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절, 불야성 |
- 일하, 태양 아래 빛무리
- 소문
왁자지껄한 인파 사이를 스치는 걸음이 느리다. 교실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거나, 아예 교실에 없던 태오가 복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오로지 점심시간뿐이다. 사람이 많은 급식실은 발 들이기 싫으니 늘 매점에서 간단히 해결하던 탓이다.
걸음마다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잠깐 머무르다 사라졌다. 바깥과는 달리 커리큘럼 덕분에 개성이 강한 학생들도 많거니와 교칙이 자유로우니 이러저러한 인물이 많다지만 태오는 결을 달리했다. 답답한 하복 와이셔츠를 목 끝까지 채워도 드러나는 붕대의 흔적, 그리고 이 여름에 걸친 점퍼까지. 팔뚝까지 내려간 점퍼는 하복으로 갈아입은 탓에 드러난 야윈 팔뚝마저 가려줄 정도로 상냥하진 못했다. 어깨를 들썩여 다시 바르게 입기엔 날씨가 덥고, 그렇다고 아예 벗고 싶은 마음은 없던 탓일까, 점퍼는 상냥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듯 허벅지에 그 끝이 한 번씩 툭툭 채이곤 했다. 대놓고 입을 열지 않지만, 이따금 태오에 대해 아는 학생들은 제각기 모여 쑥덕이고는 했다.
- 쟤 담당 연구원 또 바뀌었대.
- 또?
- 연서가 커리큘럼 때문에 같이 있었는데 연구원이 너같이 속내 함부로 읽는 애랑 커리큘럼 하기 싫다고 대놓고 쪽주고 그랬다는데?
- 돌았네. 쟤 레벨 3이라며? 속내 읽는 거 진짜야?
- 난 몰라.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연서가 처음부터 연구원이 쟤 보면 기분 나쁘다고 욕하고 그랬대.
- 그럼 연구원이 또라이네. 지가 뭔데 학생한테 쪽을 줘? 지도 학생들 커리큘럼 해서 돈 받고 살면서.
- 아 개 웃겨 미친아!
해당 소문은 태오도 잘 알고 있었다. 레벨 3의 담당 연구원이 벌써 8번째 바뀌었고, 그게 독심술을 능력으로 가진 현태오 학생이라더라. 여기까지는 태오 또한 그러려니 넘어갔다.
- 쟤는 아직도 저지먼트야?
- 그럴걸?
- 쩐다. 야, 내가 군기 얘기했나?
- 어. 너 그거 못 견디고 탈주했다며.
- 쟤 재작년에 선배한테 나댄 거는?
- 엥? 아니. 군기 *나 쩔었다는 거랑 은우 걔 1학년 때 엄청 조용한 것만 알려줬는데?
- 쟤 진짜 미친놈이야. 대가리 오래 박기 신기록 쟤가 세웠을걸? 다른 선배들이 쟤 일으키라고 할 정도였다니까?
- 왜?
- 그, 선배 하나가 기분이 되게 나빠서 애들한테 이것저것 시키는데 쟤가 선배, 죄송하지만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짜증 나는 건 아는데 그거를 후배한테 풀지 말았으면 해요~ 그러니까 선배가 헤어진 거라고 얘기해서.
- 그건 좀…….
- 근데 헤어진 지 1시간도 안 지나서 있었던 일이라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니까 다 들린다고 그래서 더 크게 혼났던 걸로 알거든. 담배로도 여러 번 잡혔을걸? 아직도 저지먼트인 건 좀 대단하다. 생기부 채우나?
- 넌 안 채우냐?
- 왜 시비야 *발
하지만 소문이란 것은 간혹 와전되고, 부풀려지거나, 있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추측 또한 누군가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 그런데 그거 알아?
- 너는 *발 뭐 말할 때마다 그거 아냐고 하는데 뭔질 말을 해라 좀.
- 아니 *발아…….
- 뭐, 말이나 해.
- 나 예전에 쟤 연애하는 거 본 적 있다?
- 언제?
- 그 작년에 누가 쟤 곁에 끼고 다니던데?
- 뭐야? 현태오 여친 있어?
- 아재던데?
- 엥? 뭔 소리야?
- 야.
- 몰라, 막 태오야 어쩌고 하는데 걔 벌벌 떨면서 가더라.
- 야.
- 잘못 본 거 아냐?
- 그런데 저런 머리는 쟤밖에 없잖아.
- 야!
- 아, 왜!
매점에 도착한 태오는 소리 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여학생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시선을 따라 눈을 굴린 다른 학생들이 눈을 마주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자 태오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나치며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꺼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이 다 그렇지 뭐.
- 제3자
마침내 창립 15주년 행사의 날이 다가왔다. 무수한 인파지만 머리와 눈으로 하여금 외지인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평소와 다르게 태오는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여름이긴 하지만 팔을 가리기 위해 얇고 긴 와이셔츠를 입고, 긴 슬랙스 바지로 깔끔한 인상을 남겼다. 부산하던 머리는 빗어 높고 단정히 올려묶었고, 늘 쓰던 코안경도 벗었으며, 네일도 지웠다. 피어싱도 요란한 것이 아니라 단정한 은제로 갈아 끼운지라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이 태오인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태오는 멀리서 중년 남성을 대동하며 걸어오는 정장 차림의 노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됐다. 여기서 오라고 했으면 올 수밖에 없는데 뭐가 그리도 미안하겠니. 그보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할애비는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할 리가요. 가족이지 않습니까."
"가족이라!"
눈앞의 노인은 태오의 할아버지였다. 머리가 희끗하지만 허리가 곧고, 노인병이라고는 일절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아침에 뛸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며, 지금까지 야망을 불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노인은 태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 너도 우리 집안 일원이지. 물론 예술하는 놈이나 계집애처럼 머리 기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마는……. 여기엔 그런 애들 많은 듯 하구나."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니, 저는 그 뜻을 따랐을 뿐이지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변명하는 건 이 할애비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유념하겠습니다."
태오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태오를 보던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인첨공에 두고 한 번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했다. 제 어미아비는 모르겠지만 노인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저 아이 11살일 때니 벌써 8년이나 지났다. 8년의 세월 동안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자랐을까.
"태오야."
"예, 할아버님."
"학교 생활은 어떠냐."
"긍정적입니다."
"대학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쌓았습니다."
"대학은 가거라."
"예."
"태오야."
"예."
"이 할애비를 원망하느냐?"
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오."
"네 네 애비랑 며늘아가는 인정했어도, 너는 혼외자식이라며 인정할 수 없다며 여기로 보내버리고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원망스럽지 않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아라."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일 뿐입니다. 저는 외지인인데 어떻게 원망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곳에 왔습니다. 집안에 섞일 수 없이 떨어져 있으니 제3자나 다름없는 시선으로 집안을 평가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는 타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원망하실지 모르나 저는 아닙니다."
"뭐라고?"
"……그렇기에 저는 명분이 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추진하는 혼사가 무산되었으니 그 파장은 컸을 것이고, 실제로 주가도 폭락했지요. 제 부모의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나마 수습할 수 있는 한의 계산이었겠지만 저는 아니었음을 압니다. 그만큼 큰 결단과 각오를 하셨음을 감히 이해하니 제가 어떻게 할아버님을 원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니? 계산이 아니라면 어쩌려고 지금 입을 함부로 놀리냔 말이야."
"저는 현태오입니다. 할아버님."
"그래, 현태오가 뭘 어쨌다고."
"진양그룹 현중철 회장님의 손패라는 뜻입니다."
"……허허! 이 놈 봐라.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인첨공에 보내지 말고 내 밑에서 키웠어야 했다! 우유부단한 지 애비나 안에 들여서 낳은 동생보다 낫구만.
태오는 눈을 감았다. 노인은 태오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너는 비록 여기에서 우리와 연이 없는 제3자로 산다지마는, 손패가 아니다. 너도 어찌 되었든 내 손자니."
짙은 와위가 느껴지나 어디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감사합니다."
"저, 회장님."
"어이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업무상 오신 걸로 알고 있으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모쪼록 편안히 보내다 가셨으면 합니다."
"그래. 초대해주어 고맙구나. 또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 부모도 모레 온다니 시간 나면 보도록 해라."
"예. 살펴가세요."
노인이 자리를 떠나고, 태오는 우두커니 서 자신의 한쪽 팔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거기 ……지 말고…… ……와.
지금은…….
네가 내 속내를 읽는 것쯤은 알아.
태오는 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 동생
인첨공 15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4학구 문화광장은 발 들이기가 무섭게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가족들과 재회하며 눈물을 펑펑 쏟는 학생, 오랜만에 만난 친구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단순히 초대를 받고 들어온 사람, 가족 없이도 충분히 잘 놀고 있는 휘황찬란한 색조의 사람들, 하도 더운 날씨에 진땀을 빼며 어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커플……. 북적북적한 인파 속에서는 그 유명한 레이브의 의뢰를 받아 진짜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도 있었다. 태오는 안드로이드에서 시선을 떼고는 다시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맸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온갖 신기하고 경이로운 결과물을 선보이고 있지만, 태오의 눈에는 영 차지 않거니와 이 자리는 지독한 멀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저렇게 서로 얼싸안고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홀로 다니는 부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태오는 후자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통에 귀에 꽂히는 소음과 함께 이따금 마음의 소리가 의도치 않게 들릴 때면 태오는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 날에는 이런 수많은 인파를 통제하고 경호까지 해야 한다고?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하던 태오는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부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고, 흡연자를 안쓰러울 정도로 조그마한 박스 안에 몰아넣지 않는 얼마 없는 개방된 흡연구역이다. 학생이 흡연을 한다는 소식에 저지먼트나 타 학생들은 기함을 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 울렁거리는 속과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한 충분한 니코틴과 타르, 그리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습관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종이로 된 담뱃갑을 엄지로 밀어 올려 손목을 능숙하게 턴 태오는 입에 연초를 하나 끼워 물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손을 멈췄다.
"무슨 일이니?"
흡연구역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 때문이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할 것 같은 단정한 인상의 소년은 태오의 앞에 떡하니 걸음을 멈췄다. 태오는 잠시 입 가장자리로 궐련을 밀어내더니 눈을 굴려 소년을 위아래로 훑고, 고개를 빼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여기에선 쓰이지 않는 기종의 핸드폰과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눈을 보니 바깥에서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부모는 주변에 없는 것 같다. 태오는 어쩌면 부모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인간이니까.
"여기에 딥상어동 있어서요."
이제 보니 GPS 신호를 기반으로 한 게임을 하던 모양이다. 소년은 천진난만하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손가락을 화면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저 멀리서 먹먹하게 들리는 웅성거림 뒤로 핸드폰에서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몬스터를 잡아 도감에 새로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만족한 표정을 짓던 소년은 태오를 정확히 마주하더니,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멋지다. 귀가 아닌 두뇌로 꽂혀 들어오는 소리에 태오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형."
"그래."
"담배 피우는 거 구경해도 돼요?"
"네 나이대에서 좋은 경험은 안 될 거야."
여기서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어째서 안 되는지부터 얘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몇 없는 진귀한 광경이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자리에서 발붙여 떠날 생각이 없다는 듯아예 한 걸음 더 다가가더니, 벽에 엉거주춤 기대기까지 하자 태오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보았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눈을 시큰거리게 찔렀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보다는 덜 따가웠다.
"저기로 다시 가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싫단 말이에요. 얌전히 있을게요."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제가 보는 건데요?"
태오는 눈을 슬쩍 굴려 소년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인첨공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태오는 주머니에서 좋아하는 밴드의 굿즈로 나온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댕겨 연초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자 일직선의 희뿌옇고 독한 연기가 길게 뻗어 나오다 금세 흩어졌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보던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린 태오는 벽에 등을 기댔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형은 여기 살아요?"
"응."
"그럼 얼마나 살았어요?"
"15년."
"여기 생길 때부터 있던 거예요? 짱이다."
"너는 몇 살이니?"
"13살이요."
태오는 다시금 연초를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13살이라. 자신은 13살 때 뭘 했더라.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태오는 티가 나지 않게 입술의 연한 살을 씹었다. 화한 멘솔 때문에 짓씹은 살이 금세 아려왔다. 그런 태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소년은 자꾸만 재잘거렸다.
"형은 몇 살이에요?"
"비밀."
"어, 형 어른 아니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빠가 그랬는데 찔리는 사람들만 그렇게 답한다고 저는 따라 하면 안 된댔어요."
"그렇구나. 아버지가 좋은 걸 가르쳐 주셨네."
"으, 아닌데요. 맨날 이거는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너는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하는걸요. 막 간섭하고 짜증 나."
"하지만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을 거야."
"형도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해요!"
"형은 곧 어른이 되니까 그래."
"나는 어른 되기 싫어요."
소년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듯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며 괜히 부스가 있는 곳을 노려다 보자, 태오는 그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최신 AI 기술로 20년 뒤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체험 부스가 보였다.
"왜 되기 싫을까?"
"다들 너무 무서워서요."
"무서워?"
"응.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뭐 하나만 잘못해도 사람들이 엄청 욕하고, 뉴스에서 사과해야 하고, 뭐 국정감사 끌려가고 그래요. 저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요, 아빠는 저보고 맨날 이렇게 되기 싫으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만 하고 친구들이랑도 못 놀게 하는 거 있죠? 아빠 탓이잖아요."
"섭섭하구나."
"…다들 라면 먹으러 가고 그러는데 나는 못 먹고 맨날 학원만 가고, 밤에 돌아오면 바로 자고 일어나서 또 학교 가야 해요. 이것도 오늘 겨우 한 거예요. 집에 돌아가면 못 해요."
소년은 고개를 들어 태오를 마주했다. 곧 중학생이 될 나이지만, 아직 마음만큼은 순진무구한 것 같았다. 올곧고 말간 눈동자를 마주한 흐린 비색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진심으로 억울한 듯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저 나이에는 누구든 놀고 싶겠지. 무리에 어울리고 싶을 것이고, 같은 심정을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소년은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 같다. 소년이 진정 부모의 뜻에 휘둘려 채찍질 받는 삶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들려오는 생각으로 알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려는 목소리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일까, 태오는 시선을 피하고는 연초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몇 모금 빨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반절 넘게 타들어 있었다.
"형은 부모님 간섭 없이 자유로워요?"
"그런 셈일까."
"나도 인첨공 가고 싶다."
태오는 연기를 뱉었다. 입술 속을 생각보다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안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심하게 쓰렸다. 소년은 고개를 돌렸지만 바람이 불어 생각하지도 못하게 덮친 연기에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왜요? 저 그래도 공부 잘해요. 여기는 너무 재미없어. 다들 나한테 뭐 기업이니 뭐니 하면서 막 그러는데, 저는 그런 거 싫단 말이에요. 저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쟤네처럼 뛰놀고도 싶고요……."
"얘."
태오는 허리를 숙여 제법 상냥하게 눈을 마주했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작고 귀여운 투정이지만 어쩐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바깥의 사람들에게 인첨공은 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이란 사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끔찍하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약에 가까운 약물로 사람들이 수많은 피해를 입고, 인명사고도 있었으며,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 있었다면 믿기나 할까? 어쩌면 이 소년은 영화 같고 멋지다고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세상이 제일 나은 거야. 여기 오면 형처럼 된다."
"형 멋진데요? 잘생겼잖아요! 연예인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태영아!"
"현태영, 너 이 녀석. 또 멋대로 빠져나가선!"
잘 빼입은 중년의 남성과 명품 가방을 든 여성이 멀리서 아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다 태오를 마주치곤 우뚝 멈췄다. 피어싱 일색에 팔엔 붕대를 칭칭 감고, 딱 봐도 불량한 모습에 기가 눌렸던 건지, 잠시 침묵이 오갔다. 태오는 소년이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딱 달라붙을 때, 그제야 허리를 곧게 세우며 두 사람을 마주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희 아이가 폐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태영아, 너도 감사합니다- 해야지."
"어, 그- 감사합니다, 형."
"……."
"여보, 왜 그래?"
"엄마?"
"……태오, 니?"
여성은 더듬더듬 입을 벌리더니 태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여성은 뺨을 더듬지도 못하고 허공을 배회하던 손을 달달 떨다 주먹을 쥐고 아래로 내렸다. 남성은 그제야 태오의 얼굴을 바라보곤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갈아 쳐다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끔뻑였다. 이제 보니 태오와 소년은 많이 닮아 있었다.
"엄마, 형이랑 아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태영아, 인사하렴. 네……."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많이, 컸구나."
"그래, 태오야. 잠깐이라도 얘기는 하고 가자꾸나. 어때? 그러니까, 보고 싶었단다."
"아뇨, 괜히 사진이 찍혀서 트집 잡히지 않을까 싶으니…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바라지 않으실 듯하니까요."
"태오야, 할아버지는 너를 아끼셔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응?"
"……진짜로 아낀다면, 태영이는 인첨공에 안 왔으면 좋겠네요. 마음의 소리에 귀도 기울여주시고요."
"태오야."
"저처럼 정치 싸움에 휩쓸려서, 여기에 명분을 이유로 잊힌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할 거 아닌가요……."
"태오야!"
"태영아."
"어. 네, 네."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태오는 지금껏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던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를 떠났다. 붙잡으려는 손길이 뻗쳤지만 차마 잡을 염치는 없었는지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에는 여전히 끄지 못한 담배가 불잉걸을 반짝이고 있었다. 태오는 손등을 감싼 붕대 위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멀리서부터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던 부모의 심정이 느껴지자 홀로그램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노이즈 속에서 입술을 자근 깨물더니 시선을 굴리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결국엔 실소가 터져나왔다. 아니, 일소였다.
"……하하!"
아무리 피로 이루어진 관계라도 모두 다른 꿈을 꾸고 있으니, 삶이란 한순간의 꿈처럼 덧없는 것이다.
- 금수, 망상.
* 시점- 챕터 2 '제로전' 이후
태오는 건물 잔해에 아무렇게나 기대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5주년의 마지막 날은 끔찍한 사고가 가득했고,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니코틴과 타르가 필요했다. 미성년자의 흡연은 사회에서 갖는 도덕적 시선이나 건강 측에서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은 온갖 예쁘고 깜찍하며 사랑스러운 것에 기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로가 소지품을 뒤질 적 같이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주머니에는 담배는커녕 먼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태오는 짜증도 내지 못하고 기운 없이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친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지만 그걸 뭐라고 콕 집어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탓이다. 제로에게 습격 당하기 전부터 곱씹자면, 자신이 레이브라는 걸 아는 존재가 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숨겨오며 삶을 표현하던 자아를 들킨 것만 같단 느낌에 머리가 싸해지고, 이 사실이 드러나면 더는 생활할 수 없을 것 같아 조건에 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함정이었단 사실과 함께 태오는 습격당해 쓰러졌다. 반항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방적인 구타였다.
그 이후에는 그림자에서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두 번째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존재들은 자신을 잘 알 것이다. 스트레인지 도박장에서 일하던 천재 엔지니어의 소문을 누가 모르겠나. 물론 자신의 감정이 순간 불탔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건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자신이 부정하던 것을 확실하게 못 박았을 때, 태오는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든 외면하고 있었다. 스트레인지 출신의 꼬리표. 언젠가의 미래를 알고 있지만, 그 미래를 보다 유연하게 대비하고자 현재에 충실하고자 만든 도피처였다. 그러나 세상은 태오의 편이 아니다. 박힌 못은 떨어지지 않았고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구원자가 결정타를 날렸다.
동생이라고 믿는 존재다. 전부 들어버렸다는 그 표정에서 태오는 결국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거칠다 못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부서진 관계성과 망가진 몸뚱이. 그렇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도 하지 않거니와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도 없다. 바로잡는다 해서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인간은 없다. 이미 하나의 오명이 생겼으니, 이 오명을 덮어가릴 구차한 변명거리라 생각할 것이다. 사람을 달래는 법은 모른다. 일평생 해온 것이라곤 안드로이드를 손대는 일과 사람의 속내를 읽는 것밖에 없다. 인간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머리를 열어 뇌를 뜯어내 그 속의 회로를 건드려 오류를 뜯어고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이대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쓸데없이 뒤를 캐거나 돕겠답시고 같잖은 위선을 들이밀지 않으리라 믿었다. 더 다가와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잠깐의 변화나 앞으로의 큰 증오가 있다 한들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달리 주변에서 지지해 줄 존재도 많을 것이다. 뒷배경도 있을 것이고, 붙잡아주고 같이 욕해줄 어른과 학우도 있겠지. 어쩌면 데 마레에서 붙잡을지도 모르겠다. 그쪽은 오지랖이 넓으니까.
그거면 족하다. 익숙한 일이다. 언제는 손에 쥐어본 적이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여기 있다 쓰러질까? 그러면 며칠 뒤 누군가 싸늘한 시체 정도는 발견해 주지 않을까. 우스운 상상을 하던 태오는 자조적인 욕설을 속에서 곱씹더니 몸을 이끌고자 했다. 그래도 구차한 삶 정도는 추구해야 뒤탈이 없을 것 같았고, 어차피 뼈 두어 개 부러지고, 속이 좀 뒤틀린 걸 가지곤 객사할 수도 없음을 잘 알았다. 병원으로 가고자 발을 이끌었을 때 기분 나쁜 것이 보였다. 사람을 두고 기분이 나쁘다 평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한계까지 다다른 정신과 육체, 그리고 이 상황에서 명백하게 들리는 생각은 원치 않게 상대의 속을 읽는 탓일까, 느닷없는 공격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의 흐름을 잡아챈 태오의 뇌와 속을 거칠게 긁다가 기어이 긴 자상을 냈다.
"필요 없어요. 놔."
한 번 역겹다 생각했으면 하나만 할 것이지 굳이 저런 위선을 보인다. 실책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부축하려는 손길을 뿌리치려 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는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떠올랐다. 무력했다.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자의 말로였다. 내가 상대의 속 따위를 읽는 게 아니라 차라리 뭔가를 내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딴 상황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의미 없는 후회와 함께 태오는 앰뷸런스에 마련된 병상에 눕혀졌다. 의료 기술도 말이 안 되는 수준에 이르른 덕분일까, 구급 대원들의 손에 쥐여 태오의 몸 이곳저곳을 훑던 최첨단 스캐너는 금세 결과를 홀로그램으로 두어 개 띄웠다. 구급 대원 하나가 더 정밀한 분석을 위해 손목의 붕대를 풀려고 들었으나, 태오가 예민하게 손을 뿌리치려 들자 난색을 표했다.
"……정밀 분석은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당장 간이 스캔으로는 늑골에도 다발성 골절이 있고…. 손목은 분쇄 골절이에요. 전신 타박상에다 뇌진탕도 있는 것 같고, 목은 혈관이 눌리고 근육이 좀 손상됐네요. 환자분 의식 잃지 않게 보호자분께서 계속 말씀 걸어주시고, 병원으로 옮기는 즉시 의사 연결하겠습니다."
완장을 보니까 저지먼트 아닌가?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다고? 목의 혈관만 아니더라면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목화고에서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 사람은 거의 없던 것 같던데. 당황스러운 생각이 들려오자 태오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용케도 살았다. 의미 없는 생이 이만큼이나 살아남았다. 불편한 감각이 인두겁을 비집고 비늘에 와닿는다. 태오는 메마른 입술을 벌려 갈라진 혀를 숨겼다.
"본론이나 말해."
하지만 상냥한 말씨가 튀어나오진 못했다. 고통을 참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상냥함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눈앞의 정상적인 외견이라 할 수 없는 후배는 이런 괴벽한 성격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런 이해조차 필요가 없고 지금 당장의 일이 급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도저히 알 도리가 없는 것들 투성이라, 응급 환자인 지금으로서는 이 불편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뛰쳐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토하는 소리랑 핸드폰 키패드 꾹 누르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 말고는 몰라요. 심히 유감스럽게도…… 난 개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세히는 모른다고. 당장 도망친 암부의 생각을 추적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고요……. 내가 7년간 연락 끊고 지낸 애를 어떻게 알아?"
속이 벌써 몇 번째 뒤집히려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에 탑승한 이유가, 아니, 찾으러 왔던 이유가 결국엔 그 아이 때문이구나 싶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언뜻 읽은 편린으로도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을 좀 내버려 둘 순 없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대체 끊으려는 연이 뭐라고 자신에게 이리도 군단 말인가? 자신이 아는 것은 그 정도다. 뒤를 돌 여력 따윈 없었다. 정에 휘둘리는 것보다 눈앞의 암부가 더 중요했다. 평소의 태오는 공과 사를 극단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더욱이.
"그 같잖은 놀음에 날 억지로 끼워 맞춰놓고 단정 짓는 듯 묻는데 대답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제발 그만 물어봤으면 했다. 왜, 자신의 입으로 소중한 동생이라고 말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가? 하등 관련 없고 연애적인 감정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존재라고 말을 해야 믿을까? 애초에 믿긴 할까? 소중하다면서 뺨이나 처맞는 쓸모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싶나? 아니면 암부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해 약점이나 만들라고 하는 건가? 네가 지킬 것은 하나 없으니 남들 지키는 꼴이나 보라고? 스스로를 가두는 피해적인 망상은 어느덧 속을 바득바득 긁고,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태오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7년 전에 애랑 연애라도 했게요? 내가 29살도 아니고 19살인데, 12살에 어울린 거면 답은 하나지 않아?"
날카로운 듯 비꼬는 문장의 나열을 뒤로, 태오는 자신이 뱉는 꼬락서니가 제법 한심하다 생각했는지 하, 하고 한숨을 뱉었다. 조금만 숨을 뱉었을 뿐인데 폐가 오그라들고 목에서 피가 끓는 느낌이 들었다. 구급 대원이 이것저것 연락을 하던 것을 잠깐 멈추고는, 태오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도록 고개를 바로 돌려주었다.
"동생."
단지 그뿐이다. 하물며 중요하지 않으면 묻지 말았어야지, 대체 너희들이 뭔데 그 상처의 원인을 나라고 단정 지어. 내가 뭐라고. 어차피 한 번 스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증오할 것이면 이딴 위선 따위 보이지 않고 노골적으로 굴지, 그깟 인간의 삶이 뭐라고 이리도 달려오듯 구냔 말이다. 어차피 진실이라곤 단 하나도 없으면서. 전부 똑같이 생각할 거면서.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가깝다 한들 삶은 유한하고, 아니면 어떻게든 유한하게 만드는 자로 넘쳐난다. 모르는 척 지나가면 될 것을, 대체 뭐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가?
"이제 좀 내버려 둬요. 날 좀 내버려 두라고."
태오는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의식이 흐려지더니, 이내 가라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미동도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뜨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입원을 해야 하는 환자는 한사코 입원을 거절하더니 잠적했다. 핸드폰은 부서져 연락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고, 칩도 기능을 꺼버린 지 오래였다.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자취방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물며 소속된 연구소도 없기에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법 우스운 일이다. 15주년 행사에도 멋대로 나타나지 않더니 연락을 끊어버리는 저지먼트라. 누구는 사활을 걸고 싸웠는데, 납치 한 번 당했다고 면죄부 받을 놈밖에 되지 않은가? 하물며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 애초에 납치당했노라 생각할 수도 없을 테다. 일부가 본 것은 암부의 인물에게 묘한 건물에서 대화를 나누다 실려간 모습뿐이다. 누군가 알리지 않는 이상 사정 알지 못하는 타인의 눈엔 아예 오지 않았던 것으로 비치진 않을까. 그렇다면, 실로 겁 많고 태만하기 짝이 없는…… 금수같은 놈이 아닌가?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 인간이 될 수 없다.
- 이시미
인첨공은 바깥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 기술의 발전을 도모했고, 그 중심에는 2학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데 마레가 있다. 인첨공이 아직 개발 단지일 때부터 설계도에 함께 있었고, 하이드로키네시스의 연구로는 이젠 오션스를 뛰어넘어 단일 권위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바다라는 이름에 걸맞은 드높은 곳. 누군가는 데 마레의 입구에만 발을 들여봐도 여한이 없겠다며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존경을 표했고, 누군가는 저기에도 끔찍한 사고가 있었을 것이라며 트집을 잡는 등 질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입구를 거닐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심지어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소장이 버선발로 달려와 맞이했지만, 놀랍게도 태오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7년 만에 다시 마주한 2학구의 모습은 여전히 끔찍했고, 데 마레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태오야! 어이구, 더 말랐네. 고생이 많지? 어서 들어오렴."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라니, 네 집이잖니. 마음 편히 있다 가거라."
"……예."
집이라, 우스운 일이다. 지나치게 속 편한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이 상황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자 무진 애썼다. 실은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승환은 한 번이라도 찾아와주길 바랐고, 한결을 통해서도 여러 번 의사를 드러냈다. 결국 태오는 수락했다. 그 과정에서 태오의 의지는 없었다. 있더라고 해도 승환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슬슬 여름의 끝자락이 다가올 것이고,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단란하던 순간을 바라는 자와, 단란함에 질린 자는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금 만나는 것은 같았다. 아마 소장님은 평생 모를 테지!
"기억나니? 여기에서 너랑 희야가 책을 읽다가 잠들었잖니. 나 참, 눈 나빠진다고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더니 여기에 숨어서 읽을 줄이야! 너희가 사라진 줄 알고 그때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단다."
"……희야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지하에 있단다. 개인 경호원과 체력 트레이닝 중이야."
"그렇군요."
"나중에 너도 소개해 주마. 좋은 분이셔."
개인 경호원이라면 아스트라페겠지. 그 작자는 거슬려서 만나기 싫다. 태오는 승환이 안내를 하는 연구소 내부를 곁눈질로 훑었다. 부산히 돌아다니던 연구원들은 소장이 잔뜩 기분 좋은 어조로 떠들며 여기는 무엇이 있고, 여기에서 너와 혜우와 희야가 놀았다는 등의 추억을 꺼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흥미로운 시선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태오는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붕대 감긴 팔을 보며 어디 다친 건가 걱정 어린 시선이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비출 때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하고 무언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걸음을 멈췄을 때, 승환도 같이 걸음을 멈추고 태오를 쳐다보았다.
"태오야, 괜찮니?"
"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태오는 눈을 흘겼다. 더 이상 걱정이 된다느니의 소리는 사절이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아무렇게나 눈을 굴렸던 태오의 눈에 레벨 스캐너가 비쳤다.
"레벨 스캔을 하지 않은지…… 꽤 됐거든요. 마침 눈에 밟혀서."
"세상에,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한 번 스캔하는 건 어떠냐. 결과는 10분 정도 기다리면 될 건데."
"……예."
"그렇지만 우리는 연결 방식이라……."
도피하려던 것이 되레 독이 되었구나. 태오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재촉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속이 불편했다. 그래,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다. 태오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풀자, 팔뚝의 선명한 문신이 드러났다. 검은색 파충류의 비늘과 기하학적인 선을 묘사한 문신은 작품으로 보았을 때는 아름답다 할 수 있으나, 입묵으로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그 문신을 본 승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개성을 존중한다지만 이런 문신은 현대 사회인의 관점에서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승환은 내색하지 않고, 레벨 스캐너의 패치를 손목과 이마, 그리고 팔뚝에 부착해 주며 웃었다.
"멋진 작품이구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아주 멋지다. 붕대는 내가 새걸로 갈아주마. 어이구, 희야가 또 스캔한다고 피어싱을 빼고 갔네. 이래놓고 살 튀었다고 뭐라고 한단 말이지."
피어싱을 괜히 손끝으로 밀어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던 승환은 태오가 자리에 앉자 몇 가지 설정을 건드리고는, 스캔 시작 버튼을 눌렀다. "조금 따끔하단다."라는 말과 함께 잠깐이지만 따끔한 감각이 팔과 머리를 스치고, 삑 소리와 함께 스캔이 시작되었다. 패치를 떼도 괜찮다는 알림이 들리자 승환은 태오의 몸에서 일회성 스캔용 패치를 제거했고, 편히 앉아 쉬라는 듯 한쪽에 준비된 푹신한 의자를 가리켰다. 팔걸이에 얼음이 끼어있는 걸 보니 희야가 여기에서 장난을 치고 간 듯싶었다.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은 어색했다. 승환도 차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없었고, 태오도 달리할 말이 없었으니. 스캔 시간 5분, 결과 도출 시간 5분. 도합 10분 동안 끔찍한 침묵이 감돌 것이라 생각할 적, 홀로그램 창이 떴다. 지금 당장 데이터에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예상보다 빠른 결과였다. 승환은 스캔 결과를 읽다 탄성을 뱉었다.
"이게 뭐야? 이명을 누가 선점했다고? 박훈이 누구야? 잠깐만, 목화 고등학교면 한결 연구원 전임 커리큘럼 아니야? 이 사람이 왜……."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에 떨던 고개를 번쩍 치들었다. 박훈. 한결의 바로 이전 연구원이자 태오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하대하던 연구원의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오는 홀로그램 통지표를 천천히 읽었다.
[대분류: 텔레파시(Telepathy)
소분류: 보컬 텔레파시(Vocal Telepathy)
계수 측정 결과: 4,883
레벨: 4
축하합니다. 귀하는 인천 첨단 공업단지에서 1% 미만에 해당하는 귀중한 인재입니다. 앞으로도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길 바라며, 성과를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귀하의 이명은 이명 관련 규칙 제1항, 선점 규칙에 의거하여「이시미」로 확정되었음을 통지하는 바입니다.
이명 신청자: 3학구 목화 고등학교, 프리랜서 연구원 박훈
이의신청은 AI 상담사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시미.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랐을 수도 있는 이명이지만, 애석하게도 태오는 이 이명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승환 또한 이시미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이의신청을 위해 홀로그램 패널을 두어 번 두들겼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확인을 좀 해야겠다."
태오는 앉아서 기다렸다. 별다른 말을 얹고 싶지 않았거니와 승환의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차마 입을 벌릴 용기도 낼 수 없었다. AI 상담사가 연결되고 이의신청을 하자, 상담사는 승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형식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죄송합니다. 데 마레와 ALTER에서는 마지막 커리큘럼을 받았던 기록이 5년이 넘었기에 이명 선점의 권한이 없습니다. 저희는 가장 최근에 커리큘럼을 진행한 연구원께서 그 성과를 알기에 직접 정하겠다 신청했으니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가장 최근 커리큘럼은 아니무스의 백한결 연구원이었습니다. 정정할 수는 없습니까?"
유감스러운 일이나 이미 선점된 이명은 변경하실 수 없습니다.
승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패널을 쿵 내리쳤다. AI 상담이 강제로 종료되고, 주변을 지나치던 연구원들도 움찔 떨더니 눈치껏 입을 다물곤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를 떠나려 들었다. 싸늘한 적막이 다시금 주변을 가득 채웠다. 승환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 연구원이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기에 커리큘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승환도 알고 있었다. 인성 글러먹었다 생각했다마는 이렇게까지 치졸하고 경우 없는 사람일 줄이야! 인첨공의 바닥을 엿본 기분과 함께 분노가 들끓었다. 이시미라니, 바리도, 영노도 아닌 이시미라니! 절대 좋은 뜻이 아니다. 명백한 보복과 저주 서린 이명이지 않은가! 평생이고 바뀌지 않을 이명이니, 너는 평생 용이 될 수 없다고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지 않은가!
"젠장!! 앞날 창창한 애한테 이시미가 뭐야, 이시미가!!"
"소장님."
"항의를 넣어야겠다. 항의를 넣어야만 해, 이건."
"소장님."
"태오야, 그러니까 걱정 말거라. 이번 일은 절대 넘어가지……."
"안승환 소장님."
승환은 몸을 우뚝 멈췄다. 자신을 지극히 공적으로 대하는 태오의 태도에 놀란 것도 있지만, 어조가 지나치게 평온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태오는 눈을 휘고 있었다. 눈에 서린 감정을 뭐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비참함도, 슬픔도, 온갖 부정적인 것을 붙여보기에는 후련하고, 그렇다고 긍정적인 감정을 붙이자니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눈이었다. 미소는 짓고 있지만 미소라고 할 수 없는 것과 함께 태오는 진정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태오야."
"소장님께 감히 직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해라."
"이게 인첨공입니다."
승환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한 문장이었을 뿐이지만 태오가 지금까지 커리큘럼을 받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이유의 편린을 본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삶을 축복하기 위해 만드는 이름에 대고 보복하는 행위만으로도 인첨공의 바닥을 본 것 같았는데, 이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평온히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을 망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태오야, 너……."
"희야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승환은 태오를 붙잡지 못했다. 위태로운 걸음과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희야가 태휘와 훈련하다 또 졌다는 일상적인 알림이 뜰 적에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또 내 아이를 지키지 못했구나. 내가 또 안일하게 판단해서 우리 아이들이,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연구원들이 승환의 상태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제각기 달려가고, 태오는 그 소란에도 뒤 한 번 돌지 않고 데 마레를 나섰다. 여름 햇살은 화창하고, 따가웠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날씨다! 태오는 늘 걸치던 점퍼도 후련히 벗어 허리에 묶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이따금 태오의 팔을 마주치면 보며 제각기 미심쩍은 시선을 한 번씩 보내거나, 눈을 피하거나, 아예 무시하기 바빴고, 2학구의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마주한 아이는 태오의 팔을 보며 순진무구하게 외쳤다.
"어? 뱀이다!"
태오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구절🎴
"태오야."
"네에, 나리."
태오는 자신의 무릎에 옹졸하게 웅크린 남성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면, 집 문을 두드리는 걸로 시작되었다. 낯익은 모습에 문 열어주니 비틀거리며 들어오지도 못하고, 덩치는 저보다 한참이고 큰 사람이 지치다 못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색이었길래 천하의 나리가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만, 급히 몸 뉘일 곳 찾아 소파로 데려가니 대뜸 이리 무릎을 빌리지 무언가.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라 태오는 자못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무릎에 엉거주춤 올려놓고 몸 구기듯 웅크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탓에 태오는 그 모습 보며 미미하게 웃음 지었다.
"……태오야."
이제 보니 술 냄새가 난다. 취하셨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흐트러진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태오는 조금 더 소파에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슬그머니 옮겼고, 나리도 몸을 꿈지럭거리며 자세를 편히 잡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주었다. 얼마나 마셨으면 늘 단정히 땋던 머리도 이리 흩어지셨을까. 조심스레 머리의 결을 따라 훑어주던 중 태오는 나지막이 답했다.
"네, 저 여기 있답니다."
"만약 네가……."
"네."
"사모의 구절을 접한다면 어떤 정취의 후음이 좋더니……."
태오는 머리를 쓸던 것을 멈췄다.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고개를 내리면 당신이 있어 시선을 피할 수도 없다. 태오는 한참이고 침묵하다 목에서 소리를 내고자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자꾸만 단어와 문장이 목이 졸리는 신음과도 같이 그 속이 단단히 메여 목구멍을 막아세운다. 이내 강제로 비집고 나오는지 사납게 긁히는 소리를 뒤로 단어를 뱉을 수 있었다.
"고통스럽게요."
입꼬리가 애써 미소를 짓지만 눈을 휘는 꼴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었다. 태오는 마저 머리를 쓸었다. 부드러운 손짓에 자신을 흘긋 향하던 붉은 시선이 느릿하게 감겼다.
