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R,AIRSS

이른 결말

last modified: 2018-01-10 17:36:22 Contributors

이른 결말, 그 여자의 토로(1)

연말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얘기를 끝내야 할 것 같아, 퇴근 후 프레이와 리키를 내 집으로 불렀다.

퇴원하고 마냥 놀기만 하던 건 아닌지 바쁜데 왜 부르냐며 툴툴거리길래 불만 있으면 나가라고 했더니 둘 다 입을 다문다. 그들의 여권도 여비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 둘은 저대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불만을 잠재우고 본론에 들어간다. 어쩌면 우리 셋의 관계가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른 결말을 짓는 이야기를.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각자의 앞에 마실 것 하나씩 두고 식탁에 따로 앉았다. 분위기만 좋았다면 좋은 그림이 되었을텐데. 애석하게도 나나 그들이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분명 이 자리의 끝을 예감하고 있어서 그렇겠지.

"바쁜 연말에 뭘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바쁜 거 지나가고 하자니까."
"연말이니까 그래. 이왕이면 깔끔하게 마무리 하고 싶거든."
"그런 생각이라면 뭐. 대신 오늘로 정말 끝내기다. 밤을 새더라도."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자, 그럼 누구부터 얘기할래?"
"......"
"......"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했는지 프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몇마디 나눈 다음 말 좀 해보라고 하니 둘 다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문다. 니들이 그럼 그렇지. 쯧. 혀를 한번 차고 내가 먼저 말했다.

"그렇게 미뤄봤자 차례가 안 오는 것도 아니라는 거 둘 다 기억해 둬."
"알았으니까 말이나 해."
"하고 있으니까 닥치고 들어. 일단 나는, 내가 아마 대부분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해. 라하트 부부 죽음의 진실, 튜브로즈에서 아마란토, 우리 셋의 관계..."

나는 잠자코 내가 그동안 알아온 모든 것들을 얘기했다. 그들은 내 말을 막거나 자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니, 중간에 의문을 표하기는 했으나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내 얘기만을 계속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돈과 인력을 써서 알아낸 모든 것을.

"뭐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모든 일의 근원으로 보이는 라하트 부부의 사건부터 시작했어. 당시 내가 스물셋이었으니까, 벌써 20년이나 지난 일을 찾는 건 만만치 않더라고. 찾으면서 새삼 그런 생각도 들었지. 아,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구나... 뭐 그건 각설하고.
프레이. 넌 내게 네가 그들을 죽였다고 말했지. 네 능력으로 무대장치, 그러니까 조명을 떨어뜨려서 그랬다고. 하지만 내가 알아본 건 달랐어. 그 날 무대장치가 떨어진 건 설비의 부실함에 더해 다른 사람의 손이 보태어진 일이었어. 어떻게 알았냐면, 내가 그 범인을 만나봤으니까.

범인은 당시 라하트 부부의 회사에서 잘린 지 얼마 안 된 말단직원이었어. 그는 내게 처음엔 그럴 생각은 없었다고 했지. 원망스럽긴 했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못 했다고. 그럼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조금만 도와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회사에서 잘려 무일푼이던 그에게 얼마나 솔깃한 제안이었을까.
눈 앞에서 보여준 돈을 보고 그는 그래도 고민을 좀 했대.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역시 꺼려졌을테니까. 그런 그에게 남자는 직접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절대 잡힐 일 없을 거라며 설득했고, 결국 그 말과 돈에 넘어간 그는 남자가 시킨 일을 했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야. 스태프인 척 무대 뒤로 들어가서 조명을 움직이는 조정간의 위치를 비틀어 놓는 것. 그것이 남자가 시킨 일이었어.
그렇게 그가 건드린 단 한번으로 조명기구가 어긋났고 애초에 부실했던 시설이 무너져 무대 위 라하트 부부를 덮친 거지. 사고가 일어난 후엔 그도 놀랐다더라. 설마 그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테니까. 안 그래, 리키?"

"......"
"리키는 왜...?"

