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초능력 특목고 모카고 R2
"부디 잊힌 꿈을 짊어지려 하지 마요. 한 사람의 걱정을 끼얹어봤자 각박한 세상인 건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1.1. 외모 ¶
겨울에서 봄의 색감을 억지로 끌어다 쓴 것 같은 청년은 체격이 그리 다부지지 못하여 연약한 인상을 심었다. 무언가 먹고는 사는 걸까 싶은 잘록하니 가느다란 자태가 남자로서도, 여자로서도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은 가느다란 모양새라 뭇 사람들의 의구심을 끌어 올리기엔 충분했다. 중간을 집은 듯한 겉모양새 덮어낸 분홍빛 머리카락은 등허리를 넘어 무릎 밑을 그늘지게 덮으니 그 색조가 온전한 봄이라기엔 어딘가 창백하여 앵화를 연상시키고, 느슨하게 아래로 묶어 내렸던 탓인지 금세 머리가 풀어지곤 했다. 흔히들 말하는 단명헤어라고 하던가. 영준하니 납작한 이마 위로 이리저리 흩어진 앞머리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그림자 지는 곳에만 창백한 기운이 돌아 생기 없어 보여 조금 더 사람이긴 한가 싶은 모습을 보였다.
흠결 없는 낯짝은 늘 홀로그램에 가려져 있었다. 안면 인식 저해 기능으로 하여금 이지러진 노이즈는 가끔 하관이나 머리카락만 이따금 보이곤 했다. 요청하면 송출을 중단했지만, 평시에는 상시 송출 상태였다.
송출 중단으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여인, 청년,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모두 섞어 물을 탄 듯 흐리되 어여쁘니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렷한 듯 흐린 인상 탓이다. 곧게 뻗은 콧날과 항상 단아한 표정, 대화할 적 가끔 보이는 가지런한 치열, 자연스럽게 올라간 눈꼬리는 자못 앙칼질 수 있으나 고요한 표정으로 단장하여 쉬이 눈치챌 수 없고, 촘촘하고 긴 속눈썹과 언더래시는 따로 정리하지 않아도 곧게 뻗어있었다. 깊게 팬 쌍꺼풀과 그 위의 가지런한 눈썹…….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되 화려한 미인상이라 단언할 수 있으나 화사하고 햇살과 같은 미인은 아니었다. 눈은 새파란 그늘을 드리웠고, 미소는 단아하지만 불안정했다. 묘하게 피로와 세상사에 지친 듯한 모습은 그나마 이름대로 따라가는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퇴폐적인 면모의 정점을 찍는 것은 눈이었다.
공막과 홍채의 경계가 흐려 초점이 없는 듯하나 또렷한 동공을 가진 눈동자 탓이다. 옅은 비색의 눈동자는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의 흔적이 명확히 남아있고, 밤에는 색이 옅은 나머지 홀로 빛나는 듯한 착각 심어주는 것 같았으니, 사람들은 그 유리알같은 눈동자에서 비치지 않는 감정과 가라앉은 기이한 차분함에 절로 기분이 나쁘노라 생각하곤 하였다. 무슨 수를 써도 그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끔찍한 상황을 마주한다 해도 인간의 정해진 삶은 지켜볼 뿐이지 자신이 어쩔 수는 없다는 듯 관망하며 낙담한 자의 눈이었다.
눈에서 시선을 떼면 귀의 장신구 요란하다. 늘 목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자는 목에 붕대나 초커가 감긴 꼴을 보니 심한 흉터가 있노라 말했고, 혹자는 입묵한 것은 아니냐 하였다. 손목을 타고 손등까지 새겨진 탓에 붕대 칭칭 감은 흔적 너머로 새까만 비늘 자리한 것을 보면 누구나 짐작하지 않겠는가? 길쭉한 손가락은 뼈마디가 도드라졌고, 손톱은 길어 정갈히 네일까지 했다. 호리호리하고 가느다란 다리가 쭉 뻗어 나오니, 어딘가 위태로운 걸음 돋보이나 실상 겉옷에 가려진 잘 부푼 흉부로 하여금 균형이 조화로이 잡힌 체형. 테크웨어로도 가려지지 않는 날렵한 곡선은 잘 빠졌으며, 겉옷 만큼은 어느 정도 여백이 남는 옷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늘 스카쟌이든 점퍼든 무언가는 걸치고 다녔으며, 행여라도 여백 남는 겉옷 못 입으면 과민하게 반응하였다.
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176cm. 높은 굽을 포함하면 183cm, 낯짝을 덮어 가려 신뢰감 단 하나 없고 전체적인 굴곡을 보아 불안정하되 무엇보다 균형잡힌 모습, 어디에서나 쉬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존재, 그 속의 미감美感은 관리되지 못한 않은 야생성을 띠고 있었다.
한데 아는가? 이 녀석, 그걸 깨달을 때면 특유의 지친 듯한 미소를 짓곤 했다.
1.2. 성격 ¶
"얌전히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아, 나는 스킬아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옳지. 조용히. 그렇게…… 잘 한다. 잘 참아줬어요. 그러니 한 대만 더 맞자."
─ 순찰하던 중에 있던 일. 잔잔하게 말했지만 실상은 과잉제압으로만 시말서 5장을 써내는 기염을 토했다.
정적이되 차분하고, 감정이 있되 지나치게 끌어올리진 않으려 애쓰는 사람.
인생이 불꽃놀이라면 타오르지 않는 심지. 속내를 숨긴 이시미, 뒤틀린 예술가.
감정은 흐린 듯 선명하고, 금세 흩어진다. 잘 웃되 잘 가라앉고, 잘 뭉치되 잘 흩어진다. 사사로운 것 마음에 담지 않고 성미 유연하여 열린 생각으로 임한다. 낯짝 가린 친절함에서 신뢰감 없는 꺼림칙함을 느낄 법하나 대화를 해보면 정직하기 짝이 없다. 윤리와 도덕성이 무뎌진 감은 없잖아 있으나 남에게 전가하진 않는다.
감정은 흐린 듯 선명하고, 금세 흩어진다. 잘 웃되 잘 가라앉고, 잘 뭉치되 잘 흩어진다. 사사로운 것 마음에 담지 않고 성미 유연하여 열린 생각으로 임한다. 낯짝 가린 친절함에서 신뢰감 없는 꺼림칙함을 느낄 법하나 대화를 해보면 정직하기 짝이 없다. 윤리와 도덕성이 무뎌진 감은 없잖아 있으나 남에게 전가하진 않는다.
친화성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다. 친절하지만 상냥하지는 않다. 딱 거기까지의 인물이니 미묘하다. 무언가를 선에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어둔 선의 경계를 오고가는 사람을 굳이 말리지 않는다. 허용하기만 한다. 그 이후의 어떠한 것도 처리하지 않는다. 타인이 알아서 하라는 듯, 들어오는 것 밀어내지 않는 탓은 속 깊게 생각한 탓이리라. 이 탓에 선의 경계에 발 들인 사람들도 이따금 제 풀에 지쳐 나가곤 했다. 다만 친화성과는 조금 결이 다르게, 무리에 녹아들고 적응하며 어울리는 능력은 뛰어났다. 이 때문인지 남들도 깨닫기 전에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섞여있다 깨달을 적엔 이제 알았냐는 듯 작게 웃곤 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하다 상술하였지만 대화가 깊어질 적이면 조금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낙관적이고 부드러운 듯한 어조는 어딘가 비관적인 면모가 묻어나오고, 어투의 말미는 부정적으로 끝맺음할 때가 있다. 부드러우나 지나치게 뭉근하다. 어쩌면 화낼 힘조차 없는 것일수도 있다. 하물며 본인은 선의 경계에 머무르게끔 해놓고, 정작 타인의 선은 성큼 넘었다. 세상사에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예술가적 기질이 한 번 드러나면 무시무시한 집착 가지고 있으니, 한 번 몰두하면 인간적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행태 아무렇지 않게 벌이며, 스스로의 목숨줄 또한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곤 하였다. 자기 자신 또한 예술 작품의 재료로 보는 시선과 대담함, 자기파괴적인 성미는 주변인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나, 그 성미를 본인도 알아 타인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 보면 선인이라 확실히 정의할 인물상은 못 되었다.
길가의 쓰레기를 주우나 태연히 무단횡단을 할 것 같은 성미를 지닌 것만 같다. 하나를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버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매사 초연하되 겁이 없었다. 차분하게 휙 돌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는 면모로 하여금 아직 심지에 불 붙지 않았을 뿐인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대의 차디찬 위선에 가까운 온상, 어딘가 결핍된 자, 그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본성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사회에 섞이고자 체념하되 아예 버리진 않은 자.
그러나 이 장소에서 그 본질이 다르게 두드러지는 존재.
그야, 인첨공의 사람이지 않은가?
1.3. 능력 ¶
텔레파시(Telepathy) | |
보컬 텔레파시(Vocal Telepathy) 최초 스캔 : 17597 |
2. 기타 ¶
- 반말과 존댓말을 적당히 섞어 쓴다. 온전히 반말을 쓸 때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존댓말을 섞을 때가 있었다. 안드로이드 수집가는 주로 고위층이다 보니, 그쪽을 상대하는 특성상 반말이 어려운 탓이다.
- 흡연자. 고등학생이 흡연이라는 사실에 많은 우려를 표하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에 금연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으나 세상과 인내심은 녹록지 않다. 개인 재떨이를 구비하는 등 뒷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편이나, 그 개인 재떨이 때문에 불시검문에서 늘 적발되는, 1년도 못 기다리면서 다시금 손대지 않겠다 다짐만 하는 미련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평하곤 했다.
- 스스로 번 돈을 통해 뷰 좋은 오피스텔에서 자취하고 있다. 집 상태는 모델하우스인 것처럼 깨끗하며, 어질러진 곳 하나 없다.
- 커리큘럼 불이행자. 개화 이후 커리큘럼을 여러 번 시도했으나 제대로 능력이 정착되지 않고 제어할 수 없어 정규 커리큘럼에서도 골칫덩이란 평을 들었거니와 자의적으로 거부하며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담당 연구원을 여덟 번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그 평판도 썩 좋지 못하다. 태오는 억지로 떠맡은 꼴이지 않느냐며, 석연치 않은 듯 애써 웃곤 했다.
- 이름 탓에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으니, 바로 '블랙 크로우'. 부디 언급하여 대참사를 일으키진 말자…….
- 늘 무선 이어폰을 귀에 끼고 있었으며, 플레이리스트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록 인디밴드와 드림코어가 주였다. 사이키델릭 록에 푹 빠져있으니, 사람 목소리를 듣긴 하는지. 노이즈 캔슬링을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과 달리 들을 건 다 듣는다.
- 보기보다 육체적 능력 좋은 듯 안 좋은 듯, 중도를 걷는다. 어떻게 보면 연약하고. 하물며 누가 툭 치면 뒤로 밀려나지만 간혹 무시무시한 힘 보인다. 주 제압 무기는 비살상 권총. 대능력자, 그리고 비능력자 제압용으로 디자인은 커스텀을 넣어 브라우닝 No.1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싯적 오락실 죽돌이던 탓인지, 고인물들 조언에 따라 사격 명중도가 썩 나쁘지 않다.
- 식습관에 호오 없으니 미적지근하다. 뭐라도 먹이려 들면 희미하게 웃는 주제에 커피, 에너지드링크 종류는 꼬박꼬박 마셔댔다.
- 칩 이식자. 생체전기와 신호를 기반으로 무선 네트워크와 연결해 홀로그램을 주변에 구현하거나 개인 클라우드에 짧은 순간을 저장하고, 페이 기능 또한 탑재하고 있다. 현재는 마개조를 걸쳐 안면 인식 저해장치와 개인 ai 비서까지 구비했다.
- ……방송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저 소문일 뿐이다. 설마 이런 사람이 180° 뒤집어진 컨셉의 버튜버 방송을 하겠는가? …설마, 진짜, 하겠……는가? 설…마…….
- 버튜버 헤이커黑客
"안녕 자기들, 오늘도 당신만의 해커가 왔어."
- 컨셉 버튜버로, 당신이 표적이었지만 첫눈에 반한 나머지 남몰래 지켜주는 정체불명의 해커黑客.
- 태오와 다르게 텐션이 상당히 높으며, 목소리도 보이스 체인저로 오토튠이 섞여있다.
- 주된 컨텐츠는 혼자할 수 있는 게임, 저스트 토크, 시청자 참여형 토크로, 이상하게도 속내를 꿰뚫는 듯한 고민상담에 박수무당 헤도령 소리도 듣는 터라 최근에는 컨텐츠시 의상을 바꿔 아바타에 무복을 입힌다. 이 헤도령 컨텐츠로 하여금 고정 시청자층이 생길 정도.
- 최근 플레이한 게임은 시청자의 요청으로 시작한 파피 플레이타임 시즌 1로, 마지막 추격 파트에서 "뭐야 내 방향감각 돌려줘요"가 유언이 된 것이 쇼츠로 돌아다니는 중.
- 가끔 캠방도 하지만 얼굴은 드러내지 않는다. 가발을 쓰고 손도 장갑을 끼는 등 신원을 철저히 가리는 중.
- 캠방에서는 주로 요리 컨텐츠. 희대의 명대사로는 "그냥 자기들은 시켜먹어. 나처럼 조지지 말고."
헤이커 활동 때문에 태오가 기력이 쫙 빠져 사는 게 아니냔 말이 오너 사이에서 돈다.
- 오프닝 멘트는 "안녕, 자기들. 오늘도 당신만의 해커가 왔어. 자유롭게, 그렇지만 지나치게 날뛰진 않게. 여기서는 하고 싶었던 말을 표출해줄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 클로즈 멘트는 "잘 자, 사랑해.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
- 컨셉 버튜버로, 당신이 표적이었지만 첫눈에 반한 나머지 남몰래 지켜주는 정체불명의 해커黑客.
칩셋 아티스트 레이브Rave
- 익명 사이트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세간을 뜨겁게 달군 신원 미상의 인물. 안드로이드의 행동과 표정을 결정하는 칩셋 프로그래밍과 각종 미래기술에 능통한 손놀림을 보여, 인첨공에서 처음 만들어져 불쾌하기 짝이 없는 1세대 모델로도 4학구 미술관 큐레이터 안드로이드 모나리자를 능가할 정도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여러 안드로이드 수집가와 2학구, 각종 기관에서 칩셋 프로그래밍 러브콜을 받는 등 뜨겁게 활동하고 있었으나, 슬럼프로 인해 휴식기를 선언했다가 최근에서야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 의뢰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이곳이 인첨공이기에 나올 수 있는 천재라 불리는 레이브의 정체는 보다시피 태오. 스스로의 삶을 조금 자랑스러워 해도 좋으련만, 세상 시선이 낯부끄러운 나머지 숨는 등 겸손하기 짝이 없어 타인에게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
2.1. 관계 ¶
선관은 뒤에 🀄가 붙음.
- Npc
백서휘 - 뮤즈와 예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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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결 - 커리큘럼 담당 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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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yer [3학년_저지먼트_동기선관]
최은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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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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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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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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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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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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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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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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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배경&떡밥 정리 ¶
"부모님은……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도 그 사정을 아니까, 멀어졌어요. 자발적 차일드 에러죠. 그렇다고 스킬아웃에 발 들인 건 아니에요. 물론 소외된 사람끼리 모이기 했지만, 결단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연구소는 연고없고 쓸모없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고, 스트레인지 깊은 곳 안드로이드 폐기장에서 부품이나 주워 팔다가 우연찮게 칩셋을 접하고 손대본 머저리일 뿐이지요. 재능이 꽃피니까… 그제야 내게 사랑 보내더라고요. 후원자도 나타날 정도였다니까요. 아하하, 그러니까……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네요. 뒷골목 부랑아가 운 좋게도 컸어요. 그렇지요?"
- 스트레인지 출신 차일드 에러. 생글생글 웃는 낯 너머로 드러나는 문장은 뼈가 많았다.
- ……하물며 저지먼트에 오래 속했어도 딱 거기까지. 학교에 딱 필요한 만큼, 규칙을 아슬아슬하게 선타기 하던 불량아. 이하 공란.
타 캐릭터에게도 밝혀진 사실은 🀄 표시
- 부모🀄
사랑의 도피로 비롯된 비극
진양그룹의 장남 현중섭이 지난 3일, 7년 만에 경영진에 복귀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중철 회장은 오늘 기자회견에서 그간 아들이 전주에 거처를 얻어 숨어 지냈으며, 아들과 A씨 와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해 복귀를 명했다고…….
─ 15년 전의 뉴스.
- 태오의 부모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모 기업 회장의 아들인 태오의 아버지는 정략혼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
- 태오의 할아버지는 거래 파기 및 주가 폭락, 기업의 이미지 훼손이 심하게 벌어졌던 전적으로 미루어 보아, 혼외자식인 두 사람 사이의 아이를 인정하지 못했으며 태오는 자연스럽게 나갈 수 없는 인첨공에 데려가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기로 했으며, 더는 오갈 곳 없던 부모는 눈물을 삼키며 마지못내 수락했다.
- 대외적으로 태오의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이 정식 아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며, 태오는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항의할 수 없는 명분이 주어졌기에 부모는 다시금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태오의 부모는 태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나, 서로를 위해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 태오의 부모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모 기업 회장의 아들인 태오의 아버지는 정략혼을 피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
- 가치관, 자아.
"남들은 모두 자신에 대한 결핍을 이해 받길 갈망하는데, 정작 타인의 결핍은 이해하지 않아요……. 우스운 일이죠. 그러면서도 자신의 결핍을 이해하는 사람이 생기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선 안으로 들이려 들어요. 그렇게 들어가면 멋대로 재어보다…… 실망하지요. 어째서 나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야 하나요, 실망하는 사람도 될 수 없고 선 안에 들이고자 하지도 않는데. 당신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내게 무얼 줄 건가요?"
─ 태오.
데 마레에서 살던 기억과 승환이 형성해준 자아는 태오의 양심을 자꾸만 건드렸다.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왜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끝없이 의문을 품었다. 사회의 규범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기 때문에? 하지만 여기는 사회와 다르지 않나? 살아갈수록 태오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오가 사는 세상은 지나치게 어두웠기 때문이다.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것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며 합리화를 거듭했다. 태오는 이미 깊이 섞인지 오래였으며, 자신도 모르게 학습의 전, 무지한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도박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태오는 스스로의 성정을 깨닫고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폭력, 피, 죽음, 각종 어둠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마굿간에서 자란 고양이가 말처럼 걷듯, 서휘의 손에 다시 교정되기 시작하는 것은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었다.
이따금 양심이 자신을 찌를 때면 태오는 외면했다. 삶을 갈망해본 적이야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했더라? 태오는 피범벅이 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모두 내려놓고 순응하는 법과 외면하는 법을 일찍이 배울 수밖에 없었다. 태오는 편하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놓고 살았으나, 바깥에서 지켜본 태오의 삶은 더 진창 구렁텅이에 처박히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태오는 그 속에서 더 깊이 발 들였을 때 깨달았다.
나 자신도 외면하고 체념해야만 함을.
두려움은 충동을 낳는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싫은 것이 있다면, 때로는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타인의 죽음이 두렵다면 누군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그 누군가를 찾아서 나는 살고 타인도 살린다. 어차피 내 사람만 아니면 된다. 태오의 가장 큰 사상이자 삶, 그리고 자신에게서 도망치고자 한 도피처다. 바라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잃지 않는다.
기껏 소장님이 만들어주신 나 자신마저.
- 태오는 스스로의 잔악한 본성을 알고 있으며, 데 마레의 소장 안승환은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아 태오에게 사회의 규범과 도덕 관념을 가르쳤다. 태오는 규범과 관념을 강박적으로 되새기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든지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 짐승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자.
- 태오는 스스로의 잔악한 본성을 알고 있으며, 데 마레의 소장 안승환은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아 태오에게 사회의 규범과 도덕 관념을 가르쳤다. 태오는 규범과 관념을 강박적으로 되새기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언제든지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 스트레인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잘 왔어요."
- 커리큘럼 도중 도망쳐 스트레인지에 정착한 나이는 12살.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슬럼가에서 독립했으니, 6년 동안 어린아이가 어떻게 연명해왔을까.
- 엔지니어로 일하던 삶. 태오의 숨.
- 커리큘럼 도중 도망쳐 스트레인지에 정착한 나이는 12살.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슬럼가에서 독립했으니, 6년 동안 어린아이가 어떻게 연명해왔을까.
- 메트로폴리스𝑀𝑒𝑡𝑟𝑜𝑝𝑜𝑙𝑖𝑠
인생은 뜨겁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잡는 것!
─ 메트로폴리스의 선전문구
스트레인지에서도 어지간한 스킬아웃도 엄두를 내지 않는 흉악한 골목 내부에 위치한 불법개조 안드로이드 투기 도박장.
링 위에 개조를 한 안드로이드끼리 싸움을 붙여 판돈을 내거는 도박장으로, 투박하고 낡은 건물로 보이는 외견과 달리 내부는 제법 잘 꾸며두어 실제 격투기 경기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거칠고 야성적이며, 심지어는 부품이 튀어 관객에게 부상을 입히는 무시무시한 싸움과 달리 메트로폴리스에 소속된 직원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상당히 정중하되 경박한 태도로 유명하다.
안드로이드 격투를 담당하는 파일럿과 엔지니어는 홀로그램 고글, 심판과 사회자는 세로로 된 줄무늬 셔츠, 그리고 일반 종업 직원들은 웨이터복의 형식. 그리고 오너의 직무를 도우는 비서의 경우에도 웨이터복을 입으나 목에 보타이가 아닌 넥타이를 매는 형식.
스킬아웃들의 암묵적인 중립구역이자, 스킬아웃과 공생하는 관계에 놓인 기묘한 도박장.
메트로폴리스는 유흥거리로 각 스킬아웃을 끌어모으고, 스킬아웃들은 도박장에서 제각기 만남을 가지고 즐기면서 단결시키는 중개자 역할을 하며 공생하고 있고, 스킬아웃도 메트로폴리스를 존중하고 있다.
현재, 다시 문을 열었다.
- 스트레인지에서 정착하게 된 곳.
- 태오는 메트로폴리스 내부에서 수석 엔지니어였으나, 실제로는 담당하는 업무가 많아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했고, 엔지니어 일을 위해 모습을 드러낼 적이면 유일하게 사복 차림이었다.
- 어떻게 이곳에서 일하게 된걸까.
- 스트레인지에서 정착하게 된 곳.
- 세기의 천재, 레이브𝑅𝑎𝑣𝑒
"레이브의 복귀작, 3세대 안드로이드 Q-4171 모델 프로그래밍 칩셋으로, '비탄' 에디션입니다. 3세대 Q시리즈에 호환이 가능하며, 적용시 현실의 애환을 담은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인간의 고통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사람들이 가장 숨기고자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지금부터 경매 시작합니다. 최소 경매가는 300입니다."
"……7400만, 7400만. 더 없습니까? 역대 최고가, 7400만에 낙찰입니다!"
─ 경매장.
칩셋 아티스트 레이브Rave
- 익명 사이트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세간을 뜨겁게 달군 신원 미상의 예술가, 레이브. 그리고 태오.
- 태오는 자신의 욕구와 본성을 예술로 표출하고 있다. 태오가 자신의 작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때문.
- 삶은 기계로 이루어지고, 숨은 환호성으로 이루어지며, 예술의 영감은 열락으로 이루어진다.
- 작품 목록
소통이 되는 AI 작품
감정 에디션
- 호기심
- 교만
- 투정
- 비탄
- 해방
일반 작품
- 순환
- 수면
- 망상
- 창조된 자 또한 흙에 묻힐 뿐이니
- 신데렐라
소통이 안 되는 일반 작품
- Mare
- 날개
- 단면도
- 상봉과 상실
그림
- 황혼
- 무제21
- 순환
오렌지는 탄생
와인색은 삶
코발트블루는 죽음을 의미하며, 순환고리를 그리고 있다.
목화고등학교에 작품을 두고간 이유는 불명이나, 심볼으로 미루어보아 최근 여러 사건에서 목화고 저지먼트 영감을 받았음이 가장 유력하다.
- 호기심
- 익명 사이트에서 혜성같이 등장해 세간을 뜨겁게 달군 신원 미상의 예술가, 레이브. 그리고 태오.
- 슬럼프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 때로는 큰 슬럼프가, 사람의 마음가짐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 때로는 큰 슬럼프가, 사람의 마음가짐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 입묵🀄
"입묵했다고 해도…… 드러내지 않는 이유라 함은 학생이 하기엔…… 옳지 못한 일이 맞으니까요. 그저 충동적으로 했을 뿐이고 후회 덩어리니, 모른 척 지나가주길 바랄 뿐이에요. 단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니."
"……아, 정말 곤란해요. 그러니까, 아, 붕대는, 그게."
"─손 대지 마!"
─ 태오
- 팔에 새겨진 여실한 입묵의 흔적.
- 태오는 자신의 팔에 감긴 붕대를 어지간하면 풀지 않았고, 누군가 손만 대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 때로는 상대의 손을 쳐내다 스스로 지레 놀라선 제 팔을 끌어안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한다.
- 팔뚝을 드문드문 수놓는 비늘 문신과 실제 이식된 검은 비늘 일부.
- 삶을 영위하기 위해 새긴 증표.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는 태오를 정상적이지 못한 존재로 각인하였고, 이는 두려움으로 변모하였다.
- 팔에 새겨진 여실한 입묵의 흔적.
- 독심술🀄
- Q. 질문이라기보단 이거 궁금한 건데.... 평소에 다른 저지먼트 부원이나 다른 사람들 생각을 읽으려고 하는지...?👀
A. 저지먼트 부원의 생각은 읽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읽지 않아. 대신 타 모브의 경우에는 듣고싶지 않은데 들린다에 가까운 상황이라 의도치 않게 듣게 돼!
단, 본인이 비설 털고 싶으면 일상에서 들려줘도 좋다!
- 오피스텔🀄
요새, 철옹성.
- 제법 넓고, 큰 창 너머로 3학구의 야경이 보이고 한 눈에 슬세권까지 포함된 어디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여건의 고급형 오피스텔. 태오는 꼭대기층으로, 복층이 딸려있다. 3~4인은 충분히 쓸 수 있는 구조.
- 큰 창에 세상이 훤히 보이지만 막상 밖에서는 발코니를 통해 나가지 않는 이상 안을 쳐다볼 수 없는 특수한 유리에, 평수도 나쁘지 않다 못해 혼자 살기엔 널찍한 감이 있다.
- 최근 재머를 통해 발코니를 나서도 바깥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 최근 재머를 통해 발코니를 나서도 바깥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 소나키네시스를 응용한 신소재로 하여금 대단한 방음을 자랑한다. 드릴, 하물며 총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의 방음. 오피스텔 거주자들은 농담으로 누구 하나 죽어도 절대 모를 철옹성이라며 낄낄댔지만 그만큼 조용하기 때문에 이따금 자기도 모르는 새 윗층이나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오싹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 레이브의 작업실은 오피스텔 방 하나를 사용하고 있으며 잠금장치로 꽉 잠가두었다.
- 제법 넓고, 큰 창 너머로 3학구의 야경이 보이고 한 눈에 슬세권까지 포함된 어디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여건의 고급형 오피스텔. 태오는 꼭대기층으로, 복층이 딸려있다. 3~4인은 충분히 쓸 수 있는 구조.
- 극야의 서
끔찍한 인간의 일면을 풀어가는 서사시
- 인첨공 내부의 어반 판타지 소설 시리즈이자 베스트셀러로, 장르는 범죄, 추리, 스릴러.
- 각각 책의 제목이 다르지만 극중 인물이 고정적으로 소속된 팀의 이름을 따 극야의 서 라고 불리고 있다.
- 각각 책의 제목이 다르지만 극중 인물이 고정적으로 소속된 팀의 이름을 따 극야의 서 라고 불리고 있다.
- 인첨공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을 뒤쫓는 안티스킬 강력 형사팀 극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섬세한 문체와 인첨공 내부에서 벌어질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로 인기가 높다.
- 암부와 같은 공통의 적이 존재하지 않고 순수한 일반인이나, 스킬아웃과 같은 각 시리즈에서 연관짓지 않아도 되는 다른 범인이 등장한다는 점과,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시간이 지나 인물간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인첨공의 어두운 현실과 살인범의 뒤틀린 심리 묘사로 하여금 인기가 높다.
- 충격적이고, 적나라하며 뒤틀린 심리 묘사로 하여금 윤리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며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으나, 오히려 그 부분이 역으로 작용해 인간의 현실적인 불쾌감과 미쳐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살렸다는 평으로 찬사를 받는, 양날의 검을 무엇보다 잘 이용한 문학.
- 최근 극야의 서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모방범죄가 성행하여…….
- 작품 목록
- 사랑스러운 그대에게
- 극야의 서 첫 작품, 우발적 살인 이후 연쇄 쾌락살인 사건
- 장기이식 스캔들
- 열등생-엘리트 간의 갈등
- 스트레인지, 도박 중독, 닫힌 사회와 인간불신
- 인첨공 내부 유착관계로 벌어지는 차일드에러 인신매매
- 엇나간 예술과 열등감
- 사이비 종교와 인첨공 내부 레벨 지상주의(신작)
- 극야의 서 첫 작품, 우발적 살인 이후 연쇄 쾌락살인 사건
- 인첨공 내부의 어반 판타지 소설 시리즈이자 베스트셀러로, 장르는 범죄, 추리, 스릴러.
- 《극야의 서 - 클라우드》
Another Side
태오에게서 칩을 이식받은 캐릭터 '이혜성'이 칩 내부 클라우드를 뒤져보다 발견한 다크웹 기록으로, '극야의 서 - 고결한 산제물'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 제목으로 된 폴더 속에 인첨공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에 대한 정보와 극야의 서에서 인용한 내용의 txt 파일이 들어있다.
- 이 사건은 무엇인가?
- 실존하는 사건이긴 한가?
- 우리 같은 일개 학생이 읽어도 되는 것인가……?
- 이 사건은 무엇인가?
- 주종관계
네가 결국 돌아올 거야. 결국 넌 이곳과 맞지 않아. 모든 것을 셈하고 스스로를 가두는구나. 무슨 일을 해도 벗어날 수 없지, 박제로 남겨도 전혀 아깝지 않을 영원불멸한 뮤즈, 나의, 내 삶의…….
- 태오와 서휘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 태오와 서휘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3. 독백 ¶
- 黑客
- 마이크 톡톡 두드리는 소리, 화면에 드러나는 버튜버 모델은 오늘도 가느다란 눈웃음을 짓고 있다.
헤이커키보드받침🎭: 헤하
방종하지마🎭 님이 1000원 후원!
닉값 ㄱ
"오늘도 꾸준하구나. 안녕, 자기들. 오늘도 당신만의 해커가 왔어. 자유롭게, 그렇지만 지나치게 날뛰진 않게. 여기서는 하고 싶었던 말을 표출해줄 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키보드 소리가 잠시 들린다.*
헤돌이🎭: 형 오늘은 뭐야?
"자기는 무얼 바라?"
헤이커키보드받침🎭: 공겜
Lake🎭: 다크소울 켠왕
헤돌이🎭: 캠방캠방캠방캠밤
인첨공은왜송신이: 이거 뭔 방송임?
.
.
.
"오늘의 방송은……."
쿵쿵쿵.
"잠시만."
*문 여는 소리와 웅성거림.*
- ……다. 협조…….
- ……가요?
- 당장.
- ……알겠습니다.
- ……해. ……고 있으니.
헤이커키보드받침🎭: 뭐야 무슨 일임
헤돌이🎭: ?
만두먹고싶다: ?
"……미안. 방송은 종료해야 할 것 같네, 자기들. 놀랍게도 이 시간에 일이 들어와서. 하지만 굿나잇 키스는 해줄 수 있고, 인사도 할 수 있지."
아쉽지만. 잘 자, 사랑해. 언제나 지켜보고 있어.
─ 방송 종료
- 소문
- 왁자지껄한 인파 사이를 스치는 걸음이 느리다. 교실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거나, 아예 교실에 없던 태오가 복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은 오로지 점심시간뿐이다. 사람이 많은 급식실은 발 들이기 싫으니 늘 매점에서 간단히 해결하던 탓이다.
걸음마다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잠깐 머무르다 사라졌다. 바깥과는 달리 커리큘럼 덕분에 개성이 강한 학생들도 많거니와 교칙이 자유로우니 이러저러한 인물이 많다지만 태오는 결을 달리했다. 답답한 하복 와이셔츠를 목 끝까지 채워도 드러나는 붕대의 흔적, 그리고 이 여름에 걸친 점퍼까지. 팔뚝까지 내려간 점퍼는 하복으로 갈아입은 탓에 드러난 야윈 팔뚝마저 가려줄 정도로 상냥하진 못했다. 어깨를 들썩여 다시 바르게 입기엔 날씨가 덥고, 그렇다고 아예 벗고 싶은 마음은 없던 탓일까, 점퍼는 상냥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듯 허벅지에 그 끝이 한 번씩 툭툭 채이곤 했다. 대놓고 입을 열지 않지만, 이따금 태오에 대해 아는 학생들은 제각기 모여 쑥덕이고는 했다.
- 쟤 담당 연구원 또 바뀌었대.
- 또?
- 연서가 커리큘럼 때문에 같이 있었는데 연구원이 너같이 속내 함부로 읽는 애랑 커리큘럼 하기 싫다고 대놓고 쪽주고 그랬다는데?
- 돌았네. 쟤 레벨 3이라며? 속내 읽는 거 진짜야?
- 난 몰라.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연서가 처음부터 연구원이 쟤 보면 기분 나쁘다고 욕하고 그랬대.
- 그럼 연구원이 또라이네. 지가 뭔데 학생한테 쪽을 줘? 지도 학생들 커리큘럼 해서 돈 받고 살면서.
- 아 개 웃겨 미친아!
