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겠다."
1. 외모 ¶
(에피소드 2 이전)
다소 탁한 하늘빛 머리카락. 어깨를 넘는 세미 롱 헤어. 자세히 보면, 머리카락 끝 부분 곳곳이 조금 뻗쳐있다.
193cm의 장신. 옷을 벗으면 몸 곳곳에 근육이 드러난다.
넓은 어깨에 큰 골격.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나있다. 빌런과 싸우던 도중 났다고 추정된다.
목소리를 내기 전에는 성별을 자주 오해받는 편. 목소리 자체도 허스키한 편이라 오해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짙은 눈썹.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 삼백안에 가까운 눈. 늘상 딱딱하게 인상을 쓴 표정.
종합하자면 꽤나 위압감을 주는 외모.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입는 옷은 백정장에 검은 셔츠. 검은 가죽장갑. 스커트는 잘 입지 않는다. (대체로 여성복과 사이즈가 안 맞아서.) 신발은 단화. 키가 워낙 크니까.
다소 탁한 하늘빛 머리카락. 어깨를 넘는 세미 롱 헤어. 자세히 보면, 머리카락 끝 부분 곳곳이 조금 뻗쳐있다.
193cm의 장신. 옷을 벗으면 몸 곳곳에 근육이 드러난다.
넓은 어깨에 큰 골격.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나있다. 빌런과 싸우던 도중 났다고 추정된다.
목소리를 내기 전에는 성별을 자주 오해받는 편. 목소리 자체도 허스키한 편이라 오해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짙은 눈썹.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 삼백안에 가까운 눈. 늘상 딱딱하게 인상을 쓴 표정.
종합하자면 꽤나 위압감을 주는 외모.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입는 옷은 백정장에 검은 셔츠. 검은 가죽장갑. 스커트는 잘 입지 않는다. (대체로 여성복과 사이즈가 안 맞아서.) 신발은 단화. 키가 워낙 크니까.
- 에피소드 2 이후
- 다소 탁한 하늘빛 머리카락. 어깨를 넘는 세미 롱 헤어. 전투시에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뒤로 묶곤 한다. 뒤로 묶으면 머리카락은 목 끝에 닿을랑 말랑한 길이가 된다. 자세히 보면, 머리카락 끝 부분 곳곳이 조금 뻗쳐있다.
193cm의 장신. 옷을 벗으면 몸 곳곳에 근육이 드러난다. 넓은 어깨에 큰 골격.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나있다.
목소리를 내기 전에는 성별을 자주 오해받는 편. 목소리 자체도 허스키한 편이라 오해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짙은 눈썹.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 삼백안에 가까운 눈. 늘상 딱딱하게 인상을 쓴 표정.
종합하자면 꽤나 위압감을 주는 외모.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입는 옷은 검회색 정장에 검은 셔츠. 짙은 고동색 가죽장갑. 스커트는 잘 입지 않는다. (대체로 여성복과 사이즈가 안 맞아서.) 신발은 단화. 키가 워낙 크니까.
전투시에는 겉옷과 장갑을 벗곤 한다.
2. 성격 ¶
무뚝뚝하고 딱딱한 말투. 위압감 드는 외모에 말투까지 이렇다보니 주변에서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많다. 오래 지내다 보면 겉모습만큼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그 고질적인 무뚝뚝한 말투는 조금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미소가 늘었다. ...미소지어도 무섭지만. 전부 다 죽여버릴 것 같은 험악한 인상과 달리, 생명윤리에 대해서 꽤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살인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입장. 그러니까, 히어로 간부 측의 몇 안되는 온건파.
그러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면모때문에 주변과 충돌하는 일도 잦다.
그러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면모때문에 주변과 충돌하는 일도 잦다.
2년전과의 눈에 띄는 변화2년전에는 예상못하게 정신을 건드는 상황에 정신적으로 위태로워지거나, 익숙치 않은 칭찬 및 애정표현에 쉽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은 그런 반응을 기대하기는 조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일들을 겪어낸 이후로는 에스터는 감정적인 문제들에 나름대로 적당히 대처할 수 있는 노련함을 얻었다. 이는 랩톳을 곁에 두며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딱딱함속에서 슬쩍 튀어나오는 물렁한 옛날의 모습을 기대했다간 잘못하면 예상못한 반격까지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
"물렁함" -> "연륜"
물론 완전히 없어졌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런 약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게 총을 꺼내거나.
3. 이능력 ¶
총기류 보정
총기류 사용시에만 적용되며, 총의 능력을 물리법칙상으로 불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어떤 값싼 총이라도 총알 무한수급, 반동 없음, 연사가능, 고화력이라는 사기적인 스펙을 지니게 된다. 단, 능력이 발동되는건 어디까지나 에스터가 "사용하고"있을 때에만 적용된다. 그러니까 총 자체의 성능이 좋아지는게 아니라, 에스터가 잡았을때만 개짱센 총이 되는 것. 빌런 진압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을 때, 네티즌들에 의해 비공식으로 명명된 이름은 "총기치트" "총기버그" "총기핵" 등등. 라오스의_흔한_총기치트.gif 같은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곤 했다.
4. 일상 ¶
- 에스터 - 유현
- (2스레)
과로는 금물이에요. 에스터씨.
라는 말을 꽤 여러 명에게서 들어왔음에도 에스터는 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부족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최전선에 나서서 빌런을 제압하는 일은 줄었을지 몰라도, 히어로들의 편성, 이능력 사건사고 보고, 전략 수립, 복지 추진 등등등 회의와 서류처리로 일어나는 일은 싸우는 것 못지 않게 수북하거늘.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그녀이기 때문인지 늘어난 일의 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몸을 쓰는 게 아니라는 이유로 한참 부족하다며 강박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고.
그런 이유로 오늘도 뭔가 업무를 잔뜩 처리하는 중인 에스터였다. 그녀의 사무실 문앞에 당신은 향했다. 만일 노크를 한다면 "들어오도록."이라는 에스터의 낮고 무게있는 울림이 당신의 귀에 들어오겠지.
ㅡ
오늘은 보고를 위해 오랜만에 에스터 씨를 뵈러 가는 날 - 유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번에 출현한 묵빛 늑대, 헌팅 킬러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를 챙기며 그와는 별개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한다.
보온병에 따스한 라떼를 담고, 아침에 분주하게 만들어 놓은 고로케를 용기에 담는다. 그리곤 정성스레 종이백에 넣어서 보고서와 함께 안아들곤 준비가 된 듯 미소를 짓습니다.
" 그럼 가볼까 ! "
왠지 즐거운 듯한 발걸음으로 에스터 씨의 사무실로 향합니다.
머뭇거림 없는 발걸음으로 힘차게 걸어가 사무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한다.
" 에스터 씨, 들어가겠습니다! "
그에 응하듯 안 쪽에서 에스터 씨의 낮고 무게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미소를 짓습니다.
" 고생하십니다, 에스터 씨! "
에스터의 책상에 보고서를 올려두곤 종이백을 들어보입니다.
종이백 안에선 향긋한 고로케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 먹으면서 하시겠어요? "
ㅡ
"아. 고마워."
간식거리를 그렇게 즐기지는 않지만 당신의 호의에는 충분히 감사할 가치가 있었다. 에스터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 쪽이야말로, 고생이 많다." 그런 말을 함께 건넨다.
에스터는 고로케를 한 입 베어문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게 잘 구워진 간식이 에스터의 입 안에서 녹아간다. 생각보다 꽤나 맛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부럽다. 나도 고로케 먹고싶다. 고로케.
"어디서 산 거지? 꽤나 질 높게 잘 만들어졌군."
요리왕 비x같은 현란한 리액션을 보인다거나, 이 맛에 대한 끊임없는 찬사와 감탄을 보내는 것 대신 에스터는 그런 심심한 반응을 보인다. 에스터의 평소 간식거리에 대한 감상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꽤나 합격이다. 에스터는 가게 이름을 알려주면 에릭에게도 추천해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묵빛 늑대와 헌팅 킬러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하며, 에스터는 문득 소문을 들은 것을 떠올려본다. 최근 이진성, 빌런 '바론'과 유현이 만나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어디까지나 소문은 소문. 본인에게 직접 사실확인을 하기 전까지는 의미없는 괴담과 구분되지 않는다.
"최근, 빌런 바론과 마주했다는 목격담이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에스터는 그것을 넌지시 언급해봤다.
"혹시나싶어 얘기를 꺼내본 것이니 편하게 얘기해주기 바란다. "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별달리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런 자가 탈출하도록 놔둔 이즈모의 무능이 잘못이었다. 거기다가 히어로 선배인데다 수장이라는 위치를 맡은 자신의 제압이 물렀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더 할말이 없었지.
ㅡ
" 하하~ 틈날때마다 연습해봤는데, 맛이 괜찮은가요? 다행이네요~ "
방긋 미소를 지으며 심심한 반응을 보이는 에스터에게 말을 해본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지 제대로 먹어주는 에스터를 보며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잔에 따라서 건냅니다.
" 이것도 마시면서 드세요 "
커피를 건내고 미소를 띄고 있다가 에스터의 말에 미소가 잠시 사라집니다.
그새 소문이 에스터에게 까지 왔다는 것에 놀란건지, 아니면 에스터가 물어오는 것에 놀란건지는 모르지만 유현은 이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 예, 어이없게도 카페에서 마주치게 됬는데 - 마침 제가 무장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쪽의 말로는 근처에 빌런이 한명 더 숨어있다고 주장해서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선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할 것 같아 제압 및 체포를 하지 못했습니다 "
그다지 숨기는 것 없이 그날 '바론'과 만난 것을 이야기 한다.
에스터 씨에게 숨기거나 할만한 문제도 아니고, 숨겨서도 안 되는 문제 였기에 .
" ... 어울리지도 않게 비행기 사고를 애도한다고 하더군요. 종잡을 수 없는 건 변하지 않았어요 "
옅은 미소를 지은 체 말합니다.
아직도 그를 조우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듯 했다.
" 죄송해요. 제가 다시 체포를 했엇어야 하는데 "
민간인이 다치는게 두려웠어요 - 라는 말은 조용히 삼킨다
ㅡ
"아. 미안. 커피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카페인에 약한 편이었기 때문일까. 이상한 부분에서 미묘하게 약한 부분이 있었다. 술에 약하다던가.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잔다던가.
"그런가."
정답이었나. 당신의 보고를 쭉 들으며 에스터는 속으로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믿고싶지 않은 소문들만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별다른 표정변화나 동요없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언제나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시민의 안전. 만약에 당장 그를 체포할 수 있다고 해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면 의미가 없다. "
그리고 이어서 계속 말해나간다.
"너는 그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수고했다."
딱딱하긴 하지만 당신의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는 당신을 책망하거나 탓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근무태만이라고 비난받는다면 어쩔 수 없으나, 꼭 타인의 자존심을 내리찍어야만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앞으로는 비무장상태로 돌아다니지 않게 노력하도록. 꼭 히어로로서가 아니더라도,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무고한 사람이 죽게 할 수 없다. 그 대상에는 당신도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빠른 시일 내로 다시 체포하도록 노력해야겠지. 개인이 끼치는 직접적인 피해량은 적을지 몰라도, 그 녀석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니까."
나쁜 쪽으로. 그로 인해 일어난 모방범죄나 사람들의 인식을 떠올려본다. 그대로 놔둔다면 사회의 도덕기준에 있어 심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ㅡ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에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다시 보온병에 담고 한쪽으로 치워둔다.
다음번엔 다른 걸로 가져와야 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보고에 대한 에스터의 답을 기다린다.
"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좀 안일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바,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딱히 자신의 탓을 하지 않아주는 에스터에게 고마운 건지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자신의 탓이 크기 때문에 유현 또한 나름대로 반성을 하고 있었다.
이어진 당신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답합니다.
" 예, 반드시 '바론'은 제가 다시 잡아 넣을겁니다. 더이상 그런 이상한 사고를 하는 자가 돌아다니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간 그때처럼 또다시 피해자가 속출할테니까요 "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순간 귓가에서 또다시 죽어버린 자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아, 괜한 것을 떠올렸나 하는 후회를 애써 침착하게 환청을 못들은 척 합니다.
" ......... 그런 건 제가 못 두고 볼 것 같아서 "
응, 더이상 이 아우성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을 죽인 자와 지키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는 말들을.
점점 환청이 커져가자 자연스럽게 주머니 안에서 통을 꺼내지 않고 알약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가져온 커피와 함께 마십니다.
" '바론'건은 저도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
ㅡㅡㅡ
"혼자서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히어로는 혼자가 아니고, 유현이 이 일에 대해 혼자 책임을 가져야 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첫 생포 당시 선배인 자신이 당시 신입이던 유현보다 큰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바론을 놓친 이즈모에는 그 이상의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에스터의 생각이었다. 유현 개인에게 이번에 바론을 놓친 것으로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다기엔, 이즈모 자체로서도 일처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워낙 많았으니까. 애초에 한 명이서 빌런하고 대치하게 되는 상황 자체가 위험했다.
고로케는 수제인가. 솜씨가 좋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에스터는 문득 약을 삼키는 당신의 움직임을 본다. 에스터는 꽤나 눈이 좋은 편이었다. 평범하게 시력 자체의 의미로도, 동체시력이라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봐주지 않고 진심으로 싸울때는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지. 당신의 움직임은 더할나위없이 자연스러웠지만, 그녀가 보지 못하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커피와 함께 약을 먹는건 그닥 좋지 못하다."
에스터는 나지막히 그런 말을 건넨다. 물이 필요하다면 가져다줄 수 있었는데 말이야. 선배이자 상사에게 그런 걸 시키는 것은 역시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약을 먹는 것 자체를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나. 후자라면 눈치없이 굴어버린 것 같군.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에릭의 말을 상기해본다.
"건강이 안 좋은 건가. 눈치없이 네 상태를 신경쓰지 못했군."
에스터는 그런 말을 하며 당신을 쳐다본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미세하게 걱정스러운 기색이 눈에서 드러났다.
ㅡ
" 아아, 그냥 비타민입니다 . 비타민 - 요즘 입술이 자주 찢어지는게 비타민이 부족한 것 같더라구요 "
아차, 앞에 있는 사람이 에스터 씨임에도 너무 안일했다고 유현은 생각하며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우울증 같은 걸 알고 있다고 에스터 씨에게 말하기엔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웃음으로 넘기려 미소를 머금습니다.
" 그렇다면 일단 빌런 '바론'은 포착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다음 보고 후에 다른 히어로분들이랑 협업해서 체포하는 쪽으로 ... ."
귓가에서 바론을 죽이라는 아우성이 커지자 잠시 말을 끊었다 애써 꾹 누르며 말을 이어갑니다.
" 보고서를 올린 다른 빌런들도 일단 위치를 포착하는 쪽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들은 특징점도 확실해서 포착하는 것은 빠를 것 같습니다. "
에스터의 목소리와 아우성의 목소리가 같이 울려퍼지지만 티를 내지 않습니다.
신경을 쓰면 더욱 더 목소리는 커져만 가니까.
" 다음 보고때는 더 좋은 소식을 가져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야 에스터씨를 뵐 면목도 있구요 "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ㅡ
"......"
상대가 에스터가 아니더라도, 그런 부자연스러운 말의 끊김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겠지. 에스터는 그 이유를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냐고 한다면, 그녀 또한 그랬으니까. 재판장 테러 직후, 심한 트라우마 증상을 겪었었던 것을 기억한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이명에다가 심지어는 일시적으로 언어 구사가 힘들어지기까지 했었지.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히어로중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거침없이 즉살을 추구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 행동이 상처의 잔재이기도 하니.
"무리하지 말아라."
긴 말을 대신하여 에스터는 그런 말을 유현에게 건네보았다. 남 걱정은 이렇게나 열심히 해주는 사람인데 말이야. 정작 자신의 마음은 돌보는 일이 없으니. 에스터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모순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통받는 이들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이 더 열심히 굴러야 할 뿐이다. 자신의 이상, 약자의 구원, 모두가 두려움에 떨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좋은 소식이라,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
실상, 히어로로서 일하는 이상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전할 일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최종적인 목표달성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일단 일에 나서면서 '죽이고' 시작하는 빌런과 달리, 히어로는 사람이 죽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누군가가 죽지 않게 막아낼 수는 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죽이지 못한 사람에겐 다시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살리지 못한 사람에게 다음은 없었다. ...아니. 자신에게는 다시 죽일 기회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몇 번이나 곱씹을 여유는 없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해줘. 히어로는 너 뿐이 아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지금의 당신에게 한 마디라도 더 보태는 데 써야하겠지. 히어로 선배로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조언을.
"그리고 너와 같이 괴로워하는 것 또한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주변에 좀 더 의지하도록."
ㅡ
무리하지 말아라 - 무뚝뚝한 듯 하면서도 따스한 말을 던져주는 에스터를 보며 유현을 밝게 미소를 짓습니다.
역시나 이분은 다정한 사람이다 - 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 예, 무리하진 않겠습니다 - 히어로는 저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녀의 말을 따라서 말하고 눈웃음을 지은체 고개를 끄덕입니다.
조금은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감사한 마음만 가득한 유현은 이 배려를 반드시 좋은 소식을 통해서 갚고 싶은지 각오를 다진다.
짐을 하나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무리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 걸 알았으니까.
" 주변... 예, 그렇겠죠. 좀 더 주변을 둘러보면서 생각하겠습니다. 직진만이 답은 아닐테니까 "
유현은 자신이 좋은 상사를 두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왠지 웃음이 나와 쿡쿡 웃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귀에서 들려오는 아우성 조차도 잠시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만큼 기쁘고 즐거웠기 때문에 조금은 웃어도 되는 게 아닐까 했다.
" 전... 에스터 씨같은 히어로가 되고 싶어요. 예, 그게 제 꿈입니다 "
주변에 에스터 씨나 샤오화 선배 같은 분들이 있다. 그들은 유현에게 너무나도 빛이나서 태양과 같았기에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게 노력하려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히어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ㅡ
"나 같은 히어로라."
에스터는 미소짓는다. 반 쯤은 씁쓸함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 한때는 자신도 누군가의 옆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 그러나, 나머지 반은 진심으로 순수한 미소였다.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래서, "영광이군."이라는 짧막한 말을 덧붙이며ㅡ
"아니지. 나 같은 히어로가 되는 게 아니야."
그 동시에, 그것을 부정한다. 누군가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굉장한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부분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것. 누군가에게 있어 구원의 손을 뻗었던 자가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절망으로의 손짓을 했다던가, 누구보다도 올바르다고 믿어왔던 사람이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이 되거나.
인간이란 입체적이고, 유동적이다. 한 사람이 여러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과거의 행보가 현재의 그 자와 도무지 같은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르다던가. 에스터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면모들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러했으니까. 검정과 하양으로 나눠지는 체스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회색인 존재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어느 한 면만을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의 어떤 부분이 옳다고 해서 그 자의 전부가 옳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당신의 목표가 될수는 없었다.
"나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ㅡ대단한 히어로가 되도록."
대신, 자신의 장점을 봐주는 당신에게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지. 자신의 장점만을 배우며, 누구보다도 올바른 히어로를 목표로 하기를. 그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목표가 높을수록, 발전 또한 눈에 띄는 법이지.
ㅡㅡㅡ
오늘도 에스터 씨를 뵙고 또 다른 건 배우게 되자 유현은 상기된 얼굴로 에스터의 사무실에서 걸어나온다. 에스터에게 격려와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유현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물론 에스터는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히어로가 되라고 했지만 유현 본인은 자신이 그다지 재능이나 능력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사람.
그렇기에 에스터보다 대단한 히어로가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저 본분에 충실할 뿐, 몸을 아끼지 않고 히어로로서 정의를 세우는 것.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만 하는 업과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생긴다면 팔 하나를 던져서라도 이루어내는 것.
그것만이 여태껏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며 에스터의 사무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왠지 오늘도 하루가 길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연은 귓가에 맴도는 아우성을 벗삼아 거리로 나선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 에스터 - 마틴
- (2스레)
괴물 늑대에 대한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보고하던 히어로가 통신 장비와 함께 무자비하게 씹어먹혔다던가. 보통 늑대보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엄청난 속도와 잔학성을 자랑한다던가. 속칭으로 개x끼라는 별명이 있다던가... ...맨 마지막 사항때문에 상상속의 어마어마한 모습이 깨져버렸다. 갑자기 이미지가 귀여워졌잖아.
큰 늑대라. 늑대라고 해도, 큰 개와 잘 구분 안되지 않나? 에스터는 큰 개를 키우고 있었다. 종은 도베르만. 이름은 또띠. 요즘은 자신의 일이 바빠지면서 연구소 사람들이나 에릭에게 돌봐지는 빈도가 더 높아진 느낌이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지만. 또띠는 종 자체도 대형견종인 데다 평균적인 도베르만 크기보다도 훨씬 커서 본의아니게 주변에 겁을 주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에스터는 묵빛 늑대의 얘기를 들었을때 문득 또띠를 먼저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음. 늑대라면, 싸우는 데 조금 죄책감이 들지 않으려나... 말 못하는 짐승에게 너무 과한 처사...
...같은 생각은 물론, 당신을 보기 전의 생각들일 것이다.
ㅡ
늑대의 입가에 붙은 털에는 피가 굳어있었다. 바닥에 구르는 손 하나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상황을 설명해주는 듯 싶었다. 분명 위험한 히어로였음이 분명했다. 같은 재해급의 히어로를 잡아먹는 것은 늑대로서는 위험부담이 꽤 컸지만, 놈에게 첫 상처를 입힌 뒤로는 결국 일방적인 늑대의 싸움일 뿐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소름끼치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다가, 꺼져버렸다. 늑대의 입이 움직이더니 비릿한 피냄새를 내뱉었다. 신경이 곤두서게 만들 정도로 기분 나쁜 냄새다.
" 지금은 사냥이 끝난 참이라 물어보는데 너는 동족인가 ? 아니면 사냥감인가 . 동족이라면 거기 둔 손이라도 들어라 . 더 많은 사냥을 해올테니. 아니라면 이만 물러나라. 내가 먹은 피와 살이 더 풍족해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
늑대의 목소리는 오만했고 짐직 폭력적이었으나 아주 부드러웠다. 꼭 연기를 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혹시 모를 적에 대한 경계도 아니면 흥분감도 없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늑대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았고 사냥에 만족할지언정 흥분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사냥이 갓 끝난 늑대는 배에 가득 찬 영웅들의 살에 포만감을 느끼어 이 앞의 생명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을 뿐이었다." 누군가 하였더니 옅지만 진한 쇠의 향이 느껴지는군. 총구를 나에게 거누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자네의 옷에 느껴지는 향수와 사람 냄새들. 꽤 높은 사람일 터. 그냥...모른척 지나간다면 내 이빨은 널 물지 않을 것이다. "
늑대는 그 말로 바닥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려는 듯 보였다. 조금 뒤 히어로들이 달려온다면 그때는 또다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달려들지도 모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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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개를 든 에스터의 눈 앞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늑대가 있었다. 나름대로 인간중에서는 거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에스터이지만, 이 쪽은 스케일이 다르다. 큰 자전거와 대형트럭을 비교하는 것 보다도 다른 스케일이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에스터는 SAN치 체크를...은 세계관이 다르고. 에스터는 늑대의 입에 엉겨붙은 핏자국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람이었던 것의 흔적을 바라본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역겨웠다. 그것은 단지 늑대에게서 피 냄새가 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늑대의 하관이 뼈와 살을 우드득우드득 씹어대는 것을 바라본다. 귀를 치르고 작게 들려오는 생명의 흔적에 에스터는 얼굴을 찡그린다.
...이것은 정말로, 괴물이었다.
단순히 힘이 강하다던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이것'은, 늑대라고도, 늑대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언어를 구사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며 일어난 행동들은 인간의 사고라고는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괴물. 괴물이라는 표현 외에는 상대를 설명할 말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마주한 것 만으로 겁을 먹고 정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동족이라. 너와 동족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늑대? 아니면 괴물?"
하지만 에스터는 겁먹지 않은 채 말한다. 자신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다가는, 누가 이 괴물을 상대한단 말인가. 다만 지금의 체급 차이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사람을 불러온다고 해도 당장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단지 늑대는 지금은 배가 부른 것으로 보였다. 사냥이 끝났다는 말과, 비교적 부드러운 늑대의 목소리를 통해 추론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당당한 태도는 쓸데없이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을 추론해낸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일종의 도박이었다. ...자신이 틀렸다면 이대로 잡아먹히는 것이고. 아니라면 정보를 조금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 부디 자신의 결정이 히어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선택이었기를.
"괴물이라고 불리는 것이라면, 이 쪽도 마찬가지여서 말이야. 너와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시체의 손을 먹는 기행을 벌이는 대신, 대화를 통해 지금은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상대에게 전달해본다.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점은 그 지혜 탓이라고들 하지. 글쎄. 그닥 공감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해보는 정신력만은 인정해줄만 하다.
"나로서는 현재 굳이 너를 공격할 마음이 없다. 그보다는, 대화를 하지 않겠나."
도박. 이 수에 걸어본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쉽게 변화하지 않는 얼굴표정이 이럴 때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며.
ㅡ
" 괴물? 네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나보군. 아쉽지만 난 괴물이 아냐. 괴물이라면 너와 대화가 통해서도 안 되고, 너의 말을 이해해서도 안되고 현실에 존재해서도 안된다. 괴물이란 그런 존재다. "
자신이 마주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하고 나면 인간은 세 가지 상태에 빠진다. 의심하고, 받아들인 뒤. 혼돈에 빠진다. 저자도 그런 것 같았다. 큰 키와 근육이 꽤 있는 몸. 몸에서 느껴지는 피냄새는 그녀가 수많은 피를 뭍힌 것처럼 느껴졌다. 재밌군 . 늑대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먹지 않은 것을 던져주었다.
아마 자세히 보면 그녀라면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제 갓 결혼한 여자의 반지. 행복하게 살겠다 다짐한 사람은 이제 손과 반지만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에스터 정도 뿐. 늑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늑대는 괴물이 아니었다. 늑대는 폭력이었다. 존재하고 누군가를 잡아먹는 것으로도 주위에 영향을 행사하는 폭력. 폭력의 대상에는 고삐를 맬 수 있을지언정 폭력에는 고삐를 맬 수 없다. 그렇기에 늑대에게 목줄을 맬 수 있을지 물어본다면 어떨까? 원한다면 당신이 메어보아라. 그 목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폭력에 고삐를 채운 첫 대상이 될지도 모를테니.
" 그리고 네 어디가 괴물이란 얘긴지 모르겠군. 네게선 향기로운.. 정정해주지. 달콤한 피냄새가 난다. 심장이 뛰고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고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그 모든 것이 섞인 것이 인간. 그리고 너는 그 특징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과 살고 있으며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도 널 인정한다. 그렇다면 너는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잘못되었나? 아니면 네가 짐승이라고 칭할 이유가 있나? 동물 사이에서도 크기가 크건 작건 그것은 한 놈의 특징일 뿐.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너는 괴물이 아니고 나도 괴물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볼까? 두 명의 인격체가 남는군. "
늑대는 씨익 웃으며 에스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장난이었고, 놀이었다면 믿어지는가? 안 믿어진다면 믿어야만 할 것이다. 늑대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고, 지혜로운 인간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마저 내고 있었으니까.