"괴로운 나머지… 나를 저주하며 끝없이 깎아내리는 듯이요……. 그렇게 비참하게…… 내 이름과 사모의 구절을 부르짖고, 갈라져가는 후음과 그 최후를 보며 소태하는 사람이 오로지 나이길 바라요……."
나리는 태오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는 중얼거렸다. "기쁘네……." 태오는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쓴 웃음을 삼켰다.
"……어째서 행우하실까요."
"그야 네가…… ─것을 아니까……."
태오는 눈을 감았다.
"취하셨어요. 이제 주무세요."
"대답은 듣고 싶은데."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줄 호의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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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하, 열대야의 습기
- 미명未明, 인시寅時🎴
"네가 한 발언을 책임질 수 있겠니?"
태오는 양 손목을 한 손에 붙들린 채, 자신을 고압적으로 내려다 보는 남성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등에 닿은 벽이 딱딱했다.
"그렇다면 통보가 아닌 거래를 하지요."
"거래라, 들어는 보자꾸나."
"한 달. 스트레인지에서 저지먼트가 활동해도 묵인하게 해줘요."
"대가는?"
태오는 가까이 오라는 듯 눈짓했다. 남성이 허리를 숙였을 때, 태오는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고는 뺨에 스치듯 고개를 틀었다.
"……그쪽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필요하잖아요."
"후회하지 않겠니?"
"누구도 모르니 나만 곱씹으면 되는 일이지요……."
"하."
남성은 손을 풀곤 조금 더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하고는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 앙칼진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다 커서 고양이라고 부르면 싫어하면서 꼭 입에 올리게 만들어. 그렇지?"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내 아무리 관대하다 한들 선은 있는 법이거든……."
"넘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땐 네 책임이란다. 알고도 넘었다는 건 각오했단 뜻 아니겠니?"
"그러면…… 나리께서 책임지면 되겠네요."
태오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으로 남성을 똑바로 마주했다.
"……거래는 성사된 걸로 알지요."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비몽사몽 상반신을 일으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감추고 일어나니 세상이 온통 까맣다. 태오는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의 피가 쫙 빠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곤 시야가 가려진 원인을 찾고자 눈 주변을 더듬었고, 이내 엄지로 콧잔등에 걸친 수면 안대를 밀어 올렸다. 분명 끼고 잠든 기억이 없는데, 머리카락이 거칠게 눌린 감각이 뺨에 느껴지니 자의로 쓴 건 아닌 것 같다. 묵직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태오는 어두컴컴한 시야에 적응한 듯하자 그제야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은 두 개였다. 그중 하나를 툭 건드리니 낯선 배경화면이 있는 잠금 화면에 시간이 뜬다. 오전 3시 41분. 남들은 벌써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애석하게도 태오는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씨-"
눈을 다시 감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의 몸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 다시 잠들기는커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이 뻔한 몸 상태에 태오는 꺼진 화면에서 눈을 돌렸다. 하필이면 이 시간에! 자신도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잠들곤 했는데, 생활 패턴이 대차게 꼬이게 생겼다. 버릇처럼 욕이 나올 것만 같아 혀에서 쌍시옷의 첫 발음이 굴렀으나, 인기척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태오는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태오는 이마에 짚고 있던 손을 떼고는 상반신을 옆자리를 향해 돌렸다. 이게 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 때문이다. 태오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곱게 이불을 덮은 몸은 규칙적인 생명 활동을 영위하고 있음을 알려주듯 천천히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시선이라도 기민하게 느끼고 깨어나 자신을 새빨간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겠지만, 오늘은 고단한 하루였는지 어째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스트레인지의 어르신이니 뭐니 해도 어찌 되었든 피로에 승복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태오는 이대로 손을 뻗으면 모든 걸 끝장낼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이면 자신의 지긋지긋한 불안도 끝이 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은 아직 학생이고, 저지먼트이자,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으며, 무엇보다 이곳은 바깥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스트레인지와 달리 조금 더 빡빡한 법률이 자리하고 있기에 충동적으로 일을 벌여서는 안 됐다.
태오는 그 사실을 무엇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에어버스터 앞에서 저지른 행동과 뱉었던 발언은 지금 와서 수습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깊은 골이 생기긴 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따금 스트레인지가 그립곤 했다. 그쪽 또한 책임을 지는 건 동일하지만, 죽음과 폭력에서 조금 더 관대한 면이 없잖아 있어 이렇게까지 신경 쓸 것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은 현재 스트레인지에서 엄연히 독립한 몸이다. 다시 계기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여기 발붙이는 수밖에 없다. 이 기회가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면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땐 오늘의 일을 교훈 삼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거, 대비할 겸 관찰이나 할까 싶었다. 상반신을 천천히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흐른다. 태오는 붕대를 전혀 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천천히 그와 거리를 좁힌 태오는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한참이고 감상했고, 생명 활동을 다시금 확인했으며, 꿈의 깊이를 쟀다. 레벨 4에 도달한 이후에도 쓸모 하나 없을 듯하던 능력은 이런 순간에 기묘한 빛을 발하곤 했다. 비명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숨소리까지. 한 번 집중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 펼쳐졌으나 여기엔 태오와 그밖에 없었거니와, 그 깊이 또한 구분할 수 있었다. 선명하고도 희미한, 심층에 다가선 목소리가 머리에 내리 꽂히고, 태오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붕대가 감기지 않은 목을 더듬고는 속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
퍽 깊이, 하물며 좋은 꿈을 꾸고 있구나.
내 속도 모르고. 태오는 제 목을 더듬던 손길을 천천히 쓸듯 움직이더니 목과 어깨를 잇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쓰라린 탓에 자조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곤, 눈을 느릿하게 위아래로 흘겼다. 제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누운 채 잠든 그는 여전히 규칙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등허리를 덮는 머리카락은 평소 같으면 곱게 땋았겠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쳤던 탓에 길게 팔뚝이나 목을 덮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끝이 푸르스름하나 그마저도 점차 물이 빠지는지 어둠 속에서도 더 하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무심하게 시선을 옮겨 무방비한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콧날은 곧게 뻗고 날렵했다. 감긴 눈에는 길고 촘촘하게 속눈썹이 박혀 곡선을 그렸고, 영준하고 납작한 이마에는 이리저리 흩어진 머리카락이 숨결에 따라 가끔씩 움직였다.
"……."
그리고 이불 밖으로 드러난 팔뚝에 끝내 시선이 도달했다. 자신과 같은 뱀 문신이 있었지만 조금 더 세밀했고, 거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아마 팔에 드문드문 남은 흉터 때문이리라. 스트레인지에서 이름을 떨치기까지 새겨온 세월의 흔적과 승리, 생존의 증표는 문신과 함께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오는 문신에서 한참이고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인첨공의 기술이 발달했다 한들 이 문신은 지울 수 없다.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역시 장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목 주변까지 다가간 손은 우뚝 멈추더니 차마 틀어쥐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기만 했다.
"……."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나는 왜 망설이는 거지? 당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짜증이 치밀고 역겨웠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목을 비틀고 싶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 그 흔적도 남지 않게 하고 싶다…… 동시에 생각했던 그 모든 감정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향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태오는 바들바들 떨리던 손을 애써 옮겨 면구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겨주는 것으로 행동을 대신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길에도 그는 여전히 몽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오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허탈한 숨결이 입에서 픽 새어 나오며 금세 끓던 감정을 승화시켰다. 그 사이에도 몇 번이고 들끓기 위해 타인을 향해 치고 오르던 감정은 자신을 충동질했으나, 여전히 자신에게도 고개를 같이 치들었다. 추했다. 태오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을 거둔 채 주먹을 말아 쥐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좋은 꿈 꾸세요."
태오는 이내 침대에서 온전히 빠져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에서 셔츠로 보이는 것을 아무렇게나 주워 걸치며 테라스로 걸어 나섰다. 특수한 보안 장치 덕분에 야외라 한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의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태오는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오전 3시 50분, 기름 타는 소리를 뒤로 창백한 연기가 걸쭉한 욕설과 함께 흩어졌다. 테라스에 앉아 제 것이 아닌 연초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 걸어와 태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태오는 뭉개진 연기를 일직선으로 뱉어내곤 눈을 흘겼다. 잠에서 막 깨어난 남성은 태오가 아닌 그 너머, 미명의 도시 전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떻니."
"……한결같지요."
"이번엔 거부반응이 유독 심하더구나. 따로 챙겨먹는 약이라도 있니?"
"글쎄요…….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줘, 네 몸을 생각해야지."
"……두통약을 다시 먹기 시작하긴 했답니다."
"어디에서 얻은 약이니?"
"약국에서 늘 먹는 파우더 제품이죠……."
"난 또, 선지자에게 쓰던 건줄 알았더니 다행이구나."
"잡혀갈 일은…… 하나로도 족해서."
강력한 효력을 가진 거래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법. 고문과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고통을 참고자 얼마나 애썼는지, 아직도 이를 악물었던 턱과 힘을 준 온몸의 근육이 아팠다. 헛구역질을 하며 식은땀에 젖어 헐떡이고, 그 모습을 보며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어를 적엔 눈앞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결국 태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뒤집듯 파르르 떨다 쓰러져 잠들었다. 아마 며칠 간은 또 개판인 몸상태로 지내겠지. 은우에게 부탁해 순찰을 당분간 하교 직후로 바꿔줄 수 있겠느냐 물어봐야겠다.
"얘, 너를 그 꼴로 만든 걸 원망하니?"
"원망해봤자 돌아올 건 없어요."
미리 생각해둔 답이었는지 재깍 대답이 나왔다. 나리는 태오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독종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일하게 해달라 빽빽 소리를 쳐 기어이 자신이 거두게 만들더니 이젠 자진해서 거래를 요청한다. 검증되지 않은 약물의 임상실험을 자처하고, 거부 반응이 심하거니와 생살을 갈라도 고통에 겨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독한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이 스트레인지에서 독립했다니, 새삼 아쉽지만 기회는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다.
나리는 허리를 숙여 어깨에 기대더니 입을 벌렸다. 태오는 다시금 연기를 뱉다가도, 제 손에 끼운 연초를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알아서 연초 쥘 테니 손을 떼려 했으나 나리는 태오의 손목을 쥐고 제 손처럼 사용하듯 움직였다. 희뿌연 연기를 뱉은 나리는 손바닥 흉터에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이내 붙인 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그걸 어찌 장담하니. 원망하렴. 네 훌륭한 원동력이 되어줄 거란다."
"……그렇게 되면 나리로 하여금 내 삶이 완성되는 것 아니겠나요."
"영민하기도 하지."
"누구 덕분에 눈칫밥 좀 먹고 산지라."
"다음엔 좀 더 독한 걸 줘야겠어. 제대로 원망하게끔."
"높으신 분 때문에…… 나리께 갈 원망은 없을 걸요. 그러니 연초랑 제 손은 돌려주셨으면 한답니다……."
"조금만 더 사용하마."
"좋을대로 하시지요……."
"어쩐 일로 고분고분할까."
당신 목을 조르려 했거든. 목 끝까지 차오르는 소리를 삼킨 태오는 눈을 흘기며 등을 편히 기대더니, 이내 다리를 꼬았다. 삐딱한 자세였다.
미명未明, 묘시卯時가 다가온다.
- 수벽의 간격🎴
타인이 오지 않는 것을 바라는 태오의 성정을 일찍이 깨달은 박 교수는 가장 구석에 마련된 1인실에 태오를 입원시켰다. 박 교수의 병원은 VIP들을 위해 보안이 철저했고, 보호받는 대상은 태오 또한 있었으나 누군가에게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보안 장치는 울리지 않는다. 가장 구석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산소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장치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첨단 스캐너가 이상을 감지하지 않았다는 홀로그램 알림 창이 구석에 뜨다 이지러지듯 사라졌다. 발자국 소리도 남지 않는 불청객은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는 재주가 있었다.
불청객은 그렇게 침대 위 곤히 잠든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이 붕대를 감은 주제에 곤히 잠에 든 모습이 이질적이다. 새하얗게 물든 속눈썹은 돌아오지 않아 어스름한 달빛 비치는 정경에 백화인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시선 물끄러미 던지고 있자니 살짝씩 몸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난리를 쳤으니 근육이 놀라 앓을 법하다. 긴 손가락이 튕기듯 움찔거리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입술 벌어져 침음 흐른다. 아무래도 몸 앓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쁜 숨과 함께 앓고 있으니 깨울 법도 하지만 객은 입을 얌전히 다물며 감상했다. 어차피 자신이 곁에 있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혼자 알아서 깨겠구나 싶을 정도로 야멸차긴 했지만 악몽을 꾸는 건지 괴로운지 표정이 일그러지고, 공포로 인해 호흡이 불안정한 모습을 계속 관망할 만큼 악독한 사람은 못 된 모양이다.
"하여튼 거슬린다니까."
불청객, 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팔을 뻗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잠에 푹 빠진 태오를 품에 안는 일은 쉬웠다. 링거 바늘이 혹시라도 불편하게 팔을 파고들거나 빠지지 않게 팔뚝을 잡는 것이 아닌, 허리 밑에 손을 넣어 품에 턱 안아주자 태오는 파고들듯 무의식적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오들오들 떨었다. 나리는 이 상황을 잘 안다. 오롯이 혼자만 끌어안을 고통을 몽중에서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불쾌한지도.
"고양아."
"……."
"고양아?"
"으……."
"일어나야지, 태오야."
태오는 몇 번이고 토닥이다 조금은 다급한 것 같은 손길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 겨우 들어 올렸다. 잠이 꽉 들어차 혼몽하나 공포와 혼란스러움에 다시 눈 감을 수 없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고막을 강타한다.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듯한 불쾌감과 몽중의 조각을 추스르고자 품 속에서 허공을 노려보는 시간이 길었다.
"……오셨군요."
잠에 잔뜩 눌렸던 목소리를 가다듬을 시간은 없다. 바싹 마르다 못해 갈라진 후음으로 더듬더듬 입술을 떼자 나리는 등을 토닥이던 손길을 등허리를 훑듯 내렸다.
"좀 됐지."
"관망하는 것 퍽 즐거우셨겠어요……."
"그렇다마다."
품에 바짝 붙은 것을 다시 뉘여주는 손길이 썩 친절하진 못했다. 원체 바짝 밀착했던지라 자연히 나리 밑에 깔린 모양새가 되어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라 생각했다. 눈만 들어 흘긋 쳐다보자니 그건 또 가까이에서 보는 것 같아 싫고, 태오는 제 상반신에 흐르듯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떼고자 괜히 눈을 굴려 천장을 쳐다봤다. 분명 자른 걸로 기억하는데, 훌쩍 원상태로 자라 아래를 향한 부채꼴의 머리가 퍽 신기한지 나리는 침대를 짚던 손 하나를 들어 태오의 머리카락을 한 터럭 쥐어 손에 감았다.
"머리가 자랐구나."
"네에."
"다시 길러주었어도 치료는 해주지 않은 모양이야."
"아쉬운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날 닮은 점이 하나 더 생겼는데 기쁘지 않았을 리가."
태오는 침묵했다. 그 점이 끔찍했노라 혀 밖으로 굴려 뱉어볼까 고민하다 이내 체념했다. 당신이라면 그 끔찍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능숙하게 잡아채겠지만, 고쳐먹을 생각 없을 자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에게 종용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자라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이고, 당신은 그 생활이 지나치게 오래됐으니까. 아마 엘리트와 열등생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듯 이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면서도 포기할 일은 없겠지. 제아무리 현태오라는 인물이 머리 구르지 못하니 영민과는 거리 먼 녀석이라지만, 네가 그걸 두려워한단 것은 네가 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내포하는 것이라 속삭이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던 것을 인정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런 소동을 벌였는지 들어나 볼까?"
"언제는…… 아니었을까요?"
"그렇다기엔 지나쳐. 내가 문화센터 소식도 못 들었을까 봐?"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다. 태오는 여상하지 못한 태도를 익히 눈치채고 있었다. 나긋하게 지나치다고만 하면 될 사람이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흐르듯 놔둔 앵화색 머리카락에만 시선을 꽂고 있었다. 태오는 대뜸 손을 뻗었다. 단단하게 여민 옷깃 너머로도 손이 파고들자 단색 눈동자가 그제야 자신을 향했다. 손바닥을 넓게 펼치니 빠른 맥동이 느껴졌다. 조금 더 깊게 손을 뻗는다면 이 맥동이 자신의 귀까지 침범할 것처럼 거세다.
"……."
태오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성애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맥동이 아니다. 달콤하고 무드 있는 두근거림보다는 공포와 상실에서 비롯되는 불안의 맥동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몽중에서 깨어 느꼈던 그 맥동을 지금은 당신이 가지고 있다. 상실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불안하다니 실로 우습다.
"……내가 혹시라도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했나요?"
"내가 널 영민하다 생각했는데, 지금껏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구나."
한 번 제동이 풀려 고삐 없이 써댔던 능력 탓일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서 선명하게 짙은 와위가 느껴졌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와위의 규명이었다. 태오는 정적 속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고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어리석은 건 형님이지요."
태오는 눈을 휘었다. 옅은 비취색 호선이 가늘어지고, 손등으로 온전히 덮어 가린 비구는 목소리를 한 꺼풀 막아세워 어성에 장벽을 세운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손바닥에 숨결 닿지만 그다지 두렵진 않다. 고작 손바닥 하나 입에 댄다고 목소리조차 먹먹히 막아세우기 마련인데 심상의 장벽이라고 세워지지 않을까.
"허상을 잡아서 좋을 일 없습니다. 놓을 것은 놓으셔야지 바깥 신기루에 홀려 손 뻗어도 잡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형님."
"실재의 여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유치한 사람."
무너지듯 그림자가 빈틈없이 겹친들 구순 겹칠 일 없다. 두 사람은 딱 그 정도의 거리었다. 손바닥 하나를 두고 마주하는 거리. 무엇보다 가까운 듯싶지만 그 손바닥이 막아세우기에 결코 닿을 일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처지를 수단과 패로 삼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수 있는 사이.
단지 그뿐이다.
- 탈피🎴
퇴원은 소리 없이 진행됐다. 혜우에게는 '퇴원해요. 병원에 와줘서 고마웠어.' 하고 짧은 문자를 남기고 젤리며 빈 몬스터 캔이며 모두 봉투째 챙겨 병원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공기가 후끈하다. 가을이 다가온다지만 여전히 아스팔트에 남은 잔열은 뜨끈하고, 습기 가득한 바람은 피부를 금세 끈적하게 만들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이 서늘한 편이라도 외부적인 요인까지 견딜 사람은 못 됐다. 그리고 여긴 2학구다. 이제 위험한 것이 없다지만 마음에 남은 공포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자니 망막 한구석에서 오렌지색 빛이 깜빡인다. 누굴까? 손목에 이식된 칩은 설정을 끄지 않는 이상 각종 알림을 증강현실로 보여주곤 했고, 태오는 중요한 알림 몇 개를 제외하고 모두 껐기 때문에 이런 알림이 드물었다. 주황색은 더욱 드물다! 레이브의 일에 관련된 것은 보라색, 헤이커에 관련된 일은 녹색, 그리고 자신에 관한 일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이다. 태오는 괜히 제로와 그림자의 술수를 떠올리곤 설마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칩이 이식된 손가락을 까딱이자 망막에 글씨가 떠올랐다.
惟命是聽
태오는 오늘의 날짜를 셈했다. 20xx년 8월……. 걸음이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골목을 향해 비틀렸다. 인파에 휩쓸리던 자가 인두겁을 벗고 굴로 기어가는 일은 무엇보다 쉬웠다.
스트레인지는 낙후된 지역이긴 하지만 무조건 열악하지는 않다. 타 지역에 낙후됐을 뿐이지, 2학구나 4학구의 스트레인지 일부는 시대에 약간 뒤처진 곳도 있었다. 태오가 향한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 그 '약간 뒤처진 곳'은 아닌 듯싶었다. 다 무너져가는 듯한 건물로 다가서자 남성 둘이 태오를 막아섰다. 태오는 이 두 남성이 무엇인지 안다. 아직도 이 안드로이드를 쓰는구나! 험악한 표정을 짓는 두 남성 중 하나의 팔을 붙들어 무언가를 툭 건드리자 고개를 축 늘어뜨리더니, 이내 두 존재가 길을 터준다. 태오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 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안은 호텔 복도를 연상케 했다. 태오는 많은 방 중에서 하나의 문고리를 잡더니,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파로 다가갔다.
"부르면 제때 오고, 말해달라 하면 말하고, 네 양지로 독립한들 본가 오는 것을 보니 평시와 다를 것 하나 없구나."
"……먼저 그런 연락을 보내셨으면서요."
"네가 저지른 일이 원체 커야지. 그 연락받고도 안 왔으면 염치도 없는 게야. 네 양심이 여기에서만 틀어박히는 게 좋았을 만큼 좁아터진 사람일 테니."
눈앞의 남성은 소파에 앉아있지만, 앉은키로도 충분히 태오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체격이 컸다. 태오는 눈을 굴렸다. 저 새빨간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두려울 것 하나 없지만, 저 눈을 마주하면 여러 감정이 샘솟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은 증오심과 분노, 두려움, 공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느끼는 한심함……. 마주하기 싫은 것 하나.
"……어쩐 일로, 호출하셨을까요?"
태오는 괜히 자신의 팔을 꽉 쥐었다. 나리는 대답 대신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태오는 저 신호가 무엇인지 알지만 다가서지 않았다. 나리는 동상처럼 꼼짝없이 발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허벅지를 두드릴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보고해야지."
"무엇을……."
"문화센터."
입안이 마른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입술을 축여보려 했지만 혓바닥도 탈지면처럼 바싹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태오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도망칠 수 있을까? 맞설 수 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간 붙잡힐 것이다. 양지로 영영 발 딛지도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금 몰아칠지도 모른다. 암운이 드리울 것이고 끝내 모든 것이….
"아이돌 불렛의 사인회 경호를 맡았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 더 말해."
"……그 과정에서 암부 그림자의 습격이 있었고, 바깥에서는 블랙 크로우와의 교전이 있어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암부의 목표는?"
태오는 레드윙이 불렛이라는 사실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겨우 상기할 수 있었다. 한낱 인간끼리의 의리라지만 자신도 양지에 새삼 깊게 스며든 것 같았다.
"…저지먼트가 샹그릴라의 종식과 더불어 그림자의 멸문지화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가장 유명한 아이돌인 불렛을 통하여 위신과 평판을 떨어뜨리고자 해당 테러를 벌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키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태오는 자신이 단단하게 굳은 석고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느꼈다. 손가락을 하나 까딱할 수 없고, 나리는 붉은 눈동자 속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까지 온전히 드러내며 태오를 마주했다.
"그 말에 한치 거짓도 없어야 할 게야."
"……."
능력이 본능에 붉은 전조등을 켰다. 저 말에 진심이 담겨있다.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나리의 손에 산산조각이 날 게 뻔하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더 기어오르면 안 된다! 지금의 나리는 태오에게 자비롭지 않을 것이다. 석고상에 금이 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 보고할 게 남았지."
"……암부 그림자의 일원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습니다만."
태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나리의 앞에서 속내를 얘기하는 건 자주 있던 일이지만, 독립한 이후로는 처음이다. 시선이 자꾸만 불안정하게 교차했다. 이걸 말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다. 이 바닥이 줄 하나로만 겨우 버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온갖 날카로운 것으로 무장한 늑대가 있다. 혀는 철로 됐고, 발톱은 가시가 돋쳤으며, 이빨은 삐죽삐죽하다. 줄에서 조금만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떨어질 텐데, 그렇게 날카로운 늑대 사이에서 온몸이 갈가리 찢기고 말겠지! 태오는 애써 눈을 마주쳤다. 붉은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 아무것도, 없어서."
"……."
"누군가를 치료할 수도 없고, 위,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하라 할 수도 없고, 탐지할 수도 없으며, 누군가를 지키는 능력도 없어서…… 공격도, 상대를 교란하는 것도, 육체적 능력이 강한 것도 아니라……."
태오는 바들바들 떨며 말을 뱉었다. 나리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 사실이 자신을 채찍으로 거세게 후려치며 줄 위를 걷기를 종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치울 수 없었다. 태오는 결국 모든 것을 뱉기로 했다.
"일반인, 거스러미, 방해물. 아수라장 속에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잘난 능력을 가지고 엘리트로 살아가지 않았느냐 하지만 누군가의 속내를 전부 꿰뚫는 것도 아닌 반푼이잖습니까. 상대가 마음먹고 지키고자 하거나 입 다물고, 혹은 딴 생각을 하면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머저리 같은 능력인데 정작 타인 보기엔 음침하고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것을 가지고 도움이 될 리가 없잖은가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꺼리니까요."
"……."
"하, 하지만 능력을 쓰지 않으면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느냐 손가락질하고, 능력을 쓰면 이런 폭력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선인들의 손가락질이 공존하니까, 차라리 숨기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어 제 수중에 쥐고 흔들게끔 주어진 능력이라면, 겨, 결국 이렇게 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방식을 택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그랬습니다. 처음으로 능력을 다룬 나머지, 그 이후에 너무 광범위하게 들려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어서 그렇게 스스로를 해쳤습니다. 상품에, 흐, 흠집을 낸 것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너는 어리다."
태오는 몸을 크게 떨었다.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나리는 드물게 딱딱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자신에 대해 깊게 고찰한들 겪은 것이 적어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필수적이다. 너 스스로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너는 남들이 보기에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너는 그 미숙함을 가지고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사람이노라 확정 지었고, 자신의 미숙함을 외면했지. 네가 어리다는 점을 악용해서, 어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합리화를 하면서."
……."
"봐라, 네가 만든 결과다. 세상이 네 마음대로 풀릴 줄 알았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토하며 결국 네 미숙함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정하고 무너지지 않았더니."
"……."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발을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새끼줄이 느슨해진 것 같았다.
"보컬 텔레파시는 숨기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어 제 수중에 쥐고 흔들게끔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타인의 속을 읽고 상황을 판단하기 용이한 능력이지. 그러니 묻겠다."
"예."
"네 아무리 붕대 감았다 해서 세상 사람들이 널 몰라볼 줄 아는 방만한 태도를 스스로 깨달은 감상이 어떠냐."
"……."
"질문을 바꾸지. 네 아무리 붕대 감았다 해서 너 자신을 숨기고자 했건만, 결국 스스로에게 배신 당한 기분이 어떠냐."
새끼줄이 끊겼지만 태오는 추락하지 않았다. 그저 나리를 마주할 뿐. 그 모습을 보던 나리는 결국 일소를 터뜨렸다. 붉은 눈동자에서 희열에 가까운 것이 번들거렸다.
"하! 이 독악한 것. 이시미는 이시미인 모양이구나. 안승환 그 작자가 어떻게 이런 것에게 사슬로 모가지를 묶어 억압했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야."
"……."
"그러니 이리 온."
허벅지 두드리는 소리를 뒤로 옷깃 스치며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만족스러운지 낮게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도.
"그래, 물 안에서만 날뛰면 미꾸라지 되는 법이지…… 나도 이 장소가 퍽 넓구나 생각했거늘, 막상 네가 있기엔 지나치게 좁았구나."
- 삶은 낙조의 스밈이자 몰각이며🎴
─ 이 독악한 것. 이시미는 이시미인 모양이구나. 안승환 그 작자가 어떻게 이런 것에게 사슬로 모가지를 묶어 억압했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야.
태오는 기억을 더듬으며 폐목했다. 세상은 데 마레의 신시申時 햇살 쏟아지던 눈부신 날로 되돌아간다.
"태오야."
"네."
어린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혜우는 낮잠을 자고, 희야는 윤 선생님의 손을 잡고 4학구의 스케이트장으로 놀러 간 날. 퇴창의 쿠션 더미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기울이면 움직임에 따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리넨 커튼에 비친 연노랑 빛 햇빛 너머로 새하얀 점 같은 먼지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던 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도 없는데 동물을 그냥 죽이고 그러는 것을 싫어한단다."
"그러면 돼지랑 소, 닭 같은 동물은요?"
"먹으려고 동물을 죽일 때는 법에 정해진 도축 방법이 있지. 하지만 보편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서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야."
"어차피 다들 저를 싫어할 거면서……."
"그게 무슨 소리니?"
"어차피 언젠가 저에 대한 쓸모를 잴 거면서, 그 가치에다 새로운 기준을 또 정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워요."
승환의 표정은 새하얀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환멸을 깨달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리고 어른의 역할이 처음이었던 승환도 무언가 조언하기 어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오야. 우리는 인간이잖니. 그리고 삼촌은 널 미워하지 않을 거란다."
그날 태오의 손에 들려있던 조그마한 새는 죽은 지 오래였다. 어린 태오는 생각했다. 창틀에 머리를 박아 곧 죽을 녀석이었기에, 더 고통받지 않게 목을 꺾어 먼저 보내준 것인데 왜 다들 이 간단한 것을 혐오스러이 여기는가.
개목하고 다시금 폐목한다.
세상은 스트레인지 유시酉時의 햇빛 쏟아져 시야 명멸하던 날로 되돌아간다.
"태오야."
"예."
아직 앳된 기색 가시지 않던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앉아 나리께서 친히 따라주신 차를 마시고 역으로 내리쬐는 낙조의 단말마에 뒤통수에 열이 오르며, 그것이 불편하여 고개를 기울여도 햇살 떨어질 기미 없고, 새붉은 것이 튄 리넨 커튼에 비친 단색 햇빛 너머로 먼지 하나 없던 날.
"인간들은 참 우습지. 이득도 없는데 동물 몇 죽이면 야만적이라 해놓고 정작 취미로 사냥을 앞세우고, 인첨공에서 레벨로 쓸모 정해서 낙인찍은 주제에 거기에 또 법을 들이밀면서 그래도 더 폐기물처럼 살기 싫으면 입 닥치라 하고."
"……."
"인간이니 뭐니 해도 결국 그 안에서 짐승으로 취급할 것을 나누는 주제에, 기어이 우리를 천 것으로 몰고 말이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요. 남들에게 이해를 바란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믿지 않는걸요."
"퍽 우스운 말이야. 그들이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미워하지는 않노라 지껄이는 연유라 함은 이해하지 못했으니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더니?"
나리의 표정은 새빨간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환멸을 깨달은 아이와 어른은 서로를 잘 이해했고, 이해하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태오야. 우리는 결국 인간이구나, 이 바닥에서 지내서 천한 짐승 취급받을 뿐이지."
그날 나리가 머리채를 쥐어 들어 올렸던 사람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 죽은 지 오래였다. 태오는 생각했다. 인간이되 짐승인 자는 이 바닥에서 쉬이 죽는다. 쓸모를 다 하였으니 더 고통받기 전에 보내주는 것인데 어찌하여 바깥사람들은 이것을 혐오스러이 여기는가.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밀접한데도. 태오는 발치에 스민 피를 보며 찻잔을 마저 기울였다. 색이 붉은 탓은 낙일의 새된 비명 탓이요 낙조의 스밈이라 믿고 폐목한다.
그리고 지금 개목하니 섬휘 찬란히 드리운 열대야는 습한 공기를 방에 가득 채우고, 목덜미에 고개 파묻은 남성의 머리카락에 고개 파묻으며 느릿하게 일소했다.
"무엇이 우습니."
"스스로에게 배신 당한 기분이 어떠냐 여쭈셨지요."
"답할 생각이 들었구나."
"결국 저들도 짐승에 불과함을 내가 깨달았으니 굴은 도래할 곳으로 삼기에 너무 좁았구나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때 지금 당장 나서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소리쳤구나."
"그런 셈이지요."
나의 삶은 낙일이자 낙조의 스밈이니 이후에는 몰각함 기다리고, 샐녘 다가오겠으나 짐승들의 도래로 승천하지 못하니 천일 다시금 마주할 일 없으리라.
이는 목하 내 속내에 대고 선언하니 와위 일절 없노라.
- 병든 속삭임🎴
내가 독악한 것이라 하였지요. 태오는 대뜸 물었다. 나리는 시선을 들어 태오를 흘깃 쳐다봤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나리는 파묻었던 고개 사이로 뺨만 느릿하게 스쳤다. "그렇지. 네 독악하기 짝이 없지."
그리 대답을 하니 흐린 웃음이 터졌다. "나는 죽어 마땅하겠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병든 속삭임을 뱉으니 나리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등허리를 껴안던 손이 스치듯 올라가 목을 받치면 태오는 목을 가누며 자연스럽게 허공에 시선을 꽂았다. 암실은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고, 나리의 무릎에 앉아 바라본 창 너머도 퍽 어둡기만 하다. 나의 삶은 낙조의 스밈이라 생각했는데 몰각이었구나.
"누구도 악한 것 좋아하지 않고 천시하니 사람들은 필히 나를 사냥할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내리고, 목을 매달아 가죽을 벗긴 뒤 이것이 사악하여 승천도 못한 녀석의 가죽이라며 전시하겠죠……."
흘리던 단어를 하나하나 이어붙이며 태오는 손을 들었다. "그러면 그때 당신이 나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주면 좋겠어요."
"내게 죽여달라고 비는 방법도 있을 텐데." 머리를 껴안는 상냥한 손길에 세로로 찢어진 붉은 동공이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그건 싫어."
"왜?"
"그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 태오는 매달리듯 머리 안은 팔에 힘을 살짝 주었다.
나리는 손길대로 고개를 파묻으며 나지막이 웃었다. "싫어?"
"그러니까 오늘은 내 살을 가르되 속은 헤집지 마. 상처만 줘. 역겹다 욕하고 침을 뱉어도 좋으니까."
나리는 침묵했다.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외 함께 태오는 눈을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손아귀가 새하얗게 물들고 목 물린 짐승처럼 바르르 떨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병든 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둘에게는 여전히 손바닥 하나의 거리가 있다.
- 유희와 균열
스트레인지는 낙후됐고, 찬란한 인첨공에서 찬란하지 못한 부분을 담당한다. 그림자가 지역이 된다면 아마 여기가 될 것이다. 과학기술, 사회, 빈부격차, 인간관계…… 어떻게 말해도 빛과는 거리가 멀다. 꾸며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고, 희망을 품으면 열 배의 절망으로 갚는 이상한 곳이라며 스트레인지라 이름을 붙이며 넉살 좋게 웃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이 어떻게 되었든 바깥사람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곳이다. 끽하면 길을 잘못 들어 슬럼이나 다를 것이 없는 곳의 초반까지만 발을 들이고 여기는 무서운 곳이라며 벌벌 떨다 자리를 떴다. 스트레인지는 그런 곳이었다. 패배자의 영토, 자신들과는 관계없지만 어쨌든 소외된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고귀한 인간과는 다른 짐승의 소굴.
태휘 또한 스트레인지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골치 아픈 일이 가득하다.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강력 범죄 형사 수사팀 반장인 태휘가 출동한 사건 중,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끔찍하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범죄는 이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 정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인첨공의 벽이 무너져도 이 편견은 평생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태휘는 이 장소에 와야만 했다. 며칠 전 참관했던 부검 때문이다. 스트레인지에서 발견된 시체는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탓에 시체로 끔찍한 농담도 던질 수 있었던 안티스킬 법의학 연구소 소장 김 씨도 그날은 입을 딱 다물 정도였다. 이도 몽땅 뽑혔지만, 그나마 온전하게 남겨둔 어금니는 범인이 신원을 파악하라고 고의로 남겨둔 것이 뻔했다. 신원 확인 결과 안티스킬 일동은 분노했다. 같은 안티스킬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스트레인지를 담당했고, 스트레인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부검에 참관했던 태휘는 자연스럽게 이 사건의 지휘를 맡게 됐다. 말이 지휘지 사실은 단독 수사였다. 데 마레에는 임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이탈하게 되었다 미리 고지를 하고, 태휘는 스트레인지에 발을 들였다.
스트레인지 초입부와 중반부에서는 누구도 태휘를 건드리지 않았다. 건드린다고 해도 몇 초면 제압은 충분했다. 하지만 깊숙한 곳, 안드로이드가 가득한 폐기장 근처로 다가갔을 때 태휘는 사건을 되새겼다. 초반 탐문에서 피해자가 여기보다 더 깊숙한 곳을 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여기를 뚫고 지나쳐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위험한 일인 건 안다. 스트레인지의 소문 정도야 알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가 그 유명한 연구원들도 얼씬도 않거니와 자신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깊숙한 곳을 알리는 입구인 안드로이드 폐기장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이라 을씨년스럽다. 산처럼 쌓인 안드로이드는 사람을 닮은 것도 있고, 구식 모델도 있었다. 태휘는 표정을 구겼다. 범죄자나 시체를 대하는 건 익숙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건 여전히 담력이 부족했다. 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 정신 한 구석에 결함이 있을 게 분명하다! 태휘는 거꾸로 늘어진 안드로이드와 눈이 마주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최대한 안드로이드가 적은 곳으로 재빨리 발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태휘는 걸음을 멈췄다. 안드로이드도 거의 쌓이지 않은 폐기장의 끝자락에서 사냥 본능이 깨어났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등골을 짜릿하게 훑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누군가 달빛을 등지고 뒷짐을 지고 태휘를 마주하고 있었다.
"돈도 안 받은 짭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안티스킬입니다. 잠시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어떤 협조를 바라, 선생?"
뒷짐을 진 남성은 안면 인식 저해 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노이즈가 끼고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탐스럽게 땋아내려 가슴 앞에 드리운 새하얀 머리카락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사냥 본능에 몸을 맡길 시간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혹시 뭔가 알고 있습니까?"
"여기서 사람 많이 죽는데 누군지 모르겠네. 아, 혹시…… 이 바닥 기어다니던 짭새 하나 말하는 거야? 난도질당해서 어금니 하나만 남은 애."
태휘는 경계하듯 발 하나를 뒤로 물리고 자세를 잡았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본능과 여러 사건을 해결한 노련한 감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하고, 뻔뻔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여러 스트레인지 인물에게 협조를 구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체 소식은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이지만 입을 벌려 확인할 만큼 위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안다고?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은 확실하다.
"난 거기까지 말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놀랍게도, 난 여기까지 알고 있고."
태휘는 금방이라도 제압하려는 듯 뒤로 뺐던 다리를 조금 더 길게 뻗었다. "네 짓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내가 그 돼지 새끼 살찌워서 길들이는 데만 2년이 걸렸는데! 나 같은 총 팔이가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고 그런담?" 남성은 장갑 낀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끔찍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뇌물 먹인 걸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그쪽도 어지간히 돌았나 봐?"
"인첨공에 안 돌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거 꺼내느냐 마느냐로 사회성 판가름 나는 거지. 사회성 안 좋은 건 맞지만."
"일단 이번 건과는 다르지만, 죄를 시인했으니 제압은 해야겠지."
"선생, 난 싸우기 싫은데 어쩜 좋아?"
"아니, 순순히 투항하는 게 이로울걸."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선생이 선택한 거야."