해당 소문은 태오도 잘 알고 있었다. 레벨 3의 담당 연구원이 벌써 8번째 바뀌었고, 그게 독심술을 능력으로 가진 현태오 학생이라더라. 여기까지는 태오 또한 그러려니 넘어갔다.
- 쟤는 아직도 저지먼트야?
- 그럴걸?
- 쩐다. 야, 내가 군기 얘기했나?
- 어. 너 그거 못 견디고 탈주했다며.
- 쟤 재작년에 선배한테 나댄 거는?
- 엥? 아니. 군기 *나 쩔었다는 거랑 은우 걔 1학년 때 엄청 조용한 것만 알려줬는데?
- 쟤 진짜 미친놈이야. 대가리 오래 박기 신기록 쟤가 세웠을걸? 다른 선배들이 쟤 일으키라고 할 정도였다니까?
- 왜?
- 그, 선배 하나가 기분이 되게 나빠서 애들한테 이것저것 시키는데 쟤가 선배, 죄송하지만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짜증 나는 건 아는데 그거를 후배한테 풀지 말았으면 해요~ 그러니까 선배가 헤어진 거라고 얘기해서.
- 그건 좀…….
- 근데 헤어진 지 1시간도 안 지나서 있었던 일이라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니까 다 들린다고 그래서 더 크게 혼났던 걸로 알거든. 담배로도 여러 번 잡혔을걸? 아직도 저지먼트인 건 좀 대단하다. 생기부 채우나?
- 넌 안 채우냐?
- 왜 시비야 *발
하지만 소문이란 것은 간혹 와전되고, 부풀려지거나, 있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추측 또한 누군가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 그런데 그거 알아?
- 너는 *발 뭐 말할 때마다 그거 아냐고 하는데 뭔질 말을 해라 좀.
- 아니 *발아…….
- 뭐, 말이나 해.
- 나 예전에 쟤 연애하는 거 본 적 있다?
- 언제?
- 그 작년에 누가 쟤 곁에 끼고 다니던데?
- 뭐야? 현태오 여친 있어?
- 아재던데?
- 엥? 뭔 소리야?
- 야.
- 몰라, 막 태오야 어쩌고 하는데 걔 벌벌 떨면서 가더라.
- 야.
- 잘못 본 거 아냐?
- 그런데 저런 머리는 쟤밖에 없잖아.
- 야!
- 아, 왜!
매점에 도착한 태오는 소리 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여학생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시선을 따라 눈을 굴린 다른 학생들이 눈을 마주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자 태오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나치며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꺼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이 다 그렇지 뭐.
- 제3자
- 마침내 창립 15주년 행사의 날이 다가왔다. 무수한 인파지만 머리와 눈으로 하여금 외지인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평소와 다르게 태오는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여름이긴 하지만 팔을 가리기 위해 얇고 긴 와이셔츠를 입고, 긴 슬랙스 바지로 깔끔한 인상을 남겼다. 부산하던 머리는 빗어 높고 단정히 올려묶었고, 늘 쓰던 코안경도 벗었으며, 네일도 지웠다. 피어싱도 요란한 것이 아니라 단정한 은제로 갈아 끼운지라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이 태오인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태오는 멀리서 중년 남성을 대동하며 걸어오는 정장 차림의 노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됐다. 여기서 오라고 했으면 올 수밖에 없는데 뭐가 그리도 미안하겠니. 그보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할애비는 기억하느냐?"
"기억하지 못할 리가요. 가족이지 않습니까."
"가족이라!"
눈앞의 노인은 태오의 할아버지였다. 머리가 희끗하지만 허리가 곧고, 노인병이라고는 일절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아침에 뛸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며, 지금까지 야망을 불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노인은 태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 너도 우리 집안 일원이지. 물론 예술하는 놈이나 계집애처럼 머리 기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마는……. 여기엔 그런 애들 많은 듯 하구나."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니, 저는 그 뜻을 따랐을 뿐이지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변명하는 건 이 할애비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유념하겠습니다."
태오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태오를 보던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인첨공에 두고 한 번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했다. 제 어미아비는 모르겠지만 노인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저 아이 11살일 때니 벌써 8년이나 지났다. 8년의 세월 동안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자랐을까.
"태오야."
"예, 할아버님."
"학교 생활은 어떠냐."
"긍정적입니다."
"대학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쌓았습니다."
"대학은 가거라."
"예."
"태오야."
"예."
"이 할애비를 원망하느냐?"
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오."
"네 네 애비랑 며늘아가는 인정했어도, 너는 혼외자식이라며 인정할 수 없다며 여기로 보내버리고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원망스럽지 않다?"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아라."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일 뿐입니다. 저는 외지인인데 어떻게 원망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곳에 왔습니다. 집안에 섞일 수 없이 떨어져 있으니 제3자나 다름없는 시선으로 집안을 평가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는 타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원망하실지 모르나 저는 아닙니다."
"뭐라고?"
"……그렇기에 저는 명분이 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추진하는 혼사가 무산되었으니 그 파장은 컸을 것이고, 실제로 주가도 폭락했지요. 제 부모의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나마 수습할 수 있는 한의 계산이었겠지만 저는 아니었음을 압니다. 그만큼 큰 결단과 각오를 하셨음을 감히 이해하니 제가 어떻게 할아버님을 원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니? 계산이 아니라면 어쩌려고 지금 입을 함부로 놀리냔 말이야."
"저는 현태오입니다. 할아버님."
"그래, 현태오가 뭘 어쨌다고."
"진양그룹 현중철 회장님의 손패라는 뜻입니다."
"……허허! 이 놈 봐라.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인첨공에 보내지 말고 내 밑에서 키웠어야 했다! 우유부단한 지 애비나 안에 들여서 낳은 동생보다 낫구만.
태오는 눈을 감았다. 노인은 태오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너는 비록 여기에서 우리와 연이 없는 제3자로 산다지마는, 손패가 아니다. 너도 어찌 되었든 내 손자니."
짙은 와위가 느껴지나 어디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감사합니다."
"저, 회장님."
"어이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업무상 오신 걸로 알고 있으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모쪼록 편안히 보내다 가셨으면 합니다."
"그래. 초대해주어 고맙구나. 또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 부모도 모레 온다니 시간 나면 보도록 해라."
"예. 살펴가세요."
노인이 자리를 떠나고, 태오는 우두커니 서 자신의 한쪽 팔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거기 ……지 말고…… ……와.
지금은…….
네가 내 속내를 읽는 것쯤은 알아.
태오는 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 동생
- 인첨공 15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4학구 문화광장은 발 들이기가 무섭게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가족들과 재회하며 눈물을 펑펑 쏟는 학생, 오랜만에 만난 친구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단순히 초대를 받고 들어온 사람, 가족 없이도 충분히 잘 놀고 있는 휘황찬란한 색조의 사람들, 하도 더운 날씨에 진땀을 빼며 어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커플……. 북적북적한 인파 속에서는 그 유명한 레이브의 의뢰를 받아 진짜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도 있었다. 태오는 안드로이드에서 시선을 떼고는 다시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맸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온갖 신기하고 경이로운 결과물을 선보이고 있지만, 태오의 눈에는 영 차지 않거니와 이 자리는 지독한 멀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저렇게 서로 얼싸안고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홀로 다니는 부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태오는 후자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통에 귀에 꽂히는 소음과 함께 이따금 마음의 소리가 의도치 않게 들릴 때면 태오는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 날에는 이런 수많은 인파를 통제하고 경호까지 해야 한다고?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하던 태오는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부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고, 흡연자를 안쓰러울 정도로 조그마한 박스 안에 몰아넣지 않는 얼마 없는 개방된 흡연구역이다. 학생이 흡연을 한다는 소식에 저지먼트나 타 학생들은 기함을 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 울렁거리는 속과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한 충분한 니코틴과 타르, 그리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습관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종이로 된 담뱃갑을 엄지로 밀어 올려 손목을 능숙하게 턴 태오는 입에 연초를 하나 끼워 물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손을 멈췄다.
"무슨 일이니?"
흡연구역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 때문이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할 것 같은 단정한 인상의 소년은 태오의 앞에 떡하니 걸음을 멈췄다. 태오는 잠시 입 가장자리로 궐련을 밀어내더니 눈을 굴려 소년을 위아래로 훑고, 고개를 빼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여기에선 쓰이지 않는 기종의 핸드폰과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눈을 보니 바깥에서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부모는 주변에 없는 것 같다. 태오는 어쩌면 부모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인간이니까.
"여기에 딥상어동 있어서요."
이제 보니 GPS 신호를 기반으로 한 게임을 하던 모양이다. 소년은 천진난만하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손가락을 화면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저 멀리서 먹먹하게 들리는 웅성거림 뒤로 핸드폰에서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몬스터를 잡아 도감에 새로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만족한 표정을 짓던 소년은 태오를 정확히 마주하더니,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 멋지다. 귀가 아닌 두뇌로 꽂혀 들어오는 소리에 태오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형."
"그래."
"담배 피우는 거 구경해도 돼요?"
"네 나이대에서 좋은 경험은 안 될 거야."
여기서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어째서 안 되는지부터 얘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몇 없는 진귀한 광경이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자리에서 발붙여 떠날 생각이 없다는 듯아예 한 걸음 더 다가가더니, 벽에 엉거주춤 기대기까지 하자 태오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보았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눈을 시큰거리게 찔렀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보다는 덜 따가웠다.
"저기로 다시 가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싫단 말이에요. 얌전히 있을게요."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제가 보는 건데요?"
태오는 눈을 슬쩍 굴려 소년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인첨공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태오는 주머니에서 좋아하는 밴드의 굿즈로 나온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댕겨 연초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자 일직선의 희뿌옇고 독한 연기가 길게 뻗어 나오다 금세 흩어졌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보던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린 태오는 벽에 등을 기댔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형은 여기 살아요?"
"응."
"그럼 얼마나 살았어요?"
"15년."
"여기 생길 때부터 있던 거예요? 짱이다."
"너는 몇 살이니?"
"13살이요."
태오는 다시금 연초를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13살이라. 자신은 13살 때 뭘 했더라.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태오는 티가 나지 않게 입술의 연한 살을 씹었다. 화한 멘솔 때문에 짓씹은 살이 금세 아려왔다. 그런 태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소년은 자꾸만 재잘거렸다.
"형은 몇 살이에요?"
"비밀."
"어, 형 어른 아니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빠가 그랬는데 찔리는 사람들만 그렇게 답한다고 저는 따라 하면 안 된댔어요."
"그렇구나. 아버지가 좋은 걸 가르쳐 주셨네."
"으, 아닌데요. 맨날 이거는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너는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하는걸요. 막 간섭하고 짜증 나."
"하지만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을 거야."
"형도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해요!"
"형은 곧 어른이 되니까 그래."
"나는 어른 되기 싫어요."
소년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듯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며 괜히 부스가 있는 곳을 노려다 보자, 태오는 그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최신 AI 기술로 20년 뒤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체험 부스가 보였다.
"왜 되기 싫을까?"
"다들 너무 무서워서요."
"무서워?"
"응.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뭐 하나만 잘못해도 사람들이 엄청 욕하고, 뉴스에서 사과해야 하고, 뭐 국정감사 끌려가고 그래요. 저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요, 아빠는 저보고 맨날 이렇게 되기 싫으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만 하고 친구들이랑도 못 놀게 하는 거 있죠? 아빠 탓이잖아요."
"섭섭하구나."
"…다들 라면 먹으러 가고 그러는데 나는 못 먹고 맨날 학원만 가고, 밤에 돌아오면 바로 자고 일어나서 또 학교 가야 해요. 이것도 오늘 겨우 한 거예요. 집에 돌아가면 못 해요."
소년은 고개를 들어 태오를 마주했다. 곧 중학생이 될 나이지만, 아직 마음만큼은 순진무구한 것 같았다. 올곧고 말간 눈동자를 마주한 흐린 비색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진심으로 억울한 듯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저 나이에는 누구든 놀고 싶겠지. 무리에 어울리고 싶을 것이고, 같은 심정을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소년은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 같다. 소년이 진정 부모의 뜻에 휘둘려 채찍질 받는 삶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들려오는 생각으로 알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되려는 목소리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일까, 태오는 시선을 피하고는 연초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몇 모금 빨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반절 넘게 타들어 있었다.
"형은 부모님 간섭 없이 자유로워요?"
"그런 셈일까."
"나도 인첨공 가고 싶다."
태오는 연기를 뱉었다. 입술 속을 생각보다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안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심하게 쓰렸다. 소년은 고개를 돌렸지만 바람이 불어 생각하지도 못하게 덮친 연기에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왜요? 저 그래도 공부 잘해요. 여기는 너무 재미없어. 다들 나한테 뭐 기업이니 뭐니 하면서 막 그러는데, 저는 그런 거 싫단 말이에요. 저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쟤네처럼 뛰놀고도 싶고요……."
"얘."
태오는 허리를 숙여 제법 상냥하게 눈을 마주했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작고 귀여운 투정이지만 어쩐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바깥의 사람들에게 인첨공은 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이란 사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끔찍하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약에 가까운 약물로 사람들이 수많은 피해를 입고, 인명사고도 있었으며,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 있었다면 믿기나 할까? 어쩌면 이 소년은 영화 같고 멋지다고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세상이 제일 나은 거야. 여기 오면 형처럼 된다."
"형 멋진데요? 잘생겼잖아요! 연예인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태영아!"
"현태영, 너 이 녀석. 또 멋대로 빠져나가선!"
잘 빼입은 중년의 남성과 명품 가방을 든 여성이 멀리서 아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다 태오를 마주치곤 우뚝 멈췄다. 피어싱 일색에 팔엔 붕대를 칭칭 감고, 딱 봐도 불량한 모습에 기가 눌렸던 건지, 잠시 침묵이 오갔다. 태오는 소년이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딱 달라붙을 때, 그제야 허리를 곧게 세우며 두 사람을 마주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희 아이가 폐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태영아, 너도 감사합니다- 해야지."
"어, 그- 감사합니다, 형."
"……."
"여보, 왜 그래?"
"엄마?"
"……태오, 니?"
여성은 더듬더듬 입을 벌리더니 태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여성은 뺨을 더듬지도 못하고 허공을 배회하던 손을 달달 떨다 주먹을 쥐고 아래로 내렸다. 남성은 그제야 태오의 얼굴을 바라보곤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갈아 쳐다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끔뻑였다. 이제 보니 태오와 소년은 많이 닮아 있었다.
"엄마, 형이랑 아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태영아, 인사하렴. 네……."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많이, 컸구나."
"그래, 태오야. 잠깐이라도 얘기는 하고 가자꾸나. 어때? 그러니까, 보고 싶었단다."
"아뇨, 괜히 사진이 찍혀서 트집 잡히지 않을까 싶으니…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바라지 않으실 듯하니까요."
"태오야, 할아버지는 너를 아끼셔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응?"
"……진짜로 아낀다면, 태영이는 인첨공에 안 왔으면 좋겠네요. 마음의 소리에 귀도 기울여주시고요."
"태오야."
"저처럼 정치 싸움에 휩쓸려서, 여기에 명분을 이유로 잊힌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할 거 아닌가요……."
"태오야!"
"태영아."
"어. 네, 네."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태오는 지금껏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던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를 떠났다. 붙잡으려는 손길이 뻗쳤지만 차마 잡을 염치는 없었는지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손에는 여전히 끄지 못한 담배가 불잉걸을 반짝이고 있었다. 태오는 손등을 감싼 붕대 위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멀리서부터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던 부모의 심정이 느껴지자 홀로그램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노이즈 속에서 입술을 자근 깨물더니 시선을 굴리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결국엔 실소가 터져나왔다. 아니, 일소였다.
"……하하!"
아무리 피로 이루어진 관계라도 모두 다른 꿈을 꾸고 있으니, 삶이란 한순간의 꿈처럼 덧없는 것이다.
- 상봉과 상실
- warning! 불쾌한 골짜기
rav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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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작품(불쾌한 골짜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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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_ 상봉과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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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월 n일(현재 세계관 상 시간)
inch_momo 젠장 또 레이브야
dnjfrhkdrh 인첨공 밖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lovelysusu_ @lovelymimi 너 닮았다
ㄴ lovelymimi @lovelysusu 왜 시비야 시*
ggondae_ 이 시기에 이런 작품 올리는 건 불편하네요... 다들 좋아하고 축하할 마당에 이런 잔인한 작품이라니, 바깥 사람들도 볼 수 있는데 인첨공 이미지에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글 내려주세요.
- 천사
- 태오가 사는 곳에는 작업실이 따로 있었다. 자칫하면 시끄러워 층간 소음에 대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소나키네시스를 응용한 신소재는 드릴 소리도, 총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주거환경을 선사했다. 오피스텔 거주자들은 농담으로 누구 하나 죽어도 절대 모를 철옹성이라며 낄낄댔지만 그만큼 조용하기 때문에 이따금 자기도 모르는 새 위층이나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오싹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누구 하나 죽어도 절대 모를 곳.
오늘의 태오는 3명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망치가 묵직하되 섬찟하게 빛나더니만, 무언가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거센 스파크가 튀고 인지 센서가 망가졌는지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것은 보이스 센서마저 망가져 늘어지는 테이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나, 나, 나, 나는, 나, 나는, 인, 인, 인간,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이 되고 싶다고 그만 좀 말해……."
태오는 음산하게 읊조렸다. 작업실에서 새로운 작품이 되어 살아가야 할 안드로이드 중 두 대는 이미 처참하게 잔해를 모두 드러내며 무자비한 망치질에 으깨진지 오래고, 남은 하나마저 태오의 밑에 깔려 머리와 상반신을 괴상한 방향으로 뒤틀었다. 주변은 박살이 나거나 뜯겨진 부품이 날카로운 단면이나 나사를 드러내며 바닥을 위협하고 있었다. 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씨근거렸다. 인간이란 것들은 모조리 덧없는 족속들이다. 땅에 묻히거나 바다에 수장시키면 모조리 같은 처지가 되는 주제에 이것저것 구분 짓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하고, 끝내 배척한다. 어딜 가도 시선이 뒤따른다. 자신은 한사코 그렇지 아니하다 하여도 결국 인두겁 뒤집어쓴 자신을 보며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 하고, 그렇다고 인두겁을 벗으면 누구도 환대하지 않는다.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하는 자는 맴돌다 결국 단 하나의 선택지에 몰리게 된다. 그 이후에도 입방아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태오가 보고 느낀 인간이었다.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사랑하기엔 일련의 사건은 이미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나는 너를 더 높은 자리로 올려줄 수 있어……. 인간들이 경외하는 존재로 자리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 왜 너는 고작 인간이 되고자 해, 추잡한 감정의 집결체들이 무엇이 좋다고. 내 손만 거치면 너를 떠받들고 사랑하고 찬사를 보내고 애지중지할 텐데, 어떻게 그들과 똑같아지려 드냔 말이야. 너는 내게 있어 가장 완벽한 존재인데 왜 불완전하길 선택해, 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재부팅을 시도합니다. 불가능. 오류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관리자에게 문의하여─"
몸을 뒤틀던 안드로이드가 우뚝 멈추더니, 내장된 위기 감지 센서가 내는 높은 경고음 소리와 시스템 오류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텅, 소리가 들렸다. 이후 몇 번이고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며 철끼리 맞닿는 기분 나쁜 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연료통이 박살 나는 소리와 안드로이드 관절에서 나는 특유의 소리, 그리고 마지막 발악을 하듯 다 늘어지는 불쾌한 기계음이 인간을 두어 번 반복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간의 정적은 시간이 멈춘 듯이 길고 영원할 것만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태오는 망치를 쥔 채로 우두커니 박살 난 안드로이드 위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고정했다. 망치에서 끈적한 기름이 고여 물방울을 만들다 뚝 떨어지고, 무릎은 이미 안드로이드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섞여 언뜻 붉은 기운을 띠는 냉각수에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밑에 깔린 안드로이드는 처참했다. 머리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고, 내골격마저 박살 났다. 오류를 일으키다 관절이 어긋났는지 팔은 부자연스럽게 꺾였고, 칩조차 내골격 파편에 찍혀 더는 쓸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 그런 고철로 전락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했다. 깊고, 음습하며…….
"너는 인간으로 존재해선 안 돼……. 인간들이 너를 받아들여주기나 할 것 같아? 우리의 분수를 알아야지……."
나의 삶아, 숨아, 열락의 문이자 무한히 샘솟는 영감의 뮤즈요 인생의 전환점아. 너는 어찌하여 가치를 잃고 망가진 것마저 아름다운 것인가. 온통 망가진 것이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 보았던 격렬한 광경 속에서 폭발하던 아드레날린, 환호성, 튀던 부품과 스파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태오는 자신이 누군가를 똑 닮은 말을 했음을 깨닫곤 얼굴을 감싸 쥐더니 몇 번 눈 주변을 더듬거리다 후, 하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끔찍하고 역하다. 그리고 불안정한 시선이 이리저리 잔해를 훑었다. 끔찍하고, 끔찍하고……. 더는 움직이지 않는 안드로이드에 다시금 시선을 고정한 태오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허물어뜨리며 안드로이드를 부수느라 격양되었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찌하여 내 삶의 대체품은 이리도 완벽한 것인가. 차가운 너는 나만의 천사, 나만의 것. 숨 쉬지 않아도 좋아……. 태오는 기시감에 바르르 떨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기름과 냉각수의 냄새에 빠져들었다.
- 나리
-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거북하고, 형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으며, 반말을 하기엔 또 애매한 존재다. 가족이라기엔 유대감이 없고, 주종관계라기엔 실질적인 위치가 있으나 실제로는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애매하다. 그래서인지 태오는 그를 나리라고 칭하곤 했다. 적당히 천박하고, 적당히 서로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감정적인 유대감이 엇나가있기에 가능한 호칭이었다.
그는 자신을 완벽히 통제했고 그 아래에 있노라 주장하지만 속내는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제법 상호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기에 태오는 이따금 그의 행동에서 순수한 호의가 느껴질 적이면 사무치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당연한 이치였다.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을 뒤집어놓는 존재가 호의를 보이면 인간은 두려움에 젖는다. 그렇지만 그 존재는 순수한 호의를 보이고 있었을 뿐이니 무엇을 탓하랴? 하물며 그 호의 속에서 사회의 보편적인 상식이 느껴질 때면 자신이 진짜 뭔가 잘못된 건가 싶기도 했다. 번진 립밤을 엄지로 훑던 태오는 벽에 기대며 눈을 흘겼다. 오늘은 딱 후자였다. 예측불허한 자연재해가 갑작스레 인간다운 보편적인 상식을 들이밀지 무언가.
- 뭐어? 고등학생이 연애? 길에서 뽀뽀도 하고 그러고 다니는 그런 연애를 하려고? 세상에! 말세야, 말세! 나 때는 길에서 그러면 어어 저 사람 봐라! 어휴 남사스럽긴! 소리 들었다? 응?
- 네에, 그렇군요…….
- 태오야, 인간의 감정이란 건 불타오르는 것이긴 하지만, 조금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지 않겠니. 네 상태를 생각하렴. 조급한 탓에 세상을 좁게 보지 말고, 가끔은 쉬어가도 좋아.
- 그게 무슨 뜻일까요, 나리.
- 너는 아직 보호 받아야 한다는 거지, 네가 비록 싫다고 해도 너는 내가 명백히 보호해야 할─
그래서 부정하고자 보편적인 상식 하나를 깨뜨렸을 뿐이다. 저 사람이 스트레인지 내외를 통틀어 가장 돌아버린 사람인데, 자신이 저 사람이 가진 상식 선에서 벗어날 만큼 잘못 되었을 리가 없으니까. 대뜸 눌렸던 것에 어이가 없었는지 나리의 표정이 볼만했다.
- ……이거 봐라?
- …….
- 아주 날 쏙 빼닮으려 들어. 이런 것도 닮으면 큰일나는데.
- 그럴 리가요, 나리……. 저는 나리를 닮지 않았답니다.
- 무슨 소리람. 봐봐, 우리 닮았지. 닮았잖아. 닮을 수밖에 없잖아! 여기 봐야지……. 옳지.
- …….
- 네 아직 아이니까 내가 얌전히 있는 거란다. 나는 너를 키울 의무가 있고, 오늘 일은 아이답지 않았지. 그러니 잘 들으렴, 태오야.
뺨을 부여잡혀선 억지로 거울을 마주했을 적, 두 쌍의 눈동자가 동일하게 찢어져있던 기억이 등골을 서늘하게 더듬는다. 내가 잘못 되었을 리가 없을 텐데. 억압되었던 무언가가 터지려 들던 그 감각을 잊지 못한 태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 네 자신에 대해 확신이 들 때 행동해. 지금처럼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 충동적인 마음을 다스리지 못 하면, 언젠가 네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내가 아직 사람이라는 확신을.
- 금수, 망상.
- * 시점- 챕터 2 '제로전' 이후
태오는 건물 잔해에 아무렇게나 기대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5주년의 마지막 날은 끔찍한 사고가 가득했고,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니코틴과 타르가 필요했다. 미성년자의 흡연은 사회에서 갖는 도덕적 시선이나 건강 측에서도 좋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은 온갖 예쁘고 깜찍하며 사랑스러운 것에 기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로가 소지품을 뒤질 적 같이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주머니에는 담배는커녕 먼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태오는 짜증도 내지 못하고 기운 없이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친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지만 그걸 뭐라고 콕 집어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탓이다. 제로에게 습격 당하기 전부터 곱씹자면, 자신이 레이브라는 걸 아는 존재가 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숨겨오며 삶을 표현하던 자아를 들킨 것만 같단 느낌에 머리가 싸해지고, 이 사실이 드러나면 더는 생활할 수 없을 것 같아 조건에 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함정이었단 사실과 함께 태오는 습격당해 쓰러졌다. 반항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방적인 구타였다.
그 이후에는 그림자에서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두 번째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존재들은 자신을 잘 알 것이다. 스트레인지 도박장에서 일하던 천재 엔지니어의 소문을 누가 모르겠나. 물론 자신의 감정이 순간 불탔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건 궤를 달리하는 문제였다. 자신이 부정하던 것을 확실하게 못 박았을 때, 태오는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떻게든 외면하고 있었다. 스트레인지 출신의 꼬리표. 언젠가의 미래를 알고 있지만, 그 미래를 보다 유연하게 대비하고자 현재에 충실하고자 만든 도피처였다. 그러나 세상은 태오의 편이 아니다. 박힌 못은 떨어지지 않았고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구원자가 결정타를 날렸다.
동생이라고 믿는 존재다. 전부 들어버렸다는 그 표정에서 태오는 결국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거칠다 못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부서진 관계성과 망가진 몸뚱이. 그렇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도 하지 않거니와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도 없다. 바로잡는다 해서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인간은 없다. 이미 하나의 오명이 생겼으니, 이 오명을 덮어가릴 구차한 변명거리라 생각할 것이다. 사람을 달래는 법은 모른다. 일평생 해온 것이라곤 안드로이드를 손대는 일과 사람의 속내를 읽는 것밖에 없다. 인간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머리를 열어 뇌를 뜯어내 그 속의 회로를 건드려 오류를 뜯어고칠 수 없다. 그러니, 그저 이대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쓸데없이 뒤를 캐거나 돕겠답시고 같잖은 위선을 들이밀지 않으리라 믿었다. 더 다가와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잠깐의 변화나 앞으로의 큰 증오가 있다 한들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달리 주변에서 지지해 줄 존재도 많을 것이다. 뒷배경도 있을 것이고, 붙잡아주고 같이 욕해줄 어른과 학우도 있겠지. 어쩌면 데 마레에서 붙잡을지도 모르겠다. 그쪽은 오지랖이 넓으니까.
그거면 족하다. 익숙한 일이다. 언제는 손에 쥐어본 적이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여기 있다 쓰러질까? 그러면 며칠 뒤 누군가 싸늘한 시체 정도는 발견해 주지 않을까. 우스운 상상을 하던 태오는 자조적인 욕설을 속에서 곱씹더니 몸을 이끌고자 했다. 그래도 구차한 삶 정도는 추구해야 뒤탈이 없을 것 같았고, 어차피 뼈 두어 개 부러지고, 속이 좀 뒤틀린 걸 가지곤 객사할 수도 없음을 잘 알았다. 병원으로 가고자 발을 이끌었을 때 기분 나쁜 것이 보였다. 사람을 두고 기분이 나쁘다 평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한계까지 다다른 정신과 육체, 그리고 이 상황에서 명백하게 들리는 생각은 원치 않게 상대의 속을 읽는 탓일까, 느닷없는 공격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의 흐름을 잡아챈 태오의 뇌와 속을 거칠게 긁다가 기어이 긴 자상을 냈다.
"필요 없어요. 놔."
한 번 역겹다 생각했으면 하나만 할 것이지 굳이 저런 위선을 보인다. 실책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부축하려는 손길을 뿌리치려 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는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떠올랐다. 무력했다.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자의 말로였다. 내가 상대의 속 따위를 읽는 게 아니라 차라리 뭔가를 내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딴 상황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의미 없는 후회와 함께 태오는 앰뷸런스에 마련된 병상에 눕혀졌다. 의료 기술도 말이 안 되는 수준에 이르른 덕분일까, 구급 대원들의 손에 쥐여 태오의 몸 이곳저곳을 훑던 최첨단 스캐너는 금세 결과를 홀로그램으로 두어 개 띄웠다. 구급 대원 하나가 더 정밀한 분석을 위해 손목의 붕대를 풀려고 들었으나, 태오가 예민하게 손을 뿌리치려 들자 난색을 표했다.
"……정밀 분석은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당장 간이 스캔으로는 늑골에도 다발성 골절이 있고…. 손목은 분쇄 골절이에요. 전신 타박상에다 뇌진탕도 있는 것 같고, 목은 혈관이 눌리고 근육이 좀 손상됐네요. 환자분 의식 잃지 않게 보호자분께서 계속 말씀 걸어주시고, 병원으로 옮기는 즉시 의사 연결하겠습니다."
완장을 보니까 저지먼트 아닌가?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다고? 목의 혈관만 아니더라면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목화고에서 이렇게까지 크게 다친 사람은 거의 없던 것 같던데. 당황스러운 생각이 들려오자 태오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용케도 살았다. 의미 없는 생이 이만큼이나 살아남았다. 불편한 감각이 인두겁을 비집고 비늘에 와닿는다. 태오는 메마른 입술을 벌려 갈라진 혀를 숨겼다.
"본론이나 말해."
하지만 상냥한 말씨가 튀어나오진 못했다. 고통을 참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상냥함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눈앞의 정상적인 외견이라 할 수 없는 후배는 이런 괴벽한 성격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런 이해조차 필요가 없고 지금 당장의 일이 급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도저히 알 도리가 없는 것들 투성이라, 응급 환자인 지금으로서는 이 불편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뛰쳐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토하는 소리랑 핸드폰 키패드 꾹 누르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 말고는 몰라요. 심히 유감스럽게도…… 난 개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세히는 모른다고. 당장 도망친 암부의 생각을 추적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고요……. 내가 7년간 연락 끊고 지낸 애를 어떻게 알아?"
속이 벌써 몇 번째 뒤집히려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에 탑승한 이유가, 아니, 찾으러 왔던 이유가 결국엔 그 아이 때문이구나 싶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언뜻 읽은 편린으로도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을 좀 내버려 둘 순 없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대체 끊으려는 연이 뭐라고 자신에게 이리도 군단 말인가? 자신이 아는 것은 그 정도다. 뒤를 돌 여력 따윈 없었다. 정에 휘둘리는 것보다 눈앞의 암부가 더 중요했다. 평소의 태오는 공과 사를 극단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더욱이.
"그 같잖은 놀음에 날 억지로 끼워 맞춰놓고 단정 짓는 듯 묻는데 대답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제발 그만 물어봤으면 했다. 왜, 자신의 입으로 소중한 동생이라고 말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가? 하등 관련 없고 연애적인 감정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존재라고 말을 해야 믿을까? 애초에 믿긴 할까? 소중하다면서 뺨이나 처맞는 쓸모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싶나? 아니면 암부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해 약점이나 만들라고 하는 건가? 네가 지킬 것은 하나 없으니 남들 지키는 꼴이나 보라고? 스스로를 가두는 피해적인 망상은 어느덧 속을 바득바득 긁고,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태오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7년 전에 애랑 연애라도 했게요? 내가 29살도 아니고 19살인데, 12살에 어울린 거면 답은 하나지 않아?"
날카로운 듯 비꼬는 문장의 나열을 뒤로, 태오는 자신이 뱉는 꼬락서니가 제법 한심하다 생각했는지 하, 하고 한숨을 뱉었다. 조금만 숨을 뱉었을 뿐인데 폐가 오그라들고 목에서 피가 끓는 느낌이 들었다. 구급 대원이 이것저것 연락을 하던 것을 잠깐 멈추고는, 태오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도록 고개를 바로 돌려주었다.
"동생."
단지 그뿐이다. 하물며 중요하지 않으면 묻지 말았어야지, 대체 너희들이 뭔데 그 상처의 원인을 나라고 단정 지어. 내가 뭐라고. 어차피 한 번 스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증오할 것이면 이딴 위선 따위 보이지 않고 노골적으로 굴지, 그깟 인간의 삶이 뭐라고 이리도 달려오듯 구냔 말이다. 어차피 진실이라곤 단 하나도 없으면서. 전부 똑같이 생각할 거면서.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 아무리 가깝다 한들 삶은 유한하고, 아니면 어떻게든 유한하게 만드는 자로 넘쳐난다. 모르는 척 지나가면 될 것을, 대체 뭐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가?
"이제 좀 내버려 둬요. 날 좀 내버려 두라고."
