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
"Call me Ismael, 나의 이름은 이스마엘입니다. 꿈을 찾고자 여기 왔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부디 어떤 사람인지 말씀해주십시오!"
1.1. 외모 ¶
"아! 저 말입니까? 비밀입니다! 비밀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한다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니, 이걸로나마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 167cm?, 품이 큰 테크웨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백발(추정), 희망에 차며 밝은 목소리, 목에 달린…….
본디 페이스 재머를 달고 다니는 족속이라 함은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새다.
제복 차림이 아니라면 후드가 달린 점퍼에 편한 카고 팬츠나 조거 팬츠를 입고, 속은 목을 덮어 표식을 가리는 타이즈와 벨트 차림에, 좋지는 않지만 적어도 닳아 헤진 건 아닌 운동화를 신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낀다. 생 양아치 같은 녀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동네 생 양아치 처럼 면상짝이 갈려있거나 구겨져있느냐면 아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재머를 달았다고. 쉬이 말해 낯짝 볼 수 없단 뜻이다.
얼굴은 각종 삼원색으로 흩어져 노이즈만 지직대거나 간혹 이모티콘¹을 띄우곤 한다. 좋은 것 구하지는 못했는지 간혹 이지러지듯 웃는 입이 보이며 일자 단발로 뚝 잘린 흰 뒷머리가 보이곤 했다. 그것을 제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곱상한 편인지, 흉측한 편인지를 떠나 모든 것을. 그래도 얼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니 노이즈를 넘어서 만질 수는 있다.
추측할 단서라고는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아직도 성장기라 주장하는, 신발을 신은 키가 포함되어 167~8cm의 이도저도 아닌 키에, 체구를 특정하기 어려운 옷차림, 주변을 왜곡하는 저해장치의 특성상 오토튠이 섞여 이지러지는 목소리는 힘이 실려있으며 어조에 희망이 가득 들어차 양기에 가까웠으나, 남이 보기에는 신뢰를 주고싶지 않은 수준이었다.
¹) 《이어즈&이어즈》 - 베서니 라이언즈役 참고.
- 본모습
-
끝이 올라간 눈매는 긴 속눈썹 덕분인지 도도하기도 했고, 반쯤 내리깔 때면 유순하기도 했다. 긴 속눈썹 밑에 자리한 눈동자는 총기와 희망이 가득 들어차 마치 봄날 파릇하게 자라나는 새싹을 연상케 했다. 깊고 길게 팬 쌍커풀 위 가지런히 놓인 눈썹은 왼쪽이 유달리 두드러졌는데, 흉터 때문임이 여실하다. 눈꼬리에 가까워지던 호선은 툭 끊겨있고, 그 때문인지 유달리 흉터가 도드라졌으나 이 또한 매력으로 자리했다. 그 밑의 반듯한 콧날이나 도톰한 듯 다물릴 적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호쾌한 미소가 자리한 입술 등, 오밀조밀 자리잡은 이목구비 또렷한 매력 자랑했다.
다만 이는 표정 관리를 했을 적이지, 가만히 있을 적엔 매섭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상대를 응시하는 눈이 가히 맹수에 가까울 정도로.
1.2. 성격 ¶
"당신은 꿈이 있습니까? 나는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을 꿈을 찾아 헤메는 멍청이에 불과하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 삶을 찾고자 합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고, 숙명이자- 으읍응음?! 으브브브!"
─ (이후 듣다 못한 주변 사람에 의해 입이 막혔다.)
긍정적인, 말이 많은, 문학적인 어조, 편집적인, 이상을 쫓는, 쾌활한, 경험없이 미숙한, 어릿광대, 과장적인, 자유로운, 사랑하는.. 광적인 자.
- #떠돌이
- #문학적인 #오락가락
- #편집적인
- #천진난만 #미숙한
쉽게 보기 어려운 인품을 가졌다. 비록 경험이 없어 미숙하며, 어리숙하여 어릿광대와 같은 양상을 보일 뿐.
1.3. 세븐스 능력 ¶
사이코키네시스 |
"아직.. 나는 누군가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 서로 증오하고, 싸워야 하는 거죠?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사이코키네시스 |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 염력이라고도 칭한다. |
2. 기타 ¶
- 과거사는 비밀
- call me Ismael!
- 상식 부족과 일상의 어려움
- 술담배 경험 전무
- 막입
- 예! 잘 못 들었습니다!
- 흉터
- 소지품
- 비살생주의자
2.1. 관계 ¶
선관은 🍀표시
- PC
- 레레시아 나나리
"머리가 길어 곤란하던 찰나, 자르는 것을 도와주셨습니다. 머리가 더는 무겁지 않습니다, 그리고 깔끔합니다! 레샤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 레샤는 대단하신 분입니다!"
─ 첫 일상, 레레시아가 이스마엘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레레시아가 작은 장난을 쳤고, 앞으로도 칠 예정이지만 이스마엘은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다.
"아, 그러니까, 그게……. 잠버릇이 나빠서, 레시-를- 해칠뻔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초콜릿을 전해준 건 고맙지만, 그게, 저는 귀엽지도 않고, 그게.."
─ 두 번째 일상, 레레시아가 이스마엘의 방에 몰래 들어왔다. 꿈에 취해 작은 장난에도 예민하게 반응해버린 이스마엘은 레레시아를 베개 밑 칼로 위협했으나, 레레시아의 달래주기 덕분에 진정할 수 있었다. 역시나 장난이 오갔지만 이스마엘은 익숙해지지 못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 쥬데카 뷔시카리오
"인간에 대한 것은 무엇인지 곱씹게 하는 사람. 제법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 첫 일상, 처음 겪어본 전투 후의 만남. 서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의무실로 가며 여러 대화를 나눴다. 이스마엘의 얼굴을 본 사람. 이스마엘은 대화로 하여금 자신의 다짐을 굳혔기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달. 달과 같은 사람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을 비춘 것은 해가 아니라 달이었지요. 내가 의지한 건 결국 폐허가 아닌 달이었던 겁니다."
─ 두 번째 일상, 헬무트가 죽은 뒤에도 그 육체를 조종 당하고 있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스마엘을 붙잡고 길을 이끈 이정표. 이스마엘이 폐허로 돌아갈 적 동행했으며, 끝내 미련이 있노라 고백했다. 이스마엘은 쥬데카를 달이라 생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삶을 비춘 것은 해가 아닌 달이었기에. 그만큼 의지하고 마음에 품고 있다.
- 레이먼드 나이벨🍀
"그 선글라스 쓴 개자식……."
─ 선관, 이스마엘이 아닌 아버지 헬무트와의 접점. 가디언즈인 헬무트와 해방군인 레이먼드는 서로 생사결을 벌인 전적이 있다.
─ 헬무트, 약 4년 전
"아버지의 원수. 그렇지만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어…….그렇지만 똑똑히 기억해. 당신이 아무리 여기 속한다 해도, 증오스러운 건 변하지 않아. 짜증 나! 진짜 짜증 난다고! 그만 이죽대!"
─ 첫 일상, 헬무트의 육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후, 이스마엘은 레이먼드를 통해 그가 아버지와 과거 생사결을 벌였던 사람이자 원수임을 알게 됐다. 짧은 충돌이 있었으나 가디언즈가 아님에도 아버지를 인간으로 봐주는 존재이자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은 공유함을 깨닫고, 함께 추모하며 그에게 온전한 증오를 쏟지 않기로 했다. 애증. 그렇지만 애가 그 愛가 아니라 碍인 대환장 유사 남매…….
- 신디🍀
"서로 헤어지는 것을 염두에 뒀음에도,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단 걸 알았지만……. 보고 싶었어, 도너티."
─ 선관, 슬럼에서 세븐스 매매업자에게 쫓기던 신디를 구한 것으로 이어진 인연. 이스마엘과 신디는 서로 비슷한 처지였으며, 적자생존을 위해 서로 뭉치며 생활한 적이 있다. 서로 이름을 부르면 정이 들면 후에 헤어지기 어렵다는 이유로 각각 개자식와 도넛이라는 별명을 붙일만큼, 생존을 위해 의지했던 사이.
"네가 없는 시간 동안 너를 그렸어, 도너티."
─ 일상 진행중
- 모브
- 제
동업자. 내키지 않는 존재, 거울.
─ 제 문서 참고
- 세븐스 사형을 이용한 도박, 그리고 미술품 경매를 주관하는 '안식'에서 태어난 존재. 오너 가란에 의해 안식의 황제라는 모습을 주입받고 그 안에서만 자란 '사형 집행인' 출신.
- 이스마엘의 양아버지 헬무트가 '안식'의 오너인 가란과 친구였으며, 친부인 에르베르토가 '안식' 소속의 수석 과학자라 연관이 깊은 사이.
- 제는 헬무트가 가끔 묻혀오는 냄새로 하여금 이스마엘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있고, 헬무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모종의 이유를 뒤로 에델바이스로 탈주한 뒤 이스마엘을 만나서 서로 사상 차이로 생사결을 벌이고 서로 조력하는 사이가 됐다.
- 조력자이자 서로의 양면.
- 세븐스 사형을 이용한 도박, 그리고 미술품 경매를 주관하는 '안식'에서 태어난 존재. 오너 가란에 의해 안식의 황제라는 모습을 주입받고 그 안에서만 자란 '사형 집행인' 출신.
2.3. 떡밥 ¶
개인 만족을 위해 아무렇게나 적습니다.
─ 이스마엘주
- 풀린 떡밥
- 얼굴
"내 자신이 떳떳할 때 드러내고 싶습니다."
- 흰 머리카락, 모카빛 피부, 녹색 눈.
- 날카롭고 매서운 인상. 만면에 피어난 웃음과 표정관리를 통해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표정관리의 달인인 듯싶다.
- 흰 머리카락, 모카빛 피부, 녹색 눈.
- 출신
"이름난 기계공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수잔나 엥엘이 유명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하던 도중 무장 세븐스 단체의 저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 독백 中
- 세븐스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
- 어머니는 가디언즈의 기술팀 연구 지휘자이자 인체 기계공학과 프로그래밍에 대해 박식한 교수, 수잔나 엥엘.
- 수잔나는 이스마엘을 버리고 후회했으나, 7년 뒤 세븐스 단체에 의해 생방송 도중 살해되었다.
- 이스마엘은 수잔나의 외형을 일부 빼닮았다.
- 아버지는 가디언즈 산하 세븐스 사형장, 안식에 소속된 선임 연구소장 에르베르토 엥엘.
- 에르베르토는.......?
- 세븐스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
- 이상향
"나의 이상향을 향하여!"
- 이상향은 무엇인가?
- 이스마엘의 근간이 되는 사상.
- 이스마엘의 근간이 되는 사상.
- 세븐스와 비능력자를 막론하고 차별 없이 섞여 사는 세상.
- 약간의 다툼이나 혐오는 존재하겠지만, 마주치자마자 적의를 드러내거나 핍박하지 않는 것.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삶을 이스마엘은 이상향이라 칭하고 있다.
- 이상향은 무엇인가?
- 인식표
"……."
─ 이스마엘, 알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 나의 삶, 나의 숨, 나의 원동력이었던 모든 것.
- 바람은 상냥하다.
- 아버지, 헬무트 케르스트너의 것.
- 가디언즈 소속, 진압 및 호위부 소속이나 슬럼의 관리인을 자처하여 동떨어진 헬무트 케르스트너.
- 그는 이스마엘을 위해 가디언즈를 배신했다 사망했다.
- 나의 삶, 나의 숨, 나의 원동력이었던 모든 것.
- 슬럼
"그 미친 꼬맹이! 원래 이곳의 미친개는 헬무트였는데, 그 새끼가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나타나서 슬럼을 뒤엎었어. 2달 지났나? 녀석도 휙 사라져버렸지! 덕분에 윌리가 실적 못 채우고 사라졌다더라. 어디로 사라지긴! '안식'이지. 세븐스랑 배신자 사형장."
─ 슬럼의 통칭 늙은이
- 아버지를 잃고 도망쳐온 곳에 낙원은 없었다.
- 슬럼 출신. 살기 위해 이스마엘은 발악했고,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가령 소매치기나, 누군가를 쥐어패는 법이나, 목숨의 위협에서 발악하는 법이나, 각종 뒷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꿰뚫는 등.
- 가령 소매치기나, 누군가를 쥐어패는 법이나, 목숨의 위협에서 발악하는 법이나, 각종 뒷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꿰뚫는 등.
- 아버지를 잃고 도망쳐온 곳에 낙원은 없었다.
- 피는 속일 수 없다
"……."
─ 이스마엘은 이를 악물더니 애써 미소를 지었다.
- 이스마엘의 성격은 후천적인 것도 있으나 선천적인 부분도 있다.
- 친모인 수잔나 엥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자식 또한 자신의 행복의 기준으로 삼았던 사람이며, 친부인 에르베르토 엥엘은 윤리관이 뒤틀린 사람이었다.
- 헬무트의 교육과 더불어 슬럼의 늙은 여우가 아니었더라면 이스마엘은 이상향을 쫓지 않았을 것이다.
- 고압적이되 예민하고, 권태로우며 제멋대로인 본 성격을 누르는 중.
- 이스마엘의 성격은 후천적인 것도 있으나 선천적인 부분도 있다.
- 망설임과 미숙함
이스마엘은 전투시 지나치게 공격을 망설이는 모습과 방어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여타 전투경험이 미숙한 대원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 전투 데이터 보고서 中
- 이스마엘은 아버지, 헬무트에 의해 비능력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능력을 제한당하며 살았다. 미숙한 것은 당연한 수순.
- 강도 조절에 대해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면 또한 있다.
- 이스마엘은 아버지, 헬무트에 의해 비능력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능력을 제한당하며 살았다. 미숙한 것은 당연한 수순.
- 풀리지 않은 떡밥
- 개
"나는 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 ???
- ???
3. 독백 ¶
- 생방송
- 대도시의 가장 외곽은 슬럼을 넘어서 폐허에 가깝다. 한창 개발을 추진하다 모종의 이유로 중단된 지역에 남은 것은 설치하다 만 스크린과 뼈대만 세워둔 건물 두어 채, 허름한 상가 건물, 아무렇게나 놓여 거미줄이 쳐진 건축자재와 경비 시스템이 탑재됐으나 배터리가 다 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녹슬어버린 안드로이드, 격렬한 전투의 흔적뿐이다. 한때 이 개발 중단 구역에 도망친 반동분자가 모여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오래전에 전부 사살됐기 때문이다. 가끔 사이렌 울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미약한 전류가 잘린 전선에 영향을 줘서 오작동이 벌어지는 때가 다수다.
그리고 여기 완공됐으나 아무도 살지 않아 허름한 건물이 있다. 비록 폐허지만 넓은 건물을 통째로 가지고 말겠다는 삶의 목표를 어느 정도 실현한 셈이니, 나름 그의 낙원이라 할 수 있다. 난방 기기를 쓸 수 없어 쾌적한 온도를 맞추긴 어려웠지만 더운 날에는 쿨러 옆에 붙어있으면 되고, 추운 날에는 가져온 옷가지를 태우면 된다. 어디서 가져온 옷가지인지는 비밀이다. 아마 죽는 날까지 모를 것이다. 타일 시공이 덜 된 욕실에 달린 미닫이 거울 찬장을 열고, 제법 괜찮은 수건을 꺼내 머리를 탈탈 털던 그는 고개를 돌려 햇빛에 비쳐 희미하게 일렁이는 홀로그램 달력을 봤다.
"오늘은 늦게 들어오겠는데."
오늘은 일이 있는 날이다. 그것도 제법 중요한 일이고, 인생과 직결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수건을 거뒀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집'을 비우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 괜찮지만, 요즘 들어 불시 순찰이 늘어 걱정이 앞섰다. 그가 요사하고 간악한 수를 썼기에 이 외곽까지 가디언즈가 오는 일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가 없는 사이 순찰을 나온 누군가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고 매복할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된다. 아직 인생의 빛도 제대로 못 보고 살았는데, 앞날 창창한 나이에 끌려가 신체의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이라는 명목 하의 고문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오늘은 지금껏 태양열을 모으고 모아 아껴둔 전기로 방범 시스템을 돌리는 수밖에.
그는 부엌으로 가 그릇을 꺼내고, 그 짧은 사이에 또 생긴 거미줄을 팍팍 털어냈다. 찬장에서 시리얼을 꺼내며 흔들어 보니 시리얼도 아침에 먹을 분량만 남은 것 같다. 오늘은 오는 길에 시리얼도 좀 사야겠다. 최근에 버추얼 배우의 미니 피규어가 들어있는 마시멜로 시리얼이 그렇게나 유행이라는데, 그거나 사 올까. 달콤한 설탕 가루까지 남김없이 털어 주고 나서야 그는 그릇을 테이블 위로 밀어놓을 수 있었다.
* * *
오늘은 인기 버추얼 진행자 바바라의 토크쇼가 있다. 초대 게스트는 '수잔나 엥엘'로, 긴 밧줄처럼 촘촘히 땋아내린 새하얀 머리와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미인이다. 듣자 하니 인체의 효율적인 개조를 위한 각종 부품과 프로그래밍에 대해 박식하며, 트랜스휴먼을 이끄는 선구자로도 불린다고 했다. 가디언즈의 기술팀 연구에도 여러 번 지휘로 참여한 경력이 있다. 그가 맡은 일은 이 지루한 대화 속에서 졸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지금까지 졸지 않기 위해 속으로 여러 번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느라 질문을 듣진 못했지만, 수잔나는 바바라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세븐스는 진화된 인간이 맞다. 이것이 제 의견입니다."