"사건 후 조사 결과를 모종의 방법으로 빼내서 봤는데, 거기엔 익스파로 인한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어. 정말로 부실 공사로 인한 흔적 뿐이었지. 프레이의 능력이 작용했다면 어디 한군데라도 인위적인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 했어. 믿기 어려운 결과였지만 그게 현실이었지. 그리고 거기서부터 의문이 들더군.
왜 프레이는 이 사건을 자신이 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꽤 쉽게 찾을 수 있었어. 무대 사건 때 얽혔던 그가 그 남자의 이름을 가르쳐줬거든. 그 이름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작하니 참 재밌는 사실들이 줄줄 쏟아져 나오더라. 내가 원했던 것들의 거의 전부가 거기서 나왔어. 다 알고나니까 일부러 그쪽에서 정보를 흘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 때는 이미 조사가 끝난 후였지.

그 남자는 어느 범죄조직에 속한 사람으로 조사할 당시엔 2대에 걸쳐 보스를 모시는 자리에 있더군. 그가 모신 사람들은 부자 관계인 사람들로 둘의 이름이 같은 것이 특징이었지... 나이로 보아 20대에 첫 주인을 섬기고 40 초반쯤 두번째 주인을 모셨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두번째 주인이 보스 자리에 앉기 전에, 그러니까 첫 주인 다음에 누가 보스 자리에 있었더라고?
그게 누굴까 했더니 이게 또 재밌대. 카르트 H. 라하트. 훗날 자회사 창립기념식에서 죽은 그 사람이 사실 그런 조직의 보스였던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아버지이자 프레이의 아버지였지.

내 아버지는 전대 보스를 계략에 빠뜨려 사고사로 죽인 뒤 그 자리에 앉았어. 그 때 죽은 보스가 그 남자의 첫 주인이었던 거고. 당시 전대 보스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했어. 그 아들은 전대 보스가 죽음과 동시에 도망쳐 소재가 불분명해졌다가, 아버지가 사고사한 뒤 타이밍 좋게 나타나 조직을 휘어잡았다고 해. 그 일련의 일을 어린애 혼자서 했을 리는 없겠지. 그 도우미가 그 남자였던 거야.
하지만 그 남자는 어디까지나 도우미일 뿐이었어. 모든 지시는 그가 모시던 작은 주인에게서 나왔지. 첫 주인을 빼다 박은 듯 닮은 야욕덩어리 작은 주인으로부터.

자, 이쯤 되면 너도 할 말이 좀 있지 않아, 리키? 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나는 웃는 얼굴로 리키를 쏘아보았다. 프레이는 내 얘기에 넋이 나간 듯 가만히 있었고, 리키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으며 묵묵히 있었다. 짧은 침묵 후 리키가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 반푼이 오라비에 비하면 넌 아주 완벽하게 네 아버지 피를 이었어. 사실을 아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저 녀석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오히려 오싹할 정도야."
"칭찬으로 듣지. 그래서 할 말은 그것 뿐?"
"그럴 리가. 그 전에 네가 알아낸 것이 더 있지 않나?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우리를 마주한 건 아닐 테니."

내 심중을 짚는 말에 내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뱀 같은 인간. 나는 식은 커피를 한모금 마신 뒤 다른 것을 얘기했다.

"사건과 조직에 대한 것을 조사하던 중, 나는 아버지에게 내 어머니 이전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어.
그 여자가 임신 중일 때 집안도 권력도 좋았던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났고, 인성쓰레기던 아버지는 단박에 여자를 갈아치웠지. 태생부터 별 볼일 없던 전 여자는 그대로 뒷골목 사창가에 흘러들어가 출산하고, 10년도 못 살고 비참하게 생을 마무리 했다, 그게 정보의 전부였어.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 정보 어디에도 그녀가 출산했다는 아이에 대한 건 없었어. 그냥 낳았다는 것 외엔. 그래서 나는 그 부분도 파고들었어. 어쩌면 그 아이도 이용당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 바닥 인생이란게 그런 거니까. 참 힘들었어. 출생신고도 안 되어있어서 쫓을 실마리가 없었거든.