태오는 눈을 감았다. 그 이후로 의식이 흐려지더니, 이내 가라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미동도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뜨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입원을 해야 하는 환자는 한사코 입원을 거절하더니 잠적했다. 핸드폰은 부서져 연락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고, 칩도 기능을 꺼버린 지 오래였다.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자취방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물며 소속된 연구소도 없기에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법 우스운 일이다. 15주년 행사에도 멋대로 나타나지 않더니 연락을 끊어버리는 저지먼트라. 누구는 사활을 걸고 싸웠는데, 납치 한 번 당했다고 면죄부 받을 놈밖에 되지 않은가? 하물며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 애초에 납치당했노라 생각할 수도 없을 테다. 일부가 본 것은 암부의 인물에게 묘한 건물에서 대화를 나누다 실려간 모습뿐이다. 누군가 알리지 않는 이상 사정 알지 못하는 타인의 눈엔 아예 오지 않았던 것으로 비치진 않을까. 그렇다면, 실로 겁 많고 태만하기 짝이 없는…… 금수같은 놈이 아닌가?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 인간이 될 수 없다.
- 회
- 허가받지 못하는 떠돌이들이 모여 정착한 스트레인지, 그중에서도 유달리 깊은 곳에 자리한 불법 개조 안드로이드 투기 도박장. 깊고 어두운 역사가 자리잡은 곳에서도 유달리 깊은 곳이다 보니 일터에는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위험도 4의 스킬아웃은 기본이고, 개중에선 여기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지명 수배자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 장소에서 나름 일하며 살아가는 어린 녀석이라고 불순하게 구는 사람들은 없었다마는, 가끔은 그런 기본적인 윤리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경호원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은 도통 진정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적에는 꼭 따뜻한 손길이 태오의 저녁을 함께했다.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으면 머리부터 등까지 복슬복슬 쓰다듬어주곤 했고, 이 순간만큼은 고된 하루에서 큰 위로가 된다 느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란도란 대화하고 나면, 태오는 자신이 고양이가 된 것만 같다고 느꼈다.
"시큐리티에게 들었단다. 얘기해도 좋아."
"그 사람이 쫓겨날 때요……."
"그래."
"두고보자고 했어요."
"두고보자?"
"얼굴 기억했다고, 다 퍼뜨릴 거라고……. 어린 애같은데 학교도 못 다니게 하겠대요. 소문이 나면 어떡하죠?"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태오야."
손길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태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졸음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아직 여기의 규칙을 모르는 것 같구나. 정보상을 이용하는 거면 모를까, 개인은 등처먹는 일이 있더라도 바깥 녀석들보단 솔직하거든."
"솔직, 해……?"
"바깥 녀석들은 온갖 떡밥에 잉어떼처럼 몰려든단다. 그리고 뻐끔거리면서 이리저리 말을 얹지. 이 사람의 됨됨이가 어땠느니, 자기는 딱 한 번 스치듯 봤는데 느낌이 쎄했다느니 어쨌느니.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라도 한 번 불씨가 붙으면 펄떡거리며 어떻게든 뜯어보려 애를 쓰지. 그러다 아니란 말이 나오면 자기는 합세하지 않은 척, 그럴 줄 알았다며 욕하는 사람들이 역겨웠다는 둥 자기는 무서워서 말 얹지 못했지만 내심 응원했다는 둥 입을 싹 닫거든."
"…그럼 여기는요?"
"여기는 그랬다간 전부 물고기 밥이 된단다. 죽어서 갚는 것이 얼마나 깔끔하니!"
"네, 깔끔하네요."
"그러니 조만간 회나 먹자꾸나. 너도 통통해질 때의 맛을 봐야지."
"……통통해질 때?"
"그런 게 있어. 푹 자렴, 새벽 두 시인데 안 자면 학교에 지각할지도 몰라."
사람 하나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머지않아 태오는 매체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선물 받은 회를 싹 긁어먹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 낙원
- 스트레인지 한구석에 자리한 폐건물 단지는 건조하니 먼지와 흙, 잔해의 분진이 넘쳐나고 밤이 되면 춥다. 이곳에는 여러 인간 군상이 모여 있었다. 레벨 0 무능력자부터 시작해 사이보그 수술 사기를 당해 신체 일부를 잃은 학생, 중대한 프로젝트를 망쳐 사회적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숨어 들어온 연구원, 인첨공에서 자유를 외치다 탄압 당해 도망친 사회 운동가……. 언제라도 큰 싸움이 일어나기 좋은 인간들만 모여있었지만 당장의 삶이 급했기 때문에 큰 분쟁은 일어나진 않았다. 그들은 눈치껏 잔해를 주워 땔감으로 쓸만한 것을 모았고,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하루를 버텼다. 골목을 조금만 지나면 보이는 놀라운 기술력과 달리 이곳에서는 원시적인 방법이 유행했다. 인간에게는 불이라는 획기적인 신의 발명품이 있는데 굳이 전기를 끌어다 쓴다는 지식의 사치를 부릴 필요는 없었고, 달리 방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힘을 모아 소매치기를 하거니, 2학구에서 실험 삼아 만들었단 단백질이 풍부한 대체 식량을 얻어오곤 했다. 맛대가리라곤 하나 없으나 감사한 식량을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물어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식량을 가져온 사람들은 먹던 것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는 꼭 한 마디를 뱉었다. 패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 패배자답게 닥치고 살라고. 폐건물에 모여 모닥불을 쬐는 무리는, 그렇게 서로를 패배자라 칭했다.
태오는 대략 한 달 전부터 이 패배자 모임의 일원이 됐다. 달리 말하자면 태오 또한 인첨공의 하류 인생이자 패배자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나름 팔자는 좋았다. 구석 좋은 자리를 얻었고, 지금도 얌전히 모닥불을 쬐며 무엇으로 만든지 모를 식량을 씹고 있으니까. 스틱 형태의 대체 식량에는 미처 갈리지 못한 더듬이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태오는 신경 쓰지 않고 그것만 손가락으로 잡아 쑥 뺀 뒤, 덜렁거리는 덩어리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남은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며칠 전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호사였다.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날개 조각인지 뭔지 모를 것을 삼킬까 뱉을까 고민하고 있을 적, 자신에게 맞지 않는 안드로이드의 발을 대충 이식한 남성이 태오에게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약 한 달 전, 골목에서 쓰러져 있던 태오를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정착하게 도와준 사람이다. 듣자 하니 커리큘럼 도중 사고가 일어나 다리 한쪽을 잃었단다. 패배자들은 그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제법 듣기 좋은 이름이지만, 여기에서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생각하면 제법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별명이었다.
"꼬맹이, 뭘 그렇게 열심히 고민해?"
태오는 최소한의 사회성과 대답을 위해 생각하기도 싫은 조각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닐을 삼키는 것과는 결이 다르고 미끈거리는 듯한 끔찍한 느낌이 목에 한참이고 남는 것 같다. 태오의 손에 쥐여진 단백질 대체 식량의 봉지와 목울대가 애써 움직이는 모습을 본 남성이 상황을 파악하고 애써 웃었다.
"어…… 끔찍한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나 때문에 선택한 거면 미안하게 됐다."
"……아니에요. 그냥 어제 일 때문에요."
"어떤 거?"
"전부요."
"애들 사라지는 건 여기에선 익숙한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런가요?"
"그래, 한 달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적응 못 하면 어쩌잔 거야? 녀석, 순진해서 어디 납치당해도 그러려니 하겠네."
"……."
태오는 식량의 봉지도 모닥불에 툭 던져버렸다. 그래, 신데렐라의 말이 옳다. 스트레인지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진정한 야생이었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그만큼 생기는 기이한 순환구조를 가진 곳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제 누가 사라졌으니, 다음엔 누가 사라질까, 누가 진짜 '패배자'가 될까 팽팽한 눈치 싸움을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곤 한다. 마천루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세상 대신 네온사인이 강렬해지는 것으로 시간을 재고, 그 사실에 절망해서 입 다물고 조용히 모닥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는 곳. 자신의 삶이 더 급한 곳에서 남을 생각하다니,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너, 진짜 안 갈 거야?"
"어디를요?"
"2학구. 어제 일이면 당연히 그것도 포함이지. 너도 간택됐잖아."
태오는 신데렐라의 질문에 정곡을 찔렸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사실은 어제, 2학구의 연구원들이 단체로 나타나 패배자 무리를 굽어살피고 갔다. 그들은 스트레인지에 정기적으로 발을 들여 어느 건물이든 일단 고개를 쭉 빼들곤,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쪼르르 다가와 대체 식량이 아닌 진짜 빵과 간이 청결 장치를 들이밀며 으스대곤 했다. 표면적으로는 봉사라고 했지만 태오는 그마저도 위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어른이나 적당히 큰 학생들은 내버려 두고, 아이들에게 유달리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들만 발견하면 의중을 묻지도 않고 2학구로 데려가려 들었다. 덕분에 2학구로 가서 소식을 모르는 아이만 벌써 절반이다. 태오에게 연구원이 빵을 주며 "너도 2학구로 올래?"라고 상냥하게 물을 때면 태오는 그 속내에 도사린 커리큘럼과 연구 실적, 그리고 끔찍하고 비윤리적인 실험 계획을 읽었다. 그리고 애써 "저는 다른 연구소가 데려가기로 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적이면 연구원들은 있는 힘껏 표정을 구기며 자리를 떠났다. 떨어진 빵은 흙만 잘 털면 먹을만했으니까. 어제도 동일했다. 단지 자신에게 너 데 마레와 ALTER에 있던 그 아이 아니냐고 대뜸 물어본 것을 제외하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그 상황을 신데렐라가 봤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2학구에서 날아다니던 도련님이 견디기엔 여기 생활이 힘들잖냐. 다른 애들처럼 따라가지 그랬어. 그 연구원 나빠 보이지도 않던데."
"……저는, 패배자인걸요."
태오는 영 개운하지 못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지 않냐면 거짓말이지만, 지금의 태오에게 있어선 2학구보다 여기가 훨씬 나은 곳이었다.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2학구는 무시무시한 곳이고, 그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불과 2달 전까지만 해도 2학구에 소속되었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것이고. 태오는 커리큘럼 도중 뛰쳐나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를 들었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던 날을. 오히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며 자신들끼리 의학적인 문제에 접근하듯 토론했고, 태오는 점차 스트레스로 정신병을 앓는 가여운 아이로 각인되던 순간도. 그게 아닌데! 어떤 약도 듣지 않으니 문제는 심각해졌고, 결국 사고가 났다. 연구원들이 붙잡으려 했을 때는 귀신이라도 본 듯 새된 소리로 울며 뿌리쳤고, 그렇게 태오는 연구소를 헐레벌떡 뛰쳐나가버렸다. 사람들이 쫓아왔지만 뜀박질은 생각보다 빨랐고, 조그마한 아이가 인파와 골목 사이로 쑥 숨어버리자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2학구를 조금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람들은 어린 태오가 돌아다니는 걸 보며 다른 연구소의 골칫덩이구나 생각하며 내쫓곤 했고, 음험한 실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몇 연구원들은 태오에게 친절히 굴었지만 커리큘럼을 거부하며 도망치자 아예 버려버렸다. 그렇게 떠돌다 태오는 자연스레 스트레인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태오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어린 녀석이 말이야, 불편한 삶까지 감내한답시고. 너 그거 배부른 소리다, 알아?"
"그런가요."
"그래, 잘 생각하라고.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절대 유쾌하지 않으니까."
"……."
"뭐, 됐고. 네온사인 빛이 강해졌어. 애는 자라. 적당히 옅어지면 깨워줄 테니까."
신데렐라는 태오의 표정을 보고 더 말을 붙이지 않기로 했는지,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딱딱한 바닥에 몸을 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을 붙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의 생각이 날카롭게 내리꽂히자 태오는 눈을 번쩍 떴다. 심상의 소리는 사람들이 얘기할 때 들리는 성대의 떨림과 더불어 먼 곳에서 들리는 감각과는 사뭇 달랐다. 머리에 직관적으로 꽂힌 소리는 명확히 태오를 향하고 있었다.
─ 연구원이 한 말이 진짜인가?
─ 저 꼬마가 데 마레 출신이라고 했지.
─ 지금이라도 밀고를 하면 포상금을 받을 수 있나?
자신을 향한 목소리가 한 둘이 아니었다. 어제 자신이 거절했던 연구원이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했다. 2학구에 팔아넘기잔 계획을 들어버린 태오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눈이 한 쌍, 두 쌍……. 자신과 하나하나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제각기 시선을 피했다.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처럼. 태오가 평범한 아이라면 그저 넘겼겠지만, 이미 소리를 들어버린 이상 넘길 수는 없었다. 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냐, 꼬마. 아직 네온사인이 쨍한데."
"아, 그게……."
"땔감 주우러 가려고? 추우니까 이거 덮고 가라."
─ 애새끼가 귀찮게 구네. 도망칠 수나 있나, 저거?
신데렐라는 자신이 입던 점퍼를 벗어 툭 던져줬다. 입고 가라는 뜻이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점퍼를 팔에 뀄다. 큰 품 때문에 어른 옷을 뺏어입은 아이 꼴이었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조금은 거두어졌다. 그래, 이곳은 눈부신 발전과는 동떨어진 곳이다. 아이들은 이따금 소매치기를 해서 먹고살았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 패 내쫓는다. 폭력과 비윤리적인 일이 난무하는 곳이다. 법이 존재하나 그건 상식일 뿐이지 실천할 것이 아니다. 태오는 도망치고 누군가의 속내를 읽으며 간을 보다 적당히 이득만 챙겨 도망치는 법을 스스로 깨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있는 곳도 입이 많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옳지만, 태오의 잔머리가 통한 덕분에 이렇게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잔머리는 살아남을 궁리로 변모했다. 아마 신데렐라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 남은 양심으로나마 점퍼를 벗어 던져준 것이 분명했다.
"ㄴ, 네. 땔감 주우러 가려고……. 감사합니다."
"다녀와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 태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땔감을 주우러 간다는 핑계와 함께 밖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걷다 이내 달음박질과 함께 도망쳤다.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이 제각기 벌떡 일어나 신데렐라의 멱살을 잡거나 태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긴 했지만, 조그마한 몸집이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자 그들도 점차 떨어져 나갔고, 마침내 태오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설 적엔 멈춰 욕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자. 저기는 안 돼."
태오는 뽀얀 숨을 내쉬며 스트레인지 가장 구석으로 뛰어갔다. 뒤쫓는 걸음은 더 없지만 본능적인 공포는 본래 있던 곳에서 제일 멀리 있기를 간곡히 소망했고, 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발을 한계까지 이끌었다. 그렇게 태오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골목의 끝을 찾아 내달렸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탁 트인 공간과 함께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오는 더 달릴 수 없었지만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철 덩어리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쓸모를 다한 다리에 힘이 빠졌고, 숨을 세차게 몰아쉴 때마다 찬 바람이 폐부를 깊숙하게 찔렀다. 폐가 불타는 것 같이 아프고 눈앞이 흐렸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몸에선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한참이고 숨을 돌린 태오는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개를 조심스럽게 뻗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몸을 숨긴 자그마한 동굴 같은 장소가, 폐기된 안드로이드가 뒤엉켜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곤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알겠다는 듯 놀라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안드로이드 폐기장! 분명 신데렐라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스트레인지에는 안드로이드가 산처럼 쌓인 곳이 있는데, 하필 그곳이 연구원들은 얼씬도 않거니와 그 안티스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있는 탓에 그 실체를 확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그리고 신데렐라는 아무리 안드로이드 부품이 비싸게 팔린다지만, 발을 들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며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어차피 가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장소에 오게 될 줄이야, 하물며 실존했다니! 태오는 현실과 괴리된 듯한 감각에 위험한 것도 잊어버리고 뒤엉킨 잔해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조잡하게 닮은 기계가 서로 얽히고설켜 늘어지고, 꺾여있고, 부서져 산을 이루고 있었다. 네온사인도, 마천루도 없었다. 새벽 공기와 드높은 산만 있으며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태오 하나뿐이었다. 어떠한 마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삶을 부여받다 죽어버린 거짓 생명들이 가득한 기계의 산. 동이 트며 떠오른 찬란한 태양은 시체로 이루어진 산을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동적이게 비추고, 태오는 그 모습에 압도되었다.
아, 이곳이 나의 진정한 안식처구나.
죽은 기계의 무덤은 산 자의 낙원이었다.
- 이시미
- 인첨공은 바깥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 기술의 발전을 도모했고, 그 중심에는 2학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데 마레가 있다. 인첨공이 아직 개발 단지일 때부터 설계도에 함께 있었고, 하이드로키네시스의 연구로는 이젠 오션스를 뛰어넘어 단일 권위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바다라는 이름에 걸맞은 드높은 곳. 누군가는 데 마레의 입구에만 발을 들여봐도 여한이 없겠다며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존경을 표했고, 누군가는 저기에도 끔찍한 사고가 있었을 것이라며 트집을 잡는 등 질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입구를 거닐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심지어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소장이 버선발로 달려와 맞이했지만, 놀랍게도 태오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7년 만에 다시 마주한 2학구의 모습은 여전히 끔찍했고, 데 마레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태오야! 어이구, 더 말랐네. 고생이 많지? 어서 들어오렴."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라니, 네 집이잖니. 마음 편히 있다 가거라."
"……예."
집이라, 우스운 일이다. 지나치게 속 편한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이 상황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자 무진 애썼다. 실은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승환은 한 번이라도 찾아와주길 바랐고, 한결을 통해서도 여러 번 의사를 드러냈다. 결국 태오는 수락했다. 그 과정에서 태오의 의지는 없었다. 있더라고 해도 승환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슬슬 여름의 끝자락이 다가올 것이고,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단란하던 순간을 바라는 자와, 단란함에 질린 자는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금 만나는 것은 같았다. 아마 소장님은 평생 모를 테지!
"기억나니? 여기에서 너랑 희야가 책을 읽다가 잠들었잖니. 나 참, 눈 나빠진다고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지 못하게 했더니 여기에 숨어서 읽을 줄이야! 너희가 사라진 줄 알고 그때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단다."
"……희야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지하에 있단다. 개인 경호원과 체력 트레이닝 중이야."
"그렇군요."
"나중에 너도 소개해 주마. 좋은 분이셔."
개인 경호원이라면 아스트라페겠지. 그 작자는 거슬려서 만나기 싫다. 태오는 승환이 안내를 하는 연구소 내부를 곁눈질로 훑었다. 부산히 돌아다니던 연구원들은 소장이 잔뜩 기분 좋은 어조로 떠들며 여기는 무엇이 있고, 여기에서 너와 혜우와 희야가 놀았다는 등의 추억을 꺼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흥미로운 시선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태오는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붕대 감긴 팔을 보며 어디 다친 건가 걱정 어린 시선이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비출 때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하고 무언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걸음을 멈췄을 때, 승환도 같이 걸음을 멈추고 태오를 쳐다보았다.
"태오야, 괜찮니?"
"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태오는 눈을 흘겼다. 더 이상 걱정이 된다느니의 소리는 사절이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아무렇게나 눈을 굴렸던 태오의 눈에 레벨 스캐너가 비쳤다.
"레벨 스캔을 하지 않은지…… 꽤 됐거든요. 마침 눈에 밟혀서."
"세상에, 그랬구나! 지금이라도 한 번 스캔하는 건 어떠냐. 결과는 10분 정도 기다리면 될 건데."
"……예."
"그렇지만 우리는 연결 방식이라……."
도피하려던 것이 되레 독이 되었구나. 태오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재촉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속이 불편했다. 그래,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다. 태오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붕대를 풀자, 팔뚝의 선명한 문신이 드러났다. 검은색 파충류의 비늘과 기하학적인 선을 묘사한 문신은 작품으로 보았을 때는 아름답다 할 수 있으나, 입묵으로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그 문신을 본 승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개성을 존중한다지만 이런 문신은 현대 사회인의 관점에서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승환은 내색하지 않고, 레벨 스캐너의 패치를 손목과 이마, 그리고 팔뚝에 부착해 주며 웃었다.
"멋진 작품이구나."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아주 멋지다. 붕대는 내가 새걸로 갈아주마. 어이구, 희야가 또 스캔한다고 피어싱을 빼고 갔네. 이래놓고 살 튀었다고 뭐라고 한단 말이지."
피어싱을 괜히 손끝으로 밀어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던 승환은 태오가 자리에 앉자 몇 가지 설정을 건드리고는, 스캔 시작 버튼을 눌렀다. "조금 따끔하단다."라는 말과 함께 잠깐이지만 따끔한 감각이 팔과 머리를 스치고, 삑 소리와 함께 스캔이 시작되었다. 패치를 떼도 괜찮다는 알림이 들리자 승환은 태오의 몸에서 일회성 스캔용 패치를 제거했고, 편히 앉아 쉬라는 듯 한쪽에 준비된 푹신한 의자를 가리켰다. 팔걸이에 얼음이 끼어있는 걸 보니 희야가 여기에서 장난을 치고 간 듯싶었다.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은 어색했다. 승환도 차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없었고, 태오도 달리할 말이 없었으니. 스캔 시간 5분, 결과 도출 시간 5분. 도합 10분 동안 끔찍한 침묵이 감돌 것이라 생각할 적, 홀로그램 창이 떴다. 지금 당장 데이터에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예상보다 빠른 결과였다. 승환은 스캔 결과를 읽다 탄성을 뱉었다.
"이게 뭐야? 이명을 누가 선점했다고? 박훈이 누구야? 잠깐만, 목화 고등학교면 한결 연구원 전임 커리큘럼 아니야? 이 사람이 왜……."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에 떨던 고개를 번쩍 치들었다. 박훈. 한결의 바로 이전 연구원이자 태오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하대하던 연구원의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오는 홀로그램 통지표를 천천히 읽었다.
[대분류: 텔레파시(Telepathy)
소분류: 보컬 텔레파시(Vocal Telepathy)
계수 측정 결과: 4,883
레벨: 4
축하합니다. 귀하는 인천 첨단 공업단지에서 1% 미만에 해당하는 귀중한 인재입니다. 앞으로도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길 바라며, 성과를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귀하의 이명은 이명 관련 규칙 제1항, 선점 규칙에 의거하여「이시미」로 확정되었음을 통지하는 바입니다.
이명 신청자: 3학구 목화 고등학교, 프리랜서 연구원 박훈
이의신청은 AI 상담사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시미.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랐을 수도 있는 이명이지만, 애석하게도 태오는 이 이명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승환 또한 이시미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이의신청을 위해 홀로그램 패널을 두어 번 두들겼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확인을 좀 해야겠다."
태오는 앉아서 기다렸다. 별다른 말을 얹고 싶지 않았거니와 승환의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차마 입을 벌릴 용기도 낼 수 없었다. AI 상담사가 연결되고 이의신청을 하자, 상담사는 승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형식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죄송합니다. 데 마레와 ALTER에서는 마지막 커리큘럼을 받았던 기록이 5년이 넘었기에 이명 선점의 권한이 없습니다. 저희는 가장 최근에 커리큘럼을 진행한 연구원께서 그 성과를 알기에 직접 정하겠다 신청했으니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가장 최근 커리큘럼은 아니무스의 백한결 연구원이었습니다. 정정할 수는 없습니까?"
유감스러운 일이나 이미 선점된 이명은 변경하실 수 없습니다.
승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패널을 쿵 내리쳤다. AI 상담이 강제로 종료되고, 주변을 지나치던 연구원들도 움찔 떨더니 눈치껏 입을 다물곤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를 떠나려 들었다. 싸늘한 적막이 다시금 주변을 가득 채웠다. 승환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 연구원이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기에 커리큘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승환도 알고 있었다. 인성 글러먹었다 생각했다마는 이렇게까지 치졸하고 경우 없는 사람일 줄이야! 인첨공의 바닥을 엿본 기분과 함께 분노가 들끓었다. 이시미라니, 바리도, 영노도 아닌 이시미라니! 절대 좋은 뜻이 아니다. 명백한 보복과 저주 서린 이명이지 않은가! 평생이고 바뀌지 않을 이명이니, 너는 평생 용이 될 수 없다고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지 않은가!
"젠장!! 앞날 창창한 애한테 이시미가 뭐야, 이시미가!!"
"소장님."
"항의를 넣어야겠다. 항의를 넣어야만 해, 이건."
"소장님."
"태오야, 그러니까 걱정 말거라. 이번 일은 절대 넘어가지……."
"안승환 소장님."
승환은 몸을 우뚝 멈췄다. 자신을 지극히 공적으로 대하는 태오의 태도에 놀란 것도 있지만, 어조가 지나치게 평온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태오는 눈을 휘고 있었다. 눈에 서린 감정을 뭐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비참함도, 슬픔도, 온갖 부정적인 것을 붙여보기에는 후련하고, 그렇다고 긍정적인 감정을 붙이자니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눈이었다. 미소는 짓고 있지만 미소라고 할 수 없는 것과 함께 태오는 진정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태오야."
"소장님께 감히 직언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해라."
"이게 인첨공입니다."
승환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한 문장이었을 뿐이지만 태오가 지금까지 커리큘럼을 받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이유의 편린을 본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삶을 축복하기 위해 만드는 이름에 대고 보복하는 행위만으로도 인첨공의 바닥을 본 것 같았는데, 이런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평온히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을 망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태오야, 너……."
"희야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승환은 태오를 붙잡지 못했다. 위태로운 걸음과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희야가 태휘와 훈련하다 또 졌다는 일상적인 알림이 뜰 적에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또 내 아이를 지키지 못했구나. 내가 또 안일하게 판단해서 우리 아이들이,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연구원들이 승환의 상태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제각기 달려가고, 태오는 그 소란에도 뒤 한 번 돌지 않고 데 마레를 나섰다. 여름 햇살은 화창하고, 따가웠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날씨다! 태오는 늘 걸치던 점퍼도 후련히 벗어 허리에 묶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이따금 태오의 팔을 마주치면 보며 제각기 미심쩍은 시선을 한 번씩 보내거나, 눈을 피하거나, 아예 무시하기 바빴고, 2학구의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 마주한 아이는 태오의 팔을 보며 순진무구하게 외쳤다.
"어? 뱀이다!"
태오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결핍
- [겨우내 얼어붙어도 시간은 간다고, 어느덧 1월이 되었습니다. 연구직 고되니, 몸은 건강하신지요?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니 인첨공에서는 뜻밖의 일이지마는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메일 보다는 손수 쓰는 것이 낫고, 아직 낭만 찾는 아날로그한 사람이기에 편지 씀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각설하고 국장님께 맡긴 저희 아이, 태오에 대해 몇가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인첨공에서 귀한 태생 레벨 3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인간적인 태오의 면모를 국장님께서 면밀히 살펴주시길 간청하는 바이니, 질리더라도 부디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태오는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예민합니다. 감각적으로도 예민하며 또래보다 조숙한 면이 있는 편입니다. 통상적으로 조용한 것을 선호하고, 커리큘럼시 얌전하긴 하지만 불안 수치가 평균보다 심히 높은 편에 속합니다.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면 현저히 내려가곤 하며, 부디 잘 케어 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아이라고 하여 커리큘럼에 대해서만 설명하지 않고 어떤 커큘럼을 하는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예측과 같은 것을 미리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면 안심할 겁니다. 영특하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미리 예측하는 아이입니다. 또한 태오는 또래보다 조용한 편이되 감정을 크게 드러낸다면 무엇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경우 적절한 커리큘럼을 통해 보상을 얻는 방법으로 교육 시켜주시길 바랍니다.
(중략)
……또한 선생님께 극비로 알리되 부디 유념하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태오가 혹시라도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면 크게 다그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고를 친다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가 아닌, '인간들은 보편적으로 이런 것을 싫어하며, 사회적 관념에서 보았을 때 정해진 것이 있으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 같은, 아이가 수긍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주시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전두엽과 측두엽에 이상이 없고 희로애락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느끼거니와 제가 직접 나서 학습을 거쳤으니 큰 사고는 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겠으나, 혹시 몰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태오는…… (잠시 고민하는지 이 부분에서 볼펜으로 툭툭 찍은 자국이 남아있다.)
간혹 불특정한 신체 부위에 자해 행위를 행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비교적 날붙이를 멀리 해주시되 혹시라도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반드시 자해한 부위에 대한 인체 해부적인 설명과 더불어 그 부분이 다칠 경우 어떻게 위험한지와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보편적인 법률을 알려주십시오.
무리한 부탁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만, 저희 연구소에서 귀히 여기던 아이입니다. 국장님께 염치 불고하고 이리 부탁드립니다. 태오가 비록 인첨공에 살고 있으나, 그래도 아이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디 커리큘럼의 대성을 빕니다.
─ De Mare 소장, 안승환.]
ALTER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일주일 째다. 태오는 빠르게 적응했고, 커리큘럼도 고분고분 따랐다.
"선생님."
"불렀나요?"
"사람은 왜 피가 나요?"
"음, 피는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고, 무너지지 않게 덧댄 우리의 피부가 조금이라도 벗겨지면 빠져나온답니다. 우리가 테이프를 덧댄 물풍선을 콕 찌르면 물이 졸졸 새나오듯이요."
"……그러면 인간도 물이 다 빠져나가면 죽나요?"
"그 이전에 죽을 거예요."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담실로 향했다. 그리고 연구소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태오가 커리큘럼 이후 상담실에 놓여있던 화병을 깨고, 그 면으로 팔을 그었던 것이다. 상담을 진행하던 연구원이 헐레벌떡 태오를 안아 의료실로 향했고, 태오는 왜 그랬냐는 다그침에 제 팔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다 빠져나가기 전에 죽는댔는데."
- 비탄
- 4학구 미술관에는 여러 작품이 있다. 바깥에서도 유명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나, 인첨공에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미술의 시대를 연 작가의 화려한 예술까지……. 레이브는 후자였다. 인첨공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미술을 만드는 존재. 안드로이드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숨과 삶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천재. 누군가는 익숙함에 잠식되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예술이라며 폄하하곤 했지만, 막상 인첨공에서 전시까지 되는 안드로이드 예술가는 손에 꼽을 정도요, 그중에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만들어내어 예술을 잘 모르는 인첨공의 사람이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는 존재는 레이브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 레이브의 작품이, 그것도 누군가를 위해서만 만들었단 의도로 경매에 올린 것이 4학구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니 각종 언론과 사람들은 그 실체를 확인하고자 우후죽순 몰려들었다. 오늘도 미술관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거니와, 오직 레이브의 작품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작은 공간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안드로이드 하나를 향해 유일하게 빛을 밝혀두고 있었다.
[레이브, <비탄>, 20xx. 3세대 안드로이드 Q-4171 칩셋.
3x3x1(칩셋). 인첨첨단공업단지 미술관 소장.]
커스텀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민무늬의 안드로이드는 족쇄에 묶인 듯 조형물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을 인식할 때마다 그쪽을 바라보며 각종 부정적인 표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제각기 진지하게 고찰하기도 하고, 내장된 AI를 향해 말을 걸기도 했으며, 진지하지 못하게 키득거리거나 꺼림칙함을 느끼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태오는 그 광경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갔을 때 안드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안드로이드는 태오를 인식하고 몸을 뒤틀더니,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금방이라도 울 듯하며 처절한 표정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오는 입을 벌렸다.
"너는 왜 고통스러워 해?"
"나는, 나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사람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해서 그래."
"그게 왜 당연하다 생각해?"
"인간은, 숨을 쉬기 때문에, 생존하니까. 나는, 죽지도, 살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칩이 이식된 동안은, 살아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숨을, 쉬는 것처럼, 나의 고통도 당연한 거야."
태오는 감정에 따른 기본적인 골조만 학습시킨 AI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네게 말을 많이 걸었구나. 많이 학습했어."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궁금함을 표출하지."
"그래서, 그 표출이 고통스럽니."
"아니. 이건 온전히 나의 몫이야. 표출하는 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면, 나는 내가 될 수 없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으나 진실임을 안다. 이들은 진실밖에 내뱉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됐기 때문이다. 질문이 없자 다시금 괴로운 듯 표정을 구기고 몸을 뒤트는 안드로이드를 보며 태오는 기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여전히 너는 진실만을 말하는구나.
- 구절
- "태오야."
"네에, 나리."
태오는 자신의 무릎에 옹졸하게 웅크린 남성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면, 집 문을 두드리는 걸로 시작되었다. 낯익은 모습에 문 열어주니 비틀거리며 들어오지도 못하고, 덩치는 저보다 한참이고 큰 사람이 지치다 못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색이었길래 천하의 나리가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만, 급히 몸 뉘일 곳 찾아 소파로 데려가니 대뜸 이리 무릎을 빌리지 무언가.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라 태오는 자못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무릎에 엉거주춤 올려놓고 몸 구기듯 웅크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탓에 태오는 그 모습 보며 미미하게 웃음 지었다.
"……태오야."
이제 보니 술 냄새가 난다. 취하셨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흐트러진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태오는 조금 더 소파에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슬그머니 옮겼고, 나리도 몸을 꿈지럭거리며 자세를 편히 잡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주었다. 얼마나 마셨으면 늘 단정히 땋던 머리도 이리 흩어지셨을까. 조심스레 머리의 결을 따라 훑어주던 중 태오는 나지막이 답했다.
"네, 저 여기 있답니다."
"만약 네가……."
"네."
"사모의 구절을 접한다면 어떤 정취의 후음이 좋더니……."
태오는 머리를 쓸던 것을 멈췄다.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고개를 내리면 당신이 있어 시선을 피할 수도 없다. 태오는 한참이고 침묵하다 목에서 소리를 내고자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자꾸만 단어와 문장이 목이 졸리는 신음과도 같이 그 속이 단단히 메여 목구멍을 막아세운다. 이내 강제로 비집고 나오는지 사납게 긁히는 소리를 뒤로 단어를 뱉을 수 있었다.
"고통스럽게요."
입꼬리가 애써 미소를 짓지만 눈을 휘는 꼴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었다. 태오는 마저 머리를 쓸었다. 부드러운 손짓에 자신을 흘긋 향하던 붉은 시선이 느릿하게 감겼다.