"놀랍군요! 세븐스에 대한 옹호인가요?"
바바라는 자극적인 주제를 꺼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주변에서 생글생글 꽃이 피어나는 효과가 송출되고 있었다. 수잔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니오, 진화된 것은 맞으나 그건 자연적인 것이죠. 언제 퇴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능력자는 앞으로 더 진화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걸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트랜스휴먼은 인공적으로 진화하는 인간입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진화가 아닌, 인간의 본성에 대항하는 진화 말입니다.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기에 퇴화할 걱정은 없고, 발전할 길만 남아있지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길만 남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겨난 찌꺼기인 세븐스를 더 확실하게 짓밟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말이군요! 다음 질문입니다. 오, 이런.."
"무슨 일이죠?"
"박사님의 아픈 기억에 대한 질문입니다.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이젠 아픈 기억도 아니니까요."
지금까지 수잔나 박사가 언급을 꺼리던 것을 생방송으로 송출할 수 있다! 시청률이 하늘처럼 치솟을 것이다. 거금을 들여 안면을 인식하는 트래킹에도 담을 수 없는 기쁨 때문에 바바라의 얼굴 표정이 비정상적으로 출력됐다. 바바라는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처럼 말꼬리를 늘였다.
"아이가 세븐스로 판명이 났다면서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예. 세븐스 검사에서 양성을 보였죠. 완벽한 그이와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온 실패작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수잔나는 잠시 침묵했다. 스튜디오 전체가 긴장하듯 침묵에 휩싸였다. 편한 소파에 앉은 수잔나의 자세가 꼿꼿해졌다. 주먹을 말아 쥐며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수잔나는 입을 열었다.
"……처분했습니다. 아이를 실험체로 보내는 것도 생각했으나, 국가의 발전에 감히 세븐스가 도모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이와 저의 입장이었습니다."
"아이를 가디언즈에 소속시키면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오점을 이점으로 남길 수 있었는데, 후회하진 않으시나요?"
그는 드디어 고개를 들어 수잔나를 쳐다봤다. 수잔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잔나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톡 소리와 함께 그녀는 축 늘어져 경련했다. 이마 한가운데에 구멍이 난 끔찍한 장면이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말았다.
"맙소사! 박사님!"
"습격이다! 전투태세에 돌입해!"
삽시간에 스튜디오는 아수라장이 됐다.
- 좌표 A-07285, 두 명의 세븐스 감지.
그는 수라장 속에서 그는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차며 전투용 바이저 헬멧을 쓰더니 총을 장전했다.
"여기는 H, 돌입하겠다."
* * *
- 맙소사, 박사님!
- 습격이다! 전투태세에 돌입해!
수잔나가 경련하는 장면을 뒤로 비명소리와 함께 화면 조정 중 표시가 뜬다. 앞으로 1시간 정도면 뉴스에서는 수잔나 박사의 죽음이 담긴 장면을 몇 번이고 송출하며 세븐스의 문제점을 피력할 것이다. 그릇에서 조그마한 동물 모양 통밀 쿠키만 골라 집어먹던 손이 멈춘다. 조막 만 한 손가락은 아직 충분히 길게 뻗지 못해 통통한 감이 남아있고 소파의 한 칸도 아닌 반 칸을 차지하는 몸집은 작다. 멍하니 벌린 입 틈새로 앞니가 빠진 것이 보였다. 그릇이 아무렇게나 굴러떨어졌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다 겨우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목이 턱 막혔다.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 그러면 들킬 것이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소파 구석에 놓인 담요를 겨우 끌어와 덮어 자신만의 요새를 만들자 새하얀 머리카락도 가려진다. 아이가 웅크리더니, 이내 작은 짐승처럼 끙끙대며 울었다. 너무 끔찍하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날이다. 오늘은 아빠가 일 때문에 늦게 오는 날이라,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진 어디에 털어놓을 수도 없다.
왜냐면, 아이의 곁엔 아무도 없으니까.
- 단란
- 이름난 기계공학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수잔나 엥엘이 유명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하던 도중 무장 세븐스 단체의 저격으로 인해 사망했다. 저명한 인물의 죽음은 도시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언론은 세븐스의 문제점을 피력하며 가디언즈의 위상을 돋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고, 방송국 주변에는 추모를 위한 꽃과 양초가 가득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추모와 보도는 2주 뒤 사그라들었다. 세븐스의 문제점을 위해 수잔나가 죽는 장면만 편집해 여러 번 반복 재생하던 언론도, 인터뷰에서 울며 말을 잇지 못하던 시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청소 로봇이 추모를 위해 올려둔 꽃 한 송이를 쓰레기로 판단했는지 빨아들인다. 한 사람이 평생 쌓아올린 삶의 값어치를 매기는 건 2주면 충분했다.
아이는 신소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크린 TV(편의상 스크린이라 명명한다.)를 켜고 낡은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2주 전 이 시간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죽는 장면을 그대로 봤기 때문에 정서적인 흥분과 패닉에 휩싸였지만, 지금은 충분한 위로와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마음 한편에 누군가의 죽음을 잘 정리해두고 살고 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적 사람이 죽었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 같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조그마한 손이 동결 건조 전투식량의 포장을 뜯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줄곧 전투식량은 약간의 물을 부어 먹는 거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이는 물을 붓는 걸 싫어했다. 동결 건조된 음식은 신기하고 먹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블록 형태로 굳혀진 아인토프를 한입 베어물었다.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전투식량이 든 상자를 받침대 삼았기 때문인지 소파 위로 떨어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음, 이것보다 굴라쉬가 들어있으면 좋았을 텐데. 바삭바삭한 아인토프를 씹다 보니 건더기도 입안에서 느껴진다. 아무래도 콩인 것 같다. 뱉을까? 콩의 껍질로 추정되는 것을 질겅질겅 씹을 때 넷-스크린이 지직 거린다. 아 이번엔 뭘 할까? 채널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지 않았다. 이 장소는 전파가 닿지 않는 곳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전파를 납치해서 쓰기 때문이다. 신호를 잡는다면 그 채널을 얌전히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조국의 용감한 병사들이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딱딱하고 거친 호밀빵을 입에 한참 물고 녹여먹자니 단조로운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TV 화면이 나온다. AI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뉴스 내용은 가디언즈가 요늘, 수잔나 엥엘을 살해한 레지스탕스 단체의 수장을 사살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수잔나 엥엘의 유족은 감사와 함께 수잔나의 유산을 모두 U.P.G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음 소식은 모두 U.P.G의 엄격한 승인 절차를 밟은 내용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 사실에 연연하지 않았다. 뉴스는 뉴스였고, 스크린은 스크린이다. 아이의 세상은 창문 밖을 보면 구동이 정지된 안드로이드 한 대만 우두커니 서있는 황무지 한가운데다. 아이는 뉴스의 내용이 재미가 없었는지 상자의 내용물을 부스럭거리며 뒤지다 눈을 빛냈다. 쇼카콜라다! 아빠가 이건 어른이 먹는 초콜릿이니 먹지 말라고 했는데, 빼놓는 걸 깜빡했나 보다. 7살이면 성인까지 13년이 남았지만, 성인의 3분의 1이나 산 셈이니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눈치를 보던 아이는 캔을 열기 위해 뚜껑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밖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노크 소리 여섯 번이 났다.
"이크!"
아버지가 왔다! 아이는 황급히 소파 구석에 잘 포개져 있는 담요 사이에 쇼카콜라를 쑥 집어넣어 숨겼다. 지금 당장 저 어른의 초콜릿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아버지에게 그 순간을 들키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리고 초콜릿 보다, 아버지가 더 중요하기도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현관을 넘어 들어왔다. 아이가 팔을 벌리며 후다닥 달려오자, 남성은 지친 기색에도 아이를 번쩍 한 팔로 안아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충-성!"
"그래, 그래. 충성. 오늘도 잘 있었나?"
"저녁밥도 먼저 먹고- 스크린을 보고 있었습니다!"
"정보 전달을 위함인가?"
"네! 유용한 정보를 송신 받았습니다!"
"그렇군."
군인 놀이에 어울려주던 남성은 주변을 둘러보다 가루가 묻은 아이의 입가와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이의 조그만 코를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아이는 코를 싸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야!"
"요 녀석. 동결 건조식품은 물에 불려먹는 거라고 했지."
"그렇지만 안 남기고 다 먹었는데!"
"나 참. 이번만이야, 알겠지?"
"네!"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아이의 볼을 가볍게 꼬집듯 잡고 쭉 늘려준 뒤 아이를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얌전히 있어야 한다." 벌써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봐주는 거지만, 아이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지금이 쇼카콜라 한 조각을 먹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남성은 제복에서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말린 뒤 소파에 잘 포개진 담요를 베개 삼아 머리를 뉘고 누웠다. 쇼카콜라를 남몰래 한 조각 먹은 아이가 그의 위로 엎어지듯 같이 눕자 그는 좁은 소파의 공간을 만들듯 모로 몸을 틀었다. 그의 너른 가슴팍에 조그마한 머리가 닿았다. 알싸한 비누 냄새가 났다. 여전히 스크린은 뉴스를 송출하고 있었다. 아이가 포근한지 품에 바짝 붙었다.
"오늘 박사님을 해친 일당을 무찔렀다면서요."
"그게 벌써 뉴스에 나왔구나."
"응."
"이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뭐가요?"
"박사님에 대해서랑, 세븐스나 가디언즈에 대해서도."
아이는 고개를 올렸다. 쭉 고개를 올려도 아버지의 턱밖에 보이지 않는다. 화면을 보자니 대화의 주제인 가디언즈가 용감하게 레지스탕스를 무찔렀다는 말만 가득하다. 아버지와 아이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대화했기 때문인지, 아이는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박사님은 불쌍해요. 말도 다 못 하고 죽은 거잖아요."
"그렇구나."
"그리고.. 음.. 가디언즈도 세븐스인데 왜 가디언즈만 멋지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세븐스는 범죄를 저질러서 그런 거예요?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다. 네 말대로 범죄를 저질러서 그렇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세븐스에게 진짜 죄가 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곤 하지."
"진짜요?"
"그래, 나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럼 봐줄 때도 있어요?"
"아니."
"왜요?"
"망설이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친단다."
"어려워요."
"이셔, 사람은 원래 그런 거야."
남성은 아이를 품에 가두듯 안았다. 뉴스의 영양가 없는 소리가 작아진다. 아이는 따뜻한 품 속에서 눈만 깜빡였다. "네가 그런 상황을 겪지 않고 자라면 좋겠구나." 라는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이는 가만히 화면만 쳐다봤다.
"그러니 이셔 일병."
"넷슴다?"
"쇼카콜라는 맛있었나?"
"아!"
아이는 품에서 최대한 어색한 미소를 숨기려 애썼다. 아이는 거짓말엔 영 재능이 없어 모두 드러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성은 담요에 느껴지던 딱딱한 쇼카콜라 케이스를 꺼내 잘각잘각 흔들어 보이더니, 손을 훅 뻗어 아이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악! 살려주세요!"
"안 돼. 이셔, 오늘 잠은 다 잤구나!"
"간지러워!"
아이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다. 뉴스 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이내 전파를 잡지 못했는지 지직 거리다 꺼졌다. 단란한 하루였다.
- 슬럼
- 외곽의 슬럼은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있다. 학살의 현장에서 도망친 레지스탕스의 잔당, 엇나가는 불량한 세븐스 범죄자, 숨어 지내고 싶은 세븐스, 어제까지는 정상적이나 오늘은 신체를 개조하려다 불법적인 일에 당해 신체 일부를 잃은 피해자……. 이스마엘은 그곳에서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재머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 좋은 자리를 얻어 웅크려 숨어있다. 며칠 전에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이 밀고를 받아 끌려갔다고 했다. 밀고 한 번이면 나흘간 먹을 수 있는 국수 세 봉지를, 두 번이면 신선한 야채를 살 수 있는 포상금을 받는다고 했던가, 그 사람은 배곯던 누군가의 좋은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도망쳐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쿵쿵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고 자라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스스로 깨친 이래 단 한 번도 능력을 지칠 때까지 써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도망칠 때가 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지배한 뒤로는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썼길래 그 삼엄한 경계를 뚫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어찌어찌 이곳까지 온 뒤로 지쳐 쓰러지자마자 곯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비쩍 마른 더벅머리의 세븐스 남성이 가엾다며 이스마엘을 슬럼의 중심인 이곳까지 질질 끌어다 주지 않았더라면 추운 날씨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요 며칠 지내보며 이곳은 허울 좋은 도축장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잘 지내다가도 사소한 앙금이 쌓이면 이 사람을 먼저 잡아가라며 밀고를 했다. 그리고 빈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사람이 흘러 들어오고, 순환되고 있었다. 딱 도축을 기다리는 짐승과도 같았다. 아마 이스마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사람 대다수가 이곳을 패배자의 영토라고 입을 모아 말했기 때문이다. 비록 패배자의 영토이자 도축장이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좋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무엇으로 만든지도 모를 대체 식량을 먹고,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해 대신 네온사인의 색이 바뀌는 것으로 시간을 쟀다. 이따금씩 환경 제어 시스템이 먹통이라 비가 내리긴 했지만 그럴 때면 서로의 세븐스로 버텼다. 그리고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새로운 누군가 채웠다. 이스마엘이 이곳에 조금 익숙해질 적, 비쩍 마른 남성이 이스마엘에게 말을 걸었다. 듣자 하니 이 사람은 레지스탕스 출신인데, 단원이 본인 빼고 전멸을 해 이곳에 오게 됐으며, 일주일 정도 이곳에 있었다 했다.
"미친 곰 윌리에게 찍히지 않게 조심해라, 꼬맹이."
"그게 누굽니까."
"저 사람."
이스마엘은 저 멀리서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남성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풍채에, 반들반들한 민머리에는 곰의 이빨이 이식돼 있었다. 아마 저 이식 수술 때문에 미친 곰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남성은 목소리를 낮췄다.
"매매업자야. 이곳에서 너 같은 어린애는 인체 개조업자에 넘기고, 어른은 밀고하는 녀석이지. 지금까지 그 녀석이 밀고한 사람 수만 세어보면 이곳의 사람 중 절반은 될걸."
"걱정하신 겁니까?"
"그래, 네가 호구 같아서 그렇지."
"……윌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다? 그걸 생각하진 못했는데. 아마 슬럼이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윌리의 횡포만 아니라면 서로 돕고 사니까."
이스마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자를 끌어안은 채 무릎을 몸 쪽으로 더 가당기자 비쩍 마른 남성은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들겨주었다. 이내 먹을 걸 구해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이스마엘은 불편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한참이고 앉아있으니 온몸이 뻐근했다. 관절이 풀리듯 똑똑 대는 소리가 목에서 들릴 때, 윌리가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노이즈 때문에 윌리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훑는 듯한 시선에 기분이 이상했다. 윌리는 휙 자리를 떴다. 시간이 지나 남성이 돌아왔고, 대체식량으로 때우는 하루가 지나갔다.
새벽, 이스마엘은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다. 추위 때문이다. 새벽 공기가 쌀쌀하고 폐 드럼통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추위에 깨면 번거로울 테니 이스마엘은 스스로 장작을 가져오기로 했다. 이 주변에 폐자재는 많았기 때문이고, 이스마엘은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단잠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혼자 해내고 잠들면 될 일이다. 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능력도 어느 정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체력이 채워지면 감사 인사를 전하고 떠나야겠다. 그 뒤엔 어떻게 할까? 일단 많은 곳을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평등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해 볼까? 어려운 일이지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일어설 때 엉덩이를 뗀 부분에 바람이 휭 불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네온사인이 어스름하게 깔린 뒷골목엔 폐자재가 많았다. 순환 시스템이 고장 났는지 공기 주입 밸브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사가 빠진 것 같은데 왜 아무도 고치지 않는 걸까? 고치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폐건물의 잔해를 주울 적, 네온사인이 가려졌다. 빛이 사라지자 이스마엘은 시선을 자연스레 올렸다. 미친 곰 윌리였다. 그가 이스마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지?"
"모닥불을 피울 잔해를 줍고 있었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인데 내버려 두지."
"생명은 어느 하나 버려선 안 됩니다."
"이 슬럼의 법칙을 모르나 보군."
"예, 모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정보고, 시체는 내다 팔면 돈이 된다. 넌 지금 이곳의 당연한 경제를 무너뜨리려 하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다들 잔해를 주웠습니다만."
"그런가?"
윌리가 이스마엘을 흥미롭게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스마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스크린으로 갔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수배령이 내려진지 오래다. 이스마엘은 저 얼굴을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 얼굴보다 이 슬럼의 철칙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으면 고객이고 죽으면 상품이다. 이게 세븐스의 현실인 걸까? 허튼 생각을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윌리가 이스마엘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니 돈이 되겠구나."
"무슨 소리십니까?"
"요 며칠 전에 레지스탕스 잔당 하나가 이곳에 왔다던데."
"모릅니다."
"진짜 몰라?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걸. 꼬맹이. 아니면 개조 업자에게 넘기는 수가 있어."
"모른다고 했습니다."
"꼬맹이, 잘 생각해."
"뭘 말입니까."
"이 슬럼을 순찰하던 가디언즈도 처형을 당한 판국인데 레지스탕스 하나가 죽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
"……."
"잘 죽었지. 그 녀석. 이 슬럼을 돌면서 순찰을 해대니 뭘 제대로 팔아 넘길 수가 있어야지."