" 좋다. 대화를 좋아한다면 어울려주마. "
ㅡㅡㅡ
에스터는 늑대가 던져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누군가의 결혼반지가 끼워진 손. 두근.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드러내서는 안 된다. 속이 뒤집히고 머릿속이 헤집혀질 지언정 얼굴색만은 바꿔서는 안 된다. 약한 부분을 드러내다가는 끝장이다. 시체를 보는 것에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식으로 산 채로 사람이 뜯어먹힌 채 손만 남는 꼴을 보게 될줄은ㅡ에스터는, 눈 깜짝하지 않는다. 마치 태연한 것 같은 얼굴 표정을 유지한다.
"최근에 묵빛 늑대라고 불리는 대상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늑대가 돌아다닌다는 이야기. "
그게 당신이라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겠고. 설마 이 정도 되는 늑대가 하나 더 있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재앙이다. 아니, 재앙이라는 표현을 넘어선다. 라오스가 통째로 씹어먹혀도 이상하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기대 이상이군.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이 정도의 고도의 지능까지 갖추고 있을 줄이야ㅡ"
이건 사실이었다. 보고만 들었을땐 그 위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니까. 에스터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띄워보이기까지 한다. 2년간의 세월동안, 에스터도 꽤나 노련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미소를 짓던 표정은 별안간 다시 진지해진다. 평소대로의 무표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닥 표정이 부드러운 사람은 못되는지라.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히어로만을 중점적으로 잡아먹는 기행을 벌일 것 같진 않은데."
ㅡ
늑대는 목표를 이루었다는 듯 히죽 웃고 있었다. 그 얼굴근육이 움직인다는 것은 짐짓 괴이할지라도 사실은 사실. 늑대는 그 커다란 꼬리를 휘휘 젓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늑대의 눈은 에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웃었다.
" 말을 돌리는군. 많이 놀랐나보지? 아니면 내가 두렵나? 아니 두렵겠군. 당연하지. 일단 하나만 말해주겠네. 첫번째. 나는 인간일세. 다만 사정이 있어 이럴 뿐이지. 둘째. 그래도 난 짐승이야. 당장 이빨로 물어뜯을 수 있는. 셋째. 짐짓 태연한 척 할 필요 없어. 능수능란하게 표정을 바꾸는게 사람을 속이긴 더 쉽지. 말해주자면 .. 당황한게 보인단 말이 되는군. "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대담해야한다. 아무렇지 않게. 는 어디까지나 아무렇지 않을 뿐.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도 그것이 동물의 감각에서 본다면 저 반응은 부자연스러웠다. 인간의 모습에서야 대담하다고 하겠지만서도.
" 당연하지 않은가 ? 그들이 조금 더 강하고 만족되는 먹잇감이기 때문이지. 너는 동물이 먹을 것을 생각하고 먹는 것을 보았나? 답은 아니다. 겠지? 동물은 맛있는 것을 먹길 좋아하고 그것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민간인은 쉽게 먹을 수 있을 뿐더러 그런 짓을 했다간 민간인 학살이니 하는 이름만 얻을 뿐이지. 그런데 난 내가 원해서 히어로들과 싸우고 그들을 사냥했을 뿐이다. 이 세계는 다르지 않아. 먹느냐, 먹히느냐다. 그들은 좀 더 강했고 나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먹었고 몸을 불렸다.
너희들은 나를 빌런이라고 부르겠지. 마음껏 불러라. 필요에의해 악당이 되었거나 살기 위해 악당이 되었다면 그런 허울만 바뀌면 악당이 아니게 될 수 있단 말이 된다. 하지만 나처럼 그저 살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다면. 과연 그것조차 허울이 될까? 아니다. 나는 그저 내 본능대로 움직일 뿐이다. "
이 늑대에게는 이유가 없다. 범죄의 이유따윈 없이 오직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싸우고, 먹어치웠을 뿐이다.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답은 하나다. 본능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말 한마디.
사람들은 늑대와 같은 종류의 악을 " 순수 악 "이라고 불렀다. 이유도 없다. 회유도 불가능하다. 어떤 목적도 없다. 그저 파괴하고, 파괴하고, 파괴할 뿐이다.
늑대는 몸을 비집고 일어나 에스터를 내려보았다. 낮아졌던 몸이 다시 일어나 에스터에게 다가오던 달빛을 가리게 만들었다. 늑대는 웃으며 에스터를 바라봤다. 이죽거리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 선에도 악에도 이유가 있다? 그럴리가. 나는 내 본능대로 움직이고 본능대로 살아가는데도 너희는 악으로 불렀다. 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희의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했을 뿐이지. 참 웃기고도 씁쓸한 이야기다. 너희에게 이득되는 것은 선. 이득되지 않는 것은 악. 그렇게 선악을 구분한 것이 지금의 너희를 붙잡고 있을 뿐이지 않나. 내가 이만한 지성을 가지고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문제인가? 그럼 넌 날 악으로 봐라. 내 기준에선 내 사냥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일 뿐이니. "
ㅡㅡㅡ
에스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미 다 들켰다면 쓸데없는 표정관리는 필요없겠지. 그러므로 드러난 것은 하염없는 무표정이다. 정색에 가까운 얼굴이다.
"그렇다면야."
안타깝게도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던 건가?' 정도로 능글맞은 발언을 할 정도의 노련미는 없었다. 솔직한 무표정이다. 상대에게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는 눈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만한 관계는 글렀군.
개과의 동물들은 후각이 매우 발달해있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다. 그 외에 후각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는 능력또한 뛰어나다. 보호자가 침울해져있으면 그 감정이 반려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 늑대도 어찌되었건 개과니까, 이런 감정들은 이미 전부 들켜버렸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에스터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기로 결정한다.
"사정이라. 어떤 사정일까. 그런 눈에 띄는 모습으로 눈에 띄는 짓만 하며 돌아다닐 만한 사정이란."
인간이지만 사정이 있다는 말에는 그렇게 응수한다. 당황한게 보인다는 말에 되도않는 연기는 집어치운 모양이다.
"살기 위해 움직였다...라."
그리고는, 당신의 말에 되받아칠 준비를 한다.
"모순투성이로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인간인 동시에 짐승이라는 궤변으로 자기 좋을대로 합리화해대고. 인간의 지능을 갖췄으면서도 인간의 도덕기준은 회피하는가. 강하고 만족되는 먹잇감? 스스로를 인격체라고 칭했으면서, 정작 인격체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쪽은 누구지? "
말들을 이어나간다. 인간으로서 괴물에게 대항한다. 순수악이라고 하는 목적없는 괴물에게 인간의 기준으로 논리를 펴나간다. 저 늑대에게는 소용없는 말들일지 몰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신을 인간으로 만든다.
"내가 너를 괴물이라고 칭한 것이 단순히 겉모습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인간과 자신을 다른 존재인 것처럼 두는 그 오만한 태도이다. 짐승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을 자기 편할대로 넘나들면서 나는 인간이니 두명의 인격체니 말한다 한들 와닿지 않는다. 너는 괴물이다."
정색한 채 쏘아붙인다. 인간들 사이에 있을때는 꽤나 위압적인 외모를 과시하는 그녀이나, 이 늑대 앞에서는 그런 위압감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늑대에게 기가 눌리지 않는 것이 대단할 정도이다.
"인류가 수천년간 쌓아올려온 역사의 흐름속에서 모두를 위해 만들어진 도덕률을 네 맘대로 무시하고, 어디서 튀어나온지 모를 너의 방식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주절대는건가. 네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지 않기를 원한다면야, 인간의 도덕기준은 소용없겠지. 도덕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에 존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너에게."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라. 네가 평범한 숲의 늑대였다면 그렇게 살아간다한들 아무 문제 없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네가 말했듯 너는 짐승이고, 인간이다. 계속해서 즐거운 사냥을 즐기고,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악으로 취급하다보면, 언젠가 너는 비참하게 멸망할 것이다."
"너의 먹잇감인 강한 자들ㅡ히어로들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겠고, 그렇다면 강한 빌런들만이 남겠지. 너의 사냥을 이어가기에는 재미없는 인간들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빌런의 세계멸망이라는 목표 하에 인간들 또한 학살당하겠지. 그것을 막아야 할 히어로들은 너의 탐욕스러운 식욕에 의해 집어삼켜진지 오래겠고.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미래정도는 생각해뒀겠지. 더 이상 너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사라져 네가 비참하게 굶어죽는 것을 바라는 것인가. "
겨우 말이 끝나자 숨을 몰아쉰다. 인간이 씹어먹히는 것을 두 눈으로 본 탓에 과하게 흥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말로 상관없는 것인가."
"선과 악이기 이전에, 장기적으로 너에게도 하등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히어로를 잡아먹는 것은."
ㅡ
늑대의 표정이 기분 좋게 바뀌었다. 즐거움, 희열. 꼭 날뛰는 것만 같은 충족감이 기분 좋게 척추를 스쳤고 즐거운 기분을 가져왔다. 그래. 이런 것이 바로 사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만족감이다. 나에게 정면으로 반박해오는 먹잇감. 나에게 정면으로 말을 걸어오는.. 사냥감.
" 내가 날 뭐라 칭하든 무슨 문제지? "
입꼬리가 올라갔다.
" 그래. 난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다. 네 기준에서 맞지 않는 악당이지. 그런 내가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에 그런 긴 말이 필요하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지 않곤 베길 수 없단 말인가? 통제를 통제한단 명목으로 강한 자의 손을 들어주고 성장했으며 강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던 우리 인간들이? "
늑대는 입에서 숨결을 토해내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어냈다.
" 그렇다면 너부터 내게 입을 닥치고 도망쳐야지 않나? 네가 말하는 얄랑한 인간의 도덕관을 이야기하는가? 수없이 쌓아온 인간의 업에서 나온 도덕을 자랑하며 우리의 추악하고, 더럽고, 역겨운 부분은 무시하는 네놈보다 차라리 입발린 말을 주절이며 오만하고 역겹게 떠드는 내가 네놈보다 더 솔직하고 순수하지 않은가 물어보마.
궤변? 그래. 궤변이다.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내가, 인간인 내가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데 왜 인격체. '인(人)'격체로 칭하느냐는 말인지 물었나? 간단하다. 난 내 뿌리가 인간에서 오되, 인간의 말로를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강한? 웃긴 소리 하지 마라. 우리는 사냥꾼을 사냥하는 사냥감이었고 사냥감을 욕심으로 모은 사냥꾼이었다.
이해? 이해가 무슨 필요란 말이지? 폭력에 이해가 있다고 생각하나? 폭력에 무슨 이유가 붙든 폭력은 폭력이다. 그 당연한 사실조차 무시한 네녀석이 기준을 들이밀어봐야 그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인간스럽게 인간답게 그 기준을 내쳤을 뿐이니까. "
늑대의 이죽임은 더욱 커져갔다. 한발짝 한발짝 다가온 늑대가 에스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 너야말로 궤변이다. 너야말로 나에게 이해를. 대화를 바란다 했으며 시선들을 무시해온 것이 되지 않나? 왜 네가 너를 괴물이라 칭했는지 알겠어. 뭐? 겉모습? 성격?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넌 너조차 너를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대화를 먼저 청한 것은 너고, 그것을 받은 것은 나야. 오히려 이해를 요구하던 것은 너다.
멸망? 그날이 오면 나도 죽을 뿐이다. 그걸 거부할 이유가 있나? 끝도 모르는 정도로 내가 멍청해보였단 말이냐?
너야말로 인간이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왜 인간의 기준에서 널 변호하고 있지? "
이죽거리던 늑대는 말을 마치고 느긋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목적은 모두 이루었다.
" 인간의 모습으로 남을지. 아니면 본성을 깨달을지. 선택하라. 이해하는 괴물아. "
ㅡㅡㅡ
괴물.
에스터에게 있어서도 꽤나 익숙한 말이었다. 큰 덩치, 험악한 외모, 상당한 신체 스펙. 평소에는 이것들을 남용하지 않고 후방지원을 위주로 하는 그녀였으나, 한 번 위기상황이 다가오면 이 모든것은 괴물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되었다. 위압적인 외모의 전사가 자신의 팔이 찢겨지든 다리가 부서지든 상관하지 않고 돌진하는 모습을 본 빌런들은 에스터를 '괴물'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스터는 자신이 괴물이라 정의한 존재에게 그 말을 듣고 말았다. 너야말로 괴물이다, 라고.
"......"
에스터는 침묵한다.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이 이후의 대화는 아득한 평행선이 될 것이 분명하며, 상대의 태도에 말려들게 될 뿐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했다가는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릴지 모른다ㅡ그런 생각이, 혐오감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렇기때문에, 대화를 중단했다.
"멍청한 생각을 했군."
그렇게 자조한다. 처음부터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말려들어갔을 뿐이었으니.
"인간의 모습이라, "
허탈한 듯이 피식 웃는다. 입가에 띈 웃음이 조소임은 명백했다. 자조하듯이 에스터는 늑대가 사라진 자리에 중얼거린다.
"...이미 인간으로 비춰지기에는 늦어버렸는걸."
에스터는 인간으로 있기를 선택했다. 인간이 이륙하고 발전시켜나간, 고상하고 구속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다움이란. 매일같이 끔찍한 방식으로 인간의 목숨을 갈취해나가는 세계. 그리고 그 방식 또한ㅡ인간이 떠올려낸 것. 자신이 인간다움을 논하고 외친다 한들 이미, ...망가진 것이 아닌가. 숭고한 도덕률이란.
하지만 그것이 늑대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결국 자기합리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짐승은 합리화하지 않는다. 짐승은 도덕과 선악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짐승의 방식을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서부터 그의 '인간다움'을 봐버린 것이다. 애초에 짐승이라면 인간의 기준 따위를 구태여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대화하지 않고 집어삼켜버리면 될 뿐.
...누구보다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집착한 결과, 인간들에 의해 괴물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괴물이고, 어느 것이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괴물과 인간다움을 부정하는 인간중에서.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괴물의 앞에 서고 나서야, 자신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괴물이라 불리더라도 자신은 인간을 위해 싸우겠다. 그것이 에스터의 다짐이었다.
보름달이 차게 하늘빛 머리칼을 비춘다. 그녀는 새카만 하늘을 그저 올려다본다. 두 인격체의 대화가 그친 자리에는, 다시 한 사람의 괴물만이 남은 것이다. 인간이라 칭하고 인간으로서 대화할 존재가 없다면 인간人間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지 않는가.
- 블래스터 - 에스터
- (10스레)
2년만에 돌아온 라오스에서, 가장 먼저 들려야 할 곳이었던 곳이 있었다. 그녀, 에스터가 상주하고 있는 ISMO본부에. 물론 가지 않았다. 내 생각의 정리와 함께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모두 정리된 생각들과 내 자신을 바로세워야한다. 미련이 남으면 죽는것이 두려워 질테니까. 그래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귀찮은 인간들만 없다면 더 좋았을것을.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신원 확인을..."
"더 비스트. 이제 꺼져."
"그게 누구...?"
귀찮은 인간같으니. 2년동안 쓰지 않았던 ISMO 사원증을 툭하고 던졌다. 경비원의 어이없다는 표정은 나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저런 놈때문에 내가 방해받는다면.... 나중에 생각하자.
천천히 문을 세번 노크했다. 2년만에 본 얼굴은 어떻게 변할까.
"에스터. 블랙이다. 들어가도 되겠나."
ㅡ
에스터는 노크소리를 확인한다. 그 뒤에는 예상못한 목소리가. 블랙. 2년동안 사라지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당신에게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도록."
어디. 당신이 확인할 수 있는 맨 처음 눈에 띄는 변화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풀어내린 것일까. 세미 롱 정도로 어깨보다 밑에 내려온 머리카락에, 흰 양복과 검은 셔츠. 당신이 별로 유쾌하게 생각하지 못할 변화로는 콧잔등의 큼지막한 상처가 있다. 예전에 났던 생채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지.
"살아있었나. 블랙."
그런 소리를 하며 슬며시 미소짓는다. 이래봬도 반가움의 표시였다. 최악의 경우까지도 상정하고 있었거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기쁠 수 밖에 없었지. 그래서, 당신은 오랫만의 재회에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ㅡ
"어떻게든 살.... 어떤 개자식이냐....!"
아마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것이다. 순간적인 반응으로 나왔지만, 스스로 제어할 생각도 없었다. 순수한 분노였고 원초적인 반응이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진정하자. 지금은.
"그래. 그건 차차 이야기하고."
그래도 건강해보여서 안심했다. 콧잔등쪽의 상처는 굉장히 열받았지만.
"사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우선 가장 가까운, 그녀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소파에 앉았다. ... 설마 긴장한건가.
"그래도.... 네가 있으니 오게 되더군."
ㅡ
"진정해."
에스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그 험악한 반응도 변함없구나. 새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로는 짐짓 딱딱하게 얘기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그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흉터다. 불편한 곳은 없어.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지우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다시는 그런 위기를 겪어서는 안 됐다. 상대가 자신을 살려놨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치욕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의 수모였다. 복수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새겨두고 싶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에는 납득하였다. 이 곳에는 너의 상처가 된 일이 무척이나 많았겠지. 어딘가 긴장한 듯한 모양새는 단순히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히어로의 수장이라는 위치에 선 것이 서로간에 거리감을 줘버린 걸까. 혹은, 서로가 너무나도 달라져버린걸까. ...테러 이후의 일을 떠올린다. 동경하던 이의 사형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낸 '영웅'인, 나는.
"...아하하."
낯간지러운 소리에 무심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블랙. 긍정적인 변화다. 에스터 본인도 미소가 늘었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ㅡ
"역시 돌려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건, 2년전이나 지금이나 같군."
그녀에게 기대한 내가 멍청했다. 외곬수적이고 가슴에 정의만을 새긴 여자에게 돌려말한들 무슨 의미겠는가. 하아. 긴장은 왜 이리 나는지. 과거에도 했었던 말을, 지금 한 번 더 하겠다는것인데.
"남자는,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떤 자세를 해야할까. 다가가서? 아니면 이 자리에서? 목소리의 톤은? 모르겠다. 사전준비를 하지 않은 내가 멍청한 놈이다. 그냥, 내뱉자.
"에스터. 나는,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거다. 그것이 돌아온 이유고, 내 목적중 하나다."
이것도 못알아듣는다면, 그건 반드시 연기일것이다.
ㅡ
"...잘 알고 있지 않나. 본론부터 말해."
에스터는 조금은 인상을 찡그린다. 불쾌하다기 보단 무안하다는 느낌이다. 그거야 진심으로,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어느 부분을 못 알아들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이상한 부분에서 눈치가 없다고 할까.
남자나 여자라고 말하자면, 주변의 남자들이 보편적인 남성상에서 벗어나있다고 할까. 그 이전에 본인이 여성상에서 벗어나있다고 할까. 쓸데없이 진지한 에스터로서는 '편견이잖나.'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가 없으면 누구나 안 움직일텐데.
"...내가 필요하다고?"
복수를 위해서 지금까지 줄곧 협력해줬었는데, 또 다시 뭔가가 생겼나? 만약에 그렇다면 언제든지 나는 도울 생각이 있다. 그것의 명분과 절차가 정의롭다는 가정하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예전의 에릭이 했던 말이 떠오르지만, 그 가능성을 부정해버린다. 그럴 리가 없다. 에스터는, 찡그린 인상을 유지하더니ㅡ흉터때문에 좀 더 험악하게 보인다ㅡ결국 그런 말을 던진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말해라."
심각하고 진지하게 굳어진 얼굴이 당신을 바라본다. 어떤 무거운 화제라도 들어주겠다는 각오가 되어있었다. ...놀랍게도 연기가 아니다.
ㅡ
예전부터 고민해 왔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녀의 사후, 내 옆에 있어 주었던것은 너 밖에 없었다. 내가 복수에 길을 걷겠다고 맹세했을 때, 너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의 옆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단순히, 처음에는 동료라는 어줍잖은 관계에 너를 묶어두었기에 안심하고 무시했었다. 내 감정을.
"처음엔 외롭기에 생긴 감정으로 여겼다. 가장 한심하고 고통스러운 부류중 하나는, 그것을 연애감정이라 착각하는 인간들이겠지."
외로웠다. 그녀를 잃고 난 후의 빈자리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고 복수에 모든것을 바친 내 손은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옆자리에서도 구원받지 못할 나는, 짐승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를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다. 네가 상처받지 않길 바랬기에 나는 차라리 내가 짊어지길 바랬다."
그렇지만, 내 감정들이 언제나 거짓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너에게있어 난 동료였고, 나는 연인을 죽게 놔둔 빌어먹을 쓰레기였기에. 게다가 그녀를 볼 낯이 없었다. 나에게 모든것을 준 그녀를 잊고 내가 새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를 잊지 않고 다른이에게 모든것을 줄 수 있는가? 어줍잖은 외로움과 감정으로 상처받게 하는게 아닌가?
수도 없이 고민했고, 잊혀지지 않는 메아리들이 머리를 울렸다.
"..... 나는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2년동안 복수를 다짐했고, 실행했다. 너에 대한 감정이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길 빌면서. 그리고 너와 내가 서로를 잊기를 바라면서."
신은 가혹하게도, 가슴에 자리잡은 그녀를 떼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억에 맴돌고 미련이 생겼다. 왜 내가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왼쪽 눈이 심연에 먹히고 죄의 사슬이 양팔에 새겨져도, 너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네가 아른거렸다. 미련이 생기고 너를 보고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무의식중에 네 이름을 부르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를 살았다."
그래. 과거, 라이티에게 느꼈던 두근거림과 기대감. 나는 너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는것도.
"에스터. 한 번만 말하겠다. 잘들어라."
너무 아픈 가슴을 놔둔채 입을 열었다. 너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닫기를.
"에스터. 좋아한다. 내가 바라는동안,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진심을 담은 말 한 마디. 더 이상의 변론은 없다. 그녀는 판사요 나는 피고인. 판결은 그녀의 몫이다.
"거절해도 좋고 나중에 답변을 해도 좋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는 멀어지지 않을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를 도울것이고, 네 적들을 모두 물어뜯을 것이다. 짊어지는 쪽은 여전히 내가 해주마."
대답해줘. 에스터.
ㅡ
(11스레)
(답)
실연이자 사별 뒤, 숏컷으로 짧게 친 머리가 턱 밑에서 벗어나 조금은 길어졌을 무렵의 이야기다. 당신이 준 꽃은 여전히 물병에 예쁘게 보관되어 생기를 잃지 않은 채였지. 막 받았을때는 이것을 자신에게 주는 블랙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예쁘긴 하지만 자신과 꽃이 어울린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보통 이런 선물은 연인에게나 주는 것 아닌가? 에스터는 다른 이유를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별달리 마땅한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의 센스의 문제라는 것. 라이티가 살아있을 때의 버릇인걸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 외에게는 선물을 줄 일이 그닥 없었을테니. 당장 엘리를 위한 선물로 예를 든 것들도 연인에게나 줄 법한 것들이었지.
그리고 자신의 집에 들른 에릭이 그것을 보고 무심코 말하였지. 꽃말에 관한 이야기를. "에스터씨. 그거 알아요?" 에릭이 에스터의 집에 꽤나 자주 드나듦을 생각하면 이 꽃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을텐데, 그제서야 말한 것은 그녀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기다려줬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 전에는 에릭도 알지 못했던 것일까.
"호접란의 꽃말은 애정의 표시래요."
에스터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라고 말하듯이. 동료사이에 애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자 에릭은 다시 말했다. 이 꽃을 에스터씨에게 준 이유를 생각해보라고요. 에스터는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별다른 또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애정의 표시겠지. 동료애로서의. 허탈한 웃음이 사내의 얼굴에서 흘러나온다. 정말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으시네요.
"라넌큘러스의 꽃말은, 매력, 매혹, 비난하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스터씨. 그렇게 말했지만 에스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이 나에게 그런 의미로 꽃을 줄리 없다."라고. 단호하기까지 한 결론이었다. 에릭은 이 꽃을 선물해준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어쩜 이렇게 눈치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순식간에 꽃집에서 고른 꽃에서 그런 깊은 의미를 생각했을 리 없어. 거기다가 그가 누군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지."
"에스터씨. 모르시네요. 직접 살 때는 순식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꽃을 사러 가기 전에 미리 꽃말같은걸 다 알아놓은 상태일 수 있다고요. "
"하지만, 꽃을 산다는 것은 확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대화중에 나온 아이디어였지."
그런 상황에서 꽃을 미리 조사해놨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스터의 판단이었다. 분명히 연인에게 주는 선물 말곤 해본 일이 없어서,
"연애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런 면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거에요."
"...아니. 연애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아니야."
"왜 그렇게까지 단정지으시는 거에요?"
에스터는 침묵한다. 블랙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에릭에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가 자신을 믿기 때문에 이야기해준 것이고, 자신은 그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어찌됐건 아니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그 악착같고 괴로운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복수를 돕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 자신인데, 연애감정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애초에 자신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부터 두 사람의 연애를 지켜봤었다. 라디언트하고도 제법 친한 관계를 유지했지. 더군다나 그녀와 자신은 외모나 성격면에서 전혀 비슷한 점이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있다고 생각해요."
"그와 나는 동료다."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더더욱 모르는 마음도 있는 거잖아요."
...확실히 연애에 관해서는 에릭이 훨씬 잘 알았다. 막상 본인은 연애감정을 거의 안 느끼면서ㅡ사실상 인생에서 느껴본 적 없으면서ㅡ타인의 연애담에는 관심많고 진단에 힘쓴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하기야 뭐 무기에 관심있다고 전쟁을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다만. 사람의 섬세한 마음에 관한 것이라서 그런 걸까.
"에스터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만약에 그 분이 에스터씨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럴 리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성 없는 상황을 전제로 상상하는 것은 별로 의미있지 못하다. 하지만 미소지어오는 에릭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속삭여오자 에스터는 결국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과 애정에 있어서 너무나도 약한 자신이었다.
"거절하겠어."
그런 말을 하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슬픈 잿빛의 눈이었다.
ㅡ
"...어째서요? 사귀다보니 좋아진다거나, 그럴 수도 있는거잖아요. "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에스터의 답이었다. 에스터가 정의하는 사랑은 무거웠다. 독과 같이 퍼져나가는 것이며,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부조리함. 빠져드는 것이 두려워지고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감정이었다. 차마 연기해낼 수도 없고, 만들어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연모와 친애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그녀였다.
"에릭. 비스트는 나의 동료이자 친우인 동시에, 은인이다. 인생에서 나를 구해주었던 유이한 사람중 하나이지. 과장을 보태자면 그 날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바뀌었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에스터는 진지했다. 블랙과의 첫만남을 떠올린다. 어린 강아지를 싸이킥 갱들에게 빼앗기고, 힘없고 무력하게 바들바들 떨며 얻어맞던 자신을 순식간에 구해내고는 사라졌었다. 인생 최초의 영웅이었다. 그가 자신을 히어로가 아니라 짐승이라고 자조하더라도, 그는 그 때의 자신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빛나는 히어로였다. 검고 흰 영웅을 회색빛의 눈으로 쫓아가며 그의 일을 도왔다. 그 구원이 나의 인생을 바꿔주었던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니 사귄다...같은 애매한 태도는 내가 용납할 수 없다. 그의 그 사랑의 무게를 바보취급하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도 장난스럽게 사랑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못했을 터이다. 무겁다 못해 들어올리는 것 조차 힘들 정도의 그것이었다. 에스터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존재만으로 자신의 바닥을 뚫고 부수며 계속, 계속, 계속 추락시키는 그런 감정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그와 사랑을 한다니, 그런 것은..."