"괴로운 나머지… 나를 저주하며 끝없이 깎아내리는 듯이요……. 그렇게 비참하게…… 내 이름과 사모의 구절을 부르짖고, 갈라져가는 후음과 그 최후를 보며 소태하는 사람이 오로지 나이길 바라요……."
나리는 태오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는 중얼거렸다. "기쁘네……." 태오는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쓴 웃음을 삼켰다.
"……어째서 행우하실까요."
"그야 네가…… ─것을 아니까……."
태오는 눈을 감았다.
"취하셨어요. 이제 주무세요."
"대답은 듣고 싶은데."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줄 호의는 없답니다……."
- 조문
- 그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나리께서는 무언가를 시도 때도 없이 확인하시다 어딘가로 연락을 넣길 반복했고, 형제와 자매들도 각각 2학구로 가거나 3학구의 어딘가로 파견을 가느라 분주했다. 엔지니어 일이나 하러 가려 했을 적, 자매 하나가 태오의 어깨를 딱 붙잡곤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께서 오늘은 도련님이 동행하길 바라십니다."
"……손님일까요?"
"네. 중요한 손님이니 접대하셔야 하거니와 앞으로도 중한 일을 맡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기름때 묻히지 마시고, 어울리는 것도 안 됩니다."
"네."
"채비합시다. 미팅은 저녁이지만 할 일이 많습니다."
"가령……?"
"어르신 곁에 계셔야지요. 지금 심기가 불편하셔서 누구 하나 머리 날아가기 전에 도련님이 곁에 계셔야 해요."
그러니까 빨리빨리. 태오는 붙잡히듯 자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생전 처음 보는 장치로 몸을 스캔하기도 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형제의 손에 다시금 이끌려 후드티가 아닌 다른 옷을 입어야만 했다. 정장은 불편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어쩔 수 없다. 머리는 혼자 빗을 수 있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안 된다 딱 잘라 말하고는 어느덧 허리 중반까지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주었다. 그리고 나리의 곁으로 떠밀리듯 도착했을 적, 나리께서는 벌써 여덟 번째의 통화를 막 끝마친 참이었다.
"나리."
"대체 무슨 일이길래 오늘은 이렇게 번듯하게 차려입었담?"
"형제자매가 도와주었어요……. 오늘 미팅이 있다고."
"옷차림이 불편하진 않고?"
"익숙해졌어요."
"그럼 어디 다녀오기라도 할래? 4학구 미술관은 어떠니."
"곁에 있으면…… 안 될까요."
"어쩐 일로 어리광을 다 부린담."
"……싫으실까요."
"아니, 가까이 오렴."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녁까지 혹여 나리께서 화가 날까 싶으면 곁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가끔 간식이나 칩을 주면 적당히 배를 채우며 칩을 만졌다. 미팅 장소로 옮기기 위해 호버 택시에 오를 적, 배웅하는 형제자매의 표정이 환했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소리 없는 환호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운전자는 없고, 전파 방해 장치를 붙여 cctv가 녹화되지 않는 택시 안에서 나리는 태오에게 나지막이 질문했다.
"오늘 무슨 미팅이 있는지 아니?"
"……아니오."
"눈여겨보던 정신 나간 녀석에게 투자를 제안할 거란다. 그동안 목표로 하던 일이 드디어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뜻이지. 너무 오래 기다렸어."
"아."
드디어 오늘이구나. 태오는 속으로 날을 셈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이라면 분명…….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게 알려주지 않겠니? 영악한 녀석이라 내 앞에서도 뻔뻔하리라 믿거니와, 네게 거래하는 법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구나."
"……네."
도착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태오는 나리를 올려다보았고, 나리는 괜찮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빈소를 지키는 남성을 발견한 나리는 유감스럽다는 듯 조의를 표했다.
"선생님, 여긴 어쩐 일로."
─ 이 사람이 왜 여기 온 거지? 설마 거래를 끊으려고? 이 상황에서?
"……이번 일은 유감입니다."
"저, 그게……."
남성은 눈을 굴려 태오를 보았다. 태오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리를 향해 시선을 굴렸다. 나리는 태오의 시선이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옆은?"
"저희 인사해야지, 무화야."
태오는 애써 공손히 예를 표했다.
"……백무화, 입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무화라고…… 했지. 몇 살이니?"
─ 어리다. 우리 아이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설마 저 양반이 알고 질책하고자 데려온 건가? 내가 애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정말 순수한 조의로? 그것보다 이 아이가 누군데?
"열넷이요."
"……무화는 제 수행원입니다. 스트레인지에서 죽어가던 아이를 거뒀지요."
"수행원이요."
"예. 조만간 선생에게도 소개하고자 했건만, 하필이면 이런 자리가 될 줄은 몰랐군요."
"……제 아이도, 이만했지요."
─ …아이에게 의심을 품고 싶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 하필 아이를 데려온다고. 그렇지만 저 아이가 정말 수행원이라면 데려올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사람을 키운다는 게 영 안 믿기는데.
태오는 느릿하게 나리를 향해 눈을 굴렸다. 나리는 태오의 시선을 금방 잡아채더니, 태오가 준비된 손가락으로 '부정적'이라는 신호를 주자 눈을 내리 감았다.
"선생. 오늘은 선생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죽었지 않습니까……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제게도 아이가 있으니까요. 저도 제 아이가 죽는다면 눈이 뒤집힐 게 분명합니다. 가슴으로 낳았어도 평생을 품고 참척할진대."
"……제, 아이는. 어째서……."
─ 어째서 죽어야 했지? 어째서 그 먼 길을 홀로 떠나야만 했지? 안타까운 우리 ■■! 형제도 두고 떠나버리다니,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다시금 태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흔들린다.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어째서 몸 멀쩡하던 아이가 그리 아파하며 죽어야 했을까요……."
"윽, 흐윽……."
"원통하지요, 자식 곁에서 떠나보낸 부모 마음을 누가 헤아리겠습니까. 예, 누가 알겠습니까."
"으으윽……."
"죽어가는 아이를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지요. 아니, 외면했지요."
"제게, 제게……."
남성은 울다가도 눈을 번쩍 떴다. 외면했다는 소리 때문이었다.
"바라는 것이 뭡니까! 얼마나 제 마음을 더 찢어놓아야-!!"
"세상이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뭐라, 고요?"
"당신 아이는 왜 죽어야만 했습니까. 왜 외면당하고 고통받아야만 했을까요."
"그건, 그건……."
"애초에 인첨공에서 이런 일이 왜 벌어져야 합니까?"
남성은 순간 머리를 맞은 듯 나리를 쳐다보았다. 태오 또한 깨달은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었고, 나리는 태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지금부터 잘 보라는 듯.
"그건……."
─ 그러게,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했지.
"남은 쌍둥이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되는 일이지요. 남은 자식마저 죽을 수는 없지요……. 선생. 그렇지만 이곳은 인첨공입니다. 무력한 자는 죽기 마련이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지요. 스트레인지 밖이든 안이든 이 법칙이 당연해져버린 곳입니다."
"……제게 뭘 바라십니까?"
나리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죽은 자를 추모하러 온 곳에서 짓기에는 딱 적당히 예의를 차린 미소였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지 않습니까?"
태오는 빈소를 나서며 나리를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호버에 오르는 나리는 슬프고, 애달프고, 고통스럽던 표정과 예의 차린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딱딱한 무표정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태오는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을 숨기기로 했다.
태오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이 작열하는 듯한 통증이 다시금 찾아온 탓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꿈을 꿔서! 팔을 움켜쥐고 고통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덜덜 떨던 태오는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그대로 고꾸라지듯 엎어졌다.
세상은 잔인하여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 미명未明, 인시寅時
- "네가 한 발언을 책임질 수 있겠니?"
태오는 양 손목을 한 손에 붙들린 채, 자신을 고압적으로 내려다 보는 남성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등에 닿은 벽이 딱딱했다.
"그렇다면 통보가 아닌 거래를 하지요."
"거래라, 들어는 보자꾸나."
"한 달. 스트레인지에서 저지먼트가 활동해도 묵인하게 해줘요."
"대가는?"
태오는 가까이 오라는 듯 눈짓했다. 남성이 허리를 숙였을 때, 태오는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고는 뺨에 스치듯 고개를 틀었다.
"……그쪽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필요하잖아요."
"후회하지 않겠니?"
"누구도 모르니 나만 곱씹으면 되는 일이지요……."
"하."
남성은 손을 풀곤 조금 더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하고는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 앙칼진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다 커서 고양이라고 부르면 싫어하면서 꼭 입에 올리게 만들어. 그렇지?"
"……."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내 아무리 관대하다 한들 선은 있는 법이거든……."
"넘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땐 네 책임이란다. 알고도 넘었다는 건 각오했단 뜻 아니겠니?"
"그러면…… 나리께서 책임지면 되겠네요."
태오는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으로 남성을 똑바로 마주했다.
"……거래는 성사된 걸로 알지요."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비몽사몽 상반신을 일으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감추고 일어나니 세상이 온통 까맣다. 태오는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의 피가 쫙 빠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곤 시야가 가려진 원인을 찾고자 눈 주변을 더듬었고, 이내 엄지로 콧잔등에 걸친 수면 안대를 밀어 올렸다. 분명 끼고 잠든 기억이 없는데, 머리카락이 거칠게 눌린 감각이 뺨에 느껴지니 자의로 쓴 건 아닌 것 같다. 묵직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태오는 어두컴컴한 시야에 적응한 듯하자 그제야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은 두 개였다. 그중 하나를 툭 건드리니 낯선 배경화면이 있는 잠금 화면에 시간이 뜬다. 오전 3시 41분. 남들은 벌써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애석하게도 태오는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씨-"
눈을 다시 감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의 몸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 다시 잠들기는커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이 뻔한 몸 상태에 태오는 꺼진 화면에서 눈을 돌렸다. 하필이면 이 시간에! 자신도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잠들곤 했는데, 생활 패턴이 대차게 꼬이게 생겼다. 버릇처럼 욕이 나올 것만 같아 혀에서 쌍시옷의 첫 발음이 굴렀으나, 인기척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태오는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태오는 이마에 짚고 있던 손을 떼고는 상반신을 옆자리를 향해 돌렸다. 이게 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 때문이다. 태오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곱게 이불을 덮은 몸은 규칙적인 생명 활동을 영위하고 있음을 알려주듯 천천히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시선이라도 기민하게 느끼고 깨어나 자신을 새빨간 눈동자로 빤히 바라봤겠지만, 오늘은 고단한 하루였는지 어째 미동도 없었다. 아무리 스트레인지의 어르신이니 뭐니 해도 어찌 되었든 피로에 승복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태오는 이대로 손을 뻗으면 모든 걸 끝장낼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이면 자신의 지긋지긋한 불안도 끝이 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은 아직 학생이고, 저지먼트이자,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으며, 무엇보다 이곳은 바깥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스트레인지와 달리 조금 더 빡빡한 법률이 자리하고 있기에 충동적으로 일을 벌여서는 안 됐다.
태오는 그 사실을 무엇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에어버스터 앞에서 저지른 행동과 뱉었던 발언은 지금 와서 수습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깊은 골이 생기긴 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따금 스트레인지가 그립곤 했다. 그쪽 또한 책임을 지는 건 동일하지만, 죽음과 폭력에서 조금 더 관대한 면이 없잖아 있어 이렇게까지 신경 쓸 것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은 현재 스트레인지에서 엄연히 독립한 몸이다. 다시 계기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여기 발붙이는 수밖에 없다. 이 기회가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면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땐 오늘의 일을 교훈 삼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거, 대비할 겸 관찰이나 할까 싶었다. 상반신을 천천히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흐른다. 태오는 붕대를 전혀 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천천히 그와 거리를 좁힌 태오는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한참이고 감상했고, 생명 활동을 다시금 확인했으며, 꿈의 깊이를 쟀다. 레벨 4에 도달한 이후에도 쓸모 하나 없을 듯하던 능력은 이런 순간에 기묘한 빛을 발하곤 했다. 비명에서 묻어 나오는 감정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숨소리까지. 한 번 집중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 펼쳐졌으나 여기엔 태오와 그밖에 없었거니와, 그 깊이 또한 구분할 수 있었다. 선명하고도 희미한, 심층에 다가선 목소리가 머리에 내리 꽂히고, 태오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붕대가 감기지 않은 목을 더듬고는 속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
퍽 깊이, 하물며 좋은 꿈을 꾸고 있구나.
내 속도 모르고. 태오는 제 목을 더듬던 손길을 천천히 쓸듯 움직이더니 목과 어깨를 잇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쓰라린 탓에 자조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곤, 눈을 느릿하게 위아래로 흘겼다. 제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누운 채 잠든 그는 여전히 규칙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등허리를 덮는 머리카락은 평소 같으면 곱게 땋았겠지만 아무렇게나 풀어헤쳤던 탓에 길게 팔뚝이나 목을 덮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끝이 푸르스름하나 그마저도 점차 물이 빠지는지 어둠 속에서도 더 하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무심하게 시선을 옮겨 무방비한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콧날은 곧게 뻗고 날렵했다. 감긴 눈에는 길고 촘촘하게 속눈썹이 박혀 곡선을 그렸고, 영준하고 납작한 이마에는 이리저리 흩어진 머리카락이 숨결에 따라 가끔씩 움직였다.
"……."
그리고 이불 밖으로 드러난 팔뚝에 끝내 시선이 도달했다. 자신과 같은 뱀 문신이 있었지만 조금 더 세밀했고, 거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아마 팔에 드문드문 남은 흉터 때문이리라. 스트레인지에서 이름을 떨치기까지 새겨온 세월의 흔적과 승리, 생존의 증표는 문신과 함께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오는 문신에서 한참이고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인첨공의 기술이 발달했다 한들 이 문신은 지울 수 없다.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역시 장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목 주변까지 다가간 손은 우뚝 멈추더니 차마 틀어쥐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기만 했다.
"……."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나는 왜 망설이는 거지? 당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짜증이 치밀고 역겨웠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목을 비틀고 싶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 그 흔적도 남지 않게 하고 싶다…… 동시에 생각했던 그 모든 감정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향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태오는 바들바들 떨리던 손을 애써 옮겨 면구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겨주는 것으로 행동을 대신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길에도 그는 여전히 몽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오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허탈한 숨결이 입에서 픽 새어 나오며 금세 끓던 감정을 승화시켰다. 그 사이에도 몇 번이고 들끓기 위해 타인을 향해 치고 오르던 감정은 자신을 충동질했으나, 여전히 자신에게도 고개를 같이 치들었다. 추했다. 태오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을 거둔 채 주먹을 말아 쥐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좋은 꿈 꾸세요."
태오는 이내 침대에서 온전히 빠져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에서 셔츠로 보이는 것을 아무렇게나 주워 걸치며 테라스로 걸어 나섰다. 특수한 보안 장치 덕분에 야외라 한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의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태오는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오전 3시 50분, 기름 타는 소리를 뒤로 창백한 연기가 걸쭉한 욕설과 함께 흩어졌다. 테라스에 앉아 제 것이 아닌 연초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 걸어와 태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태오는 뭉개진 연기를 일직선으로 뱉어내곤 눈을 흘겼다. 잠에서 막 깨어난 남성은 태오가 아닌 그 너머, 미명의 도시 전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떻니."
"……한결같지요."
"이번엔 거부반응이 유독 심하더구나. 따로 챙겨먹는 약이라도 있니?"
"글쎄요……. 있을까."
"솔직하게 말해줘, 네 몸을 생각해야지."
"……두통약을 다시 먹기 시작하긴 했답니다."
"어디에서 얻은 약이니?"
"약국에서 늘 먹는 파우더 제품이죠……."
"난 또, 선지자에게 쓰던 건줄 알았더니 다행이구나."
"잡혀갈 일은…… 하나로도 족해서."
강력한 효력을 가진 거래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법. 고문과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고통을 참고자 얼마나 애썼는지, 아직도 이를 악물었던 턱과 힘을 준 온몸의 근육이 아팠다. 헛구역질을 하며 식은땀에 젖어 헐떡이고, 그 모습을 보며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어를 적엔 눈앞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결국 태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뒤집듯 파르르 떨다 쓰러져 잠들었다. 아마 며칠 간은 또 개판인 몸상태로 지내겠지. 은우에게 부탁해 순찰을 당분간 하교 직후로 바꿔줄 수 있겠느냐 물어봐야겠다.
"얘, 너를 그 꼴로 만든 걸 원망하니?"
"원망해봤자 돌아올 건 없어요."
미리 생각해둔 답이었는지 재깍 대답이 나왔다. 나리는 태오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독종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일하게 해달라 빽빽 소리를 쳐 기어이 자신이 거두게 만들더니 이젠 자진해서 거래를 요청한다. 검증되지 않은 약물의 임상실험을 자처하고, 거부 반응이 심하거니와 생살을 갈라도 고통에 겨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독한 녀석이었다. 이런 녀석이 스트레인지에서 독립했다니, 새삼 아쉽지만 기회는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다.
나리는 허리를 숙여 어깨에 기대더니 입을 벌렸다. 태오는 다시금 연기를 뱉다가도, 제 손에 끼운 연초를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알아서 연초 쥘 테니 손을 떼려 했으나 나리는 태오의 손목을 쥐고 제 손처럼 사용하듯 움직였다. 희뿌연 연기를 뱉은 나리는 손바닥 흉터에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이내 붙인 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그걸 어찌 장담하니. 원망하렴. 네 훌륭한 원동력이 되어줄 거란다."
"……그렇게 되면 나리로 하여금 내 삶이 완성되는 것 아니겠나요."
"영민하기도 하지."
"누구 덕분에 눈칫밥 좀 먹고 산지라."
"다음엔 좀 더 독한 걸 줘야겠어. 제대로 원망하게끔."
"높으신 분 때문에…… 나리께 갈 원망은 없을 걸요. 그러니 연초랑 제 손은 돌려주셨으면 한답니다……."
"조금만 더 사용하마."
"좋을대로 하시지요……."
"어쩐 일로 고분고분할까."
당신 목을 조르려 했거든. 목 끝까지 차오르는 소리를 삼킨 태오는 눈을 흘기며 등을 편히 기대더니, 이내 다리를 꼬았다. 삐딱한 자세였다.
미명未明, 묘시卯時가 다가온다.
- 신년
- 스트레인지에서 신년이라 함은 이 빌어먹을 곳에서 죽지도 못하고 1년이나 살아남았지만 대체 언제쯤 나갈 수 있느냐며, 이번 한 해는 그놈의 독립 한 번 해보자고 자조적으로 웃어넘기던 날이었다. 태오 또한 그 차디찬 바닥에서 모닥불이나 쬐며 살던 순간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나날이 있었지만, 나리께서 거둬주어 도박장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1년 동안 또 뿌듯하게 안드로이드 작품들과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는 새해가 되곤 했다.
이따금 갈리지 못한 더듬이나 날개가 씹히는 단백질 대체식량을 물에 타 걸쭉하게 끓여먹는 게 아니라 말랑하고 보드라운 데다 꿀이 잔뜩 들어간 떡도 먹을 수 있었고, 나리께서 직원들에게 주시는 명절 선물은 태오가 내심 기대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태블릿만 한 상자에 가득 든 무언가를 받고 눈이 돌아갈 적이면 태오는 다디단 한과나 약과만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가 주어졌지만, 약과를 하나 물고 돌아다닐 적이면 도박장의 식구들도 양심은 있었는지 주머니나 상자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더니 이리 오라며 손짓하곤 했다. 어떻게 됐든 태오는 정석적인 명절 선물에, 남들이 주는 용돈까지 타먹을 수 있어 사실상 두 개의 선물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실상부 도박장의 제일 어린 직원인 태오는 어른처럼 굴 수 없으니, 아이답게 해야만 하는 관문이 있었다. 설이나 추석만 되면 태오는 좋든 싫든 한복을 입어야 했고, 도박장 식구들이 손짓할 적이면 모두 앉았을 때 얌전히 세배를 올리며 덕담을 들어야 했다. 윤리나 도덕성이 없다시피에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이번에는 보다 승부조작이 잘 되길 바란다'라는 말이나 '스킬아웃 녀석들 자금 뜯어먹는 나날 되거라'같은 해괴망측한 덕담과 지폐가 오갔다.
나리께서는 유일하게 절을 받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은 제각기 껄껄대며 태오를 앞에 떡하니 대령했고, 나리는 그럴 때마다 질색을 하며 "세상에, 나 아직 서른도 안 됐어! 절 받을 나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니!" 하고 어떻게든 세월을 부정하고자 도망 다니기 바빴다. 결국 넙죽 절 받고는 '이번에는 '성공' 하자꾸나.'라는 덕담과 함께 용돈을 주곤 하셨지만. 보듯 바깥사람들에게나 해괴망측했지, 태오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그립고도 행복한 일상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태오는 제 앞의 나리에게 고이 손 모으고 있었다. 머리는 곱게 비녀로 쪽을 지고, 한복도 정갈히 차려입은 모습이 제법 단아했다. 나리는 그런 태오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노트북에서 고개를 뗐다.
"얘, 너도 스스로 벌 만큼 벌면서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람?"
"……글쎄요, 변덕일까요?"
"변덕이라기엔 지나치게 본격적이구나. 레이브 선생."
"저의 나이 따지고 본다면…… 사회로 나가기 전이요, 학생이니 아직 받을 만큼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요……."
"하하! 어리다 어리다 했더니 진짜 방패로 써먹을 줄이야. 좋아, 오래간만에 절이나 받자꾸나."
"예전에는 싫어하셨으면서."
"실은 지금도 싫단다. 서른넷이면 청춘이야."
"열아홉도 청춘이지요……."
"혓바닥이 길어."
태오는 나리가 자리에 앉자 공손히 계수하고는, 가까이 오란 손짓에 한 걸음 무릎발로 다가갔다.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손길이 생각보다 상냥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돌아올 수 있는 계기 생기는 나날 되거라."
"악담이에요……."
"덕담이지, 스트레인지식 덕담. 그래, 바깥쪽 덕담이라도 해주리?"
"아, 그래요. 들어나 볼까요……."
"이번에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마. 자, 용돈."
태오는 잠시 침묵했다. 나리는 주머니에서 지폐 대신 무언가를 꺼내 쥐여주었고, 태오는 손에 쥔 것을 놀랜 듯한 눈치로 바라보다 이내 소매 속으로 숨겼다.
"……아, 그러고 보니 나리."
"그래."
"혹여…… 머리가 푸르고, 크크큭- 하고 웃는 남성을 스트레인지에서 보거나, 아시는지요……."
"남자?"
"네에…… 머리는 길고……."
"그런 사람은 왜?"
"절을…… 두 번 하러 가려고요."
나리는 황당하단 시선으로 태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진심이랍니다."
"……바깥이 너를 망친 것 같구나."
"저도 알고 있답니다……."
- 팔자
- Warning. 노골적인 욕설 묘사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사람들은 제 팔자가 꼬일 적이면 흔히 그런 말을 했다. 제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는데 꼭 세상이 지랄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 또한 되는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제 부모가 남긴 삶이 남은 팔자를 싹 꼬아버렸다. 아버지는 어디 무슨 조직폭력배였다. 어디 파인지 알 게 뭔가? 그 파인지 뭔지에 눈 뒤집힌 작자는 그 엿 같은 의리가 더 우선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퍽 의리 좋다 싶은 사람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는 썩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체라도 숨겼으면 이런 일은 안 벌어졌는데, 피도 안 이어진 제 형님을 공격했단 이유로 병원에 실려간 상대 조직원을 병실까지 쫓아가더니만 기어이 배때기에 칼침 놓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버지 돈으로 도박하던 어머니는 선고 당일 동생과 자신을 두고 야반도주했다. 신문 배달을 다녀왔더니 집안 살림과 동생이 꼬박꼬박 저금한 돼지 저금통까지 야무지게 싸 들고 튄 걸 깨달았을 때는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동생이 자다 부스스 일어나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난장판이 된 집 속에서 한 마디로 답했다.
"나가 뒤지러 갔겠지."
그와 동생만을 남겨둔 세상은 꼴좋다는 듯 지랄맞게 활기찬 아침 햇살을 비췄다. 그때 그의 나이는 17세, 동생의 나이는 13세. 누구도 그를 돕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하여튼 인생은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깨달았으면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바로 그를 실전에 내던졌다. 연 끊고 산 아버지와 어머니라 도와줄 친척은 없고, 살던 집은 집주인이 야멸차게 둘을 내쫓았다. 보육원? 그 개 같은 곳에 갈 리가 없잖은가! 그는 상자에 짐을 싸 들며 욕을 씹어뱉었다. 씨발,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집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 그리고 달동네의 작은방을 싹싹 빌어 얻은 날,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앞으로 돈을 벌려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퇴서를 낼 적, 선생님은 부모 잘못 두어 앞날이 박살 난 꿈 많은 소년 가장이 안타깝다는 듯 손에 만원 한 장을 쥐여주며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우리 반에서 제일 영특하던 앤데. 선생님의 푸념은 사실 들리지도 않았다. 신문 배달 일 말고 또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했다. 그 험하다는 노동판에도 들어가고, 새벽마다 신문 배달을 했으며, 동생의 공부에도 신경을 썼다. 인부 하나가 그에게 특유의 억센 말씨로 전생에 나라 팔아먹었어도 이런 삶은 못 살 거라며 위로를 할 적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이런 삶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또한 한때 꿈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는데 어떻게 이 개 같은 삶이 좋겠는가? 그러니 여기에서 끊고 싶었다. 그의 어린 동생은 영특했고, 동생이라도 꽃피워주고픈 마음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17세에 거창히 잡은 꿈은 동생 훌륭히 먹여 살리기였고, 개 같이 일한 지 2년 동안 세상은 변했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인천 첨단 공업단지. 누구든 꿈을 쥘 수 있다며 거창히 소개하는 별세계!
그렇게 그가 일을 다 내팽개치고 동생의 손잡고 인첨공에 처음 발 들인 나이는 19세였다. 아직 15살밖에 안 된 동생 머리가 영특하고 자신은 글러먹었으니 동생이라도 한 번 날개 펼쳐보게 만들겠다 싶거니와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먹여살리고 싶었다. 하물며 아직 돋아나는 곳이면, 일자리도 많을 것 아닌가? 그는 새 삶을 기대했다. 아니, 자신을 아는 저 개 같은 판에서 떠나고 싶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를 '살인자의 아들'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 동생이 여기에서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꿈의 공간이라 누가 그러던가. 누군진 몰라도 그 아가리를 여러 갈래로 찢고 말 것이다.
학교도 못 가고 머리도 나쁜 19세 애새끼가 할 수 있는 것은 대가리를 따서 길운을 점치는 일밖에 없었다. 대흉이면 평생 손가락질에 대길이라도 연구원 발밑에서 기는 일밖에 없다니, 이 미친 세상은 저 바깥보다 더 개 같구나! 심지어 나갈 수도 없으니 인생 팔자 제대로 꼬였다. 그는 인부가 했던 위로를 떠올렸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운의 결과를 보고 싶지 않아 그는 커리큘럼을 계속 미뤘다. 그리고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은 씨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
동생이 의외의 곳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인첨공이 아니면 절대 펼칠 수 없는 재능이었다. 영특한 머리로 학구 전체에서 수석을 차지했거니와 여러 연구소에서 동생이 졸업만 하면 스카우트하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하물며 동생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는 사립 학교였다. 등록금이 어마어마하지만 거기만 다니면 그 앞날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원도 다니면 앞날을 보장할 확률이 높아지겠지……. 작은 월세방에서 육개장 라면 하나로 끼니를 채우던 중 나왔던 대화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노동판에서 일하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 돈,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 학교, 진짜 가고 싶어?"
"……선생님들이 추천해 주긴 했어."
"그러면 형이랑 약속해."
"뭐?"
"너는 ─기로."
"응?"
"약속해. 할 거야, 안 할 거야."
"아, 응……. 근데 형, 어디 가?"
"연구소."
"거긴 왜?"
"사과 깎아뒀으니까 먹으면서 기다려."
그는 반도 먹지 않은 라면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섬주섬 외투를 꿰입었다. 길운을 점치면 운수의 결과에 따라 지원금을 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몇 번이고 고민했지만, 동생이 우선이었다. 운이 좋든 말든 커리큘럼 결과에 따라 수고비라도 주겠지. 연구소에 몸 몇 번 팔면 동생 학비도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대가리를 땄다. 심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새하얀 머리와 붉은 동공을 지니게 된 낯짝을 불쾌하게 쳐다보다 대뜸 물었다.
"지원금은 언제부터입니까?"
동생은 그가 돌아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숨에 바뀐 그의 모습도 있지만 손에 쥔 돈 봉투가 두둑했다. 심성 여리고 착한 동생은 목 놓아 울며 미안하다 했지만 그는 냉장고에 있던 사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며 꾸중하기만 했다. 눈이 퉁퉁 부은 동생이 사과를 물며 너덜너덜한 문제집에 펜을 들 때, 그는 돈 봉투를 노려다 보며 고민했다. 수중에 돈이 들어와도 이 욕망이 끝날 기미가 없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엿 같은 곳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다음 날 연구소에서 다시금 대가리를 딸 때도 그랬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동생의 날개를 펼쳐주고 싶었다. 자신의 대에서 이 개 같음의 연쇄를 끊고 싶었다. 하지만 연구원이 툭하면 그의 성질을 긁고, 지원금이 끊길까 바짝 엎드려야만 하며, 어느 순간부터 새 삶이 아닌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달았을 적 그의 속내는 생전 처음 보는 형태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엎드리고, 기고, 팔자 꼬이고 나라 팔아먹은 전생의 업보 대대로 물려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은 자존심 꺾어가며 몸 굴리고 바짝 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납작 기고 있었지만 실상 앞길을 막는 것이 있다면 부수고, 저항하는 것은 발밑에 두며, 붙잡는 것 없이 맹렬히 삶을 움켜쥐어야 직성에 풀리는 인물이었다. 그 속에서 우연찮게 연구원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된 곳에서 슬럼이 생겼단다. 폭력과 팔자 꼬인 인물들이 지랄하는 장소, 온갖 범죄가 득실대는 곳…….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사람들은 팔자가 엿 같게도 꼬이면 흔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노라 아가리 놀리곤 한다.
그렇지만 내가 왜 고통을 받아야 했나? 지금의 나는 착하게 살지 않나. 내가 기억도 안 나는 전생에서 나라 팔아먹었으면 지금까지 역사에서 기록되어 욕 대대로 처먹는 걸로 족하지 왜 지금의 내가 고통받아야 하냔 말이다.
내가 이대로 열심히 살아서 뒤지기 전에 내 전생에서 나 좆 되게 해달라고 했던 새끼들 때문에 내 삶이 지나치게 고통스러웠으니, 부디 그 새끼들의 다음 생은 좆 되게 해주십시오 하면 해주나?
그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신이 있다면 그럴만한 대인배는 못 된다. 옹졸한 속가지고 네 잘못이라 떠넘기는 것밖에 못 하는 주제에 감히 제게 나댔노라며 더 엿 같게 만드는 거면 몰라도.
"■■아. 형 믿어?"
"응? 어…… 응. 형 믿어. 왜?"
"형이 잘 생각해 봤는데, 형이 전생에 나라 팔아먹어서 인생이 좆 된 것 같아."
"응……?"
"그런데 내 인생 좆 되게 해달라 한 새끼들을 다음 생까지 못 기다려줄 것 같거든. 그래서 싹 좆 되게 하러 갈 건데, 형 없어도 잘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형이 돈 벌어와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너 곰 존나 좋아하잖아. 곰이 뭐야, 씨발. 곰 박제까지 사게 해줄게."
"형!"
동생은 펜을 내려놓고 그를 붙잡았다. 이대로 제 형을 가게 내버려 두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안 좋은 일이 뭔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제 형을 빨아들이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형의 시뻘건 눈동자는 먼 이상을 향하고 있었다. 동생은 옷깃을 잡은 손을 스르륵 놓았다. 저 눈을 하고 있으면 형은 절대 뒤를 돌지 않는다. 문을 열기 전, 동생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형."
"어."
"영영 못 보는 건 아니지?"
"절대 아니야. 약속하자. 형이 존나 성공해서 형 이름 모르는 사람 없게 해줄게."
"형."
"말해."
"그, 그 사람들 다 좆 되게 하면, 돌아오는 건 맞지?"
"……냉장고에 사과 깎은 거 넣어뒀다. 그거 먹어."
그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암암리에 배운 이 약간의 돈 굴리는 재주와 능력이 그나마 쓸모 있다는 스캔 결과 하나만 들고, 그는 새 삶을 위해 스트레인지에 발을 들였다. 스트레인지의 꼴같잖은 놈들이 환영식을 치를 적엔 거세게 주먹을 후려 조졌다. 스킬아웃인지 뭔지의 눈에 들었을 때, 그는 보다 높은 곳을 바라며 여러 조직을 갈아탔다. 그러면서도 족족 돈 굴리는 재주를 드러냈다. 한때 배운 것이다. 바깥 공사판에서 소장의 눈에 들었을 때, 그는 예산을 주머니로 조용히 넣는 법을 배웠다. 이따금 제 일이 아닌 제 소장님 친구의 도시가스 시공에서 가짜 인력을 작성해 손에 돈 굴려오는 편법을 대신 써주었고, 실제로도 여러 돈을 손에서 굴려보았다. 사실 그때, 그는 좀 웃었다. 노동과 가스판 말이다, 씨발. 그쪽도 전직 현직 조폭들이 아주 꽉 쥐더라. 여기도 다를 바 없어 돈 굴리는 일이 무엇보다 쉬웠다.