태휘의 주변으로 강력한 스파크가 튀겼고, 남성은 마찬가지로 한쪽 다리를 뒤로 물리더니, 사뿐거리듯 뛰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폐기장에 번개가 내리쳐 섬광이 번쩍이고, 우레가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은 난장판이 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언덕을 만들던 안드로이드 더미는 번개에 맞아 새까맣게 녹아 서로 엉겨 붙고, 불이 붙은 것도 있었다. 고무와 실리콘, 합성 소재와 기름이 타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난장판이 된 폐기장에서 태휘는 꼼짝도 못 하고 바닥을 굴렀다. 안드로이드에서 나온 폐냉각수 웅덩이에 구르는 걸로 모자랐는지 몇 번이고 더 바닥을 구르며 기름과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근육이 아팠다. 쿵 소리와 함께 쌓인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진 벽에 강제로 몸이 멈췄을 때, 전기 머금은 몸 탓에 여러 안드로이드가 뒤엉켜 잠깐 기동을 시작하듯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금세 축 늘어졌다. 태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몇 번이나 공격에 성공했지? 아마 못 한 것 같다. 코밑은 축축하고 비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피가 나는 것 같다. 입안도 터진 것이 분명하다. 태휘는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태휘는 제압으로는 파이로키네시스나 하이드로키네시스 저리가라 수준의 대분류를 가진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자였다. 레벨 4에 곧 계수 두 자리를 앞두는 능력자였고, 제우스의 창, 아스트라페라는 이름을 수여받기까지 했다. 안티스킬의 자랑스러운 정예 인력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한 자신이 무력하게 구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태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코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서고자 땅에 손을 짚었다.
"선생, 놀랐어?"
"윽-!"
"그러니까 그냥 지나치지 그랬어. 살려주고 보내줬을 텐데."
"……나는."
"응?"
"나는 그래도 경찰이라서, 뇌물 주는 사람은, 못 지나치거든……."
태휘는 남성이 발로 손을 짓밟자 몸을 움찔 떨었다. 먼지가 약간 묻었지만 깔끔한 편인 구두에 무게는 없었지만, 손톱이 있는 곳을 절묘하게 짓밟아 일어설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눈앞의 남성이 힘을 주거나, 자신이 일어나면 손톱 두어 개는 빠지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잃는 고통이 무슨 대수지? 시민의 안전과-
"조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이깟 손톱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어, 선생?"
"!"
"선생, 눈물겨운 희생은 이해하는데, 지금껏 그 각오를 한 건 선생만이 아니었어."
"너, 정말로…… 이 구역에 있던 안티스킬이 네 짓이냐?"
"눈치가 좋은 것 같은데, 이상한 부분에선 눈치가 나쁘네."
"묻는 말에 대답해!"
"바락바락 대들기까지 하고, 제법 흥미가 생겼어. 이렇게 된 거, 나랑 질문 놀이할래, 선생? 다섯 개. 지금부터 다섯 개의 질문은 내가 뭐든 답해줄게.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
"풀어주도록 하지!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거든. 오늘은 피 보면 안 되는 날이고."
"의도가, 뭐지?"
"오락이지. 선생이랑 싸워봤자 득 될 것도 없고. 선생도 알고 싶을 거 아냐? 안티스킬의 훌륭한 창이자 충실한 개새끼인 아스트라페가 어떻게 이딴 낙후된 미개인들의 지역의 흔해 빠진 총 팔이에게 탈탈 털렸지? 같은 거나……."
남성은 생글생글 웃었다. "윤찬혁 그 작자에 대한 정보는 어때?"
"너!!" 태휘는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노이즈가 일부 걷혀 드러나는 시선을 마주했고, 눈을 홉떴다. 자신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였지만 눈앞의 남성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었다. 태휘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며, 자연스럽게 데 마레에서 만났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같은 흰색과 금색의 눈이라도 이질적이고 인간과는 다르기 그지없던 희야와, 아무리 숨기고 있다 한늘 노련한 안티스킬인 자신에겐 차마 속일 수 없던, 그러면서도 저 작자와 비슷한…….
"분홍머리, 학생……?"
남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휘는 짓밟힌 손에 체중이 실리자 끼쳐오는 격통에 어깨를 비틀었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보자니 눈앞의 남성은 옷 끝자락이 탄 것을 제외하면 지나치게 멀쩡했다.
"윽-"
"나는 선생한테 생각에 잠기라고 한 적 없어. 선택하라고 했지."
"……네가, 네가- 그 사람에 대해 왜 알고 있지?"
"그게 첫 질문인가?"
"……."
태휘는 이를 악물었다. 끔찍하지만 지금은 이 놀이에 어울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좋은 태도야. 내가 왜 윤 선생을 아냐고? 그 선생도 내 거래자 거든. 아주 중요했던 고객인데 당신들이 싹 뒤집어엎었지 뭐야. 상납금도 아직 못 받았는데."
"……너는, 돈과 관련된 녀석이냐?"
"그건 두 번째 질문?"
"그래."
"맞아. 금교 금교 파이넌스? 그쪽도 고리대금업으로 한탕 벌어먹지만 나는 조금 다른 쪽. 고리대금, 주가조작, 세탁, 인신매매, 도박, 아, 요즘엔 무기 로비스트도 하고 있고, 스킬아웃 자금도 대주고 있고…… 어느 쪽이 좋아?"
"……너는."
"응?"
"이 사건의…… 범인이냐?"
"하하하!"
남성은 시선을 맞추듯 무릎을 굽히더니 태휘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여름의 끝물이라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도, 덥지도 않은지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호쾌하게 휘었다.
"말했잖아, 뇌물 먹이면서 2년 동안 길들인 우리 돼지 새끼라고. 내 짓이 아니야. 나도 솔직히…… 화가 많이 나거든. 통통하게 살 오를 때까지 잘 키워둔 걸 누가 냉큼 도축하면 화가 나, 안 나?"
"……."
"선생은 이 말이 기분이 나빠? 고귀한 안티스킬인데 돼지 취급받아서 싫어? 그런데 선생."
남성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들은 그 말이 몸서리가 날 정도로 싫은데, 왜 우리는 그 소리 듣는 게 당연해야 해? 우리 입장에서는 당신들도 똑같이 남 짐승 취급하는 족속인데."
"……질문 두 개가 남았다."
"말 돌리기는. 뭐, 나도 대답 들을 생각은 없었어, 인간은 전부 똑같거든. 그래서, 뭘 묻고 싶어?"
"너는…… 그림자냐?"
"선지자가 많은 걸 알려주었나 본데, 그건 아니야. 그쪽이랑 연관은 없어. 아, 있나?"
"똑바로 말해."
"나는 아니고, 선지자가 그쪽이랑 신나게 엮였잖아. 싹수가 노란 녀석 같으니라고. 나만 보면 머리 굴리면서 어떻게 해야 떡고물 더 얻어먹을까 궁리하는 기특한 녀석이긴 한데……. 정보도 제법 쓸만하고. 어?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몰랐어? 선지자의 호위면서."
태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남성의 눈은 파충류를 닮은 뱀 같은 동공을 가지고 있었고, 꼭 세로로 난 커다란 균열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저 균열이 지금, 태휘의 속에도 파고들어 선명한 자국을 남겼단 착각이 들었다. 선지자, 그러니까 안희야가, 뭐? 그리고 더 큰 궁금증이 생겼다. 물어본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을 알지만, 남성이 선지자라는 언급을 해버리고 윤찬혁 그 작자에 대한 얘기까지 한 이상, 판도라의 상자는 열 수밖에 없다. 태휘는 바르르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선생, 정말 나 몰라? 우리 얼굴 자주 봤는데."
얼굴을 덮는 노이즈가 사라지자, 태휘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다. 납작한 이마에 흩어지는 흰 머리카락도, 콧대도…… 아, 저 눈! 어째서 진작 알아보지 못했지? 태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지만, 남성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태휘의 귓전을 때렸다.
"선생과 내가 가장 최근에 본 게 언제더라? 아, 그래. 당장 어제도 봤잖아? 데 마레에서……. 소장님과 함께 차도 마시고 웃고 떠들었지."
"당신이, 왜."
"그러게, 내가 왜 이럴까?"
"대체, 대체, 왜……."
"선생, 딱 하나의 질문을 더 받을게."
"……오늘 피를 보면 안 된다는 게, 소장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나?"
"재밌는 질문이네. 선생, 정답이야. 이렇게 눈치가 좋은데……. 그냥 우리랑 함께할래? 여기 제법 복지 좋아. 안티스킬도 곧 끝물인 것 같은데 차라리 우리랑 함께 하면 안전할 거 아냐."
"나는 이곳의 군인이며, 경찰이다. 시민을 지탱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내가 당신 같은 작자와 함께 할 것 같아?"
"눈물겨운 충견이군. 그리고 어리석어, 선생."
"컥-!!"
남성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쿵 소리가 들렸다. 태휘는 머리채를 휘어잡히더니, 그대로 안드로이드 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했다. 남성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스트레인지 잠입 활동을 하는 안티스킬을 위해 대상을 포함해 이 일대 지역에 사이코메트리에도 읽히지 않을 만큼 기억에 큰 균열을 주는 장치였다. 2년 동안 열심히 살찌운 돼지가 주인에게 바치기 딱 좋은 보상이었다. 기절한 태휘의 눈꺼풀을 뒤집어 깐 남성은 장치로 스캔하여 1시간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날려버리곤, 이젠 필요가 없다는 듯 불타는 안드로이드 더미 위로 대충 집어던졌다.
"의무를 가진 건 당신만이 아니야……. 그러니 오늘은 살려주는 줄 알아."
레벨 4인 당신이 쓰러지면 사기는 한 풀 꺾이겠지. 여기 있는 찌꺼기들이 날뛰는 동안 나도 할 일을 좀 해야 할 것 같고.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휘를 적당히 스트레인지 골목으로 내던질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다.
"어이쿠, 약속 늦겠네. 팥차는 싫은데."
─ 惟命是聽
- 권악징악
4학구 미술관에 전시된 레이브의 작품 일부는 지정된 공간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레이브가 직접 숨결을 불어넣은 작품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며, 관람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며 소통하며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여러 평론가에게 긍정적인 찬사를 이끌어냈다. 작품이 망가지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안드로이드의 안전 감지 센서나 상시로 주둔하는 보안 요원 덕분에 지금까지 큰 사고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우려의 시선을 거두고 무뎌졌을 때, 미술관이 발칵 뒤집히는 사고가 났다.
작품이 망가졌다!
단순한 부주의로 벌어진 실수였다면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경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에는 여러 인간 군상이 모인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부터 시작해 단순히 더위를 피하려 들어오는 사람, 재밌어 보여서 들어오거나 과제 때문에 죽상으로 들어오는 사람……. 누구라도 미술관은 사람들을 환대했고, 악의를 가진 사람도 분명 있었다. 오늘 사고를 친 사람은 단순히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고,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작품을 만든다며 천대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은가! 최근 불량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극야의 서 챌린지를 쇼츠에 올리면, 조회수도, 관심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고의로 작품이 부서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보안 요원이 출동해 현장에서 붙잡긴 했지만, 작품은 산산조각이 난지 오래였다.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관장은 높은 비명을 질렀다.
"신데렐라!"
무려 이 미술관이 레이브라는 작가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사들인 작품이다! 붉은색 보석을 포인트로 넣은 순백색 드레스를 입은 남성형 안드로이드 "신데렐라"는 한쪽 다리에 맞지 않는 유아형 안드로이드의 발을 이식한 나머지 절뚝거리며 주변을 배회하는 특징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고 유쾌한 안드로이드는 오늘, 늘 그렇듯 "어이, 꼬맹이!"를 외치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관장은 소란 속에서 진짜 시체처럼 널브러지고 이리저리 부품이 튄 신데렐라를 보며 등골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 손해배상 청구와 고소를 진행하면 될 일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작가님께…… 어떻게 말씀드리지?"
신데렐라는 레이브가 팔지 않겠다고 했으나, 자신이 사정을 하며 빌면서까지 얻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아홉 번의 거절 끝에 얻어낸 작품! 레이브의 숨결 중에서 가장 귀한 것! 그런 게 부서졌다고 알려야 한다니,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멀리서 기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번쩍였고,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어 제각기 영상과 방송을 퍼날랐다. 관장은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과 미디어의 발전,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야만적인 행동을 트로피로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 사회가 미웠다. 누군가 핸드폰을 돌려 허망한 시선으로 부서진 작품을 보는 관장을 찍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오는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오른 메일을 확인했다. 뉴스에서는 조회수에 눈이 먼 몰상식한 청년들을 비판하며 제각기 열띤 토론을 나눈다. 레이브의 계정은 디엠을 막아두었다. 그 모든 것이 태오에게 닿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것을 본 것처럼,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인 것처럼 크게 와닿지 않았다. 고소니 손해배상이니 미안하느니 몇 수십 명이 달라붙어 구슬땀을 흘린 것이 보이는 장문의 메일에서도 한 문장만이 태오의 눈에 닿았다. 신데렐라가 부서졌다.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대행 주소를 보내드릴 테니 거기로 안드로이드를 보내주십시오. 상태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눈물과 식은땀, 미안한 감정으로 범벅 진 노력과 달리 답장은 몇 초면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일을 확인했다는 알림음이 떴다. 메일이 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냉큼 클릭했단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머잖아 태오는 왜곡된 좌표를 통해 작품을 집에 들여올 수 있었다. 태오는 상자를 보며 관장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인간은 역겨운 것 천지에서 안드로이드를 사람처럼 대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레이브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지금도 그 배려심이 돋보였다. 귀한 목재 상자는 내부를 완충재와 부드러운 실크로 감싸 더 이상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그 모양새가 관과 같아 작품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사람은 죄가 없다. 이 사람에게 신데렐라를 넘긴 건 후회하지 않는다.
"……신데렐라."
하지만 나 자신이 신데렐라를 넘겼단 사실이 이렇게 끔찍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을 팔아치우던 패배자들과 다를 게 무엇일까! 태오는 상자 속에 고이 누워있는 작품을 훑더니, 뭉개진 얼굴의 실리콘 파츠를 덮은 천을 들어 내골격이 드러난 것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듣자 하니 레벨 2의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자였단다. 미력하다마는 어느 정도는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붙잡기 전까지 신나게 박살을 내려 들었기 때문일까, 작품은 정말 손쓸 곳이 없이 망가졌다. 이곳저곳 불타고, 녹았고, 부서졌다. 이음새가 부서져 빠진 한쪽 발은 머리맡에 고이 놓여 있었다. 태오는 손을 더듬대며 부서진 곳을 피해 만져보다가도, 상반신을 들어 올려 품에 가두듯 안았다. 허리 파츠에 큰 충격이 갔기 때문일까? 금세 부서질 것 같아 몸이 잔뜩 떨리고 있었다.
"아, 아팠지, 어떡해, 으- 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신데렐라, 어떡해, 발이, 모, 몸이……."
천만다행으로 인격을 결정짓는 칩은 훼손되지 않았다지만, 기기는 아예 박살이 났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아! 내 신데렐라! 내 가장 소중한 작품! 안전하길 바라고 꿈을 이루어주고자 보낸 신데렐라가 망가져 돌아왔다니!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게 안드로이드를 등허리를 꽉 끌어안은 태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높여 울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한참을 엉엉 울던 태오는 결심한 듯 뭉개진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가, 고쳐줄게. 그때는 지켜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지켜줄 수 있어. 우리 평생 함께잖아. 신데렐라, 다시 걸어 다니자, 이번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공중을 떠다니던 홀로그램 스크린이 하나로 모였다. 연결 중이라는 알림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쩐 일로 내게 연락을 다 했을까?"
서휘는 호텔 객실처럼 잘 꾸며진 방 소파에 모로 누운 채 책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렸다. 일을 마쳤다 연락을 줬으니 곧 보낸 주소로 오겠지. 연락처를 주길 잘한 것 같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어르신'의 연락처를 주긴 했지만, 태오가 연락을 취한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얘가 무슨 바람이 들었나 싶었다. 드디어 독립을 철회하고 돌아오겠다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안드로이드를 껴안은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자, 기대했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감히, 누가? 단전에서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 어떤 경위도 묻지 않은 채 도와주기로 했다.
"청년,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떨어?"
서휘는 책에서 시선을 떼 정면을 응시했다. 푹신한 러그 위, 의자에 손 발목이 결박된 채 벌벌 떠는 남성은 신데렐라를 파손한 범인이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범인은 서휘의 자비로운 손길에 비명 하나 못 내고 여기까지 끌려왔다. 사람 하나 감쪽같이 속여 데려오는 건 몹시도 쉬운 일이었다. 하필 자신 같은 사람에게 잡혀온 것은 안타깝지만, 서휘도 뉴스 기사 정도는 봤다. 극야의 서 챌린지를 찍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단다. 극야의 서 작가도 참 안타깝게 됐지. 본인이 쓴 책의 범죄 내용을 스킬아웃이나 생각 없는 젊은이들이 따라 하면서 챌린지라 부른다니! 하지만 잘된 일이다. 왜, 요즘 애들이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아무튼 딱 그 꼴에다 하필 건드려도 레이브의 작품을 건드렸으니, 본보기로 하나 매달리면 잠잠해질 것이다.
"그런 일하면 당연히 이런 일도 당한다는 건 몰랐어? 어휴, 몰랐나 보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앞뒤 안 잰다니?"
남성은 불안한 눈치로 흘끔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cctv에 남은 작품을 부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서휘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책에 시선을 꽂았다. 곧 중요한 파트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자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니?" 서휘는 책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짚어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고정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태오는 머리를 두 개의 볼펜으로 대충 둘둘 말아 꽂고 있었고, 옷은 계절의 흐름도 모르는지 아무거나 걸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예술에 빠져 자기관리가 일절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얼굴이 시선이 닿았다. 드물게 표정에 경멸과 혐오, 그리고 분노가 잔뜩 깔려 있었다. 서휘는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저 숨겨진 성질머리를 보겠구나!
"저거야?"
"말도 마, 벌벌 떨더구나!"
불안하게 남성의 눈동자가 구르는 것을 확인한 태오는 겉옷을 채 벗지도 못한 채 성큼 앞으로 다가서더니, 뺨을 손등으로 거세게 쳐올렸다.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과 달리 우렁차게 올려붙이는 소리에 서휘조차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악!"
쿠당탕 소리와 함께 의자가 왼쪽으로 넘어갔다. 남성은 머리와 왼쪽 무릎에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팔이 적나라하게 눌리자, 끔찍한 통증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태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울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왜 저건 조금만 고통을 받아도 우는 건지! 허공에 멈춰 바르르 떨린 손이 새하얗게 주먹을 쥐었다.
"이깟 천한 것 때문에. 내가 눈물 흘리며 여기까지 걸음해야 했다니……."
"저, 저한테 왜 이러세요, 잘못했어요……!"
태오는 남성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남성은 눈이 마주치자 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누가 구조해 주지 않을까? 살면서 납치라는 걸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누가 납치를 당하지? 저 사람들은 혹시 작품에 관계된 사람인가? 왜 이렇게까지 하지? 혹시 그 작품이 아주 중요한 거였나? 왜, 있지 않은가, 뭔가 스캔들이 터진다든지, 아니면 이 작품에 사정이 있다든지…… 어찌 됐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나는 손해배상에, 고소에, 잘 하면 징역까지 살고 평생 욕을 먹을 텐데! 남성은 태오가 머리를 콱 짓밟자 악 소리를 냈다.
"겉으로는 빌며 다른 걸 생각해. 지독하게 오만하고 아둔한 녀석 같으니라고. 세상 만물이 서로를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네깟 것 하나 더 욕먹는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으, 으으-"
"내가 배태할 수 없는 불모이긴 하나, 네가 부순 것은 정신적으로 배태한 자식이나 마찬가지였어, 뇌로 잉태하여 손끝으로 면신한 내 자식. 모두 내 숨, 내 탈출구, 수단, 방법, 자유의 상징, 삶과 같은 것인데, 감히 네가 나의 피조물을, 아이를, 나의 신데렐라를……. 가엾은 나의 신데렐라. 내가, 내가 어떻게 살려냈는데. 내 눈에서 꺼져가던 그 순간이 선연한데 네가 감히 다시 그 정경을 눈에 보여……?"
태오는 발끝을 거칠게 비볐다. 머리카락이 신발 밑창에 감겨 좌우로 비틀릴 때마다 고통이 스몄다. 남성은 속이 읽혔단 것도 모르고 공포와 억울함에 몸만 떨었다. 혹시 저 사람이 레이브야?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그럼 저 사람은 또 누구고? 생각에 또 잠기자 태오는 머리를 짓밟은 발을 떼어 할 말이 있으니 집중하라는 듯 신발 끝으로 뺨을 툭 쳤다. 남성은 공포에 잔뜩 젖은 눈을 슬쩍 흘겨 들었다.
"네가 봐도 고작 작품 하나에 이리 화를 내는 듯싶지. 너는 사회적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는데 어찌 너에게만 이러느냐 싶지?"
태오의 신발 끝이 뺨을 짓누르며 턱 선을 스치다, 이내 끝을 세워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고개를 들게 만들어 남성에 목이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고 근육이 아팠다. 하지만 남성은 눈이 마주치자 반항할 수 없었다.
"네가 죽인 건 내 수많은 삶의 일부인데, 너는 남의 삶을 망쳐놓고 고작 대가 치르면 되겠거니 생각하는 점에서 글러먹은 거야. 알아? 고작 알량한 심상을 가지고, 되지도 않는 오만한 일을 벌이는 자그마한 피조물, 단 하나 사랑스럽지 않고 캔버스 위에 대충 짜놓은 물감과도 같은 것이라고. 얘, 너는 고작 그런 존재란다. 손으로 한 번 눌러 비비면 하나의 궤적으로 남아 사라지고, 뒤집으면 채 반항 못하고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를 녀석."
저건 짐승의 눈이다!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라 표현해야 응당 옳을, 인간의 것이 아닌 눈이었다. 번뜩 뜨인 빛바랜 비색 눈동자는 선득했고, 동공은 먹잇감을 발견한 커다란 구렁이 같았다. 사물이 아닌 저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인위적인 시선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적, 시시각각 색이 오묘하게 바뀌는 것 같은 유리구슬과 같은 눈동자에 큰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네 뇌 가장 깊은 곳 척수에 새겨진 것을 읽을 수 있고, 너의 눈 너머로 꽁꽁 숨기는 추악한 본성과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단다. 연약하고 작으며 추한 것아. 척수에서부터 네 공포가 느껴지나 내가 이걸 입 밖으로 꺼내줌에 감사를 표하고 무한한 찬사를 보내야지 어딜 눈을 그렇게 뜨며 머리를 굴릴까?"
"……자, 잘못했어요."
"두려워?"
"잘못했어요!! 돈이랑 다 배상할게요, 징역도 살게요, 네? 잘못했어요!"
"봐, 조금만 긁어도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생을 갈구하고. 오, 네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손 더럽히는 건 내 일이 아닌지라 목숨을 구걸할 대상이 다를 텐데."
태오는 끝을 세운 발의 각도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남성의 시선 끝에 닿은 서휘는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 남성을 흘긋 내려다보다가도, 태오를 향해 눈을 굴렸다. "나 시키게?" 남성의 시선이 서휘의 책에 닿았다. 아름다운 유작. 남성은 저 책을 알고 있다. 흐릿하게 결말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모조리 몰수 당하고, 화장되어 가족들 품에 돌아가는……. 남성은 이유 모를 공포에 잔뜩 젖어 고개를 억지로 쭉 빼들며 외쳤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저 진짜 잘못했어요."
본능이 생존을 외친다. 원래 이런 일을 당하면 저지먼트나 안티스킬이 구해주지 않아? 벌벌 떨며 한참을 살려달라 빌었지만 서휘는 들은 척도 않고 다시 책에 시선을 옮겼고, 태오는 턱 끝을 툭 건드리듯 가볍게 차더니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눈앞에서 보니 레이브는 훨씬 어렸다. 짐승을 닮은 눈의 위압감 탓에 깨닫지 못했지만, 분홍색 머리카락은 창백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홍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고, 관리된 모습보다는 않은 듯 아무렇게나 볼펜을 꽂아 고정한 모습이 잘 어울릴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어린 사람이 작품을 내고, 내게 화를 내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이렇게나 어린 학생이? 자신도 대학생이지만 얘는 많아야 고등학생 아닌가!
"잘못……."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적 남성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 학생을 관찰하는 만큼, 저 학생도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달랐다. 남성은 어떻게든 기억해서 안티스킬에 신고하고자 단서를 얻어내려 했지만, 이 학생은 자신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치를 가늠하는 시선에 살려달라 외치던 입이 지퍼를 채운 듯 꽉 다물려 열리지 않았다. 눈치는 없는 편이지만, 지금은 더 자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서휘는 책갈피를 끼우며 옆으로 누워있던 자세를 바로 세워 앉았다.
태오는 고개를 돌려 서휘를 쳐다봤다. "나는 저지먼트라서 손 못 대."
남성은 입을 떡 벌렸다. 저지먼트라고? 눈에 절망이 엄습했다. 이미 여기 온 시점에서 나는 죽겠구나. 차디찬 현실이 심장을 후벼팠다. 고작 작품 하나 망쳤단 이유로 죽게 된다는 사실이 썼다. 태오는 그런 남성의 속을 읽었는지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눈꺼풀에 엄지와 검지를 댔다. 눈을 억지로 비집어 벌려 동공의 움직임과 그 안의 감정을 관찰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손끝에 느껴지는 바들거림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여전히 반성 하나 하지 않는 녀석에게 자비를 줄 필요가 있나? 이제 보니 이 눈은 쓸만하긴 한 것 같다.
"그러면 대행비가 필요하단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해?"
"우리 사이가 뭔데?"
"……."
"농담이란다! 사람들은 네 마음씨가 천사 같길 바라고 미담을 칭송하며 저것도 이미지메이킹이라며 쑥덕거릴 찌라시를 준비했을 텐데. 안타깝지! 그래서, 방법은?"
"금전적 피해 보상과 고소 절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론에게 느낀 중압감."
"아하……. 이 작고 영악한 것. 그건 내 전문이지. 그럼 이건 내 적당히 교육할 테니 돌아가서 푹 쉬렴. 신데렐라를 고쳐야 하지 않겠어?"
태오는 마지막으로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는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남성은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고개를 내렸다.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처지가 망했다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눈물도 나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낙담한 눈도 관찰하고 싶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아 엄지로 눈꺼풀을 슥 밀어 올리자 둥근 안구가 보였다. 태오는 남성의 뺨을 쓸어주다 손등으로 가볍게 탁 쳤다.
"옳지, 착하다. 그게 네가 응당 가질 태도니, 마지막까지 평생 품고 있으렴."
자리에서 일어서 떠나는 걸음에도 남성은 낙담한 눈을 숨기지 못했다. 서휘는 마저 책갈피를 꽂아둔 책을 펼치며 다리를 꼬았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아름다운 유작의 결말은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모조리 몰수 당하고, 화장되어 가족들 품에 돌아가는 해피엔딩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이 늘 해피엔딩은 아니다. 서휘는 마지막 장을 넘겨 작가의 말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극야의 서는 범죄 소설입니다. 극중 캐릭터의 다수는 범죄자입니다. 픽션은 픽션으로 있어야만 아름다운 법입니다."
붉은 눈동자가 긴 호선을 그었다. 탁, 하고 책 덮이는 소리와 함께 서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냐면, 현실이 되면 안티스킬이 승리하는 법이거든. 그건 진부하잖니."
뉴스 기사가 떴다. 레이브의 sns 글을 캡처한 기사였다. 레이브는 최근 sns에 가해자의 조회수를 향한 갈망과 더불어 최근 이렇게 평온한 일상을 부수는 챌린지가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이라 토로하며, 배상을 청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나 수많은 관람객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며 난동을 부렸던 점과 4학구 미술관의 다른 작품 또한 위험했다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겠다고 협의를 마쳐 배상 청구와 고소를 진행할 예정이라 밝혔다. 또한 신데렐라는 천만다행으로 칩이 망가지지 않았고, 안드로이드를 교체하면 다시금 관람객 앞에 선보일 수 있다는 말도 붙였다. 더불어 극야의 서 작가도 본인의 sns에 레이브에게 이런 챌린지가 벌어지는 것에 대해 사과를 전하며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고, 레이브는 작가의 잘못이 아니라며 응원하는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은 그런 레이브를 대인배라 칭했고,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이름을 기억하게 됐으며, 극야의 서 작가와의 긍정적인 만남으로 새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제각기 떠들었다. 반면 가해자는 초반 진술과 달리 잘못했다, 용서해달란 말만 반복하며 불안한 눈치로 주변만 살폈다. 지속적으로 경찰 조사에 임할 때마다 스킬아웃 단체의 일원들이 기자들 사이를 뚫고 나와 너 때문에 열등생 인식이 나빠졌다며 습격한 탓이었다. 저번에는 기자가 나타나자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 울 정도였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이변이 없다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다. 권선징악과 다름없다. 태오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아래로 끌어내려 창을 닫은 다음, 벨벳 천에 감긴 안드로이드 칩을 손아귀에 올려둔 채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졌다.
"저 사람은…… 조만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줘."
하지만 근본이 다르다. 권선징악이 아니다. 더 큰 악으로 자그마한 악을 누른 것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잘 풀리고, 작위적이고, 우연과 욕망이 겹쳐 아주 큰 기회를 만드는 것. 그 삶을 이 손으로 직접 쥐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 도전하면 멈출 수 없기도 하다. 4학구 박물관은 최근 인간의 홍채를 제거하여 신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되지도 않는 존엄을 지키되, 안구를 보존하는 작업을 성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낙담한 눈을 볼 수 있을까? 오싹한 쾌감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신데렐라, 나의 신데렐라……. 나빴던 기억은 모조리 지워줄게. 다시 밝은 모습으로 날 꼬맹이라 불러주고, 그 낙원으로 인도해 줘……. 약속이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태오는 작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피조물에게 입을 맞추고자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에게 입을 맞추는 것만큼 성스러운 행위는 없다. 앞으로 죽을 것에게도 마찬가지리라.
- 엄지🎴
신데렐라를 위한 드레스가 얼추 완성되어 간다.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느질에 몰두한 덕분이었다. 실을 꿰는 태오의 손은 엉망이었다. 골무를 끼운다고 해도 바늘에 찔리면 아플 수밖에! 방금도 찔렸는지 손끝이 새빨갛다. 그동안 태오는 작품의 옷 대다수를 직접 만들었지만, 마땅한 재봉틀은 구비하지 않았다. 전부 하나하나 바느질을 해야 직성에 풀리는 깐깐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자수나 자잘한 무늬는 재봉틀이나 다른 도구로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술가의 손은 무엇보다 훌륭한 도구였다. 홍옥을 꿰던 태오는 가만히 팔을 벌리고 서있는 안드로이드의 쇄골 부근에서 시선을 집중했다. 역시 여기 말고 조금 아래에 꿰는 게 나았을까? 드레스를 안드로이드의 가슴팍에 대보았지만 도통 가늠하기 어렵다. 일단 마저 꿰자 싶어 태오는 바느질에 다시금 집중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느질에 푹 빠져 있었다.
"오늘도 열심이구나."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손이 삐끗한 나머지, 엄지를 쿡 찌르고 들어오는 바늘에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태오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주먹을 꾹 쥐며 피를 대충 짜내고는 바지에 슥 닦았다. 어차피 검은 바지니 아무도 모른다.
"……오늘은 상납 일이 아닐 텐데요."
"언제는 내 그 날짜에만 왔더니?"
"그건 아니지만…… 작품을 만들 땐 방해하지 않겠다며 오지 않았으니 말이에요……."
나리는 태오의 예술을 존중했고, 아낌없이 후원했다. 아니, 나리가 있었기 때문에 태오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만일 도박장에서 일하지 못했더라면 예술은커녕 지금까지 폐기장을 전전하며 고철 줍는 까마귀 신세를 면치 못했겠지! 태오는 아무리 나리가 싫어도 그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없었으면 레이브는 없다. 태오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나리는 태연하게 안드로이드 곁으로 다가가더니 주변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돌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시선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어 트리에 숨겨진 선물이 있는지 찾아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피부에 새롭게 묘사를 했구나!"
"네에."
피부 실리콘을 벗겨 외골격에 직접 혈관 파츠와 모조 근육 파츠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새로 붙인 피부 실리콘에는 잔주름을 묘사해 사실성을 더했음을 금세 깨달은 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언제 보아도 레이브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안드로이드 주변을 맴돌던 나리의 시선이 이번엔 태오가 바느질을 하고 있던 드레스에 닿았다.
"입혀보고 작업하지 않는 거니?"
"바늘이 들어가기엔…… 신데렐라는 지금 이 상태로 균형을 잡는 게…… 복잡해서요."
아무래도 발의 크기가 맞지 않아 넘어질 우려가 있었다. 납득한 듯 새빨간 눈동자가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한 번, 그리고 태오를 한 번 보더니 이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태오는 첫 번째 장식의 마무리 바느질을 위해 바늘을 몇 번 움직이고는 실을 잘라내며 바늘꽂이에 꽂아둔 뒤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입어보는 건 어떠니."
"농담도."
"난 제법 진지했단다. 체형도 마침 비슷한 것 같고, 그 장식 부분은 입어봐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나리는 손가락으로 홍옥을 꿴 자수를 톡 건드렸다. 태오가 방금 마무리 한 부분이었다. 마침 태오도 이 부분을 지대하게 신경 쓰고 있던 탓에,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듯한 눈으로 나리를 향해 시선을 꽂을 수밖에 없었다. 나리는 시선을 가뿐히 무시하고는 태오의 손에서 상냥하게 드레스를 거둬들였다.
"내 작품 보는 눈이 있잖니. 자, 일어나 보렴. 입기 불편하게 만든 듯하니 도와주마."
"……도울 필요 없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입을만한 옷이 아닌 걸 알면서."
"내 입을 옷이 아니었으니 그랬지요……."
"그래서, 이대로 신데렐라에게 입히고 말 생각이니?"
태오는 나리를 향해 시선을 온전히 꽂았다. 여상한 시선이지만 나리는 저게 자신을 최대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오는 자신의 존엄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예술성을 택했는지 눈을 슬쩍 좁히고는 한숨을 쉬며 상의를 벗었다. 나리는 익숙하다는 듯 태오에게 다가가더니 드레스의 착용을 도왔다.
"내 묻고픈 것이 있단다."
"무엇이든…… 하문하시지요."
"어찌 그리 신데렐라에게 집착할까, 옷도 평소랑 다르게 이리 공을 들이고."
태오는 목뒤의 리본을 매주는 손길에, 바스락거리며 구겨진 앞 매무새를 정리했다. 확실히 이번엔 공을 들이긴 했다. 지금껏 여러 작품이 공을 들였지만 이번처럼 하나하나 세심하게 새로 신경 쓰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쇄골을 일부 드러내는 네크라인과 함께 부드럽게 퍼지는 은은한 하늘색 시폰과 튤을 덧댄 새하얀 드레스는 태오의 몸에도 제법 잘 맞았고, 긴 머리를 대충 볼펜으로 틀어 올려주는 손길에 고개를 맡기던 태오는 눈을 흘겼다.
"질투하는 걸까요……."
"어찌 질투라고 생각할까, 나는 그저 묻고 싶었을 뿐인데."
"거짓말은 내 머리에 다…… 들린답니다."
"이래서 독심술사들이란."
나리는 볼펜을 꾹 꽂아주며 잔머리를 정리해주곤 태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에스코트하듯 거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작 죽은 놈 하나 기리자고 작품까지 만들더니 이젠 새로 드레스까지 지어주나 싶어서 말이다."
태오는 거울 너머의 자신을 보았다. 틀어올린 머리, 얌전히 모은 손, 새하얗고 우아하니 끝단이 풍성한 드레스……. 결혼을 앞둔 신부 같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비참한 끝을 기다리는 제물 같기도 했으며, 은은하지만 창백한 색감 덕분에 죽은 자를 위해 직접 맞춘 수의 같기도 했다. 쇄골 주변에 수놓은 홍옥 장식은 역시 조금 밑으로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는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죽였으니까요."
그 순간을 다시 회상하니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다. 신데렐라의 최후는 끔찍했다. 아름다운 죽음이라기엔 개죽음에 가까웠다. 인생을 셈했을 때 보상받았으면 받았을 사람이지 그렇게 눈도 못 감고 죽을 자는 아니었다. 태오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으면서 정작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런 곳은 오지 말고 어서 도망치라는 듯한 눈빛으로 어른이 아이에게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지켰던 모습과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을. 그리고 처참한 몰골과 함께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뇌리에 한 번 박혔던 그 순간은 잊을만하면 태오의 꿈에서 나타나곤 했다. 그놈의 어른의 도리가 무엇이길래. 태오는 그 원인을 잘 알았다. 거울로 눈을 마주라는 저 새빨간 시선의 탓.
"내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찾아 죽였을 테지."
"질투하였나요……."
"그보다 더 추잡한 감정이지. 네 작품에 신데렐라가 없었을 텐데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누가 먼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불편한 침묵이 오갔지만 두 사람은 이미 제 속내를 꿰뚫은 지 오래였다. 태오는 몸을 돌려 나리를 마주했다. 등허리를 감싸는 사부작대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손에 몸을 온전히 맡기자. 나리는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평소와 같이 수벽 하나의 간격으로 막아 세웠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당신을 증오하되 존경해."
태오는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 심장에 꽂을 비수를 준비했길 바라마."
긴 손가락이 턱을 감싸 쥐고 엄지가 입술을 짓눌러 긴 세로의 벽을 세웠다. 고개를 기울여 엄지 하나의 간격만큼 가까워진다. 그림자는 빈틈없이 메꿔지고, 쇄골께의 홍옥 장식이 찰랑거렸다.
단지 그런 사이다. 수벽이 거둬진들 엄지가 새로이 가로막는 사이. 엄지가 가로막기 때문에 결코 닿을 일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수단과 패로 삼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수 있는 사이. 다만 수벽만큼 철저히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관계.
고운 드레스 자락에 주름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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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중, 표변 |
- 목하, 짐승의 눈 아래
- 음중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온다. 길고 긴 여름이었다. 빛이란 것은 살갗에 닿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심중을 파고들었다. 뜨겁게 내리쬐던 열정의 빛이 심중에 그 투과되는 양을 줄여가는 것이 느껴진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열병은 비로소 끝맺음을 맺고 사람의 심중에 겨울을 예비하게끔 서서히 온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 열이 식으면 새하얀 눈이 내려 설국이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을은 그런 것이다. 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춥고, 겨울이라기엔 열병이 가시지 않는 계절. 열정을 품고 박차를 가하던 맥동이 숨을 멈춰가고, 끝내 차갑게 얼어붙을 준비를 마치는 의식의 기간. 사람들은 이 순간을 쉽게 설명하곤 했다.
가을 탄다.
가을이 온다. 한결은 고개를 들고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녹음이 우거지고 선명하던 색채가 바래기 시작했다. 날은 이제 크게 덥지 않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여 땀이 나더라도 금세 식혀줄 수 있는 온도였다. 옷차림도 마냥 반팔만 입기에는 저녁이 되면 약간 서늘한 감이 있어 온도에 민감한 사람들은 대다수 가볍고 얇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당장 저기에 앉아있는 태오도 그랬다.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날이 완전히 춥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대충 아래로 묶은 모습은 최소한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조치 같았다.
