파보다도 더욱 소름끼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머릿속에
스치는, 오늘도 춥구나같은 생각. 추위를 많이 타는 성격이 아닌데도 고독이라는 맹독은 나의 몸에서 체온을 알코올처럼 빼앗아 가버린다.
".........추워....."
몸에 소름이 돋아 닭살마저 느껴질 정도다. 춥지 않으려고 라이터를 켜 손바닥을 가까이 대어본다. 조금의 온기가 느껴졌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그대로 한숨을 쉬며 담배 한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연기를 들이마쉬고 내쉴때마다 현실이 더욱더 냉혹하게 다가온다. 냉혹한 현실, 맹독과도 같은 고독, 한파가 찾아온 겨울, 동사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 어 저건....?"
에스터 누나였다. 자신이 준 방한장비를 잘 착용하고 있는 듯해 보여서, 저도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연분홍빛 스커트와 단발의 에스터누나라, 이거 사진찍어서 밤비누나에게 팔면 떼돈벌것 같은 조합인걸. 파크는 거짓웃음을 환하게 지어보이며 에스터에게 '에스터누나 안녕하세요!'라며 소리쳐본다. 음.....? 에스터 누나와 한 더플코트를 입은 앞의 꼬마....? 가 서로 인사하는것이 보인다. 으음 누구지 저 꼬마. 내가 처음보는 사람같은데, 누나의 지인인가?
(에스터,에릭)
"에스터씨. 에스터씨!"
에릭이 에스터에게 폴짝폴짝 다가온다. 눈길에서 그러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에스터가 에릭을 붙잡는다. 위험하잖아. 에릭은 붉어진 코로 헤헤 웃는다.
"이거봐요. 눈사람이에요!"
아무래도 에스터를 기다리면서 미리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온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뭇가지 팔과 나뭇잎 눈동자를 가진 꼬마눈사람을 보며, 에스터는 미소지어준다.
에스터의 이름이 커다랗게 불리자 에스터 뿐 아니라 에릭까지도 시선을 집중해본다. 거대한 은발 장신의 남자가 에스터를 쳐다보고 있다. 에릭은 약간 긴장한채, 약간 두근대면서 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파크."
"아니. 에스터씨가 대답하면 어떡해요!"
보통 이런 상황에선 나에게 통성명을 부탁하곤 하지 않나. 그래도, 본인에게 물어봤는데! 에스터는 에릭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당신에게 소개의 말을 건낸다.
"이 쪽은 에릭. 나의 의동생같은 존재이다."
"에릭 앤서니를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이 쪽은 파크. 히어로 코스츔이야."
히어로 코스츔이라는 말에 에릭은 순간 굳어진다. 그... 과거 빌런 클라운이었고... 빌런갱생계획의...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멈춰서있던 에릭은, 이내.
"...우와아아아아아!"
"진정해라. 에릭."
"에스터씨. 에스터씨!? 그 코스츔이요!?"
"그 때 얘기한 적 있지 않았나."
"아니. 그...!"
동명이인이 아니라 진짜 본인이라니. 새삼 목소리랑 얘기만 들었을땐 좀 더 앳된 느낌이었는데.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고, 에릭은 에스터와 파크를 바라본다. 에스터씨하고 비슷할 정도로 크잖아.
(파크)
호오 꽤나 활기차네. 음 약간 귀여운걸. 몰론 덩치가 그렇게 작은편은 아니지만, 하는 행동이 꽤나 귀엽다고 느꼈다. 꼬마 눈사람이며 저 발걸음이며, 마치 어린애같잖아. 뭔가 에스터누나랑 있으니 진짜 누나와 남동생같아 보이는걸.
"안녕! 나는......흐하하! 에스터누나가 말해주셨네!"
파크는 에릭의 밝은 태도에 저도모르게 미소지으며 자기소개를 하려 했다. 그러자, 에스터가 자신보다 먼저 자기의 이름을 말해주는 행동이 너무 웃겨서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어 진짜 남매였던거야? 의이긴 하지만 남매가 맞구나, 사이좋은 남매인걸. 부럽네~가족이 있다는건.
"알ㅡ겠어! 기억했다 에릭 엔서니! 만나서 반가워!"
파크는 그의 손을 커다랗고 두꺼운 흉터투성이의 손으로 잡고는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에스터의 동생이라면 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친하게 지내는게 당연했다. 몰론 개인적인 호감을 느낀탓도 있겠지만.
"푸하하하! 큭큭큭.....맞아! 그 '코스츔'이야! 에스터누나하고는 누나동생 사이! 뭐 사실 내가 에스터누나를 멋대로 동경하는 거지만!"