슬픈 눈을 하고 있던 에스터의 얼굴은 이내 굳어진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분위기를 바꿔간 눈이 나타내는 감정은 이번에는 '슬픔'보다는 '환멸'이라는 쪽에 조금 더 가까웠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가정한 것 만으로 자기자신을 경멸하고 말 정도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청도로 엄격했다. 에스터 힐데가르트는. "저열하다."는 말을 짤막히 덧붙여 문장을 마친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은 더없이 추악하고 비열한 행동이다."
에릭의 이야기가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것임은 알고 있었다. 아마 걱정된 것이겠지. 쓰라린 짝사랑의 너덜너덜한 말로에 이르른 에스터가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스터에게 사랑이란 그 정도의 가벼운 의미를 지닌 단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사랑에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사귄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모욕이다. 나는 그런 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 "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겉모습뿐인 평화가 아닌, 눈에 보이게 무너져내리더라도 올바른 '정의'를. 진실을. 그런 태도는 어느 것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단순히 연애의 이야기에 이 정도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나 정도의 거절로 꺾일 자가 아니다. 비록 과거의 상처로 너덜너덜해졌지만 동시에 그는 강해. 이 내가 믿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걱정은 없어. ...그리고,"
또한, 에스터 힐데가르트는ㅡ
"...애초에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져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사랑이 다가온다고 해도,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그것이 노골적인 형태를 띄고 있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눈에 드러나는 애정에는 약했다. 쉽게 당황하고, 어울리지 않게 허둥거리지. 별로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제법 오랫동안 자라왔기 때문일까. 2년간의 세월 이후에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ㅡㅡㅡ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고백이 에스터를 흔든다. 흉진 얼굴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깨달아버렸는지 욱신거림에 입을 다문다. 당신의 감정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당신 본인의 입으로 설명들어버렸다. 결국에는, 에릭이 맞았다. 자신은 이런 쪽에 있어서는 한없이 서투른 것이다.
당신이 겪어왔을 괴로운 나날들이 가슴에 스며든다. 거짓말이기를 바라고, 서로를 잊기를 바란 당신이 어떤 기분으로 나날을 보냈을지를 상상해본다. 자신이 아른거렸다는 말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 뒤이어지는 말이 올때까지 글자 하나하나가 흩어진 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감정하고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좋아한다는 말에 모든 단어들은 비로소 형태를 이루고 문장을 갖춰 의미가 되어 머릿속을 휘젓는다. 어지러이 헤메이는 그것이 배멀미를 일으키고 있었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니, 그런 이야기를 해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은 것일까. 이 저릿함을. 씁쓸함을. 이루고 싶지 않았던 방향으로의 성장을.
당신은 나중에 답변을 해도 좋다고 했지만, 미루는 것은 에스터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만약에 당신이 오늘 죽어버린다고 해도 느긋하게 '내일 대답할게'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No'. 전하는 것은 이르면 이를 수록 좋은 것이다. 그렇기에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겨우 추스리고 차곡차곡 정돈하려고 노력한다.
돕는다니. 짊어진다니. 적을 물어뜯어준다니.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에는 이제는 자신은 너무 거대하지 않은가. 괴물이었다. 히어로 수장으로서의 에스터는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스스로를 짐승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형용할 수도 없는 무언가에 가까웠지. 그리고 에스터는 마침내 입을 열 준비를 한다.
"...블랙."
ㅡ에스터를 오래 지켜봐온 당신이 알다시피, 그녀는 올곧은 성격이다. 정의를 추구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성인이 되자마자 죄인인 자신의 친부모를 신고했고, 히어로로서 동경하는 사람, 자신의 구원자를 사형으로 몰고 갈 증거를 모두의 앞에서 제출했다. 죄인이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읊조리고 울면서도, 에스터는 상대의 객관적인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형수는 형장에 서고, 즉살당하지 못한 채 군데군데 사지가 찢겨져가며 죽었다. 총살이라고 함은 최소한의 예우를 위한 것이거늘, 사수는 그 죄에 분노했던 것일까.
그 때 에스터가 느낀 것은, 소중한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
그것이 에스터가 더 이상 불살주의로서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부터 씁쓸함이 감돈다. 어쩌면 당신은 '좋은 변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며 또 다시 생각을 헛짚는다. 정말로, 전투에 있어서는 그렇게 민감한데 감정에 있어서는 둔감한 구석 투성이구나. 언제나 자신의 약한 부분하고 마주하게 된다. 쓴 기억들이 가슴을 찌르는 것을 모른 체 하며 말한다.
"미안하다."
또 깨달은 것은, 고백의 답은 매정하고 단호한 편이 낫다는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언젠가의 예견되어있었던 다정한 거절속에서 자신은 자꾸만 어떠한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던 걸지도 모른다. 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사고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문다. 다시금 떠오르는 죄의식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감정은 죄책감, 자책의 연속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였나.
"너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는 것은 축복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네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만약에 그가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면, 그것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블랙은 한 번 사랑을 잃었고, 그 사랑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복수에 몸을 던졌으니까. 블랙에게 있어, 라디언트가 아닌 다른 사랑이 생긴다면ㅡ그것은 정말로 고맙고, 기쁜 일이다. 당신에게 '다음'이 생긴다는 것이. 라디언트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고 다정하고 눈부신 빛과 같은 그녀를 트라우마라는 존재로 남겨두지 않게 되는 것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라이티는 당신의 다음을 축복하며 편안히 눈감겠지.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을 바라왔던 에스터로서는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와 사랑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네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야. "
미련을 잘라내기 위해 벤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 밑까지 내려온 채. 커튼과 함께 에스터의 머리칼이 흔들거린다. 한 손으로는 날아가지 않게 서류더미를 누른다. 에스터의 뒤에 있는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은 그녀의 뒤를 비추는 조명이 되어줘 결과적으로는 얼굴에 그늘이 져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연출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았을텐데.
"...그저 너에게 가진 애정이 연모의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뼛속깊은 동료애. 그것에 가까웠다. 친우로서의 감정.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은 에스터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분명 당신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고 동료이다. 어린 그녀의 영웅이었던 존재고 삶의 전환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애착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에스터가 실감한 것과 비교하면 성질이 달랐을 뿐이다.
"너와 언제까지고 좋은 동료로 있고 싶어. 싫다면 도망쳐도 좋아. 나를 원망하더라도 미움받는 것엔 익숙하다. 단지 네가 나의 행복을 빌어줬듯이 나도 너의 행복을 바란다."
당신의 앞길에 더 이상 가로막는 것 따위는 없고 평화와 행복, 안식이 있기를. 그것이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으나ㅡ적어도, 자신의 거절이 당신의 불행의 초석이 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스스로는 사랑받음직한 구석이라곤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자신의 어디에서 라이티에게 느낀 감정을 다시 되살려낸걸까.
"...그리고, 그 무거운 고백을 나에게 전해줘서 고맙다."
이것으로 에스터에게도 사랑의 정의는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게 될까.
ㅡ
(12스레)
"역시인가."
그녀다운 대답과 그녀스러운 거절이었다. 미련한 여자 같으니. 좀 더 매정해도 되련만, 거절당하는 입장을 얼마나 배려하려는 것인지. 그것이 매력이지만.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매력을 가진것은 이리도 피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웃어라. 너는 그게 가장 어울리니까."
넌 언제나 무표정에 진지한 얼굴이었다. 세상의 모든것을 짊어지려하고 불살이라는 명목하에, 너는 네 몸을 제물삼아 고행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왜 그런 위태로운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혹사시키는지 의문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용서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그렇기에, 나는 너의 옆에 있고 싶던것도 사실이다. 너는 위태로웠으니까. 네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질테니까.
"그러니 얼굴 펴라. 이후에도 우리는 예전처럼 동료일테고, 친우일테니. 네가 하지못하는 더러운 일은 내가 처리할테고 내가 하지못하는 구원의 손길은 네가 뻗어줄테니까."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고, 최대의 양보였다. 그러니 이정도는 괜찮겠지.
그녀에게 다가간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이 발자국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고 당혹스러운 그녀의 표정은... 역시 욕망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래. 이건 네가 나쁜거야.
참지못하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올렸다. 매끈한 장갑을 지나 느껴지는 약간 투박한 손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표정은, 꽤 의외지만.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역시, 포기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드높은 하늘같은 그녀를 어찌 포기하라는것일까.
"하지만, 역시 나는 허락을 구하는 것보단 빼앗는 편이 어울리는 놈이었지. 언제나 그래왔듯, 너를 빼앗기지 않겠다. 이건 선전포고다."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은은한 미소? 아니면 눈웃음? 어느쪽이던지 좋다. 그녀에게먀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면, 그걸로 좋다.
"이번생에는, 네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볼까. 시간은 많고 난 네 옆에 있을테니."
기대해. 에스터.
ㅡ
당신의 다정한 말이 미소를 요구하는 것과, 친우로서의 선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문득 잡아올려진 손을 바라본다. 입을 맞추는 당신을 보고는 꽤나 놀란 눈을 하다가. 결국에는 웃어버린다.
"...푸하하!"
확실히 그 답다고 생각했다. 빼앗겠다고 선전포고하다니. 이건 도발인가? 가볍게 눈웃음과 함께 미소짓는다. 당신이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겠지. 결코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 쪽이 진심으로 나온다면, 이 쪽도 진심이다.
"히어로의 수장을 상대로 도발하는건가? 역시 너 답군. 안심했다. "
에스터는 자신이 일컬을 수 있는 사랑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은 조금 서글플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다. 결코 그것은 쉽게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감정은 아니겠지. 만약 그것이 다시금 자신을 휘감는다면, 자신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그 강렬한 감정이 다시 덮쳐온다면.
이렇게 되니, 이것은 공포에 가까웠다. 에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자신을 잠식하는 병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자신을 채찍질하고, 마음을 닫고, 그러한 고행길로 자신을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내 곁에 있어준다니, 기쁘지만ㅡ이 쪽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 무모한 승부를 걸어온 만큼 각오해뒀으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그가 선포하는 사랑의 다짐에는 웃음지을 수밖에 없었다. 용기가 가상하군. 접어올린 눈이 당신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웃는다. 2년이라는 세월동안 쌓인 연륜을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면 합격이다. 옛날이었다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거나 혹은 정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녀의 변화를 보고 싶었다면 훌륭한 시도였다고 자부한다.
"포기해도 좋다. 비웃지 않을 거라고?"
그런 여유로운 소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노련함이 생긴 것이다. 아. 이건ㅡ그 녀석에게 배운 버릇일지도 모르겠군. 애증어린 검은고양이를 떠올린다. 언제나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을 다 믿을수가 없는데, 막상 도움을 주려고 작정하면 의지가 되는 상대였던 것이다.
"어찌됐건, 지금까지처럼 '친우'로서 잘 부탁해. 블랙. "
다음에 이런 장난을 쳤다가는 총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농담인지 모를 말도 같이.
ㅡ
"뭐, 너에게 죽는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겠지. 나는 히어로와 빌런 둘 다니까."
결국 고백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납득할만 했다. 서로에게 좋은 결과였기에 그려려니 하고 마음먹었다. 물론... 조금 아프지만.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장갑은 잘 쓰도록하지."
회색 장갑이 까딱거린다. 잘 맞는 느낌이 감도는것이 꽤 좋은것이라 자부한다. 애초에 에스터가 싸구려를 줄리 없었기에 가능한 확신이었지만.
"친우로써, 맹세하지. 죽어도 네 손에 죽겠다고."
반은 농담이었지만, 그래도 좋다. 가능성은 남아있다는 것이니까.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다음에, 만나도록하지."
ㅡ
- 에스터 - 유현
- (12스레)
유현은 어젯밤의 산책을 잊고 싶은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신이 조사한 서류를 바라본다.
에스터와 녹턴이란 자의 연관성, 그리고 에스터가 녹턴이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사실일지 고뇌하고 있었다.
불살을 추구하는 에스터가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료에서는 분명 녹턴의 죽음에 에스터과 연관이 되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확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는 오묘한 상황에서 , 유현은 에스터를 믿고 싶다는 생각에 눈을 감는다.
" ......... 하아, 대체.... "
만약 그 에스터 씨가 사람을 죽였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자신은 실망하겠지, 그동안 불살주의를 주장하던 분이 이미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다면.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여태껏 걸어온 히어로로써의 길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애초에 에스터는 불살이 아니였던 거니까, 에스터의 뒤를 쫒아온 유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부정되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는 서류를 급히 덮어둔다.
" 애초에 그 남자의 주장이니까... 괜히 혹해서 이렇게 불안한 거일수도 있어... "
유현은 애써 자신을 달래며 덮어둔 서류를 힐끗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ㅡ
"들어가도 되겠나. 유현."
이번에는 에스터 쪽에서 당신에게 노크를 한 뒤 들어온다. 당신의 소식을 뒤늦게 듣고 병문안을 온 것이다. 한아름 들린 꽤나 커다란 과일바구니가 눈에 띈다.
"...일이 밀려서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사과한다."
에스터의 과로라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그녀는 당신의 옆의 의자에 앉는다. 당신이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다. 팔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접수한 모양이다. 거대하고 호화로운 과일바구니가 당신의 옆에 놓인다. 에스터는 저게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팔이라면, 얼마를 들이더라도 낫게 하겠다. 최악의 경우에 의수를 달게 되더라도 최상급의 것으로 하도록 하지."
물론 이즈모에서 그런 것을 해줄리는 없고, 에스터의 사비로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즈모에다가도 몇 번 부탁해봤으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서류업무쪽으로 전향시키는 것은 어떻냐는 태도에 화를 참느라 애썼지.
ㅡ
" 에스터 씨...?! "
갑작스런 방문에 유현은 당황해서 어버버한 표정으로 에스터를 맞이한다. 한아름 가지고 온 과일에도 시선이 갔지만 에스터가 직접 찾아왓다는 점과 방금 전까지 에스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놀라움이 컸다.
" 아.. 아닙니다..! 바쁘신 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보고는 제가 가서 드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와중에 와주신 것 만으로도 감사한데요! "
유현은 오른 팔을 휙휙 저으며 급히 에스터의 말을 부정합니다.
그녀가 직접 와줬는데 무엇을 사과한다는 건지, 그저 유현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 애초에 제가 부족해서 다친건데요... 분명 이즈모에선... 해줄리가....설마, 그런 거라면 받을 수 없어요... "
유현은 이즈모의 대우를 알기에 자신 같은 히어로에게 그만큼 해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분명 에스터가 사적으로 해주려는 것임을 깨달으며 급히 고개를 젓습니다.
우상에게 그런 것까지 부담하게 할 수는 없었다. 팔이야 빚을 내던지 해서 자신이 고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 ... 실망을 끼쳐버렷어요... "
좌절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물론 에스터가 누군가를 죽였냐, 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며칠 전에 잘 해보겠다고 말을 해놓고 이렇게 팔을 못 쓰게 되버리다니.
누가 봐도 실망할 것이라고 유현은 생각했다.
ㅡ
"...빌런과 싸우다 이렇게나 다친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면, 이즈모가 계속 썩어빠져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이즈모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즈모에서 해주지 않더라도 에스터의 사비로 해주겠지만, 에스터는 당신의 예를 들며 복지를 계속 요구할 생각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자책하지 말아라."
그리고 에스터는 유현을 토닥여준다. 너는 잘하고 있어. 그런 말하고 함께.
"고작 스무살이야. 히어로로서의 경력은 어떨지 몰라도 사회인으로서는 완전히 어린 나이 아닌가. 그 때의 나는 너랑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실수투성이였고, 무력했었다. 자신감을 가져."
에스터는 스무살 무렵의 자신을 떠올렸다. 부모의 연구소에서 은밀하게 생체실험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심이 극에 달했을 때, 마침내 신고할 생각을 했던 것. 에스터는 미리 연구소를 경찰에 신고한 뒤 간부진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실험실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있었고, 그 때의 광경은 에스터에게 오랜 기간 트라우마로 남았다. 부패한 시체들이 전부 어린 아이의 것들임을 눈치채 울부짖었었다.
고아라는 이유로 조금도 보호받지 못하고 '숭고한 희생'이라는 이름 하에 희생당해갔다. 그것을 너무 늦게 눈치채버렸다. 에스터가 불살을 추구했던 것도 그 시체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큰 이유였던 것이다.
ㅡ
(13스레)
" 이미지 ... 문제 인가요... "
왠지 에스터의 말에 조금의 오해가 생긴 듯 유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하다 입을 다문다.
이즈모의 이미지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왠지 적안의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진 듯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 다음부터 자신을 위로해주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옅은 미소만을 지어보인다.
왠지 무슨 말을 들어도, 이즈모를 위해 챙겨주는 것만 같아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 아 ..... 그렇겠죠.. 조금 더 자신을 가져도 되는 거겠죠 "
그런데 이미지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하면서, 어째서 저런 말 까지 하기 시작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유현의 마음을 채워간다.
왠지 에스터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뒤늦게 오는 사춘기 소년처럼 자신을 달래서 그동안 이용해왔던 것처럼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젠 아까 덮어둔 자료까지 생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다.
" .... 에스터씨,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동안 에스터씨의 불살주의에 열정적으로 따라왔던 후배로써의 질문인데...."
유현은 천천히 입을 닫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간다.
" ... 에스터씨가 녹턴 드레니스를 죽이셨나요? "
ㅡ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야. 이미지관리라면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아주 열심히 해주고 있지.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다."
에스터는 조금 찡그린다. 당신의 말이 조금 날이 선게 느껴졌던 걸까. 하지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가라앉히고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지금의 너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히어로들도 계속 이런 일을 겪겠지. 이즈모를 위해 봉사하고 평화를 위해 힘써봤자 다치는 순간 버리는 패로 쓰이는, 그런 상황을 나는 더 볼 수 없어. 이즈모의 부패 청산을 위해..."
그렇게 말하던 도중, 당신의 말이 우뚝 에스터에게 꽂힌다.
'녹턴 드네리스.'
그 이름이 언급된다. 에스터의 동공이 커진다. 동요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자신에게 악의를 가진 존재가 아닌, 믿어왔던 후배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는 거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거지?
"...그녀는 사형수다."
이내 어떤 대답이 올바른 것일지를 고민하다가 그렇게 입을 연다. 그녀의 사형을 위한 증거들에 자신이 크게 공헌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이 죽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대답은 오해만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한 판단으로 이즈모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지. 사형집행인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날 이즈모에 가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에스터의 표정은 아까보다 조금 그늘져있었다. 아마 당신의 말이 좋지 못한 곳을 건드린 모양이지.
ㅡ
" .... 아아, 그런가요 "
유현은 애스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전처럼 완전히 에스터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다 이어진 자신의 말에 에스터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물끄러미 에스터를 보며 입을 엽니다.
" 누군가 - 제게 귀뜸을 해주더라구요. 사실 에스터 씨는 불살... 이 아니라구요 "
유현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합니다. 마치 제발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달라는 듯, 제가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게 말해달라는 듯 다시 고개를 들고 묻습니다.
" 그냥, 에스터씨가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동경하시는 분도 결국 불살이 아니엿다면 전 - "
모든게 흔들려 버려요 - 라고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뭅니다. 그저 아니길 바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에스터를 바라봅니다.
" 에스터씨에게 민감한 내용이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당신에게 물어보는게 제일 정확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유현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중얼거리듯 답합니다.
ㅡ
"......"
에스터는 그런 유현을 보며 말없이 앉아있다가,이내 가져온 과일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낸다. 능숙한 칼놀림이 사과껍질을 끊기지도 않고 깔끔하게 벗겨낸다. 잘 잘라진 사과조각들이 접시에 예쁘게 놓인다.
"...죽이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하지 못했지."
착잡한듯한 기색을 애써 눌러담으며 말한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자신이 불살주의를 포기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을 죽일 각오를 하게 되었다고.
에스터는 위태로워보이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동경하는 사람의 흠을 믿고 싶지 않아 두려워하는 것이 어느 때의 자신을 꼭 닮아있어서, 문득 속이 아파오는 것이다. 언젠가의 그녀와 자신을 닮은 이런 모습을 이런 상황에ㅡ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물어온다는ㅡ마주하게 되다니.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 뿐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저의 진술이 녹턴님에게 불리해지기라도 할까 걱정되십니까? 녹턴님께서 느끼신 감정이나, 괴로움 같은 것은, 어떠한 증거도 뭣도 아닌 그 자체의 사실 아닙니까. 저는 애초에 논리를 통해 추리해내고... 증거를 따지고... 그런 데에는 소질도 없습니다. 일단 이 사건의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저는 입을 다물고 지켜볼 뿐입니다.
-설령 녹턴님에게 불리해지는 사실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녹턴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신이 있다면 얄궃기도 하지. 시련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나, 누군가가 짠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악취미적이었다.
-전 이미 닥터 구제프의 신원을 보증했습니다. 만약에... 사실이라고 한다면.
-저도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기억들이 자꾸만 지금의 상황과 겹쳐지니, 이야기라고 한다면 정말이지 잔인한 내용이 아닌가.
"지금까지 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인 일이 없다. 이즈모에서 즉살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꿋꿋이 징계를 받으며 버텼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제가 녹턴님의 곁에 있어선 안 되는 겁니까?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구제프를 믿는 당신이 유죄라면ㅡ당신을 믿는 저도 유죄이고... 끝없이 죄의 연속이로군요. 사람을 믿는 사람은, 전부 죄인입니다.
자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신을 대신해서 다른 동료들이 손을 더럽혔다. 혼자서 깨끗한 척을 하고, 숭고한 의지의 결실인 양 굴었다. 그러나 실상 그녀가 불살을 추구했던 이유는 트라우마의 탓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게 무서워서. 그리고 그런 무른 대처의 끝에 보게 된 것은, 그때까지의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할 정도로 참혹한 광경. 이즈모의 수많은 사람들이, 히어로들이, 아는 얼굴들이 피투성이로 널부러져있었다. 그 날의 경보음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선했다. 환청을 듣던 시기보다는 나아졌지만, 지금도 그녀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소리였다.
-그럼 머리말님은 제가 빌런으로 지목되었을때 제 신분을 보증하실 겁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에스터는 입을 뗀다. 그 때의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나아갈 수밖에 없다.
"유현."
마음이 저릿하다. 동경하던 사람을 뼛속깊이 부정하며 나아간다. 더 이상 온전히 자신의 길이 되어줄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이미 익숙해진 위치로 돌아간 것 뿐이다.
"만약에 내가 모든 것을 너에게 이야기해준다면, 들을 자신이 있겠나."
그녀와ㅡ자신에 대해서. 에스터는 꺼내기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본다. 가라앉아있던 기억은 이미 물위로 올라왔고, 그것을 다시 가라앉히고 고이게 하느냐 꺼내놓느냐가 남아있을 뿐이다. 모든 이야기를 해준다면, 당신은 나를 경멸할지도 모르지. 동경의 대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너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혼란시킬지도 모른다. 나 같은 히어로가 되고싶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입으로 말하고 싶군. 다른 사람에 의해 최악의 형태로 헤집어지느니."
-...녹턴님은 저의 얘기를 다정하게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다니, 조금 서럽습니다.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던 동경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당신에게만은 그런 이야기를 반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환상을 일찍 깨트리고, 당신이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부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그것만은 약속한다."
당신이 수락한다면, 에스터는 누구에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말한 적 없던 이야기들을 전부 털어놓게 될 것이다.
ㅡ
능숙한 손놀림으로 사과껍질을 벗겨내며 한동안 말이 없는 에스터를 유현 또한 묵묵히 기다린다. 그녀의 손길에 예쁘게 껍질이 벗겨내어진 사과가 하나하나 그릇을 채워갈 때마다 두 사람의 침묵은 길어져간다. 그리고 사과가 그릇에 모두 채워질 때쯤 천천히 에스터의 목소리가 고요했던 방안에 퍼져나간다.
“"...죽이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하지 못했지.”
유현은 에스터의 목소리에 놀란 듯 눈동자를 크게 해서 올려다본다. 착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터를 보니 자신이 어떠한 질문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분명 이 사람의 마음 속 깊은 부분을 건드린 것이구나 – 라는 생각에 유현 또한 마음이 저릿해진다. 동경해왔던 사람을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마치 익숙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같은 에스터의 눈빛을 보며 그저 유현은 입을 열지 못한 체로 조용히 에스터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인 일이 없다. 이즈모에서 즉살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꿋꿋이 징계를 받으며 버텼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동경했던 사람을 그저 자료와 믿을 수 없는 빌런의 말을 듣고 의심해버렸던 유현은 에스터의 말에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자신이 걱정되어 찾아온 에스터에게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에스터가 자신을 이즈모의 이미지 탓에 도우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바론의 말과 자료가 비슷해서 걱정을 한 것인지 어느샌가 그것마저도 모르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자책하던 유현의 귓가에 나지막한 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물기어린 눈으로 에스터를 바라본다.
만약에 에스터가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준다면 들을 자신이 있겠냐고, 분명 실망시킬수도,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에스터의 말에 물기 어린 눈으로 에스터를 바라보던 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에스터가 저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데 자신이 그 것에서 도망쳐서는 더 이상 에스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기에 자신은 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기에.
“.... 예, 듣겠습니다... 에스터씨. ”
ㅡ
(14스레)
Nocturne.
자기자신을 책망하는 그의 모습에 슬픈 눈을 한 에스터는, 상처부위를 피해 가볍게 등을 토닥여준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타당한 의심이었다."라며. 눈물을 닦아주기에는 자신의 손은 누군가의 것만큼 곱지 못했기에 이것이 최선이었다. 아니. 그 손은 고왔었던가. 어쩌면 자신이 저릿한 기억속에서 또 어딘가 착각을 해버렸던 것은 아닌가. 이젠 모르겠다. 떠올린다고 해도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지금은 자책에 빠져있는 당신을 끌어올려줄 때. 그리고는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겠지. 당신이 그것을 선택하였으니까.
"그렇다면, 어디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
끊어지지 않은 사과껍질은 뱅글뱅글 도는 모양으로 접시에 놓여있다. 에스터는 깊숙히 뿌리내린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새 수없이 얽힌 가지들을 하늘에 뻗고 있음을 깨닫는다. 잘 여문 기억 하나를 따낸다. 생명의 결실인 그것에 입을 맞춘 뒤 당신에게 건넨다. 나무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푸르른 대지에 홀로 서있었다.
"녹턴 드네리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즈모에게 있어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도 인정하였던 대역죄인이자 사형수이지. 하지만 그 동시에 나에게 있어서는 은인이었고, 동경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장황한 말로 시작을 끊어낼 가치가 있을 정도로 에스터에게 있어 각별한 사람이었다ㅡ녹턴 드네리스는. 동경했던 사람이자, 구원해준 사람이자ㅡ성인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사형이 결정될 무렵에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정의를 거듭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이자, 한편으로는 에스터를 다잡아줬다고도 할 수 있는 복잡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모든 감정들에 대해 에스터는ㅡ꺼내는 것이 두려운 아득한 마음들을, '동경'이라는 말에 가두어두곤 하였다.
"고등학생이 된 이래로, 부모가 일하던 연구소에서는 조금씩 소문이 들려왔다. 간부진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진행되는 실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험의 정체를 일반연구원들은 알지 못했고, 간부진의 가족이라곤 해도 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였지."
애초에 부모가 나를 가족으로서 여기기라도 했다면. 이라는 말은 지금의 이야기에 쓸모없는 사담이니 관둔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뿐인 것이다.
"계속 자라난 의심 끝에 내가 연구소를 신고한 것이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그녀는 경찰이었고, 나는 성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풋내기였다. 어린 애의 허황된 의심이라며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경찰은 그런 나의 신고를 받아들여주었지."