태오는 공원 구석, 넓은 공터 같기도 한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은 언덕 같은 장소는 누군가 여기까지 일부러 운동 삼아 오지 않는 이상 길을 찾기 어려웠기에, 혼자 있기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화구 통을 간이 의자 옆에 잘 세워두고, 화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결은 잠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그려진 희미하지만 수줍은 미소가 상담을 할 때 보여주던 음울한 인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미술치료를 병행할 때마다 집중하던 건 이 행동을 정말 순수하게 좋아해서였구나. 한결은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태오는 그림에 한참 시선을 꽂고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
태오는 생각보다 커다란 체격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에 그렸던 수줍은 표정을 지웠다. 평소와 같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것이 자리한 무표정을 보니, 마치 표정이라는 물감을 얼굴에 덧그린 것 같았다. 얼굴의 표정이 바뀌는 그 찰나에 다른 것도 눈에 밟혔다. 한결은 미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태오가 손에 든 팔레트는 여러 물감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고, 꼭 소모품처럼 사용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면 버려질 것 같은 모양새와 함께 어디선가 독한 냄새가 났다. 이제 보니 유화 물감과 기름통이 누워있었고, 태오의 손끝도 물감이 묻어있었다. 한결은 그 모습에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유화를 그리는구나.
"……."
태오는 표정 없이 한결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먼저 내렸다. 자신이 몇 주째 무단으로 빼먹는 커리큘럼 담당 선생이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 건 중요하지 않고, 이제 이 장소는 못 써먹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집을 제외하면 바깥에서 사색에 잠기며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새로 그림을 그릴 곳을 찾아야겠다 생각하던 태오는,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진 것을 보며 다시금 시선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홀로그램도 아닌 생화가 가득한 꽃다발을 본 태오는 꽃망울을 한 번, 그리고 한결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팔레트를 손에서 빼 무릎 위에 올렸다. 균형을 잡지 못한 팔레트는 금방이라도 움직임에 휘청이다 무너질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팔을 뻗어 꽃다발을 안는 순간까지 팔레트는 무너지지 않았다. 태오는 꽃을 받아들이고 꽃잎을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부들부들하니 매끈한 촉감이나 꽃내음이 썩 나쁘지 않다. 손이 자유로워진 한결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움직였다.
- 태오 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보나 마나 희야가 여기로 오면서 꽃을 가져오면 될 것이라 했겠군요."
태오는 무심하게 다시금 꽃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 봐도 희야짓인 건 알았다. 여기에서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아는 사람은 희야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공원 산책을 하면서 탕후루 막대를 버릴 곳을 찾던 희야가 우연히 여기까지 발을 들인 탓이었다. 희야는 태오가 그림을 그리는 걸 발견하고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자신은 아무것도 못 봤다면서 후다닥 자리를 떠버렸고, 태오도 그 이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곤란했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 하나를 잃어버린 것 아닌가. 썩 마음에 들던 곳인데 안타깝게 됐다. 태오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한결은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 혹시 제가 태오 학생의 시간을 방해했나요?
"아뇨. 어차피 집중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니 괜찮습니다. 다만……."
태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이 의자는 하나밖에 없고, 앉을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한결은 괜찮다는 듯 태오의 바로 옆, 풀이 무성한 바닥을 적당히 바라보며 앉아도 되겠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태오는 꽃다발을 바닥에 고이 내려놓다 시선을 발견하고는 그 끝을 따라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고, 한결은 자리에 앉고자 태오의 근처로 다가갔다. 한결은 드디어 태오가 무엇을 그리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웠다.
색채의 향연 탓이었다. 조화와 부조화를 모조리 담고 있는 그림은 그 의미를 쉬이 알 수 없었다. 밝은색과 어두운색이 혼재하여도 어디 하나 탁한 부분이 없었다. 패도적이되 유연했다. 밝은 어둠이자 어두운 빛이었다. 붓 터치 하나하나가 투박하지만 하늘을 나는 물새처럼 자유로웠고, 세상을 모르는 예술가의 작은 머리에서 나왔다기엔 터무니없이 압도적이었다. 그 화풍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지만, 지금 이 자유로운 심상의 표현 앞에서는 감히 무엇인지 상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한결은 자신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선생님께서 오신 이유를 압니다. 제가 커리큘럼을 받지 않아서겠지요……."
한결은 태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태오는 화폭 속을 자유로이 거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작품에 홀릴 뻔했지만 한결은 손을 움직이고자 팔을 들다가도, 잠시 멈칫했다. 작품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한결은 주머니에서 작은 홀로그램 투사기를 꺼내더니, 이내 프로그램 하나를 작동시키며 손가락을 허공에 몇 번 움직였다.
- 그것도 있지만, 태오 학생의 마음에 상처가 더 생기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어요.
"……."
단조로운 기계음 치고는 실로 인간적인 발언이었다. 태오는 붓으로 섬세하게 어두운 부분을 덧칠하면서 손가락이 허공을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부분이라도 한 번씩 붓이 지나갈 때마다 그 색채를 더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기름을 적신 붓을 향해 허리를 숙일 때, 기계음이 이어졌다.
- 그때 이후로 커리큘럼을 쉬고 싶다면 쉬는 게 맞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지금 내 마음이 커리큘럼을 다시 받고 싶다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다시 찾아와도 좋아요.
"선생님."
태오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몸을 멈춘 채 뭔가 얘기하는 것이 태오의 버릇이었지만 예술혼이 그 상황까지 배려해 주지는 못했다. 태오는 살살 물감을 문질렀다. 시선이 한결에게 한 번은 닿았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닿지 못했다.
"이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제안이 있었지요."
- 어떤 제안 말인가요?
"역방향 커리큘럼 말입니다."
한결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며 태오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장님께서 제안하셨던 커리큘럼이 있었다. 텔레키네시스는 텔레파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가설로 하여금, 텔레파시 계열의 커리큘럼을 역방향으로 진행해 새로운 능력을 개화하는 시도. 가능성은 낮지만 보컬 텔레파시는 사라지고, 새로운 능력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결은 불현듯 그 관련으로 태오가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고민을 끝마치느라 커리큘럼에 불참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소장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고도 하셨지요."
- 그랬지요. 태오 학생이 스스로,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도 않고, 휘둘리지도 않고, 스스로 결정하길 바랐으니까요.
……마음을 찌르는 창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찔러도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숨길 수 있으나, 살을 뚫고 들어가는 창은 숨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했지요."
태오는 칠하던 붓을 멈췄다. 한결은 태오에게 그 커리큘럼을 추천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원이라면 당장 그 커리큘럼을 받아 이 빌어먹을 능력을 뜯어고치려 들었을 것이다. 연구원이란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난 연구원들은 누군가 자신의 속을 읽고, 그 속내를 휘두르고자 한다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을 자신으로 규정하며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태오는 한결을 처음 만난 이후 커리큘럼에 대한 제안을 들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었다. 한결 또한 자신을 멋대로 뜯어고치겠구나. 그렇지만 자신의 속을 누구보다 잘 찌르고, 자신을 위하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그저 학생이라는 이유로.
- ……그때의 말이 혹시 신경 쓰였나요?
"저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든지 실체화가 되면 돌이킬 수 없지요."
그리고 태오는 그 호의를 끝없이 의심했다. 기름이 든 붓을 다시 내려놓고, 손수건을 들어 그나마 깨끗한 모퉁이로 캔버스에 흐를 것 같은 여분의 기름을 닦았다. 모든 호의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호의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도 자신을 위해 말했던 한결의 진심을 의심했다. 그렇게 계수 세 자리 수에 도달했을 때, 태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저는 커리큘럼을 받고 싶습니다."
- 진심인가요?
"예. 텔레키네시스는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동반한다는 말이 저를 동하게 합니다."
세밀한 붓을 든 태오는 팔레트에 붉은 유화 물감을 짰다. 그리고 가볍게 쿡 찍어내더니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선을 덧그렸다. 붉은 선이 조화와 부조화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빛과 어둠을 오갔다. 밝은 곳에서는 무엇보다 찬연하게,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는 심히 불길하게. 이따금 마르지 않은 물감이나 기름 탓에 번지는 건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홀린 듯 선의 움직임을 따르던 한결은 그 붉은색이 자신의 머리 구석에서 깜빡이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 순간이 무엇보다 불길하다. 한결은 한때 인첨공의 외진 곳에서 작은 컵라면 하나를 먹으며 대화하던 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이대로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학생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펜을 내려놓고 붙잡아야 했던 그 순간처럼 태오의 옷깃을 붙잡으려 들었다.
"어떻게 되었든 속내만 쿡쿡 찔러 홀로 병들어가는 것에 특화된 능력보다는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농담이죠.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데 마레에 있을 때도, ALTER에 있을 때도, 내가 살아갈 때도, 안희야에게 너 때문에 동생과 데 마레가 병드는 것이라 속삭였을 때도, 에어버스터와 함께할 때 그에게 칼을 쑤셔 박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을 때도…… 나는 한시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내 이상향이 아주 먼 곳에 있노라고."
한결은 태오와 눈을 마주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제 형이 시뻘건 눈동자로 먼 이상향을 향했듯, 태오 또한 자신만의 머나먼 이상향을 향하고 있었다. 환희와 안식을 향한 욕구, 그리고 지대한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에서 한결은 저도 모르게 옷깃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손이 툭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태오는 옅은 비색의 눈을 해사하게 휘었다. 몹시도 아리따운 미소였다. 수줍은 미소에 한결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태오는 붉은 물감이 묻은 손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한결의 뺨을 쓸었다.
"아는 사람과 몹시도 닮았기에 내 진심을 전하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지요."
한결은 그 이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태오는 그저 자리를 떠나버린 존재가 처음으로 숨소리를 냈음을 곱씹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열병이 가시며 차가운 설국이 도래하기 전, 그 틈 사이의 기간, 누군가의 척수 속에 태오가 자리 잡았다. 기어이 그 속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성공하였으니 설국이 도래하면 잿빛 도심은 가려지겠지.
태오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그림에 서명을 남겼다. Rave. 간결한 필기체와 함께 화구를 정리하고는 꽃다발을 안아들며 나지막이 웃었다. 좋은 냄새가 났기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루만큼의 시간 동안 시드는 것들이 마지막 삶에서 발악하는 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웠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 보호🃏
나는 네가 그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뛰쳐들지 않길 바란다.
네가 뛰쳐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지나치게 고통 받아오며 살아왔다. 네 상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고, 이 세상이 네게 손아귀를 뻗지 않기 위해서는 너를 온실에 두어 애지중지 키울 필요가 있다.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하나, 둘, 셋, 넷, 거기에서 스탭 밟고, 골반 신경 쓰고. 태오는 가이드에 맞춰 다시금 춤선을 점검했다. 춤이란 것을 춰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서 강제하는 피나는 노력과 채영의 갈아먹는 듯한 1:1 레슨은 태오를 무대에 세울 정도로 만들긴 했다. 그래, 갈아먹는 듯한 1:1 레슨……. 태오는 마침 또 신나게 거울 앞에서 인권을 빼앗긴 채 갈리고 있었다.
이런 운동은 헤이커로 링피트 했을 때 빼곤 없는 것 같은데! 태오는 틀어올린 머리를 뒤로 후,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방범 부저가 달린 개구리에게 넘어가서 나는……. 다시금 음악이 들리고, 태오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젠 음악에 맞춰 몸이 저절로 움직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셔츠 사이로 손을 넣었을 적, 누군가 연습실 문을 두드린다. 음악이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민 댄스부 후배가 태오가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확인하고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오빠, 잠깐 시간 있어요……?"
"있답니다."
"그, 연구원 선생님이 오셨거든요. 오빠 만나러 왔대요."
문이 온전히 열렸고, 그 뒤에서 한결은 부드럽게 눈을 휘었을 뿐이다. 한결의 손에는 댄스부 부원들을 위한 간식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고, 나눠먹으라는 듯 후배에게 그걸 건네주며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 방해했나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 5분 정도만 시간을 내줬으면 해요.
"…커리큘럼 관련한 용무입니까?"
- 네. 태오 학생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고자 해서요.
한결이 손을 움직이는 걸 보며 후배는 간식을 안고 주변 부원들에게 나눠주면서도 신기한 듯 시선을 자꾸 힐끔거렸다. 커리큘럼 하면서 들었는데 텔레파시 연구원 중에 말을 못 하는 분이 계신다던데, 그게 저 사람이구나. 그것보다 태오 선배는 한결의 손짓을 다 이해하고 있으니 새삼 신기했던 탓이다. 태오는 땀을 닦으며 후, 하고 짧게 숨을 고르더니 거울 앞에 놓인 생수병을 따 목을 축이고는 손을 움직였다.
-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제 제안이 퍽 흥미로우셨을 텐데도요.
- ……데 마레에서 논의가 끝난 상황이라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미안해요.
- 데 마레에서?
- 네. 테러가 벌어졌어도 학생을 위해 일해야 하니까요.
한결의 시선이 태오의 행동에 얌전히 꽂혔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도, 손을 움직여 자신과 수화를 하는 것도. 한결은 지난 세월 동안 오래 방황했고, 마침내 어느 정도 수긍의 길을 밟고자 했다. 그래, 커리큘럼을 받던 중 자신은 태연하게 얘기하고 있다 생각하나 몸은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을 때면 안아주며 달래주고 싶었다. 그리고 직업 윤리가 한결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 상담사와 내담자에게 있는 선을 넘으려 들다니, 미련한 짓이다. 하물며 지금까지 받아온 마음의 상처를 헤아릴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은 내담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공감한 나머지 유대감이 생긴 것이지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오가 기억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문제와 함께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제게 연락을 할 적이면 몇 번이고 그 사실을 상기했다. 뛰쳐가서 달래주고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어주다 먼저 끊거나 잠드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잠은 모두 깨버렸으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 그러니, 이제 다 괜찮을 거예요. 고통 받지 않을 테니까요. 평생.
그렇지만 이젠 아니다. 여기는 결국 인첨공이다. 도덕은 귀여운 사치품으로 거듭나는 곳. 직업 윤리를 이미 깨버렸기에 존재하는 거대한 도시. 그런 끔찍한 것들과 비교하자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는, 이 정도는 정당한 일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통보까지 마친 한결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태오는 그런 모습에 페트병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기더니, 한결의 지척에서 고개를 올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한결의 덩치에도 태오는 가만히 눈을 반개한 채 침묵을 유지하다, 대뜸 한결의 연구원증을 움켜쥐고 아래로 쭉 당겼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태오와 강제로 시선을 마주친 한결은 눈을 휘었다.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선생님. 감정에 휘둘리시면 아니 될 일이지요."
한결의 눈이 태오의 시선을 온통 삼켜버릴 듯 새까맣다.
태오는 한결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챌 수 없었다. 뭔가 읽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한결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어쩌면 제 무의식이 상황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스스로 지운 것일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을.
폭풍의 눈은 늘 잠잠한 법이다.
- 깨달음 - 한결🃏
시작은 조언이었다.
전임자가 길길이 날뛰며 당신도 그 악독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에게 당하지 말라며 뼈에 사무친 조언을 건네고, 몇 년 만에 다시 재회한 형이 네가 정말 연구원의 길을 제대로 걷고 싶다면 그런 말썽 많은 애들에게도 소홀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위로했을 적엔 꽤 걱정했다. 커리큘럼을 진행하는 목화고 연구원 커뮤니티에서도 제법 유명한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 학생은 문제아가 아니었다. 커리큘럼을 꺼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과묵하고, 정중하되, 배려심이 있었다. 싫은 모습을 보였지만 커리큘럼엔 늘 진심으로 임했다. 고분고분 커리큘럼에 따르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낼 적에는 누군가의 속내를 읽고 제멋대로 휘두른다던 전임자의 말과 달리 상처받은 몸을 드러내기 보다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 작은 학생에 불과했다.
스스로에게도 벽을 쌓고, 자신의 삶도 타인처럼 멀리 보며, 가시를 세울 힘마저 없어 세상의 거친 파도를 순응하며 휩쓸리는 가여운 아이. 큰 상처를 받고 이미 타고 남은 잿더미를 사람들은 조금만 파헤쳐 보고 기침을 하다 멋대로 악독한 것이라 판단하고 결단 지은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학생을 위하겠노라 다짐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지나치게 깊은 내담자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동시에 이 학생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어쩌다 이런 상처를 얻은 걸까. 그렇게 소장님께 학생에 대해 보고를 올리는 날 넌지시 물었고, 소장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옮긴 연구소에서 문제가 생겨 행방불명 되었던 아이라고. 그는 인첨공의 부조리하고 끔찍한 실체 때문임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인첨공의 어두운 곳에서 고통받던 아이. 언제부터 그 마음의 문을 닫았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나,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었음은 누구라도 잘 알았기에 시선이 계속해서 닿을 수밖에 없었다.
작게는 작품을 만들 때 드러내는 내면이나, 크게는 그 손짓, 이야기를 할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 상처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시선……. 잔잔하게 이야기를 꺼낼 적엔 메마른 입술을 한 번 달싹이고 그 끝에서 입술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고, 고민을 할 적에는 손가락을 들어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는 버릇이, 웃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맥이 빠지는 숨소리에서는 꼭 숨을 갈무리하는 버릇까지. 어느 순간부터인지 학생에게 집중했고, 서로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이 학생이 언젠가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고 내려두는 날이면 어떻게 될까, 저 잔잔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 어떨까. 괴로웠던 순간을 괴로웠노라 얘기하며 그 상처를 훌훌 털어내면 어떨까.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인첨공의 악의는 빛을 갈망하는 학생을 향했다. 저지먼트를 향한 시련이 계속되고,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어째서 학생이 행복해질 수 없게 두는 거지, 어째서? 그리고 학생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화를 건 순간, 한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빠졌다.
누군가를 갈망하면서, 드러낼 수 없으니 몽중의 자아가 대신할 정도로 망가졌구나. 그는 그날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신 있지도 않은 신에게 손을 모아 기도했다. 밤을 온통 새운 다음 날, 학생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죄 자르며 자해를 했으며 그 상황을 제 형이 발견했으니 어서 와서 수습을 도와달란 연락을 받았을 적, 그는 신을 향해 끔찍한 욕을 속으로 담아내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학생의 꼴은 엉망이었고, 병원에서 창백한 안색과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지켜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 악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죄다 치워버리고 싶다. 고통받는 학생의 앞길을 방해하는 저것들을 다……. 동생이라고 알려진 존재 덕분에 그는 한 차례의 균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 또한 학생이 제 입으로 시인했다. 그런 일을 만들 것이라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는 학생의 기둥이 되어주고 싶었다. 가느다란 손이 떨리면 잡아주고, 실컷 울고 난 후에는 얼굴을 닦아주고, 두려움에 몸을 떨면 안아주며 안정을 주고 싶었다. 꿈을 꾸게 만들고 싶다. 보호하고 싶다. 저 얼굴이 웃는 것을 보고 싶다. 고통받지 않게 하고 싶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을 적 옆에서 함께 걷고 싶다. 죽음을 꿈꾸는 저 아이의 죽음을 훼방놓고 싶다. 저 캔버스에 그리는 작품이 나였으면 한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아름답노라 속삭이고 싶다. 이따금 이유 없이 안으면 마주 안기를 소망한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울부짖으며 누구보다 나를 먼저 찾길 바란다. 매달려서 울기를 소망한다. 모두 털어놓기를, 그렇게 주변의 방해물을 모조리 치우는 명분을 얻고 싶다. 괴롭히는 모든 것을 밀어버리는 동안 그 눈을 가려주고 싶다. 귀를 막아주고 싶다. 누구도 괴롭힐 수 없게끔 영영 품에 가두고 싶─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거슬리게 굴면 치우는 방법이 뭐였더라?
악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널 지키려면 나 또한 악의를 품는 수밖에 없어서. 그것을 내 아버지와 형은 일찍이도 깨달았구나.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그는 동공과 홍채를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물든 눈으로, 성하제의 카페에서 태오에게 벌어진 상황을 담았다.
……그러니, 이젠 내 차례인 모양이다.
- 봄을 깨닫다🎴
성하제로 인해 안 그래도 시끌벅적한 인첨공이 한층 더 왁자지껄하다. 태오는 그 소란 속에서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학교를 빠져나와 인근 골목으로 들어섰다.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태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태오야."
아담한 체구에, 앙칼진 듯하지만 사랑스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태오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태오의 어머니인 화영이다. 태오는 손에 딸려온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온전히 뒤로 돌았다.
"저녁에 얘기할 텐데,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랬단다. 그때 얘기하지 못한 것도 있고."
태오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 어머니와 똑같은 자세였고, 두 사람의 인상이 비슷했던 탓에 누군가 지나치다 보면 모자관계구나 쉬이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
화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장장 13년 만이다. 남편과 사랑의 도피를 했으나 결국 궁지에 몰렸을 때, 아버님께서는 태오를 인첨공에 보내는 조건으로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남편과 화영이 기를 써서라도 반대했다. 그렇지만 예정된 거래의 파기 및 주가의 폭락, 기업의 이미지 훼손이 심하게 벌어졌던 책임을 묻고 더는 오갈 수 없을 만큼 몰려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부부는 눈물을 삼키며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매년 찾아오기로 했으나 회장, 그러니까 시아버님은 인첨공에서 태오의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된다며 그마저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15년 중 2년만 제 아들을 볼 수 있었고, 13년을 끔찍한 죄책감과 걱정에 매달려 살았다.
"……."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네 할아버지 때문에 만나지 못했단다? 보고 싶었단다? 다시 만나고 싶었단다?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해도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 닿기나 할까? 화영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태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더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태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화영을 보며 선을 그었다.
"돌아오지 못하실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태오야."
"인첨공에서는 초능력을 개발 받는다고들 하지요. 저도 커리큘럼 때문에 이렇게 머리랑 눈이 변한 거고요."
"……."
"저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 대다수는 능력이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 운 좋게도…… 상위에 드는 존재가 됐으니까요."
화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미 여섯 살 때, 저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할아버지 때문에 지킬 수 없겠구나 깨달았습니다. 제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태영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것도요."
태, 태오야."
태오는 화영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역하지요. 타인의 생각이나 읽으면서, 어머니께 진작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게." 이미 잔뜩 울상이 된 화영의 눈을 잠시 마주하던 태오는 느릿하게 걸어와 화영을 품에 안았다. 아담한 체구가 품에 온전히 들어온다. 한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적에는 마주 안고 싶어도 팔이 닿지 않아 한참을 바둥거렸는데, 지금의 자신은 장성하여 팔이 닿고 어머니를 이리도 쉽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고 덧없다. 한철 지나가는 삶의 흐름이 야속하다.
"그렇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인첨공에 오게 된 것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약속도 못 지키고……."
"……괜찮습니다."
화영은 화장이 번지든 말든 소리 내어 울었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에서 화영은 하염없이 울면서도, 불안하던 예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품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야 만났는데, 보내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13년 동안의 세월 속에서 홀로 서 떠날 준비를 마쳐버렸구나. 아이의 결심이다. 자신의 죄다.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보내주자고.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제 아이를 이대로 보내버리는 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오는 등을 한 번 더 다독였다.
"지금까지 책임의 짐을 짊어지셨으니 내려두셔도 됩니다. ……두 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며 화영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손수건으로 눈물자국을 쿡쿡 닦던 화영은 돌아가 남편에게도 말해 고이 보내주자고 생각했다. 동시에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머뭇거리다 입을 벌렸다.
"……학교생활은, 어떠니?"
"나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원수죠."
"다행이구나... 그리고……."
"네."
"아까, 그 사람은……."
태오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 감히 나 같은 것이 이름 석 자 입에 올리는 것이 천인공노할 행위일 나의 어머니. 저는 떠납니다. 먼 곳으로 떠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이라는 둥지에서 떠나고,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납니다. 나는 혼과 백으로 이루어진 보따리를 들고 작은 쪽배 타며 명의 길인 해로海路와 운의 길인 너울을 타고 종착지인 섬에 도달할 겁니다.
"……."
"네게 봄이 찾아왔구나. 그렇지?"
그곳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의 수많은 별과 같던 벗과 꿈, 동생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와 나만이 있습니다. 종착지라기엔 휑하지만 나의 마음은 편할 테니, 이것을 나는 낙원이라 칭하였습니다.
"예. 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아, 어머니! 봄은 덧없습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가 봄날의 꽃을 만개해 봤자 하루 만에 질 것을 나는 압디다.
"행복해야 한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예."
부디 그 사실은 어머니께서 모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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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양, 탈피한 그늘 아래
- 이간질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어. 거래처를 네 뚫어주길 바라는데."
태오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납득하고자 애썼다. 공원에서의 사건 이후 커리큘럼을 일방적으로 쉬어버린 한결과 4학구에서 벌어진 크리에이터의 민낯, 유니온과의 짧은 싸움,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은 타 세력과의 교전까지. 모두 납득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납득할 수 있다마는.
"아니죠."
지금은 납득해선 안 될 때였다.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존재인데, 나는 이제 독립한 하나의 객체인데……. 돌이켜보면 독립한 이후에도 제 주인의 의중에 휘말리되 자신은 그 순간을 한껏 이용했었다. 서로 그게 당연했다. 휘말려주고, 그 대가로 이용하고. 그렇지만 지금은 다시금 일방적이지 않나? 태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듯 휘청였다.
"아니야, 그건 수지가 맞지 않아. 아니야."
태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내가 아무리 돌아갈 가능성 농후한들 이래서는 안 됐다. 그런 태오를 내려다 보던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할까?"
─ 결국 도박수를 던졌어도 잭팟을 따낼 운명은 아니었던 게지.
"시, 싫……."
"네게 주어질 처벌을 이걸로 대신하는 거야."
태오는 우뚝 멈췄다. 저번에 처벌을 내리겠다 했던 것을.
"이걸로?"
"응, 고작 이런 걸로."
태오는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하지만 거래처는."
"아스트라페는 여전히 혼수상태, 네가 준 정보에 의하면 크리에이터는 수감중. 지금 아니면 힘들어."
"……."
"할 수 있잖아. 어째서 망설여?"
태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선언하는 것 같은 소리가 아득히 울린다. All in on me.
"착하지."
룰렛이 굴러간다.
어쩌면 총탄 하나만 있는 리볼버일지도 모르는 것이.
밀회는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의 끝무렵, 서로 웃고 떠드는 탓에 옆방의 이야기는 쉬이 들을 수 없는 보드게임 카페. 태오는 노이즈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앞의 사람은 눈이 마주친다는 것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를 어떻게 믿지?"
그는 20대 후반에 달하는 남성으로, 레벨 0의 무능력자다. 한때 주변과의 관계도 원활하며 촉망받던 미래를 꿈꿨지만 지금은 마땅히 설 곳이 없기에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인지를 돌고 있고, 지금은 미심쩍단 눈으로 눈앞의 학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설 곳이 없는 이유는 하나다.
"그분의 친서도 없잖아."
그는 한때, 태양을 신봉하는 열렬한 신도였기 때문이다. 인첨공 사상 최악의 테러단체인 솔리스는 태양을 신봉하는 사이비 종교로, 에어버스터로 인해 궤멸되어 남은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각 스킬아웃에 녹아들거나 수용소에 갇혔다. 여전히 태양이 다시 뜰 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한 태양의 아이를 위해.
"친서가 무엇이 중요한지요."
"대답하는 게 좋을걸. 나는 자리 뜨면 그만이거든."
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이건 지금껏 바깥으로 올라온 모든 노력을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들키면 혼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지 않으면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갈기갈기 찢겨 한 몸 유지하지 못하는 그런 끔찍한 일이. 그리고 그 찢기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생은 단 한 번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다. 그리고, 눈앞의 안타까운 내리막길 인생의 앞날도 약간. 혀가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 심상이 흔들린다. 불안하다. 두렵다. 잠깐, 두려워? 어째서? 회피하려는 무의식은 오히려 다른 본능을 충동질한다. 부조화가 몸을 잠식한다. 나는 저지먼트인데. 그래, 나는 저지먼트……. 나는. 왜 저지먼트였더라, 이런 일을 하면서 바깥에서 올라가 살고 싶단 열망 때문에 쥐었던 수단이었나? 태오는 그렇게 불안한 눈치가 노이즈 너머로 드러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침묵을 유지하다 눈을 감아버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올라와봤자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굴 깊은 곳이 안전했다. 지금처럼 어중간한 선악의 선 위에서 양심을 재어보고 끝없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들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정명하지 못한 곳에서 언제부터 선악의 귀추가 있었나요."
태오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테이블에 얹더니 남성을 향해 밀어냈다. 녹색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코뿔소 문양은 태오가 현재 어디 소속인지 알려주고 있었지만.
"바다에게 빼앗긴 선지자를 구하고 싶지 아니한가요……."
"……이건 또 흥미로운데."
입만큼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눈치로 자신을 보는 남성을 향해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자, 노이즈가 일부 걷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 영원불멸한 태양 아래에서…… 함께 빛나야 했던 성자 하나를 떠나보내지 않으셨는지요. 인간의 손에 말입니다."
"!"
"성자를 떠나보내게 만든 존재들이…… 감히 선인의 탈을 쓰며 선지자를 현혹하고 속세로 들여보냈으니 어찌 부덕하지 않으오리까. 그렇지요?"
뱀 닮은 눈이었다. 영영 승천하지 못할 구렁이의 눈이자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득한 것의 눈이었다.
"결국 그 사람들이 선을 먼저 넘은 거랍니다…. 태양의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 세상에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누구의 탓인가요…… 격차를 벌이게끔 주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건만, 혀를 놀려 선지자는 이미 홀려버리고, 우리의 대리인은 고난 속에서 안티스킬이란 악마의 손아귀에 잡혔다 사라졌지요. 가여운 선지자와 대리자……. 누구도 부덕한 이단의 손에 더럽혀지면 안 될 텐데. 다행스럽게도 이단 하나는 처리했다마는, 완전한 것이 아니니 언제라도 다시 나타나 선지자에게 속삭일지도 모르지요. 태양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고."
"아니, 태양은 영원불멸하지. 그래야만 해."
"네, 그렇지요…… 그 사람들의 탓이요,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겠나요. 그러니 내 말을 들으란 거예요. 태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계를 위한 초석이 될 준비가……."
"내가."
"네에."
"무얼 하면 되는거지?"
태오는 노이즈 속에서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그래, 흔들린다. 이럴 때 쐐기를 박아야 함을 안다. 속내를 읽고 있으니 쥐어 흔들 지금의 순간이 몹시도 중요함을 안다!
"선물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어라.
신을 빼앗긴 신자는 기도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는 성전의 때가 돌아옴을 시사함이요 여전히 인간은 뱀의 간교함에 넘어갔음이라. 대리자께서 이르시되 길 잃은 어린 빛무리는 들어라, 너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하며 극야의 때가 지고 백야의 때가 돌아올지니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금 모여 낙원을 위해 비파를 켜고 소리 높여 찬송하여라 하시니 이에 신도들은 기뻐하며 찬송하더라.
저지르고 말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해야만 했다. 나의 앞날과 그 사람의 앞날 약간을 위해서. 들키면 어쩌지? 정명하지 못한 곳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다지만 이번 일은 궤를 달리하지 않은가, 바깥으로 나와 그럴 일 없을 것이라 말했으나 정면으로 반하는 일! 태오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무언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첨공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의 삶에선 당연한 일이었나? 손가락을 한 번도 이렇게 부산스레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요란했다.
"거래를 제법 성공적으로 마쳤더구나."
"……."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단다. 네가 성공할 거라 믿지 못했거든……."
"어째, 서죠."
"네가 바깥에서 살고 싶다고 내 뒤통수를 쳤으면 그만큼 인간적인 면이 남았단 뜻일 텐데, 이번 일은 그걸 정면으로 반하는 거니 말이다."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부정하듯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아니다. 나는 아직 인간이다. 당신과는 달리 이 바깥에서 적응할 수 있는 인간. 그렇기 때문에…….
"글쎄요, 사람이니까요……."
"사람 새끼면 이런 일 못 한다. 어떻게 사람이 미친 종교인들이랑 접선해서 무기상을 연결해주겠니."
"사람 새끼라니까요."
"안승환 그 작자가 채운 목줄이 답답하면서. 너도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잖니."
분명 서휘의 속을 읽는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속내를 읽히는 것만 같았다.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스스로의 행동이 모순적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결 선생님을 압박하여 그 속내를 들어버리고, 어떻게 무너질지에 대한 계획도 세운 주제에 지금은 하나 일을 마쳤다고 겁에 질렸다.
"실은 알고 있으면서."
머리의 피가 모조리 식는 것 같았다. 태오는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머리 속이 백지처럼 단숨에 새하얘지고, 이 다음에 벌어진 일을 태오조차 알지 못했다. 단차가 있는 소파에 앉은 태오와 달리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던 서휘는 태오의 행동에 짧은 웃음을 뱉었다.
"태오야."
"……."
"역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으로 하여금 행복해지면 안돼……."
뺨을 스치는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에서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환희와 순수한 호의,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희열까지. 손에 뺨을 맡기며 태오는 눈을 반개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나는 숨결 사이로 당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수벽의 경계에서도 모든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신의 속내를 입 바깥으로 듣고 싶지 않아 이리 저지른다.
"그렇다고 불행해져서도 안돼. 그래, 타인을 통한 게 아니라 직접 쥐어야지, 행복도 불행도. 우리는 지나치게 오만하니, 결국 그럴 수밖에 없을 삶인게야. 그렇지?"
"……."
"그러니 숨 쉬는 게 좋을 게야."
삶에서 낙조의 스밈이 막을 내리고, 몰각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망막에 비친 해가 지지 않는 것 같다. 새빨갛고 균열이 일어난 태양이. 시야가 명멸한다. 눈이 멀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았으나, 떠있는 해가 사라질 일은 없으리라.
태오는 결국 바들바들 떨리는 숨을 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날, 화장실에서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먹은 것이었을 덩어리가 쏟아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흘렀다. 두 번째로는 속이라도 진정시키고자 마셨던 물이었다. 먹은 그대로 다시 목을 타고 울컥거리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세 번째는 빈속이었다. 네 번째는 빈속이었고, 다섯 번째도 빈속이었으며, 여섯, 일곱…… 모르겠다. 태오는 아예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으레 보이던 증세였다. 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자주 이랬지만 한 번 다녀오면 노이즈에 가려진 덕분에 사람들이 안색을 보지 못해 모를 뿐이다.
"……."
담즙까지 쏟아내 이젠 나올 것도 없다. 지친 나머지 차마 입에 고인 희멀건 위액을 뱉어낼 수 없어 그대로 뚝뚝 흘려내기를 택했다. 반쯤 감은 눈과 함께 태오는 생각했다. *발. 지금 상황에서는 걸쭉한 욕설 빼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발, 이 *같은 몸뚱이. 단 한 번도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도 엿 같은데, 몸도 단 한 번을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가 없으니 속이 다시금 뒤집히려는 것 같다. 아니, 뒤집혔다. 태오는 부들거리며 다시금 토했다. 시큼한 위액 때문에 목이 헐어버린 것 같았다.
저질렀다. 저지르고 말았다. 나리와의 접선을 끝낸 솔리스의 신도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데 마레를 뒤집어엎었다. 다른 신도를 앞세운 호버 택시 한 대가 데 마레로 돌진했고, 이 과정에서 연구원 셋이 다치고 한 명이 중태에 빠졌다. 신도는 이후 연구소에서 자폭했다. 단단한 얼음으로 벽을 세운 스카디 덕분에 인명피해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과호흡 증세를 일으키다 쓰러진 이후 사람만 보면 비명을 지르고 숨는 통에 독방에 옮겨졌다. 2학구에서 벌어진 호버 테러는 다시금 인첨공 최악의 테러 단체였던 솔리스의 악명을 상기시키기 충분했고, 당시 피해자 신분으로 연루되었던 데 마레가 어떻게든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막았던 이야기가 끌려 올라왔다.
"*발…."
연구자금과 기밀을 빼앗겼다더라. 데 마레가 피해자긴 했지만 부소장 자리를 노리던 연구원인 윤 씨의 행동을 정말 몰랐겠는가, 인첨공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꼬리를 자른 것은 아닌가……. 근거와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소문은 퍼지기 시작했고, 데 마레는 한시적으로 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나날이 들이닥치는 기자를 막기 위함이라지만 2학구의 사람들은 알았다. 악재와 악재를 거듭한 탓이었다. 경호원 아스트라페는 혼수상태며, 희야는 폐쇄병동의 독방에 있고, 승환이 이 모든 것을 떠안기엔 지나치게 큰 심적 부담이 있었을 테니, 그간 데 마레가 쌓아온 선행과 미덕 덕분에 이미지의 손실은 없지만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떠드는 것을 좋아하니 아마 잠잠해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누구도 그 뒤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고. 아마 누군가 양심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평생 모르겠지. 태오는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색색거리는 숨을 뒤로 얼마 안 있어 태오는 다시금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토했다.
"윽, 으-"
내 탓이 아니다. 이는 업보다, 모든 재앙은 자신이 한 걸음씩 내딛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 아닌가? 나는 그들과 걷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업보다. 나는 그저 살짝 떠밀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결백하다. 속내를 방금 읽었는데 실로 결백하다 느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우욱-"
더는 생각할 기력도 없다. 희멀건 위액이 다시금 쏟아졌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눈에 고인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떨었다.
"일반적으로 해당 환자의 면회는 금지인데, 그래도 레벨 4에다, 저지먼트니까요…… 이번만입니다. 아시겠죠?"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받아 1인 병실로 이동했다. 폐쇄병동에서 그나마 빠르게 안정을 찾은 희야는 이제 박 교수의 병원 1인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 대하는 걸 두려워하며 비명을 지르지만 무작정 공격하는 단계에서 많이 낮아진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아 희야의 몸이 성치 않았던 탓도 있다. 태오는 병실에 도착해 눈치를 보는 간호사를 향해 이제 들어가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고, 간호사는 노크를 하며 기다리다 대답이 들어오자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병문안을 왔는데요……."
"……사람?"
"네, 환자분 친구라고 하시는데, 괜찮을까요?"
"누구?"
태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희야는 새하얀 눈을 홉뜨더니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다 태오에게 호출 버튼을 알려준 것을 되새기며 자리를 떴다. 병실 문이 닫히고, 태오는 망설임 없이 희야에게 다가가 의자를 끌어오더니 자리에 툭 앉았다.
"네가 무슨 낯으로 왔나요."
"왜, 오면 안 돼요?"
"네가 벌인 일이잖아. 이 개*끼야."
"네 그걸…… 어찌 확신할까요."
태오는 희야의 눈을 마주했다. 눈을 마주치는 걸 전혀 꺼리지 않는 것은 자신도 동일한 눈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마주했을 때 읽어낸 희야의 속은 놀랄만큼 차분했고, 확신이 있었다. 방 온도가 삽시간에 내려가고, 태오는 살얼음이 끼는 손을 보며 눈을 흘겼다.
"너 아니면 누가 해?"
"미안하지만 손 뻗을 자는 널렸지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요. 어떻게 그때처럼 호버를 몰고 왔냐고. 기술력도 없을 텐데, 네 손이 닿았노라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아니, 이상했어. 어째서 내 개가 아직까지 사경을 헤매는지, 그 이후에 이런 일이 터지는지. 너 아니면 누가 하냐고!"
"……희야야."