진정해라 에릭이라니. 에스터누나의 반응도 너무 웃기잖아. 파크는 그 두명의 대화에 크게 박장대소를 하더니 이내 눈물마저 흘렸다. 와 이 두사람은 진짜 남매라고 해도 믿겠는걸. 나도 이런 동생이 있었는데. 아아 보고싶은걸. 걔는 지금쯤 뭐하려나 정말.
"그나저나 제가 드린 선물 잘 착용하시구 계시군요! 마음에 드신것같아서 기쁘네요!"
이 추운 날씨에 자신의 선물을 착용하고 다닌다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뭐 사실 나도 에스터누나의 선물을 잘때마다 안고자고, 스노우볼 가지고 놀고, 하회탈의 편지도 읽어보고-엔제 나중에 보면 감사하다고 전해야겠다 생각하며-, 내 전 이명이 적힌 너클도 쓰는등 엄청나게 선물을 쓰며 기쁘다고 느꼈으니, 에스터누나도 그런 감정이 드셔서 착용하시는거겠지.
(에스터,에릭)
"아앗. 에스터씨는 역시 동경받을만한 분이니까요!"
에스터를 동경한다는 말에, 놀랐던 것도 잊고 에릭의 눈이 반짝거린다. 에릭은 에스터가 파크의 목소리를 녹음했다는 것 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포함해 모든 부분에 있어 파크와는 첫만남이었다. 마카롱 케이크씨와의 아직 이뤄지지 않은 '첫 만남'하고는 다르게.
"엑! 아니요. 에스터씨와 누나동생사이인건 저거든요! 아무리 파크씨라고 해도 질 수는 없다!"
뭐 저런 걸로 경쟁심을 불태우고 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에스터는 묵묵히 에스터를 지켜본다. 그나저나 방금 막 만났을 터인데, 벌써 '아무리 파크씨라도' 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된건가. 부러운 사교성이군.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로 질문이 돌아오자 이에 고맙다는 말을 대신해서 작게 끄덕인다.
"아. 이 귀마개 사주신거 파크씨였군요! 역시 파크씨! 대단하신 분이에요!"
에릭은 하이파이브를 시도한다. 저기. 너희 일단은 초면인데. 코드가 맞아보이니까 굳이 건들진 말도록 하자. 코스츔의 위치가 위치다 보니까 적대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재판에서 같은 편이었다는 점 때문인지 뭣때문인지 죽이 잘 맞아보이니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에릭. 용건은."
"아!"
그리고 에릭은 곁에 있는 눈사람을 가리킨다. 자세만 보면 '저기 계신 신사분이 드리는 겁니다'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어떠신가요!"
"아까 그 눈사람이잖아."
"짜잔!"
"그게 다인가."
제가 에스터씨가 이유없이 보고 싶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알았어. 알았어. 그러더니 에릭은, 파크에게도 이 약속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파크씨도 눈사람 만드실래요! 이 근처, 눈이 잔뜩 쌓여있는데 사람이 잘 안다녀서 눈사람만들기 최고에요!"
(파크)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야, 동지를 만났구만!"
파크는 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에스터누나는 동경할 만 하다. 나같은 겁쟁이가 아닌 진짜 히어로로서, 나에게 불살에 대한 조언을 해줄만큼 정통 불살 히어로니깐. 아무리 봐도 에스터누나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진짜 히어로의 이미지를 빼다 박으셨으니깐.
"후후후.....좋은 라이벌이 되겠구나 에릭! 아무리 너가 귀엽다고는 해도 에스터누나의 동생자리는 내가 가져가겠다!"
제 삼자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대화가 오고간다. 동생이란게 원래 결투를 해서 가져가는 거던가. 뭐 어때, 에스터 누나의 허락도 안받고 이런 논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이성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것 같으니깐. 파크는 그의 하이파이브를 받아주고는 실소를 흘렸다.
"역시 에릭! 뭘 좀 아는구나! 고마워!"
파크는 그녀의 미소에 마찬가지로 가벼운 미소의 끄덕임으로 안심을 표했다. 후우, 에릭이라는 애, 내가 누구였는지 알던것 같은데, 나를 무서워하거나 적대하진 않아서 다행이네. 파크는 씁쓸한 맛이 입안에서 느껴진다. 얼굴이랑 이름이 팔린것이 꼭 좋은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정보가 쉽게 간다는건, 쉽게 미움받을수도 있다는 뜻이니.
"오오오!! 눈사람 좋지! 나도 만들래!!!!"