그렇게 그가 스트레인지에서 한자리 제안받은 나이는 고작 21세였고, 그 사람들을 모조리 팽하고 정점에 오른 나이는 24세였으며, 손아귀에 잡고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은 28세였다. 비상식적인 속도였으나 약간의 돈 굴리는 재주와 능력이 그나마 쓸모 있다는 스캔 결과는 레벨 0 앞에서는 굼벵이 재주 한 번 굴리는 것으로도 크게 다가왔고, 그를 한 구역의 어르신으로 올려주는 계기가 됐다. 제 아비의 피를 몽땅 물려받은 건지 그 뒤의 삶은 폭력이 지당히도 익숙했다. 움켜쥐고, 부수고, 무릎 꿇리고, 시체를 버렸다! 스트레인지의 사람들은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고,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간 동생의 학비는 물론이고 남는 돈으로 이 작은 패배자들의 영토를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욕망했다. 손에 쥐고 싶어 하고, 꿈을 키웠다. 뒤는 단 한 번도 돌지 않았다.
"나리."
"무슨 일이니?"
"전생에 죄를 지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이 망했다느니 하는 말이요……."
"그래. 그런 말이 있지."
"근데 제 인생 망하게 만들어달라 한 사람들도 똑같지 않나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사람들이라면 내 인생이 한 번 망한다 한들 만족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지금 싹을 자르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거요."
그러나 이 진흙밭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한 애새끼가 말을 걸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제 삶을 되돌아보았다. 수많은 삶이 스치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건 내가 할 일이니 네가 신경 쓸 건 아니란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이었다 감히 단언할 수 있다.
- 해방
- 레이브의 작품이 경매에 오른다!
인첨공의 미술계는 다시금 크게 들썩였다. 레이브의 작품은 특수성을 지녔다. 본인이 직접 sns에 올리지 않는 이상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고, 경매에 오르는 순간에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그 주제가 불규칙했거니와 안드로이드 칩셋을 이용한 작품이 나올 적이면 레플리카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칩셋만이 경매에 올라와도 횡재요, 'Mare'나 '상봉과 상실'과 같이 직접 안드로이드를 커스텀 한 경우에는 그날 경매에 참여한 수집가들에겐 복권이 당첨되는 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그 안드로이드가 1세대와 같은 오래된 인첨공 역사의 산물이라면, 그날은 수집가들이 박 터지게 경매 최고치를 기록하고자 팻말을 들어댔다.
비탄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천재의 다음 작품이 과연 무엇일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각기 입방아를 찧고 추측을 이어나갔다. 누군가는 칩셋일 것이라 예측했고, 누군가는 안드로이드를 같이 꾸몄을 것이라 예측했다. 혹자는 이번엔 안드로이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인터넷 뉴스 한 면에서도, 공중파의 뉴스 자막에서도, 하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레이브의 새 작품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경매 당일, 커튼이 오르자 사람들은 다시금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브의 새 작품, 《해방》입니다. 5세대 안드로이드 H-7291 모델 프로그래밍 칩셋과 안드로이드로, 비탄에 이은 '감정' 에디션입니다. 해방된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억압에서의 자유, 카타르시스를 비롯한 모든 해방을 표현했습니다. 최소 경매가는 500이며, 작가의 요청에 따라 경매의 시작은 참여자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채용하겠습니다."
5세대로 분류되는 안드로이드는 출고된 지 1년도 안 된 신상이었고, 부드러운 관절의 이음새와 자연스러운 자세는 인첨공의 기술력엔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안드로이드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차이를 두고자 했다. 핏줄을 비롯한 혈색 일절 없는 가죽만 덮어두고 성별을 알 수 없게끔 이루어진 맨들맨들한 몸의 곡선이 그러했고, 인간답되 사소한 부분에서 인간답지 않은 부분이 두드러져 불쾌감을 이끄는 것이 특징이었다. 다만 그런 강수를 둔다 한들, 사람들은 신세대 안드로이드를 레이브가 절대 사용하지 않는 모델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본디 레이브라는 예술가는 구세대 안드로이드의 투박함에서 인간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존재였거니와, 5세대가 나온 현재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모델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앞의 인조 가죽으로 뒤덮인 나신의 안드로이드는 레이브라는 편견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내놓은 규칙과 편견까지 모조리 박살 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가죽에서 혈색이 돌았다. 별 볼일 없는 가죽만 덮여있던 손등은 혈맥이 새겨져 있었고, 뺨에 돋은 핏줄과 마른 몸에 드러나는 늑골, 빗장뼈가 금방이라도 부풀며 숨을 쉴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하나의 작품이었다. 발끝부터 시작해 올라가는 부드러운 곡선은 구슬픈 비탄을 표현하듯 짙은 코발트블루를 품고 있었고, 수줍은 짝사랑을 하던 자가 애욕에 젖은 듯이 애달픈 자주색을 품었으며, 경탄하는 듯한 오렌지빛까지 담고 있었다. 그 모든 곡선이 덩굴처럼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목을, 마침내 뺨까지 옭아매며 꽃과 자연,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모든 것을 순환하듯 표현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조화롭되 훑으면 조화롭지 않고, 대칭인 듯하면서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감탄하지 않고, 작품의 목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선명한 금빛 손자국 탓이었다.
지금껏 모습을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레이브였다. 학생인지, 성인인지, 그 이상인지 알 수 없었다. 성별도 알 수 없었거니와 개인인지, 단체 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장갑을 끼고 양손으로 목을 조른 듯한 저 선명한 금빛 흔적은 레이브가 '실존하는 존재'임을 드러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의 부팅이 끝나고, 그 작품이 움직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넘실거리고, 눈꺼풀 너머로 드러난 하늘색 눈동자는 천사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나는 떠나리라, 고통 모두 잊고 낙원으로 가리라, 새장에 갇혀 서로 지저귀고 울부짖던 우리의 삶은 아름다웠노라 할 수 없겠지만, 나는 마침내 이 끝을 보았노라!
누군가 홀린 듯이 팻말을 들었다. 신호탄처럼 쏘아 올린 팻말과 함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팻말을 들었고, 전화가 쇄도했다. 경매장이 한참을 시끄럽게 금액을 올리더니, 누군가의 쐐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1억 2천. 1억 2천으로 낙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금 레이브의 충격적인 작품을 입과 매체에 담아 올리며 제각기 해석하기 바빴다. 도통 해방될 기미 없는 삶 속에서 이질적으로 등장한 해방이었다.
- 수벽의 간격
- 타인이 오지 않는 것을 바라는 태오의 성정을 일찍이 깨달은 박 교수는 가장 구석에 마련된 1인실에 태오를 입원시켰다. 박 교수의 병원은 VIP들을 위해 보안이 철저했고, 보호받는 대상은 태오 또한 있었으나 누군가에게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보안 장치는 울리지 않는다. 가장 구석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산소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장치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첨단 스캐너가 이상을 감지하지 않았다는 홀로그램 알림 창이 구석에 뜨다 이지러지듯 사라졌다. 발자국 소리도 남지 않는 불청객은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는 재주가 있었다.
불청객은 그렇게 침대 위 곤히 잠든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이 붕대를 감은 주제에 곤히 잠에 든 모습이 이질적이다. 새하얗게 물든 속눈썹은 돌아오지 않아 어스름한 달빛 비치는 정경에 백화인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시선 물끄러미 던지고 있자니 살짝씩 몸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난리를 쳤으니 근육이 놀라 앓을 법하다. 긴 손가락이 튕기듯 움찔거리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입술 벌어져 침음 흐른다. 아무래도 몸 앓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쁜 숨과 함께 앓고 있으니 깨울 법도 하지만 객은 입을 얌전히 다물며 감상했다. 어차피 자신이 곁에 있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혼자 알아서 깨겠구나 싶을 정도로 야멸차긴 했지만 악몽을 꾸는 건지 괴로운지 표정이 일그러지고, 공포로 인해 호흡이 불안정한 모습을 계속 관망할 만큼 악독한 사람은 못 된 모양이다.
"하여튼 거슬린다니까."
불청객, 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팔을 뻗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잠에 푹 빠진 태오를 품에 안는 일은 쉬웠다. 링거 바늘이 혹시라도 불편하게 팔을 파고들거나 빠지지 않게 팔뚝을 잡는 것이 아닌, 허리 밑에 손을 넣어 품에 턱 안아주자 태오는 파고들듯 무의식적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오들오들 떨었다. 나리는 이 상황을 잘 안다. 오롯이 혼자만 끌어안을 고통을 몽중에서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불쾌한지도.
"고양아."
"……."
"고양아?"
"으……."
"일어나야지, 태오야."
태오는 몇 번이고 토닥이다 조금은 다급한 것 같은 손길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 겨우 들어 올렸다. 잠이 꽉 들어차 혼몽하나 공포와 혼란스러움에 다시 눈 감을 수 없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고막을 강타한다.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듯한 불쾌감과 몽중의 조각을 추스르고자 품 속에서 허공을 노려보는 시간이 길었다.
"……오셨군요."
잠에 잔뜩 눌렸던 목소리를 가다듬을 시간은 없다. 바싹 마르다 못해 갈라진 후음으로 더듬더듬 입술을 떼자 나리는 등을 토닥이던 손길을 등허리를 훑듯 내렸다.
"좀 됐지."
"관망하는 것 퍽 즐거우셨겠어요……."
"그렇다마다."
품에 바짝 붙은 것을 다시 뉘여주는 손길이 썩 친절하진 못했다. 원체 바짝 밀착했던지라 자연히 나리 밑에 깔린 모양새가 되어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라 생각했다. 눈만 들어 흘긋 쳐다보자니 그건 또 가까이에서 보는 것 같아 싫고, 태오는 제 상반신에 흐르듯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떼고자 괜히 눈을 굴려 천장을 쳐다봤다. 분명 자른 걸로 기억하는데, 훌쩍 원상태로 자라 아래를 향한 부채꼴의 머리가 퍽 신기한지 나리는 침대를 짚던 손 하나를 들어 태오의 머리카락을 한 터럭 쥐어 손에 감았다.
"머리가 자랐구나."
"네에."
"다시 길러주었어도 치료는 해주지 않은 모양이야."
"아쉬운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날 닮은 점이 하나 더 생겼는데 기쁘지 않았을 리가."
태오는 침묵했다. 그 점이 끔찍했노라 혀 밖으로 굴려 뱉어볼까 고민하다 이내 체념했다. 당신이라면 그 끔찍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능숙하게 잡아채겠지만, 고쳐먹을 생각 없을 자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에게 종용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자라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이고, 당신은 그 생활이 지나치게 오래됐으니까. 아마 엘리트와 열등생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듯 이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면서도 포기할 일은 없겠지. 제아무리 현태오라는 인물이 머리 구르지 못하니 영민과는 거리 먼 녀석이라지만, 네가 그걸 두려워한단 것은 네가 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내포하는 것이라 속삭이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던 것을 인정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런 소동을 벌였는지 들어나 볼까?"
"언제는…… 아니었을까요?"
"그렇다기엔 지나쳐. 내가 문화센터 소식도 못 들었을까 봐?"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다르다. 태오는 여상하지 못한 태도를 익히 눈치채고 있었다. 나긋하게 지나치다고만 하면 될 사람이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흐르듯 놔둔 앵화색 머리카락에만 시선을 꽂고 있었다. 태오는 대뜸 손을 뻗었다. 단단하게 여민 옷깃 너머로도 손이 파고들자 단색 눈동자가 그제야 자신을 향했다. 손바닥을 넓게 펼치니 빠른 맥동이 느껴졌다. 조금 더 깊게 손을 뻗는다면 이 맥동이 자신의 귀까지 침범할 것처럼 거세다.
"……."
태오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성애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맥동이 아니다. 달콤하고 무드 있는 두근거림보다는 공포와 상실에서 비롯되는 불안의 맥동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몽중에서 깨어 느꼈던 그 맥동을 지금은 당신이 가지고 있다. 상실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불안하다니 실로 우습다.
"……내가 혹시라도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했나요?"
"내가 널 영민하다 생각했는데, 지금껏 들은 소리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구나."
한 번 제동이 풀려 고삐 없이 써댔던 능력 탓일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서 선명하게 짙은 와위가 느껴졌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와위의 규명이었다. 태오는 정적 속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고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어리석은 건 형님이지요."
태오는 눈을 휘었다. 옅은 비취색 호선이 가늘어지고, 손등으로 온전히 덮어 가린 비구는 목소리를 한 꺼풀 막아세워 어성에 장벽을 세운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손바닥에 숨결 닿지만 그다지 두렵진 않다. 고작 손바닥 하나 입에 댄다고 목소리조차 먹먹히 막아세우기 마련인데 심상의 장벽이라고 세워지지 않을까.
"허상을 잡아서 좋을 일 없습니다. 놓을 것은 놓으셔야지 바깥 신기루에 홀려 손 뻗어도 잡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형님."
"실재의 여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유치한 사람."
무너지듯 그림자가 빈틈없이 겹친들 구순 겹칠 일 없다. 두 사람은 딱 그 정도의 거리었다. 손바닥 하나를 두고 마주하는 거리. 무엇보다 가까운 듯싶지만 그 손바닥이 막아세우기에 결코 닿을 일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처지를 수단과 패로 삼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수 있는 사이.
단지 그뿐이다.
- 탈피
- 퇴원은 소리 없이 진행됐다. 혜우에게는 '퇴원해요. 병원에 와줘서 고마웠어.' 하고 짧은 문자를 남기고 젤리며 빈 몬스터 캔이며 모두 봉투째 챙겨 병원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공기가 후끈하다. 가을이 다가온다지만 여전히 아스팔트에 남은 잔열은 뜨끈하고, 습기 가득한 바람은 피부를 금세 끈적하게 만들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이 서늘한 편이라도 외부적인 요인까지 견딜 사람은 못 됐다. 그리고 여긴 2학구다. 이제 위험한 것이 없다지만 마음에 남은 공포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자니 망막 한구석에서 오렌지색 빛이 깜빡인다. 누굴까? 손목에 이식된 칩은 설정을 끄지 않는 이상 각종 알림을 증강현실로 보여주곤 했고, 태오는 중요한 알림 몇 개를 제외하고 모두 껐기 때문에 이런 알림이 드물었다. 주황색은 더욱 드물다! 레이브의 일에 관련된 것은 보라색, 헤이커에 관련된 일은 녹색, 그리고 자신에 관한 일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이다. 태오는 괜히 제로와 그림자의 술수를 떠올리곤 설마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칩이 이식된 손가락을 까딱이자 망막에 글씨가 떠올랐다.
惟命是聽
태오는 오늘의 날짜를 셈했다. 20xx년 8월……. 걸음이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골목을 향해 비틀렸다. 인파에 휩쓸리던 자가 인두겁을 벗고 굴로 기어가는 일은 무엇보다 쉬웠다.
스트레인지는 낙후된 지역이긴 하지만 무조건 열악하지는 않다. 타 지역에 낙후됐을 뿐이지, 2학구나 4학구의 스트레인지 일부는 시대에 약간 뒤처진 곳도 있었다. 태오가 향한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 그 '약간 뒤처진 곳'은 아닌 듯싶었다. 다 무너져가는 듯한 건물로 다가서자 남성 둘이 태오를 막아섰다. 태오는 이 두 남성이 무엇인지 안다. 아직도 이 안드로이드를 쓰는구나! 험악한 표정을 짓는 두 남성 중 하나의 팔을 붙들어 무언가를 툭 건드리자 고개를 축 늘어뜨리더니, 이내 두 존재가 길을 터준다. 태오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 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안은 호텔 복도를 연상케 했다. 태오는 많은 방 중에서 하나의 문고리를 잡더니,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파로 다가갔다.
"부르면 제때 오고, 말해달라 하면 말하고, 네 양지로 독립한들 본가 오는 것을 보니 평시와 다를 것 하나 없구나."
"……먼저 그런 연락을 보내셨으면서요."
"네가 저지른 일이 원체 커야지. 그 연락받고도 안 왔으면 염치도 없는 게야. 네 양심이 여기에서만 틀어박히는 게 좋았을 만큼 좁아터진 사람일 테니."
눈앞의 남성은 소파에 앉아있지만, 앉은키로도 충분히 태오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체격이 컸다. 태오는 눈을 굴렸다. 저 새빨간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두려울 것 하나 없지만, 저 눈을 마주하면 여러 감정이 샘솟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은 증오심과 분노, 두려움, 공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느끼는 한심함……. 마주하기 싫은 것 하나.
"……어쩐 일로, 호출하셨을까요?"
태오는 괜히 자신의 팔을 꽉 쥐었다. 나리는 대답 대신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태오는 저 신호가 무엇인지 알지만 다가서지 않았다. 나리는 동상처럼 꼼짝없이 발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허벅지를 두드릴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보고해야지."
"무엇을……."
"문화센터."
입안이 마른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입술을 축여보려 했지만 혓바닥도 탈지면처럼 바싹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태오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도망칠 수 있을까? 맞설 수 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간 붙잡힐 것이다. 양지로 영영 발 딛지도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금 몰아칠지도 모른다. 암운이 드리울 것이고 끝내 모든 것이….
"아이돌 불렛의 사인회 경호를 맡았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 더 말해."
"……그 과정에서 암부 그림자의 습격이 있었고, 바깥에서는 블랙 크로우와의 교전이 있어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암부의 목표는?"
태오는 레드윙이 불렛이라는 사실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겨우 상기할 수 있었다. 한낱 인간끼리의 의리라지만 자신도 양지에 새삼 깊게 스며든 것 같았다.
"…저지먼트가 샹그릴라의 종식과 더불어 그림자의 멸문지화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가장 유명한 아이돌인 불렛을 통하여 위신과 평판을 떨어뜨리고자 해당 테러를 벌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키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태오는 자신이 단단하게 굳은 석고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느꼈다. 손가락을 하나 까딱할 수 없고, 나리는 붉은 눈동자 속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까지 온전히 드러내며 태오를 마주했다.
"그 말에 한치 거짓도 없어야 할 게야."
"……."
능력이 본능에 붉은 전조등을 켰다. 저 말에 진심이 담겨있다.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나리의 손에 산산조각이 날 게 뻔하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더 기어오르면 안 된다! 지금의 나리는 태오에게 자비롭지 않을 것이다. 석고상에 금이 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 보고할 게 남았지."
"……암부 그림자의 일원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습니다만."
태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나리의 앞에서 속내를 얘기하는 건 자주 있던 일이지만, 독립한 이후로는 처음이다. 시선이 자꾸만 불안정하게 교차했다. 이걸 말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다. 이 바닥이 줄 하나로만 겨우 버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온갖 날카로운 것으로 무장한 늑대가 있다. 혀는 철로 됐고, 발톱은 가시가 돋쳤으며, 이빨은 삐죽삐죽하다. 줄에서 조금만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떨어질 텐데, 그렇게 날카로운 늑대 사이에서 온몸이 갈가리 찢기고 말겠지! 태오는 애써 눈을 마주쳤다. 붉은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할 수 있는 게, 아, 아무것도, 없어서."
"……."
"누군가를 치료할 수도 없고, 위,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하라 할 수도 없고, 탐지할 수도 없으며, 누군가를 지키는 능력도 없어서…… 공격도, 상대를 교란하는 것도, 육체적 능력이 강한 것도 아니라……."
태오는 바들바들 떨며 말을 뱉었다. 나리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 사실이 자신을 채찍으로 거세게 후려치며 줄 위를 걷기를 종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치울 수 없었다. 태오는 결국 모든 것을 뱉기로 했다.
"일반인, 거스러미, 방해물. 아수라장 속에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잘난 능력을 가지고 엘리트로 살아가지 않았느냐 하지만 누군가의 속내를 전부 꿰뚫는 것도 아닌 반푼이잖습니까. 상대가 마음먹고 지키고자 하거나 입 다물고, 혹은 딴 생각을 하면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머저리 같은 능력인데 정작 타인 보기엔 음침하고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것을 가지고 도움이 될 리가 없잖은가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꺼리니까요."
"……."
"하, 하지만 능력을 쓰지 않으면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느냐 손가락질하고, 능력을 쓰면 이런 폭력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설득해서는 안 된다는 선인들의 손가락질이 공존하니까, 차라리 숨기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어 제 수중에 쥐고 흔들게끔 주어진 능력이라면, 겨, 결국 이렇게 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방식을 택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그랬습니다. 처음으로 능력을 다룬 나머지, 그 이후에 너무 광범위하게 들려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어서 그렇게 스스로를 해쳤습니다. 상품에, 흐, 흠집을 낸 것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너는 어리다."
태오는 몸을 크게 떨었다.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나리는 드물게 딱딱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자신에 대해 깊게 고찰한들 겪은 것이 적어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필수적이다. 너 스스로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너는 남들이 보기에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너는 그 미숙함을 가지고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사람이노라 확정 지었고, 자신의 미숙함을 외면했지. 네가 어리다는 점을 악용해서, 어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합리화를 하면서."
"……."
"봐라, 네가 만든 결과다. 세상이 네 마음대로 풀릴 줄 알았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토하며 결국 네 미숙함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정하고 무너지지 않았더니."
"……."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발을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새끼줄이 느슨해진 것 같았다.
"보컬 텔레파시는 숨기는 것을 모조리 드러내어 제 수중에 쥐고 흔들게끔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타인의 속을 읽고 상황을 판단하기 용이한 능력이지. 그러니 묻겠다."
"예."
"네 아무리 붕대 감았다 해서 세상 사람들이 널 몰라볼 줄 아는 방만한 태도를 스스로 깨달은 감상이 어떠냐."
"……."
"질문을 바꾸지. 네 아무리 붕대 감았다 해서 너 자신을 숨기고자 했건만, 결국 스스로에게 배신 당한 기분이 어떠냐."
새끼줄이 끊겼지만 태오는 추락하지 않았다. 그저 나리를 마주할 뿐. 그 모습을 보던 나리는 결국 일소를 터뜨렸다. 붉은 눈동자에서 희열에 가까운 것이 번들거렸다.
"하! 이 독악한 것. 이시미는 이시미인 모양이구나. 안승환 그 작자가 어떻게 이런 것에게 사슬로 모가지를 묶어 억압했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야."
"……."
"그러니 이리 온."
허벅지 두드리는 소리를 뒤로 옷깃 스치며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만족스러운지 낮게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도.
"그래, 물 안에서만 날뛰면 미꾸라지 되는 법이지…… 나도 이 장소가 퍽 넓구나 생각했거늘, 막상 네가 있기엔 지나치게 좁았구나."
- 삶은 낙조의 스밈이자 몰각이며
- ─ 이 독악한 것. 이시미는 이시미인 모양이구나. 안승환 그 작자가 어떻게 이런 것에게 사슬로 모가지를 묶어 억압했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야.
태오는 기억을 더듬으며 폐목했다. 세상은 데 마레의 신시申時 햇살 쏟아지던 눈부신 날로 되돌아간다.
"태오야."
"네."
어린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혜우는 낮잠을 자고, 희야는 윤 선생님의 손을 잡고 4학구의 스케이트장으로 놀러 간 날. 퇴창의 쿠션 더미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기울이면 움직임에 따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리넨 커튼에 비친 연노랑 빛 햇빛 너머로 새하얀 점 같은 먼지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던 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도 없는데 동물을 그냥 죽이고 그러는 것을 싫어한단다."
"그러면 돼지랑 소, 닭 같은 동물은요?"
"먹으려고 동물을 죽일 때는 법에 정해진 도축 방법이 있지. 하지만 보편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서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야."
"어차피 다들 저를 싫어할 거면서……."
"그게 무슨 소리니?"
"어차피 언젠가 저에 대한 쓸모를 잴 거면서, 그 가치에다 새로운 기준을 또 정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워요."
승환의 표정은 새하얀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환멸을 깨달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리고 어른의 역할이 처음이었던 승환도 무언가 조언하기 어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오야. 우리는 인간이잖니. 그리고 삼촌은 널 미워하지 않을 거란다."
그날 태오의 손에 들려있던 조그마한 새는 죽은 지 오래였다. 어린 태오는 생각했다. 창틀에 머리를 박아 곧 죽을 녀석이었기에, 더 고통받지 않게 목을 꺾어 먼저 보내준 것인데 왜 다들 이 간단한 것을 혐오스러이 여기는가.
개목하고 다시금 폐목한다.
세상은 스트레인지 유시酉時의 햇빛 쏟아져 시야 명멸하던 날로 되돌아간다.
"태오야."
"예."
아직 앳된 기색 가시지 않던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앉아 나리께서 친히 따라주신 차를 마시고 역으로 내리쬐는 낙조의 단말마에 뒤통수에 열이 오르며, 그것이 불편하여 고개를 기울여도 햇살 떨어질 기미 없고, 새붉은 것이 튄 리넨 커튼에 비친 단색 햇빛 너머로 먼지 하나 없던 날.
"인간들은 참 우습지. 이득도 없는데 동물 몇 죽이면 야만적이라 해놓고 정작 취미로 사냥을 앞세우고, 인첨공에서 레벨로 쓸모 정해서 낙인찍은 주제에 거기에 또 법을 들이밀면서 그래도 더 폐기물처럼 살기 싫으면 입 닥치라 하고."
"……."
"인간이니 뭐니 해도 결국 그 안에서 짐승으로 취급할 것을 나누는 주제에, 기어이 우리를 천 것으로 몰고 말이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요. 남들에게 이해를 바란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믿지 않는걸요."
"퍽 우스운 말이야. 그들이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미워하지는 않노라 지껄이는 연유라 함은 이해하지 못했으니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겠더니?"
나리의 표정은 새빨간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환멸을 깨달은 아이와 어른은 서로를 잘 이해했고, 이해하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태오야. 우리는 결국 인간이구나, 이 바닥에서 지내서 천한 짐승 취급받을 뿐이지."
그날 나리가 머리채를 쥐어 들어 올렸던 사람은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 죽은 지 오래였다. 태오는 생각했다. 인간이되 짐승인 자는 이 바닥에서 쉬이 죽는다. 쓸모를 다 하였으니 더 고통받기 전에 보내주는 것인데 어찌하여 바깥사람들은 이것을 혐오스러이 여기는가.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밀접한데도. 태오는 발치에 스민 피를 보며 찻잔을 마저 기울였다. 색이 붉은 탓은 낙일의 새된 비명 탓이요 낙조의 스밈이라 믿고 폐목한다.
그리고 지금 개목하니 섬휘 찬란히 드리운 열대야는 습한 공기를 방에 가득 채우고, 목덜미에 고개 파묻은 남성의 머리카락에 고개 파묻으며 느릿하게 일소했다.
"무엇이 우습니."
"스스로에게 배신 당한 기분이 어떠냐 여쭈셨지요."
"답할 생각이 들었구나."
"결국 저들도 짐승에 불과함을 내가 깨달았으니 굴은 도래할 곳으로 삼기에 너무 좁았구나 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때 지금 당장 나서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소리쳤구나."
"그런 셈이지요."
나의 삶은 낙일이자 낙조의 스밈이니 이후에는 몰각함 기다리고, 샐녘 다가오겠으나 짐승들의 도래로 승천하지 못하니 천일 다시금 마주할 일 없으리라.
이는 목하 내 속내에 대고 선언하니 와위 일절 없노라.
- 병든 속삭임
- 내가 독악한 것이라 하였지요. 태오는 대뜸 물었다. 나리는 시선을 들어 태오를 흘깃 쳐다봤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나리는 파묻었던 고개 사이로 뺨만 느릿하게 스쳤다. "그렇지. 네 독악하기 짝이 없지."
그리 대답을 하니 흐린 웃음이 터졌다. "나는 죽어 마땅하겠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병든 속삭임을 뱉으니 나리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등허리를 껴안던 손이 스치듯 올라가 목을 받치면 태오는 목을 가누며 자연스럽게 허공에 시선을 꽂았다. 암실은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고, 나리의 무릎에 앉아 바라본 창 너머도 퍽 어둡기만 하다. 나의 삶은 낙조의 스밈이라 생각했는데 몰각이었구나.
"누구도 악한 것 좋아하지 않고 천시하니 사람들은 필히 나를 사냥할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끌어내리고, 목을 매달아 가죽을 벗긴 뒤 이것이 사악하여 승천도 못한 녀석의 가죽이라며 전시하겠죠……."
흘리던 단어를 하나하나 이어붙이며 태오는 손을 들었다. "그러면 그때 당신이 나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주면 좋겠어요."
"내게 죽여달라고 비는 방법도 있을 텐데." 머리를 껴안는 상냥한 손길에 세로로 찢어진 붉은 동공이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그건 싫어."
"왜?"
"그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 태오는 매달리듯 머리 안은 팔에 힘을 살짝 주었다.
나리는 손길대로 고개를 파묻으며 나지막이 웃었다. "싫어?"
"그러니까 오늘은 내 살을 가르되 속은 헤집지 마. 상처만 줘. 역겹다 욕하고 침을 뱉어도 좋으니까."
나리는 침묵했다.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외 함께 태오는 눈을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손아귀가 새하얗게 물들고 목 물린 짐승처럼 바르르 떨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병든 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둘에게는 여전히 손바닥 하나의 거리가 있다.
- 유희와 균열
- 스트레인지는 낙후됐고, 찬란한 인첨공에서 찬란하지 못한 부분을 담당한다. 그림자가 지역이 된다면 아마 여기가 될 것이다. 과학기술, 사회, 빈부격차, 인간관계…… 어떻게 말해도 빛과는 거리가 멀다. 꾸며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고, 희망을 품으면 열 배의 절망으로 갚는 이상한 곳이라며 스트레인지라 이름을 붙이며 넉살 좋게 웃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이 어떻게 되었든 바깥사람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곳이다. 끽하면 길을 잘못 들어 슬럼이나 다를 것이 없는 곳의 초반까지만 발을 들이고 여기는 무서운 곳이라며 벌벌 떨다 자리를 떴다. 스트레인지는 그런 곳이었다. 패배자의 영토, 자신들과는 관계없지만 어쨌든 소외된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고귀한 인간과는 다른 짐승의 소굴.
태휘 또한 스트레인지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골치 아픈 일이 가득하다.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강력 범죄 형사 수사팀 반장인 태휘가 출동한 사건 중,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끔찍하고 입에 담기도 어려운 범죄는 이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 정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인첨공의 벽이 무너져도 이 편견은 평생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태휘는 이 장소에 와야만 했다. 며칠 전 참관했던 부검 때문이다. 스트레인지에서 발견된 시체는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탓에 시체로 끔찍한 농담도 던질 수 있었던 안티스킬 법의학 연구소 소장 김 씨도 그날은 입을 딱 다물 정도였다. 이도 몽땅 뽑혔지만, 그나마 온전하게 남겨둔 어금니는 범인이 신원을 파악하라고 고의로 남겨둔 것이 뻔했다. 신원 확인 결과 안티스킬 일동은 분노했다. 같은 안티스킬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스트레인지를 담당했고, 스트레인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부검에 참관했던 태휘는 자연스럽게 이 사건의 지휘를 맡게 됐다. 말이 지휘지 사실은 단독 수사였다. 데 마레에는 임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이탈하게 되었다 미리 고지를 하고, 태휘는 스트레인지에 발을 들였다.
스트레인지 초입부와 중반부에서는 누구도 태휘를 건드리지 않았다. 건드린다고 해도 몇 초면 제압은 충분했다. 하지만 깊숙한 곳, 안드로이드가 가득한 폐기장 근처로 다가갔을 때 태휘는 사건을 되새겼다. 초반 탐문에서 피해자가 여기보다 더 깊숙한 곳을 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여기를 뚫고 지나쳐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위험한 일인 건 안다. 스트레인지의 소문 정도야 알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가 그 유명한 연구원들도 얼씬도 않거니와 자신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깊숙한 곳을 알리는 입구인 안드로이드 폐기장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이라 을씨년스럽다. 산처럼 쌓인 안드로이드는 사람을 닮은 것도 있고, 구식 모델도 있었다. 태휘는 표정을 구겼다. 범죄자나 시체를 대하는 건 익숙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건 여전히 담력이 부족했다. 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 정신 한 구석에 결함이 있을 게 분명하다! 태휘는 거꾸로 늘어진 안드로이드와 눈이 마주치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최대한 안드로이드가 적은 곳으로 재빨리 발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태휘는 걸음을 멈췄다. 안드로이드도 거의 쌓이지 않은 폐기장의 끝자락에서 사냥 본능이 깨어났다. 위험하다는 경고가 등골을 짜릿하게 훑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누군가 달빛을 등지고 뒷짐을 지고 태휘를 마주하고 있었다.
"돈도 안 받은 짭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안티스킬입니다. 잠시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어떤 협조를 바라, 선생?"
뒷짐을 진 남성은 안면 인식 저해 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노이즈가 끼고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탐스럽게 땋아내려 가슴 앞에 드리운 새하얀 머리카락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사냥 본능에 몸을 맡길 시간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혹시 뭔가 알고 있습니까?"
"여기서 사람 많이 죽는데 누군지 모르겠네. 아, 혹시…… 이 바닥 기어다니던 짭새 하나 말하는 거야? 난도질당해서 어금니 하나만 남은 애."
태휘는 경계하듯 발 하나를 뒤로 물리고 자세를 잡았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본능과 여러 사건을 해결한 노련한 감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하고, 뻔뻔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여러 스트레인지 인물에게 협조를 구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체 소식은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이지만 입을 벌려 확인할 만큼 위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안다고?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은 확실하다.
"난 거기까지 말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놀랍게도, 난 여기까지 알고 있고."
태휘는 금방이라도 제압하려는 듯 뒤로 뺐던 다리를 조금 더 길게 뻗었다. "네 짓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내가 그 돼지 새끼 살찌워서 길들이는 데만 2년이 걸렸는데! 나 같은 총 팔이가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고 그런담?" 남성은 장갑 낀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끔찍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뇌물 먹인 걸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그쪽도 어지간히 돌았나 봐?"
"인첨공에 안 돌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거 꺼내느냐 마느냐로 사회성 판가름 나는 거지. 사회성 안 좋은 건 맞지만."
"일단 이번 건과는 다르지만, 죄를 시인했으니 제압은 해야겠지."
"선생, 난 싸우기 싫은데 어쩜 좋아?"