거기서 나는 한가지 가설을 떠올렸어. 어쩌면, 이라는 생각을. 당시 아마란토의 젊은 보스 옆엔 조직원도 아닌 사람이 어릴 때부터 같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가 아닐까. 내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그들은 연결이 있었던 거 아닐까. 나는 지체 없이 조사를 속행했고 결과는 예상대로였지.
조직 아마란토의 현 보스 리케니스의 친우, 프라이에라 라하트는 전대 보스 카르트의 첫 자식이자 내 의붓남매라는 사실을 그렇게 알게 되었어.

내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네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른 결말, 그 남자의 진심(2)


"...내가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네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을 일단락한 나는 태연자약했고, 프레이는 새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리키는 싸늘하게 나를 쳐다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빙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우리 셋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내가 던진 말들로 빙판은 반 이상 금이 가 있었다. 이제 리키가 남은 사실을 말한다면 이 판은 무너질 것이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리키는 말을 아꼈다. 그 속셈을 알 수가 없어, 나는 그저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프레이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한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리키의 저음이 그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울프, 너의 얘기는 한 곳도 정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깔끔했어. 틀린 곳도 없고 의문점 역시 훌륭해. 나를 향한 그 의심도 물론."
"그 말은...인정하겠다는 거야? 내가 한 말들을?"
"그래. 누가 정보를 흘린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고 했지? 그 느낌 역시 맞았다고 해주지. 네가 파고들었던 그 남자, 지금 내 오른팔인 그가 내 지시를 받아 흘린 정보였어. 어쩌다보니 넌 그 미끼를 문 월척이 되고 말았군."
"이런 젠장!"

완전히 놀아났단 기분이 들어 나는 울컥 소리쳤다. 모두가 둘러앉은 테이블을 한번 내리치자 잔잔한 분위기를 깨는 소음이 울려퍼졌고, 그 소리 때문인지 프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항상 맑고 푸르던 두 눈이 온갖 것들이 뒤섞인 뒤숭숭한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눈빛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가 리키를 향했다.

"왜, 왜 그랬던 거야? 리키, 처음부터 그럴 속셈으로 나를 끌어들였어? 그 옛날 처음부터!?"
"처음부터는 아니었어. 이제부터 설명할 테니까, 진정하고 들어."
"지금 진정하란게 말이 되냐?!"

외침과 동시에 요동치는 창 같은 것이 리키에게 쏘아졌다. 명백하게 질량을 갖고 있는 그것은 내 능력과 다른 것이었다. 프레이의 N2 알케미스트...언젠가 내 배에 박혔던 그것과 같은 것.
창은 아슬아슬하게 리키를 스쳐갔다. 스쳐간 뒤 창은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졌지만, 리키의 목에는 길게 베인 상처가 남았다. 얕지만 길게.
베인 살갗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려 그의 셔츠를 적신다. 리키는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하려던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너희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어. 우습게 들리겠지만 너희를 농락할 작정으로 그런게 아니야. 나는 너희를 만나고 단 한 순간도 너희를 도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내가 8살 무렵, 아직 이름 없던 프레이와 나는 당초 계획을 18세로 잡고 있었어. 그렇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예상 외의 기회가 그렇게 생겨버려서, 고민 끝에 나는 프레이가 원하는 쪽으로 하기로 했어. 그래서 그 날 사건이 터졌지.
그런 조작을 하기로 한 건 프레이가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등록되지 않은 능력자가 그런 공개 장소에서 능력을 썼다간 단박에 들킬 테니까 다른 방법을 쓰자고 생각했어. 나는 당시 나를 뒷바라지 해주던 그와 상의해 적절한 인선을 구하고, 방법을 모색했지. 울프. 네가 알아낸 건 조정간을 움직인 그 남자 뿐이겠지만 사실 그 무대를 만든 스태프의 절반이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었어. 특히 조명 쪽으로 말야.

계획이 완성되고 난 후에 난 프레이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찍 복수를 이뤄버린 프레이가 날 떠날 것 같아서.
당시의 나는 뒷바라지 해주던 그 외에는 사방이 적이라, 그나마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프레이 뿐이었어. 어린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싫었어. 그래서 계획을 알려주지 않고 거짓 죄책감이라는 짐을 그에게 지워 떠나지 못 하게 만들었지."