그 순간 이스마엘이 총구에 손가락을 댔다. "뭐야, 꼬마. 죽고 싶어?" 윌리는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기계로 만들어진 불법 개조 총은 발포되지 않았다. 대신 덜덜 떨리더니 이내 부품이 하나하나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잔해가 후드득 떨어졌을 때, 윌리는 놀란 눈으로 이스마엘을 쳐다보려 했다. 하지만 시야가 닿는 곳엔 이스마엘이 없었다. 윌리는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컥 소리를 냈다. 이스마엘이 자신보다 체구가 큰 윌리의 목을 다리로 휘감듯 부여잡더니, 순식간에 땅에 머리를 처박게 만든 것이다. 윌리는 순간적인 일에 당황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무진 노력했으나, 이미 이스마엘이 무릎으로 등과 팔을 눌러 윌리를 제압한 지 오래였다.
"너 뭐야."
"다시 한번 말해보십시오."
"너 뭐냐고!"
순간 턱 밑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힘이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리게 했고, 목에는 서늘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칼이었다. 아까 떨어진 총의 잔해 중,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무려 1세기 전의 전쟁에 쓰이던 칼날이 이렇게 쓰일 줄 알았더라면 커스텀에 추가하지도 않았을 텐데! 윌리는 부들부들 떨었다.
"꼬마, 진정해. 난 이제 아무것도 몰라, 너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다시."
윌리는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 상황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아니면 죽거나. 윌리가 목에서 비집고 나오는 신음과 함께 부들부들 떨었다. 점점 목을 향해 칼날을 누르는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정보를.."
"다시."
"가, 가디언즈, 그 녀석이…?"
"……."
"잘.."
그 순간 별이 보였다. 퍽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아찔했다. 힘이 빠졌는지 몸을 움찔대던 윌리의 몸은 손쉽게 뒤집혔다. 이스마엘이 그 위에 걸터앉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살려주세요.."
"다시."
이스마엘이 주먹을 들었다. 한 대. 원하는 답은 나오지 못하고 살려달라는 소리가 계속됐다. 그 뒤로 다시,라는 말이 반복되는 순간마다 일방적인 주먹질이 오갔다. 다시, 다시, 다시……. 윌리의 코 뼈가 부러지고, 그가 쇼크에 경련하며 꺽꺽 소리를 내다 기절한 듯 늘어지는 순간까지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슬럼의 치안만 유지할 생각이었는데, 눈이 돌아버린 것 같다. 새벽의 소란에 잠이 깨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네온사인 밑에서 이스마엘은 뺨에 묻은 피를 슥 닦더니, 고개를 돌리고 환히 웃었다. 이지러지는 노이즈 사이로 고른 치열을 내보이는 미소가 환했다.
"이제 슬럼은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윌리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 가디언즈 병사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스마엘은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이불을 거세게 그러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대체 왜 이런 꿈을 꿨지? 이런 과거를 가져놓고 사람을 죽였다며 벌벌 떨던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때는 슬럼에서 사람이 죽어나갔지 않은가. 아니! 지금도 어린 세븐스 아이들이 죽을뻔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의 자신이 잡아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같은 정의를 위해서인데, 무엇이 앞길을 막는 걸까?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자니 가디언즈 병사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그렇다고 눈을 뜨자니 귀에서 도망치라는 목소리가 쟁쟁했다.
"Ich bin nicht falsch……."
이스마엘은 몸을 웅크렸다. 새벽 동이 트는 것이 괴로운 하루였다.
- 편지
- ─ 편지에서 발췌.
임무 중에는 조금의 감정이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감정이 대단한 행운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세상은 행운만 있는 법이 아니니까. 무언가 일이 벌어지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든, 무엇을 했든,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이든 그 인간이 저지른 결과를 바라봐야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나는 네가 이렇게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네가 나처럼 무뎌지는 날이 올까 두렵다. 네가 그렇게 된다면 더는 내가 너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도래한 뒤일 테니.
* * *
구텐탁! 그곳엔 이제 전파가 닿습니까?
안드로이드는 이제 구동을 시작했을까요?
여전히 이곳의 생활은 나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고, 많은 세븐스가 있을 뿐더러 모두 친절한 덕에 적응하기 쉬운 탓이라 이전 편지에 적어둔 그대로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나는 바깥에서 어떻게 걸어야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지를 압니다.
전파를 납치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양이라는 동물을 보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럽습니다.
오늘은 임무를 다녀왔습니다. 첫 임무에 긴장이 됐습니다만, 실수 없이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을 도망치지 못하게 했으니 제 탓입니다.
이전에 하셨던 말씀 중에 망설이면 많은 사람이 다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무뎌지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는 뜻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싶습니다.
사건과 사람에게 밀접한 관련이 있노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한참 어리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노라 스스로 되뇌인다 한들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이 아른아른 떠오릅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다짐이 무색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날 것이라 머리에서 한참을 외칩니다.
아! 나는 어째서 무뎌지기 싫으면서도 받아들일 생각을 하는 걸까요. 인간은 어째서 서로를 증오하는 걸까요.
당신도 이런 고뇌를 겪었습니까?
나는 이 고뇌를 이겨낼 수 있을지 감히 의문이 듭니다.
아마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는 다른 방식으로나마 선택한 것이겠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선택하고자 합니다. 나의 삶을, 숨을, 자유를..
마침내 이 삶이 끝나는 날, 많은 것을 봤노라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내 삶이 떳떳함을 증명하듯.
그곳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떠돌이의 발이 바람이 되는 곳입니까?
안드로이드는 오늘도 전기양의 꿈을 꾸고 있습니까?
* * *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상자엔 오래된 편지가 하나, 쇼카콜라 두 캔, 담배 한 갑, 성냥, 소설책 한 권, 장미 향수, 그리고 최근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들어있다.
이스마엘은 새로운 편지를 상자에 넣고 덮으며 성호를 그었다.
- 탄생
- 여생을 아이 없이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그때 있었던 일 때문에 불안해서 그렇냐고 물었고, 시누이는 언젠가 은퇴한 뒤 아이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고 싶다 하지 않았냐 되물었다. 위로와 관심 아래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명확한 목표 아래에서 살았던 삶이 단번에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에 한치 부끄러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수술대에 누운 뒤에도, 마취제가 몸에 들어올 때 비강에 느껴지는 특유의 시큰거림을 뒤로 정신이 아득히 멀어질 때까지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지만, 영구피임 수술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 * *
수잔나 엥엘은 비능력자로 태어나 세븐스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았다. 남들처럼 세븐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고, 기구한 운명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관심을 품은 것은 단 하나, 인간의 인공적인 진화였다. 치아를 교정하고, 커다란 안경을 쓰던 풋내기 때부터 품어온 오랜 꿈이었다. 누군가는 그녀의 목표가 허황된 꿈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지금은 꿈을 사실로 일궈내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은 인체 공학과 프로그래밍에 정평이 난 명문 대학의 교수 자리에 올랐고, 트랜스휴먼을 이끄는 선구자로도 불린다. 세븐스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연구를 하던 도중, 눈이 맞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남편도 있다. 그렇지만 많고도 화려한 삶 중에서, 그녀를 가장 빛나게 하는 수식어는 따로 있었다. 바로 가디언즈의 기술팀 연구 지휘자다. 그녀는 가디언즈를 위해 기술 연구에 여러 번 지휘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고, 그 사실은 수잔나 엥엘이라는 이름을 삽시간에 널리 떨치는 계기가 됐다. 그 기회를 잡아채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논문과 실험, 시제품을 만들었는지! 그녀는 그만큼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야망이 불타오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수잔나를 보며 비정한 마녀라고 불렀지만 상관없었다. 불만이 있다면 자신보다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냈으면 되는 일이었고, 그깟 흠집 하나로 그녀의 명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수잔나가 한숨을 내쉬며 시야가 뚫린 통유리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일출 햇살이 홀로그램 산등성이를 비추고 있었다. 오늘은 토크쇼가 있는 날이다. 그녀는 햇살을 바라보며 예상 질문을 떠올리다, 어렴풋이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직접 엄선해 지어준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막상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존재는 하는지 꿈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약 7년 전 이맘때, 그녀는 영구피임 수술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됐다. 수잔나의 명성에 단번에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 당시의 남편과는 좋은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일을 할 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일이 끝나면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도 했고, 힘들었던 일을 토로하며 서로 기대기도 했다. 가끔은 장난을 쳤고, 가끔은 싸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앙금이 풀려 눈이 마주치면 깔깔대며 웃고 놀리기도 했다. 행복하던 신혼이 갓 지나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을 때, 남편은 와인과 치즈, 그리고 1세대 전의 구닥다리 영화를 곁들이는 둘만의 시간에서 대뜸 아이를 원한다 고백했다. 아이가 생긴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겠냐며, 비록 아이로 인해 서로의 몸과 마음이 고단할지언정 그것 또한 언젠가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며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드 없는 말이지만, 그 당시의 그녀는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의 뒷모습이 담긴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며, 남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듬직한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것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생각보다 아이를 갖는 일은 어려웠다. 착상이 어려운 몸이었기 때문에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역시 아이는 가장 불같은 시기에 들어온다며 저급한 농담을 하며 웃어넘겼고, 어느 때는 자신의 몸을 탓하며 좌절했다. 밤이 다가오는 것이 꺼림칙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착상에 성공했을 때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둘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울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과 남편이 행복할 거라 믿었다. 유명해지고 능력이 있으면 살아온 만큼 돌려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아이에게 남부럽지 않은 삶을 쥐여주고 싶었다.
물론 그만큼의 시간은 고됐다. 일상의 하나하나가 한계처럼 다가왔다. 본인이 하던 강의 도중에 어지러움을 느낀 것은 다반사요, 어느 날은 교수 회의 도중 졸기까지 했다. 그런 것은 커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막상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에스프레소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어지러운 것은 물론이고 냄새만 맡아도 죽을 것 같았다. 남들은 그래도 뭐라도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이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부쩍 초췌한 모습이 된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크래커, 그리고 약간의 다크초콜릿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던 입덧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조심하는 모습이나 신체적 변화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수잔나 엥엘이 임신했다는 소식은 입소문을 타게 됐고, 그녀는 다가오는 비극을 숨길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입덧도 어느 날의 순간이 됐다. 그녀는 많은 사람의 응원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점차 활동을 줄여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출산 예정일은 다가왔을 때, 그녀는 드디어 엄마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를 끝마쳤다 생각했다. 아이의 이름도, 오로지 아이만을 위한 방과 육아를 도울 안드로이드도 구비했다. 마지막으로 검사를 했을 때 아이는 잘 움직였고, 무척이나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그녀는 자신의 배를 더듬으며 생각했다. 아이는 오로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려오던 삶의 한줄기 빛이자 새로운 안식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삶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에서도 그녀는 악착같이 버틸 수 있었다.
─ 20xx년 12월 27일 오전 3시 25분. 세븐스 검사 결과, 양성입니다.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의료용 안드로이드가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검사 결과를 출력했다. 아이는 세븐스였다. 의료용 안드로이드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 어떠한 표정을 입력할 수 없다. 그녀가 안드로이드 칩을 설계할 때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멍청한 안드로이드가 그녀를 비웃듯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모든 순간이 거짓말인 것 같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과 남편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복을 쥐여주고, 개처럼 일해오며 살아온 자신 대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품 안에 안긴 작은 아기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쏙 빼닮았다. 양수에 젖어있지만 새하얀 머리카락, 마치 커피에 우유를 탄 것처럼 부드러운 갈색이 감도는 피부, 찡그린 모양새로 감고 있지만 한눈에 봐도 큼지막한 눈과 반듯한 콧날……. 건들면 부서질 것 같은 이 아이가, 사랑으로 품어야 할 아이가 세븐스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저희 국립 병원은 세븐스 폐기 서비스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서비스 신청 시…….
"아이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단 한 마디를 뱉었다. 안드로이드가 떠난 자리, 그녀는 도저히 남편의 위로를 들을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데려올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 아니, 하나 기억나는 것은 있다. 아이를 폐기하지 않아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자동적으로 등록됐다는 사실이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사랑하고, 이끄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이 넌더리가 났다. 아마 지금쯤 뉴스에서 난리가 났겠지! 아기를 위한 방에서 수건에 돌돌 말린 아기를 안고 가만히 앉아있은 지 벌써 30분째다. 그녀는 아기를 내려다봤다. 울던 것도 멈추고 얌전히 눈 감고 있는 생명. 그럼에도 그녀는 그 생명을 곱게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사랑으로 키운다고 해도, 아이는 그렇게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낳았다 생각해야 하는데 짐승을 낳은 것처럼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위로하듯 남편이 다가와 어깨를 안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
"당신이 아이를 품고 싶다면 나는 말리지 않을 거야. 당신의 뜻이잖아."
"모르겠어……."
"……수잔나, 아이와 함께하면 행복할 것 같아?"
그녀는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마저도 길게 이어낼 수 없어 눈을 뜨며 울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미래는 암담했다. 아이가 아무리 비상하다 한들 벽에 부딪칠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수잔나의 아이라도 세븐스라며 손가락질을 하겠지! 수잔나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찬란한 미래를 위해 비정한 수잔나로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니, 불행할 것 같아."
"그러면 내가 일하는 연구소에 데려갈까?"
"아니!"
수잔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남편을 쳐다봤다. 순간 없는 것 같던 모성애가 불쑥 치솟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품어 낳은 아이인데! 그렇지만 속을 삭이며 잠깐 숨을 고르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섞으며 얘기했다.
"아이가 실험체가 된다 해도, 성과가 없으면 더 불행할 거야. 불행할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담은 상자가 있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이렇게 된 거 모두 담자 결론을 낸, 이른바 '꿈 상자'였다. 리본, 장난감, 인형, 아기를 위한 모형 총, 전자 책, 시시껄렁한 농담을 뱉는 단추, 안드로이드 칩…… 그녀가 좋아하던 초콜릿까지 담겼던 상자는 텅 비어버렸다. 대신 그 안엔 아이가 담겼다. 그녀는 슬럼 외곽 지역에 발을 붙이며 다시금 터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희미한 네온 가로등 밑에 도착하자 쓰레기 더미가 그녀의 키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여기라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렇지? 운이 좋으면 실험체로라도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면, 그때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봐줄게. 그러니까.."
그녀는 품에 안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여전히 울지 않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잔인한 세븐스 같으니라고, 차라리 이럴 때 목청이 찢어지게 울었더라면! 그녀는 상자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했지만 그녀는 위대하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았다. 온갖 감정이 물밀듯 쏟아졌을 때, 그녀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토크쇼에서 버추얼 토크쇼 진행자, 바바라와 마주 앉아있다. 바바라는 시종일관 경박한 태도로 자극적인 주제를 쏟아내고 있었다. 수잔나는 최대한 달콤한 어조로 자신을 구슬려보려는 상황에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애써 참았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아이를 생각하며 덤덤하게 답하기까지 했다. 오늘 아침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나름 잘 정리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굳었다. 그 이후로 어땠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무례한 사회자는 그녀의 상처를 후벼파 과거를 한 숟갈 떠냈다. 아이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녀는 다음날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슬럼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아이를 담은 상자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실험체 목록에서 아이를 찾아 헤맸고, 남편에게 제발 아이를 찾아달라며 빌기까지 했다. 마침내 승인 권한을 얻어 데이터베이스를 뒤졌을 때, 아이는 발견 당시 이미 죽어있어 사망신고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아이를 죽였다 보고한 사람을 어렵사리 만나 육성으로 확인까지 했다. 그는 덤덤하고 무기질적으로 답했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존재를 한순간의 변덕으로 밖에 내놓지 말았어야지요."
그리고 다시는 그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얘기를 해야 할까, 아니다. 그 이야기까지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속과 눈물이 끓는 것을 참아내며 순조롭게 답했다. 공중파에서 우는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비정하려면 끝까지 비정하고 싶었다. 그녀는 새 질문에 다시금 다짐하기 위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머리에 구멍이 생겨 짧은 생을 마감하기 전, 관중석이 아닌 스튜디오 구석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남성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처럼 새하얀 머리를 낮은 자신과 달리 높게 올려 묶고, 삶의 조각을 잃은 자신과 달리 모든 삶을 누리듯 청아하게 빛나는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대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쓰러지기 직전 생각했다. 기억났다. 저 남자다. 저 남자가 아이를 죽였다. 네가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내 아이는─
수잔나 엥엘은 생방송 토크쇼 도중 무장 세븐스 단체의 저격으로 사망했으며, 영원할 것 같던 추모와 달리 그녀가 평생 쌓아올린 삶의 값어치를 매기는 건 2주면 충분했다.
- 탄생, another side
- 그를 소개하자면 그렇게 멋들어진 수식어를 붙일만한 사람은 아니다. 고지식한 독일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슬럼가를 돌아다니는 미친 개새끼, 속내를 알 수 없는 철통 같은 놈, 철분이 부족하면 안드로이드도 씹어먹을 녀석…….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골라보자면 조국에서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인재상이다. 그는 일과 사적인 감정을 분리하는 것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는 이상적인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상대가 아이라고 해도 총구를 겨눴고, 도망치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뭇사람의 동정심을 사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이 주변에서 도망치던 10대 후반 남짓의 청년은 그의 손에 목숨을 달리했다. 사람들은 냉혹한 그의 모습을 보며 과거가 어쨌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건 아니니 제 좋을 대로 떠들어댔다. 그뿐이랴, 서로 나름의 이유를 붙이며 자신의 영역에 그나마 걸쳐있노라, 그러니 임무에서 배척하지 않고 그가 혼자 다니는 것이다 합리화를 해댔다.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어차피 그가 마땅한 이유를 대도 제멋대로 떠드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는 누군가 떠들든 말든 뒷짐을 지고 임무를 수행했다. 토크쇼의 질문을 굳이 곱씹어 보려 하지도 않았다. 바바라가 시청률을 위해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회자인 건 온 국민이 아는 사실이고, 어차피 저 질문이 그에게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수잔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질문 또한 그닥 영양가 있는 것이 아님을 꿰뚫을 수 있었다.