"아니, 순순히 투항하는 게 이로울걸."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선생이 선택한 거야."
태휘의 주변으로 강력한 스파크가 튀겼고, 남성은 마찬가지로 한쪽 다리를 뒤로 물리더니, 사뿐거리듯 뛰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폐기장에 번개가 내리쳐 섬광이 번쩍이고, 우레가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은 난장판이 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언덕을 만들던 안드로이드 더미는 번개에 맞아 새까맣게 녹아 서로 엉겨 붙고, 불이 붙은 것도 있었다. 고무와 실리콘, 합성 소재와 기름이 타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난장판이 된 폐기장에서 태휘는 꼼짝도 못 하고 바닥을 굴렀다. 안드로이드에서 나온 폐냉각수 웅덩이에 구르는 걸로 모자랐는지 몇 번이고 더 바닥을 구르며 기름과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근육이 아팠다. 쿵 소리와 함께 쌓인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진 벽에 강제로 몸이 멈췄을 때, 전기 머금은 몸 탓에 여러 안드로이드가 뒤엉켜 잠깐 기동을 시작하듯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금세 축 늘어졌다. 태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몇 번이나 공격에 성공했지? 아마 못 한 것 같다. 코밑은 축축하고 비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피가 나는 것 같다. 입안도 터진 것이 분명하다. 태휘는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태휘는 제압으로는 파이로키네시스나 하이드로키네시스 저리가라 수준의 대분류를 가진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자였다. 레벨 4에 곧 계수 두 자리를 앞두는 능력자였고, 제우스의 창, 아스트라페라는 이름을 수여받기까지 했다. 안티스킬의 자랑스러운 정예 인력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한 자신이 무력하게 구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태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코에서 피를 흘리며 일어서고자 땅에 손을 짚었다.
"선생, 놀랐어?"
"윽-!"
"그러니까 그냥 지나치지 그랬어. 살려주고 보내줬을 텐데."
"……나는."
"응?"
"나는 그래도 경찰이라서, 뇌물 주는 사람은, 못 지나치거든……."
태휘는 남성이 발로 손을 짓밟자 몸을 움찔 떨었다. 먼지가 약간 묻었지만 깔끔한 편인 구두에 무게는 없었지만, 손톱이 있는 곳을 절묘하게 짓밟아 일어설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눈앞의 남성이 힘을 주거나, 자신이 일어나면 손톱 두어 개는 빠지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잃는 고통이 무슨 대수지? 시민의 안전과-
"조국의 무궁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이깟 손톱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어, 선생?"
"!"
"선생, 눈물겨운 희생은 이해하는데, 지금껏 그 각오를 한 건 선생만이 아니었어."
"너, 정말로…… 이 구역에 있던 안티스킬이 네 짓이냐?"
"눈치가 좋은 것 같은데, 이상한 부분에선 눈치가 나쁘네."
"묻는 말에 대답해!"
"바락바락 대들기까지 하고, 제법 흥미가 생겼어. 이렇게 된 거, 나랑 질문 놀이할래, 선생? 다섯 개. 지금부터 다섯 개의 질문은 내가 뭐든 답해줄게.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
"풀어주도록 하지!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거든. 오늘은 피 보면 안 되는 날이고."
"의도가, 뭐지?"
"오락이지. 선생이랑 싸워봤자 득 될 것도 없고. 선생도 알고 싶을 거 아냐? 안티스킬의 훌륭한 창이자 충실한 개새끼인 아스트라페가 어떻게 이딴 낙후된 미개인들의 지역의 흔해 빠진 총 팔이에게 탈탈 털렸지? 같은 거나……."
남성은 생글생글 웃었다. "윤찬혁 그 작자에 대한 정보는 어때?"
"너!!" 태휘는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노이즈가 일부 걷혀 드러나는 시선을 마주했고, 눈을 홉떴다. 자신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였지만 눈앞의 남성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었다. 태휘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며, 자연스럽게 데 마레에서 만났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같은 흰색과 금색의 눈이라도 이질적이고 인간과는 다르기 그지없던 희야와, 아무리 숨기고 있다 한늘 노련한 안티스킬인 자신에겐 차마 속일 수 없던, 그러면서도 저 작자와 비슷한…….
"분홍머리, 학생……?"
남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휘는 짓밟힌 손에 체중이 실리자 끼쳐오는 격통에 어깨를 비틀었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보자니 눈앞의 남성은 옷 끝자락이 탄 것을 제외하면 지나치게 멀쩡했다.
"윽-"
"나는 선생한테 생각에 잠기라고 한 적 없어. 선택하라고 했지."
"……네가, 네가- 그 사람에 대해 왜 알고 있지?"
"그게 첫 질문인가?"
"……."
태휘는 이를 악물었다. 끔찍하지만 지금은 이 놀이에 어울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좋은 태도야. 내가 왜 윤 선생을 아냐고? 그 선생도 내 거래자 거든. 아주 중요했던 고객인데 당신들이 싹 뒤집어엎었지 뭐야. 상납금도 아직 못 받았는데."
"……너는, 돈과 관련된 녀석이냐?"
"그건 두 번째 질문?"
"그래."
"맞아. 금교 금교 파이넌스? 그쪽도 고리대금업으로 한탕 벌어먹지만 나는 조금 다른 쪽. 고리대금, 주가조작, 세탁, 인신매매, 도박, 아, 요즘엔 무기 로비스트도 하고 있고, 스킬아웃 자금도 대주고 있고…… 어느 쪽이 좋아?"
"……너는."
"응?"
"이 사건의…… 범인이냐?"
"하하하!"
남성은 시선을 맞추듯 무릎을 굽히더니 태휘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여름의 끝물이라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도, 덥지도 않은지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호쾌하게 휘었다.
"말했잖아, 뇌물 먹이면서 2년 동안 길들인 우리 돼지 새끼라고. 내 짓이 아니야. 나도 솔직히…… 화가 많이 나거든. 통통하게 살 오를 때까지 잘 키워둔 걸 누가 냉큼 도축하면 화가 나, 안 나?"
"……."
"선생은 이 말이 기분이 나빠? 고귀한 안티스킬인데 돼지 취급받아서 싫어? 그런데 선생."
남성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들은 그 말이 몸서리가 날 정도로 싫은데, 왜 우리는 그 소리 듣는 게 당연해야 해? 우리 입장에서는 당신들도 똑같이 남 짐승 취급하는 족속인데."
"……질문 두 개가 남았다."
"말 돌리기는. 뭐, 나도 대답 들을 생각은 없었어, 인간은 전부 똑같거든. 그래서, 뭘 묻고 싶어?"
"너는…… 그림자냐?"
"선지자가 많은 걸 알려주었나 본데, 그건 아니야. 그쪽이랑 연관은 없어. 아, 있나?"
"똑바로 말해."
"나는 아니고, 선지자가 그쪽이랑 신나게 엮였잖아. 싹수가 노란 녀석 같으니라고. 나만 보면 머리 굴리면서 어떻게 해야 떡고물 더 얻어먹을까 궁리하는 기특한 녀석이긴 한데……. 정보도 제법 쓸만하고. 어?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몰랐어? 선지자의 호위면서."
태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남성의 눈은 파충류를 닮은 뱀 같은 동공을 가지고 있었고, 꼭 세로로 난 커다란 균열 같기도 했다. 그리고 저 균열이 지금, 태휘의 속에도 파고들어 선명한 자국을 남겼단 착각이 들었다. 선지자, 그러니까 안희야가, 뭐? 그리고 더 큰 궁금증이 생겼다. 물어본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을 알지만, 남성이 선지자라는 언급을 해버리고 윤찬혁 그 작자에 대한 얘기까지 한 이상, 판도라의 상자는 열 수밖에 없다. 태휘는 바르르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선생, 정말 나 몰라? 우리 얼굴 자주 봤는데."
얼굴을 덮는 노이즈가 사라지자, 태휘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다. 납작한 이마에 흩어지는 흰 머리카락도, 콧대도…… 아, 저 눈! 어째서 진작 알아보지 못했지? 태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지만, 남성의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태휘의 귓전을 때렸다.
"선생과 내가 가장 최근에 본 게 언제더라? 아, 그래. 당장 어제도 봤잖아? 데 마레에서……. 소장님과 함께 차도 마시고 웃고 떠들었지."
"당신이, 왜."
"그러게, 내가 왜 이럴까?"
"대체, 대체, 왜……."
"선생, 딱 하나의 질문을 더 받을게."
"……오늘 피를 보면 안 된다는 게, 소장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나?"
"재밌는 질문이네. 선생, 정답이야. 이렇게 눈치가 좋은데……. 그냥 우리랑 함께할래? 여기 제법 복지 좋아. 안티스킬도 곧 끝물인 것 같은데 차라리 우리랑 함께 하면 안전할 거 아냐."
"나는 이곳의 군인이며, 경찰이다. 시민을 지탱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내가 당신 같은 작자와 함께 할 것 같아?"
"눈물겨운 충견이군. 그리고 어리석어, 선생."
"컥-!!"
남성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쿵 소리가 들렸다. 태휘는 머리채를 휘어잡히더니, 그대로 안드로이드 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했다. 남성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스트레인지 잠입 활동을 하는 안티스킬을 위해 대상을 포함해 이 일대 지역에 사이코메트리에도 읽히지 않을 만큼 기억에 큰 균열을 주는 장치였다. 2년 동안 열심히 살찌운 돼지가 주인에게 바치기 딱 좋은 보상이었다. 기절한 태휘의 눈꺼풀을 뒤집어 깐 남성은 장치로 스캔하여 1시간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날려버리곤, 이젠 필요가 없다는 듯 불타는 안드로이드 더미 위로 대충 집어던졌다.
"의무를 가진 건 당신만이 아니야……. 그러니 오늘은 살려주는 줄 알아."
레벨 4인 당신이 쓰러지면 사기는 한 풀 꺾이겠지. 여기 있는 찌꺼기들이 날뛰는 동안 나도 할 일을 좀 해야 할 것 같고.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휘를 적당히 스트레인지 골목으로 내던질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다.
"어이쿠, 약속 늦겠네. 팥차는 싫은데."
─ 惟命是聽
- 권악징악
- 4학구 미술관에 전시된 레이브의 작품 일부는 지정된 공간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레이브가 직접 숨결을 불어넣은 작품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며, 관람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며 소통하며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여러 평론가에게 긍정적인 찬사를 이끌어냈다. 작품이 망가지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안드로이드의 안전 감지 센서나 상시로 주둔하는 보안 요원 덕분에 지금까지 큰 사고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우려의 시선을 거두고 무뎌졌을 때, 미술관이 발칵 뒤집히는 사고가 났다.
작품이 망가졌다!
단순한 부주의로 벌어진 실수였다면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경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에는 여러 인간 군상이 모인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부터 시작해 단순히 더위를 피하려 들어오는 사람, 재밌어 보여서 들어오거나 과제 때문에 죽상으로 들어오는 사람……. 누구라도 미술관은 사람들을 환대했고, 악의를 가진 사람도 분명 있었다. 오늘 사고를 친 사람은 단순히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고,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작품을 만든다며 천대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은가! 최근 불량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극야의 서 챌린지를 쇼츠에 올리면, 조회수도, 관심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고의로 작품이 부서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보안 요원이 출동해 현장에서 붙잡긴 했지만, 작품은 산산조각이 난지 오래였다.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관장은 높은 비명을 질렀다.
"신데렐라!"
무려 이 미술관이 레이브라는 작가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사들인 작품이다! 붉은색 보석을 포인트로 넣은 순백색 드레스를 입은 남성형 안드로이드 "신데렐라"는 한쪽 다리에 맞지 않는 유아형 안드로이드의 발을 이식한 나머지 절뚝거리며 주변을 배회하는 특징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고 유쾌한 안드로이드는 오늘, 늘 그렇듯 "어이, 꼬맹이!"를 외치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관장은 소란 속에서 진짜 시체처럼 널브러지고 이리저리 부품이 튄 신데렐라를 보며 등골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 손해배상 청구와 고소를 진행하면 될 일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작가님께…… 어떻게 말씀드리지?"
신데렐라는 레이브가 팔지 않겠다고 했으나, 자신이 사정을 하며 빌면서까지 얻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아홉 번의 거절 끝에 얻어낸 작품! 레이브의 숨결 중에서 가장 귀한 것! 그런 게 부서졌다고 알려야 한다니,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멀리서 기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번쩍였고,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어 제각기 영상과 방송을 퍼날랐다. 관장은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과 미디어의 발전,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야만적인 행동을 트로피로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 사회가 미웠다. 누군가 핸드폰을 돌려 허망한 시선으로 부서진 작품을 보는 관장을 찍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오는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오른 메일을 확인했다. 뉴스에서는 조회수에 눈이 먼 몰상식한 청년들을 비판하며 제각기 열띤 토론을 나눈다. 레이브의 계정은 디엠을 막아두었다. 그 모든 것이 태오에게 닿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것을 본 것처럼,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인 것처럼 크게 와닿지 않았다. 고소니 손해배상이니 미안하느니 몇 수십 명이 달라붙어 구슬땀을 흘린 것이 보이는 장문의 메일에서도 한 문장만이 태오의 눈에 닿았다. 신데렐라가 부서졌다.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기 전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대행 주소를 보내드릴 테니 거기로 안드로이드를 보내주십시오. 상태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누군가의 눈물과 식은땀, 미안한 감정으로 범벅 진 노력과 달리 답장은 몇 초면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일을 확인했다는 알림음이 떴다. 메일이 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냉큼 클릭했단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머잖아 태오는 왜곡된 좌표를 통해 작품을 집에 들여올 수 있었다. 태오는 상자를 보며 관장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인간은 역겨운 것 천지에서 안드로이드를 사람처럼 대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레이브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지금도 그 배려심이 돋보였다. 귀한 목재 상자는 내부를 완충재와 부드러운 실크로 감싸 더 이상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그 모양새가 관과 같아 작품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사람은 죄가 없다. 이 사람에게 신데렐라를 넘긴 건 후회하지 않는다.
"……신데렐라."
하지만 나 자신이 신데렐라를 넘겼단 사실이 이렇게 끔찍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을 팔아치우던 패배자들과 다를 게 무엇일까! 태오는 상자 속에 고이 누워있는 작품을 훑더니, 뭉개진 얼굴의 실리콘 파츠를 덮은 천을 들어 내골격이 드러난 것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듣자 하니 레벨 2의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자였단다. 미력하다마는 어느 정도는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붙잡기 전까지 신나게 박살을 내려 들었기 때문일까, 작품은 정말 손쓸 곳이 없이 망가졌다. 이곳저곳 불타고, 녹았고, 부서졌다. 이음새가 부서져 빠진 한쪽 발은 머리맡에 고이 놓여 있었다. 태오는 손을 더듬대며 부서진 곳을 피해 만져보다가도, 상반신을 들어 올려 품에 가두듯 안았다. 허리 파츠에 큰 충격이 갔기 때문일까? 금세 부서질 것 같아 몸이 잔뜩 떨리고 있었다.
"아, 아팠지, 어떡해, 으- 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신데렐라, 어떡해, 발이, 모, 몸이……."
천만다행으로 인격을 결정짓는 칩은 훼손되지 않았다지만, 기기는 아예 박살이 났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아! 내 신데렐라! 내 가장 소중한 작품! 안전하길 바라고 꿈을 이루어주고자 보낸 신데렐라가 망가져 돌아왔다니!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게 안드로이드를 등허리를 꽉 끌어안은 태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높여 울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한참을 엉엉 울던 태오는 결심한 듯 뭉개진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가, 고쳐줄게. 그때는 지켜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지켜줄 수 있어. 우리 평생 함께잖아. 신데렐라, 다시 걸어 다니자, 이번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공중을 떠다니던 홀로그램 스크린이 하나로 모였다. 연결 중이라는 알림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쩐 일로 내게 연락을 다 했을까?"
서휘는 호텔 객실처럼 잘 꾸며진 방 소파에 모로 누운 채 책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렸다. 일을 마쳤다 연락을 줬으니 곧 보낸 주소로 오겠지. 연락처를 주길 잘한 것 같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어르신'의 연락처를 주긴 했지만, 태오가 연락을 취한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얘가 무슨 바람이 들었나 싶었다. 드디어 독립을 철회하고 돌아오겠다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안드로이드를 껴안은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자, 기대했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감히, 누가? 단전에서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 어떤 경위도 묻지 않은 채 도와주기로 했다.
"청년,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떨어?"
서휘는 책에서 시선을 떼 정면을 응시했다. 푹신한 러그 위, 의자에 손 발목이 결박된 채 벌벌 떠는 남성은 신데렐라를 파손한 범인이다. 경찰 조사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범인은 서휘의 자비로운 손길에 비명 하나 못 내고 여기까지 끌려왔다. 사람 하나 감쪽같이 속여 데려오는 건 몹시도 쉬운 일이었다. 하필 자신 같은 사람에게 잡혀온 것은 안타깝지만, 서휘도 뉴스 기사 정도는 봤다. 극야의 서 챌린지를 찍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단다. 극야의 서 작가도 참 안타깝게 됐지. 본인이 쓴 책의 범죄 내용을 스킬아웃이나 생각 없는 젊은이들이 따라 하면서 챌린지라 부른다니! 하지만 잘된 일이다. 왜, 요즘 애들이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아무튼 딱 그 꼴에다 하필 건드려도 레이브의 작품을 건드렸으니, 본보기로 하나 매달리면 잠잠해질 것이다.
"그런 일하면 당연히 이런 일도 당한다는 건 몰랐어? 어휴, 몰랐나 보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앞뒤 안 잰다니?"
남성은 불안한 눈치로 흘끔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들후들 떠는 모습이 cctv에 남은 작품을 부술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서휘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책에 시선을 꽂았다. 곧 중요한 파트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자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니?" 서휘는 책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짚어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고정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태오는 머리를 두 개의 볼펜으로 대충 둘둘 말아 꽂고 있었고, 옷은 계절의 흐름도 모르는지 아무거나 걸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예술에 빠져 자기관리가 일절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얼굴이 시선이 닿았다. 드물게 표정에 경멸과 혐오, 그리고 분노가 잔뜩 깔려 있었다. 서휘는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저 숨겨진 성질머리를 보겠구나!
"저거야?"
"말도 마, 벌벌 떨더구나!"
불안하게 남성의 눈동자가 구르는 것을 확인한 태오는 겉옷을 채 벗지도 못한 채 성큼 앞으로 다가서더니, 뺨을 손등으로 거세게 쳐올렸다.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과 달리 우렁차게 올려붙이는 소리에 서휘조차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악!"
쿠당탕 소리와 함께 의자가 왼쪽으로 넘어갔다. 남성은 머리와 왼쪽 무릎에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팔이 적나라하게 눌리자, 끔찍한 통증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태오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울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왜 저건 조금만 고통을 받아도 우는 건지! 허공에 멈춰 바르르 떨린 손이 새하얗게 주먹을 쥐었다.
"이깟 천한 것 때문에. 내가 눈물 흘리며 여기까지 걸음해야 했다니……."
"저, 저한테 왜 이러세요, 잘못했어요……!"
태오는 남성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남성은 눈이 마주치자 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누가 구조해 주지 않을까? 살면서 납치라는 걸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누가 납치를 당하지? 저 사람들은 혹시 작품에 관계된 사람인가? 왜 이렇게까지 하지? 혹시 그 작품이 아주 중요한 거였나? 왜, 있지 않은가, 뭔가 스캔들이 터진다든지, 아니면 이 작품에 사정이 있다든지…… 어찌 됐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나는 손해배상에, 고소에, 잘 하면 징역까지 살고 평생 욕을 먹을 텐데! 남성은 태오가 머리를 콱 짓밟자 악 소리를 냈다.
"겉으로는 빌며 다른 걸 생각해. 지독하게 오만하고 아둔한 녀석 같으니라고. 세상 만물이 서로를 조롱하고 모욕하는데 네깟 것 하나 더 욕먹는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으, 으으-"
"내가 배태할 수 없는 불모이긴 하나, 네가 부순 것은 정신적으로 배태한 자식이나 마찬가지였어, 뇌로 잉태하여 손끝으로 면신한 내 자식. 모두 내 숨, 내 탈출구, 수단, 방법, 자유의 상징, 삶과 같은 것인데, 감히 네가 나의 피조물을, 아이를, 나의 신데렐라를……. 가엾은 나의 신데렐라. 내가, 내가 어떻게 살려냈는데. 내 눈에서 꺼져가던 그 순간이 선연한데 네가 감히 다시 그 정경을 눈에 보여……?"
태오는 발끝을 거칠게 비볐다. 머리카락이 신발 밑창에 감겨 좌우로 비틀릴 때마다 고통이 스몄다. 남성은 속이 읽혔단 것도 모르고 공포와 억울함에 몸만 떨었다. 혹시 저 사람이 레이브야?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그럼 저 사람은 또 누구고? 생각에 또 잠기자 태오는 머리를 짓밟은 발을 떼어 할 말이 있으니 집중하라는 듯 신발 끝으로 뺨을 툭 쳤다. 남성은 공포에 잔뜩 젖은 눈을 슬쩍 흘겨 들었다.
"네가 봐도 고작 작품 하나에 이리 화를 내는 듯싶지. 너는 사회적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는데 어찌 너에게만 이러느냐 싶지?"
태오의 신발 끝이 뺨을 짓누르며 턱 선을 스치다, 이내 끝을 세워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고개를 들게 만들어 남성에 목이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고 근육이 아팠다. 하지만 남성은 눈이 마주치자 반항할 수 없었다.
"네가 죽인 건 내 수많은 삶의 일부인데, 너는 남의 삶을 망쳐놓고 고작 대가 치르면 되겠거니 생각하는 점에서 글러먹은 거야. 알아? 고작 알량한 심상을 가지고, 되지도 않는 오만한 일을 벌이는 자그마한 피조물, 단 하나 사랑스럽지 않고 캔버스 위에 대충 짜놓은 물감과도 같은 것이라고. 얘, 너는 고작 그런 존재란다. 손으로 한 번 눌러 비비면 하나의 궤적으로 남아 사라지고, 뒤집으면 채 반항 못하고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를 녀석."
저건 짐승의 눈이다!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라 표현해야 응당 옳을, 인간의 것이 아닌 눈이었다. 번뜩 뜨인 빛바랜 비색 눈동자는 선득했고, 동공은 먹잇감을 발견한 커다란 구렁이 같았다. 사물이 아닌 저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인위적인 시선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볼 적, 시시각각 색이 오묘하게 바뀌는 것 같은 유리구슬과 같은 눈동자에 큰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네 뇌 가장 깊은 곳 척수에 새겨진 것을 읽을 수 있고, 너의 눈 너머로 꽁꽁 숨기는 추악한 본성과 두려움을 읽을 수 있단다. 연약하고 작으며 추한 것아. 척수에서부터 네 공포가 느껴지나 내가 이걸 입 밖으로 꺼내줌에 감사를 표하고 무한한 찬사를 보내야지 어딜 눈을 그렇게 뜨며 머리를 굴릴까?"
"……자, 잘못했어요."
"두려워?"
"잘못했어요!! 돈이랑 다 배상할게요, 징역도 살게요, 네? 잘못했어요!"
"봐, 조금만 긁어도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생을 갈구하고. 오, 네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손 더럽히는 건 내 일이 아닌지라 목숨을 구걸할 대상이 다를 텐데."
태오는 끝을 세운 발의 각도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남성의 시선 끝에 닿은 서휘는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 남성을 흘긋 내려다보다가도, 태오를 향해 눈을 굴렸다. "나 시키게?" 남성의 시선이 서휘의 책에 닿았다. 아름다운 유작. 남성은 저 책을 알고 있다. 흐릿하게 결말도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모조리 몰수 당하고, 화장되어 가족들 품에 돌아가는……. 남성은 이유 모를 공포에 잔뜩 젖어 고개를 억지로 쭉 빼들며 외쳤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저 진짜 잘못했어요."
본능이 생존을 외친다. 원래 이런 일을 당하면 저지먼트나 안티스킬이 구해주지 않아? 벌벌 떨며 한참을 살려달라 빌었지만 서휘는 들은 척도 않고 다시 책에 시선을 옮겼고, 태오는 턱 끝을 툭 건드리듯 가볍게 차더니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눈앞에서 보니 레이브는 훨씬 어렸다. 짐승을 닮은 눈의 위압감 탓에 깨닫지 못했지만, 분홍색 머리카락은 창백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홍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고, 관리된 모습보다는 않은 듯 아무렇게나 볼펜을 꽂아 고정한 모습이 잘 어울릴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어린 사람이 작품을 내고, 내게 화를 내면서 발길질을 했다고? 이렇게나 어린 학생이? 자신도 대학생이지만 얘는 많아야 고등학생 아닌가!
"잘못……."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적 남성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 학생을 관찰하는 만큼, 저 학생도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달랐다. 남성은 어떻게든 기억해서 안티스킬에 신고하고자 단서를 얻어내려 했지만, 이 학생은 자신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치를 가늠하는 시선에 살려달라 외치던 입이 지퍼를 채운 듯 꽉 다물려 열리지 않았다. 눈치는 없는 편이지만, 지금은 더 자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서휘는 책갈피를 끼우며 옆으로 누워있던 자세를 바로 세워 앉았다.
태오는 고개를 돌려 서휘를 쳐다봤다. "나는 저지먼트라서 손 못 대."
남성은 입을 떡 벌렸다. 저지먼트라고? 눈에 절망이 엄습했다. 이미 여기 온 시점에서 나는 죽겠구나. 차디찬 현실이 심장을 후벼팠다. 고작 작품 하나 망쳤단 이유로 죽게 된다는 사실이 썼다. 태오는 그런 남성의 속을 읽었는지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눈꺼풀에 엄지와 검지를 댔다. 눈을 억지로 비집어 벌려 동공의 움직임과 그 안의 감정을 관찰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손끝에 느껴지는 바들거림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여전히 반성 하나 하지 않는 녀석에게 자비를 줄 필요가 있나? 이제 보니 이 눈은 쓸만하긴 한 것 같다.
"그러면 대행비가 필요하단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해?"
"우리 사이가 뭔데?"
"……."
"농담이란다! 사람들은 네 마음씨가 천사 같길 바라고 미담을 칭송하며 저것도 이미지메이킹이라며 쑥덕거릴 찌라시를 준비했을 텐데. 안타깝지! 그래서, 방법은?"
"금전적 피해 보상과 고소 절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론에게 느낀 중압감."
"아하……. 이 작고 영악한 것. 그건 내 전문이지. 그럼 이건 내 적당히 교육할 테니 돌아가서 푹 쉬렴. 신데렐라를 고쳐야 하지 않겠어?"
태오는 마지막으로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는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남성은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고개를 내렸다.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처지가 망했다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눈물도 나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낙담한 눈도 관찰하고 싶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아 엄지로 눈꺼풀을 슥 밀어 올리자 둥근 안구가 보였다. 태오는 남성의 뺨을 쓸어주다 손등으로 가볍게 탁 쳤다.
"옳지, 착하다. 그게 네가 응당 가질 태도니, 마지막까지 평생 품고 있으렴."
자리에서 일어서 떠나는 걸음에도 남성은 낙담한 눈을 숨기지 못했다. 서휘는 마저 책갈피를 꽂아둔 책을 펼치며 다리를 꼬았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아름다운 유작의 결말은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모조리 몰수 당하고, 화장되어 가족들 품에 돌아가는 해피엔딩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이 늘 해피엔딩은 아니다. 서휘는 마지막 장을 넘겨 작가의 말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극야의 서는 범죄 소설입니다. 극중 캐릭터의 다수는 범죄자입니다. 픽션은 픽션으로 있어야만 아름다운 법입니다."
붉은 눈동자가 긴 호선을 그었다. 탁, 하고 책 덮이는 소리와 함께 서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냐면, 현실이 되면 안티스킬이 승리하는 법이거든. 그건 진부하잖니."
뉴스 기사가 떴다. 레이브의 sns 글을 캡처한 기사였다. 레이브는 최근 sns에 가해자의 조회수를 향한 갈망과 더불어 최근 이렇게 평온한 일상을 부수는 챌린지가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이라 토로하며, 배상을 청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나 수많은 관람객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며 난동을 부렸던 점과 4학구 미술관의 다른 작품 또한 위험했다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겠다고 협의를 마쳐 배상 청구와 고소를 진행할 예정이라 밝혔다. 또한 신데렐라는 천만다행으로 칩이 망가지지 않았고, 안드로이드를 교체하면 다시금 관람객 앞에 선보일 수 있다는 말도 붙였다. 더불어 극야의 서 작가도 본인의 sns에 레이브에게 이런 챌린지가 벌어지는 것에 대해 사과를 전하며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고, 레이브는 작가의 잘못이 아니라며 응원하는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은 그런 레이브를 대인배라 칭했고,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이름을 기억하게 됐으며, 극야의 서 작가와의 긍정적인 만남으로 새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제각기 떠들었다. 반면 가해자는 초반 진술과 달리 잘못했다, 용서해달란 말만 반복하며 불안한 눈치로 주변만 살폈다. 지속적으로 경찰 조사에 임할 때마다 스킬아웃 단체의 일원들이 기자들 사이를 뚫고 나와 너 때문에 열등생 인식이 나빠졌다며 습격한 탓이었다. 저번에는 기자가 나타나자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 울 정도였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이변이 없다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다. 권선징악과 다름없다. 태오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아래로 끌어내려 창을 닫은 다음, 벨벳 천에 감긴 안드로이드 칩을 손아귀에 올려둔 채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졌다.
"저 사람은…… 조만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줘."
하지만 근본이 다르다. 권선징악이 아니다. 더 큰 악으로 자그마한 악을 누른 것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잘 풀리고, 작위적이고, 우연과 욕망이 겹쳐 아주 큰 기회를 만드는 것. 그 삶을 이 손으로 직접 쥐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 도전하면 멈출 수 없기도 하다. 4학구 박물관은 최근 인간의 홍채를 제거하여 신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되지도 않는 존엄을 지키되, 안구를 보존하는 작업을 성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낙담한 눈을 볼 수 있을까? 오싹한 쾌감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신데렐라, 나의 신데렐라……. 나빴던 기억은 모조리 지워줄게. 다시 밝은 모습으로 날 꼬맹이라 불러주고, 그 낙원으로 인도해 줘……. 약속이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태오는 작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피조물에게 입을 맞추고자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에게 입을 맞추는 것만큼 성스러운 행위는 없다. 앞으로 죽을 것에게도 마찬가지리라.
- 엄지
- 신데렐라를 위한 드레스가 얼추 완성되어 간다.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느질에 몰두한 덕분이었다. 실을 꿰는 태오의 손은 엉망이었다. 골무를 끼운다고 해도 바늘에 찔리면 아플 수밖에! 방금도 찔렸는지 손끝이 새빨갛다. 그동안 태오는 작품의 옷 대다수를 직접 만들었지만, 마땅한 재봉틀은 구비하지 않았다. 전부 하나하나 바느질을 해야 직성에 풀리는 깐깐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자수나 자잘한 무늬는 재봉틀이나 다른 도구로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술가의 손은 무엇보다 훌륭한 도구였다. 홍옥을 꿰던 태오는 가만히 팔을 벌리고 서있는 안드로이드의 쇄골 부근에서 시선을 집중했다. 역시 여기 말고 조금 아래에 꿰는 게 나았을까? 드레스를 안드로이드의 가슴팍에 대보았지만 도통 가늠하기 어렵다. 일단 마저 꿰자 싶어 태오는 바느질에 다시금 집중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느질에 푹 빠져 있었다.
"오늘도 열심이구나."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손이 삐끗한 나머지, 엄지를 쿡 찌르고 들어오는 바늘에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태오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주먹을 꾹 쥐며 피를 대충 짜내고는 바지에 슥 닦았다. 어차피 검은 바지니 아무도 모른다.
"……오늘은 상납 일이 아닐 텐데요."
"언제는 내 그 날짜에만 왔더니?"
"그건 아니지만…… 작품을 만들 땐 방해하지 않겠다며 오지 않았으니 말이에요……."
나리는 태오의 예술을 존중했고, 아낌없이 후원했다. 아니, 나리가 있었기 때문에 태오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만일 도박장에서 일하지 못했더라면 예술은커녕 지금까지 폐기장을 전전하며 고철 줍는 까마귀 신세를 면치 못했겠지! 태오는 아무리 나리가 싫어도 그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없었으면 레이브는 없다. 태오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나리는 태연하게 안드로이드 곁으로 다가가더니 주변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돌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시선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어 트리에 숨겨진 선물이 있는지 찾아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피부에 새롭게 묘사를 했구나!"
"네에."
피부 실리콘을 벗겨 외골격에 직접 혈관 파츠와 모조 근육 파츠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새로 붙인 피부 실리콘에는 잔주름을 묘사해 사실성을 더했음을 금세 깨달은 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언제 보아도 레이브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안드로이드 주변을 맴돌던 나리의 시선이 이번엔 태오가 바느질을 하고 있던 드레스에 닿았다.
"입혀보고 작업하지 않는 거니?"
"바늘이 들어가기엔…… 신데렐라는 지금 이 상태로 균형을 잡는 게…… 복잡해서요."
아무래도 발의 크기가 맞지 않아 넘어질 우려가 있었다. 납득한 듯 새빨간 눈동자가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한 번, 그리고 태오를 한 번 보더니 이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태오는 첫 번째 장식의 마무리 바느질을 위해 바늘을 몇 번 움직이고는 실을 잘라내며 바늘꽂이에 꽂아둔 뒤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입어보는 건 어떠니."
"농담도."
"난 제법 진지했단다. 체형도 마침 비슷한 것 같고, 그 장식 부분은 입어봐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나리는 손가락으로 홍옥을 꿴 자수를 톡 건드렸다. 태오가 방금 마무리 한 부분이었다. 마침 태오도 이 부분을 지대하게 신경 쓰고 있던 탓에,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듯한 눈으로 나리를 향해 시선을 꽂을 수밖에 없었다. 나리는 시선을 가뿐히 무시하고는 태오의 손에서 상냥하게 드레스를 거둬들였다.