목에서 흐르는 피를 어찌할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리키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무심하게 그를 지켜보았으나 프레이만이 온갖 희비가 교차하는 복잡한 얼굴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정신 사납다고 한번 걷어차자 조용해졌지만.
후... 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쉰 리키의 얘기가 이어진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후에, 늦긴 했지만 나는 내가 누리지 못 했던 것들을 프레이와 함께 하나하나 해나갔어. 학교도 사교회도. 당시의 프레이는 너무나 공허하고 또 가벼웠으니까. 무엇이든 그를 잡아주길 바랐지만 어떤 것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 했어. 그러던 와중에 울프, 너의 얘기를 들은 거야. 8살 무렵의 너를 기억하나? 그 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카운셀링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 어린 너에게서 그와 같은 공허함을 보았어. 같은 남자의 소생이라 그런가 그런 부분까지 닮았을까 싶더군. 나는 너희가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나게 했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너희가 처음 만났던 날."
"......"
"......"

그리운 듯한 리키의 말에 나와 프레이도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처음 만났던 그 날, 나와 프레이는 서로가 정말 반짝여보였다. 저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리키는 옆에서 그런 우리가 지금도 선명하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항상 능글맞거나 속이 시커먼 표정만 짓던 얼굴에 떠오른 그 미소는 너무나 의외고, 또 처음 보는 것이라.
놀라 눈을 깜빡이는 사이 부드러운 저음이 조금더 말을 자아냈다.

"너희를 만나게 한 이상 나는 너희가 불행해지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택할 권리를 주긴 했으나 내가 만든 일의 결과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중의 결과를 위해 중간을 희생하기로 했고, 너희 둘 사이에서 상황을 조정하는 역으로 있어왔어. 실제로 뭔가를 많이 한 건 프레이 쪽이었지. 똑똑한 동생과 달리 그 오라비라는 놈은 참 유약해서 말야. 하여간 손이 많이 가더군.
프레이에게는 먼저 너희의 관계를 알려줬어. 그 때가 아마 18...아니 19살일 때였나. 그가 네게서 손을 떼고 싶어한다면 그 이상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프레이는 훗날 고통스럽더라도 너와의 인연을 이어가길 원했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했지.

울프, 네게 손을 쓰지 않은 건 네가 야무진 아이기도 했지만 그런 네가 이쪽을 눈치 채고 빠져들진 않을까 염려해서 그런 거였어. 너는 양지에서 태어난 아이였으니까, 양지에만 있기를 바랐어. 잘못된 건 우리였으니까. 아니, 내 이기심으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프레이를 휘말리게 하고, 너까지 상처입히게 된 건 정말 면목 없지만..."

그 쯤 되니 우리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이 이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하고, 서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착잡한 표정으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입을 다문 그 정적 속에서 리키는 조용히 일어나 상처를 수습하러 갔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식탁엔 두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른 결말, 그 남자의 후회(3)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식탁엔 두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
"......"

어색하고 또 어색한 시간이 지나간다. 가느다란 초침 지나가는 소리가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잘 들리는 순간이었다. 그 시간이 불편하다 못 해 무겁게 느껴질 즈음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어,어?"

나는 때마침 잔이 비어서 새로 커피나 타려고 일어나던 참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일어나려던 몸을 엉거주춤하고서 그를 보자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보여,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커피야 안 마셔도 되니까.
내가 다시 자리에 앉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리키와는 다른 저음의 목소리가 말했다.

"저번 병원에서, 내가 아직도 미워하냐고 물었을 때, 잊지는 않았다고 했잖아. 그거...무슨 의미였어?"
"...말 그대로야. 네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내 배를 찌른 건 잊지 않았다는 의미였어."
"그것 뿐이야? 정말?"
"정말."