파크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신기하게도 사람이 얼마 없어 눈이 수북히 쌓어있었다. 눈사람을 만들기 딱 좋은 장소였다. 파크는 조금 눈을 뭉치더니 힘으로 꽉꽉 압축시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굴리기 시작했다. 긴 은발이 눈색하고 비슷하여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고, 단발만 고집했던 탓인지 긴 머리카락이 거치적거려 몇번이고 눈을 굴리다 일어나 머리카락을 넘겼다.
(에스터,에릭)
"그러고보니, 파크. 그 머리는 어떻게 된거야."
전에 물어본다는 것을 잊었는데. 어떤 사정이 있어야 온라인 게임에서 머리변경권을 이용한 것 같은 저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거지. 에릭과 함께 발랄하게 눈사람을 만드는 파크에게 나지막히 묻는다.
"엑. 에스터씨가 남의 머리보고 그런 말 물을 처지에요?"
"웬만하다면 그럴 처지가 아니었겠지만, 이번에는 예외다."
"파크씨...어떤 변화가 있으셨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스터는 나이빌런의 일때문인지 약간은 걱정하는 듯한 톤이었다. 머리모양만 바꿔두고 사라지는 하찮은 빌런이라면 그리 큰 걱정은 필요없을지 모르지만. 에릭은 파크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사람 머리에다가 나뭇가지 뿔을 만들고 있었다.
"에스터씨는 걱정투성이래요."
"...네가 한 말은 기억 못하고."
"남을 챙기는 것의 반의 반만이라도 자신을 좀 챙겨보세요!"
"그 정도는, 챙기고 있어..."
끝이 흐려진다. 도무지 그렇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에릭의 새 눈사람에 나뭇잎으로 눈이 생긴다.
(파크)
우으우음.....두 사람이 저렇게 캐묻다니.....뭐 나라도 갑자기 단발의 에스터누나가 핑크빛 장발이 되었다고 하면 저렇게 캐물을 테지만.....솔직히 뭔가 새롭군. 에스터누나가 저렇게 관심을 보이는건 처음이네.
"에ㅡ그러니깐.....간단하게 말하자면 길가다가 이상한 연구원들에게 시약을 강제로 먹여져서 요로코콤! 되었네요."
파크는 자기가 말하고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듯한 기분을 받았다. 음 설명을 좀 잘 할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렇지만 저게 다이긴 한데......실제로 시약을 먹어서 효능과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깐.
"둘다 거기까지."
파크는 어딘가에서 갑자기 에릭의 명치까지 오는 거대한 눈덩어리를 만들어 머리 위로 들고 튀어나왔다. 이정도 무게를 드는건 확실히 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들만 한걸. 일단 둘은 생각보다 서로를 잘 아껴주는듯 해 보였다. 음음, 나름 사이좋은 남매라는 건가.
"에릭의 말이 맞아요 누나. 누나는 제발 자기몸을 챙기세요. 검은색 안개.....아니 누나의 부정적인 느낌이 눈에 보일 지경이니깐. 그리고 에릭, 너의 마음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너무 뭐라 그러지는 마."
파크는 이윽고 또 에릭의 몸통만한 눈덩이를 하나 더 이고와 그 거대한 눈덩이 위에 상대적으로 덜 큰 눈덩이를 얹었다. 음, 멋지네 역시.
(에스터,에릭)
"......"
파크가 머리모양에 관한 설명을 마치자, 에스터는 즉각적으로 반응해 파크에게 다가간다. 당신의 두 어깨를 잡고, 조금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잘 보면 그 무서운 표정이 당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당황해서 생긴 표정임을 알 수 있지만.
에릭은 단어의 나열들을 뒤늦게 머릿속에서 결론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여 심각한 얼굴을 짓는다. 인체실험이라고 하면, 에릭의 가장 큰 트라우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에릭은 약 전공을 하고 있는 연구원이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연구원이 시약을... 강제로요."
에릭의 목소리에서 발랄함이 빠져나간다. 꽤나 드물게도 볼 수 있는 장난끼없는 에릭이다. 에스터의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이라면, 그녀와 조금만 인연이 있다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본 것이겠지만.
"파크. 그 연구원들의 얼굴을 기억하나? ...어디에서 피해를 봤는지는? 신고는?"
뒤의 에릭도 심각한 얼굴이다. 에스터는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냐고 말하듯 위압적인 얼굴표정이다. 표정으로 사람을 짓누를 수 있다면 잡빌런은 얼굴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파크씨정도의 체력과 근력인 사람에게 강제로 약을 먹일 수 있다는 것도 심각하네요. ...정말로 머리모양 말고 다른 피해는 없나요?"
에릭 또한 당신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진지한 얼굴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져온 거대한 눈덩이에는 두 사람 다 놀란 얼굴을 짓는다.