약 7년 전, 수잔나는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 서슬 퍼런 녹색의 눈길 때문에 일이 잘못됐나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간절하게 질문했다. 정말 아이를 죽였느냐고. 그는 당시 무덤덤하게 답했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존재를 한순간의 변덕으로 밖에 내놓지 말았어야지요. 그리고 그녀가 비틀대더니 자리를 황급히 뜬 사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수잔나의 답이 궁금했다. 당신은 지금도 아이를 그리워할까. 하지만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수잔나는 이마에 구멍이 뚫려 경련하더니 늘어지고 말았다. 스튜디오는 비명과 패닉으로 아수라장이 됐고, 그는 허둥대는 동료 사이에서 바이저 헬멧을 쓰며 총을 장전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당신이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는 이 방송이 끝나고 당신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을 것이다. 당신의 아이는 자신의 품에서 잘 살고 있노라고. 바람이 가져다주는 계절의 소식과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행복을 깨우치며 살고 있다고. 당신을 제법 닮았는지 배우지도 않았는데 영특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그는 기회를 주겠다는 마음도 갈무리했다.
"습격이다! 전투태세에 돌입해!"
그녀가 답변조차 못 하고 이렇게 명을 달리한 것도 있지만, 굳이 답변을 듣지 않더라도 그녀는 7년 전 자신을 마주했던 순간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그녀가 낳은 아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뱉은 모든 단어에서 아이의 그리움 보다 수잔나 엥엘이라는 여성이 인생에서 가졌어야 할 당연한 행복에 대한 미련이 느껴졌다. 마침내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도 자신 때문에 행복이 무너졌노라 자신을 탓하지 않았나. 타인이라면 이 사실을 몰랐겠지만 그는 공기의 흐름을, 나아가서 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의 기류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늘어진 수잔나의 시체에서 경멸 어린 시선을 뗐다. 추모는 남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 [해석]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 불면
- 이스마엘이 기억하기에, 아버지는 유달리 잠에서 깰 때가 잦았다. 어느 날은 소리 없이 눈만 뜨고 자신이 잘 자는지 확인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무엇이 괴로운지 숨죽여 우실 때가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제풀에 놀란 듯 구석으로 도망칠 때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밤에 잠들지 못한 자신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은 채 연신 미안하다 빌었던 일이다. 잠에서 깨지도 못한 아버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참이고 미안하다 말했다. 내 의지가 섞인 일이었노라, 내 의지가 아니었노라. 죽을죄를 지었노라, 죽을죄를 지은 건 너희가 아니었느냐. 고작 앞니 빠진 어린아이인데, 어린아이라도 위험한 존재인데……. 공용어도 쓰지 못하고 독일어로 몇 번이고 뱉던 갈팡질팡한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그 의미를 곱씹기엔 이스마엘이 너무 어렸지만, 기억만은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스마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 가렸다. 심호흡을 하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쉴 적, 뱉는 숨보다 짐승 같은 억눌린 신음이 목구멍 틈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식은땀이 전신을 흠뻑 적셨다.
해가 지지 않는다.
이미 두 눈은 죄다 타버렸는데 여전히 시야가 붉다.
이스마엘은 아버지가 왜 잠들지 못하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 의지를 잇는 자
- 우아한 레드 카펫을 밟고, 죽은 세븐스와 전리품으로 만든 예술 작품을 지나면 원형의 투기장이 펼쳐진다. 투기장은 오늘도 만석이다. 비능력자는 고사하고 휴가를 낸 가디언즈와 고위급 손님마저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의 쇼를 관람하기 위해 모였기 때문이다. 자칫 단조롭게 반동분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이라는 행위를, 곧 사형될 세븐스에게 각자 표를 던지고 자신이 배팅하지 않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움을 붙이는 투기 형식으로 바꾸는 비윤리적인 시도는 가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역작이자, 획기적인 사업 아이디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초반에는 세븐스라 할지언정 국민에게 도박을 권유하느냐며 반대의 여론이 있었으나 어차피 양지로 나오지 않고 음지에서만 관람하는 일이라 높으신 분이 못을 박게끔 뒷돈 좀 먹이고, 반대 여론을 주동한 사람 두어 명 정도를 반역으로 꾀해 죽이니 거센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피로 이룩되어 학살을 파는 장소에 발을 들일 때마다, 남성은 이따금 심심한 감상에 젖곤 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죽을 걸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알고도 각오를 다져 싸워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용기를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어리석다고 비웃어야 할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반석이 아닌, 따로 마련된 특수소재 유리 너머에서 경기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VIP석에 도착했을 때도 남성의 감상은 식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가장 먼저 본 것도 그의 오랜 친구가 아닌 오늘 황제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예정인 사람이었다. 제복 차림인 것을 보니 가디언즈 배신자가 틀림없다. 불안한 기색으로 이리저리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훑는 시선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았다. 배신자와 남성의 시선이 마주칠까 싶을 때, 누군가 불쑥 끼어들듯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와서 누굴 보는 거야? 질투 나게."
"그깟 개 짖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날 부른 거면 다시 가도록 하지."
"매정하기도 하지! 그러지 말고 앉아. 당신 하나 때문에 경기가 5분이나 지체됐다고."
흰 정장 위에 화려하게 자수가 놓인 도포를 걸친 은발의 남성, 가란은 옆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들기더니 이내 다른 손으로는 와인잔을 들어 아무렇게나 올렸다. 은은한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시종 안드로이드가 와인잔을 채우자 남성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자리에 앉았다.
"담배, 피워도 되나?"
"물론 피워도 돼. 시가는 싫어?"
"별로."
"내가 싼 티 나는 입맛 티 내는 거 걱정해서 준비한 건데도?"
"그 안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날 뭘로 보는 거야?"
"인신매매 마약상?"
"세상에, 카르텔 일은 손절한 지 오래거든?"
"무슨 소리. 아직도 윌리가 설치던데."
"나 참, 그건 정당한 상품 물색이고. 됐고, 불 붙이는 거라도 내가 하게 해줘."
"마음대로."
남성이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두어 번 손목으로 툭툭 털듯 흔들자 별다를 것 없는 궐련 하나가 딸려 나왔다. 궐련을 입에 물었을 적, 가란은 시종 안드로이드가 미리 불을 붙여 준비한 성냥을 조심스럽게 남성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시간이 조금 지나 창백한 연기가 입을 타고 일직선으로 뻗어가더니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자, 접대 해줬으니 본론. 자기, 윌리 앞니가 나갔어. 좀 살살 쳐."
"이제 제대로 된 사형장이 된 이상 사형수는 꾸준히 공급되니 이젠 눈감아줄 이유가 없지 않나? 계속 내 구역에서 설치면 다음엔 앞니로 끝나지 않을 거라 전해."
"음, 그랬다간 걔가 산재니 뭐니 지껄이겠지? 갑자기 살살 치지 말고 죽여주면 더 고마울 것 같네."
"악덕업주 같으니라고."
"카르텔 출신이 다 그렇지 뭐."
사담을 이어가자니 사회자의 경쾌한 안내 멘트가 투기장 내부를 울린다. 오늘의 경기의 주제는 생존. 국가에 대한 충성을 버린 극악무도한 가디언즈 배신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곳의 사형 집행인, '황제'에게서 10분을 살아남으면 자비를 베풀어 석방 시키고, 살아남지 못하면 주어진 대로 살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 죄로 무자비하게 찢겨 죽는 간단한 룰이었다. 친절하게 안내되는 배팅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배신자가 죽는다, 산다, 황제가 죽는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넓은 스크린에 떠오른 1분간의 배팅 타이머를 뒤로, 사람들은 각자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자기, 안 눌러?"
"도박 같은 건 안 하는 주의라."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뒷돈 찌를 때도 극구 돌려줬으니 원."
"그랬지."
"그런데 술은 안 돌려주더라?"
남성은 타이머를 노려보듯 했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나왔다. 돈을 잃을까 겁이 나거나, 취미가 고약하거나, 오늘만 살기 위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배신자가 죽는다는 선택지를 택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뒤로 가란이 만족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구석에 작게 뜬 선택지 통계 인원수를 보니 누군가의 죽음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오늘도 짭짤할 예정인 것 같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경기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벌써 첫 부상이 나왔다. 아무렇게나 쥔 창이 교묘하게 배신자의 팔을 스쳤기 때문이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오자 환호성도 같이 터진다. 황제는 봐주는 법이 없고 남을 가지고 노는 것이 특기였으니 당연한 일일 법도 싶지만, 간혹 남성은 가디언즈 하나 정도는 저렇게 순식간에 공격할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 낸 가란에 대해 꺼림칙함을 치울 수 없었다. 공포에 젖은 숨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때리자 괜히 기분이 나빠졌는지, 남성은 경기보다 담배에 더 집중하기를 택했다. 가란은 남성을 바라보다 친근하게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몸을 기울였다.
"언제 봐도 감회가 새롭지?"
배신자는 피를 흘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두 번째 부상은 어깨를 향했고, 배신자의 팔을 타고 피가 흘렀다. 세 번째 부상부터는 슬슬 진짜 죽겠구나 싶어 능력을 쓰겠지. 그러면 본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남성은 무표정으로 어깨 위의 팔을 쳐냈다. 와인잔이 흔들려 바닥에 와인 몇 방울이 흩뿌려지듯 튀었다. 방금 터진 세 번째 부상처럼. 가란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네 취향을 20년 째 보고있지만 늘 새롭게 엿같군."
"정말이지, 자기도 참. 내 취향으로 누군가 먹고살게 됐으니 받아들여."
가란은 기댔던 팔을 뗐다. 경기에 집중하듯 시선을 유리 벽 너머로 고정하던 자수정 빛 눈이 굴렀다. 20년이라.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시선이 남성을 훑었다. 한때 높게 올려 묶었으나 지금은 등허리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흰 머리카락, 왼쪽 눈썹 위를 가로지르는 흉터, 제복 차림이 잘 어울리는 관리된 체형, 굳은살투성이의 손가락엔 피우다 만 담배가 있었다. 세월이 지나 30대 후반이 되었기에 얼굴에 조금씩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으나 가란은 확신했다. 늙더라도 곱게 늙을 것이다. 세상에는 40대부터 미모에 꽃이 피는 사람이 있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그렇게 될 것이 뻔했다. 가란의 시선을 느낀 남성이 눈을 흘긴다. 날카로운 녹색 눈이 매력적이었다.
"왜."
"시간이 많이 지났단 생각이 들어서. 당신과 내가 만난 지 20년이 지났잖아. 언제였지? 열 일곱?"
"지긋지긋하군."
"그만큼 시간이 지났는지, 이젠 당신에게도 세월의 흔적이 보여."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넌 여전하고."
남성이 눈을 흘겼다. 가란이 시선을 마주치고 샐쭉 웃었다. 가란은 20대 초반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영원한 젊음을 갖기 위해 스스로에게 개조 수술을 거친 결과다. 그는 60대가 되어도, 80대가 되어도 이 모습으로 살다 죽겠지. 배신자는 혼비백산해 그런 둘의 앞을 도망치듯 지나쳤다. 마치 훌훌 떠나버린 지난날의 시간 같다. 이제 보니 능력을 쓰는지 새하얀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멍청하긴, 바닥에 피뢰침이 깔려 있으니 통하지 않을 텐데. 가란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감흥 없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늙는 건 즐겁지 않아. 세월이 흐르면 역사도 변하잖아."
"그래서 과거에 스스로를 가뒀나?"
"가뒀다니. 나는 변하지 않는 역사 속에서 살고 싶을 뿐이야. 영원한 권세, 마르지 않는 돈, 평생 충족될 즐거움과 나를 향한 애정.. 헬무트, 그때 우리 참 좋았잖아."
"뭐가?"
"신참이던 당신의 주머니에 몰래 들어가던 돈, 뿌리치던 손길, 나날이 높아지는 나의 명성, 술을 대접해도 서로 앙숙처럼 마주하더니 술김에 불꽃도 튀어보고. 난 참 좋았는데."
"난 별로였어." 헬무트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끔찍했지."
"응, 그렇겠네. 당신 우는 꼴을 보던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헬무트라 불린 남성이 잠깐 가란을 쏘아보더니 배신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온몸이 피 칠갑이다. 황제는 여유롭게 피 묻은 창을 털어 보이며 허공을 걷고 있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끝까지 반항하며 누군가에게 도망치는 모습이 처절했다. 시선을 왼쪽 위로 던지자 타이머가 보였다. 벌써 이렇게 됐나. 앞으로 5분만 더 버티면 세븐스는 자유가 될 것이다. 그 안에 과다출혈로 죽거나, 지금 여유롭게 걸어오는 저 조그마한 황제의 손에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과연 이 순간이 오도록 만든 과거가 좋았던 순간일까? 아닐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마 평생 아닐 것이다. 곱씹어 보던 헬무트를 뒤로하고 가란이 나지막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딱 그때까지만 좋았어."
"무슨 뜻이지?"
가란은 와인잔을 집어던졌다. 붉은 피처럼 튄 와인을 뒤로 투기장 바닥에도 피가 스몄다. 비명소리가 끔찍하다.
"너무 많은 것이 변해간다고."
가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안드로이드처럼 섬뜩한 표정을 지은 가란이 중얼거리자 헬무트는 표정을 구겼다. 헬무트는 재떨이에 아무렇게나 비벼 끈 담배를 이어 새 궐련을 입에 물고 고개를 까딱였다. 더 얘기해도 좋다는 듯.
"당신, 자식이나 후계자 계획은 있어?"
"갑자기 후계자 얘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말했잖아.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변한다고. 이제 후대에게 물려줄 시간이 되어간다는 뜻이야. 다시 묻도록 하지. 자식이나, 후계자를 만들 계획은 있어?"
"아니."
"난 있어. 내 투기장을 변함없이 물려줄 존재가 있다고. 영원불멸의 의지를 잇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며칠 전에 세븐스 어린애를 바로 처형하지 못해서 곤욕을 치렀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들어왔어. 그 미친개 헬무트 케르스트너가."
자수정 색 눈이 점차 가늘어지자 헬무트는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싸구려 라이터가 불을 피워 담배의 끝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었다.
"당신이 만약 숨겨둔 자식이나 후계자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러려니 하고 사태를 묵인했을 거야. 이미 똑같은 의지를 이을 사람이 있어 그 의무를 놓을 수 있을 테니. 그렇지만 당신,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달라지면 주변에서 당신을 곱게 볼 수 있을 거라 봐?"
그의 친구, 가란은 감이 좋았으며 머리 또한 명석했다. 그 감과 지능 하나로 투기장을 이곳까지 끌고 온 사람이었으니, 아마 지금 상황이 단순한 세월의 흐름을 탓하는 것은 아닐 테다.
"물려줄 사람이 없다면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려. 당신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 우리 같은 사람은 둘 중 하나야. 저기 저 새끼처럼 처참하게 죽거나, 죽여서 위로 올라가거나."
"정에 기인해서 얘기하는 건가?"
"아니, 당신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 후계자를 자식처럼 아끼거든. 내 사랑은 한곳에만 집중하는 타입인 거 알잖아."
"화났나?"
"글쎄다."
가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표정을 보니 달리 화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싶었다. 헬무트는 연기를 뱉으며 가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처참하게 죽는다는 문장을 비롯해 허벅지에 있는 홀더에서 총을 꺼내는 걸 보니 남은 시간 동안 살아남게 할 생각이 없었던 듯싶다. 헬무트는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가란은 앞으로 걸어 유리로 된 문을 열었다. 강화유리로 된 VIP석이 열리자 배신자가 혼비백산 달려오는 것이 목전에 보였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사람의 발버둥이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럭키 찬스, 오늘의 변수! 배팅 금액은 두 배, 두 배입니다!!!"
가란은 보지도 않고 총을 갈겼다. 머리를 정확하게 관통한 총알을 뒤로 가란이 피투성이 투기장 한복판을 걸었다. 그리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용을 닮은 조그마한 황제의 앞에 서더니, 깊게 절을 올리며 발등에 입을 맞췄다. 헬무트의 시선이 좁혀졌다. 이내 역겹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다. 가란이 사형장의 집행인을 연인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설마 자식이라고 공인할 줄이야. 아니, 세븐스를 투기장의 오너로 세울 생각이니 타인에게는 그게 더 역겨울 사실인가. 황제는 찢긴 옷 너머로 가란을 안았고, 가란은 그런 황제를 능숙히 안아올리며 헬무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회자의 경쾌한 안내 멘트와 예상치 못한 배팅에 성공한 사람들의 광기 어린 환호, 시체 경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화를 뒤로 헬무트는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 연기는 환풍 시스템에 의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미친놈."
"응,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네 나이를 생각해야지."
"알아. 그런데 뭐 어때. 폐하가 사람으로 보이니?"
"……."
"아차, 자기도 세븐스였지. '그것'들과는 다르게. 제법 고급 품종. 아무튼.. 당신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더라면 폐하와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어."
"개소리."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우리는 물과 기름 같았지만 결국 닮은 점이 많잖아. 아이들도 그 의지를 이어받을 테니 필히 닮겠지."
황제는 가란을 품듯 안으며 감흥 없는 눈으로 헬무트를 쳐다보다 무언가 조그마한 냄새를 맡았는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눈이 마주치자 이내 비밀로 하겠다는 듯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란에게 몸을 밀착하는 모습에 헬무트는 혀를 찼다. 다 알고 그런 말을 꺼낸 거였나. 헬무트는 녹색 눈으로 가란을 마주했다.