긴긴 인연이었다. 맨 처음에도 맨 마지막에도 상처만 남은 기억속의 유일한 구원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당신이 구원인지 상처였는지조차 구분되지 않게 되었구나. 자신의 미련함탓에. 에스터는 포크를 사과에 찍는다. 꽂힌 조각에서 과즙이 가볍게 흘러내린다.
"그래서 무모하게 쳐들어간 연구소에는,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있었다. "
이 이야기를 되살려냈던 그녀와의 대화에서는 자신이 울어버렸었다. 지금은 유현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은 그것을 달래주고 있구나. 신이 존재한다면 집착적인 농간이다. 에스터는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누군가가 자신과 타인들을 체스말처럼 늘어놓고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도 판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지도.
달콤한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상처에 울어버리고 만- 처량할 정도로 연약했던 그 때의 자신을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 따위는. ...블랙의 말을 떠올려본다. 조금이라면, 주변에 의지해도 괜찮을까. 에스터는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대정전 이후로 그 곳에서 계속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는 것. 살아난 아이들에게도 그 3년간의 기억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
에스터는 생각한다.ㅡ그리고, 그 아이들중에서는... ...에스터는 남색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를 떠올린다.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의, 자신의 소중한 가족.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겠지.
"그 일이 내가 불살을 택하게 된 이유이자, 나의 오랜 트라우마이다. 실상, 동경받을 만한 이유는 아니었지.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시체를 보는 것이 무서웠다. 사람이 죽는 것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구하지 못했다. 무력하고 약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괴로워서 계속 울음을 토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물기를 토해내고 토해낸 끝에는 마침내 기력이 소진되어 쓰러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상황은 종료되어있었고, 누군가가 울다 지친 자신에게 담요를 덮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은 딱딱한 말투임에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자신을 달래려 애쓰던 당신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속에서 유일하게 끄집어낼 수 있는 구원이었다. 당신은. ...녹턴 드네리스라고 하는 사람은, 에스터에게 그런 의미였다.
"그 날의 아픈 기억속에서 자신을 달래주었던 사람이 그녀였다. ...그랬기때문에, 히어로로서의 재회가 좀 더 특별했었지."
에스터는 눈을 감는다. 그 날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었던, 바보같이 여유로웠던 날들을ㅡ
-강한 히어로를 동경했지만, 역시,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녹턴님이나, 다른 강인하고 멋진 히어로들에 비하면...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던 부끄럼 많았던 시기. 동경의 감정과, 다른 감정들로 인해 말 하나하나가 고비일 정도로.
-머리말님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계실 뿐.
-...만약에, 녹턴님에게도 이렇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 생긴다면ㅡ오늘의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녹턴님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마지막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자신은 끝까지 당신에게 민폐를 끼칠 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대답까지도 들었는데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고통에서 허우적대는것을 구해준 사람이자,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지. 나의 인생에서는 여러가지 형태의 구원이 있었으나, 자신을 향해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그녀에 의한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ㅡ에스터는 자신을 히어로이자 빌런으로 칭하는 영웅과, 자신에게 구원받는 동시에 구원이었던 존재를 떠올려본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동안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었던가. 생각해본다. 오늘은 돌아가는 길에 에릭을 위한 선물이라도 사가도록 할까.
"계속 들을텐가."
과도는 가지런히 접시 곁에 놓여있었다. 사과조각들은 한 개도 입에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ㅡ
유현은 자신이 자기자신을 책망하자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곤 등을 토닥여주는 에스터의 위로에 애써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내려 한다. 타당한 의심이엿다며 위로하는 에스터에게 계속 이런 모습만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숨겨왓던 이야기를 해준다고 햇고, 그걸 듣고 판단을 하라고 했기에 자신은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의무가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유현은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녹턴 드네리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즈모에게 있어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도 인정하였던 대역죄인이자 사형수이지. 하지만 그 동시에 나에게 있어서는 은인이었고, 동경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녹턴 드네리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에스터의 눈은 마치 자신이 에스터를 바라보는 눈빛 그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감정이 엿보였다.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서 녹턴이란 자는 자신에겐 에스터라는 사람이겠지, 라고 유현은 판단하며 고갤 조용히 끄덕인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 연구소의 이야기와 신고 후 녹턴과 첫만남, 그 후 히어로로서의 녹턴과의 재회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앗다.
"그녀는 내가 고통에서 허우적대는것을 구해준 사람이자, 오랜 동경의 대상이었지. 나의 인생에서는 여러가지 형태의 구원이 있었으나, 자신을 향해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그녀에 의한 것이었다."
아아, 에스터씨에게 녹턴이란 사람은 유현에게 있어 에스터였던 것과 다를 바 없던 것이다. 유현은 에스터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건지, 다시 한번 자각한 듯 에스터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여버린다.
얼마나 무지하고 멍청한 질문을 던져버린 것인가. 지금 당장 에스터가 자신을 탓했어도 할 말이 없지만 에스터는 그럴 기미 조차 보이지 않아 유현은 가슴이 더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 .... 예, 듣겠습니다. 에스터 씨..."
유현은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체 그녀의 물음에 조용히 답한다.
ㅡ
ㅡ
에스터는 슬프게 미소짓는다. 정말로, 과거의 자신같지 않은가. ...타인을 구원하는 것에서부터 자기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던가. 에스터는 유현을 달래주고 등을 쓸어주는 과정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치유받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짊어지고 가야만 했던 과거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낸 것이다. 그런 자신의 구원이 유현 당신에게도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섬세한 기분을 언어로 자아내기에는 여전히 서투른 그녀였다. 역시, 성장한다는 것은 어렵구나.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라면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들일테지. 이즈모 소속의 정신과의 닥터 구제프에 대한 의혹."
빌런즉살명령과 대응하여 빌런갱생계획을 진행하기도 한 온건파에게 있어서는 큰 의지가 되었던 인물. 같은 의료계통의 사람으로서 에릭 또한 동경했었다고 했지. 에스터는 빌런 '클라운'에서 히어로 '코스츔'으로서 갱생되는 데 성공한 한 인물을 떠올려본다. 푸른 머리카락이 현재는 눈부신 은빛으로 자라난 소년. ...그러고보니, 그가 올해로 열아홉살이 되었구나. 어리다는 느낌이 잘 느껴지지 않는 그였지만,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 파크. 최근에도 심한 마음고생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네... ...이런 걱정을 한 바로 그 날 에스터는 폭탄능력으로 병원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파크와 마주하게 된다.
"구제프는 녹턴이 이즈모에 사비로 고용한 상담의이자 그녀의 남동생이다. 이즈모의 복지를 위한 일이었지. 빌런갱생계획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르겠군."
빌런갱생계획이란 당시 즉결처분이 결정되어있던 클라운을 대상으로 시행된 일종의 임상실험과도 같은 프로젝트이다. 꾸준한 상담과 히어로들 사이에서의 활동을 통해 빌런이었던 그를 히어로로서 갱생시킨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실상 닥터 구제프가 빌런의 수장임이 반쯤 확정되고, 프로젝트의 최고 수혜자였던 구 클라운인 히어로 코스츔 역시 그 의견을 전폭지지하는 주장을 해주었다. 빌런갱생계획이란 이름 뿐인 허구이고 구제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 거기다가 에스터 본인이 직접 다른 시행자와 문답을 통해 그 신빙성에 대해서 또 다시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 구제프가 빌런의 1대 수장의 정체라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자연스레 그녀조차 의심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제프의 가족으로서 그녀는 직접 그의 신원을 보증하기도 했으니까."
...이 무렵을 얘기하려니 다시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와의 대화를 마친 문 앞에서, 조금도 당신께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홀로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던 일이 기억난다. 자신은 당신에게 첫 만남때도 다시 만난 이후에도 계속 정신적인 구원을 얻어왔는데, 막상 당신이 괴로워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구제프의 죄가 녹턴의 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저 당신의 죄는 구제프를 믿었다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는 녹턴 드네리스의 '죄'라고 말할 것은 구제프에 관한 일 뿐이었었지. 가족을 믿고, 이즈모에 그를 들인 것. 하지만 이후 빌런의 아지트에 습격하는 작전이 있었을때, 나는 어떤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에스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한다. 마치 역사서의 한 부분을 읽는 것 같았다. 이 사건은 후대에 이런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부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ㅡ같은 태도로 감정을 담지 않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녹턴 드네리스의 목소리로 되어있던 테이프가, 빌런의 아지트에서 나왔다."
ㅡ
2015.8.30
'다 죽여버리겠어'
'너무 극단적이지 않아?'
'그럼, 죽을까.'
'그건 그 미친놈때문이었잖아. 안그래? 왜 죽을 생각을 해?'
'...아니. 그건 나 때문이었어.'
2015.12.20
'채용 조건은 없습니다.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지? 필요 없습니다. 혜택? 필요없습니다. 그네들의 영웅놀이를 이즈모에서 공식적으로 도와주고 임금까지 지불해주는데 왜 그 이상을 해 주어야합니까? 그들은 언론을 위한 얼굴마담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아, 활동 중 일어나는 피해 말입니까? 그건 그 개인의 책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저희는 그때마다 버리기 좋은 패들을 버리고, 다시 카드를 뽑으면 되는 겁니다.'
ㅡ
''"...저희는 그때마다 버리기 좋은 패들을 버리고, 다시 카드를 뽑으면 되는 겁니다."
달그락.
테이프가 멈춘다. 에스터는 다시 테이프를 꺼낸 뒤, 도로 라디오를 세팅한다. 그리고 또 다시 듣는다.
"채용 조건은 없습니다.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어떻게든 다르게 생각해보려 애써봤자,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와버린다. 갈 곳 없는 마음만이 줄곧 이 상태로 방황하고 있었다. ...에스터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이 잊을 수 있을리 없었다. 당신의 목소리를.''
ㅡ
에스터는, 사과 한 조각을 당신에게 권한다. 기껏 깎아놓은 사과를 다 버릴까봐 걱정됐던 모양이지. 당신이 사과를 먹는다면ㅡ아니면 거절하거나, 침묵으로 답해 조금 시간이 지난다면ㅡ에스터는 다시금 이 빛바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지.
"...그것은 히어로가 정식으로 생기기도 전의 기록이었다. 지금껏 그녀가 주장해온 히어로의 복지나 처우개선과는 전혀 다른 모순적인 내용이었고 말이야. 나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지. "
충격적이라고 말하는 단어에 감정은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은 냉정한 투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쓸데없이 생각을 거듭하는 일도, 감정을 담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사실은 지금조차도 그런 말을 그녀가 말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 이미 그 죄로 녹턴 드네리스는 공개처형당했는데.
몇 번이고 테이프를 다시 돌려들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고통어린 기억속에서 유일한 구원이었던 그 목소리를, 잊어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빌런 아지트에서 수집한 정보인 이상 그것은 이즈모에서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턴 드네리스를 동경하고 의지했던 마음이 자신의 정의하고 충돌해오는 것을 느꼈다. "
당신은 사라져버렸고, 남아있는 것은 당신의 흔적이라곤 믿고싶지 않았던 것 뿐.
"이즈모에서의 의혹과 혼란으로 휴가를 낸 그녀는- ...어디에 간건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렸고 말이야."
...그 때 당신은 대체 어디에 있었었나. 그렇게 당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말들은 전부 버림패의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었습니까. 하지만 결국에, 이즈모의 버리는 패가 되고 만 것은 당신이거늘.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혹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없나?"
ㅡ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유현은 에스터에게서 깊은 고뇌와 슬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경외하는 사람의 행적과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와의 충돌에서 오는 깊은 갈등과 고뇌를 유현은 그 고통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신도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이렇게 에스터가 와서 자신의 과거까지 이야기 해주며 해소를 하고 있었지만 - 에스터는 그저 처형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진 고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분명.... 녹턴 드네리스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네요. 이건 에스터 씨도 알고 계신테니까 - 단지 이야기를 들은 지금 걱정이 되는 건 ....."
유현은 자신의 슬픔을 쓰다듬어주는 에스터를 보며 이야기를 하다 말을 끊고 말을 고른다.
분명 녹턴 드네리스가 버림패였다면, 다른 히어로들 조차 버림패에 불과했다면 - 그렇다면 에스터, 당신은 ?
아마 에스터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너무나도 슬프다고 생각했다 - 유현, 본인도 버림패 였지만 이토록 헌신하는 사람도 이즈모에게는 결국 ..
에스터과 건내는 사과를 말없이 보다가 받아들고 한입에 말없이 밀어넣더니 금새 삼켜버린다.
에스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라도 하면 말이 제대로 나올까 싶어서 유현은 사과를 삼키고 나서 몸을 일으켜서 에스터 앞에 선다.
" ...... 에스터 씨도 버림패가 될지 모른다는 게 걱정이에요. 분명 저 같은 히어로들은 버림패일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 같이 헌신한 사람이 그렇게 버림패로 버려질지 모른다는 게 전 걱정이 된다구요. 왜냐면 - 당신은 제게 있어서 녹턴 드네리스 같은 존재인걸요. "
에스터의 손을 조심스럽게 하나 뿐인 오른손으로 잡아주머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현은 왠지 자신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이어갈 때마다 에스터의 슬픔과 고뇌가 느껴지니까 -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달되어 느껴지니까 눈물이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러니까 이야기를 끝까지 듣겠어요... 듣고 당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게 되서, 당신을 좀 더 이해하고, 따를 겁니다. 다이상 에스터 씨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둘 수 없어요 - 게다가 .... "
당신의 순고한 그 정의가 이즈모 따위의 더러운 수작에 버림패로 사용되는 건 두고 볼 수 없으니까 - 유현은 적안에 강렬한 의지를 품으며 에스터를 바라봅니다.
아, 당신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지켜내겠습니다, 무언가 더러운 짓을 하던, 피가 필요하던 - 아무렇지 않습니다.
ㅡ
에스터는 유현의 말에 쓴 웃음을 띄운다.
아마 자신과 녹턴과의 관계와 자신과 유현의 관계에서 비슷함을 느끼는 것일테지만 유현은 그 웃음을 보며 좀 더 다른 마음을 먹는다.
자신의 우상을 이즈모 '따위'가 버림패로 사용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막을 것이다.
" .... 뻔한 이야기겠죠 "
에스터는 정의를 선택했고, 그에 따라 녹턴은 죽었을 것이다. 이즈모는 그녀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워서 처리했겠지.
무언가 파고들면, 이즈모의 치부가 들어날 것이 분명했을테니 이즈모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처리했어야 할 것이다.
에스터가 말하는 재판장 사건은 어렴풋이 들은 사건이었고, 아마도 에스터의 경우라면 더욱 그 테러로 인해 괴로워 했을 것이다.
에스터는 무뚝뚝하면서도 주위 사람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유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에스터의 이즈모에 대한 빈정거림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현은 별다른 말을 달지 않았다.
" 저도..... 모든 것을 불살주의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제 친구들과 수많은 시민들을 죽인 '세이렌'이라던지 '바론'이라던지 그들은 간단하게 막을 수도 없고, 만약 저희 히어로에서 배신자가 나온다면... 처리해야 할 테니까요 "
평소와는 다른 차갑게 빛나는 적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 부분은.... 제가 조금은 이기적으로 생각한 것일 수도 잇으니...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에스터 씨 "
또다시 사과를 하는 듯한 에스터의 말에 차가워진 눈이 다시 평소처럼 돌아오며 급히 고개를 젓는다.
에스터의 심정을 전해들으며, 이 사람도 분명 그저 조금 더 마음이 강한 사람이구나 - 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이상적인 영웅의 모습을 묻는 에스터에게 천천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에스터의 한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합다.
" 저는 당신이 불살주의를 지키던 버리던 이젠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 저희에게도 손에 피를 묻혀야 할 필요가 있는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당신에게 피를 묻히지 않는 모습을 바라지 않을거에요. 당신에게 불살주의를 고수하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에스터 씨의 자리에서 신념을 지키면서 굳건하게 서있으시면 언제나의 제가 동경하던 에스터니까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뭐, 굳이 무언가를 더 부탁드리자면 짐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은 나눠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마 못 미더우셔서 그런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이즈모'따위'에게 버림패로 이용당하시는 건 제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
차가움과 평소의 따스함이 묻어나는 미소로 에스터에게 유현은 미소를 짓습니다.
전보다도 빛이 나는 듯한 적안이 반짝이는 듯 합니다.
" 그러니까, 에스터 씨 - 지금처럼 모두의 귀감이 되어주세요 "
그렇다면 더러운 일 정도는 제가.... - 라는 말은 마음 속에 담아두는 유현입니다.
ㅡ
"......"
에스터는, 부드러이 미소짓는다. "그래." 그런 짧막한 말을 건넨 채. 하지만, 지금까지는 분명 자신은 무리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여태까지의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의 태도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다는 생각에. 그러나 이제서야 깨달은 것은,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며 애쓰던 것이 역설적이게도 과거에 자신을 줄곧 묶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몸으로 맘고생시키고, 무거운 이야기를 듣게 해버렸군."
에스터는 그리고는, "들어줘서 고맙다."라는 나지막한 말과 함께 일어선다.
"다음에 보게 될 때는, 완쾌해있기를 빌지. 치료의 지원이 필요하다면 다시 연락하도록."
- 유현파크케므누 3인일상 난입
- (14스레)
(에스터)
에스터는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였지만 유현이 들을 것을 선택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유현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이후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자신이 괜한 혼란과 부담을 그에게 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면서도,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았으니 이후 있을 일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심심한 귀갓길, 그가 쾌유한 뒤에 다시금 전할 미안함과 감사의 인삿말이라도 미리 생각해두는 편이...
...익숙한 폭발음이 병원에서 들린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지금까지의 진지한 대화와 생각들을 순간적으로 전부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인상적인 울림이었다. 병원에서 테러라도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봤다가, 이내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능력까지 써가면서 알 수 없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미친 환자와 손님이 병원에서 능력을...!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들리는 것은 늑대 울음소리같은 기괴한 소리. 도무지 평범한 병원에서 나서는 안 되는 음성들이 에스터의 귀에 정통으로 꽂힌다. 그러고보니 신입 히어로의 능력이 그런 것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가만 안 둔다."
에스터는 곧장 병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한다. 도무지 어제오늘로 쉴 날이라곤 없는 것이다.
ㅡ
(케므누)
싫어 싫어..잃기 싫어 내 늑대야 전부 없애버려라.
내 소중한 것을 잃게만 드는 이들을.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세상을..
네 분노로 전부 불태워 버리렴..
"나의 분노는 하늘을 찢으며"
아뮤 감정없는 차가운 목소리
"대지를 삼키고 바다를 불태우리라"
그 말을 하고는 조용히 눈을 뜨고 쳐다봅니다. 보이는 것은 둘.
뭔가 잊어버린 것 같아 뭔가 소중한 것을..잊은 것 같아..
상관없어 상 관없어. 찢어 물어 삼켜. 저것들은 나의 모든 것을 잃게 할 자 들 먹 어 먹어 치워 먹 어치워.
속박
Dice(1,100) value : 53 -유현-
Dice(1,100) value : 93 -파크-
공격 대상
Dice(1,2) value : 1
1.유현 2. 파크
피해 정도
Dice(1,100) value : 22
ㅡ
(유현)
" ...... 아아, 다행이다... "
몸 어디가 다친지 모를정도로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케므누를 받아듭니다.
케므누를 바닥에 천천히 눕혀놓곤 자신도 뒤로 쓰러져 버립니다.
쓰러진 유현을 기점으로 피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합니다.
" 파크... 이 아이를... "
말도 다 이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고 혼절합니다.
( 중상 1 ) - 전투 end
ㅡ
(파크)
거친 늑대의 반격때문에 수갑은 저 멀리로 튕겨져나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젠장 그 대사 뭐냐구! 중2돋네!"
말은 그렇게 해도, 솔직히 말해서 긴박하다. 이 상황에서 제압할만한게.....
파크는 그의 뒷주머니를 뒤진다. 뭔가 도움될만한게 있으려나. 앗, 작은 크기의, 마치 한 손바닥에 들어갈만한 주사기가 손에 잡힌다. 이정도라면.
빠드드드득. 유현의 다친모습을 본다. 이빨이 부서지는듯한 느낌이 든다. 미안해요 유현이형. 나때문에.....
"미안한데.....착한아이는 이만 잘시간이야....!"
늑대를 가까스로 피하여 그녀의 팔에 주사를 꽂았다.
이거로, 된거려나.
ㅡ
(케므누)
움직이지 않아 싫어 싫어..
팔에 뭔가가 꽃힌다 뭐야? 뭐야? 늑대야 늑대야 물어 나를 풀어 어ㅅ..
처음 맞는 마취제가 혈관에 돈다 그 탓으로 소녀는 잠들게 되어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림자 늑대는 발을 내려치려고 하다가..형체를 잃고 소녀의 그림자로 돌아간다. ..이것으로 소녀의 폭주는 끝났다.
ㅡ
(에스터)
"늦었군."
철컥. 익숙한 권총을 들고 병실이었던 것에 들어온 에스터가 정리되어있는ㅡ이라기엔 여전히 많이 난장판인ㅡ상황에 짤막하게 감상을 남긴다. 병원에서 무기를 쓰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예외겠지. 에스터는 정색한 얼굴로 세 사람ㅡ두 사람이 기절했으니, 파크를 쳐다본다.
"파크. 이 광경에 대해 책임질 각오는 되어있겠지."
요약하자면 혼난다는 얘기였다. 나머지 둘은 기절했으니, 현재 에스터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야 할 것은 파크 뿐이겠다. 한 몸에 에스터의 관심을 받아내는 당신에게 박수를.
에스터는 한숨을 쉰다. 상식이라는 게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파크에게 그런 말을 던진다.
"병원에서 폭탄 비슷한 걸 써제끼는건, 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ㅡ
"끝.......난건가.......흐아아아아....ㅈ.....X될뻔 했다....."
파크는 잠시 그대로 엎어져 잘 뻔 했지만, 곧바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눈앞의 쓰러진 케므누, 그대로 피웅덩이 위로 쓰러진 유현이형. 이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려나.
파크는 급히 눈앞의 유현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의료용 붕대로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눈 앞에 들어온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하하......이런. 안녕하세요 에스터누나."
이건 혼나는구나. 아까도 분명히 혼났었는데. 일단 파크는 주위에 달려오는 의사들에게 유현을 맡겨버렸다. 그들이 자신보다 더 잘할것을 알기에.
그것보다는 일단, 눈 앞에있는 거대한 그녀에게 신경써야만 했다.
"아 그건.....뭐.....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그럴듯한 변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파크는 진땀을 뻘뻘 흘리면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하나 글쎄, 그렇게 훌륭한 변명은 아닌것 같다.
대부분이 횡설수설이어서 그다지 좋게 들리지는 않았던 덕도 있긴 하겠지만.
ㅡ
"대체 어떤 복합적인 이유지? 당장 환자인데 몸생각도 안하고 뛰쳐나간 유현... 이 쪽에도 할말은 많다만, 네놈은 그걸 말릴 생각은 커녕 아예 기름을 붓고. 제정신인가?"
신랄한 에스터의 발언이 이어진다. 하아. 이게 어려서 혈기가 넘친다는 건가. 아니. 자신은 저 나이때 비실비실했다. 세 사람 개인의 문제다. 그래도 케므누는 아직 어리고, 능력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서 극한상황을 맞았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나머지 둘은... 입이 몇 개라도 모자라다.
"유현 녀석은 최연장자라는 게 이런 짓거리를... 너도 내년엔 성인... 하아. 정말이지. 그래. 나이도 안 찼는데 술담배를 할거면 부디 이런 부분에서도 성인같은 행동과 태도를 보여주면 안 되겠나? 덕분에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골치가 아프다."
골치가 아프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진심인지 에스터는 이마를 부여잡는다. 히어로 수장으로서 이런저런 고충과 책임들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까지 책임져야 할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어린애들도 아니고.
당장 복도에서 뛰지 말고 공공장소에서 소란피우지 않고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치기 더 쉬우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던가 하는 얘기는 기본적인 사회화 과정에서 당연히 배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조차 배우지 못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이었던 건가. 잠시 동정어린 시선을 건네려다가 히어로로서 2년 이상 일했는데 뒤늦게라도 그런 걸 안 배웠으리라는게 말도 안된다는 판단에 다시 날카로워진다. 뭣보다도 안전에 대한 것이니 긴긴 잔소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두 사람이 깨어나면 예외없이 쏟아부어줄 예정이다.
"...그래서, 다친 데는 없나?"
뒤늦게나마 파크의 몸 상태를 물어본다. 혼나는 건 혼나는 거고,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것이다.
ㅡ
"하하하하ㅏ........진짜 할말이 없군요.......죄송합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그녀의 비판. 흐음, 할말없네 진짜. 사실 그 상황에서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쫓아가기 시작했었지. 왠지 모르게 케므누도 갑자기 저렇게 되어버렸고. 유현이형까지 같이 다쳤네. 나는 뭐한거냐 대체. 계속해서 쏟아지는 에스터의 비판에 파크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입이 열개라도 그녀에게 변명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정말 맞는 말 뿐이었으니깐.
"으으으으.......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솔직히 담배랑 술도 요새는 줄여가고 있고, 콜라를 더 많이 마시고 있는데ㅡ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겠지. 이 상황에서 파크가 할 수 있는일은? 그냥 가만히 있기였다. 애초에 기본 예절조차 지키지 않은 상황이니.
사실 그 능력을 쓴 상황에서부터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만 음.....몰론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 때 능력을 쓰지조차 말았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후회하고 반성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에스터누나에게 짐을 떠안긴건 사실이니깐.
"저는 괜찮지만.....유현이형이 걱정이군요...."
그는 긁힌 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정작 같이 사고쳤던 두명은 엄청 다쳤는데. 으아, 나는 진짜 쓰레기네 완전.
ㅡ
계속 잔소리를 이어가려던 에스터는, 당신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에서 문득 욱씬거림을 느낀다. 얼마 전에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릴 위기를 겪었던 당신의 모습을 지금과 겹쳐본 것일까.
"...그래.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이 쪽은 건강하기라도 하니. 그리고는 또 다시 걱정스러운지 말을 이어나가본다.
"다른 부상자는? 환자나 민간인들중에 다친 사람은 없는가?"
병실만 무너진걸로 끝나면 다행일텐데. 그러고보니 이즈모에서 이런걸 지원해줄리 없으니 사비로 해결해야겠지. 꼭 지원받아야 하는 부분까지 지원이 미흡한게 이즈모거늘. 하아. 에스터는 박봉인 히어로 월급에 문득 원망을 느껴본다.
"...안 그래도 험한 일들이 많은데, 이런 곳에서 다치면 어떡하나. 그렇지 않아?"
결국엔 세 사람에 대한 걱정이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잔소리를 이어가는 것도, 그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그런 말을 덧붙이자면 역으로 더 듣기 싫어지니 그만두겠지만.
"유현에게도, 깨어나는대로 혼날 것 각오하라고 전해둬라. 이즈모의 처분은 혼나는 정도로 안 끝날지도 모르지만, 노력해보겠다. 케므누는 능력 통제를 위해 내가 직접 훈련을 돕겠다고 말해주길."
"그리고. 앞으로는 제발...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주변은 당연한 거고,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에스터의 말은 애절하기까지 하다. 제발.
ㅡ
이 상황에서조차 나를 걱정하다니, 이 누나는 얼마나 착하신걸까. 정말 천성이 히어로이신 분이라니깐. 너무 착해도 탈이야 정말. 파크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김빠지는 한숨소리를 내었다. 이 상황이라면 조금 더 혼내셔도 될텐데.