역정을 내던 희야는 태오의 부름에 눈을 부릅 떴다. 왜. 어린 목소리 치고 살벌하던 기색에도 태오는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혜우 안 건드렸어.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
"그게 여기서 왜 나와."
"남이라고. 내가 왜 너희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말을 해야 하나?"
태오는 눈을 휘었다.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희야는 첨예한 고드름으로 막아세우려 했으나, 정작 손찌검은 없었다.
"안희야, 결국 너도 다른 인간과 같아요."
"하?"
"내가 과거를 청산했다 말해도 믿지 않는 주제에, 네 과거가 청산될 거라 믿나요? 그 고매하신 솔리스의 단장이?"
손으로 입을 곱게 가린 태오의 입매가 휘었다. 흔들리는구나. 그 모든 것이 숨결로 느껴졌다.
"경이로운 자니 기적의 아이니, 만인이 떠받드는 선지자는 무슨……. 남에게 한 큐빗의 시야를 가졌노라 떠든 주제에 결국 시야 좁은 것은 너였구나 싶어요. 세상을 부정하며 네 책임을 남에게 덮기 급급하니 내 도움을 주러 왔으나 필요가 없겠어."
"……그럼 네가 아니면, 누군데?"
"……."
"누구냐고."
태오는 눈을 내리 깔았다.
"누구냐고!!"
"추측일 뿐이에요."
"말해. 추측이라도 좋으니까 네 결백을 증명해."
"……최근 4학구에… 네 곁에 있던 그 녹색머리 남자가 자주 드나들던데요."
"스트레인지 사건을 조사한다고 했어."
"……윤찬혁 그 사람이 4학구에서 멀쩡히 활동중인 건 알고요?"
"뭐?"
"스트레인지에서, 불법 커리큘럼으로 먹고 산다고……."
뱀은 본디 아가리를 벌리면 두 갈래로 분열된 혀를 내밀어 제 간교함을 증명하는 법.
"…그리고 안티스킬 하나를 매수했다는 소문이 스트레인지에 파다해요."
나가."
"……내가 추측일 뿐이라 했잖아."
"나가!! 내 개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네 말 안 믿어, 안 믿어, 희야는 절대 안 믿어……."
"실로 안타깝지요."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희야는 태오가 문을 나서기도 전에 대성통곡을 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그 모습을 잠시 훑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감정이 제법 빨리 돌아왔네. 데 마레 탓인가."
태오는 그 속에서 분열의 싹이 텄음을 알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일 터다.
"마레가 어떻게든 하겠지."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 실종과 균열
태오는 눈을 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던 탓도 있으나 누군가 계속 연락을 보낸 잠이 깼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있어도 계속 보낼 사람은 없었기에 부스스 일어난 태오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저지먼트 단톡방 알림을 꺼버린 지 오래지만, 개인 알림은 미처 끄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 서성운 약 2통 남짓, 안희야 7통, 저지먼트 톡방 메시지 약 30개, 안희야 개인 카톡 50개……. 그냥 읽음 처리를 해버릴까 싶었던 태오는 희야의 개인 카톡을 눌러보기로 했다.
<{너 당장 마레로 와}
<{혜우가 실종됐다는데 계속 씹어?}
<{어디야}
<{어디냐고}
<{대답하라고 씨*}
<{너지}
<{왜 안 받아}
<{너지?}
머리에서 피가 식는다.
문 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2학구는 끔찍하게 여겨 발도 들이지 않는 곳이다. 역겨운 곳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던 태오가 데 마레에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태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급히 걸친 점퍼는 계절에 맞지 못했고, 머리는 뛰어왔는지 바람결에 엉망이 됐다. 식은땀과 함께 경호 인력을 밀치듯 들어온 태오는 입구 근처 라운지에서 희야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계속하다 고개를 번쩍 드는 것을 마주했다.
"소장님은."
"……영락."
"……인사는 못 드릴 것 같군요."
"누가 인사가 필요하대요? 이 상황에서?"
희야는 황당하다는 듯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혜우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 메시지가 떴고, 삐 소리가 나며 녹음을 시작했다.
"너 솔직히 말해요, 연락 안 받고 뭐 했어?"
"피로하여서 눈 붙였어요."
"장난하지 말고, 또 스트레인지 다녀왔어요?"
"기실이에요. 카페 일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씻고 눈 붙였-"
"네 짓은 아니고?"
"뭐?"
"네가 하던 일이 그거였잖아, 누구 데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아니라고 해도, 돌아가는 길에 배웅이라도 해줄 수 있잖아, 그렇잖아! 같이 일을 해놓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못 느꼈어요? 너 감 좋잖아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서성운 걔가 어련히 같이 갔을 거라 믿었지."
"성운이가 아니더라도 연락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지금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정신 좀 차ㄹ-"
"그럴 사람이 아니면 왜 가족이라고 해? 데 마레 출신인 것도 부정하면서!"
안다. 희야는 단순히 탓할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 투정을 잘못된 방법으로 부리는 것이다. 태오는 그 사실을 이해한다. 희야는 자아를 찾는 동안, 어린 시절을 투영하며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동시에 부정했다. 희야는 별생각 없이 탓할만한, 필요한 악을 찾았겠으나 태오는 자기 자신을 필요한 악으로 삼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탓함 당할 만한 악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 이후로는 악한 자로 남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희야가 소리를 높이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고, 지나치는 연구원 중에서는 한결도 있었다.
"……."
"혜우가, 혜우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그러면서 지금 상황에서 잠이나 잤다고 하고- 네가 진짜 가족은 맞아?! 지금이라도 같이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올 때 전화는 해봤어요? 아니면 부실 카톡은 확인했어요? 아니면, 아니면- 적어도- 으, 으윽-"
하물며 제 동생이 사라졌다는데, 그것이 자신의 탓이노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 태오는 입을 벌리려다 다물었다. 네게만 가족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도 찾겠다, 돕겠다, 나는……. 내가 그럴 자격이 어디 있다고? 연락도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날 보아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나를. 아무리 투정이라 한들 현실이 내포됐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탓할 사람을 찾지만 서로가 아니라 나를 집지 않던가. 내가 그리도 어리석다고 말해주지 않는가. 겉치레에 불과함을 깨닫게 하지 않던가. 결국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2학구의 유일했던 안식처도, 이 바깥 또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네 말이 옳아요."
"그러면 너-"
"가족이 아니지. 그 사실을 진작 말했어야 하는데."
"현태오!!!"
태오는 형용하기 어려운 눈으로 희야를 마주하더니 자리를 휙 떠났다. 희야는 태오를 붙잡으려다가도,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자 씩씩대던 것을 천천히 줄여가더니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홉떴다.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희야가 말하고 싶었던 건."
- 제가 해결할게요. 혜우 학생을 찾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세요.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태오는 이미 건물을 빠져나간지 오래였다.
태오는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핸드폰의 모든 연락을 확인했다. 다들 어떻게든 찾겠다며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레벨이 낮든 높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태오의 표정은 점차 차갑게 굳어갔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았으니까. 성운이 보낸 메시지와 영상까지 확인한 태오는 골목 초입에서 멈추더니,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난 무얼 할 수 있지? 뭘 할 자격은 있나? 태오는 손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덮어 가렸다. 그리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 얼굴을, 이 뻔뻔한 인두겁을 뜯어버리고 싶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 제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악한 자로 남으라며 세상이 등을 떠밀기만 한다. 하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지금껏 피하기만 했다.
"……."
태오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곱씹어 보니 나는 그간 대못만 박았지 아니한가. 안일하게 떠맡기지 않았나. 그래놓고 아직도 고민만 하고 있으니 이런 자신이 새삼 우습다. 심호흡 한 번에 부정적인 온갖 생각들이 치고 올라온다. 종착지는 차라리 올라오지 말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일했던 순간을 그리워할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내가 순응했어야 하는데. 어찌 되었든 내 인생은 내리막길임이 뻔했는데, 무엇하겠다고 내 죄를 피하고자 그런 도박을 해서, 내 운명을 걸었을까. 도박의 말로는 거듭되는 끔찍한 패퇴뿐인데.
누군가 근처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에도 태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무상하다. 언젠가는 흐려지고, 역사에 각인되는 자는 따로 존재하나 그것이 나는 아니다. 타인이 나로 인해 불행해진다면, 내가 떠나는 게 옳다. 째깍, 하고 멈춘 시간과 결심이 움직인다. 음중이 가고 잿빛 도심에 설국이 도래하는 날, 아니, 차라리 지금……. 모두 포기해버리자. 어차피 될 일 없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돌아가서…….
"……."
- 찮, 아요. 괜찮아…….
태오는 품 속에 갇히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살갗을 찢는 것 같던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던 골목 속의 공기가 낯선 심상의 소리를 가진 누군가의 품의 온기 덕분에 사라진다. 태오는 시선을 올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결은 태오를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달래주려는 듯 연신 괜찮다 속삭였다.
대체 무엇이 괜찮다고?
동생이 사라졌다는데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는 주제에, 놀라지도 못하고 지금 이렇게 찾아다니려는 노력 하나 보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이 괜찮다고, 이 이기적인 모습이 대체 왜 위로를 받아야 하느냐고. 차라리 대성통곡을 하는 희야를 달래주지,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태오는 혀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여러 단어를 간신히 삼켰다.
"……."
몇 번이고 등을 토닥일 적, 태오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 너머로 드러난 초점을 잃은 눈은 골목 속 어둠만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자신을 안은 품의 심장의 박동이 익숙하다. 병실에서 느꼈던 것과 온전히 같고, 상황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것 같다. 그렇게, 한참 인형처럼 품에 가만히 안겨 침묵하던 태오는 나지막이 입을 벌렸다.
"…소유하고자 하면 불행할 뿐입니다. 저는 놓고자 하는데 어찌 미련을 가지십니까."
태오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개를 돌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달싹이는 입술의 모양을 읽었다.
- 불행이 있기에 행운이 있기 때문이에요.
"낙관적이군요."
- 제발 희망을 놓지 말아요.
"언제부터 희망이 있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태오는 시선을 피하듯 눈을 굴리며 한숨에 가까운 조소를 흘렸다.
"여기는 인첨공입니다."
- 희망이 있을 수도 있죠.
"어떻게 말입니까, 데 마레와 아니무스가 말하는 학생 친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법으로 내가 뭘 합니까. 어차피 나 하나 없어도 저지먼트가 알아서 할 텐데, 내가 희망 가져봤자 무엇 하냔 말입니다."
"……."
한결은 까만 눈을 마주했다.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시선을 뒤로, 한결은 태오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외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태오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한결의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바람과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골목의 깊은 어둠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
세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 사람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는 걸 통해 다시금 뼈저리게 일깨우는구나.
태오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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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목, 금수의 설면 위
- 승천
- Warning!자살사고 및 직접적인 시도에 관련된 묘사.
태오는 달각거리며 여러가지를 내려놓았다. 손목시계, 안드로이드 칩, 장신구 몇 개…… 스트레인지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여성은 끌끌 웃었다.
"요즘 도박쟁이들 많아져서 전당포가 호황이야, 호황."
"그렇군요."
태오가 마지막으로 꺼낸 것을 슥 밀어주자 여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으잉? 하는 소리 뒤로 각종 생각이 물밀듯 들어온다. 이게 왜 여깄지? 아니, 이걸 왜 맡기자? 이거를? 놀랄 노자구먼, 어떻게 이게 여기에…….
"아니, 이건……."
"이거는…… 의뢰. 팔아줄 사람이…… 필요하답니다……. 가급적이면 추적이 붙지 않았으면 하고요……."
"청년은 이걸 빼도 지금 준 것만 셈쳐도 아주 큰 돈을 받을 텐데, 올인이라도 할 생각인가?"
"크게…… 걸어봐야지요……."
"……내 실은 여기 오기 전에도 전당포를 했었어. 손님들을 아주 많이 봐왔단 말이지."
여인은 안경을 고쳐 썼다.
"청년, 물건들 찾을 생각이긴 한감?"
"……."
"……남이 찾아주러 오는 건 말리지 않아. 그렇지만 내 노파심에 말하는 거야. 찾을 생각이긴 한가?"
태오는 그저 미소 지었다.
"운이…… 나쁘면요."
"……정 바란다면 대박나길 바라지."
"감사해요."
안타깝게도 전당포에 맡긴 물건은 며칠 지나지 않아 남김없이 소포로 돌아왔다.
"……."
태오는 그저, 소포를 뜯어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그저 미소 지었다.
화영은 자신의 남편에게 연락했다. 중섭은 학교 밖으로 나와 빠르게 장소에 도착했다. 자신의 아내 말을 무엇보다 존중하는 태도가 이런 사소한 것에도 느껴졌다. 중섭을 올려다 본 화영은 화장이 지워지고 눈시울이 새빨갰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표정만큼은 평온하던 아내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중섭은 손수건을 꺼내 화영의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고, 허둥대다 고개를 들었다. 손을 모은 태오가 있었다. 태오의 가슴팍에 번진 화장과 눈물 자국을 본 중섭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하고는 화영을 내려다보았고, 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잠시 대화를 해요."
"여보, 그러니까……."
"태오랑 얘기해야죠, 우리…."
"태오야."
태오를 마주했을 적, 중섭은 알 수밖에 없었다. 깊게, 가슴 속에 묻어두며 한참을 그리워하고 죄책감으로 품은 아이를 보내줄 때가 됐다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없다. 무슨 낯으로, 부모라는 존재가 13년을 내버려둔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인가? 무책임하다. 그리고 아직 미련이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하고 싶었다. 마음 같으면 경영진에서 물러나고 아이를 위해 인첨공에 발을 들일 수도 있을 만큼, 중섭 또한 태오를 아꼈다. 하지만 태오는 그 모든 마음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3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태오는 허심탄회하게 속을 뱉어냈다.
"저를……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할아버지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하지만…… 이젠 태영이가 있으니까, 사실상 나는 필요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구나……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게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동시에 그럴 분들이 아닌 걸 알기에 기다렸습니다."
"태, 태오야."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듯…… 지금까지 책임의 짐을 짊어지셨으니까, 두 분의 잘못이 아니니까…… 내려두셔도 됩니다."
태오는 갈라진 목소리로 얘기하다 중섭을 마주했다. 중섭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그럴 수 없다 눈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를 떠나게 두겠니. 응? 네가,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가 외면하는 건데……."
"저는 현 씨의 이름이 없어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태오는 눈을 감았다.
"제겐 이제 친구도 있고, 좋아하는 것도……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4학구에, 다녀오셨다고요."
"그래, 다녀왔지……."
"레이브의, 작품은, 어떠셨나요?"
"경이로웠지."
"두 분께도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에요. 노력했거든요."
중섭과 화영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여기에서 꿈을 찾았습니다. 혼자서도, 열심히 살았어요. 앞으로도…….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마주하겠지만, 마음에서는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이른 독립을 하는 거니까요."
"태오야."
"……예."
"이리 오거라."
중섭은 태오를 꽉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화영 또한 두 사람을 안았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뺨을 쓸어주고, 등을 토닥이는 두 사람의 손이 따스하다.
"벌써…… 벌써 어른이 됐구나."
"……."
"그간 혼자 살아가며 많이 힘들었지."
"……."
"살아줘서 고마워. 우리 태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그렇게, 매일 작은 아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미안하구나, 미안해…."
"괜찮아요. 두 분 잘못이 아니니까."
"행, 행복해야 한다…… 알겠지……? 우리, 우리 태오. 끝까지 행복해야 해. 엄마랑 아빠가 자주 찾아올 테니까. 응?"
"……네. 행복할게요."
한 걸음, 나는 첫 걸음을 뗀다.
그저 미소 지었다.
교내 연구원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다. 연구원 중 8명이나 커리큘럼을 포기했던 문제아가 요즘 들어 커리큘럼을 고분고분 따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었다. 연구원들은 그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속을 아무렇지 않게 읽고, 가끔은 그걸 내뱉으며 먼저 커리큘럼을 그만두고 싶노라, 혹은 하지 않겠다 말하는 괘씸한 녀석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신들이 사표를 낸 것을 알지만 동료 의식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데 마레 산하의 함묵증 연구원에게는 꼼짝을 못 한다더라. 데 마레의 테러 이전에 발생한 커리큘럼 무단결석은 까맣게 잊은 사람들은, 테러 이후 공백기를 가졌다가 다시 출석하는 녀석을 보며 제각기 쑥덕였다. 저게 과연 정신을 차렸을까? 흥미로운 주제는 가끔 연구원들이 가지는 술자리에서도 오가곤 했다.
그리고 오늘, 교내 연구원들은 확신했다. 변했다.
저것이 품행을 바르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거늘 그리도 변했다. 연구원을 마주하면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이따금 다른 연구원이 호출하면 군말 없이 가 연구 진행의 위대한 발판이 되었다. 태오가 레벨 4가 되었을 때, 가로채기 방법으로 이시미라는 끔찍한 이명을 붙인 연구원은 불신 끝에 질문했다.
"무슨 꿍꿍이지?"
"……졸업을 무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네까짓 게? 무슨 염치로?"
"책임감을, 이제야 느꼈을 뿐이지요……. 그간 제 품행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하, 네 주제를 깨달았다 그건가?"
"예. 제가 그간……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좀 얌전하군. 들어가라, 한결 선생이 기다릴 테니."
"예."
그리 답하며 태오는 커리큘럼실로 들어갔다.
- 어서 오세요, 태오 학생.
"……."
- 오늘은 어땠나요?
"늘 그러하듯, 사고가 있으나, 안온한 하루였습니다."
- ……영락의 혜우 학생 이야기군요.
"예. 하지만…… 모두 끝났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찝찝하긴 하다마는, 인첨공이니까요……."
- …학생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무사할 수 있게끔…… 노력해보겠습니다."
당신 덕분에 깨달았거든요.
한결은 생글생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간의 안부를 묻고,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며, 고문이라곤 일절 없는 편안한 분위기의 커리큘럼을 빙자한 상담. 태오는 한결과 눈을 마주했다.
- 요즘 커리큘럼에 자주 나와줘서 기뻐요. 어떤 바람이 태오 학생을 움직이게 만들었는지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별 이유는 없습니다. 다들 행복해지고 싶다면서……. 제각기 분투하고 있는 것에…."
- 네에.
"흥미를, 가져서요…….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여…… 일단은, 그러니까, 따라 해보고… 있습니다. 이젠…… 극복할 것도 있고……."
검은 눈을 마주할 때, 태오는 책상을 짚은 손을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고이 덮었다. 한결은 움찔 동요하더니, 입술 안쪽 살을 자근 깨물다 천천히 손을 뒤집어 깍지를 끼듯 감싸 쥐었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이 손이 나의 무력함을 증명했다.
- 장난이 심해요.
"선생님은…… 잘 받아주시는 듯하여……."
- 정말이지.
"어찌 되었든, 요점은…… 나 또한 행복해지고 싶다……겠군요…. 네, 그렇지요…….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혜우도, 희야도…… 모두 행복하니까, 이젠 내 차례겠구나 싶어서, 실은."
태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열등감이, 느껴집니다. 나는, 나는 왜 행복해질 수 없었던 걸까 하여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면서, 남들은 다 쥐는 걸, 나는 왜 갖지 못하나 싶어서……. 추잡하게 질투하고, 부러움에 손을 깨물고, 그러는 것도 이제는 지쳐서."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 태오 학생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아물어갈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상처가 난 곳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하지만 태오 학생이 질투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만큼, 나아지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단 거니까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한결은 깍지를 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안절부절못하던 태오는 한결의 온기에 가만히 눈만 감았다.
- 그러면 오늘은…… 오랜만에 바닥에 다리를 붙여볼까요? 그리고 내가 여기 앉아있다는 사실을 느껴보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구나, 나는 여기에 있구나를요. 오늘부터 새롭게, 내 삶을 느끼는 거예요.
"……예."
발붙여도 섞이지 못함을 압니다.
태오는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한결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결은 마찬가지로 손을 놓아주지 않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아, 이상, 하네요."
- 뭐가요?
"이제…… 크게, 불편하지 않아서……."
- ……정말인가요?
"네…."
- 잘 됐어요, 점차 좋아질 거예요, 이것보다 더……!
"그럴까요……. 그리하였으면, 좋을 텐데요. 이런 감각이, 낯선 나머지."
- 괜찮아요. 좋은 과정이니까……. 축하해요. 태오 학생.
"……저."
- 네?
"축하의 의미로, 염치없는, 부탁을 하여도 될지……."
-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태오는 머뭇거렸다.
"한 번만, 안아주셨으면 하여."
- …….
"역시 무리였을, 까요.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라……."
- 제가…… 학생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 손 놓지 말아요.
두 걸음 더, 나는 걷기로 했다.
그저 미소 지었다.
희야가 태오를 먼저 찾아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태오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연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희야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희야는 고개를 먼저 들었다.
"몸은… 좀 어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혜우를 구하다가…… 다치진 않았나, 해서."
"네에, 번잡한 가족 놀음에…… 어울리고 있던 새끼가 답지 않게 다칠 뻔했지요……."
"……."
희야는 태오를 바라보다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고 얘기하는 것에서 여러 소리가 들려온다. 사과를 하고 싶은데 받아주지 않을까 겁을 덜컥 집어먹은 감정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심한 말을 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끝없는 죄책감과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소리……. 희야는 더듬거리며 입술을 뗐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는……."
"……괜찮아요."
이젠 아무것도 신경 안 써.
태오는 손을 뻗었다. 희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태오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너의…… 자아가 온전하지 못함도, 그리고 그때 위로를 받고 싶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미, 미안해…… 정말로, 그,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괜찮아. 그때 많이 놀랐지. 이젠 다 해결됐으니까……. 요즘 몸은 어때, 아프진 않고?"
"우, 우으, 우우우……."
희야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다가도 이내 후드득 흘렸다. 태오는 괜찮다는 듯 머리를 토닥이던 손을 떼며 눈가를 쓸어주었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희야는 소매 속에서 끝이 푸르스름한 손을 꺼내곤 이내 제 눈물을 벅벅 닦았다. 그렇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이처럼 소리를 높여 울었다. 태오는 푸른 손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다, 괜찮다는 듯 희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는 대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손은 서로를 벼랑으로 떠밀었다.
"희야가 잘못했어- 태, 태오도 좋은데, 혜우도 좋은데에, 가족인데 험하게 말해서 미안해- 허어엉-"
"울지 마…… 괜찮아, 뚝. 다 괜찮아……."
세 걸음 더, 걸어간다.
품에 안겨 엉엉 울던 희야는 한참을 더 울더니 히끅! 소리를 내며 눈물을 삼켰고, 태오는 등을 토닥여주며 희야가 눈물을 그칠 수 있게 도왔다. 그리고 서로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화제를 돌리듯 희야는 눈을 설설 피했다.
"……있잖아, 그게."
"응."
"……이제, 태오는 안 아파?"
"안 아파."
"정말?"
"응."
"……그러면, 데 마레는 올 거야?"
"그건 모르겠어. 아프지 않아도 선뜻 몸이 움직이지는 않아서. 왜?"
"그러, 그러니까, 우리 개가."
"…개?"
"태, 태휘 말이야."
"아, 네 경호원……."
"눈, 떴거든. 소개, 해주고, 싶은데……."
"……아, 그렇구나. 축하해, 새 가족이 생겼네. 형부라 불러야 하나."
"아니야 이 바보야!"
아, 이건 변수인데.
그저 미소 지었다.
절그럭, 절그럭, 스윽, 절그럭, 철퍽, 절그럭, 끼익, 절그럭…….
***
"그래서, 전당포에 물건은 왜 팔았니?"
희야를 달래주고 2학구로 보낸 뒤, 태오는 카페에서 서휘를 마주했다. 물어볼 것이 있다며 자신을 호출한 탓이었다. 태오는 군말 없이 카페에 들어섰고, 겨울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름에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즐기던 것과 달리 오늘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답지 않은 일이었다. 따스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적 들려온 질문에, 태오는 잔을 내려놓으며 느껴지는 잔열이 날아가지 않도록 손을 모았다.
"이사를, 가려고…… 했답니다."
"이사?"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에 넘치는 것 같아서…… 자잘한 물건은 모두 팔고, 다른 건…… 버리고 새로 소박하게…… 살고 싶었답니다. 다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나머지……."
"…그런 거짓말이 내게 통할 거라 보니?"
서휘는 중지를 들어 툭, 툭,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두들기고 있었다. 무언가 고민하거나 결단을 내리기 전 으레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거짓이 아니에요…… 또래와 어울리며…… 지금 집이 학생인 내게…… 어울리지 않는단 것을 깨달았거든요."
태오가 혼자 사는 집은 3학구에서도 내로라하는 펜트하우스였다. 방음도, 보안도, 하물며 편의시설도 대단한 철옹성 같은 곳. 이른 나이에 자취를 하는 여타 학생과 달리 태오의 집은 어른도 쉬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네가 레이브로 일하며 벌어들인 수익의 정당한 값이잖니."
"타인 보기엔 미덥지 아니할 듯하여……."
"금수저니 뭐니 하는 아이들도 있으나 너는 너란다. 네 삶을 살아. 남들이 뭐라 하든 질투에 불과하지."
"……형님."
"그래."
"내, 행복해지고 싶은 건…… 과분할까요."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실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행복은, 뭘까…… 하고."
"자격이야 있지. 네 지금까지 한 일을 보렴. 쟁취해오고자 그리도 발악했는데 못 얻는 게 이상한 게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말이다, 넌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하지. 그런 바람을 내 들어주지 못하였단 것이 미안할 뿐이지."
태오는 대답을 한 귀로 흘리며 서휘의 손에 시선을 꽂았다. 큼직하니 이전에도 제 얼굴을 가뿐히 덮어 가릴 만큼이던 손을. 태오야, 듣고 있니? 고양아. 서휘는 태오가 정신이 팔려있다는 걸 깨닫고는 손을 움직여 주의를 돌렸다. 태오는 고개를 들었다.
이 손이 나의 사슬을 깨부수고 꽃을 피웠다.
"아가, 오늘따라 딴짓을 많이 하는구나. 왜 그럴까?"
"……죄송합니다."
"됐다. 그런 사건도 있었으니 내 너를 이해한단다. 동생은 괜찮니?"
"……."
"경계하지 않아도 돼. 네 친구 밈미도 그렇고, 혜우도 그렇고. 좋은 아이들이니 마음이 놓이더구나."
"그, 런가요."
"그래, 그렇지만 전당포에 물건 맡길 생각은 다시는 하지 마. 스트레인지 놈들에게 약점 주는 꼴이다."
"예, 새겨들을게요."
"……태오야."
"예."
"네 진실로 괜찮니? 안색이 좋지 못하구나."
"늘 제 안색은 좋지 못하였는데요……."
"흠."
"……실은, 석연치 못한 꿈을 꾸었거든요."
"석연치 못한 꿈?"
"네. 이름의 값어치대로 사는 꿈이었답니다……. 검은 까마귀가 되어 훨훨 날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실제 동물이 되었던 전적이 있는지라, 꿈이 아니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그땐 존엄성이 없었던지라……."
"저런, 설칠 법도 했구나."
당신에게 빼앗겼던 순간보다 덜하지만.
서휘는 손을 뻗어 태오의 뺨을 쓸었다. 손길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오는 눈을 감으며 뺨을 기댔다.
"…드릴 정보가 있는데, 들어보시겠나요…."
"무리하지 말고…… 무엇이니?"
"아스트라페가, 눈을 떴다는군요……."
"오, 데 마레의 이야기는 이제 재깍재깍 가져오는구나?"
"……가족이라도 구분할 건 해야지요."
네 걸음 더 벗어났으니 남은 것은.
그저 미소 지었다.
끼기기긱-
뚝.
짤그랑.
마지막 날, 축제까지 마무리 된 목화고의 성하제.
태오는 커리큘럼에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한결은 잠자코 기다리다 태오와의 개인 톡방에서 1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성하제를 마무리하는 저지먼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어보니 '태오는 오늘 몸이 좋지 않다며 먼저 갔다'고 답했다. 한결은 핸드폰을 다시금 내려다봤다.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기는 꺼져있다. 하지만 태오는 늘 그랬다. 피곤하면 연락을 다 차단해버리고 혼자 잠들었다 깨어나 연락을 확인하곤 했다. 언제나 사라질 것을 예비하는 사람처럼, 홀연히 누군가의 연락 속에서 사라지는 행위를 익숙하게 행했다. 오늘은 더 그럴 것이다. 평소보다 더 긴장했을 것이고, 더 몸을 움직였을 테니까.
"……."
……잠깐, 익숙하게?
한결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불현듯 태오가 최근 미소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동시에 머리의 피가 싹 식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던 행동, 주변을 정리하듯 자꾸만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던 손길, 커리큘럼 중 물어보았던 행복……. 행복. 아, 내가 왜 몰랐지. 급히 연락을 했으나 태오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있었고, 한결은 급한 대로 주변에 문자를 넣었다. 그중에는 자신의 형, 서휘도 있었다.
태오는 바닥에 온전히 발을 붙였다. 한결 선생님은 내가 여기에 있음을 온전히 느껴보라 했고, 편안해지길 바란다 했지만 단 한순간도 편하다 느낀 적 없다. 바깥에서는 나를 악인으로 보고, 스트레인지에서는 독립한 나를 바깥 것으로 보아 어디에도 속할 수 없으니, 발이 닿아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이 발을 죄 잘라버리고 싶었다. 이 바깥에 나왔을 때는, 무언가 하고 싶었다. 필히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자격은 주어지지 않고, 매사 미적지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온전히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절대 자신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였기 때문이요, 간신히 얻어낸 평범한 삶을 맛이라도 보고 싶었기에 참아왔다. 지난 1년, 비록 미처 치우지 못한 가시와 깨진 유리로 점철되었어도 마음만큼은 편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평범을 탐내면 이 도시에서는 벌을 받았다. 이 도시는 보통의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내포하는 것을 탐낼 수 없고, 운명을 뒤집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만들며, 이런 평온한 날이 지나면 다시금 몇 번이고 나를 시험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시험 속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정의감에 불타며 제각기 막아세우는 타인과 달리 나는 적대하는 대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겉으로는 내 주변과 동조하며, 속으로는 이곳에 섞일 수 없음을 깨달을 뿐이다. 그것을 편하다 느끼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슬에 얽매여 눈 뜰 날을 기다리는 나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으나,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바뀐다!
나를 미워하는 작자들은 겉으로도 나를 증오하나 속으로도 증오하기 마련이다. 남들은 하나만 들어도 충분한 것을 나는 수도 없이, 때로는 이유와 갈피를 찾지 못하는 증오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나의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나 인정하게 된다면 나는 규정짓던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당연한 것이라 여기되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만들 성정임을 난 안다. 내 그 이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얽매였던 나는 그것이 몹시도 두려웠다. 해방되는 순간 몰아칠 감정으로 얻어내고, 동시에 잃어버릴 것과, 언젠가 치를 대가! 세상은 모든 것에서 대가를 요구하니, 내 해방의 대가로 내가 바라는 것을 쥘 수 없을까 두려웠으며, 이기심으로 점철된 욕망이 깨져버릴까 두려웠기에. 그렇게 남았던 모든 것이 다 떠나고, 빼앗기고, 끝내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 벌어지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미 미움받지 아니하였던가?
이미 빼앗기고, 떠나지 않았던가?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난 널 미워하지 아니하나 너희는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떠날 것이다. 내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 바란 것은 아주 사소했으나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세상은 이미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끔 했고, 포기한다 소리쳐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내가 말하는 '너희'는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길을 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갈 타인. 그렇게 내 두려움은 늘 인정과 부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건만, 세상은 나를 자꾸만 밀어댄다. 세상이 바라는 나는 결국 대가를 치르게 만들, 그렇게 태어난, 실로 독악하며 잔악한 존재이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으면 대체 난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 아니면 존재했던 것? 애초에 내 존재는 무엇인가? 넋과 혼, 백, 이 모든 것을 담은 쪽배는 어디에 있고 너울에 따라 안배할 섬은 또 어디인가. 나의 섬은 해저에 있는가, 지상에 있는가, 창공에 있는가, 나의 시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알면서도 부정하는 것인가, 혹은 부정하기 때문에 잊은 것인가, 누군가 부정하여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 바람결이 느껴진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친다. 속내가 거창한 것 같지만 오늘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진 않았다. 이렇게 마음먹은 것도 그냥 어제 영감이 떠올랐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김에 만들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내일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겁이 난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됐을 텐데, 놀라울 만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작품을 만들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하고, 울고, 두려워하는 등 각종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외려 일상적인 생각이 오갔다. 연구원들이 약을 먹여가며 길들여도 사라지지 않던 망상 속의 친구, 이따금 보고 싶던 나의 신데렐라, 이름 모를 후배가 성하제 공연에서 팬이 됐다며 준 초콜릿, 확인하지 않은 레이브의 의뢰 메시지, 오빠, 하고 부르며 품에 안기는 피 섞이지 않은 동생……. 모두 마주하고, 먹고, 보고, 안을 수 있을 것 같이 한치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
이 이후는 도박이다. 에어버스터 앞에서 그러하였듯 새로운 도박을 할 뿐이다. 인간으로 남을 수 있거나, 나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간 도박장에서 일하며 본 사람들이 염불처럼 외우던 행운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오늘은 믿어보고자 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바람결이 등을 떠밀듯 넘실거린다. 태오는 태우던 담배를 바닥에 휙 던져버리더니, 마지막 연기를 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오늘따라 공기가 차갑지만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만큼은 따스했다.
마지막 걸음, 나는 승천할 것이다.
─ ……해!!
─ 환자분 심장 다시 뜁니다!!
─ 계속해!! 계속!! 연 간호사, 영락에 연락해서 파나케이아 불러달라 해, 응급 환자라고, 도움 필요하다 해!!
─ 괘, 괜찮을까요?
─ 으깨지고 심장 멎은 애 장비 다 동원해서 겨우 살려놨더니 지금 괜찮겠냔 소리가 나와?! 뭐든 좋으니까 연락이나 해!! 데 마레에 연락은 했어?!
─ 해, 해, 했습니다!! 담당 연구원분이 오신다고 했어요!!
─ 환자분, 버틸 수 있어요, 환자분!!
─ 태오야!! 조금만 더 버텨라, 제발, 조금만 버텨!!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인첨공의 의료 기술은 바닥에 떨어져도 한 번에 죽지 못해 고통에 몸부림치다 병원에 이송되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끝내 숨진 이든과 달리 주차된 호버 택시 위로 떨어진 태오를 사지에서 강제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차체가 아무리 흡수한들 충격으로 몸이 으스러지고 잔해에 신체 일부가 꿰뚫렸던 탓에 치미는 고통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이 순간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했다. 환자, 심장, 의식……. 각종 알기 어려운 의학용어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뇌에 정확히 꽂히듯 울린다. 의료진 여럿이 자신을 둘러싼 것이 느껴진다. 태오는 애써 시선을 굴려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흐렸으나, 필히 흉했다.
피범벅이 된 손.
미소 짓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손이 나의 삶을 점지했다.
"환자분, 학생!! 학생!!"
"피가, 피가 안 멎어요……!!"
"아, 아…… 제발, 제발!! 안 된다 태오야……! 희야랑 혜우는 어쩌고 가려고 하냐, 어? 이 녀석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힘들겠지만 살아야지 않겠냐, 어? 제발!! 으깨진 거 아저씨가 다 붙였다, 너 아주 멀쩡히 살아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너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돼. 제발, 제발! 뭐가 그리 억울했냐, 응? 풀더라도 여기서 풀자, 외롭게 가들 말고 예서 풀자…."
마치 물감을 덧바른 듯한 내 손과 몸이.
아, 이번 도박은 행운의 신이 함께 했구나.
그래, 끔찍하게도, 여긴 인첨공이었지…….
- 흉수
VIP 병실은 바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의료기기가 가득하다. 환자의 몸을 이따금 훑고 지나가며 홀로그램 차트에 스스로 기록하는 스캐너, 산소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장치, 이따금 삑 소리를 내며 보안에 이상이 없음을 알리는 일렉트로키네시스 장치……. 그리고 소름 끼치는 정적. 태오는 몸을 수복한 이후 지금까지 이따금 알기 어려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리 혜우가 태오를 건드리고, 성운의 시선이 향하고, 조사를 위해 태휘가 와도. 아니, 태휘가 왔을 때 몇 마디는 제정신으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오늘도 소득은 없었다. 유서를 찾고는 있지만 대체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고, 내일도 태오가 '완성할 수 있었는데.' 같은 대답을 한다면 명목상으로는 신세 비관으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착잡한 정적이 맴돌 적, 잠깐 문진을 왔던 박 교수는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포기하시오잉. 누가 괴롭혔다믄 정신 돌아오고 그제야 얘기하겠지, 지금은 모대."
"하지만 대답이 미심쩍어서, 외부의 개입이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개입한 사람들이 증거라도 인멸하면……."
"잘난 안티스킬이 그것이 무에 걱정이라구. 선생, 마음 급한 건 알것는디 몸이 다 고쳐지면 우쨔요? 마음은 안 돌아오겠다고 저리도 시위를 허는디 우리가 별 수 있남……. 그거는 우리도 모대. 갸가 닫았는디 우째 열것시야? 대체 무시가 저리도 서러워서 혼자 먼 길 가려구 했는진 몰라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께. 혜우두 고생이 많아야. 아저씨가 미안하다이. 최선을 다하긴 했는디 우째 상처만 주네."
태휘는 홀로그램 차트를 수기 차트에 옮겨 기록해가는 박 교수를 뒤따르면서 어딘가 켕기는 듯한 사람처럼 눈을 흘기다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섰다. 문밖에서 "원장님, 죄송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능력자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까?"라는 질문과 "이 사람아, 여기가 아무리 인첨공이라도 그렇지 떨어진 학생 정신을 강제로 깨워서 무엇 하려 그랴? 그만큼 엘리트가 중한 건 안다마는 기본적으로 사람 된 예의를 지켜야지!" 하고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시들어갈 적, 병실에는 오로지 혜우와 태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오는 길고 달콤한 꿈에 빠져있었다. 부를 때면 손이 잠깐 꿈틀거리는 것을 제외하고 눈을 뜨지 않았고, 고른 숨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잠든 것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얼마나 달콤했으면 지금까지 깨지 않고, 눈을 떠도 그 꿈속에 자리하기만 하는지. 이대로 영영 깨지 않고 싶다는 듯 굳게 닫힌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퍽 우스운 일이다. 혜우가 복수를 다짐해 소멸을 계획할 적, 태오는 삶을 위해 소멸을 계획하여 실행했다는 것도 그러하다마는 그 누구도,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태오가 속이 곪았음을 알지 못했다. 한결이 조금이라도 늦게 알아채고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여기에서 숨을 쉬며 꿈속에 갇히지 못했을 정도로 조용한 징조였다.
딸깍, 정밀 스캐너가 돌아가고자 자동으로 스위치가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소음은 말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여전히 태오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서러운 울음이 터질 적, 몽중의 경계에 발 들였던 자는 눈을 떴다. 여전히 흐린 눈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우는 혜우를 향해 구른 눈은 다시금 감긴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조차 없이,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는 상반신을 일으키자 긴 머리가 병실 침대에 퍼진다. 앙상한 손이 아직 상황을 모를 조그마한 아이를 향했고, 천천히 손은 숙인 고개를 향해 파고들었다.