"알고 있었어?"
"우리 폐하께서 후각이 원체 좋은지라. 품에서 애새끼들 쓰는 샴푸 냄새가 나면 둘 중 하나지. 네가 소아 성애자거나, 아니면 숨겨진 자식이 있거나."
"침묵도 반역의 범주야."
"알아, 그래도 재밌잖아? 난 몰랐다고 끝까지 발뺌하고 뒷돈 찌르면 되는 일이라 딱히 두렵지도 않아. 더군다나 나도 제법 미쳤잖아. 이 정도는 아가리 닥치고 있어도 저 미친 새끼가 그럴법 하다며 넘어간다고."
"가란."
"왜?"
"내가 처참하게 죽길 바라나?"
"음.."
가란은 깔깔대며 웃었다. 황제의 품에 뺨을 기대며 능글맞게 미소짓는 꼴이 역했다.
"아니, 난 당신이 괴물이 되더라도 살았으면 좋겠네."
"흥미 때문인가?"
"물론이지. 당신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 맡은 일은 해내야 하지 않겠어? 당신이 죽은 시체를 두고 의무감과 변화 사이에서 갈등하다 미쳐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걸. 물론 걱정 말아, 당신이 죽으면 시체는 내가 박제해서 당신 자식한테 보여줄 테니까."
"미친 새끼."
"말했잖아,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고. 그래서, 괴물이 되면 면죄부는 못 받을 텐데. 그건 안 두려워?"
"그깟 면죄부 하나 못 얻는다 해서 세상이 끝나던가?"
헬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하는 시선으로 가란을 한번 쳐다보고 뒤를 돌았다. 가란이 노래하듯 서슬 퍼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봐, 우리는 결국 닮을 수밖에 없는 거야. 세상을 등지고 자신만의 길을 걷지.
* * *
"글러먹었군."
훈련실에서 굉음이 울렸다. 격렬한 전투에 바닥이 깨졌는지 흙먼지가 자욱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제와 이스마엘은 노이즈 하나를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스마엘이 바깥에 나오자, 잠깐 마주친 제가 독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신을 독대하겠다 했으니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제가 네가 헬무트 자식이느냐 물었을 때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시작한 담소는 헬무트의 안부, 서로의 과거, 이상향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고, 제는 이상향에 대해 들을 적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알려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겠나.
"무슨..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담소는 훈련실 내부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이스마엘의 일방적인 부상과 패배였다. 실전 경험이 부족해 방어만 하던 이스마엘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고,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제는 감흥 없는 눈으로 이스마엘을 짓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이마가 깨지기라도 했는지 흙먼지가 가신 바닥에 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 고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스마엘은 부들대며 일어서기 위해 팔을 굽혀 힘을 주고 있었다.
"네 물러빠진 각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이 네가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롭게 될 성싶으냐?"
"……."
"헬무트의 뜻이 겨우 이 정도였나?"
"입 다무십시오."
제는 대답 대신 머리를 지르밟은 발을 한 번 비볐다. 모욕적인 처사에 이스마엘은 부들부들 떨었지만, 압도적인 괴력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고개를 들었다가 목 뼈가 부러질 것은 틀림없었다. 제가 발톱으로 머리채를 쥐어잡더니 물었다.
"그 잘난 뜻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방만히 구느냐."
"누구도,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니까, 저는……."
"그 자유로 인해 다른 누군가 피를 흘리겠지, 이 오만한 것. 아무도 죽지 않는 이상향?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군가는 죽는다. 죽는단 말이다."
"아니, 아니야."
"그리 나약하고 오만한 뜻이었기에 그가 이리도 후계자를 꽁꽁 숨기고 살았던 건가? 응?"
"입 닥치라고!!"
거친 목소리가 훈련실을 쟁쟁히 울렸다.
"하면 직접 그 입으로 답해봐라.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느냐."
"……."
"피를 흘리지 않을 권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리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패자가 입으로만 나불대는 논리지.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 상황이 계속되면 주변에서 너를 곱게 보겠느냐? 주변에서 너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너는 결국 겁쟁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피를 봐야만 하거늘. 어찌 보지 않으려 드느냐?"
"그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면, 결국 피의 역사를 이룰 뿐입니다. 어째서 피로 얼룩진 역사를 반복하려 드는 겁니까?"
"모든 것이 피로 이룩되었다. 결국 네 땅 디딜 수 있는 이유도 피를 봐 이룩한 세상에 있기 때문이 아니느냐."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은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팔에 다시금 힘을 줬다. 제의 발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다리가 굽혀졌다. 이스마엘의 상반신과 고개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제가 흥미롭단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윽고 제는 뒤로 멀찍이 뛰어 거리를 유지했고, 이스마엘은 겨우내 일어섰다. 제가 나지막이 웃었다. 이걸 견뎌서 일어났다라. 정신력 하나는 미친개의 후계자가 맞다. 이스마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꼿꼿하게 고정하며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웠다.
"가디언즈는 네가 그런 말을 할 때 눈 하나 꿈쩍 않고 널 죽일 텐데도. 되레 비웃을지도 모르는데?"
"알아."
"알면서도 그런 길을 걷겠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압니다. 알아, 안다고.. 이 세상에서 누가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개 같은 세상.. 상처를 가릴 수 있는 사람과 상처를 내보이고도 당당한 사람으로 나뉠 뿐인데..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가해자만 존재하는 곳인 걸 안단 말입니다. 이 따위 세상 따위, 진즉 사라졌으면 좋았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라졌더라면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순응하는 삶이 나았을 텐데! 어차피 발버둥 쳐봤자 누군가에게 다른 가해자가 되는 사실을 아니까!! 제가 이 말을 하길 바란 겁니까? 제 아버지를 모욕해가며!"
"그래. 그러길 바라였다. 내 너와 네 아비의 뜻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걷는다는 것이 고깝기에."
"그렇다면 여기서 끝내고자 하십니까."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마."
제가 다시금 전투 태세를 취하자 이스마엘의 무장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배트가 갈라지더니, 이내 여덟 조각으로 쪼개지듯 분해됐다. 새로운 무장을 뒤로 이스마엘은 피를 거칠게 뱉고 옆으로 슬슬 걷더니, 이내 벽에 발을 디뎠다. 염력을 통해 중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측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90도에 가까운 각도에 선 이스마엘의 뒤로 8개의 나이프로 전개된 보검이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어차피 피를 묻힐 것을 두려워 하는 주제에."
"내가 걸을 길에 상처 입은 사람의 피가 묻는 게 싫은 것일 뿐입니다. 오만합니까? 오만하다고 하십시오. 오만한 대로 살겠습니다. 이 길에 묻을 피는 내 피로, 내 숨으로, 내 삶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누군가 피를 흘린다면 그만큼 내가 피를 흘리면 되는 일입니다. 단지 그걸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태생부터 달랐기 때문에, 선택지가 있다 한들 자유로운 자에게 있어 나은 결정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틀을 깨부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내가 쥐었던 것을 남에게도 쥐여주는 게 뭐가 나쁘다는 말입니까?"
이스마엘은 발을 박찼다. 염력으로 인해 자유로이 유영하듯 공중에 떠올라 나이프를 쐐기처럼 쏘아냈다. 제는 소맷단에 손을 가리고, 날아오는 나이프를 발로 걷어차 튕겨냈다. 다른 하나가 발에 박혔지만 그마저도 뽑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을 찰나였다. 이스마엘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제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악을 지르듯 외쳤다. "망설이지 마라!" 이스마엘이 심호흡 하는 소리가 불안정하고 거칠었다. "망설이지 말라 하신 건 당신입니다." 나이프가 부들거리며 떨리더니 그대로 제를 거꾸로 뒤집듯 들어 올려 벽을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제는 용케 나이프를 덥석 쥐더니 발에 박힌 나이프를 뽑아냈다. 그리고 꼬리로 벽에 처박히는 반동을 줄이고, 역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이스마엘을 다리로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스마엘이 너머 벽으로 처박혔다. 뒤이어 날카로운 손톱이 어깨를 향했다. 뼈가 부서지는 끔직한 소리와 함께 어깨에 격통이 치밀자 이스마엘은 이를 악 물었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스마엘의 주변으로 날아온 나이프가 일제히 제를 향했고, 제는 다시금 도망치듯 멀리 떨어졌다. 몇 번의 합을 벌일 때마다 부상이 생겼다. 배에 박힌 제의 손톱이나, 허벅지에 내리꽂힌 이스마엘의 나이프……. 마침내 이스마엘이 허공에서 제의 머리를 붙잡았고, 그대로 땅에 처박듯 강하했다. 땅이 깨지고 반동 때문인지 원래 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밀려나더니 흙먼지가 다시금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치열한 격전이 끝났다. 이스마엘이 숨을 골랐다.
"─이렇게 될까봐,권리를 무시하고 피가 아닌 남의 피를 보게 되는게 두려운 겁니다..저는 다른 사람과 달리 무뎌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까 봐,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될까 봐……."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스마엘이 머리를 부여잡은 손바닥에 와닿는 감각을 깨달았다. 피를 토했는지 장갑이 축축했다. 그 모습을 본 이스마엘이 손을 떨며 황망스레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까 두려웠던 건데. 이스마엘의 두려움과 달리제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이내 상황에 맞지 않게 피 끓는 소리와 함께 꺽꺽대며 웃었다. 자그마한 웃음이 삽시간에 훈련실을 채웠다. 이스마엘은 얼굴을 부여잡은 손을 황급히 치웠다. 입가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웃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공포가 불쑥 치솟았다. 머리를 다쳤나 싶어 자가치유 시스템이 한시라도 빠르게 기동되길 바랐다. 웃음을 뒤로 제가 입을 벌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세상은 네 생각처럼 되지 않음을 너 또한 알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아직 불완전하구나."
"갑자기,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피를 보고 싶지 않느냐, 쥐여주고 싶어 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더냐?"
"……예."
"하면 네 희생하거라. 그 희생 고결하다 해줄 사람 적고 대다수는 그 성과를 뺏기 위해 짓밟고 올라설 것이며, 타인을 희생시키면 주변이 분개해 결국 너도 다를 바 없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게 삶이다. 네 오만한 만큼 타인도 오만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결한 줄 알지만 결국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잡것 천지임은 자명하지. 천한 것들이 결국 서로에게 인간이니 뭐니 면죄부를 줄 뿐이란 말이다. 네 괴물이니 뭐니 하는데, 혹 면죄부를 얻지 못해 두려워 그런 것이냐?"
제는 히죽대며 피를 뱉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지 다시 털썩 누워버린다. 이스마엘은 그런 제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쏟아지던 피를 아무렇게나 훔쳐 닦더니, 자연스럽게 입가에 고인 피를 뱉었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는 뒷머리가 깨진 듯싶었고, 이스마엘은 어깨 한쪽이 박살나며 관통상도 없잖아 있었다. 더 격식을 차리며 대화해봤자 이 제멋대로인 세븐스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이스마엘은 결국 씹어뱉듯 입을 벌렸다. 피가 죽 쏟아졌다.
"개소리 마십시오. 그깟 면죄부 하나 못 얻는다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 눈을 홉뜨고 한참 이스마엘의 노이즈 너머를 바라보다 겨우 그쳤던 웃음을 다시금 터뜨렸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높아지는 웃음 사이로 이스마엘이 눈을 좁혔다. 둘의 상처는 느린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면죄부 하나 못 얻는다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듯 네 괴물로 손가락질 받고 하찮은 것들 사이에서 산 채로 불태워진다 한들 그 이전에 이룩한 것이 달라지지는 않지. 더 짓밟고, 먹어치우고, 가지고, 누리면 되지 않느냐. 어차피 세상을 등지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너는 왜 변절자의 길을 걸은 주제에 망설이며 더 변절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것이냐?"
이스마엘은 침묵했다. 간교한 뱀의 속삭임, 그리고 광인의 일장연설 같다는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 머리가 아찔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뒤로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참을 수 있기는 무슨, 못 참는다. 머리를 너무 크게 다친 것 같다. 배도 꿰뚫린 것 같고, 시야도 흐리다. 강한 어지러움을 느낀 이스마엘은 욕을 뇌까렸다. 이런 씨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욕설에 제의 시선이 굴렀다.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어둑어둑하게 점멸하는 정신을 뒤로 이스마엘이 나지막이 입을 벌렸다.
"이곳의 군법도 있으나 지금은 당신과 달리 아직 내가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아직은? 군법이 없었더라면 그만둘 가능성이 있다 그건가?"
"아가리."
"말하는 싹수 하고는. 헬무트를 쏙 빼닮았어."
"먼저 다물었으면 될 일 아닙니까."
"그래, 그래. 재밌구나. 참으로 우스워. 얘, 나중에 혁명이 끝나면 나랑 투기장이라도 열지 않으련?"
"그건 또 무슨 개소립니까?"
"로벨리아 곁을 떠나서 평소에 고깝던 비능력자들 좀 모아두고. 떼돈 벌며 살자는 뜻이지, 어때? 어차피 혁명이 끝날 때 네 미칠 것은 자명해 보이기에."
"미친 새끼……."
이스마엘은 제를 노려봤다. 이내 "나가 뒤지십시오." 라고 살벌하게 중얼거리다 그대로 풀썩 쓰러지더니 정신을 잃었고, 제도 끅끅대며 웃더니 "그런 말 많이 들어. 근데 그거 아는가? 어차피 여는 시한부라서 말이지." 따위의 대답을 뒤로 점멸하는 의식 사이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쓰러져있고, 훈련장이 두 사람이 생사결을 벌여 흩뿌려진 피와 잔해투성이임을 발견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 영원
- "이스마엘, 영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음.. 모르겠어요."
"아빠와의 대화에서 틀린 답은 없으니 뭐든 얘기해도 좋단다."
"으음.."
태블릿을 터치하는 손가락은 아직 조그마했다. 아이의 손가락이 모델명에 가까운 무언가를 쳐내자 검색 결과가 창백한 스크린 너머로 떠올랐다. 이젠 사용하지 않아 단종된 구형 안드로이드였다.
"이거 같아요. 광고에서는 영원한 동반자로 남는다면서, 결국 이 모델은 없어졌잖아요. 사전과 현실은 의미가 다른 것 같아서 어려워."
"이스마엘, 참 멋진 답변이구나. 맞아, 네 말대로 영원한 건 없단다. 사람도 마찬가지지."
"……그럼 아빠랑 나도 영원하지 않겠네요?"
"이스마엘, 사람은 언젠가 죽는단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뒤로 머리 위에 올라온 손이 따뜻했다. 아이는 손에 머리를 비볐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서, 흔적은 유지할 수 있지. 그게 바로 역사란다."
"많은 사람이 영원이 될 만큼 기억하면 역사가 되겠네요?"
"그래."
"아빠는 누군가를 위해 역사를 만든 적이 있어요?"
"많지."
검은 정장차림. 남성은 검은 정장을 빼입고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를 역사로 만들었단다. 아빠가 아니면, 그 누구도 역사로 만들 수 없으니까."
"……저도 누군가를 기억으로 남겨서, 하나의 역사로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그럴 일이 없길 바랄 뿐이지. 이스마엘, 나는 네가 역사를 남길 일 없이 행복했으면 한단다. 저 넓은 하늘을 두 눈에 담고, 바람의 자취를 따라 세상의 많은 것을 듣고, 보았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길을 가도 네 선택인 만큼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지만, 적어도 아빠가 바라는 삶은 그렇단다."
"그 말만 벌써 여섯 번째인데!"
"그만큼 네가 소중하니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데."
"으응, 나도 아빠가 소중해요."
"이스마엘."
"응?"
"길을 잃어 방황하는 날이 있어도 바람이 너와 함께할 거란다. 바람은 네게 친절하니까. 그러니 만약.. 아빠가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면,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가렴. 알겠지?"
"응. 그렇지만 아빠가 먼저 가는 건 싫어요. 나랑 오래오래 살아야 해, 알겠죠?"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나는 당신을 역사로 남기고자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써내려가고자 한다. 이스마엘은 목에 걸린 인식표를 손에 쥐고 고개를 올렸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날씨의 매서운 바람이라지만 당신과도 같은 상냥함이 녹아 깃든 것 같았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눈을 감았다.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조만간,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그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 조언
- 슬럼은 서로의 삶을 살아가기도 버거운 곳이었다. 인심이라곤 U.P.G가 세븐스에게 베푸는 호의만큼이나 없었으며 그나마 호의를 베풀어도 누군가 자신이 죽기 전에 조금이나마 선행을 베풀어 지옥에서 감형 받기를 바라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런 각박한 곳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부터 크게는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까지. 이스마엘도 슬럼에서 각종 싸움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하고는 했다. 하지만 재수에 옴 붙는 날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 운수가 좋지 않은 날이었다. 슬럼의 늙은이들이 입을 모아 끔찍하다고 말하던 미친 곰 윌리를 필두로 활동하는 매매업자 중 하나를 마주친 것이다.
처음에는 이곳의 비능력자로 착각했는지 영역 다툼을 피해 뒷골목에 숨어있던 이스마엘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으나, 매매업자는 이스마엘이 세븐스인 걸 알아챈 뒤로는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 혹은 처음부터 세븐스인 걸 알아채고 환심을 사 방심을 시키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이스마엘을 적당한 값에 넘기기 위했던 것인지 공격을 감행했고, 이스마엘은 순식간에 내지른 칼에 목부터 시작해 가슴을 가로지르는 큰 부상을 입었다. 목부터 시작해 타오르는 듯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을 때, 이스마엘은 싸움을 넘어 사투를 벌여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이스마엘이 죽어서라도 그 가죽을 벗겨 팔아치울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총을 막아내고, 매매업자를 밀쳐내던 이스마엘은 수세에 몰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마주했다.