"그러게요. 에스터누나는 휘말리시지는 않으셨나요?"
파크는 자신을 보며 안도하는 에스터에게, 에스터의 몸을 물어본다. 그 와중에 혹시 파편같은거가 튀어서 맞았을수도 있을까봐 그런건가.
"없는것 같아요. 현재 부상자는 유현이형.....케므누를 포함한다고 치면 이렇게 두명 뿐 이네요. 병실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여서 딱히 뭐....."
생각해보니 병실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으아, 완전 망해버렸는걸. 이거 어떻게 치워야 할지를 고민해본다. 흐음, 뭐......이런건 이즈모에서 지원 안나오려나. 젠장 솔직히 이런거 보험같은거 지원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이즈모는 복지같은거 안하고 뭐하는거야 진짜로. 히어로가 무슨 봉사단체인가. 적어도 기본적인 보험이라던가 정도는 보장해달란 말이다.
".......뭐 저는 다쳐도 상관없지만......후우, 유현이형이 다쳐서 걱정이군요. 안그래도 이미 다치신것 같던데."
마음속으로 이즈모에 대한 짜증을 내고 있자, 에스터의 따뜻한 걱정이 귀에 들린다. 파크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의사들에게 실려간 유현을 생각한다. 아까 팔도 그렇고, 요새 많이 다치셨는데, 괜찮으시려나. 진짜 괜히 형을 쫓아간건가. 그냥 내버려 뒀었어야 하나. 같은 후회들이 머릿속에 몰려온다. 후회해 봤자 바뀌는건 없었지만.
"네. 케므누에 대한 건 에스터누나에게 맡기고......새겨듣겠습니다."
"그리고 뭐......가급적 노력해 볼게요."
애절한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파크는 무신경하게 보일것만 같은 말을 내뱉는다. 분명, 남을 아낄줄은 알아도 자기 자신은 아낄 줄 모르는 거겠지.
ㅡ
"나는 괜찮다. 유현은 ... 걱정되긴 하지만, 반쯤 자업자득이겠지."
유현과 파크사이에 있던 일 같은건 모르는 에스터이니 단순히 병원에서 두 사람이 어린애같이 술래잡기를 했다- 고 생각중일 것이다. ...물론, 이유를 알아도 '고작 그걸로 이런 무모한 걸로 몸을 던진거냐'며 어이없어 하겠지만.
"그래도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군. "
에스터는 보고 내용을 고민하고 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징계감이지만, 케므누의 능력 통제를 책임질 것을 조건삼으면... 폭주하는 능력자의 처리는 이즈모에서도 골치를 겪는 문제고. 괜찮은 거래일지도.
"파크. 너 자신을 돌보도록 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 네 일이고, 너 또한 한 명의 사람이다. "
그렇게 말하다가 본인이 그닥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묵한다. 그리고는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난장판. ...이대로 놔두다간, 유리조각같은 것에 다른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지.
"우선 청소부터 하도록 할까."
ㅡ
"자업자득 이려나요......후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파크 스스로도 유현이 도망쳤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싶지만......그럴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그때 그대로 뒀으면, 이런식으로 병원이 난장판이 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여긴 이름을 보니 유현이형 병실이던데, 케므누가 유현이형이랑 계속 같이 있었다면 폭주할 일도 없었겠지. 유현이형이 다칠 일도 없었겠지. 모든게 다 내 탓인것만 같다. 후회스럽다.
"그렇군요. 민간인이 다쳤다면 진짜 골아팠겠네요......아마 케므누가 보상해주는것은 몰론이고 민사재판까지 갔을지도....."
민간인이 다치면 여러모로 골치아프다. 최근에는 어떤 히어로가 그런것도 모르고 과잉진압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한 모양이지만 말이지. 뭐 어쨌든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제압해서 다행이다. 유현이형도 별로 케므누에 대해 처벌하자고 하진 않을테고. 나는 다친곳도 없으니 이곳만 보상해주면 끝나겠지.
"......글쎄요. 제가 과연 사람이려나....."
파크는 잠깐 정색해버린다. 에스터에게는 들리지 않을크기로 살짝 중얼거리고는, 이내 온화하게 웃으며 알겠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나를 구해야하나.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괴물이라 생각하고 다른사람을 구하는 것을 우선시할까.
머리아픈것은 뒤로 넘기고, 일단 에스터누나 말대로 치울까.
"동감이에요. 일단 이거부터....."
넘어진 병실 침대를 들어올려 일으켜 세운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 에스터 - 케므누
- 환자와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가 없었고, 병실은 에스터의 사비로 처리했다. 이로 인해 파크와 유현은 에스터에게 걱정섞인 폭풍같은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징계만은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즈모와의 면담에는 에스터가 어린 케므누의 보호자 신분으로 함께 참여했고, 케므누도 어찌어찌하여 징계를 피해갔다. 대신에 케므누가 능력을 통제하게 만드는 것은 에스터가 맡기로 하였으며, 앞으로 케므누의 능력 폭주로 일어나는 일은 에스터의 책임이 되었다. 케므누를 데려온 유현이 맡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나, 이번 사건으로 에스터의 유현에 대한 평가가 '믿음직하고 성실한 부하'에서 '사고뭉치2'로 일시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탓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사서 일을 늘리는 워커홀릭이다.
아무튼 훈련을 시작하기 전, 에스터는 공원에서 파는 솜사탕을 케므누에게 선물한다. 고생 많았다는 생각 탓일지. 그냥 어려보여서 그런건지. 혹은 또 폭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달래두려는 걸지도. 현재 공원에는 사람이 적었다. 주변 행사 등을 고려해 일부러 사람이 적을 시간대를 고른 것이다. 얼마 없는 사람들에겐 미리 양해를 구해뒀기에 멀찍이 떨어져있었다. 이것으로 부상 위험은 없을 것이다.
"자. 케므누. 훈련이다."
이명보다는 이름쪽이 익숙한 건지, 에스터는 그런 호칭으로 그녀를 부른다.
"마음껏 능력을 써도 된다. 다치게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네 능력을 지켜보려는 거야. "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맛있는 간식을 하나 더 사주도록 하지. 뭐든 말해라."
ㅡ
나온 곳은 공원.평상시에도 내가 자주 돌아다니던 곳.
..이제는 월급?이란게 나와서 더이상 자판기 밑을 안 뒤져도 된다구!
그리고 이 에스터..? 수장님은 내게 솜사탕을 사줬어! 좋은 사람인것 같아! 내 후견인..?이라는 것도 되줬다고 했어!
"응! 수장님!"
힘내자!라는듯 자기 볼을 약하게 짝짝 칩니다. 솜사탕은 다 먹어치워서 쓰레기통에 정성스레 넣어놨엄
"음 알았어 수장님 써볼게"
'억누를 수 있을 것 같나?'
..시끄러. 해볼거야!
자, 상상하자 나타날 것은 늑대. 사악한 신이여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고 선조들이시여 이 작은 케므누에게 악신을 억누를 힘을 빌려주소서.
그림자가 변한다. 일그러지며 나타나는 것은 늑대. 평상시에는 억누르기만 하다가 직접 쓰는 것은 처음이다. 뭔가를 악누르는듯 살짝 고통스러운 표정인 케므누.
늑대는 주위를 둘러보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 사냥감이 적군.이건 실망인데'
...네가 사냥할 시간은 아니야..!
ㅡ
"그러면 간다."
에스터는 가볍게 휘릭 하고 훈련용 검을 들고 돌진한다. 나무로 된 검은 맞아도 조금 아프긴 해도 다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림자늑대가 있는 곳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막아낼 수 있겠나? 네가 공격을 받지 않도록, 공격 겸 방어를 취하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
에스터는 목검을 휘두른다. 그림자에게는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능력의 '훈련.' 케므누가 적절히 대처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능력을 써도 좋고, 다른 방법을 써도 좋아. 무기가 필요하다면 건네주도록 하지."
ㅡ
"저..수장님 나 아직 억누르는게 고작인데.."
애가 미쳐 날뚜지 않게 억누르고 있습니다. 늑대도 어딘가 움직이려다 멈칫 멈칫 당하는 것을 보니 제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얼마 전에 폭주한 애인지라 발동까지는 가능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게는 할 수 없다.
'자, 나를 풀어라. 어제 병원에서 했던 것처럼 내 고삐를 풀어라!'
..아냐 그런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거야.. 넌 그저 가만히..있어!
겉으로 보기에도 케므누가 힘겹게 억누르는 것이 티가 납니다.
ㅡ
"...이런. 실례했다."
에스터는 툭. 목검을 놓는다. 아직은 통제하는게 고작인건가. 위험한 능력에 어린 나이인데 히어로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너무 과대평가한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당신의 앞에 다가가 총 하나를 건넨다. 탄환 대신 페인트가 들어있는 연습용 총이다.
"그렇다면, 늑대를 억누른 상태로 나를 일반공격하는 것까진 가능하겠나?"
자신의 머리에 한 손으로 빵야. 하듯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는 에스터였다. 본인이 직접 표적이 되겠다는 뜻이겠지.
"가능하다면,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한다. 나에게 총을 맞춘 뒤, 늑대가 폭주하는 것을 억누른다. 억누르는 데 성공하면 다시 사격한다. 이를 반복해가며 속도를 올려보도록 하자."
"훈련의 난이도를 최대한 네게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무리가 된다면 얼마든지 말해줘."
"참고로. 혹시 통제 실패로 이 쪽이 다치더라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싸우기 위해 길러온 몸이다. 금세 회복할 자신이 있으니, 겁먹지 말도록."
요약하자면 샌드백이 되어줄 수 있단 거겠지.
ㅡ
"음..시도해본 적이 없어서..한번 해볼게."
전에 실총을 쏴봤더니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 이것은 가짜 총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여보지만.
"..나는 수장님도 안 다쳤으면 좋겠는데.."
빌런 출신이긴 하지만 마음씨는 상대적으로 상냥한 케므누이다. 소심하고 낯을 가린다는 설정은 어디론가 발할라로 떠난 것 같지만 신경쓰지 말자. 곧 고칠거니까.
그럼 해볼게!라며 케므누는 페인트총을 에스터에게 조준하고 쏜다.
그순간 늑대의 제어가 풀리며 앞발이 에스터에게 쇄도했다.
케므누의 페인트 총 어택!
Dice(1,1) value : 1 -이능에 의한 판정-
분위기를 파악할지 모를 늑대의 앞발 어택!
Dice(1,100) value : 30
ㅡ
페인트총이 에스터를 맞춘다. 페인트니까 별다른 데미지는 없고, 에스터의 옷이 얼룩진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생각해 버릴 옷을 입고 왔으니까. 그리고 그림자 늑대가 에스터에게 달려든다. 에스터는 빠르게 회피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이런 식이면 될 것 같다. 다음에는 그걸로 이 곳을 맞춰보지 않겠나?"
이번에는 가슴팍을 가리킨다. 실상 어디를 맞추느냐는 핑계일 뿐이고, 타겟 집중과 늑대의 억제를 동시에 하게 하는게 목적이었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총을 쏠 줄 알게 되어도 나쁠건 없지.
" 세 번 정도 더 맞춘 뒤 휴식하도록 하자. 그 다음엔 맛있는 걸 사줄게."
에스터는 미소짓는다.
ㅡ
으응..해볼게!"
케므누는 에스터의 가슴팍을 노리고 페인트 총을 쏴본다. 맛잇는 것이라는 말에는 눈이 반짝거린다.
먹을거 조아!인 것일까.
빵야하고 에스터를 향해 날아가는 페인트탄. 그리고 그순간 다시 늑대의 제어가 풀린다.
늑대는 그것을 비웃듯 '헛수고를 하는구나'하고 속삭이지만 먹을 것에 정신 팔린 케므누는 관심이 없었다!
늑대야 분위기 파악 잘하자(소근)
dice(1,100) value : 62
ㅡ
페인트총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늑대의 돌진에 에스터는 방어태세를 취한다. 팔뚝이 조금 긁혔지만, 다행히도 경상인 모양이다. 에스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어보인다.
"좋아. 잘 했어."
이젠 두 번 남았다. 그 동안 에스터가 심한 부상을 입지 않은 채 끝난다면, 훈련은 성공이다. 에스터는 발끝을 가리킨다.
"다음에는 여기. 잘 하고 있어. 소질이 있구나."
또래보다도 어려보이는 케므누인데, 의외로 총을 처음 쏴보는 눈치가 아니라서 문득 에스터는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원래 빌런의 편이었다니까, 그 쪽에서 가르쳐주기라도 한 걸까. 에스터는 다음 공격을 대비한다.
ㅡ
"응, 엘리자베스 언니가 가르쳐줬어"
아무렇지 않게 빌런의 본명을 풀어버리는 케므누, 어쩌겠는가 소녀는 거짓말을 못하는데.
그리고 에스터의 발끝을 향해 노리고 쏜다. 다시 집중이 흔들리며, 늑대가 해방됬다
"수장님 다친 곳은 괜찮아..?"
그리고 걱정을 하는 케므누이다.
잠시 풀린 사이 늑대의 어택
..늑대야..파악 잘하자..(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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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이름까지 말해주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엘리자베스. 헌팅 킬러라고 불리는 빌런의 본명이었나. 이런 어린아이에게 나쁜 짓은 안 했을지가 조금 걱정되는데. 에스터는 그 사이, 자신의 다리를 물어오는 늑대를 눈치챈다.
"......!"
그림자를 짓밟으려고 해봤자 소용은 없겠지. 다행히도 경상만을 남긴 채 늑대는 사라진다.
"이 정도는 괜찮다.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케므누."
그렇게 짐짓 다정하게 불러본다. 마지막에는 어딜 쏴도 상관없단 말을 덧붙이고. "훈련이 끝나면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
ㅡ
"오오 케이크..좋아!"
비싸서 1년에 1번 누가 사주는 것만 얻어먹어봤는데..!
이번에도는 어디를 쏴도 좋아는 말에 으음..하고 고민한다.
좋아 수장님의 팔을 맞춰보자 생각하고는 조준해서 빵야!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쏜다 이번에도 늑대가 풀려난다.
'쫄랑 쫄랑 잘 피해다니는구나'
늑대는 그리 소녀에게 속삭이고는 입으로 물어뜯으려 한다.
늑대야..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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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늑대에겐 유감스럽게도 공격은 에스터를 스치지도 못했다.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뜻이다.
"수고했다. 케므누."
에스터는 미소짓는다. 케므누의 등을 토닥여준다.
"첫 훈련인데도 무척이나 잘 해줬어. 그럼 먹고 싶은 케이크를 고르러 갈까?"
이까짓 경상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케므누의 손을 잡고 카페로 향한다. 나중에 에릭이 알면 화내려나.
- 에스터 - 소이
- 오늘은 빌런이 세일인가.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몸으로는 관절기를 써서 빌런을 제압하며 눈으로는 할인판매중인 채소가게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식의 흐름까지 도달했다. 카멜 클러치를 먹고 있는 마지막 빌런 조무래기가 마침내 쓰러진다.
"...아."
문득 '아. 쓰러졌나'라고 생각하며 신음을 뱉어보니, 고맙다는 가게 주인의 인사가 들린다. 193cm의 거대한 덩치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쓰러진 빌런 세 명 정도를 경찰차에 신고한다. 채소가게를 강도질해서 뭘 하려고. 다행히 손쉽게 제압당했지만. 그러면서 할인중인 채소에 온전히 시선을 집중해본다. 무가 세일이다. 유감스럽게도 무는 얼마전에 사뒀기 때문에 굳이 살 필요가 없다. 돌아가자.
최근에 얻어맞은 배는 거의 회복했다. 히어로니까 이 정도 맷집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폭력적인 사람이 이즈모에 있다는 것은 역시 꺼림직하다. 그 자 말대로 자신이니까 이 정도로 끝났지, 다른 사람이 당했으면... 아. 그러고보니 앤서니 프로젝트가...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정말 누구누구의 말대로 과로사하는 게 아닐까. 과로사한다면 적어도 빌런이 멸망한 뒤에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빌런이 멸망하고 나서도 후의 일들이... 혼란을 처리해야... ...역시 쉽게 죽지는 못하겠다. 건강관리를 더 해야겠군.
ㅡ
대충 구운 빵에 잼을 바른 것을 먹다가 접시에 내려놓았다. 이건 뭐 바삭한 것도 아니고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잼 때문에 달기만 엄청 달았다.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많이 발랐지? 잠이 덜 깼나? ……이 시간에? 식탁 앞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물을 따라 마셨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람이라도 쐴 겸 밖에라도 나가서 돌아다니고, 그러다 또 이상한 사람들 보면 잡아다 넣고.
느릿느릿 볼캡을 쓰고 시커먼 코트를 걸친 뒤, 밖으로 나서려다 멈칫했다. 현관의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다 뺨에 흐릿하게 남은 상처를 매만졌다. 다행히도 곧 사라질 흔적 같았다. 다행이네,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흉터 남았으면 그 빌런 데려오라고 난동을 부렸을 지도 몰라. 아니면 산재처리 해달라고 박박 우기거나. …아니, 그렇게 못했겠지. 그렇게 할 배짱도 없었고 산재처리는…… 에스터 씨가 정말로 본인 카드라도 줄까 봐.
저번의 그 빌런 치료도 사비로 처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소식을 듣고 한 생각은 …괜히 전화했다, 였던 것 같다. 일단은 혼자 어떻게 해볼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놀라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냅다 전화나 하고. 푹 한숨을 내쉬자 입김이 번졌다. 옆을 슥 둘러보는데 무가 세일……. 필요할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생각하다 가게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닥여 인사하곤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죄송합, 악. 바닥을 보고서 빠르게 걷다가 앞에 걷던 사람과 부딪혔다. 고개도 들지 않고 그대로 푹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이 달려있으면 앞을 똑바로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최대한 선량한 얼굴을 하며 사과하느라 숙였던 몸을 일으키던 소이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어, 에스터 씨, 안녕하세요……."
잠깐 모자를 벗으며 인사해야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일단은 상사인 건 맞지만… 어르신은 아니잖아.
"음,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
ㅡ
"...아. 피닉...소이."
피닉스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에스터는 이름을 뒤늦게 바꿔불러본다. ...이 쪽이 더 어색한가. "죄송할 필요 없다." 고 짧게 덧붙인다. 무슨 일로 나왔냐는 말에는 무심코 빌런 세일...이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정신차리고 "단순한 산책이다."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당신의 볼을 확인하고는 말한다.
"...지난번에 싸우다 난 상처인가. 괜찮은가?"
...정작 본인은 콧등의 큼지막한 흉터를 일부러 남겨두고 있는 사람이면서. 타인에게는 걱정이 드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당신도 제법 큰 키에 속할 텐데, 에스터의 덩치가 너무하군.
ㅡ
피닉, 까지 듣고 잠깐 긴장했다가 뒤이어 나오는 이름에 안심했다. 대체 이름을 왜 그런 걸로 지었지. 지금이라도 바꿀까?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기각됐다. 불은 Fire… Fire의 F……. 이런 걸로 했다간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으니. 작명소 같은 데라도 가봐야 하나. 쓸데 없는 잡념들은 에스터의 대답에 금방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이가 이어진 그녀의 말에 제 뺨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아, 다 낫고 흔적만 조금 남은 거라 괜찮아요. 건드려도 하나도 안 아픈 걸요. 이것도 곧 사라질 걸요. 저보다는 에스터 씨가…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
뒷말을 얼버무린 소이가 뺨에 있던 손을 옮겨 제 콧등을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정도 흉터가 남았으면 상처도 컸을 텐데. 고작 이 정도 흉에 산재처리를 하네 마네 하는 생각을 했던 게 민망해졌다. 진짜 할 생각은 없었다곤 하지만. …왜 갑자기 반성을 하고 있지. 안 어울리게.
"그리고… 좀 늦었어도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저번에 그 빌런 건 에스터 씨가 도와주셨다는 거 들었어요. 제가 실수한 일인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그때 일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도 죽지 않아서 망정이지, 누구라도 죽었으면. 그게 내가 살려야 했던 사람이라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찔러대는 걸 적나라하게 본 것도 드문 일이었고. 누굴 찔러본 적도 없는데 괜히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얼굴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그 정도 살의를 느끼는 원리가 뭐지, 대체. 아마 자신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 앞으로는 번거로우실 일 없게 할게요. …그런데 그 빌런은 어떻게 되나요?"
기껏 살려놓은 사람을 죽일 일은 없을 테고. 그렇다고 그렇게 위험한 사람을 그냥 내보낼 리도 없고. 평범한 범죄자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나? …그러기엔 좀. 살려달라고 해놓고선 이렇게 선 긋는 게 좀 웃긴가. 그런데 어쩌겠어. 위험한 건 사실인데.
ㅡ
"...이건 오래전에 생긴 것이고, 지금은 아프지도 않다."
사실은 애초에 일부러 치료하지 않고 방치해둔 것이었다. 또 그때처럼 방심했다가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런 말까지는 굳이 하진 않았지만.
그 일인가. "나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쪽이야말로 제압하느라 수고 많았다." 에스터는 그렇게 전한다. 많이 무서운 광경이었을텐데, 무사히 구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빌런이라면..."
최근의 일을 떠올린다. 레드 슈즈라는 사람이 범죄자들을 마구 짓뭉개 죽였던 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일은 언급하지 않고 대답한다.
"제대로 처리가 되었다면 - 아마 이능력으로 탈출시도하는 것부터 막지 않았을까. 이능력 범죄자를 격리하는 특수한 감옥이 존재하니까. ...물론 이능력이라고 하는 게 워낙 다양한 종류가 있다보니, 하나하나를 전부 이즈모에서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 자신의 지식으로 대답해본다. 도움이 되었으려나.
"이 쪽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올바른 때에 잘 연락해주었다. 앞으로도 위험한 일이 있으면 주저말고 연락해주도록."
그렇게 말하며 조금이지만 미소를 띄워보인다.
ㅡ
"아프지는 않다니 다행이네요."
오래 전에 생긴 것이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말하고선 웃었다. 흔적이 남았으니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없다고 해도 무언가 남긴 남았을 것이다. 그게 안 좋은 것이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지금도 충분히 지고 있는 짐이 많을 사람인데, 오래 전의 일까지 보태지 않았으면 하니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는 바랄 수 있잖아.
……아니, 지금 뭘 더 얹지 않는 것도 중요할 것 같지. 음, 나만 잘하면 되겠네. 나만. 수고 많았다는 말에 웃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분명히 시작할 때는 '적당히' 하기로 했는데, 왜 자꾸 혼자 반성하고 다짐하고 있지. 앞에 있는 에스터 씨 때문인가. 혹시 이런 쪽 이능력도 있는 사람인가? 잠시 고민해보다 멈췄다. 무슨 생각을.
"모쪼록 잘 처리되었다면 좋겠네요. 이왕 살려서 생포한 거니까."
이즈모 측에서 하는 일을 모두 알 수는 없으니 이 정도만 바라보는 게 최선이겠지. 가끔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장기말에 불과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능력 때문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 자진해서 이쪽으로 들어온 건데……, 또 다른 방식으로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불쾌해졌다. 아무튼, 속을 알 수 없는 집단이야.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고개를 숙인 채로 묘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소이가 에스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에스터 씨를 너무 딱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조금 웃은 거에 이렇게 놀랄 일이야? 약간 놀란 듯 동그랗게 떴던 눈을 접어 웃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저는 저한테 좋을 말은 진짜 잘 알아채거든요. 에스터 씨 이제 큰일 났어요. 제가 매일매일 연락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해요?"
무능한 바보도 아니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에스터 씨도 너무 혼자 다 하지 말구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큰 도움까진 안 돼도 도와드릴 수는 있으니까. …지금도 산책 나온 건 거짓말이고 혼자 일 하신 거 아니에요?"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인 말은 100% 농담이었다.
ㅡ
"매일매일 연락한다는 건 매일매일 그만큼 일한다는 뜻이겠지. 환영이다."
에스터의 이 대답도 반쯤은 농담이었다. ...반쯤은. 정말로 매일 연락한다면 할 수 있는 한 매번 달려갈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이 무섭지만.
혼자 다 하지 말고... 이런 말을 부쩍 많이 듣고 있는 요즘이다. 이래저래 걱정을 끼쳐버린 모양이다. 나름대로 철저히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티가 나버린건가. ...역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익숙하지 못하다고 할까, 자신이 없었다. 최대한 주변의 짐을 덜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니, 조금 무거운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의 위치에 올라온 사람으로서도, 남들보다 조금 더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움이라... 고맙다. "
그래도 당신의 호의에는 그렇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나름대로, 2년이라는 세월동안 미소를 늘려보려 노력한 에스터이다.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에스터는 주변에 무리가 되지 않을정도로만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지, 아니면 주변에 의지하라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더 강해져야 할지를 고민해본다.
"산책하러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산책하러 나온 도중 우연히 일거리를 발견했을 뿐이지."
당신의 말은 100프로 농담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에스터가 혼자 일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당장 방금전에도 '산책가다가 무가 세일하길래 사봤어'같은 느낌의 가벼운 마음으로 빌런 셋정도를 제압하기도 했고. 산책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산책 도중에 일이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전에 경찰차가 지나가는 것을 당신은 봤을지도 모른다...
ㅡ
이 말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어째 제 무덤을 판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스터라면 (자신이 매일매일 열심히 일한다는 전제 하에) 정말 매번 기꺼이 달려와줄 것 같았다. 차라리 양치기 소년처럼 별것도 아닌 일로 계속 연락해서 내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게……. 잠깐만, 이건 좀 쓰레기 같은 짓이잖아. 그리고 이 사람은 어쩌면 진짜일 '단 한 번'을 위해 계속해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진짜 실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로 관두자……. 일단은 멋대로 농담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며 웃었다. 약간의 어색한 기운은 감출 수 없었지만. …매일매일 그 정도로 열심히 일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차마 지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
"에스터 씨가 해주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뭘."
그리고 고작 2년 차가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된다구.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뿐인데.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직업의식이랄 것도 없고 내 한 몸 잘 건사하는 게 목적이니 대단히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지만, 내가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음,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강해보인다는 게 문제인가. 아까도 생각했지만 나만 잘하면 돼.
"…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러고보니 아까 사이렌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여기저기 사건사고가 하도 많으니 또 누군가 체포되었나보다, 하고 넘겼는데. …히어로가 할 생각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다치신 데는 없는 것 같네요. 뭐 어디 맞거나… 그러신 곳은 없죠?"
어쩐지 실례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맞거나…, 에서 멈칫한 것은 에스터를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 흔치 않은데. 초면이었거나 빌런이었다면, (특히 빌런이었다면)그녀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뭘 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갔을, 아니, 도망가다 얌전히 체포당했을지도.
ㅡ
"무사제압했다."
확실히 에스터는 겉으로 보기에는 외상없이 무사했다. 레드슈즈에게 맞은 곳이 아직 욱신대긴 했지만, 티가 나는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런에 의해 생긴 상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입을 다물어도 될까? 레드슈즈가 이런 폭력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다들 알아야 하지 않을까? 숨기는 것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에스터는 고민한다.
"......"
도움을 준다고 했으니,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부담을 주는 것이... ...에스터는 결국 입을 뗀다.
"빌런들에게 내가 맞은 곳은 없었으나, 다소 심란한 일이 있었다."
학살자의 광소를 떠올린다. ...그 자가 저지른 잔혹한 짓거리도.
"...이즈모 내에서도, 서열에 따른 위계질서를 들먹이며 하급자를 폭행하는 일이 있더군."