평범한 내 대답에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기다렸다. 잠깐 사이 아까의 흥분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져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프레이가 못 다 한 말을 꺼내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웠어. 그 이상으로 네가 아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너만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날 원망하고 끝내는 나를 죽여주길 바랐지. 나는 네 부모를 죽인 원수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지금까지의 나는 뭐였던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로써는 네게 해줄 얘기가 특별히 없어. 거의 리키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뿐이니까.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너에 대한 애정이나 혈육으로서의 정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도, 진실을 안 후에도.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내 인생에 빛이 들었으니까. 혼자 있어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해주는,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 그게 너야.
네가 내게 고백하던 그 날 기억해? 그 날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정말 많이 울었었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거절하고 나를 원망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보석 같은 너를 상처 입혀야 한다는게 너무 괴로웠어. 그렇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차라리 그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을 걸 그랬나 봐. 너를 상처입히지 말고, 그냥 그 날 거기서 네게 죽을 걸.
이제와 후회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

고해성사하듯 이어지던 말은 점점 흐려져 끝내는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든다. 나는 그런 그를 위로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새삼스럽게 그가 작아보였다. 언제나 크나큰 존재로 느껴졌는데.

그가 말했듯,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것이 다였을 것이다. 한심한 짓이긴 하나 그는 거의 리키의 의견에 따르고 그의 의도대로 행동할 뿐이었으니까.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듣고 싶은 것은 리키에게만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의문을, 거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리키에게 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이의 말을 담담히 들을 수 있었다.

"......"

리키가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있었기에 나는 프레이가 감정을 추스리길 기다렸다. 이제 우리 사이에 들춰야 할 잔혹한 사실 같은 건 더 없었다. 남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정하는 일 뿐.

깨닫고보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제법 흘러 있었다. 붉게 황혼이 지던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조금 있으면 날이 바뀔 때였다. 그렇게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결국 새해 이전에 결말을 내리는 것은 하지 못 했네. 그런 아무래도 좋을 생각에 무심코 웃어버린다. 후후. 가볍디 가벼운 웃음소리에 눈가가 붉어진 프레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그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때마침 리키가 목에 거즈를 붙이고 돌아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나 대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얘기 좀 했어?"
"뭐 그럭저럭."
"...리키, 미안...많이 아팠어?"
"그다지. 이 정도로 끝내줘서 고마울 정도인데. 최소한 팔 하나 정도는 내줘야하지 않을까 했어."
"팔은 너무 싸. 적어도 그 잘난 낯짝 정도는 뜯어줘야-"
"그, 그만! 둘 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다시 모인 우리에게 아까 같은 날 선 긴장감도, 빙판 위 같은 아슬아슬함도 없었다. 오히려 살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프레이만이 그 농담을 농담으로 듣지 못 하고 놀랐지만.

짧은 대화가 오간 후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이제 더는 꺼낼 것도 감춘 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 관계는 오늘로써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고자 이렇게 침묵으로나마 시간을...

"......"
"......"
"......"

하지만 나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끝낼 거라면 이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미련한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입 다물고 있는 꼴이 아무래도 말 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럼 내가 말해야지 어쩌겠어.


이른 결말, '끝' 과 '그리고


하지만 나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끝낼 거라면 이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미련한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입 다물고 있는 꼴이 아무래도 말 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럼 내가 말해야지 어쩌겠어.

크흠. 그럴 듯한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고개를 돌려 둘러앉은 그들을 보니 그들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다.
한번씩 마주치는 시선에 나는 웃었고, 리키는 어깨를 으쓱이고, 프레이는 왜인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지난 7년간 서로 외면하던 시선이 지금에서야 마주해 우리의 얼굴이 서로에게 선명히 보였다.

그동안 어긋나기만 하던 시선이, 이제야 맞았다.

"정이란게 무섭긴 무섭네. 이 밉상들이 미워 보이질 않으니."
"내가 할 말이다."
"난 아냐. 둘 다 그렇게 감쪽같이 날 속이고...!"
"네가 멍청한거지."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누구더라-"
"윽...!"

괜히 대들다 한방 먹은 프레이가 움찔 떨며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나와 리키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다. 지금이구나. 그 생각이 들어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농담 따먹기는 그만 하고 이제 솔직하게 얘기하자. 앞으로 어쩌고 싶은지. 프레이도 리키도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 모든 걸 해온 건 아닐 거 아냐. 그치?