"...부정적인 느낌이라. 그렇게 보였나."
에릭은 맞아, 맞아 라고 옆에서 태클을 걸다가 자신보고도 돌아오는 핀잔에 피이 하고 바람빼는 소리를 낸다.
"이런 식으로 말 안하면 에스터씨는 꿈쩍도 안한다고요! 늘 자기몸은 안 챙기고."
"최근에는 정말로 괜찮아졌는데 말이야. "
"괜찮아졌다... 괜찮아진게 뭔데요! 괜찮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요!?"
"......"
에스터는 침묵한다. 두 사람의 눈을 피해본다. 2:1로 에스터의 패배다.
(파크)
"ㅡ?!"
에스터가 갑자기 파크의 어깨를 붙잡으며 무서운 표정을 짓자, 파크는 순간적으로 죄송합니다라 소리칠 뻔 했다. 으아 기절하는줄 알았네. 나보고 짓는건 아닌것 같지만.....으악 에릭의 얼굴은 또 왜저래! 아 젠장.....사람하고 말할때는 말조심 해야하는데.....
게다가 에릭의 목소리에는 그 밝던 분위기마저 사라졌었다. 음, 이거 심각한 일인가.
"엄.....얼굴은 못봣어요. 그 뭐냐....뒷골목에서 스턴건과 근이완제에 당해가지구.....가운으로 대충 연구원이라는건 알았지만. 전기통닭이 되는줄 알았다니깐요."
으아아 얼굴! 얼굴좀 그만 해주세요 지릴것같네 진짜! 저 얼굴로 태양권같은거 쏘면 분명 모든 빌런들은 스스로 체포해달라고 경찰서에 올거야!!!! 파크는 그녀의 눈을 피해 에릭을 쳐다보며 문제 없다는 투로 말한다.
"뭐, 근이완제에 당해버렸으니깐. 데헷. 뭐 딱히 부작용은 머리카락 이외에는 없어. 병원은 귀찮아서 안갔지만 별거 아니겠지. 4일정도 지났는데 아무일도 없잖아?"
파크는 이게 그렇게 신경쓸만한 일인가ㅡ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신고도 못하는 상황에서 열불내봤자지 뭐. 에릭마저 걱정하는 듯한 표정에 파크는 헤실헤실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달래듯이 말했다.
"음......뭐 피 뽑더니 적합한 어쩌구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마 별 거 없겠죠 뭐."
그래, 별거 없겠지. 고작 머리가 샌 거일 뿐인걸.
"당연하죠! 얼굴이 어두운.....원래 그러던가? 여튼 어두우니깐요! 부정적이니깐요!"
파크는 자신의 눈사람의 눈 부분을 악력으로 뚫어 눈을 만들고는 코도 악력으로 구멍을 뚫어 만들었다. 뭔가 기괴한걸.
"맞아요. 에스터누나는 좀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구요!!"
에스터를 지긋이 노려본다. 앗, 시선 피한다.
(에스터, 에릭)
"......"
에릭의 얼굴은 완전한 정색으로 바뀐다. 에스터는 파크를 추궁하려다가, 에릭의 상태를 문득 확인해본다. 에릭은 가만히 있다가, 갑작스럽게 홱 파크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었다.
"그게 가볍게 말할 일이에요!?아무일도 없다고, 그냥 넘겨도 되는 거에요?히어로잖아요. 왜 둘러싼 위험에 민감하지 못하고...!"
파크의 팔뚝을 잡는다. 아까까지 가라앉아있던 태도는 어느새 격앙으로 바뀌었다. 에스터만큼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쪽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위태롭고도 안타깝도록 튀어나가는 감정이여.
"연구원이라는 게, 그따위 짓을 저질렀는데! 두려움이라던가, 분노, 긴장, 그런...그런 게 느껴지진 않는 거에요? "
에스터는 에릭을 말리고자 한다. 하지만 에릭은 에스터의 손길을 뿌리쳐버린다. 에릭은 파크의 두 팔뚝을 붙잡고, 어딘가 원망스러움까지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그를 흔들려고 시도한다. 에릭은 무엇에 분노하고, 누구를 원망하고, 어디에 소리치고 있는 걸까.
"에릭."
"...대체, 왜...!"
"에릭. 너무 흥분했어."
"하지만..."
역으로 가라앉은 에스터의 표정에 에릭은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화를 내야 할 곳이 틀렸다는 것을. 동시에 다른 의문 또한 풀려나가버린다. 왜 파크에게 그런 식으로 화를 냈는지. 깨달아버리고 나니 모든 것이 허무하고, 바보같이 느껴진다. 나는 파크씨를 걱정해서 화를 내고 있던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연구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야.