의도적으로 자신이 피해를 봤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도, 자신의 대처 미숙이었다- ...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만약 타인이 이런 피해를 입었다면, 나는 자신을 향한 것과 똑같은 태도를 보이며 침묵했을 것인가? 당연히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갔다면, 그 자가 자신을 대신해 맞았겠지. 그러니까 숨겨선 안 된다.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ㅡ
명쾌한 답변에 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소식이 들려올 정도가 아니었으니 대규모의 테러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마 제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본인이 말한대로 테러를 저지른 빌런(혹은 빌런들)을 무사제압했을 것이다. 유능한 사람이니까. 그만큼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있는 히어로 집단의 수장직을 맡고 있는 거겠지.
이쯤에서 대화가 마무리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든든하거나 가까운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아주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물론 감사 인사는 아주 필요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주 재미있는 사람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쯤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하고 헤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묻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소이는 그냥 조용히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갑자기 일어난 충동일 뿐, 지금 말했다가는 뒤늦게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괜히 채근해서 상대가 그런 후회를 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얌전히 기다리던 소이의 얼굴은 그녀의 말을 들은 뒤, 조금 심각해졌다. 걱정이 옮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고민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일은 경험한 적이 없어서. 히어로가 아닌 이즈모 측의 사람과는 깊게 엮인 일이 없었을 뿐더러, 히어로는 명확히 직급이 나누어진 것도 아니니 저보다 위에 있는 서열이라곤 수장인 에스터가 전부인데…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을 믿어?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놀라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아무튼, 에스터는 그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당한 거지? 아는 사람을 한 명씩 떠올려 보던 소이가 미간을 좁히다 고개를 저었다.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대답을 먼저 해야지.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내쫓는다거나 큰 징계를 받게 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무언가 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보복은 무서우니까.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잖아요."
재미 없는 말이다. 영양가는 더 없는 말이고. 어쩌면 실망스럽기까지 할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해. 내가 이런 사람인걸. 눈에 띄는 건 싫고 안 좋은 화살이 돌아오는 거라면 더 싫고. …끙, 앓는 소리를 낸 소이가 뒤이어 말했다.
"그래도 계속 뒀다가는 비슷한 일이 또 생기겠죠. 실은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더 나을 거라는 건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해결책을 찾았는데 손이 모자라다 싶을 때, 그때 도와드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재미 없는 말 2, 영양가 없는 말 2…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려 노력했다. 과연 얼마나 믿음이 가는 얼굴과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쓸모 있는 말로 쓰일 수 있을지도… 실은 잘 모르겠지만.
ㅡ
"...확실히."
단순히 자신이 몇 대 더 맞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상부로 입김이 잘못 들어가 불이익을 받거나 - 혹은 죽는 것까지도 떠올리면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아무리 죄수라곤 해도 사람 머리를 짓뭉개고 사지를 끔찍하게 찢어내는 인간인데, 자신에게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지. 지금 죽기에는 아직 에스터에게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도와준다니 든든하구나. 고마워."
그 말에 잠시 에스터는 생각해본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나은걸까. 한두명의 보고로는 어떨 지 몰라도 여러 명의 보고가 쌓이면 이즈모에서도 형식적으로나마 그녀에게 징계를 줄지도 모르지. 당신의 말에 에스터는 잠시나마 심각해진 얼굴을 풀고 미소를 띄워보인다.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군... 힌트를 얻었다. 네 덕분이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에는 "이 쪽에서 눈치없이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가."라는 말을 건네며.
ㅡ
일단 납득은 가는 말이었나. 묘하게 불안한 얼굴로 에스터를 바라보던 소이가 짤막한 답변을 듣고 안심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가. 아무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에스터가 말한 이가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골치 아픈 존재라는 건 알 것 같았다.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라면 그보다 덜한 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게 뻔했다.
누가 보기에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처럼 보인다면? 최악의 경우, 죽음까지도 상상해볼 수 있었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인가 싶었지만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빌런도 아니고, 이즈모 측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긴 하겠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거야? 이쯤되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또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제가 고맙구요."
살짝 고개를 숙인 소이가 웃었다. 이번 웃음은 진심이었다. 의례히 하는 입에 발린 말이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는 우스운 말로 들렸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대단한 말은 아니었는 걸요. 에스터 씨가 혼자 찾은 거예요."
이 말도 진심. 누구나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이 건이 문제가 되고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들었으니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던 것뿐. 아…, 아니요. 저 시간 많아요, 라고 대답하려던 소이가 코트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를 보고서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린 소이가 말했다.
"이상하네. 원래 되게 한가한데… 그렇다고 노는 건 아니구요. 지금도 일이에요!"
휴대폰을 들어보이며 가볍게 흔들고서 급하게 덧붙였다. 끊어지기 전에 받아야겠지. 부디 이 검정 코트에 먼지 왕창 묻을 일만 아니길 바라며.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선 전화를 받으며 몸을 돌렸다. …뭔데, 오늘은?
- (학교AU)교사에스터 - 교사진성
수업시간, 진성이 딴짓을 하는 모습은 평범한 xx 고등학교의 풍경이었다. 고등학교 이름을 아직 못 정해서 xx라고 표현하는 것에 유감을 표한다. 그것에 '또인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까지도, 평범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근무태만의 현장의 교실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누군가가 등장한다는 것 까지도.
"이진성. 수업시간이다."
이글이글한 눈이 진성을 내려보며 노려본다. 학생들은 술렁... 술렁...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교시가 빈 에스터는 교무실을 향해 걸어가다가, 무심코 진성이 수업중 딴짓을 하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학생들의 술렁임은 계속된다. 사실 '팝콘이 필요하다.'같은 느낌의 술렁임인 것 같기도 했지만.
체육교사인 에스터는 성실한 성격으로,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193cm의 장신, 험악한 외모로 인해 첫 인상에는 무섭다는 평가를 많이 듣곤 한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면 꽤나 만만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에스터는 그렇게 따져묻는다.
ㅡ
오늘도 어김없이 월급루팡을 한다. 학생들도 자습하는게 더 편하지 않을까? 라는 발상에서 시작되어 학생도 교사도 편한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라는 생각을 지니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린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자신보다 머리 2개 정도는 더 큰 유명한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딸꾹.
묘한 위압감에 기가 죽은 듯 시선이 떨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한숨을 내쉰 그는 휴대폰을 내려두고 당당하게 설명했다.
" 보면 모르십니까? 수업중입니다 에스터 "
도대체 어딜봐서 수업시간이라고 당당히 거짓말을 칠 수 있는 것 일까.
학생들이 편 책도 다양하고, 심지어 이 교사라는 작자는 교과서도 안 챙겨왔다..
" 반면교사도 교사니까요. "
방긋 하고 상쾌하게 웃어도 수업시간에 선생이 농땡이를 치고있다가 걸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지 참 당당하게도 말한다..
보고있던 학생들은 고개를 저어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ㅡ
"반면교사도 교사라, 좋은 말이군."
에스터가 미소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지까지 보여줘야 교육의 완성이겠지?"
그렇게 받아친다. 이제부터 에스터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잔소리 데미지 Dice(1,100) value : 58이다.
"네 녀석은 어째 볼 때마다 수업을 하는 걸 본 일이 없군. 경고를 얼마나 받아야 직성이 풀릴 텐가? 얼마전에도 지적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잘리지 않는 거지?"
정답은, 빽 때문이다. 평화로운 AU에 와서도 어떤 식으로든 부패해있는 라오스는 오늘도 평화롭다.
"반면교사로서의 모범을 보여라. 이번 시간의 운동장은 텅 비어있지."
돌라는 뜻이겠다. 덤으로 운동장은 꽤 넓다. 학생들도 안 도는 운동장 뺑뺑이를 교사에게 시킬 생각이다.
ㅡ
" 수업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니. 유감이네요.. 저는 가끔 성실하게 수업한다구요? 에스터씨가 못 본걸 제 탓으로 돌리지 말아주세요. "
그리고.. 하와와와 진성챠는 뛰기 싫은거시야요.
시선을 피하며 느긋하게 하품. 고지식한 그녀에게 걸린 건 썩 운이 나쁘고 잔소리의 타격감도 히x스 보다 좋지만 유감.
그렇게 해서 말을 들어먹는 인간이였다면 진작에 수정되었다...!
" 아, 그럼 에스터씨가 수업의 모범이란 걸 보여주시지 않겠어요? 그럼 제가 또 성실하게 보고 배울테니까요. "
그는 에스터에게 수업을 넘기고 하x스x을 할 생각으로 눈을 반짝였다. 비겁하고 치졸하지만 뭐 어떤가?
학생들에게 반면교사의 모든 걸 보여주고 있는데. 후우 너희는 커서 이런 어른 되지마라.
" 부탁 드리겠습니다 에스터씨. "
자연스럽게 운동장 뺑뺑이를 생략하고 나직나직한 웃음으로 받아친 그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들며 연락을 확인했다.
아.. 애인이 있는 건 다른 Au지..
ㅡ
"'가끔 성실하게'라는 표현에서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나?"
지적한다. 성실하게 태클을 건다.
"수업의 모범이라. 내 담당과목은 체육이다."
받아친다. 운동장을 향해 다시 손가락을 가리킨다. 돌아라! 라고 말하는것 같다. 당신의 반짝이는 눈을 흐뭇한 미소로 쳐다본다. 흐뭇한 미소로 손가락은 운동장을 향해있다. 당신이 돌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이러한 불량한 교사를 통제하는 모습이 내가 보여야 할 모범이다. 그 쪽이 운동장을 열심히 도는 동안 나는 수업을 하도록 하지."
즉슨, 내가 수업을 한다면 수업 내내 운동장을 돌아야 할 것... 이라는 발언이다. 에스터는 지지 않는다. "부탁하도록 하지." 라고 당신의 말을 받아치기까지 한다.
ㅡ
와아 이거 큰일이다 저쪽은 날 억지로라도 운동장을 돌도록 시킬 것 이다. 이런 날씨에 만약 운동장을 돌다간 30분 쯤에 119를 불러야하지 않을까? 어쩌면 수상해보이는 보건선생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끌려갈지 모른다. 그건 삼가하고 싶으니 여기선 버텨본다.
" 불량한 교사라뇨. 에스터씨라곤 하지만 그 발언은 참기 힘들군요. 요컨데 제가 성실한 교사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
" 아쉽게도 당신의 예측과 다르게 여기의 저는 건물방화도, 납치도, 찐빌런 흉내도 안 내니까요. 자 애들아.. 선생님이 수업을 대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렴. 잘 생각하고 들어라.. "
반쯤 협박. 이게 빌런이 아니면 무엇일까. 어쩌면 차라리 이런 적폐활동을 증오하는 이바론씨가 괜찮아보일 정도로 그는 추잡하고 더러운 방법을 사용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 학생들은 그런 같잖은 협박따윈 낄낄 거리면서 반대로 행동하는 애들이다. 결과는 간단하다.
" ..... 얼마나 돌아야하죠? "
만장일치라는 보기드문 광경을 멍하니 보던 그는 에스터를 향해 힘들게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ㅡ
"건물방화에 납치를 저지른다고 예측했다면 진작에 신고했을 것이다."
에스터는 농담을 하지 못한다. 메타발언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재미없는 녀석. 학생들의 손이 하나하나 올라온다. 이것이 당신의 신임(반면)이라는 뜻이군. 뿌듯한 광경이다. 에스터는 환하게 미소짓는다. 모두의 소중한 한 표가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리고 에스터는 손가락 세개를 들어올린다.
"세 바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게 아니라. 학생들이 하나하나 핸드폰을 꺼내고 있다.
"당신의 반면교사로서의 면모에 감탄한다. 자. 돌고 오도록."
ㅡ
결국 진성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고작 운동장 3바퀴였지만 창가에 오순도순 모인 학생들이 휴대폰으로 그 광경을 촬영 할 만큼 별난 광경이였다.
나름 빠르게 뛰고 올라올 생각이였는지 순조롭게 한 바퀴를 돈 진성은.
이후 거짓말 처럼 반바퀴를 더 돌고 쓰러졌다.
" 하아...헤엑... 컥..케흑.. "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니 운동부족이 아닐까 싶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체력단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바론씨는 체력 단련도 하는 것 같지만.. 이곳의 이진성 씨는 한심할 정도로 허약했다.
결국 숨을 골랐음에도 쓰러져있던 진성은 창문을 통해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스터와 학생들을 보며 이를 갈다가 소리쳤다.
" 두고보자...! 에스터어ㅓㅓㅓㅓ!!! "
참 뻔뻔한 사람이다..
- 에스터 - 유현
- "...콜록, 콜록..."
옷소매로 입을 가린 채 불 속에서 빠져나온다. 다행히도 히어로 및 이즈모측 사람들도 전부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고, 구출된 피해자들도 이즈모로 한 발 앞서 돌아간 모양이다. 하지만, 만약 연구소에 다른 피해자들이 있었다면... ...아니. 이 쪽에서 확인은 전부 끝냈다. 건물의 구조도 대략적으로 확인이 끝났으니. 애초에 실험 피해자들이 소수나마 존재했던 것 자체도 함정인 방에 들어가 시간을 끌기 위한 미끼였겠지.
그리고는 주변의 다른 히어로들을 살펴본다. 유현이 막 빠져나온 것을 눈치챈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분홍머리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분명 큰 충격이 됐을텐데. 유현에게 다가간다.
"괜찮나?"
당신의 등을 토닥여준다.
ㅡ
......결국 또 죽이고 말았다. 상담한 사미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마음 속으로 변명했다.
이상한 약을 맞더니 이상하게 변해버린 사람이었기에 생포도 힘들었다. 분명한 건 그의 죽음에 자신도 어느정도 기여를 했다는 거였다.
정장 소매로 연기를 최대한 덜 들이마시려 노력하며 무너져가는 연구소에서 빠져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한쪽 눈이 피로 가려져 잘 안 보였지만 다행히 다른 히어로들을 따라 달리니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하아..하아.. "
손도 떨려오고, 옆구리도 아파오고, 눈 부근도 아프지만 그것보다도 사람을 또 죽였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괜찮나? "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을 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등을 토닥여준다.
그 사람이 에스터라는 걸 꺠닫곤 떨려오는 손을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쪽 눈을 미소를 지어보인다.
" 아아, 전 괜찮습니다. 에스터 - 그나저나 결국 놓쳐버렸네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함정을 파둔 것 같아서.. "
그걸 저희가 완전히 낚여버린 것 같네요, 라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 분에게는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드려 안 그래도 많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늘려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
ㅡ
"...그렇지."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는 당신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연기는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구소라고 생각했던 건물은 완전히 불길에 집어삼켜져있었다. 누군가의 시체도 그 안에서 타오르고 있겠지. ...그러고보니, 에릭은 괜찮을까. 이번에 같이 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이런 경우, 함정이란 걸 알더라도 출동할 수밖에 없으니까. 만에하나 피해자가 정말로 존재할 가능성을 위해서."
에스터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이어 "무리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건넨다.
"...휴가를 냈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쉬고온 것 맞나? 골치아픈 얘기가 들리던데, 뭣하면 좀 더 쉬어도 괜찮다."
골치아픈 얘기란 바로 유준에 관한 이야기겠지. 유현과 얼굴이 같으나 성격이 전혀 다른 쌍둥이가 히어로로서 살육을 즐긴다는.
ㅡ
" 그렇지요.. 정말 피해자가 있는 거일 수도 있으니 저희는 나설 수 밖에 없고,... "
이번에도 분명 실험받던 사람들은 있었으니까, 그저 함정이라고 만은 볼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래도 좀 더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 아아, 휴가는... 이제 돌아가서 좀 더 쉬면 되겠죠. 형 문제는..... 뭐, 적당히 말이 통해서 일단 어떻게든 해결했어요. 그 사람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니까.. "
휴가는... 다시 쉬러 가면 되고, 형은 뭐 일단은 얌전히 있을테니 걱정은 없었다.
물론 빌런들을 죽이는 것 까진 무어라 못하지만 , 다행히 민간인을 죽이는 건 아니었으니까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혈육을 만난 것은 기뻤으니까.
" 그나저나... 에스터 씨와 관련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무래도 에스터 씨의 사진도 나온 것 같았는데... "
문득 안에서 에스터의 어린시절 사진을 본 기억이 나서 조심스럽게 에스터에게 물음을 던진다.
ㅡ
"...형이었나. "
하긴, 그렇겠지. 도플갱어같은게 존재할리는 없고, 복제인간...같은 것도 아마 아닐테니.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했다는 말에 에스터는 "다행이로군."이라는 말을 짧게 건넨다.
"상대라면...과거에 연이 있던 사람이다. 부모님의 연구소의 소장이었지. 간부진들 사이에 일어난 생체실험을 주도하고 있던 자다."
에스터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비밀로 할 일도 아니었으니. "당시에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 어린 자신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곤 했지. " 그리고 단호하게 끊는다.
"지금은 악연이다."
정색한 채 말한다. 살아있으리라는 추측을 못 한건 아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ㅡ
" 저도 몰랐던 형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본인도 동생을 챙긴다고 하니 일단 지켜봐야죠 "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에스터를 바라본다. 아직 말도 길게 해보진 못했고, 첫 대면부터 대판 싸워서 가둬지기 까진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어디까지나 에스터씨에겐 걱정을 끼쳐선 안된다는 게 유현의 밑바탕이었다.
" 아아...... 그 이야기와 관련된 거였군요. 그래서 에스터 씨의 사진을 가지고 있던것도.. "
그제야 모든게 수긍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터를 보며 유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결국 이 모든 건 에스터 씨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겠지. 그렇게 된다면 역시나 이번에 놓친 것은 정말 뼈아프다고 할 수 있겠지.
" 악연, 그렇네요.... 애초에 악연이었던 것 같지만.... 확실해진거네요 "
유현은 물끄러미 에스터를 바라보다 심각해보이는 에스터를 어떻게 해야할까 하다 자연스레 에스터의 한손을 양손으로 감싸쥐며 미소를 짓습니다.
" 그래도 일단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냈고, 두명이나 구출도 했고, 한명은... 사살 했으니 완전히 무언가 엉망이 된 게 아니잖아요. 앞으로 좀 더 확실해진 것들로 잡기 위해 노력하면 되니까, 그리 어두운 표정하지 마세요. 저도 그렇고 많은 히어로들이 있으니까 에스터씨를 도울 수 있을거에요 "
그러니 웃어주세요 - 라고 말하며 상처 난 얼굴로 환하게 에스터에게 미소를 짓는 유현이었다.
ㅡ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가족이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은 원래 고아라고 들었으니. 에릭같은 경우도 본인의 생일이 진짜 태어난 날이 아니라고 했지. 혹시 나중에 에릭도 모르는 형제가 나타난다던가...그건 아닌가.
그러다가 문득 유현 당신이 에스터의 손을 잡아온다. 에스터는 유현의 미소를 바라본다. 어두운 표정이라, 그렇게 보였나. 보답하듯이 이 쪽도 살짝 미소를 띄워본다. "걱정시키고 말았군."
"...당연하지. 이런 일로 좌절할 거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에스터는 그렇게 당당히 얘기한다. 그리고는 그 쪽을 향해 묻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 쪽이야말로 괴로운 것은 아닌가. ...좋지 못한 상대와 전투하게 되었는데."
차분해보이던 청년의 얼굴이 점차 기괴해지던 모습을 떠올린다. 피를 토하고, 흘려가면서도 홀린듯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모습. 얼핏 보는 것 만으로도 고역이었는데 그런 자와 싸우게 된 유현에게 정신적인 상처가 남진 않았을까.
"나도 그렇고 많은 히어로들이 있으니 너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힘들다면 언제나 이 쪽을 의지해주도록."
그렇게 당신의 말을 되돌려준다.
ㅡ
에스터는 유현이 손을 잡아주자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걱정을 끼쳤다며 괜찮다는 듯 말을 해온다.
하긴 이 사람은 강하고 굳건하기에 빛이 나는 사람이니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유현은 자기 자신을 더 걱정해야 하는 쪽인 것이다.
" 뭐... 언제는 좋은 상대만 만났었나요. 오히려 파크 쪽이 좀 더 힘들어보이던데요 "
애써 태연한 미소를 보이며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슬그머니 숨긴다.
이런 모습을 에스터 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간신히 짓게한 미소를 없애고 싶지 않았다.
에스터 씨는 미소가 어울렸으니까.
" 하하, 그럼요. 저는 항상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히어로를 하는걸요. 아마 에스터씨라던지 다른 분들이 안 계셨으면 이렇게 못 하고 있을 거에요 "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그리곤 아차 싶었는지 이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입니다.
" 맞다, 저번에 병원에서 사고를 쳤을 때는 제대로 사과조차 못드렸네요. 죄송해요, 에스터씨. 케므누 건부터 해서 이래저래 병원 생활만 하다보니 "
어색하게 하하 - 웃어버리며 쓴 미소를 짓곤 에스터에게 면목 없다는 듯 말합니다.
ㅡ
"...파크도 고생이었겠지."
당신의 말에 긍정한다. 애써 미소를 짓는 모습과, 떨리는 손을 확인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에스터의 눈을 속이려는 시도는 별로 의미가 없다. 에스터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당신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무리하지 마."
당신이 동료를 생각한다고 말하며 웃자 에스터도 다시 웃어보인다. 그러다가 병원의 얘기에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런 대답을 한다.
"그러고보니 네가 너무 많이 다쳐서 잔소리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지..."
...당신은 괜한 얘기를 꺼낸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 그 때는 왜 그런 짓을 했나. 환자라는 놈이 병원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아니. 됐다. 이제와서 혼내려니 기운이 빠지는군. 앞으로는 부디 그런 짓은 하지 말도록."
ㅡ
" 아무래도 성가신 능력을 가진 빌런 같았으니까요 "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에스터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파크를 옹호한다. 녀석도 나름대로 고생했는데, 아무래도 상대방이 성가신 능력을 가진 듯 했으니 어쩔 수 없을테지.
그러다 에스터가 어깨를 토닥여주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쓴 미소를 짓는다.
" 무리하지마 "
아무래도 이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았다. 이래서야 무슨 에스터씨의 힘이 되겠다는 건지, 유현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이번에도 에스터의 위로를 받았다.
다만 이어지는 말에는 어색하게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 그..그 때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버려서요...아하하... 예, 다음부턴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파크도 아마 다시는 그렇게 능력을 쓰지도 않을테구요 "
죄송합니다, 하하 - 라며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앞으론 그럴 일이 없게 해야겠지. 안그래도 파크에게도 가볍게 사과를 해놓고 왔으니까.
" 이즈모에서는 이번 일로 트집을 잡거나 하지는 않겠죠? "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에스터에게 묻는다.
이런 일로 이즈모에서 에스터에게 꼬투리를 잡는 것은 곤란했기에,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에스터에게 묻습니다.
ㅡ
"의지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하지 않다가 혼자 무너져버리는 편이 더 나빠. "
한숨을 쉬는 당신에게 말한다. "이즈모가 아닌, 나를 위해서다." 에스터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 자신의 변화에 조금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당신의 덕분이었다.
"...이번 일이라. 빌런들을 놓친 것은 뼈아프지만, 피해자는 구조했고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니..."
에스터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물론 트집이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당히 에스터 선에서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할까. 만약 이 일로 뭐라고 한다면 인력이나 더 투입하고 말하라고 쏟아낼 생각이었다.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할까... 부상입은 곳은 없는가?"
팔의 건이 있었다보니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에스터는 당신의 몸상태를 살핀다.
ㅡ
" 그런가요... 그럼 에스터 씨한테 조금 의지해도 되겠습니까? "
장난스레 에스터에게 답하고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왠지 미소를 짓는 에스터가 보기 좋아서 유현의 미소도 짙어집니다.
그래서 좀 더, 좀 더 노력하면 더 밝은 미소를 지으실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 일단 이즈모에선 크게 트집을 잡긴 힘들겠네요. 그건 다행이니... "
유현은 이즈모가 에스터에게 트집잡고 물어뜯을 것이 신경쓰이는 듯 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에스터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지만 일단 에스터가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면 넘어가야 할 듯 했다.
" ..아아, 그냥 타박상 정도 밖에 없어요. 저도 에스터 씨처럼 얼굴에 흉터가 하나 생기긴 했지만. 자, 슬슬 돌아갈까요? "
에스터가 자신을 걱정하자 문제 없다는 듯 웃어보이며 에스터의 의견에 동조하며 환하게 미소 짓습니다.
앞으로도 좀 더 노력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 샤오화 - 에스터
- 오후 2시의 라오스란 밝은 햇살이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문 사이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와 절로 피로한 눈꺼풀이 내려앉고 온 몸이 노곤해지는 마성의 시간이다. 일을 하다가도 그 포근함에 못 이겨 조금씩 조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이는 사무실 안에서, 헤이샤오화는 홀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따듯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졸리지 않냐고? 아니. 다만 머릿속을 들쑤시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기에 차마 졸 수도 없었다. 당장 요 며칠 사이에 알게 된 이런저런 정보들만 해도 밤잠조차 쉬이 이룰 수 없는 사실들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동요하게 되는 정보인 히어로 웬 카무이-아니, 이젠 은퇴했으니 케므누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가 건네준 빌런 아지트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특히나 흑소화의 머리 한 구석에 깊이 눌러앉아 끉임없이 이 비중있는 정보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와 하는 이야기지만, 실상 그 건은 흑소화 본인이 질문을 하면서도 큰 기대를 않았었다. 해서 정말로 정보를 받게 되었을 땐 그만큼 의외였고 그만큼 놀라웠었지.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와서 그 상황을 회상해보아도 그걸 그렇게 정직하게 말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뭐, 이 쪽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현상이다. 그 상황에서 옛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나는 신뢰를 줄 사람을 하나 잃게 되었을테니. 그녀가 이즈모에서 나가버렸으니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어떠냐 싶긴 하지만, 아무튼 당신에게는 고마울 따름이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더 머금고 뻑뻑한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흑소화는 곧잘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부서를 벗어난 채 타부서의 문 앞에서 그 몸을 멈추는게다. 그리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똑도독똑똑. 하고 장난스런 노크를 올려보았지. 다만 이 문 뒤에 있을 사람이 제 어린날의 인연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문을 열기 전 약간의 쓴 웃음을 애써 삼켜낼 수 밖에는 없었겠다. 그러나 당신 또한 반가운 사람임은 물론이기에, 잠시 후 문이 열린다면 당신은 틈새로 당신을 향해서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는 흑소화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머리말 씨? "
오랜만이에요~ 에 덧붙여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던가.
ㅡ
"들어오도록."
당신의 경쾌한 노크소리에 그런 재미없는 대답이 당신을 부를 것이다. 만약 안에 있는게 에릭이었다면 '안나. 고 어 웨이!' 같은 대답으로 받아줬을지도 모르는데. 미소짓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는 에스터 역시 살짝 미소를 띄워줬을 것이다.
"그렇군.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었다. 같은 이즈모에서 일하면서도 서로서로 일하는 영역이 다른데다 둘다 심하게 바쁘니까 얼굴 볼 일이 많지 않았다. 누가누가 과로하나 배틀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밝은 미소 뒤에 피로가 보이는 것 같다고 에스터는 생각해본다. 샤오화도 피겨선수 출신인 만큼 나름 기본 체력이 있겠지만, 에스터같은 괴물같은 신체를 가진 입장에서 봤을때는 연약하게만 보이는 것이다.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나?"