나 역시 스스로 진실을 파헤치면서 생각이 수도 없이 바뀌었어. 한때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증오와 원망이 하나 둘 알아갈수록, 그 속의 너희를 이해해갈수록 옅어져갔지. 전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남은 것도 흩어지는 건 시간 문제일거야. 더이상 원망할 상대도, 복수할 가치도 없어졌으니까.

최종적으로 이 결론을 내린 건 비교적 최근...그러니까 너희가 여기에 오고 오늘 이 자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 사이지만, 절대 허투로 내리거나 자포자기로 한게 아니라는 걸 미리 말해둘게. 정말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내 결심이자 내가 바라는 결론은-

앞으로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어. 지금처럼. 그리고 옛날처럼."

어쩌면 예상되었을 그 말에 누구랄 것 없이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셋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미세하게 떨려온다. 나는 차마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 하고 말을 이었다.

"과거를 잊자고는 안 할 거야.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그래도 있잖아? 원망하고 미워했던 시간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 더 길잖아.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결국은 마주보게 됐잖아. 이제야 마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헤어지고 싶지 않잖아...나만, 나만 그래? 나만 그런거야?"

끝의 끝에 와서 덜컥 겁이 나 말끝이 흐려진다. 정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봐. 프레이와 리키가, 아니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떠나버릴까 봐.

울컥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참고 삼켜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서워도 봐야 했다. 나 외의 둘의 생각이 어떤지. 이것만큼은 피하면 안 되니까.

떨리는 눈을 들어 둘을 바라보니 둘도 나를 보고 있다. 프레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리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불안이 현실이 될까봐. 하지만 이 후 들려온 말들은 내 불안을 사그러뜨려 흩어지게 해주었다.

"너를 떠나려면, 이 관계를 부수려면 진작 할 수도 있었어. 오히려 그 시간 동안 유지된게 정말 놀랄 일이지. 어긋난 상태였긴 하지만.
그래. 나도 네 말처럼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데 떠나고 싶진 않아. 그리고 이 결말은 내가 바랐던 것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어. 한번만 더 내 이기심을 받아달라고. 너희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내 생각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나 역시 계속 함께이고 싶어...너희는 내 생에 둘도 없을 친구고, 가족이니까..."

서로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생각을 해오던 세 사람이 사실 같은 끝을 바란다는 것이 말이나 될까.
타인이 보기엔 절대 이해받지 못 할 생각이었다. 우리였기에 가능한, 우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서로를 지독하게 잘 알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이기에.

나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숨이 끊어지는 듯한 탄식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을 끝으로 결국 나도 울었다. 소리를 죽이던 프레이와 달리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지난 원망, 서러움, 모든 것이 녹아든 눈물을 쏟아내는 내 뒤로 희뿌옇게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 Epilogue -


둥지에는 두 알이 남아있었습니다.

성장을 멈춘 잿빛 알과 태어나길 포기한 검은 알.

두 알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만 같았습니다.

더이상 자라지 않고, 껍질을 깨지 않은 채 가장 불행한 끝을 맞이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이 그저 그렇게 스러지게 두지 않았습니다.

금빛 새 역시 그냥 지켜보게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세상은 금빛 새로 하여금 둥지를 흔들게 만들었고,

두 알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껍질이 깨지게 만들었습니다.

잿빛 알에서는 영롱한 에메랄드빛 깃털에 석류석 같은 붉은 눈을 가진 새가 태어났고

검은 알에서는 심야의 밤하늘처럼 검게 빛나는 깃털에 깊은 호수처럼 푸른 눈의 새가 태어났습니다.

도망치고 외면하기만 하던 서로를 끝끝내 마주하게 된 세 마리는 그제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머물렀던, 진작 떠나야 했던 둥지에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그 둥지에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같은 방향으로 날아간 세 마리는 정말 즐거운 듯이 날갯짓을 해 날아갔습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말 정말로 즐거운 듯이.

저 멀리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하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