"내 작품 보는 눈이 있잖니. 자, 일어나 보렴. 입기 불편하게 만든 듯하니 도와주마."
"……도울 필요 없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입을만한 옷이 아닌 걸 알면서."
"내 입을 옷이 아니었으니 그랬지요……."
"그래서, 이대로 신데렐라에게 입히고 말 생각이니?"
태오는 나리를 향해 시선을 온전히 꽂았다. 여상한 시선이지만 나리는 저게 자신을 최대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오는 자신의 존엄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예술성을 택했는지 눈을 슬쩍 좁히고는 한숨을 쉬며 상의를 벗었다. 나리는 익숙하다는 듯 태오에게 다가가더니 드레스의 착용을 도왔다.
"내 묻고픈 것이 있단다."
"무엇이든…… 하문하시지요."
"어찌 그리 신데렐라에게 집착할까, 옷도 평소랑 다르게 이리 공을 들이고."
태오는 목뒤의 리본을 매주는 손길에, 바스락거리며 구겨진 앞 매무새를 정리했다. 확실히 이번엔 공을 들이긴 했다. 지금껏 여러 작품이 공을 들였지만 이번처럼 하나하나 세심하게 새로 신경 쓰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쇄골을 일부 드러내는 네크라인과 함께 부드럽게 퍼지는 은은한 하늘색 시폰과 튤을 덧댄 새하얀 드레스는 태오의 몸에도 제법 잘 맞았고, 긴 머리를 대충 볼펜으로 틀어 올려주는 손길에 고개를 맡기던 태오는 눈을 흘겼다.
"질투하는 걸까요……."
"어찌 질투라고 생각할까, 나는 그저 묻고 싶었을 뿐인데."
"거짓말은 내 머리에 다…… 들린답니다."
"이래서 독심술사들이란."
나리는 볼펜을 꾹 꽂아주며 잔머리를 정리해주곤 태오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에스코트하듯 거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작 죽은 놈 하나 기리자고 작품까지 만들더니 이젠 새로 드레스까지 지어주나 싶어서 말이다."
태오는 거울 너머의 자신을 보았다. 틀어올린 머리, 얌전히 모은 손, 새하얗고 우아하니 끝단이 풍성한 드레스……. 결혼을 앞둔 신부 같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비참한 끝을 기다리는 제물 같기도 했으며, 은은하지만 창백한 색감 덕분에 죽은 자를 위해 직접 맞춘 수의 같기도 했다. 쇄골 주변에 수놓은 홍옥 장식은 역시 조금 밑으로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는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죽였으니까요."
그 순간을 다시 회상하니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다. 신데렐라의 최후는 끔찍했다. 아름다운 죽음이라기엔 개죽음에 가까웠다. 인생을 셈했을 때 보상받았으면 받았을 사람이지 그렇게 눈도 못 감고 죽을 자는 아니었다. 태오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으면서 정작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런 곳은 오지 말고 어서 도망치라는 듯한 눈빛으로 어른이 아이에게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지켰던 모습과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을. 그리고 처참한 몰골과 함께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뇌리에 한 번 박혔던 그 순간은 잊을만하면 태오의 꿈에서 나타나곤 했다. 그놈의 어른의 도리가 무엇이길래. 태오는 그 원인을 잘 알았다. 거울로 눈을 마주라는 저 새빨간 시선의 탓.
"내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찾아 죽였을 테지."
"질투하였나요……."
"그보다 더 추잡한 감정이지. 네 작품에 신데렐라가 없었을 텐데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누가 먼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불편한 침묵이 오갔지만 두 사람은 이미 제 속내를 꿰뚫은 지 오래였다. 태오는 몸을 돌려 나리를 마주했다. 등허리를 감싸는 사부작대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손에 몸을 온전히 맡기자. 나리는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평소와 같이 수벽 하나의 간격으로 막아 세웠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당신을 증오하되 존경해."
태오는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 심장에 꽂을 비수를 준비했길 바라마."
긴 손가락이 턱을 감싸 쥐고 엄지가 입술을 짓눌러 긴 세로의 벽을 세웠다. 고개를 기울여 엄지 하나의 간격만큼 가까워진다. 그림자는 빈틈없이 메꿔지고, 쇄골께의 홍옥 장식이 찰랑거렸다.
단지 그런 사이다. 수벽이 거둬진들 엄지가 새로이 가로막는 사이. 엄지가 가로막기 때문에 결코 닿을 일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수단과 패로 삼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수 있는 사이. 다만 수벽만큼 철저히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관계.
고운 드레스 자락에 주름이 졌다.
- 음중
-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온다. 길고 긴 여름이었다. 빛이란 것은 살갗에 닿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심중을 파고들었다. 뜨겁게 내리쬐던 열정의 빛이 심중에 그 투과되는 양을 줄여가는 것이 느껴진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열병은 비로소 끝맺음을 맺고 사람의 심중에 겨울을 예비하게끔 서서히 온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 열이 식으면 새하얀 눈이 내려 설국이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을은 그런 것이다. 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춥고, 겨울이라기엔 열병이 가시지 않는 계절. 열정을 품고 박차를 가하던 맥동이 숨을 멈춰가고, 끝내 차갑게 얼어붙을 준비를 마치는 의식의 기간. 사람들은 이 순간을 쉽게 설명하곤 했다.
가을 탄다.
가을이 온다. 한결은 고개를 들고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녹음이 우거지고 선명하던 색채가 바래기 시작했다. 날은 이제 크게 덥지 않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여 땀이 나더라도 금세 식혀줄 수 있는 온도였다. 옷차림도 마냥 반팔만 입기에는 저녁이 되면 약간 서늘한 감이 있어 온도에 민감한 사람들은 대다수 가볍고 얇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당장 저기에 앉아있는 태오도 그랬다.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날이 완전히 춥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대충 아래로 묶은 모습은 최소한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조치 같았다.
태오는 공원 구석, 넓은 공터 같기도 한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은 언덕 같은 장소는 누군가 여기까지 일부러 운동 삼아 오지 않는 이상 길을 찾기 어려웠기에, 혼자 있기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화구 통을 간이 의자 옆에 잘 세워두고, 화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결은 잠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그려진 희미하지만 수줍은 미소가 상담을 할 때 보여주던 음울한 인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미술치료를 병행할 때마다 집중하던 건 이 행동을 정말 순수하게 좋아해서였구나. 한결은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태오는 그림에 한참 시선을 꽂고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
태오는 생각보다 커다란 체격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에 그렸던 수줍은 표정을 지웠다. 평소와 같이 어떤 감정인지 모를 것이 자리한 무표정을 보니, 마치 표정이라는 물감을 얼굴에 덧그린 것 같았다. 얼굴의 표정이 바뀌는 그 찰나에 다른 것도 눈에 밟혔다. 한결은 미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태오가 손에 든 팔레트는 여러 물감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고, 꼭 소모품처럼 사용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면 버려질 것 같은 모양새와 함께 어디선가 독한 냄새가 났다. 이제 보니 유화 물감과 기름통이 누워있었고, 태오의 손끝도 물감이 묻어있었다. 한결은 그 모습에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유화를 그리는구나.
"……."
태오는 표정 없이 한결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먼저 내렸다. 자신이 몇 주째 무단으로 빼먹는 커리큘럼 담당 선생이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 건 중요하지 않고, 이제 이 장소는 못 써먹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집을 제외하면 바깥에서 사색에 잠기며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새로 그림을 그릴 곳을 찾아야겠다 생각하던 태오는,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진 것을 보며 다시금 시선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홀로그램도 아닌 생화가 가득한 꽃다발을 본 태오는 꽃망울을 한 번, 그리고 한결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팔레트를 손에서 빼 무릎 위에 올렸다. 균형을 잡지 못한 팔레트는 금방이라도 움직임에 휘청이다 무너질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팔을 뻗어 꽃다발을 안는 순간까지 팔레트는 무너지지 않았다. 태오는 꽃을 받아들이고 꽃잎을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부들부들하니 매끈한 촉감이나 꽃내음이 썩 나쁘지 않다. 손이 자유로워진 한결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움직였다.
- 태오 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보나 마나 희야가 여기로 오면서 꽃을 가져오면 될 것이라 했겠군요."
태오는 무심하게 다시금 꽃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 봐도 희야짓인 건 알았다. 여기에서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아는 사람은 희야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공원 산책을 하면서 탕후루 막대를 버릴 곳을 찾던 희야가 우연히 여기까지 발을 들인 탓이었다. 희야는 태오가 그림을 그리는 걸 발견하고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자신은 아무것도 못 봤다면서 후다닥 자리를 떠버렸고, 태오도 그 이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곤란했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 하나를 잃어버린 것 아닌가. 썩 마음에 들던 곳인데 안타깝게 됐다. 태오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한결은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 혹시 제가 태오 학생의 시간을 방해했나요?
"아뇨. 어차피 집중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니 괜찮습니다. 다만……."
태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이 의자는 하나밖에 없고, 앉을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한결은 괜찮다는 듯 태오의 바로 옆, 풀이 무성한 바닥을 적당히 바라보며 앉아도 되겠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태오는 꽃다발을 바닥에 고이 내려놓다 시선을 발견하고는 그 끝을 따라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고, 한결은 자리에 앉고자 태오의 근처로 다가갔다. 한결은 드디어 태오가 무엇을 그리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웠다.
색채의 향연 탓이었다. 조화와 부조화를 모조리 담고 있는 그림은 그 의미를 쉬이 알 수 없었다. 밝은색과 어두운색이 혼재하여도 어디 하나 탁한 부분이 없었다. 패도적이되 유연했다. 밝은 어둠이자 어두운 빛이었다. 붓 터치 하나하나가 투박하지만 하늘을 나는 물새처럼 자유로웠고, 세상을 모르는 예술가의 작은 머리에서 나왔다기엔 터무니없이 압도적이었다. 그 화풍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지만, 지금 이 자유로운 심상의 표현 앞에서는 감히 무엇인지 상상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한결은 자신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선생님께서 오신 이유를 압니다. 제가 커리큘럼을 받지 않아서겠지요……."
한결은 태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태오는 화폭 속을 자유로이 거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작품에 홀릴 뻔했지만 한결은 손을 움직이고자 팔을 들다가도, 잠시 멈칫했다. 작품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한결은 주머니에서 작은 홀로그램 투사기를 꺼내더니, 이내 프로그램 하나를 작동시키며 손가락을 허공에 몇 번 움직였다.
- 그것도 있지만, 태오 학생의 마음에 상처가 더 생기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어요.
"……."
단조로운 기계음 치고는 실로 인간적인 발언이었다. 태오는 붓으로 섬세하게 어두운 부분을 덧칠하면서 손가락이 허공을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부분이라도 한 번씩 붓이 지나갈 때마다 그 색채를 더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기름을 적신 붓을 향해 허리를 숙일 때, 기계음이 이어졌다.
- 그때 이후로 커리큘럼을 쉬고 싶다면 쉬는 게 맞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지금 내 마음이 커리큘럼을 다시 받고 싶다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다시 찾아와도 좋아요.
"선생님."
태오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몸을 멈춘 채 뭔가 얘기하는 것이 태오의 버릇이었지만 예술혼이 그 상황까지 배려해 주지는 못했다. 태오는 살살 물감을 문질렀다. 시선이 한결에게 한 번은 닿았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닿지 못했다.
"이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제안이 있었지요."
- 어떤 제안 말인가요?
"역방향 커리큘럼 말입니다."
한결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며 태오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장님께서 제안하셨던 커리큘럼이 있었다. 텔레키네시스는 텔레파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가설로 하여금, 텔레파시 계열의 커리큘럼을 역방향으로 진행해 새로운 능력을 개화하는 시도. 가능성은 낮지만 보컬 텔레파시는 사라지고, 새로운 능력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는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결은 불현듯 그 관련으로 태오가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고민을 끝마치느라 커리큘럼에 불참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소장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고도 하셨지요."
- 그랬지요. 태오 학생이 스스로,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도 않고, 휘둘리지도 않고, 스스로 결정하길 바랐으니까요.
"……마음을 찌르는 창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찔러도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숨길 수 있으나, 살을 뚫고 들어가는 창은 숨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했지요."
태오는 칠하던 붓을 멈췄다. 한결은 태오에게 그 커리큘럼을 추천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원이라면 당장 그 커리큘럼을 받아 이 빌어먹을 능력을 뜯어고치려 들었을 것이다. 연구원이란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난 연구원들은 누군가 자신의 속을 읽고, 그 속내를 휘두르고자 한다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을 자신으로 규정하며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태오는 한결을 처음 만난 이후 커리큘럼에 대한 제안을 들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었다. 한결 또한 자신을 멋대로 뜯어고치겠구나. 그렇지만 자신의 속을 누구보다 잘 찌르고, 자신을 위하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그저 학생이라는 이유로.
- ……그때의 말이 혹시 신경 쓰였나요?
"저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든지 실체화가 되면 돌이킬 수 없지요."
그리고 태오는 그 호의를 끝없이 의심했다. 기름이 든 붓을 다시 내려놓고, 손수건을 들어 그나마 깨끗한 모퉁이로 캔버스에 흐를 것 같은 여분의 기름을 닦았다. 모든 호의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호의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도 자신을 위해 말했던 한결의 진심을 의심했다. 그렇게 계수 세 자리 수에 도달했을 때, 태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저는 커리큘럼을 받고 싶습니다."
- 진심인가요?
"예. 텔레키네시스는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동반한다는 말이 저를 동하게 합니다."
세밀한 붓을 든 태오는 팔레트에 붉은 유화 물감을 짰다. 그리고 가볍게 쿡 찍어내더니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선을 덧그렸다. 붉은 선이 조화와 부조화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빛과 어둠을 오갔다. 밝은 곳에서는 무엇보다 찬연하게,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는 심히 불길하게. 이따금 마르지 않은 물감이나 기름 탓에 번지는 건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홀린 듯 선의 움직임을 따르던 한결은 그 붉은색이 자신의 머리 구석에서 깜빡이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 순간이 무엇보다 불길하다. 한결은 한때 인첨공의 외진 곳에서 작은 컵라면 하나를 먹으며 대화하던 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이대로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학생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펜을 내려놓고 붙잡아야 했던 그 순간처럼 태오의 옷깃을 붙잡으려 들었다.
"어떻게 되었든 속내만 쿡쿡 찔러 홀로 병들어가는 것에 특화된 능력보다는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농담이죠.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데 마레에 있을 때도, ALTER에 있을 때도, 내가 살아갈 때도, 안희야에게 너 때문에 동생과 데 마레가 병드는 것이라 속삭였을 때도, 에어버스터와 함께할 때 그에게 칼을 쑤셔 박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을 때도…… 나는 한시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내 이상향이 아주 먼 곳에 있노라고."
한결은 태오와 눈을 마주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제 형이 시뻘건 눈동자로 먼 이상향을 향했듯, 태오 또한 자신만의 머나먼 이상향을 향하고 있었다. 환희와 안식을 향한 욕구, 그리고 지대한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에서 한결은 저도 모르게 옷깃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손이 툭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태오는 옅은 비색의 눈을 해사하게 휘었다. 몹시도 아리따운 미소였다. 수줍은 미소에 한결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태오는 붉은 물감이 묻은 손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한결의 뺨을 쓸었다.
"아는 사람과 몹시도 닮았기에 내 진심을 전하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지요."
한결은 그 이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태오는 그저 자리를 떠나버린 존재가 처음으로 숨소리를 냈음을 곱씹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열병이 가시며 차가운 설국이 도래하기 전, 그 틈 사이의 기간, 누군가의 척수 속에 태오가 자리 잡았다. 기어이 그 속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성공하였으니 설국이 도래하면 잿빛 도심은 가려지겠지.
태오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그림에 서명을 남겼다. Rave. 간결한 필기체와 함께 화구를 정리하고는 꽃다발을 안아들며 나지막이 웃었다. 좋은 냄새가 났기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루만큼의 시간 동안 시드는 것들이 마지막 삶에서 발악하는 냄새가 이토록 아름다웠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 이간질
-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어. 거래처를 네 뚫어주길 바라는데."
태오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납득하고자 애썼다. 공원에서의 사건 이후 커리큘럼을 일방적으로 쉬어버린 한결과 4학구에서 벌어진 크리에이터의 민낯, 유니온과의 짧은 싸움,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은 타 세력과의 교전까지. 모두 납득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납득할 수 있다마는.
"아니죠."
지금은 납득해선 안 될 때였다.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존재인데, 나는 이제 독립한 하나의 객체인데……. 돌이켜보면 독립한 이후에도 제 주인의 의중에 휘말리되 자신은 그 순간을 한껏 이용했었다. 서로 그게 당연했다. 휘말려주고, 그 대가로 이용하고. 그렇지만 지금은 다시금 일방적이지 않나? 태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듯 휘청였다.
"아니야, 그건 수지가 맞지 않아. 아니야."
태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내가 아무리 돌아갈 가능성 농후한들 이래서는 안 됐다. 그런 태오를 내려다 보던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할까?"
─ 결국 도박수를 던졌어도 잭팟을 따낼 운명은 아니었던 게지.
"시, 싫……."
"네게 주어질 처벌을 이걸로 대신하는 거야."
태오는 우뚝 멈췄다. 저번에 처벌을 내리겠다 했던 것을.
"이걸로?"
"응, 고작 이런 걸로."
태오는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하지만 거래처는."
"아스트라페는 여전히 혼수상태, 네가 준 정보에 의하면 크리에이터는 수감중. 지금 아니면 힘들어."
"……."
"할 수 있잖아. 어째서 망설여?"
태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선언하는 것 같은 소리가 아득히 울린다. All in on me.
"착하지."
룰렛이 굴러간다.
어쩌면 총탄 하나만 있는 리볼버일지도 모르는 것이.
밀회는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의 끝무렵, 서로 웃고 떠드는 탓에 옆방의 이야기는 쉬이 들을 수 없는 보드게임 카페. 태오는 노이즈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앞의 사람은 눈이 마주친다는 것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를 어떻게 믿지?"
그는 20대 후반에 달하는 남성으로, 레벨 0의 무능력자다. 한때 주변과의 관계도 원활하며 촉망받던 미래를 꿈꿨지만 지금은 마땅히 설 곳이 없기에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인지를 돌고 있고, 지금은 미심쩍단 눈으로 눈앞의 학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설 곳이 없는 이유는 하나다.
"그분의 친서도 없잖아."
그는 한때, 태양을 신봉하는 열렬한 신도였기 때문이다. 인첨공 사상 최악의 테러단체인 솔리스는 태양을 신봉하는 사이비 종교로, 에어버스터로 인해 궤멸되어 남은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각 스킬아웃에 녹아들거나 수용소에 갇혔다. 여전히 태양이 다시 뜰 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한 태양의 아이를 위해.
"친서가 무엇이 중요한지요."
"대답하는 게 좋을걸. 나는 자리 뜨면 그만이거든."
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이건 지금껏 바깥으로 올라온 모든 노력을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들키면 혼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지 않으면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갈기갈기 찢겨 한 몸 유지하지 못하는 그런 끔찍한 일이. 그리고 그 찢기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생은 단 한 번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다. 그리고, 눈앞의 안타까운 내리막길 인생의 앞날도 약간. 혀가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 심상이 흔들린다. 불안하다. 두렵다. 잠깐, 두려워? 어째서? 회피하려는 무의식은 오히려 다른 본능을 충동질한다. 부조화가 몸을 잠식한다. 나는 저지먼트인데. 그래, 나는 저지먼트……. 나는. 왜 저지먼트였더라, 이런 일을 하면서 바깥에서 올라가 살고 싶단 열망 때문에 쥐었던 수단이었나? 태오는 그렇게 불안한 눈치가 노이즈 너머로 드러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침묵을 유지하다 눈을 감아버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올라와봤자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굴 깊은 곳이 안전했다. 지금처럼 어중간한 선악의 선 위에서 양심을 재어보고 끝없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들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정명하지 못한 곳에서 언제부터 선악의 귀추가 있었나요."
태오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테이블에 얹더니 남성을 향해 밀어냈다. 녹색 바탕에 검은 색으로 그려진 코뿔소 문양은 태오가 현재 어디 소속인지 알려주고 있었지만.
"바다에게 빼앗긴 선지자를 구하고 싶지 아니한가요……."
"……이건 또 흥미로운데."
입만큼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눈치로 자신을 보는 남성을 향해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자, 노이즈가 일부 걷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 영원불멸한 태양 아래에서…… 함께 빛나야 했던 성자 하나를 떠나보내지 않으셨는지요. 인간의 손에 말입니다."
"!"
"성자를 떠나보내게 만든 존재들이…… 감히 선인의 탈을 쓰며 선지자를 현혹하고 속세로 들여보냈으니 어찌 부덕하지 않으오리까. 그렇지요?"
뱀 닮은 눈이었다. 영영 승천하지 못할 구렁이의 눈이자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득한 것의 눈이었다.
"결국 그 사람들이 선을 먼저 넘은 거랍니다…. 태양의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 세상에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누구의 탓인가요…… 격차를 벌이게끔 주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건만, 혀를 놀려 선지자는 이미 홀려버리고, 우리의 대리인은 고난 속에서 안티스킬이란 악마의 손아귀에 잡혔다 사라졌지요. 가여운 선지자와 대리자……. 누구도 부덕한 이단의 손에 더럽혀지면 안 될 텐데. 다행스럽게도 이단 하나는 처리했다마는, 완전한 것이 아니니 언제라도 다시 나타나 선지자에게 속삭일지도 모르지요. 태양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고."
"아니, 태양은 영원불멸하지. 그래야만 해."
"네, 그렇지요…… 그 사람들의 탓이요, 구원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겠나요. 그러니 내 말을 들으란 거예요. 태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계를 위한 초석이 될 준비가……."
"내가."
"네에."
"무얼 하면 되는거지?"
태오는 노이즈 속에서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그래, 흔들린다. 이럴 때 쐐기를 박아야 함을 안다. 속내를 읽고 있으니 쥐어 흔들 지금의 순간이 몹시도 중요함을 안다!
"선물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어라.
신을 빼앗긴 신자는 기도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는 성전의 때가 돌아옴을 시사함이요 여전히 인간은 뱀의 간교함에 넘어갔음이라. 대리자께서 이르시되 길 잃은 어린 빛무리는 들어라, 너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하며 극야의 때가 지고 백야의 때가 돌아올지니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금 모여 낙원을 위해 비파를 켜고 소리 높여 찬송하여라 하시니 이에 신도들은 기뻐하며 찬송하더라.
저지르고 말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해야만 했다. 나의 앞날과 그 사람의 앞날 약간을 위해서. 들키면 어쩌지? 정명하지 못한 곳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다지만 이번 일은 궤를 달리하지 않은가, 바깥으로 나와 그럴 일 없을 것이라 말했으나 정면으로 반하는 일! 태오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무언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첨공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의 삶에선 당연한 일이었나? 손가락을 한 번도 이렇게 부산스레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요란했다.
"거래를 제법 성공적으로 마쳤더구나."
"……."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단다. 네가 성공할 거라 믿지 못했거든……."
"어째, 서죠."
"네가 바깥에서 살고 싶다고 내 뒤통수를 쳤으면 그만큼 인간적인 면이 남았단 뜻일 텐데, 이번 일은 그걸 정면으로 반하는 거니 말이다."
태오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부정하듯 입술을 자근 깨물었다. 아니다. 나는 아직 인간이다. 당신과는 달리 이 바깥에서 적응할 수 있는 인간. 그렇기 때문에…….
"글쎄요, 사람이니까요……."
"사람 새끼면 이런 일 못 한다. 어떻게 사람이 미친 종교인들이랑 접선해서 무기상을 연결해주겠니."
"사람 새끼라니까요."
"안승환 그 작자가 채운 목줄이 답답하면서. 너도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잖니."
분명 서휘의 속을 읽는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속내를 읽히는 것만 같았다.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스스로의 행동이 모순적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결 선생님을 압박하여 그 속내를 들어버리고, 어떻게 무너질지에 대한 계획도 세운 주제에 지금은 하나 일을 마쳤다고 겁에 질렸다.
"실은 알고 있으면서."
머리의 피가 모조리 식는 것 같았다. 태오는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머리 속이 백지처럼 단숨에 새하얘지고, 이 다음에 벌어진 일을 태오조차 알지 못했다. 단차가 있는 소파에 앉은 태오와 달리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던 서휘는 태오의 행동에 짧은 웃음을 뱉었다.
"태오야."
"……."
"역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으로 하여금 행복해지면 안돼……."
뺨을 스치는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에서 여러 감정이 느껴진다. 환희와 순수한 호의,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희열까지. 손에 뺨을 맡기며 태오는 눈을 반개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나는 숨결 사이로 당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수벽의 경계에서도 모든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신의 속내를 입 바깥으로 듣고 싶지 않아 이리 저지른다.
"그렇다고 불행해져서도 안돼. 그래, 타인을 통한 게 아니라 직접 쥐어야지, 행복도 불행도. 우리는 지나치게 오만하니, 결국 그럴 수밖에 없을 삶인게야. 그렇지?"
"……."
"그러니 숨 쉬는 게 좋을 게야."
삶에서 낙조의 스밈이 막을 내리고, 몰각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망막에 비친 해가 지지 않는 것 같다. 새빨갛고 균열이 일어난 태양이. 시야가 명멸한다. 눈이 멀 것 같은 기분에 눈을 감았으나, 떠있는 해가 사라질 일은 없으리라.
태오는 결국 바들바들 떨리는 숨을 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날, 화장실에서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먹은 것이었을 덩어리가 쏟아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 흘렀다. 두 번째로는 속이라도 진정시키고자 마셨던 물이었다. 먹은 그대로 다시 목을 타고 울컥거리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세 번째는 빈속이었다. 네 번째는 빈속이었고, 다섯 번째도 빈속이었으며, 여섯, 일곱…… 모르겠다. 태오는 아예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으레 보이던 증세였다. 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자주 이랬지만 한 번 다녀오면 노이즈에 가려진 덕분에 사람들이 안색을 보지 못해 모를 뿐이다.
"……."
담즙까지 쏟아내 이젠 나올 것도 없다. 지친 나머지 차마 입에 고인 희멀건 위액을 뱉어낼 수 없어 그대로 뚝뚝 흘려내기를 택했다. 반쯤 감은 눈과 함께 태오는 생각했다. *발. 지금 상황에서는 걸쭉한 욕설 빼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발, 이 *같은 몸뚱이. 단 한 번도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도 엿 같은데, 몸도 단 한 번을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가 없으니 속이 다시금 뒤집히려는 것 같다. 아니, 뒤집혔다. 태오는 부들거리며 다시금 토했다. 시큼한 위액 때문에 목이 헐어버린 것 같았다.
저질렀다. 저지르고 말았다. 나리와의 접선을 끝낸 솔리스의 신도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데 마레를 뒤집어엎었다. 다른 신도를 앞세운 호버 택시 한 대가 데 마레로 돌진했고, 이 과정에서 연구원 셋이 다치고 한 명이 중태에 빠졌다. 신도는 이후 연구소에서 자폭했다. 단단한 얼음으로 벽을 세운 스카디 덕분에 인명피해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과호흡 증세를 일으키다 쓰러진 이후 사람만 보면 비명을 지르고 숨는 통에 독방에 옮겨졌다. 2학구에서 벌어진 호버 테러는 다시금 인첨공 최악의 테러 단체였던 솔리스의 악명을 상기시키기 충분했고, 당시 피해자 신분으로 연루되었던 데 마레가 어떻게든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막았던 이야기가 끌려 올라왔다.
"*발…."
연구자금과 기밀을 빼앗겼다더라. 데 마레가 피해자긴 했지만 부소장 자리를 노리던 연구원인 윤 씨의 행동을 정말 몰랐겠는가, 인첨공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꼬리를 자른 것은 아닌가……. 근거와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소문은 퍼지기 시작했고, 데 마레는 한시적으로 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대외적으로는 나날이 들이닥치는 기자를 막기 위함이라지만 2학구의 사람들은 알았다. 악재와 악재를 거듭한 탓이었다. 경호원 아스트라페는 혼수상태며, 희야는 폐쇄병동의 독방에 있고, 승환이 이 모든 것을 떠안기엔 지나치게 큰 심적 부담이 있었을 테니, 그간 데 마레가 쌓아온 선행과 미덕 덕분에 이미지의 손실은 없지만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떠드는 것을 좋아하니 아마 잠잠해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누구도 그 뒤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고. 아마 누군가 양심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평생 모르겠지. 태오는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색색거리는 숨을 뒤로 얼마 안 있어 태오는 다시금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토했다.
"윽, 으-"
내 탓이 아니다. 이는 업보다, 모든 재앙은 자신이 한 걸음씩 내딛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 아닌가? 나는 그들과 걷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업보다. 나는 그저 살짝 떠밀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결백하다. 속내를 방금 읽었는데 실로 결백하다 느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참을 수 없는…….
"우욱-"
더는 생각할 기력도 없다. 희멀건 위액이 다시금 쏟아졌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눈에 고인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떨었다.
"일반적으로 해당 환자의 면회는 금지인데, 그래도 레벨 4에다, 저지먼트니까요…… 이번만입니다. 아시겠죠?"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받아 1인 병실로 이동했다. 폐쇄병동에서 그나마 빠르게 안정을 찾은 희야는 이제 박 교수의 병원 1인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 대하는 걸 두려워하며 비명을 지르지만 무작정 공격하는 단계에서 많이 낮아진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아 희야의 몸이 성치 않았던 탓도 있다. 태오는 병실에 도착해 눈치를 보는 간호사를 향해 이제 들어가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고, 간호사는 노크를 하며 기다리다 대답이 들어오자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병문안을 왔는데요……."
"……사람?"
"네, 환자분 친구라고 하시는데, 괜찮을까요?"
"누구?"
태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희야는 새하얀 눈을 홉뜨더니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다 태오에게 호출 버튼을 알려준 것을 되새기며 자리를 떴다. 병실 문이 닫히고, 태오는 망설임 없이 희야에게 다가가 의자를 끌어오더니 자리에 툭 앉았다.
"네가 무슨 낯으로 왔나요."
"왜, 오면 안 돼요?"
"네가 벌인 일이잖아. 이 개*끼야."
"네 그걸…… 어찌 확신할까요."
태오는 희야의 눈을 마주했다. 눈을 마주치는 걸 전혀 꺼리지 않는 것은 자신도 동일한 눈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마주했을 때 읽어낸 희야의 속은 놀랄만큼 차분했고, 확신이 있었다. 방 온도가 삽시간에 내려가고, 태오는 살얼음이 끼는 손을 보며 눈을 흘겼다.
"너 아니면 누가 해?"
"미안하지만 손 뻗을 자는 널렸지요."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요. 어떻게 그때처럼 호버를 몰고 왔냐고. 기술력도 없을 텐데, 네 손이 닿았노라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아니, 이상했어. 어째서 내 개가 아직까지 사경을 헤매는지, 그 이후에 이런 일이 터지는지. 너 아니면 누가 하냐고!"
"……희야야."
역정을 내던 희야는 태오의 부름에 눈을 부릅 떴다. 왜. 어린 목소리 치고 살벌하던 기색에도 태오는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혜우 안 건드렸어.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
"그게 여기서 왜 나와."
"남이라고. 내가 왜 너희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말을 해야 하나?"
태오는 눈을 휘었다.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희야는 첨예한 고드름으로 막아세우려 했으나, 정작 손찌검은 없었다.
"안희야, 결국 너도 다른 인간과 같아요."
"하?"
"내가 과거를 청산했다 말해도 믿지 않는 주제에, 네 과거가 청산될 거라 믿나요? 그 고매하신 솔리스의 단장이?"
손으로 입을 곱게 가린 태오의 입매가 휘었다. 흔들리는구나. 그 모든 것이 숨결로 느껴졌다.
"경이로운 자니 기적의 아이니, 만인이 떠받드는 선지자는 무슨……. 남에게 한 큐빗의 시야를 가졌노라 떠든 주제에 결국 시야 좁은 것은 너였구나 싶어요. 세상을 부정하며 네 책임을 남에게 덮기 급급하니 내 도움을 주러 왔으나 필요가 없겠어."
"……그럼 네가 아니면, 누군데?"
"……."
"누구냐고."
태오는 눈을 내리 깔았다.
"누구냐고!!"
"추측일 뿐이에요."
"말해. 추측이라도 좋으니까 네 결백을 증명해."
"……최근 4학구에… 네 곁에 있던 그 녹색머리 남자가 자주 드나들던데요."
"스트레인지 사건을 조사한다고 했어."
"……윤찬혁 그 사람이 4학구에서 멀쩡히 활동중인 건 알고요?"
"뭐?"
"스트레인지에서, 불법 커리큘럼으로 먹고 산다고……."
뱀은 본디 아가리를 벌리면 두 갈래로 분열된 혀를 내밀어 제 간교함을 증명하는 법.
"…그리고 안티스킬 하나를 매수했다는 소문이 스트레인지에 파다해요."
"나가."
"……내가 추측일 뿐이라 했잖아."
"나가!! 내 개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네 말 안 믿어, 안 믿어, 희야는 절대 안 믿어……."
"실로 안타깝지요."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희야는 태오가 문을 나서기도 전에 대성통곡을 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그 모습을 잠시 훑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감정이 제법 빨리 돌아왔네. 데 마레 탓인가."
태오는 그 속에서 분열의 싹이 텄음을 알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일 터다.
"마레가 어떻게든 하겠지."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 보호
- 나는 네가 그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뛰쳐들지 않길 바란다.