나는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던 거야.
파크를 보면서 문득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상처받는 것에 무뎌지려고 감정을 죽이던 날들을 떠올려냈다. 그 시기의 자기자신은 너무나도 추해서, 꼴보기 싫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밝으려고 노력하면서 이 시기의 자신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비틀려있는 부분들을 없는 것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리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몸의 상처가 언젠가 사라진다고 해도 상처입은 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나날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괴로운 과거를 담담하게 받아들여도ㅡ그 시기에 붙잡혀 나아가지 못했던 나날들이, 잃어버린 시간들이 돌아오진 않아. 성장하지 못한 채 있었던 날들은, 자신의 미성숙으로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거기다가, 미성숙만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런 환경들 속에서, 상처입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날들 속에서, 지옥속에서 자신은 살아있었다. 지옥의 주민다운 끔찍할 정도로 기괴한 면모가 남아있다. 상처입었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성장이 어딘가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버렸어. 괴상하고, 역하고, 징그럽고, 혐오스러운ㅡ
...천하에 둘도 없는 재앙이었다.
에릭 앤서니는, 그 부분을 보고 싶지 않아해왔다. 자신이 상처받으며 망가진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어딘가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사고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기에 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밝게 지내려고 노력해도 그 과거의 에릭 앤서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추악한 존재였어. 아무리 자존감을 부풀리려 애써도, 실험체인 음침한 소년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볼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
눈물이 나고 말아버렸다.
"...에릭."
허탈한 얼굴의 두 공허한 눈에서 인공눈물같은 징그러운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렇구나. 나는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었던 거야. 인체실험 당한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는 파크씨의 모습이, 그렇게나 보기 싫었던 것은. 그 모습이 자기자신과 닮았으니까. 자신의 행동원리를 깨닫는다니, 보고 싶지 않던 추한 부분을 봐버리다니. 정말정말 최악이야.
"...죄송합니다."
다시금 울컥, 하고. 쏟아져내리는 눈물마저도 끔찍한 것 같아. 즐거운 것을,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행복의 파랑새를 뒤쫓으며, 저주로 문드러진 자신의 본모습은 보고싶지 않았다. 앞만을 바라보며 가고 싶었다.
에스터는 에릭의 등을 토닥여준다. 그제서야 조금 끔찍함이 사그러든다. 에릭 앤서니 개인은 추악한 소년일지 모르지만, 올바른 영웅 에스터 힐데가르트의 동료는 마찬가지로 올바르고 멋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보지 말자. 다시는 자신을 마주하지 말자.
...에스터씨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자.
"파크. 미안하다. 에릭에게는 민감한 부분이니까."
"......"
"에릭이 너를 탓하기 위해서 그런게 아니야. 그저 걱정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에스터의 옆에서 자신은 다시 선량하고 올바른 존재로서 포장된다.
"...에스터씨."
"에릭. 연구원들의 부도덕함에 분노하는 건 좋지만, 피해자를 과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우스꽝스럽다. 추해. 이런 나는.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존재야. 이런 속마음을, 파크씨라면 눈치채었을까. 언제나 올곧고 자비로운 영웅인 그녀는 자신을 추궁하는 일은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릭은, 파크 당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이다. 불안 가득한 눈이 물기어린 채 눈 앞의 당신을 응시한다.
(파크)
에릭이 화를 낸다. 아, 또 말실수를 해버린건가. 그곳에서 그만 두었어야 했나. 파크는 당황했다. 그가 이렇게 화를낼줄은 몰랐다. 웃어 넘기려고, 농담으로 여겨지려 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조차도 슬펐나보다. 그는 이제는 파크의 팔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파크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에릭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지고 이내 에스터에게 제지당하자, 파크는 씁쓸한 표정으로 짧게 뱉었다.
"고통, 신체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을 상처입힌데에 대한 분노. 이것들은 모두, 광기라는 거대한 힘에 산산조각 난 사람이 광기에게 빼앗긴 것들이지."
나는 느끼지 못한다. 죽음이 뭐가 두려운것인가. 상처가 뭐가 두렵고, 슬프고, 화나는 것인가. 어차피 아프지 않은데. 다른사람은 아프기에, 그것을 볼때마다 나는 화가난다, 슬프다, 괴롭다. 허나 나는, 아프지 않기에 아무렇지도 않다. 고통이 없는데 괴로울 이유가 있는가. 나는 나의 팔을 잘라도 용서할 수 있다. 그 순간의 고통도 없다. 팔은 의수를 달면 된다. 잃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들조차도 용서 할 수 있다. 그런 연구원들 조차도.