이대로라면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이스마엘의 시야에 벽돌이 잡혔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가 한 번 나더니, 상황은 역전됐다.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다 멈췄다. 바닥에는 피가 스몄고 매매업자는 대자로 뻗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매매업자의 배를 깔고 앉아 피로 범벅 진 벽돌을 양손으로 기도하듯 모아 쥔 그 모습 그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파악하기가 무섭게 눈물이 흘렀다. 목과 가슴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데 눈만큼은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미안해요, 나는, 나는 살고 싶어서, 미안해요……."
이스마엘은 부들부들 떨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때렸다. 때리기만 한 게 아니다. 살고 싶어서 그 사람을 해쳐버렸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성이 조심스럽게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얘."
이스마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은색 머리를 가볍게 그러쥐어 모아 묶은 남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스마엘을 쳐다보더니 입을 벌렸다.
"상처가 깊어 보이는데, 괜찮니?"
"누, 누구……."
"지나가던 슬럼의 늙은이."
이스마엘이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성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잔뜩 긴장해 딱딱해진 손에 쥔 벽돌을 부드럽게 떼어주고, 이스마엘을 시체 위에서 내려올 수 있게 도왔다. 벽 근처에 기대 앉게끔 도운 남성은 이스마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의사를 부르기 전에 한 가지 묻자꾸나. 보아하니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맞니?"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휘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구나. 짧게 되묻자 이스마엘은 겨우내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은 사투로 너덜너덜해진 이스마엘의 옷과 드러난 상처를 흘끔 바라보더니 자신이 입은 외투를 벗어 상처 부근에 꽉 동여맸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단다.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테니까. 너, 세븐스지?"
이스마엘이 흠칫 놀라며 신경을 곤두세우자 남성은 놀라지 말라는 듯, 한 손을 들며 설레설레 흔들었다. "괜찮아. 나는 세븐스에게 제법 호의적이거든. 그러니 이 슬럼에 짱박혀있지." 이스마엘은 노이즈 너머에서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일단은 친절의 값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얌전히 남성이 자신의 손을 옮겨준 곳을 꾹 눌러 지혈에 집중했다.
"제게, 제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세븐스에게 호의적이라 해도 사람을 죽였는데……."
"글쎄,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좋은 말부터 하자꾸나. 너는 살아남고자 선택한 거잖니?"
이스마엘은 지혈하던 손에 괜히 힘을 더 주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아마 네가 당해줬더라면 죽었을 거야. 너는 살아남고자 선택했고, 어쩔 수 없었잖니."
"……그렇지만.."
"그거 아니? 이곳을 관리하던 가디언즈도 한때 이곳을 주름 잡던 인신매매 카르텔 나부랭이가 세븐스를 데려가도 묵인해 줬단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지. 자칫하면 슬럼의 모든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고, 아무리 가치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게 가디언즈의 임무니까. 듣자 하니 반역죄로 죽었다던데……. 그것도 결국 그의 선택이겠지. 반역자의 임무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했을 테지. 원래 그런 법이란다."
그렇기에 인생의 갈림길에서 보다 나은 선택지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지. 남성은 어깨를 토닥이며 노이즈 너머의 이스마엘을 꿰뚫어보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란다, 꼬마야."
"……그럼 나쁜 말은 뭔가요?"
"글쎄.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니? 서로 신뢰를 해야 할 수 있는 말이거든."
이스마엘은 머뭇거리다 지혈하던 손을 겨우 들어 손목을 더듬었다. 눈이 마주친 남성은 잠깐 눈동자를 둥글게 뜨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
"똑 닮았네."
"무슨, 뜻이에요?"
"글쎄, 너는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 사람의 끝을 보며 그 과정을 즐길 사람일 것 같다는 뜻이란다. 너는 그런 네 성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 같고 말이지."
이스마엘은 입을 다물었다. 남성은 이스마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 네 본성이 추악하다 생각이 들 때면,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 해보려무나. 그러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지."
"……."
"저런, 정신을 잃었네. 이만큼 피를 흘렸으니 당연한 건가?"
저 멀리서 백의를 입은 여성이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로 돌며 손을 흔들었다.
"잘 치료해 주고 옷도 주도록 하렴. 아니면 너도 폐하 앞으로 끌고 가는 수가 있어. 션! 거기 구석에 짱박힌 거 다 알아. 안식에 연락해서 '개' 데려오라고 해. 냄새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애로."
* * *
남성은 발코니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시 개발의 마무리 단계에서 모종의 이유로 중단이 되어버린 외곽 구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한편에 쌓인 폐자재, 뼈대만 선 건물, 불 들어오지 않는 대형 스크린, 신소재 보도블록이 깔린 길, 그런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구형 안드로이드. 아무것도 없고 황량한 장소에서 잘도 살았다며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사용감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며 실용적이지 못한 소파, 갑작스러운 가디언즈의 난입에 스크린이 깨져버린 신소재 플라스틱 스크린……. 아마 헬무트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부근에서 죽었을 것이다.
"당신 그래도 건물 갖고 싶다는 뜻은 이뤘네? 거기다 어떻게 보면 이 유령 도시도 당신 거잖아. 당신 보기보다 잘 살았구나? 질투 나기도 하네!"
남성, 가란은 허공에 대고 일장연설을 이어갔다.
"뭐, 아무튼. 나 왔어, 헬리. 시체라도 있으면 가져가서 적당히 박제나 해두고 당신 딸한테 선물할까 했는데 시체도 남겨두질 않았네, 잔인한 녀석들. 이런 새끼들이랑 일하는 나도 잔인하긴 마찬가진데, 뭐 어때. 안 보는 곳에선 나라 욕도 한다는데."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다른 남성은 부산스럽게 눈을 굴렸다가, 소파 구석에 놓인 낡은 인형을 보고 시선을 고정했다.
"맞다, 당신 딸도 보고 오는 길이야. 모르는 사람 경계도 할 줄 알고 야무지게 잘 키워뒀더라? 그렇지만 내가 손 좀 댔어, 양해 부탁해. 대가리 나자빠진 깡패 새끼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어, 나쁜 짓밖에 못하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당신이 생각하는 건 아니야."
가란은 핏자국조차 남지 않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헬리, 아마.. 네 딸은 당신과 같이 위험에 많이 노출된다면, 그리고 이 세계의 실상을 본다면 누구보다 빨리 무뎌지고 말 거야. 내 착각이 아니었으면 했는데 눈 보니까 바로 알겠더라. 당신을 똑 닮았어. 그렇지만 그 아이에겐 당신처럼 철 같은 면모는 거의 없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비뚤어지기 전에 손 좀 썼어. 언제까지 이게 유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사람을 사랑하라 해뒀으니 그만큼 사랑하고 다니겠지! 원래부터 사랑하는 것 같긴 하던데. 난 모르는 일이고, 무책임한 발언이 이어지더니 가란이 손을 까딱였다.
"션."
"ㄴ, 네?"
"줘."
션이라 불린 남성은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던 술병을 건넸다. 가란은 술을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값비싼 술은 헬무트가 생전에 유일하게 가란에게서 받은 뇌물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 가져왔어."
"헬리, 나는 세븐스도, 비능력자도, U.P.G도 다 싫어하지만 이 일을 하는 이유가 하나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 삶이 즐거워서지. 그리고 네 딸에게서 가능성을 봤어. 네 딸은 환경이 준비됐더라면 폐하보다 더 훌륭한 집행인이 됐을 테고, 가디언즈에 들어갔더라면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을 테지. 워낙에 쉽게 물들 수 있는 아이니까."
이내 가란은 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술병 밑에 끼워두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성을 믿어보려 해. 그 아이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나의 뒤를 이을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새 삶을 살아갈지.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서.. 네 딸이 이곳에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거든. 어리석은 반동분자가 살아 돌아오는 건 드물겠지만 어째 그런 느낌이 있거든.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양녀로 거둬서 키울 테니까. 아, 내 자식은 어쩌고? 글쎄."
가란이 일어서며 보지도 않고 입을 벌렸다. "션, 여기 죽은 사람 시체를 대신할 게 아니면 앞으로 내 앞에서 잘난 머리 굴리는 소리 안 내는 게 좋을 거야. 눈치는 챙겨야지." 션은 뻣뻣한 모습 그대로 가란을 쳐다봤지만 가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션은 겨우 눈을 굴려 자신의 주머니에 남몰래 숨겨놓은 황제의 비늘이 있을 곳을 흘끔 쳐다봤다. 가란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도시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음 섞인 한숨을 뱉었다.
"헬리, 나도 알아, 영원불멸한 건 없다는 거……. 그래서 늙는 게 즐겁지 않은 거야. 실감할 수 있으니까."
발코니 너머, 배터리가 다 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녹슬어버린 안드로이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 그림자
- 복귀 이후 제가 맞이하였다. 어째서인지 제는 참전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려 들었다.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이스마엘을 부축하면서도, 혹여 누군가 의무실을 언급하였더라면 가장 먼저 가시를 드러냈다. 명백하게 비웃는 소리를 뒤로 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병 주고 약 주는 소리 하기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것이 울렸다.
*
"헬무트의 냄새가 나는구나. 무슨 일이 있었어. 그렇지?"
"……."
"내게 무엇이든 털어도 좋단다. 사람들이 너를 이해하지 않아도 나는 너의 유일한 이해자지 않니."
"……."
"그래, 알겠단다. 헬무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마. 다른 일은 없었니?"
"……카시노프를 갖고 싶어."
"재밌는 얘기구나. 그건 해줄 수 있지?"
"카시노프는, 카시노프는 움직일 수 있어.. 죽여버리면 그 방법을 몰라, 그러니까, 가지고 싶어.. 가지면 다시 웃을 수 있어. 내가 생각하던 가족이, 가족이.. 돌아올 건데, 엘리나는 살아있으니까, 되찾으면 행복하겠지만, 나는 다시 시체를 안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이, 이기적이라 죄송합니다.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과거가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이기적이야, 이기적이라고,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시기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이상향에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스마엘은 얼굴을 연신 세수하듯 쓸었다. 손바닥에 흥건한 피를 뒤로 낮게 중얼거렸다.
"역겨워. 토할 것 같아."
허공을 쳐다보는 눈엔 여전히 특유의 반짝임이 남아있었다.
*
당연하다는 듯 갖고 싶어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버지를 다시 설득하고 싶어'나, '무찌른 뒤 되찾아서 방법을 찾고 싶어' 같은 소망을 얘기할 텐데.
*
수잔나도 만만치 않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그녀의 남편 에르베르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가란과 협업할 정도의 비윤리적인 사람이었다.
*
아빠는 내가 손톱 거스러미만 잘못 떼어도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걱정했는데.
이스마엘은 붕대를 감은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
─ 저는 다른 사람과 달리 무뎌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까 봐,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될까 봐…….
─ 이 세상에서 누가 상처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개 같은 세상.. 상처를 가릴 수 있는 사람과 상처를 내보이고도 당당한 사람으로 나뉠 뿐인데..
─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라졌더라면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순응하는 삶이 나았을 텐데!
─ 갖고 싶습니다, 무한한 기술의 발전을, 그로 인해 비롯되는 인간의 진화를, 그 열쇠를 쥔 자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습니다.
유리 조각을 삼키듯 껄끄러운 말. 누구나 뱉고 나면 피를 토할 걸 알기에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이스마엘은 침대 구석에서 웅크렸다.
*
"뭐 하니, 아가?"
"페이시가 고장났어. 페이시가 고장났어.. 페이시가…… 이게 고장나버리면, 이게, 고장나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무슨 소리니. 잘 되고 있잖니."
"아니야, 아니에요, 꺼졌단 말이야.. 그때 날 가려주지 못했어, 다들 날, 날,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줬던 사람들이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봐서, 나는, 나는……."
"얘, 정신 차리렴."
뺨을 쳐올리는 소리가 강했다. 질척이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제는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고, 손목의 옆면을 메스로 후벼대는 이스마엘의 얼굴에 수건을 덮더니 그대로 들어올려 의무실로 향했다.
"페이시가 고장났어."
"네가 고장났구나. 진정하렴."
"Ich habe mich nicht geirrt."
"그래."
*
─ 만약 네 본성이 추악하다 생각이 들 때면,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 해보려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벌이는 일이 악행인 자가 건네는 가장 끔찍한 조언.
*
"미안해요, 당신을 상처 입혔어. 미안해요."
이스마엘은 울었다.
"나도 날 모르겠어요."
불 꺼지고 문 잠긴 밀실.
*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다.
- 새장
-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신 날에는 밤이 될 때까지 혼자 있어야 했다. 밤이 되는 기준은 아이도 잘 몰랐다. 어느 날은 달이 하늘 위에 커다랗게 뜰 때였고, 어느 날은 달도 넘어갈 때였고, 또 어느 날은 달이 가고 해가 뜰까 말까 싶은 오묘한 색의 하늘이 되어야 돌아오니까.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가지는 세상은 넓고도 지루했다.
평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프로파간다 영화를 송출하는 넷-스크린을 하염없이 쳐다보기, AI와 함께하는 루미큐브, 바닥에 아무렇게나 뻗어 누워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 재밍 장치 덕분에 마음껏 바깥 바라보기, 저기 하늘에 크게 떠있는 태양과 구름을 어색하게 그려보기, 칩셋 프로그래밍 책을 읽기……. 나이에 빗대면 나름 생산적인 일이지만, 오늘따라 매일 하던 행동이 의미가 크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가 없다.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아이는 소파에 늘어져 거꾸로 뜬 폐허를 눈에 담았다.
아이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따뜻한 햇살이 온몸에 쏟아졌다. 평소엔 이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없이 낮잠을 잘 텐데, 잠도 오지 않고 고민에 몰두했다. 지금껏 살며 색다른 자극을 맛본 적은 없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하루에 하나씩만 먹으라고 찬장에 숨겨둔 초콜릿을 몰래 먹어볼까? 아니다! 그것보단 조금 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필요했다. 맛있는 것보다, 무언가 더 깊게 파고들어야 알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걸 온몸이 알려주고 있었다. 억눌린 뭔가를 풀어내면 오늘 하루가 정말 즐거울 것 같다는 느낌말이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무섭지도 않을 것 같다.
대체 뭐가 이렇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걸까? 아이가 손을 쭈욱 뻗었다. 조그마한 머리를 열심히 거치던 답이 도출되려다 마는 게, 꼭 지금 태양에 닿을 듯 말 듯 하는 손 같기도 하다. 조금만 더 뻗으면 잡을 수 있을 텐데, 막상 시야에 닿을 뿐이지 손에는 잡히지 않는 태양 말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면, 태양을 잡을 수 있나?
그 순간을 기점으로, 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슬렀다. 점차 위로 떠오르던 머리카락과 함께 아이의 누워있던 몸이 소파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손가락 한마디, 손바닥 하나, 마침내 팔을 쭉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아이가 공중에서 천천히 팔을 뻗었다. 손바닥에 가려지지 못하던 불타는 원반이 이 높이에선 쉽게 가려졌다. 평생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난제를 마침내 풀어냈을 때, 아이는 자신이 태양에 닿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발걸음의 속도를 반 걸음 정도 높였다. 평소 같으면 아이가 잠들었을 시간이다. 하필이면 지원군을 부를 줄이야! 아직도 총성과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도망치는 비명소리,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수장이 죽기 전 내뱉은 저주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네게 가족이 있다면, 같은 동족을 탄압한 죄로 똑같이 죽게 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개소리! 과거를 떨쳐내지 않고 마음속에 계속 담아두는 건 비효율적인 행위다. 일은 일에 불과하다. 적에게 어떠한 서사도 주어서는 안 됐다. 아무리 동정심을 가질 과거를 살았더라도, 적대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감정은 전력에 혼선을 줄 뿐이니까. 오늘 그가 해낸 일은 누군가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임무를 훌륭히 마친 것이다. 그는 국가의 충실한 병사이고, 그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일에서도 잃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한 일. 그는 마음을 다잡고 폐허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적어도 문을 열기 전까진 아이가 또 바닥에서 잠들었으면 소파 위에 올려야겠단 일상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스마엘- 헌터 케르스트너!!"
그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중력과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공중에 떠있는 자신의 아이를 보자 어떠한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단박에 기류를 타고 올라와 아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환영 인사를 하려던 아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단박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제정신이냐고!!"
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굴렸다. 환히 웃던 얼굴이 금세 겁에 질린 걸 보니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잘못했어요……." 기어가는 목소리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을 굴리다 입을 꾹 닫아버리는 모습에 그는 흠칫 놀라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맙소사, 내가 미쳤지! 그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던가. 그는 난생처음 보는 분노한 아버지의 얼굴에 벌벌 떠는 아이를 안아주며 고개를 파묻었다.
"미안하다. 놀랐지. 미안하다……."
소리를 치다 달래주는, 순식간에 변해버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는 소리 내 울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를 안고 소파에 내려앉아 한참을 다독이며 속내를 삭였다. 어떤 일에서도 잃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이. 세븐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시스템에 죽은 사람으로 기재됐단 이유로 아무것도 될 수 없어 탄압되고 잃게 될 아이. 목을 짓누르는 참담함을 비집고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다시는, 다시는 높이 날면 안 된단다. 아무것도 하면 안 돼. 알겠지? 미안하다……."