그래서 다음에 튀어나온 말이 이것이었다. 에스터는 당신에게 꾸준한 식사를 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ㅡ
오랜만이라는 답변에 더불어 밥은 잘 챙겨먹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흑소화는 이에 방긋 웃으면서 " 커피는 삼시세잔 잘 챙겨 마시고 있는데요~ " 하고 장난스레 대꾸했다가, 이내 " 예전보다는 잘 챙기고 있어요. 이제 일부러 굶진 않으니까. " 라고 바로 된 답변을 내놓았다.
" 머리말 씨.. 에스터 님은요? 식사 잘 챙기고 계세요? 수장까지 맡으시고 여간 피곤하신 게 아닐텐데. "
신 빌런 세력의 등장도 그렇고, 이즈모의 히어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는 것도 그렇고 참 당신 피곤할 일만 쌓이는구나. 한 단계만 더 높이 올려놓으려 들어도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외엔 큰 발전이랄 것도 없는 현실이 참 얄밉기만 하다.
" 라오스 다시 온 지는 삼 주가 넘어가는데 이제야 제대로 인사드리네요. 2년간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
머리 짧아진 건 알고 있었지만 얼굴의 저 흉은 지나가며 슬쩍 본 게 다라서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해서 무의식적으로 제 뺨을 한 번 긁적인 흑소화는 곧잘 제가 열고 들어온 문을 등 뒤로 닫은 후, 다시금 살짝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리고.. 나름 큰 정보가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
ㅡ
그 말에 에스터는 "커피를 삼시세잔 챙겨먹는건 몸에 도움이 되지 않아." 라고 진지하게 받아친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농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잘 챙기고 있다는 말에는 "다행이네." 라며 안도해보이는 것이다.
"이 쪽은 잘 챙기고 있어. 아무리 바빠도 몸 챙길 여유는 있으니까."
...몸을 챙기는 걸로는 피로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게 문제지만. 에스터는 휴식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은 나아지려나...?
"2년간..."
2년간의 일들을 떠올려본다. 수장이 된 일, 훗날 빌런의 수장이 되는 자에게 습격당했던 일, 검은 고양이를 주워 가족놀이를 시작한 일, 유현과 함께 바론을 체포했던 일... 여러가지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잘 지냈는가를 묻는다면 그래도 "잘 지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여러가지 성장을 이루어온 한해였으니까.
"큰 정보라, 어떤 것이지?"
정보를 알려주는 자가 있지만서도, 그는 과할 정도로 변덕쟁이였다. 보고도 숨기는 일도 다반사에, 아예 가짜 정보를 알려주어 혼란시키는 일도 잦으니. 더군다나 최근에는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이즈모에 코빼기도 안 비친다. 생각해보면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다만. 그에 비해서 샤오화가 말해주는 정보라면 꽤 믿을만 하겠지.
ㅡ
진지하게 받아치는 당신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뭐, 기실 그런 모습이 당신의 아이덴티티니 태클을 걸 생각은 없다.
" 왜요~ 삼시세잔의 커피는 업무 능력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준다고요. 졸게 되지도 않고.. 까딱하면 밤에 잠을 못 잔다는 게 흠이지만. "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영 피로해보이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잘 지냈다' 를 어디까지 믿으면 좋을까 싶지만, 지금 꺼내야 할 말은 그런 사소한 사담이 아니다. 용건부터 말하자. 사담은 그 다음이라도 좋다.
" ....빌런 아지트의 위치. "
해서 흑소화는 코트 주머니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쪽지 모양으로 접은 A4지 하나를 당신에게 건넨다. 쪽지를 펼친다면 아마 간략하고 허술하게 그려진 약도와 케므누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아지트의 위치가 자필로 작성되어 있을 것이다. 푸른색 볼펜으로 쓴 시원시원하고 가독성 좋은 글씨체니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으리라.
" 히어로 웬 카무이.. 케므누 님이 알려줬던 정보에요. "
꽤 쓸만하죠? 순간 굳어있었던 얼굴이 이내 엷은 미소를 머금고, 흑소화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ㅡ
"잠은 잘 자고 있는가."
질문이 추가됐다. 에스터는 신기하게 여긴다. 에스터는 뭐든 씹어삼킬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왠지 카페인에 약하다는 미묘한 약점이 있어서 카페에서 나온 에스프레소 한 잔만 마셔도 그날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빌런 아지트의 위치. 그런 말이 당신의 입에서 나온다.
"......"
에스터의 눈이 조금 커진다. 당신에게 종이를 받아들어 눈으로 훑는다.
그러고보니 케므누는 전 빌런이었다고 했지. 샤오화에게 그것을 순순히 말해줬던 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히어로로서 남아주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하긴. 히어로라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이즈모에서 히어로로서 눈에 띄게 활동하다보면 위험에 처할 일도 더 많겠지. 이제 막 능력 통제가 가능하게 된 아이에게 다소 가혹한 처사이다. 이렇게 빠르게 은퇴하는 것이 좋을지도.
"...확실히. 진짜라면 대단한 정보가 되겠군. 하루빨리 조사해보는 게 좋겠어. "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당신에게 "굉장한 수확이다." 라며 진지하게 칭찬을 건넨다. 에스터는 그리고 고민해본다. 이 곳이 정말 아지트라면, 이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가서 들키다간 기껏 얻은 정보가 수포로 돌아갈 뿐더러,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일 저녁 히어로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괜찮겠나?"
언제나와 같이 진지한 얼굴이 당신을 향해있었다.
ㅡ
칭찬은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어린날 색종이를 정확하게 자르고 붙이면서 받았던 칭찬이나 피겨 동작을 완벽히 해냈을 때 받았던 칭찬, 시험에서 A를 받았을 때 받았던 칭찬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 받은 진지한 칭찬도 결국 그 근본은 같았다. 해서 흑소화는 밝은 미소를 보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 좋아요, 근데 저도 참석해도 되나요? 이젠 히어로도 아닌데. "
물론 제멋대로 히어로들이 하는 일을 하고, 히어로 중 하나와 비공식적으로 팀까지 맺어놓은 상황이지만 아무래도 회의 같은 공적인 부분에까지 끼어들어도 되나 싶은 우려는 들 수밖에 없었던게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월초에 에릭 님의 티파티까지 다녀왔었잖아? 어쩌면 괜한 걱정이었을지도 모르겠네.
" 아, 그리고 잠은.. 예전보다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요. 그래서 스케이트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어졌지만- 뭐, 어쩌겠어요. 예전 스케줄대로 살려면 몸이 두 개는 있어야 하고. 하나는 포기해야죠. "
잠은 잘 자냐는 물음에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답하고, 2년 전에 받았던 조랑말 인형은 언제나 헤이샤오화와 함께 잠들고 있답니다- 라며 당신의 선물에 대한 근황까지 덧붙인다.
" 그럼 다시 질문, 에스터 님은 숙면에 무리 없으신가요? "
히어로뉴스에서 곰돌이 인형을 안고 주무신다는 말을 봤는데. 장난스런 음성으로 덧붙이는 표정이 제법 짓궂었을지도 모르겠다.
ㅡ
"네가 찾아낸 정보니까, 네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에스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같은 이즈모의 일원으로서, 참가해준다면 든든하면 든든하지 안 될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는 말에 역시 바빠졌다고 생각하고는. 스케이트 연습을 못 하게 되었다는 말에는 속으로 약간 걱정이 들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의지하도록." 그런 말을 당신에게 건네본다. 조랑말 인형의 이야기에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려본다. 선물해준 보람이 있었다.
"이 쪽은 문제 없다."
문제가 있다 싶을 정도로 잠을 설치진 않았다. 자주 꾸던 악몽도 최근 많이 줄어들었고. 곰인형 얘기에는 근심어린 표정을 지어보인다. "기사 쓸 거리가 얼마나 없는건지." 그래도 예전만큼 부끄럼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래. 어제도 곰돌이랑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불경해보이나. "같은 농담을 건넬 만큼의 여유는 생긴 것이다.
ㅡ
곰돌이랑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대사에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야 아직까지는 당신의 2년 전 모습이 보다 익숙했으니까. 다만 이렇게 농담으로 받아쳐주는 당신의 모습도 색다르게 친근했기에, 흑소화는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보였다.
" 아뇨, 아뇨아뇨. 그럴리가요~ 맞아요, 기사 쓸 게 얼마나 없으면 그런 기사나 쓰는지. "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 언론은 악마와도 같다. 때문에 당신을 적잖게 걱정했다만, 우려한 만큼 큰 타격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었지.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다행이에요. 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은.
" 좋아요. 너무 징징거린다고 정떨어져 하시면 안 돼요~ "
이어 힘들다면 의지해도 좋다는 당신의 말에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잘 더욱 밝게 미소지으며 답하고, 마지막에는 가볍게 거수경례를 하며 그럼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한 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다.
" 내일 뵈요. "
아, 그래도 작별 인사는 잊으면 안 되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인사를 남기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 간만에 상쾌했다.
- 에스터 - 미야
-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우는 아이를 달래주려고 했던 것 뿐인데.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더 힘차게 울고 있다.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좋지. 아마 저 나무 위에 걸린 풍선이 원인인 것 같다만. 에스터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누, 누나가 저 풍선 내려줄게. 응?"
아이는 에스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울어버린다.
"아저씨 얼굴 무서워...!"
아줌마도 아니고 아저씨는 너무하잖아. 키 때문인가? 키 때문에 그런가? 보통 어린 아이들은 머리가 긴 사람을 체격과 관계없이 여성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거짓이었나. 아니면 라오스에 장발의 남성이 너무 많았던 탓인가.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다.' 같은 말을 했었겠지만. "여성이다." 라는 말을 건네본다.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에스터는 나무위에 오르고 있다. 아이는 아저씨 화이팅! 이라고 응원을 건네고 있다. 그러니까 아저씨 아니라니까. 손을 뻗어 풍선을 잡는다. 나무에서 조심조심 내려온다. 아이에게 풍선을 건넨다. 아이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 뒤 돌아간다. 머리에 나뭇잎이 묻어있는 것을 에스터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에게 웃으며 손인사를 건넨다.
아. 풍선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 때문에 진영까지 바꾸어줬던 기특한 아이가 있었지. 마침 장소도 그녀가 아이들에게 풍선을 건네주곤 했던 공원이었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놀라울 것 같긴 한데.
ㅡ
아이가 간 쪽에서 뭔가 꾸짖는 소리가 들린다.
"함부로 사람 얼굴보고 무섭다고 우는거 아니랬지! 그리고 저 언니야가 어딜봐서 아저씨야? 누나가 자꾸 그러면 혼난다 했어, 안했어?"
친한 사이일까, 미야가 손에 풍선을 든 아이위 볼을 쭉 늘리며 혼내고 있다. 잚태써여 라던가 안그러께 같이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아이의 볼을 아코디언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더니 어휴, 한숨을 한번 쉬고 놓아준다.
"진짜지? 다음부터 그러면 안돼. 자, 누나랑 손가락 걸고 약속."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보내준다. 선물이라며 과자 한 봉지까지 쥐어준다. 그리고 에스터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누가보면 딴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네.
ㅡ
"......?"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에스터는 머리에 나뭇잎을 털어내...지 못한 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본다. 밤비가 보인다... 아이의 볼을 늘였다가... 과자를 주고... 뭔진 몰라도 잘 해결된 것 같다. 그녀에게 다가가본다.
"밤비?"
이명이 아닌 이름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 더 익숙했다. 에스터는 아이를 놓아준 밤비를 어리둥절하게 잠시 쳐다보다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우연이로구나." 그리고 아이가 간 곳을 바라보다가 말한다.
"아이랑 친한가 보구나."
하긴, 예전부터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곤 하였으니. 친한 아이를 만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ㅡ
"역시 언니야다!"
이름을 불러줘서 기쁜건지, 그냥 에스터가 와서 기쁜건지. 에스터를 꼬옥 껴안는다. 이러다가 에스터만 노리는 허그빌런으로 알려져 버릴지도.
"제 수장님 레이더의 능력이라구요. 앗, 언니야 머리에 나뭇잎 붙었다!"
방금 바보털이 살짝 움직인거 같았는데 기분탓이겠지. 에스터를 안았던 팔을 풀고 까치발을 들어 나뭇잎을 때준다.
"친하다 해야하나, 어린애들은 잘해주면 금새 경계를 푸니까요~"
얼버무리지만 친한거 맞다. 쑥스러우니까 돌려말하는거다.
"아 참, 이번에 누가 이즈모 감옥에서 아주 깽판을 쳐놨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 ST요원이라면서요? 그 쪽 요원들은 원래 다 그렇게 과격해요?"
함시온도 분명 ST였죠, 라며 뒷말을 덧붙인다. 첫인상이 나빴지. 캐리어 무기고는 다시 생각해도 무섭다.
ㅡ
꼬옥 껴안기는 미야에게 조금 놀란 눈을 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에스터는 미야가 나뭇잎을 떼어주기 좋도록 고개를 숙인다. "밤비는 자상하구나."그런 말을 건넨다.
레드 슈즈의 얘기가 나오니 잠시 멈칫한다. "...글쎄." 그러고보니 전 ST관리부장인 함시온도 상당한 과격파라고 들었다. ...그녀의 행적을 보면 재평가가 필요할 것 같지만. 사실, 원래 ST는 과격한 진압으로 유명했었지. 히어로 등장 후 이미지가 비교적 많이 묻힌 느낌이지만.
"...레드 슈즈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
슬쩍 이름을 언급해본다. 이미 사건에 관해 알고 있으니, 아마 이름도 대충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지. 미리 알려줘서 주의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상당한 위험인물이다. ...조심하도록."
그렇게 말하다가, 개인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게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런 자를 징계하고 이즈모가 올바르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ㅡ
"앗, 언니야 너무 왕자님같아요."
두근거리니까 그런 말 하지말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꺄꺄 거린다. 연예인을 앞에둔 팬 같구만.
"신발이 피로 적셔져서 붉어지니까 레드슈즈인거잖아요. 그게 뭐야, 빌런이 보통 그런 이름 짓지않아요?"
본인이 들으면 큰일날 얘기를 너무나 당당하게 말해버린다.
"언니야...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사람이 안니야한테 무슨 짓 했어요?"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본다. 딱봐도 에스터와 사상이 반대인 인물같은데, 성향까지 폭력적이라면? 한 90퍼센트는 무슨 일이 있단거다, 이거.
ㅡ
"...그러게나 말이야."
보통은 '사람에 대해 뒤에서 험담하는건 나쁘다' 같은 말을 했을 그녀지만, 부정하지 못하겠다. 여러 참혹한 광경을 봐온 자신이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생중계로 보게 되리라고는. 심지어 같은 이즈모측 사람의 손으로.
"무슨 일..."
있었다고 해야 하나. 숨겼다가 미야가 위험해지는 것은 싫고. 그렇다고 말했다가 괜한 걱정 끼치게 하고 싶지도 않고. 고민하다가 되도록 돌려 말을 꺼낸다.
"그 자가 학살을 벌이는 것을 눈 앞에서 봤다. 끔찍하더군."
그리고 이어 말한다. "지적하니 불같이 화를 내더군. 그것이 은폐된다는 것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느꼈다. "
ㅡ
"아 세상..."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짚는다.
"왜 자기가 화를 내요? 과격도 정도가 있지, 이거 완전 깡패아냐. 그리고 자기가 뭔데 죄수들을 그렇게 다 죽여버려요."
그렇다고 죽은 놈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건 아니다. 그저 조금 화가 났을 뿐이지.
"언니야가 무력감을 느낄 필욘 없어요... 그런 짓 하는거 제재 못하는 이즈모가 노답인거니까."
너무 상심하진 말라며 꼬옥 안아주면서, 에스터에겐 자신이 있다며 힘들 때 언제든 기대달란 말도 함께 덧붙인다.
ㅡ
"......"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는 밤비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 고 말한다. 이런 표정은 2년간의 성장의 결실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히어로의 수장으로서 제지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니까...하급자를 향한 폭력행위도... ...아."
말해버렸다. 에스터는 거짓말에 서툴다. 이 말은 무시하라고 덧붙일까 하다 물흐르듯 흘려보내기로 다짐한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든든하구나. 너에겐 늘 도움받게 돼."
미야가 아직 빌런이었을 때에도, 히어로로 전향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ㅡ
"부끄러워하는 언니도 좋았는데, 역시 웃는게 제일 좋아요! 이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사람~"
좋은 얼굴이라며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사진을 찍는다.
"폭... 잠깐만요 언니야, 저 그 사람한테 볼일이 생긴거 같아요."
머리에 바람구멍을 뚫어버리겠다고 중얼거린다. 감히 누굴 건드려.
"제가 멘탈 하나는 꽤 튼튼하거든요. 그 소설가 놈도 솔직히 팔만 안다쳤다면 제가 잡고싶었는데. 아쉬워라~"
분명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부상도 있었고 시간 관계상 어차피 슬프게도 전투는 불가능했지만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안면을 텃건 말건 무감각하게 총을 갈겨댔겠다.
ㅡ
"아하하."
소리내서 활짝 미소짓는다. 어찌됐건 에스터도 많이 변했지. 장난에도 장난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정도로. 근데 사진을 찍어가다니. "요 녀석.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지우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아, 아니. 진정해. 아니. 진정하면 안 되나? "
혼란해졌다. 분명 문제있는 사람이니 응당한 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치만 그건... 아니... 일단 위험하니 말려야 하긴 한다.
"...이즈모에서의 경력이 높고, 전투력이 상당하기에 무턱대고 잘못 덤볐다간 위험해진다."
이내 이어말한다.
"물론, 징계가 필요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하루빨리 다른 피해사례가 있는지 찾아내 처벌해야 하는데..."
멘탈이 튼튼하다는 말에는 "...그런가."라고 안심했다는 미소를 보인다. 히어로 일은 험하니까 걱정했다만, 기우였나. 그리고 소설가의 끔찍한 마지막을 떠올리며 약간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고보니, 밤비. 질문이 있다."
문득 그런 말을 건넨다.
"물론 별다른 범죄기록이 없다시피 하다곤 해도, 원래는 빌런 측에 속해있었는데... 빌런들과 싸우는 데 무리가 되진 않나?"
5. 독백 ¶
- 불살주의자는 즉살의 꿈을 꾸는가?
- (2스레)
어느 슬픈 다과회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도, 쪼르륵 하고 차 따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우는 목소리마저도 정적에 삼켜져버리는, 그런 물거품같은 공간에 둘이 있었다. 둘이라고 할까, 다른 한 명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형체가 흐릿했기에 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듯 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군가는 눈 앞의 무언가에게 고해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가족이 되느니, 사랑받고 싶느니... 전부 욕심이었습니다."
투명한 테이블은 흰 식탁보에 덮여있었다. 두 명이 마주보고 앉기 딱 좋은 크기의 테이블 위에는 찻주전자와 두 명 분의 찻잔. 그리고 달콤한 다과가 접시에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하늘색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장신의 여성이 울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마주 앉아있는 다과회의 상대에게, 흐느끼며 고백하듯이.
"그저 살아주셨으면, 행복해지셨으면, 당신의 그 행복에 제가 없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저는..."
불분명한 형체 앞에서 계속 말을 쏟아낸다. 티파티상대의 얼굴은 흐려져있었다. 얼굴 부분만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리고 왜곡하듯, 그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말도, 물거품처럼 흐려져간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 얼굴도 목소리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물짓는다. 이미 닿지 못하는 목소리가, 허망하게 토해내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앉아있던 여성을 포함해 다과회 테이블은 그림자에 덮인다. 등 뒤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와 무척 흡사한 외모지만,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울고 있는 연약한 자와는 달리 단호하고, 강인한 얼굴이었다.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얼굴의 상처가 그 얼굴에 험악한 기운마저 더했다. 냉정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는 울며 말하는 자의 뒷통수에 총구를 겨눈다.
이윽고 커다란 총성이 울려퍼진다. 털푸덕 하고 테이블에 엎어지는 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흰 테이블은 어느새 강렬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버리고 다과회를 장식하던 식기들은 흐트러져버린다. 쨍그랑. 엎드린 시체에 미끄러져내리던 찻잔과 다과 접시가 그대로 떨어져 산산조각나버린다. 누군가의 손에 닿아보지도 못한 채 그 달콤함은 그대로 땅바닥에 쳐박히고 만다. 찻잔 안의 차는 테이블보다 옅은 색으로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그 모든 것을 마주하면서도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흐릿하고 희미한 존재감을 발산할 뿐이다.
"구원을."
총구를 겨누는 자신의 태도에도 당신은 어떤 변화도 보여주지 않는다. 띄워내지 않는다. 그 이유라면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으니까.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불러온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ㅡㅡㅡ
"......"
빌런 부활의 연설이 있은 뒤 얼마 후, 에스터는 그런 꿈을 꾸며 깨어난 것이다.
식은 땀이 쥐어진 손을 바라본다. 에스터의 표정에는 싸늘함만이 감돌지만, 그 손만은 환상속에서 있었던 일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자신의 손으로 인간의 목숨을 뺏을 수 있다. 스스로의 가장 큰 약점이자 트라우마였던 그 차게 식은 몸뚱이를 자신의 의지로 마주해야 한다.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것을.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 그런 경우가 오지 않는 한 자신은 언제까지고 '구하는' 영웅으로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오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최근 1년, 자신은 너무 물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에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그 날의 재판장과도 같은 처참한 작태와 다시 마주할 일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무엇을 근거로?
애초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어나는 사건의 심각도를 무시하는 것 부터, 스스로는 히어로 실격이 아닌가. 당장 얼마전에도 비행기 테러가 일어났다. 이대로 평화를 만끽하는 나태한 태도가 과연 얼마나 세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자신은 가치있는 인간인가? 쓸모를 가지고 있는가?
...지끈대는 머리를 대충 짓누르고는 아침 준비를 하러 나선다. 에릭에게 선물받은 라x언 털슬리퍼는 1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쓸만하다. 보들보들한 윤기를 띄는 그 자태는 과연 자신이 곰이 아니라 백수의 왕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에스터의 발을 감싸는 역할로 전락했지만. 역시 인간이 가장 강하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다.
에스터는 아침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될 정도의 죄'는 어디까지인지 고민해본다. 아동 성범죄자나 연쇄살인범은 즉살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테러범이라던가. 토스트에 계란프라이가 먹음직스럽게 얹혀진다. 훌륭한 아침식사의 완성이다.
벌레 퇴치에 바쁜 당신도, 벌레들의 처분을 고민하는 누군가도, 오늘도 굿 데이.
- 유현 아침식사 반응
- (6스레)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보니 어린 에스터는 또래에 비해 일찍 혼자 집안일하는 법을 터득했다. 현재 에스터의 요리실력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어쩐지 폭력적인 요리를 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그녀는 제법 솜씨있는 요리사였다. 제과제빵 종류의 실력은 그것때문에 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에릭의 취향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에스터가 당신이 준비한 아침밥에 보인 반응의 의미를 설명해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미리 말해둔다. 각설하고 말하자면, 대호평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에 들어가는 정성을 알아보는 법이다. 에스터는 당신이 자신을 위한 요리에 들인 노고에 감탄한 것이다. 표정만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에스터는 이 훌륭한 아침식사를 음미하며, 당신이 이것을 만드는 데 들였을 수고에 대해 생각해본다. 신선한 재료를 골라온 뒤 그것들을 하나하나 요리에 걸맞게 정돈하고 준비하는 과정만 해도 굉장한 노력이 든다. 거기다가 그것을 본격적으로 요리하는 데에는 말할 것도 없지. 당장 이 메뉴를 고르기 위한 과정에서도 자신에 대한 배려가 들어가있었을 터이다.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사람 손을 타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요리라고 하는 작업은.
"신세지게 되었군."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에스터를 대신해 덧붙이자면, 메뉴의 선정 역시 좋았다. 샐러드파스타는 건강을 챙기는(이라기엔 최근 행적을 보면 좀 아닌가.)에스터에게 적절한 메뉴였다. 쉐이크에 설탕 대신 꿀을 넣은 것 역시 신의 한수였다. 에스터는 설탕의 맛을 싫어하는 편이었으니. 에스터는 부드러이 미소지으며 말한다.
"그 노고에 감사한다."
그렇지. 다음에는 이 쪽에서 식사를 대접하도록 할까. 그런 말과 함께.
- 진성 전화 반응(파크-진성 일상중)
- (6스레)
ㅡ아. 에스터 자네인가? 이 몸이라네. 회포를 풀고싶지만..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지. 이곳에 지금 이 핸드폰의 주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말일세..
그새 머리카락 뿐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까지 뒤바뀌어버린 건가. 파크. 그런 농담같은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실상 현실이 허락하는 부조리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거늘. 지독할정도로 유쾌한 꿈에 파묻혀있기에는, 현실은 촘촘한 콘크리트로 꽉 차있었다는거지.
에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 자에게 할 이야기따위는 없다.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저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당신의 얄미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에스터는 그 말만을 전화에 남긴다.
"...지금 가겠다. 파크."
선의니 회포니 나중의 즐거움이니 하는 단어들을 즐거운 듯이 늘어놓는 모습이, 마치 나중의 디저트를 기대하는 듯한 투로구나. 하지만 자신은 역겨운 단 맛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그런 향락에 빠지는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다. 만약 디저트를 구비한다고 해도 그것이 네놈의 것이 될 일은 없다. 에스터는 이즈모에 사정을 전한 뒤, 당장 당신을 구하러 나선다.
'히어로로서의 너를 믿는다. 하지만 빌런으로서의 너를 믿지 않는다.'
도착한 열차에 당연하다는 듯이 이진성은 사라져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폐인이 된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긴 은발의 청년.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그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준다. 슬픈 잿빛의 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파크.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몇 번인가 말을 걸어보지만, 이윽고 별로 소용없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고 에스터는,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큰 당신을 조심스레 업는다.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로구나. 연약해진 당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보며.
'히어로로서의 나는 신뢰해주는거야? 고마워. 그 정도면 됐어.'
이즈모의 병원에서의 진단결과는 외상은 없다는 것. 그러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한 동안의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에, 에스터는 파크를 대신해 휴가를 신청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버린 듯한 파크에게 그런 말을 건넨다.
"파크. 클라운이나 코스츔이기 이전에, 너는 내 한 사람의 친우이다. 동료라는 이름조차도 지금의 너에게 무거우리라는 것을 안다."
처음에는 '코스츔'이라고 불러왔었지. 그의 히어로네임이다. 그 호칭에는 지금의 네가 히어로라는 것을 상기해주겠다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어로나 빌런이기 이전에 파크는 사람이다. 친우이다. 자신의 소중한 후배이자, 동생이다.
"전에 내가 말했었지. 네가 사람을 구할 수 있음을 믿는다고. 지금도 나는 너를 믿고 있다. 네가 너 자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앉아있는 파크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다. 나지막히, 진솔하게, 그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처음 변한 머리색을 보았을때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머리카락이 꼭 희게 세어버린 것처럼만 느껴진다. 에스터는 당신의 손을 잡는다.
'...내가 무리한 화제를 던진 것 같아. 미안하다.'
'걱정마. 무리한 화제는 아니니깐. 그냥 잠깐 힘든거야.'
힘이 빠져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에스터는 가라앉은 표정이다.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코스츔이 아닌 파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디 푹 쉬도록."
...*위선이라면 어떻고, 자기만족이라면 어떤가. 어떻게든 살려내고 구해낸 목숨은 구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구원은 또 다른 구원을 낳을 것이고, 설령 그것이 위선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때문에 파크를 믿었다. 파크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로 했다.
'네가 다시 미쳐버린다면, 어떻게 해서든 고쳐내도록 하지. 심리 케어는 전문이 아니다만.'