파크는 그의 레몬색 눈을 지긋이 쳐다본다. 그의 눈은 맑고, 깨끗해 보였다. 허나 그 눈 속에는 끝없는 자기혐오가 도사려 있었다. 맑고 청명해 보이는 바다일수록 그 깊이가 깊어 마치 깊이 들어가면 끝없는 어둠만이 있는것처럼. 어딘가 자신이 겹쳐보였다. 분명 그도 나를 그와 겹쳐보고 있겠지. 잠시나마 연결된 듯한 느낌에 소름이 들었다.
"에릭."
파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했구나."
자기 혐오와 악몽같은 기억들이 점철되어 그의 모습에서도 검은 안개가 그를 가리고 있었다. 예전부타 파크는 가끔씩 끝없이 자기탓이라고 하고, 자기는 괴물이라 하고, 자기가 모든것을 잘못한 악마라고, 쓰레기라고 했다. 이런 모습이었군. 파크는 조용하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은 에스터누나와 너가 걱정을 해줘서 기뻐. 하지만 내 이야기에 너를 소모시키지 말아줘. 너의 그 감정을 소모시키지 말아줘. 너의 그 과거를 끌어내어 마음의 상처를 벌리지 말아줘. 너를 스스로 좀먹는 행위를 하지 말아줘.
너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너를 스스로 갉아먹지 말아줘.
너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으니깐."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가락을 스친다.
(에스터,에릭)
"......"
그리고 당신의 말은 에릭을 날카롭게 찔렀다.
나를 향한 말인건가? 추악한 속내를 들키고 만것인가? 당신은 내가 이렇게 비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버린거야? 에스터씨조차도 알지 못한ㅡ혹은 묵인한ㅡ그것을? ...내가 저런 감정들을 짓밟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거야? 자기혐오는 이내 두려움으로 바뀐다. ...가까이 오지 마.
고통에 무심해지려고 노력했다. 신체 손실이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둔감해졌다. 화를 삭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엔, 삶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런 비틀리는 자기자신의 사고를 흐린 눈으로 보며,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자기자신의 광기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의 머리에 당신이 손을 올린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며 사과한다. 그런 당신의 모습에, 미안함이나 부끄러움보다 먼저 느낀 것은 공포.
"...코스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자기자신에게 손을 뻗는다.
아까까지 '파크씨'였던 호칭이 '코스츔'으로 바뀐 것도 이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딘가 당신의 본질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당신을 향한 감정들이 자기혐오와 섞여서, 생리적인 공포로 바뀌어갔다. 나는. ...당신이 클라운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조금만 엇나갔더라면 나는,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두려워졌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지독한 자기혐오의 싹이 우연히 당신이라는 햇살과 함께 꽃을 틔워냈을 뿐이었다. 당신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에릭은 자신의 심연을 다시 한 번 바라볼지 모르는 일이지. 도플갱어 괴담과도 유사할법한 공포. 코스츔이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신의 그런 모습들은 자신에게 자신의 혐오스러운 일면을 마주하게 만든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였지만, 표정이 어둡다. 풀리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려는 모양이다. 에릭은 당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내 애써, ...정말 애써 미소를 띄워내본다. 좋지 못한 습관. 당신의 뒷이야기들은 좋은 얘기들이었지만ㅡ
...하나하나가 에릭 앤서니를 날카롭게 베어내고 있었다.
선의로 가득 차있는 매서운 칼날이었다.
자기연소. 감정소모. 스스로를 좀먹어가는 행위. ...그리고,
과거의 상처. 자기혐오.
"......"
어떻게 눈치챈 거지. 당신은?
"에릭. ...괜찮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거야, 자신과 닮았으니까. 에릭이 당신에게서 자신의 심연을 발견해 들여다본 만큼ㅡ당신도 에릭 앤서니에게서 당신 자신을 비춰보았다. 그런 것이지. 그러니까 에릭에게는, ...에릭 앤서니에게는, 이 약한 부분을 극복해낼 때 까지 당신은 만나기에 껄끄러운 사람이다.
"괜찮아요."
하지만 에스터라면 그것을 묵인해주리라고 믿고 있다.
"...파크."
에스터는 자신의 이런 면을 알고 있을까.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무의식 안에 깊이 가라앉아있던 감춰왔던 일면. 스스로가 부정해오고 억눌러왔던 부분을 에스터가 이미 눈치채버렸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이라고 에릭은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나의 구원자다. 왜냐하면 당신은 만약 알고 있더라도 그를 묵인해줄 것이고, ...자신이 유일하게 허락해준, 허락받은 사람이니까.