그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의무감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네게 가족이 있다면, 같은 동족을 탄압한 죄로 똑같이 죽게 될 것이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 섞일 수 없는 자
- 헬무트 케르스트너는 평범한 세븐스였다. 대기와 기류를 다룰 수 있는 세븐스를 타고났긴 했지만 어떠한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고, 그나마 세븐스를 쓰는 경우도 자신이 학교에 늦을까 싶으면 빠르게 하늘을 달리기 위한 정도로 쓰였다. 세븐스로 누군가를 해치는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비능력자긴 하지만 세븐스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가족 덕분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누이는 그가 세븐스를 옳은 길에 쓸 수 있도록 인도했다. 비록 그가 16세일 적 비능력자 보호법령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가 살던 마을에서는 케르스트너 집안사람들의 성품과 헬무트가 올곧은 사람임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많은 차별 없이 밝은 앞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까진 자신이 이런 길을 걷게 되리라 믿지도 않았고, 단 한 번도 불안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훗날 그가 회고하기를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은 불안을 받아들이고 조국에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이고, 가장 최악이었던 선택은 조국에 충성을 바쳤다는 것이다.
비극은 평범한 날에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법이다. 비능력자 보호법령이 떨어지고 1년 뒤, 헬무트는 가족을 모조리 잃었기 때문이다. 강경파 레지스탕스의 테러 때문이었다. 그날의 참상을 헬무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선물을 사러 가던 참이었다. 누이인 루이제가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임신 3주 차라 고백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신혼이 지나면 손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고, 오랜 군 생활로 감정 표현이 희미하던 어머니도 기쁜 기색을 보였다. 쇼핑센터에서 아기용 신발을 고를 때, 가족 전체가 깊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어때?"
헬무트는 신발 한 쌍을 손에 올렸다. 루이제는 신발을 받아보곤 높은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맙소사, 너무 귀여워!"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샛노란 신발은 루이제의 손바닥 위에 올려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조그맸다. 행복이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 스몄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꼭 병아리 같지 않아요?"
"예쁘네. 누가 골랐니?"
"헬리가요."
"잘 골랐구나. 역시 아트스쿨 학생은 미적 감각도 달라."
"맞아, 헬리는 뭐든 잘 그리잖아. 그래서인지 색도 예쁜 것만 고르나 봐요."
헬무트는 가족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가족을 무엇보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도 누이를 닮아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면 매형을 닮았을까? 어느 쪽이든 행복할 것이다. 달콤한 인생이겠지. 아이는 비능력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내심 생각했다. 루이제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헬리, 또 세븐스 생각이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여있는걸."
"쇼핑센터 직원 때문에 그러니? 클레임을 넣을까?"
"아뇨. 들여보낸 준 걸로 감사하려고요."
"정말이지, 괜찮아. 헬리.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
"아, 1층에 아모리노[1]가 있던데. 쇼핑이 끝나면 거기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먹을까?"
"리지, 내 나이가 열일곱인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나보단 한참 어리지. 그래서 안 먹어?"
"……먹어."
"그럴 줄 알았어!"
헬무트의 얼굴이 새빨개지자 가족 전체가 웃음꽃을 터뜨렸다. "다른 신발 찾아볼게!" 도망치듯 멀찍이 떨어져 아기 신발을 둘러보자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치사한 가족들! 그렇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아기 신발을 대충 훑어볼 적, 헬무트는 적당한 신발을 하나 더 찾았다. 연보라색 신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새하얀 피부에 딱 어울릴 것 같다. 신발을 보여주기 위해 손바닥 위에 올렸을 적,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공포영화에서 들을 법한 소리는 쇼핑센터에서 들려야 것이 절대 아니었다. 불안한 기류가 몸을 훑었다. 그의 세븐스가 요동치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됐어! 바람결에 실려오는 커다란 적의를 느낀 헬무트는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도망쳐!"
그리고 폭음이 들렸다. 불길은 삽시간에 치솟았고, 헬무트는 가족을 위해 몸을 던졌다. 공포에 질린 루이제를 뒤로 천장이 쏟아졌다. 거센 진동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세븐스를 달리는 용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사용했다. 거센 막을 만들어 억지로 버텼으나 높던 쇼핑센터는 모조리 바닥에 내려앉은 뒤였다. 가족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던 것은 잔해 더미였다. 군화 소리와 함께 가디언즈가 그가 있는 곳으로 뛰어와 세븐스 반응이 있었다며 그를 제압했다. 처음에는 목의 7자를 보며 제각기 떠들어댔으나, 막상 그의 세븐스 덕분에 몸이 멀쩡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는 여기에서 쇼핑을 하던 '착한 세븐스'라며 헬무트를 비호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짓눌린 머리 너머로 깔려 튀어나온 익숙한 신발, 머리카락, 넥타이와 조그마한 손, 그보다 작은 샛노란 아기 신발을 눈에 담았다.
그 이후 형식적이긴 해도 짧은 조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누가 세븐스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래? 차라리 가디언즈로 들어왔으면 이런 오해도 없었을 거 아냐." 듣고 싶지 않은 핀잔을 뒤로 그는 혐의가 없음을 인정받고 자리를 떠났다. 길거리 새하얀 건물, 대형 스크린에서 흐르는 뉴스는 쇼핑센터 붕괴사고가 반정부 단체, 강경파 레지스탕스의 테러였으며 세븐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비능력자 보호법령의 필요성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는 취조 때문에 새벽이 되어 인적 드문 하늘을 올려다 봤다.
"착한 세븐스는 무슨."
선과 악이 정립된 줄 알았는데 직접 마주한 세상은 선악의 개념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는 탄압받는 세븐스에 불과했다. 힘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는 세븐스. 그는 아무도 남지 않은 집에 돌아갔다. 불행은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그는 불행이었고, 마침내 홀로 남아 외면하던 것을 직시하게 됐다. 그는 해가 뜨자마자 학교를 자퇴했다. 세븐스긴 했지만 훌륭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푸념을 하던 교수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다시 할 수 없겠느냐며 헬무트를 잡아보고자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세븐스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명세를 얻어도 조롱을 당할 것이라며. 그가 학교를 자퇴하고 가디언즈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건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
입단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이제 훌륭한 가디언즈의 일원이 됐고, 동시에 주변 동료에게 있어 꺼림칙한 존재가 됐다. 주변 사람이 죽어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모습 때문이다. 그의 입단 동기는 헬무트가 과거 혹독하던 입단 테스트에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으며, 대화를 할 때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를 마주하는 것 같다며 넌더리를 냈고, 그가 첫 임무부터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였다며 혹시 이것이 천직이 아니겠느냐며 험담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동조하며 멋들어진 수식어를 붙일만한 사람은 아니라 손가락질했다. 고지식한 독일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슬럼가를 돌아다니는 미친 개새끼, 속내를 알 수 없는 철통같은 놈, 철분이 부족하면 안드로이드도 씹어먹을 녀석…….
그렇지만 헬무트 케르스트너가 조국에서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인재상이라는 사실엔 감히 아무런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는 대기와 기류를 다룰 수 있는 세븐스를 마치 염력처럼 응용해 적을 망설임 없이 제압했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도 한치의 망설임을 갖지 않았다. 마침내 일과 사적인 감정을 분리하는 것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는 이상적인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건은 그저 사건으로 보았고, 사람을 동정하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서사가 필요하지 않다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가졌든, 주변에서 어떤 평가를 들었든 그에게 있어 반동분자는 반동분자였다. 그에게 그나마 말을 붙여주던, 가장 친한 동료가 죽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출근해 일을 했던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런 헬무트가 대중에게 있어 가장 비이성적인 장소, 슬럼을 전담으로 맡겠다는 사실은 한줄기 위안이 됐다. 그의 동료들은 조국을 위해 가장 깊은 곳까지 발을 들이는 헬무트를 존경스럽지만 상식 밖의 두려운 사람이라 평했다.
헬무트는 슬럼을 걸었다. 그에게 있어 슬럼은 패배한 세븐스나 인간이 숨어사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것들 중 시끄러운 세븐스가 있다면 이곳의 작은 여우에게 적당히 넘기면 되는 일이고, 넘길 수 없으면 죽이면 된다. 세븐스는 그런 존재였다. 결국 불행 그 자체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봐야 할 존재. 가디언즈가 되어도 결국 물과 기름,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가디언즈라 해도 여전히 세븐스이기 때문에 제각기 살을 붙이고 적당하지 못한 이유를 붙이며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퉁이를 돌았다. 이 부근에서는 레지스탕스가 접선해 무기를 밀매할 때가 이따금씩 있었기에, 작은 변화 하나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곳이다. 생활의 흔적이 썩어가는 냄새는 여전히 불쾌했지만 그 사이에서 다른 기류를 느껴졌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네온 가로등 아래, 쓰레기 더미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평소와 다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지나치게 고급 진 상자였다. 이런 슬럼에 대체 누가 선물 상자를 두고 갔는지 의문이 들어 적당한 위치에 상자를 내려두었고, 안을 들여다봤다.
"……애잖아."
상자 안에는 아기가 있었다. 생긴 걸 보니 신생아인 것 같았다. 그는 처음에 대체 누가 유아형 안드로이드를 여기에 버렸는지 생각했지만 실제 아이와 혼동하지 않게끔 이마에 써두는 인식 넘버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바로 표정을 구겼다. 인간의 끔찍함을 한차례 속에 눌러둔 그는 아기의 옆에 있는 카드를 꺼내 들어 올렸다.
─ 12월 27일 오전 3시 25분에 세븐스 검사 결과 양성을 통보받았습니다.
그는 짧은 메모가 쓰인 카드를 손안에서 구기고, 주머니에 쑤셔 넣어 멀쩡하지 못한 꼴로 만들었다. 그리고 총을 겨눴다. 이곳에 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유권을 포기했으니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제법 괜찮은 이유를 떠올렸다. 세븐스라는 이유로 신생아 시절부터 끌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하고 역겨운 범죄의 희생양으로 만드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아이가 세븐스니 도의적으로 죽이는 것이 옳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그는 오늘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서 늘 그랬듯이, 조국의 위협을 제거했노라 얘기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이건 모두 조국을 위한 일이다. 조국을 위한…….
헬무트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쳤을 때,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아기가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손가락이 머리 바로 앞에 있는 총구를 쥐었고, 그는 총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아이 또한 사람이었다. 숨을 쉬었고, 비참하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 조그맣고 이제 막 태어난 그 얼굴에서 그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그리고 상자를 품에 안았다. 그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적 보고한 것은 세븐스 신생아를 발견했으나 발견 당시 이미 죽어있었고, 사체의 훼손 정도가 심했으며, 그 시신을 훼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븐스를 사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명한 가디언즈 기술 연구 지휘자이자 인체 공학 프로그래머 수잔나 엥엘이 그를 은밀하게 찾아와 아이가 정말 죽었느냐 물었다. 헬무트는 담담히 얘기했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존재를 한순간의 변덕으로 밖에 내놓지 말았어야지요."
결국 사람은 끔찍한 존재였다. 불행은 부르지 않는 이상 오지 않는 법인데도 결국 스스로 불행을 불러와버린다.
수잔나가 비틀거리며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에서 아마 2주 정도가 지났던 것 같다. 그는 그동안 아이를 위해 거처를 옮겼다. 그가 제일 처음 임무에 나서 세븐스 레지스탕스를 소탕했던 장소는 세븐스를 위한 은신처가 됐다. 인터넷의 강력한 힘 덕분에 아이를 돌보는 법을 엉성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던 탓인지 열약한 곳에서도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갔다. 헬무트는 은신처에서 자신이 본가에 있는 것처럼 전파를 바꿔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했다. 3시 25분, 헤베 엥엘……. 낡은 가구를 조립해 급조한 아기용 침대에 누운 아이의 이름은 헤베였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붙여주면 언젠가 이 아이에게 새로운 불행이 닥칠 것만 같다고. 차라리 불행이 아예 없도록 네가 살아있었다 얘기를 해야 했을까, 아니, 이미 버렸는데 두 번 버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너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대체 어떻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었다. 반사작용으로 웃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가 익숙했다.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미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이따금 못 견디게 그리웠던 미소를 뒤로하며 헬무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스마엘…… 이스마엘 케르스트너."
결국 우리는 신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주었으나,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떠돌이에 불과하구나.
----- [1] 프랑스 모기업 아이스크림 체인점. 장미꽃 모양 젤라또가 유명하다.
- 𝕊𝕟𝕠𝕨𝕖𝕕 𝕌𝕟𝕕𝕖𝕣
- 12월도 어느덧 중반에 이르렀다. 작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웠는데, 올해는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다고 따뜻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작년처럼 모닥불에서 10분만 떨어져도 객사할 것처럼 춥지는 않다는 뜻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작년처럼 추위가 올 것은 알고 있지만, 이젠 객사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에델바이스는 모닥불이 없어도 평화롭고 따스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따뜻한 것을 포함해서, 정신적으로도. 이곳은 평화로웠고, 인심이 좋았다. 개인실을 나섰을 때만 해도 겨울의 추위, 그리고 환경오염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은 각각 비능력자와 세븐스였고,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도 비능력자 바리스타가 세븐스를 위해줘서 고맙다며 공짜로 준 것이다. 마음은 풍족했고, 더는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 아마 혁명이 끝나면 이 따스함이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 다가오는 쌀쌀한 바람을 참을 정도로 인내심이 깊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스마엘은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점퍼를 다시 걸쳤다.
"네 입는 모습을 보아 추위에 내성이 깊은 줄 알았는데."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이스마엘은 눈을 굴렸다. 누군가 옆에서 덜덜 떨다가 똑같이 흘러내린 옷깃을 잡아 올려 끌었다. 같은 세븐스이자, 제0특수 부대 소속이었던 제다.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전투에서 물러났지만 세븐스 사형을 전담으로 맡았던 과거가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이스마엘에게 여러 가지 전투적 조언을 주는 좋은 멘토이기도 하며, 인정하기 싫지만 제법 괜찮은 조력자이기도 하다.
"여는 늘 따뜻하게 살아서 말이다. 이곳에 오기 이전까지는 감기란 것도 걸려본 적이 없단 뜻이지."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밖으로 나왔담."
이스마엘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후, 하고 입김을 뱉었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이라 그런지 유달리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입김이 나오기 시작하는데도, 둘은 온기가 조금이나마 가까운 공터나 술을 마시기 위한 펍이 아닌 인근 숲의 호수를 전경으로 두고 앉아있었다. 제는 호수를 유달리 좋아했고, 둘만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늘 이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제는 따뜻한 녹차가 담긴 종이컵의 홀더를 빼더니 아예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그래서 날 끌고 오셨겠다?"
"너도 나가자니까 좋다고 따라 나왔잖느냐."
"그렇긴 하지.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여가 이곳에 오는 것이 옳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네."
"네가 그런 진지한 말을 다 하네."
"시끄러워."
제가 비죽이는 모습에 더 건드렸다간 말도 하지 않겠거니 싶어 이스마엘은 더 건드리지 않고 입을 얌전히 다물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한 이유가 뭔데?"
"평화로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가 툭 뱉은 말에 이스마엘이 픽 웃었다. "그거 대장에게 걸리면 불경죄로 처벌받을지도 모르는데?"
"로벨리아 그 여자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네. 여의 생각엔 어차피 동의할 테니."
제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까맣고 단단한, 매의 발톱을 닮은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꼬리로 신발을 신을 수 없는 발을 감싸는 모습에 이스마엘은 잠시 말을 정리하도록 기다려주기로 했다.
"기실 자네가 근신했을 적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줄곧 고민했네. 이 평화가 옳은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여가 이곳에 있어도 되는지까지."
"그것만?"
"아니. 그러니까.. 왜 다른 사람이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곳은 여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네."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
"……이곳은 이상해."
툭 내뱉는 말이 투정 같았다.
"왜.. 살리려 드는 겐가? 자네가 말했던 에일린이라는 여자도, 레이버란 여자도.. 어떻게 보면 죄인이지 않은가. 아무리 레지스탕스였어도, 가족이 있어도, 앞장서서 누군가를 학살하는 죄를 지었다면 죽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곳의 사람들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살리려 드는 겐가? 어째서 희망이 있다 하냔 말이야."
"글쎄. 그건 나도 납득할 수 없는데."
이스마엘은 에일린을 떠올렸다. 죽여달라 빌었어도 어떻게든 구해보고자 했던 그 순간을.
"말도 안 되네. 지금까지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인 자는 죄 죽였으면서, 그 죽인 주체가 막상 불쌍하단 이유로 구원하겠다니. 말이 안 된단 말일세."
"그거……."
네가 세븐스 사형 집행인이라 그래? 이스마엘의 목소리에 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껏 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는지 아는가? 7년입세. 여가 지학도 채 안 되었을 때부터 지금 약관이 된 나이까지, 사형이라는 명목으로 세븐스를 죽여왔네.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피를 묻혔지. 교육과 수습이라는 기간이 있었으니 말이야."
"많이도 죽였겠네."
"그런데 이곳은 그런 여를 받아주었네. 단순히 여가 자유를 갈망했기에, 새장을 부수고자 했기에, 의지대로 살고,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자 다짐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것이야.
"여는 죄인일세. 휘둘렸다 한들 죄인이란 말이네. 아무리 깨달았다 한들, 이 몸뚱이가 진통제가 없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하고 부서지고 있다 한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한들, 세븐스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로 시술을 받았다 한들…….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네."
"그 사람들에게 널 투영하지 마."
"투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헌트리스. 그대도 잘 알잖아.."
제는 컵을 내려놓고 몸을 웅크렸다. "여가.. 깨닫기 전까지는 그곳을 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세."