네가 뛰쳐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지나치게 고통 받아오며 살아왔다. 네 상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고, 이 세상이 네게 손아귀를 뻗지 않기 위해서는 너를 온실에 두어 애지중지 키울 필요가 있다.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하나, 둘, 셋, 넷, 거기에서 스탭 밟고, 골반 신경 쓰고. 태오는 가이드에 맞춰 다시금 춤선을 점검했다. 춤이란 것을 춰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서 강제하는 피나는 노력과 채영의 갈아먹는 듯한 1:1 레슨은 태오를 무대에 세울 정도로 만들긴 했다. 그래, 갈아먹는 듯한 1:1 레슨……. 태오는 마침 또 신나게 거울 앞에서 인권을 빼앗긴 채 갈리고 있었다.
이런 운동은 헤이커로 링피트 했을 때 빼곤 없는 것 같은데! 태오는 틀어올린 머리를 뒤로 후,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방범 부저가 달린 개구리에게 넘어가서 나는……. 다시금 음악이 들리고, 태오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젠 음악에 맞춰 몸이 저절로 움직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셔츠 사이로 손을 넣었을 적, 누군가 연습실 문을 두드린다. 음악이 멈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민 댄스부 후배가 태오가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확인하고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오빠, 잠깐 시간 있어요……?"
"있답니다."
"그, 연구원 선생님이 오셨거든요. 오빠 만나러 왔대요."
문이 온전히 열렸고, 그 뒤에서 한결은 부드럽게 눈을 휘었을 뿐이다. 한결의 손에는 댄스부 부원들을 위한 간식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고, 나눠먹으라는 듯 후배에게 그걸 건네주며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 방해했나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 5분 정도만 시간을 내줬으면 해요.
"…커리큘럼 관련한 용무입니까?"
- 네. 태오 학생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고자 해서요.
한결이 손을 움직이는 걸 보며 후배는 간식을 안고 주변 부원들에게 나눠주면서도 신기한 듯 시선을 자꾸 힐끔거렸다. 커리큘럼 하면서 들었는데 텔레파시 연구원 중에 말을 못 하는 분이 계신다던데, 그게 저 사람이구나. 그것보다 태오 선배는 한결의 손짓을 다 이해하고 있으니 새삼 신기했던 탓이다. 태오는 땀을 닦으며 후, 하고 짧게 숨을 고르더니 거울 앞에 놓인 생수병을 따 목을 축이고는 손을 움직였다.
-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제 제안이 퍽 흥미로우셨을 텐데도요.
- ……데 마레에서 논의가 끝난 상황이라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미안해요.
- 데 마레에서?
- 네. 테러가 벌어졌어도 학생을 위해 일해야 하니까요.
한결의 시선이 태오의 행동에 얌전히 꽂혔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도, 손을 움직여 자신과 수화를 하는 것도. 한결은 지난 세월 동안 오래 방황했고, 마침내 어느 정도 수긍의 길을 밟고자 했다. 그래, 커리큘럼을 받던 중 자신은 태연하게 얘기하고 있다 생각하나 몸은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을 때면 안아주며 달래주고 싶었다. 그리고 직업 윤리가 한결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 상담사와 내담자에게 있는 선을 넘으려 들다니, 미련한 짓이다. 하물며 지금까지 받아온 마음의 상처를 헤아릴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은 내담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공감한 나머지 유대감이 생긴 것이지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오가 기억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문제와 함께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제게 연락을 할 적이면 몇 번이고 그 사실을 상기했다. 뛰쳐가서 달래주고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어주다 먼저 끊거나 잠드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잠은 모두 깨버렸으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 그러니, 이제 다 괜찮을 거예요. 고통 받지 않을 테니까요. 평생.
그렇지만 이젠 아니다. 여기는 결국 인첨공이다. 도덕은 귀여운 사치품으로 거듭나는 곳. 직업 윤리를 이미 깨버렸기에 존재하는 거대한 도시. 그런 끔찍한 것들과 비교하자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는, 이 정도는 정당한 일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통보까지 마친 한결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태오는 그런 모습에 페트병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기더니, 한결의 지척에서 고개를 올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한결의 덩치에도 태오는 가만히 눈을 반개한 채 침묵을 유지하다, 대뜸 한결의 연구원증을 움켜쥐고 아래로 쭉 당겼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태오와 강제로 시선을 마주친 한결은 눈을 휘었다.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선생님. 감정에 휘둘리시면 아니 될 일이지요."
한결의 눈이 태오의 시선을 온통 삼켜버릴 듯 새까맣다.
태오는 한결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챌 수 없었다. 뭔가 읽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한결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어쩌면 제 무의식이 상황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스스로 지운 것일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을.
폭풍의 눈은 늘 잠잠한 법이다.
- 깨달음 - 한결
- 시작은 조언이었다.
전임자가 길길이 날뛰며 당신도 그 악독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에게 당하지 말라며 뼈에 사무친 조언을 건네고, 몇 년 만에 다시 재회한 형이 네가 정말 연구원의 길을 제대로 걷고 싶다면 그런 말썽 많은 애들에게도 소홀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위로했을 적엔 꽤 걱정했다. 커리큘럼을 진행하는 목화고 연구원 커뮤니티에서도 제법 유명한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 학생은 문제아가 아니었다. 커리큘럼을 꺼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과묵하고, 정중하되, 배려심이 있었다. 싫은 모습을 보였지만 커리큘럼엔 늘 진심으로 임했다. 고분고분 커리큘럼에 따르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낼 적에는 누군가의 속내를 읽고 제멋대로 휘두른다던 전임자의 말과 달리 상처받은 몸을 드러내기 보다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 작은 학생에 불과했다.
스스로에게도 벽을 쌓고, 자신의 삶도 타인처럼 멀리 보며, 가시를 세울 힘마저 없어 세상의 거친 파도를 순응하며 휩쓸리는 가여운 아이. 큰 상처를 받고 이미 타고 남은 잿더미를 사람들은 조금만 파헤쳐 보고 기침을 하다 멋대로 악독한 것이라 판단하고 결단 지은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학생을 위하겠노라 다짐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지나치게 깊은 내담자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동시에 이 학생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어쩌다 이런 상처를 얻은 걸까. 그렇게 소장님께 학생에 대해 보고를 올리는 날 넌지시 물었고, 소장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옮긴 연구소에서 문제가 생겨 행방불명 되었던 아이라고. 그는 인첨공의 부조리하고 끔찍한 실체 때문임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인첨공의 어두운 곳에서 고통받던 아이. 언제부터 그 마음의 문을 닫았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나,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었음은 누구라도 잘 알았기에 시선이 계속해서 닿을 수밖에 없었다.
작게는 작품을 만들 때 드러내는 내면이나, 크게는 그 손짓, 이야기를 할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 상처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시선……. 잔잔하게 이야기를 꺼낼 적엔 메마른 입술을 한 번 달싹이고 그 끝에서 입술을 축이는 버릇이 있었고, 고민을 할 적에는 손가락을 들어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는 버릇이, 웃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맥이 빠지는 숨소리에서는 꼭 숨을 갈무리하는 버릇까지. 어느 순간부터인지 학생에게 집중했고, 서로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이 학생이 언젠가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고 내려두는 날이면 어떻게 될까, 저 잔잔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 어떨까. 괴로웠던 순간을 괴로웠노라 얘기하며 그 상처를 훌훌 털어내면 어떨까.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인첨공의 악의는 빛을 갈망하는 학생을 향했다. 저지먼트를 향한 시련이 계속되고,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어째서 학생이 행복해질 수 없게 두는 거지, 어째서? 그리고 학생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전화를 건 순간, 한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빠졌다.
누군가를 갈망하면서, 드러낼 수 없으니 몽중의 자아가 대신할 정도로 망가졌구나. 그는 그날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신 있지도 않은 신에게 손을 모아 기도했다. 밤을 온통 새운 다음 날, 학생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죄 자르며 자해를 했으며 그 상황을 제 형이 발견했으니 어서 와서 수습을 도와달란 연락을 받았을 적, 그는 신을 향해 끔찍한 욕을 속으로 담아내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학생의 꼴은 엉망이었고, 병원에서 창백한 안색과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지켜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 악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죄다 치워버리고 싶다. 고통받는 학생의 앞길을 방해하는 저것들을 다……. 동생이라고 알려진 존재 덕분에 그는 한 차례의 균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 또한 학생이 제 입으로 시인했다. 그런 일을 만들 것이라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는 학생의 기둥이 되어주고 싶었다. 가느다란 손이 떨리면 잡아주고, 실컷 울고 난 후에는 얼굴을 닦아주고, 두려움에 몸을 떨면 안아주며 안정을 주고 싶었다. 꿈을 꾸게 만들고 싶다. 보호하고 싶다. 저 얼굴이 웃는 것을 보고 싶다. 고통받지 않게 하고 싶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을 적 옆에서 함께 걷고 싶다. 죽음을 꿈꾸는 저 아이의 죽음을 훼방놓고 싶다. 저 캔버스에 그리는 작품이 나였으면 한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아름답노라 속삭이고 싶다. 이따금 이유 없이 안으면 마주 안기를 소망한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울부짖으며 누구보다 나를 먼저 찾길 바란다. 매달려서 울기를 소망한다. 모두 털어놓기를, 그렇게 주변의 방해물을 모조리 치우는 명분을 얻고 싶다. 괴롭히는 모든 것을 밀어버리는 동안 그 눈을 가려주고 싶다. 귀를 막아주고 싶다. 누구도 괴롭힐 수 없게끔 영영 품에 가두고 싶─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거슬리게 굴면 치우는 방법이 뭐였더라?
악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널 지키려면 나 또한 악의를 품는 수밖에 없어서. 그것을 내 아버지와 형은 일찍이도 깨달았구나.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그는 동공과 홍채를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물든 눈으로, 성하제의 카페에서 태오에게 벌어진 상황을 담았다.
……그러니, 이젠 내 차례인 모양이다.
- 봄을 깨닫다
- 성하제로 인해 안 그래도 시끌벅적한 인첨공이 한층 더 왁자지껄하다. 태오는 그 소란 속에서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학교를 빠져나와 인근 골목으로 들어섰다.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태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태오야."
아담한 체구에, 앙칼진 듯하지만 사랑스러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태오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태오의 어머니인 화영이다. 태오는 손에 딸려온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으며 온전히 뒤로 돌았다.
"저녁에 얘기할 텐데,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그랬단다. 그때 얘기하지 못한 것도 있고."
태오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제 어머니와 똑같은 자세였고, 두 사람의 인상이 비슷했던 탓에 누군가 지나치다 보면 모자관계구나 쉬이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
화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장장 13년 만이다. 남편과 사랑의 도피를 했으나 결국 궁지에 몰렸을 때, 아버님께서는 태오를 인첨공에 보내는 조건으로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남편과 화영이 기를 써서라도 반대했다. 그렇지만 예정된 거래의 파기 및 주가의 폭락, 기업의 이미지 훼손이 심하게 벌어졌던 책임을 묻고 더는 오갈 수 없을 만큼 몰려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부부는 눈물을 삼키며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매년 찾아오기로 했으나 회장, 그러니까 시아버님은 인첨공에서 태오의 존재가 드러나면 안 된다며 그마저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15년 중 2년만 제 아들을 볼 수 있었고, 13년을 끔찍한 죄책감과 걱정에 매달려 살았다.
"……."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네 할아버지 때문에 만나지 못했단다? 보고 싶었단다? 다시 만나고 싶었단다?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해도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 닿기나 할까? 화영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태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더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태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화영을 보며 선을 그었다.
"돌아오지 못하실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태오야."
"인첨공에서는 초능력을 개발 받는다고들 하지요. 저도 커리큘럼 때문에 이렇게 머리랑 눈이 변한 거고요."
"……."
"저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 대다수는 능력이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 운 좋게도…… 상위에 드는 존재가 됐으니까요."
화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미 여섯 살 때, 저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할아버지 때문에 지킬 수 없겠구나 깨달았습니다. 제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태영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 인정받는다는 것도요."
"태, 태오야."
태오는 화영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역하지요. 타인의 생각이나 읽으면서, 어머니께 진작 말씀드리지 못했다는 게." 이미 잔뜩 울상이 된 화영의 눈을 잠시 마주하던 태오는 느릿하게 걸어와 화영을 품에 안았다. 아담한 체구가 품에 온전히 들어온다. 한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적에는 마주 안고 싶어도 팔이 닿지 않아 한참을 바둥거렸는데, 지금의 자신은 장성하여 팔이 닿고 어머니를 이리도 쉽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고 덧없다. 한철 지나가는 삶의 흐름이 야속하다.
"그렇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인첨공에 오게 된 것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약속도 못 지키고……."
"……괜찮습니다."
화영은 화장이 번지든 말든 소리 내어 울었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에서 화영은 하염없이 울면서도, 불안하던 예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품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야 만났는데, 보내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13년 동안의 세월 속에서 홀로 서 떠날 준비를 마쳐버렸구나. 아이의 결심이다. 자신의 죄다.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보내주자고.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제 아이를 이대로 보내버리는 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오는 등을 한 번 더 다독였다.
"지금까지 책임의 짐을 짊어지셨으니 내려두셔도 됩니다. ……두 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며 화영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손수건으로 눈물자국을 쿡쿡 닦던 화영은 돌아가 남편에게도 말해 고이 보내주자고 생각했다. 동시에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머뭇거리다 입을 벌렸다.
"……학교생활은, 어떠니?"
"나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원수죠."
"다행이구나... 그리고……."
"네."
"아까, 그 사람은……."
태오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 감히 나 같은 것이 이름 석 자 입에 올리는 것이 천인공노할 행위일 나의 어머니. 저는 떠납니다. 먼 곳으로 떠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이라는 둥지에서 떠나고,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납니다. 나는 혼과 백으로 이루어진 보따리를 들고 작은 쪽배 타며 명의 길인 해로海路와 운의 길인 너울을 타고 종착지인 섬에 도달할 겁니다.
"……."
"네게 봄이 찾아왔구나. 그렇지?"
그곳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의 수많은 별과 같던 벗과 꿈, 동생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와 나만이 있습니다. 종착지라기엔 휑하지만 나의 마음은 편할 테니, 이것을 나는 낙원이라 칭하였습니다.
"예. 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아, 어머니! 봄은 덧없습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가 봄날의 꽃을 만개해 봤자 하루 만에 질 것을 나는 압디다.
"행복해야 한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예."
부디 그 사실은 어머니께서 모르셨으면 합니다.
- 실종과 균열
- 태오는 눈을 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던 탓도 있으나 누군가 계속 연락을 보낸 잠이 깼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있어도 계속 보낼 사람은 없었기에 부스스 일어난 태오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저지먼트 단톡방 알림을 꺼버린 지 오래지만, 개인 알림은 미처 끄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 서성운 약 2통 남짓, 안희야 7통, 저지먼트 톡방 메시지 약 30개, 안희야 개인 카톡 50개……. 그냥 읽음 처리를 해버릴까 싶었던 태오는 희야의 개인 카톡을 눌러보기로 했다.
<{너 당장 마레로 와}
<{혜우가 실종됐다는데 계속 씹어?}
<{어디야}
<{어디냐고}
<{대답하라고 씨*}
<{너지}
<{왜 안 받아}
<{너지?}
머리에서 피가 식는다.
문 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2학구는 끔찍하게 여겨 발도 들이지 않는 곳이다. 역겨운 곳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던 태오가 데 마레에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태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급히 걸친 점퍼는 계절에 맞지 못했고, 머리는 뛰어왔는지 바람결에 엉망이 됐다. 식은땀과 함께 경호 인력을 밀치듯 들어온 태오는 입구 근처 라운지에서 희야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계속하다 고개를 번쩍 드는 것을 마주했다.
"소장님은."
"……영락."
"……인사는 못 드릴 것 같군요."
"누가 인사가 필요하대요? 이 상황에서?"
희야는 황당하다는 듯 핸드폰을 내팽개쳤다. 혜우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 메시지가 떴고, 삐 소리가 나며 녹음을 시작했다.
"너 솔직히 말해요, 연락 안 받고 뭐 했어?"
"피로하여서 눈 붙였어요."
"장난하지 말고, 또 스트레인지 다녀왔어요?"
"기실이에요. 카페 일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씻고 눈 붙였-"
"네 짓은 아니고?"
"뭐?"
"네가 하던 일이 그거였잖아, 누구 데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아니라고 해도, 돌아가는 길에 배웅이라도 해줄 수 있잖아, 그렇잖아! 같이 일을 해놓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못 느꼈어요? 너 감 좋잖아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서성운 걔가 어련히 같이 갔을 거라 믿었지."
"성운이가 아니더라도 연락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지금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정신 좀 차ㄹ-"
"그럴 사람이 아니면 왜 가족이라고 해? 데 마레 출신인 것도 부정하면서!"
안다. 희야는 단순히 탓할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 투정을 잘못된 방법으로 부리는 것이다. 태오는 그 사실을 이해한다. 희야는 자아를 찾는 동안, 어린 시절을 투영하며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동시에 부정했다. 희야는 별생각 없이 탓할만한, 필요한 악을 찾았겠으나 태오는 자기 자신을 필요한 악으로 삼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탓함 당할 만한 악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 이후로는 악한 자로 남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희야가 소리를 높이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고, 지나치는 연구원 중에서는 한결도 있었다.
"……."
"혜우가, 혜우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그러면서 지금 상황에서 잠이나 잤다고 하고- 네가 진짜 가족은 맞아?! 지금이라도 같이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올 때 전화는 해봤어요? 아니면 부실 카톡은 확인했어요? 아니면, 아니면- 적어도- 으, 으윽-"
하물며 제 동생이 사라졌다는데, 그것이 자신의 탓이노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 태오는 입을 벌리려다 다물었다. 네게만 가족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도 찾겠다, 돕겠다, 나는……. 내가 그럴 자격이 어디 있다고? 연락도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날 보아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나를. 아무리 투정이라 한들 현실이 내포됐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탓할 사람을 찾지만 서로가 아니라 나를 집지 않던가. 내가 그리도 어리석다고 말해주지 않는가. 겉치레에 불과함을 깨닫게 하지 않던가. 결국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2학구의 유일했던 안식처도, 이 바깥 또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네 말이 옳아요."
"그러면 너-"
"가족이 아니지. 그 사실을 진작 말했어야 하는데."
"현태오!!!"
태오는 형용하기 어려운 눈으로 희야를 마주하더니 자리를 휙 떠났다. 희야는 태오를 붙잡으려다가도,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자 씩씩대던 것을 천천히 줄여가더니 이내,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홉떴다.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희야가 말하고 싶었던 건."
- 제가 해결할게요. 혜우 학생을 찾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세요.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태오는 이미 건물을 빠져나간지 오래였다.
태오는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핸드폰의 모든 연락을 확인했다. 다들 어떻게든 찾겠다며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레벨이 낮든 높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태오의 표정은 점차 차갑게 굳어갔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았으니까. 성운이 보낸 메시지와 영상까지 확인한 태오는 골목 초입에서 멈추더니,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난 무얼 할 수 있지? 뭘 할 자격은 있나? 태오는 손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덮어 가렸다. 그리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 얼굴을, 이 뻔뻔한 인두겁을 뜯어버리고 싶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않는 제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악한 자로 남으라며 세상이 등을 떠밀기만 한다. 하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지금껏 피하기만 했다.
"……."
태오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곱씹어 보니 나는 그간 대못만 박았지 아니한가. 안일하게 떠맡기지 않았나. 그래놓고 아직도 고민만 하고 있으니 이런 자신이 새삼 우습다. 심호흡 한 번에 부정적인 온갖 생각들이 치고 올라온다. 종착지는 차라리 올라오지 말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다. 스트레인지에서 일했던 순간을 그리워할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내가 순응했어야 하는데. 어찌 되었든 내 인생은 내리막길임이 뻔했는데, 무엇하겠다고 내 죄를 피하고자 그런 도박을 해서, 내 운명을 걸었을까. 도박의 말로는 거듭되는 끔찍한 패퇴뿐인데.
누군가 근처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에도 태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무상하다. 언젠가는 흐려지고, 역사에 각인되는 자는 따로 존재하나 그것이 나는 아니다. 타인이 나로 인해 불행해진다면, 내가 떠나는 게 옳다. 째깍, 하고 멈춘 시간과 결심이 움직인다. 음중이 가고 잿빛 도심에 설국이 도래하는 날, 아니, 차라리 지금……. 모두 포기해버리자. 어차피 될 일 없으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돌아가서…….
"……."
- 찮, 아요. 괜찮아…….
태오는 품 속에 갇히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살갗을 찢는 것 같던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던 골목 속의 공기가 낯선 심상의 소리를 가진 누군가의 품의 온기 덕분에 사라진다. 태오는 시선을 올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결은 태오를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달래주려는 듯 연신 괜찮다 속삭였다.
대체 무엇이 괜찮다고?
동생이 사라졌다는데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는 주제에, 놀라지도 못하고 지금 이렇게 찾아다니려는 노력 하나 보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엇이 괜찮다고, 이 이기적인 모습이 대체 왜 위로를 받아야 하느냐고. 차라리 대성통곡을 하는 희야를 달래주지,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태오는 혀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여러 단어를 간신히 삼켰다.
"……."
몇 번이고 등을 토닥일 적, 태오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 너머로 드러난 초점을 잃은 눈은 골목 속 어둠만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자신을 안은 품의 심장의 박동이 익숙하다. 병실에서 느꼈던 것과 온전히 같고, 상황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것 같다. 그렇게, 한참 인형처럼 품에 가만히 안겨 침묵하던 태오는 나지막이 입을 벌렸다.
"…소유하고자 하면 불행할 뿐입니다. 저는 놓고자 하는데 어찌 미련을 가지십니까."
태오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개를 돌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달싹이는 입술의 모양을 읽었다.
- 불행이 있기에 행운이 있기 때문이에요.
"낙관적이군요."
- 제발 희망을 놓지 말아요.
"언제부터 희망이 있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태오는 시선을 피하듯 눈을 굴리며 한숨에 가까운 조소를 흘렸다.
"여기는 인첨공입니다."
- 희망이 있을 수도 있죠.
"어떻게 말입니까, 데 마레와 아니무스가 말하는 학생 친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법으로 내가 뭘 합니까. 어차피 나 하나 없어도 저지먼트가 알아서 할 텐데, 내가 희망 가져봤자 무엇 하냔 말입니다."
"……."
한결은 까만 눈을 마주했다.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시선을 뒤로, 한결은 태오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외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태오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한결의 대답을 듣지 못했으나,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바람과 스트레인지로 향하는 골목의 깊은 어둠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
세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 사람의 속내를 읽을 수 없다는 걸 통해 다시금 뼈저리게 일깨우는구나.
태오는 눈을 감았다.
3.1. 《극야의 서》 ¶
극중소설 극야의 서 시리즈의 일부 내용 및, 캐릭터들이 풀어나가는 떡밥 모음.
전개는 시점 상관 없이, 소설 전개의 흐름대로 기술
- 죽은 자의 심장
- 죽은 자의 심장
원래 비워져있어야 옳을 클라우드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폴더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자의 심장, 깊은 불신, 아름다운 유작……. 클라우드에 자리한 불청객만으로도 불안감이 드는 것이 사람 심리지만, 이런 제목까지 있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이 알았더라먼 찜찜해서라도 읽지 않고 삭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속내를 들여다 보았다.
3학구 스트레인지의 상세한 지도는 어디에 어떤 스킬아웃이 있는지, 어느 경로에 지름길이 있는지 적혀있었거니와 장부는 절대 정상적인 것이 기록되지 않았다. 실탄, 총, 약물……. 안티스킬에게 넘기면 훌륭한 공적을 세워 당장 스카웃 제의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것이었으니.
H: 2xxx.12.05, 담당 연구원 H. 새벽 2시 집도 완료.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소체 코드 '필리'의 뇌세척을 오늘도 성황리에 마무리. 후속 작업은 소체 임시 코드 '나비'에게 위임하기로 했으나 '나비'의 이상 반응으로 연구원 C에게 위임함.
(잠시간의 정적)
H: '나비'의 이상 반응이 정화 작업 이후 발현된 것 같은데, 조만간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녹취록의 내용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텍스트 파일은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 아무리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뇌사자로 판명이 났다지만 한 시간 전에는 분명 숨을 쉬었다. 꿈을 꾸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수술실처럼 당신이 껍질만 남았을 때, 나는 당신의 가죽을 직접 꿰맬 사람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불 꺼진 병원을 돌아다녀도 사람이 없어 결국 직접 손을 대야만 했지만. 나는 당신을 꿰매며 깨달았다. 외로운 마지막을 배웅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과, 그 사실이 제법 참담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나는 텅 빈 수술실에서 울었다. 안구도 적출되어 눈두덩이 움푹 파인 가죽이라고 해도, 당신의 감긴 눈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 어째서 평온하게 갔는가! 차라리 고통에 표정이라도 일그러뜨렸더라면, 그 사람들이 당신을 이 꼴로 만든 걸 미안해 하기라도 했을 텐데!
아니, 섬뜩한 내용이라면 모를까.
태오는 핸드폰이 울리자 손목을 두드렸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미지와 나 코마야. 라는 단어를 보더니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입에 물었다. 실내에서는 흡연을 할 수 없으니 막대 과자라도 물고 싶었던 탓이다.
[음… 설마 내가 그런 어두운 곳까지 발을 담갔을까요.}>
[그렇다고 설마 내가 남의 손목을 짓이겨서 중고 칩을 가져와 이식할 사람도 아닐 테고.}>
태오는 어느 날을 떠올렸다. 손목은 생각보다 잘 부러지지 않는다.
[예전에, 좋은 정보가 있으면 쓸어와서 비축했는데 그걸 찾은 것 같네요.}>
[축하해요, 쓸 곳은 없겠지만.}>
[이스터에그 맞아요.}>
실로 태평한 소리와 함께 태오는 막대 과자를 짓씹었다. 어떠한 마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다른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령 별이 자리를 잡고자 거대한 꼬리와 함께 추락하는…….
똑.
과자가 잇새에서 부러졌다.
- 죽은 자의 심장 - Behind
- 아마, 당신이 클라우드를 조금 더 뒤져봤을 때, 숨김 파일 보기를 클릭하고 수상한 이름의 파일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Deal
무엇을?
20xx년 7월 23일.*
이명 '콜'(이하 소나키네시스 레벨 4 능력자, ■■중학교 1학년 배선욱)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은 재단 소속의 열등생(이하 하이드로키네시스 레벨 0 능력자, ■■중학교 1학년 유이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선동 및 조작 작업 완료.
작업에 사용한 스트레인지의 정보 조작 단체는 증거인멸을 위해 2학구로 인계 후 표본 보존처리 작업을 완료함. 표본 또한 확인. 4학구 의학 발전 박물관에 기증 및 전시될 예정.
예정대로 열등생-엘리트 간의 갈등, 양극화를 부추긴 뒤 재단 소속에게 불이익을 줄 연구원 매수 작업 진행중. 긍정적 전망.
작업이 완료되면 필리 데 솔리스의 이사와 접선할 것.
쭉정이를 거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다.
- 지금으로부터 5년 전.
혜성아.=}>
[파일 하나만 지워줄래요?}>
[내가 예전에 주웠던 정보 하나가 꽤 큰 거라서.}>
[읽지 말고 바로 지워줘요.}>
[만약 읽었다면 허튼 생각 말고 손 떼.}>
[이렇게 말해도 행동할 걸 알지만, 이번엔 진짜 곤란해서요.}>
[부탁할게요.}>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래.
아무것도 몰라줄 거지?
*
20xx년 8월 7일.
재단 소속 차일드 에러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동을 목격. 긍정적 전망. 온전히 양성될 소체를 '필리*'로 명명.
필리 데 솔리스의 이사와 접선 완료, 협상 자리에 '코튼' 동석. 현 상황에서 솔리스의 계획을 온전히 실행할 조건 충족 및 필리에게 진행되던 커리큘럼 자료를 공유로 하여금 신뢰 형성.
*필리: 오래 전부터 선별된 소체. 데 마레 소속. 뇌세척 작업으로 교단의 행동이 옳다 믿게 만든 것과 더불어 '금색'으로 하여금 상징물로 쓸 수 있음.
*이전 필리는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 연구에 지장 없음.
이명 '콜'(이하 소나키네시스 레벨 4 능력자, ■■중학교 1학년 배선욱)의 살해 계획 수립 완료. 행동에 필요한 스킬아웃 매수 완료.
살해 이후의 행보는 필리 데 솔리스의 이사에게 전적으로 위임.
모든 것은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다.
태오는 해당 정보를 데 마레에 차마 넘길 수 없었다.
이걸 넘기는 순간 모든 판도가 뒤집히고,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리고 묻겠지. 이 정보를 대체 어디서 났냐고!
그랬다간 레이브의 삶이 끝장이 난다.
내 유일무이한, 자유로운 정체성이.
나의 삶과 숨이…….
이 이기적인 놈!
태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늘 빼앗기고 다니던 삶인데, 이 정도는 이기적이어도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내가 이런 걸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지 않아도 언젠가 그 잘난 아스트라페 덕분에 모두가 알게 될 진실인데, 조금만 늦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어차피 끝난 일이잖아……."
그러니까 나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 지금으로부터 5년 전.
- 고결한 산제물
- 고결한 산제물
당신은 책을 펼쳤다. 책의 전개는 늘 그렇듯 범인의 시점에서 시작되다, 안티스킬 강력반 '극야'의 시점으로 옮겨진다. 극야의 주인공 2인조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사건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던 사회 초년생에서 노련하게 사건과 일상을 분리할 수 있는 하나의 안티스킬 대원으로 인정 받기 시작했고, 작가가 묘사하는 인첨공도 지금과는 다른 점이 사뭇 있었다. 작가가 집필을 시작한 시기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듯 '레이브'의 작품에 대해서도 짧은 언급이 나오고, 곧 인첨공 13주년이 다가온다는 언급도 적혀 있었다.
13주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던 극야 사람들에게 들어온 실종자가 시체가 되어 발견 됐다는 신고와 함께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막 난 시체가 학교 곳곳에 발견되고, 부검 결과 수상쩍은 표식이 피해자의 위장에서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아마 오래 굶은 나머지 자신의 옷이라도 뜯어먹은 듯하며, 아사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상태에서 끔찍한 고통을 받고 쇼크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듣는다.
범인을 찾기 위해 강력반 극야는 피해자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을 듣고 다녔다. 그리고 피해자가 '평소 행실이 불량하며 특정 학생을 괴롭혔으나, 반의 유일한 엘리트였기 때문에 선생들이 앞날을 위해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증언을 얻는다. 그리고 특정 학생을 수소문했으나, 학생은 이미 '모종의 사건'으로 죽은지 오래였다.
사건을 파헤치던 극야는 모종의 사건과 피해자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위장에서 발견된 특정한 표식이 새겨진 옷 조각과, 이미 죽은 학생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표식이 모 단체의 증표였다는 것. 해당 단체는 인첨공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던 연구 시설임과 더불어, 2학구의 비협조로 인해 수사에 난항을 겪는다.
그러나 사건은 점차 커지기 시작하고, 알 수 없는 집단 테러가 벌어저 사상자의 규모가 커지자 2학구는 협조에 나서며 연구 시설의 꼬리를 밟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사망을 좁혀갈 적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한 학생의 자수와 함께, 연구소에 대한 진상을 듣게 된다.
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사이비 종교가 있다는 것. 연구원들은 특정 존재를 신격화 하며,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벌이고 제물을 바친다는 핑계로 불법적인 커리큘럼을 일삼았고, 연구소는 '인첨공의 깨끗한 레벨체계'를 위함을 앞세웠다.
현장을 급습한 극야의 활약으로 사이비 종교는 몰락하고 13주년 행사에서 벌어질 테러를 저지했으나, '진짜 교주'의 도주와 신분 세탁을 모르는 극야의 강력반이 건배사를 외치며 찝찝한 마무리를 짓는다.
[─예수는 인간에게 말한다. 나의 어린 양아. 그렇지만 인간들은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다. 결국 인간 또한 제물이라는 암묵적인 표현을 그는 좋아했다. 눈앞에서 눈을 반쯤 까뒤집고 고통을 견디는 어린 양을 내려다 보며 그는 손을 모았다.
'오! 우리의 유일무이한 신이시여, 저 자의 고통을 보살피시고 기적을 내려주소서!'
물론 기적을 내리는 건 자신이다. 그는 마저 메스를 들었다. 그는 신이다. 유일무이하고, 고통을 보살피며, 제물을 선점할 권리를 가졌기에 누구보다 요란한 믿음을 누리는 신.]
[……극야는 잔을 요란하게 맞댔다. 서로의 잔에서 튄 내용물이 뒤섞이고, 이내 당연한 것이라는 듯 제각기 입을 대며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마치 요란한 믿음 탓에 진실된 신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던 그 순간처럼.]
……
[우여곡절 끝에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범죄 자문을 구할 때 친절하게 답해주신 S 반장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친절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세밀하게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부검 과정의 세세한 수정을 도맡아주신 K 박사님께도 감사를 표합니다. S 반장님과 함께 최근 사건의 부검 과정을 견학하게 해주신 점에 유익한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다음부터는 불에 탄 시체는 묘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로파일링 묘사를 도와주신 J씨 덕분에 조금 더 세밀한 감정 표현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2학구의 A 교수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교수님의 자문으로 현실성이 가미되어, 더욱 완벽한 작품이 되었노라 생각합니다.
출판사의 식구에게는 늘 감사를 전하지만, 이번에도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극야의 서를 읽어주시며 사랑해주시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출판사로 오는 편지와 선물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극 중 캐릭터의 팬클럽이 생기고, 코스프레 사진이나 각종 유명인의 작품 완독 인증샷을 보면 제 작품을 사랑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생각에 잠 이루지 못합니다.
다만 유념해주십시오. 아무리 매력적인 캐릭터라 하더라도 극중 캐릭터의 다수는 범죄자입니다. 픽션은 픽션으로 있어야만 아름다운 법이며, 현재 벌어지는 '극야의 서 챌린지'는 간곡히 중단하기를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