"울지 마."
나지막한 목소리가 서러운 울음과 달리 잔잔하다. 태오는 혜우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려 하면서도, 침대 가장자리를 향해 제 팔을 굽혀 당겼다. 울더라도 앉아서 울라는 듯 상냥한 손길이었고, 그만큼 잔인한 손길이기도 했다.
"울지 마, 울지 마…… 쉬이, 착하지."
실존하는지 확인하듯 뺨을 더듬거리던 태오는 더듬거리던 손을 뒤통수로 가져다 대더니, 품에 가두려 들었다. 어릴 적 넘어지거나, 악몽을 꾸면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던 나날처럼. 몇 번이고 동그랗고 납작한 뒤통수를 더듬거리다 실존함을 깨닫고는 와락 끌어안는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표정은 넋이 나간 사람과도 같았다. 등을 토닥이며 착하지, 어찌 울고 그럴까. 속삭이는 목소리는 갈라졌고, 손길은 서서히 다급해졌다.
"여기서 울면 들킬 거란다. 잡혀가서 2학구에 팔려간단다. 착하지, 울지 마……."
태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속삭였다. 착하단 말로도 달랠 수도 없다는 걸 알듯 점차 떠는 목소리가 비참하다. 태오는 한때 데 마레의 일원이었다는 듯 눈동자에 옅고 얕은 비색 바다를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침잠하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와는 달랐다. 그저 바다가 되길 바라는 무언가에 불과했다. 바다라는 소속감이라도 주고팠던 자들 또한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얕은 바다는 파도가 치면 수없이도 부서진다는 것을. 바다는 희멀건 포말을 피 대신 뱉고, 철썩이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원치 않게 바닷속으로 끌려가다, 다시금 뭍으로 내던져진다. 더없이 아름다운 죽음과 생의 순환이다. 그리고 그 바다가 심해를 마주하고 있었다.
"데 마레는 널 구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들은 너를 외면할 테고, 장성하면 그리움이라는 이름 하에 너를 꾀어내려 들 거란다. 누구도 돕지 않는단 것을 깨달은 녀석들은 네 약을 먹여 길들이고 들어서는 안될 것을 선사할 거란다. 나로 족한 것을 네게 행하도록 내가 과연 내버려 둘까…… 그것들이… 아니하다 주장한들 말이야. 오, 어련하시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중얼거리는 음색은 일정하니 광인과도 같았다. 불신. 깊은 불신과 환멸로 가득하던 삶의 일각을 드러내며 토닥이던 손길이 멈추고, 태오는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둥글던 것을 조각내어 깎아낸 눈의 동공은 뱀의 것을 닮고, 머리카락 쏟아져 음산히 그림자 드리우니 비색 눈동자만 드러났다. 낙하의 충격으로 터진 실핏줄이 아물지 못해 공막은 새빨갛다. 인간의 눈보다는 짐승의 눈이다. 그런 눈을 홉떠 혜우를 쳐다보고 있던 태오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 가지 말아, 내가 잘못하였으니 제발 그 지옥으로 가지 마……."
새붉은 공막 가진 눈에서 투명한 것이 고이다 후드득 쏟아졌다. 내 그리도 필사적으로 너를 지키고자 하였건만, 너는 이제 있을 곳 전부 가졌건만, 그들이 나의 무력함을 증명함과 달리 너는 나 없이도 굳건히 자리한 곳과 널 지탱해 주는 존재가 생겨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건만. ……그 상황에서 나를 방해하더니 이젠 네 손으로 나의 무력함을 증명하고자, 거기로 떠나시겠다? 그 빌어먹을 곳으로? 네 확실히 못을 박는구나.
내가 치워야 할 것이 실로 많음을.
데 마레에서 오라비라는 이름을 달았을 적 피 섞이지 않은 동생을 사랑했고, 허물을 벗은 구렁이도 이것을 퍽 귀애했다. 나의 동생이, 그리고 나의 비늘 하나 자리를 잡고 숨 쉬며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필멸자가 눈물을 흘리면 쓰나. 너는 나의 삶에서 함께 거학의 능선을 그리며 파도의 포말을 만들었고, 때로는 침잠하는 날이 있으나 그 깊은 바다에서 함께 진주를 찾던 바다의 전령이다. 그런 네가 바닷물이 아닌 다른 것을 흘리는 이 순간을 용납할 수 없다. 또한 네가 나를 떠나기 위해 그 역겨운 곳으로 간다는 것도 용납할 리가 없다. 너를 괴로이 한 것에게 큰 흥미는 없으나 네가 날 떠나 물을 흐리는 것과 어울린다면 그 주변을 이 발톱으로 눌러 번지게 만들 수는 있을 텐데. 아니, 그리해야만 하지. 태오는 퍽 가련한 눈빛과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독악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울면서 하염없이 속삭였다.
"지쳐서 쉬고 싶었어. 지친 나머지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어. 그런데, 네게 못을 박았구나. 미안해, 실로 미안해……. 그러니 울지 말아……."
독악한 것이 길고 달콤한 꿈에서 눈을 떴다.
지독히도 죄스럽고 애처로운 눈길을 하며.
- 간신🎴
분명 어제까지는 책도 읽고 내게 거래까지 요청했던 것이, 다시금 망가진 것처럼 늘어졌다. 침대에 눈을 뜬 채 축 늘어진 태오의 모습은 며칠 전 병실에서 넋을 놓고 자아를 몽중에 두고 온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죽어버린 듯 늘어진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2시간째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엔 말을 걸어보고, 시야를 휘휘 저으며 방해도 해봤지만 고장 난 안드로이드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서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넋을 잃은 채 골몰하다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아 결국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모든 걸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 어떻게 잊겠는가? 그렇게 날 보기 좋게 농락하고 떠났는데. 서휘는 태오의 곁을 침묵하며 지키면서도, 이번에는 대체 무얼 결심하려는 건지 추측했다. 이번에도 떠난다면 아예 스트레인지로 목줄을 묶어버릴 생각이었다마는.
"백한결."
하지만 태오가 뱉은 단어에 서휘는 목줄 채울 생각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한참을 넋을 놓던 것이 침묵을 깨고 익숙한 이름을 읊조리자 서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몸을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였길래 그 선생 이름이 나올까."
"……왜 내 제안을 망설였는지 답이 나와서요."
"내가 어찌 망설였을까?"
"가족을 당신 손으로 해하라 하니 그건 싫었을 테지요…… 그 빌어먹을 혈연이 뭐라고."
그럴 리가 있겠더니."
서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태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태오는 여전히 늘어진 모습으로 있다가도, 천천히 눈을 굴렸다. 공막이 새카맣게 물든 것을 본 서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이미 짙은 와위를 느낀 태오는 자신의 앞에선 어떤 거짓도 소용 없다는 듯 눈을 휘었다.
"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닮았는데…… 어찌 모를까요. 백한결, 백서휘……. 나를 지금껏 잘도 농락하였군요. 그래, 어쩌면 당신이 그의 모습을 하고 이따금 커리큘럼을 대신 하러 왔을지도 모르겠어요."
"……네가 먼저 도망쳤으니 내 수를 썼을 뿐이지."
"커리큘럼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알잖니."
"……."
"다만,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라 고민했던 것이지 사심은 없었단다. 결국 그 아이도 손패니까."
"손패라고 보기엔 모종의 이유로 바깥에서 커리큘럼도 시키지 않고 애지중지 키운 것 같던데요. 언제부터 그리 손패에 신경을 썼다고."
서휘는 속이 꿰뚫린 것 같았다. 어디까지 들여다보는 건진 몰라도 이대로면 낱낱이 밑천을 털릴 것 같았다.
"바라는 게 뭐니."
"바라는 것이라."
"네 내가 한결이를 습격해야만 하는 이유가 리버티의 견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나인 이유가 뭐니."
"직고하길…… 바라시나요."
"그래."
"당신이 절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순간, 작게 벌어진 입술이 다물리지 못했다. 서휘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 태오가 시체같이 늘어지다 대뜸 떠났던 이유도, 지금 이리 구는 것도 모두 예상은 했지만 으레 충격이란 것은 어렴풋이 예상하던 것이더라도 귀로 듣는 순간 머리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던가. 태오는 그런 서휘의 마음을 알면서도 막힘없이 말을 쏟아냈다.
"당신이 내 모든 걸 꺾어버리고…… 이 지경까지 몰아간 당신이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서…… 무너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짖으면 하여서 그리 거래를 요청했답니다."
"꿈도 크군. 나를 역린으로 하여금 무너뜨리겠다?"
"정확히는 자멸이겠지. 당신의 손인데."
거부하는 머리와 달리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귀를 울릴 정도로 그 소리가 크다. 서휘는 태오의 말 뒤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다. 단순한 증오가 아니다. 철저한 득과 실을 계산한 발언이다. 네가 바라는 것이 너무나도 크다……. 손을 들어 입가를 덮어 가리고자 더듬거릴 적, 앙상한 손이 제 손을 붙들었다.
"물론 내 이리 방자히 굴어도 용서하실 것을…… 아니 이리 군답니다."
"……진심이니?"
이대로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양심을 발휘해 막아야만 함을 안다. 그것이 자신이 행할 마지막 어른된 도리임도 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그리고 저 조그마한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인간의 것이 아닌 색조의 공막과 달리 홍채만은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포사가 비단 찢는 것에 웃는 것을 본 황제가 그 이후로 귀한 비단을 모조리 사들여 찢어내어 재정을 망가뜨리고 무너짐의 발판을 마련했다던 글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붉은 전조등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뛴다. 그래, 양심도, 어른된 도리도, 가족간의 정도 무슨 소용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저 곁에 있으면……. 내가…….
"들키는 순간 네 무덤을 네 손으로 파는 꼴일 텐데? 넌 저지먼트다. 그 점을 상기하고 내게 요청해야지."
"내 찢겨도 묻어주는 사람은…… 형님일 텐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단숨에 시원해지는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서휘는 넋을 잃은 채 태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대로면 몽중의 의식에 잡아먹혀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을 안다…….
"형님은 행하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주 잠깐, 가책을 내려놓고…… 선을 그어두고, 무너지더라도 나의 품에서 무너지면 된답니다. 죽더라도 내 손에 죽고, 비명을 지르더라도 내게 질러야지요."
"하, 하하."
"리버티가 무너뜨릴 거예요, 형님. 형님이 일구어낸 모든 것을, 어떻게든 인첨공에 물들지 않게끔 발악한 당신의 동생을…… 그 작자들은 잘린 목을 쥐며 외치겠지요, 우리는 정당했고 악마를 처단했노라고. 그러니 우리가 정의라고…… 오, 미천한 짐승들이 갇힌 곳에서 정의라니, 어련하시려고."
"……."
"그러니 선수를 치는 것은 오로지 형님의 손이어야만 해요……. 괴롭겠지만 어쩌겠어요. 모든 것은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랍니다."
"네 나를 진창길로 떨어뜨리고자 하는구나. 밑바닥 그 아래로."
"아무리 위를 노니는 것들이 나를 가여이 여긴들 결국 경애할 걸 아니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이 곁에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서휘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하! 하하……. 점차 웃음은 갈라지고 사그라들더니, 이내 태오의 눈을 정확히 마주하며 사납게 읊조렸다.
"영악한 것."
"당신이 알려줬잖아. 사람 속내 읽고 쥐어 흔드는 법."
"영악한 것…… 거둬 키우는 것이 아니었는데."
"진실로?"
"……."
"그럴 줄 알았아요. 어찌 되었든 내가 바라는 대답은 그게 아니랍니다……."
"……할게."
하게 해줘. 씹어뱉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절절 끓는 듯했다. 태오는 앙상한 손을 뻗어 서휘의 뺨을 더듬었다. "현명한 판단이니 상을 드려야겠죠." 속삭이는 소리외 함께 서서히 굽히는 팔과 함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수벽으로 이루어진 간격이 허물어졌다. 가볍게 내려앉은 것은 묵직하게 떨어지고, 이내 그림자 틈을 모조리 메꿨다. 공막 새카맣게 물든 눈이 서서히 감긴다. 나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 척수에 새겨진 자. 당신의 눈을 가리고, 온갖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옳은 것을 쳐낼 간신.
최후의 순간, 내가 속삭인 모든 것이 실은 당신이 원하던 것이었음을 깨달으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 포사🎴
인적 드문 늦은 새벽, 큰 소리와 함께 차에 떨어진 청년을 본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같이 길을 지나던 이름 모를 행인은 높은 비명을 지르더니 자리에 주저앉아 꺽꺽거리며 패닉에 빠졌고, 이내 아이처럼 울었지만 나는 달랐다. 이건 특종감이다! 아무리 보아도 특종이다! 나는 주변 눈치를 보다 청년이 떨어진 게 분명한 건물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신고는 저 사람이 알아서 해주겠지. 요즘엔 시민의식이 투철하니 말이다. 하물며 내게는 기자의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이 더 중요하다. 인첨공의 비밀을 파헤치고, 부조리한 일을 드러내는 것. 세간에서는 나를 황색 언론이니 찌라시나 만드는 얼간이니 하지만, 지금 미동도 없이 늘어져 시체가 될 존재가 과연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지 드러나면 입을 싹 다물겠지.
옥상으로 도착하니 바람이 쌀쌀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바람을 맞고 떨어졌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떨어졌을까?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뭐라도 있겠지? 옥상을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보였다. 색도, 디자인도 날렵하니 잘 빠진 운동화는 동료 기자가 한때 오픈런을 위해 줄까지 섰지만 끝내 못 샀던 한정판이다. 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집이 잘 사는 것 같다. 아니면 엘리트인가? 그렇다면 더 안타깝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 가슴이 떨린다. 나는 그 신발 주변을 유심히 살폈고, 곱게 접힌 봉투를 보았다. 깔끔하고 정갈한 우편 봉투를 보니 감이 잡힌다. 유서다! 이 유서 안에 모든 진막이 담겨있을 것이다.
나는 옥상 저 멀리에서 구급차의 경광등이 번쩍이는 걸 발견하자 허겁지겁 유서를 집었고,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내려온 건물 주변에 사람들이 구경을 위해 몰려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그 사이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숨어있다가 경찰이 모두 물러나라 제지할 때, 시민들과 함께 흩어지며 골목 속으로 숨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골목 깊은 곳 지리를 잘 알았다. 스킬아웃을 취재하며 그들과 친해진 덕분이다. 골목 깊은 곳 가로등이 쨍한 곳은 벽에 새겨진 스킬아웃의 표식 덕분에 이곳이 스트레인지 중심부임을 알 수 있었다. 성하제의 마무리로 지친 사람들이 모두 자러 들어간 덕분에 아무도 없었던 덕분일까, 나는 수월하게 품에 숨긴 편지 봉투를 꺼낼 수 있었다. 그 청년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투신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세로로 뜯는 형식이 아니라 카드형 편지지를 넣을 수 있는 봉투라 유서 치고는 제법 깔끔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열어보니 접힌 종이가 아니라 빳빳한 재질의 종이 하나만 들어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손가락 틈새로 끌어올렸고, 이내 눈을 크게 뜨며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건 특종감이다. 아니, 이 좁고도 넓은 인첨공을 발칵 뒤집을 수 있다! 아까 그 청년의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어서 돌아가서 기사를 작성해야겠다. 제목은 베일에 가려진 얼굴 없는 예술가의 죽음… 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자 뒤를 돌았을 때.
나는 도망쳤다.
태휘는 스트레인지 깊은 곳으로 향하며 욕을 짓씹었다. 깬지 얼마나 됐다고 이 직장은 사람을 이렇게 굴려대는지! 조그마한 애새끼, 그러니까 안희야의 피가 섞이지 않은 형제 일이 아니었더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두고보자, 나중에 민트초코 과자에, 끝장나는 휴가, 그리고 애새끼 볼 잡고 늘리기로 반드시 그 값을 받아내고 말 테다.
"불안한데."
어찌 되었든 희야의 형제는 성하제가 끝나기 무섭게 투신했다. 본인 말로는 외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의 판단이라 했으니 그 건에 대해서는 수사가 종결됐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학생의 유서를 훔쳐간 사람. 유서야 흑역사로 생각하며 무시하고 새로운 삶을 살면 되겠지만, 자신은 안티스킬이라 무책임하게 나설 수 없을 뿐더러 그때 학생이 내가 적은 유서가 어디로 갔냐며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으로 눈을 마주쳤을 적엔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희야와는 결이 다른 압도적인 눈빛은 아직도 떠올리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태휘는 덕분에 쉴 수 없었다. 불철주야 개처럼 주변을 탐문했고, 마침내 실마리를 잡았다. cctv를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끔찍한 장면을 마주한 것도 있지만 투신 장면을 목격한 행인이 제보를 한 덕분이다. 어떠한 사람이 있었노라, 아마 건물로 들어간 것 같다……. 인첨공의 발전은 범인의 얼굴을 선명하게 드러냈고, 안티스킬은 ID 카드를 통해 신원을 조회할 수 있었다. 태휘는 신원을 조회하기가 무섭게 이마를 쳤다. 자극적인 기사로 몇 번이고 논란이 되었던 기자였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걸려도 이 사람에게 걸렸다니!
심지어 더 큰 문제가 있으니, 이 사람은 오늘 긴급신고를 한 이후 연락이 끊겼다. 마지막으로 신고한 위치는 스트레인지 최심부였고, 태휘는 지금 이렇게 한때 머리가 깨졌던 장소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네온사인에 의지할 만큼 어두운 장소에 도착했을 때, 태휘는 결국 짓씹던 욕을 크게 뱉었다.
"당했네."
기자는 죽어있었고, 누군가 자신을 이쪽으로 유도한 게 분명했다. 상태는 참혹했다. 무릎을 꿇은 채 죽어있는 시체는 이미 부패가 시작됐고, 조악한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손 위에 고이 올려둔 머리도, 입에 물린 카드와 유서, 등을 기점으로 날개처럼 펼친 골격도 그렇고, 태휘는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속을 겨우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가까이 다가서 시체를 살피니 고약한 시취가 진정시킨 속을 다시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시체의 입에 물린 카드를 먼저 손가락으로 꺼내던 태휘의 눈이 커졌다.
─ 나의 포사에게.
태휘는 카페에서 태오를 마주했다. 유서를 돌려줘야 하는 것도 있지만, 물어볼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휘는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점장이 직접 가져다 준 음료를 미심쩍게 노려봤다. 선라이즈를 기반으로 그레나딘 시럽과 오렌지 주스 대신 자몽과 오렌지를 적절히 블렌드한 시트러스 스무디는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태오 또한 스무디를 가만히 바라보다 먼저 고개를 들었다.
"제 유서를…… 찾으셨다고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태휘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뭇거렸다.
"저, 학생."
"네."
"유서에…… 피가 좀 많이 묻어있어서, 괜찮을까."
"……."
태오는 태휘의 표정이 왜 착잡한지 알 것 같다는 듯 잔을 끌어당겨 제 앞에 두며 눈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표시였다.
"누군가 죽었나보군요."
"그래. 유서를 훔친 사람을 발견했는데, 찾아가 보니 죽어있었어."
"……누구였나요."
"이 사람, 알아?"
태오는 태휘가 띄워준 홀로그램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대체 누구인지…."
"장진혁, 인터넷 뉴스 기자."
"초면이에요. 이런 분이…… 유서를 왜 가졌는지도……."
"……이 사람,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로 유명한 기자인데… 학생이 투신할 때 하필 그 현장을 지나고 있었다나봐."
"…그래서, 나를 좋은 먹잇감으로 본 것이로군요."
"그렇지.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일단은 줄게. 찾고 있었잖아."
"읽었을까요……?"
"아니, 읽지 않았어. 학생의 개인사잖아."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태오는 피가 마른 편지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겉면을 쓸어보다, 눈을 들어 태휘를 마주했다. 태오의 머리로 태휘의 속내가 모조리 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사건을 많이 겪은 저지먼트라도 이런 건 괜찮은 걸까, 그걸 얘기해줘야 하나……. 태오는 속이 타는 듯 스무디를 쭉 빨아마시던 태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숨기는 게 있군요."
"……."
"내 앞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는답니다."
"……학생."
"네에."
"실은 시체 상태가 꽤 끔찍했어. 그리고…… 학생에게 미안하지만, 스트레인지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던데. 희야한테 들었거든. 학생이 내가 스트레인지에 드나드는 걸 알고 있었다고."
"……."
"……부디 솔직하게 말해줘. 학생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도, 안티스킬을 믿어줬으면 해. 네 편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카페 점장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태휘는 알고 있었다. 저 문신을 가진 사람들은 다들 '한때 유행했던 것'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알 수밖에 없다. 수용소에서 들어와 일 년도 채 안 되어 풀려나던 기이한 존재들을. 그리고 하나같이 큼직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을. 학생은 누구야? 태휘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짓씹을 적, 태오는 봉투를 열며 유서를 꺼냈다. 카드에 간결히 적혔던 자신의 유언 밑에, 피로 쓴 것이 분명한 붉은 글씨가 있었다.
𝑅𝑎𝑣𝑒
𝒫ℴ𝓁𝒶𝓇𝓃𝒾ℊ𝒽𝓉
"푸흡."
태오는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 지었고, 태휘는 고개를 번쩍 들어 태오를 마주했다. 말갛게 웃는 모습에 팔에 소름이 돋았으나, 동시에 노련한 안티스킬의 감이 시체의 입에 물려있던 카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더 파헤치면 나도 저 웃음의 제물이 될 것이다.
- 숭앙🃏
어딘가에서 학생들이 아이가 되어 혼란을 빚고 있다 해도, 연구소를 향한 위협은 줄어들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유달리 가혹했던 연구소들은 이미 몇 연구원을 잃어 줄초상 분위기였고, 학생들에게 우호적인 연구소들도 결국 우리를 속인 건 똑같다며 피해를 입곤 했다. 가장 온건하고 진보적이기로 소문난 연구소인 데 마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까지 사망자는 없었지만 연구원들 중 몇은 심하게 폭행을 당했고, 데 마레는 현 상황에 대해 자신들은 알지 못했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뒤 당분간 커리큘럼을 전면 중단하기로 선언했다.
굳게 닫힌 연구소에는 희야를 비롯한 데 마레를 졸업한 학생과 소수의 연구원, 그리고 안티스킬에서 파견된 경호원인 아스트라페만이 있었다. 항상 활기차던 데 마레가 이렇게 첨예한 분위기가 된 것은 윤 씨가 연구 기밀과 예산을 빼돌린 것이 밝혀진 이후 처음이었다.
짜악-!
그리고 그 냉철한 분위기 속에서, 우렁찬 파열음이 울렸다. 희야는 자리에 없었고, 아스트라페는 뒷짐을 지고 서있다 눈을 홉떴다. 연구원들 또한 지레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소장인 승환이 숨을 씨근대고 있었고, 그 앞에는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를 가진 한결이 고개가 정확하게 돌아간 채 자신의 뺨 위에 손을 더듬거리며 얹고 있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
"그렇게 징계를 받아놓고도 제정신이야? 역방향 커리큘럼 중지 안건까지는 내 그 아이를 직접 봤으니 이해할 수 있어.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일세. 그 이후는 건드려서는 안 됐어. 자네는 연구원이야, 우리가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데, 자네가 지금 행하는 모든 것은 선을 넘었다고!"
"……."
"자네가 보고 있는 미래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해보게. 아이를 위한 미래야? 아니면 제 뱃속 채우기야!"
"……."
"우리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었기에 이미 한 번 사달이 났어! 그걸 알면서도 자네는 지금─"
한결은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소리 없는 사과에도 승환은 얼음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한결을 마주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게. 자네가 어긴 규칙을 내가 눈 감고, 내쫓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란 말입세. 그 아이가 내게 탄원서를 넣지만 않았어도 자네는 해고였어. 나가 보게."
승환은 몸을 휙 돌려 소장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한결은 입을 다문 채 터덜터덜 연구소를 나가고자 걸음을 옮겼다. 요즘 소장님께서 부쩍 예민하시더니, 결국 사달을 냈다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한결을 쳐다보고 제각기 속닥거리던 연구원 사이에 섞여있던 아스트라페, 태휘는 한결에게 말을 걸었다.
"……위험할 텐데, 어디 가시려고요?"
한결은 쓰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자신의 담뱃갑을 꺼내 보였다. 태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새삼 놀랍다는 눈치였다. 한결 연구원이 가끔 담배를 피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독한 걸 피울 줄은 몰랐는데. 태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같이 피우시겠습니까?"
한결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순하게 입술을 벙긋거리는 모습에 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태휘는 그런 한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결은 흡연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흡연자라기엔 그 빈도가 현저히 낮고, 그렇다고 비흡연자라기엔 또 애매한 위치였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그나마 흡연자라 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골초였던 제 전 애인을 따라 나섰던 것뿐이지, 졸업 이전 헤어지고 나서는 그마저도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최근 한결의 담배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한 갑을 사도 한두 달이면 겨우 비우던 것을 이제는 2주에 한 갑을, 최근에는 나흘이면 충분했다. 연구소 뒤 낮은 담벼락 근처에서 담배를 빼문 한결은 편의점에서 산 라이터의 불을 댕겼다. 인첨공에서만 단독으로 생산하는 진한 향 담배는 머리가 아플 정도의 장미 향이 났다. 길쭉하게 연기를 내뱉을 적, 한결은 시야에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리는 조그마한 무언가에 의문을 품었다.
봄은 지났을 텐데 당최 어디에 앵화가 피었나.
시선을 내리자 조그마한 인영이 소리도 없이 한결 앞에 서 있었다. 앵화를 닮은 옅은 분홍색 머리가 일자 단발로 곱게 잘려있는 조그마한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한결은 저도 모르게 담배를 등 뒤로 숨겼다. 아이는 한결을 물끄러미 마주하다가도, 뺨에 시선이 한참 닿아있다 대뜸 손을 쭉 뻗었다. 한결은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굽힌 뒤 허리를 숙였다. 한 팔로 조그마한 태오를 안아올리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담배를 든 손을 멀리하고, 자세를 편히 잡을 수 있게 잠시 기다리자 조그마한 몸이 부산히도 꿈지럭거린다. 태오가 자신의 목을 얌전히 끌어안고 기대자 한결은 담벼락 평평한 곳을 찾아 그 위에 앉혔고, 팔을 조심스럽게 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조그마한 몸을 훑었다.
전통적인 색채가 담긴 옷자락은 질질 끌릴 정도로 컸지만 인첨공의 기술을 모조리 동원했는지 오염된 기색 하나 없었고, 발목을 너끈히 덮어 담벼락에도 폭포처럼 길게 늘어졌다. 고이 모은 두리 소매는 조그마한 손가락에 옥수수알처럼 잘 영글듯 박힌 손톱을 드러냈고, 옷자락 너머로 슬쩍 보이는 발은 맨발이었다. 한결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이 음중에 맨발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듯 한참 시선을 고정했다. 태오가 다리를 움직여 발을 옷자락 틈새로 가리고 나서야 시선은 다시금 위로 떠올랐지만, 그렇게 폭이 크진 않았다. 굳이 위아래로 훑을 것도 없이 태오는 단정했고, 또래보다 작았다. 옷의 품이 큰 것도 체구가 작아 보이는 것에 한몫을 했겠지만 안아올렸을 적 턱없이 가벼웠다. 옷 무게를 뺀다면 더 가벼우리라. 몇 살쯤 됐을까, 여섯? 일곱? 나이를 셈하자니 한결은 담배를 끌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손에 들린 것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려 했던 순간, 자그마한 손이 한결의 팔을 꼭 붙들었다. 동시에 한결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를 향해 허리를 쭉 기울여 담배를 빼물려 들자 한결은 급히 태오를 붙들듯 품에 덥석 안았다. 태오는 물끄러미 고개를 올려 한결을 마주했고, 한결은 단호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 안 돼.
태오는 그런 한결의 입술에 빤히 집중했다. 그 틈을 타 한결은 담배를 재빨리 땅에 떨구고 구둣발로 짓이겼다. 태오는 한참이고 한결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적, 한결은 태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가늘게 휜 눈동자 밑 곱게 자리한 입술이 벙긋거렸다. 사근사근, 달싹이며 움직이는 꼴이 지저귀는 새의 부리를 닮았다는 착각을 차마 지울 수 없었다.
"이제야, 제게 집중하는군요……."
변성기가 시작되지도 못한 앳된 목소리지만 특유의 나긋한 어조,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곱씹듯이 굴리는 발음과 기운이 빠진 듯한 어조의 말미가 익숙하다. 한결은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조그마한 존재가 진짜 태오라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오는 허리를 세우려다 한결이 자신을 아직 놓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얌전히 품에 파고들듯 몸을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이제 입술 따위는 읽지 않아도 된다.
"퇴원한 이후… 여러 일이 있었음에도 연락이 없으셔서……."
- 그래서, 2학구까지 온 건가요.
"데 마레는, 내게 어떠한 것도…… 알려주지 않아서요."
- 여기까지 오는 걸 두려워했으면서, 고작 내 근황을 알고자……?
"……그렇다고 한다면 필히 웃으시겠지요."
"……."
한숨에 가깝지만 웃음임을 안다. 태오는 그 안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배신감, 상처,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의심, 그리고 그 끝에 꽁꽁 숨겨둔 죄책감과 안심까지. 그런 일을 벌였으면서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에 대해 뻔뻔하다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그 도와달란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탓해야 할지. 양가적인 감정에 한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조그마한 몸집을 이끌고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대한 착잡함이 느껴졌다. 한결은 손을 애써 들어 태오의 머리 위에 올렸다. 누군가를 쓰다듬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한결은 애써 입술을 벙긋거리며 태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 ……그때 그 상담이요.
"예."
- 당시에, 발을 붙이고 실존함을 느낀다는 행위가 불편하지 않다 했었지요. 그건 진실이었나요……?
"……."
태오는 눈을 느릿하게 뜨며 품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깊게 새겨진 균열은 작고 어린 몸집 때문인지 순진무구한 것 같기도 하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충분했으나, 계속 마주치면 삼켜질 것 같았다. 한결은 애써 눈을 마주치며 동그란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뇨, 단 한 번도…… 편하다 생각한 적 없습니다. 행복이란 것도."
- 어째서 저를 속였죠?
"선생님도…… 저를 속이지 않으셨습니까. 서휘 형님과 함께, 둘이서 같이……. 저를 속이고 농락하였지 않나요."
태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음울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한결의 손이 우뚝 멈췄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지러운 속내도 뇌리로 스며들듯 박혔다.
"당신도 나를 속였으면서…… 왜 나는 안 되는 건가요."
-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커리큘럼에는, 학생에게는 진심이었어요. 저는, 저는 학생을 위해서…….
"나도 진심이었어요. 남의 행복에 열등감을 느꼈단 것도…… 행복하고 싶었단 것도…. 남들은 모두 당연하게 쥐는데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어요……. 어째서 개같이 빌어봐도 누구도 나를 나로 봐주지 않고 모두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아니, 짐승으로 규정지을까 하였어요…. 하여 내가 행복하고자 하는 방향을 추구했을 뿐인데, 나도 내 목표에 진심이었는데……."
태오는 순식간에 감정이 사그라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다 망쳤어요…." 속닥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한결의 옷깃을 쥔 조그마한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한결의 셔츠에 작은 주름이 졌다. 옷차림 때문인지 승천하지 못한 이시미가 인간에게 원통하다 저주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혜우가 사라진 그날 나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내가 내 처지를 깨닫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내 주제를 일깨웠으면서……."
- …….
"선생님, 저는 지쳤어요…….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 하나뿐인데 그걸 인정하고 행하라 종용하고 있어요……. 내가 그 허물을 벗으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 모두가 나를 어떻게든 사지로 밀어 넣고자 합니다……. 왜 나를 살렸나요? 왜. 박 교수 그 인간도, 간호사들도, 내가 억울했느니 뭐니 제멋대로 속삭이는지요, 아니오…… 아니에요. 당치도 않는 소리예요. 억울하지 않아요, 내가 탐낼 수 없는 것에 무엇이 억울합니까. 끔찍하게 증오스럽고 역겨울 뿐이지. 인간이란 것들은 어째서 내가 쥘 수 없는걸 쥐어놓고 끝없이 추구할까요, 저는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네, 원망스럽고, 두려워요……."
조그마한 몸을 한결의 큼직한 품에 맡긴 태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손이 새빨갛게 상흔이 남은 뺨을 스치듯 더듬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억센 손이 후려쳐 살갗이 쓸리고 그 겉이 까진 흔적이 역력했다.
"실은 알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 커리큘럼을 다시 재개하려 하셨다는 걸…….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요……?"
저를, 시험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고작 수습 연구원이라서 그런 겁니까……?"
- 저를…….
"사냥당할 겁니다."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에 한결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굴로 돌아갈 저를…… 데 마레가, 가만히 두겠습니까…? 제게 다시 목줄을 채우고, 약으로 길들일 겁니다. 그건 싫어요, 두렵습니다……."
- 나를…….
"윤찬혁은 실패했으나,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 학생, 제발.
"나를 지킬 수 있잖아요…. 형님과 함께, 유이한 제 편이시잖아요……. 나를 믿어주잖아요."
시선을 내려 태오의 눈을 마주한 한결의 눈이 한없이 어둡다. 지킬 수 있다. 그래, 지킬 수 있지, 인첨공에 사건에서, 언제고 무너뜨릴 준비를 하는 저지먼트에게서, 그 틈을 파고드는 간악한 존재에게서, 부소장의 자리에 앉는다면, 그 권한을 쥐어 명분을 가진다면……. 태오의 눈망울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결은 백의가 더러워지든 말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믿어요.'
그리고 태오의 작은 발등에 제 이마를 기댔다. 믿어요, 당신의 말을 믿어요……. 홀린 듯 한결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숙인 고개 너머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전지전능한 존재라 굳게 믿으며 짧게 기도를 올리고 절절한 눈으로 땅에 시선을 박았다. 그런 한결을 바라보며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태오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에, 저를 믿어주세요. 신앙해 주시고 숭앙해 주세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른 손을 올렸다. 조그마한 손가락이 입가에 닿고, 이내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휘었다.
착하지.
태휘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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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목, 흉수의 발치 아래
- 구십춘광🃏
이게 무슨 일일까. 태오는 커리큘럼 별관 누수로 인한 공사 안내문을 읽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수도가 터진 것 때문에 공사를 해야 하니, 약 일주일 동안 커리큘럼은 자율적으로 연구원과 합의하여 진행하도록 한다, 라. 태오는 오늘 왔던 알림을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증강현실을 통해 망막 너머로 쭉 훑었다. 이런 일은 연구원에게 누구보다 먼저 공문이 내려가기 마련이거늘, 달리 한결 선생님께 연락이 온 건 없었다. 오늘은 커리큘럼이 없는 걸까 생각했을 때, 오렌지색 알림이 깜빡였다.
<안녕하세요, 태오 학생. 오늘 커리큘럼에 대해 안내드리고자 연락 드려요.
별관의 공사로 인해 일주일 간 다른 곳에서 커리큘럼을 진행해야 하는데, 아니무스에 마련된 상담실은 어떠신가요?
편하게 답해주세요!>
태오는 아니무스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2학구로 생각이 닿자 몸이 굳는다. 꾹 주먹을 쥐고 노이즈 속에서 입술을 깨문 태오는 뇌파를 통해 글자를 하나하나 입력했다.
<죄송합니다. 2학구는 너무 멉니다.>
……
<외람되오나 선생님 댁이 3학구라고 했었나요?>
…….
생각보다 한결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자신이 사는 펜트하우스는 아니지만 작은 오피스텔은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오피스텔과 펜트하우스의 거리 중앙에는 편의점이 있고, 아무리 자신이 잘 나가지 않는다 해도 지금까지 서로 마주치지 못했다는 점이 새삼 신기할 정도였다. 건물을 올려다 보던 태오는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은 키가 엇비슷했다. 앵화색 머리카락은 보드랍게 목 주변을 덮고, 꿀처럼 부드러운 눈은 우거진 녹음과 돋아나는 새순 같기도 했다. 여린 체구와 손등을 고이 덮은 백의의 소매까지 보니 두 사람 다 타인에게 보호하고 싶은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건 비슷하지만, 전반적으로 시들어가는 봄이기 때문에 안쓰러워서라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태오와 달리 화사하니 만개한 봄이기에 유지하고자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남성은 메마른 태오와 달리 보드랍고 수분기 많은 입술을 지저귀듯 달싹였다.
"여기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네가 이시미야?"
─ 저게 한결이의 새 장난감인가?
단아하니 세상물정 모르는 규수같은 말씨와 달리 훅 치고들어오는 속내에 태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백의 차림을 보니 연구원인 것 같은데, 자신을 아는 것은 둘째치고 한결 또한 아는 듯하다. 데 마레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던 얼굴이었던지라 태오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길 그만두고 자리에서 한 걸음 벗어났다.
"맞습니다만…… 용건이 있으신지요, 커리큘럼이 예정된지라 오랜 시간을 내어드릴 수는 없지만요……."
"얼굴 한 번은 보고 싶었거든."
연구원은 눈을 곱게 포개듯 접어 웃었다. 퍽 애교있는 웃음이지만 숨결부터 묻어나는 짙은 와위에 태오는 속이 싸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버린 놈이 대체품을 찾았다길래, 대체 누군가 싶었거든."
해사한 미소와 함께 연구원은 태오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런데…… 맛을 못 잊었다고 해도 그렇지, 급한 나머지 장난감을 주워 껄떡대면 어떡하니. 기분 나쁘게."
"장난감, 이요."
"그래, 장난감. 왜? 모르모트가 더 낫나?"
연구원은 순수한 눈망울로 고개를 기울였다.
"반동분자들이 아무리 지껄여도 결국 너희는 우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잖아. 지금 날뛰어봤자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울면서 커리큘럼 좀 해달라고, 확률에 기대 올라서고 싶은 마음 탓에 굳이 말 안 해도 발밑에 설설 기는 주제에."
안 그래? 묻는 소리가 들렸으나 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음, 한결이가 대체품으로 널 고른 거면 나랑 나름 잘 맞을 줄 알았는데…… 대답이 없네."
"……."
"엘리트라고 한들 버릇이 없으면 다시 조립해야지. 맞다, 훈씨가 그러더라, 네가 주제도 모르고 우위를 점하려 든다고."
"훈씨, 라면……."
"사람인 척하는 구제불능인 네게 진짜 이름을 지어준 사람."
순수한 눈망울, 해사한 미소, 봄결같은 모습…… 태오는 어디에서 불쾌함을 느꼈는지 깨닫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낮은 로퍼를 신었던 탓에 눈을 정확하게 마주칠 수 있었다. 아스라한 파도의 끝자락을 보는 듯한 비색의 눈과 달리 녹음 우거지고 새순 돋아나는 생명을 품은 눈이 몹시도 따스했다. 태오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 돌연 손등으로 연구원의 뺨을 쳐올렸다. 철썩 소리와 함께 연구원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목에 걸어둔 연구원증이 순간 들썩였다. 사랑스러운 시원과 달리 태오는 성숙한 태도 탓에 세게 후려치는 꼴이 우아했다. 일렉트로키네시스 연구소 수석 연구원 류시원. 태오는 그 이름을 머리에 기억하며 손을 거뒀다.