"나 또한 마찬가지였는걸." 이스마엘은 괜찮다는 듯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물러 터졌어. 무릇 뜻을 가졌다면 앞을 보아야 하는 법일세. 군주의 덕목은 온화함이 아니야. 잔인해져야 하고, 냉정해야 하네. 결집을 위해서라면 피를 보아야 할 때가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을 살리려 드는지 모르겠네. 필히 후환이 될 텐데……. 하여 자네가 이상향을 언급할 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했던 것이네. 모두 받아버리면 죄인은 뉘우칠 기회가 없이 갱생되는데, 그게 옳은 걸까?"
제는 한숨을 푹 쉬며 호수를 바라봤다. 지나치게 깨끗한 물. 지나치게 깨끗한 사상. 어째서 이리도 무르게 구는 것일까. 마음에 들지 않고, 혼란스러움은 가득했다. 악인을 왜 비호하는가? 비호할수록 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짓눌려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이 걸어온 길에 쌓인 업보와 죄책감임을 깨달았을 때, 자신은 이곳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차라리 자신이 이곳에 오지 않고 계속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이기적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여는, 체제가 전복되면.. 아니, 그 이전에도.. 심판할 자는 죄다 심판하길 바라고 있네."
제는 이스마엘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입에 그려냈다.
"그 순서에 필히 여가 있을 테니."
이스마엘은 그런 제를 보더니 빈 컵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무어라 속삭였다. 제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이내 환희에 가득 찬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같은 시각, 따뜻한 카페 안은 두 명의 손님만 존재했다. 누군가는 차갑게 얼음이 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나긋하게 입을 벌렸다.
"자유와 방종은 한 끗 차이라고들 하지.. 하여 네 알량한 동정심이 무슨 결과를 가져왔을지 스스로 깨닫도록 하려무나."
"……."
"만일 네 깨달았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겠지.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말도록 하렴."
겨울은 아직 오지도 않았으니.
3.1. AU 독백 ¶
- 가디언즈 AU
- 출전
- 그는 비능력자이며, 세븐스와의 공존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목뒤에 박힌 7의 유무로 사람의 귀천을 나눈다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극구 위험하다 하며 그를 다그치고, 때로는 의미도 없는 외출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사상은 숨겨지기만 할뿐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심은 무럭무럭 커져가더니 점차 그 강도가 거세졌다. 우리도 총기로 사람을 여럿 죽이지 않던가! 그는 숨어 활동하기를 택했고, 사회의 눈총에 시달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철저한 개인정보 보안과 우회를 통한 자유를 보장하는 익명 sns를 통해서만 그 불만을 토로했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제법 많았다.
어엿한 성인이 됐을 때, 그는 익명 sns에서 만난 사람들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대단한 성적으로 1지망 대학까지 붙었지만 그 거대한 영광을 내려두고 가출했다. 그리고 한적한 외곽 지역에서 작은 아지트를 구성했다. 슬럼 외곽 개발 중단 구역에 세워진 아지트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2년 전, 정보전과 짧은 격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영광적인 첫 승리였다. 승리에 도취하여 작은 파티를 연 이후, 상황은 늘 순조롭게 흘러갔다. 점차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모였고 어엿한 레지스탕스 조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는 소규모지만 여러 곳에 분할되어 이곳이 본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널리 발 뻗은 단체의 수장이고, 두려울 것이 없는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다.
이젠 가디언즈와의 싸움이 익숙했다. 에델바이스 소속의 가디언즈 하나가 이곳에 단신으로 온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동료 중에서 정보를 가장 많이 쥔 사람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했지만 겨우 한 명이었기에 다른 동료들은 아무리 혼자라도 이젠 세븐스의 일부도 일원이 된 이 조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 했다. 누군가 그래도, 옷차림을 보니까 미인계라도 쓰면 다 죽는 거 아니야? 같은 저열한 농담을 건넸을 적 이해한 사람은 모두 웃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조그마한 무장을 챙겼다.
"기실 무의미한 생명의 미숙한 발버둥이지요. 덧없는 삶의 희미한 순간이니 이 어찌 가엾지 않겠어요."
그는 주변을 둘러다 봤다. 웃던 사람들은 이제 없다. 불안해하던 동료는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저열한 농담을 건네던 동료는 총탄처럼 날아온 동전에 의해 머리 반쪽을 잃었다. 그뿐일까? 대다수의 전력이 알 수 없는 힘에 짓눌리고, 갑자기 내려앉은 천장에 깔려 죽거나 아직 숨이 붙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본대는 비능력자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정예 전력으로 이루어진 세븐스 기동대는 손 발목 관절이 뒤틀리거나 서로 멀쩡한 몸을 허우적대며 타의로 이루어진 싸움에 희생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멀쩡한 것은 그와 이곳에 파견된 가디언즈 하나뿐이었다. 하이힐의 굽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지겨워요……. 나는 가장 아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니 권태롭지요."
어둠 속에서 연두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겁을 먹고 도망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짓누르더니 그대로 강제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상냥하지 않은 힘에 의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이 닿을 적, 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하이힐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이내 멈췄다. 그는 덜덜 떨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새까만 킬힐과 발목을 덮은 새빨간 옷자락이 보였다.
"이쯤 되면 궁금해요. 그러니 하문할게요. 똑바로 답하는 것이 좋아요..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답하면 더 좋겠는데요. 용기를 내 봐요. 할 수 있잖아요?"
상황에 맞지 않는 낭랑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그는 용기를 내 겨우 시선을 올릴 수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에 더 가깝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옷의 원단이 붉은 재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라갈수록 새하얀 옷자락에 난잡하게 튀어 물든 붉은 것이, 사실 원단이 아닌 피라는 걸 깨달았을 적 속이 울렁이고 구토가 목까지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육감적인 몸을 덮어가린 옷 너머로 연두색 시선이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마주친 눈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발광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아래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자 사이에서 살아오며 누려온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당신 같은 아둔한 것과 함께 한다면, 나는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다툼이 있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그런 이상향 말이에요. 나는 그런 세상을 바란답니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생존자의 신음으로 가득 찬 어두운 복도를 울리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장의 의미는 이해했으나 그 많은 사람을 해쳐놓고 세븐스와 비능력자의 화합 같은 얘기를 한다는 걸 도저히 그의 머리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믿어도 될까? 묵직한 침묵 사이에서 그는 눈동자에 스미는 감정을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순수함 빼고는 읽을 수 없었기에 손을 가늘게 떨뿐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지? 설마 배신하려고 하는 건가? 그는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우, 우리와, 하, 함께하며, 소, 속죄한다면. 오겠지. 네가 바라는.. 이, 이상향이."
"기실로?"
그는 뻣뻣해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곳에 도달하면 필히 아름다울 거예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실패한다면 그 사람이 나를 죽이러 오겠죠. 즐거울 거예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긴 하겠지만 그것도 더없이 만족스러울 거야.. 응."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여성은 눈을 휘더니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매서운 공격을 예상한 것과 달리 머리 위에 얹힌 손은 강아지를 쓰다듬듯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쓰다듬던 손길 뒤로 여인은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잠깐 넋을 잃을 정도였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착하기도 해라.. 이제 보니 귀엽기까지 하네요. 강아지 같아라. 그래, 내 작은 강아지. 당신 덕분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네요. 그렇지만 안타깝기도 해요."
여인의 속삭임에 그는 정신을 차리듯 눈을 홉떴다.
"나는 지금 세력도 제대로 안 된 쭉정이의 싹을 쳤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 라.. 다 죽었는데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요. 차라리 의도하지 않은 말이었다면 모를까.. 확신이 너무나도 강해요. 당신, 숨기는 세력이 더 있군요."
"아, 아니야. 나는……."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이끄는 곳이라면 나머지도 비슷하게 우리 대원들이 처리하러 가겠지요. 지금쯤 다 죽고 당신만 살아남았을지도 몰라요."
"아니야, 우리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어리석고 아둔한 내 작은 강아지."
그의 몸이 강제로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힘은 그를 비틀비틀 일으켜 손바닥 하나는 더 작은 여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여인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능숙하게 머릿결을 헤집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상냥했지만 지금은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쓸듯 스산한 느낌이 그를 옥좼다.
"혼자 살아남는다면 무섭겠지요.. 괜찮아요, 괜찮아. 울고 싶겠죠. 맘껏 울어도 돼요……. 당신은 그래도 된답니다."
여인의 말을 신호로 죽음의 공포가 목전에 다가왔다. 맹수에게 목이 물린 초식동물처럼 그는 짙은 피비린내와 공포에 젖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여인이 우아하게 입매에 호선을 그었다.
"당신 또한 마음을 정했군요."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 의지마저 잃었는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벌벌 떨었다. 여인은 그런 남성을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겹쳐봤는지 서슬 퍼렇고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도 당신처럼 순하게 내 것이 되면 좋을 텐데."
상관없나. 그딴 것, 억지로라도 쥐고 말면 되니까. 여인, 이스마엘은 한 손을 들어 귀에 꽂힌 이어셋에 손가락을 올렸다.
"여기는 이스마엘, 테러 조직 소탕을 완료했답니다.. 네에, 본대가 아니라 휘하 세력이 있음도 파악했어요. 순한 분이 수장이셔서 고분고분 털어주시지 뭐예요. 네에, 곧 복귀할게요. 게이트를 열어주시겠어요?"
연락을 하는 도중에도 다른 손으로는 쓰다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내 연락이 끊기자 쓰다듬도 멈추더니 여인, 이스마엘은 자연스럽게 품 깊숙하게 머리를 안았다. 공포에 젖어 울 수도 없으며, 도망칠 의지를 잃어버린 그가 본능적으로 목에 억눌린 신음을 뱉자 이스마엘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등을 두어 번 토닥이더니 허리를 숙이듯 하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어진 대로 살았더라면 네 명은 보다 안전하고 길었을 텐데 말이에요.. 괜찮아요.. 나와 같이 가요, 이상향으로. 당신 같은 벌레도 인간이라 아량껏 이해해 주고.. 틀려먹은 인간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아르센 님의 위대한 뜻 아래에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요. 내 강아지.. 낙원으로 가야죠, 응, 낙원으로.. 필요 없는 건 여기에 두고 가요."
이윽고 머리를 안자 강한 힘에 짓눌려 뼈가 부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눈을 홉뜬 채 이스마엘의 품에 그대로 늘어졌다. 허공을 배회하던 팔이 힘없이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이내 기이한 소리와 함께 몸통이 이스마엘의 흰옷에 붓 칠을 하듯, 바닥을 향해 쓰러지듯 엎어졌다. 머리를 품에 안은 채 황홀경에 젖어 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못하고 숨 꺼진 복도에서 이스마엘은 무언가에 잔뜩 취한 듯한 표정으로 한참이고 시체를 내려다 보다, 게이트가 열리자 목 없는 육체를 지르밟고 열린 게이트 너머로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 헤베 엥엘
- 헤베 엥엘의 삶은 풍족했지만, 그녀의 가치는 고작 2달러 75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어린 헤베가 셈해본 결과,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Rich's의 초콜릿 퍼지 하나를 사고 25센트가 남는 가격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비싼 값이었더라면 납득하고 가족에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을 텐데! 헤베의 가치가 정립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머니, 수잔나 엥엘이 테러리스트의 저격으로 생방송 도중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다. 수잔나의 남편이자 헤베의 아버지인 에르베르토 엥엘은 일찍이 헤베가 세븐스라는 이유로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아내의 죽음을 기회로 삼았다. 아내가 죽은 첫날에는 처음으로 그녀를 품어줄 듯 굴더니, 점차 헤베가 아내를 죽인 테러리스트와 같은 세븐스이고,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설명했다. 현 사회의 시점에서 옳은 답을 정해놓고, 스스로 인정하며 굴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묻는 나날이 지나 끝내 오늘, 그런 괴물인 헤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그가 몸담던 세븐스 투기 도박 및 생체실험 연구소, 안식에 헤베를 팔아넘긴 것이다.
"사랑하는 헤베, 너를 사랑하고 싶지만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지 않니. 더는 네게 사랑을 줄 여유가 없어지는구나. 너는 위험한 세븐스니까. 우월한 유전자 사이의 실패작인 네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너무 두려워 말거라."
어린 헤베는 천대받는 가축을 밀듯 거친 아버지의 손길에 강제로 떠밀리더니 처음 보는 사람 앞에 섰다. 뒤를 돌아 아버지를 쳐다봤으나 싸늘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모두 세븐스인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해도, 모멸찬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눈이 마주쳤을 적 에르베르토는 형용하기 어려운 역겨움을 느꼈는지 단박에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세븐스의 값 치고는 비싸 기분이 나쁘다며 2달러 75센트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밖으로 나서버렸다. 헤베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허름한 옷자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고, 헤베는 아버지가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곰곰이 되짚었다. 사형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들었다. 자신은 세븐스니, 아마 여기서 죽지 않을까? 죽음의 공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헤베가 눈을 내리깔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네 아버지란 사람 밑에서 오래도 견뎠구나."
"……."
"아가, 고개 들지 않겠니?"
"아빠가.. 세븐스는 비능력자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된댔어요."
"저런, 네 아빠가 국가의 사상을 빨아대는 소리로 음험한 영상을 찍을 사람인 건 익히 알았지만 자기 유전자가 섞인 존재에게도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헤베는 강도 높은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다가오자 다시금 질끈 감았지만 뺨 위에 손을 보드랍게 얹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남성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기르기 시작한 은발의 머리 한 뼘을 끈으로 묶고, 자수정색 눈을 가진 남성은 아버지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아버지가 네게 뭐라 말하더니."
"……."
"괜찮아, 말해도 돼. 여긴 아무도 없잖니. 너는 말해도 되는 존재란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도 되는 존재기도 하지."
"……저는 엄마를 죽인 사람이랑 똑같대요."
"저런. 괜찮다면 자세히 얘기해 주겠니? 힘들다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단다."
"저는.. 쓸모없고, 위험하고, 사람들은 다 저를 싫어하는데 여기는 좋아해 줄 거니 다행으로 생각하라 하셨어요."
"오.. 네가 들을 말이 아닌데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남성이 헤베를 끌어안고 토닥였으나 헤베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대신 쥐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세븐스인걸요."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러니? 쓸모없고, 위험하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지. 아가, 알고 있니? 맹수는 보는 것 외엔 쓸모가 없어. 그렇지만 보는 것 하나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는단다. 그럼에도 늘.. 원하는 사람이 있지. 그 매력에 홀려보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내가 보기에 너는 그런 아이로구나."
"제가요?"
"물론이지. 너는 누군가에게 선망받을 자격이 있단다. 그 역겨운 것이 가치를 몰라볼 뿐이야.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는데도 공포에 젖어 짖어대는 꼴이란……. 너는 많은 사람의 환호와 찬사, 사랑 속에서 살 수 있을 거란다."
처음 듣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세븐스와 환호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확고했다.
"그러니, 이름이 뭐니? 알려주지 않으련?"
"……헤베 엥엘이요."
"헤베.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헤베, 안식의 주인인 가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네 청춘은 시들지 않을 것이고, 네 인생은 지금부터 가장 위에서 내려다보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네게 무한한 환호와 사랑, 찬사를 보낼 것이야. 내가 너를, 세상이 너를 귀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지. 대신."
가란은 눈을 정확하게 마주했다. 아무도 자신의 눈을 마주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껏 배운 모든 것은 쓸모가 없을 거란다.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네가 배운 것은 오로지 억압받고 눈치 보는 하찮은 삶이라는 것을. 나는 안단다. 너무나도 잘 알아. 네가 지금 벗어던져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요..?"
"그래. 겉껍질. 너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마음껏 표출하고, 휘두르며, 손에 쥐어야 할 것이야. 누군가 욕을 한다면 참지 말고, 손가락질을 하면 하고픈 대로 하렴.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걷어차도 사랑을 받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라는 뜻이란다."
"……지금부터요?"
"그래. 바라는 것이 있니?"
헤베는 우물쭈물 대다 천천히 입술을 오므렸다.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이름을?"
"제가 사랑받는 거 맞죠..?"
"물론이지."
"헤베 엥엘로 불리면, 엥엘이니까 사랑받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오, 아가. 물론이지. 물론이야. 그 이유라면 백 번은 더 바꿔줄 수 있단다."
"그렇지만 미들네임은 헤베로 둘래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내가 사랑받는 걸 보면서 후회할지도 모르잖아요."
"사랑받는 법을 잘 아는구나. 좋은 이름을 추려줄 테니 네가 정하려무나. 자, 이제 이런 더러운 지폐가 떨어진 곳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가자꾸나. 너를 위해 방을 준비했단다. 그 역겨운 천 쪼가리도 어서 바꿔 입어야겠어. 네 살에 닿을 것은 모조리 귀한 것이어야 할 테니."
가란은 헤베를 안아올리며 문밖으로 나섰다. 문을 나서자 허리를 깍듯하게 숙이는 정장 입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복도를 걸으며 거울 너머에서 헤베가 에르베르토를 쳐다보던 시선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포식자의 것임이 자명하던 그 시선을.
* * *
이스마엘은 복도를 지나치다 에르베르토를 마주했다. 에르베르토는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무진 애쓰다, 이스마엘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이를 악물었다.
"한 대 치겠어요, 엥엘 씨."
"무슨 소리. 지나가던 길이잖소."
"어디 가시나요? 아하. 말하지 말아 봐요.. 알겠다. 아내분 묘지 가는구나. 그렇죠? 그래서, 아내분은요? 남편이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회임하셨대요? 그 정도면 회임하고도 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헤베!!!"
이스마엘이 에르베르토를 무시하고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며 스쳐 지나갈 적, 에르베르토는 손바닥을 확인하고 끔찍한 혐오를 섞은 비명을 내질렀다.
2달러 75센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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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 출처: twitter@Denny__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