"...다시 한 번 너와 체스를 둘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에스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파크의 손을 놓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는 없었다. 그저 바라고 기도할 뿐.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한 삶인지를 몸소 깨닫게 되는 요즈음이다.
※중간중간 작은따옴표로 인용된 말들은 시즌1 파크와의 첫번째 일상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로 인용된 문단도 그렇습니다
-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멀리서 들려오는 '처음 뵙는 얼굴이네요. 안녕하십니까- '라는 가벼운 인사에 이 쪽도 가볍게 인사로 받자마자, 온 몸이 마비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헬멧을 쓴 자는 숙련된 암살자인지, 상당히 망설임없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었던 것이다. 아마 누군가의 전화가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겠지. 그가 누군지, 어째서 자신을 살려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보가 필요했다. ...그렇게 에스터는 걸어가고 있었다. 콧잔등의 상처를 의도적으로 방치한 상태였다.
머리가 아직 많이 길지 않았을 무렵인 동시에, 수장이 된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에스터는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며,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
검은 고양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뭐가 그리 당당한지 자신의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에스터를 바라본다.
"고민되는 거라도 있어?"
"딱히."
그보다, 책상에서 내려오도록 해. 그런 말을 건네자 "무뚝뚝하네- "라고 웃으며 그는 내려왔다. 늘상 장난스럽고 싱글싱글거리는 것이 에스터와는 정 반대였다. 히어로인 주제에 이즈모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즈모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는 것은 에스터도 깊이 느끼는 바였지만, 그처럼 대놓고 농땡이를 피우지는 않았다. 말이 좋아서 농땡이지, 하는 행적 하나하나를 보면 거의 업무 방해로 체포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아닌가.
"상처가 생겼네. 예쁜 얼굴인데. "
"예쁘지 않다."
"글쎄- 아저씨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는걸. 그렇게 숭고한 정의를 쫓아가는 모습이."
갑작스레 자신을 칭찬하는 이유가 뭘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조금 껄끄러웠다. '그 연구소'의 소장을 포함해 몇 번 데인적이 있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늘상 미소를 짓고 있지만, 뱃속에 검을 삼키고 있을 확률이 높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무적인 관계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랩톳은 에스터의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에스터는 얼굴을 찡그린다.
"용건은."
"도와줄까 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가 도와준다면 든든한 전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랩톳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간다. 짧아진 에스터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딸이 살아있었다면, 곧 성인이 되었겠네." 같은 소리를, 에스터에게 건넨다.
"있잖아. 아저씨는 아내와 딸을 잃어버렸어. 바로 그 이즈모 사람의 손에- "
...가족.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이상적인 가족에 대해서 에스터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부모의 냉랭한 시선을 떠올려본다. 그들을 잡아넣을 때 자신에게 던진 폭언들도. 그래서 이 자의 말도 사실은 조금 믿기 어려웠다. 행복한 가족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모습이, 그 성격나쁜 하이에나가 아닌 평범한 사람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내 랩톳은 이어 말한다.
"가족놀이를 해보자고. 수장님."
나는 가짜 가족을 만들고, 당신은 정보를 얻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지. 괜찮지 않아? ...에스터는 침묵한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은 악한 행동이다. 아무리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는 없어. "
"아하하."
에스터의 그런 올곧은 말에, 그는 그저 웃음짓는다. "뭘 모르는구나. 수장님." 그렇게 말하며 코를 찌른다. 완전히 어린애취급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는 대답하지도 않고.
"내가 손해보는 제안을 하는 사람으로 보여?"
그렇게 말하며 그는 무슨 생각인지 빙글 웃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 유감스럽게도 이쪽도 종종 서투르다.
- ...라디언트가 살아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에스터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은 트렌치코트와 옅은 빛깔의 청바지, 고동색 장갑과 단화를 입은 채. 대체 왜 그런 얘기가 들려온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 소문이 널리 퍼져있다면 가장 신경쓰이는 사람은 정해져있었다. 히어로 비스트. 블랙 더 라이트.
그렇기때문에 에스터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나섰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정보를 모으는 데에 협력했던 자신이었다. 지금도 그 계약은 유효하겠지. 문자나 전화로 가벼이 할만한 얘기는 아니니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한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다짜고짜 얘기하기엔 예민한 주제이니, 우선 다른 얘기로 시작했다가 자연스레...
...자연...스레...
자연스러운 집에서의 차림을 하고 있는 블랙이 총을 들고 나왔다. 이건 예상 못했다. 분노어린 목소리가 나오다가 흐릿하게 끊긴다. 머리통이 아닌 목에 총이 들이대졌다. 아마 자신보다 20센치쯤 작은 사람을 예상했던 모양이지.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아. 유감이군. 좋은 시간 방해했다. 꺼지도록 하지...는 우선 아니고. 뭐지? 뭐지? 뭐 잘못했나?
아. 블랙이 조용히 문을 닫는다. 에스터는 초인종을 누른다.
"비스트. 너를 해치러 오지 않았다. 우선 진정하고 들여보내줘."
...에스터씨는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누군가에게 지적받을만한 반응이었다. 물론 에스터도 당황했을테니 적절한 대처가 힘드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니. 일단 이 상황에서 무슨 반응을 해야 적절한건지 모르겠다. 노크를 해본다. 조금 진정한...이라기보단 화를 참고 있는 그의 5분만 기다리라는 말이 들린다. 얌전히 기다린다.
들어가기 전에 블랙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본다. 문신이라던가, 몸 쪽까지는 못 본걸로 치자.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그보다는, 눈의 색깔이 신경쓰인다.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예나 지금이나 컬러렌즈같은걸 하고 다닐 성격은 아니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 껴있을지 모르니, 나중에 조심히 물어볼까. ...그나저나 오늘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도입부가 너무 강렬했다. 라디언트의 이름을 올리지도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고등학생때의 에스터
- 대정전으로부터 반년이 조금 넘게 지났다. 고등학생인 그녀는 홀로 있는 집에 익숙해져있었다. 예전부터 바쁜 부모님이긴 했지만, 요즘은 일부러 연구소에 찾아가지 않으면 얼굴보기도 힘들다. 흐트러진 이불에 말려있던 소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조심스레 일으켜본다.
이불을 개고, 알아서 아침을 적당히 만든다. 프라이팬 위의 계란이 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후라이를 얹은 토스트를 적당히 우물우물 씹어먹는다. 식기를 대충 싱크대에 밀어넣는다. 설거지까지 하고 갈 시간은 없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해야지.
에스터는 교복을 입는다. 자켓 단추를 꼼꼼히 채우는 고지식한 학생이다. 동복은 껴입을게 많아서 시간이 오래걸린다. 스타킹을 신으며 '벌써 검은 스타킹 신었다고 놀림당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무심코 나온다. 나는 추운데. 검은스타킹의 비율을 유지하기 위한 어둠의 검은스타킹 모임이 있다면...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고작 그런걸로 모임을 만들면 안 돼. 애초에 그런 모임이 있으면 나는 거기에서도 발언력이 약할거라고.
헝클어진 머리는 아무리 정리해도 어딘가가 삐죽 튀어나와버린다. 포기한다. 누가 머리 안 빗고다니냐고 하면 늘 흠칫흠칫 한다. 원래 이런 머리인데. 놀림받으면 부끄럽다. 농담과 악의를 구분하는건 너무 힘들다. 머리를 뒤로 묶으면 목 위에 닿을랑 말랑 하다. 이제 학교갈 준비는 끝났다.
겨울의 추위에 코 끝이 따갑다. 아마 루돌프 사슴처럼 빨간 코가 되었겠지. 입김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반쯤 감긴 눈매는 다소 차갑게도 보일 법 한데, 얼굴 자체가 워낙 순하고 약해보인지라 인상은 유순했다. 아. 바람이 분다. 겨울은 역시 너무 추워. 내일부터는 목도리를 하고 와야지.
몇 명 오지 않은 교실에 꽤나 일찍 착석한다. 언제나와 같았다.
얼마전에 빌린 소설책을 서랍에서 꺼내 읽는다. 근처에서 대화소리가 들리지만 굳이 끼어들진 않는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조금 서툴다. 슬슬 학기말이긴 하지만 에스터는 반의 서른명 남짓한 사람들을ㅡ아니, 이성은 빼서 열다섯명이라고 해도ㅡ 전부 친구로 만들 만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걸.
친한 아이들이 오고 나서야 담소를 조금 나눈다. 사실은 친한 사람들하고도 대화하는 것에는 에너지가 많이 든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종이 치면 다들 자리로 돌아간다. 줄곧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채였던 에스터는 읽고 있던 책만을 집어넣는다. 1교시 교과서가 뭐였더라.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괴상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버려도 개개인의 일상이 어마어마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쉬는시간에 펜과 노트를 들어올리는 재주를 부리는 친구를 구경하거나, 길거리의 양아치들이 괴력으로 사람을 협박하거나, 강아지를 끌어안고 하늘을 둥실둥실 날아다니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는 것이 일어나더라도 - 에스터 H.클라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킬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재주를 부리는 친구도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양아치들은 이능력을 써도 안 써도 언제나 무섭다. 둥실둥실 날아다니는 사람은 둥실둥실 날아다니게 두면 된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변하지 않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조금 성실하고, 조금 키가 크고, 조금 소심하다.
이능력이 생긴다면, 투명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누가 머리카락이나 스타킹으로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그렇지만 자신이 통제하기 힘든 어떤 능력이 생긴다는 건 무서운걸. 체육시간에 뒷구르기 배우는 것도 망설여지는 자신인데... 역시 겁쟁이구나. 생각한다. 히터가 닿는 곳에 있으니 노곤노곤한 기분이 드는 것을 참으려 애쓰며.
예를 들어 약 십년후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곰돌이가 나타난다고 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히어로라는 집단이 그를 막는다고 한다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자신이 그 히어로의 수장이 된다는 얘기를 해준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말도 안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겠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가장 농담같은 것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개연성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졸려."
지루한 수업에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싸움이었다. 클라인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힐데가르트라는 미들네임을 생략했다. 연구소의 소장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시기였다.
이런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면, 글쎄. 이야깃거리로서는 불합격이었을 것이다.
- 2번방의 괴물
- (유토피아의 독백이나, 편의상 이 곳에 기록.)
"그렇지만 유감이에요."
2번방의 괴물은 빌런이었던 히어로의 손에 끝장이 났다. 이제는 연구소가 불타면서 인간이었던 것의 시체도 함께 바스라졌겠지. 카메라가 불타도, CCTV 기록은 이동되어 저장되므로 상관이 없었다. 유토피아는 괴물의 최후를 지켜보며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따스한 기운이 몸에 퍼져나간다.
"그를 그녀의 손으로 끝내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그, 라고 함은 괴물의 이야기일 것이다. 한 때 인체실험을 주모한 연구자중 한 명이었고, 이후 유토피아의 체스말로서 충실히 이용당하게 된 자. 잔학무도하고 광기어린 실험의 끝은 자신의 파멸이었다. 유토피아는 그의 파멸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죽음으로 위장해 탈옥시켜준 댓가로서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새삼 불화 가득한 가족이었다. 그 애가 어릴때부터 늘 바빴던 부모님. 대정전 이후로는 연구에 미쳐가며 쌀쌀맞아지기까지. 마침내 딸의 손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두 사람. 면회올때마다 증오를 뱉어낼 뿐인 부모를 매번 찾아가던 딸. 마침내 포기해버린뒤 단절되어 끊겨버린 가족. 그리고 죽은줄 알았던 부모와의 극적인 재회. 스스로의 업보로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린 가족을 만난 그녀의 반응.
"안타깝게 끝난 가족과의 재회란, 멋진 이야기 소재잖아요?"
마지막이 되었기에 관용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되었다고 하는 결말도, 그 끔찍한 몰골을 알아보지 못한 채 비참하게 끝나는 배드엔딩도, 모두 인상깊고 멋진 이야기였다. 어찌됐건 딸에 의해 최후를 지켜봐진다는 이야기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끝이 되어서야 극적인 화합을 이루는 가족. 또는 그의 마지막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주는 딸.
잔혹하도록 붉은 차의 향이 퍼져나간다.
- 영세빌런의 독백 시즌2
나는 김영세. 영세빌런이다.
영세한 빌런이기도 하고, 영세이자 빌런이기도 하다. 능력은 손톱을 폭탄으로 바꾸는 것... 이런 소개부터 시작하자면 너무 오래 걸린다고. 그러니까 짧게짧게 가자. 지난 줄거리. 나와 싸이킥 갱 동료들은 고등학생때 연약한 에스터를 괴롭힌 일이 있었다. 그 때 블래스터가 우리를 쳐발라서 이후 해체되었다. 그랬다가 어른이 된뒤 싸이킥 갱 동료중 하나인 시료쿠에게 복수하자는 말을 들어서 에스터에게 덤볐다. 그새 에스터는 열라 강해져서 또 쳐발렸다. 우리는 에스터의 자비로 즉살당하진 않고 감옥에 갇혔다. 끝!
...이었으면 평범하게 끝날 얘기였는데 말이지. 나의 이야기는 이야깃거리가 될만큼 멋지고 화려하지도 않고 말이야. 기껏해야 어딘가의 모브캐릭터들같은 위치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걸까. 사실 이것은 긴긴 과거에 불과하고 이후 우리는 주인공으로서 화려한 부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럴리가 없지. 그냥 모브1에서 악당1로 지위가 올라갔을 뿐이다. 그래봤자 중간보스나 비중있는 악역도 아니고 전투력 측정기를 위해 동원되는 조무래기 악당들일 뿐이라고. 쳇쳇쳇! ...이게 아니라, 그래서 에스터가 나에게 면회를 신청한 것이다.
"......"
무섭다.
"김영세."
아니. 진짜 무섭다. 순간 히익! 하고 놀라버렸다. 고딩때는 여리여리했는데. 지금은 덩치가... 덩치 뿐만이 아니라, 근육이... 인상이... 거기다가 얼굴에 저 흉터는 뭐지? 곰하고 싸우기라도 했나? 잘못했습니다! 라고 외쳐야 하나? 에스터가 이렇게 쫄아있는 나를 그저 지켜본다. 아. 저거 혹시 한심하다는 눈인가? 진짜면 좀 상처입을텐데. ...기분탓인가? 그래. 기분탓이라고 생각하자. 자비로우신 에스터님께서 설마 나에게 그러시겠어. 하하. ...이번에는 에스터가 아닌 외부에서부터 한심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누구냐!? 누가 나를 이렇게 한심한 눈으로 보는거야!?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정보를 전해주러 온 것 뿐이니까."
"네. 네엡."
"...저기. 너 일단 나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거든. 동갑에. "
"무, 무슨 말을 전해주시러 오셔셨나요."
...에스터는 마침내 나의 태도에 태클을 거는 것은 포기한 모양이다. 좋은 태도다. 그저 이야기만 끝내고 빨리 가주시라구요. 히어로님. 난 더 이상 범죄 저지를 패기도 없고 무섭기만 한걸. 최근에 시료쿠가 탈옥했는데, 나는 혹시 나에게 불똥이 떨어질까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구역에서 범죄자 학살 사건도 있었다던데... ...무서운 세상이다. 빌런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 세상 인권의식이 너무 땅바닥에 떨어져있는거 아냐!?
그리고 그 뒤에 나온 말은 내가 굳어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시료쿠가 죽었어."
나는, 방금까지 놀라있던것도 잊어버리고 얼어붙었다. 나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 것을 확인했는지 에스터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손이 떨린다. 좋은 녀석이라고 말할 순 없긴 했지만, 내 친구였는데. 나는 덜덜 떨면서 눈 앞의 그녀에게 질문을 건넨다.
"...어째서."
"비스트에게 복수를 하러 갔다."
"...그에게 죽은 거야?"
에스터는 대답하지 않는다. 비스트. 그 때 우리들을 전멸시켰던 자의 히어로로서의 이명.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시료쿠는 갑자기 복수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었지. 탈옥한 것도 그래서였던가. 몸이 떨린다. 이것은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노하기에는,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슬픔이었다. 동료를 잃은 것에 대한 순수한 슬픔.
"무모했던 짓이라는 것만 말하도록 하지."
"...시료...쿠."
"...그는 그렇게 빌런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야."
"...으...으으..."
눈물이 터져나온다. 추하게 나의 얼굴을 뒤덮는 그것에 에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준다. 펑펑 흘러나온다. 왜 그런 짓을 한거야. 위험한 짓을 해봤자 목숨을 잃을 뿐이라는거 알고 있잖아. 나는 복수니 어쩌니 하는 것 보다 내일 있을 밥 메뉴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고, 우리들의 추함을 곱씹으며 주절거리는 매일이 좋았다고. 한심하다고 한들 좋아. 한심한게 사실인걸. 하지만 한심하게라도 살아있는 것이 죽어버리는 것 보다 낫잖아. 그것도 이런 초라한 죽음을, 누가 기억해준다고.
"......"
"...에스터."
"...묻고 싶은게 있나."
"너는, 왜 이것을 나에게 말해주러 왔어...?"
에스터의 입장에서는 사실 우리들을 꼴보기 싫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복수를 논하면서 자신의 피해자에게 징징거린 것도 그렇고, 애초에 지금 에스터가 강해졌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 거지 원래는 우리쪽에서 그녀를 괴롭힌 입장이었으니까. 일부러 내가 절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 얘기해줬다기엔, 우는 걸 모른체 해주는 것 하며 명백히 이상한 태도였다. 동정하고 있는 걸까.
"괜한 짓을 해서 목숨을 내다버리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난 그런거 못해."
"그렇지만 그 때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었나."
컨테이너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숨어 구경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그 때는 시료쿠와 함께 그녀를 찾아갔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에스터는 험악하고 무서운 인상때문에 그렇지 히어로중에서는 온건파에 가까운 사람이었지. 즉살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버텼다고 하고. 다른 히어로들이 빌런에게 대처하는 태도는... 글쎄. 솔직히 죽여버렸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다시 찾아간데다, 자기들이 피해자인양 버둥거렸으니. 심지어 즉살명령이라는 좋은 명분까지 있었는데. 뭐. 정보를 빼내기 위해 살려줬는데 너무 과대평가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죽는 게 무서워. 맞는 것도 무섭고. 이제 나쁜 짓같은거 할 마음도 안 들 정도로..."
"......"
"가, 감옥에서 최근 학살이 일어났대. 레드 슈즈라는 히어로가... 아니. 히어로 비슷한 사람이... 막 죄수들의 머리를 짓뭉개고 팔다리를 뜯어냈다고..."
"...레드 슈즈."
"이제... 우리 구역으로 올지도 모르는 거잖아. ...무서워. 더 이상 무서워서라도 나쁜 짓은 안 저지를거야.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 말아줘. 나, 나는 진짜 얌전하게 있을 테니까."
추한 말을 쏟아내본다. 에스터는 그저 찡그린 채로 바라보고 있다. 저 오묘한 표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뭔가 집히는 거라도 있는 걸까. 그런 것은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눈물범벅된 얼굴로 죽일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을 뿐이다.
"...앤서니 프로젝트의 얘기는 전달되었나."
"...상담...뭐 어쩌구 하던거...?"
그리고 에스터는 생각못한 단어를 꺼낸다. 나는 관련된 안내문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리고 있었던 것 같다.
"모범수에 속하고, 상담을 잘 이어간 사람에게는 히어로로서 복귀할 기회가 주어진다. 살고 싶다고 하면 이 쪽도 생각해보도록."
"...어?"
"살고 싶다고 말한 게 아닌가.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고."
"자, 잠시만."
이런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에스터의 의도를 모르겠다. 나는 클라인, 아니, 에스터에게 말을 물어본다. "왜 이런걸 나에게 굳이 와서 알려주는 거야?"
"...이래봬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중 하나니까."
"그, 그치만."
"그리고 한심한 네가 어떤 식으로든 이즈모에 도움이 되는 게 낫지 않겠나."
"하, 한심하다고 말했지!? 히어로가 그렇게 사람을 깔봐도 되는 거야!? 너무한 거 아냐!?"
"...그런 말을 할 자존심이 남아있었나."
괜히 발악해본다. 그래봤자 저 쪽에서 진심으로 나오면 또 쫄 것이다. 적대할 의지가 없다는 걸 아니까 괜히 해보는 소리다. 아. 이러다가 총알이 날아오는건 아니겠지. 괜히 말해놓고 후회를 해본다.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이 쪽은 이만 가보겠다."
그리고 면회실에서 그녀는 모습을 감춘다. 나는 그 곳에 오랫동안 그냥 앉아있었다.
"......"
울어서 따끔따끔한 눈이 부어올라있었다.
- (AU)마법소녀 리턴즈
연구원 에스터 H.클라인은 오늘도 야근중이다. 실험이 연장되었다. 용액이 아주 잠깐 남색으로 변하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반응인데, 뭐가 문제인지 계속해서 용액은 노란 빛깔만을 보여줄 뿐이다. 한숨을 쉰다. 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이 잘 받는 체질이 이런식으로 도움이 되는건 싫었는데. 이렇게 된거 오기로라도 결과를 확인할 것이다.
끊임없는 실패 기록들이 적혀나간다. 이쯤되면 자신의 눈이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더 설득력있었다. 에스터의 눈이 용액을 쫓고 있다. 아. 드디어 다시 변화가...노란...남색...어라?
"오랜만에 보네요. 마법소녀님!"
투명한 용액 뒤에 나타난 것은 어디선가 본 일 있는 쬐끄만 요정님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그래서, 왜 나를 다시 찾아온건데. ...모습은 왜 또 다시 그렇게 됐고."
"그게! 악의 세력이, 다시 나타났어요!"
이 요정의 이름은 에릭. 햄스터만한 크기에 풍뎅이처럼 붕붕 날아다니는, 소년의 외형을 한 레몬 요정이다. 원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인데, 저주로 인해 쬐끄만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마법소녀로서 활약해가며 돌려놓았었는데...
"...또?"
"네! 그래서 마법소녀님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반짝반짝대는 눈. 근데, 난 이미 어른인데. 당장 비쥬얼을 봐도 어릴때의 순수함이나 귀여움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변신하면 모습은 변하니까 외모는 상관없지만, 다 큰 어른을 마법'소녀'라고 해도 되는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에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른 지원자는 없는거냐."
"다들 마법소녀가 되어달라고 하니 불길해하셔서!"
"하긴 시대가 변했지."
"...아니. 근데.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씨! 이렇게 귀여운 요정이 무슨 나쁜짓을 한다고."
과거와 달리 마법소녀의 상징이 어린이의 동심과 꿈과 희망이 아닌 시대이다. 이제와선 마법소녀라고 하면 부당계약, 근로기준법 위반, 노동력 착취...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른다. 뿡뿡거리는 에릭을 그저 바라본다. 눈이 나쁜 에스터는 안경을 끼고도 자주 얼굴을 찡그리곤 한다. 덕분에 오해도 자주 받지.
"그래서, 유경험자인 나를 찾아왔다는 거구나."
"네! 에스터씨가 멋진 마법소녀로서 복귀해준다면, 다들 마법소녀 일을 함께하고 싶어할거에요."
"...댓가는?"
"네?"
어린애도 아니고, 꿈과 희망이라는 말론 안 통한다.
"편의점에서 일을 해도 정당한 노동계약을 하고 댓가를 지불받아. 봉사정신만으로 일할 수 있는건 아니라고. 옛 정이 있긴 하지만, 이건 당연한거야."
"어어, 어..."
"...최저임금? 물질적 지원?"
"자자잠시만요, 생각 좀 해보고..."
끄으으으응. 에릭은 하찮고 짤똥한 팔로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한다.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줬으면 좋겠는데. 에스터는 큰 기대는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
"떠올랐어?"
"자그마한 축복을 걸어드릴게요. 마법소녀로서 일하는 모두가 불행과 괴로움 없이 늘 행복해질 수 있기 위해서."
고작 그런...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에릭의 발언이 이어진다.
"이어폰 줄을 주머니에 넣어도 꼬이지 않는 축복을."
"......?"
"속눈썹이 빠져도 눈에 들어가지 않는 축복을."
"잠깐. 뭐?"
"버스정류장에 서면 원하는 버스가 늘 바로 뒤에 도착하는 축복을."
그건 현실조작급 아냐?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도 에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혼잡한 주차장에서도 차 세울 자리는 하나 존재하고..."
"......"
"예보에 없는 비가 내리는 날은 왠지 우산을 챙기고 싶어지고..."
"...너."
"길가던 고양이에게 사랑받고,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지 않고..."
그 외에도 온갖 소박하지만 훌륭한 축복들이 이어진다. 에스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그저 듣고 있다.
"...눈와서 미끄러운 길에도 넘어지지 않는 축복을 걸어드릴게요."
"......"
"어때요. 할만한가요?"
"...너, 되게 유능한 요정이구나."
이후, 에스터는 마법소녀가 되며 속눈썹이 눈을 찌르지 않게 된다.
6. 기타 ¶
과거 부모님, 클라인 부부는 연구소 내에서 소장의 지시하에 비윤리적인 생체실험에 참여했다. 이 실험은 연구소 내에서도 간부진 급에게만 알려져있었으나, 우연히도 에스터의 의심을 산다. 에스터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연구소를 습격. 간부진들은 처벌받는다.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지른 부모의 성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통 이름 소개시 성인 "클라인"을 생략하곤 한다. 미들네임이 아닌 성을 생략하는 독특한 이름 표기방식. 히어로가 생기기 전부터 사이킥 갱의 피해를 막기 위한 활동들을 해왔다. 전 히어로 대표이자, 빌런 측과 내통한 "배신자"로 지목되었던 녹턴 드네리스가 사형되기 위한 증거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 이후 그 동안의 공헌에 의해, 대표를 이어받게 되었다.
히어로 대표이자 수장이라는 위치가 된 이후로는, 주요한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싸우는 일이 비교적 줄어들었다. 별다른 일이 없을때는 전체적인 지휘를 맡으며, 보조나 후방 지원 위주로 전투하고는 한다.
바꿔말하자면, 주된 전투에서 그녀가 최전선에 서는 때는 "최악의 경우". 이 때는 상당히 가차없어진다. 거구의 덩치, 빌런에게 유리해진 판의 흐름에서만 등장하는 최종병기스러운 면모, 누구 팔이 날아가든(자신의 것인건 상대의 것이건)눈 깜짝 하지 않고 돌진하는 거침없는 행동들 때문에 이명과 별개로 얻은 별명은 "괴물".
바꿔말하자면, 주된 전투에서 그녀가 최전선에 서는 때는 "최악의 경우". 이 때는 상당히 가차없어진다. 거구의 덩치, 빌런에게 유리해진 판의 흐름에서만 등장하는 최종병기스러운 면모, 누구 팔이 날아가든(자신의 것인건 상대의 것이건)눈 깜짝 하지 않고 돌진하는 거침없는 행동들 때문에 이명과 별개로 얻은 별명은 "괴물".
이 때의 에스터가 트라우마로 남은 빌런들도 있다. 그 외 시즌 1에서 있었던 기타 설정들은, 스토리 상으로 언급될때마다 추가.
- 전투다이스
- 평상시 - 15, 95
급박한 상황 - 10, 120 (이벤트 전투중, 히어로측 위기. 대략 히어로측 전투가능 인원 전체의 20프로 이하 정도로 생각중이나, 전체적인 반응 봐가며 유도리있게 할 예정)(101이상은 치명상 취급)
"급박한 상황"시, 상대의 다이스값+10의 데미지 받음 (밸런스 문제시 차차 수정할 예정)