"...한 가지만 물어보지. 파크."
이윽고 에스터는 입을 연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으나,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얘기들 뿐이었다. 자신의 투박하고 무뚝뚝한 표현으로는. 잘못 건드려서 말했다가는 모두에게 다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언제나 이야기라는 것은 어려웠다. 똑같은 내용물이라 해도, 상황과 방식에 따라 그 본질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에스터는, 지금 이 대화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보류하기로 했다. 묵인이 아닌, 보류의 형태. 언젠가 이 모든 이야기들은 가장 적당한 때에 포장지가 풀려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 하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였다.
"에릭이 너보다 다섯 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자괴감을 띄던 에릭의 얼굴이 물음표로 덮여만 간다.
(파크)
그의 눈 속에서 이제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나에대한 혐오감인가. 관찮아 익숙하니깐. 나보고 괴물이라 생각하는거지 그래. 상관없어 나는 너처럼 말로만 하는 괴물이아닌, 진짜 괴물이니깐. 나는 악마가 맞으니깐. 그러니깐 그 두려움의 공포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어.
"..........미안해 에릭."
그가 코스츔이라고 부르자 또다시 사과했다. 그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공포감이 느껴진다. 그는 나를 지금 혐오하고있는건가, 아니면 내가 그의 내면을 알고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건가. 나는 그의 감정을 느낄수 있을뿐 생각을 읽지는 못한다. 그가 무엇때문에 이러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수 없다.
"괜찮아. 상관없어, 익숙하니깐."
사과하는 그에게 싱긋하고 웃어준다.아니, 씁쓸하고 힘없게 웃는다. 억지 웃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에게 이런 공포감은 익숙했다. 클라운때 모두에게 지겹도록 받았다. 공포감, 혐오감, 두려움, 경계심........허나 왜일까. 지금은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니, 이건 그냥 환상일 뿐이다. 나는 괜찮다, 정말로.
".......왜 불러?"
그가 다시 파크라고 불러주자 그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아 역시 더이상 못보고 있겠다 싶어 그의 얼굴 전체로 시야를 옮겼다. 그의 감정을 읽는것을 그는 껄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깊고 깊은곳에 있는 그의 숨겨진 공간의 비밀스러운 감정들을 누군가가 엿보는 것을 싫어하는건 당연한 거지만.
"......??????????"
파크는 얼굴에 ?를 띄울 정도로 놀랐다. 아니 그렇게 귀여운 행동을 하던분이 22라고.....? 나보다 다섯살....??? 어, 어 그럼 이거 쓰다듬도....
파크는 재빨리 손을 떼더니 에릭에게 사과를 했다.
"죄.....죄송해요 에릭형......."
으아아 이게 무슨 망신이야.....
(에스터,에릭)
"예?"
"17살."
"네?"
"22살."
네? 를 계속 번갈아가며 말하는 에릭과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는 파크에게 에스터는 홀로 차분하게 나이를 읊조린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도한 에릭은 심각한 충격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에엥!?"
에스터는 에릭에게 손바닥을 내민다. 에릭이 손을 잡는다. 네가 강아지냐. 명함을 달라고 말로 언급해본다. 에릭은 어리둥절하며 에스터에게 명함을 건넨다. 에스터는 파크에게 그것을 전달해보인다. 에릭연구소 소속 연구원 에릭 앤서니(22)의 명함이 당신의 손에 들어온다.
"뭐...뭐..."
에릭은 뒤돈다. 도도도도 뛰어가더니 멀리에서부터 걸어온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그 쪽이 코스츔씨로군요! 저는 연구원 에릭 앤서니랍니다!"
"없었던 일로 만들지마."
이것이 충격요법이라는 것일까. 더 충격적인 사실을 머리에 때려박아서 지금까지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깨끗한 첫만남...은 아무리 그래도 무리수지만!
뭐. 에스터의 배려(?)가 나름 통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저 화제는 자신이 건들기엔 너무나도 섬세한 것이니, 다른 충격적인 화제로 일시적으로 흐름을 바꿔버린다. 흐름이 바뀐 정도가 아니라 시작을 바꿔버리려는 교활한 에릭 앤서니가 있었지만 무시하도록 하자.
"아니. 17살이 말이 돼요!? 이거 그거죠!? 17세교인가 하는 그거죠!? 종교 이름 붙은것들은 하나같이 믿을게 못돼!"
"그런소리 할거면 에스터교 드립부터 그만두고 말해라."
"그러니까 저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게 된거죠...! 이 사회의 희망과도 같은..."