"존경하는 연구원 님."
태오는 연구원의 황당함과 모멸감, 근거 없는 자존감과 선민의식에 가득 찬 시선을 마주하며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보듯 버릇이라곤 일절 없는 모르모트가…… 연구원 님처럼 지고하신 분을 여덟이나 갈아치웠음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그건 지고하시다 일컫는 존재들이 역량이 부족하여 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걸까요, 아니면 두려운 나머지 먼저 꼬리를 마는 것일까요……."
세로로 길고 가늘게 찢어진 동공이 명확히 연구원을 향했다. 항상 지친 기색이 어린 얼굴에는 달리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내 구제하기 힘들고 가능성 없는…… 열등한 자면 모를까, 어디에서나 나를 떠받드는데…… 그토록 성과를 바라는 당신들이 막상 감당을 못 하고 그리 군 것이면, 두려운 것이지요. 내가 자신들의 추악한 속내를 읽을까 두려워 그러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속내를 읽는다라, 글쎄…… 당신들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대체 뭘 한다고. 하품이 다 나오겠어. 그래, 진부하지요…… 고작 그런 상상밖에 할 줄 모르는 것과 내 격이 다른 것을 아는지ㄹ-"
태오는 휘청이며 입을 딱 다물었다. 순간 시야에 불꽃이 튀는 듯했고, 충격으로 혀를 깨물어 피어싱이 눌린 탓에 전신을 타고 기어오는 고통이 짜르르 느껴졌다. 뺨과 깨문 혀가 화끈거리고 시야는 아찔하다. 먹먹한 귀 사이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오는 홧홧한 뺨을 한 손으로 더듬다 돌아간 고개를 다시 정면에 두고, 초연한 표정으로 연구원을 응시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머리가 열심히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다.
"더 해봐."
부드러운 목소리가 흐르고, 태오는 현 상황의 결론과 함께 새로운 상황의 결과를 예상해 도출해냈다.
"더 지껄여보라 했잖아. 이시미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 뭐하니? 한 대 맞아야 정신이 드는 장난감 주제에."
"……."
"그렇지, 말 안 듣는 건 때려 키우라 하지. 이참에 버릇이란 걸 들여보자."
연구원의 손이 다시금 올라갔다. 태오는 최소한의 반항을 제하면 반항하지 않았다. 팔을 올려도 뺨을 얻어맞고, 멱살을 붙들기가 무섭게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또 후려치는 소리가 텅 빈 건물 주위를 선명하게 울렸다. 끝나지 않는다는 듯 다시 손을 올려 뺨을 후려친 연구원은 담담한 얼굴로 또 뺨을 치고자 손을 올릴 적 문이 열리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결아."
"……."
"너, 연락도 안 받고 말이야. 형이 늘 전화는 똑바로 받으라고 했잖아."
"……."
"그래서 너 대신에 애 혼 좀 냈어. 네 탓인 건 알지? 애가 버릇이 없더라. 데 마레 같은 곳에서나 일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
"아."
한결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표정을 굳히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연구원의 손목을 덥석 잡아 쥐어 뿌리쳤다. 여린 체구의 연구원은 뒤로 쉽게 밀려났고, 한결은 태오를 연구원의 손에서 어떻게든 떼어놓기가 무섭게 태오를 보호하듯 품에 덥석 안아 가뒀다.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는 가슴팍의 움직임이 선명하고,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결아, 그런 장난감한테 감정 쏟지 말랬지."
"……."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하자. 그때 일 이후로 입 닫는 병x 됐다곤 해도 말은 할 수 있잖아."
"……."
"어라."
태오의 눈에서 후두둑 무언가 고여 쏟아지자 연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한결은 태오의 상태를 보고는 머리를 더 품에 밀착시키머 괜찮다는 듯 등을 다독였고, 더 할 얘기가 없다는 듯 연구원을 사납게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도 똑같으면서."
"……."
"거기 그만 두고 돌아와."
"……."
"음, 꼬왔으면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또 찾아올게. 난 만족했거든. 그때는 장난감 버릇도 잘 들이고…… 또, 영악한 이시미야, 또 보자. 다음엔 커리큘럼실이면 좋겠다."
연구원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뒤를 돌아버렸고, 한결은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다 인영이 온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품에 있던 태오를 황급히 살폈다.
"저는…… 괜찮습니다."
태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통 정도야 익숙하거니와 정보를 건졌다 생각하니 이 정도는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한결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엄지로 태오의 눈가를 쓸었다. 그제야 태오는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울어야 하는 순간이 있으면 지금 흘리면 되는구나 판단하여 짜냈던 것이라 쉽게 그칠 수 있던 것이 수도꼭지를 비틀어버린 듯 제멋대로 뚝뚝 흐른다. 태오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고개를 다시금 저었다.
"괜, 괜찮……."
한결은 다 괜찮다는 듯 태오를 품에 안아 다독였고, 태오는 자신의 그 순간 한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제 속내를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
아. X됐다.
온기에 무너지면 안 되는데.
당신은 그저 떠나간 그것과 같은 족속일 뿐인데.
그래야만 하는데.
- 리버티 - 모략
"어떻게 하실 겁니까?"
데 마레의 소장, 안승환은 회의실에서 메시지를 크게 띄웠다. 회의에 소집된 연구원들은 제각기 쑥덕거리며 불안함을 표했고, 고개를 저었다. 리버티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큰일이 났다는 것정도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승환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며 박수를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인첨공의 피해자이자, 우리가 무지하여 벌어진 참사입니다. 데 마레는 어떤 조건에도 응하지 않습니다. 모든 연구원은 4학구의 안티스킬 산하 대피시설로 피신하며 신변을 보호하되, 나는 연구소에 남겠습니다."
"소장님, 안 됩니다. 그렇게 감성으로만 밀고 나갈 일이 아니에요! 아시지 않습니까, 죽는다니까요!"
연구원 하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이성도, 논리도 하나 없는 어린아이들 생떼입니다!!"
"그럼 박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이룩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퇴하는 것이 좋다 보나요? 아니면 학생을 넘겨? 무시만이 답이지 않나요?"
다른 연구원이 대화에 끼어들고,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목숨이 달렸는데 하나라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둘 다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무시가 답이라니까요?"
"대체 저희가, 이 직위를 내려놓지 않을 이유가 뭡니까?"
한결은 그 와중에 무언가를 고민하듯 툭, 툭,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놓으며 멍을 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승환은 한결에게 집중하라 핀잔을 주려 했으나, 한결은 뜬금없는 의견을 뱉었다.
- 우리가 연구직을 내려놓는다 해서 리버티가 저희를 살려두리라 보십니까?
단조로운 기계음에 좌중이 침묵했다. 저게 무슨 뜻인가 가늠하는 사람도 있었고, 눈치챈 사람도 있었다.
- 이미 4학구에 테러를 벌이고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연구원들은 지속적으로 신변을 위협받고 있고, 최근에 바즈라의 연구원 하나가 사표를 냈으나 결국 토막난 채 발견된 것도 있지 않습니까. 소속된 곳마저 없다면 우리는 사자굴에 풀어놓은 동물처럼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될 겁니다.
누군가 고개를 저었다. 가장 끔찍한 상황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
- 직위를 내려놓으면 멍청하게 자신을 지켜주는 새장을 나왔다며 죽일 것이며, 학생을 내놓으면 그럴 줄 알았다며 너희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위선적인 연구소라 부술 것입니다. 어떤 것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승환은 한결의 눈을 마주했다.
"더 얘기해보게."
- 저희는 이 상황에서 하나라도 더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고통받는 학생들이 있으니, 그 학생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 위해서라도 직위를 내려놓는 건 안 됩니다.
연구원들이 몇 동의했고, 한결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다 눈을 흘겼다.
- ……저도 남겠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 가여운 학생들이에요. 그 학생들도 사랑받을 자격은 충분합니다.
어두운 방, 엎드렸던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키며 비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뜨였다. 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다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하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들은 늘 용기 있는 행동을 동경해. 데 마레를 지킬 거라며 나이에 맞지 않는 사명감이니 뭐니를 보이며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용기있는 방범대, 학생 영웅에 도취되어 자신도 하겠노라 나서지요. 리버티는 그걸 세뇌라고 하며 혀를 찰 거예요."
"무슨 소리야?"
"리버티는 그러면…… 아이들을 도망치게 해줄까, 아니면 자유롭게 해줄까?"
"잠깐만, 너 설마."
"정문 앞을 자의로 지키는 어린아이들."
"……."
"대치하는 리버티."
"……현태오."
"어쩌면 좋아, 저지먼트가 오기도 전에 아이 하나가 죽어버렸네. 몇 살인진 몰라도 리버티의 손에 그만……. 그렇지, 희야야."
"너 진심이에요?"
"언제는 아니었을까?"
"너 진짜 큰일 나. 이건 아닌 것 같아."
"선지자야."
비색 눈동자가 휘었다.
"그렇다고 네가 호버 택시를 운전할 수는 없잖니."
그쪽이 비정한 방법을 쓰는데 어찌 내가 공명정대한 방법을 쓰리라 생각하니.
- 집착🃏
목화고 저지먼트가 리버티의 폭격을 저지했다. 연구소 주변을 지키던 안티스킬의 보고와 함께 데 마레 내부에 있던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희야 또한 갇혀있던 안전 벙커에서 뛰쳐나오더니 승환의 품에 안겨 목청 높여 울었다. 하지만 온전히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안티스킬이 잠시 동태를 살피기로 했고, 데 마레의 남은 연구원들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로부터 대략 15분 뒤, 주변을 경계하던 안티스킬 대원 하나는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홀로그램 고글의 시야를 확대했다. 새하얗고 붉은 무언가가 비틀거리며 주변까지 도달하자 총을 들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티스킬입니다. 신원 확인 협조 부탁드립니다."
"……목화고 저지먼트 소속 이시미입니다. 리버티의…… 후퇴를 알리고자 왔으니 들여보내주시지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ID 카드를……. 아, 확인 완료 되었습니다."
태오는 비틀거리며 안티스킬 대원을 스쳐 지나갔고, 대원의 생각 또한 흐리게 스쳤다. 코피를 저렇게 쏟았을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하지 않나? 요즘 저지먼트들은 사명감이 투철하네. 당연하게도 태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대신 데 마레의 정문을 통해 당당히, 그리고 금이 간 유리병처럼 위태롭게 걸어 안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데 마레 내부에서는 각종 감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기쁨, 환희, 미처 가시지 못한 두려움, 안도, 슬픔과 리버티에 대한 동정……. 그리고 태오를 발견한 사람들의 경악. 동시에 들려서는 안 될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난데없는 백화인의 등장에, 하물며 피투성이인 모습에 사람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태오는 개의치 않았다. 희야를 안고 연신 미안하다며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던 승환이 자신을 알아보고 경악에 물든 시선을 보내도, 얼굴 한 번 본 연구원이 괜찮냐 물어보아도 대답 없이 앞으로 쭉 걸었다. 시야에 잡힌 익숙한 갈색 머리를 향해 쭉 걷는 모습에, 눈치 빠른 연구원이 길을 터줬다.
"……."
태오는 한결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휘청이는 걸음에 한결은 다급히 걸음의 속도를 높여 팔을 뻗었다. 쓰러질 것처럼 크게 한 번 휘청이던 태오는 한결의 품에 파고들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멈추지 않는 걸음에 한결은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중심을 잃었고, 태오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뎌 한결을 뒤로 밀쳤다. 뒤로 자빠진 한결은 당황스러운 눈길로 태오를 쳐다봤지만, 태오는 품 속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한결을 안았던 팔을 천천히 굽혀 주먹을 꽉 쥐었다. 품의 온기에 기대듯 한참을 그렇게 있던 태오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내 연락을 받지 않았나요. 이런 버러지 가득한 곳에서 내가 찾길 바랐나 봐요."
갑작스러운 태오의 행동에 데 마레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언제 기뻐했냐는 듯,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태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상황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은 흐렸고, 암울한 목소리는 도저히 끊길 기미가 없었다.
"잔인한 사람……. 내가 친히 2학구까지 발 들여줬는데, 머리 조아리지 못할망정 버릇도 없이. 내 연락 일부러 피했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온순한 낯짝으로 음침하게 머리 굴렸을 생각을 하니 우스워서야. 당신도 결국 연구원이다 그건가……?"
한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태오는 주먹을 들어 가슴팍을 퍽 내리쳤다. 한결은 예상치 못한 힘에 움찔 몸을 떨었다. 1L 생수통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 같던 태오 치고는 퍽 힘이 셌다. 태오는 한결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계속해서 주먹으로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 발 들였다고, 내가. 당신 따위의, 한낱 버러지 새끼 때문에…… 한 번 쓰면 될 소모품에게……."
태오는 도저히 자제할 수 없었다. 2학구에 너무 오래 있었다. 사력을 다해 능력을 쓴 나머지 그 반동이 태오를 잠식하고 있었다. 위험 부담이 최소화되는 것이 인첨공의 초능력이라지만 태오는 달랐다. 연산식을 쓰는 법이 남들과는 달랐고,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다. 태생부터 예민한 성격에서 자꾸만 타인의 생각을 읽으며 자의도 아니었거니와, 최대의 출력을 냈으니 제정신일 리도 없었다. 태오가 느끼기에, 지금 자신의 상태가 10년 동안 창고에서 먼지 한 번 털지 않은 1세대 안드로이드를 억지로 부팅 시킨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 연락 한 번 받지 않고 몸 멀쩡히 살아있는 한결을 보자니 기어이 남은 이성의 줄이 뚝 끊겨버렸다.
"곁에 있어준다면서, 나를 버리지 않겠다면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도 당신은 나를 두고…."
지금 이 상황이 몹시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암울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연구원들은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차하다 종국에는 승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승환 또한 상황을 파악하는 듯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한결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적인 감정을 만들라 했건만 기어이 이런 사달을 낸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태오는 허리를 세우며 한결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버드나무 가지 드리우듯 우수수 한결 위로 쏟아졌고, 한결은 그제야 태오가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숨을 작게 들이켰다.
"신앙도, 외경도, 여운도 없으면서…… 입에 발린 말로 나를 꾀어내서 네 손에서 멋대로 휘두르니까 좋았어……? 나는 다 내어주려 했는데……. 나는, 나는 당신을 위해서……."
가련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던 태오는 손을 들더니 자신의 머리를 꽉 쥐면서 몸을 웅크렸다. 한결이 몹시도 거슬렸다. 이럴 거면 맑게 웃어주던 첫 만남도, 이야기를 들어줄 때 짓는 부드러운 표정도 짓지 말았어야지, 당신 때문이다. 품에 안아주지만 않았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당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을 텐데,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듣기 싫어……."
─ 태오야?
"머리가 계속 울려. 이런 건 싫어, 싫단 말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응? 어떻게 좀 해봐.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야. 내가 여기까지 행차해서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를 네가 만들었으니 책임을 지라고. 당신 탓이잖아, 당신이…… 당신이 내 말만 들었어도……."
태오는 고개를 연신 저었다. 2학구에 너무 오래 있었다. 그래, 2학구에 너무나도 오래 있었다. 과거에 겪었던 그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것 같았다. 태오는 머리를 더 꽉 쥐더니 몸을 조금 더 웅크렸고, 연신 시끄러워, 시끄러워……. 따위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한 손을 풀더니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코에서는 다시금 피가 한 줄기 흘렀고, 태오는 결국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가 아파, 시끄러워, 아니야, 아니야─!! 선생님, 나 이런 거 싫어. 싫어!! 제발 그만 좀 속삭여, 죽기 싫어, 나도 싫단 말이야, 나도 밉단 말이야 그만, 그만, 약도 먹기 싫고 더는 안 돼 싫어 잘못했어……."
한결은 손을 뻗으려다 태오의 눈을 마주하고 멈칫했다. 비명을 지르던 태오가 실이 끊어진 듯 우뚝 멈추며 팔을 축 늘어뜨린 탓이었다. 손을 허리춤에 매단 비녀에 가져다 대고,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춘 태오가 살벌하게 속삭였다.
"이제야 알겠다, 나 떠나려고 한 거지. 이런 꼴 보려고 한 거구나……. 난 또. 내 편이 되어준다면서, 너도 똑같은 부류였을 뿐인데… 곁에 있어준다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 했지만……. 결국엔 곁에 있지도 않았으니, 당신이 바라는 게 뭔지 알겠어……."
─ 아니야, 태오야. 진정하고 내 말 들어요. 제발…….
"이미 한 번 해봤는데 여기에서 두 번은 못 할 리가 없잖아, 당신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니면 매일 내게 좋은 말 해줄 리가 없잖아. 내가 더 괴롭길 바라니까 그러는 거 아냐…. 떠나지 마, 나 버리면 안 돼. 절대 버리지 마…… 나 당신 좋아하니까, 당신도 나 좋아해야 해. 우리 맹세했잖아, 당신이 나한테 믿는다 해줬잖아, 그러니까 제발 떠나면 안 되는 거잖아……."
"아-"
"나, 나 당신 좋아해…… 제발 곁에 있어줘."
이건 약속의 증표니까. 뱀 닮은 비녀의 머리가 분리되었고, 그 속의 첨예하게 번뜩이는 것이 일순 휘둘렸다. 깊숙하게 파고드는 모습에 연구원들이 비명을 질렀고, 태오는 몸을 허물어뜨렸다. "이제야." 선득하게 속삭이는 소리 뒤로 반쯤 뒤집어진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제, 야 고백, 했, 는데. 왜, 그런 시선으로……."
애정 받는 방법이 뒤틀린 자는 애정 주는 법도 뒤틀렸으니, 한결은 속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지금은 경악과 충격, 그리고 큰 슬픔에 빠진 사람의 표정을 짓고는 더 속내가 찔려 헤집어지지 않도록 태오를 뒤집었다.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며 119에 신고하는 소리, 승환과 희야의 높은 비명, 그리고 뛰쳐 들어온 안티스킬이 지혈을 돕는 모습까지.
평온한 한때였다.
- 체념🎴🃏
음중의 어느 날, 발치에 머무르겠다 맹세한 네가 벌여놓은 깜찍한 일이 그리도 마땅찮다. 주제도 모르고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친히 거둬주기가 무섭게 너는 보란 듯이 나와의 약조를 위괴하고 농락했다. 네가 지금껏 내게 품은 것이 외경이 아닌 추잡한 욕구였음은 안 봐도 뻔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좌불안석하여 너의 안위부터 찾았다. 지랄맞은 기억도 어떻게든 잊고 너란 새끼 하나 찾고자 친히 발까지 들였단 소리다.
사상은 그럭저럭 들어맞지만 대가리도 욕심도 턱없이 모자란 탓에 뜻을 함께하기 싫은 별 꼴같잖은 것들과 대치하고 몸까지 굴려 네 있을법한 곳 찾아갔더니만, 정작 너는 수발 멀쩡하여 안도하는 꼴이요 나는 안중에도 없었음이 선했다. 생각으로도 몸서리치고 오지 않길 바라던 순간 눈에 담으니 더 지랄맞을 수 없었다. 기분 삽시간에 잡치는 것은 당연하다. 같잖은 새끼 하나 눈에 치웠다 생각했더니 더 같잖은 꼬락서니 눈에 선하지 않은가. 배역한 새끼가 사지 멀쩡하고 걱정일랑 하나 없었다는 것 머리로 떠올리고 결론 내리니 너도 결국 가죽 벗겨 몸뚱이는 저잣거리 걸어놓고 이것이 그토록 세간 소문 역이하던 이시미의 가죽이자 머리요 과시할 사냥꾼에 불과했다.
너는 나를 배역했다. 나를 모시겠단 것이 보란 듯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너를 신의하여 그 모든 걸 내어줬건만 너도 결국 저 버러지들과 같다. 배때지 가를 적에 네가 지었던 표정만 되새기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너는 나를 저버려서는 안 되었다. 너는 나를 숭앙하고 맹종해야 옳았다. 배역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그런 네가 그 새까만 눈, 후벼파고 싶을 정도로 시커먼 눈깔로 말가니 날 쳐다보며 세상 모든 충격이란 죄 끌어안았다는 듯 낯짝 일그러뜨리니 내 시야 깜깜해질 적 나는 이대로 죄 포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시야가 핑 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년이며 놈이고 늙은 것과 애새끼 짐승과 인간할 것 없이 세상 모든 것이 구더기 꿈틀거리는 것 같아 그리도 구역질이 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날 그리 쳐다봐도 너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제 형을 쏙 빼닮은 것이 한때 네 형님이 정 반대의 상황에서 부라렸던 눈깔로 똑같이 쳐다보아선…….
하루만큼 늙어가는 역한 삶 내음에 눈 뒤집어 까고 쓰러질 때까지 너란 새끼 낯짝에 달린 시커먼 눈알이 도통 잊히질 않았다.
네깟 것 잊으면 그만이다. 나는 천장 말가니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저 잊고 손아귀에서 치워 집어던지면 된다. 어차피 너 같은 것 없어도 나는 원하는 것 손에 쥐고 말 테다. 다음에는 내 목 찔러서라도 네게 내가 이리도 가치 있고 존귀한 몸이라는 걸 입증할 테다……. 배알이 꼴리지만 어떻게든 다시금 나의 각본 새로이 쓰려던 상황 속에서 너는 기어이 나를 음중했다. 지금 당장 저두평신하며 죄를 낱낱이 고하고 참회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 참소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국 산산이 부서지니 이 모두 머저리 같은 네 탓이다.
모두 네 탓이다…….
"……."
"숨 쉬어."
방금 뭔가 떠오른 것 같은데. 병원 와상에 몸 뉘여 등 밑에 깔린 흰 천 쥔 채 눈알 반쯤 뒤집어 깠다. 몹시도 중요한 단어가 떠오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며칠인지도 모르겠다. 시야는 시꺼멓다 희멀겋게 점멸한다. 모가지 닭처럼 비틀렸던 탓이다. 번쩍이는 시야에서 간신히 떠오르던 단어를 미끄덩하게 목구멍 속으로 넘겨버리고 추잡함으로 덮어 가리는 설면을 받들까 하면 당신이고, 그 꼴이 몹시도 역겨워 설면 이로 깨물어 저며버릴까 하면 미친 개새끼다. 혼몽하여 눈 내리감고 싶지만 자꾸만 네 낯짝 아른거리듯 상기되고 눈을 뜨자니 네가 여기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나를 둔해 빠진 잡것이라 생각하지. 구제불능이라 생각하여 네가 아니면 돌볼 사람 없는 애물단지라 생각할 것이지, 좋은 실험 대상으로 생각하지, 참소가 아니라 온갖 저열한 단어로 나를 몰아가며 네 발치에 꿇리면 나는 외려 네게 배 깔고 누우며 매달렸을 텐데. 다시금 대가리 따도 좋다며 머리까지 대줬을 텐데. 병X같은 것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도 못 얹고……. 달달 떨리는 손들어 뺨 틀어쥐려다 눈에 보이는 머리채 콱 잡고 결국엔 폐목하였다.
살가죽으로 면밀히 덮어 틈새라곤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에 눈알 가둬도 네 내게 지었던 표정이 선하여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우화
─ 모든 것이 지루해져라!!
태오의 숨이 일순 멎었다. 이미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삶이었다. 하루를 살면 이틀의 숨이 멎었으면 했고, 이틀의 숨이 멎으면 그 이후의 여념도 없었으면 했다. 능력 또한 첨예하게 구르는 탓에 정상적인 타인과는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다른 삶이 되었고, 거듭된 심적 고통은 타인이라면 괴로워 구르고 비명 내지를 상황조차 예사스럽게 반응할 정도로 무뎌졌다. 그런 것이 당연한 삶에 타인의 강제적인 명령이 가중되었을 때,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미 무뎌진 것에 지루함과 따분함이 거듭되어 매듭지을 수 있는 감정은 하나다.
환멸.
기어이 이 삶에서 고이 접어둔 환멸 다시금 깨어나니 자연히 증오심 자리 잡는다. 어째서 나를 가만두지 않는 것인가? 이 빌어먹을 삶, 거센 너울질에 운명 순응하고 돛 움직이지 아니하겠노라 맹세했더니 이젠 또 네 헛된 짓이라 하는 꼴을 보아라. 이대로 광양 멀리하고 차라리, 죄다…….
"아."
제압되는 광경 눈 뒤로 두고 제 몹시도 귀애하는 아이 쓰러지는 꼴 그 눈알에 잡히니 수륜 좁아지며 정신이 번쩍 든다. 환멸이요 증오심 아직 채 가시지 못했다마는 그런 것 뒷전으로 둘만치 중한 일이 뇌리를 강제로 쑤셔 박고 들어온다. 태오는 제 몸 이끌며 달렸다. 긴 머리 제멋대로 휘날리고 옷자락 추하게 날려 털썩 쓰러지는 아이 품에 붙들려 들었다. 칠규에 흐르는 피 보며 걷잡을 수 없이 몸 떨려온다. 다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함을 알았다. 어금니로 혓몸 짓씹자 비릿한 내음 울컥 밀려오고, 잦아든 떨림과 함께 섬세한 손길로 고개를 돌려주며 기도 막히지 않게끔 목 가누게 했다.
"혜, 혜우야."
119를 불러야 한다. 그렇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스트레인지다! 태오는 돌지 않는 제 대가리 굴려댔다. 제아무리 암부의 후계자라 한들 타관 타는 것 어찌할 도리 없었다. 그러나 고향에 도달한 지금, 마음 편한 것도 아니다. 아둔한 것, 119를 부르면 된다는 바깥 놈들 상식에 잠식되었구나! 스스로를 타박했다. 외려 홈통에 넣을 구실 생긴다, 그것만은 안 된다.
"혜우야."
……그렇지만 달리 도와줄 사람 없다. 한시가 급하다. 보듯 오도 가도 못하니 양자택일하지 못한 자신 같은 상것의 야루한 최후가 이리도 골수 파고들어 깊게 찌른다. 약점 잡히면 안 된다며, 그러나 살려야 한다며 고뇌하고 수천 번 갈등했으나 시간은 찰나였다. 피 다시금 울컥 뱉는 모습에 정신 다시금 번쩍 들려 한다. 지나치게 빠르게 돈 머리에 정신이 아찔하고, 능력의 여파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지 눈앞이 핑 돈다. 태오는 점멸할 것 같은 시야를 애써 절레절레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자 했다. 개나 그 비슷한 동물이 대가리 털듯 추잡한 작태다.
"혜우야……."
차라리 주인을 부를까. 내 주인이라면 이걸 모두 보고 있을 터인데. 그렇지만 이곳에 저지먼트가 남아있다. 혼란한 마음에도 개죽음과 떼죽음만은 아니 된단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물론 제 주인이 먼저 뒤질 가능성 없잖아 있으나 그것이 작정하고 대가리 굴리면 여기에서 둘셋 정도는 길동무로 데려갈 것이요 뼈도 못 추림을 안다. 다시금 덜덜 떨리는 손과 함께 태오의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간다.
"아가, 내 녹우綠雨가 어찌 처우凄雨가 되었어, 어째서……."
인간의 삶은 무상하지만 너는 안 된다. 아직 봄이 채 오지 아니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짧은 봄조차 보지 못하고 가려는 게냐. 설국 도래한 머리카락 쓸어주며 조금 더 편하게 숨 쉬도록 고개를 마저 꺾는다. 태오는 고개를 들어 어디에서 비가 내리는지 알고자 했다. 그리고 지각하여 손가락 까딱이니, 긴급 연락처로 지정된 번호로 연락과 GPS 정보가 전송된다. 119에 자연히 연결되었으니 남은 것 기다림뿐이다.
"……."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무릎 꿇은 채, 호흡 원활하도록 돌린 고개 제 손바닥 위에 뉘여주듯 안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다. 지루하다. 몹시도 환멸스럽다……. 장고의 끝, 매듭을 짓는다. 될 대로 되어라. 그 많은 계산 일순 끝나버린다. 바깥이고 안이고 당최 그것이 무엇이냐? 이 좁디좁은 그림자 속에서 나를 적으로 돌리고 홈통에 넣고자 하는 것들은 죄 가둬 염매하리라. 넓은 바깥에서 활개치는 네놈들이 예징 가져왔으니 나는 결과를 가져와 속신의 주체 되어주마.
너희가 그토록 바라는 짓, 내가 해주도록 하마.
내 왜 이걸 진즉 생각하지 못하였는지.
태오는 생명활동의 영위를 눈에 담는다. 호흡마다 가슴팍이 일정하게 오르내린다. 불안정하게 헐떡이던 이전과 다름에 안도하지만 아직 마음 온전히 놓을 수 없다. 뺨 가볍게 쓸어주며 고개 푹 숙인다. 네 이름 석자 불러보려다 혀에 곱씹기로 한다. 대신 네게 두 글자 툭 던져본다.
"우화."
나의 우화憂火이자 藕花이며, 끝내 우화雨華인 아이야.
태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암만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속내에 부디 텅 비어버린 것만 아니어라 빌며 병실을 나섰다.
- 춘치자명, 그 이후🎴🃏
마지막 심문이 끝났을 적, 병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금이 툭 굴러들어 왔다. 병실 문 틈새로는 아무리 봐도 달랑 들어 내던지기도 싫었다는 듯 발로 툭 걷어차듯 굴려낸 것이 확실한 깨끗한 구둣발과 여유롭게 간다는 듯 흔드는 손만 보일 뿐이었다. 태휘가 급하게 쫓아 나갔지만 안티스킬 대원은 안색이 새파래져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었고, 자리에는 누구도 없었다. 동시에 태오는 끌끌 웃었다. 드문 반응이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생각보다 더 무능하잖아."
"학생, 뭔가 알고 있지."
태휘는 안티스킬과 금의 상태를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둘 다 급소를 정확하게 맞았고, 단숨에 벌어진 일이다. 누구의 짓인지 태휘는 알았다. 태오 또한 그 사실을 읽었는지 "바즈라의 개야. 너도 느꼈잖니."하고 속삭이며 무언가 더 얘기하려 했지만, 혜성의 능력이 더 빨랐다. 태오는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듯 헉,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혜성을 부릅 뜬 눈으로 쏘아보았다.
"ㄴ, 너 이 미친 새─"
그대로 고개를 쭉 빼들다 흑- 아악- 하고 짤막하되 목에서 끓는 듯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태오는 몸부림을 치듯 덜덜 떨다 그 자리에서 휘청이더니, 늘어지듯 혼절해버렸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캐퍼시티 다운은 훌륭하게 제 몫을 다 해냈고, 태휘의 질문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혜성 또한 쉬이 알아챘으리라. 만약 기절하지 않았으면 스트레인지의 무언가가 풀려버렸을 것임을.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금을 부축하고, 근처 보호자용 침대에 눕힌 태휘는 태오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다가감과 동시에 혜성을 향해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내더니, 희야가 말가니 쳐다보자 이내 더 묻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잠시 착잡한 속내를 가라앉히고는, 기절한 태오를 한참이고 쳐다보다 저지먼트를 향해 허리를 깍듯하게 숙였다.
"……불필요한 수사로 여러모로 저지먼트에게 큰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학생과 리버티가 연관점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냈으니, 윗선에 보고하며 최대한 밀어붙여 명예와 신뢰의 회복에 힘쓰겠습니다. 다시금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휘 쪽에서도 절대 공정하지 않았노라 판단한 듯하다. 속내로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다시 되돌리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짐한 태휘는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심문의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이 학생이 깨어날 때까지 떠날지 말지 정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혜우에게는 실로 다행인 시간이었다. 연락을 넣기엔 충분한 시간일 테니.
- 안녕하세요, 형부. 저 혜우예요.
"발칙하게도 이젠 형부라고 부르는군요, 처제. 마음에 들어요."
수화기 너머의 어조는 여유롭고 나긋하다. 울림 좋은 목소리가 배부른 짐승 같기도 하고, 물가 노니는 짐승들을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휘는 끌끌 웃었다.
"예, 잠시 뒤에 뵙도록 해요. 곧 갈 테니."
다만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메신저의 1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서휘는 다시금 혜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하나 깊이는 결이 달랐다.
"처제, 다시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우리 고양이가 류시원이라고 명확히 말했던가요?"
대답 듣고 한참이고 침묵하나 차에 시동 거는 소리는 명확하되 악셀 무엇보다 세게 밟았는지 웅, 하는 소리 울린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서휘는 입을 벌렸다.
"아무렴 알다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친구라서요."
절벽에서 내려다보던 것이 기실 흉수였으매 살의 가득하였다.
금이 깨어난 이후, 당신이 만일 끝까지 남았더라면 대략 15분에서 30분 정도 지났을 것이다. 태오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고, 뇌에 쑤셔 박히는 고통의 여파로 식은땀에 젖었던 얼굴은 창백하고도 싸늘하게 식어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몫이라 생각하며 당신들이 돌아가려 했을 적, 다급히 문이 열렸다.
가히 부서지듯 세게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만신창이가 된, 키가 큰 갈색 머리의 남성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을 것이다. 손바닥은 죄다 찢어져 피와 살가죽이 서로 뭉치듯 떡졌고, 신발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어딘가에 굴렀거나 나무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백의는 이리저리 헤지고 머리에서도 한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목에는 새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마 누군가 손목을 결박해서라도 도망치지 못하게 한 듯싶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모습에 저지먼트의 상태를 살피던 태휘는 놀란 눈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서, 선생님……?"
"-."
남성 또한 입을 벙긋거렸다. 목에 걸린 연구원증으로 무언가 맞비벼 끊고 탈출했는지, 줄이 끊길 듯 덜렁거렸지만, 소속과 이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무스, 백한결. 당신들은 심문 과정에서 태오와 연관 있는 사람들이 언급한 피해자의 이름을 언뜻 들었을 테니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린 남성은 흐- 하고 심적으로 퍽 고통이 어린듯한 침음을 내뱉었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희야는 슬쩍 저지먼트를 보더니, 소매에서 푸르스름한 손을 꺼내 자신의 입을 톡톡 두드리고는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저 선생님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공식적으로 끝난 건 맞지만 다가가면 안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
한결은 침대로 비척비척 다가가더니, 기절한 태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술하는 동안 토해낸 피가 새붉게 번진 흰 이불, 창백한 안색으로 쓰러진 모습과 캐퍼시티 다운의 영향으로 괴로웠던 탓인지 흐른 식은땀과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 강제로 약을 투여하는 과정에서 부러진 손톱…… 한결은 태오를 품에 안아들지도 못하고 몇 번이고 손을 뻗으려다 찢어진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그대로 무너지듯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이건……."
고개를 치든 남성의 눈에서 후드득 무언가 고였다 떨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눈이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안티스킬도, 저지먼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사로잡힌 눈이 떨림 하나 없이 눈물만을 뚝뚝 흘려냈다.
- 제 의견도, 의사도 없이 강행한 결과가 이겁니까?
한결은 제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배려하듯 입술을 명확하고 느리게, 또박또박 발음하듯 벌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결의 성정이 어떤지 타인들은 쉬이 알 수 있었으리라. 사려 깊고 지독하게 착한 사람. 저 사람은 인첨공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다. 누구라도 쉽게 품어주고 다독여줄, 온기 쥐여줄 존재가 이 삭막한 도시에 있으면 쓰나. 괜한 희망과 헛된 꿈을 품게 만들 텐데.
- 당신들이 그 인간의 말 하나만 믿고 강행한 결과가 이거냔 말입니다, 태휘 씨. 제가 뭘 믿어야 합니까. 당신의 수하는, 저를 거기 가둬놓고 수사를 진행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덜덜 떨리는 주먹에서 붉은 피가 스몄다.
- 저는-
"……."
- 선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는데, 당신의 상사와 수하란 사람들은, 소장 말만 믿고 저를 4학구에 가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건."
- 제 의사 없이 독단으로 진행된 수사잖습니까…. 이 부분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결이 고통스럽게 호소하며 얼굴을 다 까진 손에 파묻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을 적, 랑은 큰 위험을 느꼈다. 저 존재는 위험하지 않지만, 저 존재에게 집착하는 무언가가 있다. 머잖아 일어날 미래가 아른거린다.
─ "이시미야."
의자에 묶인 채 고통에 겨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태오와 지켜보며 생글생글 웃는 구십춘광을 빼닮은 존재가 보인다.
─ "네 주변의 모든 걸 나에게 주라. 아니면 너를 내게 줘."
그 미래가 산산이 부서진 것은, 뚜벅. 하고 복도에서 단정한 걸음 소리 울릴 때였다.
한결은 혜우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확실하게 본인의 실책이었으나 해명할 기회는 없다. 죄 있는 자의 말로다. 한결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침잠할 뿐이었다.
동시에 목표도 명확하게 잡혀가는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속내 읽을 수 있는 존재는 기절하여 깨어나지 못하였으니, 실로 애석하게 된 일이다.
광신하는 나만의 신이여.
어쩌면 누군가 가장 바라던 상황이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다.
호소할 시간 모조리 끝났으니 악랄하게도 경종 울리며 여기 있는 선한 자에게 선고한다. 데인저 센스로 감각을 곤두세운 자에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감각과 머리에서 울리는 경고음이 치솟았다. 동시에 열린 문에 누군가 슬쩍 들어오며 공손히 미소 지었다.
"실례하겠습ㄴ……. 선객이 있었군요."
한결과 몹시도 닮은 남성은 검고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었고, 동시에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반반하니 단아한 듯, 어딘가 날선 낯짝이다마는 랑의 본능이 외쳤다. 저 존재는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서는 존재다. 인첨공에서 만든 전쟁 병기는 많고도 많지만, 저건 아직 인간인 것조차 병기로 설계할 수 있을 만큼 독악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덤빈다 치면 자신이 죽든 말든 두엇은 길동무로 너끈히 데려갈 무언가가 있으며 당신과 정 반대의 인물이다. 남성 또한 랑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잠시 시선을 굴려 마주하더니, 이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아, 이것 참… 어쩐지. 오늘 날씨가 좋더군요. 화가 나도 하늘을 보면서 한 번, 발치에 피어난 네잎클로버를 보면서 또 한 번은 참을 수 있을 만큼요."
저 사람은 당신의 상성이다.
"…음, 뭐더라? 형사님께서 해주신 말로는, 스트레인지 사람들은 장의사 부르기 좋은 날이구나……라고, 한다지요? 형사님."
"……작가님?"
"그렇지만 오늘은 병문안을 왔으니 장의사 부를 일 없길 바라겠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학생들이 많을까요……? 전부 태오 친구인가요?"
남성은 당신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지만 그 기울이는 몸짓 하나로도 자칫하면 사람 거뜬히 죽이지 않을까, 랑의 심기를 자꾸만 자극하는 품새가 있었다. 태오를 살피며 이불에 묻은 피에 시선을 집중하던 남성은 고개를 슥 돌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심문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저지먼트고요."
"아, 심문……. 사고를 쳤다고는 들었는데, 그것 때문이군요. 유감입니다. …제가 혹시 심문을 방해한 건 아니지요?"
"공식적으로 끝이 났긴 했지마는……."
"아……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어떠한 위협도 없었겠죠. 몸이 성하지 않다는 것도 일찍이 알고 있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안티스킬을 신뢰하고 있으니까요."
"……."