문득 에릭은 파크가 에스터를 동경한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친하게 지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죠. 파크씨!? 에스터교에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그만둬."
"에스터교의 멋짐을 모르는 에스터씨는 불쌍해요!"
"네가 말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파크)
"???????"
파크는 명함을 집어든다. 22........진짜냐.....22살이 왜 그렇게 있어!! 머리속에 투쾅하고 메테오를 누군가가 때려박는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왜그렇게 반응이 험악한가 했더니 연구원이라서 였나ㅡ같은 다른 생각을 하며 현실도피를 시도한다. 실패지만.
"안녕하세요 연구원 에릭엔서니! 저는 히어로 코스츔, 파크라고 합니다!"
파크는 다시한번 악수까지 해가며 그 모든일을 없던것으로 하려 했지만 에스터에게 제지당해버렸다. 작게 쳇, 하고 혀를 차버린다. 아깝다 아까 있던일을 없앨수 있었는데.
"에스터교요??네네네네 저 신도할래요!!!"
파크는 그의 말에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한다. 마치 아까 눈사람을 만들때 동의하던 것처럼 말이지. 파크는 에릭의 두 손을 모아 꼭 잡고는 즐거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묻는다.
"자 그러면 저희의 활동은 뭔가요 주교님! 포교? 아니면 봉사활동? 아니면 접신?"
파크는 그리고 나서 에스터를 봤다. 이러면 에스터누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마음속으로 박장대소를 한다.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야
(에스터, 에릭)
"그만둬."
정색한다. 언제나와 같은 진지한 에스터였다. 하지만 에릭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저희의 제 1목표~! 에스터님의 이름을 언급하여 종교인을 물리치기!"
"그만둬."
"제 2목표~!에스터씨 부끄럽게 만들기~!"
"그러니까, 그만둬."
"제 3목표는...음. 뭘로 할까요? 기부와 봉사하기?"
"그것만 남겨두고 전부 그만둬."
에스터가 구성하는 모든 문장에 그만둬가 들어가고 만다. 에릭은 제 2목표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하며 파크와 맞장구를 친다.
"에스터씨. 만사에 부정적인 태도는 좋지 않아요. 에스터교가 가져다줄 모든 축복과 기적을 막아낼 셈인가요!"
"일단 이름부터가 근본적으로 아주 잘못되어있으니 그만둬!"
"그치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에스터씨. 나에게는 관심도 없는걸...!"
"나의 관심이 부족했나!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자. 이제 에스터교는 혼자가 아니라고요! 히히히. 못 가! 라고 말하듯이 에릭은 에스터를 포위하는 시늉을 한다. 이러니까 파크가 5살 연상이라고 생각 못하지.
"그리고, 에스터교의 최고 숙적은 에스터 그 자신!"
"이 점에서 그 무엇보다 문제많은 종교가 아닌가!"
에릭은 미소짓는다. 웃음이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래. 혐오스러운 과거의 자신이 있다 해도 괜찮다. 에스터와 함께 있을때만은 그 과거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당신에게서 구원받는 것으로 결말지어지는 과거였으니.
그러니까 함께 있을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둘 다 에스터씨를 정말 좋아하니까. 그치? 에릭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듯이 말한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에릭은 눈으로 에스터에게 눈싸움을 시도한다. 에스터는 반격의 의지 없이 그대로 맞아주고 있었다.
*: 윤동주 - 쉽게 쓰여진 시
(파크)
"햐 저는 셋다 마음에 드는데요? 자 그러면 2번부터 시작하죠! 아니 이미 하고있으려나~?"
파크는 그대로 에스터를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크크크 두명이서 한명을 놀리는건 너무한가. 뭐 어때 에스터누나는 평소에 우리한테 걱정끼치니간 이정도는 약과지.
"관심이 부족하든 어쩌든, 일단 저는 이름부터 신비하고 듬직한 종교라고 생각해요~"
그 둘의 말싸움에서 파크는 왠지모를 흐뭇함을 느낀다. 가족이란 역시 좋은거네. 파크는 에릭이 에스터를 못지나가게 하는 듯한 대사를 치자 "역시 에릭형이야. 에스터 누나 놀리는대에는 천재적이라깐" 라는 대사를 해보기도 했다.
"전허 문제없는 종교인데요~어디가 문제있는건지~~"
파크는 능청스럽게 에스터에게 미소지었다.이런 상황도 나름 재밌는걸. 파크는 눈덩이를 위아래로 던지며 슬슬슬 어디론가로 갑작스레 향했다.
"음, 여기서 머무를 수 잇는 시간은 오늘은 여기까지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뵈요 에스터누나 에릭형~"
그리고 이 즐거운 상담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