그야 저것, 한 번 작정하면 태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오 주변의 모든 것에게 위협을 가해 고립시키고는, 기어이 태오를 집어삼킬 자다. 남성은 뒷짐을 졌다. 동시에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애써 눈을 휘었다. 퍽 슬픈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금방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정 때문에 얼굴만 보러 온 거였거든요.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을 줄은 몰랐지만……."
무릎 꿇고 무너진 한결을 향해 측은하게 눈을 굴린 남성은, 자리를 떠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지먼트 또한 노고가 많습니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라지요."
남성은 깍듯하고 상냥하게 당신을 대했다.
여전히 랑의 속내에서 경종 울리나 어쩌면, 존재만 위험하고 행하지 않는 이상 위협 하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렇게 만든 인첨공이 그만큼 잔인한 곳이 아니겠는가.
침대에 쓰러져 춘치자명한 것만 우습게되었지
예상대로 태오는 무죄였다. 혐의도 없었고, 리버티라는 증거도 없다. 그저 실적에 눈이 멀고 부패한 인첨공의 윗대가리가 마침 태오의 불안정한 정신으로 비롯된 해프닝과 데 마레 소장의 지나친 의심 탓에 건수 하나 물었다 생각하고 애먼 사람 잡았을 뿐이다. 다만 이는 당신들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저지먼트의 부장이 항의하고, 안티스킬의 수뇌 중 하나가 그 존재들을 내치면 될 일이지. 태휘 또한 다시금 저지먼트에 찾아와 몇 번이고 사과를 건네며 깍듯하게 이번 사건의 마무리에 대해 설명했다.
데 마레의 소장은 학생 친화 위원회에 불려가 자숙의 의미로 소장직을 일주일 간 내려놓고 자택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고, 학생들의 요구대로 안티스킬 중 그나마 믿을만한, 사이코메트리를 가진 제 수하와 함께 cctv와 더불어 능력으로 판독하여 바즈라의 부소장 류시원이 소장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았고 수사에 나섰지만 그렇게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부소장 님의 능력이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이 아니거니와 진술하셨을 때 '리버티가 데 마레를 진짜 죽였는지 궁금해서 찾아갔는데 아니라서 아쉽다고 말하고 왔다면라고 한 것과 사이코메트리가 일치했습니다. 동시에……."
류시원이 수사망을 잘도 빠져나갔단다. 아니, 혐의가 진짜 없었을지도 모른다.
"태오 학생과 알고 있는 사이지만, 교류가 있었을 뿐이지 자신이 설마 해를 끼치려 했겠느냔 진술도 사이코메트리와 거짓말탐지기가 모두 일치했습니다."
뺨에 아무리 봐도 얻어맞은 자국이 있던 태휘는 마지막으로 전할 소식에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피하다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학생의 처벌은 불가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오는 정학 처분을 받았다. 한결이 선처를 요구함과 동시에 저지먼트 덕분에 큰 처벌은 면했지만.
"커리큘럼 윤리 프로그램은 제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연구원 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이자 자율적인 참여 이후 투표로 선출되며……."
랑이 본 미래는 현실이었다.
"만장일치로 프로그램 이수 담당자가 바즈라의 부소장으로 배정되었습니다."
"판결, 피해자 백한결이 선처를 요구함과 동시에, 데 마레 소장과 동일한 방법으로 학생-연구원 中 연구원 요구 우선 조항과 무죄 입증에 대한 저지먼트의 심문 보고서 및 탄원서를 근거, 계약 해지 무효를 요구하였다. 연구원 본인의 강력한 의사와 더불어 무죄의 입증으로 하여금 해당 사안을 승인한다."
"……."
"단, 건전하지 못한 행동으로 교화의 필요성이 있어 본 볍정은 졸업까지 약 2개월 동안 1주에 한 번, 꾸준한 정신감정 및 72시간의 커리큘럼 윤리 프로그램 이수, 엿새간의 정학 및 근신 처분을 명한다. 윤리 프로그램의 담당 연구원은 현재 자리에 있는, 데 마레를 비롯한 산하 연구소를 제외한 타 연구원들의 자율적인 참여 후 투표임을 밝힌다. 이상, 판결 종료. 신속 집행 안건이기에 연구원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선출할 것을 명합니다."
"아! 그럼 내가 할래. 이의 없지?"
태오는 법정 내부에서 생글생글 웃는 시원을 보며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바즈라의 류시원, 오션스의 장배준, 보신의 박준식, 태상의 박훈. 더 없습니까?"
대체 자백제 처먹은 내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기까지 왔나.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프로그램 이수 담당자는 바즈라의 류시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씨*."
─ 춘치자명하였음을 모르는 자의 말로였다.
데 마레는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소장의 날카로움이 극에 달한 탓이었다. 파나케이아의 이름으로 방문했을 적, 임시 소장직을 맡을 중년의 여성 연구원은 한결과 어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백한결 연구원은 지금, 개화 이후가 아닌 개화부터 역방향으로 커리큘럼을 시도하는 안건에 대해…….
"아. 어서 오세요. 승환 씨는 안에 계세요. 한결 연구원은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요. 흥미로운 안건이지만 당장 실행할 법한 건은 아닌 듯하니 협력 연구소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도 아는 얼굴이다. 태오가 떠난 이후에 들어와 당신을 조금 돌봐주었던 사람이기도 했으니. 한결은 당신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는 자리를 떴다. 손에 감긴 붕대가 두툼하지만 품에 안은 서류만큼 두껍지는 않았다.
"우리 공주님 왔구나! 그 이름으로 오다니, 별ㅇ-"
승환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안이 벙벙한 듯 뺨을 더듬던 승환은 충격에 젖은 눈으로 혜우를 쳐다보았고, 오라버니 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태오 이야기구나. 알 수 없는 증오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악의가 꽃을 피우고, 지금이라도 다시 태오를 저당잡아 화를 내든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다 말했구나."
교화라는 말과 해칠지 모른다는 언급에 승환의 눈이 홉떴다. 다시금 뺨을 얻어맞자 이번에도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단다." 하는 말은 그나마 쥐어짤 수 있던 본심이었다. 목에서 나오지 못하는 말이 너무 많다. 태오를 그렇게 의심한 것은 내가 그 당시 너무나도 무지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품지만 불안해하는 이유는 희야가 윤 선생에 의해 망가졌듯이 너희 또한 망가질까 두렵기 때문에, 이미 태오도 너도 망가져버린 탓에 나는─ 머리와 달리 입은 모진 말을 쏟았다. 승환의 눈은 본심이 아니라는 듯 상처 가득한 눈이지만 당신이 알 바는 아니다.
"성자는 이 연구소를 물려받을 테니까."
승환은 희야를 성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 이 빌어먹을 목소리! 목을 찢을 절규와 함께 소장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하다. 이것만큼은 본심이었다.
희야는 머리가 북슬해지지 않도록 죽어라 뛰었다. 얼음으로 스케이트를 타 도망을 치기도 했고, 벽을 세우기도 했지만 태휘는 무서운 속도로 쫓아와 희야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방방 띄웠다.
"아! 이거 진짜 다 일러버릴 거야!"
"일러라, 이 일름보야!"
쨍알거리는 목소리가 뚝 끊긴 것은 혜우의 방문 때문이었다. 희야는 발랄하게 맞이하려다 입을 다물고 우뚝 멈췄고, 태휘 또한 고운 눈빛이 아님을 깨닫고 슬쩍 얼음조각을 걷어차 저 멀리 치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휘는 정자세로 뒷짐을 졌다. 착실한 경호원의 행동이자 안티스킬 형사로 일한 감이 발동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손을 보다,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슥 올렸다. 붉은 눈이 명확히 심해를 마주했다.
"……일렉트로키네시스가 아닌데, 소장님께 따끔한 전류가 느껴진다 그 말씀이십니까?"
"……."
태휘는 시큰둥하던 표정을 굳히고 한 걸음 다가섰다. 데 마레를, 소장님을 잘 알면서, 바즈라의 뒷배를 가진. 희야가 언급된, 단 한 사람.
"학생이 어떻게 아는지, 어쩌다 그런 추측을 했는지는 나중에 직접 파나케이아에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여 증언을 듣겠습니다. 지금은 잠시 실례해도 괜찮을지."
허락한다면 아마 손을 쥐어봤을 것이다. "따갑습니다." 하고 잠시 정전기 닿듯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고는, 태휘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을 것이다. 희야 또한 표정이 고요했다. 부서진 자아가 돌아오기 시작한 이후 방글방글 웃거나 애교 있게 입꼬리를 말아 고양이처럼 올린 표정이 기본이었던 희야는 다시금 학기 초처럼 공허한 눈으로 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닮은 듯한 눈동자가 희게 물들어 무언가에 푹 빠진 듯하기도 했다.
"어린 빛무리야, 제사장의 손길이 닿았더냐."
"어, 그 새끼 짓이 확실해."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구원할 자가 외려 구원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다만 능력 신호가 변했다."
"성장했다 그 뜻인가?"
손을 놓은 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 5 정도면 이렇게 파장이 변한다고는 하던데. 조금 불안정해. 레벨 5에 근접할 수도 있겠어."
희야는 침음을 흘렸다. "산 넘어 산이로고."
"이 전기 신호를 기반으로 추적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바즈라까지 단번에 잡기에는 명분이 부족함을 알아주십시오. 아무리 바즈라가 일렉트로키네시스 연구소라 한들, 이미 바즈라는 혐의가 없음을 사이코메트리로 입증했으니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태휘는 이내 희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해묵은 원한 정도는 풀 수 있겠지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안티스킬이며, 조국의 수호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군인이자, 당신 같은 학생의 안전을 위해 이 자리까지 올랐으니. 태휘의 진심이 빛을 발했다.
태오는 검지 손톱이 빠져 뭉툭한 손가락으로 매트리스를 연신 두드렸다.
제사장, 아스트라페, 바즈라, 스카디, 파나케이아, 형님, 한결 선생님, 역방향 커리큘럼, 라바나에게 전해둔 지시사항, 비사문천, 샹그릴라, 전언, 에어버스터…….
"과욕은 화를 부르지……."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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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예술 |
- 열락, 삶의 증명
- 상봉과 상실
warning! 불쾌한 골짜기
rav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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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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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_ 상봉과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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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월 n일(현재 세계관 상 시간)
inch_momo 젠장 또 레이브야
dnjfrhkdrh 인첨공 밖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lovelysusu_ @lovelymimi 너 닮았다
ㄴ lovelymimi @lovelysusu 왜 시비야 시*
ggondae_ 이 시기에 이런 작품 올리는 건 불편하네요... 다들 좋아하고 축하할 마당에 이런 잔인한 작품이라니, 바깥 사람들도 볼 수 있는데 인첨공 이미지에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글 내려주세요.
- 천사
태오가 사는 곳에는 작업실이 따로 있었다. 자칫하면 시끄러워 층간 소음에 대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소나키네시스를 응용한 신소재는 드릴 소리도, 총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주거환경을 선사했다. 오피스텔 거주자들은 농담으로 누구 하나 죽어도 절대 모를 철옹성이라며 낄낄댔지만 그만큼 조용하기 때문에 이따금 자기도 모르는 새 위층이나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오싹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누구 하나 죽어도 절대 모를 곳.
오늘의 태오는 3명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망치가 묵직하되 섬찟하게 빛나더니만, 무언가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거센 스파크가 튀고 인지 센서가 망가졌는지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것은 보이스 센서마저 망가져 늘어지는 테이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나, 나, 나, 나는, 나, 나는, 인, 인, 인간,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이 되고 싶다고 그만 좀 말해……."
태오는 음산하게 읊조렸다.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품이 되어 살아가야 할 안드로이드 중 두 대는 이미 처참하게 잔해를 모두 드러내며 무자비한 망치질에 으깨진지 오래고, 남은 하나마저 태오의 밑에 깔려 머리와 상반신을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었다. 주변은 박살이 나거나 뜯겨진 부품이 날카로운 단면이나 나사를 드러내며 바닥을 위협하고 있었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씨근거렸다. 인간이란 것들은 모조리 덧없는 족속들이다. 땅에 묻히거나 바다에 수장시키면 모조리 같은 처지가 되는 주제에 이것저것 구분 짓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하고, 끝내 배척한다. 어딜 가도 시선이 뒤따른다. 자신은 한사코 그렇지 아니하다 하여도 결국 인두겁 뒤집어쓴 자신을 보며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 하고, 그렇다고 인두겁을 벗으면 누구도 환대하지 않는다.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하는 자는 맴돌다 결국 단 하나의 선택지에 몰리게 된다. 그 이후에도 입방아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태오가 보고 느낀 인간이었다.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사랑하기엔 일련의 사건은 이미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나는 너를 더 높은 자리로 올려줄 수 있어……. 인간들이 경외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 왜 너는 고작 인간이 되고자 해, 추잡한 감정의 집결체들이 무엇이 좋다고. 내 손만 거치면 너를 떠받들고 사랑하고 찬사를 보내고 애지중지할 텐데, 어떻게 그들과 똑같아지려 드냔 말이야. 너는 내게 있어 가장 완벽한 존재인데 왜 불완전하길 선택해, 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재부팅을 시도합니다. 불가능. 오류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관리자에게 문의하여─"
몸을 뒤틀던 안드로이드가 우뚝 멈추더니, 내장된 위기 감지 센서가 내는 높은 경고음 소리와 시스템 오류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텅, 소리가 들렸다. 이후 몇 번이고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며 철끼리 맞닿는 기분 나쁜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연료통이 박살 나는 소리와 안드로이드 관절에서 나는 특유의 소리, 그리고 마지막 발악을 하듯 다 늘어지는 불쾌한 기계음이 인간을 두어 번 반복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간의 정적은 시간이 멈춘 듯이 길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태오는 망치를 쥔 채로 우두커니 박살 난 안드로이드 위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고정했다. 망치에서 끈적한 기름이 고여 물방울을 만들다 뚝 떨어지고, 무릎은 이미 안드로이드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섞여 언뜻 붉은 기운을 띠는 냉각수에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밑에 깔린 안드로이드는 처참했다. 머리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고, 내골격마저 박살 났다. 오류를 일으키다 관절이 어긋났는지 팔은 부자연스럽게 꺾였고, 칩조차 내골격 파편에 찍혀 더는 쓸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 그런 고철로 전락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했다. 깊고, 음습하며…….
"너는 인간으로 존재해선 안 돼……. 인간들이 너를 받아들여주기나 할 것 같아? 우리의 분수를 알아야지……."
나의 삶아, 숨아, 열락의 문이자 무한히 샘솟는 영감의 뮤즈요 인생의 전환점아. 너는 어찌하여 가치를 잃고 망가진 것마저 아름다운 것인가. 온통 망가진 것이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 보았던 격렬한 광경 속에서 폭발하던 아드레날린, 환호성, 튀던 부품과 스파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태오는 자신이 누군가를 똑 닮은 말을 했음을 깨닫곤 얼굴을 감싸 쥐더니 몇 번 눈 주변을 더듬거리다 후, 하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끔찍하고 역하다. 그리고 불안정한 시선이 이리저리 잔해를 훑었다. 끔찍하고, 끔찍하고……. 더는 움직이지 않는 안드로이드에 다시금 시선을 고정한 태오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허물어뜨리며 안드로이드를 부수느라 격양되었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찌하여 내 삶의 대체품은 이리도 완벽한 것인가. 차가운 너는 나만의 천사, 나만의 것. 숨 쉬지 않아도 좋아……. 태오는 기시감에 바르르 떨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기름과 냉각수의 냄새에 빠져들었다.
- 비탄
4학구 미술관에는 여러 작품이 있다. 바깥에서도 유명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나, 인첨공에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미술의 시대를 연 작가의 화려한 예술까지……. 레이브는 후자였다. 인첨공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미술을 만드는 존재. 안드로이드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숨과 삶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천재. 누군가는 익숙함에 잠식되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예술이라며 폄하하곤 했지만, 막상 인첨공에서 전시까지 되는 안드로이드 예술가는 손에 꼽을 정도요,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만들어내어 예술을 잘 모르는 인첨공의 사람이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는 존재는 레이브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 레이브의 작품이, 그것도 누군가를 위해서만 만들었단 의도로 경매에 올린 것이 4학구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니 각종 언론과 사람들은 그 실체를 확인하고자 우후죽순 몰려들었다. 오늘도 미술관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거니와, 오직 레이브의 작품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작은 공간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안드로이드 하나를 향해 유일하게 빛을 밝혀두고 있었다.
[레이브, <비탄>, 20xx. 3세대 안드로이드 Q-4171 칩셋.
3x3x1(칩셋). 인첨첨단공업단지 미술관 소장.]
커스텀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민무늬의 안드로이드는 족쇄에 묶인 듯 조형물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을 인식할 때마다 그쪽을 바라보며 각종 부정적인 표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제각기 진지하게 고찰하기도 하고, 내장된 AI를 향해 말을 걸기도 했으며, 진지하지 못하게 키득거리거나 꺼림칙함을 느끼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태오는 그 광경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갔을 때 안드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안드로이드는 태오를 인식하고 몸을 뒤틀더니,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금방이라도 울 듯하며 처절한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오는 입을 벌렸다.
"너는 왜 고통스러워 해?"
"나는, 나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사람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해서 그래."
"그게 왜 당연하다 생각해?"
"인간은, 숨을 쉬기 때문에, 생존하니까. 나는, 죽지도, 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칩이 이식된 동안은, 살아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숨을, 쉬는 것처럼, 나의 고통도 당연한 거야."
태오는 감정에 따른 기본적인 골조만 학습시킨 AI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네게 말을 많이 걸었구나. 많이 학습했어."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궁금함을 표출하지."
"그래서, 그 표출이 고통스럽니."
"아니. 이건 온전히 나의 몫이야. 표출하는 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면, 나는 내가 될 수 없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으나 진실임을 안다. 이들은 진실밖에 내뱉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됐기 때문이다. 질문이 없자 다시금 괴로운 듯 표정을 구기고 몸을 뒤트는 안드로이드를 보며 태오는 기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여전히 너는 진실만을 말하는구나.
- 해방
레이브의 작품이 경매에 오른다!
인첨공의 미술계는 다시금 크게 들썩였다. 레이브의 작품은 특수성을 지녔다. 본인이 직접 sns에 올리지 않는 이상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고, 경매에 오르는 순간에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그 주제가 불규칙했거니와 안드로이드 칩셋을 이용한 작품이 나올 적이면 레플리카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칩셋만이 경매에 올라와도 횡재요, 'Mare'나 '상봉과 상실'과 같이 직접 안드로이드를 커스텀 한 경우에는 그날 경매에 참여한 수집가들에겐 복권이 당첨되는 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그 안드로이드가 1세대와 같은 오래된 인첨공 역사의 산물이라면, 그날은 수집가들이 박 터지게 경매 최고치를 기록하고자 팻말을 들어댔다.
비탄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천재의 다음 작품이 과연 무엇일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각기 입방아를 찧고 추측을 이어나갔다. 누군가는 칩셋일 것이라 예측했고, 누군가는 안드로이드를 같이 꾸몄을 것이라 예측했다. 혹자는 이번엔 안드로이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인터넷 뉴스 한 면에서도, 공중파의 뉴스 자막에서도, 하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레이브의 새 작품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경매 당일, 커튼이 오르자 사람들은 다시금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브의 새 작품, 《해방》입니다. 5세대 안드로이드 H-7291 모델 프로그래밍 칩셋과 안드로이드로, 비탄에 이은 '감정' 에디션입니다. 해방된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억압에서의 자유, 카타르시스를 비롯한 모든 해방을 표현했습니다. 최소 경매가는 500이며, 작가의 요청에 따라 경매의 시작은 참여자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채용하겠습니다."
5세대로 분류되는 안드로이드는 출고된 지 1년도 안 된 신상이었고, 부드러운 관절의 이음새와 자연스러운 자세는 인첨공의 기술력엔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안드로이드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차이를 두고자 했다. 핏줄을 비롯한 혈색 일절 없는 가죽만 덮어두고 성별을 알 수 없게끔 이루어진 맨들맨들한 몸의 곡선이 그러했고, 인간답되 사소한 부분에서 인간답지 않은 부분이 두드러져 불쾌감을 이끄는 것이 특징이었다. 다만 그런 강수를 둔다 한들, 사람들은 신세대 안드로이드를 레이브가 절대 사용하지 않는 모델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본디 레이브라는 예술가는 구세대 안드로이드의 투박함에서 인간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존재였거니와, 5세대가 나온 현재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모델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앞의 인조 가죽으로 뒤덮인 나신의 안드로이드는 레이브라는 편견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내놓은 규칙과 편견까지 모조리 박살 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가죽에서 혈색이 돌았다. 별 볼일 없는 가죽만 덮여있던 손등은 혈맥이 새겨져 있었고, 뺨에 돋은 핏줄과 마른 몸에 드러나는 늑골, 빗장뼈가 금방이라도 부풀며 숨을 쉴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하나의 작품이었다. 발끝부터 시작해 올라가는 부드러운 곡선은 구슬픈 비탄을 표현하듯 짙은 코발트블루를 품고 있었고, 수줍은 짝사랑을 하던 자가 애욕에 젖은 듯이 애달픈 자주색을 품었으며, 경탄하는 듯한 오렌지빛까지 담고 있었다. 그 모든 곡선이 덩굴처럼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목을, 마침내 뺨까지 옭아매며 꽃과 자연,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모든 것을 순환하듯 표현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조화롭되 훑으면 조화롭지 않고, 대칭인 듯하면서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감탄하지 않고, 작품의 목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선명한 금빛 손자국 탓이었다.
지금껏 모습을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레이브였다. 학생인지, 성인인지, 그 이상인지 알 수 없었다. 성별도 알 수 없었거니와 개인인지, 단체 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장갑을 끼고 양손으로 목을 조른 듯한 저 선명한 금빛 흔적은 레이브가 '실존하는 존재'임을 드러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의 부팅이 끝나고, 그 작품이 움직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넘실거리고, 눈꺼풀 너머로 드러난 하늘색 눈동자는 천사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나는 떠나리라, 고통 모두 잊고 낙원으로 가리라, 새장에 갇혀 서로 지저귀고 울부짖던 우리의 삶은 아름다웠노라 할 수 없겠지만, 나는 마침내 이 끝을 보았노라!
누군가 홀린 듯이 팻말을 들었다. 신호탄처럼 쏘아 올린 팻말과 함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팻말을 들었고, 전화가 쇄도했다. 경매장이 한참을 시끄럽게 금액을 올리더니, 누군가의 쐐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1억 2천. 1억 2천으로 낙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금 레이브의 충격적인 작품을 입과 매체에 담아 올리며 제각기 해석하기 바빴다. 도통 해방될 기미 없는 삶 속에서 이질적으로 등장한 해방이었다.
- 순수
서휘는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한 번 작품활동에 몰두하면 작업실에 콕 틀어박혀 나오는 일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거나 환기, 청소 같은 것은 알아서 하기에 그나마 바깥 공기를 마시긴 한다마는 그 모든 것을 서휘가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이따금, 극단적일 정도로 작품에 홀린 경우에는-가령 그 빌어먹을 신데렐라라든지.- 방에 콕 박혀 그마저도 하지 않았으니 서휘는 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오야."
똑똑,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없었다. 고양아, 똑똑. 아가? 똑똑. 문을 여럿 두드렸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자 서휘는 문앞에서 팔짱을 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니, 지쳐 잠들었나? 아니면 또 이어폰을 끼고 작업중인가? 서휘는 고민의 끝에 문고리를 잡았다.
"음, 들어가마."
밥을 먹지 않았을 확률이 크니 뭐라도 먹이고 작업을 시키든 해야겠다. 서휘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문을 열었고, 크게 기함했다. 조그마한 몸집을 가진 태오는 유아형 안드로이드 앞에 무릎을 꿇듯 무너진 채 비구를 조그마한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조그마한 손가락 사이로 방울져 떨어지는 붉은 액체에 걸음을 성큼 내디딘 서휘는 바닥에 늘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에너지 드링크, 그리고 먹고 치우지 않은 두통약 포장지를 지나쳐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태오를 품에 덥석 안아 비구를 가린 손을 치웠다.
"내가 미쳐."
"……."
코에서 흐르는 피가 멎을 기미가 없자 서휘는 초점 없는 눈을 마주하다 코를 꽉 쥐며 고개를 강제로 숙이게 했고, 한숨을 쉬었다.
"네 몸이 지금 일곱 정도 된 듯한데 열아홉에 먹던 대로 먹는다고 버텨줄 것 같더니?"
"……히히."
"이게 웃겨?"
"에헤, 에헤헤, 히히히히……."
서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슬쩍 눈을 굴려 작품에 시선을 고정했고, 마른 침을 삼켰다. 유아형 안드로이드는 고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에 미세한 선이 있었다. 툭 건드리자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가졌던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얼굴을 쥐더니, 그대로 얼굴을 쥐어뜯듯 좌우로 열어젖혔다. 태오가 만든 인조 안면 근육을, 그리고 그마저도 기계를 하나하나 연결했는지 벌어지는 연출과 함께 실제 뼈와 같이 개조한 내골격을 드러냈다. 사랑스러운 모습과 달리 끔찍한 모습이었다.
"내가……."
태오는 꽉 막힌 어조로 옹알거리다 다시금 히죽거렸다. 얼굴엔 잔뜩 지친 기색이 어렸고, 눈밑은 새카맸다.
"내가…… 내가 해냈어……."
"……내가 못 살아. 태오야, 정신 좀 차리고 자자. 응?"
"아직 도색을 다 끝내지 못했…… 아…… 눈앞이…… 왜 안 보이지……."
서휘는 한숨을 쉬며 카페인을 이기지 못하고 멍을 때리는 태오를 안아 작업실에서 빠져나왔다.
"얼굴부터 닦자. 피범벅이야."
"커피 한 잔만 더…… 마시고……."
"절대 안 돼."
- 사칭
2학년 3반 윤성훈, 나이는 18세, 목화고등학교 재학, 안드로이드 공학과 진학을 희망하며 연구원의 기로도 밟고 있는 레벨 2의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자. 그는 비록 레벨 3의 문턱을 밟지 못했지만 그의 담당 연구원은 능력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새로운 기로를 추천해 주었고, 안드로이드 공학과 연구원의 기로에서 특출난 재능을 찾을 수 있었다. 학우들이 이따금 너는 기계를 잘 다루니 고장 난 것 좀 고쳐달라며 전혀 상관없는 것을 가져와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제외하면 무난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기묘한 점이라면, 그의 교우관계는 모두 연구원 지망생이었다. 일반 학생은 인첨공에서 연구원이라는 자리를 희망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의 무리에서 살아갔다. 자신을 떠받드는 인간, 출중한 재능, 삶……. 성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타 학생들은 그를 괴짜라 평했고, 혹자는 오만한 녀석이라고도 했다.
그런 그가 학교에서 자신이 레이브라고 밝혔을 때, 학생들의 의견은 반으로 나뉘었다. 진실이다, 혹은 저 괴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성훈은 당당히 안드로이드를 가져오겠다 했고, 시간이 흐른 오늘, 2학년 3반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막론하며 우글우글 문전성시를 이뤘다.
"진짜야?"
"헐, 레이브 작품 나 본 적 있는데 진짜 저렇게 웃어!"
평온하게 미소를 짓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를 보고 제각기 의견을 나누며 레이브다, 레이브가 아니다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성훈은 뿌듯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선생님이 수업이 시작됐다며 어서 가라고 내쫓고 나서야 한차례 조용해졌지만,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대다수의 학생들이 급식실로 이동하고, 성훈은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꺼내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성격과 더불어 안드로이드에 못된 짓을 하는 학생이 있을까 노심초사한 탓이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을 적, 누군가 텅 빈 교실 문을 열었다.
"응?"
성훈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얼굴에 낀 인식 저해 노이즈, 길다 못해 무릎 끝에서 살랑이는 무지막지한 길이의 창백한 앵화색 머리카락, 교복 위에 걸친 화려한 외투……. 저 외형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3학년 선배 중에 저지먼트가 있는데, 이따금 담배를 태우는 것이 보이는 양아치가 있다고. 그 선배는 독심술사인 데다, 엘리트인 것만 믿고 산다며, 생기부만 채우려고 활동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고 연구원 지망 동기들은 툭하면 험담을 했다. 자신들처럼 연구직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면서! 이명이 이시미란다. 저번에 성하제 때 꿈틀거리며 춤을 추던 꼴이 딱 어울렸노라 자기들끼리 낄낄대던 순간이 떠올라 등골이 섬찟했다. 성훈은 제대로 씹지 못한 첫 입을 꿀꺽 삼켰다.
"여,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 서, 설마 안드로이드를 부수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저지먼트잖아. 그렇지만 양아치라고 했는데…….
"……아, 레이브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식사 중이었군요. 방해가 된다면 나중에 보러 오도록 하지요……."
태오는 손을 고이 모으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성훈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보셔도 돼요." 생각보다 불량하지는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까딱이자 대기하고 있던 안드로이드가 우아한 걸음과 함께 사뿐사뿐 걸어왔다. 고이 기른 검은 머리카락과 깊은 녹음을 담은 듯한 녹색 눈동자, 그리고 수도사와 같은 옷차림의 안드로이드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태오와 눈을 마주했다. 태오는 그런 안드로이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고, 성훈은 시끄럽게도 속내를 울려댔다.
"편하게 먹고 있어요……. 손 대지 아니할 테니."
"ㄴ, 네."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되는데! 저러다 망가지면? 손 대면 안 되는데! 고가의 장난감을 사촌 내지 조카 앞에서 들킨 삼촌의 심정처럼 불안한 기색을 뇌에 직격탄으로 꽂던 성훈과 달리, 태오는 평온하게 안드로이드를 훑어보았다.
"작품명은…… 무엇인가요."
"《기도》요."
안드로이드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정자세로 있었고, 태오가 움직일 때마다 눈동자를 굴리긴 했으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하던 태오가 입을 열었다.
"4세대 P 시리즈 모델이군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귀 부분의 마감 처리를 보아하니 머리카락은 기존 에셋을 쓴 것 같고요……."
성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성훈을 가뿐히 무시하고 안드로이드에 집중한 태오는 잠시 실례, 하며 안드로이드의 안구 부분에 눈을 마주치듯 한참 시선을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용된 칩은 PLA-18267a군요……. 최근 작품에서 PLA 시리즈 칩을 사용했지요. 해방이었던가요."
"맞아요!! 해방에서 PLA-19165c를 사용했어요!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이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요."
태오는 느릿하게 걸어오더니, 노이즈를 끄며 허리를 숙였다. 시선을 마주한 성훈은 쭉 찢어진 눈동자에 잠깐 떨었지만 이목구비를 훑어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귓가에 속삭일 적엔 먹던 샌드위치의 오이가 무릎으로 툭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레이브 흉내를 내고 싶었더라면 페이셜 인식 값을 조정했어야지요. 여럿이 보는 거면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소수의 인원이 있다면…… 어설프게 타인의 안면 센서와 동기화해서 표정을 바꾸고 있다는 걸 금방 들킬 텐데도요……."
"……!"
성훈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귀까지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들켰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당황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성훈과 달리 태오는 느긋하게 무릎의 오이를 집으며 허리를 세우고 다시금 작품을 바라보다, 쓰레기통에 툭 던졌다.
"다만…… 작품에 대해서는 나무라지 않겠어요…… 아름다우니 말이에요. 검은 머리는 죄를 상징하고, 표정은 참회를 드러내고 있어요……. 실로…… 좋은 시도라고 보아요……."
태오가 발걸음을 떼며 교실을 나섰을 적, 성훈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샌드위치를 포장지 위에 툭 올려놓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로 좋은 시도라고……."
하교 종이 울리고, 가방을 챙기던 태오는 오늘의 남은 일과를 되새겼다. 순찰이 없다. 돌아가서 수행평가를 하고, 《순수》의 칩을 마저 손을 보고, 남은 시간에는 서휘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 되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태오는 누군가 반에 들어오자 시선을 마주했다.
"저, 선배."
성훈이었다. 성훈은 외알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을 애써 마주하려 들더니, 심호흡을 하다 단어를 뱉어냈다.
"드,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시간 좀 내주세요!"
"……."
"시,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좋아요. 학교 밖으로 나가죠. 대화 장소는…… 내 맘대로 골랐으면 하는데."
태오는 속내에서 들려오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 태오는 성훈이 뒤를 쫓자 옆에서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였다. 성훈은 그 상황에서 한 마디도 없이 불안한 기색과 함께 뒤를 따를 뿐이었고, 목화고 학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카페에 도달했을 적에야 눈을 크게 끔뻑일 뿐이었다.
"음료는 내가…… 사도록 하지요. 할 말이 있는 듯하니……."
"아,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선배가 후배에게 사준다고 생각하면 된답니다……."
"세상에~ 언제 그리 꼰대가 됐어? 됐고 둘 다 앉기나 해. 사람도 없겠다, 한 잔씩 돌릴 테니까. 학생은 자몽 좋아해~?"
"조, 좋아해요……."
"그래 보여~ 그럼 누나가 맛있는 거 해줄게~ 탱탱이는 그냥 커피 마실 거지~? 차가운 걸로, 원두는 산미 있는 걸로?"
"부탁할게요……."
카페의 점장으로 보이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의 여성은 태오와 아는 사이인지 너스레를 떨었고, 태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구석진 자리를 향해 앉았다. 성훈 또한 머뭇거리다 맞은편에 앉았고, 잠시 우물쭈물 댔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뭘까요."
"그게, 그, 그러니까."
성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레이브가 아니라는 걸 들킨 것이 두려웠다. 이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 하는 건 비굴하고, 그렇다고 레이브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도 경멸의 시선이 돌아올까 두렵다. 이미 알아챈 사람이지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저 선배가 말해버리면 다른 학생들이 다 나를 그럴 줄 알았다며 단체로 미워하지 않을까……. 불안해할 적, 태오가 먼저 서두를 뗐다.
"레이브는……."
"ㄴ, 네!"
"모든 작품에서 강조하지요……. 작품은 작품이고, 작가의 삶이 녹아있는 것이라면 그만큼의 경의를 표해야 하노라고…."
"……."
"예술가와 관람객은 같지만 달라요……. 관람객은 작품을 제각기 평가하지만, 예술가는 작품을 제각기 담아내지요……. 시선이 아무리 달라도, 그 사람의 예술인 법……. 인간이란 본디…… 서로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자신과 동급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있다고. 아니한가요."
"그, 그렇죠."
성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레이브가 sns에 짤막히 글을 올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은 무언가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의 의미를 자신 또한 갖고 싶어 하고, 쥘 수 없다면 낙담하면서도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자신을 올리거나, 타인을 내린다고. 혹은 타인을 올리며 그 의미를 달리 새긴다고. 그렇기에 창작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것은 겸허히 받들어야 하노라고, 그 길이 어렵다 해도 예술이란 것은 언제나 어려웁고 쉬운 일이라고. 태오는 커피와 스무디가 나왔을 적, 스무디를 앞으로 밀어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후배님이 레이브를…… 동경하고, 그 모습이 작품에 녹아든 것을, 넘어서…… 레이브 그 자체가 되고 싶은 것은 알지만, 후배님은 레이브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저, 저 같은 건 레이브에 묻히는걸요. 안드로이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래요! 레이브에 비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래서, 저도 레이브처럼 되고 싶어서, 그러니까─"
"인간이란…… 한철 봄날과 같이 실로 덧없는 존재이나… 덧없음 뒤로 영원히 남을 흔적을 새기는 존재들이…… 어찌하여 스스로의 색채를 부정하나요."
"!"
"레이브의 색이 아니라, 네 색이어야지요. 레이브라면 새로운 색채를 축복하고 경의를 표할 텐데도."
"……."
성훈은 손을 꼼질거렸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다들 제가 레이브가 아니라고 밝히면 끔찍한 시선으로 볼 텐데……. 거짓말쟁이라고, 그럴 건데."
"너는…… 어리고, 악의가 아닌 솔직한 심정이 있으며, 네 작품이 있잖아요."
"……."
"그들이 무어라 하든 네 작품이 있고…… 솔직하게 말을 해요……. 미워할 사람은 끝내 미워하겠지만…… 용기를 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 미움에 연연하여 봤자, 네 노력을 미워하지는 아니할 쪽에 연연하는 것이 심사에는 능사일 터이니……."
"……."
"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 마시고는 냅킨 몇 장을 밀어주었다. 느껴지는 속내는 안도감과 아직 해소되지 못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가득하지만, 앞으로 알아서 할 일이지. 태오는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다, 이내 얼음만 남은 커피를 뒤로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가, 감사, 합니다. 그러니까."
"됐고…… 얘기해 봐요. PLA-18267a 칩에 어떻게 페이셜 인식을 시켰는지."
"……!"
성훈은 눈물을 닦더니, 용기 있게 입을 벌렸다.
"칩의 코드를 손댔어요."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카페 마감시간이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모델 코드까지 외워가며, 그게 뭔데 씹덕아 소리가 절로 나올 오타쿠적 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차례도 끊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가 안드로이드에 진심이었다. 태오 또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황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대화한 적이 있었나? 단 한 번이라도? 대화가 너무나도 길었다. 페이셜 인식부터 시작해서 안드로이드 모델의 모질게 대한 고찰, 인조 피부에 대한 재질 논의, 메트로폴리스에 있다는 안드로이드를 꼭 보고 싶다며 눈을 빛낼 적에는 본인도 보고 싶다 맞장구를 쳤고, 칩셋의 파라미터 UI에 대해 불만을 쏟아낼 적엔 끝도 없는 공감이 이어졌다. 카페 청소를 도우라며 여인이 바락바락 태오를 붙잡는 통에 배웅은 하지 못했지만, 성훈은 한결 후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태오는 손을 대충 흔들어주고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말 그렇게 많이 하는 거 처음 봐~"
"나도 처음이에요……."
"세상에, 도련님 목 나갔어!"
"……."
"그래서, 정말 저 애한테 조언해주고 싶어서 대화를 한 거야~? 천하의 도련님이?"
"예술가, 이니까요……."
"세~상에, 사람 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저런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애한테 예술론 전파하는 거~ 라바나는 무섭다~"
"글쎄……. 다른 것도 있지만, 굳이…… 쓸만한 패도 아니고, 파봐야 해서요……."
"그러니까~ 청소 돕고 가! 혼자 하기 귀찮아!"
"뻔뻔하기는."
"커피값, 노동 값~"
다음 날, 태오는 아침부터 조례 시간 직전 바나나우유를 사들고 부리나케 달려온 성훈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혀, 형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
"할 수만 있다면 평생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대체…… 어째서죠?"
"형님은!! 전기 신호로 이루어진 자극이 얼마나 거센지 알려주셨으니까요!! 어제, 그런 방식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잠깐, 사람들이, 오해하ㄱ─"
"사실이잖아요!! 저야말로 오해 때문에 형님의 진가를 몰라뵀습니다!! 그 짜릿하던 순간을 평생 기억에 새기고 형님으로 모시게 해주세요!!"
뭐야? 전기로 지졌나? 현태오라면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근거 없는 생각이 들려오자 태오는 이마를 팍 쳤다.
"형님!"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이상한 녀석들만 꼬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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